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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4

위험한 호기심 - 알렉스 보즈 / 김명주 : 별점 4점

 

위험한 호기심 - 8점
알렉스 보즈 지음, 김명주 옮김/한겨레출판

그동안 진행된 여러 심리 실험 중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들만을 짧게 요약하고 정리한 책입니다. 심리 실험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와 비슷하지만, 실험의 의미나 후일담까지 자세히 분석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례를 최대한 많이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진지한 실험뿐만 아니라 가십성 실험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되도록 짧고 재미있게 요약해 놓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충실한데, 이것이 단점은 아닙니다. 충분히 재미있었고, 예상보다 유익한 내용도 많아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너무나 유명한 '스키너의 상자', 홀로코스트의 이유를 탐구한 '충격적인 복종 실험', 영화 "익스페리먼트"의 원형이 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키티 제노비스 살인 사건에서 착안한 '구경만 하는 구경꾼' 등 이미 알고 있던 실험들이 많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고 인상적인 실험'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내용의 깊이는 부족하지만, 흥미롭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큼 별점은 4점입니다. 이런 유형의 심리학 실험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책에 실린 실험 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페스팅거의 실험"

지구 종말을 예언한 도로시 마틴과 그의 추종자 집단에 잠입하여, 예언이 실패로 끝난 뒤의 상황을 기록한 실험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통해 집단의 믿음을 탐구했으며, 결론적으로 믿음은 끈질기고, 오히려 오류를 먹고 더욱 강해진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다미선교회의 '휴거 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지상 최후의 생존자는?"

핵전쟁 이후 바퀴벌레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SF적 주장을 실험을 통해 뒤집었습니다. 바퀴벌레에게 방사능을 쬐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바퀴벌레는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하며, 오히려 벌의 한 종류인 '기생봉'이 방사능에 가장 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와인 / 콜라 시음 맛 대결"

와인이든 콜라든, 사람이 '시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뇌는 혀로 느끼는 정보보다 시각 자료를 더 신뢰한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와인의 경우, 병을 먼저 보여주면 아무리 전문가라도 화이트 와인에 색소를 탄 것을 전형적인 레드 와인으로 착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순수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는 펩시와 코카콜라의 맛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맛'은 혀보다 광고나 시각적 요소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콜라 브랜드들이 광고에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는 이유가 이해되네요.

"모차르트 이펙트"

음악이 성인의 시공간 능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킬 수는 있어도, 아이들의 지능이나 학습 성취도를 높인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즉, 모차르트 음악을 이용한 아동 교육 사업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코끼리 기억 실험"

'코끼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는 서양 속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입니다. 특정 무늬를 선택하면 먹이를 주는 방식으로 학습을 시킨 후, 1년 뒤 같은 실험을 진행했더니 코끼리는 67%의 확률로 정답을 맞혔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상당히 뛰어난 동물임이 입증된 셈이죠.

"기억 전이"

뇌를 먹으면 기억이 옮겨진다는 가설을 검증하려 한 실험입니다. 성공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보며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의 한 에피소드("오메가의 성찬")가 떠올랐습니다... 웩!

"수면 학습 효과"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수면 학습은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구리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주는 메시지를 들려주었더니 개구리 점프 대회에서 늘 우승했다는 실험 결과도 있었다고 하네요. 저도 자기 전에 영어 회화 파일이라도 틀어봐야겠습니다.

"검은 가방 사나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복면의 사나이를 통해 인간 심리를 분석한 실험입니다.

개인이 익명의 존재가 되면 반사회적인 행동을 더 쉽게 하며, 주변 사람들 역시 익명의 존재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쉬워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익명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특성도 있다고 하네요.

이 실험을 보니 '슈퍼히어로'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껴집니다.

"물에 빠진 주인을 구하라"

'명견 래시'에서 착안한 실험으로, 주인이 위험에 처한 상황을 연출하고 개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과는… 멍멍이는 주인의 생명을 구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일까요?

"타인의 물건"

미국 CSI 등에서 흔히 등장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타인의 음모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검증한 실험입니다.

과학수사국 직원들이 자신의 배우자와 관계를 맺은 후, 음모를 수거하여 분석한 결과, 타인의 음모가 발견된 확률은 17.3%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달되는 경우보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두 배 더 많았다고 하네요. 다소 애매한 수치군요.

2008/12/30

매드 사이언스 북 - 레토 슈나이더 / 이정모 : 별점 4점

매드 사이언스 북 - 8점
레토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뿌리와이파리

제목 그대로라면 미친 과학에 대한 책으로 보이겠지만 이 책은 여러 다양한, 그리고 기상천외했던 과학실험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제목처럼 미친 짓도 적잖이 등장하나 등장하는 사례들이 다 미친짓은 아니고 의미심장한 것도 있고 지금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 실험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300년대부터 소급해서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도 방대하지만 재미있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많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네요. 저도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것도 많기도 했고요.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단 잘못 알려진 사례로는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과 "영화 중간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삽입하여 콜라와 팝콘을 엄청나게 많이 판 사건" 을 들 수 있겠네요. 저도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이 실험 결과가 엄청나게 오류에 가득차 있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과 마케팅적으로도 아주아주 유명한 콜라 판매 실험 역시 거의 사기..에 가깝다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재미있었고 특기할 만한 것이라면 영화 "익스페리먼트"의 모델이 된 모의 감옥 실험이라던가, 투자한 비용이 아까워 실패한 투자를 멈추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구인 "1달러 경매" 등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히치하이크를 하는데에는 예쁘고 가슴큰 여자가 유리하다는 상식이나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는 유혹에 대한 실험도 인상적이었고요. 몇가지 이야기는 소설 소재로 써먹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익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의 웹사이트 등의 참고 자료의 소개도 엄청나게 충실하고요.

전체적으로 약간은 심리학적인 부분에 책의 내용이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은 좀 강하지만 제가 워낙 심리학에 관심이 많기에 그다지 하자가 있는 부분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때문에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A급인 별 4개짜리 책입니다. 5개를 줘도 좋겠지만 아쉽게도 번역이 약간 지루하고 따분한 점이 있어서 약간 감점하였습니다. 그래도 읽는데는 전혀 지장없는 수준이니 이런 분야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참고로, 매드사이언티스트가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으니 그러한 것을 기대하신 분이라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2008/07/26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로렌 슬레이터 / 조증열 : 별점 4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8점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에코의서재

부제는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입니다. 부제 그대로 10개의 위대한 심리실험과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10개의 실험 모두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으며, 저자인 로렌 슬레이터의 쉽고 편하면서도 정보 제공을 소홀해 하지 않는 문체 역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든 실험이 인상적이었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부분에 응용될 수 있는, 저 자신도 많은 영향을 받은 내용들로 충격적인 실험 결과와 더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여 줍니다.

뭔가 창조적인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10개의 연구 중 "우리가 기억하는 기억은 진짜 기억인가?"를 예로 들자면, 결론적으로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아주 쉽게"라는 연구 결과를 싣고 있습니다. 딸이 이십년 전 아버지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를 강간, 살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주장했던 사건에서 비롯된 실험과 그 결과로 억압된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죠. 
이 실험과 결과에서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괴로워하고 그 사실에 발목이 잡혀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브루스 웨인"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실제로 브루스 웨인의 부모는 그의 눈 앞에서 악당에게 저격당해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그리고 부모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암시하는 다른 어른이 그에게 이러한 왜곡된 이야기를 주지시켜 기억을 조작했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주위에 있었던 유일한 어른이자 조언자인 집사 알프레드에게 혐의가 실리겠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 알프레드가 자신에게 없는 젊음과 기회, 재력을 가진 어린 브루스 웨인에게 실제로는 다른 이유로 사망한(뭐, 교통사고라고 하죠) 부모님의 죽음을 전해 주며 지속적인 암시로 그의 눈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고 기억을 심어 버린거죠. 때문에 브루스 웨인은 알프레드의 조작대로 조종되어 배트맨이 되어 버린 것이고요. 결말은 진실을 알게된 배트맨이 알프레드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어쨌건 요렇게 바라보니 심리학이라는 것도 정말 재미있네요.


이외에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윤리적인 부담을 이겨내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숙제 역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해당 연구에 대한 반대파의 의견도 충실히 조사하여 서술하고 있어서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별점은 4개 얻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여간 다양한 심리학 서적을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심리학이라는 것이 정말 범위도 넓지만 충격적인 사실도 많아서 흥미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 뿐더러 창조적인 작업에도 많은 부분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전부 이 책 처럼 재미있진 않겠지만요...

2013/02/19

죽음의 샘 - 미나가와 히로코 / 권일영 : 별점 2.5점

죽음의 샘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권일영 옮김/시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0년대 독일, 아이를 임신한 채 애인에게 버림받은 마르가레테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의 시설 '레벤스보른'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나치 독일이 순수한 아리아인종, 즉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었다. 시설의 최고 책임자인 의사 클라우스 베셀만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에리히와 그의 형 같은 존재 프란츠를 양자로 삼기 위해, 두 사람이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마르가레테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마르가레테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독일 패망에 즈음하여 연합군의 침공이 피난처를 덮치자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아이 미하엘을 지키기 위해 프란츠와 에리히를 버리고 마는데....

나치 독일의 인체 실험을 주도했던 의사를 주요 소재로 다룬, 거의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 장편입니다. 그 동안은 일본 작가가 2차 대전과 관련된, 그리고 독일인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쓴 것이라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접했던 주간문춘 미스터리 리스트에 실려있는 것을 알고 읽게 되었네요.

작품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는 클라우스 박사와 결혼한 마르가레테 시점으로 독일 3제국 패망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2부는 권터와 게르트 2명의 시점으로 1부 이후 15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나치 독일의 실험이나 잔당을 다룬 작품은 그동안 많이 접했었고, 특히나 광기의 의학 실험을 다룬 작품은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나 "모레"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광기의 나치 의학 실험이 아니라, SS 출신의 의학 박사 개인의 욕심을 위해 벌어진 사건들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온갖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거대한 서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요한 등장인물은 몇 없을 뿐더러, 이 몇 명의 인물들이 거의 모두 우연으로 얽혀 있는 등의 작위적인 설정이 너무 강한 탓입니다.

예를 들면, 미하엘의 친부 권터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데 그가 물려받은 폐허가 된 성이 클라우스 베셀만이 노리는 지하 통로의 입구로 되어 있다든가, 마르가레테와 레벤스보른에서 인연이 있는 브리기테의 아들이자 클라우스의 아들일 수도 있는 게르트가 이런저런 우연으로 미하엘의 대부인 SS 출신 대령이 이끄는 국방 스포츠단에 입단하고, 우연한 기회에 프란츠와 에리히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는 식입니다. 우연도 이 정도라면 너무나 지나치죠.
무엇보다도 마지막 폐허가 된 성에서의 결전의 작위성은 정말이지 읽는 사람을 어처구니없게 만들어요. 대령이 마르가레테나 게르트 등 처음 가본 사람들이 척척 찾아내는 비밀의 방을 15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다가 하필이면 마지막 그 시점에 그곳을 덮치는 하등의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도 않으니까요.

또 클라우스 베셀만의 예술에 대한 집념이 초반부터 강하게 묘사되어 이후의 전개가 어느 정도 예측되는 등, 잘 짜여진 스릴러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늘려 놓았습니다. 의학 실험이라 할 수도 없는 "거세"가 주요 테마라서 광기의 의학 실험 따위는 곁가지 이야기일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대관절 레나는 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2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게르트와 헬무트로 대표되는 주변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런 것들만 들어내도 분량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클라우스 베셀만 박사가 악역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예술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는 것도 별로였어요. 빈 소년 합창단원에게 꽂힌 SS 친위대원의 사랑 이야기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물론 15년 뒤 만난 에리히는 사실 미하엘이며, 미하엘인 줄 알았던 소년은 클라우스와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 허나 이는 2부 시작되면서 마르가레테가 운 좋게(?) 미쳤다는 설정으로 이루어진 서술 트릭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고, 마지막 "후기를 대신하여"라는 챕터는 살짝 서늘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큰 한 방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일본인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라 권터가 쓴 작품의 일본어 번역본이라는 장치는 안 나와도 그만이었고요.

내용 자체가 불쾌하고 찜찜하나 계속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흡입력은 있지만, 그저 그뿐,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 그냥 완독했다는 것에 만족하렵니다.

2020/06/28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강석기 : 별점 2점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4점
강석기 지음/Mid(엠아이디)

과학 전문 컬럼니스트 강석기의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 에세이로 과학 동아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엮은 책입니다. 

그런데 일러스트는 사실 별 볼일 없습니다. 딱히 일러스트가 있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요. 또 모두 50편의 수록된 컬럼 모두가 흥미롭거나, 재미를 자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재미있는 주제도 없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사람들의 대인관계 범위, 즉 네트워크가 한정돼 있어 새로운 사람을 사귀게 되면 기존 네트워크에 올라와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를 잘라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로빈 던바 교수는 사람의 뇌 크기를 토대로 인류의 이상적인(구성원 각자가 서로 잘 아는) 집단의 규모가 150명 내외라고 주장했다는군요. 이를 '던바의 수'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던바의 수는 실질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네트워크에 한계가 있으니, 누군가 선호 네트워크에 추가되면 누군가는 내려가야 하는 법인 셈이죠. 저는 150명까지는 안 될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추려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들의 산책 습관과 이들의 엄청난 창조력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놀랍습니다. 학술지 실험심리학저널 2014년 7월호에는 걷기가 정말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고 하네요. 걷는 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건 아니며, 걷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걸음, 즉 산책 같은 걷기가 효과가 있다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답니다. 여튼, 회사에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잠깐 걷는게 상책인 듯 합니다.

선택 어업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물고기는 한 번에 알을 수만 개나 낳고, 이 가운데 살아남은 강한 녀석들이 짝짓기를 해(물론 체외수정이지만) 종을 이어갑니다. 자연계에서는 어리거나 병든 녀석들은 사망률이 높기 마련이고요. 그런데 선택 어업은 정 반대로 작고 어린 녀석들은 그물망을 빠져나가 살아남으며 커다란 물고기만 잡히게 됩니다. 어획량이 적다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겠지만, 지금처럼 어자원고갈에 이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총량을 규제하는 상황에서는 선택어업이 덩치 큰 물고기의 사망률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몸집이 크게 자라고 늦게 성숙하는 유전자를 지닌 물고기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대신 조숙하고 몸집이 작은 경향의 물고기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큰일이에요.
이런 부자연 선택은 캐나다 큰뿔양의 뿔 크기에서도 증명됩니다. 사냥꾼 한 사람이 사냥할 수 있는 큰뿔양 마리수를 제한하자, 사냥꾼들은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큰 뿔을 지닌 큰뿔양만을 골라 사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20여 년 만에 뿔의 크기는 평균 25%나 줄어들었다네요. 원래 큰 뿔은 성선택으로 나타난 표현형으로, 뿔이 크고 화려할수록 수컷이 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는 증거이므로 암컷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큰뿔양의 뿔은 더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사람들이 선택적인 사냥에 나서면서 불과 20년만에 성선택에 완전히 반대가 되는 방향의 진화를 이끌어낸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선택어업' 대신 어획량과 크기를 규제하지 말고 어획량만 규제하는 '균형어업'으로 어업정책을 바꿔야 할 때라고 하는데, 그럴 듯 합니다. 앞으로는 "도시 어부"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를 대고 기준에 못 미치는 물고기는 놓아주는 모습도 사라져야 할 것 같네요.

아울러 더운 여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완벽한 냉난방 시스템은 우리 몸의 대사율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는 내용이지요. 25도 내외에서 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몸이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더우면 땀을 내 체온을 식혀야 하고 너무 추우면 몸을 덜덜 떨어, 즉 근육에서 영양분을 연소시켜 열을 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25도 내외의 온도가 유지되어 몸의 대사율이 떨어지면, 즉 에너지를 덜 쓰게 되면 섭취한 여분의 에너지는 지방으로 축적되고 이것이 현대 사회 비만이 만연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하네요. 그래서 연구자들은 겨울철 난방 온도를 좀 내려 몸이 지방을 태우는 '열생성'을 통해 체온을 유지하게 만들자고 주장한다는데, 잘 되면 좋겠습니다.

집단의 크기가 문화적 복합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도 재미있습니다. 그물 설계 실험을 거쳐 집단 내 구성원 숫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걸 증명한 실험입니다. 이를 통해 고립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은 복잡한 문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피험자들이 두 과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 조건 역시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군요. 능력에 따른 노동의 분업을 통해 두 과제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ABE 문고에서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결국 이 마지막 인디언이 모든 문화를 전달하는건 불가능했을거라는게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나는 전설이다"역시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인들이 관계지향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이유가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며, 개인주의이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은 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재미있어요.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잘 나눠 써야 한며, 피를 뽑는 작업 등 밀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가는 탓입니다. 그 결과 벼농사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왔고 나보다는 우리'를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밀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내가 먹을 걸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이런 생활패턴이 수천 년 이어져오면서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고, 동아시아인 가운데서도 특히 논농사가 압도적인 한국인과 일본인에서 전형적인 동아시아적 사고 패턴이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럴싸하지요?
그러나 요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부상조하는 전통만큼은 앞으로도 유지되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글은 소수이고, 전체적으로는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관심사 밖의 이야기도 많았고요. 또 제목처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지만, 내용은 별다를게 없는 글들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그냥 인간이 오래 전에 키웠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내용은 없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9/03/14

앨저넌에게 꽃을 - 다니엘 키스 / 김인영 : 별점 5점

앨저넌에게 꽃을 - 10점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빵가게 점원 '찰리 고든'은 32살이지만 IQ가 70도 되지 않는 저능아. 그런 그에게 지능 향상을 위한 실험이 제안되며 똑똑해 지고 싶었던 찰리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지능향상 실험은 이미 "앨저넌"이라는 이름의 생쥐에게 적용되어 성공하였기에 인체 실험이 필요했던 것. 찰리는 실험 시작과 동시에 "경과보고"라는 이름의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기 시작한다....

반세기전인 1959년에 출간된, 휴고상과 네뷸라 상을 수상한 SF의 고전입니다. 유명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SF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읽지 않았었는데 중고서점에서 별 생각없이 충동구매한 뒤 순식간에 다 읽어버린 작품입니다.
찰리의 경과보고라는 형태의 극단적 1인칭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저능아의 서툰 글에서 시작하는 변화의 과정이 고작 8개월여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의 이야기이기에 심리 묘사의 극을 보여주면서도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이 작품은 한마디로 굉장히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그러면서도 끔찍하고도 잔인한 이야기였습니다. 다 읽고나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 리뷰를 쓰기도 쉽지 않군요.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얻어가면서 더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기도 하고, 슬픈 결말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시한부 최루성 멜로물이기도 하고, 행복이라는 것이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짤막한 상식으로 리뷰를 쓴다는 것이 무례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성취"를 이룬, 진정한 걸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고전이네요.

한마디로 이제서야 읽은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대단한, 놀라운 작품으로 이런 책이 잘 팔리지 않아서 절판을 거듭한 국내의 척박한 장르문학 환경은 화가 나기까지 하네요. 차라리 SF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진정한 고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을까요? SF적인 요소도 많지 않은데... 어쨌건 별점은 당연히 5점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책 리뷰를 올리면서 5점짜리 작품은 처음이네요. 이 작품을 좀 더 일찍 읽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덧붙이자면. 소설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워렌학교로 돌아간 찰리에게 곧 다가올 필연적 죽음, 그의 시체를 놓고 벌어질 실험을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픕니다. 부디 찰리가 마지막 얼마간이라도 워렌학교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PS : 그나저나 영화화도 몇번 된 것 같은데 이 1인칭 심리묘사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을 어떻게 영상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네요. 뭐 찰리 역이야 연기 좀 한다는 배우는 당연히 욕심낼만한 배역이긴 하지만 도저히 책이라는 매체의 효과를 뛰어넘는 영화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거든요.

2021/02/06

숙명 - 히가시노 게이고 / 권남희 : 별점 2점

숙명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역 최고 회사인 UR 전산 대표였던 우류 나오아키가 병사한 뒤, 회사 사장이 된 스가이 마사히코가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흉기는 우류 나오아키가 생전에 수집했던 무기 중 하나인 독이 든 석궁이었기 때문에, 범인은 우류 가문 관계자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사건 수사를 맡은 형사 중 한명인 와쿠이 유사쿠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우류 가문이 숨기고 있던 비밀에 대한 수사에 집중한다. 어린 시절, 우류 가문 아들 우류 아키히코와 엮였던 여러가지 인연과 추억 때문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0년에 발표한 비교적 초기 장편입니다.

UR 전산 사장 스가이 마사키요 살인 사건은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흉기를 통해 범인은 우류 가 근처에 있는 사람들로 특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기만 알아내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지요. 당연히 이야기도 '왜 살인 사건을 저질렀는지' 에 대한 탐구가 핵심이고요.

탐구 결과, 스가이가 우류 나오아키가 사망한 뒤 그의 유품 중에서 강탈한 '전뇌' 어쩌구가 써 있었다는 오래된 파일, 스가이가 뇌 의학 전문가에게 접촉했다는 증언, 관계자인 우에하라 박사와 우류 아키히코 모두 뇌의학자이며 오래전 죽은 사나에의 지능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 중요 단서들이 모두 초반에 드러납니다. 독자는 이를 통해 과거 사나에에게 불법으로 뇌에 관련된 실험이 자행되었고 비밀 파일은 그 실험을 다룬 것이며, 스가이는 이 실험을 묻어두려는 관계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뻔한 소재인 탓입니다.

하지만 그냥 뻔하지만은 않습니다. 형사 와쿠라 유사쿠의 수사로 30여년에 걸친 장대한 비밀이 한꺼풀 씩 드러나는 전개가 굉장히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직후 우에하라 마사나리는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됩니다.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하여 사람의 감정 조작이 가능하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연구 성과 발표는 묻혀버렸지만, 대기업 우류공업 대표이사 우류 가즈아키가 우에하라 박사를 지원하며 연구가 은밀하게 재개됩니다. 그들은 7명의 남녀 피실험자를 모아 '전뇌식 심동 조작 방법' 이라고 이름붙인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뇌수술을 받고 실험 중이던 피실험자들 중 4명은 탈주하고, 남은 3명은 원상 복구 수술을 받은 뒤 2명은 죽어버립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여성 사나에도 심각할 정도로 지능이 퇴화해 버리고요. 이런 비참한 결과를 본 우류 가즈아키와 우에하라 박사는 연구를 영원히 묻어 버리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여기에 더해 의외성 있는 설정과 전개가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어요. 백미는 우류 아키히코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단서가 작품 곳곳에 드러나지만, 진범은 우류 나오아키의 충신 중 유일하게 회사에 남았던 마쓰무라 겐조 상무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억지스럽과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문제는 큽니다. 어린 시절부터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와쿠라 유사쿠와 우류 아키히코가 사실은 사나에가 낳은 쌍둥이 형제였다는건 눈에 거슬릴 정도였어요. 우류 아키히코야 그렇다쳐도, 와쿠라 유사쿠까지 사나에 아들이라고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사나에가 쌍둥이를 낳았다면, 우류가문에서 두 명 다 입양하는게 맞지, 한 명만 전혀 관계없는 다른 곳에 입양보낸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또 이란성 쌍둥이라면 아무리 외모가 다르더라도 성격이나 취향은 닮은 점이 많았을텐데, 마지막에 비밀이 드러난 뒤에서야 이를 언급하는건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7인의 실험체 중 한명이었던 에지마 소스케의 딸 미사코와 유사쿠가 고등학생 때 교제했다가 헤어진 뒤, 미사코가 우류 아키히코와 결혼했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왜 아키히코가 미사코와 결혼했는지도 설명이 부족했고요. 형제라서 이성에 대한 취향도 비슷했다는 것일까요?

그 외에도 우류 아키히코의 배다른 동생들인 히로마사와 소노코가 의기 투합해서 스가이를 죽이려고 한게, 마침 살인 사건이 저지른 딱 그 날 그 시간이라던가, 우류 아키히코가 석궁 화살촉을 수리했던 순간접착제를 떨어트린걸 마침 아내 미사코가 발견한다던가 하는 등 우연이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작품이 그만큼 정교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래서야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또 추리적인 부분도 별로에요.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과 석궁을 현장에 가져다 둔 사람이 다르다는 트릭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투서를 보내서 경찰에게 이 트릭이 간파된 뒤에는, 사건은 해결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자 중에서 오전 시간에 석궁을 가져다 놓을 수 있던건 가사 도우미 스미에 씨 밖에 없었으니까요. 지나가던 여중생들 증언이 아니었더라도, 마쓰무라 겐조의 운명은 정해진거나 다름이 없었던거지요. 석궁 화살깃 수리와 같은 디테일은 솔직히 불필요한 사족으로 느껴졌고요. 

유사쿠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던 사나에 죽음에 대한 진상도 어색했습니다. 실험 재개를 노렸던 스가이 가문이 납치하려 할 때 병실에서 떨어져 죽었다는데, 누가봐도 분명한 살인 사건을 경찰이 이렇게 쉽게 덮는게 가능했을까요? 가능했다 치더라도, 유사쿠의 아버지가 사나에가 유사쿠 모친이라는걸 알았다는게 사건을 덮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저라면 아이 어머니 복수를 위해서라도 발 벗고 나섰을거 같은데 말이죠. 최소한 사건을 덮었다면, 죽을 때 유사쿠에게 남긴 비밀 수사 노트에 그 진상은 써 놓았을 겁니다.

우류 가문이 지켜왔던 비밀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있지만 석연치는 않습니다. 우류 가즈아키와 우에하라 박사부터가 좀 웃겨요. 연구를 묻어버리기로 했다면 파일도 바로 없애버렸어야죠. 왜 화근을 남겼는지 모르겠어요.

스토리텔러로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솜씨가 잘 드러나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이 너무 많아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오래전 숨겨왔던 가문의 비밀이 도화선이 된 사건이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건 오다 경부보이고, 주인공 유사쿠는 순전히 과거의 비밀에 집중한다는 구조 등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몽환화"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밝은 미래를 향해 젊고 열정적인 커플이 발을 내딛는다는 "몽환화"하고는 반대로, 이 작품의 유사쿠는 숙적이자 형제인 아키히코에게 완패하고 쓸쓸히 물러선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시대가 느껴지네요. 버블이 막 끝날 1990년의 일본과, 아베노믹스로 막 부활하기 시작한 2013년 일본의 시대상이 그렇게 달랐으리라 짐작됩니다.

2010/05/29

밤의 기억들 - 토머스 H 쿡 / 남명성 : 별점 4점

밤의 기억들 - 8점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시작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50년 전 일어났던 한 소녀의 살인사건을 재구성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범죄소설작가 폴 그레이브스가 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부유한 별장지 리버우드에서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내용으로 "심문"의 토머스 H 쿡 작품입니다. 50년 전의 페이예 살인사건과 더불어 그레이브스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누나 그웬의 잔인한 살인사건이 회상 형식으로 겹쳐져 진행되는데, 46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심문"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으로 장편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네요.

먼저 50년 전 페이예 사건부터 살펴본다면, 범행이 실제로 가능했던 용의자는 한 줌도 안됩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용의자에게 타당한 동기를 부여하고 용의자별로 상세한 수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 대단합니다. 또한 트릭이 등장하고 단서들이 앞부분부터 교묘하게 배치되어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에서 정통 추리소설로 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사소한 단서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많아서 정말 쉴 틈 없는 짜임새를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주요 사건인 그레이브스 사건의 경우는 이야기 전개 상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로 그레이브스가 페이예 사건을 수사하면서 떠올리는 심리 묘사를 통해 전개되죠. 이러한 전개는 본편의 수사 과정과 다른 심리 스릴러스러운 맛을 전하면서도 페이예 사건의 전개와 절묘하게 맞물리며 독자의 마음을 강하게 건드리는 맛이 정말 탁월하더군요. 아울러 제대로 된 반전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에 반전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반전이 작품을 효과적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결말 역시 아주 깔끔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아쉽습니다. 일단 미국의 유서 깊은 가문의 별장지에서 벌어진 사건이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학 실험과 연관되어 있다는건 터무니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의학 실험에 비교하면, 꽃의 교잡 실험이라든가 의학에 관심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 복선은 너무 미미했습니다. 워런 데이비스와 그로스먼이 나치 독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전혀 설명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페이예라는 소녀에게 이런 몹쓸 실험을 가해야 했을 타당성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지역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워런 데이비스의 영향력이라면 뒤끝 없었을 희생양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했을 텐데, 왜 딸의 친구이기도 한 이웃 소녀를 골랐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하면 워런 데이비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기도 한데, 조금만 더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래도 수사와 단서가 잘 결합된 수사물이면서도 여러 가지 트릭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소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작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학적 성취를 이룬 듯한 미국의 오래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뛰어난 심리 묘사와 군더더기 없는 전개는 "앵무새 죽이기"의 추리물 버전이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심리 추리 스릴러 장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 아직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0/08/04

미스터리 박물관 - 라인하르트 하베크 / 김희상 : 별점 1.5점

미스터리 박물관 - 4점
라인하르트 하베크 지음, 김희상 옮김/갤리온

모두 13가지의 불가사의한 역사적 - 과학적 유물로 상식에 반하는 역사속 미스터리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사기꾼으로 알려진 에리히 폰 데니켄이 서문을 쓴 것 부터 좀 불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존의 여러 유사 책에서 발췌한 것에 최근의 몇가지 실험결과를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의 실험도 고대 문명의 비행기 그림과 새 유물을 가지고 실제 모형을 만들어 날려보고 '잘 나니까 이건 비행기가 맞다!' 라고 주장하는 식이라 당황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새 모양 비행체가 잘 나는건 당연하잖아요....

딱 한 가지, 메소포타미아의 배터리에 대한 용도를 밝혀낸 실험 - '금 도금 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 은 신선했습니다. 용도나 발상이 그럴싸했거든요. 이 배터리 실험 하나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2015/04/27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2 - 제프리 스타인가튼 / 이용재 : 별점 2.5점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2 - 6점
제프리 스타인가튼 지음, 이용재 옮김/북캐슬

보그의 음식 컬럼니스트 제프리 스타인가튼의 연재 컬럼을 모은 두 번째 책입니다. 최고 수준의 잡지 보그에서 20여 년간 음식 컬럼을 써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되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1권은 절판이라 2권밖에는 구할 수 없었지만요.

음식이라는 큰 주제 아래 다양한 글이 실려 있는데, 법대 출신으로 미식가, 음식 평론가이지만 전문 요리사는 아닌 저자의 시각이 반영된 점이 특징입니다. 요리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초보자다운 시행착오가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루 최저 비용 4.5달러로 식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실험입니다. 뉴욕에서 저렴하다는 음식점 10군데를 시식해본 뒤, 결국 끼니를 해결하려면 집에서 조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나름의 해결책과 레시피를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하지요.

미국에서 판매되는 서른세 병의 케첩과 직접 만든 두 종을 포함해 총 35종을 테이스팅하고 최고의 케첩을 고르는 컬럼도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하인즈"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네요.

저지방 조리법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다양한 레시피, 그리고 몸에 흡수되지 않는 지방 "올레스트라"에 대한 소개도 흥미로웠습니다. 실험 결과로 볼 때 진짜 기름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부족해 보였지만요.

그 외에도 체험이 반영된 글 중에서는 웨이터 학교 입학기 에피소드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일본 구루메 만화에서 흔히 보던 이미지와 달리, 이 학교의 핵심 교육은 "팁을 많이 받는 기술"이었습니다. 정성 어린 접객보다도 고객에게 병물을 판매하는 방법 등 영업 중심의 교육이 강조된다는건 꽤 충격적이었어요.

또한 미국식 시니컬한 유머와 과장이 가득하여 읽는 재미가 큽니다.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즐겁고 유쾌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싶더군요. 이런 개성 덕에 20년이 넘도록 컬럼니스트로 활동할 수 있었겠죠.

다만 식도락 기행과 직접 조리한 레시피를 소개하는 뒷부분은 국내 현실과는 달라서 잘 와 닿지 않았고, 유사한 내용을 접한 적이 많아 신선함이 떨어집니다. 물론 튀니지 요리나 포장 상자 뒷면 조리법을 실험한 글 등은 재치 있었고, 아쉬움 속에서도 배울 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소 딱딱한 편이라는건 확실히 아쉽습습니다. 저자의 문제라기보다 번역 문제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몇몇 오역이 보였고,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재 컬럼 모음이라 베스트 셀렉션일 거라 생각했는데, 90년대 후반이라는 특정 시기에 쓰여진 컬럼들만 수록되어 있다는 점도 기대와는 달랐고요. 최신 트렌드와 정보를 반영했기 때문으로 생각되는데, 전체 연재물에서 엄선한 글이 수록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음식 컬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단순히 미식 기행이나 레시피에 그치지 않고 실험정신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점은 분명 인상적이었어요. 한국 정서에 딱 맞지 않고 번역 문제도 있으나 음식 관련 글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1권도 기회가 된다면 구해보고 싶네요.

2022/01/30

고쿠 1~6 - 테라사와 부이치 : 별점 2점

[고화질세트] 고쿠 (총6권/완결) - 4점
테라사와 부이치 지음/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걸작 "우주해적 코브라"로 스페이스 판타지의 신기원을 연 작가 테라사와 부이치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1987년에는 비교적 먼 미래로 느껴졌을, 2014년을 무대로 한 근미래 SF 액션 스릴러로, 우리나라에는 e-book으로만 소개되었습니다. 설 연휴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경찰 출신의 사립탐정 후린지 고쿠입니다. 맨 몸에 쟈켓을 입고 목에 넥타이를 메는 다소 충격적인 패션 센스를 가진 남자지요.

고쿠는 첫 번째 사건에서 악당의 최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왼쪽 눈을 찔러 실명하는데, 누군가 그 왼쪽 눈에 소형 컴퓨터 단말기가 장착된 '의안'을 설치해 줍니다. 그 의안은 전 세계의 모든 컴퓨터는 물론, 인공위성까지도 연결하여 제어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요. 고쿠는 이른바 '신의 눈'이라고도 하는 이 의안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누군가가 전해 준 또다른 장비 여의봉(?)을 무기로 악당들과 싸워나갑니다.

여러 면에서 작가의 출세작 "코브라"가 떠오릅니다. 미인들의 부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기본 전개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로 엄청난 마초인데다가 시니컬하면서도 독특한 유머 넘치는 대사를 내뱉는 고쿠 캐릭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갖추고 있는 피지컬만으로도 세계관 최강자인데다가, 강력한 무기 '싸이코 건' 까지 소유한 코브라와는 다르게 고쿠는 비교적 평범한 인간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도 전능하다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은 왼쪽 눈의 의안 덕분에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의안으로 왠만한 적들은 쉽게 무력하게 만드니까요.

그래도 단순한 자가복제 아류작은 아닙니다. '신의 눈'이라는 아이디어 덕이 큽니다. 모든 단말에 접속하여 조작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최소한 1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것입니다. 인공 위성으로부터 현재의 GPS, 카 네비게이션과 동일한 정보를 전달받아 이를 추격에 활용하는 장면 등은 미래를 보고 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공 위성과 각종 단말을 조작하여, 악당 하크류 겐지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영상을 건물 전광판으로 표시하는 장면은 능력의 특징을 제대로 선보여준 명장면이었고요.

정보를 장악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탐정'이 주인공인 이야기에도 잘 어울렸어요. Private Eye가 Midnight Eye를 갖게 되니, 금상첨화인 셈이지요.

탐정물답게 놀라운 진상과 반전을 갖춘 이야기들도 꽤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류는 의붓 아버지에 의해 사이보그로 개조되어 몸에 강력한 보호막을 두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중화제를 투약하지 않으면 미치광이 살인마로 돌변하기 때문에, 여동생 요시코는 고쿠에게 류를 죽여달라고 의뢰했고요. 그런데 알고보니 류는 의붓아버지 젠조의 복제인간으로 창조된지 고작 30일에 불과했던 생명체였습니다. 젠조는 자기 몸에 보호막을 설치하기 위해 류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수정체를 만든 건 여동생인줄 알았던 요시코였고요. "차이나타운"이 떠오르는, 하드보일드스러운 막장 관계를 인공수정, 급속 성장, 기억 이식 등 미래 기술에 녹여낸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슈퍼 스타 시노즈카 레이라가 자기 노래를 표절했다며 죽이려고 하는 지하 록의 여왕 야마가미 리사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놀라운 진상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4권(일본 기준)으로 끝나버린 이유도 분명합니다. 뒷 부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암흑의 선녀" 편에서 귀신 '천동녀'의 정체는 쿠키 일족의 정신을 넣은 인공두뇌로 구현된, 일종 에너지 덩어리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주해적 코브라"의 사라만다 설정과 똑같죠. 다카르 랠리에 참여한 오토바이 레이서 보니의 문신 속에 마이크로 필름의 정보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우주해적 코브라"와 유사했고요. 유령 유전자 실험에 자원하여 스스로 생명체의 모든 진화를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카산드라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실험 덕분에 생물 진화의 최종 단계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건 바로 악마였다는건 재미있는 발상입니다만 이는 "코브라"에서 화성의 최종 병기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악마가 고작 금괴를 노린다던가, 그 최후가 녹아버린 뜨거운 금을 뒤집어 쓰는 것에 불과했다는 등 세부적인 이야기 완성도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요. 

후반부 에피소드들에서는 '신의 눈'의 능력도 잘 선보이지도 못합니다. 모든 장치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기본 설정만 답습할 뿐입니다. 이런 능력을 활용하여 악당에게 자신의 경고를 날린다던가, 공장에서 자기만을 위한 특별한 무기를 만든다던가 하는 초반부 에피소드들같은 새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걸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악당들과 육탄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도 별로였고요. 

또 한국어판 e-book은 에피소드별 제목이 제대로 부여되어 있지 않은 등 편집이 그닥이며, 마지막 권에 '지금 밝혀지는 고쿠의 비밀'이라는 저자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고 소개되는데 정작 수록되어 있지 않은 등 문제가 많아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던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유튜브를 뒤지면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교적 수작인 초반부 에피소드를 영상화한 만큼 애니메이션만 찾아서 보시는게 낫습니다.

2010/07/13

B컷 - 최혁곤 : 별점은 2.5점

B컷 - 6점
최혁곤 지음/황금가지

국내 작가 최혁곤의 장편 스릴러. 국내 작가에게서는 보기 드문 전형적인 스릴러물로 전직형사 황재복과 미국에서 온 여성 킬러 현수 이야기를 동시간대에 서로 교차시켜 전개합니다.
황재복은 민사장이라는 인물에게서 의뢰받은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리고 킬러 현수는 연쇄살인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행동하며 마지막 인물 "D"의 행적 추적 끝에 둘은 서로 마주하게 됩니다.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스릴러답게 긴장감, 재미가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또 보통 이런 류의 스릴러물은 연쇄 살인 뒤에 감추어진 흑막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데 반해 이 작품은 흑막이나 사건의 진상보다는 황재복의 살기 위한 투쟁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독특함도 마음에 들었어요. 결말도 깔끔하고요.
황재복이라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절어있는 한국식(?) 마초 꼰대 전직 형사 캐릭터가 굉장히 잘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특히나 황재복의 야수성이 지능적으로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황재복의 전처의 사고사 이후 드러나는 반전과 속물 치과의사를 작살내는 결말도 괜찮았어요. (황재복의 딸 나미에 의한 지나치게 자세한 설명은 사족으로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야기의 기본 틀이 헐겁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이 작품의 핵심 내용인 사건의 흑막과 진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외국산 스릴러물과 비슷한 수준의 스케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 것과 나름의 전형성을 잘 지켜나간 것은 좋았지만, 좀 더 잘 짜여진 이야기였어야 했어요.
애시당초 황재복에게 민사장이 왜 조사를 의뢰했는지도 애매하고, 조직의 보스가 따로 있는데 민사장이 앞장서 4명의 한국인 살해에 가담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D"의 협박 역시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납득하기 힘들고요. 일기? 협박자가 스스로 누군가에 대해서 쓴 일기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흑막에 대한 이야기도 짤막한 설명으로만 끝내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하드보일드 의학 생체실험 스릴러의 교과서적인 작품인 "제6계명"만큼은 아니더라도, 진상의 핵심인 의학 관련 이야기는 보다 설득력있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험이 실패했다고 실험 대상자들을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수십명씩 죽인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가만히 두면 다 묻힐텐데... 제보가 상원의원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수십명 죽어나가는 것 보다는 눈에 덜 띄었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에 대한 설명이 너무 빈약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여성 킬러 현수에 대한 이야기도 아쉬웠습니다. 레옹의 마틸다나 니키타처럼 킬러로 성장해 나가는 스테레오 타입 설정에 불과했던 탓입니다. 부가적인 불우한 가정사도 마찬가지로 뻔할 뻔자였어요. 차라리 황재복의 딸 나미가 킬러였다는 서술 트릭 형태로 풀어나갔더라면, 아니면 현수 이야기는 아예 빼더라도 스케일을 좀 줄이면서도 황재복을 중심으로 하여 민사장과의 대결 구도를 그리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냥 황재복을 중심으로 한 한국 무대의 밑바닥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가져가던가요. 그만큼 황재복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던 만큼 소재가 낭비된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아무래도 후속작이 나오기 힘든 결말이기도 하니까요.

단점도 크지만 재미는 확실하고, 황재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국형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더운 여름 함께할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PS :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아시는 분 제보 부탁드립니다.

2010/02/21

신비의 사기꾼들 - 조르주 샤르파크, 앙리 브로크 / 임호경 : 별점 2.5점

신비의 사기꾼들 - 6점
조르주 샤르파크 외 지음, 임호경 옮김/궁리

여러가지 신비현상을 과학자의 눈으로 비판하고 그 진상을 밝혀내는, 일종의 "마술트릭 밝혀내기"같은 책입니다. 저자인 두명의 과학자가 밝혀내는 현상은 한, 두개가 아닙니다. 고대의 마법과 여러가지 염력들, 점쟁이와 점성술사의 예언 및 수맥탐사와 여러가지 신비현상에 대한 트릭을 설명해 줍니다.

당연히 재미있는 내용도 많습니다. 일전에 "클로버의 악당들"이라는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던 카드를 이용한 텔레파시 트릭, 아무 카드나 한장 뽑은 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를 어떤 것을 뽑았는지 물어본다는 트릭은 카드마다 이름을 부여하고 전화를 걸때 친구의 이름이라고 하며 해당 카드의 이름을 댄다는 간단한 트릭이지만(즉, 스페이드 A가 "데이빗"이라고 한다면 "데이빗! 내가 뽑은 카드가 뭐지?" 라고 물어보는거죠) 굉장히 효과적이라 생각됩니다. 지금도 통용될만한 멋진 트릭이죠.
또 인도의 수도사들 - 파키르 - 이 보여주는 다양한 신비 현상들, 즉 공중 부양이라던가 심장 박동 조작, 뾰족한 못들 위에 누워있거나 뾰족한 것으로 몸을 꿰뚫는 방법에 대한 트릭들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중 심장 박동 조작 트릭은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도 고무공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짤막하게 언급된 적이 있었죠.
그 외에도 현대로 넘어오며 텔레비젼을 이용한 심령술사들의 초능력을 밝혀내는 것 - 확률적으로 시청자들 중 심령술사가 언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일정 수를 충족시키며, 방송에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만 방송된다는 내용 - 도 흥미로왔습니다. 과거 국내에 유리겔라가 방문했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또한 과학자들 답게 실제 과학 실험을 통해 여러가지 사기행위(?)를 밝혀내는 부분들, 예를 들어 수맥 탐사봉을 이용하여 수맥 탐사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람들에 대한 실험, 물이 샘솟는다는 기적의 관에 대한 실험 등도 읽음직한 내용이었고요.
아울러 비교적 상세한 도판이 곁들여져 있다는 것도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였습니다. 단, 책의 인쇄질이 너무나 후져서 크게 돋보이지는 않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미있는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나칠 정도로 문체가 딱딱하고 읽기가 힘들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주제별로 짤막하게 압축해서 표현했더라면 훨씬 재미있고 깔끔하게 끌고나갈 수 있었을텐데, 딱딱한 문체 탓에 막판에는 졸릴 정도였습니다. 소재를 개발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과학자들말고 전문 작가의 도움을 받는게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분명 건질만한 내용도 있었고 의미도 있었지만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던, 뭐 평범한 수준의 책이었다 생각되네요. 이런 류의 책에 관심있으시다면 모를까, 딱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2020/07/17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 이치카와 유토 / 김은모 : 별점 1.5점

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 4점 이치카와 유토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U국에서 개발한 소형 신예 기낭식 비행정 젤리피시의 보급이 확대되던 어느날, 젤리 피시 개발 주역인 UFA사의 기술개발부 멤버 6명 전원이 탑승한 신규 시험용 기체가 추락하여 불타버렸다. 기술 개발부 멤버도 모두 불에 탄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그들 모두 불에 타기 전 살해당했다는 검시 결과가 드러났다. 독으로 죽은 두 명은 누군가 시체를 단정하게 놓았으며, 총에 맞은 사체는 남은 흔적이 근거리에서 맞은게 아니었다. 칼에 찔려 죽은 사체는 칼이 뽑혀 있었고 뒷통수를 둔기로 타격당해 죽은 사체는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마지막 사체는 머리 등이 토막나 있는 상태였다..

형사 마리아와 렌 컴비는 신규 젤리 피시 개발을 의뢰한 공군과 함께 범인을 쫓기 시작하는데....

세상에는 참 많은 상이 있습니다. 추리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죠.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상도 많습니다. 아유카와 데쓰야 상은 많은 신인상 중 하나입니다. 신인상 중에서는 최초로 본격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1989년 시작되어 2020년 30회 째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역대 수상작 중 제가 읽어본건 가노 도모코의 "일곱가지 이야기", 곤도 후미에의 "얼어붙은 섬", 아오사키 유고의 "체육관의 살인",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입니다. 작품들 면면을 보면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작품들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었다는게 허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26회 (2016년) 수상작인 이 작품 역시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큰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대대로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악천후로 접근, 탈출이 어려운 등산로도 없는 설산 구석에 6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젤리피시가 추락하였는데, 6명 모두 타살 사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탈출했나?'가 핵심 수수께끼인데, 이를 '젤리피시는 원래 2대였다!'라는 대담하고 스케일이 큰 아이디어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멤버들은 공군의 요청 사항을 검증하기 위한 비교 대조 실험을 핑계로 3명씩 나누어 젤리 피시에 탑승했으며, 범인이 모두를 죽이고 한 척을 불태운 뒤, 남은 한 척을 타고 탈출했던 것이지요.

사고가 일어나고, 한 명씩 살해되는 과정과 함께 사건 발생 이후 현재의 수사 과정이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고 당시 승무원들 시점의 묘사가 이루어짐에도 이들이 함께 한 배에 타고 있는게 아니라 나누어 타고 있다는걸 교묘하게 숨기는 전개도 제법입니다. 서로 만나는 경우는 정박지에 한하고, 운항 중에는 같은 젤리 피시에 탑승한 사람들끼리만 마주치며, 통신은 무전기로 하고 있는 식으로 독자가 트릭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서술하고 있거든요. 이러한 전개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여섯 명의 탑승자 중 마지막 인물이 줄곧 이야기에 등장하던 에드워드 멕도웰이 아니라 다른 기술개발부 멤버인 사이먼 애트우드라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도 역시 서술 트릭에 가깝습니다. 범인인 에드워드가 미리 토막낸 사이먼의 시체를 집에 넣어 몰래 숨긴 뒤, 자신은 탈출하고 시체를 남겨놓은 건데, 마지막까지 이를 잘 숨겨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솜씨는 일품이에요. "십각관의 살인"에서 모리스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과 비슷한데, 그만큼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젤리피시 제조에 쓰이는 화학식을 이용한, 13년 전 리베카 자살 위장 사건 트릭도 괜찮습니다. 문을 틀어막은 플라스틱 조각은 밖에서 넣을 수 없었다는 상황을, 밖에서 부드러운 상태로 밀어넣은 뒤 화학 반응을 일으켜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건데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여러가지 트릭들이 등장하고, 잘 설명되고 있어서 추리적으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른 수상작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만화적인 인물들로 만화적으로 가볍게 써내려간 탓입니다. 주인공이자 탐정역인 마리아와 렌 컴비가 대표적입니다. 거유의 몸매 좋고, 어딘가 칠칠맞은 마리아와 딱 부러지고 냉정침착한 렌의 조합부터 지극히 만화적이고 평면적이에요. 수사 과정에서 빚는 갈등, 티격태격도 모두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요. 갓 대학에 입학한 리베카가 천재라서 젤리피시를 만드는 공식을 완성했다는 설정도 만화적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젤리 피시 내에서의 연쇄 살인 사건 묘사도 캐릭터들이 평면적이라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작품 속 캐릭터 중 자신만의 매력을 갖춘 캐릭터는 전무합니다. 80년대, 비행선이 날아다는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는건 괜찮아요. 젤리 피시의 제조 방법과 그 존재가 트릭의 핵심이니만큼, 이런 기계가 떠다니는 무대가 필요했을테니까요.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묘사도 모두 유치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비행정이 2대였다는 핵심 트릭은 좋지만 범행 자체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모두 악당이기는 하지만, 자살로 보이는 사체를 옮겨 완벽한 자살로 위장하고, 연구 성과를 독차지한게 과연 죽어 마땅한 범죄일까요? 연구 성과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걸 리베카의 노트로 밝혀낼 수 있다면 더더욱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살아서 사회적인 매장을 지켜보는게 더 큰 복수일테니까요. 최소한 복수를 한다 해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그들의 영향력이 바닥에 떨어진 뒤 하는게 더 현실적일겁니다.
그리고 6명 중 유일하게 죽어 마땅한건 리베카를 능욕하고 살해한 윌리엄 뿐입니다만,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일단 멤버들을 죽이고 시작하니 이래서야 누가 악당인지도 모를 지경이에요. 목숨을 걸고 6명이나 살해한 이유가, 13년 전 몇 번 말을 나눈 뒤 사랑에 빠져서 그랬다는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묘사가 유치해서 에드워드의 마음이 전혀 와 닿지도 않았고요.

트릭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헛점 투성이입니다. 사건에 사용된 젤리피시는 새로 만든 것과 첫 개발자 (로 알려진) 교수가 소유하고 있던 영호기를 개조한 것 두 대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젤리피시는 거의 백만 달러에 이르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경찰과 주변 인물들이 그 존재를 아예 모른다는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거의 집 한채 크기의 비행정이 2대가 비행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시간차를 두고 비행했더라도, 분명 눈에 띄었을텐데 말이지요.

증거도 빈약합니다. 마리아가 증거라고 이야기한, 젤리피시의 잔해가 눈보라를 조금이라도 더 견딜 수 있는 암벽 밑이 아닌 남쪽에 치우쳐져 발견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사고 후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설명도 있고, 크고 무거운 기체가 비상 착륙했다면 그게 어디건 착륙 위치에 머물러야지 암벽 밑에 옮기지 못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사이먼의 시체와 5명이 비행한게 아니라, 비행정에는 6명이 탑승했다는 증거가 정박한 체크포인트 다섯군데에서 일용품을 산 행위라는 것도 어설픕니다. 물건을 산 사람이 전부 다른 사람이라는게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증명되지도 않았고 교수가 물건을 사러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또 설령 술에 절어 있는 교수를 제외한 서로 다른 5명이 번갈아 물건을 샀다고 한 들, 그들 중 한 명이 사이먼 애트우드가 아니라 에드워드 맥도웰이라는게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죽은 여섯 명이 모두 살해당했다는걸 곧이 곧대로 믿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먼 거리에서 총이 발사되도록 한다던가, 뒷통수를 둔기로 맞게 만든다던가, 죽은 뒤 칼이 뽑히던가 하는 식의 트릭은 많잖아요? 현장이 불에 탔다면 이런 트릭을 위한 흔적을 지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솔직히 말해 범인 에드워드가 누군가가 다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현장을 조작하지 않아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린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5명이나 (정확하게는 4명) 죽인 살인범이 사건을 일부러 미궁에 빠트릴 이유는 없어요.

범행을 위한 전개도 엉망입니다. 비교대조 실험을 핑계로 2척이 비행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이먼이 비행에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네빌이 사이먼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에드워드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야 했는데 말이죠. 에드워드가 정말로 살인을 계획했다면 직접 사이먼을 살해하고 그가 도주한 것처럼 꾸민 뒤, 핵심 멤버로 비교대조 실험을 내걸어 2대의 운항을 끌어내는 게 타당했습니다. 사이먼을 죽인 뒤 진정한 복수귀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식으로 말이지요.

살인 계획도 스케일은 크지만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젤리 피시 2척의 자동 항행 프로그램등을 건드려 악천후 속에서 설산에 착륙하게 만든다는 계획부터 그러합니다. '천운'이 따른 덕분에 두 척 모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고 범인이 직접 이야기할 정도거든요. 네빌을 독살시킨, 컵에 독을 넣는 방법도 운에 의지한건 마찬가지고요. 크리스가 몰래 가지고 온 총의 존재를 몰라 위기를 맞는다는 돌발 상황이야 있을 수 있다 쳐도, 위기를 넘기는 것도 순전히 운이고.... 마지막 생존자인 윌리엄에게 칼과 총이라는 무기를 모두 넘겨주고 습격한다는 마지막 살인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총은 넘겨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장점보다 단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한 명의 응징자에게 여러명이 차례로 살해된다는 이야기를 보시려먼 차라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십각관의 살인"을 추천드립니다. 같은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이라도 "얼어붙은 섬"이나 "시인장의 살인"역시 폐쇄된 공간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클로즈드 서클 계열인데 이 작품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이 작품은 지나칠정도로 만화적이니만큼, 만화화되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만화적이라는 점에서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이 아니라, 메피스토 상 수상작이었다면 차라리 납득이 되었을 듯 합니다. 메피스토 상은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만화적이고 가벼운 설정의 작품에 수여되곤 했으니까요.

2015/11/20

내가 그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내가 그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예 시인 간바야시 미와코와 유명 작가 호타카 마코토의 결혼식에서 호타카가 독살당했다. 호타카에게 버림받은 동물병원 조수 나미오카 준코도 음독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동반 자살을 위해 호타카가 먹는 비염약에 독을 섞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결과, 그녀가 호타카의 비염약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와코는 약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던 용의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려 하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어 범인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단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는 추리적으로 훨씬 낫습니다. 특히 ‘필케이스에 전혀 다른 인물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는게 스루가 나오유키의 범행을 증명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합니다.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고 그것 자체를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당연히 호타카와 접점이 없는 다카히로는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남은 두 명인 스루가와 유키자사 중에서 스루가가 '호타카 전처의 짐을 맡았다'고 말했으니 범인은 스루가라는 결론이 도출되고요. 이 정도면 독자에게 충분히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미와코가 다카히로에게 케이스를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키자사 가오리가 호타카와 관계가 있었을 때 케이스를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경찰에서 수사를 보강할 필요는 있겠지만, 독자는 넘어가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나미오카 준코가 사망한 장소를 밝혀나가는 디테일—상품 전단지에 쓴 유서, 머리에 묻은 잔디, 샌들에 묻은 흙, 짝이 맞지 않는 휴대폰 충전기 등—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실험적인 시도 때문인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제법 많습니다. 우선 캡슐의 개수에 대한 지루한 공방이 그렇습니다. 자살 시체가 놓인 상황에서 과연 캡슐이 몇 개였는지를 세고 있을 정신이 있을까요? 스루가는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도, 방에 잠깐 숨어 있던 유키자사 가오리의 눈에 캡슐 개수가 들어왔다는건 영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매일 먹는 알약이 지금 몇 개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여섯 개 있었다’라고 증언해봤자, 그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핵심 증거(필케이스)에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기 위한 억지 설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또한 준코가 캡슐을 구한 시점이 금요일 오후였기 때문에 약통에 독을 집어넣을 틈이 없었다는 주장은, 뒷 부분에서 다카히로 혼자 1층에 있을 때 그녀가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었다는게 밝혀지면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누군가 집에 있을 때도 독약을 넣는 게 가능했다면, 밤에도 넣는 것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더해 마지막 추리 쇼는 작위적이라는 단점의 절정입니다. 가가가 수집한 증거라면, 이런 비공식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 대신 스루가를 바로 연행해 취조하는 게 더 합리적이니까요. 캡슐에 집착하면서 용의자들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있어야 소설로서 성립되니 트집 잡긴 애매하지만, 가가의 말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에 가까운 소설같은 이야기라는건 분명합니다.

용의자인 스루가 나오유키, 유키자사 가오리, 간바야시 다카히로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는 구성도 흥미로우나 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전개 역시 객관적이지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범인 시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가공한다는 점에서는 "악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악의"는 애초에 수기 형식을 빌린 서술 트릭물에 가까운 작품이니 비교 자체가 어렵지요.

또 호타카를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묘사하여 용의자들의 동기를 그리고 있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인 심리 묘사 탓에 오히려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에요. 특히 스루가의 속내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이 모두 자기 변호에만 급급하다 보니 오히려 간바야시 다카히로가 가장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스루가는 흠모하던 여인이 죽었고, 유키자사는 낙태를 한 바 있어 ‘죽음’과 연결되지만, 간바야시는 여동생에 대한 그릇된 애정을 제외하면 호타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동기 면에서는 가장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설령 동기가 있다 해도 여동생의 결혼식을 망칠 인물 같지는 않습니다. 동기를 드러내려면 본인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키자사가 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을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와 재미 모두 전작보다는 낫지만, 다양한 단점이 뚜렷한 범작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마찬가지로 정답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추리소설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을 마무리한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2020/03/08

여태까지 나만의 다카기 아키미쓰 순위

오래전, 30~40년 전 출간된 작품까지 포함해서, 국내 출간작은 어쨌건 모두 읽은 것 같아 정리의 의미에서 포스팅합니다. 모두 아홉편으로, * 표시된 작품은 오래전 절판본들입니다.

1위 : 별점 4점 "야망의 덫"*

2위 : 별점 3.5점 "실험부부"*

공동 3위 : 별점 3점 "문신 살인 사건" "파계 재판" "대낮의 사각"

공동 6위 : 별점 2.5점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유괴" "제로의 밀월"*

별점 1.5점 "법정의 마녀"

절판본 순위가 높기는 하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은 해 준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이 2.8점으로 3점에 육박하니까요. 얼마전 읽었던 "법정의 마녀"가 별점을 많이 깎아 먹었는데, 이 작품만 없었어도 평균 별점이 3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매 번 안타를 기대해 볼 만한, 명실 상부한 타율왕이라 할 수 있지요.

최근 나온 작품들은 가미즈 교스케 ("문신 살인사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와 햐쿠타니 센이치로 ("파계 재판", "유괴", "법정의 마녀") 시리즈가 많고, 기리시마 사부로 ("야망의 덫", "실험부부", "제로의 밀월") 시리즈는 단 한 편도 정식 출간되지 못했는데, 정식으로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여태까지 나만의 요코미조 세이시 순위 (ver2.0)

2019/09/07

세 가닥의 머리카락 - 구로이와 루이코 외 / 김계자 : 별점 1.5점

세 가닥의 머리카락 - 4점
구로이와 루이코 외 지음, 김계자 옮김/이상미디어

과거 이런 책이나 이런 책을 읽을 정도로 추리 소설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래전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작품 모음집이라던가, 아니면 일본 작품으로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 - 주로 페가나 북스로 대표되는 - 들도 여럿 읽어보았고요. 이 책도 추리 소설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들의 모음집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 외의 다른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표제작인 구로이와 루이코의 "세 가닥의 머리카락" 정도만 어느 정도의 재미와 완성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뿐, 다른 작품들은 한 편의 완성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고 있던데 이래서야 후속권들은 도무지 읽을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의 역사까지 관심이 있으시다면 모를까, 평범한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는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가닥의 머리카락"

표제작으로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입니다. 일본 최초의 창작 추리소설이라고 합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처참한 시체가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단서로 사복 형사 오토모와 다니마다가 범인을 알아낸다는 이야기지요.

두 형사 중 구세대를 대표하는 다니마다는 머리카락이 곱슬머리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여럿이 그를 죽였으며 옆에 곱슬머리 여자가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이는 여럿이 한 사람을 죽이고 신원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소지품을 빼앗은 곳은 도박장이다! 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다니마다는 도박장에 있던 곱슬머리 여자는 과거 다른 수사 때 알게 되었던 오콘이라고 단정하고 오콘을 찾아 나섭니다. 누가 봐도 추리의 비약이 심하고 결론이 심히 엉터리라는 점에서 당시 수사가 어땠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 수사를 신봉하는 신세대 오토모는 세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이런 저런 실험을 하여서 그 머리카락은 천연 곱슬이 아니라는 것, 세 가닥 중 한 가닥은 역방향이라는 것, 머리카락은 염색했다는 것 등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범인은 남자일 것이며, 긴 머리를 곱슬머리 형태가 되게 틀어 묶은 남자라면 '지나인'이 분명하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 머리의 기묘한 상처는 팽이에 찍힌 것으로, 이를 통해 어린 아이를 둔 중년의 염색한 지나인을 조사하여 범인을 알아내게 됩니다.
주어진 몇 안되는 단서 - 머리카락, 피해자의 상태 - 만 가지고 추리하여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귀납법적 고전 트릭물이 떠오릅니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실험하는건 과학 수사의 원조 손다이크 박사를 연상케하고요. 

그런데 재미있는건 결국 다니마다도 오콘을 통해 오토모와 똑같이 범인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오콘이 사건의 동기가 된 범인의 아내이자 피해자의 정부였기 때문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 구세대 다니마다의 건투에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오래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나는건 단점이긴 합니다. 고색창연한 대사가 난무하고 추리 역시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아무리 고전이라도 번역을 이렇게 낡아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렸듯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아요. 낡고 고즈넉하지만 왠지 유쾌한 분위기도 괜찮고요. 무엇보다도 한 장르의 시작, 태동을 볼 수 있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두 명의 여인"

구로이와 루이코가 윌키 콜린스의 "두 인연", 그리고 휴 콘웨이(본명 프레드릭 존 풀거스)의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읽은 뒤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원작과 동일한 내용으로 재 창작한 작품입니다. 본인 스스로 번역물이 아니라고 언급할 정도이니 굉장히 각색이 많이 되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내용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뭔가 멋진 트릭이라도 사용되었다면 이해가 됐을텐데, 이 정도 내용에 감명을 받아 재창작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알맹이가 없어요. 구로이와 루이코가 재창작한건 고색창연한 메이지 시대 문체로 가득찬 낡아빠진 묘사에 불과해 보입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영국에 사는 의사 '다쿠조'(!)가 환자의 딸인 '리파'와 사랑에 빠지지만 리파가 '히라야마'(!) 자작과 결혼한 뒤 시름에 잠겨 은둔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리파'가 악랄한 히라야마에게 농락당한걸 전해듣고 그녀의 도주를 돕다가 히라야마가 살해된걸 보고 해외로 도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히라야마 살해범으로 누군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걸 알고 자수하기 위해 귀국하죠. 여기서 모든 사건의 진상은 범인의 자백 뿐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에 추리적으로 가치가 있는 부분은 전무해요.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협력자의 심리를 처절하게 다루어 독자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려는 목적이라면 메이지 당시에는 먹혈을지 모르니 지금은 개그 요소같은 묘사 덕분에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21세기도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 읽을 이유는 없는 낡아뻐진 고대 유물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유령"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 "두 명의 여인"처럼 기묘한 현지화가 눈에 뜨입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로메다'라는 마을에 사는 오래된 시골 무인 지쿠부 요시나리의 여동생 오시오가 가로메다의 차남 나쓰오와 결혼을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거든요. 부부는 심지어 결혼 후 '미국'으로 갔다가, 죽은 오시오를 두고 돌아온 나쓰오가 오토시와 재혼하지만 병사한 뒤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내용입니다.

진상은 나쓰오가 죽은 척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두 명의 여인" 보다는 조금 낫긴 해요. 최소한 의외성은 있고, 죽은 척 했던 이유도 오시오의 오빠 요시나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진상도 나름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다른 여러가지 장치들, 특히나 오토시가 사고사하고 다시 오시오와 결혼한다는 억지스러운 결말은 지금 읽기에는 한 없이 유치한 탓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고양이", "모르그 가의 살인"

일본풍 문체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라 별도로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탐정 유벨"

빅토르 위고가 영국에 망명했을 때,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공화파 인사들 사이에 나타난 유벨(Herbert)이 사실은 나폴레옹의 탐정(첩자) 였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로 빅토르 위고가 직접 쓴 르포르타쥬의 번역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특기할 내용은 전무합니다. 유벨이 나폴레옹의 첩자임이 밝혀지는건 드러난 여러가지 증거 때문이고, 결국 '공복' 때문이었다는 동기마저 유벨이 직접 밝혀서 의외성도 없거든요. 빅토르 위고 시점에서 당대 망명객들의 삶을 그린 묘사는 좋지만 딱히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라서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나마 인상적인건 첩자를 '탐정'이라고 부른다는 점 밖에는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07/02

식물 이야기 사전 - 찰스 스키너 / 윤태준 : 별점 2점

식물 이야기 사전 - 4점
찰스 스키너 지음, 윤태준 옮김/목수책방

120가지 식물들에 대한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전해지는 전설이나 재미난 일화를 모아서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하나하나의 호흡이 굉장히 짧습니다. 길어야 2~3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이야기들입니다. 짧은 건 반 페이지 짜리도 있고요.

이런저런 정보들이 많으리라 기대했는데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내용이 재미가 없는 탓이 큽니다. 식물, 꽃이 많아서겠지만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데, 대체로 비슷해서 지루하거든요. 슬픈 사랑의 결과로 연인이 꽃이나 식물이 되었다, 신의 저주 등으로 꽃이나 나무가 되었다는 식인데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내용도 중구난방입니다. 항목들의 정리부터가 모호해요. '곡식' 이라는 큰 주제로 벼, 귀리, 수수 등을 모아 소개하는 항목이 있을 정도니까요.
수록된 이야기도 전설이면 전설, 실제 역사면 역사라는 식으로 보다 명확하게 카테고리를 구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심지어 도판도 하나 없습니다! 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항목별로 똑같거나 유사한 구성에 적절한 도판이 필수라 생각합니다. 이런 건 일본 친구들이 잘 하는데 말이죠. 솔직히 사전이라는 표현은 가당치도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 실정과 정서와 맞지 않는 식물들이 많은 것도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봄직한 것들은 별로 등장하지 않아요. 서구권 신화, 전설, 일화 비중이 높습니다. 동양권 이야기는 그나마 일본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좀 과한 점이 없지 않고요. 국화 이야기에서 국화와 아무런 관계없는, 단지 이름이 '오키쿠'인 인물의 전설을 가져다 인용하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래서야 '사전'이라는 취지에 많이 어긋나지요.

그래도 워낙에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기에 재미있는 것들도 제법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 몇개 소개해 드립니다. 우선 처음 알게 된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개암이 헤이즐넛입니다. 개암은 북유럽에서는 굉장히 '신령스러운' 나무로 요술지팡이의 재료이자 일찌기 '다우징' 용으로 많이 쓰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식물학자 린네가 이것이 그냥 전설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숲 속에 돈을 숨겨두고 친구에게 개암나무 가지로 찾아보도록요. 뭘 이런걸 실험 씩이나 했는지.... 여튼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아담을 불쌍하게 여겨 신이 전해준 것이 개암나무 지팡이라는 등, 잉글랜드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 건물은 개암나무 가지를 엮어 지었다는 등 기독교 쪽에서도 알아주는 나무더군요.
이와 정 반대되는 식물은 '금작화'입니다. 유다에게 팔려가기 직전 예수의 기도를 방해한 것은 금작화가 내는 소리였고, 헤롯왕에게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은신처를 알려준 것도 금작화와 이집트 콩이라고 하니까요. 마녀가 타는 빗자루도 금작화 가지로 만든다니 중세 시대에 멸종되지 않은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보리수 열매가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라는데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딘의 우주수 위그드라실이 물푸레나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그동안 선악과가 사과라고 알고 있었는데 성경에는 명확하게 종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니 의외였습니다.
동방 박사가 바친 '유향'은 발삼나무 수액을 말려 만든 약재라는군요. 수천년 된 전설의 약재인데,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요리 관련 이야기도 몇가지 기억에 남습니다.
타비스톡 애비의 수도사들은 맛있는 사과주를 만들어 수도사를 모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톡 쏘는 맛이 너무 강했어요. 와인과 섞어서 부드럽게 만들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요. 그래서 수도원장이 사과주를 부드럽게 만드는 공정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키작은 절름발이 노인 한 사람이 나섰죠. 그런데 한 수도사가 노인이 뭐하나 궁금해서 몰래 훔쳐보니 악마였다지 뭡니까. 그래서 놀란 수도사가 술통에서 잠자던 악마에게 사과주를 쏟아 붓자 노인은 저주를 퍼부으며 하늘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화난 노인이 발한 열기 때문에 사과주가 펄펄 끓었고, 식어버린 사과주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미! 그때부터 모든 사과주를 불타는 유황에 부어 만든다고 합니다.
단풍당 (maple sugar)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한 인디언 여성의 귀차니즘 때문이랍니다. 어느날 그녀가 사슴고기를 요리하다가 물을 떠오기 귀찮아서 단풍나무 수액을 채워 넣고 불에 올린 것이죠. 그 다음 잡담을 즐기다고 돌아와보니 수액이 모두 날아가버리고 사슴고기는 끈적끈적해 버렸습니다! 남편에게 혼날게 두려워 도망갔는데 밤에 돌아와보니 남편이 딱딱하게 굳은 고기를 열심히 먹고 그녀를 칭찬했다고 하네요. 아마 일종의 '사슴고기 강정' 이 되어버린 것이겠죠? 쉽게 구할 수 있는 단풍나무 꿀을 고기에 발라먹으면 비슷한 맛이 날 것 같습니다.
그 외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도 인상적입니다. 1월 6일 밤 딱총나무 가지를 꺾고 나무에게 허락을 구한 후, 대답이 없으면 침을 세 번 뱉는다. 꺾은 가지를 가지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마법진을 그리고, 주위에 특정 꽃과 산딸기 등을 늘어놓은 다음 한가운데에 선다. 악마가 나타나면 힐다의 지팡이(딱총나무 가지)로 가리키면 복종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한번 시도해 봐야 겠네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질 항목에서 소개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이사벨라, 로렌조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둘의 사랑을 방해한 오빠들에게 로렌조가 죽자 이사벨라는 로렌조의 시신에서 머리만 잘라내어 화분에 숨기고 바질을 심어 소중하게 가꾸었다는 내용이거든요. 머리가 들은 화분이라니! 괴담에서나 봄직한 이야기인데 이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포장한 것도 놀랍기만 하네요.

이렇게 읽을만한 부분도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14,000원에 가까운 가격도 과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 인터넷을 통해 접해도 충분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호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