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닥의 머리카락 - 구로이와 루이코 외 지음, 김계자 옮김/이상미디어 |
과거 이런 책이나 이런 책을 읽을 정도로 추리 소설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래전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작품 모음집이라던가, 아니면 일본 작품으로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 - 주로 페가나 북스로 대표되는 - 들도 여럿 읽어보았고요. 이 책도 추리 소설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들의 모음집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 외의 다른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표제작인 구로이와 루이코의 <<세 가닥의 머리카락>> 정도만 어느 정도의 재미와 완성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뿐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한 편의 완성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에요.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고 있던데 이래서야 후속권들은 도무지 읽을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의 역사까지 관심이 있으시다면 모를까, 평범한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는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가닥의 머리카락>>
표제작.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 일본 최초의 창작 추리소설이라고 합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처참한 시체가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단서로 사복 형사 오토모와 다니마다가 범인을 알아낸다는 이야기지요.
두 형사 중 구세대를 대표하는 다니마다는 머리카락이 곱슬머리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여럿이 그를 죽였으며 옆에 곱슬머리 여자가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이는 여럿이 한 사람을 죽이고 신원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소지품을 빼앗은 곳은 도박장이다! 라는 추리로 이어지죠. 다니마다는 도박장에 있던 곱슬머리 여자는 과거 다른 수사 때 알게 되었던 오콘이라고 단정하고 오콘을 찾아 나섭니다. 누가 봐도 추리의 비약이 심하고 결론이 심히 엉터리라는 점에서 당시 수사가 어땠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 수사를 신봉하는 신세대 오토모는 세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이런 저런 실험을 하여서 그 머리카락은 천연 곱슬이 아니라는 것, 세 가닥 중 한 가닥은 역방향이라는 것, 머리카락은 염색했다는 것 등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범인은 남자일 것이며, 긴 머리를 곱슬머리 형태가 되게 틀어 묶은 남자라면 '지나인'이 분명하다고 추리하죠. 피해자 머리의 기묘한 상처는 팽이에 찍힌 것으로 이를 통해 어린 아이를 둔 중년의 염색한 지나인을 조사하여 범인을 알아내게 됩니다. 주어진 몇 안되는 단서 - 머리카락, 피해자의 상태 - 만 가지고 추리하여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은 귀납법적 고전 트릭물이 떠오릅니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실험하는건 과학 수사의 원조 손다이크 박사를 연상케하고요.
여기서 재미있었던건 결국 다니마다도 오콘을 통해 오토모와 똑같이 범인을 찾아낸다는거죠. 오콘이 사건의 동기가 된 범인의 아내이자 피해자의 정부였기 때문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 구세대 다니마다의 건투에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오래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나는건 단점이긴 합니다. 고색창연한 대사가 난무하고 추리 역시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아무리 고전이라도 번역을 이렇게 낡아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렸듯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아요. 낡고 고즈넉하지만 왠지 유쾌한 분위기도 괜찮고요. 무엇보다도 한 장르의 시작, 태동을 볼 수 있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두 명의 여인>>
구로이와 루이코가 윌키 콜린스의 <<두 인연>>, 그리고 휴 콘웨이 (본명 프레드릭 존 풀거스)의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읽은 뒤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원작과 동일한 내용으로 재 창작한 작품. 본인 스스로 번역물이 아니라고 언급할 정도이니 굉장히 각색이 많이 되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내용은 굉장히 심플합니다. 뭔가 멋진 트릭이 사용되었다던가 했더라면 이해가 될 텐데, 이 정도 내용에 감명을 받아 재창작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알맹이가 없어요. 구로이와 루이코가 재창작한건 고색창연한 메이지 시대 문체로 가득찬 낡아빠진 묘사에 불과해 보일 정도에요.
영국에 사는 의사 '다쿠조'(!)가 환자의 딸인 '리파'와 사랑에 빠지지만 리파가 '히라야마'(!) 자작과 결혼한 뒤 시름에 잠겨 은둔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리파'가 악랄한 히라야마에게 농락당한걸 전해듣고 그녀의 도주를 돕다가 히라야마가 살해된걸 보고 해외로 도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히라야마 살해범으로 누군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걸 알고 자수하기 위해 귀국하죠.
여기서 모든 사건의 진상은 범인의 자백 뿐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에 추리적으로 가치가 있는 부분은 전무해요.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협력자의 심리를 처절하게 다루어 독자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려는 목적이라면 메이지 당시에는 먹혈을지 모르니 지금은 개그 요소같은 묘사 덕분에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21세기도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 읽을 이유는 없는 낡아뻐진 고대 유물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유령>>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 <<두 명의 여인>>처럼 기묘한 현지화가 눈에 뜨입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로메다'라는 마을에 사는 오래된 시골 무인 지쿠부 요시나리의 여동생 오시오가 가로메다의 차남 나쓰오와 결혼을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거든요. 부부는 심지어 결혼 후 '미국'으로 갔다가, 죽은 오시오를 두고 돌아온 나쓰오가 오토시와 재혼하지만 병사한 뒤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내용이죠.
진상은 나쓰오가 죽은 척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두 명의 여인>> 보다는 조금 낫긴 해요. 최소한 의외성은 있고, 죽은 척 했던 이유도 오시오의 오빠 요시나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진상도 나름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요. 다른 여러가지 장치들, 특히나 오토시가 사고사하고 다시 오시오와 결혼한다는 억지스러운 결말은 지금 읽기에는 한 없이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고양이>>, <<모르그 가의 살인>>
일본풍 문체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라 별도로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탐정 유벨>>
빅토르 위고가 영국에 망명했을 때,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공화파 인사들 사이에 나타난 유벨 (Herbert)이 사실은 나폴레옹의 탐정 (첩자) 였다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글. 빅토르 위고가 직접 쓴 르포르타쥬의 번역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특기할 내용은 전무합니다. 유벨이 나폴레옹의 첩자임이 밝혀지는건 드러난 여러가지 증거 때문이고, 결국 '공복' 때문이었다는 동기마저 유벨이 직접 밝혀서 의외성도 없거든요. 빅토르 위고 시점에서 당대 망명객들의 삶을 그린 묘사는 좋지만 딱히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라서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나마 인상적인건 첩자를 '탐정'이라고 부른다는 점 밖에는 없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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