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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12

동서추리문고 70- 백모 살인사건 : 별점 1점

백모살인사건 - 2점 리처드 헐 지음, 백길선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세계 3대 도서추리소설 명작"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나온 리처드 헐의 작품으로, 에고로 가득찬 악당 주인공 에드워드가 백모를 살해하기 위한 일종의 일기와 마지막 백모의 수기로 이루어진 1인칭 소설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실망입니다. 주인공 에드워드와 백모의 신경전, 유머스러운 스토리는 재미있었지만 절대로 추리소설은 아니가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살의"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최소한 "클로이든발 12시 30분"은 진정한 걸작임에 분명한데 이 작품이 세계 3대 도서 추리소설이라니 어림도 없죠. 그냥 단순한 영국식 유머소설이니까요.

뒷부분에 같이 수록된 휴 월폴의 "은가면"과 윌키 콜린느의 "사람이 오만하면"이라는 두개의 단편 역시 예전 하서추리문고 단편소설집에서 읽었던 작품으로, "은가면"은 이 백모 살인사건이라는 소설의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무겁고 음울한 선택이어서 더욱 실망스러웠습니다.

동서추리문고가 "문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고가의 책들이라고 볼 때 이 책은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통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피해야 할 책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09/02/17

화형법정 - 존 딕슨 카 / 오정환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별점 4점

화형법정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오정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출판계에서 꽤 잘나가는 편집인 에드워드 스티븐스에게 주말 별장 이웃인 마크 데스파드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전 죽은 마크의 백부 마일즈가 사실은 독살당했다며 시체 발굴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마크와 그의 친구인 전직 의사 파팅턴, 마크의 고용인 헨더슨 노인과 스티븐스 네 명은 한밤중에 납골당 입구를 뜯어내는 대 공사를 진행했지만, 마일즈 백부의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여러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는데....

10여년전 다른 구판 동서 추리문고 몇권과 함께 제 첫 직장의 여사장님께서 하사하여 주셨던 구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습니다. 지금은 복간되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구판 동서 추리문고로 밖에는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너무나 감사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고전 추리물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샘솟던 차에 읽게 되었네요.

줄거리 요약부터 하자면, 위에 대충 써 놓기도 했지만 미모의 정체불명 아내와 못난 이웃 사촌때문에 벌어진 3일 동안의 대소동... 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써버리면 흡사 "어니스트 캠프 대소동"같은 코미디 영화가 연상되는데 딕슨 카 선생님 작품이니 당연히 코미디는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 그것도 흑마술 관련된 고딕 호러같은 이야기를 근대에 벌어진 사건과 절묘하게 결합시킨 딕슨 카 류 모던 고딕 호러 오컬트 추리물의 결정판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달랑 3일에 걸친 이야기 -그것도 대부분은 이틀 동안 벌어진- 를 장대한 장편으로 풀어낸 딕슨 카의 탁월한 글 솜씨는 역시나 탁월합니다. 또한 이틀동안 몇 안되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스케일을 커버하기 위해 앞서 말했듯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던 역사적인 사실, 즉 17세기 사형당했던 유명한 독살범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마리 도브리)과 생 클르와, 데프레와 같은 인물들을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재와 쌍으로 엮어서 색다른 맛과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전개도 좋았고요. 덕분에 최근 유행하는 팩션같은 형태를 띄는데, 이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퍼즐러, 고전 미스터리 황금기의 거장답게 불가능 범죄 2건을 전면에 배치하여 대담하게 독자와 승부하는 맛이 잘 살아있어서 추리 애호가로서 너무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런게 진정한 고전 추리물의 맛이겠죠.
두 개의 범죄 -꽉 막힌 납골당에서 어떻게 시체가 사라졌는지와 마일즈 백부의 방에서 문을 뚫고 나가듯이 사라진 백부에게 독약을 먹인 여인의 정체- 모두 신선하면서도 예측을 뛰어넘는 전개와 더불어 고딕 호러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건과 어우러진 작품과 너무 잘 어울리는지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것 아닌 듯 했던 여러가지 복선들이 나중에 사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고전적 전개의 효과적인 사용 역시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알리바이에 대한 참신하면서도 거장다운 대담한 발상과 전개(응?)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 거리가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딕슨 카 선생 최 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지 않게 좀 지나칠 정도로 오컬트 쪽에 치우친 나머지 전개의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사건에 뛰어들어 탐정 역할을 하는 고던 클로스의 생뚱맞은 등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크의 도주, 오그덴의 돌출행동 같은 것들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에필로그가 지나칠 정도로 사족의 느낌이 강해서 무척 불만스러운데요. 왜 이런 에필로그를 구태여 집어넣어서 잘 마무리 된 정통 고전 추리물을 오컬트로 덧칠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에필로그 때문에 사건의 진범과 범행의 방법 등 모든 요소가 헝크러져 버리거든요. 아무래도 작가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과거에 벌어진 역사와 맞물리는 현대에 벌어지는 괴사건, 그리고 놀라운 진상! 덧붙여 반전까지 있는 저도 이런 작품을 한번 써보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읽은 딕슨 카 작품 중에서는 충분히 상위권을 점할 작품으로(해골성,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연속 살인사건 등이 상위권입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멋진 요소가 많고 재미 역시 확실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도 이 작품을 읽지 않는 추리 애호가가 있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김내성 선생님의 "진주탑" 처럼 이 작품도 번안하면 무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 말기에 벌어진 살인사건과 얽힌, 경성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참극! 조선 총독부 주재원인 옆집 일본인 후루따(가칭^^) 의 부탁으로 우연찮게 사건에 뛰어든 조선인 변호사(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고도일, 그리고 그의 미모의 부인에 얽힌 놀라운 진상! 어쩌구 저쩌구...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2003/12/13

동서추리문고 35- 특별요리 : 별점 5점!

특별요리 - 10점 스탠리 엘린 지음, 황종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엘러리퀸 매거진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뷰한 데뷰작 "특별요리"를 필두로 한 스텐리 엘린의 단편선입니다. "특별요리"는 국내의 다른 앤솔로지에 포함된 적이 있었지만 다른 단편들은 접하기 힘들었는데 이번에 동서추리문고에서 정식 번역되어 주저 않고 구입했습니다.

일단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은 전부 "추리소설"은 아닙니다. 극적 반전이 존재하고 몇몇 단편은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이 등장하는 추리물적인 요소도 있지만 대체로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어떤 뿌리깊은 공포와 특별한 심리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단편소설선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네요.

조금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수록 단편중 가장 유명한 "특별요리"는 역시 뛰어난 작품이었고 다른 작품들 중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흉사", "벽 너머의 목격자" 등이 재미있었습니다. 뭐 이외의 다른 단편들도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는 면도 있고 설득력이 약한 작품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반전이 뛰어나고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역자의 세심한 번역때문인지 다른 동서문고에서 가끔 보이는 번역상의 오류가 거의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부록격으로 토마스 버크의 "오터모올 씨의 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단편도 세계 추리사에 길이 남은 작품이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트릭이긴 하지만 역시나 명불허전!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수준높은 단편들로 꽉 차있는, 별점도 5점이 아깝지 않은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스텐리 엘린은 정말이지 추리계의 오 헨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수준높은 단편 작가라 생각되네요. 이 작품은 정말로! 추리소설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꼭 한번쯤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2009/05/02

처형 6일전 - 조너슨 라티머 / 문영호 : 별점 3점

처형 6일전 - 6점
조너슨 라티머 지음, 문영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로버트 웨스틀랜드는 이웃 사형수의 자살소동을 보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친 뒤, 자신의 돈을 이용하여 단 일주일 남은 사형 집행때까지 진범을 잡고자 한다. 유일한 단서는 그의 무죄를 증언해 줄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편지 뿐이었다. 웨스틀랜드는 유능한 변호사 핑클슈타인, 사립탐정 윌리엄 크레인과 그의 조수 윌리엄즈를 고용한 뒤, 자신의 지인과 친구들을 총 동원하여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하는데 남은 시간은 단 6일!

조너선 (조나단?) 라티머의 대표작이자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명편으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멋진 고전입니다. 어렸을 때 아동판으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이번에 알라딘에서 동서 추리문고 할인 행사를 하길래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새 야구만 보는 것 같아서 연휴도 되고 했기에 맘잡고 한번에 읽고 포스팅합니다.

이 책의 특징이라면 위의 줄거리처럼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을 많이 연상케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두 작품을 착각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환상의 여인"은 정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단 한명의 목격자를 찾기 위한 고난의 과정을 강렬한 서스펜스와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서스펜스보다는 하드보일드적인 탐정의 수사과정과 주인공이 뒤집어 쓴 누명을 파헤치는 추리 부분이 더 돋보이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에 가깝다는 명확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맹점을 찌르는 밀실 트릭, 그리고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나무랄데 없는 수준이며, 진범을 밝히는 과정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 중요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는 등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거리가 충분합니다. 트릭이나 구성이 지금 읽으면 굉장히 쉬운 발상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도록 구성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반전과 진범의 정체도 납득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타당한 결말이라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중반 이후부터 서스펜스가 확 죽긴 합니다. 추리물로 돌변하면서 주인공이 탐정 윌리엄 크레인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리묘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거든요. 단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체적인 균형 면에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뭔가 더 끄집어낼게 있어 보였던 옆방 사형수들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것도 좀 애매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윌리엄 크레인이라는 캐릭터가 작중에서 하드보일드 탐정다운 간지도 없고 일체의 호감도 느껴지지 않아 몰입하기 어려운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하드보일드 치고는 두뇌가 결합된 행동파 탐정이라는 독특한 면은 있지만 지나치게 본능 - 술과 여자 - 에 탐닉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성실해 보였거든요. 이런 친구한테 목숨을 내 맡긴 웨스틀랜드가 불쌍해질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고전적 하드보일드 스릴러물이면서도 "정통 추리"의 요소를 잘 도입한 이색적인 작품이라 지금 읽어도 그 매력이 충분한 고전명작이라 생각합니다. 걸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추리와 하드보일드 모두를 좋아하신다면 추천할만한 작품으로 제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웨스틀랜드는 살아나긴 했어도 잃은게 너무 많아 보이네요...

덧붙이자면, 솔직히 별점은 3점 이상을 줄 수 있는 작품인데 번역이 너무 별로라서 도저히 3점이상은 못 주겠습니다.... 동서 추리문고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한데 몰입해서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어요. 대사의 구분도 이상해서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한 장황한 묘사를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직역으로 표현하는 등 읽다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였거든요. 예를 들자면 '해걸음은 점점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환등기 앞에서 누군가가 모슬린을 두 겹 네 겹을 차곡차곡 접어서 포개 놓아가는 듯 했다' 라는 문장을 들 수 있겠네요. 뒷부분이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불필요한 묘사이기도 하고요. 그냥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도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이런 문장이 전편에 난무합니다...

2012/06/10

혼진 살인사건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혼진 살인사건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혼진 살인사건"은 이미 예전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지만, 이번에 시공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중,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작품은 중편인 "혼진 살인사건"과 단편인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중단편 길이의 "흑묘정 사건"입니다.

수록작의 전체 평균 별점은 2점. 표제작 외 다른 두 작품이 점수를 좀 깎아먹은 탓입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보다는 예전 동서 추리문고의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더 좋았습니다. 이쪽은 별점 3점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나만의 요코미조 세이시 순위"에 추가한다면, "혼진 살인사건"은 공동 2위이고 이 책 전체적으로 따지면 7위입니다. 긴다이치 시리즈 팬분들께는 추천드리지만 그냥 추리 애호가분들께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혼진 살인사건"

이 작품은 기념할 만한 긴다이치 시리즈 첫 작품으로 시리즈의 전형적 특징 - 시골 마을 지역 유지 가문에 얽힌 원한 관계와 오싹한 살인사건, 그것을 해결하는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펼쳐지며, 공들인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에 있어 큰 문제가 있긴 합니다. 작품 속 공개된 정보만 가지고 트릭을 독자가 풀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한 탓입니다.

그래도 기념비적인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역사적 의미도 확실하며, 지금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전형적인 긴다이치 시리즈다운 소품. 긴다이치는 아주 잠깐 언급될 뿐 화자는 혼이덴 가문의 병약한 막내딸 쓰루요로, 그녀의 1인칭 시점 서간문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스기 죽음의 진상과 에마를 숨긴 이유를 쓰루요에게 숨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탓입니다. 게다가 오노 가문의 쇼지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수했다는 결말부는 어이가 없더군요. 강도, 퍽치기 전과가 있는 인간이 약간의 호의 때문에 살인죄까지 뒤집어써 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협박을 하면 했지...
편지로 진행되는 전개 역시도 몇몇 단락을 제외하면 그냥 소설이라 해도 될 정도로 편지 특성을 살리지 못했고요.

한마디로 쓰루요의 쓸데없는 오해가 내용의 대부분인 작품으로, 일종의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이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흑묘정 사건"

추리소설가 Y가 긴다이치 코스케와 함께 밀실 살인, 1인 2역, 얼굴 없는 시체라는 전통적 추리소설 트릭에 대한 견해를 나눈 뒤, 얼굴 없는 시체에 관련된 사건을 실제로 긴다이치가 해결하고 알려준다는 내용입니다.

얼굴 없는 시체 트릭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바꿔치기 트릭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아간, 나름 고심한 트릭이 펼쳐집니다. 특히 장지문과 다다미에 묻은 혈흔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뜬금없이 오노 지요코라는 여인이 등장해서 딱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사라진다던가, 그냥 봐도 수상한 변장과 뒤이은 밀회 쇼를 그냥 성격 문제였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 부분은 심하게 거슬렸습니다. 트릭 자체도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요. 아유코와 시게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너무 뻔했어요. 그 외에도 닛초가 공범이 되는 동기와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긴다이치 코스케의 개그스러운 만담과 과거사가 잠깐이나마 펼쳐져 팬으로서는 즐길 거리가 있고, 본격 추리 소설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게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09/08/17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에도가와 란포 / 김은희 : 별점 3.5점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6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두드림

제목 그대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이자 변격물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선집입니다. 1권 다음에 3권이 먼저 나온 뒤 나온 2권입니다. 순서조차 엽기적이군요.... 1권과 3권을 이미 읽고 소장하고 있기에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추리 단편을 워낙 좋아라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접한 작품도 많고 "본격물" 로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들도 제법 많아서 1 - 3 권을 읽고 느꼈던 것보다는 조금 못합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죠. 전체적인 평점은 3점입니다.

최고 베스트는 "음울한 짐승" 이긴 한데, 너무 잘 알려진 작품이라 조금 식상하다면 "그는 누구인가"를 꼽고 싶네요. "악귀"도 괜찮았고요.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호반정 사건 :
거울장치로 남을 엿보는 취미가 있는 주인공인 나는 묵고있던 여관 목욕탕에 몰래 숨겨놓은 장치를 통해 한 여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관에서 친구가 된 코우노와 함께 사건의 조사에 착수한 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여관 잔치에 불려나왔던 기생 쵸키치가 실종되고 정체불명의 손님들이 커다란 트렁크를 든 채 서둘러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경찰까지 수사에 나서지만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작가의 변격적인 취향이 잘 반영된 "거울장치"라는 설정은 인상적이지만 본격물에는 미치지 못한 조금은 애매한 작품입니다. 본격물로 기능하기 위한 트릭은 그런대로 합격점이긴 하며 쵸키치의 실종이라던가 군불지기 산조우의 존재 등을 통해 이야기도 나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는 있지만 "거울장치"라는 소도구 자체가 우연을 토대로 한다는 점과 정체불명의 손님들과 거액의 돈이라는 설정 역시 지나칠정도로 작위적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야기는 중편 길이에 가까우나 알맹이가 없는 작품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악귀 :
추리소설가 토노무라 쇼우이치는 고향에서 우연히 친구인 오야 코우기치가 연루된 사건에 휘말린다. 오야의 정혼자 츠루코가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 마침 오야는 파혼을 주장하며 유키꼬라는 아가씨와 사귀고 있었기에 완벽하게 범인으로 몰린다. 결국 토노무라는 친구의 누명을 벗어주기 위해 나서는데...
작가 스스로도 책 뒤의 해설에서 이야기하듯 결정적 트릭을 홈즈 단편 중 하나인 "브루스파팅턴 잠수함 설계도의 모험"에서 차용한 작품으로 정통 본격물입니다. 비록 중요 트릭이 모방이라 하더라도 다른 트릭들, 즉 1인 2역 트릭 같은 것들이 중요 트릭과 함께 작품과 잘 결합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말이 조금은 쌩뚱맞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작품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지붕 속 산책자 :
백수 코우다는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와 친분을 맺은 뒤 "범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새로 이사한 하숙집 천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우연히 발견한 그는 다른 하숙생들을 염탐하는 취미에 빠져들다가 싫어하는 하숙생 엔도우를 완벽하게 살해할 수 있는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대표작 중 하나로 과거 동서 추리문고의 "음울한 짐승"을 통해 먼저 접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변격물적인 성향에 더해 범행이 먼저 이루어지는 약간은 도서추리적인 전개, 그리고 사건을 밝혀내는 아케치 코고로의 추리쇼가 돋보이며, 특히나 범행을 행하는 과정까지의 서스펜스가 정말 장난이 아니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죠.
코우다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과 범행의 유력한 증거가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격물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에도가와 란포라는 작가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

그는 누구인가 :
유우키 소장의 아들 히로카즈가 도둑에게 저격당해 불구가 된다. 그러나 범인이 남긴 불가사의한 발자국 등 알 수 없는 여러 정황증거 때문에 사건이 미궁에 빠진다. 결국 추리광인 히로카즈 스스로 탐정역을 소화하려 하고, 유우키 가문의 손님인 아카이씨 역시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범인이 하늘로 꺼지는 발자국이라는 불가능 범죄의 설정을 가진 본격물입니다. 지도까지 도입한 치밀한 구성, 잘 짜여진 캐릭터 구도와 완벽한 동기 등 본격물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죠. 덕분에 상당한 길이의 중편이지만 작품 내내 계속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아 지루하지 않게 읽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케치 코고로가 등장한다는 것 역시 팬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고요.
저자 스스로는 자신의 냄새가 많이 나지 않아 별로 화제가 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후대의 팬으로서는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달과 장갑 :
카츠히코는 고리대금업자 마타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자신의 애인이기도 한 마타노의 아내 아케미와 공모하여 사건을 은폐할 결심을 한다...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황제의 코담배갑" 같은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멀리서 바라본다"라는 알리바이 트릭을 언급하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죠. 완전 오버에요... 이 작품은 트릭 자체는 별게 없고 오히려 이를 밝혀내기 위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서스펜스가 더욱 돋보이는 스릴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아케치 코고로의 이름이 잠깐 언급되는 것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리코시 수사1과장 귀하 :
도쿄 경시청의 호리코시 수사1과장은 5년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궁의 천만엔 도난사건에 대한 편지를 받는다...
서간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1인 2역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트릭과 설정은 뻔해서 역시나 본격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전개과정이 뻔한 아이디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흡입력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처럼 결말까지 깔끔할 뿐 아니라 훔친 돈의 은닉에 대한 몇가지 아이디어 등도 재미있었기에 별점은 3점. 무난하고 평이했습니다.

음울한 짐승 :
추리작가인 나는 실업가 오야마다 로쿠로의 부인인 오야마다 시즈코라는 여성과 우연히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에게 오에 슌데이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추리작가에 대해 문의하고, 나는 오에 슌데이가 과거의 연인이었다가 스토커로 돌변한 히라타 이치로라는 그녀의 고백을 듣게 된다. 히라타 이치로의 스토킹과 편지의 강도가 세지던 와중에 결국 오야마다 로쿠로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나왔다! 이 작품도 동서추리문고를 통해 소개된 대표작이기도 한 변격물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스로 작중의 오에 슌데이, 즉 히라타 이치로라는 인물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여 작품을 써 나갔기 때문에, 란포의 여러 작품들이 오에 슌데이의 작품으로 인용되는 등 작가와 왠지 일체화된 느낌이 강한 작품이기도 해서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비록 읽어본 작품이기는 하지만 번역이 다른 탓에 굉장히 신선한 기분을 느끼면서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스토킹이나 가학증 등 변격물적인 성향도 잘 드러나 있지만 본격물로 보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여러가지의 트릭 - 특히 오야마다 로쿠로 살인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볼거리입니다 - 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간 여운을 남기는 애매한 결말까지도 인상적이라 에도가와 란포 작품 중에서도 탑 클래스에 들만한 좋은 작품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2006/12/22

독초콜릿 사건 - 앤소니 버클리 콕스 / 김선옥 (자유추리문고 10) : 별점 4점

독초콜릿사건
앤소니 버클리 콕스 지음, 손정원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유명한 난봉꾼 유스티스 펜퍼더 경은 선물로 도착한 초콜릿을 같은 클럽 회원 벤딕스씨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초콜릿을 먹은 벤딕스씨의 부인이 초콜릿에 들어있던 독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런던 경시청의 수사는 난항에 빠졌고, 경시청 주임경감 모리스비는 친분이 있는 소설가 로저 셀링검에게 그가 회장으로 있는 범죄 연구회에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한 뒤, 그들의 추론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경시청에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범죄 연구회 멤버 6인은 순번을 정해 차례로 자신들의 추리를 발표하는데...

이번에 구입한 자유추리문고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아주 유명한 고전 명작이지요. 너무 늦게 읽은 감은 있네요.

이 작품 전에 발표되었다는 단편 버젼은 이미 읽어봤지만 이 작품은 단편 버젼의 사건과 상황을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6명의 범죄 연구회 회원들이 각자의 추리를 펼친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독자에게 다양하고 화려한 추리의 향연을 느끼게 해 줍니다. 추리 클럽 회원들의 추론 및 결과 하나 하나가 각각 추리소설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은 흡사 단편 연작을 읽는 듯한 느낌도 전해 줍니다.
전에 읽었던 "시행착오"의 치터윅씨의 등장도 반가왔고, 각 회원들이 자기 차례가 될 때마다 이전의 추론을 뒤집고 새로운 결론을 발표하는 전개로 독자가 회원들과 동일한 정보를 입수하여 끝까지 함께 두뇌 게임을 펼치게끔 하는 구성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공정한 승부야말로 정통파 고전 미스테리로서의 최고 미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작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동안의 추리소설의 탐정들의 추리방식, 즉 하나의 단서만 가지고 단 하나의 추론만 내세우며 그것이 바로 결과가 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 소설이면서도 추리 소설의 헛점을 제대로 꼬집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보완하여 다양한 추론이 등장하게 한 아이디어가 이 작품을 당시의 기존 추리 소설보다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지니게 만든 힘이었다 생각되네요.

단 너무 복잡하게 꼬아놓은 나머지 결론이 조금 황당하다기는 합니다. 한두발짝만 더 나아가면 좋았을 것을 대여섯걸음 더 나아간 느낌에요. 그런 면에서는 단편 버젼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었다 생각됩니다. 물론 단편 버젼의 추리도 주요 추론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역시 추리소설사에 이름을 남긴게 당연할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치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좋은 작품은 몇년, 아니 몇십년이 지나도 재미있고 좋은 작품인거죠. 별점은 4점입니다. 고전 정통파 추리물 애호가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1/05/07

통 - 프리먼 월스 크로프츠 / 오형태 : 별점 2.5점

 - 6점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부두에서 포도주 통 하역 작업을 하던 해운회사 직원 보로턴은 통 한 개 안에 금화와 시체가 들어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브로턴이 회사와 경찰에 신고하던 사이에 통을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번리 경감의 수사를 통해 통을 가져간 사람인 훼릭스 씨와 통, 그리고 통 속 금화와 시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번리 경감은 파리 경시청 경감 르빠르쥬와 함께 피해자 아네트, 피해자의 남편 보와라크 수사에 나서는데....

1920년에 발표된, 고전 본격 추리 소설 황금기 최고 걸작 중 한 편입니다. 작가 F.W.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데뷰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고요. 유명세답게 이런저런 리스트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편입니다. '주간문춘에서 선정했던 동서미스터리 100'에서는 33위로, '에도가와 란포 본인 선정 미스터리'에서는 9위로 선정했었네요. '히치콕 매거진 선정 세계 10대 추리 소설' 중에서는 무려 2위이고요. 저도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모처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추리 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용의자들 중 누가 진범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하우더닛과 같은 당대에 유행했던 '두뇌 게임', '퍼즐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 아네트는 단순한 교살로 살해되어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범인은 훼릭스가 아니면 보와라크 씨일 수 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해서, 두뇌 게임이 아니라 '수사를 통한 현실감'이 주는 재미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사한 작품입니다. 그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겠지요.
1부에서 통을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수사도 볼 만 하지만 2부와 3부에 걸쳐 선보이는 본격적인 수사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2부는 번리 경감, 파리의 경시총감 쇼베 씨, 르빠르쥬 경감이 보와라크 씨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고, 훼릭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여 그를 체포하는 내용이며 3부는 훼릭스의 변호사가 고용한 탐정 조르쥬 라튀슈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보와라크가 진범임을 밝히는 내용인데, 20세기 초반 시대상을 잘 반영하면서 당시 최신 문물과 단서들을 활용하여 멋지게 표현해 냅니다.

무언가를 수사, 조사하기 위해서는 추리를 통해 가설을 먼저 세우는 덕분에 아예 추리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역시 수사의 영역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사건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이를 조사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탐문 수사가 대부분인 수사 과정은 추리할 부분이 많지 않고요. 2부에서 놓치거나, 간과했던 부분을 3부에서 검증, 보완하여 진상이 드러나게 될 뿐이거든요. 대표적인게 보와르크의 알리바이입니다. 보와르크는 파리에서 집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하고, 집사 등은 그 시간에 보와르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걸 보장합니다. 그러나 라튀슈의 조사로 이 전화는 파리가 아니라 칼레에서 걸려왔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확실히 추리가 아닌 수사를 통해 깰 수 있는건 범인의 알리바이 밖에 없지요. 이런 점에서 광고 문구 그대로 '리얼리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현실적인 수사 과정에 반해, 고전 본격물에서 흔히 봄직했던, 시체가 들어있던 불길하고 기묘한 '통'의 존재가 결합되어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도 좋습니다.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관계자들이 여럿 얽혀 왔다가다 하는 과정이 긴장감넘치고 심지어 웃음까지 자아내는 1부는 아주 흥미로왔으며, 마지막에 시체가 발견되는 클라이막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고전 중심의 리스트말고,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과 같은 최신 작품을 포괄하는 리스트에는 선정되어 있지 않은데 이 역시 당연합니다. 시대를 앞서나가고, 경향을 주도한 당대의 최신작이었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고, 문제도 많은 탓이에요. 보와르크 씨가 저지른 범죄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살해 후에 충분히 사체를 숨길 수 있었습니다. 훼릭스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이미 집사와 하녀가 믿은 상태니까요. 구태여 조각상을 한 개 더 주문하면서, 정체가 드러날걸 각오해가면서까지 통을 파리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파리로 옮길 수고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시체를 통 속에 넣어둔 뒤, 집사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는걸 고민하는게 당연하지요. 훼릭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랬다는데, 그럴거라면 파리에서 훼릭스가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꾸미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훼릭스가 수상해 보이도록 만들어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는데, 통이 깨져서 금화와 함께 시체가 살짝 드러나지 않았다면 사건이 커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훼릭스에게 누명을 제대로 씌우려면, 이 작품에서처럼 훼릭스가 찾기 전에 시체가 드러났어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그래도 통의 이동은 작품의 핵심이니 그렇다 치죠. 그러나 2부에서 보와라크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고 의견을 모으는 장면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예를 들어 보와라크가 1시 쯤 내린 집중호우를 맞아서 옷이 젖었다는게 그 시간에 밖에 있었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경시총감 쇼베의 말대로 부인이 1시 전에 집을 나갔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고요. 지나치게 보와라크를 무죄로 만드려는 억지로 보였습니다.
세부 설정들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훼릭스의 복권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를 사건에 써먹을 생각을 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훼릭스와 친구 르 고티에 씨는 복권 이야기를 할 때 보와르크 씨가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이건 공정하지 않지요. 마지막에 보와르크 씨가 라튀슈에게 모든 범행을 고백한 뒤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자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가독성이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의 번역도 역시나 문제가 많네요. '워타르 로드'는 '워털루 로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평가한다는게 온당한 처사는 아니겠지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부와 3부를 묶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06/04/05

모자 수집광 사건 - 존 딕슨 카 / 김우종 : 별점 2.5점

모자수집광사건 - 4점 존 딕슨 카 지음, 김우종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런던에 출몰한 "모자 수집광"이라는 기상 천외한 도둑을 쫓던 기자 필립 드리스콜이 런던탑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발견될 당시 삼촌인 윌리엄경이 모자수집광에게 도난당한 실크햇을 쓰고 있었던 상태. 기디온 펠 박사는 윌리엄경이 도난당한 에드거 앨런 포우의 미발표 원고에 대한 사건과 모자 수집광에 대한 사건을 런던 경시청의 해드리 경감에게 의뢰받았다가 우연찮게 살인 사건에 개입하게 되어 사건 해결을 위한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존 딕슨 카의 작품입니다. 정말이지 오랫만에 추리소설을 한권 읽었네요. 사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이긴 하지만 나이탓인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고 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기분전환이나 할 겸 다시 옛날 세로줄 동서 추리문고를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수많은 딕슨 카 작품들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인데 유명세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 작품이었어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딕슨 카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모름지기 명탐정의 추리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 왕도인데 이 작품에서는 범인의 고백으로 이야기가 종결되어 버리거든요. 앞부분에서 묘사된 여러 복선과 단서들이 범인의 자백에 등장하고, 펠 박사도 그때마다 차분히 지적해 주기는 하지만 이런 이야기 구조는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반칙과 같다 생각되네요.
또 가장 중요한 살인사건 트릭 자체도 문제입니다. 시간차 알리바이에 근거한 순간이동 트릭으로 약간은 밀실 트릭스럽기도 한데... 우연에 기인한 요소와 군더더기가 많아서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 트릭보다는 오히려 포의 작품이 어떻게 도난당하는지에 대한 트릭이 훨씬 좋았어요. 훨씬 카 답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마지막 장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미해결"이라니! 장난치는거냐!

마지막으로 캐릭터도 별로에요. 저명하신 펠 박사님은 "파일로 밴스" 스타일의 말많고 잘난척 덩어리라는 스테레오 타입 명탐정으로 지루함이 앞서며 해드리 경감은 나름 괜찮은 조역이지만 랜포울이라는 조수역 캐릭터는 왜 등장했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서 그나마 부족한 캐릭터성을 많이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전 펠 박사 시리즈에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리즈의 연속성을 부여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유일한 등장 이유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자면 미스 마플의 조카 같은 존재?)

모자수집광이라는 기발한 설정과 런던탑을 무대로 한 음침한 딕슨 카 특유의 호러스러운 느낌, 그리고 유쾌한 펠 박사라는 캐릭터를 즐기기 위해서라면 괜찮은 초이스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망이 더 컸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음에는 펠 박사 시리즈의 걸작이라는 "세개의 관"에 도전해 봐야 겠습니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하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재미를 전해 주는 "밤에 걷다"나 "해골성"같은 방코랑 시리즈가 더 제 취향인 것 같네요.

PS : 그런데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동서 문고 옛날 판본이 크기면에서 훨씬 마음에 듭니다. 왜 요새는 저렇게 나오지 않을까요?

2007/01/07

말더듬이 주교 - E.S 가드너 / 정계춘 (자유추리문고 17) : 별점 1.5점

말더듬이 주교 - 4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 사무실로 멜로리 주교가 찾아와 더듬는 말투로 한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변호를 의뢰하며 억만장자 렌월드 C 블래운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상세한 내용은 추후 관련인물들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전한 후 사라진다. 페리 메이슨은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를 통해 주교에 대한 모든 정보와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나 곧바로 주교가 폭행당한 뒤 사라지고 주교에게 고용되었던 간호사 아가씨마저 종적을 감춘다.
페리 메이슨은 주교가 말한 과실치사 사건의 당사자이자 블래운리 가문에서 내쳐진 며느리인 줄리아 블래너와의 만남을 가진뒤 정확한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게 되나 곧바로 렌월드 C 블래운리가 살해당하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줄리아 블래너가 체포되고 페리 메이슨은 증거를 얻기 위한 활동 덕에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미국 추리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쪽이야 걸작도 많고 이래저래 접한 작품이 많지만 그외의 작품들은 뭔가 흥행을 굉장히 의식한 듯한, 시드니 셀던 류의 작품이 너무 많다고 여겨졌거든요. 때문에 진정한 흥행 대마왕인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 선뜻 손이 가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자유추리문고 구입에 포함되어 있어 모처럼 주말에 진득하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동서문화사 판이지만 뭐 어차피 같은 작품이니까...)

"관리인의 고양이"라는 작품을 포스팅 하는 등 이전에도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몇편 읽어보았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조금 다른 분위기였어요. 정통 추리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외려 하드보일드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페리 메이슨과 하드보일드는 잘 어울릴 듯한 소재는 아니지만 이 작품은 페리 메이슨이 혼자 쳐들어가서 악당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나 악당과의 담판 등 세세한 분위기 및 범행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뚜렷하게 하드보일드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전개 역시도 여러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사건의 본질을 추적해 나간다는 하드보일드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더라고요.
그래서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밖에 없어요. 무엇보다도 사건은 단 한건의 살인 사건만 벌어질 뿐이며 그 동기가 너무 뚜렷하고 악당 캐릭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져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물론 어차피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서 사실 기대하는 것은 정통파적인 요소보다는 법정쇼겠죠.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정쇼" 대신 일종의 속임수로 범인의 자백을 이끌어 내는 결말이기에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법정쇼는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의 해결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자리였기에 긴장감이 떨어지거든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증언과 증거 수집,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법정쇼라는 최대의 매력이 없는 앙꼬없는 찐빵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탐정 폴 드레이크라는 고정 캐릭터 3인의 협력 관계 등 시리즈의 팬이라면 즐길 만한 요소가 많고 위에서 이야기한 하드보일드적인 부분때문에 색다른 느낌도 전해주며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최대 장점인 "쭉쭉 읽히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단지 추리소설로만 놓고 본다면 높은 수준의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도 좀 애매한 편이고요. 제목에서 유래되는 주교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초반부가 외려 저는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런데, "주교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통설이 구미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쓰이는 말인가보죠? 제목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작품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쓰이고 있어서 궁금해지긴 하네요.

2006/11/28

즐거운 살인 - 에드먼드 크리스핀 / 박현미 (자유추리문고 21) : 별점 3.5점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 교수인 저버스 펜은 다른 일에 손대고 싶은 충동에 시골마을인 샌포드의 하원의원에 입후보하고 그곳에 장기 체류하게 된다. 그리고 선거 운동의 광풍에 휘말리는데 우연히 여관에서 옛 동창생이자 런던 경시청 경감인 붓시를 만나고 그에게서 공갈-독살 사건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붓시마저 살해되고 범인으로 그 마을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병자 엘핀스턴이 지목된다.

런던 경시청에서 파견된 경감 험블비와 마을 경찰서장 울프와 힘을 합쳐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의 수사를 도우면서 그는 점차 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급기야 마지막 연설회에서 유권자들을 아둔하다고 외치며 투표도 하지 말라는 충격적 연설을 하여 당당히 탈락할 결심을 하지만 그의 색다른(?) 연설에 매료된 유권자들에 의해 당당히 당선되고 펜은 절망한다. 그래도 그는 선거 직후 진범을 추리하여 그를 체포하게 되는데...


한동안 눈씻고 찾아봐도 없던 자유 추리문고가 최근에 이상하게 잘 구해지네요. 이번에 읽은 책은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즐거운 살인" (Buried for pleasure) 입니다. 전에 포스팅한 "동서 미스터리 100"이라는 리스트에도 94위로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제목이 "즐거운 장례식"이라 이 작품이 같은 작품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구하게 되어 무척 반갑기도 하네요. 작가의 작품은 킬러물인 단편 "샤프 펜슬"만 읽어보았으나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어렵게 구한 노력만큼이나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P.D 제임스 여사의 "어떤 살의"가 떠오르더군요. 시골 마을 정신병원이 소재로 쓰이고 있다는 점 이외에 왠지 모르게 영국적이고 시골스러운 전개가 상당히 비슷하거든요. 뭐 이러한 부분은 시골마을과 그 마을의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진 인간 군상들, 그리고 이들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것이 정통 영국 고전 추리물의 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겠지만요.

하지만 결정적 차이점이자 이 작품만이 가진 매력은 왠지 모르게 작품에서 풍기는 "유쾌함" 입니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 이어지는 연쇄살인,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과 흉폭한 범죄라는 굉장히 공포스럽고 무서운 상황이 연발하는데 정작 작품에서는 굉장히 유머스럽게 포장되어 있어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가 한니발 렉터가 아니라 자신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월슨이라고 믿는 노출증 환자라는 설정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건이 시끌벅적한 선거극과 하나같이 유머스러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제목처럼 정말 즐겁습니다. 지루하지 않게 사건과 에피소드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읽는 동안 계속 흥미를 붙잡아 놓을 수 있게끔 하고 있는 것도 매력적인 부분이고요.
또한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인 부분도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등장인물이 굉장히 적어서 범인이 한정된다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 범인이 정말로 의외의 인물이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요소를 가지고 범인을 추리해 내는 장면은 정말이지 무릎을 칠 정도였어요. 범인이 유력한 용의자로 내세운 인물이 사실은 범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단서가 너무 일찍 나오기는 하지만 진범의 정체는 마지막까지 오리무중이라서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것도 대단했고요. 한마디로 모든 증거와 단서, 맥락이 딱 맞아 떨어지는 고전적이면서도 무척이나 깔끔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아울러 주인공 탐정역의 옥스퍼드 영문학교수 저버스 펜이라는 캐릭터는 이상하게도 이러한 시끌벅적한 분위기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제일 웃기지 않는 캐릭터라 처음에는 호감이 별로 가지 않았는데 읽어 나갈 수록 독특한 매력이 풍겨져 나와 역시 시리즈 캐릭터로서의 존재감을 어필합니다. 마지막 선거 연설 장면에서의 명연설 ("유권자는 우둔한 인물이고 정치가들은 모두 미쳤다")은 그 장면만 따로 읽어도 될만큼 압권이에요. 작품의 스타일을 볼때 약간 모스경감스러운 주인공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상당히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세계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지만 정통 영국 추리물의 충실한 적자로서 작가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절묘한 솜씨가 빛나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 저같은 고전 팬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자유 추리문고치고는 번역도 괜찮은 편이니 구하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저자의 다른 대표작인 "사라진 완구점"도 무척 읽어보고 싶네요.

한가지 궁금한 것은... 목사관의 요정의 정체인데... 누구 알고 계신 분 안계신가요?

2018/02/25

2017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2016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소설!

매년 이맘때쯤 발표되는 2017년 하우미스터리 선정 올해의 추리 소설 결과입니다. 언제나처럼 2017년 출간된 추리 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여자는 45명 뿐이지만 투표하신 분들이 대부분 추리 애호가라는 점에서 상당히 공신력있는 투표가 아닐까 싶네요.

대망의 2017년 1~3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위 20표 : "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엘릭시르

2위 17표 :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한겨레출판

3위 13표 "괴물이라 불린 남자", 데이비드 발다치, 북로드

특징이라면 2위까지가 작년 1위보다도 획득 표수가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1위 20표는 주목할만해요. 참여자 45명이 무순으로 세 작품씩을 꼽는 방식인데, 이중 20표라면 추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45%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니까요. 저도 오래전에 동서 추리 문고 버젼으로 읽어본 작품이긴 합니다만 이 정도의 선호도라면 다시 읽어봐야 될 것 같네요. 3위인 데이비드 발다치 작품도 이번 기회에 도전해 봐야겠고요.
이외의 다른 순위의 작품들이 궁금하시면 상기 링크를 통해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 선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애거서 크리스티 완전 공략" - 추리소설 비평의 바이블. 아 저도 이런 리뷰를 쓰고 싶네요. 

2. "하늘을 나는 말" - 소개가 늦지 않았나 싶은 원조 일상계. 재미있었어요.

3. "웃는 경관" - 재 소개가 반가운 북유럽 걸작.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0/08/23

빨강집의 수수께끼 - 앨런 알렉산더 밀른 / 이철범 : 별점 2점

빨강집의 수수께끼 - 4점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이철범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어렸을 때 유산 상속으로 거부가 된 '빨간집'의 주인 마크 애벌레트는 문학인으로 자처하며 비서이자 사촌동생 케일리와 함께 스폰서와 기고, 손님 접대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15년만에 방탕한 형 로버트가 찾아오는데 둘만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나고, 놀란 케일리는 우연히 방문한 길링검과 함께 닫힌 방 안에서 로버트의 시체를 발견했다. 마크의 손님이자 식객 베벌리의 친구로 그를 만나기 위해 저택을 찾았던 길링검은 스스로 탐정이 되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데...

"아기곰 푸우"로 유명한 앨런 알렉산더 밀른의 정통 고전 본격 추리 소설입니다. 황금기 시절 고전 걸작의 하나로 여러 리스트나 책자에서 많이 소개되고 있는 작품이지요. 읽은 시점이 좀 늦은 감도 있네요.

하지만 읽고난 감상은 '이왕지사 늦은거 아예 읽지 말걸' 입니다. 지루하고 재미가 없던 탓입니다. 살인 사건 딱 하나로 기나긴 장편을 풀어나가는 것부터 지루해요. 단편급 아이디어로 장편을 만든 느낌이랄까요? 용의자도 초반에 드러나고, 트릭도 지금 읽기에는 쉽게 추리해 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나마도 지문 등 법의학에 대한 상식이 별로 없었던 시대에만 통할 진부한 아이디어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안이한 변장 트릭이 잘 먹힌다는건 고전의 품격을 벗어나는 반칙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카메라같은 기억력을 토대로 추리를 펼쳐나가는, 홈즈를 자칭하는 길링검과 그의 친구로 왓슨을 자칭하는 베벌리의 만담이 주는 잔재미와 고전적인 품격은 잘 살아있기는 합니다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크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명성과 기대에 비하면 아쉽습니다.

그리고 제가 읽은 동서 추리문고 판본에는 뒷부분에 사립탐정 마틴 휴이트 단편인 "랜턴관 도난사건"이 실려있더군요.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이전에 읽은, 다른 판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라서 별점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2007/04/10

세계추리명작단편선 - 하서출판사 : 별점 4점

하서출판사에서 70년대에 간행된 세계 추리 명작 전집 중 한권으로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입니다. 추리소설 초창기 작품들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으로 재미와 수준이 아주 뛰어난 작품들로 엄선되어 있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어요. 지금은 좀 구하기 힘들어진 작가들의 비중이 높은 것 역시 마음에 든 점이었고요.

다른 곳에서도 많이 소개된 초유명 작품들 몇편도 실려있는 것은 약간 아쉽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걸작들이니 납득할만 합니다. 오래된 낡은 책이기에 수반되는 편집, 장정, 번역 문제를 제외하고 수록작품들의 퀄리티만 따진다면 별점 5점은 충분하겠죠. 어쨌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어요.

개인적인 베스트를 꼽자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나 순수한 희소성 측면에서 최고 작품은 로버트 바의 "건망증 있는 사람들"과 윌키 콜린즈의 "사람이 오만하면", 그리고 로드 던세이니의 "두병의 소오스"를 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희귀 고전 걸작을 새로 간행하면 어떨까 싶어서 저만의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혹 출판사 관계자가 보신다면 한번 고려해 보셨으면 합니다. FTA 체결로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후 50년 이상이면 저작권이 풀리는 당장의 국내 현실에 맞춰본 것이죠. 이 단편집 위주이긴 하지만 몇몇 작품은 다른 작품에서 뽑아와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번역은 다시 해야겠지만요.
-추리소설의 여명기 걸작선-
토마스 버크 (1886~1945) "오터모울씨의 손"
로버트 바 (1850~1912) "건망증 있는 사람들"
윌키 콜린즈 (1824~1889) "사람이 오만하면"

-기묘한 맛, 추리소설의 색다른 재미-
로드 던세이니 (1878~1956) "두병의 소스"
도로시 L 세이어스 (1893~1957) "의혹"

-셜록홈즈의 라이벌들-
스미스 어네스트 브래머 (1869~1942) "연립주택의 참극" (장님탐정 맥스 캐러더스) 또는 그외 (브룩밴드 장의 비극)
멜빈 데이비드 포스트 (1871~1930) "둠도프 사건" "나보테의 포도원" (서부개척시대 탐정 엉클 애브너) 또는 그외
로널드 A. 녹스(1888~1957) "밀실의 수행자" (비밀탐정 마일즈 브랜든)
체스터튼 (1874~1936) "날개달린 단검" (브라운 신부 시리즈) 또는 그외
오르치 백작부인 (1865~1945) 더블린 사건 (구석의 노인 시리즈) 또는 그외
잭 푸트렐 (1875~1912) "정보누설" (사고기계 반 두젠 시리즈) 또는 그외 (13호 독방의 문제)
아더 모리슨 (1863~1945) "렌턴관 도난 사건" (사립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크리스티 여사의 "야앵장"
한 여성의 의혹과 생존을 위한 속임수를 다룬 소품. 심리묘사가 정말로 흥미진진한 걸작입니다.
 
토마스 버크 "오터모울씨의 손"
추리소설 초창기 최고 걸작 중 하나. 이유는 아주 획기적인 트릭이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이후 여러 후대 작품들에 인용된 걸작 트릭이죠.

로버트 바아 "건망증 있는 사람들"
유머 미스테리. 은화 위조단 추적으로 비롯된 사건이 기발한 사기 사건으로 연결되는 구조도 신선하고 트릭과 전개 역시 유쾌하고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스미스 어네스트 브래너 "브룩밴드 장의 비극"
장님탐정 맥스 캐러더스 시리즈. 시리즈 최고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과학적이고도 신선한 트릭이 등장한다는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단, 맥스 캐러더스가 장님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설정상 감점요소가 좀 있고 결말이 좀 개운하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하여간 이 작가는 전개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로드 던세이니 "두병의 소오스"
로얄드 달이나 스텐리 엘린류의 "기묘한 맛" 류의 작품. 지금 읽어도 굉장히 충격적이고 기발한 결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화자를 통해 전개하는 작품의 스토리텔링이 무척이나 빼어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멜빈 데이비슨 포스트 "둠도프 사건"
서부개척 탐정 엉클 애브너 시리즈입니다. 이 작품은 동서 문고 시리즈로도 접할 수 있죠. 하나님 어쩌구 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전개는 짜증나지만 기발한 트릭만큼은 일품이었습니다.

G.K 체스터튼 "기묘한 발소리"
브라운 신부 시리즈. 지금은 정식 간행되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시리즈 최고작이라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좋은 작품이죠.

로널드 K 녹스 "밀실의 신비주의자"
밀실 트릭의 새로운 지평을 열은 단편. "김전일" 시리즈 중 한편인 <이진간촌 살인사건>의 서브트릭으로 사용될 정도로 추리 소설계에 유명한 트릭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작품이죠. 지금 읽는다면 트릭이 좀 뻔해보이기도 합니다만...

휴 월폴 "은가면"
착한 부인이 자신의 선행에 의해 파멸해 나가는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그린 독특한 작품. 이색적이고 좀 서늘한 유머가 있는 작품입니다.

윌키 콜린즈 "사람이 오만하면"
전체가 서간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진행에 추리소설로 나무랄데 없는 전개를 가진 걸작입니다. 유머러스한 문체까지 곁들여진 초기 영국 추리 문학계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죠.

E.B 오르치 "더블린 사건"
구석의 노인 시리즈. 역시 동서문고로 간행되어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최고 걸작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발상의 역전이 기발한 작품으로 당대의 명탐정의 반열에 오른 구석의 노인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A.모리슨 "렌턴관 도난사건"
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역시나 추리소설 역사에 남을만한 멋진 트릭이 등장합니다. 또한 이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도 굉장히 합리적이라 단편 추리소설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덧붙이자면 아주 오래전 <세계의 명탐정 50인>에 등장했던 바로 그 트릭입니다. 전개가 조금 밋밋한 것이 약간 아쉽네요.

도로시 L 세이어즈 "의혹"
굉장히 유명한 작품이니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걸작.

2005/04/04

해골성 - 존 딕슨 카 / 전형기 : 별점 4점

해골성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라인 강변의 대 마법사 메이르쟈가 기차에서 사라지는 사건으로부터 17년 후, 메이르쟈의 친구로 그가 기거하던 해골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당대의 명배우 마일런 아리슨이 총에 맞고 불에 타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파리의 명탐정 방코랑은 이 사건을 메이르쟈와 아리슨의 친구인 대부호 드오네이로부터 의뢰 받아, 아리슨이 거처하던 해골성 옆 별장으로 조수겸 화자인 소설가 제프리 마르와 함께 떠났다. 방코랑은 그곳에서 사건을 정식으로 담당한 독일의 명탐정 폰 아른하임 남작과 추리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이전에 읽었었던 "밤에 걷다" 이후 2번째로 읽은 딕슨 카의 방코랑 시리즈입니다. 딕슨 카의 3번째 작품이라고 하네요. 개인적으로 딕슨 카 작품은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정통 본격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굉장히 선호하는 편인데, 우연찮게 일신 추리문고 출간본을 헌책방에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동서에서 나온 책도 있지만 최근 자금의 압박이 심해서....(개인적으로 일신 추리문고 판본이 더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작가의 다른 시리즈인 펠박사와 헨리 메리베일 경 시리즈와는 다르게, 방코랑 시리즈는 오컬트를 넘어서는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주는게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밤에 걷다"는 흡혈귀 괴담, 이 작품은 "마술"을 배경 설정으로 다루고 있는데, 고딕 호러 스타일이 작품 전체에 굉장히 짙고 뭔가 약간 일본 변격물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단순히 괴담 분위기로만 끝나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우수해서 각종 단서가 독자에게 충실하게,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다는게 대단합니다. 굉장히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클로우즈 써클 타입 - "고립된 별장" 타입 - 의 미스터리인지라 용의자도 한정되어 있는 탓에 진부해 질 수 있는데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나간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무엇보다도 "올드보이" 못지 않은 반전과 이어지는 결말은 저의 예상을 초월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로 만들면 굉장히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의 "라이벌"격인 탐정이 등장해서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도 신선했습니다. 보통 주인공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이벌을 "찐따"로 만드는 이 바닥의 상식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비교적 공평한 시각으로 두명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거든요.

방코랑은 유머도 부족하고 잘난척도 심하며, 혼자만의 꿍꿍이가 많아서 주인공 탐정으로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 거장의 황금기 걸작다운 충분한 재미와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명작입니다. 저는 무척 즐겁게 읽었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해골성의 도해와 구조를 설명한 사이트가 있더군요. 아주아주 약간의 트릭이 밝혀지니 만큼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읽으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둘러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나저나 정말 해골 모양이네요^^

PS : 한가지 의문은 미국 작가가 왜 프랑스 탐정을 주인공으로 독일 라인강을 무대로 한 작품을 썼는 지는 조금 궁금합니다. 이렇게 설정하는게 더 있어보였을려나?

2009/02/19

녹색은 위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 이진 : 별점 3점

녹색은 위험 - 6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이진 옮김/시작

2차 대전 당시 런던 대공습의 와중에 마을 외곽의 한 야전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우체부로 일하던 히긴스 노인이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외과의사 문과 저베이스, 마취의 반스, 간호사 마리온과 간호 봉사대원 제인, 프레데리카, 에스더 7명의 작은 공동체에 파문이 일고 경시청에서 커크릴 경감이 파견되어 사건 수사를 시작한다. 이후 간호사 마리온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커크릴 경감은 범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공습의 와중에서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대표작입니다. 국내 출간이 너무 늦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죠. 뭐, 이 땅의 장르문학 홀대가 한두해 있었던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어쨌건 동서 추리문고를 통해 "제제벨의 죽음" 밖에 소개되지 않았었지만 "제제벨의 죽음" 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녹색은 위험"이 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있어서 기대가 무척 컸었기 때문에 이렇게 읽게 되니 정말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작품 자체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게 아닌가 싶네요. 일단은 전개가 굉장히 고풍스러운 것이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반세기 이전 작품이긴 하지만 글쎄요...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을 읽을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작풍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리묘사와 개인적이고도 사변적인 대사가 지나칠정도로 장황하게 난무하는 점도 고풍스러운 느낌에 한몫 거들면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고요. 이렇게 장황한 묘사와 대사는 그 사이사이에 중요 단서를 살짝 살짝 끼워넣기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번역의 문제가 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매끄럽지도 않고 말이죠.
게다가 커크릴 경감 (콕크릴 경감) 은 이 작품에서는 정말이지 하는게 너무 없어요! 되려 애꿎은 희생자만 늘려버리고 추리보다는 자백에 의존하는 등 명탐정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제벨의 죽음" 에서 접했던 명탐정과는 전혀 다른사람 같았어요.

동기도 지나치게 오버스러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혐의를 두기 위해서 다양한 동기를 등장인물들에게 가져다 붙이는건 고전 추리물로는 당연한 전개겠지만, 문제는 이 동기들이 거의 다 평이한 수준이라 "살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좀 어려워 보였던 탓입니다. 심지어는 남동생과 누나의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어거지(?)까지 가져다 붙이는 건 영 아니다 싶더군요.

하지만 실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제가 10년도 더 전에 이 작품의 영화버젼을 이미 감상했던 탓이 가장 큽니다. 화쪽이 더 깔끔하고 간결하게 각본을 구성해서 더 몰입해서,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었거든요. 사건도 잘 축약하고 내용을 많이 쳐 냈지만 추리적인 맛은 충분히 잘 살려냈던 덕분입니다. 물론 영화에 비해서 훨씬 중첩되어 쌓여있는 복선들, 다양한 단서들, 용의자와 범인을 특정하게 만드는 시간의 굴레에 대한 설정, 특히 "가운" 에 대한 추리적인 발상은 무척 좋았고 곳곳에 숨어있는 영국적인 묘사와 유머들 역시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장의 대표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영화와는 다른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심리묘사와 디테일은 확실히 잘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구하기 힘들어도 영화쪽이 더 나은건 분명합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 역시 히치콕 감독의 영화버젼이 훨~씬 뛰어나듯이 가끔은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도 존재하는 법이겠죠. 
아울러 이 작품의 가장 큰 트릭은 바로 "제목" 과 동일한데 역시나 영화를 통해 접했기에 신선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주요 트릭과 범인을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다시금 느끼게 되었네요. 
영화는 "흑백영화"라서 색깔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던 탓에 마지막 트릭 공개가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점수가 좀 더 높았을까요? 아직 크리스티아나 브랜드를 접하지 않으신 추리 애호가분들이 계시다면, "제제벨의 죽음" 을 먼저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이 고전 명작을 출간해 주신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지만 책 표지 디자인과 본문의 구성은 별로였습니다. 표지 디자인은 "병원이 무대인 소설에 제목은 "녹색은 위험" 이니 이렇게 가야겠다!" 라고 떠오른 첫 생각을 그대로 비쥬얼로 옮겨놓은 듯한, 녹색 바탕에 의사로 보이는 인물이 전면에 배치된 디자인인데 너무 뻔하고 안이하잖아요... 90년대 로빈 쿡 소설이 생각날 정도로 올드하기도 하고요. 가격도 착하고 책도 괜찮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신경써 주신다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2022/03/18

완전살인 - 크리스토퍼 부시 / 남정현 : 별점 2점

완전살인 - 4점
크리스토퍼 부시 지음, 남정현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런던의 주요 신문사와 경시청에 '마리우스'라고 자칭한 인물이 '완전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 속에 마리우스가 지정한 날짜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부유한 독신 노인 토머스 리치레이였다. 토머스 리치레이가 결혼을 앞둔 탓에,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할 위기에 빠진 조카들이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네 명 모두 알리바이가 완벽했었다. 줄랑고 회사 사장인 프랜시스 웨스튼 경은 회사의 새로운 중핵이 될 비밀 탐정부를 키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완전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회사의 두뇌 역할을 맡고 있는 수재 루드빅 트레버스와 전 형사부장 존 프랭클린을 투입하는데...

크리스토퍼 부시가 1929년에 발표했던 고전입니다. "고전 추리, 범죄 소설 100선"에서 추천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추리 소설의 초창기 황금기 발표작다운 면모를 과시합니다. 추천할만한 요소가 몇 가지 보이기도 하고요. 첫 번째는 트릭을 추리해내기 위한 단서 제공이 공정하다는 점입니다. 범인 프랭크 리치레이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 트릭은 변장한 대역을 내세웠던 겁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단서 모두는 작품 맨 앞 프롤로그 부분에서 제공됩니다. 대역이었던 플래이스가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영화배우 진 앨런의 대역을 찾는 오디션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 단서거든요. 플래이스의 편지에서 사용되었던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암호 트릭도 인상적이고요. 

두 번째는 다양한 용의자를 드러내고,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계속 등장시켜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전개입니다. '마리우스'가 보낸 편지에서 시작해서, 범행이 일어나기 전 피해자 토머스 리치레이를 방문했던건 누구인지? 토머스 리치레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협박장을 쓴 T.W.리처드는 누구인지? 등의 수수께끼가 계속 등장합니다. 수사 과정에서도 새로운 수수께끼가 드러나고요. 그야말로 고전 본격 황금기 작품의 기본은 해 줍니다. 

세 번째는 두뇌 역할의 부르주아 루드빅 트레버스와 발로 뛰는 유능한 수사관 존 프랭클린의 컴비 탐정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두 명이 컴비로 등장할 경우, 보통 한 명은 평범한 일반인 시각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명 모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꽤 신선했습니다. 이들이 사건에 뛰어든게 '회사 선전'을 위해서였다는 것도 굉장히 현대적인 동기였고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만한 고전 명작이냐고 물으신다면, 제 답은 '아니오'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 된, 유통기한이 지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의 '완전 살인'을 예고한 마리우스의 편지입니다. 괜히 경찰의 주목을 끌 이유는 없는데, 프랭크 리치레이가 왜 이런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범행을 널리 알려야 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의 시선이 분산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왕 살인을 저지르니, 사회적인 반향도 불러 일으켜보자고 여겼던걸까요? 하지만 프랭크는 자신의 완전 살인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불쌍한 대역 배우 플래이스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만 잔혹한 범죄자입니다. 이런 사명감같은걸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또 이 때문에 여론이 크게 움직였다는 묘사도 딱히 없고, 경찰도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은 등, 한 마디로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핵심 알리바이 트릭이 단지 변장이었다는 것도 맥이 빠집니다. 또 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찰리 채플린 급의 유명 배우 대역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이 탓에 루드빅 트레버스의 주목을 끌고 말았으니까요. 프랭크가 자기와 꼭 닮은 누군가 - 플래이스 - 를 발견한 뒤 범행 계획을 꾸몄다는데 더 설득력 높았을 겁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프랭크 리치레이를 몰아세운 뒤, 그가 자멸하는걸 노렸던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의 작전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플래이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프랭크의 알리바이가 조작되었다는걸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플래이스가 프랭크에게 살해당했다는 거라도 증명했어야 했는데, 시체조차 찾지 못했으니 이 역시 불가능했고요. 

프랭크가 둘에게 추궁당한 직후 곧바로 범인임을 자백할 이유 역시 마땅치 않습니다. 프랭크 본인 말대로 시한부였다면 더더욱요. 어차피 오래 못 살텐데, 뭐하러 범행을 인정한단 말입니까? 도주 후 시체로 발견되는 과정도 쉽게 흘러간 느낌이라 별로였고요. 차라리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이 선량했던 프랭크를 물에 빠트려 죽인 뒤, 범인임을 자백했다며 죄를 뒤집어 씌우는게 더 현실적인 전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번역의 질이 심하게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 출간 버젼이라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번역은 정말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앞서 괜찮았다는 암호 트릭이 사용된 편지는 나쁜 번역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지요. 번역 때문에라도 도저히 권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인건 분명한데,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기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작가와 작품이 잊혀진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이런 류의, 명성은 약간 남아있지만 지금은 그 생명을 고해버린 작품은 이젠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03/12/15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 유정 : 별점 1.5점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와 나는 여름을 산간마을에 있는 친구 집에서 보내게 된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배우, 화가 등 20여 명과 같이 지내게 되는데, 돌연 인기작가가 살해되면서 이후 차례로 7, 8명이 연달아 칼에 찔리거나 교살, 독살, 익사체로 죽어나간다. 범행방법도 제각각, 동기도 알 수 없는 이 연쇄살인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연속 살인사건인가.

일본 고전 미스테리 걸작을 뽑을때 빠지지 않는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살인사건입니다. 평소 헌책방을 뒤져 절판된 추리소설을 구해 읽는것을 좋아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본 정통(?) 고전 추리소설인지라 동서 추리문고의 따끈따끈한 새책으로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위의 줄거리와 같이 무려(!) 20여명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것이 특징으로 화자역인 야시로 슨페이나 탐정역의 교세이 박사 두명 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에 가려 별로 돋보이지 않을 정도에요. 홈즈나 왓슨의 비중이 죽어나가는 조연들보다 낮은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이름들도 "야시로 슨페이""우타가와 가즈우마""모치즈키 다카히토" 등등 외우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 앞부분의 등장인물 표를 계속 보게끔 만들더군요. (중반 이후부터는 번역과 교정 문제인 듯 이름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꽤 눈에 띄더군요. 흐....)
또 여러 설정들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식이라는 것도 큰 특징으로 한 시골마을에 왕처럼 사는 구 귀족 출신의 부자와 그의 자식들,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친구들, 미친 의사와 간호원까지.. 어떻게 보면 "김전일"에 많이 나옴직한 시골 명문가와 비뚤어진 인간관계의 원형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김전일에 비하면, 이야기는 너무나 장황하고 사건보다는 심리묘사와 각종 상황묘사, 그리고 인물간의 대사에 치중하고 있어서 추리소설의 느낌이 많이 약합니다. 너무 대사가 많은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살인사건"마저도 이런 저런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묻혀 어영부영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건 약과일 뿐이고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이 죽어서 결국 용의자가 좁혀진다는 것입니다. 저조차도 끝부분에서 트릭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범인이 누군가인가 하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실질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한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 다했죠 머...^^ 
게다가 정통 고전파 명작 중 하나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통파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최소한 동요에 맞춰 사람이 죽어나간다던가, 이름 머릿글자 순으로 죽어나간다던가 하는 재미 정도는 더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결론내리자면 고전을 읽은 기쁨은 있지만 아쉬움도 큰 책입니다. 이 책은 분명 고전이고 발표 당시에는 뭔가 획기적이고 대단한 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어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나 작가의 이름값에 기댄 측면이 커 보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뒷부분에 수록된 진슌신의 "얼룩화필"도 별로 신선하지 못했기에 본전 생각이 더 나게 만듭니다.

9마일은 너무 멀다 - 해리 케멜먼 / 이정태 : 별점 5점

9마일은 너무 멀다 - 10점 해리 케멜먼 지음, 이정태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문학교수이자 추론의 과정을 강조하는 탐정역의 니콜라스 웰트 교수와 화자역의 지방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8편의 단편과 기타 2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충실한 단편집입니다.

니콜라스 (닉) 웰트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주위에서 말하는 사건의 이야기만 가지고 진상을 추론하는 탐정입니다. '9마일이나 되는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 이 한마디를 분석.추론하여 열차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가장 유명한 표제작을 포함하여 나머지 단편들도 모두 고전적인 추리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물론 추론 자체는 셜록 홈즈의 그것처럼 독자에게 너무 일방적인 한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애시당초 반론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이야기 구조상 그 추론 자체가 사실이 되는 구조입니다. 장편일때는 약점이 보일 수도 있으나 짧은 호흡의 단편인만큼 그러한 약점도 부드럽게 넘어가게 되네요.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 이러한 정통파 추리소설은 단편이 가장 적합한 듯 싶기도 하고요. 최소한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즐기고 쓴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행간행간에 유머와 위트가 느껴지거든요. 한마디로 홈즈의 맥을 제대로 있는 단편집이라고 할까요... 홈즈나 기타 고전 명탐정에 비하면 탐정에 대한 묘사가 약한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추리 게임을 즐기기엔 손색없는 단편집입니다.

다만 수록 단편들이 다 걸작일 수는 없듯이 표제작과 같은 추론을 하는 단편은 주전자 소리 하나로 사건을 꽤뚫어 보는 "말 많은 주전자"정도인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정보도 좀 많고 일반적인 추리물 경향을 많이 따라가는 편이죠.

8편의 단편은 조금 짧은 듯 하여 아쉬운데 나머지 2개의 단편-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살인의 소리'와 휴 펜티코스트의 '다이아몬드 살인'-도 역시 상당히 수준작이라 위안을 줍니다. 두 편 다 주인공역의 탐정이 개성이 넘치고 문장도 상당히 미려하여 나머지 시리즈가 역시 기대되는 괜찮은 소품들이었습니다. 다만 "살인의 소리"는 조금 무겁고 우울하여 전체적인 작품집의 유머스러운 분위기하고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 약간 아쉽네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 5점이 아깝지 않은 좋은 작품집으로 짧은 호흡에서 깊이있는 지적 유희를 즐기려는 모든 분에게 추천드립니다. 동서추리문고에는 유난히 괜찮은 단편집이 많고 개성있는 탐정들도 넘쳐나지만 이 "9마일은 너무 멀다" 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단편집이라 생각됩니다.

2010/03/05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4점

유다의 창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부유한 청년 제임스 앤스웰은 예비 장인 에이버리 흄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흄이 권한 술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정신이 든 그의 앞에 화살에 찔린 시체가 된 에이버리 흄이 놓여 있었고, 방은 방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진 완벽한 밀실 상태였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그를 구하기 위해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를 맡아 법정에서의 사투가 시작되는데...

드디어 나왔다! 오랜 시간 기다린 존 딕슨 카의 대표작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네요. 소식을 듣자마자 구입했습니다. 작품도 하루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그야말로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멋진 작품이었고요.

일단 밀실 트릭의 대가다운 솜씨가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두터운 문에 빗장이 질러지고 창문마저도 빗장쳐진, 틈 하나 없는 완벽한 밀실(검찰측 말대로 "봉인된 방"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죠)에서의 살인이라는 설정도 흥미롭고, 트릭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남을 명트릭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여러가지 단서들도 굉장히 합리적이고요.

또 의외로 법정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게 대박입니다. 사건이 재판 과정을 통해서 증인들의 증언과 단서로 재구성되어 전개됨에 따라, 고전 추리물의 최대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완벽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독자가 머리속으로, 또는 손으로 그려야 하는 사건 시간표 같은 것도 전부 표로 제공해 주니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겠지요. 아울러 작가의 시리즈 탐정 캐릭터이기도 한 헨리 메리베일경의 왕실 고문 변호사로서의 활약을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이 영미권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동기가 취약하다는 것, 그리고 헨리 메리베일경이 극중에서 언급하듯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뻔하다"는건 고전 본격 추리물로는 확실한 약점입니다. 헨리 경이 독자가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다는 설정도 약간 아쉬웠고요.
그래도 전개과정에서 나름 합리성을 보장하고 있기에 크게 흠 잡기는 어렵습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고전 황금기 시대 본격 추리물 및 법정 미스터리 걸작입니다. 동서 추리문고 스타일의 낡은 일어 중역본이 아닌 깔끔한 번역으로 소개된 것도 반갑고요. 추리 애호가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제가 읽은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및 개인적인 순위를 예전 "세개의 관" 리뷰에 언급했는데 업데이트해 봅니다. 확인해 보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하나만 아직 안 읽었는데, 일단 읽은 것 까지만 정리할께요.^^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 순서는 무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 연속 살인사건 / 모자 수집광 사건 / 해골성 / 벨벳의 악마 / 화형법정 / 흑사장 살인사건 / 세개의 관 / 구부러진 경첩 / 감미로운 초대 (밤에 걷다) /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이 중 딱 세 작품만 꼽으라면 저의 영원한 베스트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정통 추리와 고딕 호러의 완벽한 결합체인 "해골성", 그리고 바로 이 작품인 "유다의 창" 을 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