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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재난의 세계사 - 루시 존스 / 권예리 : 별점 2.5점

재난의 세계사 - 6점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눌와

폼페이 베수비오산 분화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일본 도호쿠 지진까지 총 11개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 소개하며 설명해 주는 책. 

몰랐던걸 새롭게 알게되는 재미가 컸습니다. 몇 가지 설명드리자면,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네요.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되며,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훌륭한 천연 요새가 되어 주고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베수비오산 일대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습니다. 유명한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산 분화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구조차 향했던 도시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래도 질식사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두 번째 분화로 사망한 폼페이 희생자들은 화산설쇄류로 타죽었거든요. 섭씨 2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무려 시속 480Km로 이동하여 사람을 덮쳐 닿자마자 사망했습니다. 정말 끔찍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최소 8.5에서 9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철학과 과학에 뚜렷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가는 성스러운 날, 교회가 가득찬 아침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 보였으니까요. 교회에 간 독실한 신자들은 목숨을 잃고, 근처 홍등가 창녀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여 기독교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돌로 지었고 홍등가의 집들은 나무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무는 돌보다도 유연하고 흔들림을 잘 견뎌 사망자가 적었던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네덜란드 정부가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 사상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숭배한 포르투갈을 신이 벌하였다면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783~18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산 분화는 인류역사상 임명피해가 가장 컸던 자연재해로 총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이었고 전 세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 탓입니다. 극심한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몬순이 사라져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화산은 자연재해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층권의 기체 조성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권 하층부는 극지방에서 밀도가 낮아서 아이슬란드 화산은 성층권으로 물질을 보내기도 쉬운 탓에 피해가 더 컸지요. 다행히 화산 폭발의 영향은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온실가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은 당시 폐쇄적이었던 중국 환경 탓에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저뚱 사후 4인방이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고전에서 지진은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 외에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음기가 강해져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하들이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경우, 또다른 하나는 여자가 정치에 나서는 경우로요. 4인방, 그리고 중심인물이 마오의 아내 장칭이라는게 이 경우에 해당되어, 인민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데 꽤 그럴싸 했어요.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의 죄수의 딜레마도 기억에 남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제방에 막대한 압력을 가할 때, 위험에서 마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맞은편 제방을 부수는 겁니다. 건너편 이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딜레마'라는 말이 걸맞는 상황입니다. 놀라운건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건너편 제방을 부쉈다 - 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 발생 시 일어났던 참극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소개된건 참 고마왔어요. 이 책에서는 학살 이유를 전통적인 세계관을 대체할만한 과학 이론이 부족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작위성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주장은 말은 되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인종 차별과 범죄는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방을 보강하게 시켰다가, 제방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서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도록 만든 범죄처럼요. 제방이 무너진 뒤 재방 붕괴지점 근처에 구조를 위해 동원된 배에도 백인과 흑인 모두 동등하게 타지 못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불과 4년 뒤라 세계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미국의 당시 사회 특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수십년의 차이는 있었을터라, 단지 세계관에 따른 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참극과 학살은 인종 차별과 인종 혐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걸 분명히 해 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이외의 토막 상식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미시시피강 홍수 때 구호활동을 지휘했던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건, 당시 흑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배신하여 흑인 표를 잃고 루스벨트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지원금이었던 10억 달러의 연방정부 자금 중 7억 달러가 불분명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도 새로왔습니다. 그냥 없다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잭 리처'가 나서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지진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많은데, 지금도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규모 5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측했지만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성공한 예측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도 새로왔어요.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규모 5의 두 배이기 때문이라지요. 어차피 지진 관련해서는 확률에 대한 논의를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세계사'라는 제목에 걸맞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볼 부분이 많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주로 과학과 재해 전, 후의 대책에 대한 주장이 보다 많은 편입니다. 마지막 장은 아예 지진에 대비해야 하는 내용이고요. 앞서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 좋았을겁니다.
설명도 쉽고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도판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6/29

직장 내 살인사건 -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 박종대 : 별점 2점

직장 내 살인사건 - 4점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지음, 박종대 옮김, 표창원 해제/지식트리(조선북스)

일의 조건이나 일자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의 대표격은, 취업을 위해 자기 윗 순위 대기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의 걸작 "도끼"일 겁니다. 작품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읽으면서 이런 류의 실화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만 보면 이런 실화를 다룬게 분명해 보이는 논픽션이 있더라고요. 독일의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으로,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그간 눈에 뜨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쳤네요. 주말을 맞아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볼프가 푀펠에게 법정에서 총격을 받아 살해당했던 1927년 사건은 말 그대로 '직장 내 살인사건'입니다. 볼프는 같은 회사 동료 푀펠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푀펠의 해고와 이익 배당금 지급 방해, 그리고 인격 모독에 앞장섰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읽어보니 죽어도 싸다 싶을 정도로 못되게 굴었더라고요. 범인 푀펠이 오히려 꽤나 선처를 받았다는 이후 판결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1909년 호프리히터 독살 사건은 "도끼"를 연상케 합니다. 호프리히터는 출세길이라 할 수 있는 참모 본부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트 장교들에게 독약을 보냈고, 그 중 한 명인 마더 대위가 독약을 먹고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정력제'라고 속이고 보낸 범행 과정, 호프리히터가 범인임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 모두 한 편의 범죄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스가 유명한 철학자 슐리크를 살해한 사건도 "도끼"와 동기는 비슷합니다. 한스는 학계의 유명인사이자 실력자 슐리크의 눈 밖에 나서 먹고 살 길이 막혀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역시, 비슷한 실화가 많긴 많네요.

이렇게 직장 내 문제 때문에, 혹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에 더해,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직장을 찾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범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883년, 직업 소개를 미끼로 다수의 여성들을 살해한 생크와 그 일당들의 범행, 그리고 1891년 거의 동일한 방식이었던 프란츠 슈나이더와 그의 아내가 저질렀던 범행처럼요. 그러나 이 범행들은 '직장 내 살인'으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직장'은 피해자들을 유혹한 무기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금품을 노린 살인 강도에 불과한 탓입니다. 
1964년의 음식점 부부 살인 사건, 1905년의 루스 중령 살인 사건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단순 강도 사건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피해자와 범인이 주종 관계였지만, 이들의 관계 때문에 범행이 일어난건 아니니까요. 1896년의 베르너, 그로세가 레비 변호사를 살해한 사건 역시 그 옛날에 미성년자들이 상당히 체계적인 계획하에 저지른 범죄라는 점은 놀랍지만, 단순 살인 강도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외에도 '직장 내 살인'과는 별 관계없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직장을 잃은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2006년의 후베르트 사건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회적 타살일 수는 있겠지만, 이를 직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명 소설 "비아말라"의 소재라는 클라인슈로트 살인 사건도, 잔혹한 가정 폭력을 저지르던 아버지를 나머지 가족들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볼 수 없고요. 동성애 관계에 빠졌다가 파트너를 살해한 베르노 사건, 2002년, 퇴학으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사회보호 대상자로 전락하게 된 슈타인호이저가 학교로 쳐들어가 17명을 사살한 사건도 그러합니다.
이런 사건들보다는 서두에 짧게 언급되고 지나가는, 학대받던 하녀들이 주인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1933년 파팽 자매 사건이 더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유니스 파치먼이 주인 가족을 살해한다는 소설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의 원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장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 비중이 적다는건 분명 기대와는 어긋나며, 시대도 1차대전 이전 제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게 많고 지역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만 한정된다는건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6/28

인사이드 아웃 2 (2024) - 켈시 만 : 별점 1.5점

한창 흥행 중인 작품입니다. 전작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라일리와 감정들 시점의 이야기 모두 재미없고, 별다른 위기도 없는 탓입니다. 
라일리의 경우, 전편에서는 향수병때문에 부모님과 심하게 갈등을 일으킨 후 가출해서 홀로 미네소타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2박 3일동안 하키 합숙에서 친구들과의 트러블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절친 두 명이 같은 중학교를 가지 않는다는걸 처음 알게된 상황에서, 합숙에서 만난 '영웅'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그 영웅과 더 친하게 지내려하는건 당연합니다. 어차피 친구들은 새학기가 되면 얼굴도 보기 힘들테니까요.

감정들도 마찬가지에요. 새로 나타난 '불안'에게서 쫓겨난 '기쁨' 등 기본 감정들이 라일리의 신념을 되찾아 본부로 돌아가는 과정은 무난하기만 합니다. 전작에서처럼 새로운 장소에서 새롭게 벌어진 일들과 감정으로 추억으로 만들어진 섬이 무너지는 등의 스펙터클한 장면이나 일상과 감정이 연계된 묘사도 부족했고요. 특별한 모험이나 '빙봉'과의 드라마와 같은 감동을 자아내는 서사도 전혀 없어서 지루했습니다.
 
지루한건 마음 속 세계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자아'가 생겨나는 부분 외에는 전무한 수준입니다. 새로 등장하는 감정들도 아쉽습니다. 매력적으로 표현할 부분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불안' 말고는 하는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불안'은 디자인부터가 너무 별로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나쁜 기억들도 자아 형성에 중요하다, 자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주제도 결국은 전작과 비슷한게 아닌가 싶었어요.

픽사답게 화면의 완성도는 최고 수준입니다. 잘 짜여진 부분도 분명 있고요. '사춘기'라는 시기에 대한 접근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막 중학생이 된 제 딸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고 하니, 단지 나이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2024/06/26

라플라스의 마녀 (2018) - 미이케 타카시 : 별점 1.5점

티빙에서 뭐 볼거 없나 하고 탐색하다가 발견한 작품. 소설 리뷰에서도 밝혔지만, 영화에 적합한 소재라 생각했었기에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실망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형편없는 각본입니다. 메인 빌런인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악행, 그리고 겐토의 복수심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영화만 보면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장면들도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는 누구지?'라고 묻은 아오에 교수에게 마도카가 '마녀, 라플라스의 마녀'라고 답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손발이 오그라들더군요. 요즘 슈퍼 히어로물도 이렇게 유치하지는 않을겁니다. 그 외에도 호러 영화 스타일 느낌을 주려고 한 장면들이 눈에 띄는데, 억지스럽기만했습니다. 나름대로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를 갖춘 미이케 다케시 감독 영화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별로였습니다. 특히 토요카와 에츠시가 맡았던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배우인데 왜 이랬을까요?

기대했었던 공기의 흐름같은 자연 현상을 조작(?)하는 극히 일부 장면 - 마도카가 발연통으로 아오에 교수에게 연기가 흘러들어가도록 한다던가, 종이 비행기를 날리는 장면 등 - 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흥행에 재미를 못 본 듯 한데 당연합니다. 재미도 없고, 완성도도 별로니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4/06/25

리움 미술관 나들이 및 전시회 관람 (필립 파레노 '보이스')

2주 전인 6월 14일, 회사 행사 덕분에 리움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라는 기획전을 관람하였습니다. AI가 테마 중 하나라고 해서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전시는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언어와 음악이 공간을 압도하는 경험을 선사한다고 하는데, 그런 느낌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소리'가 전시장 안에서 그리 압도적으로 인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전시된 오브제들이 시각적으로 대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소리 없이 전시되는 오브제 자체만으로도 뭔가 울림을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AI가 도입된 부분도 전시장 밖에서 채집한 데이터를 전시 중인 조명과 오브제들에 반영하는 시스템, 그리고 만화 캐릭터가 말하는 작품 정도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만화 캐릭터 작품은 나름 중요한 전시품으로 보이는데, 디자인과 완성도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3D 폴리곤 데이터가 단순히 녹음된 목소리를 말하는 것에 불과해서 이게 뭔가 싶더군요. 시대 흐름에 맞추려면, 관객과 대화가 가능한 시스템 정도는 구축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레트로한걸 주제 의식에 녹여낸게 아니라면 말이지요.

다행히 리움 미술관의 상설전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 번 관람한 적이 있지만 워낙에 수준높은 소장품들이 많아서 언제 보아도 좋네요. 이번에는 대담한 무늬의 분청사기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패턴이 굉장히 현대적이라 다른 굿즈, 상품으로 응용해서 판매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쇼핑백이나 포장지로 만들어도 아주 멋드러질 것 같아요.

그런데 전시 방법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런 자기들은 관람객이 회전시킬 수 있게 하거나 자체적으로 천천히 회전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의 초화어문병의 경우 전체 그림을 보고 싶은데 뒷면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거든요. 회전이 위험하다면, 뒤에 거울이라도 설치해주면 관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 거울을 관람객이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면 최고일테고요.
국보인 금동대탑과 용두보당의 디테일에는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역시 확대해서 볼 수 있도록 전시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리움 미술관은 삼성과 제휴가 용이할 것 같은데, 카메라와 디스플레이를 잘 활용하여 전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계단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엄청난 깊이감을 구현한 올라퍼 엘리아슨의 '중력의 계단'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간단한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전시회 관람은 바쁜 회사 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주어서 좋은데, 아무래도 저는 현대 미술보다는 고미술이나 근대 조형, 회화 쪽 전시가 더 잘 맞는 듯합니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다면, 좀 더 고전적인 전시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2024/06/24

06.18 ~ 06.23 두산 베어스 경기 감상평

NC - 삼성 홈 / 원정 6연전
성적 : 2승 4패

좋았던 점
  • 김택연 선수의 안정적 마무리 (편안~)

나빴던 점
  • 브랜든 선수의 부상(?)
  • 맥없는 중심 타선
  • 힘이 빠지는 계투진
  • 두드러지는 삼성포비아

총평과 이번주 예상 (혹은 기대)
주간 5할 승률을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삼성전을 스윕패 당한 탓입니다. 올 시즌은 삼성에 유난히 약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발진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최준호, 브랜든, 김동주 선수 모두 퀄리티 스타트는 커녕 긴 이닝 소화도 하지 못했습니다. 최준호 선수와 김동주 선수는 치명적인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고요. 브랜든 선수 경기만큼은 반드시 잡았어야 했는데 불의의 부상으로 2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한 것도 뼈아팠습니다. 남은 7이닝 동안 실점을 최소화하면서 동점까지는 만들었지만, 8회에 믿었던 김강률과 이병헌 선수가 무너지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투수진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최준호, 김동주 선수야 어차피 상수라고 보기는 어렵고, 계투진도 그동안 무리한게 사실이니까요. 오히려 실책으로 주지 말아야 할 점수를 헌납하고, 찬스를 허사로 만든 야수진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중심 타선인 김재환, 양석환 선수의 부진이 크게 다가옵니다. 나름대로 스탯을 올리고는 있지만, 이 선수들은 장타를 쳐 달라고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겁니다. 삼성전 패배는 순전히 장타때문에 졌어요. 
조수행, 전민재 선수 등 하위 타선도 심각해서 출루 자체를 거의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김택연 선수가 푹 쉬었다는게 위안일 뿐입니다.

이번 주는 한화, SSG와의 원정 - 홈 6연전이 펼쳐집니다. 최원준, 알칸타라, 최준호, 브랜든, 김동주, 최원준 선수가 선발로 나서는데, 브랜든 선수 몸상태가 관건이네요. 브랜든 선수에게 휴식을 준다면 김유성 선수가 등판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땜빵 및 하위 선발이 계속 나서는 일정이라 여러모로 어려운 경기가 예상됩니다. 김택연 선수 외 다른 계투진은 지친 모습이 역력해서 불펜 데이를 펼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고요.
때문에 그나마 상대 1, 2선발이 등판하지 않을 한화전에 집중하여 선발이 버텨주면서 5~6회까지 앞서는 경기라면 무조건 잡으려 노력하고, 선발이 조기 강판당한다면 주전들에게 휴식을 주면서 운영하였으면 합니다. 날씨가 더워져서 부상이 없더라도 체력 문제는 발생할 시점이기도 하니까요. 

질만한 경기는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게 최선입니다. 시즌은 깁니다. 더 이상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허슬~ 두!!

2024/06/23

클래식 사용 설명서 - 송사비 : 별점 3점

송사비의 클래식 사용 설명서 - 6점
송사비 지음/1458music

딸아이 논술 교재.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입니다.
 
전부 '입문자' 기준으로 맞추어져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어린 시절 교과서를 통해 뭣도 모르고 '암기'했던 지식보다는, 실제 감상에 도움이 될 내용들 위주로 되도록 쉽게 설명해줍니다.

이 중 곡의 악장 구분이라던가 클래식 음악이 긴 이유같은건 꽤 유용했습니다.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공연 관람 순서도 빼 놓을 수 없고요. 시립 교향악단의 연말, 연초 공연을 1순위로 추천하고 있는데, 올 연말에 딸아이와 함께 과천 시립 교향악단 연주회는 꼭 찾아가봐야겠더군요.
내 취향의 편성과 악기를 찾을 수 있도록 대표적인 곡들을 소개해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클래식 취향 찾기'도 괜찮았던 주제였습니다. 이 책을 따라서 입문자분들이 취향의 추리 소설을 찾을 수 있는 '추리 소설 취향 찾기'를 한 번 구성해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에 따른 특징, 지휘자가 하는 일, 그리고 악기별 특징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휘자가 과연 무슨 역할을 할까?는 항상 궁금했던 주제였는데, 악보를 해석하고 많은 악기들이 조화롭게 소리를 터트릴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라는걸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준 덕분입니다. 악기별로 흥미로운 설명들 - 예를 들어 호른이 음이탈이 많은 이유 - 도 많았고요.

그러나 종이로 된 책으로 읽다보니 함께 소개되는 곡들을 일일이 QR코드를 찍어 들어야 했다는 점은 불편했습니다. 한, 두 곡도 아니고 소개되는 개별 곡을 모두 QR 코드를 찍어야 했는데, 스캔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정말로 없었을까요?
아울러 악기별 설명에서는 대표적인 연주자나 대표곡 정도는 함께 소개해주는게 좋았을 것 같고요. 

그래도 입문서로는 차고 넘치는 좋은 책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QR 코드를 찍는 문제도 있고 하니, 동영상 컨텐츠로 제작하는게 더 적합했을것 같기는 합니다.

2024/06/22

스켈리튼 키 - 미치오 슈스케 / 최고은 : 별점 1.5점

스켈리튼 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아원 세이코엔 출신의 조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는 특이 체질의 소유자였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를 '사이코패스'라고 불렀다. 세이코엔을 나온 뒤, 오토바이를 이용한 위험한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던 조야는 고아원 친구 '우동'의 아버지 다고 요헤이가 어머니를 살해했던 범인이라는걸 알고나서 그를 살해한 뒤, 첫사랑 히카리 누나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녀마저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하지만 이 모든건 조야의 쌍둥이 형 겐토가 저지른 사건이었고, 겐토는 그를 조야로 착각한 우동에게 납치되어 죽을 위기에 빠지는데....


사이코패스 조야(인줄 알았던 겐토)의 연쇄 살인이 펼쳐지는 범죄 드라마. 조야가 저질렀던 범행이 알고보니 쌍둥이 겐토가 저질렀다는 반전이 핵심입니다. 이 반전을 위해 조야 시점의 범행 묘사에 은근슬쩍 조야가 아니라는 단서를 집어 넣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고 있고요.

하지만 도무지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가장 큰 이유는 겐토의 무차별적인 살인의 동기를 '사이코패스'라는 것만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 한들, 주변 사람들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죽이고 다닌다는게 말이 될까요? 자신에게 불이익을 줄 것 같아서 별다른 죄의식없이 살해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겐토가 양부모를 살해한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도쿄의 명문대학까지 입학한 상황에서, 친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다고 요헤이를 살해할 이유도 당연히 없고요. 그가 현재의 겐토에게 불이익을 준 부분은 전무하니까요.
겐토가 이런 잔혹한 살인극을 벌였는데 조야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 반대로 우동과 마사다의 폭력과 살인 행각은 그들이 역시나 사이코패스라서 그랬다는 설명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이 둘은 실제로 불이익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겐토보다야 조금 설득력이 있기는 합니다만, 도토리 키재기 수준입니다. 게다가 이들 중 조사를 통해 정말로 사이코패스라는게 입증된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사이코패스 설정을 위해 덧붙이고 있는 설명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쌍둥이가 사이코패스가 된 이유가 친모가 임신 중에 흡연과 음주를 했고 납으로 된 탄환을 맞았던 탓이라던가, 사이코패스의 살인 충동을 심장 박동 수로 조절한다는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심박수로 살인 충동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조깅을 하는게 낫겠지요.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한니발 렉터'만큼이나 매력적이지도 못합니다. 이래서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핵심인 반전도 급작스럽습니다. 쌍둥이라는 설정부터 좋은 아이디어로 보기는 힘듭니다. 이미 100여년 전 '녹스의 10계'에서도 사용하면 안된다고 언급했던, 반칙에 가까운 아이디어니까요. 이왕 쌍둥이를 등장시키려면 "살인의 쌍곡선" 정도의 트릭은 써 줬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반전에 기대는건 안일했습니다. 설명도 부족합니다. 좋은 집에 입양된 겐토야 그렇다쳐도, 세이코엔에서 조야가 성인이 될 때까지 쌍둥이였다는걸 함구한 까닭부터 잘 모르겠더라고요.

히카리 누나가 겐토에 의해 급작스럽게 살해당해 퇴장당하는 전개도 겐토의 잔혹함을 부각시키고 반전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단순 장치일 뿐이라 많이 불편했습니다. 아무런 까닭없이 죽기에는 쌓아올렸던 서사가 만만치 않았는데 말이지요. 조야가 이 때 겐토를 그냥 내버려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집어넣은 약간의 감동 요소도 별로였습니다. 이미 쌍둥이는 '괜찮지 않은'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조야는 도주한 겐토에 의해 살해당할 수도 있으니 더 나빠질 수도 있고요. 20년전에 친모가 녹음했던 '괜찮을거다'라는 메시지를 전해들은 것만으로 뭔가 희망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진짜로 괜찮은 상황을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억지 감동은 없느니만 못한 것 같아요. 도대체 작가는 무슨 생각이었던걸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건질게 거의 없는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역자 후기에서 '사이코패스'라는 중심 소재를 자극적인 도구, 반전을 위한 충격적인 트릭으로만 쓰지 않았다고 설명하는데 제가 봤을 때는 자극적인 도구로 밖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만 극대화해서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6/21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연극 오디션에 합격한 7명의 남녀 배우를 연출자 도고 신페이가 펜션으로 초대했다. 도고는 그들이 앞으로 4일간 펜션에 갖혀 있어야 하며, 눈에 갖혀 고립된 상태로 가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첫째날 밤, 가사하라 아쓰코가 그녀가 살해당했다는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산장 곳곳에는 그들을 위해 여러가지 정보를 알려주는 쪽지들이 놓여있었다. 배우들은 탐정역을 노리고 진짜 사건처럼 몰입했다.
그러나 둘쨋 날, 모토무라 유리에가 살해되었다는 메모가 남겨진 뒤 진짜 혈흔이 발견되는 등 정말 살인이 일어났을지 모를 단서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 배우들 중 유일하게 극단 '수호' 단원이 아닌 신분으로 오디션을 통과한 구가는 사건 중심에 스키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단원 아사쿠라 마사미가 있다는걸 알아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2년 발표 작품. "가면 산장 살인사건", "하쿠바 산장 살인사건"과 함께 '산장 3부작'의 하나라고 합니다. 제목에 '산장'이 들어간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많지는 않습니다. 구태여 이렇게 묶어 홍보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하여튼,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클로즈드 써클' - 즉 고립된 장소 - 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물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설정입니다. 펜션 '사계'는 전화도 제대로 연결되어 있고, 외부로의 이동도 자유롭거든요. 다만 나흘 간 펜션에서 실제로 갇혀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오디션에서 떨어진다는 조건 때문에 일곱 명의 배우들은 외부와의 연락도 취하지 않고, 이동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정말 사람이 죽었다면 누군가 연락을 취했겠지요. 그러나 펜션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이 진짜인지? 연극인지?를 알 수 없게해서 이를 막는다는 아이디어도 좋았습니다. 수상한 정황만 포착될 뿐 시체나 결정적 증거는 드러나지 않아서 독자들도 이게 진짜인지, 연극인지를 마지막까지 눈치채기 힘들 정도니까요. '폐쇄된 공간에 한정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범행을 저지르는건 하잘것없는 삼류 추리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구가의 입을 빌어 말하기까지 하고요. 결국 남아있는 배우들은 신고도 못하고 시간만 끌게 됩니다. 이런 심리적인 '클로즈드 써클' 작품은 처음 보는데 꽤 재미있는 발상이었어요.

"카나리아 살인사건"에서 트럼프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장면에 대한 비판처럼 다른 본격물에 대한 비판도 볼거리입니다. '녹스의 10계'를 대신할 작 중의 10계명이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 인간 하나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명탐정 따위를 만들어 내지 마라.
  • 경찰의 수사력을 폄하하지마라.
  • 공정하다느니 불공정하다느니 하고 투덜거리지 마라.
이렇게 세 개만 언급되는데, 이왕이면 10개를 꽉 채워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쉽게 읽힌다는 장점도 확실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닥으로 다른 '산장 시리즈' 작품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수준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범행 동기가 마사미의 반신불수에 대한 복수라는건 명백하다는 점에서 추리의 여지가 적은 탓입니다. 반신불수인 마사미가 아닌 조력자가 범행을 저질렀을겁니다. 피해자 세 명을 제외하면 서술 트릭을 쓰지 않은 이상 구가가 범인일리 없고요. 그렇다면 남는건 혼다, 요시오, 다카코인데, 여자인 다카코에게는 범행이 무리였을테니 혼다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요시오는 펜션에서 유리에에게 프로포즈를 했기 때문에 마사미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프로포즈가 거짓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건 독자와 유리에, 요시오에게만 공개된 정보거든요.

추리를 위한 단서 제공도 부족합니다. 
  1. 가사하라 아쓰코를 죽인 흉기인 헤드폰 줄의 잭
  2. 모토무라 유리에 살해 당시 정전이 되었던 이유
  3. 혼다 유이치가 구가와 알리바이를 만들었는데 이를 밝히지 않은 이유
정도가 유력한 단서처럼 소개되지만, 이 세 가지 단서는 살인 사건이 연극이었다는걸 증명할 뿐입니다. 진범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못해요. 혼다가 범인이라는걸 밝힌건 수면제를 먹은 일행이 잠들었을 때, 구가가 모두의 몸 위에 사력을 다해 올려놓았던 성냥개비 덕분입니다. 혼다 몸의 성냥개비만 떨어져 있었거든요. 하지만 자다가 뒤척일 수 있고, 구가가 다른 일행들보다 늦게 깨어날 수도 있으니 제대로 된 단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기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마사미가 반신불수가 된 건 피해자 세 명이 연루된 장난전화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애초에 마사미가 그들의 자동차를 훼손했던게 원인입니다.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쓰코와 유리에에게 밀려서 오디션에 떨어진게 이유인데, 이 중 원망할 상대도 아쓰코밖에 없고요. 모토무라 유리에는 압도적인 미모를 갖추었다고 하니까요. 아무리 연기력이 좋아도, 타고난 미모를 이기기 힘든건 당연합니다. 게다가 오디션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줄리엣을 선택해서 연기를 했던건 본인 실수였는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혼다가 마사미의 복수를 위해 그녀를 농락했던 세 명을 살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눈 앞에서 그들을 살해하는 '연극'을 펼쳤다는 진상만큼은 앞서 '진짜인지, 연극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전개와 잘 어울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피해자 아마미야가 혼다의 알리바이가 분명했던 유리에 사건에서 대신 범행을 저질렀던 공범이었으며, 아마미야 뿐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 모두 이게 마사미를 위한 연극이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고, 죄책감에 연극을 도와주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럴 거였다면 '수호' 단원들이 힘을 합쳐서 더 제대로 된 살인 연극을 보여주면 되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단원 두 명 - 다도코로 요시오, 나카니시 다카코 - 에게 협조를 구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말이죠. 마찬가지 이유로 외부인 구가를 끌어들일 이유도 없었습니다.

마사미가 펜션 안에 숨어서 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은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걸 지켜보려면 범행 장소가 제약된다는 문제가 크니까요.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게 더 합리적이지요. 건물 내부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도촬한다는 설정의 영화 "슬리버"가 발표된게 1993년이니, 기술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을겁니다.
마지막에 모두가 감동하며 하나가 된다는 신파조 결말도 허무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이중, 아니 삼중으로 겹쳐진 연극 트릭이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올해 초에 영화화되었던데, 영화 버젼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연극이라는 설정 상 영화화하기도 적당했을테니까요. 영화 버젼이나 기회가 되면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2024/06/19

범죄도시 3 (2023) - 이상용 : 별점 2점

작년에 천만 명을 넘는 흥행을 기록했던, 범죄 액션물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 얼마전 천만 명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의 막을 내리는 추세인데 감상이 늦었네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내용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마석도 형사가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는 악당들을 박살내는 게 전부이지요. 물론 이 영화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나 반전을 기대한건 아닙니다. 화끈한 액션과 감칠맛나는 유머로 2시간을 알차게 채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천만 명 이상의 관객분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이었을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이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메인 빌런 주성철 탓입니다. 별로 강하지도 않고(상대적인 개념입니다만), 정체가 마약 수사 팀장이었다는 반전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설정 오류로 보이는게, 주성철이 한국 현직 경찰이었다면 권총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일본 야쿠자나 마석도 형사는 손쉽게 처리하는게 당연해요. 총기를 사용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중반까지는 최대한 사용을 자제했다고 치더라도, 도주를 결심했던 마지막 순간에 마석도 형사에게 야구 방망이로 맞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리키를 비롯한 일본 야쿠자들도 전형적인 클리셰 그대로라 진부했습니다. 주성철보다 쪽수와 무기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에게 박살난다는건 더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전작들처럼 마형사가 상대하는 적의 숫자를 줄여야 했습니다.
마형사 소속을 금천서 강력반에서 광역 수사대로 변경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금천서 강력반 동료들은 경찰 동료 느낌이 많이 났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려웠어요. 웃음 포인트로 내세우는 초롱이도 너무 노골적이라 저는 별로였습니다.

악당을 박살내는 장면은 여전해서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되긴 하지만, 이런 점들 때문에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네요. 제 점수는 2점입니다.

2024/06/17

06.11 ~ 06.16 두산 베어스 경기 감상평

한화 - 키움 홈 / 원정 6연전
성적 : 3승 3패

좋았던 점
  • 계속된 불펜 활약
  • 김택연 선수 마무리 확정
  • 돌아온 4, 5 선발 쾌투

나빴던 점
  • 곽빈 선수 부진
  • 맥없는 중심 타선
  • 라모스 선수의 어슬렁 수비

총평과 이번주 예상 (혹은 기대)
예상했던 3승 3패라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승리해야 했던 곽빈 선수 경기와 브랜든 선수 선발 경기를 패하고 나머지 경기를 잡았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루징의 위기에서 팀을 구한건 땜빵 4, 5선발 최원준, 김동주 선수였습니다. 모처럼 안정적인 투구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두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필승조인 이병헌, 최지강, 김택연, 이영하 선수는 물론 김강률, 정철원, 홍건희 선수 등 추격조까지 불펜진은 모두 괜찮은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지난 주부터 마무리를 김택연 선수로 바꾼 이승엽 감독의 결단도 좋았고요. 좌완투수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질과 양 모두 베어스 사상 역대급 불펜진이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곽빈 선수가 화, 일 두 번의 선발 경기에서 완전히 무너졌던건 아쉽습니다. 알칸타라 선수도 아직 별로고, 브랜든 선수도 예전같지 않은데 곽빈 선수마저 무너지면 큰일인데 말이지요. 2군에서 조정을 거치고 복귀한 최원준, 김동주 선수가 쾌투를 펼친걸 볼 때, 한 번 정도 휴식을 주는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타선도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상대 에이스급을 만나면 철저하게 막히는 모습이 두드러졌던 탓입니다. 한화의 바리야 - 류현진 선수 상대로는 의미있는 타점을 거의 만들지 못했을 정도로요. 양의지 선수는 여전히 활약해 주고 있고, 강승호 선수가 다시 살아나고 있지만, 김재환, 양석환 선수 등 중심 타선이 잠잠했기 때문입니다. 승리했던 경기는 대부분 하위타선 활약 덕분이었고요. 그나마도 한 경기 반짝하면 몇 경기 침묵하고 있지요.
물론 하위타선은 지금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긴 한데, 그래도 일요일 경기는 좀 심했습니다. 키움 약점은 불펜진이고, 연 이틀 키움 필승조 불펜진을 상대로 점수를 냈으니 무조건 선발을 일찍 끌어내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빠른 공격으로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며 선발 하영민 선수가 7이닝 이상 투구를 하게 도와주었지요. 최소한 하위 타선은 투구수를 늘리며 좀 더 끈질긴 모습을 보여줬아야 했습니다.

치지를 못하면 수비라도 좋았어야 했으나, 라모스 선수의 수비는 볼썽사나웠습니다. 그야말로 경기를 날려먹는 수비였지요. 감독이 따끔하게 이야기했다는데 쉽게 고쳐질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는 NC, 삼성과 홈, 원정 6연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곽빈 선수에게 휴식을 준다면 브랜든, 최원준, 알칸타라, 김동주, 최준호, 브랜든 선수가 나설테니 신인 2명 보다는 외국인 선수 2명이 나서는 NC전에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 주말에 필승조는 휴식을 취하기도 했으니까요. NC전을 위닝으로 가져간다면, 삼성전은 올 시즌 성적도 좋지 않고, 선발진도 다소 약한 만큼 무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천 취소가 하루 정도 생기면 더 바랄게 없고요.

무엇보다도,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질만한 경기는 무리하지 않고 주전들에게 휴식을 주는 방향으로 운영하기를 바랍니다. 시즌은 깁니다. 더 이상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허슬~ 두!!

2024/06/15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살인의 쌍곡선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야카와 혼자서 운영하는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에 회사원인 예비 부부 교코와 가쓰로, 역시 회사원인 야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야코, 범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이가라시, 택시 운전사 다지마가 초대되었다. 누군가 설상차를 망가트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야베를 시작으로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는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원에 사선을 그은 기묘한 부호가 그려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하야카와, 교코, 아야코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되어 경찰과 취재 기자들이 곧바로 찾아왔지만, 관설장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으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 니시무라 교타로의 초기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명성에 걸맞는 여정 미스터리, 기차 시간표 트릭이 활용되었었던 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고립된 공간에서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당한다는 점, 그 때마다 볼링핀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설정은 거의 똑같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했다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와 같은 질낮은 졸작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덕분입니다. 특히 '고립된 호텔에서 범인은 투숙객들을 전부 죽이고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트릭이 일품이었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범인 하야카와 형제는 쌍둥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호텔 지배인으로 변장하고 투숙객들을 살해했지요. 그리고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외부에 흘려 경찰과 기자들이 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기자로, 처음에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호텔로 달려왔지만 호텔 앞에서 은근슬쩍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남아있던 범인이 기자인 척 했던 겁니다. 지금 읽어도 그럴싸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앞서 작가가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을 사용했다'고 직접 밝히고, 본문에서도 쌍둥이 고시바 형제가 강도 행각을 벌이지만 경찰이 체포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호텔 연쇄 살인 사건과 겹쳐 진행시켜 트릭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활용한 쌍둥이 트릭 이야기는 하야카와 형제 탈출 트릭이 아니라 고시바 형제 사건에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시바 형제의 강도 행각과 형제를 뒤쫓는 경찰과의 밀땅도 재미있었고요. 
참고로, 이 트릭은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에 사용되었던 트릭과 같습니다. 당시 모 드라마와 표절 시비가 있었던 듯 한데, 애초에 특별히 오리지널임을 내세울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네요....

여기에 더해, 아야코가 범인임을 의심하게 만든 초대장 필적과 유서 - 초대장은 이가라시가 필적 감정을 한다며 모두에게 쓰게했고, 유서는 첫 날 일종의 내기 결과에 따른 자필 문장이었을 뿐 -를 확보한 방법, 다지마가 스키를 부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 등도 괜찮았습니다. 아야코 범인설을 보도하여 하야카와가 기자를 사직하게 만든 결말-진짜 기자가 아닌 가짜였으니-까지 안배한건 보통 솜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호텔에 갇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심리가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교코는 약혼자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각 등장인물들의 매력도 제대로 그려져있지 못합니다. 깔끔하고 담백한건 좋지만, 이 작품은 너무 과했습니다.
범인 하야카와 형제가 이런 거창한 범행을 벌인 동기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만원 전철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 것 자체는 말이 안되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려 6명(정확하게는 7명이지만요)을 살해할만큼 원한이 깊은지는 설명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상복의 랑데뷰"처럼요. "상복의 랑데뷰"는 짤막하게나마 연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려주고, 그 뒤 이어지는 복수극 과정에서도 1인칭 심리 묘사를 삽입하여 복수와 범행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이 작품도 그런 묘사가 반드시 나와 주었어야 했습니다.

고시바 형제가 벌인 강도 행각도 소소한 부분들은 억지스러웠습니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고 범행을 저지를 필요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서 형제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요. 쌍둥이라서 당장 체포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체포는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고시바 형제도 복수 대상이어서 강도짓을 제안하고 체포되게 만든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으며, 고시바 형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하야카와의 가면을 벗기는 마무리도 작위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없지만,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졸작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의 좋은 작품입니다. 명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분량도 짧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4/06/14

유리병 속 지옥 - 유메노 큐사쿠 / 이현희 : 별점 1점

유리병 속 지옥 - 2점
유메노 큐사쿠 지음, 이현희 옮김/이상미디어

이 책은 데뷰작 "기괴한 북"을 비롯하여 11편의 단편과 단편 모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시골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모아 짤막하게 소개하는 "시골의 사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였다면 섬찟했겠다 싶은 이야기들이 몇 편 있었던 덕분입니다. 못생긴 과부가 딸의 연인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가 파국을 맞는 "오래된 냄비"가 대표적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로 황당무계한 아이디어가 바탕이 된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중국 최고의 진귀한 차 '곤륜차'를 마시는 방법을 장황하게 펼쳐놓는 "미치광이는 웃는다", 사람을 마약으로 취하게 만든 뒤 레코드를 들려주어 그대로 재생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한 "인간 레코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그렇습니다. 로마노프 왕가의 아나스타샤 공주가 살아남아 탈출했다는 설정의 단편 "사후의 사랑"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느낌을 줍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가 치정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갱"의 당시 탄광 분위기 묘사와 같은 디테일들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전개가 황당해서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거나, 비슷한 설정과 전개가 반복되는 탓이 큽니다. 정신병자가 나오는 몇 편의 이야기들이 특히 그러했어요. 에도가와 란포의 변격물적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완독하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더 이상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4/06/12

명탐정 코난 : 흑철의 어영 (2023) - 타치카와 유즈루 : 별점 3점

전 세계 경찰의 CCTV를 연결하여 감시 및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 '퍼시픽 부이'가 도쿄 하지조지마 근해 바다 속에 건설되었다. 여기에 도입된 신기술 '생장 인식 프로그램'은 어떤 인물의 특정 시기 사진을 입력하면, AI로 현재의 모습을 알아내어 전 세계 카메라를 이용해 그 인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을 노린 검은 조직에게 엔지니어 나오미가 납치되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장인식 프로그램 데이터로 하이바라가 셰리라는게 드러났다. 검은 조직은 하이바라마저 납치했고, 이를 막으려던 코난 일행을 피해 잠수함으로 도주했다. 한편 퍼시픽 부이에서는 검은 조직의 내통자를 추궁하던 직원 레온하르트가 살해당하는데....


명탐정 코난의 26번째 극장판. 지난 주말에 딸아이와 함께 티빙을 통해 감상했습니다. 
사실 이전에 감상했던 최근 극장판들(대표적으로 "비색의 탄환")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추리와 액션 모두에서 재미를 주는데 실패했고, 황당하게 스케일을 키우는 바람에 탈선한 기차가 날아올라 도시를 덮친다는 등, 아무리 만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가득했던 탓입니다. 극장판이란 강박관념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재미있더군요! 우선 설정이 돋보였어요. "명탐정 코난"의 핵심인 '몸은 작아졌어도 두뇌는 그대로!'를 활용한 '생장 인식 프로그램'은 하이바라가 납치당하는 상황의 설득력을 높여줄 뿐더러, 주인공들에게 또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불어넣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전세계 CCTV를 실시간 감시하고 언제든 데이터 확인이 가능한 '퍼시픽 부이'의 설정도 괜찮았고요. 검은 조직이 자신들이 기록된 영상을 조작하기 위해 퍼시픽 부이 시스템을 노린다는건 충분히 말이 되지요.
하이바라가 셰리일지 모른다 여긴 검은 조직이 하이바라를 납치하는 사건 중심의 스토리도 깔끔하며 액션도 좋았습니다. 검은 조직 요원 핑가와 란의 격투, 워커의 차를 쫓는 카체이스는 최근 보기 힘들었던 몰입감을 선사해 주었으니까요. 해상 시설물 퍼시픽 부이를 검은 조직의 잠수함이 공격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았고요. 말도 안되게 스케일을 키웠다기보다는, 비교적 상식적인 수준으로 그려진 덕분입니다. (악의 조직이 잠수함까지 갖추고 있다는건 좀 그렇지만... '백팔용'인가?)
검은 조직의 레귤러에 아무로와 아카이, 경시청의 메구레 경부와 시라토리 등 괴도 키드와 하츠토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여 각자의 역할을 선보이는 것도 팬으로서는 감사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에요. 추리할만한 사건은 퍼시픽 부이에 잠입한 검은 조직 요원 핑가의 정체를 밝히는 것 뿐인데, 손동작이라는 단서는 제공해주지만 용의자가 워낙 적은 탓에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이지요.
핑가가 코난 일행을 상대하기에는 확연히 처지는 모습만 보여준 것도 - 란에게 발차기를 얻어맞고, 코난에게 도주 경로가 드러나 범행이 탄로나는 등 - 별로였습니다. 이렇게 약하다면 먼가 사연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진에 대한 쓸데없는 라이벌 의식만 불태우는 잔챙이로 보여 실망스러웠어요. 
검은 조직이 퍼시픽 부이를 파괴한 것도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백도어 등으로 외부 조작이 가능했으니 그냥 놔 두는게 훨씬 유용했을텐데 말이지요. 하긴, 한 명이 잠입한 것만으로 동영상 데이터 조작과 백도어 삽입을 이렇게나 쉽게 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시스템을 장악하는게 더 나았을까요?
무엇보다도 베르무트가 직접 변장을 하여 조직이 '생장 인식 시스템'은 오류 투성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는건 답답했습니다. 그녀도 이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정체가 탄로날 수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지면 좋겠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명탐정 코난" 팬 입장에서, 그리고 '하이바라 아이'의 팬으로서 두말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즐겼던 작품이에요. 일본에서의 대박 흥행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흥행을 거두었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6/10

06.04 ~ 06.09 두산 베어스 경기 감상평

NC - 기아 원정 / 홈 6연전
성적 : 5승 1패 (!)

좋았던 점
  • 철벽 불펜진
  • 발야구와 빅 볼의 적절한 융합
나빴던 점
  • 잦은 연장 승부
  • 연이은 홍건희 선수의 블론 세이브
  • 신예급 선수들의 뇌주루

총평과 이번주 예상 (혹은 기대)
3승 3패를 예상했는데 의외의 5연승으로 5승 1패라는 호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홍건희 선수를 제외한 불펜진의 역투가 컸습니다. 무려 3번이나 연장 승부를 벌인데다가 한 경기는 선발이 1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강판되었음에도 중간 투수들이 버텨주어서 이길 수 있었지요. 철강왕 이영하 선수의 쾌투, 그리고 오랫만에 복귀한 정철원 선수도 나아진 모습이라 앞으로도 기대가 되네요. 김택연 선수의 마무리도 해볼만한 선택같고요. 최준호 (5이닝 무실점), 곽빈 (6이닝 2실점), 브랜든 (6이닝 3실점), 알칸타라 (6이닝 4실점) 선수의 선발진도 잘 버티면서 초반부터 밀리는 경기는 만들지 않아 연승에 일조했습니다.
타선도 이긴 경기는 매 경기 4점 이상은 뽑았습니다. 양의지, 라모스 선수의 꾸준한 활약에 양석환 선수가 적절히 터져주었고, 이유찬 - 조수행 선수의 하위 타선 활약도 좋았습니다. 특히 조수행 선수는 어떻게든 출루하면 거의 무조건 (91% 성공률) 도루에 성공하여 2루타를 친 효과를 주니 하위 타선으로는 더할나위 없네요.

그러나 투, 타 현재 엔트리에 더할 선수가 커 보이지 않는건 아쉽습니다. 김유성 선수는 퓨처스에서는 더 증명할게 없는데, 1군에서는 두 번의 기회 모두 1이닝을 버티지 못했지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군 문제 해결부터 하는게 좋아 보입니다. 아무리 안 좋아도 최원준, 김동주 선수를 쓰는게 낫습니다. 두 선수는 실점하더라도 최소한 3~4이닝은 버텨주니까요. 
김태근 선수도 퓨처스 성적은 좋지만 특기라는 주력, 그리고 주루 센스가 기대 이하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양의지, 김기연 선수로만 운영되는 포수진도 보충이 필수인데 마땅치 않고요. 선발진도 구멍이 명확하게 생겼고, 알칸타라 선수가 여전히 별로 좋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회복이 안된다면 대체 선수를 빨리 알아봐야 합니다. 이번 주 엔트리를 어떻게 가져갈지 궁금합니다.

이번 주는 한화, 키움과 홈, 원정 6연전을 펼치는데 한화전이 관건입니다. 곽빈, 브랜든, 알칸타라라는 1~3선발이 바리아, 류현진, 산체스로 이어지는 상대 1~3선발과 맞붙기 때문입니다. 대량 득점도 어려워 보이고, 브랜든, 알칸타라 선수가 좋지못해서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네요. 최준호, 땜빵(?), 곽빈 선수가 나서는 키움전은 선발진에서 확실한 우위라고 보기 힘들고요.
다행히 지난 주 유일하게 패배했던 일요일 경기에서 필승조가 휴식을 취했으니, 주초 첫 경기는 전원 투입이 가능합니다. 곽빈 선수 경기를 무조건 잡고, 브랜든 선수와 최준호 선수 경기에 집중하면서, 우천 취소 한 차례를 더해 3승 2패 성적을 거두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질만한 경기는 무리하지 않고 주전들에게 휴식을 주는 방향으로 운영하기를 바랍니다. , 더 이상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허슬~ 두!!

2024/06/09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곽재식 : 별점 2.5점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6점
곽재식 지음/인물과사상사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 중,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괴사건 15개를 소개하는 범죄 논픽션. 곽재식 작가의 '미스테리아" 연재물에서 추려냈다고 합니다. 연재된 글들을 재미있게 읽어왔기에, 출간되었을 때 부터 관심있게 지켜보았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네요.

범죄를 다룬 논픽션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계보"처럼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여 거의 그대로 전해주는 글, 그리고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처럼 여러가지 정보를 짜 맞추어서 의미있는 새로운 추리를 들려주는 글로요. 
이 책은 전자 스타일입니다. 신문 기사와 유사한 글이지요. 기사 스타일로 범죄, 사건 자체는 물론 사건의 배경이라던가 당대 시대상 등 이해를 돕는 상세한 설명이 명확한 근거를 통해 제공됩니다. 
당대 한 시점만 촛점을 맞추지 않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 사건의 후일담을 10년 이상 지난 다른 신문의 다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도록 연결해서 소개해주는 덕분입니다. "소매치기 전성시대"를 예로 들자면, 혼자서 범행하는 소매치기는 '특공대'의 일본식 발음인 '독고다이'로, 여러 명이 움직이는 팀은 '회사'라고 불렀다, 교통이 발달하자 소매치기 회사는 대중교통수단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등의 당시 소매치기 수법에 대한 소개는 1975년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하고 있으며, 헌병으로 변장하여 범행을 저질렀던 소매치기였던 '꼬마' 문씨에 대해서 1955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그리고 10년도 더 지난 1966년 경향신문, 또 10년이 지난 1975년 6월의 다른 기사를 통해 알려주는 식입니다. 한 범죄자의 20여년의 행적을 - 본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아도 -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셈이지요. 문씨가 "순교자" 영화 제작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등 재미있는 정보도 굉장히 많았고요.

당대 시대상과 관련된 사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1959년 남대문 권총강도의 범행 동기가 '영어학원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였다던가, 1967년 나일론 백이라고 속인 쓰레기를 운반하던 워싱턴 메일호 사건은 '수출보국' 분위기에서 해외 수출 실적을 가짜라 남기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었다는 것처럼요. 해방 직전, 일본인들이 명동 어딘가에 전재산을 바꾼 보석을 묻어놓았다는 '명동의 보물을 찾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은 연재 당시에도 재미있게 읽었었지요. 마곡사 5층 석탑 꼭대기 구조물의 재료라는, 황금보다 더 귀한 금속이라는 '풍마동'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고요.
이런 재미있는 사건들 외에도 어린이 3명이 백주대낮에 실종 후 처참한 모습의 사체로 발견되었던 1960년대 초의 사건, 마을 왈패들이 공공연하게 노리던 젊은 처녀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1956년의 '보호받지 못한 피해자' 사건같은 끔찍한 사건도 소개됩니다. 참으로 무참했던 시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요.

하지만 소개된 모든 사건이 인상적이거나 재미있는건 아닙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다소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진 사건들과는 다르게, 미제 사건은 아무래도 답답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한 보강 취재나 조사도 없고, 당시 기사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이런 사건은 관련된 기사를 시간과 관계없이 모아서 의미있는 내용으로 전달해주는 , "소매치기 전성시대"와 같은 구성이 필요했는데 아쉬웠어요. 그러기에는 분량이 부족했으려나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잘 알려지지 못했던 오래 전 우리 나라 사건들을 전해준다는 의도와 취지는 마음에 드는데, 몇몇 사건의 경우는, 분량을 더 늘리더라도 보다 깊이있는 취재와 정보가 덧붙여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연재가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2024/06/08

진짜 황제의 코담뱃갑, 나폴레옹의 코담뱃갑.

"황제의 코담뱃갑"에서의 코담뱃갑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추측케 하는 황제 나폴레옹의 코담뱃갑입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이 7월 15일, 영국 해군 군함 페레로폰호에 항복하고 승선했을 때 함께 실렸던 것으로 중앙에 나폴레옹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고 주변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습니다. 육각형의 금 상자는 왕실 보석상 베르나르 아르망 마거리트가, 중앙의 초상화와 장식은 장 밥티스트 이사베이가 만들었습니다.

최근 각종 공연 매체에서 나폴레옹은 꼭 한 번은 코담뱃갑을 들고 등장한 뒤, 코담배를 무대에 뿌리며 대사와 연기를 펼치곤 합니다. 이는 나폴레옹 황제가 코담배를 애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습니다. "황제의 코담뱃갑"에서의 설명처럼 말이죠. 나폴레옹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 숨이 막혔던 탓에, 냄새를 맡는 코담배를 애용했습니다.
황제 뿐만이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에서는 코담배가 널리 유행해서 상류층은 물론 서민들도 즐겨 피웠습니다. 부자들은 호화롭게 장식된 코담뱃갑을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마리 앙트와네트는 무려 52개의 코담뱃갑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코담배는 가루로 된 담배를 코 안쪽 점막에 묻혀 니코틴을 섭취하는 방법으로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즐길 수 있습니다. 불을 사용하지 않고 연기가 배출되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목과 폐에 부담을 주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흡연자들이 여러모로 밀려나는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코담배가 다시 유행하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2024/06/07

리뎀션 - 안데슈 루슬룬드, 버리에 헬스트럼 / 이승재 : 별점 1.5점

리뎀션 - 4점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베트 그랜스 경정은 유람선에서 밴드 가수에게 걷어차인 핀란드인 남자가 뇌출혈을 일으켰다는걸 알고 가수를 체포했다. 가수의 존 슈워츠라는 캐나다인 여권은 위조되었으며, 그의 정체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존 메이어 프레이였다는게 밝혀졌다. 존 메이어 프레이는 오하이오의 사형수였는데, 6년 전 교도소 안에서 사망 상태로 조작되어 탈옥했었다. 그가 무죄라고 믿었던 교도관 버논 및 사형 폐지 연합의 도움 덕분이었다. 버논은 식사에 독을 섞어 건강 이상을 유발시킨 뒤, 사형 폐지 연합 소속 의사가 마취제 등을 투여하여 사망을 위장했었다. 시체 운반 부대를 통해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존은 러시아 등을 거쳐 위조 여권으로 스웨덴에 입국할 수 있었다.
존의 생존을 알아낸 미국 정부는 송환 후 사형 집행을 원했다. 스웨덴은 사형과 같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개인의 송환요구는 거부하고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갈까 우려하여 존을 러시아로 추방하는데 합의했다. 존은 러시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끌려가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형제를 반대하던 교도관 버논의 계획이었다...


모르는 스웨덴 컴비 작가의 범죄 스릴러. 에베트 그랜스 경정 시리즈 중 하나로 내용의 핵심은 교도관 버논이 엘리자베스 피니건을 살해하고 존이 사형 선고를 받도록 만든 음모입니다. 존이 사형 집행을 당한 다음에, 자신이 진범임을 밝혀 체제를 뒤흔들 생각으로요. 사형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형과 같은 '동해보복'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살할 때 에드워드 피니건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조작하여 에드워드를 살인 사건의 피고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버논이 계획을 밀고 나가던 중간에 존을 불쌍히 여겨 교도소에서 탈옥하게 만든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약물로 심장에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킨 후, 교도소에 고용된 같은 편 의사들이 존을 언뜻 보기에 죽은 것처럼 마취시키도록 만들어서 사망 선고를 내렸고, 그 뒤에는 시체 안치실에 집어 넣었다가 부검 절차를 핑계로 시체 운반 부대에 넣고 빼돌리는 과정 모두가 설득력있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송환되면 죽을게 뻔한 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스웨덴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도 흥미로왔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딜레마는 항상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살인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게 만든 뒤, 이를 폭로한다는 핵심 계획부터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그가 살해했다는 피해자는 자살했었습니다. 피해자는 데이비드 게일의 공범이었고요. 이 사실은 게일의 사형 집행 직후에 드러납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죠. 게다가 이 작품은 이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피해자로 알려진 콘스탄스도 불치병에 걸려 자살했던 공범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버논은 무려 세 명 - 사형 선고를 받은 에드워드까지 - 이나 죽게 만든 살인범입니다. 버논의 존재가 사형 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근거인 셈이지요. 살인마가 사형 제도 폐지를 논한다는건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큰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살해당했던 엘리자베스 피니건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니건은 작 중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존에게 엄청난 복수심을 불태우는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에드워드 피니건을 복수심 때문에 제 정신을 잃은 변태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버논은 꽃다운 청소년 두 명을 희생시킨 살인범입니다. 에드워드 피니건마저 자신을 죽인 살인자로 조작한건, 에드워드가 그가 사랑했던  앨리스와 결혼한 것에 대한 복수로 보이고요. 그런데 작 중 버논은 시종일관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굳게 지키는 정의로운 인물처럼 등장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에드워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존이 갇혔던 사형수 동에 감금되었다는 에필로그도 억지스럽습니다. 끈을 이용하여 자살 후 총이 튕겨 나가도록 만들고, 끈은 까마귀가 먹어치우도록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경찰이 '초연 반응' 정도를 검사하지 않을리 없어요. 존이 자살한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걸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을겁니다. 설령 수사가 미비하여 에드워드가 버논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썼다고 치죠. 그래도 딸을 살해한 범인을 직접 처단한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버논이 그의 딸을 살해했다는건 이미 밝혀진 다음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워요.
다른 인물들도 엉망이거나 별볼일 없습니다. 기껏 목숨을 건진 존이 분노를 참지 못해 사건을 저질러 정체가 드러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멍청하다면 죽어도 싸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해서 지루했고요.
에베트 그랜스도 영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지 주변 인물들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뇌손상이 온 아내(?) - 전작을 읽지 않아 이 설정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은 안 됩니다만 - 안니에 대해 신경쓰는 것 밖에는요. 나이 많고 화도 많은, 붙임성 없는 거구의 경찰이라는 인물 설정도 "메그레" 경감과 똑같습니다. 그나마 독특한건 스웨덴 가수 시브 말름크비스트의 광팬이라는 것 뿐입니다. 마리안나 헬만손 경위도 이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미모의 여성 형사의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그리고 버논의 계획은 스웨덴 형사 에벤트 그랜스와 별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에베트 그랜스가 존의 무죄를 믿고 송환에 반대할 까닭도 없지요. 한 국가의 고위 경찰이 남의 나라 사법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니까요. 한마디로. 스웨덴 형사 에베트 그랜스 시리즈일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베트 그랜스의 등장 부분을 거의다 잘라내고, 존과 버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도 충분했어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탈옥에 대한 디테일 외에는 전부 꽝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4/06/05

Q.E.D. iff 증명종료 23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5점

Q.E.D Iff 증명종료 23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오랫만의 수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화"
가나는 캐스터네츠를 돌려주기 위해 플라멩코 댄서 지망생 타케다 사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달 쯤 전 사라졌다. 애인 유키토 때문에 엮인 뒤 친해진 부잣집 딸 마츠자와 리카의 별장 파티 직후였다. 리카는 사키에게 매료되어 절친이 되었지만, 강하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 인물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를 한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던 리카는 가나에게, 자신에게 동화된 사키를 위해 거금을 주어 그녀가 스페인으로 유학가도록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는 사키 방에 있던 수상한 인형, 사키가 리카를 협박했던 증거가 담겨있는 스마트폰을 회수하지 않은 것, 유키토에게 더 이상 사키와 리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한 것, 사키가 스페인으로 간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캐스터네츠를 누군가 훔쳐간 것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리카가 아니라 사키가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이후 리카로 살아가게 되었다는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진상입니다. 앞서 둘이 닮았다는 묘사도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이를 위한 단서와 설명은 부족했습니다. 유키토만이 둘 모두를 사귀었어서 둘을 구분할 수 있을터라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이에요. 친한 사람이 그 외에 없었을까요? 리카에게는 부하는 물론 가족도 있었습니다. 모아서 파티를 열 정도로 친구도 많았고요. 이들 눈을 모두 속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키 자신이 스페인으로 떠난 것으로 소문내고 꾸몄다면 모든게 깔끔했습니다. 구태여 자신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 - 침실에 있던 인형과 현장에 남겨진 스마트폰 - 를 남겨둘 필요는 없었어요. 수사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단순 실종과 살인 사건은 그 수준이 다르잖아요?
가나가 캐스터네츠를 보여주었을 때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플라멩코 방식으로 캐스터네츠를 사용한게 중요한 단서라는 것 역시 설득력이 약해요. 리카는 사키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으니, 캐스터네츠 사용법은 당연히 알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래도 캐스터네츠에 지문이 남겨졌기 때문에 그걸 훔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착안은 좋았고, 마지막에 현장에서 발견한 사키의 핸드폰을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지문인식 해제하도록 만들어 리카가 사키라는걸 밝혀내는 장면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덕분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의 전개만 좀 더 타당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형식적 진실"
우마오이 토비나가의 사후, 유산이 네 형제와 집사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막내는 불륜으로 입적한 탓에, 형과 누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유산 분배 현장에서까지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현장을 목격한 토마와 가나는 막내 쇼료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장남, 차남은 피해자가 먼저 화장실에서 폭행을 저질러서 방어한 것이라 주장했다. 가나가 반격했지만, 형제가 다시 입을 맞추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집사 코바도 사건 이후 행방불명 상태라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합의금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사의 '형식적 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 '형식적 진실주의'는 쌍방 서로 다툼이 없이 합의한 부분은 진실로 다루는 민사재판의 원칙입니다. 반면 형사 사건은 합의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각적으로 사실을 분석, 검증하는 '실체적 진실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작 중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형들의 위세에 눌려 합의하고 말았습니다. 아를 통해 형들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는게 '형식적 진실주의"에 따라 법률적으로 입증되었고요. 하지만 이는 쇼료의 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형들과 집사 코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챈 뒤, 복수에 나섰던 겁니다. 먼저 화장실에서 코바를 살해하고, 형들에게 자연스럽게 폭행 당하도록 설계했지요. 이후 코바의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 사건 수사를 통해 화장실이 범행 현장이라는게 밝혀집니다. 그리고 앞서의 민사 소송 합의 내용을 통해, 쇼료는 알리바이가 생겨나고 형제가 범인이 되어 버립니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범인일 수 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민사지만, 다른 증거가 없으니 경찰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마도 형제가 이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벽한 계획입니다!
쇼료의 어머니를 살해한 트릭도 '폭포'라는 현장을 잘 이용하고 있고요.

형제가 화장실에서 쇼료에게 반드시 시비를 걸었으리라는 보장이 부족하다는건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학습 만화로서도 우수한 Q.E.D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빼어난 오랫만에 보는 수작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6/03

05.28 ~ 06.02 두산 베어스 경기 감상평

KT - LG 홈 6연전
성적 : 2승 4패

좋았던 점
  • 안경민 선수 복귀
  • 선발진은 안정(?)

나빴던 점
  • LG전 스윕패
  • 피로가 쌓여가는 선수단 (2주 째)

총평과 이번주 예상 (혹은 기대)
KT 전은 2승 1패의 위닝으로 마무리하였지만, 주말 LG전 스윕패로 기세와 홈 극강 모드를 이어가지 못했던 한주였습니다. 순위도 4위로 떨어졌고요. 신인 투수와 대결했던 두 경기만 잡아내었을 뿐, 상대 외국인 선발에게는 형편없이 밀렸고 LG전은 홈런까지 연달아 얻어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토요일 경기의 홍건희 선수의 뼈아픈 피홈런에 의한 블론 세이브가 컸네요. 필승조 외의 투수들도 연달아 홈런을 쳐맞으며, 대체로 좋지 못했고요.
타선도 양의지, 넓게 보아서 라모스 선수 정도를 제외하고는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특히 강승호, 조수행 선수의 부진은 심각한 수준이네요. 백업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던 김규연, 전민재 선수 등도 슬슬 한계가 오는 듯 합니다. 슬슬 더워지는 터라 체력적인 문제가 불거지는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그나마 괜찮았던건, LG전은 스윕패하기는 했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를 보이지는 않았다는겁니다. 금요일 경기는 9회 찬스까지는 좋았고, 토요일 경기는 실제로 역전까지 했으니까요.
이는 역설적으로 선발진이 괜찮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현재 LG의 미친 공격력을 감안한다면요. 즉, 곽빈 선수를 필두로 브랜든, 알칸타라 선수면 6이닝 3실점 정도를 항상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거지요. 필승조도 제 몫을 잘 해 주고 있고요. 4, 5선발이 관건인데 4선발 최준호 선수에 더해 김유성 선수를 롱 릴리프로 활용하면서, 5선발로는 김민규 선수 등을 투입하면 올스타전까지는 버틸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최승용 선수가 돌아오겠죠? 계투진도 박치국 선수는 내리며 새 얼굴로 교체해보는게 맞을 것 같고요.
타선 침체는 지친 탓이 큰데, 안경민 선수가 언제 수비에 투입될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안경민 선수가 주전 라인업에 올라서고, 박준영 선수도 돌아오면 강승호 선수에게도 휴식을 줄 수 있을거에요. 이유찬 선수가 2루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외야도 조수행 선수 대신에 퓨처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태근 선수 등의 투입을 검토해 봐야 할 시점입니다. 아니면 차라리 김재환 선수를 좌익수로 기용하던가요.

이번 주는 NC, 기아와 원정 - 홈 6연전입니다. 두산은 최준호, 곽빈, 브랜든, 알칸타라, 김유성(?), 최준호 선수가 나서는 좋지 않은(지친 4선발이 2번 나서는) 일정입니다. 
우천 취소 한 차례 정도가 있기를 바라며 3승 2패 성적을 거두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트 선수 외 신인급이 나설 NC전 두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겠지요. 네일, 윤영철 선수가 나서는 기아전은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니까요.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질만한 경기는 무리하지 않고 주전들에게 휴식을 주는 방향으로 운영하기를 바랍니다. 올 시즌 두산의 뎁스는 나쁘지 않습니다. 타격감만 회복된다면, 상승세는 다시 탈 수 있을 거에요.

여튼, 더 이상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허슬~ 두!!

2024/06/02

절벽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절벽의 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각 단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편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연결고리를 가지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구조이지요. 마지막 단편은 총 정리하는 결론에 가깝습니다.
단편별로 여러가지 트릭이 사용되며 추리도 많이 펼쳐집니다. 의외의 반전도 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전개가 억지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개에 포함되었어야 할 내용을 마지막 사진으로 퉁친건 '실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편의에 따른 '반칙'에 가까왔습니다. 그나마 사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마지막 단편 뿐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미나게 절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구니오는 자살 명소 유미나게 절벽 옆 터널에서 사고를 당했다. 불법 유턴을 하던 차 탓이었다. 사고를 유발한 차 운전자 나오는 구니오를 구해주기는 커녕 현금을 빼앗은 뒤 살해했다.
구니오의 아내 유미코의 옛 연인인 형사 구마지마는 전력으로 사건 수사에 나섰지만, 나오가 살해당했고 동승자였던 히로도 실종되고 말았다. 구마지마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지만, 유미코를 또다른 동승자 마사가 노린다는걸 알고 황급히 유미코의 맨션으로 항했다....


구니오가 사고 당시 죽지 않고 실명했으며, 죽은건 조수석에 있던 네 살배기 아들 나오야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일당이 사건 당시 현금을 훔치려고 지갑을 확인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추리, 그리고 구니오가 집에 찾아온 히로를 손쉽게 살해한 방법 - 궁도부였던 아내 유미코의 화살을 이용 - 과 범행을 은폐하는 과정도 깔끔하게 진행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이비 종교 '십왕환명회'도 작품 내에서 단순히 들러리가 아닌 제 역할 - 히로 사건 은폐를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 마지막의 사고 등 - 을 충실히 해 주고 있고요.

하지만 구니오가 살아있다는걸 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리 잘 만들어진 서술 트릭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구니오가 복수를 위해 나오의 차 깜빡이 커버와 동일한 걸 구해 사건 현장 근처에 놓아두고 잠복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최소 몇십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의 깜빡이 커버를 알아챈다? 대단히 큰 덩어리도 아니고 부서진 조각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나오가 알아채고 차를 세운 뒤 커버를 회수했다 한들, 때마침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등 범행에 딱 맞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 정도 억지가 필요하다면 실명한 구니오가 나오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것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늘이 나오보고 살해당하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설득력없는 내용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건너온 초등학생 커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부모님의 방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볼 정도였다. 환영 퇴치를 위해 문방구를 찾은 커는 기묘한걸 목격했다. 젊은 남자의 묘한 모습, 안쪽 방 고타쓰 앞에 쓰러지듯 놓여진 발, 뒤섞인 문구류, 얼핏 보인 바닥 얼룩.... 커는 남자가 주인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멀쩡했고, 추리를 털어놓은 친구 야마우치도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문방구 할머니의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어른 문구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 문구가 놓여진 상황에서 출발하는 커의 추리는 깔끔합니다. 뉴스를 통해 진짜 피해자가 밝혀지고 범인인 조카와 할머니가 커를 납치하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하지만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 숨어 있다가 커를 구해준다는 결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야마우치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 커를 구해주는지도 설명이 없는건 마찬가지고요. 차 안에 숨었다는 것도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으로 살짝 알려주기는 하는데, 본 편에 녹여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칙으로 보일 뿐이에요. 커가 보아왔던 환영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데, 커가 환영을 본다는 설정보다는 커와 야마우치와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그려내는게 나았을 겁니다. 커 주변을 야마우치가 항상 멤돌았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는 안 된다"
십왕환명회의 간부 미야시타 시호가 자택에서 목을 멘 사체로 발견되었다. 신참 형사 미즈모토는 또다른 간부 모리야 다쿠미가 그녀를 살해했고, 이를 알아챈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마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시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고민했다. 그러나 미즈모토는 파트너이자 선배 다케나시와 술을 먹다가 트릭을 간파해내는데...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 미야시타 시호의 방은 제대로 잠겨진 밀실이 아니라 자석으로 '스마트록'을 붙여 임시로 만들어진 밀실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동산 회사 사장 앞에서 잠겼다는걸 보여준 뒤, 열쇠로 문을 열 때 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면서 회수했던 것이지요.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에요. 문제는 눈에 뜨이지 않고 록을 회수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실제로 현장에 함께 있던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에게 곧바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또 모리야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좋은 후더닛, 와이더닛 물이라기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나카가와 도루의 수첩을 조작해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렸고, 진상을 알아챈 미즈모토마저 살해했다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였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만....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수첩 조작도 마지막에 사진으로 설명해줄 뿐, 앞선 본문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살하려던 구니오는 옛 제자를 만난 뒤 다시 삶의 의지를 찾는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작품. 짤막한 에필로그에 가까우며, 이 작품만 단독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서 단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에필로그. 결말답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경찰 내 협조자가 누구인지? 사고를 당한건 누구인지? 히로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진상은?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건을 조작한건 누구인지? 미즈모토를 누가 살해했는지? 등 모든 떡밥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라서 첫 사건에서 구마지마의 사고사를 거짓 증언했고, 세 번째 작품 사건에서의 은폐와 미즈모토 살해를 저질렀다는 고백을 선보이는게 핵심이지요.
에필로그라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지만, 시력을 상실해서 아내 유미코에게 사건 진상 고백문을 쓰게 했지만, 알고보니 백지였다는걸 마지막 사진 한 장으로 밝히는 반전은 강렬했어요.
 
그러나 다케나시,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의 진범 모리야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는건 문제에요. 깔끔하게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이 한 편 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서 별점을 주기도 어렵네요. 구태여 준다면 2.5점? 반전만 좋았습니다.

2024/06/01

계간 미스터리 2024 봄호 - 김태현 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봄호 - 4점
김태현 외 지음/나비클럽

정말 오랫만에 읽어보는 계간 미스터리입니다. 이전 리뷰는 2011년이니 강산이 변해도 벌써 한 번 이상 변했네요. 싼마이틱하지만 강렬한 표지 일러스트에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리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예지 스타일이라는건 같은 미스터리 잡지"미스테리아"와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는 특집 기획 르포르타쥬 기사인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마저도 소설 형식을 빌어 작성되어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인스타그램에서 주식 고수익을 인증하며 투자자를 끌어들인 뒤, 폰지 사기를 저지른 실화를 가명, 그리고 사건 핵심 관계자 시점의 묘사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수록 단편 6편 중 무려 5편이 한국 작가 작품이라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국 추리 문학의 본진'이라는 광고가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수록 단편 중에서는 세 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세 편에 대해 스포일러 가득 담아 짤막하게 감상을 남겨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신인상 수상작인 "사이버 니르바나 2092"입니다. 유명 연예인 강준기가 전뇌 합선으로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캐는 전직 경찰의 활약을 그린 SF 추리물이지요. 이미 죽은 강준기의 뇌를 회사, 매니저들이 이용해서 그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왔지만, 전뇌에 복수 접속하는 사고로 뇌가 타버렸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좋은 추리물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강준기는 전뇌화 수술을 받지 않은 인본주의 인물이었다는 정도의 단서로는 진상을 추리해내는게 독자에게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최신형 전뇌가 아니어서 과부하가 걸리면 타버린다는걸 독자는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안티 부디스트 시위, 전뇌, 전뇌 연결, 신체 임플란트 등 "공각 기동대"로 대표되는 사이버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어요. 저자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흔하디 흔한 설정인데 1973년 박정희 유신 당시 경찰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니 굉장히 독특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이 피라미 노동자를 간첩이라며 고문, 심문하는데 알고보니 그 노동자가 취조하던 형사의 6.25 때 헤어진 동생이었다!'라는 극한의 딜레마도 흥미로왔습니다. 형은 여기서 동생임을 밝히고 노동자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러면 빨갱이 가족임이 드러나 출세길이 영영 막힐텐데? 아, 정말 쫄깃하더군요. 다만 노동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결론은 다소 식상했고, 악마가 끼어들 이야기였는지는 의문이기는 합니다. 뭔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억지스러운 악마의 등장보다는, 같은 역사 속 비극을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훨씬 깊은 울림을 주는 걸작인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선례를 참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문센의 텐트에서"는 수록작 중 유일한 외국 단편입니다. 존 마틴 레이히의 작품이지요. 남극 탐험대가 미지의 괴생명체를 발견한 뒤 모두 죽고만다는 크리처 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의 직속 선배라 할 수 있어요. 로버트 드럼골드와 대원들이 느끼는 공포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덕분에 몰입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미지의 괴생명체가 뭔지 제대로 묘사도 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별점은 4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 단연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특집 기사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흔히 보아왔던 범죄 이야기이기는 한데, '사기 감별사' 주제한이 범인 '여우비'의 사기를 간파한 방법은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화라서 설득력도 높고요. 
한국 미스터리를 키워드를 통해 분석한다는 신연재 "로컬리티와 미스터리"에서는 여러가지 주장 중 한국 소설의 공간 중 '시골'에 주목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역 주민의 텃세와 오지랖, 부조리한 규율이라는 시골적 배타성, 이른바 '부족주의'와 도시인의 충돌이 벌어지는 식으로 시골은 미스터리 무대로 흔히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인 기준이라는 주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부족주의를 전형화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를 극복한 작품으로 황세연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를 소개하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이 작품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런 시선이 추리 비평에 필요하겠구나 싶더군요. 저도 한참 공부가 부족하다는걸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단편 세 편은 추리물로 보기 어렵거나, 달리 언급할 부분이 없는 범작 수준에 그친다는건 아쉬웠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계간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는 정통 추리물이 더 많이 수록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