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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5

골프코스의 인어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2점

골프 코스의 인어들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연달아 읽어버린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두 번째 권입니다. 원래는 이게 세 번째 단편집이고 먼저 읽었던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가 두 번째 단편집이라고합니다. 첫 번째 단편집을 착오로 구입 못해 순서가 좀 바뀌어 버렸네요. 뭐 단편집이니까 그건 별로 중요하진 않겠지만요. 

여튼,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 워낙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실망스러웠어요. 이전 단편집에서 언급한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 같달까요? 한마디로 심심합니다. 의표를 찌르는 맛이나 독자의 감정을 살살 건드리는 맛은 거의 없고, 세밀한 심리묘사에 더욱 치중한 경향이 강한 탓이에요. 작품들 개개의 결말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았고요. 저는 단편소설에서는 여운을 남기던, 반전이 있던 어쨌거나 결말의 끝맺음이 작품에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편집에서는 대체로 애매모호하고 시시하게 처리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이상할 정도로 해피엔딩이 많은게 특히나 불만스러워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하이스미스 여사 작품에서의 해피엔딩이라니 이건 정말 아니올시다죠. 배신감을 느꼈달까요? 

물론 특유의 불편한 인간 관계 설정과 심리묘사,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과 기발한 발상을 토대로 한 전개는 여전합니다. 역자가 해설에서 카뮤의 "이방인"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정도의 임팩트는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문장과 설정에서의 몽환적인 느낌은 확실히 거장의 풍모를 전해줍니다. 

그래도 확실히... 전작보다는 좀 읽는 맛은 확실히 덜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던 독특한, 기묘한 맛은 거의 없고 그냥저냥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기대가 너무 큰 탓도 있긴 하겠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시리즈의 구입을 망설이게 되네요. 지금까지 5할의 확률이니 기대를 한번 더 걸어봐야 하겠지만요... 

역시나! 싶은 이 단편집의 베스트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골프 코스의 인어들 

대통령의 생명을 구한 교수의 환상과 애증 이야기랄까요? 골프 코스의 인어들이라는 제목과 발상 자체는 기발하기 그지 없지만 그다지 끌리는 요소는 없었습니다. 

2. 단추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들과 아들 때문에 변해가는 아내 탓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던 회계사 롤랜드는 어느날 밤 갑작스럽게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상 생활속에서의 평범한 사람의 심리가 급작스럽게 변해가는 과정과 그 결말을 디테일하게 그린 수작입니다. 역자가 "이방인"을 언급한 작품으로 그만큼 순문학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나름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감점 요소로 보입니다. 막판에 힘이 팍 풀려버리는 바람에 뫼르소 만큼의 고뇌를 롤랜드가 끝까지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3. 우연한 특종

별볼일 없는 지방신문 사진 기자 크레이그는 어느날 우연히 찍은 성폭행 피해자의 사진 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평범한 일반인이 우연으로 성공하게 되지만 그 뒤에 도사린 죄책감과 결국 성공이라는 열매때문에 모든 것을 무시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비판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독특한 전개와 발상에 비해서 왠지 묘사의 섬세함이 좀 떨어지는 작품이더군요. 결말도 시시하고요. 

4. 크리스의 마지막 파티

자신을 배우의 길로 이끈 크리스 웰스의 죽음을 앞두고 배우 사이먼은 취리히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일과 현재를 돌아보게 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사이먼에게 있어서 크리스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그의 죽음으로 무엇이 변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추억과의 결별이 닥쳤을때의 심리묘사랄까요? 깊이 생각하자면 메시지를 많이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알맹이 없는 공허한 작품이었습니다.

5.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시계

자수성가한 샤를과 부호의 딸인 미셸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지만 미셸이 도와준 거리의 소년이 샤를의 물건을 훔쳐가면서 둘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가게 되는데... 

부유한 부부와 거리의 소년에 대한 자세한 설정과 심리묘사는 모파상을 연상케 합니다. 출신성분이 다른 두사람의 디테일하게 묘사된 갭은 디킨즈 작품같은 느낌도 주고요. 

하지만... 기둥 스토리 자체와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6.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

미국 청년 앤드류는 멕시코의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한 소년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신고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범인으로 몰려 악몽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평범한 청년에게 닥친 악몽과도 같은 하루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틱한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에 생기가 가득 넘치는 것이 이 단편집에서 단연 돋보이더군요. 뭐 이야기 자체는 뻔하긴 했습니다만.... 

7. 애완동물 공동묘지 

변호사 크리스토퍼는 키워왔던 애완동물을 박제로 만드는 아내 페니의 취미를 싫어했지만 그 취미가 기사화되자 과거에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복수심으로 발전한다.

제목 그대로 애완동물의 공동묘지와 같은 기묘한 취미와 더욱 기묘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다룬 여사다운 단편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스티븐 킹 작품을 연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전혀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덜 자극적이고 원색적이지만 왠지 더 우울하고 기묘한, 아주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8. 어쩌면 다음 생에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엘리너는 어느 날 부터 유령과 같은 "그"를 보게 된다. 그와 엘리너는 서로 생활을 공유하며 가까와지지만 "그"는 결코 착하지 않은 존재였다.

여사님이 이런 작품까지 쓰셨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유령 공포 환상 괴담이자 심리학적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곳이 많은 디테일한 작품이네요. 주인공 여성 엘리너의 애절한(?) 삶과 사고방식이 전혀 공감되지 않아 높은 점수를 줄 순 없었지만, 여러모로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생각됩니다.

9. 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

세일즈맨 랠프는 주말 별장 이웃인 에드와 그레이스 부부의 척척박사와 같은 작업들에 컴플렉스를 느끼며 불안해 하던 중 별장에 초대한 프랜시스라는 아가씨와의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일종의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한 남자에게 빗대어서 조금은 유머스럽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결국 주인공이 폭주하게 되지만 그나마 해피엔딩이라는 데 현대인으로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10. 가장 잔인한 달

영어교사 오딜의 취미는 소설가들에게 개인적인 팬레터를 보내는 일로, 그녀는 친구와 영국 여행을 떠나며 작가 데니스 홀리우드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여사 특유의 몽환적이고도 섬세한 심리묘사가 발군인 작품으로 환상이 현실 앞에서 잔혹한 얼굴을 드러낼때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이상하게 마무리가 좀 대충대충이라서...

11. 몽상가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은 항상 낭만적인 데이트를 꿈꾸지만 첫 데이트에서 바람을 맞고 만다. 그 후 다시 한 남자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는데...

바로 위의 "가장 잔인한 달"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역시 환상과 현실의 갭을 다루고 있으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심리묘사를 기반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결말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잔인한 달"의 주인공은 나름 현실을 수긍하며 환상을 전개하는 데 반해 이 작품의 이저벨은 아예 환상속에서 살기로 결심해 버리니까 말이죠. 여사의 글 솜씨를 느끼게 해 주는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남성인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긴 하지만, 비교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2007/08/10

대답은 필요없어 - 미야베 미유키 / 한희선 : 별점 3.5점

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입니다. 잡지 "판타스틱"에서 읽었던 단편이 별로였으며 같은 여성작가인 기리노 나쓰오의 단편집 "암보스 문도스" 역시나 그냥저냥이었기에 그닥 기대하고 구입한 책은 아닙니다.

그런데 상당히 물건입니다! 단편들의 수준도 높고 추리적으로도 깔끔한, 정통파적인 맛이 느껴진 덕분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해피엔딩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미야베 미유키의 해피엔딩은 익숙치 않았는데 의외로 아주 좋았어요. 바로 직전에 읽은 "백기도연대"와 정 반대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같이 사무실을 차려서 일할 만큼 서로의 영역에서 인정받는 작가들이긴 하지만 제 취향은 아무래도 저는 쿄고쿠 보다는 미야베 미유키 쪽이라 생각이 드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추리적인 요소가 잘 살아있는 "배신하지 마"인데 다른 작품들도 다 재미있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 대답은 필요없습니다.^^ 미야베 월드 입문작으로 추천합니다.

작품별 간략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답은 필요없어" 

일종의 은행사기를 다룬 단편으로 의외성은 없지만 사건 수사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비밀번호"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부분의 맹점을 팍!하고 찔러주기 때문입니다. 보험사기 등 현대 신용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구성하는 작가의 전공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고요.

"말없이 있어줘"

난데없는 교통사고가 완전범죄와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일본 추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의 수사극"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지만, 결말의 의외성이 독특했습니다. 너무 의외성을 강조한 점, 그리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가 보이는 점이라는 단점은 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는 운이 없어"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일종의 사기극을 다룬 소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의 설정이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너무 극단적인 복수극인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장난이지만 너무 심한 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결말부의 약간의 반전 역시 별로였고요. 주인공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 외에는 다 별로라서 이 단편집의 워스트로 선정합니다.

"들리세요"

어머니와 할머니의 불화끝에 이사를 오게 된 초등학생이 우연찮게 도청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노인의 외로움과 의심 등을 잔잔하지만 나름 충격적으로 담아낸 소품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서정적이면서도 주제를 잘 전달하는 능력이 잘 드러나는 수작입니다.

"배신하지 마"

빚더미에 올라 앉은 신세대 여성의 추락사를 수사하는 내용으로 가장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는 부분이 너무 "감"과 "우연"에 의지하는 것은 단점이나 여성의 심리를 잘 아는 여성작가답게 심리를 파고드는 점은 괜찮았어요. 씁쓸한 결말의 조화도 마음에 들었고요.

"둘시네아에 어서 오세요"

최고급 디스코텍 둘시네아에 관한 메모를 남기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고학생 속기 아르바이트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설정이 일상적이면서도 재미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잔잔하나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2017/01/28

칼리의 노래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칼리의 노래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죽었다고 알려졌던 시인 M.다스가 아직 살아있고, 캘커타에 나타났다는걸 알게 된 잡지사의 의뢰로 시인 보비는 아내 암리타, 젖먹이 딸 빅토리아와 함께 캘커타로 향했다. M.다스의 신작 확보와 그에 대한 기사 작성이 목적이었다. 보비는 그를 찾아온 조력자 "크리슈나"로부터 M.다스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신작에 얽힌 "칼리" 신을 모시는 신앙과 폭력에 대해 들었다.
여차저차 M.다스의 신작을 입수해 독파한 보비는 반은 협박에 가까운 어거지로 M.다스를 직접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다스의 죽음과 카팔리카 교단의 납치와 폭력에 휩쓸리고 말았고, 크리슈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호텔에 돌아왔지만 빅토리아가 유괴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장르 소설가 댄 시먼스의 데뷰작입니다.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스티븐 킹, 딘 쿤츠 등이 격찬한 공포 소설이라기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캘커타를 무대로 범죄 집단의 광기에 휩쓸린 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사실 보비의 임무(?)는 별게 없습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시인의 복귀작을 구해오고, 관련된 기사를 쓰는게 전부니까요. 그러나 이를 독자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솜씨가 정말 빼어나며, 그 바탕에는 발군의 묘사력이 자리합니다. 캘커타라는 곳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 솜씨가 가장 돋보여요. 이 작품의 첫 문장부터가 그러합니다. "어떤 장소는 너무나 사악하여 그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어떤 도시는 지독히 악랄해서 용납할 수 없다. 캘커타는 그런 곳이다." 작품 내내 이 첫 문장을 그대로 증명하듯 캘커타의 치부와 오점만을 상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러한 캘커타 묘사 덕에 "폐쇄공포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포감이 모락모락 생겨나고요. 특정 장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데 그 장소나 너무나 혐오스럽게 묘사되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이렇듯 특정 장소에 대한 혐오감과 폐쇄 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은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과 좋은 비교가 될 정도에요. 이런 곳에서 하나 뿐인 아이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 공포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러한 공포에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묘사한 덕분에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되고요. 

다른 묘사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크타난다지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카팔리카의 예배 의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좋은 예입니다. 엄청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되어 있어 보이는 디테일, 신상이 밟고 있는 시체와 들고 있는 참수된 목을 이용한 아이디어도 아주 공포스러워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익사한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었고요.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무섭기에 시각화하더라도 아주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칼리의 노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좋아요. 일종의 서사시와 현대 문명을 결합하여 설명하는데, 번역된 결과물로는 천재 시인의 작품인지 잘 모르겠더라도 아이디어만으로 놀라운 결과물로 느껴졌습니다. 현대 문명이 진정한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광고나 뉴스 기사와의 결합을 통해(의도한 것이던 아니던) 잘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 속 표현 그대로 "칼리의 시대가 열렸도다"! 인 것이죠. 

적절하게 등장하는 소소한 액션, 빅토리아를 잃었지만 보비와 암리타 부부는 결국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는다는 나름대로의 해피 엔딩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해피 엔딩을 좋아하기도 할 뿐더러, 이 정도 고초를 겪었으면 좀 행복해져도 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주요 인물인 보비, 크리슈나의 급격한 심리 변화와 행동들의 이유, 목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보비가 다스를 꼭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 - 보비가 원고를 손에 든 시점에서는 M.다스를 만날 이유는 없음 -, 만남 이후 크리슈나가 건네준 권총을 M.다스가 부탁한 시집 속에 숨겨 넣은 이유, 마지막에 보비가 발작적으로 캘커타로 돌아가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등 이야기의 핵심 변곡점 모두가 그러합니다.
크리슈나 즉 산자이의 목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카팔리카가 되고 싶었지만, 되고 난 이후에는 왜 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를 전혀 모르겠거든요. 칼리 신의 뜻도 아니고, 그 스스로 칼리 신을 거역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정도의 실력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만약 크리슈나의 행동이 카팔리카의 목적이라면 M.다스를 죽인 이유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놔 두었어도 어차피 오래 갈 목숨은 아니고, 시의 출간을 막기 위해서라면 보비와의 만남과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칼리 신의 안배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 안배, 계획이 무엇인지 정도는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폭력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선언한다...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어요.
빅토리아를 납치한 것도 밀수품 운반을 위한 악당들의 음모였는지, 칼리 교도인 카팔리카들의 복수인지도 결국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악당들의 음모라면 사전의 안배 - 다스의 조카라는 카마키야 브하라티의 존재 - 라던가, 차터지가 M.다스와의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카팔리카가 연류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좀 애매해요. 이렇듯 좀 모호한 이야기가 '환상문학' 스타일이기는 합니다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보비가 과거 성폭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등의 짤막한 묘사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고요.

아울러 공포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다는 단점도 있지만 사소합니다. 재미도 있고 묵직한, 좋은 장르 문학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만큼 장황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러고보니 아주 무섭지는 않지만 환상 문학 쪽으로는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앰브로스 비어스 작품과도 비슷하군요. 여튼,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신 장르문학 팬 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리는 바 입니다.

덧붙이자면,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독서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인도는 절대 가면 안된다는 것을. 댄 시먼스가 캘커타에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앙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대부분은 캘커타라는 곳을 방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2005/11/01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 당계례 : 별점 1.5점


고고학자 잭은 친구인 물리학자 윌리엄의 요청으로 고대의 "무중력"세계를 구현했던 유적지를 찾아 그 수수께끼를 풀려 한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에 다가갈 수록 자신이 계속 꾸는 진시황 시절 몽 장군과 옥수 공주의 사랑에 대한 꿈과 겹쳐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결국 꿈에서 본 장소인 한 폭포 속에서 완벽한 무중력으로 구현된 진시황의 지하 궁전을 발견하게 되는데...

공사가 다망한 관계로 (?) 포스팅이 뜸했네요. 짬내서 주말에 본 성룡의 최신작입니다.

사실 성룡 영화를 저도 예전에는 매년 놓치지 않고 봤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슬슬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안조" 이후의 영화는 안 본 영화가 더욱 많은 것 같네요. 이유야 여러가지이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성룡의 유머가 슬슬 사라지면서 영화의 재미가 많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왠지 유머와 재치를 돈으로 커버하려 한 듯한 느낌이 많이 나서 싫어지더군요.

그런데 이 영화 역시 제가 싫어한 부분을 극대화해서 답습하고 있습니다. 성룡의 유머와 재치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액션도 성룡 특유의 아크로바틱 코믹 액션은 묘지에서의 액션과 끈끈이 공장에서의 액션, 딱 2장면에서만 드러나고 나머지는 흔해빠진 중국 무협 영화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불만스럽고요. 제일 용서가 안되는건 클라이막스의 액션을 와이어로 땜빵한거에요. 이건 성룡이 아니야!
이야기도 당위성과 설득력 모두 굉장히 부족할뿐더러 "불사의 약"에 관련된 시공을 초월한 사랑과 윤회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진용"에서 써먹은 것이라는 점, 그리고 식상해진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에 발표된 "진용" 쪽이 이야기의 밀도나 설득력은 훨씬 높다는 것 역시 당황스러운 점이었어요.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었으면 좀 더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는데 언해피 엔딩이라는 것도 별로였고 말이죠. 게다가 악당역의 "구선생"이 왜 무공 고수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떡하니 등장해서 최고수의 무예를 급작스럽게 선보이니 기가 막힐 뿐이죠. 중국은 쿵후 고수만 교수를 할 수 있나?
이러한, 10여년 전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전개와 설정은 빼 놓더라도 장예모 쪽이 성룡보다는 더욱 진나라 무사에 어울리는 비쥬얼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성룡은 아무리 생각해도 외모상으로만 본다면 미스 캐스팅이에요.

그래도 무중력에 관한 접근이 진시황릉의 비밀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것을 구현한 상상력 하나는 꽤 괜찮았다고 보여지고, 김희선의 연기는 잘 모르겠지만 비쥬얼 하나만큼은 정말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성룡도 몇몇 장면에서 나이를 잊은 듯한 모습과 액션을 가끔 보여주는만큼, 성룡과 김희선의 팬이라면 볼 만한 수준의 영화라 생각되긴 합니다. 그래도 대단한 팬이 아니시라면 TV에서 방송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낫을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06/22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 별점 3점

책만 보는 바보 - 6점
안소영 지음/보림

정조 때 관리 이덕무와 그의 벗들에 대해 이덕무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역사, 전기 소설입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꽤 재미있더군요.
장점이라면 우선 이덕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서자' 출신으로 여러가지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덕무가 괴로움을 버티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갔는지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와 노력, 그리고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뻔한 해피 엔딩도 마음에 들어요. 이런 해피 엔딩이 거의 불가능했을 조선 후기였다는 점에서요.

두번째로는 이덕무 본인보다도 유명한 이덕무의 벗,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덕분입니다. 이덕무의 스승 격인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학의"의 박제가, "발해고"의 유득공, 이덕무의 처남으로 최근 이런저런 드라마 때문에 널리 알려진 "조선무예보통지"의 저자이기도 한 무인 백동수, 신분은 다르지만 순전히 책 사랑 때문에 친해진 이서구, 심지어는 정조까지 등장하는데, 이를 이덕무의 시점으로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예를 들자면 담헌 홍대용이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건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덕무 시점에서 홍대용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러가지 장면을 그려내니 훨씬 생생합니다. 게다가 단순한 연주 묘사에 그치지 않아요. 홍대용이 천문, 수학,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걸 '자연의 이치는 곧 조화'라며 뛰어난 음악 실력과 연결하고 있거든요. 이런 장면들 덕분에 인물들이 더 입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웠집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이덕무와 친구들에게 명확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에 미친 책벌레로 책만 있으면 근심걱정 따위는 모두 잊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박제가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뜻을 굽히지 않고 올-인하는 혁명가로 그려지고요. 유득공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의 명랑한 메모광입니다. 백동수는 지위, 나이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 사교성 발군의 낙천적인 무예가죠.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 심지어 아끼던 책을 팔아 양식을 삼곤 했지만, 이런 벗들과 책들로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니, 뭔가 "성균관 스캔들" 스럽네요. 그리고 이들의 언행 모두가 굉장히 현대적이라서 읽기도 편합니다. 잘 된 고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종의 드라마같은 느낌을 주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세번째는 이덕무의 무지막지한 책 사랑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독서인인 탓에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그가 직접 정리한 4가지 책 읽기의 이로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야말로 독서 하나면 만사형통인 셈이에요. 배고픔, 추위, 근심걱정, 병을 독서로 잊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독서가 좋았으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덕무가 추천하는 우리나라의 좋은 책 세 가지는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입니다. "성학집요"는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당대, 즉 정조 시대 시대의 분위기 묘사도 마음에 듭습니다. 실학의 대두, 청나라와의 관계, 정조의 개혁 정치 등이 이덕무에게 닥쳤던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드라마가 함께 해서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이덕무가 출세하게 되는게 정조의 개혁 정치와 그대로 겹치기도 하고요.
물론 이 부분은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너무 이덕무와 백탑파를 좋게만 그리고 있어서 그렇지, 정조가 서자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을 발탁한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보겠다는 취지도 있었겠지만 당파에 좌지우지되던 당시 정국에서 자신만의 세를 키우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 더 컸으니까요. 결국 서자 출신들을 비롯한 이른바 '백탑파' 세력을 끌어올린건, 또다른 붕당을 만든 것과 다름 없는 셈이고요. 결국 서자 출신들은 고작해야 시골 군수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평양 감사까지 출세한건 신분이 높았던 이서구 뿐이었다는건 결국 현실의 벽이 높았다는 이야기라 여러모로 씁쓸합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역사, 조선 사람 시각으로 본 세상 등 '조선' 운운하는 발언이 많은 것도 너무 오버스러웠어요. 솔직히 진위여부도 의심스럽고 말이죠. 애초에 이덕무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위인전이라는 것 부터가 이덕무의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일종의 용비어천가스러운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백탑파에 편향된 시선, 고증과 진위여부가 모호하다는건 단점이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 한 선비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점 때문에 완벽한 역사서라 하기는 어렵고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 위인전에 가깝기에 성인분들보다는 어린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제 딸에게도 언젠가 권해줄 생각입니다.

2024/05/12

문라이트 마일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2점

문라이트 마일 - 4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하지만 옛날처럼 살면 우린 벌써 죽었을 거야."

아내와 딸의 부양을 위해 위험한 일은 지양하고, 양심에 반하는 일까지 닥치는대로 하면서 살고 있던 켄지 앞에 베아트리체가 나타났다. 그녀는 12년 전, 켄지가 찾아주었던 소녀 아만다의 숙모였다. 켄지는 아만다를 사랑했던 납치범 삼촌으로부터 소녀를 되찾아 알콜 중독에 빠진 형편없는 엄마에게 돌려주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아만다가 또 사라졌다고 말했고, 켄지는 돈 한 푼 받을 수 없지만 과거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로 아만다를 다시 찾아나섰다.
그러나 아만다의 실종은 러시아 갱단과 관련이 있었고, 갱단은 켄지의 주소까지 알아내어 아만다가 가지고 사라진 아이와 '벨라루스 십자가'를 찾아오라는 협박을 시작했다...

데니스 루헤인을 대표하는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완결편. 책 소개를 보니 "가라, 아이야, 가라"의 후속작 성격이라고 하네요.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답게 납치, 절도에 살인과 폭력 등 각종 범죄가 난무합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갱들이 도박으로 수렁에 빠트린 의사 드레를 아동가족부에 취업시킨 뒤, 어린 임산부들에게 몰래 아이를 낳게 한 뒤 팔아치워왔다는 범죄 행각이 독특하더군요.
범죄들과 관련된 여러가지 죽음들이 끔찍한 시리즈 특징도 여전하고, 돈 때문에 기본적인 인간성을 저버리는 등장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여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한 술 더 뜹니다. 심지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켄지마저도 돈과 가족 때문에 양심을 파니까요. 이런게 이 시리즈의 매력이기는 한데, 역시나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켄지와 제나로, 딸 가비의 사랑과 유대감, 신뢰에 대한 묘사도 많습니다. 완결편인 덕분이겠지요? 이는 켄지가 탐정일을 완전히 은퇴하는 시리즈 결말에 대한 설득력도 높여 줍니다. 본인이 양심을 팔고 돈을 택했던 몇몇 사건들에 대한 회한과 함께 더 이상 위험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지켜야 할 가족보다 완벽한건 없겠지요. 아만다가 딸(?) 클레어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이런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한 결말도 깔끔합니다. 러시아 갱 예핌이 약에 중독된 두목 키릴 등과 인간 쓰레기 아만다의 의붓아버지 케니를 모두 죽이고 켄지와 아만다, 납치했던 소피와 기타 등등을 풀어주고 끝나거든요. 마침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시점도 완벽한 셈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서의 해피엔딩은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는 커요. 예핌이 왜 이들을 살려주는지 설명이 없는 탓입니다. 어차피 네 명을 죽인 상황에서 세 명을 더 죽이는게 별 문제도 아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중요 목격자인데요. 다른 악당이라면 다 죽이고 켄지의 집으로 찾아가 가족도 다 죽였을 겁니다.
드레를 아만다가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기차가 달려오는 것도 모르고 십자가를 주으러 달려갈만큼 멍청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직전에 약에 취했다는 묘사가 있기는 한데, 이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마침 기차가 달려오는 순간을 딱 맞췄다는 것도 작위적이었고요.
대체로 우연이나 특별한 기회를 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개도 그닥입니다. 예를 들자면, 켄지가 아만다의 집을 몰래 들어가 수색하다가 아만다의 가족들과 소피를 만나는데, 그 때 마침 러시아 갱단이 습격해서 소피를 납치해갑니다! 갱을 추격하던 켄지는 면허증을 빼앗겨서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요. 이런 전개는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여지를 아예 없게 만듭니다.
그나마 아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 19번 유니폼을 애지중지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레드삭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분은 약간 추리물 성격을 보이기는 합니다. 알고보니 아만다가 어린 시절 유괴당했을 때 살았던 마을 이름이 '베켓' 이었던 거지요. 좋은 추억만 가득했기에 레드삭스 19번 조쉬 베켓의 유니폼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켄지와 제나로는 베켓에서 아만다를 찾아내지요. 하지만 이 역시, 아만다의 행적을 뒤쫓는데 그리 중요한 단서가 되지는 못해요. 19번 유니폼이 없어도 '베켓'을 찾아가는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니까요.
핵심 인물인 아만다도 와 닿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혹독한 경험을 했다고 모두가 천재가 되는건 아닙니다. 친구의 아기를 자기 딸인양 돌볼 이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아만다의 현재는 켄지의 심경 묘사 정도의 비중은 할애해서 설명해 줘야 했습니다. 지금은 치기어리고 겁없는 사춘기 10대인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복잡한 내면을 갖춘 인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펄프 픽션입니다. 시리즈 팬이시라면 '완결편' 이라는 의미도 있고하니 읽어볼만 하겠지만,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3/05/27

당신의 과녁 - 고태호 : 별점 2점

당신의 과녁 5 - 4점
고태호 지음/3rdpost(써드포스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스무살 청년 최엽은 연쇄 살인범 석규남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쓴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석규남이 노환으로 죽고, 남은 가족들이 발견한 증거를 제출한 덕분에 17년 후 풀려났다. 
그러나 17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연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가족은 생업을 잃고 갖은 욕을 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죄를 탄원하는 거리 시위를 하다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에 최엽은 연쇄 살인마의 손녀를 납치해 자기와 똑같이 17년간 감금하기로 결심했다.
죄책감으로 최엽의 협력자가 된 경찰과 당시 기자, 그리고 여동생과 절친 3인방은 최엽의 계획을 알고나서, 17년 감금할 시설 공사를 한다는 핑계로 최엽과 주말마다 어울렸다. 사회의 따뜻함, 가족의 온정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엽은 석규남의 손자 - 납치 대상의 남동생 - 으로부터 자기가 무죄라는걸 알고도 그 가족들이 증거 제출을 10년이나 미루었다는걸 알고난 뒤, 납치를 결행했다. 그러나 납치 대상이 여성 연쇄 납치범 일당에 납치당하는걸 목격한 최엽과 일행들은 납치범들을 뒤쫓아 결국 그들을 체포하고 납치 대상을 구해냈다....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보고 혹해서 보게 된 웹툰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최엽의 심리 묘사입니다. 뎃셍력이 별로라 인물 형태가 계속 깨지며, 모든 묘사에서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작화는 등 좋은 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미묘한 심리 묘사는 놀라울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최엽이 분노하는 장면은 묘사의 달인 윤태호의 <<야후>>를 보는 듯한 섬찟함마저 느껴졌으니까요.
만화의 컷 구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돋보입니다. 엣 연인을 다시 만나 각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게 마지막 컷에서 드러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대했던 복수극으로는 뜨뜻미지근한 탓입니다. 최엽의 복수 외길 전개가 아니라, 최엽이 친구들을 만나 다시 흉금을 터 놓게 되는 과정처럼 주변 인물들과 관계 복원을 이루는 출소자의 사회 적응기, 주변 인물들과 여러가지 즐거운 추억을 쌓는 일종의 일상 시트콤, 거기에 연쇄 부녀자 납치범들과 대결하는 액션 추적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곁가지 이야기들이 비중만 놓고 보면 복수 자체보다 더 커요.
게다가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납치하려던 여자를 도리어 구해주게 된 뒤, 최엽이 복수를 포기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더 큰 악을 만나서 그들을 물리치고나니 모든게 허탈해졌다는 건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 과정에서 석규남 가족의 진심어린 사죄도 없고요.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뒤 식물인간이 되었던 어머니가 깨어난다는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너무 뜬금없었어요. 최엽이 겪은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줘야지!라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이런 애매한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화끈한 복수가 더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최엽 캐릭터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0cn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로 묘사되는데, 딱히 대단한 전투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뇌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라서 강력 범죄를 계획하는 인물로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맨몸 운동을 조금 한 정도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지요. 경찰과 기자라는 조력자,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 검사의 유산 - 납치범을 가둘 일종의 별장 - 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서는 최엽이라는 인물에게도 보다 설득력을 부여했어야 했습니다.
납치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납치에 성공했었더라도 체포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납치가 핵심인 범죄물이 아무리 아니더라도,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기대했던 복수극이나 범죄 스릴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더 글로리>> 류의 화끈한 복수극을 기대하고 보신다면 실망하실겁니다.

2005/05/09

두 사람이다 - 강경옥 : 별점 1.5점

조선시대 우의정 한씨 가문에서 액땜을 위해 치성을 드리던 중 한 스님의 말을 듣고 우환을 막기 위해 이무기를 잡았다. 그러나 승천을 하루 남기고 죽은 이무기는 한씨 가문에 저주를 걸었다. 한씨 가문 자자손손 그 대(代)의 한 명은 주위의 친지 중 2명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저주였다.
세월은 흘러 1999년, 한씨 가문의 자손 지나가 그 세대에서 희생자로 지목되었다. 지나는 같은 세대 사촌인 명현과 명현의 친구인 영능력자 유진, 친구 세희 등의 도움으로 저주와 맞서 싸우려 했지만 어머니와 명현, 2명이 목숨을 노린 직후 세희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리자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자신이 새로 사귄 남자 친구 재석이 아버지와 원수인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는데...

강경옥이라는 작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단편 옴니버스에 가까운 "라비헴 폴리스" 정도만 괜찮다 생각하고 있었고 이외의 작품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영화화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헌책방 골목에서 구해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스터리 심리극"이라는 저 제목의 카피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저주로 인해 주위 사람중 누군가 두 명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데, 그것이 누구인지는 모른다는 설정은 아주 좋습니다. 더군다나 생명을 노리는 사람이 두 명이 아니라 하나 둘 더 늘어나며, 실질적인 저주의 근원과 그 배경을 파헤쳐 나간다는 전개는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나름의 반전과 재미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 정도라면 영화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괜찮아요.

하지만 충분히 괜찮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표현하고 전개해 나가는 만화 자체는 지극히 실망스럽습니다. 강경옥씨의 단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에요.
일단, 데뷰 때부터 거의 늘지 않은 작화 탓이 큽니다. 이 정도 중견 작가가 컷마다, 각도마다 캐릭터 얼굴 선이 틀려 보인다는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캐릭터 자체도 구분이 어려울 정도에요. 심지어 표지와 속표지와 작품 내용의 주인공 캐릭터 얼굴도 달라보입니다!
거기에다가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이 오히려 이야기 전개에 혼선을 가져옵니다. 기본 등장인물들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 전개가 가능했는데 말이지요. 목숨을 노릴 만한 원한을 억지로라도 집어넣어서 범인(?)의 다양화를 꾀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본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개념없는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져서 보는데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해피 엔딩은 작품과는 어울리지도 않았고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희생자로 밝혀지려면 누군가가 생명을 노린 다음에야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설정상의 대 전제입니다. 이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그것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작품에서는 순간적으로 어머니가 착란을 일으켜 지나가 습격당하는 묘사로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이후 이야기는 급격하게 힘을 잃고 맙니다. "나일지도 모른다"라는 불특정 다수를 지배하는 공포심이 계속 깔려 있어야 했는데, 그러한 공포심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럴거라면 차라리 가문을 지배하는 공포심으로 인해 집단 광기로 발전하는 전개, 예를 들자면 옆의 친척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피해 망상으로 피가 피를 부르는 방향으로 진행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야기가 후반부에 급속하게 힘을 잃고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으로 전개될 필요도 없었을겁니다. 이무기의 저주가 그렇게 쉽게 풀리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도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설정은 탁월하지만 만화로는 전혀 살리지 못해서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보다 "공포"스럽게 만들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영상화 작업이 진행된다면 많은 부분의 각색과 보강을 통해 보다 가슴 서늘한 공포를 안겨주어야 할 겁니다.

PS : 관심있으시다면 네이버에서 유료 만화 서비스로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총 4권이니 1,200원에 다 볼 수 있습니다.

2014/03/19

열세 번째 배심원 - 아시베 다쿠 / 김수현 : 별점 2점

열세 번째 배심원 - 4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다카미 료이치는, 책이 팔리지 않아 궁지에 몰린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그가 저지르지 않은 사건의 범인으로 일부러 체포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집필해 출간한다는 이른바 “누명 계획”. 다카미는 이 계획에 따라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꾸고, 의도대로 경찰에 체포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체포 직후 상황은 예기치 않게 흘러간다. 자신이 연루된 사건이 단순한 위장된 범죄가 아닌, 실제 강간 살해사건이며, 결정적인 증거는 그와 피해자의 DNA가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였다.

다카미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모리에 슌사쿠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과 조작된 증거의 진실을 파헤치며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홍루몽 살인사건"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아시베 다쿠의 장편소설로,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두 개의 큰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전업작가를 꿈꾸지만 실패한 다카미 료이치가 '누명 계획'이라는 이름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해 혈액의 DNA까지 바꾼 뒤, 가짜 살인사건을 연출해 경찰에 체포되기까지의 과정. 두 번째는 그렇게 체포된 다카미가 뜻밖에도 실제 강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며,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의 법정 투쟁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한번에 읽히는 흡입력이 있어 독자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은 법정물 특유의 긴장감을 잘 살리고 있고, 배심원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설정 역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충분히 이슈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아주 미세한 단서를 활용한 마지막 반전도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을 깨지는 않으며, 무엇보다 DNA 감정이라는 과학적 수사기법의 맹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추리극이나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작가가 스스로 밝힌 대로 “역본격 추리소설”이라는 명칭을 붙이기에는 설득력도, 완성도도 부족해 보입니다. 진상 자체는 그럴듯한 편이지만, 근간이 되는 설정이 문제입니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도입되지 않은 배심원 제도가 전제된 가상의 세계관이 이 이야기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가공의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SF적 상상력에 기대는 방식으로, 마치 밀실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의 범인이 초능력자였다는 식의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접근으로는 현실 속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완성도 높은 법정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배심원 제도에 대해서 다룬 작품이라면 QED 27권의 "입증책임" 에피소드나 헨리 데커의 "복수법정" 쪽이 훨씬 더 나아요.

또한 이야기의 핵심 장치인 “누명 계획”—조혈간세포를 이식해 DNA를 바꿔치기하는 설정—은 실제 골수이식 사례에서도 확인된 적 있는 방식이라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추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전제하고 있는 경찰 수사의 허술함이 문제입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듯 혈액이 아닌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다른 유전자 샘플로 검사를 했더라면 바로 들통날 일이기 때문이죠. 물론 작품 속에서는 정치적 개입으로 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변호인 측에서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 사안이기에 서사의 긴장감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결말 역시 지나치게 급하게 흘러가는 해피엔딩입니다. 다카미를 다시 유죄로 만들려는 시도가 왜 실행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미요시 기요히코가 센노 마치코 살인범으로 체포된다는 전개는 작위성의 극치입니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체포가 이루어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고, 미요시 역시 혈액만 바뀌었을 뿐이라면 모발 샘플을 통해 얼마든지 DNA 감정이 가능했을 텐데, 이런 간단한 접근조차 하지 않은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단순한 해피엔딩보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활용한 보다 치밀한 반전이 있었더라면 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겁니다.

모리에 슌사쿠 변호사 캐릭터 자체도 아쉽습니다. 의뢰인의 결백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너무나 착한,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인물로 그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나 개성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리즈를 이끌어갈 중심 인물로서의 흡인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근미래 SF 판타지처럼 끌고 갈 요량이었다면 다른 복잡한 설명도 대충 요약하고 길이만이라도 줄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분량은 450여 페이지에 달하지만, "누명 계획"의 핵심 트릭인 조혈간세포 이식을 통한 DNA 바꿔치기라던가 "배심원 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니까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작가가 영향받은 유사 작품들을 소개하는데, 소개된 작품들이 훨씬 재미있어 보입니다.

2013/11/25

킹의 몸값 - 에드 맥베인 / 홍지로 : 별점 3.5점

킹의 몸값 - 8점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구두 회사의 중역 더글러스 킹의 집 거실에서 비밀 중역 회의가 한창이다. 중역들은 더글러스 킹을 포섭하여 회사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더글러스 킹에게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 나름대로 회사를 차지하기 위해 아무도 몰래 준비한 계획은 성공을 눈앞에 두는 듯하지만 뜻하지 않은 변수가 나타난다. 아이가 유괴된 것이다.

하지만 남의 아이다. 남의 아이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온 부를 허물어뜨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아이의 목숨을 외면하고 부를 유지할 것인가. 어릴 적 가난의 상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출세지향주의자가 된 그이지만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87분서 형사들이 유괴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일단 몸값을 주어야 아이의 목숨을 보장받는다. 선택은 오로지 더글러스 킹의 몫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고 난 후 비슷한 유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몇 년 뒤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인터넷 서점 제공 책 소개 인용>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장편.

유괴 소재 작품은 그동안 몇권 읽어보았습니다. 유괴 자체가 작전인 정통파 추리물을 비롯하여 피해자 시점, 유괴범 시점, 용의자 시점으로 그린 작품 등 종류도 다양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그간 읽었던 작품과 확실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를 위한 몸값 지불' 이 핵심 설정이라는 점에서요.

물론 그 아이가 생판 남이 아니고, 킹이라는 인물은 충분한 재력이 있기에 몸값을 턱하니 지불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값을 지불하면 그동안 이루어왔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극한 상황에 처한 시점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작중의 킹은 성공을 위해 걸림돌은 남김없이 쳐내버리는 인물로 묘사되기에 그는 몸값을 내지 못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수사하는 형사(스티브 카렐라) 등 주변 인물이 그에게 살인자와 같다는 맹비난을 퍼붓습니다(당연하지요). 심지어 아들을 유괴당한 운전기사는 간절히 애걸하며 무릎을 꿇기까지 하고요.
이 모든 과정이 설득력 넘치면서도, 숨쉴틈없이 이어지며 그 와중에도 킹과 회사가 관련된 위기 상황까지도 깨알같이 전개됩니다. 즉, 돈을 낼 수도 없고 안낼 수도 없는 개미지옥 딜레마에 빠진 상황을 정말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지요. 이 처절한 묘사 덕분에 읽는 내내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그를 뒷받침하는 박진감넘치는 전개는 역시나 거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킹 이야기와 정 반대의 다른 축으로 전개되는 유괴범인 사이, 에디, 캐시 트리오의 이야기도 나름 괜찮아서 재미를 더합니다. 리더이자 사악한 사이, 똘마니 에디, 박애주의자 캐시(?)로 이루어진 트리오는 전형적이고 진부하지만, 캐시가 사이를 견제하고 사이는 캐시를 강하게 억누르고 에디가 완충제 역할을 하는 식으로 절묘하게 조화되면서 긴장감을 불러오는 덕분입니다. 캐시를 초반부터 잘 묘사한 덕에 사건이 해결되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높아졌고요. 또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에디의 라디오 관련 지식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작전을 벌인다는 점, 특히 마지막 몸값 확보 작전에 써먹는 아이디어는 제법 그럴싸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이 작품이 87분서 시리즈일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형사들은 하는게 하나도 없는 탓이에요. 감식과의 활약이 일부 그려지는 정도이며, 오히려 시리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브 카렐라는 앞서 설명했던대로 몸값을 내지 않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는 등, 본인의 위치를 망각한 주제넘은 행동만 일삼습니다. 킹도 분명 피해자인데 수사관이 하라는 수사는 하지 않고 누구를 비난한다는 걸까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징계감으로 보여요. 게다가 몸값을 전달하는 차량에 동승했는데도 불구하고, 결말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킹이 언제나처럼 '직접 나서서' 유괴범을 때려잡는다니 끝까지 하는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작품만 놓고 보면, 말만 많고 활약은 없는 떠벌이 찌질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억지스럽게 87분서원들의 이야기를 넣고 늘려서 시리즈의 하나로 만들 바에야, 차라리 하나의 다른 작품이 되는게 낫지 싶습니다. 아이디어가 아까워요.

결말도 좀 별로였습니다. 사이의 총질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킹이 그를 때려잡는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의 작위적인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디와 캐시가 탈출을 위한 차를 어디서 구했는지, 사이가 돈을 받은 뒤 돌아올 것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애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허술하게 느껴졌고요. 개인적으로는 비열한 배신자 피터 캐머런을 킹이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알려주는 후일담이 없는게 가장 섭섭했네요. 이런 녀석을 짓밟아버리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안일한 해피엔딩이라도 충분히 참아줄 수 있었는데...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단점이 명확하다고 평하긴 했으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87분서의 활약을 없애고(이게 마이너스 1점), 심리묘사 중심으로 마지막을 깔끔하게 처리했더라면 별점 5점도 줄 수 있었는데 좀 아쉽네요. 그래도 장점이 워낙 탁월하고 읽는 재미도 확실한 수작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가 쓴대로 단점을 최소화하여 킹의 입장 중심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전개했다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천국과 지옥》을 구해봐야겠군요.

2016/04/03

세인트 메리의 리본 - 이나미 이쓰라 / 신정원 : 별점 2.5점

세인트 메리의 리본 - 6점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손안의책

이나미 이쓰라의 단편집으로 표제작 외 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손안의 책과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인 커뮤니티인 하우미의 콜라보레이션 기획물인 '하우미 컬렉션'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하우미에서 기획을 담당했다기에 하우미 회원으로 안 읽을 수가 없더군요. 아니, 외려 읽는 게 늦었다 싶네요. 

작품들 수준은 편차가 있지만 재미있는 편입니다. 주인공들이 모두 '진짜 사나이'들인, 묵직한 남자 소설이라는 기존에 읽어왔던 일본 추리물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장점도 명확하고요. 남자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작품들은 많았지만 보통은 남자의 탈을 쓴 폭력 성향 가득한 마초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작품들 속 남자들은 배려할 줄 알고 심지가 굳은 진짜 사나이들이거든요. 그들에 대한 묘사 역시 정말 매력적입니다. 작가가 이런 남자를 그리고 싶었다는 게 문장 하나하나에서 느껴질 정도에요.

이렇게 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구나! 싶은 부분은 또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 장면, 상황에 집중한다는 것으로 "모닥불"과 "종착역"이라는 작품이 그러합니다. 어떤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핵심 장면만 뽑아내서 작품을 쓴다는 발상은 정말 기발하네요. 단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 긴 이야기의 일부만 읽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읽고나니, 하우미 컬렉션이라는 기획물 의도에 적합한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추리물'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딱 하나밖에 없는 탓입니다. 사실 "세인트 메리의 리본" 역시 주인공이 탐정일 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고요.

그래도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니까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모닥불"

남의 여자와 도망치던 남자는 여자가 죽은 후에도 계속 쫓기다가 한 노인의 오두막까지 오게 된다...

도주하는 남자가 주인공이지만 핵심은 노인입니다. 개의 행동과 밭을 밟지 않으려는 남자의 행동을 보고 그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하는 장면에서는 깊은 식견을, 남자를 쫓는 조직원들을 한방에 제압하는 장면에서는 고수의 풍모와 함께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다 주거든요. 짧지만 화끈한 액션에 더해 총에 대한 묘사도 아주 탁월했어요. 주머니에서 방아쇠를 당길 셈이라면 리볼버를 써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단점은 큽니다. 남자가 도주하게 된 자세한 사정이라던가, 이후 남자가 어떻게 되고 노인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무대가 어디인지, 누가 선인지 악인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도 몇몇 장면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묵직한 남자 소설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하나미가와의 요새"

지바의 알려지지 않은 강 주변에서 우연히 전쟁 당시의 토치카를 발견한 사진작가 마쓰무라는 토치카에 머무는 포 할머니와 하라다와 만난 후, 시공을 초월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작가 마쓰무라가 전쟁 당시 극적인 비밀 계획을 목격한다는 일종의 타임 슬립물입니다.

패망한 일본군 수뇌부가 옮기던 재물을 빼돌리려는 하라다 조장의 작전과 맞물려 진행되는, 동물원 동물 탈주 계획이 핵심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이 작품에서 탈주 계획은 거의 언급만 되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증기 기관차의 질주와 질주하는 열차 주변에서 벌어지는 활극에 집중하거든요. 이 부분의 묘사는 정말이지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그러나 단점은 전작과 동일합니다. 전작보다야 이야기로의 완결성은 있기는 하지만 타임 슬립의 이유가 무엇인지, 포 할머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빼돌린 재물과 탈주한 동물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라다 조장은 무사한지 등 상세한 설정은 뭐 하나 설명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솔직히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죠. 조금 더 길게 쓰더라도 떡밥은 모두 회수하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보리밭 미션"

영국 뉴베리에 있는 농장주의 남편인 제임스는 B-17F 폭격기 진 할로호의 기장이기도 했다. 목숨을 건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볼 터렛의 입구가 고장나 사수 제프 가르시아가 갇혔다. 착륙 직전 바퀴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동체 착륙 시 제프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제임스는 폭격기 기수를 농장으로 돌렸다. 그리고 농장 가운데 수로 '마시의 리본'에 기체를 포개어 볼 터렛을 으스러뜨리지 않고 착륙하려 하는데...

"파일럿이 되고 싶다면, 되려무나. 남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야." - 제임스. 아들 리처드가 농장주가 아니라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하자 하는 말.

2차대전의 독일 본토 폭격전을 그린 밀리터리 항공물입니다. 앞부분 제임스와 리처드 부자가 농장에서 보내는 목가적인 그림과 폭격에 관련된 화약 냄새 물씬나는 화끈한 묘사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지요.

매력 포인트는 사고뭉치 제프를 구하기 위해 승무원 모두가 목숨을 거는 "전우애", 즉 "싸나이 의리"가 아주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겁니다. 이거야말로 밀리터리물의 로망이죠. 결말도 해피엔딩이고요.
2차대전, 항공물, 목숨을 건 작전, 전우애와 해피엔딩이라는 점에서는 오래전 영화 "멤피스벨"이 떠오르는데, 좀 뻔하기는 하지만 전 이런 이야기 아주 좋아합니다.

멋진 드라마에 더해 수록작 중 유이한, 이야기의 완결성이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별점을 더 얹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종착역"

도쿄역 아카보(철도 역내에서 승객의 화물 등을 대합실이나 차량 같은 데에 운반하는 사람)의 우두머리인 라이조는 고향 산림에 펜션과 양로원을 짓겠다는 꿈이 있다. 그러나 억 단위의 돈이 필요한 현실 앞에 좌절하고 있던 중, 야쿠자가 운반하는 현금의 존재를 우연찮게 알게되고 그 돈을 몰래 빼돌리는데...

도쿄역에 대한 세밀한 묘사,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사나이 라이조에 대한 묘사 등에서 작가의 글 솜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의 디테일 외에 라이조가 계획에 성공했는지, 야쿠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등이 설명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입니다. 본격적인 장편이라면 첫머리에 불과한 이야기에요. 이러한 점에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세인트 메리의 리본"

노세 지역의 땅 3만 5천 평을 소유한 류몬 다쿠. 그는 맥주를 좋아하는 애견 조와 함께 잃어버린 사냥개를 찾는 것이 주업인 사냥개 탐정이다. 그런 그에게 이치쿠라 가문의 외동딸이 잃어버린 '맹도견'을 찾는 의뢰가 들어오는데...

표제작. 이 작품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죠. 1993년 일본모험소설협회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고 1994년 '고노미스'에서 3위를 차지한 작품이거든요.

하지만 탐정이 나올 뿐,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유사 설정의 작품(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탐정으로 등장하는)"트랙커 토우마"라는 추리 만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보다도 추리적으로 별로에요. "트랙커 토우마"는 정말로 알려지지 못한 작품이라 안 읽어보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이보다 못하다면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사건 해결 후 계화가 경위를 듣고 싶어하지만 류몬 다쿠가 거절하는 장면의 묘사, '나는 "기업 비밀입니다"라고만 대답했다. 자랑할 만큼 대단한 추리를 한 것도 아니었고, 모험도 없었을 따름이다.'라는 말 그대로일 정도거든요.
작 중에서 류몬 다쿠가 하는 일이라곤 운 좋게 사건 현장 거의 대부분이 찍힌 비디오에서 수상한 트럭을 발견한 뒤, 트럭을 쫓아 집을 알아내고 개에게 냄새를 확인시키는 게 전부입니다. 다른 탐정 일 역시 마찬가지, 개 '조'의 후각에 의존하거나 친구로부터 들은 정보로 잠복하여 확인한다 밖에는 없어요.

물론 이런 수사가 현실적인 탐정의 수사 방법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쓰려면 억지스럽게 하드보일드 탐정을 엮지는 말았어야 해요. 애초에 류몬 다쿠는 거액의 재산가이기 때문에 사건에 목숨을 걸고 일희일비하는 하드보일드 탐정하고는 어울리지도 않고요. 그래서인지 조직 폭력배와 얽히는 전개로 끌고가는데 이 역시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류몬의 땅을 노리는 센추리 흥업과 하나비시 구미의 수작질은 CCTV 설치로 충분히 막을 수 있고, 광역 폭력단 효도구미의 김계화와 엮이는 건 완전 억지였던 탓입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메리를 하나에게 선물한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로 편의적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수임료보다 비싼 개를 턱하니 선물할 정도의 재산가가 하드보일드 탐정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낭만적인 자선사업가 산사나이이죠. "캔디캔디"의 윌리엄 아저씨와 다를 게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냥개 탐정이라는 직업과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모습만큼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류몬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 모두 멋진 사나이를 표방해서 마음에 듭니다. 억지로 하드보일드 탐정물로 엮은게 문제이지요. 그냥 산사나이의 인간 드라마로 그리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06/03/20

살파랑 (殺破狼 SPL, 2005)) - 엽위신 : 별점 2.5점


홍콩 밤거리의 제왕 왕보 (홍금보)와 숙명의 대결을 펼치는 경찰 팀장 진장관 (임달화)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왕보에 의해 팀원이 살해 당하자 남은 모든 것을 걸고 팀원들과 같이 왕보를 검거하기 위해 나선다. 실제 살인을 저지른 용의자를 죽이기 까지 하며 증거를 조작하려는 진장관과 팀원들, 새로 팀에 합류한 마장관 (견자단)은 그들을 막으려 하지만 진장관의 논리에 지고 만다.
하지만 왕보는 결국 풀려나게 되고 진장관의 양녀를 돌보기 위해 왕보의 돈을 몰래 훔쳐왔던 팀원들은 결국 왕보의 부하에 의해 전부 살해 되고 진장관과 마장관은 왕보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간만에 본 홍콩 영화입니다. 간략한 스토리만 보면 느와르적인 분위기는 물씬 나지만, 이상하게 편집이 되어 있어서 호흡이 좀 묘하더군요. 나름 뭔가 있어보이게 만들어 놓은 스토리가 결국 뻔한 이야기였다라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홍콩 특유의 과장된 묘사가 넘쳐서 이야기 진행 자체를 즐기기는 조금 어려웠습니다. 경찰이나 조직이나 서로를 잡기 위한 싸움과 암투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이미 "무간도"에서 보여줬던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둘다 악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경찰의 폭력을 너무 과장되게, 또한 "형제애"로 포장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전혀 공감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폭력 자체를 부정하던 견자단이 너무 쉽게 "형제애"에 포섭되는 부분은 완전 설득력 제로였고, 신파의 요소를 많이 도입한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 간만에 제대로 보는 액션은 최고 수준입니다. 특히나 제가 좋아하는 견자단의 액션을 제대로 즐길 수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들었었죠. 간만에 보는 임달화 형님의 모습도 반가왔고 홍금보 형님의 느물느물한 악역연기도 제대로 였습니다. 무엇보다 최대의 수확은 킬러로 나오는 오경! 이 친구 예전에 귀여운 이미지로 태극권 2에 나왔을 때 정도만 기억이 나는데 잔인한 미소와 빠른 몸놀림의 킬러 액션 연기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어서 감탄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있는 견자단과 오경, 견자단과 홍금보의 액션씬은 꼭 한번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견자단과 오경의 액션씬은 대단한 스피드와 화려함으로 가득찬 액션이며 홍금보와 견자단의 액션씬은 파워와 기술이 충돌하는 우직한 액션인데 총 무술감독을 맡은 견자단 따꺼의 모든 것을 함축한 명장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액션 자체도 그동안 보아온 단순한 쿵푸 액션에서 벗어나 꺾기나 관절기 같은 실전 무술이 많이 도입되고 있어서 독특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으며 뭐니뭐니 해도 아직 전성기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견자단 따꺼의 화려한 몸놀림은 정말이지 감동이더군요. 간만에 보는 견자단 따꺼의 진정한 무영각이란..아흑!

여튼, 앞부분의 스토리 전개는 무시하고서라도 액션 하나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엔딩이 두가지 버젼이라는데 제가 본 것은 나름 해피엔딩 버젼입니다. 자료를 좀 조사해보니 배드엔딩인 버젼이 오리지널인것 같던데 이쪽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견자단 따꺼가 제발 다음에는 좀 제대로 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 좀 나와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다시금 생기네요...

2009/10/29

아웃 1,2 - 기리노 나쓰오 : 별점 4점

아웃 1 - 8점
기리노 나쓰오 지음/황금가지

도시락공장에서 야간근무를 하는 4명의 여인 마사코와 요시에, 야요이, 쿠니코는 서로 팀을 짜서 일하는 관계. 그러던 어느날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야요이가 마사코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정통 추리물도 아니고 특별한 반전도 없는 만큼 대단하진 않지만 염두해 주세요.

정말 끔찍한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막장의 심리를 이보다 잘 표현한 소설이 있을까요? 읽는 내내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뒷맛이 개운치 못한 탓에 더더욱 끔찍한게 아니었나 싶네요. 기리노 나쓰오 작품은 세편 ("얼굴에 흩날리는 비""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부드러운 볼)""암보스 문도스") 만 접해보았지만 사람 마음을 후벼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습니다.

끔찍하고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들자면 첫번째로는 등장 인물들의 도를 넘는 이기주의와 자기 합리화를 들고 싶네요.
자신이 자초한 회사내 왕따(?)로 인해 회사도 잘리고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이 모두에게 소외된 주인공 마사코는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절대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꾸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바람나고 도박에 빠진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야요이 역시 남편과 어떻게 잘해보려는 의지는 작품내에서 전혀 보이지 않고요. 시어머니와 딸에 치여 사는 요시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터무니없는 과소비로 빚더미에 눌려사는 쿠니코는 뭐 말할 필요도 없죠.
즉 본인 스스로들이 세상의 모든 고민과 불행을 지고 사는 것 처럼 묘사는 되지만 원인 자체부터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대부분 망각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거나 개선하려는 의지는 눈꼽만큼도, 1mg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야말로 극단적 이기주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야요이와 마사코는 이혼과 같은 현실적 방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요시에는 무너진 가정을 홀로 지탱할 뿐 딸에 대해서는 전혀라고 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거의 "짐"으로 여겨질 만큼요. 엄청난 민폐 캐릭터지만 상황을 현실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는 쿠니코가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였어요.

두번째 이유는 지옥행 급행열차에 대한 묘사를 들고 싶습니다. 어려운 상황만 당장 벗어나려 발버둥치려는 현실이 결국 지옥으로 향하는 전개는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보아왔지만 이 작품의 처절함은 수준이 다르더군요. 처음에는 어쨌건 "선의"였을 수 있는 친구 남편 시체를 토막내어 유기하는 행위가 우정의 파탄과 더불어 협박, 또다른 시체 유기와 같은 단계를 거쳐 결국 살인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과정이 디테일하면서도 너무나 적나라하거든요. 때문에 중반에 등장하는 "시체처리 부업" 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깜찍하고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절대 절망 엔딩입니다. 알거지가 된 야요이는 그래도 나름 미모가 있으니 조금 나은 편이고 마지막에 사다케에 의해 만신창이가 될 뿐 아니라 결국 모든것을 잃고 그야말로 "홀로" 남겨지는 마사코의 결말도 비참한 수준이나 그래도 그녀에게는 현실에서의 탈출과 거금이라는 보상이 있는 반면 친구들에 의해 토막나 버려지는 쿠니코와 가족에게 버림받고 마지막에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결국 뭘 위해서 시체 토막까지 했는지 알 수 없게 된 요시에의 엔딩은 정말이지 죽을때까지 맞고 한대 더 맞는 기분이 들 정도로 씁쓸했습니다.

어쨌건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너무나 인상적이고 재미있었으며 읽는 내내 손에서 떼기 힘들정도의 박력과 흡입력, 거기에 무엇보다도 대단한 심리묘사가 어우러진 대단한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차피 고전적인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것은 아닌 만큼 만족스러운 독서였어요. 때문에 별점은 4점. 하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에 다시 읽게될 것 같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디테일한 심리묘사와 일상속의 지옥도, 남자 캐릭터들은 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다케를 빼면 하나같이 머저리같은 인물로 그려진 등의 점이 미네트 월터스 (그 중에서도 "냉동창고") 작품과 비슷하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미네트 월터스 작품은 나름 해피엔딩들이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만....

2022/06/10

버드 박스 - 조시 맬러먼 / 이경아 : 별점 2점

버드 박스 - 4점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검은숲

4년 전, 갑자기 나타난 크리쳐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발광하여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했다. 생존을 위해 창문을 가리고 숨어 살던 임산부 멜로리는 언니 섀넌이 발광하여 자살해버린 뒤, 위험을 무릅쓰고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조지의 집으로 향했다. 조지는 죽었지만 리더 톰의 원만한 성품 덕분에 멜로리, 그리고 그 집에 있던 펠릭스, 줄스, 셰릴, 올림피아는 몇 개월 간 짧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멜로리의 출산일에 그녀와 갓난 아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비관주의자 돈이 다른 생존자 게리를 만난 뒤 세뇌되어, 집 창문을 가렸던 것들을 모두 치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년 후 멜로리는 4살된 두 아이와 함께 거주지를 떠났다. 4년 전, 톰의 전화로 연결된 생존자 '릭'의 거처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험을 위해 그녀는 두 아이의 청각을 극도로 강화시키는 훈련을 해 왔다...

신예 작가의 SF 크리쳐물입니다. 

무언가를 본 뒤 발광한다는 소재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닥친 위험과 공포, 그리고 극복 방법을 실감나게 그려낸 묘사는 좋습니다. 폐쇄 공간에서 빚어지는 여러 긴장감도 잘 살아있고요. 단순히 '물을 뜨러 가는 행위', '배설물을 버리러 가는 행위'에서 긴장감을 빚어내는 솜씨에는 감탄했습니다.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집은 수력 발전으로 전기가 공급되며, 마당에 우물이 있고 일단은 몇 개월 버틸만한 식량을 갖추었다는 식으로 생존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준 것, 그리고 "크리쳐를 보면 발광하기 때문에 집의 창문까지 모두 닫은 폐쇄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설정을 "다른 매체, 예를 들어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크리쳐를 보아도 발광한다.", "동물들도 크리쳐를 보면 발광한다."는 식으로 디테일을 보강한 것도 마음에 들어요. 비디오 카메라는 정말 생각도 못했었네요.

하지만 이외에는 볼 만한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소재부터가 너무 진부합니다. 기묘한 상황 탓에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특정 현상을 바라본 사람들이 모두 실명한다는 설정은 "걷는 식물 트리피드"에 등장했었지요. 운 좋게 재난을 피한 생존자들이 최대한 조심하면서 살지만 위기가 닥친다는 전개 역시 크리쳐물 대부분에서 뻔하게 반복되어 왔던 것이고요. 좀비물 거의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잖아요? 

물론 보기만 해도 사람, 동물을 발광시키는 크리쳐의 특수한 능력만큼은 독특한 요소였고, 이를 작품 안에서 잘 부각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쳐에 대해 어떤 과학적인 근거나 설명은 없이 주인공 멜로리의 시점에서의 경험만 나열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탓에 뒤로 가면 갈 수록 식상해지기만 할 뿐이니까요. 뭔가 살아남거나, 해결책은 없이 그냥 버티고 살아가는게 전부이니까요. 톰이 주도해서 활로를 모색하는 전개가 더 등장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개 몇 마리를 데려오는게 전부라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또 전개의 클라이막스를 차지하는 돈의 폭주에서, 게리가 크리쳐를 보았음에도 어떻게 멀쩡했는지 설명되지 않는건 정말 답답했습니다. 설명이 부족해도 정도껏 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멜로리와 올림피아가 임신했는데, 마침 그 둘이 출산할 때 돈이 폭주해서 모두가 죽는다는 작위적인 설정도 별로였고, 마지막에 멜로리가 안식을 찾게되는 피난처가 맹인 '릭'이 이끄는 맹인들 학교였다는 약간의 반전 역시 만족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읽으면서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사느니 차라리 스스로 맹인이 되는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은 엔딩이니까요. 의외성이 전무한 셈입니다.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는 점 만큼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반전 요소를 갖추려면 개인적으로는 릭이 멜로리와 아이들 눈을 멀게 만든다는 결말이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앞서 아이들에게 이런저런걸 보게 해 주고 싶다는 바람과 대조되면서 더 큰 울림을 가져다 즐 수 있었겠지요. 솔직히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한 일상계 크리쳐물 분위기는 괜찮았지만 진부한 소재를 뻔한 전개로 풀어냈고, 결말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한 모양인데, 영화에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하네요.

2003/12/31

내 집으로 와요 - 하라 히데노리

하라 히데노리는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 "내 집으로 와요"는 하라 히데노리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한편인데 국내에서는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더군요.

우연히 하룻밤을 같이 지낸 것을 계기로 연인 사이가 되는 연상녀 아야와 연하남 미키오 커플.

아야는 피아노 교사 겸 밤에는 호텔에서 연주 알바를 하는 피아니스트 지망생이고 미키오는 대학 사진 동아리 활동에 열심인 대학생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서 동거를 시작하는 두사람, 처음에는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점점 아야가 피아니스트로 성공해 가자 열등감을 느끼는 미키오가 사진작업에서도 벽에 부딪히고, 자극을 받아 좌절하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지만, 나름의 노력으로 결국 미키오는 카메라 맨으로 성공하게 되지요. 그런 과정에서 결국 이별이 찾아 옵니다...
이 둘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과 자질구레한 줄다리기에서 서로의 미래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과 결국 서로의 길을 가며 헤어지는 이야기가 7권 동안 보여집니다.

뭐.. 주인공 시오무라 미키오의 우유부단하면서 의지할 곳 없으면 정신적으로 뻗어버리는 성격에 대한 묘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별다른 갈등이나 이야기 구조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착실하게 카메라 맨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디테일이 굉장히 좋습니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전형적인 누나 타입인 아야씨에 대한 묘사는 별로군요^^ 피아니스트로 성장해 나가는 부분도 별로고, 카즈라는 옛날 애인과의 관계 부분은 너무 뻔합니다.

그래도 하라 히데노리는 이 작품에서도 별다른 특징이나 개성없는 캐릭터들의 미묘한 심리를 포착해서 표현해 내는데 탁월한 재주를 보여줍니다. 연인의 공허한 시선에서 이별을 예감한다던가 하는 디테일한 설정과, 반복되는 화면에서 울리는 혼잣말 같은 묘사로 가슴이 시릴 정도의 느낌을 전해 주네요.

"... 해보신적이 있나요?"로 붙여진 부제들과, 언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새롭게 출발하는 아야와 미키오의 빈 방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엔딩도 인상적입니다. 그 방에서의 추억이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기네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보다 만화에서 더 미묘하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가인 하라 히데노리, 상당히 다작 작가인 만큼 작품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탁월한 작품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었으니 인터넷으로 구해 보시는게 빠를 것 같네요. 추천합니다.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자주 들러주세요^^

2005/07/07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 레너드 위벌리 / 박중서 : 별점 4점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뜨인돌

유럽에 위치한 가로 5Km, 세로 8Km의 초미니 독립국 그랜드펜윅. 이 공국은 일찌기 그 주권을 인정받은 독립국가로 와인 수출로 주 수입원을 충당해 왔으나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와인에 물을 섞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쟁에 휩싸였다. 선거결과 희석당과 반희석당은 동수의 의원이 선출되어 논쟁은 답보상태에 빠졌고, 지도자 글로리아나 12세 대공녀는 난국 타개를 위해 강대국 미국에 선전포고 할 것을 제안받았다. 요지는, 미국은 패전국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 주므로 월요일에 선전포고를 해서 목요일쯤 점령당하고, 금요일에 그 차관으로 부흥시키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랜드펜윅의 선전포고는 장난으로 치부되었고, 결국 그랜드팬윅은 미국에 공격부대를 보냈는데 마침 뉴욕은 그때 가상 공습을 대비한 민방위 훈련으로 텅텅 빈 상태여서 그랜드팬윅의 사령관 털리 배스컴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당대 최고위력의 폭탄 Q폭탄과 개발자 코킨츠 박사를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그리고는 Q폭탄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랜드팬윅은 세계 정점의 강대국이 되는데....

국내에 50여년만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 성인들을 위한 풍자 소설입니다.

일단 무척 재미있습니다! 그랜드팬윅 공국의 설정이 치밀하고 유머러스해서 그 묘사만 따라가도 즐겁게 읽을 수 있거든요. 선전포고 장면에서부터 읽는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20세기에 아직 장궁과 갑옷으로 무장한 24명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미국 정벌기라는 아이디어는 정말 높이 살 만 합니다. 심지어 전투를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하며 귀환할때에는 포로와 노획물, 거기에 희생자까지 더한 완벽한 모습까지 보여주는 부분은 정말로 감탄스러웠어요. 미국과 소련, 영국등 강대국의 행위에 대한 통렬한 풍자 역시 유머로 포장해서 읽는 사람을 너무나 즐겁게 해 줍니다. 

아울러 이상적인 국가로 그려진 그랜드팬윅의 모습이야말로 성인들을 위한 환타지에 걸맞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말해 즐겁고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디테일도 잘 살아있는, 그야말로 성인들을 위한 동화랄까요? 별점은 4점입니다. 미국에 대한 묘사가 완전한 비판이나 풍자보다는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쉬우며, 냉전시대에 발표된 풍자소설답게 내용은 지금 읽기에는 약간 낡은 감도 있고 엔딩이 너무 이상적인 해피엔딩이라 약간 허무하다는 것은 아쉽지만 충분히 납득할 만 한 수준입니다. 최소한 그랜드펜윅 공국만큼은 행복해 질 권리가 있거든요. 미국을 이긴 나라이니까!

덧 1 : 약간 스탠리 큐브릭의 블랙 코미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연상될 정도이니만큼 영화화하기 무척 좋은 소재라 생각되며 당연히 영화화가 되었다지만 저는 아쉽게도 감상하지 못했네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꼭 보고 싶습니다.

덧 2 : 원제대로 "생쥐, 울부짖다 (Mouse that roared)"라고 출간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데 너무 설명적인 번역 제목이 붙어서 약간 아쉽긴 하네요.

2012/01/23

이니그마 - 로버트 해리스 / 조영학 : 별점 2.5점

이니그마 - 6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톰 제리코는 선배 앨런 튜링의 소개로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 부서에 배치된 후, 독일군 기기 중 가장 어려운, 4중 회전자를 채택한 이니그마 "샤크"를 해독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건강을 해친 톰은 요양을 떠났지만, 고작 3주 후 샤크의 체계가 바뀌어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와 동시에 옛 연인 클레어의 행방을 뒤쫓다가, 그녀의 방에서 훔쳐낸 암호문을 발견하는데...

역시나 물만두님의 리뷰집을 읽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된 작품입니다. "그들의 조국"으로 데뷔한 로버트 해리스의 두 번째 작품으로, 45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첫 작품은 가상 역사물이었지만,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 블레츨리 파크를 무대로 한 팩션입니다.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와는 달리 디테일이 확실해서 좋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니그마와 블레츨리 파크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는데, 소설은 이니그마에 대한 고증과 암호를 풀어내는 과정이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거든요. 암호 해독에 관심이 있다면 자료 삼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해 줍니다. 실제 이니그마 해독 과정이 중심이라 독자가 암호 해독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성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또한,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 축인 '이니그마 해독'과 '클레어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 중에서 클레어 실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균형 있게 전개하는 것도 좋았어요. 거대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단서를 알아내야 하고, 그 단서가 되는 것이 수송 선단을 발견한 U보트의 통신 암호라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그로 인한 서스펜스 (명확한 시간 제한이 생기므로)를 영화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박진감 있게 서술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가 너무 길고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톰 제리코의 불안한 심리 묘사와 옛 연인 클레어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클레어에 대한 비중이 커진 탓에, 진짜 여주인공인 헤스터의 존재가 묻혀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제리코가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와 함께 클레어의 실종에 얽힌 진상과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는 전개는, 영화에서 초반에 간결하게 처리한 것처럼 소설에서도 요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밀도 있는 상세한 묘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부분은 장황한데 반해,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너무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이 있어 강약 조절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확실하게 정리하며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마치 연재 종료를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만화의 엔딩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한, 폴란드인 푸코프스키가 가족을 위해 카틴 숲 학살 관련 암호문을 몰래 해독하려 했다는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애초에 암호문 내용이 카틴 숲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스파이로서 해당 메시지를 중개했다고 설명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품 내에서 해당 암호문은 해독조차 시도되지 않았다고 묘사되며, 가장 뛰어난 암호 해독 전문가인 제리코조차도 해독이 기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어려운 암호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사실 위그램이 심어놓은 블레츨리 파크 감시용 스파이였다는 설정은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나름 반전 요소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꼭 필요하지는 않으며 퍼그에게 의도를 가지고 암호를 전해주었다는 점도 현실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애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퍼그의 배후를 찾기 위한 작전이었다면, 주객이 전도된 셈입니다. 이 암호 때문에 퍼그가 독일 쪽에 붙으려 한 것이라면, 차라리 단순한 미행이나 감시를 붙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U보트를 뒤쫓는 암호 해독 요원들의 시간 제한이 있는 작전과, 또 다른 음모가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서스펜스와 재미는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알리스테어 맥클린 스타일 (짧고 임팩트 있게)로 쓰였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 둘을 비교한다면 영화 쪽이 더 낫습니다. 일반 독자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해독 장면보다는, 클레어의 실종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거든요. 결말 또한 영화 쪽이 깔끔하고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 시종일관 을씨년스럽고 어두운 분위기의 원작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톰 제리코가 마지막 퍼그와의 추격전 이후 요양할 때 읽었다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목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13인의 만찬", "명탐정 파커 파인",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목사관 살인사건" 등, 작중 주인공이 읽는 책들이 제 취향과도 묘하게 어울려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14/10/21

엣지 오브 투모로우 (2014) - 더그 라이먼 : 별점 3점

가까운 미래, '미믹'이라 불리는 외계 종족의 침략으로 인류는 멸망 위기를 맞이했다. 인류는 이에 맞서 전 세계 군대가 연합한 연합방위군(United Defence Force, UDF)을 창설했다. 그러나 방위군은 정훈장교였던 육군 소령 빌 케이지(톰 크루즈 분)는 장군의 명령으로, 훈련이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전투에 투입되었다. 결국 미믹의 함정으로 인해 군대는 전멸하고 케이지 역시 전사했지만, 죽기 직전 자신이 죽인 미믹의 피를 뒤집어쓴 그는 작전 시작 직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출장 중 비행기에서 꽤 많은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며칠간은 영화 리뷰가 쭉 이어질 것 같네요. 첫 번째작품은 가장 먼저 본 "엣지 오브 투모로우"입니다.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 라이트노벨 "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SF 액션 블록버스터입니다. 동일한 삶을 반복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블랙홀"과도 유사  타임 루프물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사랑의 블랙홀"은 잠들거나 하루가 지나면 리셋되는 반면, 이 작품은 죽음에 의해 리셋되는 구조이고, 나름 과학적인 설명도 덧붙여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이렇게 삶이 리셋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더불어, 전투 장면의 육중함과 리얼함도 돋보입니다. 죽음을 반복하면서 점점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 덕분입니다.
절망적인 전투 외에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탐색해가는 과정의 짜임새도 좋아요. 여러가지 디테일들 덕분인데, 대표적인 예는 여주인공 리타와 함께 헬기가 있는 곳에 도착한 장면에서 "설탕은 세 개 넣지?"라는 대사를 통해 루프의 누적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실감케 만드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메가의 피를 뒤집어쓴 케이지가 더 과거의 시점으로 점프하여 여주인공과 다시 만나게 되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톰 크루즈의 상큼한 미소도 오랜만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오메가라는 존재는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고, 마지막 작전의 전개는 비약이 심했습니다. 오메가의 위치를 파악한 시점에서는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없었고, 리타가 오메가를 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오메가를 죽인 뒤 다시 리셋되었을 때,   이미 오메가가 죽은 세계가 펼쳐진다는 결말은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이전의 규칙대로라면 리셋은 되더라도 오메가가 죽은 시점이 유지되는 건 말이 안 되고, 만약 그렇게 바뀌었다면 케이지가 깨어나는 지점도 변경되어야 했겠지요.

이렇게 불만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웰메이드 SF 활극임은 분명합니다. 톰 크루즈라는 이름은 이제 톰 행크스나 브래드 피트처럼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된 것 같네요. 물론 가끔 실패는 하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9/28

소스 코드(2011) - 던칸 존스 : 별점 2.5점

시카고행 열차 안에서 콜터 스티븐스 대위는 "션 패트리스"라는 남자의 몸안에서 눈을 떴다. 8분 후 열차는 폭발했고, 콜터는 어둡고 비좁은 캡슐 속에서 깨어났다. 지상 통제관 굿윈과 프로젝트 책임자 러틀리지는 그가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통해 션의 뇌파 잔상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제한 시간 8분 이내에 열차 폭발의 범인을 8분 안에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시카고를 향한 후속 대형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다.

콜터는 수없이 폭발로 인한 죽음과 소스 코드를 통한 귀환을 반복하며, 범인 후보를 줄여나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2차 테러를 선제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8분이 지나도 콜터는 소스 코드를 통해 복귀하지 않고 "션 패트리스"의 육체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콜터는 새로 가지친 시간선에서 굿윈에게 메시지를 보내 소스 코드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평행한 현실 분기를 생성함을 알려주었다.

군에서 개발한 실험 기술을 통해 사망자의 마지막 8분으로 진입해 폭탄 테러범을 찾아낸다는 타임 루프, 시간 여행, 멀티버스 설정의 SF 스릴러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흥행했던 작품인데 넷플릭스를 통해 이제서야 감상했습니다. 

타임 루프·시간여행·멀티버스 장르물은 흔해 빠졌지만, 군사용 ‘소스 코드’라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마법, 초능력이 주류였던 타임 루프 방법을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군에서 개발한 기술로 테러를 막기 위해 이용한다는 발상도 그럴듯 했고요.
또 이를 통해 정의되는 8분이라는 시간 제한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실패를 반복해가며 정답을 찾아내는건 다른 타임 루프물과 동일하지만, 8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엄청난 제약으로 작용하여 긴박함을 더해주거든요. 영화라는 매체에 잘 어울렸던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은 과거를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결말부에서 제시되는 해피 엔딩도 여운을 남깁니다. 콜터가 ‘션 패트리스’의 몸으로 평행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는건 예상 가능했지만, 죽을 뻔 했던 사람들과 즐기는 스탠딩 개그 쇼와 굿윈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콜터의 신체는 '잔해'만 남아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는건 확실한 단점이고, 핵심 설정인 ‘8분’이라는 시간 제약도 논리적으로 어설픕니다. 설명에 따르면 8분이 지나면 션의 의식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8분 뒤엔 반드시 죽는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원 시간선에서 션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데스티네이션"과 동일한 운명론적 설정이라면 크리스티나 역시 예외일 수 없는데 그녀는 살아남는 시간선이 있어서 모순이 생깁니다.
결말에서 콜터의 정신이 션의 육체에 남는 설정도 이상합니다. 소스 코드는 ‘덧씌움’이 될 수 없습니다. 8분이라는 찰나 동안만 임시로 의식을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되니까요. 만약 영원한 덧씌움이라면, 사고로 죽은 뒤 콜터에게 의식이 돌아온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션 패트리스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를 기용했음에도 액션이 별볼일 없고,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기차와 콜터의 캡슐 안에서 이루어지는 등 스케일이 작은 점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32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 탓이겠지만요.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 뻔한 전개, 헐거운 설정 등의 단점은 있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