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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8

소스 코드(2011) - 던칸 존스 : 별점 2.5점

시카고행 열차 안에서 콜터 스티븐스 대위는 "션 패트리스"라는 남자의 몸안에서 눈을 떴다. 8분 후 열차는 폭발했고, 콜터는 어둡고 비좁은 캡슐 속에서 깨어났다. 지상 통제관 굿윈과 프로젝트 책임자 러틀리지는 그가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통해 션의 뇌파 잔상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제한 시간 8분 이내에 열차 폭발의 범인을 8분 안에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시카고를 향한 후속 대형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다.

콜터는 수없이 폭발로 인한 죽음과 소스 코드를 통한 귀환을 반복하며, 범인 후보를 줄여나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2차 테러를 선제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8분이 지나도 콜터는 소스 코드를 통해 복귀하지 않고 "션 패트리스"의 육체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콜터는 새로 가지친 시간선에서 굿윈에게 메시지를 보내 소스 코드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평행한 현실 분기를 생성함을 알려주었다.

군에서 개발한 실험 기술을 통해 사망자의 마지막 8분으로 진입해 폭탄 테러범을 찾아낸다는 타임 루프, 시간 여행, 멀티버스 설정의 SF 스릴러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흥행했던 작품인데 넷플릭스를 통해 이제서야 감상했습니다. 

타임 루프·시간여행·멀티버스 장르물은 흔해 빠졌지만, 군사용 ‘소스 코드’라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거나 마법, 초능력이 주류였던 타임 루프 방법을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군에서 개발한 기술로 테러를 막기 위해 이용한다는 발상도 그럴듯 했고요.
또 이를 통해 정의되는 8분이라는 시간 제한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실패를 반복해가며 정답을 찾아내는건 다른 타임 루프물과 동일하지만, 8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엄청난 제약으로 작용하여 긴박함을 더해주거든요. 영화라는 매체에 잘 어울렸던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짧은 시간은 과거를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결말부에서 제시되는 해피 엔딩도 여운을 남깁니다. 콜터가 ‘션 패트리스’의 몸으로 평행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는건 예상 가능했지만, 죽을 뻔 했던 사람들과 즐기는 스탠딩 개그 쇼와 굿윈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콜터의 신체는 '잔해'만 남아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는건 확실한 단점이고, 핵심 설정인 ‘8분’이라는 시간 제약도 논리적으로 어설픕니다. 설명에 따르면 8분이 지나면 션의 의식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8분 뒤엔 반드시 죽는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원 시간선에서 션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데스티네이션"과 동일한 운명론적 설정이라면 크리스티나 역시 예외일 수 없는데 그녀는 살아남는 시간선이 있어서 모순이 생깁니다.
결말에서 콜터의 정신이 션의 육체에 남는 설정도 이상합니다. 소스 코드는 ‘덧씌움’이 될 수 없습니다. 8분이라는 찰나 동안만 임시로 의식을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되니까요. 만약 영원한 덧씌움이라면, 사고로 죽은 뒤 콜터에게 의식이 돌아온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션 패트리스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를 기용했음에도 액션이 별볼일 없고,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기차와 콜터의 캡슐 안에서 이루어지는 등 스케일이 작은 점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32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 탓이겠지만요.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너무 뻔한 전개, 헐거운 설정 등의 단점은 있지만, 즐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14/07/14

일곱 번 죽은 남자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이하윤 : 별점 3점

일곱 번 죽은 남자 - 6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북로드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생 히사타로는 하루를 아홉 번 반복해서 겪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도도 아니고 원리도 모르지만. 히사타로는 그것을 "반복 함정"이라고 불렀다.

그런 히사타로는 할아버지 댁에서 열리는 신년회에 모든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히사타로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막내 이모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신년회에서 후계자가 정해질 예정이었다. 신년회 중 히사타로는 모처럼 술을 많이 마셔서 집에 가는 차를 탔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아침 그는 다시 할아버지 집에서 눈을 떴다. "반복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어제와 다르게 할아버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히사타로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홉 번의 반복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작전을 짜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할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사타로는 과연 할아버지의 살해를 막을 수 있을까?

그간 격조했습니다. 장기간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정말 오랜만에 리뷰를 올립니다. 이 작품은 "닷쿠 & 타카치 시리즈"로 접해보았던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으로,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타임 루프를 다룬 콘텐츠는 많습니다. "도라에몽"에서는 숱하게 반복된 소재이기도 하고, 작가 본인도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명확하게 정해진 규칙 안에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전개를 갖췄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해당 규칙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1. 반복 함정은 아홉 번 반복되고 다음 날로 이어진다.
  2.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도 "오리지널 주"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결국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규칙을 통해 히사타로가 할아버지의 살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작품 내에서 설정되어 있는 후계자 선정과 맞물려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특히 하루 일상의 조그만 변화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과율에 대한 정교한 묘사가 발군입니다. 예를 들면 루나 누나의 귀걸이의 존재 같은 것이요.

추리적으로도 즐길 거리가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집을 방문한 가족들에게 이상한 의상을 강요하는 이유, 아침에 빨간색 색종이를 찾은 이유, 범인들이 호접란 화분을 흉기로 쓴 이유, 할아버지의 일기 등의 디테일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반복 함정"의 맹점이자 오류를 해결하는 마지막 부분이 압권입니다. 히사타로가 죽었을 가능성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그 외에도 작품이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한 묘사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아무래도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탓입니다. 히사타로가 범인이 누군지를 알고 범행을 막기 위해 노력해도, 원래의 결과로 회귀하기 위하여 또 다른 인물이 범행을 저지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작중 히사타로가 결국 누군가 다른 인물이 범행을 저지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 늦는게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무의미한 노력을 너무 반복했달까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반복 함정" 때문에 히사타로가 30세 정도의 정신연령을 갖췄다고 한들 사람들이 인식하기로는 고등학교 1학년이라서, 한참 연상인 도모리 씨가 사랑에 빠진다는게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도모리 씨의 감정과 고백이 반복의 와중에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한 만큼, 무난하게 히사타로를 대학생 정도로 설정하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이색적인 타임 루프 SF로 읽히는 재미 하나만큼은 충분한 가작입니다. "타임리프"와 비스무레하지만 나름 차별화되는 점도 많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되네요.

2023/11/25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스튜어트 터튼 / 최필원 : 별점 2점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4점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년 전, 장남 토마스가 관리인 카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하드캐슬가의 저택 블랙히스 하우스에서 그날의 손님들을 고스란히 다시 불러모은 파티가 열렸다.
손님 중 한 명인 의사 서배스천 밸은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숲에서 깨어나 애나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걸 목격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앞에 흑사병 의사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나타나 여러가지 경고를 날렸다. 이런 저런 경고와 조언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서배스천은 누군가 자기에게 죽은 토끼를 선물한걸 발견하고 실신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고난 뒤, '나'는 집사 콜린스로 깨어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흑사병 의사는 '나' 에이든 비숍에게 그는 모두 여덟 명의 다른 사람으로 하루를 반복하게 되며, 무도회에서 살해당하는 하드캐슬의 장녀 에블린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이 루프 속에 다른 두 명의 경쟁자가 있다는 말과 함께.
에이든 비숍은 하룻동안 8명 - 마약 판매상이기도 한 의사 서배스천 벨, 집사 스탠윈, 늙고 뚱뚱한 레이븐코트, 강간범 더비, 에드워드 댄스, 순경 짐 래시턴, 도널드 데이비스, 화가 그레고리 골드 - 의 몸을 오가며, 에블린 하드캐슬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본인과 애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미래는 경고가 아니야, 미래는 약속이라고.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가 결코 깨버릴 수 없어. 바로 그게 우리가 갇힌 이 덫의 본성이라고."

어딘가에서 추천하는 글을 읽고 알게 된 영국 대장편 판타지 미스터리. 무슨 리스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하루를 반복하는 루프물이라는 아이디어는 특별한건 아닙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제목처럼 계속 반복해 살해당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내용마저도 비슷하지요. 루프보다는 시간 여행에 가깝지만, 과거를 반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세계", "리피트", "나만이 없는 거리", "타임 리프"등 수도 없이 많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설정에 딱 한 가지 차이를 두어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한 명이 하루를 반복하는게 아니라,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입니다. 

루프에 갖힌걸 모른 채 에블린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이 드러나는 도입부는 신선하고 흥미로왔습니다. 사건 자체는 심플합니다. 에블린 하드캐슬이 자살한건 부모가 돈 때문에 레이븐코트 경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걸 막으려고 동생 마이클 등의 도움을 받아 벌인 연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에블린으로 알고있던건 사기꾼 펄리시티 매덕스였습니다. 오랫만에 유럽에서 돌아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에블린은 하녀 마들렌으로 변장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마이클은 연극이라 믿고 있었던 펄리시티 매덕스를 살해해서 자살로 보이는 살인을 완성했습니다.
동기는 19년 전 토마스 살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토마스를 죽였던건 에블린이었습니다. 토마스가 에블린과 마굿간지기 파커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하드캐슬과 불륜 관계로 에블린의 진짜 부친이었던 카버는 딸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누명을 쓰고 교수대로 향했죠. 그러나 레이디 하드캐슬이 에블린이 진범이라는걸 알아채서 입막음 댓가로 가문을 위해 에블린에게 레이븐코트와 억지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에블린은 부모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자살한걸로 위장하려 했던 겁니다.

에블린의 자살이 연극으로 위장한 살인이었다는걸 증명하는 단서도 제대로 제공됩니다. 대표적인게 "왜 권총 두 정을 모두 가져갔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마이클이 나머지 한 정으로 죽은 척하던 에블린 - 으로 변장한 펄리시티 매덕스 - 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그 외 발견된 신호용 피스톨 (총 소리만 내기 위함), 피를 담아둔 병도 자살 연극에 사용되었다는 추리로 잘 이어집니다.
루프를 오가는 중간중간마다 '체스말'같은 연결고리도 충실히 제공되고 있어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전해주고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기는 한데, 이야기를 괜히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해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각 인물별로 시간대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에이든 비숍이 얻는 정보도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굉장히 복잡한 구성과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정보와 단서는 전개 후반인 순경 짐 래시턴 시점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앞서 다른 사람들 - "호스트"라고 불리우는 - 의 정보들은 추리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8명의 '호스트' 들의 설정들도 불필요하게 장황합니다. 서배스천이 마약을 몰래 공급해왔다던가, 레이븐코트가 식탐이 엄청난 고도비만이었다던가, 더비가 성범죄자라던가하는건 에블린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협박범 스탠윈, 하드캐슬 가문의 사생아 커닝햄, 또다른 루프 참여인물 대니얼 콜리지 등의 주변 인물들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황하더라도 설명이 명확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정작 중요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대니얼 콜리지가 에이든을 방해하는건 당연하지만 - 루프에서는 한 명만 탈출할 수 있어서 -, 애나가 에이든에게 협조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루프의 정체 - 일종의 감옥 - 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소자들을 살인 사건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타인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저만 이해를 못하는걸까요? 그리고 에이든 비숍은 애나를 찾아 제발로 루프에 들어왔기 때문에 배석 판사 흑사병가면이 호스트 통제권 및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반 감옥이라고 치면, 감옥 재소자를 제 발로 찾아온 선량한 시민에게 감옥에서 지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말과 같은데 이건 말도 안되죠. 그냥 일종의 "두뇌 게임"을 펼치기 위한 장을 억지로 만든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사악했던 괴물 애나벨 코커는 비숍의 여동생을 고문해 죽였지만, 그녀는 죽고 지금의 애나는 갱생했다! 비숍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 증명했다! 며 두 명 모두 풀어주는 마지막의 해피 엔딩도 허무했습니다.

복잡하고 일견 치밀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핵심 전개와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전개는 부족하고, 기본 설정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잡하지만 알고보니 알멩이 없는 미국 드라마같은 작품입니다. 정통 추리물을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26/06/06

리스타트 (Boss Level) (2021) - 조 캐너한 : 별점 2점

전직 특수부대원 로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죽은 뒤 다시 같은 날 아침으로 돌아오는 현상에 직면했다. 전처 젬마가 개발한 장치 때문이라는걸 알아낸 로이는, 젬마를 상관 벤터로부터 구하고 루프와 지구 파멸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하루가 반복된다는 루프물 영화는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소스 코드"를 보았었지요. 

뻔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만의 큰 특징은 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끊임없는 액션의 무대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비슷하지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을 무대로 복선과 음모는 거의 없이 시종일관 액션으로만 밀어붙인다는게 차이점이에요. 맨손 격투와 총격전은 물론이고, 맨몸 스턴트, 자동차 추격, 검술 액션까지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액션은 다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이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들과 악당들을 해치우기 위해 죽어가면서 공략법을 익히고 결국 그들을 극복해 나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선보이는 프랭크 그릴로의 외모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촬영도 화끈하며 적절한 유머와 합도 좋고요.

일종의 게임같은 '공략' 세계관은 전체 전개에서도 일관되게 선보입니다. 루프가 계속되면 세계가 붕괴하기 때문에, 로이는 살아남거나 악당들을 없애는 대신 잠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들과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로요. 그런데 로이는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전처 젬마가 그날 아침까지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로이는 다시 하루를 공략하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적들을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젬마를 최대한 빠르게 구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거든요. 이렇게 단계별로 공략이 진행되며 단서와 조건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원제 "Boss Level"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습니다.

또 아예 복선과 음모가 없지도 않습니다. 로이가 암살자들에게 쉽게 추격당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날 치위생사를 만났는데, 그때 치료받은 이빨에 추적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대단히 놀라운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액션 중심 영화에서 제법 흥미로운 요소로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는 좀 부족합니다. 우선 앞서 액션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는데, 암살자들 개개인과의 대결이 대부분이라서 규모가 많이 작습니다. 루프물답게 반복되는 장면도 많고요. 

또 중반부에서 아들 조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영화 전체가 쉴 새 없이 액션을 몰아치다가 갑자기 멈추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 선택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달리던 액션 영화로서의 기세를 잡아먹는건 사실이에요.

배우들의 활용도 아쉽습니다. 프랭크 그릴로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이름값에 비해 크게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멜 깁슨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별다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년의 대배우가 이렇게 몰락했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만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신선함보다는 액션의 물량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킬링타임용 루프물입니다. 저는 운동할 때 감상했는데 적당했어요.

2014/10/21

엣지 오브 투모로우 (2014) - 더그 라이먼 : 별점 3점

가까운 미래, '미믹'이라 불리는 외계 종족의 침략으로 인류는 멸망 위기를 맞이했다. 인류는 이에 맞서 전 세계 군대가 연합한 연합방위군(United Defence Force, UDF)을 창설했다. 그러나 방위군은 정훈장교였던 육군 소령 빌 케이지(톰 크루즈 분)는 장군의 명령으로, 훈련이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전투에 투입되었다. 결국 미믹의 함정으로 인해 군대는 전멸하고 케이지 역시 전사했지만, 죽기 직전 자신이 죽인 미믹의 피를 뒤집어쓴 그는 작전 시작 직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출장 중 비행기에서 꽤 많은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며칠간은 영화 리뷰가 쭉 이어질 것 같네요. 첫 번째작품은 가장 먼저 본 "엣지 오브 투모로우"입니다.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 라이트노벨 "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SF 액션 블록버스터입니다. 동일한 삶을 반복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블랙홀"과도 유사  타임 루프물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사랑의 블랙홀"은 잠들거나 하루가 지나면 리셋되는 반면, 이 작품은 죽음에 의해 리셋되는 구조이고, 나름 과학적인 설명도 덧붙여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이렇게 삶이 리셋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더불어, 전투 장면의 육중함과 리얼함도 돋보입니다. 죽음을 반복하면서 점점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도 설득력 있게 그려진 덕분입니다.
절망적인 전투 외에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탐색해가는 과정의 짜임새도 좋아요. 여러가지 디테일들 덕분인데, 대표적인 예는 여주인공 리타와 함께 헬기가 있는 곳에 도착한 장면에서 "설탕은 세 개 넣지?"라는 대사를 통해 루프의 누적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실감케 만드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메가의 피를 뒤집어쓴 케이지가 더 과거의 시점으로 점프하여 여주인공과 다시 만나게 되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톰 크루즈의 상큼한 미소도 오랜만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오메가라는 존재는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고, 마지막 작전의 전개는 비약이 심했습니다. 오메가의 위치를 파악한 시점에서는 더 이상 도망칠 이유가 없었고, 리타가 오메가를 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오메가를 죽인 뒤 다시 리셋되었을 때,   이미 오메가가 죽은 세계가 펼쳐진다는 결말은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이전의 규칙대로라면 리셋은 되더라도 오메가가 죽은 시점이 유지되는 건 말이 안 되고, 만약 그렇게 바뀌었다면 케이지가 깨어나는 지점도 변경되어야 했겠지요.

이렇게 불만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웰메이드 SF 활극임은 분명합니다. 톰 크루즈라는 이름은 이제 톰 행크스나 브래드 피트처럼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된 것 같네요. 물론 가끔 실패는 하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9/01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미스터리 소설 (オモコロ(Omocoro)bros)

유머러스한 기사들로 인기가 많은 일본 웹 사이트인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멤버들이 추천하는 미스터리 소설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세 편 뿐이라는게 아쉽네요.

브로스 편집부입니다.
8월의 일요일마다 다양한 장르의 "추천 소설"을 소개하는 기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주는... "추천 미스터리 소설"! 다양한 미스터리를 즐겨보세요.

**다빈치 오시야마의 추천 호러 소설**
《우주 탐정 노그레이》 (타나카 히로부미)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작품을 "특수 설정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마법이 있는 세계"나 "타임루프가 있는 세계"와 같이,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수 설정이라도 "아무거나 가능"한 것은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마법이 있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는 워프 마법을 범인만 사용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 흥이 깨지겠죠. 비현실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말에도 논리적인 납득이 필요합니다.
《우주 탐정 노그레이》는 다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우주를 무대로 하는 능력 있는 탐정 "노그레이"가 기묘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단, 이 행성들이 모두 매우 특이합니다.
  •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만 사는 "괴수 행성 킹고지"
  • 주민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천국 행성 파라이스"
  • 주민 수가 항상 일정하며,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 행성 텐쇼우"
  • 모두가 대본대로 연극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연극 행성 엔게키"
……등, 독특한 행성들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에서 "목 없는 시체"는 흔한 미스터리지만, 그 시체가 무적의 거대 괴수라면? 유쾌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사건들. 그 해결도 역시 행성의 특수한 성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한 듯 보이면서도 마지막에 피스가 맞아 떨어지며 규칙의 전체 그림이 보이는 그 기분은 미스터리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장난감 상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있는 한 권입니다.

**카마도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명탐정의 제물: 인민교회 살인사건》 (시라이 토모유키)

플롯부터 너무 멋진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최고입니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 "다중 해결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추리 결과, 여러 진실이 존재한다"라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입니다. 이 시라이 토모유키 선생님의 다중 해결물은 탁월합니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물은 매우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추리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도중에 "이게 뭐야... 방금 추리는 뭐였지?" 또는 "피곤해... 결론만 말해줘..."라는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이 《명탐정의 제물》에서는 제시된 여러 추리가 모두 강력한 임팩트를 줍니다. 압도적인 해설 파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게 될 정도입니다. 장인의 기술에 감탄할 정도로 멋진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의 구조적 약점을 없애면서, 동시에 "다중 해결"이라는 장르 자체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는 듯한 훌륭한 플롯을 꼭 경험해 보세요.
다른 작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며, 이 《명탐정의 제물》을 시작으로 깊이 빠져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작품인 《엘리펀트 헤드》는 정말 최악입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지만, 진짜 최악입니다. 사람이 이런 걸 써도 되나? 여러 의미에서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습니다.

**나시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이야기》 (스기이 미츠루)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떨리다니" 라는 경험을 한 건,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상쾌함까지 느낄 정도로, 기분 좋게 압도당했습니다.
훌륭한 독서 체험을 보장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서점에서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아니면 Amazon 카트에 담아주세요.
"전자책은 없나요?"라고 낙담할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키노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취업을 위해 양산된 듯한 여섯 명의 우수한 대학생들이, 모두 내심 내정받고 싶은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 남았으나, 전원이 내정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한 명만 내정된다고 변경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최종 토론 중에 우등생들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이 나오면서, 한 사람씩 가면이 벗겨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책의 재미 순위를 석권하고, 만화화, 영화화, 라디오 드라마화까지 이루어졌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습니다! 취업을 위해 드러난 좋은 면과 고발을 위해 드러난 나쁜 면이 교차하며, 사람의 인상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스릴 넘치는 구성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엄청 읽기 쉽습니다!).
여러 번 뒤집히는 대학생들의 의혹에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교묘한 미스리드, 마지막에 남겨진 고발문의 놀라운 결말,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선명한 복선 회수... 말할 것이 없는 소설의 완전체였습니다. 11월에 영화도 개봉된다고 합니다. 꼭 보세요!

**가미죠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나오키상을 받은 화제작을 지금 와서 추천하는 것도 뭐하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경은 전국시대로,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전국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입니다.
…잠깐만요, 이 시점에서 "역사물인가, 흥미 없네"라고 생각한 분들,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이 소설은 등장인물과 배경만 역사물일 뿐, 내용은 완벽한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 무라시게는 어느 계기로 상사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성에 틀어박힙니다. 그곳에 쿠로다 칸베이라는 엄청나게 뛰어난 지장이 찾아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성 안에서 둘이 나눈 이야기가 지금으로 치면 실제로 있었던 "밀실 토크"처럼 느껴져,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예상해가며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설마, 이런 전개가 가능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요네자와 호노부 선생님의 《흑뢰성》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다시 한번, 독서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2025/04/12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 - 미카게 에이지 / 제이노블 : 별점 2점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권 - 4점
EIJI MIKAGE/테츠오/제이노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호시노 카즈키)는 엄청난 미모를 갖춘 전학생 오토나시 아야를 보자마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아야는 '오늘 모기 카스미의 팬티 색깔은 하늘색이야'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종례를 앞두고, 아야는 반 친구들에게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어디서 나온지도 모를 '마리아'라는 이름을 써 주었고, 아야는 그런 나를 붙잡고 자신이 끝없이 3월 2일을 반복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데...

라이트 노벨로, 원제는 『空ろの箱と零のマリア』입니다. 일본에서는 2009년 전격문고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대원씨아이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7권으로 완간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최근 e-book으로 재출간되었더군요. 라이트 노벨은 평소 전혀 읽지 않지만, '걸작 시간 미스터리'물로 선정된 적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시간 미스터리'답게, 의도하지 않게 특정 시간을 반복한다는 타임 루프물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로 대표되는 설정이지요. 소설로도 "일곱 번 죽은 남자" 등에서 활용되었고요. 다른 작품들처럼 무한 시간 반복을 없애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특징도 분명합니다. 우선, 시간을 반복하는건 화자이자 주인공 호시노가 아닙니다. 호시노는 이 사실을 전학생 오토나시 아야에 의해서 나중에야 깨닫게 되거든요. 

그리고 작 중 '거절하는 교실'의 시간 반복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소원을 빈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는게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종의 '후더닛' 류의 추리물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를 밝히는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상자의 주인인 모기 카스미는 시간을 수없이 반복한 탓에, 자기 자신을 꾸밀 이유가 없어져서 화장품을 가지고 다니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걸 통해 알아채거든요. 호시노 카즈키의 친구 하루아키가 상자의 주인 제로였다는 걸 알아채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모기 카스미가 상자에 갇힌 뒤, 다시 시간 반복이 일어났는데 모기를 아이가 대체했다는 상황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아키는 '모기가 굉장히 예뻐졌다'는 식으로 이걸 알아챈 말을 했기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고 말지요. 독자에게 주는 단서로도 공정한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기가 상자의 주인이 되어 빈 소원이 지극히 청춘 연애물스러운 동기였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모기는 카즈키를 좋아해서, 고백이 거절당한 뒤 고백한 날을 반복했습니다. 수만번의 반복 끝에 카즈키가 고백을 받아주는건 물론, 카즈키가 되려 고백을 하게끔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매 번 새로운 날이 또 시작되었고 카즈키는 고백했다는걸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지요. 사춘기 소녀라면 할 법한 귀여운 생각이었는데, 그 단순한 소망을 상자가 뒤틀린 형태로 이루어주었다는게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그걸 치명적인 방식으로 왜곡한다는건 고전 걸작 "원숭이 손"을 비롯해서, "펫샵 오브 호러즈" 등에서 자주 보아온 장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소망 자체가 귀여운 만큼, 반전의 잔혹성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하지만 유치한 인물 설정과 대사, 그리고 라이트 노벨 특유의 감정 과잉 묘사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대사로 모든걸 표현하려고 해서, 소설보다는 만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설정 면에서도 몇몇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모기가 상자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시간이 반복될수록 상자에서 거절당한(모기가 죽인)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기만 남게 되니까요. 즉, 대단한 추리 없이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오토나시 아야는 이미 이전에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모기와 대결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반복되자 이를 잊어버렸다는건, 설정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카즈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남아있었으니까요. 물론 상자의 주인 제로나 상자의 능력이 개입하여  아야의 기억을 조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상자의 주인은 결국 반복 속에서 당연히 드러날 터라 구태여 조작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 모기가 죽어서 상자에 갇힌 상황에서도 시간의 반복이 깨지지 않았다는 설정 역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조금 답답했고요.

물론 이런 설정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제가 읽은 1권 외, 전 7권에 이르는 나머지 분량에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읽을 의욕이 생기지 않는군요. 재미가 없는건 아니고, 설정도 매력적인 부분이 있지만, 캐릭터성과 연출 방식이 라이트 노벨 특유의 유치함에 갇혀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무슨무슨 리스트에서 추천하는 작품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읽는건 지양해야 겠습니다.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입니다. 이번 권에는 네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겁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