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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1

유괴 - 다카기 아키미쓰 / 이규원 : 엘릭시르 : 별점 2.5점

유괴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트 치과 의사가 유괴 살인을 저질러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기무라 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 그곳에 완전 범죄를 꿈꾸는 한 남자가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본다.
이윽고 고리대금으로 거금을 모은 이노우에 라이조의 아들이 유괴되고, 기무라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치밀함에 경찰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뒤, 라이조는 거금을 들여 범인에게 현상금을 거는데...

다카키 아키미쓰의 장편. 파계재판의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 시리즈로 실제 있었던 유괴 사건을 소재로 쓴 작품입니다. 범인이 유괴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재판을 방청하며 얻은 정보로 완전 범죄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는 내용이지요.

약간은 도서 추리소설 스타일로 전개되는데, 실제 사건과 거의 동일한 기무라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이노우에 가문에서 일어난 유괴 사건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흥미진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행의 "동기"와 범행의 과정만큼은 이쪽 장르 경쟁작들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 합니다. 특히 고령인 라이조의 나이를 감안하여 유산 상속을 노렸다는 진짜 동기는 정말이지 무릎을 칠 만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아들이 있고 특정한 유언이 없다면, 라이조 사후 아들에게 전 재산이 상속되지만 아들이 없다면 아내와 동생과 같은 친권자 기준으로 분배됩니다. 그런데 아내와도 이혼을 한다면? 이라는건 작중 내내 강조되는 라이조의 재산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이 느껴졌으니까요. 또 이 동기와 "실종 후 7년 동안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법적 조항이 맞물리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범행 과정 묘사도 실제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답게 생생합니다. 상세한 부분에서의 고민도 많이 느껴졌고요. 유괴 사건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서 제기되는 질문 - 결국 범인이 몸값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가? - 에 대한 나름의 해석도 괜찮았습니다. 거짓말 탐지기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전해주는 등 당대 수사 기법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주는 부분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거짓말 탐지기의 %에 대한 이야기나 부신 피질의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검사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고요.

또 당시 화제가 되었던 유괴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점, 정신 감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견지하는 설정 등에서는 사회파적인 성격을 느끼게 해 주는데, 권말에 상당한 분량으로 수록된 '마사키 유괴 살인 사건'의 재판을 다룬 논픽션이 그 방점을 제대로 찍어줍니다. 논픽션으로서도 뛰어나지만 실제 작품과 여러모로 연결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주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놓고 본다면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했던 범행 과정의 묘사에 비교하면 후반부는 너무 쉽고 어설픈 탓입니다. 범인을 지목한 이유가 "범인이 기무라 재판을 방청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재판이 보도된 신문을 연구하는게 훨씬 안전하고 손쉬웠을텐데 구태여 방청을 한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범행이 성공한 이후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기무라의 운명을 알기 위해 방청을 계속했다는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범인이 관련된 장소에 당당히 얼굴을 내민다는 것도 비상식적인 행동이라 생각되고요.

이렇게 근거 없는 추리와 설명할 수 없는 범인의 무의미한 행동이 결합된,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우연으로 보이는 전개는 또 있습니다. 다에코에게 불륜남이 때맞춰 전화하여 라이조에게 이혼 결심을 하게 만드는 장면, 오카 다미코의 죽음과 오카야마 도시오의 도주로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부분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그의 아내가 라이조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사건에 뛰어든다는 동기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너무 억지로 시리즈로 끌고가려는 느낌이었달까요. 차라리 시리즈가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던 에노모토 경위 그룹에서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는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게 어땠을까 싶어요. 아니면 최소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기무라 재판에 방청객, 혹은 참고인으로 참여했다가 범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내용이라도 나와 주던가요.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어머니 다에코의 공작에 의해 범인으로 확정된다는 결말도 깜찍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약합니다. 누군가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가장 유치한 수준의 공작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증거도 없는 인물의 집에서 유력한 단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바로 범인 취급을 해 버리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낭패를 볼 겁니다. 제가 봤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근거도 제법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본격 추리의 향취도 나면서도 사회파적인 느낌도 전해주는, 과도기의 교량 역할을 잘 해주고는 있지만 이러한 단점들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아래에서 순위를 다툴만한 작품입니다.

2013/11/26

저물어 가는 여름 - 아카이 미히로 / 박진세 : 별점 2.5점

저물어 가는 여름 - 6점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카이 미히로의 유괴 미스터리 소설. 1955년생인 아카이 미히로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 작품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닛폰방송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마흔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그때의 경험을 살려 쓴 본 작품으로 시라누이 교스케의 "매치메이크"와 공동으로 49회 에도가와 란포상(2003)을 수상했다.

20년 전 일어났던 유괴 사건 범인의 딸이 20년 후 유명 신문사 기자로 합격이 내정된다. 이 사실을 폭로한 경쟁사 주간지의 기사를 계기로 신문사는 20년 전 유괴 사건의 재조사를 개시한다. 몇 년 전 사고 때문에 신문사의 한직에서 시간을 보내던 전직 기자 가지가 회사의 명령으로 범인의 주변, 피해자, 당시의 담당 형사와 병원 관계자를 거듭 취재한 끝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을 밝혀낸다. '알라딘 책소개 인용'

제49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작품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알라딘의 피니스 아프리카에 편집장 인터뷰를 접한 뒤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좌천당한 기자 가지 히데카즈가 히로코의 입사를 위해 20년 전 유괴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뒤쫓아 숨겨진 진상을 파헤친다는 내용인데, 읽다보니 바로 직전에 읽었던 "킹의 몸값", 그리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천국과 지옥》이 중요하게 언급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유괴라는 범죄가 얼마나 부모와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한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한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데즈카 부부가 20년 동안 인형을 아이 대신하여 키워온 모습은 정말 짠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확실히 여성 작가가 썼다는 느낌이듭니다. 다른 유괴 관련 작품들은 범죄자나 피해자(부모)를 대상으로 범죄와 관련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루는 반면, 이 작품은 애틋한 묘사가 디테일하게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확실한 차이점이지요.

허나 감정에만 호소하는 내용은 아니고 실제 유괴사건에 대한 박진감 있는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킹의 몸값"의 주제인 '누구를 유괴했는지 보다,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는지가 중요하다'가 그럴싸하게 변주되어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요. 또한 유괴 사건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몸값 전달 방식이 기발하게 펼쳐지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5천만 엔 중 천만 엔을 만 엔짜리 지폐로 전달받은 뒤, 사람 많은 거리에 뿌리고 혼잡을 이용하여 나머지 돈을 가지고 도망친다는건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이디어이고 운에 의지한 측면이 강하지만 실제로 성공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반전 역시 충격적이라 마지막까지 읽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맛이 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가지가 사건 당시 취재 기자 중 한 명이었던 덕분에 사건을 지휘했던 이노우에의 비망록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는 건 어이가 없었어요. 20년 뒤 일개 기자가 진상을 밝혀낼 정도라면, 당시 경찰이 무능했다는 이야기밖에는 안되니까요.

그리고 당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던 츠쿠모의 지인을 만나 주식에 대한 정보를 듣고 호리에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진상을 밝혀내게 되었다는데, 가지가 편집 자료실을 이용하여 사건 관계자 이름을 먼저 검색해보았다면 발품을 파는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었습니다. 저 같으면 비망록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 모든 관계자 이름을 검색해봤을 거예요. 이 부분은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더군요.

반전도 충격적이기는 하나 거기에 다다르는 과정에 대한 설득력은 낮습니다. 가지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호리에의 웃음을 본 것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억지스러웠고, 무토 국장 아내의 키라던가 미키마우스 티셔츠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것은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보다는 호리에에게서 약간의 설명을 듣는다는 식으로 전개하는 게 충격은 덜했겠지만 설득력은 더 큰 결말이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호리에를 진범으로 하여 이야기를 끝내던가요. 반전은 달리 보면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일 뿐이거든요. 또 에필로그에 잘나가게 된 히로코를 묘사하는 것 역시 사족입니다. 차라리 진정한 피해자가 된 슌지에 대해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로코는 결국 살인자의 아이는 아니지만 범죄자의 딸은 맞는데, 조사 결과로 뭐가 달라지는 건지는 아리송합니다. 거액의 빚을 지고 전전긍긍하다가 협박범이 된 뒤, 나중에는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하여 애인과 함께 골로 간 멍청한 아버지가 인간 말종이라는 건 다를 바 없으니까요. 단지 살인만 저지르지 않았을 뿐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능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아마추어 수준 이상의 바둑 고수이자 순간 기억능력을 갖춘 도자이 신문사의 사장 스기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끝판왕 포스가 철철 넘치는데 하는 일이라고는 여대생에게 회사 입사를 권유하는 것밖에 없어서 격에 맞지 않는다 여겨졌습니다.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읽는 재미는 있고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작품이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실한 점이 많아서 감점합니다. 란포상을 탄 작품들 대부분이 추리보다는 묘사에 더 치중하는 느낌인데 이 작품 역시 전례를 벗어나지 않네요.

2022/11/27

몸값과 생명을 둘러싼 속고 속이는 공방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유괴 미스터리 걸작

* 자주 소개드리는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으로, 이번에는 유괴가 주제인 작품들입니다. 일본 작품만 선정하지 말고, <<킹의 몸값>>과 같은 유명 해외 고전도 포함시키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유괴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뤄지는 범죄를 말합니다. 범인과 피해자, 경찰간의 몸값과 생명을 둘러싼 긴박한 공방,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를 어떻게 속일 것인지?는 소설의 주제로 매력적입니다. 이런 유괴 주제 미스터리 소설 중에서, 끝까지 결말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걸작을 골라보았습니다.

<<99%의 유괴>> 오카지마 후타리 : 국내 미출간
오카지마 후타리는 '납치의 오카지마', '유괴의 오카지마' 라고 불릴 정도로 유괴 소설의 명수이다. 이 작품은 30여년 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었던 컴퓨터 등의 첨단 기기를 동원하여 치밀한 유괴 범죄를 그리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알리바이도 완벽하고, 증거도 남기지 않은 완전 범죄의 행방에 주목해 보시길.

<<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광고 크리에이터 사쿠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망친 원수 카츠시로의 딸과 공모하여 가짜 유괴 사건을 저지른다. 몸값은 3억엔. 유괴와 몸값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속셈이 서로 엇갈리며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굴러간다. 유괴를 순수 두뇌 게임으로 그린 걸작.

<<대유괴>> 덴도 신
감옥에서 알게 된 3명의 남자들이 인생 한방!을 목표로 대부호 할머니를 유괴한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오히려 유괴범들을 손아귀에 넣고, 그들의 범행을 자기 시나리오로 바꾸어 버린다. 이를 통해 5천만엔이었던 몸값이 100억엔으로 늘어나면서 엄청난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대유괴'로 바뀌어 가는 모습이 압권인 작품.

<<유괴의 과실>> 신포 유이치 : 국내 미출간
종합 병원 병원장의 손녀가 유괴된다. 범인의 요구 사항은 몸값이 아니라 입원 환자를 죽이라는 것. 그 입원 환자는 정계의 거물이자 재판 중인 피고였다. 그리고 이 사건과 동시에 '몸값 대신 특정 주식을 사라'고 요구하는 또 다른 유괴 사건이 일어나는데... 두 개의 유괴 사건이 얽히며,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

<<1의 비극>> 노리즈키 린타로
야마쿠라 가문에 아들을 유괴했다는 전화가 오는데, 실제로 유괴된건 지인의 아들 시게루였다. 잘못 유괴했다는걸 범인에게 숨긴채 야마쿠라는 몸값을 전해 주려 노력하지만, 사소한 실수로 시게루는 살해당하고 만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자마저 살해당한 뒤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나서고, 사건은 의외의 전개를 맞이하게 된다.

2023/09/23

오전 0시의 몸값 - 교바시 시오리 / 문승준 : 별점 1.5점

오전 0시의 몸값 - 4점
교바시 시오리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참 변호사 고야나기 다이키는 보스의 지시로 여대생 혼조 나코와 상담을 진행했다. 그녀는 범죄 조직 리더 가와사키의 여자친구였던 친구 사키때문에 보이스 피싱 사기 범죄에 가담했었다. 그러나 가와사키에게 맞은 사키가 죽고나서 복수하고자 가와사카의 중요한 물건을 빼돌린 뒤, 조직에게 쫓기는 중이었다. 다이키는 그녀를 자수시키려 했지만 나코는 사라져버렸고, 다음 날 아침 나코의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일본 최대의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모기업 ‘사이버앤드인피니티’에 전달되었다. 범인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나코의 몸값 10억엔을 모금하라고 요구했다.
나코를 구하고자 발품을 팔던 다이키는 사무실 보스 미사토 변호사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데...


소갯글이 흥미롭길래 읽어보게 된 신작. 잘 모르는 작가인데 이 작품이 데뷰작이더군요. 잘 모를 수 밖에.
나코의 유괴와 몸값 요구에서 시작되어 숨쉴 틈 없이 계속 사건이 벌어진다는건 장점입니다. 나코 유괴는 어느새 사이버앤드인피니티의 기밀 자료를 노리는 산업 스파이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집니다. 여기에는 다이키의 보스도 연루되어 있고요. 그러다가 다이키의 사촌 와카를 납치한 뒤 기밀 자료를 요구하던 가와사키가 폭사하며,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나코의 친아빠였다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이런 내용이 적절한 분량 안에서 펼쳐져서 읽는 재미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비현실적입니다. 범인이 세세한 조건을 붙여서 크라우드펀딩으로 몸값을 요구한다는 아이디어부터가 그러합니다. 흥미롭기는 하나 실제로 범인이 몸값을 수령할 가능성은 전무한 탓입니다. 작 중에서는 "별도로 몸값을 입금할 계좌를 알려주겠다"고만 언급하고 대충 넘어가는데, 이 점 하나만으로도 몸값 수령이 범인의 의도가 아니라는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어디 기부하라고 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사이버앤드인피니티'가 납치 사건과 몸값 모금을 일으킨 진짜 흑막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막 런칭해서 이름을 알려야하는 스타트업이었다면 해 볼만한 시도였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기밀을 빼돌리려는 산업 스파이를 잡아내기 위해서 납치 사건을 조작했다? 단순 산업 스파이 수사는 경찰이 나서지 않고, 안이하게 직원들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서? 납치 사건을 일으켜서 직원들을 재택 근무시킨 뒤 시스템을 조사하고, 회사에 파견된 경찰 수사진에게도 회사 내부에 협력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흘려 스파이를 찾도록 만든다? 뭐 하나 이해가 되는게 없었습니다. 직원이 4,000명이나 되는 회사의 산업 스파이 조사 의뢰를 경찰이 흘려듣는다는 것 부터가 와 닿지 않는데 뒷 이야기들은 더 말해 무얼하겠습니까.

물론 사이버앤드인피니티가 가짜 유괴를 저지른다는 막장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가짜 유괴 사건을 일으키고, 가와사키를 조종해서 회사 기밀 정보를 빼돌리려고 했던건 나코와 사키의 친 아빠들이었다는게 진상이니까요. 문제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나코가 저지른 범죄로 가족이 가와사키에게 협박을 받았고 사키는 가와사키 때문에 죽었다는게 동기라면, 가와사키만 죽이면 됩니다. 가짜 유괴 사건을 일으켜 몸값을 요구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심지어 가와사키를 죽였던 상황은 유괴 사건과는 무관하게 와카가 납치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죽일 수 있었다는 말인데, 왜 전 국민이 주목하는 사건을 일으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앞서 이야기했듯, 보스의 산업 스파이 색출 작전과 가짜 유괴가 어떻게 절묘하게 맞물렸는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요.

사건의 진짜 동기라 할 수 있는 사이버앤드인피니티사의 기밀 정보도 굉장히 유치한 발상인데다가, 이를 가방에 넣고 다니거나, USB로 전송한다던가 하는 묘사는 어설펐습니다. 화룡정점은 마지막에 빨간 USB와 파란 USB를 건네주며 하나만 진짜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수십년은 늦은 <<매트릭스>>의 철지난 흉내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유괴물의 핵심인 몸값 전달에 있어 획기적인 무언가를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별로 추천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4/05/20

64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3.5점

64 - 8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사부에서 홍보담당관으로 발령난 미카미는 교통사고 가해자 익명 보도건 때문에 기자단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허나 경찰총장의 방문이 예정되어 어느 때보다 기자단의 역할, 홍보담당관의 역할이 중요해져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 경찰총장의 방문이 사실은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의도라는 걸 알아챘다. 형사의 피가 흐르는 탓에 이러한 음모에 맞서지만, 딸의 가출 후 조사를 도와준 경무부장 아카마와 알력다툼이 벌어지던 와중에 14년 전에 벌어졌던 유괴사건, 속칭 64 사건을 쏙 빼닮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찰이라는 조직과 그 조직에서 겉돌게 되는, 그러나 천상 경찰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찰 소설입니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와 유사하게 조직과 개인의 갈등이 주요 소재인, 경찰이 등장하는 일련의 시리즈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지요. 제가 리뷰를 쓴 작품도 제법 됩니다.

이 작품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데,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미카미의 딸 가출 사건
  • 14년 전에 벌어져 아직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시효가 코앞으로 다가온 유괴살인사건 64
  • "고다 메모"라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64사건 당시 일어났던 형사부의 치부
  • 주변 인물들에게 걸려온 장난전화
  •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본청 / 경무부의 음모와 이에 맞서는 형사부
  • 기자단과 홍보실의 다툼
  •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

이러한 사건들이 64사건의 범인 체포라는 큰 주제로 묶이는데, 뭐 하나 허투루 진행되는 것이 없고 이야기 하나가 완결되면 또다시 위기가 닥치는 연재소설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그야말로 지하철에서 읽다 보면 내릴 정거장을 깜빡해서 지나치게 만들정도로요(저는 한 정거장 지나쳤습니다).

경찰 출신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묘사도 여전합니다. 경찰 내 복잡한 조직 구성 및 조직 간 역할 관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작품이 있을까 싶네요. 비교할만한 "제 3의 시효"역시 같은 작가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경찰에 대한 깊은 내공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또 법의관이나 형사가 주인공인 작품은 많이 있지만, 이 작품처럼 홍보담당관이 주인공인 작품은 처음이라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관련된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경찰 담당 기자가 나오는 오시마 야스이치의 "특종 사건현장"과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만화에서는 기자와 경찰이 서로 협력 관계로 공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 작품에서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는 차이가 크게 다가옵니다.

경찰이라는 무대 설정만이 특이한 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제법 괜찮습니다. 미카미가 "고다 메모"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수사 과정의 디테일도 볼거리이지만, 64사건에서 범인이 몸값 회수에 성공하는 트릭도 괜찮습니다. 유괴범이 범행에 성공한다는 전개의 작품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64사건의 피해자 아마미야가 유괴범의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현 내의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부 순서대로 전화를 한다는 진상이 백미입니다. 이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였어요. 아-이-우-에-오 순으로 이어진다는 트릭적인 요소도 충분히 설득력 있을 뿐더러, 딸을 잃고 남은 게 없는 아버지의 절절함이 전해지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사고 당시 실수의 충격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히요시가 자신의 경력(NTT 직원)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수사를 벌인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의외의 진상이라 더욱 놀랐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미카미의 딸 아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메사키가 정말로 64의 진범인지(먹어버린 메모지에 쓰인 글귀는 무엇인지), 고다 메모를 둘러싼 형사부의 치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결국 하나도 정리되지 않고 끝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미카미가 짊어지고 끝까지 책임지겠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데 무척 세련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가장 중요한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메사키가 경찰에 신고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메사키를 경찰에게 넘겨준다는 일련의 행동은 수사 지휘관 마쓰오카가 메사키가 64사건의 범인임을 눈치채고 모든 진상을 파악했으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이런 번잡하고 불편한, 그리고 범죄에 가까운 사건을 벌이느니 청장이 방문하기로 했을 때 청장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대형 범죄를 저지른 메사키가 같은 현에서 계속 살아왔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고요.

그 외에도 경무부와 형사부의 갈등 관계를 만드는 후타와타리가 고다 메모를 들먹이며 형사부를 들쑤시는 행동의 저의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선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냥 소문만 흘리는 게 훨씬 간단했을 테니까요. 이는 이야기를 번잡스럽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경 미쿠모도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얼굴"의 미즈호를 객관적으로 그린 듯한, 여경이지만 일 욕심 있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인물인데 이야기에서 별 영향을 주지도 않고, 작품 내에서 뚜렷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 탓입니다.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해서 아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그래도 문학적 성취와 대중소설의 재미, 추리적 완성도도 두루 갖춘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재미와 함께 유괴라는 범죄의 비정함,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 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길다 싶긴 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호평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등장하는 경찰 수사,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아버지 얼굴과 똑같은 얼굴로 생겼다고 좌절하여 가출까지 하다니... 저 역시 딸아이 아버지일 뿐더러 딸아이가 저하고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지라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2012/03/09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조세핀 테이 / 권영주 : 별점 3점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 6점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검은숲

어느 봄날 오후 4시, 로버트 블레어는 이제 그만 퇴근할까 생각 중이었다.

40줄에 접어든 독신 변호사 로버트 블레어는 어느 날 퇴근 직전에 사건 의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는 매리언 샤프였다. 의뢰 내용은 샤프 모녀가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유괴당했다고 주장하는 소녀 베티 케인의 디테일한 증언 때문이었는데...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인 18세기 엘리자베스 캐닝 유괴 사건을 현대물로 재창조한 독특한 픽션입니다(현대물이라고 해도 작품이 쓰여진 1948년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요.). 이런 저런 리스트에서 고전 걸작으로 선정되었던 유명한 작품으로, 장르와 성격은 다르지만 실제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진리는 시간의 딸"과 비슷합니다.

이런 저런 리스트에 선정될만큼의 재미는 확실히 갖추고 있습니다. 추리물, 법정물로서의 가치는 낮을지라도, 중요한 증언(첫 진술의 허점, 베티의 유혹에 대한 증언, 파트타임 도우미의 위증)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과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은 충분한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 보기 드문 짜증나는(!) 영국인 심리 묘사와 캐릭터 설정, 재치 있으면서도 지적인 영국식 대사, 자존심 강한 영국 신사 스타일의 해피엔딩 등, 고전 영국 본격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길 거리가 한가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눈 색깔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독특한 (짙은 청색 눈: 성적으로 문란 (매리언 샤프), 연푸른색 눈: 말주변 좋은 거짓말쟁이 (핼럼 경위)) 설정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아, 이 얼마나 영국적인가요!

그러나 비록 억지스러운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팩션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진리는 시간의 딸"에 비하면, 이 작품의 추리적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이유는 유괴 사건의 핵심인 베티 케인의 주장이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관만 슬쩍 본 저택 내부의 배치나 가방에 대한 증언이 너무 상세하고 정확해서, 단순히 때려맞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원래 사건에서도 증언이 핵심 요소였고, 작중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베티 케인의 카메라 같은 기억력, 당시 영국 저택들의 유사한 구조, 가구, 장비 등)으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자를 설득하기에는 많이 부족해요. 사건이 뉴스화된 이후에는 채드윅이나 그의 부인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물론 불륜이기에 드러낼 수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작중 설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그녀의 증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고, 초반 몇 발자국만 운이 좋았을 뿐 결국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게 과연 사건성이 있나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인인 코펜하겐의 호텔 주인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극적이기는 하나, 결국 운과 우연이 겹친 결과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웠습니다. 이런 전개 때문에 추리적인 서사는 보잘것없고, 법정 드라마적인 요소만 살아 있는 묘한 구성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영국식 관용어구의 사용이 지나쳐 "버터를 입에 물어도 녹지 않는다"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다소 과한 느낌이었습니다. 찾아보니 "순진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풀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번역자가 영국적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 한 의도였겠죠.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단점이 명확하지만, 실제 있었던 미해결 사건을 토대로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하여 창작한 픽션이라는 점과,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만큼은 뛰어납니다. 

저와 같은 고전 영국 본격 미스터리 팬들이나, 조셉린 테이, 프랜시스 아일즈,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014/01/24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 표창원 : 별점 3점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 6점
표창원 지음/지식의숲(넥서스)

유명했던 국내 사건들에 대해 소개해 주는 논픽션입니다. 시사저널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인데, 연재물을 꾸준히 읽고 갈무리까지 한 저에게는 별로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냥 한 권으로 모아서 다시 읽었다는 정도의 의미 뿐이지요.

그래도 한 권의 단행본인 덕분에 가지게 된 장점도 많습니다. 먼저 표창원 씨의 일관된 시각 - 범인은 엄정한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 - 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미제사건인 제주도 여교사 사건 등을 재조명하여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천명하는 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또 부산의 한 교수가 아내 살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변호사를 동원해서 20년 형을 선고받았던 사건, 유명한 시체 없는 사건의 피의자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이 대비되는 효과도 단행본이기에 지니는 장점이었고요.
연재물에서는 보지 못했던 짤막한 해외 사례 및 중간, 중간에 토막 상식처럼 들어간 표창원 씨의 생각도 눈여겨볼 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고 가치가 반감되는건 아닙니다. 사건 중에서는 애 키우는 아빠라 그런지 유괴사건들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모든 사건에서 유괴 초반에 이미 아이가 살해당하는 이유는, 범인도 처음에는 죽일 생각까지 없었는데 아이의 칭얼거림, 보챔 등의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닫게 된다는 분석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유괴범은 괴물이 아니라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아이에게 교육을 정말 잘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지강헌 사건의 이유가 이른바 사회보호법 때문에 556만원이라는 단순절도에도 무려 17년형을 선고받은 탓이 가장 컸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저라도 미쳐버릴 형량이긴 하죠. 살인범도 한 20년형 선고받는 게 고작인 세상인데.... 어떻게 보면 현대의 장발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약간 아쉬운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사건의 주요 인물과 관계된 단체, 회사를 어떤 사건에서는 애매하게 등장시킨 부분인데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의아했거든요. 예를 들어 장영자 사건에서 사위와 며느리인 탤런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인데, 인터넷 좀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라 구태여 숨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아울러 사건의 범인들의 현재까지 취재하여 엄정한 심판이 이루어졌는지, 관계자들의 근황은 어떠한지까지 알려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이미 출소하였을 윤금이 사건의 범인인 케네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는 수지킴 사건의 윤태식의 근황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윤태식의 경우는 얼마 전 여대생 청부살해 사모님과 같이 편안한 징역생활을 하고나 있지는 않은지 걱정도 되니까요.

여튼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책으로 범죄, 사건을 다룬 논픽션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중에서도 이 글들을 아직 다른 매체로 접하지 않으신 분들께는 추천드립니다.

2014/11/19

세계적인 과학수사 - 콜린 에번스 / 김옥진 : 별점 3점

세계적인 과학수사 - 6점
콜린 에번스 지음, 김옥진 옮김/가람기획

과학 수사, 법의학 관련 서적입니다. 건당 길어야 열페이지를 넘지 않도록 요약되어 있어서 전체 분량은 450페이지를 조금 넘는 정도네요. 크게 아래의 15개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 프로파일링
  2. 시신의 신원확인
  3. 혈청학
  4. 사망시각
  5. 독극물학
  6. 탄도학
  7. 사망원인
  8. 문서감정
  9. DNA분석
  10. 폭발물과 화재
  11. 지문감식
  12. 법인류학
  13. 치의학
  14. 흔적증거
  15. 성문

"과학" 수사가 주제인 덕분에 가장 오래된 사건도 19세기 후반 사건입니다. 특정 사건으로 인하여 해당 기술이 유명해진 것들이 많기 때문에, 주로 20세기 초반까지의 사건들이 주요하게 다루어지고요. 20세기 후반 유명 범죄도 몇건 있기는 하지만, DNA 분석과 같은 신기술이거나 너무나도 유명해서 빼기 어려웠던 사건들에 한합니다. 주제로 삼은 15개 항목의 대부분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실제 사건을 통해 그 실효성이 검증된 것들이니 당연하겠지요.

익히 알고 있던 사건도 많지만, 관련하여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코와 반체티 사건은 일종의 인종차별, 정치적 탄압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탄도학으로 범행에 사용된 총알이 사코의 총에서 발사된게 증명되었다는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놀랍게도 사코가 범인이라는 뜻입니다.
린드버그 아들 유괴사건도 범인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해 왔었지만,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사다리와 용의자 하우푸트먼의 집에서 발견한 재료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명백한 흔적 증거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모호한 부분도 없지는 않으나, 이 정도면 범행에 깊이 관여한 것은 분명하기에 유죄판결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20세기 초중반 범죄자들이 완전범죄를 노리고 벌였던 사건들도 인상적입니다. 독극물 검사를 빠져나가기 위해 동공을 일부러 확장시키기 위한 아트로핀을 투입했던 로버트 뷰캐넌 사건, 남편을 독살했는데 남편에게 가져다 주던 커피를 실수로 흘린 것 때문에 발목이 잡힌 에바 레이블런 사건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니벌 알모도바르 사건과 같은 조금 어설픈 알리바이 공작들도 몇 개 눈에 띄이고요. 시대를 막론하고 범죄자들의 생각은 다 비슷한 것 같네요.
또 팬암의 여승무원 헬레 크래프츠 살인사건은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범행을 재구성할 때 유력한 용의자인 남편 리처드가 냉동고와 나무분쇄기를 구해 놓았었다는 점에서 영화 "파고"가 바로 떠올랐습니다. "나비성"이었나 "적색등"이었나.. 여튼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 중 하나에서도 분쇄기로 시체를 갈아버리는 트릭이 등장했던 기억도 났고요. 여튼 수사관들이 나무분쇄기로 시체를 뿌린 서토닉 강을 샅샅이 뒤져 소량이지만(책에 따르면 인체의 1/1000 정도) 사체를 찾아내어 범인을 유죄로 만들 수 있었다니 다행일 뿐입니다.
그 외에도 작업복 한 벌 분석을 통해 범인의 모습을 거의 실제처럼 묘사해 낸 도트레몽 형제 사건, 침대에서 발견한 1cm 정도의 털 한가닥으로 범인이 밝혀진 낸시 티터턴 살인사건, 방문자를 대접한 형태로 봤을 때 아주 친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피해자의 옷과 범인의 옷에서 발견된 흔적 증거로 범인을 잡아낸 로저 페인 사건 이야기 등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러한 수록 사건들 중 최고를 꼽자면 프레더릭 스몰 사건입니다. 집에 큰 불을 질러 범죄 흔적을 지워버리려 했지만 방바닥이 먼저 타올라 아내의 시신이 침실에서 지하실로 떨어져 발목을 잡힌 사건인데, 이유는 범인 스몰의 인색함 때문입니다. 본인 스스로 싸구려 판자로 지하실 천정의 일부를 다시 만들었는데, 바로 그곳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이거든요! 큰 범행을 앞둔 인간이 쪼잔하게, 인색하게 굴면 안되는 법입니다. 특히 살인에는 돈을 들여야죠. CMB 20권의 에피소드에서 처럼요.
남편 살해를 완벽하게 저질렀지만 의사가 사고가 아닌 폐기종으로 진단한 사망확인서 때문에 스스로 경찰에 전화를 걸어 사건 수사를 진행하게 만든 스텔라 니켈 사건도 비슷한데, 스텔라는 조금이나마 돈을 받은 시점에서 포기했었어야 합니다. 하긴 도박판에서 돈을 조금 딴 시점에서 일어난게 가장 힘들다고는 하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허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너무 요약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개략적으로 훝어본 뒤, 정말 깊은 관심이 생기는 사건은 별도의 다른 책을 찾아보게 만드는 일종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 정도에 그칩니다. "손과 낵" 사건이 궁금하다면 타블로이드 전쟁을 찾아보는 식으로요. 덧붙이자면 이전에도 언급했던 가람기획의 책 답게 번역이나 책의 만듬새는 약간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풍성하고 재미도 있으면서도 자료적 가치도 높은 책이 도서정가제 실행을 앞둔 할인 열풍으로 50% 할인된 금액으로 판매되고 있으니 고맙기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을 생각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네요. 이런 류의 책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 1 : 그나마 잡힌 사건만 수록되어 있는데 용케 빠져나간 범죄자는 얼마나 많을까요?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4/10

기억 속의 유괴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5점

저자의 "붉은 박물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작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않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단편다운 기발하고 신선한 부분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록작 전부가 빼어나지는 않고, '설녀' 히이로 사에코 관장의 만화적인 설정은 여전히 별로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고생 추락사 사건"

1991년 2월, 기타구 도립 니시가하라 고등학교에서 2학년 여학생 후지카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후두부를 화단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친 것이 사인이었고, 사건 당시 아래층에서 일하던 작업자는 옥상에서 한 소녀가 "이제 곧 작별이네요.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유리코가 선배에게 고백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졌고, 같은 미술부 3학년 남학생 세 명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고 공소시효까지 만료되었습니다.

'붉은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던 사건의 전제를 뒤집어 버립니다. 당시 고백한 사람은 유리코가 아니라 그녀의 후배인 1학년 여학생이었고, "이제 곧 작별"이라는 말 역시 죽음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 전학을 뜻하는 말이었다고요. 그래서 당시 1학년생 가운데 전학을 간 학생을 추적해, 그 학생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연쇄 방화 사건"

1990년, 후추, 고쿠분지, 구니타치, 다치카와 일대에서 연쇄 방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이나 교환 방화설은 설득력을 잃었고, 여러 건 가운데 한 건만 진짜 목적이고 나머지는 위장이라는 해석도 방화 횟수가 너무 많아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범인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건의 실마리가, 범인을 신고하려다 살해당한 가타노 사치에의 전화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야채 장수 오시치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확인된 유일한 공통점은 방화 대상이 된 집들이 모두 24~25년 전에 지어졌다는 점뿐이었습니다.

사에코는 우선 소거법을 이용해 범인이 찾고 싶어 했던 대상들을 추려냅니다. 소방관은 다른 사람이 출동할 수 있어서 제외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동시에 특정한 조건을 가진 집들을 계속 태웠다는 점을 연결해 사건의 목적을 밝혀냅니다.

그렇게 해서 추리해 낸 진상은 현장검증 책임자 벳쇼가 진범이며, 그는 연쇄 방화가 일어나면 동일한 수사 인력이 반복적으로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특정 시기에 지어진 집들 가운데 한 곳의 바닥 밑에 묻혀 있을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안의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켰습니다. 시신이 훼손되거나 혼동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시치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고, 연쇄 방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통해 범인의 목적과 정체를 밝혀 나가는 추리도 빼어납니다. 어머니의 사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치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단점이 조금 거슬리지만, 큰 흠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토막 사체 사건"

1999년 3월 23일,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머리와 몸통, 양팔의 위아래 부분, 양다리의 위아래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위가 관절을 중심으로 절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보통 토막 사체는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절 부위를 추가로 정교하게 잘라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두고 흥미로운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사에코는 범인이 "가동 범위가 큰 관절"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고 보고, 이것이 시신의 마지막 자세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는 죽은 뒤 사후 경직이 일어나 특정 자세로 굳었을 것이고, 그 자세만 보면 범행 현장이나 범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이지요.
또 범인은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굳은 자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시신을 관절 위주로 절단해 유기했다는 점을 통해 사에코가 지목한 범인은 피해자의 지인 쓰카모토 가즈오였습니다.

피해자는 가즈오의 중고차 가게에서 차를 타며 자주 놀았는데, 차에 앉아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 뒤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피해자가 운전하는 자세로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즈오는 피해자의 아내 오리에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남편 호소다의 성으로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막고 싶어서 시신이 빨리 발견되도록 유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처럼 사후 경직으로 범행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절'을 제거했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네요. 정말 획기적입니다. 단편 특성상 용의자가 몇 명 등장하지 않아서 범인이 빠르게 짐작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회사원 살해 사건"

1990년 3월 14일, 미나미시나가와에서 회사원 후지시로가 살해당했습니다. 후지시로는 주변 동료들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게 만들고, 그런 상황을 즐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많았고, 사건 역시 원한 관계를 중심으로 수사가 전개되었지만 유력한 용의자에게 알리바이가 있어서 결국 미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평균 이하였던 졸작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에코는 후지시로가 속한 재료과 멤버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혀 가는데, 그 전제부터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협박이나 금전적 압박이 특정 부서 사람들에게만 향했을 리 없으니까요.
또 후지시로의 집에 있던 의자의 위치를 보고 그가 어깨를 다쳤다고 추리하는 부분까지는 흥미롭지만, 그것이 사건 해결의 핵심 근거가 되는 과정은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의자를 무엇에 썼는지는 피해자가 죽었으니 밝힐 수 없기도 하고요. 청소하느라 빼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에 더해 진범 사와모토가 구보데라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을 빼앗았다는 반전은 최악입니다. 앞서 구보데라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제시해 놓고, 나중에 사실은 그 인물이 이미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고 뒤집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를 납득하게 할 만한 사전 단서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억 속의 유괴"

26년 전, 다섯 살이던 토다 나오토가 유괴당했습니다. 당시 범인은 몸값을 요구했지만, 결국 별다른 이유 없이 나오토를 풀어주었다.

친모가 나오토와 동반 자살을 할 목적으로 납치했지만 양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뒤, 양부모는 친모의 사체를 유기하고 나오토가 납치당한 기억을 왜곡시키기 위해 유괴 사건을 자작했다는 것이 진상입니다.

양부모가 매년 어디론가 참배를 갔던 점, 범인의 이상했던 당시 몸값 요구 같은 단서는 있지만 친모의 정체 등 독자에게 공유되지 않는 정보가 많아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납치와 유괴,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소품 느낌을 준다는 점도 별로였고요. 납치와 살인은 우발적이고, 유괴가 작위적인 연극인 탓이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9/01

익명의 전화 - 야쿠마루 가쿠 / 최재호 : 별점 1.5점

익명의 전화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 담당도 아니었던 아라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누명을 쓰고 경찰에서 쫓겨난 아사쿠라는 그 뒤 가족과도 등을 돌렸다. 그러나 딸 아즈사가 유괴당한 뒤, 유괴범을 홀로 잡으려다가 유괴범들의 목적이 3년 전 사건의 진실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 몰입감을 주는 전개로 다수의 인기 작품을 발표한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도입부만큼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3년 전, 마약에 취해 사고를 일으켜 유치원생을 포함한 7명을 사망케 한 아라이 사건의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라이 사건을 몰래 수사하다가 경찰 조직에 의해 인생을 망친 경찰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 경찰을 만나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 떳떳해지자고 설득하는게 순서일겁니다. 그런데 대뜸 유괴부터 한다? 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유괴범들이 나오미와 아사쿠라가 몸값을 들고 뺑뺑이 돌게 만들 이유도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몸값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이라고 요구하면 되니까요. 경찰인 치하루가 유괴범 중 한 명이었으니, 뺑뺑이를 통해 경찰 신고 여부를 파악할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이 과정에서 아사쿠라가 유괴범으로 몰리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겨서 조사만 불편해지고,1억이라는 돈을 낭비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1억은 마약상에게 준거라 동정의 여지도 없고요. 

뺑뺑이 과정도 복잡하게 서술하여 치밀해 보이지만 나오미가 범인이 준, 거는게 불가능한 핸드폰을 가지고 범인에게 휘둘리는 장면에서 메모를 적어 역무원이나 건물 경비원에게 줄 생각은 왜 못했는지 등의 단점만 눈에 띕니다. 유괴극이니 반드시 몸값 전달하는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등장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아사쿠라가 이미 남과 같은 자신에게 처음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내 나오미가 경찰에 신고하려는걸 막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건 마찬가지에요.

이후 아사쿠라가 아라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은 더 가관입니다. 현직 경찰 시절에 몇일에 걸쳐 조사해도 밝혀내지 못했던 진상을,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신세로 하룻밤만에 알아낸다? 설득력이 없습니다. 사기꾼 범죄자 키시타니의 도움이 있기는 하지만, 현역 경찰 신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수사력과는 비교하기 어렵지요.
조사 방법도 스스로를 미끼로 내걸어 경찰의 움직임을 떠 본다던가, 급작스럽게 카라키를 불러낸 뒤 먼 곳에서 쌍안경 관찰로 의중을 파악한다던가, 일부러 아라이의 공범이었던 이와키가 속한 조직에게 잡혀간다는 식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계획과는 무관한 즉흥적인 발상 투성이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도 맞으면서 버티는 '몸빵' 밖에는 없고요.

진상을 알아낸 것도 아라이의 공범인 전직 경찰 이와키를 찾아내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인데,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사고는 도주하던 아라이가 경찰의 총에 맞아 일어났으며, 아라이는 유력 정치인 니시자와를 협박하던 범인이었기 때문이라는게 겁니다. 니시자와는 매춘부 아케미와 마약을 하다가 아케미가 죽게되자 아는 경찰을 통해 사건을 무마시키켰는데, 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던 거지요. 그래서 니시자와와 연결되었던 경찰이 무리해서 협박범을 잡으려다가 사고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니시자와의 관계 여부를 떠나서 일곱 명이나 죽은, 그것도 희생자 중에 어린 유치원생이 포함된 사건을 덮는다는게 21세기에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총소리를 들은 증인이 분명히 있었고, 당시 수사를 하던 아사쿠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게다가 생존한 유치원 버스 운전사 미카미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 이 정도면 거의 국가에서 움직여 조작한 수준입니다. 주택가에서 차량 추격 중 총질을 한다는 헐리우드 영화스러운 발상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또 이 진상은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어색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서던 카라키가 나오미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대화는 다 녹음되었고, 카라키가 아사쿠라를 협박하는 영상까지 찍혀 완벽하게 외통수에 몰리게 되기는 하지만 , 7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사고를 덮었는데 고작 이 정도 사건을 덮지 못한다는건 설득력이 약한 탓입니다. 아사쿠라가 이와키로부터 확보한 증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최소한 니시자와와 아케미가 함께 마약을 하고 정사를 나누던 비디오 테이프는 확보했어야 했습니다. 지문이 묻은 마약 봉투와 영수증 따위는 증거가 될 수 없어요. 봉투와 영수증의 지문이야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증거로서의 효력은 없습니다.
설령 증거가 된다고 한 들, 니시자와가 마약을 했다는 증거이지 그가 아케미 사건, 그리고 아라이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사건 은폐에 앞장섰던 장인 마사타카가 아사쿠라의 호소에 개심해서 자수한다는 끝맺음은 최악 중 최악이고요.

그 외에도, 유괴 수사를 벌이는 와중에 유괴 아동의 어머니인 나오미가 태연하게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전개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괴와 상관없는 제3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토다의 존재도 불필요했습니다. 나오미가 아사쿠라의 진심을 알게되는 계기가 된 증언을 한 게 전부니까요. 이는 치하루가 해도 되는 역할입니다. 토다의 과거도 뻔하디 뻔하고요. 단순한 분량 늘리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와 설득력, 현실성 등 뭐 하나 갖추지 못하고 흔해빠진 설정들로만 이루어진 졸작입니다. 찾아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12/26

Q.E.D Iff 증명종료 12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2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이번 권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괴 교섭을 다룬 "좋은 사람"과 복잡한 트릭이 사용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재생의 시간" 입니다. "좋은 사람"은 평균 이하였지만, "재생의 시간"은 Q.E.D가 다른 추리 만화와 다른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편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사람"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아르젠트 (알) 로셀리니가 시리아 무장 단체에게 유괴되었다. 교섭인 시나 샌드는 토마의 옛 동창이어서 토마와 가나는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그녀와 이탈리아 정부, 그리고 알의 백부 마이클까지 모두 3개의 창구가 존재하는 상황으로 교섭은 난항을 겪는데....

유괴 교섭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단순 교섭보다는 복잡합니다. 세 개의 창구가 교섭에 나선 탓입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에게 범인 X의 요구액이 너무 높으니 일부분을 부담해달라는 부탁을 해 보라는 토마의 계획은 기발합니다. 만약 다른 두 창구가 범인과 교섭하고 있는게 아니었다면 동의할테고(인질 석방이 우선이니), 그들도 교섭 중이었다면 거절할거라는 이유입니다.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의 거절로 범인이 세 개 창구 모두와 교섭하여 몸값을 받아낼 속셈이라는걸 알아낸 뒤, 모두의 몸값 전달 날짜가 다르다는걸 통해 각각 다른 사람들과 교섭하고 있다고 추리하게 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개 창구가 교섭하는건 가짜인거지요. 

이러한 교섭 단체간 의견 조율과 교섭 이야기는 꽤 그럴싸 합니다. 또 중동 유괴범들이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투자자도 있고, 이자도 지급하는 등 여러모로 명백한 사업이더군요. 그래서 빠른 교섭이 필요하고요. 투자금 회수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손해가 커지기 때문에 몸값이 점점 올라갈 수 밖에 없거든요.
콘테이너를 이용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에 대한 묘사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난민 소년이 유괴범 일원이 되는 과정도 설득력이 있고요. 즉 유괴 교섭, 유괴 사업, 유괴범에 대한 드라마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그런데 알을 돌려받는 클라이막스는 영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까지 토마와 가나가 나서서 위험에 휘말릴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요. 또 알과 가나가 절벽 아래에서 탈출하기 위해 숨겨둔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다는건 과정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중요한 조사를 가나 한 명으로 돌려막기 하는 내용도 비현실적입니다. 가나 혼자 이탈리아에서 마이클을 만나 협상하고, 마이클 비서를 자칭하여 은행으로부터 몸값 전달 날짜를 알아낸다는 식인데, 일본이었다면 모를까 외국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진행한건 지나쳤습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가나도 토마 못지 않은, 어학과 연기의 천재인거지요. 이 정도면 "엘프 사냥꾼"의 코미야마 아이리급이 아닐런지?

이야기도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유괴 교섭인에 대한 이야기, 유괴된 인질의 탈출극 (?),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 좋은 사람 알에 대한 이야기가 마구 뒤섞여 있거든요. 예전 "마스터 키튼" 속 에피소드처럼 '교섭' 하나에 집중하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재생의 시간" 

잡지 기자 크리스는 시의회의원 모카이에게 찾아가 17년전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며 협박하여 300만엔을 뜯어 내었다.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여 출입금지된 장소에서 목을 메고 죽은걸로 보이는 백골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었다. 유류품으로 사체는 스미야 코우사쿠로 판명되었는데, 그는 이미 14년 전 실종된 상태였었다(현 시점에서는 17년 전).
경찰은 14년 전 스미야가 이 장소에서 목을 메고 자살했다고 결론내렸었다. 하지만 스미야는 함께 일하던 쇼우스케와 자주 다퉜으며, 쇼우스케가 큰 상처를 입고 기숙사로 돌아온 17년 전 어느날 돌아오지 않았었고, 쇼우스케도 곧바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사라졌다.

이후 쇼우스케가 있는 마을로 찾아온 크리스는 시체로 발견되었고, 유력한 용의자는 쇼우스케의 아들 세이지였다. 아르바이트 중 피해자와 다퉜고, 아르바이트하던 술집 근처에서 피해자가 살해되었으며, 시체를 옮긴 보트는 그의 아버지 가게에서 분실된 것이라는 등의 불리한 정황 증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범인이 술집에서 술을 먹는다는걸 알 수는 없었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피해자가 술집에 오는걸 알지 못했다면, 보트를 미리 준비해서 유기 장소로 옮기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살해 현장 근처에는 보트를 숨길 곳도 없었다...

17년 전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사건이 하나로 만나는 작품으로 두 개의 사건은 모두 수수께끼를 품고 있습니다. 17년 전 사건에서 쇼우스케는 범인일 수 없었습니다. 쇼우스케와 스미야가 다투는게 목격된 장소에서 사체 발견 현장까지는 왕복 1시간 이상 걸리는데, 쇼우스케가 다친채로 기숙사로 돌아온건 고작 30분 뒤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누가 봐도 쇼우스케가 범인이니, 무언가 트릭이 사용된게 분명합니다. 현재의 사건에서는 술을 어디서 먹을지 모르는데 보트를 어떻게 미리 준비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요.

토마는 두 사건은 모두 밤에 술 마시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공통점에 착안하여, 술 마시러 가는 장소 모두에 미리 시체를 숨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추리합니다. 스미야는 역 앞 라면집, 산기슭 정식집, 이자카야의 세 개 가게만 다녔기 때문에 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거지요.
산 기슭 정식집 근처에서 도난당했던 포크레인이 발견된게 증거입니다. 범인은 포크레인을 휘둘러 사체를 멀리 던져 버리고 알리바이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17년전 사건에 사용된 트릭과 같아요. 사체가 밀실에서 발견된건, 담벼락 넘어 공중에서 던져졌기 때문이었죠. 꽤 기발하고, 나름 현실적인 멋진 트릭이었어요.

범인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체로 발견된 스미야가 원래 쇼우스케였던 겁니다. 스미야가 쇼우스케를 죽이고 신분을 바꾼거지요. 모카이가 이를 도왔고요. 쇼우스케와 모카이는 고교시절 야구부 배터리로 절친이었고, 모카이는 쇼우스케가 야구부 매니저였던 교우카와 맺어지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그만두고 방탕한 삶을 보내던 쇼유스케가 음주운전으로 교우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도망간 탓에 원한을 품었다가, 스미야가 저지른 사건을 알고 그를 도와준 겁니다.

이후 바꿔치기한 스미야가 교우카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사랑 이야기도 나무랄데 없어요. 처음 봤을 때 부터 사랑했다는 부부의 말은 참 슬프네요. "마틴 기어의 귀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바꿔치기와 트릭을 눈치채고 크리스는 모카이를 협박했고, 스미야(현 쇼우스케)가 그를 죽인겁니다.
크리스가 17년전 사건은 살인 사건이 분명하다며 남긴, '기름게와 무당게의 다른 점'이 핵심이라는 말도 바꿔치기를 의미합니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건 이름 뿐이라는 뜻이지요. 이를 여러가지 단서복선으로 드러내는 전개도 일품입니다.

그런데 추리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현재의 크리스 살인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이자카야에 동행했던 아오야마가 공범에 전화를 걸어 보트를 준비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요? 단독 범행이라고만 생각하는 이유를 통 모르겠어요.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30분 안에 사체를 어딘가 숨기고 돌아온 뒤, 퇴원 후 숨기러 가도 되니까요. 17년, 아니 14년 만에 백골로 발견되었다면 그 정도 차이를 눈치채는건 불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아니면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된 후, 현장을 뒤져 시체를 암매장하는 것도 방법이었고요. 살인사체 유기가 동시에 벌어졌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별다른 증거가 없는 말 뿐만인 추리라는 약점도 큽니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를 살해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설령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게 밝혀진다 한 들,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숨겼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한 명 더 살해해서 위험을 늘리기보다는, 정면으로 반박하는게 더욱 타당했습니다. 

아울러 토마와 가나가 무리하게 사건에 뛰어들어 추리를 도와주는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용의자 세이지와 교제하는 마리나와 가나가 친구라는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세이지가 혐의를 벗은 시점에서 더 도와줄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토마가 입만 다물었어도 미제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토마가 웃는 얼굴로 추리쇼를 펼치며 사건을 해결해서 세이지 가족을 파괴해버리고 맙니다. 이래서야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사랑을 방해하는 무자비한 악마, 냉정한 추리하는 기계일 뿐이지요. 한 마디로 토마의 비인간성이 부각된 에피소드입니다. 하긴, 이게 Q.E.D와 토마의 매력이긴 하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에서의 설득력이 조금만 갖추어졌더라면 걸작이 될 수 있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좀 긴 호흡의 소설로 발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2018/05/26

속삭이는 자 1,2 - 도나토 카리시 / 이승재 : 별점 2.5점

속삭이는 자 1 - 6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시공사
속삭이는 자 2 - 6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본 작품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섯 명의 소녀들이 차례로 유괴된 후, 여섯 명 소녀의 절단된 팔이 발견되었다. "아돌프" 라고 명명한 범인의 도전에 게블러 박사가 이끄는 연방 경찰의 행동 과학 수사팀은 총력을 다해 응했지만, 소녀들의 시체가 한 구 씩 차례로 발견되었고, 발견된 장소와 얽힌 추악한 범죄가 함께 드러나며 수사팀은 서서히 와해되는데...

이탈리아 출신 범죄학자의 장편 소설 데뷔작입니다. 회사 동료인 Y리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습니다(Y리님 감사해요!).

천재적인 범죄자와 경찰과의 대결은 굉장히 많이 보아온 물릴대로 물린 설정입니다. 제 블로그에서도 여러 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모방작은 아닙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범죄자 "아돌프"가 여섯 명의 조력자와 함께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두 번째 시체 발견 장소인 옛 고아원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주 기가 막힙니다. 왜 고아원에 시체를 유기했는지? 에 대해 오래전 고아원에서 빌리라는 소년이 살해된 사건을 밝혀내고, 진범 로널드 더미스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들거든요. 로널드 더미스가 "그"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진짜 흑막을 드러내는 연출도 괜찮고요.

작가로서의 첫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전 편에 걸쳐 치밀한 복선과 단서를 배치하는 전개도 인상적입니다. 실종 아동을 찾는 전문가로 팀에 투입된 밀라를 적대시하는 로사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죠. 이는 로사가 발견되지 않은 여섯 번째 실종 아동의 어머니로 유괴 사건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반전으로 이어지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됩니다. 아울러 여섯 번째로 실종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샌드라가 최초의 목표였으며,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 실종 아동은 모두 샌드라의 조건에 맞춰 고른 것 - 때문에 모두 비슷한 또래의 외동 딸들임 - 이라는 이론도 아주 괜찮았어요. "ABC 살인사건"같은 아이디어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못한 만큼, 다른 작품 속 트릭으로 사용해도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나 이렇게 사체가 발견된 장소와 얽힌 다른 사건이라는 설정에 대한 작가의 욕심은 지나쳤어요. 두 번째 실종 아동이 발견된 사건까지는 앞서 말씀드렸듯 아주 괜찮지만, 세 번째 실종 아동과 관련된 조지프 록포드, 네 번째 실종 아동과 관련된 펠더 사건은 그 규모와 잔혹성 모두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탓입니다. 어린 시절 동료 고아를 죽인 고아 소년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허나 엄청난 거부가 30여 명의 동성애 상대들을 모두 죽여 저택 인근에 매장하거나, 별볼일 없는 고아 출신 일용직 노동자가 고급 주택가에 거주하는 일가족을 6개월 동안 지배하며 학대하다가 잔혹하게 살해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다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본 이야기와 비교해도 더 자극적이고 규모가 절대로 작지 않은 사건이라 본말전도가 된 느낌도 들고요. 

게다가 수사팀 본부에서 다섯 번째 소녀가 발견된 이유가 팀 내부에 있는 배신자이자 유괴의 조력자인 로사를 고발하는게 아니라, 수사팀의 실질적인 리더인 고란 게블러 박사가 저지른 살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반전도 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전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불필요한 반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앞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묘사된 게블러 박사의 일상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도 조금 입맛이 썼어요. 좋은 아이디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이렇게 까지 해서 독자를 속일 필요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과한 이야기들도 나름 재미는 있어서 그렇다 쳐도, 사건의 진짜 흑막이자 진범인 "속삭이는 자"에 대한 설정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조종해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실제로도 여러 사건들이 있다고 하고, 저자도 범죄학자 출신이라 이런 사건들을 토대로 창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 선보이는 그의 모습, 행적은 모두 모호하고 어떤 건 초능력에 가까운 탓에 설득력이 낮습니다. 물론 몇몇 디테일이 없지는 않습니다. 로널드 더미스(와 펠더)는 어린 시절부터 세뇌했다고 설명하며, 방법도 조지프의 회상에서 살짝 선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몇마디 말, 연극적인 무대 묘사에 그칠 뿐이라 별로 그럴듯 해 보이지는 않더군요. 알렉산더 버먼처럼 특별하게 세뇌하지 않고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게 더욱 현실적으로 보였어요. 

그리고 그나마 방법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이 네 명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유괴할 타겟을 골라내었으며, 어떻게 실행범 빈센트 클라리소를 한 달만에 감방에서 교육시켜 원하는 대로 범행을 저지르게 만들었는지는 아예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이게 사건의 핵심인데, 결국 범행은 증명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니까요. 여기에 더해 아돌프가 고란 게블러 박사가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완전 억지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교도소에서의 모습은 자신의 DNA 정보를 절대로 흘리지 않는다는 식이라 그냥 전능한 존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전능한 범죄자의 비법(?)이 소개되지 않는 점에서는 마에카와 유타카의 작품들이 떠오르는데 좋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겠죠. 이럴 바에야 로널드 더미스가 진범인 서스펜스 스릴러로 끌고가는게 모든 면에서 훨씬 나았을 겁니다.

또 반전에는 욕심을 냈지만 캐릭터 설정은 그렇지 못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고란 게블러 박사와 밀리 형사 모두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레오 타입이라 굉장히 식상해요. 토마스 해리스, 제프리 디버 등 유명 작가들의 두뇌파 남성과 행동파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 속 캐릭터들과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차별화를 두기 위한 여러가지 설정, 예를 들어 밀라가 과거 유괴된 경험이 있고 고통에 무감각한 캐릭터라는 식의 설정도 무리수에 불과합니다. 고통에 무감각한 캐릭터치고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왜 이런 설정을 넣었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여러모로 욕심이 너무 과해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재미를 선사해 주는 만큼 소일거리를 찾으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08/06/15

무지개집의 앨리스 - 가노 도모코 / 장세연 : 별점 2점

무지개집의 앨리스 - 4점
가노 도모코 지음, 장세연 옮김/손안의책(사철나무)

전에 읽었던 "나선계단의 앨리스"에 이어지는 샐러리맨 출신 탐정 니키와 아리사 컴비 연작의 두번째 단편집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른바 "일상계 미스터리물"을 많이 접하다보니 식상하기도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없는 탓입니다. 일상계 미스터리가 잔잔하고 소소한 사건들을 다루는 이야기라고는 하더라도, 이렇게 재미없어서야 소설 자체로 성립하기 어려운거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추리적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도 별로 없어서 추리물로의 재미 역시 많이 부족합니다. 소시민 고바토 - 오사나이 시리즈 역시 두번째 작품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이 무척 재미없었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일상 속에서 펼쳐질만한 재미있고 기발한 소재"가 동일한 캐릭터로 계속 등장하는건 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하여튼, 수록된 여섯편의 이야기 대부분이 지루하고 시시합니다. 이렇게 시시할 바에야 만화 QED처럼 일상계에 얽매이지 않고 잔잔하고 소박한 사건 + 강력 사건 미스테리가 잘 어우러져서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이 나았을 겁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인 "네 탓이야" 같은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니면 일상 속에서의 악의나 서늘한 사건을 그리는 로열드 달 분위기로 가 주던가.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세 번째 시리즈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지루한 일상계 시리즈의 전형이라 판단되기에 저는 더 이상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중 그나마 베스트를 꼽으라면 평작 이상 수준은 보여주는 "감옥의 집의 앨리스"를 꼽습니다.

"무지개 집의 앨리스"

아리사를 통해 소개받은 주부들의 모임에 참석한 니키는 자신이 "미세스 하트"라 별명을 지은 부인에게 조사 의뢰를 받았다. 그녀가 속한 주부들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과 협박장들에 대한 의뢰였다. 

이번 편에 많이 등장하는 주부들 커뮤니티 시리즈 1작입니다. 워낙 사건이 별볼일 없어서 지루합니다. 일본어 말장난은 짜증나는 수준이고요. 결말은 그나마 깔끔했지만 뻔해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감옥의 집의 앨리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산부인과 아오야마 의원과 우연한 통화를 통해 병원에서 발생한 신생아 유괴 사건 의뢰를 받는데...

1편에 등장했던 아오야마 의원이 또 등장하네요. 이 작품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약간 강력사건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추리적으로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던 덕분입니다. 동기와 사건 전개 모두 확실한,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고양이 집의 앨리스

"무지개 집의 앨리스" 편의 주부 모임에서의 또 다른 사건 의뢰는, 그녀들의 친구인 애묘인 사나에씨가 우연찮게 발견한 고양이 ABC 살인사건이었다. 

역시나 주부 커뮤니티 시리즈입니다. 고양이 ABC 살인 사건이라는 설정 자체도 웃기지만 모든 것이 익명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진다는 설득력없는 전개가 영 맘에 들지 않더군요. 결말 역시 씁쓸했습니다.

"환상의 집의 앨리스"

아리사의 본가 가정부 후키코의 의뢰로 니키는 아리사가 왜 후키코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조사하는데...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아리사의 과거에 얽힌 추억담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캐릭터 설명을 위한 취지는 좋지만 힘이 다 빠질정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추리 단편이라기 보다는 아리사 팬픽에 불과합니다.

"거울의 집의 앨리스"

니키의 아들 슈헤이가 자신의 약혼녀 유리아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과거 사귀던 아키코라는 아가씨로부터 협박을 받게 된 탓이었다.

니키가 추리에 실패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전작에 이어 이번 편은 니키의 과거와 가정사에 얽힌 이야기인데, 전작보다는 낫습니다. 제법 긴장감있는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유리아에 관련된 결정적인 단서가 그닥 공정하지 못해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었고요. 

그나마 보석 은닉 장소에 대한 내용만큼은 괜찮아서, 이 정도면 평작 정도는 됩니다.

"꿈의 집의 앨리스"

주부 모임을 통한 화분, 화초 도난 사건의 의뢰와 정체불명의 여인으로부터의 마치 소설과도 같은 의뢰 등 갑자기 몰린 의뢰를 해결해 나가는데...

화초 도난 사건의 진상이 그닥 명쾌하지 않아서 주 사건으로서의 긴박감이 많이 떨어집니다. 정체불명의 여인의 의뢰는 괜찮았지만 워낙 주 사건이 심하게 아니라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2015/06/22

13.67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점

13.67 - 6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100여페이지 정도 분량의 중단편 6편이 수록된 연작 중단편집. 제목의 13.67은 2013년에서 시작하여 1967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적 배경을 의미하고 있죠. 탐정역의 관전둬가 전편에 등장할 뿐더러, 뤄 샤오밍이나 탕 아저씨, 범죄자 스씨 형제 등 등장인물들이 여러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등 연작, 시리즈 느낌이 강합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중국 추리소설이라는 점인데, 단지 이색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중국 추리소설 수준도 정말 높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탐정역인 '천리안' 관전둬의 뛰어난 추리력과 사소해보이던 단서들의 조합으로 진상이 밝혀지는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성도 좋지만, 진상이 놀랍기 때문에 흡사 반전 스릴러를 읽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국 작가가 쓴 중국 추리소설이기에 선보이는 중국 - 홍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에요. 특이한 계급명과 CIB를 비롯한 중안조, 반흑조, 특별 직무대, 비호대와 같은 다양한 부서명에 1호 (경찰 최고위인 경무청장의 속칭), 장작 (제복 문양)같은 중국 - 홍콩 경찰 관련 용어 및 은어들, 탁가, 고혹자, 파파라치, 다취안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범죄자), 도사 (마약중독자), 일루일봉 (홍콩 특유의 매춘업소) 과 같은 범죄 관련 은어, 호루라기를 분다 (동원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한다)나 책에 들어간다 (감옥에 간다), 저수지를 경비한다 (한직으로 밀려난다)와 같은 홍콩 속어, 은어로 탄산수를 "네덜란드 음료수"라고 부른다거나 광둥어로 농땡이부리는 사람을 사왕이라고 한다는 등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실존하는 맥퍼슨 스타디움, 퀸 메리 병원, 프린스 에드워드 서로, 퉁초이가 (여인가) 등 몽콕의 거리, 그레이엄가 시장, 카오룽 거리와 같은 이국적 풍광 역시 가득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탐정인 관전둬의 캐릭터가 큰 매력이 없다는 점이 그러해요. "천리안" 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경찰로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이지만 사생활에서는 구두쇠 수준으로 알뜰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라는 식으로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한 묘사는 제법 되기는 하나 특별히 와 닿지도 않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또 몇몇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기도 합니다. "죄수의 도의" 편이 대표적이죠.

허나 단점은 사소할 뿐, 부담되는 분량임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자극도 많이 되었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새로운 추리 소설을 읽기 원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저와같이 80~90년대 홍콩영화 최 전성기 팬이시라면 더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책 소갯글을 보니 영화가 나온다고 하는데 꼭 보고 싶어집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흑과 백 사이의 진실"

펑하이 그룹의 총수 위안원빈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담당인 뤄 독찰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사부 관전뒤의 병실로 사건 관계자들을 소집하는 것. 이유는 관전둬가 사건해결 100%를 자랑하는 명탐정이지만 간암말기로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으로 병원에서 뇌파를 읽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하여 관계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듣고 그 자리에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관전둬의 추리를 통해 단순 강도사건인줄 알았던 사건이 위씨 가문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 - 테이프, 다이잉 메시지가 없는 이유, 흉기인 작살에 대한 이상한 사실 등 - 을 통해 아들 위용렌이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뤄 독찰은 위용렌 뒤에 고용인 탕 아저씨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한다. 탕은 경찰서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설임을 전제로 사건의 진짜 동기와 위용렌을 조종한 방법 등을 낱낱이 밝힌다. 그를 옭아맬 증거는 전혀 없는 상태. 그러나 뤄 독찰은 탕이 관전둬를 살해하는 현장을 촬영하여 그를 관전둬 살해범으로 체포하게 된다.

2013년을 무대로 한 첫 이야기. 그동안은 링컨 라임이 안락의자 탐정의 최고봉이라 생각했는데 그를 뛰어넘는 존재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탐정이거든요.

이런 설정은 좀 작위적이고 웃기지만 추리의 흐름은 괜찮습니다. 바닥이 어질러져있지만 침입한 흔적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초반부, 위씨 가문의 무남독녀 위첸러우에 관련된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는 중반부, 테이프와 작살총, 다이잉메시지가 없는 상황 등을 통해 범인을 확정하는 후반부까지 모두 합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이기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공정한 편이고요.

무엇보다도 탕 아저씨가 진정한 흑막이며 사건의 핵심 동기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어요. 위용롄의 설득력없는 동기에 비해, 설득력은 물론 드라마까지 갖춘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용롄을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아울러 뤄독찰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었다는 것도 앞서 말한 작위적인 설정을 잘 포장하고 있어서 꽤 괜찮았어요.

그러나 탕이 관전둬를 살해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이 영 별로네요. 그가 직접 나서서 관전둬를 살해할 이유가 없거든요. 본인 스스로 말했듯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뭐하러 추가 범행, 그것도 경찰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가며 뒷처리를 해야 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아도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고 그의 추리도 결국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가설이자 추론에 불과할텐데 말이죠.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 사족만 없었어도 별점 3점이상은 충분했을텐데 아쉽습니다.

"죄수의 도의"

잘 나가는 엔터회사 사장이지만 실상은 흑사회 보스인 줘한창을 검거하려는 뤄샤오밍은 실패만 거듭한다. 그러던 중 줘한창 회사에 소속된 신인가수 탕린이 괴한에게 습격당하고 살해당하는 동영상이 배포되는데....

줘한창을 잡아넣기 위해 암흑가 도의를 굳게 지키는 경쟁 조직 보스 런더러의 입을 열게 만든다는 작전이 그려지는 작품.

솔직히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특히 죄수의 딜레마가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영 모르겠어요. 죄수의 딜레마가 소용이 없는 암흑가 도의가 관련된 특수 상황에 대한 것은 알겠지만 런더러가 입을 여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또 탕린이 사실 줘한창에게 복수를 다짐한 전 정보원의 딸이라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과거 가쉽으로 접해보았던, 암흑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홍콩 연예계의 이면을 그린 점은 괜찮았지만 평작 이상의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장 긴 하루"

최고의 지능범인 스번톈의 탈옥 사건과 시장 대상의 무차별 산성액 투척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진 날, 모든 사건을 꿰뚫어 본 관전둬는 한번에 사건을 해결한다.

스번톈이 저우샹관과 바꿔치기 되어 있다는 진상도 기발하지만, 이를 밝혀내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스번톈 탈옥에 징교원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리는 쉽지만, 작중 등장하는 번호표가 뜯겨진 죄수복,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 산성액 투척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저우샹관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상황, 응급처치에 대한 증언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한 추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스번톈과 대면한 관전둬가 그를 옭아매는 장면도 아주 통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인구밀집형 도시가 무대인 탓에 설득력이 생기는' 작품의 대표적인 예라 더 주목할만 합니다. 탈옥 해 봤자 더 큰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누군가 죽었을 때 누구라도 조그만 의심을 품으면 법망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홍콩만의 상황을 기본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홍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홍콩 추리문학계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스케일이 큰 만큼 영화화에도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영화로도 보고 싶네요.

"테미스의 천칭"

흉악범 스씨 헝제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스번성이 머무는 은신처 주위에 잠복한다. 그러나 일당이 도주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잠복 중이던 TT가 이끄는 경찰들이 그들을 체포하려 나서고, 총격전 끝에 범인은 모두 사살하지만 인질이 된 시민이 모두 죽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후 경찰내 내통자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발견되고 사건을 지휘하던 가오랑산이 TT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홍콩 영화에서 봤던 악당과의 총격전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작품. 봉쇄된 주상복합(?) 건물에서의 활극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TT가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라는 진상도 놀랍지만 동기가 합리적으로 그것을 끌어내는 추론 역시 타당하거든요. 몇몇 사소해보이는 대사에서 단서를 끌어내는 관전둬의 활약이 빛을 발하거든요. 아울러 전작의 스번톈과 필적하는 강적 TT와의 두뇌 싸움도 돋보였습니다. 무선 발신 시간과 총격전 시간을 조종하는 트릭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명확합니다. 관전둬의 추리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때문에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벌이는 관전둬의 협박(?)이 그리 와닿지 않기도 합니다. TT가 총탄이 바꿔치기 당했다고 우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공간"

염정공서에 근무하는 영국인 그레이엄 아들 유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염정공서가 홍콩 경찰의 부정부패를 캐고 있었기에 경찰 조직과의 마찰이 있다는 당시 홍콩의 시대적 배경을 작품 전편에 깔고 있습니다.

유괴물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지금 보아도 흥미진진한 몸값 전달 방법이 그 백미입니다. 지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금괴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는 것, 혹시 모를 탐지기를 무효화하기 위해 수영장 잠수를 지시하는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시대에 적합했던 수사 현실을 반영한 완전 범죄 계획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범인이 몸값 회수에 실패하는 결정적 이유인 주머니의 지퍼 고장 역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고요. 홍콩에 실존하는 여러가지 공간을 활용하여 현장감이 높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아서, 관전둬가 사간의 진상을 깨우치는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될 뿐더러 반전도 괜찮습니다. 유괴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제로는 집 금고를 열고 서류를 훔쳐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린 좋은 동기였습니다.

허나 경찰이 연류되어 있었다면 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운과 우연에 많이 기댄 계획이니까요. 특히 리즈는 상근 유모이기에 열쇠를 복제할 기회는 찾다보면 분명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사건을 키운건 쉽사리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이국(異國) 독자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아울러 관전둬가 직접 서류를 훔쳐낸 뒤 벌이는 공작 역시도 이해는 잘 되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주모자를 체포해 나가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유괴 자체는 굉장히 잘 그린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시간"

1967년, 영국 정부와 홍콩인의 충돌 및 좌익 인사들의 테러 등이 벌어지던 시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사는 화자인 "나"는 "아칠"이라는 순경과 함께 좌익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한 모험에 뛰어드는데...

1편의 악당 탕 아저씨가 화자로, 관전둬가 아칠이라는 순경으로 등장하는 작품. 화자인 "나"의 추리력과 활약이 비상해서 이 친구가 관전둬인지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여튼, "1번"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여 '페리선에서 영국인이 타지 않았다'는 답변을 통해 1번 차만 페리로 옮기며 운전사는 중국인이었다는 상황 설정이 돋보입니다. 당시 홍콩 거리를 차와 오토바이를 활용하여 질주하는 묘사 등에서 스케일 큰 모험 활극 느낌이 들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크게 눈여겨 볼 부분이 없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딱히 감흥은 없었던 평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06/03

스무고개 - 윤은조 : 별점 2점

삼촌의 집 관리와 포토샵 알바로 연명하는 백수 양여준에게 십년 전 '스무고개'로 연을 맺었던 PC 통신 동호회 당시 지인 '로매(로케이션 매니저)' 가 갑작스럽게 연락해왔다. 이유는 그에게 보내진 협박성 메세지 때문이었다. 과거 동호회에서 '총무' 라고 불리었던 양여준은 로매와 함께 동호회 경험을 되살려 사건 해결에 뛰어들었지만, 살인 사건과 로매의 실종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고 말았다. 여준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아는 최고의 추리력을 지닌 동호회의 창조자이자 리더 '여고' 형 김남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국내 최대, 최고의 미스터리 커뮤니티 사이트 '하우미 (Howmystery.com)' 의 운영자이신 decca님이 집필하여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장편보다는 중편 길이의 작품으로 1, 2부 구성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 전문가가 쓴 작품답게 현대물이지만 여러모로 고전 본격물 느낌이 강한게 특징으로, 단서들이 대체로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1부 관찰 놀이" 은 양여준의 설명으로 여고형이 진상을 알아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모든 정보가 탐정과 독자에게 거의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음은 물론이고요. "2부 탐정 놀이" 는 양여준과 로매가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흐름에 맞춰 함께 추리를 하는 방식이라 조금 다르지만, 공정성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이렇게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만드는 내용 외에도 오래 전 PC 통신 시대를 무대로 한 핵심 설정과 인간 관계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어 반갑더군요. 특히나 작 중 PC 통신 동호회의 주요 활동이었던 '관찰 게임' 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셜록 홈즈의 의뢰인 분석을 현대적으로 변주했다는 점에서 고전 본격물의 향취가 한껏 느껴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놀이에 가까운 여흥으로 가능한, 설득력넘치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입니다. 이 관찰 게임만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어도 참 좋겠다 싶더라고요.

하지만 정작 이야기 자체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고 작위적이라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1부 "관찰 놀이" 부터 이야기하자면, 양여준의 삼촌이 유명한 추리 소설 수집가로 모든건 그의 집에서 희귀본을 훔치기 위해 로매가 벌인 연극이라는게 진상의 설득력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집의 번호를 카메라를 설치하여 알아낸다? 차라리 총무의 행동을 관찰하여 집을 비울 때 잠입하여 책을 훔치는 게 상식적입니다. 양여준이 경찰에 신고만 하면 그 집이 로매의 여친 김미영의 집이라는게 밝혀질테고, 그렇다면 로매가 엮여 있다는게 바로 드러날테니까요. 그리고 삼촌이 책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더라도 유력한 용의자가 로매가 될 게 뻔하다는 것도 문제에요. 아무리 동떨어진 사건이라도 두 사건을 엮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범인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까지 드러내고 무언가 하려고 한다는건 사실 이해하기 힘들어요.

2부 격인 "탐정 놀이" 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과거 여고형의 실종에 대한 진상은 설득력이 빵점인 탓입니다. 우선 아파트 밖에 나간다고 하고 실제로는 밖에 나가지 않고 사라졌다면 아파트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왜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어차피 윗 층으로 가서 범행을 저지를거라면 그냥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지 왜 줄사다리를 썼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CCTV 때문에? 그렇다면 올라가 사다리를 설치한 여고형의 누님은 찍혔을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범행을 위해 로매와 총무를 끌어들인 것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관찰 놀이" 와 마찬가지로 경찰에 신고했다면 큰 일이 났을테고, 설렁 그렇지 않아도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이상한 사람에 대해 행방을 묻고 다녔나는 증언을 경찰이 접수하면 역시나 검거는 시간 문제였을 겁니다. 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인간이 이러한 위험 요소를 구태여 외부에서 불러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유괴 사건에 대한 복수라고 하는 동기도 어설픕니다. 일단 범인이 유괴로 소소하게 먹고 살았다는 설정부터 문제에요. 유괴 사건은 대서특필하고 범인을 검거하고야 마는, 미제 사건일 경우 "그것이 알고 싶다" 등 다양한 매체에서 기억에서 잊혀질 때 쯤 다시 드러내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빵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피해 아동 한명이 사망까지 한 범행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차라리 체포된 후 십 수년의 징역을 마치고 나온 범인에게 복수했다는 식으로 풀어내는게 설득력은 더 높았겠죠. 아니면 이 때 범인이 문을 열었을 때 기절 시키고 그의 어린 아들을 유괴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고형과 그 누나가 키우고 있었다던가요. "1부 관찰놀이" 에서 총무가 고등학생 아들을 보고 놀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정작 추리물로서는 조금 미흡하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판타지나 무협 등 타 장르와 이종 교배한 괴이한 추리물이 범람하는 현 시점에서 보기 드문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고 추리 애호가로서 충분히 즐길거리도 많다는건 분명하니 추리물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지금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읽으실 수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냥 PC 통신 시절, '관찰 놀이' 으로 소소한 추리를 즐기던 멤버들이 나이가 들어 또다시 뭉쳐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가벼운 일상계 이야기로 풀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관찰 놀이 아이디어가 그만큼 괜찮았기 때문인데, 작가님이 이 IP를 활용한 다른 아이디어도 있다고 하니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08/07/22

제 3의 시효 - 요코야마 히데오 / 김성기 : 별점 3점

제3의 시효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노블마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으로 만화 "강력1반"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F현 경찰청 강력반의 이야기로 총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1편은 1반, 2편은 2반, 3편은 3반, 4편은 3반 모두의 이야기이며 5편은 1반의 신참형사, 마지막 6편은 1반과 3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반의 이야기가 좀 많긴 한데 나름 균형은 잘 맞추고 있는 편입니다.

전부 3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에서 각 반마다 지나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의식을 품고 있다는 설정도 특이하지만 각 반마다 특색있는 반장들이 그려지는데 이 반장들 캐릭터가 굉장히 잘 살아 있습니다. 1반의 절대 웃지 않는 "파란 귀신" 구치키와 2반의 전 공안 출신의 엘리트이자 감정없는 냉혈한인 구스미, 3반의 절대 육감의 소유자인 무라세라는 캐릭터들이 각각의 별명과 설정에 잘 어울리는 수사방법, 즉 구치키의 끈질기고 합리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정공법 스타일과 구스미의 용의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지능형 스타일, 그리고 구스미의 육감을 이용하여 범인을 그려내는 수사방법들이 작품에 잘 드러나고 있거든요.

경찰들이 주인공인 경찰 소설이기에 본격 추리의 맛을 느끼기는 좀 어렵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상당한 수준의 트릭이나 두뇌게임이 등장해서 추리 애호가로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것은 덤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을 준다면 3점은 충분한 작품으로 보이네요. 아울러 개인적인 베스트를 꼽자면 제일 마지막 작품인 "흑백의 반전"을 꼽겠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좋지만 만화로 이미 접한 작품은 신선함이 조금 떨어지긴 했으니까요.
만화화 된 것은 1편에서 4편까지이며 나머지 2편은 처음 접한 작품인데 원작을 읽고나니 만화쪽도 비록 복사본을 많이 사용해서 쉽게 만든 작품이기는 하지만 캐릭터도 잘 구현하고 스토리도 매끄럽게끔 잘 극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화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1. 침묵의 알리바이
구스미의 1반이 맡은 사건은 현금차량 탈취 살인 강도 사건으로 용의자 유모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하나 유모토는 법정에서 범행을 전면 부인한다. 알리바이를 제시함에 따라 조사를 맡았던 시마즈의 미숙함과 더불어 찾아온 위기에 1반 반장 "파란 귀신" 구치키가 직접 나서게 된다.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서가 부족하고 법정물로 보기에도 애매하지만 구치키의 캐릭터와 함께 몇가지 사소한 단서에서 풀어내는 진상이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조금 더 길게 가져가서 정통 수사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 제 3의 시효
부녀자 강간 후 남편 살해사건을 저지르고 도망중인 용의자 다케우치의 공소시효를 앞두고 2반은 다케우치의 범행 피해자의 집으로 출동한다. 다케우치가 1주일 간 대만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공소시효가 연장된 것을 모를 것이라 여기고 과거의 인연으로 다케우치가 연락할 것을 기다린 것.
냉혈한 구스미와 1반 소속 형사로 2반에 지원나온 모리 형사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공소시효 연장에 따른 긴장감도 넘치지만 구스미의 치밀한 계략에 따른 "제 3의 시효"와 진범에 대한 추리가 아주 좋았습니다. 단서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라 추리 애호가로서 즐겁게 읽은 작품입니다.

3. 죄수의 딜레마
형사과장 다하타는 자신의 휘하 3반 소속 반장들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서로의 경쟁 때문에 고민이 많다. 마침 진행되는 사건은 3건. 1반의 주부 살인사건과 2반의 조리사 살인사건, 3반의 증권맨 살인사건.
3건의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형사과장 시점에서 그린 이색작입니다. 2반의 사건은 제목의 "죄수의 딜레마"를 끄집어 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만 구스미의 심리 조작이 빛났고 1반, 3반의 사건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이라 보다 흥미진진 했습니다. 나름 형사들의 인정이나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훈훈함이 남다르기도 했고요.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4. 밀실의 탈출구
무라세 반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3반의 히가시데가 반장 대리를 맡는다. 마침 백골로 발견된 여성 사체 사건의 용의자를 알아낸 히가시데는 용의자의 맨션을 덮치지만 용의자는 깜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이 사건을 위한 대책회의가 열리는데..
3반이 주역이지만 주역은 무라세 반장이라기 보다는 반장 대리 히가시데 입니다. 반장 대리의 역할을 맡았지만 동기인 이시가미와의 경쟁으로 날카로운 심리 상태와 용의자가 사라진 것에 대한 의심 등 다양한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어서 읽는 재미가 느껴지더군요. 흡사 본격물의 느낌을 주는 제목만큼의 대단한 트릭이 나오지는 않지만 비교적 합리적인 트릭이기도 하고, 정보의 제공이 공정하며 추리의 과정도 설득력이 높다는 점 역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5. 페르소나의 미소
청산가리를 이용한 노숙자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신참 형사 야시로가 수사를 맡게된다.
1반의 신참 형사 야시로가 주인공인 단편입니다. 야시로의 과거의 트라우마 (어렸을 때 유괴사건 범행에 연루된 것) 가 자세하게 설명되는 등 추리와 수사보다는 한 개인에 대한 소품같은 느낌을 많이 가져다 준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도 굉장히 적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기도 하네요.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되는 트릭은 괜찮았지만 이 단편집에서는 제일 처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6. 흑백의 반전
일가족 세 명이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다하타 과장은 3반이 맡은 이 사건에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1반을 보조로 투입시키지만 두 반은 경쟁의식으로 과열되어 과장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수사가 전개된다.
2반이 등장하지 않고 1반과 3반이 경쟁하는 작품입니다. 두 반의 반장 캐릭터와 유사한 각각의 수사방법이 잘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트릭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모처럼 "본격" 스러운 작품이라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국 과장이 의도한 대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며 사건이 종료되는 것 역시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결말이기도 했고요. 사건의 동기와 범인, 트릭, 수사과정 모두 합리적이고 잘 짜여진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2025/07/05

미치도록 잡고 싶다 - 정락인 : 별점 3점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범죄 전문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미제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사건의 흐름은 물론 왜 지금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1년에 발생한 "'그놈 목소리'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저자는 이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된 가장 큰 원인을 초동 수사 실패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사건 초기 세 번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거든요. 첫 번째는 범인이 돈을 전달하려 할 때 접근했던 수상한 남성을 놓친 것이고, 두 번째는 경찰이 다른 장소에 잠복하느라 범인이 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지게 만든 점, 세 번째는 범인이 은행에 돈을 찾으러 왔지만 현장에서 놓친 경우입니다. 오늘날 CCTV 등의 수사 인프라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적인 추리입니다. 앞서의 "그놈 목소리" 사건의 경우, 저자는 범인이 최소 세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합니다. 범인의 언행, 범행 방식, 통화 기록 등을 종합한 분석이 그 근거입니다. 또한 사건의 최신 수사 현황도 책에 충실히 담겨 있습니다. 이형호 군의 외가 친척인 이 모 씨의 성문이 범인과 완벽하게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명확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급됩니다. 그런데 만약 범인이 여럿이라면, 알리바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희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지금이라도 체포해서 수사할 수는 없는지 독자로서 궁금해지네요.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에서도 실제로 추리 소설의 소재로 활용될만한 추리가 선보입니다. 14층 피해자의 집까지 찾아가려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CCTV에 범인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면 마찬가지로 비디오폰에 촬영되고요. 그러나 두 카메라 모두에 범인이 찍히지 않았고, 아파트 문을 억지로 열지 않았으며, 범인이 화장실까지 이용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피해자와 친분이 있는 아파트 내부자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의 추리입니다. 현관 비디오폰 촬영은 노크를 해서 피했고요. 이 정도면 어느정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대부분 워낙 유명한 사건들이라, 이미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여러 차례 다뤄진 내용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엽기토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정동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평소 저자의 '사건 속으로'라는 이름의 칼럼을 꾸준히 읽어온 저에게는 책에 담긴 정보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접했던 것이었고요. 이런 점 때문에 새로운 정보나 미공개 기록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몇몇 사건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홍해 토막 살인 사건"은 남편의 혐의가 짙은 정도가 아니라 명백해 보이는데도 왜 체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김해, 부산 부녀자 연쇄 실종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사체를 찾지 못해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는데, 최근에는 '시체없는 살인 사건'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최신 판례와 수사 기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았을 겁니다.
미제 사건과 무관한, 저자의 기자로서의 활약과 소회를 담은 컬럼인 "정락인의 사건 추적"은 책의 성격과 많이 다른 탓에 차라리 추가되지 않는게 좋겠다 싶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제 사건 자체의 흥미와 저자의 분석력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알려진 사건 중심의 구성과 정보의 신선도 부족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완전범죄"보다는 깊이있는 정보가 많고, "표창원의 사건 추적"보다는 추리와 분석 측면으로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2013/11/25

킹의 몸값 - 에드 맥베인 / 홍지로 : 별점 3.5점

킹의 몸값 - 8점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구두 회사의 중역 더글러스 킹의 집 거실에서 비밀 중역 회의가 한창이다. 중역들은 더글러스 킹을 포섭하여 회사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더글러스 킹에게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 나름대로 회사를 차지하기 위해 아무도 몰래 준비한 계획은 성공을 눈앞에 두는 듯하지만 뜻하지 않은 변수가 나타난다. 아이가 유괴된 것이다.

하지만 남의 아이다. 남의 아이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이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온 부를 허물어뜨리고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아이의 목숨을 외면하고 부를 유지할 것인가. 어릴 적 가난의 상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출세지향주의자가 된 그이지만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87분서 형사들이 유괴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일단 몸값을 주어야 아이의 목숨을 보장받는다. 선택은 오로지 더글러스 킹의 몫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고 난 후 비슷한 유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몇 년 뒤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인터넷 서점 제공 책 소개 인용>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 장편.

유괴 소재 작품은 그동안 몇권 읽어보았습니다. 유괴 자체가 작전인 정통파 추리물을 비롯하여 피해자 시점, 유괴범 시점, 용의자 시점으로 그린 작품 등 종류도 다양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그간 읽었던 작품과 확실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를 위한 몸값 지불' 이 핵심 설정이라는 점에서요.

물론 그 아이가 생판 남이 아니고, 킹이라는 인물은 충분한 재력이 있기에 몸값을 턱하니 지불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값을 지불하면 그동안 이루어왔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극한 상황에 처한 시점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작중의 킹은 성공을 위해 걸림돌은 남김없이 쳐내버리는 인물로 묘사되기에 그는 몸값을 내지 못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수사하는 형사(스티브 카렐라) 등 주변 인물이 그에게 살인자와 같다는 맹비난을 퍼붓습니다(당연하지요). 심지어 아들을 유괴당한 운전기사는 간절히 애걸하며 무릎을 꿇기까지 하고요.
이 모든 과정이 설득력 넘치면서도, 숨쉴틈없이 이어지며 그 와중에도 킹과 회사가 관련된 위기 상황까지도 깨알같이 전개됩니다. 즉, 돈을 낼 수도 없고 안낼 수도 없는 개미지옥 딜레마에 빠진 상황을 정말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지요. 이 처절한 묘사 덕분에 읽는 내내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그를 뒷받침하는 박진감넘치는 전개는 역시나 거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킹 이야기와 정 반대의 다른 축으로 전개되는 유괴범인 사이, 에디, 캐시 트리오의 이야기도 나름 괜찮아서 재미를 더합니다. 리더이자 사악한 사이, 똘마니 에디, 박애주의자 캐시(?)로 이루어진 트리오는 전형적이고 진부하지만, 캐시가 사이를 견제하고 사이는 캐시를 강하게 억누르고 에디가 완충제 역할을 하는 식으로 절묘하게 조화되면서 긴장감을 불러오는 덕분입니다. 캐시를 초반부터 잘 묘사한 덕에 사건이 해결되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높아졌고요. 또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에디의 라디오 관련 지식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작전을 벌인다는 점, 특히 마지막 몸값 확보 작전에 써먹는 아이디어는 제법 그럴싸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이 작품이 87분서 시리즈일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형사들은 하는게 하나도 없는 탓이에요. 감식과의 활약이 일부 그려지는 정도이며, 오히려 시리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브 카렐라는 앞서 설명했던대로 몸값을 내지 않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는 등, 본인의 위치를 망각한 주제넘은 행동만 일삼습니다. 킹도 분명 피해자인데 수사관이 하라는 수사는 하지 않고 누구를 비난한다는 걸까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징계감으로 보여요. 게다가 몸값을 전달하는 차량에 동승했는데도 불구하고, 결말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킹이 언제나처럼 '직접 나서서' 유괴범을 때려잡는다니 끝까지 하는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작품만 놓고 보면, 말만 많고 활약은 없는 떠벌이 찌질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억지스럽게 87분서원들의 이야기를 넣고 늘려서 시리즈의 하나로 만들 바에야, 차라리 하나의 다른 작품이 되는게 낫지 싶습니다. 아이디어가 아까워요.

결말도 좀 별로였습니다. 사이의 총질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킹이 그를 때려잡는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의 작위적인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디와 캐시가 탈출을 위한 차를 어디서 구했는지, 사이가 돈을 받은 뒤 돌아올 것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애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허술하게 느껴졌고요. 개인적으로는 비열한 배신자 피터 캐머런을 킹이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알려주는 후일담이 없는게 가장 섭섭했네요. 이런 녀석을 짓밟아버리는 결말이 있었더라면 안일한 해피엔딩이라도 충분히 참아줄 수 있었는데...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단점이 명확하다고 평하긴 했으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87분서의 활약을 없애고(이게 마이너스 1점), 심리묘사 중심으로 마지막을 깔끔하게 처리했더라면 별점 5점도 줄 수 있었는데 좀 아쉽네요. 그래도 장점이 워낙 탁월하고 읽는 재미도 확실한 수작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가 쓴대로 단점을 최소화하여 킹의 입장 중심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전개했다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천국과 지옥》을 구해봐야겠군요.

2024/10/27

종이학 살인사건 - 치넨 미키토 / 권하영 : 별점 2점

종이학 살인사건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범인 및 진상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준세이 의대 부속 병원 조직 검사실 병리의 치하야의 아버지 미노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병리해부를 유언으로 남겨서 치하야는 동기이자 지도의 시오리의 보조로 해부에 참석했다. 그런데, 아버지 위에는 암호가 새겨져 있었다. 암호는 28년 전 어린 아이들을 노렸던 미제 연쇄살인극 '종이학 살인사건'의 마지막 피해자 진나이 양의 시신이 숨겨진 곳을 의미했다.
둘은 이를 몰래 알리려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28년 전 형사였던 아버지의 동료 사쿠라이 형사와 진범을 찾아내려 나섰다. 그와 함께 다시 연쇄 살인극이 일어났고, 현장에는 28년 전과 똑같이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으로 이름을 날린 치넨 미키토의 장편 소설. "유리탑의 살인"처럼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 생각했는데, 전형적인 연쇄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아래와 같이 '위 속에 암호를 새겼다.'는 독특한 설정은 흥미로왔어요. 덕분에 이야기 중반까지 흥미를 잘 잡아줍니다. 
치하야, 시오리가 의사이며 특히 시오리가 병리해부를 맡은 병리의라는 설정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미노루가 생전 유전병인 '구루병'을 앓고 있었다는걸 알아내는 식으로요.

뼈가 약해지는 구루병은 X염색체 변이가 원인으로 100% 딸에게 유전됩니다. 즉, 키도 크며 격투기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튼튼해서 구루병을 앓지 않는 치하야는 미노루의 친 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노루의 친 딸은? 목이 부러진채 발견된, 28년 전의 피해자 진나이 양으로 알려진 시신의 진짜 주인공이었습니다. 구루병 탓에 급작스럽게 딸이 죽어 혼란에 빠졌던 미노루의 아내가 진나이 양을 유괴했고, 범인이었던 야기누마(타치바나) 와카코가 이 사건을 연쇄 살인극이 하나로 위장했던 겁니다. 알리바이를 통해 혐의를 벗기 위해서요. 마침 유괴 사건을 엮어 미노루를 협박하기도 해서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지요. 범인을 놓아준 죄책감에 경찰을 그만 둔 미노루는 더 이상의 범행을 막기 위해 와카코를 계속 감시해왔고, 미노루가 죽자마자 와카코는 범행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하지만 여러모로 전작보다 못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많이 부족해요. 범인을 추리할 만한 단서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미노루가 경찰을 그만둔 뒤,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무언가를 감시했다' 정도만 의미있는 단서입니다. 그 외의 단서들은 모두 쓸모가 없어요. 핵심 증거와 단서들은 모두 마지막에 범인이 치하야를 납치하며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후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시오리가 알아낸 아버지의 유전병이라는 단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특했던 '위에 암호를 새긴다는 설정'도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작품에서처럼 위궤양으로 암호가 지워질 수도 있는 등 변수도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에게 사쿠라이 형사에게 전해주라고 편지를 남겼으면 될 일입니다. 게다가 암호로 남길 이유도 없었고, 암호의 내용도 불합리합니다. 마지막 사건의 시신 위치를 알린다 한 들, 이는 진상과 연결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냥 범인 이름을 써 놓지 않았을까요? 범인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에 피해자도 두 명이나 생겼는데 말이지요. 암호 해독도 특별한게 없고요.

전개도 어이가 없습니다. 둘이 암호를 곧바로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 시신 발굴 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 사쿠라이와 비밀 수사를 하는 이유 모두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경찰 수사도 많이 어설픕니다. 특히 가장 어이가 없었던건, 이전 수사 담당자 이노하라가 타치바나 사장의 자식이 마지막 사건에서만 알리바이가 없었다고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모든 연쇄 살인이 단독범의 소행일리 없는데, 마지막 알리바이가 없다고 유력한 용의자를 그냥 풀어주는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려 다섯 명의 아이가 살해된 사건인데, 경찰이 너무 안이한거 아닙니까? 범인이 유괴한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다는 설정도 많이 접했던것이라 식상합니다. 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전해주고요.

이렇게 위에 새긴 암호, 병리의, 유전병 정도의 소재를 제외하면 연쇄 살인범과 형사의 대결을 그리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와 흡사합니다. 범인의 정체도 반전처럼 등장하지만 굉장히 뜬금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은 흥미롭지만 그 뒤의 이야기들은 모두 설득력낮고 억지스러우며, 뻔했다는 점에서 위에 암호를 새기는 상황을 떠올리고, 전체적인 얼개없이 재미있겠다 싶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게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