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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9

별의 계승자 - 제임스 P 호건 / 이동진 : 별점 3.5점

별의 계승자 - 6점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오멜라스(웅진)

달에서 5만년이 경과된 것으로 보이는 우주비행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우주복 안의 유골은 인류와 똑같은 호모 사피엔스. "찰리"라고 불리우게 된 이 유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일전에 "해물파전" 님이 댓글로 추천해주신 책인데 이제서야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해물파전님의 추천 그대로 엄청난 하드 SF이기는 하지만 추리소설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SF라는 쟝르에 태생적으로 거부감이 있는 (? 예체능과 출신입니다^^) 제가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더군요! SF는 원래 취향이 아닌지라 해물파전님의 정보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작품과 같이 인류는 어떻게 유래되고 진화되었는가? 라던가, 진화상의 미싱링크의 이유는? 과 같은 인류의 발생과 진화에 대한 수수께끼를 밝혀나가는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죠.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있어서 외계인이 개입했다는 아이디어 역시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21세기 달에서 발견된 5만년전 유골이 우주복을 갖춰입은 현생 인류와 동일한 호모사피엔스라는 이야기의 발단부터 무척 흥미진진하며 이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전개 과정이 굉장히 기발하면서도 내용도 대담하고 스케일이 무척 커서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해주고 있습니다. 추리소설로 보아도 괜찮을 정도로 공정한 단서와 치밀한 전개가 맞물려져 있기에 추리 애호가로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마지막의 반전도 좋았습니다. 유물 발굴에 대한 사족은 없는게 나았겠지만...^^;;

또한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찰리가 남긴 유물(?)들을 토대로 제기되는 다양한 단서들, 예를 들면 "달력"과 지형지표, 각종 서류들에 대한 디테일한 언급과 그에 따르는 여러 묘사들 - 찰리의 유체를 토대로 인체에 미친 조석간만의 차를 연구해서 하루의 시간을 알아내어 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혀내려 한다던가, 언어를 파악하기 위하여 달력으로 보이는 문서와 개인 서류를 조사하여 공통된 단어를 찾아낸다던가 - 은 하드 SF답게 많은 이론들이 전개되지만 이 역시 추리적인 재미가 곁들여져 있었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70년대 쓰여졌지만 낡아보이지 않는 상상력 역시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고 말이죠.

이러한 대단한 전개와 비교한다면 캐릭터가 너무 매력이 없는 무미건조한 인물이라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한데 어차피 캐릭터의 매력에 기대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큰 흠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취향을 좀 타기야 하겠지만 SF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대중들을 만족시킬만한 재미가 있는 매력적인 작품임이 분명하기에 적극! 추천합니다.

PS : 책의 표지 디자인은 지나치게 전위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최소한 제목은 좀 잘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울러 표지가 너무 구김이 많이 가는 소재로 제작된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2004/05/25

쿼런틴 - 그렉 이건 / 김상훈 : 별점 2점

쿼런틴 - 4점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2066년,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가 버블이라 불리우는 명왕성 궤도의 두배크기의 정체불명의 광대한 검은 구체로 둘러싸여 별들이 사라진 시대, 즉 태양계가 외계 종족의 과학기술 능력에 의해 격리(quarantine) 당한 시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립탐정 닉 스타브리아노스는 익명의 의뢰인으로부터 24시간동안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정신지체 여성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닉은 각종 공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나노머신에 의한 여러가지 모드를 갖춘 전직 경찰출신으로 로라라는 실종된 여성을 찾는 동안 그 여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자역학에 의한 다양한 확률적 관측을 절대적인 경로로 스스로 축소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의 소유자로 그 능력의 모드화를 위해 “앙상블”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나, 그 자신도 앙상블을 위한 충성모드가 삽입되어 충실한 심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닉은 뤼 키우충이라는 충성모드를 자신만을 위해 개조한(?) 과학자에 의해 스스로 확산능력을 삽입하게 되고 신에 가까운 능력을 획득하면서 스스로 “앙상블”의 실체와 버블의 존재에 대한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간만에 읽어본 하드 SF. 여러가지 상을 많이 타기도 했고 걸작이라는 칭송 역시 높은 소설이라 취향은 아니지만 한번 도전해 보게 되었습니다.
일단 소설 전체에 깔려있는 나노머신등을 이용한 모드라던가 각종 장치들에 대한 디테일과 격변한 지구촌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멋지지만,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적인 설정과 전개는 아주 좋았어요. 덕분에 초반부의 흡입력은 정말이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중반 이후부터는 물리학에 바탕을 두고 그 중에서도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에 굉장히 깊게 파고들어 이른바 “평행우주”라는 세계관과 지구인의 잠재 능력에 의한 우주의 위기까지를 엄청난 스케일과 방대한 과학적 지식으로 펼쳐놓는데... 솔직히 이러한 이론들에 대해서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 머리에 쥐나는 줄 알았네요. 제가 이공계 출신이 아니라서 더 심하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어려움은 너무나도 딱딱한, 원서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재미없는 번역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좀더 읽기 쉽게 번역할 수도 있었을텐데 출판사측 배려가 아쉽네요. 행복한 책읽기 SF 총서 기획은 환영할만 하고, 선정된 작품 또한 이견을 표하기 힘들만큼 수준높고 좋은 작품들이지만 앞으로 번역에는 보다 신경을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명성 높은 걸작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이해도 못한 내용에 점수를 주는건 힘들잖아요. 물론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작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펼쳐놓는 재주는 정말로 놀랍기에 앞으로 보다 쉽고 간결한 문체로, 보다 하드보일드 느낌으로 번역되어 재출간된다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싶긴 해요. 그러나 현재 시점의 이 책은 저에게는 전혀! 가망이 없는, 그야말로 quarantine 대상일 뿐입니다...

2017/03/25

삼체 - 류츠신 / 이현아 : 별점 2.5점

삼체 - 6점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단숨

나노 공학자 왕먀오는 경찰에게서 오래전 흠모해왔던 여성과학자 양둥이 자살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가 속했던 단체 '과학의 경계' 조사를 부탁받았다.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이후 갑자가 왕먀오 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이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다. 왕먀오는 이 현상을 밝히기 위해 온라인 게임 '삼체'에 접속하여 플레이하는 한 편, 양둥의 어머니 예원제로부터 과거 중국이 만들었던 '홍안' 시스템에 대해 듣게 되는데..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는 중국산 SF입니다. SF는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호기심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중국산 장르문학 추리물 두 편 -"13 .67", "기억나지 않음, 형사" -이 괜찮았던 기억도 한 몫 했고요.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양둥을 비롯한 '과학의 경계'에 소속된 세계 석학들의 잇단 자살 사건, 그리고 눈 앞에 기묘한 카운트다운이 펼쳐진 나노 기술 과학자 왕먀오가 경찰 스창등과 함께 진상을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온라인 게임 "삼체 (theree body)" 플레이가 상세하게 설명되지요.
두 번째는 여성 과학자 예원제를 주인공으로, 그녀가 문화대혁명 기간 박해를 받다가 우연히 '홍안' 시스템에 근무하게 된 후 외계와 교신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 모든 수수께끼가 밝혀지고, 이후 삼체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이 상세하게 드러나며 마무리됩니다.

이 이야기들 모두 탄탄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놀라운 상상력을 담아내고 있으며, 묘사와 깊이가 실로 대단합니다. 특히 수학적으로 꽤 오래된 문제라는 '삼체 문제'를 활용한, 세 개의 태양이 불타는 센타우루스성 알파 삼중성계의 삼체 문명을 그려낸 묘사와, 이 삼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에서 각종 해법을 제시하는 부분이 돋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진시황의 3천만 군사를 이용하여 컴퓨터를 만드는 장면을 꼽고 싶네요. 컴퓨터를 인력으로 대체하는 아이디어인데 그야말로 대국적인 발상과 과학이 잘 결합된 어마무시한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상만해도 웅장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압도적이었어요. 영상화가 기대될 정도로 말이죠.
그 외의 디테일들도 실제 과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예원제가 우연히 태양이 전파 증폭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삼체인과 통신이 가능했다는 핵심 설정 역시 이런저런 과학적 이론을 곁들여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며, 마지막에 큰 활약을 하는 나노 소재 '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중국산 SF답게 중국적인 설정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예원제가 겪은 문화 대혁명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홍위병이 예저타이를 핍박하는 과정의 묘사부터 섬찟합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학을 철학과 사상으로 포장하려는 헛된 노력도 눈물겹고요(물리학은 잘 모르지만 빅뱅이론이 신의 존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특이한 배경 설명에 그치지 않고, 문화대혁명의 병폐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예원제가 삼체인을 불러들이게 된 핵심 이유인 '인간에 대한 실망감' 이라는 것에 굉장한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아울러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위해 1960년대 이미 전파를 송출하는 안테나를 설치했다는 배경 설정도 그럴싸했습니다. 정말 그랬음직하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홍위병, 문화 대혁명에 대한 비판이 엄청나다는 것은 좀 신기하네요. 그만큼 엄청난 과오이자 실책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중국 내에서 이렇게까지 비판적인 작품이 나올 정도인지 좀 의문이거든요.

삼체인과 지구인의 관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삼체 반군이 '인류 사회는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에 주께서 강림해야 한다. 주께서 사악한 인류에게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전 인류 멸망이 소망인 강림파와 어떻게든 삼체의 움직임을 밝혀내어 삼체인을 구원하려 하는 구원파로 나뉜다는 설정도 괜찮아요. 사실 강림파 쪽 아이디어는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기생수의 히로가와도 비슷한 인물이죠), 구원파쪽은 확실히 신선했어요. '주'라고 불리울 정도로 전능한 존재가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한데, 그들이 벌레로 부르는 미약한 존재들이 '주'가 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관계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체인이 지구의 과학을 무너트리려고 획책한다는 발상도 나쁘지 않아요. 그들의 기술력으로도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여년 걸리는데, 그 사이에 지구인이 맞서 싸울 수 있는 과학력을 보유할 수도 있으니 그걸 원천봉쇄하자는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이지요. 그것을 위해 '지자'를 만들고, 이런저런 작전으로 과학자들이 자살하게 만드는 등의 과정도 특유의 묘사력을 발휘하여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과 묘사를 뺀다면 좀 별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잘 엮여져 있지 않은 탓이 큽니다. 특히 마지막, 삼체인이 '지자'를 만들어 지구 침공에 활용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겉돕니다. 앞부분에서 현재의 지구를 기준으로, 벌어지는 수수께끼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갑자기 외계인 기준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니까요. 차라리 현재의 왕먀오, 과거의 예원제 이야기를 가지고 현재의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이야기를 1부로, 2부는 삼체인 시점으로 지구 침공 작전을 다룬 이야기로, 3부는 400여년 후 지구에서 두 세력이 자웅을 겨루는 방식의 3부작 구성이 더 나았을 것 같아요. 제목과도 잘 어울리잖아요. '삼체 삼부작'.

또 현란한 설정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이야기가 진부하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핵심 내용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깊숙히 들어가도 '외계인과 통신하며 지구 문명 멸망을 바란 삼체 반군을 처단하고, 400년 후 도착할 삼체인과 맞서 싸우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가 전부입니다. 이게 애니메이션이라면 도입부에 불과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3부작의 1부에 해당할 뿐이에요.
외계인이 생존을 위해 지구를 침략한다는 내용도 쎄고 쎘습니다. 그들 행성이 모종의 이유로 절멸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작품에서 '삼체'를 가지고 조금 더 과학적으로 그럴듯하게 그려내었을 뿐 설정 외의 새로운 점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삼체인에 대한 설정도 극단적으로 생존만을 위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말살했다는 점에서 진부합니다. 젠트라디와 별로 다를것도 없더라고요. 이래서야 지구에 침공하더라도 민메이 어택에 쓸려나갈지도 모르겠어요.

삼체 게임을 통해 설명되는 알고리즘 역시 현란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른바 '구원파'가 삼체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개의 태양 움직임 예측을 어떻게든 밝혀내기 위한 게임이라는 설정인데, 지구보다 과학이 훨씬 발전한 삼체인에게 지구인이 무언가 해결 방법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같은 물리적 세계관을 지녔다는 설정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순관계를 그려낸 설정이라고 이해는 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비중이 컸어요.

물론 재미있고 괜찮은, 신선한 SF라는건 맞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자국의 아픈 역사와 하드 SF를 결합한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를 과대 포장한 느낌도 지우기는 힘드네요. 중국이 무대가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이 무대였다면, 아니면 일본을 무대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면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을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4/14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 로버트 A. 하인라인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 이정 외 : 별점 2.5점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 6점
로버트 A. 하인라인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이정 외 옮김/오멜라스(웅진)

이전에 읽은 1권에 이어지는 2권. 마찬가지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수록작품은 모두 13편입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화성의 오디세이 A Martian Odyssey" - 스탠리 와인봄 Stanley G. Weinbaum
"헬렌 올로이 Helen O' Loy" - 레스터 델 레이 Lester del Rey
"길은 움직여야 한다 The Roads Must Roll" - 로버트 하인라인 Robert A. Heinlein
"소우주의 신 Microcosmic God" - 테오도어 스터전 Theodore Sturgeon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 Mimsy Were the Borogoves" - 루이스 패짓 Lewis Padgett
"오로지 엄마만이 That Only a Mother" - 주디스 메릴 Judith Merril
"스캐너의 허무한 삶 Scanners Live in Vain" - 코드웨이너 스미스 Cordwainer Smith
"화성은 천국! Mars is Heaven!" - 레이 브래드버리 Ray Bradbury
"즐거운 인생 It's a Good Life" - 제롬 빅스비 Jerome Bixby
"즐거운 기온 Fondly Fahrenheit" - 앨프리드 베스터 Alfred Bester
"친절한 이들의 나라 The Country of the Kind" - 데이머너 나이트 Damon Knight
"앨저넌에게 꽃다발을 Flowers for Algernon" - 대니얼 키스 Daniel Keyes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A Rose for Ecclesiastes" - 로저 젤라즈니 Roger Zelazny

SF계의 어마무시한 거장, 큰형님들의 대표 걸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1권과 같습니다. 국내 소개 기준으로는 1권보다 이름값은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은데, 로버트 하인라인, 레이 브래드버리, 로저 젤라즈니가 묵직하니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SF 작가들의 투표로 선정된 리스트이기 때문일까요? "최고작"을 모았다기보다는 역사적 의미까지 고려하여 선정된 느낌이에요.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가 그러합니다.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명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프로스트와 베타"를 꼽고 싶거든요. 디테일한 과학적인 설정, 냉전시대의 세계관 등 현실이 잔뜩 투영된 그간의 공상과학 소설과는 다른 서정적이고도 종교적인 주제를 미려한 문체로 그려낸, 순문학에 가까운 새로운 SF의 "효시"라는 장르 역사적 의미가 커서 선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서도 "화성은 천국!"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죠.

위에서 예를 든 작품들을 비롯하여 제 All time best이기도 한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처럼 다른 곳에서 소개된 작품이 많다는 점, 지금 읽기에는 낡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단점인데 이건 걸작선이라는 특징 및 작품 발표 시기를 볼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읽기 힘들었는데, 원작 자체가 어렵게 쓰이기는 했겠지만 번역하면서 조금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쓰는 배려가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감점요소가 제법 있는데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는 강력 추천드립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 아래에 짤막하게 리뷰 남깁니다.


"화성의 오딧세이"

열흘간 소식이 두절되었던 화성 탐사대원 자비스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마크 트웨인이 화성을 무대로 한 SF를 쓰면 이런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유머러스한 분위기, 허풍 가득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모험, 거기에 지구인의 탐욕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다는 결말에서의 풍자가 그야말로 마크 트웨인 스타일인 덕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타일만 모방한 파스티시가 아닙니다.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 친구가 된 타조 외계인 "트윌"에 대한 묘사 같은 설정의 디테일도 뛰어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길은 움직여야 한다"

모든 도로를 움직이게 만들어 나라 전체를 발전시켰지만, 기술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대형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한 총감독관 게인스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분위기는 하드보일드 범죄물 스타일인데 게인스의 활약이 별다른 게 없으며 전개도 뻔하고, 결말도 허무해서 전체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도로가 움직인다는 황당한 설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굉장합니다. 도로에 대한 세밀한 설정과 묘사에서 그야말로 거장의 힘이 한껏 느껴집니다.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이야기는 아쉽습니다만 이 설정 묘사 하나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소우주의 신"

천재 과학자를 이용해 먹는 은행가가 과학자에게 색다른 동력 전송기를 만들게 한 뒤, 그것을 이용해 국가를 협박하고 과학자를 죽이려 합니다. 다행히 과학자에게는 그가 만든 새로운 생명체 네오테릭스들이 있었고, 네오테릭스들이 더 뛰어난 발명을 해서 과학자를 구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악덕 기업가는 물론 기이한 피조물까지 생생한 캐릭터 묘사 역시 아주 일품이고요. 흡입력도 대단해서 네오테릭스가 과학자가 요청한 "방어막"을 만든다는 결말까지 손을 떼기 힘들 정도 였습니다. 재미만 놓고 따지자면 1권의 "투기장"과 비교될 만큼 최고였어요.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오로지 엄마만이"

방사능으로 돌연변이들이 태어난다는 내용으로 냉전시대 핵공포가 만연했을 때 쓰여진 듯 합니다. 아이가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인데, 엄마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반전은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캐너의 허무한 삶"

우주(작중에서 "위와 밖") 여행 시 느끼는 거대한 고통을 잊고,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 스캐너라는 전문 직업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몸의 감각을 없애고 "하버맨" 상태가 되어 우주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크랜치"라고 불리는 행위를 통해 잠깐이나마 감각을 회복할 수 있고요.
그리고 이들은 고통 없이 우주를 여행하는 방법을 알아낸 애덤 스톤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 직업의 위대함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그러나 스캐너 중 한 명인 마텔이 인류를 위해 그를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굉장히 간단한데 스캐너, 크랜치 등 작중 나오는 관련 설정이 아주 상세하게,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텔의 활약이 이러한 설정 묘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결말이 허무할 정도로 시시하고 간단한 해피엔딩이라는건 단점이지만 압도적인 설득력에는 점수를 줄 수밖에 없네요. "길은 움직여야 한다"와 비슷하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즐거운 인생"

조물주급의 초능력을 지닌 아이 앤서니를 중심으로 가족, 마을사람들이 마을 통째로 이세계를 방황한다는 내용의 작품.

SF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이 "아이"로 태어난다면 그것은 재앙일 것이라는 주제를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앤서니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신 앞에 비굴한 현대인을 풍자한 것으로 보이고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운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즐거운 기온"

인간에 가까운 다기능 안드로이드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추리물 스타일로 풀어낸 작품. 일종의 서술 트릭이 도입된 점도 특징입니다.

하지만 그냥 추리극 형태로만 풀어내는 게 깔끔했을 것 같아요. 밴덜루어와 안드로이드에게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일종의 "투영" 현상이 일어났다는건 이야기에 넣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가 혼란스러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좀 더 짧고 깔끔하게 전개했더라면 보기 드문 SF 추리물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4/10/27

화성 연대기 - 레이 브래드버리 / 김영선 : 별점 2.5점

화성 연대기 - 6점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샘터사

SF계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으로, 화성인 시점에서 지구인이 아직 화성에 오기 이전부터 지구인 탐험대가 수 차례에 걸쳐 도착하고, 이후 지구인의 이주와 화성인의 멸망, 이주민들의 귀환... 순으로 이어지는 여러 단편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연대순 배치는 제목처럼 "연대기"라는 느낌을 전해 주는 데 크게 기여하지만, 수록된 작품들이 하나로 통일된 구성은 아닙니다. 본격 하드 SF는 물론 서정적인 동화, 블랙 코미디까지 장르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거든요. 그래서 몇몇 작품은 다른 작가가 쓴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처럼 아예 대놓고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화성 연대기"라는 속성의 작품만 모아 놓다 보니 송곳처럼 확 튀어나오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쉽더군요.

그래도 한 페이지짜리를 포함한 스무 편이 넘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볼륨 덕분에 괜찮은 작품도 제법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블랙 코미디 반전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지구에서 온 탐험대가 화성인들에게 정신병자로 오해받는다는 "지구인"은 이런 류의 농담물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지적 논리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고, 아담과 이브가 되었는데 이브가 너무 못생겨서 도망쳐버린 사나이 이야기인 "적막에 휩싸인 도시들"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주인공 월터의 심리 묘사가 대단해서 감정이입이 절로 되었습니다.
이런 블랙 코미디 외에도 화성인의 텔레파시 능력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이야기인 "3차 탐험대"나 "화성인"도 좋은 작품이며, 화성이라는 곳을 망치는 침략자로서의 지구인을 묘사한 "달은 지금도 환히 빛나건만"은 분명한 걸작입니다. 화성인이 멸망한 것이 지구인의 '수두'라는 전염병 때문이라니요!

하지만 환상을 다룬 설정이 반복되고, 작가 특유의 '기묘한 맛'을 느끼기 어려웠던 점 등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또 낡은 소재들이 있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티드 맨"과 같이 지금 시점에 먹히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한데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났네요. 이 작품을 실시간으로 접했던 당대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거장다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만큼 장르문학 팬들에게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허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도 조금 묵직한 편이니, 만약 브래드버리 입문자이시라면 다른 단편집을 먼저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덧 : 책의 디자인과 장정은 아주 예뻐서 소장 가치가 충분한데, 출판사가 "샘터"라는 것이 신기하네요. 앞으로도 꾸준히 장르 소설을 출간해 주었으면 합니다.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퀸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3/07/08

마션 - 앤디 위어 / 박아람 : 별점 3점

마션 - 8점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지구로부터 225,000,000km 떨어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한 남성, 마크 와트니는 화성 탐사 계획에 참여한 식물학자로 1,000여 일 동안 아레스3 탐사선을 타고 무사히 화성에 도착한다. 예정된 탐사를 수행하던 엿새째, 예기치 못한 모래 폭풍에 휩쓸린 와트니와 일행들 사이에 교신이 끊겨버린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두려움 속에 귀환하고, 모래 언덕에서 홀로 깨어난 그는 감자 몇 알과 함께 다음 탐사선이 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이보다 더 최악의 생존기가 있을까? 하지만 이 똑똑한 과학자는 화성에 지구 작물을 심고, 물을 만들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로 경작을 해낸다. 한편 나사 영상 담당 직원은 마크 와트니의 시체가 보일 줄 알았던 영상 기록을 통해 깨끗이 치워진 막사 근처에서 마침내 그의 생존을 확인한다. (알라딘 책소개에서 인용)

화성에 고립된 우주비행사의 눈물나는 과학적인 생존기. 출간되어 이미 시장을 휩쓴지 오래지만, 이번에 유럽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용으로 좀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찾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인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비교해 본다면, 정 반대, 대척점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화성에 고립된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전 지구가 힘을 합쳐 노력하는 반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단 한 명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이 훨씬 낫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페트로바선, 아스트로파지라던가 비교적 손쉽게 외계인과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설징이 바탕이 된 반면, 이 작품은 상식 선에서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위기가 찾아오는 극적인 전개도 이 작품이 우위에 있고요. 무엇보다도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라는 첫 문장부터 독자를 강하게 사로잡아요. 이어지는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의 생존을 위한 분투도 엄청 흥미롭고요. <<로빈슨 크루소>> 등과 다름없는 순수한 모험물인데, 고전적인 생존 모험물과는 다르게 치밀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론의 전문성이 높아서 거의 하드 SF에 가까울 정도인데, 이를 이렇게 재미나게 그려내는건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됩니다.
또 마크 와트니 시점과 NASA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시점을 번갈아 가며 전개해 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느 한 쪽은 모르지만 다른 한 쪽은 알고 있는 위기 상황 - 예를 들어 NASA에서 관측한 모래 폭풍 - 을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어 줄 뿐 아니라, 마크라는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마지막 마크 구조 순간의 감동이 극대화 되기 때문입니다.
유머 넘치는 마크 위트니 캐릭터도 아주 좋습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조차 유머로 대처하는 강한 멘탈에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어요. 암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죠. 갖추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과 기술도 적절했습니다.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로 '식물을 갖고 노는 전담 수리공'이라고 언급되는데, 덕분에 생존에 핵심이었던 화성 토양에서 감자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거든요. 각종 장비 수리 및 개조를 하는 모습, 심지어 '육분의'까지 자체 제작하여 화성에서 이동할 때 위치를 측정까지 하는걸 보면 단순한 공학자 수준은 아닌거 같아요. 하긴, NASA의 우주 비행사니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하지만 구조 이후의 후일담이 없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간단하게나마 마크 와트니의 구조 이후의 모습을 그려주었더라면 아주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발표 당시의 인기가 수긍이 가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할게 없어서 동료 우주 비행사 짐을 뒤져 크리스티의 전자책을 읽어본다는 디테일이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무척 반가왔습니다. <<백주의 악마>> 속 범인을 아예, 터무니없이 잘못 짚기는 했습니다만.

2010/09/07

플루토 1~8 - 데즈카 오사무 / 우라사와 나오키 : 별점 3점

플루토 Pluto 8 - 6점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서울문화사(만화)
데즈카 오사무의 "지상 최강의 로보트"가 원작인, 우라사와 나오키의 SF 추리 스릴러입니다. 완결된지는 꽤 되었는데 마지막권 구입이 늦어 이제서야 완독하게 되었네요. 워낙에 제가 원작의 팬이기도 해서 관심이 가던 기획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랄까요? 아톰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신 세계 제일의 로봇 수사관 게지히트를 주인공으로 한 사회파 수사물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사의 과정도 합리적이며, 게지히트 본인에게 있었던 과거의 아픈 경험이 현재의 사건들과 겹쳐지며 벌어지는,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로봇의 고뇌’도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죠. 마지막 흑막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 역시 원작팬도 납득할만 한, 최고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작 "지상 최강의 로보트"의 핵심인 플루토와 최강 로보트들 간의 격투, 그리고 아톰이 주인공인 후반부는 별로였습니다. 로봇들 간의 격투는 원작에 비해 너무 심심했기 때문입니다. 리얼한 SF스릴러라는 작품 성격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화끈함을 선사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후반부에 밝혀지는 음모의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보라’가 거의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데 구태여 플루토에게 먼저 복수를 시킨 이유, 갑작스러운 플루토의 변심(?) 등이 별로 설득력있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불필요하고 복잡하게 꼬아놓고, 애매하게 넘어가는 부분들도 거슬렸으며 '이라크전'을 풍자하는 듯한 설정은 너무 노골적이라 작품에 잘 녹아들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게지히트가 주인공인 부분만큼은 최고의 SF 하드보일드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추리물'로 분류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또한 작중에 등장하는 '거액을 받고 불가능한 수술을 실현하는 일본인 무허가 천재 외과의사'를 비롯해서 텐마박사, 오챠노미즈박사, 반 슌사쿠 등 많은 데즈카 오사무 캐릭터를 만나는 즐거움도 큽니다.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로보트의 감정이라는 어려운 테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도 좋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7/05/08

월간 판타스틱 창간호

Fantastique 판타스틱 2007.5
판타스틱 편집부 엮음/페이퍼하우스(월간지)

우연찮게 기획을 담당하시는 분과 알게 되어 무상으로 받게된 창간호입니다. 선물해 주신 모 기자님께는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잡지도 괜찮은 판형과 두께에 국내 최초의 쟝르문학 전문 월간지를 표방한 제목과 카피 그대로 관련 소설과 만화, 그 외의 각종 기획기사들로 꽉 채워져 있어서 팬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법 한 완성도를 보여줘서 기뻤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네요. 이유는 제가 일단 추리 장르를 선호하는데 반해 잡지는 다른 장르에 촛점이 많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만 해도 총 7편의 작품 중 추리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 작품 뿐이었거든요. 그리고 일견 많고 풍족해 보이는 기획기사들도 대부분 두페이지정도로 끝나는 알맹이 없는 기사들이어서 아쉬움이 큽니다.

개별적으로 좀더 자세히 훝어본다면, 

소설은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 듀나의 "너네 아빠 어딨니?", 김창규의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미야베 미유키의 "유월은 이름뿐인 달", 폴 윌슨의 "다이디타운-거짓말", 이윤하의 "이팅 하트", 그리고 루이스 캐럴의 "실비와 브루노"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이미 다른 곳에 연재하다가 중단된 뒤 연재를 재개하였다는 복거일의 가상 역사 SF라 할 수 있는 "역사 속의 나그네"가 꽤 재미있었고, 폴 윌슨의 정통 하드보일드 SF라 할 수 있는 "다이디타운-거짓말"은 이 잡지의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름 기대가 컸던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 "유월은 이름뿐인 달"은 유일한 정통 추리물이긴 하지만 트릭이 빈약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그 외의 작품들은 솔직히 언급할 정도의 재미조차 없었습니다. 특히 듀나의 "너네 아빠 어딨니?" 는 수록작 중 워스트로 꼽겠습니다. 제가 무식하다면 할 수 없겠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고, 제 취향도 전혀 아니었을 뿐더러 읽고나서 불쾌해지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뭔가 있어보일려고는 했지만 결국 좀비물의 안좋은 부분만 확대 해석했다는 느낌만 들었습니다.

만화는 유시진 특유의 "뭔가 있어 보이는" 환타지, 김태권의 창작기계 비스무레한 SF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수준은 그럭저럭이지만 두 편 모두 그림과 내용이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김진태씨가 참여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김진태님의 코믹 추리물을 보고 싶었는데...

기획기사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제목 만큼의 깊이에 미치지 못하는 얄팍한 분량으로 그다지 건질만한건 없습니다. "영화인 17명의 꿈의 프로젝트"라는 야심찬 대표 기획도 단지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과 그 이유만 짤막하게 나열할 뿐 작품에 대해 실제로 전해주는 정보가 거의 전무해서 참여한 영화인들의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반쪽짜리 기획기사일 뿐이고요. 최소한 해당 작품의 정보와 판권 문제, 그리고 영화화된 적이 있는 작품이라면 과거 영화에 대한 소개 등 보다 자세한 조사가 바탕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와 기시 유스케의 무척 괜찮은 인터뷰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시나 분량이 너무 짧았다는 것은 아쉽지만 의미있고 좋은 기사였습니다.

전체적으로 평은 좀 안 좋게 썼지만 그동안 척박했던 국내 쟝르 문학계의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기에 계속~ 쭈욱~ 잘 팔렸으면 좋겠습니다. 추리쪽 비중도 차차 높아지길 바라고요. 이런 잡지가 많이 팔리고 시장과 독자가 확대된다면 제가 바라는 미스테리 전문 잡지도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겠죠.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고자 합니다.

PS : 다음호에서 경성탐정록이나 실어주면 차~암 좋을텐데요^^ 연재 의향도 있는데...

2022/05/29

나쁜 토끼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나쁜 토끼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가출 소녀 미치루를 찾는 의뢰를 수행하던 중 칼에 찔렸지만, 이 사건을 해결한 덕분에 로열 할리우드 호텔 체인 회장 다키자와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미치루의 친구이기도 한 딸 미와를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고압적인 다키자와 때문에 조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미치루의 도움으로 공통의 친구였던 아야코가 미와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아야코는 마약 중개인에게 살해당했고, 소녀들의 공통 친구인 가나도 실종되는 등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결국 하무라 아키라도 납치 후 감금당하고 마는데....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첫 장편입니다. 국내 소개된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초기작이 지금 소개되는게 조금 뜻밖이네요.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은 이 작품에서도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가출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는 간단한 의뢰에 미친 강간마 탐정이 끼어드는 바람에 격투 끝에 발이 부러지고, 친구가 교제하는 남자가 사악한 혼인 빙자 사기범이라는걸 알게 되고, 또 다른 실종 소녀를 찾는 의뢰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처음부터 고생하다가 납치 당해서 이틀 동안이나 갖히고, 마지막에는 사냥 게임의 사냥감으로 죽을 뻔 하니까요. 이 정도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불행과 고생으로는 1, 2위를 다툴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오히려 억지스러운 설정 문제가 도드라집니다. 비교적 현실적이며, 일본의 현실에 잘 어울리는 하드보일드물이라고 여겨지는 후기작 - 특히 살인곰 서점 시리즈 - 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에요. 부유하지만 고압적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다키자와 가족과 다이라 가족 묘사부터가 그러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흉내내지만 캐릭터들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딸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내다 버리면서 거액의 용돈을 주고 남자와 만나는건 아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다키자와, 어린 시절 유괴당한 뒤 죽은 아들을 못 잊어 딸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다이라 미치루의 엄마 등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이 한 가득입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자기만 아는 괴물로 묘사되는 것 역시 읽기 불편했고 현실적이지도 못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들이 버젓이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고, 경찰서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눈에 젖가락을 꽂는 방법으로 자살한다는 식의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현대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중 백미는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명사들의 모임 '28회'에서 사람을 사냥감으로 하는 게임을 했다는 진상입니다. 

사실 사냥꾼이 사람을 사냥한다는 소재를 가진 장르 문학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소유의 섬으로 난파해 온 생존자들을 사냥하는 게임을 즐긴다는 내용의 "가장 위험한 게임"이 우선 떠오르지요. SF "불사 판매 주식회사"도 고용한 인간 사냥꾼들과 승부를 펼치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단편 "요트클럽"은 이 작품처럼 나름 상류층 사람들 모임에서 친목 행사로 사람 사냥이 벌어진다는 설정이고요. 하지만 이 작품처럼 막 나가지는 않아요. "불사 판매 주식회사"은 이야기가 허구라는게 이미 시대 배경 등으로 등장하고, "아주 위험한 게임"은 개인 소유의 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벌이는 게임입니다. "요트클럽" 역시 망망대해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박 승객들을 사냥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말은 됩니다. 그러나 현대 일본에서 노숙자도 아니고, 평범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사냥 게임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무리 봐도 억지스러우며 설득력도 낮습니다. 

노나카가 사냥 게임 사냥감으로 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고 시끄러운 주변 인물이 없는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다 하더라도, 친구 딸의 친구를 끌어들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최소한 다른 연줄을 활용하는게 맞았어요. 이 건을 계기로 사기가 파토날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작위적이며 불필요했던 요소들도 너무 많아요. 가면을 쓰고있던 딸 미와를 사살한게 아버지 다키자와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를 납치해서 이틀 동안 가두어 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정황을 보면, 감금 장소에 시체를 묻었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거에요. 범인들의 범죄 행각을 보면 하무라 아키라 한 명 더 죽인다고 해도 죄상이 달라질 것도 없고요. 사건이 커질걸 우려했다? 미와와 가나의 실종은 경찰도 알고 있었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가나야 그렇다쳐도, 대기업 회장 다키자와의 딸 실종은 이야기가 다르지요. 이래저래 하무라 아키라를 죽여서 입을 막는게 당연했습니다.

이외에도 하무라의 친구 미노리가 혼인 빙자 사기범 우시지마 준타와 교제하면서 일어나는 트러블, 도토종합리서치 사원 세라가 일으킨 트러블들도 불필요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보통 정통 하드보일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는 트러블 들이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요란스럽기만 할 뿐,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분량만 차지할 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었습니다. 노나카가 범인이라는걸 추리해 낸 것처럼 그려지지만, 당연히 노나카밖에 용의자가 없게끔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독자가 함께 고민해볼 만한 단서도 딱히 제공되지 않으며, 제목이자 게임의 유래가 되는 동요의 존재는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대부분의 수사는 탐문, 그리고 관계자들 증언을 통해서 나아가고 있어서 탐정이 딱히 필요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물론 볼만한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하무라 아키라라는 독특한 탐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에요. 그녀에 대한 세세한 일상 묘사로 소심하면서도 정의로운 그녀의 매력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미와의 엄마 아스미가 자살한 탓에 노나카가 궁지에 몰리는 과정이라던가, 미치루가 발가락을 잘 쓰는게 특기라는 극 초반의 복선도 잘 활용되고 있고요. 악당들이 모두 몰락하고 만다는 결말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반부 작품들 수준에는 확연히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05/02

악몽과 몽상 2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악몽과 몽상 2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엘릭시르

어쩌다보니 1을 읽지않고 2부터 읽게 된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입니다. 1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보너스격인 논픽션 "고개를 숙여"와 시 "브루클린의 팔월", 우화인 "거지와 다이아몬드"를 제외하면 수록작은 9편입니다.

그간 순문학적인 부분으로 흘러가던 중, 단편집들과 비교해볼 때, 좀 더 화끈한 작품이 많다는게 특징이에요. 과거의 스티븐 킹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거장과 과거에 대한 오마쥬 형식의 작품들도 신선했고요. 전통적인 크리쳐 호러인 "장마", 기발한 호러 액션 모험물인 "10" 등이 과거 킹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면, "다섯 번째 4분의 1"은 화끈한 마쵸 하드보일드 액션, "크라우치앤드"는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오마쥬, "의사가 해결한 사건"은 셜록 홈스 파스티쉬로 모두 나름 매력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클라이드 엄니의 마지막 사건"도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변주를 가한 독특함이 좋았고요. "10"을 제외하면 대체로 클리셰로 가득한 친숙한 이야기들이지만, 워낙에 필력이 원숙하고 묘사가 대단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걸 특별하게 만드는, 이런게 바로 장인의 솜씨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충고가 전부인 "내 귀염둥이 조랑말", 일종의 타임 슬립물인 "죄송합니다, 맞는 번호입니다", 기묘한 가족 드라마 SF인 "메이플 스트리트의 그 집"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화끈함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부록격인 논픽션과 시, 우화는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하고요.

그래도 12편 중 6편, 제대로 된 수록작만 치면 9편 중 6편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니 전반적으로 괜찮은 작품집에는 분명합니다.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이 정도면 본전치기는 하는 셈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마"

시골 마을 윌로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젊은 부부에게 마을 사람들이 그날 하루만 다른 곳에서 보낼걸 요구했다. 이유는 그날이 칠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두꺼비 장마'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과 앨리스 부부는 객기를 부려 윌로에서 머무는데, 오래지않아 비처럼 내리는 무시무시한 식인 두꺼비 떼와 조우하게 된다.

그야말로 스티븐 킹!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크리쳐 호러물입니다.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마을 사람들, 비가 곧 오기 직전인 축축한 공기에 대한 묘사로 가득찬 도입부에서, 식인 두꺼비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부부를 습격하는 중, 후반부까지의 전개 모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정말로 두꺼비가 장마처럼 쏟아진다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두꺼비들이 모두 다음날 햇볕과 함께 녹아서 사라지는 이유가 젊은 부부를 장마 직전인 7년에 한 번씩 인신공양한 덕분일 거라는 결말도 꽤 참신했어요. 보통 이런 크리쳐 호러물의 경우,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책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게 대부분인데 최소한의 설명 정도는 덧붙인 셈이니까요.

달릴 때 확실히 달려주는 킹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읽는 재미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의 권유대로 부부가 장마날 다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한데, 소설의 결말처럼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졌겠죠?

"내 귀염둥이 조랑말"

할아버지가 "어른이 되면, 이상하게 시간이 빨리 갈 때가 있다"는 충고를 손자에게 해 주는게 전부입니다. 시골 마을에 대한 묘사도 좋고, 시간이 빨리가는 상황 설명도 흥미롭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데다가, 엄마는 알콜 중독에, 누나는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뭉쳐있다는 등의 불필요한 묘사가 많아서 읽기도 지루했고요.
아니나 다를까, 책 뒤 해설을 보니 손자 클라이브 배닝이 살인 청부업자가 된 이야기를 그린 오래전 '리처드 바크만' 필명으로 착수했던 동명 장편에서 뽑아낸 회상 장면이라는군요.

순문학적인 소양이 엿보이기는 하나,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죄송합니다, 맞는 번호입니다"

작가 빌 위더먼이 아내, 세 명의 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끔찍하고 처절한 목소리로 "제발 데려가..."는 말을 남기고 끊어진 전화를 받은 아내 케이티는, 그 목소리가 자기 가족이 확실하다고 느끼고 기숙사의 딸, 어머니 등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동생이 연락이 되지 않자 남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가는데....

시나리오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덕분에 시각적인 상상과 여러가지 배경 음악들을 머릿 속에 떠올리기 좋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게 다름아닌 '미래의 케이티' 였다는 진상도 그럴듯했고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족임을 확신했다는데 그게 바로 자기였다니! 이런거야말로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싶네요. 시공을 초월하여 메시지를 나누는 작품은 많지만, 연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었다는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그러나 "제발 데려가.."는 그날 바로 심장발작을 일으킨 빌 위더먼을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뜻이었다는건 좀 허무합니다.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걸 때에 보다 명확하게 메시지를 남기는게 당연하잖아요? 빌 위더먼이 처제의 집을 찾아가며 느끼는 서스펜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작가에게서 기대해 봄 직한 공포나 스릴, 서스펜스도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고요.

소품에 가까운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대로 영상화되었다는데, 영상물로 보는게 훨 낫지 싶네요.

"10"

출근 후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온 브랜든 피어슨은 '박쥐 인간'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비명을 지르려던 그를 진정시킨건 같은 회사 프로그래머 듀크였다. 듀크는 '박쥐 인간'은 흡연자들에게만 보인다며 브랜든을 '박쥐 인간'을 본 사람들 모임에 초대했다. 그러나 모임은 리더 델레이의 배신으로 박쥐 인간의 습격을 받게 되고, 브랜든은 모임에서 처음 만난 캐머런, 모이라와 함께 탈출하는데....

아,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다니! 출근 후 10시, 지정된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끼리 일종의 유대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저 역시 과거 흡연자라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의 흡연자들만 그들을 지배하는 사악한 '박쥐 인간'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죠. 금연 열풍, 담배 혐오가 널리 퍼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역습이자 발버둥같은 작품이에요. 물론 흡연자들에게는 경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테고요. 스티븐 킹이 흡연자일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좋았던 아이디어에 비하면 전개는 그냥 그렇습니다. 일단 박쥐 인간과의 혈투가 시시합니다. 끔찍하게 생겼을 뿐, 별다른 능력이 있지도 않고 물리적 공격에 바로 격퇴되기 때문입니다. 어찌어찌해서 겨우 오마하로 탈출한 뒤, 브랜든 일행이 다시 '10시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박쥐 처단에 나선다는 한 페이지짜리 후일담으로 끝낼 이야기도 아니었고요. 서둘러 대충 끝낸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좀 아쉬웠어요. 아울러 '10시의 사람들'은 그냥 흡연자가 아니라 '담배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 디테일도 사족이었다 생각되네요.

하지만 그 어떤 단점에도 워낙에 아이디어가 압도적이라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이런 생각과 발상은 정말이지 본받고 싶네요.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제 주변 흡연자들에게 권해주고 싶습니다.

"크라우치 엔드"

남편이 실종되었다며 미국인 로니 프리먼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경찰 베터와 로버트 파넘 순경에게 부부가 방문했던 런던 근교 '크라우치엔드'에서 겪었던 기묘한 경험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크라우치엔드가 크툴루를 위한 '크라우치엔드 토운'으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부부가 크툴루를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러브크래프트를 위한 오마쥬로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의 팬이라면 제법 즐길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특별한 드라마는 없습니다. 부부가 겪는 공포스러운 상황만 이어질 뿐 크라우치엔드가 왜 크라우치엔드 토운으로 이어지는지, 어떻게 그 거리로 빠져들어 희생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물론 이런게 러브크래프트 작품이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한 마디로 요악하자면, "지나치게 잘 쓴 팬픽"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메이플 스트리트의 그 집"

장남 트렌트, 여동생 리사와 로리, 막내 브라이언은 의붓 아버지 루와 함께 사는 집에서 기묘한 금속 생명체가 자라난다는걸 알게 되었다. 트렌트는 엄마가 루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로 기절까지 하자, 금속 생명체를 이용하여 루를 없앨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집 안에서 기묘한 금속 생명체가 자라나고, 이윽고 그 생명체가 만든 시한장치에 의해 지하실에서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걸 트렌트가 알아채는 부분까지는 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은 '미국에 사는 남자아이라면, 시계가 0을 가리키면 폭발하든지, 이륙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걸 알고 있다'는 설정에 따른 결말은 좀 안이했습니다. 아이의 생각 그대로, 단지 카운트다운에 의해 나중에 '이륙해 버린다'는건 너무 단순한 발상이었으니까요. 또 이 기계 생명체가 무엇인지, 왜 성장한 끝에 이륙했는지 등 설명이 전무해서 답답했습니다. 어차피 가상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설득력을 조금이나마 보충해 줄 만한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엄마가 힘들었다 하더라도, 새 아빠에 집까지 없어져버리면 엄마가 네 아이를 데리고 잘 살 수 있었을까? 라고 질문하면 그리 희망적인 답을 할 수는 없을거에요. 실제로 엄마가 루를 엄청나게 사랑했을 수도 있고요. 한마디로 무책임한 결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잔인함은 전혀 찾아보기 힘든, 가족 드라마스러운 내용은 이색적이나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이 잘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째 4분의 1"

바니의 친구 제리는, 키넌에 의해 죽어가는 바니에게 들은 정보로 키넌과 병장을 습격했다. 이유는 바니에 대한 복수와 그들 4명이 나눠가진, 현금이 묻힌 4장의 지도 조각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부제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4"을 쓴다면?" 인데, 내용도 그에 걸맞는 충실한 하드보일드 액션물입니다. 보물 지도 때문에 사람들을 서로 죽이는 고전적인 설정에 더해, 4인 중 마지막인 재거와 벌이는 죽음의 사투가 인상적이에요.

'다섯 번째 4분의 1'이라는 제목은 이미 죽은 바니와 주인공 제리, 그리고 키넌과 병장, 재거라는 등장인물 5명을 의미합니다. 등장인물은 5명 뿐이고 (심지어 한 명은 이미 죽었고), 장소도 키넌의 집과 병장의 집이 전부이며 분량도 굉장히 짧지만 화끈한 액션이 휘몰아쳐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라기 보다는 미키 스필레인에 가깝지 않나 싶더군요. 그만큼 파괴적이고 화끈했거든요.

한마디로 고전적이고 화끈한 마초 하드보일드 액션물로는 최고에요. 달릴 때 확실히 달려준, 그런 작품인 셈이죠. 딱히 드라마가 돋보이지는 않지만, 그런건 애초에 불필요해요. "터미네이터"에게서 내면 연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의사가 해결한 사건"

홈스에게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찾아왔다. 헐 경이 밀실에서 살해되었는데, 방이 완벽한 밀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헐 경은 가족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터라, 아내와 아들들 모두 동기가 있던 상태였는데, 함께 방을 조사하던 왓슨이 사건의 진상을 꿰뚫는다.

와, 이제는 이런 작품까지 등장하네요. 스티븐 킹의 셜록 홈스 파스티쉬이자, 트릭이 사용된 본격물을 쓰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작품도 놀라운 점이 많습니다. 홈스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제대로 현장 검증을 하지 못할 때, 왓슨이 진상을 꿰뚫고 추리 쇼를 벌이는 탐정 역을 맡는다는 과감한 설정, 피해자인 헐 경이 가족의 마음을 가지고 논 인간 말종이라 진범과 진상 모두를 알았지만 홈스, 왓슨, 레스트레이드 모두 진상을 덮고 단순 강도 사건으로 위장한다는 결말까지 모두 특이하거든요.

밀실 트릭의 정체는 화가인 둘째 아들 조리 헐이 엄청난 하이퍼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려낸 배경 그림을 테이블 다리 사이에 설치하고, 그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수 효과나 마술에서 쓰임직한 방법이죠. 주로 거울을 쓰는데, 하이퍼 리얼리즘, 극사실주의라는 미술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트릭을 예전 "경성탐정록" 창작 시절 써 먹어 볼까 고민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 반갑기도 했고요.
또 이 트릭 하나 뿐만이 아니라, 헐 경은 통풍으로 걸을 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리가 아버지를 지나쳐 서재로 먼저 들어갈 수 있었다던가, 조리가 방에 들어가 있던건 모든 가족이 알고 있어서 그들 모두가 공범이라는 등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다는게 놀라왔어요.

물론 본격물 치고는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헐의 아내와 아들들이 모두 공모해서 헐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복잡한 장치를 설치해가며 밀실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 모여있는 응접실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함께 현장을 조작하는게 더 현실적이잖아요? 하인 스탠리의 증언? 정 필요하면 스탠리까지 죽이면 됐을테고요...
트릭도 비록 헐 경이 비명을 질렀다는 변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애초에 너무 거창한 장치가 필요한 트릭이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림자까지 가짜로 만들어야 해서 공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날씨에 따른 변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도 영 별로죠.
아울러 파스티쉬인데 캐릭터에 대해 지나치게 창조적인 해석이 들어간 것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호 쪽입니다. 왓슨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게 특히나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모로 독특하며, 제가 읽은 최초의 스티븐 킹 본격물이자 셜록 홈스 파스티쉬라는 가치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셜록 홈스 팬이시라면 놓치기 마시길 바랍니다.

"클라이드 엄니의 마지막 사건"

유능한 사립탐정 클라이드 엄니는 어느날, 자신을 둘러싼 모든게 이상해졌다는걸 깨닫는다. 매일 시끄럽게 만드는 이웃 데믹 부부가 조용하고, 매일 아침 신문을 사는 신문팔이 피오리아가 복권에 담청되고, 단골인 식당 블론디스는 문을 닫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 안내원 버넌이 은퇴한다고 하는 등 익숙치 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클라이드 엄니 앞에 새뮤얼 D.랜드리라는 인물이 나타나, 그를 둘러싼 모든건 모두 소설 속 설정이며 자신이 그 모든걸 창조한 창조주, 작가라고 이야기하는데...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와 현실의 작가, 또는 현실 세계가 만나서 사건이 벌어지는 작품은 많습니다. 특정 컨텐츠로 현실 인물이 빠져들어 벌이는 모험담이야 쌔고 쌨고, 현실과 픽션이 결합하여 벌어지는 일종의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도 있지요. 오래전 "라스트 액션 히어로"처럼요.

이 작품은 구태여 이야기하자면 후자 쪽에 가까운데, 특징이라면 픽션으로 빠져드는 현실 속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픽션 속 캐릭터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세계를 멋대로 비집고 들어와, 그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심지어 나 자신을 지워버리는 멋대로인 창조주의 희생양이라는 포지션이에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제대로 맞는 캐릭터인데, 이런 비현실적으로 암담한 상황 묘사야 말로 킹의 특기 중 하나이지요.

또 클라이드 엄니는 더쉴 해밋 등 정통파 하드보일드 작가의 영향을 짙게 받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작 중에서 상황에 휘둘리면서도 추리하거나, 또는 상황 반전을 위해 노력하는 여러가지 행동들이 그야말로 클리셰대로라는 것도 재미있던 점입니다.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계속 하도록 유도하는게 대표적이에요. 당연히 실패하지만요.

결국 새뮤얼 랜드리에게 자신의 세계를 빼앗긴 클라이드 엄니가 현실의 새뮤얼 랜드리가 된다는 결말도 독특합니다. 일종의 바꿔치기가 일어난건데, 클라이드 엄니는 하드보일드 탐정답게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여 자신의 세계를 되찾을 결심을 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에요.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게 탐정이니까요. 과연 클라이드 엄니가 새뮤얼 랜드리에 의해 붕괴한 자신의 소설 속 세계를 재 구성하여 되 찾을 수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뻔한 설정이지만 약간의 변화로 새로움을 안겨다 준다는 점, 특별한 액션 없이 둘의 대화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긴장감도 넘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고개를 숙여"

스티븐 킹의 아들 오언 킹이 뛰는 리틀 야구팀 뱅고어 웨스트가 지구 우승을 차지한 시즌에 대해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리틀 야구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회에 역전 홈런을 쏘아 올리는 등 상당히 드라마틱한 경기 묘사가 이어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별점을 주기에는 좀 애매한 결과물이에요. 제가 원한건 스티븐 킹의 논픽션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작품을 비롯하여 나머지 부록들에 대한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참고하시길.

2014/02/20

11인이 있다! - 하기오 모토 / 서현아 : 별점 2.5점

11인이 있다! - 6점
하기오 모토 지음, 서현아 옮김/세미콜론

애니메이션으로 미리 접했었던 작품. 생각해보니 하기오 모토 작품을 책으로 읽는 것도 처음이네요. 유명세에 비하면 읽는 것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한데, 뭐 국내 소개가 늦은 탓이 크겠죠? 여튼 표제작 "11인이 있다!"와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이라는 두 편의 중편과 함께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의 "스페이스 스트리트"라는 짤막한 개그 꽁트가 실려있더군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오래된 걸작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명성만큼의 재미나 가치를 느끼기는 어려운건 모든 고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이겠지요. 가끔, 정말이지 아주 가끔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있기는 한데, 이 작품은 그럴 정도의 명작은 아닙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좋은 번역과 디자인으로 국내에 소개하여 주신 출판사 세미콜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가격이 너무 쎄요. 정가가 거의 만 원이라니! 할인된 금액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이른바 "가성비" 측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아직 읽지 못하신 장르문학(만화) 팬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반짝이는 부분은 확실히 있으니까요. 가격 부담만 없으시다면...

간단한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1인이 있다!"

동명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우주대학 입학 시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10명의 수험생이 시험을 치루는 우주선에 11명의 수험생이 타고 있다는 기발한 설정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고립된 단체 속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설정은 흔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 명이 수상하다!"라고 알려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보기 드무니까요.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소위인지 중위인지가 두 명이라 둘 중의 한 명이 가짜다! 라는 이야기였는데...
어쨌거나 이 설정 하나 덕분에 우주선에 닥치는 갖가지 위기에서 서로 단합하기 어렵고 누가 11번째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기에 단순할 수 있는 입학시험이 흥미롭게 흘러가게 됩니다.

또 천편일률적이기는 해도 몇몇 캐릭터는 아주 괜찮았어요. 특히 여성이 될지 남성이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의 히로인 프롤의 독특함이 기억에 남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히로인입니다. "남자"가 될 것을 주장하는 히로인이라니!

허나 시대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던 것일까요? 솔직히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점은 초반 테스트에서 꽤나 강력해 보였던 타다의 초능력이 왜 먹히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여기서 11번째는 충분히 밝혀졌어야 하지 않나요?
또 흥미로운 전개에 비해 11번째가 결국 자백(?)에 의해 밝혀진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설득력은 있지만 시시했거든요. 뭔가 단서라도 던져줘서 독자에게 함께 추리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흥미로운 설정에 비하면 전개는 부족하고 결말은 시시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러한 단점이 과연 시대가 흐른 탓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은 각색을 잘 했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

"11인이 있다!"의 후일담으로, 우주대학에 합격하여 훈련받는 타다 - 프롤 커플이 마야왕 바세스카의 초대에 응해 마야에 방문하나 급진파 - 전통파의 충돌로 전쟁 목전의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SF 판타지 군웅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 캐릭터를 등장시켜 약간 하드한 SF에서 판타지로 이어지는 구조는 초인 로크의 "신세계전대" - "빛의 검" 구성과 유사하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11인이 있다!"보다도 더 문제가 많습니다. 행성 마야의 위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악당들의 음모도 유치하기 그지없으며,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와중에 낀 타다와 프롤의 행동 역시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또 타다와 프롤이 대체 이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도 애매하고, 입학 동기인 4세의 죽음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동기들의 활약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후일담치고는 부족한 점도 많아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스트리트"는 정말이지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이라 별점을 주기는 애매합니다만, 후일담 성격으로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2007/01/22

다이혼야 - 도리 미키 : 별점 2점

 

아키하바라 코미케 폭파 사건 뒤의 근미래, 작은 서점들은 모두 사라지고 거대 서점만 살아남아 거대 조직에서 책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도입된 서기 20XX년, 거대서점중 하나인 문조당에서 개최되는 "세계 잡지전"을 테러리스트들이 노린다는 정보 때문에 서점관리국의 특수 요원인 관리관 시미즈가 파견되고, 그는 서점의 관리 머신 HAL코와 함께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싸운다.

도리미키의 근미래 SF 개그만화입니다. 수백층이라는 과장은 섞여 있지만 폐쇄된 건물 안에서 테러리스트들과 싸운다는 기본 설정은 "다이 하드"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고 거기에 도리 미키가 창작한 근미래관을 접목해서 좀 괴이한 만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표지의 조금 Retro 틱한 느낌이 좋아서 구입했는데 실제 내용물은 표지보다는 도리 미키 특유의 굵은 펜선으로 이루어진 거친 그림이라 약간 실망했고 개그도 작가만의 캐릭터 개그가 대부분이라 즐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슨 상도 탄 도리 미키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제 관점으로는 재미나 개그, SF적인 발상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서점과 테러리스트들의 음모와 반전은 나름 맛이 잘 살아 있으며 도리 미키의 특기이기도 한 패러디는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또한 광대한 네트워크의 발달과 지구 산림 자원의 부족으로 서점법이 생겨 출판사와 서점을 관리한다는 설정이 제법 괜찮더군요. 지금 봐도 먹힌다 싶을 정도로 아이디어 하나는 정말 기발했습니다.

스토리도 장황한 패러디와 개그의 연속때문에 계속 옆길로 새면서도 기어이 끝을 내기는 해서 그럭저럭 볼만하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속편이 있긴 하다는데 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저는 그런대로 재미나게 읽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8/07/12

왓치맨 - 알란 무어 / 정지욱 : 별점 4점

왓치맨 Watchmen 2 - 8점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악당들과 싸우던 슈퍼 히어로들은 킨 법령에 의해 거의 대부분은 은퇴 수순을 밟는다. 그러던 어느 날 "코미디언"이란 히어로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예전 동료의 한명은 "로어샤크"는 예전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히어로들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간파하게 된다. 조사의 와중에 "로어샤크"는 경찰에 체포되나 그를 도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나이트 아울"은 그를 탈옥시키고 결국 모든 사건과 음모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데...

휴고상을 수상하는 등 너무나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걸작이라는 평이 자자했던 왓치맨이 드디어 국내 정발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단의 평 처럼 대단한 예술성을 느꼈다고 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재미있더군요. 단순한 권선징악적 이야기가 아닌 복잡한 음모가 이면에 펼쳐지며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슈퍼 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 슈퍼 히어로물을 잘 아는 성인을 위한 만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의 지구 평화를 지키기위한 명목하에 벌어진 거대한 음모에 대한 히어로들의 암묵적인 동의, 그에 반발하는 로어샤크의 제거라는 극단적인 결말은 무척 인상적이었고요. 절대 선이 존재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적인 SF, 그리고 다른 차원의 지구와 세기말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겠지만 친숙한 슈퍼 히어로물에 이러한 세계관을 도입한 아이디어는 높이 사 줘야죠.

아울러 추리 애호가로서는 "추리적" 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왔습니다. 히어로 연쇄 살인사건이라 할 수 있는 중심 사건과 그것을 조사해 나가는 로어샤크의 모습은 하드보일드 물을 연상케 했거든요. 수사 과정 자체는 별거 없는 탐문수사에 그치지만 거대한 음모와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은 꽤 흥미진진하고 나름 하드보일드 전통에 충실하다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래픽 노블"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정도로 미국 만화 특유의 선을 살리면서도 정교하게 그려지며 화려한 채색이 덧붙여진 데이브 깁슨의 그림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세부적인 디테일 하나를 놓치지 않는 치밀함 역시 빛을 발하고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작품에 대한 방대한 정보와 해석이 넘쳐나는데 그러한 세부 정보가 없이 처음 접하더라도 작품의 수준은 평범 이상을 보여주는 뭔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종합해 보았을 때 별 4개는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번에 영화화되어 개봉할 예정이라는데 스토리를 영화 하나로 압축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긴 하지만 무척 기대됩니다.

2007/12/15

009-1 : 별점 3점

전 세계가 이스트블록과 웨스트블록으로 나뉘어져 대립하는 시대. 중립 지역은 달. 각 블록의 핵과 군비 경쟁의 뒷면에서 서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평화를 유지시키려는 에이전트들의 활약이 존재한다. 웨스트블록의 핵심 에이젼트는 009-1!

이 작품의 제목을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헛갈립니다만(제로제로 원인지, 더블오 원인지, 제로제로 쿠노이치인지...), 간만에 전 편을 몰아본 TV 애니메이션이네요. 정말 간만입니다. 보게 된 동기는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이 작품의 히로인 밀레느 호프만의 피규어 사진 때문입니다. 정말 땡기게 만들었거든요.

작품은 009로 유명한 이시노모리 쇼타로 선생의 원작으로 30여년전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작한, "자이언트 로보"나 "009" 애니메이션과 같은 컨셉입니다. "쾌걸 증기탐정단"을 보는 느낌도 좀 들고요. 작품에 레트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복고적인 의상과 메카닉을 좋아하는 탓에, 모두가 제 취향에 딱 맞아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주 내용은 "에이전트"라 불리우는 사이보그 여성의 활약상을 담고 있는데 SF적인 느낌보다는 첩보물 성향이 강합니다. 첩보물적인 설정의 에피소드들은 그 수준도 모두 상당한 편이었고요. 정보를 얻기 위한 여러가지 스파이 활동의 디테일은 물론이고, 에이젼트들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충실하게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SF적인 설정의 근간인, 온 몸이 기계화된 미녀들의 액션도 괜찮습니다. 각 에이젼트들의 캐릭터나 특징이 사이보그 009의 멤버들과 무척 유사하다는건 저같은 고전 매니아에게는 반가운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히로인인 009-1 밀레느 호프만입니다. 강하고 냉정한 것은 물론, 임무를 위해서라면 몸을 팔거나 살인까지 서슴치 않는 팜므파탈적인 매력이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복잡한 성격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비쥬얼도 돋보였고요. 피규어를 사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하고 재미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적인 취향의 작품이었기 때문인지 12화로 짧게 끝납니다. 단지 짤막한 시즌이면 괜찮은데 9화부터 심각하게 작화 붕괴 현상이 일어나 안타깝네요. 조금 더 길게, 완성도 있게 제작되었더라면 더욱 좋았텐데 말이지요. 

워낙 짧은 분량이라 딱히 특정 에피소드를 추천하기는 좀 어렵지만, 다양한 미녀들의 멋진 액션과 작품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1화 "잠입자들", 강력한 라이벌과의 사투가 벌어지는 3화 "하드보일드"는 내용과 전개 모두 일급인 걸작 에피소드라 생각되며, 미래세계의 굉장히 기발한 황금 운송 작전이 등장하는 5화 "황금의 여자"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6화 "팝"은 여운을 남기는 전개가 인상적이었고 작화가 붕괴되던 초입인 7화 "항구"는 순진한 소년과 추악한 음모가 대비되는 전개가 좋았고요. 

다만 앞서 설명드린대로, 결말부인 10,11,12화는 솔직히 너무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 강해서 아쉽습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인데 말이죠.

그래도 정말 간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전부 몰아 보았는데 나름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고전 매니아라면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6/21

세계 미스터리 명작여행 악성인자 - 정태원, 최진섭 편역 : 별점 2점

지난주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단편집이라 주말동안 한 번에 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수록작들이 기존에 잘 알려져 있던 걸작들이 대부분으로, 제가 이미 읽었던 단편이 상당수더군요. 홈즈 단편과 브라운 신부 단편, 포와로 단편은 너무 안이한 선정이었습니다. 단편의 거장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앤솔로지에 포함된 작품들이 대부분인 헨리 슬레사 작품이 3편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대충 선정한 느낌이고요. 이런 책에는 보다 마이너하고, 국내 독자가 접하기 힘든 작품들 위주로 선정되어야 했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단편과 더쉴 해미트의 컨티넨털 옵 단편만 이런 선정 기준에 부합하네요.

또 앤솔로지로서의 정체성 문제도 큽니다. 일단 작품 선정에 있어서 기준이 모호해요. 연도별 베스트나 작가 중심 선정도 아니고, 장르도 정통 추리물에서부터 서스펜스 스릴러, 꽁트, 마지막에는 SF 분위기의 단편까지 실려 있습니다. 기준이 물건 기왕 선정했다면, 연도별로 배치하는게 더욱 좋았을텐데 그것도 아니라 혼란스러웠어요.

전체적으로 초심자들이 즐기기 좋은 선정이기는 하나 너무 평범하고 무난하달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세계 서스펜스 명작여행" 보다는 독자를 흥분시키는 맛이 없네요. 제가 이런저런 작품을 너무 많이 읽은 탓도 있겠지만...

베스트는 제가 안 읽었던 작품 중에서만 뽑아보겠습니다. 메그레 경감의 정통 추리물 "다섯명의 용의자"와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 버젼이라는 앤소니 버클리의 "무서운 초콜릿" 입니다. 더쉴 해미트의 "파리 종이"도 괜찮았어요.

작품별 간략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돼지와 피아노 - 헨리 슬레사

폭력적인 남편에게 괴롭힘 당하며 사는 한 여인이 숙면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 등장하는 단편. 심리 드라마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2. 헬로 자스민 - 헨리 슬레사 

로봇 개발에 취미가 있는 해리는 아내 자스민을 죽이기 위해 자신이 만든 로봇 맥더프를 프로그래밍 하는데.... 

 단편의 거장 중 하나인 헨리 슬레사의 독특한 단편. 다른 앤솔로지에도 많이 실려있는 작품이죠. 반전의 묘미가 탁월합니다.

3. 세 여인의 공통분모 - 빌 프론지니 

30대의 금발 머리, 그리고 영업을 위해 자주 출장을 떠나는 세 여인이 차례로 살해당했고, 한 남자가 자수했는데 동기는? 

단편으로 더 유명한 작가인 빌 프론지니의 괜찮은 작품입니다.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도 실려있는 작품이죠. 짧지만 강렬한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4. 한낮의 정사 - 브루노 피셔

앞집에 사는 노마가 살해당한 뒤, 불륜 관계에 있었던 TV 수리기사 래리 포레스트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브린 형사는 새로운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데...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단편으로 짧은 길이 안에서 꼼꼼하면서도 공정한 전개, 그리고 화자가 남편이라는 독특함까지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가 참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다른 앤솔로지에 수록된 작품이긴 하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5. 색다른 토끼 스튜 - 윌리엄 아이리쉬 

수많은 앤솔로지에 실려있는 걸작 단편. 지금은 낡아 보이지만 괜찮은 증거 인멸 트릭이 등장하는 고전입니다.

6. 미인과 초콜릿 - 로버트 블록 

아내 메어리를 죽이고 애인 프란시스와 새로운 생활을 꿈꾸는 존은 약제사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 직접 독을 넣은 초콜릿을 제조하여 아내에게 선물로 주는데... 

역시 다른 앤솔로지에서 본 작품입니다. 살인을 계획하는 과정을 주 내용으로 하되 반전을 통한 파국으로 끝나는 미국 추리 단편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런 전개는 "헬로 자스민"하고도 똑같죠.

7. 살아있는 라디오 - 존 딕슨 카

중요한 연구를 진행 중이던 두 남녀가 허름한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괴로워하다가 유령이 나온다는 방에서 라디오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시체가 놓여 있었다... 

꽤 장황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나름 명쾌한 해석과 결말이 있는 잘 짜여진 고전적인 추리 단편입니다. 특히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거장의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작품이었습니다.

8. 사랑의 도박 -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작가 데이비드의 비서로 일하는 펜은 데이비드의 아내 지니와 사랑에 빠졌다. 데이비드는 펜을 조롱하고 지니와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실종 사건을 연출하는데... 

스릴러라고 봐야 할까요? 마지막 한줄로 사건을 정리하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줄의 증언이 실제 수사단계에서 얼마나 확신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9. 초록색 벌레 - GK 체스터튼

브라운 신부 단편입니다. 굉장한 힘을 가진 인물이 조그만 흉기를 써서 광포한 살인을 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하지만 브라운 신부 특유의 화법으로 설명하는 작품으로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는 단편입니다.

10. 마음 돌리기 - 도널드 마틴

그래디 부인은 자신의 수표를 훔치려다 다리를 삔 토빈이라는 젊은이를 치료해 주며 그를 개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토빈은 부인의 보석을 가지고 달아나게 된다... 

추리물로서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마지막 반전이 괜찮은 소품입니다.

11, 파리종이 - 더쉴 해미트

건달과 사랑에 빠진 명문가 막내딸이 송금을 부탁하자 컨티넨털 옵이 수표를 가지고 출동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간데없고 송금 요청은 조작된 것이었는데... 

컨티넨털 옵 시리즈로 길이도 길고 내용도 풍성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책이 단서가 되는 등 트릭과 전개도 꽤 잘 짜여진 편이고요. 특히나 하드보일드이면서도 사람이 많이 죽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알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12. 위험한 초보운전 - 프레드 S 토비

굉장히 짤막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짧은 길이 탓인지 사건의 동기가 미흡한 것은 아쉽네요.

13. 사라진 열쇠 - 애거서 크리스티

포와로 단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죠.

14. 다섯 명의 용의자 - 죠르즈 시므농

벨기에 국경 밖으로 나가는 열차에서 한 부자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같은 객차안에 있었던 다양한 직업과 국적의 다섯 명 뿐이었다.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이 단편집 최대의 수확입니다.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단서가 완벽하네요. 트릭 자체는 별게 없는 완전범죄 스타일의 작품은 아니지만 메그레 경감의 수사방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15. 무서운 교배 - 죤 콜리어

예전에 호러 앤솔로지에서 본 기억이 나는 짤막한 호러단편입니다.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 의문이네요. 전혀 성격이 맞지 않거든요.

16. 무서운 초콜릿 - 앤소니 버클리

클럽 회원인 윌리엄 경에게 선물로 배달된 초콜릿을 같은 클럽 회원인 버레스포드가 아내에게 주려고 대신 받았는데, 초콜릿을 먹은 아내가 독으로 죽고 말았다.

역시 이 단편집에서 베스트 중 한편입니다. "독 초콜릿 사건"의 단편버젼이라고 하는데 정통 추리물로 동기와 전개가 나무랄데 없네요. 불특정 다수를 노린 듯한 트릭도 굉장히 우수하고 독창적입니다.

17. 약속의 그늘 - M.레버

모파상 단편같은 지독하게 잔인한 인생사를 다룬 소품. 그러나 15편 "무서운 교배"와 같이 왜 이 단편선에 실려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18. 빨간 머리와 지하실 - 코난 도일

"붉은 머리 클럽"입니다. 설명은 필요 없겠죠?

19. 매력적인 안드로이드 신부 - 헨리 스레사

SF취향의 소품으로 전 아시모프 작품인줄 알았습니다....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설정만 독특한 작품으로 이 작품도 이 단편선 성격과는 잘 맞지 않는 선정인것 같네요.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28

2025 블로그 리뷰 결산 (스물 두 번째!)

안녕하세요. 어제의 "어차피 곧 죽을텐데"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고, 올해 결산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요새 이런저런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리캡에 편승한건 아닙니다. 제 블로그 연말 결산은 이번이 스물 두 번째이니까요. 

간략한 블로그 통계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독서 결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읽은 총 책 권수는 82권입니다.

  • 추리 / 호러: 48권
  • 기타: 14권
  • 역사서: 9권
  • 디자인/스터디 : 1권
  • 기타 장르문학: 5권
  • Food / 구루메: 5권

독서량이 작년(110권)에 비하면 30% 가까이 대폭 줄었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감상이 늘은 탓입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걸 선택하게 되네요. 추리 소설은 왠만한 작품으로는 신선함이나 재미를 찾기도 좀 어려웠고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지요.

그래도 1년에 100권은 읽어야 책 좀 읽는다고 할 수 있으니, 내년에는 좀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입니다.


1. 추리 / 호러

베스트: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별점 3.5
-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함이 인상적이다.

올해 별점 3.5점을 줬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오가와 사토시의 "신의 퀴즈"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정통 본격 추리물에 가깝고, 수록 단편 중 "반딧불이 계획"은 별점 4.5점의 걸작이라서 올해 베스트로 꼽습니다. 

워스트: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별점 1.5
- 범죄 스릴러로의 매력은 전무하다.

올해 별점 1.5점의 망작은 모두 여섯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망작들은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추리물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않았어도 워스트로 꼽지는 않았을텐데, 뒷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이 너무 컸네요.

2. 기타

베스트: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
- 가볍지만 의미도 있다.

읽은 책 중 절반에 가까운 여섯 권이 별점 3점을 받아서 한 권을 꼽기가 애매하지만, 재미와 정보 모두 좋았던 이 책을 꼽아 봅니다.

워스트: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별점 1.5
- 2025년에 읽기에는 낡고 지루했던, 재미와 가치 모두 압도적인 워스트. 

3. 역사서

베스트: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별점 4.0
-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 난파 관련 논픽션은 항상 기대 이상!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별점 3.0
- 일상 감각을 해킹하는 여러가지 팁이 가득.

이 분야는 올해 한 권만 읽어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4.0
-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SF와 만나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다 별점 2점이네요.

6. Food / 구루메

베스트: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별점 3.5
- 상세하게 알 수 있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생활.

워스트: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별점 1.5
- 방향성과 완성도 모두 기대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