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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7

나의 로라 - 비라 캐스퍼리 / 이은선 : 별점 3점

나의 로라 - 6점
비라 캐스퍼리 지음, 이은선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모의 유명 여성 카피라이터 로라 헌트가 자택에서 총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연인 셸비와 결혼을 앞둔 상태였다. 사건을 맡게 된 형사 마크 맥퍼슨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녀에게 빠져드는데...

원제는 "로라(Laura)". 여성 작가 비라 캐스퍼리의 작품입니다. 여성 작가가 쓴 하드보일드물의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에도 당당히 선정된 고전으로, 챈들러와 말로우가 모두 소개된 현 시점에서 본다면 국내 출간은 외려 늦어보이기까지 합니다(챈들러 완역은 하루키가 팬이라는 것이 잘 알려진 탓도 클 것 같긴 하지만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팜므파탈과 마초 탐정(또는 형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서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형사 마크는 본인 스스로 무식하다고 여기지만,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이지적인 면을 갖춘 노력가입니다. 여성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혐오하지도 않고요. 강렬한 폭력 충동도 보이지 않는 냉정한 인물입니다. 여성 주인공 로라 역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남자를 농락하고 벗겨먹으려는 악녀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현재의 지위를 차지했고, 남자를 고르는 것도 본인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하는 독립적 여성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너무 빛나서 주변 남자들이 나방처럼 몰려들고, 그래서 서로가 불행해진다는 측면에서 보면 궁극의 팜므파탈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이렇게 등장 인물들부터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질 정도에요.

또한, 이러한 등장 인물들이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로 그려져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영화 각본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답게 상황별로 장면이 연상되는 묘사력도 빼어나며, 등장 인물들에게 딱 들어맞는 명대사가 잘 어우러져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명곡 "Smoke Gets in Your Eyes"가 초연되었던 뮤지컬 "로버타"의 언급 등 당대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묘사 역시 깨알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화자가 월도 - 마크 - 로라 순으로 바뀌며 전개되는 것도 좋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서술 트릭같이 이야기를 꼬아놓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확실하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1인칭 시점 덕분에 각 캐릭터들에 대해 독자가 더 깊게, 상세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월도가 얼마나 현학적이고 자기 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질투의 화신인지, 마초 경찰로 보였던 마크가 피해자로 알았던 로라에 대해 알아갈수록 왜 흔들리는지, 로라는 대체 어떤 여자인지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요. 아울러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동기, 즉 월도 스스로 영원히 조종할 수 있었던 로라가 자신의 품을 벗어나게 되자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는 것도 꽤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그 외에 셸비가 잃어버린 금담배갑, 그가 산 싸구려 술이 단서가 된다는 복선도 나름 잘 짜여져 있는 등 전체적인 전개도 충실합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사건이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이앤이 로라의 집에 머물게 된 것, 셸비가 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 모두 우연입니다. 최소한 경찰 신고만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도 월도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건 어려웠을 거에요. 아울러 로라의 유죄가 강하게 시사되는 상황에서 마크가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그녀의 무죄를 믿는다는건, 기존 하드보일드에서 팜므파탈에게 사로잡혀 진실을 망각하는 남성 피해자 역할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해 이 작품의 장점을 퇴색시키는 듯하여 아쉬웠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앞서 이야기한 복선 이외에는 별다른 인과관계 없이 사건이 벌어지는 편이라 눈여겨볼 부분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낭비된 복선이 거슬립니다. 예를 들면 꽤나 중요하게 언급되던 왈도의 골동품 사랑이 실상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소한 로라에게 선물한 화병은 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어야 하는데, 전형적인 맥거핀에 불과해 실망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왈도와의 사투를 다룬 결말도 헐리우드스러워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차라리 본인의 의지는 아니지만 모두가 불행해지는, 운명대로의 결말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도 확실하고 읽는 재미도 뛰어난 고전임에는 분명합니다. '엘릭시르' 시리즈다운 예쁜 디자인과 일러스트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형적인 남성향 하드보일드물에 식상하신 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영화화되어 큰 히트를 치고 하드보일드 영화 걸작선에 이름을 올렸다는데, 영화도 꼭 한번 구해보고 싶어지네요. 호러 영화로 더 알려진 빈센트 프라이스가 잘생긴 매력덩어리 셸비 역으로 출연한다니 더더욱이요!

2021/07/24

살인과 창조의 시간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5점

살인과 창조의 시간 - 6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튜 스커더에게 비밀스러운 봉투를 맡겼던 스피너가 살해당했다. 소식을 들은 매튜는 봉투를 열었고, 봉투 안에는 스피너가 협박해 왔던 세 명에 대한 증거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셋 중 누군가가 스피너를 죽였다고 생각한 매튜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협박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스피너처럼 자신에게도 범인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프레이저는 자살했고, 베벌리는 이혼당해 모든걸 잃었다. 진상을 알아챈 매튜 스커더는 세 번째 협박 대상인 휘샌들을 찾아가, 그가 스피너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걸 알리며 마지막 담판을 벌이는데...

로렌스 블록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매튜 스커더가 술을 끊고 알콜 중독자 치료 모임에 다니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시거든요. 찾아보니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네요.

얼마 전 읽었던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가 하드보일드의 탈을 쓴 헐리우드 스타일의 펄프 픽션 범죄물이었다면, 이 작품은 정통 하드보일드에 가깝습니다. 매튜 스커더는 진짜 사나이로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법을 동원해가면서 정의 구현에 최선을 다합니다. 베벌리 에스리지라는, 유혹과 살인을 동시에 행하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도 등장하고요.

하지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서 설명해 주었던, 변해버린 시대상을 반영한 하드보일드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탐정역인 매튜 스커더부터 알콜중독자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고, 타인의 죽임에 대해 고민하는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정의 구현에 나섰지만 실제로 정의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프레이저는 스피너 죽음과는 무관했고, 그가 협박당했던 과실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튜 스커더가 스피너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며, 기존에 스피너가 했던 협박을 이어갔기 때문에 프레이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매튜 스커더 스스로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게 살인이 아니라면 뭐가 살인일까요? 오래전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때문에 죽어나가던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어 마땅했었는데, 탐정 때문에 지극히 선량한 인물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는 처음 봤네요. 이런 정의, 선과 악이 모호한 설정은 시대가 변했다는걸 강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팜므 파탈이 부자 남편을 잃었지만, 나름대로 개과천선하고 매튜 스커더와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 더해 “나도 목석은 아니거든요.”라며 방을 찾는 베벌리에게 “내 호텔이 있지."라고 말하는 매튜 스커더의 마지막 대사는 화룡 정점이었어요. 몰락한 팜므 파탈과 불완전한 탐정이 '몸친구' 사이가 되는 결말이라니! 이 얼마나 현대적입니까! 고전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했던 복잡하고 꼬인 인간 관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이제는 과거와 같은 깊은 정을 나누는 관계가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세 명의 협박 피해자들 외에는 고작해야 프레이저의 딸 스테이시 정도가 살짝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구현해 낸 하드보일드 캐릭터와 설정들에 비해 추리적으로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세 명 중 한 명이 범인이다!라는 생각에, 세 명 모두에게 자기가 새로운 표적이라는걸 알리고 공격을 기다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 중 스피너를 죽였던 휘슬러의 하수인과 베벌리의 옛 남자 룬드그렌이 각각 공격 시도를 했으며, 매튜 스커더는 모든 공격을 룬드그렌이 했던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지요. 결국 프레이저는 죽었고, 베벌리도 아니라면 남는건 휘슬러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명의 공격이 겹쳤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문제인데, 이 결론을 토대로 마지막에 휘슬러와 담판을 짓는 장면은 더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요. 휘슬러가 스피너가 죽었다는걸 알고 놀랐다는걸 증거라고 제시하는데, 이건 증거도 뭐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에 가까와 보입니다.

그래도 읽기 적당한 분량에, 결말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재미는 확실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현대적인 하드보일드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매튜 스커더 시리즈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3/12/15

팜므파탈 (Femme Fatale) - 브라이언 드 팔마 : 별점 2점


동료들과 함께 1천만달러짜리 다이아몬드를 훔칠 계획을 세운 로르는 동료들의 배신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쫓기는 도중 호텔 난간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은 로르는 자신을 릴리라고 부르는 한 중년 부부에 의해 릴리의 집으로 옮겨진다. 부부는 로르를 쉬게 한 뒤 다시 오겠다며 집을 나서고, 집안을 둘러보던 로르는 이 집의 딸 릴리가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릴리의 신분증과 미국행 비행기표까지 발견한 로르, 그녀는 이제 릴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그때 집에 들어온 진짜 릴리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권총으로 자살한다. 로르는 릴리로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7년 뒤 프랑스 대사가 된 남편과 더불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러나 7년 전의 사건은 그냥 잊혀지지 않았다. 릴리로 변한 로르에게 다시 위험이 다가오고 사건은 실타래처럼 엉켜간다...

"미션임파서블1" 이후에 별다른 흥행작은 없었지만 스릴을 창조해 내는 재능에 있어서는 탁월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최신작 (그래봤자 1년도 전의 것이지만) 입니다. 그다지 실망을 주지 않는 감독 중 한명이라 무료한 일요일 오후, 소일거리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은 꽤나 흥미진진한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따라갑니다. 제목 그대로 "팜므파탈-치명적인 여인"답게 중반부에서 반데라스를 함정으로 끌어드려 서서히 조여나가는 부분의 긴장감과 재미는 대단했고요.
하지만 막판 반전... 이 너무나도 깹니다. 감독 스스로 데이빗 린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만큼 일종의 "몽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스릴러영화로서는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제목하고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요. 각각의 사람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물고 물리는 구조 역시 다른 영화에서 많이 보아온 식상한 요소였습니다. (펄프픽션이 대표적이겠죠)

아울러 주연인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포스터만 보면 그야말로 제목에 딱 어울리는 레베카 로미즌 스테이모스 두명 다 미스캐스팅이라는 점도 아쉬운 점이었어요. 반데라스는 엄하게 함정에 빠져드는 파파라치 역을 하기엔 너무 느끼하고 레베카는 생각보다 화면에서의 매력이 별로더라고요. X맨에서 미스티역은 좋았었는데.. (앗! 그리고 추가정보.. 저도 프렌즈 광팬인데 레베카가 프렌즈로 데뷰했다고 해서 조사해 보니 프렌즈 4기에서 러스가 잠깐 데이트했던 박물관 조교로 나왔더군요. 무진장하게 지저분하게 살던^^)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영화에서 반데라스가 찍는 파리의 풍경사진만큼의 재미도 없는, 평범한 스릴러물이었습니다. 모 영화 전문지에서는 "저주받은 걸작"비스무레하게 포장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절대 그정도 작품은 아니에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흥행에 실패하는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반데라스가 비스무레한 캐릭터로 나왔던 레베카 드 모네이와의 95년도 작품 "스트레인져 (Never Talk to Strangers)"가 훨씬 더 나았습니다 .

2005/02/16

밀랍 인형 (Wax Work) - 피터 러브시 : 별점 4점

밀랍인형 - 8점
피터 러브제이 지음/뉴라이프스타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립 식물원이 있는 고급 주택가 큐 스트리트의 고급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진사 하워드 클로우머의 조수 퍼시벌이 독살당했다. 경찰은 그가 사진사의 아내 미리엄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미리엄을 기소했다. 그녀는 피해자가 즐겨 마시던 와인 디캔터에 사진관에서 쓰던 청산가리를 넣어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술서를 제출했고,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며칠 안 남은 어느날, 형사부장 크리브에게 이 사건에 대한 엄중 조사 명령이 하달되었다. 사실은 독약을 꺼낼 수 있는 금고의 열쇠는 피해자 퍼시벌과 남편 하워드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리엄은 열쇠를 손댈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건 수사에 나선 크리브는 미리엄 주변에 비슷한 형태의 자살-독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워드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하워드가 종적을 감춘 탓에, 크리브는 법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는 사형수 미리엄과의 면회를 통해 진상을 밝힐것을 결심하는데....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로 접했던 영국작가 피터 러브시의 작품. 작가에 대해 호감도 있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여러분들의 호평을 인터넷 상에서 익히 접해왔기에 헌책방에서 눈에 띄었을때 주저없이 구입하였습니다.

고전 황금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영국이 무대입니다. 손에 잡힐 듯한 시대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작가의 시대 묘사는 특출합니다. 3편의 장편 모두 다른 시대가 배경인데도 말이지요. 현대가 무대인 "마지막 형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 초엽의 "가짜경감 듀"나 이 작품 모두 창문 밖 거리를 보고 쓴 듯한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권이거든요. 특히나 이 19세기 후반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적당히 수사와 재판 등의 조직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한 듯한" 고전 추리소설적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인데 작품과도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작품 속 탐정역의 크리브 형사 부장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데, 상사에게 치여살며 만년 형사부장에 머물러 있는 궁상맞은 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자존심도 있고 행동력, 추리력이 탁월한 능력있는 탐정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홈즈를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당시 경찰에도 레스트레이드같은 무능한 인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설정은(출세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뭐 레스트레이드도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능력있는 인물이겠지만요.

하지만 이 크리브 형사 부장보다 이 작품을 빛내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리엄이라는 영국 스타일 "팜므파탈"입니다. 주로 "몸"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은 미국식 팜므파탈에 비교해서 상류계급의 귀부인이라는 사고방식, 엄숙하고도 단정하면서도 곧은 행동거지로 무장하고 약점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독사같은 면모를 갖춘 독특한 악녀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냅니다.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 역시 갖추고 있고요.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은 굳은 마음과 치밀함도 큰 무기입니다.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하며 무너지긴 했지만,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였습니다. 이야기도 스토리텔러로서의 피터 러브시의 진가를 잘 보여줍니다. 크리브 형사부장이 서서히 사건을 파헤치며 드러나는 과거의 또 다른 자살 사건, 그리고 과거 사건과의 이해할 수 없는 연관성에서 비롯된 추리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승부! 결국 마지막에 "일사부재리 원칙"이라는 결정적 법 조항으로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반전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를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드러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다왔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인과 타소 밀랍 인형관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다 긴장감을 자아내면서도,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는 연출 역시 발군이고요.

하지만 작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인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승부에서 크리브 형사부장이 이끌어내는 부분은 약간 치밀함이 부족했고(물론 이 사건에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전제조건이 있어서 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해답이 급작스럽게 돌출된다는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트릭으로 지적 흥분과 재미를 가져다 준다는건 분명합니다. 중편 정도의 부담없는 분량도 매력적이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만한 매력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PS : 그나저나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는 물론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좀 길었다고 느껴졌었는데 이 책은 깔끔하네요. 아무래도 이 정도 길이가 저한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2010/09/07

연기로 그린 초상 - 빌 벨린저 / 최내현 : 별점 2.5점

연기로 그린 초상 - 6점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북스피어

대니 에이프릴은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작은 채권대행 수금업체를 인수했다. 업체의 고객카드를 정리하던 중 자신이 젊었을때 스쳐 지나갔던,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남은 한 여인의 사진과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대니는 사진과 기사만을 토대로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 혼자만의 수사에 착수하는데...

빌 밸린저(빌 S 밸린저)의 장편입니다. 이전에 작가의 "사라진 시간", "이와 손톱"을 읽고 리뷰를 올렸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국내 출간된 작가의 작품은 완독하게 되었네요.

작품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크래시 알모니스키가 미모와 두뇌를 이용하여 주변의 남자들을 도약대로 삼아 성공해 나간다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팜므파탈물입니다.
너무 뻔해서 솔직히 실망이 컸습니다. 별다른 복선이나 반전이 하나 없어서 결말까지 쉽게 예측 가능합니다. 
그리고 크래시의 계획은 그다지 치밀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쉽게 남자 사냥에 성공한다던가, 피해자들이 피해를 본 이후에 단순한 피해자로 전락한다는건 범죄 스릴러로서의 가치도 없어보입니다. 수긍하기도 어려워요. 주인공 대니 에이프릴은 대단한 능력없이도 시간과 노력으로 결국 그녀를 찾아내니까요. 이런 식으로 피해자 남자들이 멍청한 바보라는게 팜프파탈물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정도가 너무 심했어요. 

그래도 빌 밸린저 특유의, 주인공과 시간대가 다른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다가 '현재'에서 만난 뒤 극적 결말에 이르는 독특한 전개는 좋았습니다. 주인공 대니 에이프릴이 약간의 단서만 가지고 크래시 - 캐서린 - 캐런 - 캔디스 을 추적해 나가는 수사 과정의 디테일은 합리적이면서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 주고요. 마지막 사건에서 의도하지 않은 완전 범죄가 성립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던 점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 읽기에는 단점이 더욱 도드라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1950년 작품으로, 이런 류의 팜므파탈물 원조 중 하나일 수는 있습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국내 소개된 작품 중에서는 가장 별로였습니다.

2012/12/09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 - 최애순 : 별점 4점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 - 8점
최애순 지음/소명출판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탐정소설에 대한 8편의 논문을 모은 한국문학사 서적.

8편의 논문은 각각 '탐정'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론, 소파 방정환의 소년 모험소설, 채만식의 탐정소설 "염마", 김내성의 "백가면", 주요 번역 작품 소개, 번역 작품 중 독보적인 인기였던 모리스 르블랑과 루팡(뤼뺑) 시리즈의 번역 역사, 최서해의 번안 탐정소설 "사랑의 원수"(원작 "노란 방의 수수께끼")와 김내성 "마인"의 관계 연구,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 범죄와 팜므파탈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제목만 보아도 흥미진진한데, 내용도 딱딱하지 않고 상당히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상 외로 꽤나 인기 있었던 근대 조선의 '탐정' 소설들과 왜 정통 본격물이 유행하지 않고 통속적인 연애 소설과 결합되어 진화하였는지에 대해 밀도 있게 쓰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이때 조선에 본격물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였더라면 제가 좋아하는 고전 본격물이 다수 소개되었을 테고, 국내 추리 창작 환경도 많이 변했을 텐데 조금 안타깝기도 하네요.

또 저자가 실제 확인한 자료를 통해 소개하는 다양한 창작 및 번역 작품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에 대한 소개는 마치 작품을 직접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예요. 아울러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존재했음에도, 현재 우리가 직접 읽을 수 있는 작품이 한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라는 현실도 아프게 다가왔고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소파 방정환과 김내성의 아동 모험물을 다양한 텍스트와 비교 분석한 내용, "노란 방의 수수께끼"와 "마인"을 비교하여 "마인"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연구, 그리고 한국형 팜므파탈을 당시 빈번했던 본부 살인 사건과 연계하여 소개하는 연구 등이 추리 애호가로서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 연구야말로 한국 추리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겠죠.

아무래도 모든 분께 추천드리기에는 조금 어려워 보이기는 하나, 식민지 조선을 무대로 한 추리소설을 창작하는 분께는 자료적인 의미에서라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의 하나로서 별점은 4점입니다. 꼭 창작이나 자료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분들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6.25 전후 한국 추리소설사를 조망하는 후속권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2014/08/04

타블로이드 전쟁 - 폴 콜린스 / 홍한별 : 별점 4점

타블로이드 전쟁 - 8점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양철북

19세기 말, 토막난 채 발견된 시체가 신원이 마사지사 굴든수프로 밝혀진 후,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마틴 손에 대한 재판과 사건을 보도하며 선정적 보도의 끝을 보여준 퓰리처의 월드, 허스트의 저널지의 경쟁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우선 빅토리아시대 말, 그야말로 셜록 홈즈 전성기를 무대로 상세하게 소개되는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은 굉장한 볼거리였습니다. 과학 수사의 초창기로, 아직 지문 대신 베르티용 측정법이 사용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혈흔 분석, 포장지의 출처 추적, 여러 목격자 증언을 통한 용의자 특정 등의 수사 과정은 현대 수사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고문에 의존하지 않는 냉정한 수사라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백여년의 시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보다 더 현대적 수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논란이 되는 시체 없는(또는 시체의 정체가 불명확한) 사건에 대해 혐의를 물을 수 있느냐는 쟁점도 흥미로왔던 점이며, 마틴 손의 변호를 맡았던 당시 최고의 변호사 하우의 실력도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피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묘사되는데, 예를 들자면 다른 사건에서는 핵심 증인을 돈을 주고 홍콩으로 이민 보냈다고도 하네요. 페리 메이슨이 떠오릅니다. 하여튼, 하우가마틴 손이 범인이라고 말했던 오거스터 낵을 법정에서 박살내는 장면,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와 증거(예: 사건 현장의 욕조가 시신을 썰기엔 너무 작았다)는 뛰어난 변론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마틴 손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배심원단의 음주 사실을 조사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물론 개인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지만요.

아울러 사건의 진상이 재판이나 수사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지만, 저자가 제시한 추론도 나름 설득력 있더군요. 굴든수프의 시신에는 반항 흔적은 있으나 섬유 증거는 없었고, 오거스터 낵 체포 시 멍자국이 있었으며, 빈 와인병이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굴든수프가 게이가 아닌 이상, 함께 와인을 마시고 알몸 상태에서 칼을 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오거스터 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추리였습니다.

오거스터 낵은 사건과 재판, 그리고 이후의 행보까지 볼 때 정말 대단한 팜므파탈이라 생각됩니다. 자기 확신과 합리화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소시오패스와 다를게 없더군요. 예전에 읽었던 "밀랍 인형"의 팜므파탈 미리엄의 리얼 버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의 또다른 축인 황색지의 보도 경쟁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현재의 언론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씁쓸함도 전해 줍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노력이 만들어낸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더군요. 무엇보다도 허스트의 말처럼, 사건을 실제로 만들어서라도 특종을 얻는다는 전략은 지금 보아도 놀랍습니다. 예전에, 평화로운 시골 마을 신문사 기자가 사건을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단편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게 그냥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재판 중 굴든수프의 사체 일부에 대한 묘사, 마틴 손의 외모를 언급하는 증언들, 일종의 ‘아이돌’이 된 피고의 인기, 그리고 사건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 등도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범죄 논픽션으로도, 황색 언론의 보도 행태를 다룬 기록물로도 손색 없는 책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추리물, 범죄물,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2013/07/03

비로드의 손톱 - 얼 스탠리 가드너 / 박순녀 : 별점 2.5점

비로드의 손톱 - 6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박순녀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에게 이바 글리핀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찾아와 사건을 의뢰했다. "스파이시 빗츠"라는 협잡 신문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페리 메이슨은 "스파이시 빗츠"의 실제 주인인 베르타를 찾아가 협박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오히려 베르타의 아내가 이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바에게서 베르타가 살해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초기작이라고 합니다. 단 4일 만에 완성된 작품이라네요.

일단 굉장히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빨라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스파이시 빗츠'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페리 메이슨이 알아내는 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게다가 그 인물은 바로 그날 밤에 살해되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빠른 호흡으로 쉴 틈 없이 사건이 전개되고, 해결을 위한 페리 메이슨의 작전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당대의 인기작다운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추리적인 요소도 꽤 괜찮은 편입니다. 모든 증거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전개는 아니었어요. 이바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는 장면도 인상 깊었고, 베이츠의 젖은 몸, 닫힌 문 등의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도 충분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또한 캐릭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상당히 컸습니다. 주역 3인방인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폴 드레이크의 매력은 여전했고, 특히 이 작품에서의 페리 메이슨은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유산 검인 장면 한 곳을 제외하면 변호 활동도 거의 나오지 않아, 굳이 직업이 변호사일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바 베르타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한마디로 어벙한 팜므 파탈인데요, 탐정에게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는 팜므 파탈은 또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어요. 유혹해도 무시당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다 되레 들통나고 망신당하는 등 한없이 찌질한 모습만 보여줘서 여러모로 신선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대리만족(?)도 느껴졌고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글리핀의 베르타 살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차피 유산은 자신에게 돌아올 텐데, 굳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하녀 딸과의 관계가 드러나 유산 상속에 위협이 된다는 정도의 설명은 필요했을 것 같은데, 너무 간단히 넘겨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 공통된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사건 해결을 위한 메이슨의 연극과 공작이 지나치게 쉽게 성공하는 점, 대부분의 사건이 자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니지만, 당대의 인기작다운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한 심심풀이 독서로는 제격인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출간된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완독했기에 더 좋았고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얼 스탠리 가드너가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소개되는데, 나름 감동적이었습니다. 바쁜 생활 중에도 하루에 최소 4,000단어의 소설을 써냈다는 점, 타자기를 너무 많이 쳐서 손톱이 빠질 정도였다는 점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있는 저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2004/08/17

하이 윈도 - the High Window : 레이먼드 챈들러 / 박현주 : 별점 2.5점

하이 윈도 - 6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북하우스
-아래 줄거리 및 감상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머독부인이라는 괴상한 노부인에게서 집나간 며느리가 훔쳐간 머독 집안의 보물 - 브랴셔 더블린 금화- 을 되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금화를 장물이라 생각해 연락해온 화폐상 모닝스타를 조사하던 중, 얼빠진 초보 탐정 필립스의 협조 제의를 받고 아파트로 찾아가게 되나 그곳에서 필립스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시체 발견 시의 정황 때문에 경찰에게도 심문 받는 등 궁지에 몰린 말로우가 모닝스타의 시체까지 발견한 뒤, 머독부인은 사건을 끝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갱 두목에게서 조사를 요청 받은 머독 부인의 며느리 린다와 친분이 있던 갱 두목 부인의 정부 바니에르와 사건이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고, 우연히 방문한 머독 부인의 비서 멀 데이비스 덕분에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간만에 읽은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 "안녕 내사랑" 읽은 이후 처음이네요. 얼마전에 번역 출간된 북하우스의 시리즈입니다. 출간 자체가 반가운 탓에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의 공식을 따릅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복잡한 복선을 깔고 있는 의뢰, 의뢰를 조사하던 중 점점 커지는 사건, 의외의 등장인물들이 얽혀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점 등이 그러합니다.
이런 공식은 대부분의 하드보일드가 따르기에 자칫 잘못하면 진부하거나 식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리지널리티가 숨쉬는 거장 레이몬드 챈들러의 작품인 덕에 범작 이상의 재미와 흥분을 전해 줍니다. 또 의외로 말로우 답지 않은 의외의 기사도 정신이 등장하는 후반부, 팜므파탈이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점 등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차별화 포인트도 분명하고요. 오히려 머독 부인이라는 노부인이 팜므파탈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도 독특했어요.
중간중간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사건 전개, 특히 바니에르의 친구 치기공사 티거와 "브랴셔 더블린"을 연결시키는 핵심적인 트릭은 약간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역할 분담 및 전개가 무난하며, 챈들러 특유의 문체가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권선징악이랄까... 악인이 어떤식으로든 처벌받는 그간의 하드보일드 공식과는 다르게 조금 흐지부지 끝나는 결말은 아쉽습니다. 말로우의 표현대로 그 싸이코 할망구에게 "양손에 야구 방망이 두개씩 든 양키스 팀의 외야수" 정도는 끌고가서 맛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 개인적으로는 외야수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래봤자 3명인데, 최소한 구단 전체 선수는 동원해야...)

여튼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5점. 흥미진진하고 몰입하여 재미있게 읽었지만 챈들러 작품치고는 범작이라 생각됩니다. 유별나게 재미있거나 특기할 만한 점은 없거든요. 다만 그다지 사람이 많이 죽지는 않고 사건의 전개도 깔끔하며 나름대로 여성에 대한 미덕(?) 이 살아있는 편이니 여성분들의 입문서로 최적의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뒷부분 해설을 보니 흑백시절 2편이나 영화가 제작되었더군요. "빅 슬립"은 영화로 보았는데 이 영화들도 한번쯤은 보고 싶어집니다.

PS : 번역은 무난하지만 북커버와 제목은 조금 불만이네요. "하이 윈도"라.....

2009/05/01

벨벳의 악마 - 존 딕슨 카 / 유소영 : 별점 3점

벨벳의 악마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고려원북스

1925년, 58세의 역사학 교수 니콜라스 펜튼은 악마와 계약해서 240년 전, 헨리 2세 통치하 영국의 니콜라스 펜튼 경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는 아내 리디아의 독살을 막고 자신과 관련된 정치적 암투를 해결하며, 헨리 2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화요추리클럽'의 운영자로 유명한 장경현님이 감수하셔서 이른바 "장경현의 MOM(Magnum Opus Mystery)"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고려원북스의 걸작 미스터리 시리즈 두번째 작품 - 첫번째 작품은 역시 딕슨 카의 "구부러진 경첩" 이었죠 - 입니다.
유명 추리애호가의 감수답게 국내 미출간된 거장의 작품을 선정하여 출간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 역시 딕슨 카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어 저같이 영어가 딸리는 추리 애호가들의 맘을 아프게 했었는데, 이번 출간으로 오랜 갈증을 해소한 것 같아요.

그런데 작품은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 물이라 놀랐습니다. 저는 그동안 역사 추리소설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작품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과거로 타임 슬립한다는 상상 밖의 이야기더라고요.

그런데 이러한 전개는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유치하다는 느낌까지 받았으니까요. 유사한 시공 이동 판타지를 너무 많이 접한 탓이지요. 하여튼, 작품 발표 당시에 발휘되었을 새롭고 신선한 맛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아울러 시공 이동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타임 패러독스의 딜레마" - 역사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꿀 경우 현재가 영향을 받아 결국 과거로 이동한 자신마저 영향을 받게 된다는 - 역시 편법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기 때문에 실망스럽습니다. 

내용도 부실하고 황당한 부분 역시 많습니다. 원래는 58세인 주인공의 행동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초딩스러운 행태를 많이 보이는 점이라던가 팜므파탈로 설정한, 그야말로 악마의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의 존재와 정체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또 역사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정도로 추리와 역사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역사 추리물이라면 실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후대의 추리적 고찰이 반영되어야 할텐데, 이 작품은 단지 2세기 전을 무대로 한 독살 사건일 뿐이며, 사실 시대적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트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단점만 가득한 작품은 아닙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명성에 값하는 재미도 충분한 덕분입니다. 일단 헨리 2세 치하의, 이른바 토리당 - 휘그당의 대립을 소재로 쓴 역사 이야기 부분은 제대로 된 활극의 재미가 넘칩니다. 주인공 니콜라스 펜튼이 "벨벳의 악마"라 불릴 정도의 영국 제일의 검사이자 과격한 인물이라는 것 덕분에 "검의 대가" 나 "스카라무슈" 만큼이나 검술 액션이 가득하니까요. 검술의 기술, 칼의 고증 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딕슨 카의 디테일도 제대로라서 볼거리가 많습니다.
다만 이러한 디테일은 실제 2세기전의 영어로 대사를 표현하는 등 이 작품에서 신경쓴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한글로 번역되면서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긴 하네요.

추리적인 부분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비소 독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제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의표를 찌르는, 예상밖의 트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소개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악마가 영혼을 거래할 때 맺는 계약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 가 잘 드러나면서도, 이 계약 내용을 복선으로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서 나름 본격물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점입니다. 딕슨 카는 역시나 딕슨 카 였달까요. 역사 추리물은 아니지만, 시공 이동 판타지 물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는 대가의 노련함이 엿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부러진 경첩" 보다는 확실히 의표를 찌르는 맛이 넘치는 의외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통 추리 애호가라면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는데 재미와 아이디어, 독창성 측면에서 충분히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7/03/23

긴다이치 코스케 - 여왕벌


이즈반도의 시모다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바다 70리상에 위치한 월금도에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직계 후손이라는 다이토우지가가 살고 있었다. 19년전, 그곳을 찾은 도쿄의 두 학생 긴죠와 쿠사카베는 가문의 외동딸인 미모의 아가씨 다이토우지 고토에를 만났다.
고토에와 쿠사카베는 사랑에 빠졌고 고토에가 임신을 했지만, 고토에가 쿠사카베를 밀실에서 살해한 뒤, 긴죠가 대신 데릴사위로 다이토우지가에 들어가 가문을 잇는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년 뒤, 고토에의 딸 다이토우지 토모코는 19세가 되자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도쿄로 나와 3명의 신랑 후보를 만났다다. 어머니 고토에는 같은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후손으로 핏줄을 잇기를 바랬던 것.
그러나 신랑 후보 유사, 고마이, 츠쿠모가 연달아 살해되고, 이는 고토에가 남편인 쿠사카베를 살해했던 19년 전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지며, 유력한 용의자로 토모코와의 결혼을 욕심내던 타몬 렌타로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떠오른다.
긴다이치는 요코미조 선생과 같이 휴양 여행을 간 호텔 소라이장에서 처음 토모코를 본 인연으로 사건에 뛰어들어 명컴비인 다치바나 서장과 함께 진상을 파헤치게 되는데...

전에 보았던 "팔묘촌"과 같은, 이나가키 고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로 말해서 너무나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보고나니 힘이 다 빠지네요. 추리물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공정한 정보의 제공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그나마 기대했던 긴다이치의 추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 작품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마지막 범인(?)의 유서(?)에서 진상을 드러내는 등 추리물로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수준이었거든요.
각 사건들의 표현 비중도 애매해서 현재의 세개의 사건보다 19년전 사건을 더욱 디테일하게 끌고가는 편집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건의 발단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라지만 각 사건들을 보다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추리적으로도 "박쥐"라는 말을 이용한 트릭은 제법 재치있었지만 그 외의 트릭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네요. 19년전의 사건을 설명하는 "발작" 부분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황당할 정도였고 3건의 사건 모두 우연과 재수(?)에 기인한 것들이 많아서 정교함이 한없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보다보면 유력한 용의자가 딱 한명밖에 떠오르지 않기에 공정한 정보의 제공이나 설명이 그만큼 어려웠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실망감만 안겨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원작은 읽지 못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전혀 기대되지 않는군요.

이 작품에서 볼만했던 것은 아래의 쿠리야마 치아키가 맡은 고토에- 토모코 뿐이었습니다. 제목은 왠지 팜므파탈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데 실제로는 청순가련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이 좀 특이하죠. 잘 어울렸습니다. 정말이지 그 외에는 건질만한게 단 한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2010/03/25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 박신우 : 쓴소리 좀 할께요... 별점 2점


일전에 일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기에 기대가 컸던 영화입니다. 일본 드라마 리뷰 글에서 썼듯이 이 방대한 내용을 어떻게 2시간여의 분량으로 압축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죠.

그런데 보고나니 아니나다를까... 압축하여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 결국 실패했더군요. 곳곳이 허술하고 횅~해서 빈틈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이야기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를 너무 많이 들어냈기 때문이죠.
예를 들자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너무 줄여놓는 바람에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은 도대체 요한이 왜 유미호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겠더라고요. 또한 이러한 어린 시절 이야기의 생략은 첫번째 살인사건 - 한국판에서는 김시후 살인사건 - 이 왜 일어났는지 관객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요. 덕분에 극초반 한동수 형사가 수사하는 과정의 서스펜스가 전무하다는 것은 또다른 감점요소고... 두번째 유미호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설득력 역시 없어져 버립니다.
그나마 이 두 사건은 현재시점, 즉 14년 뒤로 넘어와 두번째 사건 수사의 발단이 되는 강재두 살인사건 이후의 사건들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공소시효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강재두를 죽여야만 한 이유는 무엇이며 다른 시체들은 그래도 은닉작업을 했는데 강재두만 왜 자살로 위장해서 사건을 키우는지 모르겠는 등 도저히 상식선에서 사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도 역시 이해할 수 없어요. 앞서 말한대로 "공소시효"라는 부분이 원작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 의미가 별로 표현되지 않고 왜 하필이면 그날 죽음으로 사건을 끝맺을 생각을 했는지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원작따라 간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산타옷도 같이 입혔으면 웃기기라도 했을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낮아보여서 실망이 더욱 컸는데요, 아무래도 감독이 작품을 느와르라고 착각한 것 같아요. 이 작품에서의 요한은 미호의 지시대로 사람을 죽여나가는 살인기계에 지나지 않거든요. 미호는 성공에 눈이 멀은 악녀일 뿐이고요. 한마디로 전형적인 느와르의 팜므파탈과 행동대장에 불과해요. 결국 이들에 대항하는 정의의 형사 나으리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단순한 이야기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단지 원작의 캐릭터와 스토리라인만 일부 가져와서 자기식으로 변주하면서도 외려 중요한 몇몇 대사와 모티브는 일본 드라마에 너무 충실해서 실소를 자아냅니다. 정말이지 이야기의 흐름과 관계없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원작의 대사들은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였어요. 갑작스럽게 태양 아래를 걷고 싶다니 나원참... 원래 원작의 유키호가 어렸을 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는 이유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스칼렛 오하라"라는 캐릭터와 감정이입을 시키기 때문인데 영화에서는 그냥 두 아이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소재로만 쓰이고 있는 등 사소한 부분에서도 겉핥기에 그치기에 실망만 안겨줍니다. 음악도 백조의 호수만 주구장창 나와서 원작 대비 훨씬 떨어진다 생각되고요.

또 불필요한 요소들은 왜 이다지도 많을까요. 대표적인 것이 비서실장 이시영의 등장이죠. 그냥 한동수 형사가 강재두 사건 발생 후 사건을 다시 맡게 된다는 설정으로 갔어도 충분했을텐데 괜히 시간만 늘어잖아요. 중간의 자동차 사고라던가 성폭행 미수 사건 등은 지나친 오버였고요. 아울러 필요도 없는 정사씬의 등장은 서비스 차원인지는 모르겠으나 다 아줌마들만 등장한 관계로 외려 감점감입니다 -_-;;

물론 원작보다 좋았던 점도 있긴 합니다. 일단 영화답게 스케일도 크고 화면도 아주 좋다는 장점이 있죠. 색깔로 표현한 캐릭터들과 미장센이 멋드러지거든요. 또한 배우들, 특히 한동수 형사역을 맡은 한석규씨의 연기는 정말 대단해서 몰입을 도와줍니다. 과연 명배우는 명배우더군요. (아쉽게도 별로 하는거 없는 고수씨와 평면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손예진씨 연기는 실망스러웠지만....) 그리고 이야기적으로도 한동수 형사가 다시 사건을 추적하는 계기는 원작보다도 더 설득력있게 구현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체적으로 봤을때 솔직히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너무 분위기와 드라마에 신경쓴 나머지 이 작품이 원래 "추리 - 스릴러"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추리적 속성을 놓쳤다면 둘 사이의 애절한 관계라도 잘 포착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꽃등심 등 온갖 좋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결과물이 결국은 라면 수준이었달까요... 실망이 크기에 별점은 2점이며, 부디 원작이 있는 작품을 각색을 할 때에는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덧붙이자면, 감독님이 과 후배님이시더군요. 쓴소리는 했지만 앞으로 무운을 빕니다.

2022/08/07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 김선형 : 별점 2.5점

가재가 노래하는 곳 - 6점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살림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슾지대에서 태어난 카야는 엄마와 언니, 오빠들, 마지막으로 아빠마저 집을 떠나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카야는 어린 나이와 마을에서는 '마시 걸'이라고 불리우며 차별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놀라운 생존 본능과 흑인 점핑, 그리고 첫 사랑 테이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심지어는 글을 깨우친 뒤 독학으로 슾지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진행하며 책까지 출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이트와의 이별, 첫 남자 체이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몇 년이 지나 돌아온 체이스는 그녀를 강간하려 시도했고, 카야는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뒤, 체이스는 망루에서 떨어진 시체로 발견되었고, 카야는 유력한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는데...


일전에 소개해드렸던 랭킹에서 해외 미스터리 걸작 베스트 10에 당당히 선정되어 있기에 궁금한 마음에 읽어보게 된 작품입니다. '버려진 아이'인 카야가 테이트와 점핑의 도움만으로 훌륭한 늪지대 전문가로 성장한다는 낭만적인 성장기와 체이스 살인 사건이 병행해서 전개됩니다.
초반부 어린 카야 시점에서의 여러가지 묘사들과 성장기스러운 분위기,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엄청난 디테일 - 제목부터가 엄청난 오지인 노스캐롤라이나 늪지대를 의미합니다 - ,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재판이 있던 1970년까지 난무했던 인종 차별, 여성 차별, 편견이 난무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묘사와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 법정 장면이며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함께 펼쳐진다는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앵무새 죽이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성장기 측면에서는 이 작품 쪽이 더 볼만한 부분이 많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 남부 요리들에 대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츠'가 기억에 남습니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인데, 처음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먹는 형편없이 빈약한 일상식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의 40여년이 흐른 뒤에는 관광지의 별미처럼 격상하는게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보릿고개 때 소나무 껍질로 만들어 먹다가 지금은 지역 명물 별미가 된 송기떡 같은 경우겠지요? 그 외의 음식들 묘사도 그럴듯했습니다.
카야를 도와준 몇 안돼는 지인인 흑인 점핑과 메이블 가족과의 에피소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카야의 첫 책이 출간되었을 때,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에 서로 포옹하지는 못했지만 두 손을 꼭 감싸쥐었다가 돌아서서 떠나는 장면은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애매합니다. 디테일의 끝판왕이기는 한데, 한 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간 관계부터 그러하지요. 어린 카야만 남겨두고 엄마부터 시작해서 언니, 오빠들이 집을 떠난 뒤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건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카야의 아빠를 비롯, 조디 오빠, 테이트, 체이스 등 카야 주변의 모든 백인 남자는 모두 한 번씩 카야를 버렸다는 일관된 설정도 영 별로였습니다. 카야가 체이스같은 인간 쓰레기에게 손쉽게 농락당하는게 특히나요. 전혀 카야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야는 늪지 생태계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통해, 암컷이 수컷을 짝짓기와 먹이로 이용하는 방법을 이미 통달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수컷은 무가치하며, 암컷들을 전전하며 거짓으로 암컷을 유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본능적인 팜므 파탈로, 체이스의 등골까지 뽑아먹는 악녀로 묘사되는게 더 설득력이 높지 않았을까요? 단지 암컷으로서의 본능 때문에 체이스의 유혹에 넘어간다는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추리물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알리바이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카야가 빠듯한 시간 안에 망루에 도착해서 체이스를 살해할 수 있었던 건, 그 지역의 '이안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트릭인데, 전문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았으니까요. 그 지역에서 보트만 십 년 넘게 따온 카야라면 쉽게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할만큼 카야에 대한 배경 설정은 완벽한 편이기도 하고요.
마침 사건 당일 출판사로 출장을 떠났던 카야가 도심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 근처 호텔에 숙박했었던 등의 요소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검사측 주장대로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자연에서 지내다보니 도심 속 호텔을 싫어했으리라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버스에는 카야와 체형이 흡사한 승객이 탑승했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과연 카야가 법정에 피고로 서서 유죄 판결을 받을만 했나? 라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법정 추리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체이스를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체이스 옷에 그녀의 모자 섬유가 묻어 있었던건 사건 당일 묻었다고 볼 근거가 없고, 체이스 살해 현장으로 그녀가 이동했다고 확신하는 증인도 없습니다. 아니, 그녀가 체이스 살해 현장으로 시간 맞춰서 이동이 가능했는지조차 검사는 증명할 수 없었지요. 게다가 이 모든게 사실이라서 그녀가 망루에서 체이스를 만났다 한 들, 그녀가 체이스를 밀쳐 떨어트려 살해했다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 즉, 제대로 정신이 박힌 배심원이라면 그녀가 유죄라고 판단할리 없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배심원들의 편견인데, 마침 배심원 중에는 그녀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는 설정이니 그녀가 무죄로 풀려나는건 당연합니다. 카야가 흑인은 아니지만, 비슷한 편견 때문에 유죄를 받는 식으로 흘러갔다면, 그건 그야말로 <<앵무새 죽이기>>의 복제에 불과했을테고요.

카야가 체이스의 목걸이를 풀어 가져간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하는 약점도 거슬렸습니다. 목걸이가 남아있었더라면 그냥 사고사로 처리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목걸이를 아무리 잘 숨겨 놓았다 하더라도 집 안에 숨겼다? 완전 범죄물로 보기 힘들 정도의 큰 결격 사유에요. 완전 범죄를 계획했던 범인이 자기 집에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다 놓는건 아무리 봐도 말이 안됩니다. 이는 진상을 어떻게든 드러내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카야가 죽은 뒤, 그녀와 결혼한 테이트가 집 안 비밀 장소에서 목걸이와 카야가 쓴 글을 찾아내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결말도 식상했고요.

즉, 법정 미스터리나 완전 범죄 추리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기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낭만적인 성장기로는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소 진부했고, 추리물로서도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역대 서양 미스터리 베스트 10 중 한 작품으로 꼽힐 작품은 아니에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인건 맞습니다. 이런 류의 랭킹은 불신이 더 컸었는데, 가끔은 참고할만 하네요.

2009/06/17

악마같은 여자 - 토마 나르스작 외 / 양원달 : 별점 3점

악마 같은 여자 - 6점
토마 나르스작 외 지음, 양원달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디아볼릭"이라는 영화로 더 유명한 소설이죠. 이쪽 바닥에서는 유명한 작품인데 프랑스 쪽 소설은 뤼뺑 시리즈말고는 그닥 취향이 아니라서 스킵하고 지나갔지만 동서 추리문고의 꾸준한 할인행사 덕분에 결국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보니 본편이라 할 수 있는 "악마같은 여자" 보다 같이 실려있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쪽이 더 길고 비중있는 작품이라 황당했습니다. 제목이 바뀌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어쨌건, 일단 "악마같은 여자"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 작품은 낚시 전문 샐러리맨 라비넬이 정부 뤼세느와 공모하여 아내를 살해하고 거액의 보험금을 받으려고 하는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라비넬은 결국 시체 유기까지 성공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 죽은 아내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라비넬은 폭주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유명한 작품이긴 한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감이 큽니다.

제일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영화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이겠죠. 중반 이후부터는 결과가 빤히 보여서 도저히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어차피 "제목" 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이기도 한 탓에 영화에 대한 내용을 몰랐다 하더라도 결국 눈치챘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또한 결국 범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될까라는 것에 대한 설득력이 좀 약하더군요. 라비넬이 소설과 같은 의도된 결말로 폭주할 것일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물론 라비넬의 1인칭 심리묘사를 통해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심리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합니다.그러나 독자는 알지만 범인은 모를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라서 썩 와닿지 않았으며 (중간에 뤼세느가 잠깐 라비넬을 만나긴 하는데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심리묘사 역시 너무 지나쳐서 읽는데 좀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참고로, 이러한 프랑스 소설 특유의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한 묘사는 제가 프랑스 추리 소설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납니다. 너무 장황해요. 도대체 라비넬의 "파리낚시" 이야기는 왜 나오는건지도 모르겠다니까요... 그리고 라비넬 심리묘사와 반대로 팜므 파탈에 대한 묘사가 애매하고 부족한 것 역시 감점 요소였고요.

한마디로 소심남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대형 사고를 쳤다가 파멸하는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였습니다. 보다 유머스럽게 블랙코미디로 갔더라면 더 제 취향이었을 것 같은데, 뭐 시대가 너무 흐른 탓도 크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두번째 작품인 노엘 칼레프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역시 영화로 더욱 유명한 작품이죠. 사실 아주 오래전에 "하서 출판사" 판본으로 이미 읽은 작품이긴 합니다만 다시 읽어도 재미있더군요.

줄거리는 반쯤은 사기꾼인 주인공 줄리앙 크르트와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완전범죄를 꾸며 고리대금업자 볼그리를 살해하는데 성공하지만, 깜빡한 마지막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사무실로 되돌아가다가 엘리베이터에 갖히게 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사건은 여기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죠. 일단 줄리앙의 아내와 가족의 분란에서 시작해서 줄리앙의 차를 훔쳐탄 한 연인의 범죄행각 등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거든요.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가 소란스럽고 유쾌하다는 점, 그리고 전혀 다른 인물들이 얽히고 섥히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결말로 흘러간다는 점이 굉장히 현대적이고 영화적이라서 인상적입니다. 정말 "영화" 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또한 사람들의 심리묘사 등이 프랑스 소설이지만 어느정도 수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품에 딱 어울리는 수준이었어요. 단, 중간에 등장하는 두 연인 -프레드와 테레즈- 의 묘사가 "셸부르의 우산"류의 신파 멜로물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좀 별로였습니다. 두 연인의 존재가 작품의 결말에 필요 불가결했던 부분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겠지만요...

"악마같은 여자"와 비교하자면, 수렁에 빠진 남자의 원맨쇼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훨씬 제 취향이었달까요. 뭔가 타란티노 영화가 연상되는 것이 시대가 흘렀지만 현대적인 느낌도 전해주며, 지옥행 급행(정말이지 초특급!) 열차를 타는 줄리앙의 모습이 통쾌하기도 해서 여러모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두 작품 평균한 이 책 전체의 별점은 3점으로, 점수가 높은 편은 아니며 두 작품 모두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범죄, 스릴러 물에 가깝긴 하지만 이 책 한권이면 1950년대 프랑스 추리소설의 진수이자 장, 단점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되네요.

2009/07/27

작전 (2009) - 이호재 : 별점 3점


연극영화과 출신의 개미 강현수 (박용하)는 수년전 선배에게 당한 주식사기를 교훈삼아 5년에 걸쳐 개인투자자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 그러던 중 조폭 출신의 사업가 황종구 (박희순)이 작전 중인 주식을 건드린 그는 황종구에게 오히려 스카웃 된 뒤 무려 600억짜리 주식 작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작전 프로젝트는 부실 건설회사 대산토건이 환경벤처 "한결"을 인수 합병하는 정보를 먼저 입수하여 대산토건 주식을 매수하여 주가를 올린 뒤 처분하려는 작전!

이번 주말에 와이프와 같이 감상한 영화입니다. 국내 최초의 주식 작전을 다룬, "스팅"과 같은 일종의 "범죄 - 사기"영화로 넓게 보면 추리영화로 볼 수도 있는 작품이죠.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어쨌건 쟝르는 추리 / 호러 + 영화!)

영화를 보면서 제일 놀랐던 점은 영화가 기본적으로 "코미디"라는 점입니다. 때문에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흡사 유쾌하고 경쾌하면서도 치밀한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마저 드는데 (앞서 말한 "스팅", 혹은 "오션스 일레븐" 등) 이러한 작품의 매력은 주식을 가지고 벌이는 "작전"과 그에 얽힌 세력들의 다툼을 상당히 잘 그리고 있으면서도 주인공의 동생이 미생물학과 출신이라는 등의 여러 설정들과 나름 잘 짜여진 복선의 삽입, 그리고 코믹한 에피소드와 대사들의 유효적절한 사용 등의 디테일도 치밀하게 구성한 각본의 승리로 보여집니다. 그만큼 각본이 아주 괜찮았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비호감이었던 박용하씨 연기가 상당히 괜찮아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안 본 이유는 박용하씨 존재 이유가 가장 컸는데, 그러한 저의 생각이 미안해질 정도로 마스크나 그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별볼일없는 개미 연기를 능청스럽게 잘 소화하고 있거든요. 그 외의 조연들, 특히 김무열씨의 연기가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놈은 꼭 처절하게 망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 정도였어요^^ (박희순씨의 조폭출신 사업가 연기도 좋았습니다만 이 캐릭터는 누가 했어도 비슷한 수준은 뽑아줬을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김민정씨 연기는 불만스럽더군요. 결국 악역도 아니고 조연이라고 하기에도 캐릭터의 비중이 애매한 캐릭터이긴 한데 그나마 있는 매력도 잘 살리지 못했어요. 한창 유행한 "팜므파탈" 캐릭터를 삽입하려다 실패한 케이스랄까요? 뭐 애시당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유명 정치인들의 비자금을 독점 관리한다는 설정자체가 에러죠. 고두심씨 정도가 등장했더라면 모를까.

그리고 실제 "작전"이라는 측면만 놓고 본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주식을 한지 5년이 넘어가기는 하지만 주구장창 손해만 본 개미라 그다지 주식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600억이라는 돈을 들여서 주식 시장에서 작전을 한다면 짧은 기간동안 승부를 보고 나오기에는 불가능하지 않나 싶더군요. 2만원짜리 주식이라면 총 300만주를 매집한건데 하루 거래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한달에 걸쳐 서서히 팔아야 하는 물량으로 보이거든요. 팔다가 지칠거 같아요....
그리고 "한결"이라는 유망한 바이오벤처를 합병하는 것이 호재인데 이 "한결" 합병 이전에 대산토건이라는 회사가 오래갈것 같지 않은 부실기업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설득력이 상당히 약했습니다. 대주주인 사장이 나중에 주식을 모두 정리하고 도망가는 묘사까지 나오는 부실기업이라서 결국 모회사의 부도로 인해 같이 나자빠질 가능성이 높아보였거든요. 국책 과제로 선정되어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 투자금 반환하고 자력갱생하여 유망한 회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영화에서처럼 대산토건 주식에 올인한 박용하는 결국 쪽박이었을테고 말이죠. 하여간 이 "한결"과 "대산토건"이라는 회사의 관계는 그다지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한 측면이 강합니다.
덧붙여, 박용하 캐릭터가 연극영화과 출신이라는 복선을 좀 더 잘 활용했더라면 어떨까 싶은데 그것까지는 좀 무리였겠죠?

그래도 주식 작전에 대해 복잡하지 않게 잘 설명하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해서 주말 한나절을 보내기에는 충분했던 영화라 별점은 3점입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는 엔딩도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제가 아주 좋아하는 끝마무리이기도 하죠. 제발 영화에서처럼 선량한 사람들이 돈버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각본과 감독을 모두 소화한 이호재 감독의 데뷰작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의 작품이라 차기작도 기대가 됩니다. 차기작도 유쾌하고 선량한 작품을 찍어주시기를 바랍니다.

2006/10/03

타짜 (2006) - 최동훈 : 별점 4점


허영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영상화한 영화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원작 1부의 내용을 90년대로 끌어와 재구성했는데 상당히 긴 이야기의 원작을 잘 압축하고 넘어갈건 넘어가면서 각색을 잘 해서 원작팬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그리고 원작을 보지 않더라도 영화 자체만으로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영화라 생각됩니다. 저같이 화투로 섯다를 칠 줄 모르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더군요. 타짜들의 손동작이나 속임수도 핵심적인것만 잘 영상화하고 있으며 최동훈 감독 특유의 (두작품밖에는 안 찍었지만) 왠지 회를 쳐 놓은 듯한 화면빨(?)도 여전한데 이 작품에서는 "색채"를 상당히 강조해서 스타일을 더했습니다. 여러 세트들도 꽤 공들여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고요. 중간중간의 유머들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서 영화가 물 흐르듯 유머와 긴장감을 잘 조율하며 흘러가는 것이 무척이나 탁월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 최대의 수확은 한국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팜므파탈 "정마담"을 창조해 낸 점이겠죠. 이 캐릭터는 원작에서도 꽤 비중이 큰 캐릭터이긴 했지만 영화에서는 정말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으로, 그러면서도 스토리 자체를 쥐고 흔드는 역량과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독과 각색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가슴을 자랑하며 화면을 장악한 김혜수라는 배우의 공도 크겠죠. 가슴하나는 정말 작살이었습니다. 좋은 배우가 좋은 배역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니 좋네요. 그 외에도 평경장 역의 백윤식이나 유해진 등 조연들의 캐스팅도 적역이고 연기력도 출중해서 모든 캐릭터가 잘 살아있더군요.

하지만 그에 비해 주인공 곤(고니) 역의 조승우는 카리스마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려보이는 듯한 외모 때문에 그러한 인상이 더했기 때문에 미스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네요. 원작 2부의 주인공인 함대길 캐릭터가 외려 조승우에게는 적역이 아니었을까요? 남원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조금 더 나이들고 묵직해 보이는 배우, 개인적으로는 강한 인상의 권해효 같은 배우가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너무 코믹할지도...) 그리고 화면 밑에 일종의 타짜로서의 룰이나 격언 같은 것이 깔리는 연출은 좀 작위적이었던 것 같고 몇몇 장면에서의 이야기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점, 저는 아직도 정마담이 왜 평경장을 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최대의 승부가 너무 쉽게 시작해서 쉽게 끝난다는 점이 긴장감을 끌고가는 데 있어서는 좀 부족해 보였고요.

그래도 전작에 이어 그럴듯한 (물론 원작이 있긴 하지만) 범죄 스릴러 도박물을 성공적으로 촬영한 최동훈 감독의 역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각색이 워낙 출중해서인 탓도 있겠지만 원작 팬으로서는 흥행에 성공해서 원작 2부도 영상화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네요. 물론, 최동훈 감독이 찍어야겠죠. 별점은 4점입니다.

그나저나, 수출된다면 어떨까요?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쓰면 바로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한국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까요? 이게 워낙 만화등에서 자주 쓰여서 익숙하기도 한데 과연 이게 한국적 상황이 맞기는 맞는걸까요? 궁금해지네요.

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11/06/04

13인의 만찬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2점

13인의 만찬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주의! 하기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유명 여배우이자 에지웨어 경의 아내로 이혼 스캔들에 휩싸인 제인 월킨슨은 포와로에게 자신의 이혼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의외로 에지웨어 경은 이미 6개월 전 이혼을 승낙했다고 말했고, 이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제인이지만, 범행 시간에 13명이 참석한 만찬회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며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간만에 여사님 책을 읽었네요. 탐정은 포와로, 조수는 헤이스팅스, 그리고 의뢰인이자 사건의 핵심은 금발 미녀 여배우라는 드림팀스러운 조합의 작품이죠.

일단 좋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후더닛물로는 괜찮았습니다. 의외의 진상 덕분입니다. 끝까지 꼬아놓은 구조와 다양한 용의자들을 적재적소에 삽입하여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 역시 거장의 풍모를 물씬 느낄 수 있고요. 제인 월킨슨은 유머러스한 팜므파탈이라는 점에서 현대적이면서도 독특해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사님 작품치고는 실망스러운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핵심 트릭의 설득력이 너무 많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발상 자체는 괜찮았지만 만찬회에서 정체가 드러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거든요. 무엇보다도 지위와 명성이 있는 여성이 도박에 가까운 행동에 운명을 건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알리바이만 확실히 했으면 됐을텐데, 구태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가며 저택에 들어간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사건 해결에 핵심이 되는 "패리스 - Paris" 라는 단서도 기발하고 재미있지만, 이 정도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살인을 한번 더 일으키는건 질질 끄는 것 같아 별로였습니다. 소소한 디테일(예를 들면 코안경이라던가) 역시도 작품을 길게 늘이는 역할만 할 뿐, 그닥 중요한 단서가 아니라는 것도 별로였고요. 이러한 디테일들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만큼 범인을 옭아매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 제프 경감이 고문이라도 하지 않는 바에야 - 여러모로 단편용 아이디어를 무리하게 늘린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워낙 많은 작품을 쓰신 여사님이시기에 그 작품들이 다 걸작일 수는 없다는 것을 심정적으로 이해는 하지만 독자로서 기대치가 항상 높은 작가라 다른 작가들 작품에 비하면 평가가 좀 박하게 - 한 0.5점은 더 깎는 것으로 - 채점된 것 같네요. 워낙에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니만큼 저승에서도 박정한 평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덧 : 조사해 봤는데 피터 유스티노프가 포와로 역을 소화한 영화가 출시되어 있더군요! 페이 더너웨이가 제인 월킨슨 역을 맡은 것 같던데 나름 적역이라 생각됩니다. 소설은 좀 실망스러웠지만 영화는 꼭 구해봐야겠어요.

2009/05/22

요리장이 너무 많다 - 렉스 스타우트 / 김우탁 : 별점 3점

요리장이 너무 많다 - 6점
렉스 스타우트 지음, 김우탁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국내에 소개된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는 딱 3편이 있습니다. "독사", "챔피언 시저의 죽음", 그리고 이 "요리장이 너무 많다"죠. 예전에 읽었었지만 옛 기억을 되살릴 겸 다시 손에 들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스토리는 무척 간단합니다. "전설의 요리사 15명"이 주최하는 모임에 네로 울프가 옛 친구인 요리사 마르코 뷰크식에 의해 초대되어 "카노와 수퍼"라는 휴양지 (여긴 대체 어디?)로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정기모임에서 요리사 13명 (2명은 사망하여 공석인 상태) 은 2명의 새로운 멤버도 선발하고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는 그런 행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리사 중 한명인 필립 래스지오가 살해된 것이죠!
이 래스지오라는 인물은 경쟁자의 제자를 빼앗고, 아내를 빼앗고, 직장을 빼앗은 요리계의 무법자? 공적? 뭐 하여간 그런 존재였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그런 작자로, 앞서 말한 강력한 동기를 지닌 3명의 요리사 중 한명인 헬로메 벨린이 유력한 용의자로 곧바로 체포됩니다. 그 다음에 이기주의자 네로 울프가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이야기 되겠습니다.

그러나.... 네로 울프 시리즈의 대표작이긴 한데 추리적으로 높이 평가하기는 좀 어려운 작품이긴 합니다. 일단 사건이 딱 하나뿐이라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끌어나가는데에는 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기도 하고요. 또한 중간에 몇개의 증언을 통해 유력한 용의자들의 혐의가 거의 대부분 벗겨질 뿐 아니라, 실제 범인을 확정하는 마지막의 추리쇼도 결국 "추리"가 아니라 "수사에 의한 단서"를 통해 범인을 잡아내기 때문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아주 비합리적인건 아니지만 조금 반칙으로 보였던 것도 아쉬웠고요.
즉, 단서의 제공은 공정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 자체는 드러나지 않기에 정당한 트릭물로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야말로 네로 울프의 독무대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재미가 넘칩니다. 이기적인 모습은 물론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지구가 자기를 위해 돈다고 믿는 네로 울프의 캐릭터가 곳곳에서 작렬하니까요. 헬로메 벨린의 걸작 요리인 "소시스 미뉴이"의 레시피를 탐내는 네로 울프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결과까지 이어지는 과정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네로 울프의 모습은 정말이지 굉장히 웃깁니다. 또한 조수인 아치 굿윈의 톡톡튀는 재담과 둘 사이의 만담과 같은 네로 울프 시리즈를 관통하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전개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수 있습니다. 왓슨 역의 신기원을 이룬 뻰질뺀질하고 느물느물한 조수 아치 굿윈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읽을때마다 재미있단 말이죠^^

그리고 수사과정과 증언이 중요하게 쓰이는 전개, 팜므파탈과 같은 여인이 등장한다는 것 등이 하드보일드를 많이 연상시키는데, 주인공이 안락의자 탐정의 대명사인 네로 울프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기발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블랙 코미디같은 매력도 더 잘 살아나는 것 같고요.

앞서 이야기한 단점이 약간 있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기에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독사" 보다는 낫고, "챔피언 시저의 죽음" 보다는 못한데, "독사"의 경우는 번역 문제가 더 큰 만큼 평균적인 재미는 보장한다고 할 수 있겠죠.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특히 네로 울프의 매력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추천합니다.

덧붙여, 요리사와 요리가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쓰이기에 미식가인 네로 울프의 모습이 굉장히 잘 드러날 뿐 아니라 요리에 관한 디테일한 묘사도 수준급이라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혹 요리를 직접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레시피 소스의 "네로 울프 식 요리들" 을 한번 참고해 보셔도 좋겠네요. 저는 포기했습니다.... 미식가인 네로 울프가 절찬하여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궁금한 "소시스 미뉴이" 레시피가 없는 것이 안타깝네요....^^;; 원서와 렉스 스타우트의 요리책에는 조리법이 나와있다는데 아직 못찾았습니다. "소시스 미뉴이"의 스펠링이 뭘까요?

PS : 네로 울프에 대해 궁금하시면 여기를 참조하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2011/09/10

브릭 (Brick) - 리안 존슨 : 별점 3.5점

브랜든에게 전 여자친구 에밀리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브랜든은 그녀를 돕는데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만 발견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한 브랜든은 에밀리의 최근 동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에밀리가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학교 최상류층 브래디쉬와 로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데...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정통 미국식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스릴러물입니다. 예상보다도 너무나 완벽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주인공 브랜든부터가 그러합니다.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가 현대 고등학교에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여주거든요.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사교성, 몸으로 부딪혀 성과를 내는 행동력, 힘의 균형을 잘 이용하여 줄타기하는 솜씨 등이 딱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 그 자체입니다. "500일의 썸머"에서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조셉 고든 레빗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독특한 이미지의 마약 조직 보스, 힘만 잘 쓰는 어깨 캐릭터, 전형적인 팜므파탈 등의 친숙한 캐릭터들도 하드보일드스럽게 적절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야기 역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입니다.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어 주인공이 여러 세력 간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지만, 복잡한 관계를 하나로 정리하며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전개를 보여주니까요.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앞뒤가 딱 들어맞고 복선과 단서들이 적절히 제공된다는 점, 그리고 하드보일드의 단점인 '운에 의지하는 과정이 많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때문에 "요새 누구랑 점심 먹는 줄 알아?" "점심은 어려워..." 같은 고등학생다운 대사 외에는, 딱히 고등학교가 무대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세계관은 좋았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어요. 이왕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면, 살인과 마약 밀매 대신 조금 더 일상적인 범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물함을 터는 도둑으로 몰린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학교 내 조직 간 암투에 뛰어든다거나, 조직적인 컨닝으로 내신 등급에 영향을 받게 된 여자친구를 위해 사건 해결에 나선다거나... 이게 더 괜찮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하드보일드 영화로 보기 드문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스토리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