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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7

말더듬이 주교 - E.S 가드너 / 정계춘 (자유추리문고 17) : 별점 1.5점

말더듬이 주교 - 4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 사무실로 멜로리 주교가 찾아와 더듬는 말투로 한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변호를 의뢰하며 억만장자 렌월드 C 블래운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상세한 내용은 추후 관련인물들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전한 후 사라진다. 페리 메이슨은 사립탐정 폴 드레이크를 통해 주교에 대한 모든 정보와 과실치사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나 곧바로 주교가 폭행당한 뒤 사라지고 주교에게 고용되었던 간호사 아가씨마저 종적을 감춘다.
페리 메이슨은 주교가 말한 과실치사 사건의 당사자이자 블래운리 가문에서 내쳐진 며느리인 줄리아 블래너와의 만남을 가진뒤 정확한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게 되나 곧바로 렌월드 C 블래운리가 살해당하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줄리아 블래너가 체포되고 페리 메이슨은 증거를 얻기 위한 활동 덕에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미국 추리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쪽이야 걸작도 많고 이래저래 접한 작품이 많지만 그외의 작품들은 뭔가 흥행을 굉장히 의식한 듯한, 시드니 셀던 류의 작품이 너무 많다고 여겨졌거든요. 때문에 진정한 흥행 대마왕인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 선뜻 손이 가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자유추리문고 구입에 포함되어 있어 모처럼 주말에 진득하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동서문화사 판이지만 뭐 어차피 같은 작품이니까...)

"관리인의 고양이"라는 작품을 포스팅 하는 등 이전에도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몇편 읽어보았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조금 다른 분위기였어요. 정통 추리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외려 하드보일드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페리 메이슨과 하드보일드는 잘 어울릴 듯한 소재는 아니지만 이 작품은 페리 메이슨이 혼자 쳐들어가서 악당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나 악당과의 담판 등 세세한 분위기 및 범행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뚜렷하게 하드보일드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전개 역시도 여러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사건의 본질을 추적해 나간다는 하드보일드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더라고요.
그래서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밖에 없어요. 무엇보다도 사건은 단 한건의 살인 사건만 벌어질 뿐이며 그 동기가 너무 뚜렷하고 악당 캐릭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져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물론 어차피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서 사실 기대하는 것은 정통파적인 요소보다는 법정쇼겠죠.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법정쇼" 대신 일종의 속임수로 범인의 자백을 이끌어 내는 결말이기에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법정쇼는 등장하긴 하지만 사건의 해결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자리였기에 긴장감이 떨어지거든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증언과 증거 수집,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법정쇼라는 최대의 매력이 없는 앙꼬없는 찐빵같은 작품이었습니다.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탐정 폴 드레이크라는 고정 캐릭터 3인의 협력 관계 등 시리즈의 팬이라면 즐길 만한 요소가 많고 위에서 이야기한 하드보일드적인 부분때문에 색다른 느낌도 전해주며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최대 장점인 "쭉쭉 읽히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단지 추리소설로만 놓고 본다면 높은 수준의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도 좀 애매한 편이고요. 제목에서 유래되는 주교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초반부가 외려 저는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런데, "주교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통설이 구미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쓰이는 말인가보죠? 제목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작품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로 쓰이고 있어서 궁금해지긴 하네요.

2013/07/03

비로드의 손톱 - 얼 스탠리 가드너 / 박순녀 : 별점 2.5점

비로드의 손톱 - 6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박순녀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에게 이바 글리핀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찾아와 사건을 의뢰했다. "스파이시 빗츠"라는 협잡 신문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페리 메이슨은 "스파이시 빗츠"의 실제 주인인 베르타를 찾아가 협박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오히려 베르타의 아내가 이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바에게서 베르타가 살해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초기작이라고 합니다. 단 4일 만에 완성된 작품이라네요.

일단 굉장히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빨라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스파이시 빗츠'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페리 메이슨이 알아내는 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게다가 그 인물은 바로 그날 밤에 살해되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빠른 호흡으로 쉴 틈 없이 사건이 전개되고, 해결을 위한 페리 메이슨의 작전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당대의 인기작다운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추리적인 요소도 꽤 괜찮은 편입니다. 모든 증거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전개는 아니었어요. 이바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는 장면도 인상 깊었고, 베이츠의 젖은 몸, 닫힌 문 등의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도 충분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또한 캐릭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상당히 컸습니다. 주역 3인방인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폴 드레이크의 매력은 여전했고, 특히 이 작품에서의 페리 메이슨은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유산 검인 장면 한 곳을 제외하면 변호 활동도 거의 나오지 않아, 굳이 직업이 변호사일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바 베르타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한마디로 어벙한 팜므 파탈인데요, 탐정에게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는 팜므 파탈은 또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어요. 유혹해도 무시당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다 되레 들통나고 망신당하는 등 한없이 찌질한 모습만 보여줘서 여러모로 신선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대리만족(?)도 느껴졌고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글리핀의 베르타 살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차피 유산은 자신에게 돌아올 텐데, 굳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하녀 딸과의 관계가 드러나 유산 상속에 위협이 된다는 정도의 설명은 필요했을 것 같은데, 너무 간단히 넘겨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 공통된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사건 해결을 위한 메이슨의 연극과 공작이 지나치게 쉽게 성공하는 점, 대부분의 사건이 자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니지만, 당대의 인기작다운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한 심심풀이 독서로는 제격인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출간된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완독했기에 더 좋았고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얼 스탠리 가드너가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소개되는데, 나름 감동적이었습니다. 바쁜 생활 중에도 하루에 최소 4,000단어의 소설을 써냈다는 점, 타자기를 너무 많이 쳐서 손톱이 빠질 정도였다는 점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있는 저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2007/03/28

기묘한 신부 - E.S 가드너 / 장백일 : 별점 2점

기묘한 신부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장백일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변호사 페리 메이슨에게 한 여성이 찾아와 자신의 친구의 이야기라며 실종된 남자와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페리 메이슨은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녀를 설득하여 진실을 털어놓게 유도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고 사무실을 떠나고, 그녀가 이미 선금을 지급한 것을 알게 된 페리 메이슨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사건에 대해 대략 파악하게 되나 그녀의 전 남편 그레고리가 피살된 후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는데...


페리 메이슨 시리즈. 리뷰는 "관리인의 고양이"와 "말더듬이 주교" 이후 세번째네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러모로 다른 작품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다른걸 다 떠나서 "실제로 의뢰인이 사건을 저질렀다" 라는 황당한 진상 탓이 크죠. 때문에 페리 메이슨이 법정에서 사건을 뒤집는 결정적 장면도 "꼼수" 일 뿐이며 그 속에 담긴 진상을 파악해서 역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실망스러웠어요. 진상 역시 희박한 근거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 추리적으로 보기에 상당한 무리가 있었으며, 그녀가 범행을 저질렀고, 그것은 정당방위였다라는 당연한 이론을 도입하지 못하는 과정의 설득력도 빈약했고 말이죠.

또한 굉장히 간단할 수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결혼"이라는 설정을 도입해서 불필요하게 질질 끈 티가 나는 것도 별로였습니다. 별거 없는 사건인데 왜 이리 등장인물은 많은지... 게다가 등장하는 대부호와 그 아들 캐릭터는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라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꼭 무슨 붕어빵 기계에서 찍어놓은거 같은 전형적인 미국식 대부호 캐릭터더라고요.

물론 흥행 대마왕이자 탁월한 스토리텔러인 가드너의 작품답게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이런저런 재미만 놓고 본다면 꽤 괜찮은 편이긴 하거든요. 또 제가 읽은 페리 메이슨 시리즈 중에서는 법정씬이 제일 길고 유쾌하며 활약도 엄청나서 페리 메이슨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후대 미국의 대중 소설에 큰 영향을 준 듯한 요소가 많이 보여서 나름 흥미로우며 재미만 놓고 본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나 앞서 말했듯 추리적으로 헛점이 많아서 잘 된 추리소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중소설"과 "추리소설"의 줄타기를 잘 실천한 작품이긴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3/29

관리인의 고양이 - 얼 스탠리 가드너 / 한영순 옮김 : 별점 3점

어느날, 변호사 페리 메이슨에게 대부호 피터 렉스터의 관리인 애슈튼이 의뢰를 맡겼다 피터가 화재 사건으로 사망한 뒤, 상속인 샘 렉스터가 키우던 고양이를 내쫓으려고 하는걸 막아달라는 의뢰였다. 메이슨이 상속권을 놓고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자, 두명의 상속인인 샘 렉스터와 프랭크 오프리가 악덕 변호사 나다니엘 샤스터와 함께 메이슨을 방문했다. 메이슨은 끝까지 싸우기 위해 또다른 상속인 후보 위니프렛을 찾았고, 고양이에 관련된 사건을 알게 된 위니프렛은 불쌍한 고양이를 대신 맡아주기 위해 남자친구 더글라스 킨을 저택으로 보냈다.
그러나 애슈튼 노인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용의자로 몰린 킨은 도주했다. 메이슨은 피터 렉스터의 사인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당시 간호사 이디스 도보를 찾았지만 그녀마저 살해당했고, 2건의 사건이 동일인물의 소행으로 보여 더글라스 킨은 수배되었다. 메이슨은 그에게 자수할 것을 권유한 뒤, 법정에서의 단판 승부를 벌인다...

역시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서 구한 책입니다. 문공사에서 간행되었던 월드 미스테리 시리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토라진 아가씨" 이후 두번째로 읽게된 페리 메이슨 시리즈입니다.

일단, 지금 읽기에는 존 그리샴 시리즈에 비해 확실히 시대에 뒤처진 티가 역력합니다. 순진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쉽다고 할까요? 이 소설은 변호사 출신 저자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은 법정 지식이나 많은 자료를 풀어놓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모두 상식선에서 전개되고요.

그래도 역시나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솜씨는 대단합니다. 이야기가 숨쉴틈없이 빠르게 진행되면서도 복선이나 단서도 나름대로 치밀한 덕분입니다. "고양이"를 키우게 해 달라는, 어떻게 보면 사소하고 어처구니 없는 의뢰가 여러명이 얽힌 살인 사건으로 전개되는데, 빠른 속도감과 더불어 흥분을 자아내게 하는 맛도 일품이고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면에 숨어있던 다른 진실이 밝혀진다는 내용은 굉장히 뻔할 수도 있지만, 흥미롭게 잘 풀어냈어요. 

시리즈 팬으로 즐길거리도 많아요. 메이슨을 비롯, 델라 스트리트와 폴 드레이크로 구성되는 3인방의 활약 역시 여전하며 메이슨 소설의 백미라 볼 수 있는 법정에서의 대 역전극도 잘 표현되어 있거든요. 또 여러 증인들을 소환하여 필요한 정보를 단계적으로 수집한 뒤, 마지막에는 직접 "증언대"에 올라 증인으로서 사건을 밝히는 메이슨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는 보지 못했던 신선한 부분이라 특이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너무 쉽게 쉽게 쓴 탓인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메이슨의 계획들이 그다지 치밀해 보이지 않는다는건 아쉽습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도 그 자체는 제법 합리적이지만, 우연성 측면이 강하고, 여러 사건들의 연관성이 떨어져 보이고요. 개인적으로 제일 궁금했던 것이 순전히 "우연"에 지나지 않았던 더글라스 킨의 방문이 없었다면, 과연 범인들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점이었어요. 애슈튼 살인 사건은 우발적이었으니 만큼 은폐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여러군데에서 보여지는 번역 오류와 눈뜨고 봐 줄 수 없는 삽화는 용서가 안됩니다. 번역 오류로 인해 내용 전달이 잘 안되는 점이 많고 주인공들의 이름도 아무 고민없이 쓴 티가 역력하며, 깔끔한 표지 디자인에 비해 너무나 무성의한, 필요도 없이 삽입된 짜증나는 삽화들은 이 소설의 배경이 "태국"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끔 하더군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쉽게 읽히는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제시되는 증거와 단서를 이용하여 사건 자체를 밝히고 말끔하게 해결하는 추리적인 부분과 장치는 장, 단편 통틀어 제가 읽었던 페리 메이슨 시리즈 중 최고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5/29

다섯 번째 증인 - 마이클 코넬리 / 한정아 : 별점 2.5점

다섯 번째 증인 - 6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 할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담보대출 관련 민사소송 변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뢰인 중 한 명이었던 리사 트레멀이 자신의 집을 압류하려 한 은행가 미첼 본듀란트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자, 다시 형사 소송 변호에 뛰어드는데...

해리 보슈를 창조했던 마이클 코널리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큰 인기를 끌어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매튜 매커너히 주연 영화로 발표되기까지 했었지만, 마이클 코널리의 전작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동안은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엄청난 두께도 큰 진입 장벽이었고요.

하지만 읽어보니, 그동안 진작 읽지 않은게 후회될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재미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법정물로 완벽한 재미를 선사한다는 점입니다. 리사 트레멀 재판에서 변호사 미키 할러가 승리하기 위해 프리먼 검사와 벌이는 치열한 법정 공방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에요. 또 미키 할러는 재판 과정에 철저한 작전을 세워서 변칙적이고, 어떻게 보면 불법에 가깝거나 비열해 보이는 짓까지 서슴없이 동원합니다. 단순히 증거 몇 개로 난타전을 벌이는 수준이 아니고요. 그래서 더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미키 할러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피고인이 정말 무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든요. 돈을 받은 이상, 의뢰인 승리 - 여기서는 무죄 판결 - 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렇게 기브 앤 테이크에 충실한 모습, 그러면서도 변호, 그 중에서도 형사 사건 변호라는 직업적 전문 분야에서의 출중한 능력은 '페리 메이슨'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함께 일하는 수족과 같은 동료들과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은 성격, 엄청난 말주변까지 더해져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페리 메이슨의 적자인 셈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현실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 미첼 본듀란트는 키가 180cm가 넘어서, 키가 160cm밖에 안되는 의뢰인 리사가 망치로 정수리를 가격해서 살해하는건 어려웠다는 증언이 리사의 무죄 평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리사는 풍선을 이용해서 본듀란트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게 만든 뒤, 뒤에서 망치로 가격했던 겁니다.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미키 할러가 복수하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리사가 전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은닉했다는걸 폭로하고, 본인은 더 이상 변호사를 하지 않고 검사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보여줄 것 같아 두근두근해지더라고요.

그러나 리사가 진범이라는 반전과 트릭은 좋았지만,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동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리사가 본듀란트를 급작스럽게 죽인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거든요. 작 중 미키 할러의 변론을 통해서도 설명되지만, 미키 할러에 의해 리사의 집 압류는 늦춰질 예정이었지요. 작장을 잃은건 한참 전이니 그 때문에 갑작스럽게 살의가 폭발했을리도 없고요. 우발적인 범행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풍선을 이용해서 사건 현장을 꾸민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미키 할러의 재판 전략도 복잡하지만, 실상 들춰보면 그렇게 알맹이가 많지는 않아요. 검찰에서 내민 증거는 많다지만, 실제로 리사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리사가 쓰던 정원용 장화에 피해자 피가 아주 미량 묻어있던게 거의 유일한 증거지요. 흉기인 망치는 리사 집에 있었던 것이라는게 증명되지 못했고, 오히려 장화와 망치가 놓여있던 차고가 잠겨 있지 않았다는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탓에 직접 증거로 보기는 애매해 졌으니까요. 그러니 장화에 묻은 피 정도로 리사를 살인범으로 단정 짓는다는건 무리로 보였습니다. 제가 배심원이었다면,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했을거에요.

그리고 앞서 설명드렸던 결정적 트릭, 즉 키가 큰 피해자 정수리를 때리기 위해 풍선을 이용했다는 트릭도 조금만 생각해봐도 억지스럽습니다. 검시 결과, 피해자 무릎이 깨져 있는걸로 드러나고 이로써 고개를 뒤로 젖힌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부각됩니다. 그러나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정수리를 가격당한다면, 당연히 뒤로 넘어가서 뒷통수가 깨질 겁니다. 무릎을 다칠 이유는 없어요.

위탁 추심업체 ALOFT의 수장 오파리지오가 본듀란트로부터 협박을 받아 그를 죽였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본듀란트의 협박(?)성 편지는 딱히 큰 위협이 되지 않는걸로 보였고, 실제로 오파리지오가 회사를 매각하는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오파리지오가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증언을 끌어낸 뒤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장면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리사가 사건 현장을 잘 빠져나가고, 대부분의 증거를 인멸하는데 성공했다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던건 마찬가지에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니,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겠지만요.

그 외 전개에서 불필요한 부분도 많습니다. 미키 할러의 전처 등 사건 외적언 이야기라던가 미키 할러를 깡패들을 시켜 폭행하는 이야기, 잔챙이 3류 영화 제작자 허브 달의 존재, 신참 변호사 애런슨의 정의에 대한 고민 등은 이야기를 길게 늘일 뿐, 딱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킬링 타임 펄프 픽션으로는 적당했습니다. 제 2의 페리 메이슨 자리를 차지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러나 책 보다는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영화로 보는게(나온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2005/08/22

대통령의 미스터리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정태원 : 별점 1.5점

대통령의 미스터리 - 2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외 지음, 정태원 옮김/산다슬

짐 블레이크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엄청난 재산가로 러시아 배우에게 반해 결혼하나 그녀가 사랑한건 그가 아닌 돈이었다. 이후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짐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혼을 하기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크다, 배신자인 아내에게 보기 좋게 복수를 해줄까? 하지만 이 또한 그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결국 그는 스스로의 ‘실종’을 선택한다. 나는 살아 있으되, 나를 죽인다. 나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전혀 새로운 존재로의 완벽한 변신이 시작된다...

요사이 추리소설에 많이 집중하고 있는 기특한 출판사 산다슬에서 발간된 책입니다. 실제로 미스터리 매니아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플롯과 기본 아이디어를 유명 작가 6명이 나누어 집필한 소설이라고 하네요. 릴레이 연재 소설로 연재 작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 1장 : Rupert Hughes
  • 제 2장 : Samuel Hopkins Adams
  • 제 3장 : Anthony Abbot
  • 제 4장 : Rita Weiman
  • 제 5장 : S. S. Van Dine
  • 제 6장 : John Erskine
  • 제 7장 : E. S. Gardner

그러나 읽고 난 소감은 한마디로 말해서 "완전 별로!" 였습니다. 한 인물이 복수와 새로운 인생을 위해 완벽하게 자신을 바꾼다는 아이디어는 너무 진부하고 뻔한, 그야말로 대통령이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작가들이 절대 써주지 않았을 구태의연한 아이디어와 플롯에 불과하잖아요. 단편이었다면 그래도 괜찮을 수 있었는데 중편 이상의 길이로 써 준 것은 작가들의 과잉 충성일 뿐이었어요.

그나마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바꾸어 놓기 위한 프로 작가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돋보이기는 합니다. 예를 들면 짐이 신분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의 디테일, 짐의 사체로 위장한 시체에서 발견된 총알이라는 변수와 약간의 반전이 있기는 하거든요. 그러나 이후의 해결 방법이 너무나 기대 이하라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애견의 충성심으로 확인한다니.... 설득력은 제로에 가까워요.
팬이라면 파일로 밴스 시리즈의 마컴 지방검사의 등장, 페리 메이슨의 등장 정도는 반갑게 보일 수 있지만 그 활약은 지극히 미미할 뿐이며, 페리 메이슨의 등장은 정말 억지스러워서 뭐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책에 자신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광고를 시도하는 진정한 프로 얼 스탠리 가드너의 진면목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는 것 정도가 수확이죠.
두께나 분량도 많지 않아 1시간이면 별 생각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그러기에는 책 값도 만만치 않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그냥 이런 책이 있다..라는 정도로만 훝어보고 넘어가면 딱 좋은 수준입니다.

2005/03/27

세계 미스테리 단편선 - 김한상 편역 : 별점 3점

역시 보수동 헌책방에서 구한 단편선.
원전이 되는 작품집이 모호하고,  읽기 짜증날 정도로 번역이 부실한 일어 중역본일 뿐 아니라 표지와 본문 편집 방식 조차 이 바닥의 바이블 격인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을 거의 그대로 카피한, 한마디로 질낮은 기획물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실린 단편들의 수준이 우수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에드워드 D 호크의 읽지 못했던 단편이 하나 실려있다는 이유로 구입했는데 의외의 성과랄까요?

첫 작품 "D언덕의 살인사건"은 에도가와 란뽀의 아케치 시리즈 단편으로 다른 단편집으로 가지고 있고, 이미 읽기도 해서 일단 패스.

두번째 작품 "냉장고 속의 갓난아기"는 제임스 M 케인의 단편입니다.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의 작가죠. 미국의 사회상과 문화를 서스펜스 스릴러에 잘 섞어놓는 작가로 알고 있는데 이 단편도 유사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정과 소재가 무척 독특해서 인상적이긴 하지만 글쎄요..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는 드라마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세번째 작품 "쿠비날 섬의 약탈"은 더쉴 해미트의 작품입니다. 탐정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컨티넨탈 옵으로 보이는 예의 하드보일드 탐정이 등장해서 한 섬에서 일어난 전쟁과도 같은 약탈 사건의 해결과 그 진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맛을 굉장히 잘 보여주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나무랄데 없는 추천작입니다. "난 다리 병신 소년으로부터 쌍지팡이를 훔치는 놈이라는 것도 모르나?" 라는 한마디로 이 작품의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할 것 같네요.

네번째 작품 "레오폴드 경감의 휴일"은 에드워드 D 호크의 레오폴드 경감 시리즈입니다. 독립기념일 연휴에 발생한 출판사 공동 경영자 실종사건이 어느덧 살인사건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로 트릭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뻔하지만 상당히 작품과 잘 맞아 떨어지고 여러 설정이나 복선도 명쾌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섯번째 작품 "성난 증인"은 얼 스탠리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입니다. 페리 메이슨이 담당하게 된 대형 금고 도난사건의 진범을 찾는 이야기인데 꽤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고 사건 해결과정도 좋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섯번째 작품 "두번 죽은 사내"는 다그 아린이라는 잘 모르는 작가의 작품이더군요. 장의사에서 일하는 청년이 15년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시체를 맡게되어 스스로 진상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설정은 재미있었지만 그 진상이라는게 조금 시시해서 아쉬웠어요. 좀더 반전이나 섬찟한 맛을 넣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거든요.

일곱번째 작품 "손톱"은 윌리엄 아이리쉬의 작품으로 다른 앤솔로지에서 이미 읽은 작품입니다. 손톱이 빠진 손가락을 인멸하는 증거인멸 트릭이 등장하며 마지막의 반전이 좋습니다. 뭐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아 보이기도 하나 좋은 작품이죠.

여덟번째 작품 "일석이조"는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협박범과 빚을 동시에 없애려는 한 건달의 계획을 그리고 있는데 내용적으로 연결과 이해가 잘 되지 않더군요.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사건해결 방법이 너무 단편적이고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은 작가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았고요.

아홉번째 작품 "악인은 지옥으로"는 단편의 명수 헨리 슬레서의 단편으로 유일한 강도사건의 증인을 없애기 위한 한 강도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름의 반전도 있고 단편의 맛도 잘 살아있어서 역시 단편의 명인답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주더군요.

마지막 작품인 열번째 작품은 일본작가 마츠모토 세이쵸의 "증언"입니다. 불륜 상대와 만나던 직장인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이웃집 사람을 목격했지만 불륜 사실이 들통날까봐 그것을 숨기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내용으로 제법 묵직한 내용으로 잘 진행되긴 하지만 결말은 사실 좀 어처구니 없더군요. 너무 쉽게 끝났달까요? 단편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한 작품들 중 이미 읽었거나 가지고 있는 작품을 뺀다면, 베스트는 "쿠비날 섬의 약탈", "레오폴드 경감의 휴일", "성난 증인", "악인은 지옥으로" 입니다. 다른 작품들도 그다지 처지지는 않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기대를 하지 않아서 더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다른 단편집보다 무척 얇기도 하고 작품수도 적지만 제가 처음 접한 작품이 그래도 반 이상 되며 수준들도 괜찮은 편이라 작품 선정은 탁월했다 생각됩니다. 번역만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2012/11/12

절대 0도의 수수께끼 - E.S 가드너 : 별점 2점

변호사 페리 메이슨 시리즈로 유명한 E.S. 가드너의 작품인 표제작과 R.M. 파뤼의 "액체 침략자"가 실려 있습니다. 구 아이디어 회관 문고본 시리즈의 하나로, 직지 프로젝트 덕분에 전자책화된 것이죠. 구글북스에서 무료로 제공하길래 다운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절대 0도의 수수께끼"는 억만장자의 유괴 사건에서 시작되어 관계자들이 연이어 사라지는 사건을 추적하는 핑거튼 탐정소의 탐정 로드니의 활약을 그린 모험물입니다. 절대 0도가 되면 분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물질이 사라진다는 이론이 핵심 설정이라서 SF로 분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리였습니다... 로드니가 절대 0도에 대해 눈치채게 되는 몇 가지 단서 및 복선이 등장하고, 나름 단서를 짚어나가며 수사하는 과정이 상세하기 때문에 굳이 분류하자면 추리물이라 생각됩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핵심 설정과 트릭 때문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도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요. 거기에 더해 꽤 박진감 넘쳤을 전개 과정의 묘사가 아동용으로 번역되면서 많이 훼손된 듯하다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페리 메이슨이라도 등장했더라면 팬심으로 점수가 좀 더 올라갔을지 모르나,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도통 없네요.

"액체 침략자"는 작은 호수의 여과성 바이러스가 지능을 갖추게 된 뒤, 인간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 업그레이드하여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는, 1930~4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외계에서 온 방문객' 소재의 작품입니다. 흔해빠진 소재와 설정이지만 물로 희석되면 죽는다는 바이러스의 약점을 잘 활용하여 바다로의 길을 차단하는 작전이 등장하는 부분은 꽤 흥미로웠으며, 주인공 화학자 데이가 인류를 정복(?)하려는 여과성 바이러스와 일종의 우정을 나누게 된다는 발상과 바이러스보다는 주인공의 동료인 슈미트 쪽이 오히려 더 악당이라는 점은 돋보였습니다. 80여 년 전 작품이지만 이러한 점에서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지더군요.

결론적으로 지나치게 아동틱한 번역은 아쉬우나, 시대를 앞서간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들이 돋보이는 괜찮은 소품이었다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북스 자체의 성능이나 가독성은 나쁘지 않았어요. 그러나 기존 아이디어 회관의 직지 프로젝트 버전 전자책에 포함되어 있는 삽화가 빠진 것은 무슨 이유인지 좀 궁금합니다.

2015/01/06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워싱턴 어빙 외 / 한동훈 : 별점 3점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6점 워싱턴 어빙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는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고전 본격 황금기, 클래식 미스터리는 사족을 못 쓰는 애호가입니다. 이런저런 고전들은 많이 읽은 편인데 평균적으로 괜찮게 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 저의 취향 때문이죠.
 그러나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예전에 읽었던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 심하게 기대 이하라서 나름의 기준점을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는 심하게 낡았다고 여겼거든요. 이 책 역시 대부분 작품이 19세기 후반 발표된, 기준점 통과가 간당간당해서 그동안 읽지 않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완전 대박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과 견줄만한,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명탐정들 -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의뢰인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과학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 시리즈 단편들은 완성도를 떠나 존재만으로도 반가웠을 뿐더러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이라는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된 볼륨도 마음에 들고요. 발표된 시기를 감안할 때 지금 읽기에는 낡아버리거나 시대착오적인 작품도 있고, 고전적 작법으로 쓰여져 지금 기준의 완성도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작품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고전을 읽을 때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세금과도 같은 것이죠. 가이 포크스나 보르시치와 같은 고유명사를 잘못 번역한 옥의 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무난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록 작품 평균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물 미스터리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책인데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도 최소한 걸작이라 말씀드린 저 세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서는 절판되었으나 e-book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울버트 웨버, 혹은 황금의 꿈" 

"슬리피 할로우" 등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이라는 워싱턴 어빙의 작품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 배추농부 울버트 웨버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내용인데, 떠벌이가 지껄이는 듯한 구전문학같은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울버트의 보물을 찾기 위한 헛된 노력이 해적들의 은밀한 행동과 결합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전개, 블랙코미디 느낌도 많이 전해주는 유쾌함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울버트가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난데없는 결말과 같은 두서없는 전개, 구전문학스러운 묘사 등은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 호러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하기도 하고요. 최소한 "미스터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부동산이 최고라는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사풍자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길쭉한 궤짝"

에드거 엘런 포우의 단편. 친구가 애지중지 돌보는 궤짝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나 흥미로왔어요. 

다만 선장의 말을 빌어서 마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침몰 직전 상황에서 진상이 드러나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관 뚜껑이 열리고 아내의 시체가 등장하는 "어셔가의 몰락"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걸작 단편입입니다. 무허가 3류 도박장에서 주인공이 도박으로 거금을 딴 뒤 술에 취하고 몽롱한 채로 도박장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자다가 침대 천장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주인공이 술에 취하는 과정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지붕이 내려오는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에요. 잠이 오지 않아 세밀하게 관찰했던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의 깃털 유무에서 모골송연한 범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과정도 매끄럽고요. 짧은 글이지만 정교하게 복선이 짜여져 있는 덕분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을 읽은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작품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거장의 작품다왔달까요. 별점은 5점입니다.

"꿈속의 여인"

조금 흔해빠진 괴담이랄까...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나타나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마부 아이작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극적 반전도 없고 여인의 정체도 알려주지 않는 등 불친절한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앞선 작품은 걸작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장이라고 항상 걸작만 쓰는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아이작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우며 꿈과 현실을 잇는 과정의 묘사만큼은 볼만했던 만큼 별점은 2.5점입니다.

"공주의 복수"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에 "문간의 검은 가방"이라는 단편이 소개되었던 시리즈이지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루시에 쿠니에르라는 아가씨의 실종 사건을 그리는데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어요. 러브데이의 추리가 불완전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가 드루스 소령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나친 억측입니다.
뭐 이 부분은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는 무림 고수와 같은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사건 관계자들이 모인 상황에 난입하여 "모자 가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의 비약입니다. 그녀를 빼돌린 드루스 부인과 그윈 부인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모자 가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냥 눈둘데가 없는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그 모자 가게에서 산 모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주로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러브데이 브룩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위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루시에 캐릭터, 셜록 홈즈의 라이벌치고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진 점 등은 특이하지만 추리적으로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천국의 물가에서"

아주아주 약간 고딕 호러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실상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주인공 케언공이 라마스 양에게 청혼할 때의 대사는 재미난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는 고전 할리퀸 로맨스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목사 서재의 피웅덩이"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시리즈 단편입니다. 목사관 서재에 피웅덩이를 남긴채 목사가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면서도 기발한 인간 소실 트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트릭이고 뭐고 없이 서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지하실에 숨겼다는게 결론이라서 맥이 빠집니다. 이래서야 명탐정이 딱히 등장할 필요도 없죠. 자세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아무리 피가 응고하였더라도 아무런 흔적없이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성공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가 순전한 우연 - 범인이 시체를 옮길 때 우연히 팽이가 떨어져 그것을 돌리게 된 것 - 이라 추리적인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양치기 캐릭터는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고요. 

셜록 홈즈처럼 현장을 아주 철저하게 조사한 뒤 단서를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뮬러의 활약은 그럴듯했습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홈즈 시대 추리소설의 단점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어요.

"범죄구성 사실" 

엉클 애브너 시리즈로도 유명한 멜빈 데이비스 포스트의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사교계의 총아인 사무엘 월콧이 사실은 리차드 워렌이라는 인물로, 월콧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인 뒤 신분을 가로챈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콧 (워렌)이 아내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계획을 돕는다'는 나름 충격적인 설정으로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랜돌프 메이슨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페리 메이슨의 선구자적인 캐릭터죠.

또 완벽하게 시체를 없앨 경우 범죄 사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망 사실과 그 사망을 가능케 한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 소설로 발표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이른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이 법의 헛점이 많이 알려진 덕인지 이런저런 정황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이 입증된다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체를 없애는 과정의 디테일도 좋아요. 황산을 이용하여 시체를 녹여 없애는 방법인데 소설처럼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단시간내에 없애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묘사가 잔혹하면서도 생생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나,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쌍벽의 탐정"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서사,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범죄 및 트릭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좀 처집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치 스틸맨이 어머니를 버리고 모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능(냄새 맡기)을 어필하는 전반부와 호프 캐넌의 은광 부락에서 벌어진 폭사사고를 다룬 후반부로 나뉘는데, 두 이야기가 잘 결합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한 탓입니다. 

특히 전반부 이야기는 설득력도 낮고 이렇게 길게 설명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장황해요. 후반부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플린트 버크너에게 살의를 품은 노예와 같은 영국 소년 페트락 존스가 범행을 결심하는 과정, 거기에 아치 스틸맨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실종된 아기를 찾아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플린트 폭사사건 이후 페트락의 친척 아저씨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단서를 이용하여 범인을 지목하고 아치 스틸맨과 추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잡하게 전개됩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정교한 과학적 트릭 - 초가 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알리바이를 만듬 - 이 등장하는 것은 인상적이지만 아치 스틸맨이 현장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만큼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아요.

물론 셜록 홈즈의 패러디물을 쓰기도 했던 작가의 작품답게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지없이 망가지는 장면은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 예를 들어 "탐정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탐정 곁에서 일을 꾸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은 인상적이고 재미있긴 했습니다. 미국적인 정취와 무식함 (집단 린치를 포함하여)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라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더 짧게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블랙 핸드"

제목을 한글로 풀이하면 "흑수단". 제목 그대로의 범죄단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시리즈 중 한편입니다. "과학 탐정"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도청 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데 1인칭 화자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기묘한 사건의 의뢰, 독자가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장치의 등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홈즈 시리즈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별게 없습니다. 유괴 사건에서 아이를 은닉한 장소를 도청 장치를 통해 듣고 경찰에게 알려준다는 방법이 전부니 말이죠.

그런대로 잘 쓰여지기는 했지만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탁상시계"

"독화살의 집"이라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내용이라 기대와 영 달랐습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판타지에 가까왔달까요. 시간을 불특정하게 14분간 멈추는 능력이 있는 탁상시계로 벌인 완전범죄 이야기로 시간이여 멈춰라! 류의 내용이라 추리적으로는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시계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전도 없어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만년 2인자의 질투심이라는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있기는 하고,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인지도 궁금하긴 한데, 상술한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산"

퍼시벌 와일드의 단막극.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단편집 두 권밖에 없지요. 때문에 자료로서도 귀중한데 작품의 수준도 아주 높습니다. 딱 두명의 등장인물이 이발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빚어지는 극도의 서스펜스가 놀라울 정도에요. 이발사 킬번이 과연 그의 딸을 농락하고 버린 손님 존의 멱을 딸 것인가?와 존이 시간제한이 있는, 전 재산이 걸린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두가지 드라마를 긴장감넘치게 선보이면서도 킬번이 존을 12년 동안 뒤쫓고 지금의 찬스를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는 솜씨도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울러 마지막 반전 - 존이 이야기한 경매시간과 이발소 시계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대한 대사 - 까지 확실하고요. 이런 작품이 1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니 고개가 숙여질 뿐이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위험천만한 게임"

프로 사냥꾼 레인스포드는 우연히 조난당하여 러시아 출신 부호 자로프 장군의 섬에 표류하였다. 자로프 장군은 사냥에 미친 인물로 극도의 긴장감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고 레인스포드도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건 게임에 참여하는데..... 

어딘가의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던 걸작입니다. 인간 사냥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실제 사냥 게임에 대한 설정 - 3일이라는 시간 제한 및 자로프 장군이 사거리 짧은 피스톨을 장비했다는 핸디캡 등 - 이 탁월할 뿐 아니라 두 명의 대결에 대한 묘사가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도 기가 막혀요. 바다로 뛰어든 레인스포드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성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인데 예상을 깨는 맛이 있었거든요. 별점은 5점입니다. 

한 남자가 협박 때문에 생명을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협박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은 스티븐 킹의 단편 "벼랑 끝에 선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새 출발"

잘 모르는 작가의 종말 이후를 그린 SF로 문명이 모두 사라진 뒤, 이전 문명의 기억을 지닌 자가 미개집단의 종교인과 충돌한다는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부터 많이 접해보았던 것으로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네요. 종교인이 믿는 신의 존재가 식기세척기였다는 반전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여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고요.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진부했어요. 시대가 너무 흐른 탓이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12/01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 레이먼드 챈들러 / 안현주 : 별점 3점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 6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북스피어

레이먼드 챈들러의 다양한 편지들을 주제별로 모아놓은 서간문집입니다. 창작관과 인생관은 물론 헐리우드에서의 생활, 고양이, 아내와의 사별과 그녀에 대한 사랑 같은 일상사와 농담들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다양한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창작론, 창작관에 대해 쓴 편지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작가 지망생이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입니다.

  • 챈들러 스타일로 글을 쓰는 방법. 쓸 수 있을 때는 쓰고, 쓸 수 없을 때는 쓰지 않는다.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고,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 작가란 몹시 고된 직업이다.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다. 글로 먹고살 가능성은 아주 낮다.
  • 창작 교육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미 출간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알아낼 수 없는 건 하나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하고 때로는 필수적이기도 하나, 그걸 위해 돈을 내야 한다면 대체로 수상쩍은 것이다.
  • 나도 그저 그런 추리소설이 너무 많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엄밀히 보면 모든 종류의 책들이 다 그저 그렇다.
  • 내가 만난 어떤 추리소설가도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좀 더 잘 쓰고 싶어할 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평가한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임스 케인에 대해 '문학계의 쓰레기', '매춘부의 집 같다'라고까지 엄청나게 비하하는게 눈에 띕니다. 선정적이고 날것의 문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게까지 비판할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중배상"의 각본을 쓴 것이 몹쓸 경험이었던 걸까요? 또 편집자에게 쓴 이러한 돌직구 평가 편지 뒤에, 제임스 케인에게 직접 쓴 편지가 이어지는 책의 구성도 재미있었습니다. 뒷담화하다가 본인과 대면한 술자리 느낌이에요. 편지의 내용은 평범했습니다만.

로스 맥도널드의 '녹이 여드름처럼 돋아있다' 같은 문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허세라고 여기는 시각도 특이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서정적 문체가 맥도널드의 작품을 다른 하드보일드와 구분짓는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아무래도 챈들러는 정직한 직구 승부로 일관해서 그랬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에 대해서도 싸구려 소설이라고 매도하는데, 이는 자신과 대실 해밋의 문장을 표절한 것에 대한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반대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건 서머싯 몸과 오스틴 프리먼, 피츠제럴드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호평을 아끼지 않더군요. 피츠제럴드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만 펄프 픽션의 제왕 얼 스탠리 가드너와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문학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그다지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들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가 아주 재미있게 본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시나리오 초고를 챈들러가 썼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챈들러의 막말 때문에 히치콕이 그를 해고했고, 초고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하네요. 초고 그대로 영화가 만들어졌더라면, 범죄소설과 범죄영화의 거장이 손잡은 진정한 콜라보를 볼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말조심 좀 하지...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한 뒤, 편지로 구구절절 자기 해명을 늘어놓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았고요.

"빅슬립" 시나리오 작업 중 언급된 최고의 멋진 장면에 대한 소개도 기억에 남습니다. 보가트와 카멘이 가이거의 집에 갇힌 뒤의 이야기인데, 덕분에 "빅슬립" 영화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습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편지에 언급된 대로라면 정말 멋진 장면이었을 것 같거든요.

하여튼,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인물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고, 당대 헐리우드 및 추리문학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과 재미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서간문집입니다. 가격 대비 분량이 짧다는 점에서 감점하지만, 하드보일드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임은 분명합니다. 그나저나... 국내에서는 하드보일드의 거장이라서가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팔린다니 괜히 서글퍼지네요.

2014/03/02

일년 반만 기다려 / 一年半待て (2010) : 별점 2점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을 TBS에서 드라마 스페셜로 영상화한 작품.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영상화도 수차례 되었는데 제가 본 것은 2010년도 버전입니다. 종전 직후를 무대로 한 원작을 현대물로 각색하였더군요.

짤막한, 거의 꽁트에 가까운 단편을 1시간 30분짜리 영상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부가적인 것들로 이야기를 늘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법정물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게 특징이고요. 그것도 정통 법정물이 아니라 타키코 변호사가 머리카락을 잘라 현장에 버린다든지, 꽃집 총각을 빼돌리고 정보를 언론에 미리 흘리는 식의 페리 메이슨 스타일 느낌이라서 조금 신선했습니다.

가정 폭력의 증거로 블로그가 사용되는 등의 현대적인 설정도 괜찮았고, 원작에서는 순수한 선의로 움직이던 타키코 변호사가 영상물에서는 개인의 이득을 최우선시하는 속물로 그려지고, 사토코도 1억엔을 남에게서 훔쳐내는 식으로 악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각색되었는데 이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진정한 승자는 타키코 변호사라는 결말도 인상적이고요.

그러나 확실히 원작보다는 별로에요. 사토코의 치밀한 계획이 원사이드하게 전개되는 빠른 템포의 원작에 비하면, 영상물은 길게 늘이기만 했을 뿐 딱히 재미있는 부분은 없는 탓입니다. 아울러 원작에서는 사토코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반전의 매력이 더 컸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약간은 뻔한 법정물이 되어버리면서 일사부재리 설정도 별로 부각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것을 살리지 못하는, TV 영상물의 한계로 보이는 저렴한 화면도 몰입을 저해합니다. 솔직히 화면만 봤을 때는 80년대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던 원작 쪽이 훨씬 좋았어요. 원작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30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2014/08/04

타블로이드 전쟁 - 폴 콜린스 / 홍한별 : 별점 4점

타블로이드 전쟁 - 8점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양철북

19세기 말, 토막난 채 발견된 시체가 신원이 마사지사 굴든수프로 밝혀진 후,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마틴 손에 대한 재판과 사건을 보도하며 선정적 보도의 끝을 보여준 퓰리처의 월드, 허스트의 저널지의 경쟁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우선 빅토리아시대 말, 그야말로 셜록 홈즈 전성기를 무대로 상세하게 소개되는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은 굉장한 볼거리였습니다. 과학 수사의 초창기로, 아직 지문 대신 베르티용 측정법이 사용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혈흔 분석, 포장지의 출처 추적, 여러 목격자 증언을 통한 용의자 특정 등의 수사 과정은 현대 수사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고문에 의존하지 않는 냉정한 수사라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백여년의 시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보다 더 현대적 수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논란이 되는 시체 없는(또는 시체의 정체가 불명확한) 사건에 대해 혐의를 물을 수 있느냐는 쟁점도 흥미로왔던 점이며, 마틴 손의 변호를 맡았던 당시 최고의 변호사 하우의 실력도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피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묘사되는데, 예를 들자면 다른 사건에서는 핵심 증인을 돈을 주고 홍콩으로 이민 보냈다고도 하네요. 페리 메이슨이 떠오릅니다. 하여튼, 하우가마틴 손이 범인이라고 말했던 오거스터 낵을 법정에서 박살내는 장면,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와 증거(예: 사건 현장의 욕조가 시신을 썰기엔 너무 작았다)는 뛰어난 변론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마틴 손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배심원단의 음주 사실을 조사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물론 개인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지만요.

아울러 사건의 진상이 재판이나 수사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지만, 저자가 제시한 추론도 나름 설득력 있더군요. 굴든수프의 시신에는 반항 흔적은 있으나 섬유 증거는 없었고, 오거스터 낵 체포 시 멍자국이 있었으며, 빈 와인병이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굴든수프가 게이가 아닌 이상, 함께 와인을 마시고 알몸 상태에서 칼을 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오거스터 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추리였습니다.

오거스터 낵은 사건과 재판, 그리고 이후의 행보까지 볼 때 정말 대단한 팜므파탈이라 생각됩니다. 자기 확신과 합리화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소시오패스와 다를게 없더군요. 예전에 읽었던 "밀랍 인형"의 팜므파탈 미리엄의 리얼 버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의 또다른 축인 황색지의 보도 경쟁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현재의 언론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씁쓸함도 전해 줍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노력이 만들어낸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더군요. 무엇보다도 허스트의 말처럼, 사건을 실제로 만들어서라도 특종을 얻는다는 전략은 지금 보아도 놀랍습니다. 예전에, 평화로운 시골 마을 신문사 기자가 사건을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단편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게 그냥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재판 중 굴든수프의 사체 일부에 대한 묘사, 마틴 손의 외모를 언급하는 증언들, 일종의 ‘아이돌’이 된 피고의 인기, 그리고 사건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 등도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범죄 논픽션으로도, 황색 언론의 보도 행태를 다룬 기록물로도 손색 없는 책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추리물, 범죄물,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