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정의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정의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1/07/24

살인과 창조의 시간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5점

살인과 창조의 시간 - 6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튜 스커더에게 비밀스러운 봉투를 맡겼던 스피너가 살해당했다. 소식을 들은 매튜는 봉투를 열었고, 봉투 안에는 스피너가 협박해 왔던 세 명에 대한 증거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셋 중 누군가가 스피너를 죽였다고 생각한 매튜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협박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스피너처럼 자신에게도 범인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프레이저는 자살했고, 베벌리는 이혼당해 모든걸 잃었다. 진상을 알아챈 매튜 스커더는 세 번째 협박 대상인 휘샌들을 찾아가, 그가 스피너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걸 알리며 마지막 담판을 벌이는데...

로렌스 블록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매튜 스커더가 술을 끊고 알콜 중독자 치료 모임에 다니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시거든요. 찾아보니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네요.

얼마 전 읽었던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가 하드보일드의 탈을 쓴 헐리우드 스타일의 펄프 픽션 범죄물이었다면, 이 작품은 정통 하드보일드에 가깝습니다. 매튜 스커더는 진짜 사나이로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법을 동원해가면서 정의 구현에 최선을 다합니다. 베벌리 에스리지라는, 유혹과 살인을 동시에 행하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도 등장하고요.

하지만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서 설명해 주었던, 변해버린 시대상을 반영한 하드보일드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탐정역인 매튜 스커더부터 알콜중독자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고, 타인의 죽임에 대해 고민하는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정의 구현에 나섰지만 실제로 정의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프레이저는 스피너 죽음과는 무관했고, 그가 협박당했던 과실도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튜 스커더가 스피너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며, 기존에 스피너가 했던 협박을 이어갔기 때문에 프레이저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매튜 스커더 스스로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게 살인이 아니라면 뭐가 살인일까요? 오래전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때문에 죽어나가던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어 마땅했었는데, 탐정 때문에 지극히 선량한 인물이 죽음을 택하는 경우는 처음 봤네요. 이런 정의, 선과 악이 모호한 설정은 시대가 변했다는걸 강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팜므 파탈이 부자 남편을 잃었지만, 나름대로 개과천선하고 매튜 스커더와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 더해 “나도 목석은 아니거든요.”라며 방을 찾는 베벌리에게 “내 호텔이 있지."라고 말하는 매튜 스커더의 마지막 대사는 화룡 정점이었어요. 몰락한 팜므 파탈과 불완전한 탐정이 '몸친구' 사이가 되는 결말이라니! 이 얼마나 현대적입니까! 고전 하드보일드에 흔하게 등장했던 복잡하고 꼬인 인간 관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이제는 과거와 같은 깊은 정을 나누는 관계가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세 명의 협박 피해자들 외에는 고작해야 프레이저의 딸 스테이시 정도가 살짝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구현해 낸 하드보일드 캐릭터와 설정들에 비해 추리적으로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세 명 중 한 명이 범인이다!라는 생각에, 세 명 모두에게 자기가 새로운 표적이라는걸 알리고 공격을 기다리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 중 스피너를 죽였던 휘슬러의 하수인과 베벌리의 옛 남자 룬드그렌이 각각 공격 시도를 했으며, 매튜 스커더는 모든 공격을 룬드그렌이 했던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지요. 결국 프레이저는 죽었고, 베벌리도 아니라면 남는건 휘슬러 뿐이라는 간단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명의 공격이 겹쳤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문제인데, 이 결론을 토대로 마지막에 휘슬러와 담판을 짓는 장면은 더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요. 휘슬러가 스피너가 죽었다는걸 알고 놀랐다는걸 증거라고 제시하는데, 이건 증거도 뭐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에 가까와 보입니다.

그래도 읽기 적당한 분량에, 결말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재미는 확실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현대적인 하드보일드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매튜 스커더 시리즈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1/10

메이지 단두대(明治斷頭台) - 야마다 후타로 : 별점 3점

明治斷頭台 山田風太郞ベストコレクション (角川文庫) (文庫) - 6점
山田 風太郞/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단두대"는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집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합니다.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되었기에 계속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원서를 ChatGPT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걸맞는 장점들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장점은 실존 인물과 메이지 시대 풍광을 활용한 팩션적 재미입니다. 츠키지 호텔관, 에이타이바시 다리, 코덴마초 감옥 등 메이지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사건 속 배경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변화와 증기선같은 기술 발전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역 중 한 명으로 근대 경찰의 아버지 카와지 토시요시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던가 '마지막 사무라이' 키리노 토시아키, 일본 육군 창설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현실감과 역사적 몰입감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가공의 이야기와 결합해 당시 시대적 풍광을 생생히 재현하며, 작품의 팩션적 매력을 극대화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추리적 재미와 정교한 트릭의 사용입니다. "괴담 츠키지 호텔관"에서는 일본도 양 끝에 게다를 고정시키고, 게다 굽을 나선형 계단 난간에 걸쳐 위에서 미끄러트린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나카사카 큐우치는 이를 이용해 자신은 옥상 전망대에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피해자를 공격해 살해했지요.
"미국에서 보내는 사랑"에서 범인은 인력거를 혼자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진상은 인력거 두 대를 묶어서 일종의 4륜 차량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를 언덕 위에서 밀어서 굴러내려가게 한건데, 굉장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만 라소츠(나졸)들의 위증(?)과 마지막 현장에서 인력거가 묶여 있지 않았던 점(얇은 끈으로 묶여 풀렸다?) 등이 애매했던 점인데, 이는 라소츠들이 진범의 도우미였다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잘 설명되고요.
"에이타이바시의 교수형"에서는 밧줄과 배의 움직임을 이용해 자살로 위장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범인 테라니시 진주로는 피해자를 강 위 증기선으로 유괴한 뒤, 미리 에이타이바시에 설치해 두었던 밧줄 고리에 목을 밀어넣고, 반대쪽 끝을 자신이 잡아당겨 자살처럼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증기선을 타고 있어서 당시 상식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었고요. 앞서 설명드렸던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전이 사용된 멋진 트릭입니다.
"자신의 목을 안고 있는 시체"에서는 범인이 아리사카 이헤이를 살해한 뒤, 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몸과 처형된 죄수의 목을 붙여 위장한 사건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죄수의 목을 빼돌렸는지?'인데, 이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라소츠의 속임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앞서 모든 작품에서 라소츠가 한 몫했다는 걸 결정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점은 충격적인 결말입니다. 마지막 단편 "정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악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라소츠들의 협력을 얻었던 겁니다. 사실 사건 대부분에서 라소츠들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바탕이 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무사였던 라소츠들은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의 이상에 공감하며 범죄에 협력했고, 케이시로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어갔던 것이었지요. 모든 걸 밝힌 케이시로가 스스로 단두대를 사용해 자살하는 장면도 충격적이며, 정의와 권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전해줍니다. 이후 체포하는 척했던 라소츠들이 에스메랄다를 탈옥시키며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괜찮은 결말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작품의 배경인 일본 메이지 시대는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츠마와 조슈번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주요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추리 소설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트릭이 활용된 본격 추리 단편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 "탄정대 대순찰"은 케이시로와 라소츠들, 탄정대와 단두대의 배경 설명에 치중되어 있고, 이어지는 "무녀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거든요. 마지막 "정당한 정부는 가능한가"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는 자백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추리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고요. 따라서 본격적인 추리 요소는 부족한 편입니다.

케이시로가 정의를 추구하며 폭주하는 이유, 라소츠들이 케이시로에게 충성을 바치며 목숨까지 거는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균 이하 범죄자들인 라소츠들의 심경 변화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했어요.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문의 후예로, 일본에서는 '무녀'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너무 과했고요. 만화적이라서 영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팩션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바실리스크"같은 닌자 액션물(?) 원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18/06/30

정의 - 하마오 시로 외 / 페가나 : 별점 2점

정의 - 4점
하마오 시로 외/페가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된 컨텐츠들을 번역 소개하는 전자책 전문 출판사 페가나의 일본 단편 추리소설 모음집입니다. 비교적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임에도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번역의 질도 괜찮다는 점에서 가끔 생각이 나면 구입해 읽곤 합니다.

이번에는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전 모음집에 비하면 별로였습니다. 추리물도 아니고 한 편의 이야기로도 완성도가 떨어지는 두 편("촬영장 살인사건", "병사와 배우")에다가, 다른 작품들도 딱히 새롭거나 신선하지 않은 고전 본격물의 재탕이거나 심각한 단점을 한가지 이상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표제작인 "정의"만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별점은 2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진주탑의 비밀" 코가 사부로

일본 작가 코가 사부로의 명탐정 하시모토 빈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이전 읽었던 "혈액형 살인사건" 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전람회장에서 거액의 진주탑이 가짜로 바꿔치기 된 사건을 다룹니다.

12Kg 정도 되는 탑을 5미터 높이의 창으로는 가지고 나갈 수 없고, 범행 당시의 유리 깨지는 소리가 침입할 때가 아닌 도망갈 때 들렸다는 점, 그리고 진주탑이 바꿔치기 되었다는 증언은 사세 주임 단 한 명이 확인했다는 단서를 모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내는데, 여기까지 읽으면 다 아시겠지만 진주탑이 바꿔치기 된 게 아니라 가장 비싼 진주 한 개만 바꿔치기 된 것이지요...

몇몇 단서들을 토대로 진상을 밝혀내는 전개는 전형적인 고전 본격물 스타일로 단서, 추리, 진상 모두 그런대로 합리적이라 딱히 흠을 찾기는 어렵지만 지극히 무난해서 새로운 점 역시 딱히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언급했듯 모조 진주탑을 만들어 달라는 우연한 의뢰가 겹쳐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든 건 완전한 억지고요. 제 3의 인물이 개입한게 우연이라는 점에서 작위적인데다가, 사세 주임이 처음부터 진주 몇 개를 빼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우연에 기인해 거액을 들여 기묘한 사기를 치려고 한 건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렇게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촬영장 살인사건" 사카이 카시치

촬영장에서 동료 엑스트라를 죽인 남자는 미친 척을 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의 단편. 의외성도 없고 추리물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어차피 도주에 성공한 거라면 미친 척을 할 이유도 없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미친 기관차" 오사카 케이키치

명탐정 아오야마 쿄스케가 등장하는 단편으로 오사카 케이키치는 다른 단편집으로 이미 접했었던 작가인데 추리적으로는 반짝반짝했던 작품들이 많아서 기대가 컸습니다.

기차역 (W역)에서 가해자의 흔적이 전무한 사체가 발견된 불가능 범죄를 다루는데, 쿄스케가 광학 현미경을 요구한 후 피해자 상처의 모래의 재질에 대해 분석한 후 흉기를 추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듯 "과학 수사" 가 핵심이라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내용도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조면암과 석영조면암을 구분하여 설명할 정도로 깊이가 있는 편이에요. 

그 외에도 기관차와 선로. 열차 운행 시간, 물과 석탄의 보충, 운행 속도 등을 감안한 추리, 또 열차 내부 장치와 흉기인 곡괭이 자루 구멍을 연결하는 추리도 나름의 탄탄하고 깊이 있는 자료 조사가 뒷받침 된 덕에 굉장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초창기 기차와 기차역에 대한 묘사는 철덕들에게는 굉장히 사랑을 받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푸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리로 밝혀낸 진범인 역장의 동기가 장점을 다 잡아 먹습니다. 열차에 손을 잃은 후 그 열차를 바다로 밀어넣는 복수를 위해 두 명이나 되는 승무원을 죽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정차해 있는 동안 불이라도 지르는게 더 합리적이잖아요.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동기만 설득력 있었어도 조금은 높은 점수를 받았을텐데 아쉽네요.

"병사와 배우" 와타나베 온

병사 옹과 배우 하루는 친구로 옹은 옆나라 맘루크 술탄 왕국의 파르티잔 파업 진압 전쟁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하지만 실제 전투는 없었기 때문에, 이건 영화사의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네요. 1928년이라는 발표 년도를 보면 체제 비판인 듯 싶은데, 거의 백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눈길을 끌 만한 요소는 전무합니다. 왜 이상한 판타지스러운 설정을 만들어 이야기를 전개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체제 비판이라서 설정을 틀었다고 보기에는 어차피 내용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그닥 효과가 있어 보이지 않거든요. 핵심 주제인 "전쟁은 추악하지만, 전쟁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영화야 말로 진짜 쓰레기다." 라는 주제도 그다지 설득력있게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정말로 파르티잔 파업 진압 전쟁이 영화사의 속임수라는게 밝혀졌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검은 수첩" 히사오 주란

히사오 주란은 에도 시대를 무대로 한 "아고주로 체포록" 시리즈로 접해보았던 작가입니다. 모험물 성격이 강했던 아고주로 시리즈는 재미있게 읽었었죠. 이 작품은 근대를 무대로 일본인 파리 유학생 "나" 가 같은 건물에 살던 주민들과 얽힌 후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 가 허름하고 저렴한 하숙집으로 이사온 첫 날, 아래층 부부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미국 태생의 음악 전공인 일본계 이민자 2세 커플이지요. 그리고 우연히 친분을 맺게 된 윗층 남자는 룰렛 순열을 예측하는 공식을 알아낸 수학자고요. 그리고 유학 자금이 끊겨 한 방을 노리는 아래층 부부가 윗층 남자의 룰렛 순열 공식이 담긴 검은 수첩을 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법 탄탄한 설정으로 꽤나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 하나만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는 독자 심리를 자극하는 전개 능력이 탁월한 덕분일 뿐, 실제 그닥 깊이가 있지는 않습니다. 룰렛 순열 공식이 무엇인지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요. 이야기의 핵심인데 장황한 대사로 그럴듯하게 포장할 뿐, 결국 실체가 없는 이야기라 별로 설득력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등장인물들도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유학 자금이 끊겼다는 이유로 도박이나 하려는 철없는 부부는 볼썽사납기 그지 없어요. 도박에서 살인으로 흐르는 인과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함이라 해도 정도가 너무 지나치고요. 단지 살인을 관찰하기 위한 주인공의 심리도 이해 불가입니다. 타인의 죽음을 방조하는 방관자는 또 다른 살인의 공범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걸 정당화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캐릭터 설정과 묘사로 낯선 느낌과 불쾌함을 자극하는, 가학적인 분위기가 흥미를 자극하는 건 사실이지만 제 취향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결국 부부는 인간다움을 되찾지만 6층 남자는 실연과 잃어버린 젊음을 저주하며 자살하고, 도박 비법인 수첩은 주인공에 의해 난로로 향한다는 결말도 앞서 풀어나가던 과정에 비교하면 너무 쉽게, 대충 넘어가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룰렛 시스템을 완성한 남자 수학자만큼은 나쁘지 않긴 합니다. 카리스마 있고 괜찮은 편으로, 그가 일부러 잃으려 했지만 따 버렸다는 중반부 반전도 나쁘지 않았다는 점에서 뭔가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갔어도 훨씬 괜찮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펄프 픽션 이상의 결과물은 아닙니다.

"정의" 하마오 시로

옛 친구 키야가와 준이 키누가와 변호사에게 찾아와 키누가와가 맡고 있는 마츠무라 자작 살인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마츠누마 자작은 호텔 방에서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처음에는 자세와 현장 상태를 미루어 자살이라 생각되었지만 유서가 없는 점과 왼손잡이인 백작이 오른손으로 총을 쏠 리가 없었기 때문에 호텔 종업원 모리키가 체포된 상황이었다...

표제작입니다. 하마오 시로의 작품은 역시나 페가나의 추리 단편 선집 "감방" 을 통해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 "감방" 에 수록되었던 "그는 누구를 죽였는가"도 아주 좋았는데 이 작품도 괜찮습니다. 모리키의 무고를 입증할 증인은 키누가와의 아내와 불륜 관계였다는 이야기로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전개가 실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뻔한 설정이지만 이를 법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논쟁을 벌이는 둘의 대화가 그야말로 압권이에요.

딱 한 가지, 증인인 A씨는 키요가와의 동생이 아니라 키요가와 준 본인이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읽어도 여전한 재미를 선사하는 긴장감 넘치는 좋은 이야기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에요. 

2020/09/27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주머니 속의 호밀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은선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융 회사 사장 포티스큐가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죽었다. 독을 먹은게 확실하여 경찰은 수사에 나서는데, 유력한 용의자였던 미모의 젊은 부인마저도 자택에서 과자와 꿀을 먹던 중에 사망했고, 비밀을 숨기고 있던 하녀 글래디스마저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포티스큐의 옷 속에 '호밀'이 들어 있었던 것, 글래디스가 빨래 집게로 코가 집힌 채였던 상황을 통해 미스 마플은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 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라는 마더구스 동요를 떠올렸고, 미스 마플의 조언에 따라 닐 경위는 '지빠귀'를 찾다가 의외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미스 마플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별점 5점짜리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미스 마플이 하녀 글래디스의 불쌍한 죽음을 파헤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복수의 여신'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해서 시리즈 중 최고로 멋지기 때문이랍니다. 추리적인 구성이나 트릭에 점수를 주고 있는건 아닌데, 여사님 작품이라면 추리적인 요소는 당연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나 싶네요.
그런데 저는 뭐가 그렇게 멋진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글래디스가 살해당한걸 뉴스에서 읽고 직접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출동한거라 다른 작품들 보다 적극적이기는 한데, 딱히 정의의 수호자 느낌을 받지는 못했거든요.

그래도 작품은 좋았어요. 저는 외려 "공략"에서 언급하지 않은, 추리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범을 제외한 (!) 모든 등장 인물들이 수상하다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진범이 랜스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더욱 충격적이었거든요.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티스큐 씨를 독살한 방법은 차가 아니라 아침 식사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었던 겁니다. 가족 중 포티스큐 씨만 마멀레이드를 먹기 때문에 그 속에 독을 넣어 살해한 거지요. 이 수법은 비교적 초반에 드러나며,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라 몇 개월 전 영국의 포티스큐 저택을 방문했던 랜스에게 아예 불가능한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머문 손님이, 그것도 안성마춤으로 몇 개월 후에 먹을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는건 상식적으로 어려운 탓에, 랜스는 경찰은 물론 독자의 시야에서도 완벽하게 빠져나갑니다.
게다가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기 위해 누구나 범인이 아니라 여길 덜 떨어진 하녀 글래디스를 실행범으로 조종했다는 수법이 정말이지 기가 막힙니다. 랜스가 가명으로 글래디스를 유혹한 뒤, 독을 자백약이라고 속이고 포티스큐 씨에게 먹게 만든건데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거든요. '맹했다'는 글래디스의 캐릭터 묘사도 설득력을 뒷받침 해 주는 요소였고요.
이후 랜스는 아버지, 유산을 손에 넣을 새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증인 글래디스까지 살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범행을 포장하기 위해 마더 구스 동요를 가져온 것도 기발했어요. 확실히 나쁜 놈들이 머리가 좋은 법입니다.

이런 랜스의 범행을 적절히 배치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 - 특히 글래디스의 유품인 사진과 편지 등 - 을 통해 독자가 미스 마플과 같은 수준에서 추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전개, 동기인 '돈'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 점, 이론적이고 상식적인 닐 경위와 인간 관계를 통해 진상을 파악해내는 미스 마플의 협업, 랜스의 부인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습성을 통해 랜스의 본질을 파악하는 미스 마플의 통찰력 등 그 외에도 돋보이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랜스가 글래디스를 죽일 때까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을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실제로 그녀는 죽기 전 미스 마플에게 편지와 함께 결정적인 단서를 보냈으니까요. 닐 경위에게도 거의 실토하기 직전이었고요. 이래서야 천재 범죄자의 완벽한 범죄로 보기는 힘듭니다. 기껏해야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알기 전에 몰래 글래디스를 죽이고, 막 도착한 듯 티 타임에 참석해서 새어머니의 차에 독을 타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쉽게 흘러간건 좀 아쉬웠어요. 교살할 때 글래디스가 반항했더라면? 피터 러브시"밀랍 인형"에서처럼 새어머니가 즉사하지 않고 난리를 쳤다면? 바로 체포되어 교수대로 향했을 테지요. 이는 조금은 편의적인 전개였다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더 구스의 '6펜스 노래를 부르자'와 비슷하게 사건을 꾸민 작전도 기발할 뿐, 현실적이지는 않아요.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맥켄지 가문의 후예나 형 퍼시벌이 유력한 용의자인데 구태여 정신병자인 제 3의 인물을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요. 오히려 '지빠귀 광산' 이 유력한 동기임이 드러나는 멍청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녀 글래디스 살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걸 강조했더라면 차라리 말이 되었을텐데, 이대로는 좀 애매합니다. 그나마도 이렇게 복잡하게 사건을 꾸밀 필요 없이 글래디스가 뭔가 목격해서 죽였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는게 더 현실적이라는건 분명하고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5/08

금의위 (14 blades, 2010) - 이인향 : 별점은 1.5점


명나라 황제 직속 비밀조직 금의위의 우두머리 청룡은 임무 수행 중 간신의 음모에 빠져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하여 마지막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 나선다.

존경하는 견자단 형님이 등장한다고 하고 홍보 스틸도 간지가 넘치기에 챙겨본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무협영화라 하더라도 어느정도는 스토리가 받쳐줘야 하는데 스토리가 산으로 가다못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리거든요.

일단 애시당초 금의위를 싹 정리해버리는 이유도 불명확하고, 청룡이 도피를 위해 호송을 요청한 정의표국의 딸 조미를 납치하는데 역시나 이유는 없으며, 납치된 조미는 청룡한테 마구 이용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청룡을 사랑하게 된답니다.,. 스톡홀름신드롬인가?
그 외에도 무림고수 사막판관과 마지막에 난데없이 등장한 정의표국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걸고 청룡의 개인적 용무를 도와주는 것인지 전혀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 정의표국 사람들은 딸을 납치당한 피해자인데도 말이죠) 막판에는 최정예 병사들이 20명도 안되는 주인공 일당에게 전멸하다시피 무너진다는 황당무계한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그나마 액션은 기대해 볼 만 했는데 영문 제목이기도 한 금의위 우두머리가 황제에게 수여받는다는 14개의 검(14 Blades)을 너무 강조해서 좀 이상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대놓고 와이어" 랄까요... 최종보스로 나오는 여자닌자 투투의 쓰잘데없이 옷벗는 효과도 공은 들인 듯 싶지만 별로였어요. 너무 CG티가 많이 나더라고요.

아쉽지만 형님의 나이를 먹지않는 동자공 간지와 조미의 미모를 제외하고는 건질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1점 주려다 0.5점은 안쓰러운 형님께 바치며, 다음 영화는 제발 스토리가 좀 있는 영화에 나와주시길 팬심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2019/03/02

레시피가 없어도,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 다마무라 도요 / 권남희 : 별점 3점

레시피가 없어도,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 6점
다마무라 도요 지음, 권남희 옮김/위즈덤하우스

보통 요리는 어렵다, 손이 많이 간다, 복잡하다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실제로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고요.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생각을 여지없이 깨 줍니다. 조리법을 기본부터 파고들어 레시피라는게 실제로는 별 게 아니다라는걸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요리의 기본 요소는 물과 공기, 물, 기름이고 모든 요리는 이 네 가지 요소를 엮어서 연출하고 응용할 수 있다는게 결론인데, 여러모로 조금 전문적인 "한그릇 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설명을 돕기 위해 실전 레시피도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그럴듯합니다. 대충대충 만드는 알제리식 양고기 스튜와 무지하게 세련된 프랑스 요리 코틀렛 드 무통 퐁파두르는 굉장히 비슷한 요리라는 첫번째 단락부터 굉장히 와 닿습니다.
집에서 만드는, 아마추어가 만드는 요리니 레시피에 너무 구애받지 말라는 말도 인상적입니다. 소스 100가지, 1000가지 만드는건 일도 아니라며 소개하는 비결도 아주 심플해서 마음에 들고요. 집에 있는 재료들을 대충 조합해서 쓰라는 이야기인데 충분히 그럴싸 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레시피들이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시인 구사노 신페이 씨의 아이디어로 나온 일품요리라는 "신페이 죽" 레시피는 정말 따라해보고 싶어졌어요. 야식용으로 생쌀과 참기름, 물을 1:1:15의 비율로 섞어 흙 냄비에 넣고 불을 켠 뒤 뚜껑을 덮고 2시간동안 내버려두면 된다고 합니다. 소금간을 해서 먹으면 엄청나게 맛있다네요. 참기름을 너무 많이 넣는 듯 한데 그 맛이 정말로 궁금합니다. 혹 제 블로그 지인 분 중 시도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꼭 제보 부탁드립니다.

또 요리와 음식의 몇가지 정의에 대해 저자가 고민한 결과를 소개하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첫번째는 샐러드라는 요리 정의에 대한 고민입니다. 간단하게 소스를 뿌려 먹는게 샐러드라면, 스테이크에 소스를 뿌리는 것도 샐러드인가? 에 대한 고민인데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이 고민은 '인간이 "불"을 이용할 줄 알았을 때 요리를 발견했다' 가 아니라 '인간은 "소금"을 이용할 줄 알았을 때 요리를 발견했다.' 는 말로 이어지는데 그럴싸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열을 가하지 않아도 맛있는 요리는 많으니까요.
스튜와 수프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고민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국물이 많은 스튜(예를 들어 부이야베스)와 수프는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으니 결국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이야기로 이 역시 깊이 공감할 수 있었거든요. 얼마나 건더기가 들어갔는지, 국물을 먹는 요리인지 건더기를 먹는 요리인지에 따라 구분할 수는 있지만 그게 어느 시점인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리기와 삶기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딱 한가지, 마지막에 저자가 강조하는 '요리의 사면체' 이론은 좀 지나쳤습니다. 앞서 쉽게 설명해주었던 여러가지 이론을 본인 스스로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그냥 쉽게쉽게, 대충대충 요리해도 맛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도판이라는게 극도로 부족하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책의 특성 상 몇몇 요리는 사진으로라도 소개해 줄 필요가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요리 전문가로서 실력과 지식을 갖춘 저자의 내공을 잘 느낄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쉽고 재미나게 설명하는 글솜씨도 괜찮은 만큼, 요리와 음식에 관심있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05/03/06

제 5 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 커트 보네거트 / 박웅희 : 별점 4점

제5도살장 - 8점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아이필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주인공 빌리는 검안사로 성공하여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퇴원한 날 부터 자신이 예전 딸의 결혼식 날 머나먼 "트라팔마도어"행성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다니게 된다. 빌리는 "트라팔마도어"로 납치된 이후 유럽의 전장에서부터 '현재'와 미래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간여행을 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초월적인 경험을 한다.

제목의 "제 5 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미군 포로 수용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부제인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요.
그런데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장르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SF나 반전소설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품이에요. 작가가 직접 경험했다는 2차 대전에서의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일화를 단순히 담아낸게 아니라 빌리라는 존재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닮아 있지만 결정적 파국, 즉 종말은 피할 수 없다는 종말론적 사고방식은 또한 기독교의 그것인데도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극중 주인공 빌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공 초월에 대한 소설적 접근은 엄청나게 새로우면서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또한 재미도 있습니다. 짤막한 단상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소설을 이루는데 그 단상들의 등장인물들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사건들도 다양함에도, 또한 시간과 공간이 제각각임에도 불구하고 소설로 성립되는데 재미까지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워요.
그리고 "트랄파마도어" 행성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정의! 왜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잔인해지는지에 대한 해답. 즉 복음서의 의도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것을, 나아가 낮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지만 실은 "누구를 죽이기 전에, 그자에게 든든한 연줄이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하라"라고 가르친다라는 부분은 너무나 멋집니다.
소설에서 말하는 "종말은 피할 수 없으니 가장 즐거운 시간을 즐겨라"라는 사고방식도 왠지 공감이 가네요. 채근담이었나요? 흡사 군대 훈련소 시절 화장실 벽에 붙어 있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 왠지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하긴, 이 책은 군대소설이기도 하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좋은 작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한 작가 어쩌구 하는 선전문구가 꼭 필요했을지는 의문이나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표현했던 "중간의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멋진 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들 중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정말로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작품으로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영화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뒷 해설에 나오는데,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2017/03/24

서평 쓰는 법 - 이원석 : 별점 2점


서평 쓰는 법 - 4점
이원석 지음/유유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평도 괜찮길래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많이 달랐습니다. 아니, 실망스럽네요. 제목 그대로 서평을 잘 쓰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이 소개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은 탓입니다.
1부 "서평이란 무엇인가?" 부터 그러합니다. 서평을 쓰기 전, 무엇을 쓰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서평의 정의를 내리는게 나쁜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거창하게 포장했어요. 자신의 내면을 파악하여 자기 성찰을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전 그냥 책을 읽고 난 감상을 잘 적고 싶을 뿐인데, 자기 성찰이라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그나마 제대로 된 정의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독후감은 정서적이고 서평은 논리적이다. 독후감은 독자가 없어도 되지만 서평은 독자와의 대화다."라고 구태여 독후감과 서평을 구분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평가는 기준이 필요하고, 서평은 다른 책들과 사이에서 관계를 정립하게 해 주는 맥락화의 일환이다"라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다른 책들과 비교하여 평가를 해야 하나요? 제 마음 속의 잣대로 기준을 세워 평가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
물론 다른 책들과 연계, 비교하면 근거가 탄탄하여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용이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건 학술적인 부분이라면 모를까 창조적인 부분에 적용되기는 힘듭니다. 서태지 첫 데뷰 당시 음악 평가하는 프로그램에서, 기존에 없었던 음악이기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는 일화가 떠오르네요.
이와 같은 이론과 장황한 소개가 실제 '서평을 잘 쓰는 방법'보다 분량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서평을 잘 쓰는 방법은 전체 분량의 1/3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잘 정리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우며, 인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고요.

아울러 본인 스스로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용에는 어렵고 장황한 말 투성이입니다. 공시적 맥락화, 범박하다, 메타적으로 등등... 읽으면서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말이 많습니다. 저자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서평이 '독자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면 자신의 글부터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용어를 쓰는 게 옳은 자세가 아니었을까요? 드레스 코드가 없는 파티라고 해 놓고,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 손님들 앞에 혼자 턱시도를 차려 입고 나타난 주인을 보는 느낌입니다.

다행히 건질 내용도 몇 개 있긴 합니다. 서평은 요약과 평가로 이루어지며 특히 좋은 서평을 위해서는 요약이 중요하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비추어 서평을 써라, 하나의 문단에는 하나의 생각이 담겨야 한다는 문단 구성 방법 등은 괜찮았습니다. 공부도 많이 되었고요. 

하지만 제가 원했던 것은 서평을 잘 쓰는 방법론, 설명서였는데 이 책은 서평에 대한 에세이에 가깝기 때문에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이 책에 소개된 대로 보다 명확하게 책의 가치를 정한다면, 서평을 잘 쓰기 위해 읽을 필요는 없는 책입니다. 저와 같이 블로그에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감상이 목적이라면 더더욱이요. 이 리뷰가 별로인 것은 이 책에서 그만큼 얻은게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림 하나 없는, 200페이지도 안되는 반양장 책에 만원이라는 과격도 과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서평을 잘 쓰는 방법론은 "책장의 정석"에 짤막하게 소개된 글 쪽이 훠~얼씬 낫네요. 

덧붙이자면, 도서출판 유유에서 나온 책들은 기획은 대체로 마음에 들지만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책이 많은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군요. 가격이 과하다는 단점도 동일하고요. 작은 출판사라 응원해주고 싶기는 한데 또 구해보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2026/01/0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 - 드니 빌뇌브 : 별점 3.5점

FBI 요원 케이트는 CIA 작전 참여를 명령받고 책임자 맷과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를 만났다. 그녀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맷과 알레한드로의 수사에 위협을 느꼈지만, 사명감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선을 넘은 소노라 카르텔을 응징하는게 아니라, 그 세력을 메데인 카르텔에게 귀속시키는게 목적이었다는걸 알게 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2015년작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명성만 익히 듣고 그동안 보지 않았었는데, 와 정말 잘 만든 영화더군요. 특히 연출이 압도적입니다. 특수 효과나 과도한 액션 없이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가 대단한 덕분입니다. 절묘한 구도 및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미장센, 배우들의 의상, 절정부 터널 진입 씬에서의 야시경 등 모든 디테일이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요. 그야말로 '삭막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건조한 멕시코 국경 지대 풍광 묘사도 좋습니다. 

맷과 알레한드로의 진짜 목적을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알레한드로의 복수심을 설득력있게 전개한 각본도 좋습니다. 정의롭지만 힘이 없고 방관자에 머무는 케이트, 강한 힘으로 불법이면서 강요된 정의를 행하는 맷, 힘을 이용하여 복수를 달성하는 알레한드로라는 등장인물별 설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케이트 역의 에밀리 블런트는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의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강한 마초 미국'을 상징하는 맷 역의 조시 브롤린도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요. 무엇보다도 정의를 넘어선, 치외법권의 '시카리오(암살자)'인 알레한드로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복수심과 고독함, 그리고 전략가로서의 냉철함과 충분한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 일가족을 모두 죽인 뒤, 케이트에게 나타나 모든게 정당했다는 서류의 서명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두 명배우의 불꽃튀는 연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액션 쪽은 다소 심심합니다. 총격전이나 대규모 액션보다는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전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액션도 '상상력'에 의존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고요. 주인공 케이트가 관찰자이자 이용당하는 인물로 머무는 탓도 큽니다. 그녀의 능동적인 활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때문에 액션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재미는 전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맷과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작전 내용을 숨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작전이 불법이라서 숨겼다? 하지만 이 작전은 대통령급의 결정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현장 요원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설정은 말이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반 협박으로 불법이 아니었다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더욱요. 말 잘 듣는 FBI 요원에게 작전에 협력하라고 설득하는게 훨씬 쉬운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임에도 예술성을 갖춘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이라는 뻔한 소재를 통해서 국가의 폭력성과 목적의 정당성을 묻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데 놀라게 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1/06/27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배한철 : 별점 4점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 8점
배한철 지음/매일경제신문사

국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은 역사서입니다. 역사적인 가치와 담고 있는 의미는 물론 국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가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구입했던 고령 가야 금관이 도굴품이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12개국이나 되는 나라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듯 'OO가야'가 아니라 가락국, 가라국, 아라국과 같은 이름이었다. 임나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문무왕릉비 설명도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비에 따르면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 왕손의 후예라는 것 처럼요. 비 외에도 거대 무덤, 북방 민족이 신성시하는 나무와 사슴뿔로 꾸며진 금관, 왕의 명칭이 '칸'과 비슷한 '마립간'이라는 등의 다른 근거들도 꽤나 그럴듯합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신라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평지에 목곽을 만들어 그 안에 관을 넣은 뒤봉분을 올리는데, 이게 바로 카자흐스탄 양식이랍니다. 동시기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정상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적석총인데 말이죠. 금관도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뀔 때 등장하며, 아프카니스탄 북부 틸리야 테페 무덤 유물과도 흡사합니다. 또 이러한 거대 무덤과 금관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으로, 후대 법률왕 무덤은 규모가 작은, 돌로 무덤방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며 부장품들도 주로 투기류였다는 것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고 법치 체계가 확립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결말은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정말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은 아니고, 단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데, 근거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어요. 

화엄사 석탑 설명에서 소개되는 여러가지 국보 탑 소개도 재미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차례 수정되었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불상의 명칭과 뜻을 알려주는 부분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는 '샤카족 (인도 종족)의 성인' 이라는 의미, 비로자나불은 지혜와 진리의 부처를 부르는 칭호로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의 음역이라는 것, 아미타불은 '무한한 수명의 것'이라는 범어 '아미타우스'에서 유래, 미륵은 석가모니 제자 중 한 명으로 사후 부처로 신격화 보살은 부처처럼 깨달았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존재라는 등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에밀레 종의 유명한 인신공양 설화는 일제 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조선 후기 유림 세력이 강했던 경주에서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공한 설화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어요.

그 외에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습니다. 우선 관촉사 은진미륵이 이름처럼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데 놀랐습니다. 생긴 걸로는 영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관촉사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상이 따로 없고, 법당 벽 창으로 야외 불상이 보이도록 만들었다는데, 다음에 관촉사에 가면 확인해봐야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일본이 계속 노렸었고, 심지어 '구변국'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사칭하면서까지 달라고 했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이 때 조선은 유교 국가라서 딱히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태종과 세종 모두 주려고 했지만, 예조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난중일기가 국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여기서 왜 난중일기가 국보인지에 대한 설명이 특히 와 닿았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귀중한 '기록 유산'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뿐 아니라 전략과 전술, 일반 백성 모습까지 고스란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누군가의 일기도 내용에 따라서는 국가 1급 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저도 일기를 열심히 써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선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과연 '충'무공이다 싶더군요. 

1968년과 70년, 중국에서 발굴되기 전까지 중국 한나라의 가장 중요했던 유물이 나온 곳이 우리나라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910년대, 일본 학자의 낙랑 고분군 발굴에서 수습된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인데, 손바닥만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정말 엄청나더군요. 중요한 유물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러한 국보들의 입수, 보존 경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라면 간송 전형필 관련 일화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 중에서 특히 훈민정음 혜레본을 입수한 경위가 인상적이었어요.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지하 조직원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가보를 판 것이라고 하거든요. 이 항목에서 훈민정음은 오롯이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근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도 나왔었던 승려 신미 창제설의 경우, 신미는 산스크리트어의 자음, 모음 설명에 그쳤다는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식입니다. 훗날 문종이 된 세자와 정의 공주의 도움이 오히려 컸다는데, 특히 정의 공주 관련 사료들을 보면 공주는 정말 똑똑했었나 보더라고요. 신미보다는 정의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와는 반대인 문화재 훼손과 도난 등의 이야기도 눈여겨 볼 내용이 많았습니다. 훼손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억지로 복원해서 망가진 문화재들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석굴암이야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미륵사지 석탑을 콘크리트 떡칠을 해서 복원에 십 수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던가, 부석사 무량수전의 해체 복원 때 철물을 사용하여 건물을 망쳐놓았고 해체 시 자료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내용은 화가 날 정도였어요. 물론 불국사 복원 같이 광복 후 복원도 엉망인건 사실입니다. 개발 독재 시대 성과 주의에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습성이 결합된 아쉬운 결과물들이지요. 지금이라도 다시 잘 복원하기를 바랍니다. 제 생전에 제대로 복원된 유물을 볼 수 있도록요.

국보 도난 사건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 2019년 말 기준으로 도난 피해를 입은 국가지정문화재는 2,438점이었고 이 중 1,552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니 놀랍습니다. 문화재 도둑들에게는 제발 천벌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그나마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200명이나 되는 괴한을 동원하여 해체 후 도쿄로 빼내려던 다나카 미쓰아키의 계획이 실패했던 사건, 해방 후 미국에 국보급 백자를 팔아먹으려는 시도를 막아내었다는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의 활약 등은 다행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국내로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일은 안타깝더군요. 이런 일은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 쉽고 재미있게 소개되고 있으며, 도판도 좋습니다. 단순한 국보 사진이야 인터넷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긴 한데, 일제 강점기 등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이 많이 수록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시 문화재가 어떻게 방치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에요. 수학여행 때 첨성대를 둘러싸고, 올라거서 찍은 사진을 보면, 이래서야 도굴만 문제는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책 초반부를 장식하는 무령왕릉 발굴과 유물에 대한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 관련 이야기, 백제 금동 대향로 이야기 등 다른 자료를 통해 많이 접했던 이야기가 제법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재미와 가치,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국보와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1/06/19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상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여러 단편들에서 엄선했다는 좀비 관련 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여름에는 좀비물이지요. 원래 책으로는 무려 서른 네 편,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상, 중, 하로 분권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한 번에 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양이니까요.

상권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 댄 시먼스, 제프리 포드 정도가 제가 아는 작가인데, 다른 작가들도 소갯글만 보면 모두 나름대로 유명 작가들로 보입니다. 좀비라면 바로 떠오를 고어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비롯하여, SF, 범죄 드라마, 풍자, 블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들이 수록되어 있고요. 덕분에 풍성하기는 한데, 작품들 편차는 큽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과 같은, 기존 좀비물 팬을 만족시키는 걸작도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거나, 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분만"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과 몽상 1"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출산을 앞둔 임산부 시점에서 그려낸 작품이지요. 

그런데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좀비의 기원까지 설명되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 문제였는지 뭔가 누락된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보통은 주인공이 도와주는 역할은 임산부가 주인공이며, 무대가 섬마을이라서 한 개 뿐인 묘지만 사수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상황이 독특했습니다. 버티는 와중에 죽은 남편을 한번 더 죽이는 처절함,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인공과 무대 설정의 독특함을 더해 스티븐 킹의 필력으로 써 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픈 변화구 보다는, 그냥 한가운데 직구 승부가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심지어 그 공을 던지는게 스티븐 킹이라면 더더욱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슴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재벌들이 과시용으로 데리고 사는 '트로피 와이프'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뒤 벌어진 일들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좀비로 돌아온 트로피 와이프는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고, 사람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부활시켰는지를 찾아 헤멜 뿐이지요. 이런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더군요.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탓이에요. 시체가 되살아난건 충분히 드라마틱한 사건인데, 이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묘사는 탓입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부활시켰다는 여동생이 찾아 오는건 아주 뜬금없었고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외모, 돈과 사치품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주는가 싶은데, 자동차 한 대 값을 들였다는 실리콘 가슴만 쳐지지 않고 영원이 남았다는 묘사에서 '적절한 투자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서, 뭐가 맞는지는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재미만 놓고 보자면 후자 쪽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만.

하여튼 좀비물로 보기는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고, 쟝르도 모호하며 이야기도 딱히 볼만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 

노년의 가이스 선생은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 혼자 살아남았다. 그녀는 포획한 좀비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데...

좀비 설정에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어요. 그냥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한 뒤를 그리고 있거든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물입니다. "가정 분만"과 같이, 뻔한 설정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더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교육' 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꽤 잘 그려내고 있기도 하고요. 좀비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는 결말은 깊은 울림을 가져다 주네요. 단지 치킨 너겟 때문에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뭐 그것도 학습이라면 학습이니까요.

"칼리의 노래", "테러호의 악몽" 등의 공포 소설로 유명한 댄 시먼스다운 필력도 돋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디테일이 특히 압권이에요. 좀비 아이들을 포획하고, 이들을 교실에 묶어 놓은 뒤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학교를 요새처럼 만든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아주 빼어난 덕분입니다. 좀비물로서의 기본 재미도 놓치지 않습니다. 학교로 수백명의 좀비가 몰려오고, 이를 가솔린 해자와 레밍턴 소총, 권총으로 처단하는 가이스 선생의 활약이 그려지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화끈합니다.

뻔하지만 독특한 설정에 더해, 재미도 기본 이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작가적 명성은 허투루 얻어진게 아니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유령의 춤" 

커스터 기병대가 좀비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추격하던 FBI 요원 에드거는 좀비의 습격에 대한 모든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쓰레기 백인 경찰관이 인디언을 몰래 학살하다가 되살아난 좀비 커스터 기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도입부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그냥 에드거 요원이 좀비 기병대의 잔학한 행동을 모두 알게되는 신기한 능력을 얻었다가 전부인 뒷부분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니까요. 군대식 명령으로 좀비떼를 제어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로 좀비떼를 격퇴했다던가 하는 결말도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제 기준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시체" 

아프리카 수용소를 통해 좀비를 대량 생산하여 유통시킬 계획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도널드는 좀비 격투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좀비 매춘부를 만난 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에요. AI,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과 별다를게 없거든요. 하지만 AI를 좀비로 바꾼 아이디어가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가치가 폭락하고, 심지어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 큰 충격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죽음과 선거권" 

시체가 되살아나 투표를 하기 시작해서, 대통령 선거는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버튼 후보의 보자관 롭은 지고있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었던 소녀 데이나 맥과이어가 되살아나 좀비가 된 모습을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고, 버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의가 이루어지는걸 보기 위해서라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 롭이 어린 시절 저질렀던 총기 오발 사고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펼쳐질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거든요. 시체들이 되살아난게 롭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고요. 또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버튼이 대통령이 되는게 왜 정의인걸까요? 좀비물이나 호러물적인 속성이 전무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초원" 

모종의 탐험대가 대륙 횡단을 하면서 괴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항해 시기 쯤, 그러니까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탐험대가 굶주림과 초현실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댄 시먼즈의 "테리호의 악몽"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탐험대는 시체들과 산 사람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저지르는 악당들이라는 차이는 큽니다. 화자인 '나' 조차도 대륙 횡단에만 골몰해서 학살, 식인을 꺼리지 않는 정신병자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사뭇 부족하고요. 왜 시체가 되살아나 배회하는지, 시체를 되살린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결말도 모호해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잔혹하기만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시체"

매춘부를 유혹한 뒤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리치의 희생자였던 '나'가 되살아나서 리치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복수극으로 보이기도 하고, 멜로물로도 보이기도 하고, 범죄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별로 의외성이 없고, 리치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말도 밋밋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무엇보다도 무섭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밤처럼 아름다운" 

성인 모델들 촬영으로 거부가 된 네이선 그라임스는 좀비 사태 발발 후 카리브 해의 섬 요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모델들과 좀비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좀비 사태가 끝나면 아름다운 모델 수요가 폭증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모델들은 좀비가 되어버렸으며 심지어 이성이 남아있는 듯 네이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네이선도 생존자를 가장했던 좀비에게 물려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데...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주인공과 성인지 모델들이 좀비가 되고, 좀비들이 생전의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행동한다는 설정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전개는 뻔했고, 애매한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처럼 죽어봐"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그리고 있습니다.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습격하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리나 냄새, 체온 등에 반응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단순하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한 곳을 찾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요. 실제로 주인공은 그렇게 좀비 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와중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지를 만나 섹스를 하는 설정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의지인 상황인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설명은 부족합니다.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니까요.

물론 자기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죽어봤자 좀비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나름 와 닿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해도 저라면 진작에 자살을 택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맬더시안의 좀비" 

이웃 노인 맬더시안은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뇌 수슬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맬더시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나는 그가 숨겨두었던 좀비를 떠맡아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데...

기존의 '좀비', 즉 부두교 주술로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뇌 수술처럼 뭔가 있어보이는 장황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환상 소설에 가깝게 풀어나가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뭔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라는 환상 소설을 쓴 작가 작품다왔달까요. 결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점 까지 말이지요. 좀비가 등장해서 급격하게 노화한 뒤, 맬더시안이 되었다는게 결말인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멜더시안이 심장마비로 죽은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젊은 좀비가 되었고, 다시 급격하게 노화해서 멜더시안이 된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환생이라면 젊은 육체로 있는게 맞을텐데, 이런 일을 벌인 동기도 잘 모르겠고요. 

주인공도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끝맺는데, 작가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데, 그런 평가가 가능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2022/07/24

네 명의 의인 - 에드거 월리스 / 전행선 : 별점 2.5점

네 명의 의인 - 6점
에드거 월리스 지음, 전행선 옮김/양파(도서출판)

아래 리뷰에는 내용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악한 자들을 처단하는 자경단 네 명의 의인이 이번에는 영국 외무부 장관 필립 레이먼 경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가 추진 중인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면, 부패한 정부를 쓰러트릴 영웅 가르시아가 죽게 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네 명의 의인은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보내며 압박하지만, 레이먼 경은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사건 총 책임자 팰머스 형사는 레이먼 경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경은 결국 네 명의 의인이 경고한 시간에 자택 밀실 안에서 살해되고 마는데....

사회 정의를 위해 힘쓰는 4인조가 영국 총리를 암살한다는 내용의 모험물이자 범죄 추리물입니다. "킹콩"의 원작자로 당대의 유명한 스토리텔러였던 에드거 윌리스의 작품이지요.

20세기 극초반인 1905년 발표된 작품인데 상당히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았고, 지금 시점에서 읽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라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스스로 악을 처단한다는 '자경단' 설정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재력과 변장 기술로 대표되는 특수 능력이 돋보이는 덕분이에요. 멤버 중 한 명인 테리가 조직의 기밀을 누설하려 하자 신문사로 복면을 하고 직접 찾아가 빼내온다던가, 팰머스 형사로 변장하여 총리에게 직접 협박장을 전달하는 등의 대범함에 더해 빼어난 추리력까지 갖춘 모습은 후대, 아니 현재의 DC나 마블 히어로들과 비교해도 딱히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 악당이지만 경찰과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며 매너까지 갖춘 안티 히어로적인 모습도 독특함을 더해주고요.'괴도 신사'의 영국 버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무엇보다도 레이먼 경이 수많은 경찰로 둘러쌓여 있는 밀실 안에서 살해된 트릭은 대단합니다. 레이먼 경이 자주 누르던 부저에 전기가 통하게 하여 감전시켜 죽였다는 건데, 지금 보면 왜 경찰이 진작에 알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만,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꽤나 그럴싸하면서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손에 있는 얼룩 흔적라던가, 머나먼 이국 독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네 명의 의인이 도둑맞은 수첩 속에 표기되었던 지명이 전기가 통하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는 등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이고요. 

모험과 범죄를 잘 결합한 전개도 좋았습니다. 좀도둑 빌리 마크스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빌리에게 호주머니를 털려 '4명의 의인'이라는게 드러난 네 명의 의인 중 한 명인 포이카르트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빌리를 찾아낸 뒤, 그가 자기들의 정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처단하는 부분이지요. 포이카르트는 대놓고 빌리에게 얼굴을 드러내어 그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가 보상금 때문에 일부러 경찰에 신고를 미루고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 뒤 다른 의인 맨프래드가 경찰을 사칭하여 빌리를 살해하게 되고요. 이 일련의 과정은 모두 합리적일 뿐더러, 추리는 물론 여러가지 디테일일들이 곁들여져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물론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부분, 작위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네 명의 의인의 활약 대부분은 변장 중심이며, 운에 많이 의지하고 있어서 딱히 스릴을 느끼기 힘들고 꽉 짜여진 정교한 이야기라고 하기는 무리인 탓입니다. 마지막에 테리가 왜 죽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리고 네 명의 의인 캐릭터가 약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한 명은 화학 전문가라는 설정 정도에 그치는데, 리더이자 돈줄, 브레인, 행동대장과 같은 식으로 각각의 캐릭터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A 특공대"처럼요. 트릭도 앞서 괜찮았다고 말씀드렸지만, 레이먼 경이 범행 예고 시각에 부저를 누른다는건 장담할 수 없었던 등 몇가지 디테일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100년이 넘은 고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재미를 가져다주는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당대의 인기가 이해가 되는 수준이었어요. 설정은 정 반대지만, 비슷한 시기의 대흥행작이었던 "팡토마스"와 비교해보자면, "팡토마스"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 번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2009/08/24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 윌리엄 윌키 콜린스 외 / 한동훈 : 별점 1.5점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 - 4점
윌리엄 월키 콜린스 지음, 한동훈 옮김/하늘연못
하아.... 오랫만에 추리소설 포스팅입니다. 최근 바쁘기도 하고 여유가 없어도 통 책 읽을 시간이 없었네요. 이 책도 읽는데 1주일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럼 리뷰를 시작할께요.

일단 이 책을 소개하기 전에 "골든에이지" 가 과연 어떤 시기인지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는 단편 중심의 추리소설의 시대인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여명기를 지나 1913년 벤틀리가 "트렌트 마지막 사건" 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둔 이후 이든 필포츠의"빨간머리 레드메인즈". 메이슨의 "독화살의 집", 버클리의 "독초콜릿 사건" 등 장편 추리소설 명작들이 속속 발표되고 곧바로 크리스티, 반다인, 엘러리 퀸, 딕슨 카, 크로포츠 등 본격 추리소설의 거장들이 데뷰를 하기 시작한 시기, 즉 1차대전 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거장들의 데뷰가 이어지고 본격 추리소설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황금시대 (골든에이지)"라고 하는 것이죠.

때문에 1차대전 이전의 소설만 담고있는 이 책의 "골든에이지"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책 소갯글을 보면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기를 연 대표작가 다섯 작가의 소설을 담은 책" 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소갯글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개척기에 활동한..." 이라고 설명되는 것이 더욱 적당한, "개척기 (여명기) 미스터리 중편선" 이 더 합당한 표현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못된 제목이라면 과장광고를 넘어서서 거의 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제대로 목차나 내용을 살펴보지 않은 제가 죽일 놈이지만요.

그래서인지 사실 책 내용은 기대와는 많이 달라서 실망이 컸습니다. 이 "골든에이지"라는 시기에 나온 작품들을 제가 워낙 좋아라하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흥미진진한 본격추리물을 기대했는데 이 책에 실린 중편들은 실제 추리물로 보기에는 힘든, 추리물 성향을 띈 드라마들로 단지 오래되었다라는 가치 밖에는 없는 탓입니다. 더군다나 5편의 작품들 중 한작품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 을 다룬 것이 아닌 일종의 "창작극"이나 "자작극" 이라서 그런지 더더욱 몰입하기도 어렵고 지루했습니다. 이럴바에야 셜록 홈즈의 라이벌이나 번역해 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아노 탐정 중단편이 하나 실려있긴 하지만 많이 부족해요. 작품도 별로였고요.

물론 역사적인 의미는 크고 책 자체의 번역이나 장정, 디자인도 훌륭한 편이라 과장된 제목으로 현혹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물론 그랬더라면 절대 구입하지 않았겠지만요. 별점은 1.5점입니다(솔직히 1점 주려다 책 자체의 가치를 생각해서 참습니다.).

3층 살인사건 / 프랭크 보스퍼 

런던 블룸즈베리의 한 하숙집을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목 그대로 하숙집 3층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하숙집을 무대로 하여 몇몇 인물들만 등장하여 주로 대화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인 작품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작가가 배우 출신인 탓이 크겠죠.

그러나... 제목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과는 달리 추리소설로 보기는 애매했습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확립되지도 않았고 특히나 퍼즐 미스터리는 등장하지도 않았던 때에 쓰여진 작품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추리물로 정의하기는 확실히 무리였어요. 가장 중요한 목격자의 증언이 범인의 변장을 통해 유도된 것이라던가 하는 간단한 트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유치한 수준의 트릭이며, 경찰의 수사 역시 너무 대충이고 전개도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등 범죄와 관련된 부분에서의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더군다나 극중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추리소설이나 장르문학에 대한 홀대(?)가 묻어나는 것 역시 조금은 불쾌한 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추리소설 초창기의 추리물의 성격을 띈 소설이다.. 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네요. 영국 하숙집과 거주민들의 생생한 묘사, 블랙코미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 재기발랄하면서도 요란한 대사들은 재미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뻔하기도 하고요.

애시당초 이 작품 하나밖에 작품이 없는 작가를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기를 연 대표작가" 라고 선전하는 출판사 행태가 더욱 문제겠죠.

데드 얼라이브 / 윌리엄 윌키 콜린스 

영국인 변호사가 미국의 외딴 농장에 휴양차 체류하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으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하네요. 피해자가 사실은 살아있었다... 라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법정 장면에서의 증거를 둘러싼 공방과 감형을 위한 거래로 거짓된 자백이 속출하는 등 드라마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시나 추리물은 아닙니다. 사건이 결국 범인(?)의 자백으로 해결된다던가 - 아니 애시당초 사건 자체가 없었지만 - 주요 증인을 찾아 나서는 것도 신문 광고를 통한 제보에 의지한다던가 등으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라는 발상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초창기 법정 드라마 정도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역사적 가치 이외의 재미를 찾아보기도 힘들고요.

안개속에서 /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 

초면인 사람들도 친구가 되는 영국의 한 클럽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용인데, 등장인물들의 "증언 (목격담 / 경험담)" 으로 사건이 이어지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미국인이 간밤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목격한 경험담을 이야기하자 그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러시아 공주를 자칭하는 여자도둑과의 인연을 다른 회원이 이야기하고, 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귀족의 변호사가 살인사건의 다른 진상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식으로 증언과 증언이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거든요.

결국 이 모든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사건에 관심을 보인 클럽회원 준남작이 하원에서의 연설을 하지 못하도록 한 작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르는 약간의 반전이 밝혀지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앞선 두 작품에 비하면 확실히 추리라는 과정이 묘사된, 때문에 그나마 "추리 소설" 로는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두 번째 다이아몬드 사건 이야기는 내용에 별반 필요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추리의 과정은 있지만 결국 경찰 수사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지는 뻔한 추리라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쓰여진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 박하게 굴 필요는 없겠죠?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입니다. 그런데 엘러리 퀸의 ‘가장 중요한 추리소설 125편’에 선정된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무슨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이유를 통 모르겠네요. 그만큼 가치있는 작품은 아닌듯 싶은데...

버클 핸드백 /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 

"나선계단의 비밀"로 유명한 서스펜스 소설의 대모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의 작품입니다. 시리즈 캐릭터이기도 한 간호사 "힐더 애덤스" 시리즈의 한편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된 시리즈 같네요. 작가의 간호사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듯한 디테일한 묘사와 별명에 걸맞는 서스펜스, 스릴의 묘사가 일품인 작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이 넘치면서도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고 결말도 합당해서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너무 급작스럽게 사건이 해결되는 점, 주요 등장인물의 고백(?)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 하죠. 무엇보다도 소설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이 좋았으니까 말이죠. 이 책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세미라미스 호텔 사건 / 알프레드 에드워드 우들리 메이슨

"독화살의 집"에 등장했던 명탐정 아노 탐정의 중단편입니다. 상당히 좋아하는 캐릭터라 기대가 큰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 별로네요. 본격물스러운 맛이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의 핵심인 여주인공이 우연히 본 범인의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심리적인 부분에 기대고 있어서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심리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아노 탐정의 캐릭터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등 실망스러운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초반부 마약을 발견하는 과정과 추리가 여러 단계로 발전하는 부분, 그리고 범인의 이상한(?) 행동과 장물을 숨겨놓는 곳에 대한 아이디어 정도는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다른 중단편들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구태여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0/05/21

달님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 아사쿠라 세카이이치

달님은 알고있을지도 몰라 - 6점
아사쿠라 세카이이치 지음, 오주원 옮김/중앙books(중앙북스)

4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어른들을 위한 환상 동화 단편집. 심심하면서도 뭔가 여유로운 느낌이 가득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아사쿠라 세카이이치의 귀엽고 오묘한 그림과 결합되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블로그 이웃 "청정하수구" 님이 번역하신 작품이기도 하죠.

"여사장의 나날"
대리 운전 회사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단편. 바다 속에서 잠수정 사고가 난 우미노씨를 구하기 위해 잠수정과 자동차를 우연하게 운전하게 된 후, 대리 운전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는 여사장에 대한 상상력은 정말 압권이었어요. 부하 직원의 이야기도 좋았고요. 잔잔한 분위기와 더불어 그야말로 이게 아사쿠라 세카이이치다!라는 느낌 가득한 작품이라 시리즈로 계속되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터너씨, 고맙습니다"
영국에서 제작된지 40년이 지나서 운행되는 E.터너씨가 설계한 오토바이. 그 오토바이를 모는 청년의 드라이브에 대한 하룻밤 상상을 그린 작품. 상상과 현실의 갭을 느끼게 하는 현실적인 마무리가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좀 다르네요. 하지만 여전한 여유로움과 더불어 단순한 환상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 속으로 끌고 들어온 느낌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yaongderful"
고양이 요괴의 대를 이은 저주와 그것을 막으려는 엑소시스트의 한판 승부!를 코믹하고 여유롭게 그린 난장판 코미디입니다. 설정과 캐릭터보다는 왁자지껄 소동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장르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은데, "데보네어 드라이브"와 조금 유사합니다. 그러나 너무 단칼에 끝내버리는 (여운이 남긴 하지만) 시니컬한 결말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슬과 롯"
할아버지가 개발한 슬롯머신 로봇 "슬"이 롯을 위해 빠져있는 "7" 2개를 찾으려 심볼 군단과 싸워가며 모험을 한다는, 역시나 난장판 코미디. 청정하수구님에 따르면 파칭코 잡지에 연재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파칭코 잡지? 그럼 슬롯머신의 영웅담을 그리면 되겠네? 예쁜 소녀를 보호하는 정의의 슬롯머신! 그를 노리는 심볼군단!" 뭐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짜낸 듯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쉽게 쉽게 생각나는대로 그린 느낌이라는거죠.
이러한 대충 전개된 느낌에 더해서 에 비하면 엔딩이 시시하고 뜬금없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 튀는 느낌도 강해서 차라리 이 작품을 빼고 더 작고 예쁘게 책을 만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어쨌건 이렇게 해서 작품 평점은 3점입니다. 취향을 많이 탈만한 작가이고 작품인데, 이런 류의 환상 동화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6/02/15

더 립 (2026) - 조 캐너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팀장 재키가 살해된 뒤, 팀장 대행 데인이 이끄는 팀은 밀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발견했다. 돈을 빼돌리려는 데인에 맞서 제이디와 마이크 로는 각자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조직의 습격 후 데인과 제이디의 대립은 격화되고 말았다. 결국 현장에 지인인 DEA 요원 마테오 팀이 출동하여 대립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압수 현금을 이송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는데...

 넷플릭스의 최신 장편 범죄 스릴러 액션 영화입니다. 연휴를 맞아 감상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현금을 둘러싸고 출동한 경찰 팀 내부의 갈등과 배신을 그린 작품으로, 거액의 돈, 부패한 경찰, 내부 밀고자라는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반전이 포함되어 있다는게 다른 유사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와 다른 점입니다.

이야기는 거액의 현금이 숨겨진 집에 경찰 다섯 명이 출동하면서 시작됩니다. 팀 리더 데인과 제이디, 마이크 로, 누마, 롤로 형사가 현장을 통제하고 집주인 데시와 대치하는 가운데, 단순한 압수 작전처럼 보이던 상황은 점점 미묘한 긴장감으로 변해 갑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릴 의도를 드러내고, 제이디는 이에 의심을 품으며 같은 경찰이지만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 전개가 아주 일품이에요. 절정부 직전까지 영화는 대부분 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며, 인물 수도 많지 않고 무대 역시 크지 않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전개의 핵심은 부패 경찰과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인데 데인 역의 맷 데이먼, 제이디 역의 벤 애플렉, 마이크 로 역의 스티브 연 등 화려한 이름값의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 설득력을 더해 주고요.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데인이 돈을 빼돌리려 했던 것은 실제 횡령이 아니라 내부 밀고자를 찾아내기 위한 연극이었고, 진짜 밀고자는 마이크 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거든요. 데인은 팀원들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 두었고, 그 정보가 외부로 흘러나간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배신자를 특정해 내었던 겁니다. 영화 "밀정"에서 사용된 트릭과 동일한데, 특별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며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앞서 무심히 지나갔던 대사가 반전의 단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이렇게 밀고자 마이크와 그와 연결된 협력자 마테오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카 체이스와 총격전이 이어지는데,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꽤 화끈합니다. 문제의 가방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등이 들어 있었고, 실제 현금은 한 푼도 빼돌려지지 않은 채 모두 압수되며 정의로운 경찰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도 깔끔했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설득력은 많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흑막인 마테오의 행동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출동한 시점에서 데인 일행을 모두 제거하고 현금을 탈취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습니다. 카르텔의 습격으로 위장해 상부에 보고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누마와 롤로 형사를 현장에 남겨둔 채 데인과 제이디만 차에 태워 이동한다? 이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워요. 데인을 포섭해 제이디를 제거하고 돈을 나눌 생각이었다면 다른 형사들 역시 정리하거나 끌어들였어야 했고, 둘 다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인물들을 그대로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데인의 연극 또한 집주인 데시가 마이크만을 정의로운 형사로 오해한 뒤, 마이크에게 데인이 펼친 연극을 밀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사실상 불필요했습니다. 대놓고 마이크에게 돈을 빼돌릴 계획을 설명해 주더라도 결과는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데인과 제이디가 마이크의 비밀 휴대전화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마테오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악당들의 행동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데인 일행에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주고, 30만 달러만 가져가라는 식의 경고를 하는 장면은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보이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돈을 노리는 범죄자라면 전부를 노렸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촬영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넷플릭스 영화인 탓일까요?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교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킬링 타임용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적당한 수준입니다.

2012/09/25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 별점 3.5점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8점
박원순 지음/한겨레출판

지금은 서울 시장이 되신 박원순 '변호사'가 저술한 세기의 재판 이야기.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에서부터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한 재판까지 모두 10개의 역사적인 재판이 실려 있습니다.

사건의 시작에서부터 재판 과정, 그리고 결말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자세하게 펼쳐놓기 때문에 법정 드라마 같은 재미를 안겨 주는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드레퓌스, 패탱, 로젠버그 부부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와 함께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한 편의 소설 못지않아 읽는 재미가 빼어났고, 결국 사건을 은폐하려 한 대다수의 주동자들의 비참한 최후도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어서 좋았습니다.

2차 대전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인 패탱 원수의 재판은 우리나라의 일본 강점기 시절과 비교하여 진정한 "청산"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고요.

마지막의 로젠버그 재판은 발단과 전개 모두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법 위에 이른바 "이념"이 존재하여 피해자를 양산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얼마 전 읽은 "확신의 함정"에서 로젠버그 부부는 스파이였다는 씁쓸했던 결말과 맞물려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더군요. 물론 스파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사형을 시킨 것은 잘못이겠지만요...

어쨌건 명저는 명저. 법정에서 벌어진 불의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서 개인의 신념과 정의를 지켜나간 이야기가 대다수로, 법이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인지,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네요. 조금 지루한 부분이 있고 이상론을 다룬 부분이 있기는 하나,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0/02/01

유리 열쇠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3점

유리 열쇠 - 6점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황금가지

네드 보몬트는 도시의 거물 폴 매드빅을 보좌하는 동생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네드는 폴이 친분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헨리 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의 살해된 시체를 발견했다. 폴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잔챙이 버니 데스테인이 도주하자, 개인적인 금전 문제도 있어서 그를 쫓은 뒤 헨리의 모자를 이용한 조작으로 버니를 궁지에 몰아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폴과 관련된 팀 아이번스의 주요 증인도 살해당했고, 이 모든건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폴 매드빅을 음해하려는 적대 세력의 음모가 아닐가 생각하게 되는데....

대실 해밋 전집의 네 번째 권입니다. 해밋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리스트 들에서 순위권에 꼽히는 대표작이지요. 그동안 눈여겨 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드보일드 범죄물로 주인공 네드 보몬트가 완벽한 안티 히어로라는게 특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한다는건 하드보일드 주인공같은데, 네드는 탐정도 아니고 정의를 위해 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범죄에 연루된게 분명한 폴 매드빅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더러운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당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히 여자들에게도 잔인하고 냉정하며, 뉴욕에서 이름모를 촌동네로 흘러들어온지 3개월만에 그 도시 최고의 실력자의 친동생 급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능력자이기도 하고요. 작 중에서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갖추고 있거든요. 오히려 완력 면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다는게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도시에서 두 개의 파벌이 경쟁하는 와중에 주인공이 나타나 분란을 일으킨다는 "붉은 수확" 류의 전개 속에서, 네드 보몬트는 충심을 다해 폴 매드빅을 돕고 진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네드의 폴 매드빅을 위한 충심은 변함이 없고,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의리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같은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안티 히어로의 활약을 그린 하드 보일드 추리물이지만, 나름 정의로운 활극이기도 합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고조 할아버지 쯤 되는 이야기랄까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작위적이고 평이합니다. 버니 데스테인을 엮기 위한 모자 작전 정도만 그럴싸할 뿐이에요. 다른 네드 보몬트의 행동은 모두 즉흥적인데도 불구하고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작위적이에요.
아버지가 헨리를 살해했다고 굳게 믿는 오팔 매드빅이 기자에게 털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네드는 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신문사 편집장 매튜스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 때 벌어지는 상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오팔의 고백을 이용하려던 폴의 라이벌인 섀드 일당이 있었고, 또 섀드 일당과 남편의 기묘한 행동거지를 짜증내하던 매튜스의 아내 엘로이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엘로이스의 유혹으로 네드가 넘어간 척을 하자 매튜스는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마침 이용하기 좋은 유언장을 남기고요. 그래서 네드는 폴에게 연락하여 신문에 오팔의 고백이 발표되지 않게 막게 됩니다. 그냥 봐도 너무 편의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지요?
폴의 자백을 지방 검사에게 증언한 뒤, 헨리 의원이 진범임을 증명하는 결말도 억지스럽습니다. 헨리 의원이 자백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증거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폴이 뒤집어 쓰기로 결정한 이상, 이를 뒤집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네드가 폴의 결백을 확신한다는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하니까요. 아들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아들 모자가 아버지 집에 있는게 증거가 될리 없죠. 지팡이 역시 원래 그의 물건이니 집에 있는게 당연하고요. 이 마지막 반전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정과 전개에 전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안티 히어로이기는 하지만 네드 보몬트의 심리 묘사와 행동은 다른 하드보일드 속 탐정들의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습니다. 지방검사마저도 두려워하는 폴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을 날리며, 주먹질은 물론 총질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남자라는 점에서요. 이는 그 누구도 네드를 우습게 보거나, 등쳐먹을 수 없으며 돈보다는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으로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들과 다를게 없습니다. 네드와 정말로 우연하게 만난 제프가 섀드를 죽이는 등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악당들이 서로 싸움으로 붕괴하고 마는 전개도 전형적이라 구태의연하고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추리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범인이라고 폴이 고백하기는 하지만, 흉기로 사용한 지팡이는 이미 태워버렸다는 증언이 헨리 의원의 딸 재닛에 의해 곧바로 부정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헨리 의원이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게 다 맞아 떨어지니까요. 실제로 진상도 그러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그다지 정교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확실하고, 문체도 수려하고 멋집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다운 위트있는 명대사도 많고요. 병문안을 온 재닛에게 모진 소리를 한 뒤, 그녀가 떠나는걸 본 간호사가 그녀가 울음을 꾹 참으면서 가더라는 말을 듣고. 네드가 "내 수완이 약해지는 게 틀림없군. 예전 같으면 울렸을 텐데."라고 말하는 식인데,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작품 중 최고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장점도 많고 좋은 작품임에도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이자면, 유리열쇠는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썩은 동아줄"을 의미하는 듯 싶네요. 재닛의 꿈 속에서 그녀와 네드가 뱀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사용하지만, 유리라서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문을 잠그지 못해 뱀 때에게 죽고 말지요. 그런데 이게 그녀가 오빠 살인범으로 폴을 지목하여 음해하고, 소문을 퍼트린 행위를 뜻하는지, 아니면 진범이 아버지 헨리 의원이라는걸 알게 된 후 네드와 떠나기로 결심한 행동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꿈에서는 네드와 함께 죽는데, 꿈과 같은 결과라면 같이 떠나는 행동이 가장 위험해 보입니다. 물론 네드는 상남자답게 같이 떠나기로 결심하지만요.

2022/09/11

스완 - 오승호 / 이연승 : 별점 2.5점

스완 - 6점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형 쇼핑몰 고나가와 시티 가든 스완을 '엘리펀트'라 자칭한 2인조 테러범이 습격했다. 그들이 대량의 사제 총기를 무차별 난사한 탓에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 때 여고생 이즈미는 범인에게 협박을 받아서 쳐다본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이 사실이 학교 친구 고즈에의 증언으로 기사화된 탓에 오명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얼마 후, 변호사 도쿠시마가 스완 사건 생존자들을 모은 비밀 모임에 이즈미를 초대했다. 사건 당시 사망했던 기쿠노 할머니의 아들이 어머니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다며 만든 모임이었다. 몇 번의 모임에서 참석자들의 증언을 통해 서서히 사건 당일의 진상, 그리고 그들이 각자 숨기고 있었던 진실이 드러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추리 소설계에서 부쩍 유명해진 재일교포 작가 오승호 (고 가츠히로)의 작품입니다.

두 명의 테러범이 일으킨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그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았는데 사망한 피해자 요시무라 기쿠노의 아들이 진상을 밝히기 위해 당시 생존자들 몇 명을 불러 그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거대한 스완 내부 구조의 상세 설정, 그리고 정교하게 짜여진 테러범들과 피해자, 생존자들의 동선이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단지 공들여 만들어진 것에 그치지 않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면서도 서서히 진상을 드러내도록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쿠노 할머니가 왜 스카이라운지에서 3층으로 이동했는지, 왜 비상계단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던 고즈에와 유키오와 함께 스카이라운지로 돌아가지 않았는지에 대해 거의 분 단위로 밝혀지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참석자들의 증언으로 서서히 진상에 이르는 과정이 정말 좋아요. 지적인 쾌감과 함께 독자가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더라고요.

이렇게 생존자들이 증언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각자 무엇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는지? 라는 또 다른 수수께끼 풀이도 볼거리입니다. 생존자 중 도산 - 오다지마와 이쿠노는 각각 피해자인 누군가의 죽음에 큰 책임이 있었고, 가장 정의로운 척 했던 꼰대 호사카 할아버지가 기쿠노 할머니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걸 지루하지 않게, 합리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다지마의 거짓말은 연인 하마야를 감싸기 위해서였다는게 밝혀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추리해내는 도쿠시마 변호사의 활약도 눈부셨습니다. 하야마는 오다지마가 걱정되어 비상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총에 맞았는데, 스카이라운지에 도움을 요청한 탓에 기쿠노 할머니가 내려왔던게 할머니의 이유를 알 수 없던 동선에 얽힌 진상이지요. 하야마가 깜짝 등장하여 증언을 더해주는 등 사건의 중요한 열쇠들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추리물로서의 가치도 적절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멤버 중 가장 주변인으로 보였던 하타노가 사실은 스카이라운지에서 사살당해 죽었던 아이 유키오의 아버지였다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하타노와 이즈미 등을 통해 선과 악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테러범들이 찍은 동영상에 대한 정보가 독자들에게 공유되지 않는 탓입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으니까요. 유키오가 얼굴 앞 뒤에 총을 맞은건 고즈에가 방패로 써서 그렇다는 반전도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어요. 추리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는 결국 이즈미의 기억이 전부라는 의미거든요. 

고즈에가 총에 맞은 상황에 대한 진상도 마뜩치 않습니다. 고즈에는 이즈미를 괴롭히던, 학폭 주동자였습니다. 사건 후 이즈미에 대해 고발하는 인터뷰를 해서 이즈미의 현재를 더 지옥처럼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사건 경과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고즈에는 위험에 처한 이즈미를 구하기 위해 구태여 밖에서 스완으로 들어왔던 의리녀입니다. 또 범인 니와가 총을 쐈을 때 '이미 죽은' 유키오의 시체를 방패로 삼았다는 이유로 자살을 시도했던 마음 여린 소녀이기도 하고요. 즉, 앞서의 학폭 주동자와 너무 상반된 모습이라 전혀 다른 두 명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품에서 계속 언급하는 백조와 흑조, 오데트와 오딜은 이즈미와 고즈에가 아니라 고즈에 한 명 안에 포함된 두 개의 인격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에요. 기쿠노 할머니의 응급처치를 호사카 할아버지가 질타했던 탓에, 그렇잖아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할머니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할머니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기 어렵게 만드는 작위적인 설정에 불과해 보였거든요.

설정과 묘사에서 '스완', 즉 백조와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과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했던 대형 쇼핑몰 이름부터 시작해서, 테러의 주 현장이었던 백조, 흑조 광장와 이즈미가 사랑하는 발레 '백조의 호수' 속 백조, 흑조 이미지와 엮는 여러가지 묘사들은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마지막에 한 단계 성장한 이즈미가 스완에서 홀로 백조의 호수 연기를 펼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했고요. 영상화를 염두에 둔 장면 같은데, 여러모로 실소만 자아내는 장면이었어요. 그 외에도 여러 명의 관계자들이 모여 증언을 하는데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던가, 살아남은 이즈미가 언론에 의해 여러 명을 희생시킨 희대의 악녀가 되어 버렸다던가 하는 흔한 설정이 많은 것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래도 흔한 설정을 무대와 상황에 대한 변주를 통해 독특하게 그려내고, 비교적 정교하게 짜여진 전개로 지적 쾌감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작가가 왜 최근에 '핫' 한지를 잘 알 수 있었어요. 단점은 있지만 재미와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1/18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2 - 카리야 테츠 / 김숙이 : 별점 1.5점

한 권으로 읽는 맛의 달인 미식 특강 2 - 4점
카리야 테츠 지음, 김숙이 옮김/창해

1권을 오래전 읽었었고, 바로 얼마전에도 읽었었습니다. 별점은 2점이고, 딱히 구입해서 읽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게 감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2권 목차가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구입해서 읽어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이미 절판되었지만 많이 팔렸는지 중고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저를 낚았던 목차부터 소개해드립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 시드니에 살면서
제2장 | 세계 맛기행
제3장 | 맛의 나라 일본
제4장 | 유명가게를 찾아서
제5장 | 특별요리 강좌
제6장 | 못 다한 이야기
1장이야 그렇다쳐도, 2장은 카리야 테츠가 전 세계를 다니며 맛 본 맛있는 요리를 소개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3장에서는 일본의 맛있는 요리를 소개해주고요. 4장은 유명 가게들에서 맛본 경험담이, 5장은 자신만의 레시피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하게 기대를 벗어났습니다. 2장 "세계 맛기행"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맛 본 요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깊이있는 요리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고 개인적인 경험담이 펼쳐질 뿐입니다. 미국 요리의 대표로 스테이크의 예를 들면서 하는 이야기라곤 미국에서는 레어로 제대로 굽지 않더라, 웰던으로 구워져 나왔을 때 항의하면 제대로 갖다 주라, 일본에서는 항의해봤자 미안하다고만 하지 다시 주지 않더라는게 전부에요. 프랑스 3대 진미 이야기도 푸아그라와 캐비아는 그냥저냥이고 트뤼프는 최고라는,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설명 밖에는 없고요. 다른 모든 이야기가 다 이런 식입니다.
심지어 "유명 가게를 찾아서"는 제목과는 전혀 다릅니다. 진짜 유명 가게가 아니라 자기가 갔을 때 최고였던 가게를 소개하고 있거든요. 니기리즈시라면 '스키야바시 지로' 정도는 나와줄 줄 알았는데, 1975년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도 모르는 초밥 가게가 나오는 식으로 말이죠.
"특별요리 강좌"는 기대대로 레시피가 소개되기는 하나 로스트 비프는 오븐이 없으니 도전하기 어렵고, 채 선 양배추에 마요네즈를 듬뿍 바르고 간장을 조금 친 뒤 잘 휘젓고 먹으라는 요리, 무를 국물 맛이 배도록 푹 끓인 뒤 튀겨 먹는 요리 등은 별로 따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게다가 에세이 전체적으로 1권에서도 눈꼴 사나왔던 꼰대 마인드가 지배하고 있는 것도 단점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심한 말을 한 뒤 '너무 극단적인 말이 아니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남에게 실례가 되든 다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뭐든지 말해버리는 정의의 악한이란 말이다'고 본인을 정당화하는데 참 꼴보기 싫습니다. 정의의 악한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요. 나는 저렇게 늙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만 듭니다.

물론 꼰대 마인드라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 없는건 아닙니다. 명품을 이해하지 못하며, 유명세에 좌지우지된다는건 그만큼 자신감이 없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에요. 영국의 전통있는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 2층에는 여성 손님 입장이 아직 금지되었다는 말을 듣고 음식이 맛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관습을 전통이라 자랑하는 듯한 인종에게 섬세한 감정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동의할 수 밖에는 없지요.
음식 전문가로서의 식견이나 경험을 살짝 보여주는 부분들도 간혹 등장합니다. 소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도쿄 토박이들이 소바 끝만 살짝 담구어 먹는 이유는 소바의 향과 맛에 소바 국물의 깊은 맛을 살짝 더해서 먹기 위함이라면서, 이 국물에 대해 "맛의 달인"에서도 등장했던 명점 '나미키 야부'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내용인데 여러모로 볼 만 했습니다.

그래도 장점은 극히 드물고, 자의식 강한 꼰대의 자기 주장, 경험만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1/10/15

미스테리아 34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34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미스테리아는 주제가 흥미로울때만 가끔 읽곤 합니다. 34호는 일본 본격 추리 소설이 특집이라서 읽게 되었습니다. 나름 고전 본격물의 팬을 자부하고 있으니까요. 표지부터 마음에 들어요. "니가 범인이야!" 라는 느낌이니까요. 강렬합니다.

특집은 일본 본격물의 역사에서 시작합니다. 본격과 변격이라는 말의 유래, 그리고 본격이라는 말의 정의, 최초의 본격물에서 신본격, 그리고 근래 라이트 노벨류까지 이어지는 역사와 대표작, 대표 작가들이 소개되지요. 큰 흐름으로는 본격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고가 사부로에서 시작하여 에도가와 란포"D언덕의 살인사건", 하마오 시로의 "그 남자가 죽였을까", 요코미조 세이시"혼진 살인사건",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사회파 미스터리의 대 유행에 이은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월광 게임 - Y의 비극 '88", 니시자와 야스히코"일곱 번 죽은 남자", 모리 히로시"모든 것이 F가 된다"신본격 전국 시대를 넘어 우타노 쇼고"벛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식입니다. 

뒤로는 본격물이 일본에 받아들여진 당시 일본 추리 문단에 대한 상세 설명, 여러가지 유명 작품 속 트릭에 대한 소개, 점점 캐쥬얼화 되어가는 신본격 장르물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자료 조사도 탄탄하고, 담고 있는 내용도 풍성한 편이었어요.

두 번째 특집 기사 '체인질링'은 인간의 아이와 바꿔치기된 요정 아이에 관련된 민담을 분석하는데, 중세 유럽에서 왜 아이가 바뀐 것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는지를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기형일 수도 있고, 아이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던 탓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관련된 다른 전설, 우리 나라의 예도 들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홍한별 번역가와 곽재식 작가의 옛 사건 탐구도 흥미로왔어요. 특히 명동 한복판에 일제 강점기 시절 빼돌리지 못했던 보물이 묻혀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레이철 쿠시너의 "마스 룸" 속 등장하는 요리들을 소개한 컬럼은 '추리 소설과 요리'에 대한 글을 써 온 저로서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요리들도 아주 신기하더군요.

그런데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본격물 관련 특집은, 이미 대충 알고 있던 내용들로 새로운 건 없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저도 쓸 수 있었을 기사였달까요? 물론 캐쥬얼화 되어가는 최근의 흐름은 잘 몰랐던 내용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쪽 작품들 찾아 읽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아서 몰랐던거에요.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가 있었던 기사는 아니었습니다. 

유성호 법의학자의 아동 학대 흔적에 대한 컬럼, 이은의 변호사의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속 법적 대응 방법 등 다른 기사, 컬럼들은 볼륨이 대체로 빈약합니다. 인터넷 검색 결과와 별다를게 없는 수준이에요. 반대로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 "포제서" 평론은 볼륭은 풍성했지만 글의 가독성이 너무 낮아서 지루했고요.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평론만 봐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어요. 이렇게 가독성이 낮은 글은 이외에도 많아서, 쉽게 읽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짤막한 리뷰들 하나하나까지 모두요.

마지막에 수록된 3편의 단편들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관심있는 특집이더라도 더 이상은 구매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은지, 홍한별, 곽재식의 컬럼과 논픽션 기사나 추후 단행본이 출간되면 구입해 볼 생각입니다.

수록 단편에 대한 짤막한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알이를 지켜라!" 

자신이 창조해 낸 인기 동화책 콩알이가 인생의 전부인 일러스트레이터 지혜정의 남편 김진석 교수가 살해되었다. 범인은 제자 최은비였다. 진석이 그녀를 강간하려 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혜정은 은비를 꼬드겨 시체를 강원도 의천에 있는 별장에 유기하러 출발했다. 콩알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별장에는 진석의 변태 친구 한동철이 머무르고 있었고, 혜정은 동철마저 살해한 뒤 시체 두 구를 함께 유기해 버렸다.

듀나범죄 스릴러 단편인데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졸작입니다. 

우선 범죄에 대한 설득력이 너무 낮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쓰레기였다 한들, 피해자 아내가 남편을 죽인 살인자와 함께 시체 유기를 한다는걸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한 탓입니다. '콩알이'의 존재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부족해서, 그다지 절박한 이유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혜정이 처음부터 한동철을 죽이려 했고, 이를 위해 앞서 시체 유기를 일부러 훤히 드러나게 시도했다는 식으로 범죄 계획을 정교하게 세우기라도 했다면, 범죄물로 볼 만한 여지가 있었을텐데 그렇지도 않고요.

전개도 혼란스럽습니다. 진석이 제자의 고백을 녹화하여 한동철과 공유하고,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는 진상이 드러나는건 뜬금없었고, 이 때문에 한동철을 죽였다는 것도 급작스러워서 이해가 힘들었습니다. 애초에 진석은 여태 은비의 고백을 녹화해서 잘 쓰다가, 왜 갑자기 강간을 저지르려고 한걸까요? 문학하는 남자들을 모두 성범죄자로 단정짓는 설정도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듀나의 특기이자 장점인 기발한 설정이 빠져버리니, 뭐 하나 건질게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웃는 탐정" 

초월탐정 김재건과 미소년 조수 마곤이 등장하는 단편으로 집주인 여사와 김재건 사이에 택배로 인해 발생한 트러블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엉망진창이에요. 마곤이 초능력자로 일종의 투명 인간이 되어 집주인 여사가 가지고 있던 김재건의 택배를 훔쳐내는게 이야기의 거의 전부인데, 마곤이 이 택배를 왜 훔쳐내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월탐정 어쩌구하는 김재건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경박하고 유치찬란한 김재건 묘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초월 탐정' 이 뭘 뜻하는 별명인지 감도 오지 않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는군요. 서두의 시점을 가지고 독자와 장난치는 부분은, '메타 미스터리' 운운했던 앤솔로지 "Y의 비극"에서 니카이도 레이토가 썼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도 엄청난 졸작이었지요.

마곤이 할머니와 김재건 사이에 있었던 일을 추리하는 일상계 추리스러운 부분은 괜찮았지만, 다른 부분은 그저 그랬어요.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의 세트장" 

배우 잭 하터가 영화 촬영용 세트장에서 살해당했다. 사건 당시 21번 방음 세트장 안에는 현장 제작자 조 캐츠키와 감독 샘 매스터퍼드 등 모두 열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1930년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단편인데 옛스러운 영화 촬영장 분위기를 상세하게 그려낸 묘사는 아주 좋았습니다. 잭 하터와 마리 플레밍, 두 주연 배우 간에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는 마지막 촬영 장면 묘사가 특히 그럴싸 했어요. 이 부분은 여배우를 연모하고 있었던 감독 샘의 살인 동기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기도 했는데, 잘 그려냈습니다.

'스크립터'가 탐정역을 소화한다는 설정도, 과연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썼구나! 싶더군요. 스크립터는 씬마다 있는 오류를 잡아내기 위한 사람으로, 당연히 관찰력이 남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관찰력을 바탕으로, 일종의 닫힌 공간인 촬영 스튜디오에서 소거법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 과정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거의 대부분 목격 증언으로 소거되는 덕분이에요. 결국 조 캐츠키와 샘 매스터퍼드만 남는데, 발소리를 듣지 못해서 샘이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조 캐츠키의 발소리는 독특했고, 샘은 고무 장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서가 별다르게 제공되는건 없어서 본격물로 보기 힘들며, 추리도 일사천리라 의외성은 없습니다. 사실 샘이 범인이라는 스크립터의 추리는 증거가 명확하다고 볼 수 없어서, 경찰 수사가 추가로 필요한 부분이었다 생각되네요. 그래도 다른 단편들에 비하면, 최소한 읽을만한 수준의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