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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 박병욱 : 별점 3점

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 6점
박병욱 지음/굿플러스북

유명한 작품, 작가에 대해 소개한 뒤 그와 관련된 특허, 지식 재산권 등에 대해 알려주는 인문학 서적. 모두 20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허와 지식 재산권을 유명한 미술 작품과 작가를 통해서 소개되도록 유도하는 구성은 그럴듯합니다. 어려운 길을 조금이나마 쉽게 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 주니까요. 하지만 작품과 작가에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억지스러운 항목이 더 많았습니다. 거미와 거미 관련 신화에서 시작해서 큰 거미 조각상인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으로 이어지다가 작품이 위치한 도시 빌바오에 대한 소개, 여기서 스파이더맨 웹 슈터 특허 이야기로 넘어가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과 빌바오, 그리고 스파이더맨'이 대표적입니다. 여기서 특허 이야기는 세 페이지 정도 분량에 그쳐서 책 취지에도 맞지 않고요. 고흐 이야기를 하다가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리는 씨는 밀 씨일 거라고 한 뒤 몬산토의 종자 분쟁 이야기로 넘어가는 '고흐, 밀레, 그리고 몬산토와 권리 소진', 샤갈에 대해 한참 소개하다가 그의 대표작 <생일>에서 생일 노래 분쟁으로 넘어가는 '마르크 샤갈의 <생일>과 Happy Birthday to You' 등 대부분의 항목이 그러합니다.
단순히 지식 재산에 관련된 항목을 그렸기 때문에 소개된 항목들도 많아요. '앤디 워홀의 '5'와 지식재산 관리'에서 앤디 워홀 작품은 콜라를 소재로 한 그림이 필요해서 소개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작품과 현대 팝아트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콜라 지식 재산 관련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지요.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비오는 날, 파리 거리>에 돌로 포장된 도로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도로 포장 특허 이야기를 끌고 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관계없는 특허가 소개된 경우도 있습니다. '루벤스의 <촛불을 든 노인과 소년>과 특허 소송을 할 수 있는 자격'은 뜬금없음의 절정입니다. 바로크 양식과 명암 대비 효과에서 촛불 집회로, 그리고 LED 촛불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브 클라인의 IKB와 색채 상표'의 경우는 색깔도 상표 출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다루는데, 이브 클라인은 IKB의 제조법을 출원한거라 성격이 전혀 다르고요. 이에 비하면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시작해서 셀카봉 특허 소개로 이어지는건 기발해서 마음에 듭니다. 참고로, 셀카봉은 미놀타의 기술자 우에다 히로시가 만들었다고 하네요. 무려 1984년에 출원했답니다. 기술이 아이디어를 따라오지 못한 좋은 예입니다. 돈을 번 사람은 따로 있다니까요.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은 부분도 많습니다. 튜브 물감의 발견이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건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야외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지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튜브 물감의 초창기 제품과 이전의 돼지 방광 물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던건 수확입니다. 도판으로 수록되어 있어서 확인이 가능한 덕분입니다. 재미있는건 튜브 물감이 먼저였고, 튜브형 치약은 무려 30년 뒤에 나왔다는 사실이지요. 아마 지금처럼 치아 관리가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 짐작됩니다. 또 튜브 물감의 특허권자 존 랜드가 튜브형 치약이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게 대박이었어요. 튜브형 치약으로 포스터가 특허를 받기는 했지만, 이는 특허가 독점권이 아니라서 가능했습니다. 즉, 존 랜드의 특허를 침해한게 맞다는겁니다. 존 랜드가 특허 출원당시 튜브형 용기에 담기는걸 '물감'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유체'라고 명기했던 덕분인데, 앞으로 특허를 출원할 때 유념해야겠습니다.

코카-콜라 특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은데, 영업비밀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네요. 2006년 코카-콜라의 라이벌인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의 직원으로부터 코카-콜라의 레시피를 수백만 달러에 팔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펩시콜라는 오히려 이러한 불법행위를 코카-콜라 측에 알려 주었고, 제안을 한 코카-콜라 고위 임원의 비서 등 직원 3명은 150만 달러를 받으려고 나왔다가 FBI에 의해 체포된 뒤 영업비밀을 훔친 죄로 8년 형을 선고 받았다고 하네요. 또 콜라의 상표권과 관련한 소송을 살펴보면, 1988년 코카-콜라는 라이벌인 펩시콜라와 캐나다에서 소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사용하는 필기체와 동일한 "Cola" 글씨를 펩시콜라가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Cola"는 일반적으로 청량음료인 콜라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인데, 당시 캐나다 법원은 이러한 일반명사라도 코카-콜라가 사용하고 등록한 글씨체를 똑같이 모방하여 사용하면, 일반 소비자가 펩시콜라를 코카-콜라로 혼동할 수 있으므로 상표권을 침해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반명사인 "Cola"만으로는 상표로 등록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나 "Coca-Cola"는 단순히 특정한 제품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인식되지 않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다른 콜라와 제품의 출처를 구별할 수 있는 식별력이 있으므로 상표로서 등록이 가능했던 겁니다.

생일 축하 노래는 큰 돈이 오간게 핵심인데, 최초 저작권 등록을 거쳐 1988년에 워너/채플 뮤직이 저작권자 써미 컴퍼니를 2,500만 달러에 인수하면서 저작권이 이전되었는데, 인수 당시 저작권 평가액은 500만 달러였습니다. "Happy Birthday to You”는 1935년 미국에서 저작권 등록이 되었으므로, 등록된 때로부터 95년이 지난 2030년까지 저작권이 유효하고요. 워너/채플 뮤직은 2010년 이 노래를 한번 연주할 때마다 700달러의 로열티를 받겠다고 발표했고, 이후 이 노래로 워너 뮤직이 벌어들인 저작권료는 5,000만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어 역사상 가장 많은 저작권료를 번 노래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7급 공무원'에서 남자 주인공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위해 지불한 저작권 사용료는 무려 12,000 달러였다고 합니다. 이거 참 부럽네요.
 
발명의 실험을 위해 공개되었던 도로 포장 특허 소송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발명이 공지되기는 했지만 예외적인 상황이라 특허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선출원주의와 선발명주의의 차이도 잘 알 수 있었고요

항상 궁금했던,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미리 머릿 속으로 발명한 뒤 출원한 경우?'에 대한 사례가 많았던 것도 주목할 만 합니다. 바코드 특허가 대표적으로, 바코드가 특허 출원된 후 보호 기간이 만료될 때 까지 스캐너 등이 개발되지 못해 사업화하여 수익을 올릴 수 없었다는군요. TV와 전자책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이런 발명을 했다면 주변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출원을 미루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꿀팁도 전해줍니다. 일단 출원하고, 개량과 주변 기술에 대한 특허를 지속적으로 취득하면 된다네요.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또 바코드 특허를 통해 현대 특허 괴물의 모태인 '레멜슨'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레멜슨은 기술적 문제 등으로 상업적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점을 간파하여 주변 기술이 성숙될 때까지 등록을 미루다가 마지막에 등록한 뒤 침해 소송을 벌인 인물이라지요. 세상에는 정말 머리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상표권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지명이나 일반적인 명칭 - 랩 - 같이 식별력이 없는 상표는 당연히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천안 호두과자'가 아마 등록되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 어느 하나의 사업자가 적극적으로 상표를 사용하여 그 상표를 보면 누가 만들어 파는 제품인지 소비자의 입장에서 현저하게 인식되어 혼동할 우려가 없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상표 등록이 가능한데 대표적인게 우리나라는 K2, 유럽은 4 핑거 킷캣입니다. 색채만의 상표도 마찬가지로 아래의 요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1. 타인의 상품과 구분되는 식별력을 가질 것.
  2. 색깔 자체에 기능성이 있으면 안됨. 예를 들어 분홍색 붕대는 피부색과 비슷한 기능성이 있어서 출원 불가.
이는 패션업계에 사례가 많더라고요. 크리스찬 루부탱의 빨간 하이힐 밑창, 그리고 티파니의 푸른 상자와 쇼핑백이 대표적입니다.

건축물도 지식 재산권으로 보호될 수 있을지도 평소에 궁금했었는데, 당연하지만 기존 건축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건물의 경우만 인정된다고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즉, 일률적인 아파트는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보호되려면 어느 정도 예술성이 요구된다고도 하니까요. 저작권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표현된 창작물에만 인정되는 권리이기 때문이라는데, 이를 특허 기관에서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또 저작권은 '아이디어'를 보호하는게 아니라 '표현;을 보호한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디어나 컨셉이 유사해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다르면 저작권을 침해한게 아니라는데,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애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정량적으로, 수치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정보이니까요.

이런 내용들을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다는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특허, 지식 재산권 이야기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만큼, 구태여 미술 작품을 통해 소개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2/02/20

해적판 스캔들 - 야마다 쇼지 / 송태욱 : 별점 2.5점

해적판 스캔들 - 6점
야마다 쇼지 지음, 송태욱 옮김/사계절출판사

어떻게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복제와 판매가 허락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문화사 - 미시사 책입니다. 깊이 있는 다양한 정보를 소개해 주시는 네이버 블로거 "반거들충이 한무릎공부" 님의 소개 글을 읽고 구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핵심이 되는 사건은 18세기 영국에서 벌어진 대형 서점주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의 '해적판' 출판업자 도널드슨 간의 법정 소송 대결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작권’이란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훑어보며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에 더해, 탐욕스러운 서점주에 맞선 도널드슨의 치밀한 작전이 흥미롭게 펼쳐집니다(영국의 대법관이 영구 카피라이트를 인정하자, 도널드슨은 일부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뒤 재판을 스코틀랜드로 옮겨 승소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원에 대법관부의 오심을 제소하는 방식).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법정 공방은 마치 잘 짜인 법정 추리물을 연상케 할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또한, 자료적인 가치도 가히 독보적입니다. 저작권의 역사를 다룬 책 자체가 거의 없는 데다, 비록 영국에 한정된 내용이지만, 실제로도 저작권의 초기 역사는 이 책에 등장한 '앤 여왕법'과 이후의 재판이 거의 전부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주장—"저작권은 분명 필요하지만 특정 개인에게 영구히 소유되는 권리라면 대중이 책을 접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수정과 개정을 통한 발전도 늦어질 것이다. 문화는 누구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도 논지가 확실하여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되새겨볼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제법 많습니다. 일단 배경 설명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나 등장 인물들의 후일담까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고, 예를 들면 당시 스코틀랜드 문예를 상징하는 앨런 램지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저작권에 대한 관습법상의 해석이 가장 중요한 이슈인데, 내용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 점도 아쉬웠습니다. 상세한 설명이 뒷받침되어 있기는 하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수준은 아니었거든요. 저자의 권리와 서점의 권리(출판권)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 작가가 쓴 책을 번역한 탓에 일본의 저작권법을 예로 들거나 일본 자료를 인용하는 부분이 많은데, 최소한 국내 저작권법 정도는 조사해서 함께 실어주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반적으로 무난하지만, 누구에게나 권할 책은 아닙니다. 저작권법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지만, 현재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2006/03/07

이글루스 SK 커뮤니케이션즈에 인수되다?

흠... 정말 생각 밖의 일이군요. 좋은 분들도 만나고 재미있고 수준높은 글들을 읽으며 잘 활동하던 저의 유일한 공간이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이글루스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글에 대한 저작권을 거의 다 제가 가지는 약관 때문이었으니 (최소한 제가 가입할 당시에는 그랬었죠) 이렇게 된 이상 저작권에 대한 관련 약관을 한번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대단히 가치있는 글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제가 써내려간 기록들은 저만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만 있을 뿐이니까요.

확인 후 네이버 블로그같은 어처구니 없는 저작권을 적용한다면.... 그냥 조용히 슬슬 옮겨갈 준비를 하렵니다. 지난 3년여간 공짜로 잘 써온 셈이니 뭐라 하기도 뭐하니 조용히 가야죠. 플러스 서비스 한번 신청해 본 적 없는 유저로서는 이 부분에서는 미안한 감정도 살짝 듭니다. 또 덧글이나 관련글 남겨주신 분들에게는 무척 죄송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글도 백업받고 싹 지워버리고요. 그래도 3년여의 기록인데 SK라는 회사에 넘겨주는 것은 솔직히 싫거든요.

제가 인기 블로거도 아닌 만큼 별 영향력도 없겠지만 그래도 무척 아쉽긴 합니다. 어디 가서 이 글들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올리기도 힘드니 이제 저만 보는 글들이 될 것 같다는 것도 아쉽고요. 무엇보다도 좋은 인연들이 여기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것이 제일 아쉽습니다.

하여간, 관련 항목을 좀 잘 알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많은 도움 주세요.

2019/02/03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 안나 캐서린 그린 외 / 위즈덤커넥트 : 별점 2점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 4점
안나 캐서린 그린 외/위즈덤커넥트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고전 단편을 소개하는 e-book 레이블 Mystr 컬렉션 시리즈에서 "럭키팩" 이라는 이름으로 내 놓은 합본집 중 한 권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격 명탐정들이 등장하는 고전 본격물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여하기에 읽게 되었네요. 고전 본격물은 영원한 제 favorite이니까요. 대부분 저작권이 만료된 저작권 free 판권물로 보이는데 딱 한 편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품들로 보입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경찰 뮐러라던가, 영국의 사립 탐정 존 벨은 탐정도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일 정도입니다. 희귀하다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러나 국내에 그동안 소개되지 않은 이유도 알겠습니다. 그냥 작품의 수준이 기대 이하입니다. 탐정들도 매력적이지 않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 몰랐던 탐정, 몰랐던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가치를 느끼기 힘든 시리즈였습니다. 저렴한 가격 외에는 이 시리즈를 구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황금 총알 

혼 국장에게 펠너 교수의 집사 요한 더멜이 찾아왔다. 교수가 닫힌 서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 국장은 조 뮐러 형사와 함께 교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닫힌 문을 열고 살해된 교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였고, 흉기인 총알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기묘한 상황에서 조 뮐러는 이 사건이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데...

오스트리아 비밀 경찰국 소속의 자비심 많은 천재 형사 조 뮐러 시리즈 단편으로 밀실 살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거의 잊혀진 시리즈가 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재미와 완성도 모두 평균 이하거든요. 핵심 트릭이라 할 수 있는 밀실 살인 트릭은 열쇠 구멍이 넓어서 빛이 새어나오고 안의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총알도 통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이디어인데, 발상은 신선하지만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야기에 잘 녹아든 것도 아니고, 독자에게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지도 않고요. 추리물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뮐러가 이전에 맡았던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부분 역시 작위적이라 아쉽습니다. '우연히' 옷이 찢어진 밀러가 요한으로부터 '우연히' 옷을 빌려입는데, 그 옷은 '우연하게도' 예전에 펠너 교수가 요한에게 선물한 것 중 하나였고, 그 때 '우연히' 트리스탄이라는 거대한 사냥개가 친근함을 표시한 상황에서 그 개의 주인이 니에프라는걸 알게 된다는 식으로 우연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이상은 너무 많으니까요. 차라리 뮐러의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 수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니에프를 찾아갔다가 개가 친근하게 구는걸 알고, 그 옷의 주인이 사냥개와 친했다는걸 알게되었다는 전개가 훨씬 나았을겁니다.

불쌍한 범인 니에프가 자살할 시간을 벌어줄 정도로 자비심이 많다는 뮐러 캐릭터 역시 별로였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 

그라우만 부인은 경찰을 찾아와 자신의 조카 알버트가 친구 사이더스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썼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체포된 이유는 사이더스가 살해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며, 그의 권총이 흉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온 뮐러에게 알버트는 사이더스가 오래전 큰 돈을 훔쳤던 전과가 있어서 자신이 돌보는 아가씨와의 약혼을 거절했으며, 사건이 일어난 밤 사이더스가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방문했다는 증거를 남기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후견인인 엘레노라는 오히려 알버트가 자신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뮐러의 수사를 통해 사이더스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 친구에게 쓴 편지가 거짓으로 밝혀진 후 - 그에게 친구가 없었기 때문 - 이 모든 것은 사이더스의 정교한 자살 계획이라는 진상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조 뮐러 시리즈인데 전편보다도 추리적으로는 더욱 별볼일 없습니다. 현대 독자라면 사이더스가 자살 계획을 꾸몄다는걸 너무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조 뮐러의 독백은 장황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게다가 자살자가 자기에게 총을 쏘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총을 멀리 던진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러나 정황 증거만으로 누군가를 유죄로 만드는 사법 체계의 모순, 그리고 전과자가 갱생할 수 없다고 믿는 일반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높은 편입니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시대를 많이 앞서간 느낌이에요. 사이더스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했던 검찰청장 구스타프 슈미트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알버트는 심장병으로 결국 몇 개월 뒤 죽는다는 씁쓸한 결말까지도 현대적이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했던 고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지만, 기대 외의 사회파 추리물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서 이전 작품보다는 좀 더 높이 평가받을만 합니다. 그래도 평균 이하 작품이라는건 변함은 없지만요...

아이비 코티지 살인 사건

예술가 개빈 킹스코트가 그의 저택 아이비 코티지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킹스코트는 머리에 난 상처로 죽었다. 현장을 방문해서 나무를 몇 그루 훔치려 했던 정원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상황에서 "나"는 사건을 수사한다는 지인 마틴 휴이트와 함께 현장을 찾는데...

셜록 홈즈와 그의 라이벌 시대인 고전 본격 단편물 황금기 탐정 중 비교적 알려진 편인 사립 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킹스코트가 묶었던 하숙집에서 그가 꾸몄던 나무 장식품들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도망친 하숙인들 사건과 킹스코트 살인사건이 엮이는 전개가 꽤나 깔끔합니다. 하비 찰리트가 다이아몬드를 방에 숨긴 후, 킹스코트가 그 보석을 찾아내었다는 마틴 휴이트의 추리도 그럴싸하고요. 특히 도둑들이 킹스코트가 자고 있지 않을 때 만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서랍장 안에 들어갈 만한 작은 물건이었다는 설명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물론 옛 하숙집 주민 중 한 명이 찰리트라는게 밝혀진다면 사건이 쉽게 해결되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하비 찰리트의 급작스러운 등장과 사망은 완성도를 조금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그래도 별점은 2.5점은 충분한 무난한 작품이에요.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은 시리즈와 작품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연쇄 보석 도난 사건

제임스 노리스 경이 마틴 휴이트를 자신의 렌튼 크로프트 저택으로 초대했다. 이유는 저택에서 벌어진 보석 절도 사건의 해결을 위함이었다. 11개월 전 부터 무려 3건의 연쇄 보석 도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보석은 창문 외에는 모든 문이 잠긴 방 화장대에서 사라졌고, 남은 것은 불에 탄 성냥 하나 뿐이었다.
경은 방이 어두웠을 때 도둑이 성냥을 켜고 서둘러 화장대를 살핀 후 보석을 훔쳐 달아났을거라고 말했지만, 두 번째 사건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훨씬 귀한 반지를 남겨둔 채 싸구려 브로치가 도난당했다는 모순이 있었다.
그리고 
고가의 브로치가 사라졌던 세 번째 사건에서는 주인이었던 경의 처제가 방을 비운 것은 5분도 되지 않고,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며 문은 열려 있었지만 바로 옆이 경의 딸 방이라 누군가 움직였다면 소리가 들렸어야 했다. 오직 남아있는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타버린 성냥 뿐이라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오래전 하서 추리문고 단편 모음집을 통해 읽었었던 걸작 "렌턴관 도난 사건"과 같은 작품입니다. 거의 밀실에 가까운, 사람은 드나들 수 없는 방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마틴 휴이트의 활약이 정말로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단서는 불에 탄 성냥개비 뿐이고요.
현장은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 불을 밝히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는게 드러난 후 성냥개비의 용도에 주목하여 추리하는 과정도 설득력 높고, 여기서 "앵무새"가 범죄에 사용되었다는 진상도 아주 그럴듯합니다.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 - 약간의 틈을 이용하여 방에 침입할 수 있는 건? 왜 한 번에 하나의 물건만 훔쳤는지? 왜 물건의 가치를 알 지 못했는지? 등등 - 도 상당히 공정한 편이라 이 정도면 홈즈 시대 고전 본격물 단편 중 최상급 수준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이미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으며, 이런 저런 추리 퀴즈에서 트릭이 소개되어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인데 이는 시간이 오래 흐른 탓일 뿐 작품의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틴 휴이트라는 탐정의 매력이 떨어지는게 이 작품이 지금은 많이 잊혀진 이유가 아닐까 싶기는 하군요. 이대로 잊혀지기는 아까운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둥근 방

존 벨은 친구인 변호사 에드콤비로 부터 웬트워스가의 유일한 상속인 아치볼드의 기묘한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부탁받았다. 

아치볼드가 머물렀던 여관 주인 등의 증언으로 아치볼드의 방에서 유령이 나오며 그는 공포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드러났다. 존 벨은 수사를 통해 캐슬 여관에서 세 번이나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는걸 알아냈고, 직접 캐슬 여관에 투숙할 계획을 세웠다. 캐슬 여관 주인 가족은 유령이 나와서 세 명이나 죽었다고 강하게 경고했지만 그는 결국 투숙에 성공했고, 하룻밤을 무사히 버텼다.
다음날 원래 제분소였던 여관 건물을 조사하던 존은 여관 주인 바인드로스와 부딪힌 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두번째 밤을 보내다가 방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런던의 유명 탐정 존 벨 시리즈입니다. 존 벨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게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셜록 홈즈의 라이벌 시리즈물은 화자가 별도로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읽다보니 탐정 스스로가 직접 위험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라 1인칭으로 쓰여진게 이해는 되더군요. 무엇보다도 '회전하는 방'에 갖힌 묘사에는 아주 딱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약간은 고전 모험물 느낌도 났습니다. 스케일이 큰 기계 장치 트릭 역시 이런 느낌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하지만 제분소 건물, 회전하지 않지만 가동 가능한 물레방아 등의 조건이 무언가에 사용되었다는 내용은 좀 뻔했으며 회전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 아무 상처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고속 회전이라면 원심력으로 어딘가에 부딛혀서 상처가 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서처럼 완전 범죄가 가능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또 무언가 조작이 있는 방에서 기묘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이 직접 방에 뛰어들어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내용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라 식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말하는 시바신

존 벨은 로리에 박사로부터 시바신에 빠진 에드워드 더시거라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더시거의 조카딸 헬렌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조카 재스퍼 베그웰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삼촌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상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더시거가 벌이는 시바 신상 앞에서의 기괴한 의식을 목격한 로리에 박사는 그가 미쳤다는걸 확신한 나머지, 존 벨에게 무언가 음모가 있는게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령술사로 변장하여 로리에 박사와 함께 더시거의 저택으로 향한 존 벨에게 베그웰은 더시거 삼촌이 미쳐서 헬렌을 죽이려 한다고 경고했고, 더시거 역시 존 벨에게 시바 신이 자신에게 끔찍한 일을 명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헬렌은 몰래 존 벨을 만나 재스퍼를 만난 두세달 전 부터 삼촌이 이상해졌다며, 재스퍼가 재산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게 아니냐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타원형 회랑에서 소리가 전달되는 구조를 응용한 과학 트릭이 등장합니다. 특정 위치에서 나는 소리가 회랑 반대쪽 특정 위치에서만 들린다는 것으로, 저도 언젠가 기사에서 보고 트릭에 써 먹어야 겠다! 고 생각했었던 내용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수십년 전 작품에 사용된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나 봅니다.

하지만 과학적 트릭이 사용된 것 외의 작품의 완성도, 가치는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소리의 "촛점"이 맞아야만 들린다고 하더라도 더시거 혼자 환청을 들은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존 벨이 단 몇 시간의 조사만으로 우연이더라도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전개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더욱 약화시키고요. 또 설령 환청을 들었다쳐도, 더시거 정도 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광기에 곧바로 사로잡혔다는 것 역시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과학적 트릭 외에는 건질게 없는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라면 좀 더 이 설정을 잘 활용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소모된게 아까울 뿐입니다.

동굴 속 유령

바이올렛 스트레인지는 뮤지컬을 보다가 특별한 한 명의 남자를 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너무나 뚜렷한 우울함이 나타나 그 슬픔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남자 로저 업존이 바이올렛에게 사건 하나를 의뢰했다. 도박 때문에 가정이 파탄날 위기에 몰려 이혼 절차를 진행하던 중, 아내가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죽음의 원인으로는 심장 질환이 거론되었지만, 시체 손목이 멍들어 있던 탓에 로저 업존에게 이런저런 추문이 덧붙여져 그는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바이올렛에게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털어놓는다. 첫 번째는 아내가 죽은 날 아이의 양육권을 걸고 아내와 도박을 벌였다는 것, 두 번째는 그녀에게 패배한 후 도박을 벌이던 해안 지대 동굴에서 홀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얼마 전 동굴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아내를 묶어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여성 작가가 쓴 작품답게 복잡하고 여성스러운 심리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별로인 작품입니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로저 업존의 증언이 대부분이며 바이올렛은 단 하루, 저택을 방문한게 전부입니다. 현장 검증이나 별다른 수사는 이루어지지도 않아요.
바이올렛의 분장쇼 한 번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도 어처구니 없지만 이 분장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아서 추리물이라고 부르기 민망합니다.

아울러 충직한 아버지의 하인이 진범이었다는 진상도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누가 범인이든 어차피 별로 중요한 상황도 아니고요. 솔직히 아버지 로저가 범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야기 전개와 결말에 별 차이가 있지 않았을겁니다. 곧 죽을 사람이니까요.

탐정이 추리를 하지 않고, 진범이 누군지 중요하지도 않은 작품이 좋은 추리소설일 수 없겠죠. 완벽하게 건질게 없는 워스트 중의 워스트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눈먼 의사, 아내, 그리고 시계

하스브룩 씨는 5년 전 자신의 집 안에서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공격당해 총에 맞아 죽었다. 자기 전 집 안의 블라인드와 셔터는 철저하게 내려졌던 상태였다. 꾸준히 수사를 이어온 사립탐정 "나"는 당시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맹인 의사인 재브리스키가 하스브룩을 죽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그의 미모의 아내는 그가 망상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결국 재브리스키는 경찰에 출두하지만 동기가 없다는 그의 말과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고, 재브리스키는 스스로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걸 경찰에 증명하기 위한 실험에 뛰어들지만 과녁인 시계를 품은 아내를 쏘고 말았다...

사립탐정인 "나"라는 화자에 의한 사건의 첫 수사 보고서와 바이올렛 스스로 "나"로 지칭하고 쓴 수사 보고서가 혼재되어 전개되는 구조가 독특합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재브리스키가 집을 잘못 알고 하스브룩 씨를 쏘아 죽였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이를 위해 재브리스키는 맹인이며 사건 당일 극도의 흥분에 사로잡혔다는 묘사를 통해 그가 집을 잘못 찾은 이유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과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술에 취했을 때 아파트를 착각해서 다른 아파트 현관문에 먹히지도 않는 비밀번호를 여러번 눌렀던 적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하지만 진상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제공되는 단서는 거의 없습니다. 재브리스키 부인에게 추근대던 남자가 현관문을 통해 도망쳤다는 정도? 그 외에 아무도 믿지 않는 재브리스키의 주장(권총은 길거리에 버렸는데 누가 주워간 것이다 등)이 사실이었다는건 너무 황당하고요. 또 바이올렛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이래서야 탐정 없이 재브리스키의 1인극으로 그의 자백으로 이야기를 끝맺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겁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좋은 설정, 재미있는 사건을 억지스러운 전개와 탐정 캐릭터의 개입으로 망쳐버린게 아쉽습니다.

2019/07/07

31번지 뉴 여인숙의 수수께끼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 민웅기 : 별점 2점

31번지 뉴 여인숙의 수수께끼 - 4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지음, 민웅기 옮김/바른번역(왓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용 의사로 일하던 저비스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로 왕진을 나가서 모르핀 중독으로 보이던 환자 그레이브스를 치료했다. 이후 저비스는 감금되다시피 이동했던 상황, 심상치 않았던 환자의 상태 때문에 사건을 친구 손다이크와 상의했다. 손다이크는 그 집이 어딘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두 번째 왕진에서 저비스는 그레이브스가 거의 사망 직전이라는걸 알고나서 왕진 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당장은 사건성이 없다며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후 저비스는 고용 의사를 그만두고 손다이크 박사와 일하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수임한 사건은 기묘한 유언장 사건이었다. 의뢰인은 사망한 제프리 할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게 된 스티븐이었다. 그는 별 것 아닌 삼촌의 유언장 수정으로 거액을 상속받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사건을 조사한 손다이크 박사는 이 사건이 저비스가 접했던 기묘한 환자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풀려서 번역된 것 같네요. 저작권 만료된 작품이 주로 발매되는 전자책 전문 출판사 '왓북'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당연히 종이책은 없습니다.

읽기 전 기대가 컸습니다. 제가 사랑해 마지 않는 고전 본격물이기 때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손다이크 박사의 장편으로, 이전에 읽었던 손다이크 박사 장편은 모두 괜찮았기도 했고요. 그러나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다운 부분은 전부 장점입니다. 첫 번째는 현장을 방문하여 온갖 쓰레기를 샅샅이 뒤져 단서를 모으는 등 당시의 과학 수사가 치밀하게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초반에 저비스가 철저하게 마차에 가두어진 채로 미지의 장소로 왕진나갈 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는 경로 추적도를 만드는 장면이 일품입니다. 단순한 나무판에 나침반을 부착하고 수첩을 곁들인 정도지만, 그래도 방향이 바뀔 때의 시간 및 상세한 정보를 수첩에 자세하게 기록하는 방법은 꽤나 유용해 보였습니다. 서명을 분석하기 위해 사진 확대를 이용하는 장면은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고요. 

두 번째는 본격 추리물로서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화자 저비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쫓아갑니다. 그래서 탐정과 독자에게 모든 정보와 단서는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디테일도 상당히 좋아요. 바이스 씨는 분명히 독일인이라고 했는데 집에 커피가 없고 차만 있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독일인은 보통 커피를 마시지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네요.
물론 몇 가지 단서들(기묘하게 생긴 갈대, 깨진 유리 조각 등) 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정체를 알기 힘들다는 문제는 있지만, 이 정도 단서는 없어도 진상에 이르는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세 번째는 당연히 손다이크 박사의 팬으로 즐길거리가 많다는 점이죠. 저비스가 의사를 떼려 치우고 손다이크 박사의 조수로 일하게 된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손다이크 박사가 법의학자가 아니라 변호사로 소개되는게 특이했습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고 많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진상이 너무 알아차리기 쉬운데, 저비스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점입니다. 당대 독자 수준이 저비스 수준이라 이렇게 썼겠지만 지금 읽기는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이미 독자는 초반부, 저비스가 왕진나가 진찰했던 환자 그레이브스가 시체로 발견된 제프리라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편에 취해 결국 약물 과용으로 사망했다는 사인, 그리고 한 쪽 눈에 두드러진 실명에 가까운 증상 등의 단서 때문이지요. 과연 누가 그를 감금하여 살해했을까?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피해자의 형 존이 유력하고요. 그리고 존이 제프리와 꽤 닮았으며 배우로 활동했다는 이력을 듣고나면 그가 제프리로 변장해서 뉴 여인숙에 거주했다는걸 모르면 바보입니다. 설형문자 액자가 뒤집혀 있었다는 증거까지 있는데 말이죠. 그러나 저비스는 이런 점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저비스라는 인물의 설정에도 문제가 있어요. 초반부 저비스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 걸로 묘사됩니다. 홀로 그레이브스에게 왕진갈 때가 좋은 예입니다. 그레이브스 코의 안경 자국을 보고 이건 얼마 전 까지 안경을 쓰고 있다는걸 나타내므로 오랜 기간 혼수상태였다는 바이스 씨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걸 추리해 내거든요. 그러나 두 번째 왕진부터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의식을 찾은 피해자는 저비스가 계속 "그레이브스 씨"라고 말을 걸 때마다 당황해합니다. 누가 봐도 자기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걸 계속 놓칩니다. 손다이크 박사의 표현을 빌겠습니다. "저비스, 자네는 정말 구제불능이군". 단지 바보일 뿐 아니라 제프리 죽음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고 범죄의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를 죽게 내버려둔 셈이거든요. 손다이크가 악당들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까지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핑계는 단지 바쁘다는 것 뿐이고요.
이래서야 아무리봐도 추리 소설의 사이드 킥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비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불러온 손다이크도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추리에 있어서도 헛점이 눈에 뜨입니다. 바이스 박사가 은신처를 떠나면서 편지가 올까 두려워 열쇠를 가지고 자주 왕래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곧바로 다음 세입자가 입주해버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던걸까요?
변장용 안경에 반드시 돗수가 있어야 한다는 추리는 현 시점에서 보면 그닥 일리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안경용도 아니고, 회중 시계용도 아닌 유리의 정체가 범인을 밝혀내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는 점도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위적인 우연, 불필요한 장치도 지나치게 많습니다. 저비스의 왕진이 사건과 겹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저비스가 그레이브스 씨라고 불리운 제프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건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부분을 덜어내고 추리를 펼치는게 더 완성도는 높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바이스 씨의 부인이 사시였다던가, 바이스 씨와 마부는 동일인물이었다는 등의 장치는 불필요했고요.

마지막으로 사건이 밝혀지는 계기가 된 다시 쓴 유언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확인이 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원래 존은 250 파운드만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바뀐 유언장에 의해 '잔여 재산 수여자' 가 되어서 죽은 고모의 유산 3만파운드를 받는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모든 유산의 수령인은 조카 스티븐인데, 왜 고모의 유산이 잔여 재산이 되어 존에게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너무 쉬운 내용이라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없었고, 특히 저비스의 왕진 부분은 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손다이크 박사의 팬이시라면 모를까, 구태여 구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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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칙]
(시행일) 본 약관은 2003년 6월 16일부터 시행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직은 (주) 온네트로 되어 있는 이상 별 문제 없군요. 빨간 글씨 부분에서처럼 어느 순간 약관을 쓱싹 바꾸고 "탈퇴를 안했으니까 동의한거다..."라고 뒤통수를 칠 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2025/04/05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유감.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2점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센텐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국내 미출간 단편집이라 하여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챗GPT를 통한 자동 번역이 어느 정도 보편화된 시대에, 이런 수준의 번역을 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래는 이 책의 "폴스타호의 선장"의 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는 비스킷 반 탱크,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커피콩과 설탕의 매우 제한된 공급이 남아 있었다. 후방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하리코 양고기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사치품이 많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50명의 인원이 먹기에는 매우 한정된 양이었다.

창고에는 밀가루 두통이 있고 담금질한 담배만 많았다. 모두 합쳐서 18일이나 20일 동안 절반의 배급으로 선원들을 지탱할 수 있는 양이었다. 

...

"여러 시즌 동안 우리나라에 온 배 중에는 오래 된 폴스타호 만큼 많은 석유 돈을 벌어들인 것이 없었고, 너희 모두가 그 돈을 나눠가졌지. 다른 불우한 녀석들이 와이프를 편안하게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너희들은 그 여유를 누렸다. 너희가 그것을 얻은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해야 하며, 우리가 실패한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다. ."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담금질한 담배'라니....  아래는 원문(저자 사후 70년이 지난, 저작권이 풀린 퍼블릭 도메인이라 무료입니다)을 찾아서 챗GPT에게 번역을 시킨 결과물입니다. 그냥 보아도 수준 차이가 확연하지요. 번역본이 임의로 원문을 줄인 것도 눈에 뜨이고요.

선수 쪽에는 비스킷 반 통,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그리고 커피콩과 설탕은 아주 적은 양만 남아 있었다. 선미 쪽 창고와 보관함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해리컷 양고기 등 사치품에 가까운 식료품들이 제법 있었지만, 승무원 50명에게 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저장실에는 밀가루 두 통과, 담배는 무제한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져봤을 때, 모든 인원이 절반의 배급량으로 나눠 먹어도 18일, 길어야 20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

“그동안 이 땅에 오는 배들 중에서 ‘올드 폴스타’호처럼 많은 기름 돈을 벌어들인 배는 없었고, 여러분 모두 그 덕을 봤잖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집에 아내를 안심시키고 떠났지만, 다른 불쌍한 놈들은 돌아와 보니 여자가 구빈원에나 들어가 있지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를 원망할 수 있다면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이번 전에 대담한 모험을 해서 성공했었고, 이번엔 실패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울고불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 "

하여튼, 이따위 결과물을 돈 받고 팔려고 했다는게 황당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기에 점수를 따로 주지는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책은 사라져주면 좋겠네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북극성 호의 선장"은 다른 단편집에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단편은 무료 텍스트를 챗 GPT에 번역을 시키는게 훨씬 나을겁니다.

2019/09/07

세 가닥의 머리카락 - 구로이와 루이코 외 / 김계자 : 별점 1.5점

세 가닥의 머리카락 - 4점
구로이와 루이코 외 지음, 김계자 옮김/이상미디어

과거 이런 책이나 이런 책을 읽을 정도로 추리 소설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래전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작품 모음집이라던가, 아니면 일본 작품으로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 - 주로 페가나 북스로 대표되는 - 들도 여럿 읽어보았고요. 이 책도 추리 소설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들의 모음집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 외의 다른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표제작인 구로이와 루이코의 "세 가닥의 머리카락" 정도만 어느 정도의 재미와 완성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뿐, 다른 작품들은 한 편의 완성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고 있던데 이래서야 후속권들은 도무지 읽을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의 역사까지 관심이 있으시다면 모를까, 평범한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는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가닥의 머리카락"

표제작으로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입니다. 일본 최초의 창작 추리소설이라고 합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처참한 시체가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단서로 사복 형사 오토모와 다니마다가 범인을 알아낸다는 이야기지요.

두 형사 중 구세대를 대표하는 다니마다는 머리카락이 곱슬머리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여럿이 그를 죽였으며 옆에 곱슬머리 여자가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이는 여럿이 한 사람을 죽이고 신원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소지품을 빼앗은 곳은 도박장이다! 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다니마다는 도박장에 있던 곱슬머리 여자는 과거 다른 수사 때 알게 되었던 오콘이라고 단정하고 오콘을 찾아 나섭니다. 누가 봐도 추리의 비약이 심하고 결론이 심히 엉터리라는 점에서 당시 수사가 어땠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 수사를 신봉하는 신세대 오토모는 세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이런 저런 실험을 하여서 그 머리카락은 천연 곱슬이 아니라는 것, 세 가닥 중 한 가닥은 역방향이라는 것, 머리카락은 염색했다는 것 등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범인은 남자일 것이며, 긴 머리를 곱슬머리 형태가 되게 틀어 묶은 남자라면 '지나인'이 분명하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 머리의 기묘한 상처는 팽이에 찍힌 것으로, 이를 통해 어린 아이를 둔 중년의 염색한 지나인을 조사하여 범인을 알아내게 됩니다.
주어진 몇 안되는 단서 - 머리카락, 피해자의 상태 - 만 가지고 추리하여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귀납법적 고전 트릭물이 떠오릅니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실험하는건 과학 수사의 원조 손다이크 박사를 연상케하고요. 

그런데 재미있는건 결국 다니마다도 오콘을 통해 오토모와 똑같이 범인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오콘이 사건의 동기가 된 범인의 아내이자 피해자의 정부였기 때문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 구세대 다니마다의 건투에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오래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나는건 단점이긴 합니다. 고색창연한 대사가 난무하고 추리 역시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아무리 고전이라도 번역을 이렇게 낡아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렸듯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아요. 낡고 고즈넉하지만 왠지 유쾌한 분위기도 괜찮고요. 무엇보다도 한 장르의 시작, 태동을 볼 수 있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두 명의 여인"

구로이와 루이코가 윌키 콜린스의 "두 인연", 그리고 휴 콘웨이(본명 프레드릭 존 풀거스)의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읽은 뒤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원작과 동일한 내용으로 재 창작한 작품입니다. 본인 스스로 번역물이 아니라고 언급할 정도이니 굉장히 각색이 많이 되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내용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뭔가 멋진 트릭이라도 사용되었다면 이해가 됐을텐데, 이 정도 내용에 감명을 받아 재창작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알맹이가 없어요. 구로이와 루이코가 재창작한건 고색창연한 메이지 시대 문체로 가득찬 낡아빠진 묘사에 불과해 보입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영국에 사는 의사 '다쿠조'(!)가 환자의 딸인 '리파'와 사랑에 빠지지만 리파가 '히라야마'(!) 자작과 결혼한 뒤 시름에 잠겨 은둔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리파'가 악랄한 히라야마에게 농락당한걸 전해듣고 그녀의 도주를 돕다가 히라야마가 살해된걸 보고 해외로 도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히라야마 살해범으로 누군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걸 알고 자수하기 위해 귀국하죠. 여기서 모든 사건의 진상은 범인의 자백 뿐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에 추리적으로 가치가 있는 부분은 전무해요.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협력자의 심리를 처절하게 다루어 독자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려는 목적이라면 메이지 당시에는 먹혈을지 모르니 지금은 개그 요소같은 묘사 덕분에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21세기도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 읽을 이유는 없는 낡아뻐진 고대 유물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유령"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 "두 명의 여인"처럼 기묘한 현지화가 눈에 뜨입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로메다'라는 마을에 사는 오래된 시골 무인 지쿠부 요시나리의 여동생 오시오가 가로메다의 차남 나쓰오와 결혼을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거든요. 부부는 심지어 결혼 후 '미국'으로 갔다가, 죽은 오시오를 두고 돌아온 나쓰오가 오토시와 재혼하지만 병사한 뒤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내용입니다.

진상은 나쓰오가 죽은 척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두 명의 여인" 보다는 조금 낫긴 해요. 최소한 의외성은 있고, 죽은 척 했던 이유도 오시오의 오빠 요시나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진상도 나름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다른 여러가지 장치들, 특히나 오토시가 사고사하고 다시 오시오와 결혼한다는 억지스러운 결말은 지금 읽기에는 한 없이 유치한 탓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고양이", "모르그 가의 살인"

일본풍 문체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라 별도로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탐정 유벨"

빅토르 위고가 영국에 망명했을 때,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공화파 인사들 사이에 나타난 유벨(Herbert)이 사실은 나폴레옹의 탐정(첩자) 였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로 빅토르 위고가 직접 쓴 르포르타쥬의 번역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특기할 내용은 전무합니다. 유벨이 나폴레옹의 첩자임이 밝혀지는건 드러난 여러가지 증거 때문이고, 결국 '공복' 때문이었다는 동기마저 유벨이 직접 밝혀서 의외성도 없거든요. 빅토르 위고 시점에서 당대 망명객들의 삶을 그린 묘사는 좋지만 딱히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라서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나마 인상적인건 첩자를 '탐정'이라고 부른다는 점 밖에는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08/18

물건의 탄생 - 앤디 워너 / 김부민 : 별점 3점

여러가지 일상 속 물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미시사 만화책입니다. 욕실, 옷장, 거실, 주방, 카페, 사무실, 마트, 술집, 야외라는 8개 항목의 대분류로 구분된 4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 생활 속에 맞닿아 있는 사소한 물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불과 수 십년 전만 해도 대세였던 고리가 달린 캔 뚜껑 따개를 누가 만들었는지, 지금과 같이 뚜껑이 떨어지지 않게끔 누가 개선했는지 알려주는 식으로요. 덕분에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들의 비중이 높고요. 문제는 그 중에서도 면도기, 고양이 모래, 비단, 찍찍이(벨크로), 옷핀, 슬링키, 전자레인지, 볼펜, 종이, 포스트잇, 종이봉투, 인스턴트 라면, 아이스크림 콘, 감자칩, 철조망의 15종은 이미 다른 책에서 상세하게 접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또 220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으로 머릿말, 참고 문헌, 감사의 말 등을 제외하면 이야기 하나 당 4페이지를 갓 넘는 정도라 그다지 밀도가 높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화로서 꽤나 재미있는 덕분입니다. 별 것 아닌 이야기에서 나름 드라마를 뽑아내어 전개하고 있어서, 이야기 하나하나가 만화 한 편으로 볼 만 하거든요. 유머러스하게 전개도 즐거웠고요. 흑백 톤으로만 그려져있지만 정확한 뎃셍으로 그려진 작화도 이야기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이런 부분은 "만화로 보는 맥주의 역사"와는 다른 명확한 장점이죠. 

아울러 1/3이 다른 책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2/3는 새로운, 신선한 정보들이라 이러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비롯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괜찮았어요. 1904년 흑인 여성 마담 C.J 워커가 샴푸로 대박을 쳐서 미국 최초로 자수성가한 여성 백만장자로 기록되었다는 이야기, 흑인 혼혈 청년 마첼리허르가 네덜란드령 기아나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후 구두 골 위에 가죽을 씌우는 라스팅 공정을 자동화하는 기계를 발명한 이야기, '요요'는 필리핀에서 유래되었는데 1915년 미국으로 이주한 요요의 달인 페드로 플로레스가 대량 생산을 처음 시작한 후 던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 전국적 인기를 얻지만, 이후 '요요'라는 말은 필리핀어로 장난감을 뜻하는 일상 용어라 제품명 저작권을 상실하고 결국 도산했다는 이야기, 감자칩을 과자의 왕으로 만든 사람은 서부의 감자 칩 여왕 로라 스커더로 그녀가 처음으로 바삭한 감자칩을 유통했다는 이야기, 1922년 흑인 발명가 개릿 모건이 신호등 특허를 출원했다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수박 겉핥기 수준이라도 관련된 Trivia를 소개하고 있는 점도 괜찮았어요. 주로 후일담이나 관련된 이야기들인데, 몇 컷 되지는 않지만 본 편 만큼이나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발명품으로 돈을 벌지 못한 실패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처럼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많았던 "학습 대백과" 류의 만화가 떠오르는, 만화의 장점을 잘 살린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2017/04/29

초초패미컴 - 타네 키요시 외 / 문성호 : 별점 2.5점

초초패미컴 - 6점
타네 키요시 외 지음, 문성호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이전 읽었던 "초 패미컴"의 후속작입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패미컴'으로 발매되었던 여러가지 게임들 중, 특기 할 만한 것들을 소개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많은 게임이 소개되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던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당대 유행과 트렌드를 알려주는 작품들입니다. 혼다의 인기 소형차 '시티'가 주인공인 "시티 커넥션", 그리고 "북두의 권"과 "매드맥스"에서 영향을 받은 세기말 황야를 무대로 한 레이싱 게임 "마하 라이더" 등이 대표적입니다.
다양한 당시 컨텐츠를 원작으로 한 게임들도 같은 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또 물건이 많네요. "스타워즈" 게임에 등장하는 '전갈 베이더', '갸오스 베이더', '크라도스 베이더', '완파 베이더' 등의 악당은 그야말로 대폭소에요. "맛의 달인" 게임의 후짐과 억지스러움도 아주 인상적이고요.
유명인들과 관련된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명탐정 산마"와 같이 당시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유명 크리에이터들의 활약도 돋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공각기동대" 3인방인 오시이 마모루, 이토 가즈노리, 카와이 켄지가 손잡고 만든 RPG "산사라 나가"는 어떤 게임이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심거리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 내세워 새로운 흐름을 만든 작품들이었습니다. 비키니 여성 전사가 주인공인 "몽환전설 바리스", "아테나"라던가 전투 미소녀 안드로이드 밀리아가 등장하는 "가딕 외전", 소노다 겐이치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던 "갈포스" 등이 대표적인데, 전부 아는 작품들로 옛 추억이 소록소록 떠올라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네요.

조금 자세하게 들여다보자면, "바리스"의 유코는 이 바닥에서 전설같은 존재로 어린 시절 상당히 호감을 가졌던 누님입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되는 패미콤 버젼은 흑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엉망으로 이식되었다고 합니다. '쿠소게'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죠. 

SNK의 아테나는 "아테나"라는 게임으로 첫 등장한 듯 한데 접해보지는 못햇습니다. 하지만 "킹오파" 시리즈로는 잘 알고 있죠. SNK 간판걸로 아직 쌩쌩한 현역이기도 하고요. 패미콤 버젼은 아케이드판을 이식한 것인데 '비키니'가 방어구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방어력 '0'의 물건이라는 합리적(?) 설정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방어력이 중요한 디자인은 아니겠지만요.

"갈포스". 소노다 겐이치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죠. 당시 우리나라 잡지 소개 자료에서 보았던 게임도 무척이나 하고 싶었었는데 결국 손대지 못하고 애니메이션만 봤던 기억이 납니다. 

"가딕 외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컴파일의 슈팅 게임인데, 비행형으로 변신 가능한 미소녀 휴머노이드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특이하네요. 본편보다 외전이 유명해진 이유는 주인공 밀리아의 존재가 컸던 것 같습니다. 오리지널 "가딕"은 밀리아는 단지 설정 문장에만 존재했는데 "가딕 외전"에서는 도트 그래픽으로 게임 본편에 화려하게 등장한다고 하니까요. 참고로 아래의 밀리아 일러스트는 가토 나오유키 (스튜지오 누에)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재미난 정보가 많이 있지만 아쉽게도 게임을 잘 모르면 큰 재미를 느끼기 힘든데, 전작에 비하면 유명한 게임이 별로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그나마 아는 게임도 흔해빠진 아케이드 이식작인 "팩맨"이나 "봄버맨", "마계촌", "이카리" 정도거든요. 때문에 재미는 전작보다 못합니다. 

도판도 전작처럼 부실합니다. 제가 앞서 소개해드린 것 같은 특징적인 주인공이나 메카닉 도판 정도는 충분히 소개해줄 만 한데, 글로만 떼우는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었을까요?
아울러 뒷부분에 수록된 "패미컴 헌터, 난부선을 가다!"와 같은 리포트는 오시키리 렌스케가 동참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과 큰 상관이 없는 단순 추억담에 불과해서 분량 낭비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게임의 역사, 혹은 패미컴 게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거나, 굉장한 추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즐기기가 어려운 서브컬쳐 분석 자료입니다. 여러모로 추천드리기는 좀 애매하네요. 가격도 비싼 편이고요. 컬러 등으로 도판을 보강하고 보다 멀티미디어 측면을 강화한 e-book 버젼이라면 모를까, 구태여 구입하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10/06/21

판타스틱이 돌아오는군요.

국내유일의 장르문학 전문 잡지였던 판타스틱.
성향이 달라 애독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르문학 애호가로서 관심있게 지켜보았기에 얼마전 휴간이 아쉬웠었는데 네어버 카페에 웹진 형식으로 돌아왔네요.

관련된 바이럴 마케팅도 진행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시다면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nfantastiqu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90
모쪼록 잘 되어서 오프라인 잡지도 재간되면 좋겠네요. 저도 한번 찬찬히 둘러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웹진"을 표방하면서도 네이버 카페를 통해 오픈한 것은 왜일까요? 커뮤니티 시스템 때문인가? 네이버가 저작권 관련한 시스템이 엉망이라고 들었는데 문제가 없을지 걱정이 살짝 되는군요.

2016/10/22

소년 생활 대백과 - 현태준 : 별점 2점

소년 생활 대백과 - 4점
현태준 지음/휴머니스트

그간 격조했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바쁜 요즈음이네요. 주말만 글을 올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뽈랄라 대행진"으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콜렉터인 현태준 씨가 쓴, 한국 프라모델과 완구를 시대별로 망라한 책입니다. 제품 명칭, 스케일, 가격, 출시년도, 주요 특징과 주로 어떤 제품을 베꼈는지가 중심인 간략한 제품 소개가 곁들여진 구성으로, 특히 한국 프라모델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보집을 보는 듯한 재미가 큽니다. 시대를 연상케 하는 패키지와 광고 문구들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덕분입니다. 일본식 발음, 오타, 그리고 반공 분위기가 팽배하던 70년대에 소련기를 출시하면서 "적기를 식별하자"라는 슬로건으로 반공 분위기 속에서도 제품 출시에 문제가 없도록 했던 마케팅 정책 등이 그러합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조립식'이라는 단어도 반가웠고요. 

70년대 생으로 80년대 모형 라이프를 보냈던 세대라서, 직접 만들어보았던 여러 제품들이 소개되는 것도 무척 반가웠던 점입니다. 몇몇 제품만 꼽아보자면, 우선 아카데미의 연발 루가총은 확실히 만든 기억이 납니다. 정교하고 재미있어서 두어 번 만들었던 것 같아요. "내 맘대로 인디언" 시리즈는 너무 좋아했던 시리즈입니다. 쉽게 만들 수 있고, 결과물도 예쁘고 완성도도 높아서 자주 만들었었습니다. 정말 추억 돋습니다. 건담 시리즈는 그냥 그랬지만,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어딘가 샵에서 전시된 건담 마크 2 조립 완성품을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손가락이 움직이다니! "변신 혹성 전자 로보트 (다이덴진)", "발디오스", 그리고 "가리안 시리즈" 모두 기억에 생생하고요. 보물섬 시리즈는 어린 마음에도 큰 녀석은 너무 비싸서 그림의 떡이었지만, "보물섬 3호 감시전망대"는 확실히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품 소개 외에도 제일과학의 창시자 김병휘 사장 관련 기사처럼 흥미로운 토막 기사도 꽤 괜찮습니다. 중앙매스컴에 근무하던 평범한 광고인이 소년중앙에 실릴 아카데미 광고를 계기로 모형에 흥미를 느껴, 모형점 개업 → 모형 개발 및 판매 → 법적 고초(일본 모형 수입 문제) → 사업 철수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담겨 있습니다. 취미를 살려 일가를 이뤘다는 점은 부럽지만, 동시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차라리 "라면 요리왕"의 후지모토처럼 부업으로 계속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네요.

하지만 이런 추억을 되새기기 위한 용도 외의 무언가를 보여주기엔 좀 부족합니다. 모든 프라모델을 총망라하고 있지는 않으며, 당대 유행과 실제 역사와의 연결 같은 미시사적 시각도 많이 부족합니다.
소련기 출시 시기의 광고 카피, 인기 만화·영화와의 연계 흐름도 짤막하게 언급되긴 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그나마 비중 있게 다루는 저작권 무시, 복제 행태는 이미 다른 컨텐츠를 통해 수없이 접해본 것들이라 신선하지 않았으며, 국내 프라모델 역사 측면에서도 제일과학 외에는 주요 메이커들에 대한 소개가 부족합니다. 아카데미, 아이디어 과학, 에이스 과학, 뽀빠이 과학 등 업체들의 흥망성쇠나 관계자 인터뷰가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특히 명가 아카데미 과학에 대한 소개가 단 한 페이지라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국내 최초 모형 동호회였던 걸리버모형회, 애독했던 "취미가" 기사도 구색 맞추기 수준이어서 아쉬웠고요.

역사적 흐름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모델" 자체에 집중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부족했습니다. 대부분 패키지만 보여주고 러너나 실제 작례 소개는 드문 탓입니다.

한마디로 국산 프라모델 카탈로그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물론 그 자체로 나쁘진 않고 저 역시 충분히 즐겼지만, 미시사적 시각이나 모델 중심 구성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35,000원이라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오래전 읽었던 "클로버 문고의 향수"처럼 오래된 컨텐츠를 시대순으로 조망하려는 의도는 비슷하지만, 깊이와 디테일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0/10/08

시체를 사는 남자 - 우타노 쇼고 / 김성기 : 별점 3점

시체를 사는 남자 - 6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몽환" 시리즈로 굴지의 명성을 얻었으나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해 절필을 선언한 추리작가 호소미 다쓰토키는 잡지 "월간 신소설"에 연재된 작품 "백골귀"를 읽고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백골귀"는 에도가와 란포를 주인공으로 하여, 란포가 말려든 시라하마 삼단벽에서의 괴이한 자살 사건을 친구 하기와라 사쿠타로와 함께 해결해 나가는 3부작 연재 소설이었다.

"백골귀"의 작가 니시자키 가즈야는 호소미 다쓰토키를 만난 뒤, 작품의 원전이 되는 사건을 경찰 출신 외할아버지의 유품을 통해 알게 되어 창작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호소미 다쓰토키는 작품의 저작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는데...

"백골귀"라는 소설이 포함되어 전개되는, 이른바 액자 소설의 구성을 취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에도가와 란포 풍의, 1930년대 분위기가 물씬 나는 "백골귀"의 잡지 한 회 연재 분량(총 3회) 사이에, 현 시점인 1990년에 그 소설을 접한 추리 소설 작가 호소미 다쓰토키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두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완성된 결말로 향합니다. 그런데 "백골귀"의 비중이 상당히 큰 편인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액자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백골귀"는 앞선 줄거리에서 이야기했듯이 1930년대를 무대로, 에도가와 란포와 그의 친구로 알려진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가 등장하여 시라하마의 '삼단벽'에서 발생한 자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한다는 내용이에요. 탐정 역할은 하기와라 사쿠타로가 맡고 있으며, 란포는 일본 추리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심약한 조력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1930년대 란포의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살린 것은 물론, 대단치 않아 보이는 요소들을 '괴이'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묘사가 특히 그러합니다. 또한, 소제목을 란포의 작품에서 빌려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란포의 작품을 인용하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단순히 분위기와 캐릭터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추리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초반에 공정하게 제공되며, 다양한 복선이 깔려 있어서 반전도 효과적으로 작용하거든요.

다만, 살해 동기가 단순한 분노라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웠고, 반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설정이 '쌍둥이 형제'라는 다소 뻔한 장치라는건 아쉽습니다. 따라서 "백골귀"만 놓고 본다면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액자소설의 형식을 빌려, 현재 시점에서의 호소미 다쓰토키 이야기가 삽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백골귀"라는 작품과 호소미 다쓰토키의 이야기가 맞물려 최종 결말로 이어지면서, 작품의 재미와 완성도가 함께 상승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동기와 다소 진부한 설정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우타노 쇼고 특유의 설득력 있고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가 아주 돋보입니다. 독자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야말로 뒤통수를 강타합니다.

결과적으로 액자소설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 점이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1930년대 분위기의 작품을 매우 좋아하는 만큼, 이 작품에서 끝내지 않고 에도가와 란포가 등장하는 후속 작품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덧붙이자면, 역자의 해설에도 언급되었지만, 다 읽고 나서도 제목이 왜 "시체를 사는 남자"인지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시체가 "백골귀"라는 작품을 은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역자의 애너그램 풀이처럼 과거를 그리워하는 의미가 내포된 것인지 다소 애매하네요.

2014/06/02

탐정사전 - 김봉석, 윤영천, 장경현 : 별점 1.5점

탐정사전 - 4점
김봉석.윤영천.장경현 지음/프로파간다

제가 어렸을 적,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출판사였던 해문은 "세계의 명탐정 50인"(이후 일본 탐정을 뺀 44인으로 축약 재간)이라는 책을 출간했었습니다. 명탐정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명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퀴즈를 한 개 선보이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었죠. 이런 핵심 내용 외 일러스트, 수록된 여러가지 추리 관련 정보도 인상적이었고요. "스포일러"라는 점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추리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던 추리 키드에게는 정말로 좋은 선물 같은 책이었습니다.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이라는 동일 구성의 유사 도서가 연이어 출간되었던 걸로 보면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네요.

이 책 "탐정 사전"의 출간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세계의 명탐정 50인"의 현대적인 재구성이 될 걸로 예상했습니다. 스포일러 문제 및 저작권 이슈로 추리 퀴즈 부분이 빠지더라도 그만큼 잘 만들어진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솔직히 실망이 큽니다. 이 책이 대체 누구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가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 문학 초보자를 위한 책이라면 정말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엄선하여, 그중 등장한 탐정들을 중심으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애호가를 위한 책이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탐정을 소개하거나, 기존에 소개된 탐정이라도 다양한 정보를 충실히 실었어야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뷔페에서 맛이나 코스 구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얹어놓은 쟁반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일단, 어떤 기준으로 탐정들이 선정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탐정을 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선정 기준은 막연하게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출판물이라면 판매 부수나 시리즈 권수, 방송물이라면 시청률이나 방영 횟수, 또는 역사적 의의 등의 기준이 있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솔직히 선정 기준은 그냥 저자들의 팬심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IWGP"의 마시마 마코토, "트릭"의 야마다 나오코와 우에다 지로, 니시오 이신의 이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일본의 3대 탐정 중 하나인 가미즈 교스케, 다카기 아키미쓰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우치다 야스오의 시나노의 콜롬보 다케무라 이와오나 경시청의 오카베 경부,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쓰가와 경부 등을 제치고 소개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꼭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걸작에서 활약했으며 추리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탐정들 중 소개되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프렌치 경감, 커크릴(콕크릴) 경감, 방코랑은 그렇다쳐도, 대체 뤼뺑은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보기엔, 그 외의 황금기 명탐정은 거의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차일드 44"의 레오 데미노프와 같은 스탠드얼론 작품의 주인공이 포함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작품이 추리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레오 데미노프가 전통적인 ‘탐정’ 역할에 충실한 인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소련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평가하고 싶었다면, 시리즈 캐릭터인 아르카디 렌코가 더 타당했을 것입니다. "토로스 & 토르소"의 헥터 라시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즈라고는 하나 국내에선 한 권만 소개되어 있어 스탠드얼론으로 보이고, 탐정 같지도 않은 인물인데 뤼뺑마저 빠진 명단에 포함되었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탐정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가 실려 있는 부분은 어이없음의 극치입니다. "지뢰진"의 이이다 쿄야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요. 굳이 추리만화에서 뽑고 싶었다면 "Nervous Breakdown"의 두 컴비나 "절대미각 식탐정"의 다카노 세이야를 꼽는 게 나았을 겁니다. 완성도를 떠나 최소한 ‘추리 만화’이긴 하니까요. 대중문화적 아이콘으로 넣고 싶었다면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가 더 적절했을테고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절판본이나 국내 미출간작에 등장한 탐정을 소개한 점도 아쉬웠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메이즈리크 시리즈를 소개하며 국내 절판이라 언급했는데, 이런 식이면 독자보고 어쩌라는 건가요? 커트 캐넌 시리즈도 한 권만 출간되었는데, 현재 절판입니다. 뒤렌마트의 베르라하(베를락) 경감 시리즈, 모돌이 탐정도요.

캐릭터별 글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도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전이라면 구성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캐릭터는 단순히 정보만 나열하는 반면, 어떤 경우는 작품 분석과 작가 소개까지 이어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정보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 항목도 많습니다. 반 두젠(밴 듀슨) 교수의 경우, '생각하는 기계'라는 별명과 대표작 "13호 독방의 문제" 언급만으로 그치는데, 이런 내용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개 작성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라리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항목에서 주요 작품과 그 속에서의 활약상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에요. 

그 외, 탐정들의 배열도 시대순이나 장르순이 아니라 이름순이라는 점도 의아했으며 실제 캐릭터가 묘사된 일러스트조차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건질 만한 부분도 없진 않았습니다. 결과물 자체는 아쉬웠지만, 고전 본격물부터 하드보일드, 현대물, 대체역사 판타지, SF, 만화, 드라마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범위는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하라 료의 사와자키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게 읽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스가무라 사부로 시리즈, 센도 타카시의 "폐허에 바라다"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로버의 악당들"의 빌 파믈리, 토니 힐러만의 인디언 탐정 조 리프혼과 짐 치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Q.E.D"의 토마 소같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적은 탐정 소개도 반가왔던 점입니다. "Q.E.D" 소개글은 작품의 매력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졌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괜찮았던 몇몇 항목에 비해 전체적인 만족도가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방향성이 없는 기획과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정보들이 대다수인 탓이지요. 30여 년 전 읽었던 "세계의 명탐정 50인"과 비교해 특별히 나은 점도 없고요. 가격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덧붙여 눈에 띈 몇 가지 오류를 정리해봅니다. 엉클 애브너 항목에서 "나보테(나봇)의 포도원"을 "나보프의 포도밭"이라 오기한 부분, "차이나타운" 작가 소개 영역에서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표기된 점(각본가가 언급되었어야 함), 유불란의 후속작이 없다고 언급한 점 등입니다.

2007/12/10

로봇 머신 X - 아이작 아시모프 / 이원수 : 별점 3점


이 작품은 아시모프의 로봇 단편 연작집으로, 그 유명한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을 쉽고 재미나게 설명하기 위한 동화와 같은 작품들입니다. 최소한 제가 읽은 이 책은 아동용이었는데 뭐 원작 완역본을 제대로 읽는다면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전편이 전부 몇 편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는 전부 4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보는 로봇 로비. 수성로봇 스피디, 생각하는 로봇 하비, 그리고 머신X의 4편이죠. "걷는 식물 트리피드"를 읽고 탄력을 받아 읽게 된 고전 SF 작품으로 "직지심경 프로젝트"의 아이디어 회관 출간 버젼을 구해 읽어 보았습니다.(이것도 저작권에 걸리는 행위일까 궁금하군요)

어쨌건, 예상치 않은 거장의 동화라는 것에서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이런 것두 좋지요. 네 작품 모두 고르게 착하고 귀여운 이야기들이지만 특히 수성로봇 스피디같은 경우에는 스피디의 이상한 행동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잘 어우러진 수작이었습니다. 단지 교훈만이 아닌 재미를 전해주는 측면에서 말이죠. 단 그 외의 작품들은 좀 지나치게 교훈적인 부분이 많아 약간 지루한 맛이 없잖아 있습니다. 착한 이야기의 맛을 간만에 느끼는 잔재미와 귀여움은 있지만 거의 도덕교과서 수준의 이야기이긴 하거든요.

그래도 착하고 인간을  위해 살아가는 로봇들이 등장하는 귀여운 동화로서 충분히 제몫을 하고 있고 우리나라 판본의 삽화가 너무 귀여워서 이 삽화그대로 작은 판형으로 재간된다면 꼭 다시 구입하고 싶어지네요. 정말 삽화가 너무 귀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새삼 과거 아이디어 회관 SF시리즈의 위력과 알참을 느끼게 해 주네요. 직지 프로젝트에 올라온 책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 봐야겠습니다.

2012/02/03

단상 - 초등학교 5학년의 추리소설을 읽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5학년이 썼다는 추리소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폐쇄공포증"입니다.

솔직히 완성도를 논하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폐쇄공포증, 신종 마약 엑스터시 등의 소재를 엮어 하나의 글로 만들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장해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부디 초심과 열정을 잃지 말고 한국 추리문학계에 우뚝 서기를 바랍니다. 요즘 좋은 국내 추리문학이 많이 발표되는 와중에, 초등학생마저 창작에 뛰어들다니 위기의식도 샘솟네요. 저도 어떻게든 짬을 내서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창작이 많아지면 발표할 공간도 늘어나면 좋지 않을까요? 회사 화장실에 거치되어 있는 잡지 "좋은 생각"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이 잡지가 간행된 지 20년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권당 2천 원에, 주로 독자 투고 원고에 의지하는 120여 페이지짜리 잡지가 무려 이십 년을 버티다니요! 그렇다면 화장실에서 읽는 책을 목표로, 추리 작가들의 10~20페이지짜리 단편과 약간의 특집 기사로 이루어진 120여 페이지짜리 잡지를 2천 원에 판매하면 어떨까요?

고료는 무조건 페이지당 4만 원 정도로 하고, 추가 이익금을 독자 투표에 의한 인기 순위에 따라 나누는 방식으로 재미와 경쟁을 함께 가져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면 대충 손익분기를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부족한 창작 원고는 저작권이 만료된 외국 작가의 작품 번역으로 충당하고, 독자 투고도 활발하게 전개하면 어떨까요?

하지만 요즘은 화장실에서도 모두 스마트폰을 보는 시대라, 책이나 잡지가 자리 잡기 힘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아마 이런 추리 잡지도 보나 마나 성공하기 어렵겠죠... 그래도 혹시 이러한 잡지를 기획하시는 분이 계시면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저의 바람이기도 한 한국판 EQMM 출간이나 편집은 어렵더라도, 상기 고료로 작가로서 참여할 생각이 있습니다~!

2009/03/10

에이브 (ABE)를 아시나요?

"ABE 81 - 샘 아저씨 유산"이 재간된 "웨스팅 게임"을 구입한 기념으로 몇자 적어봅니다.

에이브 (ABE)라는 아동용 문고 레이블을 아시나요? 아마 80년대 중, 후반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요. 저 역시 당시 초등학생으로, 위인전과 몇 안되는 창작 동화밖에 없던 열악한 국내 도서 시장에서 한줄기 빛과 같았던 에이브의 세례를 제대로 받고 자랐습니다. 억지스러운 감동과 모범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 투성이의 이야기들 속에서 에이브처럼 다양한 종류의 재미를 선사한 시리즈는 정말 그 당시에는 없었으니까요. 소년 모험물, 전쟁의 참상을 전해 주는 반전물, 역사물 및 모험물을 비롯해서 SF에 추리적 성향의 작품까지 가득했던 정말로 좋은 시리즈였습니다.

아직까지도 영국 기숙학교의 유머러스한 일상을 다룬 "제닝스는 꼴찌가 아니다"와 애니메이션까지 나왔던 꼬마 바이킹 이야기 "작은 바이킹". 아동용 판타지의 대표작으로 영화는 물론 국내에서 번안해서 TV 드라마로도 방영했던, 어른들이 모두 사라진 도시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인 "아이들만의 도시" 등은 기억에 생생하네요. 끔찍한 마녀사냥에 대한 고발과도 같은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와 정신지체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는 "어른학교 아이학교" 역시 지금도 생각나고요.

당시는 정말 에이브 넘버만 봐도 그 책 내용이 뭔지 알 정도로, 달달 외울정도로 읽었는데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군요. 인터넷에서 찾은 아래 목록을 보니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작품도 있고 제목부터가 생소한 작품들도 있는데 꼭 다시 구해보고 싶어집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웨스팅 게임" 처럼 재간된 작품이 몇개 있던데 하나씩 옛 추억을 들추는 의미에서라도 구입해 봐야겠어요.

저작권 문제 등이 걸리기는 하지만 아이디어 회관 SF 문고를 가지고 DB화를 진행한 "SF 직지 프로젝트" 와 같은 형태로 에이브가 다시 살아난다면 좋겠습니다.

ABE 시리즈 목록

  • ABE 1 : 나의 학교 나의 선생 (조반니 모스카, 허인 역) 
  • ABE 2 : 조그만 물고기 (에릭 크리스챤 호가드, 박순녀 역) 
  • ABE 3 : 형님 (제임스 콜리어, 이가형 역)
  • ABE 4 :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한스 리히터, 원동석 역)
  • ABE 5 : 파묻힌 세계 (앤테리 화이트, 김용락 역) 
  • ABE 6 : 아이들만의 도시 (헨리 윈터펠트, 오정환 역) 
  • ABE 7 : 큰숲 작은집 (로러 잉걸스 와일더, 장왕록 역) 
  • ABE 8 : 시베리아 망아지 (칼라 시니코프, 윤종혁 역) 
  • ABE 9 : 은빛 시절 (추코프스키, 박형규 역) 
  • ABE 10 : 막다른집 1번지 (이브 가네트, 조용만 역)
  • ABE 11 : 횃불을 들고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공덕룡 역) 
  • ABE 12 :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아네 르슨, 유영 역) 
  • ABE 13 : 바닷가 보물 (헬렌 부시, 김인숙 역) 
  • ABE 14 : 마나난 숨은섬 (앨리스 딜런, 이정기 역) 
  • ABE 15 : 산골마을 힐즈엔드 (아이반 사우드올, 이경식 역)
  • ABE 16 : 안네 (에른스트 쉬나벨, 신동춘 역) 
  • ABE 17 :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 (스코트 오델, 신상응 역) 
  • ABE 18 : 파파 (표도로브나, 채대치 역) 
  • ABE 19 : 칼과 십자가 (피터 카터, 윤태순 역) 
  • ABE 20 : 북극의 개 (니콜라이 칼라시니코프, 문무연 역)
  • ABE 21 :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 (베티 그린, 이우영 역) 
  • ABE 22 : 마더 테레사 (르 졸리, 허문순 역) 
  • ABE 23 : 삼촌생각 (유리 콜리네츠, 최홍근 역) 
  • ABE 24 : 초록 불꽃 소년단 (엔초 페트리니, 양동군 역) 
  • ABE 25 : 대장간 골목 (바클라프 제자치, 맹은빈 역) 
  • ABE 26 : 외딴섬 검은집 소녀 (메이벨 에스터 앨런, 문순표 역) 
  • ABE 27 : 여우굴 (아이반 사우드올, 하종언 역) 
  • ABE 28 : 부엌의 마리아님 (루머 고든, 홍사중 역) 
  • ABE 29 : 룰루와 끼끼 (이누이 도미코, 김선영 역) 
  • ABE 30 : 달나라에 꿈을 건 사나이 (에릭 버거스트, 황종호 역)
  • ABE 31 : 마지막 인디언 (디오도러 크로버, 김문해 역) 
  • ABE 32 : 원시림에 뜬 무지개 (페초르스키, 유성인 역) 
  • ABE 33 : 이를 악물고 (체르드 아데마, 석광인 역) 
  • ABE 34 : 초원의 집 (로러 잉걸스 와일더, 장왕록 역) 
  • ABE 35 : 새벽의 하모니카 (마리안 모네스티에, 방곤 역) 
  • ABE 36 : 우리 어떻게 살 것인가 (제이 베네트, 도창회 역)
  • ABE 37 : 작은 바이킹 (루너 욘슨, 박외숙 역)
  • ABE 38 : 아버지가 60명 있는 집 (마인더트 디영, 이태극 역) 
  • ABE 39 : 눈보라를 뚫고 (수잔 플레밍, 신동집 역) 
  • ABE 40 : 우리들 정글 (존 로우 타운젠드, 이상준 역)
  • ABE 41 : 엄마 아빠 나 (주디블룸, 이종찬 역) 
  • ABE 42 : 마침내 날이 샌다 (마야보이 체홉스카, 최창학 역) 
  • ABE 43 : 맘모스 사냥꾼 (에두알트 쉬돌프, 양광남 역) 
  • ABE 44 : 쥬릴리 (바바라 스머커, 김계동 역) 
  • ABE 45 : 한밤의 소년들 (해리 쿨만, 김종 역)
  • ABE 46 : 바이킹 호콘 (에릭 호가드, 백길선 역)
  • ABE 47 : 늑대에겐 겨울없다 (쿠르트 류트겐, 곽복록 역)
  • ABE 48 : 무인도 소녀 (스코트오델, 채훈 역) 
  • ABE 49 : 우리 읍내 (로러 잉걸스 와일더, 장왕록 역) 
  • ABE 50 : 바람과 모래의 비밀 (앤 드웨이트, 정동화 역)
  • ABE 51 : 먼 황금나라 (야나기야 케이코, 조병무 역) 
  • ABE 52 : 콘티키 (디오하이 에르달, 조익규 역) 
  • ABE 53 : 태양의 전사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한혜경 역) 
  • ABE 54 : 헤어졌을 때와 만날 때 (케스트너, 김양순 역) 
  • ABE 55 : 인생 첫걸음 (샤무일 마르샤크, 정명자 역) 
  • ABE 56 : 얀 (얀 세렐리어, 이세형 역) 
  • ABE 57 : 어린 농장주인 (질리언 에이버러, 박승탁 역) 
  • ABE 58 : 신비섬 탐험 (베르이먼, 이정태 역) 
  • ABE 59 : 빵 포도주 마르셀리노 (산체스실버, 탁인석 역) 
  • ABE 60 : 집나간 아이 (커닉스버그, 박옥선 역)
  • ABE 61 : 얼음 바다 밑 노틸러스 (윌리엄 앤더슨, 박용수 역) 
  • ABE 62 : 장닭호 모험 (존 메이스필드, 최영도 역) 
  • ABE 63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레이그 스트리트, 최경림 역) 
  • ABE 64 : 일곱 개구장이 (에델 터너, 김수연 역) 
  • ABE 65 : 16살 선장 (로빈 그레이엄, 양병탁 역) 
  • ABE 66 : 홀로 황야를 가다 (그리피드, 조효진 역) 
  • ABE 67 : 자유지하철도 (힐데거드 스위프트, 이풍우 역) 
  • ABE 68 : 제닝스는 꼴찌가 아니다 (버커리지, 신호웅 역) 
  • ABE 69 : 비챠의 학교생활 (니콜라이 노조프, 박형규 역) 
  • ABE 70 : 검은 램프 (피터 카터, 최종욱 역)
  • ABE 71 : 로키산맥의 울프 (조지 스톤, 한예석 역) 
  • ABE 72 : 지노의 전쟁 (카를 브루크너, 이계병 역) 
  • ABE 73 : 사랑의 길을 떠나다 (케이 엠페이튼, 김진식 역)
  • ABE 74 : 얼어붙은 불꽃 (제임스 휴스턴, 홍준희 역)
  • ABE 75 : 바이킹 소녀 헬가 (에릭 호가드, 박기열 역) 
  • ABE 76 : 인생의 문 (아나톨리 알렉신, 채대치 역)
  • ABE 77 : 조각배 송사리호 (필리퍼 피어스, 강통원 역)
  • ABE 78 : 겨울 떡갈나무 (유리 나기빈, 이철 역)
  • ABE 79 : 바렌랜드 탈출작전 (팔레이 모와트, 김남석 역) 
  • ABE 80 : 사막의 우정 (앙트완 르불, 박경식 역)
  • ABE 81 : 샘 아저씨 유산 (앨런 라스킨, 한명남 역) 
  • ABE 82 : 아버지에게 네 가지 질문을 (호르스트 부르거, 송영택 역)
  • ABE 83 : 뺏을 수 없는 나라 (몰리 헌터, 김종휘 역)
  • ABE 84 : 긴코장이 대항해 (콘스탄틴 이오시호프, 박일충 역)
  • ABE 85 : 밀림의 북소리 (르네 기요, 현광식 역)
  • ABE 86 : 백합 골짜기 (베라, 빌 클리버, 전재근 역)
  • ABE 87 : 어른학교 아이학교 (하이타니 켄지로, 권오현 역)
  • ABE 88 : 할아버지 안녕 (엘 피드네리, 한봉흠 역)

2020/02/21

미스터리는 풀렸다! - 박광규 : 별점 2.5점

미스터리는 풀렸다! - 6점
박광규 지음, 어희경 그림/눌민

주간 경향에 연재되었던, 계간 미스터리 편집장이셨던 박광규씨의 컬럼을 모은 책으로 추리 소설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연재 당시에 대부분 읽은 터라 별도의 단행본을 구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헌책방에 올라와있기에 구입했습니다.

사실 저도 추리 소설이라면 남 못지 않게 읽은 탓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웹 사이트가 아니라 책으로 진득하게 읽으니 이전에 놓쳤던 세세한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클라이브 커슬러의 시리즈 주인공 더크 피트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생환하는지, "스트라이크 살인"탐정역이었던 프로야구 선수 하비는 후속작에서 아예 사립탐정으로 전직했다던지, 제닛 에바노비치기리노 나쓰오가 원래는 로맨스 소설 작가였다던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편집자 시절 에도가와 란포의 이름을 빌린 대필 작품을 발표했다던지, 체스터튼은 194cm에 135kg의 거구였다던지 등 시시콜콜하면서도 쉽게 알 수 없는 정보들은 다시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주고요. 펠레, 나브라틸로바, 찰스 바클리가 추리 소설을 발표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다른 책에서 읽기는 어려울겁니다. 공저라고는 합니다만.
다카키 아키미쓰"문신 살인사건"을 쓰게 된 이유가 점술사의 권유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심지어 점술사가 대가에게 원고를 보내라고 해서 에도가와 란포에게 보낸 뒤 출간과 성공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보면, 점이라는게 그냥 미신으로 치부할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시시콜콜한 추리소설 관련 뒷 이야기 외에도 '헌사'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와 소설 속 화폐가치를 현재 가치로 치환하여 알려주고, 추리 소설 속에 등장했던 동물들에 대해 소개하고 제목이 바뀐 작품들의 이유를 알려주는 등의 좋은 분석 자료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추리 소설 정보서에서 보기 드물게 국내 작품 소개가 많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저도 꽤나 애호가라고 생각하지만 황세연이 1998년 발표한 단편 "떠도는 시체"같은 작품은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요. 박광규씨의 내공의 깊이, 그리고 연륜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요.

또 이런 류의 책이라면 빠질 수 없는, 읽지 않고 잘 몰랐던 작품들 소개도 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스포일러 등 핵심 정보 공개를 최소화하면서 작품을 소개하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핵심 내용이 빠진채 소개되는 작품들도, 그 정도의 소개만으로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니까요. 스티븐 킹의 "죽음의 지대", 딘 쿤츠의 "어둠의 소리", 구라치 준의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등은 꼭 찾아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소개 이후 진상이 너무나 궁금하니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백은의 잭"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줄거리 요약은 저도 배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일단은 작품들이 고르게 소개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겠죠. 소개되는 작품은 1차대전 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의 황금시대 (골든에이지)와 1990년대 후반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추리 소설 강국이기는 하지만 비중만 놓고 보면 영, 미에 비하기 어려운 일본 작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점도 같은 이유로 문제고요.

억지스럽게 가져다 붙인 소재들도 약간은 거슬렸습니다. 무주택자 탐정을 소개하면서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의 지장 스님을 예로 드는게 대표적입니다. 행각승이 집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특이한 캐릭터 설정이나 이야기 전개에 따른게 아니라, 단지 직업 탓에 집이 없는걸 특이하다고 설명하는건 억지죠. 예로 든 바와 같이 진짜 집이 없는 주인공은 잭 리처 정도면 족했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요리를 즐긴다는 것도 딱히 와 닿는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이 역시 "수수께끼가 있는 아침 식사"처럼 요리가 직업인 탐정을 예로 드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이건 정말 큰 문제인데 연재 때에는 풍성했던 여러가지 자료 도판이 전무하다는건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유명 작가들의 아들, 딸 관련 글에서 작가들 가족 사진같은건 꽤 인상적이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저처럼 연재 당시에 이미 읽으셨던 분들이라면 또 읽어보실 필요는 없지만,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가볍게 읽을거리로 추천드립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즐길거리가 많은건 분명하니까요.

2020/07/09

오래된 책들 (9) - JOKER

딱히 포스팅꺼리가 없을 때 업로드하려고 모아놓은 오래된 책들 이야기 아홉 번째 글입니다. 

이 작품은 "은하영웅전설"의 만화판 작가로 유명한 미치하라 카츠미의 SF 추리물입니다. 소설가 마키 유우의 글을 만화화한 작품이지요.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아 보이지만, SF와 추리 양쪽 모두에서 나쁘지 않은 구성을 보여주었던 작품입니다. 특히 "특무사법관"으로 초법적인 활동을 펼치는 은빛 눈동자의 자웅동체(?) 합성인간 Joker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범죄자를 처단할 때에는 그 어떤 연민도 보이지 않는 냉혹함과, 린 앞에서는 어린 소녀처럼 변하는 성격의 차이를 남성 - 여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변형과 함께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거든요.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 잔재미도 잘 살아있고요. 다양한 특수능력 등의 설정도 잘 짜여져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런데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조사하다가 몰랐던 사실 두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국내판은 전 7권인데 일본판은 전 8권으로 진작에 완결되었다는 겁니다. 8권이 7권 출간 후 무려 7년 후인 2004년에 출간되었는데, 국내 출간을 진행하던 세주 문화사가 이 때 폐업했기 때문에 완결되지 못한거지요. 어찌보면 세주 폐업의 피해작인데, 출판사를 옮겨 완결될만큼 인기를 얻지도 못하긴 했습니다. 저도 구하느라 고생 좀 했을 정도로 팔린 물량 자체가 적거든요. 국내에서 재출간될 가능성도 없으니, 일본어 e-book으로 8권만 구입해 봐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런 비인기 작품까지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니 확실히 80~90년대 초반은 OVA 전성시대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문제는, OVA는 원작의 장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블레이드 러너"의 설정을 차용한 망작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80년대 테이스트가 과하고, 완성도도 낮아서 도저히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니에요. 남, 녀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주인공 린을 농락하는 Joker의 매력 정도만이 눈에 뜨일 뿐이지요. 하지만 만화책은 절판된지 오래된 탓에 특수사법관 Joker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이 애니메이션밖에는 없는게 현실입니다. 특수사법관 Joker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업로드 동영상은 저작권 문제로 언제 내려갈지 모르니까요.

2006/07/24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 오일우 / 오수현 : 별점 3.5점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 8점
윌리엄 브리튼 지음, 오일우 외 옮김/모음사

 괜찮은 추리소설들을 많이 내 놓았던 출판사 모음사에서 출간되었던 오래된 단편선. 동호회나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책이기는 하지만 구하기가 힘든 책 중 하나였는데 용산역 지하 서점에서 우연히 구하게 되어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표제작은 예전에 정태원선생님이 편집한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읽은 것이지만 이외의 2작품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제가 처음 읽은 작품들이라 더욱 그러했죠.

책은 국내 번역가 2명이 읽은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7페이지 정도의 짧은", "재미있는", "한 작가당 한편씩", "다양한 내용으로" 라는 기준으로 선정한 앤솔로지입니다. 아시모프의 "미스테리 환상여행", 그리고 퀸의 "미니 미스테리"와 유사한 기획인데 이 두 앤솔로지와 비교해 볼 때 수록된 작품의 수도 적지만 작품의 질이나 쟝르의 풍부함, 이색적 측면에서 외려 이 국내 편저 앤솔로지가 저는 더 나은 것 같군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편저자들 말대로 다른 앤솔로지나 단편집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가들을 제외한 것입니다. 작가들이 얼마나 다양하냐 하면 심지어 "작자미상"인 단편도 있으니까요. 그동안 엄청나게 발매된 이런저런 앤솔로지들은 편저자들이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중복 선정되는 작품들이 많아서 불만스러웠었죠. 예를 들자면 크리스티 여사님의 "야앵장"은 한 10가지 버젼은 읽은 것 같습니다.... 이 앤솔로지에도 물론 퀸과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은 포함되어 있지만 퀸의 단편은 편저자들의 의도에 충실하기 그지없는 작품이고, 여사님 작품은 도저히 뺄 수가 없어서 한편 넣었다는 편저자들 이야기가 이해가 되는 작가이니 만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단 그 작품이 "이중단서"라는 것은 좀 이해 불능이지만... 편저자들이 포와로 팬이었나?)
또 워낙 한편 한편의 내용이 짧아서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인 부분이며 수록 작품의 쟝르도 광범위하여 정통 추리물을 비롯하여 유머스러운 작품이나 스릴러, 약간 호러 취향까지 다양한 쟝르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38편이라는 많은 작품이 실려있는 탓에 개개의 요약은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인 추천작만 소개한다면 일단 표제작. 저자의 "...을 읽은 사나이" 라는 시리즈 중 한편으로 알고 있는데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위에 나온 다른 앤솔로지에도 수록된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죠. 딕슨 카 매니아인 한 청년이 유산을 노리고 완벽한 밀실살인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기지만 마지막에 실패하는 내용으로 뭔가 유머러스 하면서도 홀딱깨는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선량한 사기극의 일종인 페렌츠 모나르라는 작가의 "최선책", W.하이덴펠트의 작품으로 전쟁을 소재로 한 회고담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암호(?) 트릭이 등장하며 끝나는 "달빛".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사기극과 반전을 다룬 "목사의 오명", 역시 멋진 사기극의 일종이자 유머스러운 결말을 지닌 찰스 G 노리스가 쓴 "존 로시터의 아내" 를 꼽고 싶네요. 이외에도 조르주 심농의 "석장의 렘브란트" 역시 괜찮지만 다른 곳에도 실려 있는 작품이니 패스합니다. 적고 보니 제가 가벼운 사기극 취향인것 같기도 하군요.

물론 너무 짧은 길이 안에서 반전을 노리다 보니 좀 뻔한 것도 있고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반전도 있어서 식상한 작품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수준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며 번역도 깔끔한 수준이고 읽기 편한 책이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저같은 추리 단편 매니아라면 어떤 분이든 좋아하실 만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저작권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책으로 보이기에 이제와서 다시 출간되는 것을 바라기는 좀 힘들것으로 보이지만 다행히 전 구했으니...푸훗!

덧붙이자면, 출판년도를 보니 1992년 책인데 당시 가격이 4000원이라는 것도 놀랍습니다. 당시 책이나 좀 많이 사둘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