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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 클레이튼 로슨 / 장경현 : 별점 2.5점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 - 6점
클레이튼 로슨 지음, 장경현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컬트 신봉자 세자르 사바트 박사가 완벽한 밀실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들 등 유력한 용의자들은 모두 마술사였다. 개비건 경감은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마술사 그레이트 멀리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말로만 들었던 클레이튼 로슨의 마술사 멀리니 시리즈 대표작. 출간은 작년에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멀리니가 영 별로였습니다. '괴도 키드'와 같은 후배들의 원조답게 굉장히 개성적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직업만 특이할 뿐 고전 황금기 시대의 다른 명탐정들과 딱히 구분되는 점이 없는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스테레오 타입 형태도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말 많은 천재형’이며, 그중에서도 최악인,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쓸데없는 말만 많고 정작 중요한 것은 잘 알려주지 않는 타입(초기의 엘러리 퀸이나 파일로 밴스 타입)이라 더 화가 나더라고요. 범인이 누군지 알면 증거나 단서를 잡기 전에 행동부터 좀 하란 말이죠! 하여간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개비건 경감이 어떻게 참고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트릭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걸작’이라는 말을 듣기에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특히 범인이 마술사라는 점에 너무 많이 의지한다는게 문제에요. 예를 들자면, 첫 번째 사건에서의 손수건 바꿔치기, 두 번째 사건에서의 최면술 같은 건데, 이 정도 능력이면 거의 초능력 수준이라 일반적인 상황과 상식에서는 구현할 수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어요. 마술에 의지한다는 점 때문에 독자와의 두뇌게임 역시 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고요. 최면술 같은 것을 사전에 단서로 공유해주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이유는 멀리니도 말하듯 증거가 너무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완벽하게 살인계획을 짤 생각이었다면 단순한 밀실 살인이 아니라, 범인으로 옭아맬 희생양도 필요했을 텐데 그냥 불가능 범죄를 연출했을 뿐이라는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범인 입장에서는 들인 공에 비하면 별로 얻은 게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럴거라면 애초에 왜 밀실을 만들었을까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의 안도가 말했지만, 가장 완벽한 밀실 살인은 자살이어야 합니다. 그게 살인으로 밝혀지면 범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마지막 이유는 경찰력의 무능함을 극대화시킨 전개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5만 달러나 되는 큰돈이라는 유력한 동기를 간과하고 멀리니에게만 기댄다? 직무유기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에 주목해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더라면 범인을 잡아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고전 황금기 시대 이름을 날린 작품다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술의 미스디렉션을 살인의 기법과 연결시키는 발상 하나만큼은 높이 쳐주고 싶고, 초반의 타로가 사라지는 간단한 마술 트릭이라든가 첫 번째 사건에서의 바꿔치기 트릭 하나만큼은 치밀하게 짜여져 있어서 ‘과연 추리 소설사에 이름을 남길 만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딕슨 카의 밀실 추리 이론 등 다양한 작품과 이론에 대한 소개 역시 볼거리이고요.

그러나 저의 컸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더 컸다 생각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번역 출간 자체는 반갑지만, 저 같은 고전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권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작품이었어요. 멀리니의 장광설만 좀 줄이고, 두 번째 사건에서의 최면술 트릭 하나만 보완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안타깝네요. 멀리니가 등장하는 단편집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2021/03/07

ON 온 - 나이토 료 / 현정수 : 별점 1.5점

ON 온 - 4점
나이토 료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갓 형사과에 입사하여 서류 정리 업무를 맡은 신참 형사 도도 히나코는 미해결 사건 파일들을 암기하다가, 처음으로 자살로 보이는 어느 택배 배달원의 변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그 자살 피해자는 히나코가 암기 중이었던 미해결 성폭행 사건의 유력 용의자였다. 자신의 음부에 병을 박아 넣고 죽은 참혹한 시신은 당연히 살인으로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완벽한 증거가 곧 발견되었다. 피해자가 자신이 직접 자살하는 장면을 촬영한 스마트폰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경찰서에 보관된 스마트폰 속 자살 동영상이 어느 날 인터넷 동영상 투고 사이트에 공개되고, 연이어 유사한 자살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일본산 범죄 스릴러물로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던 범죄자들이 연쇄 자살한 사건 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범죄자들이 자살하게 만들었는지를 풀어내는게 핵심인데, 검시를 통해 자살한 범죄자들 뇌에 종양이 있다는게 발견됩니다. 당연히 자살은 뇌 종양이 원인이고요. 정상적인 검시 과정에서 밝혀진거라 추리의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때문에 추리의 여지를 남기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누가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뇌종양을 만들었는지?"를 밝혀내는 후더닛+하우더닛 이야기로 흘러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구조를 만드는데 실패했습니다. 우선 후더닛 측면으로 보자면, 유력한 용의지 나카시마 다모쓰가 초반에 등장해서 범인이라는 인상을 팍팍 심어주는 탓에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의외성이 전무하니까요. 

도도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양념통 지문과 자살 현장의 콜라병 지문이 일치한다는게 밝혀지는 클라이막스는 나쁘지는 않아요. 양념통을 나카시마가 만졌던 적이 있었고, 이를 통해 나카시마가 피해자 미야하라 아키오를 마지막에 만난 인물이라게 입증된 셈이거든요. 하지만 이미 나카시마가 근무하는 병원이 피해자들의 접점이라는게 드러난 이상, 곧 밝혀질 일이었어요. 뭔가 대단한, 결정적인 단서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는 봐줄만 한데, 하우더닛 측면에서는 아예 빵점입니다. 상식적으로 뇌종양을 만들려면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했을겁니다. 이전에 읽었던 "숙명"에서 처럼요. 그러나 감옥에 수감된 사형수마저 종양이 생긴걸 보면, 다른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전혀 셜명되지 않습니다!

나카시마가 끼고 있던 큰 반지가 자살을 시작하게 만드는 하이테크 장치였다는 설정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초능력자가 염력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스캐너스"와 별로 다를게 없는 SF,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중간에 이런저런 가능성을 타진하며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조건반사, 최면술 조작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입니다.

캐릭터들도 진부하거나, 묘사나 설명이 지나칩니다. 주인공 도도 히나코는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에서, 이런 범죄 스릴러 속 스테레오 타입이었던 강단있고 강한 여형사가 아니라는 차별화 포인트는 명확합니다. 그러나 흔하디흔한 일본 컨텐츠 속 착하고 열심히 사는 여주인공 그 자체라서 스테레오 타입인건 마찬가지죠. 게다가 그녀가 절대적인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왜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든요. 히토미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잘생긴 점원에 대해 이야기한 걸 떠올린게 수사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허나 이 정도는 절대 암기력까지는 필요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구태여 이런 초능력같은 설정을 붙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살인 방법과 더불어 작품의 현실성을 급락시키는 또 다른 원인만 제공할 뿐이었어요. "탐정학원 Q"스러운, 만화같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연쇄살인마 오토모 이야기는 진부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전개 상 불필요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나카시마가 뇌를 조종하여 자살하게 만드는 장면을 히나코 앞에서 보여준다는, 극적인 클라이막스를 위해 억지로 등장시켰을 뿐입니다. 살해당한 히토미가 언급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잘생긴 직원이 오토모라는게 밝혀지면, 체포는 시간문제였을테니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그 외 범죄자들의 자살과 그들의 범행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거북했습니다. 지나치게 잔인한 탓이지요. 범죄자들이 천벌을 받게 만드는, 일종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는 합니다만 좀 지나쳤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는 독자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며, 천벌을 위해 뇌를 조작해서 자살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꽤 흥미로왔습니다. 그러나 그걸 이야기로 잘 풀어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득력도 낮고요. 싸구려 헐리우드 스릴러 수준에 불과해요. 시리즈라고 하는데, 후속권을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06/01/14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아리스가와 아리스 : 별점 2점

ロシア紅茶の謎 (講談社文庫) (文庫)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講談社

범죄 심리학 조교수이자, 실제 사건에서의 활약으로 "임상 범죄 학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천재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 시리즈 단편집. 아리스가와 아리스(저자)의 첫번째 단편집이기도 합니다. 그의 "국명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책에는 전부 6개의 단편과 작가 해설 등이 담겨있습니다.
일본 여행 가서 구입한 책으로 장편이 아니라 단편집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번역 한번 해 볼까 하고 삽질하느라 걸린 시간도 있어서 이래저래 거진 한달이 걸렸네요.... 2006년 들어서는 처음으로 완독한 책인 것 같습니다. (만화책은 수도없이 읽었지만서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하였습니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본격 작가라서 굉장히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이유는 작품 대부분이 "트릭을 위한" 이야기들이라 트릭에 매몰된 듯한 느낌인 탓입니다. 트릭도 만들기 쉬운 암호 미스테리가 많아서 별로였고요. 표제작이며 작가 스스로 마음에 든다는, 이른바 국명 시리즈인 "러시아 홍차의 비밀"이 제일 어처구니 없고 수준이하였다는 점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또한 탐정역의 히무라 히데오의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단편이라는 특성상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겠지만, 잘난척 하는 천재라는 고전적 스테레오 타입 그대로의 인물이라 새로운 면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신본격답게 문제-해결이 명확하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은 좋았습니다. 용의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단서에 대한 범위를 좁혀줌으로써 이해를 돕는 추리만화 타입의 전개도 쉽게 읽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그냥저냥한 평작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 자체는 제법 괜찮은게 있고, 뛰어난 작품도 분명있기는 합니다. 위에 말한 단점은 장편을 보면 많이 상쇄될 것도 같고요. 다음번에는 장편에 한번 도전해 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한 3개월은 걸리겠지만....

개인적인 베스트는 "동물원의 암호"와 "팔각형의 함정" 입니다.

작품별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동물원의 암호 :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육사. 그는 죽기 직전 암호로 된 쪽지를 남긴다. 그 암호는 퍼즐광이었던 피해자가 공들여 만든 것으로 암호를 해독하면 범인을 알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주인공 컴비는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해독에 도전하는데...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자체가 무척 괜찮습니다. 기발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그런 암호거든요. 일본 거주자가 아니면 풀기 힘들다는 약점은 있지만 말이죠. 내용 전개도 명쾌하고 논리적이라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 중 하나였습니다.

2. 지붕 밑의 산보자 :
하숙집 주인이 살해되는데 경찰 조사로 발견한 그의 일기에서 그가 하숙집 지붕을 밤에 돌아다니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는 사실과 하숙인들 중 인근 연쇄 강간마로 짐작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런데 하숙인들을 암호화된 이니셜로 표기하고 있어서 정체를 모르는 상태. 연쇄 강간마이자 하숙집 주인 살인 사건의 범인인 그 하숙인을 찾기 위해 두 컴비가 나선다.
역시 암호 트릭입니다. 이 작품은 암호 자체는 무척 간단한 편이라 정교한 맛은 좀 없더군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의 동명 단편을 응용한 센스와 마지막의 살짝 등장하는 반전은 무척 좋았다 생각됩니다.

3. 붉은 도처 (稻妻) :
한 여인이 투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무라 히데오의 제자인 학생이 목격자로 나서 그 여자가 방에서 밀려 떨어졌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여자의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
밀실 트릭물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정교함은 떨어지는 편이고 작품에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너무 적어서 이상할 정도였어요.

4, 룬의 가르침 :
외국인 기자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요청받아 찾아간 히무라 히데오. 그는 피해자가 손에 쥐고 죽은 "룬 문자판" 4개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주력한다.
이 책의 단편들 중에서 전개가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 히데오의 방에 놀러간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책상위에 놓여진 룬 문자판을 보게 되자 히무라 히데오가 그것에 관련된 사건을 들려주는 셜록 홈즈물 스타일의 전개로 이루어지거든요. 트릭은 역시나 일본 독자들만이 풀 수 있는 암호인데 평이하기도 하지만 좀 억지성이 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룬 문자"라는 요소가 왜 들어갔나 싶게 쌩뚱맞아서 의아했는데 책 뒤의 작가 후기를 보니 "고대문자"에 관련된 트릭 추리물을 써 달라는 의뢰의 결과물이더군요. 뭐 그냥저냥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5.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인기 작사가 독살 살인 사건에 참여한 컴비. 아무도 그의 찻잔에 독을 주입할 기회가 없었던 상황에서 사건의 해결에 도전한다.
표제작이자 국명 시리즈라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트릭도 억지에다가 범인이 왜 그런 트릭을 썼는지에 대한 타당성 자체가 불분명 합니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상황" 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제일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는데.... 본격물의 정도를 벗어나 너무 트릭에만 집착한 씁쓸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6. 팔각형의 함정 :
아리스가와 아리스 원안의 추리극을 상연하는 연극 예행 연습에 초대된 두 컴비는 실제로 살인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게 실제로 있군요! 만화에서만 보던 "추리극" 공연과 관객이 함께 하는 범인 맞추기 이벤트라는 연극을 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작가)가 실제로 원안을 제공했던 연극 각본의 소설화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도 본격물에 걸맞는 깔끔하고 완벽한 구성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트릭도 아주 약간을 제외한다면 수긍할 만 했고 범인이 왜 그렇게 트릭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합당하며 범인을 알게 되는 단서 역시 이치에 맞거든요. 일종의 문제편 격인 서술 뒤에 "독자에게의 도전장" 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으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아요.

2019/12/20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에드 멕베인 외 / 이리나 : 별점 2점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4점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북스피어

미국 뉴욕에는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유명한 '미스터리 서점'이 있습니다. 유명 추리소설 편집자이자 비평가인 오토 펜즐러가 운영하는 서점으로 1979년에 문을 열었다니 올해로 40년이 되었네요. 이 책은 오토 펜즐러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점 고객들에게 선물로 증정했던 소책자에 수록되었던 단편들을 모아 엮은 단편집입니다.

오토 펜즐러의 말에 따르면, 소책자용 이야기의 기준은 세가지였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할 것, 두번째는 당연하겠지만 미스터리를 포함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적어도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어날 것이 그 기준입니다. 이 책이 국내 첫 출간될 당시, 책을 펴낸 북스피어가 이벤트삼아서 이와 유사한 조건의 꽁트를 모집했었습니다. 저의 짤막한 글도 다행히 선정되어 "작가의 수지"라는 멋진 책을 경품으로 증정받았었죠. 그러나 이벤트가 당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오토 펜즐러가 자신의 서점 고객용으로 준비한 글을 엮었던 "라인업" 같은 경우, 소설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다가 드디어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일단, 작가진은 굉장히 화려합니다. 오토 펜즐러의 유명세와 인맥 덕분이겠죠. 도널드 E 웨스크레이크, 로렌스 블록, 에드워드 C 호크, 에드 멕베인, 토머스 H 쿡, 메리 히긴스 클라크 등 제가 소개했었던 유명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가득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오토 펜즐러가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탐정 역할을 소화하는 작품마저 있을 정도에요. 미스터리 서점이 사건의 무대가 되고, 서점 직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많고요. 오토 펜즐러가 내세운 기준 때문이겠죠. 마찬가지의 이유로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파티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제법 되는 편입니다.

허나 이러한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 팬, 고객을 위한 서비스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볼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은 탓입니다. 오토 펜즐러가 내 건 조건들도 작위적으로 충족시킬 뿐이에요. 특히나 미스터리 서점에서의 흥청망청 크리스마스 파티는 영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희귀본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자신의 서재에 술취한 손님들이 들어오는 파티를 연다는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솔직히 전체 평균내면 2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반올림한 점수죠. 수많은 추리 작가, 추리 소설들이 인용되고 작품 속에서 활용되는 것을 보는 재미는 괜찮았지만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점수를 주기가 민망한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작가들 역시 단순한 팬 서비스 정도로 여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정 작가의 팬이라도 마찬가지고요. 몇몇 괜찮은 작품이 있기는 하나 극소수거든요. 나중에 e-book으로 각 단편들이 분철되어 판매되면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표지 디자인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크리스마스라기 보다는 할로윈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일러스트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서점 + 크리스마스 소품이라는 미국 원작 스타일 표지였다면 판매는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낌없이 주리라"

도둑 도트문더가 크리스마스날 맨해튼 호텔에서 고대 주화를 훔쳐 달아나다가 우연찮게 '미스터리 서점'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주인 오토와 다른 일행들의 착각으로 그들이 벌이는 포커판에 끼어든 도트문더는 정직하게 게임을 해서 240달러 정도를 땄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하여 수상한 사람에 대해 탐문하는데....

걸작 "도끼"와 유쾌한 케이퍼 소설 "뉴욕을 털어라", 묵직한 복수극 "인간 사냥" 등으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단편. 좋은 단편도 여러 편 발표했기에 작품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마침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뉴욕을 털어라"의 주인공인 도둑 도트문더가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수수께끼는 딱 한가지, "왜 오토와 친구들은 도트문더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일까?" 인데 그 진상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거든요. 이유는 바로 도트문더가 240여달러의 돈을 땄기 때문이죠. 도트문더가 체포되면 포커판은 깨지고 돈도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도트문더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오토와 친구들에게 돈을 잃어주기로 결심했다는 결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포커판의 유지가 중요했다면, 240여 달러를 다시 잃는 것 보다 오토와 친구들의 돈을 모조리 따는게 게임을 끝내기에 더 현실적인 방법이니까요. 돈은 게임이 끝나고 공평하게 돌려주면 되잖아요? 돈을 다 따거나, 아니면 240여 달러를 다 잃거나 어느 쪽이건 게임이 끝날 때 오토와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기도 하고요. 아울러 크리스마스날 일어난 사건일 뿐,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주제에 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쓴, 오토 펜즐러의 세 가지 기준에만 맞춘 졸작입니다.

"계획과 변주"

희귀 서적 중개인이 뉴욕에서 차례로 살해당했다. 파로아 러브 형사는 그들의 죽음이 대실 해밋의 잃어버린 원고인 "마른 여자"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고, 자신의 친구 오토 펜즐러를 찾아가 책 수집상 와일리 에머슨을 함께 찾아가 보자고 부탁했다. 와일리 에머슨이 "마른 여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일리 에머스는 "마른 여자"라는 원고는 본 적도 없다며, 자신을 찾아왔던 수집가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오토는 와일리 에머슨이 썼다는 원고 뭉치를 들고 나오는데...

흑인 동성애자 형사 파로아 러브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저술한 조지 백스트의 파로아 러브 단편. 크리스마스가 배경이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대실 해밋의 "마른 여자"라는 원고를 와일리 에머스가 숨긴채 가지고 있던 이유도 썩 납득이 되지 않고요. 원고를 쫓는 악랄한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차피 돈 받고 팔 생각이었다면 마찬가지 결과였을텐데 말이죠. 게다가 범인이 오토 펜즐러 서점의 매니저 알렉스였다는 진상도 뜬금없습니다. 나름의 복선이라고 등장하는건 찢어진 청바지와 원고를 노리는 도라를 배웅해 주었다는 것 뿐이라 억지스러웠어요.

한마디로 단편에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를 무리하게 펼쳐낸 느낌입니다. 조금 더 길게, 상세한 설명을 더하여 풀어냈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녹슨 책갈피 도난 사건"

닉 벨벳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고등학교 때 친구 찰스 오닐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의뢰는 오토 펜즐러에게 판매한 대량의 헌 책 속에 끼워진 금속 책갈피를 훔쳐와 달라는 것이었다. 닉은 택배기사로 변장하여 서점에 잠입한 뒤, 책갈피를 빼내오는데 성공하는데...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단편. 시리즈 캐릭터인 괴도 닉 벨벳이 주인공입니다. 확실히 제왕다운 작품이에요. 오토 펜즐러의 어떻게 보면 무리한 요구를 모두다 들어주면서 완성도까지 높은 수작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크리스마스라는 시즌을 유효적절하게 써먹고 있는게 눈에 뜨입니다. 크리스마스라 바빠서 닉의 변장이 잘 먹혔거든요. 오토 펜즐러가 대량의 추리 소설을 구입한 것과 그 탓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책갈피를 훔치게 되는 과정도 그럴듯합니다.

또 녹슨 책갈피를 거액의 수고비를 지불하면서까지 훔치게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도 인상적입니다. 사실 진상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요. 앞서 찰스의 여동생 마시의 남편이 목을 칼로 베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니까요. 그래도 '구리는 녹슬지 않는다. 이건 부식한게 아니다!'라는 닉 벨벳의 착안과 이를 통해 진상을 끌어내는 추리는 꽤 그럴듯합니다. 자수하라는 닉의 제안도 깔끔하고요.

무엇보다도 닉이 택배기사로 변장할 때, 위장을 위해 준비했던 여자친구의 추리소설들 중 한 권 - 놀랍게도 수 그래프턴의 "알리바이의 A" - 이 꽤나 값나가는 작품이었다는 결말이 아주 크리스마스답습니다. 오토 펜즐러씨가 횡재했다는 결말인데, 원고도 써 주고 덕담까지 해 준 셈이니 에드워드 D.호크는 상당한 대인배였던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오토 펜즐러의 기획 의도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작품입니다. 완성도를 떠나 이 정도로 의도를 잘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역시 대가는 대가구나 싶네요.

"모작 살인 사건"

안 팔리는 아동 추리소설가 루페 페티코드는 자신의 교육 센터 창작 수업 수강생이 검토를 요청한 원고에 홀딱 반했다. 그 원고를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넘겨 선인세로 거액을 약속받은 루페는 원작자 도라 윔블러를 어쩔 수 없이 살해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 론 굴라트의 작품. 다른 누군가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해 원작자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는 많을겁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럴듯한 동기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좋아보였던 도라 윔블러의 작품도 사실은 '도작' 이라는 진상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덕분에 기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옛 고전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이라고 칭송받지만, 사실은 고전물의 모작에 불과했던 것이죠! 정말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루페 페티코드의 나름 절박한 현실, 작가로서의 뒤틀린 긍지와 복수심이 만화적으로 과장되어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합니다. 너무 스테레오 타입의 묘사였거든요. 반전 외의 모든 전개 역시 스테레오 타입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뻔했고요. 그래도 반전만으로 모든게 용서되는 작품. 별점은 3점입니다.

"이보다 더 어두울 순 없다"

네로 울프를 추종하는 탐정 레오 헤이그의 조수이자, 그가 해결한 사건들을 소설로 발표하는 칩 해리슨은 오토 펜즐러의 요청을 받아 '미스터리 서점'을 찾았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직후, 귀중한 코넬 울리치의 육필 원고가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유명한 로렌스 블록의 단편. 매튜 스커더 시리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코믹한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화자인 칩 해리슨의 거침없는 언변이 아주 돋보여요. 온갖 고전 추리소설을 비트는 독설, 그리고 오토 펜즐러가 흠모하던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술 때문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상황을 풀어낸 전개도 유쾌하고요. 오토 펜즐러에게 장난치기 위해 쓴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문제는 로렌스 블록답지 않은 유쾌함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 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파티의 구실일 뿐 이야기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며, 추리 역시 대단할게 없거든요. 용의자들을 불러 모아 순서대로 증언을 듣는걸로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여섯명, 아니 일곱명의 용의자가 원고를 돌려보았으며, 마지막에 원고를 읽었던 연회업체 사장 진 보트레이가 오토 펜즐러의 침대 옆에 원고를 올려놓아 곧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진상은 허무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졸작으로 로렌스 블록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요정들의 선물"

보스턴에서 희귀 초판본 배달을 의뢰받고 오토 펜즐러의 '미스터리 서점'에 방문한 사설탐정 존 프랜시스 커디는 오토 펜즐러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그가 수집한 추리 소설가들의 소장품이 동일 가격의 돈이 들은 봉투와 바꿔치기 당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세 명의 추리 소설가였다. 존은 세 작가를 차례로 탐문한 뒤, 진상을 알아낸다.

진상은 림프종으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작가 모리가 꾸민 장난이었다는 소품으로 오토는 손해본게 실제로 없기 때문에 진지한 범죄가 아니라 장난이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토 펜즐러를 피해자로 삼은 생생한 추리 소설을 오토 펜즐러에게 선사한다는 건 추리 소설가가 세울법한 계획이구나 싶어 재미있었습니다. 모리의 시한부 삶이 다음 크리스마스를 맞지 못할 것 같다는게 도화선이 되었다는 설정은 필요없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이 설정 때문에 밝고 유쾌할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가 좀 묵직해졌거든요.

그래도 미스터리 서점의 주인과 그의 친구인 추리소설가들이 벌일법한 크리스마스 장난과 선물이라 단편집 주제에 꼭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엄마가 산타클로스 아저씨를 죽였어요"

어느 바쁜 크리스마스 오후,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앨런의 앞에 맥스라는 꼬마가 나타나 산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기 시작했다. 

제목이 스포일러입니다! 제목이 다 망쳤어요. 맥스가 산타클로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할 때 부터 맥스의 엄마가 산타클로스를 죽였다는건 명백해집니다. 산타클로스의 정체가 대체로 아빠라는 점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동기도 대체로 짐작이 가고요.

물론 추리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등장하는 전개는 볼만 합니다. 특히 서점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인 2급 형사 로지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경찰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 정작 경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87분서"> 시리즈로 일세를 풍미한 작가 스스로에 대한 자학개그로 느껴졌거든요. 역시 로지가 고양이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싫어한다면서 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고양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도 굉장히 와 닿았고요. "삼색털 고양이" 시리즈는 솔직히 첫 편을 제외하고는 엉망이었죠. "펠리데"는 괜찮았었지만요. 또 범죄물의 거장 에드 멕베인답게 맥스의 엄마가 서점에 나타나는 장면의 긴박감도 꽤 훌륭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제목만 조금 비틀어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에드 멕베인답지 않은 안일한 구성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동방 박사의 간계"

오토의 손님 키티는 오토에게서 한 희귀본의 완벽한 표지를 가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 오토를 위해 희귀본을 완벽하게 만들어 선물하려던 키티는 그 남자 가토의 방에 잠입하여 표지를 빼내 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물용 희귀본 "바깥 화장실 가는 길"이 도난당한걸 알게 되는데... 

오토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두 도둑이 각자 서로의 희귀본과 표지를 훔친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의좋은 형제"같은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낮습니다. 전반적으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왜 오토에게 귀중한 희귀본을 선물하려고 하는지, 키티와 가토는 직업이 도둑인지 등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거든요. 둘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려는걸 오토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고요. 또 오토가 둘이 그에게 선물하려던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흘린 정보로 둘이 각자 상대방이 가진 물건을 훔쳐내리라고 예상하는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게 둘의 인연을 이어주려는 오토의 계획이었다니! 억지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 해피엔딩 등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어울리는 소재들을 잔뜩 가져다 쓰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내 목표는 신성하니"

윌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스터리 서점을 방문한다. 삼촌에게 고가의 책을 선물하려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오토 펜즐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목적은 선물 구입이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였다...

오토 펜즐러에게 원고를 퇴짜맞은 후, 복수심에 사로잡힌 작가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서스펜스 스릴러. 그러나 아쉽게도 긴장감이 잘 살아나지 않아서 서스펜스물로는 실격입니다. 정말로 윌슨이 오토 펜즐러를 죽이려고 했는지조차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러나 마지막에 오토가 윌슨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써 내면 고료를 주겠다고 구슬리는 장면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대단한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퇴짜를 놓은 평론가가 퇴짜를 맞은 작가에게 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느껴지거든요. 작가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잖아요?

그래도 별점은 1.5점입니다. 전개가 엉망이라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고양이 요정 스피릿"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찰서장 커디 맨검은 우연히 옛 인연이 있는 뉴욕 형사 로리를 만나 함께 오토의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가했다. 그리고 유명 작가 바트 웰스의 전처 클라우디아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떠들썩한 묘사는 볼거리입니다. 화자인 커디 맨검의 과장섞인, 허풍스러운 말투가 인상적인 탓으로 오토 펜즐러가 통이 커서 캐비어와 샴페인을 "전쟁과 평화"에서 보다도 많이 내 놓았다는 류의 말이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또 오토 펜즐러의 관심사, 미스터리 서점과 그곳에서 키우는 고양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 등은 작가가 오토 펜즐러를 속속들이 알고 있구나 싶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나도 별볼일 없습니다. 장황한 파티,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후 시체가 발견되고 사건이 해결되기까지는 달랑 2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되거든요. 고양이 스피릿이 바트 웰스의 바지에서 귀걸이를 발견하는게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양이의 도움이 없었어도 범인이 드러나는건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흉기인 샴페인 병에 바트의 피가 묻어 있었고, 동기마저도 명확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주인공의 장황한 대사만 돋보일 뿐, 추리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봐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다면 추리 소설이 아니라 무슨 스탠딩 코미디와 다를 바 없지요.

"크리스마스가 남긴 교훈"

프리랜서 편집자 베로니카 크로스는 박봉 때문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며 부수입을 챙겨 왔다. 그녀는 토요일마다 서점에 나타나 싸구려 중의 싸구려 소설인 브루노 클렘의 페이퍼 백만 찾는 손님 해리에게 도대체 왜 브루노 클램 책을 읽는지를 묻는데... 

토머스 H 쿡의 단편. 심리 묘사의 대가다운 진중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 누구나 가졌을 법한 질문, 이런 싸구려 책을 뭐하러 읽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답도 인상적이고요. 베트남 전쟁에서의 무자비한 살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해리에게는 싸구려 페이퍼백, 펄프 픽션이 일종의 스카치 위스키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읽는다는게 그 진상인데, 이를 대단히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고급 문학만 읽는 베로니카 역시 이런 류의 고통 - 강한 증오심으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후려쳤던 것 - 을 잊기 위해 책으로 도피하는게 아닐까 싶은 결말도 돋보입니다. 결국, 수준을 떠나 문학은 마약이라는 결론이랄까요?

문제는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신간이 나오지 않는 브루노 클램의 책 대신, 시리즈가 많은 다른 싸구려 소설을 권해주고, 베로니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원하는건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는 교훈을 얻는다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딱히 흥겹거나 유쾌하지도 않고요. 또 미스터리라고 할 법한 내용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좋네요. 다른 졸작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회하게 될 거에요"

미스터리 서점은 끔찍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토 펜즐러의 유일한 희망은 미스터리 소설을 수집하는 백작 부인이 찾는 "데인 가의 저주"를 찾아내어 판매를 성사시키는 것 뿐. 다행히 크리스마스에 책을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백작 부인에게 건네기 전, 책을 분실해 버리고 마는데... 

오토 펜즐러의 아내라는 아동 도서 작가 리사 미쉘 앳킨슨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라는 조건은 충족시키지만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데인 가의 저주"가 사라진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급료 없이 스티븐 킹의 신간 스릴러를 원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마지막 근무와 책을 숨기기 위해 스티븐 킹의 표지를 덮었다는 묘사가 합쳐지면 그 답은 너무나 뻔하잖아요. 게다가 백작 부인이 고가의 컬렉션을 오토 펜즐러에게 남기고 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것도 순록이 끄는 썰매에 치어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도저히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긴 겨울의 한잠"

프리랜서 사진가였던 '나'는 오토 펜즐러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맞은 첫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아래층 화장실을 방문했던 산타클로스의 시체를 발견한다. 산타클로스의 정체는 서점 직원 알란이었다. 

셜록 홈즈 원고가 동기인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정통 추리 단편. 오토 펜즐러가 직접 탐정역을 수행하는게 독특했습니다. 전개, 특히 셜록 홈즈와 비슷한 추리쇼를 펼쳐가면서 범인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 등에서 고전 본격물을 잘 흉내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흉내에 그칠 뿐이라 아쉽습니다. 고전물 만큼의 정교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인 "왜 희귀본을 창고에 넣는다고 했던 알란이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채 살해되었는가?"부터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으니까요. 당연히 산타클로스가 알란을 죽이고, 옷을 갈아입힌게 뻔하잖아요? 그렇다면 산타클로스는 누구냐는 수수께끼가 남는데, 여기서 억지스럽게 이야기가 비약해 버리고 맙니다. 시체 발견이 계기가 된 튜바 연주자 더그가 범인으로, 그는 시체 근처에 떨어진 튜바의 밸브 오일을 감추기 위해 다시 현장을 방문했다는 설정인데 이건 말도 안되죠. 현장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면 다시 돌아가서 증거를 인멸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냥 도망가버리면 되지요. 현장의 튜바 밸브 오일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될 수도 없었을겁니다. 애초에 서점에 나타나지 않은걸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고전 본격물에 대한 팬심으로 조금은 후한 점수를 줍니다.

"콜드 리딩"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로저의 특기는 손님들을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책을 권해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매들린 커크라는 아가씨가 나타났다. 유명 작가였던 할머니 매들린 커크 (동명이인)의 미발표 원고를 발견하고 그 값어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로저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원고를 확인하기로 약속하는데, 원고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 그녀를 습격한다. 로저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해낸다.

서점 손님을 보고 그들이 원하는 책을 추리해낸다는 로저의 특기는 재미있습니다. "시인장의 살인"에서 학생 식당 손님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추리 배틀을 펼치는 아케치 교스케와 하무라 유즈루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저는 별로였지만 존.D.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가 중요 소재로 등장하여 관련된 정보가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등 추리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인상적이었고요.

문제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라는 일상계스러운 추리라면 모를까, 폭행 납치에 살인 미수까지 벌이는 범인을 추리하기에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범인인 맥도널드 팬을 특정하는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없지는 않고요. 그러나 단편 소설 분량에서 쉽게 풀어낼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리스천 킬러"

지능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 죽이는 일에 충실한 킬러 사케시언은 독실한 크리스천. 어느날 자신의 타깃인 스티븐의 여동생을 진짜 천사로 착각한 뒤 살인을 그만두는데...

크리스천 킬러가 천사 분장을 한 타깃의 여동생을 만난 후 살인을 그만두지만, 또 다른 킬러의 살인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봐도 "레옹"이 떠오르지요? 우직한 킬러 사케시언, 살아있는 천사같은 헤일리 캐릭터도 딱 그러하고요. 마지막에 사케시언이 죽고 마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타깃인 인간 쓰레기 스티븐이 살아남는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딱 한가지, 사케시언이 죽기 전 진짜 천사를 보았다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 뻔하지만 극적인 전개에 이 결말을 더하면 평작 수준은 되다고 보여지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오토 펜즐러의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작품이에요. 특별히 수수께끼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칠십네번째 이야기"

미스터리 서점에서 칠십 세가지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을 구입한 주인공은 책에 수록된 "어셔가의 몰락"을 읽은 후,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래층 한국인 편의점 주인을 트렁크에 넣어 땅에 파 묻는다... 

영미권 작품에 흔한, 1인칭 시점의 정신병자가 등장하는 사이코 스릴러. 하지만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이기는 한데, 지능지수가 너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질렀던, 동물들을 땅에 파묻던 행동을 범죄와 연결시키는데 발상이 지극히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동기도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점도 그러하고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루스 렌들같은 심리 묘사를 선보였다면 나름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묘사 역시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마지막 목격자로 오토 펜즐러와 서점 직원을 등장시킨 건 명백한 패착입니다.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어요. 때문에 별점은 1점입니다.

"이름이 뭐길래"

전직 공중 곡예사 렉시 스미스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할머니의 유언으로 그녀가 퇴짜맞았던 원고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내 놓은 뒤, 친구 알비라의 사인회로 향했다. 사인회가 끝난 뒤, 사인회장이었던 미스터리 서점의 오토 펜즐러와 파티를 가지게 된 렉시는, 그곳에서 할머니의 작품 중 한 편이 유명 작가의 작품과 5년 전에 바꿔치기 되었다는걸 알고 경악한다.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유명한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단편. 작은 애완동물들을 사랑하고 추리 소설가를 지망했던 할머니 캐릭터 설정이 귀여웠던 작품입니다.

문제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건 아니며, 할머니의 작품이 사실은 대단한 걸작들이었다는 결말이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점이죠. 렉시가 전직 곡예사였다는 설정도 딱히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아니고요. 분쇄될 뻔 했던 봉투를 더 극적으로 회수했었어야 했어요.

그래도 크리스마스 특별 단편이니 이 정도는 눈감아줄 만합니다. 전개도 깔끔하고 시원시원해서 읽을 만 하고요. 완성도보다는 분위기가 적당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6/09/02

메종 잇코쿠 - 다카하시 루미코 : 별점 5점

메종일각 신장판 15 - 10점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김동욱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메종일각 (메종 잇코쿠)라는 허름한 하숙집(?)을 무대로 하숙생(?)인 고다이와 관리인 오토나시 교우코의 사랑 이야기.

단순히 내용만 놓고 본다면 굉장히 뻔합니다. 별볼일 없는 주인공에게 계속 여자가 생겨서 3각, 4각관계로 까지 발전하는 전개와 캐릭터, 설정 모두요. 3류 대학 출신에 변변한 직장도 없고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은 주인공 고다이는 80 ~ 90년대를 넘어 현재진행형인 스테레오 타입 주인공의 원형에 가까우며 이 주인공이 그에게 과분한 여러 미녀들, 교우코를 비롯하여 고즈에, 야가미 등과 얽히는 과정과 전개 모두 뻔하기 그지 없거든요. 부잣집 아들이자 본인 자신마저 외모와 능력 모든 면에 있어 뛰어난 라이벌 미타카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발표 시기를 감안한다면이 작품이 이러한 뻔한 설정의 원조격 역할을 하는 부분도 있기에 이러한 비난 자체가 타당하진 않겠죠. 외려 지금 발표되는 러브 코미디물과 비교해서도 뒤떨어 지지 않는 시대를 뛰어넘는 감각 같은것이 느껴지는 것이 정말 대단합니다.

주인공 고다이가 작품 끝까지 별볼일 없다는 것. 갑자원에 진출하는 것도 아니고 농구로 전국제패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지금 보아도 무척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합니다. 거기에 등장인물들 모두 약점이 있다는 전제하에 나름 현실감 있게 내용이 진행되는 것도 굉장히 와 닿고요. 그리고 전에 쓴 적이 있던 오렌지로드의 아유카와 마도카와 대립각에 서 있는 여주인공 -그야말로 "성인"인- 오토나시 교우코가 특히 인상깊었었죠. 미망인이라는 설정이 이러한 느낌을 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현재의 귀여운 "누님" 캐릭터의 원형을 제시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오로지 만남과 대화, 혹은 편지나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서만 사랑이 진전되어 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세밀하고 루미코 여사 특유의 개그와 유머 속에서도 점차 가슴저린 느낌을 가져다 주는, 80년대 아날로그 러브 코메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카하시 루미코 여사 작품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죠. -"나보다 오래 살아요"는 정말이지 심금을 울리는 명대사. 80년대 베스트 명대사를 꼽으라면 분명 꼽힐만한.

21세기가 된 지금에야 많이 빛이 바래었을 수도 있지만 언제 어떤 편을 읽어도 저에게는 옛 추억과 더불어 항상 가슴 뭉클함을 안겨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2015/03/17

던전 밥 1- 쿠이 료코 : 별점 4점

던전밥 1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던전 심층부에서 드래곤과 승부를 벌이다가 간신히 탈출한 주인공 라이오스 일행은 곧바로 던전에 복귀했다. 그들을 구하고 드래곤에게 잡혀버린 여동생 파린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짐을 잃어버려 곤경에 처했다. 그래서 식비를 줄이기 위해 라이오스는 던전 내의 마물들을 사냥해 먹자고 제안하는데!

쿠이 료코의 만화. 일전에 "서랍 속 테라리움"을 재미있게 읽어서 바로 구입해 본 작품입니다.

전사, 드워프, 엘프, 도둑(열쇠사)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던전을 공략한다는 점과 기본 세계관은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린 전형적인 RPG 판타지의 룰과 설정을 따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마물을 사냥해 먹는 이야기를 요리 만화 스타일로 풀어낸다는 아이디어가 탁월했습니다. 재료가 되는 마물들과 요리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돋보였고요.

어떻게 보면 뻔한 판타지와 뻔한 요리 만화의 결합인데, 서로의 장점과 재미를 극대화시켰기에 단순히 구루메 만화 붐에 편승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장르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는 식재료와 요리를 정말로 있음직하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 재미있지만 그중 인상 깊었던 두 가지 에피소드를 꼽자면,

첫 번째는 만드레이크와 바실리스크의 알로 만든 오믈렛 이야기입니다. 만드레이크를 채취할 때 비명을 들으면 죽을 수도 있지만, 드워프 전사 센시는 소리를 지르기 전에 목을 베어버리는 방식으로 채취해서 멀쩡하죠. 그러나 엘프 마법사 마르실은 책에서 배운 대로 개와 연결된 밧줄로 만드레이크를 묶고 개를 달리게 해 채취하는 방법(그리고 개는 죽게 되는)을 쓰고자 합니다. 던전에는 개가 없으므로 박쥐 마물을 대신 사용해서요. 자신이 파티의 짐 같은 존재로 여겨져, 파티에 기여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탓입니다.

하지만 박쥐가 폭주하면서 되려 죽을 뻔하게 되고, 더 큰 실의에 빠지게 되는데요. 그때 드워프 전사 센시가 바실리스크의 알에 만드레이크를 섞어 만든 오믈렛을 맛보고, "비명을 지른 쪽"이 더 맛있다고 인정하면서 훈훈한 결말을 맺습니다. 센시가 마르실에게 몸에도 좋고 맛도 좋다는 만드레이크의 머리 부분을 특별히 챙겨주며 마무리되고요(이건 정말 만화를 봐야 느낄 수 있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움직이는 갑옷 에피소드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리보다는 판타지 설정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움직이는 갑옷이 실제로는 갑옷처럼 생긴 일종의 조개라는 설정은 정말 기발하더군요.

게다가 주역 캐릭터들도 전사 - 엘프 - 드워프 - 도둑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개성을 더해 각자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에피소드마다 번갈아가며 주역을 맡는 방식으로 비중 배분도 확실해서 좋았습니다. 쿠이 료코의 뛰어난 작화와 독특한 개그 센스 역시 더할 나위 없습니다.

동어 반복적인 요소가 조금 있으며,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설정(죽어도 마법으로 소생 가능하다는 설정)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이세계 구루메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신경지를 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4점. 판타지와 구루메, 요리 만화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2014/12/19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Guardians of the Galaxy (2014) - 제임스 건 : 별점 4점

1988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슬픔에 가득 차 병원에서 뛰쳐나간 피터는 우주선에 납치당했다. 그리고 26년 후, 라바저로 성장한 피터 퀼은 정체불명의 고가 오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오브를 팔기 위해 향한 잔다르에서 오브를 노리는 로난의 양딸 가모라, 피터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린 로켓과 그루트 컴비와 격투를 벌였고, 한꺼번에 체포된 그들은 우주 감옥으로 보내졌다.
감옥에서 만난 드랙스와 의기투합한 4인은 탈옥 후 오브를 고가에 팔기위해 구매자가 있는 노웨어(Knowhere)로 향했고, 콜렉터로부터 오브의 정체를 들었다. 오브는 생명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무기였다. 마침 로난이 노웨어로 쳐들어왔고, 결국 오브를 빼앗긴 일행은 라바저의 보스 욘두를 설득하여 오브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가는데...

드디어 봤습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히어로 시리즈 최신작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옛날 말로 "우주 활극"이라고 해도 어울릴 고전적이면서도 B급의 향취 가득한 작품인 덕분에 아주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우주해적 코브라"를 영화로 만들면 딱 이런 분위기일 것 같은데, 정말 저 같은 사람에게는 취향 직격하는 영화였어요.

장점이라면 우선, 2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전개가 좋습니다. "퍼스트 어벤져"처럼 "어벤져스"를 위한 떡밥으로 사용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러닝타임을 소비한 덕분입니다.

캐릭터들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캐릭터들을 매력적으로 살리고 있어요. 초인은 아니지만 몇몇 특수 장비와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스타로드 피터 퀼은 "육화의 용사"의 아들렛 등과 비슷하지만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 덕분에 차별화되며, 입이 거친 터프가이 콤플렉스 덩어리 로켓 라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최강자 그루트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최고의 캐릭터들이었습니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보아왔던 츤데레 여전사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인 가모라와, 비중만큼의 강함과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드랙스는 조금 아쉽지만 나름대로 액션과 개그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요.

이들의 활약에 더불어 감독의 재능이 엿보이는 감각적인 연출, 곳곳에 숨어있는 잔혹하지만 웃기는 장면들과 깨알같은 명대사들도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특히 잔혹해 보이는 유머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필요도 없는 의족을 탈출에 쓸 거니 가져오라고 하는 식으로요. 이런 건 오롯이 감독의 능력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다른 마블 영화와는 다르게 대놓고 "만화입니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화면 효과와 아트워크를 선보이는데, 이 역시 완전히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굉장히 과하고 쨍해서 리얼리티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외려 영화와는 분위기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가 80년대 키드이기에 "Awesome Mix"를 온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영화에서 기억에 남을 정도로 언급된 케빈 베이컨의 "Footloose"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의외이긴 합니다. 어른의 사정이 있던 걸까요?

물론 좀 막나가는 영화답게 전개에 허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콜렉터의 시녀가 자살을 시도하지만 않았어도 콜렉터가 오브를 정상적으로 소유하게 되었을 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죠. 드랙스가 로난을 불렀어도 이미 피터 일행은 떠난 뒤였을 테고, 피터 퀼 일행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 외 가모라의 급작스러운 배신이나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욘두의 행동거지 등 전개에 급작스러운 것들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 즐겁고 화끈하다는 영화 본연의 가치에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즐거운 영화로, 모든 분들께 추천하기에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한데 저는 대호(大好)!였습니다. 저와 같은 취향, B급 정서 가득하신 분들께는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로난 앞에서 스타로드가 댄스 배틀을 벌이는 장면은 "Breathless"의 마지막 장면, 리차드 기어의 노래와 춤을 그대로 사용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확인 한 번 해 보시길.

2014/02/14

BM 넥타 - 후지사와 유키 : 별점 2.5점

비엠 BM 넥타 12 - 6점
후지사와 유키 지음/삼양출판사(만화)

발표된 지 10여 년이 지난 크리쳐물이자 재난물인 만화입니다. 거의 모든 쓰레기를 섭취, 소화하며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궁극의 식량 대용 생명체 "BM (Bio Meat)"이 핵심 소재로, 당연히 사람도 먹을 뿐 아니라 그 번식 능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라 결국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총 3부 구성으로 각 부마다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초등학생, 중학생, 성인으로 구분되며, 1부는 주인공들이 사는 도시, 2부는 주인공들이 우연히 방문한 대형 주상복합 센터, 3부는 규슈를 제외하고 BM에게 점령당한 일본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BM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밖으로 나오게 되어 식인과 증식을 거듭하며 무대가 된 곳을 멸망시킨다는 뻔한 내용으로 일관하며, 주인공 파티도 행동파 리더 칸, 냉정한 두뇌파 신고, 괴력의 반바, 홍일점 카노미야 등 뻔한 스테레오 타입인데다가, 전개도 우연과 작위성이 지나치고 마지막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리한 해피엔딩은 그야말로 서둘러 끝냈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등 문제점은 많습니다. 그림도 뛰어나다 할 수 없는, 10년 전에나 먹혔을 낡은 작화고요.

그러나 이상화 선수 1,000미터 경기 시작이 늦어져 겸사겸사 보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읽고 자게 될 정도로 흡입력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아 졸려...). 이유는 바로 주 소재인 "BM"의 압도적 설득력 덕분입니다. "식인"과 "압도적인 증식력"이라는 키워드는 "좀비물"과 같지만, "좀비"와 다른 점은 BM은 '환경난과 식량난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창조한 것'이라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이유가 있거든요.

BM을 관리하는 방식의 설정도 꽤 디테일하게 잘 짜여져 있는 편이며, BM과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 일행이 BM의 약점 — "햇빛 아래에서는 움직일 수 없음", "불에 약함", "소리에 반응하여 움직임(특히 특정 소리에는 강하게 반응)" — 을 이용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꽤나 재미나게 그려지는 것도 디테일한 설정 덕분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물건이라서 한번 유출되면 해당 지역을 초토화시켜야 한다는 상부의 방침도 논리적으로 겹쳐지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사투가 더욱 인상적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BM에게서 도망쳐야 하는데, 정부가 지역을 폭탄으로 날려버릴 예정이라는 시간 제한마저 생겨버리니까요.

그 외에도 일반적 상식을 깨고 1부에서부터 초등학교를 무대로 BM의 식인 파티가 벌어지는 것을 묘사하는 식의 심리적 터부를 건드리는 잔인한 묘사, BM을 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사악한 인간 군상도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정말이지 이렇게 초등학생이 죽어나가는 만화는 처음 본 것 같네요.

결론내리자면 한번쯤 볼 만한 가치는 있달까요? 모든 분들께 추천해드릴 작품은 아니지만 "좀비물"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찾아 읽으셔도 좋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04/23

정신자살 - 도진기 : 별점 1.5점

정신자살 - 4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길영인은 아내 한다미의 가출 이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인터넷에서 '정신자살연구소'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정신을 파괴하여 자살 없는 인생을 살게 해 준다는 연구소 소장 이탁오 박사의 말에 혹한 길영인은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시술비를 지불하고 정신자살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시술 이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에 더욱 집착하며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작품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건너뛰게 되었네요. 전에 읽은 "어둠의 변호사"가 요코미조 세이시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먼저 좋았던 부분부터 이야기해보죠.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둠의 변호사"와 비교할 때 소설적인 완성도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편인 덕분이겠죠? 문체나 전개가 모두 세련되어졌습니다. 길영인이 "정신자살"이라는 독특한 말에 이끌려 이탁오 박사의 연구소에 찾아가는 과정과 정신자살 시술 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를 파헤치며 진상을 더듬어 가는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전작과 달리 고진과 이유현 형사 콤비의 캐릭터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진의 가벼운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채로웠고요.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인 트릭도(중반까지는) 괜찮은 편입니다. 4년 전 이탁오 박사가 저지른 첫 사건인 박재성 - 우호선 사건에서의 트릭은 장편에서 캐릭터 소개에 사용되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후 신재인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트릭도 복선이 잘 설계되어 있으며, 신재인 집에서의 소실 트릭도 괜찮았어요.

또 전작에서의 아쉬웠던 점 - 판사가 쓴 작품이지만 실제 법률을 이용한 부분이 별로 없다 - 를 초반 염상우의 친족상도례 작전에서 잘 써먹습니다. 때문에 여기까지는 별점 3점, 아니 4점 가까이 줄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나... 마지막 진상과 반전이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일단 다중인격이라는 길영인 사건의 진상은 현실적이지 않고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요. 1인칭 시점에서의 수기와 전개를 통해 서술 트릭 같은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한데, 뜬금없이 밝혀지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나마 두 가지 - 1년 전 프리버드의 전화와 펜션 사건에서의 길영인 전화 - 단서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리 띄엄띄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한초록이 끝까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뭐 다중인격 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다음, 펜션에서의 살인 사건에서의 과일을 이용한 트릭은 어떨까요? 그림 몇 장 본다고 과일을 가지고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럴 능력이 있다면 수박을 깎아서 사람 모양을 만들거나, 아니면 화장실 휴지를 적셔서 종이찰흙을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인간거미 합체 장면은 정말이지 나오지 않는 것만 못했습니다. 작품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설픈 에도가와 란포 흉내 내기에 불과했으니까요. 게다가 그 이유가 체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극치. 다시 병원으로 보내 둘을 나눠 놓으면 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탁오 박사도 불법 시술로 구속되었을 테고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덧붙이자면, 이탁오 박사 캐릭터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작품에 현실감을 심는 데는 오히려 장애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초, 중반부의 전개는 좋았고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도 있으며, 세 번째 장편다운 완성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특히 마지막 장면 두 페이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추리소설의 현재이자 미래를 나타내는 작품이고 시리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일본 추리소설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해 보이네요.

2008/04/06

네 탓이야 - 와카타케 나나미 / 권영주 : 별점 3점

 

네 탓이야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캬캬. 결혼하고 간만에 몇만원 이상되는 추리소설을 질렀습니다. 첫번째로 읽은 것은 바로 이 책 "네 탓이야" 입니다. 이전에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을 재미있게 읽었었고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이기도 하니 안 살 이유가 없었죠. 책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읽어 보았습니다.

일상계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작풍과는 다르게 정통 추리 단편의 모양새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탐정역으로 두명의 인물, 프리터인 하무라 아키라와 시경 형사과 경위인 고바야시 순타로 2명이 번갈아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독특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하무라 편은 하무라 1인칭으로 사건 발생 후 단서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정통 트릭물, 고바야시 경위 편은 범인 1인칭으로 도서 추리물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또 작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인칭과 시점, 시공간의 변경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도 특징입니다. 물론 너무 남용되는 느낌이 있기에 좀 거슬리는 부분도 있고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에서도 어느정도 써먹은 것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물론 정통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들이 좀 약하긴 했습니다. 전개도 무척 쉬운 편이고요. 읽어나가면서 "범인이 누굴까" 라는 고민을 별로 하지 않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일상물과 정통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조금은 섬뜩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추리물로의 완성도는 약합니다. 
신경날카로운 노처녀와 약간 독특하고 순박해 보이는 형사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라서 징글징글한 묘사 외에 신선한 맛은 부족했고요.

그래도 대부분의 작품이 의표를 찌르는 맛과 약간의 섬뜩한 느낌, 그리고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작품마다 편차가 제법 있고 추리물로 보기에는 완전히 에러인 작품도 있기에 정통 추리 팬이라면 약간 애매한 작품이긴 할 것 같네요. 뭐 시대가 변한만큼 추리 단편의 속성도 변한 것이겠죠. 빠른 전개와 흡입력 있는 묘사는 추리팬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꽤 먹힐거 같기도 하고요. 단, 일반 독자에게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을 더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정통 추리적인 요소를 따진다면 "바다 속"과 "살인공작", 작가 특유의 시점과 공간의 변경을 느낄 수 있는 이색작으로는 "재생"을 추천합니다.

첫번째 이야기 "바다 속"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바다가 내다보이는 고급 호텔로 하무라 아키라는 대학 선배 엔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다. 불려간 이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인 작가 아카쓰키 부이치의 실종과 관련된 핏자국을 지우는 일. 다양한 프리타 생활로 청소쪽도 능통한 하무라는 불만을 가지면서도 핏자국을 지운 뒤,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작품집의 시작과 캐릭터의 소개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작품으로 무대공간의 독특함, 그리고 시작과 끝이 인상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안에 있다는, 어떻게 보면 좀 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설정과 설득력있는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가 충분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겨울 이야기"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나는 소꼽친구이지만 나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긴 요시모토를 살해하고 시체를 은닉한다. 며칠 뒤, 시경 형사과의 고바야시 경위가 찾아오는데...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로 겨울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입니다. 범인 시점의 전개와 디테일한 완전 범죄 시나리오의 구성은 미국 미스테리 단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전해 주더군요. 이 작품도 "소금"이라는 단서를 통한 결말부는 사실 예상 범위 안에 있긴 한데 고바야시 경위와 범인과의 문답을 통한 반전이 효과적이라 그러한 단점이 묻히면서 재미를 극대화 시켜 주는 점이 참 탁월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 "당나귀 구덩이"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화 고민 상담소에서 일을 시작한 하무라.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상담원 중 한명이 자살하고, 최근 그 회사 직원 중 여러명이 자살한 사건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이 작품은 "일상계"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작품입니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범행이 아닌 정신적 공격을 통한 범행이라는 것이 그러한데요.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전화라는게 어떤 것인지 영 감이 안와서 설득력이 좀 떨어지긴 했고 결말이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걍 그냥저냥한 수준이랄까요.

네번째 이야기 "살인공작"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하루미의 사체를 은인 가타쿠라 조교수의 사체와 같이 놓아 두어 동반 자살로 위장한다...
세번째 이야기와 같이 이 작품도 직접적 살인을 담고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일종의 누명 공작 이야기인데 작품 전체에서 보이는 공작이 너무 허술하고 단서가 굉장히 쉽게쉽게 드러나는 등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더군요. 약간의 반전이 있긴 하지만 작품 자체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이야기 "네 탓이야"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하무라는 대학 동창이긴 하지만 과거의 악연으로 얽힌 가요코의 일방적 약속 통보를 받은 뒤 약속을 어기고 술을 먹으러 나가지만 그 뒤 해당 시간에 있었던 가요코의 연적 피살 사건에 연루된다. 결국 가요코에게서 탐정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인연으로 사건을 반 강제로 의뢰받게 되는데...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단편으로 작품 자체의 완성도 보다는 사건이 일어나는 전반적인 동기, 즉 "네 탓이야" 마인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어떤 일도 자기 때문이 아닌 남 탓으로 여기는 이 마인드에서 벌어지는 범행이라는 것이 무척 독특했거든요. 추리적으로는 단 한번의 돌발 사건에 의해 범인이 밝혀지기에 썩 완성도 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동기와 심리묘사가 좋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섯번째 이야기 "프레젠트"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사에키 리리의 피살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날, 피살 사건 당일 그녀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었던 지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한 진실게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 중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전개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솔직히 증언들의 배후에 감추어진 진상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증언 자체들도 별로 꼬이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어서 추리적으로는 낙제점에 가깝더군요. 범인이 내뱉는 말들이 정말 뜬금없이 등장하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땅짚고 헤엄치기였으니까요. 이런류의 작품은 정교한 플롯이 제일 중요할텐데 시작부터 설득력이 없어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표제작이라 의외였습니다. 작품의 수준도 별로고 1인칭 주인공 하무라가 아닌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가 표제작이라니 좀 난데없었거든요. 저와는 달리 작가는 의외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군요.

일곱번째 이야기 "재생"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하무라가 일하는 탐정 사무소에 사무소장의 친구인 작가가 찾아와 사건을 의뢰한다. 사건은 자신이 작품때문에 방에 갖혀 있던 어느날, 알리바이를 위해 몰래 비디오 카메라를 셋팅하고 잠깐 방을 비운 뒤 카메라에 찍힌 영상 때문. 그날 벌어진 살인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증거인데...
첫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하무라의 선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인칭의 혼용을 통해 소설적 트릭을 구사하는 작품입니다. 단서가 명확하게 마지막에 등장하기에 그다지 놀라운 반전은 없지만 발상 하나만큼은 기발하네요. 추리적 요소보다는 심리묘사와 아이디어가 돋보인 작품이었습니다. 단, 이 작품처럼 두명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트릭을 동일한 장치로 구현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지는 의문입니다만....

여덟번째 이야기 "트러블메이커"
하무라 아키라와 고바야시 경위 만나다. 빈사상태의 여성이 발견되고 그 여성의 소지품을 통해 여성의 신원을 하무라 아키라로 파악한 고바야시 경위는 사건 조사를 위해 도쿄로 향한다.
이 단편집의 마무리 작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점에서 전개되는 사건과 고바야시 경위가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뒤쫓는 사건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특기이기도 한 시점과 시공간의 변경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단서가 애매하고 범인들의 조작이 좀 치졸해 보인다는 약점도 있지만 마지막 부분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도록 잘 짜여진 작품이었습니다. 한국 판형에서만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섬뜩한 마지막 대사 한줄이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있는 책의 구성도 인상적입니다.

2024/11/29

십계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십계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대 입시생 리에와 그녀의 아버지 오무로는 오랫만에 큰아버지 슈조의 소유였던 에다우치지마섬을 찾았다. 슈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리조트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개발회사, 부동산 업자, 건축가 등을 포함해 모두 9명이었다.
그런데 섬에서 대량의 폭탄 재료들이 발견되었고, 그날 밤 부동산 업자 오사나이가 살해당했다. 범인은 열가지 규칙('십계')를 남긴 뒤, 앞으로 사흘 동안 생존자들에게 섬을 떠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행은 십계를 지키며 사흘을 버티려고 했지만, 슈조의 친구였던 야노구치, 부동산 업자 후지와라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유키 하루오의 장편 소설 "십계"는 그의 전작 "방주"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물로, 특유의 반전 매력을 내세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는 짧은 분량입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길이로, 빠르게 읽고 즐기기 좋은 점이 매력적입니다. 또한, 전작 "방주"보다는 설득력 있는 무대 설정이 돋보입니다. 부유한 개인의 취미 생활이었던 무인도라는 설정은 현실성은 물론이고,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충실히 전해줍니다.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단서가(그런대로)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범인은 왜 자신의 발자국이 아니라 야노구치의 발자국만 지웠을까?'라는 핵심 단서를 통해 결말로 이어지는 추리가 좋았습니다. 야노구치가 범인의 신발을 착각해서 신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착각할만한 신발은 후지와라의 신발밖에 없어서 범인은 후지와라이다!라는 건데, 아주 합리적이었어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방주"와 달리 사건의 템포가 느리며,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방주"에서는 제한 시간 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반면, "십계"는 제한 시간 내에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 조건만 지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범인이 약속을 어기고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는 하는데, 이는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작가가 애써 제시한 '십계'라는 공정한 룰이 깨지면, 본격물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해칠테니까요.

또 아야카와가 진범임을 반전처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추리물로서는 불공정합니다. 애초에 아야카와는 리에와 오사나이가 살해당한 밤에 같은 방을 썼기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었고, 심지어 리에는 주요 화자로 등장하여 아야카와의 알리바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리에도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하는건 반칙입니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고 했더라면 모를까요. 아울러 리에가 아야카와의 범행을 숨긴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점도 독자에게 혼란을 줍니다. 최소한 아야카와가 범행 이유- 폭탄을 만든 일당이 그들을 죽이려 해서 먼저 죽였다! -를 설명하고 같은 편이 되기를 설득했다는 설정은 필요했습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눈에 띕니다. 오사나이의 살해 이후 야노구치와 후지와라가 차례로 아야카와의 꾀임에 빠져 홀로 행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본인이 유력한 다음 희생자라는 점이 명확한 상황에서,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야카와를 쉽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섬에 폭탄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역시 작 중에서는 실수로 설명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전작보다는 낫다고 해도 비현실적인 요소 역시 여전합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엄청난 양의 폭탄이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왜 폭탄을 만들었는지 설명도 없고요. 중요한 연결고리가 끊겨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캐릭터 역시 평면적으로,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른 작품에서 자주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매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탐정이자 천재 범죄자인 아야카와는 흥미롭기보다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결말에서 리에에게 반 협박식으로 건네는 마지막 인사도 영 별로였고요. 다른 인물들도 건축사 노무라 씨 정도를 제외하면 특별한 묘사가 없어서 그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이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만큼의 화제를 불러오지 못했는데,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전작을 정 반대로 비틀기는 했는데, 단점은 거의 그대로이고 좋았던 장점마저 희석되고 말았네요.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09/11/06

블랙아웃 (Black Out) - 이세형 그림 / 하오 글... 쓴소리 리뷰 : 별점 2점

블랙아웃 - 4점
이세형 그림, 하오 글/중앙books(중앙북스)

20대 여대생이 엽기적으로 살해되고, 현장으로 출동한 과학수사팀은 발견된 몇 안되는 단서를 토대로 용의자를 좁히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용의자들의 알리바이가 증명되거나 결정적 단서가 없어 수사는 난항에 빠지게 되는데...

"누가 울새를 죽였나" 이후 오랫만에 읽어본 국산 추리만화입니다. 대산초어님 리뷰에서 저를 언급하시기도 해서 서둘러 읽어 보았습니다.^^ 추리만화는 왠만하면 빼놓지 않으려 하는데 이 만화는 정보가 거의 없었기에 대산초어님 아니었으면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를 뻔 했으니 먼저 감사드려야겠네요.

일단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상당히 공들여 자료조사를 한 티가 많이 나는 수사과정의 묘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을 정도로 디테일해서 작가 스스로 후기에서 지적한 일부 만화적 과장 및 의도적인 수정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그러나... 이러한 자료조사에 기반한 디테일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좋은 점을 찾기는 좀 어렵더군요.

문제점으로 제일 먼저 들고싶은 것은 캐릭터들입니다. 과거 천재 연쇄살인범과의 모종의 인연으로 이상한 환영을 보는 주인공 오진우 형사가 대표적인데, 왜 이러한 배경 설정이 필요한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냥 평범한 과학수사팀 형사로 표현하면 어땠을까 싶은데 작품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불필요한 설정 때문에 이야기만 괜히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속편이나 외전을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설정이 계속 이어질정도로 매력적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외의 캐릭터들은 너무나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라 별로 언급할 필요도 없고요.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말이지 너무 뻔했어요...)

두번째 문제점은 과도한 화면 효과입니다. 원래 웹툰이라고 하는데 웹툰의 특징 중 하나인 올컬러를 잘 살려 인쇄한 책 자체는 좋지만 지나칠정도로 포토샵 효과 등이 난무해서 제대로 이어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중요한 장면에서만 컬러나 효과가 강조되었어야 할텐데 이렇게나 대중없이 쓰이니 작품은 일관되게 강약중간약 없이 강강강...으로 전개됩니다. 나중에는 눈이 아플 정도였어요.

마지막 문제점으로는 기대와는 다르게 추리적인 부분에서 실망감이 컸다는 것을 들고 싶네요. 최초의 엽기적인 여대생 살인사건 자체는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이후의 전개가 너무나 기대와는 다르거든요. 별다른 두뇌게임이나 추리는 존재하지도 않고 애초의 범행 동기도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해당 당사자들 대부분이 죽어버린다는 결말은 첫 범행의 당위성마저 희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럴거면 아예 처음에 년놈을 다 죽이고 자살하지 왜 이리저리 빙빙 돌렸는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거든요. 이러한 불친절한 전개속에 주인공이라는 녀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컷만 낭비하고 있으니 재미가 있을리도 없겠죠. 이러한 막장 전개에 비하면 범인의 정체가 역시나 식상한 설정속에 초중반에 예상가능하다는 것은 추리만화로서는 치명적이지만 이 작품에 한해서는 별 문제도 아닌것 같기까지 합니다...

아울러 과학수사 스릴러라는 모토와는 어울리지 않게 과학수사적인 요소는 초반의 검시와 프로파일링같은 현학적인 잔재미를 주는 것 이외에는 사건해결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다른 추리만화에서도 쉽게 보여짐직한 "혈흔"과 실제 용의자를 만나서 증언의 모순점을 찾아내는 단순 탐문 수사가 사건해결의 주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두가지 단서는 적절하게 잘 쓰이고 추리만화로서 어느정도 가치를 빛내주기는 하지만 기대와는 많이 달랐으니까요.

물론 척박한 국내 추리 환경에서 이정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점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일개 추리 애호가로서 힘을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단순히 문제점만 지적하기는 미안한 상황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캐릭터와 그림은 그렇다치더라도 추리적인 부분에서의 문제점은 너무나 확실하기에 차기작에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쓴소리 가득한 리뷰를 마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2/01/09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9)

지구 멸망 일주일 전, 뭐 먹을까? - 4점 신서경 지음, 송비 그림/푸른숲

한국 작가 컴비의 먹방 만화. 지구 멸망을 1주일 앞 둔 상황에서, 먹방 BJ 봉구가 최후의 그 순간까지 먹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내용입니다.

설정은 독특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등장하는 요리들은 나쁘지 않았고, 밥솥으로 시루떡 만들기같은 한국적인 소재가 등장하는 것도 좋고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지극히 뻔하고 평범했어요. 설정 상 음식을 구하기 힘들거나 조리가 어려운 상황이었을텐데 그에 걸맞는 요리라고 보기 힘든 것도 문제고요.

캐릭터도 뻔하고 평범합니다. 소심남 BJ 봉구 캐릭터는 우리나라 만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아싸 오덕 캐릭터의 전형에 불과했고, 다른 캐릭터들도 과장된 설정의 스테레오 타입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봉구가 이웃집 아저씨, 보험왕 아줌마, 썸을 타던 동창생, 그리고 악플러와 함께 유사 가족을 이루는 마지막 이야기는 사뭇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에 다 같이 모여 설겆이를 하는 장면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BJ라는 직업에 걸맞게 현피를 뜨려는 악플러가 등장하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은 있지만, 이야기에 잘 녹아났다고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전기 공급을 재개시키려는 노력이 단지 애니팡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불필요한 디테일이었어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려서 서바이벌과 긴장감을 살리는 전개로 갔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술 한잔 인생 한입 47 - 6점 라즈웰 호소키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전통의 시리즈도 47권째네요. 소소한 술자리에서의 가벼운 일상 에피소드들은 여전한 재미를 안겨 줍니다. 에비사와와 스와 부부가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는 오랜 팬으로 기뻤고, 우리나라에서 먹는 안주는 아니지만, 마즙으로 만드는 '아마가케' 먹는 법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이 시리즈만의 매력을 다시금 알려줍니다. 

그런데 분명 이전 권에서 절친인 타케노마타가 결혼했고, 이와마도 그 탓에 결혼에 대해 동경을 품으며 카스미, 마츠시마라는 두 여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번 권에서는 전부 리셋된 느낌을 주는건 좀 이상했습니다. 다케노마타는 여전히 이와마, 사이토와 술자리에서 어울리면서 결혼한 티를 내지 전혀 내지 않더라고요. 이와마가 마츠시마와 우연히 함께 술자리를 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에피소드가 있기는 한데, 다음 단계의 진도는 전혀 나가지 못하고요. 오히려 언제나처럼 카스미와 함께 술자리를 갖는 에피소드들이 뒤에 이어질 뿐입니다. 한참 진도를 빼다가 갑자기 쉬어가는 느낌인데 이유가 궁금해지네요. 

이전 권보다 줄기는 했지만, 일본에 살아야만 의미있는 아사쿠사, 도쿄역, 이케부쿠로 술집 탐방같은 에피소드는 한국 독자로서는 그닥 반길만한 에피소드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여전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8)

2006/05/20

황금의 랑데뷰 - 알리스테어 맥클린 / 이재중 : 별점 4점

미국 정부의 무기 개발 연구소에서 국지전용 핵폭탄 "트위스터"가 개발자인 캐롤라인 박사와 함께 사라지고 당시 출항했던 호화 여객선 캄파리호가 의심을 받아 수색을 당하게 된다. 캄파리 호의 불렌 선장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카리브해의 기항지 카라시오에서 무사히 마지막 승객과 화물을 싣고 출항한 캄파리 호. 그러나 1등 항해사 카터의 앞에서 급사장의 실종과 무선실장의 피살 등 연이은 괴사건이 벌어지고 카터의 추리와 활약으로 범인의 꼬리를 잡는데에는 성공하지만....

"여왕폐하 율리시즈 호"의 작가 알리스테어 맥클린의 모험 활극입니다. 맥클린의 장기로 알고 있었던 밀리터리 계열이 아니라 신선했습니다. 거기에 "민간인" 이 주인공인 설정 또한 맥클린 답지 않은 새로운 모습이었고요. 그러나 전공이 아니라서 작품의 수준이 낮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캄파리 호라는 호화 유람선과 수송선을 겸한 배라는 한정된 공간이 무대라서 긴장감이 배가됩니다. 손에 땀을 쥐게하는 사건과 모험도 연이어 펼쳐지고요. 한마디로 모험 활극의 기본이 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걸작입니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설정과 시간 제한이 있는 승부, 거기에 거의 맨몸으로 수십명의 악당과 맞서는 카터의 활약은 흡사 영화 "다이하드" 1편을 연상시집니다. 그 정도로 흥미롭고, 이를 박진감있는 전개와 묘사로 뒷받침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주인공이 몸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단순한 모험 활극도 아닙니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국지전용 핵폭탄 "트위스터"라는 아이템이 극중에서 아주 적절하게, 합리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러한 무기가 등장하는 소설은 테러리스트의 테러 기도에 쓰이는 이야기 전개가 많은데, 평범한 발상에서 벗어난 독특한 사용성(?)도 돋보였어요.
주인공 카터의 기민한 추리를 바탕으로 한, 앞뒤가 꼭 들어맞는 이야기 전개도 일품입니다. 카터의 추리대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마다 일종의 반전같은 놀라움을 주는 요소가 효과적으로 삽입, 묘사되고 있는 점도 좋아요.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거든요. 이러한 특징들은 이 작품을 단순한 모험 활극을 넘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맨 마지막 장면인 카터의 재치에 의한 반전은 정말 놀라왔어요.

제한된 공간탓에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많지 않아 캐릭터 성이 조금 약하고, 그나마 등장하는 인물들도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라는건 조금 쉽게 간 느낌을 전해주지만(특히 여주인공격인 수잔 베레스포드라는 캐릭터가 너무 뻔합니다), 작품 자체가 워낙 재미있을 뿐더러 주인공 카터가 특출난 탓에 문제될 여지는 없습니악.
"여왕폐하 율리시즈 호"와 "하얀장미"는 솔직히 말해 작가나 작품의 명성에 비한다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보니 그간의 편견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네요. 진작에 읽은 작품이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한 흥분을 가져다 주는 1급 모험소설로 별점은 4점입니다. 번역이 약간 매끄럽지 못해 감점합니다.

2006/02/08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 - 데니스 루헤인 / 김승욱 : 별점 4점

살인자들의 섬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황금가지

화려한 군 경력을 지닌 역전의 용사지만 아내가 방화에 의해 죽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던 연방보안관 테디(에드워드)는 파트너 처키와 함께 비밀임무를 띄고 수수께끼의 정신병원이 있는 외딴섬으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병동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레이첼 솔란도라는 여성 환자의 수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헐리 상원의원의 특명으로 정신병원 내부에 만연하는 불법 시술을 밝히는 임무와 함께 아내를 죽게 만든 방화범 레이디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품고 수사에 임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불어닥친 허리케인으로 고립된 테디와 처키는 레이첼 솔란도가 남긴 암호를 해독하며 진상에 접근해 갔고, 허리케인으로 병원 내부의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직접 행동에 나서는데.... 

"미스틱 리버"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사실 스릴러물이라 불리우는 이런 쟝르도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그동안 읽어 보았던 현대 미국 작가의 책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뻔한 내용이 많아서 최근에는 별로 읽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리네요. 한마디로 물건입니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전개와 묘사의 탁월성도 놀랍지만 독자를 빨아들이는 재미와 몰입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정도의 대단한 흡입력, 그리고. 서두와 결말,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한치의 오차 없는 치밀한 구성과 함께 중간중간의 디테일한 묘사까지도 책의 내용과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것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내공과 역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스릴러물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나름의 "암호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추리 매니아로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어요. 정통파 추리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지만 내용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의 재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잘 해 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딱 한가지, 반전 이후에 나오는 에필로그와 같은 마지막 날 오전의 풍경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잡역부 중 한사람이 나르던 물건은 과연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요. 또 주인공 테디의 캐릭터는 작품 설정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이런 류의 작품에 항상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 (터프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지닌 트라우마로 괴로워 하며 자살 충동마저 느낀다는) 이라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그간 읽은 미국식 스릴러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질렸던 참인데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던 것 같네요. 미스틱 리버도 읽어봐야겠다는 것과 앞으로 현대 미국 작가 책도 눈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영화화 이야기도 있는데 책의 내용만 잘 살린다면 "야곱의 사다리" 못지않은 이바닥의 수작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물론 잘 살린다는 것이 어려운 이야기겠지만요....

2023/08/27

마당이 있는 집 - 김진영 : 별점 1.5점

마당이 있는 집 - 4점
김진영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약 회사 영업 사원이던 김윤범이 저수지 속 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윤범은 아내 상은 몰래 회사를 그만둔 뒤 거래하던 의사들을 협박하다가 모르는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했었다. 상은이 발견한, 윤범이 죽기 전 숨겼던 휴대폰에는 수민이라는 아이가 성매매했다는 증거가 저장되어 있었다. 상은은 수민에 대한 정보로 윤범이 의사 박재호를 협박했다고 생각했다.
박재호의 아내 김주란은 판교의 개인 주택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은 뒤, 정원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박재호는 이를 모두 주란의 망상이라 치부했다. 주란의 증상은 그녀가 상은과 만난 뒤, 남편의 범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가는데....


김태희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던 한국의 여성향 서스펜스 스릴러. 이용하는 구독형 이북 서비스인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길래 읽어보게 되었네요.

주인공 두 명 - 김주란, 이상은 -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는게 특징입니다. 이상은은 잔혹한 살인범이자 협박범, 김주란은 일방적인 피해자 포지션에 가까운데, 나중에 둘이 일종의 파트너 (?) 관계로 한 팀을 이루게 되는 결말로 향하는 전개가 재미있었어요. 이상은이 임산부라는 설정도 독특했고요. 임산부라서 사람들이 경계심을 잘 푼다는 상황을 잘 써먹은 장면이 두어장면 있기도 합니다.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괜찮은 트릭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수면제를 먹여 재운 윤범을 운전석에 앉힌 뒤, 상은이 운전석 의자를 뒤로 바싹 밀고 그 위에 앉아 운전했다는 트릭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윤범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내려집니다. 작고 연약한 임산부인 상은이 거구의 윤범을 조수석에서 다시 운전석으로 옮기는건 불가능하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수민이를 죽인건 박재호가 아니라 아들 승재였다는 반전도 신선했습니다. 이를 수민이 찍었던 휴대폰 속 사진으로 드러내는 묘사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지루했습니다. 이상은과 김주란 모두 심리 묘사 중심의 여성향 스릴러에서 흔히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이라서 식상했던 탓이 가장 큽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냉소, 혐오와 일종의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여성으로 묘사되거든요. 그동안 제가 읽어왔었던 <<우먼 인 윈도>>, <<걸 온 더 트레인>>,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등의 여성향 스릴러와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게다가 묘사만 보면 김주란은 정신병자에 불과합니다. 작품 속에서 보이는 행동에는 설득력을 느낄 수 없으며, 그동안 자신의 망상으로 많은 사고를 쳐 온걸로 - 강남 아파트에 살 때 윗 층 부부를 살인범으로 오해했던 등 -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전업주부이면서 아들이 방에 여자아이를 숨겨놓았다는걸 며칠동안 눈치채지도 못했다는건 변명의 여지도 없고요. 이웃과 상은, 기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일방적이고 편견 및 망상으로 가득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광적인 심리 묘사와 행적이 이어지니 남편의 표정, 낚시 가방을 빨아 말렸다는 정도로 남편과 시부모님을 살인범 일당으로 모는 과정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주장이 모두 거짓말이라는게 밝혀져서 남편에게 이혼당하는 결말을 기대하게 만들더군요.
물론 주란의 남편 박재호가 수민의 시체를 정원에 몰래 묻었고, 시체를 처리하러 간 날 집을 비웠던걸 숨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작 중 묘사와 행적을 보면, 박재호가 이를 숨긴건 살인을 저지른 아들과 망상증에 걸린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상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오히려 주란이 재호를 죽인다는 결말은 황당했어요. 주란이 왜 급발진해서 남편을 죽였을까요?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수십년전부터 차고 넘치던 설정을 가져오려면 남편은 모두 사악하다는 작품 저변에 깔려있는 일방적인 이분법적인 논리 말고 더 그럴듯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비하인드 도어>>처럼 못 봐줄 수준이라도 말이죠.
이런 이분법적 논리로 상은의 살인을 정당화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상은의 범행에는 남편의 폭력 - 심지어 임신도 남편의 성폭행 탓 - 때문이라는 동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상은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는건 차원이 다른 중범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다른 유사한 여성향 스릴러와 차별화되기는 커녕, 더 나은 점도 찾기 힘든 억지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리뷰를 남기는게 힘들 정도였어요. 이런 류의 소설은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08/04/28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 - P.D 제임스 / 이옥진 : 별점 3점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 - 6점
P.D. 제임스 지음, 이옥진 옮김/황금가지

코델리아 그레이는 신참 사립탐정으로 파트너 버니의 자살로 인해 독립하게 된 첫 날, 로널드 칼렌더경의 의뢰로 경의 아들 마크의 자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의뢰받는다. 코델리아는 마크가 학창시절을 보낸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그의 과거사를 뒤쫓으면서, 서서히 자신에게 위협이 닥치는 것을 깨닫고 최후의 순간에 의외의 진상을 밝혀내게 된다...


제가 그동안 너무나 읽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인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의 재 출간본입니다. 번역도 전부 새로 다시 하였으니 복간이라기 보다는 아예 새롭게 책을 낸 것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겠죠. 이로써 P.D 제임스 여사의 모든 국내 출판 도서들의 독서를 완료했기에 굉장히 후련합니다.
이 작품은 코델리아 그레이의 데뷰작이기도 하고, P.D 제임스 하면 떠오르는 명탐정 달그리쉬 총경이 주인공이 아닌 점 등 여러가지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미녀 코델리아가 주인공인 탓인지 젊은이들이 많이 등장하여 작품이 좀 시끌벅쩍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역시 다른 작품과는 달라 보이고요. 철학적이고 사려깊은 달그리쉬 총경보다는 아무래도 가벼운 느낌을 많이 전해 주더군요. 뭐 저야 좀 생각좀 할라치면 철학적 문체와 사고가 난무하는 달그리쉬 시리즈보다야 이 작품 분위기가 더 읽기는 즐겁고 편했습니다. 참고로 코델리아 그레이는 명탐정 코난의 "하이바라 아이" 이름의 유래가 된 명탐정이기도 하죠.

그런데 솔직히 읽으면서 느낀 점은 왜 그렇게 이 작품이 유명했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단지 절판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나?
일단 사건부터 이야기하자면 자살 사건의 진상 조사라는 의뢰야 이 바닥에서는 뻔한 결과를 항상 낳습니다. 바로 자살로 위장한 살인이라는 결과인데, 이 작품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있는 진실 역시 대체로 출생의 비밀이나 유산 관련 이야기인데 이 역시 뻔했고요.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하면 흥미진진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가 작품의 키 포인트나 다름 없는데 이 작품에서는 코델리아의 조사가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가서 설득력은 있지만 의외성이나 호기심 유발 부분에서는 뒤떨어집니다. 사립탐정이 하는 조사가 별게 없는 만큼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대보다 더 추리적 요소가 많이 부족했어요.
게다가 마지막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종의 깜짝쇼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들 역시 당혹스러웠습니다. 등장인물들의 극심한 심리변화는 물론이고 사고가 연달아 벌어지는 개연성이 뚜렷하지 않거든요. 너무 급하게 마무리 지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급작스럽게 끝나는 결말은 왠지 개운치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달그리쉬 총경이 등장해서 전체적인 헛점을 마무리 해 주는 부분은 팬으로써 반갑기는 했지만 반칙 같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과거가 좀 복잡하고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하야테 수준의 복잡한 어린시절 정도랄까...) 생각많은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는 좋았지만, 딱히 개성은 없습니다. 스테레오 타입의 미녀 탐정 캐릭터일 뿐이니까요. 코델리아의 복잡한 과거에 얽힌 기억이 수사 도중 도중마다 튀어나오는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색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솔직히 불필요한 이야기였어요. 코델리아보다는 "원 포 더 머니"의 스테파니 플럼이 개성, 현대적인 측면에서는 더 나은 캐릭터라 생각되네요.
심리묘사도 여성 작가 들이 흔히 쓰는 여성의 심리묘사라는 특징이 너무 뚜렷이 드러나 보여서 좀 지루했습니다. 흡사 알렉산드라 마리리나의 작품같았달까요. 여성 작가들이 여성 주인공을 등장시키면 정말이지 이젠 작품들이 너무 비슷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 (죽은 인물인 버니와 마크를 제외한) 이 사악하고 뭔가 음모를 지니고 있는 듯이 묘사된 페미니즘 적 묘사도 약간 거슬렸는데. 차라리 미네트 월터스의 작품들이나 델마와 루이스 마냥 그냥 달려주는 것도 아니라서 뭔가 약간 애매하고 가다 만 듯한 인상만 전해 줍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P.D 제임스 여사의 작품 완독의 의미가 더 컸던 독서였습니다. 단점만 너무 절절이 늘어놓긴 했는데 분명 재미는 있었고 달그리쉬 총경이 깜짝 등장해서 명추리를 펼쳐 주는 것 같이 시리즈 독자로서는 반가운 부분도 많았지만 확실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고 명성에도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원래 알려진 제목과 다른 번역판 제목도 용서가 안되고요.
그래도 여사의 다른 장편들("어떤 살의", "검은 탑", "나이팅게일의 죽음") 중에서는 중간 정도는 되는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번역도 문제겠지만 많이 지루한 편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3점. 전 관대합니다.

2021/12/31

2021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열 여덟번째 블로그 리뷰 총 결산입니다. 블로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라니 감개무량합니다. 다 컸으니 이제 돈을 좀 벌어 와야 할 텐데 말이지요.

하여튼,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사태 장기화 탓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작년보다는 줄었어요. 작년에는 133권을 읽었는데, 올해는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7 (77)권, 기타 장르문학 3 (4)권, 역사서 17 (9)권, 디자인 or 스터디 1 (4),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5 (25)권, 기타 도서 24 (14)권으로 다 합쳐서 117권을 읽었으니까요. 이유는 백신 접종과 위드코로나 정책 덕분에 다른 활동으로 보낸 여가 시간이 늘었던 탓입니다. 올림픽도 열심히 관전했고요. 거기에 더해 작년에는 '추리 소설 1,000권 읽기'라는 개인적인 큰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열심히 달리기도 했었지요. 여러모로 작년이 역대급이었던 셈으로, 당분간은 작년처럼 책을 많이 읽는 해는 오지 않을거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최소한의 목표인 100권은 훌쩍 넘겼으니 만족합니다.

그럼 언제나처럼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를 소개해드립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21년 베스트 추리소설 :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별점 4.5점!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 역사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는 문학사 서적. 상세 리뷰는 링크 참고하시길.

"나는 언제나 옳다
별점 4점! 복잡한 복합 장르 구성을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 단편 분량인 만큼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2021년 워스트 추리소설 :

"ON 온"
올해의 워스트 후보작은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술트릭의 모든 것",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 "가면병동", "최후의 일격, "범죄 캘린더"와"On 온"의 7편이나 됩니다. 모두 별점 1.5점짜리였지요. 거장 엘러리 퀸의 작품이 두 편이나 포함되어 있는게 놀라운데, 한 편은 나이 탓에, 또 한 편은 양산 모드로 쓰여졌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최후의 일격"은 괜찮은 발상의 트릭이 사용되기는 했고, 단편집 "범죄 캘린더"는 별점 2~2.5점짜리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워스트 급은 아닙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은 책 자체 내용 문제보다는 다른 문제로 인한 감점 요인이 더 컸고요. 단편집 "서술트릭의 모든 것"은 "범죄 캘린더"와 같은 이유로 제외하면, 진짜 워스트 후보작은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와 "가면병동", "On 온"의 세 편이 남습니다. 

이 중 올해의 워스트로는 "On 온"을 꼽습니다. 유치한 설정, 합리적이지 못한 전개,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주인공들이 어우러진 싸구려 스릴러니까요. 다른 두 편은 약간이나마 추리적인 요소가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나마 "On 온"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 물론 도긴개긴입니다만....

2021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도 3권 밖에 읽지 않아서 뽑기가 어렵네요. 재미만큼은 확실했던 별점 3점의 "사라진 세계"가 베스트였어요. 워스트는 따로 뽑지 않겠습니다.

2021년 베스트 역사 도서 :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별점 5점! 역사 바로 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와 "영어 조선을 깨우다 1"도 별점 4점을 받은 좋은 책이었는데, 아쉽게도 탈락했네요.

2021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별점 1점. 편협한 개인 의견을 잔뜩 투입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그냥 '나쁜' 책입니다.

2021년 베스트 / 워스트 디자인 or Study :

딱 한 권 밖에 읽지 않아서, 올해는 평가할게 없네요. 공부가 부족했던 한해네요....

2021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올해 이 쪽 분야 책들은 다 고만고만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경양식집에서",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가스트로노미"의 5권이 별점 3점을 받았습니다. 이 중 재미와 자료적인 가치, 책의 완성도 등 모든 면을 고려하여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를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1부만 한정하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던 책이니까요.

2021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올해는 2점 이하의 별점이 없어서, 워스트는 따로 뽑지 않습니다.

2021년 베스트 기타 도서 :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별점 4점을 받은 책은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n분의 1의 함정"의 세 권이었습니다. 다 좋은 책이었지만, 이 중 재미에 더해 제 전공 분야인 커뮤니케이션과 상호 작용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준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를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21년 워스트 기타 도서 :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별점 1.5점을 받은 올해의 워스트 후보작은 "재미있는 식물 산책 도감",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만화로 보는 99가지 발명품 이야기"의 3권입니다. 이 중 사람 열받게 만드는 가소로운 자기 주장을 담고 있는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가 올해의 워스트입니다.

2021년 베스트 Movie : 

"나이브스 아웃"
훌륭하게 현대에 되살린 본격 추리물! 별점 3점.

2021년 워스트 Movie : 

"철권을 가진 사나이"
황당무계하고 유치했던, 심지어 액션마저 별 볼일 없었던 '가짜' 무협 영화.

2021년 베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전체적인 별점은 고만고만해서 베스트랄건 없네요. 에피소드 기준으로는 "Q.E.D iff 증명종료 14" 수록작 "1억엔과 여행하는 남자"가 오랫만에 별점 4점짜리 에피소드였습니다.

2021년 워스트 Comic - 추리 or 호러 : 

"Q.E.D iff 증명종료 16"
수록작 3편 중 2편이 별점 1.5점, 1편이 별점 1점을 받은 워스트 오브 워스트. 그 외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의 "앙숙"도 별점 1점짜리 망작이었습니다. 별점 1.5점 짜리 에피소드들은 언급하기도 힘들만큼 숱하게 있었고요. 추리 만화 분야는 영 실망스러웠던 한해였네요.

2021년 베스트 Comic - 기타 : 

"그리고, 또 그리고 1~5"
별점 4점짜리 책은 이 책 외에도 "피너츠 완전판 19 : 1987~1988"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베스트로 꼽은 이유는 재미와 감동에 더해 미대 졸업생인 저에게 많은걸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고요. 하여간,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지만 만화가가 그린 자기 이야기는 무조건 최고에요.

2020년 워스트 Comic - 기타 : 

최저 별점이 2점이라서, 워스트는 따로 꼽지 않겠습니다.

결산평 : 

이상으로 2021년 블로그 결산을 마칩니다. 올 한해는 저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한해였어요. 인생의 큰 목표 중 하나였던 '추리 소설 1,000권 읽고 리뷰 쓰기'를 완료했기 때문이거든요. 저도 하루하루, 한달한달, 한해한해가 더욱 소중한 나이가 되었는데, 2022년에도 저 개인적으로 내세울 수 있고 자부심을 가질만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2022년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했고, 또 감사드립니다!

2020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2/04/02

다이몬즈 1~13 - 요네하라 히데유키 : 별점 2점

다이몬즈 13 - 4점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요네하라 히데유키 그null림/서울문화사(만화)

데즈카 오사무의 "철의 선율"을 리메이크한 작품. 친구에게 배신당해 양 손을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정신력으로 조종하는 철의 의수를 얻는다는 기본 설정 이외의 모든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하여 13권에 이르는 장편으로 탄생시켰습니다.

가장 손을 많이 댄 부분은 배경 설정과 등장인물들입니다. 배경 설정은 "북두의 권"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근미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캐릭터, 특히 최종 보스인 프로그레스는 "베르제르크"에서의 아름다운 절대악 그리피스의 이미지를 끌어왔고요. 친구에게 배신당한 좌절감과 복수심 역시 원작보다는 "베르제르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원작과 대 히트작의 설정만 베껴온다고 걸작이 되는 것은 아니죠. 공은 좀 들였지만, 흔해빠진 이능력 배틀물 이상의 무언가는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복수의 이유만큼은 확실한 주인공 헤이토 이외의 인물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나노머신을 자신의 몸에 부여했다는 적들은 설정부터가 건맨, 최면술사, 검사, 근육맨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의 식상한 존재들이었고, "자연을 생각한다"는 최종보스 프로그레스 역시나 한 권 정도의 분량을 할애해가며 배경 설정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역부족인 평면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또 다른 제스모스 능력자 스왈로우가 원천적인 복수심을 가지고 상상 이상의 자해(?)를 통해 헤이토와 대적하며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친구도 마지막이 너무 별로여서 당쵀 왜 등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황당했던건 원작에서 끝까지 복수심을 잃지 않는 헤이토를 이 작품에서는 마지막에 "차갑지만 내 여자와 친구에게는 따뜻한 남자" 로 포장, 각색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원작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한 어처구니없는 각색의 결과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그나마 주인공 친구들도 대부분 죽고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는다는 다크엔딩과 함께 제스모스를 이용한 복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액션, 특히 제스모스만의 독특한 능력 (연결 부위에는 어떠한 것도 연결하여 팔로 사용할 수 있다)을 이용한 몇 번의 반전과 마지막 프로그레스와의 승부에서 보여지는 결말은 괜찮은 편이긴 합니다만.... 원작을 재미있게 본 입장에서는 점수를 주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거창하게 이야기를 벌이지 말고 원작을 보다 충실히 리메이크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5/07/20

래스코 탄젠트 - 리처드 노스 패터슨 / 황해선 : 별점 1.5점

래스코 탄젠트 - 6점 리처드 패터슨 지음, 황해선 옮김/해문출판사

외부에서의 밀고로 조사가 시작된 대통령의 친구인 거물 실업가 래스코의 주가조작 사건 담당인 경제범죄대책위원회 고발국 소속 변호사 크리스토퍼 캐넌 파제트. 그는 정치적인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사건의 성격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관과 계속 충돌한다.
그러던 중, 래스코의 경리부장이던 알렉산더 리만에게 증언을 약속받으나 리만은 파제트의 눈 앞에서 뺑소니차에 치어 즉사하고 파제트는 리만의 유품을 뒤져 수수께끼 같은 메모를 입수하게 된다.

계속 사건을 추적해 가던 파제트는 정보가 계속 누설되어 래스코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내부의 배신자를 찾으면서도 메모의 내용을 해독하는데 성공하여 래스코의 모든 음모를 밝혀내게 되지만 배신자의 책략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우연찮게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그닥 땡기지는 않았지만 책 뒷표지에 있는 "1979년도 미국 추리 작가 협회상(MWA)"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낚이기도 하고 가격도 워낙 싸서 냉큼 구입하게 되었네요. 해문 Q 미스테리 46권입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내용은 뻔하디뻔한 미국식 스릴러에 불과하더군요.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과 거물 악당을 잡아들이기 위한 노력, 그 와중에 벌어진 증인의 원인모를 죽음과 그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사건들... 단서는 피해자가 남긴 메모 한장뿐!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충격적인 배신자의 정체!까지 어디서 본듯한 내용이 난무합니다.

스테레오 타입의 이야기와 주인공 캐릭터라 워낙 뻔하기 때문에 이를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복잡한 음모와 배신자의 정체를 잘 포장하는 것이 나름 중요할텐데 이 작품은 이런 부분에서도 성공하지 못했어요. 무엇보다도 증인인 알렉산더 리만이 죽기 직전 남긴 메모로 범행의 전모가 밝혀지며 범행이 입증된다는 결말은 당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범행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해도 순전히 주인공 파제트의 추정에 불과한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뭔가 있어보이던 메모조차 별다른 암호 트릭도 아니고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정보의 나열이었을 뿐이어서 더욱 실망스러웠고요.

그래도 경제범최대책 위원회 고발국 소속 변호사라는 주인공 크리스토퍼 케넌 파제트라는 캐릭터의 직업 하나만큼은 독특하고 신선해서 좋았습니다. 직업에 더해 고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 등에 대한 디테일도 뛰어난 편이라 감탄했는데 조사해 봤더니 작가가 변호사 출신이더군요. 이야기 전개도 시원시원 명쾌하며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여 연결하는 글재주는 있어서 읽는 재미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고요.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요즘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구식인, 시시하기 짝이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