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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6) 맥주가 맛있는 순간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닿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보리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젖은 빵이 발효된 것을 먹어 본 것이 맥주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문학으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음식을 대표하는 상형문자가 ‘맥주’와 ‘빵’이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를 맥주와 마늘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마늘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이집트에 냉장고가 있었을 리는 없지만, 더위 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하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합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드니까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 중 한 편인 "맥주 별장의 모험"에서 주인공 닷쿠 일행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무더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별장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대량의 맥주를 발견하지요. 당연히 일행은 유혹을 참지 못합니다. 긴급 피난이라는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체내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알코올의 이뇨 작용까지 더해지면 탈수 증상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젊은 닷쿠 일행에게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텅 빈 별장 1층에 싱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저마다 추리를 꺼내 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작가의 단편 "맥주집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닷쿠 일행이 빈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시며 그 이유를 추리하는 이야기거든요. 만화 단행본 표지에서도 닷쿠 일행은 맥주를 들고 있는데, 이쯤 되면 참 맥주를 좋아하는 일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작품 속 닷쿠 일행이 마신 것은 냉장고 속 캔맥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캔맥주보다 병맥주 쪽이 조금 더 시원한 인상을 줍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 병뚜껑이 열릴 때 나는 소리, 잔에 따를 때 올라오는 거품이 캔맥주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즐겼던 맥주도 Remmers 병맥주였습니다. "독사"에서 그 상표명이 직접 언급되지요.

병맥주 하면 역시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병을 꺼내, “퐁”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고, 살짝 얼음이 낀 잔에 거품이 올라오도록 따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데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에는 바로 이 습관을 이용한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노 쿄코는 냉장고 속 맥주를 냉동실에 얼려 둔 잔에 따라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남편을 원격으로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리 잔에 청산가리를 발라 두었던 겁니다.

다만 이 방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여도, 과학적으로는 맥주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주에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적정 온도가 있는데, 얼린 잔은 그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버리는 탓입니다. 또 잔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 때문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장 시원해 보이는 방식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방식은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고 더위 속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만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에 등장하는 사코미즈처럼, 2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맥주를 마신다면 어떨까요. 그 맥주가 맛없을 리 없습니다. 그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두고 “마치 목에도 미각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느끼며, 맥주를 “액체 모양을 띤 황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잘 와닿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지붕 공사 장면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는 간수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요구합니다. 그 덕분에 죄수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위에 앉아, 차갑게 식힌 Stroh’s Bohemian 맥주를 한 병씩 나누어 마시지요. 특별히 고급 맥주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교도소 안에서 잠시 자유를 맛봅니다. 죄수가 아니라 하루 일을 마친 평범한 노동자처럼요.

물론 차갑지 않아도 특별한 분위기가 함께한다면 맥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미시 순경은 일부러 맥주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시곤 합니다. 미국 영화 속 탐정들이 책상 서랍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장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 자신도 옛 하드보일드 탐정과 닮아진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맛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스티븐 킹의 "여름 천둥"은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든 것이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은 버려진 개 간달프와 함께 살아가고, 근처 고급 주택가에 홀로 남은 팀린과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결국 방사능 후유증이 심해져 죽음을 앞두게 된 팀린은 자살할 준비를 마친 뒤 로빈슨을 부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지근한 Budweiser를 나누어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맥주의 제왕”이라면서요. 차갑지도 않고, 세상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마시는 맥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의 Budweiser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맛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 그리고 맥주라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이 만들어 내는 쓸쓸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달프가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의 파트너 조처럼 Budweiser를 좋아하는 개였다면, 그 자리가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실 이 자리는 Budweiser보다 벨기에 맥주 Duvel이 더 어울렸을겁니다. 시원해야 제맛인 라거 계열의 Budweiser와 달리, 에일 계열 맥주는 어느 정도 온도가 올라왔을 때 본연의 맛이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도 Duvel이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향과 맛을 즐기기 좋은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udweiser도 겨우 구했던 로빈슨과 팀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요.

이처럼 맥주의 맛은 온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위, 갈증, 자유, 고독, 동경, 마지막 순간의 체념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맥주는 차가워서 맛있고, 어떤 맥주는 오래 기다린 끝에 마셔서 맛있습니다. 또 어떤 맥주는 맛 자체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시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날의 갈증이든, 하루 끝의 여유든, 이야기 속 인물이 느낀 자유든, 맥주는 그런 장면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방법인 ‘세 번 따르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네로 울프도 좋아하는 Remmers 병맥주를 전용 금도금 병따개로 딴 뒤, 정확하게 거품을 맞춰 따라 마시곤 했다고 하니, 미식가에게 검증된 방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맥주에 잘 어울리는 잔까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 번 따르기

1.
맥주병을 높이 들고 처음에는 천천히, 이어서 조금 세게 따라 거품을 만든다.

2.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 정도가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로 가져가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1cm 정도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맥주를 조심스럽게 붓는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20/02/23

그때, 맥주가 있었다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 이상원.장혜경 : 별점 2.5점

그때, 맥주가 있었다 - 6점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 이상원.장혜경 옮김/니케북스

유럽의 기나긴 역사에서 맥주가 중요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소개해 주는 독특한 미시사, 음식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역사 속 맥주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수 페이지 정도 소개한 뒤, 해당 사건과 관련된 현대의 맥주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스물 네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취지에 걸맞는 내용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연히 맥주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바뀐 이야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떤 한 장면에서 맥주가 멋지게 등장하거나 활용된 정도를 기대한 정도이지요. 그러나 절반 이상의 이야기가 그렇지 못합니다. 단순히 유럽의 특정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때는 아마 맥주를 마셨을거다'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물론 추정 자체는 꽤 그럴싸 합니다. 문제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조금 맥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들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맥주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거나, 맥주 회사가 관련되어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예를 들자면 난센의 북극 탐험은 단지 링그네스 양조장에서 탐험 비용을 후원했을 뿐입니다. 히틀러가 맥주집에서 바이에른 정부를 실각시키고 제국 정부를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역사를 맥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건 억지고요. 옥스퍼드 대학 문인들이 펍에서 열리는 문학 클럽에 참석하다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장소가 펍일 뿐입니다. 딱히 맥주와 관련이 있지는 않아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 장관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야기나 체코 대통령 하벨의 이야기는, 그 둘이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많고 시기적으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현대까지, 장소로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폭은 상당히 넓고 방대합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은 편이에요.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30년 전쟁 당시, 목마른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농부로부터 맥주를 대접받은 후 커다란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답례로 선사하고,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명백히 맥주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로 증명되지는 않은 전설급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전설 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계속 맥주를 만들어 왔으며, 지금의 크로스티츠 양조장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양조 시설 중 한 곳으로 대표작인 '파인헤르베스 필스너'는 라벨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초상화를 담아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 이상 된 전설 속 맥주라니 마케팅으로는 더할 나위 없네요.
1836년, 유럽 대륙 첫 철도 운송 화물이 뉘른베르크 레데러 양조장에서 퓌르트로 보낸 맥주 두 통이었다는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레데러는 현재도 독일 리데베르거 그룹의 계열사로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를 계속 출시하고 있답니다.
파스퇴르가 맥주 양조 분야에서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맥주가 중심입니다. 영국 위트브레드 양조장과 협력하여 최적의 열처리 온도가 섭씨 50~55도라는걸 알아내는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맥주에 관한 연구"라는 유럽 맥주 양조인의 경전과도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의 맥주 실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양조장이라는게 재미있네요. 결국 칼스버그에서 파스퇴르의 꿈이었던 미생물없는 라거 맥주 효모 배양에 성공했다니 진짜 후계자인 셈입니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오줌싸게 소년 동상의 모델은 브라반트 공국의 수장인 어린 고드프리 3세로,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어린 나이로 출정했을 때 반란군을 향해 오줌을 싼 게 유래라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 유모가 맥주를 마시고 수유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맥주를 마셔서 요의를 느꼈을 거라고 설명하는건 좀 억지스러웠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함께 알려주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 브뤼셀의 전통있는 맥주 '램빅'도 아주 입맛을, 아니 흥미를 돋구고요.
스웨덴의 미식가 전쟁 영웅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역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인물입니다. 1808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입니다. 다만 소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맥주 관련된 일화는 없습니다. 러시아 군 보급품을 털었을 때, 맥주도 함께 털었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전부죠. 그래도 지금 '산델스'라는 이름의 맥주가 산델스가 활약했던 핀란드 양조장 올비에서 양조되어 판매된다니 한 번 마셔보고 싶네요.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는 재미가 덜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 경주에서 맥주 탓에 벌어진 순위 변경이라던가, 이탈리아 경제 성장기에 함께 발전한 페로니 맥주의 마케팅 전략, 아일랜드가 무섭게 성장하다가 리먼 사태 등으로 휘청일 당시, 카우언 총리의 기네스 맥주 사랑 등은 기억에 남네요. 특히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이야기는 온갖 정당이 창궐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해서 제일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의도대로 완벽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저자들의 글 솜씨도 유쾌하기 때문이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맥주 리스트를 인용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파는 맥주는 한 개 씩 구입해서 마셔볼 예정입니다.

  1. 생 푀이엥 트리플 St-Feuillien Triple 벨기에 
  2. 칸티용 괴즈 100% 램빅 바이오 Cantillon Gueuze 100% Lambic Bio 브뤼셀 (벨기에)
  3. 아인베커 우어 보크 둔켈 Einbecker Ur-Bock Dunkel 아인베크 (독일) 
  4. 린데만스 파로 Lindemans Faro 블렌제비트 (벨기에)
  5. 우어 크로스티처 파인헤르베스 필스너 Ur-Krostitzer Feinherbes Pilsner 크로스티츠 (독일)
  6. 발티카 No.6 포터 Baltika No.6 Porter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7. A. 르꼬끄 포터 A. Le Coq Porter 타르투 (에스토니아)
  8. 올비 산델스 Olvi Sandels 이살미 (핀란드)
  9.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 Lederer Premium Pils 뉘른베르크 (독일)
  10. 위트브레드 베스트 비터 Whitbread Best Bitter 웨일스의 마고 (영국)
  11. 칼스버그 Carlsberg 코펜하겐 (덴마크)
  12. 링그네스 임페리얼 폴라리스 Ringnes Imperial Polaris 오슬로 (노르웨이)
  13. 그랭 도르주 뀌베 1898 Grain d'Orge Cubee 1898 릴 (프랑스)
  14. 레벤브로이 오리지널 Lowenbrau Original 뮌헨 (독일)
  15.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Berliner Kindl Weisse 베를린 (독일)
  16.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오베르네 (프랑스)
  17. 그래비타스 Gravitas 브릴 (영국)
  18. 스핏파이어 프리미엄 켄티시 에일 Spitfire Premium Kentish Ale 파버샴 (영국)
  19. 페로니 나스트라즈로 Peroni Nastro Azzurro 로마 (이탈리아)
  20. 크라코노시 스베틀리 레작 Krakonos Svetly Lezak 트루트노프 (체코)
  21. 지비에츠 Zywiec 지비에츠 (폴란드)
  22. 사라예브스코 피보 Sarajevsko Piv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3. 기네스 드래프트 Guineness Draught 더블린 (아일랜드)
  24. 하이네켄 Heinek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19/03/23

맥주어 사전 - 리스 에미 / 황세정 : 별점 2.5점

맥주어 사전 - 6점
리스 에미 지음, 황세정 옮김, 세노오 유키코 감수/웅진지식하우스

앞 부분의 맥주의 역사를 간략히 만화로 그린 부분에 꽂혀서 구입했는데,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제목 그대로 사전입니다. 맥주에 관련된 용어들과 간략한 설명이 200여 페이지되는 분량에 빼곡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맥주 재료, 양조법이나 양조장에 대한 정보 외에도 이런저런 새로운 정보가 많습니다.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비법이라는 '세 번 따르기' 같은 내용처럼 말이죠.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첫 번째 단계 – 거품 만들기 → 맥주병을 높이 들어 천천히 따른 후, 한 번 세게 부어 거품을 충분히 만든다.
  2. 두 번째 단계 – 맥주와 거품의 균형 맞추기 →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이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에 대고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약 1cm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세 번째 단계 – 마무리 거품 정리 →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조심스럽게 맥주를 따라 완성한다.

그리고 마녀가 에일을 만들어서 팔던 에일 와이프에서 비롯되었다는 소개는 뜻밖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마녀 하면 떠오르는 뾰족한 모자, 고양이, 끓는 냄비, 빗자루 모두가 에일 와이프를 상징하며, 모자를 빼면 고양이는 맥아를 노리는 쥐를 쫓기 위해, 끓는 냄비는 맥아죽을 끓이는 용도, 빗자루는 청소 및 에일 와이프를 알리는 소품이었다고 소개하는데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렸습니다. 한 번 조사해 보고 싶어지네요. 그 외에도 레시피도 몇 개 소개되어 있습니다. 글루비어를 만드는 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맥주에 관련된 인물들도 여럿 소개되는데 독일의 대문호 괴테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입니다. 세 끼 식사보다도 슈바르츠비어(독일식 검은 맥주)를 더 좋아했다네요.

좀 지루해질 만 하면 등장하는 저자의 짤막한 에세이나 이런저런 토막정보들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맥주와 잘 어울리는 막과자 (다카시)에 대한 소개 등이 그러합니다. 살라미 계열은 바이젠, 고추냉이 맛은 브라운 에일 등의 조합인데 한 번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일러스트도 아주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아사오 하루밍 스타일인데 단순하면서도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색의 활용도 단순하지만 대담해서 아주 마음에 듭니다. 이런 일러스트가 어우러져 단순한 사전이 아닌 '그림 도감'을 읽는 기분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어른을 위한 동화책같은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 시장을 위해 쓰여진 책이라 주요 지역 정보는 일본에 대부분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무리 정성껏 일본의 크래프트 비어와 양조장을 소개해 준다 한 들 그림의 떡이니까요. 국내 정보는 한 장 짜리 국내 양조장 지도 정도 외에는 별게 없습니다.
소개 측면에서도 몇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어, '기린 맥주'를 즐겼다는 로산진도 소개되는게 마땅했을텐데 왜 소개되지 않았을까요?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아인쉬타인을 소개하느니 로산진을 소개하는게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언젠가 일본에 가게 되면 소개된 맥주를 좀 구해봐야겠어요.

2017/07/23

만화로 보는 맥주의 역사 - 아론 맥코넬 / 조너선 헤네시, 마이클 스미스 : 별점 2점


만화로 보는 맥주의 역사 - 4점
아론 맥코넬 그림, 조너선 헤네시.마이클 스미스 글/계단

제목 그대로 만화로 보는 맥주의 역사입니다. 맥주의 시작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만화로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럽습니다. 만화로 잘 그려냈다기 보다는, 그냥 있는 설명을 그림으로 충실히 설명하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때문에 만화라고 해도 읽기 쉽지 않아요. 미국 극화체 스타일의 그림도 내용과 별로 잘 어울리지 않고요. 게다가 지나친 맥주 예찬도 거슬리는 부분입니다. 맥주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 맥주에서부터 농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식이기까지 하니까요.

물론 건질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수메르의 바피르는 보릿가루로 구워 만든 일종의 빵을 단지 안에 넣고 물을 부어 적신 후 발효를 일으켰는데 이게 최초의 맥주 레시피라는 이야기, 신부와 관련된 것을 나타내는 Bridal은 Bride Ail, 즉 결혼식에 에일을 마시는 파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홉 이전에 그루이트라는 맥주 첨가물이 있었는데 정부의 이권으로 이용되자 홉이 등장하였고, 홉이 가진 강점으로 그루이트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 등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 그러합니다.
유명한 맥주들에 대한 유래 소개도 재미있었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인디아 페일 에일 (IPA) : 원래는 인도를 통치하는 영국인들을 위해 만든 맥주. 인도에 있던 영국인들이 귀국하면서 영국에서도 유행. 이것이 미국에서 재배되는 향이 강하고 쓴 맛이 센 홉이 첨가된 미국식 인디아 페일 에일로 진화함. 
  • 필스너 : 오늘날 전 세계 맥주의 95퍼센트가 필스너. 1838년 보헤미아의 플젠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서 시작됨. 탁월한 양조 기술자 요제프 그롤이 1842년 손에 넣은 바이에른의 라거 효모에 바이에른의 순한 홉, 달콤한 모라비아 지방 보리, 미네랄 함량이 낮은 플젠의 연수로 만든 맥주.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맥주의 원형.

그러나 이런 정도의 내용을 위해 구태여 어렵게 만화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정보면에서도 부실하고, 그렇다고 딱히 재미가 있지도 않으니까요. 이럴 바에야 글 중심으로 설명하고 삽화 몇개 추가하는 것이 노력 대비해서는 훨씬 나은 결과물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네요. 노력이 가상하여 별점을 주고 싶지만 별로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4/30

낮의 목욕탕과 술 - 구스미 마사유키 / 양억관 : 별점 2점

낮의 목욕탕과 술 - 4점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지식여행

<<고독한 미식가>> 원작으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의 에세이. 제목 그대로 낮에 목욕탕에 갔다가 술을 먹는 10군데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와 장단점은 같은데, 장점은 <<술 한장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타츠를 연상케하는 인생관이 글에 잘 녹아있다는 점입니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라는 그야말로 소다츠스러운 생각이 담뿍 담겨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생각이지만 소다츠라면 그야말로 격렬한 동의를 보일 법한 발상이에요.
맛깔나게 잘 쓴 글이기도 합니다. 특히 비유가 아주 찰집니다. 한낮에 타는 완행 열차를 '어른용 원숭이 열차 (아마도 우리나라로 따지면 유원지 코끼리 열차겠죠?)'에 비유하고, 목욕탕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들어가는건 '낯선 땅의 야만스러운 공기 속에 나 몰라라 하는 이방인이 되어 몸을 던져 넣는 스릴이 느껴진다'는 식이에요. 이 중에서도 최고는 오래된 목욕탕 안젠탕을 블루스에 비유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폐자재를 때는 목욕탕은 친환경을 이야기하는 현재와 맞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갈 데 없는 괴로움, 끝도 없이 찢어지는 마음을 우스꽝스럽게 절규하는 블루스가 느껴진다는건데 캬,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이 비유가 직접 작사한 가사가 어우러지는데, 이 부분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음식의 군사>>에서 오뎅 먹는걸 제갈량의 진법에 비유하는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니까요.
벚나무들을 스쳐갈 때 차량 전체가 벚꽃색으로 물든다는 등 묘사력도 좋고, 특히 목욕을 끝내고 마시는 맥주에 대한 묘사가 정말 찰집니다. 이건 소개해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작가의 장점, 비유와 묘사력, 그리고 소다츠스러운 감성이 잘 살아있는 명문이기 때문입니다.

목을 타고 넘어간 맥주가 이윽고 위 안으로 스며든다.
아, 맛있어.
나는 지금, 온몸으로 맥주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다 바쳐서 맞아들인다.
사랑, 그런 느낌이다.
바보인가, 바보라도 좋아. 아니 바보라서 다행이다.
지혜 따위 필요 없다. 옳고 그른지 따질 것도 없어. 작전도 포기. 내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뭐.
꼰대 아저씨 주제에, 목욕탕에서 다시 태어나 신제품으로 변신한 내가 전면적으로 맥주를 맞이한다.
지금, 맥주는 내 몸 안으로 무혈입성을 달성했다.
나의 모든 세포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며 열광한다.
"맥주 만세!" "맥주 만세!" "임금님 만세!" "임금님 만세!"
물론 임금님은 나다. 어리석은 임금. 벌거벗은 채 왕관 하나 달랑 쓰고 당나귀 귀를 쫑긋 세워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백성을 향해 손을 흔든다.
다시 한 모금, 쭈욱 들이킨다.
황금빛 액체가 목을 치달려 내려간다. 이미 길은 닦였다.
취기라는 아련한 벛꽃색 공기가 머리 쪽으로 출렁 흐르기 시작한다.
행복하다. 이것을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한 인생일꼬.

지극히 소다츠스럽지 않습니까? 여기에 더해 "술꾼이란 결국 마시고 만다. 반드시 마신다. 술집이 보이지 않으면 편의점 주류 코너라도 돌진한다."는 말까지 더하면 그냥 소다츠에요. 

목욕에 대한 찬양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반년 만에 목욕을 하게 된다면,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가 눈을 뜨면 빛이 있었다. 악마가 사라진 세계가 수증기 속에 펼쳐진다. 성스러운 탕 안에서 벌거벗은 내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묘사는 목욕을 부활과 천지창조에 비유한건데, 이거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까 싶네요.
만화가답게 같은 사물을 보아도 독특한 발상으로 풀어내는 것도 재미 요소입니다. 일본식 목욕탕이 옛날 신사 스타일 지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일본인에게는 목욕이 종교와 가까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요.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목욕탕에 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는데, 그럴듯합니다.

새롭게 알게된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상식들도 있습니다. 긴자에 목욕탕이 있다는 이야기처럼요. 작가가 전설의 만화잡지 <<가로>>에서 데뷰 후 겪었던 편집장 나가이 씨와의 에피소드 - 돈이 없으니 맛있는걸 대접할 수 없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먼저 데리고 가서, 싸구려 술집의 맥주를 몇 배 더 맛있게 마시게 하려고 했다 - 도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겠지요. 물론 원고료도 주지 않으면서도 힘들면 죽어버리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나가이 씨는 영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씁쓸했습니다만....

그러나 이전 책처럼 자기 생각과 철학이 너무 강하다는 단점도 여전합니다. 지극히 꼰대스러운 사고방식이 넘쳐나는데,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건 목욕탕 손님들을 관찰하며 자기만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입니다. 재미를 떠나서 그들을 폄하하는 듯한 - 예를 들어 '큰 인물이 될 것 같지 않은 느낌, 어딘지 모르게 좀스럽다' -설명을 덧붙여 조롱거리처럼 삼는건 솔직히 불쾌했습니다. 나이 좀 들었다고 남을 폄하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꼰대스러움 가득한 글이었습니다.
음악 파트너 구리 짱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개로 비유한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리 짱이 이 글을 읽으면 굉장히 불쾌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런 글을 서슴없이 쓴건 도무지 이해가 안되네요. 본인도 바보로 비하하지만, 자신을 비하한다고 남을 비하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기대했던 음식 측면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목욕'에 더 집중하는 탓입니다. 꼬치구이 가게 <<만페이>>의 고기가 들어있지 않다는 소프트 햄버그스테이크만 처음 들은 메뉴라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어육 소시지를 다져 만든 햄버그라고 하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 한번 쓱 읽기는 괜찮은 에세이이지만 구태여 찾아 읽을만한 글은 아닙니다. 이와마 소다츠가 누군지 모르신다면 아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4/12/31

맥주별장의 모험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이연승 : 별점 1.5점

맥주별장의 모험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 중 불의의 사고로 헤매게 된 닷쿠 일행 4명은 발견한 별장에 불법으로 침입하고 말았다. 더위와 피로로 넋이 나간 탓이었다. 별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1층에는 싱글 베드 침대 한 개 뿐이고, 2층 붙박이장 속 숨겨진 냉장고에는 다량의 맥주가 보관되어 있었다. 일행은 피로와 배고픔이 극에 달했기에 긴급피난이라는 핑계로 별장의 맥주를 마시며, 별장의 특이한 상황에 대해 각자 추리한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타카치" 시리즈 장편입니다. 시리즈는 오하시 카오루의 만화로 먼저 접했었지요. 전작이 있는데 깜빡하고 두 번째 작품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캐릭터 관련 소개가 약간 부실하지만 읽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제목만 보고는 제가 읽었던 만화책에 수록된 단편 원작인가 싶었는데 아니더군요. 

보안 선배, 타쿠, 타카치, 우사코 4명이 특이한 상황에 대한 추리를 내놓는다는 설정은 추리 동호인들의 수수께끼 풀이 수다를 소설로 옮겨 놓은 듯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추리를 피력한다는 설정은 "독 초콜릿 사건"이나 "바보의 엔드크레디트", 얼마 전 읽은 "탐정 영화" 등 많은 작품에서 선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각자가 정리된 추리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수다 레벨의 추리를 펼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도 술자리 수다라서 터무니없거나 허점 투성이인 추리가 속출합니다. 때문에 추리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작가도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좀 쉽게 썼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엉터리 추리를 마구 끼워넣어 분량을 늘릴 수 있으니까요.

물론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수다를 펼치더라도, 그럴듯한 진상만 잘 뽑아낸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다른 유사한 작품들도 말도 안 되는 추리가 등장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진상도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납치한 뒤 그가 혼자 맥주를 먹으며 잠들기를 기다린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납치된 사람이었다면 일단 나갈 생각부터 했을 거에요. 납치당한 판국에 맥주는 무슨 맥주.
게다가 범인들이 범행을 일으킨 이유는 결국 명확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장치를 꾸밀 노력과 돈이면 보다 효율적이고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모종의 범행을 뒤집어씌우려고? 하이고... 차라리 사람을 고용해서 묻어버리는 게 낫죠. 진상보다는 영화 세트장일 것이라는 초반의 추리가 더 현실적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캐릭터 설정이 진부하기 그지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라이트 노벨이나 만화를 보는 듯 천편일률적인 무채색 캐릭터들이었어요. 술 좋아하고 허술하지만 사람도 많이 따르는 리더 보안 선배, 키 크고 차갑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츤데레 미녀 타카치, 키 작고 딱히 남자답지 않지만 의외로 꼼꼼하고 추리력 좋은 타쿠, 이런 파티 구성에 빠질 수 없는 마스코트 캐릭터 우사코로 구성된 4인 파티인데 정말 많이 본 설정이죠.

그래도 아주 건질 게 없지는 않습니다. 산사태가 났다는 도로 표지판이 조작이었을 것이다, 퍼스트·세컨드(별장)의 위치는 어느 쪽 길을 향했어도 무방하게끔 배치된 것이다 등 추리가 번뜩이는 부분이 있기는 했고, 두 번째 별장과 같은 의외의 포인트는 읽는 재미를 주기는 했습니다.
수다라는 분위기도 떠들썩하니 나쁘지는 않았어요. 술자리 마다하지 않고 술만 있다면 끝까지 달렸던 제 대학 생활 때가 떠오르기도 했고 말이죠.

하지만 내용에서 추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추리 소설에서, 그 추리가 억지와 비약으로 점철되었고 진상 자체가 전혀 설득력이 없는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1점을 주려 했지만 약간의 건질 만한 포인트에 0.5점을 더합니다.
만화책 쪽이 7만 배는 더 좋았는데, 차라리 만화 번역본이 출간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20/01/26

레이디 조커 2, 3 - 다카무라 가오루 / 이규원 : 별점 2.5점

레이디 조커 2 - 6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레이디 조커 3 - 6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던1권에 이어, 거의 2년여 만에 읽게 된 후속권입니다.

1권이 주요 등장인물 소개 및 히노데 맥주 사장인 시로야마 납치 사건이라는 본 사건의 전초전이 벌어지는 도입부라면, 2권은 히노데 맥주를 협박하는 범죄집단 '레이디 조커'의 범죄 행각과 요구했던 거액의 돈을 손에 넣는 과정, 그리고 경찰에서 시로야마 사장의 안전과 사건 수사를 위해 파견한 고다 형사가 이런 저런 단서들을 통해 범인의 정체를 차츰 눈치채 가는 과정이 주로 그려집니다. 중간에 대화가 단절된 것에 대한 분풀이로 레이디 조커가 경고했던 맥주 내 이물질 투입이 벌어지고, 이후 히노데 맥주의 임원이자 시로야마 사장의 처남이기도 한 스기하라의 자살이 대미를 장식하고요. 여기에 기자 네고로가 사건 이면에 주식 매매를 둘러싼 네트워크 존재를 알아내고 관계자들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3권에서는 레이디 조커 사건의 비중은 미미합니다. 레이디 조커 멤버들과는 거의 무관한 2차 범행 및 경찰의 끊임없는 수사 과정과 네고로 기자의 실종으로 촉발된 오카다 경우회 검거 및 관련자들의 재판을 주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범행에 성공한 레이디 조커 멤버들은 등장은 거의 후일담 수준이며, 히노데의 시로야마 사장과 오카다 경우회 관계자들 비중이 훨씬 큽니다.

즉 레이디 조커 사건은 2권까지가 핵심인데, 2권에서 레이디 조커 일당의 범죄 계획, 그리고 그에 따른 범행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다카무라 가오루 작품답게 심리 묘사도 발군이고요. 특별한 근거 없이 심리 묘사 만으로도 범행의 동기가 설명될 정도니 말 다했죠. 다카무라 가오루는 제 머그컵이 저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머그컵 시점에서 설득력있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니까요.
경찰 수사와 네고로와 구보 등 기자들의 취재 활동, 시로야마 등 히노데 맥주 관계자들의 업무 및 회의, 레이디 조커 일당의 경마장 묘사 등 등장하는 모든 장소, 상황 및 행동에 대한 디테일도 아주 빼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게 끌고 가면서 도대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묘사 과잉의 애매모호한 전개와 결말을 갖춘 그런 작품이에요. 무려 3권, 페이지로는 1,000여 페이지에 가까운 대장편의 결말이 30여 페이지도 안될 정도입니다.

우선 레이디 조커 사건부터 제대로 끝맺지 못합니다. 고다의 말대로 한다가 본인 스스로 범인이라고 주장했음에도 왜 체포하여 심문하지 않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정신 이상으로 퉁쳐서 넘어가기에는 어려워보이는 대형 사건이잖아요? 물론 경찰이 내부에 범인이 있다는 희대의 스캔들을 감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한다를 추궁하던 고다라도 그 사실을 독자에게 독백 식으로나마 설명해주는게 필요했습니다.

그 외에도 설명되지 않는건 많습니다. 레이디 조커 일당인 누노카와가 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레이디를 둔 채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역시나 일당인 고가 벌인 마이니치 맥주를 노린 2차 테러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인지 등이 그러합니다.
3권의 핵심 이슈인 시로야마 사장의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오카다 경우회와의 악연 역시 마찬가지에요. 정작 오카다 경우회를 중심으로 한 악의 세력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되었는지 등도 모두 심리 묘사나 정황 묘사가 전부입니다. 시로야마 사장이 저격당해 사망하는 등 제대로 마무리 되지 못할거라는 인상만 강하게 심어줄 뿐이죠. 무언가 진행된 것 처럼 보이는 검찰 수사 결과도 등장하지 않으며, 네고로 기자의 실종 역시 진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물론 모든 사건들이 깔끔하게 해결되는게 오히려 현실적이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범죄를 테마로 한 순문학을 추구하는 다카무라 가오루다운 작품이기도 하고요. 읽다보면 누노카와는 삶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고는 단지 주가 조작이 목표였으며, 오카다 경우회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큰 흑막이 있다는 정도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모든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버린다는건, 관심있게 수백여 페이지를 읽어온 독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 않나 싶네요.

심리 묘사도 좋다고는 하지만, 고다 형사를 비롯하여 네고로 기자, 시로아먀 사장 등 주요 등장 인물 중심으로 시점이 자주 바뀌며, 묘사도 지루하고 장황한 편이라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등장 인물들 모두가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에요. 특히 주인공 격인 고다 형사와 범인들의 리더격인 한다가 심합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 외에도 개인적인 생각과 호기심도 많고, 심리도 복잡한 인물인 탓입니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이에요. 그리고 욕정을 품었다 운운하는 묘사는 등장하지 않느니만 못했고요.
또 고다는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데 다른 작품들보다는 더 멋을 들인 티가 납니다. 바이올린 연주를 즐기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티보가의 사람들" 등을 읽는다는 등의 설정을 마구 덧붙인 덕분이죠. 그러나 멋있기는 한데,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는 않더라고요. 모든 형사가 술, 담배를 즐기고 폭력적이라는게 오히려 편견이겠지만 그래도 더무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캐릭터를 설정해 버리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카무라 가오루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여기서 심리 묘사를 덜어내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끝맺었다면 보다 대중적이며, 보다 제 취향의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2018/03/30

레이디 조커 1 - 다카무라 가오루 / 이규원 : 별점 3.5점

레이디 조커 1 - 8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문학동네

"석양에 빛나는 감", "마크스의 산"이라는 묵직한 사회파 범죄 추리 소설을 발표했던 다카무라 가오루의 또 다른 대표작입니다.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에 29위로 선정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국내 소개가 상당히 늦었네요. 문학동네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1권만 우선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 전 먼저 문학동네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 절판된 고려원 출간본으로 두 작품 모두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팬인데 이렇게 읽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합니다. 참고로 원래 저는 완결까지 다 읽지 않으면 리뷰를 쓰지 않습니다만, 이번에 1권만 리뷰를 올리는 이유는 이벤트 조건 때문이에요. 그런데 쓰다보니, 이렇게 권 별로 나눠서 쓰는 것도 리뷰로서 나름 괜찮은 방법같기도 합니다. 1권에서의 감상이 후속권에서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 리뷰로서 재미요소가 많아 보이거든요. 앞으로도 이렇게 리뷰를 쓸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드네요.

리뷰로 돌아가서, 이번에 읽은 1권은 목차와 동일한 4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947년의 괴문서, 1990년, 1994년, 1995년으로요.
서두를 장식하는 "1947년의 괴문서"는 종전 직후, 오카무라 세이지가 히노데 맥주로 보낸 장문의 투서입니다. 내용은 일부 동료 직원들이 '부락민' 출신이라 차별 받았고, 결국 퇴사에 이르렀다는 증언이고요. 이 투서와 관계된 인물들이 수십 년이 지난 1990년 이후, 현실과 맞부딪히며 사건이 일어납니다. 1990년에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치과의사 하타노가 바로 부락민의 후손이며, 그의 아들도 이 이유 때문에 히노데 입사가 좌절되었다는 내용이거든요. 입사가 좌절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이 죽은 후, 하타노는 일종의 분노심에 사로잡혀 정체불명의 인물인 니시무라와 엮인 후 이 수십 년 전의 투서를 히노데 맥주로 보냅니다.
이후 하타노는 자살하지만, 그의 장인이자 수십 년 전에 투서를 보낸 오카무라의 동생인 약국 노인 모노이 세이조와 그의 경마장 친구들이 의기투합해서 '레이디 조커'라는 그룹을 만듭니다. 그리고 히노데 맥주에 거액을 요구할 계획을 꾸미지요. 마침내 이들에 의해 히노데 맥주 사장 시로야마가 납치되어 풀려나기까지가 1권의 주요 내용입니다.

대략의 줄거리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총 3권으로 이루어진 대장편의 1권인 탓에 큰 이야기로 보면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주요 등장인물, 주요 범행 동기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을 뿐이며, 정작 중요한 범행은 맛보기 수준으로만 보여지니까요.

하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아요. 아니,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때문입니다. 궁지에 몰리고 절망에 빠진, 벽에 부딪힌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습니다. 특히나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고 우직하게 살아왔지만, 남은 건 하나도 없는 모노이 노인에 대한 묘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묘사와 중요도, 비중 모두 1권의 주인공 격인데 그야말로 처절한 삶이라는게 뭔지 절절하게 느껴지도록 묘사됩니다. 가난한 촌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기 시작하여 근근히 살아온 인생인데, 별다른 사건 없이 이러한 모노이 노인의 삶만 가지고도 한 편의 이야기, 드라마는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러한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 속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는 기리노 나쓰오를 연상케 하는데, 기리노 나쓰오보다는 처절하고 스멀거리는 느낌이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피 뚝뚝 떨어지는 듯 한 날 것 느낌인 반면, 그보다는 좀 더 정제되고 세련된 덕분입니다. 회와 초밥의 차이 정도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물론 저는 두 작가, 두 음식 모두 좋아합니다. 단지 취향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하여튼, 이러한 압도적인 묘사 덕분에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 범행 동기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아무리 오래 보아왔던 사이라도 경마장에서 본 노인의 범행 제안에 모두들 선뜻 나선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텐데,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하다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사회의 패배자들, 아웃사이더들이 의기투합하는 과정이 그만큼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뜬구름 잡는 듯한 비현실적인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는 모노이 노인과 레이디 조커를 응원하게 될 정도입니다!

묘사 외에도 앞서 말씀드린 투서에서부터 시작되는 전개도 훌륭합니다.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하타노 아들의 죽음을 통해 투서와 등장인물들이 엮이는 과정에서 한껏 위험천만한 분위기를 잡아가며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몰입도도 상당하고요. 이야기가 탄탄하게 묘사된 캐릭터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히노데 맥주 관련된 설정은 일본의 전형적인 정관 유착, 그리고 각종 일본 내 스캔들을 참조한 듯한데 국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설정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등장 인물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직 형사인 한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모노이 노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굴레에 갖혔고, 운전사는 장애인 딸이라는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굴레가 있지만 한다는 공대를 나와 경찰에 투신한 것부터 시작해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 중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하여 현재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가 좌절하고 벽에 부딪힌건 다 본인 탓입니다. 그래서 남 탓, 특히 고다 형사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는건 인간적이지만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캐릭터 묘사도 사메지마와 똑같은, 흔히 보아왔던 전형적인 한마리 늑대 캐릭터라 식상했고요.
또 신용금고에서 일하는 고가 조직에 합류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단지 노모이, 한다가 "그 놈은 무조건 참여할거다" 라고 단정한게 전부인데 이래서야 좀 부족해요. 평생 생활고에 시달린데다가 부락민 출신 사위 때문에 손자마저 죽은 노모이, 독단적인 수사로 한직으로 밀려나 경찰 조직과 수뇌부를 증오하게 된 한다, 평생 무료하고 지루하게 살아가며 사고로 손가락마저 잃은 기계공 요짱, 자위대 출신으로 장애인 딸 수발에 평생을 바친 누노카와처럼 일본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들과는 다르게 고는 아무리 봐도 아웃사이더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재일 조선인" 이라는 잠깐 드러나는 그의 설정은 아웃사이더스럽지만, 그에 따른 묘사는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부족해서 확 와 닿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이디조커 조직과 히노데 맥주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얻으려는 회색분자로 보였는데, 제 짐작이 맞을지는 후속권에서 밝혀지겠지요.

이들의 주도로 벌어진 시노하라 사장을 유괴한 범행도 이해되지 않아요. 대기업의 비자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기 위한 목적 치고는 너무 큰 범죄를 벌였으니까요. 자신들의 위력, 힘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 범행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수사 본부가 조직됨은 물론, 고다 형사에게 '현직 경찰이 포함되어 있다' 는 단서를 전해 주는 등 득보다는 실이 훨씬 컸습니다. 그냥 사장을 덮쳐서 데려가는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협박장만 주는걸로 충분했읉텐데 말이지요. 이 부분도 제가 눈치채지 못한 협박 외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니, 추후 후속권을 읽어보고 최종 판단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히노데 맥주가 움직이는 돈의 단위도 현실적이지가 않아서 이러한 거대한 돈의 움직임이 주인공들과 어떻게 엮일지가 잘 와 닿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등장인물과 범행 동기들의 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만든 범행이, 범행 대상의 비현실적인 측면 때문에 조금 빛을 잃는 느낌이에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말단 형사가 소시민과 어울려 거대 사건에 휩쓸린다는 흔해빠진 헐리우드 액션물 수준의 설정이라 작품 분위기, 묘사와의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특유의 묘사력은 앞서 말했듯 일품이지만 지나치게 장황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가끔 일본 여성 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너무 생각없이 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생각이 많은데, 지나친건 없으니만 못하다는 옛 속담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단점을 잔뜩 열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음 권에 대한 기대는 충분합니다. 도입부로는 최고 수준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고다 형사는 어떻게 범인들을 추적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게 만드니까요. 몇몇 단점들은 후속권에서 잘 처리하면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고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노이 노인에게 감정이입해서 노인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는데,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너무 궁금합니다. 빨리 다음 권을 읽고 싶네요. 1권의 별점은 3.5점입니다. 다카무라 카오루의 팬 뿐 아니라 일본 사회파 장편 추리소설, 그 중에서도 기리노 나쓰오나 미야베 미유키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가 이벤트라고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건 제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은 잘 아시겠죠? 다른 작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감을 뽐내면서도 재미까지도 확실한 작품입니다. 확실히 대표작은 다르네요.

2013/08/14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구마 겐고 외 / 권은희 : 별점 2.5점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6점
구마 겐고 외 지음, 권은희 옮김/까치

건물 하나당 한 장 분량의 짤막한 글과 사진으로 구성된 전편에 이어지는 건축물 관련 서적. 몰랐는데 아사히 신문 연재 컬럼이라고 하네요.

이 책의 장점은 아주 확실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굉장히 멋지다는 점이죠. 글들은 4명의 작가가 나누어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움이나 기묘함만을 설명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 건축물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보는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글이 가장 좋았습니다. 일본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이 제법 있다는 정보는 솔깃했고요. 여행 갔을 때 좀 알고 돌아볼걸...

그러나 건축물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 전편보다 참신함과 재미가 부족하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정보 부족의 경우, 이 책을 사진과 함께 하는 일종의 건축물에 대한 감상 중심의 에세이로 규정한다면 단점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단점은 심각합니다. 에펠탑이나 런던의 유리 달걀 같은 관광지화된 유명 유적에다가 가우디, 르 코르뷔지에, 반 데어 로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의 대표작들은 이런저런 다른 매체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것들로, 이 책의 제목인 "불가사의한"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아트북 같은 책의 성격은 마음에 들지만 전편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에 든 건축물들을 몇 개 꼽아본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카이딘 황릉

베트남 최후의 황제 바오다이 바로 직전의 황제인 카이딘 황제의 능. 철근 콘크리트와 가우디 취향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지만 슬프고 품위가 없는 분위기라는 기묘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긴타이쿄

그야말로 우키요에의 풍경 그림 같은 독특한 다리.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마구치현, 이와쿠니번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세 미술관

1970년대 초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1968년 5월 혁명 후 이의가 제기되어 보존이 결정되고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내용은 잘 알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대한 이의제기가 관광 명소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씁쓸한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이탈리아의 몬테마르티니 박물관

히틀러의 전체주의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미래파를 후원하는 등 디자인 선진국다운 미의식의 소산이 보였다죠. 그래서인지 다른 국가의 오래된 건물을 박물관화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오르세 미술관처럼 역사적 건물 안에 근현대 미술품을 전시한 의외성이 특징이나, 이 미술관은 고대 조각을 수용했다는 독특함이 돋보입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것이 영원한 디자인 대국다운 면모라고 하네요.

스트로베리힐 빌라

고딕 호러 오트란트 성의 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자신의 고딕 취미를 반영하여 건축한 자택. 당시 기준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잔뜩 집어넣으려 노력한 것 같은데 사진만 보면 괴기스럽다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느껴집니다.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이겠죠.

긴자 라이온

1934년에 개업한 맥주 마니아의 성지. 건축적인 의미보다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보고 싶더군요. 사진만 보면 뭐... 그냥 강남 지하에 있는 맥주집 같긴 하지만요. 참고로 이 "긴자 라이온"은 대일본맥주의 직영 맥주홀로 1934년 개장하였으며, 연중무휴로 생맥주 한 잔은 25전이었다고 합니다.

2025/06/20

아이가 없는 집 - 알렉스 안도릴 / 유혜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산림재벌 페르 귄트(PG)는 사립탐정 율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시체 사진의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회사 주주총회 이후 만찬 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필름이 끊겨, 사진이 찍힌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PG는 사진 속 피해자가 자신의 형 베르테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의 시골 저택 ‘만하임’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옆에 위치한 맥주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저택에는 자정부터 경보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에, 사진은 저택 부지 내, 특히 맥주 공장에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아와 시드니는 저택에 머무르며 수사를 이어갔고, PG의 사촌 형제인 비에른, 안드레, 시리를 만났다. 비에른과 안드레는 과거 베르테르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만하임을 팔자는 문제로 PG 부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막내 시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PG의 아내 모니카와는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호수 위로 베르테르의 시체가 떠올랐고, 부검 결과 그는 일요일 오후 3시에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모니카는 시리와 함께 있었고, 안드레는 애인과 있었으며, PG와 비에른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율리아는 장애가 있는 줄 알았던 비에른이 실제로는 홀로 걸을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맥주 공장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거두었고, 우여곡절끝에 진상을 깨달은 뒤 베르테르의 장례식 날 관계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추리쇼를 펼쳐 범인을 지목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현대 스웨덴 장편 추리 소설. 사립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복고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들이 율리아의 추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풀이됩니다.

1. 베르테르는 왜 전 재산을 시리에게 남겼는가?
→ 베르테르는 시리를 동생이자 애인, 그리고 자기 소유물이자 희생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 PG와 베르테르의 아버지 쉴베스테르는 아내 린네아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해서, 갓난 딸 시리를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린네아는 자식을 빼앗긴 상실감에 자살했고, 시리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베르테르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시리를 농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2. 베르테르는 왜 살해당했는가?
→ 모니카가 베르테르와 맥주 공장에서 만날 때 시리와 동행했었습니다. 베르테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장소에서 1의 사실을 알게 된 시리가 분노에 휩싸여 베르테르를 살해했습니다.

3. 범인은 누구였는가?
→ 주범은 시리였고, 모니카는 공범이었습니다. PG에게 전송된 베르테르의 이메일을 숨기고, 공장 열쇠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는 모니카뿐이었습니다. 범행 후 두 사람은 범행 시간에 함께 보트를 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고요.

4. 왜 PG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가?
→ 모니카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울증을 앓고 있던 PG가 자신이 범인이라 오해하고 자살하게 되면, 그의 모든 재산이 모니카에게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5. 왜 시신을 댐에 유기했는가?
→ 숲에 묻었다면 절대 발견되지 않았을 테지만, PG가 탐정까지 불러 자기 범행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 하자 급해진 모니카가 사체가 드러나도록 유도했던 겁니다.

추리는 본격 추리물답게,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단서와 복선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모니카가 일요일에 시리와 함께 보트를 탔다고 말하면서 ‘손에 녹이 묻었다’고 했던 대목은, 열쇠가 녹슬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모니카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유추하는 단서가 됩니다. 피해자 사진을 본 시리가 베르테르라는걸 알아챈 배의 흉터는,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범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또한,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내 휴대폰에 살해된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왔어요. 300여페이지 남짓한 분량도 합리적이고요.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주로 음식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음울하지만 귀족적인 만하임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탐정의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설정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율리아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에서 혼자 생존한 후 PTSD를 앓으며, 타인과 접촉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야기 전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전남편 시드니를 못 잊고 맴도는 묘사 또한 장황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요. 솔직히 중간에 졸 정도였습니다.
율리아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멈춰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가는 디테일과 표정을 포착한다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만화적일 뿐이며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하니까요.  

또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 추리쇼는 극적이긴 하나 설득력은 다소 부족합니다. 시리가 PG와 베르테르의 친동생이었다는 사실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 나머지 추리는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 근거 없이 진행되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비에른이 열쇠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비에른의 형 안드레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네주거나 복제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용인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PG 또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베르테르가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리와 모니카가 범인이라는 사실도 시리의 자백이 없었다면 증명이 어려웠을 겁니다. 사건의 주요 현장인 맥주 공장이 불에 타버려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치밀하게 설계된,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이라는 제목과 작중 대사로 상징되는(핏줄이 사악해서 대를 끊어야 한다!), 일본 고전 변격물에서나 봄직한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콩가루 집안 설정도 와 닿지 않았고, 카리스마와 사악함을 모두 갖춘 최고 악당인 베르테르가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제대로 뭔가 보여줬을만한 설정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 구성은 돋보이지만, 심리 묘사의 과잉과 논리적 비약 등 아쉬움이 많아 감점합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8/10/20

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 엘리자베스 아치볼드 / 서민아 : 별점 2점

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 4점
엘리자베스 아치볼드 지음, 서민아 옮김/스윙밴드

제목만 보면 실용 서적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학자가 중세 시대의 고문헌을 뒤적거려 뽑아낸 대단해 보이는 (?) 조언, 금언들을 당대 삽화와 함께 배치한 어른들을 위한 '우스개' 서적이거든요. 그만큼 내용이 뜬금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영주 부인 거절하는 법'이 있습니다. 1,200년 경 베클스의 다니엘이 쓴 "교양인 대장전"에서 뽑아낸 말입니다. 영주 부인이 자꾸 유혹하면 아픈 척하라는 조언이지요. 과연 교양인! 답네요.
물 속에서 발톱 깎는 법도 있습니다. 1789년 멜키세덱 테브노의 "수영의 기술" 에 나온 비법으로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발을 들어 오른쪽 무릎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걸 책으로 쓴 이유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글을 쓴 멜키세덱 조차도 별다른 쓸모나 장점은 없지만, 시간 관리 방법으로 추천할 만 하다고 했다는걸 보면 본인 스스로도 알맹이 없는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도 등을 대고 똑바로 눕는건 자살행위라는 1474년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의 말, 주위 사람에게 땅에서 무언가를 주워 달라고 해서 땅에서 씨앗 등 자라나는 걸 줍는다면 4시, 7시, 10시이며 돌 등 자라지 않는 걸 주우면 2시, 5시, 8시, 11시 경이다는 1658년 존 화이트의 '언제든지 시간을 알 수 있는 비법', 일곱살 이전 아동에게는 연령과 와인의 도수에 따라 적절한 양의 물에 희석한 와인을 먹이라는 미켈레 사보나롤라의 의학 지침 등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당대의 어처구니없는 레시피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11세기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라는 어마무시한 이름의 저자가 쓴 "성생활을 위한 책"에 수록된 발기 불능 치료약이 눈길을 끕니다. 흰 양파 씨, 금불초, 참새 뇌, 야자 숫나무의 꽃, 백향목을 같은 양으로 준비해 따뜻한 물에 개어 병아리 콩만하게 만든 후, 아침에 와인과 함께 일곱 알을 먹으라고 하네요. 참새 뇌를 대관절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와인을 마시기 전에 샐러드 오일을 한 모금 죽 들이켜고, 와인을 마신 후 마신 와인의 세 배의 우유를 마시는 1653년 휴 플랫의 술 취하지 않는 법은 왠지 모르게 시도해보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말도 안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1280년 경 아마뉴 드 세스카스의 "신사를 위한 자기계발서"에서 소개된 알뜰하게 멋 부리는 법처럼 지금 읽어도 와 닿는 조언이 없는건 아닙니다. 몸매부터 관리해야 하며, 옷을 살 돈이 없다면 좋은 악세서리를 챙기고 추레한 차림으로 다니지 말라는 조언인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니가요. 추레한 차림은 볼품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며, 진정한 멋쟁이는 평범한 것을 세련되고 품위 있게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라니 이 역시 맞는 말이지요.
그리고 따뜻한 맥주는 차가운 맥주처럼 갈증을 충분히 해소하지도, 더위를 식히지도, 속을 시원하게 해 주지도 않아서 별로라는 토비아스 베네르의 글은 특정 종류의 맥주는 상온에서 마시는게 좋다는 일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암요, 맥주는 시원하게 마셔야죠.

하지만 유용한 조언은 한 줌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내용은 피식하고 넘어갈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빵빵 터지는 이야기가 많지도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뜬금없는 내용과 한 쌍을 이루는 당대의 도판들이 꽤나 적절하고 책의 만듦새도 괜찮긴 하지만 아무리 가점을 한다 해도 별점은 2점입니다. 권해드릴 만한 책은 절대 아닙니다.

2024/01/07

오늘 한잔? - 하이시 가오리 / 안혜은 : 별점 3점

오늘 한잔? - 6점
하이시 가오리 지음, 안혜은 옮김, 아사베 신이치 감수/이다미디어

'애주가 의사들이 권하는 최강 음주법'이라는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된 책. 애주가 의사들이 풀어낸 올바른 음주 방법 가이드로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숙취를 예방하는 음주법이 대표적입니다. 숙취 예방을 하려면 술이 위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의 상승을 완만하게 만드는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름'이 많은 음식을 안주로 같이 먹는게 좋다는군요. 대표적인게 치킨입니다. 치즈, 낫토도 좋으며 위벽 보호를 위해서는 음주 전 미리 우유를 마시는 것 보다는 양배추를 먹는게 도움이 됩니다. 
또 숙취 예방을 위해서는 간이 알코올을 해독하는 능력을 알고, 이에 맞춰 음주를 하는게 중요합니다. 1시간 동안 분해 가능한 순수 알코올 양 (술에 함유된 에탄올의 양으로 도수/100*마신 양(ml)*0.8)은 '체중*0.1g'이라네요. 저는 7g이니 한 시간에 맥주 500cc 1/3이 적당량인 셈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음주법도 알아두면 좋은 정보입니다. 일본인 기준, 적정 주량은 순수 알코올로 하루 20g (맥주 500cc 한 잔, 와인 2잔 정도) 입니다. 일주일 총량으로 이 기준을 지켜야 하며, 일주일에 이틀 이상 '휴간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한 음주 후 구토가 하고 싶어질 때는 참으면 안됩니다. 자연스러운 생체 반응에 따르는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구토는 식도가 위산에 손상될 수 있으므로 구토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건 지양해야겠지요.
그리고 술과 함께 약을 먹는건 절대로! 안됩니다. 약은 원래 절반 정도 대사되는걸 전제로 처방되는데, 간에서 약과 알코올을 동시 처리해서 약리 효과가 지나치게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사의 절반을 알코올이 가져가므로). 그래서 음주 후 약을 먹어야 하면 최소 3~4 시간은 지나야 한다네요.

어떤 술이 어디에 좋은지?에 대한 정보도 실려있는데 고구마로 만든 전통 소주는 혈전 용해 물질을 증가시키며, 레드 와인 속 폴리페놀은 심질환과 동맥경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레드 와인의 레스베라트롤과 쓴 맛 나는 맥주 속 이소알파산은 치매 예방에도 효과적이고요.
이외에 만취 때 뒷담화가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전두엽이 마비되기 때문이며, 필름이 끊겨도 집에 찾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고정된 장기 기억 덕분, 술은 마실 수록 세지는게 아니라 무조건 (100%)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등의 재미있는 정보가 많습니다. 음주 후 목욕할 때 '히트 쇼크'가 와서 사망할 수도 있다는건 추리 소설의 트릭으로 사용해도 좋아 보였어요.

비슷한 조언이 반복되며, 관심이 없을 소재도 일부 섞여 있다는 단점도 있으나 여러모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책이 제공해 준 정보에 따라 앞으로는 한 주에 와인 1병 정도를 치즈 안주와 함께 즐겨볼까 합니다.

2025/07/20

도쿄의 뮤지엄을 어슬렁거리다 - 오타가키 세이코 / 민성원 : 별점 2.5점

만화가 오타가키 세이코가 도쿄 시내뿐 아니라 요코하마, 하코네, 유가와라, 사이타마 등 도쿄 근교를 포함한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직접 방문한 뒤, 그 경험을 일러스트와 함께 풀어낸 에세이집입니다. 저자의 시선과 감상이 담긴 일러스트가 좋아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느낌을 전해 줍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곳을 소개해드리자면, 도쿄 국립박물관은 저도 첫 일본 여행 당시 방문했던 기억이 나서 반가왔습니다. 저는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기나 모자이크 타일 벽 같은 세세한 디테일이 특히 인상적으로 묘사되는 덕분에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은 파울 클레를 비롯해 히가시야마 가이이 같은 일본 국민 화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장소일 것 같고요.
 요코하마 미술관에서 열렸던 동서양의 교류를 주제로 한 기획전 소개도 좋았습니다. 판화가 하세가와 기요시, 설치미술가 스가 기시오, 그리고 달리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당시 전시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스미다구의 호쿠사이 미술관에서는 '가나가와오키의 큰 파도' 같은 대표작을 상설 전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입니다.
도쿄 근교 하코네에 위치한 랄리크 미술관은 아르누보 유리공예의 대가 르네 랄리크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공간으로, 오리엔트 특급 열차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리소설 팬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어질 만한 장소입니다.
사이타마 국립 현대 미술관의 의자 컬렉션도 흥미로운데, 전시된 의자에 직접 앉아볼 수 있다는 점은 흔치 않은 경험일 것입니다. 입장료가 단돈 200엔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가성비 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곳입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뮤지엄 공간과 건축의 아름다움을 조명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사쿠라 조소관은 '동양의 로댕'이라 불리는 아사쿠라 후미오가 설계한 공간으로, 붉은 마노를 갈아 벽에 바르고, 외벽에는 전복 껍질을 가루 내어 덧칠했다는 설명만으로도 그 정성과 고집이 전해집니다. 단게 겐조의 작품이라는 요코하마 미술관, 유서깊은 료칸을 개축했다는 유가와라 미술관,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한 국립신미술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는 국립서양미술관 역시 건축물만 보아도 좋을 것 같고요. 특히 국립서양미술관은 일본의 유명했던 미술품 수집가 마쓰카타가 수집했던 컬렉션 중심인데 밀레, 마네, 모네, 고흐 등 유명 작가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있다니 빼 놓기 어렵지요. 이 정도 전시품에 입장료 500엔은 너무 싼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간단한 주위 소개도 볼거리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 현대미술관이 있는 기요스미시라카와는 커피 애호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동네라고 합니다. 미술 감상과 함께 거리 산책, 카페 탐방까지 더해진다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입니다.

컵 누들 뮤지엄이나 에비스 맥주 기념관 같은 공간들도 저자 특유의 호기심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집니다. 특히 요코하마에 위치한 컵 누들 뮤지엄은 음식에 대한 책을 발간한 경험이 있는 제 입장에서 더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네요. 마침 관련 책도 읽어본 적이 있고요. 에비스 맥주 기념관도 첫 일본 여행 당시 방문했던 곳인데, 또 가 보고 싶어집니다. 도쿄 스테이션 갤러리처럼 기차역 안에 위치한 미술관도 새로운 발견처럼 다가왔고요.

이렇게 저자의 시선을 따라 읽다 보면, 책 속의 여러 미술관을 메모해 두고 언젠가 직접 방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책의 상당수가 기획전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이미 끝났을 전시에 대한 내용은 독자 입장에서 실용성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상설 전시나 소장품 중심의 소개가 더 많았더라면, 아니면 뮤지엄 주변의 관광 정보가 더 곁들여지는게 보다 활용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겁니다. 또한, 박물관들을 지역별로 묶어서 지도와 함께 코스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더라면 여행자에게 훨씬 더 유익했을 텐데, 저자 주관적인 구성으로 묶여 있는 탓에 실용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흥미도를 찾기 어려운는 뮤지엄들이 등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담배와 소금 박물관, 도라상 기념관 등은 개성은 있으나, 일부 독자에게는 굳이 찾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공간일 수 밖에 없지요. 또 모든 주석을 책 뒷부분 미주 형식으로 처리한 것도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본문 하단에 각주를 바로 넣는 방식이었으면 훨씬 읽기 편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또는 근교 여행을 계획 중인 분이라면, 이 책에서 소개된 뮤지엄 중 한두 곳을 골라 직접 둘러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책 속의 어슬렁거림을 실제 여행으로 확장해 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여, 혹시 도쿄에 여행간다면 하루 정도 뮤지엄 둘러보는 코스가 무엇이 좋을지, 제 기억에 남은 뮤지엄 중심으로 ChatGPT에게 물어보았는데 아래 코스를 추천하네요. 우에노 미술관 트리오 코스는 다음 여행에 참고해야겠습니다.1~2년 안에 꼭 가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코스 1: 우에노(Ueno) 미술관 트리오

도쿄 국립 박물관 (Tokyo National Museum) → 국립서양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 도쿄도 현대미술관 (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장점: 모두 우에노 공원 내 도보권. 이동 시간 최소화, 하루에 세 곳 방문 가능

코스 흐름: 도쿄 국립 박물관 (추천 관람 2h) – 일본·아시아 전통·불교미술과 국보 컬렉션이 압도적 → 도보 5분 → 국립서양미술관 (추천 관람 1.5h) – 피카소, 고흐, 폴록 등 서양미술 정수 → 도보 5분 → 도쿄도 현대미술관 (추천 관람 1.5h) – 국제전시와 현대미술 대규모 기획전

총 소요 시간: 관람 5h + 이동 10분 + 휴식/점심 포함 약 6시간 → 오전 9시 시작 시 오후 3~4시 일정 종료 가능

코스 2: 도쿄 북·서쪽 모던 아트 여정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MOMAT) →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또는 스미다구 호쿠사이 미술관

장점: 일본 근대·현대 미술 → 전통 장식 미술 순으로 다양한 감상 가능

코스 흐름: MOMAT (Takebashi 역) – 2~3시간 → 이동: 지하철 도자이선 → 오모테산도역 환승 → 긴자선 →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1520분) 관람 1.52시간 또는 지하철 이동 → 스미다구 호쿠사이 미술관 (약 20~30분 이동, 1–1.5시간 관람) 

총 소요: 관람 3.55h + 이동 4060분 → 여유 있게 오후 일정 종료 가능

2017/06/24

오늘 뭐 먹지? - 다카기 나오코 / 고현진 : 별점 2점

오늘 뭐 먹지? - 4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고현진 옮김/artePOP(아르테팝)

신간이 나오면 찾아보곤 하는 다카기 나오코에세이 만화입니다. 제목처럼 평상시 먹는 음식들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로 구분되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부 19편에 스페셜 만화 두 편을 포함한 21편 구성으로, 각 편이 끝나고 해당 음식 사진들과 정말로 짤막한 만화가 덧붙여진 형태이고요.

다카기 나오코 만화다운 소소함, 그리고 소소함 속에서 피식하게 만드는 잔재미가 넘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굉장히 일상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이라 공감도 많이 갔어요. 여름에 차가운 소면 등 차가운 음식만 먹은 후, 위기 의식을 느끼고 간단 미소시루를 끓여 먹는다는 이야기처럼요. 조미료가 냉장고에 넘쳐난다는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히 특별한 조미료는 유통 기한 내 다 먹기가 쉽지 않지요. 계량을 대충대충한다는 내용도 와 닿았고요. 무엇보다도 맥주를 좋아하고, 중간에 술에 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제 이야기였습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슬쩍 소개되는 레시피도 반가왔습니다. 토마토 편에서 소개된 토마토 먹는 방법 - 토마토에 소금만 살짝 뿌려먹는다, 토마토를 맥주 안주로 먹는다 -, 다카기 나오코의 비법 국수장 레시피 - 간장, 미림, 청주 가쓰오부시 (등)을 넣고 끓인 농축 엑기스 - , 닭 가슴살을 물에 술과 소금 조금, 생강과 함께 끓인 후 불을 끄고 예열로 한참 익힌 후 간장과 청주, 고추기름을 섞은 양념장을 끼얹어 먹는 레시피(닭 국물은 소금, 후추로 간하고 계란과 파를 풀어넣어 국을 만든다)는 한번 해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우리나라는 생강대신 마늘을 넣으면 되겠지요?

하지만 일본 기준이고 등장하는 음식들도 일본 요리들 - 미소 어묵탕, 토필 볶음, 우메보시, 히야얏코 등등 - 이 많다는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내용 대부분이 "배 빵빵 일본 식탐 여행" 처럼 여행지에서 생긴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되는 여행지 별미도 아니고, 그냥 집밥들로 '어떤 음식을 먹고 싶어서 해 먹었다'라는게 전부라서 별다른 드라마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술을 많이 마셔 숙취가 심해졌기 때문에 콩나물 국을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로 만화 한편이 나온 것과 다를게 없어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런 소소함이 다카기 나오코 작품의 매력이지만, 내용면에서 볼륨이 부족하다고 느껴진건 어쩔 수 없네요.
아울러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매 편 이야기도 부실합니다. "배 빵빵 일본 식탐 여행" 대비 한 페이지에 포함된 그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입니다. 출판사의 의도인지, 원래 이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격 대비해서 내용이 충실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단점이 더 눈에 밟히기에 감점합니다. 마지막에 결혼했다고 나오는데 이전에 읽은 작품들 모두가 독신으로 오래 살아온 이야기로 좀 급작스럽더군요. 여튼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재미있는 만화를 많이 그려주기를 바랍니다.

2010/06/22

야구장 습격사건 - 오쿠다 히데오 / 양억관 : 별점 2.5점

야구장 습격사건 - 6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동아일보사

유명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여행 에세이집으로 주니치 팬인 저자가 야구장만 돌아다닌다는 독특함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총 6곳의 야구장이 등장하는데 모두 지방 구장이고 심지어는 타이완까지 등장하니 생각보다는 범위가 넓은 편이죠. 이야기도 굉장히 개인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가고 있어서 쉽게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자신만의 주제를 담은 여행기라는 점에서 마치다 코우의 <동경산책>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점도 많았는데 제일 달랐던 점은 "야구" 자체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거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야구경기를 보러간 그 장소에서 이런저런 경험을 한다는 여행기적인 이야기가 중심일 뿐 야구경기는 그냥 여행의 목적일 뿐이거든요. 그나마 등장하는 선수들과 경기에 대한 묘사도 선동열 선수가 활약하던 90년대 후반이 무대였다면 아는 선수가 더욱 많았을텐데 2000년대 쓰여진 책이라 아는 선수가 썩 많지 않아서 쉽사리 몰입할 수는 없었고요.

그리고 책 전체적으로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너무 강조하듯이 쓰여져 있고, 그러한 사고방식이 너무 중년아저씨의 보수적인 시각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예를 들자면 예를 들어 오키나와에서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혐오한다고 쓰여있는 것 같은거죠. 뜨거운 오키나와에서 긴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이 더 비정상적인거 아닌가 싶을 뿐더러 운전하면서도 맥주를 자주 마시는 인간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또한 여행 자체도 자신의 옷은 몇만엔 어치를 걸치고 한끼 식사는 몇천엔짜리를 서슴없이 하며 매일같이 마사지를 즐기고 최고급 호텔의 트윈베드룸에 혼자서 묵는 호사스러운 여행이라 썩 와닿지 않았습니다. 돈 잘 버는 작가라는 것은 알겠지만 여행기란 모름지기 독자와 그 감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거늘 이래서야 순수한 여행기로서의 재미가 많이 경감되는게 아닌가 싶네요.

쉽게 읽히는 재미, 작가의 기발한 발상이 곳곳에 엿보이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몇가지 실망한 부분도 있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글쓰는 재주 하나만큼은 돋보인 만큼 다음에는 작가의 정식 소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덧 1 : 야구경기의 묘미를 새롭게 하나 익힌 것은 수확이네요. 바로 "느긋하게, 편안하게 '맥주를 마시면서 선수들을 야유할 수 있다. 그런 경기는 야구뿐이다." 라는 저자의 말 처럼 승패보다는 경기를 즐기면서 야유를 하는 관전 방식 말이죠. 앞으로는 저도 이길때는 이길때대로 즐기고 질때는 야유라도 실컷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습니다.

덧 2 : 정말 부럽습니다. 스프링캠프부터 시즌 경기를 보기 위해 전국 구석구석을 며칠씩 다니며 좋은 곳에만 묵고 맛난것만 먹으며 그걸 글로 써서 돈까지 벌다니! 야구 팬으로서는 꿈의 직업이 아닐까 싶네요. 부러우면 지는거겠죠?

<각 여행지별 상세 소개>

<오키나와 2월 5 ~ 12일>
오키나와 자탄 구장의 주니치 스프링캠프와 기노 만 구장의 요코하마 스프링캠프를 돌아보는 일정
시즌 전의 스프링 캠프라 야구에 대한 이야기는 적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이 스프링캠프를 둘러보는 이야기가 제일 비중이 크더군요. 그러나 아무래도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인지 굉장히 많은 선수가 언급됩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선수라고는 다이호 정도밖에는 없네요.
특산물로 "대사각하의 요리사"에도 나온 명물요리 타코라이스가 맛있다고 잠깐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코쿠 4월 19 ~22일>
마쓰야마의 봇짱 스타디움에서 주니치와 야쿠르트의 경기를 보기 위한 일정.
다른건 모르겠고 영화광인 작가가 시코쿠에서 감상한 영화가 한국영화 "친구"인데 아주 호평인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야구는 페타지니 선수가 비중있게 언급되는 것도 반갑지만 두번째 경기에서의 야쿠르트 선발투수가 이리키라고 하니 더욱 반가왔어요.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OB시절 암흑기에 비교적 괜찮은 투구를 했던 외국인 투수였거든요. 현 강인권 코치와의 배터리가 아주 멋지고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참고로 이 경기에는 이와세와 이가라시 료타 선수가 모두 나오는 등 대단한 경기였던 것 같네요. 야쿠르트의 후루타 선수의 끝내기 안타로 게임이 끝났다니 주니치 팬인 작가에게는 안된 일이겠지만...
두번째 경기 후 다카마쓰로 이동. 사누키 우동에 대한 극찬이 정말 대단해서 가가와 지방에 꼭 가서 먹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타이완 5월 13~16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대 오릭스 블루 웨이브의 해외 첫 공식전 관람차 떠난 외국 여행입니다. 타이완 4박 5일 코스죠.
마쓰우라 아야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공식전에서 일본 국가를 불렀다고 하네요. 아이돌의 아슬아슬한 가창력을 불만스럽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팀에서 오릭스의 세기뇰만 들어본 기억이 나는 선수고 그 외의 아는 선수는 한명도 없더군요.
이 경기 말고도 대만 프로경기까지 보고 오다니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뭔가 색다르고 독특한 문화를 즐기러 간 것 같기도 합니다만.

도호쿠 6월 7~10일
아키타현 내륙 가쿠노다테와 히나이에서 이스턴리그 쇼난 시렉스대 자이언츠 2군 공식전.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로 월드컵을 보지 않고 야구경기를, 그것도 2군경기를 보러가는 작가의 야구사랑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가쿠노다테의 사무라이 저택은 가보고 싶더군요.

명대사 하나 작렬합니다.
"자이언츠 2군 - 인재의 보고인 동시에 희망의 별을 기르다 죽여버리는 농장"

히로시마 9월 22~24일
히로시마 대 요코하마 경기입니다.
리그 끝자락에 하위권 팀들의 경기를 관전하러 간 탓에 경기에 대한 긴장감은 전무하더군요.
관광지라는 느낌도 크지 않습니다. 비싼 호텔에 묵으며 비싼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편한 여행이니까 당연하겠죠.

규슈 11월 30~12월 2일
OB들의 '마스터스 리그' 관전.
상당히 진지한 OB들의 리그로 보였습니다.
OB들은 80년대 활약 선수들이라니 역시나 아는 선수가 없었지만 3루 베이스 코치 철완 이나오 가즈히사는 아는 이름이었습니다.
구마모토 특산물 말고기 육회는 겁나 맛있었다고 하네요.

2022/02/11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쿠스미 마사유키 / 박정임 : 별점 3점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박정임 옮김/살림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먹부림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총 3부 구성인데, 가장 비중이 높은 1부는 혼자서 혼술을 마실 때, 어떤 안주를 직접 만들어 어떤 술과 함께 먹는지에 대해 쓴 글들입니다. 2부는 혼자서 술집에 갈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요. 3부는 술을 다 먹고 마무리로 어떤걸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로 술과 안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술과 안주를 사랑하고,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고집과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술잔이라던가, 차림상의 구성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다츠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고요. 얼마 전에 읽었던 "혼밥 자작 감행"의 쇼지 사다오도 그러했는데, 혼술하는 아저씨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먹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전략, 전술'을 고려해서 안배한다는, "음식의 군사"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돈가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돈가스를 소금, 간장, 소스 순서로 찍어 먹는다던가, 마지막 두 조각을 미리 소스를 뿌려 절여두었다가 밥이랑 함께 먹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에피소드와 거의 똑같았으니까요. 오뎅을 접시에 담을 때 색감을 고려해서 담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쥬쿠 카페 베르크의 커피 역시 "음식의 군사"에서도 소개되었었지요,

그러나 돈가스 정식을 일종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는건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육류에 전채 (야채절임), 샐러드 (양배추), 수프 (미소시루), 푸짐한 채소 요리 (밥)이 곁들여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왕 코스 요리니 주문할거면 값은 비싸도 히레가스 정식을 주문하자라던가, 맥주를 시킬 때 "이집 맥주는 어디 건가?"하고 브랜드를 물어보면 와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에 이르르면, 이런걸 만화로 선보였다면 아주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요리 에피소드보다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의 길" 속 추다와 멘치빵을 재현해 먹는 에피소드는 과연 만화가구나! 싶어서 기억에 남고요.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 더 기억에 남은 것 같네요. 참고로 원작 속 '츄다' 레시피는 소주 3, 사이드 7의 비율입니다. 멘치빵은 아래와 같고요.

기요켄의 슈마이 도시락에 대한 글은 저자의 데뷰작 "스키야키"가 떠올라서 반가왔습니다.

혼자 안주를 만드는 이야기 속 레시피도 짤막하지만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가다랑어 안주입니다. 조금 얇게 썬 가다랑어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파를 잘게 다져서 듬뿍 올립니다. 다음은 양하도 잘게 다지고, 차조기나 깻잎 한 장도 채썰어 올립니다. 마지막이 비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늘 대신 편을 썬 마늘장아찌를 올리는겁니다. 생마늘은 맵고, 간 마늘은 느낌이 약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레몬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먹는다는데, 반주로 니혼슈, 조금 비싼 사케가 제격이라네요. 가다랑어 회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방어회로 다음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방어회는 먹다보면 물려서 남기기 십상이니까요. 

다른 먹부림 콘텐츠에서 탕두부라고 소개되는 물두부 레시피는 정말 쉬워 보여서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냄비에 다시마 한 장을 깔고 물을 담아 가스버너 등에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두부를 넣은 뒤 끓고 나면 간장과 가쓰오부시, 다진 파를 섞은 종지에 찍어 먹으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기로는 '조야나베'도 만만치 않아요. 냄비에 물을 붓고 저민 생강 두 조각 정도를 넣은 뒤 끓이다가 큼직하게 썬 양배추, 기다란 삼겹살을 세 토막 낸 걸 넣고 갈은 무와 다진 파를 듬뿍 넣은 아지폰(감귤 과즙 폰즈 상품명)에 찍어 먹는게 끝입니다. 폰즈가 집에 없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재료나 조리법 모두 너무 쉬워서 당장 해 먹어도 됨직한 수준이네요. 심지어 우러난 국물은 제가 좋아하는 우동 사리를 넣어 먹으면 끝장이라니, 꼭 한 번 해 먹어 봐야 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열한 올리브 오일에 큼직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양배추 볶음, 오니기리를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굽다가 간장과 미림, 미소 양념장을 발라 굽는 오니기리 구이, 간단한 여주 볶음밥, 통조림 참치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 만든 속을 버터 발라 구운 식빵에 끼워 먹는 참치 토스트(굽지 않은 빵에 머스터드를 바른 뒤 슬라이스 치즈를 깔고, 그 위에 참치 마요네즈를 올려 구워도 맛있다네요) 등 대부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만 소개되고 있어서 아주 반가왔습니다.

뻔한 먹부림 에세이지만 재미도 있고, 레시피들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적당합니다.

2012/10/06

빨리 명탐정이 되고 싶어 - 히가시가와 도쿠야 / 채숙향 : 별점 2점

빨리 명탐정이 되고 싶어 - 4점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채숙향 옮김/지식여행

최근 각광받는 유머 본격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단편집. 가상의 도시 이카가와 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는 탐정 우카이와 견습 류헤이의 활약상을 다룬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도 몇 개 있고, 특유의 유머 감각도 여전하나 작품별 수준의 편차가 꽤 큰 편입니다. 몇 작품은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어요. 탐정역인 우카이와 조수 류헤이 설정이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진부했다는 것도 감점 요소고요.

때문에 전체적인 별점 평균은 2점입니다. 그러나 읽는 재미는 있고 괜찮은 작품도 있는 만큼 작가의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할 것 같네요. 킬링타임용으로는 적합해 보입니다.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후지에다 저택의 완벽한 밀실"

범인 슈사쿠의 범죄가 먼저 선보이는 도서 추리단편.

밀실을 만드는 공작이 꽤 그럴듯한데 실제 추리의 과정은 없고, 결말이 이른바 "돌직구"라는게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트릭 따위는 잘 모르겠지만 범인은 너야!"라는 결말인데 발상의 전환이 돋보였습니다. 추리 부분 약하지만 이 돌직구 아이디어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시리즈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탐정 컴비인 우카이 - 류헤이의 소개가 거의 되지 않는 것도 독특했어요.

"시속 40킬로미터의 밀실"

류헤이의 미행 도중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

괴짜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탐정 우카이와 조수 류헤이 컴비가 조금씩 소개됩니다. 전개도 작가 특유의 유쾌함이 잘 살아 있거여. 그러나 여러 가지 조건이 복합적으로 갖춰진 상황에서 발생한, 우연에 의한 사고라는 진상 때문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일곱 개의 맥주상자"

종적을 감춘 의뢰인, 골목길 가정집 창문을 깬 돌멩이, 동네 주점에서 사라진 맥주상자, 부동산 주인을 살짝 치고 도망간 뺑소니 택시라는 일상계스러운 소재와 단서가 조합되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작품.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설득력이 있으며, 자판기의 형태마저 이용한 트릭이 아주 좋았습니다. 일본스럽기는 하지만 설명도 제법 좋은 편이고요. 우카이가 정말 명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점, 그리고 새 캐릭터인 사야카 양이 무척이나 귀엽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딱 한 가지, 마지막 범인의 폭주 및 류헤이의 추격은 일상계 분위기를 깬 것 같아 아쉽지만, 과장된 묘사가 작가의 특징이니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참새숲의 이상한 밤"

사이온지가의 당주 쇼조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 시작 부분부터 수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설정이고(류헤이에게 에리가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에러죠), 시체를 휠체어에 묶는다는 트릭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행의 진상도 허무하기 그지없고요. 평범 이하의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보석 도둑과 엄마의 슬픔"

1인칭 시점인데 화자가 애완동물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지닌 작품. 또한 어떤 동물인지를 마지막에 밝힌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낮습니다. 트릭은 파격적이지만 그만큼 작위적이고 너무 독자를 속이려는 게 드러나서 별로 와닿지 않았던 탓입니다. 중요한 정보를 숨기는 전개 역시도 억지스러웠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0/05/31

과학을 훔친 29가지 이야기 - 하인리히 찬클 / 박소연 : 별점 3점

과학을 훔친 29가지 이야기 - 6점 하인리히 찬클 지음, 박소연 옮김/말글빛냄

"과학의 사기꾼"의 저자 하인리히 창클의 최신작으로 이번에는 과학사에 유명한 허위 논문과 이론, 장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것이 가장 큰 장점인 책이죠. 아무래도 반 이상이 악의없는 장난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이 유쾌한 탓이 큰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것이 먹혔을까?싶은 터무니없는 것들에 대한 학계의 진지한 반응이 더욱 웃기네요. 물론 장난치고는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기도 했습니다만.

몇가지 이야기, 특히 필트다운인과 카티프의 거인 이야기는 책의 주제와 좀 동떨어지긴 했지만 이외의 내용도 대체로 재미있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학과 유머, 개그에 모두 관심이 있으시다면 추천드립니다.

몇가지 인상적인 “장난”을 소개해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파이pi” 전쟁 - 원주율에 대한 공격"

파이는 누구나 3.14…. 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에 나오는데로 “3”이라고 규정해야 한다는 이론이죠. 성경 열왕기에 ‘그릇의 지름이 10엘레면 30엘레의 끈으로 둘러쌀 수 있다’라는게 근거라고 하네요.

"인텔리전트 디자인? - 창조설에 대한 풍자"

파이 이야기에도 등장한 성경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또다른 장난입니다. 창조론에 대한 현대적 형태를 “인텔리전트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패러디해서 “인텔리전트 폴링”, 즉 중력이 신의 의지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발전된 것이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FSM, 즉 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라고 하네요. 아울러 이 FSM도 지금 종파가 분열 중이라니 양덕들의 패러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궁금해집니다. 

* 덧붙이자면, FSM의 아멘과 같은 기도 용어는? Ramen입니다!

"위험한 화학물질 - 디하이드로젠모노옥사이드와 에탄올의 정체"

유명한 농담일 수도 있는 ‘디하이드로젠모노옥사이드’, 즉 DHMO 소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음료수에 이것이 들어갔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의 정체는?... 물이라고 하네요. 

똑같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 지저분한 분수에 "주의! 이 분수의 물에는 하이드로제늄이 다량 함유되어 있음!"이라는 표지판을 걸었더니 사람들 출입이 딱 끊겼다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하이드로제늄은?... 수소이고요. 

마지막 "에탄올" 역시 독일에서 맥주에 에탄올이 들어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에탄올은?... 맥주에 포함되어 있는 알코올입니다. 만우절 농담치고는 너무 학술적이죠?

"모두가 열망하는 프로그램 - 출판을 위해 발명된 글 생성기"

MIT 공대생들이 만든 SCIgem, 그러니까 학술 논문 생성기에 대한 이야기에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을 통해 뭔가 있어보이는 논문을 만들어준다는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유용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도 도입이 시급해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왠지 한국 SF의 명작인 “창작기계”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네요.

"유명한 코 동물 - 비행류의 삶과 죽음"

"비행류"는 저도 오래 전에 과학잡지(아마도 Newton?)에서 읽었었지요. 거꾸로 서서 코로 걷는다는 환상의 동물! 이런 류의 책에서는 빠지지 않는 사례인가봐요. 제가 처음 접했을 때는 초등학생이었을땐데 그때는 진짜 있는 생명체인줄 알았더랬죠.^^

2010/04/09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 - 윤광준 : 별점 2.5점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 - 6점
윤광준 지음/생각의나무

몇주전 읽었던 “윤광준의 생활명품”에 이은 윤광준씨의 생활 속 명품 이야기 책입니다. 제목도 비슷하고 내용도 비슷한 형제 같은 책으로 이 책이 훨씬 먼저 출간되었기에 형님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동생이라 할 수 있는 “생활명품”에 비하면 재미가 없었습니다. 소개되는 상품에 비해 쓸데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고, 신변잡기적인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윤광준씨가 저자로서의 내공이 확실히 쌓이기 이전이었거나, 아니면 글을 쓴 컨셉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어쨌건 저는 별로였어요. 소개되는 상품도 18종 밖에 없어서 풍성함도 부족했고요.

대부분의 내용이 본인이 직접 구입하여 사용한 것들에 대한 사용기라는 주제에는 충실해서, 사용기 측면으로는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특히나 정말 한국의 장인정신이 빛어낸 명품이라 할 수 있는 송림티롤화는 언젠가 꼭 한켤레 구입하기로 굳게 결심했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런데 생활 속 명품이라는 주제와는 다르게 개인 취향의 기호식품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담배 (던힐 라이트) / 맥주 (레드락) / 간장 (몽고간장) 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의아했어요. 뭐 간장이야 명품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던힐 라이트나 레드락 맥주가 생활 속 명품이라니 너무 쌩뚱맞잖아요. 하지만 달리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자신의 일상속 깊이 침투한 기호물이 명품이 될 수 있다라는 색다른 관점도 괜찮아 보이기는 하네요. 그렇다면 제 생활 속 명품은 One 0.1mg 과 버드아이스, 그리고 둘둘치킨의 마늘치킨 되겠습니다.

2007/06/06

タック&タカチの事件簿 6つの箱の死体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오하시 카오루 : 별점 3점

추리소설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원작을 오하시 카오루가 만화로 옮긴 두번째 작품. 아키타 서점의 본격 미스테리 시리즈로 출간된 시리즈 중 하나로 간만에 간 북오프에서 건졌습니다.

제목대로 대학 동기이자 친구이상, 애인이하 관계인 탁과 타카치가 탐정으로 활약하는데, 탁이 안락의자 탐정역을 소화하고 있고 타카치는 좋은 조언자이자 동료로 등장합니다. 이 책은 표제작을 포함해서 여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토막 살인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게 특징이고요.

한 권에 여섯 편이나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탓에 표현이 빈약해져 설득력이 떨어지는 작품이 몇 개 있는건 사실이지만 "추리만화" 로의 완성도는 충분합니다. 오하시 카오루의 여전한 그림도 좋았고요. 주인공 커플 탁과 타카치를 비롯한 보안 선배와 우사코 등 명랑쾌활한 음주 추리 동아리(?) 멤버들 역시 마음에 드네요(등장인물들은 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만화로는 충분히 즐길만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시리즈(니시자와 야스히코와 오하시 카오루 컴비)의 첫번째 작품도 구해보고 싶어집니다. 이외에도 책 뒷 커버를 보니 이 시리즈, 즉 아키다 서점의 본격 미스테리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이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작품, 니카이도 레이토 원작 작품, 우타노 쇼고 원작 작품등 네임벨류가 상당하던데 이들도 역시나 전부 말이지요.

수록작별 간단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번째 작품인 "해체수호"는 한 행복한 가정에서 벌어진 "곰인형 토막 사건" 의 진상을 파헤치는 소박하고 잔잔한 작품으로 꽤 그럴싸하고 합리적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두번째 작품 "맥주집의 문제"는 탁과 타카치의 선배인 보안 선배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이야기로 꽤 재미는 있지만 이야기의 비약이 좀 심했습니다. 누군가가 대량의 맥주 주문을 받았다는 짤막한 사실에서 끌어내는 진상이 너무 장황해서 짧은 단편 만화 하나로 소화하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내용 자체는 꽤 재미있는 편이었으니 만족.

세번째 작품이자 표제작 "6개 상자의 사체"는 탁이 골칫덩이 숙모가 부탁한 딸의 결혼 문제로 찾아간 집에서 살인 사건과 조우한다는 내용의 작품으로 내용적으로 상당히 완성도 있는, 표제작이 될만한 수준의 작품이었습니다. 토막 살인 사건의 이유도 나름 합당했고 범인과 트릭 역시 그럴싸 했거든요.

네번째 작품 "해체 양도"는 토막 살인 사건과 한 중년여성이 에로 잡지를 다량으로 구매해 간 것을 연관시키는 이야기인데 두번째 작품과 비슷한 단점, 즉 추론의 단초가 되는 사실에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의 설득력이 빈약하다는 문제가 있더군요. 또 에로 잡지를 사 가야만 했던 이유가 부실한 만큼 그다지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섯번째 작품 "사라진 실내화의 문제"는 보안 선배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벌어진 실내화 분실 사건과 한 여학생의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단서도 공정하고 추론도 합당한, 잘 짜여진 단편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라 할 만 합니다. 나름 메시지도 전해주고요. 번역이 욕심날 정도로 괜찮은 이야기였습니다.

여섯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은 "해체 신속". 제목대로 역시나 토막 살인을 다루고 있는데 10년전의 사건을 신문으로 읽고 추리하는 전형적 안락의자 탐정물이었습니다. 트릭도 나름 기발한 편인데 다만 만화의 한계인지 동기부분의 표현이 좀 약해서 확 와닿는 맛은 없더군요. 그래도 단서와 그것을 통한 추론 하나는 볼만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