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막장 드라마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막장 드라마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1/02

법의 체면 - 도진기 : 별점 2점

안녕하세요, 2026년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처음으로 리뷰를 올리는 작품은, 척박한 한국 본격 추리물 시장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 두 편은 좋습니다. 법을 잘 아는 작가가 법에 대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진기 작가만 쓸 수 있을 법한 작품이에요. "완전범죄"는 본격물을 방불케 하는 추리가 펼쳐지기도 하고요.
"애니"는 다소 독특한 설정의 SF인데, 이 역시 설정만큼은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천국"과 "행복한 남자" 두 편은 한마디로 망작이었고, 앞서의 세 편 역시 전개와 묘사 등 소설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빼어난 설정과 아이디어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작가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분명 있는데, 아쉽게도 단점이 더 많습니다.

수록작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

호연정 변호사에게 변상일이 찾아와 자신의 장물 취득 사건 3심 변호를 의뢰했다. 변상일의 유죄가 확실했지만, 시한부 인생이라는 변상일의 청에 못 이겨 호연정은 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상고는 기각되었다.

그러나 상고 기각 확정 후, 변상일이 강원도 홍천에서 일어났던 ‘청테이프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증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변상일의 쪽지문이었다.

호연정 변호사 시리즈 단편입니다. 변상일의 조작으로 유죄가 확정된 장물 취득 사건이 일어난 날짜가 청테이프 살인사건 발생 일자와 같아서, 변상일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지만 풀어줄 수 없는 딜레마를 다룹니다. ‘법의 체면’이라는 제목 그대로이지요. 법관들은 체면 때문에 이전 판결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는 굉장히 흥미롭고, 변상일이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딸과 아내를 잃었는데, 음주운전 가해자 장봉호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탓에 장봉호와 법에 복수하려고 결심했다는 서사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변상일의 범행 과정을 1인칭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처럼 묘사한건 반칙입니다. 독자는 변상일이 진범이 아니라고 오해하게 되니까요. 전개에 필요했던 부분도 아니니 빼야 합니다. 마지막 변상일의 자살도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을 잘 풀어냈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쉽습니다.

당신의 천국

국회의원 최명환에게 상담 차 장애가 있는 박성혜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환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막장 드라마를 쓰다가 시민단체로 고발당하고 취조당한 끝에 자살 시도로 몸을 망쳤다는 박성혜의 1인칭 고백입니다.

그러나 장황한 고백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낮고 시시합니다. 박성혜가 최명환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무슨 논리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최명환을 살해하는 방법도 생수통에 독을 풀었다는 것인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자가 생수통에 어떻게 약을 풀었는지, 청산가리는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묘사도 문제입니다. 28살 여성의 한 서린 독백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건질 만한 점이라면 박성혜가 ‘신시아’라는 필명으로 썼다는 막장 드라마의 내용뿐인 막장 범죄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완전범죄

석지연은 동거하던 직원 방미래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사인은 의심할 바 없는 뇌출혈이었고, 방미래가 술에 취한 줄 알아 방치했다는 변명은 설득력 있어 보였다.

의사 출신 김 검사는 피해자가 거액의 질병 사망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기소하는데...

과실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 완전범죄가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이자, 법정에서의 공방이 벌어지는 법정물 단편입니다.
작 중, 김 검사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동기. 단지 직원 방미래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인 사장 석지연이 그녀를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2. 범행 방법. 마침 그 시간에 뇌출혈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 검사는 첫 번째는 거액의 보험으로, 두 번째는 평소 피해자에게 뇌출혈 전조 증상이 있다는 점을 눈치챈 범인이 보험 가입을 유도했고, 뇌출혈이 일어났을 때 방치했다는 답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방미래의 연인 류소이의 증언 등을 통해 법정에서 전조 증상은 2개월 전 부터 있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이러한 본격 추리적인 재미에 더해 법적인 딜레마 부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 검사는 방미래의 의료 기록을 보고 그녀가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거의 즉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석지연이 방미래를 방치했던건 방미래의 죽음과 인과관계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녀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본격물적인 요소와 법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딜레마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나 황 판사가 의사인 아내를 통해 방미래의 사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 이를 숨긴 채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결말은 작품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아쉽기만 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애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던 동한은 금사원 박사의 연구에 피험자로 응모했다. 하룻밤에 한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꿈을 꾸게 해 주는 ‘영생’ 실험이었다.

설정은 정말 멋집니다. 한 평생의 꿈을 꾸게 하면 결국 그것이 영생에 가깝다는 발상은 정말 혹할 만 하니까요. 친구 수민에게 사 주었던 전기 충격기로 뇌에 삽입된 칩을 제거한다는 결말도 작가의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 깔끔합니다.

하지만 연구로 만들어진 ‘꿈’에 자아가 생겨 본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전개는 뻔합니다. 설명도 충분하지 않아 와 닿지 않고요. 애니와의 사투 역시 박진감은 넘치지만,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탓에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설정과 마무리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다른 작품들도 이 정도로만 정리되었다면 훨씬 좋을텐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행복한 남자

꽃뱀에게 당한 한 남자의 약 반년에 걸친 일기 형식을 빌린 독백으로 내용도 뻔하지만, 그나마의 설득력조차 낮습니다. 문체가 30대 남자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식이고, 과장되고 낡은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는 결말 역시 식상하며 전혀 현대적이지 못합니다.

낡은 설정을 낡게 풀어낸, 새로운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탓에 2025년에 읽을 이유가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7/05/28

허즈번드 시크릿 - 리안 모리아티 / 김소정 : 별점 2점

허즈번드 시크릿 - 4점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마시멜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드니에서 딸 셋, 남편 존 폴과 행복하고 무난하게 살고 있는 성공한 주부 세실리아는 어느 날 존 폴의 비밀 편지를 다락에서 발견했다.
레이첼은 30여년전 살해당한 딸 쟈니에 대한 회한으로 평생을 보내온 할머니로 쟈니의 죽음 이후 남편, 아들과 멀어진채 살아왔는데 아들 부부가 유일한 위안인 손자 제이컵과 함께 뉴욕으로 간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테스는 남편 윌, 사촌 펠리시티와 함께 광고회사를 하는, 아들 한명이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어린 시절부터 펠리시티와 떨어진 적이 없는 단짝이었는데, 급작스럽게 남편과 펠리시티가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들었다.

실수는 사람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 - 알렉산더 포프.

최근 가장 핫한 베스트셀러인 책입니다.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읽을거리를 찾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습니다. 세실리아가 존 폴이 남긴 비밀 편지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궁금해 하는 과정까지는 흥미롭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절반 정도 부분인데,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데 성공하고 있어요. 도입부의 판도라 상자 이야기와 엮이는 아이디어도 절묘하고요.
뒷 부분도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남편 존 폴이 과거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고백하는 편지에 대해 고민하는 아내 세실리아의 심리 묘사가 아주 준수한 덕분입니다. 특히 지역 공동체에서의 삶 때문에 피해자의 어머니인 레이첼과 얽히는 과정에서 세실리아의 긴장이 극으로 치닫는 장면이 아주 대박이었어요. 딸을 허무하게 잃은 레이첼의 심리 묘사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편집증과 같은 심리 상태를 아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딸의 죽음 때문에 남편, 아들과의 관계가 파탄나버렸다는 묘사도 발군이고요. 시드니라는 낯선 공간을 무대로 했다는 점, 부활절 풍광과 핫 크로스번같은 디테일도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이야기의 핵심인, '아내가 어느날 남편이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알게 된다.'는 설정이 지나칠 정도로 흔해 빠진 탓이 큽니다. 때문에 작품이 살아남으려면 차별화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사실은 남편이 범인이 아니고 범인을 숨겨주고 있었다던가("레베카"), 아니면 남편이 아직도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라던가 (스티븐 킹의 중편 "행복한 결혼 생활") 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이 작품이 선택한 방법은 "섹스앤시티"나 "위기의 주부들"같은 미국 막장 드라마 설정을 가져온게 전부입니다! 등장하는 아줌마들 모두 머릿 속에 섹스 생각밖에 없어요! 기승전섹스, 생각의 단계가 이거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 외 고부간 갈등과 불륜이라는 한국 일일 드라마 소재도 좀 섞여있는 정도고요. 제 취향과는 완전히 달라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또 레이첼이 쟈니의 죽음 이후 삶이 망가졌다는걸 세실리아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세실리아의 죄책감이 별로 부각되지 못합니다. 이래서야 세실리아 혼자만의 고민일 뿐이죠. 최소한 이전부터 친했다, 또는 잘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레이첼의 붕괴된 심리를 세실리아가 공유하는 전개였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없이 남편이 거의 30여년전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엄청난 문제처럼 부각시키니까 솔직히 설득력도 좀 많이 떨어집니다. 공소시효도 한참 지났을 뿐더러 범행을 저질렀을 때 까지의 삶보다 그 이후, 특히 결혼하고 함께 지낸 삶이 더 길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최소한 진심을 믿어주고 잊어버리는게 현실적일 테니까요. 존 폴은 그만큼 참회하는 인생을 살아오기도 했고요.

세실리아의 고민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레이첼이 피해자 포지션으로 확실히 와 닿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특히 아들 롭은 내버려뒀으면서 손자 제이컵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이며 며느리를 미워하는 모습은 완전 비호감이기 때문입니다. 카드로 만든 집 운운하며 가장 중요한 카드가 제이컵이라 그 카드가 빠지면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손자이기는 하지만 부모가 직접 뉴욕으로 데려간다는데 뭘 어쩌자는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게다가 아이를 더 많이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니, 완전 우리나라 꼰대 시어머니 저리가라에요. 물론 직접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지만 심리묘사가 지나칠 정도죠. 이래서야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악역에 더 가까와 보입니다. 쟈니의 죽음으로 인한 안쓰러움보다는 악당이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 다했지요.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지막 결말입니다. 남편의 죗값으로 내 딸이 불구가 되었다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장면은 솔직히 어이가 없어요. 저라면 레이첼에게 남편의 죄를 고백하고, 남편에게 보복하라고 했을 겁니다. 그 대신 레이첼도 목숨을 내 놓아야겠지요. 레이첼의 행동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건 존 폴이지 어리고 귀여운 폴리가 아니니까요. 이런 식으로 풀어낸 결말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쟈니는 마르판 증후군이었고, 존 폴은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에필로그는 더 최악입니다. 쟈니가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설정을 밀고 싶었으면 단서를 최대한 제공해 줬어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테스와 윌 부부, 펠리시티 세 명의 삼각관계와 뒤이어 벌어지는 테스와 코너간의 일탈은 완전히 사족입니다. 테스가 불안증이 있고 펠리시티는 뚱뚱해서 둘만의 세계에 갖혀 살았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코너를 극에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데 그런 것 치고는 분량이 너무 많았어요. 그렇잖아도 무지하게 긴데, 쓸데없는 이야기는 좀 잘라냈어야 합니다. 하긴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거 한개 뿐만이 아니죠. 지겹고도 지겨운 베를린 장벽 관련 잡담을 비롯해서 수도 없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반까지 독자를 몰입 시키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이거보다는 우리나라의 범죄가 조금 들어간 막장 드라마들이("아내의 유혹"(?)) 더 재미있을 겁니다.

2014/06/10

CMB 박물관 사건목록 2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24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 박물관 사건목록 2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24권 리뷰입니다. 최신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25권이 나와있네요.

여튼, 24권에는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잔잔한 일상계 없이 네편 모두 사람이 죽는 등 심각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점은 동시기 발표된 "Q.E.D 45"와 같군요. 작업 당시 작가에게 뭔가 안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수록작 2편의 "Q.E.D", 3~4편의 "C.M.B"로 목차도 굳어져가는 느낌이네요.

전체 별점은 반올림해서 2.5점. 두편은 괜찮고 두편은 평범했습니다.

상세한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니쇼테이"

"니쇼테이"라는 실존했던 기묘한 건축물을 재현하는 괴짜에 대한 이야기. 진상은 과거 있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였는지를 밝히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쇼테이를 재건하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아서 본 줄거리와 그렇게 잘 연결된다고 볼 수 없고 내용도 작위적인 부분이 한가득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니쇼테이 재건은 단지 "돈을 물쓰듯 쓰는" 행동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라도 상관없는 것이니 별 관계도 없고, 진범이라는 이모부부가 구태여 그 건축물안에서 여보란듯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당쵀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니쇼테이라는 건축물에 대해 접한 작가가 기묘한 부분이 좋아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짓지 못한 느낌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이상의 독특한 시를 주제로 추리소설을 써야지!"라는 생각까지는 좋았으나 그 결과물은 실제 시와는 유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희대의 졸작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아예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니쇼테이는 지금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영화 세트"로 허가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해내어 곁가지 진상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 하나만큼은 괜찮았고 특유의 박물학적 지식의 전달 측면에서도 니쇼테이라는 건축물을 알게 해 주었다는 점은 좋았으니까요. 관심이 생겨서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는데 확실히 신기하긴 하군요.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 충분히 나올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여튼, 별점은 2점입니다.

"다이아몬드 도둑"

미술관에서 사라진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찾는 이야기. 도둑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전개도 깔끔하고 진상도 그럴듯합니다. 마지막에 진범이 새롭게 드러나는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신라가 진범을 깨닫게 되는 사소한 범인의 실수가 저는 그렇게 와닿지는 않더군요. 자포자기를 했을 수도 있고 다른 경로로 명확하게 진품이 아니라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일 수도 있는데 너무 지레짐작이 심했던 것 같거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확실히 깔끔해서 이번 권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꼽을 만한 에피소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레이스"

아버지와 삼촌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만 놓고보면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딱히 재미가 없어요. 막장드라마의 제국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정도야 뭐 장난 수준이니까요. 총을 쏘았던 경비원의 증언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너무나도 쉬운 전개라는 것도 불만이고요, 반전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딱히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평균 이하의 졸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옷장 속의 유령"

C.M.B가 아닌 M.A.U로 제목이 달려있는, '암시장의 마녀' 마우가 주인공인 사건목록 번외편입니다. 마우가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강령회 도중 쇠사슬로 묶인 옷장 안에서 영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지요. 

조작된 랩소리라던가 강령회에서 들려왔던 유령의 목소리, 어떻게 밀실과 같은 옷장 문을 열었는지 등 트릭만큼은 풍성합니다. 대저택, 강령회, 밀실 등의 고전적인 설정과도 잘 맞물려 있어서 고전 본격물을 즐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추리적으로는 괜찮았어요. 구태여 이런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는 설정상의 헛점과 랩소리, 빗을 이용한 유령 목소리 등이 실제 가능했을지와 같은 장치 트릭의 문제점까지도 고전적이라 저는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마우를 주인공으로 또 스핀오프를 벌려놓느냐는 겁니다. 솔직히 마우라는 캐릭터는 너무 만화적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타츠키를 더욱 잘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이래서야 진히로인은 마우라고 해도 할말 없겠어요.
게다가 이 작품에서 마우의 활약은 나쁘지는 않지만 "고전적"이라는 설정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기에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토마가 주인공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2/12/31

청춘의 증명 - 모리무라 세이치 / 최고은 : 별점 2점

청춘의 증명 - 4점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는 일부 내용의 소개 및 주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쟁 직후, 가사오카는 연인과 데이트 도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운 좋게 경찰이 구해주었지만, 경찰의 위기를 도와주지는 못했다. 가책을 느낀 가사오카는 연인과 헤어지고, 경찰에 투신하여 형사가 되었다. 오로지 그 사건의 범인 "구리야마"를 체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20여 년 후, 산에서 피살 사체가 발견되었다. 사체의 주요 특징, 그리고 투병 중임에도 주요 증거를 가지고 온 가사오카의 노력으로 피해자가 "구리야마"라는 이름의 전과자임이 밝혀지는데..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대표작인 "증명 시리즈" 3부작의 완결편. "인간의 증명"과 "야성의 증명"과는 다르게 국내 초역 출간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오래전부터 읽기를 희망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운이 좋게도 국내 최고의 추리동호회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했던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이 자리를 빌어 먼저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증명 시리즈"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형사 가사오카가 천신만고 끝에 신원을 밝혀낸 피살 사체가 가사오카가 찾아 헤매던 원수였다는 핵심 설정을 비롯한 수사의 과정 모두가 운과 우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식사를 같이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 거기에 얽힌 존 덴버의 노래와 사연, 유력한 용의자 야부키가 떠올린 또 다른 관계자,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증거 등, 수사가 벽에 부딪힐 만하면 주요한 증언이나 단서가 튀어나오는데, 이래서야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힘듭니다. 트릭이나 추리적 장치도 별다른게 없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단지 발품을 파는 수사와 증언에 의지할 뿐이거든요.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 기다가 구리야마를 살해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점—구리야마가 협박을 하더라도 사회적 지위 등을 놓고 볼 때 설득력을 지니기 어려웠을 것—등 주요 동기도 설득력이 없어서 점수를 주기 힘들게 만듭니다.

게다가 형사 가사오카 부부 - 주요 참고인인 전 특공대원 출신 야부키 부부 - 요정 주인인 용의자 이시야마와 기다 부부 가족이라는 단 세 가족 관계 안에서 모든 이야기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형사 가족의 아들이 용의자 가족의 딸과 결혼하는데, 용의자 딸은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자 형사의 전 애인 아들과 불륜 관계이며, 이 전 애인 아들이 형사를 죽게 만든다... 황당하지 않나요? 전 애인 아들이 형사를 죽이는데 사용한 자동차는 용의자가 사용한 뒤 증거인멸 차원에서 처분한 것으로, 결국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깨알 같은 우연까지! 이 정도면 국내 막장 드라마들도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수준의 막장이 아닐까 싶네요. 결말도 장대한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한두 페이지로 다 정리해버리며, 내용도 황당해서 마지막까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많이 낡았다는 느낌이 강한 것도 단점입니다. 전개도 그렇지만, 중간에 나오는 야부키의 특공대원 시절 에피소드와 구리야마와의 관계, 기다가 가사오카 도키야의 아버지의 직업을 듣고 보이는 반응 등, 낡아빠진 전형적 클리셰들은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했습니다. 특히 야부키의 에피소드는 비중에 비해 너무 길어서 아예 별개의 이야기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래도 당대의 인기 작가다운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그런대로 있는 편이기는 하며, "청춘"에 대해 작가가 고민한 결과를 전달해 준다는 점은 괜찮았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청춘은 짧다",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청춘은 자유롭게 누려라", "단, 청춘은 비겁하면 안 된다"라는 내용을 끝없이 반복하거든요. 전전 세대가 고도 성장기를 맞이하여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전후 세대에게 던지는 주요한 메시지였다 생각됩니다.

아울러 비겁한 청춘의 결말은 불행밖에 없다는 식으로 주제의식을 전달하려 하지만, 정작 가장 비겁했던 것은 과거를 숨기고 불륜까지 저지른 마쓰노 도키코와, 야망을 위해 진실을 조작한 가사오카의 아들 도키야, 결혼 전 불장난을 즐긴 아사야마 유키코라는 점에서 오히려 "비겁하면 인생을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씁쓸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는 점이 이 작품을 사회파 추리소설로 만드는 것이겠죠. 이게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막장 설정과 전개, 추리적으로는 거의 무가치했기에 이 정도 장점만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취향과는 다르지만 수작이라 생각하는 "인간의 증명", 평작 수준이지만 폭발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던 "야성의 증명"과 비교하기도 어려운 작품으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이벤트로 받은 도서를 이렇게까지 혹평하니 저도 마음이 무겁군요...

2021/06/26

안개의 항구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5점

안개의 항구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시내 한 복판에서 머리에 수술을 받은 채로 기억을 잃은 남자가 발견되었다. 신문 광고를 통해 그는 위스트르앙의 항만 관리소장인 조리스 선장이라는게 밝혀졌다. 하녀 쥘르 르그랑이 나타난 덕분이었다. 조리스 선장은 쥘르, 메그레 반장과 함께 위스트르앙 자택으로 귀가했다. 하지만 귀가한 바로 그 날, 조리스 선장은 독살당했고, 메그레 반장은 끈질긴 수사를 통해 이 사건에 마을 시장 그라메종과 쥘르의 오빠 그랑 루이, 그리고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1932년에 발표되었던,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 초기작입니다. "피해자가 총상을 입은 뒤 정성껏 치료를 받고 살아났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독살당한다"는, 다른 메그레 반장 시리즈에서는 보기 드문 기묘한 사건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선장을 누가 공격했으며, 결국 누가 죽였는지? 다친 선장을 깔끔하게 치료해준건 누구인지? 선장에게 30만 프랑의 거액을 입금해 준 건 누구인지? 등 여러가지 본격물스러운 수수께끼도 가득하고요. 

이를 밝혀내는 메그레 반장의 추리도 빼어납니다. 메그레가 그랑 루이와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레몽)를 체포하고, 그랑메종 시장을 자살하게 만든 것은 모두 수사 과정에서 알아낸 정보를 통한 추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추리력보다는 경험과 통찰력이 돋보이며 범죄 드라마에 가까운 다른 메그레 시리즈보다는 본격 추리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밝혀진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는 그랑메종 시장의 조카 레몽이었습니다. 과거 부정을 저지르고 외국으로 쫓겨났었지요. 그 뒤, 그랑메종은 장의 연인 엘렌과 결혼했고요. 그런데 엘렌은 레몽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거부가 된 레몽은 아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랑메종으로부터 아들을 빼앗아 오기 위해 작전을 벌였는데 이 때 레몽을 도와주던 조리스 선장이 그랑메종의 총에 맞았고, 레몽은 그를 정성껏 치료하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30만 프랑까지 입금해 주었지만, 조리스 선장이 입을 열 걸 두려워했던 그랑메종이 그를 독살했던 겁니다.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 느낌이 들만큼 대중적으로 먹힐만한 소재 - 기억 상실, 거액의 유산, 숨겨진 아들, 복수 등등등 - 들이 가득하여 아주 흥미로왔어요.

이렇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전형적인 '사나이'인 메그레 반장과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그랑메종 시장의 대비, 그리고 둘의 알력 다툼도 눈에 띄는 부분이었습니다. 짜증나긴 하지만 당대 부르주아를 잘 묘사했을 그랑메종 시장 캐릭터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짜증나는 부르주아 독신녀들 묘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니까요.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읽는 재미도 좋은데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관계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는 설정은 답답할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레몽은 선장을 독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른다쳐도, 그에게 총상을 입힌게 그랑메종 시장이라는걸 경찰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시장이 자살한 뒤에도 입을 다물 이유는 더더욱 없고요. 단순 조력자였던 생미셀호 선원들이 입을 다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선원들간의 의리'로 입을 다물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조리스 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선원들간의 의리에 해당하지 않는걸까요? 

그랑메종의 행동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엄연히 남의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까닭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는 건지... 또 선장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걸 알았을텐데, 돌아온 날 바로 살인을 저지를만한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파리에서 온 형사가 함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거부인데도 범행을 직접 저지를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긴, 레몽과 일당들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형사가 있는데도 다시 아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으니, 다들 메그레 반장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추리적인 요소들은 좋았지만, 이런저런 비현실적이고 지루했던 전개는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하니, 메그레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여, 쥘리의 오빠 그랑 루이가 쥘리를 찾아왔을 때 쪽지를 남겼으리라는건 당대 프랑스인의 상식이었을까요? 쪽지가 있다는걸 당연하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소한 점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궁금합니다.

2016/06/18

매듭과 십자가 - 이언 랜킨 / 최필원 : 별점 1.5점

매듭과 십자가 - 4점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딘버러에서 소녀들을 유괴하여 살해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혼한 전 SAS 특수부대 출신 경사 존 리버스에게 기묘한 협박장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존 리버스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싸우며 사건 수사에 나섰고, 여러가지 단서들을 통해 범인이 정말로 노리는 것이 자신이었다는게 밝혀진다...

"'타탄 느와르의 제왕'이라는 작가 이언 랜킨이 창조한 존 리버스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홍보 문구에 더해 적절한 분량과 괜찮은 책 디자인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인기있는 소재들 몇 개를 나열한 펄프 픽션에 불과한 탓입니다. 우선 주인공 존 리버스부터 살펴보죠.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못나가는 경찰, 전직 SAS 출신, 골초, 이혼남, 고독한 늑대, 트라우마..." 이 키워드 몇 가지를 섞어 만든 캐릭터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겁니다. 그냥 현대 하드보일드풍 범죄물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스테레오 타입이니까요. SAS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으로 관련된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이 바닥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한다는 것 역시 뻔하디 뻔한 설정이고요. SAS에서의 훈련과 경험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차라리 트라우마 없고 군대 경력을 활용하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마스터 키튼"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그다지 잘생기거나 몸이 좋지도 않고, 다른 매력도 없는데 여자들과의 원나잇이 쉽게 그려지는 것 역시 불만입니다. 이게 영국적인 문화라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조직 내 동료들끼리 스스럼없이 원나잇을 즐긴다는건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버스의 전처가 리버스와 티격태격하는 상관 앤더슨의 새파랗게 어린 아들과 사귄다는 막장 설정은 도무지 왜 나왔는지 모르겠고요. 딱 한가지 마음에 드는 설정은 딸바보라는 점 뿐입니다. 특히 딸에게 추파를 던지는 거리의 건방진 수컷들을 하이에나 떼 보듯이 하는 장면만큼은 딸 아이 아빠로서 공감이 가더군요. 그러나 이는 사건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범죄 스릴러로서의 가치도 형편없습니다. 범인이 지속적으로 존 리버스에 메시지를 보내지만 리버스는 살인마가 SAS 당시의 전우 고든 리브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는게 핵심인데, 이유는 트라우마로 과거의 기억을 봉인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막장 드라마의 기억 상실증에 버금가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편의적인 설정이 아니었다면 매듭을 통해 고든 리브를 쉽게 떠올렸을 거라는건 자명합니다. 당연히 체포도 손쉬웠을테고요. 최소한 사만다가 유괴되기 전에는 잡을 수 있었겠지요.

게다가 기억을 되찾는 것도 최면술사인 동생 덕분이라니 이 역시 어처구니 없습니다. 그나마 첫 만남에서 동생 마이클이 최면으로 전생도 끄집어낼 수 있다 운운하는 복선을 깔아놓기는 했지만, 절대로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지독히 편의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또 작중 리브스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처의 애인이 죽고, 전처는 중상을 입고 딸까지 유괴당한 후에도 하는건 집에서 술이나 먹는 것에 불과합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자책하는 것은 덤이고요. 범인을 알아낸 것은 앞서 말했듯 동생 마이클의 최면술 덕분이며, 범인의 흔적도 경찰에서 피해 아동들이 같은 도서관(중앙도서관)에 다녔다는 단서를 포착한 것을 토대로 잡아냅니다. 그나마 마지막 추격전에서 아주 약간의 활약을 하기는 하지만 대단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더해 급작스러운 결말과 두페이지 분량도 채 되지 않는 에필로그 역시 실망스럽습니다.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브스의 트라우마는 극복되었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이클은 어떻게 되었는지, 앤더슨은 어떻게 되었는지, 질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건지 등등등....

물론 몇가지 건질만한 재미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피해 아동들 이름의 머릿글자를 연결하면 리버스의 딸 사만다의 이름이 표시된다던가, "죄와 벌"에 대한 과거 대화를 언급하며 책 속에서 총을 꺼낸다던가 하는 요소는 제법 괜찮았어요. 기자 짐 스티븐스가 마이클 리버스의 마약 거래를 뒤쫓는 이야기가 병행해서 펼쳐지는 것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무대가 되는 에딘버러에 대한 묘사는 특히 좋아요. 유괴 사건에 대한 지루하고 기나긴 탐문, 자료 조사에 대한 끔찍함에 대한 묘사는 놀라운 수준이고요. 모든 내용이 250페이지 안쪽의 짤막한 분량이라는 것도 4~500페이지 짜리 장편이 넘쳐나는 시대에 보기 힘든 미덕이지요. 아울러 출판사 오픈하우스가 새롭게 런칭한 장르문학 전문 브랜드 Vertigo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성격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정과 디자인도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장점에 비해 단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관심이 가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후속권을 읽을 생각이 없고요. 이런 싸구려 펄프픽션을 뭔가 있어보이게 "느와르"라는 표현을 써가며 홍보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습니다.

2014/05/27

타인의 목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점

타인의 목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사형수 외르탱은 사형 직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사실 탈옥은 메그레 경감이 외르탱이 진범이 아님을 직감하고 진범을 알아내고자 벌인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이후 외르탱이 체코인 라데크를 만나려고 시도한다는걸 알아챈 메그레는 라데크를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라데크의 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하고, 외려 외르탱의 자살 시도 등으로 궁지에 몰린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5, 6, 7, 8번째 작품을 건너뛰고 선택하여 읽게 되었는데, 오래전 "황색견"과 함께 국내 소개되었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 대표작이겠거니 싶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라데크라는 일종의 소시오패스 악당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별난 재능은 사람의 약점을 파악하여 뜻대로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묘사되는데, 당대 유행하던 "팡토마스"의 영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당이라는 점에서도요. 노파 하나의 생명을 빼앗아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는건 "죄와 벌"과도 비슷한데, 라데크는 구원 따위는 믿지 않는 내추럴 본 악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캐릭터 크로스비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범죄를 단순한 욕망의 충족이 아닌,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기 위해 저지른다는 점과 결국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는 최소한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유감스럽게도 볼 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정교한 맛도 없고 전개도 뜬금없는 탓입니다. 메그레가 자신의 목을 걸고 외르탱 탈옥 작전을 벌인 이유부터가 석연치 않습니다. 외르탱이 라데크와의 접촉을 시도해서 라데크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후의 수사는 지지부진하기 그지없거든요. 라데크가 무전 취식 후 경찰과 함께 나가는 전략으로 외르탱과의 접촉을 무효화시키는걸 메그레가 막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수고를 덜 수 있었는데 가만히 지켜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생폴레옹에 지다"에서 메그레가 다른빈유를 방관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데, 과거의 실수에서 뭔가 배운게 없는걸까요?
또한, 메그레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외르탱이 짧은 시간 안에 귀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이 단순히 택시를 탔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허술합니다. 수사가 부실했다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라데크가 계속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는 듯한 허세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사건이 과연 쉽게 해결되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라데크가 최후의 순간에 메그레에게 총을 쏘는 우발적 행동 역시 큰 약점이고요. 이 장면 때문에 그나마 있던 천재 범죄자와의 두뇌 대결 분위기가 무너져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라데크가 무계획에 즉흥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은 L의 죽음 이후 급속도로 힘이 빠진 "데스노트"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찌질한 모습을 보여줘 실망을 안겨준 야가미 라이토와 다를게 없다는 점에서요.

이렇게 좋은 추리소설로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물론 멋드러진 제목만큼이나 문학적인 향취는 짙고, 외르탱의 탈옥을 지켜보는 메그레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한 등 심농이라는 작가의 필력은 유감없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차라리 "죄와 벌"처럼 라데크의 심리를 더욱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2013/06/23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 - 에드 멕베인 외 / 홍한별 : 별점 3점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 - 6점
에드 맥베인 외 지음, 린다 랜드리건 엮음, 홍한별 옮김/강

EQMM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과 쌍벽을 이루는 미스터리 잡지인 AHMM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의 50주년 기념 선집.

과거 엘리너 설리번이 엮었던 같은 잡지 걸작선은 이미 접해보았는데, 이 선집은 서문에서 밝히듯 독자 투표가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인지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진이 정말로 화려해요. 헨리 슬레서, 에드워드 D 호크, 에드 멕베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빌 프론지니, 로렌스 블록, 새러 패러츠키 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으니까요. 그것도 32편이나! 작품들도 작가들의 유명 시리즈들 중심이라는 점도 반가운 요소였고요. (제가 아는 시리즈는 매튜 스커더와 워쇼스키 시리즈밖에는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수록작 모두 수준이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추리와는 동떨어진 작품도 많았고요.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문체가 딱딱해서 쉽게 읽기 힘들었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에드워드 D 호크의 "긴 추락"이 "내려가는 동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제가 취미삼아 번역했던 결과물이 더 읽기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워낙 다양한 작품이 많이 실려 있기에 평균 이상의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도 볼륨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만큼, 관심 있으신 분들은 큰 부담 느끼지 말고 한 번쯤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헨리 슬레서 "사형 집행일"

아내를 죽인 범인에게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든 검사 셸비 앞에, 그 사건의 진범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노인이 나타났다...

단편의 명수답네요. 깔끔하고 짤막한 분량 안에 스릴과 범죄, 동기, 반전까지 모두 들어 있거든요. 이런 쇼트쇼트물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제임스 홀딩 "살인요리법"

은퇴한 요리사가 자신의 전설적 요리인 포타주 프랑수아 프르미에 비법을 노리는 조카 부부에게 맞서는 이야기. 짤막하지만 적절한 전개 및 반전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계획을 눈치챈 뒤에 벌이는 반격이 과연 프로 요리사! 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기발했어요. 마지막의 한마디 - "포타주 드 볼라유 귀스타프 – 쥐약으로 간을 한 스프"- 까지 요리사다움을 잃지 않고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윌리엄 브리튼 "역사적 오류"

옛 풍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을에 역사학자 노먼이 억류된 뒤 고난을 맞는다는 이야기. 

폐쇄된 마을에 찾아온 이방인이 겪는 기이한 경험이라는 소재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보통 "인스머스의 그림자"처럼 마을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설정이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마을이 고증에 집착하는 오타쿠스러운 곳이라서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을 가져다 주는 이색작입니다. 데미 무어가 출연했던 코미디 영화 "난폭한 주말"이 연상되기도 하더군요. (물론 영화는 망작이었지만...)

S.J 로잔 "바디 잉글리쉬"

중국계 미국인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가 돋보이는 본격물입니다. 한국 막장드라마 같은 설정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캐럴 케일 "하수구"

궁지에 몰린 남자에 대한 일상계 서스펜스 심리 호러물. 전개가 뻔할 뿐더러, ‘미쳐버렸다’는 결말은 너무 쉽게 간 듯해서 아쉽지만, 뭔가 꽉 막힌, 그야말로 탈출구 없는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제대로라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2010/12/20

츠키지 어시장 3대째 築地魚河岸三代目 (2008) - 마츠하라 신고 : 별점 2점

상사맨 아카기 슌이치는 과장 진급과 동시에 회사 구조조정을 떠맡게 된 후 존경하던 선배의 구조조정을 직접 진행한다. 이 일로 회사생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우연찮게 애인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던 츠키지 어시장에서 일을 할 결심을 굳히는데...

인기 만화 "어시장 3대째"의 영화화 작품.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1권 시작 직전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츠키지 어시장의 도매상인 우오마츠에 3대 째로 사위가 새롭게 들어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지요. 

에이지와 아스카의 관계를 오해한 어시장 사람들을 그린 에피소드 등은 괜찮았고, 특히 치아키 - 에이지 커플의 이야기는 원작에서의 재미만큼 영화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자 옷 따위를 고를 수 있을줄 알아!" 라는 명대사가 작렬하는 부분은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영 별로였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로 변질되는 중간 과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원작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한국 막장드라마같은 에이지 - 아스카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클라이막스에 이르기까지는 솔직히 지루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산만하고 포인트를 못 잡은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원작의 재미요소 - 초보자의 어시장에서의 성장기 + 다양한 해산물에 대한 정보 제공 - 를 모르고 만든 작품이에요. 슌이치가 츠키지에 일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생선의 시식과 여러 훈련을 거쳐 생선 요리와 생선을 다루는 스킬을 높여 나가는 과정, 그리고 츠키지 어시장 상인들의 에피소드를 상세하게 그린 TV 시리즈로 만드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3/05/04

유리고코로 - 누마타 마호카루 / 민경욱 : 별점 2점

유리고코로 - 4점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서울문화사

행복의 절정에 있었던 료스케에게 애인 지에의 실종, 아버지의 말기 췌장암,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불행이 연이어 닥쳤다. 실의에 빠진 료스케는 우연히 아버지의 방에서 발견한 비밀스러운 수기를 읽은 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글은 연쇄살인범인 여주인공의 고백을 담은 것으로, 자신의 출생 및 가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2 오오야부 하루히코 대상’, ‘2012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5위, ‘2012 일본 서점 대상’ 6위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책이기도 하죠. 평단의 평도 좋고요. 

주인공에게 닥친 불운한 현실과, 료스케의 어머니 것으로 추정되는 충격적이고 비밀스러운 고백이 서로 교차되며 전개되다가 하나의 결말로 합쳐지는게 특징입니다. 덕분에 일종의 액자 소설 느낌도 전해 줍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이유는 책 소개에서 극찬하고 있는 심리 묘사가 별로였던 탓입니다. 수기 속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심리가 영 와 닿지 않았거든요. 말랑말랑한 순정만화 감수성 넘쳐나는 묘사만 가득하고, 정작 깊이 있는 캐릭터 설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만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집 누나 같은 평범한 소녀 연쇄살인마에 불과합니다. 이 캐릭터가 작품의 핵심인데 이렇게 밍숭맹숭 애매하게 묘사한 건 큰 문제이지요. "미래일기"의 가사이 유노 정도의 설득력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캐릭터 묘사보다 료스케의 사업인 애견들을 뛰놀게 만드는 공원 카페 설명이 차라리 더 좋아보일 정도였습니다.

마지막 료스케 살인 미수(?) 후 가족을 떠나, 갑자기 개과천선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전개 방식도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접해보았던 것이라 딱히 신선하지 못합니다. 료스케가 읽는 수기의 주인공 정체에 대한 진상도 너무 뻔했고, 마지막 반전(?) 역시 예상 범위 안에 있어서 딱히 대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수기를 발견하여 읽게 되는 발단부의 작위성, 막장 드라마 같은 지에에 대한 묘사 등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물론 "이런 작품을 이런 스타일로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신선함과 더불어, 수기에서 "유리고코로"라는 말로 자신의 알 수 없는 감정(살의)을 묘사하는 것, 그리고 료스케의 동생 요헤이의 이론적인 추리라든가 지에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정도는 괜찮았으나, 분량에 비하면 건진 게 많아 보이지는 않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전체적으로 너무 뻔한 작품이었습니다.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2016/01/11

헤밍웨이 위조사건 - 조 홀드먼 / 김상훈 : 별점 2.5점

헤밍웨이 위조사건 - 6점
조 홀드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헤밍웨이의 분실된 원고를 위조하여 한몫 잡으려 하는 존 베어드 앞에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그만둘 것을 명령했다. 미지의 존재는 시공을 초월한 평행 우주의 관리자로, 존의 작업이 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지의 존재는 명령을 거절한 존을 죽였고, 존은 다른 모습, 다른 기억을 지닌 채 부활했다. 그가 부활한 세계도 기존 세계와 무언가 조금 다른, 평행 우주 속 세계였다...

SF 작가 존 홀드먼의 중편 SF 범죄 스릴러. 초, 중반부까지는 헤밍웨이의 원고를 위조하여 한몫 잡으려는 전형적인 위조 사기물인데, 관리자에 의해 존이 최초로 죽은 뒤에는 평행 우주 세계관의 SF물로 바뀝니다.

초반부의 위조 사기물 전개는 훌륭합니다. 원고를 위조하는 것보다 그 원고가 가짜임을 증명하는 논픽션을 써서 대박을 치려 한다는 계획부터 아주 참신하거든요.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 높은 계획이라 생각됩니다.
진지한 학자 존이 이 사기에 뛰어든 동기(신탁 재산의 투자 실패와 그로 인한 아내의 유혹)도 설득력 높고, 사기꾼 캐슬과 존, 리사 부부, 문학을 공부하는 콜걸 팬지 등 주요 캐릭터가 생생하다는 점도 좋습니다. 원고를 위조할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는 과정의 묘사와 헤밍웨이 관련 디테일도 괜찮은 편(국내 독자가 그 참맛을 느끼기는 어렵긴 하지만)이며, 전체적으로 유머가 묻어난다는 점도 마음에 드네요. 아울러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적나라한 성관계 묘사가 꽤나 빈번하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꽤나 잘 어울린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캐릭터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어 주더라고요.

허나 평행 우주의 관리자가 개입한 뒤부터는 별로였습니다. 존 베어드가 헤밍웨이를 위조하는게 왜 우주에 위기를 가져오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 탓도 크지만, 마지막이 영 이해가 안 되었던 탓입니다. 헤밍웨이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의 묘사는 압도적이긴 합니다만 결말이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두 여자를 구하고 죽은 뒤? 헤밍웨이가 되었다가 그를 초월한다? 존이 관리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주인공이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으로 결말을 퉁치는 작품은 너무나 많은데 - "타이거! 타이거!", "제 5 도살장" 등등등 - 이들보다 나은 점도 없습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뜬금없고 급작스러운 편이니까요. 여러모로 깊이 고민하지 않고,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 설정같이 일종의 만병통치약을 사용해서 뻔하고 쉽게 끝낸 느낌입니다.

물론 평행 우주 하나의 존이 죽을 때 그의 기억을 간직한 채 다른 평행 우주의 존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부활할 때마다 조금씩 바뀌어간다는 설정을 통해 캐슬이 호감 가는 잔챙이 사기꾼에서 살인마로 돌변하는걸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등의 디테일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어설프고 대충 넘어간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적당한 길이에 책의 장정과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도 충분합니다만 앞서의 이유로 감점합니다. 차라리 위조 범죄물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2020/05/01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구리하라 유이치로 / 문승준 : 별점 2.5점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 - 6점
구리하라 유이치로 엮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제목 그대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런 저런 곡들에 대해 해설해 주는 책입니다.
몇 년 전 "애프터 다크"를 읽었을 때, 이런저런 곡들이 무척 많이 소개되어 리뷰에 따로 적어놓았던 적이 있는데, 이런 책이 나올 정도로 다른 작품 역시 많은 곡들이 쓰였네요. 하긴,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제목부터가 비틀즈의 곡 제목일 정도이니 당연하겠지요? 책은 1960년대적 가치관 소멸을 상징한다는 1980년대 이후의 음악들 (주로 팝), 록, 팝, 클래식, 재즈의 5가지 장르로 하루키 작품 속 곡들을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렇게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곡 역시 그리 많지 않았고요. 하지만 짤막한 해설들이 꽤 재미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아는 작품, 아는 곡의 경우는 더욱 반갑더군요.

특히 좋았던건, 곡이 특별한 '상징'이나 '메타포'로 사용된 경우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는 부분들이었습니다. 냇 킹 콜이 불렀다는 'South of border' 소개가 대표적입니다. 노래 속의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멕시코'가 실재하지 않듯이, 이 노래를 냇 킹 콜이 부른 버젼도 실재하지 않고, 그래서 이 곡이 등장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지만 이상하게 현실적인,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판타지를 상징한다는데 이 정보를 알고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부분은 팝 보다는 클래식, 재즈 쪽 소개에 많은 편입니다. 클래식은 저자의 전공 분야인듯 싶고, 재즈는 하루키가 소싯적, 재즈 카페를 운영했을 정도의 재즈 매니아인 덕분이겠지요.

특히 클래식은 곡 마다의 소개도 다른 장르에 비하면 비교적 긴 편이며 내용도 굉장히 충실합니다. 일례로, "태엽갑는 새" 1부의 부제인 "도둑까치"를 통해, 까치의 장난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마지막에 행복한 결말을 맞는 오페라 "도둑까치"와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며, 각 부마다의 부제 모두 해당되는 오페라와 일맥상통한다는걸 알려주는 식입니다.
단지 곡 뿐만이 아니라, 누가 연주했는지에 따라 각 버젼별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를 드러낸다는 디테일도 아주 좋았습니다. "해변의 카프카" 속 호시노가 듣고 반한 "베토벤 피아노 3중주 제 7번 대공"은 야샤 하이페츠 등 '백만불 트리오' 세 명이 조화따위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연주하는 버젼인데, 오시마 씨가 좋아하는건 앙상블에 주축을 둔 수크 트리오의 잘 정돈된 연주라는게 대표적이지요. 정말 아는만큼 보이는 것 같네요.

재즈의 경우는 곡 자체보다는 그 곡의 발표된 배경이나 연주자의 특징 등 좀 더 깊고 디테일한 정보를 작품과 엮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깊이가 느껴집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A gal in calico'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명하지 않은 1950년대 (1955년) 앨범의 유명하지 않은 곡으로,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배경인 1970년대에서는 이미 잊혀진 앨범입니다. 때문에 이 앨범을 찾는 '나'의 모습은 '나'의 허영심과, 1970년대 은퇴 선언 후 칩거에 들어간 마일스 데이비스의 모습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작가의 의도인건지, 꿈보다 해몽이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은 참 좋네요. 저도 음식과 추리 소설에 대한 책을 썼는데, 이런 내용을 많이 담고 싶었습니다.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 외에도, 하루키 작품과는 무관하지만 이런저런 재미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하루키 작품에서 유독 많이 등장했다는 보비 다린이라는 가수는, 이 책에서 소개한 가정사가 아주 놀라왔어요. 키워준 어머니가 사실은 외할머니이고, 누나가 친어머니였다는데, 하드보일드 막장 드라마에서나 봄 직한 설정이지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등 그 자신의 인생도 파란만장해서, 이 책에서 소개된 대표곡 'Beyond the sea'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게 당연하다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듀란듀란과 보이 조지에 대한 신랄한 비평 - 특히 "댄스 댄스 댄스"에서 '끔찍하다'의 대명사처럼 인용되었다니 - 이 눈에 띄였습니다. 제 초등학생 때 좋아했던 밴드이고, 특히 컬쳐 클럽의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는 많이 들었던 곡이었기 때문이거든요. 진짜 팝 애호가라면 좋아하기 힘든 곡일 수는 있지만, 이렇게까지 신랄한 평을 들어야 할 밴드는 아닐텐데, 조금 슬펐습니다.

아는 가수와 곡으로는 밥 딜런, 비치 보이스 소개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밥 딜런이야 시대의 총아였으니 그렇다 쳐도, 비치 보이스는 좀 의외죠? 비치 보이스의 최고 명반인 'Pet sounds'의 일본 소개 당시 야마시타 타츠로가 라이너 노트를 썼다는 건 처음 알았는데, 정말 잘 어울린다 싶네요.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공통점이 느껴진다며 시작된 소개와 해설은 모두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비치 보이스의 음악은 죽음, 상실과 연관되는 내용이 많다는데, 이는 밴드의 운명과 브라이언 윌슨의 생애와는 별로 관계없는 작가의 기호일 뿐이라 생각되니까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비치 보이스의 곡에 관련된 작품으로는 도리 미키의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단편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비치 보이스의 불운한 싱글인 'Child of winter'를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비치 보이스의 크리스마스 앨범을 계기로 대학교 동창과 썸을 타는 관계가 되는데, 그녀는 다른 친구의 연인이 됩니다. 그 뒤 졸업을 앞 둔 겨울 방학의 어느날, 그녀가 자취방에 찾아오지만 나는 그녀를 내쫓습니다. 오해받기 싫다는 이유로요. 떠나면서 그녀는 "비치 보이스는 별로 좋아한게 아니었다..."는 말을 남기는, 83년도 단편입니다.

당연히 하루키 작품에 대한 소개, 평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이 멋지게 마무리된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는 사랑이 이루어졌는지, 아니 '나'의 미도리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를 애매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하루키 작품 속 이런저런 곡들을 100곡 채우겠다! 는 의도가 지나친 나머지 무리한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보비 비의 'Rubber ball'에 대한 설명은 지나쳤어요. "1973"에서 이 노래가 1960년을 상징하는 것 처럼 - 1960년, 보비 비가 'Rubber ball'을 부른 해다' - 언급되지만, 1960년 최대의 히트곡은 다른 곡이라고 알려주죠. 이로써 객관적인 의미의 히트곡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사적인 선곡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이는 독자가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곡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여 공감의 회로가 발생한다는데, 설명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을 뿐더러, 이렇게 오타쿠, 매니아만 알 수 있는 기호가 어떻게 공감을 일으킨다는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배경 음악에 지나지 않는 곡에 대한 침소봉대식 소개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곡들은 그냥 제목, 아티스트만 소개하고 작품 소개 및 기타 주변적인 요소에 집중하는데 책의 취지에는 벗어나는 듯 하여 여러모로 별로였습니다. "춤추는 난쟁이" 속 프랭크 시나트라의 "Night and day'가 대표적이죠. 곡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도 없이 4줄 정도의 소개로 그치고, 나머지는 전부 작품에 대한 줄거리와 인용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보 측면에서 나쁘지 않고,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설명도 적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절반 정도 됩니다. 설명도 곡의 장르에 따라 편차가 있는 편이고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셔야 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금 애매한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곡들이 궁금해서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곡들의 연주자, 발표 버젼이 일치하는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비슷은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링크는 여기 입니다.

2023/05/05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 - 브라이언 리 오말리 : 별점 2.5점

수상한 레스토랑 세컨즈 - 6점
브라이언 리 오말리 지음/미메시스

인기 레스토랑 '세컨즈'의 셰프 케이티는 젊고 야망넘치는 여성으로 '러크나우'에 오픈할 자신의 레스토랑 개업 준비에 골몰하면서 많은 갈등을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의 버섯을 발견한 케이티는 실수를 할 때마다 버섯을 먹어가며 실수를 지워나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세상은 이상한 비현실 세계로 바뀌고 말았다. 케이티는 버섯을 처음에 알려준 세컨즈의 터주 '리스'에게 모든걸 돌려 놓으라고 따지지만, 알고보니 이미 리스는 '러크나우'의 터주 마녀에게 힘을 빼앗겨 버린 상태였다. 러크나우에서 케이티가 마녀가 담긴 항아리를 세컨즈에 가져다 놓았던 탓이었다. 케이티는 러크나우의 마녀를 설득해서 모든걸 처음 세계로 돌려 놓는데 성공한다.


미국 만화인데 일본 풍의 모에한 캐릭터가 등장인물이라서 신기한 마음에 구입한 작품입니다. 정가 25,000원은 제법 쎄지만, 300페이지가 넘는 풀컬러 양장본이라는 특성상 더 싸게 내 놓을 수는 없었겠지요.
 
물불안가리고 즉흥적인 케이티 성격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박진감넘치는 전개, 화끈한 묘사와 모에 캐릭터의 결합이 상당한 화학 작용을 불러 일으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모에한 캐릭터들이 미국 막장 드라마같은 치정극을 벌이는 - 이미 결혼한 세계관에서 수석 셰프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 장면같은 독특한 부분도 재미 요소였어요. 작화와 컬러도 마음에 들며 양장본인 책의 만듦새도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딱히 신선하지는 않았습니다. 집에 나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 살고 있다? 흔하디 흔한 일본의 지박령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실수를 지워주는 버섯은 알고보니 또다른 세계의 나로 깨어나게 만들 뿐이었다? 널리고 널린 멀티버스, 다차원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고요. 케이티만 터주 리스를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데, 레스토랑 스탭 헤이즐은 리스를 볼 수 없어도 느낄 수는 있고 그려낼 수 있다는 아래와 같은 설정 역시 익히 많이 보아왔던 것입니다. 
이런 류의 만화를 많이 접해보지 못했을 서구권 독자들에게는 모를까, 저에게는 그리 새롭지 않았어요.

무엇보다도 한, 두 페이지의 설득 만으로 러크나우의 마녀가 케이티를 용서하고 모든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영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7/07/30

바쿠만 (2015) - 오오네 히토시 : 별점 1.5점

히트만화 "바쿠만"이 영화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별 관심없던 차에, 이용하는 '옥수수' 앱에 무료 영화로 등록되어 있어 보 되었습니다. 와이프가 애청하는 "품위있는 그녀"라는 막장 드라마가 방영하는 동안 눈과 귀를 잡아둘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를 한참 밑돕니다. 원작에서 가장 좋았던, 여러 편집자 및 라이벌들과의 대화와 경쟁을 통해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는 부분은 거의 사라졌으며, 당연히 "소년 점프"의 독자 앙케이트를 통한 순위 경쟁이라는 핵심 요소 역시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원작을 상위 호환 각색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설픈 코스프레로 재미없는 원작 에피소드만 조금 따라할 뿐입니다. 

캐릭터들의 각색도 아주 심각합니다. 모리타카를 좋아하는 여자의 응원 한마디로 만화에 목숨을 거는 열혈 청춘으로 단순화 한 건 짧은 분량의 영화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덕분에 슈진의 분량이 대폭 삭제된건 실수입니다. 슈진은 원작을 쓴다고는 하지만, 초반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서태지가 만화 어시스턴트를 하네?'라고 생각될 정도의 역할 정도만 소화하는데 원작 팬으로서는 어이가 없네요.
하기사, 악역으로 돌변한 니즈마 에이지에 비하면 약과겠지요. 니즈마 에이지는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건방을 떠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애초에 이런 역할은 이야기에 불필요합니다. 편집부와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그렸어야 하는데, 괜히 원작의 인기 캐릭터를 끌고 들어오려고 무리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기묘한 CG와 함께 니즈마와 사이코, 슈진 컴비가 그림을 그려가며 싸우는 장면은 개중 최악이고요. 이럴거라면 두 작가 작품 속 캐릭터가 작가들을 대신해서 싸우는 식으로 화면을 꾸미는게 훨씬 보기도 좋고, 내용도 와 닿았을 겁니다.

또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사이코가 병으로 쓰러진 후 친구들과 함께 연재 분량을 완성하여 개제한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어시스턴트를 왜 안 쓰는지부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연재를 한 회 연장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우정, 노력, 승리'라는 점프 3대 키워드를 써먹기 적합한 장면도 아니었어요. 대체 누구한테, 뭘 이겼단 말입니까?

물론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주인공과 라이벌들의 만화, 만화를 그리는 부분의 디테일은 상당히 괜찮았어요. 실제로 오바타 타케시가 직접 작화를 맡은 듯한 사이코의 만화는 특히나 그럴듯 했고요. 그러나 단점 투성이인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요새 일본 영화계가 위기라고 하는데 왜 그런지 와 닿습니다.

2022/01/23

글록 - 폴 배럿 / 오세영 : 별점 3점

글록 - 6점 폴 배럿 지음, 오세영 옮김, 강준환 감수/레드리버

오스트리아의 자영업자 가스통 글록이 국방부 납품을 위한 새로운 권총을 1년 만에 만들어 납품에 성공한 뒤, 전 세계 권총 신업 패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관련되었던 다양한 인물들과 여러가지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권총 글록이 아니라, 회사 글록의 성공담인데 과정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성공을 꿈꾸는(많이 늦었지만) 직장인인 탓이지요. 책에 따르면 독창적인 구조로 새롭게 발명되었던 총으로 사격과 관리가 용이했다는게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총에는 문외한이었던 글록이 1년 만에 권총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국방부 납품 경쟁에서 승리했던 비법은 "그는 처음 만들어 봤기 때문에 제대로 해냈다. 기존의 제조업체들은 NIH 증후군 때문에 새로운 디자인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기존 권총을 변형하면 되는데 굳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고집이 있었다." (Not invented Here :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닌 기술이나 제품을 배격하는 배타적인 조직문화)와 "백지에서 시작했다. 그는 고객인 군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고객이 요청하는 대로 수정해서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적시에 해냈다."라는 건데, UX 디자이너로서 새겨들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암요, 고객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요.

하지만 뛰어난 발명품이라도 반드시 성공하는건 아닙니다. 성능면에서 앞섰던 베타가 VHS에게 졌던 역사처럼요. 심지어 글록은 플라스틱 사출물 구성품이 많고, 디자인이 별로였다는 약점도 있었습니다. 정말 못생기기는 했으니까요.

여기서 마케팅의 귀재 발터가 글록에 합류한게 대박의 시작이었던 걸로 설명됩니다. 경찰이 무장한 범인에게 다수 사망한 1986년 마이애미 총격 사건 이후 미국 경찰 전체를 대상으로 권총 교체 바람이 불었는데, 발터의 활약으로 글록 채택이 급증하게 되었거든요. 외부 안전장치가 없는 리볼버와 동일한 시스템을 채용했다는 구조적인 장점도 있었지만, 발터가 사격 교관들을 채용하여 글록에 대한 좋은 소문을 널리 퍼트렸던 덕분이지요. 글록을 구입하면 회사가 현장으로 교관을 파견하여 훈련을 도와주고, 다양한 보상 판매 정책을 실행한 것 역시 주효했었고요. 

헐리우드 진출도 빼 놓을 수 없어요. TV 시리즈 <<이퀄라이저>>에 첫 등장했는데, 이퀄라이저는 발터 PPK를 쓰다가 글록으로 바꿨다는 설정이었다네요. 발터는 "더티해리"로 대박을 친 S&W와 같은 역사를 만들어 주기 위해(아니면 제임스 본드의 발터 PPK) 다른 경쟁 총기업체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경쟁업체는 영화 관계자에게 정가를 청구했고, 악당이 사용하는걸 거부했지만 글록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처음 등장하게 된 영화가 "다이하드 2"입니다. 용병 테러리스트의 무기로 글록이 등장하지요. 여기서 브루스 윌리스가 내뱉는 대사 - "저놈들 내게 글록7을 쐈어요! 뭔지 모르죠? 독일에서 만든 세라믹 권총이라고요. 엑스레이 기계에 걸리지도 않고 당신 한 달 월급을 줘도 못 산다고요!" - 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 총기 마니아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슈퍼 권총을 의미하는 저 대사 내용은 모두 엉터리였지만요. 이후 승승장구한 글록은 대중 문화 영역에서 독보적 입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로우 앤 오더"는 장편 글록 광고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요. 우리나라에서도 원빈이 "아저씨"에서 사용했고요.

이후 글록은 권총을 언급할 때의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글록은 권총계의 구글로 현대의 권총을 처음으로 정의한 브랜드이며, 가스통 글록은 20세기의 콜트인 겁니다!

발터의 신박한(?) 마케팅은 끝이 없었습니다. 1989년, 미국 총기와 탄약 산업 주요 컨퍼런스 SHOT에서 신형 글록 20을 공개하면서, 스트리퍼 샤론 딜런이 직접 홍보하도록 만든 광고가 대표적입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광고입니다. "10점 만점의 인기 절정 (이 번역이 맞나요? 이 도시에서 가장 핫한 10! 이 맞지 않나....) SHOT 쇼에서 글록의 신형 10mm를 만나보세요." 라는 건데, 권총과 섹스를 결합한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고 합니다. 단순 홍보 뿐 아니라 실제 구매 대상자를 상대로 한 접대에서도요.

물론 글록에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 당선 이후 정부가 NRA와 대립하며, 여러가지 총기 규제 법안들이 발효되었던게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규제 법안 발효 직전, 앞으로 총을 못 살 수도 있다는 공포 심리에 의했던 총기 수요 폭증 효과도 보았고, 규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신제품 출시로 오히려 글록의 매출은 상승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담당자 쿠오모와 총기 업체와의 협상에서 S&W는 굴복하고 말았지만, 버텼던 글록은 NRA의 S&W 불매 운동의 수혜를 보았고요. 쿠오모는 글록이 합의하지 않으면 정부기관 매출 30%를 잃게될거라 협박했지만 글록은 굴복하지 않았고, 심지어 쿠오모 부처 감찰관실 감찰관도 글록을 구입했다니 애초에 이기는 게임이었던 겁니다. 부시 정권으로 넘어가서는 이런 규제는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러가지 주변 상황을 고려했던, 경영진의 현명했던 판단이 빛납니다. 여러가지 소송을 쏙쏙 빠져나갔던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볼거리였고요.

이렇게 마케팅과 경영진의 협상과 판단에 따른 위기 탈출 등은 전형적인 기업 성공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NRA라는, 주요 소비자가 정치적 이익 단체이기도 한 비교적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요. 제가 어렸을 때 유행했었던, 도요타 등 일본 회사의 성공담을 그렸던 반쯤은 논픽션에 가까왔던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러나 뒤이어 이런저런 막장 드라마가 불거지며, 글록의 성공담은 "시마 과장"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대표적인게 1999년, 가스통 글록의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 70세라는 나이 치고는 건장했던 글록이 암살범을 제압해서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는 글록이 세금 탈루를 위해 고용했던 에베르트의 청부였다는게 밝혀지고, 이런저런 복잡한 돈의 흐름이 얽혀있는 영화같은 사건이었지요. 결국 글록은 구속된 에베르트는 물론이고, 글록의 성공을 위해 함께 했던 모든 직원들을 버리게 됩니다. 마케팅 귀재였던 발터는 진작에 회사를 떠났고, 미 정부의 규제에 맞서 현명한 판단을 했던 야누초 등 핵심 임원들 모두를요. 이 때의 동료들은 모두 말로가 좋지 못했다네요. 허나 가스통 글록은 82세 때 31살의 여성과 재혼했고, 여전히 거액의 재산을 누리며 잘 살았다고 합니다. 가스통 글록은 20세기의 콜트가 아니라, 현실 버젼의 시마 과장인 셈입니다. 시마 코사쿠보다 더 비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만.

글록의 성공담도 볼 만 했지만, "시마 과장" 스러웠던 막장 이야기들도 모두 흥미로왔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문제는 '글록'이 이야기의 핵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도판이나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글록의 시대별 변천 과정과 히트 모델, 경쟁사 모델 등을 도판으로 소개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해도 쉬웠을테고요. 그래서 약간 감점하여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총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의(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19/03/24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웬디 워커 / 김선형 : 별점 2점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4점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북로그컴퍼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인하게 강간당한 제니를 위해 부모는 망각 요법으로 당시의 기억을 없앴다. 그러나 오히려 제니는 자살을 기도했고, 새로 제니를 맡게 된 정신과 의사 앨런은 제니의 기억을 복구하여 치료에 나섰다. 하지만 제니의 기억이 차례로 돌아오면서 제니가 표백제 냄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자, 앨런은 자신의 수영 선수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표백제, 그리고 강간범은 몸에 털이 없었으며 빨간 새가 그려진 파란색 후드티를 입었다는 증언 모두 제이슨에게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제니의 아버지 톰에게 들은, 톰의 직장 상사 밥이 딸 뻘인 비서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이용하여 밥을 범인으로 조작하려 결심했다. 약간의 조작으로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 밥은 알리바이도 없으며 과거 성범죄 경력이 있었다는게 밝혀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밥은 어쩔 수 없이 제니 강간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친구의 딸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누명을 벗지만, 분노한 라일라의 아빠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권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러러면 자아가 아주 강인해야 한다."
"우리가 낳은 자식을 보호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담한 불행이다."

심리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망각 요법과 트라우마 치료에 대한 안내서에 가까와 의외였던 작품입니다. 제니와 앨런, 숀, 톰, 샬럿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강박증을 이겨내는게 주요 내용인 탓입니다. 범죄물의 분위기를 풍기는건,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한 앨런이 제니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뿐이고요. 

물론 설득력은 높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다운 디테일아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샬럿에게 들은 밥과의 성관계 묘사와 TV 광고, 경찰과의 통화를 활용하여 제니의 마음 속에 밥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과정이 아주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밥이 왜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하며, 알리바이를 밝힌 후 처단받는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어요. 조금 꼬아놓기는 했지만 초반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마약 판매상 더마코와 제이슨, 그리고 진범 셸비가 그곳에 있었던 이유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일단 범죄 스릴러, 추리물이 아니까요. 범죄물로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제니를 강간한 범인이 누구인지가 이야기의 핵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범의 정체 역시 뜬금없고요. 몇 번 반복해서 소개된, 앨런이 구하지 못한 유일한 환자라는 셸비가 진범인데 그 전 까지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다가 결말에서 급작스럽게 정체가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습니다. 셸비가 앨런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제이슨을 스토킹하여 강간하려고 했다는 목적 정도만 납득이 갈 뿐입니다. 이럴거면 범인은 누구라도 괜찮았던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충 마무리한 느낌이 들 정도에요.
셸비가 오래전 앨런도 강간한 적이 있었다는 설정도 황당합니다. 앨런도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이며, 제니의 치료와 함께 스스로도 치유되었다는 결말을 위한 억지 설정인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또 셸비가 진범이라는걸 진작 알고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는 제이슨에게 혐의가 가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던 앞부분 모습과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진범이 누구인지를 경찰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극에 달한 앨런 1인칭 시점의 묘사 역시 그닥입니다. 주변 묘사 없이 앨런의 심리 묘사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나 인터뷰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몰입하기 힘들었어요.
또 어느새 톰과 샬럿의 과거와 현재 비밀까지 공유하며 그들을 치료하게 되는 전개도 이상합니다. 분명 제니의 치료, 기억 복원이 목적인데 왜 부부의 심리 치료까지 하는건지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이를 위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심지어 샬럿은 과거 의붓아버지와의 성관계를 숨겼을 뿐 아니라 남편 톰의 직장 상사 밥과 불륜 관계라는 설정인데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성폭행 피해자인 제니가 아닌 샬럿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역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샬럿은 밥과의 관계를 깨고, 자신이 잃었던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톰 역시 그런 샬럿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다시 사랑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고통을 떠올린 후 치유가 되었다는게 전부입니다. 샬럿과 톰이 뭘 어떻게 하건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냥 막장 드라마와 같은 재미를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등장 인물들과의 대사로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져 숀같은 인물의 비중이 기묘하게 높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숀은 제니의 심리를 전달해주기 위해 투입되어 비중도 커진 도구에 불과해 보이거든요. 제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한데 말이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졌다면 더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도 없고 묘사도 지루하며 장황할 분 아니라 범죄 스릴러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인터넷 상의 그럴듯한 소개에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5/04/06

사상학 탐정 1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사상학 탐정 1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보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쓰루야 슌이치로가 탐정 사무소를 개업한 날, 사야카라는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청년 IT 재벌 아키라와 약혼했지만, 약혼자가 급작스럽게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한 후 자신의 주변에 떠도는 죽음에 이유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아무런 사상도 보지 못한 쓰루야는 의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약혼자의 본가인 이리야가에 함께 살게 된 후, 기이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녀는 다시 쓰루야를 찾았다. 쓰루야는 그녀를 뒤덮은 섬뜩한 사상을 확인한 뒤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리야가를 방문했다. 그러나 기이한 사건은 멈추지 않고 아키라의 이복형 나쓰키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가족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볼 수 있다는 특수 능력의 소유자가 주인공으로,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는 탐정이라는 직함을 걸고 있지만 별다른 추리력은 없습니다. 자신의 특수 능력과 일본 최고의 무녀인 할머니 아이젠에게서 배운 지식과 경험에 의존할 뿐입니다. 사건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술’의 영역에서 벌어지고요. 이런 점에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일본식 퇴마 판타지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만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뻔한 퇴마 배틀물은 아닙니다. 쓰루야의 능력은 사상을 보는게 전부로 다른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백귀야행"의 리쓰가 탐정 사무소를 열었다고 해도 될 정도에요. 쓰루야와 리쓰는 능력치도 거의 비슷하니까요. 실제 스물스물 움직이는 저주의 실체를 보고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거든요. 주술, 저주가 정말 일상 속에 있을 법한 것으로 그럴듯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 역시 "백귀야행"스럽습니다. 이렇게 설득력 넘치는 괴이 묘사는 민속 탐정 시리즈를 써왔던 미쓰다 신조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 특유의, "백귀야행"과는 다른 섬뜩한 묘사들도 볼거리이고요.

이러한 설득력 넘치며 섬뜩한 분위기에 더해 작가의 명성과 "탐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추리적인 부분도 나름 볼 만 합니다. 비과학적인 영역이기는 하지만, 주술과 저주에 적용된 일종의 법칙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덕분입니다. 부제 그대로 '13'에 관련된 법칙인데, 정교하게 짜인 복선과 함께 쓰루야의 메모를 중심으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여 두뇌 싸움을 벌이게 만드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이리야가 전 당주 및 가족들의 취미와 엮은 자잘한 설정들도 흥미로웠고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점은 굉장히 빠르게 전개되는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지루할 틈 없이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고작 두 권 읽은 게 전부지만, 어렵고 복잡한 일본 민속 관련 지식을 고풍스럽고 무겁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탓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읽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흡사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젊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운운하며 누벨바그 운동(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이 일어났을 때, 거장 르네 끌레망이 정말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태양은 가득히"를 발표한 일화가 떠올랐어요.

이렇듯 독특함과 재미를 모두 갖춘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13'에 관련된 법칙이 재미는 있지만, 합리적인 구조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설정에 맞춰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숫자만 들어가면 무엇이든 되기 때문에 단서들의 비약이 심하고, 억지스러운 전개도 제법 있고요. 작중에서도 언급되듯 나이 든 사람들만, 그것도 일본이라는 환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입니다. 사야카가 쓰루야에게 단서를 전해주려 애쓴다는 설정도 쓰루야의 무능함만 돋보이며, 혹 쓰루야가 정말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단점입니다.

아울러 동기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작품에서처럼 사야카가 모든 저주의 흑막이라면, 그녀는 아키라 재산의 60%로 왜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설령 아키라의 배다른 형제를 모두 죽였다 치더라도 60%가 80%가 될 뿐 - 20%는 죽이고 싶지 않았던 아키라의 어머니 도시코의 몫이기에 - , 예를 들어 유산이 한 40억이라고 한다면 24억이 32억이된다... 본인까지 저주를 걸 정도로 의미가 있는 금액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방법적으로 무리수가 너무 많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형제들에게 저주를 걸고 어디 외국이라도 가 있었을겁니다. 사인이야 어차피 급성 심부전이니 수상하기는 해도, 증거는 없었을테니까요. 구태여 같이 저주에 걸려가며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과 동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쓰루야에게 사건을 의뢰한 이유도 사건이 언젠가 쓰루야나 아이젠 귀에 들어갈까봐 의뢰했다는 것인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설령 귀에 들어갔다손 치더라도, 주인공이나 주인공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리야 가문의 설정, 판에 박은 의붓형제 캐릭터인 나쓰키, 하루미 등은 고민이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자 미쓰다 시존의 새로운 모습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몰입해서 읽는, 재미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에스프레소라면 달달한 카푸치노같은, 아주 무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은 작품이니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궁금하신 입문자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해졌다. 며칠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했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렸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서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까운 편입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 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결정적 단서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럽습니다.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탓입니다.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20/03/11

너무 예쁜 소녀 1~3 - 얀 제거스 / 송경은 : 별점 1점

[세트] 너무 예쁜 소녀 (전3권) - 2점
얀 제거스 지음, 송경은 옮김/한경비피

인적이 드문 프랑스의 한 마을에 어느 날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쁜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마농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녀를 돌봐주던 미망인이 심장마비로 죽자 마농은 마을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마을을 떠났다. 때마침, 총각 파티를 떠나던 세 명의 남자들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차에 태워 주었다.

장면이 바뀌어 한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프랑크푸르트. 미국대통령의 방문으로 도시 전체가 삼엄한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도시 숲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강력계 팀장 로버트 마탈러가 이 사건을 맡게 된다. 사건 발생 이틀 뒤, 사건 현장 근처 호수에서 물에 빠진 자동차가 발견된다. 트렁크에서 또 다른 남자의 시체가 나오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진다. 트렁크 안에서 발견한 피해자의 옷에서 주유소 영수증을 찾아내고, 그 일행이 주유소 주인의 조카는 자동차에 남자 세 명과 유난히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타고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작가의 추리 소설 데뷰작이자 로버트 마탈러 형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네요. 코로나 사태로 방콕하는 와중에 도서관 e-book 대여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유럽 추리 소설은 딱히 취향이 아니지만, 이전에 분명 어디선가 소갯글을 읽고 장바구니에 담아놓았었기 때문이죠. 제목에서 왠지모를 호기심도 느꼈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선택은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끔찍한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범인을 뒤쫓는 형사들의 활약이 펼쳐지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모든 면에서 함량 미달인 탓입니다. 주인공인 로버트 마탈러 형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랫동안 형사로 일하고, 지금은 팀장이라는데 전혀 전문가스럽지 않기 때문이에요. 피해자 가족에게 피해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기를 지극히 꺼려할 정도로요. 독일 형사라면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것 같지만, 연락하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도 잊어버린다거나,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등 잔 실수도 많습니다. 추격전과 같이 대단한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고, 사람 몇 명 만났다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을 보면 영 신뢰하기 어렵고요. 여기에 먹는걸 좋아하고, 15년 전 사망한 아내를 잊지 못하면서도 단골 카페의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테레사를 유혹하는 모습을 더하면, 이게 무슨 독일인이가 싶습니다. 이탈리아 인에 더 가까운거 아닐까요? 수사 외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미술 쪽에 대한 취미도 피력하는데 이는 완전한 사족이었습니다. 운전을 싫어하고, 담배와 커피를 즐기는 모습 정도의 독특함만 가져가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다른 경찰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탈러의 부하들은 도주 중인 플뢰거에게 습격당해 총을 빼앗기고, 플뢰거에게 사로잡혀 끌려다니는데다가, 마리 루이제가 있는 쇼핑몰 봉쇄에 실패하고, 심지어 유력 용의자인 마리 루이제를 호송 중에 놓치기까지 합니다. 다른건 몰라도 유력한 용의자를 놓친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너무 예쁜 소녀' 마농, 마리 루이즈의 존재도 별거 아닙니다. 누구나 반할만큼 대단한 외모를 소유했다고 묘사는 되지만, 그 미모 탓에 사건이 벌어진다고는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모 때문에 가족이 파멸하고, 그녀가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요
또 소악당 3명의 차에 얻어탄 뒤 성폭행 당한건 미모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외모가 평균 수준만 되었어도 충분히 닥칠 수 있는 범죄였으니까요. 로만을 유혹한 뒤 살해하는 범행에는 명백히 미모가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마농의 모든 행동은 뒤떨어져 보이는 지능 등으로 모두 즉흥적, 수동적으로 묘사됩니다. 미모를 사용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어요. 미모를 활용한 어린 팜므파탈을 기대했었지만, 실망스럽기만 하네요.

내용에서도 스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당연히 없고요. 시체가 발견된 뒤, 목격자들의 증언과 이런저런 증거를 모아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요. 마농이 베른트 풍케와 요헨 힐셔, 플뢰거가 탄 차에 동승한 뒤 숲 속에서 플뢰거를 제외한 사람들끼리 성관계가 있었고, 일행 중 베른트 풍케와 요헨 힐셔가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이 제 3의 인물이 아니라면 플뢰거나 마농,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인건 뻔합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여자인 마농보다는 플뢰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봐야겠죠. 마농 혼자 남자 2명을 살해하고, 그 중 한 명을 차 트렁크에 실어 호수에 버릴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우니까요. 마농이 범행을 저지르는 와중에 플뢰거 혼자 도주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하지만 이 가설은 사건 뒤 마농이 우연히 만나 유혹한 로만을 난도질해서 살해한 것 때문에 부정됩니다. 그녀는 정말 살인마였던거죠, 그렇다면 플뢰거는 왜 마농과 따로 도주한 뒤 경찰에 쫓기다가 투신자살했을까요? 범행의 공범이었다 하더라도 직접 실행범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릴 이유가 없었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공범이었다면, 애초에 자기 친구 두 명 살해와 시체 유기에 가담한 이유와 요헨 힐셔의 시체를 은닉한 뒤 마농이 플뢰거를 살해하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남자만 죽인다는게 이유였을까요? 그렇다면 왜? 정말로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던 트라우마가 있었던걸까요? 그리고 로만과는 몇일간 함께 지내며 관계를 맺었는데 왜 바로 살해하지 않은걸까요?
이렇게 떡밥을 던진건 많은데 제대로 회수되는건 별로 없어요. 범행 동기도 도무지 알 수 없고요. 게다가 모든 수수께끼는 결말에서 마농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서 그랬다, 즉 심신 미약 상태에서 일으킨 불가항력적인 범행이었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됩니다. 이 정도면 막장 드라마의 기억 상실급에 비교할 만한 최악의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설명되지 못한 부분은 많습니다. 애초에 왜 마농의 아버지 페터가 가족 동반 자살을 기도했는지, 가족 동반 자살 사건에서 마농 혼자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지, 살아남은 뒤 왜 정상적인 사고를 갖추지 못하게 되었는지, 마농이 체포되고 난 후 장 루크 지로가 죄를 뒤집어 쓰기 위해 나선 이유는 무엇인지 등 많은 부분이 모호합니다. 장 루크 지로는 마농에게 홀딱 반한 멍청이라서 그렇다지만, 딱히 납득이 되는 설명은 아니었어요.
그나마 추리가 등장하는건, 페터 가이슬러가 좌절하여 일가족 동반 자살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 익명의 투서를 누가 썼느냐를 밝혀내는 정도에 그치며, 이 역시 사건 후 페터의 주변 동료 중 한 명이 자주 쓰지 않는 단어를 진술서에 썼는데 이 단어가 투서에도 쓰였다는게 이유라서 대단한 추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캐릭터, 내용 모두 뭐 하나 건질게 없었던 완벽한 시간 낭비였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걸 알게된게 유일한 수확이에요. 로버트 마탈러가 팀장으로 근무하는 독일의 치안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