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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3

글록 - 폴 배럿 / 오세영 : 별점 3점

글록 - 6점 폴 배럿 지음, 오세영 옮김, 강준환 감수/레드리버

오스트리아의 자영업자 가스통 글록이 국방부 납품을 위한 새로운 권총을 1년 만에 만들어 납품에 성공한 뒤, 전 세계 권총 신업 패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관련되었던 다양한 인물들과 여러가지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권총 글록이 아니라, 회사 글록의 성공담인데 과정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성공을 꿈꾸는(많이 늦었지만) 직장인인 탓이지요. 책에 따르면 독창적인 구조로 새롭게 발명되었던 총으로 사격과 관리가 용이했다는게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총에는 문외한이었던 글록이 1년 만에 권총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국방부 납품 경쟁에서 승리했던 비법은 "그는 처음 만들어 봤기 때문에 제대로 해냈다. 기존의 제조업체들은 NIH 증후군 때문에 새로운 디자인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기존 권총을 변형하면 되는데 굳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고집이 있었다." (Not invented Here :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닌 기술이나 제품을 배격하는 배타적인 조직문화)"백지에서 시작했다. 그는 고객인 군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고객이 요청하는 대로 수정해서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적시에 해냈다."라는 건데, UX 디자이너로서 새겨들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암요, 고객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요.

하지만 뛰어난 발명품이라도 반드시 성공하는건 아닙니다. 성능면에서 앞섰던 베타가 VHS에게 졌던 역사처럼요. 심지어 글록은 플라스틱 사출물 구성품이 많고, 디자인이 별로였다는 약점도 있었습니다. 정말 못생기기는 했으니까요.

여기서 마케팅의 귀재 발터가 글록에 합류한게 대박의 시작이었던 걸로 설명됩니다. 경찰이 무장한 범인에게 다수 사망한 1986년 마이애미 총격 사건 이후 미국 경찰 전체를 대상으로 권총 교체 바람이 불었는데, 발터의 활약으로 글록 채택이 급증하게 되었거든요. 외부 안전장치가 없는 리볼버와 동일한 시스템을 채용했다는 구조적인 장점도 있었지만, 발터가 사격 교관들을 채용하여 글록에 대한 좋은 소문을 널리 퍼트렸던 덕분이지요. 글록을 구입하면 회사가 현장으로 교관을 파견하여 훈련을 도와주고, 다양한 보상 판매 정책을 실행한 것 역시 주효했었고요. 

헐리우드 진출도 빼 놓을 수 없어요. TV 시리즈 <<이퀄라이저>>에 첫 등장했는데, 이퀄라이저는 발터 PPK를 쓰다가 글록으로 바꿨다는 설정이었다네요. 발터는 "더티해리"로 대박을 친 S&W와 같은 역사를 만들어 주기 위해(아니면 제임스 본드의 발터 PPK) 다른 경쟁 총기업체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경쟁업체는 영화 관계자에게 정가를 청구했고, 악당이 사용하는걸 거부했지만 글록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처음 등장하게 된 영화가 "다이하드 2"입니다. 용병 테러리스트의 무기로 글록이 등장하지요. 여기서 브루스 윌리스가 내뱉는 대사 - "저놈들 내게 글록7을 쐈어요! 뭔지 모르죠? 독일에서 만든 세라믹 권총이라고요. 엑스레이 기계에 걸리지도 않고 당신 한 달 월급을 줘도 못 산다고요!" - 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 총기 마니아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슈퍼 권총을 의미하는 저 대사 내용은 모두 엉터리였지만요. 이후 승승장구한 글록은 대중 문화 영역에서 독보적 입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로우 앤 오더"는 장편 글록 광고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요. 우리나라에서도 원빈이 "아저씨"에서 사용했고요.

이후 글록은 권총을 언급할 때의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글록은 권총계의 구글로 현대의 권총을 처음으로 정의한 브랜드이며, 가스통 글록은 20세기의 콜트인 겁니다!

발터의 신박한(?) 마케팅은 끝이 없었습니다. 1989년, 미국 총기와 탄약 산업 주요 컨퍼런스 SHOT에서 신형 글록 20을 공개하면서, 스트리퍼 샤론 딜런이 직접 홍보하도록 만든 광고가 대표적입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광고입니다. "10점 만점의 인기 절정 (이 번역이 맞나요? 이 도시에서 가장 핫한 10! 이 맞지 않나....) SHOT 쇼에서 글록의 신형 10mm를 만나보세요." 라는 건데, 권총과 섹스를 결합한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고 합니다. 단순 홍보 뿐 아니라 실제 구매 대상자를 상대로 한 접대에서도요.

물론 글록에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 당선 이후 정부가 NRA와 대립하며, 여러가지 총기 규제 법안들이 발효되었던게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규제 법안 발효 직전, 앞으로 총을 못 살 수도 있다는 공포 심리에 의했던 총기 수요 폭증 효과도 보았고, 규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신제품 출시로 오히려 글록의 매출은 상승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담당자 쿠오모와 총기 업체와의 협상에서 S&W는 굴복하고 말았지만, 버텼던 글록은 NRA의 S&W 불매 운동의 수혜를 보았고요. 쿠오모는 글록이 합의하지 않으면 정부기관 매출 30%를 잃게될거라 협박했지만 글록은 굴복하지 않았고, 심지어 쿠오모 부처 감찰관실 감찰관도 글록을 구입했다니 애초에 이기는 게임이었던 겁니다. 부시 정권으로 넘어가서는 이런 규제는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러가지 주변 상황을 고려했던, 경영진의 현명했던 판단이 빛납니다. 여러가지 소송을 쏙쏙 빠져나갔던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볼거리였고요.

이렇게 마케팅과 경영진의 협상과 판단에 따른 위기 탈출 등은 전형적인 기업 성공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NRA라는, 주요 소비자가 정치적 이익 단체이기도 한 비교적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요. 제가 어렸을 때 유행했었던, 도요타 등 일본 회사의 성공담을 그렸던 반쯤은 논픽션에 가까왔던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러나 뒤이어 이런저런 막장 드라마가 불거지며, 글록의 성공담은 "시마 과장"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대표적인게 1999년, 가스통 글록의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 70세라는 나이 치고는 건장했던 글록이 암살범을 제압해서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는 글록이 세금 탈루를 위해 고용했던 에베르트의 청부였다는게 밝혀지고, 이런저런 복잡한 돈의 흐름이 얽혀있는 영화같은 사건이었지요. 결국 글록은 구속된 에베르트는 물론이고, 글록의 성공을 위해 함께 했던 모든 직원들을 버리게 됩니다. 마케팅 귀재였던 발터는 진작에 회사를 떠났고, 미 정부의 규제에 맞서 현명한 판단을 했던 야누초 등 핵심 임원들 모두를요. 이 때의 동료들은 모두 말로가 좋지 못했다네요. 허나 가스통 글록은 82세 때 31살의 여성과 재혼했고, 여전히 거액의 재산을 누리며 잘 살았다고 합니다. 가스통 글록은 20세기의 콜트가 아니라, 현실 버젼의 시마 과장인 셈입니다. 시마 코사쿠보다 더 비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만.

글록의 성공담도 볼 만 했지만, "시마 과장" 스러웠던 막장 이야기들도 모두 흥미로왔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문제는 '글록'이 이야기의 핵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도판이나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글록의 시대별 변천 과정과 히트 모델, 경쟁사 모델 등을 도판으로 소개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해도 쉬웠을테고요. 그래서 약간 감점하여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총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4/06/24

아이스 - 에드 멕베인 / 이동윤 : 별점 2점

아이스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무용수 샐리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흉기는 조무라기 마약상 로페즈를 살해한 것과 같은 권총임이 밝혀졌다. 카렐라와 동료들은 두 피해자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들 앞에서 차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87분서 시리즈'로, 1983년에 발표된 시리즈의 36번째 작품입니다.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출간되었던 전작 시리즈와는 달리 검은숲에서 독립적으로 출간되었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조무라기 마약상이자 양아치인 로페즈, 대히트 뮤지컬 "팻백"의 댄서 샐리 앤더슨, 보석판매상 에덜먼이 동일한 권총으로 살해당했는데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왜 차례로 희생되었는지를 밝혀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 와중에 잔인한 폭력배 엔터니 수사와 팻레이드 에마 커플이 마약 거래로 한몫 잡으려 끼어들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본 사건과 무관한 사건들 에서 주로 미끼로 활동하는 여자 형사 아일린의 활약, 버트 클링 형사의 어려운 가정사 등이 복합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준은 평균 이하였습니다. 책 뒤 소개에서 ‘중기 걸작’이라 칭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설정의 설득력이 거의 없으며, 추리적 요소도 거의 부재한 탓입니다. 로페즈와 샐리가 과거 동거했다는 설정은 처음 등장 시의 묘사만 봐도 상상하기 힘들고, 결국 경찰 수사로 관계가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가 추리를 해볼 여지조차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샐리가 성공한 후에도 로페즈와 섹스 파트너로 관계를 유지했다는 설정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진짜 흑막인 티모시의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히 마이애미에서 한 꼬마의 생명을 구하고, 그 대가로 그의 아버지로부터 코카인을 구매해 큰돈을 번다는 황당한 시작부터 엉망입니다. 부유한 의대생이 코카인에 거금을 투자해 돈을 불리려 했다는 설정도 비현실적이고요. 이런게 진상인 작품의 완성도가 높게 느껴지기는 어렵지요. 에마에 의해 난자당하는 티모시의 최후 역시 예상 가능한 전개였고요.

여형사 아일린 버크가 맡은 개별 사건들, 버트 클링 형사가 이혼 후 다시 아일린과 관계를 맺는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많이 삽입되어 있는 점도 의아합니다. 카렐라 형사와 테디의 발렌타인 이벤트처럼 본 사건과 큰 연관이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팬들을 위한 일종의 팬서비스로 보이지만, 이 때문에 분량이 늘어나며 지루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프 픽션의 제왕다운 흡입력은 유지됩니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잔혹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는 전개는 몰입감을 줍니다. 아일린이 맡은 세탁소 팬티 도둑이나 간호사 강간범 사건도 그 자체로는 흥미롭고요. "아이스"라는 단어의 중의적인 의미나, 티모시가 권총의 소유주를 속여 핵심 혐의에서 벗어나는 과정 등에는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특히 권총의 실소유자를 피해자로 위장하여 자신이 빠져나간다는 설정은 많이 본 이야기이지만("헤드헌터" 등)잘 써먹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원조인지 여부는 조금 궁금해집니다. 탄도분석이나 탄조흔 검사의 시작 시점을 알면 원조 여부를 추정할 수 있을텐데 말이지요.

또한 "노상강도"에서 사랑에 빠진 클레어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잘나가는 모델과 결혼했지만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이혼하게 되었다는 버트 클링의 파란만장한 연애사 역시 팬으로서는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주변 여성들을 모두 자기 곁으로 끌어들이는 옴므파탈로서의 클링의 모습이 빛났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본편 줄거리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팬심으로 점수를 조금 더했지만, 팬서비스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묘사가 가득한 뻔한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시리즈 최고작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작품은 역시 초기작 외에는 건질 것이 많지 않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2005/07/23

정인숙 사건 - 나명순 르포집 : 별점 2점

1988년에 나온 책이니 당시에는 화제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냥 잊혀진 한국 현대사의 한토막인 정인숙 사건에 대한 르포집입니다.

정인숙 사건은 아마 지금은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간략히 소개한다면, 박정희 독재 당시 주미대사를 손가락으로 부르며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손에 넣었던 미모의 여인(아마도 고급 콜걸?) 정인숙이 1970년 자동차를 타고 귀가중 운전하던 오빠 정종욱의 총을 맞고 살해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가 몇 가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여인의 이름이 역사에 한토막으로 남게 되었지요.

미스테리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정인숙이 낳은 아이는 누구인가? 이미 수차례의 임신 중절 수술을 경험했으며 직업 특성상 아이를 가지는 것이 불리했을 것이 당연한 정인숙이 애써 낳아 기른 아이는 누구의 아이였을까? 이 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정인숙을 죽이고 희생양으로 오빠 정종욱을 내세워 이 사건의 수사를 졸속으로 처리하게 하였을까?
  2. 집에서 가까운 위치에 동기마저 불명확한 오빠의 충동적 살인은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진범은 과연 누구인가?
물론 이외에도 사건에 관련된 소소한 수수께끼들, 예컨데
  1. 결국 발견하지 못한 권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 범행에 사용된 권총을 제공했다는 신현정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앞서 말한 저 두 가지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 미스테리는 정인숙의 부와 권력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부분이기도 해서 더욱 관심을 자아내는데, 일단 이 책에서는 소문과 추론을 통해 인물을 두 명, "박정희"와 "정일권"으로 좁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 미스테리도 당시 수사와 재판은 졸속이었고 다른 곳에서 살해당해 옮겨졌다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을 만큼 정종욱은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추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고요. 거기에 사건의 정황에서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 그리고 정인숙의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의 행적, 당시 사회상 등을 소상하게 추적하여 기술하고 있고 관련자 인터뷰도 진행하는 등 소문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로 팩트에 기초한 것 같지는 않고 추정과 당시의 소문 등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자체를 밝혀내는데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점에서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새롭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없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르포집이라는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인데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요. 국내 현대사에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많은 만큼 이런 장르의 책들도 많이 나와 주길 바랍니다.

덧 : 그나저나, 몇년전에 아들인 정승일이 정일권씨에게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DNA검사를 했지만 결국 친자가 아닌것으로 증명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부는 누구였을까요? 정말이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2013/05/09

미국 총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김예진 : 별점 2점

미국 총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김예진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인 와일드 빌의 로데오 쇼에서 옛 헐리우드 스타 벅 혼이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마침 현장에 있던 퀸 경감이 직접 지휘하여 철저한 수색을 벌였지만, 흉기인 25구경 권총은 발견하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리고 한 달 뒤 다시 벌어진 로데오 쇼에서 간판스타 외팔이 우디가 벅 혼과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흉기로 살해되는데...

재발간되고 있는 엘러리 퀸 시리즈의 한 권. 시리즈 출간 소식은 이전에 접했었으나 이미 읽었던 작품을 다시 읽는 것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국내 초역된 것이라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부터 소개하자면, 미스터리 황금기 시대의 국명 시리즈답다는 점입니다. 즉, 현대물에서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것이지요. 도저히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불가능 범죄, 연이어 등장하는 수상한 등장인물들, 공정하게 제공되는 단서들과 마지막 독자에의 도전까지 충실한, 정통 본격 추리물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덕분에 즐길 거리가 아주 많았어요.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이 우연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핵심 트릭인 바꿔치기 트릭 (벅 혼 바꿔치기)는 순전히 와일드 빌과 키트 혼 같은 지인들이 모두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에 미궁에 빠졌을 뿐입니다. 과연 아무런 사전 교감 없이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수 있었을까요?

두 번째 문제점은 벤지 밀러의 존재입니다. 첫 만남에서 오랜 친구라는 와일드 빌이 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그가 수상하고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는걸 독자가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전개되기 때문에 본격물치고는 좀 시시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핵심 트릭 중 하나인 권총을 숨기는 방법이 너무나 쉽게 파악되고, 파악되는 근거도 우연에 기인한 뉴스 촬영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엘러리 퀸이 중반 전에 벅 혼 사건 일부의 진상을 눈치챘음에도 벤지 밀러를 방치한 점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과실치사로 구속감이 아닐까 싶네요.

다섯 번째 문제는 정통 추리물치고는 범인의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퍼즐 풀이에만 주력한 느낌이에요. 너무 범인 쪽 드라마가 없다 보니 장대한 추리 퀴즈를 본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문제점을 정리하다 보면, 결론적으로 용의자도 명확하고 트릭도 쉬운데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내용에 불과해서 좀 허무하기도 하네요. 벤지 밀러만 잡아다 족쳐도 빨리 끝났을 텐데, 경찰의 무능도 정도껏 해야죠...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점. 고전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 책이 소개된 것 자체는 굉장히 반갑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며, 책도 아주 예쁘게,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잘 나왔지만 단점이 많아서 완성도는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국명 시리즈보다는 라이츠빌 시리즈가 아무래도 더 제 취향인 것 같습니다.

2021/10/03

법정에 선 수학 -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 김일선 : 별점 3점

법정에 선 수학 - 6점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아날로그(글담)

수학이 법정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재판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숫자가 잘못 사용되어서 재판 결과가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적인 조건으로 판단하고 곱하면 안되는데, 곱해서 숫자가 엄청나게 커진 경우처럼 대부분 통계와 확률 계산의 오류들이고요. "루시아 더베르크 사건", "샐리 클라크 사건", "콜린스 부부 사건", "조 스니드 사건" 이 대표적입니다. 

루시아 더베르크는 2001년 네덜란드에서 아동 연쇄 살인마로 몰렸던 간호사입니다. 여러 아이가 심정지로 사망했을 때,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현장에 있었을 확률이 왜곡되어 재판에 사용되었습니다. 수학은 단지 거들었을 뿐이고, 사실 무리했던 기소와 수사, 그리고 무능했던 변호사의 환장의 콜라보였기에 그녀는 결국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오류가 일어난 이유는, 모두 개별적으로 보아야 하는 독립 사건을 곱했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를 영아 돌연사로 연달아 잃은 뒤, 영아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던 샐리 클라크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샐리는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명명한 메도 박사의 증언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사는 아이 두 명의 죽음을 모두 독립적이라고 생각하고 확률을 계산했었고요. 그러나 유전적일 경우 두 죽음은 독립적이지 않을 뿐더러, 설령 확률이 맞았다 하더라도 이게 샐리의 범행을 증명하는건 아닙니다. 운 나쁘게 불행한 죽음이 닥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여러모로 확률이 잘못 사용된 거지요.

콜린스 부부는 범인과 인상착의가 같을 확률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검사측은 LA 시민 중 비슷한 특징을 지닌 커플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해서 증거로 제시했었습니다. 부부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지만, 배심원은 유죄를 선고했고요. 그러나 이 확률 계산이야말로, 오류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우선 사용된 값이 문제였어요. "여성이 머리를 묶었을 확률" 은 통계학적 근거에서 나온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건이 독립적이라고 확정하고 곱한 것도 실수였고요. 마지막으로, 설령 그 숫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건 샐리 클라크 사건처럼 실제 범인을 찾아낼 확률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대법원에서 판결은 뒤집혔습니다. 이 재판에서 그나마 긍정적이었던건 검찰측 오류를 밝혀내는데 활약했던 트라이브가 법조계 유명인사가 되었고, 법정에서 수학 사용이 자제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정도네요. 

"조 스니드 사건"은 1964년 뉴멕시코 실버시티에서 스니드 부부가 살해된 뒤, 용의자였던 아들 조 스니드 재판을 다루고 있는데 재판의 승패는 조 스니드와 권총을 구입했다는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인지를 입증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이를 수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권총을 구매한 사람의 특징 - 신장, 머리 색, 눈동자 색, 사서함 번호, 이름 등 - 을 독립적으로 보고 값을 뽑은 뒤 곱했는데, 이건 수학에 어두운 제가 봐도 설득력없는 숫자로 보입니다. 전체 인구에서 크로셋이라는 이름이 나올 확률을 추산했다? 가명을 썼다면서 그 이름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한다는건 이상하지요. 다른 조건과 값도 비슷해서, 결국 이 확률 계산은 재판과는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숫자일 뿐입니다. 설령 숫자가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숫자는 조 스니드와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과는 상관도 없고요. 오히려 이런 검찰의 삽질이 드러나서, 수학이 사용되지 못했던 항소심 이후의 법정 공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검찰은 다른 한 방을 준비해야 했기에, 변호인측과 드라마틱하면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니까요. 참고로, 여기서 검찰이 마지막 날린 한 방은 스니드의 전처를 증언대에 세웠던 겁니다. 그녀가 스니드의 폭력 성향을 입증했던 덕분에, 스니드는 종신형을 받게 되었지요.

이렇게 수학이 재판 결과를 왜곡시킨 사건도 있지만 수학이 잘 사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2007년 11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영국인 유학생 메러디스 커처가 살해된 뒤,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어맨다와 남자친구 라파엘이 체포되었던 "어맨다 녹스 사건"은 재판 결과야 어찌 되었건, 수학은 증거로 유의미하다는걸 나름대로 증명했습니다. 여기서 앞 뒤가 나올 확률이 다른 동전을 이용한 설명도 좋았어요.

그런데 몇몇 사건은 주제와 벗어나 좀 아쉬웠습니다 .폰지 사기의 원조 찰스 폰지 사건 재판은 그의 사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월가의 마녀로 불렸던 해티 부인 재판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은 수학이 서명과 필적 위조를 입증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실제 재판 결과와는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요. 재판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었지만요. 드레퓌스 재판은 워낙 유명해서 이 책에서 따로 짚고 넘어갈 필요도 없어 보였고요. 저 같은 초보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이나 계산이 사용된 경우가 많은 점도 단점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수학 교양서로도 충분했고, 소개된 재판들 대부분이 한 편의 법정물을 읽는 듯한 재미를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비슷한 책으로 "넘버스"가 있는데, 재미 면에서는 이 책의 압승입니다.

2013/05/24

살의의 쐐기 - 에드 멕베인 / 박진세 : 별점 3.5점

살의의 쐐기 - 8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87분서 형사실에 갑자기 찾아온 여자 버지니아. 그녀는 한 병의 니트로글리세린과 권총으로 형사실의 형사들을 제압했다. 스티브 카렐라 형사의 죽음이 목적이었다. 카렐라 형사가 남편을 체포하여 형무소로 보낸 탓에 남편이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로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그간 유명세는 많이 들어왔으나 국내에 소개되지 않아서 아쉬웠었는데, 드디어 번역 출간되었네요.

읽어보니 역시나 명불허전! 스티브 카렐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총과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무장하고 87분서 형사실로 쳐들어온 연약한 여자 한 명에게 동료 형사들이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는 도입부부터 흥미진진합니다. 여자 한 명이 터프가이 형사들 모두를 제압한다는 이색적인 상황이 눈길을 사로잡는 덕분입니다.

게다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형사들 한 명, 한 명의 심리와 작전 묘사도 대단합니다. 흡사 모두가 주인공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업무를 가장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쪽지를 작성한 뒤 밖으로 날려 보내는 마이어 마이어, 일부러 방의 온도를 올린 뒤 범인인 버지니아가 코트를 벗기를 유도하여 코트 주머니 속 권총을 확보하려는 코튼 호스, 전화와 방문자들에게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번스 반장 등 각자의 노력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속에 펼쳐집니다.

또한 버지니아가 스티브 카렐라가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 카렐라의 활약도 볼거리입니다. 자살로 보이지만 실은 밀실 살인이었던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인데, 트릭이 상당히 그럴듯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대중적인 펄프픽션 작가로 알고 있던 에드 멕베인의 필력이 제대로 폭발하는(물론 좋은 번역 탓도 크겠지만) 문장들도 감동이었어요. 도시를 여자로 비유하는 장면은 코넬 울리치를 연상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버지니아가 스티브 카렐라의 등 뒤에 총알을 꽂아넣지 않고 일부러 87분서로 쳐들어온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는 않는 단점은 큽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의 취급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걸 들고 직접 이동하여 경찰서를 찾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또 번스 반장을 비롯한 형사들 모두가 버지니아가 카렐라를 죽이면 상황이 종료될거라 생각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누가 봐도 폭탄을 터뜨려 다 죽이고 끝낼 상황이잖아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리고 싸구려 헐리우드 영화 느낌이 철철 나는, 과연 에드 멕베인이구나 싶었던 작위적인 부분도 단점입니다. 푸에트리코 미녀 안젤리카의 등장과 역할, 카렐라의 부인 테디가 등장하고 그녀로 인해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허나 단점은 모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큰 재미와 줄거리를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서스펜스를 제대로 느끼게 해 주는 전개가 워낙에 빼어나서 읽는 동안에는 흠이라 생각되지도 않았고요. 이제서야 소개된 게 의아할 정도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제목과 명성만큼 멋진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추리 애호가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신생 출판사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 직접 번역한 책인 듯한데 앞으로도 건승하세요!

2017/01/27

만화의 길 (망가노미치) 1~4 - 후지코 후지오 A : 별점 3점

만화가 후지코 후지오 컴비(그 중에서도 A인 마가 미치오)를 모델로 한 장편 만화입니다. 전 4권짜리 애장판으로, 전체 연재분에서 "입지편", "청운편", "야스나로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권당 9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마가 미치오와 사이노 시게루가 만화가를 꿈꾸다가 데뷰하고, 성공 가도를 달리지만 스스로의 과욕과 실수로 쓰디 쓴 좌절을 맛본 후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까지가 치밀하게 그려집니다. 구하기는 오래 전에 구해 놓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가 올해 들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독파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네요.

저는 "만화가가 나오는 만화는 재미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대표격인 "바쿠만", "아오이 호노오" 외에도 개그 만화인 "호에로 펜", "만화가의 사랑", "만화가와 어시스턴트", "월간 순정 노자키군" 등 만화가가 나오는 만화는 뭐 하나 빼 놓기 어려울 만큼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라 히데노리의 "언제나 꿈을"은 조금 취향과 다르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고요.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다른 작품들 못지 않게 재미있습니다! 어린 컴비가 만화가로 데뷰하고 연재작을 이어간다는 부분은 "바쿠만"에 가까운데, 거장의 실제 경험이 뒷받침된 덕에 큰 설득력을 갖추었다는게 가장 큰 차이점이자 장점입니다. 물론 오바 츠구미와 오바타 다케시 컴비도 경험이야 있었겠지요. 허나 후지코 후지오 A는 본인 스스로 만화의 거장일 뿐더러 초창기 시절을 데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토키와 장을 무대로 과거에 현대 일본 만화 거장들과 함께 활약을 펼쳤던, 만화 역사에서도 특별하면서도 역사적인 인물이니 비교가 어렵습니다.

함께 소개되는 후지코 후지오 컴비 및 토키와장 멤버들의 당시 작품들도 아주 볼만합니다. 특히 후지코 후지오 컴비의 초기작은 집대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학생 때 습작인 "작은 권총왕", 후지코 후지오 컴비의 단행본 데뷰작 "유토피아 최후의 세계 대전", 최초의 잡지 개제 "서부의 어딘가에", 최초의 의뢰이자 별책인 "3인 형제와 인간 포탄", 최초의 연재 "4만년 표류", 초기 창작 방법을 엿볼 수 있는 "백마가 온다", 상경 전 마지막으로 그린 의뢰작 "선풍도시", 세미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린 "해발 6천미터의 공포(히말라야의 설인)"와 "남부전선 이상 없다", 상경 이후 최초로 각자 동시 진행한 소년클럽 의뢰작 "콘크리트 정글"(후지코 후지오 A)와 만화 동화 "사자와 꼬마 사슴", 상경 후 첫 정식 연재작 "해저인간 메바루", 처음으로 가혹한 프로의 일정에 도전하게 된 "치비와카마루", "장미와 반지", 이후 연재작 "밤의 왕자님", "세계와 싸운 소년", 땜빵으로 그린 첫 스포츠 만화 "철권의 분노" 등 수많은 작품이 빠짐없이 소개됩니다. 장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편 감상이 가능한 수준이고요.
컴비의 작품 외에도.신만화당 합작물인 "4개의 시계", "도감 시리즈" 등도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작품 자체가 후지코 후지오 컴비의 활동을 다루기에 단순히 소개로 끝나지 않고 작품들이 어떤 과정에서 탄생되고 완성되었는지 자세하게 알려주는데 이 역시 재미있습니다. 마가 미치오의 개인 경험을 토대로 그려내었다는 "꼬마 권총왕", 급작스러운 폭설로 놀랐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살아있는 눈 괴물(?)을 그려낸 "백마가 온다", 영화 "아스팔트 정글"을 감명깊게 본 후 갱스터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작업한 "콘크리트 정글" 등 처럼요. 모든 작품 시작 전 관련 노트를 만들고 줄거리와 캐릭터 설정을 적어놓는 창작 과정도 꽤 그럴듯했습니다. 앞으로 저도 따라해 봐야겠다 싶을 정도였어요.

다른 등장 작가들의 작품도 풍성합니다. 유명 작가의 등장 시 짤막한 소개를 곁들이는 정도가 많지만,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작품도 제법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글 대제"입니다. 두 컴비가 처음 데즈카 오사무를 만날 때 신연재물로 그리기 시작하고, 후일 마가가 급한 도움 요청으로 마지막화의 어시스턴트로 참여한다는 식으로요. 아마도 실화겠지만, 굉장히 드라마틱한 내용이었다 생각됩니다.

또 "만화 소년", "모험왕", 등등 당대 유수의 잡지들과 출판사, 편집자 들도 다수 등장하여 극의 흐름에 동참하는데, 이러한 점은 "바쿠만"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 속 편집자는 마감 독촉 및 원고 수령 밖에는 딱히 하는게 없다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그리고 짧은 기간 (약 2년?)이지만 마가의 신문사 근무 중 진행한 각종 일러스트와 광고 도안, 만화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림 실력 및 디자인 감각이 정말 빼어나더라고요. 이게 정말 갓 고등학교(작중 중학교)를 졸업한 신입의 솜씨라니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확실히 거장, 천재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업물들이었어요. 만화가 아니라 이쪽, 산업 미술 쪽으로 매진하였어도 충분히 디자인 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당대 (1950~60년대)를 잘 그려낸 여려가지 디테일들도 좋습니다. 영화가 유일한 취미로 보이는 컴비가 감상하는 여러가지 영화들("베라크루즈", "아스팔트 정글", "위대한 환영", "제 3의 사나이", "너의 이름은"....), 증기 기관차를 이용한 출퇴근과 도쿄 상경, 전화가 드문 시절의 전보와 공중전화를 이용한 연락, 산보 등을 통해 보여지는 당시의 거리 풍경들 모두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당시 두 컴비의 여러가지 일상 생활 묘사도 재미있습니다. 상경 전 학창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시작하여 첫 하숙집 좁은 방에 대한 묘사, 매일매일 프랑스 빵과 우유 등으로 때우는 식사, 가끔 나가는 산책 등 모든 부분이 디테일하면서도 푸근하고 따뜻하게 그려지거든요. 악역은 없이 멘토인 데즈카 오사무와 도키와장의 큰 형님격인 테라오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난 사람으로 보이는 등 이야기도 모두 푸근하고 따뜻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을 들 수 있습니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옹호해주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을 해 주는 선생님이라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첫번째 하숙집의 주인인 마가의 백부도 역시 만화는 잘 모르지만 컴비의 꿈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토키와장의 보증금으로 거금 3만엔을 선뜻 빌려주겠다고 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조금은 시대 착오적인 작화야 어쩔 수 없다쳐도, 원고 마감에 맞추지 못하는 사고를 치는 장면이 자주 반복되어 지루합니다. 주로 꿈이긴 하지만요.
청춘물이기도 해서 마가의 상대역 여성을 등장시키는데 뭔가 관계가 이루어질 것 처럼 떡밥만 던져놓고 제대로 된 드라마를 그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이렇게만 등장할거면 분량 낭비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읽는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될 가능성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읽다보니 이 때가 축복받은 시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록 먹고 살기는 좀 힘들고 척박한 시기지만 젊은 혈기와 열정은 보답받는,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거나 들고 가면 원고가 실리고, 급하게 땜빵이든 뭐든 어떻게든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시대로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수요에 비하면 공급이 부족해 보였기에 열정만 있다면 어떻게든 데뷰 자체는 좀 쉽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라 하더라도 데즈카 오사무 혼자 6~7개 잡지 모두에 연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니까요. 두 컴비는 20대 초반, 테라오는 20대 중반, 데즈카 오사무도 20대 후반에 불과한 청년들인데 당대 만화계를 짊어진다는 설정을 볼 때 정말로 만화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시대적인 운으로 둘의 성공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철야 등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꿈과 열정을 잃지 않는 노력, 그리고 결과물의 완성도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어시스턴트 한명 없이 한달에 100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스토리부터 전부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만 그려내는 말도 안되니까요. 초기작의 스토리가 영화나 서적에서 따온 것이 많은 이유도 아이디어 구상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는 환경 탓이었을 테고요. 

비슷한 시기 활약했던 다른 신만화당 멤버들이 대체로 잊혀졌지만, 후지코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이 거장으로 남은 이유는 결국, 꾸준히 히트작을 내 놓는 실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노력하는 천재가 시기를 잘 만났다'는 것이 정답인 셈입니다.

2023/08/26

명탐정의 제물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2.5점

명탐정의 제물 - 6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오토야 다카시의 조수 리리코는 민박집에서 일어났던 밀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뒤, 학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사무실을 떠났다. 귀국 예정일이 지나도 리리코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오토야는 가이아나의 조든 타운으로 향했다. 알고보니 리리코는 짐 조든이 이끄는 종교의 광신도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 조든 타운을 조사하기 위해 찰스 클라크가 조직한 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착 직후 오토야와 동행했던 저널리스트 노기가 타운의 보안군에게 총살당했고, 뒤이어 클라크 조사단원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불가능 상황에서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리리코는 오토야와 함께 조사를 펼친 끝에 미국 하원의원 라일랜드가 조든 타운을 방문한 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고 불가능 상황이 된 건 신도들의 의지였다는 추리를 밝혔다.
그러나 라일랜드 일행을 타운 보안군이 사살하고 리리코마저 살해당한 날, 오토야는 대규모 자살쇼를 앞둔 조든과 신도들 앞에서 숨겨져 있었던 진상을 폭로하기 시작하는데....

최근 추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있는 일본 본격 추리물. 2023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을 비롯하여 '고노미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등 유명 미스터리 어워드 상위권을 휩쓴 작품이지요.

유치해보이는 표지와 부제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화려한 수상 이력이 증명하듯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가 높다는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무려 4건의 불가능 범죄를 비롯하여, 도입부의 요코야부 요스케 밀실 살인 사건 등 사건도 풍성하고,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단서가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며, 오토야와 리리코를 통해 각 사건마다 여러가지 추리가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리리코가 왜 오토야에게 가짜 서명이 되어 있는 <<탐정 교과서>>를 가져왔었는지 등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추리들도 잘 짜여져 있고요.
특히 핵심이 되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에 대한 트릭과 추리가 기발해서 만족도가 높습니다. 사건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은데요.
  1. 전 FBI 조사관으로 인민교회 간부로 위장한 알프레드 덴트가 밀실인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음.
  2. 조든 타운 요리반 멤버들과 티 타임을 갖던 사이비 과학 탐정 조디 랜디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는데, 차는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들 모두가 같이 마셨음.
  3. 한국인 이하준이 상, 하반신이 토막난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하준은 가방에 갇혀서 오토야와 리리코의 눈을 피해 빠져나갈 수 없었음.
  4. 묘지에서 리리코를 살해한건 아이였는데,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는 아이는 누구도 묘지에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고 단언함.
여기서 진상은 '조든 타운의 광신도들은 스스로 아무도 질병이나 몸의 이상이 없으며, 사람들을 이상이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바라보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현재 그대로 바라본다'는, 오토야의 표현을 빌자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를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덴트는 이미 칼에 수차례 찔린 채로 방에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밀실을 만든 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방에 가던 덴트를 목격했던 Q는 덴트의 치명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든 타운의 신도가 몸에 상처가 있을리 없기에, 기억에 왜곡을 일으켰던 겁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 조디 랜디는 오른 손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의 입이 닿는 부분에 묻혀진 독을 먹고 죽었습니다.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 중 크리스티나는 오른 손이 없었고, 블랑카는 왼손잡이였으며 레이첼은 오른 손가락이 골절되어 오른 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오른 손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범인은 사전에 레이첼의 오른 손가락을 부러뜨렸지만, 레이첼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도 레이첼이 다쳤다는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사건에서 범인은 감방에서 이하준을 살해한 뒤, 상하체를 토막내어 각각을 간수 프랭클린을 이용해 밖으로 옮겼습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다리가 있다고 믿었기에, 휠체어 하반신 쪽에 설치(?)된 사체 토막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시체를 옮길 때 마다 범인에 의해 기절했던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요. 
네 번째의 리리코 사건은 범인 레이 모튼이 어른이지만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던 탓에 아이같은 외모를 가졌던게 이유였습니다. 오토야는 실제 그대로 어린아이를 목격했지만,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의 눈에 레이 모튼은 정상적인 성인이었기에 상반된 증언에 의한 불가능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광신자 집단의 잘못된 믿음같은 일종의 대규모 집단 최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기는 했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이 대표적이지요. 특정 집단 전체에 걸려있는 일종의 최면으로 정보 자체가 왜곡된다는건 동일합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소개된 <<다카마가하라의 범죄>>는 '현인신은 신이라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녀가 조서를 들고 2층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보초 눈에 보이지 않았다'라는, 종교 단체의 신앙으로 비롯된 현실 왜곡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아예 똑같은 발상일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과 트릭을 꽤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정신병자 교주가 주도하여 신도들이 집단 자살했던 가이아나 존스 타운 사건 (인민 사원 사건)을 사건의 바탕으로 삼고있는 덕분입니다. 실제 사건을 본격물로 풀어내어 다채로운 트릭을 선보인 것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다소 팩션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좋더라고요.

하지만 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 외의 추리들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문제는 큽니다. 리리코의 추리부터 살펴보자면, 그녀는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다고 - 덴트는 밀실에서 실수로 칼에 찔려 죽었고, 조디 랜디는 지병인 협심증으로 사망했으며, 이하준은 간수 프랭클린으로 변장하여 휠체어를 타고 급경사에서 고속으로 도주하다가 와이어에 걸려 토막이 났다 - 생각했습니다. 이를 발견한 조든 타운의 신도들이 '질병도 없고, 사고도 없는 조든 타운'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현장을 조작했다고 추리했고요. 
그런데 협심증이야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칼이 튀어 등에 찔려 죽었다? 고속 휠체어 이동으로 몸이 토막났다? 솔직히 어이없는 발상입니다. 이런 추리에 수긍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물론 이는 사건을 대충 수습해서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풀어낸 추리였다는 전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오토야의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는 더 한심했습니다.
오토야는 덴트의 방을 밀실로 착각하게 만든 열쇠와 조디 랜디에게 다과회 시점에 녹아내리도록 독이 든 캡슐을 낮은 온도에서 녹는 저융점 합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은 별다른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조든 타운에서도 어떻게든 가공할 수 있는 소재였을 수는 있어요. 문제는 이 합금이 그렇게 흔하지도 않았을테고, 원하는 모양으로 딱 맞춰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때 맞춰 녹아내리도록 한다는건 더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사용될 수준의 트릭이었어요. 그나마 3일 전 사망했던 오토야의 지인 노기의 사체를 토막내어 이하준 사체로 위장한 뒤 발견되도록 만든 다음에 이하준을 살해했다는 추리 정도만 괜찮았습니다. 이후 이하준 사체를 토막내서 공동묘지 관리 오두막의 노기 사체와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죠.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의 끝이 짐 조든이 범인이라는건 설득력이 더욱 약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을 사용할 수 있고, 이하준의 사체를 빼돌리기 위해 1감옥에 갇혀 있던 오토야와 리리코를 석방시킬 수 있었던건 짐 조든 밖에 없었다는게 근거인데, 애초에 저융점 합금을 사용했다는게 말도 안될 뿐더러, 짐 조든은 앞서 맹인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낮다는게 이미 언급되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조든이 카리스마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의 천벌같은 불가능 범죄를 저질렀을거라는 동기도 미흡하기 짝이 없고요. 설령 조든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한들, 직접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수족같은 간부나 광신자를 이용하겠지요. 맨슨 패밀리의 찰스 맨슨이나, 오움 진리교의 이시하라 쇼코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애초에 '명탐정' 들이 다수 등장하는 설정부터가 별로에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괴사건 해결 전문 명탐정을 실체 있었던 사건과 결합하여 풀어나가니 괴리감만 크게 느껴집니다. 오토야와 리리코를 사이비 종교 전문가로 설정해서 조든 타운으로 향하게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거에요.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기는 하나, 너무 과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느낌도 들게 만듭니다. 대표적인게 덴트 방 옷장의 혈흔입니다. 등에 칼을 찔렸다고 혈흔이 저렇게나 튄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문이 어떻게 열리든 그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도입부의 밀실 살인 사건도 그닥입니다. 밀실 안에서 죽은 사람은 유명탐정 요코야부 유스케였고 사체에 남겨진 탄환 감식 결과, 그를 쏜 건 10여년 전 권총을 훔친 뒤 11명을 사살했던 108호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건이지요. 오토야는 추운 날씨인데도 요코야부가 얆은 옷에 난방도 켜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는 범인이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갔으며, 그 이유는 겉옷에 총을 쏜 흔적을 숨기기 위해서였고, 따라서 요코야부는 자살했다, 이유는 요코야부가 108호였기 때문으로, 실수로 권총이 오발된 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창 밖 바다에 총과 겉옷을 버렸고, 그 때 그걸 목격한 거리의 떠돌이 소년을 쏴 죽였으며, 문만 열어두면 침입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여겨졌겠지만 힘이 다해 문을 열기 전에 죽고 말았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리리코는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간 건 자기보다 큰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리의 떠돌이 소년이며, 그가 바로 108호였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요코야부에게 원한을 품은 108호는 요코야부에게 총을 쏜 뒤 오토야의 추리처럼 그를 108호로 몰기 위해 총을 객실에 두고 나왔는데, 기력이 남아있던 요코야부가 창 밖의 108호를 쏴 죽인 뒤 108호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권총을 던져버렸다면서요. 108호는 10년 전에도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는데 지금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이유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선천성 질환인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경찰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지게 됩니다.
오토야와 리리코의 추리는 괜찮습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켜지 않는 나방과 입지 않은 외투, 안에서 보기에 열릴 것 처럼 보이지 않는 바다로 향한 창, 다른 객실 투숙객이 들은 물 튀기는 소리 등 단서도 잘 제공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총을 훔쳐 11명이나 죽였던 범인이 알고보니 성장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게 너무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며,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오토야가 조든 타운 신도들을 모두 독살한 진범이었다는 마지막 진상으로 이어진다는건 해도 너무했습니다. 명탐정 리리코가 고작 세 명을 살해한 잡범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인정할 수 없어서 - 요코야부는 11명을 죽인 108호에게 죽었는데! - 수백명을 참살하도록 만들었다는데, 정말 가관이었어요. 일본식 명탐정 허세의 극을 달리는, 정신줄 놓게 만드는 황당한 동기였습니다. "탐정은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탐정의 역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도 옥의 티이고요. <<유리탑의 살인>>도 그렇고, 왜 이렇게 명탐정이라는 존재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동기야 어쨌건 오토야가 독을 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루이스의 유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요. 신도 중 생존자였던 Q가 루이스가 이상했지만, 당시 조든 타운 신도였기에 이를 몰랐다는 주장을 펴는 것 역시 입증할 증거는 전무하고요. 오토야가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고 체포되어 수감될 이유가 도저히 보이지 않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 실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추리와 결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솜씨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만화같은 불필요한 설정, 그리고 추리에 사족이 많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건 분명하니, 추리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24/09/14

가연물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가연물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 소설 동호회인 하우 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작가 최초의 경찰 수사 본격 추리물인데, 손대는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뽑아냈던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치고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경부 캐릭터도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이고요. 
하지만 "목숨빚"만큼은 빼어납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낭떠러지 밑"
눈밭에서 조난당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목을 무언가에 찔려 살해당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끝이 날카로운 말뚝 같은 걸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는 감식 결과를 보았을 때에는 흉기가 고드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고의가 아니었다면, 낭떠러지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운 나쁜 피해자 목에 꽂힌 사고일거라 여겼지요.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목에 혈액이 응고되는 반응이 있었다는 감식 결과를 토대로, 이는 다른 사람의 혈액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니 범인 미즈노의 혈액이 포함된(?) 흉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즉, 흉기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에 부상당해 튀어나온 미즈노의 팔 뼈였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흉기는 신선한 편이고, 이에 이르는 추리와 단서 제공 모두 공정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경찰 수사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흉기가 뭐든 범인은 미즈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소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기 - '고드름'이 흉기였다고 주장해도 될테지요 - 때문입니다. 수사가 아니라 '추리'에 방점을 둔 느낌입니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라도 처음 시도하는 경찰 시도물이라서 다소 혼선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흉기 트릭도 신선하지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정신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했을 방법이니까요. 아울러 수사 기계같은 냉정한 가쓰라 경부의 묘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작품들 속 냉정한 수사 반장들 - 대표적으로는 "제 3의 시효" - 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는 탓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요?

여러모로 평범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졸음"
유력한 강도 치상 사건 용의자 다구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경찰은 다구마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차로에서 발생한 사고 원인이 다구마의 신호위반일 경우, 체포 영장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새벽 3시 일어난 다구마의 교통사고를 무려 네 명이나 목격했고, 그들은 모두 다구마가 신호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쓰라 경부는 다구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즉 신호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처음에는 다구마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상대방 미즈우라와 신분을 바꿔 도망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황당하면서도 뻔한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거짓 증언 부수기' 설정의 작품으로, 피해자나 가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목격자들이 우연히 똑같은 거짓 증언을 하게 된 과정의 설득력이 높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성실한 근무 태도로 언제 해고될지 모를 교통 정리원과 편의점 직원이 하필 사고 시점에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투합해서 졸았다는걸 숨기려고 거짓 증언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런데 전개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가쓰라 경부의 확신 - 네 명 모두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 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다구마는 바로 체포해도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경찰 수사를 위해서는 증언이 없었더라도 체포 영장을 청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난 사건의 목격 증인이 네 명이나 되고, 이들의 증언이 일치해서 불신을 품었다? 말도 안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또 응급실 의사와 게임 클랜의 리더인 대학생도 졸아서 위증에 동참했다는건 과했습니다. 이 둘은 빼고 교통 정리원 가마타와 편의점 직원 고가가 입을 맞추었다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거예요. 의사와 대학생은 사고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더러, 거짓 증언에 똑같이 동참할만한 접점도 마땅치 않으니까요.

이런 단점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목숨 빚"
유명 관광지에서 절단된 사람의 팔이 발견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나머지 사체 부위들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신원은 노스에 하루요시로 밝혀졌다. 곧 피해자가 오래 전에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미아타무라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미야타무라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아타무라의 흉기에 대한 증언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가쓰라 경부는 납득하지 못하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명확한 상황에서 가쓰라 경부가 의문을 품는 과정의 설득력은 약합니다. 특히 '사체를 절단하는 커다란 수고에 비하면 사소한, 치아를 뽑거나 부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고 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사체 전달은 옮기기 편해서라는 이유가 더 클 테니까요. 유명 관광지에 사체를 흩뿌린게 이상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했다거나, 길을 잘 몰라 실수하는 등 이유는 여러가지 있습니다. 범인이 확실하다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빚과 노모의 간병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하루요시가 자살한 뒤, 이를 살인으로 위장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긴 미야타무라가 현장을 조작했다는게 충격적인 진상이 모든 문제를 덮어줍니다. 우리도 직면한 문제인 '부양하기 힘든 고령 인구의 증가, 중년의 노후 보장 없는 은퇴, 취직도 못하는 삼포세대 젊은이'라는 3대에 걸친 사회 현상을 정면으로, 그것도 제대로 된 추리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파 본격 추리 수사물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앞서 억지스럽다고는 했지만, 가쓰라 경부가 수상하다고 여긴 상황들이 진상에 딱 들어맞는건 추리물다와서 좋았어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광지의 사체를 버린 이유는 빨리 발견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확인되어야 보험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체의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흉기에 대한 거짓말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야타무라는 '노스에 하루요시를 살해했다'는게 진실로 여겨지기를 바랬으니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요.
사체를 토막낸 이유가 하루요시의 사체에서 '목을 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트릭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다만, 독자에게 하루요시 사체 중 목의 중간부 일부가 사라졌다라는걸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은건 조금 아쉬웠지만요.

그래도 여러모로 볼만했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연물"
월요일 심야부터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가 잇달아 발생하여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잠복수사 결과 몇 명의 용의자가 떠올랐지만, 잠복근무 시작 후 방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잠복 중인 형사가 범인에게 들킨 거 아니냐고 상관이 가쓰라 경부를 질책했다. 그러나 가쓰라 경부는 범인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를 내놓았고, 어떤 목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는지 동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인 오노하라가 버린 쓰레기에서 착화에 쓰인 잡지가 발견되는데...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 물인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지거든요. 범인의 동기가 하찮을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려운 탓입니다. 화재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돌발적인 화제를 막으려고 안전한 방화를 저질렀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범인은 그냥 수사를 통해 체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진짜인가"
이제사키 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권총을 가진 범인이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게 점장 아오토와 아르바이트 생 유노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가쓰라 경부는 아오토와의 통화로 유노가 범인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범인 시다는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파르페를 사주려고 가게를 찾았는데,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에게 견과류가 들어 있는 파르페가 서비스되어 화가 난 뒤 다툼이 시작된걸로 보였다. 유노는 파르페에 대해 시다에게 설명하지 않은 직원이었다.

비교적 독특한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인질을 븥잡고 농성을 벌이는 사건은 웬만한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요. "스완"이 약간 비슷하지만, 결은 전혀 다르고요. 또 이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질범과의 협상'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오로지 가쓰라 경부의 추리에 의한 의외의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돋보였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전개, 가게 안 장난감 가게에서 타는 물총이 시다가 들고 있는 권총과 비슷하다는 단서 등 여러 가지 정보와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사건은 아오토 점장의 자작극이었습니다. 치정 문제로 유노를 살해한 직후, 시다가 사무실로 들이닥쳐 범행이 들키자 시다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시다가 범인이고 자신은 피해자인 척 농성하는 연극을 시켰던 것이지요. 나중에 구출 직전 시다와 아들은 살해할 생각으로요.

그런데 조리 담당으로부터 사건 당시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조리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추리해냈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오징어 먹물 파스타 조리 시간을 감안하여, 시다가 항의차 점장을 찾은 뒤, 한참(약 10분?) 지나서 도망치라는 큰 소리가 나왔다는건 그리 큰 단서나 증거로 볼 수 없습니다. 짜증이 쌓여 한참 있다가 폭발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살해 현장을 무마하기 위해 농성이라는 연극을 벌인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아 감점합니다. 

2020/09/19

남은 날은 전부 휴가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 별점 3점

남은 날은 전부 휴가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

이사카 고타로단편집입니다. 그다지 많이 읽어 본 작가는 아닌데, e-book 대여가 가능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단편집인데 구성이 특이합니다. 수록작 모두 화자도 다르고, 시점도 다르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모두 다르지만, 돈만 주면 뭐든 하는 해결사 미조구치-오카다 컴비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연작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성만 특이한게 아니라, 작품들도 독특한 발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백수가 된 오카다가 이제 인생의 남은 날은 모두 휴가, 바캉스다라는 의미의 제목부터가 그러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자! 보다 훨씬 와 닿는 멋진 제목이라 할 수 있어요. 작품 속에서 장 뤽 고다르의 "작은 병정"이라는 영화 속 대사라고 하는데 참 적절하게 잘 써 먹었다 싶더군요.

물론 수록작 중 "남은 날은 전부 휴가"와 "불길한 횡재"는 그 자체만으로 완성된 작품은 아닙니다. 설정에 대한 소개, 수록작들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 뿐이지요.

그래도 나름의 재미도 분명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봐야 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은 날은 전부 휴가" 

아빠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된 가족의 마지막 날, 아빠에게 친구가 되자는 전화 메시지가 날아왔고, 가족은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사람과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메시지를 보낸건 해결사 오카다였다. 상사 미조구치가 조직에서 발을 빼려면 전화 메시지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화자는 가족의 고교생 딸 사키로, 미조구치와 오카다 및 주요 설정에 대해 소개하는 도입부 격 작품입니다. 문제는 사키 가족과 드라이브와 식사를 즐긴 오카다가 조직을 배신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미조구치 씨 일당에게 끌려간 뒤, 세 가족만 차에 남는 결말이라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다는 거지요. 사실 여기서 다른 사건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사키 등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서 당황스럽더라고요.

가족이 친구가 되는 과정, 오카다의 여러모로 독특한 시각 등은 볼거리이지만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성가신 어른의 오지랖" 

미조구치와 오카다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유다이라는 가정 폭력 피해 아동을 알게 되었다. 아빠에게 폭행당하는 유다이를 구해주기 위해 오카다는 기묘한 작전을 구상하는데...

오카다가 자신이 협박하던 불륜남 곤도와 함께 유다이의 아빠 사카모토가 폭력에서 손 떼도록 만드는 귀여운 작전이 펼쳐지는 일상계 추리, 범죄, 사기극입니다.

사실 오카다의 작전은 유치합니다. 성인이 된 유다이가 미래에서 사카모토를 찾아와, 유다이 폭행을 그만두지 않으면 성인이 된 유다이 때문에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연극이 전부거든요.

그러나 이 연극을 위해 터미네이터, 타키온 입자 등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사카모토에게 주입시키는 과정, 그리고 문 닫은 슈퍼마켓을 엉망으로 만드는 다른 의뢰를 활용하고 유다이와 이미지가 비슷한 곤도에게 연기를 시키는 등의 디테일은 빼어납니다. 혹시라도 사카모토가 유다이를 죽일 수 있어서 미리 그에 대해서도 확실히 선을 긋는 등 계획도 나름 정교하고요.

덕분에 뻔하고 유치하더라도 설득력은 있는 편이에요. 유치하지만 맘 먹고 이렇게 속이겠다고 덤비면 저라도 혹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한 횡재"

'나'는 미조구치와 오타라는 남자들에게 납치당했다. 그들이 훔친 차로 이동하던 중, 다나카 중의원이 칼에 찔린 탓에 시작된 검문에 걸렸지만 미조구치는 훔친 차의 번호를 외워 말하는 노하우로 검문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트렁크에는 거액이 있었고, 차 번호도 잘못 외웠었다. 경찰은 왜 미조구치 일당을 놓아준걸까?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이에 대해 미조구치 등은 검문하던 경찰이 차에 돈을 숨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주고 몰래 숨겨둔 휴대폰 GPS로 위치를 추적하여 돈을 회수할 생각이었다고 추리하지요. 그러나 사실로 밝혀지는건 없습니다. 고작해야 돈이 든 가방 속 휴대폰 정도만이 근거가 될 뿐이고요.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보다는 낫지만 마찬가지로 완성된 이야기로 볼 수는 없어요.

결말도 석연치 않습니다. 미조구치와 오타가 GPS 추격을 피해 거액을 나누어 달아나는건 그렇다쳐도, '나'도 놓아준다는건 말이 안되거든요. 의뢰인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을거라는(죽었을테니) 그녀의 말만 듣고 놓아준다는건 프로로서는 있을 수 없을 일이잖아요. 최소한 보스인 부스지마의 허락은 받았어야 합니다. 

또 그녀의 납치는 다나카 중의원의 의뢰였고, 이유는 그녀가 불륜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나카 중의원 암살 계획의 일부로, 흉기를 은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실제 습격한 사람, 흉기를 숨기는 사람 등 여러 명이 역할 분담을 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아이디어만큼은 나쁘지 않았지만, 예전 "소년탐정 김전일" 등 다른 작품에서 접했던 내용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연작을 이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용 작품이라는 느낌입니다.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 

초등학교 4학년 생인 '나'는 해외에서 극비 임무를 수행 중인 아빠와 통화 중에 아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빠가 유미코 짱이 위험하다, 학교에 페인트 낙서가 되어 있지 않냐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아빠에게 말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미코 짱이 담임인 유미코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나'는 페인트 낙서를 한 오카다에게 이러한 내용을 물어보았고, 오카다는 유미코 선생님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말해주는데...

오카다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났던 사건을 그린 나름 본격 추리물입니다. 화자는 오카다의 친구 '나'이고요. 아빠가 '나'를 몰래 감시하는 것과, 유미코 선생님 스토커 이야기의 조합이 절묘하며, 이야기 앞 뒤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오카다가 페인트 낙서를 한 이유는 유미코 선생님의 욕이 적혀 있었기 때문, 아빠가 이 사실을 알았던 건 그날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던 등산이 취소되었기 때문인 등 앞선 기묘한 행동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게 설명됩니다. 참고로, 아빠는 불륜으로 이혼했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스파이라고 꾸몄던 겁니다. '나'를 보기 위해 쌍안경으로 몰래 관찰했고, 그래서 유미코 선생님 욕이 쓰여져 있는걸 알게 되었던 거지요. '나'를 관찰하던 아빠를 오카다와 '나'는 스토커로 착각했고요.
아빠가 주변 사물을 무기로 이용한다고 스파이인척을 할 때 했던 말을, 나중에 오카다가 위기에서 탈출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등 - 칼로 위협하던 스토커를 향해 거울로 햇볕을 반사시켜 눈을 부시게 만듬 - 복선 활용도 완벽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연작 단편집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었다는게 문제네요. 자체만으로도 완벽할 뿐더러 오카다 외 다른 등장인물이 나오지도 않으니까요. 오히려 미조구치의 부하 오타가 영화감독이 된 '나'를 찾아가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는 에필로그가 사족처럼 추가된건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별점은 4점! 이 단편집 수록작 중 최고입니다.

"날아가면 8분, 걸어가면 10분"

오타 후임으로 미조구치의 파트너가 된 다카다는, 뒷 차를 고의적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가 사고를 당해 입원한 미조구치 문병을 갔다. 미조구치는 뒷 차를 협박하다가 뒷 트렁크에서 권총을 발견했고, 피해자가 달아나다가 여파로 다른 차에 치였었다. 조직의 보스 부스지마 빌라에 총격이 가해졌고, 뒷 차 운전수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게 된 조직은 미조구치와 다카다에게 용의자 색출을 지시하는데...

전 편이 본격 추리물이었다면, 이번 이야기는 본격물의 한 갈래인 암살물입니다. 화자는 미조구치의 새 파트너 다카다로, 부스지마를 암살하려고 하는건 미조구치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독립하려던 오카다가 처단당했다고 생각하고, 그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지요.

부스지마는 병원 별실에서 휴양 차 입원 중인데, 음식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부하가 받아 시식 후 전달하며, 방문자는 2~3명의 경호원으로 부터 몸 수색을 받는 철통의 보안에 놓여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미조구치가 이러한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부스지마를 습격하기 위한 작전이 상세하게 펼쳐지고요.

어설프지만, 한 번 정도는 먹힐 만한 작전이 상당히 볼거리입니다. 작전은 이전 뒷차 추돌 사고 때 부터 시작되었었습니다. 빌라 총격을 사주하여, 미조구치가 범인을 알고 있다고 조직이 생각하게 만든 뒤 미조구치는 다카다에게 미조구치와 친한 입원환자 '선생님'이 암살범이라고 생각하도록 함정을 팝니다. 협박장에 붙어있는 파슬리 스티커의 의미를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다카다의 조사로 파슬리의 꽃말 중 하나가 '죽음의 전조'라는게 밝혀지며, 이를 통해 협박과 꽃말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선생님' 병상에서 의사로 변장하기 위한 가운을 발견하며, 동기로 선생님'의 아들 부부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우연찮게 들려오고요. 그래서 다카다가 '선생님'을 암살범으로 오해한다는 건데, 읽으면서는 굉장히 작위적이라고 느껴졌었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싸 했을 것 같습니다. 앞 뒤가 척척 잘 맞아 떨어지니까요.
이를 통해 다른 경호원들이 '선생님'을 잡으러 떠난 사이, 부스지마 병실에 남아있게 된 미조구치는 음식 전용 엘리베이터로 권총을 반입하는데 성공하지요. 

마지막 작품 답게, 앞서의 이야기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음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알려주는 것도 좋았어요. 미조구치가 오카다를 찾아다녔던 것, 단 것을 좋아하는 미조구치가 자주 찾는 맛집 블로그, 부스지마 암살 계획에 여러명이 관련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 등은 모두 앞서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내용들인 덕분입니다. 미조구치의 작전에서 다카다가 '선생님'을 범인으로 착각하게 만든 수법 중 하나는 "성가신 어른의 오지랖"에서 오카다가 쓴 방법과 같고요. 누군가에게 그럴듯하게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무심결에 듣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2년 전 처음 만나기 전 부터 미조구치와 오카다가 알고 있었다는 설정은, 미조구치가 "작은 병정들의 비밀 작전"에 등장했던 애드벌룬 감시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만들어 재미를 더합니다. 그러고보니 "조만간 전화를 들고 다니는 시대가 올 거라고 하지만 그런건 꿈이지 현실감이 없다. 전화를 가지고 다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할 바에야 직접 만나러 가는게 낫다. 꿈을 꾸기보다 주위의 현실을 봐야 한다"는 애드벌룬 감시인의 장광설은 그 파격적인 발상과 강한 자기 주장이 미조구치와 꼭 닮아있기는 하지요.

결말도 흥미롭습니다. 죽기 직전 부스지마는 오카다가 살아있다며, 맛집 블로그인 '사키의 블로그' 운영자가 오카다라고 알려 주거든요. 미조구치는 다카다에게 블로그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라고 지시한 뒤, 3분 내 답이 오지 않으면 총으로 부스지마를 쏴 죽이겠다고 하는데 3분 뒤 다카다의 폰이 울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오카다일까요? 아니면 계속 날라오던 스펨 메일일까요? 열린 결말인데,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어요. 미조구치가 8분과 10분에 대한 표현으로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다던가 하는 독특한 발상과 묘사도 많은데, '단지 나는게 걷는거보다 낫다'가 아니라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남자가 하늘을 날아와서 '네가 좋아!'라고 말하는' 상상을 하다니 이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만 합니다.

마무리로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미조구치의 파트너가 오카다 - 오타 - 다카다로 바뀌는데 일부러 이름이 비슷한 사람을 채용한건지 궁금해집니다.

2023/07/0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5. 즌부리코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5. 즌부리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마사오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락을 주면 먹고, 차를 내밀면 조용히 마셨다. 목적지도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마이코의 코트에 감싸여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차 여행 내내, 약한 비가 모든 곳에서 끝없이 내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객들은 언제나 익숙한 표정과 모습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둘만 이질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타미의 바다는 하늘과 같은 회색으로 저 멀리에서 그대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다. 후지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후지산이 보이지 않는게 이 여행에 더 어울렸다.

토시오는 미시마에 내려 곧바로 공중전화로 에토를 불렀다. 에토는 상대가 토시오라는 것을 알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카츠? 라디오 들었어?"
"안 들었어."
에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살인 용의자와 함께 도망쳤다는 게 정말이야? 방금 뉴스에서 들었어."
오랜만에 듣는 에토의 억양에는 사투리가 돌아와 있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그보다 여관 방 하나만 잡아줘."
"그건 맡겨 둬, 지금 어디야?"
"미시마 역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거야? 되도록이면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 슈젠지까지 갈 수 있을까?"
"야, 잠깐만.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해. 이렇게 해. 오히토(大仁)에서 내려서 상가를 지나 가노가와(狩野川)의 오히토 다리 쪽으로 걸어가. 그러면 내가 차로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자 마사오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친구에게 폐를 끼치는 건가요?"
"당신이 신경쓰실 일은 없습니다."
토시오는 그렇게 말하고 걸어 나갔다.
미시마에서 이즈 하코네 철도를 탔다. 차 안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에토의 말에 따르면, 자신도 뉴스에 보도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토시오는 전철 구석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마사오의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전철은 느리고 정차역이 많았다. 오히토까지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오히토에서 내리는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눈에 띌 정도로 적지도 않았다. 토시오는 에토의 배려를 알게된게 기뻤다.
오히토 역을 나와 앞에 있는 짧은 언덕을 오르면, 옆 쪽으로 상가가 펼쳐져 있었다. 상가를 오른쪽으로 가면 가노가와 강이 나온다고 에토는 말했다. 상가에 들어서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차가운 비바람이 거세게 두 사람을 감쌌다.
우산을 샀다. 비는 약하게 내렸지만, 우산을 쓰는게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상점가는 길지 않았다. 상점가 끝에서 제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걷고 있던 두 사람 곁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푸른색 경트럭이었다. 운전석에서 에토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로 봐서는 아주 건강해 보이네."
에토는 두 사람을 차에 태우며 말했다. 차 안은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미안해…."
토시오가 말했다.
"아냐, 오히려 날 기억해줘서 고마운걸."
에토는 뻣뻣한 얼굴의 수염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구마사카에 친숙한 여관이 하나 있어. 작지만 조용하지. 그곳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차는 가노강을 건넜다. 넓고 깊은 강바닥은 검은 돌로 채워져 있고, 물은 그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노강을 건너자 차는 좌회전해 제방 위를 달렸다. 건너편 제방 위를 달리는 차의 불빛이 작게 이어졌다.
여관으로 향하면서 에토는 자기 얘기만 했다. 약혼녀가 미인이라는 것, 일이 바쁘다는 것 등이었다.
제방을 내려와 밭을 지나 낮은 산자락을 돌았다. 산 중턱에 성처럼 생긴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히토 산이야. 아무리 채굴해도 더 이상은 광물이 나오지 않지만 폐광은 남아 있어. 여름에도 그 안은 시원하지."
좁은 길을 한참 달리다 '섬집'이라고 적힌, 불이 켜진 작은 간판 아래에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줘."
에토가 말했다.
"그리고 너 이름은 야마다 타로야. 한심한 이름이지만 워낙 급했으니 참아줘."
작지만 잘 정돈된 숙소였다.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은 별채로 안내되었다. 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조용하네."
마사오가 중얼거렸다.
토시오는 유카타와 단젠 (*일본의 남성용 겨울 실내복)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식판이 정리되자 마사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거짓말 같네요........ ......"
마사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에요. 하지만 카츠 씨까지 도망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이 곤경에 처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어요. 어떤 행운이 닥쳐오더라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당신이 체포되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더라도요?"
"그래요."
"사형에 처해지면 죽습니다."
"사형에 처해지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 같은 거에요. 사람을 죽여도, 안 죽여도 마찬가지에요."
마사오는 멍하니 말했다.
"당신이 죄가 있다는게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입니다."
마사오의 침착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시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경찰의 손에서 구해냈고, 앞으로도 운명을 함께 할 겁니다."
".... 내가 살인자라고요?"
마사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어요. 나한테만 숨기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면요?"
마사오는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너무 똑똑하고 아름다워요. 나 같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천천히 일어선 뒤, 등을 돌려 미닫이 문을 열었다. 옆 방은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마사오는 전등을 껐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져 방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단젠이 마사오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사오는 유카타의 끈을 뒤로 풀고 바닥에 떨어트렸다.
"......데츠바의 약병에 독을 넣은 것은 나에요."
마사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사오는 인형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사오에 대한 애정은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그것은 광기 어린 격정으로 변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그 격정을 마사오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몸을 떼어내자 마사오는 눈을 떴다.
"...... 나, 이제 안 되겠어요."
목소리를 담은 숨결이 토시오의 어깨에 닿았다.
"안 된다는 말은 싫어요. 슬퍼지니까요.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은 것 아닙니까?"
토시오가 말했다.
"그랬군요. 미안해요."
마사오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미로 속에 있는 것 같아요."
"...... 나사 저택의 동굴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군요."
"토모히로에게 들었어요. 토모히로는 동굴의 지도까지 만들어 놓았어요."
토시오는 문득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 동굴 어딘가에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이 있다는 것도?"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꿈같은 일은….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동굴에 들어갔었잖아요?"
"그야 저도 호기심은 있었으니까요. 토모히로가 죽고, 토모히로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토모히로의 지도를 믿고 동굴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겁이 났어요. 캄캄한 동굴의 맞은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
"폭포 소리예요."
"맞아요, 살아있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동굴 안에서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폭포를 보고 순간 겁이 났어요. 나는 중간에 돌아섰지만, 저렇게 큰 무대가 있는 걸 보니 토모히로가 말하는 숨겨진 재산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소우지, 카오리, 데츠바 씨 등은?"
"소우지 씨가 알았다면 바로 손을 대서 써버렸을 거에요. 카오리 씨가 알았다면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 것 같고요. 데츠바 씨가 알았다면 사업을 더 확장했을테죠."
"즉,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건 당신과 남편,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토모히로 씨는 그 재산을 혼자서만 갖고 싶었던 것이고요."
마사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 토모히로 씨의 유지를 당신이 이어받으려 한 것이군요."
마사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목구멍에 걸려서 마치 흐느끼는 소리처럼 들렸다.
"당신은 소우지와 인연을 끊지 못한 탓에, 토모히로 씨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속에 무겁게 쌓여 있었어요. 이번 여행에서 토모히로 씨에게 고백과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토모히로 씨가 기이한 사고를 당해 그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죄책감만 무겁게 남아 버렸죠."
"맞아요......."
"토모히로 씨의 죽음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토우이치 군까지 죽었죠. 토우이치 군의 죽음은 자신의 실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고였고요. 이 사고는 토모히로씨에 대한 죄책감을 더욱 더 키워서 당신이 짊어지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지요."
"나는 계속 남편을 외면하고 있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당신은 미쳤어요. 마음의 평형을 잃고 자신을 잃고 말았죠. 지금 당신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토모히로 씨에게 사과하기 위해 그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결심했죠."
마사오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귀로 흘러내렸다.
"당신의 마음속에 토모히로 씨의 인격이 들어갔습니다. 항상 토모히로 씨를 경멸하던 소우지가 미웠습니다. 소우지는 토모히로 씨의 아내까지 빼앗아 농락하고 있었으니 소우지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나는 소우지 씨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마사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노 벤키치의 역립인
형에 독침을 장치했어요. 그 인형은 오직 소우지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지가 당신에게 태엽을 감게 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기계를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 있었어요."
마사오는 조용히 토시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역립인형에 독침을 장치했을 때, 당신은 이미 소우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대담해진 당신은 카오리 씨를 총으로 쏴 죽였어요. 총소리가 났을 때 나는 미로 속에 있었지요. 우다이 씨는 테츠바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요. 소우지는 방에서 막 뛰쳐나온 참이었습니다. 당신만이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어요........"
"맞아요, 나만 카오리 씨 곁에 서 있었죠."
"그때 나는 절대로 당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었죠. 그 범인은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했어요. 그런데 당신을 범인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설명이 되더라고요. 또 당신이 다가왔다면 카오리 씨도 경계를 하지 않았을테죠."
"카오리 씨를 쏜 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트릭이 사용됐어요. 나사 저택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인 사건은 모두 교활한 트릭이 사용된게 가장 큰 특징이죠. 소우지를 죽이기 위해 역립 인형을 이용했듯이,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카라쿠리 즌부리코가 사용되었어요."
"즌부리코?"
"예전에 길거리나 장터 등에서 장난감으로 만든 움직이는 오리를 팔았어요. 오리는 일반 셀룰로이드 재질로 만들어졌지만, 움직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장난감 오리 목에 실을 묶고 그 끝에 미꾸라지를 연결해 탁한 물이 담긴 수조에 넣는 거지요. 그러면 장난감 오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헤엄쳐 다니거나 먹이를 잡아먹는 듯한 동작을 하게 됩니다. 카오리 씨를 죽인 흉기는 없앤 방식은 이와 같아요. 그때 당신 곁에는 연못의 오리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카오리 씨를 쏜 후 바로 종이끈으로 권총을 오리에 묶어 놓았습니다. 오리는 곧장 연못으로 돌아갔고요. 종이끈은 물에 녹아내리고 권총은 연못 바닥에 가라앉게 된 겁니다."
마사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그것을 패배자의 웃음으로 해석했다. 자신도 권투에서 패하고 나서 마사오처럼 웃은 적이 있었다.
"데츠바 씨의 약병에 독을 넣는 데에도 트릭이 필요했죠. 데츠바 씨는 두 자식가 죽고 나서 극도로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방에 자물쇠를 걸어놓고 그 누구라도 거의 접근하지 못하게 했죠. 그 데츠바 씨의 약을 독약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요. 아무도 그 약병에 손도 대지 못했죠.”
"그래서 트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번 트릭에 사용된건 아무도 모르는 동굴이었고요. 당신은 데츠바 씨가 살해당하기 전날 밤, 미로에서 이어진 동굴로 데츠바 씨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든 사이, 약병의 캡슐을 독이 든 캡슐로 바꿔치기했고요. 당신은 자신말고는 나사 저택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다이 씨는 동굴을 찾아냈어요. 만약 동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누구도 당신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마사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 가지 범행은 모두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산에서 벗어난,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났어요. 그 중 첫 번째는 우다이 씨가 동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데츠바 씨의 약병 속 캡슐을 바꿔치기한건 당신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우지가 그 장소에서 역립인형을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서 소우지는 카라쿠리를 움직이려고 했고 당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억지로 막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되니까요. 그 결과 우리는 범인의 수법을 알게 된 겁니다. 역립인형 안에 독침을 장치해 둔 범인의 수법 말이에요. 범인은 역립인형으로 소우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죠.”
"알려지는걸 원치 않았다고요?"
마사오의 눈빛이 한 곳을 응시하며 멈췄다.
"그렇습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소우지의 시신은 무수한 장난감들 속에서 발견됐을 거예요. 역립인형은 다른 장난감들 속에 섞여 있고, 안에 장치된 독침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테고요. 당신은 범인이 외부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외부인?"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또 다른 미끼 주사기를 준비해서 나사 저택 밖에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겠죠."
"미끼 주사기......."
"그것도 오늘 우다이 씨가 찾아냈어요. 주사기 안에는 액체가 남아 있었고요. 분명 소우지를 죽인 독극물과 같은 것으로 밝혀질테죠. 바늘에는 소우지의 피가 묻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소우지에게 주사를 놓아본 당신에게 불가능한 공작은 아니였겠죠."
마사오의 눈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린 뒤 입술을 탐했다.
"...... 내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마사오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사라졌다.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 괜찮아요."
"다른 부분? 어디가요?"
"괜찮아요."
마사오는 팔을 뻗어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 있어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 이대로, 힘을 주세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팔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마사오의 상체가 드러났다.
토시오 밑에서 마사오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등에 팔을 두르고 몇 번이나 하얀 목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냄새를 맡았다.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토시오는 팔을 뻗었다. 토시오는 그렇게 하면서 마사오의 몸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시오의 팔은 하늘을 향해 뻗어 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마사오는 없었다.
방은 밝아져 있었다. 옆의 침구류가 가지런히 접혀서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시오는 옆방을 열었다. 정리된 책상 위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빨갛고 하얀 눈을 드러낸 마도죠가 문진으로 놓여져 있었다. 토시오는 마도죠를 치우고 종이를 손에 쥐었다.
"카츠 씨의 호의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있을 수 없습니다.
부디 저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마사오”

…….죽으려고 하는구나. 토시오는 직감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마사오가 숙소를 떠난 시간은 7시였다. 한 시간 전이었다.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토시오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물었다. 물론 마사오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 뒤 전화가 걸려왔다. 에토였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에토가 물었다.
"......그게, 사라져버렸어."
토시오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망쳤지?"
"그래."
"이거 참… 도망가는게 유행도 아니고. 그럼 너는 어떻게 할거야?"
"......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사라져버리는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정말 여자는 알 수가 없군."
토시오는 우스갯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에토의 말에 의심이 생겨났다.
“...정말 여자는 알 수 없네…. 라고?”
마사오는 나사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어제는 자기가 방해가 된 것이다. 마사오는 다시 한 번 동굴에 숨겨져 있는 비밀 재산을 되찾으러 나간 것이다. 그 때문에 마사오는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무일푼으로 마사오가 따라올 거라 생각한 자신의 생각은 얄팍했다.
여종업원이 와서 아침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토시오는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가지고 온 새 손전등을 방 안의 비상용이라고 적힌 꼬리표 아래에 걸려고 했다.
"그건?"
토시오는 무심코 물었다.
"어머, 모르셨나요? 먼저 가신 손님분께서 실수로 떨어뜨려서 망가뜨렸다고 하셔서 ...... 네, 대금은 받았습니다."
마사오는 손전등을 들고 떠났다. 마사오의 행선지는 나사 저택의 동굴이다. 확실하다.
토시오는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여전히 가랑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산 우산은 그대로였다.
마이코의 코트를 입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마사오의 작은 등이 보이는 듯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5/2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1. 베이지 않는 말
에그가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사가미호(相模湖)를 왼쪽으로 보고 오쓰키(大月), 사사코(笹子) 터널을 지나 코후(甲府)에서 주오자동차도로 나올 때까지 마이코는 뒷좌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이야."
그 말대로, 그녀는 조금만 틈이나면 정말로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
스와코 호수에서 밤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호숫가에 방사형 빛이 비쳤다. 시오지리에서 북쪽으로 마츠모토로 향했다. 마츠모토에서 국도 15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아즈미(安曇)의 댐군을 통하며, 왼쪽으로 노리쿠라(乗鞍)산, 오른쪽으로 야리가다(槍ヶ岳), 호다카(穂高)의 산맥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사카마키, 히라유 온천을 지나면 히다이였다.
구름이 흐려지고 안개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그는 깊은 산속을 지나 에치츄 도카이도에서 신토우 강변을 따라 히다 가도로 향했다. 도야마에 도착한 후 호쿠리쿠 자동차 도로를 달리니 어느새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에그는 쇼와강을 건너 후카야 온천을 거쳐 가나자와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아사노 강과 사이 강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에는 오래된 민가와 상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수와 흙담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가 백만석 성곽 마을의 풍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점심은 고린보(香林坊)의 우동집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마이코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오노에 갈 거야."
마이코가 말했다.
"오노 벤키치, 본명은 나카무라 벤키치. 오노에 살면서 오노 벤키치라고 불렸어. 오노초 덴센지(伝泉寺)에 벤키치의 무덤이 남아 있지."
토시오는 지도를 보았다. 가나자와 성터, 겐로쿠엔(兼六園), 혼간지(本願寺), 노마치(野町), 데라마치다이(寺町台) ......
오노는 가나자와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해에 면한 가나자와 항구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가와호쿠가타에서 흐르는 오노가와 사이카와 강 하구에 끼여 있는 오노의 바로 옆은 카네이시(金石)로, 제니야고헤에(銭屋五兵衛)의 유품관이 있었다.

일본해는 거칠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묵직한 구름의 움직임, 하얀 거친 파도, 검은 항구도시의 지붕.
"호쿠리쿠의 바다는 이제부터가 진짜야."
마이코가 말했다.
덴센지에 있는 벤키치의 무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덤은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작고 낡은 비석으로, 벤키치의 이름은 알 수 있었지만 뒷면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였는데, 묘비명은 같았지만 비석에 일월오봉도 문장이 새겨져 있는 훌륭한 비석이었다.
덴센지 주지스님은 최근 가나자와에 사는 한 독지가가 벤키치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기념관이라고 해도 건물 한 칸이 전부지만, 흩어져 있던 벤키치의 유품이 꽤 많이 모였으며, 열렬한 벤키치 팬이라서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했다.

사설 오노 벤키치 기념관 관장 다카라다 고로(宝田五郎)는 일흔이 넘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지금 병원 일은 대부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고 있다고 했다.
"벤키치의 역립 인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었어요."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을 개조한 기념관 관장실의 방 전면에는 커다란 패널 세 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오래된 사진을 복제한 것으로, 표면에 얼룩과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그 양옆에는 유리 케이스가, 방 중앙에는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혹 소문을 들은 애호가들이 관람하러 오면 다카라다 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 주지스님께서 사설 기념관이라고 하셨나요?"
다카라다는 반쯤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념관이라고 하는건 사실 부끄럽습니다. 유품도 적고, 벤키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테에보시(立烏帽子)에 산바소(三番叟) 의상을 입은 산바소 인형이었다. 이 인형은 태엽 장치로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움직인다고 했다.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있는 가라코 인배대는 고쇼차 위에 잔을 올려놓으면 두 명의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차 나르는 인형 ...... 노시메(熨斗目)의 옷에 금란(金襴)의 하카마(袴)를 입고, 눈이 동그란 동자(童子)로, 양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의상은 곳곳이 낡았지만, 얼굴에 칠한 호분(胡粉)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대학 교수님이 오셨어요. 내부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다카라다 씨는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말했다.
다카라다의 말에 따르면, 유물이 적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금속으로 만든 원경(遠鏡), 안경, 전기 텔레비전, 사진기, 자명종, 점화기, 라이터, 권총, 도자기 자동 분수대, 증기선 모형 ......
또한 벤키치는 유리 세공과 조각, 대나무 세공과 금속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고 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살펴보니, 카라쿠리는 엄청난 지식과 고도의 기술로 형성된 벤키치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인형 제작자가 아니야. 소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노 벤키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이코는 수많은 벤키치의 작품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렇죠. 이토록 뛰어난 천재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첫째, 벤키치에 대해선 너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비범한 학예를 가졌으면서도 평생 어느 번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호쿠리쿠에 은거하다 죽은 기인(奇人)이니......."
"교토의 깃털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호오,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시조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더군요. 스무 살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서양화도 배웠다고 합니다. 벤키치에 대해서는 이시카와현 출신의 정치가 나가이 유타로(永井柳太郎)씨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벤키치가 나가사키에 있었던 시기와 일본 서양학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시볼트 박사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부임한 시기가 같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여기서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에서 역법, 의학에서 항해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은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볼트는 간첩혐의로 고발당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로 떠나 나가사키에서 모습을 감췄지요. 벤키치는 그 후 대마도, 조선으로 건너갔고요. 이 역시, 시볼트 사건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귀국 후에는 기이(紀伊)에서 기마술, 포술, 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벤키치가 오노에 살게 된 계기는요?"
마이코가 물었다.
"덴포 2년, 벤키치가 서른 살이었을 때입니다. 성곽 마을의 외곽에 있는 오노 마을은 교토에서 결혼한 아내 우타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 후 메이지 3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벤키치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 땅도, 바닷모래에 파묻혀서 집도 없어졌지만......"
그리고 다카라다 씨는 정면의 벽에 걸린 세 장의 패널을 가리켰다. 가운데 한 장이 오노 벤키치의 사진이었다.
큰 눈과 콧날, 뼈가 굵은 얼굴이었다. 개국론자로서의 강한 신념이 그 풍모에서 느껴졌다.
"오른쪽 사진은 벤키치의 아내 우타 씨입니다. 덴포 말기, 벤키치가 직접 만든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죠. 당시 사진은 기독교의 요술이라며 벤키치가 사진을 찍는 것을 다들 꺼려했죠. 부인도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벤키치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래요. 깊은 지식과 정교한 기술, 그것만으로는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 수 없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번주가 벤키치에게 명령해 차를 나르는 인형을 만들게 했어요. 인형은 예의상 영주 앞에 차를 가져다 주었죠. 번주는 문득 부채로 인형의 머리를 두드려 보았어요. 그러자 인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갑자기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어 자르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깜짝 놀라서 벤키치에게 물었더니, 벤키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형에 미리 장치를 해 두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번주는 분명 요술이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이야기라면 또 있습니다. 벤키치는 술장수 인형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어느 술집 앞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인형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술장수는 인형이라며 술의 양을 줄였는데, 인형은 술장수의 마음을 알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술장수가 어쩔 수 없이 술의 양을 가득 채워 주자 인형은 돌아갔다고 하고요.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요. 인형은 술병이 일정한 무게가 되지 않으면 마개가 빠지지 않고, 기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거에요."
"원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과 같다는 거군요"
"차를 나르는 인형에 대해서는 벤키치도 자필 설계도를 남겼는데,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본을 보여드릴까요?"
다카라다 씨는 유리 케이스에서 한 권의 제본된 책을 꺼냈다. 제본된 표지에 '동시궁록(東視窮錄)'이라고 적혀 있었고, 내용 중 한 장에 정밀한 차 나르는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자동 인형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사진기, 화학약품, 색유리 제조법부터 자동분수대 내부, 볼타식 파일 도해 등이 세세한 설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이코는 그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키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묘한 힘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학력과 창의력이 뛰어났있으니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많았겠지요?"
마이코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해서 벼슬길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벤키치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아주 적었어요. 불과 대여섯 명도 안 되는 제자 뿐이었지요, 카라쿠리는 요네하라 린하쿠에게, 의술은 다카라다 이스케에게 가르쳤어요. 다카라다 이스케가 제 증조부이십니다."
"그래서 벤키치의 유품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군요."
다카라다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벤키치는 매독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요. 수은을 이용한 요법입니다. 벤키치는 은광 채굴에 종사한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다카라다 이스케가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구한 기간은 극히 짧았어요. 가가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즉, 기존의 집정관인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가 죽고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젠고(銭五)씨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죠."
"잠깐만요."
마이코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다카라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고 씨라고 하면 그 비극의 호상이라 불리는 제니야 고헤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가가, 카네이시의 호상 제니야 고헤에. 카네이시는 이 오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럼, 오노 벤키치와 제니야 고헤에는 친분이 있었나요?"
"그렇죠. 벤키치와 젠고 씨는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카라다는 세 장의 사진 패널 중 왼쪽 사진을 가리켰다.
"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벤키치, 오른쪽에 있는 큰 사람이 젠고 씨예요."
토시오는 벤키치보다 더 큰 제니야 고헤에의 사진을 보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키치는 젠고 씨의 틀니를 만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를 알면 알수록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요. 특히 자신이 미국에서 구한 권총과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벤키치는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지구본을 젠고에게 보여주기도 했어요. 벤키치는 젠고 씨이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실수로 지동설 따위를 입에 올리면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도 벤키치가 만들어 젠고 씨에게 선물했다는 원안경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의 지식에 의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니야 고헤에는 오노 벤키치의 후원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벤키치의 지식을 빌리면서 약간의 금품이 오갔겠지만, 벤키치는 젠고 씨의 비호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벤키치의 가난을 본 젠고 씨는 쌀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벤키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젠고 씨는 거액의 재산을 모은 뒤에도 장작과 등잔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보통 거상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유흥비, 쓸데없는 사치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단성 있는 결단을 상훈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벤키치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동안 물건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즐거움은 고양이와 원숭이를 키우는 것 정도였다고 하고요. 이런 두 사람의 성격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죠?"
"제니야 고헤에는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확실히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젠고 씨의 집은 가나자와 항구도시 미야노코시(宮腰), 지금의 카네이시(金石)에서 환전상과 간장업을 하고 있었어요. 안에이 2년, 젠고 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가독(家督)을 이었고요.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가업을 이어받아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어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서른 아홉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이미 한창 때는 진작에 지난 나이였을텐데..."
"그게 바로 젠고 씨의 비범한 점이죠. 그는 전당포에 있는 오래된 배를 개조해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에는 배를 새로 한 척 만들면 두 번의 항해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젠고 씨는 해운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해운업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출몰했죠. 하지만 수익은 엄청났어요. 젠고 씨의 배는 홋카이도의 해산물과 비료를 도호쿠로 운반하고 도호쿠의 목재와 호쿠리쿠의 쌀을 간사이로 운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의 잡화를 싣는 등 운송 이익 외에도 많은 거래가 얽혀 있었죠. 상술에 능했던 젠고 씨는 순식간에 거액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젠고 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 가가번이었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거군요"
"가가번에서는 젠고씨에게 자꾸만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어요.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두말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젠고 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기꺼이 돈을 바쳤어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도 젠고씨의 상훈 중 하나였습니다. 공납금에 대한 보답으로 번의 물자 수송용 배를 한 척 맡을 수 있었고, 젠고 씨의 배는 곧바로 가가번의 공식 수송선이 되어 백만 석의 문장, 가가 매화 그릇을 염색한 깃발을 내걸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가가번의 집정관은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였는데, 그와 손을 잡은 젠고 재벌은 흔들림 없이 성장해 나갔죠."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네, 천석선이 열 척. 오백 석선이 열한 척. 오백석선이 십일척.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이백 척의 선주였고, 전국에 서른네 개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추정 자산은 삼백만 양이라고 하는데요."
"삼백만 양--"
"그렇다고 해도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을 훨씬 넘을 겁니다."
"수백억!"
마이코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과 3억 엔의 강도 사건이 시효가 지나기 전까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젠고 씨는 오쿠무라 히데미와 함께 밀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다케시마를 중심으로 한 조선 근해 무역, 카라우타의 산탄(山丹) 무역, 사쓰난(薩南)열도에서는 대영국 무역, 북해에서는 대러시아 무역.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남쪽으로 태즈메이니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벤키치의 원양 항해술, 천문학, 어학에 대한 조력이 있었을테고요. 또한, 젠고 씨는 다양한 과학 기계를 밀수입해 벤키치에게 사용법을 배웠을 겁니다. 덕분에 벤키치도 몰랐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지식이 더욱 풍부해졌을테고요."
"여러 가지 과학 기계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마이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패널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해나가던 젠고 재벌은 정말 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봉건제 하의 재력은 정치적으로는 정말 무력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죠 ......"
다카라다는 수염을 몇 번이고 빗어 넘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덴포 14년, 젠고와 함께 번영했던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젠고 씨는 71세였어요.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죠."
다카라다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니야 고헤에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했다.
"당시 가가번에는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라고 해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오쿠무라 히데미 사망 후 검은 하오리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젠고씨의 번(藩) 공식 상인 지위를 박탈한 거였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젠고 씨는 어디까지나 상인일 뿐이었으니,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젠고씨가 좌절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음에 정말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그 유명한 하북 매립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레가 26km, 약 2천6백 헥타르나 되는 곳을 20년 계획으로 매립해서 논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 공사가 완료되면 가가 백만석에 수만 석이 더 추가될 것이었어요."
"일흔일곱 살에 20년 계획이라니…… 정말 이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군요."
"공사는 가에이 4년에 착공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공사였어요. 게다가 매립으로 인해 생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한 어민들의 격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젠고씨의 가훈 세 번째는 '세인의 믿음을 얻아야 한다’였는데, 이 때 세인의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과거 천보 대기근 때에도 쌀 수탈과 타 지역 유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매립 공사 시기에는 현지 노동력보다 임금이 싼 이주 노동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심해져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북 투독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극물 투척 사건이라니, 하북에 독극물을 투척한 건가요?"
"네, 하북의 물고기만 죽으면 어민들의 반대 운동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셋째 아들 요가 독극물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요가 석회에 냄새나는 물인 쿠사미즈, 기생충인 고나무시의 기름 등을 섞은 것을 몰래 하북에 투입했다고 했지요. 그 결과, 붕어, 고니 등이 죽어 떠올랐고, 이를 먹은 가마우지, 비둘기, 까마귀, 고양이와 개가 죽었고,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먹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가에이 5년, 젠고씨 가문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헤에 일가와 공사 관계자를 합해 51명이 감옥에 갇혔죠."
"하북에 독극물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일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하북은 원래 수질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수초가 너무 많이 번식하면 물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왜 고헤에가 체포된 거죠?"
"가가번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젠고 씨를 마음껏 이용해, 말하자면 번 전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죠. 그 밀무역이 막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그것이 표면화되어 막부의 추궁을 받게 되면 번 존폐와도 관련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번은 밀무역의 죄를 젠고 씨 한 명에게만 뒤집어씌워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하북의 집단 중독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젠고 씨는 번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매립 공사는 중단되었고요."
"물론 그렇죠. 대체로 간척이라는 공사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같은 시기에 막부는 인바누마(印旛沼)의 간척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한편 막부에서는 젠고 씨의 밀무역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죠. 막부 내부에서도 대외무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대정봉환이 눈앞에 다가왔고요. 일일이 밀무역을 감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거기까지 왔던 거죠."
"번에게 시대를 판단할 힘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당시 상업 자본은 정치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오사카의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郎), 하마다번의 아이즈야하치(会津屋八) 우에몬(右衛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사건의 결말은?"
"제니야 고헤에는 체포된 지 석 달째 되는 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젠고는 80세였어요. 요와 그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지금도 십자가의 소나무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니야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요. 이것이 젠고 재벌의 마지막이 되었죠. 벤키치가 51세 때였습니다."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노 벤키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마이코가 물었다.
"좋은 지인을 잃은 외로움은 누구보다 컸을겁니다.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점점 더 강해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일개 촌부로서 일생을 마감했어요. 한편, 카라쿠리 기우에몬의 다나카 히사시는 젠고 씨가 투옥된 해에 교토에 기공당(技巧堂)이라는 가게를 열었죠. 이후 차근차근 키워나가 마침내 긴자에 다나카 제조소를 개업했고요. 그게 오늘날 도시바의 기틀이 된 겁니다. 같은 천재였지만, 인간의 일생은 정말 명암이 엇갈리는 법이에요. 이것은 그저 운의 좋고 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츠루슈일록(鶴寿日録)에 따르면........"
다카라다의 장탄식을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츠루슈..…"
"츠루슈 일록. 아까 말씀 안 드렸나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 츠루슈일록이라는 건?
"벤키치의 일기의 일부가 남아 있어요. 그걸 츠루슈일록이라고 합니다."
"왜 츠루슈인가요?"
"벤기치 씨의 호가 츠루슈였거든요. 또 이치토(一東)라는 호도 사용한 적이 있어요 ......"
"츠루슈에, 이치토 ......"
오노 벤키치와 오나와에 이주한 마와리 사쿠조와의 인연은 이미 분명한 것 같다. 사쿠조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鶴寿堂(쓰루슈도)'라고 짓고 자신의 아들을 '東吉(도키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도, 암시도 아니다.
"오노 벤키치의 제자 중에 마와리 사쿠조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이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벤키치의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마와리 사쿠조 ...... 라는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츠루슈일록은 벤키치의 일생을 기록한 일기인가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던, 오쿠무라 히데미 씨가 병사했던 해인 덴포 14년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벤키치의 유언대로 사후에 소각되었는데, 이 기록만 우연히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볼 수 있나요?"
"복사한 것이라면 거기에 있습니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東視窮錄)'이 들어있던 같은 유리 케이스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카라다는 츠루슈일록의 사본을 꺼내 마이코 앞에 놓았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과 같은 정갈한 서체로 세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일상 기록이라 길지 않았다.

3일, 맑음 저녁에 복어국을 먹다
4일, 흐림. 베지 못하는 말 도면 그리기. 우타가 통풍을 일으켰다.
5일, 비, 도면 그리기를 계속.
6일,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7일, 맑음, 하루 종일 고민하다.
8일, 맑음, 도면은 진전이 없다.
9일, 맑음, 久右衛門(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森八の千歳, 일본 전통 과자)를 가져옴. 久右衛門(구우에몬)에게 일을 맡기고 계속 도면을 그리다.
10일, 맑음, 우타가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듬.
11일, 맑음, 도면 그리기를 계속하다…..

마이코는 열심히 츠루슈일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카라다 노인은 다른 방에서 다도 도구를 가져왔다.
"이 일록의 앞부분에 '무자마(無斬馬)'라고 되어 있는데, 무자마(無斬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마이코는 다카라다 노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물었다.
"베이지 않은 말이란,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라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실물은 남아있지 않겠군요."
"네, 아쉽게도 실물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장난감이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벤키치가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서적에 그 장난감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지 않는 말이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베어도 목이 다시 연결되는 목을 가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네요."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목?"
"이 말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포도주 잔을 대면 안의 술을 다 마시죠. 장치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해요. 그냥 말의 중앙에 있는 관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겁니다. 그 후 날카로운 칼로 말의 목을 베는데, 칼은 말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 아래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베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목은 제대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을 대면, 말은 다시 포도주를 다 마시고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2천 년 전이겠군요."
마이코는 놀란 듯 말했다.
"헤론은 증기기관, 압착기, 압착 펌프, 사이펀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동시에 많은 장치도 만들어 냈어요. 제단의 불로 춤추는 신상, 흐르는 물로 우는 새, 동전을 넣으면 일정한 성수가 흐르는 그릇,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판기의 원조겠지요."
"그럼,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의 목의 장치는 뭐죠?"
"원래 말의 목에는 잘리는 절삭점이 있어요, 말의 목은 세 개의 고리로 연결됩니다. 칼이 첫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칼이 지나갈 길을 만들지만 목은 두 번째, 세 번째 고리가 지탱합니다. 칼이 두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원래대로 제자리에 연결되고요. 이렇게 해서 칼이 완전히 목을 통과해도 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포도주가 지나가는 길의 개폐도 있어서 실제로 만들기는 아주 어려운 장치였습니다. 벤키치는 그 장치 제작에 도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벤키치는 구우에몬이라는 사람과 자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예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라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스즈키 구스에몬, 마에다 도사마모루(前田土佐守)의 직행(直行) 가신으로 30석 봉록 무사였습니다. 당시 30살을 갓 넘겼을 것입니다. 벤키치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입니다. 벤키치는 직행의 대우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출입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구스에몬은 벤키치의 학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배우는 도중에, 봉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죠."
"가가번의 개혁 때문이었나요?"
"아니요,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입니다.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번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구우에몬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다른 몰락 무사와 비슷한 길을 갔겠지요."
마이코는 아쉬운 듯 츠루슈일록을 덮었다.
"그런데 최근에 벤키치에 대해 조사하러 이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이코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어?"
다카라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요즘은 옛날로 갈수록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 가까운 일이라면 어제의 일도 잘 떠올릴 수 없어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로부터 최근에 오노 벤키치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다카라다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틀니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오노 벤키치 기념관을 나와서 젠고 유품관으로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품관은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마이코는 그리 아쉽지 않은 듯 말했다.
에그는 젠고 유품관을 나오자마자 고베의 보금자리인 혼류사 앞을 지나 그대로 해안으로 향했다.
마이코는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진눈깨비 길에 섰다. 검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제니야 고헤에의 동상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일본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헤에는 손에 원안경을 들고 있다. 오노 벤키치가 최신의 지식과 뛰어난 기술로 만든 원안경일 것이다.
다카라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젠고 씨, 벤키치라고 불렀다.
고헤에가 팔십,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시오는 격렬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2003/12/15

이퀄리브리엄 - 별점 2.5점

아메리칸 사이코의 크리스천 베일 주연 SF영화입니다.

미래 세계, 엄격한 통제에 의해 전쟁은 없어지고 감정은 억누르게 된다. 책과 예술 그리고 음악은 엄하게 금지되고 있고 감정이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이다. 존 프레스톤(크리스챤 베일)은 이런 법규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처치하는 최고의 정부 요원이다. 감정을 억제하는 세뇌약 프로지움의 복용을 놓치게 되자 엄격한 법률의 집행자로 훈련 받아온 프레스톤은 갑자기 그것을 오히려 전복시키는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 구조로 전개됩니다. 3차대전 이후 독재에 의해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는 도시국가나 감정을 조절하는 약 프로지움, 무술과 권총액션을 결합한 "건카터"라는 설정들과, 막판에 졸개들을 해치우고 보스와 대결하는 대결구도까지 많이 보아왔던 일본 작품들의 설정과 형식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초중반부까지는 설정과 캐릭터, 그리고 위기를 벗어나는 프레스톤의 기지 등으로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지만 막판에 너무 쉽게, 한번에 끝내버린 것은 아쉽네요. 조금 더 클라이막스를 신경써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적으로는 전체적으로 한번 지나가기에는 비쥬얼적으로 신경쓴 재미있는 요소도 많고 화려한 액션도 볼만한 그런저런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일각에서는 매트릭스보다 낫다, 철학적 요소가 있다 등등 이야기가 많은데 그냥 아무 생각없이 즐기는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뭐 매트릭스 아류작임에는 분명하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7/05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2025) - 시게하라 카츠야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마토 칸스케는 용의자를 추격하던 중 저격을 당해 왼쪽 눈의 시력과 당시 사건에 대한 기억 일부를 잃었다. 10개월 뒤, 모리 코고로의 옛 동료 사메타니가 저격당해 죽자, 모리 탐정은 경찰과 함께 사메타니가 찾았다는 나가노현으로 향했다. 

결국 여러가지 단서들로 범인은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려 했던 나가노현 경찰 하야시였다는걸 밝혀냈다. 마지막 설산 추격전 끝에 하야시는 체포되고, 야마토 칸스케도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으며 사건은 해결된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의 28번째 극장판입니다. 전작은 하코다테가 무대였는데 이번에는 나가노현이 무대입니다. 설산과 노베야마 전파망원경 시설이 주 배경으로 등장하지요.

가장 좋았던 점은 원작 만화나 TV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모리 코고로가 오랜만에 사건 해결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나름대로의 추리는 물론이고 뛰어난 사격 실력까지 선보이며 제 몫을 톡톡히 합니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비중 배분도 훌륭합니다. 나가노현 경찰 3인방은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만큼 당연하게 활약하고, 란은 범인과 맞서 가라데 액션을 보여 줍니다. 소년 탐정단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 하이바라는 마지막 추격전에서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요. 비중이 적은 사토와 타카기도 마지막 추격전에서는 나름 역할을 합니다. 아가사 박사의 퀴즈, 아무로 토오루의 냉정한 모습도 팬으로서 반가왔어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범인이 사용한 총기를 주요 단서로 쓰는게 좋았어요. 겉으로는 권총이지만 실제로는 소총탄을 사용하는 개조 총기였는데 이는 앞서 여러 단서들로 밝혀지고, 결국 범인이 경찰 내부 인물이라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거든요. 피해자의 별명인 '와니' 역시 진범을 특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나가노현 경찰 하야시가 연인의 죽음 탓에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설산과 전파망원경 시설을 활용한 액션들도 대체로 그럴듯하게 그려집니다. 최근 극장판에서 자주 보였던 어처구니없는 액션이 줄어든 점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 무대인 나가노의 풍광도 수려하게 그려지고요.

반면 코난의 활약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추리에서는 큰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했고, 마지막 평지에서 무한 동력으로 날아다니는 스노보드 추격 장면은 황당했습니다.

범인 하야시의 행동도 쉽게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려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사메타니를 살해한 것은 스스로 범행의 명분을 무너뜨린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법안이 바뀔 이유도 없고요.

야마토 칸스케의 기억 상실 역시 아쉬웠습니다. 특정 기억만 사라졌다가 사건 해결에 필요한 순간 되살아나는 전개는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메'와 '와니'의 연결도 많이 사용된 소재인데, 작중 등장인물들이 모두 모르고 있다는 것도 좀 와 닿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이야기 완성도가 떨어졌던 전작보다는 여러모로 낫습니다. 모리 코고로의 활약도 만족스러웠고요. 일부 설정은 아쉬웠지만 코난 팬이라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