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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에요.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2026/05/16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 아라키 히로히코 : 별점 1.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으로 유명한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단편집입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데드맨즈 Q"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상상력과 불길한 상황 설정을 짧은 이야기 안에 압축한 이야기들로, 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거나 무너지는지를 주로 보여줍니다. 

감옥인지 호텔인지 알 수 없는 공간, 바다 위 요트에서 사람과 고양이간 벌어지는 기묘한 생존극, 죽은 뒤에도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인물이라는 소재는 확실히 아라키 히로히코답습니다.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기괴한 상상력도 돋보입니다. 평범한 공간을 순식간에 불안하고 위협적인 장소로 바꾸는 감각, 인물의 육체를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작화와 연출, 현실적인 논리보다 불길한 이미지로 독자를 압박하는 방식은 분명 개성적입니다. 또한 "돌치 ~ 다이하드 더 캣"처럼 제한된 상황에서 작은 두뇌 게임을 활용하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 작가의 재치를 잘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점이 더 큽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는 아무리 기묘한 사건이 벌어져도 스탠드라는 설정과 대결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독자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책 수록작들은 그런 뒷받침 없이 기괴한 상황만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기묘하다는 인상은 강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결말도 대체로 시시한 편이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추천할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표제작. 한 남자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듯한 방에 갇히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공간은 단순한 감옥이 아닙니다. 음식과 생활 시설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호화로운 호텔 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의 모든 사물은 죄수를 죽이기 위한 장치처럼 움직이지요. 침대, 욕실, 식사, 창문까지 일종의 함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방 안의 구조를 파악하며 조금씩 탈출 가능성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사형 집행과 탈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핵심으로 주인공은 계속 죽음의 위협을 피하면서, 결국 탈옥 직전의 상황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탈옥을 포기한 채 그 안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게 결말입니다. 

기괴한 발상은 인상적이고 중반부의 위기와 탈출 묘사는 흥미롭지만, 갖은 노력을 통해 탈출 직전의 상황을 만든 주인공이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남는다는 결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몇 년 안에는 결정을 내렸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충 의도는 알겠지만 마무리의 설득력이 약해서 감점합니다.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난파한 요트 위에서 남자와 고양이 돌치가 생존을 두고 얽히는 이야기인데, 이 단편집에서 그나마 두뇌게임과 반전의 재미가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기괴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상대를 속이거나 유인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덕분이지요. 특히 손가락을 이용해 돌치를 낚는 장면에서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잔혹한 아이디어, 일종의 두뇌 게임이 잘 드러납니다. 대단히 정교한 추리나 전략은 아니지만, 짧은 단편 안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는 꽤 효과적입니다.

다만 이 작품 역시 결말까지 놓고 보면 강렬한 설정에 비해 뒷맛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돌치가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는 정도인데 반전도 아니고, 별로 통쾌한 결말도 아닌 탓입니다. 애초에 돌치의 능력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나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내용과 작품 완성도만 놓고 보면 이 책 최고의 수록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를 통해 이미 접했다는 점입니다. 책 값도 제법 나가는 편인데 중요한 수록작 하나를 이미 접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데드맨즈 Q"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와 이어지는 성격이 강한 단편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죽은 뒤의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상태에서, 어떤 의뢰나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독립적인 단편으로 읽기에는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탓입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를 읽은 독자라면 키라 요시카게라는 인물 자체에서 오는 흥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모른다면, 알 수 없는 인물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영문모를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요.

즉, 단독 작품이라기보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이미 읽은 독자를 위한 후일담이나 외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6/04/26

존 윅 4 (2023) - 채드 스타헬스키 : 별점 3점

최고 회의의 그라몽 후작이 직접 존 윅을 처단하기 위해 나섰다. 존 윅의 친구 케인이 후작의 하수인으로 직접 나섰고, 그는 존 윅을 보호하던 또 다른 친구 코지마저 죽였다. 존 윅은 살아남아 자유를 얻기 위해 후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는데...

존 윅 시리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시리즈 장편답게 독립적인 에피소드라기보다는 앞선 세 편에서 쌓아 온 존 윅에 대한 설정과 서사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종결부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당연하겠지만 액션은 정말 최고입니다. 더 기대할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을 보여주네요. 몇몇 장면이 특히 인상적인데, 첫 번째는 베를린 시퀀스에서 존과 독일 지부 수장 킬라 하르칸의 격돌 장면입니다. 현란한 네온 조명에서 춤추는 군중 사이로 처절한 격투가 어우러지는 몽환적인 연출이 돋보입니다. "발레리나"의 첫 액션 시퀀스가 노렸던게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결투 직전 파리에서 펼쳐지는 '사냥' 장면은 더욱 대단합니다. 존은 결투에 참가하기 위해 자신을 노리는 킬러들을 상대로 개선문 로터리의 자동차 지옥을 통과하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가 다시 기어오르며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데 그 쾌감이 장난이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건물 내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길게 이어지는 총격전은 역대급입니다. 카메라가 인물 위를 부유하듯 이동하면서도 동선이 흐트러지지 않고, 각 방을 돌파하는 리듬과 총기 화력의 변화가 롱 테이크를 통해 합을 맞추며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게임과 홍콩식 총격 액션, 현대 스턴트 설계가 한 장면 안에서 결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어요.

등장 인물들도 좋습니다. 케인은 견자단의 존재감만으로도 강함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젊은 킬러 노바디도 애견인 킬러라는 설정과 가방을 활용한 독특한 액션이 시선을 사로잡고요. 빌런 킬라 하르칸의 거구, 그라몽 후작의 뺀질거리면서도 잔혹한 모습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시리즈가 길어지면서 생겨난, 설정 놀이가 지나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결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존이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싸운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이 남네요. 후작이 윈스턴의 호텔을 파괴하고 샤롱을 죽이는 선택 역시 이유도 알 수 없는 비효율적인 행동이었고요.
마지막 결투도 여러모로 석연치 않습니다. 승패가 후작이나 존 윅이 죽어야 갈리는 거라면, 처음에 후작을 쏴 버리고 끝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초반 오사카 파트는 완전히 억지였습니다. 존이 일본에 가서 서사적으로 얻는게 전무한 탓입니다.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친구 코지만 죽게 만들었을 뿐이지요.
코지도 의리는 멋지지만 액션이 영 별로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총격전 중심 세계관에 활과 수리검을 들고 나오는 행동도 영문을 모르겠고요. 감독이 와패니즈일 거라는 강한 의심만 듭니다. 

그래도 어차피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요. 중요한건 압도적인 액션인데, 액션만큼은 충분히 기대에 값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6/03/21

발레리나 (2025) - 렌 와이즈먼 : 별점 1.5점

"존 윅" 시리즈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핀 오프 액션 영화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을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컨티넨탈 호텔이나 루스카 로마 같은 익숙한 설정들이 등장하지만, 이미 알려진 장치를 배경처럼 끌어다 쓰는 데 그칠 뿐입니다. 시리즈의 개성을 만들어 주던 설정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여성이 복수에 나선다는 흔한 설정을 포장하는 장식에 불과해요. 사실 "존 윅" 세계관도 서양 관객들에게는 새로왔을지 모르지만, 일본 만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설정들일 뿐이기도 하고요.

이야기도 뻔합니다. 강한 조직의 후계자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운명의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도망치지만 결국 아버지를 잃은 뒤, 다른 조직에 들어가서 실력을 키운 뒤 복수한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인 탓입니다.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 할아버지라는 설정조차도요.
이에 대한 이야기 전개도 엉망입니다. 어린 시절 헤어졌던 언니가 갑자기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세력 간 협상을 위해 등장한 존 윅이 어느 순간 그녀의 편에서 싸운다는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장치였으니까요.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원래 "존 윅" 시리즈 역시 액션이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 작품마다 적어도 하나쯤은 관객에게 강하게 남는 시퀀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레리나"는 그런 인상적인 장면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은 여성의 액션이라서 타격감도 부족하고, 대체로 밀리는 액션이 많아서 시원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발레리나"에 걸맞게, 발레 동작을 액션에 녹여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화염 방사기를 이용한 대결은 눈꼴 사나운 수준입니다. 화면은 요란하지만, 열린 공간에서 총도 충분히 있는 상황에 굳이 화염 방사기를 사용해야 할 이유는 설명이 안되지요. 현실감이나 개연성 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선사하기 위한 욕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이렇게 "존 윅"의 명성에 기댄 졸작이지만 장점이 아주 없지만은 않습니다.무엇보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이 역할에 잘 어울립니다. 다소 가련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소녀 역할을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팬이라면 '존 윅'의 등장과 활약은 이야기의 개연성과는 별개로 즐길만한 부분이었고요.
전직 킬러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 '할슈타트'의 설정 만큼은 아주 괜찮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장점은 너무 사소합니다. 평균 이하의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불과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2/21

잔혹한 여로 - 야마무라 미사 : 별점 2점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는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일본 여성 추리작가 야마무라 미사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설 연휴 때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의외였던건, 수록작 중 세 편은 트릭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통파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특히 "공포의 연하장"이 아주 괜찮습니다.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겨진 유류품을 통해 피해자는 당첨된 연하장을 상품인 우표와 오전 9시 이후에 교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인 거래 증권회사 직원 가사하라는 오전 8시 40분에 출근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보냈지만, 사전에 당첨 유무를 아는건 불가능해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 수도 없고요.
다카기 경부는 연하장에 소인이 없는 점(연하장은 12월 22일까지 접수분은 1월 1일 도착 보장이라 소인이 찍히지 않음)에 주목해서, 빌견된 당첨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사건 당시에 가지고 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당첨 연하장을 가사하라가 미리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증권회사가 직원에게 연속 번호의 연하장 500장을 주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연하장 추첨에서 최하등 우표는 100장당 반드시 3장 당첨되므로, 가사하라는 보내지 않고 남겨 둔 100장의 연속 번호 연하장만 있어도 반드시 당첨 엽서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즉 가사하라는 당첨 번호 발표 후 보관 중이던 연하장 중 당첨된 것을 고른 뒤, 사건 당일 피해자 집에 들고 가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집에 있던 자기가 보낸 진짜 연하장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상품은 따로 교환해서 시체를 발견하러 갔을 때 몰래 피해자 주머니에 넣었고요.

이렇게 일본의 연하장 풍습과 증권 회사의 전통 등을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트릭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지만, 가사하라가 원래 피해자에게 보냈던 연하장이 드러나면서 범행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피해자와 가사하라의 육체 관계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진짜 연하장이 발견되는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도 충분한 수준입니다.

"검은 테두리의 사진"은 오사카로 출장간 범인이 전날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방송이 오사카에서는 그날 방송된다는걸 알고난 뒤, 전날 찍었던 사진을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사실 트릭이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우연과 운이 지나치게 많이 좌우되는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같은 방송이라도 방송하는 채널이 다른데,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체포한다는 결말도 설득력이 약했고요. 앞서 범인 오사와는 '화면만 사진에 담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채널 다이얼이 어떻게 보였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호텔 종업원이 오사와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다고 증언했다니, 사진 따위는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줄 수도 있으니, 애초에 그리 탄탄한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TV를 찍은 사진을 알리바이에 사용한다는 설정만큼은 독특해서 눈길이 갑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 방식인 덕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을 잘 반영한건 분명합니다.

"죽은 자의 손바닥"에서는 셀로판지를 이용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손바닥 도장을 찍는 트릭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두 편 보다는 별로에요.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의 모든 측면에서 기대 이하거든요. 경찰의 추리는 근거없는 첫인상에 기반하고 있고, 범행 방법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위의 세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내용도 그냥저냥합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잔혹한 여로"는 일종의 범죄 반전물입니다. 진범이 드러난 뒤 진범마저 개미지옥에 빠진다는 마지막 부분은 꽤 그럴 듯 합니다. "50퍼센트의 행복"은 오래 전 친자 감정 방식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볼만했던 치정 드라마이고요.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너무 뻔합니다. 결말도 안이하고요.

"고독한 증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떠오르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가사이 나오미의 증언을 회사측, 유족측이 제각각 제멋대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지요.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나오미의 고뇌를 심도깊게 다루지도 못했고, 밝혀진 진상 - 폭탄 테러 - 도 설득력이 약하며, 가사이 나오미가 결국 자고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결말도 영 아닌 탓에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살의의 축제"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돈으로 진범을 날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가 되는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가족마저도 영원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당시 범인과 유족 측 인물들이 당시 상황을 복잡하게 밝히는 결말은 꽤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걸 읽은 바람에 다소 김이 빠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만, 잘 모르는 작가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공포의 연하장"만큼은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2026/02/20

꽃다발은 독 - 오리가미 교야 / 이현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세는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이었던 마카베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기타미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소장 대리인 기타미는 기세의 중학교 선배였다. 마카베가 의뢰를 망설여서 기세는 직접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를 통해 협박은 마카베가 저질렀다는 4년 전 강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났다. 마카베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마카베는 모든 걸 잃고 학교마저 그만둔 채 지금에 이르렀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분량이 비교적 간결한 편이라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마카베에게 익명의 협박장이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협박은 4년 전 그가 저질렀다는 강간 사건과 관련되었고, 협박범은 당시 피해자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마카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도 그가 누명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기타미의 조사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마카베는 억울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이렇게 '원죄(엔자이)'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사회파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뒤이은 전개는 마카베가 정말 결백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을 싹트게 하여 흥미롭습니다. 마카베의 모친도 그의 무죄를 믿지 않고, 마카베 가족이 왜 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 - DNA 검출 -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기세를 통해 소개된 마카베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서, 독자로서는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뒤집어 버리는 덕분입니다. 우선, 4년 전 사건은 피해자였던 나가노 가나미의 자작극이었습니다. 마카베에게 푹 빠진 나머지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성공해서 마카베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박장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의 아버지 나가노가 마카베를 돕기 위해서 보냈던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자연스럽게 믿어온 전제가 뒤집히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 반전이 결혼식 직전의 마카베에게 진상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로 이어지는 결말도 충분히 흥미롭고요. 

그리고 반전은 협박장이 두 종류 - 강경한 경고와 정중한 문체 - 였다는 단서로 뒷받침되는데 이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기타미와 기세는 강경한 경고는 마카베에게 보냈고, 가나미가 받아볼 수 있는 협박장은 정중한 문체로 보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나가노는 처음에 가나미에게 강경한 경고가 전달되도록 협박장을 보냈습니다. 부부의 이름으로 동거 중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내가 우편함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는 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경고가 효과를 보지 못해서, 마카베에게 정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은 물론 독자까지 공정하게 제공한 단서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했다는게 아주 좋았어요.
가나미가 마카베를 옭아매기 위해 벌였던 몇 가지 장치 - 당시 마카베가 연인과 시간을 보냈던 러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DNA를 손에 넣었다는 등 - 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요.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기타미가 벌이는 조사의 상세함도 최고 수준입니다. 주로 탐문과 관계자 면담이 중심이지만, 기타미는 피해자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카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보를 캐 내기까지 하는데 이는 법대생 기세의 입을 빌어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이라고 설명되거든요. 그야말로 일반 '탐정'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를 그려낸 느낌이에요.
개인이 받은 '협박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재를 다룬 점도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 역시 일개 탐정이 해결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죄일테니까요.

그러나 마카베가 받는 협박의 원인이 4년 전 사건일 수밖에 없는 탓에 협박범이 그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가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길어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합니다.  
아울러 중학생 시절부터 탐정으로 활약해 왔다는 기타미의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저해합니다. 굳이 필요했던 설정은 아니었어요. 기세와 기타미의 1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불필요해 보였고요. 

그래도 반전을 중심에 둔 일상계 범죄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1/25

명탐정 코난 : 17년 전의 진상 (2025) - 야마모토 야스이치로, 카마나카 노부하루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티빙에 업로드되었길래, 작년 말에 기말고사가 끝난 딸과 오랜만에 감상한 코난 극장판입니다. 리뷰가 많이 늦었네요. 정확히 말하면 해당 내용의 TV 시리즈 총집편입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현재 벌어진 체스 대회 살인 사건과 17년 전에 있었던 아만다 휴즈와 하네다 코지 살인 사건이 이어지며 전개됩니다. 현재 체스 대회에 참가했던 쿠로다 관리관이 17년 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설정이지요.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추리적으로 완성도가 치명적으로 낮습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에요. 우선 체스 대회 살인 사건은 ‘다이잉 메시지’가 핵심 단서로 등장하는데, 피해자가 죽기 전에 굳이 이런 암호 같은 메시지를 만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범인의 이름을 쓰면 되니까요. 트릭을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범인이 잔을 깨는 척 자작극을 벌인 트릭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네덜란드의 눈물’이라는 일종의 유리 덩어리를 활용해 잔을 깨뜨렸다는 트릭인데, 번거롭고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한 손으로 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네덜란드의 눈물 끝부분을 부러뜨릴 만년필을 사용하는 모습도 어색할 테고요. 이럴 바엔 잔 깨지는 소리를 녹음해 틀어놓은 뒤 컵을 떨어뜨려 깨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원작 이야기를 읽지 않아서 왜 검은 조직과 럼이 아만다를 살해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독약이 완벽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조직원이 호텔에 침투해 보디가드들을 제압했다면 굳이 독을 사용할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괜히 다이잉 메시지를 남길 시간만 준 셈이니까요.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독약 설정도 유치했고, 다이잉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도 유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리고 17년 전 당시 현장에서 도주했던 생존자, 아만다의 보디가드 아사카가 현재 소년 탐정단의 부(副)담임인 루미 선생님이라는 설정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초반부터 ‘수상하다’는 분위기를 깔고 가서 대단한 반전도 없었고, 코바야시 선생님을 죽을 지경으로 만들면서까지 검은 조직을 노렸지만 결국 헛수고로 끝난 결말도 황당했습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더군요. 키안티 등의 저격을 코바야시 선생 일행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도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긴 시리즈를 끌고 가는 중간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졸작입니다. 등장인물의 매력도 별 볼 일 없고, 추리와 트릭은 엉망이며, 액션은 부족하고 작화 역시 수준 이하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총집편 "흑철의 미스터리 트레인"은 이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는데 아쉽네요. 앞으로 총집편은 웬만하면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2026/01/16

더럽혀진 성지 순례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2점

영화까지 발표되었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작가 세스지의 신작입니다.

전작은 여러 형식의 기록들을 이어붙인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괴이 현상의 실감을 높였는데, 이번에는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따릅니다. 때문에 형식은 유사하지만 별로 실감나지는 않았어요. 여러 기록들도 작중에서는 모두 심령 현상이 일어난 해당 장소와 관련된 괴담을 '날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고요.

괴이한 심령 현상들도 복수라고 볼 수 있는, 일종의 '윤회'라는 식으로 풀어가는데 깔끔한 느낌을 주지는 못합니다. 등장인물들의 개별 서사도 이야기에 충분히 녹아들지 않고, 주어진 떡밥들 역시 모두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작가의 욕심이 지나쳐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섬찟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모로 전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상세한 괴담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태 오두막

유튜버 이케다와 팬북을 출간을 진행 중이던 고바야시는 재생 횟수가 많았던 동영상에 그럴싸한 괴담을 날조해서 꾸며 넣기로 했다. 출판사가 혹하게 만들이 위해서였다. 첫 번째 대상은 '변태 오두막' 촬영 영상으로, 산 속의 이른바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 도촬한 듯한 사진이 널려있는 기묘한 곳이었다.
날조에도 리얼리티가 필요하다는 고바야시의 주장으로, 이케다는 '변태 오두막'처럼 '인형'을 버린 폐가를 취재했던 유튜버와의 인터뷰를, 고바야시는 '변태 오두막' 속에서 발견된 사진에 대한 추가 취재를 진행하는데..

괴담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변태 오두막은 누군가를 저주하려는 사람들이 저주의 대상 사진을 집어 넣는 곳이었습니다. 유키에는 불륜 상대의 아내 료코가 이혼해 주지 않아서 그녀를 저주하려고 오두막에 사진을 집어 넣었고, 이후 료코는 자살했습니다. 자살 후 유키에의 딸 유카에게 료코가 윤회하여 빙의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료코 사진이 '정화' 의식 때에는 부풀어 올라 있었다는 묘사는 확실히 섬찟했고요.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찾아낸 정보라고 설명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인터뷰,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드러내는건 전작과 비슷했지만 전작보다는 더 소설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진상을 유키에의 독백으로 마무리한건 문제입니다. 유카가 마지막에 말한건 맥락 상 "용서 못해"일텐데, 이를 표현하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이 진상은 맥락적으로도 이상해요. 변태 오두막의 저주가 통해 료코가 죽었다면, 료코의 영혼 역시 저주로 죽는게 맞지 않을까요?

유키에의 독백말고 그냥 그녀가 딸을 방치하여 죽였고,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후일담 기사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천국 병원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괴담 작가 호조가 '천국 병원'에 대한 괴담을 찾아냈다. 폐암으로 연명 치료 중이던 할머니가 그만 편해지기를 바랬다는 한 소설가의 고교 시절 추억담으로, 이후 소설가는 자살했다...

앞부분 소설가의 회고는 괴담이라고 보기 어려운 담담한 이야기로 실망스럽지만, 뒤이은 청년들이 병원에서 벌인 담력 시험 체험기는 오싹합니다. 천국 병원의 막혀있던 병동에서 '괴이'를 마주쳤다가 쫓기는 과정의 서스펜스, 그리고 일행을 쫓던 머리가 커지던 괴이가 들고 있던 친구 휴대전화 번호로 아직도 전화가 걸려 온다는 후일담까지 완벽했던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소설가의 회고를 틀어서 진상, 즉 소설가는 할머니가 미워했던 양녀였고, 소설가는 사신과 거래하여 할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아울러 병원이 '제로 자기장'에 위치해서 괴현상이 많이 발생한다는 설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이거나 설득력이 높지는 않지만, 단순 괴담에 그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니까요.

그러나 소설가가 할머니를 저주로 죽게 만든게 그리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건 문제입니다. 할머니는 나쁜 사람으로 그려진 탓에, 그냥 보면 정의구현으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소설가가 저주의 역풍을 맞은 듯한 현실은 별로 와 닿지 않네요.

어리석은 세 사람

등장인물들의 과거 - 이케다는 과거에 호감을 품었던 유코를 저주로 죽게 만들어서 유령을 쫓는 유튜버를 하게 되었다, 호조가 유령을 볼 수 있어서 중학교 때 왕따를 당하다가 교생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등 -가 펼쳐집니다. 책 전체로 보면 징검다리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뒤에 이 과거가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그냥 이 부분만 놓고 보면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는,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윤회 러브 호텔

러브 호텔에 그려진 괴상한 벽화와 여러 소문에 대해 논의하는게 대부분인데, 대체로 굉장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마무리하는게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스토커 피해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죽은 여성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지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에 불과한데, 스스로 스토커 게이이치에게 뭔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묘사는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에요.

불확실한 괴이

앞서 날조를 위해 만들었던 이야기들 모두 고바야시의 음모였다는게 드러납니다. 유령을 믿지 않는 이케다가 유령에 홀리게 만드는게 목적이었지요. 이케다에게 뭔가 괴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책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세사람"처럼 각자의 사정과 과거가 펼쳐지는 징검다리 이야기입니다.

한낱 패밀리 레스토랑

이케다에게 달력 일정에 유코의 기일이 기입되었고, 기분 나쁜 장난 전화가 걸려왔고, 움직일리 없는 유튜브 동영상 속에 괴이한 여성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자주 보던 버튜버의 화면이 기이하게 바뀌는 등의 괴이 현상이 일어났다...

이케다의 괴이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앞서 선택되었던 괴담들 모두가 일종의 '윤회'를 다룬, 괴이가 다시 태어난다는 괴담이었다는게 설명되기 때문에, 책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부분이지요.

한낱 옛날 이야기

세 명 모두 누군가를 죽였었다, 그리고 죽였던 여자들이 유령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유령에 홀렸던 이케다가 신관인 호조 아버지의 도움으로 벗어나고, 책은 출간이 결정된다는 결말입니다. 앞서 그들이 각자 보았던 괴이들은 각자가 죽였던 피해자들이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윤회에 관련된 로쿠부 살해 괴담을 이방인의 피가 필요했다로 연결하는 아이디어만큼은 참신했는데 회수가 안 된 떡밥이 너무 많고 - 이케다는 유코를 죽이지 않았는데 무엇에 홀린건가? 호조의 교생 선생은 어떻게 죽었는가? 윤회는 모든 저주의 대상에 해당하는가? 등 -, 등장인물들의 일이 모두 잘 풀린다는 결말은 허무합니다. 최소한 고바야시는 이케다를 괴이에 홀리게 만들려는 악의가 있었던게 분명하니, 이 작자만큼은 벌을 받으면 했는데 말이지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2025/07/26

더 킬러 (2023) - 데이빗 핀처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연출만큼은 매우 정교합니다. 특히 파리 호텔에서의 실패 이후 킬러가 탈출하는 장면은 색감, 구도, 리듬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킬러가 스스로의 신분을 감추고 위장하며 타겟을 하나씩 처리하는 과정의 디테일도 빼어납니다. 중개인 호지스를 습격하려고 쓰레기 수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차량은 물론 옷에 부착하는 패치의 로고를 수작업으로 그려서 신분을 속이며,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시간을 측정해서 침입하는 타이밍을 잡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게 굉장히 좋았어요. 정말 저렇게 하면 침입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데이빗 핀처 감독 작품답게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킬러 역을 맡은 마이클 패스밴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내면을 표현해내는데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허술합니다. 암살 실패로 연인이 폭행당하자 복수에 나선다는게 이야기의 전부로 크게 새로울게 없는 킬러 복수극에 불과한 탓입니다. '킬러의 생활'을 따라가는 일종의 킬러 일상계물이라서 행동의 디테일을 좇는 재미는 있지만, 정교한 퍼즐처럼 맞물리는 서사를 기대한 관객으로서는 아쉬웠습니다.
또 암살 중개인이 킬러를 제거하지 않고, 여자친구만 폭행하고 사라진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 기다렸다가 킬러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협박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한데 말이지요. 결국 이는 킬러의 복수극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인데, 수천km를 여행하며 4명이나 살해하는 복수를 하기에도 단순 폭행은 좀 부족해 보여서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중반부, 킬러가 플로리다로 가서 흑인 청부업자와 벌이는 격투 장면도 아쉽습니다. 상대는 거대한 체격과 잔혹함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격투는 힘의 압도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지는 인상입니다. 어두운 탓에 액션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고요. 이럴바에야 킬러의 압도적 강함을 짧게 선보이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초반부터 반복되는 킬러의 나레이션은 철학적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후반부엔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핀처 특유의 절제된 미장센과 현실감 있는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집중력 있는 연기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화면 자체로 모든 걸 말하는 영화이지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06/08

미로장의 참극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사업가 시노자키 신고의 초대로 후지산 앞에 위치한 저택 ‘명랑장(미로장)’을 방문했다. 이 저택은 본래 구 백작 후루다테 다쓴도의 소유였으나, 시노자키가 이를 구입해 수리한 후 호텔로 개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과거 20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도주했던 외팔이 남자 오가타 시즈마가 이 명랑장 주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시노자키는 긴다이치에게 조사를 의뢰하고자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마침 호텔 개업을 앞두고 후루다테 가문과 관련된 인물들—후루다테 다쓴도, 그의 외삼촌 덴보, 아내 가나코의 여동생 야나기마치 요시에—도 모두 명랑장에 모였다. 시노자키 자신도 후루다테 가문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다쓴도의 아내였던 시즈코와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후루다테 다쓴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출동해 수사를 개시했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다가 다음 날에는 덴보마저 살해당했고, 하녀 다마코는 실종되었음이 밝혀졌다. 덴보가 죽은 방은 비밀 통로가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확인되며,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긴다이치와 경찰은 명랑장의 구조를 조사하던 중, 비밀 통로와 연결된 지하 동굴에서 다마코의 참혹한 시신을 발견했고, 바로 그 직후에 시노자키의 전처 소생 딸 유코가 중상을 입은 채 비밀 통로 출구 근처에서 구조되었다.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 “아빠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날 밤, 긴다이치는 다하라 경부보와 이가와 형사 앞에서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든 방법을 직접 시연했고, 지하 동굴 속 오가타 시즈마의 묘소로 경찰을 안내했다. 그리고 명랑장에 나타난 외팔이의 정체는 마부 조지였다는걸 밝혔다. 조지는 명랑장의 관리인 이토메와 함께, 다쓴도를 괴롭히기 위해 외팔이 행세를 했던 것이었다. 긴다이치는 이후 연이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냈다. 진상은 다음과 같았다.

시즈코는 관계를 이어가던 다쓴도와 함께 남편 시노자키를 살해하려고 했다. 목적은 유산이었다. 다쓴도는 외팔이로 변장해서 시노차키를 살해할 계획이었는데, 범행 예행 연습을 요시에에게 우연히 목격당했다. 둘은 격투를 벌였는데, 외팔이로 변장한 탓에 다쓴도는 요시에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요시에는 현장을 급히 떠나 알리바이를 만든 뒤, 나중에 도르레를 이용하여 마차 위로 사체를 옮겼다. 그래서 복잡한 형태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덴보는 다쓴도와 시즈코의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을 가지고 시즈코를 협박했는데, 시즈코는 이를 빼앗기 위해 덴보를 살해했다. 그 현장을 마침 목격한 다마코 역시 시즈코에 의해 희생당했다는게 진상이었다.

마지막에, 외팔이로 위장해 남편 시노자키를 제거하려던 시즈코의 계획은 요시에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무너지는 비밀 통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1975년에 발표한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중후반부 작품입니다.‘명랑장(미로장)’이라는 기묘한 저택을 무대로 복잡한 가족사와 잇따른 살인 사건을 그려낸 본격 추리소설이지요.

장점이라면 사건들이 흥미롭고 풍성하다는 점입니다. 명랑장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연쇄 살인이 어우러지는 구성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덴보가 살해된 밀실 트릭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작품 속에 흩어진 단서들이 수수께끼 해결에 필요한 정보로 작용하는 점 역시 공정한 추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작품 속 핵심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죽은 다쓴도는 왜 외팔이인척 했는가?
  2. 범인은 다쓴도를 왜 번거롭게(둔기로 타격한 뒤 교살하여 마차 위에 올려놓는 식으로) 살해했는가?
  3. 덴보를 살해하고 밀실을 어떻게 만들었나?

여기서 1번 수수께끼의 답은, 다쓴도가 외팔이인척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다쓴도가 외팔이로 보이게끔 조작하지 않았다는건, 그의 복장과 가져온 짐으로 증명되었고요. 2번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역시 도르래와 모래 주머니, 그리고 범인 요시에의 조금 어긋나있는 알리바이 증언으로 증명됩니다.
3번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로는 이전에는 다른 곳에 놓여 있던 칠기 접시의 존재, 그리고 시즈코의 프랑스 자수가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범인은 접시에 바늘을 꽂은 뒤, 실을 회전창 너머로 넘기고 이 실에 열쇠를 매달아 접시 위로 내려보냈던 겁니다. 바늘은 밖에서 잡아당겨서 회수했고요.

그 외의 수수께끼들에 대한 추리 모두가 논리적으로 제시됩니다. 명랑장에 나타났던 외팔이의 정체가 조지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메가 조지를 외팔이로 변장시켰던건데, 선대 주인 가즌도가 죽은 이유가 다쓴도의 비열한 소문 때문이었으니 이토메가 원한을 품은건 당연합니다. 

긴다이치와 경찰이 탐험해 나가는 명랑장의 미로에 대한 묘사는 모험물을 보는 듯한 느낌도 전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약간 "팔묘촌" 느낌도 나더군요.

그러나 좋은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주요 범행이 일어난 이유가 우연이라서 범행에서 정교함을 느끼기 어려운 탓입니다. 다쓴도가 살해된 것은 요시에에게 살인 모의 장면이 들켰기 때문이었고, 다마코 역시 시즈코가 덴보를 살해한 직후 우연히 방을 찾은 바람에 희생당했으니까요. 이런 전개는 극적이긴 하나, 치밀한 계획 범죄의 인상은 줄 수 없었습니다. 

범행 동기의 설득력도 낮습니다. 시즈코가 신고와 결혼한 뒤에도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갔다는 핵심 동기에 대한 단서가 전혀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쓴도는 돈도, 외모도 특별히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지도 않고요. 재산, 외모 모두 시노자키가 압도적인데 시즈코는 왜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나가며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걸까요?
이런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약한건 비슷한 설정인 - 위장 결혼 후 재산을 노리고 배우자를 살해하는 - 걸작 "나일 강의 죽음"도 그렇다 치죠. 하지만 다쓴도가 살해당한 뒤, 범행을 이어나간 시즈코의 동기는 아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협박자인 덴보를 구태여 살해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불륜의 대상자인 다쓴도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는, 시노자키에게 고백하고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게 빠른 방법이었으니까요. 어차피 시노자키도 원죄 - 시즈코와 강제로 결혼한 - 가 있으니 괜찮았을거에요. 설령 협박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 치더라도,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리바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시간만 걸리는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이건 독자를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단순한 장치 이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즈코가 신고를 살해하려 했던 계획은, 외팔이 범인의 존재를 조작해 빠져나가려는 원래의 설정과 연결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명랑장에는 명탐정 긴다이치와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범행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에 희박했습니다. 게다가 원래의 외팔이가 누구인지 시즈코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진짜가 있는데, 그 진짜를 위장해서 경찰이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시즈코의 범행 시도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쓴도와 시즈코의 관계를 알아챈 시노자키가 1,000만엔을 주고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핵심 동기가 맨 마지막 에필로그에나 등장한건 반칙같이 느껴지네요.

후더닛 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명랑장에 모인 사람 중 비중이 있는건 주인인 시노자키와 시즈코 부부, 다쓴도, 덴보, 요시에와 시노자키의 딸 요코, 비서 오쿠무라, 종업원 이토메, 조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을 빼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요코와 오쿠무라, 동기가 없을 조지를 빼면 시노자키와 시즈코, 이토메만 남습니다. 시노자키가 시즈코와 다쓴도의 불륜을 알고 살해하려고 했다는건 있을 수 없고 - 본인도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 , 설령 그랬다쳐도 덴보를 살해할 이유는 없으니 시노자키는 범인일리 없습니다. 이토메가 범인이라면, 그녀 역시 덴보는 죽일 이유도 없지만 지난 수십년간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구태여 지금 범행을 벌일리 없고요. 그러니 유력한 범인은 시즈코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알리바이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기괴하고 뒤틀린 가족 관계도 뻔하고 식상했습니다. 명랑장이라는 무대 설정 역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이토메와 조지가 현재 주인인 시노자키에게 품고 있는 과다한 충정의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구조는 갖추고 있지만 주요 동기와 설정의 설득력 부족, 과도한 우연의 연속, 뻔한 인물 구성 등이 완성도를 낮춥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2/15

A하라 죽이기 - 도미나가 미도 / 김진환 : 별점 2점

A하라 죽이기 - 4점
도미나가 미도 지음, 김진환 옮김/라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능한 웨딩플래너 미노 탓에 결혼식이 엉망이 되어 버린 슈헤이, 시에리 부부는 하르모니아 호텔 예식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예식부는 창업주 아들인 미노의 잘못을 다른 플래너 아이하라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나 이는 인플루언서 시에리와 그녀의 친구 키미에의 SNS를 통한 비난을 불러왔고, 아이하라에 대한 악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아이하라를 회사는 전혀 지켜주지 않았고, 아이하라는 친구와 지인, 그리고 변호사 쿠인의 도움으로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일본 최대 라이트노벨상 ‘인터넷소설대상(제9회)’수상작이라고 해서 읽게 된 작품. 온라인 범죄 관련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정물 성격이 약간 있지만 평범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SNS, 온라인에서 '#A하라를용서할수없다'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아이하라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고립되는 과정 묘사는 볼 만 합니다. 회사는 결혼식을 망친 원흉인 미노를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보호하면서, 오히려 아이하라를 공범으로 몰아가며 비난의 화살을 그에게 돌리거든요. SNS에서 아이하라를 향한 비난이 거세지지만, 회사는 아이하라를 방패막이로 삼아 책임을 떠넘기고 전혀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경찰의 지시와 아이하라의 도움 요청도 무시하고요. 결국 아이하라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며 아이하라는 아무 죄도 없다는게 잘 설명되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이하라가 쿠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진행하는 법적 조치도 볼 만 했습니다. 회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서 필요한 자료, 고용 문제 및 진단서 등에 대한 설정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고, 300만엔이라는 청구 금액도 이치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디지털 마녀사냥의 폐해를 다룬 다른 기존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시각이나 새로운 접근이 없는 탓입니다. 아이하라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에게 사과를 받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무난했고요.

무엇보다도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법정 다툼이 시작되기 직전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인 미노와 회사로부터는 어떠한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욱 철저한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최소한 발암 물질 미노는 철저하게 응징받았어야 했습니다.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 역시 단순 사과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SNS 마녀사냥과 회사의 부조리한 대응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은 인상적이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이 크지 않고,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워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추리'와 관련된 장르 문학이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기도 했고요. 특별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1/10

메이지 단두대(明治斷頭台) - 야마다 후타로 : 별점 3점

明治斷頭台 山田風太郞ベストコレクション (角川文庫) (文庫) - 6점
山田 風太郞/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단두대"는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집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합니다.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되었기에 계속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원서를 ChatGPT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걸맞는 장점들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장점은 실존 인물과 메이지 시대 풍광을 활용한 팩션적 재미입니다. 츠키지 호텔관, 에이타이바시 다리, 코덴마초 감옥 등 메이지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사건 속 배경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변화와 증기선같은 기술 발전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역 중 한 명으로 근대 경찰의 아버지 카와지 토시요시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던가 '마지막 사무라이' 키리노 토시아키, 일본 육군 창설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현실감과 역사적 몰입감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가공의 이야기와 결합해 당시 시대적 풍광을 생생히 재현하며, 작품의 팩션적 매력을 극대화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추리적 재미와 정교한 트릭의 사용입니다. "괴담 츠키지 호텔관"에서는 일본도 양 끝에 게다를 고정시키고, 게다 굽을 나선형 계단 난간에 걸쳐 위에서 미끄러트린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나카사카 큐우치는 이를 이용해 자신은 옥상 전망대에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피해자를 공격해 살해했지요.
"미국에서 보내는 사랑"에서 범인은 인력거를 혼자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진상은 인력거 두 대를 묶어서 일종의 4륜 차량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를 언덕 위에서 밀어서 굴러내려가게 한건데, 굉장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만 라소츠(나졸)들의 위증(?)과 마지막 현장에서 인력거가 묶여 있지 않았던 점(얇은 끈으로 묶여 풀렸다?) 등이 애매했던 점인데, 이는 라소츠들이 진범의 도우미였다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잘 설명되고요.
"에이타이바시의 교수형"에서는 밧줄과 배의 움직임을 이용해 자살로 위장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범인 테라니시 진주로는 피해자를 강 위 증기선으로 유괴한 뒤, 미리 에이타이바시에 설치해 두었던 밧줄 고리에 목을 밀어넣고, 반대쪽 끝을 자신이 잡아당겨 자살처럼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증기선을 타고 있어서 당시 상식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었고요. 앞서 설명드렸던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전이 사용된 멋진 트릭입니다.
"자신의 목을 안고 있는 시체"에서는 범인이 아리사카 이헤이를 살해한 뒤, 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몸과 처형된 죄수의 목을 붙여 위장한 사건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죄수의 목을 빼돌렸는지?'인데, 이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라소츠의 속임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앞서 모든 작품에서 라소츠가 한 몫했다는 걸 결정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점은 충격적인 결말입니다. 마지막 단편 "정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악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라소츠들의 협력을 얻었던 겁니다. 사실 사건 대부분에서 라소츠들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바탕이 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무사였던 라소츠들은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의 이상에 공감하며 범죄에 협력했고, 케이시로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어갔던 것이었지요. 모든 걸 밝힌 케이시로가 스스로 단두대를 사용해 자살하는 장면도 충격적이며, 정의와 권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전해줍니다. 이후 체포하는 척했던 라소츠들이 에스메랄다를 탈옥시키며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괜찮은 결말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작품의 배경인 일본 메이지 시대는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츠마와 조슈번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주요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추리 소설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트릭이 활용된 본격 추리 단편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 "탄정대 대순찰"은 케이시로와 라소츠들, 탄정대와 단두대의 배경 설명에 치중되어 있고, 이어지는 "무녀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거든요. 마지막 "정당한 정부는 가능한가"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는 자백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추리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고요. 따라서 본격적인 추리 요소는 부족한 편입니다.

케이시로가 정의를 추구하며 폭주하는 이유, 라소츠들이 케이시로에게 충성을 바치며 목숨까지 거는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균 이하 범죄자들인 라소츠들의 심경 변화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했어요.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문의 후예로, 일본에서는 '무녀'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너무 과했고요. 만화적이라서 영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팩션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바실리스크"같은 닌자 액션물(?) 원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4/11/30

최후의 증인 - 유즈키 유코 / 한성례 : 별점 2.5점

최후의 증인 - 6점
유즈키 유코 지음, 한성례 옮김/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출신 변호사 사가타 사다토는 요네사키 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재판에서 검사 마오와 대결을 벌였다. 마오는 피고가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를 살해했다는걸 공판 과정 내내 여러 증인과 증거를 통해 착실히 밝혀나갔지만 사가타는 공판 마지막 날, 전직 형사 마루아먀를 증인으로 불러 놀라운 진상을 밝혔다. 피해자 미쓰코는 8년 전, 피고 시마즈의 음주 신호 위반 사고로 외동아들 스구루를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사건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최후의 증인”은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유즈키 유코의 법정 스릴러이자 복수극입니다. 제7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으로 변호사(검사) 사가타 사다토 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하네요.  “고독한 늑대의 피”는 하드보일드였는데 이런 작품도 잘 쓰는군요.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사고에서 시작해 복수, 법정 공방, 그리고 8년 전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까지 세 개의 큰 흐름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순서대로 설명드리자면, 타카세 코지와 미쓰코 부부의 외동아들 스구루는 신호를 위반한 음주운전자 시마즈의 차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시마즈는 자신의 부와 '공안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사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지요. 그리고 8년 후, 미쓰코의 시한부 판정을 계기로 부부는 교묘한 복수를 계획합니다. 이후 시마즈는 미쓰코의 의도된 유혹에 빠져들었다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고 맙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받은 사가타와 마오가 법정에서 대결을 펼치고요.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는 깔끔하고, 인물 묘사도 돋보입니다. 특히 주요 악역 시마즈는 독자들이 분노를 느낄 만큼 적절히 그려졌습니다. 그의 특권과 오만함, 그리고 본의는 아닌 사악함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캐릭터로, 독자들이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쓰코의 복수극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시마즈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이 수단이 마지막 순간까지 감춰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종의 서술 트릭적인 재미를 제공합니다. 공판 3일째에 피고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까지는, 피고인이 미쓰코라고 생각하도록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전개 상 감추기 쉽지 않은 부분인데, 고민을 참 많이했구나 싶었어요.

법정물로도 볼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변호사 사가타가 검사 마오의 논리를 하나씩 무너뜨리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예컨대, 시마즈가 사건 직후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도망친 행위는 오히려 범죄와 무관하다는 논리로 반박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불륜 상대로부터 공격받은 뒤 도주하는 상황이라면 사람 많은 호텔 로비를 지나 택시를 탄게 당연하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럴리 없다는 논리인데 그럴싸합니다.
시마즈가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으나, 결국 8년 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처벌받게 된다는 점도 통쾌함을 안겨주고요.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미쓰코의 복수 계획은 서술 트릭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치밀하지 못합니다. 특히 시마즈가 미쓰코의 단순한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했어요.
또 마지막 공판에서 등장하는 마루야마 형사의 증언도 지나치게 극적이고 억지스럽습니다. 그의 증언이 없더라도 8년 전 사건이 복수극의 동기였다는건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가타와 마오 검사에게 부여된 설정도 다소 진부하고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사가타가 검사직을 떠나게 된 계기, 마오 검사의 아버지가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희생당했다는 서사는 작품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뿐이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사가타가 '어떤 식으로든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지만, 지은 죄는 반드시 죗값을 치루게 만드는' 변호사라는 설정을 끌고가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깔끔한 전개와 강렬한 악역 묘사, 그리고 법정 스릴러의 묘미를 잘 살렸지만 추리적으로 다소 아쉬우며, 작위적이고 진부한 부분도 많아 감점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10/04

당일치기 조선여행 - 트래블레이블 : 별점 3점

당일치기 조선여행 - 6점
트래블레이블 지음, 이도남 감수/노트앤노트
딸과 함께 종로 투어를 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읽어본 책.
실제 가이드가 투어를 하듯이, 코스를 짜고 그 코스 안의 여러가지 사적지들에 대해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코스는 모두 14개인데 크게는 조선 코스 6개, 일제 강점기 코스 8개로 구분됩니다.

경복궁 코스는 광화문 - 홍례문 - 영제교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순입니다. 실제 궁궐에 들어가는 순서이지요. 광화문의 '광화'는 빛으로 세상을 교화시키다는 의미로 세종이 지은 이름입니다. 즉, 왕이 백성들에게 한 약속이지요. 홍례문은 '예를 널리 편다'는 의미로 대궐 문을 들어선 관료들에게 일러주는 말이고요. 홍례문을 지나 삼도를 거쳐 영제교를 건넙니다. 다리의 이름은 원래는 '금천교'였습니다. 왕이 있는 곳이라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의미로요. 하지만 세종은 영원히 건널 수 있다는 뜻의 '영제교'로 바꿨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왕의 공간입니다. 근정문과 근정전은 공식적인 행사를 치루는 곳입니다. 회사로 따지면 행사장, 회관같은 곳이겠지요?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요. 사정전은 실제 업무를 보던 곳으로 한 마디로 사무실입니다. 이름도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뒤의 강녕전, 교태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과 사적 공간입니다.
창덕궁 코스는 돈화문 - 금천교 - 인정문 - 인정전 - 선정전입니다.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이 만든 궁이라 강한 왕권이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금천교가 그대로 있는게 특이합니다. 말 그대로 왕과 신하를 구분한 것이지요.
창경궁 코스는 홍화문 - 옥천교 - 명정문, 명정전 - 문정전 - 경춘전 - 환경전이며, 뒤에 춘당지 - 대온실 로 이어집니다. 홍화문은 '천지를 밝히고 적의 조화를 넓혀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과거 홍화문 앞은 넓은 마당으로 백성과 왕실이 서로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했고요. 다른 궁궐들처럼 궐내 다리인 옥천교를 건너면 왕의 공간으로, 명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입니다. 공식적인 의례와 행사를 진행한 곳이지요. 창경궁은 왕의 주거 공간 목적으로 지은 궐이라 다른 궐보다 규모가 작다는게 특징입니다. 다른 궐은 모두 삼문 원칙으로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지만, 정전까지의 문도 2개만 지나게 됩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경춘전은 정조가 태어난 곳, 환경전은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이한 곳입니다. 주거 공간 목적답게 이런 역사가 많네요. 춘당지와 대온실은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며 위락시설로 전락시킨 산 증거입니다. 궁궐을 일반 대중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지요.
경희궁 코스는 홍화문 - 서울고등학교 터 비석 - 방공호 - 서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희궁 자체가 고종 때 경복궁 증건을 위해 헐려 빈 터만 남은 탓에 내용이 적습니다. 이 중 '서암'이라는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왔습니다. 숙종이 강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조선 시대 왕 중 딱 7명만 가진 '적장자' 타이틀 덕분이었는데 이건 인조 반정이 성공해서 얻은 타이틀입니다. 인조가 정당한 왕이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원래부터 집에 왕기가 서려있었다!며 평범한 바위에 '왕의 기운이 어렸다'고 숙종이 직접 '서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타이틀이라는게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왕들에게는 정말로 어마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코스는 서암말고는 딱히 볼 건 없어보였습니다.
종묘 코스는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 종묘의 부속된 건물들을 차례대로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부속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보다는 종묘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 위주이고요.

덕수궁 코스는 황궁우 - 대한문 - 중화문 - 중화전 - 석조전 - 중명전, 돈덕전 - 함녕전 순입니다. 이 코스는 '대한제국'과 '황제'라는 지위를 알리는 건물들 중심이에요. 덕수궁은 대한제국 때 고종이 법궁으로 선택하여 큰 발전을 이룬 궐이니까요. 우선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가 된 걸 알리는 건물이고, '대한문'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며 한양이 넓고 크게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중화전도 '황제'의 국가를 증명하기 위해 황금색과 황제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석조전은 황제가 된 고종이 새로운 근대 궁전을 만들려고 돌로 지은 건물이고요. 이 뒤의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나타냅니다. 석조전 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일제가 궁의 격을 낮춰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미술관으로 만들었던 건물이며, 그 옆의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돈덕전은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곳이거든요.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급작스럽게 승하한 곳입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짧았던 운명을 잘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정동은 궁궐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속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 미국공사관 - 구 프랑스공사관 - 구 러시아공사관 - 구 영국공사관 - 광혜원 - 배재학당 - 이화학당 - 언더우드 사택 -  정동제일교회 - 손탁 호텔을 둘러보게 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 없네요. 그나마 주한 영국대사관이 1890년대 영국이 만들었던 구 영국 공사관 건물 그대로라는데, 한 번 가 봐야겠습니다.
서울역, 서대문 형무소는 건물만의 코스입니다. 서울역은 많이 가 보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장소는 기억에 없군요. 다음 기회에 한 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성북동은 혜화문 - 한양 도성 해화동 전시 안내 센터 - 최순우 고택 - 간송미술관 - 수연산방 - 심우장 순서입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간성미술관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다소 어려운 코스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3대 전통 정원이자 의친왕 이강이 죽기 전까지 머물던 것으로 유명한 성복동 별서는 한 번 가 보고 싶지만요.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 코스들과 정보들이 가득한데, 몇몇 코스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고궁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같이 특정 장소만을 중심으로 안내하는 코스가 특히 그러합니다. 종묘와 서울역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여러 명의 가이드가 글을 쓴 것 같은데, 사람에 따라 내용이 들쭉날쭉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코스는 구태여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애매해 보였기 때문에 코스들도 선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여행 코스라면 둘러보는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정보는 꼭 들어갔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 궁궐에 대한 책은 몇 권 읽어 보았는데, 그 책과는 다르게 돌아볼 수 있는 코스 중심으로 설명하여 실제로 관람 시 도움이 됨직한 책이라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궁궐의 구성도 코스 중심이라 더 잘 알 수 있었고요.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번 둘러보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관심이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궁궐 관련 책을 읽는 순서로 읽어 나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9/13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피가 흐르는 곳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브 킹의 중편집. 세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빌 호지스 3부작' 시리즈 후속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제외한 두 편은 순문학에 가깝습니다. 순문학 성향이 두드러지는 스티븐 킹의 말년 작품답네요. 말년 작품이라도 왕년의 화끈함, 끔찍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보여준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런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다만 '호러의 제왕'이라는 이름값에 걸맞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초등학생 크레이그는 똑똑했던 덕분에 마을 굴지의 대부호 헤리건 씨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 때마다 헤리건 씨에게 복권을 선물받았다. 마침 선물받은 복권이 당첨된 어느 해,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사 주었다. 해리건 씨는 평소 이런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금새 아이폰에 푹 빠졌다. 그리고 헤리건 씨가 노환으로 사망한 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 관에 아이폰을 몰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케니 얀코에 대해 헤리건 씨의 전화기에 넋두리를 늘어놓은 날, 케니 얀코가 자살했다는걸 알게 되는데...

스마트폰이 처음 도입되었던, 아이폰이 첫 출시되었던 시대에서 시작되는 작품. 
핵심은 해리건 씨입니다. 나이는 많지만 똑똑하고,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괴팍한 노인을 생생하게 잘 그리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대한 헤리건 씨의 탁월한 식견 등은 그를 단순한 노인 이상으로 구체화합니다. 여러모로 "재벌집 막내아들"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크레이그(진도준)이지만, 해리건 씨(진양철 회장)에게 눈길이 더 간다는 점과, 현재 시각으로 과거 - 여기서는 스마트폰 도입 - 의 경제 효과를 예측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돈을 벌었겠지지요. 스티븐 킹이 과연 애플과 아마존 주식을 샀을지 궁금하네요.
조숙하고 똑똑한 크레이그, 그리고 크레이그의 아버지라던가 케니 얀코, 하긴슨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크레이그가 초등학생에서 시작하여 대학 졸업 후 직장인이 될 때까지 겪는 성장기로도 볼 만 했고요.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크레이그와 해리건 씨의 우정(?)과 크레이그의 성장기를 제외하고는 무덤 속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거는게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아요. 이래서야 단순한 저주나 주술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매개체가 밀짚인형이나 생닭같은게 아니라 아이폰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관에 휴대폰이 들어갔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데, 그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크레이그가 옛 은사를 위한 복수를 마치고 전화기를 버리는 결말도 시시했습니다. 옛날 스티븐 킹이라면 좀 더 화끈하게 달려주었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도 나이가 들면서 문학적이면서도 은근하고, 다소 애매한 결말을 즐기는데 이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글솜씨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일가를 이루었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다만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척의 일생"
3막 : 고마왔어요, 척!
자연재해로 미국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었다. 마틴을 비롯한 주민들 눈 앞에는 찰스 크란츠의 은퇴를 알리는 광고만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후가 다가왔다....

2막 : 길거리 공연
길거리 드럼 연주가 제러드 프랑크의 연주에 맞춰 시작된 척의 춤은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제니스도 합류하여 대단한 공연을 마쳤고, 척은 호텔로 가면서 왜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렸다.

1막 :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척의 할아버지는 다락방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본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에, 척은 잠겨진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척은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3막이자 맨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틴과 주민들이 사는 곳은 척의 인생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척이 죽어 가자, 그가 은퇴한다는(죽는다는) 광고가 계속 표시되었고 숨을 거두자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겁니다. 척의 안에 담겨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세계였다고 해도 되겠지요. 사실 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글을 잘 써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막에서 서서히 세계가 멸망해가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상 속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한 때를 묘사한 2막이 가장 좋았어요. 후기를 보면 크리스토퍼 워켄의 팻 보이 슬림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감을 얻은 듯 한데, 저는 "패리스 뷸러의 해방"의 거리 퍼레이드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척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 주는 2막, 그리고 척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1막은 문학적인 성취와는 별도로 사족에 가깝습니다. 3막만으로도 이야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1막은 킹 스스로가 후기에서 1년 뒤에 덧붙였다고 하니 사족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럴 바에야 3막의 이야기에 가필하여 짧지만 반전이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독특한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마틴의 눈 앞에 척의 광고만 떠오르는 묘사는 나름 공포스러웠는데, 이를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거든요. 설명도 많이 부족했고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리고, 척 내면 세계라는걸 짧지만 강렬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쓰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현재의 결과물은 장르 문학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와서 평가하기 어려운데,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파인더스 키퍼스의 탐정 홀리 기브니는 뉴스를 보다가 캐스터 채트 온도스키가 테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걸 알아챘다. 홀리는 전직 경찰 벨 씨와 벨 씨 손자의 협조로 온도스키가 모습을 바꿔가며 저질렀던 오래전부터의 사건들 증거를 확보했다. 온도스키를 만나 살해할 계획을 세운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 사무실에서 대결을 준비했지만, 제롬과 바버라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미스터 메르세데스" 시리즈 후속작 중편. 빌 호지스 사후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게 된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입니다. 제롬과 바버라 등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도 건재합니다.
수록작 중 유일한 범죄 호러 스릴러물로 체트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수사물로 손색이 없으며, 그가 마음대로 모습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살아온 '괴물'이라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쳐 호러물을 연상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얼굴은 몇 가지 타입밖에 없다는 이론도 재미있었습니다. 홀리의 조력자 벨 씨가 탁월한 그림 실력을 갖춘 전직 경찰 몽타주 작성 전문가였고, 그의 손자는 음악 전문가로 성문 분석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온도스키가 과거부터 모습을 바꿔가며 암약했다라는 걸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장치였어요. 호러와 과학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습도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를 지닌 온도스키가 고작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정도로 죽어 버렸다는 결말은 맥빠집니다. 홀리가 이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고는해도, 이러한 괴물 상대로는 약해보였기 때문입니다.제롬과 바버라가 사건에 휩쓸리는 전개도 좀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읽는 재미는 좋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쥐
영문학과 교수 드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아버지의 오두막 집에 틀어박혔다. 집필 중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쳐 오두막집에 고립된 드류는, 자신이 구해준 쥐가 소설 완성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쥐는 소설 완성과 동시에 드류의 멘토 앨이 죽을거라고 말했고, 드류는 거래에 응했다...

소설을 완성하는데 작가들이 문장과 단어 하나 가지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는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실감나게 풀어낸 작품. 드류가 태풍으로 오두막집에 고립되었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인지 모를 쥐(악마)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는 건 다소 뻔했습니다. 특히 그 거래가 일종의 사기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런 류 작품들은 보통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제 졸작 "계약은 충실하게"도 같은 이야기였지요.
앨이 죽은 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래도 소설 완성의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잘 모를 다소 애매한 결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최근 킹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악마와의 거래가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좀 더 화끈한 맛이나 반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8/10

열린 어둠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5점

열린 어둠 - 6점
렌조 미키히코 저자, 양윤옥 역자/모모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단편집. 원제는 "夜よ鼠たちのために (밤이여, 쥐들을 위해)".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3년에 출간된 나름 고전(?)으로 일본에서도 꽤 오래 절판 상태였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14년 판에서 '복각(재출간) 희망! 환상의 명작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한 덕분에 2014년에 복간된 이력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아래와 같이 극찬하는 인터뷰와 글을 남겼을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 미스터리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마지막의 반전,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걸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단편집은 모든 작품이 놀라운 반전 구조를 그립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전개를 실현한 작품들입니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이 포지티브로 바뀌는 것처럼, 결말에서 흑백이 뒤바뀝니다. 모든 작품에서 완전히 속아버릴 수 밖에 없어요. 전후 미스터리 단편집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표제작입니다. 미스터리라는 성격상,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습니다만, 제가 만약 단편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an・an」 1990년 11월 23일호, 아야츠지 유키토 「나의, 한 권. 멋진 반전의 구조. 전후 최고의 미스터리 단편집」에서)
  • 아야츠지: 렌조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연애소설 『연문』이 유명합니다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먼저, 『회귀천 정사』, 『은밀한 상복』 등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지금은 고분사 문고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이여, 쥐들을 위해』입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실업지일본사에서 신서판으로 나왔고, 신초문고와 하루키 문고로 차례로 옮겨졌는데, 현재는 절판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서술 트릭 계열 단편집의 최고봉인데......아깝네요. (「작가의 독서도 제150회: 아야츠지 유키토」에서)

읽어보니 이 정도 극찬을 받을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호평은 이해가 됩니다. 서정성과 트릭이 잘 결합되어 있던 작가 최전성기 시절("회귀천 정사" 시절)답게,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트릭이 사용된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유괴극, 복수극, 서술 트릭 반전극, 느와르 등 수록작의 장르도 다양합니다. 과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묘사도 다른 후기작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요.
모든 수록작이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더운 여름, 한 번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다는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개의 얼굴"
화가 마사키 유스케는 아내 게이코가 신주쿠 호텔에서 살해당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택 침실에서 유스케가 살해해 뒷마당에 파묻었다. 호텔 사건의 여자가 게이코라면, 유스케가 집에서 죽인 여자는 누구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스케는 죽인 여자의 얼굴을 그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스케는 호텔 사건에는 알리바이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서 발견된 여자를 게이코로 만들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진상은 유스케의 범행을 목격한 동생 신지가 자신을 협박하던 꽃뱀 여자를 함께 처치해 버렸던 겁니다. 마침 몸매가 비슷해서 속일 수 있었지요. 이 때 집 안에 전화가 두 대 있는 것을 이용해서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입니다. 전화가 걸려와 안부를 물으면 당연히 외부에서 전화를 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같은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유스케가 살해한 아내의 사체가 이동한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사건에 대한 유스케의 심리묘사도 독자의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서스펜스가 제법이었어요.
하지만 단편이라서 설명이 부족하며, 작위적으로 전개한 부분은 눈에 거슬립니다. 우선 신지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건 너무 뻔했습니다. 신지를 협박하던 꽃뱀 여자가 유스케 집까지 찾아와 지문을 남긴건 억지스러웠고요, 마지막 신지의 장난도 이유를 알기 어럽습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7인 1역"과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에서 온 목소리"
'나'는 금수저 출신으로 형사일을 견디다 못해 2년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 그만 둔 이유에 대해 강 선배에게 편지를 썼다.
1년 전, 전일항공 부사장 야마후지 다케히코의 외아들 가즈히코 유괴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전화기에 붙잡아 놓은 상태에서, 담을 뛰어넘어 아이를 유괴했다. 경찰은 몸값을 확보하고 도주하던 범인을 미행하다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몸값을 받은 범인은 아이를 무사히 풀어주었고, 이후 공개 수사로 전환한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난 범인 오카다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괴범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당시 일부러 범인이 도주하도록 수사를 방해했다. 유괴범 중 한 명이 강 선배라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건 범인이 '내일'이 금요일인지 토요일인지 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통해, 범인이 두 명이며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하지 않다는걸 추리해 내는건 아주 좋았습니다. 두 명 중 한 명이 아이를 유괴당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부잣집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려 했다는 발상도 재미있었어요. 실행범은 자기 아이를 유괴한 범인의 요구사항을 자기가 유괴한 사건 피해자에게 그대로 전달만하면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강 선배가 오카다를 살해했을거라는 결말도 합리적입니다. 오카다가 체포되면 진상이 드러날 수 있으니, 경찰이 체포하기 전 정보를 흘려 유인한 뒤 살해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유괴가 이렇게 겹쳐서 강 선배가 피해자이자 범인이 된다는건 다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나'가 강 선배의 눈에서 이십 년 전 범인 눈빛을 떠올린 덕에 진상을 깨달았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나'가 집 안에 있는 신이치가 사실은 유괴당한 가즈히코라는걸 눈치챈건 앞선 복선으로 설명되지만, 독자는 눈치채기 힘들다는 점에서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괴 피해자가 몸값 마련을 위해 유괴범이 된다는 아이디어는 아주 좋았던만큼, 이를 확장한 장편으로 묵직하게 썼다면 "킹의 몸값"과는 또 다른 딜레마를 안겨다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만으로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화석의 열쇠"
하반신 마비 소녀 지즈가 목이 졸려 죽을 뻔 했다. 피해자 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창문은 모두 안에서 잠겨 있었고, 출입구는 현관문밖에 없는데 열쇠는 관리인 사와가 보관하고 있었다.

지즈가 엄마를 집에 들이기 위해 자물쇠 바꾸는 청년을 속여 헌 자물쇠를 달게 했고, 엄마와 아빠 모두 지즈가 부담되어 살해하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한 정보 제공은 공정합니다. 지즈가 자물쇠 바꾸는 청년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초콜릿 부탁을 한 것, 관리인 사와가 엄청나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는 등 상황에 대한 공유는 확실하니까요. '열쇠 화석'이라는 말도 단서로서는 좋았습니다. 사와가 이 모든걸 깨닫는 전개는 일상계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둘이 동시에 딸을 살해할 생각을 한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자기가 빠져나갈 생각을 할까요? 신파적인 결말도 별로였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묘한 의뢰"
흥신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쓰치야 마사하루라는 의뢰인이 찾아왔다. 아내 동향 조사 의뢰를 위해서였다. 아내 사야코는 하릴없이 이곳 저곳에서 시간만 보냈다.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나에게 오히려 남편 쓰치야의 행적 조사를 부탁했다. 알고보니 나를 이용해서 몰래 불륜 행각을 저지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쓰치야에게 들켜버렸고, 쓰치야는 자기 행적 조사를 거짓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전달하기 위한 쓰치야의 행적은 애인 유리의 맨션 주소와 연락처로 받으려 했는데, 그 뒤 유리가 살해되었다...

쓰치야는 유리의 다른 애인으로, '나'와 유리의 관계를 알고 유리를 살해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조사를 맡긴건 유리와 나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였고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리고 냉소적인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딱히 눈에 뜨이는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묘사로 '나'의 별로인 모습만 드러나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쓰치야 부부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무능력했고, 유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쓰치야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아 버렸지만, 그냥 그대로 끝나버리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이여, 쥐들을 위해"
어린 시절 불우했던 나는 교정을 받아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를 잃은 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수를 결심했다. 
병원 원장 요코즈미 다다오는 '나'의 협박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을 나선 뒤 살해당했다. 경찰은 백만엔이라는 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의 원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원장 사위이자 내과 부장 이시즈의 사체도 발견되었다.

'나'인 쓰무라의 아내는 불치병 뇌종양이었고, 병원의 과실로 죽은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백만엔이라는 돈을 건네려고 했을까요? 이 수수께끼는 흥미롭습니다. 알고보니 이하라의 아내 후미요에 대한 오진을 숨기려고 원장과 내과 부장이 그녀가 백혈병에 걸리게 만들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쓰무라와 이하라의 정체가 독자가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라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좋았습니다. 잘 짜여진 서술 트릭물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단 둘의 흉터는 너무 노골적으로 속이겠다!는 의도가 보여 좀 별로였고, 어린 시절 쥐를 죽였던 원한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하라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었으니 억지스럽더라도 죽일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충은 이해가 되지만, 억지는 억지에요. 그래도 심리 묘사가 탁월한 덕분에 생각보다는 잘 설명되는 편이라 다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중생활"
마키코는 열 여섯살 많은 슈헤이에게 젊음을 바쳤지만, 자신을 버리려하는 슈헤이에게 증오를 느꼈다.

정부인줄 알았던 마키코가 진짜 아내이고, 반대로 나이많은 시즈코가 정부이자 불륜녀라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전을 결말 부분까지 잘 숨기면서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서술 트릭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키코가 남편 슈헤이와 불륜녀 시즈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처럼 자살한다는 반전, 그리고 이를 위해 데쓰오와 시즈코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방법도 잘 짜여져 있어서 범죄물로도 우수한 수준이고요.

그런데 마키코가 정부 데쓰오를 범행에 끌어들인건 억지스럽습니다. 불륜을 저지르다가 살해당한 모양새이니, 마지막 순간치고는 영 폼이 나지 않으니까요. 데쓰오 없이도 현장 상황 - 슈헤이가 받아온 수면제가 들어있는, 슈헤이가 즐겨 마시던 와인 - 과 스토브 지문으로 슈헤이에게 누명을 씌우는건 가능했을것 같거든요. 시즈코마저 옭아매기 위해 데쓰오를 이용했다고보면 말은 돼지만, 이 역시 나이든 시즈코와 데쓰오가 불륜 관계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조건이 갖춰진 뒤에야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인간 관계를 쌓아올리는게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풀어나가는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역"
인기 배우 하세쿠라 슌은 아내 료코와의 이혼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자신과 꼭 닮은 남자 다카쓰 신야를 찾아냈다. 그러나 료코가 슌의 불륜을 알고 있었으며, 이혼할 생각도 없다는걸 알게된 뒤 료코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다카쓰 신야를 이용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서였다. 오사카에서 다카쓰를 자신인 척 연기시킨 뒤, 자신은 변장하고 도쿄로 가서 살해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료코는 없었고, 오사카로 돌아간 뒤 자신의 방에 죽어있는 기누에를 발견했다. 이 모든건 료코와 다카쓰의 음모였었다.


하세쿠라 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완전 범죄물로는 볼만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세큐라 슌의 대타가 다카쓰 신야가 아니라, 료코와 기누에 입장에서는 그 반대였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주위에 같은 여자들이 엮이게 된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베이 시티에서 죽다"
동거녀와 믿었던 아우에게 배신당한 조직원이 출소 후, 둘이 함께 도망친 항구 도시로 찾아가 모두 죽여버린다는 느와르.. 묘사도 멋있고 배신의 진상 - 없던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원래 내가 지은 죄였다는 - 도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딱히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맛은 거의 없고, 내용도 신선함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그냥 서정적인 '사나이' 이야기를 한 편 쓰고 싶어 쓴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열린 어둠"
불량 학생들만 다니는 사립 세이에이 고등학교 음악교사인 미즈키 마사는 '마더'라는 별명으로 학생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어느날 퇴학당한 폭주족 블랙호크스 멤버 중 한 명인 노리코가 긴급한 도움 요청을 해 왔다. 리더 다카기가 살해당했다고 했다. 노리코와 함께 현장에 온 마사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노리코가 유력한 용의자라는걸 알고 한 시간만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카기의 죽음이 학교 체육 교사 아카자와 다케시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아카자와는 동성애자였다.

불량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학생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열혈 신입 교사가 해결한다는 내용으로 7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청춘 미스터리'의 영향이 가득 느껴집니다. 동성애로 인한 삼각관계가 원인이라는 점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신선한 편이고요. 요새 이런 설정이 유행이라는데,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생각으로 쓴 듯한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카기가 폐소 공포증이라는게 핵심 단서인데 - 아카자와 선생의 차는 비가 오는데도 창문이 열려있었다 -, 이는 여러가지 단서로 독자에게도 공유됩니다. 노리코가 아침에 다카기의 방에서 쫓겨난 건 창문을 닫으려고 해서, 다카기가 초고층 맨션에서 뛰쳐나온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서, 다카기가 폭주족이 된 건 차를 타기 싫어서였다는 식으로요. 
미즈키 마사가 학생들 앞에서 추리쇼를 펼쳐 진상을 밝히는 전개도 정통 본격 추리물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다카기가 스즈타에게 아카자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고 현장을 조작했기에, 스즈타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고 다카기를 살해하고 노리코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후더닛 물로는 괜찮았지만,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좋다고 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7/24

2024년 7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중식당 남풍 코스

신라 호텔에서 코스를 즐겼던게 엊그제같은데, 다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일이 생겼네요. 이번에는 부모님이 거주하시는 부산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부산은 잘 모르지만, 부산 어르신들이 가장 높게 평가하는 식당이 파라다이스 호텔 중식당 남풍이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약 후 지난 일요일 점심에 코스 요리를 즐겼습니다.
저희 가족이 고른건 Steve Jun 코스였습니다. 디저트까지 모두 8개의 요리와 식사가 이어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Steve Jun 스페셜 냉채 :
랍스터 회, 찐 전복, 해파리 냉채, 멘보샤(?), 닭 조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재료도 좋지만 회부터 튀김, 조림까지 다양한 구성에 간도 적당하여 맛있게 먹었습니다.

2. 남풍 시그니처 딤섬 3종 : 
하가우, 샤오마이, 구채하 3종. 새우와 부추가 섞인 구채하가 제일 좋았습니다. 다른 2종은 비교적 흔하게 먹을 수 있기도 하니까요.
3. 최고급 통 상어지느러미 찜 :
크기로 압도하네요. 4년 전 신라호텔에서 먹은 것 보다 소스가 훨씬 묵직하고 진한데, 크기가 커서 그런지 잘 어울렸습니다. 고급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전해 주고요.
4. 남풍 서해산 어자 해삼 활전복 :
'어자'는 소스 이름인 듯 합니다. 재료가 좋아서 맛있게 먹었지만, 간은 다소 심심했습니다. 조금 더 짭짤한게 좋았습니다. 
5. 북경 오리 1마리 :
셰프님이 직접 와서 손질해 주시고 말아주셨지만, 가장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배가 부르기 시작해서 양이 적고 조금 자극적인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북경 오리를 뺀 조금 더 저렴한 코스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 홍삼 고법 불도장 :
불도장은 제가 좋아하는 요리입니다. 맛있었습니다. 재료도 좋았고요. 하지만 역시 뭔가 좀 심심하다는게 아쉬웠어요.
그리고 식사로는 랍스터 짬뽕, 마지막으로 다과로 구성된 디저트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식사와 디저트는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두 개 모두 별로였습니다. 랍스터 짬뽕은 랍스터는 질겼고 간도 애매했으며, 디저트도 가격에 걸맞는 퀄리티로 여겨지지는 않은 탓입니다. 

신라 호텔과 비교해본다면, 신라 호텔 쪽이 압승입니다. 맛이 없는건 아닌데, 남풍의 간이 전반적으로 제 입맛과는 잘 맞지 않았던 탓이 큽니다. 많이 심심했는데, 이런 간이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래도 가족과 함께 한 좋은 식사였기에 만족합니다. 서비스도 좋았고요. 다름에 방문하게 된다면, 맛있게 즐겼던 요리 단품으로 몇 가지 시킬 생각입니다.

2024/06/15

살인의 쌍곡선 - 니시무라 교타로 / 이연승 : 별점 2.5점

살인의 쌍곡선 - 6점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야카와 혼자서 운영하는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에 회사원인 예비 부부 교코와 가쓰로, 역시 회사원인 야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야코, 범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이가라시, 택시 운전사 다지마가 초대되었다. 누군가 설상차를 망가트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고립된 상태에서, 야베를 시작으로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범행 현장에는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원에 사선을 그은 기묘한 부호가 그려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하야카와, 교코, 아야코만 살아남은 상태에서 운 좋게 전화가 연결되어 경찰과 취재 기자들이 곧바로 찾아왔지만, 관설장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트릭으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거장 니시무라 교타로의 초기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명성에 걸맞는 여정 미스터리, 기차 시간표 트릭이 활용되었었던 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많이 의식하고 있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고립된 공간에서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당한다는 점, 그 때마다 볼링핀이 사라지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는 설정은 거의 똑같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오마쥬했다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와 같은 질낮은 졸작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덕분입니다. 특히 '고립된 호텔에서 범인은 투숙객들을 전부 죽이고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트릭이 일품이었습니다. 설명드리자면, 범인 하야카와 형제는 쌍둥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호텔 지배인으로 변장하고 투숙객들을 살해했지요. 그리고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외부에 흘려 경찰과 기자들이 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기자로, 처음에는 경찰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호텔로 달려왔지만 호텔 앞에서 은근슬쩍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남아있던 범인이 기자인 척 했던 겁니다. 지금 읽어도 그럴싸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앞서 작가가 '쌍둥이를 활용한 트릭을 사용했다'고 직접 밝히고, 본문에서도 쌍둥이 고시바 형제가 강도 행각을 벌이지만 경찰이 체포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호텔 연쇄 살인 사건과 겹쳐 진행시켜 트릭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전개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활용한 쌍둥이 트릭 이야기는 하야카와 형제 탈출 트릭이 아니라 고시바 형제 사건에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시바 형제의 강도 행각과 형제를 뒤쫓는 경찰과의 밀땅도 재미있었고요. 
참고로, 이 트릭은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에 사용되었던 트릭과 같습니다. 당시 모 드라마와 표절 시비가 있었던 듯 한데, 애초에 특별히 오리지널임을 내세울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이네요....

여기에 더해, 아야코가 범인임을 의심하게 만든 초대장 필적과 유서 - 초대장은 이가라시가 필적 감정을 한다며 모두에게 쓰게했고, 유서는 첫 날 일종의 내기 결과에 따른 자필 문장이었을 뿐 -를 확보한 방법, 다지마가 스키를 부쉈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 등도 괜찮았습니다. 아야코 범인설을 보도하여 하야카와가 기자를 사직하게 만든 결말-진짜 기자가 아닌 가짜였으니-까지 안배한건 보통 솜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호텔에 갇혀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심리가 그려지지 않아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교코는 약혼자가 눈 앞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각 등장인물들의 매력도 제대로 그려져있지 못합니다. 깔끔하고 담백한건 좋지만, 이 작품은 너무 과했습니다.
범인 하야카와 형제가 이런 거창한 범행을 벌인 동기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만원 전철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게 말이 안되는건 아니지만, 무려 6명(정확하게는 7명이지만요)을 살해할 정도의 동기인지는 설명해 주었어야 합니다. "상복의 랑데뷰"처럼요. "상복의 랑데뷰"는 짤막하게나마 연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알려주고, 그 뒤 이어지는 복수극 과정에서도 1인칭 심리 묘사를 삽입하여 복수와 범행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지요. 이 작품도 그런 묘사가 반드시 나와 주었어야 했습니다.

고시바 형제가 벌인 강도 행각도 소소한 부분들은 억지스러웠습니다. 괜히 얼굴을 드러내고 범행을 저지를 필요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서 형제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게 밝혀졌으니까요. 쌍둥이라서 당장 체포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체포는 시간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고시바 형제도 복수 대상이어서 강도짓을 제안하고 체포되게 만든다는 전개도 억지스러웠으며, 고시바 형제 사건에 휘말린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하야카와의 가면을 벗기는 마무리도 작위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없지만, 완성도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다른 졸작들에 비하면 눈이 부실 정도의 좋은 작품입니다. 명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분량도 짧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4/05/17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3점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거물 앨버트의 애인 에마와 사랑에 빠진, 갓 스무살이 된 조는 경찰관 세 명이 죽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조는 도주 중에 에마의 배신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찰스타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앨버트의 라이벌인 마소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출소 뒤  마소의 명령으로 탬파 지역으로 향했다. 지역 밀주 사업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써서 밀주 원료를 독점하게 된 조는 앨버트를 지역에서 축출한 뒤, 탬파 지역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마소가 조의 구역을 아들에게 넘겨주려한 탓에 두 세력은 엄청난 격돌을 벌였고, 큰 희생끝에 마소를 제압한 조는 조직을 이탈리아인인 부하 디온에게 넘기고 은퇴한 뒤 조직의 자문역으로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사업에만 관여하였다. 하지만 조 때문에 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미쳐버린 전 경찰서장 어빙의 총격으로 아내 그라시엘라를 잃고 마는데...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네가 세상에 뿌린 씨앗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경찰의 아들로 템파 지역 밀주 사업을 장악해 거물이 된 조지프(조) 커글란이 은퇴(?)하기까지의 반생을 그린 범죄 스릴러.

기본 뼈대는 흔해빠진 밀주시대 암흑가 거물 성공담입니다. 1990년대 영화 "몹스터즈" 등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몹스터즈"의 주인공이었던 실존 인물 찰리 '럭키' 루치아노가 임팩트있게 등장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자의 필력은 이야기를 아주 뻔하지 않게 만듭니다. 방대한 분량으로 쌓아올린 등장인물들의 서사는 모두 일품이며, 조에게 닥치는 온갖 위험과 역경이 워낙에 창의적이고 생생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찰스타운 교도소에서 자기 아버지의 힘을 이용하려는 마소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운 좋게 마소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부터 나름대로 기발했습니다. 탬파 지역 밀주 사업을 장악하기 위해서 군함의 무기를 털어야했던 작전도 그럴듯했고요. 조가 사업을 위해 흑인들과 손을 잡은걸 꺼림직하게 여겼던 KKK단의 훼방도 신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박 사업을 일으키려다가, 서장의딸 로레타의 광적인 전도 활동 탓에 꿈을 접는건 창의적인 역경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살짝 웃기기까지 했어요.
또 이런 일련의 서사와 역경을 통해 소개된 여러가지 복선들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마지막에 마소가 조의 사업을 통째로 자기 아들에게 주려고 조를 죽이려했던 부분에서 이런 복선들이 특히 잘 활용됩니다. 조의 거짓말 - 나를 배반한건 디온이 아니라 그의 형이다 - 을 밝히기 위해 초반에 무대에서 사라졌던 앨버트가 다시 나타나고, 시멘트 구두를 신고 수장당할 위기에 놓인 조가 죽은줄 알았던 에마가 찍힌 사진으로 시간을 끌고, 마지막에 조를 구해낸건 사업 초기부터 언급되었던 '기관총이 장착된 운송용 비행기' 덕분이라는 식입니다.

묘사도 출중합니다. 총격전은 많이 벌어지지 않고, 벌어져도 담담한 편이지만 '처단' 장면만큼은 인상적으로 잘 쓰여져 있습니다. 조와 마소 조직원들이 격돌하는 클라이막스에서 개틀링 기관포를 무력화 시키는 비행기의 공격도 화끈했고요. 배경 묘사도 뒤지지 않아서 찰스타운 교도소의 끔찍함과 탬파 지역의 무더위, 쿠바 담배 농장의 풍광 등은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했습니다. 읽으면서 '냄새'가 느껴질 정도도 말이지요. 이는 실존했던 금주법 시기 일화 및 인물들, 역사적인 배경과 결합되어 일종의 '팩션'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조 커글란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건 운이라고 해도 지나쳤습니다. 두뇌파 범죄자로 금주법이 끝나는걸 대비해 정상적인 양조 사업을 미리 준비하는 등 사업(?)에 있어서는 상당한 식견과 비젼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위기 상황은 운으로만 모면한다는건 그리 좋은 설정은 아니었어요. 마소가 조를 불렀을 때, 별다른 준비없이 호랑이굴로 들어간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소가 호텔방에서 조의 거짓말 - 디온이 배신했다! - 를 밝혀낸 뒤 바로 조를 죽이지 않은 것 처럼요. 괜시리 시멘트 구두를 신겨 수장시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또 앞서 인물들의 서사는 이 작품의 장점이라고 했는데, 과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로레타의 자살과 그의 아버지 어빙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부분은 많이 거슬렸고요. 이왕 이렇게 갈 거였다면 좀 더 확실히 상황을 드러내던가.... 
서로를 미워하던 토머스와 조 부자가 조가 큰 부상을 입고 회복한 뒤, 갑자기 친밀해지는 것처럼 인간 관계의 변화도 급작스러운게 많습니다. 이 시점에서 토머스는 조 때문에 모든걸 잃었기 때문에 미움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가까와질 이유는 없어 보였는데 말이지요. 아내 그라시엘라가 죽은 이후 전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조 커글란이 사랑에 목숨거는 순정남이라는건 어린 시절 에마와의 에피소드에서는 충분히 먹힐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애송이였으니까요. 그러나 나이도 먹은데다가 큰 조직의 수장이 된 현재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조가 쿠바 농장을 대하는 태도는 총칼을 앞세우고 약간의 호의만 제공했을 뿐인데, 이를 의미있는 것처럼 포장하는건 전형적인 식민지 지배자의 논리라 불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아내가 죽은 뒤 조는 범죄 세계를 떠났다는 한 페이지의 에필로그가 전부인 결말은 이 책만의 평가를 어렵게 만듭니다. 이 작품이 3부작의 가운데 권인 탓인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혀 몰랐으나, 이 정도로 후속권과 이어진다면 각 권을 별개로 출간하지 말고 1~3권의 긴 장편으로 출간하는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속았다'라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래서 이 책만의 별점은 3점입니다. 묘사와 전개 모두 좋은 1급 범죄 스릴러이지만, 이 책만으로는 온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2024/04/20

권외편집자 - 츠즈키 쿄이치 / 김혜원 : 별점 3점

권외편집자 - 6점
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컴인

일본의 편집자이자 작가, 사진가인 저자가 자신이 출판계에서 쌓아온 경력을 털어놓는 에세이집.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저도 아주 좋아하는 잡지인 'popeye'와 'Brutus'에서 시작하여, 독립후 사진까지 직접 맡아 취재하여 발표한 Tokyo Style, 일본의 기묘한 장소들과 같은 기사들과 기사를 토대로 발표한 책들, 지금은 e-mail magazine 작업을 진행한다는 저자의 출판 여정과 함께, 이러한 취재와 창작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단상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기자, 작가, 사진가, 창작자로서의 작업이 훨씬 많은건 의외였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한데, 여튼 익히 알고있고 친숙한 편집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직접 기획해서 만든 기발한 책들 소개도 인상적이었어고요.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데, 일본, 미국의 기묘하고 재미있는 장소라던가 러브 호텔 사진집 등 소개만 보아도 재미있는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 중 가장 흥미로왔던 책은 성인 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에 주목하여 출간한 기획이었습니다. '핀카라타이소 (ぴんから体操)'라는 작가는 그 중에서도 특출났던 덕분에, 출간 후에 유명해져서 전시회까지 정기적으로 열린다고해서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변태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승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시선, 판매량과 관계없이 원하는 책을 내고야 마는 열정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책을 만들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문화적 저변도 부럽고요. 물론 저자도 인세로 먹고 살지 못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이런 책을 여러 권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요.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안타까운 최후가 겹쳐집니다)

백전노장다운 조언, 경험담도 새겨들을만한게 많습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 돈 주고 구입하기'
무작정 인터넷으로 검색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와 주머니의 돈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열어봐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머지않아 주변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좋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 "현시연"의 마다라메의 말이 떠오릅니다.

속독이나 다독은 밥을 급하게 먹거나 과식하는 것과 같다.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추리소설 1,000권을 넘게 읽었다고 우쭐했던 저를 반성하게 만드는 명언입니다. 추리 소설 중에 100번 읽을만한 책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록만 들을거야라고 고집부리다가 어른이라면 재즈를 들어야지 하다가 마지막에는 고급 노래방에서 언니들과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승자 그룹보다, 죽을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들으며 만족하는 패자 그룹이 훨씬 존경스러워졌다.
: 성인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사람다운 견해였어요. '병신같지만 멋있어!' 느낌의 말이기도 하지요. 패자들을 위한 멋진 헌사라 생각됩니다.

프로란 대신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생각만 끝없이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철학자는 평생 동안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책을 읽는다. 이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 먼 곳까지 가보는 사람, 맛을 연구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일을 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직장인이 그 업무의 '프로'라서 월급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기도 하니까요.

이외에 실제 책을 여러 권 출간한 '프로'다운 말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는 정도가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준비는 결과를 가정하고 단정짓는 과정이 아니라 기초를 닦아두는 과정이다." 처럼요. 미술 대학을 부정하는 말도 기억에 남네요. 저 역시 아득히 오래 전이지만 미대 졸업생인데, 솔직히 대학에서 예술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무언가 배웠다는 실감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작업을 하는 공간과 같은 분야에 관심있는 친구들을 모아놓은 오프라인 모임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전부가 다 볼만하고 좋은건 아닙니다. 꼰대스러움이 글 곳곳에 묻어나는건 별로였어요. 대표적인게 '기획과 여정도 처음부터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는게 좋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해야 하는 취재, 업무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MBTI가 J인 사람은 견디지 못할 상황이기도 하고요. 업무의 특성과 사람마다 개성이 모두 다른데, 자신에게 잘 맞았다고 남에게도 단정지어 이야기하는건 꼰대지요.
"그들의 삶은 세상에서는 패배자라 하고 부모에게는 근심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건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글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주는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신선했던 취재들도 거듭되다보니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와 비슷해져서 식상해져 버리고 맙니다. 러브돌을 만드는 오리엔트 공업 이야기는 그냥 같은 취재더라고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인터넷 메일 형태의 매거진을 정기 간행하는 등 꺾이지 않는 저자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