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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8

2025 블로그 리뷰 결산 (스물 두 번째!)

안녕하세요. 어제의 "어차피 곧 죽을텐데"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고, 올해 결산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요새 이런저런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리캡에 편승한건 아닙니다. 제 블로그 연말 결산은 이번이 스물 두 번째이니까요. 

간략한 블로그 통계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독서 결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읽은 총 책 권수는 82권입니다.

  • 추리 / 호러: 48권
  • 기타: 14권
  • 역사서: 9권
  • 디자인/스터디 : 1권
  • 기타 장르문학: 5권
  • Food / 구루메: 5권

독서량이 작년(110권)에 비하면 30% 가까이 대폭 줄었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감상이 늘은 탓입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걸 선택하게 되네요. 추리 소설은 왠만한 작품으로는 신선함이나 재미를 찾기도 좀 어려웠고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지요.

그래도 1년에 100권은 읽어야 책 좀 읽는다고 할 수 있으니, 내년에는 좀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입니다.


1. 추리 / 호러

베스트: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별점 3.5
-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함이 인상적이다.

올해 별점 3.5점을 줬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오가와 사토시의 "신의 퀴즈"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정통 본격 추리물에 가깝고, 수록 단편 중 "반딧불이 계획"은 별점 4.5점의 걸작이라서 올해 베스트로 꼽습니다. 

워스트: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별점 1.5
- 범죄 스릴러로의 매력은 전무하다.

올해 별점 1.5점의 망작은 모두 여섯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망작들은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추리물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않았어도 워스트로 꼽지는 않았을텐데, 뒷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이 너무 컸네요.

2. 기타

베스트: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
- 가볍지만 의미도 있다.

읽은 책 중 절반에 가까운 여섯 권이 별점 3점을 받아서 한 권을 꼽기가 애매하지만, 재미와 정보 모두 좋았던 이 책을 꼽아 봅니다.

워스트: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별점 1.5
- 2025년에 읽기에는 낡고 지루했던, 재미와 가치 모두 압도적인 워스트. 

3. 역사서

베스트: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별점 4.0
-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 난파 관련 논픽션은 항상 기대 이상!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별점 3.0
- 일상 감각을 해킹하는 여러가지 팁이 가득.

이 분야는 올해 한 권만 읽어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4.0
-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SF와 만나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다 별점 2점이네요.

6. Food / 구루메

베스트: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별점 3.5
- 상세하게 알 수 있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생활.

워스트: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별점 1.5
- 방향성과 완성도 모두 기대 이해.

2025/12/27

어차피 곧 죽을 텐데 - 고사카 마구로 / 송태욱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탐정 나나쿠마 스바루와 조수 야쿠인 리쓰는 시한부 생명의 환자들만 모인 '하루살이 회' 정기 모임 초대를 받아 모임 회장 자야마 교이치의 외딴 별장으로 향했다. 미스터리 애호가인 회원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회원인 자야마, 지로마루, 롯폰마쓰, 가모, 하시모토, 하루나와 함께 즐거운 저녁을 보낸 다음 날, 홀 벽에 걸린 하루나의 그림이 훼손되었고 가모가 사망했다. 의사인 자야마와 지로마루의 검안으로 병사로 추정되었지만, 야쿠인은 타살일 수 있다 여기고 나나쿠마와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나쿠마마저도 죽은 채 발견되었다...

제 23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의 문고 그랑프리 수상작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이기도 하고요.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 되어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징이라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통 본격 미스터리의 ‘클로즈드 서클’ 형식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외딴 별장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기묘한 참석자들, 밀실이라는 공간적 설정 등은 전형적이지만,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지 않았고 피해자가 자연사(병사)로 보이도록 꾸며서 과학 수사나 경찰의 개입이 일시적으로 미치지 않는다는 설정이거든요. 작중 표현 그대로 ‘어정쩡한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아요. 

나나쿠마 사건은 별게 없지만, 가모 사건은 정통 본격물다운 트릭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체 발견 당시, 인슐린을 이용한 저혈당성 쇼크 살인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는 나나쿠마의 조사로 곧바로 반박됩니다. 가모가 부착하고 있던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쿠라코는 나나쿠마가 죽은 뒤, 데이터는 가모 것이 아니라 나나쿠마의 것이었다고 추리합니다. 그녀의 측정기가 가모와 동일 기종이었거든요. 가모는 나나쿠마에 의해 인슐린 쇼크로 살해당했고, 이를 나나쿠마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조작된 데이터를 보여주었다는 추리이지요. 밀실은 데이터를 보여주려고 가모의 짐을 뒤질 때(측정기를 찾기 위해서) 몰래 가지고 있던 가모 방 열쇠를 가방 안에 있었던 양 꺼내 들었던 것이고요. 현실적이라서 그럴싸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두 살인 사건 모두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을 왜 살해했나"라는 기묘한 상황에 더해, 사실은 가모와 나나쿠마가 모두 죽은 척 했었고 이는 대충인 검안과 사체 이동 등에서 드러난다는 등 진상 부분에서도 본격물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외에도 나나쿠마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였고 야쿠인은 그녀의 손자라는 점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술 트릭의 맛을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사쿠라코의 추리를 한 번 더 꼬아서 만든 반전과 진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가모 게이타 사건의 진상이 이상합니다. 나나쿠마가 살해한게 아니라 야쿠인이 인슐린을 투약해 죽이려 했던게 진상인데, 그렇다면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다는 설명과 충돌합니다. 혈당이 실제로 떨어졌다면 데이터가 변했어야 하고, 변하지 않았다면 야쿠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으니까요. 의대생 출신이라는 설정까지 고려하면 당연합니다. 자신의 인슐린 투약이 효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병사로 믿고, 다음 날 나나쿠마 살해까지 저지른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밀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쿠인이 가모에게 인슐린을 투약한 뒤, 가모가 스스로 방을 잠갔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주사에 이상함을 느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방을 잠글 이유가 있을까요? 인슐린이 가짜라는걸 나나쿠마가 미리 알려주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건 알았더라도, 문을 잠그면 밀실이 되는데 혹시라도 죽으면 자연사로 보일 수 있으니 잠그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가모 사건 때 하루나의 그림을 훼손한 부분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미 나나쿠마가 그림을 본 상황에서, 그리고 모델인 사쿠라코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림만 훼손한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나나쿠마를 어차피 살해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가모와 나나쿠마를 '병사'처럼 보이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그림을 훼손하는 실질적인 범행을 저지른 건 자칫 경찰 수사의 꼬투리가 될 수도 있으니 하면 안되는 짓이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지로마루가 손녀의 죽음 진상을 밝히기 위해 꾸민 연극이었다는 설정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야마의 ‘하루살이 회’는 실재했던 것일까요? 자야마는 수년 전부터 블로그 활동을 해 왔던 인물인데, 그 모든 게 연극이었다는 설정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큰 연극을 벌이는 상황에서 정작 가모의 방에 CCTV를 장치해 야쿠인의 범행을 찍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래서야 무엇을 위한 연극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설정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나나쿠마 1인칭이 섞이는 묘사는 전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나쿠마와 사쿠라코의 말투도 의도된 유머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무례하게 느껴졌고 몰입을 방해합니다. 마지막에 하루나가 야쿠인을 독살하는 듯한 묘사 역시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동기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림을 훼손했기 때문에? 하루나 본인 스스로 습작에 불과해 미련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이유가 될 수 없지요.

정통 본격물을 현대 무대의 클로즈드 서클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고, 몇몇 볼만한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한참 모자랍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수상작은 기대에 미쳤던게 없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네요. 앞으로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5/12/21

카우보이 비밥 TV Serires (1998~1999) - 와타나베 신이치로 : 별점 2.5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만화에만 집중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거의 보지 않았지요. 이동이 잦았던 취준생, 직장인이었던 탓입니다. 이동하면서 보는건 꿈도 못 꿀 시대였거든요. 당시는 구하기도 힘들었고요. 그래서 "에반게리온"을 필두로, 당시 유명했던 작품은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 역시 1990년대 후반, 세기말을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감상하지 못했고 2025년 올해, 처음으로 전 시즌을 감상하였습니다. 

설정과 줄거리는 워낙에 유명하니 소개는 생략합니다만, 확실히 '잘 만든' 작품인건 맞네요. 특히 작화와 연출이 뛰어납니다. 카메라 워크와 속도감은 지금 보아도 괜찮고요. 재즈와 블루스, 록 등 여러 장르를 활용한 음악도 에피소드별로 분위기에 잘 맞도록 연출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입니다. 스파이크, 제트, 페이의 외모와 대사, 액션은 물론 인물별 개별 서사가 이야기에 잘 결합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에피소드별로 등장인물들의 '기억'과 '현실', '꿈'에 대한 여러 단서들을 하나 둘 씩 보여주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들다가, 마지막 대단원에서 한번에 정리하는 구조도 좋습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우선 설명이 너무 부족해요. 스파이크의 과거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에피소드의 절반 이상은 물론 본편에 해당하는 이야기조차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비셔스는 조직을 차지했는데 왜 스파이크를 못 죽여서 안달일까요? 그냥 분위기와 스타일에 의존한 채 이야기를 흘려보낼 뿐입니다. 게다가 본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쥴리아, 비셔스와 스파이크의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재미없었습니다.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2인자 이야기 그대로니까요. 그냥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하면서 펼치던 소소한 추격과 범죄극이 훨씬 나았어요. 문제는 경쾌한 SF 활극 측면에서는 "우주해적 코브라"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액션도 양과 질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루팡 3세"의 설정과 구조에 SF와 진지한 느와르 색채를 덧씌운 설정이라서 크게 신선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언제나 단벌 양복을 입는 유쾌한 더벅머리 스파이크는 루팡이고, 진중한 연장자 역할의 제트는 지겐이지요. 페이는 주인공 일당이지만 같은 편이라 보기 어려운 팜므파탈 후지코 그 자체고요. 그나마도 잘 따라하지 못했습니다. 비밥호 멤버 중에서 에드는 "루팡 3세" 계열이 아니니까요. 특히 에드는 이야기에 기여하는 바도 거의 없으며, 등장할 때마다 산만함과 짜증만 유발해서 아무리 보아도 작품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뛰어난 작화와 연출, 매력넘치는 등장인물들이라는 강점은 분명하지만, 서사적 완성도와 이야기 구조는 솔직히 기대 이하였어요.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5/12/19

오무라이스 잼잼 15 - 조경규 : 별점 2점

이전 권 리뷰에서 더 구입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형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책 가격이 2만원을 돌파했네요.

특유의 정감 있는 그림체와 따뜻한 분위기는 여전하고, 다양한 음식에 얽힌 이야기와 정보들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따로 국밥은 6.25 때 밥이 미리 말아져 있는 국밥을 양반들이 체면 때문에 거부해서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투움바 파스타는 미국 아웃백에서 만들어진 메뉴다라는 등 음식 유래들에 대한 설명이 특히 좋습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정통 알프레도 파스타에는 크림이 들어가지 않고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와 버터만 들어간다는 등 처음 알게 된 정보들도 많고요. 

그리고 레시피도 꽤 볼 만 합니다. 무엇보다 초코파이 라테 레시피가 가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초코파이를 전자레인지에 6초간 데운 뒤,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뿌리고 부숴서 먹는 디저트라는데, 이건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네요. "연유처럼 끈적이고 달콤한 삶" 편에서 연유의 유래와 함께 소개되는 홍콩의 '버터 돼지'(딱딱한 롤빵에 연유와 버터를 넣은 간식)를 한국 가정에서 만들려면 빵을 플레인 베이글로 대체하면 된다는 등의 꿀팁들도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전 권에서도 언급했듯 가족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졌다는건 단점입니다. 더 이상 음식과 요리 만화가 아니라 가족 일상툰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가족끼리 어디 놀러가서 뭘 먹었다는 류의 에피소드 반복은 식상하다는 말도 사치라 느껴질 정도로 뻔하고요.

이미 웹툰으로 읽은 독자가 책을 구입할만한 요소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독자가 뽑은 오무라이스 잼잼 명대사라던가 팬아트 모음은 솔직히 페이지 낭비입니다. 맛집 탐방 및 소개 역시 인터넷 컨텐츠 대비한 장점을 찾기 어려웠어요. 이래서야 가격 인상에 걸맞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원래 이 시리즈의 장점이었던 음식 중심의 이야기와 정보성이 점점 희석되어 가는데, 다음 권을 구입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라면 구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요.

2025/12/14

포즈랑의 투자 이야기 - 포즈랑 : 별점 2점

전업 투자자로 활동하며, 13년 동안 70배 넘는 수익을 거두었다는 포즈랑 님의 생생한 투자 경험담과 실전 노하우를 담은 재테크 서적입니다.
저자가 실제로 시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실패와 성공 사례, 그 과정에서 깨달은 원칙과 노하우를 차분하게 기록하여 알려줍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가치 투자'는 상승 가능성이 큰 기업을 사전에 분석해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방법으로, 이를 위해 투자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와 투자 요령, 그리고 실제 사례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습니다. 

저자의 몇몇 원칙은 참고할 만 합니다. 종목을 결정하면 포트폴리오 내에서 얼마의 비중을 채울지를 정하고, 주가와 상관없이 다음 날 장 마감 전까지 절반을 매수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후 주가가 오르면 속도 조절, 떨어지면 더 빨리 채우고, 다 채웠는데도 더 떨어진다면 아이디어가 유효하다면 비중을 더 늘린다는 식입니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종목을 고를 때부터 확신을 가지고 판단해야 가능한 전략이지요. 저도 지정가를 낮게 잡아서 매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확신이 있다면 이렇게 매수해 봐야겠어요.

매도 시점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한 수익 구간까지는 기다리고 버틴다는게 원칙인데, 이 역시 종목을 골랐을 때 수익에 대한 목표도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이 외에도 현실적인 투자 조언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PBR은 보지 말고 PER만 간단하게 보라, 장기적으로 상승 여력이 크다고 판단한 종목은 비중을 10% 이내로 묵혀두어라, 어느 정도 성과가 나면 일부 수익을 실현해 다른 종목으로 분산하라, 인생이 바뀔 만큼 주식을 많이 사면 위험하다, 주가가 떨어질 때 추가 매수를 할 수 없는 종목이라면 애초에 매수하지 말라, 시장이 모두 하락할 땐 함께 빠지지만 상승장은 각자 오른다 등 실전에 적용할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유튜브 주식 방송 좀 그만 보고 공부의 양을 늘려라”는 말은 완전히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펀드매니저와 개인 투자자의 차이를 짚으며, 개인은 잘못된 결정 몇 번으로 자산을 잃고 나락으로 갈 수 있으므로 추천이나 루머에 휩쓸리지 말고 반드시 본인이 정보를 확인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도 투자 초보자에게는 인상 깊을 조언이고요. 그 외에도 심리를 다스리는 법 등 유용한 조언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저자가 실제로 가치 투자를 할 때 기업을 분석하고 발표한 방식입니다. 재무제표, 10년간 손익과 최근 분기 실적, 사업 모델, 투자 아이디어, 리스크, 결론 순으로 정리된 자료의 목차는 실제 발표 예시와 함께 소개되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공부해야 진짜 ‘투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도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전업 투자자 기준에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용하지만, 일반 직장인 투자자가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저자도 분명히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하면 일반 직장인은 차라리 액티브 ETF 같은 상품을 이용하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 전체의 구성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목차와 편집 방식이 마치 개인 투자 일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인상이어서, 읽는 동안 조금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중요한 내용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아서, 정보 전달력 측면에서도 아쉽고요.

생생한 투자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도 있었지만, 재테크 서적으로서는 유용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자의 투자 접근 방식과 일반 투자자로서의 입장 차이가 큰 탓입니다. 직접 투자를 고민하고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2

전지적 독자 시점 (2025) - 김병우 : 별점 2점

"나 혼자만 레벨업"과 쌍벽의 인기를 누리는 판타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입니다. 세계가 갑자기 '성좌'들의 관전용 무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 속 현실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가 소설 속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설정의 작품이지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기존 회귀물, 전생물과는 약간 차별화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준 설정입니다. 지난 주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되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액션 판타지 장르로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한 편이에요. 안효섭(김독자 역), 이민호(유중혁 역)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도 잘 어울립니다. 두 사람의 호흡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잘 알겠더라고요.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졌거든요. 우선 CG가 전반적으로 부족합니다. 게임 동영상이나 철지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해서 몰입을 방해하는데, 그 중에서도 절정부인 최종 화룡과의 결전 장면이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몬스터들의 디자인 역시 현실감 없이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라 위협감도,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액션도 특별히 합이 잘 맞는다던가, 서로의 특성을 살려 위기를 극복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지 못합니다. 유중호의 이기어검술(?) 등 여러 스킬들은 모두 중국 무협 영화 그대로라서 새로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 구성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단순한 게임 스타일로, 이를 극복하면서 나오는 반전이나 복선은 거의 없습니다. 김독자가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게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고요. 오히려 금호역에서 천인호를 쫓다가 결계에 갇혀 죽기 직전, 갑자기 난입한 이지혜가 구해주는 식으로 우연과 운에 의지한 전개를 보이는 설정 구멍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화룡과의 결전에서 유중호가 죽는 장면도 뜬금없습니다. 유중호가 죽은 것 외에는 김독자의 작전대로 흘러간 건데,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실망하고 감정선을 무겁게 끌고 가는 건 납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추가 아이템을 얻어 칼을 완성해서 화룡을 물리치는데, 그럼 그 전의 작전은 어쩔 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부족한건 이야기 완성도 뿐만이 아닙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현재 상황이 어떤 구조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성좌'의 무대라는 전제는 나오지만, 코인, 아이템, 스킬 같은 기본 설정조차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게임적인 설정이라서 그냥 넘어갔다면, 이 영화를 과연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작과 다른 설정도 문제입니다. 특히 김독자와 작가가 일종의 '게임'을 하는 듯한 설정은 최악입니다.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다면, 김독자의 전능한 예지 능력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부분이었어요. 여성 캐릭터들도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이 캐릭터성을 갖지 못한 뻔한 설정인데다가, 이지혜는 왜 등장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입니다. 연기도 어색한 부분이 많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길영이가 코피를 쏟으며 사마귀를 조종하고, 그 장면을 본 이현성이 각성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유치합니다. 

결론적으로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팬이라면 실망할 수 있고, 원작을 모른다면 초반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CG 퀄리티, 각색 방향, 연출 등 여러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1

샘터 무기한 휴간

샘터 무기한 휴간

1970년부터 간행되었던 장수잡지 샘터의 무기한 휴간 뉴스를 접했습니다. 

쇼츠와 SNS 등으로 컨텐츠 중심축이 옮겨간 탓에, 지지 독자가 확고하지 못한 일반 종이 잡지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겠지요? 저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다 주었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호가 될 26년 1월호만큼은 꼭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2025/12/07

단 3개의 미국 ETF로 은퇴하라 - 김지훈(포메뽀꼬) : 별점 1.5점

네이버 경제 전문 블로거 포메뽀꼬의 ETF 투자 안내서입니다. 최근 재테크에 관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은퇴 자금은 9억 원(연 생활비의 25배)이 필요합니다.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자산을 보호하려면 금융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6% 이상의 투자 수익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평균 5~6%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매년 4% 정도를 생활비로 인출해도 자금은 감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투자 방법들은 별다른게 없습니다. S&P500에 장기간 복리 투자하라는 조언은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니까요. S&P500 외에도 투자 수익률을 위한 QQQ, 배당을 위한 SCHD에 투자하라는 조언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장기간 투자가 어려운 4050 세대를 위해 고배당주 투자를 권하는건 조금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커버드콜' 상품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이 꺼리는 상품인데, 이 책에서는 꽤 강하게 추천하고 있더군요.
또한 S&P500, SCHD 외에도 저자가 실제 투자 중인 종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환율을 활용한 투자법이나 레버리지 투자 전략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가 IRP 계좌로 투자하고 있는 ETF는 아래와 같은데, 참고가 되네요.

  1. ACE 미국나스닥100채권혼합 액티브
  2. TIGER 미국테크TOP10채권혼합 액티브
  3. SOL 미국배당미국국채혼합50

노동력과 무관한 금융 소득을 따로 모아 일정 금액이 되면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매일 소수점 매수하는 적립식 투자의 성과가 좋다는 이야기도요. 뭐니뭐니해도 꾸준함이 제일 중요하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저와는 관련 없지만, 신혼부부 재테크 전략이나 대출과 투자의 비중 조정에 대한 조언은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다만 워낙 보편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많아서, 이 책만의 차별적인 '비결'이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제목처럼 단 3개의 ETF만을 콕 집어 집중 소개하지도 않고요. 유튜브나 다른 재테크 블로그를 살펴봐도 이 정도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닙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5/12/06

희생양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인으로 프랑스 역사 교수인 존은 프랑스 여행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프랑스 시골 귀족 장 드게와 만났다. 장은 다음 날 존의 옷과 짐, 차를 가지고 몰래 떠나면서, 존이 자신(장)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존은 장의 가족과 영지 마을에 가득한 갈등과 증오에 치이다가, 장의 아내 프랑수아즈의 비참한 죽음 이후 각성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장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는데...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입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난 뒤 벌어진 한 남자의 일주일간 대역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쭉쭉 읽힙니다. 일주일간의 대역극 이야기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짜여 있는 덕분입니다. 주인공 존이 보내야 하는 장 드게의 삶이 가족 간의 냉랭한 분위기와 갈등,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등으로 다양한 드라마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존이 장인 척하며 과거사와 갈등의 원인을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이 특히 볼 만합니다. 차례대로 단서가 제공되면서 결국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이 중 장 드게가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누나 블랑슈의 약혼자였던 모리스 듀발을 부역자로 몰아 직접 총살했다는 진실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질투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고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이념 충돌이 불러왔던 비극도 떠올리게 했습니다.

존이 감정적으로 가족과 얽히며, 프랑수아즈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존이 이 가족을 위해 계획한 '역할 분배' — 동생 폴 부부에게는 공장 경영에서 손을 떼고 해외 연수와 영업 기회를 주고, 공장은 원래 모리스의 연인이었던 블랑슈에게 맡겨 혁신을 이끌게 하고, 어머니는 모르핀을 끊고 다시 가문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직업을 주는 등 — 는 급작스럽지만, 앞부분에서부터 가족 각자의 사연과 불만을 충실히 쌓아온 덕분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야기 전개의 또 하나 재미 요소는, 존이 어떻게든 장 드게인 척하려 애쓰는 장면들입니다. 대표적인 게 사냥 장면입니다. 총을 쏴 본 적 없는 존이 사냥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손에 화상을 입어 빠져나가지만, 키우던 사냥개가 말을 듣지 않거나 말실수를 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는 과정이 아주 실감납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전형적이지만, 장 드게의 딸 마리노엘만큼은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아직 어린 천사 같은 소녀인데, 그녀가 악의 없이 행한 행동들이 상황을 수렁에 빠트리기 때문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장 드게의 선물을 가족 앞에서 풀어보게끔 유도하여 가족 간 불화를 키우고, 건강하다는 걸 과시하려다가 프랑수아즈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서 히스테리를 유발하고, 폴과 르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걸 지적해서 화를 돋우며, 고행을 자처해 실종된 바람에 홀로 남게 된 프랑수아즈가 사고를 당하고 마는 식입니다. 이런 류의 캐릭터는 지금은 흔하지만, 1957년이라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선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점도 큽니다. 우선 지금 읽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전혀 다른 배경의 두 남자가 얼굴이 똑같고, 그중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일주일간 대신 살아가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설정부터 말이 안 됩니다. 대가족이 사는 저택과 작은 시골 마을 영지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무리가 있지요. 가족 간의 갈등과 거리감이 크다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합리화하려 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보다 더 큰 단점은 결말이 굉장히 싱겁다는 겁니다. 프랑수아즈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 장 드게가 돌아오자, 존이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 냈는데도 불구하고요. 살의를 품기는 했지만, 결국 존이 마지막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모습은 여러모로 허무하고 시시했습니다. 특히 장 드게는 영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간 말종 쓰레기에 가까워서 제대로 처단되었으면 했는데, 그런 인물이 돈과 존 덕분에 정상 궤도에 오른 가족을 모두 손에 넣는다는 결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이라면 보다 치밀한 심리극이나 범죄극으로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가족과 사랑에 빠진 존이 장을 어떻게든 죽이고 시신을 잘 숨겼지만, 모종의 이유로 다가올 미래에 시신이 드러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프랑수아즈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틀에 떨어진 로켓을 주우려다 추락사했다는 진상은 너무 평범했습니다. 마리노엘의 악의 없던 장난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거나, 장 드게가 선물한 로켓에 뭔가 장치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런 반전은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종교적 색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쉽게 읽게 만드는 몰입감은 뛰어나지만, 이야기 전체를 지탱해야 할 중심 설정이 설득력이 부족하고 결말이 시시한 탓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기대했던 범죄극이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묵직한 심리극과 가족 드라마를 선호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겠습니다만, 범죄극이나 추리물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5/12/05

귀멸의 칼날 1~23권 - 고토게 코요하루 : 별점 2.5점

최근 극장가를 강타한 인기 애니메이션 원작 만화입니다.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는데, 딸 아이가 친구 영향으로 빠져들었길래 어떤 만환가 싶어 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인기가 있을만 하더군요. 가장 눈에 띄는 미덕은 장편 서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도 불필요하게 늘리지 않고 완전히 정리했다는 점입니다. 인기 때문에 전개를 비틀거나 후반부에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억지로 끼워 넣지 않고, 주요 인물 모두에게 적당한 마무리를 주면서 이야기가 긴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마무리됩니다. 길이도 적당한 편이고요.
덕분에 지나친 파워 인플레도 없고, 세계관 최강인 빌런 보스 무잔을 없애기 위한 귀살대의 처절한 노력도 설득력있게 묘사됩니다. 귀살대 전원이 공격해도 정면승부로 이기는건 불가능했고, 온갖 독약을 때려 넣어야 겨우 이길 수 있었다는 전개는 아주 좋았어요. 

전투 작화도 괜찮습니다. 귀살대 대원들의 특기 호흡마다 성격이 뚜렷하고, 오니의 능력도 각기 달라 보는 맛이 충분합니다. 오니 디자인도 과하지 않은 편이고요.

주인공 탄지로는 평면적이지만 네즈코, 이누시치, 젠이츠가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과, 악역들 역시 단순한 악인으로 처리하지 않고 각기 다른 사연을 부여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이들을 중심로 한 짧은 개그나 SD 컷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엄청난 인기를 얻을만한 작품인가?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습니다. 신선함이 없다시피한 탓입니다. 동족(부하)을 늘릴 수 있는 빌런 보스의 유일한 약점은 햇빛이라는 기본 소재부터 흡혈귀물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오니가 되었지만 다른 방법(잠)으로 인육에 대한 욕구를 잠재우고 낮에도 활동할 수 있는 네즈코 역시 "블레이드"의 데이 워커 설정과 똑같고요.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니가 된 악역들의 개인적인 상처나 사연도 뻔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한 연출은 "오니키리마루"를 떠오르게 하고, 주인공 파티의 구성과 성장 단계가 단계별로 등장하는 강적과 함께 표현되는 방식은 "타이의 대모험"이나 "바람의 검심" 같은 왕도 점프식 전개의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엄청난 인기는 원작보다는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덕이 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도 완결까지의 흐름이 깔끔하고, 기본기가 탄탄하며, 왕도 만화의 재미를 잃지 않는다는 장점은 확실하기는 합니다. 원작도 나름의 가치는 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만 시대를 넘어서서 회자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2025/11/30

속임수의 심리학 - 김영헌 : 별점 2.5점

검찰 수사관으로 오랜 기간 일해온 저자가 다양한 사기 범죄를 심리학적으로 고찰한 범죄 인문·심리 교양서입니다. 각종 사기의 수법과 사람들의 심리적 허점을 교차 분석하며 ‘왜 사람은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심리 조작의 비밀"과 약간 비슷한데, 더 우리나라 중심의 사례와 사기 범죄 위주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선급금 사기’ 등 대표적인 수법을 비롯해 다양한 사기의 유형이 등장하는데, ‘경품 당첨’을 가장한 사기의 뿌리가 1800년대 후반 ‘스페인 죄수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는 등 그 소개가 무척 상세합니다. 사기 수법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형태만 바뀌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걸 잘 알려줍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사기에 잘 걸리는 이유를 인간의 유전적 본성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본래 집단 내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이고, 집단의 의견에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본능적인 성향이라고 하고요. 또한, 누구나 손실을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겁니다. 대표적인게 댓글과 별점 조작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주식, 코인 투자 열풍과 연결되는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봐 두려운 심리)’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리딩방에서 쉽게 사기 행각이 일어나는건 당연합니다.

사기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심리 기법인 '콜드 리딩’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뢰를 얻는 화법, 예를 들어 “당신은 외향적이면서도 내성적인 면이 있군요”처럼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이런 애매한 화법은 점술가나 역술인이 자주 쓰는데, 이런 화법으로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점점 더 정보를 얻고 맞춰가는 구조라고 합니다. 특히 건강, 돈, 인간관계에 대해 넘겨짚어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은 사기성 상담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신흥 종교의 포교 방식도 다루고 있습니다. ‘미끼 – 끌어올리기 – 격리 – 사랑 – 헌신’이라는 5단계 전략을 통해 상대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심리를 조작하고 세뇌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의 겐조의 수법도 이런 방식이었겠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 이슈가 되는 사이비 종교들, 그리고 해외의 세뇌 범죄가 다 이런 방식이고요. 핵심은 '격리'라고 하니, 어딘가에서 합숙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단체 모임은 정말 조심해야 할 것 입니다. 

결혼 사기의 심리적 기제도 설명되는데, 여성은 대체로 사랑에 신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깊이 빠지는데, 그 시점이 되면 상대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는 성욕과 관련된 유전적 특성으로 인해 여성의 신호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사기에서 빈번히 이용되는 심리적 허점이니 역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고요.

‘사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도 풍부합니다. 공짜에는 반드시 숨은 목적이 있다는 사실, 욕망이 클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조언, 후회라는 감정이 오히려 사기의 브레이크를 무디게 만든다는 설명 등은 관련된 사기 범죄와 함께 소개되어 굉장히 와 닿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반드시 조사하고, 정과 감정에 휘둘리지 말며, 거절은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당연하지만 실제로 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명심해야 할 테고요.

이런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는데, 전반적으로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며, 목차 간 구성의 차이도 뚜렷하지 않아 중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사기라는 주제가 기본적으로 ‘속인다’는 공통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례 중심, 수법 중심, 예방 중심으로 명확히 분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사례도 실제 유명 사건보다는 소설처럼 각색된 예시가 많은데 이 역시 아쉬운 부분이고요.
사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전반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 상식적인 말들을 정리해 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같은 사기 과잉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자주 잊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11/29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 - 호시즈키 와타루 / 최수영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터리 작가 아사미는 개인 블로그에 불치병에 걸려 자살할 생각이니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글을 올리고 사라졌다. 뒤이어 블로그에 예약 갱신으로 시어머니의 치부와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벌였던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을 그린 소설을 차례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아사미의 남편 마사타카와 아사미의 편집자 사오리는 자신들의 불륜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리고 아사미가 다른 무언가를 고백할까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블로그 패스워드를 찾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 갱신글로 동반 자살극의 진상과 사오리의 치부가 드러났다. 모든걸 잃은 사오리는 마지막 글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마사타카가 은거하는 별장으로 향하는데...

유명 작가의 자살과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블로그 글로 시작되는 구성이 인상적인 장편 범죄 복수 스릴러입니다. 

블로그 글, 마사타카, 아사미 시점을 오가면서 아사미가 정말로 자살한 것인지? 시체는 어디에 있는지? 라는 의문과 아사미 고교 시절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전개는 흡입력이 뛰어납니다.
편집자 사오리가 마지막 블로그 글의 용어 선택이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고 진상을 눈치챈 장면은 '편집자'라는 직업의 전문 지식을 활용한 추리라는 점에서 괜찮았고요.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는 낮습니다. 우선 주요 인물들의 설정부터 비현실적이에요. 모리바야시 아사미는 극단적인 학대를 겪은 뒤 고아로 자라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남편 마사타카는 데이트 강간을 일삼고 아사미에게 질투심을 품은 채 얹혀 사는 인간 말종입니다. 사오리 역시 아사미에게 집착한 나머지 마사타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설정이고요. 이렇게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과장되거나 극단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은 복수극으로 '아사미는 자살한게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 마사타카를 일부러 자극해 살인에 이르게 만들었다'인데, 복수로 보기에는 애매하고 부족합니다. 마사타카가 살인을 저지른 후의 계획이 전무한 탓입니다. 살인범으로 만든 뒤 파멸시키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범행을 덮어주기 위해 자살로 가장한 블로그 글을 올리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마사타카는 뻔뻔하게 아사미 증쇄본 수익, 그리고 실종 신고 7년 후에는 남은 유산으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데 이걸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살해당하는 것만 목표였고 그 뒤는 상관없다’고 유서에 쓰여있는 걸로 퉁치고 끝내는데, 허무하기 짝이 없네요. 이보다는 정교하거나 복잡한 추가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사미가 불러낸 사기꾼에게 속아 전 재산을 날린 마사타카의 어머니가 유산을 노리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아사미가 실종 중에는 마사타카에게 유산이 상속될 수 없으니, 아들을 죽여봤자 헛짓거리였다!는게 밝혀지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물론 마사타카가 자살하기는 했지만, 이는 계획된게 아니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아사미가 사라진 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책은 큰 화제를 얻었고, 그에 따라 인세 수입도 늘어날 상황에서 마사타카같은 쓰레기가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것도 영 와닿지 않고요. 앞서 그의 내면을 묘사할 때 죄책감이 큰 인물로 그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중 마사타카가 아사미를 살해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의 작품 혹평에 대한 분노와 증오인데,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의 결정적인 트리거라는 것 역시 잘 설명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소설 속 소설인 "하얀 새장 이야기"도 중반까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흥미를 이끌지만, 결말은 결국 동반 자살로 귀결될 뿐이라 추리적 가치는 없고, 아사미의 성격이나 내면을 깊이 있게 드러내지도 못해서 왜 삽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들 이야기 설정도 새로운게 없어서 시시하니까요.

그 외에도, 마사타카가 블로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아챈 방법도 대충이고, 사오리가 멍청하게 혼자 마사타카를 찾아가 살해당한 것도 비현실적이며, 아사미야 그렇다 쳐도 사오리 실종 이후에 경찰 수사가 시작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눈에 많이 띕니다. 사체 은닉도 그냥 잘게 나누어(?) 버렸다 정도로 넘어가는건 아니다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흡입력 있는 출발과 일부 매력적인 장치는 있지만, 여러모로 비현실적이고 복수극으로도 미흡하여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11/28

두산 베어스 스토브리그 : 기아 지명 선수 및 FA 단상

기아의 지명 선수는 작년 지명 신인 홍민규 선수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박치국 선수가 풀리지 않으면 박신지, 윤태호, 최준호, 양재훈, 홍민규, 김유성, 제환유 선수 등 중에서 지명되리라 예상했는데(그중에서도 김유성 선수),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반드시 보호해야 했던 주력 선수들에 더하여 작년 지명 선수 중 박준순, 최민석 선수를 보호해야 했으니 이 정도 급 선수들을 지키는 건 무리였으니까요.
올 시즌 30여 이닝을 던지며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라 무척 아쉽지만, 팀으로서는 제법 많은 우완 정통파 투수들이 있어 공백은 최지강, 윤태호, 양재훈 선수 등이 메꿀 수 있으리라 보여 선방했다고 생각합니다. 홍민규 선수도 기아에서 대성하기를 바랍니다.

박찬호 선수 FA 계약은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우선 베어스의 FA 선수인 조수행, 이영하, 최원준 선수는 모두 잡았습니다. 오버페이 논란은 있지만, 조수행 선수 외에는 납득이 가는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이영하 선수는 젊은 나이에 고점이 높았고, 최원준 선수는 FA 직전인 올 시즌 계투 전환을 받아들이며 팀에 헌신한 측면도 감안해야 하고요. 특히 이영하 선수는 최 전성기 코치였던 김원형 감독 및 바뀐 코치진의 지도에 따라, 과거 활약을 재현해 준다면 오히려 좋은 계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김재환 선수가 아무런 대가 없는 방출 선수 신분으로 시장에 풀린 건 의외였어요. 그런데 그로 인해 여러모로 욕을 먹고는 있는 상황은 저는 이해하기 힘드네요. 이건 선수를 비난할게 없으니까요. 4년 전 계약 당시, 이 조항을 삽입하는 조건으로 구단이 돈을 아낀 건 사실이잖아요. 양측 합의하에 계약했던 걸 지금 와서 일방적으로 한쪽을 비난하는 건 말이 안 되지요(마찬가지로 저는 케이브 선수 보류권 문제는 구단 잘못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4년 전 계약 시 이런 옵션과 조건에 대해 공개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요.

하여튼 김재환 선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라 베어스와 다시 계약하는 건 무리로 보이며, 다음 시즌 구상에서는 없는 선수로 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박찬호 선수 영입에 김재환, 홍건희 선수가 빠진 셈이 되고, 박찬호 선수가 좋은 선수이긴 하지만, 또 김재환 선수의 올해 활약이 기대 이하였다 하더라도 베어스 전력에는 흠집이 가는 상황입니다. 수비야 그렇다 쳐도, 타선에서 그 정도 역할을 대신할 선수? 당장은 없지요. 넘치는 내야에 비해 외야 선수층이 빈약하게 문제인데, 이는 기대를 모았던 김대한, 김민석 선수가 자리를 잡지 못하는 탓이 큽니다.
그래도 다른 커뮤니티의 의견처럼 김현수 선수나 강백호 선수에게 투자를 했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김현수 선수는 나이가, 강백호 선수는 최근의 부진과 포지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는 새로 계약한 외국인 선수 다즈 카메론이 어느 정도 활약해 주고, 제발 '나는 좌익수다 시즌 2'에서 누구든 기회를 잡아 주전으로 자리 잡아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넘치는 내야 자원 중 몇 선수가 외야 컨버젼을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스토브리그와 외국인 선수 계약이 모두 마무리되고, 전지훈련도 끝나면 다시 제대로 시즌 예상을 해 보겠습니다만, 이래서야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좀 어려워 보이기는 하네요. 

덧붙이자면, 김재환 선수가 어디로 갈지도 궁금합니다. 키움과 LG는 영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김현수 선수와 강백호 선수를 영입한 KT와 한화도 빼야 할 테고, 최형우 선수 계약이 더 급한 기아는 아닐겁니다. 그렇다면 SSG, 삼성, 롯데, NC가 후보인데 이 네 팀 모두 김재환 선수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는 않네요. 네 팀 중에서 그래도 필요하다면 NC인데, 시장 상황과 선수 상황 모두를 볼 때 거액을 배팅하지는 않을테고요.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4년 전 FA 계약은 김재환 선수에게도 그리 좋게 작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2025/11/23

딸과 함께 본, 무간도

세 번째로 딸과 함께 본 홍콩 영화는 "무간도"입니다. 느와르의 탈을 쓴 무협지 "영웅본색", 느와르인줄 알았던 멜로물 "천장지구"를 봤으니 이젠 정말 제대로 된 홍콩 느와르를 볼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는 다시 봐도 여전히 탄탄했습니다. 경찰 내부에 잠입한 조폭 스파이, 반대로 조직에 잠입한 경찰,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내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을 그린 각본과 절제된 연출, 그리고 유덕화와 양조위의 대립은 지금 보아도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반이라는 시점에도 불구하고 촌스러운 느낌 없이 도시적이고 세련된 영상미도 빼어나고요. 

덕분에 저는 끝까지 몰입하며 보았는데, 딸 아이의 반응은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별로 재미없어 하더라고요. 두 남자 외에도 조직과 경찰, 또 다른 스파이의 존재 등이 계속 얽히는 식으로 이야기가 복잡한 탓으로, 숏폼 세대에게는 어려웠던 듯 합니다.
게다가 지금 세대에는 이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임무에 충실하거나, 조직에 충성하거나, 정체성을 지키는 인물들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희생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요. 확실히 이런 정통 홍콩 느와르의 정서는 21세기 소녀인 딸에게는 별로 와 닿는 점이 없을테지요.

그래서 이번 "무간도"가, 딸과 함께하는 홍콩 영화 감상의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딸아이가 "귀멸의 칼날" TV 시리즈를 보기 시작했으니, 몇 달 간은 다른 걸 볼 여유도 없네요. 딸과 함께 한 시간이 좋았는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귀멸의 칼날" 감상이 끝날 때 함께 볼 영화를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2025/11/22

오랫만의 베어스 이야기 : 두산 베어스 보호 선수 20인과 기아 지명 선수 예상

실망스러운 2025시즌도 끝났습니다. 스토브리그가 다 마무리되면 글을 좀 쓸까 했는데, 두산이 이번에 계약한 기아의 FA 유격수 박찬호 선수 보상 선수 관련 커뮤니티 글을 읽다가 20인 선수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몇 자 적어 봅니다.

우선, 두산이 반드시 보호해야 할 선수는 아래와 같습니다. 아마 누가 뽑아도 이 11명의 선수는 보호 선수에 포함될거에요.

투수 (5) : 곽빈, 최승용, 최민석, 이병헌, 김택연

포수 (1) : 양의지

내야수 (4) : 안재석, 박준순

외야수 (1) : 정수빈

여기에 제가 단장이라면, 젊은 군필 야수 오명진, 박지훈 선수에 젊은 투수 - 박신지, 윤태호, 최준호, 양재훈, 홍민규, 김유성, 제환유 선수 - 를 보호할 겁니다.

그러면 박치국, 최지강 (투수) / 김기연, 김재환, 양석환, 김동준, 이유찬, 임종성, 여동건, 강승호, 박계범, 김대한, 김인태, 김민석, 홍성호 (야수) 선수가 풀리게 되지요.

보호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투수 중 박치국 선수는 ABS 도입 이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이드암 투수 중에서는 좋은 활약을 선보였지만, 좌타에 약하다는 약점이 큽니다. 최지강 선수는 부상 이후 제 폼을 찾지 못했고 올 시즌 박신지 선수가 역할을 완벽히 대체했지요. 마찬가지로 올 시즌만 보면 홍민규, 윤태호, 양재훈 선수가 불펜에서 같은 역할 수행이 가능해 보이고요.

야수들도 고참급은 물론 30대 이상 선수들은 양의지, 정수빈 선수를 제외하면 모두 보호 선수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젊은 야수들 중에서 내야수 이유찬, 임종성, 여동건 선수는 모두 박찬호-안재석 선수의 백업 역할일테니, 좋은 선수들이지만 유출 시 크게 타격을 받지 않을 걸로 판단했고요. 김대한, 김민석 선수의 경우는 기대치는 높지만 보여준게 애매해서 제외했습니다. 김민석 선수는 미필, 김대한 선수는 부상이 잦다는 문제도 있지요. 
김기연 선수 제외는 도박수이기는 한데, 기아가 세 번째 포수를 20인 외에서 뽑지는 않을걸로 생각합니다. 퓨처스에서 엄청난 성적을 올린 윤준호 선수도 돌아오고요. 물론 김기연 선수는 100% 보호되겠지만요.

제 보호 선수 명단대로라면, 기아 타이거즈는 박치국 선수를 지명할 가능성이 100%일거라 확신합니다. 올 시즌 중간 계투가 부진했고, 강속구 투수가 별로 없기도 했으니까요. 만약 박치국 선수가 보호된다면, 제가 마지막에 뽑은 투수들 중 빠지는 선수가 지명될 겁니다. 그 중 가능성 높은건 김유성 선수겠지요.
야수라면 박찬호 선수 부재와 김선빈 선수의 노쇠화를 대비할 수 있는 강승호 선수 지명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젊은 강속구 투수가 많이 풀릴 명단에서 노장급 야수를 뽑지는 않을거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일 뿐입니다. 보호 선수 명단은 통상 공개되지 않으니 확인할 길도 없고요. 다만 어떤 선수가 지명되더라도, 모쪼록 좋은 활약으로 기아 타이거즈에서도 사랑받으면서 오래 선수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2025/11/21

다크 플레이스 - 길리언 플린 / 유수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5년 전, 오빠 벤이 저질렀던 가족 몰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리비 데이는 '킬 클럽' 라일의 요청으로 사건 재조사에 나섰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결정적 증언을 했던 리비는 조사를 통해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나를 찾아줘"로 확 뜬 길리언 플린의 또 다른 범죄 스릴러입니다. 568페이지라는 어마무시한 분량으로 제목은 주인공 리비의 어둡고 질척한 과거 추억을 의미하며, 리비가 이런 '다크 플레이스'의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지요. 

길리언 플린 특유의 치밀한 묘사가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데이 가족에게 닥쳤던 경제적 몰락, 심리적 붕괴, 특히 패티와 벤의 절망적인 내면 묘사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생생합니다. 읽다 보면 나 역시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탕에 함께 잠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주인공 리비가 어린 시절 증언으로 벤을 교도소에 보냈는데, 25년이 지나 성금이 다 떨어진 탓에 오빠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돈으로 조사에 나서는 딜레마도 리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다가오고요.

전개도 여러 복선을 통해 정교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진범 중 한 명인 캘빈 딜이 '킬 클럽' 모임 초반에 언급되고, 리비의 도벽이 디온드라의 DNA를 입수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식으로요. 특히 벤을 흠모하던 크리시의 거짓 고발로 인해 패티가 아들 벤을 아동 성추행범으로 오해하게 되는 부분이 탁월합니다. 디온드라가 임신해서 벤은 중고 아기 옷을 잔뜩 사고 아이 이름을 정하기 위해 여러 이름을 노트에 써 두었는데, 이걸 본 패티가 심증을 굳히게 되거든요.
또 현재 시점인 리비의 시선과, 1985년 사건 당일을 시간대별로 따라가는 패티(엄마)와 벤의 시점을 교차해 보여주는 구성도 좋습니다. 현재 시점의 리비의 조사와 실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순서대로 이어지며 결국 진실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정통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고, 특별한 트릭이 있지는 않지만 결정적 장면 하나는 인상적입니다. 당시 살해된 미셸이 짝사랑하던 남학생 '토드 델헌트'의 이름을 크리스탈이 언급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데, 이미 살해된 가족만 아는 이야기를 만난 적도 없는 크리스탈이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리비는 미셸이 딱 9일 동안만 썼던 1985년 일기장에만 그 이름을 적었고, 크리스탈이 일기장을 읽었다고 추리합니다. 일기장은 범인밖에는 가져갈 사람이 없으니, 디온드라가 범인이라는 의미이고요. 이는 꽤 타당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지나치게 깁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인물도 별로 없는데, 그들의 심리 묘사가 많아서 읽는 내내 피로감을 느꼈고요. 그 중에서도 리비의 아버지 러너 데이와 벤의 여자친구 디온드라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로 거북했습니다. 읽으면서 여러차례 그만 두게 만들 정도로요. 

후반부로 갈수록 우연이 너무 과도하게 겹치는 점도 아쉽습니다. 사건 당일, 패티가 생명보험금으로 빚을 갚기 위해 캘빈 딜에게 자신의 살인을 의뢰한 날, 공교롭게도 디온드라가 집에 들어와 미셸을 죽이고, 이를 본 데비가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캘빈의 모습을 본 탓에 살해당했다는 전개는 너무 작위적입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거슬립니다.  벤이 디온드라의 가명을 문신으로 새긴 이유, 일가족 몰살이라는 대형 사고 이후 실종된 디온드라가 사건과 엮여 함께 수사되지 않은 이유처럼요. 그 작은 시골 동네에서 벤과 디온드라가 사귄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트레이마저 조사를 받았는데 말이지요.

디온드라가 미셸을 살해한 동기도 석연치 않습니다. 아무리 분노가 폭발했다고 하더라도, 10살 아이를 죽인다는건 영 납득하기 힘듭니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이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아울러 이 때 디온드라가 미셸을 살해하는걸 방조한 벤 역시 지은 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5년 동안의 수감 생활은 했어도 쌉니다.

결정적으로 절정부에서 리비가 크리스탈에게 공격받는 장면과 탈출극은 정말 억지스럽습니다. 크리스탈이 ‘토드 델헌트’라는 이름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리비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도 납득이 잘 가지 않았고요. 리비가 의심을 품기는 했지만, 그게 디온드라가 범인이라는걸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미셸의 침대 시트에서 디온드라의 DNA가 검출되었다는 점 역시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벤과 디온드라가 사귀었고, 디온드라가 벤의 아이까지 가졌는데 그녀의 DNA가 집 안에 남아 있는게 뭐가 그리 이상할까요? 미셸의 시신에서 디온드라의 DNA가 검출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그것도 아니라서 핵심 증거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25년간 디온드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벤이 진범이 그녀라고 밝힐 까닭도 없을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 특유의 문체와 분위기, 구성은 뛰어나고 완성도도 높지만 과한 작위성과 무리한 전개 탓에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길리언 플린 특유의 어두운 심리 묘사를 즐기고 싶은 독자라면 도전해볼 만하겠지만, 일반적인 추리 소설 독자에게는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영화화 되었지만 망했다는데, 이해가 됩니다.

2025/11/16

고독한 용의자 - 찬호께이 / 허유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년간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오다가 자살한 셰바이천의 방 옷장 안에서 수십 개의 표본병에 토막난 채 담긴 두 구의 남녀 사체가 발견되었다. 쉬유이 경위는 수사를 진행하며 바이천의 이웃이자 친구 칸즈위안을 의심했지만, 칸즈위안은 바이천의 외삼촌 셰자오후가 진범이라 주장하며 경찰에 협력을 제안했다. 유명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추리대로 셰자오후가 범인일 수 있다는 증거가 하나 둘 씩 드러나지만, 경찰 고위 층은 진범은 바이천이라며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추리작가 찬호께이의 신작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쉬유이가 주인공이지만, 전작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없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이번에도 작가 특유의 촘촘한 트릭과 복선, 마지막의 반전까지 추리소설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은둔자 살인마’ 셰바이천이 실제 범인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수수께끼가 하나둘씩 풀려나가는 전개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덕이 큽니다.

셰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로 방 안에서만 생활하던 인물인데, 그의 방 옷장에서 다수의 표본병이 발견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경찰은 당연히 셰바이천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칸즈위안이 셰자오후가 범인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때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단서들과 그 단서들을 조합해 수수께끼를 풀고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묘미이지요.

첫 번째 수수께끼는 셰바이천이 방 안에만 머무르는 은둔자인데, 어떻게 셰자오후가 수십 개의 표본병을 셰바이천 몰래 옷장 안에 넣을 수 있었냐는 겁니다. 수사 결과, 그 날 어머니 메이펑은 외출했습니다. 식사권을 선물받고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나갔었지요. 그런데 이 식사권을 선물한 사람이 셰자오후였습니다. 그는 누나 메이펑이 나간 틈에 셰바이천의 저녁 식사에 수면제를 타 재운 뒤, 몰래 표본병을 옷장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평소처럼 그릇을 씻지 않고 그대로 방 문 앞에 내 놓았던 점이 증거입니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셰바이천이 오랜 시간 동안 옷장 속의 사체를 왜 몰랐느냐는 것인데, 셰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라 옷을 갈아입을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옷장을 열 일이 없었고요.

그리고 밝혀지는 셰자오후의 범행 동기도 놀랍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어린 궈쯔닝을 노려서, 먼저 궈타오안을 살해한 뒤 그의 아내 쑨수칭의 동거남이자 기둥서방이 됩니다. 이후 궈쯔닝을 장기간 성폭행했는데, 궈쯔닝이 집을 가출한 뒤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다시 발견하여 살해했습니다. 증거는 궈쯔닝 사체에 남겨졌던 담배로 지진 흔적들입니다. 셰자오후가 운행하는 택시에도 혈흔과 머리카락 등의 증거가 남았고요.
이후 셰자오후는 궈타오안과 궈쯔닝 사체를 버리면 범행이 들통날까봐 두려워 작은 병에 담아 토막 보관했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자 새 거처인 레지던스로는 사체를 옮길 수 없어서 셰바이천의 방에 숨겼던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셰자오후가 범인이라는걸 밝혀내는 칸즈위안의 관찰력과 추리력도 볼거리입니다. 쑨수칭의 기둥서방일 때 찍혔던 사진 속 손목시계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당시 상황을 추리해내는게 대표적입니다. 회사에서 범죄 혐의로 해고당하고 빚더미에 올랐던 셰자오후가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는 건, 쑨수칭의 수입이 좋았다는걸 의미하며 쑨수칭이 셰자오후를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며, 이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훌륭한 스릴러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셰자오후를 체포한 이후 충격적인, 진짜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반전이 펼쳐지거든요. 바로 옷장에서 발견된 사체가 셰바이천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바이천은 이미 20년 전 뇌종양으로 사망했고, 친구 칸즈위안이 사체를 숨기고 어머니 메이펑을 위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왔던 겁니다. 은둔형 외톨이였던 덕분에 외부와 접촉이 거의 없었고, 이를 이용해 오랫동안 존재를 숨길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자살한 남성은? 그는 칸즈위안의 동거인이자 또 다른 은둔자인 ‘더듬이’였습니다. 온라인 게임을 통해 궈쯔닝과 친구가 된 그는, 궈쯔닝이 자살한 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어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셰자오후를 덫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셰자오후는 살인은 저질렀지만, 토막 살인의 진범은 아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은 더듬이와 칸즈위안이 함께 짠 복수극이었습니다.
이 반전을 셰바이천과 더듬이 시점의 교묘한 전개로 독자를 속이고 있어서 일종의 서술 트릭물로 볼 수도 있고요.

이렇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데,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분량이 지나치게 긴 편이고, 경찰의 수사가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게 묘사되는 탓입니다. 칸즈위안을 의심해 미행하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누가 보아도 셰바이천이 범인임이 명백한데, 구태여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경찰의 유치한 복수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반전도 드라마틱한 힘에 비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설계는 조금 약합니다. 어머니가 더듬이의 시신을 아들이라고 착각한다거나, 같은 아파트에 은둔자가 둘이나 살았는데 누구도 더듬이의 존재를 몰랐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20년 전 죽은 셰바이천의 사체가 보관 상태가 좋았음에도, 그 정체를 끝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20년 동안 은둔자였다면, 20년 전의 사진이나 기록을 찾아보는게 당연합니다. 때문에 사체의 정체가 경찰 수사에서 드러나지 못한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인간 관계 부분의 작위적인 설정도 거슬립니다. 은둔형 외톨이 더듬이는 궈쯔닝과 온라인 게임 친구가 되었다가 그녀를 자기 방에서 돌봐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이 궈쯔닝을 어린 시절 성폭행했던 셰자오후의 외조카 셰바이천의 집이었고, 조카집을 방문한 셰바이천을 목격한 궈쯔닝이 자신의 거처가 드러났다 여겨 자살했습니다. 아무리 홍콩이 좁아도 그렇지, 주요 인물들이 이렇게까지 밀접하게 엮인다는건 억지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찬호께이 특유의 기획력과 구성력은 좋고 추리와 반전 모두 괜찮은 편입니다. 단점도 명확해서 감점도 약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평균 이상의 재미는 보장해 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표지 디자인은 정말 최악이네요. 최근 출간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에요...

2025/11/15

딸과 함께 본, 천장지구

"영웅본색"에 이어 딸과 함께 본 오래된 홍콩 영화입니다. 이번에는 아내의 선택이었지요. 1990년 작품이니, 이것도 벌써 35년 전 영화입니다.

저에게는 순진무구하고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대표하는 배우로 오천련이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아도 그 느낌은 여전하더군요. 영화 속 철없고 순수한 부잣집 아가씨 죠죠 역에 너무도 잘 어울렸습니다. 한편 유덕화는 폭주와 싸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리의 건달로 등장하는데, 전성기의 매력이 그대로 녹아 있어 보는 내내 몰입감이 높았고요.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푸른 빛이 감도는 세련된 화면, 홍콩의 전설적인 록 밴드 Beyond의 음악, 그리고 1시간 30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 완벽한 기승전결을 갖춘 각본까지, 지금 봐도 수준 높은 상업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함께 봤던 "영웅본색"은 여러모로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크게 흠잡을 데가 없더군요. 딱 한 가지, 갑자기 아화가 다쳐서 마카오로 간 뒤 둘이 잠깐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장면은 좀 뜬금없었지만 문제될 정도는 아닙니다.

딸 아이의 반응도 흥미로웠습니다. 몰입해서 재미있게 봤는데, 21세기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자기파괴적인 결말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고요. 왜 아화가 죽어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화가 나요.”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걸 보고 확실히 ‘80년대의 정서는 이제 정말로 유통기한이 지났구나’ 싶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비극이 낭만이었고, 희생이 미덕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지금 세대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감성이 변했고 시대가 바뀌었더라도, 좋은 영화는 여전히 마음을 움직인다는걸 딸 아이가 알려주네요. 영화의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영화 자체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요(아래는 딸 아이의 지금 핸드폰 바탕화면입니다). 홍콩 영화 특유의 낭만과 감성, 오천련과 유덕화, 그리고 Beyond의 음악이 함께 만들어낸 정서가 지금 봐도 빛나는 덕분입니다.

다음 번에는 무슨 영화를 함께 보면 좋을지,벌써부터 고민이 되네요.

2025/11/14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 켄 피셔, 라라 호프만스 / 이건, 백우진 : 별점 3점

책 소갯글을 보면, 원래 성공한 투자자는 책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투자에 몰두하다 보면 글을 쓸 시간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투자 책을 쓴 사람은 실전 투자자라기 보다는, 책 판매가 목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켄 피셔는 실제로 큰 성과를 이룬 전문 실전 투자자이자 여덟 권이나 되는 책을 출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들은 흘려듣기 어렵습니다.

주장은 간단하지만 확실합니다. 시장에는 영원한 약세장도, 끊임없는 경기 침체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켄 피셔는 과거 데이터를 근거로, 하락장이라 불리는 시기에도 배당까지 포함하면 대부분의 경우 수익이 발생했으며, 침체 뒤에는 빠르고 강한 반등이 뒤따랐다는 걸 보여줍니다. 흔히 말하는 V자 반등입니다. 결국 시장은 순환하고, 위기는 오래가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주가는 반드시 고점을 갱신해 왔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입니다.
이런 말이 먹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비관론에 끌리기 때문이며, 저자는 인간 심리가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예측에 더 큰 신뢰를 부여한다고 말합니다. 공포를 자극하는 목소리는 과장되어 보이지만 그럴듯하게 들리는 법이지요. 그러나 시장의 역사는 이런 비관론을 무수히 부정해 왔고, 결국 반등하고 회복하는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장기 투자 관점에서 시장을 바라보면, 일시적인 하락에 크게 흔들릴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기를 견디지 못한 투자자들이 더 큰 기회를 놓쳤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해 줍니다. 강세장은 대체로 약세장보다 길고, 상승폭도 크며, 평균 수익률을 훨씬 웃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투자자는 겁먹지 말고,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 시장에 꾸준히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또 '지나치게 빠른 상승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강세장이 원래 그런 속성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천천히 오르는 장보다 단기간에 크게 오르는 장세가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단기 조정은 불가피하지만, 기업의 펀더멘털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아울러 시장 변동성에 대한 접근도 기존 상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변동성이 클 때는 투자를 미루라고 말하지만, 피셔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합니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려면 일정 수준의 변동성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안정성과 수익률은 본질적으로 상충 관계이며, 만약 변동 없는 수익을 원한다면 낮은 금리의 예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면서요. 심지어 변동성 없이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말은 대부분 사기에 가깝다고 경고합니다. 메이도프의 폰지 사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투자 지평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도 현실적입니다. 대부분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투자 계획을 짜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 방식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산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어야 하느냐이지, 나이가 몇 살이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본인의 삶은 물론, 배우자와 가족까지 고려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긴 투자 지평이 필요할 수 있고, 이런 상황이라면 주식 비중을 과감히 줄일 이유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어떤 투자보다 주식 투자를 오래, 길게 가져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국가 부채에 대한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정 적자는 경제에 부정적이라고 생각되지만, 피셔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와 반대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재정 흑자일 때 대공황이 발생했고, 재정 적자 이후에는 오히려 시장 수익률이 개선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기업에 일률적인 부채 기준이 없는 것처럼, 국가에도 획일적인 부채 한계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국채는 통화 정책을 운영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라는 점도 강조됩니다.

미래를 지나치게 예측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입니다. 24개월을 넘는 시장 전망은 의미가 없으며, 한때 시장을 이끌었던 종목이나 섹터에 대해 '이제는 끝났다'고 단정 짓는 것도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현재 흐름이나 기존의 가정에 의존한 예측보다는, 데이터와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실용적인 조언도 많습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유망한 자산군이 달라진다는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약세장 바닥을 벗어나는 시기에는 소형주가 강세를 보이며, 장기금리와 단기금리의 차이가 좁아질 때는 성장주가, 차이가 벌어질 때는 가치주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분석은 실제 투자 전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치와 주가의 관계에 관한 내용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시장이 뚜렷하게 반응하지는 않으며, 이 부분은 미국 정치 중심의 설명이라 국내 독자 입장에서는 큰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식 투자자라면 흥미를 느낄만한 내용이 많지만 미국 기준으로 서술되었다는건 분명한 한계입니다. 기본적으로 국내 주식 시장은 미국 시장만큼 투명하다고 보기 어려우니까요.
아울러 주식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동산과 금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단호한데 이 역시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한 부동산 관련 투자 근거 - 미국 기준으로 지난 40년간 상업용 부동산의 수익률이 주식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고, 주거용은 그보다 더 낮았다는 통계 - 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이건 미국 기준이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10년만 보아도 대출 및 전세라는 레버리지를 활용해서 3~4배(300~400%) 되는 수익을 거둔 사례가 즐비하니 동의할 수 없어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전세 제도가 사라지고, 대출은 어려워지며 부동산의 매매가 실거주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정책이 자리잡으면 모르겠지만요.
금 역시 장기적인 수익률이 낮고, 포트폴리오 다변화에도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안전 자산' 측면에서 충분히 투자 효과가 있다는건 이미 증명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화제인 전자 화폐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책의 주제에 걸맞는 오랜 기간, 최소 50년 이상 역사가 없는 탓이겠지만, 최근 10년 정도의 흐름만 짚어 주어도 엄청난 상승률을 보인 자산이라는걸 부정할 수 없을텐데 말이지요. 저자가 이를 '튤립 버블'과 같은 무가치한 거품 자산으로 볼건지, 진지한 투자 대상으로 볼건지 궁금했는데 언급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참고할 내용이 많고 미국 주식 대세 상승론에 대한 이견도 없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금과 국내 증시에도 분산 투자하는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코스피는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는 확신을 가지기는 힘드니 미국 주식에 직, 간접적으로 투자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환율과도 연동되는 만큼 국내 투자자로서는 확신을 가지고 장기 투자하기는 어려우니까요. 1:1:1 비율로 분산하는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5/11/09

더 하더 데이 폴 (2021) - 제임스 새뮤얼 : 별점 1.5점

냇 러브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살해하고 자신의 이마에 십자가를 새긴 루푸스 빅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면받은 그의 근거지로 동료들과 함께 향했다. 절대적인 숫자에서 뒤지던 냇의 애인 메리는 루푸스 빅과 협상하다가 인질로 잡혔고, 냇은 루푸스의 협박으로 은행까지 털며 자금을 모은 뒤 최후의 결전에 나선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제임스 새뮤얼 감독의 장편 서부극 영화로, 전통적인 백인 중심 서부극의 문법과 다른 독특함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독특함은 등장인물 전원이 흑인이라는 점입니다. 진취적인 여장부 스테이지 코치 매리와 잔혹한 루푸스 빅 일당 2인자 트루디, 남장 여자 바운서 코피와 같은 강한 여성들이 비중있게 활약하는 점 역시 전통적인 서부극과는 다르고요.
애송이 짐이 빠른 사격 실력 하나만 믿고 승부에 집착하다가, 상대 체로키 빌의 비열한 저격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익숙한 '결투의 미학'을 허물고, 캐릭터의 허망한 말로를 통해 오히려 서부극의 현실감을 강조하는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조너선 메이저스와 이드리스 엘바의 묵직한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면을 꽉 채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졌어요.

하지만 상술한 극소수 장점을 제외하면, 영화는 망작에 가깝습니다. 특히 각본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루푸스 빅을 구출하기 위해 갱단이 기차를 습격하고, 수많은 군인을 학살하는 도입부부터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미 사면받은 인물이라면 굳이 군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데려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클라이맥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짐마저 전사하고 고작 다섯 명만 남은 냇 러브 일당이 수십 명의 루푸스 빅 패거리를 일망타진한다는 전개는 현실감이 없고, 황당함만 더합니다. 특히 냇 러브는 작전도 없이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대부분을 처리하는데, 그런 전투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메리를 인질로 보내 협상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나마 마지막 총격전이라도 화끈했더라면 괜찮았을텐데, 이 역시 별로입니다. 냇의 일격 필살 방식이 대부분인 탓입니다. 게다가 서부극 같지도 않은 메리와 트루디의 육탄전은 필요도 없이 길어서 짜증만 나게 만들고요.
루푸스 빅의 최후도 허무합니다. 그는 냇 러브의 이복 형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총 한 번 쏘지 않고 조용히 죽습니다.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부하들은 대관절 왜 죽었단 말일까요? 이걸거라면 그냥 자살을 하면 되잖아요? 강함도 느껴지지 않고, 거대한 서사의 무게감도 느낄 수 없었던 최악의 결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연출과 연기보다 각본이 훨씬 중요하다는걸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같은 흑인 중심 서부극이라면, 차라리 30년 전 작품인 "파씨(Posse)"가 더 괜찮았던 것 같네요.

2025/11/08

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 마사키 도시카 / 이정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앞에서 노숙자 여성 마쓰나미 이쿠코가 살해당했는데, 그녀의 지문이 1년 4개월 전 지바현에서 살해된 히가시야마 요시하루의 가방에서 검출된 지문과 일치한다는게 밝혀졌다. 이쿠코의 과거 행적 수사를 통해, 그녀가 요시하루를 살해한 뒤 도쿄로 도주하여 노숙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공무원이었던 요시하루가 이쿠코의 생활보호지원금 지급을 거절했던게 동기였다.
하지만 경시청의 ‘파스칼’이라 불리는 순간 기억 능력자, 미쓰야 슈헤이는 주변 인물들의 진술을 분석하며 사건 이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가는데...

이 작품은 마사키 도시카의 장편 소설로, 경시청 미쓰야 슈헤이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전통적인 본격 추리나 수사물이라기보다는, 사회파 추리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는 마쓰나미 부부의 실직을 계기로 한 장년층 빈곤 문제입니다. 부부에게 닥친 경제적 어려움과 이를 무시하는 공무원의 행태는 직접적인 사건의 동기는 아니지만, 중요한 배경이 되지요. 보호가 필요한 시민에 대한 공무원의 무관심이라는 설정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두 번째는 SNS를 통한 허상의 행복 이미지에 중독된 현대인의 문제입니다. 행복해 보이려는 욕망과 실제 삶의 괴리, 그로 인해 놓쳐버리는 진짜 삶의 가치가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현실과도 맞닿아 있어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외에도 빈곤 부부를 노린 사기, 부부간 불화와 히키코모리가 된 자식과 같은 사회 문제들이 단편적으로 등장합니다.

사회적 문제와 엮이는 이야기도 볼만합니다. 이쿠코는 남편이 무리한 노동 끝에 사고사한 뒤, 행복해 보이는 히가시야마 부부를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 히가시야마 부부는 SNS와 주변 시선에 얽매여 행복한 부부인 척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후 아내 리사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요시하루가 딸 루미나를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 여겨 성적으로 접근하려 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루미나가 그를 살해했으며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이쿠코가 루미나를 돕기 위해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고 도주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전개도 깔끔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이쿠코가 노숙자 소년인 줄 알았던 ‘에이군’이 사실은 루미나였다는 반전도 괜찮았고요.

수사 과정에서 순간 기억 능력자 미쓰야 슈헤이의 관찰력도 잘 활용됩니다. 리사는 SNS 중독자였고, 노숙자 신분이 된 이쿠코를 도와준 이들은 이자와 유스케, 다카하시 형제, 그리고 루미나였다는 사실을 몇몇 사소한 상황의 관찰로만 추리해내는 덕분입니다.
초반부의 토끼 인형으로 일부러 가린 가족 사진이나 집 바깥에 꾸며놓은 꽃꽂이 장식, 그리고 중반 이후 햄버거 가게에서의 손님들 관찰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요시하루 사건과 이쿠코 사건 모두 우연이 지나치게 많다는 단점은 큽니다. 이쿠코가 미행한 날 우연히 루미나가 요시하루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거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남편의 무관심에 분노한 기무라 나루미가 이자와 유스케를 몰래 따라가 이쿠코와 마주치고 격분한 끝에 그녀를 살해한다는건 모두 과한 우연이라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이자와 유스케가 사실은 이쿠코 남편의 사고를 일으킨 트럭 운전사였고, 다카하시 형제가 이쿠코 남편을 빚쟁이로 만든 회사 사장의 아들들이라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에요. 인물들을 어떻게든 얽어놓으려는 시도가 지나쳤습니다.
이자와의 전처 나루미가 이쿠코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도 이자와 유스케의 동선과 SNS에 올라온 크리스마스 케이크 사진이라는 간접적인 증거를 통해 밝혀지는데, 이마저도 운에 가까운 단서에 의존한 것이고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 역시 아쉽습니다. 미쓰야 슈헤이의 관찰력은 몇몇 장면에서 돋보이지만, 이를 통해 밝혀지는 사실들은 사건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리사가 SNS 중독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건 작품 분량만 소비했을 뿐, 사건 해결과는 무관합니다. 이자와, 다카하시 형제, 루미나가 서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실제 범행과 직접 관련이 없고요. 그들이 범행 현장을 훼손(?)한 것도 일부러는 아니며, 범인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도 아니었기에 추리적인 재미를 느낄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미쓰야의 관찰력을 강조하려는 설정은 실제 사건 해결 과정에 효과적으로 녹아들지 못해서 분량 낭비에 불과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자와 유스케의 아들이 히키코모리라는 설정, 다카하시 형제의 등장도 분량 낭비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카하시 형제가 건물 관리 업무를 통해 이쿠코의 은신을 도왔다는 설명은 있지만, 굳이 그런 인물들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어머니가 살해당했던 과거사가 있는 순간 기억 능력자 미쓰야에 대한 설정과 기계같은 언행 묘사도 별로입니다.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볼 만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닌데, 뚜렷한 장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이 시리즈도 더 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5/11/07

딸과 함께 본, 영웅본색

요즘 딸아이가 무협 웹툰 "화산귀환"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 무협이 뭔지, 진짜 의리가 뭔지”를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치며 함께 감상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영웅본색" 입니다.

이 영화는 제게는 두말할 필요 없는 인생 영화인데, 딸도 재미있게 봐줘서 참 뿌듯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각자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참 특별하게 느껴졌고요. 요즘 아이 눈에도 주윤발, 장국영 두 배우는 여전히 멋지고 잘생겨 보였다는 점에도 놀랐습니다. ‘미’라는 기준이 시대가 변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만 인상 깊었어요.

하지만 역시 요즘 세대는 다르긴 다르더군요. 마크가 죽는 장면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물을 때, 80~90년대에 흔했던 자기파괴적인 정서가 지금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번에 다시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쉬운 부분들이 보이더군요. 편집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고, 음악의 연결이나 활용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액션 장면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낡은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티빙을 통해 감상했는데, 담배에 블러 처리를 해 놓은 건 정말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몰입을 심하게 방해하는 최악의 편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봐도 여전히 명작이라는 건 분명했습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 감탄하며 봤던 그 영화를, 이제는 중학생이 된 딸과 함께 다시 보며 감정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남았고요.

앞으로도 이런 명작들을 몇 편 더 골라서 딸과 함께 감상하고, 또 이야기를 나눠봐야 겠습니다.

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2025/11/01

백 인 액션 (2025) - 세스 고든 : 별점 1.5점

넷플릭스 제작 액션 코미디 영화입니다. 전직 비밀 요원 부부가 아이들을 낳고 평범한 삶을 살다가, 정체가 들통나면서 다시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반 비행기 액션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잘 설계되어 있고, 비행기 내에서의 사투와 추락, 이후 탈출까지의 과정이 설득력있게 묘사된 덕분입니다. 정체가 들통난 가족의 집을 습격한 악당들과의 자동차 추격씬도 볼만합니다. 변변한 무기가 없던 부부가 머리를 짜내 악당들을 상대하는 장면이 펼쳐지기 때문으로, 그 중에서도 멘토스를 넣은 콜라를 악당들 차로 던져넣어서 사고를 유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에요.
사춘기 딸과 부모가 펼치는 티키타카도 재미있고, 왕년의 명배우 글렌 클로즈가 노익장을 과시하며 등장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전 동료 척이 흑막이라는 반전도 잘 짜여진 편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에는 망작에 보다 가깝습니다. 우선, 영화는 전직 요원이 신분을 숨기고 살다 복귀한다는 진부하고 수없이 반복된 구조를 답습합니다. 새로운 점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워요. 사춘기 딸과의 갈등도 "트루 라이즈"의 복사판일 뿐입니다.

그나마도 가족이 영국으로 향한 이후는 각본과 액션 모두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척이 사이버 키를 손에 넣고도 가족을 죽이지 않는 상황부터 납득이 어렵습니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면, 후환을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구태여 부부를 살려두고 아이들을 납치할 이유가 없어요. 척의 정체가 드러나서 MI6 요원 배런이 같은 편임을 알고난 뒤에도, 배런에게 연락하여 같이 행동하지 않을 이유 역시 없고요.
액션의 밀도 역시 한없이 떨어집니다. 총이 있는데도 맨몸으로 싸우는 장면이 반복되는 탓이 큽니다. 맨몸 액션도 최근의 실전 액션 영화들에 비하면 타격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요. 

한 마디로, 중반 이후는 모든게 비논리적인 망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부부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버틸 만하지만, 이후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후속편을 암시하며 끝나지만 기대감은 전무합니다. 추천하기도 어렵네요.

2025/10/31

배트맨 이어원 - 프랭크 밀러 / 데이비드 마주켈리 : 별점 3.5점

프랭크 밀러 각본, 데이비드 마주켈리 작화의 한 권짜리 단일 이슈 배트맨 만화입니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분류되어 있기는 한데, 제 기준으로는 만화입니다. 

배트맨의 탄생을 다루는 이야기를 고든의 시선으로 풀어낸 게 특징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아닌 제임스 고든의 부임기와 고군분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거든요. 그래서 슈퍼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부패한 경찰 조직과 맞서는 고든 중심의 느와르 장르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배트맨도 전지전능한 영웅이 아니라, 늘 어딘가 다치고 실수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요.

프랭크 밀러 각본답게 이야기 완성도도 높습니다. 고든은 부패한 경찰 조직 안에서 고립된 채 홀로 싸우고, 브루스 웨인은 자경단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갑니다. 이런 각자 정의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노선이 여러 위기를 겪다가 최종 결전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부패한 경찰들이 무너지고 고든과 배트맨이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전개가 깔끔한 덕분입니다.

거칠고 묵직한 작화도 매력적입니다. 마초적이고 러프한 선이 느와르 장르 및 무거운 고담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본편 외에도 콘티, 인터뷰, 캐릭터 설정 등 다양한 부록이 수록돼 있어 소장가치도 높고요.

다만 독특한 점은 있다 하더라도, 배트맨 탄생 이야기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는 문제는 큽니다. 이를 뒤집을 만큼 전개에서도 극적인 드라마가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 주변 인물로 소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든의 아내나 불륜 대상인 동료 여성은 그렇다 쳐도, 캣 우먼 셀리나 카일은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더군요. 하비 덴트도 비중에 비해 존재감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고요.

그래도 배트맨 단편 그래픽노블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밀러가 왜 이 바닥에서 명불허전인지 잘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배트맨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5/10/26

디스펠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구수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벽 신문 담당이 된 초등학교 6학년 사쓰키, 미나, 유스케는 마을 오쿠사토정에 전해 내려오는 ‘7대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를 풀어 기사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쓰키에게는 1년 전 살해당한 사촌누나 마리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목적도 있었다. 마리코가 죽기 전 ‘6개의 불가사의’라는 괴담 글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쓰키는 벽 신문 취재를 핑계로 오컬트 애호가 유스케의 협조를 얻기 위해 벽 신문 담당으로 끌어들였다.

사쓰키는 논리적 관점, 유스케는 오컬트적 관점으로 괴담과 사건에 대해 추리하고, 추리 애호가 미나가 객관적으로 추리를 판단하기로 협의한 뒤 세 사람은 취재와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괴담이 오래 전 마을과 관련된 거대한 비밀, 그리고 '나즈테의 모임'이라는 조직에 대해 폭로한다는걸 알아내는데...

하무라-겐자키 컴비가 활약하는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최신작입니다. 괴담, 호러 및 오컬트와 추리를 엮고 있는 점에서 미쓰다 신조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리커시블"도 유사하다고 느껴졌고요. 몰락해가는 시골 마을,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과 현재의 사건이 엮이는 전개,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하여튼, 무슨 작품을 떠올렸건 이 작품만의 확실한 장점, 차이점은 명확합니다. 마리코 언니가 남긴 '6개의 불가사의' 이야기마다 숨겨진 진상을 알아내면, 마지막에 '일곱 번 째 불가사의'인 마을에 얽힌 비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6개의 불가사의 각각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오쿠사토정 ‘6개의 불가사의’

첫 번째 불가사의 - S 터널의 동승자 :
내용 : 산 중턱 S터널에 놀러간 학생들 중 터널 끝까지 걸어간 세 명을 제외한 한 명이 차 안에서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S터널은 일찍부터 '소몬' 터널로 알려져 있었는데, 소몬 터널은 휘어져 있어서 터널 끝에서 차가 보이지 않는다. 즉, S터널은 소몬 터널이 아니라 쭉 뻗은 사쿠라즈카 터널이었다. 이야기는 마리코 언니가 죽기 전날 사쿠라즈카 터널 안 멈춰있는 차에서 급사한 진케이 대학 교수 사건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불가사의 - 영원한 생명 연구소 :
내용 : 폐허가 된 신흥 종교 시설을 방문했던 학생들이 차례대로 무언가에 씌워져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영원한 생명 연구소는 종교 단체 시설로 사용하기 전에는 반도 정신 병원 건물이었다.

세 번째 불가사의 - 미시사 고개의 목이 달린 지장보살 :
내용 : K가 저주받은 목이 잘린 지장보살을 본 뒤, 누군가 K의 집을 찾아왔고 그는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누군가'가 정사무소, 병원, 도서관, '나즈테'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말에서 '나즈테의 모임'과 그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알려준다. 또한 이 이야기는 K의 시점과 '그림자 괴물'의 시점이 교차되는 서술 트릭물이기도 하다. 

네 번째 불가사의 - 자살 댐의 아이 :
F는 면허를 따자마자 자살의 명소인 댐 수문 전망대로 향했다. 그곳 전화부스 전화기에 적혀있던 번호에 장난삼아 전화를 걸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숨겨진 진상 : 916-7O62라는 전화 번호의 의미. 숫자 0이 아니라 영문 대문자 O라는게 핵심이다. 다섯 번째 불가사의와 연결하면, 이건 책의 분류번호와 페이지이다.

다섯 번째 불가사의 - 산할머니 마을 :
내용 : 시어머니를 산에 버려 죽게 만든 며느리 가족은 장례식에서 이상한 아이를 본 뒤, 한 명씩 차례대로 죽었다. 결국 의식을 주관하던 절의 주지스님까지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할머니가 쓴 관용구 - 날개 돋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등을 지다 - 를 통해 '책'을 주목하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과거 계획을 무시했던 채굴 때문에 수십 명이 죽은 광산 사고가 있었고, 광산 마을에서도 연이어 사람이 죽거나 정신 이상이 생기는 비극이 있었다는게 드러난다.

여섯 번째 불가사의 - 우물이 있는 집 :
내용 : 오래 전, 후카자와무라라는 마을은 집마다 있는 우물을 통해 이상한 돌림병이 돌았다. 우물에서 무언가를 본 정사무소 직원에 의해 마을은 댐이 생긴 뒤 수몰당했다.
숨겨진 진상 : 정사무소 직원은 '열 가지 약속 중 단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를 '녹스의 십계'에 빗대면, 화자인 정사무소 직원이 범인이거나 오컬트적 존재인 신이 실존한다는걸 알려준다. 


이렇게 괴담들 진상을 풀어내면서 점점 스케일이 커져가는 전개도 흥미롭고, 단순히 증언의 오류를 찾아내는 수준을 넘어 서술 트릭이나 리들 스토리 형태, 심지어 녹스의 십계까지 활용하는 추리적 장치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추리물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괴담의 진상뿐 아니라 마리코가 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설득력 있었습니다. 괴이가 사람들의 찬미를 통해 힘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축제를 연기했다는건데, 앞부분에서 교수가 목공소에서 축제 용품을 부쉈던 장면, 시바타 할아버지가 북이 이상했다고 했던 말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단서로 공정하게 제시됩니다.

유스케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오컬트적인 묘사 역시 인상적이며, ‘나즈테의 모임’이 은근히 아이들을 협박하고, 더 이상 진상 조사를 이어갈 수 없도록 만드는 장면은 꽤 섬뜩했습니다. 이야기 전반에 은근한 공포를 깔고가는게 꽤 매력적이었어요. 아이들 시점의 묘사들, 성장기로 보아도 흐뭇한 설정과 전개도 마음에 들고요. 아이들이라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 - 늦은 시간까지 멀리 돌아다닐 수 없음, 자유롭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음 등 - 도 적절히 활용됩니다.

하지만 일찍이 '괴이'가 후카자와무라 사람들을 희생시켜 힘을 모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마을의 신관 가문 출신 무녀, 정사무소 직원 등이 힘을 합쳐 '나즈테의 모임'을 결성했다, 조력자인줄 알았던 사쿠마가 괴이였다는 진상과 사쿠마와의 대결이 펼쳐지는 결말은 아쉽습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이형 호러 괴담으로의 방향 전환이 급작스럽고,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괴이가 초등학생들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패배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왜 유튜버와 시바타 할아버지를 죽였는지 모르겠고, 인간의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제약 조건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에 비하면 무게감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미쓰다 신조 쪽이 훨씬 더 무섭고, 그 존재에 대한 설명 역시 더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쓰다 신조 작품에서 괴이의 존재는 여운을 남기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등장하는 모든 기묘한 사건을 괴이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설명하지요. 이 작품처럼 명백하게 괴이가 등장해서 모든걸 정리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나즈테의 모임'이 초등학생들을 방관하는 설정도 이상했습니다. 어느 정도 알아냈다면 바로 진상을 알려주었어야 합니다. 그걸 못해서 모두가 다 죽을 뻔 했잖아요? 초등학생들을 방관해서 죽은 사람이 정장, 도서관 직원에 유튜버 두 명, 시바타 할아버지까지 모두 네 명인데(유튜버 댓글에 사쿠마를 만났다고 쓴 두 명도 포함하면 일곱 명), 불필요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괴담 풀이까지는 좋았지만 모든 진상과 반전이 드러나는 절정부와 결말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직전에 읽었던 두 편의 추리 소설이 소설로의 기본적인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졸작이라서 읽는 내내 즐거웠지만, 단점도 없지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평균 이상의 재미는 전해주는 만큼, 추리와 호러 장르 애호가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10/25

역대급 영지 설계사 - 문백경 원작/ 이현민 각색 / 김현수 작화 : 별점 3.5점

문백경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입니다. 각색은 "질풍기획"의 이현민, 작화는 김현수가 맡았습니다. 

소설 전생물과 영지물의 전형을 따르지만, 몇몇 차별화된 설정이 재미요소입니다. 우선 전생을 한 게 원작 소설 속 주인공인 하비엘이 아니라, 초반에 죽는 악역인 망나니 귀족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비교적 흔해진 설정이지만, 이 설정을 잘 살려서 이야기 몰입감을 높입니다. 이를 위해서 등장하는게 바로 주인공이 토목공학도라는 설정이고요. 로이드는 토목 지식을 바탕으로 닥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토목 공학에 최적화된 소환수와 능력들도 잘 어울립니다. 

주인공의 성장 방식도 차별화 요소입니다. 몬스터를 잡는 대신, 다양한 미션을 해결하며 레벨업이 진행되는데 과제들이 신선하고 재미있으며, 전략적인 요소도 함께 녹아 있거든요. 단순한 전투보다는 꽤 치밀한 계획과 인프라 구축 중심의 접근이 많다는게 특징이지요. 켄타우로스 폭주족과의 대결 결과로 경기장을 지어주고, 인어들에게 찜질방을 만들어 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각색을 맡은 이현민의 빠른 전개와 과감한 개그도 잘 어울렸고, 김현수 작가의 작화 역시 인물 디자인과 액션, 컷 구성 모두 빼어납니다. 이 둘이 합쳐서 시너지를 불러 일으킨 명장면이 바로 아래의 '고기 사주는 짱친'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개그가 넘쳐납니다.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인 전개 구조는 익숙하며, 결말 역시 깔끔하긴 하지만 특별한 여운은 남기지 않습니다. 지옥왕 헬카로스의 최후도 심심한 편이고요.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마무리된 작품으로, 완성도는 높습니다. 제가 본 전생물 중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 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전생물이나 영지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10/24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명칭이나 유래를 잘 알지 못했던 물건들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주는 책입니다. 원래는 매일경제 연재물입니다. 접할 때마다 흥미롭게 읽었는데,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와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습니다. 

단순한 사물 설명을 넘어, 그것들이 가진 인문학적 의미까지 함께 풀어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집 반찬으로 자주 나오는 자차이를 소개하면서, 중국에서는 자차이의 지역별 판매량이 도시화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소비되는 반찬으로 도시 거주 인구수와 비례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지표 역할을 하는 음식이 놀랍게도 커피라고 하네요. 이처럼 단순한 사물에서 출발해, 관련된 사회적 맥락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배달 음식 포장을 벗길 때 사용하는 랩칼을 다루면서는, 우리나라 배달 음식 문화의 역사가 함께 소개되고요. 과거 젓가락으로 그릇과 랩이 닿은 부분을 문질러 벗겨내던 '젓가락 신공' 소개는 저에게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초밥 사이에 넣는 인조 대잎에 대한 설명이 조지 오웰의 소설 "엽란을 날려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저자의 넓은 식견을 느낄 수 있었으며, 상표나 가격이 적힌 꼬리표를 고정하는 택핀 항목에서는 과거 서태지가 유행시키기도 했던, 흑인 문화에서 상표 태그를 떼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문화적 배경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여러가지 설 중에서도 '난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새걸로 가지고 있다'는걸 자랑하고 과시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건 확실히 그럴 듯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자부심의 표현이었다는 것이지요.

도어 스토퍼를 다루며 엘러리 퀸의 "용 조각 문 버팀쇠의 비밀"을 언급한 대목은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반가왔습니다. 참고로, 원래 문 버팀쇠는 여닫이창을 열린 상태로 고정하기 위해 받쳐 세우는 막대를 뜻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역이라고 하네요. 문이 천천히 닫히도록 하는 현관문 위에 달린 장치는 도어 체크, 혹은 도어 클로저라는 것도 도어 스토퍼 설명에서 소개되고요.

뚫어뻥의 어원은 흥미로운데, 1980년대 백광산업이 출시한 '백광 트래펑'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하수구 트랩에 펑크를 내는 도구라는 의미의 '트래펑'에, ‘뚫어’와 ‘뻥’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이 더해진 멋진 네이밍인데 아직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게 오히려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어원이라면 사이펀 펌프로 알고 있던 기름 펌프의 정식 명칭이 '간장 츄르츄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정보입니다.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일본의 기발한 발명가 닥터 나카마츠로, 그의 엉뚱하면서도 놀라운 발명 인생에 대한 짧은 소개도 인상 깊었어요.

여러 익숙한 물건들의 명칭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예를 들자면 중식당 회전 테이블의 '레이지 수잔', 신발끈 끝의 '애글릿', 끈이 통과하는 구멍인 '아일릿', 창문 잠금장치인 '크리센트', 마트 계산대에서 사용하는 막대는 '체크아웃 디바이더', 겨울 가로수에 묶는 볏짚은 '잠복소', 사원증 목걸이 끈은 '랜야드'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신장개업 가게 앞에서 바람에 춤을 추는 풍선 인형에도 이름이 있었는데, '스카이댄서'입니다. 원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 예술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디어를 낸 예술가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민셜, 하지만 특허는 협업했던 풍선 예술가 가짓이 등록했다고 합니다. 가짓은 유대인이었다니 그럴만도 하겠다 싶습니다.

그 외에도 과일을 감싸는 포장재인 팬캡이나 과일망이 재활용이 안 된다는 사실, 회 밑에 깔린 천사채의 한자가 '천사(天使)'가 아닌 '하늘이 내린 채소(天賜)'였다는 등 짧지만 밀도 있는 정보가 가득하고, 단순한 설명을 넘어 인문학적인 부분도 전해준다는 점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핵심이 되는 '그거' 말고는 도판이 부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연재물로 접했던 독자에게 별다르게 새롭게 전해주는 정보도 별로 없고요. '그거' 종류에 따라 분량도 조금씩 다르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인문학, 잡학 서적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볍게, 하지만 의미도 있는 독서를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