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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5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에 대한 유감.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2점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센텐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국내 미출간 단편집이라 하여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챗GPT를 통한 자동 번역이 어느 정도 보편화된 시대에, 이런 수준의 번역을 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래는 이 책의 "폴스타호의 선장"의 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는 비스킷 반 탱크,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커피콩과 설탕의 매우 제한된 공급이 남아 있었다. 후방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하리코 양고기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사치품이 많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50명의 인원이 먹기에는 매우 한정된 양이었다.

창고에는 밀가루 두통이 있고 담금질한 담배만 많았다. 모두 합쳐서 18일이나 20일 동안 절반의 배급으로 선원들을 지탱할 수 있는 양이었다. 

...

"여러 시즌 동안 우리나라에 온 배 중에는 오래 된 폴스타호 만큼 많은 석유 돈을 벌어들인 것이 없었고, 너희 모두가 그 돈을 나눠가졌지. 다른 불우한 녀석들이 와이프를 편안하게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너희들은 그 여유를 누렸다. 너희가 그것을 얻은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해야 하며, 우리가 실패한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다. ."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담금질한 담배'라니....  아래는 원문(저자 사후 70년이 지난, 저작권이 풀린 퍼블릭 도메인이라 무료입니다)을 찾아서 챗GPT에게 번역을 시킨 결과물입니다. 그냥 보아도 수준 차이가 확연하지요. 번역본이 임의로 원문을 줄인 것도 눈에 뜨이고요.

선수 쪽에는 비스킷 반 통,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그리고 커피콩과 설탕은 아주 적은 양만 남아 있었다. 선미 쪽 창고와 보관함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해리컷 양고기 등 사치품에 가까운 식료품들이 제법 있었지만, 승무원 50명에게 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저장실에는 밀가루 두 통과, 담배는 무제한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져봤을 때, 모든 인원이 절반의 배급량으로 나눠 먹어도 18일, 길어야 20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

“그동안 이 땅에 오는 배들 중에서 ‘올드 폴스타’호처럼 많은 기름 돈을 벌어들인 배는 없었고, 여러분 모두 그 덕을 봤잖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집에 아내를 안심시키고 떠났지만, 다른 불쌍한 놈들은 돌아와 보니 여자가 구빈원에나 들어가 있지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를 원망할 수 있다면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이번 전에 대담한 모험을 해서 성공했었고, 이번엔 실패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울고불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 "

하여튼, 이따위 결과물을 돈 받고 팔려고 했다는게 황당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기에 점수를 따로 주지는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책은 사라져주면 좋겠네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북극성 호의 선장"은 다른 단편집에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단편은 무료 텍스트를 챗 GPT에 번역을 시키는게 훨씬 나을겁니다.

2025/04/04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김성준, 김주식 : 별점 4점

미친 항해 - 8점
마이크 대쉬 지음, 김성준.김주식 옮김/혜안

마이크 대쉬가 집필한 역사 논픽션입니다. 1628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바타비아 호가 이듬해 6월, 현재의 소호주 해안 인근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한 뒤 생존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BBC History Magazine과 History Today 등의 권위 있는 역사 전문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항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선장이었지만, 직급상 최고 책임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대상인' 프란시스 펠사아르트였습니다. 선장 야콥스와 펠사아르트 사이의 갈등은 여자 문제 등으로 항해 중부터 깊어졌고,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부상인'이자 전직 약제사였던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였습니다. 그는 선장을 꼬드겨 선상 반란을 모의했는데, 바타비아 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면서 계획이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사아르트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바섬으로 떠난 틈을 타서 코르넬리스는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체계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식량과 식수를 가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서, 반항할만한 불순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펠사아르트가 구조대를 이끌고 보물을 회수하러 돌아오면, 그 배를 점령해 해적 생활을 하려는 계획으로요. 그래서 병자와 노약자,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약 115명에 달하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계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회수할 보물이 많기에 구조대 인원이 많지 않을거라는 코르넬리스 생각대로 구조대가 움직였거든요. 그러나 말라 죽으라는 의도로 다른 섬으로 보내졌던 위이버 헤이스와 건장한 남성들이 우물을 발견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코르넬리스의 학살을 알게된 후 방어 거점을 구축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코르넬리스는 친위대를 이끌고 위이버 헤이스를 속이려다가 사로잡혔고, 코르넬리스의 후임이 일당들과 함께 위이버 헤이스 섬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대상인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스럽다고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라웠어요. 여튼, 위이버 헤이스와 코르넬리스 세력은 각각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으로 사람을 보냈고,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에서 위이버 헤이스가 이겨서 폭도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코르넬리스의 음모는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난파 후 서사만으로도 영화나 소설로 각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코르넬리스가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학살을 지시하며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세계 전생물'로 바꾸어 보아도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와 조직(동인도 회사)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종교론과 조직에서의 직위를 무기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는게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저자 마이크 대쉬는 방대한 사료 조사와 기록 분석을 통해, 사고 외에도 각 인물의 생애와 심리, 사회 구조적 배경까지 책에 촘촘히 담아냅니다.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가 처한 시대와 개인적 몰락, 종교적 배경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업 구조와 식민 경영 방식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납니다. 실제로 코르넬리스의 생애만 따로 정리한 분량이 3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이 꼼꼼하게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놀라운 수준입니다. 코르넬리스의 아내에 대해서까지 최대한 조사해서 수록했을 정도니까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당시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설명 역시 상세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항해 중 먹거리 설명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바다 고기를 낚으면, 누가 고기를 낚든 매일 맨 처음 낚은 고기는 선장의 몫이었고 그 다음 12마리 정도는 상인과 사관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인정된 순서에 따라 고기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게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그래서 선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조림에 든 고기와 콩, 건빵으로 알려진 딱딱한 빵인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는 음식의 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 도축한 돼지와 소를 사들여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피도 빼내지 않은 채 바닷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리된 고기는 쌌지만, 아주 짜서 조리를 하려면 청수에 담가 짠 맛을 빼내야 했는데, 항해 중에는 한정된 식수를 절약하기 위해 바닷물에 넣어 끓였다는군요. 얼마나 짰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말린 생선도 싣고 다녔는데, 대구가 대부분이었다네요. 말린 대구는 스튜로 끓여서 역 시 말린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함께 먹었고요. 그 외 먹거리들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호 선원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잘 먹고 잘 마신 편이라는게 충격적입니다. 부과된 노동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가혹했던 항해에 대한 설명 등 재미있는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이렇게 재미와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 모두 빼어난데, 코르넬리스가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이라던가, 후일담 이후 코르넬리스가 정신병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 비중이 지나치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들 후예가 살고 있을거라는 추측도 마찬가지고요. 섬에서의 학살도 논픽션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책의 디자인과 구성도 옛스러워서 읽기 불편했고, 도판도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입니다. 난파에 대한 논픽션을 세 권째 읽게 되었는데 - "바다 한가운데서", "메두사 호의 조난" - 대체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장르인 것 같네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4/01

지브리 스타일, 브루스 팀 스타일(?) 경성탐정록

최근 유행하는, 챗GPT를 이용한 지브리 스타일 일러스트 열풍에 동참해 봅니다. "경성 탐정록"의 설홍주와 왕도손을 그리도록 시켜보았습니다.

결과물이 정말 그럴싸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뒤이어 제가 좋아하는 브루스 팀 스타일로도 만들어 보았는데, 이건 좀 미묘하네요. 여튼, 다른 스타일도 계속 시도해봐야겠습니다.



2025/03/30

전쟁과 군복의 역사 - 쓰지모토 요시후미 / 김효진 : 별점 3점

전쟁과 군복의 역사 - 6점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군사사 전문가인 쓰지모토 요시후미가 집필한 책으로, 전쟁과 군복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방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조명합니다. 인류 최초로 군복 개념이 등장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를 시작으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군복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시대별, 지역별 군복의 변화를 다루면서도, 단순한 복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초로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와 독일의 효웅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격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제국의 결전에서 대활약했던 폴란드 왕 얀 3세의 유익 기병대 '후사리아(윙드 후사르)' 이야기, 군인왕 프리드리히의 생애 등 군복과 불가분한 주요 전사 및 영웅들의 활약상을 병행해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당연히 복식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폴란드 중장기병 후사리아의 복장 묘사처럼요. 등에 장착한 거대한 스크시드워(천사의 날개 모양 장식)부터, 장창 코피아, 휘어진 군도 사블라, 2미터 장검 콘체슈, 권총 반돌레트, 동양풍 투구 시샤크,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까지 장비 일체를 착용 이유와 이후 발전 상황 등까지 모두 알려줍니다. 아래와 같이 도판도 함께 제시되고요.

복식으로서의 군복에 대한 정보도 흥미롭습니다. 군복이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되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화약은 짙은 연기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전장의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총기의 명중률도 낮아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피하는 것보다 아군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원색과 금·은 자수, 매듭 장식이 선호되었다고 하네요. 또, 화려한 군복은 군대의 상징이자 국가 권위의 표상으로 기능해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이 이를 의도적으로 장려했다는 설명은 군복이 단순한 실용품이 아닌 국가 전략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고요. 또한 병사들에게 눈에 띄는 군복을 입히면 탈영을 어렵게 만든다는 설명도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프랑스 총사대의 복장, 이른바 '타바드'에 대한 고증 또한 세밀합니다. 대부분 대중매체에서 보아온 파란색 상의는 실은 루이 14세 시대의 것이며, 루이 13세나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에는 다른 복장이었다고 하네요. '늑골복'이라 불린 헝가리계 경기병의 복장이 오스만 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1848년 무렵, 재인도 영국군의 선도 군단(Corps of Guides)을 이끈 해리 버넷 럼스덴 중위(후에 중장. 1821~1896 년)가 고안한 진흙으로 염색한 군복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우르두어에 카키 (Khaki, 진흙 색)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카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위장 효과를 의식한 군복이라던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세계 최강의 패권국은 대영제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육군이 전 세계에 유행시킨 세 가지 아이템은 승마 바지와 승마 부츠의 조합, 어깨에 두르는 샘 브라운 벨트, 오늘날 일반 신사복으로 널리 정착한 '트렌치코트' 이고, 세계 최초의 위장복은 2차대전 독일 친위대가 도입했다는 등의 재미난 정보가 가득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다소 산만하고 두서없이 전개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주로 근대 유럽에 치우쳤다는 비중 문제도 있고요. 또한 소개된 내용들의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학술적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전사(戰史)'와 함께 입체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전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29

산마처럼 비웃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5점

산마처럼 비웃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고키 가문의 넷째 노부요시는 미뤄두었던 성인식을 위해 고향 구마도로 귀향했다. 산속 사당을 순례하던 중 길을 잃고 흉산 부름산에 들어선 노부요시는 가스미 가문의 다쓰이치 일가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 날, 다쓰이치 가족은 밀실인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나선 노부요시는 과거 광부와 사기꾼들이 살해되었다는 금광터 여섯 무덤굴에서 망자의 비명을 듣고 도망치다가 사악한 존재까지 목격하고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도조 겐야는 노부요시의 병든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마도로 향했다. 지역 유지인 리키하라와 부름산에 오른 겐야는 다쓰이치의 집에서 얼굴이 불타고, 구전 동요의 지장 형태를 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다쓰지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쓰지 아들 고지의 시신이 흑색지장 사당에서 역시 동요에 나오는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후 리키하라도 실종되었고, 겐야는 다니후지 형사와 함께 여섯 무덤굴에서 토막난 리키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쓰지의 장례가 열리던 날, 가설 극장에 불이 나 경찰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 가스미가에 남은 다쓰지의 아버지 단고로, 아내 시마코, 첩 슌기쿠도 동요 속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하는데....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찾아 읽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네 번째 출간작으로, 반 년 전에 읽었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바로 전작입니다. 2008년 일본 현지 출간 당시에 각종 랭킹 상위권을 휩쓸었었지요.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만큼 대담한 추리와 충격적인 진상이 돋보입니다.

진상은 다쓰이치 씨 가족과 다쓰지 씨 가족이 실은 동일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다쓰이치의 딸 유리는 사실 소년 다쓰하루가 변장한 것이었고, 이들은 마을에 들어온 유랑극단 ‘태평극단’으로 모습을 바꾸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부요시가 유리에게서 느낀 섬뜩함은, 결국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위장한 데서 비롯된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단발머리는 연극 "거미줄 활시위"에 등장하는 단발머리 시동의 가발로, 그것 자체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요. 고지와 히라히토가 닮은 이유 또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다쓰지의 얼굴을 훼손한 이유 역시 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얼굴이 온전하게 발견되면, 다쓰이치와 다쓰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쓰지 일가가 변장을 택한 동기도 충분히 납득할 만합니다. 작년 백중 무렵, 다쓰하루가 부름산에서 금이 섞인 암석을 발견했고, 이를 다쓰지 혹은 고지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가즈토리 가문 소유였고, 가즈토리 리키하라의 사위 마사오는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금을 빼앗기고 채광 기회도 잃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쓰지 일가는 다쓰이치 가족으로 변장하여 몰래 금을 캐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쓰이치 가족이 사라진 밀실 트릭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 유리가 혼자 남아, 두 문의 안쪽에 직접 빗장을 걸고 노부요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목욕통을 가리는 칸막이 뒤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겼고, 노부요시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는 사이 2층으로 올라가 노부요시가 자던 방에 다시 숨은 것이지요.

이외에도 노부요시가 성인식 도중 겪었던 괴이 현상들에 대해, 겐야의 추리로 합리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야생 여우나 염주 비둘기의 울음이었고, 소름끼치는 절규는 발정기의 야생 여우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다른 짐승들과 대치하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산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파였으며, 나병에 걸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게라의 길’이라는 외길을 이용해 이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무 위의 시뻘건 불덩이는 날다람쥐였고, ‘어어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형들이 노부요시를 찾으러 산에 들어왔을 때 외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작품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서를 흘려두고, 이를 추리를 통해 조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정통 본격 추리물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다쓰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시신 훼손에 사용한 '두꺼비 기름'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점은 추리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다쓰지, 고지, 시마코, 슌기쿠, 다쓰하루, 노부요시 단 여섯 명뿐입니다. 이 중 다쓰지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아이 다쓰하루가 범인일 수는 없기에 남는 사람은 노부요시뿐입니다. 

다쓰이치 가족의 정체를 밝혀내는 단서로, 소노코의 혼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활용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노부요시가 소지한 물건 중 상대가 알지 못했던 건 혼례 시간 변경을 알리는 편지뿐이었고, 그걸 읽고 이들이 갑작스레 자리를 떠났다는 걸 통해 정체를 유추해낸 것입니다. 이유는 '태평극단'이 혼례 축하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구전 동요를 따라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인데,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공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 동요가 ‘금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어서, 사건의 핵심 동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은 전개가 조금 처지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진상인 ‘다쓰지 일가의 변장’ 설정의 설득력 부족입니다. 아무리 가즈토리 가문과 가스미 가문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해도, 어릴 적 친구였던 리키하라가 다쓰지를 알아보지 못한 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가족 모두가 변장을 했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금광을 몰래 캐기로 했다면 다쓰지와 고지만 변장했어도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다쓰지만 변장해서 머무르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불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조 겐야는 처음에는 마사오를, 그 다음에는 수행자 단부로 변장한 다쓰이치, 다쓰지의 동생 다쓰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마사오는 금광을 캐는걸 주장해 왔었기에 이를 반대했던 장인과 몰래 금광을 캐던 다쓰지 일가를 없앨 수 있었고(딸 유리의 실종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고요), 다쓰조는 이미 금광 때문에 여섯 명이나 살해했었으니까요.

반면, 진범인 노부요시의 동기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인식을 실패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며, 다쓰이치 일가가 장난을 쳤다고는 해도, 이로 인해 여섯 명이나 살해한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입니다. 그럴 거였다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혔던 형들을 먼저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또한 금맥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묘사하다가, 결국 사냥용 총에 사금을 넣어 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금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런 사기를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소하지만 다쓰이치 가족이 나타난건 작년 백중 무렵, 태평극단이 나타난건 작년 여름께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건 국내 독자에게는 이해가 힘든 부분이라 아쉬웠고요. 이런건 번역할 때 통일시켜 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시리즈 특유의, 일본 촌락에 전승되는 괴담이 실제 사건과 얽히며 전개되는 플롯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단점이 커서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입니다.

2025/03/28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 강신몽 : 별점 2.5점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 4점
강신몽 지음/이다북스

국내 ‘법의학의 대부’로 불리는 강신몽 교수의 에세이 집. 15년 전 "타살의 흔적"이라는 책으로 접했던 분이지요.

저자의 생각과 주장을 실제 사례와 엮어 이해하기 쉽게 소개해 주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칼에 찔린 깊이나 칼몸의 전체 길이 중 얼마가 들어갔느냐 하는 것은 '힘껏' 찌르거나 '살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해자 가슴에 칼몸이 25센티미터 박혔다고 5센티미터 들어간 것보다 다섯 배의 힘으로 힘껏 찌르거나 지속적으로 힘을 가한 것이 아니라는 실제 사례를 드는 식입니다. 

의료 처치가 사망 원인을 왜곡할 수 있는 경우도 소개됩니다. 대표적으로는 심폐 소생 중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례 등인데, 이렇게 응급처치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들이 오히려 폭행의 증거로 오해될 수 있고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특정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한 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는 경우를 의미하는 자세성 질식은 새롭게 알게 된 개념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거나, 놀이기구의 쇠봉에 목이 걸려 있는 상태로 사망한 사례 등으로 겉으로는 타살의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추리 소설에 사용될 법한 내용이 아닐까 싶네요.

또한, 20세기 초, 한 남성이 세 명의 아내를 차례로 욕조에서 익사시킨 후 보험금을 타냈던 "욕조 속의 신부들 사건"처럼 법의학이 범죄 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례도 흥미로왔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단순 익사로 처리될 뻔했지만, 법의학적 검토를 통해 연쇄 살인이 밝혀졌다는군요.

이외에도 법의학적 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한 다양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은건 아래와 같습니다.

  • 공기색전증: 자위행위를 하던 중 질 속으로 공기가 유입되어 혈관을 통해 심장으로 들어가 사망한 사례. 부검을 통해 원인을 밝혀내었음.
  • 건성 익사: 물에 빠졌지만 물을 거의 마시지 않은 채 사망한 사례. 갑작스러운 찬물의 자극이 미주신경을 통해 심장을 멈추게 했을 가능성이 제기됨.
  • 열사병: 핀란드의 ‘사우나 챔피언십’ 참가자가 사우나 안에서 장시간 버틴 후 사망한 사례와, 국내에서 술을 마신 후 찜질방 한증막에서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례 등을 통해 고온 환경의 위험성을 경고함.
  • 황화수소 중독: 계란 썩는 냄새가 나는 가스에 노출되어 호흡 마비로 사망한 사례. 산업 현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위험할 수 있음을 강조함.

다만 법의학자가 탐정이 아니라는걸 지속 강조하는건 좀 별로였습니다. 법의학자도 부검 결과를 통해 충분히 자신의 의력을 피력할 수 있을텐데, 그건 법의학자의 영역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거든요. 당연히 경찰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겠지만, 반대로 보면 좀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에세이라서 개인 감상이 많이 포함된 점, 사례들은 저자의 주장과 견해를 뒷받침하는 용도로만 인용되어 후일담이나 결말은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점도 좀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보다 전문적인 법의학 사례집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25/03/24

법정유희 판례 검토

"법정유희"를 읽고, 가오루가 고발했을 때 판결이 어땠을지 궁금하여 ChatGPT에 해당 사건의 판결을 요청해 보았습니다. 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피고 1 (여학생 - 무고 및 명예훼손)

  • 징역 3~6년
  • 무고죄 및 명예훼손죄 적용.
  •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으나, 법적 인과관계 인정 여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수 있음.

2. 피고 2 (담당 검사 - 부실 수사 및 직권남용 의혹)

  • 형사처벌 가능성 낮음, 대신 감찰 및 징계 조치 예상
  • 기존 판례에 따르면 직권남용죄 적용이 어려우나, 감찰을 통해 정직·해임 등의 징계 가능성 높음.

3. 기존 유죄 판결 번복 가능성 (재심 청구)

  • 재심 청구 후 무죄 판결 가능성 큼
  • 여학생의 무고가 밝혀지면, 피해자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해 판결을 번복할 수 있음.
  • 기존 판례(익산 택시기사 사건 등)와 유사한 사례로, 무죄 선고 가능성 높음.

4. 국가배상청구 가능성

  • 유족이 국가배상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 받을 가능성 높음
  • 검찰의 부실 수사 및 무고한 사람에 대한 기소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으므로 국가배상법에 따라 보상 가능하며, 기존 사례를 보면 수억 원대 배상 판결이 나온 전례가 있음.

결론적으로, 한국 기준으로 미레이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으므로 징역형을 선고받을 테고, 검사측은 특별한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선고를 받고, 국가 배상을 받는 게 현실적인 결론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 형량이라면 직접 복수를 꿈꾼 게 아예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죽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좀 애매하군요. 결론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으니까요...

2025/03/23

법정유희 - 이가라시 리쓰토 / 김은모 : 별점 2.5점

법정유희 - 6점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토대 로스쿨에는 '무고 게임'이라는 학생들이 진행하는 모의 공개 법정이 있었다. 여기서 판사 역할을 하는건 학교 최고의 천재 유키 가오루였다. 

동급생들이 졸업하고 약 일 년 뒤, 가오루의 친구였던 구가 기요요시는 메일을 받았다. 무고 게임이 다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에 적힌 시간에 모교를 찾은 구가는, 가오루의 사체와 피투성이인 동급생이자 친구 미레이를 발견했다. 살인범으로 기소된 미레이는 구가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사실 미레이와 구가는 어린 시절 보육 시설에서 함께 했던 친구로 함께 치한 사기를 치고 살았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일본 신예 작가가 쓴 법정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만장일치로 제62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했으며,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3위와 신인상, 2020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4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3위에 랭크되는 등 수상이력이 아주 화려합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속에서 꽤 많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핵심은 유키 가오루 살인 사건입니다. 사실 사건은 가오루의 자작극이었어요. '일본 검찰이 실수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법정에서 증거를 공개'하려고 미레이를 끌어들여 자살(?)했던 겁니다. 이 계획 안에 여러가지 법률 이론과 지식을 효과적으로 녹여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고요. 작가가 현직 법조인인 덕분이지요. 특히, ‘동해보복’ 이론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정당한 죗값'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가오루는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미레이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정당한 재판을 하지 않은 사법기관도 같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죗값은 두 측이 아버지의 무고함을 밝히는 것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판단해서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지요. 단순히 미레이의 생명을 노리거나 미레이에게만 죄를 묻는 복수를 넘어서는, 진지한 법학도가 생각할만한 타당한 동기였습니다. 법적으로도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더러, 작 중 가오루의 언행으로도 동기를 설득력있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상을 마지막까지 숨기면서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구가가 계획한 ‘무고의 제재’ 전략도 그럴듯 했습니다. '무고 게임'에서 심판자가 부정을 저질렀음이 증명되면 심판자 본인도 벌을 받는다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가오루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로스쿨 학생들이 즐기는 모의 법정 ‘무고 게임’ 설정이 가오루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잘 짜여진 점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미레이를 도청하고 협박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과정도 추리적으로 나쁘지 않고요. 법정에서의 공방도 긴장감 넘치도록 잘 묘사됩니다.

법정에서 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어 미레이의 무죄가 밝혀진 후, 사실 가오루는 죽을 생각이 없었고 미레이가 살해했다는 반전도 강렬합니다. 미레이와 구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치한 치한 사기 및 상해죄에서 구가를 보호하기 위해 미레이는 가오루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앞선 회상과 법정 장면을 통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춥니다. 구가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겠다고 결심하는 결말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요.

그러나 치밀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진행되지만, 결국 미레이의 무죄는 사건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으로 증명된다는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너무 명확한 증거라서 다른 계획은 어차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또, 비디오 카메라가 사건 현장에 장치되어 있었다는데 이를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비디오 카메라에서 뺀 SD 카드에 암호가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카메라를 치우고, 바로 SD 카드를 빼서 구가에게 전달하면서 암호화를 했다는건데 말도 안돼지요. 더불어, 비디오에 반전을 위한 결정적인 장면인 ‘미레이가 가오루를 살해하는 순간’만 찍히지 않았다는 점도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가오루의 계획에도 허점이 많습니다. 미레이와 구가는 오랜 시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구가가 미레이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면 가오루가 남긴 미레이의 유죄를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 - 동영상 외 녹음 파일 등 - 는 무의미해집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구가는 검찰이 기소하기 전에 SD 카드 속 동영상을 검찰에 제공하여 불기소 처분을 받아내려 했을 테니까요. 가오루의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 증거들은 은사인 나쿠라 교수에게 맡기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오루가 저지른 죄에 적절한 벌을 선택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기 위해서 무고 게임을 만들었고, 패자에게 벌을 선고하면서 죄를 인정하고, 벌을 결정하는 경험을 쌓았다는데 이건 좀 억지였어요. 가오루의 계획은 적절한 벌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사심이 담긴 판결에 가까왔으니까요. 가오루가 법에 미친 천재라는 설정을 선보이기 위한 장치로만 무고 게임을 사용하는게 바람직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 해결이 동영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단점은 크지만,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들 정도의 강한 흡입력은 충분합니다. 이런 재미 덕분에 영화화까지 되었겠지요. 어떻게 요약해서 영화로 만들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다면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만 hit

몰랐는데 통계를 보니, 어느새 방문자 수가 20만 명을 넘었더군요.

이글루스 시절이었던 2008년에 20만 hit에 대한 글을 올렸었는데, 17년이 지나서 다시 비슷한 글을 반복하는게 뭔가 기묘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무한의 연쇄를 반복하는 환술에 갇힌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기쁘네요. 변방의 마이너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위니프리드의 유골이 있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그가 유골 이전을 반대한 탓이었다.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지만, 리샤르트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도 어렵다는 점입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5/03/21

마트료시카의 밤 - 아쓰카와 다쓰미 / 이재원 : 별점 2.5점

마트료시카의 밤 - 6점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리드비

94년에 출생하여 2017년 데뷰한 추리 소설계의 신성이 발표한 두 번째 책입니다. 신예 작가의 재기넘치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단편 네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마지막 수록작 외의 수록작 모두에서 추리 소설 매니아의 향취를 짙게 풍긴다는 점입니다. 모두 코로나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어서, 등장인물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했고, 기발한 작품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억지스러운 설정이 많고, 너무 트릭과 반전에 열중한 느낌이 드는건 좀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험한 도박 - 사립 탐정 와카쓰키 하루미"

제목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연상시킵니다. 서점과 관련된 여탐정이 등장한다는 설정도 비슷하고요. 헌책방이 주요 무대라는 점에서는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작 중 핵심 소재인 유가미 유즈류의 "얼룩무늬 눈밭"은 가공의 작품이지만, 이외에는 모두 실존하는 유명 작품들이 대거 언급되어 재미를 더해 줍니다. "병든 대형견들의 밤"이라는 작품을 극찬하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그 외 작품들에 대한 소개도 인상적이고요. 책 소개만 써도 먹고 살겠다 싶을 정도로 잘 쓰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마키무라 신이치의 뒤바뀐 가방을 찾던 탐정 '와카쓰키 하루미'가 알고보니 신이치를 살해한 범인이었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서술 트릭을 도입해서 효과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를 와카쓰키 하루미의 명함이 단 한 장 뿐이었다는 핵심 증거를 통해 잘 알려주고요. 와카쓰키 하루미가 추리작가 히루마 다카하루와 동일인이라는 반전도 괜찮았어요.

그러나 마침 마키무라를 죽인 날, 범인의 살인 증거가 담긴 가방이 뒤바뀌었다는 상황은 억지스럽고, 명함이 한 장이라는게 증거라는 주장은 빈약합니다. 명함이 정말 한 장 밖에 안 남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또, 명함은 얼마든지 추가로 만들 수 있는데 탐정 명함 한 장으로 탐문 수사를 이어나가는 모습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경찰 신분증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헌책방, 고전 추리 명작, 추리 매니아 등 좋아하는 소재는 한 가득인데,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2021년도 입시’라는 제목의 추리소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꿈꿀만한 작품. 대학교 입시에 추리 소설의 진범 찾기가 출제된다는 설정이거든요. 출제 범위로 아유카와 데쓰야, 다카기 아키미쓰, 엘러리 퀸, 아야쓰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언급되며, 실제 시험 문제도 한 편의 추리 소설의 문제 편입니다. 이런 대학이 있다면 꼭 한 번 시험에 응시해 봐야 겠습니다. 

전통적인 소설 구성이 아니라 뉴스, 인터뷰, 각종 보도 자료와 커뮤니티 의견들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여러 명이 각자의 추리를 펼치는데 효과적이었다 생각되네요. 해답으로는 유명 학원 강사, 수험생 및 대학 측의 제시되어 추리적으로도 풍성하고요.

이 중 학원 강사는 6분할 화면, 생일 선물이 놓여진 탁자 위에 놓여진 사물의 개수가 6개라는 점에 착안하여, 원격 생일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5명이 아니라 6명이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이 친구는 왕따라 모두가 없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범인이 선물한 탁상 선풍기가 현장의 연기를 흩날리게 만들어 컴퓨터 위치를 알아냈다면서요.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여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착안점은 재미있었습니다. 범인 이름까지 소설 내에서 짚어내는 발상은 놀라왔고요. 확실히 카리스마 학원 강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수험생의 추리는 범인은 코드를 더듬어 컴퓨터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고, 그렇다면 범인은 피해자 방에서 나타났으며, 범인은 에나미 에리라고 추리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도 앞의 지문을 통해 상세하게 들고 있고요. 이 정도면 합격을 시켜도 무방한 좋은 추리였습니다.

이 둘에 비하면 대학 측에서 제기한 해답은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피해자가 쓰러진건 연극이었고,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던 친구 오우가 범인이었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간단한 답이거든요. 이런걸 해답이라고 제시하고, 앞서 지문에 있던 단서들 중 불리하거나 오독할 수 있는걸 멋대로 삭제해 버렸으니 이 수험을 주도한 기자키 교지로 교수가 짤리는건 당연합니다. 제가 수험생이더라도 가만 두지 않았을거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잘 펼쳐놓고는 있는데, 딱 한 가지가 아쉽습니다. '무한대'라는 대학 내 동아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를 찍어내기 위해 이런 입시 시험을 기획했고, 시험에 통과했던 신입생을 낚아챈다는 진상이자 반전입니다. 이는 완전히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일개 동아리가 입시를 의도한대로 진행시킬 수 있다는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차라리 획기적인 새로운 대학 입학 시험이 도입되었다는 설정으로 문제편, 여러 사람의 해답편을 소개하고 결말로 정말 좋은 제도였다!며 추리 시험이 전국으로 확산된다는 결말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마트료시카의 밤"

무대에서 2인극을 펼치면서, 과거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드러낸다는 내용으로 작가가 편집자에게 연극을 제안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알고보니 편집자는 작가의 부인과 불륜 관계였고, 작가는 편집자의 지문을 과도에 묻히기 위해 연극을 벌였습니다. 이미 아내를 과도로 살해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편집자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협박에 나섭니다. 궁지에 몰린 작가는 편집자가 진짜 범인이라는걸 추리해내고요. 

이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재미있었습니다. 까면 깔 수록, 열면 열 수록 계속 새로운 진상이 밝혀진다는 것에서 제목이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이를 '양파형'이라고 부르는데, "발자국"이라는 영화를 참고한 모양이네요. 

작 중 금고 다이얼을 여는 암호로 "심장과 왼손", "요도妖盜 S 79호", "붉은 오른손", "대여 보트 13호", "화려한 유괴", "다이얼 7을 돌릴 때"이 언급되는건 과연 추리 매니아구나 싶었고요. 이 작품들의 구성도 작가의 장치 중 하나라는 것, 그 외 사소한 대사들이 모두 단서가 된다는 구성도 치밀한 편입니다.

하지만 원작자인 소설가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연극 연출가가 알아채 협박하기 위해 무대를 꾸몄고, 소설가가 이를 이용해 연출가와 손을 잡고 다른 작가들을 협박할 계획을 세운다는 결말은 억지스럽습니다. 소설가가 아내를 죽였던 사건의 진상을 무대에서 폭로한다고 해도 그게 소설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요? 이미 십여년 전 사건인데다가 증거도 없는데 말이지요. 저는 오히려 연출가가 무고죄로 고소당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는 과거 사건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하면 되니 일석이조일거에요. 게다가 이 뒤에 이어지는, 이건 전부 영화였다는 반전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나치게 '까서' 오히려 감점이 되어 버리고 말았네요.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입니다. 그냥 앞부분 연극으로만 끝내는게 좋았을겁니다. 실제로 연극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었을 이야기니까요. 

"6명의 격앙된 마스크맨"

대학교 복면 레슬러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뛰어났던 레슬러 '센론 마스크 49세(하자마 지로)'가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복면 레슬러의 마스크가 찢어져 있었던 것, 그리고 마스크 내부 혈흔에 주목하여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앞서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레슬링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은 구성도 마음에 듭니다. 사람들이 하자마 지로로 알고 있던 '센론 마스크 49세'의 정체는 지로의 형 가즈토시였고, 피해자 하자마 지로가 가즈토시를 죽이려다 되려 죽고 말았으며 이 탓에 복면을 찢을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은  '복면 레슬러'가 범인이자 피해자였기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 여러가지 설정 - 마람프와 지로가 전날 술을 마셨던 영수증 등 - 도 단서로 활용될 수 있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유쾌하고 떠들썩한 분위기도 잘 어울리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프로 레슬링 팬으로서, 세계 최초라고 해도 무방할 복면 레슬러 살인 사건을 다룬 추리 소설에는 나쁜 점수를 주기 어렵지요. 수록작 중에서 완성도로는 가장 좋기도 하고요.

2025/03/16

나홀로 온천 여행 - 다카기 나오코 / 이소담 : 별점 2점

나홀로 온천 여행 - 4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이소담 옮김/살림
일본의 에세이 만화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나홀로 여행" 후속작. 이번에는 혼자 떠나는 온천 여행을 중심으로 일본의 다양한 온천지와 그곳에서의 경험을 특유의 여유로운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큰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도 일상의 여행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게 언제나처럼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정말 쉬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에요.

작가의 다른 여행기와 다른 점이라면 여행 과정(특히 기차 중심)과 온천욕이 핵심이라는 점입니다. 지역의 맛있는 먹거리 먹부림이나 유명한 장소 관광이 없는건 아니지만, 다른 "나홀로 여행"이나 "식탐 만세" 시리즈와 같은 비중은 아니에요. 문제는 기차 여행은 이미 "에키벤" 시리즈에서 철저하게 파고든 부분이 있어서 새롭거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등장하는 에키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제목처럼 '온천욕' 이야기가 많지도 않습니다. 어느 온천에 갔더니 물이 어떻다 정도로 끝나서 실망스러웠어요. 온천과 먹거리에 대해 "낮의 목욕탕과 술" 정도로는 이야기를 풀어줬어야 햤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온천 여행'에 딱히 매력을 느끼지 않아서 더 재미가 없었던 것 같은데, 딱히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2025/03/15

도시전설의 모든 것 - 얀 해럴드 브룬반드 / 박숭서 : 별점 3점

도시전설의 모든 것 - 6점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위즈덤하우스

현대의 도시전설, 즉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퍼지며, 사람들의 믿음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해당 이야기들과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랑니를 빼면 기억력이 감퇴한다',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있는 괴한 이야기', '맥도날드 햄버거에 벌레가 섞여 있다' 같은 익숙한 이야기들이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되어 널리 퍼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분석하여 알려줍니다. 관련된 서브컬처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 남자가 여자와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 차를 세우고 시간을 보내려던 중, 라디오에서 갈고리 손을 가진 탈주범에 대한 뉴스가 나온다. 겁에 질린 여자가 집에 가자고 강하게 요구해 남자는 화가 난 채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여자가 차에서 내린 순간, 차량 문고리에 갈고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갈고리 괴담을 소개한 뒤,

'이 이야기는 1967년, 인디애나 대학의 한 여학생이 룸메이트에게 들려준 "갈고리남"을 문자 그대로 채록하여 1968년 학술지 인디애나 민간전승 창간호에 실은 것이며, 민속학자 린다 데그 교수는 이 전설이 최소 1959년부터 전해졌고 지역에서 44종의 변형된 버전이 수집되었음을 보고했습니다. 1960년 디어 애비 칼럼에도 소개되었고, 이후 가장 유명한 미국 도시전설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미트볼스(1979)와 캔디맨(1992), 만화 파 사이드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으며, 많은 소설가들도 이를 차용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공포담인지, 늦은 밤 외진 곳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인지, 혹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는 상황과 자동차 밖에서 갈고리남이 위협하는 구조가 상징적 거세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라는 해설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쿠키를 빼앗아 먹었는데, 알고 보니 남의 쿠키였다는 이야기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 수록작인 "깨진 습관"이 원전인 줄 알았는데, 영국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비스킷 봉지(The Packet of Biscuits)"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의 수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과거 수십 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에 독자 투고로 실린 유머들이 사실은 도시전설의 일환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다는 것도 흥미로왔고요.

이처럼 단순한 유머, 재미난 도시전설 소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함께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과 미디어가 도시전설의 확산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 대한 분석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믿고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허구이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장소(The Holy Place)"라는 도시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의 신도들이 측랑의 특정 지점에 가면 항상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오래된 신도에게 이유를 물어본 결과, 원래 그 지점에는 벽에서 돌출된 부분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습관이 남아 무릎을 꿇는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볼 만한 내용이 많은데,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은 과했습니다.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고, 변형되는 과정에 집중하려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례를 수록하기보다는 보다 핵심적인 이야기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학술적으로 접근한다면 "한국의 학교 괴담"처럼 논문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테니, 어느 정도 균형은 잘 맞춰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수록된 도시전설들이 흥미롭고, 관련된 서브컬처 정보도 풍부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수록 도시전설 한 가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정신병자와 타이어 너트(The Nut and the Tire Nuts)"

어느 시골길을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 차를 세웠다. 그는 당황했지만 곧 잭을 꺼내 타이어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수로 휠 너트 다섯 개를 모두 흘려버리고 말았다. 어두워지는 길가에서 너트를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낙담한 그때, 근처 정신병원의 울타리에 기대어 있던 환자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각 바퀴에서 너트 하나씩만 풀어 끼우면 되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정비소까지는 갈 수 있을 텐데요.”

운전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감탄하며 물었다.

“이렇게 똑똑한 분이 왜 정신병원에 계신 거죠?”

그러자 정신병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건 아니니까요.”

2025/03/14

기차 시간표 전쟁 - A.J.P. 테일러 / 유영수 : 별점 4점

기차 시간표 전쟁 - 8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페이퍼로드

이 책은 1914년 7월 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는 전쟁이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강대국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기차 시간표와 병력 동원 계획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각국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군대 동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동원을 빠르게 마쳐야 했고, 이에 따라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이동시키는 계획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병력과 수천 대의 열차가 동원되는 만큼, 계획이 한 번 실행되면 중단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각국은 병력 동원을 상대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일종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원이 시작되면 이를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양면전 가능성을 고려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고, 다른 나라들도 부분 동원만으로는 전면전에 대비할 수 없어 연쇄적으로 동원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상대를 위협하려던 동원 계획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했던 동맹 및 외교 관계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입니다. 유럽 열강 간의 동맹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타협을 원했으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며 개입했습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명확한 대응 방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독일이 터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고, 영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군을 동원하면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했습니다. 독일 황제는 세르비아가 제시한 조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전쟁 준비가 진행된 후였습니다. 결국 1914년의 전쟁 위기는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강대국들의 경직된 대응으로 인해 확대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곧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각국의 황당하고 순진했던 생각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탁상공론과 연구만 오갔던 무능했던 각국 군사 작전 계획들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다들 말도 안되는 동원 계획 등으로 꿈만 꾸고 있었다는걸 잘 알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슐리펜이 여러 해 고심했던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는 계획 - 은 프랑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던가, 슐리펜이 오랫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프랑스가 어느 때인가 알아차리고 길을 막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난건 외교를 맡은 관료들 책임이 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합국이 전범으로 지목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야말로 '베오그라도 정지'를 제안하는 등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시도를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더라고요. 소위 군국주의 군주들을 온화하고 선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정치가들이 말한 바를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모든 결정권이 군주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쟁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합니다. 

1차 대전 불씨를 당긴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왜 암살을 시도했는지 -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이 나머지 민족을 지배했는데, 마침 세르비아가 터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었기 때문에 - 부터,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이 암살범 프린치프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수상 파시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 처음 폭탄 투척 사건에서는 암살에 실패했었지만 대공이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병원으로 갈 때 암살당했다는 사건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물론 범인 일당에 대한 재판 결과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당은 사형당했지만, 미성년자였던 프린치프는 사형을 면했다고 하네요. 수백만 명이 죽은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감을 안고 여생을 보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주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도판도 충실하고, 책의 장정과 디자인 모두 빼어납니다. 다만 '기차 시간표'가 중요한 핵심 소재는 아니고 일종의 키워드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시작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관련된 인물들과 국가들의 결말은 다른 경로로 알아 보아야 한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3/09

퇴마록 (2025) - 김동철 : 별점 3점

"삼백이 반으로 나뉘고, 다섯이 모자랄 때 불씨가 하늘을 모두 태우리라"

해동밀교의 서교주는 산제물을 바쳐 절대 악(惡)의 힘을 얻기 위한 의식을 시작했다. 아들 준후가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을 알아챈 해동밀교의 장호법은 준후를 친구인 퇴마사 박신부에게 맡기려했다. 그러나 이미 악의 힘을 손에 넣은 서교주는 준후를 빼앗아 마지막 제물을 바치려 했고, 이를 막으려던 호법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나 박신부, 현암과 각성한 준후가 힘을 합쳐 서교주를 막아낸다...

1993년 연재가 시작되었던 이우혁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애니메이션. 극장에서 감상하였습니다. 극장 나들이도 오랫만이네요.

원작 중 "하늘이 불타던 날" 편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줄거리는 이미 잊은지 오래되어서 처음 보는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원작이 연재되고 출간되던 당시에 열심히 읽었었는데, 30여년 세월이 지난 탓입니다. 사실 등장인물들 설정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도 감상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더군요.

장점이라면 재미있다는 겁니다. 해동밀교 서교주가 산제물을 바쳐 악마의 힘을 손에 넣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양이 될 준후를 구해내려다가 호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지만 각성한 준후와 현암, 박신부의 협공으로 서교주를 제압한다는 결말까지 시원시원합니다. 호법들과 퇴마사들의 액션도 화끈하고요. 지루한 부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트웤도 좋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 원작에서 바로 뛰쳐나온듯 잘 그려졌고,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디자인도 빼어납니다. 한마디로, 아주 잘 만든 오락물입니다.

하지만 1시간 30분도 안되는 상영시간은 이야기를 담아내기는 좀 부족했습니다. 초반부, 아스타로트와 박신부가 대결할 때 잠깐 등장할 뿐인 승희의 존재가 대표적입니다. 승희가 누구이고, 어떤 능력자인지 원작팬이 아니라면 알 수도 없는데다가, 해동밀교에 찾아온 현암이 악마 서교주와의 싸움에 뛰어드는건 너무 급작스러웠어요. 이 이야기는 빼고 현암의 서사에 집중했어야 합니다. 승희가 등장하는 노골적인 속편 예고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이렇게 풀어낼 이야기가 많다면, 차라리 넷플릭스같은 플랫폼에서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원작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던 현암의 검 '월향'이 선보이지 않은 것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고, 준후가 아버지 장호법의 죽음을 보고 각성하는건 너무 뻔한, 그야말로 90년대스러운 서사였다 생각됩니다. 네 명의 호법을 순식간에 참살한 서교주가 준후, 현암, 박신부에게 밀리는 것도 설득력을 좀 더 부여했어야 했고요. 이 역시 분량의 문제였겠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액션, 퇴마 장르를 좋아한다면 누구나 즐겁게 감상할만한 잘 만든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흥행에 성공해서 후속편도 문제없이 제작되기를 바랍니다.

2025/03/08

결혼반지 이야기 1~14 - 메이비 : 별점 2점

[고화질] 결혼반지 이야기 14 - 4점
메이비 지음/학산문화사

고교생 사토는 어디론가 사라지는 소꿉친구 히메의 뒤를 쫓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이세계였다. 그곳에서 사토는 히메의 결혼식에 난입했다. 히메는 이세계 크리스탈 노바티 노카나티의 공주였고, 그녀와 결혼하면 전설의 용사 반지왕이 되어 심연왕의 위협을 물리쳐야 했다. 히메와 결혼한 사토는 반지왕의 힘을 모두 끌어내기 위해, 다른 네 명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다...

이세계 판타지로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그게 아니더군요. 일본식 하렘물의 모든 요소를 총망라한 므흣(?)물입니다. 질투심 많은 순정파부터 청순가련한 내성적 얌전파, 강한 힘을 앞세우는 무투파, 연상 츤데레, 말없는 인형까지—일본 하렘물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서 므흣한 장면을 수시로 선보이는게 내용의 핵심이거든요. 빠진 캐릭터라고 한다면 스쿨드 같은 천재 발명가 정도인데, 이마저도 사피르와 안바르가 캐릭터성을 나누어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캐릭터들을 므흣하게 구현한 작가의 작화력도 상당합니다. 전형적인 러브 코미디 하렘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진중하고 묵직한 그림체이지만, 워낙 뎃셍력이 좋은데다가 이세계 판타지라는 설정과 결합되어 강한 시너지를 보여줍니다. 종족도 인간, 엘프, 수인족에 용족, 드워프의 기계 인형(?) 등 다양하고, 설정 상 안경 소녀는 없지만 그 외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합 - 거유, 로리, 장발, 단발 등 - 이 그려지는데, 색기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단지 야하기만 한건 아니고, 여러 액션 장면도 볼만합니다. 히메를 비롯한 공주들과 맺어질 듯하면서도 번번이 실패하는, 전형적인 하렘물 특유의 코믹한 전개도 재미를 더해 주고요. 

주인공 사토가 흔한 하렘물 주인공과 차별화되는 점도 좋습니다. 무능하고 유유부단한데도 주변 여성들이 이유 없이 따르는 캐릭터가 아니라, ‘선택받은 영웅’이기 때문에 다섯 명의 공주가 반드시 그를 따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제적인 하렘 구축 설정이 꽤 괜찮거든요. 성격도 밝고 긍정적인 성장형으로, 결국 세계관 최강의 힘을 손에 넣어 영웅답게 활약하는 것도 좋습니다. 미녀를 거느리는 당위성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렘물로서는 괜찮습니다.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될만큼의 인기 요소는 충분히 갖추고 있어요. 이세계 판타지물로도 심연의 마물이 전대 반지의 용사였고, 공주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는 설정은 제법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세계 전생 영웅 판타지로는 낙제점입니다. 설정 자체가 뻔하디 뻔하며, 심연의 마물과 싸워 나가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도 없고, 내용 전개가 일사천리인 탓입니다. 오히려 곁가지라 할 수 있는 학교 생활이나 일상 생활을 다룬 하렘물 전개가 더 흥미로왔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므흣한 여성 캐릭터, 액션에 특화된 빼어난 작화에 별볼일 없는 판타지가 결합했다는 점에서는 "스트라바간차"와 비슷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트라바간차" 쪽이 더 좋기는 했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애매하네요. 별점도 같고요.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03

두산 베어스의 2025 시즌 전망

뜨거웠던 스토브리그가 끝나고 전지훈련도 마무리되며, 이제 곧 시범경기가 시작되는 3월입니다. 언제나처럼 두산 베어스의 시즌 전망을 해보겠습니다.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두산은 굵직한 선수 이동이 있었습니다. 신인왕 출신 정철원 선수와 내야수 전민재 선수가 롯데의 외야수 김민석, 추재현 선수 그리고 투수 최우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한 트레이드 칩으로 활용되며 팀을 떠났습니다. 또한, 주전 3루수 허경민 선수와 불펜 투수 김강률 선수가 FA 자격을 얻어 이적했고, 베테랑 유격수 김재호 선수는 은퇴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트레이드였습니다. KBO에서 보기 드문 규모의 대형 트레이드였지요. 제가 봤을 때, 두산 입장에서는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두산은 젊은 투수진에 비해 야수진, 특히 외야진의 세대교체가 지연되며 전력 불균형이 심각했으니까요. 불펜진에는 홍건희, 이영하, 박치국, 김명신, 이병헌, 최지강, 김민규, 최종인 선수 등 쓸만한 자원이 많고, 마무리 김택연 선수도 확실합니다. 반면, 외야진은 작년 기회를 받았던 김태근, 양찬열 선수가 방출될 정도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고, 세대교체에도 실패했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선수단 구성 변경에 따른 예상 야수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외야는 정수빈, 제이크 케이브, 김재환 선수가 선발로 나설 가능성이 큽니다. 네 번째 외야수로는 현재까지는 추재현 선수가 앞서나가는 분위기입니다. 여기에 조수행 선수는 대수비와 대주자로 필수적인 자원이며, 김재환 선수가 지명타자를 맡을 때를 대비하여, 실적과 기대치를 고려했을 때 김인태 선수가 엔트리에 포함될걸로 보입니다. 내야는 양석환, 이유찬, 강승호 선수는 고정입니다. 유격수 1순위는 박준영 선수고요. 대수비 요원으로는 박계범 선수, 오명진 선수 순으로 생각합니다. 포수는 양의지, 김기연 선수가 확고합니다. 야수진은 이렇게 14명은 확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투수진은 선발의 경우 콜 어빈, 잭 로그, 곽빈, 최승용까지 4선발은 확정되었습니다. 5선발 자리에는 최원준, 김유성, 최준호 선수가 경합 중입니다. 불펜은 5선발 경쟁에서 탈락한 선수들과 함께, 이영하, 홍건희, 이병헌, 김명신, 그리고 마무리 김택연 선수로 구축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12명이지요.

야수진, 투수진 합쳐 26명인데 1군 엔트리가 2025년부터 29명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3명 추가 필요한데 타자 1명, 투수 2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타자는 대타로 기용할 타자, 혹은 양의지 선수 부상을 대비한 포수일테고 투수진은 부족한 좌완이나 사이드 투수가 우선순위가 높겠지요. 예상 후보로는 김민석, 이교훈, 박정수 선수 등입니다.

작년 시즌 전망을 돌아보면, 야수진은 전혀 기대할게 없고 타선보다는 경쟁력있는 투수력으로 버티는 시즌이 될 거라고 했었는데, 절반을 맞췄었지요. 특히 계투진 힘으로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스토브리그를 통해 야수진이 어느 정도 보강되었고, 오재원 사태도 종결되면서 활용 가능한 자원이 증가했습니다. 덕분에 조금은 기대가 됩니다. 다만 허경민 선수의 이적에 따른 강승호 선수의 포지션 변경이라는 변수는 있습니다. 강승호 선수가 3루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지난해 수준의 생산성을 유지한다면, 2루수 자리에는 테스트해 볼 선수들이 많아 비교적 수월한 운영이 가능할 것입니다. 타선에서는 외국인 타자 제이크 케이브 선수의 활약이 필수적이고요. 

투수진도 작년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해 두산의 외국인 투수 승리 기여도는 10개 구단 중 9위에 머물렀습니다. 올해는 외국인 투수들이 평균적인 활약만 해줘도 전력 상승 효과가 상당할 것입니다. 유일한 걱정은 지난해 많은 이닝을 던졌던 불펜 투수들의 피로 누적이지만, 젊은 투수들이 많은 만큼 한 시즌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또한, 선발진이 작년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다른 팀들 역시 적극적인 전력 보강을 했지만, 위에서 설명드린 이유로 작년보다 높은 순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상 순위는 3위입니다. 유망주인 김대한, 추재현, 김민석, 여동건, 임종성, 박준순, 오명진, 전다민 선수 중 최소 한두 명이 주전급으로 성장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승엽 감독의 계약 마지막 시즌인 만큼, 스몰볼 대신 KBO 타격 레전드다운 화끈한 공격 야구를 기대해 봅니다. 무엇보다 못하더라도 LG는 꼭 이겨주길 바랍니다.

2025 시즌, 두산 베어스 화이팅! 허슬~두!

2025/03/02

지도로 읽는다, 삼국지 100년 도감 - 바운드 / 전경아 : 별점 2점

지도로 읽는다 삼국지 100년 도감 - 4점
바운드 지음, 전경아 옮김, 미츠다 타카시 감수/이다미디어

남자라면 누구나 "삼국지" 팬이겠지요. 저도 무척 좋아해서 원전은 물론, 관련된 책들도 많이 읽어왔습니다. 

이 책도 그러한 삼국지 관련 책 중 하나로, 삼국지의 역사를 '지도'로 정리한 도감 형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전투의 전개 과정과 국가 간 역학 관계를 모두 지도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러한 지도 중심의 접근은, 삼국 시대의 복잡한 전쟁과 외교 관계를 시각화하여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시 이민족의 위치, 작은 난이 일어났던 지역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주요 전투도 전황과 흐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요.

또한,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 오나라의 멸망까지 약 100년간의 전개를 연대별로 다루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서술되었기 때문에 소설 "삼국지연의"와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하지만 '지도'에 너무 집착한건 단점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는 것보다, 지도로 보여줄 수 있는 주요 전투와 판도 변화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삼국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나 인물 간의 관계 등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탓입니다. 전투들도 배경이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이런 전투가 있었다"는 식이 대부분이고요. '지도'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만든 책같아요.

지도의 완성도도 별로입니다. 특히 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작은 지도들은 가독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큰 지도에서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방식이었어야 했는데, 현재 구성으로는 각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졌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표기된 전투의 진행 순서도 더 잘 보이게 만들어졌어야 했어요.
모든 전투를 지도로 설명하는 방식도 좋다고 할 수 없어요. 단순히 전투의 순서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세력의 판세나 승패를 알아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관도 대전이나 적벽 대전 같은 중요한 전투조차 다른 소규모 전투와 비슷한 비중인 것도 단점이에요. 핵심적인 전환점 정도는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오나라의 멸망까지 다룬 것은 삼국 시대를 끝까지 정리했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지나치게 지루하기는 했습니다. 앞서의 큰 전환점도 없이 소소한 전투들로만 이어지는 탓입니다. 차라리 잘 몰랐던 진나라 이후 5호 16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도와 함께 짧게라도 설명해주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독립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을 위한 유용한 참고서에 가깝습니다. 이런 류의 책이라면 십년도 훨씬 전에 읽었던 "전쟁으로 읽는 삼국지"가 훨씬 나은 선택입니다.

2025/03/01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2024) - 나가오카 치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괴도 키드가 히지카타 토시조에 썼다는 일본도를 훔치려 했다. 이 칼들을 모으면, 오노에 재벌 선대가 남긴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핫토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키드는 칼을 훔쳐갔지만, 암호를 풀 수 없어서 코난 일행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 오노에 가문 변호사가 살해되었고, 경찰은 모리 탐정, 핫토리와 함께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보물 찾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보물을 노리는 무기 상인 카도쿠라가 오노에 선대로부터 칼을 맡았던 전직 사범 후쿠시로를 납치했고, 괴도 키드를 쫓던 나카모리 경부도 카도쿠라에게 저격받아 중상을 입고 마는데...

"흑철의 어영"에 이은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의 27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의 유명 관광지 하코다테를 배경으로 전설적인 보물과 연쇄 사건이 얽힌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한 암호가 등장하는데, 전통 일본도의 구조와 히지카타 토시조가 남긴 시집, 하코다테의 오릉곽 등 실존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몰입감을 높이며, 사라진 성릉도 대신에 히지카타 토시조가 칼싸움 중 남겼다는 자국의 본을 떠서 코등이를 만드는 이야기는 팩션같은 재미도 줍니다. 덕분에 2차 대전 당시 숨겨진 무기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도 그럴듯하게 포장됩니다.

주 무대인 오릉곽은 물론, 여러 하코다테의 실제 명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코다테 뿐 아니라 모미지가 좌충우돌하면서 다른 홋카이도의 명소를 보여주기까지 하고요. 덕분에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여정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엔딩에서는 실제 사진이 보여지는데, 꼭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판 코난 특유의 비현실적인 액션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케이블카 선로를 따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리거나, 비행기 날개 위에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건 고속 열차가 탈선하거나,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고 침몰하는 것에 비교하면 소소한 편이지요. 실제 명소들이 무대인 덕분이기도 할 텐데,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성이 유지된다면 좋겠습니다.

시리즈 팬으로는 핫토리 헤이지가 핵심 멤버로 활약한다는게 좋았습니다. 제 최애 캐릭터 중 한 명이거든요. 핫토리가 카즈하에게 고백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모미지의 훼방으로 고백에 실패하는 장면 등은 충분히 즐길만 했고요. 신이치와 괴도 키드가 닮은 이유(알고보니 사촌간!)가 밝혀지는 쿠키 영상도 호불호가 갈린다는데,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괴도 키드 세계관과 엮을 필요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요.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너무 허술합니다. 초반에는 칼을 훔치려는 키드와 핫토리, 코난과의 대결이 펼쳐지고, 그 뒤에는 보물을 찾으려는 암호 해독이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만 중심으로 전개해도 차고 넘쳤을 텐데, 경찰이 개입하게 하기 위해 변호사 살인 사건을 삽입한건 무리수였습니다. 애초에 범인이 저지를 이유가 없었던 사건이기도 했고요. 키드 역시 칼을 훔치려다가 돌려준 이후에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어서, 계속 등장하는건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동기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전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했던 무기라 하더라도, 21세기에 경제적 가치를 가질리 없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고, 악당들이 경찰에게 총질을 하고 일본 대도시에서 폭탄 테러를 하면서까지 이를 찾아다니는 전개는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다른 이야기도 이 때문에 여러모로 이상하고요. 차라리 금괴가 보물이라는 설정을 밀어붙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암호 풀이의 과정은 좋지만,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마지막 장면은 많이 허술했습니다. 트릭은 성릉도의 코등이(?)의 모양이 오릉곽과 동일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먼저 기구를 띄운 뒤 칼을 바라보면서 오릉곽과 코등이의 형태가 일치하는 고도를 찾아냅니다. 기구 고도에 위치하는 장소는 하코다테 산 밖에 없으니, 하코다테 산의 이 고도 위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건데, 실존하는 장소에 기반한 트릭이라는건 장점이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구를 띄우는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면 고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칼을 세우는 위치에 따라서도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크고요. 기구에서 산을 가리키는 정확한 방향을 모르면, 이 역시 오차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야 '하코다테 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라는 말과 별다를게 없어서,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암호를 풀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평작은 된다 싶네요.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2025/02/28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다카노 가즈아키 / 김수영 : 별점 2점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4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단편집으로, 비일상적인 순간에 타인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대학원생 야마하 케이시의 능력을 핵심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수록된 작품의 장르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와 "3시간 후 나는 죽는다"는 시간 제한이 있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은 일상계 추리 판타지 드라마고요. "시간의 마법사"와 "돌 하우스 댄서"는 케이시가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미래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잔잔한 드라마입니다. 때문에 여러 취향의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 애호가 입장에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는 부족하고,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뻔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요시에는 케이시로부터 자기가 6시간 뒤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는 예지를 들었다. 6시간 뒤는 요시에의 25번째 생일이었고, 마침 여성들이 생일에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참이었다. 요시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데이트 클럽에서 만났던 스토커가 범인일거라 생각하고 케이시와 함께 추적에 나섰다..

케이시의 첫 등장과 그의 능력에 대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살인이나 사고를 제한된 시간 안에 막아야 한다는 류의 '시간 제한 서스펜스 스릴러'는 매우 흔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 시리즈만의 특징은 나름 확실합니다. 케이시의 예지 능력에 여러 제약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비일상적인 순간'만 볼 수 있어 정확한 장소와 상황을 알기 어렵고, '시간'도 예지된 장면 속 시계를 봐야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고, 이는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스토커 누마타가 범인이 아니라면, 용의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탓입니다. 유력한 용의자는 예지를 핑계로 요시에와 함께 행동하는 케이시인데, 케이시의 예지 능력은 '진짜'라는 설정이 맨 앞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데이트 클럽 여성들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인데, 데이트 클럽 사장은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니 이 정보를 아는 건 경찰 사와키밖에 없습니다. 즉, 그가 범인인 것이지요. 너무 뻔해서 의외성이나 재미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방탄, 방인조끼'를 입고 반격을 가한다는 반전도 마찬가지로 뻔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예지 능력이 등장하는 도입부는 신선했지만, 평범한 시간 제한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시간의 마법사"

"미쿠짱은 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분명 이겨낼 수 있어.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지만 마음으로부터 웃을 수 있는 날은 꼭 오니까, 그날을 믿고 힘내는 거야."

플롯 라이터 미쿠는 극작가로 성공을 꿈꾸지만, 기약없는 데뷰와 고된 생활에 지쳐갔다. 어린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고자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다가, 20년 전 자신을 만나 하루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일종의 타임 리프, 타임 슬립물입니다. 본인은 아무 기억이 없지만, 20년 전의 잃어버렸던 하루를 20년 뒤 다시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미쿠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잔잔한 일상계 드라마로 케이시는 순전히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예지 능력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처음 알았네요.

추리 애호가로서 특별히 점수를 줄 부분은 없지만, 희망찬 미래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는 잘 전달해 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

남자를 숱하게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하던 미아에게 케이시가 "수요일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날 미아는 사고로 누군가 죽는 장면을 목격한 뒤, 지나가던 야마기시 신고에게 도움을 받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신고는 점점 이중인격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퇴마 성수를 이용하여 이를 해결하려던 미아는 신고를 영원히 잃고 마는데..

미아는 당시 사고에서 죽은 남자가 신고에게 빙의했다고 생각해서 그를 물리치려고 퇴마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신고에게 죽은 남자가 빙의했던 것이 아니라, 신고가 죽은 남자였다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신고의 혼이 '스즈키 히로시'라는 남자에게 빙의했던 것이지요. 신고는 미아가 벌인 퇴마 작업으로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고요

신고의 정체에 대해 밝혀지는 과정에서 추리물적인 성향이 살짝 보이기는 하지만, 일상계 판타지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물은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돌 하우스 댄서"

프로 댄서를 꿈꾸는 미호는 계속해서 오디션에 떨어져 좌절하던 중, 자신이 접하는 현재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기시감은 어린 시절 찾았던 '돌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현재를 담은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의 마법사"와 똑같은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내용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시간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게, 미쿠는 극작가로서의 미래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면서요. 하지만 미호는 댄서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대사가 이 작품을 대표하는 메시지지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평범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게 더 중요하다는 "돌 하우스 댄서"가 주는 감동이 더 강렬했습니다. 꿈을 쫓는 삶을 살기에는 제가 나이가 많은 탓이겠지요.

케이시는 이름만 언급될 뿐 등장하지 않아서 연작물로서의 가치는 다소 낮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이하 "6시간 후...")" 사건 5년 후, 요시에가 일하던 예식장에 케이시가 하객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케이시는 자신이 3시간 후 죽는다는 예지를 보았고, 이야기를 들은 요시에는 케이시의 죽음에 이르는 사고를 막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케이시와 요시에가 또다시 생존을 위해 시간 제한이 있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는 내용으로 "6시간 후..."의 진짜 후속편에 해당합니다.

"6시간 후..."처럼 예지 능력의 제약을 잘 활용해 서스펜스를 제공한다는건 같은데, 후속편답게 조금 업그레이드된 서스펜스를 제공합니다. 이번에는 시간과 '불에 타 죽는다'는 상황만 알 수 있거든요. 왜 불에 타 죽는지 조차 알 수 없고요. 또 토도 교수의 은퇴식 피로연장에서 죽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있어서 더 큰 긴장감을 가져다 줍니다. 예지와 식장의 상세한 조사를 거쳐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를 밝히고 도움을 얻는건 불가능한 상황도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고요.

계속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습니다. 케이시는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3시간 후 반드시 죽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미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미래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요. 요새 작품이라면 '멀티 버스'라고 부를, 평행 우주의 다른 루트로 옮겨 탄 결말인데, 뻔했지만 완벽한 해피엔딩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토도 교수의 자살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했고, 총알이 운 나쁘게 복도의 가스통을 맞춰서 폭발하게 된다는 상황부터 어처구니 없었어요. 게다가 이는 사전 조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고라, 시간 제한 서스펜스를 근본부터 흔드는 잘못된 설정이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2/23

세인트 세이야: 더 비기닝 (Knights of the Zodiac) (2023) - 토마스 바진스키 : 별점 1점

"세인트 세이야"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 원작의 오랜 팬으로, 옛 추억을 되살리고자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장점이라면 주인공 세이야 역을 맡은 아라마 맛켄유의 비쥬얼, 그리고 일부 액션 장면입니다. '성투사'의 싸움답게 맨몸 액션이 펼쳐지는데, 세이야가 각성한 뒤 카시오스를 포함한 구라드의 부하들을 인형처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라던가, 성투사 피닉스의 성의 액션, 마이록을 연기한 마크 다카스코스가 선보인 권총과 곤봉을 활용한 액션 등이 그러합니다. 원작 팬이라면 비교적 원작에 가깝게, 하지만 촌스럽지 않게 구현된 마린의 등장은 만족할 만 하고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장점을 제외하면 영화의 완성도는 전반적으로 처참합니다.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이야는 마린에게 훈련을 받던 중, 알먼이 누나 패트리샤를 납치한 일당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훈련을 중단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갑자기 아테나를 데리러 온 구라드를 막기 위해 카시오스 일당과 싸웁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져서 전개가 엉성하고 난잡합니다. 아테나가 각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구라드는 아테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던 도스카라스가 구라드의 부하에게 한 방에 쓰러져 포로가 되는 장면도 황당했어요. 배우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각본이 별로라면 적어도 볼거리라도 화려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CG 티가 강하게 나는 화면도 조악하고, 앞서 언급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액션 연출도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라마 맛켄유의 액션 연기가 어색해서 많이 거슬렸습니다. 그나마 볼만했던 액션 장면들은 성의를 입은 후에야 등장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주요 액션 장면에서는 대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어야 할 성투사들의 싸움이 맛보기 수준이며 심지어 페가수스 유성권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작 팬들이 가장 기대했을 대표적인 기술이 빠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페가수스와 피닉스 성투사의 클라이맥스 대결 장면은 80년대풍 특촬 영화보다 못한 빔 공격 연출이 반복되면서,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마무리되고 맙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매우 낮습니다. 스케일을 줄이고 원작 초반부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성투사 변신 장면과 성투사들 간의 격투를 좀 더 멋지게 연출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별점은 1점인데, 솔직히 1점을 주기도 아깝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 낭비 하지 마시고, 이 작품은 쳐다도 보시지 말기 바랍니다.

2025/02/22

모즈가 울부짖는 밤 - 오사카 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모즈가 울부짖는 밤 - 6점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 '모즈'는 타겟 가케히를 죽이려다 가케히가 들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에 휘말려 죽은 피해 여성은 경시청 공안부 형사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였다. 담당자였지만 가족이라 사건에서 배제된 구라키는 얻어낸 열흘간의 휴가를 이용해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신가이 가즈히코는 호메이 흥업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 흥업이 계속 그의 목숨을 노리는 와중에, 신가이는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여 결국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가즈히코가 아니라 동생 히로미이자 킬러 '모즈'였다. 

구라키, 모즈, 그리고 형사 오스기 등의 수사와 추적으로 폭탄 테러는 공안부장 무로이 때문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무로이와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는 불륜 관계였고, 방일하는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테러하기 위해 가케히는 무로이를 협박해서 정보와 폭탄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무로이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이 협박에 흥했지만,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해 가케히를 죽이려다 폭발에 말려든게 진상이었다...

오사카 고의 '모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1986년에 출간된 작품이지요.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가가와 데루유키 주연으로 드라마도 제작된 인기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0여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 선정되어 있어서 이전부터 관심이 가던 차에, 늦었지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킬러 신가이 가즈히코와 아내를 잃은 공안 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절벽에서 추락해 기억을 상실한 채 발견된 신가이는 아주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폭탄 테러로 아내를 잃은 구라키 형사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며 사건의 실체를 쫓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굉장히 빠른 전개로 강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지루함 없이 여러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와중에 폭력과 액션도 넘쳐나서 오락적인 요소도 풍부하거든요. 사람도 여럿 죽어나가고요.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히지만, 모두 '복수'가 중심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구라키 형사는 폭탄 테러로 죽은 아내 다마에의 복수를 위해, 신가이(히로미)는 형 가즈히코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흑막이자 원흉인 공안부장 무로이조차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이렇게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건 신선했습니다. 

반전들도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기억을 잃은 신가이 가즈히코가 사실은 쌍둥이 동생 히로미였다는 것입니다. 히로미는 남성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여장을 하고 킬러로 살아왔다는데,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그가 신가이로 오인되는 과정도 합리적인 편이고요.

두 번째 반전은 구라키 형사의 아내 다마에가 사실 폭탄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마에는 공안부장 무로이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였고, 이를 가케히에게 들켜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로이가 폭탄을 가케히에게 주기로 했었습니다. 무로이는 사르도니아 대통령 에체베리아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러나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하여 협박자였던 가케히를 죽이려다 결국 자신까지 말려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구로키와 다마에 사이에 태어났던 딸이 사실은 무로이의 자식이었고,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가 호메이 흥업과 손을 잡은 악당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도 꽤 놀라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전들 모두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구라키 형사의 수사와 신가이(히로미)의 추적, 그리고 흑막인 무로이 부장의 존재까지는 납득할 만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 경시가 독단적으로 극우 폭력단 호메이 흥업을 조종했다던가, 감찰부의 쓰키 경시정이 부하 미키를 이용해 내부 감찰을 벌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과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비중있는 등장은 오히려 서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미키는 정말 불필요해서,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구로키에게 갖게되는 연심도 불필요한 요소였던건 마찬가지고요. 

또한, 이야기 전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호메이 흥업이 애초에 신가이를 살해하려 한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로이 부장 측이 불륜과 테러의 증거 사진이 신가이에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도 불합리하고요. 피해자인 가케히가 설령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가이에게 넘겼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가이(히로미)를 두 번이나 생포하여 사진의 위치를 추궁한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불륜 사진 확보 없이 가케히에게 사진과 폭탄을 전해준 것도 말이 안되지요. 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라는 거대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진을 회수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건 당연하니까요. 

구로키와 신가이 이야기가 교차될 때, 신가이 시점은 신가이가 살아난 다음부터 시작되지만 구로키 시점은 폭탄 테러 직후라서 시계열이 일치하지 않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결말도 아쉬운 점 중 하나입니다. 대단한 증거없이 무로이 부장의 자백으로 마무리되는건 허무하며, 길고 늘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대단원에 이르는건 비현실적이었어요. 하긴, 형이 살해당한 그 장소에서 쌍둥이 동생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발견된다는 기본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강렬한 반전, 그리고 복수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이야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많아요. 무엇보다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킬링 타임용 작품을 찾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격 미스터리 100에 선정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2025/02/21

게임북 전용 e-Ink 게임기

자주 찾는 블로그인 자그니님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기기를 소개하고 있더군요. 게임북을 즐길 수 있는 휴대용 e-Ink 게임기입니다. 
게임북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인기를 끌었던 책입니다. 페이지마다 선택지가 있고, 선택에 따라 페이지를 이동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었지요. 이러한 게임북만을 위한 전용 e-Ink 게임기로 전자책 리더기와 비슷한 형태네요. 화면 크기는 7.5인치에 800*400해상도이고 게임은 SD카드로 별도 판매할 계획인 듯 합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아들에게 책을 읽힐 목적으로 만든걸 사업 모델로 확장한 것이더군요. 아직 양산된건 아니고, 시제품이 준비된 정도고요. 곧(3월 1일)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현 시점까지 게임북이 20개 밖에 준비되지 않은건 문제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플랫폼이 정착되어 누구나 게임북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보다는 일반 모바일 플랫폼 용으로 아이들을 위한 게임북 앱을 만드는게 더 시장성이 있을겁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응원하고 싶습니다. 게임북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 탓도 있지만, 과거 게임북의 단점이었던 한정된 분량(책 한권)을 극복하고, IT 기기에 맞는 재미(인터랙티브한 동작과 사운드 효과 등)으로 재미를 선사해 준다면 어느 정도 반응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거든요. 아이들 영어 교육용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최근 깡통 전자 사전이 다시 뜨는 것처럼 말이지요. 

과연 시장 반응이 어떨지,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되면 눈여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2025/02/19

드디어 밝혀진 잭 더 리퍼의 정체!

‘잭 더 리퍼’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외신 보도(기사는 여기)에 따르면,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숄의 DNA 분석을 통해, 폴란드 출신 이발사 애론 코스민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코스민스키는 1888년 런던에서 발생한 ‘잭 더 리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으나, 증거 부족으로 체포되지 않았고 이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영국의 역사가 러셀 에드워즈가 주도했습니다. 그는 2007년 경매에서 피해자 캐서린 에도우스의 피 묻은 숄을 구매한 뒤, 희생자 및 용의자의 후손들로부터 DNA 샘플을 받아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숄에서 검출된 혈흔과 정액의 DNA가 각각 피해자와 코스민스키의 후손과 일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용된 미토콘드리아 DNA의 신뢰도가 낮고, 조사 역시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아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는군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유력한 용의자였던 만큼, 잭 더 리퍼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인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좋겠네요.

그런데 도무지 이런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다는게 상상이 되지 않는 외모라 놀랐습니다. 하긴, 강호순도 미남이었지요....

2025/02/16

아틀라스 마이오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도책 - 강민지 : 별점 2.5점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아틀라스 마이오르"는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도책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의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결과물로, 단순한 지도책을 넘어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틀라스 마이오르"가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지도책을 단순한 지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인문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깊이 있게 분석한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예술, 인문학 서적이자 문화사, 미시사 서적 이라는 성격도 갖추고 있습니다. 지도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좋은 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무역국이었으며, 높은 문해율과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적과 인쇄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도책은 단순한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식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 도서 지관을 꾸려 장서를 자랑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크기가 크고 값비싼 지도책이 인기를 끌었고, 이는 곧 출판 시장에서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성장했습니다.'는 것이지요.

지도책 본연의 모습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를 중심으로 지도 제작의 발전 과정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텔리우스(상업 지도책의 선구자), 메르카토르(현재도 사용되는 평면 도법의 창시자), 블라외 가문(아틀라스 마이오르 제작 명문 가문), 혼디우스 가문(블라외 가문의 라이벌) 등 지도 제작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과 이들의 대표작을 통해 지도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를 넘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지도 제작과 출판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한 권의 지도책을 탐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지도 제작에 사용된 도판과 인쇄 기술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에 대한 방대한 양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을 묘사한 지도가 포함된건 반가왔고요. 또한, 인쇄 방식과 채색 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데, 컬러 인쇄 기술이 없던 시절 '채색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이 단순한 흑백 인쇄물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기여했으니,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울러 지도책을 단순한 과학적 산물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도 연구 분석하는데, 그 깊이가 대단합니다. 지도 제작에 사용된 물감을 단순히 색채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의 유행과 연결해 설명하며, 지도 속 도상(알레고리) 분석을 통해 지도책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는 식이거든요. 특히 지도에 등장하는 문양과 장식 요소를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시대적 사고와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요소로 분석하는 과정은 지도책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틀라스 마이오르" 외의 불필요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구성은 아쉽습니다. 지도책의 유행 이유나 지도 제작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필수적인 정보지만, 당대 경쟁 지도 제작자의 지도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문화까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건 과했습니다. 특히 60페이지에 걸친 '도상(알레고리)' 설명은 지나쳤습니다. 지도책에 문양이 들어갔다고 해서, 문양의 구성 요소와 의미, 디자인 규칙까지 세세하게 독자가 이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도판도 풍성하지만,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다소 작은 도판이 많은건 단점입니다. 주요한 도판은 접어 넣는 방식으로라도 보다 크게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자의 가벼운 문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최신 트렌드를 인용한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책의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느 정도는 교열 과정에서 조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도책을 다룬 미시사,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결과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허나 지도책을 벗어난 이야기도 많기에 감점합니다. 

2025/02/15

A하라 죽이기 - 도미나가 미도 / 김진환 : 별점 2점

A하라 죽이기 - 4점
도미나가 미도 지음, 김진환 옮김/라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능한 웨딩플래너 미노 탓에 결혼식이 엉망이 되어 버린 슈헤이, 시에리 부부는 하르모니아 호텔 예식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예식부는 사건을 수습하려고 미노의 잘못을 다른 플래너 아이하라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나 이는 인플루언서 시에리와 그녀의 친구 키미에의 SNS를 통한 비난을 불러왔고, 아이하라에 대한 악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아이하라는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지만 회사는 아이하라를 전혀 지켜주지 않았고, 아이하라는 친구와 지인, 그리고 변호사 쿠인의 도움으로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일본 최대 라이트노벨상 ‘인터넷소설대상(제9회)’수상작이라고 해서 읽게 된 작품. 온라인 범죄 관련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정물 성격이 약간 있지만 평범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SNS, 온라인에서 '#A하라를용서할수없다'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아이하라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고립되는 과정 묘사는 볼 만 합니다. 회사는 결혼식을 망친 원흉인 미노를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보호하면서, 오히려 아이하라를 공범으로 몰아가며 비난의 화살을 그에게 돌리거든요. SNS에서 아이하라를 향한 비난이 거세지자, 회사는 그를 방패막이로 삼아 책임을 떠넘기고 전혀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경찰의 지시와 아이하라의 도움 요청도 무시하고요. 결국 아이하라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며 아이하라는 아무 죄도 없다는게 잘 설명되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이하라가 쿠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진행하는 법적 조치도 볼 만 했습니다. 회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서 필요한 자료, 고용 문제 및 진단서 등에 대한 설정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고, 300만엔이라는 청구 금액도 이치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디지털 마녀사냥의 폐해를 다룬 다른 기존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시각이나 새로운 접근이 없는 탓입니다. 아이하라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에게 사과를 받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무난했고요.

무엇보다도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법정 다툼이 시작되기 직전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인 미노와 회사로부터는 어떠한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욱 철저한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최소한 발암 물질 미노는 철저하게 응징받았어야 했습니다.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 역시 단순 사과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SNS 마녀사냥과 회사의 부조리한 대응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은 인상적이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이 크지 않고,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워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추리'와 관련된 장르 문학이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기도 했고요. 특별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2/14

단다단 시즌 1 (2024) - 야마시로 후가 : 별점 3점

최근 가장 핫한 작품 중 하나지요.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원작의 매력을 충실하게 살리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원작의 화려한 작화를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맞게 안정적으로 구현했으며, 원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화끈한 액션이 아주 훌륭합니다. 오카룬이 터보 할매에 빙의한 후 펼치는 질주 액션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플래시'같은 기존의 스피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과 차별화된 연출을 보여주거든요. 단순하게 직선적인 속도감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과장되면서도 왜곡된 구도와 함께 과감한 색채를 활용해 강렬한 비주얼로 실감나는 고속 질주를 선사합니다.

또한 원작의 감동을 더욱 끌어올린 연출도 돋보입니다. ‘아크로바틱 찰랑찰랑’과 아이라의 관계를 그린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원작의 감정을 더욱 깊이 전달하며,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강점을 활용해 감동을 극대화했습니다. 움직임과 색감, 조명을 활용한 세심한 연출이 캐릭터들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외에도 오카룬이 모모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슬램덩크' 1기 엔딩인 'あなただけ見つめてる'를 부르는 장면도 애니메이션이라서 즐길 수 있었던 연출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지루해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액션이 거의 없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의 흐름이 처지는 느낌이에요. 초반부의 빠른 전개와 강렬한 액션과 비교했을 때,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루즈합니다.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 설정에 연이은 라이벌 등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 뻔했고요.

무엇보다도, 1기의 결말이 하나의 주요 사건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간에서 끝나는 느낌을 준건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연재물의 '다음 편에 계속' 방식을 이렇게 써먹는건 과하다 싶네요. 연재물은 최소한 한 달 뒤에는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1기 완결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어서 리뷰도 늦어졌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화려한 작화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돋보이며, 원작 팬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보여주니까요. 단순한 이야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작품도 사실 아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으셨다면, 한 번 챙겨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2/09

중증외상센터 (2025) - 이도윤 : 별점 2.5점

최근 가장 핫한 드라마지요. 지인 추천을 받아 주말에 감상했습니다. 평이 좋은 이유는 알겠더군요. 장점이 확실히 많더라고요.

우선, 8회라는 짧은 분량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늘어지는 부분 없이 속도감 있는 전개로 지루함 없이 몰입할 수 있습니다. 한국 의학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신파도 없고, 심지어 러브 라인도 없을 정도입니다. 한 과장, 기조 실장, 원장 등 차례로 등장하는 빌런과의 대립과 해결도 완벽합니다.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백강혁 교수의 과거를 원장의 개심을 위한 복선으로 써 먹는 등 전개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백강혁 교수의 뛰어난 실력을 단순히 수술을 잘하는 것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수 딸 심장 수술 중 수술 장갑을 이용해 심장의 구멍을 덮는 방식, 남수단에서 총상 환자의 팔을 절단하지 않고 괴사한 뼈만 절제하는 방식처럼 창의적인 해결 방법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 점도 인상적입니다. 

캐릭터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노력형 주인공이 천재에게 감화를 받아 성장한다는 전형적인  일본 소년 만화 구성이기는 한데, 이를 의학 드라마에 효과적으로 접목했어요. 캐스팅도 찰떡이었고요.

그러나 내용도 일본 소년 만화스럽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백강혁 교수가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인 탓에 슈퍼 히어로물에 가깝거든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갈등도 긴박하게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백강혁 교수가 결국은 수술을 성공하는게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분량은 캐릭터들의 서사, 관계를 깊이 있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백강혁 교수가 의사가 된 이유 정도만 등장할 뿐이지요. 

그래도 재미있다는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