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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1

화산전생 - 정준, 토마씨 : 별점 1.5점

화산의 장로였던 주서천은 죽은 뒤, 과거로 회귀했다. 주서천의 시대에서 암천회와 무림의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던 탓에, 주서천은 영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암천회의 음모 좌절에 새로운 생을 걸었다.

인기 웹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인기가 많다기에 이번 연휴에 몰아서 완결까지 보았습니다. 

뻔한 회귀물이지만 인기작답게 나름대로 독특한 점은 있네요. 단순한 무공 대결보다는 전략과 정보전이 강조된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암천회는 소문과 거짓 정보를 활용해 무림 인물들을 현혹시키고, 9파 1방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질투심과 자격지심을 교묘히 자극해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꽤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 무림맹과 암천회의 결전은 수천의 병력이 각자 군사의 지휘 하에 지형과 다양한 작전을 활용해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무협지보다는 말 그대로 '전쟁'을 그려내고 있고요.

전통적인 무협의 틀을 벗어나, 기관 전문가와 상인이라는 인물을 주력 조력자로 배치한 점도 특이합니다. 기룡 제갈승계는 초반에는 단순한 기관 돌파 전문가 정도의 역할이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다양한 병기와 기관으로 암천회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참호전 당시 첫 등장했던 기관총을 연상케 하는 그의 활약은 열세인 무림맹의 승리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작 중 대립 상대인 '암천회'의 설정도 괜찮습니다. 비록 숙청당할까봐 두려워 숨어지냈지만,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은 암천의 다양한 재보, 자금과 군대까지 엮을 수 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협물은 황실과 거리를 두는게 보통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설정에 녹여낸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았습니다. 

또한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명쾌해서 고구마스럽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주서천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인간 관계를 - 심지어 여자 관계까지! - 칼같이 정리하는 덕입니다. 주변 인물들도 불필요한 감정선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건 마찬가지에요. 선악의 구도도 명확하고, 악인은 반드시 최후를 맞이하는 단순하지만 시원한 구성도 이야기를 더욱 속도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회귀물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전개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구조이며, 과거의 기억으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최강자가 되는 설정은 지극히 뻔했던 탓이 큽니다. '기연이 있는 장소를 미리 알고 찾아서 확보한다'가 거의 전부거든요. 별 탈 없이 레벨(?)을 올린 주인공이 상대방을 모두 해치우며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무협이라는 장르의 틀을 벗어나 전형적인 판타지물처럼 변모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혈마가 강시를 만들고 시신을 활용해 몸을 바꿔치기하며, 인어와 이무기, 현무, 말하는 독거미 등 이종족(북해빙궁은 엘프더군요)과 몬스터에 이상한 주술까지 등장하는데 무협물이 아니라 혼합 장르물 혹은 마법 판타지로 느껴집니다. 등장인물들의 강함을 일종의 레벨처럼 표현하고, 최강자들의 필살기(심상구현이라 부르는)는 각자 독특한 무공이 한 개씩 있다는 것 역시 전형적인 만화 판타지 세계관으로 보이고요. 뒤로 가면 이게 무협물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나마도 무공이라면 모를까 주서천이 마지막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시간을 되돌리는건 어이가 없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아니고... 주서천의 심상구현인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회귀'로 주서천이 치명상을 입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암천회주에게 한 방을 먹이는 정도가 적당했습니다. 

그 외 전개에서 이상하게 늘어지며 억지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아요. 대표적인게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퇴장입니다. 암천회와의 결전 직전에 무림맹 내부의 다툼으로 처형된다는 전개보다는, 백의종군하여 마지막 대결에 참여하게 했더라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비급과 보물이 과도하게 등장하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전형적인 판타지 회귀물과 별다를게 없고 작화가 심하게 좋지 않아서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별호'가 이렇게 별로인 무협지는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검 좀 쓰면 검성, 검신, 검선, 검마로 돌려막는 식이거든요. 제가 만든 챗봇으로 화산파 장문인 검선 우일문의 별호를 만들어보니 '매영검옹(梅影劍翁)'을 추천하는데, 검선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나 싶습니다.

2025/05/10

너의 퀴즈 - 오가와 사토시 / 문지원 : 별점 3.5점

너의 퀴즈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문지원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퀴즈 최강자를 가린다는 Q1 그랑프리 결승에서 미시마 레오는 도쿄대 출신의 천재인 유명 방송인 혼조 기즈나와 맞붙었다. 팽팽한 6:6 상황에서, 혼조 기즈나는 사회자가 문제를 말하기도 전에 정답을 맞추어 우승했다. 레오와 퀴즈 마니아 동료들은 방송국의 '짬짜미'를 의심했고, 레오는 스스로 조사에 나섰다. 조사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퀴즈 사랑에 대해 반추해 나가던 레오는 결국 이건 '짬짜미'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혼조를 만나 진상에 대해 듣게 되는데...

2023년 제23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신예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작품입니다. 작가의 "거짓과 정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어서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책 소개만 보았을 때는 퀴즈 마니아의 퀴즈 관련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퀴즈라는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퀴즈에 대한 진지한 접근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명확한 규칙과 전략이 존재하는 진지한 ‘시합’으로 설명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퀴즈에는 '확정 포인트'가 있다고 합니다. 문제 중에 퀴즈의 답을 확정할 수 있는 포인트이지요. 그리고 퀴즈 플레이어는 상대보다 빠르게 답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답을 알고 누르는게 아니라 답을 '알 것 같은' 단계에 눌러야 한다는 등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퀴즈 대회 Q1은 실제 대회를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며, 미시마 레오가 퀴즈를 풀어내는 사고를 세밀하게 그려내어 정말 하나의 '스포츠'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안겨줍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퀴즈 관련 정보들도 실제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등장한 서술만으로도 충분히 그럴듯해 보일 정도로 잘 설명되고요. 작가는 이런 세심한 설정을 통해 퀴즈가 단지 지식을 겨루는 게임이 아니라, 사고와 감각이 살아 있는 장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퀴즈와 인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이 부분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주인공이 겪었던 경험들이 정답과 우연히 연결되었었는데, 이 작품은 퀴즈의 정답, 아니 퀴즈 자체가  레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인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퀴즈의 정답을 맞힌다는 것은 그 정답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해 왔다는 증거다.'라는 레오의 말 처럼요. 그리고 작품에서는 Q1에서 레오가 맞춘 문제를 통해 레오의 인생을 어린 시절 - 퀴즈를 몰랐던 때 부터 퀴즈에 빠지고, 여자 친구를 사귀고,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 부터 돌이켜보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레오가 퀴즈를 정말 사랑한다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고요. 레오가 알고 있던 ‘일본에서 가장 낮은 산’의 정답이 ‘덴포잔’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히요리야마’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레오는 퀴즈가 '살아있다'는걸 깨닫고, 퀴즈에 대해 더 충실감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는 단순히 지식을 외울 뿐이었던 혼조와 비교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미시마 레오도 호감이 갑니다. 지극히 평범한 청년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단지 퀴즈에 대한 애정만으로 잘 하게 되었다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등장인물 뿐 아니라, 작가가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여러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하루의 시간대를 나타내는 단어는 모두 태양의 움직임이 기준인데 심야만 성격이 다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 그리고 그게 퀴즈 정답을 말했을 때의 전율과 엮이는 묘사는 정말 빼어났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물로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답네요. 핵심은 ‘혼조 키즈나가 어떻게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말했는가?’라는 수수께끼 풀이인데, 레오가 과거 영상과 시합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은 긴장감이 넘칠 뿐더러, 작은 단서에 의해 하나 둘 씩 수수께끼가 풀려나가는 미스터리 장르로서의 재미 또한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 비해 진상 자체는 다소 아쉬움을 남깁니다. 혼조가 퀴즈 프로그램의 본질을 꿰뚫고 문제 출제의 경향을 파악했다는 점까지는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Q1 그랑프리에서는 참가자들이 반드시 정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설정은 말이 되니까요. 그러나 혼조가 마지막 문제로 과거 악연이 있는 연출자 사카다와 관련된 문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건 도박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문제를 듣기도 전에 정답을 외친 이유가 화제를 유도해 이후 자신의 온라인 및 유튜브 사업 홍보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건 최악이었어요. 레오와 박빙의 승부를 펼칠 정도의 인물이기에, 보다 더 강렬한 철학이나 신념을 기대했는데 너무 세속적인 동기라 실망스러웠어요. 이보다는 혼조가 레오를 만났을 때 해 주었던 이야기 - 아픔을 주었던 '곰의 장소'였던 야마가타가 정답을 알려주어 퀴즈에 진정한 매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 가 훨씬 나았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혼조가 도박을 벌인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결정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진상이 실망스러웠던건 혼조의 묘사가 별로였던 탓도 큽니다. 도쿄대 의대 출신의 천재로 사전을 머릿 속에 집어 넣고 있다는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인 설정도 별로고, 어린 시절 학폭같은 불필요한 서사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서 말한 '곰의 장소' 이야기로 끌고갈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래도 퀴즈를 단순한 게임이 아닌 삶과 연결된 진지한 시합으로 그려내며, 미스터리적 긴장감과 감성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05/09

야당(2025) - 황병국 : 별점 2.5점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마약 수사의 뒷거래
모든 것은 야당으로부터 시작된다!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이강수(강하늘)는 검사 구관희(유해진)로부터 감형을 조건으로 야당을 제안받는다. 강수는 관희의 야당이 돼 마약 수사를 뒤흔들기 시작하고, 출세에 대한 야심이 가득한 관희는 굵직한 실적을 올려 탄탄대로의 승진을 거듭한다.

한편, 마약수사대 형사 오상재(박해준)는 수사 과정에서 강수의 야당질로 번번이 허탕을 치고, 끈질긴 집념으로 강수와 관희의 관계를 파고든다.

마약판을 설계하는 브로커 강수,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관희, 마약 범죄 소탕에 모든 것을 건 상재.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이해관계로 얽히기 시작하는데… (공식 시놉시스)

올해 개봉해서 간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범죄 스릴러극입니다. 연휴에 감상하였습니다. 

좋은 흥행 성적이 이해가 되더군요. 시종일관 관객을 몰입시키는 전개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이강수와 오상재 복수극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유튜브 생중계가 일품이에요. 굉장히 대담하면서도, 구관희와 조훈의 추악한 거래를 전국민에게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 통쾌함을 선사해 주니까요. 생중계를 눈치챈 구관희 일당이 다급하게 블라인드를 내리는 장면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생각되고요. 이 생중계를 마지막 순간까지 감춘 구성은,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으로서의 효과를 극대화 해 줍니다. 

등장인물 설정도 좋습니다. '야당'이라는, 전혀 몰랐던 직업(?)을 주요 소재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에 더해, 검사가 절대악이자 최종 빌런으로 대통령 선거의 흐름까지 뒤흔든다는 설정이 최근 현실과 맞닿아 있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구관희 검사에 대한 약간이지만 나름 복잡한 설정도 잘 그려져 있고, 강하늘과 유해진의 연기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줍니다.

하지만 단점도 뚜렷합니다. 우선 이강수라는 인물의 설정이 다소 납득이 어렵습니다. ‘야당’이라는 직업 특성상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그가, 마약사범들과 경찰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요. 아무리 구관희 검사라는 뒷배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고, 이런 경솔한 면모는 이후 등장하는 치밀한 복수극과도 어울리지 않아서 인물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대선후보 아들로 구관희를 설득해 강수, 상재, 수진의 인생을 망치고 복수심을 품게 만든 조훈은 더 최악이에요. 요즘 시대에, 대선후보 아들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고 막나간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잘 나가던 배우였지만 마약으로 인생을 망친 수진은 뻔한 설정이라 진부했고요.

이강수와 오상재가 꾸미는 작전도 설득력이 다소 부족합니다. 조훈의 마약 투약 장면이 담긴 영상을 USB에 담아 야당 의원에게 전달하려다 실패하는 설정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같은 더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이 있는데 굳이 USB를 사용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든요. 이건 오상재가 체포되는데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듀폰 라이터를 이용한 도청 장치 역시 마찬가지에요. 라이터가 영화 속에서 너무 자주 비춰져서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폐인이 되었던 이강수가 마약을 끊고, 체력을 키워 복수에 나서는 과정은 설명이 더 필요했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 걸맞게 수위 높은 장면들도 다소 과합니다. 마약 복용 후 벌어지는 난교 장면이나 과도한 살인 묘사는 굳이 이 정도까지 노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장면을 빼고 수위를 조절해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다면 흥행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겁니다.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인물 설정의 허술함과 작위적인 장치들, 과도한 수위는 몰입을 저해하지만 재미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 범죄극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05/04

오랫만에 베어스 이야기 : 삼성이 레전드를 살려줬지만, 리빌딩이 답이다.

오랜만에 두산 베어스 관련 글을 씁니다. 올 시즌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개막을 맞이했는데, 시즌 초반부터 실망스러운 경기력이 이어지며 글을 쓰는 것조차 망설여졌습니다. 

 외국인 선수들이 제 몫을 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보다 팀 성적이 떨어진 것은 명백히 투수진의 부상 이탈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곽빈 선수, 홍건희 선수, 이병헌 선수 등 작년 필승조의 핵심 선수들이 이탈한 데다, 최지강 선수까지 부진하며 현재 남은 믿을 만한 불펜 자원은 이영하 선수 한 명 뿐입니다. 

그러나 저 선수들의 부상 대부분은 작년 이승엽 감독님의 투마카세 기용 탓이 큽니다. 올 시즌도 감독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선수 기용으로 팀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고 있고요. 프로야구도 '명장'이라는게 존재한다는걸 올 시즌에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김태형 감독님이었다면 최소 중위권 싸움은 하고 있을 겁니다. 김태형 감독님 시절에는 이겨야 할 경기는 거의 이겼었지요. 

사실 KT 루징 시리즈에 이어, 작년에 엄청나게 약했던 주말 삼성전이라 호흡기 떼고 감독 경질이 구체화될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의 위닝 시리즈를 거두더군요. 삼성이 레전드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일부러 패한건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말이지요. 그래도 이번 위닝 시리즈에서는 그간 보아왔던 어처구니없던 투마카세, 타마카세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앞으로도 최소한 아래의 사항들을 지키며 시즌을 운영했으면 합니다.

  1. 필승조부터 명확히 정리하라. 최지강 선수는 현재 필승조가 아닙니다. 작년에 무리하게 등판하다 부상당한 이후로는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영하 선수 외에는 넓게 보아도 박치국 선수만 현재 필승조입니다.
  2. 지는 경기에 필승조를 투입하지 마라. 점수 차가 2점이든 1점이든 지고 있으면 이영하, 박치국 선수는 투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베어스가 경기 후반에 상대 필승조 상대로 역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3. 4점차 이상으로 이기고 있는 경기에도 필승조를 아껴라. 이런 상황에서는 홍민규, 박신지 선수 등 롱 릴리프 자원을 활용하는게 바람직합니다.
  4. 계투진은 누구든, 롱 릴리프 보직을 명확히 한게 아니라면 멀티이닝으로 기용하지 마라. 최근 홍민규 선수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투수진에서 또 부상자가 생기면, 그 책임은 오롯이 감독이 져야 할 겁니다.
  5. 이름값으로 선수 기용하는 일은 삼가하라. 2루수로 기용되며 조금 살아나는 모습이지만, 지금의 강승호 선수가 1군 주전 야수로 계속 출전한다면 2군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의 사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몸값 높은 주전이라도 공정한 평가를 해야 합니다.
  6. 2군에서 콜업된 선수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다른 팀들에는 유망한 젊은 야수들이 꾸준히 출전 기회를 받는데, 왜 우리 팀에는 그런 선수가 없을까요?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7. 초구에 무의미하게 건드려 아웃되면, 페널티를 부여하라. 선수들에게 집중력과 타석 운영, 상대 투수 투구수의 중요성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8. 스트라이크존 밖 공에 대한 탐욕 스윙으로 아웃될 때 경각심을 주어라. 도저히 못 봐줄 스윙으로 삼진 아웃될 때에는 벌금 등 내부 규율을 강제해서라도 선수단 전체에 메시지를 주기 바랍니다.
  9. 조수행 선수는 작작 써라. 앞으로는 제발 대주자나 대수비로만 기용하세요. 타석에 김인태 선수, 아니면 최소한 김민석 선수가 들어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수행 선수를 고집하는건 감독의 직무유기입니다.
  10. 후반 초입에 타마카세좀 그만해라. 김인태 선수를 1, 2점차로 이기고 있다고 6회 쯤에 조수행 선수로 바꾸지 마세요. 우리는 필승조가 약해서 1, 2점차는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조수행 선수가 투입되었다고 1점 더 날 가능성도 별로 없다면, 타선의 강력함을 유지하는게 더 나은 방향입니다. 후반에 얼척없는 대타도 그만 쓰고요.

그러나 이렇게 운영해서 이기는 것 보다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연패를 거듭해서 꼴찌를 해도 좋으니 코칭 스탭과 선수단의 전면 개편이 일어나서 진득한 리빌딩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비록 남은 시즌이 아직 길고, 상황을 반전시킬 복귀 선수가 없는건 아니지만, 어차피 우승 전력이 아닌데 왜 투수진을 망치고, 탐욕 스윙하는 고액 연봉자들의 스탯타를 보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작년에 한 해는 제발 리빌딩하자는 글을 썼는데,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2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신인들이나 꾸준히 기용하면 좋겠습니다. 대타로만 쓰거나 선발로 내보내도 몇 경기 부진하면 바로 제외시키는 운영 방식으로는 젊은 선수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명진 선수는 물론, 김민석, 추재현, 여동건, 임종성, 김동준, 류현준 선수 등이 활약하는 베어스를 보고 싶네요.

2025/05/03

브라이턴 록 - 그레이엄 그린 / 서창렬 : 별점 2.5점

브라이턴 록 - 6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런던의 신문 기자 헤일은 브라이턴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뒤, 자신의 불길했던 예감대로 죽음을 맞는다. 그가 생의 마지막 날에 잠시 만났던 여자 아이다는 헤일이 자연사했다는 검시 소견에 의문을 품고서 단서를 찾던 중, 고인이 죽기 직전 들른 곳으로 밝혀진 스노 식당의 직원 로즈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헤일의 죽음을 설계한 젊은 갱 두목 핑키가 먼저 로즈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로즈는 아이다의 추궁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핑키는 점점 다가오는 아이다의 추적을 피해 자신의 살인을 덮고자 또 다른 범죄를 계획하고, 유일한 증인이 될 로즈의 입을 영원히 틀어막을 방법을 궁리한다(출판사 제공).

오랫만에 묵직한, 500페이지가 넘는 고전 정통 장편 범죄 소설을 읽었네요. 그레이엄 그린이 1938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문학과 범죄의 교차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지요. 영국 남부 해안의 휴양지 브라이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 갱과 주변 인물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죄와 구원, 선과 악이라는 주제를 날카롭게 천착하며, 단순한 범죄 소설을 넘어선 문학성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범죄 소설로도 평가가 높습니다. "CWA 선정 100대 범죄소설"에 46위로 선정되었고, 2010년 타임즈(The Times)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범죄 소설 50선”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우선 1930년대 영국 휴양지 브라이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싼티나는 쾌락과 범죄가 넘쳐나는 타락의 도시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등장 인물 역시 브라이턴 못지 않게 생생하게 그려지며, 그 중 압권은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소년 핑키입니다. 술도 못 마시고 여자도 모르는 미성년자가 어른 여럿을 수하에 두고 아무런 죄책감없이 사람을 죽이는 과정은 섬뜩함을 자아냅니다. Brighton Rock의 유튜브 검색 결과에서 Pinkie's first appearance가 가장 먼저 뜨는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건 확실해 보입니다.


그 외에도 핑키에게 푹 빠져 타락하고 마는 순진한 소녀 로즈, 탐정 역할을 자임하는 중년 여성 아이바, 핑키의 부하 스파이서와 커빗, 최초 피해자 프레드 등 주요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상세하고 생생합니다. 

범죄극으로서도 뛰어난 편입니다. ‘프레드의 사인을 경찰은 왜 자연사로 판단했을까?’라는 미스터리도 등장하니까요. 진상은 핑키 일당이 프레드의 입에 '브라이턴 락' 사탕을 쑤셔 넣어 급사하게 만든겁니다. 의도한건 아니라서 트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앞서 핑키 일당의 주무기는 면도날이라는 언급을 계속 해 주었기 때문에 일종의 서술 트릭으로 읽혔습니다.
아이바의 끈질긴 탐문 수사, 그리고 몇 안 되는 핑키가 남긴 단서도 공정하게 공유되며 마지막 아이바의 일격은 추리적인 재미를 더합니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 역시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특히 반전이라 할 수 있는 핑키의 욕설 레코드가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과연 '구원'이라는게 가능할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반면 단점도 존재합니다. 핑키가 로즈와 결혼할까 말까 고민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장황하고 지루했습니다. 또한 핑키가 술을 못 마시고 여자를 모른다는 설정도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다소 지루하고요. 또한 이런 묘사들이 핑키를 철없는 소년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도 문제입니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들을 부리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조직 우두머리'라는 핑키의 독특한 존재감을 희석시키는 탓입니다. 핑키에 대한 설명도 너무 부족해요. 별다른 완력이나 두뇌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카리스마도 없는데 어린 나이에 범죄조직 우두머리가 되었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프레드의 죽음에 대한 핑키의 두려움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미 경찰이 자연사로 판단한 사건에 몇 가지 단서가 더해졌다고 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핑키의 '두뇌'에 심대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만 들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카톨릭의 구원과 타락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나, 교인이 아닌 독자로서는 크게 와닿지 않아 흥미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교인이었다 하더라도 다소 낡은 논의였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타락한 도시와 범죄 조직, 도덕의 경계를 주제로 한 설정과 상세한 묘사는 좋지만, 개연성과 몰입도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많이 지난 느낌입니다. 

2025/05/02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이노우에 마기 / 이연승 : 별점 2점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4점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론 사업 벤처기업 탈랄리아 직원 다카기 하루오는 어린 시절 형의 사고사를 방조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다카기는 최첨단 조사용 드론 아리아드네의 3세대 모델인 SVR-3가 채택된 지하도시 WANOKUNI 개막식에 참석하는데, 마침 그날 지진이 일어났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사히 대피했지만, 붕괴와 침수가 계속되는 지하 5층에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이 생존자가 헬렌 켈러처럼 시각, 청각, 언어 모두에 장애가 있는 나카가와 히로미라는 점이었다. 물이 완전히 차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여섯 시간뿐으로, 다카기는 동료들과 함께 유일하게 지하에 접근할 수 있는 드론 아리아드네를 원격 조종해 생존자 수색과 구조에 나서는데....

일본 작가 이노우에 마기가 쓴 재난 구조 SF 소설입니다. 구조라는 테마에 첨단기술과 장애인이라는 소재를 결합한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존 재난소설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탈출극 추천'이라는 리스트에서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구조 과정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듬뿍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드론'을 활용하여 헬렌 켈러와 똑같이 시력, 청력 및 대화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지하 도시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설정 때문이지요. 그래서 '드론'은 '촉각'과 '후각' 만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해서 아리아드네는 향수를 내뿜어 도착을 알리고, 점자 카드가 포함된 구호 물품을 투척하며, 장착된 하네스(유도용 와이어)를 잡게하여 경로를 안내합니다. 또 이러한 설정들은 단순한 SF 상상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구조 과정의 설득력을 더해줍니다.

작품의 배경인 지하도시 WANOKUNI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에너지 보존과 탄소 배출 감소, 지진 대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지하 건설의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드론을 활용한 물류 시스템, 개인 맞춤형 서비스, 광덕트를 통한 자연광 유입 등 매력적인 기술들이 상세하게 소개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통신망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드론 조종이 가능했던 원리, 드론의 무선 충전 방식 등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구조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WANOKUNI가 정치적인 이유로 활성 단층 위에 건설되었다는 설정도 괜찮았고요. 

재난 구조 소설답게 구조 과정에서 벌어지는 위기 상황들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진으로 인해 구조용 드론이 추락하고, 지하 4층 스파 구역에서 발생하는 누전, 폭주하는 지게차들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들, 그리고 다카기가 폭로 유튜버의 드론에 맞아 아리아드네의 통제권을 놓치는 장면까지, 하나하나의 위기들이 정교하게 쌓여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울러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히로미가 조명 스위치를 작동시키거나, 쥐떼를 감지하고, 돌진하는 지게차를 스스로 피하는 등, 의아한 행동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정말 시각을 잃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이 수수께끼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상 - 히로미가 사실은 도시에 추락했던 다른 장애인 미도리를 업고 있었고, 모든 기이한 행동들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반전 - 은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요. 아울러 이 진상은 광덕트 붕괴와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진 이유, 이유를 알 수 없는 배낭의 열기 등 여러 복선들과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정교함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난 생존물로서 치명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 대상자인 히로미가 아니라 드론 조종자인 다카기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인물의 긴박감을 그리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카기는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드론을 조작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래서야 일종의 1인칭 슈팅게임과 별다를게 없지요.

또한, 서사의 일부 전개는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예컨대, WANOKUNI 입주식 날 하필 지진이 발생한다는 설정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 맞춘 듯 합니다. 평소대로 일상생활을 하다가 지진이 발생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구조 활동 중에 온갖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다카기, 그리고 계속해서 민폐를 끼치는 니라사와의 모습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특히 장애가 있는 동생을 계속 잃어버리는 니라사와의 행동은 짜증을 유발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애인을 구조하는 독특한 설정과 드론 기술의 활용, 그리고 정교하게 짜인 반전은 매력적이지만, 긴박감을 살리지 못한 시점 선택과 작위적인 전개는 아쉽습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4/27

악녀는 두 번 산다 - 한민트 / 피치베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기 웹소설의 웹툰 버젼입니다. 자주 찾는 커뮤니티인 클리앙에서 어떤 분이 강력 추천하시기에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 작품은 회귀한 아르티제아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제국의 정치판을 뒤흔들며 정적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 큰 줄기를 이룹니다. 오빠 로렌스를 비롯해 황위 계승을 둘러싼 여러 귀족들과의 지략전, 황실 내부의 갈등 구조, 회귀한 아르티제아의 철저한 계산이 맞물려 극적인 전개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세드릭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그녀가 감행하는 정적 제거의 과정은 독자들에게 높은 몰입감을 안겨줍니다.

이처럼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입체적인 성격 덕분이기도 합니다. 황제 그레고르는 단순한 악역을 넘어서 지략과 권력을 모두 갖춘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지며,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인척까지 숙청하는 냉혹함 속에서도 가식 없는 일면을 보여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 외에도, 깊은 원한을 품은 황태후, 아르티제아의 친모이자 황제의 정부인 밀라이라, 우유부단하지만 트라우마를 지닌 황제의 동생 로이가르, 로이가르에게 순종적인 인형같은 존재에서 강인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가넷, 출신 신분 때문에 능력은 있지만 트라우마와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카멜리아 후작 부인 등 주변 인물들 모두 과거사와 현재의 권력 구도가 촘촘하게 얽혀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심리 묘사 또한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아르티제아와 세드릭의 감정선, 둘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변화들도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단순한 권력 암투 이상의 인간적인 교류와 관계 형성도 이 작품이 가진 장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 존재합니다. 작품 속 권모술수와 지략 대결이 마치 큰 판을 짜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 전개를 살펴보면 주인공 아르티제아의 행보는 단순하고 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로이가르 대공의 몰락은 아르티제아의 계략보다는 카멜리아 후작 부인의 딸 스카일라와 원래 카멜리아 후작 후계자 이안을 끌어들인 결과일 뿐이지요. 이안이 목숨을 건진건 순전히 운일 뿐이었고, 아르티제아가 닥쳤던 위기를 성녀로 인정받으며 극복하는 장면 또한 우연에 가깝습니다. 독자가 기대한 ‘천재적 전략가’의 모습보다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쓰고 운이 따른 결과로 상황이 풀리는 흐름이 많아 다소 김이 빠지네요. 이런게 능력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아르티제아만 주변에 인물이 많은 이유는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한, 아르티제아가 전생의 부채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클라이맥스에서 무너지는 제방을 복구하기 위해 마법을 쓰는 장면은, 전개상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로렌스를 제거하고 세드릭이 황제가 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세드릭과 리시아를 연결시키려는 노력도 무리하게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해요. 초반부 하이라이트인 에브론 대공가에서 발생하는 오브리 역모 사건은 짜증만 일으키는 이야기였고요.

아울러, 주인공인 아르티제아와 세드릭, 로렌스는 설정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캐릭터에 머물러 있어 인물 구성이 아쉽습니다. 이들이 중심축을 담당하는 이야기인 만큼, 이들의 내면이 좀 더 입체적으로 다뤄졌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훨씬 높아졌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잡하고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들과 지략을 펼쳐가는 긴장감 있는 전개, 세심한 심리 묘사는 분명 장점이지만, 전개상의 허점과 중심 인물의 평면성은 몰입에 방해가 됩니다. 남성향으로, 보다 강한 인물들이 진짜 지략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였더라면 더 마음에 들었을텐데, 제 취향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2025/04/26

엘리펀트 헤드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2점

엘리펀트 헤드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 병원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는 배우인 아내 기키, 대학생이자 가수인 큰 딸 마후유, 고등학생 둘째 딸 아야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가족의 행복이 쉽게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술사였던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아픈 기억 탓이었다. 그래서 기사야마는 가족의 행복을 망치려는 원흉을 사전에 제거해 왔고, 최근에는 딸을 취재 목적으로 스토킹하던 방송인 이즈미를 살해했다. 그러나 마후유가 애인 하루를 가족에게 소개시켜 주는 날, 하루가 기사야마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가졌다는걸 폭로해서 가족은 붕괴되고 말았다. 자포자기한 기사야마는 마약상 에덴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스마'를 주사했다. 그런데 시스마가 이상한 효과를 일으켜 시간을 역행한 기사야마는, 하루를 습격해서 입을 막고 가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 시간 역행이 아니라 시간 분기였다. 결국 두 개의 시스마를 사용해 사태를 해결한 행운아, 한 번 실패해서 시간 역행 효과만 확인한 복원자와 공격받아 입원한 산송장, 모두 실패한 도망자라는 다중 시간축이 생겨났다. 기사야마들은 어느 시간 축에서라도 사람이 죽으면(기사야마가 살해하면), 모든 시간 축 사람이 죽는다는걸 알아내고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살인을 막으려 했지만, 마후유와 기키, 아야카가 차례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신예 작가 중 '추리' 장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최신작.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추리하는 구성이 특징인데, 이번에는 각기 다른 시간축(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동일 인물이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다중 시간축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축이 달라도 죽음의 순간은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설정에서 일종의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탐정역을 소화하는 기사야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점도 큰 특징입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방해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소시오패스거든요. 아내의 스토커를 잡아다가 능욕하고, 딸 스토커는 살해하는 초반부 단계를 지나 후반부로 갈 수록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그 수준이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나 참신함, 독특함은 설정에 국한될 뿐, 정작 추리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큽니다. 여러 명의 기사야마가 가족의 죽음을 놓고 펼치는 대부분의 추리는 결국 ‘추리를 위한 추리’에 불과해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아야카가 폭발한 이유가 알약에 숨겨진 소형 폭탄 때문이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산산조각이 나고, 신체 조각이 날아갈 정도라면 알약 크기 폭탄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요. 다중 시간축에 있던 복수의 가족들이 동시에 죽었는데, 죽은 상태가 서로 극과 극이라 사망한 원인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저절로 폭발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 자체는 그럴싸한데, 상황이 너무 말도 안돼요. 추운 차를 운전하다가 동사하고, 두꺼운 탈을 쓰고 공연하다가 열사병에 걸려 죽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여러 명이 추리를 펼쳐봤자 다 억지스럽고 말이 안된다면, 이건 그냥 분량 낭비일 뿐입니다. 이런 류의 대표 걸작 "독 초콜릿 사건"처럼, 모든 추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 또한 억지스럽습니다. 기사야마들은 가족들이 죽는 순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범인 기사야마는 피해자가 죽는 순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시한 장치 트릭' 더하기 '원격 조종 트릭'을 사용했는데, 상황을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맞춰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후유는 '행운아'가 죽였습니다. '행운아'는 마후유가 하루와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는걸 알게된 뒤, '산송장'의 손을 빌어 하루를 죽게 만듭니다. '산송장'의 시간축에서 하루가 죽자, '행운아'의 시간축 하루도 죽는데 마침 운전 중이라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되고요. 사고로 차밖으로 튕겨나간 마후유는 공교롭게 지나가던 차량에 머리가 으깨져 죽습니다. 즉, 이 모든건 말 그대로 ‘기적의 타이밍’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마후유가 왜 튕겨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야카 폭사에 대한 진상은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도망자' 기사야마가 그녀를 성폭행해 임신시킨 뒤 태아를 불법으로 적출해 폭사시키고, 임신을 유지하던 '두더지' 시간대의 아야카의 뱃 속 아기가 폭발하자 다른 시간축의 아야카들 모두 폭사했다는건데, 이건 추리의 수준을 떠나 인간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이렇게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트릭으로 포장한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단점도 추리물로는 치명적입니다. 행운아는 마후유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행운아의 시간축에서는 마후유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소시오패스라서,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죽였다? 정신병자의 과대망상이 동기인 작품이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또 이게 동기라면, 행운아가 마후유를 살해했다는걸 숨길 이유는 없어요. 약속대로 다른 시간 축의 기사야마들이 가족을 죽이면, 손 안대고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설정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입니다. 죽음만 동일하게 적용될 뿐, 상처 등은 시간축에서 공유되지 않는다는게 대표적이에요. 상식적으로는 상처도 동기화되어야지요. 산송장이 중상을 입었을 때, 다른 시간축의 기사야마들도 모두 동일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더지가 도망자를 죽이려고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에필로그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도망자를 죽이려면 그냥 자살하면 됩니다. 시간축에 있는 모든 기사야마가 동일한 운명을 맞을테니까요. 또 에필로그에서처럼 한 시간축에서 터진 폭탄이 다른 모든 시간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앞서의 현란하고 복잡했던 시한 장치 및 원격 조종 트릭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그냥 하루와 마후유가 탔던 차에 폭탄을 설치하면 되잖아요?

기사야마에 대한 묘사도 이상해요. 기사야마들은 시간축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축마다 별개의 인격을 가진듯 보이는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야카 폭사 때 두더지는 도망자의 부탁을 받아 아야카의 아이를 살려주기까지 하는데, 이건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시스마를 잔뜩 맞은 탓에 시간축을 오가는 절대자가 된 우라시마도 사건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탐정역이 필요해서, 기사야마를 뛰어넘는 절대자가 필요해서 등장시킨 듯 한데, 인물 설정이나 등장 과정, 묘사 모두가 과장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스마를 맞은 복원자가 첫 번째 시스마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축을 한 번 더 분기시켜 ‘두더지’가 생겨났다는 설정은 참신했습니다. 이즈미 사키와 페페코 등 단순한 희생양으로 보였던 인물들을 활용하여 독자에게 시간 이동을 착각하게 만든 디테일도 눈에 띄었고요. 여러 시간축의 기사야마들이 추리를 펼칠 때, 사이렌 소리와 기키와의 과거사 등을 근거로 산송장이 사실은 아파서 누워있는 척 했다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참신한 설정과 캐릭터 구도는 흥미로웠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비윤리적인 트릭과 없다시피한 동기, 개연성 부족의 삼박자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전에 보았던 한 추천 리스트에서 언급했듯, 재미는 있지만 최악이에요.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2025/04/25

나 혼자만 레벨 업 시즌 1, 2 (2024~2025) - 이토 신고 : 별점 2.5점

동명의 유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넷플릭스를 통해 시즌 1과 2를 한 번에 몰아쳐 감상하였습니다.

이세계에 전생한 주인공이 특별한 치트 능력을 부여받아 무쌍한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최약체 E급 헌터였던 성진우가 이중던전에서 '플레이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각성하는데, 플레이어는 혼자만 레벨업이 가능하고, 퀘스트 수행이나 능력치 분배가 가능한 게임처럼 작동하는 세계의 규칙을 적용받는다는 설정 역시 다른 이세계 무쌍류와 유사합니다. 등장 인물들을 능력치로 등급화한 세계관, 그리고 주인공이 여러 스테이터스 창을 띄우고, 게임처럼 진행한다는 설정도 뻔하디 뻔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배경 설정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전생물이 아니라 무대가 '현실 세계'라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어느 날 갑자기 현실 세계에 '게이트'가 등장해서 마물들이 출몰하고, 인간 중 일부는 '헌터'라는 초능력자처럼 각성한 뒤 게이트에 들어가 마물과 싸우고 보상을 얻는다는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거든요. 헌터는 E급부터 S급까지의 능력치를 기준으로 등급이 나뉘며, 사회 전반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고요. 헌터 간의 계급, 게이트 등급, 마석과 마정석을 둘러싼 경제 구조와 이를 둘러싼 인간 관계 등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성진우가 네크로맨서로 전직한 뒤 자신만의 군단을 형성해 가는 설정도 독특해서 괜찮았습니다. 많은 부하를 이끌게 됨으로써 빠른 레벨업과 강하고 다수인 적들과 맞서 싸워 이기는데 설득력을 부여함은 물론, 자신이 이긴 적을 동료로 얻고 활용하는 과정은 '동료 수집'이라는 게임적 재미를 구현하고 있거든요. 시즌 2의 제주도 4차 레이드에서 치명상을 입은 차해인을 구하기 위해 전사한 A급 힐러 민병구를 되살리는 극적 연출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액션 연출의 완성도가 아주 높습니다. 칼과 마법, 그림자 군단이 엇갈리는 전투 장면은 빠른 속도감과 현란한 연출로 몰입도를 극대화시킵니다. 가끔은 동화 수가 부족한 느낌도 들기는 하는데, 과감한 구도의 사용 등으로 잘 커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던 대로 비교적 뻔한 설정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들 대부분이 가진 문제인데, 성진우의 능력이 후반으로 갈수록 상식을 초월한다는 문제도 커요. 결국 성진우가 이길게 뻔해서, 그렇게 몰입이 되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성진우가 초월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레이드 초기에 참여하지 않은건 욕 먹어도 쌉니다. 그가 초기에 참여했다면 헌터들의 희생을 막고 보다 쉽게 개미 떼를 정리했을 테니까요.

성진우가 플레이어로 선택된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하며, 여동생의 친구 한송이나, B급 힐러 이주희 등 주요 캐릭터처럼 등장했지만 별 의미 없이 퇴장하거나 비중이 사라지는 인물들이 많은 점도 이야기의 완성도를 떨어트립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세계 무쌍물의 익숙한 틀을 따르지만, 배경을 현실 세계로 설정해 차별점을 두었으며 주인공의 네크로맨서 전직과 액션 연출의 몰입도는 인상적입니다. 다만 전개가 뻔하고 설명되지 않은 설정, 비중 없는 조연 등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다음 시즌이 기대되네요.

2025/04/20

사유리 - 오시키리 렌스케 : 별점 2점

[고화질] 사유리 (완전판) - 4점
오시키리 렌스케/대원씨아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누나와 남동생, 모두 7명으로 이루어진 노리오의 가족은 그동안 꿈꿔왔던 단독주택으로 이사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 뒤 남동생은 사라졌고, 할아버지도 급사하고 말았다. 누나와 어머니마저 자해, 자살하여 순식간에 노리오와 치매에 걸린 할머니만 남게 되는데...

오시기리 렌스케의 하우스 호러. "하이스코어 걸"이라는 레트로 청춘 연애 코미디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작가는 "미스미소우"로 대표되는 호러물로도 유명하지요. 이 작품도 호러물이고요. 이런 작품이 있다는걸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영화화가 되었다고 하여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이북으로 출간되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 분량이라 부담도 없었고요.

행복했던 7인 대가족이 꿈에 그리던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뒤, 온갖 괴현상을 겪으며 한 명씩 죽어나가는 과정은 귀신들린 집(Haunted mantiion) 설정 그대로, 하우스 호러물의 전형대로 진행됩니다. 가족이 이사한 집은 '사유리'라는 소녀가 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암매장된 곳이라, 사유리가 행복한 가족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던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가족들이 차례로 죽고, 자살하고, 사라지는 과정의 묘사는 그렇게 뻔하지는 않습니다. 일견 자연사처럼 보이는 평범한 죽음이 점차 진화해 나가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웠거든요. 누나가 혼자 혀를 물어 뜯는 묘사는 굉장했어요.

그리고 노리오와 치매에 걸렸던 할머니를 제외한 전 가족이 죽은 상황에서, 할머니 정신이 돌아오는 부분부터는 아주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강단있고 행동력 강한 할머니 캐릭터가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이지요.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모습은 와~ 정말 '핵간지'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귀신에게 지지않는 생명력을 갖추고, 오히려 복수를 위해 사유리를 죽인 사유리 가족을 모두 납치해서 죽이려 하는 모습은 광기어리면서도 통쾌했고요.

하지만 사유리가 자기를 죽인 가족도 가족이라고, 그들을 동정해서 약해진 탓에 노리오의 죽은 가족들에게 끌려가 성불하는 결말은 솔직히 영 아닙니다. 너무 급작스럽잖아요. 애초에 자기를 죽인 가족에게 원한을 품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할머니와 사유리의 제대로 된 대결이 펼쳐지지 않은 것도 실망스럽습니다. 남편과 아들, 며느리에 손자, 손녀까지 5명이나 죽인 악령을 그냥 놓아준다는게 앞서의 할머니 캐릭터와는 영 어울리지도 않았어요. 죽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영혼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전형적인 전개를 특유의 스타일,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로 풀어낸건 좋았는데, 결말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감점합니다.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4/18

악연 1~6 (2025) - 이일형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직장 동료였던 폭력 조직 출신 조선족 장길룡에게 살인을 청부했다. 한 달 뒤까지 사채를 갚지 않으면 장기가 적출될 위기에 처해서 보험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고, 장길룡은 경찰마저 살해한 뒤 박재영에게 돈을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박재영은 장길룡을 살해하려했지만, 되려 습격당한 뒤 납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길룡과 함께 김범준에게 살해당했다. 호구 한의사 한상훈을 살해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던 김범준이 박재영으로 신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최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최근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인데, 회사 동료 조문 차 장거리 버스 여행을 떠난 김에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생생한 등장 인물들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거든요. 그냥 욕설만 하는게 아니라 농담섞인 대사를 나누는 식으로 각본도 잘 받쳐주고요. 각본에서 시니컬한 블랙 코미디 정서가 묻어나는데, 제법 괜찮았습니다.

피해자인 의사 김주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악행을 저지르는 주요 등장 인물들이 이른바 '악연'으로 촘촘히 연결되었다는 설정도 눈에 띄네요. 박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장길룡에게 청부를 의뢰하고, 장길룡은 교도소 동기였던 김범준을 범행에 끌어들입니다. 김범준은 박재영의 고등학교 선배이고, 사고로 입원한 박재영(으로 신분 세탁한 김범준)의 주치의 이주연은 고등학교 시절 박재영 일당에게 성폭행을 당했었는데 이는 김범준의 애인 이유정의 사주 때문이었고요. 마지막 장기 밀매 조직 소속 의사로 김범준의 장기를 적출하는건 김주연의 애인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총 6화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며 깔끔하게 마무리하였으며, 모든 악당들이 죽고 만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최종 빌런인 김범준은 산채로 장기를 적출당한다는 끔찍한 죽음을 맞는데, 작 중에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정도로 통쾌했습니다.

김범준과 이주연이 공모해서 한상훈을 털어먹기 위해 짠 설계, 박재영이 장길룡을 살해하기 위해 준비한 휴대폰 알람(방심하게 만들려고), 한상훈이 자동차 정비소 이야기를 듣고 블랙박스 메모리를 뒤져 진상을 알아채는 장면, 김범준의 약병 바꿔치기 등 추리 및 범죄물로도 볼만했습니다.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채, 장기 밀매, 보험 사기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극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유치하다는 인상을 주는 탓이 큽니다. 사채빚을 못 갚아서 장기가 털린다는건 도대체 언제적 발상인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김범준이 박재영과 고등학교 선후배였고, 이주연의 애인이 장기 밀매 조직의 일원이라는 요소는 과도하게 작위적으로 느껴지고요. 아무리 '악연'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이야기는 익숙하고 결말도 뻔합니다. 박재영이 이주연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박재영이 사실은 박재영이 아니라는 뜻이 되며, 그렇다면 그 정체는 이야기 흐름 상 김범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김범준이 마지막에 장기가 적출되며 죽음을 맞는다는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요. 그래서 특별한 반전이나 여운이 남지는 못합니다. 제가 이런 장르물을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화차"의 바란다 이와 같으니...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전개, 배우들의 연기는 좋은데 개연성 부족과 다소 뻔한 전개는 아쉽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짧다는 장점은 확실하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습니다.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신다면 보셔도 괜찮을겁니다. 인기작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25/04/13

약사의 혼잣말 Season 2 (2025) - 나가무라 노리히로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기에 이어 방영된 후속 시즌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시에 대한 암살 음모, 마오마오의 출생의 비밀 등 보다 긴 호흡의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1기에 비해, 이번 시즌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1기에서는 꽤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추리물적인’ 요소가 이번 시즌에서는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래가 그나마 이번 시즌에서 마오마오가 추리력을 발휘해 해결한 주요 사건들입니다.

  • 외국 사절단 방문 이후 비취궁에 수상한 향유가 퍼졌고, 마오마오는 그것이 임산부에게 해로운 향유임을 밝혀냈습니다. 이에 진시는 누가 해당 물건을 들여왔는지 조사를 명했고, 조사 결과 범인은 리화비 시녀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촌 리화비가 황제의 후궁이 된 것에 질투심을 느껴 그런 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 가오슝은 집 밖에 나간 적이 없는 자매 중 한 명이 임신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마오마오에게 부탁합니다. 마오마오는 거울을 이용해 한 사람이 두 사람인 것처럼 위장했다고 추리합니다. 둘이 놓던 자수 역시 거꾸로 보면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착시를 이용했던 것이고요.
  • 진시가 과거 외국 사신이 목격했다는 ‘빛무리 속에서 춤추는 키 큰 미인’의 전설을 재현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마오마오는 진시를 여장시킨 뒤, 야광 성분이 있는 나방을 날려 춤을 추게 하여 그 장면을 연출합니다.
  • 마오마오는 황제가 ‘황제의 조건’이라 불리는 사당 통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적록색맹만이 올바른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던걸 알아챈 덕분이었지요. 참고로, 왕모의 혈족은 적록색맹의 유전 여부를 가려 자기들 핏줄을 유지하려고 했었던 겁니다...
  • 황태후는 선대 황제의 시신이 사후에도 썩지 않았던 이유를 밝혀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오마오는 선제가 남긴 그림을 통해, 웅황을 부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독성이 체내에 축적되어 방부 효과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 마오마오는 수수께끼의 노년 궁녀가 주최한 괴담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괴담 13개를 이야기한 뒤 촛불을 끄자 모두가 죽을 뻔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궁녀는 생전에 선제에게 농락당했던 소녀 중 한 명이었고, 이미 사망한 인물이었습니다. 괴담회에 참석한 모두를 죽음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장소 역시 밀폐된 공간이었기에 질식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오마오의 활약으로 모두 위기를 모면합니다.
  • 괴담회에서는 ‘금지된 산’에서 죽은 모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오마오는 모녀가 그 산에서 독버섯을 채집해 먹고 사망했음을 추리합니다. 해당 산은 원래 독초가 많아 금지된 곳이었고, 밤에 빛나는 독버섯이 도깨비불처럼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모친이 죽기 전 남긴 말인 “저 산에는 맛있는 버섯이 있다”는 말은, 마을 사람들을 함께 죽음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습니다...

시즌 1은 진시 암살 음모처럼 전체를 관통하는 큰 사건까지 마오마오가 추리했던 반면, 시즌 2에서는 마오마오가 요청을 받아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녀 스스로 의문을 품고 탐색해 나가는 정통 추리물의 형식은 많이 약해졌어요. 게다가 일부 사건은 명확한 결말 없이 마무리되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는 1기에 비해 아쉬운 수준입니다.

진시의 정체가 밝혀지는 중요한 전개 역시, 이미 초반부터 충분한 암시가 주어졌기 때문에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총명한 마오마오가 왜 이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는지가 더 의문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그녀가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 모른 척했다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완성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개별 에피소드들이 모두 단절된,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보이지만, 궁에서 소설이 유행하고 글공부를 원하는 궁녀들이 늘어나면서 학교가 생기고, 그 학교에서 건국신화 속 왕모 전설을 가르치는 장면이 다시 사당 통과 시험과 연결되는 식으로 전체적인 구성은 치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선대 황제의 성적 취향이나, 제국과 황실 가문의 역사 같은 설정도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 주고요. 진시와 마오마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선도 볼만했습니다. 특히, 11화 마지막에 폭포 뒤 동굴에 갇힌 뒤 보이는 모습은 시즌 2의 핵심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의 색채는 옅어졌지만, 에피소드 간의 연결성과 캐릭터 간의 관계는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다음 시즌이 기대되네요.

2025/04/12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 - 미카게 에이지 / 제이노블 : 별점 2점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권 - 4점
EIJI MIKAGE/테츠오/제이노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호시노 카즈키)는 엄청난 미모를 갖춘 전학생 오토나시 아야를 보자마자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아야는 '오늘 모기 카스미의 팬티 색깔은 하늘색이야'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종례를 앞두고, 아야는 반 친구들에게 자기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어디서 나온지도 모를 '마리아'라는 이름을 써 주었고, 아야는 그런 나를 붙잡고 자신이 끝없이 3월 2일을 반복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는데...

라이트 노벨로, 원제는 『空ろの箱と零のマリア』입니다. 일본에서는 2009년 전격문고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국내에는 대원씨아이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7권으로 완간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최근 e-book으로 재출간되었더군요. 라이트 노벨은 평소 전혀 읽지 않지만, '걸작 시간 미스터리'물로 선정된 적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시간 미스터리'답게, 의도하지 않게 특정 시간을 반복한다는 타임 루프물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로 대표되는 설정이지요. 소설로도 "일곱 번 죽은 남자" 등에서 활용되었고요. 다른 작품들처럼 무한 시간 반복을 없애려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특징도 분명합니다. 우선, 시간을 반복하는건 화자이자 주인공 호시노가 아닙니다. 호시노는 이 사실을 전학생 오토나시 아야에 의해서 나중에야 깨닫게 되거든요. 

그리고 작 중 '거절하는 교실'의 시간 반복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소원을 빈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야 한다는게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종의 '후더닛' 류의 추리물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를 밝히는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상자의 주인인 모기 카스미는 시간을 수없이 반복한 탓에, 자기 자신을 꾸밀 이유가 없어져서 화장품을 가지고 다니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걸 통해 알아채거든요. 호시노 카즈키의 친구 하루아키가 상자의 주인 제로였다는 걸 알아채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모기 카스미가 상자에 갇힌 뒤, 다시 시간 반복이 일어났는데 모기를 아이가 대체했다는 상황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아키는 '모기가 굉장히 예뻐졌다'는 식으로 이걸 알아챈 말을 했기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고 말지요. 독자에게 주는 단서로도 공정한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기가 상자의 주인이 되어 빈 소원이 지극히 청춘 연애물스러운 동기였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모기는 카즈키를 좋아해서, 고백이 거절당한 뒤 고백한 날을 반복했습니다. 수만번의 반복 끝에 카즈키가 고백을 받아주는건 물론, 카즈키가 되려 고백을 하게끔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매 번 새로운 날이 또 시작되었고 카즈키는 고백했다는걸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지요. 사춘기 소녀라면 할 법한 귀여운 생각이었는데, 그 단순한 소망을 상자가 뒤틀린 형태로 이루어주었다는게 매우 흥미로왔습니다.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그걸 치명적인 방식으로 왜곡한다는건 고전 걸작 "원숭이 손"을 비롯해서, "펫샵 오브 호러즈" 등에서 자주 보아온 장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소망 자체가 귀여운 만큼, 반전의 잔혹성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하지만 유치한 인물 설정과 대사, 그리고 라이트 노벨 특유의 감정 과잉 묘사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대사로 모든걸 표현하려고 해서, 소설보다는 만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설정 면에서도 몇몇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모기가 상자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시간이 반복될수록 상자에서 거절당한(모기가 죽인)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기만 남게 되니까요. 즉, 대단한 추리 없이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오토나시 아야는 이미 이전에 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어 모기와 대결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반복되자 이를 잊어버렸다는건, 설정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카즈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남아있었으니까요. 물론 상자의 주인 제로나 상자의 능력이 개입하여  아야의 기억을 조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상자의 주인은 결국 반복 속에서 당연히 드러날 터라 구태여 조작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또, 모기가 죽어서 상자에 갇힌 상황에서도 시간의 반복이 깨지지 않았다는 설정 역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조금 답답했고요.

물론 이런 설정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제가 읽은 1권 외, 전 7권에 이르는 나머지 분량에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읽을 의욕이 생기지 않는군요. 재미가 없는건 아니고, 설정도 매력적인 부분이 있지만, 캐릭터성과 연출 방식이 라이트 노벨 특유의 유치함에 갇혀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무슨무슨 리스트에서 추천하는 작품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읽는건 지양해야 겠습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4/06

집이 없어 (전 270화) - 와난 : 별점 3점

웹툰은 잘 몰랐는데,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진 인기작이더군요. 별로 볼 생각은 없었지만, 아래 유튜브에서 만화 매니아이신 부부께서 추천해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고해준이 어머니의 죽음 뒤, 갈 곳이 없어져(집이 없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학교 별관에서 우연찮게 만나 앙숙이 된 백은영과 함께 지내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둘의 관계는 날이 서 있지만, 여러가지 사건, 사고를 함께 겪으며 점차 신뢰를 쌓아가지요. 단순히 두 주인공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김마리, 박주완, 강하라 등 주변 인물들의 사연까지 함께 엮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고요.

장점이라면 뛰어난 몰입감입니다. 등장인물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불행 포르노' 느낌도 들 정도로 절망적이고 힘든 상황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는 전개로 이루어져 있고요. 그런데 이에 대한 묘사가 정말 일품입니다. 고해준과 백은영은 물론, 주변 인물들의 서사 모두 그런 맛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흡입력이 대단했어요.

귀신이 나오는 학교 별관에서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상계 에피소드들도 흥미로운 편이고, 박주완과 강하라 이야기처럼 반전이 있는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반면, 단점도 있습니다. 우선, 주요 인물 5인방 대부분 - 특히 백은영 - 이 스스로 사고를 일으켜서 짜증을 유발시킨다는 점입니다. 서로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관계도 보통 이런 발암 행위로 촉발되고요. 도대체 참을성, 배려 따위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해 지더군요.

그리고 고해준, 백은영, 김마리 모두 가정 폭력으로 인한 아픔이 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가정 폭력의 트라우마도 뻔한 설정으로 일관되어 있고요. 고해준과 백은영의 갈등도 반복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후반부에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백은영이 한 일에 대해 고해준이 오해하고, 이로 인해 다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탓입니다. 

고해준이 귀신을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도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했으며, 결말도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주었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하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현실적인 불행과 인물 간의 신뢰 회복 과정을 성장기 형태로 강렬하게 그려낸건 높이 평가하지만, 비슷한 설정과 이야기의 반복과 결말은 조금 아쉽네요. 책으로 출간된다면, 이야기를 조금 쳐내고 정리하면 더욱 완성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25/04/05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에 대한 유감.

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2점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센텐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국내 미출간 단편집이라 하여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챗GPT를 통한 자동 번역이 어느 정도 보편화된 시대에, 이런 수준의 번역을 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래는 이 책의 "폴스타호의 선장"의 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는 비스킷 반 탱크,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커피콩과 설탕의 매우 제한된 공급이 남아 있었다. 후방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하리코 양고기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사치품이 많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50명의 인원이 먹기에는 매우 한정된 양이었다.

창고에는 밀가루 두통이 있고 담금질한 담배만 많았다. 모두 합쳐서 18일이나 20일 동안 절반의 배급으로 선원들을 지탱할 수 있는 양이었다. 

...

"여러 시즌 동안 우리나라에 온 배 중에는 오래 된 폴스타호 만큼 많은 석유 돈을 벌어들인 것이 없었고, 너희 모두가 그 돈을 나눠가졌지. 다른 불우한 녀석들이 와이프를 편안하게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너희들은 그 여유를 누렸다. 너희가 그것을 얻은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해야 하며, 우리가 실패한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다. ."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담금질한 담배'라니....  아래는 원문(저자 사후 70년이 지난, 저작권이 풀린 퍼블릭 도메인이라 무료입니다)을 찾아서 챗GPT에게 번역을 시킨 결과물입니다. 그냥 보아도 수준 차이가 확연하지요. 번역본이 임의로 원문을 줄인 것도 눈에 뜨이고요.

선수 쪽에는 비스킷 반 통, 소금에 절인 고기 세 통, 그리고 커피콩과 설탕은 아주 적은 양만 남아 있었다. 선미 쪽 창고와 보관함에는 통조림 연어, 수프, 해리컷 양고기 등 사치품에 가까운 식료품들이 제법 있었지만, 승무원 50명에게 돌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저장실에는 밀가루 두 통과, 담배는 무제한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져봤을 때, 모든 인원이 절반의 배급량으로 나눠 먹어도 18일, 길어야 20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

“그동안 이 땅에 오는 배들 중에서 ‘올드 폴스타’호처럼 많은 기름 돈을 벌어들인 배는 없었고, 여러분 모두 그 덕을 봤잖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집에 아내를 안심시키고 떠났지만, 다른 불쌍한 놈들은 돌아와 보니 여자가 구빈원에나 들어가 있지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를 원망할 수 있다면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이번 전에 대담한 모험을 해서 성공했었고, 이번엔 실패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울고불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 "

하여튼, 이따위 결과물을 돈 받고 팔려고 했다는게 황당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기에 점수를 따로 주지는 않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책은 사라져주면 좋겠네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북극성 호의 선장"은 다른 단편집에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단편은 무료 텍스트를 챗 GPT에 번역을 시키는게 훨씬 나을겁니다.

2025/04/04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김성준, 김주식 : 별점 4점

미친 항해 - 8점
마이크 대쉬 지음, 김성준.김주식 옮김/혜안

마이크 대쉬가 집필한 역사 논픽션입니다. 1628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바타비아 호가 이듬해 6월, 현재의 소호주 해안 인근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한 뒤 생존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02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BBC History Magazine과 History Today 등의 권위 있는 역사 전문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항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선장이었지만, 직급상 최고 책임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인 '대상인' 프란시스 펠사아르트였습니다. 선장 야콥스와 펠사아르트 사이의 갈등은 여자 문제 등으로 항해 중부터 깊어졌고,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부상인'이자 전직 약제사였던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였습니다. 그는 선장을 꼬드겨 선상 반란을 모의했는데, 바타비아 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면서 계획이 꼬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사아르트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바섬으로 떠난 틈을 타서 코르넬리스는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체계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식량과 식수를 가지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면서, 반항할만한 불순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였지요. 펠사아르트가 구조대를 이끌고 보물을 회수하러 돌아오면, 그 배를 점령해 해적 생활을 하려는 계획으로요. 그래서 병자와 노약자,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약 115명에 달하는 이들을 죽였습니다. 

계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회수할 보물이 많기에 구조대 인원이 많지 않을거라는 코르넬리스 생각대로 구조대가 움직였거든요. 그러나 말라 죽으라는 의도로 다른 섬으로 보내졌던 위이버 헤이스와 건장한 남성들이 우물을 발견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코르넬리스의 학살을 알게된 후 방어 거점을 구축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코르넬리스는 친위대를 이끌고 위이버 헤이스를 속이려다가 사로잡혔고, 코르넬리스의 후임이 일당들과 함께 위이버 헤이스 섬을 공격하여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대상인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나 소설이라고 해도 억지스럽다고 할 것 같은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라웠어요. 여튼, 위이버 헤이스와 코르넬리스 세력은 각각 펠사아르트의 구조선으로 사람을 보냈고, 빨리 도착하는 쪽이 승리하는 싸움에서 위이버 헤이스가 이겨서 폭도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코르넬리스의 음모는 막을 내립니다.

이러한 난파 후 서사만으로도 영화나 소설로 각색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코르넬리스가 생존자들의 리더가 된 후 학살을 지시하며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이세계 전생물'로 바꾸어 보아도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종교와 조직(동인도 회사)가 절대적인 사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종교론과 조직에서의 직위를 무기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는게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저자 마이크 대쉬는 방대한 사료 조사와 기록 분석을 통해, 사고 외에도 각 인물의 생애와 심리, 사회 구조적 배경까지 책에 촘촘히 담아냅니다.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가 처한 시대와 개인적 몰락, 종교적 배경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기업 구조와 식민 경영 방식에 대한 설명 역시 뛰어납니다. 실제로 코르넬리스의 생애만 따로 정리한 분량이 3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깊이 있는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이 꼼꼼하게 조사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놀라운 수준입니다. 코르넬리스의 아내에 대해서까지 최대한 조사해서 수록했을 정도니까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당시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모든 설명 역시 상세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항해 중 먹거리 설명을 예로 들자면, 우선 바다 고기를 낚으면, 누가 고기를 낚든 매일 맨 처음 낚은 고기는 선장의 몫이었고 그 다음 12마리 정도는 상인과 사관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인정된 순서에 따라 고기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신선한 음식을 먹는게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그래서 선원들은 거의 전적으로 통조림에 든 고기와 콩, 건빵으로 알려진 딱딱한 빵인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는 음식의 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 도축한 돼지와 소를 사들여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피도 빼내지 않은 채 바닷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어 보존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리된 고기는 쌌지만, 아주 짜서 조리를 하려면 청수에 담가 짠 맛을 빼내야 했는데, 항해 중에는 한정된 식수를 절약하기 위해 바닷물에 넣어 끓였다는군요. 얼마나 짰을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말린 생선도 싣고 다녔는데, 대구가 대부분이었다네요. 말린 대구는 스튜로 끓여서 역 시 말린 완두콩이나 강낭콩과 함께 먹었고요. 그 외 먹거리들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 호 선원들은 당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잘 먹고 잘 마신 편이라는게 충격적입니다. 부과된 노동을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칼로리를 섭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외에도 가혹했던 항해에 대한 설명 등 재미있는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납니다.

이렇게 재미와 역사적, 자료적인 가치 모두 빼어난데, 코르넬리스가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된 과정에 대한 추측이라던가, 후일담 이후 코르넬리스가 정신병자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 비중이 지나치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들 후예가 살고 있을거라는 추측도 마찬가지고요. 섬에서의 학살도 논픽션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묘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책의 디자인과 구성도 옛스러워서 읽기 불편했고, 도판도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입니다. 난파에 대한 논픽션을 세 권째 읽게 되었는데 - "바다 한가운데서", "메두사 호의 조난" - 대체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장르인 것 같네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4/01

지브리 스타일, 브루스 팀 스타일(?) 경성탐정록

최근 유행하는, 챗GPT를 이용한 지브리 스타일 일러스트 열풍에 동참해 봅니다. "경성 탐정록"의 설홍주와 왕도손을 그리도록 시켜보았습니다.

결과물이 정말 그럴싸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뒤이어 제가 좋아하는 브루스 팀 스타일로도 만들어 보았는데, 이건 좀 미묘하네요. 여튼, 다른 스타일도 계속 시도해봐야겠습니다.



2025/03/30

전쟁과 군복의 역사 - 쓰지모토 요시후미 / 김효진 : 별점 3점

전쟁과 군복의 역사 - 6점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군사사 전문가인 쓰지모토 요시후미가 집필한 책으로, 전쟁과 군복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방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조명합니다. 인류 최초로 군복 개념이 등장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를 시작으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군복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시대별, 지역별 군복의 변화를 다루면서도, 단순한 복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초로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와 독일의 효웅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격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제국의 결전에서 대활약했던 폴란드 왕 얀 3세의 유익 기병대 '후사리아(윙드 후사르)' 이야기, 군인왕 프리드리히의 생애 등 군복과 불가분한 주요 전사 및 영웅들의 활약상을 병행해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당연히 복식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폴란드 중장기병 후사리아의 복장 묘사처럼요. 등에 장착한 거대한 스크시드워(천사의 날개 모양 장식)부터, 장창 코피아, 휘어진 군도 사블라, 2미터 장검 콘체슈, 권총 반돌레트, 동양풍 투구 시샤크,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까지 장비 일체를 착용 이유와 이후 발전 상황 등까지 모두 알려줍니다. 아래와 같이 도판도 함께 제시되고요.

복식으로서의 군복에 대한 정보도 흥미롭습니다. 군복이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되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화약은 짙은 연기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전장의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총기의 명중률도 낮아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피하는 것보다 아군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원색과 금·은 자수, 매듭 장식이 선호되었다고 하네요. 또, 화려한 군복은 군대의 상징이자 국가 권위의 표상으로 기능해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이 이를 의도적으로 장려했다는 설명은 군복이 단순한 실용품이 아닌 국가 전략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고요. 또한 병사들에게 눈에 띄는 군복을 입히면 탈영을 어렵게 만든다는 설명도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프랑스 총사대의 복장, 이른바 '타바드'에 대한 고증 또한 세밀합니다. 대부분 대중매체에서 보아온 파란색 상의는 실은 루이 14세 시대의 것이며, 루이 13세나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에는 다른 복장이었다고 하네요. '늑골복'이라 불린 헝가리계 경기병의 복장이 오스만 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1848년 무렵, 재인도 영국군의 선도 군단(Corps of Guides)을 이끈 해리 버넷 럼스덴 중위(후에 중장. 1821~1896 년)가 고안한 진흙으로 염색한 군복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우르두어에 카키 (Khaki, 진흙 색)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카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위장 효과를 의식한 군복이라던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세계 최강의 패권국은 대영제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육군이 전 세계에 유행시킨 세 가지 아이템은 승마 바지와 승마 부츠의 조합, 어깨에 두르는 샘 브라운 벨트, 오늘날 일반 신사복으로 널리 정착한 '트렌치코트' 이고, 세계 최초의 위장복은 2차대전 독일 친위대가 도입했다는 등의 재미난 정보가 가득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다소 산만하고 두서없이 전개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주로 근대 유럽에 치우쳤다는 비중 문제도 있고요. 또한 소개된 내용들의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학술적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전사(戰史)'와 함께 입체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전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29

산마처럼 비웃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5점

산마처럼 비웃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고키 가문의 넷째 노부요시는 미뤄두었던 성인식을 위해 고향 구마도로 귀향했다. 그러나 노부요시는 산속 사당을 순례하던 중 길을 잃고 흉산 부름산에 들어서고 말았다. 노부요시는 부름산의 유일한 민가인 가스미 가문의 다쓰이치 일가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다쓰이치 가족은 노부요시만 남긴 채 밀실인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나선 노부요시는 과거 광부와 사기꾼들이 살해되었다는 금광터 여섯 무덤굴에서 망자의 비명을 듣고 도망치다가 정체불명의 사악한 존재까지 목격한 뒤,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도조 겐야는 노부요시의 병든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마도로 향했다. 지역 유지인 리키하라와 부름산에 오른 겐야는 다쓰이치의 집에서 얼굴이 불타고, 구전 동요의 지장 형태를 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다쓰지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쓰지 아들 고지의 시신이 흑색지장 사당에서 역시 동요에 나오는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후 리키하라도 실종되었고, 겐야는 다니후지 형사와 함께 여섯 무덤굴에서 토막난 리키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쓰지의 장례가 열리던 날, 가설 극장에 불이 나 경찰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 가스미가에 남은 다쓰지의 아버지 단고로, 아내 시마코, 첩 슌기쿠도 동요 속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하는데....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찾아 읽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네 번째 출간작으로, 반 년 전에 읽었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바로 전작입니다. 2008년 일본 현지 출간 당시에 각종 랭킹 상위권을 휩쓸었었지요.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만큼 대담한 추리와 충격적인 진상이 돋보입니다.

진상은 다쓰이치 씨 가족과 다쓰지 씨 가족이 실은 동일 인물들이었다는 겁니다. 다쓰이치의 딸 유리는 소년 다쓰하루가 변장한 것이었고요. 이들은 마을에 들어온 유랑극단 ‘태평극단’으로 모습을 바꾸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부요시가 유리에게서 느낀 섬뜩함은, 결국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위장한 데서 비롯된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단발머리는 연극 "거미줄 활시위"에 등장하는 단발머리 시동의 가발로, 그것 자체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요. 고지와 히라히토가 닮은 이유 또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다쓰지의 얼굴을 훼손한 이유 역시 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얼굴이 온전하게 발견되면, 다쓰이치와 다쓰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쓰지 일가가 변장을 택한 동기도 납득할 만합니다. 작년 백중 무렵, 다쓰하루가 부름산에서 금이 섞인 암석을 발견했고, 이를 다쓰지 혹은 고지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가즈토리 가문 소유였고, 가즈토리 리키하라의 사위 마사오는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금을 빼앗기고 채광 기회도 잃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쓰지 일가는 다쓰이치 가족으로 변장하여 몰래 금을 캐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쓰이치 가족이 사라진 밀실 트릭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 유리가 혼자 남아, 두 문의 안쪽에 직접 빗장을 걸고 노부요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목욕통을 가리는 칸막이 뒤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겼고, 노부요시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는 사이 2층으로 올라가 노부요시가 자던 방에 다시 숨은 것이지요.

이외에도 노부요시가 성인식 도중 겪었던 괴이 현상들에 대해, 겐야의 추리로 합리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야생 여우나 염주 비둘기의 울음이었고, 소름끼치는 절규는 발정기의 야생 여우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다른 짐승들과 대치하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산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파였으며, 나병에 걸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게라의 길’이라는 외길을 이용해 이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무 위의 시뻘건 불덩이는 날다람쥐였고, ‘어어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형들이 노부요시를 찾으러 산에 들어왔을 때 외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작품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서를 흘려두고, 이를 추리를 통해 조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정통 본격 추리물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다쓰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시신 훼손에 사용한 '두꺼비 기름'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점은 추리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다쓰지, 고지, 시마코, 슌기쿠, 다쓰하루, 노부요시 단 여섯 명뿐입니다. 이 중 다쓰지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아이 다쓰하루가 범인일 수는 없기에 남는 사람은 노부요시뿐입니다. 

다쓰이치 가족의 정체를 밝혀내는 단서로, 소노코의 혼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활용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노부요시가 소지한 물건 중 상대가 알지 못했던 건 혼례 시간 변경을 알리는 편지뿐이었고, 그걸 읽고 이들이 갑작스레 자리를 떠났다는 걸 통해 정체를 유추해낸 것입니다. 이유는 '태평극단'이 혼례 축하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구전 동요를 따라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인데,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공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 동요가 ‘금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어서, 사건의 핵심 동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은 전개가 조금 처지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진상인 ‘다쓰지 일가의 변장’ 설정의 설득력 부족입니다. 아무리 가즈토리 가문과 가스미 가문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해도, 어릴 적 친구였던 리키하라가 다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무리입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요. 가족 모두가 변장을 했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금광을 몰래 캐기로 했다면 다쓰지와 고지만 변장했어도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다쓰지만 변장해서 머무르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불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조 겐야는 처음에는 마사오를, 그 다음에는 수행자 단부로 변장한 다쓰이치, 다쓰지의 동생 다쓰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마사오는 금광을 캐는걸 주장해 왔었기에 이를 반대했던 장인과 몰래 금광을 캐던 다쓰지 일가를 없앨 수 있었고(딸 유리의 실종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고요), 다쓰조는 이미 금광 때문에 여섯 명이나 살해했었으니까요.

반면, 진범인 노부요시의 동기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인식을 실패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며, 다쓰이치 일가가 장난을 쳤다고는 해도, 이로 인해 여섯 명이나 살해한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입니다. 그럴 거였다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혔던 형들을 먼저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또한 금맥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묘사하다가, 결국 사냥용 총에 사금을 넣어 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금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런 사기를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소하지만 다쓰이치 가족이 나타난건 작년 백중 무렵, 태평극단이 나타난건 작년 여름께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건 국내 독자에게는 이해가 힘든 부분이라 아쉬웠고요. 이런건 번역할 때 통일시켜 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시리즈 특유의, 일본 촌락에 전승되는 괴담이 실제 사건과 얽히며 전개되는 플롯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단점이 커서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입니다.

2025/03/28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 강신몽 : 별점 2.5점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 4점
강신몽 지음/이다북스

국내 ‘법의학의 대부’로 불리는 강신몽 교수의 에세이 집. 15년 전 "타살의 흔적"이라는 책으로 접했던 분이지요.

저자의 생각과 주장을 실제 사례와 엮어 이해하기 쉽게 소개해 주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칼에 찔린 깊이나 칼몸의 전체 길이 중 얼마가 들어갔느냐 하는 것은 '힘껏' 찌르거나 '살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해자 가슴에 칼몸이 25센티미터 박혔다고 5센티미터 들어간 것보다 다섯 배의 힘으로 힘껏 찌르거나 지속적으로 힘을 가한 것이 아니라는 실제 사례를 드는 식입니다. 

의료 처치가 사망 원인을 왜곡할 수 있는 경우도 소개됩니다. 대표적으로는 심폐 소생 중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례 등인데, 이렇게 응급처치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들이 오히려 폭행의 증거로 오해될 수 있고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특정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한 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는 경우를 의미하는 자세성 질식은 새롭게 알게 된 개념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거나, 놀이기구의 쇠봉에 목이 걸려 있는 상태로 사망한 사례 등으로 겉으로는 타살의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추리 소설에 사용될 법한 내용이 아닐까 싶네요.

또한, 20세기 초, 한 남성이 세 명의 아내를 차례로 욕조에서 익사시킨 후 보험금을 타냈던 "욕조 속의 신부들 사건"처럼 법의학이 범죄 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례도 흥미로왔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단순 익사로 처리될 뻔했지만, 법의학적 검토를 통해 연쇄 살인이 밝혀졌다는군요.

이외에도 법의학적 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한 다양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은건 아래와 같습니다.

  • 공기색전증: 자위행위를 하던 중 질 속으로 공기가 유입되어 혈관을 통해 심장으로 들어가 사망한 사례. 부검을 통해 원인을 밝혀내었음.
  • 건성 익사: 물에 빠졌지만 물을 거의 마시지 않은 채 사망한 사례. 갑작스러운 찬물의 자극이 미주신경을 통해 심장을 멈추게 했을 가능성이 제기됨.
  • 열사병: 핀란드의 ‘사우나 챔피언십’ 참가자가 사우나 안에서 장시간 버틴 후 사망한 사례와, 국내에서 술을 마신 후 찜질방 한증막에서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례 등을 통해 고온 환경의 위험성을 경고함.
  • 황화수소 중독: 계란 썩는 냄새가 나는 가스에 노출되어 호흡 마비로 사망한 사례. 산업 현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위험할 수 있음을 강조함.

다만 법의학자가 탐정이 아니라는걸 지속 강조하는건 좀 별로였습니다. 법의학자도 부검 결과를 통해 충분히 자신의 의력을 피력할 수 있을텐데, 그건 법의학자의 영역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거든요. 당연히 경찰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겠지만, 반대로 보면 좀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에세이라서 개인 감상이 많이 포함된 점, 사례들은 저자의 주장과 견해를 뒷받침하는 용도로만 인용되어 후일담이나 결말은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점도 좀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보다 전문적인 법의학 사례집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25/03/24

법정유희 판례 검토

"법정유희"를 읽고, 가오루가 고발했을 때 판결이 어땠을지 궁금하여 ChatGPT에 해당 사건의 판결을 요청해 보았습니다. 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피고 1 (여학생 - 무고 및 명예훼손)

  • 징역 3~6년
  • 무고죄 및 명예훼손죄 적용.
  •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으나, 법적 인과관계 인정 여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수 있음.

2. 피고 2 (담당 검사 - 부실 수사 및 직권남용 의혹)

  • 형사처벌 가능성 낮음, 대신 감찰 및 징계 조치 예상
  • 기존 판례에 따르면 직권남용죄 적용이 어려우나, 감찰을 통해 정직·해임 등의 징계 가능성 높음.

3. 기존 유죄 판결 번복 가능성 (재심 청구)

  • 재심 청구 후 무죄 판결 가능성 큼
  • 여학생의 무고가 밝혀지면, 피해자의 유족이 재심을 청구해 판결을 번복할 수 있음.
  • 기존 판례(익산 택시기사 사건 등)와 유사한 사례로, 무죄 선고 가능성 높음.

4. 국가배상청구 가능성

  • 유족이 국가배상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 받을 가능성 높음
  • 검찰의 부실 수사 및 무고한 사람에 대한 기소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으므로 국가배상법에 따라 보상 가능하며, 기존 사례를 보면 수억 원대 배상 판결이 나온 전례가 있음.

결론적으로, 한국 기준으로 미레이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으므로 징역형을 선고받을 테고, 검사측은 특별한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선고를 받고, 국가 배상을 받는 게 현실적인 결론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 형량이라면 직접 복수를 꿈꾼 게 아예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죽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좀 애매하군요. 결론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으니까요...

2025/03/23

법정유희 - 이가라시 리쓰토 / 김은모 : 별점 2.5점

법정유희 - 6점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토대 로스쿨에는 '무고 게임'이라는 학생들이 진행하는 모의 공개 법정이 있었다. 여기서 판사 역할을 하는건 학교 최고의 천재 유키 가오루였다. 

동급생들이 졸업하고 약 일 년 뒤, 가오루의 친구였던 구가 기요요시는 메일을 받았다. 무고 게임이 다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에 적힌 시간에 모교를 찾은 구가는, 가오루의 사체와 피투성이인 동급생이자 친구 미레이를 발견했다. 살인범으로 기소된 미레이는 구가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사실 미레이와 구가는 어린 시절 보육 시설에서 함께 했던 친구로 함께 치한 사기를 치고 살았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일본 신예 작가가 쓴 법정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만장일치로 제62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했으며,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3위와 신인상, 2020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4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3위에 랭크되는 등 수상이력이 아주 화려합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속에서 꽤 많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핵심은 유키 가오루 살인 사건입니다. 사실 사건은 가오루의 자작극이었어요. '일본 검찰이 실수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법정에서 증거를 공개'하려고 미레이를 끌어들여 자살(?)했던 겁니다. 이 계획 안에 여러가지 법률 이론과 지식을 효과적으로 녹여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고요. 작가가 현직 법조인인 덕분이지요. 특히, ‘동해보복’ 이론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정당한 죗값'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가오루는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미레이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정당한 재판을 하지 않은 사법기관도 같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죗값은 두 측이 아버지의 무고함을 밝히는 것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판단해서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지요. 단순히 미레이의 생명을 노리거나 미레이에게만 죄를 묻는 복수를 넘어서는, 진지한 법학도가 생각할만한 타당한 동기였습니다. 법적으로도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더러, 작 중 가오루의 언행으로도 동기를 설득력있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상을 마지막까지 숨기면서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구가가 계획한 ‘무고의 제재’ 전략도 그럴듯 했습니다. '무고 게임'에서 심판자가 부정을 저질렀음이 증명되면 심판자 본인도 벌을 받는다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가오루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로스쿨 학생들이 즐기는 모의 법정 ‘무고 게임’ 설정이 가오루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잘 짜여진 점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미레이를 도청하고 협박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과정도 추리적으로 나쁘지 않고요. 법정에서의 공방도 긴장감 넘치도록 잘 묘사됩니다.

법정에서 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어 미레이의 무죄가 밝혀진 후, 사실 가오루는 죽을 생각이 없었고 미레이가 살해했다는 반전도 강렬합니다. 미레이와 구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치한 치한 사기 및 상해죄에서 구가를 보호하기 위해 미레이는 가오루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앞선 회상과 법정 장면을 통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춥니다. 구가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겠다고 결심하는 결말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요.

그러나 치밀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진행되지만, 결국 미레이의 무죄는 사건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으로 증명된다는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너무 명확한 증거라서 다른 계획은 어차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또, 비디오 카메라가 사건 현장에 장치되어 있었다는데 이를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비디오 카메라에서 뺀 SD 카드에 암호가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카메라를 치우고, 바로 SD 카드를 빼서 구가에게 전달하면서 암호화를 했다는건데 말도 안돼지요. 더불어, 비디오에 반전을 위한 결정적인 장면인 ‘미레이가 가오루를 살해하는 순간’만 찍히지 않았다는 점도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가오루의 계획에도 허점이 많습니다. 미레이와 구가는 오랜 시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구가가 미레이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면 가오루가 남긴 미레이의 유죄를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 - 동영상 외 녹음 파일 등 - 는 무의미해집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구가는 검찰이 기소하기 전에 SD 카드 속 동영상을 검찰에 제공하여 불기소 처분을 받아내려 했을 테니까요. 가오루의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 증거들은 은사인 나쿠라 교수에게 맡기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오루가 저지른 죄에 적절한 벌을 선택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기 위해서 무고 게임을 만들었고, 패자에게 벌을 선고하면서 죄를 인정하고, 벌을 결정하는 경험을 쌓았다는데 이건 좀 억지였어요. 가오루의 계획은 적절한 벌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사심이 담긴 판결에 가까왔으니까요. 가오루가 법에 미친 천재라는 설정을 선보이기 위한 장치로만 무고 게임을 사용하는게 바람직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 해결이 동영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단점은 크지만,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들 정도의 강한 흡입력은 충분합니다. 이런 재미 덕분에 영화화까지 되었겠지요. 어떻게 요약해서 영화로 만들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다면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만 hit

몰랐는데 통계를 보니, 어느새 방문자 수가 20만 명을 넘었더군요.

이글루스 시절이었던 2008년에 20만 hit에 대한 글을 올렸었는데, 17년이 지나서 다시 비슷한 글을 반복하는게 뭔가 기묘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무한의 연쇄를 반복하는 환술에 갇힌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기쁘네요. 변방의 마이너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유골이 있다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유골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이전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는데, 리샤르트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요.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어렵다는 겁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5/03/21

마트료시카의 밤 - 아쓰카와 다쓰미 / 이재원 : 별점 2.5점

마트료시카의 밤 - 6점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리드비

94년에 출생하여 2017년 데뷰한 추리 소설계의 신성이 발표한 두 번째 책입니다. 신예 작가의 재기넘치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단편 네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마지막 수록작 외의 수록작 모두에서 추리 소설 매니아의 향취를 짙게 풍긴다는 점입니다. 모두 코로나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어서, 등장인물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했고, 기발한 작품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억지스러운 설정이 많고, 너무 트릭과 반전에 열중한 느낌이 드는건 좀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위험한 도박 - 사립 탐정 와카쓰키 하루미"

제목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연상시킵니다. 서점과 관련된 여탐정이 등장한다는 설정도 비슷하고요. 헌책방이 주요 무대라는 점에서는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작 중 핵심 소재인 유가미 유즈류의 "얼룩무늬 눈밭"은 가공의 작품이지만, 이외에는 모두 실존하는 유명 작품들이 대거 언급되어 재미를 더해 줍니다. "병든 대형견들의 밤"이라는 작품을 극찬하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그 외 작품들에 대한 소개도 인상적이고요. 책 소개만 써도 먹고 살겠다 싶을 정도로 잘 쓰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마키무라 신이치의 뒤바뀐 가방을 찾던 탐정 '와카쓰키 하루미'가 알고보니 신이치를 살해한 범인이었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서술 트릭을 도입해서 효과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를 와카쓰키 하루미의 명함이 단 한 장 뿐이었다는 핵심 증거를 통해 잘 알려주고요. 와카쓰키 하루미가 추리작가 히루마 다카하루와 동일인이라는 반전도 괜찮았어요.

그러나 마침 마키무라를 죽인 날, 범인의 살인 증거가 담긴 가방이 뒤바뀌었다는 상황은 억지스럽고, 명함이 한 장이라는게 증거라는 주장은 빈약합니다. 명함이 정말 한 장 밖에 안 남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또, 명함은 얼마든지 추가로 만들 수 있는데 탐정 명함 한 장으로 탐문 수사를 이어나가는 모습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경찰 신분증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헌책방, 고전 추리 명작, 추리 매니아 등 좋아하는 소재는 한 가득인데,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2021년도 입시’라는 제목의 추리소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꿈꿀만한 작품. 대학교 입시에 추리 소설의 진범 찾기가 출제된다는 설정이거든요. 출제 범위로 아유카와 데쓰야, 다카기 아키미쓰, 엘러리 퀸, 아야쓰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언급되며, 실제 시험 문제도 한 편의 추리 소설의 문제 편입니다. 이런 대학이 있다면 꼭 한 번 시험에 응시해 봐야 겠습니다. 

전통적인 소설 구성이 아니라 뉴스, 인터뷰, 각종 보도 자료와 커뮤니티 의견들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여러 명이 각자의 추리를 펼치는데 효과적이었다 생각되네요. 해답으로는 유명 학원 강사, 수험생 및 대학 측의 제시되어 추리적으로도 풍성하고요.

이 중 학원 강사는 6분할 화면, 생일 선물이 놓여진 탁자 위에 놓여진 사물의 개수가 6개라는 점에 착안하여, 원격 생일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5명이 아니라 6명이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이 친구는 왕따라 모두가 없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범인이 선물한 탁상 선풍기가 현장의 연기를 흩날리게 만들어 컴퓨터 위치를 알아냈다면서요.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여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착안점은 재미있었습니다. 범인 이름까지 소설 내에서 짚어내는 발상은 놀라왔고요. 확실히 카리스마 학원 강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수험생의 추리는 범인은 코드를 더듬어 컴퓨터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고, 그렇다면 범인은 피해자 방에서 나타났으며, 범인은 에나미 에리라고 추리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도 앞의 지문을 통해 상세하게 들고 있고요. 이 정도면 합격을 시켜도 무방한 좋은 추리였습니다.

이 둘에 비하면 대학 측에서 제기한 해답은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피해자가 쓰러진건 연극이었고,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던 친구 오우가 범인이었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간단한 답이거든요. 이런걸 해답이라고 제시하고, 앞서 지문에 있던 단서들 중 불리하거나 오독할 수 있는걸 멋대로 삭제해 버렸으니 이 수험을 주도한 기자키 교지로 교수가 짤리는건 당연합니다. 제가 수험생이더라도 가만 두지 않았을거에요.

이렇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잘 펼쳐놓고는 있는데, 딱 한 가지가 아쉽습니다. '무한대'라는 대학 내 동아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를 찍어내기 위해 이런 입시 시험을 기획했고, 시험에 통과했던 신입생을 낚아챈다는 진상이자 반전입니다. 이는 완전히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일개 동아리가 입시를 의도한대로 진행시킬 수 있다는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차라리 획기적인 새로운 대학 입학 시험이 도입되었다는 설정으로 문제편, 여러 사람의 해답편을 소개하고 결말로 정말 좋은 제도였다!며 추리 시험이 전국으로 확산된다는 결말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마트료시카의 밤"

무대에서 2인극을 펼치면서, 과거 있었던 사건의 진상을 드러낸다는 내용으로 작가가 편집자에게 연극을 제안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알고보니 편집자는 작가의 부인과 불륜 관계였고, 작가는 편집자의 지문을 과도에 묻히기 위해 연극을 벌였습니다. 이미 아내를 과도로 살해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편집자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협박에 나섭니다. 궁지에 몰린 작가는 편집자가 진짜 범인이라는걸 추리해내고요. 

이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재미있었습니다. 까면 깔 수록, 열면 열 수록 계속 새로운 진상이 밝혀진다는 것에서 제목이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는 이를 '양파형'이라고 부르는데, "발자국"이라는 영화를 참고한 모양이네요. 

작 중 금고 다이얼을 여는 암호로 "심장과 왼손", "요도妖盜 S 79호", "붉은 오른손", "대여 보트 13호", "화려한 유괴", "다이얼 7을 돌릴 때"이 언급되는건 과연 추리 매니아구나 싶었고요. 이 작품들의 구성도 작가의 장치 중 하나라는 것, 그 외 사소한 대사들이 모두 단서가 된다는 구성도 치밀한 편입니다.

하지만 원작자인 소설가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연극 연출가가 알아채 협박하기 위해 무대를 꾸몄고, 소설가가 이를 이용해 연출가와 손을 잡고 다른 작가들을 협박할 계획을 세운다는 결말은 억지스럽습니다. 소설가가 아내를 죽였던 사건의 진상을 무대에서 폭로한다고 해도 그게 소설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요? 이미 십여년 전 사건인데다가 증거도 없는데 말이지요. 저는 오히려 연출가가 무고죄로 고소당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는 과거 사건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하면 되니 일석이조일거에요. 게다가 이 뒤에 이어지는, 이건 전부 영화였다는 반전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나치게 '까서' 오히려 감점이 되어 버리고 말았네요.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입니다. 그냥 앞부분 연극으로만 끝내는게 좋았을겁니다. 실제로 연극으로 만들어도 재미있었을 이야기니까요. 

"6명의 격앙된 마스크맨"

대학교 복면 레슬러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뛰어났던 레슬러 '센론 마스크 49세(하자마 지로)'가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복면 레슬러의 마스크가 찢어져 있었던 것, 그리고 마스크 내부 혈흔에 주목하여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앞서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레슬링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은 구성도 마음에 듭니다. 사람들이 하자마 지로로 알고 있던 '센론 마스크 49세'의 정체는 지로의 형 가즈토시였고, 피해자 하자마 지로가 가즈토시를 죽이려다 되려 죽고 말았으며 이 탓에 복면을 찢을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은  '복면 레슬러'가 범인이자 피해자였기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 여러가지 설정 - 마람프와 지로가 전날 술을 마셨던 영수증 등 - 도 단서로 활용될 수 있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유쾌하고 떠들썩한 분위기도 잘 어울리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프로 레슬링 팬으로서, 세계 최초라고 해도 무방할 복면 레슬러 살인 사건을 다룬 추리 소설에는 나쁜 점수를 주기 어렵지요. 수록작 중에서 완성도로는 가장 좋기도 하고요.

2025/03/16

나홀로 온천 여행 - 다카기 나오코 / 이소담 : 별점 2점

나홀로 온천 여행 - 4점
다카기 나오코 지음, 이소담 옮김/살림
일본의 에세이 만화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나홀로 여행" 후속작. 이번에는 혼자 떠나는 온천 여행을 중심으로 일본의 다양한 온천지와 그곳에서의 경험을 특유의 여유로운 그림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큰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도 일상의 여행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게 언제나처럼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정말 쉬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에요.

작가의 다른 여행기와 다른 점이라면 여행 과정(특히 기차 중심)과 온천욕이 핵심이라는 점입니다. 지역의 맛있는 먹거리 먹부림이나 유명한 장소 관광이 없는건 아니지만, 다른 "나홀로 여행"이나 "식탐 만세" 시리즈와 같은 비중은 아니에요. 문제는 기차 여행은 이미 "에키벤" 시리즈에서 철저하게 파고든 부분이 있어서 새롭거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등장하는 에키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제목처럼 '온천욕' 이야기가 많지도 않습니다. 어느 온천에 갔더니 물이 어떻다 정도로 끝나서 실망스러웠어요. 온천과 먹거리에 대해 "낮의 목욕탕과 술" 정도로는 이야기를 풀어줬어야 햤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온천 여행'에 딱히 매력을 느끼지 않아서 더 재미가 없었던 것 같은데, 딱히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2025/03/15

도시전설의 모든 것 - 얀 해럴드 브룬반드 / 박숭서 : 별점 3점

도시전설의 모든 것 - 6점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위즈덤하우스

현대의 도시전설, 즉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퍼지며, 사람들의 믿음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해당 이야기들과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랑니를 빼면 기억력이 감퇴한다',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있는 괴한 이야기', '맥도날드 햄버거에 벌레가 섞여 있다' 같은 익숙한 이야기들이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되어 널리 퍼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분석하여 알려줍니다. 관련된 서브컬처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 남자가 여자와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 차를 세우고 시간을 보내려던 중, 라디오에서 갈고리 손을 가진 탈주범에 대한 뉴스가 나온다. 겁에 질린 여자가 집에 가자고 강하게 요구해 남자는 화가 난 채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여자가 차에서 내린 순간, 차량 문고리에 갈고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갈고리 괴담을 소개한 뒤,

'이 이야기는 1967년, 인디애나 대학의 한 여학생이 룸메이트에게 들려준 "갈고리남"을 문자 그대로 채록하여 1968년 학술지 인디애나 민간전승 창간호에 실은 것이며, 민속학자 린다 데그 교수는 이 전설이 최소 1959년부터 전해졌고 지역에서 44종의 변형된 버전이 수집되었음을 보고했습니다. 1960년 디어 애비 칼럼에도 소개되었고, 이후 가장 유명한 미국 도시전설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미트볼스(1979)와 캔디맨(1992), 만화 파 사이드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뤄졌으며, 많은 소설가들도 이를 차용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이야기가 단순한 공포담인지, 늦은 밤 외진 곳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이야기인지, 혹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는 상황과 자동차 밖에서 갈고리남이 위협하는 구조가 상징적 거세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라는 해설이 이어지는 방식입니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쿠키를 빼앗아 먹었는데, 알고 보니 남의 쿠키였다는 이야기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 수록작인 "깨진 습관"이 원전인 줄 알았는데, 영국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비스킷 봉지(The Packet of Biscuits)"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의 수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과거 수십 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에 독자 투고로 실린 유머들이 사실은 도시전설의 일환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다는 것도 흥미로왔고요.

이처럼 단순한 유머, 재미난 도시전설 소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함께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과 미디어가 도시전설의 확산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 대한 분석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믿고 있는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허구이거나 잘못 전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장소(The Holy Place)"라는 도시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의 신도들이 측랑의 특정 지점에 가면 항상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오래된 신도에게 이유를 물어본 결과, 원래 그 지점에는 벽에서 돌출된 부분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습관이 남아 무릎을 꿇는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볼 만한 내용이 많은데,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은 과했습니다. 도시전설이 만들어지고, 퍼지고, 변형되는 과정에 집중하려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례를 수록하기보다는 보다 핵심적인 이야기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학술적으로 접근한다면 "한국의 학교 괴담"처럼 논문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테니, 어느 정도 균형은 잘 맞춰야 하겠지만요.

그래도 수록된 도시전설들이 흥미롭고, 관련된 서브컬처 정보도 풍부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수록 도시전설 한 가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정신병자와 타이어 너트(The Nut and the Tire Nuts)"

어느 시골길을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 나 차를 세웠다. 그는 당황했지만 곧 잭을 꺼내 타이어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수로 휠 너트 다섯 개를 모두 흘려버리고 말았다. 어두워지는 길가에서 너트를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 하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낙담한 그때, 근처 정신병원의 울타리에 기대어 있던 환자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각 바퀴에서 너트 하나씩만 풀어 끼우면 되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정비소까지는 갈 수 있을 텐데요.”

운전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감탄하며 물었다.

“이렇게 똑똑한 분이 왜 정신병원에 계신 거죠?”

그러자 정신병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건 아니니까요.”

2025/03/14

기차 시간표 전쟁 - A.J.P. 테일러 / 유영수 : 별점 4점

기차 시간표 전쟁 - 8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페이퍼로드

이 책은 1914년 7월 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는 전쟁이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강대국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기차 시간표와 병력 동원 계획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각국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군대 동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동원을 빠르게 마쳐야 했고, 이에 따라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이동시키는 계획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병력과 수천 대의 열차가 동원되는 만큼, 계획이 한 번 실행되면 중단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각국은 병력 동원을 상대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일종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원이 시작되면 이를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양면전 가능성을 고려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고, 다른 나라들도 부분 동원만으로는 전면전에 대비할 수 없어 연쇄적으로 동원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상대를 위협하려던 동원 계획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했던 동맹 및 외교 관계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입니다. 유럽 열강 간의 동맹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타협을 원했으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며 개입했습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명확한 대응 방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독일이 터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고, 영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군을 동원하면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했습니다. 독일 황제는 세르비아가 제시한 조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전쟁 준비가 진행된 후였습니다. 결국 1914년의 전쟁 위기는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강대국들의 경직된 대응으로 인해 확대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곧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각국의 황당하고 순진했던 생각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탁상공론과 연구만 오갔던 무능했던 각국 군사 작전 계획들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다들 말도 안되는 동원 계획 등으로 꿈만 꾸고 있었다는걸 잘 알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슐리펜이 여러 해 고심했던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는 계획 - 은 프랑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던가, 슐리펜이 오랫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프랑스가 어느 때인가 알아차리고 길을 막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난건 외교를 맡은 관료들 책임이 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합국이 전범으로 지목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야말로 '베오그라도 정지'를 제안하는 등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시도를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더라고요. 소위 군국주의 군주들을 온화하고 선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정치가들이 말한 바를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모든 결정권이 군주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쟁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합니다. 

1차 대전 불씨를 당긴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왜 암살을 시도했는지 -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이 나머지 민족을 지배했는데, 마침 세르비아가 터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었기 때문에 - 부터,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이 암살범 프린치프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수상 파시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 처음 폭탄 투척 사건에서는 암살에 실패했었지만 대공이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병원으로 갈 때 암살당했다는 사건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물론 범인 일당에 대한 재판 결과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당은 사형당했지만, 미성년자였던 프린치프는 사형을 면했다고 하네요. 수백만 명이 죽은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감을 안고 여생을 보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주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도판도 충실하고, 책의 장정과 디자인 모두 빼어납니다. 다만 '기차 시간표'가 중요한 핵심 소재는 아니고 일종의 키워드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시작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관련된 인물들과 국가들의 결말은 다른 경로로 알아 보아야 한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