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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3

세인트 세이야: 더 비기닝 (Knights of the Zodiac) (2023) - 토마스 바진스키 : 별점 1점

"세인트 세이야"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 원작의 오랜 팬으로, 옛 추억을 되살리고자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장점이라면 주인공 세이야 역을 맡은 아라마 맛켄유의 비쥬얼, 그리고 일부 액션 장면입니다. '성투사'의 싸움답게 맨몸 액션이 펼쳐지는데, 세이야가 각성한 뒤 카시오스를 포함한 구라드의 부하들을 인형처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라던가, 성투사 피닉스의 성의 액션, 마이록을 연기한 마크 다카스코스가 선보인 권총과 곤봉을 활용한 액션 등이 그러합니다. 원작 팬이라면 비교적 원작에 가깝게, 하지만 촌스럽지 않게 구현된 마린의 등장은 만족할 만 하고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장점을 제외하면 영화의 완성도는 전반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우선, 무슨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이야는 마린에게 훈련을 받다가 알먼이 누나 패트리샤를 납치한 일당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훈련을 중단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갑자기 아테나를 데리러 온 구라드를 막기 위해 카시오스 일당과 싸웁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이야기의 개연성이 없어서, 전개가 엉성하고 난잡합니다. 아테나가 각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구라드는 아테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던 도스카라스가 구라드의 부하에게 한 방에 쓰러져 포로가 되는 장면도 황당했어요. 배우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각본이 별로라면 적어도 볼거리라도 화려해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CG 티가 강하게 나는 화면도 조악하고, 앞서 언급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액션 연출도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라마 맛켄유의 액션 연기가 어색해서 많이 거슬렸습니다. 그나마 볼만했던 액션 장면들은 성의를 입은 후에야 등장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주요 액션 장면에서는 대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어야 할 성투사들의 싸움은 맛보기 수준이며 심지어 페가수스 유성권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작 팬들이 가장 기대했을 대표적인 기술이 빠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덕분에 페가수스와 피닉스 성투사의 클라이맥스 대결 장면은 80년대풍 특촬 영화보다 못한 빔 공격 연출이 반복되면서, 원작의 느낌을 살리지 못하고 어설프게 마무리되고 맙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매우 낮습니다. 스케일을 줄이고 원작 초반부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성투사 변신 장면과 성투사들 간의 격투를 좀 더 멋지게 연출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별점은 1점인데, 솔직히 1점을 주기도 아깝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 낭비 하지 마시고, 이 작품은 쳐다도 보시지 말기 바랍니다.

2025/02/22

모즈가 울부짖는 밤 - 오사카 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모즈가 울부짖는 밤 - 6점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 '모즈'는 타겟 가케히를 죽이려다 가케히가 들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에 휘말려 죽은 피해 여성은 경시청 공안부 형사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였다. 담당자였지만 가족이라 사건에서 배제된 구라키는 얻어낸 열흘간의 휴가를 이용해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신가이 가즈히코는 호메이 흥업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 흥업이 계속 그의 목숨을 노리는 와중에, 신가이는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여 결국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가즈히코가 아니라 동생 히로미이자 킬러 '모즈'였다. 

구라키, 모즈, 그리고 형사 오스기 등의 수사와 추적으로 폭탄 테러는 공안부장 무로이 때문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무로이와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는 불륜 관계였고, 방일하는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테러하기 위해 가케히는 무로이를 협박해서 정보와 폭탄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무로이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이 협박에 흥했지만,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해 가케히를 죽이려다 폭발에 말려든게 진상이었다...

오사카 고의 '모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1986년에 출간된 작품이지요.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가가와 데루유키 주연으로 드라마도 제작된 인기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0여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 선정되어 있어서 이전부터 관심이 가던 차에, 늦었지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킬러 신가이 가즈히코와 아내를 잃은 공안 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절벽에서 추락해 기억을 상실한 채 발견된 신가이는 아주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폭탄 테러로 아내를 잃은 구라키 형사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며 사건의 실체를 쫓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굉장히 빠른 전개로 강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지루함 없이 여러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와중에 폭력과 액션도 넘쳐나서 오락적인 요소도 풍부하거든요. 사람도 여럿 죽어나가고요.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히지만, 모두 '복수'가 중심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구라키 형사는 폭탄 테러로 죽은 아내 다마에의 복수를 위해, 신가이(히로미)는 형 가즈히코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흑막이자 원흉인 공안부장 무로이조차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이렇게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건 신선했습니다. 

반전들도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기억을 잃은 신가이 가즈히코가 사실은 쌍둥이 동생 히로미였다는 것입니다. 히로미는 남성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여장을 하고 킬러로 살아왔다는데,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그가 신가이로 오인되는 과정도 합리적인 편이고요.

두 번째 반전은 구라키 형사의 아내 다마에가 사실 폭탄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마에는 공안부장 무로이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였고, 이를 가케히에게 들켜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로이가 폭탄을 가케히에게 주기로 했었습니다. 무로이는 사르도니아 대통령 에체베리아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러나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하여 협박자였던 가케히를 죽이려다 결국 자신까지 말려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구로키와 다마에 사이에 태어났던 딸이 사실은 무로이의 자식이었고,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가 호메이 흥업과 손을 잡은 악당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도 꽤 놀라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전들 모두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구라키 형사의 수사와 신가이(히로미)의 추적, 그리고 흑막인 무로이 부장의 존재까지는 납득할 만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 경시가 독단적으로 극우 폭력단 호메이 흥업을 조종했다던가, 감찰부의 쓰키 경시정이 부하 미키를 이용해 내부 감찰을 벌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과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비중있는 등장은 오히려 서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미키는 정말 불필요해서,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구로키에게 갖게되는 연심도 불필요한 요소였던건 마찬가지고요. 

또한, 이야기 전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호메이 흥업이 애초에 신가이를 살해하려 한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로이 부장 측이 불륜과 테러의 증거 사진이 신가이에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도 불합리하고요. 피해자인 가케히가 설령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가이에게 넘겼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가이(히로미)를 두 번이나 생포하여 사진의 위치를 추궁한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불륜 사진 확보 없이 가케히에게 사진과 폭탄을 전해준 것도 말이 안되지요. 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라는 거대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진을 회수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건 당연하니까요. 

구로키와 신가이 이야기가 교차될 때, 신가이 시점은 신가이가 살아난 다음부터 시작되지만 구로키 시점은 폭탄 테러 직후라서 시계열이 일치하지 않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결말도 아쉬운 점 중 하나입니다. 대단한 증거없이 무로이 부장의 자백으로 마무리되는건 허무하며, 길고 늘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대단원에 이르는건 비현실적이었어요. 하긴, 형이 살해당한 그 장소에서 쌍둥이 동생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발견된다는 기본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강렬한 반전, 그리고 복수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이야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많아요. 무엇보다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킬링 타임용 작품을 찾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격 미스터리 100에 선정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2025/02/21

게임북 전용 e-Ink 게임기

자주 찾는 블로그인 자그니님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기기를 소개하고 있더군요. 게임북을 즐길 수 있는 휴대용 e-Ink 게임기입니다. 
게임북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인기를 끌었던 책입니다. 페이지마다 선택지가 있고, 선택에 따라 페이지를 이동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었지요. 이러한 게임북만을 위한 전용 e-Ink 게임기로 전자책 리더기와 비슷한 형태네요. 화면 크기는 7.5인치에 800*400해상도이고 게임은 SD카드로 별도 판매할 계획인 듯 합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아들에게 책을 읽힐 목적으로 만든걸 사업 모델로 확장한 것이더군요. 아직 양산된건 아니고, 시제품이 준비된 정도고요. 곧(3월 1일)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현 시점까지 게임북이 20개 밖에 준비되지 않은건 문제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플랫폼이 정착되어 누구나 게임북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보다는 일반 모바일 플랫폼 용으로 아이들을 위한 게임북 앱을 만드는게 더 시장성이 있을겁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응원하고 싶습니다. 게임북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 탓도 있지만, 과거 게임북의 단점이었던 한정된 분량(책 한권)을 극복하고, IT 기기에 맞는 재미(인터랙티브한 동작과 사운드 효과 등)으로 재미를 선사해 준다면 어느 정도 반응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거든요. 아이들 영어 교육용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최근 깡통 전자 사전이 다시 뜨는 것처럼 말이지요. 

과연 시장 반응이 어떨지,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되면 눈여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2025/02/19

드디어 밝혀진 잭 더 리퍼의 정체!

‘잭 더 리퍼’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외신 보도(기사는 여기)에 따르면,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숄의 DNA 분석을 통해, 폴란드 출신 이발사 애론 코스민스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코스민스키는 1888년 런던에서 발생한 ‘잭 더 리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으나, 증거 부족으로 체포되지 않았고 이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영국의 역사가 러셀 에드워즈가 주도했습니다. 그는 2007년 경매에서 피해자 캐서린 에도우스의 피 묻은 숄을 구매한 뒤, 희생자 및 용의자의 후손들로부터 DNA 샘플을 받아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숄에서 검출된 혈흔과 정액의 DNA가 각각 피해자와 코스민스키의 후손과 일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용된 미토콘드리아 DNA의 신뢰도가 낮고, 조사 역시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아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는군요. 하지만 오래전부터 유력한 용의자였던 만큼, 잭 더 리퍼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인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좋겠네요.

그런데 도무지 이런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다는게 상상이 되지 않는 외모라 놀랐습니다. 하긴, 강호순도 미남이었지요....

2025/02/16

아틀라스 마이오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도책 - 강민지 : 별점 2.5점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아틀라스 마이오르"는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도책으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유럽 최고의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결과물로, 단순한 지도책을 넘어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아틀라스 마이오르"가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지도책을 단순한 지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인문학적, 역사적 맥락에서 깊이 있게 분석한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예술, 인문학 서적이자 문화사, 미시사 서적 이라는 성격도 갖추고 있습니다. 지도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좋은 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무역국이었으며, 높은 문해율과 학문을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서적과 인쇄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지도책은 단순한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식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인 도서 지관을 꾸려 장서를 자랑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크기가 크고 값비싼 지도책이 인기를 끌었고, 이는 곧 출판 시장에서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성장했습니다.'는 것이지요.

지도책 본연의 모습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를 중심으로 지도 제작의 발전 과정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텔리우스(상업 지도책의 선구자), 메르카토르(현재도 사용되는 평면 도법의 창시자), 블라외 가문(아틀라스 마이오르 제작 명문 가문), 혼디우스 가문(블라외 가문의 라이벌) 등 지도 제작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과 이들의 대표작을 통해 지도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를 넘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지도 제작과 출판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한 권의 지도책을 탐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지도 제작에 사용된 도판과 인쇄 기술에 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아틀라스 마이오르"에 대한 방대한 양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을 묘사한 지도가 포함된건 반가왔고요. 또한, 인쇄 방식과 채색 과정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운데, 컬러 인쇄 기술이 없던 시절 '채색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이 단순한 흑백 인쇄물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 기여했으니,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울러 지도책을 단순한 과학적 산물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도 연구 분석하는데, 그 깊이가 대단합니다. 지도 제작에 사용된 물감을 단순히 색채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의 유행과 연결해 설명하며, 지도 속 도상(알레고리) 분석을 통해 지도책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는 식이거든요. 특히 지도에 등장하는 문양과 장식 요소를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시대적 사고와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요소로 분석하는 과정은 지도책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틀라스 마이오르" 외의 불필요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은 구성은 아쉽습니다. 지도책의 유행 이유나 지도 제작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필수적인 정보지만, 당대 경쟁 지도 제작자의 지도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문화까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건 과했습니다. 특히 60페이지에 걸친 '도상(알레고리)' 설명은 지나쳤습니다. 지도책에 문양이 들어갔다고 해서, 문양의 구성 요소와 의미, 디자인 규칙까지 세세하게 독자가 이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도판도 풍성하지만,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다소 작은 도판이 많은건 단점입니다. 주요한 도판은 접어 넣는 방식으로라도 보다 크게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저자의 가벼운 문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최신 트렌드를 인용한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책의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느 정도는 교열 과정에서 조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지도책을 다룬 미시사,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결과물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허나 지도책을 벗어난 이야기도 많기에 감점합니다. 

2025/02/15

A하라 죽이기 - 도미나가 미도 / 김진환 : 별점 2점

A하라 죽이기 - 4점
도미나가 미도 지음, 김진환 옮김/라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능한 웨딩플래너 미노 탓에 결혼식이 엉망이 되어 버린 슈헤이, 시에리 부부는 하르모니아 호텔 예식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예식부는 사건을 수습하려고 미노의 잘못을 다른 플래너 아이하라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나 이는 인플루언서 시에리와 그녀의 친구 키미에의 SNS를 통한 비난을 불러왔고, 아이하라에 대한 악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말았다.

아이하라는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지만 회사는 아이하라를 전혀 지켜주지 않았고, 아이하라는 친구와 지인, 그리고 변호사 쿠인의 도움으로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일본 최대 라이트노벨상 ‘인터넷소설대상(제9회)’수상작이라고 해서 읽게 된 작품. 온라인 범죄 관련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정물 성격이 약간 있지만 평범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SNS, 온라인에서 '#A하라를용서할수없다'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아이하라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고립되는 과정 묘사는 볼 만 합니다. 회사는 결혼식을 망친 원흉인 미노를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보호하면서, 오히려 아이하라를 공범으로 몰아가며 비난의 화살을 그에게 돌리거든요. SNS에서 아이하라를 향한 비난이 거세지자, 회사는 그를 방패막이로 삼아 책임을 떠넘기고 전혀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경찰의 지시와 아이하라의 도움 요청도 무시하고요. 결국 아이하라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며 아이하라는 아무 죄도 없다는게 잘 설명되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이하라가 쿠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진행하는 법적 조치도 볼 만 했습니다. 회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서 필요한 자료, 고용 문제 및 진단서 등에 대한 설정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고, 300만엔이라는 청구 금액도 이치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디지털 마녀사냥의 폐해를 다룬 다른 기존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시각이나 새로운 접근이 없는 탓입니다. 아이하라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에게 사과를 받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무난했고요.

무엇보다도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법정 다툼이 시작되기 직전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인 미노와 회사로부터는 어떠한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욱 철저한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최소한 발암 물질 미노는 철저하게 응징받았어야 했습니다.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 역시 단순 사과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SNS 마녀사냥과 회사의 부조리한 대응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은 인상적이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이 크지 않고,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워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추리'와 관련된 장르 문학이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기도 했고요. 특별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2/14

단다단 시즌 1 (2024) - 야마시로 후가 : 별점 3점

최근 가장 핫한 작품 중 하나지요.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원작의 매력을 충실하게 살리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원작의 화려한 작화를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맞게 안정적으로 구현했으며, 원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화끈한 액션이 아주 훌륭합니다. 오카룬이 터보 할매에 빙의한 후 펼치는 질주 액션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플래시'같은 기존의 스피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과 차별화된 연출을 보여주거든요. 단순하게 직선적인 속도감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과장되면서도 왜곡된 구도와 함께 과감한 색채를 활용해 강렬한 비주얼로 실감나는 고속 질주를 선사합니다.

또한 원작의 감동을 더욱 끌어올린 연출도 돋보입니다. ‘아크로바틱 찰랑찰랑’과 아이라의 관계를 그린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원작의 감정을 더욱 깊이 전달하며,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강점을 활용해 감동을 극대화했습니다. 움직임과 색감, 조명을 활용한 세심한 연출이 캐릭터들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이지요. 

이외에도 오카룬이 모모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슬램덩크' 1기 엔딩인 'あなただけ見つめてる'를 부르는 장면도 애니메이션이라서 즐길 수 있었던 연출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지루해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액션이 거의 없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의 흐름이 처지는 느낌이에요. 초반부의 빠른 전개와 강렬한 액션과 비교했을 때,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루즈합니다.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 설정에 연이은 라이벌 등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 뻔했고요.

무엇보다도, 1기의 결말이 하나의 주요 사건을 완전히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간에서 끝나는 느낌을 준건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연재물의 '다음 편에 계속' 방식을 이렇게 써먹는건 과하다 싶네요. 연재물은 최소한 한 달 뒤에는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1기 완결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어서 리뷰도 늦어졌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화려한 작화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돋보이며, 원작 팬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보여주니까요. 단순한 이야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작품도 사실 아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으셨다면, 한 번 챙겨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2/09

중증외상센터 (2025) - 이도윤 : 별점 2.5점

최근 가장 핫한 드라마지요. 지인 추천을 받아 주말에 감상했습니다. 평이 좋은 이유는 알겠더군요. 장점이 확실히 많더라고요.

우선, 8회라는 짧은 분량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늘어지는 부분 없이 속도감 있는 전개로 지루함 없이 몰입할 수 있습니다. 한국 의학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신파도 없고, 심지어 러브 라인도 없을 정도입니다. 한 과장, 기조 실장, 원장 등 차례로 등장하는 빌런과의 대립과 해결도 완벽합니다.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백강혁 교수의 과거를 원장의 개심을 위한 복선으로 써 먹는 등 전개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백강혁 교수의 뛰어난 실력을 단순히 수술을 잘하는 것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수 딸 심장 수술 중 수술 장갑을 이용해 심장의 구멍을 덮는 방식, 남수단에서 총상 환자의 팔을 절단하지 않고 괴사한 뼈만 절제하는 방식처럼 창의적인 해결 방법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 점도 인상적입니다. 

캐릭터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노력형 주인공이 천재에게 감화를 받아 성장한다는 전형적인  일본 소년 만화 구성이기는 한데, 이를 의학 드라마에 효과적으로 접목했어요. 캐스팅도 찰떡이었고요.

그러나 내용도 일본 소년 만화스럽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백강혁 교수가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인 탓에 슈퍼 히어로물에 가깝거든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갈등도 긴박하게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백강혁 교수가 결국은 수술을 성공하는게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분량은 캐릭터들의 서사, 관계를 깊이 있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백강혁 교수가 의사가 된 이유 정도만 등장할 뿐이지요. 

그래도 재미있다는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

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

2025/02/02

방어구의 역사 - 다카하라 나루미 / 남지연 : 별점 2.5점

방어구의 역사 - 6점
다카히라 나루미 지음, 남지연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Trivia Book 58번째 책. 제목처럼 '방어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어구의 시작부터 통사적으로 정리하여 모두 105개 항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페이지는 설명, 한 페이지는 도해로 이루어진 구성은 다른 시리즈들과 마찬가지고요.

통사적으로 방패와 갑옷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고, 왜 이렇게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초창기에는 방패와 갑옷이 고르게 발달했지만, 크로스보우와 장궁 같은 무기가 도입되면서 전신 판금 갑옷이 도입되었고, 이 탓에 방패는 사라지고 양손으로 힘을 주어 타격하는 무기가 나타나는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거든요. 일본과 중국, 인도와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갑주까지 보여주는 등 다루고 있는 범위도 넓고요.

각종 방패와 갑옷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도 좋았습니다. 이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핵심 용어는 '스케일 아머'와 '라멜라'입니다. 스케일 아머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다수의 물고기 비늘 모양 조각을 천이나 가죽 등 안감에 꿰매 붙여 형성한 방어구입니다. 라멜라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고대부터 존재했던 갑옷으로 스케일과 동일하게 비늘 조각이나 가죽, 금속 재질의 사각형 소찰로 이루어져 있으나, 안감은 없습니다. 조각과 소찰들을 엮어서 만든 갑옷이지요. 스케일이 보다 더 원시적이고 옷처럼 유연성이 있는 반면, 라멜라의 몸통 부분은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단단합니다. 라멜라가 스케일보다 제작에 손이 많이 가는 고급품이고요.

플레이트 아머의 가격에 대한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잔 다르크(1412~1431년)를 위해 급조된 이탈리아제 갑옷은 100리브르로서, 금화 백 닢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의 금화 한 닢은 120만 원으로 환산할 수 있으므로, 잔 다르크의 갑옷은 1억 2,000만 원인 셈이지요. 다만 영웅을 위한 특제품, 게다가 특별히 서둘러서 만들었기 때문에 예외적이고, 그보다 50년 전의 기록에 나오는 판금 갑옷은 25리브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는 약 3,000만 원입니다. 자동차 한 대 값 정도인데, 기사 전용 장비로 상위 계급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네요.

당대 세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갑옷 설명도 흥미로웠습니다. '보인갑'은 중국의 보병용 중장 갑옷의 총칭으로 10세기 송나라의 보인갑은 철제 갑엽을 엮은 라멜라였습니다. 금나라의 중장기병에 맞서는 송나라 중장 보병대를 위한 장비로, 최전선용 보인갑은 갑찰 1825장으로 전신을 감싸서 무게가 35kg이나 나갔습니다. 양산 체제도 갖춰져서, 직인 한 사람이 만들면 보인갑 한 벌을 완성하는 데 70~140일이 걸렸지만, 실제로는 분업화되어 이틀에 한 벌씩 생산이 가능했다네요. 당대 최고 장비 중 하나를 이 정도 속도로 생산했다는건 송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외에도 무기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바이저를 올려 상대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동작이 기사의 인사 = 군대의 경례의 기원이 되었다는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일본 갑주의 비중이 높다는 건 아쉬웠습니다. 일본 갑주에 대한 통사적 설명까지는 볼 만 했고, 아래처럼 "세인트 세이야"의 성궤 상자는 일본 갑주를 담는 상자의 형태와 비슷했다는 등의 정보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갑주 제작 공정 중에는 갑옷의 강도를 확인하는 시험도 흔히 이루어졌고, 오요로이가 주류이던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를 '다메시요로이'라 부르며, 후세다케노유미라는 강력한 복합궁을 쏘아 시험했는데 16~17세기에는 화승총으로 도세이구소쿠를 쏘는 '다메시구소쿠'로 변화했다는 등의 정보는 과하다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설명할 내용은 아니었다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도판도 나쁘지 않으나, 한 페이지로는 내용에 소개되는 모든 도판을 담지 못한다는 단점이 큽니다. 아래 난반도구소쿠는 뭔지 보여주지도 않더군요. 

도판 크기도 작습니다. 오래전에 구입했던 DK 무기 백과사전을 일부 참조하며 읽었는데, 이 정도 사이즈는 되어야 명확하게 세부까지 확인이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제목이 주는 기대에는 충분히 값하고, 재미도 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런 류의 서적과 정보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2/01

스토브리그 (2019~2020) - 정동윤 : 별점 2점

SBS에서 2019 ~ 2020년 총 16화로 방영했던 드라마. 호평은 익히 들어왔었지만 본방 때 놓쳤었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길래 설 연휴 기간 동안 감상하였습니다.

야구를 좋아해서 그간 많은 스포츠 소재 영상물을 보아 왔었지만, '단장'을 주인공으로, 실제 리그 개막 후가 아닌 개막 전 '스토브 리그' 기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은 "머니 볼" 이후 처음입니다. 이런 작품이 국내 제작 방영되었다는게, 그리고 심지어 시청률도 좋았다는게 놀라왔어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 인기를 끌 만 하더군요. 드라마적인 재미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특히 초반부 임동규, 중반부 고세혁이라는 중간 보스를 거쳐 후반부 권경민으로 이루어지는 빌런들과의 대결이 흥미롭습니다. 세 명의 캐릭터가 잘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아는 슈퍼스타 임동규, 스카우트 과정에서 비리를 저질렀으며 이 때문에 해고된 고세혁이 백승수에게 앙심을 품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가져다 줍니다. 무엇보다도 구단주 대행이자 사장이 되는 권경민이 정말 최고입니다. 재벌 조카지만 본인 가족은 무능하다는 컴플렉스, 이 탓에 재송 그룹 안에서 기를 제대로 펴지 못하지만 백승수한테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안 좋은 쪽으로 열의를 불태우는 복잡한 인물을 정말 잘 그려낸 덕분이에요. 이는 찰진 대사들, 그리고 배우 오정세의 찰떡같은 연기도 한 몫 단단히 해 주고 있고요.

또 전개 과정에서 주축 선수의 병역 기피, 약물, 승부 조작, 이면 계약에 원정 도박까지, 음주 운전을 제외하고는 실제 프로 야구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요소요소에 삽입하여 재미를 더해줍니다.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트레이드를 비롯하여 외국인 선수 영입, 연봉 협상, 신인 지명, 2차 드래프트, 자율 훈련 관련 이슈 등 야구 팬으로서도 즐길거리가 많았고요. 한국 드라마의 병폐라 할 수 있는 러브 라인, 신파도 없어서 마음에 드네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후반부의 비현실적이고 억지스러운 전개가 많아지는게 대표적입니다. 각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드라마적인 재미와 극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둔 무리수도 눈에 거슬립니다. 30대로 보이는 여성 운영팀장과 재벌 가문 3세 직원이라는 설정처럼요. 외국인 선수를 찾으러 간 출장에서 고용했던 현지 코디네이터가 알고보니 메이저리그에서도 뛰었던 유명 선수였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칭 스태프를 비롯하여 구단 내 직원들도 대부분 꼴찌 의식에 젖어 설렁설렁 일하는데, 이 역시 과장이 심했습니다. 팀 성적은 코칭 스태프, 조금 넓게 보면 운영팀과 전력 분석팀까지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홍보와 마케팅 팀은 자기 일을 해야죠. 

야구적으로 바라보아도 허술합니다. 특히 감독 및 코치진의 유임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비용 문제라는 언급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4연속 꼴찌를 한 데다가 신인 육성 및 팀 장악에도 실패한 감독을 3년이나 재계약을 준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덕아웃에서 서로 싸우는 추태를 부린 수석 코치와 투수 코치들도 마찬가지에요. 바로 경질을 못했더라도, 2군으로 내리는게 당연했습니다. 사람이 좋아서였다면 그런 캐릭터를 확고히 했어야 하는데, 후반에 감독이 백승수 단장의 뒷통수를 치는 말도 안되는 트레이드에 동의하면서 캐릭터를 망치고 맙니다.

4년 연속 꼴찌팀이 20승 투수 한 명 영입했다고 우승 경쟁을 한다던가(심지어 주축 타자가 반 시즌을 날렸는데도 불구하고), 과도한 스카우터의 현장 개입, 에이전트를 배제한 선수 계약, 트레이닝 파트와 배팅볼 투수, 심지어 불펜 포수가 성적 향상에 핵심 요소로 묘사(중요하다는걸 부인하지는 않지만, 과했습니다)되는 등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래도 인기를 끌만한 재미는 있었기에 만족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1/31

사라지는 아들 - 안도 요시아키 / 오정화 : 별점 2점

사라지는 아들 - 4점
안도 요시아키 지음, 오정화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가미 호수 가족 여행 중 아들 케이스케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아들과 최면 치료를 받으러 간 가즈오는, 케이스케가 33년 전 사가미 호수에서 살해당했던 '오이카와'라는걸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33년 전, 사건 직전으로 돌아간 가즈오는 오이카와 사건이 일어나는걸 막았다. 그러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뒤,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도 않은 현실에 좌절했다. 오이카와가 죽지 않으면, 케이스케는 태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타임 슬립, 즉 시간 여행과 환생이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한 가족 관계의 수수께끼와 33년 전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가는 작품. 주인공 가즈오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3년 전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에 걸친 시간 여행을 통해 사쿠마가 아니라 센다가 진범이라는 진상이 드러나고, 후미요의 증언에 의해 센다가 처벌받은 뒤 통해 가족이 다시 회복되는 결말까지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즈오의 두 가지 딜레마도 흥미를 더해줍니다. 첫 번째는 아들 케이스케는 오이카와의 환생이고, 가즈오는 범인 사쿠마의 환생이라고 믿게 된 상태에서 '전생의 내가 죽인 사람이 환상한 뒤, 내가 환생한 그 사람의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카와가 살해당하지만 그를 살리면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 못하는데 그를 살릴 것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타임 패러독스로도 꽤 그럴듯한 부분이었어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꾸고 현재로 돌아오면, 역사와 기억이 다시 쓰여져서 기억이 사라지고 만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또한, 33년 전 당대의 배경을 생생하게 재현한 점도 눈에 띕니다. 견직물 공장의 공정은 물론, 하치오지 특산물인 넥타이 직물을 둘러 싸고 벌어졌던, 미국과 일본의 섬유 협상 탓에 어려움에 처한 공장들 분위기가 생생합니다.
소니 트리니트론 텔레비젼,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 세이코의 로드매틱 시계 등 소품들도 잘 그려지고 있는데, 특히 자동차들에 대한 언급이 상세합니다. 사쿠마는 히노 자동차의 콘테사, 오이카와는 닛산 스카이라인(원래 GT-R을 가지고 있었다), 센다는 토요타 크라운을 탄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차종과 인물을 잘 배치한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약삭빠르고 치고 빠지는데 능한 사쿠마는 소형차이자 레이싱카로도 진화했던 콘테사가, 흑막이자 거물 센다에게는 중후한 토요타 크라운이 잘 어울리니까요. 오이카와가 연인 후미요의 빚을 갚기 위해 차를 GT-R에서 스카이라인으로 바꿨다는건 돈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차종만큼은 고집한 점에서 뭔가 남자의 자존심같은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는 정말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남자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가즈오가 33년 전에는 통용되지 않는 지폐를 가지고 있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과 상표로 만들어진 유니클로 점퍼와 나이키 신발로 오이카와에게 추궁을 받으며, 스마트 폰을 들켜 카메라로 얼버무리는 등 미래에서 와서 겪는 고초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설정이 정교하지 못한건 단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반에 가즈오가 오이카와를 살해했다는 꿈 때문에, 가즈오는 사쿠마의 환생인 것처럼 끌고 가지만 알고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즈오는 사쿠마는 물론, 오이카와 살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게 진상이지요. 이는 앞서의 딜레마 - 나는 살인범의 환생이고, 아들은 내가 죽인 피해자의 환생 - 로 흥미를 주기 위해, 억지스럽게 설정을 집어 넣은 느낌입니다. 가즈오가 이런 꿈을 꾼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으며 대충 수습하는 전개 역시 영 별로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사쿠마가 진범이 아니고 센다가 악인이었다는건 꽤 이른 시간에 눈치챌 수 있을 뿐더러, 사쿠마와 센다의 관계, 센다의 범행 및 동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우선 센다가 사가미 호수에서 오이카와를 살해한건 완전 범죄를 노렸을 텐데, 그 자리에 후미요가 있었던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둘이서만 만났어야 했습니다.

또 센다가 오이카와를 살해할 정도로 후미요를 가지고 싶었다면, 범행 후 그녀와 결혼하거나 살림을 합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흥미와 재미를 위해서라면 후미요와 센다가 합친 미래가 훨씬 나았을 겁니다. 가즈오에게 센다가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로 인식되어 있다면 극적인 효과가 배가되었을 테니까요.
같은 이유로 오이카와가 친부라는걸 가즈오가 진작에 눈치챘다면, 앞서 두 번째 딜레마가 더 강하게 와 닿았을겁니다. 이런 부분의 전개는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흔해빠진 시간 여행물이지만, 흥미로운 소재들을 잘 엮어서 소소한 재미를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설정 곳곳이 설명이 부족하고 오류가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2025/01/26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소설 추천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이번에는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리스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을 추천하고 싶네요.


지진이나 사고로 폐쇄된 공간에 갇힌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소설을 소개합니다. 밀실 미스터리는 물론, VR 공간이나 우주 공간을 무대로 한 SF 작품까지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을 직접 체험해 보세요.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에 손에 땀을 쥐게 될 것입니다.

"방주" 유키 하루오

지진으로 지하 건축물에 갇힌 남녀 10명. 심지어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명이 희생되면 나머지 전원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살인범을 찾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합니다. 탈출이냐 죽음이냐의 시간적 제약,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 아름답게 짜인 논리적 추리 등, 읽는 재미가 가득한 걸작 미스터리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이노우에 마기

지하 복합 시설에 남겨진 여성은 시각과 청각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하루오는 최첨단 드론을 사용해 그녀를 구조하려 하지만, 연이어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닥쳐옵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고난도 탈출 미션극이자, 인간 드라마와 반전이 가득한 미스터리 요소를 갖춘 만족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앨리스 살인게임"코야 게이이치

앨리스라 불리는 VR 공간에 갇혀 데스 게임에 강제 참가하게 된 주인공 하루가 탈출, 즉 로그아웃을 목표로 하는 이야기. 밀실 상황에서의 서바이벌,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 다양한 요소를 균형 있게 담은 오락 작품으로, VR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전개가 탁월합니다.

"천애의 요새" 오가와 잇스이 (국내 미발간)

사고가 발생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지구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군상극 형식으로 그린 SF. 하지만 SF임에도 현실 세계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읽힐 것입니다. 독특한 인간 묘사를 즐길 수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의 절망감과 긴장감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서바이벌 패닉 소설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홀로 깨어난 라일랜드 그레이스. 자신이 있는 장소가 우주선 내부라는 것을 추측하며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가자, 지구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엄청난 미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성에서의 서바이벌을 다룬 영화화된 저자의 걸작 "마션"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은 SF의 재미가 응축된 소설입니다.

2025/01/25

Q.E.D iff 증명종료 2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27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강력 사건 1편, 일상계 1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2024년 6월의 23권 이후 네권째 만에 평균 이상의 작품을 선보여 주었네요. 앞으로도 이 정도 수준을 계속 유지해주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수록작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형의 집 살인 사건

가나의 입학 절차 때문에 하버드를 방문한 토마와 가나는 회계사 레기 베이커 살인 사건 수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25년 전 발생했던 윌리엄 힐 살인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피해자는 윌리엄 힐 사건 당시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사건 현장에는 윌리엄 힐 사건을 재현한 인형의 집이 놓여 있었다.

인형의 집을 만든 이는 윌리엄의 모친인 카밀라였으며, 토마는 카밀라를 찾아가 그녀가 범행을 지시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암으로 죽어가던 카밀라는 자백하기에 앞서, 25년 전 사건의 진상을 먼저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윌리엄 힐 사건은 범인이 피해자를 폭행한 둔기는 가져갔지만, 나이프는 남겨두었고 혈흔은 사방에 튀었으나 발자국은 없는 등 기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인 윌리엄의 애인이 실종되어 사건은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범인은 회계사 레기 베이커였습니다. 윌리엄 힐은 충동적으로 애인을 살해한 뒤, 레기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레기는 이 틈을 이용해 알리바이 - 차를 가져간 윌리엄 힐에게 차가 없다고 말하게 한 뒤, 윌리엄의 차를 몰고 가겠다고 말하고 바로 현장으로 출발하여 시간을 번 것 - 를 만들고 윌리엄을 살해했습니다. 윌리엄이 가지고 있던 300만 달러를 가져가기 위해서였지요.
레기는 윌리엄이 애인을 죽인 둔기로 윌리엄을 때렸기에 둔기를 가져갔으며, 애인의 피를 숨기기 위해 윌리엄을 난자하면서 현장이 혼란스러워졌던 겁니다.

Q.E.D에서는 정말이지 오랫만에 만나보는 정통 본격 추리물로 설득력 높은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되었고, 기묘한 상황을 풀어내는 추리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Q.E.D의 특징인 '학습 만화'스러운 부분도 과학 수사의 어머니라는 프랜시스 글래스너 리의 생애와 그녀가 만든 '인형의 집' 방식을 소개해 주면서 독자를 만족시킵니다. 그 외에도 가나의 하버드 입학 등이 펼쳐지는 등, 여러모로 오랜 팬으로서 즐길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라면 모를까, 현대적 관점에서는 과학 수사를 다소 무시한 점은 아쉬웠습니다. 25년 전이라고 하면 오래전으로 느껴지지만, 작품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1990년대 극후반입니다. "C.S.I" 시즌 1이 2000년에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당시 현장 조사에서 다른 혈흔을 밝혀내지 못하거나, 자동차 타이어 흔적 등을 통해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건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워요. 이미 핸드폰 시대인데 윌리엄 힐이 집 전화로 전화를 건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윌리엄 힐이 자택에 전화를 두 번 - 레기에게 먼저, 그 다음에 가족에게 - 걸었던건 왜 밝혀지지 않았을까요? 피해자의 모친이 엄청난 재력가로 진상 규명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허점들은 더욱 아쉽습니다. 범인 발자국이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치명적인 단점이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평작 수준은 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임시 특별 침대 열차 사건

"습관에 주의하세요. 그것은 언젠가 성격이 될 테니. 성격에 주의하세요. 그것은 언젠가 운명이 될 테니." - 테레사 수녀.

봉사활동을 위해 아오모리에 간 토마와 가나는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고급 침대 열차에 탑승했다가 부유한 할머니가 급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 사건에 휘말렸다.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모두 사건 현장인 식당칸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할머니의 사망은 단순한 사고였지만, 승객들이 식당칸에 있었던 사실을 숨기려 했던 이유가 충격적입니다. 승객들은 모두 식당칸에서 할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이를 방관했고, 사망 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숨겼던 것입니다.

이후 전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라면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강도와 살인범에게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로 끌고 갔을겁니다. 그리고 방관자 효과 설명으로 마무리했겠지요. 사회파적인 고발, 그리고 Q.E.D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정체성을 선보이기 이해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을테지요.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봉사'라는 개념을 끄집어내며 마무리합니다.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해 "남을 돕는 행동도 스포츠나 공부나 그림처럼 무의식이면서 습관적으로 하면 할 수 있지만, 무의식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급작스럽게 대응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의식은 할 수 없었던 정당성을 생각해낸다. 남을 돕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도록 습관화하는 것은 인격 형성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봉사 활동 경력이 대학 입시 등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드렸던 테레사 수녀의 말로 마무리되고요. 이런 깔끔한 일련의 전개와 마무리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봉사에 대한 개념 역시 그동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많은 반성도 하게 만드네요. 봉사가 몸에 배어 있는 분들은 존경할 수 밖에 없겠어요.

중반에 승객들이 가상의 범인을 만들어내는 전개는 다소 억지스러웠지만, 그 외의 전반적인 내용은 평균 이상의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01/24

가을비 이야기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1.5점

가을비 이야기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비채

'현대 호러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 작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이 커서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인간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공포를 극대화한 기담집이다.
호러에 미스터리 기법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 이후 일본 호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일인자 자리에 오른 기시 유스케가,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가지 공포담은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읽는 이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서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는 책 소갯글을 보고 집어든 작품.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소갯글에서는 공포, 호러 소설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나 의외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작가 명성만 놓고 보면 "엠브리오 기담" 정도의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의 소재, 내용들도 "백조의 노래" 외에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완성도도 그닥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단편들 - "도깨비불의 집", "미스터리 클락" - 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도 역시나군요. 앞으로 기시 유스케 단편은 읽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귀의 논"

아오타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는 못하는 아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미하루는 그 말을 들은 뒤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미하루와 아오타가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미하루가 고백을 끝낸 아오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무섭지도 않고 의외의 반전도 없는 짤막한 소품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가"

작가 아오야마는 자다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이동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병원 의사는 마쓰나가에게 '푸가(해리성 전주)'라는 말을 꺼냈다. 자살 명소 수해로 이동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오야마는 영능력자에게 부탁해 침실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그러나 결계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는 침실에서 대량의 물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집자 마쓰나미는 얼마 후, 아오야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안으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떠오르는 작품. 에메의 작품에서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약의 부작용으로 벽에 갇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면서 순간 이동을 하던 주인공이 결계 탓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로 이동을 못해서 중간에 갇힌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짧았던 에메의 작품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아오야마 시점의 순간 이동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너무 길거든요. 읽다보면 비슷한 내용이라 지루해집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거미를 테마로 한 결계 등의 이야기도 지나치게 장황하며, 거미 꿈은 정말이지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반면 순간 이동에 대한 설명은 제목의 '푸가' 뿐인데 극히 부족하고요. 분량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반전 소재로 사용된 물침대는 너무 생뚱맞았어요. 물침대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침구는 아니니까요. 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억지 발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다는 함께 자던 동거인 아키 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게 더 호러블하지 않았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백조의 노래"

인기없는 소설가 오니시 레이분은 대부호 사가로부터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는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창법으로 부른 레코드를 남겼다.

탐정 로스의 보고를 통해, 미쓰코 존스의 창법은 사막에서 노래하다가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라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병이 성대를 찢어 얇게 만들고, 분할 진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환상이 깨진 사가에게 로스는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했고, 레이분은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콘덴서 스피커는 놀라운 기술이지만 저음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거나, 스테레오 녹음은 3D 영화 같아서 진기함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가지 내용은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소개된 노래들 - 메리 캠프가 무른 마농 레스코의 '홀로 외로이 버려져', 미쓰코 존스가 부른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고요. (아래와 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창법의 비결이 불치의 풍토병이라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의 비법이 제어할 수 없는 손가락 떨림이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궁극의 비법을 손에 넣었지만, 짧은 영광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앞서의 오디오, 음악에 대한 상세 설명에 비하면, 풍토병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반전을 위한 억지 설정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쿠리 상"

2003년 11월 28일, 대형 사고를 쳐서 자살을 결심한 열두 살 다쿠야에게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루토가 함께 죽자며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주술은 소원을 빈 네 명 중 세 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했다. 다쿠야와 하루토는 친구 가에데와 신이치를 끌어들여 고쿠리상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고, 숨을 거둔 하루토 외 세 명은 고쿠리상의 조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2일, 성공한 변호사가 된 다쿠야 앞에 주간지 기자 노구치가 나타나 18년 전 하루토의 돌연사, 가에데의 집 전소와 가족의 죽음 및 다쿠야가 저질렀던 사건을 언급하고 돈을 요구했다. 충동적으로 노구치를 살해하고 다급해진 다쿠야는 다시 한 번 고쿠리상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가에데와 신이치 등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쓰타나나누마로 가라는 답을 받은 다쿠야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주술이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쿠야는 쓰타나나누마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은 명확한 주술의 조건과 이를 불러낸 존재에 의한 저주와 공포가 필수입니다. 고전 걸작인 스즈키 코지의 "링"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은 조건, 목적은 물론 주술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설명과 주술 결과 모두 애매하게 묘사되어 혼란스럽고,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안락사를 선사하는 주술이었다면, 18년 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걸까요? 

마지막 순간에 이미 사망한 하루토와의 대화도 무슨 맥락으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쓰타나나누마의 경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도 뭐지 싶어요. 아오모리 현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2025/01/19

(번역) 컬럼 : 책 모형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

전에 읽었던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 속에 등장하는 츠즈키 미치오의 책에 대한 재미있는 컬럼을 발견해서 소개드립니다. 원문은 이 곳입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관심있게 읽을 수 있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저는 전자책 버전으로 읽었는데, 책이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는걸 전혀 몰랐습니다. 이런건 - 빌 벨린저의 "이와 손톱"도 마찬가지겠지요? - 정말 전자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인데, 기술 발전과 전자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책 모형이란 무엇인가?

책 모형(束見本)은 대량으로 인쇄 및 제본을 시작하기 전에 실제 사용될 종이를 이용해 시험적으로 제작된 책입니다. 몇 부 정도만 인쇄소에 의뢰하여 만들어지며, 이를 통해 완성된 책의 외형과 특징을 미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책의 두께(등 너비), 무게, 열림 정도, 촉감 등을 사전에 검토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죠.

이 책 모형은 인쇄 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표지와 본문 모두 하얗게 비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점에서도 이러한 백지 책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일기장, 메모장, 혹은 그림책으로 활용하는 등 용도가 다양합니다.

책의 구성은 편집자가 페이지를 배치하고, 디자이너나 책 제작자가 종이를 지정하여 완성됩니다. 특히 고급 제본(上製本)의 경우에는 세부적인 제본 양식을 지정해야 하며, 이 단계에서 속지, 책갈피(스핀), 꽃무늬 천(花布) 등도 결정됩니다. 그러나 책 모형은 대량 생산 과정과는 달라서 최종 완성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부 상자를 제작할 때는 실제 제작된 책의 크기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 있죠.

추리소설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

이러한 책 모형을 소재로 한 독특한 추리소설이 있습니다. 일본 작가 츠즈키 미치오(都筑道夫, 1929~2003)의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는 196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이후 여러 출판사를 통해 재출간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책 모형의 구조를 활용한 독창적인 트릭과 기발한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

주인공인 아와지 에이이치(淡路瑛一)는 잡지에 잡문을 쓰며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입니다. 그의 집에는 책 모형이 있었고, 주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그는 책 모형을 일기처럼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은 주인공이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을 읽으며 사건을 따라가게 됩니다.

경찰은 주인공을 용의자로 의심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진범을 찾기 위해 직접 탐정 역할을 맡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누군가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용의자, 탐정, 피해자의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트릭과 결말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몇 장의 공백 페이지가 등장합니다. 책 모형에서 공백 페이지는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당시 독자들은 이를 인쇄 사고로 오해하여 반품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특히 초판본은 페이지 번호도 없어서 더 혼란을 주었습니다.

갑자기 공백 페이지가 나타난다. 공백 페이지가 가장 많은 책은 헤이안쇼텐(平安書店) 판본으로 9페이지이며, 고단샤 문고(講談社文庫)는 6페이지, 고분샤 문고(光文社文庫)는 5페이지이다. 이는 접지 방식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책 속 깊숙한 부분에 몇 줄로 조판된 글자가 있다. 그곳에 사건의 진상이 적혀 있다.

소설의 진상은 공백 페이지의 깊숙한 부분에 적혀 있습니다. 단순히 책을 넘기기만 해서는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든 주인공의 의도였죠. 이러한 트릭은 소설의 물리적 형식을 활용한 뛰어난 장치로 평가받습니다.

작품이 남긴 의미

저는 대학생 시절 이 작품을 통해 책 모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편집자로 일하게 되면서 이 책이 제게 미친 영향을 실감하게 되었죠. 이야기의 플롯과 책 제작의 물리적 구조가 서로 맞물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큰 반응을 얻지 못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작품의 배경이 된 신주쿠, 이케부쿠로, 고이시카와 등 익숙한 장소들을 떠올리며 가끔 이 책을 다시 읽곤 합니다. 책 속에 담긴 일본 에도 시대 문화와 언어유희 역시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드는 매력입니다.

추가 이야기 (2016년 2월 27일)

오랫동안 꿈꾸던 "고양이 혀에 못을 박아라"의 초판본을 드디어 손에 넣었습니다. 페이지 번호가 없는 공백 페이지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죠. 당시 이 페이지는 독자들로부터 반품 요청이 빗발쳤던 악명 높은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 초판본은 제 서재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고, 다른 희귀 서적과 함께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이 작품의 전자책 버전도 출간되었습니다. 공백 페이지가 어떻게 디지털화되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2025/01/18

쿠이 료코 낙서집 데이드림 아워 - 쿠이 료코 / 김민재 : 별점 3점

쿠이 료코 낙서집 데이드림 아워 - 6점
쿠이 료코 지음, 김민재 옮김/㈜소미미디어

만화 “던전밥”의 작가로 잘 알려진 쿠이 료코가 2010년부터 2023년까지 그린 다양한 일러스트와 짧은 만화를 모은 화집. 4개의 챕터를 통해 총 257점의 일러스트와 57페이지 분량의 만화를 선보입니다.

이 화집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압도적인 드로잉 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손 가는 대로 그린 듯한 그림들조차도 모두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골격과 근육을 바탕으로, 그리고 치밀한 설정을 토대로 완성된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낙서 모음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더군요.

“던전밥” 팬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디테일들도 돋보입니다. 라이오스 일행 외의 등장인물들이 '체인질링'으로 다른 종족으로 변화했을 때의 모습이나 현대 의상을 입었을 때의 모습 같은 그림들이 그러합니다.
또 이런 그림들에서도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설정의 깊이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아래의 종족별 마스크 쓰는 방법에 대한 일러스트가 대표적입니다. 귀가 큰 엘프와 드워프는 귀부터 꼼꼼하게 시작하고, 아무 생각없는 이즈츠미는 대충 쓰다가 엉망이 되고, 코볼트는 마스크 형태부터 다르지요.

만화들도 풍성합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라이오스와 파린이 상단과 동행하며 여행한 일화를 다룬 짧은 만화, 등장인물이 총 출동하는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 이벤트 이야기 등이 기억에 남네요. 오코노미야키를 햄버거처럼 만들어 먹는 라이오스의 모습도 재미있었고요. 갓 태어난 파린을 본 뒤 라이오스가 마을 동물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장면은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새롭고 신선한 만화가 많습니다.

“던전밥”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그림들도 흥미롭습니다. 작가가 먹고 싶은 요리들을 그린 일러스트는 “던전밥” 특유의, 요리와 재치가 결합된 유쾌한 감성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 관련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는 등, 작가의 팬이라면 더욱 즐길 거리가 많아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라이오스 파티보다는 카나리아 부대 소속 엘프들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나, 마물과 마물 요리 관련 그림이 거의 없다는 점은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분량에 비하면 책 가격도 다소는 높은 편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이 료코의 팬이라면 소장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던전밥”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1/17

도쿄의 가장 밑바닥 - 겐콘 이치호이 / 김소운 : 별점 2.5점

도쿄의 가장 밑바닥 - 6점
겐콘 이치호이 지음, 김소운 옮김/글항아리

1893년, 저자 겐콘 이치호이(본명: 마쓰바라 이와고로)가 빈민가로 알려진 시타야 만넨정, 요쓰야 사메가하시, 시바 신아미정 등 3대 빈민굴을 직접 찾아 하층민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이를 생생하게 글로 옮긴 논픽션입니다. 일본 근대 르포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단순히 빈곤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빈민들의 식생활, 일상적인 노동, 그리고 지역 경제의 구조적 문제까지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차부'(인력거꾼)에 대한 상세한 설명처럼요. 그들의 영업과 업무 행태, 하루 벌이, 주요 먹거리, 생활상과 나이 들었을 때의 비참한 모습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는 그들의 생존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드리운 가난의 무게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초기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되고요. "경성탐정록"의 "운수 좋은 날"을 쓰기 전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네요.

차부 외에도 고물상, 경매 시장, 일용직과 도급 인부들, 아침장과 야시장 등 다양한 하층민 직업에 대한 설명 및 하층민들의 생계 방식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잔반을 모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잔반야'의 존재와 그들이 판매하는 잔반들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생존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음식들 설명도 많은데, '후카가와 메시'가 차부들을 대표하는 식사 중 하나로 바다 비린내가 심해서 먹기 힘들다는게 새롭더군요. 지금은 지역 먹거리로 유명한 음식이니까요. 조리법의 문제였을까요? 원래는 꿀꿀이죽과 다를게 없었던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의 유래와 현재 위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 시점에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망하면 3년을 못 간다는 '좌식산공'에 대한 언급,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들의 무자비한 행태, 가증스러운 도급업자들에 대한 서술은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막걸리는 1홉(0.18리터)에 2센이며 잘 마시는 사람은 한 번에 5동이에서 7동이를 해치운다. 그중에는 옷가지를 잡히고 홧술로 10동이 이상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는 설명은 더 말할 것도 없을테고요.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특성 모두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으며,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해 잘 모른다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빈민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책입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1/14

[단상] 현실로 다가온 모듈러 하우스 기사를 읽고.

오늘, 건축 기술의 혁신을 보여주는 ‘모듈러 하우스’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는 건물의 주요 부품을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여 완성하는 방식입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모듈러 공법으로 지은 세종시 산율동 행복주택 아파트는 416가구 규모로, 주거 공간의 약 80% 이상을 공장에서 미리 제작했습니다. 이후 현장에서는 모듈을 크레인으로 옮겨 조립해 공사를 마쳤고, 약 100일 만에 모든 적층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이 공법은 공사 기간을 크게 단축하고 현장 인력을 줄이는 동시에 품질을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떠오른 것은 1974년에 발표된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흑마술의 여자"입니다. 작품 속에서 모듈러 공법과 흡사한 ‘유니트 하우스’로 이루어진 별장촌에서 밀실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밀실이었던 2층은 사실 옆 별장 유니트로, 범행 후 방만 통째로 이웃집과 교체하지 않았을까?라는 추리가 펼쳐집니다. 모듈별로 끼워 맞출 수 있는 유니트 하우스라서 가능한 추리입니다. 

이렇게 50년 전 작품에서 상상으로 그려졌던 기술이 이제야 현실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다는게 신기하네요. 또 상용화에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궁금해졌는데, 지금도 이 공법은 기존 방식보다 공사비가 약 30% 더 든다고 하니 비용 문제일까요? 그래도 재미있는 기술이고, 획일화된 아파트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식이니 보다 기술이 최적화되어 널리 퍼지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밀실 살인을 위한건 아닙니다...

2025/01/12

장송의 프리렌 : season 1 (2023~2004) - 사이토 케이이치로 : 별점 4점

용사 힘멜 일행이 마왕을 물리치고 80년이 지난 후,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 용사 힘멜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총 28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정통 판타지 설정인데도 잔잔한 힐링물 성격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프리렌이 추억을 되새기고 새로운 기억을 쌓는 여행 와중에 드러나는 소소한 추억들 - 힘멜이 동상을 세우는 이유, 프리렌이 꽃밭을 만드는 마법을 좋아하는 이유 등 - 은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힘멜이 경련화 반지를 선물하는 장면은 정말 희대의 명장면이었고요.
장명종 종족이 단명종 종족과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던전밥"의 마르실이 떠오르기는 했는데, 슬픔을 극복하기 어려워하는 마르실과는 다르게 프리렌은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더군요. 장명종으로 시간을 개의치 않는 성격도 곳곳에서 드러나서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단순한 레벨업 구조를 벗어나, 캐릭터들의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돋보입니다. 괴물 한, 두 마리 잡았다고 레벨이 오르는게 아닙니다.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해서 실력이 오르는 것이지요. 당연히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더 쉽게 성공하기는 하지만, 그건 현실도 그러하니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계관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인 프리렌조차 마족을 쉽게 이기기 위해 마력을 숨기는 속임수를 쓰는 등, 마법사들의 대결에서는 레벨 대결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걸 일관되게 주장하는 점도 좋았고요.

힐링물임에도 액션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슈타르크와 홍경룡의 격투나 마족 단두대 아우라 일당과의 전투는 강렬한 작화와 연출로 박진감을 더해 줍니다.
소소한 개그씬들, 귀여운 캐릭터들 역시 매력적이에요. 특히 어린 시절의 페른은 너무 귀여웠어요. 피규어가 출시되면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수천년을 살아왔지만 귀여운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프리렌도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다만 중반 이후의 1급 마법사 시험 이야기는 아쉬웠습니다. 정통 판타지의 힐링물이라는 방향성이 흐려지고, 배틀물로 변질된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마법사의 등급 구조나 마법 상성 설정, 마법사들이 주요 마법 하나에 의존한다는 설정은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왜 다른 마법을 배우지 않는걸까요? '닌자물'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징어 게임"이 떠오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 시험을 이렇게 길게 끌고갈 필요도 없었고, 마력의 양으로 승부가 나는 상황도 시험의 필요성을 떨어트린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이럴 거라면 목숨까지 걸어가며 시험을 치룰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마력 순으로 줄세우기를 하면 되니까요. 애초에 프리렌이 1급 마법사 시험을 치루는 상황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북부 제국은 위험해서 1급 마법사만 갈 수 있다는 이유인데, 현 시점에서 마족을 가장 많이 죽인 마법사는 프리렌입니다. 시험을 보는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보내주는게 타당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누가 보아도 재미있을 작품입니다. 제 딸 아이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5/01/11

커피 일가 - 가바야마 사토루 / 임윤정 : 별점 2점

커피 일가 - 6점
가바야마 사토루 지음, 임윤정 옮김/앨리스

3대에 걸쳐 오쿠노 가문이 운영하고 있는 일본 교토의 작은 찻집 로쿠요샤(六曜社)의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로쿠요샤는 단순한 찻집을 넘어 교토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 잡았는데, 교토신문 기자 가바야마 사토루가 창업주 미노루부터 2대 오사무, 3대 군페이에 이르기까지 가족이 가게를 어떻게 운영하고 발전시켰는지 알려줍니다.

3대에 걸친 교토 명물 카페의 일대기는 흥미로왔습니다. 세대를 거듭하며 변화한 경영 철학이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창업주인 1대 미노루는 최고의 접객 서비스 - 손님 자리를 향해 서서 끊임없이 살펴 본다. 밀크 저그는 손님이 쓰러뜨리는 일이 없도록 컵에서 5센티미터 정도 떨어뜨린 곳에 둔다. 빈 그릇, 빨대 포장지나 밀크 저그는 바로 치운다. 손님 테이블에 놓인 물컵이 비면 바로바로 채운다. 담배꽁초가 쌓이기 전에 새로운 재떨이로 바꾼다. 등 - 에 집중했으며, 2대 오사무는 자가배전 커피를 도입해 찻집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현재 3대 군페이는 보다 자유로운 발상으로 운영 방식을 새롭게 하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의 세세한 디테일들도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전전의 유명 카페들 목록, 1950년대 징병되었다가 라바울에서 커피맛을 알게되었다는 커피 도매상, 1971년 베스트셀러 "스무 살의 원점"에 등장하는 로쿠요사 이야기, 당시 커피 가격 등 여러가지 정보가 가득합니다. 

로쿠요사 성공의 비결로 작용한 '운'도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창업 초기 로쿠요샤가 위치한 거리가 번화가로 발전하거나, 오사무의 포크 가수로서의 유명세가 가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 등이 그 예입니다. 특히 오사무가 70년대 일본 록의 태동기에서 버블에 이르기까지 구가했던 자유로운 인생은 그 자체로서 상당히 볼만 했어요. 음악적 성취도 상당한 수준으로 묘사되는데, 몇 곡 찾아서 들어보았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좋았습니다. "자기 실력 이상의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큼의 벌이면 된다. 찻집의 마스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오사무 씨의 이상과 비슷한 곡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오사무의 뮤지션으로서의 유명세와 더불어, 80년대 중반에 이미 자가배전한 자신만의 맛을 찾아내어 커피를 제공했다는, 시대를 앞서간 감각이 현재 로쿠요샤 인기의 핵심으로 생각되네요. 오사무가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점이기도 합니다. 3대를 이어갔다고는 하지만, 오사무가 없었다면 과연 로쿠요샤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 솔직히 의문이거든요. 미노루는 커피 장인으로 보기는 어려운 접객 특화 사장이고, 군페이는 스스로 이룬게 없고 철학도 없으니까요. 
오사무의 커피조차도 80년대에는 특이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자가배전 스페셜티 커피'는 꽤 흔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카페의 핵심은 커피 맛일 텐데, 로쿠요샤의 커피맛이 좋다는 묘사는 전무합니다. 명물로 언급되는 수제 도넛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요. 이래서야 카페 소개로는 영 별로지요. 교토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설령 간다한들 딱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 10년 뒤, 과연 이 카페가 남아있을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2025/01/10

메이지 단두대(明治斷頭台) - 야마다 후타로 : 별점 3점

明治斷頭台 山田風太郞ベストコレクション (角川文庫) (文庫) - 6점
山田 風太郞/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단두대"는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집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합니다.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되었기에 계속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원서를 ChatGPT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걸맞는 장점들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장점은 실존 인물과 메이지 시대 풍광을 활용한 팩션적 재미입니다. 츠키지 호텔관, 에이타이바시 다리, 코덴마초 감옥 등 메이지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사건 속 배경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변화와 증기선같은 기술 발전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역 중 한 명으로 근대 경찰의 아버지 카와지 토시요시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던가 '마지막 사무라이' 키리노 토시아키, 일본 육군 창설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현실감과 역사적 몰입감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가공의 이야기와 결합해 당시 시대적 풍광을 생생히 재현하며, 작품의 팩션적 매력을 극대화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추리적 재미와 정교한 트릭의 사용입니다. "괴담 츠키지 호텔관"에서는 일본도 양 끝에 게다를 고정시키고, 게다 굽을 나선형 계단 난간에 걸쳐 위에서 미끄러트린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나카사카 큐우치는 이를 이용해 자신은 옥상 전망대에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피해자를 공격해 살해했지요.
"미국에서 보내는 사랑"에서 범인은 인력거를 혼자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진상은 인력거 두 대를 묶어서 일종의 4륜 차량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를 언덕 위에서 밀어서 굴러내려가게 한건데, 굉장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만 라소츠(나졸)들의 위증(?)과 마지막 현장에서 인력거가 묶여 있지 않았던 점(얇은 끈으로 묶여 풀렸다?) 등이 애매했던 점인데, 이는 라소츠들이 진범의 도우미였다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잘 설명되고요.
"에이타이바시의 교수형"에서는 밧줄과 배의 움직임을 이용해 자살로 위장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범인 테라니시 진주로는 피해자를 강 위 증기선으로 유괴한 뒤, 미리 에이타이바시에 설치해 두었던 밧줄 고리에 목을 밀어넣고, 반대쪽 끝을 자신이 잡아당겨 자살처럼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증기선을 타고 있어서 당시 상식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었고요. 앞서 설명드렸던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전이 사용된 멋진 트릭입니다.
"자신의 목을 안고 있는 시체"에서는 범인이 아리사카 이헤이를 살해한 뒤, 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몸과 처형된 죄수의 목을 붙여 위장한 사건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죄수의 목을 빼돌렸는지?'인데, 이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라소츠의 속임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앞서 모든 작품에서 라소츠가 한 몫했다는 걸 결정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점은 충격적인 결말입니다. 마지막 단편 "정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악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라소츠들의 협력을 얻었던 겁니다. 사실 사건 대부분에서 라소츠들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바탕이 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무사였던 라소츠들은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의 이상에 공감하며 범죄에 협력했고, 케이시로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어갔던 것이었지요. 모든 걸 밝힌 케이시로가 스스로 단두대를 사용해 자살하는 장면도 충격적이며, 정의와 권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전해줍니다. 이후 체포하는 척했던 라소츠들이 에스메랄다를 탈옥시키며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괜찮은 결말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작품의 배경인 일본 메이지 시대는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츠마와 조슈번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주요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추리 소설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트릭이 활용된 본격 추리 단편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 "탄정대 대순찰"은 케이시로와 라소츠들, 탄정대와 단두대의 배경 설명에 치중되어 있고, 이어지는 "무녀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거든요. 마지막 "정당한 정부는 가능한가"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는 자백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추리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고요. 따라서 본격적인 추리 요소는 부족한 편입니다.

케이시로가 정의를 추구하며 폭주하는 이유, 라소츠들이 케이시로에게 충성을 바치며 목숨까지 거는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균 이하 범죄자들인 라소츠들의 심경 변화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했어요.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문의 후예로, 일본에서는 '무녀'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너무 과했고요. 만화적이라서 영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팩션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바실리스크"같은 닌자 액션물(?) 원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5/01/05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손지연 : 별점 3.5점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8점
사이토 미나코 지음, 손지연 옮김/소명출판

이 책은 2차대전 당시 '주부의 벗' 등 일본 여성지에 실린 요리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이 일본 가정의 식탁에 미친 영향을 알려주는 미시사, 식문화사 서적입니다. 잡지에 실린 요리 정보로 그 시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며, 전쟁 시기 일본인의 먹거리 변화도 굉장히 생생하게 알 수 있어서 전쟁의 실상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 순으로 보자면 1940년부터 '절미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뭄과 흉작 탓으로, 일본이 쌀을 절약하기 위해 대체 음식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아빵'이라는 레시피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빵은 밀가루에 콩가루, 해초 가루, 말린 생선 가루를 넣어 만들었는데, 맛이 있을리가 없지요=.

1941년에는 국민의 영양을 고려한 '국민식 운동'이 도입되었으나, 배급제가 본격화되면서 이상에 그치고 맙니다. 배급제에서는 단백질이 특히 부족했는데 오징어와 조개가 단백질 공급원으로 활용되었고, 콩비지도 다양하게 요리되었습니다.
과달카날 패전 이후인 1943년에는 생쌀을 볶아 양을 늘리거나, 겨를 사용하는 레시피까지 등장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레시피에 설탕, 버터, 달걀과 같은 재료가 포함된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너무 비현실적이었거든요.

1944년, 공습이 심화되면서 죽과 집에서 키운 고구마, 호박이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길가의 잡초, 들풀, 곤충을 식용으로 권장하고, 심지어 차 찌꺼기를 채소로 먹으라는 권고까지 실리게 됩니다. 저자가 표현대로 '최후의 발악'이지요. 이런 쓰레기 레시피 중 하나가 '민들레 칼슘 무침'입니다. 

들풀 먹는 법 1 민들레 칼슘 무침

민들레 어린잎을 살짝 열탕한 후 물에 헹궈둡니다. 구운 생선 머리와 뼈, 달걀 껍데기 등을 갈아 으깨고, 다시마가 있으면 구운 후 갈아서 기호에 따라 맛을 내어 무쳐줍니다.

민들레의 쓴맛을 제거하려면 데친 후 얼마 동안 물에 담가 둡니다. 민들레의 쓴맛은 국화과 식물 특유의 영양소이므로 제거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전후에는 미국에서 제공된 밀가루 중심의 레시피가 많아졌고, 식량 사정이 안정되기 시작한 1949년 이후로는 점차 다양한 요리가 복원됩니다. 195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식탁은 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의 실상을 독특하면서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독서였는데,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요리를 현재 구현한 컬러 사진이 몇 장 실려 있지만, 더 많은 요리를 재현하거나 당시 잡지 자체의 도판을 함께 수록했다면 책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실생활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1/04

이세계에서 치트 스킬을 얻은 나는 현실 세계에서도 무쌍한다 ~레벨업이 인생을 바꿨다~ (2023) - 이타가키 신 : 별점 2점

얼마 전 "전생 귀족, 감정 스킬로 성공하다"를 보았기 때문인지, 알고리즘으로 추천되었길래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전생 귀족~"보다는 낫더군요. 이세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드는 설정을 통해 기존 이고깽 장르에 차별화를 시도한 덕분입니다. 이세계에서 얻은 능력이 현실에서도 적용되어, 왕따를 당하던 추남 주인공이 초인기 초미남이 된다는 설정, 즉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는 찐따가 현실에서도 게임에서의 레벨업을 통해 같은 능력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진짜 판타지가 뭔지 보여줍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닐겁니다. 따지고보면 "간츠"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테고요. 하지만 이 설정을 조금 더 차별화 시켜주는건 주인공 유야입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끝없이 선행만 베풀던 착한 인물이거든요. '선행을 베풀면 보답받는다'는 고전 동화 속 명제를 이세계 이고깽 판타지에 잘 녹여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현재 외모와 능력이 일종의 '반칙'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기도 하고요.
먼치킨이 된 유야가 겪는 여러 학교 생활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었습니다. '요리' 특기를 얻은 덕분에 캠프에서 멋진 요리를 선보여 담임의 프로포즈를 받는다는 등으로 훈훈하고 좋은 에피소드들이었어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왕따와 외모 콤플렉스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진부합니다. 왕따 과정에서의 과장된 연출도 별로였고요. 레벨업한 뒤 자신의 외모와 능력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설정도 반복된다는건 설득력이 너무 약합니다.
유야의 레벨업은 단순히 마물을 물리치는 데 집중되어 있어 흥미를 유지하기 어렵고, 후반부의 파워 인플레도 뻔했습니다. 영웅과 마왕의 대결과 다를바 없는 설정이었으니까요. 이를 그려내는 작화, 연출도 좋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캐릭터 간 관계나 서사도 전형적이라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판타지 세계가 특히 그러한데, 차라리 현실 세계 속 이야기를 더 길게 끌어가는게 재미있었을겁니다.
그리고 이건 넷플릭스의 문제인데, 서비스 신(?)을 모두 블러처리한 까닭을 잘 모르겠네요. 엄연히 15세 이상 관람가 작품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이고깽 장르물로는 나름의 매력이 있기는 한데,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시즌 2는 방영되면 볼 생각입니다. 저 역시 인기없던 학창생활을 보냈던터라, 이런 판타지에 감정이입하게 되네요. 

덧붙이자면, 유야 할렘이 시작되었지만 진 히로인은 호죠 카오리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유야가 먼치킨이 되기 전 모습을 알고도 유야를 흠모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2025/01/03

오징어게임 2 (2024) - 황동혁 : 별점 2점

전작의 성공을 기반으로 돌아온 작품. 전체 7부작입니다. 새해를 맞아 하루만에 모두 감상해버렸네요.

장점은 등장하는 전통 게임들이 드라마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5인 6각’ 게임은 팀워크를 강조하며 참가자들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짝짓기 게임’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이기심과 잔인함을 되새기게 만들고요. 특히 박용식 모자가 찢어지는 장면이나 래퍼 타노스 팀의 분열은 이러한 주제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앞서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장면이라 더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다른 장면으로, 오영일(이병헌 분)이 방에 먼저 들어와 있던 참가자를 살해하는 장면은 그의 잔인함을 부각시키며 이 게임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데스게임’임을 새삼 각인시켜줍니다.
그 외 게임과 참가자들 이야기도 소소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성기훈이 다시 게임에 참가하는 과정에서의 딱지남과의 러시안 룰렛 장면도 높은 몰입도를 선사하고요.

그러나 성기훈의 계획이 전혀 치밀하지 않다는 단점은 너무 큽니다. 밖에서 오랜 시간 준비하고 큰 돈을 들여왔음에도, 다시 게임에 참가한 뒤에는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할 뿐이니까요. 그나마 준비했던, 고용한 용병들의 게임장 난입이라는 계획도 쓸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임장을 찾지도 못했지만, 난입이 성공했더라도 병력 차이로 성공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임 측의 저격수들까지 고려하면 더욱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고요. 저격수의 존재나 병력 규모를 대충이라도 아는 사람이 세운 계획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허술해요.

이러한 무계획은 성기훈이라는 캐릭터의 일관성을 훼손하는 최악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성기훈은 초반에는 참가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게임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가 5:5로 갈린 이후에는, 밤에 습격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면서도 희생자들을 방치합니다. 게임 주최측을 습격하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는데, 앞서의 행동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어요.
기훈의 반란 계획에 동참하는 다른 참가자들의 태도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살아남기만 하면 수억 원의 돈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일면식도 없던 성기훈의 말에 따라 돈을 포기하고 사지로 들어간다는 설정은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캐릭터의 매력 또한 시즌 1에 비하면 떨어집니다. 특히 빌런 캐릭터의 부재가 아쉽습니다. 시즌 1의 장덕수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없어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줄어들었습니다. 래퍼 타노스는 배우부터 비호감이었을 뿐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을 유발해서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연기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요. 소규모라도 조직(?)을 이끌만한 인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임정대(송영창)도 마찬가지입니다. 빚이 많을 뿐, 완력이나 지력,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해서 빌런 우두머리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박수무당 역시 과장된 설정과 연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이렇게 과장된 인물들이 드라마에 꼭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코인 투자 실패자들이 많은건 세태를 반영했겠지만, 너무 많아서 뻔하다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설득력과 캐릭터의 매력 측면에서 부족했습니다. 다음 시즌은 모쪼록 짧게 끝나기만을 바랍니다.

2025/01/01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하세요, 2025년이 밝았습니다.

2024년 연말에 발생한 계엄령 선포로 나라가 큰 혼란을 겪었고, 아직도 수습 중인 상황에서 제주 항공 사고라는 큰 비극이 더해졌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2025년부터는 우리나라와 국민 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일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울러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