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2/01/31

살해하는 운명카드 - 윤현승 : 별점 3.5점

살해하는 운명카드 - 8점 윤현승 지음/새파란상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0대 초반에 이미 십억 가까운 빚을 지고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루저 종민의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모종의 게임을 제안하며, 게임의 승자가 되면 거액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게임에 참가한 종민과 알 수 없는 다른 4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잭 - 킹 - 조커 - 에이스 -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한 장씩의 '운명카드'를 받아들었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운명카드에 적힌 운명을 거스르면 되는데, 잭 종민에게 주어진 운명은 "누군가를 살해할 운명!"

이 작품은 불특정한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을 다룬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입니다. 제가 접해본 이런 류의 작품만 해도 한 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을 정도로 흔한 설정이기도 하죠. 이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큐브"에서부터 시작해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등 수많은 작품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장르물에서 핵심 요소는 얼마나 게임이 합리적이고 재미있게 구성되었는지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운 설정이니, 게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는 조건도 충족해야 합니다. 독자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난해한 수학 공식같은게 난무하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게임 자체는 간단하지만, 규칙이 공정하게 짜여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또한, 게임의 규칙을 설명할 때 중요해 보였던 것들 - 언제든 나갈 수 있음 / 상대방에 대해 묻지 말 것 / 운명 카드를 보여주거나 강제로 보지 말 것 -보다,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 식사 시간을 반드시 지킬 것 / 반드시 포커 게임에 참가할 것 / 돈을 어떻게 받아갈지 정할 것 -이 더 중요한 규칙이었다는 의외성도 돋보였고요.

게임의 규칙과 중간중간 탈락하거나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정교하게 엮이는 전개도 훌륭하며, 서스펜스와 스릴도 굉장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는 데 2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곳곳에 헛점도 많습니다. 에이스의 무리한, 합리성을 잃은 배팅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킹은 본인이 조심만 했어도 "살해당한다"는 운명을 거스르기 가장 쉬운 존재였다는 점 등이 그렇죠.

무엇보다도 퀸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해서 돈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정말 말이 안 됩니다. 20억이면 충분했을 텐데 100억이라니? 거기에 에이스가 종민의 운명카드를 우연히 보게 된 뒤 퀸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는 전제가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더러(숟가락을 이용한 공작이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참가자들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루 만에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는 점 등은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조커를 구태여 자살로 위장하려 했던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요. 마지막 종민의 상황 역시 충분히 정당방위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를 위해 억지로 몰아간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구성이 나름 신경 써서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종민은 다른 사람들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릴 적 저지른 작은 실수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루저로 묘사되는데, 아무리 봐도 주인공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서 갑자기 의외의 행동력을 발휘하는 전개가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뭔가 인연이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접해왔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 중에서도 재미 하나만 놓고 본다면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추리 요소가 적다는 단점은 있지만, 에이스의 광기 어린 행동과 종민의 심리 묘사 등이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높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설정과 앞서 언급한 단점들 때문에 최고점을 주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건투를 빕니다.

덧: 좋은 추리소설 소개로 자주 방문하는 카구라님 블로그에서 리뷰를 보고 읽게 된 책인데, 카구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소개가 없었다면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립니다!

2012/01/29

생폴리앵에 지다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1.5점

생폴리앵에 지다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갈레씨, 홀로 죽다" 다음에 읽은 메그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한 남자가 거액을 우송하는 장면을 우연히 본 메그레 반장이 그를 추적하다가 자살하는 장면까지 목격한 뒤, 모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너무 많네요. 일단 사건의 발단부터가 메그레의 쓸데없는 호기심과 참견이라는 점에서 별로였습니다. 좀 수상해 보인다고 해서 모르는 남자를 국경까지 넘어서 추적한다는 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물론 메그레 반장의 성격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그리고 죄네-다른빈유가 자살한 원인이 메그레 반장이 바꿔치기한 가방 때문이라는 점은 황당하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오지랖 넓고 집착이 대단한 메그레 반장의 스토킹과 절도로 인해 한 남자가 자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잖아요!

아울러 이야기 전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과 얽히게 되는 과정에서 우연과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반 담이야 시체가 있는 곳에 잠복하고 있던 반장의 그물에 걸린 것이긴 하나, 본인이 너무 티가 날 정도로 요란을 떠는 것부터 비현실적입니다(그냥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정도로 넘어가면 됐을 텐데 말이죠). 처음 찾은 술집에서 벨루아르라는 또 다른 용의자를 발견하고, 그다음에 방문한 벨루아르의 집에서 다른 연관 인물들을 알게 되는 식인데, 이건 수사도 아닙니다. 메그레 반장이 이동하는 곳마다 용의자가 "똻~!" 하고 등장하는 전개라니요. "옳지! 네놈이 연관되어 있으렸다~!"라는 식으로 사건이 풀려가는 것이 전부니까요.

마지막으로 진상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십 년 전 어울렸던 친구들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살인사건과 이후 친구들 중 하나였던 다른빈유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10년 전 양복 하나만을 증거로 거액을 요구하며 친구들을 협박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없어지자마자 자살했다는 내용인데, 진상이 시시할뿐더러 이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대체 왜? 가방 안에 옷이 있다고 사기 치면서 협박을 하고 다녔다면, 그 안이 신문지건 뭐건 그게 그렇게 큰 문제였을까요? 공소시효도 제대로 모르고 협박을 했던 것인지도 의문이고요. 살인자도 아니고 별다른 증거도 없어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반 담, 롱바르, 자냉 같은 친구들이 왜 그렇게 협박에 전전긍긍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순진한 시대였다는 뜻일까요?

책 뒷부분 해설을 읽어보니, 조르주 심농의 학창 시절 추억이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그냥 추억팔이용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히 재미도 없고 추리소설로 보기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메그레 반장 시리즈도 워낙 많다 보니 모든 작품이 걸작일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은 기대와 너무 달랐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2/01/25

명탐정의 저주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3점

명탐정의 저주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존 본격 추리물을 비웃는 블랙코미디였던 시리즈 전작과는 다르게, 작가인 주인공이 일종의 유체이탈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작품 속 세계에서 활약한다는 동화 같은 설정의 독특한 연작 단편집입니다. 

전작과의 공통분모는 제목, 주인공의 이름을 제외하면 거의 없습니다. 본격 추리에 대한 비꼼이 약간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격 추리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요. 동화 같은 설정은 "시미가의 붕괴"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점은 비교적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동화적인 설정임에도 동기와 전개, 트릭 모두 확실한 본격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무차별한 비난이 즐거웠던 전작이 더 취향에 맞았지만, 본격 추리물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이번 작품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이쪽 장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여전하지만, 전작보다는 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 가깝다는 것도 확실한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전체적으로 평균하여 3점입니다.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념관

주인공이 덴카이치가 되어 이상한 마을로 소환된 뒤, 의뢰받은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과 여러 등장인물들, 사건의 무대가 되는 기이한 마을에 대해 소개하는 도입부 역할이 강한 에피소드입니다. 짧은 분량 안에서 많은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추리적으로 특별히 눈여겨볼 점은 없습니다. 덴카이치가 기념관 수위의 팔뚝에 난 자국을 보고 그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리라 추리하는 부분 정도가 유일할 정도죠.

그러나 동화 같은 마을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마을의 크리에이터라는 미이라, 미이라 발굴 직후 도난당한 30cm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Who done it?"이라는 문구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볼거리가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자산가

기념관 보존 위원회 멤버이자 마을 제일의 자산가 미즈시마 유이치로를 찾아갔다가, 그가 밀실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밀실 추리극이 펼쳐지는데, "명탐정의 저주"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덴카이치 시리즈 특유의 추리소설 비꼬기가 다수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피해자의 아들 아키오가 "먼저 타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 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의심해 보라고 한다"는 밀실 트릭의 문제를 비판하는 부분이겠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밀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자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니까요. 걸작 추리만화 "nervous breakdown"에서도 언급된 내용이라 반가웠습니다.

이렇듯 밀실을 비꼬고는 있지만, 트릭 자체는 합리적이기에 추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작품입니다. 간단한 트릭이지만, 사건의 무대가 효과적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완성도가 높습니다. 또한, 밀실의 일곱 가지 종류라는 덴카이치의 이론도 추리 애호가로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이 마을이 '본격 추리'라는 개념을 전혀 모른다는 것과, 마을 자체가 짜여진 무대장치 같은 설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보다 효과를 극대화하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소설가

덴카이치 탐정이 기념관 보존 위원회 멤버인 소설가 히다를 방문한 직후, 히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 이야기입니다. 범인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간 소실' 트릭이 펼쳐집니다.

본격 추리물에 대한 나름의 작가론이 담겨 있는 점은 인상적이지만, 트릭이 너무 쉽다는 점과 "자산가" 에피소드와 유사한 느낌이 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그냥저냥 평작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위원회

남은 기념관 보존 위원회 멤버들이 시장의 별장에 모인 뒤, 벼락으로 인해 고립된 후 한 명씩 살해되기 시작하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연쇄살인극입니다. 고립된 별장, 요일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참석자들, 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를 예언한 듯한 살인마의 장치 등, 설정만 봐도 작가의 의도가 뻔히 보입니다. 마치 "이게 왕도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패기마저 느껴집니다.

물론 작가가 이러한 작위성을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기에 단점은 아니며, 오히려 진부하고 뻔한 클리셰를 동화적인 설정과 결합해 효과적으로 구현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트릭 역시 예측 가능하지만, 작품과 잘 어우러져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본격 추리에 대한 작가의 향수와 애정이 잘 느껴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무리 낡고 오래된 장르라 하더라도, 추리물의 원류는 본격 추리물이기 마련이고, 이 장르에 대한 애정은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별점은 3.5점입니다.

2012/01/23

이니그마 - 로버트 해리스 / 조영학 : 별점 2.5점

이니그마 - 6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톰 제리코는 선배 앨런 튜링의 소개로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 부서에 배치된 후, 독일군 기기 중 가장 어려운, 4중 회전자를 채택한 이니그마 "샤크"를 해독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건강을 해친 톰은 요양을 떠났지만, 고작 3주 후 샤크의 체계가 바뀌어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 복귀와 동시에 옛 연인 클레어의 행방을 뒤쫓다가, 그녀의 방에서 훔쳐낸 암호문을 발견하는데...

역시나 물만두님의 리뷰집을 읽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된 작품입니다. "그들의 조국"으로 데뷔한 로버트 해리스의 두 번째 작품으로, 45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첫 작품은 가상 역사물이었지만, 이 작품은 2차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 블레츨리 파크를 무대로 한 팩션입니다.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와는 달리 디테일이 확실해서 좋았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니그마와 블레츨리 파크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는데, 소설은 이니그마에 대한 고증과 암호를 풀어내는 과정이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거든요. 암호 해독에 관심이 있다면 자료 삼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해 줍니다. 실제 이니그마 해독 과정이 중심이라 독자가 암호 해독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완성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또한,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 축인 '이니그마 해독'과 '클레어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 중에서 클레어 실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균형 있게 전개하는 것도 좋았어요. 거대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단서를 알아내야 하고, 그 단서가 되는 것이 수송 선단을 발견한 U보트의 통신 암호라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그로 인한 서스펜스 (명확한 시간 제한이 생기므로)를 영화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박진감 있게 서술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가 너무 길고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톰 제리코의 불안한 심리 묘사와 옛 연인 클레어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클레어에 대한 비중이 커진 탓에, 진짜 여주인공인 헤스터의 존재가 묻혀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제리코가 클레어의 룸메이트 헤스터와 함께 클레어의 실종에 얽힌 진상과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는 전개는, 영화에서 초반에 간결하게 처리한 것처럼 소설에서도 요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밀도 있는 상세한 묘사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부분은 장황한데 반해,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너무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이 있어 강약 조절이 실패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확실하게 정리하며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마치 연재 종료를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만화의 엔딩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또한, 폴란드인 푸코프스키가 가족을 위해 카틴 숲 학살 관련 암호문을 몰래 해독하려 했다는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애초에 암호문 내용이 카틴 숲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스파이로서 해당 메시지를 중개했다고 설명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품 내에서 해당 암호문은 해독조차 시도되지 않았다고 묘사되며, 가장 뛰어난 암호 해독 전문가인 제리코조차도 해독이 기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어려운 암호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 클레어가 사실 위그램이 심어놓은 블레츨리 파크 감시용 스파이였다는 설정은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나름 반전 요소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꼭 필요하지는 않으며 퍼그에게 의도를 가지고 암호를 전해주었다는 점도 현실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애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퍼그의 배후를 찾기 위한 작전이었다면, 주객이 전도된 셈입니다. 이 암호 때문에 퍼그가 독일 쪽에 붙으려 한 것이라면, 차라리 단순한 미행이나 감시를 붙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U보트를 뒤쫓는 암호 해독 요원들의 시간 제한이 있는 작전과, 또 다른 음모가 복합적으로 펼쳐지는 서스펜스와 재미는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알리스테어 맥클린 스타일 (짧고 임팩트 있게)로 쓰였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 둘을 비교한다면 영화 쪽이 더 낫습니다. 일반 독자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해독 장면보다는, 클레어의 실종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거든요. 결말 또한 영화 쪽이 깔끔하고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이 시종일관 을씨년스럽고 어두운 분위기의 원작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톰 제리코가 마지막 퍼그와의 추격전 이후 요양할 때 읽었다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목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13인의 만찬", "명탐정 파커 파인",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 "목사관 살인사건" 등, 작중 주인공이 읽는 책들이 제 취향과도 묘하게 어울려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2012/01/19

다잉 아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1.5점

다잉 아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 '양하'의 바텐더 신스케는 손님에게 습격당해 머리에 중상을 입고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회복한 뒤, 사건의 원인이 자신이 일으킨 1년 반 전의 교통사고에 대한 복수라는 경찰의 수사 결과를 들었다. 그러나 신스케는 그 사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신스케는 어렴풋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물만두님의 리뷰 때문에 읽게 된 책. 

그런데 물만두님의 극찬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물만두님의 극찬 요지는 양심 없는 가해자들에 대한 사회고발적인 성격이 짙다는 것인데,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인 우에하라 미도리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고, 동승자이자 사후종범인 기우치는 미쳐버린 약혼녀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으니 사는 게 지옥일 텐데, 양심 없이 사는 가해자라는 건 어울리지 않잖아요.

물론 사고를 잊고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던 또 다른 가해자인 신스케와 에지마에게 복수의 철퇴를 내려 경종을 울린다는 해석도 가능하긴 합니다. 그러나 진범이라 할 수 있는 에지마가 걸려든 것은 순전한 우연 - 신스케 살인미수가 루리코의 잠복과 겹친다는 - 에 불과하다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래서야 경종을 울린다기보다는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니까요.

또 우연이 많이 개입되어 있고, 무리하고 작위적인 설정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단 죽어가는 피해자의 눈이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는 기본 설정부터 작위적입니다. 게다가 우연찮게 머리를 맞고, 우연찮게 사고 및 사고와 관련된 일들만 잊어버렸다... 참 편한 설정이기는 합니다만 말도 안 되죠.

그 외에도 유니버설 맨션이라는 루리코의 거처를 알게 된 순간 경찰에 신고만 해도 범행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을 텐데, 출동한 형사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출동한 뒤 우연찮게 실종된다는 것과, 왜 경찰은 형사가 실종되었는데 핸드폰 통화 내역과 발신자 조회도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중간에 신스케가 발견한 레이지의 SF 소설 같은 일기, 신스케의 애인 나루미가 남자가 없었다는 증언과 그녀의 실종을 대비시키는 전개 등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요.

무엇보다도 루리코가 신스케를 유혹하고 정사를 나눈다는 설정은 정말이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미모의 여자가 몸까지 바쳐가며 초호화 맨션에서 같이 살 것을 요구한다니! 이런 복수라면 오히려 환영하는 피해자가 더 많을 것 같아요.

그냥 순수한 원한과 복수를 서스펜스 스릴러 형태로 그리고 싶었던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요? 그렇다면 범인보다도 범행을 지켜보기만 했던 목격자들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살인 더하기 다섯"처럼, 미나에 사건의 원인인 고용인을 막 다루는 후카미 집안 사람들도 같이 응징했어야 하는 게 더 합리적이었을 것 같은데, 이건 뭐 신스케에 대한 복수극도 아니고 대체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서두의 죽어가는 미나에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더불어 '원한의 눈길'이라는 지극히 동양적이면서도 신비한 동기를 서스펜스 스릴러로 포장한 작가의 능력은 인정합니다. 신스케의 사고 - 루리코의 등장 - 나루미의 실종 - 기우치와의 만남 - 감금과 탈출 등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느껴지는 재미도 탁월하고요. 그러나 작가의 장점인 트릭과 플롯의 조화는 사라지고, 작위적인 설정과 우연으로 점철된 전개, 불필요한 자극적인 묘사로 싸구려 펄프 픽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네요. 좋게 봐줘도 흔해빠진 서스펜스 스릴러물 정도니까요.

물만두님의 리뷰는 경애하는 바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분명하게 다른 견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2/01/17

머니볼 - 베넷 밀러 : 별점 2점

원작을 굉장히 재미있게, 인상적으로 읽었고 영화의 평도 좋아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원작과는 사뭇 다르더군요.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원작은 빌리 빈이 폴 데포스데타와 함께 2002 드래프트에서 제레미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다른 경쟁팀이 주목하지 않는 선수들을 상위 픽을 사용하여 영입하는 과정이 중심입니다. 이 드라마틱한 드래프트야말로 그동안 계속 정립해온 머니볼 이론을 완성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 변화의 장 그 자체인 것이죠.

그러나 영화에서는 드래프트는 언급도 되지 않고, 2001년 시즌이 끝난 뒤 데이먼, 지암비, 이스링하우젠이라는 스타 선수를 자유계약으로 놓친 후 몇 명의 선수 보강만으로 2002년 기적과도 같은 20연승을 이루어낸다는 줄거리로 흘러갑니다. 도저히 영화로 어떻게 찍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드래프트 현장보다 야구 시합이 중심이 된건 콘텐츠 속성상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처럼 선수 몇 명 바꿨다고 믿을 수 없는 연승을 한 것처럼 그리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 됩니다. 프로야구 매니저 게임에서도 불가능할 거예요. 게다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2002년의 오클랜드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루저들의 팀도 아니었습니다. 배리 지토, 마크 멀더, 팀 허드슨이라는 투수 3인방이 건재했고, 미겔 테하다와 같은 타선의 구심점도 있었던, 충분히 지구 우승을 노려볼 만한 탄탄한 전력의 팀이었어요!

게다가 빌리 빈 캐릭터도 불만입니다. 야구계의 혁명가이자 독재자, 야구계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에서는 따뜻한 가장이자 야구를 사랑하는 야구인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따뜻한 도시 남자 이미지가 브래드 피트의 상큼한 외모와 함께 전형적이고 뻔한 야구 영화 장면들로 반복되며 강조되는데, - 예를 들자면 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락커룸에서 벌이는 일장 연설이나 데이빗 저스티스에게 팀의 구심점이 되어주기를 요청하는 장면, 미안함이 어린 방출 통보, 그리고 경기를 보지 않는 신조를 깨고 츤데레 아가씨처럼 몰래 관객석에서 게임을 지켜보는 장면들 - 이건 아니죠...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장이 된 제리 맥과이어 필이거든요. 원작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나마 머니볼 이론을 야구를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살짝 보여주는 부분은 괜찮았고 경기 장면도 좋긴 합니다. 중간중간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스타 선수들도 반갑고요. 한마디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면 썩 괜찮은 야구 영화이긴 해요. 하지만 원작과의 괴리가 너무 심하고 각색도 심해서 원작 팬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2/01/16

밀실살인게임 2.0 - 우타노 쇼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밀실살인게임 2.0 - 6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호인 다섯명. 반도젠 교수, 두광인, aXe, 쟌가, 044APD. 이 커뮤니티는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추리하는 '리얼탐정놀이' 커뮤니티였다.

저는 추리소설도 좋아하지만 야구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두 분야 모두 정통파를 좋아하지요. 추리는 정통파 본격 미스터리, 야구는 정통파 강속구 완투형 에이스 투수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고보니 멸종해가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네요.

어쨌건 이러한 야구 시각으로 본다면, 우타노 쇼고는 정통파 강속구 투수라기 보다는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승부하는 기교파 투수입니다. 잘 짜여진 플롯과 동기, 복잡한 인간관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와중에 트릭을 통한 두뇌게임이 펼쳐지는 고전적인 본격물보다는 기발한 트릭과 그에 따르는 전개에 치중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null제가 읽은 작가의 다른 작품은 트릭이 중심인 기교파 소품들이었습니다.

물론 이게 나쁜건 아니에요. 이러한 방식으로도 역대급 작품이 된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 같은 강력한 결정구가 있으니까요. 다른 구질(작품)들도 충분히 제 몫을 하며, 팬들에게도 항상 기쁨을 주는 유형이니까요. 실제 야구에서도 이런 투수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꾸준하고 성실한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들이죠. 팔색조 조계현 선수처럼요.

이 작품 역시 이러한 비유에 딱 맞는 작품입니다. 트릭이 풍성하고 설정을 독특하게 가져가며 등장인물 캐릭터에도 트릭이 숨어 있는 등 특유의 화려한 퍼즐러, 트리커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기교파로서의 단점 또한 도드라져서 안타깝습니다. 트릭, 즉 변화구의 각도와 위력은 좋았지만 동기와 설득력, 이야기 전개라 할 수 있는 제구가 영 꽝이었던 탓입니다. 온전히 트릭을 위해 짜맞춰진 작위적인 설정과 전개였거든요. 트릭이 없다면 작품으로 성립이 힘들 정도입니다. 이래서야 소설보다는 추리 퀴즈에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또한 아무리 사회부적응 잉여 오타쿠들이더라도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얼굴도 모르는 인물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역시도 불가능합니다. 실제 범행 과정에 소요되는 돈과 노력, 리스크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첫번째 에피소드처럼 미디어에 보도된 미궁에 빠진 사건을 아마추어 추리 애호가들이 모여 추리한다거나, 각자 생각한 트릭을 문제로 낸 뒤 서로 해결하기위해 머리를 짜내는 이야기 쪽이 훨~씬 좋았을거에요. 이편이 보다 스트라이크에 가까웠겠죠. 지금의 결과물은 트릭을 풀어나가는 면에서는 헛스윙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공 자체는 볼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트릭이 비록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전개면에서 현실성과 합리성을 지녀야 완성도를 인정받을테니 당연한 결과겠죠. 볼의 위력이 좋아도 도망다니는 투수보다는 일단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 아는 투수가 진짜 투수인 처럼요. 그래도 트릭만큼은 괜찮은 부분이 있었던만큼 다음 투구에서는 보다 제구력이 동반된 피칭을 기대해 봅니다.

이하 에피소드 상세 소개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Q1. 다음은 누가 죽입니까?

이야기의 시작. 다섯 명의 멤버가 접한 살인 사건 보도. 그들은 사건이 살인게임이라는 것을 직감한 뒤 진상을 추리하기 시작한다...

살인게임 동호인이 많다는 설정 자체도 넌센스에다가 아무리 오타쿠 추리 매니아들이더라도 추리를 하는 과정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단편집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닥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에피소드입니다. 트릭도 별다른 것은 없고 순수한 수사와 추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의 공정한 참여가 차단되는 측면이 강해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딱 한 가지, 달력에 예고를 남기는 것이 단지 날짜와 술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행 장소인 맨션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더군요. 달력처럼 구성된 맨션의 체크된 날짜와 호수를 일치시켜 범행을 저지른다는 게 솔직히 말이나 됩니까... 애시당초 일반인에 가까운 커뮤니티 멤버가 도출 가능했던 연관된 살인사건에 대한 정보를 경찰이 모르고 넘겼을 가능성도 낮고요. 

놀라운건 이 에피소드가 멤버들의 범행이 아닌 조사와 추리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Q2. 밀실 따위는 없다.

Q1에서 반도젠 교수가 낸 수수께끼와 그것을 응용한 두광인의 수수께끼에 대해 다루는 간단한 소품.

수수께끼 수준이라 딱히 언급할 것은 없습니다. 밀실살인은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 성립한 것으로, 밀실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aXe의 발언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 애호가로서 공감가기도 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Q3. 살인마 잭 더 리퍼, 삼십 분의 고독

Q2에서 범행을 예고한 쟌가가 토막살인으로 밀실을 만든 뒤 그것을 모두가 추리하는 이야기.

다리 두 개를 문에 놓아둔 것만으로 밀실이라는 설정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리 두 쪽이 문에 기대어져 있다 한들 문을 여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그래도 핵심 트릭은 충분히 한 번 정도는 써봄직한 괜찮은 아이디어이긴 했습니다. 시체를 훼손한 이유도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또 다른 작품 속 트릭이라 할 수 있는 온도계를 이용한 미끄럼틀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았고 말이죠. 물론 트릭대로 잘 됐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시체 속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을 이용할 것이면 더 교묘한 밀실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네요. 피해자와 딸만 가지고 있는 열쇠를 이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충분히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텐데 급하게 마무리 지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트릭은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Q4. 상당한 악마

Q3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두광인의 귀축 단두살인사건 예고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광인이 화상 채팅으로 커뮤니티 멤버들에게 특정 장소를 보여주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었고요. 커뮤니티 멤버가 일종의 증인이 되어 두광인의 알리바이가 완벽하다는걸 증명하게 된다는 발상의 전환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핵심 트릭이 그닥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잘 됐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요. 피해자 루카가 통화 중 실수 한 번만 하더라도 모든 게 틀어질 테니까요. 또 두광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은 괜찮았지만 이 커뮤니티처럼 위험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릭과 반전이 합리적 전개보다 우선한 나쁜 사례죠. 별점은 2점입니다.

Q5. 세 개의 빗장

aXe군이 공들여 준비하고 있다는 트릭을 이용하여 구현한 눈 속의 밀실살인이 수수께끼로 던져지는 에피소드.

눈이 그친 이후에도 피해자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제시되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발자국 하나 없는 쓰레기장 한가운데의 전화박스 형태의 박스였습니다. 박스는 세 개의 빗장이 걸려있는 이중밀실이었고요. 이를 위해 aXe군이 계속 이야기하는 정교한 장치 트릭이 선보입니다.

이런 류의 트릭은 극 중 aXe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 시간과 노력이 너무 들어서 실효성이 없어서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이 작품처럼 순수하게 트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설정에는 제법 잘 어울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장소와 도구가 잘 맞아떨어진 괜찮은 트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치의 정교함에 대한 묘사와 함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단서 제공이 필요해서 만화에 더 잘 어울렸겠지만, 평작 수준은 되는 에피소드라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추리 게임의 필요도 없이 진상은 이미 밝혀졌을 텐데, 경찰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싶긴 했습니다.

Q6. 밀실이여. 잘 있거라

멤버 중 명탐정 역할을 담당한 044APD가 낸 수수께끼. 관리인과 현관 자물쇠로 잠긴 이중밀실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는 내용입니다.

트릭은 범인이 피해자이며 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신데렐라의 함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핵심 트릭인 밀실살인 외에도, 별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암호 트릭까지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 확실히 풍성합니다.

그러나 네 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채팅을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일반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거기에다가 044APD와 마미야가 동일인물이라는 진상은 정말 트릭을 위한 것일 뿐, 동기 측면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 자신을 배달해서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트릭은 화려하지만 그 외의 것은 뭐 하나 합리적인 것이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트릭은 아닌데, 트릭이 아깝네요.

2012/01/14

갈레 씨, 홀로 죽다 - 조르주 심농 / 임호경 : 별점 3.5점

갈레 씨, 홀로 죽다 - 8점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그레 반장과, 그가 몇 주 동안 당황스러우리만치 내밀하게 지내게 될 그 죽은 이와의 최초의 접촉, 그것은 1930년 6월 27일, 아주 평범하고도, 힘들고도, 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메그레 반장이 생파르조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갈레라는 이름의 남자에 대한 수사를 벌인다는 열린책들의 메그레 시리즈 제2탄. 구한지는 한참 된 것 같은데 해를 넘기고서야 읽게 되었네요. 이유로는 제 프랑스 소설 거부 취향이 컸습니다만... 그런데 왠걸? 재미만 놓고 따진다면 전작이자 시리즈 제1탄인 "수상한 라트비아인"보다는 나았습니다.

사건부터가 흥미롭습니다. 7m 떨어진 곳에서 총에 맞은 뒤 칼에 찔려 죽은 갈레씨.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는 사건 수사 도중 발생한 두 번째 총격 사건 당시 메그레 반장이 직접 목격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또 다른 용의자 역시 알리바이가 확실하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정통 추리물같습니다. 고전 추리 애호가를 만족시키기 충분할 정도로요.

그리고 장편 이하, 중편 이상 정도 되는 적당한 분량에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주위 인물 관계와 깔끔한 전개 덕분에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그레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 작품 이력처럼 (출판만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먼저였다고 하네요) 아직은 완숙하지 못한 탓일까요? 진상은 명쾌하지만 곁가지들에 대해 설명이 부실한 것이 큰 단점으로, 그중에서도 두 가지는 아주 불만스럽습니다.

첫 번째는 왜 갈레씨가 어차피 자살할 결심이었다면 왜 ‘안뜰로 향한 방’을 달라고 요청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요청한 시점이 생틸레르가 요청을 거절한 이후이든 아니든, 결과적으로는 추리와는 관계없는 불필요한 정보, 아니 오히려 독자의 추리를 방해하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하게 부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두 번째는 "자코브" 씨의 정체는 엘레오노르와 앙리임이 분명할 텐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협박했는지가 전혀 밝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쉽사리 돈줄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텐데, 갈레가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강한 협박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역시 조금이나마 설명되었어야 했어요. 이러한 설명의 부재 탓에 결국 이 두 악당 캐릭터는 부족한 용의자를 늘리고 작품을 조금이라도 길게 만들기 위한 잉여, 소모품으로만 느껴집니다.

그 외에도 갈레씨가 구태여 가명을 사용한 호텔에서 자살할 이유는 없었다는 것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불합리한 부분이에요. 호텔에서 증거를 인멸하고 자살했다고 해도 결국 가명과 그의 이중생활이 드러났으니까요. 차라리 낚시배 사고를 위장해서 집에서 죽는 게 나았겠죠. 비록 기계 장치 같은 것을 조립하는 게 취미였다 하더라도 권총에 부착하고 나무에 매달아 놓은 조잡한 장치가 제대로 동작했으리라 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마지막의 메그레 반장이 갈레씨의 희생을 동정하여 사건을 덮어주려 결심하는 장면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갈레씨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반장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가족들, 특히 처가 식구와 아들 앙리에게는 돈 한 푼 주는 게 아까왔거든요.

그래도 앞서 말한 재미와 함께 무엇보다도 아내와 아들,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무시당했으며 건강마저 나쁘지만 그래도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갈레씨라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이 왠지 모를 연민과 함께 불쌍한 가장으로서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는 점 때문에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는 없습니다! 무려 80여 년 전 프랑스 소설 속 피해자에게 머나먼 한국 땅 직장인이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는 부분이 어찌 보면 서글프기도 하네요. 가장들은 언제 어디서나 다 똑같은 불쌍한 존재라는 뜻이겠죠...

불쌍한 갈레씨 때문에라도 별점은 3.5점입니다. 이 땅의 모든 가장들, 우리도 거액의 보험에 가입하던가, 아니면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아봅시다!

2012/01/12

퍼스트 어벤져 - 조 존스톤 : 별점 2점

작년에 개봉했던 마블 히어로 영화입니다. 감상 직후 작성했던 리뷰가 날아가 버린 줄 알고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백업본을 찾아내어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줄거리 요약은 필요 없으시겠죠?

이 영화의 두 시간여 러닝타임은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허약하지만 애국심은 넘치는 크리스 에반스가 신기술의 힘으로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초반부, 군 홍보 모델에서 벗어나 전쟁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중반부, 그리고 레드스컬과의 최후 결전을 다룬 후반부로요.

이 중 초반부는 제법 괜찮습니다. 허약하지만 애국심이 투철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크리스 에반스의 캐릭터를 여러 에피소드로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유머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반부 이후의 전개는 심각할 정도로 별로였습니다. 레드스컬의 세계 폭격 계획으로 대표되는 지구의 위기가 전혀 실감 나지 않아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에요. 또한, 캡틴의 친구 버키와 덤덤 더간으로 대표되는 용감한 미군 병사들만 있으면 캡틴이 필요 없을 정도로 히드라 군단의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대단해 보였던 코스믹 큐브와 그에 관련된 신무기들도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고, 그런 신무기를 보유하고도 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는 히드라 군단을 보고 있으면, 레드스컬이 대체 무엇을 믿고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세계 정복을 꿈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스토리가 별로여도 액션이 멋지다면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장르이기에 위와 같은 단점이 반드시 결정적인 결함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레드스컬이 명배우가 연기했든 말든, 액션만 멋지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기대했던 캡틴의 활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액션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병사 수준의 느낌이랄까요? 특유의 방패 던지기 장면 몇 개만 볼 만했을 뿐, 조금 힘이 세고 높이, 멀리 뛸 뿐이라서 과거 홍콩 영화 "동방독응" 같은 작품과 비교해도 더 나은 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캡틴의 액션이 십수 년 전 홍금보, 원표가 보여줬던 액션과 별반 다를게 없다면, 이 영화의 가치가 대체 무엇일까요?

게다가 마지막 레드스컬과 캡틴의 1:1 결투는 정말이지... 휴고 위빙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소모될 캐릭터는 절대 아닌데 말이죠.

밀리터리물과 슈퍼히어로물을 결합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전쟁 장면도 부족했고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도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 3점, 중반부 1.5점, 후반부 1점의 평균입니다)

많은 분들의 평가대로, 이 영화는 단순히 거대한 "어벤져스" 예고편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조 존스턴 감독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물인 "로케티어"를 연출한 감독이라 나름 기대했는데,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다행히 흥행에는 성공한 듯하지만, "어벤져스"와는 무관한 독립적인 스토리로 속편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2012/01/10

조선전쟁 생중계 - 정명섭 외 / 김원철 그림 : 별점 3.5점

조선전쟁 생중계 - 8점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북하우스

조선 역사에서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10개의 전투를 선정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책입니다. 소개된 전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파저강 야인정벌 (4군 6진 개척)
2.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
3. 행주산성 전투 (임진왜란)
4. 칠천량 해전 (임진왜란)
5. 명량해전 (임진왜란)
6. 노량해전 (임진왜란)
7. 사르후 전투 (명 원조)
8. 쌍령 전투 (병자호란)
9. 광교산 전투 (병자호란)
10. 손돌목돈대 전투 (신미양요)

임진왜란 관련 전투가 절반을 차지하며, 행주산성 전투, 명량해전, 노량해전 같은 유명한 전투가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비교적 덜 알려진 전투들입니다. 상당수가 조선이 패배한 전투라는 점도 독특하고요. 무엇보다 전투 장면을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대화를 나누며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묘사한 점이 특징으로, 이러한 방식 덕분에 독자가 더욱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개된 전투 중 인상적이었던건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불렸던 신립 장군의 '배수의 진' 작전을 다룬 "탄금대 전투", 원균이 조선 수군을 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몰아넣은 "칠천량 해전",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10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도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쌍령 전투"의 세 가지입니다.

"탄금대 전투" 편에서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참패 상황이 상세히 묘사되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신립 장군의 전술과 그가 조령이 아닌 탄금대에서 결전을 치르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령에도 우회로가 존재했으며, 오합지졸인 병사들을 산속에 배치할 경우 도망칠 가능성이 높았고, 무엇보다 조총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이 주요 원인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칼을 물에 식혀가며 싸웠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의 교전으로 조선군이 붕괴했다는 것이 보다 신빙성 있는 설로 설명됩니다. 이는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조선의 신흠과 일본의 종군승 덴케이의 증언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전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전투로, 그 중요성에 비해 세부적인 내용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며, 특히 일부에서 주장하는 '원균 명장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원균이 선무 1등 공신으로 책봉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봐도 선조만이 인정한 것일 뿐, 다른 기록들에서는 그의 무능이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선조의 입장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라는 분석도 덧붙여집니다.

"쌍령 전투"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전투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남한산성이 포위된 후 각지의 조선군이 인조를 구하려다 각개격파당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쌍령 전투는 조선군이 적군보다 10배 이상 많았고, 지형적으로도 유리한 곳에 진지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탄약 부족, 조총 부대의 훈련 부족, 화약 폭발 등의 사고로 인해 순식간에 전멸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반대로 신립 장군의 기마전술이 조총을 상대하는 데 반드시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전투 외에도 풍부한 정보와 자료를 제공합니다. 각 전투의 역사적 배경, 지휘관과 병력 규모, 전투 양상 등을 세밀하게 설명하며, 덕분에 익숙한 전투도 새롭게 보입니다. 또한 오랑캐라는 말의 어원이 북방 유목민 오랑카이족에서 유래했다는 점, 명량해전의 쇠사슬 함정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귀걸이가 유행했다는 점, 이순신 장군의 자살설 등 흥미로운 역사적 토막 상식도 가득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내 서적에서는 드물게 풀컬러 인쇄로 제작되어, 당시 병사들의 모습, 무기, 전장의 모습을 재현한 일러스트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는 점도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단순한 역사책을 넘어 자료적 가치까지 갖춘 보기 드문 도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이 책의 기획 자체가 멀티미디어에 더 적합했다는 점입니다. 영상화되었더라면 고증에 입각한 방대한 자료와 생중계 방식의 묘사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대상 연령대가 다소 낮게 설정된 느낌이 있어서, 좀 더 성인 독자층을 고려한 글이었다면 더욱 깊이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일러스트 역시 전체 전투에 대한 조감도보다는 고증에 충실한 자료용 도판이 더 많았더라면 더욱 가치 있는 책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성인 독자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만, 고등학생 정도의 독자층에게 특히 잘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향후 영상화된 콘텐츠로도 만나보면 좋겠네요.

2012/01/08

UN-GO : 별점 2점

정말 오랜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끝까지 감상했습니다. 추리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생겨 보게 되었습니다.

사카구치 안고의 오래된 단편집을 원작으로, 배경을 근미래로 각색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총 11화 완결입니다. 단편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점차 세계관과 주인공들의 관계 및 정체를 밝혀가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됩니다.

근미래가 무대이긴 하지만, 원작이 워낙 오래된 작품이어서인지 사건 수사는 탐정들의 추리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공권력과 거대 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잘 각색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거대 자본이 인터넷 기업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터넷 기업의 수장이자 자본과 공권력을 모두 상징하는 인물인 카이쇼 린로쿠의 사상을 비교적 디테일하게 보여준 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분위기가 잘 묻어났습니다. 다만 원작을 읽어보지 못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네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에피소드의 길이가 고작 20여 분밖에 되지 않아 정교한 추리 구조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들이 추리물이라기에는 다소 얄팍한 편이었습니다. 20여 분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단편 에피소드 형태로 진행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긴 호흡의 구조로 바뀝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그려갔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길었던 마지막 3편의 에피소드가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탐정 신쥬로의 파트너 인과의 능력이 '그가 물어본 질문에 인간은 반드시 답을 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이런 능력이 있다면 용의자들에게 "너가 범인이냐?"라고 묻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요? 그나마도 초반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이야기 전개에 크게 필요 없는 판타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이 설정을 제외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RAI 카자모리 정도의 조력자였다면 훨씬 설득력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고 홍보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던져놓은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않고 끝맺었다는 점, 그리고 연출과 작화에서도 다소 저렴한 느낌이 들었던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세간에는 백전백패의 '패전 탐정'으로 알려진 주인공 신쥬로의 추리가 사실은 옳고, 명탐정으로 알려진 IT 거물이자 공권력의 흑막인 카이쇼 린로쿠의 추리가 틀린 것이라는 설정은 정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권력 집단의 조작으로 인해 카이쇼의 추리가 매번 옳은 것으로 발표된다는 설정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주요 반전 요소로 써먹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설정이었는데, 1화에서 너무 쉽게 소비해버린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 설정 하나 덕분에 감점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추리물로서는 기대 이하였던 만큼, 혹시 다음 시즌이 제작된다면 보다 추리 요소에 진지하게 접근해 주었으면 합니다.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화

"당신에게 있어 남편은 뭐야?"

파티장에서 살해당한 부도덕한 기업회장 사건.

캐릭터 소개와 세계관 등을 설명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카이쇼 리에 - 카이쇼 린로쿠 - 유우키 신쥬로라는 주요 탐정역들의 추리를 연달아 보여주며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탓에 추리가 그냥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구조인 탓에 추리적인 내용은 그닥이었습니다. 트릭도 고전적이라 신선함이 떨어졌고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본 설정 소개 이외의 가치는 별반 없는 에피소드였습니다.

2화

"정말 네번째 요나가히메는 누구야?"

아이돌 요나가히메의 프로듀서 살해사건을 다룬 에피소드. 요나가히메의 죽었다는 네번째 멤버에 얽힌 동기는 그럴싸했는데 범인이 딱히 변장까지 해 가면서 다른 멤버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은 것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래도 작품 설정과 이야기가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평작 수준은 되는 듯 싶네요.

3화

"사사 카자모리는 누구?"

사사가문의 당주 카자모리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나 7년 전 폭사한 전당주 사사 코마모리가 인공지능의 권위자였다는 것에서 카자모리의 정체가 쉽게 예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동기가 부실하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부유하지만 기괴한 콩가루 집안이라는 일본 본격물의 전통적 설정을 근미래 배경에 걸맞게 각색하고 나름의 트릭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좋았는데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어서 아쉽네요.

4화

"그 시체는 누구?"

3화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사사 카자모리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시체는 그럼 누구였는지를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인과의 질문이 효과가 없고 신쥬로의 추리에 의해 사건이 밝혀지는 비중이 높아집니다.

그래도 추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 없고(경찰 공조수사였다면 단박에 결판났겠죠), 인간의 욕망에 더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세계관과 믹스하여 보여주는 부분은 지나친 훈계조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이 에피소드부터 뭔가 미묘하게 변해서 그닥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5화

"어젯밤 너는 여기에 돌아왔었지. 거기서 뭘 봤지?"

'일륜의회'라는 우익단체(로 보이는) 리더 시마다 하쿠로우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시마다 하쿠로우의 아들 시마다 지로가 배우라는 것은 뭔가 고이즈미를 연상케도 하지만 내용은 풍자와는 별 관계는 일종의 보물찾기 이야기였습니다.

신쥬로의 최초 추리가 실패하고 인과와 신쥬로의 인연이 살짝 드러나며 인과의 다른 능력 (파워)이 드러나는 등 설정면에서 특이한 부분이 많이 보여지는 에피소드이긴 하나 추리적으로는 정말로 심각할 정도로 별 내용이 없더군요... 외려 카이쇼의 추리가 더 그럴듯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정의 이외에는 건질게 없었던 수준 이하의 에피소드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여전히 별로였고요.

6화

카이쇼의 옛친구 야지마가 신쥬로에게 카니쇼의 장서 중 한권인 책 속에서 발견된 암호에 대해 의뢰하는 내용으로 야지마가 아내의 잠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같은 일상계적인 요소가 괜찮았던 소품입니다. 야지마의 아내와 카이쇼간의 불륜을 암시하는 전개에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좋았고요. 마지막 카이쇼의 "진실은... 언제나 하나인 걸까" 라는 모 유명작품 명대사를 비트는 센스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인과의 기묘한 능력을 통한 활약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설득력 측면에서 점수를 줘야하는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이렇게 판타지스러운 설정 없이도 잘 만들 수 있었는데 대관절 왜 인과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7화

신쥬로가 6화 사건의 흑막인 야지마의 동료 죄수인 소설가를 면회하던 중 그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이야기를 듣고나서 전쟁 전 영화 촬영현장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이야기. 전쟁에 대한 나름의 시각은 있으나 여러 수수께끼같은 설정을 가지고 장난친 느낌만 드는 알 수 없는 에피소드였어요. 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르겠고 사건도, 추리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어요. 물론 다음 에피소드와 이어지기에 이 에피소드만 놓고 평가하기는 좀 무리이긴 합니다.

8화

전편 마지막에 벌어진 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감독 살인사건과 주요 용의자로 몰린 신쥬로가 추리를 통해 진범을 밝혀내는 이야기.

교도소라는 무대에서 모니터 가능한 수감자 번호를 이용하여 만든 트릭은 작품에 꽤 잘 어울렸고 마지막 추리쇼에서 결정적 단서로 내민 상자에 가린 범인에 대한 피해자의 대사도 제법 디테일이 살아있는 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전편에서 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설정들의 떡밥이 해결되지 못하고 범죄 자체가 우발적이기에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설가와 별천왕 (벳텐오우)의 관계라는 핵심 요소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요.

9화

카이쇼 린로쿠가 적들을 모아놓은 TV토론회에 참석했다가 폭발사고에 휘말리고 그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전편에 등장한 별천왕의 최면술을 주요 트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기억 디테일이 어긋나는 사소한 장치는 돋보이지만 완결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서 에피소드만의 평가는 어렵습니다.

10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데 숨겨야만 하는 것은?"

9화의 사건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카이쇼가 TV 청문회로 결백을 증명하려하나 인과에 의해 심복인 코야마 검사가 카이쇼의 비밀인 정보조작을 고백하여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후 자동차 폭발사고로 사망하게 된다는 이야기.

추리는 신쥬로가 별천왕의 존재를 알고 카이쇼의 죽음을 의심하는 것이 전부지만 간만에 등장한 인과의 활약(?)과 함께 주요 인물들의 극적인 행동 등에서 서스펜스가 제법 느껴지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의 진실에 만족하는 것은 거기서 사고를 멈추는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카이쇼 린로쿠가 대중이 쉽사리 빠지게 되는 음모론에 대해 설명하며 내뱉는 대사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친구 "하나의 진실" 이라는 말을 꽤 좋아하는 듯 싶군요.

11화

"너의 바람은 뭐지?"

9, 10화에서부터 이어져 카이쇼 린로쿠 죽음과 별천왕 존재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에피소드로 대망의 최종회입니다. 3화에 걸친 장편 에피소드답게 복선도 확실하고 단서도 풍부할 뿐 아니라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확실히 장편답게 디테일했어요. 무엇보다도 별천왕 능력에 대한 설명을 보여줘서 일종의 두뇌게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나 하야미가 별천왕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후루써클이라는 조직과 함께 어떻게 인과까지 조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등 시청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설득력도 함께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정통 추리물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부분을 좀 더 신경썼어야 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몇몇 설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요사이 유행인 듯 한데 별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혹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같지는 않네요.

2012/01/06

일상 생활 속 단상. 세가지

하나. 바람의 검심 

요새 영상화에 이어 신작 OVA, 재연재 등 새롭게 부활하고 있더군요.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생명력을 지닐 컨텐츠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좀 의외이긴 합니다. 이미 이전에 내용 자체가 켄신의 죽음으로 완결되어버렸는데도 세월이 지나 이어지다니 놀라울 따름이네요. 어쨌건 저쨌건 이후 연재작에서 실패만 거듭한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에게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상황이겠죠? 이러다가 인기를 다시 끌게된다면 홈즈처럼 "사실은 죽은체 한 것이었다" 며 아예 새롭게 그려나갈지도 모르겠네요. 

둘. 알라딘 TTB의 달인 

처음 선정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네번째 선정이네요. 작년에는 독서량이 현저히 줄었었는데 선정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TTB의 달인이 무색하게 블로그 옆에 달아놓은 알라딘 광고는 한달에 몇십원 벌기도 힘들군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계시다면 오른쪽 광고배너를 살포시 눌러 주셨으면 합니다. TTB 메달 말고 책광고요~! 

셋. 수면 양말 

수족냉증이 있어서 겨울에 고생을 좀 했었는데 갑갑한 것은 더 싫어하는 탓에 양말을 신고 자는 것도 힘들었었죠. 그러다 이번에 신게된 수면양말! 오오~ 이것은 신세계! 제 인생은 수면양말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이거 만든 사람에게 노벨상을! 북실북실 뽀송뽀송 따뜻하고 부드러워 너무나 좋습니다. 매일매일 숙면! 아침에는 상쾌! 그동안 여자들이나 신는거 아냐? 하고 외면했던 저 자신이 창피해지는군요. 이번 주말에 한켤레 더 사야 겠습니다. 사는 김에 우리 딸 것도 하나 사야지~

2012/01/05

개를 돌봐줘 - J.M. 에르 / 이상해 : 별점 2점

개를 돌봐줘 - 4점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작가정신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연속극 작가 막스 코른느루와 맞은편 건물에 사는 으젠 플뤼슈는 서로가 상대방을 염탐하고 있다고 여기며 각자의 일기를 써 내려갔다. 두 사람은 건물에 살고 있는 여러 기이한 인물들과 얽히면서 강박관념이 극에 달하고, 결국 조용한 싸움을 시작하는데...

물만두 홍윤 님 리뷰 추천 도서 두 번째 작품입니다. 막스 코른느루와 으젠 플뤼슈 두 사람의 일기가 전개의 뼈대를 이루고 있지만, 단순한 일기의 반복이 아니라 중간중간 건물 관리인의 편지, 각종 진정서, 대자보 등을 활용해 이야기를 보완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중간중간 별표와 함께 낯선 전지적 시점이 개입해 상황을 정리해 주는 구성도 신선했어요.

그러나 독특함 외에는 점수를 주기가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아파트 주인이 세입자들을 선별하여 통제하면서 거대한 현실 기반 소설을 써 나간다는 설정 자체는 흥미로웠고, 중간중간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그러고 보니 이 아이디어는 최근 감상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UN-GO의 중반 에피소드와도 유사하네요. 다음에 리뷰를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 거주민 대부분이 비정상적인 인물들이라 현실감이 부족했고, 진중한 추리물로 읽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중반 이후 브리숑 부인의 번지점프 사망 사건에서, 이미 오래전에 버린 그녀의 개 액토르의 사체를 왜 죽은 그녀가 쥐고 있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부각되다가, 갑작스럽게 흑막을 깨달은 으젠 플뤼슈의 죽음, 가짜 형사 타뇌즈 반장의 정체 폭로 등이 이어지는 전개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마지막 화재로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최악이었고요. 서스펜스와 반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언급한 -"서스펜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욕구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다."-라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면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화재로 모두 사망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을 뿐더러, 가스파르의 마지막 편지를 보면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유전자 감식이라는 개념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걸까요?

솔직히 가스파르의 편지가 결말이 아니라, 이 모든 이야기가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환자들의 이야기로 일부 범행만 사실이었다는 반전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정직하고 단순하게 진행되어서 의외였어요. 이런 전개를 반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거침없이 써 내려간 느낌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비하면 "서로를 염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스파르의 계획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였을까?" 하는 의문이나, "어떻게든 커튼을 치거나 가구를 놓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같은 의문은 사소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도 아쉬웠습니다. 의도는 장 자크 샹뻬의 스타일을 따르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결과물은 어설픈 펜 일러스트에 불과했습니다. 그림 자체에 별다른 메시지도 없고, 단순한 삽화 역할만 했으며, 오히려 책을 아동용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저의 유럽산 추리소설에 대한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블랙코미디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물만두 님의 리뷰대로 최소한 웃기기는 했고, 영화감독의 작품 제작 방식 등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긴 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한가할 때 시간 때우기용으로 가볍게 읽는 코믹한 책 정도로 생각하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추천해 드리기는 어렵네요. 어쩌면 제가 아직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2/01/04

Read it Later Pro : 별점 3.5점

작년 연말 안드로이드 마켓 특별행사기간에 0.99$의 가격으로 구입한 앱입니다. 에버노트와 중복된 기능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워낙 싼 값이라 별 생각없이 충동구매했는데 써보니 이거 정말 물건이더군요.

스크랩하면 제목과 URL 중심으로 가져오는 에버노트와 달리 이놈은 내용 전문을 긁어와서 저장할 뿐 아니라 광고 등 불필요한 영역을 잘라내고 본문 텍스트와 이미지, 삽입된 하이퍼링크만 뽑아서 스크랩하는 기능이 정말 최곱니다. 에버노트 등의 앱으로 내용 공유 역시 손쉽고요. 그야말로 요 놈을 설치한 뒤 정말로 조금은 스마트해진 느낌이랄까요? 구글리더로 글을 읽다가 괜찮은 글은 요넘에 저장, 이후 짬날때 몰아서 한번에 읽다가 정말 괜찮은 글은 에버노트로 이동시켜 카테고리 및 태그 정리로 분류 하는 식으로 말이죠. 특히나 와이파이가 잘 안되거나 3G 품질이 불량한 곳에서 아주 유용하네요. 정가로 구입했어도 아깝지 않았을것 같아요.

그런데 일부 사이트의 경우 내용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가져오더라도 간단 스크랩 모드를 지원하지 않는데 어떤 사이트가 지원하지 않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없는 것은 좀 의아한 부분입니다. 심지어는 동일 사이트에서 어떤 글은 되고 어떤 글은 안되는 등 편차가 있는데 이러한 부분은 좀 더 잘 긁어(?) 올 수 있도록 개선이 되면 좋겠네요. 거기에 더해 긁어온 글들을 카테고리별로 구분하는 식의 분류기능도 추가되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구글리더에서 일부만 보이는 구독글을 링크연동해서 전체 다운로드하는 기능도 추가되면 좋겠고요.

쓰다보니 바라는게 많아졌는데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잘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태로의 별점은 아쉬운 점을 각 0.5점씩 감점해서 3.5점인데 위의 개선사항이 적용된다면 5점짜리 앱이 될 것 같습니다. 부디 2012년에는 모두 업그레이드되길 바랍니다!

2012/01/03

일상 생활 속 단상. 세가지

하나. 어제는 좀비가 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이게 길몽인지 흉몽인지 모르겠네요. 해몽 사이트에 물어봐야지. 아! 꿈에서 좀비에게 올리브오일을 뿌리니 죽더군요!. 꿈이지만 신기했습니다. 

둘. 일을 너무나 하기 싫은 요즈음이네요. 뭔가 재충전이라는 것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꼬박 반년이상을 한가지 과제에 올인해서 하니 지쳐요. 빨리 설 연휴가 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셋. 독서를 위한 시간을 내기가 참 어렵네요. 아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스마트폰을 쓰면서 다른 컨텐츠가 너무 많아진 탓도 큽니다. 올해에는 집에서는 인터넷 사용을 최소화하고 책을 읽기로 결심했어요. 물론 일찍 퇴근해야 가능한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노코는 애인 준이치에게 결별을 통보받았다. 그녀의 하나 뿐인 친구 가요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 뒤, 소노코는 자살로 추정되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이자 경찰인 야스마사는 사건 현장에서 타살의 증거를 발견했다. 야스마사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어 단죄할 것을 결심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높은 지명도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는 아니라서 큰 관심이 없었던 작품인데, (취향 존중!) 물만두 홍윤 님의 유작 리뷰집에 실린 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물만두 님의 리뷰대로 정통 본격 추리물이더군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완성도도 높았고요. 특히 탐정 역할을 하는 야스마사가 발견한 단서와 거기서 비롯되는 의문들을 독자와 공정하게 공유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수사 단계별로 와인과 와인병, 복사 키, 태워버린 종이의 정체, 소노코가 죽기 전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곳, 빌린 비디오데크의 의미 등 다양한 단서가 제시된 후 설명을 덧붙이며 결론으로 이어지는 구성인데, 독자에게 "이것이 단서다"라고 제시하면서 함께 추리하고 수사하도록 유도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해졌습니다.

피해자의 오빠 야스마사가 가가 형사와 경쟁하며 범인을 쫓는 구도로 이루어진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지는 두뇌 싸움도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만의 단서를 갖고 있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독자는 야스마사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수사가 막힐 때마다 가가 형사가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든요. 이러한 구조 덕분에 앞서 이야기한 단계별 진행 방식과 맞물려,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한 독특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준이치의 알리바이 트릭 같은 곁가지 트릭도 잘 짜여 있었고, 마지막 결말에서 이어지는 반전도 어차피 둘 중 한 사람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구도 속에서 의외의 재미를 주는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인 '진범이 누구인지 끝까지 독자에게 밝히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열린 결말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작가의 머릿속에는 정리된 답이 있을 텐데 명확한 해답 없이 끝내버리는 것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확실한 단서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다양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된 '약봉투의 뜯어진 모양'이 오른손잡이라면 준이치, 왼손잡이라면 가요코라는 설정도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정을 근거로 마지막에 펼쳐지는 야스마사의 처형 쇼 역시 억지스러웠어요. 단순히 가가 형사의 공정한 수사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극적인 연출을 위해 설정을 밀어붙인 인상이 강했습니다.

더불어, 가요코라면 몰라도 준이치의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여자친구의 과거가 밝혀진다고 해도 준이치가 잃을 것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소노코를 떠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순정파도 아닌 듯한 캐릭터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만족스러웠고,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말랑말랑한 로맨스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불확실한 결말도 흥미로운 아이디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고요. 그러나 본격 추리물이라면 최소한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장점은 분명한 만큼,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물만두 님의 리뷰를 더 찾아봐야겠네요.

2012/01/01

심플 플랜 - 스콧 스미스 / 조동섭 : 별점 3점

심플 플랜 - 6점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비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 일 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눈으로 가득한 촌 마을에서 출산을 앞둔 아내와 함께 사는 평범한 가장 행크는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형 제이콥, 형의 친구 루와 함께 묘지 참배를 떠났다. 이동 중 그들은 추락한 비행기 잔해와 4백여만 달러의 거금을 발견했다. 행크는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6개월을 기다리자고 제의하는데...

먼저 사과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편견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작가 스스로 썼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영화보다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후속작 "폐허"의 출구 없는 지옥, 절망의 도가니의 리얼 버전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요. 읽는 내내 불편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지만 흡입력이 굉장했습니다. 눈으로 가득한 춥고 삭막하고 볼품없는 촌동네를 무대로, 전형적인 소시민이자 평범했던 주인공 행크가 우연히 발견한 거액의 돈 때문에 무려 여섯 명을 죽이는(이외에도 보안관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살인자로 변해가는 과정이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살육의 과정도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우발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때문에 읽는 내내 긴장감이 극대화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다소 찌질하고 애처롭게 그려졌던 형 제이콥의 최후와 어설펐던 마무리 등이 소설에서는 훨씬 더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살육의 과정이 평범한 행크의 1인칭 심리 묘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에필로그에서 묘사되는 행크의 모습 역시 강렬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할 뿐이라는 무간지옥 같은 삶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지만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띕니다. 형의 죽음 이후 등장하는 FBI 요원의 이야기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한 장치로 필요하긴 했으나, 다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이후 행크의 딸 아만다에게 닥친 사고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또한, 돈을 처리하는 방식도 다소 비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1/10의 확률이라면 모험을 걸어보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일반적이지 않았을까요? 사라의 말처럼 도망 다니면서 사는 삶도 가능했을 텐데 말입니다. 어차피 돈의 일련번호가 일부 기록되어 있었다면, 세 명의 계획대로 잘 풀렸더라도 결국 결과는 뻔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말이 공정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흑막처럼 보였던 아내 사라 캐릭터는 영화 쪽이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사라 역의 브리짓 폰다가 워낙 적역이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소설에서는 행크가 위안을 구하고 의지하는 존재일 뿐, 사건을 주도하는 역할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라 캐릭터가 너무 약해졌고, 범죄를 공유한다는 느낌도 희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끼"라든가 "유니스의 비밀" 같은, 평범한 인물이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 걸작들과 견줄 만한 뛰어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데뷔작이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성공은 당연해 보입니다. 확실히 이 장르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면 그 완성도도 보장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교훈은 "루저나 찌질이는 거액이 생겨도 루저이고 찌질이다"라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