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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7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 권도희 : 별점 2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4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권도희 옮김/엘릭시르

"녹색은 위험", "제제벨의 죽음"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집. 5부 구성으로 모두 1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통 본격물, 범죄물,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등으로 수록작 장르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정통 본격물의 비중은 무척 적은 탓입니다. 트릭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추리도 억지스러워서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아요. '기묘한 맛' 장르 느낌으로 마지막 한 줄, 한 문단으로 반전의 매력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티는 역력하지만 이 역시 모두 성공한건 아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5부 구성도 1부 코크릴 칵테일을 코크릴 경감 시리즈로만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도로 분류하여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인 게임"은 앙트레로 묶기 어려운, 이 단편집 최고의 메인 요리라 생각되거든요. 오히려 앙트레 선택에 5부 블랙 커피에 수록된 심리물들을 포함시키고, 범죄물을 메인 요리로 묶어 구성하는게 더 일목요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범죄물도 심리 묘사가 중심이거나 조금 가벼운 이야기와 묵직한 본격물을 구분하여 배치하고요. 제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아페리티프(식전주) : 코크릴 칵테일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피를 나눈 형제"
* 기존 구성에서 코크릴 경감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 한 편, 그리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정.

2부 앙트레 선택
"이 집에 축복을"
"수군거림"
"발코니에서"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
* 심리 묘사 중심의 작품들로 구성.

3부 르 푸아송 (생선 요리)
"말벌집"
"너무나 괜찮은 사람"
"신의 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 말벌집은 '굴'이 사용되어서 생선 요리로 분류했고 다른 작품들은 심리 중심의 범죄물들.

4부 리플렛 프로스펠 (메인 요리)
"살인 게임"
"희생양"
"여기 잠들다"
"회전 목마"
정통 본격 추리 범죄물들.

5부 데세르 (디저트)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

6부 블랙 커피
"잔 속에 든 독"
도서 추리물로 '커피'가 핵심 소재라는 점에서 블랙 커피로 분류.


마지막으로 수록작들의 간략한 리뷰는 아래에 요약하였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부 코크릴 칵테일.
코크릴 경감이 활약하는, 늙은 형사의 회고담인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뺑소니 살인과 정부 살인 사건을 저지른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인 "피를 나눈 형제", 성질 고약한 부자 노인이 후처를 맞은 결혼식 날 독살당한다는 "말벌집", 남편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독살한 아내 시점의 도서 추리 소설 "잔 속에 든 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범인의 조작을 코크릴 경감이 간파한다는 작품들로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에서는 유명 극단의 톱 스타 주연 배우 제임스 드래건의 아내가 살해당했는데, 극단 배우들이 모두 나서 경찰 앞에서 연극을 펼칩니다. 이를 통해 제임스 드래건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알고보니 범인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서 드래건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피를 나눈 형제"에서는 쌍둥이 형제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이고, 한 명은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었다면 누구를 체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둘 다 자기가 알리바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밝혀내는건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옷에 증거를 남겼다는 반전도 기발했고, 결국 진흙탕 속으로 서로를 밀어넣어 파멸하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말벌집"은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1966년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이 후원한 영국추리작가 협회 회원 대상 단편소설 경연대회 1등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죠. 이유는 범인 엘레자베스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훈제 연어를 준비하는게 어려웠다'는 말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된다는건 믿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가 사건을 연출했다는 것도 정황 증거에 불과하며 굴 안에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먹였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고요.
"잔 속에 든 독"은 범인 스텔라가 범인으로 몰리자, 임기 응변으로 남편 등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내용으로 도서 추리 소설과 심리 스릴러를 잘 결합한 좋은 작품입니다. 완벽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독이 든 커피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마지막 한 마디도 좋았고요.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2부 앙트레 선택.
유명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살인 게임", 일종의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희생양", 거짓 증언으로 선량한 히피가 파멸에 이른다는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의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게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도 소개되었던 단편이지요. 이전에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경찰로 변장한 뒤 밀실이었던 현장에 숨어있다가, 밀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 중 한 명으로 위장했다는 트릭이 기발합니다. 마지막에 이야기를 듣던 노인의 한 마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도 서늘했고요. 다만 범죄자의 혈통은 유전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는건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낡은 사고방식이라 아쉽네요. 그래도 2부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희생양"은 13년 전, 유명 마술사 미스테리오소가 저격당해 충직한 하인 톰이 대신 죽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저격용 총의 방아쇠에 묶인 끈에 사과 봉투를 위에서 떨어트린 장치 트릭인 것 처럼 풀어나가지만, 일종의 시간차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릭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이었던 경찰이 사과 봉투를 터트려 총소리를 위장한 뒤 진짜 저격은 나중에 벌였다는데, 사과 봉투를 터트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총 소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마지막에 소년이 미스테리오소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같은게 있었던걸까요? 2부, 아니 수록작 전체를 통틀어서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는 웨일스를 무대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탈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짓말의 연쇄가 진범의 알리바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선량한 히피 무리의 리더 크리스토가 누명을 쓰고 마는 과정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묘사됩니다. 셜리 잭슨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방불케할 정도에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볼만한 범죄 심리 스릴러였습니다.

3부 입가심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한 편이 소개됩니다. 블란쳇 부인의 진주 목걸이를 훔치려는 컴퍼트 양과 스네이스 씨의 작전, 그리고 이들을 농락하는 진짜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호지 양이 얽힌 재미난 범죄극이 펼쳐집니다. 진짜 도둑은 하녀 글래디스였다는 마지막 반전도 일품이고요. 그야말로 '입가심'에 적절한 유쾌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쾌작입니다.

4부 프티 푸르
'프티 푸르'는 한 입 디저트라고 하는데, 수록작들 대부분이 완전범죄 계획 살인물입니다. 한 입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네요.
하여튼, "여기 잠들다"는 아내를 사고사처럼 위장하여 죽이려는 제럴드의 치밀한 계획을 그립니다. 아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익사시킨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거의 성공했고요. 하지만 알리바이를 위해 고용했던 타이피스트 부처 부인이 제럴드를 죽인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부처 부인의 외모라던가 성격 묘사를 덧붙여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회전 목마"는 자신을 협박하던 빈들 씨를 살해한 하틀리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범죄물로도 좋은 수준이지만, 빈들 씨와 하틀리 부인의 꼬마 아이들이 범죄에 대해 모든걸 알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채 진상을 이야기하는 묘사도 서늘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는 악당 호러호러 족장을 살해한 이야기인데, 계획에 따른 완전범죄는 아니었습니다. 범인이 풀려났던건 목격자였던 존스 부인이 유리창 반사로 일으켰던 착각 탓이었지요.
"발코니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웃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킨 제닝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의 심리 스릴러 범죄물입니다. 히치콕의 "이창"을 뒤집어 놓은 설정과 제닝스 부인을 바라보는 이웃 시점의 묘사를 곳곳에 삽입하다가, 이웃들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5부 블랙 커피
수록작 네 편 중 세 편은 여자의 심리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에 축복을"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믿는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괜찮은 사람"은 그야말로 딱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너무나 괜찮았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심리를, "수군거림"은 자신의 실수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촌과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여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신의 힘"은 완전 범죄물입니다. 범인 에반스 경관의 범행 계획은 그냥저냥이지만, 딸과 손녀를 죽게만든 범인 젤링크스를 옭아맨 설정은 일품이었습니다. 에반스 경관의 거짓 증언으로 젤링크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무죄를 받아들인 뒤 협박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습니다.

2011/06/16

누명 - 애거서 크리스티 / 이가형 : 별점 2.5점

누명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부유한 자선사업가인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쟈코 아가일은 감옥에서 죽었다. 그리고 2년 뒤, 지질학자 아서 캘거리는 아가일 가문을 방문하여 살해 당시 쟈코의 알리바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가일 저택에 거주하던 가족들 뿐이었다. 내놓은 자식이었던 쟈코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을 당연시 여기던 가족들은 누가 진범이냐를 놓고 큰 충격과 의심, 공포에 빠지게 되는데...

지난 주부터 저만의 애거서 크리스티 섭렵이 이어지고 있네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누명"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선정한 자신의 작품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사실 완독한 것은 며칠 전으로 리뷰 글을 다 써 놓았었는데, 편집 버튼 누른 뒤 알 수 없는 버그가 발생해서 다 날아갔네요. 망할 에버노트.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리뷰 내의 오류나 텐션이 떨어지는 것은 다 에버노트 탓입니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여사님 작가 인생의 비교적 후반기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작중에 폭스바겐 비틀과 스푸트니크가 언급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단순한 배경 뿐만이 아니라, 여사님의 유명 시리즈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등 전체적으로 이색적인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여러모로 원숙기를 넘어선 작가의 여유같은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여사님의 전공인 전통 본격 추리물보다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 스타일의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성향이 엿보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과거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낸 뒤, 가족 중 누가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증폭되는 오해와 증오 등 복잡한 심리 묘사가 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러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촘촘히 짜여진 가족 구성원들의 설정도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심리 드라마는 아니며 여사님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특출난 부분이 있습니다. 앞선 여러가지 복선들, 예를 들어 자코의 중년 여성 대상 사기 행각이나 비밀 결혼 같은 별것 아닌듯한 정보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범인의 정체와 진상도 놀라운 점이 있고요.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팬들도 즐길거리가 많은 편이에요.

하지만 쟈코가 유죄 판결을 받고나서 사망할 때까지, 6개월 동안의 수감생활 중 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는지가 설명되지 않은건 옥의 티입니다. 심리 묘사가 중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에는 헤스터의 심리 묘사에만 너무 치우치는 것도 문제고요. 심리 묘사의 디테일도 부족할 뿐더러, 가족 구성원 개개의 심리 묘사는 진범의 심리를 건드릴 수 없기에 깊숙이 진행할 수 없다는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게임처럼 생각해서 장난스럽게 접근하던 필립 듀란트의 비중이 큰 것은 작품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필립 듀란트가 밝혀낸 진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관절 이 친구는 뭘 위해서 등장해서 기웃거리다 죽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네요. 뭔가 하긴 한 것 같은데 죽어서도 뭘 했는지 밝혀지지 않으니 정말로 안습한 캐릭터랄까요. 그 외에 탐정역의 아서 캘거리의 활약이 좀 뜬금없었고, 빅토리아 시대의 향취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은 시대에 걸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긴장감넘치는 심리묘사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대단한 걸작이 되었을텐데 앞서 언급한 한계가 발목을 잡은 느낌이에요. 그래도 고전 황금기 이후 현대화된 정통 본격 추리물과 심리 스릴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사실 이 작품은 오래전 TV에서 영상화된 작품을 먼저 접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심리 묘사를 다루면서도 그 중에 범인이 있는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상물이 더 어울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인 것 같은데 도널드 서덜랜드의 캘거리 박사,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레오 아가일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이 인상적이라 다시 구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페이 더너웨이의 레이첼 아가일이라.... 이 아줌마 의외로 크리스티 영화에 많이 나왔네요?

2011/11/15

서스피션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3점

"더 크레이터"를 읽고 좌절했지만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읽은 데즈카 오사무의 또 다른 단편집. 원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이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주로 심리 서스펜스 - 호러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심리 묘사가 상당히 탁월해서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거든요.

특히 "서스피션"이라는 표제로 연재되었다는 세 작품이 발군입니다.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첫 번째 작품인 "파리채"는 로봇을 이용한 살인 계획과 뒤이은 반전을 다룬 그럴듯한 SF 범죄 스릴러로 헨리 슬레서의 단편 "헬로 자스민"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대한 깊은 고뇌를 묵직하게 그리고, 비교적 현실적인 반전은 더 낫습니다. 

"벼랑의 두 남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쫓아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도착한 뒤 벌어지는 치밀한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특징은 심리 묘사입니다. 정말 최고예요. 일종의 갇힌 공간이고 인적이 없다는 점에서 폐쇄형 스릴러물 느낌도 드는데, 후쿠모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하거든요. 다만 결말이 뜬금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끌어서 주인공 채무자가 외려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에필로그라든가, 시점을 바꿔 의외의 진상을 드러낸다는 식으로 그려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P4의 사각"은 바이러스 SF물입니다. '홀로 갇히게 되는 실험체(?)의 비애'라는 흔한 설정도 그닥이지만, 반전이 너무 작위적이라 셋 중 가장 처집니다. 심리 묘사가 더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디테일과 현실감이라는 측면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에게 더 잘 어울렸을 이야기였어요. 그냥저냥 평작입니다.

이외에는 블랙잭과 유사한 캐릭터가 프로 곤충채집가로 등장하는 "인섹터" 시리즈와 풍자, 블랙코미디, 시사성 짙은 무난한 작품들이 이어지다가 정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요리하는 여자"로 마무리됩니다.

이 중에서는 "요리하는 여자"가 물건입니다. 앞선 "서스피션" 시리즈 못지 않아요. 노인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노인 실종 사건을 다루는데, 뻔한 이야기이긴 하나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디테일하게 잘 살아있고 반전을 잘 숨겨서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랄까요. 극화를 섞어 디테일을 강조한 그림도 상당히 잘 어울렸어요.

이곳저곳에 실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작품들의 편차가 좀 있다는 점, 그리고 호흡 조절에 약간은 문제가 있다는 단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별점 3점은 충분해 보입니다. 최소한 "서스피션" 시리즈 3작품과 마지막에 실린 "요리하는 여자"는 장르물 애호가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0/05/29

밤의 기억들 - 토머스 H 쿡 / 남명성 : 별점 4점

밤의 기억들 - 8점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시작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50년 전 일어났던 한 소녀의 살인사건을 재구성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범죄소설작가 폴 그레이브스가 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부유한 별장지 리버우드에서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내용으로 "심문"의 토머스 H 쿡 작품입니다. 50년 전의 페이예 살인사건과 더불어 그레이브스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누나 그웬의 잔인한 살인사건이 회상 형식으로 겹쳐져 진행되는데, 46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심문"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으로 장편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네요.

먼저 50년 전 페이예 사건부터 살펴본다면, 범행이 실제로 가능했던 용의자는 한 줌도 안됩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용의자에게 타당한 동기를 부여하고 용의자별로 상세한 수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 대단합니다. 또한 트릭이 등장하고 단서들이 앞부분부터 교묘하게 배치되어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에서 정통 추리소설로 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사소한 단서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많아서 정말 쉴 틈 없는 짜임새를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주요 사건인 그레이브스 사건의 경우는 이야기 전개 상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로 그레이브스가 페이예 사건을 수사하면서 떠올리는 심리 묘사를 통해 전개되죠. 이러한 전개는 본편의 수사 과정과 다른 심리 스릴러스러운 맛을 전하면서도 페이예 사건의 전개와 절묘하게 맞물리며 독자의 마음을 강하게 건드리는 맛이 정말 탁월하더군요. 아울러 제대로 된 반전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에 반전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 반전이 작품을 효과적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결말 역시 아주 깔끔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아쉽습니다. 일단 미국의 유서 깊은 가문의 별장지에서 벌어진 사건이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학 실험과 연관되어 있다는건 터무니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의학 실험에 비교하면, 꽃의 교잡 실험이라든가 의학에 관심이 있다는 수준에 그친 복선은 너무 미미했습니다. 워런 데이비스와 그로스먼이 나치 독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전혀 설명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페이예라는 소녀에게 이런 몹쓸 실험을 가해야 했을 타당성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지역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워런 데이비스의 영향력이라면 뒤끝 없었을 희생양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했을 텐데, 왜 딸의 친구이기도 한 이웃 소녀를 골랐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하면 워런 데이비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표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기도 한데, 조금만 더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래도 수사와 단서가 잘 결합된 수사물이면서도 여러 가지 트릭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소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작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학적 성취를 이룬 듯한 미국의 오래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뛰어난 심리 묘사와 군더더기 없는 전개는 "앵무새 죽이기"의 추리물 버전이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심리 추리 스릴러 장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 아직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09/05/20

인체 모형의 밤 - 나카지마 라모 / 한희선 : 별점 3점

인체 모형의 밤 - 6점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일본 작가 나카지마 라모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단편들은 제목처럼 인체모형에 관련된 기괴한 묘사에서 시작되어, 눈-피-코-귀-다리-무릎-배꼽-팔-뼈-위-유방-날개와 성기 라는 인체의 부분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보고 구입하게 되었네요.

각 단편별로 분위기가 굉징하 다른 것이 특징인데, 유령이 등장하는 정통(?) 심령 호러물에서 부터 시작해서, 일종의 괴물이 등장하는 스플래터 호러, 심리 스릴러에 더불어 진지한 드라마와 1인칭 시점의 블랙 코미디까지 실려 있어서 굉장히 풍성합니다. 그야말로 색다른 인생을 살아온 작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품별 수준의 편차가 크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예상 가능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좀 아쉽네요. 뭔가 한번 정도 더 비틀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하게 마무리한게 아닌가 싶거든요. 또한 앞서 말했듯 쟝르가 다양해서 호러 소설이 취향이 아니더라도 즐길 작품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외려 정통 호러로 보이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인 "사안"과 "코" 처럼 오싹하면서도 의외성이 있는 작품들이 더욱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충동구매에 가까운 구매였는데 다행히 평균 이상은 해 주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해서 점수가 더 높을지도 모르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프롤로그 : 인체모형의 밤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작품을 한데 묶는 이야기로 별 특기할 점은 없습니다.

사안(邪眼) : 싱가포르를 무대로 한 심리 스릴러물로 스멀스멀 계열의 작품입니다. 일본인 싱가포르 주재원의 아내가 임신하였는데, 현지 고용인인 가정부가 임신한 아이가 "사안"을 지녔다.. 라고 믿는다는 내용으로, 사안이라는 전설과 푸른눈이라는 설정을 잘 결합한 좋은 단편입니다. 진실이 괴담보다 무섭다는 마지막 반전도 톡 쏘는 맛이 아주 좋았고요. 이런 류의 단편으로는 모범답안이 아닐까 싶네요.

세르피네의 피 : 세르피네라는 섬을 그야말로 "낙원" 이라고 믿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사실 "낙원"의 실체는 달랐다.. 라는 반전이 있는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반전에 이르기까지 교묘하게 장치한 복선을 풀어나가는 맛은 괜찮지만 반전 자체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아서 약간은 심심했습니다. 또 "피"를 연관시키기에는 좀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 조향사인 주인공은 옛 남자친구의 소개로 싼 맨션을 얻어 이사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수없는 물소리와 냄새 때문에 곤란해 하던 차에, 전 세입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입니다. 뻔하게 흘러가서 뻔하게 끝맺긴 하지만 유령 이야기의 무서운 점, 즉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를 조향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냈으며 특히나 "돼지뼈 라면 국물 끓이는 냄새"의 정체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전 정말이지 일본 욕탕이 물을 그렇게 데우는 시스템이라는걸 몰라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네요.

굶주린 귀 :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통해 접한 것이 이 단편의 소개였죠.
옆방을 엿듣는것이 취미인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새로 이사온 집 옆집을 엿듣던 중 분명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인데 여자만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옆집에 인사를 가는 척 하며 여러가지를 물어보던 중에 옆집 여자 남편이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조금은 허무한 마음에 술을 사러가던 주인공은 여자 집을 우연히 올려다 보는데.... "남자 빨래가 하나도 없어!"
이 줄거리만 놓고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아쉽게도 결말이 너무 예상 가능한 범위내에 있었습니다. 좀 더 반전다운 반전이 등장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것 같아요. 예를 들면 레즈비언 부부였다던가, 남편이 게이바 사장이나 트랜스젠더였다던가....

건각(健脚)-국도 43호선의 수수께끼 : 전직 드라이버 지망생이었던 주인공과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된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괴담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 단편집 안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뭔가를 전해준다는 것 하나가 독특할 뿐 별로 남는건 없는 그냥 홈드라마같은 느낌의 소품이었습니다.

무릎 : "인면창" 이 실제로 그 주인을 먹어버린다! 는 내용의 이종괴물 스플래터 호러 단편입니다. 전개는 한마디로 일직선이라 별로 평할게 없는 평작인데, 주인공의 설정이 독특하고 전개가 어울리지 않게 유머스러워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나저나, 인면창이라니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인면창이 있는 피해자(?) 가 "블랙잭"을 만났더라면 완치되고 생명을 건지지 않았을까요?^^

피라미드의 배꼽 : 대 부호의 데릴사위인 가난뱅이 학자가 도심 한복판에 피라미드를 건축한다! 는 SF 단편입니다. 피라밋과 피라밋 파워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이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색작으로, 작가가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 박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역시나 좀 뻔해서 별로 특기할건 없더군요.

EIGHT ARMS TO HOLD YOU : 비틀즈의 존 레논의 미발표 곡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의 방대한 지식세계를 다시한번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비틀즈 4명이 안아준다는" 노래의 제목과, 마지막의 반전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좋았고요. 반전이 너무 끼워다 맞추는 것이 지나쳐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평작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뼈 먹는 가락 : 1인칭 시점의 공원묘지 판매원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었는데, 이유는 주인공이 왜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너무 다양한 내용을 펼쳐만 놓았지 이야기의 맥락이 전무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도 어설퍼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수준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장의사" 정도로는 이야기를 끌고가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다카코의 위주머니 : 거식증에 걸린 채식주의자 소녀가 최후의 순간에는 부모에게 살의를 품는다는 이야기로 "채식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내용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문제는 별다른 공포도, 반전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겠죠. 그냥저냥 홈드라마 소품입니다. 이게 호러가 되려면 다카코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가르는 정도는 되어야겠죠. 어쨌건 저는 읽고나니 로스트비프가 먹고싶어질 뿐이었습니다.^^;

유방 : 영매사가 불러온 유령을 거짓이라 치부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짤막한 블랙코미디 꽁트로 약간의 반전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별로 특이하지는 않더군요.

날개와 성기 : 무슨 이야기인지? 성기를 없애고 스스로 "무성", 천사와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인공이 명상을 통해 접한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묘사는 현실적이고 와 닿지만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라 평가 자체가 어렵네요....

에필로그 목저택 :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역시나 별로 특기할 것은 없습니다.

2011/08/01

동기 - 요코야마 히데오 / 임경화 : 별점 2.5점

동기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임경화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런저런 작품들로 접해본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집. 딱히 큰 임팩트는 없는 작가라 별 관심은 없었는데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2007년판"에서 게스트들이 과거 18년 동안의 베스트 중 한 작품으로 꼽았기에 찾아서 읽게 되었네요. 제가 이런 류의 리스트에 굉장히 약하거든요.

이전에 제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은 장편 1편, 단편집 2권이었습니다. 단편집은 비교적 정통 사회파 추리 - 수사물 흐름을 따라갔던 반면, 장편 "사라진 이틀"은 섬세한 심리묘사와 전개, 설정은 탁월했지만 추리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이 단편집은 "사라진 이틀"과 비슷합니다. 사회파 작품으로 보기에는 사건 자체가 소소하고, 일상계라고 보기에는 좀 무거운 이야기들이며 특별한 수사없이 주인공의 심리를 쫓아가는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요.

이러한 절묘한 균형은 장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묵직한 사회파 수사물이나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실망감을 가져다 줄 겁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 분위기를 기대했던 저도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표제작인 "동기"는 2001년 일본의 여러 추리소설상을 휩쓴 작품답습니다. 작가의 장점이 잘 살아있거든요. 전체 평균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동기" 한 작품만큼은 3.5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작품들도 섬세한 심리묘사 하나만큼은 탁월한 만큼 심리묘사를 즐기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단, 생각하시는 추리소설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점 명심해 주세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동기"

표제작. 경찰서 내에서 보관 중이었던 경찰 수첩이 대량으로 분실된 사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경찰 수첩의 중요성에 대한 설정은 잘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내용을 볼 때, 우리나라로 치자면 거의 총기 분실 사고 쯤 되는 대형 사고로 보이네요. 이 사건을 주인공 가이세의 심리묘사만으로 끝까지 끌고가는 전개가 아주 탁월합니다. 마지막 소소한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일상계 심리 스릴러 사회파 수사물'이라는 쟝르가 있다면 충분히 교과서로 쓰일만 한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으나 용의자가 너무 적다는 것에서 살짝 감점했습니다.

"역전의 여름"

자초하기는 했지만 반쯤은 불운한 탓에 살인을 저지렀고, 복역 후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야마모토에게 살인 청탁이 들어온다는 이야기. 

추리적으로는 가장 눈여겨볼 요소가 많고 설정과 전개도 흥미진진했습니다. 문제는 완전범죄 계획 치고는 별로 설득력이 높은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고요. 야마모토가 어쨌건 잔혹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기에 감정이입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결말 역시 너무 좋게 마무리하려 한 느낌이 들어 별로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취재원"

한 지방지 여성 신문기자의 눈물겨운 분투를 다룬 드라마. 사건 수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을 스카웃하려는 전국지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기자의 고민입니다. 때문에 추리물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한참 거리가 있습니다. 취재원이 정보를 제공한 이유, 그리고 스카웃에 대한 나름의 반전이라면 반전이 있기는 한데,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밀실의 사람"

재판 중 졸았던 판사에게 닥친 위기를 그린 소품. 이게 좌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인지 이해도 안되지만, 판사 아내의 불륜이 원인이라는 결말도 너무 쉽게 간 듯 합니다. 추리물이나 수사물로 보기에도 문제가 많았고요. 무엇보다도 과거도 숨기고 결국 불륜까지 저질렀으면서 남편이 항상 법복을 입은 것 같다 어쩌구하는 편지를 남긴 판사 아내의 뻔뻔함 때문에 읽고나서도 기분이 나쁘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13/05/21

붉은 낙엽 - 토머스 H.쿡 / 장은재 : 별점 2.5점

붉은 낙엽 - 6점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고려원북스

한때 부유했지만 몰락한 전제군주 아버지, 교통사고로 사망한 어머니, 알코올중독자 형, 암으로 단명한 여동생으로 구성된 가족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사진관을 운영하며 가족을 일군 에릭에게 어느 날 닥친 뉴스. 그것은 전날 아들 키이스가 베이비시터로 돌본 아이 에이미가 실종되었다는 뉴스였다.

토마스 H. 쿡의 장편 스릴러. 작가의 대표작 중 한편입니다. 제가 접했던 작가의 전작 "심문", "밤의 기억들"과 비교해보면, 심리묘사 중심의 스릴러라는 점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만의 차별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이자 장점은 그야말로 '일상계 스릴러'라고 명명해도 될 정도로 현실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유괴 사건이라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에릭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그와 가족들이 관련된 소소한 일들 뿐이거든요. 무지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작가의 묘사력도 여전합니다. 자긍심 없는 청소년인 키이스와 그러한 아들을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 에릭의 모습은 디테일이 정말 뛰어납니다. 저도 한 아이의 아빠로서 공감 가는 점도 굉장히 많았고요. 특히 극한의 상황에서의 심리 묘사는 정말 제대로였습니다. 탈출구 없이 꽉 막힌, 작중에서 표현되듯 '불길 가득한 방 안에서 덫에 치인 느낌'이 정말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좀 쉽게 비유하자면 "도막묵시록 카이지"의 카이지의 심리를 소설로 쓰면 이렇게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일단 설정이 너무 뻔해요. 범인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절친한 가족에게 닥친 의심을 벗기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하니까요.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가 현실에 널려 있기도 하고요. 촌구석이지만 단란했던 가족, 커뮤니티가 하나의 사건으로 붕괴하는 과정의 치밀한 묘사 역시 "심플 플랜" 쪽이 더 낫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너무 많아요. 전제군주였던 에릭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 전에 고려했던 계획이 과연 무엇이었으며, 왜 그 계획을 중지했는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머니 사고의 진상 및 그녀가 보험을 가입한 이유 역시 아버지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고요. 에릭의 아내 메러디스가 불륜을 정말 저질렀는지, 아니면 형 워렌이 정말 소아성애자였고 제니에게 몹쓸 짓을 했는지는 이야기만 벌려 놓을 뿐입니다.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대충대충 넘어가는 게 현실적이라는건 동의합니다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짜증만 났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이 정말 너무 아니더군요. 유괴 사건이 밝혀지는 게 키이스가 아버지 에릭과의 깨졌던 신뢰 관계를 어렵게 회복한 직후, 피자 식당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담배꽁초를 통해서였다는 상황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결국 모든건 피해자 집에 마지막에 피자를 배달한 배달부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실수에 불과하다는 결말도 잘 짜여진 스릴러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요. 유괴 피해 아동의 아버지 빈스가 저지르는 키이스 저격과 자살도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딸이 어디 갔는지 행방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총질부터 한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는 안 됐어요. 상식적이라면 키이스를 납치해서 진상을 알아낼 때까지 고문하는 게 답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역시나 대단하지만, 그만한 알맹이와 가치가 있냐 하면 속 시원히 그렇다라고 답하기 어려운 작품이었어요. 비슷한 설정과 분위기라도 더 치밀하고 더 극적인 "심플 플랜" 쪽을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5/06/05

관 - 아르노 슈트로벨 / 전은경 : 별점 2.5점

- 6점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바 로스바흐는 관에 갇히는 악몽을 꾸었는데, 실제로 몸에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이복동생 잉에가 관 속에 갇혀 생매장당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건을 지휘하게 된 쾰른 강력계 베른트 멩호프 경감은 본인 가정사,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동료들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파트너 유타 경위와 사건을 수사해 나가는데....

독일산 심리 스릴러. 보통 유럽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는데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동호회 하우미스터리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된 책입니다. 리뷰 전 먼저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 분들께 감사 인사 전해드립니다.

그동안 유럽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어렵고 무겁다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러한 경향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요 네스뵈가 그러한 선입견을 깨 준 대표적인 작가고요. 이 작품 역시 최근 인기작답게 유럽, 독일산 느낌보다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릴러 느낌이 강합니다.

장점이라면 "산 채로 관에 갇히는" 상황을 그린 흥미로운 설정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맛, 빠른 전개, 무엇보다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힘든 재미입니다.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브리타가 에바와 동일인물이라는 깜짝 반전에 더해서 살아있는줄 알았던 마누엘마저 에바의 또다른 인격이었다는 반전입니다. 에바 - 브리타 시점 변화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볼 수도 있네요.

관 속에 갇힌 느낌과 범행, 마지막 납치된 에바가 갇힌 곳 등에 대한 묘사도 생생합니다. 특히 마지막 묘사는 CSI의 "생매장" 에피소드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칩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심리 묘사 역시 제대로고요.

그러나 아주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건이 밝혀지게 되는 이유가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베른트 경감의 수사는 마누엘 생존설로 흐르는 방향으로 향했기에 진상을 알아내려면 오래 걸렸을겁니다. 그러나 마침 정신과 의사인 라이엔베르크 박사가 죽지 않고 살아난 덕분에, 그리고 대거라는 파티셰가 에바와 브리타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증언해서 진상을 알아내는데 이 모든 것은 우연에 불과합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대로 서술트릭처럼 시점 변화에 기반을 둔 반전 역시 범인이 노골적으로 남자라고 지칭되고 내용에서도 의도적으로 마누엘 생존을 강하게 언급해서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건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최소한 범인의 성별은 숨겼어야 했습니다. 술집에서 여자를 낚아챈 것은 피해자가 레즈비언이었다는 설명으로 충분하지만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남네요. 참고로, 반전도 비록 저는 예상치 못했지만 영화 "아이덴티티"와 흡사해서 좀 뻔하다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 같고요.

사건의 핵심인 다중인격 설정도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에바가 브리타라는 다른 인격으로 삶을 영위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다중인격이라고 해도 아예 삶 자체를 다르게 사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요. 외르크 빕킹이 흑화한 에바를(남자로 오해했지만) 목격하고, 대거라는 파티셰가 에바 - 브리타를 모두 목격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순식간이었을겁니다.

무엇보다도 부유한 사업가와 재혼한 새어머니가 아이들을 학대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점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새어머니의 학대에서 비롯된 것인데, 전처 딸을 아동 성매매시키고, 작은 상자에 넣는 등의 학대를 자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전처 딸이야 그렇다쳐도 자신의 친아들마저 학대하고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인없는 결과만 있는 꼴이에요. 원인은 없지만 아동 성매매는 "돈"이 목적인 것처럼 보이기에 피해자 브리타를 부유한 가문의 딸인 에바와 연결하기도 어렵고요. 반전을 위해 사용된 반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외의 소소한 디테일들도 약간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에바의 아버지가 집 안에 도피처를 만들어 놓았다는 대사를 복선으로 이용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경찰이 집 안을 수색했는데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한 것, 베른트 경감을 싫어하던 우도가 급작스럽게 마음을 돌리고 화해하는 상황 등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베른트 경감의 조금 부족한 자제력에 대한 묘사도 딱히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고요.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한 스릴러물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래저래 단점만 쭉 나열한 꼴인데 킬링타임용으로는 아주 우수합니다. 요 네스뵈도 그렇고, 요새 북유럽 쪽 신예 작가들 작품이 괜찮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2/02

아내를 죽였습니까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김미정 : 별점 2점

아내를 죽였습니까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내용,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월터는 신경질적인 아내 클라라 때문에 진절머리를 내던 중 어떤 여자가 고속도로 휴게소 인근 숲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 기사를 읽게 되었다. 월터는 남편 키멜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기묘한 충동에 휩싸여 키멜의 가게를 찾아가기까지 했다.
클라라가 어머니 임종을 지키러 고속버스를 타고 떠난 날, 월터는 그가 상상했던 키멜의 행동대로 고속버스를 뒤쫓아 휴게소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클라라를 찾지 못해 배회하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클라라가 휴게소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사를 맡은 경찰 코비의 추적으로 월터와 키멜은 연결되었고, 키멜을 고문하는 등 코비의 집요한 수사는 월터와 키멜의 정신을 무너트렸고, 결국 둘은 치명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범죄 심리 스릴러 장편.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데뷰작인 "열차 안의 낯선 자들"과 비슷합니다. 비교적 평범했던 주인공이 아내 때문에 범죄에 대한 꿈을 꾸다가 절대악에 가까운 파트너와 엮인 탓에 파멸한다는 점에서요. 다만 월터는 꽤 헌신적인 남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다는 점, 그리고 심리 묘사도 더 탁월하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다른 묘사들도 빼어납니다. 특히 클라라 묘사가 놀랍습니다. 월터가 클라라를 진작에 죽일 생각을 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생생한 "결혼 지옥"을 잘 보여줍니다. 클라라가 죽은 뒤 월터와 키멜이 코비의 수사 탓에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의 묘사도 발군이고요. 여러모로 심리 묘사가 중심인, 순문학에 가까운 스릴러가 많은 '버티고 레이블'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꽤 기발했던 설정만큼은 높이 평가할만 했으나, 이 작품은 그런 부분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월터가 구렁텅이에 빠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낼 뿐이라 지루했어요.
등장 인물 설정도 별로입니다. 키멜은 코비한테 맥없이 얻어맞고 범죄 계획도 잘 짜내지 못하는 등 악당으로서의 강력함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찰 코비가 오히려 절대악에 가까운데, 악당처럼 보이지만 범죄자 체포라는 명분은 확실하고, 키멜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긴 하나 키멜은 살인자가 맞으니 뭔가 좀 애매합니다. 악당도 아니고 안티 히어로도 아니고.... 보다 캐릭터를 선명하게 구체화하는게 나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코비가 키멜을 고문하고 월터를 압박해가면서 "사냥꾼"이라는걸 드러내는건 결국 월터가 죽어야 끝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월터는 코비가 만든 출구없는 지옥에 빠진 셈이니까요.
물론 별로인 설정이라도 현실적이라는 장점은 있기는 합니다. 모두 빼어난 묘사가 뒷받침 된 덕입니다. 키멜은 목공예를 즐기는 서적상이라는 디테일이 아주 생생해서 손에 잡힐 듯 하며, 월터에 대해 살의를 품는 과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코비도 용의자를 고문에 가깝게 구타하고, 폭언을 퍼붓는 경찰답지 않은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고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전반적인 아쉬움을 뒤집기는 부족했습니다.

깔끔하지 못한 결말도 아쉬웠어요. 클라라는 자살한 것인지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인지?도 불분명하고, 마지막에 월터가 죽인 사람은 누구인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코비의 부하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장면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읽는 독자마저도 진저리치게 만드는 묘사는 인상적이지만 그리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2006/08/31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 제프 린제이 / 최필원 : 별점 1점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 2점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마이애미,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덱스터는 양부였던 헨리의 충고에 따라 사회악적인 존재만 골라서 처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본 직업인 경찰 혈흔 분석가로서의 이중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덱스터와 유사한 연쇄살인범이 나타나 마이애미는 광란 상태에 빠지고 덱스터는 살인범과의 교감을 느끼면서도 의붓 여동생인 데보라의 소망에 따라 자신의 직감과 본능에 따라 살인범을 추적한다...

모던 스릴러 소설가이자 기획자라는 모중석씨가 선정한 스릴러 소설들을 출간하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4번째 작품입니다. 스릴러 소설은 별로 취향은 아니지만 평도 좋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그러나.. 읽어본 결과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실망!" 입니다.
일단, 대체 이 소설의 어디가 스릴러라는 것인지 저는 당쵀 알 수 없더군요. 살인범과의 몇가지의 단서를 놓고 벌이는 스릴 넘치는 두뇌게임이나 쫓고쫓기는 추격? 이 작품에서는 그런건 전혀 없습니다. 살인범의 추적은 덱스터가 같은 연쇄살인범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고 순전히 자신의 "본능"과 "직감"에 따를 뿐입니다. "단서" 이런건 전혀 없습니다. 단서랍시고 나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실제 수사에는 군더더기일 뿐이고요. 압권은 살인범이 덱스터를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히려 서서히 접근해 온다는 설정. 장난쳐 지금? 주인공은 하는게 하나도 없잖아!
혹 잔인한 장면의 나열만으로 스릴을 줄 수 있다고 작가가 착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구태의연하고 지루한 묘사였을 뿐입니다. 제임스 옐로이의 블랙 다알리아같은 숨이 콱콱 막히고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범죄소설 보고 연구나 좀 할 것이지... 작가가 본 건 헐리우드 영화들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의붓동생과의 관계나 직장 상사와의 관계 등 모든 다른 세부 설정들도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를 아주 충실히 모방하고 있거든요. 아, 주인공 직업에 대한 설정이나 몇몇 장면들에서는 CSI도 좀 본 티를 내긴 하더군요.
그리고 덱스터의 심리묘사에 너무 많이 치중하고 있는 것도 실수로 보입니다. 작가의 필력이 그닥 캐릭터의 심리묘사를 돋보이게 할 정도로 화려하지도 않아서 설득력이 많이 떨어져서 소설만 불필요하게 길어질 뿐이었습니다. 이놈은 왜이리 잡생각이 많은지 원...

범죄자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이야기는 온갖 만화에서 써먹은 소재이니 별반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고 경찰과 범죄자의 이중생활 역시 뻔한 이야기고.... 잔인하면서도 완벽한 연쇄살인범을 "착한"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설정빼고는 건질게 별로 없는 알맹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연쇄살인마가 경찰 업무를 수행한다는 이중생활을 드라마틱하게 그렸더라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최소한 웃기기는 했을텐데.
요새 이래저래 안좋은 일이 생겨 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 이 작품이 좀 집중포화를 맞은 듯도 하지만 두번다시 손에 잡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뒷 커버에는 "리얼리티의 힘!" 이라는 카피가 나와있는데 이 소설의 어디가 리얼하다는 건지 대관절 알 수가 없네요. 보름달에 살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게 리얼하다니... 보름달이 뜰때 주인공이 늑대인간으로 변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인하는 것이 리얼하다고 표현한 건가?

PS : 원제가 "Darkly Dreaming Dexter" 니 줄이면 "3D"군요. 전혀 상관없지만 더들리 보이스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PS2 (2006.10.11) : 블로그를 둘러보다 보니 영상화가 끝난 모양이군요. 의외로 TV Series인 듯 합니다. 뭐 워낙 영상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이다 보니 의외성은 없고 외려 보고싶어지네요.

2010/03/17

도시전설 세피아 - 슈카와 미나토 / 이규원 : 별점 2.5점

도시전설 세피아 - 6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노블마인

제가 일본 추리 - 호러 단편집을 워낙 좋아라하기 때문에 진작부터 관심이 있던 단편집입니다. 일본에서는 TV용으로 영상화되기도 했었고요. 하지만 별다른 입소문도 없고, 커뮤니티나 추리, 호러 애호가들 사이에서 언급조차 되지않은 탓에 구입해 읽을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온 뒤 찾아간 집근처 산본 중앙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기에 바로 대여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총 5편의 호러 취향 단편이 실려있는데, 기이한 변태들의 이야기가 많은 전형적인 일본식 호러, 스릴러 단편들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을 받았다는 것이 허명은 아닐 정도로 설정이 참신한 작품도 있고, 재미와 반전도 잘 갖추고 있는 편입니다.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도 괜찮고요. 

그러나 이러한 재미와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야기 전개에서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건 크게 거슬립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상대적으로 괜찮은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 단점이 두드러지는데, 적절한 수위를 조절이 필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앞부분 수록작들만 놓고 본다면 3점은 충분한데, 뒤로 갈수록 힘이 딸리기에 감점했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올빼미 사내"를 꼽습니다.

"올빼미 사내"

도시전설에 매료되어 스스로 전설이 되고싶어한 주인공이 자칭 올빼미사내로 변장하고 나타나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를 1인칭 서간문 형태로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변태적인 상상력이 실제 범죄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는 작중에서 주인공이 언급하는 그의 멘토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과 유사해서 참신한 맛은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전형적인 설정이니까요. 그러나 괴담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인터넷을 활용하는 등의 요소가 곁들여져 설득력을 확보하는 점,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전설의 구체화를 위해 변장을 하고 벌이는 마지막 범죄가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이어지는 결말이 아주 괜찮았습니다. 작위적인 내용은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어제의 공원"

절친 마치의 사고사를 알게된 초등학생 엔도가 우연히 자신이 사건 직전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마치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는 타임슬립SF입니다만... SF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타임슬립의 원인이나 이유가 해명되지 않기에 판타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소소한 이야기인데 사건을 막으려 노력할 때마다 더 큰 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정이 그간의 타임슬립과 타임 패러독스물을 재치있게 피해가는 참신함이 돋보여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작위적인 반전이 등장한다는 것이 옥의 티이긴 한데 역시나 별점 3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영상화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덧붙이자면 이러한 작위적 반전보다는 차라리 성인이 된 엔도가 다시 타임슬립하게 되어 마치의 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결말이 어떨까 싶긴 한데, 이것도 작위적이었을까요?

"아이스맨"

25년전 요양차 내려간 외할아버지 댁에서 냉동된 갓파 흥행사와 함께 알 수 없는 사건에 흽쓸렸던 가츠키의 이야기인데, 25년전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흥행사가 선보이는 얼음속의 정체불명 갓파 시신, 갓파 흥행사의 어리지만 영악하고 속을 알 수없는 딸 논코, 어마어마한 체구의 갓파 흥행사 등 등장인물도 개성이 넘칠 뿐 아니라 사건의 전개과정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25년 뒤의 현재 시점에서의 결말이 너무 시시합니다. 뻔할뿐더러 밝혀지는 것도 없고 주인공의 기묘한 심리상태 역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계속 언급하는 이 단편집 전체의 문제이지만 작위적인 결말이 특히나 별로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 시점의 분위기로 계속 달려주었더라면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쉽습니다.

"사자연" 

제목 그대로 죽은 사람과의 인연을 다루는 심리 스릴러물입니다. 여류화가 가나에 린코가 인터뷰하는 형식의 일인칭 소설로 그녀가 푹 빠졌던 기미히코라는 자살한 청년과 그녀와 똑같이 기미히코에게 매료된 시노부라는 두명의 여성의 이야기로 광기어린 집착과 그에 따르는 파멸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고 분위기 있었던 기미히코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막판에 길을 잘못들어도 유분수지 난데없는 지박령 이야기로 끝맺어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 역시 기미히코 이야기로만 잘 마무리했더라면 4점은 충분했습니다.

"월석"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마네킹을 다룬 소품으로 호러라기보다는 심리 썰렁 드라마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전개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두서가 없어 보이며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작위적이지 않아서 이야기가 담백하고 깔끔합니다. 일종의 정신적 성장과 강함을 보여주는 마무리도 괜찮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03/24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웬디 워커 / 김선형 : 별점 2점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4점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북로그컴퍼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인하게 강간당한 제니를 위해 부모는 망각 요법으로 당시의 기억을 없앴다. 그러나 오히려 제니는 자살을 기도했고, 새로 제니를 맡게 된 정신과 의사 앨런은 제니의 기억을 복구하여 치료에 나섰다. 하지만 제니의 기억이 차례로 돌아오면서 제니가 표백제 냄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자, 앨런은 자신의 수영 선수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표백제, 그리고 강간범은 몸에 털이 없었으며 빨간 새가 그려진 파란색 후드티를 입었다는 증언 모두 제이슨에게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제니의 아버지 톰에게 들은, 톰의 직장 상사 밥이 딸 뻘인 비서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이용하여 밥을 범인으로 조작하려 결심했다. 약간의 조작으로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 밥은 알리바이도 없으며 과거 성범죄 경력이 있었다는게 밝혀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밥은 어쩔 수 없이 제니 강간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친구의 딸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누명을 벗지만, 분노한 라일라의 아빠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권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러러면 자아가 아주 강인해야 한다."
"우리가 낳은 자식을 보호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담한 불행이다."

심리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망각 요법과 트라우마 치료에 대한 안내서에 가까와 의외였던 작품입니다. 제니와 앨런, 숀, 톰, 샬럿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강박증을 이겨내는게 주요 내용인 탓입니다. 범죄물의 분위기를 풍기는건,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한 앨런이 제니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뿐이고요. 

물론 설득력은 높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다운 디테일아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샬럿에게 들은 밥과의 성관계 묘사와 TV 광고, 경찰과의 통화를 활용하여 제니의 마음 속에 밥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과정이 아주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밥이 왜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하며, 알리바이를 밝힌 후 처단받는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어요. 조금 꼬아놓기는 했지만 초반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마약 판매상 더마코와 제이슨, 그리고 진범 셸비가 그곳에 있었던 이유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일단 범죄 스릴러, 추리물이 아니까요. 범죄물로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제니를 강간한 범인이 누구인지가 이야기의 핵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범의 정체 역시 뜬금없고요. 몇 번 반복해서 소개된, 앨런이 구하지 못한 유일한 환자라는 셸비가 진범인데 그 전 까지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다가 결말에서 급작스럽게 정체가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습니다. 셸비가 앨런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제이슨을 스토킹하여 강간하려고 했다는 목적 정도만 납득이 갈 뿐입니다. 이럴거면 범인은 누구라도 괜찮았던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충 마무리한 느낌이 들 정도에요.
셸비가 오래전 앨런도 강간한 적이 있었다는 설정도 황당합니다. 앨런도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이며, 제니의 치료와 함께 스스로도 치유되었다는 결말을 위한 억지 설정인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또 셸비가 진범이라는걸 진작 알고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는 제이슨에게 혐의가 가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던 앞부분 모습과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진범이 누구인지를 경찰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극에 달한 앨런 1인칭 시점의 묘사 역시 그닥입니다. 주변 묘사 없이 앨런의 심리 묘사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나 인터뷰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몰입하기 힘들었어요.
또 어느새 톰과 샬럿의 과거와 현재 비밀까지 공유하며 그들을 치료하게 되는 전개도 이상합니다. 분명 제니의 치료, 기억 복원이 목적인데 왜 부부의 심리 치료까지 하는건지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이를 위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심지어 샬럿은 과거 의붓아버지와의 성관계를 숨겼을 뿐 아니라 남편 톰의 직장 상사 밥과 불륜 관계라는 설정인데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성폭행 피해자인 제니가 아닌 샬럿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역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샬럿은 밥과의 관계를 깨고, 자신이 잃었던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톰 역시 그런 샬럿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다시 사랑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고통을 떠올린 후 치유가 되었다는게 전부입니다. 샬럿과 톰이 뭘 어떻게 하건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냥 막장 드라마와 같은 재미를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등장 인물들과의 대사로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져 숀같은 인물의 비중이 기묘하게 높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숀은 제니의 심리를 전달해주기 위해 투입되어 비중도 커진 도구에 불과해 보이거든요. 제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한데 말이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졌다면 더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도 없고 묘사도 지루하며 장황할 분 아니라 범죄 스릴러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인터넷 상의 그럴듯한 소개에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4/12/15

반가운 살인자 - 서미애 : 별점 2점

반가운 살인자 - 4점
서미애 지음/노블마인

한국의 여성 추리 작가인 서미애의 단편선입니다. 일상계 범죄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들로 총 10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표제작이 영화화되기도 해서 궁금하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이야기들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정이입이 힘들었던 탓입니다.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심리 묘사가 등장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은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습니다.

아울러 작품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도 잘 모르겠어요. 정통파 본격 추리물도 아니고, 기묘한 맛의 반전물도 아니고, 스릴러도 아니고... 굳이 분류하자면 범죄가 테마인 드라마가 대부분인데 그렇게 접근하기에는 묘사력이나 깊이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집처럼 최소한 한두 작품이라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도 않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추리물이나 스릴러 애호가분들께 상기의 이유로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가운 살인자"

보험금 때문에 사고로 죽어야 하는 가장이 자신을 죽여줄 연쇄살인자를 찾아다닌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지요.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사고로 위장한 자살을 연구하는 게 당연합니다. 연쇄살인마가 어디서 나올 줄 알고 헤매고 다닙니까? 그거 쫓아다니면 오히려 운동이 되어서 더 오래 살겠네요. 아울러 재미를 위해서라면 연쇄살인자의 정체라던가, 이야기의 흐름에서 반전이 한번 정도 나와줬어야 합니다. 

영화화가 되었다고 해서 잠깐 조사해보았는데, 사뭇 다른 각색으로 제작된 것 같더군요.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연쇄살인마를 찾아다니는 백수가 연쇄살인마로 몰린다는 영화의 설정이 더 나아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

남편을 죽이는 방법에 골몰하던 주부가 실제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 당황하다가, 완전범죄 이야기로 넘어가는 작품입니다. 정신과 의사와 주인공의 관계가 드러나면 꼬리가 밟힐게 뻔해서 잘 짜여진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입니다. 나름 반전이 있다는 점도 괜찮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냄새 없애는 방법"

냄새에 민감한 여주인공이 이웃집의 개 때문에 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런데 주인공부터 정상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예민해서 감정이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거의 초능력 수준으로 묘사되는데, 이럴 거면 슈퍼히어로물을 만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공동주택에 살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이 있는 게 당연한 상식이며, 단지 6개월치 월세를 선불로 주었다고 이사를 고려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피냄새를 지우는 방법을 알게 된 204호 남자가 덕분에 연쇄살인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반전이 있기는 한데 대단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딱 하나, 남자의 이름이 "유영철"이라고 밝혀지는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살인 협주곡"

부부가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으로 앞서 이야기한 천편일률적인 심리묘사가 이어져서 지루합니다. 서로 미워하는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왜 이혼 같은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지도 설명되지 않아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차라리 블랙코미디로 풀어나가는 게 나았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전에 읽었던 "완벽한 부부"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완전범죄를 계획하다가 둘 다 죽는다는 걸작 단편과 굉장히 유사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예요. 에필로그까지 완벽했던 해당 작품과 비교할 때 완성도도 더 낮아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정글에는 악마가 산다"

파파라치로 돈을 벌려는 찌질이에게 닥친 가혹한 현실을 다룹니다.

최근 이슈인 수원에서 발견된 토막 살인 사건과 약간 겹쳐지는 부분이 조금 있어서 신기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공통적인 문제는 여전합니다. 장기 밀매를 하는 범인들이 시체를 서툴게 처리한 이유, 주인공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할 때 무방비로 접근하는 이유 등 설명되지 않는 것도 너무 많고요. 채팅 프로그램이 트리거가 된다는 아이디어 하나만 신선했을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숟가락 두 개"

평생 중 교도소 생활이 더 길었던 전과자와 벙어리 아가씨가 가족이 된 뒤 벌어진 가혹한 현실을 다룬 일종의 드라마입니다. 김성종 선생님의 "어느 창녀의 죽음"이 떠올랐는데, 약간 억지스러운 감동 외에는 별다른 반전이나 극적 요소가 없어서 감히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뻔하기도 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녀만의 테크닉"

친구가 자기의 남자를 빼앗았다고 생각한 여인의 납치극으로 시작되어, 다중인격 백합물로 끝나는 이색작입니다. 아무런 복선 없이 급작스럽게 진상이 드러나는 구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광기 묘사도 별로 새롭지 않았고요. 차라리 완벽한 서술트릭물로 꼼꼼하게 작업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비밀을 묻다"

불륜 관계였던 친구 남편의 죽음을 파헤치려는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이야기. 촬영 테이프에 찍힌 자동차 번호판과 친구의 지인은 별로 중요한 단서로 생각되지 않으며,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인 아내의 친구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설명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그나마 조금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경계선"

왕따와 원조교제 소녀의 기이한 교제와 학교 일진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다룬 작품입니다. 핸드폰을 숨겨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의 요소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원조교제 소녀는 당췌 왜 나왔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콩가루 집안의 설정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작품과는 별 상관없는 내용이었으니까요. 가족관계의 회복을 그린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미디어믹스를 노린 티도 너무 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거울 보는 남자"

살인자의 관상이 따로 있다는 뻔한 아이디어를 현대적으로 풀이한 설정은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의 비약이 너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교수의 분노나 주인공의 범죄가 딱히 설득력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요. 좀 더 짧고 임팩트 있게, 서늘하게 써야 했을 작품이 아닌가 싶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10/22

걸 온 더 트레인 - 폴라 호킨스 / 이영아 : 별점 2점

걸 온 더 트레인 - 4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임으로 인한 알콜 중독 탓에 이혼과 퇴사로 인생이 엉망이 된 레이첼에게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정차하는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이첼은 부부 중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가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인어 다크, 다크 우드"와 동일한, 요새 유행하는 1인칭 시점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영화화되었다는데, 영화화될 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전해줍니다. 사라진 메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 계속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전개 덕분입니다. 이 중 메건이 실종된 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의 기억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특히나 일품이에요. 레이첼이 메건을 죽인걸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이러한 전개가 모두 3명의 여성 - 레이첼, 메건, 애나 -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교차되는 전개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읽은 이런 류의 전개 방식은 보통 서술 트릭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 작품은 애나가 톰이 거짓말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 애나가 톰이 숨겨둔 전화기를 찾아내는 장면 등 레이첼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을 보강해주는 장치로서, 또 톰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이유에 대해 레이첼에게 한 말과 애나 시점의 심리 묘사가 반대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첼은 모르지만 독자에게만 해당 정보를 살짝 알려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등 정직하게 전개를 위해서만 사용해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레이첼이 메건을 엿보며 "제스"라고 혼자 부르다가 갑자기 "메건" 시점으로 넘어올 때의 기묘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아울러 "일상계" 느낌이 가득하다는 독특함 역시 큰 장점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현 상태만 보면 오히려 그 이하)인 레이첼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좌석의 기차를 타면서 똑같이 정차 하는 곳의 집을 쳐다보다가 사건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설정부터 아주 매력적이지요. 게다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사소한 사항에 불과했고, 사건의 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는 진상도 마음에 들고요. 우연히 찍은 사진에 거대 조직의 음모가 담겼다! 이런 것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범죄 스릴러냐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는데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리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작 중 레이첼이 벌이는 일종의 탐정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밝혀질 뿐이에요. 단지 메건 사건 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씩의 비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비밀들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메건의 비밀은 비교적 초반, 즉 심리치료사 카말과 면담 때 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철없을 때 낳았던 딸을 부주의로 잃었다는건데, 이걸 아는 사람은 헤어진 아이 아빠 맥 밖에 없으므로 본 사건과 관계가 있을리 없으며, 심리치료사 카말이 이 것을 안다고 해도 딱히 뭘 할 리가 없지요.
레이첼이 술을 마시는 이유? 불임 때문에 알콜 중독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톰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역시 본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요. 

톰이 진범임이 드러나는 장면도 황당합니다. 메건 시점으로도 작품이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메건 시점의 마지막 날 범인은 밝혀지게 됩니다. 때문에 최대한 레이첼, 애나 시점에서 범인을 제대로 드러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정교한 맛이 없어서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결정적 단서는 애나가 우연찮게 발견한 톰의 또다른 휴대전화가 전부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왜 휴대전화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톰이 뜬금없이 둘 앞에서 "내가 범인이야. 놀랐지?"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이는 "톰은 거짓말을 잘한다"를 드러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범인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 탓이 큽니다. 레이첼이 필름이 끊겼을 때 톰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요.
이럴 바에야 레이첼 1인칭 시점으로만 작품을 전개하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메건과 애나 시점의 전개는 실상 본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장황한 묘사로 페이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레이첼 시점의 묘사가 너무 많은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고, 이혼에 대해 자책하고 항상 알콜 중독을 의식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도피처를 찾는 묘사들로 솔직히 짜증 났어요. 무능력한데다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오지랖은 넓어서 쓰잘데 없는 사건에 뛰어들어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 자체니까요. 경찰 라일리가 그녀를 못견뎌하는게 충분히 이해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 역할도 불가능한 인물이 탐정역을 한다? 어불성설도 유분수여야지요.
레이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 모두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에요. 메건? 남편 덕에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바람을 피면서 사람 가지고 노는게 취미인 유부녀로,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해요. 카말은 자신의 환자와 바람을 피는 부도덕한 심리치료사, 스콧은 의처증 가득한 정신병자, 톰은 거짓말을 일삼는 살인자라는 점에서요.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 애나, 그리고 "좋은 사람"은 레이첼의 친구 캐리가 유일할 정도로 작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아, 캐리는 거의 마더 테레사 수준입니다).

또 최근 접했던 이런 류의 여성 1인칭 시점의 스릴러물의 대부분이 "아이"와 "임신"이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도가 지나칩니다. 레이첼이 알콜 중독이 된 이유는 그녀의 불임이고, 톰과 애나의 불륜과 재혼은 애나의 임신 때문이고, 메건의 불면증의 원인은 그녀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탓이고, 메건이 살해당한 이유는 톰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고.... 모든 사건이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는 그럭저럭인데, 최근 유행(?)에 편승한 작품으로 딱히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말이죠.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걸"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제목이 "걸 온 더 트레인" 일까요? 이 역시 미스테리입니다...

2021/02/27

나는 언제나 옳다 - 길리언 플린 / 김희숙 : 별점 4점

나는 언제나 옳다 - 8점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성스러운 종려나무(Spiritual Palms)'라는 호텔에서 일하는 매춘부이다. 손목에 문제가 생겨 남성 고객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하던 수음 테크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호텔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점을 보며 사람들의 기운을 읽는다. 물론 실제로는 신기(神氣)와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익힌 요령으로 손님들의 상황을 짐작해 마음을 읽어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전 버크가 찾아온다. 그녀는 카터후트 메이너 가문의 낡은 저택을 처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낡은 저택은 그녀의 문제투성이 의붓아들, 열다섯 마일즈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퇴마사를 자처하며 귀신이 나온다는 저택을 정화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직접 본 저택과 마일즈의 상태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벽마다 기괴한 핏자국이 나타나고, 마일즈는 나를 볼 때마다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저택에 관해 조사하던 나는 100년 전 카터후크 가문이 이 저택에서 큰아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으로 본 큰아들은 마일즈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마일즈와 수전 모두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나를 찾아줘"를 쓴 길리언 플린의 단편입니다. 단편 한 편만으로 책이 출간되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드물지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단독 출판되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대박이에요. 저주받은 저택이라는 고딕 호러로 시작해서 사악한 소시오패스와의 두뇌, 심리 게임으로 이어지는 얼개가 탄탄하고, 단계별로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나'가 봉으로 보였던 수전 버크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부터 기묘하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저택의 등장, 그리고 저택으로 이사온 뒤 부쩍 더 의붓아들 마일즈와 불화가 심해졌다는 수전 버크의 강박증으로 고딕 호러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고요.
세 번째 단계에서는 저택에서 과거 잔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범인은 마일즈와 똑같이 생긴 큰 아들이었다는게 드러나며 고딕 호러로의 진면목을 선보입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마일즈가 '나'에게, 이 모든건 남편이 '나'에게 수음을 받았단걸 복수하려는 수전의 음모라며 같이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멋진 완전 범죄 스릴러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일즈가 자기가 '나'를 속였다며 철저하게 '나'를 옭아매고 조종하는 마지막 단계인 심리 스릴러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각 단계 모두 개별적인 장르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일 뿐 아니라, 항상 앞선 단계를 뒤집는 반전이 등장해서 흥미를 자아냅니다. 자세한 묘사와 여러가지 복선으로 설득력도 높아요. '나'가 버크 가 가장의 사진을 마지막에 발견하고, 그가 자기 수음 서비스 단골이라는걸 알게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덕분에 마일즈의 거짓말이 설득력을 가지며 '나'가 속아넘어가는 네 번째 단계가 진행되게 되니까요.
위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자칭하던 '나'가 마지막에 마일즈에게서 '봄 냄새'를 맡는다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닳고 닳은 '나'와 악마를 구체화한 마일즈라는 주요 캐릭터 묘사도 아주 훌륭하며, 단편인 덕분에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에서 마지막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되짚어 생각하면 문제이기는 합니다. 마일즈가 '나'를 속여서 함께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그 이전 단계에서 '나'의 가방에 토를 하는 등으로 도발할 필요는 없었거든요. '나'가 저택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공포라는 감정도 설명되지 않는 작위적인 요소였고요.
또 결말에서 '나'가 마일즈의 어머니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서 사기를 쳐 거액을 얻는 꿈을 꾸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어요. 수전의 보석과 마일즈 유괴를 모두 뒤집어 쓸 수 있어서 '나'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니까요. 마일즈가 수전에게 전화했다고는 하는데, 내용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고요. 이래서야 수전은 경찰에 신고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조금은 애매한 열린 결말은 호불호가 갈릴 영역이 아닐까 싶어요. 스티븐 킹이라면 '나'가 자는 방으로 마일즈가 침입해서, 저택 살인 사건 내용처럼 난도질하면서 끝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다시 유추해서 떠올린 결과일 뿐, 읽는 내내 긴장감 넘쳤던 좋은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단편이 갖는 힘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2023/08/27

마당이 있는 집 - 김진영 : 별점 1.5점

마당이 있는 집 - 4점
김진영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약 회사 영업 사원이던 김윤범이 저수지 속 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윤범은 아내 상은 몰래 회사를 그만둔 뒤 거래하던 의사들을 협박하다가 모르는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했었다. 상은이 발견한, 윤범이 죽기 전 숨겼던 휴대폰에는 수민이라는 아이가 성매매했다는 증거가 저장되어 있었다. 상은은 수민에 대한 정보로 윤범이 의사 박재호를 협박했다고 생각했다.
박재호의 아내 김주란은 판교의 개인 주택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은 뒤, 정원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하지만 박재호는 이를 모두 주란의 망상이라 치부했다. 주란의 증상은 그녀가 상은과 만난 뒤, 남편의 범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가는데....


김태희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던 한국의 여성향 서스펜스 스릴러. 이용하는 구독형 이북 서비스인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길래 읽어보게 되었네요.

주인공 두 명 - 김주란, 이상은 -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는게 특징입니다. 이상은은 잔혹한 살인범이자 협박범, 김주란은 일방적인 피해자 포지션에 가까운데, 나중에 둘이 일종의 파트너 (?) 관계로 한 팀을 이루게 되는 결말로 향하는 전개가 재미있었어요. 이상은이 임산부라는 설정도 독특했고요. 임산부라서 사람들이 경계심을 잘 푼다는 상황을 잘 써먹은 장면이 두어장면 있기도 합니다.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괜찮은 트릭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수면제를 먹여 재운 윤범을 운전석에 앉힌 뒤, 상은이 운전석 의자를 뒤로 바싹 밀고 그 위에 앉아 운전했다는 트릭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윤범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내려집니다. 작고 연약한 임산부인 상은이 거구의 윤범을 조수석에서 다시 운전석으로 옮기는건 불가능하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수민이를 죽인건 박재호가 아니라 아들 승재였다는 반전도 신선했습니다. 이를 수민이 찍었던 휴대폰 속 사진으로 드러내는 묘사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지루했습니다. 이상은과 김주란 모두 심리 묘사 중심의 여성향 스릴러에서 흔히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이라서 식상했던 탓이 가장 큽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냉소, 혐오와 일종의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여성으로 묘사되거든요. 그동안 제가 읽어왔었던 <<우먼 인 윈도>>, <<걸 온 더 트레인>>,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등의 여성향 스릴러와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게다가 묘사만 보면 김주란은 정신병자에 불과합니다. 작품 속에서 보이는 행동에는 설득력을 느낄 수 없으며, 그동안 자신의 망상으로 많은 사고를 쳐 온걸로 - 강남 아파트에 살 때 윗 층 부부를 살인범으로 오해했던 등 -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전업주부이면서 아들이 방에 여자아이를 숨겨놓았다는걸 며칠동안 눈치채지도 못했다는건 변명의 여지도 없고요. 이웃과 상은, 기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일방적이고 편견 및 망상으로 가득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광적인 심리 묘사와 행적이 이어지니 남편의 표정, 낚시 가방을 빨아 말렸다는 정도로 남편과 시부모님을 살인범 일당으로 모는 과정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주장이 모두 거짓말이라는게 밝혀져서 남편에게 이혼당하는 결말을 기대하게 만들더군요.
물론 주란의 남편 박재호가 수민의 시체를 정원에 몰래 묻었고, 시체를 처리하러 간 날 집을 비웠던걸 숨긴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작 중 묘사와 행적을 보면, 박재호가 이를 숨긴건 살인을 저지른 아들과 망상증에 걸린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상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오히려 주란이 재호를 죽인다는 결말은 황당했어요. 주란이 왜 급발진해서 남편을 죽였을까요?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수십년전부터 차고 넘치던 설정을 가져오려면 남편은 모두 사악하다는 작품 저변에 깔려있는 일방적인 이분법적인 논리 말고 더 그럴듯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비하인드 도어>>처럼 못 봐줄 수준이라도 말이죠.
이런 이분법적 논리로 상은의 살인을 정당화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상은의 범행에는 남편의 폭력 - 심지어 임신도 남편의 성폭행 탓 - 때문이라는 동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상은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는건 차원이 다른 중범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다른 유사한 여성향 스릴러와 차별화되기는 커녕, 더 나은 점도 찾기 힘든 억지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리뷰를 남기는게 힘들 정도였어요. 이런 류의 소설은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08/09/24

도쿄겐지 이야기 - 아기 타다시 : 별점 2점

도쿄겐지 이야기 - 4점
아기타다시 지음/서울문화사

Act 1 나비의 장송 :
어렸을때부터 친구와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등 주위에 죽음을 몰고다니는 겐지 (별명). 그녀는 자신의 메일 친구인 아게하의 남자친구로부터 그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Act 2 사신의 키스 :
친구 린과 함께 인기 그룹 "기요틴"의 라이브를 찾아간 겐지는 "기요틴"의 보컬 토우야의 목소리에서 묘한 기지감 (旣知感)을 느끼게 된다. 토우야의 초대로 자리를 함께 하지만 먼저 자리를 뜬 겐지는 토우야를 제외한 기요틴 멤버들에게 연락을 받고 린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Act 3 장미의 낙인 :
메일 친구 유리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만난 겐지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언니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Act 4 냉혈의 론도 :
연쇄 강도 살인사건이 발생하던 와중의 어느날, 겐지는 후배 쥰을 우연히 만나고 그가 자신의 애인을 소개해 주는 자리에 따라가게 된다.

Act 5 만화경의 개미 :
후배 쥰이 주워온 만화경을 보던 겐지는 갑작스럽게 과거의 사실을 알게되고, 과거 친구의 살인사건의 조사를 위해 고향을 찾아간다.


40여일만의 추리 소설 관련 포스팅입니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차에 이글루스 렛츠 리뷰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리뷰에 앞서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이글루스와 서울 문화사에 감사 드립니다.

이 책은 "신의 물방울" 로 국내에서의 지명도를 크게 높인 만화 원작가 아기 타다시(필명)의 소설입니다. 추리 애호가들에게는 김전일의 원작가 "아마기 세이마루 (필명)" 으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죠. 총 5편의 단편이지만 서로 이어지는 일종의 연작 소설집으로 심리 서스펜스와 추리물이 뒤섞여 있습니다.

일단 만화 원작가로서의 작가의 경력을 읽으면서 계속 느낄 수 있었는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쉽고 빠르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겠죠. 1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독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머리속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음직한 묘사 방법도 괜찮았습니다. 주인공 겐지의 왜곡된 기억에 관련된 이야기는 얼마전 읽었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에 접했던 내용이라 왠지 반갑기도 했고요.

그러나 단점 역시 존재합니다. 인물 설정부터 굉장히 만화적인데 주인공 겐지의 독특한 분위기 감지 능력, 그녀의 "사신" 인 파트너 토우야가 초미소년에 천재 음악가이자 격투의 달인이라는 등의 설정이 그러하고 피해자나 용의자들의 설정 또한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더군요. 그리고 트릭들이 왠지 "그림" 에 더욱 어울릴 것 같은 것들도 많았다는 것과 그다지 참신한 트릭이나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예를 들자면 그나마 트릭이 등장하는 "Act 2 사신의 키스" 는 경찰의 첫 현장 수사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미흡했을 뿐더러 현대의 과학수사로 충분히 범행 증거를 밝혀낼 수 있는 사건으로 생각되거든요. 3번째 단편 "장미의 낙인"과 4번째 단편 "냉혈의 론도" 는 일종의 서술 트릭물로 볼 수 있긴 합니다면 별로 새로운 것도 없고, 서술트릭에 사용하기에는 서술이 부족할 정도로 짤막한 단편이라 설명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라이트 노벨과 추리물의 경계선상에 있어보이는 쉽게 읽히고 나름 자극적인 묘사가 담긴 추리 성향의 캐릭터물로, 본격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심리 스릴러로 보기에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는 알맹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겐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괜찮았는데 관련된 내용만 장편화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만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작 단편 소설로서 자립할 만한 가치를 느끼기 어렵더군요. 고어 요소를 덜어낸 "GOTH"라고 생각할 수 있는 책인데 단점 역시 비슷하네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만큼 평가가 많이 나뉠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에게는 단점 쪽이 더 눈에 들어온 책이었습니다. 비록 좋은 기회를 통해 공짜로 얻어 읽게 된 책이지만 리뷰는 냉정해야죠.... 별점은 2점입니다.

2006/07/09

퀴즈 [QUIZ] (2000)

영어강사인 다카노 마이는 어느날 한통의 메일을 받는다.

제목: 퀴즈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
힌트: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 순간 그녀가 떠올린 것은 초등학교 2학년생인 아들 쇼가 아직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학교나 친구들에게도 연락해보지만 아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고 그 후 또 한 통의, 정체불명의 메일이 도착한다.

‘아들을 데리고 있다. 경찰에게는 알려선 안 된다.
퀴즈: 경찰에게 알리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힌트: 도레미파솔라…시(시는 일본어로 죽음) 죽음?!!!


다카노 마이는 경찰에 신고하고 경시청의 유괴 전담반인 SIT의 키리코 카오루가 사건 수사 지휘본부에 투입된다. 수사 지휘자인 오자와 형사과장과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범인의 감시카메라를 피해 다카노가에 잠입에 성공한 형사 시라스나와의 협력 수사로 범인의 퀴즈를 하나씩 해독해 나가며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데...


2000년에 방영되었던 일본 드라마입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는데 극의 흡입력 하나는 정말 대단하네요. 이틀만에 다 볼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유괴범이 "퀴즈"를 보내고 경찰과 두뇌게임을 펼친다는 전개는 비스무레한 작품이 많아서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퀴즈 자체, 즉 일종의 퍼즐을 시청자가 몰입하면서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제시하며 적절하게 사용한다는게 다른 복잡한 심리 스릴러 극과 차별화됩니다. 퍼즐 풀이의 재미로 상당한 몰입감도 전해주고요. 스토리도 단순한 유괴극으로 끝나지 않고 2중, 3중으로 포장되어 있으며, 이러한 요소를 설명하기 위한 복선 역시 많아서 정교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극의 긴박감도 일품이고요.
범인이 6억엔을 요구하여 도주하는 장면은 정말 머리를 많이 썼구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진 트릭이었으며, 이 도주극에서 주인공 키리코 카오루의 또다른 함정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거기에 결말부분의 반전이 유명하던데 저도 놀랐습니다! 솔직히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물론 이 반전 역시 쌩뚱맞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전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드라마 전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거든요. 각본진의 노고가 느껴질 정도로 잘 짜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제작진이 "케이조쿠"의 제작진 그대로라고 하는데 케이조쿠에서 인상깊었던 몽환적인 화면이나 순간순간의 교묘한 이미지 편집, 절묘한 음악과 화면의 조화로 긴장감을 자아내는 여러 장면들, 그리고 드라마의 미술적 감각은 지금 보아도 전혀 유치하지가 않은 수준입니다. 이미지 과잉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비쥬얼 적으로는 만족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본 드라마에서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인 배우들의 오버가 이 작품에서는 심하지 않아서 더욱 좋았습니다. 주인공 키리코 카오루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설정은 분명 만화적이고 심리가 극도로 불안하여 환영을 본다는 설정은 불필요하다 생각되지만, 자이젠 나오미라는 배우는 그 만화적인 설정을 커버해 줄 정도의 연기력은 충분히 보여주었고, 남자 주인공격인 시라스나가 굉장히 현실적인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마음에 드네요. 또한 트릭의 개그형사 야베역의 배우가 맡은 오자와 형사반장의 연기 역시 그간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 주는 멋진 연기와 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감 있는 연기와 더불어 심각한 극의 전개가 설정과 오버가 가득한 그간 일본 드라마의 편견을 많이 불식시켜 준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외의 조연도 친숙한 얼굴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만화적인 설정, 즉 키리코 카오루라는 캐릭터의 설정은 너무나 불필요했기에 아쉬움이 남으며, 다카노가를 비롯한 주변 가족들의 일상 및 심리상태 묘사도 좀 오버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11부작에서 요런 부분을 줄였으면 한 6부작 정도로 충분히 끝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진범을 사주한 인물에 대한 설득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기에, 또 이 인물로 인해 반전의 충격이 많이 희석되는 것, 그리고 좀 억지에 가까운 해피엔딩은 각본진이 좀 몸을 사린 것 같았습니다. 지나치게 공포-충격요법을 전달하기 위해 군더더기 -클로즈업만 되면 눈알을 굴리는 연기를 하는 등- 가 좀 많았던 것도 불만스러웠고요. 아무래도 디테일에서 좀 작위적인 연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괴당한 다카노 쇼 역의 아역배우의 연기는 솔직히 독서낭독회 수준이라서.... (뭐 7살짜리 아역한테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잘못이겠지만요)

뭔가 후속편을 부르는 듯한 여운도 살짝 남기는데 후속편이 없는 것으로 보면 드라마의 인기는 별로였나 보네요. 그래도 몰입력 하나는 대단한, 그리고 여름에 보면 더더욱 좋을 것 같은 서늘한 맛을 잘 전해주는 재미있는 드라마였습니다. 비록 방영한지는 6년이 지났지만 지금 보아도 전혀 유치한 느낌을 주지 않는 내용과 비쥬얼로 포장되어 있으니 휴가철에 하루이틀 몰아서 보면 딱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가인 "Toy Soldier"도 마티카의 원곡을 번안해서 부르는데 극의 내용(?) 이나 이미지와 잘 부합하고 있고 오랫만에 들으니 더욱 반가왔습니다. 

2006/10/02

신데렐라의 함정 / 살인 급행 침대열차 - 세바스띠앙 자프리조 / 지정숙 : 별점 2점

신데렐라의 함정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지음, 지정숙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이글루스의 문제로 먼저 썼던 글이 다 날아가서 다시 적습니다.... 사실 대단한 리뷰는 아니지만 꽤 길게 썼는데 약간 화가 나긴 하네요. 처음 쓸때의 기분이 전혀 들지 않으니 대충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자프리조의 작품은 그동안 두어개 읽어보았었는데 사실 다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특유의 몽환적이고 정신사나운 문체 탓입니다. 그래서 추리라는 쟝르와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졌었지요.
그래도 이 작품은 탐정이면서 증인,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희대의 1인 4역 트릭을 구현한, 추리 소설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관심은 계속 갖고 있다가 여러가지 책을 사면서 같이 구입,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같이 실려있는 "살인급행 침대열차" 역시 꽤 관심가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읽어보니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앞서 이야기한 1인 4역의 트릭 그 자체는 꽤 그럴듯하게 구현해 놓았지만, 기억상실이라는 너무나 흔한 장치를 통해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명제를 던져놓는 것이 전부라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서나 실마리를 찾아간다기 보다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심리묘사를 따라가다보면 작품이 끝나버린다는 점에서는 추리물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같이 실려 있는 "살인급행 침대열차"는 작가의 데뷰작으로 침대칸에서 발견된 시체와 같은 침대칸에 타고 있던 승객이 하나씩 살해된다는 연쇄 살인극을 꽤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있는 덕분에 정통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너무 뜬금없이 밝혀지고 작품 전반에 걸쳐 탐정역을 수행하던 그라지아노 형사가 어느새 한켠으로 밀려나고 침대칸에 무임승차했던 애송이가 탐정으로 등장, 사건을 전부 해결해 버리는 내용 구성은 이색적이긴 했지만 수긍하긴 힘들었어요. 독자와의 공정한 승부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고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 작품 (들)의 문제는 사실 사소한 것이고 진짜 문제점은 제가 구입한 동서 미스터리 북스의 번역이 너무나 엉망이라 뭐라 논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겁니다. 특히 주인공의 왔다리 갔다리 하는, 몽환적인 심리묘사가 작품 전반에 걸쳐 현란하게 펼쳐지는 "신데렐라의 함정"은 무슨 이야기인지 당쵀 감을 잡기 힘든,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번역이었습니다.
그나마 "사건"과 "인물" 묘사에 많이 치중하는 "살인급행 침대열차"의 경우는 이해는 가능한 수준이기에 약간이나마 낫긴 하지만 도토리 키재기지요. 동서 미스터리 북스의 기획과 작품 선정은 마음에 들고 괜찮은 작품은 계속 구입할 의사가 있긴 하지만 번역이 이정도 수준이라면 도저히 참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것 같습니다. 좀 더 제대로 즐길 수 있었던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씁쓸하기 그지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8/14

사일런트 페이션트 -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 남명성 : 별점 3점

사일런트 페이션트 - 6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해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리 상담사 테오 파버는 그로브 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화가 앨리샤 치료를 맡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의자에 묶인 남편을 총으로 사살했고, 그 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화상인 "알케스티스"만 남겼을 뿐이었다. 

앨리샤와의 첫 면담에서 그녀는 테오를 폭행했지만, 이윽고 그녀도 테오에게 마음을 열며 자신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테오는 그녀의 형부인 맥스, 사촌인 폴, 친구인 장 펠릭스 등과 만나서 얻은 정보와 일기장 내용을 조합하여, 그녀의 정신병의 원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냈던 교통사고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이런 치료를 통해 앨리샤는 다시 말문이 트였다. 그리고 테오에게 남편을 죽인 사람은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고 말해주었지만, 테오는 물론 병원장 디오메디스 교수 등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앨리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는데...

영국을 무대로 한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이자 서술 트릭이 사용된 추리물입니다. 

앨리샤 시점에서 사건 전부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까지를 보여주는 부분과, 테오 시점에서 테오가 앨리샤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아내 캐시의 불륜을 알고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과정이 뒤섞여 전개되는데, 앨리샤의 일기는 사건 전부터이므로 과거 시점입니다. 당연히 독자들은 테오 시점의 묘사는 모두 현재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하지만 테오 시점의 묘사는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었다는게 사용된 서술 트릭의 핵심입니다. 테오가 앨리샤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만 현재에요. 아내 캐시의 불륜을 의심하다가 뒤를 밟고, 결국 불륜남의 집을 덮치는 이야기는 모두 앨리샤 일기와 동일한 과거 시점이지요. 그리고 앨리샤와 테오의 과거는 서로 만나게 된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엘리샤 일기 속 정체불명의 남자이자 진범은 테오였던 겁니다. 

사실 화자별로 병행 전개되는 이야기의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걸 숨기다가, 마지막에 드러내면서 반전으로 이어지는건 "이니시에이션 러브"로, 한 명의 화자 시점의 이야기지만 시간이 다른 이야기 두 개가 진행되는 이야기라는건 "통곡"으로 이미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섞어서 진행하는 작품은 처음인데, 독자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솜씨도 일품이라 감탄했습니다. 트릭을 알고 나서 돌이켜보면, 두 이야기가 전혀 섞이지 않게끔 확실히 구분되어 있을 뿐더러, 캐시 이야기에서의 테오는 명백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식으로 나름 서술 트릭에 대한 단서도 제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을 수 밖에 없었어요.

또 남편에게 배신당한 뒤 말을 잃은 알케스티스 공주 이야기는 단순히 상징인줄 알았는데, 그게 앨리샤에게 실제로 닥쳤던 일이었다는 진상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테오는 앨리샤의 남편 가브리엘이 아내 캐시의 불륜남이라고 확신하고, 집을 덥쳐서 앨리샤와 가브리엘을 포박한 뒤 가브리엘에게 누굴 살릴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지요. 이 때 가브리엘이 자기를 살려달라고 이야기한게 앨리샤의 과거 - 어머니와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앨리샤가 죽었어야 했다고 절규했던 - 상처를 헤집어 폭발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테오가 사랑을 비웃으며 떠난 뒤, 앨리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가브리엘도 죽인거지요. 

맥스, 폴, 장 펠릭스 등 앨리샤 주변 인물들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앨리샤의 일기 내용도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앨리샤가 테오를 처음 만났을 때 공격했던 이유는, 테오가 침입자였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은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하지만 조금 과장된 심리 묘사와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많다는건 아쉽네요. 두 화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 (특히 앨리샤) 모두 수상하고, 비정상적입니다. 앨리샤의 일기도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며 흥미를 더해주는건 맞지만, 그냥 읽으면 혼란스러워요. 명백한 사실은 테오가 앨리샤 집을 감시하다가 침입해서 사건을 일으킨 것 뿐입니다. 그 외의 내용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증거도 일기 외에는 전무하고요. 피해망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일기를 읽고 당사자들을 찾아가서 추궁하는 테오에게 거의 모두가 사실을 털어놓는다는건 작위적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앨리샤를 치료했던 적이 있다고 일기장에 쓰여있다며 테오가 크리스티안을 추궁할 때 처럼요. 크리스티안은 그로브에서 앨리샤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입니다. 앨리샤가 자신이 아는 정신과 의사 이름을 대고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왜 생각해보지 않은걸까요? 테오야 지은 죄가 있으니 앨리샤의 모든 증언을 믿는다 쳐도,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침입한 이후 가브리엘을 죽인게 테오인지 앨리샤인지, 캐시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건 맞는지, 그 불륜 상대남이 가브리엘이 확실한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테오의 심리 상태도 극히 불안하고, 마리화나도 피우는 탓에 1인칭 시점 묘사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이니까요.

테오가 앨리샤의 입을 막기 위해 약물 과다 복용을 위장하여 피하 주사를 놓아 죽이려 했다는 결말도 석연치 않습니다. 앞서 테오가 이끌어 내었던 앨리샤의 증언 - "앨리샤는 범인이 아니고, 그 집을 감시하던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범인" - 은 디오메디스 교수 등을 통해 부정됩니다. 그냥 봐도 제 정신으로 한 증언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정신병이 있는 환자의 이 정도 증언 따위가 테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 증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테오라고 주장한다는건 인정될리 없습니다. 뭐 앨리샤의 말문이 트인게 위협이라고 생각되어 살의를 품었을 수는 있습니다만... 구태여 피하 주사 자국을 찾았다는걸 밝힐 필요는 없었습니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타살이라는걸 부각시켜 얻을게 별로 없으니까요. 

혐의를 크리스티안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어요. 크리스티안이 과거 앨리샤를 진료했다는걸 숨겼다는게 살인 동기라는데, 이를 증명하는건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앨리샤의 증언과 일기장은 실체는 남아 있지 않았고, 오로지 테오의 증언만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티안을 옭아매는건 무리입니다. 앨런 형사가 일기장을 찾았다며 테오를 찾아와 그가 범인이라는 페이지를 읽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리샤의 몇 안되는 짐에서 일기장을 찾지 못하고 경찰에게 빌미를 준 테오의 행동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 일기가 증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녀의 증언은 이미 정신과 의사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는데, 일기가 진실일 이유는 없잖아요. 일기는 굉장히 설득력있게, 잘 정리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일기 전체가 거대한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최소한 테오가 범인이라는걸 밝히기에는 많이 부족했어요. "열심히 치료해 주었는데, 뒷통수를 맞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테오의 주장을 뒤집긴 힘들었을겁니다.
캐시가 연극도 포기하고, 정크 푸드만 먹는 돼지가 되었다는 결말도 불륜남 가브리엘이 죽은 탓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이디어도 좋고 전개도 일품입니다. 비정상적인 심리 묘사가 많고, 결말이 석연치 않아 감점하지만 추천합니다. 색다른 추리 스릴러를 찾으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