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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3

너는 내 운명 (You're my sunshine) - 박진표 : 별점 3점


서른 여섯살의 농촌 노총각 석중은 목장 경영이 꿈인 알뜰 구두쇠의 순진한 사나이. 어느날 그는 순정다방에 새로 온 레지 은하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쫓아 다니기 시작한다. 석중의 진심을 외면하던 은하도 손님에게 크게 다친 뒤 정성스러운 간호를 해 주는 석중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은하가 AIDS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석중에게서 은하는 옛 남자를 피해 떠나게 되고 석중은 은하를 찾아 전국을 헤멘다. 1년 뒤, 은하가 사창가에서 적발되어 구속된 이후 감염사실이 폭로되지만 석중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며 그녀를 기다리게 되는데...

정말 오랫만에 본 '정통 한국판 최루성 멜로물'

솔직히 그간 우리나라 영화들은 특히 코미디의 경우 살짝 눈물을 짜내게 하려는 감동적인 장면을 집어넣곤 했었는데 저는 이런 방식이 무척이나 짜증났었습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다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우직하게 한번 울려주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처음부터 진행되는 이 영화는 최소한 내러티브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허술함을 찾을 수 없는 꽉 짜여진 전개를 보여줍니다. 때문에 마지막에 관객들 눈에 눈물 한번 핑 돌게 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하고 있고요.

거기에 황정민과 전도연 두 배우의 연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나문희씨 등 중견배우들의 백업도 탄탄하지만 두 주연배우의 힘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궁상맞은,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직하게 한 길만 걸어가는 영화의 힘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미워할 수 없는 작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배우의 연기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전제를 영화 앞부분에서 부터 관객에게 알려주고 영화가 진행되는데 실제 당사자분들에게는 누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더군요. 영화에서 AIDS를 무슨 문둥병 마냥 묘사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실화에 대한 내용을 조금 조사해 보았는데 너무 처절해서 차라리 실화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아예 빼고 만들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았습니다. 감독이 조금만 조사했어도 이렇게 포장은 못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영화는 영화라지만 좀 심한 것 아닌가 싶네요. 이런 이유로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뒷맛은 개운치 못했습니다. 흥행에 성공하고는 있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군요.

2024/06/29

직장 내 살인사건 -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 박종대 : 별점 2점

직장 내 살인사건 - 4점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지음, 박종대 옮김, 표창원 해제/지식트리(조선북스)

일의 조건이나 일자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의 대표격은, 취업을 위해 자기 윗 순위 대기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의 걸작 "도끼"일 겁니다. 작품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읽으면서 이런 류의 실화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만 보면 이런 실화를 다룬게 분명해 보이는 논픽션이 있더라고요. 독일의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으로,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그간 눈에 뜨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쳤네요. 주말을 맞아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볼프가 푀펠에게 법정에서 총격을 받아 살해당했던 1927년 사건은 말 그대로 '직장 내 살인사건'입니다. 볼프는 같은 회사 동료 푀펠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푀펠의 해고와 이익 배당금 지급 방해, 그리고 인격 모독에 앞장섰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읽어보니 죽어도 싸다 싶을 정도로 못되게 굴었더라고요. 범인 푀펠이 오히려 꽤나 선처를 받았다는 이후 판결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1909년 호프리히터 독살 사건은 "도끼"를 연상케 합니다. 호프리히터는 출세길이라 할 수 있는 참모 본부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트 장교들에게 독약을 보냈고, 그 중 한 명인 마더 대위가 독약을 먹고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정력제'라고 속이고 보낸 범행 과정, 호프리히터가 범인임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 모두 한 편의 범죄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스가 유명한 철학자 슐리크를 살해한 사건도 "도끼"와 동기는 비슷합니다. 한스는 학계의 유명인사이자 실력자 슐리크의 눈 밖에 나서 먹고 살 길이 막혀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역시, 비슷한 실화가 많긴 많네요.

이렇게 직장 내 문제 때문에, 혹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에 더해,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직장을 찾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범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883년, 직업 소개를 미끼로 다수의 여성들을 살해한 생크와 그 일당들의 범행, 그리고 1891년 거의 동일한 방식이었던 프란츠 슈나이더와 그의 아내가 저질렀던 범행처럼요. 그러나 이 범행들은 '직장 내 살인'으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직장'은 피해자들을 유혹한 무기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금품을 노린 살인 강도에 불과한 탓입니다. 
1964년의 음식점 부부 살인 사건, 1905년의 루스 중령 살인 사건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단순 강도 사건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피해자와 범인이 주종 관계였지만, 이들의 관계 때문에 범행이 일어난건 아니니까요. 1896년의 베르너, 그로세가 레비 변호사를 살해한 사건 역시 그 옛날에 미성년자들이 상당히 체계적인 계획하에 저지른 범죄라는 점은 놀랍지만, 단순 살인 강도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외에도 '직장 내 살인'과는 별 관계없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직장을 잃은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2006년의 후베르트 사건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회적 타살일 수는 있겠지만, 이를 직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명 소설 "비아말라"의 소재라는 클라인슈로트 살인 사건도, 잔혹한 가정 폭력을 저지르던 아버지를 나머지 가족들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볼 수 없고요. 동성애 관계에 빠졌다가 파트너를 살해한 베르노 사건, 2002년, 퇴학으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사회보호 대상자로 전락하게 된 슈타인호이저가 학교로 쳐들어가 17명을 사살한 사건도 그러합니다.
이런 사건들보다는 서두에 짧게 언급되고 지나가는, 학대받던 하녀들이 주인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1933년 파팽 자매 사건이 더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유니스 파치먼이 주인 가족을 살해한다는 소설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의 원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장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 비중이 적다는건 분명 기대와는 어긋나며, 시대도 1차대전 이전 제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게 많고 지역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만 한정된다는건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1/10/21

일본의 탐정소설 - 이토 히데오 / 유재진 외 : 별점 3점

일본의 탐정소설 - 6점
이토 히데오 지음, 유재진 외 옮김/문

메이지 시대 구로이와 루이코로 대표되는 다양한 번안소설과 실화소설, 다이쇼 시대 영화 지고마의 인기로 촉발된 모험·탐정 활극의 유행, 그리고 잡지 신청년을 중심으로 한 창작 단편들, 마지막으로 쇼와 전기의 에도가와 란포와 오구리 무시타로의 번안·창작 소설까지—추리 강국 일본의 초기 추리소설 역사를 시대별 대표 작가와 작품을 통해 설명하는 책입니다.

저처럼 일본 추리소설을 애호하는 독자나 다이쇼·쇼와 시대 자료가 필요한 창작자에게는 반드시 구입해야 할 책이긴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가장 큰 이유는 각 시대별 대표작의 줄거리 요약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건조해서 읽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실존했던 탈옥의 명수를 소재로 한 "실화소설 탈옥수 후지쿠라", 타이완의 광산 조사를 배경으로 한 "광산의 마왕",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모험소설 작가 오시카와 슌로의 "전기소설 은산왕", 마에다 쇼잔의 "뒤쫓는 그림자",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요시카와 에이지의 "에도 삼국지" 등 흥미로워 보이는 작품이 다수 소개되지만, 정작 본문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원작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좀 더 보기 좋고 읽기 쉽게 각색했더라면 자료적 가치뿐만 아니라 읽는 재미까지 더할 수 있었을 텐데요.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이 엄밀한 의미의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탐정소설'—즉, 정교한 트릭보다는 모험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자료적 가치가 크다는 점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단,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에 따른 평가이며, 일본 추리소설의 깊은 애호가가 아니거나 근대를 무대로 한 창작물을 준비하는 분이 아니라면 다소 흥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참고해 주세요.

2008/11/06

뱅크잡 (Bank Job) - 로저 도날드슨 (2008) : 별점 4점!


1971년 영국, 빚으로 고민하는 잔챙이 범죄자 출신의 카 딜러 테리는 옛 애인 마틴으로 부터 군침도는 제의를 받는다. 마틴이 알고 지내는 정부기관 요원으로 부터 로이드 뱅크의 경보장치가 1주일동안 해제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테리는 땅굴을 파고 은행을 터는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팀을 꾸리고 곧바로 은행털이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부기관의 음모로서 은행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고위 공직자의 은밀한 사진을 비공식적으로 회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카피가 마음에 들어 감상한 영화입니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블로우 잡"으로 착각해서 제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영화이기도 하죠.... 어쨌건 일본의 "3억엔 사건" 처럼 엄청난 돈을 훔치는데 성공하지만 실제로 범인이 아직 검거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잘 각색하여 풀어나가서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웰메이드 범죄 스릴러 물입니다. 범죄의 진행 과정도 드라마틱하지만 그 이후의 전개 역시 무척이나 흥미진진해서 영화가 끝날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기 힘들더군요. 범죄의 진정한 성공은 완전범죄라는 기존 상식을 무너뜨리는 대담한 협상 등은 무척 참신하다 느껴졌고요.

특히 범인들이 프로가 아닌 아마츄어들이었다는 것과 은행을 터는 동기 자체가 모든 관련자들에게 설득력있는 것이었다는 것 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마츄어들이라 벌어지는 실수, 그리고 우연과 운에 의한 성공 등이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으며, 은행털이, 정부기관, 경찰, 범죄자 등 복잡한 관계로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타당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사실 범죄물이 이치에 합당하게 전개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만 관객까지 설득하는데 보통 실패하기 마련이었고, 그동안 실망한 작품들도 적지 않은데 이 작품은 충분히 기대에 값했다 생각됩니다.

캐스팅도 상당히 괜찮은 편으로, 액션스타로만 알고 있었던 제이슨 스타뎀의 진지한 연기는 그다지 눈에 띄진 않지만 캐릭터에 아주아주 적합한 캐스팅으로 보이며, 그 외의 캐릭터들은 정말이지 실제 사건의 그 인물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습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범행 장소가 "베이커 거리" 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인 점 중 하나였습니다. 왠지 "붉은머리 클럽" 과 이야기가 머리속에서 겹쳐지는 것이 참 희한하고도 재미있었어요. 홈즈가 있었다면 진작에 체포되었을 텐데 말이죠.^^
그 이름도 찬란한 베이커거리! 죽기 전에 한번 가 볼 수 있으려나....

물론 마지막 극적 해결이 생각보다도 손쉬웠다는 점이 좀 걸리긴 합니다. 고위공직자의 언약 만으로 풀어주기에는 너무 중범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일반적인 영화라면 다 죽이고 입막음 했을 것을...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맺은 것은 좋았지만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는거 아닌가 싶었어요. 그 외에도 약간의 인종차별적 시각 및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몇몇 요소들이 없잖아 있는 등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킬링타임용으로는 손색없는 흥미진진 두근두근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대부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16/02/12

극비수사 (2015) - 곽경택 : 별점 1.5점

1978년 실제로 일어났던 '정효주양 유괴 사건'을 영상화한 작품입니다. 설 특선으로 TV에서 방영해주길래 감상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이 컸습니다. 실화 바탕의 정통 수사극을 기대했는데, 수사물로는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사건 해결부터가 수사보다 김중산 도사의 예지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에요. 아무리 실화 기반이라도 그렇지, 너무 비현실적이라 와 닿지 않더군요. 그나마도 재미있게 풀어내지도 못했고요. 전체 내용에서 수사가 차지하는 비중도 한없이 낮습니다. 유괴 수사에 초점을 맞추면 됐는데, 필요도 없는 조직 내 더러운 거래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수사물인지 풍자물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에요.
조직 내 암투에 비중을 둘 거였다면 실제 정효주 양이 두 번 유괴당했다는 드라마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공 형사의 공을 빼앗아 독식한 중부서 형사들이 두 번째 유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공 형사에게 석고대죄하다시피 사건 해결을 부탁한다는 식으로요. 두 번이나 유괴당하는 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일인데 왜 살리지 않았을까요?

또 주인공 공길용 형사(김윤석 분)의 캐릭터도 전형적이라 지루했습니다. 여러모로 그간의 김윤석 캐릭터, 그 외 형사물 주인공들과 상당 부분 겹쳐요. 현실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전혀 도사 같지 않았던 김중산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다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78년 당시를 충실히 구현한 화면은 상당한 볼거리였으며, 수사물로서도 몇몇 장면은 괜찮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극 초반 공길용 형사가 '극비 수사'를 주장하며 범인에게 경찰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최대한 감추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네요. 덧붙이자면, 담배 피는 장면에서 담배에 모자이크를 한 방송국의 행태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거 좀 가린다고 뭔지 모를 것도 아닐 텐데,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2023/11/10

소년 a 살인사건 - 이누즈카 리히토 / 김은모 : 별점 1.5점

소년A 살인사건 - 2점
이누즈카 리히토 지음, 김은모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년 전, 아홉 살 소녀가 살해당한 뒤 안구가 적출당하는 영상이 다크 웹 경매에 올라왔다. 경시청은 영상을 유출한게 경찰 내부 인력이라 생각해서, 감찰부 시라이시 계장에게 조사를 명령했다.
한편 영상 판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당시 미성년자로 간단한 처벌을 받고 풀려났던 범인 "소년 A", 오치아이 세이지의 주간지 인터뷰가 발표되었다. 오치아이가 판매한게 아니라는 기사였다. 하지만 여론은 나빠졌고, 인터넷을 통해 악당들을 사적 제재를 하는 자경단 운영자 야요이와 유튜버 료마 등은 오치아이 세이지의 현재 정체를 폭로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친구를 살해했던 미성년자 소년 A - 사카키바라 사건 말고 다른 사건입니다 - 가 번듯한 변호사가 되었다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소설.
기본적으로는 복수극이지만, "방황하는 칼날"과 똑같이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미성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 옳은지와 사적 제재가 과연 합당한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일종의 사회파 소설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극적인 실화 소재라는 것 외에는 건질 부분이 없습니다. 기본 전개부터 엉망이거든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야요이는 소년 A에게 살해당했던 소녀 미쓰키의 어머니였습니다. 소년 A의 정체를 까발린건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소년 A가 그냥 히키코모리처럼 살고 있었다면 복수가 될 수 없으니 야요이는 자살한 뒤 소년 A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조작을 추가로 벌였습니다. 
하지만 소년 A인 히토쓰바시는 정체가 드러난 탓에 모든걸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습니다. 아요이가 죽기까지 하면서 누명을 씌울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누명을 씌우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히토쓰바시가 범인임이 뻔한 상황에서 야요이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복수를 위해서라고 해도 억지스럽습니다. 히토쓰바시 입장에서는 복수의 대상은 료마니까요. 변호사라면 법적으로 해결했을 거에요. 
동영상이 있고 없고는 정체가 이미 까발려진 히토쓰바시의 현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동영상 원본을 구하러 옛 사건 장소에 찾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소년 A 사건을 다시 세간의 화제로 만들기 위해 야요이가 다크 웹에 딸이 죽을 때의 동영상을 경매에 올린 것도 부모 입장으로는 납득하기 힘듭니다. 딸이 죽는 장면을 복수에 이용한다는건 말도 안되며, 괜히 경찰의 눈길만 끈 셈이 되어버렸거든요. 동영상이 진짜일까 필요도 없었고요. 게다가 세간에 조금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료마나 에리코와 같은 협력자가 야요이를 도운 것도 여론 때문은 아니었지요. 물론 덕분에 히토쓰바시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결정적 계기인 주간지와의 인터뷰가 진행되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료마의 부탁대로 주간지 편집장이 히토쓰바시에게 CD롬을 보낸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애송이 유튜버 말만 듣고 움직인다는 것도 석연치 않지만, 2020년대에 사서함으로 CD롬을 보낸다? 저 같으면 CD롬 안의 파일을 메일로 보내라고 했을 겁니다.

야요이가 완벽하게 신분을 세탁한 후 복수를 시작했다는 설정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신분을 유지한채 인터넷 자경단 사이트를 운영하면 안되는 이유부터 떠올리기 힘듭니다. 가족들에게 폐가 될까봐였다고 하는데, 딸이 죽은 뒤 아들은 소아 성애 범죄자가 되도록 방치했던 어머니가 할 말은 아니지요. 이렇게 앞 뒤가 안 맞도록 설정된 인물을 보는 것도 참 오랫만이에요. 하긴 별다른 재주도 없던 40대 아줌마 야요이가 인터넷 자경단 사이트의 운영자가 되어 하나의 세력을 만든다는 설정도 말이 안되신 마찬가지겠지요.
다른 등장인물들 설정도 어설습니다. 가출 고딩이 악당들 정체를 까발리는 특종을 선보이는 유튜버라던가 하는 식이거든요. 그 중에서도 시라이시 감찰 계장 설정은 최악입니다. 감찰 조사 자체가 너무 어설퍼요. 시라이시와 그의 팀은 관계자를 찾아가 증언을 들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식으로 수사를 진행하는데, 왜 이렇게 수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서류 조사부터 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예를 들어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형사가 원래는 미마 무네키 경위였고, 그가 비디오 테이프를 반출했었다는건 가장 기본적인 증거물 출납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마 무네키 경위에 관련된 자료들을 미리 조사하지 않은 탓에 그의 행적을 놓치고 맙니다. 발로 뛰는 수사를 한다면 범인이라도 잘 잡아야 할텐데 그렇지도 못해요. 중요 참고인인 이토 유키오는 쉽게 도망갈 정도였지요. 
복싱 동작을 한 눈에 알아보는 등의 쓸데없는 지식은 과시하지만, 수사와 추리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료마와 시라이시가 엮이는 전개는 작위적인게 지나쳐서 짜증이 날 정도였고요.

이렇게 장점은 찾아보기 어렵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방황하는 칼날"보다 좋았던 점은 복수가 성공한다는 점 뿐입니다.

2023/08/16

리바운드 (2023) - 장항준 : 별점 3점


평이 좋길래 딸과 함께 넷플릭스로 감상한 작품.
약 10여년 전 부산 중앙고가 단 5명의 선수로 전국대회 결승에 올랐던 전설적인 실화를 당시 인물들 실명 그대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부산 중앙고의 신화는 당시 많은 농구팬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었고, "리얼 슬램덩크"라고 불리우며 많은 농구팬들이 영화화를 외쳤던 대사건이었지요. 고등학교 농구팀의 기적같은 승부를 다루었다는 점은 미국의 80년대 농구 영화 <<후지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알고 있을 분들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얼마 지나지 않은 실화라 그런지 <<퍼펙트 게임>>처럼 거슬릴 정도의 각색은 없습니다. 첫 공식 경기에서 사건을 일으켜 6개월 출장 정지를 받는건 영화에서의 창작이라 생각되지만,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강양현 감독과 선수들의 단결심을 강화하는 좋은 장치였다 생각됩니다.
농구 시합 장면도 박진감있게 펼쳐지는데, 전체적으로 잘 만들었더군요. 고등학생들 경기답게 현란한 기술보다 정해진 작전, 패스와 슛 위주라는 것도 현실적이었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작품에 흔히 있는 억지 눈물 짜내는 설정이 없다는 점, 그리고 농구를 가장한 연애물이 아니라는게 제일 좋았습니다. 농구부원이나 감독의 동년배 여성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농구는 즐겁고, 한 게임 더 하는게 너무 좋다!는 모토를 시종 일관 유지하면서, 유머와 함께 풀어나갈 뿐입니다. 비록 지기는 하지만, 모든걸 후외없이 불태우며 결승전 후반부를 앞두고 We are young OST와 함께 나아가는 중앙고 멤버들의 모습은 아래와 같이 패배가 아니라 꿈,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전형적이지만 그야말로 가슴 벅차게 만드는 청춘 찬가입니다.

그 외에도 중앙고 선수들 외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실명이 시합 중간중간에 언급되는 것도 재미를 더해 주었었습니다. 이어지는 후일담 소개도 좋았어요. 중앙고 6명의 선수 중 무려 4명이나 프로 구단에 지명을 받았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프로 선수로 뛰는 선수들은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농구를 즐겼으리라 생각됩니다.

허나 중앙고가 5명의 선수만으로 어떻게 전국대회 결승까지 진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건 단점입니다. 토너먼트 초, 중반까지는 상대 분석에 따른 작전이 선보이며 승리에 대한 설득력이 어느정도 부여되는데, 뒤로 가면 갈 수록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어쨌든 이겨서 좋다!" 입니다. 당시 기사나 자료를 찾아보면 전국구 장신 가드 천기범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묘사는 많지 않습니다.
뻔한 이야기라 그런지 반복되는 클리셰도 많습니다. 배규혁의 발목 부상 설정이 대표적이지요. 마지막에 배규혁이 덩크를 성공시킨 후 천기범과 하이파이브를 하는건 클리셰의 정점이고요. 그냥 봐도 슬램덩크의 강백호 - 서태웅의 하이파이브 장면을 떠오르게 하거든요. 그만큼 극적인 장면도 아닌데 꼭 이렇게 비슷하게 가져가야 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배규혁은 실제로는 3점이 전문인 샤프 슈터여서 캐릭터와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요.

그래도 즐겁고 유쾌했던 가족 스프츠 영화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흥행에서 별로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는데, 넷플릭스를 통해서라도 많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2024/06/01

계간 미스터리 2024 봄호 - 김태현 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봄호 - 4점
김태현 외 지음/나비클럽

정말 오랫만에 읽어보는 계간 미스터리입니다. 이전 리뷰는 2011년이니 강산이 변해도 벌써 한 번 이상 변했네요. 싼마이틱하지만 강렬한 표지 일러스트에 호기심이 동해 읽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리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예지 스타일이라는건 같은 미스터리 잡지"미스테리아"와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심지어는 특집 기획 르포르타쥬 기사인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마저도 소설 형식을 빌어 작성되어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인스타그램에서 주식 고수익을 인증하며 투자자를 끌어들인 뒤, 폰지 사기를 저지른 실화를 가명, 그리고 사건 핵심 관계자 시점의 묘사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수록 단편 6편 중 무려 5편이 한국 작가 작품이라는 것도 특징입니다. '한국 추리 문학의 본진'이라는 광고가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수록 단편 중에서는 세 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세 편에 대해 스포일러 가득 담아 짤막하게 감상을 남겨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신인상 수상작인 "사이버 니르바나 2092"입니다. 유명 연예인 강준기가 전뇌 합선으로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캐는 전직 경찰의 활약을 그린 SF 추리물이지요. 이미 죽은 강준기의 뇌를 회사, 매니저들이 이용해서 그동안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왔지만, 전뇌에 복수 접속하는 사고로 뇌가 타버렸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좋은 추리물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강준기는 전뇌화 수술을 받지 않은 인본주의 인물이었다는 정도의 단서로는 진상을 추리해내는게 독자에게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최신형 전뇌가 아니어서 과부하가 걸리면 타버린다는걸 독자는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안티 부디스트 시위, 전뇌, 전뇌 연결, 신체 임플란트 등 "공각 기동대"로 대표되는 사이버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어요. 저자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낭패불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는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흔하디 흔한 설정인데 1973년 박정희 유신 당시 경찰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니 굉장히 독특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이 피라미 노동자를 간첩이라며 고문, 심문하는데 알고보니 그 노동자가 취조하던 형사의 6.25 때 헤어진 동생이었다!'라는 극한의 딜레마도 흥미로왔습니다. 형은 여기서 동생임을 밝히고 노동자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러면 빨갱이 가족임이 드러나 출세길이 영영 막힐텐데? 아, 정말 쫄깃하더군요. 다만 노동자를 죽이고 말았다는 결론은 다소 식상했고, 악마가 끼어들 이야기였는지는 의문이기는 합니다. 뭔가 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억지스러운 악마의 등장보다는, 같은 역사 속 비극을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훨씬 깊은 울림을 주는 걸작인 김성종의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선례를 참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문센의 텐트에서"는 수록작 중 유일한 외국 단편입니다. 존 마틴 레이히의 작품이지요. 남극 탐험대가 미지의 괴생명체를 발견한 뒤 모두 죽고만다는 크리처 물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의 직속 선배라 할 수 있어요. 로버트 드럼골드와 대원들이 느끼는 공포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덕분에 몰입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미지의 괴생명체가 뭔지 제대로 묘사도 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별점은 4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 단연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특집 기사  "인스타그램 주식 여신"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흔히 보아왔던 범죄 이야기이기는 한데, '사기 감별사' 주제한이 범인 '여우비'의 사기를 간파한 방법은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화라서 설득력도 높고요. 
한국 미스터리를 키워드를 통해 분석한다는 신연재 "로컬리티와 미스터리"에서는 여러가지 주장 중 한국 소설의 공간 중 '시골'에 주목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역 주민의 텃세와 오지랖, 부조리한 규율이라는 시골적 배타성, 이른바 '부족주의'와 도시인의 충돌이 벌어지는 식으로 시골은 미스터리 무대로 흔히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도시인 기준이라는 주장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부족주의를 전형화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를 극복한 작품으로 황세연의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를 소개하는 것도 이채로왔고요. 이 작품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런 시선이 추리 비평에 필요하겠구나 싶더군요. 저도 한참 공부가 부족하다는걸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단편 세 편은 추리물로 보기 어렵거나, 달리 언급할 부분이 없는 범작 수준에 그친다는건 아쉬웠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는 '계간 미스터리'라는 명칭에 걸맞는 정통 추리물이 더 많이 수록되면 좋겠습니다.

2019/10/26

위작 X 미술시장 - 켄 페레니 / 이동천 : 별점 3점

위작 X 미술시장 - 6점 켄 페레니 지음, 이동천 옮김/라의눈

위작 전문가 켄 페레니의 자서전입니다. 1949년에 태어난 켄 페레니가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전성기 때 범죄자 토니 마사치오와 어울리며 예술가 톰 달리를 만나 예술에 눈을 뜨고, 판 메이헤른의 책을 읽고 위조를 시작한 뒤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위조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본인 스스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책은 기막히게 재미있습니다. 본인의 생생한 경험담들이 압권이기 때문입니다. '허구는 실화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맞는 말이에요. 톰 달리와 앤디 워홀, 유명 변호사 로이 콘, 유명 컬렉터 지미 리코, 피카소의 딸 팔로마 피카소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서 팩션같은 재미도 전해주고요.게다가 켄 페레니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은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이야기로 충분할 정도로 기승전결이 완벽한데, 이런 범죄들이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다는 볼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존하는 위조범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위조를 하면서 발전시키는 기술과 위조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어떤 젯소와 어떤 캔버스를 써서 어떻게 오래된 듯한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아낌없이 공개해주고 있으니까요. 공개해 봤자 어차피 따라하기는 힘든 영역이긴 하지만요.
대표적인 노하우는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 이런저런 공통 요소들을 조합한 패턴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아요. 그림에 흔히 보이는 작은 까만색 덩어리는 바니시의 당분에 끌린 집파리 싼 파리똥 축적물이라는게 좋은 예입니다.

초창기 켄이 영향을 받은 예술가인 톰 달리를 비롯하여 오드리 비어즐리, 제임스 엔서, 히로니뮈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브라이스 마든, 벤자민 웨스트를 비롯하여 지미의 영향으로 현대 미국 회화를 방대하게 위조할 때 연구했던 현대 미국 화가인 캐틀린, 찰스 버드 킹, 인먼, 존 F 피토, 라파엘 필, 존 F 프랜시스, 레비 웰스 프랜시스, 제임스 E 버터스워스, 안토니오 제이콥슨, 제임스 바드, 마틴 존슨 히드, 윌리엄 아이콘 워커, 안토니오 제이콥슨, 세베린 로센, 레비 웰스 프렌티스, 그리고 FBI의 추적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위조를 시작했을 때 손 대었던 영국 수렵파 화파 화가들인 조지 스터브스, 존 우턴, 존 프레드릭 헤링 주니어. 제임스 세이무어, 존 노스트 사토리우스, 토머스 스펜서, 존 프레드릭 헤링 시니어, 존 E 퍼넬리와 영국 해양화가인 토마스 휘트콤, 찰스 브루킹, 토마스 버터스워스, 니콜라스 캔디 등 실존 유명 화가들에 대한 언급도 상세합니다.

이런 오랜 연구와 위조 과정을 거치며 가면 갈 수록 실력이 늘어서 1993년 마틴 존슨 히드의 "브라질의 보배" 위작은 경매에서 판매되었다는 기사가 '런던 타임즈'에도 실리고, 1994년 그린 최고의 위작인 히드의 "팻 보이"는 모든 전문가의 감정까지 통과하여 무려 71만 달러에 경매에서 판매되기까지 합니다. 마침내는 그가 가공의 화가를 내세워 그린 작품들, 심지어 위작가 켄 페레니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이 정도면 위작계의 미켈란젤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네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켄 페레니가 저지른 범죄 들은 위조 관련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도, 사기 행각이며 별로 치밀하지도 않은 즉흥적인 범죄가 많습니다. 사회 통념과 정의를 깨트리는 파격이라는 재미로 보기에는 단순히 '돈'을 노리고 저지른 단순 범죄에 불과하고요.
켄 페레니가 '천재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 거리의 잡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 역시 당연하지만 썩 개운하지 않았어요. 이런 인간이 잘난척 떠벌이는 무용담을 수백 페이지나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인생이 너무 잘 풀립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 의해 인생이 바뀌고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탓입니다. 실화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소설이라면 이렇게 쓰면 욕을 먹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에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위조, 위작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면 도판이 보다 충실한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번역도 오타가 많아서 불만스러워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자서전이자 논픽션임에는 분명합니다. 켄 페레니가 동네 잡범이라도 최소한 위작 계에서의 위치는 인정해 줄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위조와 위작 사기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04/09

MIT 수학천재들의 카지노 무너뜨리기 - 벤 메즈리치 / 황해선 : 별점 3점

MIT 수학천재들의 카지노 무너뜨리기 - 6점
벤 메즈리치 지음, 황해선 옮김/자음과모음
3학년이 된 MIT 전기공학도 케빈은 같은 학교를 중퇴한 피셔와 마르티네즈에 이끌려 ‘동부의 라스베가스’ 애틀랜틱시티로 첫 원정 도박에 따라 나선다. 짧은 시간에 800달러를 딴 것은 우연한 불행의 단초가 아니라, 그를 도박판에 끌어들이려는 치명적 유혹이었다. 
블랙잭 비밀 조직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데다 ‘중국계’라는 자격 요건을 갖춘 그를 발탁한다. '동양계 큰 손'이 도박장에서 오히려 어색하지 않다는, 인종적 선입견마저도 철저히 계산에 넣은 것. 조직은 블랙잭의 모든 것을 학구적으로 파헤쳤고, 조직원들은 리더인 MIT 퇴직 교수 로사를 사교(邪敎)집단 교주처럼 숭배했다. 케빈은 카지노를 유린하는 체계적 분업인 '스포터(spotter)', '고릴라', '빅 플레이어' 같은 도박사 수련 단계를 밟아 최고 지위에 오른다. 

평일엔 캠퍼스 모범생, 주말엔 욕망의 천국 라스베가스의 승부사로 위태로운 두 겹의 생활은 짧은 기간 전업(專業) 갬블러 생활을 했지만, 졸업 후 시카고 투자은행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 되었다. 변장하고 가명을 쓰거나 어리숙한 척 연기하는 일은 일상이 됐다. 한판 수입 40만달러, 수익률 80% 

이후 조직은 '공룡'으로 커가면서 내홍을 겪고, 케빈을 끌어들였던 피셔가 앞장서 은사인 로사 교수로부터 '젊은 세대의 독립'을 선언한다. "도박사가 해야 할 가장 중대한 결정은 떠나야 할 때를 결정하는 것일세…" 자신이 최저점에 위치해 있다는 승부처에서의 자기 합리화가 중대 결심을 미루게 한다는, 피셔의 고별사가 복선(伏線)으로 깔린다. 

승승장구하던 새 팀에게 그림자 같은 미행이 뒤따른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것을 도박사로서의 덕목으로 강요하는 라스베가스의 불문율 탓에, 팀은 시카고나 슈리브포트(루이지애나)로 활동 공간(카지노)을 넓히고 철저한 준비로 라스베이거스를 역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옹성' 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은 라스베이거스가 고용한 사립 탐정들의 추격과 보복, 그리고 단 25,000달러에 조직의 비밀을 판 배신자 때문에 피 끓는 20대의 5년을 불살랐던 라스베이거스. 1년에 20번 왕복하며 매주말 40시간, 시간당 60판, 모두 4만8000번의 피 말리는 승부를 치렀던 케빈의 삶은 라스베가스를 떠나 벤처기업에 취직함으로써 현실로 돌아온다.
블랙잭(숫자 합계가 17~21 사이에서 높은 패를 쥔 쪽이 승리하는 딜러와의 1대1게임)의 허점을 공략하는 묘수인 '카드 카운팅(card counting)'으로 1990년대 중 후반에 실제로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수백만 달러를 땄다는 MIT 출신 천재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비교적 자세하게 쓰여진 카드 카운팅 방법이 가장 인상적으로 실제로 도전의식(?)을 불태우더군요. 낮은 점수의 카드를 +1, 높은 점수의 카드를 -1로 하여 그 숫자를 순간적으로 더해서 지수가 높아질 때 판에 뛰어들어 딜러와 승부한다는 것이 기본 개념입니다. 그 때가 높은 점수 카드가 많이 남았을 때라는 거죠. 그 외에도 순간적으로 여러명의 카드를 분석하여 계산한다던가, 카드 셔플 시 특정 카드의 위치와 순서를 추적한다던가, 팀을 여러 명으로 나누어 운영함으로써 카드 카운팅의 위험을 최소화 하는 방법 등의 여러가지 노하우까지 공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수학적인 게임이라는 블랙잭, 펼쳐진 카드로 다음에 나올 카드를 예상할 수 있다는 확률의 법칙이 수학 천재들에 의해 분석되었기에 거의 완벽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카지노 측이 더 현명하여 자동으로 카드를 섞는 기계나 여러 감시 장치의 도입으로 이러한 방법에 따른 위험을 줄이고, 카드 카운터를 세심하게 적발하는 등 몰락의 과정도 충실히 묘사됩니다. 실제로 불법도 아니고 단지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을 뿐인 천재들에게 카지노가 가한 응징은 좀 무자비하더군요. 물론 그들의 파워..를 막기에는 멤버들의 힘이 너무나 미약했던 탓이 크겠지만요.

이런 류의 책 치고는 나름대로 교훈적이기도 한데, 보안회사에 인터뷰 차 찾아간 케빈이 카드 카운팅의 우월성을 입증하며 카지노를 나서는 마지막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제 도박은 하지 않고 그동안 잃어 왔던 것을 되찾기 위해 애쓰지만 한편으로는 카드 카운터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인데 과연 케빈은 도박의 유혹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찾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여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설득력도 높이 평가할만 하고 꽤 재미있게 읽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수학과 도박, 확률 이론에 관심있으신 분들께서는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덧 : 하나 못 마땅한 것은 카지노에서 큰 금액을 베팅하는 인물은 “동양인” 이라고 하는 설정이더군요. 한국계 가명도 당연히 등장하고요. 졸부 아들들이 얼마나 돈을 흥청망청 써대길래…

2020/10/11

개의 힘 1,2 - 돈 윈슬로 / 김경숙 : 별점 2.5점

개의 힘 1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개의 힘 2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 윈슬로의 대장편 범죄 소설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 해외편 무려 2위로 선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두던 책입니다. 하지만 1, 2권 합쳐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기가 죽어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추석 연휴 집콕 동안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읽히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약 단속 국장 아트 켈러,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파트론 아단 바레라의 20여년에 걸친 악연과 대결을 그리는데, 실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각색했습니다. 여러 카르텔, 여러 보스가 얽힌 이야기를 바레라 가족 중심으로 풀어내었을 뿐입니다.

우선 작품 내에서 콘도르 작전 당시 마리화나 재배지가 초토화되고, 당시 보스였던 돈 페드로의 사망, 뒤이어 티오 미겔 앙헬 바레라가 사업을 코카인 운송으로 바꾸며 조직 보스인 파트론이 되면서 조직을 3개로 나누는 건, 실제로 시날로아 카르텔이 아마도를 보스로 하는 후아레스 카르텔, 아레나요가 보스인 티후아나 카르텔, 그리고 엘차포가 보스인 시날로아 카르텔로 분리된 역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여기에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이 생산한 코카인 유통을 도맡게 된 걸프 카르텔이 급성장하여 4대 조직이 되는데, 작품에서는 티오의 조카 아단 바레라가 지능적인 코카인 유통 혁신을 통해 카르텔 실권을 손에 쥐는 모습으로 그려지고요. 1985년 미국 요원 키키 카마레나 고문 살해 사건도 작품 안에서 어니 요원이 납치되어 고문받다가 살해되는 이야기로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아단, 라울 바레라 형제와 게로 멘데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항쟁은 시날로아 카르텔 보스 엘차포와 티후아나 카르텔 보스 아레나요 형제 간에 실제로 벌어졌던 전쟁을 거의 그대로 따 왔습니다. 대표적인게 아레나요 형제가 잘생긴 킬러 클라벨을 시켜서 시날로아 카르텔 2인자 엘구에로의 아내 레이하를 유혹하게 만든 겁니다. 레이하는 유혹에 넘어가 클라벨, 어린 아들, 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클라벨에게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그 뒤 엘구에로는 레이하의 목과 아들, 딸이 다리에서 내던져지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받게 되지요.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만 바뀐 채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아단 바레라가 사주한 킬러 파비안이 게로 멘데스의 아내 필라르를 유혹한 뒤 그녀와 아이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로요.

작품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후안 신부 살해 사건 - 공항에서 바레라에게 살해당하지만, 바레라와 게로 멘데스간 전쟁에 휘말려 죽은걸로 처리되는 - 도 아레나요 형제와 엘차포 간 총격전에서 티후아나 대교구장 포사다스 오캄포 추기경이 휘말려 사살된 사건과 똑같습니다. 작품에서는 후안 신부가 멕시코 정부와 여러 관계자가 마약 조직과 관계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살해된 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실제로 오캄포 추기경 역시 티후아나 카르텔과 살리나스 대통령간 결탁에 대해 폭로하려다 살해된 걸로 알려졌지요. 게로 멘데스가 성형 수술을 받고 모습을 바꾸어 재기하려다가 아단 바레라 측 킬러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도, 후아레스 카르텔 보스 아마도가 1997년 성형수슬을 받다가 사망한 역사를 따 온 듯 하고요.

NAFTA 이후 멕시코 경제가 파탄나고, 마약 사범들이 나라를 거덜내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실제 카르텔간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엘차포는 체포된 뒤 멕시코 감옥에서 7년여간 편안하게 수감생활을 하다가 탈옥했다는 정도입니다. 작품에서 아단 바레라는 미국 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연방 감옥에서 복역하는 결말이거든요.
그 외의 모든 디테일들, 예를 들어 은이냐 납이냐, 코카 콜라냐 펩시 콜라냐와 같은 협박 문구라던가, 마약 수송용 지하 땅굴, 대형 여객기 수송 등도 모두 실제 조직 이야기에서 따 왔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렇게 실제 마약 카르텔 이야기를 극화했기 때문에 설득력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럴거면 아트 켈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구태여 소설로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마약 전쟁 이야기 외의 이야기는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바레라를 뒤쫓는 아트 켈러 이야기만 해도 간단한 도청, 정보원에 의지할 뿐이고 기껏 티오와 아단을 체포해봤자 모두들 기가 막히게 빠져나가는 탓에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니까요.
또 소설로 만들면서 추가된 요소들도 거의 대부분 지루하고 뻔합니다. 이런 마약 전쟁의 뒷 배경에 중남미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걸 경계한 미국의 자금 투입과 원조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그랬으리라 짐작되는 설득력있는 설정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식상하지요. '케르베로스'. '레드 미스트' 운운하며 뭔가 있어보이게끔 노력은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 흔히 보아왔던, 미국이 돈을 주고 키워낸 용병단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CIA 국장 존 홉스가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은폐하려고 난리를 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미국은 이미 그 이상의 추문을 수도 없이 들켰잖아요.
또 이 설정이 사실이라면, 아단 바레라가 콜롬비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댓가로 마약을 손에 넣으려는건, 파멸의 지름길에 발을 담근 셈입니다. 구태여 들쑤셔서 체포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울러 어차피 미국이 돈을 대지 않아도, 바레라 가문이 멸족해 버려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누군가 권력을 잡고 마약을 여전히 유통할 겁니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요. 흑막이니, 음모니 하는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후안 신부와 유일하게 정의로운 멕시코 폭력 경찰 라모스 정도만 독특함과 생생함이 느껴질 뿐,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며 단순한 탓입니다. 특히 실제 인물을 따오지 않은 창작 캐릭터들 문제가 심각해요. 고급 매춘부 노라를 한 번 볼까요? 그녀는 멕시코 대 지진 때 '우연히' 알게 된 후안 신부와 친분을 맺습니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아단의 정부가 되는데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된 뒤, 여러가지 정보를 아트에게 제공한다는 설정입니다. 아단이 노라에게서 푹 빠져서 온갖 사업상 기밀을 전해주고, 심지어 사업 이야기에 동참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노라 설정에만도 우연이 여러개 겹쳐있지만, 티오와 게로 멘데스, 아단 바레라 모두 여자에게 푹 빠져서 파멸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일랜드 낭만 킬러 칼란도 한 번 볼까요? 그는 우연히 킬러가 된 뒤, 멕시코에서 아단의 목숨을 '우연히' 구해주고, 아단과 게로 멘데스 전쟁에 끼어들어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되는걸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 뒤 '우연히' 받은 청부로 정보원이 된 노라를 보호하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에요. 마지막에는 아트를 죽이는 킬러로 고용되었다가 노라의 진심을 알고 고용주들을 쓸어버리고요. 이렇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거라면 솔직히 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게다가 칼란도 그렇고, 엘 티부론 파비안도 그렇고, 청소년 때 이미 타고난 킬러라는게 증명되었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수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애송이들인데 말이지요.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어야 할 아트 켈러도 이런 류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마약 전쟁에 대한 사명감으로 가족을 저버리고 일에 몰두한다는 설정인데, 별다른 매력이나 특이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노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정도만이 의외였어요. CIA 국장 존 홉스와 그의 오른팔인 인간 백정 군인 살 스카키 이런 작품에 나오는 악덕 CIA 국장과 그 부하와 전혀 다를 바 없어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지만 실화에 끼얹은 부분이 대부분 기대 이하, 함량 미달이라는 감점합니다. 흔하디 흔한 미국 음모론과 헐리우드식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각에 존재하는 높은 평가를 이해하기는 힘드네요. 이 작품보다 실화 논픽션이 훨씬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일종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엘차요와 '라 파밀라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돈을 위해 살인하지 않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지만, 죽어 마땅한 놈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만들지만 절대로 마을과 멕시코 내부에는 판매하지 않고 미국에만 판다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기묘한 세력이거든요.

2020/09/12

괴담의 테이프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괴담의 테이프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미쓰다 신조)는 편집자 도키토 미나미로부터 녹음된 괴이담을 기초로 한 단편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녹음한 카세트나 MD는 많아도 대부분 써먹기 힘든 탓에 거절했지만, 도키토 미나미는 자기가 듣고 소재를 찾아보겠다며 카세트와 MD를 빌려갔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작품이 "빈 집을 지키던 밤"이었다. 

도키토는 후속 작품도 정기적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연작 단편 구성을 취하기 위해 실제 괴담을 겪은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고 쓴 글이라는 머릿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도키토는 녹취를 시작한 이후, 기묘한 걸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마시던 홍차 속 기묘한 반원형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나날이 바뀌어 결국 작은 사람의 모습이 되었고, 도키토는 이후 홍차 마시기를 그만두었다. 이외에도 샤워할 때 빗소리가 들리는 등의 괴이 현상이 그녀 옆에서 계속 일어나자 나는 그녀에게 녹취를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

작품 연재를 마무리한 나는, 도토키 미나미로 부터 회수한 MD와 카세트 중에서 예전에 듣다가 무서워진 나머지 꽁꽁 봉해놓고 처분했던 기류 마사히코의 카세트를 다시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카세트를 듣다가 그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괴기 현상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실제 사연들을 소설화 했다는 설정의 생활 괴담 단편들이 미쓰다 신조가 괴담 단편을 창작하는 과정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가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또 저자의 '작가 시리즈'와 유사하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처럼 쓰여진 덕분에 실제감, 현실감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작품은 논픽션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야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도 빼어나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쓰다 신조 장편이 두께 때문에 손대기 어려우셨던 분들이라면, 이 책으로 발을 들여놓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 

나 (미쓰다 신조)는 자살 명소에 대한 글을 의뢰하기 위해 프리랜서 작가 기류 요시히코를 만났다. "호러 재피니스크 총서" 기획 때문이었다. 기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테이프를 여러개 가지고 있다며, 그 테이프 녹취를 출간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3개월 뒤, 기류는 3개의 테이프를 듣고 기록한 샘플 원고를 보내 오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생함입니다. 특히 진짜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듯한, 생생한 테이프 녹취가 아주 일품이에요. 그 처절한 죽음의 순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섬찟합니다. 생생함은 미쓰다 신조 1인칭으로 쓰여지고, 미쓰다 신조의 과거 펀집자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낸 덕분이기도 합니다. "붉은 눈"에 수록되었던 1인칭 괴담과 같은 계열이지요.

또 3개의 괴담 테이프 녹취 중 앞의 2개는 호텔에서 목을 매거나, 자동차로 절벽을 향하는 등 일반적인 자살에 대한 단순한 녹취이지만, 마지막 녹취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류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고, 미쓰다 신조가 기류의 테이프를 잠시 틀어보고는 바로 봉인해 버리는 결말이지요.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은 듯 하지만 기류는 죽었고, 기류가 녹음한 테이프는 누군가 회수해서 미쓰다 신조에게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받은 사람이 듣기를 원했을테고요. 즉, "링"과 같은 일종의 저주, 죽음의 연쇄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로서의 얼개는 갖춰진 셈이지요. (*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이야기에서 어느정도는 비슷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입니다.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가 1인칭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생생함도 대단했고요. 무서워야 한다는 괴담의 조건도 아주 잘 충족하고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빈집을 지키던 밤"

마이코는 대학 문예부 선배 오다기리로부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젊은 부부가 백모와 함께 살고 있는 시골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부부가 집을 비운 동안 백모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아르바이트 내용이 소개되는 시작부터 흥미를 잡아 끕니다. 여대생이 선뜻 수락하기에는 너무 수상한 아르바이트잖아요? 역에서 저택까지 거리도 멀고, 인기척도 없는 곳에 홀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다니, 이래서야 바로 납치되어 이상한 비디오 주인공이 되는 전개도 어색하지 않죠. 당연히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마이코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겨우 탈출한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뻔한 설정과 전개임에도 여러가지 복선과 디테일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택에 대한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아치 장식 등을 통해 위화감과 뒤틀림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하여튼, 미쓰다 신조의 무서운 집 묘사는 정말이지 최고에요.
또 저택에서 느낀 위화감과 뒤틀림을 젊은 부부에게서도 느끼게 된다는 연계도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가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백모님을 숭배하고 있으며, 백모님은 낯선 사람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집을 지킬 때 백모님이 계신 3층에는 올라가지 말아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백모님은 이미 죽었으며 남편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아, 정말 섬찟합니다.

단순한 체험 괴담이 아니라 한 편의 완성된 소설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3층에 있던건 백모님이 아니라 젊은 남편 미쓰노부였으며, 그가 이전 아르바이트 생들을 살해했다는 명확한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말에 앞서 마이코는 팔 다리가 길었고, 저택 근처에서 양팔만 잘라 가슴께에 평행하게 올려놓은 기묘한 토막 살인 사체가 발견되었었고, 부부가 저택 안을 오갈 때에 복도 한 가운데로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등의 복선과 단서를 통해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앞서 위화감을 느꼈던 아치는 '도리이'이며, 도리이 아래 길은 신이 지나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백모의 방과 통해 있다, 사체의 토막은 도리이를 나타내고, 그래서 긴 다리를 지닌 피해자가 필요했다... 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니까요.

젊은 부부의 광기, 백모님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미쓰노부가 살인마라는 반전은 뻔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호러, 공포 소설로 나무랄데 없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우연히 모인 네 사람"

오쿠아먀 가쓰야는 가쿠 마사노부의 하이킹 계획에 동참했는데 정작 가쿠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쿠야마가 리더가 되어 하이킹을 이끌어 달라는 휴대전화의 부재 중 메시지 탓에 가쓰야는 모르는 세 사람과 하이킹을 떠나는데...

네가히산이 실존하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를 보는 듯한 상세한 묘사도 좋고, 가쿠씨가 오지 못한 이유로 불안이 쌓여가는 전개도 멋집니다. 가쿠씨가 보낸 메시지 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서서히 하나씩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하이킹을 일렬로 가야 하는 상황도 불안하고요. 그러다가 숨겨진 길로 발을 들이는건 그야말로 화룡정점입니다. 알 수 없이 무서운 공간에 대한 묘사도 좋지만, 길에 남아있는 발자국 오른쪽보다 왼 쪽이 더 먼저 찍힌것으로 보인다는 묘사가 아주 기가 막혔어요. 방 구석에 있는 사람을 차례로 터치하는 게임처럼, 가쿠가 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특급 열차에 네 명이 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의심을 품는 장면도 오싹합니다. 가쿠가 오지 못한다는건 미리 알지 못했다면, 표가 모자랐을테니까요!

하지만 괴이한 존재였던 이마이 쇼조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쿠는 어떻게 되었는지, 산에서 주은 계란돌은 무엇인지 등 수수께끼만 남긴채 이야기는 마무리되기에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생생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었습니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

'나'에게 중학교 동창 K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는 기묘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던 요양병동에서는 밤마다 희미한 비명 소리나 남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 이어 입원한 노인 로쿠바 히로는 K의 뒤에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거의 정신을 잃은 노인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이야기를 모아 놓았더니 무서운 이야기였더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습니다. 로쿠바 히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는 그야말로 엄청나고요.

로쿠바 히로 노인의 이야기를 설명드리자면,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다른 가족들이 다치거나 상황이 어려워 부의금을 가지고 상가에 혼자 방문하게 된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소년은 출발 전 할머니와 함께 한 곳쿠리님에서 '시체와 함께 자지 마라'는 계시를 받죠. 그러나 기차에서 소년은 이상한 노인을 만나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서 잠을 깨고,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의 부고를 받는다... 는 루프물입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운 요소는 없어요. '나'를 통해서 노인의 괴이한 행동은 노인이 젊은 아이의 몸을 빼앗는 과정이라 설명되는데 이 역시도 뻔한 설정입니다. 또 이야기만 놓고 보면 K에게 시카바네 히로(로쿠바 히로)가 뒤집어 씌여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쿠바 히로가 한 말 중 '휴대'와 '뉴루우스'라는 말 뜻을 몰라 궁금해 하는 장면이 있어서 충격적인 진상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도 전혀 없어서 실망스러웠고요.

흥미로운 설정이었고, 전개도 대단했지만 결과물은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아쉽습니다.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내었더라면 분명 걸작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

잡지의 편집자인 '나'는 점성술사 취재를 하다가, 그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냐는 질문에 절대로 답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답을 알려준 적이 있다는 점성술사에게 '나'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단 사토루와 '기우메' 이야기로 답해 주었다.

기우메는 사토루 자취방에서 학교 통학로에서 목격된,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과 레인코트, 장화, 우천용 모자를 노란색으로 전부 갖춰입은 여자였다. 사토루는 어느 날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선배의 조언으로 기우메를 무시했다. 그리고 여름 방학, 점성술사는 사토루와 헤어져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며 편지로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사토루의 마지막 편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기우메가 수로에 휩쓸려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사토루의 자취방을 찾아간 점성술사는 빈 방에서 쓰다만 편지를 읽었다. 사토루가 기우메의 시체를 발견하기까지 했지만, 계속 기우메를 통학로에서 목격했는데 그녀가 볼 때마다 점점 자취방으로 다가왔으며 마지막에는 폭우와 함께 문을 두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토루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초반에 비중있게 설명되는 '나'가 과거 고교 시절 겪었던 기묘한 유령 체험은 본 편인 기우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점성술사의 기우메 이야기도 그녀가 왜 죽을 날을 손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지와 크게 관련이 없고요. 괜히 이야기만 두서없이 전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기우메 이야기는 충분히 무섭기는 했습니다. 괴이한 무언가를 눈치챈 후 '그것'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온다는걸 알게되는 이야기는 몇 편 읽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말이지요.

실화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

도쿄에서 직장에 다니며 혼자 사는 유나는 어느날 집을 나서다가 문 앞에 꽃이 꽂혀 있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져 있는걸 발견했다. 그 뒤 유나는 출근길에서 검은 이상한 형체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형체는 출근길을 거슬러 점점 유나의 집으로 다가왔고, 유나는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검은 형체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었던게 아닌가 싶어 공포에 떨었다.

드디어 어느 월요일 아침, 유나의 집 앞에 검은 형체가 도착해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도움을 요청한 친구 히나타가 도착하자 이상한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후 히나타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 기우메와 비슷하게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대한 괴담입니다. 마지막 유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 히나타에게 무언가 씌워진다는 결말은 상당히 오싹합니다. 이전 작품과 유사하기는 한데, 정확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애매한 공포라서 실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차별화 요소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왜 유나의 집 앞에 그것이 다가오는지, 대체 그건 무엇인지 등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기는 합니다. 유나의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건널목 근처 사고 현장에 놓여진 공양물이었고,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이를 가져다 유나의 집 앞에 놓았기 때문에 원령이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식의 추리가 살짝 등장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작은 유리병과 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유나의 집 앞에 놓여 있는지도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기승전결은 있고, 오싹한 맛도 괜찮았습니다.

2009/03/27

천사의 나이프 - 야쿠마루 가쿠 / 김수현 : 별점 3점

천사의 나이프 - 6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황금가지

커피숍 점장 히야마 다카시는 4년 전 13세 미만 소년 강도들에게 아내가 살해당해 어린 딸과 살아가는 싱글대디이다. 당시 소년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경미한 처벌에 그쳤고, 히야마는 TV 를 통해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속마음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소년 강도들이 차례로 살해당하자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히야마는 누명을 벗고 당시 사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그리고 소년범들에 대해 알기 위해 스스로 사건의 조사에 뛰어드는데...


이 책은 5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번 이글루스 렛츠 리뷰에 당첨되어 읽게 된 책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란포상 수상작은 반정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었을 뿐 아니라 이 작품은 제목과 작가가 생소해서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절대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네요. 정말이지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극과 연관되어 펼쳐지는 과정도 괜찮았을 뿐 아니라, "소년범죄"를 소재로 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솜씨가 제법이라 감탄했습니다. 소년들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과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는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이나 소설 "소년탐정 김전일" 등에서 읽었던 것과 좀 유사하긴 한데 나름 합리적으로 잘 포장해서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앞부분의 만화경이나 저금통장의 출금액 같은 사소한 단서를 복선으로 잘 포장해서 결말로 이끌어내는 부분과 마지막 반전 부분에서는 정교함도 엿보였고요. 얼마전 TV에서 실제 일본에서의 한 소년범죄의 실존 인물이 이후 변호사로 성공했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이 같은 해당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부분도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소년범죄"라는 것에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좋은 점이겠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촉법소년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형사책임무능력자 - 은 조사해 보니 국내에서도 소년법에 따른 보호 처분을 받는다고 하네요. 국내에서도 이 소설에서처럼 피해자를 무시한채 소년들의 인권을 고려한 처벌을 내리는 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소설에서의 소년들에 대한 처벌과 그 결과는 정말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충격적이긴 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게, "계획범죄" 라도 아이들은 보호를 받나요? 어쨌건 이 이야기대로라면 아이들에게 거금을 주고 살인을 청부하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만 하겠더라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쉬움도 있긴 합니다. 솔직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의 구조가 일직선이기도 해서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으며, 범죄의 동기 자체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과정과 결과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죠. 특히 야기라는 범인이 히야마에게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 너무 억지를 부린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더군요. "사회파 추리소설" 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기는 한데 그냥 "사회파" 소설이랄까요...

아울러 소년범죄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덕분에 메시지 전달은 더 강하게 이루어지지만, 이 범죄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는 설정은 너무 지나쳤어요... 작가의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좀 덜어내는 것이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울러 결말도 너무 급작스럽게 끝나버려서 좀 맥이 빠지는 감이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서둘러 대충 마무리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추리 매니아로 평가하기에는 추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누가 읽어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1급 쟝르 문학이라는 것은 확실하니까요. 개인적인 별점은 3점이지만 재미만 놓고 따진다면 4점을 줘도 아깝지 않은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재미난 작품이 사회적 메시지까지 확실하게 담고 있으니 란포상을 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싶더군요. 추리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에 국내 쟝르문학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PS : 좋은 독서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이글루스와 황금가지 관계자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05/09/27

라간 (Lagaan: Once Upon A Time In India)- 2001, 아슈토쉬 고와리커 : 별점 2.5점

"저 흰둥이들을 박살내 버리라구!" - 영주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1800년대 인도의 어느 조그마한 마을. 가뭄이 길어져 라간 (세금)을 두 배로 올리겠다는 영주에게 마을 촌장과 주민 대표들이 찾아가 선처를 부탁한다. 하지만 거만한 영국장교 러셀대위가 그들에게 크리켓 게임을 해서 그들이 이길 경우 3년간 라간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는 내기를 제안한다. 마을 청년 부반이 이 승부에 응하고 지루한 설득과 노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크리켓을 연습하기 시작하며 부반에게 호감을 가진 영국 장교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이들을 돕는다. 시합까지는 3개월. 과연 승부는 어떻게 될까?


TV에서 보게된 인도 발리우드 영화입니다. 처음에 별 생각없이 봤는데 의외로 진지한 스포츠물이라 몰입해서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예전에 정말 낯설게 보았던 "춤추는 무뚜"보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적 문법이 더욱 많이 도입된 편이라 크게 어려움없이 볼 수 있었다 생각되네요.
억압받는 식민지 주민들이 스포츠를 통해 승리와 환희를 느낀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많이 있어왔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는 특히나 우리나라 영화 "YMCA야구단"이 많이 연상되더군요. 하나씩 팀원을 모아가는 과정, 경기 규칙을 가르치는 미녀라는 설정이나 천민과 상위 계급이 대립하지만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장면 같은 것은 정말 똑같다고 보이거든요. 시기상 "YMCA..."쪽이 많이 참고하지 않았나 생각도 되지만 "YMCA..."도 어느정도 실화에 근거한 만큼 유사한 설정에서 오는 공감대가 비슷한게 많았다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어느나라나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가봐요^^

발리우드 영화답게 중간중간 음악과 춤을 곁들인 뮤지컬 장면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흥겨움을 더해주고요. 개인적으로는 부반과 카오리, 엘리자베스 3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사랑의 세레나데 장면의 편집과 촬영은 베스트로 꼽고 싶군요.

아쉽게도 제가 크리켓을 잘 알지 못해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인 크리켓 시합 장면에서의 몰입이 초반에 약간 힘들었지만 보면서 어느정도 룰도 깨우쳐 가니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인들은 크리켓을 "즐기지만" 주민들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완성도와 가치를 더욱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부반역의 아미르 칸은 현재 인도 최고의 스타라는데 그에 걸맞는 마스크와 완벽한 눈빛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에 힘을 더 실어줍니다. 다른 조연들의 개성넘치는 연기도 물론 좋고요.

엘리자베스와 부반의 사랑 이야기는 지나친 사족이라 생각되고 거의 4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은 지나치게 길어 중간중간 조금 지루하기도 했었지만 특이하고 이색적인, 이국적인 문화에 더불어 정통 스포츠물로의 가치까지 있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던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별점은 2.5점입니다.

2025/12/28

2025 블로그 리뷰 결산 (스물 두 번째!)

안녕하세요. 어제의 "어차피 곧 죽을텐데"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고, 올해 결산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요새 이런저런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리캡에 편승한건 아닙니다. 제 블로그 연말 결산은 이번이 스물 두 번째이니까요. 

간략한 블로그 통계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독서 결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읽은 총 책 권수는 82권입니다.

  • 추리 / 호러: 48권
  • 기타: 14권
  • 역사서: 9권
  • 디자인/스터디 : 1권
  • 기타 장르문학: 5권
  • Food / 구루메: 5권

독서량이 작년(110권)에 비하면 30% 가까이 대폭 줄었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감상이 늘은 탓입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걸 선택하게 되네요. 추리 소설은 왠만한 작품으로는 신선함이나 재미를 찾기도 좀 어려웠고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지요.

그래도 1년에 100권은 읽어야 책 좀 읽는다고 할 수 있으니, 내년에는 좀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입니다.


1. 추리 / 호러

베스트: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별점 3.5
-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함이 인상적이다.

올해 별점 3.5점을 줬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오가와 사토시의 "신의 퀴즈"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정통 본격 추리물에 가깝고, 수록 단편 중 "반딧불이 계획"은 별점 4.5점의 걸작이라서 올해 베스트로 꼽습니다. 

워스트: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별점 1.5
- 범죄 스릴러로의 매력은 전무하다.

올해 별점 1.5점의 망작은 모두 여섯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망작들은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추리물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않았어도 워스트로 꼽지는 않았을텐데, 뒷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이 너무 컸네요.

2. 기타

베스트: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
- 가볍지만 의미도 있다.

읽은 책 중 절반에 가까운 여섯 권이 별점 3점을 받아서 한 권을 꼽기가 애매하지만, 재미와 정보 모두 좋았던 이 책을 꼽아 봅니다.

워스트: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별점 1.5
- 2025년에 읽기에는 낡고 지루했던, 재미와 가치 모두 압도적인 워스트. 

3. 역사서

베스트: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별점 4.0
-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 난파 관련 논픽션은 항상 기대 이상!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별점 3.0
- 일상 감각을 해킹하는 여러가지 팁이 가득.

이 분야는 올해 한 권만 읽어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4.0
-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SF와 만나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다 별점 2점이네요.

6. Food / 구루메

베스트: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별점 3.5
- 상세하게 알 수 있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생활.

워스트: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별점 1.5
- 방향성과 완성도 모두 기대 이해.

2007/03/29

루미놀 - 최상규

루미놀
최상규 지음/청림출판

예전 "지상아" 등으로 법의학 관련 서적을 내 놓았던 청림출판에서 내 놓은 비슷한 기획의 법의학 서적입니다. 지금도 발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월간 수사 연구"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던 칼럼을 묶은 것으로 국과수에 근무하신 최상규님의 법의학 수사 이야기를 담은 책이죠.

하지만 책 내용은 기대와는 좀 거리가 있더군요. 90%이상이 루미놀과 기타 방법을 이용한 혈흔 확인 및 혈액형 분석, 그리고 친자확인 검사 이야기뿐이며 약 20여년전의 이야기라서 "DNA"분석이 도입되기 이전이기에, 그리고 혈액형 분석 이외의 보다 자세한 분석방법이 등장하지 않아서 답답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미흡한 조사 결과 때문에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법의학적인 이야기는 수사의 보조수단으로만 기능하고 있거든요. "혈흔" 만 가지고 증거를 삼기에는 아무래도 많이 부족하니까요. 아울러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상투적인 문체도 흥미를 많이 떨어트리는데 한 몫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몇몇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 예를 들자면 혈흔에서의 혈액형 분석은 "땀"의 존재로 잘못 판단될 수 있다던가, 타액으로 혈액형 분비가 되지 않는 비분비형 사람이 인구의 15%정도 된다던가 하는 재미난 이야기들과, 사건 대부분이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강력사건들이기도 해서 나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딱 한건을 제외하고는 범인이 모두 잡혔다는 것도 뭔가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고요. "C.S.I"를 기대한다면 당연히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법의학의 한계를 그만큼 명확히 한 "실화집" 이라는 측면에서는 높이 살 만 하겠죠. "C.S.I"도 사실 구라가 대부분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추리소설 창작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구입한 측면도 있는데 도움되는 요소가 몇가지 있었기에 만족합니다. 다름 작품에서는 뭔가 써먹야 봐야 겠네요.^^

2015/05/22

퍼펙트 게임 (2011) - 박희곤 : 별점 2점

2011년에 개봉한 야구 영화. 최동원, 선동렬이라는 두 대투수의 잊을 수 없는 15이닝 연장 무승부 완투 승부를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BTV 설치 기념으로 감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완전 실망스럽더군요. 도대체 뭘 생각하고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탓입니다. 영화의 핵심은 두 대투수의 엄청난 투수전 한 경기입니다. 때문에 당연히 두 투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어야 합니다. 즉,

  • 선동렬 - 지금이 아마츄어 시절부터 우상이었던 최동원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그 때인가?
  • 최동원 - 고질적인 어깨부상, 이제 최고 투수는 선동렬인가? 아니면 아직 나인가?

이러한 고민이 보여지고, 이것들에 의해 괴로워하고 또 성장하는 모습이 나왔어야 합니다. 두 투수들이 이런 고민을 포함한 여러가지 문제에 시달리다가 치열한 승부를 통해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도약한다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면 충분했어요. 야구 팬들도 이러한 내용이면 만족했을테고요.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핵심 이야기는 뒷전이고 온갖 주변 에피소드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박만수 캐릭터와 관련 에피소드입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무명 백업 포수로 야구라는 꿈 하나만 가지고 최저 생활비에도 모자른 연봉을 받으며 버티는, "공포의 외인구단"의 뜨기 전 백두산같은 인물인데 이 영화에 왜 나오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영화의 고질병인 억지 신파, 억지 감동을 주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에 불과하니까요. 실존인물도 아니고 말이죠. 물론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에 가상인물이 등장해서 감초 역할을 하는 것이 아주 없는 사례는 아니지만, 이렇게 흐름을 깨먹는건 큰 실수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박만수는 야구 선수로 영화에 아주 중요한 역할(동점홈런)을 담당하기라도 하는데, 스포츠지 여기자는 상당한 비중으로 온갖 장면에 출연하는데 당쵀 왜 나오는지를 알 수가 없더군요. 의상이나 분장도 80년대로 보이지 않아 영 몰입도 안 되었고요.

그 외에도 이 게임에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 설정, 마지막에 영호남이 하나되는 감동의 도가니탕도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캐스팅의 문제도 지적하고 싶어요. 그 중에서도 양동근이 가장 문제입니다. 저는 양동근의 연기는 죤 웨인 스타일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에서든 그 인물이 된다는 메소드 액팅과 반대되는, 어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을 연기하던 죤 웨인이라는 연기 스타일이지요. 제가 본 양동근 출연작에서의 양동근이 연기한 캐릭터는 모두 동일 인물이라 여겨질 정도의 외모와 발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의 사투리만 구사할 뿐 결국 양동근이더라고요. 문제는 그가 연기한게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선동렬"이라는거... 마찬가지 이유로 손병호의 김응룡 감독 연기도 완전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조승우의 최동원 연기와 최동원 중심의 롯데 이야기는 괜찮은 편입니다. 외모부터 발성 등 기본적인 캐릭터가 꽤 그럴듯하고 허구이기는 하나 팀 내에서 김용철과의 갈등, 고질적인 어깨 부상으로 인한 고민 등 야구 중심으로 드라마가 잘 잡혀 있거든요. 강현수라는 가상의 인물과 그의 아버지 강감독 에피소드도 뜬금없기는 하지만 최동원의 인간성을 부각시키고 김용철이 그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고요.

야구 시합의 열기, 긴장감은 잘 그려내었기에 이러한 롯데 - 최동원 이야기처럼 해태 - 선동렬 이야기를 구성했더라면 영화가 훨씬 좋았을텐데 안타깝기까지 하네요. 아니면 차라리 최동원이 모든 것을 불살랐던 1984년 한국시리즈를 영화로 만드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야구 팬으로서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와주었으면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기본적인 영화 완성도의 문제가 있어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슈퍼스타 감사용"이 아직까지는 국내 야구 영화 중 최고인 것 같군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는데 저같은 가벼운 야구팬에게도 어필할 수 없는 야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건 애시당초 무리였으리라 생각됩니다.

2012/12/02

위대한 승부 (Searching for Bobby Fischer / 1993) - 스티브 잘리안 : 별점 3점

7살 아들 조쉬가 체스에 대해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프레드는 조쉬를 브루스 판돌피니라는 거물급 플레이어에게 맡겼다. 그러나 토너먼트에 출전하면서 조쉬는 점차 체스와 승부에 지쳐가는데...

원제는 "Searching for Bobby Fischer". 체스 천재 조쉬 웨이츠킨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네요.

일단 성장 영화다운 교훈적인 내용이 가득합니다. 예를 들자면 "체스(또는 다른 것이라도)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인생에서 승부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스스로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등 입니다.

이러한 교훈과 더불어 조쉬의 천재성을 소유하려 하고 통제하려 하던 아버지 프레드의 모습에는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때문인데, 우리나라의 무리한 교육열과 비슷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천재마저도 현실에 좌절하고 피로감을 느끼는데, 아이의 능력조차 제대로 모른 상태에서 아이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 아닐까요? 영화 속 조쉬가 체스를 잊고 아이다운 삶을 즐기며 부활하듯, 아이는 정말로 아이처럼 키우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키우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힘든 일이겠지만...

단지 교훈만 있는 것은 아니고, 체스를 잘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시합 장면의 박진감을 잘 살린 좋은 체스 영화이기도 합니다. 전설적 체스 천재 바비 피셔의 소개가 곁들여진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또 "퀸을 먼저 사용하면 안 된다"라는 지시를 영화 내내 복선처럼 써먹는 것도 괜찮았어요. 마지막 결승전은 아주 약간의 체스 지식—끝까지 간 졸은 자신이 잃은 말과 바꿀 수 있다, 퀸은 전후좌우대각선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이 있어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나,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라고 봐야겠죠.

그 외에도 주인공 아역, 특히 조쉬 역의 꼬마도 귀엽고, 체스 선생 역의 벤 킹슬리, 조쉬 아버지 역의 조 만테냐, 조쉬의 동네 친구이자 선배(?) 비니 역의 로렌스 피쉬번 등 화려한 조연진도 볼거리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조쉬의 현명한 어머니의 비중이 너무 작고 아버지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동네 친구 비니의 역할이 애매하다는 점(사실 비니는 빼고 브루스에게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집중시키는 게 나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에서 졸을 움직여 퀸으로 승부를 내는 장면은 너무 뻔했습니다. 최종 보스인 라이벌 조나단과의 마지막 결전치고는 좀 김이 새는 결말이었어요.

그래도 성장 영화로서도 우수하고, 체스 영화로서도 괜찮은 만큼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점. 성장기 아이가 있다면 더 와 닿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아울러 영화에서 최종 보스 끝판왕으로 나오는 조나단과의 마지막 챔피언십 매치가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고 하는 후일담도 재미있었습니다. 정말로 조쉬가 무승부를 제의했지만, 실제 마지막 경기 상대였던 제프 역시 거절했고, 경기 끝에 공동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정보는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세요.

2016/05/01

귀담백경 - 오노 후유미 / 추지나 : 별점 1.5점

귀담백경 - 4점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북홀릭(bookholic)

최근 좀 격조했습니다. 프로야구 시청 때문이지요. 덕분에 퇴근 후 저녁에 잠깐 책 읽던 시간이 거의 사라져 버렸거든요. 중계 중에 읽으려 시도해 봤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더라고요.

이 책은 오노 후유미의 괴담집입니다. 짤막한 괴담 99편을 모아 놓았다는 소갯글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시귀", "마성의 아이" 등을 통해 접했던 작가의 필력도 믿었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본인 혹은 지인이 겪었다는 맥락없는 두서없는 경험담으로, 인터넷 괴담 게시판 글 수준보다 못한 탓입니다. 게다가 무섭지도 않았고요. 화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기묘한 현상, 그리고 서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괴담이라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오노 후유미 특유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문체 역시 괴담과는 잘 맞지 않았고요. 그나마 무서운 이야기도 대부분 뻔해서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방대한 분량 덕분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는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세 편을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늘어나는 계단

한 중학교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늘어나는 계단’은, 평소에는 열세 계단이지만 심야 2시에 세면서 오르내리면 끝없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어느날, 두 친구가 이에 도전했습니다. 한 명은 올라갔고, 다른 한 명은 내려갔지요. 내려온 친구는 열 셋까지 세었는데, 위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열넷”, “열다섯”… 

전형적인 괴담이지만, 목소리라는 요소를 활용한 극적 전개는 효과적이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나 영상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 파란 여자

F씨가 초등학교 시절 처음 본 유령은 파란빛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여자 얼굴이었습니다.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렸었지요. 이후 다다미방 주변에서만 여자의 기척이 느껴졌고, 아버지가 급사한 뒤 사라졌습니다. F씨는 아버지가 쫓아 준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른이 된 후 의문을 갖습니다. 애초에 다다미방은 아버지의 방이 되었고, 여자가 쏘아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것은 원하던 바를 이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반전이 괴담보다는 어른의 이야기로서 인상적이었습니다.

3. 마음에 들다

Y씨의 어린 딸은 몇 가지 단어만 말할 줄 알았는데, 그중 하나가 ‘그네’였습니다. 아직 그네를 탈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계속 ‘그네’를 외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미피’ 인형의 목에 끈을 걸어 흔들며 ‘그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허공을 가리키며 또다시 ‘그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책 속 괴담 중 가장 오싹한 이야기로 꼽을 만했습니다.

이외에도 학교 합숙 중 장지문에서 손가락이 튀어나온다는 "훔쳐보기", 사고가 잦은 건널목에 있던 지장보살이 부서지자 사고가 사라졌다는 "건널목의 지장보살"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오노 후유미 정도의 작가라면 단순한 괴담 나열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로 재창조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 정도라면 한때 유행했던 "깊은밤 갑자기" 류의 공포 실화집보다 나을 게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몇몇 괜찮은 이야기 덕에 최악은 면했지만, 장르문학 팬이시라면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2022/06/16

룸 - 엠마 도노휴 / 유소영 : 별점 1.5점

 - 4점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arte(아르테)

다섯 살 잭은 엄마와 함께 방 한 칸 짜리 별채 집에 감금된채 살아왔다. 엄마를 납치한 올드 닉은 매주 생필품을 가지고 모자를 찾아와 엄마를 농락한 뒤 돌아갔다. 그러던 중 올드 닉의 실직으로 위기 의식을 강하게 느낀 엄마는 잭이 죽은 것 처럼 올드 닉을 속여서 탈출시키고, 도움을 요청하게 만드는 '몽테크리스토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잭은 탈출에 성공하는데....

실화를 각색한 범죄 휴먼 드라마로 2015년 발표되어 주목받았었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입니다. 영화 쪽이 훨씬 유명한 것 같네요. 직접적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라 그 아들 잭이 화자이자 주인공인게 특징입니다.

전반부는 방 한 칸 집에 감금당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는 엄마와 그 결과로 태어난 아이 잭의 생활을 그립니다. 모자가 가로세로 3.5미터에 불과한 공간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범인 올드 닉이 1주일마다 한 번씩 찾아와 엄마를 덮치고, 그 때마다 그가 가지고 오는 생필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 묘사는 정말로 굉장합니다. 엄마가 극심한 치통에도 병원에 가지 못해 결국 이빨이 빠지고, 잭은 바깥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TV와 현실의 차이도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잭에게 운동과 교육을 시키며 최소한의 상식과 교양을 갖추게 하려는 엄마의 노력도 잘 보여주고요. 또 이 와중에 모자 간의 애정, 어린 잭의 순진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비참한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독특했습니다. 자기가 피해자인줄 모르고, 자기가 감금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요정의 시선이랄까요?

이어지는 짤막한 중반부는 일종의 모험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직했다는 올드 닉의 말을 듣고, 집이 은행에 넘어가면 자기들이 죽을거라 확신했던 엄마의 탈출 계획이 중심이거든요. 이른바 '몽테크리스토 작전' 으로 올드 닉이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든 후, 트럭에 싣고 매장하러갈 때 탈출하는 계획이었지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잭이 탈출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결국 모자는 구조되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잭의 시점에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어른이라면 쉽게 성공했겠지만, 잭은 세상물정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바깥 세상을 처음 접해 보았기에 실패할 뻔 하거든요. 치밀한 계획 끝에 성공하는 탈주극은 아니지만, 덕분에 훨씬 긴장감 넘치면서도 설득력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실존했던 범죄를 다룬 픽션이라기에 범죄 스릴러물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요소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범죄 자체보다는 범죄의 결과를 그린 이야기니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후반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제대로 된 교육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서부터 집 안에 갇혀 자란 잭의 사회 적응기로 일종의 성장기인데, 이런 특수한 환경에 놓였을 아이의 심리를 유추하여 글을 쓴 상상력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너무 깁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내용도 뻔해서 지루하기만 했고요. 

이 기나긴 잭의 성장기는 범죄와 천진한 아이를 대비시키고,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차라리 아이러니 그 자체인 잭의 존재를 강조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잭은 엄마가 감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선물이지만, 아빠는 엄마를 감금한 잔인무도한 범죄자 올드 닉이니까요. 굉장히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인데 이 작품에서는 너무 짧게 언급되어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큰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대했던 쟝르물도 아니라서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군요. 별로 권해드릴 책은 아니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에버노트의 문제로 두 번 날려먹었던 리뷰입니다. 세 번째도 날려먹을 뻔 했네요. 더 길게 적기도 힘들기에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