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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1

모래톱의 수수께끼 - 어스킨 칠더스 / 사주영 : 별점 1.5점

모래톱의 수수께끼 2 - 4점
어스킨 칠더스 지음, 사주영 옮김/바른번역(왓북)

외무부 직원 커러더스는 옛 친구 데이비스의 초대로 늦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함부르크로 향했다. 젠틀맨에게 어울리는 우아한 요트 여행을 기대했는데, 데이비스의 요트 덜시벨라호는 선원 한 명 없는 작디 작은 요트였다.
독일 인근 북해 연안을 무모하게 누비는 몇일간의 요트 여행 후, 무엇을 위해서인지 커러더스가 궁금해하자 데이비스가 얼마 전 만났던 대형 요트 선장 돌만이 자신을 죽이려 했고 그는 독일의 스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이유는 데이비스가 북해 인근 모래톱을 항해했기 때문으로, 데이비스는 모래톱의 수로는 초계정과 얼마전 들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어서 군사적 가치가 높다고 주장했다.
커러더스는 수로들을 조사하고 돌만의 음모를 박살내자는 데이비스의 부탁을 받아들이는데...

"블러디 머더"에서 스파이 소설의 원점이자 정점이라고 소개했던 작품입니다. 이렇게까지 소개하면 읽어 보지 않을 방법이 없죠. 셜록 홈즈를 읽어보지 않고 추리 소설을 논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것과 같으니까요.

하지만 읽어보니 스파이 소설로는 합격점을 주기 힘듭니다. 우선 돌만이 '스파이' 이며 그의 음모는 이러저러하다! 는 두 청년의 확신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탓이 큽니다. 커러더스가 돌만과 폰 브뤼닝, 헤르 뵈메와 그림이 참석했던 회의를 몰래 염탐했을 때의 느낌처럼 그들은 정말 멤메르트 섬에서 오래전 난파선을 인양하려는 목적으로 뭉친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진상은 결국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니까요. 돌만이 과거 영국 해군 소속이었다는걸 숨겼다는게 과연 그리 대단한 비밀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설령 둘이 밝혀낸(것 처럼 보이는) 독일의 음모, 즉 독일이 자국 앞바다 수로를 영국과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항로로 개척하여 병력을 태운 바지선을 영국 해안에 상륙시키려 한다는게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자국 앞바다에서 항로를 개척하는건 당연한 군사 훈련이자 작전입니다. 오히려 두 청년이 하는 짓이야말로 염탐이자 스파이 행위에요! 이러한 스파이 행위를 배신자 돌만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포장하는 행위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돌만이 배신자이건 아니건간에 둘의 스파이 행위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게다가 이 음모도 둘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근거가 없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둘의 모험담에서도 잘 알 수 있듯 아주 날씨가 좋고 물 때가 맞아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으니까요. 주위에서 보는 사람도 많고요. 이래서야 효과가 있을리 없지요. 차라리 멤메르트 섬에서 인양 회사를 가장하여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있다는 처음의 가설 쪽이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이렇게 스파이 소설로는 여러모로 함량미달이라면 다른 재미라도 주었어야 하는데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요트에 의지해서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라면 최소한 해양 모험 소설로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두 청년의 모험이 너무나 보잘 것 없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인 위험이라곤 데이비스가 좌초할 뻔 했던 무모한 항해 뿐이며, 이는 돌만의 입을 통해 안전할 줄 알았다는 식으로 부정됩니다. 그 외에는 안개 속에서 적의 본거지로 노를 저어 간다던가, 몰래 창 뒤에서 대화를 엿듣는게 전부에요. 스파이 소설에서 기대해 봄직한 서스펜스와 스릴은 커녕 모험 소설로 최소한의 액션도 등장하지 않아서 무척이나 지루합니다.

애송이에 불과한 두 청년이 활약을 해 봤자 이 정도에 불과할 거라는건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킹스맨" 등이 날아다니는 시대에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따분했습니다. 항해와 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도 지루함을 가중시킵니다. 디테일을 살리며 설득력을 높여주는 요소임은 분명하지만 재미와는 영 거리가 멀더군요. 게다가 번역도 좋지 못해서 읽다가 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후 발표된 다양한 스파이, 모험 소설의 원조라는 점에서는 높은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읽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09/04/27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존 르카레 / 이종인 : 별점 3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6점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열린책들

수십 년 전 모스크바는 영국 정보부 내에 자신들의 스파이를 심어 놓는다. 그리고 지금 그 스파이는 정보부 최고위직에 올라 있다. 모든 작전이 그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중요한 정보망은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다. 혐의자는 정보부장을 포함한 최고위 간부 네 명. 과연 그중 스파이는 누구인가? 은퇴한 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는 어떤 동료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책 소개에서 인용)

존 르 카레의 냉전시대를 무대로 한 유명한 스파이 소설입니다. 썩 좋아하는 쟝르는 아니지만 이 책은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책 중 한권이기에 출간된지는 좀 오래되었지만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좋은점 부터 이야기하자면 우선 유명세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디테일은 확실히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조직의 구성과 각종 직책의 명칭에서 시작해서 실제 작전과 임무에 대한 설명은 소설이 아니라 르포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심지어는 저자가 "창조한" 용어가 나중에 실제 정보기관에서 쓰이는 일상용어가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거의 이쪽 용어를 확립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서커스", "두더쥐", "램프라이터", "베이비시터" 등이 있겠죠.
두번째로는 스파이 답지 않은 조지 스마일리라는 돋보이는 주인공 캐릭터를 들고싶네요. 대니 드 비토를 연상시키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외모에 액션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로 (TV 드라마에서는 알렉 기네스가 맡아 연기했다고 하는데 비쥬얼적으로는 미스 캐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내에게마저 버림받은 비참한 존재, 한마디로 하찮은 동네 아저씨지만 그 정체는! 영국정보부에서도 나름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거물 스파이라는 것! 모종의 이유로 은퇴한 이후에도 정부의 부름을 받고 홀로 엄청난 작전을 수행한다는 설정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이야기와 왠지 비슷한 맥락이랄까요. 돌아온 제5전선 (미션 임파서블) 간지도 좀 나고 말이죠. 배우는 비록 대니 드 비토나 정현돈이겠지만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그다지 와 닿지도 않는 이야기라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읽기는 좀 힘들었습니다. 냉전이 끝난 것도 10년도 훨씬 더 전이니 당연하겠죠. 장점이기도 한 디테일한 묘사 역시 대단한 수준을 넘어서서 너무 장황했다 느껴졌고요. 물론 이러한 묘사에서 후대에 인정받는 문학적 성취가 있었겠지만 지나치게 길 뿐더러 불필요한 심리묘사 등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이중 간첩의 정체를 밝혀내는 이야기가 정교하거나 세련된 복선도 없고 추리적 요소 역시 전무한 상태로 단지 주인공 스마일리의 여러가지 조사와 심문, 그리고 자백에 가까운 녹취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기에 나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제가 기대한 것과 너무 달라서 실망스러웠어요. 약간의 추리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굉장히 미미한 수준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요.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크게 흥미롭지도 않은 작전을 무려 500여 페이지로 기록해 놓았을 뿐으로, 저자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처럼 스파이 작전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묵직한 주제의식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나마도 없어서 저에게는 실망이 조금 더 컸던, 알고있던 명성에는 값하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스마일리와 동료들의 권력과 돈 앞의 쇠락한 모습이 현실적인 부분을 대변하기는 하겠지만 역시나 상식선에서 그치는 뻔한 묘사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저는 스파이 소설하고는 잘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군요. 스파이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바이블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하나, 확실히 지금 읽기에는 확실히 너무 낡아버린 주제와 낡아버린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전 제목이 주인공들의 직업이라 생각했었는데 읽고보니 일종의 암호-코드명이더군요. 요거 하나는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2019/04/06

블러디 머더 - 줄리안 시먼스 / 김명남 : 별점 2.5점

블러디 머더 - 6점
줄리안 시먼스 지음, 김명남 옮김/을유문화사

추리 작가인 줄리언 시먼스가 쓴 추리, 범죄 장르 문학 역사서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확고한 명성을 다지고 있는 책이지요. 1794년 출간된 윌리엄 고드윈의 "칼렙 윌리엄스" 부터 시작해서 비도크, 에드거 앨런 포와 찰스 디킨스, 월키 콜린스, 에밀 가보리오로 이어진 범죄 문학이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단편 추리물로 만개하고,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스, 앤서니 버클리 콕스, 반 다인 등 거장들에 의해 추리 문학 "황금기"인 1920~30년대에 이른 후 정통파에서 하드보일드 등으로 변주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범죄 문학 역사의 주요 변곡점과 주요 작품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및 기타 국가의 추리, 범죄 소설도 비중있게 언급됩니다. 뒤렌마트의 범죄 소설들이라던가 부알로 - 나르스자크, 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작품들이 그러하죠. 스웨덴의 페르 - 마이셰발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특히나 페르 - 마이셰발 작품이 좌파적 견해를 드러낸다는 시각이 독특한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떠오르기는 하네요. 저는 이런게 유럽 스타일이구나 싶었는데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스파이 소설은 아예 한 단락을 할애합니다. 대부분 아는 작가와 작품들인데 이 중에서도 문학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최초의 스파이 소설인 어스킨 칠더스의 "사막의 수수께끼"야 말로 모든 스파이 소설과 모험 소설 중 최고작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번역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북이 저렴하게 나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략적인 추리, 범죄 문학의 역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내용이라 딱히 새롭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눈길이 간 건 저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러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 본인이 추리 소설 작가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트릭에 대해서는 평가가 박하고 문학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추리 소설은 정통파, 고전 퍼즐 미스터리를 선호합니다만, 작가의 주장처럼 수수께끼 풀이는 그냥 핏기없고 인물없는 게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는 어느정도 수긍이 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수수께끼 없이 범죄와 인물에만 기댄 작품도 반쪽짜리일텐데, 그런 부분에 관대한건 좀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 해밋의 "유리 열쇠"를 당대 최고작이라 극찬하는데, 그 이유는 캐릭터 묘사로 대표되는 문학적 성취 때문입니다. 트릭은 부차적이고요. 하지만 단지 캐릭터와 인간관계만으로 최고 성과라니 평이 과하다 싶습니다.
스펜서 시리즈로 유명한 로버트 B 파커를 챈들러의 후계자로 언급된다고 소개한 단락도 뭔가 싶었네요. 전형적인 펄프 픽션 작가로 좋은 평을 줄 만한 부분이 전혀 없는데 말이지요.

반대로 윌리엄 아이리쉬를 플롯이 한심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는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을 작가는 아닙니다. 평가 절하된 작가는 또 있습니다. 조세핀 테이가 대표적이에요. 지루하다는 이유인데 역시 수긍하기 힘듭니다. 그 외에도 존 르 카레, 제임스 엘로이 등도 평이 좋지 않더군요. 

작가 특성상 단편에 좋은 평을 주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러리 퀸의 초기 단편집에 좋은 평가를 한 건 눈에 뜨입니다. 암, 좋은 작품이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비슷한 수준으로 여기는 푸아로미스 마플 단편에 대해서는 좋은 평을 주지 않는건 의외였습니다. 장편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진다는게 그 이유인데 말도 안됩니다!

이렇게 평가는 좀 갈리지만, 잘 몰랐던 작품들에 대해 스포일러 없이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소개는 일품입니다. 몇 몇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해봅니다.
우선 1920년대 작가인 필립 맥도널드가 있습니다. "줄"에서 엔서니 게스린 대령을 소개했다는데 최고작은 "리녹스"와 <> 두편이라는군요. 존 딕슨 카는 저 역시 좋아하는 작가인데 줄리언 시몬스는 최고 작품으로 "할로 맨"을 꼽습니다.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으로, 1980년대 전문가 집단의 최고의 밀실 소설 투표에서 카의 다른 작품들 - "구부러진 경첩", "유다의 창", "열개의 찻잔" - 보다 두배 가까운 표를 얻었다고 하며 "환각과 위장에서 문제를 끌어낸" 소설이라니 궁금해서 미치겠네요. 마찬가지로 황금기 작품인 C.데일리 킹이 쓴 세 편의 "오벨리스트" 시리즈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학파의 심리학자들이 함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완벽하게 공정한 정통파 추리소설이라니까요.
황금기 이후 작품 중에서는 페트릭 퀜틴의 "두 아내를 가진 남자"와 "로널드 셸던의 아내",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움직이는 장난감 가게"와 "피 흘리는 사랑"에 대한 평이 괜찮고요. 시릴 헤어의 "법정의 비극"은 코미디적 감각과 인물에 대한 진실된 감정으로 순회 재판 판사의 삶이 잘 묘사된 그의 최고작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소개된 에드거 러스트가튼의 "대답해야 할 사건", 케네스 피어링의 "커다란 시계", 헬렌 유스티스의 "수평의 남자", 존 프랭클린 바딘의 "악마의 푸른 꼬리 파리" 모두 한 번 읽고 싶어 집니다. 국내 소개된건 아쉽게도 "커다란 시계"밖에 없지만요. 

이후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범죄 소설가 중 가장 중요하다며 소개하는 단락은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아주 좋아하는 작가라 무척 반갑기도 했고요. 이어서 소개되는 마고 베넷의 작품들도 굉장히 흥미로운데, "비행하는 남자들"은 국내에 소개되면 참 좋겠습니다. 로스 맥도널드에 대한 호평도 좋았고요. 마거릿 밀러의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지만, 여기서 최고로 치는 "천사처럼"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 작품까지는 읽어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작품 소개만 흥미롭다면 인터넷 서점 리뷰보다 나을게 없죠. 아니, 국내 소개된 작품이 드물다는 점에서는 인터넷 서점보다도 못합니다. 전문가적인 시각이 반영되었다고는 하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느낌이 강해서 마음에 들지 않고요. 명성에 비하면 조금은 실망스러운 책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6/03/26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 유키 쇼지 / 김선영 : 별점 2.5점

고메스의 이름은 고메스 - 6점
유키 쇼지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나"는 사이공으로 파견된 니치난 무역 사원으로 직무와 함께 도쿄 복귀 예정이었던 전임자 가토리의 실종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아낼 의무까지 지게 되었다. 나는 가토리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는 훈, 그리고 임시 거처 양양관의 수상쩍은 이웃들인 득, 토 등과 얽히며 복잡한 베트남의 정치적 세력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싸움의 한복판으로 휘말려 들어가는데....

일본 추리 문학사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스파이 소설의 고전.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서 무려 19위로 선정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작품의 특징이자 매력 포인트는 분명합니다. 베트남 전쟁 직전의 남베트남을 무대로 평범한 일본 파견 주재원인 주인공이 목숨이 위태로운 첩보전의 세계에 휘말려 들어가는 과정을 꽤나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반면 스파이 소설에서 기대해 볼만한 정교한 작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모리가키의 덫에 걸린 것에 불과하니까요. 우연이기는 하지만 사택을 빠져나와 양양관에 머물게 된 시점부터요. 주인공이 한 일이라곤 모리가키의 부탁으로 옆방 토에게 서류를 전해준 게 전부고요.
물론 주인공이 우편배달부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토리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두 세력 - 응오딘지엠 정부 전복을 노리는 세력과 베트콩 세력 - 모두에게 쫓기게 되고, 결국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목이기도 한 "고메스의 이름은..." 이라는 말을 살해당한 "초"로부터 들은 이후는 그야말로 숨 쉴 틈 없이 여러 사건이 벌어져서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아울러 베트남 전쟁 직전의 베트남에 대한 묘사도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작가 후기에서 밝히듯 당시 베트남을 방문하지 못하고 한정된 자료로 썼다는데, 그런 것 치고는 사이공과 여러 유명 장소에 대한 묘사 모두 괜찮았어요. 저도 가보지도 못하고 당시를 살아보지 못했으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럴듯하다는걸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명 식당과 클럽, 주인공이 휘말린 양대 조직과 조직원들의 묘사 모두 말이죠.

또 잔류 일본군을 소재의 하나로 사용한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고메스를 자칭한 전화를 일본어로 한 이유는, 베트남어와 프랑스어로 주인공과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약간의 트릭처럼 사용되기도 하는데 작품과 참 잘 어울렸습니다. 오히려 이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예요.

하지만 과연 이게 스파이 소설인가? 하는 의문은 생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주인공은 스파이가 아니고 별다른 작전이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스파이의 사전적 의미는 "수단을 써서 적이나 또는 경쟁 상대의 정보를 탐지하여 자기편에 통보하는 사람"인데, 주인공은 그냥 봉투 전해주는 운반책일 뿐입니다. 그것도 끝까지요. 이런 류의 소설에서는 아무리 일반인이라도 결국 특정 조직을 위해 싸워나가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는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즉, 주인공 입장에서는 모험물이나 재난물(?)일 수는 있지만 스파이 소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인공과 가토리를 진짜 스파이 모리가키가 끌어들인 이유 역시 불분명합니다. 몰래 봉투를 전해주기 위한 의도였다면 양양관에 거주하게만 해도 충분했을 거예요. 같은 일본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자주 방문한다, 정도의 핑계를 대고 방문한 후 돌아갈 때 직접 옆집 문 앞에 봉투를 던져 놓는 정도로도 가능했을 일이니까요.

게다가 결말이 시시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무엇보다도 고메스가 누구였는지 중요치 않다는 건 정말 문제예요. 고메스는 그냥 고메스로, 어차피 주인공과는 별 관계없는 베트콩 조직 내 암호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이게 뭔가 싶더군요. 최소한 "부머랭 살인사건"에서의 "왜 그들은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라던가 "39계단"의 "39계단" 정도의 의미와 용도는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는 식으로요. 허나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수사와 미행을 통해 사건에 개입하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 말은 하등의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소재를 낭비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그나마 조직에서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만큼은 긴박감이 넘치지만 이 역시 모리가키의 변덕에 불과할 뿐더러 운이 많이 좌우하기에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묘사도 매력적이고 내용도 상당히 흥미롭지만 위의 단점 때문에 감점합니다. 고전으로 일상계 스파이물이라는 독특함은 있지만,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슈퍼 스파이들이 난무하는 지금 시점에 먹힐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딱히 고전을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3/07/07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 존 르 카레 / 최용준 : 별점 2점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 4점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마일리는 페넌의 자살이 수상하다는걸 눈치챘다. 자살하기 전날에 다음날 모닝콜을 부탁했다는걸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모닝콜을 부탁한 8시와 자살한 10시 30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페넌의 부인 엘자는 모닝콜을 자기가 신청했다고 했지만, 그녀는 불면증이었고 모닝콜 신청 시간에 언제나처럼 공연 관람중이었다. 스마일리는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사 매스틴은 스마일리의 의견을 묵살했고, 스마일리는 결정적 단서 - 페넌이 스마일리에게 만나자고 보내왔던 편지 - 를 덧붙인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누군가 집에 침입한 뒤, 이대로 발을 빼기 힘들어졌다는걸 깨달았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건 은퇴가 코 앞인 경찰 멘델 뿐이었다. 둘은 스마일리를 찾아왔던 차의 소유주 스카를 만나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들었지만, 스마일리가 습격을 당해 쓰러졌고 스카는 살해당했다.
그래도 멘델의 도움으로 스마일리는 사건에 동독 사절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잡았다. 동독 사절단은 페넌과 연결고리가 있었고, 그걸 페넌이 밝힐까 두려워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사절단 대표는 전쟁 당시 스마일리와 일했던 정보원 디터였다.....


"알겠네. 페넌은 자살할 결심을 해. 그런 뒤 교환국에 전화를 해서 8시 30분 모닝콜을 부탁하지. 코코아를 타서 거실에 놓고. 이층으로 가 유서를 쓰지. 다시 내려와 코코아는 마시지 않은 채 그냥 두고 자기 머리에 총을 쏜다. 모든 게 멋지게 맞아떨어지는군그래."

존 르 카레의 데뷰작. 스마일리의 등장 역시 당연히 처음입니다.
첩보 조직과 첩보원들이 등장하고 관련된 사건이 등장하지만, 전형적인 첩보, 스파이 소설은 아닙니다. 첩보 기관은 사건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이용될 뿐, 전반적인 전개는 전형적인 범죄 소설에 가깝습니다. 전개는 평범한 범죄, 수사 소설과 유사하며 스마일리도 첩보원이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으로서의 활약만 선보이거든요. 심지어 파트너격인 멘델은 경찰이고요. 

그러나 범죄, 수사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수사가 단순히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예컨데 1. 불법 렌트카 업자 스카의 증언으로 익명의 대여인의 존재를 알아낸다, --> 2. 패넌 부인 엘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면서 그녀가 매주 극장에서 수상한 남자에게 악보 가방을 전해주었다는걸 알아낸다. --> 3. 익명의 대여인 전화번호의 주인인 동독 사절단에 고용된 문트가 엘자와 만난 남자라는걸 알아낸다. 는 식입니다. 이렇게 수사할 때마다 한 발자욱씩 다음 단계로 나아가 진상에 도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딱 한 번 뿐이었던 엘자와의 만남, 그리고 스카의 증언을 들은 것만으로 동독 사절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진상을 어느정도 눈치챌 정도에요.
첩보, 스파이 소설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수를 줄 부분은 없습니다. 비중이 작을 뿐만 아니라, 스카를 통해 동독 정보원이기도 한 사절단 전화번호가 노출되는 등 스파이 소설에서 기대해봄직한 정교함과는 거리가 너무 멀거든요.
메인 빌런이라 할 수 있는 디터에 대한 묘사도 많은 공을 들였지만, 좋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소아마비로 장애가 있는 디터가 엘자를 죽이고 멘델까지 쓰러트린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디터를 평범한 중년 남성에 불과한 스마일리가 죽인다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도 딱 한 가지, 페넌이 아니라 엘자가 동독 정보원이었다는 진상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범인 문트가 가장 위험한 엘자를 죽이지 않고 급하게 귀국했던 기묘한 행동, 그리고 페넌이 기밀 정보 대신 쓸데없는 정보만 수집했던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모닝콜도 페넌이 아내를 고발하기 위한 핑계거리로 신청했다고 추리하는데 꽤 그럴싸했어요.
엘자가 정보를 전달하는 아날로그적인 방식 - 서로 같은 가방을 극장 휴대품 보관소에 맡긴 뒤, 휴대품 보관증을 바꿔 가져감 - 도 깔끔해서 좋았습니다. 
그 밖에도 은퇴를 앞 둔 퇴물 스마일리에 대한 묘사, 스마일라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 대한 설명, 스마일리와 전처 앤과의 관계 등 시리즈 팬이라면 볼거리는 제법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했던, 국제적인 음모가 등장하는 정통 스파이 소설은 아니었고, 그렇게 재미있다고 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거장의 작품이지만 확실히 데뷰작의 한계가 느껴지네요.

2019/02/02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오혜진 : 별점 3점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6점
오혜진 지음/어문학사

6년전에 읽고 리뷰까지 남겼었는데, 어쩌다보니 깜빡하고 다시 구입해서 읽은 책입니다. 5년이 지난 탓에 새로 읽는 것과 다를게 없었네요. 다시 리뷰 남깁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5장은 맺음말로 내용은 4장 구성), 해방 전까지의 한국 추리 소설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으로 문학사니까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해방 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점은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와 더 비슷한데, 내용이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각이 일관된 덕분에 더 나은 점도 많습니다. 이전에 유사한 책들을 많이 읽어왔지만, 여전히 눈에 뜨이는 부분도 제법 되고요.

우선 추리 소설을 어떤 기준으로 연구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브 뢰테르의 세가지 분류 - Mystery, Crime novel, Suspense - 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과 서구 추리 소설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짤막하게 소개하는 등의 도입부가 마음에 듭니다. 연구서다운 상세한 설명과 접근 방법이 좋더라고요.

이후 실제 한국 추리 소설의 역사 역시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우선 1920년대 중반 "취미"라는 용어가 일상화 되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원래 있던 단어인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당시 중산층의 개념이 1년 수입으로 1년간 채무 없이 살 수 있는 정도를 뜻하며, 극히 드물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취미"에는 돈이 들고,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값싼 인쇄물을 가까이 하는 책읽기가 그나마 일반적인 취미로 널리 퍼졌다고 하고요.
또한 이러한 출판 산업의 호황에 더해 당시 언론 통제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가 난무한 것, 그리고 "자본주의" 때문에 상업화로 흐른 등 "대중 소설"을 위한 토양이 갖추어져 결국 추리 소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던 것도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비싼 책 값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아울러 당시에도 코난 도일과 르블랑에 대한 편식이 심했다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이후 당시 발표된 여러 추리 소설을 소개하는데 이 역시 흥미로왔습니다. 최독견의 "사형수" 라던가, 신경순의 "피무든 수첩", "제 2의 밀실", 최유범의 여러 작품들이 그러합니다. 특히 최유범의 작품은 비록 일부 표절("브루스 파팅턴 설계도")이 있지만 미스터리 추리 소설로 장르의 규칙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고 하니 놀랍네요. 수수께끼 풀이가 완벽한 수준의 해방전 국내 작품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든데 말이지요.
그 뒤에 이어지는 다른 작품들은 국내 추리 소설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연애사"가 부각되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최유범의 작품이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 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박태원의 "우맹", 김유정의 "만무방"과 같은 추리 서사가 도입된 국내 소설 소개가 이어집니다. 염상섭의 "사랑과 죄" 역시 마찬가지죠. 영화에 나온 수법을 따라하는 모방 범죄가 등장하고, 살인 사건이 주요한 내용인 등 꽤 진지한 추리 서사가 도입된 작품이라는데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몇몇 부분은 안타까움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통속 소설", "대중 소설"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당시부터 존재했었다는 점입니다. 추리 소설이 싸구려 통속 소설로 폄하된 이유가 이 땅에 추리 소설이 소개된 시점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심지어 추리 소설을 창작, 번역하기까지 했던 일부 작가들조차(염상섭 등) 동일한 인식을 지녔다는 점에서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과학적, 근대적 사고가 널리 퍼진 것이 논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추리 소설의 유행과 관계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근대적 사고 방식을 토대로 한 작품이 이렇게까지 폄하되는 것도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물론 당시 미디어, 작가들의 잘못도 크겠지만요.

마지막 4장에서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세 편의 작품 - 채만식의 "염마",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 김내성의 "마인"- 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당대 추리 소설의 수준, 그리고 어쩔 수없는 한계를 설명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내성의 여러 작품들을 소개해 주는데, 김내성의 "마인"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뜨입니다. 지금 읽으면 많이 허술하지만 당대 국내 추리 문학계를 대표했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 작품 소개 모두 읽을만 합니다. 그러나 책의 특성상(일종의 학술 논문) 전편 내용이 수록된 것이 아니라는게 좀 아쉽습니다. 관심이 크다면 별도로 구해 볼 수 밖에 없으니까요.

마지막에는 194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쟁 탓에 스파이 소설이 범람하였으며, 이른바 "친일 문학"으로 여러 작품이 발표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외국인 여성 마리에가 만드는 센닌바리가 경성의 방공 시설과 반도내 포대 위치를 말하는 모르스 부호가 숨겨져 있음을 폭로한다는 김내성의 "수놓은 송학"이 대표적인데, 꽤 괜찮은 아이디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식민지에서의 친일, 매국 문학으로 전락한 작가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이는 6년 전과 같습니다. 다른 유사 자료, 도서와 차별화되는 점도 크고, 나름의 재미는 물론 여러가지 정보와 함께 큰 흐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덕분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저는 두 번 읽었지만 여전히 좋은 독서였습니다.

2005/05/14

르윈터의 망명 - 로버트 리텔 / 강호걸 : 별점 4점

르윈터의 망명 - 8점 로버트 리텔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미국 MIT 대학의 부교수이자 MIRV (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 미사일) 계획의 관계자인 르윈터는 일본에서 소련 대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한다. 그의 전문분야는 미사일의 탄두부분인 노즈콘이라는 그다지 가치없는 일이지만 그는 극비문서의 비밀 열람을 통해 자신의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암기한 MIRV의 미사일 탄도 공식을 가지고 소련과 협상하여 망명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된 CIA출신의 부차관보 대리 리오 다이아몬드는 자료 조사 및 심리 분석을 통해 르윈터가 실제로 가치있는 진짜 탄도 공식을 가지고 갔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전 동료이자 CIA 담당자 듀크스는 르윈터의 탄도 공식은 가짜일 것이라는 견해를 내어 서로 대립하게 된다.
다이아몬드와 듀크스, 그리고 소련의 르윈터 담당자이자 유능한 정보국원 포고딘은 체스를 두듯 서로의 계획과 의도를 숨긴채 작전과 계획을 차차 실행해 나가게 되는데....

저는 스파이소설이라는 쟝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슈퍼맨같은 주인공, 미녀-액션이 짬뽕된 007시리즈에 대한 편견 탓에 그동안 선택에 있어서도 항상 뒷전으로 미루어 놓았었죠. 하지만 이 작품은 그간의 저의 선입견을 깨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제목대로 미국 MIT 교수 르윈터의 망명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데 르윈터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KGB와 CIA가 중심이 된 양 진형의 "체스게임"이 더욱 중요하거든요.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속에서 르윈터는 단순한 소모품, 이용물로 전락될 뿐입니다. 이러한 게임이 각 진영에서 캐릭터들과 주변인물의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특히 정보전의 근본이 되는 여러 조직들과 회의들에 대한 묘사는 대단합니다) 세밀하고 현실적으로 벌어지며, 그야말로 "정보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과 재미가 엄청나서 히어로의 큰 액션이나 반전 없이도 커다란 만족감을 전해줍니다. 그야말로 "리얼한 재미"를 전해주는 소설이랄까요?
예를 들자면 소설에서 양 진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르윈터는 과연 탄도함수를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오가지만 답은 결국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양 진영에서 이 정보를 가지고 서로가 게임하듯 진행되는 과정만이 소설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이죠. 그 외에도 많은 정보들에 대한 답은 소설속에서 답해주지 않고 오직 서로의 작전의 "과정"과 "결과"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친절하다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서 리얼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예외적으로 후반부의 리오 다이아몬드의 작전에 의한 첩보 작전 자체는 꽤 긴박감이 넘치는 부분으로 스파이 소설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 소규모일 뿐더러 사람과 사람을 서로 도구로 여기고 이용하며 필요여부에 따라 가차없이 배신하기 때문에 역시나 다른 소설들과 차별화되고 있고요.
아울러 여타 소설들에 비해 적수인 소련 정보국원들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묘사로 표현하는 것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소련의 체스 마스터 자이체프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마음에 들더군요.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소설 자체가 리얼하기는 하지만 많이 싱겁다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책은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재미와 흥분을 선사해 줍니다. 너무 딱딱하고 약간 덜 다듬어진 듯한 번역 때문에 읽기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0/10/08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에릭 앰블러 / 최용준 : 별점 2.5점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 6점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영국인 추리 소설 작가 레티머는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디미트리오스라는 범죄자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래티머는 디미트리오스에게 강한 흥미가 생긴 나머지 디미트리오스의 행적을 좇아 유럽을 횡단해 가며 이런저런 조사를 벌이는데...

에릭 앰블러가 발표했던 스파이 소설의 고전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찌기 걸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지요. MWA 선정 베스트 미스터리 100 순위도 17위라는 고순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파이 소설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범죄자를 쫓는 탐정 수사물로 보는게 맞습니다. 물론 래티머는 제대로 된 탐정은 아니고, 수사도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추억담같은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옛 동화나 민요를 수집하는 민속학자 활동에 가깝지요. 차이점이라면 디미트리오스는 정말로 사악한 범죄자이며, 이야기되는 추억담은 모두 범죄라는 정도고요.

읽으면서 아직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흔해빠진 스파이 소설이나 느와르, 하드보일드 물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움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빼어난 묘사들과 생생한 캐릭터들 덕분입니다. 유유부단하며 체면을 중시하는 속물이자 샌님인 주인공 래티머부터 눈부실정도로 생생해요.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맹이는 없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전해 줄 정도입니다. 탐정 수사, 모험물 주인공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심하기도 힘든데, 거의 백여년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해 내고 있는게 놀랍네요.

조역들도 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물, 특히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에서 자주 등장했던 쌍욕을 하는 범죄자, 보자마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여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와 폭력배들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조차도 나름 신사적이며, 그를 등쳐 먹으려는 시시한 사기꾼 악당 피터슨조차 철학사를 옆에 끼고 사는 인물로 그려지는 등, 후대의 느와르나 하드보일드와는 캐릭터가 사뭇 달라요. 요즘 작품이라면 당연시되는 불필요한 정사 장면 묘사나 고어, 포르노에 가까운 혐오스러운 폭력 묘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고요.

실제 등장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그치는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 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순수한 악당이지만, 기묘한 조직력과 행동력, 관찰력이 잘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가난뱅이 악당 시절, 이웃이었던 프레베자를 범죄에 끌어들이며 한 말이 기억에 남네요. "내가 당신을 고른 건, 비록 당신이 무르고 감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쉽게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그날 당신 방에 갔을 때, 나는 당신이 커튼에 돈을 숨겨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커튼에 돈을 숨겨 놓거든. 낡은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백을 계속 주시했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어." 라는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프레베자는 자기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말에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디미트리오스의 여러 악행을 1920~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났던 실제 역사에 잘 녹여낸 전개도 그럴듯합니다. 예를 들자면, 디미트리오스는 1922년 터키와 그리스 전쟁으로 벌어진 스미르나 대학살 당시, 피난민들 움직임을 이용하여 그리스로 도주했고, 1924년에 터키 지도자 케말 퍄사 암살 음모에 가담했었으며, 1926년에 유고슬라비아가 오트란토 해협에 설치한 기뢰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빼돌려 프랑스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 팩션 느낌도 전해 주고요.
래티머가 당시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이스탄불에서 스미르나, 아테네, 소피아,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합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4,162Km에 달하는 거리더라고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렇게 긴 수사 여행을 떠나는 래티머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 도드라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수사는 별 볼일 없고 - 영국인 작가가 밝혀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에 그칩니다. - 디미트리오스의 악행과 범죄는 모두 관계자 증언만 있는 탓입니다. 증거라고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딱 한 가지, 이전 디미트리오스를 협박했던 피서르가 살해된 후 디미트리오스로 위장된 경위를 설명하는 피터슨의 추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여러명이 함께 요트 여행을 간 뒤, 다른 승객이 내릴 때 피서르에게만 따로 이스탄불로 함께 가자고 유혹했다는 추리지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피서르를 살해하고 자기 옷을 입혀 바다에 버린 후, 자신은 피서르의 이름으로 투숙한 뒤 떠난 겁니다.
다만 피서르가 자신이 협박하던 디미트리오스와 선뜻 단 둘이 항해를 떠났다는건 설명하기 어렵고, 역시나 증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또 래티머가 확인했던 사체가 사실은 디미트리오스가 아니라 피서르였다 한 들, 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프랑스 경찰이 뭘 할 수 있지도 못해서 딱히 디미트리오스에게 위협이 될 사건도 아닙니다. 피터슨이 협박하자 디미트리오스는 살인으로 입을 막으려 하는데,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보였거든요. 

그리고 피터슨이 디미트리오스에게서 백만 프랑을 울궈낸 뒤, 당연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던 악당인데, 협박범을 그냥 놔 둘리 없잖아요? 래티머도 위험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협박은 엄연한 범죄인데 래티머가 공범으로 함께 자리하는 전개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어요.

피터슨과 래티머를 궁지에 모는 데 성공한 디미트리오스가 래티머를 제압하지 못해 최후를 맞는 결말도 많이 시시했습니다. 래티머는 바닥 양탄자에 미끄러진 탓에 디미트리오스가 쏜 총알을 피할 수 있었고, 이어진 격투로 총을 빼앗는데 성공하는데, 이렇게 운과 우연에 의해 살아남는게 소시민 래티머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고급스러움을 얻기 위해 도입한 장황하면서 옛스러운 묘사, 그리고 느릿느릿한 전개와 말투는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고급스러움의 반대급부로 지루함이 생겨난 셈이지요. 예를 들어 제목은 래티머가 디미트리오스를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인간은 악마의 가면처럼 얼굴을 사용한다. 얼굴은 자기감정을 보충해 주는 감정을 타인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다.' 라는 상념에서 비롯된겁니다. 얼굴이 가면같다니! 멋지긴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걸작이었을테고, 지금 읽어도 멋진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추리적인 요소와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감점합니다. '추리' 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으로 출간한게 이해가 됩니다.

덧 1 : 해설이 아주 좋습니다. 서점에서 뒷부분 해설만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 2 : 원래 "디미트리오스의 관"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해설에 따르면 원래는 "가면"이 맞다고 하는군요. 미국 출간 당시 제목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도 관 보다는 가면 쪽이 작품에 더 적절합니다.

2005/04/02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 존 르 카레 / 강호걸 : 별점 2.5점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 4점 존 르 카레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동서 냉전이 극에 달해 있던 시대, 영국의 베를린 지역 정보원 총 책임자 리머스는 런던으로 귀환했다. 동독 지역의 정보 기관 총 책임자인 문트에 의해 최대의 스파이였던 카를 리메크가 살해당한 후 조직이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리머스는 케임브리지 서커스의 관리관과 문트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뒤, 몰락한 인생의 패배자로 위장하여 폐인같은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 징후를 눈치챈 동독측 요원에 의해 포섭되어 동독으로 향한 리머스는 문트에 이은 제 2인자 피들러와의 회담과 제공한 정보로 문트를 서방세계의 스파이라는 제1급 반역죄로 고발당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리머스가 사랑했던 여인 리즈가 등장하여 모든 계획은 틀어졌고 리머스는 패배를 인정했지만, 그 순간 그 모든 계획의 진상을 깨닫게 되는데...

이른바 냉전 시대에 발표된 스파이물입니다. 존 르 카레의 출세작이기도 하고 영화화도 된 베스트셀러인데 워낙 이쪽 쟝르를 좋아하지 않아 이제서야 보게 되었네요.

작품의 최대 장점은 현실적인 스파이 세계를 그렸다는 겁니다. '007' 등으로 친숙한 슈퍼 히어로같은 스파이나 미인 여자 정보원 따위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스파이 소설로 정보와 정보의 교환에 따른 댓가와 음모만 있을 뿐입니다. 
특히 어학에 대한 재능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중년 남자 리머스는 육체적인 능력도 별볼일 없으며, 주변 조직에 이용만당하는 존재로만 그려지는데 그간 스파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인물들보다 무척 현실적이고 순진한 캐릭터라 왠지 공감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아마 이러한 현실적인 면 때문에 발표 당시 크게 어필했으리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마지막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는 "리즈"의 재판정 등장은 작위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영국 공산당 당원이라고는 해도 당시 동독에 그렇게 쉽게 갈 수는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무엇보다도 음모 자체가 책 뒷커버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 처럼 "사상 최대..." 어쩌구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그만큼 현실적이기는 한데, 여러모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게다가 음모의 근거가 되는 여러 단서들도 별로 치밀하지 않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스파이물의 효시로 이 분야에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고 읽을 가치는 충분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각종 상을 휩쓸고 시대를 대표했던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너무 시대가 지난 탓이겠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 및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을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 중 몰랐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네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의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군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이 중에서는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도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파를 터트려 도청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24/02/04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김승욱 : 별점 4점

스파이와 배신자 - 8점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열린책들

1970~80년대 영국 정보부서 M16와 내통하던 KGB 최고위급 간부(KGB 런던 지부장)였던 올레크 고르디엡스키에 대한 논픽션.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입니다. 냉전시대 여러 첩보 작전들이 굉장히 상세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큰 재미를 안겨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고르디엡스키의 정체가 들통나서 모스크바로 소환된 뒤부터는 논픽션이지만 왠만한 스파이 소설보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고르디엡스키가 궁지에 몰리며 수렁에 빠지는 과정,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설계되었던 '핌리코 작전'의 가동, 그리고 고르디엡스키의 목숨을 건 소련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지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실제로 진행되었던 작전이라 픽션에서는 주기 어려운 생생한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핌리코 작전 때 차 트렁크에 있는 고르디엡스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아기 기저귀를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갈았다는 것처럼요. 소련 당국의 안일한 태도 - 그래서 탈출을 눈치채지 못했음 - 도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픽션이라면 허술하다고 비판받았을테지만요.
이런 디테일들은 올레크가 M16과 안가에서 만나 내통하는 상세한 과정, 당시 기술로는 최고 수준의 정교한 라이터 내장 카메라, 스파이가 메시지를 잘 받았다는 답이 맥주병 뚜껑을 올려놓는 것인데 '진저비어' 병뚜껑을 올려둔건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던는 등으로 책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실제 스파이들을 둘러 싼 첩보 과정도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대표적인게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첩자의 정보를 그냥 활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간닪난 일이 아니더라고요. 적의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첩자가 우리 진영 내 첩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면, 적 역시 자기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M16는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길게 보고 이용하는걸 택했지만, 결국 정보를 이용한 탓에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CIA가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를 알아낸 과정도 왠만한 추리 소설은 비벼보기도 힘듭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CIA는 M16에서 제공한 라이언 작전 관련 정보로 정보원이 KGB 요원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보고서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M16과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그는 소련 밖에 있고 영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추리했습니다. 전달된 정보는 기술 정보나 군사 정보보다 정치 정보가 많다는 것으로 그가 제1주요부 PR라인에 근무한다는 걸 알려주었고요. 마지막으로 KGB 내부 첩자라면 서방의 소련 첩자를 알려주었을텐데, 최근 소련이 잃은 첩자들은 노르웨이의 호비크와 트레홀트, 스웨덴의 베릴링, 영국의 마이클 베터니였습니다. 호비크와 베릴링이 체포되었을 때 스칸디나비아에 있었고, 트레홀트와 베터니가 잡혔을 때 영국에 있었던 사람은? 올레크 고르디엡스키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올레크의 과거 조사는 그가 M16의 내부 첩자라는건 분명히 드러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CIA가 알아낸 내부 첩자의 정체를 CIA의 배신자 올드리치 에임스가 밀고하여 올레크가 위기에 빠졌던 것입니다.

고르디엡스키의 활약(?)과 함께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설명되는데 냉전 때 KGB 수장이었던, 그리고 소련 서기장까지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실제 서방의 핵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KGB는 서방의 선제 핵 공격 징후를 다각도로 포착하기 위한 '라이언 작전'을 진행했었으며,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는 등의 비화도 놀라왔습니다. 
라이언 작전 당시 크렘린은 '혈액 은행'이 진짜 은행처럼 혈액을 사고 파는 곳인줄 알았다는건 좀 웃겼고요.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도 무척이나 독특한 매력을 전해줍니다. 우선 그가 조국을 배신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탓이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스파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변절했는데 말이지요. 본인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보를 넘긴걸 다른 반체제 활동과 동일시했다는 올레크의 생각도 신선했어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작가 솔제니친은 글로 싸웠듯이 KGB 요원인 올레크는 첩보 세계에서 정보를 활용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간에 고르디엡스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에 대해 칭송하다시피하는 내용을 쓴건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적이라고 책에서 설명되는 것들의 실체도 모호하고요. 책에서는 소련이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걸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으로 전달된 정보로 서방은 알고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서방은 당시 스타워즈 계획을 중지하거나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고르디엡스키가 제공한 정보와 핵 전쟁을 막은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그의 활약과 희생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하고, 대처도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을 그를 높이 평가했다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인정받을만한 인물일까요? 가족도 잃은 채 조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 M16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는 현재가 고르디엡스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외한다면, 달리 나무랄데 없는 최고의 책입니다. 스파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4/04/07

39계단 - 알프레드 히치콕 : 별점 4점


해니(Richard Hannay: 로버트 도나트 분)는 캐나다에서 업무차 런던에 온다. 어느날 쇼구경을 갔다가 아나벨라(Annabella Smith: 루시 맨하임 분)라는 묘령의 여인을 만나는데, 그녀는 자신이 스파이로 지금 쫓기고 있으며, 스파이들이 영국 공군의 기밀을 외국에 넘기려 하고 있기에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39 계단'이라는 알 수 없는 암호를 남긴다. 그러나 그날밤 그녀는 살해된다.
해니는 아나벨라가 얘기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떠나나 기차 안에서 자신이 아나벨라의 살인범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아나벨라를 살해한 스파이들에게도 쫓겨 파멜라(Pamela: 마델레인느 캐롤린 분)에게 도움을 청하나 거절당한다. 겨우 기차에서 탈출한 해니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농가 아낙의 도움으로 다시 경찰의 추적에서 벗어난다. 구사일생으로 아나벨라가 남긴 지도로 조단 교수(Professor Jordan: 고드프리 터얼 분)의 집에 도착한 해니는 교수가 스파이 두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수의 집에서도 탈출한 해니는 경찰에 가서 사실을 말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다시 경찰서에서 도망치게 되고 결국엔 파멜라의 신고로 경찰로 위장한 스파이들에게 잡힌 뒤, 파멜라가 위험하다고 느낀 스파이들은 파멜라와 해니를 수갑으로 묶어 두지만 해니는 또다시 탈출한다. 결국 파멜라도 해니의 말을 믿게 되고 스파이 두목인 교수가 조직인 '39계단'에게 위험을 알린 뒤, 런던 극장에서 기밀을 넘겨받아 국외로 탈출하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존 버칸의 39계단을 영화로 옮긴 히치콕의 초기 대표작. 소설은 한 3년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파멜라라는 여인의 비중이 큰 것 같지는 않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소설은 너무 오래된 탓에 명성에 걸맞지 않게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결말도 다소 맥빠졌었죠.
하지만 영화는 무려 70여년 전 영화라 흑백이고, 낡은 촬영과 편집 탓에 조금 적응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재기발랄하고 보는 재미가 넘칩니다.

일단 리차드 해니라는 주인공 캐릭터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전체적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힘이 있는 캐릭터거든요. 유머러스한 성격이 돋보이는데 특히 파멜라와 수갑에 엮인채 탈출하여 숨어든 여관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유머는 정말 최고였어요. 아직 자기를 믿지 못하고 여관 여주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파멜라를 호주머니에 넣어둔 파이프담배로 위협하며 사랑의 도피중인 연인이라고 설명하는 장면 같은 부분이 특히 그러합니다.
거기에 여러가지 복선과 음모가 얽히는 전체적인 스토리도 괜찮았어요. 원작을 많이 각색했는데 원작보다 더 나아 보일 정도로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코트에 넣어두었던 찬송가 책처럼 우연에 의지하는 설정이나 진정한 흑막 조단 교수를 너무 빨리 보여준 점, 그리고 여자 캐릭터 얼굴이 도대체 구분이 잘 안 간다는 단점이 있지만 단점들로 폄하하기에는 굉장히 멋진 고전입니다. 히치콕의 영국 시절, 그러니까 초기 시절 최고 걸작이라는 평판이니 한번 구해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원작소설을 읽으신 분들도 많은 부분 각색되어 보다 재미있게 보실 수 있는 만큼 놓치시지 마시길.

덧 1 : 그런데 왜 스파이 조직 이름이 “39계단”일까요? 원작에서는 지명.. 으로 쓰였던 것 같았는데...
덧 2 : 자신의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한다는 히치콕 감독은 여기서는 해니가 여관에서 가명을 쓸 때 이름만 잠깐 나오고 마네요. 초기작이라서 그런가?

2013/01/06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오혜진 : 별점 3점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6점
오혜진 지음/어문학사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문학적 위상을 지녔는지를 알려주는 논문집.

1930년대 추리소설이 유행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총독부의 언론 장악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언론이 경쟁 과열 등으로 급격하게 상업화가 진행되어 독자의 흥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글들이 많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 하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김동인, 최독견, 방인근, 염상섭, 박태원, 김유정, 김내성 등 당대 유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자료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되는 것이 큰 장점인데, 이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얻기 위해 급파된 서인준과 뉴욕에 본부를 둔 범죄집단 LC당이 윤백작 공채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이고, 이를 형사 이필호가 쫓는다는 이야기로 스파이 모험소설의 서사를 갖춘 작품인데, 줄거리만 봐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또한 1940년대로 넘어가면서 김내성이 친일문학에 손을 대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유불란이 적국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태풍", 그리고 결국에는 유불란이 이름부터 친일스러운 "애국방첩협회" 회장으로 등장하여 미·영의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매국노"라는 작품 발표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건 뭐 면죄부를 줄래야 줄 수 없네요.

그 외에도 당시 추리서사의 작품들이 유행하였고 유명 작가들도 많이 창작하기는 하였으나, 대중문학이라서 순수문학에 비해 평가절하당하고 냉대받았다는 것, 동아일보에서 (1934.3.6~7) 세계 10대 탐정 작가로 소개한 작가들의 이름들(오픈하임, 르블랑, 췌스터턴, 반 다인, 필립 포츠, 엘러리 퀸, 프리먼, 레오나드 메릭, 프레챠, 비-스톤), 조선뿐 아니라 일본 추리문학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글들(그중에서도 1918.7.7 중앙공론 정기증간호를 통해 "비밀과 개방"의 '예술적 탐정 소설' 특집이 발표되었으며, 여기에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두 예술가의 대화"(금과 은으로 개제), 사토 하루오의 "지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개화의 살인", 사토미 톤의 "형사의 집"이라는 유명 작가 작품이 실렸다는 사실!) 등 유념해서 볼 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논문집이기에 단지 재미만 따지기는 어렵고, 2만 원에 가까운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하나, 식민지 조선에서의 추리소설이 어떤 시대적·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어떠한 작가들에 의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2010/06/06

에토로후 발 긴급전 - 사사키 조 / 김선영 : 별점은 2.5점

에토로후 발 긴급전 - 6점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시작

이런저런 작품으로 알려진 사사키 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진주만 공습 직전, 미국인 스파이가 관련된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비밀 작전을 그린 첩보 모험 소설입니다. 무려 500페이지를 꽉 채운 대장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길이에 비하면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수상경력이 무색할 정도로요.

일단 이렇게 길 이유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는 과거사는 주요 내용하고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해설에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학대받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어쩌구 하면서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어차피 남의 나라에 스파이 활동하러 들어오는 일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일인데 왜 그런 것들을 합리화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악도 모호하고 센치한 정서만 난무하는 등, 첩보 모험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할 뿐입니다.

또 준비 과정과 잠입 과정의 디테일에 비해 에토로후 섬에서의 첩보 활동은 설명이 많이 부족합니다.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섬을 봉쇄한 해군이 유일한 발전기가 있는 공장을 내버려둔다? 당연히 말이 안 되죠. 상식적으로라도 해군 부대가 일부라도 상륙해서 마을과 주요 고지를 점령한 뒤, 감시 및 경계 근무를 벌였어야 했습니다. 물론 섬 최고의 미녀가 정체도 모르는 스파이한테 반해서 이것저것 도와준다는 설정에 비하면 이 정도 몰상식은 양반이지만요. 그 외에도 작전 자체의 긴장감이 부족하고, 첩보를 입수한 미국 쪽에서의 움직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점 등 첩보 소설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뒷 부분 해설에서도 언급하듯이 켄 폴레트의 "바늘구멍"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적성국의 스파이가 외딴 섬에 스파이로 잠입하고, 섬에 살던 여자가 그 스파이에게 홀딱 빠진다는 설정은 똑같습니다. 하필이면 비슷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비슷하냐... 단지 "바늘구멍"의 스파이와 여자는 국가에 충실한 애국자였고, 이 작품에서의 스파이와 여자는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라는 차이만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전 "바늘구멍" 쪽이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유명세만큼 읽는 재미는 있긴 합니다. 에토로후 섬에 대한 세밀한 묘사 등 방대한 자료조사가 뒷받침된 내용, 그리고 일본인의 전쟁 범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좋았어요. 건질 게 아예 없지는 않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키-센조 이야기, 케니 사이토의 스페인 내전과 미국에서의 범죄활동 묘사, 슬렌슨 신부의 난징에서의 체험 묘사 등은 모두 잘라내고 케니 사이토의 첩보활동을 중심으로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추적활동을 보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19/11/16

추리 소설 30선

출처 : MLB park

영국추리작가협회 선정 1위부터 100위까지 작품과 미국추리작가협회 선정 1위부터 100위 작품들, 그리고 일본 미스테리 독자 선정 서양 추리소설 1위부터 100위에 뽑힌 작품들 순위를 기본으로, 여기에 추리소설 평론에 있어 가장 권위를 갖는 평론가들인 데이비드 레먼, 하워드 헤이크래프트, 줄리언 시먼스, H.R.F. 키팅이 뽑은 100대 추리소설과 미국 독립서점협회에서 선정한 100대 추리소설 리스트를 보완해서 뽑은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추리소설 30편 순위라고 합니다.
저도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 이라던가, 일본의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의 해외편 등을 관심깊게 보아 왔는데, 고전 중심으로 추리 소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친숙하고, 국내 소개된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한 리스트라 생각합니다. 

너무 오래되어 지금 읽기에는 큰 재미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작품들이 일부 있고, 어떤 작품은 순위와 선정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거든요. 특히나 고전과 역사적 작품들이 많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입문자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을 듯 합니다.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가 있는 작품은 링크가 걸려 있으며, 리뷰는 없지만 읽었던 작품은 붉은색,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은 회색입니다. "레베카"와 "유리 열쇠"부터 빨리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 2020/02/01 "유리 열쇠" 링크 추가
* 2020/08.30 "레베카" 링크 추가
* 2020/12/31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링크 추가
* 2022/11/27 "로그 메일" 링크 추가

30. 유리 열쇠 (대실 해밋)

29. 붉은 수확 (대실 해밋)

28.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27. 로그 메일 (제프리 하우스홀드)

26. 재칼의 날 (프레드릭 포사이드)

25.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24. 광고하는 살인 (도로시 세이어즈)

23. 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22. 가짜 경감 듀 (피터 러브지)

21. 트렌트 최후의 사건 (E C 벤틀리)

20. 나인 테일러스 (도로시 세이어즈)

19. 대학제의 밤 (도로시 세이어즈)

18. 39계단 (존 버컨)

17. 사라진 완구점 (에드먼드 크리스핀)

16.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존 르 카레)

15. 실종당시 복장은 (힐러리 워)

14. 바스커빌가의 개 (아서 코난 도일)

13. 디미트리오스의 관 (가면) (에릭 엠블러)

12.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1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셔 크리스티)

10. 빅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9. 월장석 (윌키 콜린즈)

8.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7. 레베카 (다프네 듀 모리에)

6.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제임스 케인)

5.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4. 말타의 매 (대실 해밋)

3. 애크로이드 살인 (애거셔 크리스티)

2. 셜록 홈즈 단편집 (아서 코난 도일)

1. 진리는 시간의 딸 (조세핀 테이)

2014/09/02

탐정 취미 - 유재신, 이현진, 박선양 : 별점 1점

탐정 취미 - 2점
유재진.이현진.박선양 옮김/문

"일본의 탐정소설"에 이어지는, 식민지 조선에서 발표되었던 추리 문학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책입니다. 자료로서 꽤 괜찮았던 전작에 기대가 컸고, 기획 의도도 마음에 들어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창작되었던 추리 소설의 수준이 높지 않았으리라는 건 이미 짐작했었지만, 최소한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수준 이하였던 탓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29년 11월에 연재가 시작된 김삼규의 "말뚝에 선 메스"입니다. "김내성""타원형 거울"보다 먼저 발표된 '한국 최초의 탐정 소설'이라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는건 분명하지만 완성도가 심하게 떨어져 한 편의 소설로 보기 어려웠거든요. 의문의 카드, 엽기적인 연쇄살인 등 이야깃거리는 많지만, 전개는 복선도 단서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간 느낌을 주니까요.

조선의 일본인들이 합작 형태로 발표한 "여자 스파이의 죽음"은 진범과 진상이 너무 황당했고, 세 구슬의 비밀"은 러시아 가문의 암투극이라는 설정이 무리였습니다. 그나마 "여자 스파이의 죽음"에서 ‘누드화와 열쇠구멍을 직선으로 연결해 총을 쏘았다’는 독특한 트릭이 흥미로웠고, "세 구슬의 비밀"은 앞선 복선과 인물들로 연결되는 결말만큼은 괜찮았지만 완성도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그 외에 조선에 소개되었던 셜록 홈즈 번안물 두 편, "명마의 행방"과 "의문의 죽음(얼룩끈)"이 실려 있는데, 원작 대비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명마의 행방"은 등장인물과 지명, 설정을 일본식으로 바꿔 놓은게 인상적이긴한데 "진주탑"처럼 시대적 상황을 잘 녹여낸 번안은 아니었고, 단순히 이름만 바꾼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당대 조선의 문인들이 창작하고 발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는 분명 있습니다. 예컨대 당시에 수면제가 널리 쓰였다는 점, 러시아계 여인들이 카페 등에서 일한 것이 그다지 이색적이지 않았다는 사회상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여자 스파이의 죽음"에서의 공산주의자 조직, "세 구슬의 비밀"에 등장하는 종로의 실존 장소들(우미관, 미쓰코시 백화점 등), ‘천 원은 일본인 사무원의 일 년치 연봉’이라는 묘사도 좋았고요. 특히 일본인들이 ‘아파트’에 거주한다고 묘사된 부분이 의외였는데, 조사해 보니 실제로 식민지 조선에 "아파트로 불렸던 건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이번 독서의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료적 가치를 제외하면 작품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14,000원이라는 가격에 비해 책의 완성도도 심하게 낮고요. 번역이 어려운 단어는 ‘XXXXX’로 처리하는 무성의한 편집도 거슬렸고, 두 장의 페이지가 빠진 채 출간되어 내용 이해에 방해가 되는 점도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저처럼 식민지 시기의 조선 문학이나 추리소설 문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더라도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 한 권이면 충분합니다.

2017/08/1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 - 대중서사장르연구회, 박유희 외 : 별점 3점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 - 6점
대중서사장르연구회.박유희 외 지음/이론과실천

한국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 등장했던 추리물의 역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정리하여 알려주는 인문학, 문화사 서적입니다. 

"아랑 전설"에서 밀양 부사가 빨간 깃대를 흔들고 가는 아랑에 대해 꿈꾼 후, 범인이 '朱旗'라는 사람임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에서 '한각사중계월침, 붕월반월원무심'이라는 점 글귀의 뜻 풀이 같은 것이 소개되는 등, 고전 설화와 각종 야담, 역사서 등에 등장했던 추리 서사부터 소개하고 있기에 그 양과 깊이가 실로 방대합니다.

근대적인 추리 소설, 즉 '정탐 소설'이 처음 등장한 "쌍옥적" 이후의 자료는 더욱 풍부합니다. 처음 알게 된 건 "쌍옥적" 시기에 발표되었던 "박쥐우산"이라는 작품입니다. "르루주 사건"을 번안한 "누구의 죄"를 표절한 느낌이지만, 소개를 보니 범행 동기와 범인 설정을 당시 국내 실정에 잘 맞도록 나름 개선, 발전시킨 부분이 있는 덕분에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근대 초기에 셜록 홈즈와 같은 정통파 추리물이 아니라 '에밀 가보리오'의 프랑스 소설이 유독 인기를 끌었다는 점도 꽤나 흥미로왔고요.

아울러 근대에 추리 소설이 번안되어 소개되면서 이른바 '탐정 소설'이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가진 독자들이 읽는 지적인 작품으로 어필했다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추리 소설이 항상 싸구려 문학의 대명사로 알려진 80년대 이후를 살아온 저에게는 이해가 안되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독서라는 취미 자체가 어느정도 지적 수준이 있는 계층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을테고, 그 중에서 추리 소설은 트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적인 지식이 뒷받침 된 이해력이 필요하니까요. 근대에는 그러한 독자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렇게 초창기 추리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아주 괜찮은 듯 싶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정탐', '탐정'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당대 분위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어요. 인용되는 자료들을 보니 각종 신문 기사 헤드라인에서 이 단어들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더군요.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대구에 사는 한 소년이 10세 아동을 납치 살해한 후 협박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대표적이에요. 범행도 충격적이지만 이 소년이 '탐정소설만 매일 탐독'했다고 소개되거든요. 이렇게 탐정소설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상식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죠. 가슴아프게도 이러한 부정적 인식, 앞서 말씀드린 물질 문명에 대한 부분, 거기에 '그로(그로테스크)'로 대표되는 새로운 유행의 결합 등으로 한국 추리 문학이 서서히 선정성, 엽기성이 강조된 싸구려 펄프 픽션화하는 과정이 해방 이후 현대에 걸쳐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아울러 지적인 영역, 논리적 추론과 과학적 수사 외에도 서구 물질 문명의 유혹 역시 지식인들을 끌어당기는 요소였다고 하는데, 이 역시 후대에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적인 영역이 아니라 물질 문명에 대한 부분만 확대, 발전해 버린 탓입니다.

그래도 저도 익히 알고 있는, "최후의 증인"이라는 기적으로 대표되는 김성종 시대에서 현재(이 책이 발표된 2010년 기준)까지 이어지는 과정의 마지막 부분 덕분에 아직 한국 추리 문학에 희망이 있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만들어 줍니다. 한국 추리문학의 미래로 "경성탐정록"이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경성탐정록"이야 말로 한국 현대 추리문학이 이룬 놀라운 성취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선정성, 엽기성이 사라지고 정통 추리 서사에 기반한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원점에 회귀한다는 측면은 분명히 있죠. 이를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 추리문학의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고요(반은 농담인거 아시죠?).

"경성탐정록" 외에도 고전에서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는 추리 문학 발전 와중에 등장한 수많은 작품이 소개되기 때문에 눈길을 끄는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문학의 홍수 속에서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추리 서사를 보여주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 친일 문학이기에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사면에서는 흥미로와 보이는 김내성의 "태풍", 해방 후 추리 문학계의 1인자였다는 방인근의 작품들(그 중에서도 사립탐정 장비호 시리즈), 허문영의 번개 탐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방인근, 허문영의 작품들은 소개만 보아도 앞서 말씀드린 펄프 픽션들에 다름없기에 구태여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방인근 작품들에 등장하는 해방 이후 주요 설정들 - 일본인이 해방 후 강제로 쫓겨가며 챙기지 못했던 재산을 되찾으려고 한다던가, 국가 혼란기에 국보를 훔친다던가 등등 - 은 한번 연구해 보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추리 문학 뿐 아니라 추리 문학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흐름 및 주요 작품의 소개 또한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이 역시 읽어볼만 합니다. 007 시리즈의 여러 모방작들 등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스파이물, 액션 스릴러, 느와르 등 다루는 폭도 넓고요. 제가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놓치시기 힘들 내용들이었어요.

그런데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은건 단점입니다. 기껏 흥미를 자아내는데, 정작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니 답답할 수 밖에 없지요. 지금 구하기 쉬운 작품들도 아니니까요. 도판도 부실한 편이고요.

그래도 얻은 것이 훨씬 많은 독서였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3만원이라는 가격도 마음에 들고요.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가 식민지 시대 추리 문학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책은 다루는 폭과 기간이 훨씬 넓다는 차이가 있기에 비교해 읽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읽기 전에는 내가 아무리 추리 애호가지만 이런 것 까지 찾아서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 정도면 모든 추리 문학, 장르 애호가분들께 권해드릴 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3/28

사라진 남자 (Charlie Muffin) - B. 프리맨틀 / 박종원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찰리 머핀은 영국 정보부의 베테랑 요원이지만 정보부장이 엘리트 군인 카스버트슨 경으로 교체된 뒤, 그를 싫어하는 부장과 다른 애송이 엘리트들에 의해 홀대와 좌천은 물론 죽을 위험까지 겪게 되었다. 한편, 찰리 머핀의 활약으로 체포된 소련의 1급 스파이 베렌코프의 석방 지연으로 궁지에 몰린 KGB의 수장 카레닌은 망명 의사를 은밀하게 피력했고, 영국 정보부는 카레닌을 받아들이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카레닌과 접촉했던 애송이 해리슨은 사살당했고, 스네어도 체포되자 카스버트슨은 어쩔 수 없이 찰리 머핀을 작전 전면에 내세웠고, 찰리 머핀은 단독으로 진행한 카레닌과의 대화에서 입수한 정보로 CIA 수장 거슨 라트거즈를 협박하여 협조를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카레닌 망명의 D-Day가 다가오고, 그가 국경을 넘기로 계획한 오스트리아에는 수백명의 영국 정보부와 CIA 요원은 물론 두 수장까지 자리잡아서 카레닌 망명을 기다리는데....

원제는 "Charlie Muffin"으로 브라이언 프리맨틀의 스파이 소설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오래전 '동서 미스터리 100'에서 4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요. 무려 "빅 슬립"보다 순위가 높습니다! 이미 14년 전에 읽고 리뷰를 남겼었지만, 책 정리 중 우연찮게 다시 집어들어 읽어보게 되었네요. 워낙 오래전에 읽어서 그런지, 처음 읽는 느낌이었어요. 심지어 마지막 반전마저도 기억나지 않았으니 처음 읽는 것과 다를바 없지요.

이 작품의 재미를 책임지는건 주인공 찰리 머핀입니다. 궁지에 몰려도 항상 퇴로를 마련하는 능력있는 스파이로서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 덕분입니다. 액션 없이 주로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자아내게 만드는 전개도 빼어나고요. 찰리 머핀이 카레닌 장군과 손을 잡고, 영국 정보부와 CIA 주요 요원과 부장들까지 소련에 체포되는 배신을 저지르는 반전도 좋았어요. 배신한 동기에 대한 설명도 확실해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진짜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장으로 부임한 헨리 카스버트슨 경과 그가 총애하는 젊은 애송이들에게 무시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기 때문이거든요. 퍼블릭 스쿨 출신 엘리트가 아닌 낮은 신분 출신으로, 외모도 보잘 것 없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탓이니 복수를 당해도 싸죠. 애송이 해리슨은 사살당하고, 스네어는 체포된 뒤 세뇌 공작으로 광인이 되며 카스버트슨은 소련에 체포된 뒤 실각하게 되는 결말인데, 안타깝다기보다는 속 시원했습니다.

이렇게 찰리 머핀이 배신하는 반전에 대한 단서, 복선도 충실하게 짜여져 있어서 이야기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비교적 초반에 묘사되는,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베렌코프와의 회견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베렌코프는 찰리 머핀에게 러시아는 결코 스파이를 잊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지 않는다며 "찰리, 나는 결단코 당신네 나라의 조직에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찰리는 그게 체포되지 않기 위한 큰 동기라고 답하지만 베렌코프는 "그래 가지고 어떻게 자기 부하가 일을 잘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소. 물론 러시아에도 여러 가지 결함은 있소. 하지만 적어도 충성심이라는 것은 존재합니다"라고 응수하지요. 베렌코프가 한 말 그대로 찰리 머핀은 충성심 따위는 잊고, 복수와 개인 영달을 위해 마지막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 외에도 초반부 찰리 머핀이 유럽으로 향했던 2주간의 휴가, 베렌코프와의 여러 번 회견에서의 대화도 모두 복선 및 단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 14년 전에 읽었을 때 보다 '조직 관리'와 '역량 평가' 부분이 더 눈에 들어왔던게 신기했어요. 저도 직장에서 어느 정도 리더,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보기에 찰리 머핀은 그 전문성을 인정하여, 위에서의 관리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업무 진행, 의사 결정의 권리를 주어야 하는 인재입니다. 그러나 영국 정보부는 찰리 머핀의 역량을 잘못 판단하여, 조직원이 조직에 대한 충성과 애정 모두를 잃고 떠나게 만드는 최악의 조직 관리를 보여줍니다. 상사가 전문성이 부족했던 탓이죠. 저도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보다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스파이, 첩보물로는 평균 이상의 완성도와 재미를 갖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냉전 시대 스파이물을 좋아하신다면 적극 추천드립니다. 이미 절판된지는 오래 되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지요.

2013/02/25

흥분 - 딕 프랜시스 / 김병걸 : 별점 3점

흥분 - 6점
딕 프랜시스 지음, 김병걸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신의 목장을 운영하는 다니엘 로크는 영국 경마 위원회 3인방의 하나인 옥토버 백작의 의뢰를 받았다. 의뢰 내용은 마부로 위장하여 잠입한 뒤, 부정이 의심되는 경마 사기 사건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경마와 경마장 관련 사건 전문 작가 딕 프란시스의 대표 장편. 주간문춘 선정 동서미스터리 100 리스트를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이고, 국내 출간된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왜 빼먹었는지 모르겠군요.

일단 제가 읽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게 주인공의 활약이 스파이 소설 같다는게 특이했습니다. 책 뒤의 해설에서 언급된 대로 007 스타일이랄까요?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적대적인 세력에 고용되어 비밀을 파헤친다는 기둥 줄거리에 더하여 변장 및 위장, 주인공의 특기(말에 대한 전문 지식 및 던지기(?))가 중요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일종의 경마 사기의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이라서 국제적인 음모를 다루는 정통 스파이 소설들보다는 스케일이 작은 편이지만, 이는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흔하지 않은 소재를 작가의 전문 지식으로 잘 묘사하여 강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이 큽니다. 정말이지 이 책의 마굿간과 마부에 대한 묘사는, 달리 경쟁작을 찾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엄청납니다.

또 핵심 트릭인 경마 사기 사건의 트릭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로크의 수사도 아주 그럴싸하게 묘사됩니다. 부정이 의심되는, 그러나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던 11마리 말의 공통점을 경기장, 잠시라도 소유했던 소유자 등으로 좁혀 나가고, 약물이 아닌 조건반사를 이용한 트릭이라는 것을 개피리라는 소품으로 알아내는 모든 과정이 굉장히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추리적인 만족도도 괜찮은 편이에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 존재합니다. 주인공 다니엘 로크의 설정이 가장 거슬립니다. 등장하는 여성들이 모두 반한다는 매력적인 외모는 불필요한 설정이었어요. 여자들이 반해서 로크의 수사에 방해만 일으킬 뿐이라, 평범한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만들려는 작위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아 보였던 탓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격투도 드라마틱하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로크가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상황인데, 헨버 일당이 사건을 키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러한 부분은 좀 B급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결론 내리자면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헐리우드 모험 영화 같은 흥미진진함이 읽는 내내 유지되는 흔치 않은 결과물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다니엘 로크가 영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정보원 역할을 수락하면서 끝나는데,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는 것인지 조금 궁금해지는군요.

2004/09/07

빅포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1.5점

빅포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이름 그대로 4명의 인물 - 조직의 보스이자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중국인 리창옌, 자금을 대는 거부 미국인 에이브 라일랜드, 천재 여류 과학자이면서도 사악한 무기를 개발하려고 하는 프랑스인 올리비에 부인, 조직의 킬러인 전직 연극배우 - 을 중심으로 구성된 빅 포 (Big Four)라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린 단편집.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정복(?) 계획에 포와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리라 예상하여 포와로를 제거하려 하고 포와로는 헤이스팅스와 함께 힘을 모아 대결한다는 조금은 단순한 설정인데 각 단편들이 하나의 큰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연작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행방불명 되었었던 영국 정보부원 메이얼링의 살해사건입니다. 메이얼링이 포와로에게 빅포의 위험을 알리다가 포와로 방 침대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며 살해당한 증거는 시계의 문자판으로 만든 "4"라는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정작 트릭은 범인이 "변장의 명수"였다.. 라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라 뭐라 이야기할게 없네요.

두번째 사건은 훼일리라는 빅포의 존재를 알고있는 노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트릭이 등장합니다. 범인이 진작부터 살해를 목적으로 하인을 포섭하는 부분은 좀 억지스럽지만 영국의 여름 날씨와 푸줏간 주인을 연결하는 부분이 아주 괜찮았어요.

세번째 사건은 젊은 유망한 과학자 할리데이의 실종사건입니다. 빅포의 구성원 중 한명인 과학자 올리비에 부인의 정체가 폭로되는 부분으로 빅포의 하수인으로 포와로의 옛사랑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등장하는 등 연작의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중요한 작품이나 추리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웠습니다. 스파이 소설이나 모험 소설로 보는게 더 타당한 작품이었어요.

네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나머지 멤버가 미국인 거부 에이브 라일랜드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헤이스팅스가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로 세번째 사건처럼 전체에 있어서는 중요한 내용이긴 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한마디로 별로라는 이야기죠...

다섯번째 사건은 부유한 여행가 페인터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빅포가 페인터의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페인터가 죽기 전 남긴 "노란 자스민"이라는 글귀를 토대로 범인을 알아낸다는, 어떻게보면 전형적인 포와로식 단편입니다. 이 책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 추리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내용이라 그나마 마음에 든 편입니다.

여섯번째 사건은 러시아 체스 고수와 미국인 체스 고수의 시합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입니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단편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에서 거의 보기 드문 과학적, 기계적 트릭이 등장하고 있으며 살인의 원인과 동기도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일곱번째 사건은 헤이스팅스의 부인을 납치,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포와로를 배신하게 하려 하는 빅포의 음모가 그려집니다. 그냥 뻔한 모험소설로 포와로의 "액션"이 등장하긴 하지만 건질건 거의 없는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크리스티 여사 작품 중에서도 최악으로는 1, 2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어요.

여덟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킬러인 연극배우의 정체를 밝히려는 포와로의 치밀한 노력이 빛나는 편입니다. 외모와 행동에서 유출한 데이터만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모험소설적인 내용과 추리적인 부분과의 모범적인 공존 형태를 보여주고는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역시 마지막 부분이 많이 허무한 등 아쉬운 점이 더 많았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포와로의 죽음과 포와로의 쌍동이 형 아킬의 등장, 빅포의 회의장소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사투를 담고 있습니다. 쌍동이 형에 관한 반전은 괜찮았지만 빅포의 너무나 허무한 최후나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탈출이 "운이 좋아서" (물론 포와로의 준비는 있었지만) 가능했다는 등, 내용상의 헛점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결론내리자면 홈즈 시리즈의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 모험물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리고 싶었던 크리스티 여사의 의도는 확실히 전해지고요. 그러나.... 포와로라는 캐릭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라 생각되며 빅포라는 악의 조직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그려져서 설득력도 떨어지고 왠지 아동물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거의 "검은별" 수준입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나 트릭이 간간히 등장하고 여섯번째 사건 같은 경우는 상당한 수준으로 충분한 재미를 전해주긴 합니다만 괜찮은 아이디어들을 빅포라는 조직과 무리하게 연관 시키면서 무너져 버리는 부분이 많아 안타깝네요.
"부부탐정" 처럼 악당 조직은 중간 중간 별개의 이야기로 등장하고 아예 다른 내용으로 꾸며져 한권의 단편집으로 처리하였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여간.... 제가 읽은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