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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3

B컷 - 최혁곤 : 별점은 2.5점

B컷 - 6점
최혁곤 지음/황금가지

국내 작가 최혁곤의 장편 스릴러. 국내 작가에게서는 보기 드문 전형적인 스릴러물로 전직형사 황재복과 미국에서 온 여성 킬러 현수 이야기를 동시간대에 서로 교차시켜 전개합니다.
황재복은 민사장이라는 인물에게서 의뢰받은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리고 킬러 현수는 연쇄살인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행동하며 마지막 인물 "D"의 행적 추적 끝에 둘은 서로 마주하게 됩니다.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스릴러답게 긴장감, 재미가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또 보통 이런 류의 스릴러물은 연쇄 살인 뒤에 감추어진 흑막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데 반해 이 작품은 흑막이나 사건의 진상보다는 황재복의 살기 위한 투쟁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독특함도 마음에 들었어요. 결말도 깔끔하고요.
황재복이라는 패배감과 열등감에 절어있는 한국식(?) 마초 꼰대 전직 형사 캐릭터가 굉장히 잘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특히나 황재복의 야수성이 지능적으로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황재복의 전처의 사고사 이후 드러나는 반전과 속물 치과의사를 작살내는 결말도 괜찮았어요. (황재복의 딸 나미에 의한 지나치게 자세한 설명은 사족으로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야기의 기본 틀이 헐겁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이 작품의 핵심 내용인 사건의 흑막과 진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외국산 스릴러물과 비슷한 수준의 스케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 것과 나름의 전형성을 잘 지켜나간 것은 좋았지만, 좀 더 잘 짜여진 이야기였어야 했어요.
애시당초 황재복에게 민사장이 왜 조사를 의뢰했는지도 애매하고, 조직의 보스가 따로 있는데 민사장이 앞장서 4명의 한국인 살해에 가담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D"의 협박 역시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납득하기 힘들고요. 일기? 협박자가 스스로 누군가에 대해서 쓴 일기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흑막에 대한 이야기도 짤막한 설명으로만 끝내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하드보일드 의학 생체실험 스릴러의 교과서적인 작품인 "제6계명"만큼은 아니더라도, 진상의 핵심인 의학 관련 이야기는 보다 설득력있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험이 실패했다고 실험 대상자들을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수십명씩 죽인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가만히 두면 다 묻힐텐데... 제보가 상원의원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수십명 죽어나가는 것 보다는 눈에 덜 띄었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에 대한 설명이 너무 빈약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여성 킬러 현수에 대한 이야기도 아쉬웠습니다. 레옹의 마틸다나 니키타처럼 킬러로 성장해 나가는 스테레오 타입 설정에 불과했던 탓입니다. 부가적인 불우한 가정사도 마찬가지로 뻔할 뻔자였어요. 차라리 황재복의 딸 나미가 킬러였다는 서술 트릭 형태로 풀어나갔더라면, 아니면 현수 이야기는 아예 빼더라도 스케일을 좀 줄이면서도 황재복을 중심으로 하여 민사장과의 대결 구도를 그리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냥 황재복을 중심으로 한 한국 무대의 밑바닥 하드보일드 스릴러로 가져가던가요. 그만큼 황재복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던 만큼 소재가 낭비된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아무래도 후속작이 나오기 힘든 결말이기도 하니까요.

단점도 크지만 재미는 확실하고, 황재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국형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더운 여름 함께할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PS :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아시는 분 제보 부탁드립니다.

2012/04/19

수상한 미술관 - 이은 : 별점 2점

수상한 미술관 - 4점
이은 지음/노블마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이오가 아내의 생명을 걸고 정체불명의 괴한과 미술 퀴즈 게임을 벌인다는 내용의 작품. 물만두님 리뷰집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읽게 되었네요.

전화로만 이루어지는 시간 제한이 있는 퀴즈.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바로 "다이하드 3"의 판박이죠. 미술에 대한 퀴즈라는 점으로 차별화하고 있기는 한데, 차별화에 그다지 성공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이하드 3"의 관객을 몰입시키는 퀴즈와 비교한다면, 순수한 미술 평론, 그것도 패러디라는 항목에 집중된 퀴즈들인 탓입니다. 퀴즈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의 반전, 그리고 진상은 어처구니가 없네요. 일단 범행과 전개에 대한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기껏 공들인 복수극으로 전개되다가 갑자기 명화 도난으로 이어지고, 진상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의적질이라니 참 뭐라 말해야 할지도 난감하네요. 이 작전이 국가를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실해 보인다는 것도 큰 약점이고요. 김이오의 모든 것을 캔다면 충분히 흑막을 밝혀낼 수 있다 생각되거든요.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공정함"입니다. 추리 - 스릴러물이라면 최소한 독자와의 두뇌게임을 벌일 수 있는 전개에서 공정한 단서 제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러한 부분이 없습니다. 어차피 다 짜놓은 것이라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초반부 김이오에 대한 심리 묘사와 전개는 모조리 연극, 또는 가공의 것이었다는 것인가요?
게다가 공정함을 가장하여 억지스럽게 수상한 범인 역을 등장시킨 선택은 최악이었어요. 우연히 마주친 한미라가 가명, 가짜 신분, 불륜남의 핸드폰이라는 요소들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작위적인 독자 기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무런 설명이 없다가 뜬금없이 "진상은 사실 이러했다"는 식인데 저는 납득할 수 없었어요. 이래서야 "이런저런 사건이 발생하고 이런저런 위기가 닥쳤는데 눈을 떠보니 부왘 꿈이었지롱~" 하는 이야기하고 다를 게  없지요.

마지막으로, 전개 내내 패러디에 대한 궤변으로 독자를 설득시키는 이유가 결국 이 작품이 "다이하드 3"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패러디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황당한 점이었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놓고 주장하는 패기에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지적 아트 스릴러를 표방한 점, 그에 걸맞게 충실한 설명과 도판이 곁들여진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차라리 추리나 스릴러물보다 미술사 측면에서 패러디의 역사와 현재, 개념을 설명해주는 학습서로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패러디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배운 것 같으니까요. 정통 추리 - 스릴러물을 기대하시면 안 되고, 그냥 독특한 미술 교양서적으로 접근하는 게 더 나은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2010/07/22

아이거 빙벽 - 트레바니언 / 이수경 : 별점 2.5점

아이거 빙벽 - 6점 트레바니언 지음, 이수경 옮김/황금가지

동명 영화의 원작입니다. 영화는 아주 오래전 TV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및 주연을 맡았던 작품이었지요. 영화를 통해 진상과 핵심 반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손이 쉽게 가지 않았었는데, 작가 트레베니안이 이쪽 바닥에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날짜별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헴록에 대한 캐릭터 설명과 첫번째 타겟 살해
  2. 이후 손을 떼고자 한 헴록을 끌어들이기 위한 SS의 리더 드래곤의 음모 - 제마이아의 등장
  3. 결국 마지막이라는 조건으로 의뢰를 수락한 헴록은 등반 훈련을 위해 옛 친구 벤을 찾아감
  4. 벤의 등산학교에서 만난 옛 원수 마일즈에 대한 복수
  5. 암살을 위한 아이거 빙벽 등반 시작
  6. 등반 실패 이후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의뢰를 완수. 하지만 의외의 진상을 알게 됨
이렇게 "암살"을 다룬 암살 스릴러물입니다. "자칼의 날"이나 "피닉스"처럼요. 그러나 "자칼의 날"과 "피닉스"와의 차이점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킬러의 캐릭터에 촛점을 맞추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정치적인 목적의 암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두가지 차이점 모두가 작품에 나쁜 영향만 끼친다는 것입니다.
특히 캐릭터가 문제입니다. 자칼이나 피닉스와 같이 정체불명의 암살자라면 모를까,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암살자인 비밀조직 CII의 부서 "수색-처형국" 소속의 요원 조나단 헴록은 남성들의 판타지를 집대성한, 상상 이상으로 유치한 캐릭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37세의 미술사 교수로 미술품 감정의 권위자이며, 학교에서도 최고 인기인데다가 다국어에 능통하고 유명한 산악인이기도 합니다. 별로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스쳐지나가는 여자들은 모두 그와 같이 자지 못해서 안달이고요. 게다가 헴록 스스로는 포르노배우하면 떼돈 벌 수 있는, 사정을 조절할 수 있는 절륜한 정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고요. 유치하기 그지 없지요.
또 암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아이거 빙벽 등반과 암살' 이 현실적이지 못해 당황스럽습니다. 조나단 헴록이 등산의 권위자라 등산대에 속한 타겟을 살해하기 쉽다는 것인데 어처구니를 상실한 설정입니다. 그냥 땅 위에 있을때 죽이면 되지... 다른 타겟들은 총으로 쏴서 잘만 죽이면서 이 타겟만 등산 중 사고사로 위장할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게다가 사건의 발단이 마일즈가 헴록에게 빚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설정은, 나중에 마일즈가 헴록 살해를 시도하는 모습으로 볼때 그냥 가서 죽이면 되는 것이여서 역시나 비합리적이고(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글자를 가립니다) 등산대원 중 타겟이 없고 타겟은 따로 있었다는 결말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등산대원이 전멸한 뒤 드래곤이 의뢰를 완수했다고 헴록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볼 때 드래곤과 CII도 타겟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왜 암살을 의뢰하고 진행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이래서야 원래의 목적인 "확실한 복수"를 상대편에게 인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한데 말이죠
이 정도로 문제가 심각한 탓에, 정치적 목적이 수반된 암살이 아니라 동-서 냉전 시대의 비밀 생화학 무기를 둘러싼 복수극이기에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은 단점이라고 부를 수도 없네요.

그래도 초유명작가의 베스트셀러답게 건질만한 부분도 있긴 합니다. 과거 동료이자 원수인 마일즈에 대한 복수극은 괜찮았고, 아이거 빙벽 등반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하거든요. 단지 이 묘사를 위하여 앞부분의 말도 안되는 설정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정말이지 힘이 팍팍 느껴지는 재미를 안겨다 줍니다. 방대한 자료조사도 돋보이는데 예를 들자면 "비박"이라는 용어가 '비부악'이라는 외래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전 "대충 덮고 잔다" 라는 의미의 한자인줄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 반전도 뜬금없지만 계속된 복선으로 이어져온 단서를 통하여 밝혀지는 것이기에 과정만큼은 그런대로 괜찮았고요. 단 저는 영화를 먼저 봤기 때문에 반전을 이미 알고 있어서 썩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지만 말이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릴러보다는 무협지에 가까운, 남성을 위한 전형적인 마초 판타지물입니다. 때문에 암살자가 등장하는 암살 스릴러물을 기대한 저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기둥 줄기로 따지면, 1~3번 항목은 1.5점, 4번 3점, 5번 4점, 6번 3점 정도입니다. 평균내자면 별점은 2.5점이네요. 킬링타임용으로는 괜찮은 편이니, 간단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빙벽 등반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는 더운 여름에 딱 맞는 작품이네요.
덧붙이자면, 영화가 훨씬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전에 본 것이라 확인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2025/02/28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다카노 가즈아키 / 김수영 : 별점 2점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 4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단편집으로, 비일상적인 순간에 타인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대학원생 야마하 케이시의 능력을 핵심 소재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수록된 작품의 장르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와 "3시간 후 나는 죽는다"는 시간 제한이 있는 서스펜스 스릴러물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은 일상계 추리 판타지 드라마고요. "시간의 마법사"와 "돌 하우스 댄서"는 케이시가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미래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잔잔한 드라마입니다. 때문에 여러 취향의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 애호가 입장에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는 부족하고,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뻔했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요시에는 케이시로부터 자기가 6시간 뒤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는 예지를 들었다. 6시간 뒤는 요시에의 25번째 생일이었고, 마침 여성들이 생일에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참이었다. 요시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데이트 클럽에서 만났던 스토커가 범인일거라 생각하고 케이시와 함께 추적에 나섰다..

케이시의 첫 등장과 그의 능력에 대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살인이나 사고를 제한된 시간 안에 막아야 한다는 류의 '시간 제한 서스펜스 스릴러'는 매우 흔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 시리즈만의 특징은 나름 확실합니다. 케이시의 예지 능력에 여러 제약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비일상적인 순간'만 볼 수 있어 정확한 장소와 상황을 알기 어렵고, '시간'도 예지된 장면 속 시계를 봐야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고, 이는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스토커 누마타가 범인이 아니라면, 용의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탓입니다. 유력한 용의자는 예지를 핑계로 요시에와 함께 행동하는 케이시인데, 케이시의 예지 능력은 '진짜'라는 설정이 맨 앞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데이트 클럽 여성들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인데, 데이트 클럽 사장은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니 이 정보를 아는 건 경찰 사와키밖에 없습니다. 즉, 그가 범인인 것이지요. 너무 뻔해서 의외성이나 재미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방탄, 방인조끼'를 입고 반격을 가한다는 반전도 마찬가지로 뻔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예지 능력이 등장하는 도입부는 신선했지만, 평범한 시간 제한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시간의 마법사"

"미쿠짱은 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분명 이겨낼 수 있어.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지만 마음으로부터 웃을 수 있는 날은 꼭 오니까, 그날을 믿고 힘내는 거야."

플롯 라이터 미쿠는 극작가로 성공을 꿈꾸지만, 기약없는 데뷰와 고된 생활에 지쳐갔다. 어린 시절의 행복을 떠올리고자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다가, 20년 전 자신을 만나 하루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일종의 타임 리프, 타임 슬립물입니다. 본인은 아무 기억이 없지만, 20년 전의 잃어버렸던 하루를 20년 뒤 다시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미쿠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잔잔한 일상계 드라마로 케이시는 순전히 주변 인물로 등장하며, 예지 능력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처음 알았네요.

추리 애호가로서 특별히 점수를 줄 부분은 없지만, 희망찬 미래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주제는 잘 전달해 주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

남자를 숱하게 사귀고 헤어짐을 반복하던 미아에게 케이시가 "수요일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날 미아는 사고로 누군가 죽는 장면을 목격한 뒤, 지나가던 야마기시 신고에게 도움을 받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신고는 점점 이중인격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퇴마 성수를 이용하여 이를 해결하려던 미아는 신고를 영원히 잃고 마는데..

미아는 당시 사고에서 죽은 남자가 신고에게 빙의했다고 생각해서 그를 물리치려고 퇴마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신고에게 죽은 남자가 빙의했던 것이 아니라, 신고가 죽은 남자였다는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신고의 혼이 '스즈키 히로시'라는 남자에게 빙의했던 것이지요. 신고는 미아가 벌인 퇴마 작업으로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고요

신고의 정체에 대해 밝혀지는 과정에서 추리물적인 성향이 살짝 보이기는 하지만, 일상계 판타지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물은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돌 하우스 댄서"

프로 댄서를 꿈꾸는 미호는 계속해서 오디션에 떨어져 좌절하던 중, 자신이 접하는 현재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기시감은 어린 시절 찾았던 '돌 하우스'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현재를 담은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의 마법사"와 똑같은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내용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시간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게, 미쿠는 극작가로서의 미래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라면서요. 하지만 미호는 댄서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대사가 이 작품을 대표하는 메시지지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평범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게 더 중요하다는 "돌 하우스 댄서"가 주는 감동이 더 강렬했습니다. 꿈을 쫓는 삶을 살기에는 제가 나이가 많은 탓이겠지요.

케이시는 이름만 언급될 뿐 등장하지 않아서 연작물로서의 가치는 다소 낮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이하 "6시간 후...")" 사건 5년 후, 요시에가 일하던 예식장에 케이시가 하객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케이시는 자신이 3시간 후 죽는다는 예지를 보았고, 이야기를 들은 요시에는 케이시의 죽음에 이르는 사고를 막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케이시와 요시에가 또다시 생존을 위해 시간 제한이 있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는 내용으로 "6시간 후..."의 진짜 후속편에 해당합니다.

"6시간 후..."처럼 예지 능력의 제약을 잘 활용해 서스펜스를 제공한다는건 같은데, 후속편답게 조금 업그레이드된 서스펜스를 제공합니다. 이번에는 시간과 '불에 타 죽는다'는 상황만 알 수 있거든요. 왜 불에 타 죽는지 조차 알 수 없고요. 또 토도 교수의 은퇴식 피로연장에서 죽게 되는데, 그 자리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있어서 더 큰 긴장감을 가져다 줍니다. 예지와 식장의 상세한 조사를 거쳐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이를 밝히고 도움을 얻는건 불가능한 상황도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고요.

계속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습니다. 케이시는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3시간 후 반드시 죽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미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미래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요. 요새 작품이라면 '멀티 버스'라고 부를, 평행 우주의 다른 루트로 옮겨 탄 결말인데, 뻔했지만 완벽한 해피엔딩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많이 부족합니다. 토도 교수의 자살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이 발포했고, 총알이 운 나쁘게 복도의 가스통을 맞춰서 폭발하게 된다는 상황부터 어처구니 없었어요. 게다가 이는 사전 조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고라, 시간 제한 서스펜스를 근본부터 흔드는 잘못된 설정이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06/02/08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 - 데니스 루헤인 / 김승욱 : 별점 4점

살인자들의 섬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황금가지

화려한 군 경력을 지닌 역전의 용사지만 아내가 방화에 의해 죽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던 연방보안관 테디(에드워드)는 파트너 처키와 함께 비밀임무를 띄고 수수께끼의 정신병원이 있는 외딴섬으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병동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레이첼 솔란도라는 여성 환자의 수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헐리 상원의원의 특명으로 정신병원 내부에 만연하는 불법 시술을 밝히는 임무와 함께 아내를 죽게 만든 방화범 레이디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품고 수사에 임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불어닥친 허리케인으로 고립된 테디와 처키는 레이첼 솔란도가 남긴 암호를 해독하며 진상에 접근해 갔고, 허리케인으로 병원 내부의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직접 행동에 나서는데.... 

"미스틱 리버"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사실 스릴러물이라 불리우는 이런 쟝르도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그동안 읽어 보았던 현대 미국 작가의 책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뻔한 내용이 많아서 최근에는 별로 읽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리네요. 한마디로 물건입니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전개와 묘사의 탁월성도 놀랍지만 독자를 빨아들이는 재미와 몰입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정도의 대단한 흡입력, 그리고. 서두와 결말,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한치의 오차 없는 치밀한 구성과 함께 중간중간의 디테일한 묘사까지도 책의 내용과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것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내공과 역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스릴러물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나름의 "암호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추리 매니아로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어요. 정통파 추리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지만 내용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의 재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잘 해 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딱 한가지, 반전 이후에 나오는 에필로그와 같은 마지막 날 오전의 풍경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잡역부 중 한사람이 나르던 물건은 과연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요. 또 주인공 테디의 캐릭터는 작품 설정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이런 류의 작품에 항상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 (터프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지닌 트라우마로 괴로워 하며 자살 충동마저 느낀다는) 이라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그간 읽은 미국식 스릴러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질렸던 참인데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던 것 같네요. 미스틱 리버도 읽어봐야겠다는 것과 앞으로 현대 미국 작가 책도 눈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영화화 이야기도 있는데 책의 내용만 잘 살린다면 "야곱의 사다리" 못지않은 이바닥의 수작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물론 잘 살린다는 것이 어려운 이야기겠지만요....

2024/02/09

더는 잠들지 못하리라 - P.D. 제임스 / 이주혜 : 별점 2.5점

더는 잠들지 못하리라 - 6점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아작

P.D. 제임스 단편집. "겨우살이 살인사건"과 같은 출판사에서 동일한 판형으로,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간한 시리즈 도서. "겨우살이 살인사건"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에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겨우살이 살인사건"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정통 고전 영국식 본격 추리물보다는 범죄 심리물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반전이 중심인 몇몇 작품들은 대체로 헨리 슬레사등 미국 단편 전문 작가들 스타일이라 신선함을 느끼기도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요
인기없는 선생을 하인이 살해하는걸 목격한 소년은 거짓말을 지어내서 하인을 구해준다.
소년이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꾸며내고, 의도한대로 사건 수사가 흘러가도록 주도한다는 내용의 심리 범죄물. 요요를 통해 옛 추억을 떠올리고, 소년이 이 때 받은 인상으로 법조인이 되었다는 등의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소악마'라는 측면 외에는 특별한건 없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피해자
완전 범죄 계획을 꾸미고 실행하는 과정이 그려진 범죄 소설이자 도서 추리물. 완전 범죄물로의 가치도 높고, 전처 엘시가 완전 범죄가 가능하게끔 안배했다는 반전도 깔끔합니다.

그러나 거의 30년 전에 다른 추리소설 걸작 단편선 앤솔러지를 통해 이미 읽어보았기에 신선함은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결말의 반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물론 30여년 전에 읽었던 작품의 기억이 생생하다는건 그만큼 이 작품이 빼어난 작품이라는걸 증명하지만, 이전 번역은 주인공의 협박 편지 속 오타까지 한글화했었는데 반해 이 책의 번역은 그 맛은 살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추리소설가 찰스 미클도어는 1939년 16살 때의 의붓삼촌 살인 사건의 재조사를 시작했다.
삼촌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협박 편지를 받은 뒤 편지대로 그날 밤 살해당했다. 그런데 찰스를 제외한 저택의 초대 손님들과 주변 이웃들도 삼촌을 살해할 동기가 있었다...

저택에서 벌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 다양한 초대 손님들이라는 무대 구성부터 정통 고전 본격 미스터리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는 작품.
추리적으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범인이 너무 명확하거든요. 찰스가 목격했던 산타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발견된 삼촌 - 산타로 분장했던 - 은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찰스가 목격했던 산타는 누군가가 변장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손님 중에서 찰스 삼촌과 키가 비슷했던건 콜드웰 뿐이었고요. 콜드웰이 방을 바꾸자고 한 등의 정황증거들도 차고 넘치니 범인은 콜드웰입니다!
범인이 뻔하니 흥미를 돋우기 위해 터빌 부부를 수상하게 보이게 만드는 묘사를 시도했는데, 이는 실패에 가깝습니다. 알고보니 부부가 성모상을 훔쳐갔다는건 드러난 정보로는 추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한 번 정도 이야기를 꼬아서, 누군가 키높이 구두를 신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어야 했어요.
전개도 아쉽습니다. 찰스와 당시 사건 수사 담당이었던 존 포팅어 경감 시선을 오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관계자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에필로그 역시 불필요했고요.
한마디로 초기작 느낌이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묘지를 사랑한 소녀
어린 시절 고아가 된 뒤 숙모집에 머물게 된 소녀는 묘지에 푹 빠졌다. 어른이 된 뒤 오래전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잊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옛 집을 찾아가서 어린 시절 봉인되었던 살인 사건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는 내용의 범죄물. 아버지는 할머니를 살해했다는 죄로 사형당했는데, 사실 할머니를 죽인건 소녀였다는 반전은 미국식 단편 범죄물 느낌인데, 심리 묘사로 잘 드러내서 섬뜩함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묘지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비일상적이라 억지스러웠고, 반전과 잘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는 사형수라 감옥 묘지에 묻혀있어 아버지 묘지에 갈 수 없다는걸 드러내는 결말은 작위적이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거주지
종합 중등학교 교사 해럴드 빈스는 아내 에밀리를 학대하다가, 에밀리 살인 미수 사건을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았다.
동료 교사였던 나는 이혼한 에밀리와 재혼해서 그녀의 소유였던 멋진 주택에 입주했다. 사실 살인 미수 사건은 모두 나와 에밀리가 사전에 모의해서 꾸며냈던 것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알고보니 덫에 걸려버렸다는 내용의 단편. 나는 에밀리를 위해 범행을 계획하고 도와주었지만, 에밀리가 먼저 죽으면 해럴드에게 누명을 씌웠던 범죄가 공개된다는 협박(?)을 받고, 원했던 주택마저 에밀리가 파는걸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채 결혼 지옥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요.
공들인 살인 미수 계획은 눈길을 끌지만, 설정과 전개, 결말 모두 전형적이고 흔한 미국식 범죄 스릴러물 단편을 연상케해서 아쉽습니다. 남편을 지옥에 빠트리는 에밀리라는 캐릭터의 마성(?)도 잘 드러나지 못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밀크로프트씨의 생일
밀드레드와 로드니 남매는 아버지의 생일 파티를 위해 양로원을 찾았다. 아버지는 과거 유산 때문에 동생을 독살했었는데, 비싼 다른 양로원으로 옮겨주지 않으면 이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남매는 옛날에 살던 저택에서 증거인 비소병을 몰래 회수하려했지만, 오히려 현 주인에게 들켜 약점을 잡히고 말았다.
결국 원하는 양로원으로 옮겨간 아버지는, 친구 '준장'과 함께 작전 성공을 자축하는데....

약간 코믹한 범죄극. 알고보니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약병의 회수와 관련된건 친구 준장과 함께 계획했던 작전이었다는 반전에 이어, 정말 아버지가 모티머 삼촌을 살해했다는 반전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깔끔합니다. 별 것 아닌 듯 했던 나무 구멍 속 비닐봉지를 반전으로 이어가는 솜씨는 과연 거장답다 싶었어요. 설득력도 높고요.
수록작 중 최고로 꼽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1/11/15

서스피션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3점

"더 크레이터"를 읽고 좌절했지만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읽은 데즈카 오사무의 또 다른 단편집. 원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이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주로 심리 서스펜스 - 호러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심리 묘사가 상당히 탁월해서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거든요.

특히 "서스피션"이라는 표제로 연재되었다는 세 작품이 발군입니다.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첫 번째 작품인 "파리채"는 로봇을 이용한 살인 계획과 뒤이은 반전을 다룬 그럴듯한 SF 범죄 스릴러로 헨리 슬레서의 단편 "헬로 자스민"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대한 깊은 고뇌를 묵직하게 그리고, 비교적 현실적인 반전은 더 낫습니다. 

"벼랑의 두 남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쫓아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도착한 뒤 벌어지는 치밀한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특징은 심리 묘사입니다. 정말 최고예요. 일종의 갇힌 공간이고 인적이 없다는 점에서 폐쇄형 스릴러물 느낌도 드는데, 후쿠모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하거든요. 다만 결말이 뜬금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끌어서 주인공 채무자가 외려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에필로그라든가, 시점을 바꿔 의외의 진상을 드러낸다는 식으로 그려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P4의 사각"은 바이러스 SF물입니다. '홀로 갇히게 되는 실험체(?)의 비애'라는 흔한 설정도 그닥이지만, 반전이 너무 작위적이라 셋 중 가장 처집니다. 심리 묘사가 더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디테일과 현실감이라는 측면에서 호시노 유키노부에게 더 잘 어울렸을 이야기였어요. 그냥저냥 평작입니다.

이외에는 블랙잭과 유사한 캐릭터가 프로 곤충채집가로 등장하는 "인섹터" 시리즈와 풍자, 블랙코미디, 시사성 짙은 무난한 작품들이 이어지다가 정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요리하는 여자"로 마무리됩니다.

이 중에서는 "요리하는 여자"가 물건입니다. 앞선 "서스피션" 시리즈 못지 않아요. 노인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노인 실종 사건을 다루는데, 뻔한 이야기이긴 하나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디테일하게 잘 살아있고 반전을 잘 숨겨서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랄까요. 극화를 섞어 디테일을 강조한 그림도 상당히 잘 어울렸어요.

이곳저곳에 실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작품들의 편차가 좀 있다는 점, 그리고 호흡 조절에 약간은 문제가 있다는 단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별점 3점은 충분해 보입니다. 최소한 "서스피션" 시리즈 3작품과 마지막에 실린 "요리하는 여자"는 장르물 애호가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08/06/26

적색의 수수께끼 - 나가사카 슈케이 외 / 김수현 : 별점 3점

적색의 수수께끼 - 6점
나가사카 슈케이 외 지음, 김수현 옮김/황금가지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중단편 5편을 모아놓은 중단편선집입니다. 란포상을 탄 작품은 아니고요. 본격물과 스릴러, 모험물(?) 등 다양한 쟝르가 섞여 있습니다. 본격물은 ""밀실"을 만들어 드립니다" 한 편 뿐이고 "구로베의 큰 곰"은 산악 조난-모험물, "라이프 서포트"와 "가로"는 사회파를 계승한 듯한 일반인의 진상 탐구 추리물, "두개의 총구"는 스릴러입니다.

이 중 개인적으로는 "구로베의 큰 곰" 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두근두근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작품들도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수준의 편차는 있습니다. 
그래도 국내에서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작가들의 중단편을 맛볼 수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희고 긴 복도"의 가와다 야이치로의 작품을 다시 읽을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이런 것이 앤솔로지 단편집의 매력이겠죠.

비슷한 시리즈로 "청색의 수수께끼"도 있는데 읽어봐야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추리 단편선집의 출간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밀실"을 만들어 드립니다 - 나가사카 슈케이
주인공 "나"는 추리소설가로 매주 수요일에 단골 카페 "사쿠"에서 열리는 추리 모임의 멤버. 어느날 "나"는 카페 모임의 주요 게스트인 "상복 부인"에게서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받고 뒤이어 벌어진 추리 모임에서 모임의 최 연장자인 회장의 밀실 재현극 해결에 고심한다. 결국 조수와도 같은 가출소녀 피노코의 도움으로 수수께끼를 해결하지만 회장의 밀실 살인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정통 본격 추리물이면서도 140페이지 가까이되는 중편인데 수록작 중 가장 재미가 떨어집니다. 제목 그대로 "밀실"에 지나치게 집착한 듯한 작위적인 설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밀실 수수께끼 자체는 재미있었고 마지막 사건의 트릭 자체는 괜찮았지만 여러 캐릭터들의 묘사는 진부했고 동기도 설득력이 없어요.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냥저냥한 작품이었습니다. 별 2개 정도?

구로베의 큰 곰 - 신포 유이치
구로베의 큰 곰이라 불리우는 나는 오래전의 사고를 계기로 산장지기를 맡아 외롭게 생활을 하고 있는 도중, 예전 자신의 사고와 같은 사고를 접하고 구조를 위해 출동한다.
산악 조난-모험물입니다. 주인공 야가미, 그리고 구로베의 큰곰 히누마를 오가는 시점의 변화가 인상적이었고 워낙 전개가 손에 땀을 쥐듯 긴장감을 전해다 주기에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막판의 시점 변화를 통한 살짝의 반전도 괜찮았고요. 별 4개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라이프 서포트 - 가와다 야이치로
의료사고 뒤 균형감각을 읽고 휴직중인 의사 요시토는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한 부유한 시한부 인생 노부인 히토미의 주치의를 맡아 그녀의 딸을 찾기위한 여정에 동참한다.
가와다 야이치로의 작품으로 "희고 긴 복도" 처럼 역시나 의사가 주인공이지만 실제 내용은 예전에 가출하여 행방불명된 딸의 행방을 찾는 사회파적 구성을 많이 답습하고 있어서 특이했습니다. 120여 페이지에 걸쳐 제법 길게 여러가지 단서를 통해 딸을 찾아내는 과정은 꽤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사실 그 단서라는 것 들이 너무 뻔한 조사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예전의 사립탐정을 통한 조사에서 밝혀내지 못한 것이 외려 미심쩍기도 했습니다. 앞뒤가 조금 안 맞는달까요? 또 막판의 급작스러운 전개는 너무 달려준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평작 수준의 작품이었습니다. 별 3개.

가로 - 신노 다케시
애인 노리코와의 다툼으로 거리를 배회하던 다쓰야는 급작스럽게 모르는 인물로부터 피습을 당한다. 그러나 그 인물의 자살 후 밝혀진 유서에 예전 원수를 죽이겠다는 표현 때문에 주간지 등에서 피습자인 다사카의 딸 지아키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게 되고 결국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절한 아버지가 살고 있는 예전 고향 마을로 내려간다.
일단 설정 자체가 참 좋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습격을 당했는데 습격한 인물의 유서를 통해 외려 피해자가 다른 사건의 가해자 처럼 인식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고, 미디어의 횡포를 잘 보여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그 이후 사건의 진상을 찾아가는 과정이 과거 의절한 아버지와의 추억담과 맞물리면서 그닥 마음에 들게 전개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또한 지아키가 왜 다쓰야에게 관심을 가졌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요. 뭐니뭐니해도 너무 큰 사건에 대한 주인공의 망각 자체는 설득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개의 사건의 진범은 결국 밝히지 않고 끝나는 것도 개운치 못했습니다... 
초반 전개와 설정은 좋았는데 뒷부분이 영 껄끄러워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개의 총구 - 다카노 가즈아키
거리에서 일어난 무차별 총기 난사사건의 범인과 같은 건물에 갇히게 된 청소 아르바이트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데...
스릴러물입니다. 소수의 인물과 닫힌 공간에서의 살의를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이전 읽었던 "고백" 과 유사합니다. 흔한 소재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나름의 긴장감을 영화와도 같은 구성으로 잘 그려내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심리묘사도 좋았고요. 
그러나 범인이 "이중인격"이라는 점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반전이 연속되는 결말부는 좀 뻔하기도 하고 시시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우직한 스릴러로 밀어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별 3개 줍니다.

2019/01/19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5점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엽기적인 살인 범죄가 잇달아 일어났다. 사건 담당 형사 고테가와는 과거 성범죄 등을 일으켰던 우범자 수사 중 알게 된 우범자 도마 가쓰오와 그의 보호 관찰관 우도 사유리와 친분이 생겼지만 우도 사유리의 아들 마사토가 세번째 피해자로 발견되었다. 피해자들의 성이 아-에-이.. 순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급기야는 우범자 명단을 내 놓으라며 경찰서까지 습격했다. 시민의 습격을 막던 고테가와는 시민들이 도마 가쓰오를 노린다는 우도 사유리의 전화를 받고, 그를 구하려 반장 와타세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를 나서는데...

저자인 나카야마 시치리는 2010년 "고노미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대상을 받으면서 데뷰한 작가입니다. 이력을 봤더니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쏟아내었더군요. 하지만 잘 모르는 작가이고 제목도 전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던 차에, 어디선가 괜찮은 작품이라는 리뷰를 얼핏 보고 출장 중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괜찮은 부분이 많네요. 우선 엽기적인 범죄극에 형법 39조에 대한 비판이 곁들여져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는게 좋습니다. 저 역시도 최근 일어나는 흉폭한 범죄에 대해 더 강하게 단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심신 미약이었다던가, 단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형을 경감해준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짐승은 짐승답게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이 회복해서 사회에 복귀하는걸 막자는건 아니지만, 그들의 회복을 지원하고 기다려주는건 죗값을 치룬 다음이어야 합니다.
이 작품은 절대로 회복되지 않고 다시 살인마로 돌변하는 정신 이상자와 그들의 끔찍한 범행 묘사를 통해 이에 대한 메시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참고로 제목의 "개구리 남자"는 범인이 개구리를 잔혹하게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인데, 그만큼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범행이 이어집니다.

전개도 탄탄하고 세련된 편입니다. 대표적인게 도마 가쓰오와 이름이 비슷한 나쓰오라는 소년의 과거 일화를 조금씩 소개해주면서 도마 가쓰오가 범인이 아닐까? 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는 과정입니다.
물론 나쓰오가 저지른 미카 살인 사건은 이미 앞부분에서 도마 가쓰오의 범행으로 소개된 '교살'이 아니라서 나쓰오는 도마 가쓰오가 아니라는게 밝혀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카 사건 직후, 시민의 한노 경찰서 습격이 몰아치기 때문에 고테가와가 도마 가쓰오의 집에서 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증거를 포착한 뒤 도마 가쓰오와 생명을 건 사투로 이어지는 과정은 위화감없이 진행됩니다. 경찰서 습격 장면 묘사는 그만큼 임팩트가 넘쳐서 독자가 딴 생각을 하기는 힘든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비록 본격물 수준의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건 아니지만 범죄 스릴러물로서의 완성도는 충분합니다. 특히 도마 가쓰오가 범인이었다고 마무리되는게 아니라 이 뒤에도 무려 두 번이나 반전!이 더 있다는게 돋보입니다. 단지 깜짝 반전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습니다.
첫 번째 반전은 우도 사유리가 진범이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근거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네 번째 피해자 에토 가즈요시가 남긴 물어 뜯은 듯한 상처, 그녀가 과거 범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는 묘사, 보험금 등 받을 수 있는 돈과 그녀의 주택 대출금이 일치한다는 등 여러가지 복선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나쓰오였다는 진상은 살짝 서술 트릭 느낌도 들고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부상을 입은 채 우도 사유리와 맞서 싸우는 고테가와에 대한 묘사는 "검은 집"의 절정부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마지막 반전인 오마에자키 교수가 흑막이었다는 결말도 좋습니다. 이 쪽은 증거보다는 형법 39조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와 닿은 덕입니다. 우도 사유리와 같은 단순히 "돈" 이라는 측면 보다는 훨씬 그럴듯했고, 사회파 소설다운 느낌을 전해주어서 괜찮더라고요. 결국 풀려나게 된 도마 가쓰오가 자신이 "개구리 남자" 임을 자각하고 아-이-우-에-오 순으로 오마에자키 교수를 죽이러 가겠다고 결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의 에필로그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경찰서 습격 이후의 묘사가 장황하고 강약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경찰서 습격에서 이미 한바탕 클라이막스를 거치고, 다시 도마 가쓰오와 고테가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이어진 후, 또 다시 우도 사유리와 어둠 속에서 결전을 벌이는 식으로 강-강-강으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우도 사유리와의 결전은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합니다. 목숨도 한 번 걸어야지 세 번이나 연속으로 걸면 값이 싸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오마에자키 교수의 동기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득력은 높지만 그가 우도 사유리를 다시 범죄로 인도했다는 이야기는 영 와 닿지 않아요. 사람의 정신과 기억을 마음대로 복사하고, 집어넣을 수 있다는건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어요. 설령 그녀의 악마성을 깨워 아들 살해까지 유도했다 하더라도, 에토 가즈요시를 살해한 이유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결국 도마 가쓰오가 범인으로 드러날 판인데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잖아요? 사유리가 오마에자키 교수가 지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지 않은 이유 역시 불분명하고 말이죠. 싸이코 연쇄 살인마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도 석연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서스펜스 넘치는 전개에 더해 몇 번의 반전까지 제공한다는 점과 형법에 대한 비판 정신만큼은 괜찮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서스펜스가 지나쳐 표류해 버리는 후반부는 아쉽지만 추리, 스릴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킬링 타임용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03/12/15

마지막 에이스 - 프레드릭 포사이스 : 별점 4점

"자칼의 날"등으로 유명한 첩보/스릴러 작가 F.포사이스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증거", "목격자", "광고번호H331","마지막 에이스", "면책특권","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이하 아일랜드)", "황홀한 죽음", "제왕","재수없는 날" 순입니다.
"목격자"와 "아일랜드.."는 이전에 다른 단편 앤솔로지에서 읽었었던 단편이니, 새롭게 접한것은 7편이네요.
첫 번째 작품인 "증거"는 걸작입니다. 독특한 설정, 계단을 올라가는 듯한 스릴, 반전까지 짧은 분량에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발견하기 힘들정도로 완성도 높은 단편입니다.

"목격자"는 예전에 다른 미스테리 앤솔로지에서 접했었던 이야기로("세계 미스테리 명작여행") 설정과 내용은 조금 뻔하지만 평작 이상은 됩니다. 킬러가 총을 반입하는 과정이 내용보다 오히려 흥미진진했습니다.

"광고번호 H331"은 한 중년남자의 일탈과 그것때문에 협박당하는 과정에서의 심리적 공포, 스릴 등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역시 좀 뻔했다는 것이고요. 그래도 마지막 장면에서의 살짝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마지막 에이스"는 수록 단편들 중 추리 및 스릴러물 성향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데 왜 표제작인지 모르겠네요. 포커에 빠져들게 되는 과정의 묘사는 흥미진진하고 디테일하지만 결말은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너무 익숙한 반전이었어요.

"면책특권"은 신문기사에 의해 명예를 훼손당한 주인공이 법률서적을 뒤진 끝에, 면책특권이라는 법률을 이용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는 이야기인데........., 일종의 콩트로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의 요소는 별로 없습니다. 존 그리샴이 쓴 가벼운 단편물 같은 느낌입니다.

"아일랜드.."는 아마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포사이스의 단편이겠죠?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지요.

"황홀한 죽음"은 자신이 죽은 뒤 유산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한 자산가의 이야기인데, 이색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부자들 이야기를 싫어하나봐요. 
그래도 보기싫은 여동생 가족을 골탕먹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국 이루어 낸다는 구성과 마지막 묘사까지 완성도는 대체로 높습니다.

"제왕"은 헤밍웨이를 다분히 의식하고 쓴것이 분명한 "낚시"단편입니다.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이지만 감정의 변화와 막판 뒤집기 (반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모자란)가 통쾌한 나름대로 멋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노인과 바다"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요..

마지막 "재수없는 날"은 그야말로 모든것이 꼬여버린 한 도둑의 이야기인데 코믹한 분위기가 넘치는 소품입니다. 아일랜드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포사이스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범작과 수작이 골고루 섞여있고, 범작에서도 포사이스의 재능은 느낄 수 있는 꽤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모든 작품에서 포사이스 특유의 단계적으로 늘어가는 스릴과 반전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코믹한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나름대로 "해피앤딩"인것도 특이합니다.

이 책은 저같이 단편소설 매니아에겐 딱 알맞는 책인것 같아요. 단편 하나하나의 길이도 적당하고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강추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PS: 9편이 실려있는데 책 뒷커버에는 "F.포사이스의 전율적인 스릴러 10편이 들어있다"라고 되어있군요. 흠...

2009/09/14

전쟁 전 한잔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3점

전쟁 전 한 잔 - 6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사립탐정 켄지는 상원의원 스털링 멀컨의 의뢰를 받는다. 의뢰내용은 동료인 브라이언 폴슨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던 제나 안젤린이라는 여성을 찾아서 그녀가 훔쳐간 중요 서류를 돌려받게끔 도와달라는 것. 켄지는 파트너 엔지와 함께 그녀를 찾는데 성공하지만 그녀는 켄지에게 사진 한장을 전해준채 눈 앞에서 사살당하고 켄지는 사건뒤에 얽힌 흑막과 함께 지역 암흑가 조직의 암투에 휘말리게 되는데....


지금은 초유명한 초베스트셀러작가인 데니스 루헤인의 데뷰작입니다. 유명 시리즈라는 "사립탐정 켄지 & 제나로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처음 완독하고나서 들은 생각은 "데뷰작스럽다"는 겁니다. 무슨말이냐 하면 내용 자체가 굉장히 전형적이라는 것이죠.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국식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가장 뻔한 전개, "뭔가 미심쩍지만 간단해보이는 의뢰를 받아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다보니 의뢰의 배후에 어마어마한 흑막이 존재해서 거기에 휩쓸려 들어간다" 는 전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형성은 작가의 전작들과는 많이 다른데 (읽어본 작품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전형적 전개를 지니는 작품이 아무래도 출간에, 데뷰에 유리했을테니 데뷰작스럽다...는 느낌이 든 것이죠.

하지만 뻔하긴 해도 이 작품이 재미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쿠만"이라는 요사이 즐겨보는 만화에서 두 신인만화가가 "점프 만화"의 "왕도"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전형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힘겹게 분투하는 과정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히트치기는 쉽겠지만 사실 구현하기는 어려운 "전형적이지만 재미있다!"라는 명제에 굉장히 충실한 작품이거든요. 이러한 재미는 데니스 루헤인의 글솜씨가 데뷰작에서부터 작렬한 탓이 크겠죠. 하여간 이 작가는 재미의 포인트를 잘 아는것 같아요. 별거 없어보이는 단순한 사건 뒤에 감추어진 흑막을 더듬어나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지루해질려고 하면 어김없이 엄청난 액션이 지면을 가득 채워서 한숨 돌릴 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데뷰작임에도 불구하고 아동 성폭행같은 충격적인 이슈를 이야기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도 대단하고요. 350여페이지나 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하룻만에 뚝딱 읽어버릴 정도로 흡입력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데뷰작의 한계랄까? 하는 부분도 눈에 띄입니다. 애시당초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약간 부족한, 헐리우드 범죄-스릴러물이라는 점은 어쩔 수 없겠죠. 전형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구조를 위해서 복잡하게 머리를 써야 하는 부분은 대폭 줄이고 대신 화끈한 액션으로 작품을 채워넣고 있으니까요.

단 아무리 전형적이라도 그렇지 주인공인 켄지라는 캐릭터는 너무나도, 생각하던 그대로의 스테레오 타입이라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더군요. 20세기 후반~21세기 미국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인 "뭔가 고민거리를 하나이상 안고 살아가는, 차가운 도시남자지만 자기 여자에게는 따뜻한(응?) 탐정" 그 자체거든요. 조금은 다르게 보이려는 의도였는지 어렸을 적 주변사람들은 영웅으로 알고 있는 권위주의자이자 가정폭력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사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긴 했는데 이 설정 역시 구태여 이렇게 복잡스럽게 만들어 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단순무식했더라면 (부바처럼?) 외려 더 독특했을거 같아요. 작품에서 소시아 - 롤랜드라는 두 암흑가 보스의 싸움과 중첩시켜 복잡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작가의 의도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효과적으로 쓰인 것 같지도 않거든요.

또 전개에 있어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브라이언 폴슨이 애시당초 사진의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상식적으로도 "복사본"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더군다나 이 중요한 사진에 대한 관리 허술은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나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고요. 그 외에도 고문의 달인 소시아가 애시당초 왜 켄지와 신사적으로 협상을 하려 했는지 등등 대충대충 넘어가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면 상식 밖의 전개가 꽤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건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적인 데뷰작이겠죠? 전형적인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물이긴 하지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는 재미 하나는 확실한 작품이니까요. 조금만 추리적인 부분이 많았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몇몇 묘사에 있어서는 데니스 루헤인스러운 면모도 보이고 있는 등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1/27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 권도희 : 별점 2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4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권도희 옮김/엘릭시르

"녹색은 위험", "제제벨의 죽음"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집. 5부 구성으로 모두 1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통 본격물, 범죄물,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등으로 수록작 장르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정통 본격물의 비중은 무척 적은 탓입니다. 트릭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추리도 억지스러워서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아요. '기묘한 맛' 장르 느낌으로 마지막 한 줄, 한 문단으로 반전의 매력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티는 역력하지만 이 역시 모두 성공한건 아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5부 구성도 1부 코크릴 칵테일을 코크릴 경감 시리즈로만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도로 분류하여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인 게임"은 앙트레로 묶기 어려운, 이 단편집 최고의 메인 요리라 생각되거든요. 오히려 앙트레 선택에 5부 블랙 커피에 수록된 심리물들을 포함시키고, 범죄물을 메인 요리로 묶어 구성하는게 더 일목요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범죄물도 심리 묘사가 중심이거나 조금 가벼운 이야기와 묵직한 본격물을 구분하여 배치하고요. 제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아페리티프(식전주) : 코크릴 칵테일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피를 나눈 형제"
* 기존 구성에서 코크릴 경감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 한 편, 그리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정.

2부 앙트레 선택
"이 집에 축복을"
"수군거림"
"발코니에서"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
* 심리 묘사 중심의 작품들로 구성.

3부 르 푸아송 (생선 요리)
"말벌집"
"너무나 괜찮은 사람"
"신의 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 말벌집은 '굴'이 사용되어서 생선 요리로 분류했고 다른 작품들은 심리 중심의 범죄물들.

4부 리플렛 프로스펠 (메인 요리)
"살인 게임"
"희생양"
"여기 잠들다"
"회전 목마"
정통 본격 추리 범죄물들.

5부 데세르 (디저트)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

6부 블랙 커피
"잔 속에 든 독"
도서 추리물로 '커피'가 핵심 소재라는 점에서 블랙 커피로 분류.


마지막으로 수록작들의 간략한 리뷰는 아래에 요약하였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부 코크릴 칵테일.
코크릴 경감이 활약하는, 늙은 형사의 회고담인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뺑소니 살인과 정부 살인 사건을 저지른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인 "피를 나눈 형제", 성질 고약한 부자 노인이 후처를 맞은 결혼식 날 독살당한다는 "말벌집", 남편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독살한 아내 시점의 도서 추리 소설 "잔 속에 든 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범인의 조작을 코크릴 경감이 간파한다는 작품들로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에서는 유명 극단의 톱 스타 주연 배우 제임스 드래건의 아내가 살해당했는데, 극단 배우들이 모두 나서 경찰 앞에서 연극을 펼칩니다. 이를 통해 제임스 드래건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알고보니 범인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서 드래건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피를 나눈 형제"에서는 쌍둥이 형제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이고, 한 명은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었다면 누구를 체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둘 다 자기가 알리바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밝혀내는건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옷에 증거를 남겼다는 반전도 기발했고, 결국 진흙탕 속으로 서로를 밀어넣어 파멸하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말벌집"은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1966년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이 후원한 영국추리작가 협회 회원 대상 단편소설 경연대회 1등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죠. 이유는 범인 엘레자베스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훈제 연어를 준비하는게 어려웠다'는 말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된다는건 믿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가 사건을 연출했다는 것도 정황 증거에 불과하며 굴 안에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먹였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고요.
"잔 속에 든 독"은 범인 스텔라가 범인으로 몰리자, 임기 응변으로 남편 등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내용으로 도서 추리 소설과 심리 스릴러를 잘 결합한 좋은 작품입니다. 완벽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독이 든 커피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마지막 한 마디도 좋았고요.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2부 앙트레 선택.
유명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살인 게임", 일종의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희생양", 거짓 증언으로 선량한 히피가 파멸에 이른다는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의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게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도 소개되었던 단편이지요. 이전에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경찰로 변장한 뒤 밀실이었던 현장에 숨어있다가, 밀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 중 한 명으로 위장했다는 트릭이 기발합니다. 마지막에 이야기를 듣던 노인의 한 마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도 서늘했고요. 다만 범죄자의 혈통은 유전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는건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낡은 사고방식이라 아쉽네요. 그래도 2부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희생양"은 13년 전, 유명 마술사 미스테리오소가 저격당해 충직한 하인 톰이 대신 죽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저격용 총의 방아쇠에 묶인 끈에 사과 봉투를 위에서 떨어트린 장치 트릭인 것 처럼 풀어나가지만, 일종의 시간차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릭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이었던 경찰이 사과 봉투를 터트려 총소리를 위장한 뒤 진짜 저격은 나중에 벌였다는데, 사과 봉투를 터트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총 소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마지막에 소년이 미스테리오소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같은게 있었던걸까요? 2부, 아니 수록작 전체를 통틀어서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는 웨일스를 무대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탈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짓말의 연쇄가 진범의 알리바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선량한 히피 무리의 리더 크리스토가 누명을 쓰고 마는 과정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묘사됩니다. 셜리 잭슨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방불케할 정도에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볼만한 범죄 심리 스릴러였습니다.

3부 입가심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한 편이 소개됩니다. 블란쳇 부인의 진주 목걸이를 훔치려는 컴퍼트 양과 스네이스 씨의 작전, 그리고 이들을 농락하는 진짜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호지 양이 얽힌 재미난 범죄극이 펼쳐집니다. 진짜 도둑은 하녀 글래디스였다는 마지막 반전도 일품이고요. 그야말로 '입가심'에 적절한 유쾌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쾌작입니다.

4부 프티 푸르
'프티 푸르'는 한 입 디저트라고 하는데, 수록작들 대부분이 완전범죄 계획 살인물입니다. 한 입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네요.
하여튼, "여기 잠들다"는 아내를 사고사처럼 위장하여 죽이려는 제럴드의 치밀한 계획을 그립니다. 아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익사시킨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거의 성공했고요. 하지만 알리바이를 위해 고용했던 타이피스트 부처 부인이 제럴드를 죽인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부처 부인의 외모라던가 성격 묘사를 덧붙여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회전 목마"는 자신을 협박하던 빈들 씨를 살해한 하틀리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범죄물로도 좋은 수준이지만, 빈들 씨와 하틀리 부인의 꼬마 아이들이 범죄에 대해 모든걸 알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채 진상을 이야기하는 묘사도 서늘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는 악당 호러호러 족장을 살해한 이야기인데, 계획에 따른 완전범죄는 아니었습니다. 범인이 풀려났던건 목격자였던 존스 부인이 유리창 반사로 일으켰던 착각 탓이었지요.
"발코니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웃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킨 제닝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의 심리 스릴러 범죄물입니다. 히치콕의 "이창"을 뒤집어 놓은 설정과 제닝스 부인을 바라보는 이웃 시점의 묘사를 곳곳에 삽입하다가, 이웃들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5부 블랙 커피
수록작 네 편 중 세 편은 여자의 심리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에 축복을"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믿는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괜찮은 사람"은 그야말로 딱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너무나 괜찮았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심리를, "수군거림"은 자신의 실수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촌과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여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신의 힘"은 완전 범죄물입니다. 범인 에반스 경관의 범행 계획은 그냥저냥이지만, 딸과 손녀를 죽게만든 범인 젤링크스를 옭아맨 설정은 일품이었습니다. 에반스 경관의 거짓 증언으로 젤링크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무죄를 받아들인 뒤 협박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습니다.

2024/09/28

무도 실무관 (2024) - 김주환 : 별점 2점


무술에 능한 치킨배달원 이정도는 보호관찰관 김선민을 도와준걸 계기로 전자 발찌를 찬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무도실무관'을 하게 되었다. 최악의 아동 연쇄 성범죄자 강기중이 20년만에 출소한 뒤, 강기중에게 돈을 대어 아동 성착취물 영상을 만드는 조직이 보호관찰관 조직을 습격했다. 다행히 이정도와 김선민은 중상에 그쳤지만, 무도실무관 조주임은 사망하고 말았다. 정도는 퇴원 후 동네 친구들과 힘을 합쳐 강기중을 잡으러 나서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본 액션 범죄 스릴러물. 지난 추석 연휴에 감상하였습니다. 리뷰가 늦었네요.

고단자 무도 실무관으로 나오는 김우빈을 중심으로 한 액션은 볼만했습니다. 유도, 태권도, 검도 각 3단의 엄청난 유단자로 등장하는데, 외모부터 설정에 걸맞고 액션도 나쁘지 않았어요. 최종 빌런이라 할 수 있는 강기중도 외모, 덩치로 강함을 충분히 어필하고요. 
다소 가벼운 분위기의 전개, 그리고 전자 발찌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무도 실무관'과 '보호 관찰관'이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각본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정도가 차량 번호판에 대한 조회를 김선민 팀장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스스로 강기중을 잡으러 나서는 클라이막스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별볼일 없는 친구들과 협력해서 다크웹 조직과 강기중을 일망타진하는 모습은 경찰의 무능력함만 돋보이게 만들 뿐이고요.
설정도 문제 투성이입니다. 다크웹 조직이 무도 실무관과 보호 관찰관을 습격할 이유는? 왜 다크웹 조직이 돈과 시간, 중범죄 죗값까지 나중에 치뤄야 하는 무리수를 두었을까요? 아동 성착취물에 강기중이 등장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설령 강기중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강기중만 전자 발찌를 떼어내고 다른 곳에 옮긴 뒤 영상물을 만들면 될 일이었고요. 무도 실무관과 보호 관찰관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 강기중이 본인 거주지에서 당당히 살아가는건 불가능했을테니까요.
강기중의 강함도 설정에서 뒷받침해주는게 좋았습니다. 20년 형을 살고 나왔으니 최소한 40대 중반일테고, 출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쌩쌩한 몸 상태를 유지하며 무술 고단자와 대등하게 일기토를 겨룬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거든요. 세 명의 친구들이 이정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경찰도 부르지 않고 먼 곳에서 동영상 중계만 보고있던 설정도 어처구니가 없었고요.

초반부의 가벼운 전개가 조주임의 죽음으로 무겁게 전환되는 것도 별로였습니다. 이정도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리지 않은 탓입니다. 이왕 무겁게 전개할 거였다면 '신입 무도 실무관 이정도'라는 설정으로 정상적인 경찰 조직내 활동으로 그려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OTT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볼 만한, 양산형 킬링타임용 액션물 이상은 아닙니다.

2019/03/24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웬디 워커 / 김선형 : 별점 2점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4점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북로그컴퍼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인하게 강간당한 제니를 위해 부모는 망각 요법으로 당시의 기억을 없앴다. 그러나 오히려 제니는 자살을 기도했고, 새로 제니를 맡게 된 정신과 의사 앨런은 제니의 기억을 복구하여 치료에 나섰다. 하지만 제니의 기억이 차례로 돌아오면서 제니가 표백제 냄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자, 앨런은 자신의 수영 선수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표백제, 그리고 강간범은 몸에 털이 없었으며 빨간 새가 그려진 파란색 후드티를 입었다는 증언 모두 제이슨에게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제니의 아버지 톰에게 들은, 톰의 직장 상사 밥이 딸 뻘인 비서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이용하여 밥을 범인으로 조작하려 결심했다. 약간의 조작으로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 밥은 알리바이도 없으며 과거 성범죄 경력이 있었다는게 밝혀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밥은 어쩔 수 없이 제니 강간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친구의 딸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누명을 벗지만, 분노한 라일라의 아빠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권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러러면 자아가 아주 강인해야 한다."
"우리가 낳은 자식을 보호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담한 불행이다."

심리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망각 요법과 트라우마 치료에 대한 안내서에 가까와 의외였던 작품입니다. 제니와 앨런, 숀, 톰, 샬럿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강박증을 이겨내는게 주요 내용인 탓입니다. 범죄물의 분위기를 풍기는건,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한 앨런이 제니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뿐이고요. 

물론 설득력은 높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다운 디테일아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샬럿에게 들은 밥과의 성관계 묘사와 TV 광고, 경찰과의 통화를 활용하여 제니의 마음 속에 밥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과정이 아주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밥이 왜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하며, 알리바이를 밝힌 후 처단받는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어요. 조금 꼬아놓기는 했지만 초반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마약 판매상 더마코와 제이슨, 그리고 진범 셸비가 그곳에 있었던 이유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일단 범죄 스릴러, 추리물이 아니까요. 범죄물로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제니를 강간한 범인이 누구인지가 이야기의 핵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범의 정체 역시 뜬금없고요. 몇 번 반복해서 소개된, 앨런이 구하지 못한 유일한 환자라는 셸비가 진범인데 그 전 까지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다가 결말에서 급작스럽게 정체가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습니다. 셸비가 앨런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제이슨을 스토킹하여 강간하려고 했다는 목적 정도만 납득이 갈 뿐입니다. 이럴거면 범인은 누구라도 괜찮았던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충 마무리한 느낌이 들 정도에요.
셸비가 오래전 앨런도 강간한 적이 있었다는 설정도 황당합니다. 앨런도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이며, 제니의 치료와 함께 스스로도 치유되었다는 결말을 위한 억지 설정인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또 셸비가 진범이라는걸 진작 알고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는 제이슨에게 혐의가 가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던 앞부분 모습과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진범이 누구인지를 경찰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극에 달한 앨런 1인칭 시점의 묘사 역시 그닥입니다. 주변 묘사 없이 앨런의 심리 묘사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나 인터뷰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몰입하기 힘들었어요.
또 어느새 톰과 샬럿의 과거와 현재 비밀까지 공유하며 그들을 치료하게 되는 전개도 이상합니다. 분명 제니의 치료, 기억 복원이 목적인데 왜 부부의 심리 치료까지 하는건지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이를 위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심지어 샬럿은 과거 의붓아버지와의 성관계를 숨겼을 뿐 아니라 남편 톰의 직장 상사 밥과 불륜 관계라는 설정인데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성폭행 피해자인 제니가 아닌 샬럿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역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샬럿은 밥과의 관계를 깨고, 자신이 잃었던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톰 역시 그런 샬럿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다시 사랑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고통을 떠올린 후 치유가 되었다는게 전부입니다. 샬럿과 톰이 뭘 어떻게 하건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냥 막장 드라마와 같은 재미를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등장 인물들과의 대사로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져 숀같은 인물의 비중이 기묘하게 높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숀은 제니의 심리를 전달해주기 위해 투입되어 비중도 커진 도구에 불과해 보이거든요. 제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한데 말이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졌다면 더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도 없고 묘사도 지루하며 장황할 분 아니라 범죄 스릴러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인터넷 상의 그럴듯한 소개에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2022/07/09

사명과 영혼의 경계 - 히가시노 게이고 / 송태욱 : 별점 3점

사명과 영혼의 경계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송태욱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키는 아빠 겐스케가 대동맥류 수술을 받다가 죽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의사가 될 결심을 했다. 데이도 대학 의대를 졸업한 그녀는 아빠를 수술했던 니시조노 교수 팀에 소속되었고, 이후 엄마 유리에와 니시조노 교수가 재혼한다는 사실과 아빠가 경찰이었을 당시 추격하다가 교통 사고로 사망한 소년이 니시조노 교수의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빠 죽음에 더 큰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한편 데이도 대학 병원의 간호사 노조미와 교제하고 있는 전자 기술자 나오이 조지는 노조미로부터 병원에서 아리마 자동차의 사장 시마바라 소이치로가 곧 수술을 받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모종의 계획을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의학 드라마이자 범죄 스릴러물. 의학 드라마는 유키와 니시조노 교수 사이의 이야기에서 주로 등장합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종합병원'같은 의학 빙자 연애물같은건 아니에요. 유키가 겐스케가 죽은게 정말 의료 사고였는지, 아니면 니시조노 교수가 유키의 엄마 유리에와 불륜 관계라서 아빠를 실수로 위장해 죽인건지, 아니면 아들의 복수였는지에 대해 추적하면서 독자를 고민에 빠트리기 때문이지요. 동기가 많은 탓에 진상도 굉장히 궁금하더라고요. 이렇게 여러가지 동기를 쌓아나가는 솜씨는 확실히 잘 나가는 작가다왔습니다.

의학 드라마로서의 가치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 핵심이 의사로서의 '사명'인 탓입니다. '사명'은 유키의 아빠 겐스케의 입을 빌어 "인간은 그 사람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전개를 통해 니시조노 교수는 그의 사명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어차피 겐스케 죽음의 진상은 유키가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터라,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전개와 결말 모두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끔 잘 그려지고 있어요.
이를 의학 드라마라면 반드시 클라이막스에서 보여줄 '위험한 수술의 성공' 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이용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조지의 테러로 수술의 성공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온갖 노력을 짜내어 시마바라의 수술을 이어가는 과정은 왠만한 모험 소설 못지 않은 긴장감과 스릴을 가져다 주는 덕분입니다. 이만큼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사가 사람을 일부러 죽일리 없다는 설득력도 갖추면서요.

그리고 시마바라가 수술받을 때를 노려 병원을 정전시키는 조지의 계획이 펼쳐지는 부분이 범죄 스릴러물 부분인데, 여기서는 탁월한 장르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력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조지의 계획이 아주 그럴듯 했던 덕이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심폐 소생기 전원만 건드리는 수준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조지가 일으켰던, 혹은 행했던 소소한 사건들 모두 - 대표적인 예는 처음에 기묘한 협박장을 보냈던 이유입니다. 자신의 계획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가 목적이었지요. -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계획 역시 굉장히 스케일 크고 잘 짜여진 것이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나나오 형사가 협박범의 진짜 목적은 시마바라 소이치로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벌여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추리적인 부분들도 볼만했습니다. 나나오 형사는 범인의 동기를 밝혀내기 위해 아리마 자동차의 과거 과실을 조사했고, 단순히 과실 피해자가 아니라 과실로 인해 수술 골든타임을 놓쳤던 다른 피해자의 애인이었던 조지가 드러나게 되거든요. 과실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서 처음에는 용의 선상에 오르지도 않았었는데,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유키가 조지의 얼굴을 살짝 보고 기억하고 있었다가 이를 나나오 형사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우연찮게 보고 떠올린다는 작위적인 요소는 조금 거슬리기는 했습니다만, 이 정도는 봐 줄만 하지요.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조지가 본인 이름으로 숙박했던 호텔을 경찰이 덮쳤음에도 현장에 없었다는 식의 두뇌 게임도 볼만 했습니다. 경찰에게 정체가 발각날 것을 대비해서 미리 본명으로 추가 예약을 해 놓았을 뿐, 조지의 은신처는 따로 있었다는 공격을, 범인이 호텔 예약 시 특별한 '층'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통해 그 호텔은 저층에서는 데이도 대학 병원이 보이지 않으니 이건 위장이다! 라고 나나오 형사가 받아치는 식인데 재미있었어요.
조지가 전자 기술 전문가로서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장치들도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고요.

그러나 조지의 계획도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조지가 노조미를 유혹해서 사귀게 된 것은 언젠가 데이도 대학 병원에서 시마바라 소이치로가 수술을 받을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는 것 처럼요. 그리고 노조미가 수술실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할 속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간호사를 유혹하려면 시간이 없잖아요. 또 수술 중 정전을 일으키는 테러를 일으킬 수 있었다면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폭탄 등을 설치할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말이죠. 시간이 필요한 계획을 세우다 보니, 결국 노조미가 감정에 호소하자 복수를 포기하고 말았으니까요. 여러모로 구멍이 많은 계획이었어요.
의학 드라마 부분에서 니시조노 교수가 유키의 엄마 유리에와 재혼을 앞두고 있다던가, 니시조노 교수 아들 사건과 같은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유키와 니시조노 교수간 갈등이 약해질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런 설정에 대한 분량도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조지와 노조미의 감동적인 엔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범죄 스릴러 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명성에 값하며, 의학 드라마로서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가져다 준다 생각됩니다.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드라마도 한 번 보고 싶네요.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데 어떻게 구현했으려나....

2024/01/05

검은 황무지 - S.A. 코스비 / 윤미선 : 별점 3점

검은 황무지 - 6점
S. A. 코스비 지음, 윤미선 옮김/네버모어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러가드는 어머니의 병원비와 딸의 대학 등록금 등 급전이 필요해서 로니의 보석상 다이아몬드 강탈에 참여했다. 로니와 콴의 실수로 엉망진창이 된 와중에도 보러가드의 빼어난 운전실력 덕분에 다이아몬드는 훔쳐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뒷세계 거물 레이지의 것이었고, 레이지는 강도단을 붙잡아서 경쟁자 셰이드의 플래티넘 코일을 훔쳐오라고 협박했다. 보러가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코일을 성공적으로 탈취해 왔지만, 로니가 배신해서 코일을 빼돌렸고 보러가드의 사촌 켈빈마저 살해했다.
배신을 알게 된 레이지는 보러가드의 가족을 납치하려고 했고, 이에 보러가드는 로니와 레지 형제를 죽이고 코일을 되찾은 뒤, 가족을 지키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레이지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데....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을 통해 읽게 된 작품. 두뇌파 악당이 주인공이며, 그가 세운 계획에 따라 벌어지는 여러가지 범죄들이 이어집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는 피카레스크 하이스트 스릴러, 쉬운 말로는 악당 범죄 활극이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흑인 버젼의 "악당 파커" 시리즈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물과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주인공 보러가드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악당이기는한데,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건 모두 가족 때문이며 마지막에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사라질 결심까지 한다는 점입니다. 가족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요. 물론 마블 세계관의 킹핀처럼 '내 가족에게는 따뜻하지만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잔인한' 악당도 있지만 '보러가드'는 삶에 찌든 소시민으로 가족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탁월한 묘사는 이런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요. 반면 '버그'로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으로 범죄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괴롭힌 악당들에게 하는 복수는 처절합니다. 이렇게 악당 '버그'와 좋은 아버지 '보러가드'라는 이중적인 면모를  이상하지 않게 잘 그려낸 솜씨가 탁월했니다.

범죄물로서도 평균 이상입니다. 일단 스릴러로서의 전개가 발군입니다. 보러가드에게 끊임없이 위기가 닥치는데 정말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호를 기다리기 힘들었을 것 같을 정도였어요.
'하이스트' 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 코일 탈취 사건, 그리고 마지막 레이지와의 결전이라는 세 개의 큰 작전 모두 계획부터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세밀하게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모두 보러가드의 운전 실력이 핵심이라는 독특함도 좋았습니다.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에서 고가도로로 도주한 뒤 뛰어내린다던가, 코일을 탈취할 때 코일이 실렸던 트럭을 더 큰 트럭 안으로 몰아 넣어 숨기는 식이거든요. 마지막에는 레이지를 끝장내기 위해 애차 더스터를 몰고 카 체이스를 벌이고요.
보러가드의 정비 기술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 때에는 이산화질소식 촉매 시스템을 엔진에 장착해서 빠른 속도를 냈으며, 강철판을 용접하여 추락 시 충격을 흡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코일 탈취 때에는 달리면서 밴이 트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트럭 꽁무니에서 경사로가 나오도록 개조했고요. 레이지에게 준 벤에는 원격 조종 폭탄을 설치하여 폭발시켰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범행 과정에서 반전처럼 등장해서 재미를 더해주며, 설명도 충분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동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차는 차종에 대해 무조건 언급해줄 정도인데, 작가가 자동차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유물로 또 다른 주인공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더스터'는 무슨 차인지 궁금해서 좀 찾아보았는데, "Plymouth Duster"로 1970년대 생산된 자동차더군요. 전형적인 '아메리칸 머슬' 입니다. 보러가드, 아니 버그와 참 잘 어울리네요. 가족에 위기가 닥쳐도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지만, 복수를 끝낸 뒤 폐차시킨다는 결말까지도 뭔가 미국적이고 마초적이었고요.

하지만 걸작 하이스트 소설로 보기에는 작전은 평이한 편입니다. 신기에 가까운 운전 실력이 알파이자 오메가로 그렇게 치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대단한 세력을 지닌 듯한 악당 레이지의 조직이 보러가드 한 명에 의해 괴멸되는 결말도 별로였습니다. 여기에서야 말로 수와 화력의 열세를 뒤집을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는데, 단지 '폭탄'으로 모든걸 해결한다는건 지나치게 시시했거든요. 악당 조직이 이 때 한 곳에 모두 모인다는 설정도 억지스럽고요. 최소한 보스 레이지가 직접 나서서 트럭을 찾으러 갈 이유는 없잖아요? 전형적인 헐리우드 액션 스릴러 스타일의 결말이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소설로서의 재미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덧붙이자면, 보러가드가 흑인이지만 인종 차별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떤 가치관, 사상은 전혀 담겨있지 않은 순수한 오락물이거든요.

2022/09/03

파기환송 - 마이클 코넬리 / 전행선 : 별점 1.5점

파기환송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전행선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방검사장 게이브리얼이 미키 할러에게 특별 검사 자리를 제안했다. 아동살해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20년 이상 수감되어 있었지만, 스스로 사법 투쟁을 벌여 파기 환송을 만들어낸 제이슨 제섭 사건 때문이었다. 사건 당시 발견되었던 정액이 DNA 분석 결과, 제이슨 제섭의 것이 아니었다는게 결정적 이유였다. 앞으로 60일 이내에 검찰은 그를 무죄 방면할지, 재심할지 결정해야 했다. 게이브리얼은 사건을 재심하기를 원했지만 특별 검사제를 시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키 할러가 필요했다. 

전처 매기를 차석 검사로, 이복형 해리 보슈를 전담 수사관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받아들인 미키는 팀을 꾸렸고, 재판을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한 끝에 세라의 증언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걸 알아챘다. 사건 당시 13살의 나이로 제섭을 범인으로 지목했던 그녀는 현재 실종 상태였다. 해리 보슈는 수사를 통해 세라를 찾아냈고, 그녀를 증언대에 세우는데 성공하는데....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이후 이어지고 있는 마이클 코넬리미키 할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전 작에서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미키 할러가 '특별 검사'로 변신하여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변호사 클라이브 로이스와 맞서 싸운다는 설정 변주가 독특했습니다. 전처인 검사 매기 맥퍼슨,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인기 시리즈 주인공 해리 보슈와 함께 하는 '드림팀' 구성도 볼만했고요.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제이슨 제섭 사건 재판은 분량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조사가 진행된 듯 하지만, 실상은 세라의 증언 - "제이슨 제섭이 동생을 납치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정액이 묻었던 옷은 원래 내 옷으로,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탓에 정액이 묻었었다." - 가 증거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이를 뒤집기 위한 클라이브 로이스의 카드도 별볼일 없습니다. 세라의 전 남편인 에디 로만을 증언대에 세워, 당시 양부가 멜리사를 죽였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세라에게 거짓 증언을 시킨 거라는걸 폭로하려 했는데, 이 시리즈 내내 반복되어 왔던, '검찰 측 거짓 증인' 이나 '교도소 내 밀고자' 를 통한 물 흐리기 작전과 똑같아서 식상했어요. 

게다가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에디 로만을 무너트리는건 전작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디 로만의 현재 동거인 소니아 레이예스를 법정 안에 데리고 들어온게 전부거든요. 그녀가 있거나 없거나 에디 로만의 증언이 바뀔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에디가 그녀를 본 뒤 증언을 완벽하게 번복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클라이브 로이스의 작전은 배심원들에게 의심의 씨앗만 심으면 충분했는데, 이렇게 전적으로 증언을 번복할 이유 역시 없고요.

추리, 범죄, 스릴러물로도 기대 이하입니다. 멜리사 사건의 진범이 제섭이고, 초반 재판의 키 포인트로 보였던 정액이 양아버지 것이었던 이유는 세라가 성폭행 당했기 때문이라는 등 주요한 수수께끼 모두는 세라의 증언으로 밝혀지니까요. 세라는 제섭의 얼굴을 24년이 지났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양아버지 정액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다른 수수께끼들은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제섭이 재판 전, 한 밤중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따라 프랭클린 캐니언 등의 공원에 몰래 방문해서 촛불을 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수수께끼가 대표적이에요. 제섭은 연쇄 살인범으로 자기가 죽였던 피해자들이 묻혀있어서, 그걸 기념(?)하는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해리 보슈의 지인인 FBI 심리 분석관 레이철의 분석으로 설명하는데 이해하기 힘듭니다.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뒤,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피해자를 살해했던걸 어떻게 연쇄 살인과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동 살해범이 이전에도 범행을 저질러왔던 연쇄 살인마라는건 당황스러울 정도로 전형적이었을 뿐더러, 설령 그렇다쳐도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는 곳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묻혀있는 시체를 제섭과 연결시킬 수 없으니 일단 묻고 가자는 미키 할러의 주장은 용납할 수도 없고요. 그게 제섭의 범행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종된 여자들과 그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심이 있다면 만사 젖혀두고 시체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제섭이 해리 보슈의 집 앞에 머물렀던 이유, 은밀한 거처를 만들었던 이유 등도 딱히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전개도 시원치 않습니다. 우선 미키 팀이 피해자의 언니 세러를 찾아내서 인터뷰하는 부분이 작품의 1/3 정도 지점이라 그 이후 제섭 사건에 대한 흥미는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제섭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니 당연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미키 팀이 에디 로만의 증언을 박살내 버린 후, 좌절한 제섭이 자기 변호사 팀과 감시하던 SIS 요원들을 사살하고 도주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법정물, 추리물 비스무레한 뭔가에서 헐리우드 액션물로 전락해버리는 탓입니다. 제섭이 도주 후 딱히 하는 것 없이 사살당하는 장면도 허무했고요. 복수를 노린 것도 아니고, 뭔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단지 숨어있으려고 했던 것 뿐이라 실망스럽습니다. 

아울러 중반부에서 엄청나게 치밀하고 복잡하다고 설명되었던 SIS 감시 시스템이 제섭의 도주로 별볼일 없이 무너져버리는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미 제섭이 총을 손에 넣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4명이나 제섭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SIS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해리 보슈의 등장이라던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름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제섭이 도주해서 사건을 키우지 않았다면, 배심원 중 한 명이 반대해서 - 심지어 미키 할러의 의도로 재판 초기에 바뀐 배심원 -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나름의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단점이 훨씬 더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이 시리즈도 이제 더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25/08/24

스펜서 컨피덴셜 (2020) - 피터 버그 : 별점 1점

경찰 스펜서는 부패한 상관 보일런을 폭행했다가 5년 동안 수감되고 말았다. 스펜서의 출소 직후 보일런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선량한 경찰 테렌스가 누명을 썼다는걸 알게 된 스펜서는 룸메이트 호크와 함께 잔상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부패한 경찰들이 범죄 조직과 함께 대량의 마약을 유통한 자금으로 카지노 '원더랜드'를 개장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걸 알아내는데...

로버트 B. 파커가 창조한 보스턴 사립탐정 ‘스펜서’ 시리즈 중 하나인 에이스 앳킨스(로버트 B.파커 사후 원작을 이어서 쓰고 있는 작가)의 "원더랜드"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장편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로 범죄 스릴러, 액션, 버디 코미디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어느 쪽에서도 두드러지 못합니다.

특히 기대했던 범죄 스릴러, 수사물로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일단,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수사는 전개상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단서들은 스펜서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우연히 제공해 주니까요. 예를 들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도청 파일을 피해자 테렌스의 아내가 스펜서에게 직접 전해주는 식으로요.
스펜서의 옛 파트너 드리스콜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너무 쉽게 밝혀집니다. 초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이쑤시개 조각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수준이라 긴장감 있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패한 옛 파트너, 마약 조직, 조직 내부의 은폐 구조 등 설정들도 지나치게 전형적이고요.

전개 또한 뻔하고 치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간 보스급인 벤트우드에게 쳐들어가서 물고문을 통해 마약 운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럴 거라면 은밀한 수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요. 게다가 정보를 털어놓았다면 악당들도 운송 시간을 바꾸는건 당연한데, 예정대로 운송하다가 마약 트럭을 스펜서에게 탈취당하는건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스펜서 캐릭터도 원작 붕괴 수준입니다. 원작에서는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시니컬한 말투, 심리 묘사 측면에서 복잡한 면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말빨(?)좋은 전형적인 마초 헐리우드 경찰, 형사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액션에서라도 화끈했어야 했는데, 작중 대부분 장면에서는 적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장면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럴거라면 권투에 일가견이 있다는 설정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마크 월버그도 그리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고요.

액션은 다른 부분에서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격투 장면들 모두 속도감이나 위력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맨손 액션의 쾌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호크가 덩치를 활용해 마지막에 잠깐 활약하긴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워 액션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절정부입니다. 부패 경찰과 범죄 조직이 결탁한 악의 무리와 대단한 결전을 벌여야 할텐데, 스펜서가 트럭을 몰고 악당 본거지에 돌진한 뒤 호크가 몇 명을 때려눕히는 걸로 결전은 대체로 마무리됩니다. 스펜서와 드리스콜의 1:1 맞짱은 너무 작위적이라 어이가 없더군요. 부패 경찰들 때문에 보도도 못하고 사건이 은폐되었었는데, 스펜서와 호크의 활약 이후 사건이 대대적으로 폭로된다는 결말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래도 너무 바보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다는건 오히려 장점이기는 하네요. 몇몇 유머 코드는 피식 웃게 해 주기는 하고요. 거인 호크, 조력자 헨리 캐릭터는 캐스팅이 좋습니다. 완전한 권선징악 마무리도 후련했고요.

다만 이 정도 장점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보완해주기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범죄물로서도, 수사극으로서도, 액션 영화로서도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원작인 탐정 스펜서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로 에필로그에서 후속작, 시리즈의 여운을 남기는데 어림도 없지요. 소리없이 망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012/08/17

12인의 상냥한 암살자 1~2 - 후지에다 토루 : 별점 2점

12인의 상냥한 암살자 1 - 4점
후지에다 토루 지음/대원씨아이(만화)
12인의 상냥한 암살자 2 - 4점
후지에다 토루 지음/대원씨아이(만화)

카리스마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카루가의 진짜 정체는 악을 벌하는 12인의 암살자 중 한 명인 라이브라 (천칭). 그가 친구인 배우 타카기의 실종사건을 조사해 나간다는 내용의 추리 스릴러물.

12인의 암살자를 다룬 원작의 코미컬라이즈판. 그래서인지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암살자로서의 이카루가의 모습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등이죠.

그래도 두 권이라는 분량 치고는 내용과 설정을 잘 녹여내고 있고, 원작을 읽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는 문제가 없는 수준입니다. 제목과는 다르게 실제 주인공은 타카기의 연인 마아야이며, 암살자 이카루가의 모습이나 능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암살자 관련한 설정은 좀 유치해 보였거든요. 차라리 작중에서처럼 "화장 솜씨"가 뛰어난 탐정 역할 정도만 수행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랬더라면 타카구치 사토스미의 "무지개색 가면"과 비슷했으려나요?)

추리적으로 평가하자면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F가 된다"와 설정 면에서 유사성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러나 진상과 반전은 괜찮은 편이에요. "불사"라는 복선의 쓰임새 및 구두, 모리노의 가족 관계 등 주요 단서들이 공정하게 제시되는 등 깔끔한 전개도 좋았고요. 덕분에 결말까지 쉽게 쉽게 읽히는 맛이 있었습니다.

다만 사무국장 우가 등이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이유, 10대 소녀들에게 인체 실험을 한 이유, 타카기를 왜 바로 죽이지 않았는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긴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순정만화풍의 추리-히어로물로는 괜찮은 수준인 만큼, 가벼운 순정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볼 만하실 것 같네요. 순정만화 탐정 히어로물로는 아키노 마츠리의 "가면탐정"과 비교할 만한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훨씬 좋았습니다.

2017/11/05

화석의 기억 1~3 - 타가미 요시히사 : 별점 2.5점 (국내 미출간)

도쿄에 사는 미나기 류이치는 어린 시절 살던 시골 마을(정확하게는 '붉은 숲'이라는)에서 "누시"라는 큰 곰(?)에 의해 어머니 후유코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본 TV 뉴스를 통해 누시가 다시 나타났다는걸 짐작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교제하던 유키에와의 성관계 동영상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협박하여 300만엔이라는 자금을 마련하여 시골 마을로 향한 류이치는 대학 조교 혼조 테츠야를 만났다. 그는 백악기(7,000만년전) 지층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 화석을 발굴하고 있었다.
이후 이 '오파츠'가 교수에 의해 부정당한 테츠야는 홀로 조사를 떠나는데....

국내에는 "nervous breakdown" , 그리고 "초공속 가루비온"의 캐릭터 디자이너로만 알려진 타가미 요시히사의 1980년대 작품입니다. 정확하게는 1985~87년까지 연재되었는데, 대표작이라고 하는 "카루이자와 신드롬" 연재 종료 직후(1982~85) 시기이니 작가 인생 최전성기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대표작 "grey"와도 년도가 겹치네요. 굉장히 진지한 SF물이면서도 크리쳐 물이기도 하고, 미스터리 스릴러물 성격도 포함된 복잡한 장르물입니다.

위의 줄거리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오파츠가 등장하는 부분까지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누시가 무엇인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도 7,000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화석 정체는 특히나 궁금증을 자아내니까요. "별의 계승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고요.

뒤이어 모든 것은 타임머신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전개와 여기서 불거지는 '타임 패러독스'도 볼만합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뭔지도 모르면서 찾아 헤메는, 그리고 타임 머신으로 밝혀지는 "용고"의 정체는 원래 지구에서의 생존이 어려워져 만들어낸 외계로의 도망 우주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엔진 (용고)의 폭주로 시공을 뛰어넘어 1987년 붉은 숲에 떨어졌고, 이 "용고"가 계속 시공간을 뒤튼 탓에 7,000만년전과 연결되어 있게 된 겁니다. 누시는 7,000만년 전 숲에 살던 공룡이었고, 7,000만년전 지층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화석은 마찬가지 이유로 과거로 점프한 현대 인류의 것인거지요.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타임 패러독스는 도라에몽에서도 익히 보아 온 것입니다. 작 중에서도 용고는 노비타의 책상 서랍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까요. 그러나 진지한 SF 스토리에 약간의 추리적 요소를 가미한 덕에 꽤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용고"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한 단서가 오래전 한 할머니가 남긴 일기라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시가 12간지의 움직임을 보이는, 일종의 시계 같은 장소에 나타나며 이를 통해 한 가운데임을 추리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결말이 완성도를 떨어트립니다. 류이치가 깨닫는 것, '조금씩의 차이가 결과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려내기에는 너무 서둘러 마무리된 탓입니다. 관련자들을 타임 머신이 부른 이유 - 동일한 역사 반복을 위해 - 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고요. 설득력을 갖추려면 또다시 시공을 점프한 후, 류이치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현 시점(1987년)에 "용고"가 없는 평안한 인생을 손에 넣는다는 결말 정도는 보여줬어야 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현세의 기차에서 내리는 류이치가 어머니 후유코와 포옹하는 것이었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 스톤 오션의 결말이나 영화 "프리퀀시"의 클라이막스처럼 말이죠. 뭐 그만큼의 설득력은 조금이나마 쌓아 올렸어야 하겠지만... 여튼 지금의 결말은 역사가 단순 반복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작가 의도가 제대로 반영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흥미로운 본편 전개에 비하면, 곁들여지는 사이드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누시의 정체가 공룡이라는 것도 너무 빨리 밝혀져서 몰입을 저해하고, 누시보다 주인공들 혈족에 전해지는 "용고"를 찾아내려는 음모 이야기는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인 기업, 친족 간의 파벌 싸움이 이야기에 잘 녹아나지도 않았고 말이죠.
아울러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나 별로에요. 여중생 섹스 파트너와의 성관계 비디오를 그 아버지에게 팔아 넘겨 자금을 마련하는 쓰레기인데다가, 어머니인 후유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 등장 인물들과 정사를 갖는 등 전반적으로 쿨함을 강조하기에는 도가 지나칠 뿐더러 너무 자극적으로 접근하려 한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꽤나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지루한 전개에 더해 작가 특유의 허무한 결말이 더해진 결과물입니다. 본 편 이야기에 집중하여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가져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