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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4

더블, 더블 - 엘러리 퀸 / 이제중 : 별점 2점

더블, 더블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에게 신문기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라이츠빌에서 일어났던 루크 매캐비의 죽음, 루크의 유산 4백만 달러가 주치의 세바스티안 도드에게 상속된 것, 유산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하트 방적 공장 사장 존 스펜서 하트가 자신이 유용한 루크의 돈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4월 7일에는 마을에서 구걸을 했던 술꾼 톰 앤더슨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담긴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엘러리 퀸에게 톰 앤더슨의 딸 리마가 찾아와 아버지는 죽었을 거라며 사건 해결을 의뢰했고, 엘러리 퀸은 리마와 함께 십여년 만에 다시 라이츠빌로 향하는데...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수작들이 많이 모여있는 '라이츠빌 시리즈'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이었던 국명 시리즈에 반해, 라이츠빌 시리즈는 범죄 드라마 성격이 강하다는게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기존 라이츠빌 시리즈와는 조금 다릅니다.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범죄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도둑, 의사, 변호사가 차례로 죽는다'는 마더 구스 동요 중 한 편의 내용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확실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라이츠빌 시리즈에요. 이야기 자체는 전혀 본격물처럼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로 여겨진 탓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도 않는 탓입니다. 경찰이 방관하는 동안, 탐정인 엘러리 퀸 역시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던가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답게 인간 관계와 동기에 집중합니다.

덕분에 왜 동요가 사건과 연결되는지? 왜 범인이 엘러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한, 와이더닛물로는 꽤 흥미로운 편입니다. 특히 동요와 사건과 연결되는 이유가 참신했어요. 범인 케네스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유언장 쓰기를 미루던 도드 의사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순순히 유언장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두 건의 사망 사고의 피해자 직업에서 착안하여 톰 앤더슨을 죽이고, 니콜 자카르도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한 뒤 이 모든게 마더구스 동요 법칙에 따른 죽음으로 다음 차례가 도드 의사인걸 명심하게 만든 것이지요.
도드 의사가 오래 앓아온 신경증 탓에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게 전개와 묘사에서 계속 드러나서 설득력도 넘칩니다. 우발적인 죽음이 목표한 살인의 연결고리로 이용된다는 트릭은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작품에서의 동기만큼은 신선하면서 설득력 높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허나 후더닛물로는 좋은 작품은 못됩니다. 범인은 케네스 아니면 리마일게 너무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리마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바깥 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을 수는 있습니다. 속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죽일 동기는 없습니다. 때문에 범인은 케네스인 거지요. 도드 박사의 유산 4백만 달러는 동기로 차고 넘치잖아요. 세 번째 사건인 니콜 자카르 사살 사건은 어쨌건 케네스가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고요. 

물론 도드 박사의 유언장이 공개된 뒤, 거의 모든 유산은 종합 병원에 기부되기 때문에 케네스의 동기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도드 박사 뒤에 살해된 변호사 홀더필드, 양복장이 월더 형제 사건에서는 동기가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도드 박사 살해까지는 케네스가, 그 뒤 범행은 리마가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도드 박사가 죽은 뒤 결혼했으니 뭔가 동기를 공유했을거라고 본 것이지요. 사실 뒷 부분은 여러모로 리마인게 더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동요 순서대로 '대장'이 마지막에 죽는다면, 이는 앞서 엘러리가 리마에게 말했듯 엘러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말은 결국 케네스가 진범이라서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케네스의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엘러리가 꾸민 리마 체포 쇼를 보고 자백했다는 결말도 좋은 후더닛 본격물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요.

국명 시리즈로 대표되는 엘러리 퀸 본격물처럼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도 큽니다. 동요와 사건을 무리하게 엮은 탓입니다. 동요 순서대로 변호사와 장사꾼 (양복장이)가 죽는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드 박사가 유언장을 두 번 남겼다는 것도 우연이고, 이를 진작에 데이비드 월도가 밝히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변호사 비서 플로스가 때마침 라이츠빌을 떠났다는 것도 동요에 끼워 맟추기 위한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비서 플로스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게 그나마 말이 되었을 겁니다. 

엘러리 퀸에게 케네스가 편지를 보냈다는 설정은 억지의 정점입니다. 엘러리 퀸의 입으로 도드 박사에게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서라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케네스는 그냥 신문에 투고만 했어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범이 탐정을 불러서 피해자가 죽는걸 예언하게 만들다니, 억지도 정도껏 해야죠.

캐릭터들도 현실적이지 않은, 만화같은 캐릭터들 뿐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산 속 움막에 살던 청순한 소녀 리마가 대표적입니다. 도드 의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증 증상을 보인다는건 사건 동기 설명을 위해 필요했던 묘사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점치기를 시도한다는 설정 등 다른 캐릭터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엘러리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던 리마가 케네스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라이츠빌 시리즈라면 아예 리마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게 맞았을테고, 이왕 등장한거라면 팬들에게는 리마가 엘러리와 연결되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나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예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의 장점보다는 기존 엘러리 퀸 시리즈의 단점이 더 불거진 망작입니다. 역시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23/12/03

하쿠바산장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하쿠바산장 살인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대생 나오코는 친구 마코토와 함께 펜션 마더구스를 찾았다. 1년 전 마더구스의 밀실인 방에서 자삻했던 오빠 고이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펜션은 방마다 '마더 구스' 동요가 쓰여진 패널이 걸려져 있었는데, 이 동요들이 암호라는걸 눈치챈 둘은 암호 해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손님 중 한 명인 오오키가 추락사했고, 이는 교묘하게 계획된 살인이라는게 드러났다.
결국 암호를 풀어낸 둘은 오빠 죽음의 진상과 범인을 밝혀내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가면 산장 살인사건"의 또다른 번역본이라 생각했었는데, '마더 구스' 동요를 이용한 암호 트릭이 등장한다는 광고글을 보고 착각을 깨우친 뒤 읽게 되었습니다.

추리적으로 볼거리가 많다는게 장점으로 외딴 산장이라는 무대에서부터 시작해서, 밀실 살인, 원격 조종 살인이 등장하고 '마더 구스' 동요를 활용한 암호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먼저 밝혀지는건 오오키를 살해한 원격 조종 트릭인데 '다리를 대신할 수 있는 판자를 썩은 것으로 바꿔치기해서 추락하게 만들었다'는 간단명료함도 좋았지만, 단순히 장치 트릭에 그치지않고 이를 범인이 특정될 수 있는 중요 단서로 활용하는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원래 판자와 비슷하면서도, 사람이 올라가면 부서져 떨어질 판자를 고르는건 상당히 전문적인 안목이 필요하므로, 목재에 대한 전문가가 범인이다!는 논리인데 꽤 합리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빠 고이치가 자살한 것으로 위장했던 밀실 살인 트릭은 '범인은 방에 숨어 있었다'는 단순한 것이지만, 공범을 활용한 변주가 괜찮았습니다. 먼저 구루미가 침실 창문과 문을 잠그고 다카세가 창문도 잠겼다는걸 확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구루미는 창문을 통해 탈출했고요. 에나미는 다카세에게 다시 고이치를 불러오라고 시킵니다. 이 때 문이 잠겼다는걸 다시금 다카세에게 확인시키고 마지막으로 에나미가 열려있던 창문으로 침입하여 창문을 잠근 뒤 방 안에 숨어서 밀실을 만들었던 겁니다. 에나미 혼자 실행도 가능한 트릭이지만,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 당연히 눈에 띄였겠지요. 구루미가 산장 펜션 종업원이었던 덕분에, 때맞춰 다카세를 피해자 방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도 있었고요. 이 때 구루미와 에나미가 포커가 아닌 백개먼을 했다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습니다. 단서와 정보 제공도 공정한 편이에요.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마더 구스 동요'를 활용한 암호 트릭이 별로였어요. 쉼표를 활용해서 문장을 이어 붙이는 것까지는 나름대로 말이 되지만, '말을 반대로 바꿔야 한다', 즉 '다리가 부서지는게 아니라 세워지는것' 이라는건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 탓입니다. 분명 중간까지는 나름 논리적으로 풀리는데, 그 뒤는 완전 국문학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건 억지스러워요. 마더 구스 동요에서 끝냈어야 하는데, 갑자기 휴게실의 마리아 - 알고보니 마녀 - 조각상이 필요했다는 것도 와닿지 않았습니다.
와닿지 않는건 암호 해독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 노을이 질 때, 부서진 다리가 그림자 이어지는 곳'이라는 결과를 1년 전에 손에 넣었던 범인들이 왜 1년을 기다렸을까요? 여름이라도 그림자의 변경 추이만 관찰해도 겨울 철 그림자가 어디 위치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구루미는 몰랐다쳐도 에나미는 이과계 연구원이라는 설정인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에나미가 측정에 실패해서 겨울철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치죠. 그래도 1년 중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을 때 보물을 파내려고 시도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정 그 날짜가 필요했다면, 장소만 사진을 찍어두던가 해서 표시하고 나중에 파내면 되었습니다.

오빠 고이치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한건 밀실 트릭만큼은 앞서 설명했듯 괜찮은 부분이 없지 않으나, 밀실을 만들어야 했을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밀실이라서 자살이다!'라기보다는, 원래 노이로제가 있었고 펜션 손님들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는 정황이 자살설의 핵심 근거였습니다. 즉, 밀실은 자살설에 무게를 더해주기는 했지만 절대적인건 아니었어요. 게다가 노이로제에 대해서는 범인을 비롯한 펜션 손님들은 아무도 몰랐었는데, 단지 밀실이라는 상황만으로 자살로 몰고가려 했던건 비현실적입니다. 에나미가 나오코와 마코토에게 '오빠는 살해당했다'며 접근한 행동도 납득이 가도록 설명되지 못하고요. 이는 나오코과 마코토가 에나미를 의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했습니다.

그 외에도 구루미가 최초 보석상 가와사키를 살해한게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던가, 영국 여자가 아들을 죽게 만든 마스터에게 복수와 경고의 의미로 암호를 남겼다던가, 보석상의 혼외자가 다카세였다던가, 보석은 가짜였다던가 하는 등의 에필로그도 별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손님 중 한 명인 가미조가 보석상 가족의 요청으로 이 사건을 3년이나 추적했던 탐정(?)이라는 설정도 과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명탐정 '가미즈 교스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나름 활약을 기대했는데, 하는거라곤 마지막에 구루미의 범행을 밝히는 것 뿐이라는 것도 좀 허무했어요. 일종의 맥거핀에 낚인 셈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초기작답게 여러가지 시도는 돋보이나 단점 또한 많아서 감점합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2021/01/03

비숍 살인 사건 - S.S. 밴 다인 / 최인자 : 별점 1.5점

비숍 살인 사건 - 4점
S. S. 밴 다인 지음, 최인자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딜러드 교수 자택에서 조셉 코크레인 로빈이 화살에 찔려 죽었다. 범인이 비숍이라고 서명하여 보낸 마더 구스 동요 편지가 발견된 뒤, 동요대로 조니 스프리그, 드러커마저 살해당했다. 체스 연구가 파디가 자살하여 사건은 종결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어린 소녀 매들린 모팻마저 유괴되자 파일로 밴스는 행동에 나서는데....

'마더 구스' 동요에 따른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내용으로 반 다인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추리작가 협회가 선정한 '동서 미스터리 100'에서는 9위,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에서는 18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밴 다인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기대치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몇 권 읽어 보기는 했는데, 명성과는 다르게 추리적으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 역시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무려 다섯 번이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만, 마더 구스 동요에 맞춰서 일어났다는 특징 외에는 별다른 트릭은 없습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범인이 지나치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범인 딜러드 교수가 코크 로빈을 살해했을 때 드러커 부인에게 들키지 않은 것, 드러커를 살해할 때 미행하던 경찰에게 들키지 않은 것 모두 운에 불과하니까요.
드러커 부인 앞에서 드러커 살해를 이야기하여 심장마비로 사망케 한 것도 결과를 예상할 수 없었던 도박입니다. 부인이 큰 소리를 질러 교수가 범인이라고 외쳤다면, 아래 층에 있던 요리사까지 살해할 생각이었던걸까요?

범행 전개 과정도 정교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딜러드 교수는 드러커가 연구하던 노트를 훔치고, 아르네손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전기 의자로 보내버릴 생각이었습니다. 젊은 아르네손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코크 로빈과 조니 스프리그는 죽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드러커만 험프티 덤프티라고 해서 죽이고 '비숍' 이라는 서명을 남기면 되니까요. 왜냐하면 비숍이 헨리크 입센이 쓴 "왕위를 노리는 자들" 속 악당 니콜라스 아르네손에서 유래되었다는걸 경찰이 눈치챌 수 있고, 그렇다면 이후 드러커가 쓴 연구 노트를 훔치기 전에 아르네손이 체포되고 사건이 끝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장은 증거가 없어서 풀려나더라도, 경찰이 엄중 감시했을테니 나중에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같은 이유로 코크 로빈, 조니 스프리그, 드러커, 드러커 부인을 살해한 뒤 파디가 자살한걸로 꾸며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범인은 아르네손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디가 진범이라고 경찰이 착각했던 탓에 교수는 매들린 모팻을 유괴해서 죽이려는 번잡스러운 추가 범행을 벌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아르네손에게는 드러커 부인을 비숍이 습격한 날,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동행했던 벨 양이 시계를 보지 않았어도, 연극을 봤다면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알리바이를 깨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으니 소거법으로 모든 피해자들 스케쥴과 집 안팎을 꿰고 있는건 범인 딜러드 교수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도 민망합니다.

전개도 짜증납니다. 특히 수사, 심문 과정이 그러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제대로 경찰에게 협조하는 인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탓입니다. 딜러드 교수, 드러커, 드러커 부인이 모두요. 요리사 비들은 심문도 아니고 단순한 사정 청취에 지독한 반감을 드러낼 정도입니다.
게다가 드러커나 드러커 부인이 한 말은 거짓말 투성이인데, 이를 추궁하지 않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컴 검사와 경찰은 드러커 부인이 불쌍한 여자라며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그녀가 범인을 목격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또 드러커 부인을 살해하려고 온 범인이 비숍 말을 남겨두면 부인이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할거라고 여겼다는 추리도 어처구니가 없어요. 매컴 검사가 이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건 말이 안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컴 검사는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모르는 느낌입니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탐정 역을 자처했던 아르네손은 입센의 광팬이라 비숍의 뜻을 처음부터 눈치챘을텐데,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은 이유처럼요. 파디가 루빈슈타인과 대국을 하던 중에도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에요. 45분 정도 시간이 빈 틈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 있었겠지만, 루빈슈타인이 45분동안 숙고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루빈슈타인이 45분 숙고 시간을 요청했다는 설명 정도는 필요했습니다.

그나마 밴스가 인간 정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범죄는 수학자의 범죄라고 추리하는 정도가 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거는 빈약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장기간 심하고 지속적인 정신 노동을 하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폭발을 낳으며, 아르네손은 균형 유지를 위해 항상 남을 비하하고 비웃는 식으로 감정 표출을 해서 범인이 아니니, 범인은 딜러드 교수일 수 밖에 없다'는게 전부거든요. 당연하게도, 스트레스가 심하면 가학적 본능에 따른 기괴한 범죄를 행한다는건 근거가 없습니다. 수학자들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주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그리고 이 논리라면, 항상 아이들과 놀고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드러커도 범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밴스는 드러커를 용의선상에 올려 놓았었죠. 자기 추리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행동이었어요. 

이외에도 파일로 밴스가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장황하게 떠드는 묘사도 너무 많고 지루합니다.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묘사로만 줄여도 길이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이런 현학적 과시가 작품 특징이기는 한데, 저에게는 불필요하고 짜증나는 요소였습니다.

그나마 마지막에 아르네손을 몰래 살해하려던 교수를 술잔 바꿔치기로 대신 살해한 밴스의 행동만큼은 괜찮았어요. 매컴 검사는 "하지만 그건 살인이야!"라고 화를 내지만, 범인이 아르네손인지, 교수인지 증명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괜찮은 선택이었어요. 그리고 어차피 술은 둘 중 누군가가 먹게 될 테니, 이왕이면 범인이 먹는게 낫겠죠.
그러나 이 정도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절망적인 수준이며 마더 구스 동요를 잘 녹여내었다는 선구적인 아이디어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추리 소설 속 트릭의 비밀"에서 이 작품에 대해 '동요와 살인의 소름돋는 일치가 최대의 스릴이며, 그 절묘한 스릴을 제외하면 이 작품이 가진 대부분의 매력을 잃는다'고 말했는데, 그 말 그대로에요. 그러한 특이점 외에는 매력이 없습니다.

2025/03/29

산마처럼 비웃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5점

산마처럼 비웃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고키 가문의 넷째 노부요시는 미뤄두었던 성인식을 위해 고향 구마도로 귀향했다. 그러나 노부요시는 산속 사당을 순례하던 중 길을 잃고 흉산 부름산에 들어서고 말았다. 노부요시는 부름산의 유일한 민가인 가스미 가문의 다쓰이치 일가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다쓰이치 가족은 노부요시만 남긴 채 밀실인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나선 노부요시는 과거 광부와 사기꾼들이 살해되었다는 금광터 여섯 무덤굴에서 망자의 비명을 듣고 도망치다가 정체불명의 사악한 존재까지 목격한 뒤,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도조 겐야는 노부요시의 병든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마도로 향했다. 지역 유지인 리키하라와 부름산에 오른 겐야는 다쓰이치의 집에서 얼굴이 불타고, 구전 동요의 지장 형태를 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다쓰지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쓰지 아들 고지의 시신이 흑색지장 사당에서 역시 동요에 나오는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후 리키하라도 실종되었고, 겐야는 다니후지 형사와 함께 여섯 무덤굴에서 토막난 리키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쓰지의 장례가 열리던 날, 가설 극장에 불이 나 경찰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 가스미가에 남은 다쓰지의 아버지 단고로, 아내 시마코, 첩 슌기쿠도 동요 속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하는데....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찾아 읽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네 번째 출간작으로, 반 년 전에 읽었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바로 전작입니다. 2008년 일본 현지 출간 당시에 각종 랭킹 상위권을 휩쓸었었지요.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만큼 대담한 추리와 충격적인 진상이 돋보입니다.

진상은 다쓰이치 씨 가족과 다쓰지 씨 가족이 실은 동일 인물들이었다는 겁니다. 다쓰이치의 딸 유리는 소년 다쓰하루가 변장한 것이었고요. 이들은 마을에 들어온 유랑극단 ‘태평극단’으로 모습을 바꾸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부요시가 유리에게서 느낀 섬뜩함은, 결국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위장한 데서 비롯된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단발머리는 연극 "거미줄 활시위"에 등장하는 단발머리 시동의 가발로, 그것 자체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요. 고지와 히라히토가 닮은 이유 또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다쓰지의 얼굴을 훼손한 이유 역시 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얼굴이 온전하게 발견되면, 다쓰이치와 다쓰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쓰지 일가가 변장을 택한 동기도 납득할 만합니다. 작년 백중 무렵, 다쓰하루가 부름산에서 금이 섞인 암석을 발견했고, 이를 다쓰지 혹은 고지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가즈토리 가문 소유였고, 가즈토리 리키하라의 사위 마사오는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금을 빼앗기고 채광 기회도 잃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쓰지 일가는 다쓰이치 가족으로 변장하여 몰래 금을 캐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쓰이치 가족이 사라진 밀실 트릭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 유리가 혼자 남아, 두 문의 안쪽에 직접 빗장을 걸고 노부요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목욕통을 가리는 칸막이 뒤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겼고, 노부요시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는 사이 2층으로 올라가 노부요시가 자던 방에 다시 숨은 것이지요.

이외에도 노부요시가 성인식 도중 겪었던 괴이 현상들에 대해, 겐야의 추리로 합리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야생 여우나 염주 비둘기의 울음이었고, 소름끼치는 절규는 발정기의 야생 여우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다른 짐승들과 대치하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산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파였으며, 나병에 걸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게라의 길’이라는 외길을 이용해 이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무 위의 시뻘건 불덩이는 날다람쥐였고, ‘어어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형들이 노부요시를 찾으러 산에 들어왔을 때 외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작품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서를 흘려두고, 이를 추리를 통해 조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정통 본격 추리물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다쓰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시신 훼손에 사용한 '두꺼비 기름'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점은 추리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다쓰지, 고지, 시마코, 슌기쿠, 다쓰하루, 노부요시 단 여섯 명뿐입니다. 이 중 다쓰지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아이 다쓰하루가 범인일 수는 없기에 남는 사람은 노부요시뿐입니다. 

다쓰이치 가족의 정체를 밝혀내는 단서로, 소노코의 혼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활용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노부요시가 소지한 물건 중 상대가 알지 못했던 건 혼례 시간 변경을 알리는 편지뿐이었고, 그걸 읽고 이들이 갑작스레 자리를 떠났다는 걸 통해 정체를 유추해낸 것입니다. 이유는 '태평극단'이 혼례 축하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구전 동요를 따라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인데,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공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 동요가 ‘금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어서, 사건의 핵심 동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은 전개가 조금 처지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진상인 ‘다쓰지 일가의 변장’ 설정의 설득력 부족입니다. 아무리 가즈토리 가문과 가스미 가문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해도, 어릴 적 친구였던 리키하라가 다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무리입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요. 가족 모두가 변장을 했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금광을 몰래 캐기로 했다면 다쓰지와 고지만 변장했어도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다쓰지만 변장해서 머무르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불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조 겐야는 처음에는 마사오를, 그 다음에는 수행자 단부로 변장한 다쓰이치, 다쓰지의 동생 다쓰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마사오는 금광을 캐는걸 주장해 왔었기에 이를 반대했던 장인과 몰래 금광을 캐던 다쓰지 일가를 없앨 수 있었고(딸 유리의 실종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고요), 다쓰조는 이미 금광 때문에 여섯 명이나 살해했었으니까요.

반면, 진범인 노부요시의 동기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인식을 실패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며, 다쓰이치 일가가 장난을 쳤다고는 해도, 이로 인해 여섯 명이나 살해한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입니다. 그럴 거였다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혔던 형들을 먼저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또한 금맥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묘사하다가, 결국 사냥용 총에 사금을 넣어 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금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런 사기를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소하지만 다쓰이치 가족이 나타난건 작년 백중 무렵, 태평극단이 나타난건 작년 여름께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건 국내 독자에게는 이해가 힘든 부분이라 아쉬웠고요. 이런건 번역할 때 통일시켜 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시리즈 특유의, 일본 촌락에 전승되는 괴담이 실제 사건과 얽히며 전개되는 플롯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단점이 커서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입니다.

2015/06/23

다섯 마리 아기 돼지 - 애거스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2.5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2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포와로를 찾아온 미모의 여성 칼라. 그녀는 16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독살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의뢰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여사님 장편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10"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에디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디언지 선정 베스트에도 포함되어 있고, 판매량에서도 10위 안에 드는 작품이더군요. 여태 읽어보지 않은 미숙함을 탓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섯 마리 아기 돼지라는 마더 구즈 동요를 작품에 깊이 개입시켜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주요 증인 다섯 명을 동요 속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캐릭터를 일체화시켜서요. 시장에 간 돼지는 돈을 밝히는 속물 필립 블레이크, 집에 머무른 돼지는 소심하고 영향력없는 메러디스 블레이크, 로스트비프를 먹은 돼지는 천박하고 화려한 레이디 디티셤(엘사 그리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돼지는 검소하지만 날카로운 세실리아 윌리엄스, "꿀꿀꿀" 운 돼지는 말괄량이 안젤라 워런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만들어 나간 솜씨가 일품이며, 덕분에 작품이 적절한 분량으로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장편이 흔하디 흔한데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작품을 단 350페이지 내로 마무리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긴 장편들 대부분이 상세한 배경 설명과 묘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데 반해, 마더 구즈 동요를 활용하여 짧고 효과적으로 캐릭터를 구체화시킨건 역시나 거장다와요. 트릭이 중심인 고전 황금기 걸작은 아무래도 트릭을 제외하고는 조금 얄팍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요.

추리적으로도 고전 황금기 작품답습니다. 16년 전 벌어졌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설정 탓에 포와로가 변호사와 경찰 등 사건 관계자는 물론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섯 명을 찾아다니면서 증언을 듣는 등 발로 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락의자 탐정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독자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받는 덕분에 포와로와 공정한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지요. 당연히 저는 포와로에게 또 패배했습니다만... 고전 황금기 작품의 최대 매력인 두뇌 싸움은 항상 즐거운 법입니다. 진상과 동기 모두 합리적인 것은 물론이고요.

또 각자의 증언이 미묘하게 다르고, 여기서 진상을 찾아낸다는 설정과 전개를 가진 많은 유사 작품들  - 대표적으로 "라쇼몽" - 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일관된 방향으로 증인들이 증언하고 있고 딱 한 명만 거짓을 말한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이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열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진상을 모두 설명하고 마무리 짓는 결말은 좀 당황스럽더군요. 너무 급작스러웠어요. 진상은 알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캐롤라인이 안젤라가 범인이라고 오해했다 하더라도, 엘사 그리어가 그림만 완성되면 내쫓길 것이라는걸 왜 변호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요? 증인이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전략입니다. 짐을 싸서 내쫓을 것이라는 말은 블레이크 형제가 듣기도 했고요. 어차피 손해볼 건 없었는데 말이죠. 경찰 수사를 통해서도 엘사 그리어가 진범임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아끼는 동생은 물론 다섯 살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가 고아가 될 수도 있는데 쓸 수 있는 카드는 모두 써 봤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납득이 잘 되지 않네요.

또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마더 구즈 동요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좋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친숙하지가 않다보니 잘 와 닿지 않기는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사실 이 책이 700번째 추리소설 리뷰 글입니다. 그래도 나름 기념할만한 리뷰 도서인데 여사님 작품 정도는 읽어 줘야 할 것 같아 의도적으로 고르기도 했습니다. 별 네개 이상의 걸작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고요. 허나 제가 납득되지 않는 모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023/09/01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만끽! 흉내내기 (따라하기) 살인을 테마로 한 걸작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모두 국내 소개된 작품입니다. 구하기도 별로 어렵지 않고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일본 추리 소설 소개가 많은게 아쉽네요. <<옥문도>>나 <<묵시록의 여름>>은 소개되어도 무방한 수작이지만, <<명탐정에게 장미를>>은 참고 보기 어려운 졸작이었거든요. 이보다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고 유명한 <<장미의 이름>>이 대신 선정되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흉내내기 살인'은 동요나 시, 전설이나 이야기에 빗대어 살인을 저지르거나 살인 현장에 장식을 하는 것을 말한다. 범인은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는가? 그 동기와 목적이 핵심이며, 정통 미스터리의 진수와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흉내내기 살인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 소설의 명작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절해의 외딴섬이라는 폐쇄된 서클, 서로를 모르는 초대 손님들, 만찬 자리에서 밝혀지는 범죄, 마더구스의 가사대로 죽어가는 살인, 줄어드는 인형들.... 이 책에서 아가사 크리스티는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요소들을 확립했다. 미스터리 소설의 최고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금자탑 같은 작품이다.

"비숍 살인사건" - 반 다인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지?'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마더구스 동요에 빗대어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에 탐정 파일로 밴스가 도전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보다 먼저 발표되어 동요 살인, 흉내내기 살인의 효시로도 유명. 미스터리 소설의 고전 걸작으로 항상 손꼽히는 작품이다.

"명탐정에게 장미를" - 시로다이라 쿄
"메르헨 난쟁이 지옥"이라는 동화가 미디어에 소개된 뒤, 이를 모티브로 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만으로도 훌륭한 본격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지만, 2부에서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 2부부터가 메인이다. 기억에 남는 한 권이 될 것이 분명한,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명작이다.

"옥문도" - 요코미조 세이시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가 <<비숍 살인사건>>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영향을 받아 일본답게 '병풍에 쓰여진 하이쿠'를 바탕으로 완성시킨 추리 미스터리. 명탐정 긴다이치 고스케가 옥문도라는 외딴 섬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에 도전한다. 작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명작이다.

"묵시록의 여름" - 가사이 기요시
밀실 살인, 비보 전설 등 다양한 미스터리 요소가 산재되어 있는 현상학 탐정 야부키 카케루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남프랑스를 배경으로 요한계시록에 빗댄 살인이 벌어진다.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이를 포함한 독특한 분위기가 매우 매력적이어서 본격 미스터리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시리즈 1편부터 읽는 것을 추천한다.

2020/09/27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주머니 속의 호밀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은선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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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회사 사장 포티스큐가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죽었다. 독을 먹은게 확실하여 경찰은 수사에 나서는데, 유력한 용의자였던 미모의 젊은 부인마저도 자택에서 과자와 꿀을 먹던 중에 사망했고, 비밀을 숨기고 있던 하녀 글래디스마저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포티스큐의 옷 속에 '호밀'이 들어 있었던 것, 글래디스가 빨래 집게로 코가 집힌 채였던 상황을 통해 미스 마플은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 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라는 마더구스 동요를 떠올렸고, 미스 마플의 조언에 따라 닐 경위는 '지빠귀'를 찾다가 의외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미스 마플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공략"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별점 5점짜리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미스 마플이 하녀 글래디스의 불쌍한 죽음을 파헤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복수의 여신'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해서 시리즈 중 최고로 멋지기 때문이랍니다. 추리적인 구성이나 트릭에 점수를 주고 있는건 아닌데, 여사님 작품이라면 추리적인 요소는 당연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나 싶네요.
그런데 저는 뭐가 그렇게 멋진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글래디스가 살해당한걸 뉴스에서 읽고 직접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출동한거라 다른 작품들 보다 적극적이기는 한데, 딱히 정의의 수호자 느낌을 받지는 못했거든요.

그래도 작품은 좋았어요. 저는 외려 "공략"에서 언급하지 않은, 추리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범을 제외한 (!) 모든 등장 인물들이 수상하다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진범이 랜스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더욱 충격적이었거든요.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티스큐 씨를 독살한 방법은 차가 아니라 아침 식사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었던 겁니다. 가족 중 포티스큐 씨만 마멀레이드를 먹기 때문에 그 속에 독을 넣어 살해한 거지요. 이 수법은 비교적 초반에 드러나며,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라 몇 개월 전 영국의 포티스큐 저택을 방문했던 랜스에게 아예 불가능한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머문 손님이, 그것도 안성마춤으로 몇 개월 후에 먹을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는건 상식적으로 어려운 탓에, 랜스는 경찰은 물론 독자의 시야에서도 완벽하게 빠져나갑니다.
게다가 마멀레이드에 독을 넣기 위해 누구나 범인이 아니라 여길 덜 떨어진 하녀 글래디스를 실행범으로 조종했다는 수법이 정말이지 기가 막힙니다. 랜스가 가명으로 글래디스를 유혹한 뒤, 독을 자백약이라고 속이고 포티스큐 씨에게 먹게 만든건데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거든요. '맹했다'는 글래디스의 캐릭터 묘사도 설득력을 뒷받침 해 주는 요소였고요.
이후 랜스는 아버지, 유산을 손에 넣을 새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증인 글래디스까지 살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범행을 포장하기 위해 마더 구스 동요를 가져온 것도 기발했어요. 확실히 나쁜 놈들이 머리가 좋은 법입니다.

이런 랜스의 범행을 적절히 배치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 - 특히 글래디스의 유품인 사진과 편지 등 - 을 통해 독자가 미스 마플과 같은 수준에서 추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통 본격 추리물다운 전개, 동기인 '돈'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 점, 이론적이고 상식적인 닐 경위와 인간 관계를 통해 진상을 파악해내는 미스 마플의 협업, 랜스의 부인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습성을 통해 랜스의 본질을 파악하는 미스 마플의 통찰력 등 그 외에도 돋보이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랜스가 글래디스를 죽일 때까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을거라는 보장이 없었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실제로 그녀는 죽기 전 미스 마플에게 편지와 함께 결정적인 단서를 보냈으니까요. 닐 경위에게도 거의 실토하기 직전이었고요. 이래서야 천재 범죄자의 완벽한 범죄로 보기는 힘듭니다. 기껏해야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알기 전에 몰래 글래디스를 죽이고, 막 도착한 듯 티 타임에 참석해서 새어머니의 차에 독을 타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쉽게 흘러간건 좀 아쉬웠어요. 교살할 때 글래디스가 반항했더라면? 피터 러브시"밀랍 인형"에서처럼 새어머니가 즉사하지 않고 난리를 쳤다면? 바로 체포되어 교수대로 향했을 테지요. 이는 조금은 편의적인 전개였다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더 구스의 '6펜스 노래를 부르자'와 비슷하게 사건을 꾸민 작전도 기발할 뿐, 현실적이지는 않아요.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맥켄지 가문의 후예나 형 퍼시벌이 유력한 용의자인데 구태여 정신병자인 제 3의 인물을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요. 오히려 '지빠귀 광산' 이 유력한 동기임이 드러나는 멍청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녀 글래디스 살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걸 강조했더라면 차라리 말이 되었을텐데, 이대로는 좀 애매합니다. 그나마도 이렇게 복잡하게 사건을 꾸밀 필요 없이 글래디스가 뭔가 목격해서 죽였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는게 더 현실적이라는건 분명하고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2/18

일곱 명의 술래잡기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5점

일곱 명의 술래잡기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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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도쿄의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 상담원 누마타 아예는 "다~레마가 죽~였다 ..." 라는 섬뜩한 전화를 자정 경에 받았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는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전화는 곧이어 자살을 결심했다는 남자로 연결되었다. 다몬 에이스케는 자살할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 신사를 찾았다가, 옛 추억이 떠올라 당시 함께 놀던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목을 맬 요량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를 포함해 여섯 명 뿐이어서 월요일부터 한 명 씩, 다섯 명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은 뒤 토요일에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후 다몬이 실종되었고, 친구들도 괴전화를 받은 뒤 한 명씩 차례로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유준, 사야에 토시까지 죽고, 사건 해결을 위해 힘을 함친 다츠요시와 고이치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일곱번째 친구 '사카야노 요시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요시코와 관련되었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장편 소설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호러가 아니라 정통 추리물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탐정역인 하야마 고이치가 호러물 설정으로만 보였단 '다레마의 귀신 들린 아이'가 실존했고, 그 사건과 자기들의 어린 시절 놀이가 어떻게 엮였는지를 밝혀내는 과정이 꼼꼼하면서 합리적인 덕분입니다. 

여기서 과거, "오오니타 군"을 "오오타 군" 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세 번째 음절을 빼먹고 말했던 요시코의 버릇을 떠올려 요시코가 '사카야노 요시코'라고 말한건 사실 '사카X야노 요시X코", 즉 "사카나야노 요시히코"라고 말했던 거란걸 걸 밝혀내는 추리도 굉장했고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를 이용하는 추리도 깔끔합니다. 이건 완성된 메시지가 아니며, TEL을 쓰려고 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풀어내기 때문입니다. 전화 상담을 했던 누마타 야예가 진범이었다는게 여기서 드러나게 되지요. 

이어지는 누마타 아예의 범행 동기와 과정도 이치에 맞습니다.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해도, 금쪽같았던 아들이 사라지고, 남편이 자살한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에게 살의를 품는건 당연합니다. 범행을 실제로 저질렀던 '귀신 들란 아이'도 나쁘지만, 이 범행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아이들도 큰 잘못을 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연쇄 살인극에서 오오니타를 마지막에 죽이려 했던 이유가 그가 술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인상적이었어요. 술래는 처음부터 엔카쿠, '귀신 들린 아이'가 뒤에 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제일 악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작품답게, 마지막에 하야마 고이치가 추리쇼를 펼치기 직전까지는 호러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연쇄 살인극이 마타테 시에서 아직도 두려움의 대상인 다레마 가문의 귀신 들린 아이,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와 결합되어 섬뜩함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동일한 "다~레마가 죽~였다 ..." 놀이를 하다가 술래가 뒤를 돌아보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는 이야기를 가지고 공포스럽게 풀어낸 솜씨도 절묘했어요. 그래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을 한 명 씩 술래가 잡았던 거지요, 설득력 넘치면서도 호러물에 딱 맞는 그런 상황과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기억은 봉인되고 말았다는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입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 모두가,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비교적 고학년인데 요시코가 납치되는걸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모두 똑같이 기억을 잃었다? 말도 안돼죠. 게다가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를 듣자 봉인이 풀리고 다시 기억을 떠올린다는건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설정도 지나칠 정도로 전형적입니다. 마타테 시에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는 다레마 가문과 그들의 융성과 몰락을 가져왔단 다레마 신사의 다루마, 몰락의 상징같은 잔혹했던 후계자 '귀신 들린 아이' 등의 설정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와서 식상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공정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 다몬 에이스케가 생명의 전화에 걸었던 전화 내용 묘사가 그러합니다. 사실을 적시하는 것 처럼 쓰여 있지만, 이 전화 내용만 가지고 상담원 누마타 야에가 자기 아들의 실종과 죽음이 다몬 에이스케와 친구들과 관계가 있다는걸 알아채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게 분명합니다. 즉, 애초부터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에 "다~레마가 죽~였다 ."는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야에의 범행도 세세한 면에서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구호단체 직원들보다 먼저 현장을 찾아가 다몬 에이스케를 살해한 첫 번째 범행이 대표적입니다. 현장에 누군가 출동한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이보다는 어차피 자살을 앞두고 있었다면, 자살하도록 놔두고 친구들 정보를 빼 내는게 훨씬 손 쉬운 방법입니다. 그가 구조를 받는다면, 그 뒤에 죽여도 되고요. 다른 범행들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며, 범행 전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다~레마가 죽~였다 ."를 들려준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행 과정 전반에 죽은 요시히코의 원념이 도왔을거라는 지극히 미츠다 신조스러운 설정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만, 이건 합리적인 추리물과는 거리가 멀지요. 

엔카쿠 다카야키 경부가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걸 밝히는 마지막 추리쇼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근거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메시지로, 이는 TE를 쓰다가 만 것으로 사건 관계자 중 TE라는 이니셜을 가진 엔카쿠 다카아키 경부밖에 없다는게 요지였지만 이건 TEL을 쓰려고 했다는 거니까요. 이 이니셜을 엔카쿠 경부와 엮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가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었다는걸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그가 요시히코 등을 납치해서 죽였던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비약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장에 나타나 하야미 고이치와 대면한다는 지극히 작위적이면서 편의적인 상황 설정은 둘째치고서라도요.

그 외에도 다레마 신사에 모셔진 다루마의 정체라던가, 다몬 에이스케가 전화를 하려고 했던 일곱번째 친구가 누구인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는 '맥거핀'의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불필요하고 진부했던 설정을 일부 제외하고, '귀신 들린 아이'가 엔카쿠 경부였다는 비약을 잘 정리했더라면 훨씬 간결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4/08/28

쥐덫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3점

쥐덫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최근 불붙은 여사님 단편집 구입 러쉬의 마지막 작품. 진작에 읽어보았던 작품이라 구입계획은 없었는데 신촌 숨어있는 책에서 1000원에 발견해서 그냥저냥 소장 겸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전부 9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사님의 시리즈 캐릭터인 미스 마플과 포와로는 물론 할리 퀸까지 등장하기 때문에 흡사 종합 선물 세트같은 느낌을 전해주네요.
제일 먼저 실려있는 표제작이자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쥐덫"은 추리소설의 전형적 소재인 눈으로 폐쇄된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신혼부부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저택을 하숙집으로 개조하여 영업하던 중 런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 하숙집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첩보와 함께 형사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 눈으로 고립되고 전화마저 끊긴 하숙집에서 투숙객 중 한명인 보일 부인이 살해당하며 이 사건은 과거에 있었던 아동 학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세마리의 눈먼 쥐" 라는 동요를 소재로 세명이 살해 당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누가 범인인줄 모르는 긴장감과 더불어 폐쇄적인 상황을 잘 이용하는 작품입니다. 영국에서는 연극으로 50년이 넘게 공연되고 있는데 연극에 정말 잘 어울리는 소재라 생각되네요.
이전에 이미 읽어서 범인이 누구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재미는 덜 했습니다만 폐쇄된 곳에서 벌어지는, 동요와 연관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상황의 원본이자 모범 답안으로서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두번째 작품 "이상한 사건"은 미스 마플양이 나오는 일종의 암호 추리물인데 "거액을 투자하여 종이 한장분량으로 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명제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명제와 트릭은 당대에는 기발하고 신선했을 것 같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 문제가 큽니다. 후대 작가들의 수없는 인용으로 신선함이 떨어지니까요. 그래도 마플양의 캐릭터는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세번째 작품 "줄자 살인사건"은 마플양의 범인을 잡기 위한 실제적인 활약이 펼쳐지는 특이한 이야기로, 트릭이나 동기 등이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제목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던,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인 어처구니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제목만 빼면 별점은 2.5점. 원제가 조금 궁금합니다.

네번째 작품 "모범 하녀"는 살인 사건이 아닌 도난 사건을 소재로 하여 두 자매의 집에 새롭게 들어온 모범 하녀의 이야기인데, 트릭 자체는 "사람바꾸기"라는 평범한 것으로 추리적으로 그닥 신선하지는 않지만 워낙 설정이 기발하고 이야기도 척척 들어 맞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다섯번째 작품 "관리인 노파"는 마플양을 찾아온 헤이독 의사가 마플양의 원기 회복을 위해 과거에 있었던 루이즈 랙스턴 부인의 사고를 수수께끼로 전해 주고 그것을 마플양이 전형적인 안락의자형 방식으로 (즉 생각만으로)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그냥 저냥 평범한 수준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여섯번째 작품 "4층 아파트"는 포와로가 등장합니다. 아랫층에 사는 젊은이들이 우연히 발견한 살인사건을 해결해 주는 이야기로 "어두운 방 안에서라도 항상 같은곳에 있는 것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로 진상을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사건의 해결방법은 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추리적인 재미 부분에서 점수를 주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일곱번째 작품 "조니 웨이벌리의 모험"은 웨이벌리 가문에 발생한 유괴사건을 의뢰받은 포와로가 의외의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회색 뇌세포"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작품으로 탄탄한 구성과 더불어 추리적으로도 색다른 재미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 방법이 너무 미흡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 건 조금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여덟번째 작품 "24마리의 검은 티티새"는 우연히 찾아간 식당에서 매주 같은 요일에 항상 같은 음식만 주문하는 괴짜 손님을 포와로가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괴짜 손님이 시체로 발견되자 포와로는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죽음의 진상과 범인을 밝혀내는데 성공한다는 내용으로 우연히 주목한 사소한 사실에서 진상을 밝혀내는 구조가 완벽하고 동기 및 시간의 흐름도 깔끔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아홉번째 작품 "연애 탐정"은 마지막 작품답게 이색적으로 세터드웨이트 씨와 할리퀸이 등장하네요. 이야기는 할리 퀸 스럽지 않게 할리 퀸이 너무 정보를 많이 뿌려주는 감이 있고 내용도 조금 빈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는 두명의 공범자라는 소재는 너무 뻔했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다양하고도 멋진 작품들이 실려 있고 탐정 캐릭터들도 여럿 등장하며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좋은 단편집입니다. 개인적 베스트는 "모범하녀" 와 "24마리의 검은 티티새" 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거의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이거든요. 추리 소설의 팬이시라면, 거기에 크리스티 여사의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아울러 여기 실린 포와로 단편은 전부 케이블 TV의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극장"에서 극화되어 방영되었기 때문에 드라마 까지 구해 본다면 금상첨화일것 같습니다.

이로써 제가 소장한 총 13편의 크리스티 여사 단편집은 "화요일 클럽의 살인", "검찰측의 증인", "명탐정 파커 파인", "쥐덫", "포와로 수사집", "부부탐정", "수수께끼의 할리 퀸",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패배한 개", "리가타 미스터리", "헤라클레스의 모험" 입니다. 혹 다른 단편집이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PS :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베스트라면 역시 "화요일 클럽의 살인" 이 아닐까 싶네요^^

2011/06/09

0시간으로 - 애거서 크리스티 / 안동림 : 별점 3점

0시간으로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안동림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제작 외에 <포켓에 호밀을>까지 총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된 동서추리문고 판본입니다. "13인의 만찬"을 읽은 뒤, 갑자기 생겨난 크리스티 여사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읽게 되었습니다.

"0시간으로"는 시골 노부인의 별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여사님 특유의 후더닛물입니다. 서로의 악의와 증오가 교차하는 전반부, 그리고 사건 후 해결 과정을 그리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일단 배틀 총경이 활약한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했습니다. 배틀 총경은 "4개의 시계" 등에서는 우직하고 끈기 있는 형사로 탐정의 조력자 역할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경험에 기반한 끈기 있는 수사 능력에 더해 감수성과 자애로움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벨기에인 탐정 포와로를 들먹이며 단서를 찾아내는 모습에서는 ‘과연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하는 동물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깔끔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해결 과정은 약간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장소에 있던 제3자가 우연히 등장해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는 급작스러운 전개도 별로였고, 단지 정신병으로 치부된 살인의 동기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도 많고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전처에게 집착한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이혼 후 더 예쁜 아내를 얻어 잘 살고 있으면 그게 복수지, 뭐 이리 어렵게 일을 꾸몄나 싶었습니다.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원했다면 차라리 직접 죽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요.

또 후더닛물의 공통적인 단점이기도 한데, 모든 등장인물을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다루다 보니 초반부 전개가 약간 늘어지는 감이 있었습니다. 배틀 총경이 ‘눈빛이 어쩌고’ 하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딱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따뜻한 배려심의 소유자 배틀 총경의 모습과 함께,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나름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별점 2점, 추리적으로 완전범죄에 가까웠던 범인의 계획과 독자에게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0.5점을 더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작품 "호밀 속의 죽음"은 독특한 점이 많았던 "0시간 속으로"와는 달리 전형적인 여사님 작품입니다. 콩가루 대저택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마더 구스 동요를 바탕으로 한 살인사건이라는 설정이 딱 그러합니다. 작품도 중박 이상은 되는 편이라, 용의자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면서도 공정하게 독자와의 두뇌싸움을 펼치는 고전 정통 추리물의 미덕이 아주 잘 살아 있습니다. 또 미스 마플 팬이라면 시리즈에서 가끔 언급되곤 했던 글래디스 마틴이라는 하녀가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좀 과하긴 했습니다. 저택의 왕고모님이 뭔가 아는 척하면서 던지는 이야기들이 모두 진상을 흐리는 별 볼 일 없는 내용이라는 것은 그렇다 쳐도, 마더 구스 동요를 끌고 들어온 것은 확실히 무리였어요. 최초의 티티새 장난은 범인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이었다는 점, 그리고 범인이 과거 티티새 광산주의 딸이 어떤 식으로든 복수에 관여했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기에, 그냥 흥미거리 소재에 머물고 맙니다.

범인이 자신의 범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을 만한 다른 용의자가 딱히 없었다는 것도 완전범죄라는 측면에서는 감점 요소였어요.

그래도 트릭과 함께 사건의 진상은 상당히 놀랍고 동기도 나름 합리적이기에 만족합니다. 마지막 글래디스의 편지도 심금을 울리는 적절한 에필로그였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그래서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중박 이상은 되고 즐길 만한 요소가 많기에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5/03/26

샘 호손의 사건부 : 서문 - 에드워드 D 호크

시리즈 캐릭터의 발단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을때도 있지만 닥터 샘 호손의 경우 그 때의 상황을 확실히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1974년의 1월의 일입니다. 새 달력을 타이프라이터 옆에 걸었습니다. 달력 각 월의 페이지에는 과거의 전원풍경 수채화가 그려져 있었고 1월은 겨울의 유개교(有蓋橋 : 덮개있는 다리) 의 그림이었습니다.

1월내내 그 그림을 보고 있다가 어느날 마차가 그 다리의 한쪽 편에서 들어가서 반대쪽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는 어떨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틀정도 고민해서 그것에 어울리는 해답과 플롯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이제 그밖에 필요한 것은 탐정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시대는 과거로 설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새로운 종류의 탐정, 새로운 시리즈,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했습니다. 주인공은 시골의사로 하고, 이름은 간단하게 "닥터 샘 선생"으로 하였습니다. 아마 당시 악명이 높았던 닥터 샘 세펴드의 이름이 아직 기억에 새로웠기 때문이었겠죠. 이야기의 닥터 샘 선생은 의학교를 졸합한지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젊은이로 보물은 1921년형의 "피어스애로우-런어바웃", 양친이 졸업 축하 선물로 준 차로 설정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거의 전 단편을 그렇게 했듯이 이 작품을 "EQMM (엘러리퀸스 미스테리 매거진)"에 보냈습니다. "엘러리 퀸"의 한사람이자 이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프레더릭 더네이씨는 곧 이 이야기를 마음에 들어해서 두세가지의 수정을 제안했습니다.

먼저 릴리안 데 라 토레가 창조한 닥터 샘 죤슨 시리즈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닥터 샘 선생의 성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죠. 프레더릭은 두세개의 이름을 제안해 주었는데 저는 그자리에서 바로 "호손"을 선택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탐정으로써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요?

두번째의 제안은 저를 조금 동요하게 만들었는데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늙은 샘 선생의 어미의 "g"발음을 없는 것 처럼, 시골의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것 처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입니다. 저는 극중의 다른 여러 등장인물들 (특히 렌즈 보안관) 에게 그렇게 사투리를 사용하도록 하였지만 닥터 샘 선생만은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동의 했습니다만 이 모든 수정사항은 프레더릭 더네이씨의 지시였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그래도 그 후의 여러편에 사투리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게 하였는데 후에 이 시리즈의 작품은 사투리를 사용 하지 않았지만 전부 같은 시리즈로 보여서 좋다고 프레더릭이 말해 주더군요.

처음부터 저는 샘 호손 시리즈를 밀실살인 등의 불가능범죄를 취급하는 시리즈로 계획했습니다. 프레더릭 더네이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어서 제가 시리즈의 두번째 편을 보내자 이후 시리즈의 작품 전부가 불가능범죄를 취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해 주었습니다. 저는 기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범죄소설이 있지만 탐정소설의 서브 쟝르 중에서는 뛰어난 불가능범죄나 밀실살인처럼 호기심을 자극하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죠.

본서에 수록되어있는 작품들은 닥터 샘 호손 시리즈 최초의 12편입니다. EQMM의 1974년 12월호부터 78년 7월호까지 사이에 처음 발표되었던 것들이지요. 1편에서의 시대를 1922년 3월로 설정했고 그 후는 연대순으로 이어집니다.

단, 인쇄오류의 탓으로 인해 연대가 바뀌어 들어간 예가 하나 있습니다. 무대는 노스몬트 마을과 그 주변으로 노스몬트는 코네디컷주 동부에 있는 것 같고, 그 위치는 조금 달라지고 있습니다. 후의 작품에서 이웃 마을이 진 코너스라고 알려지는데 그것은 엘러리 퀸의 장편소설 "유리의 마을"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연로한 닥터 샘 선생이 노스몬트에서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술친구들을 환영하는 장면에서부터 작품이 시작하며, 대부분의 경우 다음 사건을 암시하고 끝났었습니다. 이것도 프레더릭의 생각으로 긴 시간동안 잘 진행해 왔습니다만, 이야기의 전개를 빠르게 하기 위해 저는 도입부를 상당히 줄이고 결말의 예고부분을 전면적으로 없앴습니다. 최근에는 1년에 약 두편의 샘 호손 시리즈밖에는 쓰고있지 않아서 육개월뒤의 다음 작품의 내용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의 수많은 시리즈 캐릭터 대부분이 두근두근한 불가능범죄에 도전하지만 그 서브,서브쟝르에 있어서 저의 최고의 작품은 샘 호손 시리즈 속에 있습니다. 최초의 12편을 자세히 살펴 보자면 "유개교의 수수께끼"가 제일 많이 재록되어 있는 것으로 마음에 들며 밀실물의 전문가 로버트 에이디에 따르면 "투표부스의 수수께끼"가 "호슨 시리즈 속에서도 최고로 만족을 주는 작품의 하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이 작품집의 12편은 닥터 샘 호손 선생의 제 1 단편집에 수록하기에 모자라지 않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즐겁게 쓴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좋았던 옛 시절의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에드워드 D 호크 /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1995년 11월


일본에서 구입한 국내 미발표 단편선의 작가 서문입니다. 에드워드 D 호크는 다른 앤솔로지에서 레오폴드 경감 시리즈로 접해본 작가인데 이 작품 평이 꽤나 괜찮은 편이라 구입해 보았습니다. 먼저 소개격인 서문을 한번 번역해 보았는데 실력이 많이 부족하군요. 의역과 생략 투성이이니 감안해서 보셨으면 합니다. 국내 초역(?)이라는 자부심으로 단편들도 한두편 번역해 보려고 하는데 워낙 실력이 딸려서.... (혹 하게된다면 많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마음이 약하므로 번역에 대한 너무 많은 태클은 삼가해 주시길...푸훗!)

2011/06/14

백주의 악마 - 애거서 크리스티 / 하영진 : 별점 4점

백주의 악마 - 8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영국 래더콤만에 위치한 졸리 로저 호텔을 찾았다. 그들 중 케네스 마셜 대위의 아내 알레나는 엄청난 미인으로, 주변 남성들을 본의아니게 유혹하는 존재였다. 갓 결혼한 패트릭 레드펀이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녀에게 열중하여 여행객들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알레나가 해변 근처 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제목은 왠지 예스럽고 촌스럽지만 원제도 Evil Under The Sun! 책 뒤 해설을 보니 '마더구스 동요'에서 따온 제목이라 하네요. 찌는 듯한 태양 아래 휴양지에서의 악마의 소행같은 범죄를 다룬 이 작품에 정말로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소설도 명작이지만 피터 유스티노프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가 더욱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죠. 저 역시도 영화로 먼저 접해보았기에 그간 독서를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트릭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겁니다. 일종의 '순간 이동 알리바이 트릭'인데 지금 읽어도 무릎을 칠 만큼 기발합니다. 영화를 볼 때도 감탄스러웠지만 원작도 감동이 남달랐어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주어지는 사소한 단서들을 모아서, 놀랍지만 사실일 수 밖에 없는 결론을 내리는 포와로의 추리는 작중에 언급된대로 그야말로 '퍼즐을 맞추는 듯한' 고전 정통 본격물의 미덕을 제대로 전해주고요. 이런 단서는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공정성 측면에서도 백점 만점을 주어도 충분합니다. 포와로의 기이한 언행 묘사를 통해 진짜 명탐정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여러모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전개에서 아주 약간의 허술함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범인들이 옭아매려 한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우연찮게 증명된 이후에도 사건의 전개가 너무 범인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점입니다. 우연이 너무 심하게 겹쳐요. 막판 추리쇼의 기반이 되는 린다의 자살 소동도 좀 지나친 감이 들어 거북했고요. 그리고 증거가 없다고 운운하며 추리쇼를 펼치는데, 사진을 가지고 범인들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변치않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묵직하면서도 충실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30년대 고전 황금기 시대를 대표하는, "왕도"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뒤에 실린 정말로 짤막한, 꽁트 수준의 단편 "말벌집"도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 드라마지만 완벽한 범죄계획과 상황에 잘 맞는 해결이 존재하기에 걸작의 여운을 즐기는 식후 디저트로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도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2019/08/03

살인 카드 게임 - 제임스 패터슨 / 조은아 : 별점 1점

살인 카드 게임 - 2점
제임스 패터슨 지음, 조은아 옮김/북플라자

내 소개를 하지. 이름은 딜런. 저명한 심리학 교수지. 어느 날, 아름답고 당찬 여형사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지. 그녀는 대뜸 내게 피 웅덩이 위에 쓰러진 피해자의 사진을 보여주었어. 맙소사, 사진 속 모습이 얼마나 참혹한지 역겨움이 들 지경이었어. 그녀는 범인이 시신 옆에 트럼프 카드 ‘킹’을 두고 갔다고 설명했어. 남기고 간 카드로써 다음 희생자를 예고하는 연쇄 살인 게임이 시작된 거야. 나는 그녀를 도와 범인을 잡는 수사에 참여하기로 했지. 그런데 빌어먹을! 놈은 그런 우리를 비웃듯이 교묘한 방법으로 살인을 계속 저질렀어. 과연 이 살인 카드 게임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국의 인기 작가 제임스 페터슨의 신작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아주 오래 전 몇 권 읽어보았는데, 사실 좋았던 기억은 없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른 만큼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살짝 기대를 했지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역시나 실망이었습니다. 그냥 실망도 아니고 왕실망이었어요.

미치광이 연쇄 살인마와 주인공이 대결하는 작품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살인마가 특정 소재 - 동요라던가, 타로 카드라던가... - 로 살인 예고를 한다는 작품도 많고요. 무작위로 보였던 피해자들에게 무언가 공통점, 패턴이 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흔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무언가 특별한걸로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차별화된 재미 요소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주인공만 조금 독특한 정도입니다. 딜런 라인하르트 교수는 예일대의 이상 행동 분석 교수로 정신 감정 전문가이자 전직 CIA요원, 거기에 아이를 입양하려고 하는 게이 부부의 남편! 이라는 설정이니까요. 파트너격인 엘리자베스 니덤은 게이마저도 반할만한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에 뒤지지 않고요. 그런데 이게 재미요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헐리우드 영화같기는 한데 이야기와는 별 상관이 없는 탓입니다.

또 이렇게 캐릭터를 구성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야기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서, 정작 본 사건 이야기는 구멍 투성이입니다. '트럼프 카드'로 다음 피해자를 예고한다는 핵심 설정부터 억지스러워요. '클로버 킹'이 뉴욕 클럽의 왕으로 군림했던 두번째 피해자를 나타낸다는 것, 그리고 '하트 퀸'이 여성 흉부외과 전문의를 가리킨다는 정도만 아슬아슬하게 설정과 어울리며 그 외에는 전부 무리수입니다. 예를 들어 하트 2가 두명의 불륜 남녀를 가리킨다? 그 대상자는 뉴욕에 수만명은 될 겁니다. 킹스맨 재판 관련자라는 조건이 걸리더라도 둘의 불륜을 어떻게 알아낼까요? 최소한 경찰은 알아내기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도 억지스럽지만 피해자들을 어떻게든 알아내기는 합니다. 허나 범인보다 앞서가고자 할 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항상 범인이 앞선다는 식상한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너무 뻔해서 놀랄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렇게 범인에게 계속 뒤진다면 경찰이 딜런 교수에게 협조를 요청할 이유도 없습니다. 실제로 딜런 교수가 사건 해결을 위해 한 일은? 거의 없어요! 피해자들 모두 악인들로 킹스맨에게 재판받았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진범이 엘리야 티미츠라는걸 눈치챈 뒤 그라임스 기자에게 달려간 정도만 경찰보다 빠른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건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야 티미츠는 그라임스 기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킹스맨 판사가 범인이 아니라는게 밝혀진다면 그의 자동차, 옷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엘리야 티미츠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시간 문제였고요.
마지막에 시장을 구하는 활약? 범인이 죽기전 '나를 야구장으로 데려다 주오'를 부르고 손목에 문신이 새겨졌다는 정도로 무언가 행동을 벌인다는건 억지 아닐까요? 그야말로 작위적인 전개의 끝판왕입니다. 딜런 교수의 유일한 활약은 총상을 입은 엘리자베스를 구한게 전부에요.

범인 엘리야 티미츠의 설정과 그의 범행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경찰에 특별한 연줄도 없고, 대단한 기술을 배우지도 않은 흑인 청년이 어떻게 이런 복잡하고 거대한 살인 계획을 경찰보다 앞서 실행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합니다. 그냥 어릴 때 부터 다이너마이트와 피를 가까이하면서 살았는게 고작입니다. 전직 경찰이었다, 전직 무슨 요원이었다는 등으로 어떻게든 설득력을 갖추고자 하는 시도도 없습니다. 등장도 급작스러워서 반전의 묘미도 없고요.

한마디로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운 수준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리뷰를 쓰기도 아깝지만 다른 피해자 (?) 분들을 막기 위해 몇 자 적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제임스 페터슨의 소설은 손에 대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2023/06/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3 나사 저택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3 나사 저택
"건드리지 마!"
마이코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건드릴 리 없었다. 토시오는 다다미방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이코는 데츠바 옆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데츠바의 양손 손가락이 비틀려 있었다. 죽기 직전에 데츠바는 어떤 고통에 시달렸을까. 의복 가슴 부분의 흐트러짐도 고통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방금 전에 죽었네."
마이코는 토사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검은 칠을 한 책상에는 주홍색 쟁반이 놓여 있고, 물이 반쯤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쟁반 옆에는 뚜껑이 잘 닫힌 작은 빨간 병이 놓여 있었다. 낯익은 병이었다. 병 바닥에는 여전히 몇 개의 빨간 캡슐이 들어 있었다.
마이코는 방을 둘러보았다. 방의 가구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미로로 돌아가자. 누군가 발견하면 귀찮아질테니까."
마이코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앉아있던 다다미 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다미방 안쪽으로 돌아갔다. 낡은 도구들이 쌓여 있는 방에 들어서자 마이코는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젠장 ...... 드디어 나의 마지막 증인까지 죽여버렸군……"
라는 말을 내뱉었다.

"데츠바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동굴의 세 갈래 길, 마이코가 말한 E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 토시오는 물었다.
마이코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그것은 데츠바의 죽음을 목격한 뒤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 몸을 추스르기 위한 것 같았다.
"자살이 아니야. 독약을 먹은 거야."
마이코는 그렇게 단정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병을 기억하겠지? 그건 마사오가 데츠바를 위해 준 약이었어. 만약 데츠바가 자살했다면 죽기 직전에 그 병을 놓아두었을리 없어."
"그렇군요."
"데츠바는 아침 식사 후 늘 그렇듯이 그 약을 먹었을거야."
"식사에 독극물이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토시오는 마사오가 준 약에 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지. 식사에 독이 들어있었다면 당연히 식사 중에 쓰러졌을테니까."
"식사를 누군가가 치웠을 수도 있잖아요?"
"안 돼. 책상 위의 토사물은 책상이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에서 토한 것이니까."
"컵의 물 속에 독극물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마이코는 멍하니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책상 위에 약병이 있는 이상, 독극물은 그 약에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럽지 않겠어?"
"그건 그렇긴 하지만 ......"
"당신은 마사오가 데츠바에게 건네준 약병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분명 누군가가 똑같은 캡슐에 독을 담아서, 그 약병과 똑같은 약병에 담아서 바꿔치기 한 것이겠죠."
"하지만 데츠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썼을 거야. 최근에 가족이 네 명이나 죽었으니까. 데츠바가 가지고 있는 약병을 바꿔치기 할 틈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걸."
"......독극물 캡슐을 하나만 준비해서 데츠바의 약병에 몰래 넣었다는건 어떻습니까? 카오리 씨와 소우지가 죽기 전에요. 데츠바가 아직 자기들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말입니다."
"호오......."
마이코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그럴싸한 말을 하는군. 맞아. 독약 캡슐을 하나만 넣었다면 가능성은 있어. 책상 위에 있던 약병 안에 얼마나 많은 캡슐이 남아있었을까?"
"열 알도 채 안 됐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그 약병이 캡슐로 가득 차면 몇 알 정도 들어갔을까?"
"오십 알은 들어가겠지요."
"데츠바는 그 캡슐을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습관이 있었어. 따라서 범인이 독극물을 넣었다면 거의 40일 전에 넣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역시 가장 쉽게 독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마사오야"
"독은 무엇일까요?"
"청산성 독극물인 것 같더군...... 마사오는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
"독극물은 꼭 병원이 아니어도 구할 수 있어요. 청산가리라면 도금에도 쓰이지 않나요? 해바라기 공예는 작지만 도금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
마이코는 손전등으로 동굴의 바위 하나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거울로 햇빛과 놀고 있는 것처럼 전등 불빛이 춤을 추었다.
"마사오 씨는 동기가 없어요."
토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
마이코는 무심코 말했다.
"데츠바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와리 가문의 유산은 마사오의 것이야."
"유산이라니........"
"있어."
마이코는 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건, 제니야 고헤에가 덴포 14년에 오노 벤키치에게 상담했던게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야."
"제니야 고헤에가 ......"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 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오노 벤키치의 츠루슈일록 첫머리에 적혀 있었잖아.
‘….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카네이시는 당연히 고헤에의 집이야. 비가 오든 말든 벤키치는 카네이시에 갔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었음을 알 수 있지. 카네이시에서 은밀한 회의가 있었고, 고헤에는 중요한 일을 벤키치에게 부탁했던거야. 하지만 쉽게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고심 끝에 승낙을 미루었고."
"그게 뭐였을까요?"
"다음 날들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 다음 날은 ‘도면은 진전이 없다….. ‘라고. 너무 큰 일이라서 도면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던거야. 그리고 다음 날, 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를 가지고 찾아왔어.…..구우에몬에게 맡길까, 벤키치는 고민했지. 또 다음 날,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통풍이 회복된 우타는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들었어. 이 기록은 구우에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 벤키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
"그 구우에몬이란?"
"마와리 사쿠조야."
마이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은 가명을 지을 때 아예 엉뚱한 이름으로 짓지는 않는 법이야. 그때 스승 벤키치는 칼로 베지 못하는 말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 ……..말을 베는 마와리 사쿠조, 어때? 딱 맞는 이름 아니야?"
"............"
"구우에몬은 그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번을 떠나 도망쳐 버렸어. 명목상으로는 시녀에게 손을 댔다고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야. 구우에몬은 가나자와를 떠나 오나와로 옮겨왔지."
"사쿠조의 아내는 오나와 태생이었어요."
"거기서 비롯되었겠지. 구우에몬은 생계를 위해 가나자와에서 배운 기우라기리코보시(起上り小法師)와 쌀을 먹는 쥐에서 힌트를 얻은 키츠키(きつつき)를 만들기 시작했어. 카라쿠리를 배웠던 만큼, 섬세한 일에 능했을테고. ……생활이 안정된 후, 구우에몬은 가게 이름을 츠루슈도(鶴寿堂)로 짓고, 아이에게도 도키치(東吉)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 벤키치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지 않아?"
"그렇다면 구우에몬이 물려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제니야 고헤에의 입장이 되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 모르겠습니다."
"이봐.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 고헤에는 절정의 시기였어. 나이는 칠십. 하지만 가가번에서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세간의 시기와 질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 오히려 더 강하게 느꼈을거야. 지금 손을 잡고 있는 히데미도 병이 들었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으면 내일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요도야 진고로(淀屋辰五郎)의 사례도 있다, 사소한 일로 상인이 재산을 몰수당한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시대였어. 자신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이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말했다,
"재산의 일부를 은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토시오는 생각에 잠겼다. 재산의 은닉.......그래, 그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 금화를 담은 항아리가 발굴되는 경우가 있다. 재산을 은닉하는 것은 당시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식적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제니야 고헤에의 자산이 삼백만 양이었다니 10%만 해도 삼십만 양이야. 천량상자가 삼백 개나 된다고."
마이코는 회계업자처럼 계산을 했다.
"고베에가 아무리 해운업자였더라도 그런 막대한 돈을 다른 번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노 벤키치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벤키치는 젠고 재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두뇌였어. 하지만 벤키치는 거절했어. 벤키치의 은둔 생활을 보면 상상이 가. 벤키치는 지금까지 없던 가라쿠리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번주의 눈을 피해 재산을 은닉하는 일은 꺼려했어. 너무 세속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벤키치는 고민 끝에 모든 것을 구우에몬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어."

"구우에몬이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랬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벤키치에게 푹 빠져 있었고, 동시에 제니야 고헤에의 신봉자였다고 생각되는군. 그렇지 않다면 벤키치가 구우에몬에게 상담할리도, 고헤에가 일을 맡길리도 없었을테니까."
"구우에몬은 그 일에 성공했군요?"
"그렇지. 구우에몬은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탈번 후 가나자와를 떠났지. 벤키치는 그 때 마지막 작별의 선물로 역립 인형을 주었을테고. 그리고 어떤 계획에 의해 고헤에의 재산의 일부가 이 오노와에 숨겨졌던거지. 장소는 이 동굴 안이 틀림없을거야."
"그 재산은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구우에몬은 정직한 사람이었어. 고베에의 재산을 맡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스스로 장난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던 중 가가 번에서는 결국 집정관 히데미가 죽어버려서 반대파가 득세하게 되었어. 고헤에는 공식어선의 지위를 빼앗긴 뒤, 하호쿠가타 매립공사에 착수했다가 투독사건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했고, 제니야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했어. 구우에몬은 가슴이 아팠을거야. 유산을 제니야에게 돌려주어야 했는데 불가능해져버렸으니까. 결국 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병으로 죽고 말았지."
"그 사실을 자신의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물론, 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들 도키치는 한, 두 가지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어."
"마와리 호도말씀이시죠?"
"그래. 도키치는 자신의 이름도 버린 뒤 호도라 자칭하고, 츠루슈도를 없애고 해바라기 공예라 했지. 문장까지도 바꾸었고. 이유는 하나야. 가나자와와의 인연을 끊고 고헤에의 재산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했던거야."
마이코는 손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호도는 요코하마의 도박판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그 자금은 고헤에의 재산 중 일부였을거야. 하지만 호도는 상술에 능한 사람이었어. 은닉 재산의 대부분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마이코는 계속했다,
"호도는 요코하마를 떠나 오노와로 이주했어. 물론 동굴에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야. 그리고 기괴한 나사 저택을 지었어.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이런 건물을 지은건 아까 말했듯이 이 저택에 미로 같은 것이 있어도 부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야. 그 미로는 지하 동굴의 지도이자 입구였고. 평범한 건물에 미로 따위를 만든다면, 미로는 금방 관심의 대상이 되었겠지. 그러면 미로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동굴도 발견되고 말았을테니까."
"나사 저택 전체가 입구를 숨기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미로였던 셈이군요."
"그리고 호도의 언행도 생각해보면 마찬가지야. 호도는 기행이 많은 남자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격 역시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꾸민 것이었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서 숨겨진 재산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동굴 속에 재산을 숨겨놓는건 과연 호도가 할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호도가 나사 저택을 만든 진짜 속뜻은 바로 이것이야."
"호도는 이 사실을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아마도? 미로로 그린 지도만 남겼지. 설령 아들에게 전했을지 몰라도 데츠바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어. 데츠바는 전쟁 후 가난을 경험했잖아? 만약 알았더라면 당연히 은닉 재산을 사용했을 거야. 그리고 둘러보니 이 동굴이 발견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 같아."
"누가 발견했을까요? 토모히로, 아니면 소우지?"
"둘 다겠지. 소우지는 오노 벤키치의 역립 인형을 발견했어. 역립 인형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 작은 방에 있었고........ 토모히로가 가나자와의 다카라다 노인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두 사람 뒤에 찍힌 소나무 숲의 모양이 카네이시의 소나무 숲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토모히로는 가나자와에 갔었군요"
"그렇다면 마사오도 당연히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에 대해 들었을거야. ...... 이제 가 봐야겠다."
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약한 햇살이 비췄지만,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눈에는 꽤나 눈부셨다.
마이코는 남은 양초와 손전등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의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마이코는 진흙을 털어낸 뒤, 닫힌 담벼락 문 아래로 손을 뻗었다.
물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돌판이 조용히 동굴 입구를 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미로의 문을 열었다.
"정말 잘 만들었어."
마이코는 오각형의 돌탁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타리 사이로 몸을 넣었다.
미로를 걷던 중, 미로 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을 만났다. 두 사람의 모습을 쫓고 있던 순경이었다.
"어머, 마중 나왔어요?"
마이코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
경찰관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길을 잃었어요. 출구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게 ......"
"그건 곤란하네요. 아마 이쪽인 것 같은데요."
마이코는 순경과 자리를 바꾸어 먼저 나섰다.
미로를 빠져나와 소정 쪽으로 가니 호시자와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덕분에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어요."
마이코가 지나가려고 하자,
"나라키 씨가 만나고 싶대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오호. 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구나."
"그런 게 아니야. 데츠바의 시체가 발견됐어. 이제는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고. 각오해."
마이코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0/03/04

가상가족놀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선영 : 별점 2점

가상가족놀이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수사 끝에 사흘 전에 일어난 21세 여대생 이마이 나오코 살인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언뜻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딸의 닉네임인 '가즈미'는 도코로다의 친딸 이름이기도 했다.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야베 미유키의 범죄 수사물입니다. 초반부에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잠시 등장한 뒤에는 취조실에서 진행되는 3 명의 가짜 가족에 대한 심문, 그리고 이를 매직 미러 뒤에서 지켜보는 피해자의 딸 가즈미와 그녀를 보호하는 경찰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이지요. 실제로 심문은 '연극' 이기도 하고요.

비교적 짤막한 길이에, 이야기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건 장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요. 가족 해체가 진행 중인 현재 시점에 통용될만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은근하고 깊은 심리 묘사들도 여전히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별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가짜 가족을 데려다가 진행하는 심문부터가 아무리 봐도 진범을 밝히려는 목적은 없어 보인 탓입니다. 심문 과정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 가짜 가족 놀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살인 사건은 언급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문의 목적은 뭘까요? 서로 너가 죽였지! 너가 범인이야! 라고 싸우다가 누군가 자멸하여 자백할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즈미가 가짜 증언에다가 범인과 가짜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복수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심문이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거듭하기 때문에 가즈미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문은 가즈미가 동요하게 만들어 자백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심문 자체가 연극이었다는 것 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요. 

그러나 이렇게 거창한 연극을 벌여가면서 가즈미의 범행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 방법이 고작해야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라는건 어설픕니다. 또 경찰이 연극을 벌여가며 가즈미를 함정에 빠트리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건 수사가 벽에 부딪혔다 하더라도, 이런 노골적인 함정 수사는 위법 아닌가요? 아울러 범행 때 사용된 파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온 이상, 어차피 가즈미의 애인 이시구로 다쓰야는 체포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다면 범인을 잡는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말이죠. 실제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헛수고였어요. 연극에는 가즈미의 분노와 복수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이지만, 경찰이 두 명이나 죽인 살인범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극을 벌인다는건 말도 안되겠죠. 경찰이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 이마이 나오코 가족이 연극을 벌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겁니다. (가면 산장 살인 사건?)

가즈미가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진짜 가족을 내버려두고 외부에서 가짜 가족, 심지어 딸 이름이 똑같은 가족을 만들어 놀았다는걸 알면 분노할 수는 있을거에요. 그러나 이게 살인으로 이어지게 될까요? 그것도 그 사실을 알고 난 직후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 젊은 연인이었던 이마이 나오코를 가짜 가족 가즈미로 착각해 살해한 다음에? 연기이건 아니건, 친아버지가 살인에 대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데 거기서 더 큰 살의가 생겼다는 뜻인데 이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아무리 아버지 료스케가 실수를 많이 했다 해도, 이런 진심까지도 연기로 치부되어 살해된다는건 지나친 비약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불만과 단점을 잔뜩 썼는데, 이는 책 뒤 소개글에 낚인 탓도 큽니다. 책 뒤에서 두 번의 반전이 있다고 소개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일단 가즈미가 진범이라는 건 앞서 말씀드렸듯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영 수상쩍기 때문에요.
두 번째 반전인 세 명의 가짜 가족이 경찰의 대역이라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예상하지 못한건 맞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초반부에 다케가미가 대역의 대사 운운하는 장면을 통해 제공해주고요. 그러나 이 사실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건 전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연극을 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다쓰야의 파카에 엄청난 피가 튄 걸로 봐서 료스케 살인의 실행범은 다쓰야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즉, 반전물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반전도 대단하지 않으므로 반전물을 기대한 저 같은 독자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애초에 수사를 위해서는 진행할 이유가 없는 연극이 소재인 탓에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장점은 딱히 없습니다.

2008/04/22

악마의 공놀이 노래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3점

악마의 공놀이 노래 - 6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긴다이치 코스케는 휴양차 오카야마의 귀수촌에 머물게 된다. 귀수촌은 23년 전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마을로 긴다이치는 당시 사건 담당자 중 한명인 이소카와 경부로 부터 해당 사건에 대한 재 조사까지 의뢰받는다. 마침 마을에서는 23년 전 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의 사생아가 영화배우로 성공하여 귀향하여 떠들썩한 분위기인데 갑자기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입니다. 이로써 국내에 출간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는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전부해서 "혼진 살인사건", "팔묘촌", "옥문도", 그리고 이 작품이죠. "나비부인 살인사건"은 긴다이치 시리즈는 아니니까 제외하더라도 말이죠.

일단 이 작품은 혼진 살인사건과 팔묘촌 중간 정도에 걸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혼진 살인사건과 같은 완전 본격물은 아니지만 팔묘촌 같은 모험물 성격도 아니고, 본격과 어느정도의 드라마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생각되네요. 이러한 작풍은 "옥문도"와 유사한 성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상기 타 작품들과 비교해서 이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은 긴다이치 시리즈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골 촌 마을의 독특하고 기괴한 가족 관계와 유별난 캐릭터들이 비중있게 등장하지 않는 것이죠. 물론 시골 촌 마을과 촌 마을을 지배하는 가문 (유라 가문 - 니레 가문)이라는 일관된 설정(?)은 유지하고 있고, 또 이 가문과 얽힌 여러 인물의 복잡한 인간관계 역시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부 정상적인 성격과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거든요. 외모적으로 장애를 지니고 있는 캐릭터가 한명 나오기는 하지만 비련의 공주같은 캐릭터로 다른 작품들처럼 호러 분위기를 전해주지는 않죠.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도 한결 본격물에 가까우며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추리적으로는 총 4건(과거의 살인까지 5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사건 자체의 트릭은 빼어난 것은 없지만 범인이 과연 누구인가? 와 진상에 대한 추리적 접근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전개도 좋지만 독자에 대한 공정한 설명, 즉 단서에 대한 접근이 충분히,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제시되는 만큼 추리적인 완성도 역시 상당한 수준이죠.

그러나 마을에 전해지는 "공놀이 노래"를 토대로한 범행은 솔직히 좀 작위적이었습니다. 이 동요 그 자체만으로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가문의 "옥호"를 통해 피해자가 특정된다는 전개는 너무 짜맞춘 티가 나거든요. 이 바닥 전설적인 작품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비하면 억지스러움이 너무 커 보일 정도로 말이죠. 또한 "변장" 등의 설정은 사실 그렇게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며 마지막의 범인 체포를 위한 함정 수사 부분은 약간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대로 합리적인 단서에 더하여 사건의 동기 및 진행과정 역시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추리물의 미덕을 잘 보여주면서도 긴다이치 시리즈만의 독특함도 놓치지 않는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뭐니뭐니 해도 긴다이치가 연쇄살인의 피해자로 예정된 사건을 한번은 막아낸다는 점이 참으로! 독특한 점이죠. 비련의 주인공들과 어두운 과거사, 아이돌 등 등장인물들만 놓고 본다면 하야미 레이카 - 겐모치 경감 등 올스타 캐릭터가 총 등장하는 만화판 "김전일" 시리즈의 분위기와 가장 유사한 작품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추리적 요소가 약간 부족한 점 때문에 3점이지만 재미만 따진다면 그 이상의 점수를 줄 수도 있는 작품으로 생각되네요.

2016/01/08

테두리 없는 거울 - 츠지무라 미즈키 / 박현미 : 별점 2점

테두리 없는 거울 - 4점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박현미 옮김/arte(아르테)

'감성 호러'라는 마케팅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읽게 된 작품. 대체 호러가 어떻게 감성적일 수 있을까 아주 궁금했거든요.

허나 한마디로 기대 이하였습니다. 소녀 취향 감성은 넘쳐나지만 호러의 비중은 지나치게 낮은 탓입니다. 전혀 무섭지 않아요. 때문에 볼만한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호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도 "계단의 하나코" 외에는 범죄물이나 일상계에 가까와서 호러로 보기 어렵고요.

또 수록작 5편 중 2편이나 내용 파악이 어렵다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아빠, 시체가 있어요"는 대부분 같은 의견이더군요) =. 독자 나름대로 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답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계단의 하나코"

  • 첫 번째. 이 학교의 하나코는 계단에 산다.
  • 두 번째. 하나코와 만나고 싶으면 하나코가 사는 계단을 진심을 다해 열심히 청소할 것.
  • 세 번째. 하나코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다.
  • 네 번째. 하나코의 질문에 거짓말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
  • 다섯 번째. 하나코가 상자를 줘도 받으면 안 된다.
  • 여섯 번째. 하나코에게 부탁할 때는 하나코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 일곱 번째. 하나코가 내리는 벌은 계단에 갇히는 무한 계단의 형벌.

학교의 왕따 사유리 자살 사건의 진상을 풀어가는 이야기로 일본 괴담의 메이저 중 메이저인 하나코가 등장합니다. 화장실이 아니라 계단에서 나타나는 하나코를 그리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이런 설정이라면 굳이 '하나코'였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네요.

하여튼,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하나코에 얽힌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엮어 진상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아이카와의 후배 지사코로 변장한 하나코가 나타난 후, 그녀가 나타난 이유는 아이카와가 간절히 계단을 청소한 덕분(핏자욱을 지우기 위해)이며, 하나코가 주는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데 다행히 아이카와는 지사코가 선물한 케잌과 사탕을 먹지 않아서 운 좋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결국 '거짓말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에 걸려서 무한 계단 지옥에 갇히게 되지요. 이러한 과정의 긴박감은 일품입니다. 아이카와의 심리 묘사 역시 발군이고요. 마더 구즈 동요에 맞추어 살인극이 벌어지는 고전 본격 추리물이 떠올랐습니다.

문제라면 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부분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하나코는 부탁을 들어 주는 역할도 있는 듯한데 여기서는 벌만 내린다는 점입니다. 좀 의아했어요.
아이카와 앞에 하나코가 나타난 게 사유리의 죽기 직전 부탁이 아니라 아이카와의 간절한 소망때문이라면, 사유리의 죽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왜 복수자 역할을 수행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죽기 직전 사유리가 계단에서 "살려줘!"라고 외쳤다는 묘사 정도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아이카와의 범행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독자 상상에 기대는 부분과 사유리를 왕따시킨 학교 아이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 결말도 답답하고 찜찜했습니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네를 타는 다리"

애니메이션 하이디의 그네 속도에서 착안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왕따 이야기와 분신사바를 엮는 과정과 '큐피트님'이라는 유령 이야기는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인기없던 미노리가 인기 있는 가오리 그룹에 들기 위해 분신사바 놀이를 하다가 유령을 화나게 했다... 그런데 그 유령 때문에 미노리가 죽었다? 유령의 정체도 모호하고, 아카네의 상상이 미노리와 겹치는 마지막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보이려면 최소한 유령의 정체, 혹은 죽음의 이유는 명확했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아빠, 시체가 있어요"

쓰쓰지와 엄마, 아빠가 치매가 있는 시골 할머니 집 청소를 나섰다가 집안 곳곳에서 시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으로 시체가 왜 나왔으며 시간이 지나면 쓰쓰지를 제외한 사람들은 왜 모른 척을 하는지, 연달아 시체가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에필로그는 누구의 제사 장면인지 등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대체로 제 감상과 동일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잠깐 고민해 본 결과로는, 앞서 청소 시작 전 아버지가 5월 내내 청소해야 된다는 말을 하는데 마지막 에필로그의 일력은 5월 5일이라는 것이 핵심인 듯 합니다. 즉, 에필로그는 사실 청소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 것이지요. 앞서 2주에 걸쳐 시체를 치우고 집배원까지 죽인 뒤, 방문 간병인이 오게 되는 것은 아무리 봐도 한 달은 걸렸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앞서 묘사된 청소와 시체 은닉은 모두 쓰쓰지의 상상이 아닐까요? 집에서 발견한 것은 시체가 아니라 쓰쓰지의 오래된 나쁜 기억, 예를 들자면 과거 이 집에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 주민들에게 몹쓸 짓이라도 당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야 매주 어머니, 아버지가 시체에 대해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설명이 되고요. 아니면 히로후미의 수건이 놓여져 있는 제사상을 볼 때 히로후미가 죽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혹은 가족 모두가 관계되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진상은 도무지 알 길이 없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블랙코미디스러운 전개는 그럴듯했지만 내용도 모를 글에 점수를 줄 수는 없네요.

"테두리 없는 거울"

표제작입니다. 거울에서 본 미래(아이)가 악몽으로 구체화되고, 이 미래를 죽이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저주를 다중인격 범죄와 엮은 작품이지요.

사건의 원인과 동기,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약간 추리적인 성향을 띠는 것도 좋았고요. 가나코 시점에서 다카하타 도야 - 다카하타 유이치로를 뒤섞는 심리 묘사는 일종의 서술 트릭으로 보아도 무방하고요. 트릭이 약간 반칙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8월의 천재지변"

신지는 병약한 친구 교스케와 더불어 왕따를 당하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공의 친구 "유짱"을 창조하여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이 밝혀지고, 더욱 심한 괴롭힘을 당하는데, 그 때 "유짱"이 나타나났다...

거짓말이 현실이 된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가 핵심으로, 초등학생들 사이의 우정과 비밀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일상계 추리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지가 유짱의 정체가 사실은 매미가 아닐까 고민하는 과정, 교스케가 진료소에서 친구를 사귀었다는 복선과 함께 밝혀지는 마지막 결말도 아주 괜찮았어요.

하지만 이 작가 스타일일까요? 결국 유짱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 이야기의 결말이 조금 불명확한 게 옥의 티입니다.. 초등학교에서의 왕따가 주요 동기로 계속 등장하는 것도 지루한 요소였고요.

그래도 평작 이상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떠올랐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여름을 무대로 초등학생들이 등장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건 설정이 반대라는 점입니다. 유짱이 매미의 화신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알고보니 실존 인물이라는 결말이거든요. "해바라기..."는 죽은 친구가 거미로 환생하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의 환상이었다는 것이니 완벽하게 반대입니다.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2022/11/13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 니시자와 야스히코 / 김은모 : 별점 2점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인 소년 마모루 미키가미는 어느 순간 부모님과 떨어져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기숙학교에 재학하게 되었다. 그곳에 머무는 학생들은 그 외에 스텔라와 중립, 시인, 여왕님, 신하 (마모루가 붙인 별명)의 모두 6명이었다. 어느날 '교장 선생님'이 새로운 학생의 입학을 알리자 마모루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마모루는 '시인'에게 이유를 물었고, '시인'은 신입생이 오면 학교에 살고있는 무엇인가가 깨어나며, 과거 마모루가 전학왔을 때도 그랬다는 말을 해 주었다. 몇일 뒤, 신입생 루 베넷을 처음 만났을 때, 마모루를 포함한 학생들 모두는 세계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루 베넷은 입학한 첫날 사라져 버렸고, 그를 찾기 위해 '교장 선생님'과 '사감'이 학교를 비운 사이, 신하, 시인 등 다른 학생들과 선생들이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일곱 번 죽은 남자"와 '탓쿠 & 타카치' 시리즈로 유명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예전에 소개해드렸던 "헌책방 스탭의 추천"에서 반전이 놀라운 작품으로 소개되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숙학교에 모인 소년, 소녀들'이라는 주제는 일본 만화에서는 많이 보아왔는데, 이 상황에 대해 학생들이 하나씩 펼쳐놓는 추리가 초반부의 볼거리입니다. 맨 처음에 '중립'은 그들을 특수한 비밀 탐정으로 만들려는 목적이라고 추리합니다. '여왕님'은 그들이 전생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특별한 아이들이라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고 추리하고요. 다른 기억을 떠올릴 때는 현재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에 오기 전 기억이 없다는게 이유였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학교는 가상 현실 속 세계라는 '시인'의 추리였습니다. 기억 상실은 물론 '뒤틀림' 까지 설명가능했던 덕분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앨리스 살인게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 즉 케네스 더피도 가공의 인물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진상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반전도 놀랍습니다. 사실 학생들은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던 겁니다! 그들 모두 치매 탓에 12살 이후의 기억을 잃고, 12살에 갇혀 있던 상태였어요. 이는 '교장 선생님' 시워드 박사의 연구를 위해서였는데, 이 연구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수가 같은 착각을 하면, 그 착각이 객관적 사실로 변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인들이 10~12살 아이들이라고 착각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데 상당히 그럴싸했어요. 노인 모두가 자기들이 아이들이라고 믿고 생활하게 되었지만, 잘 모르는 신입생이 나타나면 노인을 억지로 어린 아이로 착각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뒤틀림'이 일어났다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고요. 역자의 말대로 "벛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가 떠오르기도 하만, 주인공들도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변주도 아주 좋네요.

반전까지 이르는 과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싫어하는 코튼 부인의 저염 건강식 요리, 게이트 볼 정도 밖에 없는 야외 활동, 열 살에서 열두 살 먹은 아이들치고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고방식과 말투가 어른스럽고 실제 그 또래들보다 지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 엄청나게 다양하고 방대한 단서를 통해 반전에 대한 단서를 사전에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단서들은 온갖 세세한 데에 이르고 있어서 공정함 측면에서는 최고 점수를 줄만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인 마모루가 영어를 금방 습득했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작 중에서는 '머리가 좋다' 고 설명되지만, 사실은 12살 이후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익혔기 때문입니다. '전화 부스' 방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최첨단 전자 장치들과 사건이 일어난 뒤 아이들이 '전화 부스'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를 걸 수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60년 뒤 제품들이라 최첨단으로 보였을 뿐이며, 전화도 미래의 물건이니 걸기 힘들었던게 당연하지요.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전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잠시 머물렸던 중계점이 있었다는 공통의 기억과 신문과 잡지는 물론 텔레비젼도 없는 시설, 사감 파킨스 씨 이름과 그가 내는 추리 퀴즈에 항상 등장하는 치매 노인 등 단서들은 그 외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 많은 단서들 중 가장 결정적인건 이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데니스 루드로가 '이 세계, 건물과 사람 모두 거짓이며 우리는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고 한 말일 테고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스텔라라는건 다소 뜬금없었지만, 학교 세계에 푹 빠져 소녀로 있고 싶었던 스텔라가 판타지를 깨트리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동기만큼은 중반에 소개되는 마모루의 종교관 - '자신의 판타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부정하고 말살하려 한다. 자신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이 피를 흘려도 태연하다.' - 으로 거의 돌직구처럼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야말로 전개 과정에서 독자와 정정당당히 승부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데니스가 사라진 상황에 대한 시인의 추리 등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듭니다. 곳곳에 헛점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학교는 가상 현실이라는 '시인'의 추리처럼요.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최신의 첨단 기술로 60년 전 과거에 사로잡혀서 최신 폰으로는 전화도 걸지 못하는 노인의 추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역자는 '등장인물들도 속고 있으므로, 이 작품은 서술 트릭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반쯤은 의도적인 설정 오류 때문에 서술 트릭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반전을 숨기기 위한 색다른 추리를 위해 집어넣은 장치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런 설정 오류는 가상 현실 외에도 텔레비젼과 비디오 테이프, 비디오 게임 등에 대한 설명 등 곳곳에서 눈에 뜨입니다. 오래전 TV, 자동차를 구하기 위해 고생했다는데 정작 이런 미래 기술(?)은 거리낌없이 도입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죠.

그래도 이 정도 오류는 반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을텐데, 살인 사건은 도무지 용납이 안됩니다. '신하' 살인 사건부터 보자면, 수업 도중에 스텔라가 급작스럽게 저지른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동안 스텔라의 판타지에 잘 맞춰주던 '신하'가 왜 갑자기 살해당할 정도로 스텔라 심기를 거슬렸을까요? 게다가 이 자리에는 '시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즉, '시인'은 범인이 스텔라라는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스텔라와 함께 있으라는 마모루의 말을 선선히 들었을리 없습니다. 당연히 마모루와 함께 있으려 했겠지요. 케네스 (신하) 만의 사정이 있었을거라는 '사감'의 말로 퉁치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코튼 부인 살해도 억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치매 노인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 앞에서 욕설을 퍼붓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돼요. 전개를 보면 '학교'에서 일어났던 기존 사건들은 모두 '사감'이 숨기고 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코튼 부인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려다가 충돌을 일으켜 총에 맞아 죽을 이유는 없어요. '신하'는 사고사로 착각했다쳐도, '시인'은 엄연히 칼에 찔려 죽었으니 당연히 경찰에 신고했었어야 합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사감'과 코튼 부인이 한패였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무합니다. 오히려 '교장 선생님'마저도 '사감'이 살인 사건을 은폐한걸 몰랐다고 묘사될 정도지요. 경찰이 나타나면 곧바로 진상이 드러날테니,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또 스텔라가 판타지를 지키기 위해서 뭔가 거슬렸던 신하를 죽이고, 범행을 목격한 시인을 죽인건 그렇다쳐도 그 뒤의 범행은 아예 설명이 불가합니다. 여왕님과 마모루를 설득해서 교장 선생님과 사감만 조용히 기다렸으면 만사 해결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자동차로 이동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던 여왕님 살해야 그렇다쳐도, 중립을 실해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적인 반전과 반전을 위한 빌드업은 대단했지만, 살인 사건 쪽으로는 영 별로였고요 감점합니다. 작가의 장점 - 아이디어 - 과 단점 - 무리수 - 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003/12/15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 유정 : 별점 1.5점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와 나는 여름을 산간마을에 있는 친구 집에서 보내게 된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배우, 화가 등 20여 명과 같이 지내게 되는데, 돌연 인기작가가 살해되면서 이후 차례로 7, 8명이 연달아 칼에 찔리거나 교살, 독살, 익사체로 죽어나간다. 범행방법도 제각각, 동기도 알 수 없는 이 연쇄살인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연속 살인사건인가.

일본 고전 미스테리 걸작을 뽑을때 빠지지 않는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살인사건입니다. 평소 헌책방을 뒤져 절판된 추리소설을 구해 읽는것을 좋아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본 정통(?) 고전 추리소설인지라 동서 추리문고의 따끈따끈한 새책으로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위의 줄거리와 같이 무려(!) 20여명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것이 특징으로 화자역인 야시로 슨페이나 탐정역의 교세이 박사 두명 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에 가려 별로 돋보이지 않을 정도에요. 홈즈나 왓슨의 비중이 죽어나가는 조연들보다 낮은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이름들도 "야시로 슨페이""우타가와 가즈우마""모치즈키 다카히토" 등등 외우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 앞부분의 등장인물 표를 계속 보게끔 만들더군요. (중반 이후부터는 번역과 교정 문제인 듯 이름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꽤 눈에 띄더군요. 흐....)
또 여러 설정들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식이라는 것도 큰 특징으로 한 시골마을에 왕처럼 사는 구 귀족 출신의 부자와 그의 자식들,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친구들, 미친 의사와 간호원까지.. 어떻게 보면 "김전일"에 많이 나옴직한 시골 명문가와 비뚤어진 인간관계의 원형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김전일에 비하면, 이야기는 너무나 장황하고 사건보다는 심리묘사와 각종 상황묘사, 그리고 인물간의 대사에 치중하고 있어서 추리소설의 느낌이 많이 약합니다. 너무 대사가 많은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살인사건"마저도 이런 저런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묻혀 어영부영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건 약과일 뿐이고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이 죽어서 결국 용의자가 좁혀진다는 것입니다. 저조차도 끝부분에서 트릭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범인이 누군가인가 하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실질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한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 다했죠 머...^^ 
게다가 정통 고전파 명작 중 하나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통파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최소한 동요에 맞춰 사람이 죽어나간다던가, 이름 머릿글자 순으로 죽어나간다던가 하는 재미 정도는 더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결론내리자면 고전을 읽은 기쁨은 있지만 아쉬움도 큰 책입니다. 이 책은 분명 고전이고 발표 당시에는 뭔가 획기적이고 대단한 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어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나 작가의 이름값에 기댄 측면이 커 보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뒷부분에 수록된 진슌신의 "얼룩화필"도 별로 신선하지 못했기에 본전 생각이 더 나게 만듭니다.

2010/07/23

1001초 살인 사건 - 온다 리쿠 / 권영주 : 별점 2점

1001초 살인 사건 - 4점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까멜레옹(비룡소)

총 14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온다 리쿠의 단편집입니다. 온다 리쿠는 최근 가장 '핫'한 작가 중 한 명인데, 몇권 읽지는 않았지만 저한테는 잘 맞지 않더군요. 그래도 단편집인데다가 추리 소설이 포함되어 있다기에 속는 셈 치고 읽어보게 되었네요.

추리, SF, 환상 소설, 패러디, 호러, 순문학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 호시 신이찌 스타일의 쇼트쇼트까지 포함되어 있는 수록작들의 폭넓고 풍부한 구성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도서실의 바다"처럼 작품의 편차가 크다는 단점 또한 두드러집니다. 이래서야 잘 하는 한 장르에 집중한 것 보다 못한 결과라 할 수 있겠지요.
특유의 스타일을 어울리지 않는 장르에 무리하게 도입한 티도 많이 납니다. 예를 들자면 "심야의 식욕"은 어두운 복도 구석방에서의 식육? 이미지를 구체화한 전형적이고 뻔한 호러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특유의 뭔가 있어 보이는 애매모호한 묘사로 분위기를 한껏 잡다가, 제대로 이야기를 매듭짓지도 못하고 끝내버립니다. 허무해서 힘이 다 빠질 정도였어요. 
이야기의 맥락은 둘째치고서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감이 잘 오지 않는, 그냥 화자가 품고 있는 짧은 이미지만 전달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털어놓는다는 식의 작품들도 실려있다는 것 역시 감점 요소였습니다. 심지어 표제작인 "1001초 살인사건"은 제목부터가 무의미한, 별다른 기발함이나 작가 특유의 정교한 이미지도 없는 되는대로 써 내려간 어이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나마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과 "그대와 밤과 음악과"의 두 작품은 정통 추리의 맛이 잘 살아있는 편입니다.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작가와 작품에 대해, 그리고 친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낙원에서 쫓겨나"도 괜찮은 작품이어서 점수를 줄 만 하고요.
아울러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은 작가의 다른 장편의 외전격인데, 구태여 본편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완성된 이야기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원래는 당연한건데 이 작가 외전에서는 고마와해야 될 일이더라고요)

하지만 이 두 작품으로 전체 별점을 끌어올리기는 역부족이죠. 그동안 제가 온다 리쿠라는 작가에 대해 안 좋게 가지고 있는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물론 이런 분위기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추리에 가까왔던 두 편만 아래에 짧게 소개해 드립니다.
"수정의 밤, 비취의 아침"
장편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외전격인 작품입니다. 감옥같은 학교의 사연많은 학생들이라는 무대에서 '웃음물총새에게는 말하지마'라는 동요에 맞춘 사고가 이어지다가 주인공 요한이 마지막 사고로 죽을 뻔 한 뒤 결국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강력 사건이 등장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탓에 일상계로 보기는 어렵지만, 추리의 과정 자체는 일상계스러운 맛이 있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특히나 '웃음물총새'라는 장난이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는 복선이 괜찮더군요. 평작 수준은 되는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대와 밤과 음악과"
음악 방송을 진행하는 두명의 남녀 DJ의 방송 속 대화로 진행되는 것이 독특한 재미를 가져다주는 작품입니다. 방송국 현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놓여있는 기현상을 청취자들에게 해석해 달라고 요청한 뒤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죠.
방송에서 틀어줬던 노래가 놓여있던 물건과 관계가 있고, 그 노래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와 연관이 있다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전개는 재미있었습니다. 앞뒤 여러가지 복선과 단서가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왜 이렇게 복잡한 작전을 펼쳐 범인을 옭아매려 했는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건 아쉬웠습니다. 자백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다 하더라도 너무 불확실한 시도니까요. 어차피 '트위드 재킷'이라는 증거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자백을 끌어낼 필요도 없어 보이고요. 게다가 마지막 유령소동은 유치하고 진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