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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4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 (2025~2026) : 별점 3점

"흑백요리사 시즌 2"는 지금은 흔해빠진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다른 요리 서바이벌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 이미 성공한 셰프들과 신인들을 대결시킨다는 대결 구도를 잘 살려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워낙 쟁쟁한 셰프들이 백수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참가자는 단연 후덕죽 셰프입니다. 50년이 넘는 요리 경력을 지닌 요리계의 거물이 자신의 긴 이력에 기대지 않고, 거의 자식뻘에 가까운 후배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연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큰 감동이었습니다. 결승 직전까지 가는 엄청난 실력이 함께 한 덕분이지요. 특히 당근 요리 지옥에서 요리괴물과 맞붙은 대결은 무협지의 비무대회에서 원로 고수와 신예 후기지수가 맞붙는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긴장감과 재미가 넘쳤습니다. 그날의 당근 짜장면은 단연 최고의 한 수였고요. 만약 그게 결승 요리였다면, 요리괴물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애청하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친숙해진 셰프들의 출장도 반가왔습니다. 손정원 셰프야 백수저로 등장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정호영 셰프와 샘 킴 셰프는 솔직히 초반에는 애매하거나 웃음 후보가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 경연에서 예상과 달리 끝까지 잘 버텨주어서 좋았어요. 특히 정호영 셰프는 탑 4에 오르는 성적으로 실력을 분명히 입증했지요. 대진운이 따른 측면도 있겠지만, 이런 경연에서 운 역시 실력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결과라 생각됩니다.

또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나치게 캐릭터를 과시하거나 센 척에 집중하는 흑수저 요리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요리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매너 있게 경연에 임하고 있어, 시청자로서 불편함 없이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시즌 1에서 중간에 하차했던게 이상한 캐릭터 만들기에 의한 불편함 때문이었는데, 그런걸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대결도 꽤 잘 짜여 있습니다. 개인전과 팀전의 배치, 그리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요리 천국과 요리 지옥이라는 대비되는 무대는 흐름을 단조롭지 않게 만듭니다. 특히 요리 지옥에서 진행된 당근을 활용한 30분 요리 대결은 이번 시즌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라 할 만합니다. 제한된 재료인 당근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발상과 요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결과물의 완성도 역시 납득이 갔습니다.

결승으로 이어지는 서사도 인상 깊었습니다. ‘나를 위한 요리’라는 결승전 주제는 경쟁의 끝에서 요리사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들었고, 최강록 셰프의 우승은 단순한 실력 경쟁을 넘어 감정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감동과 재미를 모두 잡은,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시즌 1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백수저 참가자들 사이의 급 차이는 여전히 큽니다. 각종 대회 우승자, 미슐렝 스타 셰프와 단순히 방송 출연 경험이 많은 스타 셰프를 같은 선상에서 경쟁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참가자 선별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재 스님은 사찰 요리의 대가이지만 육류나 오신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제약을 안고 있고, 고기굽기 연구소장의 경우는 BBQ에 특화된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문 셰프라고 보기 애매한 참가자, 혹은 특정 장르에만 지나치게 특화된 참가자들은 애초에 어느 정도 걸러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괴물의 캐릭터 만들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굳이 그렇게까지 센 척하는 연출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대결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흑백 팀전이 가장 큰 문제에요. 여기서 패한 팀은 전원이 탈락한다는 규칙인데, 흑수저들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으니까요. 패자 부활전으로 두 명을 살려주기는 했지만, 그 중 한 명이 누가 봐도 결승까지 올라갈 요리괴물이라서 긴장감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팀을 섞거나, 최소한 두 팀 씩 나눠 경쟁하게 했다면 긴장감과 공정성을 모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심사위원 평가 역시 쉽게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백종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진 탓이 가장 크지만, 안성재 셰프의 심사 또한 일관되게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특정 분야에 대해 가혹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심사위원 수를 늘려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었더라면 더 좋았을거에요.

그래도 잘 짜인 미션과 인상적인 참가자, 그리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결말을 보여준 재미있는 시리즈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요리 서바이벌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2016/10/11

ONE OUTS 1~20 - 카이타니 시노부 : 별점 3점

One Outs 20 - 6점
카이타니 시노부 지음/대원씨아이(만화)

카이타니 시노부의 출세작입니다. 

이른바 '원 아웃'으로 불리우는 갬블의 달인 토쿠치 토아가 합류한 후, 만년 약체 리카온즈가 우승에 이르기까지의 한 시즌이 펼쳐지는데, 지장으로 불리우는 시로오카가 이끄는 버거브즈와 비밀무기 대주자 존슨과의 대결, 온갖 방법으로 사기를 치며 홈 구장에서 승리를 계속해온 블루마즈의 트릭 파헤치기, 그리고 라이벌인 최강팀 마리너즈와의 우승 결전이 중요하게 그려집니다. 이 과정 속에서 토아와 사이카와 구단주와의 지략 대결이 함께 펼쳐지고요.

시합의 승패와 토아, 사이카와의 대결은 실력 이외의 지략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야구 만화라기보다는 "라이어 게임" 같은 두뇌 배틀물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근간이 되는 토아의 절묘한 제구력과 심리전은 분명 허구의 영역이기도 하고요. 빗맞은 볼이 안타로 연결될 수 있는 등, 공은 둥글기 때문에 이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심리적 문제가 있던 무르와카와 쿠라이가 최대 승부처에서 각성한다는 내용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설정면에서의 오류도 있습니다. 토아의 공을 이데구치가 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최종 결전을 앞두고 마리너즈의 타카미가 만들어낸 파해법은 '공을 받기 어렵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리카온즈 타자들이 적응해서 부숴버린 요시다 히토시를 이후 만났을 때에는 그러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공은 둥글고, 여러 변수가 존재하는게 야구라서 오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면에서는 정교함이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야구 만화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요소는 많습니다. 마리너즈의 최강 타선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출루율'이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야구 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디테일이었어요. 초반 토아가 처음으로 대량 실점하며 사이카와가 승기를 잡지만 결국 토아가 우천 노게임 - 게임 포기 선언을 이끌어내는 장면처럼 지략 대결도 철저하게 야구 '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시합 장면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고요.

또 안티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 토쿠치 토아의 캐릭터도 강렬한 매력을 뽐냅니다.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 태어난 듯한 갬블러라는 것이 너무나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안배하는 전개가 잘 와 닿았어요. 공 하나하나, 승패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프로야구의 본질은 이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여준 캐릭터는 많지 않지요. 헤어스타일부터 승부욕과 승부사적 기질, 치밀한 심리전과 작전 구사 등은 여러모로 "아이실드 21"의 히루마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단 몇 페이지로 정리해버리는 결말이 조금 미흡하기는 하지만 야구 만화로도, 두뇌 배틀물로도 모두 볼만한 괜찮은 작품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된 인기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구단주와 특정 개인이 어마어마한 돈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베팅하고, 그 때문에 구단주와 대결한다는 내용은 "공포의 외인구단"과 비슷하네요. 이를 위해 영입된 사교성 없는 선수들이 구 선수들과 대립하여 팀 내 분열을 가져온다던가, 막강한 라이벌팀과 천재 타자가 그것을 가로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이 작품은 최종 보스 토아가 절대 흔들리지 않고, 여자 관계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으며 끝까지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완벽하게 승리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시대가 달라도 너무 달라졌어요.

2025/06/13

아인 1~17 - 사쿠라이 가몬 : 별점 2.5점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단순한 콘셉트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내용은 꽤 독특한 밀리터리 액션물입니다. 주인공 나가이 케이와 아인 테러리스트 사토 간의 대립이 핵심인데, 사토가 군사 전략과 물리적 전투 능력 모두에 특화된 사이코패스라서 경찰 특공대, 자위대 군대와 교전을 벌이는 연출이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고증에 충실하게 잘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작품 속 '아인' 설정도 독특합니다. 아인은 단순한 불사의 존재가 아니고, 죽기 전까지는 보통 인간과 똑같기 때문에 마취제나 산소 결핍, 냉동 등으로 제압 가능합니다. 하지만 죽고 나면 놀랍도록 신속하게 부활하며, 이 부활은 원래의 신체 상태를 완벽히 복원함과 동시에 어떠한 물리적 장벽도 무시한다는 설정이 추가되어 있고요. 이 설정은 이야기 전개에 잘 활용되어 극적 긴장감을 더합니다.

등장인물들도 복잡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빌런 사토의 존재감은 압도적입니다. 냉혹하고 잔인한 사이코패스지만, 단순히 광기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투가이며, 리더십마저 갖춘 인물로, 작전의 구상과 실행 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거든요. 절단된 손을 튀겨 프라이드 치킨으로 위장하여 보안 업체로 보낸 뒤, 자신의 몸을 분쇄기에 갈아서 회사 내부에서 부활하는 침투 장면은 아인의 기묘한 설정 중 하나 - 몸이 조각나면 가장 큰 조각 기준으로 부활한다 - 를 활용하여 극대화한 명장면으로 기억될 만합니다. 공군 기지를 장악한 뒤 군용기를 직접 조종하여 정부 기관을 테러하는 장면도 사토라는 캐릭터가 가진 전략에 있어서 독보적인 창의성, 그리고 아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고요.
주인공 나가이 케이 역시 기존 소년 만화 주인공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인물입니다. 이타심이나 정의감과는 거리가 먼 그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캐릭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격이 사토와의 대립 구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둘의 대결은 단순히 강함의 여부가 아니라 심리전과 전략의 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케이와 사토의 대결 구도로 집중된 전개와 결말도 깔끔합니다. 인기에 영합해 불필요한 외전을 덧붙이거나 결말을 늘이지 않고, 처음 구상된 틀 안에서 완결을 짓는 모습은 만화계에서 보기 드문 미덕이라 마음에 드네요.

"기생수"처럼 사회 풍자적 메시지가 곳곳에 녹아 있는 점도 좋았습니다.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생체 실험에 활용하여 거액을 번 제약 회사가 테러 경고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을 계속 근무하게 만드는 모습, 아인 차별법안을 만든 국회의원이 실제로는 아인이었다는 반전 등은 작품이 단순한 SF나 액션에 머물지 않고 현실 사회의 모순을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아인이 아니지만 테러에 가담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 소셜 미디어 등을 활용한 무차별적인 메시지 전달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고요.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인이 조종할 수 있는 그림자형 존재 'IBM'은 표지에서도 적극 노출하는 등의 비중에 비하면 활용도가 너무 떨어집니다. 사토의 테러 장면 몇 군데 외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종의 초능력에 가까운 소년만화적인 발상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밀리터리 액션물인 작품 분위기와도 사뭇 차이를 보이고요. 

케이와 사토의 마지막 대결도 기대에 비해 밋밋합니다. 단순히 몸통 박치기(?)로 함께 물에 빠진 뒤 기절한 사토를 체포하는 식의 마무리는, 치열한 두뇌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이 결말보다는 사토의 잘라진 손을 놓고 벌이는 테러리스트와 케이 측의 대결이 훨씬 볼만했습니다.

이외에도 '플러드 발생', '일반인의 부활' 등 작품 내 여러 떡밥은 끝내 회수되지 않았고, 케이의 친구 카이토가 지나치게 무리하게 행동하는 이유 역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는 점도 단점이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세계관과 불사의 존재라는 콘셉트를 잘 활용했고, 무엇보다 강력한 빌런 사토의 존재와 그를 중심으로 한 치밀한 전개는 탁월합니다. 다만 일부 설정과 떡밥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대결의 맥빠진 마무리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래도 당대의 인기작이었던 이유는 충분히 잘 보여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영화도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2024/02/14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2017~2020) : 별점 2.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 4부의 조연 키시베 로한이 주인공인 단편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죠죠 시리즈는 좋아하기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에피소드도 4편 뿐이라 부담없어서 좋았습니다. 한 번에 몰아서 보았네요.

특징이라면 호러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기괴한 등장인물들과 더불어 대결 장면에서의 섬찟한 긴장감을 주는 묘사가 탁월한 덕분이지요. 최고는 "무츠카베자카"입니다. 오오사토 나오코가 실수로 남자친구를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에는 약혼자가 찾아와서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시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터져나옵니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꿰메기까지 했는데도 피를 막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약혼자는 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나오코는 어떻게 피를 숨겼을까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고해소"는 악령, "부호촌"은 산신, "더 런"은 헤르메스 화신이라는 기괴한 적과의 대결이 선보여집니다.

죠죠 시리즈다운 두뇌 게임 요소도 있습니다. "부호촌"이 대표적입니다.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산신을 상대로 함정을 간파하여 예의를 차림은 물론, 집사를 헤븐즈 도어로 조작하여 대결을 승리로 이끄는 식이거든요.
앞서 소개해드린 "무츠카베자카"에서 피를 숨긴 방법, "고해소"에서 비둘기 떼가 노리는 팝콘을 무사히 던져서 먹는 방법도 두뇌 게임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아요. 일단 작화 문제가 큽니다. 컬러와 디자인이 과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원작의 괴이한 패션 감각은 만화는 흑백이라서 그렇게 거슬리지 않지만, 풀 컬러 애니메이션에서는 거의 시각적 공해라고 해도 무방하겠더라고요. 핵심 장면 외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동화도 그닥이에요. 잘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효과가 조금 화려한 슬라이드 쇼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대결도 헤븐스 도어의 능력을 활용하여 마무리하는건 별로였습니다. "무츠카베자카"에서, 소녀가 사고로 죽었는데 헤븐스 도어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살려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는건 무리일 뿐더러, 살려내는 방법도 단지 '키시베 로한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리는게 전부라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호촌"도 단순 대결물로 끌고가다가 헤븐스 도어의 능력으로 마무리한건 아쉬었습니다. 마을의 존재가 굉장히 흥미로왔는데도 말이지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원작 에피소드들도 영상화되면 좋겠습니다.

2004/03/11

자토이치 - 기타노 다케시 : 별점 3점


'자토이치’는 도박과 마사지로 생계를 이어가는 맹인 방랑자. 하지만 이 남루한 행색의 사내에겐 외모와는 달리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 번개처럼 빠르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상대를 찌르는, 전광석화 같은 검술이 그것! 민심이 흉흉한 어느 마을에 당도한 자토이치. 그는 도박장에서 비밀스러운 게이샤 자매를 만난다. 치명적인 미모를 지닌 ‘오키누’와 그녀의 동생 ‘오세이’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분을 위장한 채 주점에서 일하고 있다. 

한편, 마을에 군림한 채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긴조’는 숙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떠돌이 무사인 하토리’를 고용하기에 이른다. 맹인 검객, 게이샤 자매, 떠돌이 무사. 이제 이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 앞에 서게 되는데…

기타노 다케시의 신작.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오래전에 영화화된 시리즈를 리메이크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영화제 초청 작품 답지 않은, 전형적인 사무라이 무협 활극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맹인 검술 천재 자토이치와 낭인 무사로 복수와 아내를 위해 경호원 일을 하는 고수 핫토리, 10년전 도적단에게 살해당한 부모의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게이샤 자매와 서서히 밝혀지는 흑막 등이 그러하죠.

피가 난무하고 과장될 정도의 검술 액션에 사운드와 영상의 조화에 신경쓴 여러 장면은 볼 만 합니다. 그리고 긴조 일당의 배후를 밝혀내는 후반 부분까지의 스토리도 제법 짜임새 있고요. 하지만 금발머리의 자토이치는 나름대로 멋지고 잘 어울렸지만, 그 외의 호평 받았다는 탭댄스 장면 같은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장면은 빼고 대신에 보다 더 고전적인 정통 활극으로 만들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도 그 장면들은 마음에 들기는 했어요. 작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서 문제지. 그리고 마지막의 핫토리와 자토이치의 대결은 고수들 대결답게 단칼에 끝내긴 하는데 조금 맥이 빠지더군요. 좀 더 멋진, 웅장한 한판 대결을 기대했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신기치나 옆집 바보 같은 개그 캐릭터도 전면에 배치 되어 있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며 마지막 장면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등, 기타노 다케시스럽지 않은 상당히 흥행위주의 작품으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코미디언으로서의 기타노 다케시스러운 영화랄까요? 별점은 3점. 소재나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었던 만큼 후속작도 기대해 봅니다.

2017/04/09

파인더스 키퍼스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점

파인더스 키퍼스 - 4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천재 작가 로스스타인의 원고를 훔친 모리스는 흥분 상태에서 성폭행 범죄를 저질렀는데, 35년만에 가석방되어 돌아왔다. 한편 숨겨진 원고를 찾아낸 피터 소버스는, 원고와 함께 있던 현금을 가족의 행복을 위해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돈이 다 떨어지자, 원고 일부를 동생 티나의 사립학교 진학을 위해 팔려고 계획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드루 홀리데이는 오히려 피터를 협박하여 원고를 손에 넣으려 하는데...

빌 호지스 3부작의 두번째 작품으로 "미스터 메르세데스" 후속작입니다.

스티븐 킹 작품답게 쉽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끝까지 쉬지 않고 달려주는 덕분입니다. 숨 쉴 틈 없이 사건이 계속 벌어져서 눈을 떼기 힘들었어요.
묘사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특히 범죄자 모리스 시점 묘사가 아주 대단합니다. 광기어린 집착을 보이는 정신병자의 편향된 사고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굉장히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포르노나 하드고어 호러물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부분은 전작과 비슷하네요. 집착의 대상이 거장의 미발표 원고라는 점도 왠지 공감이 갔고요. 저 역시 한때(?) 오덕이었으니까요.

인물 설정도 괜찮습니다. 모리스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잘 묘사되어 있으며, 또다른 주인공인 피터 소버스도 설득력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평범한 초등학생이라면 대충 처리했을 로스스타인의 원고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설정을 학교 수업과 연결하여 소개하는 점이 그 중에서도 백미였어요. 여러분, 학교 수업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빌 호지스 3부작으로 만든건 최악입니다. 호지스 패밀리보다는 모리스와 피터의 대결이 핵심이며, 홀리와 제롬은 그냥 등장한다 싶을 정도로 별다른 활약이 없는 탓입니다. 심지어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결마저도 빌 호지스는 물론이고 다른 호지스 패밀리는 없어도 됩니다. 피터가 붙인 불로 모리스가 타 죽는 게 끝이니까요. 제롬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설정은 억지로 시리즈로 만들기 위한 사족일 뿐입니다. 하기사 빌 호지스에게 사건이 의뢰된 이유도 피터의 동생 티나가 제롬의 동생 바브라와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니 말 다했지요. 과연 이런 일로 탐정에게 사건 의뢰를 할까요?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에게 알리는게 당연하지요. 이것 역시 억지로 시리즈에 끼워 넣었습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 외에도 피트의 아버지가 메르세데스 킬러에게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던가, 메르세데스 벤츠 킬러 브래디가 등장하여 일종의 백치 상태로 살아난 묘사를 그린 부분도 마찬가지에요. 시리즈만 아니었으면 다 빼도 무방한 설정들입니다. 게다가 브래드가 무언가 초능력을 얻었다는 떡박이 던져지는 것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불필요한 설정을 통해 후속작을 암시하다니, 돈독이 올라도 너무 오른게 아닌가 싶더군요.
이보다는 정신병자 모리스 대 여동생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모범생 피터와의 대결로 그리는게 훨씬 나았습니다. 빌 호지스 패밀리는 팬 서비스 수준의 카메오 등장이면 충분했어요.

전개도 열심히 달려주기는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전부 우연입니다. 모리스가 숨겨 놓았던 트렁크를 피터가 발견하는건 전개상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모리스가 원고를 훔치게 된 계기를 만든 드류 홀리데이가 이후 피터의 노트 판매 계획에 엮이는건 우연이라도 너무 지나칩니다. 피터가 원고를 숨긴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심지어 바로 그 장소에서) 최후의 대결이 벌어진다는 것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고요. 스티븐 킹이 나이가 들어 변한건지 모르겠지만 전편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중요성과 해피 엔딩을 강조한 결말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피트 어머니가 모리스에게 총을 맞지만 살아난다는 것이 대표적인데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휙휙 읽히는 재미만큼은 명불허전으로 킬링 타임용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지만, 단점도 명확하기에 감점합니다. 딱히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2006/07/15

시노비 (忍: Shinobi, 2005) - 시모야마 텐 : 별점 2점

전국시대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닌자 가문의 기술과 힘을 두려워 한 나머지 400여년 동안 이어져왔던 코가와 이가 닌자 가문의 대립을 이용하여 그들을 섬멸할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코가의 후계자 겐노스케와 이가의 후계자 오보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쇼균의 계략인 두 가문간 결투의 이유를 알 수 없던 겐노스케는 쇼군을 만나기 위해 떠났다. 그는 뒤를 쫓는 이가 닌자들과 사투를 벌였고, 결국 겐노스케와 오보로 둘만 살아남아 최후의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작년에 개봉해서 일본에서도 짭짤한 히트를 기록한 닌자 액션영화입니다. 원작은 소설이라지만 보지는 못했고, 대신에 만화 버젼인 "바실리스크 - 코우가 인법첩"은 예전에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알맹이야 뻔한 이야기이지만 인법의 대결이 잘 묘사되어 있고, "한번 들통난 인법은 무용지물" 이라는 요소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겐노스케의 인법이 사상 최강의 인법이며 별볼일 없어 보이는 오보로의 인법만이 겐노스케의 인법을 파해할 수 있다는 설정이 흥미로왔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실망스럽습니다. 만화의 기본 설정 및 도입 부분은 각색은 약간 있었지만 충실히 따라가고 있기에 초반에는 그런대로 만화에 충실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는데, 결과적으로는 초반 도입부 이후부터 각색이 엄청나게 심했던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실제 두 조직의 항쟁에 참여하는 닌자의 수가 반으로 줄어 10:10의 승부가 5:5의 승부가 되어 버린 점, 그리고 닌자들의 독특한 인술들도 영화에 적합하게끔 변형시킨 점입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수성과 아무래도 상영시간에 맞추어 내용을 삭감했을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이 탓에 만화의 설정 중 가장 중요했던 "인법과 인법의 대결"이라는 요소가 대폭 줄어들고, 초반 대결에서 이미 2명씩 죽어버려 바로 3:3, 그리고 바로 2:2 구도로 전개되기 때문에 극의 긴장감이 확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닌자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기본 이야기를, 닌자들의 운명이라는 주제로 바꾸어 전개시킨 영화의 스토리는 명백히 실패작입니다. 극적인 긴장감도 거의 없고, 마지막 오보로가 장군에게 읍소하는 장면은 설득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뻔하면서도 허무맹랑한 결말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두명의 인법도 만화와는 전혀 다르게 묘사한 것 역시 이야기를 많이 흐리고 있고요. 

그 외에도 몇가지 지적하자면 원작에서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실질적인 악역인 "야쿠시지 텐젠" 이라는 캐릭터를 닌자, 즉 시노비의 운명과 괘를 같이하는 인물로 변형시키고 비중도 대폭 줄여버린 것도 명백한 실수라 생각되며 배우들이나 연기도 미흡한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청순하면서도 순진한, 아무것도 모르지만 지니고 있는 막대한 능력과 신분때문에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오보로" 역을 소화하기에는 나카마 유키에라는 배우는 전혀 어울리지 않더군요.

이런 점을 놓고 본다면 만화를 재미있게 감상한 저로서는 썩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각색이 많고 스토리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영화만의 스토리로도 개연성은 충분히 잘 살리고 있긴 하며. 몇몇 인술 액션 장면은 공들여 만든 티가 팍팍 날 정도로 비쥬얼이 괜찮은 것이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야샤마루의 채찍(?) 액션과 주인공 겐노스케의 사이보그 009같은 가속 액션은 굉장히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영화만 놓고 본다면 그냥저냥 볼만한 수준이랄까요? 추천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4/10/07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 아이라 레빈 / 김효설 : 별점 2.5점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 6점 아이라 레빈 지음, 김효설 옮김/시작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비밀 회합을 가진 조직, 그들은 나치 잔당으로 나치의 재건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조직 "카메라덴베르크"의 멤버들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과학자이자 의사 "멩겔레 박사"를 주축으로 한 조직이다. 그들의 사명은 앞으로 2년 반 사이에 미국과 유럽에 흩어져 있는 94명의 60대 중반 노인들을 살해하는 것.
우연히 베리 퀠러라는 청년에게 녹음된 이 대화는 일부 내용만 저명한 유대인이자 나치 사냥꾼 야콥 리베르만에게 전달되고 리베르만은 이 음모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미국과 유럽의 사고-살해로 죽은 60대 중반 노인의 자료를 모아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이 없어 허위 신고로 판명되는 듯하여 조사를 중단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리베르만은 우연찮게 피해자의 가족을 접하게 되며 충격적인 음모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는데... 

아이라 레빈의 장편소설. 충격적인 데뷰작이었다는 - 익히 알고 있던 명성 탓에 품었던 기대보다는 별로였지만 - "죽음의 키스"의 작가죠.
이 작품은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첩보 서스펜스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으로 2차 대전의 히틀러 최측근 중 하나인 "멩겔레 박사"가 악역으로 등장하여 나치 잔당을 척결하는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유대인 "리베르만"과의 한판 승부를 국제적인 거대한 음모와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국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65세 가량의 공무원 및 비슷한 직업의 노인들을 살해한다는 음모가 일견 황당하지만, 멩겔레 박사의 치밀한 십수년에 걸친 치밀한 작전이라는 것이 설득력있고 스릴넘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본 발상이 상당히 기발한 편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꽤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기발한 발상이며 충격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설정이 비슷한 스릴러 물이었던 "모레"를 먼저 읽었기에 충격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꽤 그럴듯하거든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리베르만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나가는 과정이 전부 우연에 기대고 있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우연히" 누군가의 전화로 음모를 알게되고 "우연히" 피해자의 가족을 접하게 되어서 진상을 알게되는 식인데 별로 매끄럽지도 않고 쉽게쉽게 간 느낌이에요. 막판의 멩겔레와 리베르만의 대결도 조금 밋밋해 보인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죠. 고수들의 대결 치고는 너무 시시했거든요. 둘의 대결에는 자비에르와 매그니토의 대결과도 같은 뭔가 "아우라"가 있어야 했습니다...
또 30년 전에 쓰여졌다는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클로닝"이라는 유전학적 기법에 대해 너무 과대 포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드네요. 물론 멩겔레 박사가 "쌍동이"라는 테마에 집착한 악마의 연구를 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 정도 가지고 이 소설에서처럼 완성도 높은 복제를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보여지거든요. 뭐 소설이 현실에 크게 기반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의 "제 4제국"이 다가온다는 식의 엔딩은 석연치 않군요. "오멘"류의 엔딩을 집어 넣기는 했지만 그만큼의 임팩트도, 힘도 없는 결말이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기는 했지만 비스무레한 설정의 후기작들을 먼저 접하고 읽은 탓에 저에게는 평작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죽음의 키스"나 "로즈메리의 아기"도 그랬고 이 작가는 항상 저에게 기대만큼의 재미는 가져다 주지 못하네요.
어마어마한 호화 캐스팅으로 무장한 영화 나 나중에 한번 봐야겠습니다.(링크를 따라가면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으니 조심을...) 쟝르 특성상 내용을 알고 보면 좀 재미가 떨어질려나요?

2006/11/05

프레스티지(Prestige) - 크리스토퍼 놀란 (2006) : 별점 4점

19세기 말 영국 런던의 두 마법사, "그레이트 단톤" 앤지어와 "교수" 보든은 과거 수행시절 보든의 실수로 인해 앤지어의 아내가 죽은 뒤 원수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마술쇼를 훼방놓으며 대결하던 중, 앤지어는 보든이 새로 개발한 "순간 이동" 마술의 비법을 파헤치지 못하자 마술 장치 개발자 커터의 도움으로 보다 화려한 순간이동 마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보든의 계략으로 쇼가 실패한 뒤, 보든을 협박하여 그의 비법의 단서를 찾은 앤지어는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천재 과학자 테슬라를 만나 보든의 마술 장치를 재현해 줄 것을 부탁한 앤지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보든의 계략이었다는걸 알게된 앤지어는 좌절하고 마는데.... 

두 마술사의 잔혹하며 처절한, 어떻게 본다면 유치하기까지한 대결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대결의 핵심은 서로의 "마술"의 트릭(여기서는 비법)을 밝혀 나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트릭을 밝히려는 대결이 워낙 흥미진진했고, 짜임새 있는 복선으로 전개되어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좀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메멘토"의 감독답게 시간축을 교묘하게 흔들어서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아울러 마술사들이 각각 서로에게 한방 먹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그래서 뻔한 이야기를 복잡하면서도 색다르게 만드는 편집도 탁월했습니다. 상영시간도 제법 긴데 이렇게 편집의 묘를 잘 살린 덕분에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지며, 긴장을 조이고 푸는 맛도 빼어납니다.

둘 사이의 두뇌게임도 치밀했고, 마술의 트릭을 밝히는 과정 역시 뒷부분에서 관객이 거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면서 제대로 단서를 전달해줄 정도로 추리의 묘가 잘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트릭은 좀 허황되지만, 추리 스릴러 물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이에요. 반전의 맛도 살아있고요. 물론 정통파는 아니라 약간 사도에 가까와서 취향을 좀 탈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각적으로도 당시의 고풍스러운 시대상황을 잘 살리면서도 마술쇼의 화려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도록 촬영되어서 풍성합니다. 마술 소도구와 여러 "비법" 들에 대한 묘사 역시 재미가 넘치고요. 캐스팅도 완벽해서 보든 역의 크리스챤 베일은 예의 사악하면서도 냉정한 연기를 잘 보여주며, 마이클 케인의 묵직한 연기도 좋습니다. 단 휴 잭맨의 앤지어 연기는 좋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울버린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 약간 아쉽더군요. 아울러 스칼렛 요한슨은 정말 조연 2 정도의 비중이라 왜 포스터 한 가운데에 떡하니 나와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슨 팬이라면 실망하실수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수조들을 불빛이 관통해서 안에 들어있는 엔지어의 시체를 전부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쿵 들긴 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부분은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흠 잡을데 없는, 전체적으로 크게 무리없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원작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요. 책을 사기는 좀 부담되니 집에 있는 니콜라 테슬라 전기나 일단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0/11/01

가다라의 돼지 - 나카지마 라모 / 한희선 : 별점 3점

가다라의 돼지 - 6점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아프리카 주술 전문가 오우베 교수는 과거 현장 탐사에서 딸 시오리를 사고로 잃은 뒤, 아내 이쓰미와도 마음을 닫은 채 술에 의존하며 방송 출연으로 시간을 보내는 '탤런트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우연히 한 방송의 아프리카 기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케냐를 방문하고, 그곳의 주술사 마을에서 죽은 줄 알았던 딸 시오리를 발견했다. 시오리를 구해냈지만, 곧바로 그녀를 자신의 '키시투'(일종의 주술 도구)로 여기는 최강의 주술사 바키리의 복수에 직면하게 되는데...

7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그에 걸맞은 무게감으로, 읽기 전부터 독자를 압도하는 나카지마 라모의 대장편입니다. 일본 추리작가협회 장편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네요.

작품은 크게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부 : 오우베 교수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아내 이쓰미를 구하기 위해 마술사 미스터 미라클, 제자 도만과 함께 종교의 '기적'을 폭로하는 이야기

2부 : 오우베 교수 일가가 TV 프로그램을 위해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한 후, 케냐 최고의 주술사 바키리로부터 실종된 줄 알았던 딸 시오리를 구해내는 이야기.

3부 : 일본까지 찾아온 바키리와 오우베 일가의 최종 결전.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엄밀히 말해 이 작품은 추리 소설보다는,   초능력과 아프리카 주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모험 소설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재미만 놓고 본다면 최고입니다. 1부에서 등장하는 '초능력', 특히 사이비 종교 교주가 공중 부양한다는 '기적'의 실체를 폭로하는 과정은 "신비의 사기꾼들"을 연상시키는 트릭물 같은 재미를 제공합니다. 또한, 2부에서는 케냐의 상세한 묘사와 긴박감 넘치는 탈출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며, 3부에서는 본격적인 주술 대결이 펼쳐지면서 트릭과 긴장감이 조화를 이루어 끝까지 몰입하게 해 주고요. 덕분에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작가의 전작인 "인체모형의 밤"과는 전혀 다른,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도 볼거리였고요.
엄청나게 디테일한 자료 조사를 통해 구축된 초능력과 주술에 대한 설명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를 압도하고 조종하는 바키리의 주술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특히 후반부 오우베의 각성 이후 펼쳐지는 '초능력 대결'은 너무 과장이 심했어요. 오컬트와 초능력, 주술이 결국 '존재한다'는 식의 결말은, 앞서 철저하게 구축했던 과학과 상식에 기반한 초능력과 주술이라는 테마와도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또한, 여러 범행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요. 일본만의 독특한 오컬트 문화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영향이 크겠지만, 이렇다 보니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조차 모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목을 가져온 '마태복음'의 가다라 돼지 일화처럼 실제로 악령과 주술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미스터 미라클의 말처럼 모두 트릭에 불과한 것인지...

또한, 마지막 방송국에서의 대결은 "서브리미널 광고 효과"와 집단 최면을 너무 과장되게 묘사하면서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봤던 초능력 소년 기요카와와 마술사 미스터 미라클이 너무 일찍 퇴장한 것도 아쉬웠던 부분이고요.

결론적으로, 1부는 작품의 테마와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도입부로서 아주 괜찮은 중편이었고, 2부는 아프리카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주술'이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낸 모험소설로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3부는 속도 조절 없이 너무 폭주해버린 느낌이 강합니다. 전형적인 B급 감성이 넘치는 데다가, 3부의 결말만 놓고 보면 이 방대한 작품이 '새로운 영능력 히어로 탄생'의 프롤로그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니까요. 막 나가는 재미는 있었지만, 1부와 2부처럼 보다 진지하고 과학적인 접근을 유지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재미는 있었지만, 모호한 방향성과 후반부의 급전개 때문에 선뜻 추천하기는 애매한 작품입니다. 1부는 별점 3점, 2부는 3.5점, 3부는 2점, 전체적으로는 대략 별점 3점입니다.

2005/11/09

어둠속의 목소리 (The Voice From the Dark) - 이든 필포츠 : 별점 2점

어둠의 소리 - 6점 이든 필포츠 지음, 박기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유명한 탐정 존 링그로오즈는 은퇴 후 회상록 저술 작업을 위해 제이콥 브렌트의 호텔에 머물던 중, 한밤중에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링그로오즈는 아이 유령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호텔에 거주하던 노부인 베라아스와 그녀의 하녀 수잔을 만난 뒤, 목소리의 정체가 브루우크 남작의 후계자였던 르도비크 소년이며, 소년의 죽음에 현재 남작인 숙부 바아고인과 바아고인의 심복인 집사 아서 비튼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범인들을 검거하기 위해 링그로오즈는 변장하여 비튼에게 접근하여 그가 소년을 죽일때 사용한 악마의 머리 모형을 이용하여 겁을 주었지만, 비튼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조사를 계속한 링그로오즈는 바아고인의 형인 전 남작 부르우크의 죽음도 의심스럽다는걸 알아낸 뒤, 바아고인과 최후의 대결을 준비한다....

"빨간 머리 레드메인즈"의 작가 이든 필포츠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집에 있던지는 꽤 되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차에 이번에 결국 완독에 성공했습니다.

"빨간 머리 레드메인즈"와 같이 사악한 인물과의 한판 대결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야기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 작품이 더 낫습니다. "빨간 머리..." 에서는 탐정역이 2명이 등장해서 혼란스러인데, 여기서는 시종일관 우직하게 은퇴한 노 탐정 혼자 악당과 대결하는 구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악한 범인역의 캐릭터라던가 각종 심리 묘사, 러브 스토리를 이야기에 잘 끼워 넣은 점 등은 "빨간 머리..."와 거의 판박이로 보인다는 점에서 같은 작가 작품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당대에 높이 평가되었다는데, 그럴 법 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내용은 "빨간 머리..."보다 더욱 지루합니다! 일단 이 작품에서는 최소한의 트릭 조차 찾아보기 어려우며 탐정의 역할이나 캐릭터도 그다지 강하게 다가오지 않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악역이라도 뭔가 해 줘야 할텐데 악역인 바아고인의 캐릭터 역시 뭔가 심심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악역이기는 커녕 오히려 순진해 보일 정도에요. 계획도 많이 어설프고요. 그래서인지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래된 작품이어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늘어지는 느낌도 강합니다. 등장 인물도 많지 않은데, 왜 이렇게 긴 걸까요? 지금보다는 더 짧게 압축해서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 명작임에는 분명하고 이후의 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역시 분명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예전의 "하서판"으로 읽었기에 번역의 문제로 더욱 지루함을 느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이 작가 작품은 아무래도 취향에 맞지 않나 봅니다.

2009/11/04

대결! 궁극의 맛 - 츠치야마 시게루 : 별점 3점

대결! 궁극의 맛 2 - 6점
츠치야마 시게루 지음/중앙books(중앙북스)

"신장개업"과 "먹짱" 등으로 요리만화계에서 입지를 굳힌 츠치야마 시게루의 신작입니다. 대산초어님의 글을 읽고 관심도 갔고, 워낙에 요리만화를 좋아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2권까지밖에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보아왔던 요리만화중에서 가장 독특한 만화더군요. 사실 제가 그동안 읽었었던 츠치야마 시게루의 과거 작품 2편도 정통 요리만화라고 보기는 좀 어려운 (신장개업 - 명요리사가 망해가는 식당을 살리는 전문가로 활약하는 이야기 / 먹짱 - 대식대결, 즉 푸드파이팅 이야기) 내용이었지만 이 만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요리하는 장면" 이라던가 실제의 요리 자체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자기가 먹었던 가장 맛있었던 요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승부가 펼쳐지는 내용으로 모든 요리들이 (일부 교도소 제공 음식을 제외하고는) 단지 등장인물들의 추억담으로만 펼쳐진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거야말로 발상의 전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미면 억지스럽지 않게 다양한 요리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요. 등장인물들의 직업과 나이, 고향도 제각각이라 캐릭터나 배경 이야기도 무궁무진하게 끌어낼 수 있을테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나오는 요리들이 과장되거나 화려한 대신 재소자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요리들을 벅찬 감동으로 눈물이 넘치는 등의 과장된 묘사 없이 단지 "먹고싶다"라는 원초적 감정만 전달하는 절제된 묘사가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그냥 맛있는건 먹고싶다라는 생각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음식 하나로 거의 지구를 구하는 듯한 과장된 묘사가 넘쳐나는 작금이 요리만화 현실에 이런 묘사를 보여주다니 정말 놀랍고도 반가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일단 인물들의 작화가 전작들에 비교한다면 좀 엉망입니다.예를 들자면 1권의 주인공급인 슌스케와 죠지, 2권의 류지는 인물을 도저히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간의 눈매와 흉터 정도의 차이?) 유사하고 그 외의 인물들도 컷마다 인물 뎃셍이 조금씩 어그러지는 등의 문제를 보이거든요. 또 1권에 비하면 동일한 포맷이 단지 교도소 방만 바뀌어 진행되는 2권부터는 조금 식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뭐 이건 좀 더 지켜봐야겠죠.

그래도 앞서 이야기한 독특한 설정에 츠치야마 시게루의 정성들인 요리 그림은 돋보이는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작가의 요리그림은 그 요리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는 측면에 있어서는 거의 당대 제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단순히 요리사들의 배틀물이나 레시피를 전달해주는 요리 정보물로만 명맥을 이어오던 기존 요리만화에 식상하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1권에 등장하는 전직 형사 죠지가 "먹짱"의 전설적 푸드파이터 죠지일까요? 조금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2010/08/12

명탐정 코난 67, 68 - 아오야마 고쇼 : 별점 2점

명탐정 코난 67 - 4점
아오야마 고쇼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첫번째 에피소드는 전편에서 이어지는 고스로리 아가씨 살인 사건입니다. 소노코의 예리한 패션 감식안이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다는 보기 드문 묘사도 놀랍지만, 대단한 트릭 없이 일상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완전 범죄를 꾸미려는 아이디어가 괜찮습니다. 흔하디 흔한 물컵 바꿔치기와 변장 트릭인데, 유치하지만 굉장히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결말도 깔끔하고요. 경찰의 수사, 특히 옷가게에서의 조사가 대충이라 사건을 어렵게 만든 점은 공정하지 못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모두 좋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간만에 장타 하나 터졌네요.

두번째 에피소드는 지나가던 할아버지에 대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내일에 관심없는 할아버지의 자살기도를 밝혀내고 구해준다는 내용인데, 자살을 앞둔 사람이 동네 꼬마들에게 과연 신경이나 쓸까요? 그 외에도 억지가 너무 많아 좋은 점수는 못 주겠어요. 심지어는 결말까지 억지더군요. 짧다는 장점 이외에는 건질게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백화점에 갇혀 폭탄마에게 협박당하는 상황에 처한 모리 탐정과 코난, 란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FBI수사관과 죽은줄 알은 아카이 슈이치, 그리고 검은 코트 일당들이 한데 모여 법석을 떠는 내용이 겹쳐집니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코난과 검은 코트 일당과의 대립을 이어나가는 다리 역할이자 슈이치의 생환을 암시하는 떡밥성 에피소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추리적으로도 썩 와닿지 않았고요. 그나마 조디 수사관을 비롯한 여러 고정 캐릭터들이 등장해준다는 거 하나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여기까지가 67권의 주요 에피소드입니다. 뒤에 실린 에피소드는 68권으로 이어지니 68권에서 설명하는게 맞겠죠. 3개의 에피소드가 전체 6.5점이니 평점은 2.1점... 2점으로 하죠. 그냥저냥한 수준의 평범한 내용들로 가득한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명탐정 코난 68 - 4점
아오야마 고쇼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전권에서 이어집니다. 시라토리 경부와 코난의 담임 선생님 코바야시 선생님의 애정 행각 와중에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룹니다. 추리적으로는 목격자 코바야시 선생의 착각에서 비롯된 사건이고, 만화적인 트릭(인물묘사)이 중심이라 별로 특별한건 없습니다. 딱히 흠잡기는 어려운 평범한 수준이었어요. 추리적인 재미보다는 시라토리와 코바야시 선생간의 알콩달콩한 줄다리기, 사토 경부와 다카기 등 고정 경찰 캐릭터들이 전해주는 소소한 재미가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코난 시리즈의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모리 탐정과 별거중인 에리 변호사가 생일을 계기로 만났는데 살인 사건이 벌어져 에리 변호사가 주요 용의자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트릭이 너무나 같잖아서 실소를 자아냅니다. 그야말로 트릭을 위한 트릭이었거든요. 미니카라니! 차라리 롤러 블레이드가 취미라고 하던가.... 작품의 기본 구성 역시 이전의 모리 탐정과 에리 변호사가 엮이는 에피소드들과 유사했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간만에 등장한 모리 코고로의 활약과 약간의 개그 요소 빼고는 건질게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괴도 키드와 스즈키 지로키치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나 이야기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별로였어요. 추리적으로는 키치에몬이 만든 금고를 어떻게 열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핵심인데 설득력이 제로에 가깝거든요. 꼬마들이 등을 순서대로 기댄 것은 우연에 불과했으니까요. 지로키치와의 대결도 많이 반복된 탓에 지루해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고여. 괴도 키드가 인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이전의 괴도 키드 관련 에피소드들은 제법 그럴듯한것도 많았지만 이제 이 대결 구도는 자제 좀 해 줬으면 좋겠어요. 별점은 1점. 뭐 하나 건질게 없는, 근간 본 에피소드 중 최악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졸작이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축제에서 벌어진 소매치기 - 상해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이야기로 합리적인 전개와 일상계스러운 소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비교적 괜찮은 범인 - 피해자의 관계 역전 트릭이 등장해서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수준이었고요. 그리고 이야기의 한 축인 란의 귀여운 심리묘사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범인을 쫓는 단서가 되는 메시지에 대한 설명이 부실한 것은 아쉽네요. 그래도 모든 면에서 기본은 하는 에피소드였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렇게 4개 에피소드 총점이 8점 – 평균해서 전체 별점은 2점 되겠습니다. 괴도 키드 이야기가 너무 별로라 점수를 다 깎아먹은 탓이 크네요. 캐릭터에 기대어 추리 만화로의 본분을 잊어가는 듯 한데, 비교적 좋았던 가벼운 일상계 분위기로 당분간 끌고가는게 좋아 보입니다.

2026/08/22

스파이더 맨 브랜드 뉴 데이(2026) -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별점 4점

지금 최고 흥행작이죠. 마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OTT를 통해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왜 리뷰가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번 작품은 오랫만에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가장 돋보인 건 액션입니다. 화끈하고 속도감 넘칩니다. 특히 초반의 1인칭 시점 질주, 활강 장면은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연출이라 신선했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도 적절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진 그레이가 점프하듯 다른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CG가 필요없는 아날로그적인 촬영으로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구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탄탄한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진 그레이가 벌이는 일종의 테러에는 V-Max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이는 나중에 진이 갇혀 있던 연구소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브랜드에서 유래되었다는게 밝혀지면서, 진의 언니 세라가 연구소에 감금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과거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단서가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고, 동시에 진 그레이의 행동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구성인데 아주 훌륭해요. 복선을 제시하고 회수하는 과정도 깔끔하고요.

중반에 진이 MJ의 육체를 강탈했지만, MJ인 척 피터 파커를 속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이 역시 진의 농간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의 가공할 능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켜 주거든요. 

블랙 위도우와 헐크 등 다른 마블 히어로들의 등장도 반갑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퍼니셔와 스파이더맨의 조합이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보면 잘 어울리는 콤비는 아니지만, 상극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의외로 잘 맞습니다. 피터 파커가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퍼니셔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등 개그 장면들이 아주 발군이에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피터 파커가 MJ를 잊지 못한 채 4년이나 홀로 지내며 괴로워한다는 설정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21세기 MZ 세대의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MJ 역의 젠데이야가 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외모를 갖췄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고요.

마지막 절정부도 조금 아쉽습니다. 영화의 중심이 강력한 슈퍼 빌런과의 대결보다는 피터 파커 내면의 사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액션 대결이 없습니다. 핸즈와의 대결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질 것 같지 않은 상대라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마블 영화와 세계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100% 즐기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신선한 아이디어, 적절한 유머에 잘 짜인 이야기를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2023/04/01

돌원숭이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1.5점

돌원숭이(THE STONE MONKEY)(개정합본판)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불법 밀항을 주선하는 스네이크헤드 중 고스트는 가장 악랄한 인물로 수많은 사건을 저질러 왔었다. 그를 잡기 위해 인터폴 적색 수배령이 내려졌고, 이민귀화국 INS와 연방 FBI, 뉴욕주 수사관 합동 작전이 시작되었다. 자문역으로 참여한 링컨 라임 덕분에 미국 해양 경비대는 밀항선을 발견했으나, 고스트는 배를 밀항선 승객, 선원들과 함께 폭파시키고 탈출했다. 
링컨은 자기가 배의 위치를 알아낸 탓에 승객과 선원들이 희생되었다고 자책하며 고스트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고스트는 운 좋게 탈출한 승객들까지 죽이려 암약했고, 그 와중에 링컨과 친구가 된 유능한 중국인 공안 경찰 소니 리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니는 죽기 직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링컨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남겼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 네번째 작품. 설정은 다른 시리즈들과 동일합니다. 악질이지만 유능한 범죄자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거든요. 이번에는 중국인 불법 밀항 브로커 고스트가 링컨 라임과 대결합니다. 제목의 '돌 원숭이' 부터가 손오공을 뜻할 정도로 중국 관련한 소재와 설정이 듬뿍 담겨있는게 특징이에요. 링컨 라임과 중국 공안 소니 리가 바이주를 마시며 바둑 대결을 벌이는 장면처럼요. 차이나타운에서의 중국인 범죄자 이야기의 클리셰들과는 다르게 중국 문화 혁명, 반체제 인사 등 사회적인 이야기가 가미되어 있는건 나름 진보한 측면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런 이국적인 설정 외에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전개가 굉장히 억지스러웠습니다. 불법 밀항 브로커 정도가 링컨 라임의 상대가 될 수 없기에, 무리하게 스케일을 키운 탓이지요. 예를들어 미국이 아무리 치안이 허술하다 하더라도, 대놓고 살인을 저지르고 - 푸저우통의 회장 지미 마 살해, 고스트를 배신하고 달아났던 제리 탕 살해, 백주대낮에 우씨 일가를 습격하려던 사건, 고스트의 거처였던 고급 아파트에서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 버젓이 도망갈 수 있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차이나타운 내에서야 그랬다쳐도, 백주대낮의 거리나 고급 아파트에서 손쉽게 탈출한다는건 말도 안돼죠. 
고스트의 정체가 존 성 박사였다는 반전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고스트는 처음에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성 박사를 살해한 뒤, 혼다 차를 훔쳐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차를 숨기고 난 다음, 의도적으로 죽을 뻔 한 척 하다가 경찰에게 구조된 후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말인데..... 고스트는 뉴욕 한복판에 은신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차로 숨어드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라고 수사팀도 이야기하고요. 몰래 뉴욕으로 숨어들어 은신처로 향하면 됐을걸 왜 경찰과 엮여서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죽을 뻔 하면서까지 말이지요. 망명이 허용될 정도로 유명한 반체제 인사였다면 누군가 알아채는건 시간 문제였을테고요. 경찰 보호를 받고 난 뒤로도 다른 밀항 승객들과 혹시라도 만나게 되었다면 바로 정체가 탄로났을겁니다. 
고스트가 마지막에 창씨 가족 거처로 향하는 색스와 동행하며 창씨 가족과 경찰을 죽이고 섹스를 납치할 계획을 짜는 것도 어이가 없었어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고스트가 가짜 존 성 박사였다는게 바로 드러났을테니까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체포 시 마지막 결말에서처럼 '콴시'에 따른 석방도 기대하기 어려웠을겁니다. 미국인 경찰을 죽인 외국인 범죄자를 풀어준다는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뜬금없었습니다. 고스트가 푸젠성 정치부와 결탁하여 반체제 인사를 밀항을 위장하여 살해해 왔다는 진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설득력도 있고요. 하지만 미국 해안까지는 온 다음에 살해해서 없애려고 했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어차피 죽일거였다면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어요. 식량과 연료를 소비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항구에서 승객들을 모두 살해하고 시체만 처리했다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드래곤 호'의 양심적인 선장과 승무원들을 속이려고? 미국 해안에서 죽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까요? 배를 폭발시킨 뒤, 곧바로 승객들을 죽이려 나선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혼자 탈출한 뒤, 조용히 죽이면 됐을텐데 미국 경찰이 쫙 깔린 해안가에서부터 총질을 한다는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죠. 실제로 제리 탕의 배신으로 위험에 처했었으니까요. 여러모로 무리수였습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아멜리아 색스의 조사에 따른 링컨 라임의 추리라는 기본 뼈대는 지키고 있기는 합니다. 몇 안되는 단서를 가지고 고스트의 위치를 좁혀나가기는건 볼만하고요. 그러나 결정적 상황은 모두 운과 우연에 의해 발생합니다. 링컨 라임이 활약한건 밀항선의 위치를 추리해 낸 것과, 우씨 일가 부인이 패혈증을 앓고 있을거라고 추리하고 그 행적을 밝혀낸 것 두 가지 정도 뿐입니다. 고스트의 은신처만 해도 어떤 아파트인지까지는 좁혔지만 결국 은신처가 드러난건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덕분이었죠. 고스트가 존 성 박사였다는걸 알게된 것도 소니 리가 죽어가면서 돌원숭이 목걸이 흔적을 부여잡았던 덕분이었고요. 소니 리가 이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면, 링컨 라임이 창씨 가족의 거처를 알아냈다 한들 아멜리아 색스의 납치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캐릭터들도 별로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별로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메인 빌런 고스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국인 캐릭터들 모두가 뻔하고 평면적이에요. 소니 리는 외국 독자가 보기에는 독특하다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전형적인 홍콩 영화 속 마초 형사를 따온 캐릭터로 느껴졌습니다. 이른바 '킬링 포인트'를 쌓아가며 죽음으로 이르는 전개도 뻔했고요. 거기에 더해 중국의 격언을 들먹이는 모습은 '찰리 챈'을 연상케 했습니다. 
나름 풍수에 주목하는 등의 활약은 있지만, 이 역시 억지로 끝나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풍수 전문가를 찾다가 고스트와 마주치는건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과했거든요. 애초에 이 시점에 고스트가 풍수 전문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문화 혁명에서부터 비롯된 고스트의 악행, 창씨 가족의 갈등이라던가, 우씨 일가의 이야기 등은 이야기 전개에도 불필요했을 뿐더러, 불법 이민과 가족에 대한 흔해빠진 담론을 반복할 뿐이라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뭔가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 같은데 작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헐리우드 양산형 범죄 스릴러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렇게 하면 깜짝 놀라겠지?" 라는 생각으로 의외의 범인을 드러내는데 촛점을 맞춘 나머지, 다른 부분의 설득력이 헐거워진게 아닌가 싶네요. 앞으로 이 시리즈도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13/01/06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오혜진 : 별점 3점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6점
오혜진 지음/어문학사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문학적 위상을 지녔는지를 알려주는 논문집.

1930년대 추리소설이 유행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총독부의 언론 장악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언론이 경쟁 과열 등으로 급격하게 상업화가 진행되어 독자의 흥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글들이 많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 하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김동인, 최독견, 방인근, 염상섭, 박태원, 김유정, 김내성 등 당대 유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자료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되는 것이 큰 장점인데, 이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얻기 위해 급파된 서인준과 뉴욕에 본부를 둔 범죄집단 LC당이 윤백작 공채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이고, 이를 형사 이필호가 쫓는다는 이야기로 스파이 모험소설의 서사를 갖춘 작품인데, 줄거리만 봐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또한 1940년대로 넘어가면서 김내성이 친일문학에 손을 대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유불란이 적국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태풍", 그리고 결국에는 유불란이 이름부터 친일스러운 "애국방첩협회" 회장으로 등장하여 미·영의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매국노"라는 작품 발표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건 뭐 면죄부를 줄래야 줄 수 없네요.

그 외에도 당시 추리서사의 작품들이 유행하였고 유명 작가들도 많이 창작하기는 하였으나, 대중문학이라서 순수문학에 비해 평가절하당하고 냉대받았다는 것, 동아일보에서 (1934.3.6~7) 세계 10대 탐정 작가로 소개한 작가들의 이름들(오픈하임, 르블랑, 췌스터턴, 반 다인, 필립 포츠, 엘러리 퀸, 프리먼, 레오나드 메릭, 프레챠, 비-스톤), 조선뿐 아니라 일본 추리문학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글들(그중에서도 1918.7.7 중앙공론 정기증간호를 통해 "비밀과 개방"의 '예술적 탐정 소설' 특집이 발표되었으며, 여기에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두 예술가의 대화"(금과 은으로 개제), 사토 하루오의 "지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개화의 살인", 사토미 톤의 "형사의 집"이라는 유명 작가 작품이 실렸다는 사실!) 등 유념해서 볼 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논문집이기에 단지 재미만 따지기는 어렵고, 2만 원에 가까운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하나, 식민지 조선에서의 추리소설이 어떤 시대적·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어떠한 작가들에 의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2005/08/18

대도오 (大刀傲) - 좌백 (드래곤북스 명작 컬렉션 1) : 별점 2.5점

대도오 - 6점
좌백 지음/시공사

흑기맹의 하급무사이자 풍자조의 조장 대도오. 그는 일신의 무예는 높지 않지만 순간적인 판단력과 기지, 살인에 대한 기술로 흑기맹과 감숙성의 패권을 놓고 대적하던 구륜교의 고수를 여럿 죽이며 남다른 카리스마로 조원들에게서 신망을 얻는다. 계속되는 전투의 와중에서 계속 공을 세워 나감으로써 흑기맹 흑기당의 하급 조직이었던 풍자조는 어느덧 불패의 "흑풍조"라고 불리우게 된다.

하지만 흑기맹의 배신자들에 의해 대도오는 중상을 입고 구륜교에 생포되어 폐인에 이를 정도의 고문을 받고 버려지게 된다. 다행히 구륜교의 흑옥에서 기연을 얻은 대도오는 살아남은 흑풍조 조원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한편 구륜교도 손을 잡은 녹림맹의 배신으로 교주가 척살당하고 3륜사자 하향월만 겨우 소교주 독고청청을 데리고 떠돌던 중, 복수를 위해 결국 대도오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재정비를 위해 머무르던 신강에서 당금 제일의 고수 중 하나인 천외제일신마 혁련소천과 친분을 맺은 후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흑풍조를 다시 일으킨 후 감숙성으로 향한다.

좌백의 이른바 "신무협"의 대표작 중 한편입니다. 이게 "신무협"이라는 건가요? 여튼, 권가야의 "남자 이야기"라는 만화로 먼저 접했었는데 소설로 읽으니 꽤 새롭네요. 

일단 이 작품의 특징이자 뛰어난 점이라면 별로 말도 없고, 천하 제일 고수도 아닌데 이상하게 강한, 살인에 대해 독특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 대도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묵직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에요. 보통 일반 무협지의 경우는 겁많은 하급 무사에서 한명의 사나이로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매봉옥같은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정체와 과거를 알 수 없는 대도오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것만으로도 새로움과 신선함이 충분히 전해집니다.

하지만 초반부의 좋았던 전개를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시시한 복수극으로 마무리 되는 전개는 아쉽네요. 운기려가 죽어가는 상황은 기발함과 반전으로 제법 재미를 가져다 주기는 하지만 이후부터는 대도오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가 불명확합니다. 더군다나 뻔하디 뻔한 지하 뇌옥에서 기연을 얻어 나름대로 고수가 되어가는 설정은 정말이지... 불필요했다고 생각되네요. 어차피 혁련소천이라는 당금 무림 제일고수라는 인물을 동료로 등장시킬 바에야 더욱 그러했겠죠. 
아울러 대도오, 그리고 노대와 매봉옥을 제외하고는 흑풍조의 조원들도 묘사가 투박하고 비중이 오락가락할 뿐더러 너무 묵직한 카리스마 과잉이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그나마 남성 캐릭터들의 묘사는 과묵한 카리스마의 대도오나 운기주같은 특별한 광인같이 신선한 부분이 있었던 것에 비해 여성 캐릭터는 너무나 진부해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여성 캐릭터 묘사는 김용이래 그닥 발전한 것이 없네요.

그리고 무협지의 중요한 요소인 결투, 대결, 비무 장면, 특히 클라이막스의 대결들이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녹림맹과의 최종 결투나 마지막의 종남파 장문인 유종양과 대도오의 한판 승부 등은 시시해서 김이 다 빠지네요. 그간 묘사된 대도오의 결투 방식과는 큰 차이는 없지만 너무 극단적이랄까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대결에서의 혁련소천의 도움은 앞부분에서 복선으로 처리하는 것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살짝쿵 듭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색다르고 새로운 시작으로 무협지로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기대에는 못 미친 작품입니다. 그래도 꽤나 중독성을 가지고 쭉쭉 읽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겠죠. 솔직히 굉장히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재미는 충분하며 무엇보다도 대도오라는 캐릭터의 존재감을 알기 위해서라면 볼 만 합니다. 후기도 재미있더군요.

PS : 책이 무자게 이쁘게, 마음에 들게 나왔네요. 추리소설도 이렇게 합본으로 나와주면 좋을텐데...

2024/02/17

메이크 미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3점

메이크 미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마더스 레스트라는 작은 마을 역에 내렸다. 역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탐정 미셸 장을 만났다. 그녀는 실종된 탐정 키버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 리처는 미셸을 돕기 시작했고, 둘은 키버의 의뢰인 맥캔의 거처까지 알아냈지만 누군가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맥캔마저도 이미 살해된 다음이었다. 사건의 흑막은 마더스 레스트에서 운영한다는 자살 도움 서비스였다.
그러나 자살 도움 서비스의 진짜 정체는 자살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촬영하는 스너프 필름 제작소였고, 잭 리처는 이곳을 주모자들 전부와 함께 쓸어버린다.


"희망은 최선을 기대하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서 세우는 거요."

저만의 '잭 리처 week'의 두 번째 작품이자 잭 리처 시리즈 20번째 작품. 어제 리뷰를 올렸던 "61시간"과 똑같이 일종의 수사 드라마 장르지만, "61시간"은 '보호'에, 이 작품은 '추적'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찾아오는 악당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실종자와 미지의 의뢰인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한 전개는 합리적입니다. 실종된 탐정을 찾기 위해, 그에게 사건을 의뢰했던 의뢰인과 의뢰한 사건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는건 당연합니다. 이런 저런 탐문 수사와 조사로 발견한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다음 단계로 추리하며 나아가는 과정도 설득력 높습니다. 맥캔의 거처를 알아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키버가 남긴 유일한 단서였던 LA 타임스 기자 웨스트우드의 전화번호로 웨스트우드를 찾아가 맥캔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그가 핸드폰을 산 가게와 평소 행적을 통해 거처를 추리하여 찾아내는데 굉장히 그럴싸하게 그려지고 있거든요. 다소 운이 작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웹에서 얻은 정보인 '시보레 엔진을 돌려 발생시킨 배기가스로 사망케 한다'에 들어맞는 구조물이 마더스 레스트 농장에 없고, 자살 도움 서비스 비용만으로는 전문가 킬러를 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더스 레스트의 자살 도움 서비스의 이면에 추악한 뭔가가 있다는걸 끌어낸 추리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이었고요. 
이곳이 '스너프 필름 제작소'라는 정체 역시 마지막에 반전으로 제시되는 순간까지 독자를 속이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앞서 '디프 웹'에서 접근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지만, '자살 도움 서비스'로 독자(그리고 미셸과 웨스트우드까지)의 눈을 현혹시킨 덕분입니다.

리처의 강함을 드러내는 액션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킬러 헤켓과의 1:1 대결, 맥켄의 여동생 에밀리 집에서 벌어진 킬러 3명과의 대결, 그리고 마지막 마더스 레스트 일당들과의 대결 모두 전문가적인 소견으로 잘 짜여진 작전, 동선으로 움직이는게 잭 리처와 잘 어울렸습니다. 아래와 같이 자비를 품지 않고 악당들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장면들 모두 마음에 쏙 들었어요.
"편하게 보내줘선 안 될 놈이었소. 주방에서 무딘 칼을 가져다가 모가지를 썰어버렸어야 했는데."
그야말로 '무숙자'인 리처의 특징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마더스 레스트' 역에 내린 이유부터가 그러합니다. 단지 역 이름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라니!

물론 단점이 없는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악당 조직의 힘이 허약하다는 결정적 문제는 큽니다. 돈은 있어서 킬러는 고용할 수 있지만, 본인들은 고작해야 시골 마을 촌부들에 불과하니 영 모양새가 살지 않더라고요. 하나의 단계, 역경을 극복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전개도 다소 진부했으며, 꼭 필요한 단서가 꼭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온다는건 우연치고는 너무 지나쳤어요. 이런 점에서 일종의 게임같은 느낌도 강하게 전해줍니다. 마침 에밀리 집에 리처가 방문한 날 킬러가 들이닥친다는 등 작위적인 부분도 많았고요.

그래도 펄프 픽션이라도 잘 짜여져 있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걸 알려주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잭 리처 시리즈 입문작으로 추천드립니다.

2012/02/11

명탐정 코난 74 - 아오야마 고쇼 : 별점 2점

명탐정 코난 74 - 4점
아오야마 고쇼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이번 권에는 전편에서 이어지는 추리소설가 살인사건 해결편과 아유미 납치사건, 헤이지와 신이치(코난)의 탐정 대결, 그리고 해결편이 없는 디자인 회사 사장 살인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추리소설가 살인사건은 신 캐릭터 소개 측면 이외에는 추리적으로 별로 볼 것이 없었고, 전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또한, 아유미 납치사건은 하이바라와 엮어서 뭔가 있어 보이려 한 것 외에는 사건의 발단, 동기, 결과 모두가 설득력이 부족한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나마 간만에 등장한 헤이지가 신이치와 탐정 대결을 벌인다는 패밀리 레스토랑 살인사건은 말장난이기는 하나, 관서 사투리와 도쿄 토박이의 말버릇을 이용해 범인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줄 만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맹점은, 결국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모리 코고로 탐정의 수사법이라는 점입니다(용의자들이 시킨 음식을 다 먹어본다는 것). 탐정 대결의 승자는 사실 모리 탐정이라는 거지요. 경찰 수사 없이도 요리의 맛만 보면 범인을 알아낼 수 있는 트릭이라니, 다소 허무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헤이지가 오랜만에 등장해 코난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팬으로서 즐길 만했고, 평균 정도는 충분히 되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 사건은 해결편이 없어 평가를 보류한다고 치면, 전체적인 별점은 2점 정도 될 것 같네요. 최근 몇 권 중에서는 괜찮은 축에 속하긴 하지만, 아주 좋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차가 많이 느껴지는 수준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오랜 캐릭터들의 우정 출연(?)을 통해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너무 많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도 즐겁게 보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추리적인 부분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면 이 효과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관성으로 보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저의 애정이 80권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2023/08/25

폭탄 - 오승호 / 이연승 : 별점 2.5점

폭탄 - 6점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상,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시 정각. 아키하바라 쪽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겁니다." 술에 취해 자판기를 훼손해 인근 경찰서로 붙잡혀온 남자가 왠지 촉이 온다며 내뱉은 이 말에 귀 기울인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술이 덜 깼나?" 하는 비아냥은 10시 정각에 폭발 사고 신고가 들어오며 서늘한 공포로 변한다.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을 잇는다. "제 촉대로라면 지금부터 총 3회, 이다음에는 한 시간 후에 폭발이 일어날 겁니다."

가벼운 상해 사건이었던 이 건은 금세 최우선 순위로 격상되고, 본청 형사들이 취조실로 들이닥친다. 베테랑 형사들을 앞에 두고 남자는 선문답을 연상케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아홉 개의 꼬리'라는 퀴즈 게임을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제한 시간을 두고 그와 마주 앉아 절박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 경찰. 허술한 주취자로 생각했던 남자가 "하지만 폭발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것 없지 않나요?" 하며 싱글벙글거리고, 사건의 전모가 예상을 가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밝혀지며 취조실에는 오싹함이 감돈다. 이들은 폭발을 막을 수 있을까. (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도덕의 시간>>, <<스완>>의 작가 오승호의 따끈따끈한 신작. 작년 거의 모든 일본내 추리, 미스터리 랭킹을 휩쓸었던 화제작이었지요. 천재 범인과 경찰의 대결을 독특하게 변주한 점에 더해 추리적으로도 (제가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빼어난 덕분일 겁니다. 
별볼일 없는 사고뭉치 노숙자로 보였던 스즈키가 폭탄 테러의 핵심 인물로 드러나는 도입부부터 굉장히 흥미로우며, 스즈키가 경찰에게 심문을 받으며 내 놓는 퀴즈(?)는 대부분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설명도 그럴듯합니다. 전설의 동물 구단 이야기로 지역은 '구단시타', '신의 말씀과 회문, 그리고 탁점'이라는 힌트로 '신문지'를 떠올리게 해서 구단시타의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곳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답을 이끌어내는 식으로요.
스즈키와 진범 다쓰미 일당과의 연결 고리를 더듬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스즈키가 일부러 남긴 핸드폰이라는 단서와 도도로키 형사의 심문 중 나온 하세베 유코의 이름을 통해 가족들을 찾게되는 수사 모두 다쓰미의 마지막 거주지로 연결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쓰미 시체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한 것도 단순히 경찰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쓰미의 사인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목적이었다는 것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스즈키의 퀴즈로 역을 알아낼 수 없었던건, 그도 어떤 역에 폭탄이 설치되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스즈키는 다쓰미 일당이 아니었고 진범임을 자처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는 반전도요. 다쓰미의 모친 아스카가 아들의 테러를 알고 살해한 뒤 스즈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도 셰어 하우스에 다쓰미가 데려왔던 네 번째 인물, 그리고 스즈키가 노숙자 시절 알고 지냈던 신참 노숙자, 스즈키의 드래곤즈 모자 등으로 차분히 단서와 복선을 설계하여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진범 다쓰미 일당이 계획했던 폭탄 테러 방법도 기발했습니다. 일당 중 한 명인 야마와키의 주류 배달업이라는 직업을 활용하여 음료수 형태로 가공한 폭탄을 자판기 안에 넣었다는데, 이래서야 경찰의 수색으로 찾아내지 못한건 당연하겠지요. 결국 정해진 시간이 되어 순환선 야마노테선의 주요 역들이 차례대로 폭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고요. 이건 영상화되면 꼭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에요.

아울러 오승호 작품답게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단순한 사회파 범죄물처럼 특정 이슈에 대한 범죄를 등장시키는건 아니고, 주로 스즈키의 입을 통해 누군가 폭발로 죽을 때 내가 슬퍼해야 하는가? 인간의 생명은 과연 평등한가? 동료가 아닌 적의 목숨은 없애도 괜찮지 않나? 이 세상은 정말 살 가치가 있는가? 이런 세상은 모두 망해버려야 하지 않는가? 등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여러가지 문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덕분에 스즈키의 캐릭터성도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천재 범죄자이자,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있을 '조커'가 배 나오고 머리에 땜통까지 있는, 자기비하에 능숙한 노숙자 출신 아저씨라니! 다시 보기 힘든 빌런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작가의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듯한 메시지가 과잉인 탓입니다. 다쓰미가 가족이 무너진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테러를 저지른다는 동기는 명확하고 설정도 참신했지만, 그 뒤 스즈키가 테러를 떠안는 동기도 잘 설명되지 못해서, 메시지 전달도 공허합니다. 다쓰미가 직접 별거 아닌 일로 가족을 붕괴시킨 일본 사회에 복수하겠다는 메시지를 외쳤다면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애초에 남편과 아버지가 변태였다는게 사회적으로 가족이 모두 매장당할 일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범행 현장에서 자위 행위를 한 건 피해자들 입장에서 분통이 터질 행위인건 맞지만, 법률적으로는 죄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거주지만 옮겨도 가족들의 생활이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억울했을 다쓰미에 비하면, 스즈키의 메시지는 사회 부적응자의 개인 주장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또 노숙자에 불과한 스즈키가 어떻게 고도의 심리 - 정보전을 엘리트 경찰들과 대등하게 벌이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유너바머' 정도의 배경은 있어야 할 인물 같은데, 노숙자라는 '현재'만 보여주다보니 그런 부분에서 설득력이 많이 부족해져 버렸네요.

그래도 스즈키는 독특한 매력을 뿜뿜해서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역으로서의 자리매김은 확실히 하고 있는 반면, 상대역인 경찰쪽 인물들의 매력은 부족하다 못해 없다시피 합니다. 도도로키 형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스타일이라서, 루이케는 정의와 사명감보다는 스즈키와의 게임에 심취해서, 기요미야는 심약하고 정서가 불안해서 스즈키에게 농락만 당하는 탓에 모두 맞상대로서의 격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때문에 스즈키와 1:1로 대결을 펼치는 재미를 전혀 주지 못합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 중요한 팽팽한 대결의 긴장감도 없다시피하고요. 마지막에 야마노테 선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그 외에도 친구의 부상으로 폭주하는 순경 사라, 자리를 지키는데에만 급급한 쓰루쿠 등도 그야말로 뻔하디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라 지루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범죄로 다쓰미 가족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는 것 같이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도 많습니다. 천재 범죄자와 경찰과의 두뇌 게임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가치관에 맞는 행동을 고집하여 조직 내에서 고립된다던가 (도도로키 형사) 하는 이야기는 질릴 정도로 많이 봤습니다. 잇달아 일어나는 범죄 탓에 일반 시민들이 경찰서로 몰려드는 묘사도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등에서 이미 써먹었던 것이고요.
 
변태 남편 탓에 이미 지옥을 맛 보았던 아스카가 또 고통을 겪고야 마는 결말, 에필로그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쓰미가 폭탄 탓에 산산조각이 나기 전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스즈키를 죽일 의도로 경찰서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폭탄도 없었고, 살의를 증명할 방법도 사라의 증언 말고는 딱히 없어 보이고요. 그녀를 어떻게 재판에 회부할 수 있을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알겠지만 제게는 좀 애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