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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1

교통경찰의 밤 - 히가시노 게이고 / 이선희 : 별점 2.5점

교통경찰의 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바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연작단편집. 총 6편의 단편이 "교통사고"라는 일관된 주제로 실려있습니다.

먼저 단점부터 이야기하죠. 일단 이야기의 얼개가 대부분 허술했습니다. 사건에 우연이 많이 작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교통사고라는 주제에 있어 사회고발적인 메시지를 너무 직접적으로 강하게 드러내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련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초기작이기 때문이겠죠?

보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먼저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은 "천사의 귀"와 "버리지 마세요"를 들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편 "천사의 귀"는 장님소녀가 특이한 재능을 이용하여 교통사고의 진짜 가해자를 밝힌다는 발상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중에 이야기되듯 신호등 표시 시간이 변경되었는데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으며 이러한 소녀의 노력과 관계없이 너무나 우연한 제 3자의 비디오 촬영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는 것에서 정교한 느낌을 받기 어려웠어요.
다섯번째 단편 "버리지 마세요" 역시 우연에 의해 사건이 마무리되는 단편이죠. 나름 치밀한 살인극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이 살인극이 도로에 버린 캔 깡통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결국 우연이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결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피해자인 카메라맨이 범인의 범행을 눈치채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 알았는데 아예 다르게 풀어버리고 결말은 우연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라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살인극 자체는 괜찮았던 만큼 아쉬움이 크네요.

그리고 설득력 부족은 "분리대"와 "불법주차"라는 단편에서 크게 느껴졌습니다. 두 작품모두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두드러지나 동기와 결말에 있어 설득력이 약했거든요.
예컨데 두번째 단편 "분리대"는 독자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아줌마 캐릭터 덕에 무단횡단에 대한 사회고발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에는 성공하고는 있지만, 결말이 개운치 못합니다. 경찰의 약간의 조사만으로도 복수를 위한 자해라는건 쉽게 밝혀질테니까요.
네번째 단편 "불법주차"는 불법주차 차량으로 제시간에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은 아이의 복수라는 이야기로 역시나 사회고발적 메시지는 확실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이라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네비게이션이 부정확한 길을 알려줘서 그것때문에 손해본 사람이 복수한다" 라는 이야기와 다를것도 없잖아요. 뭐 나름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단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장점도 명확하죠. 위에 예를 든 단편들도 그렇지만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대단하니까요. 또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에 값하는 추리적인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 말이죠.
특히 세번째 단편 "위험한 초보운전"같은 경우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이 치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려 이 단편은 동기부분에서 다른 단편들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사건의 결말까지 범인이 의도한대로 정확하게 흘러가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단편 "거울 속에서"는 우발적 사고를 토대로 한 공정한 추리 수사물로 우연과 작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정통 수사물이라 할 수 있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었고 결말이 미적지근하다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의 등장이라던가 전체적으로 감도는 따뜻한 느낌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도 잘 살아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을 매기자면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장단점이 명확한 만큼 2.5점 주겠습니다. 초기작인것을 감안한다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한번쯤 봐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충분히 보여주니까요.

2013/10/21

귀동냥 - 나가오카 히로키 / 추지나 : 별점 2.5점

귀동냥 - 6점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추지나 옮김/레드박스

일본작가 나가오카 히로키의 단편집. 표제작 포함 전부 4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운좋게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 전에 자리를 빌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단 이력이 화려한데 2008년 표제작 "귀동냥"이 제 61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발표된 이 단편집이 2012년 "추천 문고 왕국 2012" (이건 무슨 상일까요?)에서 국내 미스터리 부분 1위에 오르며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판매도 꽤 괜찮았다고 하고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상을 수상할 정도의 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점이 없는건 아닙니다. 우선, 최근의 추세라 할 수 있는 연작이나 시리즈물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각 단편이 전부 다른 주인공과 설정, 배경으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작품으로 과거 오 헨리 시대에서나 봤었던 정통 단편물입니다. 뭐 연작, 시리즈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 입장에서, 또 판매나 마케팅 측면에서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는 이런 스타일로 창작했다는 것에서 작가의 신조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또 모든 단편이 제가 좋아하는 잔잔한 일상계물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이야기 측면에서는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수록된 모든 단편이 사건 발생과 마지막 극적 해결이라는 오 헨리 스타일의 정석적인 단편 구성으로 전개되는데, 사건의 발생과 전개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예를 들자면 충분히 구두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아 오해를 키운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억지스러운 설정이 눈에 뜨이는것도 불만이고요. (이러한 점들은 아래의 각 단편별 상세 소개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같은 일상계라 하더라도 추리쪽에 좀 더 많이 치우친 작품들 - 가노 도모코의 작품들이나 요네자와 호노부의 일상계 추리물,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의 일상계 작품들 등- 과는 다르게 추리보다는 심리 묘사와 전개에 더 주력하는 작품 -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들과 같은 - 인데,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을 싫어하는건 아닌데,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정보를 먼저 접해서 정통 추리쪽으로 기대가 너무 컸네요. 충분히 추리쪽으로 강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아 아쉽기도 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충분히 읽는 재미는 있으며 일상계를 좋아하시고 단편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작품집이나 추리적으로 약간 미묘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는 다시금 깊은 감사 드립니다.

아래 수록작별 상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경로이탈"

구급대원 하스카와는 대장 무로후시의 딸 가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가나는 6개월 전 외과의 마스바라의 차에 치어 휠체어에 의존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긴급한 상해사건으로 출동한 하스카와와 일행은 피해자가 가나 사건의 검사였던 구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고를 일으킨 의사 마스바라를 기소하지 않고 풀어주었었다.

칼에 찔린 구즈이를 병원으로 호송하는 와중에 무로후시는 바로 병원으로 이동하지 않고 사이렌을 켠채 병원 주변을 맴돌며, 하스카와에게 전화기를 주며 귀에서 떼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는데....

무로후시가 복수때문에 구즈이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인가?가 사건의 핵심인 작품. 결국 결말은 나름 훈훈한 일상계스러운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떨어진 핸드폰 + 사이렌 소리를 이용하여 위치를 알아낸다는 트릭 하나로 이만큼 이야기를 뽑아낸 것은 감탄스럽네요. 마스바라의 지병을 복선으로 배치한 것도 절묘하고요.

그러나 무로후시가 아무리 과묵하더라도 상황만 설명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지는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혹 사고라도 생긴다면 대장이 아무리 책임을 지더라도 다른 대원들한테 아무런 데미지가 없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것이 구즈이에게 원한을 품은 탓도 있다면, 마지막의 감동도 희석되는 느낌입니다. 구즈이가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자백하는 대사도 사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귀동냥"

경찰 하즈미 게이코는 딸 나츠키와 둘이서만 살아가는 모자 가정의 가장이자 경찰로 이웃에게 발생한 집털이 사건을 맡은 뒤, 유력한 용의자인 네코자키 (요코자키)가 이미 체포되어 구류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코자키는 하즈미에게 접근하여 면회를 요청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반복하는데...

제목의 "귀동냥"을 상대방이 꼭 듣고 싶은 정보를 우연히 알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라고 정의내린 후, 이러한 귀동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입니다.

네코자키가 귀동냥을 이용하여 진범을 유도하는 것, 그리고 나츠키의 엽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귀동냥의 형식을 빌어 후사노 할머니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얽히는데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하즈미가 네코자키의 보복을 우려하는 부분에서부터 긴장을 쌓아나가다가 폭발시키는 과정도 일품이고요.
앞서 말했듯 "귀동냥" 설정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과 일상계 왕도스러운 훈훈한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도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설득력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단 네코자키가 구태여 귀동냥 형식을 빌려 진범에게 내사가 진행중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릴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냥 형사에게 이야기하는게 더 쉽지 않았을까요? 또 이렇게 정보를 들었다고 해서 사이토가 바로 자수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나츠키가 왜 엽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그냥 어머니한테 할머니를 안심시켜달라고 이야기하는게 더 나았을것 같은데 말이죠.

이런저런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899"

소방대원 모로가미는 이웃에서 홀로 갓난아기 아이리를 키우며 살아가는 하쓰미에게 반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사는 주택에 화재가 발생하고 상황이 899 (긴급구조자) 마루아카 (1세 미만의 영아)라는 암호로 전달되는데...

아이를 잃은 아픈 경험을 가진 소방대원 가사마가 아이리가 학대를 받은 것을 파악하고 잠깐 동안 아이를 숨겨 엄마에게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는 것이 핵심 내용인데....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이가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아이가 학대받은 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목적을 위해 아이를 비닐봉지에 넣어 잠깐 숨긴다는 발상은 애시당초 이해불가였어요. 구한 다음 바로 경찰을 부르거나 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이가 다치려면 어쩔려고 했던건지...

아이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던가, 가사마가 장을 본 뒤 큰 비닐봉투를 재활용을 위해 따로 챙긴다던가 하는 식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고, 모로가미의 애타는 심리묘사도 괜찮은 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이야기의 설득력이 제로에 가깝기에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고민 상자"

갱생보호시설의 원장 유코는 퇴소를 앞둔 우스이의 앞길에 왠지 모를 신경이 쓰였다. 그는 만취한채 자전거로 여자아이를 치여 죽인 죄로 구속된 뒤 출소한 인물이었다. 우시이는 입사한 이즈카 제작소 기숙사에 입주하는데 1주일에 걸쳐 가전제품을 보러 다니거나 선술집을 돌아다니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다가 투신 자살을 시도하는데...

설정은 굉장히 묵직하지만 실제 내용은 아주 담담한 일상계의 왕도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핵심 단서(?)인 유코의 NHK 대담 방송이 중요한 소재로 계속 언급되기 때문에 진상에 대해 독자가 눈치채기 쉽다는 단점은 있지만 유코의 심리묘사 등 디테일한 묘사가 아주 뛰어나며, 우스이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의 긴장감도 충분합니다. 아울러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내용의 설득력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네요. 물건을 버리기 위한 "고민 상자"라는 모티브를 잘 엮은 것도 좋았고요.

이 작품집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1/25

시월의 저택 - 레이 브래드버리 / 조호근 : 별점 2.5점

시월의 저택 - 6점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특별한 존재들이 머무르는 고향, 시월의 저택을 중심으로 그곳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연작 단편집입니다.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고, 고양이 아누바를 비롯한 주민들이 모이고, 버려진 인간 아이 티모시가 가족이 되고, 전 세계 친척들이 저택에 모이는 귀향 파티가 열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성난 군중들에 의해 저택이 불타버리고, 네프 할아버지는 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총 23장에 이르는 이야기들로 이어집니다.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이름에서 떠올릴 법 한, 반전 매력 넘치는 호러 혹은 비슷한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약간 호러풍일 뿐 기본적으로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고,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랑'과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이 나쁜건 아닙니다. 그러나 초창기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아담스 패밀리"와 같은 유사 컨텐츠가 넘쳐나는 지금 상황에서는 새롭다는 느낌을 전해주기는 힘들지요.

또 이렇게 긴 흐름의 이야기는 연작으로 묶어 개작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것으로, 원래 존재했던 단편은 발표 시간 순서대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 "여행하는 이"
  • "귀향 파티"
  • "에이나르 아저씨"
  • "바람 속의 마녀"
  • "시월의 서쪽"
  • "오리엔트 북행 특급"

문제는 그래서인지, 좀 억지스럽게 엮인 작품들도 눈에 뜨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여행하는 이"입니다. 후일 추가된 단편인 "삶을 서두르라"도 딱히 연작 이야기에 포함될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요. 이렇게 후대에 하나의 시리즈로 모아 엮은게 과연 좋은 방법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름다운 문장들, 묘사들이 넘쳐나며 매력적인 설정도 많지만 여러모로 생각과는 다르기에 감점합니다. 작가의 팬이시라거나,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지만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주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바람 속의 마녀"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조종할 수 있는, 저택 다락방에 사는 세시가 사랑을 하고 싶다며 앤이라는 소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 뒤 실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약하자면 한 여름 밤 변덕스러운 첫 사랑을 호러 터치로 그려낸 감성 호러 틴에이저 로맨스 소설이에요. 마지막 장면, 찌르레기의 마음 속에 들어간 세시가 자신의 주소를 적은 종이를 꼭 쥔 톰을 보고 사라져 버리는 결말도 애틋하고요. 레이 브래드버리가 이런 작품도 쓸 수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귀향 파티"

핼러윈 이브에 시월에 저택에 온갖 이능력자 친척들이 귀향하는 파티가 열렸다. 시월의 저택에 버려졌던 인간 아이 티모시는 흥미 반, 두려움 반으로 이 파티에 참석하여 파티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는데...

얼마전 개봉했었던 "아담스 패밀리" 애니메이션 영화와 아주 흡사한 분위기와 내용입니다. 모두 친척인 이능력자들이 특정 저택에 모여 파티를 연다는 기본 설정이 똑같으니까요. 이를 바라보는 화자이자 기록자 역할을 수행하는 '인간' 가족이 있다는 점만 다르고요.

그런데 이능력자들의 기묘함과 능력에 대한 화려한 묘사 외에는 특별히 대단한 내용은 없습니다. 티모시 시각에서 이야기가 많이 전개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티모시는 유한한 삶과 무한한 삶을 비교하며 자신이 다르다는걸 자각한다는 정도에 그칠 뿐입니다. 지금 보다는 성장기 느낌을 좀 더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월의 서쪽"

귀향 파티 후 저택에 머무르던 피터, 윌리엄, 필립, 잭은 세시의 도움으로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 상태로 놀다가 육신이 머물던 외양간이 불타버려 머물 곳을 잃고 만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네 명은 4천살 먹은 나일강 고조할아버지 머리 속에 머물게 된다.

세시의 능력이 잘 드러난 단편으로 성인용 코믹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4명의 사촌들이 모두 여자를 밝히고, 할아버지의 과거 속에 수많은 여성이 있었다는 설정 등에서 말이죠. 세시가 사실은 할머니였으며, 할아버지가 세시를 노리고 다락방을 가끔 찾아간다는 결말도 그러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리엔트 북행 특급"

유령을 믿는 노처녀 간호사 미네르바 할러데이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우연히 유령 '창백한 승객'을 만난 뒤, 일 평생 박제처럼 지냈던 자신의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영국에 있는 시월의 저택으로 향하는 것을 발벗고 돕는데...

유령인 '창백한 승객'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는건, 사람들이 유령을 믿지 않게 되어서라는 설정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미네르바 할러데이가 유령을 살려내기(?) 위해 온갖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들 - "햄릿", "크리스마스 캐럴", "폭풍의 언덕", "나사의 회전", "레베카", "원숭이 손" - 을 읽어주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이며, 유령과 인간, 즉 이종족간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물이라는 점도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미네르바마저 유령이 된다는 결말은 조금 뻔해서 아쉽더군요. 1988년 발표된 비교적 후기작인데, 전성기만큼의 반전 매력은 전해주지 못했어요.

"에이나르 아저씨"

시월의 저택의 친척인 날개달린 이종족 에이나르 아저씨는 사고로 밤에 비행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대낮에 고향 유럽으로 날아가다가는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몰라 귀향을 포기한 그는, 사고 후 그를 도와주었던 젊은 브루닐라 웩슬리와 결혼하여 마을에 정착하는데... 

시월의 저택 다른 주민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에이나르 아저씨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스핀오프 단편. 사고 후 결혼하여 정착하는 과정과 대낮에도 비행할 수 있도록 '연'으로 변장한다는 결말까지 유쾌했던 소품입니다.

"삶을 서두르라"

마드모아젤 안젤리나 마르게리타는 뒤집힌 삶을 사는 존재. 그녀는 무덤에서 환생하여 점점 어려지다가 누군가의 뱃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시월의 저택 버젼입니다. 벤지만 버튼과 데이지처럼 안젤라니와 티모시의 관계가 동일하고, 전해주는 주제도 유사합니다. 무덤에서 삶을 끝내지 않고 어린 신부의 석류같은 미궁 속에서 잠들다니 운이 좋다고 말하는 안젤리나의 초긍정 대사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이죠. 티모시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시월의 저택 연작에 포함될 이야기로 생각되지도 않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행하는 이"

시월의 저택 주민들을 해하려 했던 '부정한 존'은 마을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고통받다가, 경찰서를 찾아가 저택 주민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는데... 

잔혹한 '부정한 존'을 해치우는 이야기입니다. 부정한 존을 고통스럽게 만든 종소리는 알고보니 세시가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능력을 활용한 비교적 정통적인 호러물입니다. 덕분에 다른 단편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개작하여 연작 단편집으로 묶이기 이전에는 시리즈에 속한 작품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자만 등장한다면 써 먹을 수 있는 반전이니까요.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표된 (1945년) 작품이라는 점, 발표 당시 유행했던 단편 호러물들과도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2009/04/18

절규성 살인사건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 별점 3점

절규성 살인사건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범죄 심리학 조교수이자 실제 사건에도 뛰어들어 활약하여 "임상 범죄 학자"라는 타이틀로도 불리우는 천재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역으로, 그의 대학동창이자 친구인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도우미로 활약하는 단편집으로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이후 두번째로 국내에 출간되었네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때와 똑같이 이 컴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 이외의 작품이 계속 출간되는 것은 여전히 궁금합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일본 추리 단편집이라 주저없이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 단편집에는 전부 6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작가 후기에 등장하는 작가의 의도, 즉 "... 살인사건" 이라는 주제로 단편 연작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충실하게 따른 단편들입니다. 연작 시리즈 답게 일종의 "저택"을 무대로 해서 밤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연관성을 가지게 하겠다라는 것 역시 동일하고요. 그러나 "저택"을 무대로 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겠구나... 싶은 작품은 "월궁전"과 "홍우장" 2편 정도? 나머지는 그냥 다른 이야기로 꾸미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추리적으로 필요도 없는데 "저택"을 무대로 하는 설정을 도입하는 것은 작가의 욕심에 불과해 보였거든요. 트릭 자체는 신본격의 대표 작가답게 괜찮은 것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지나친 작위성 때문에 외려 완성도가 낮아진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냥 놓고 본다면 괜찮은데 작위적인 설정 덕에 단편마다 완성도의 편차가 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사실 이 작가의 가장 큰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설정에 매달리는" 모습은 작가의 작품을 여러권 읽어왔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고 거슬리기만 하는데, 이제는 계속 구입해 봐야 하는건지 솔직히 의심스러운 수준인 듯 합니다. 별거아닌 트릭을 작위적으로 포장한 얄팍하고 빈약한 과대포장된 선물상자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죠... 작가의 최고 걸작이라는 "쌍두의 악마" 가 출간되면 읽어보고 최종 평가를 내려야겠지만 현재로는 위험수준!입니다.

그나마 별점은 실망스러운 감상평과는 별도로 수준높은 작품 몇편이 끌어올리고 있어서 평균점 자체는 괜찮은 편이네요. 괜찮았던 작품은 "흑조정", "홍우장" 두편이었고 "호중암", "월궁전", "절규성" 은 평작~범작 수준, 그리고 "설화루"는 절망적인 쓰레기 수준으로 토탈 평균은 한 3점 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책의 사이즈, 장정, 디자인, 커버는 모두 아주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같은 학산계열인데 "경성탐정록"과는 비교가 되는 수준인데, 앞으로 출판사에서 경성탐정록도 신경좀 써줬으면 좋겠네요.

단편별로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흑조정 살인사건"
히무라와 아리스는 대학 동창인 화가 아마노의 요청으로 그가 거주하는 시골 저택 "흑조정"을 방문한다. 과거 "흑조정"의 주인이었지만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던 전 은행가 나미키 마사토의 죽은지 얼마 안되는 시체를 발견한 아마노는 기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흑조정"이라는 설정을 도입할 필요는 전혀 없었던 단편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아마노의 딸 마키를 통해 다양한 복선과 수수께끼를 전달하는 이야기 구성이 무척 좋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스무고개 퀴즈를 작품에 녹여내는 전개와 이솝우화를 가지고 풀어낸 트릭도 마음에 들었고요. 짤막하지만 복선과 단서가 잘 배치되어 있어서 단편의 왕도를 걷는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4점 주겠습니다.

"호중암 살인사건"
"호중암"이라 불리는 지하의 밀실에서 기묘하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 츠보우치 토마의 시체가 밀실에서 항아리를 뒤집어쓴채 매달려 있었던 것.
밀실 트릭물입니다. "호중암"이라는 밀실의 이름과 피해자의 이름, 사체의 상태를 연결시킨 것은 흡사 엘러리 퀸의 억지스러운 본격물 트릭을 연상케 하더군요. 21세기에 먹히기는 어려운 설정이죠. 그래도 기계적인 장치를 사용한 트릭은 깔끔한 편이라 중간정도는 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 작위적이고 장치적이라 "만화"에 더 적합해 보이긴 했다는 것은 단점이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월궁전 살인사건"
히무라와 드라이브 도중 아리스는 우연히 자신이 발견했던 황당했지만 예술성있던 노숙자의 무허가 건물을 이야기한다. 근처에 도착한 그들은 그 집을 찾아보는데 마침 "월궁전"이라 불리우던 그 집이 방화로 불타고, 노숙자도 사망한 것을 알게된다.
"월궁전"이라는 단어에서 뽑아내어 집과 연결시킨, "집" 이라는 설정과 트릭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단편입니다. 깔끔하게 정리해서 마무리했기 때문에 읽기도 편했고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단순해서 정통 본격물이라기 보다는 소품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설화루 살인사건"
"설화루"라 불리우는 공사가 중단된 여관건물에서 거주하던 남자가 살해당한다. 처음에는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머리에 둔기에 의한 상처가 발견되어 살해된 것으로 판단되나, 눈오는 건물 옥상에는 남자의 발자국만 남아있던 상태.
불가능범죄를 테마로 한 작품인데 작위적인 수준을 떠나서 황당 그 자체의 우연을 다룬, 추리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작중 아리스가 이야기하는 다양한 가설 (예를 들면 부메랑 같은) 이 차라리 트릭으로 더 의미가 있는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이 단편집의 워스트입니다. 작가 스스로는 영화 "매그놀리아" 이야기를 하면서 어물쩍 빠져나가고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죠. 별점? 1점도 아깝다.

"홍우장 살인사건"
화장품 회사의 CEO였다가 은퇴한 이지마 쇼코의 자살로 위장한 사체가 "홍우장"이라 불리우는 그녀의 자택에서 발견되고, 출동한 경찰과 히무라 - 아리스는 세간에 진짜 "홍우장"으로 알려져 있는, 과거 영화촬영 세트로 쓰여 유명한 저택에 살고 있는 이지마 쇼코의 자녀들을 찾아가게 되는데...
저택과 살인사건, 그리고 트릭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두번째 작품입니다. 트릭의 완성도도 높고 사건이 밝혀지는 중요 단서도 설득력이 있으며 동기도 확실한 편이라 추리적으로는 확실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범인의 동기가 좀 작위적이고 우연이 겹쳐져 사건이 이루어 졌다는 것, 그리고 단편 전체적으로 이 저택이 유명세를 타게 된 "바람도 모른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계속 등장시키는 것 등은 확실히 단점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단편으로 풀어내기에는 괜찮은 소재이고 작품 자체도 잘 썼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4점 주겠습니다.
그나저나 홍우장에서는 "청소"라는 것을 하지 않는것일까요? 저도 가끔 테이블은 걸레로 닦아 주는데.... 사소한 점이지만 추리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니 만큼 작중에서 설명을 좀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네요.

"절규성 살인사건"
'나이트 프라울러' 라고 자칭하는 부녀자 연쇄 살인범의 등장으로 전 일본이 공포에 빠진다. 결국 네번째 피해자가 발생하고, 히무라는 사건을 조사하여 그 뒤에 숨겨진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
"절규성"이라는 게임을 테마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연쇄살인을 다루고는 있지만 트릭이 별게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주제는 상당히 묵직했는데 결말이 좀 안이해서 중간 이후 트릭과 진상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흘러가거든요. 때문에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현실을 잘 믹스한 설정, 특히 "게임"에 대한 설정이 괜찮기에 작품 전체 수준을 놓고 본다면 평작 이상 수준은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별점은 3점 주겠습니다.

2012/03/03

추상오단장 - 요네자와 호노부 / 최고은 : 별점 2.5점

 

추상오단장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데도 책은 무선 제본되어 있었다."

무사시노의 헌책방 스고 서점에서 일하는 요시미츠에게 한 여자 손님이 찾아왔다. 무명작가 카노 코쿠뱌쿠의 리들 스토리 단편이 실린 잡지를 찾고 있던, 본명이 기타자토였던 카노의 딸 기타자토 카나코였다. 그녀는 요시미츠에게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작품 중 남은 네 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데...

"기발한 일상계 추리물"과 장편 "인사이트 밀"로 좋은 인상을 남긴 요네자와 호노부의 연작 단편 형식의 장편 소설입니다. 스고 요시미츠가 단편 소설을 찾는 과정과 각 단편의 결말에 얽힌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가 교차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반에는 단순히 무명 작가의 작품을 찾는 일상계 미스터리처럼 보였지만, 점차 단편들의 수수께끼들이 기타자토와 관련된 과거 사건, 즉 그의 아내(카나코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앤트워프의 총성" 사건과 연결된다는게 밝혀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반전과 추리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리들 스토리의 결말이 실은 두 종류로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도 돋보였고, 모든 단편이 '앤트워프의 총성' 사건 기사의 수수께끼를 밝히고 있다는 것도 그럴듯 했어요.

"기적의 소녀" – 소녀는 자고 있었나? 깨어 있었나?
"환생의 땅" – 죽이고 심장을 찔렀는가? 죽이기 전이었나?
"어두운 터널" – 남자는 아내에게 달려갔는가? 그렇지 않은가?
"소비전래" – 남자는 아내를 죽였나? 그렇지 않나?

또한, 스고의 성장기같은 잔잔한 묘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일상계 미스터리의 분위기가 강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점도 마음에 드네요.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와 설득력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단장, 기묘한 우화 같은 단편들의 완성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탓입니다. 작품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내용이 너무 쉽게 흘러간다는 느낌이랄까요.  리들 스토리, 즉 열린 결말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장르의 취지와 걸맞지도 않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제대로 밝혀놓지도 않는 식이니까요. 

기타자토가 단편들을 리들 스토리로 만든 이유도 명확하지 않으며, 마지막에 밝혀지는 결말—즉, 단편들이 의도적으로 뒤섞여 구성되었다는 진상—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카나코가 진상을 아는 것이 두려웠다면 차라리 죽기 전에 모든 원고를 태워버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스고가 이 모든 단편을 찾아낼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에, 설정 자체가 다소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작품 "눈꽃"의 결말이 앞선 네 작품에 비해 의외성도 없고 다소 시시하게 마무리된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마무리를 감안했을 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습니다.

평도 좋고 인기도 높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아이디어와 결말을 먼저 정한 후, 그에 맞춰 설정과 전개를 조정한 느낌이에요. 조금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구성과 설정이 들어갔다면 더욱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을 텐데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리들 스토리의 대표작으로 클리브랜드 모펫의 "수수께끼 카드"가 언급되는데, 굉장히 궁금해졌습니다.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작품 같은데,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서 읽어보고 싶네요.

2023/10/15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을 즐기자! '기묘한 맛'의 신구 단편 모음집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천. 대부분 국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원조이자 대표작인 "특별 요리"를 추천하지 않았는데, 국내 출간되지 않은 마지막 작품 대신 "특별 요리"를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8/04/12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대답은 필요없어" 이후 정말이지 간만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 책이네요. 사실 "쓸쓸한 사냥꾼"과 착각하고 구입한 책입니다. 단편 미스터리물이라고 해서 착각했어요.
 7가지의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에도시대의 혼조 후카가와를 무대로 한 단편 연작 미스터리 물(?)로, 탐정겸 형사로 오캇피키 모시치가 전편에 등장하고 있고 장소와 시간대가 동일하기에 연작 미스터리라고 칭한 듯 합니다.
7개의 이야기는 '외잎 갈대, 배웅하는 등롱, 두고 가 해자, 잎이 지지 않는 모밀잣밤나무, 축제 음악, 발 씻는 저택, 꺼지지 않는 사방등'입니다. 뻔한 괴담들이긴 하지만 작품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 참 재미있게 꾸며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역자 후기를 보니 원래 전승되는 이야기라고 해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원래 있던 이야기와 연관되도록 이야기를 또 꾸미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참 대단한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모든 작품에서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재미있게 읽었고 워낙 좋은 작품이라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울러 개인적인 베스트는 "두고 가 해자" 였습니다. 모두 다 일정 수준 이상의 단편들이지만 추리적 요소가 가장 많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미스터리보다는 시대물 +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했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범인 체포는 함정수사나 잠복에 의존하고 있고 추리라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미야베 여사의 필력이 느껴지는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나 추리팬에게 추천하기는 조금 난감하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잎 갈대는 초밥집 오우미야의 주인 도베에의 강도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7개의 이야기 중에서 기이한 이야기와 제일 연관이 없다는게 특징입니다. 그래도 작품의 완성도도 높고 내용도 마음에 들었어요. 문제는 사건을 해결이 가장 중요한 단서인 "나무 부스러기"를 통해 이루어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연이 많이 좌우하고 있어서 추리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배웅하는 등롱은 주인 아가씨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한밤중에 에코인으로 매일 다녀와야 하는 하녀 오린의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추리물은 아닙니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로 애틋한 느낌이 잘 살아난 서정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요. 과연 등롱을 들고 오린을 매일 바래다 주는 것은 누구였을까요?

두고 가 해자는 남편이 살해당한 오시츠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전해진다는 기이한 이야기도 제일 괴담에 가까우며 내용도 추리물로 보기에 충분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단서와 복선이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고 전개도 아주 명확하거든요. 물론 아주아주 정교한 내용은 아니고 결국은 함정수사지만, 뭐 에도시대니까요.

잎이 지지 않는 모밀잣밤나무는 잡곡가게 오하라야 근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계기로, 오하라야의 며느리 후보 오소데가 낙엽을 열심히 치우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건 자체가 불명확하며 전혀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 등 좀 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은 있지만, 따뜻한 내용이 좋았던 작품입니다. 오소데가 뭐라고 편지를 썼는지는 궁금한데, 이런 부분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해서 여백의 미를 살린 것도 좋았습니다.

축제 음악은 상상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아가씨 오요시와 모시치의 조카딸 오토시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얼굴베기"라는 악당을 실제 검거하기 위한 노력과 오토시의 질투가 얽히는 추리적인 요소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축제 음악이라는 비유가 아주 적절하게 쓰이고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워낙에 심리묘사가 탁월하기에 더 와 닿기도 했고요.

발 씻는 저택은 재산을 노리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곳곳에서 수수께끼들과 기이한 상황들이 계속 발생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였던 작품입니다. 진상이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평이한 것이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시점과 심리를 통해 진행되는 묘사는 좋았지만, 평범한 수준입니다.

꺼지지 않는 사방등은 홀로 열심히 살아가는 오유라는 아가씨가 부자집인 이치케야의 정신나간 사모님을 위해 딸 역할을 부탁받는 이야기.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는 부부간의 치정극으로 역시나 평범한 수준입니다. 사방등과 부부간의 관계를 빗대어 사방등의 연료, 불꽃을 지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묘사와 디테일은 과연 미야베 미유키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기는 한데, 워낙 이야기가 알맹이없고 별다른 것이 없어서 연작집의 마지막을 마무리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2010/05/26

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ストロボ (2003)) - 심포 유이치 / 권일영 : 별점 3점

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 6점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원제는 "스트로보". 사진작가 기타가와 고지를 주인공으로 한 5편의 단편 연작입니다. 엊그제 리뷰했던 작가의 "추신"이 기대치에 못 미쳐서 다른 작품을 찾아보다가 읽게 된 작품인데, 훨씬 재미있더군요.

기타가와 고지의 나이 50세 - 42세 - 37세 - 31세 - 22세 당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당시 기타가와 고지의 "현재"를 다루고 있는 특이한 구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5편의 연작 모두 별다른 사건이 없는 인간 드라마인데도 불구하고 모두 "수수께끼"나 "반전", 혹은 "진상"이 담겨 있는 이야기라 광의의 의미로는 추리소설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작품별로 사건과 수수께끼를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50세 - <영정>:
  • 기타가와의 상태: 정점을 넘어 매너리즘에 빠진, 관성에 의해 작업을 하는 기계적인 상태
  • 사건: 20년 전 기타가와 고지의 모델이었다는 여성이 갑작스럽게 영정사진을 의뢰한다
  • 수수께끼: 이 여성이 영정사진을 그에게 의뢰한 이유는?
42세 - <암실>:
  • 기타가와의 상태: 막 스튜디오를 오픈한 상업적 최전성기
  • 사건: 기타가와의 과거 불륜 상대였던 미녀 사진작가 하루미가 등산 도중 사고로 죽는다. 그 뒤 매스컴을 통해 등산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그녀라는 의혹이 증폭된다.
  • 수수께끼: 결국 발견된 하루미의 카메라. 그녀가 마지막에 카메라에 담은 사진은 무엇인지? 그리고 필름이 뒤로 감긴 이유는?
37세 - <스트로보>:
  • 기타가와의 상태: 잘 나가는 프리랜서 작가
  • 사건: 기타가와가 불륜을 저지르던 모델과의 밀회 장면을 스트로보를 이용한 몰래 카메라에 찍힌다. 그 뒤 사진이 기타가와에게 배달되는데...
  • 수수께끼: 사진을 찍은 인물은? 그리고 기타가와의 스승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31세 - <한순간>:
  • 기타가와의 상태: 잡지사 계약직 사진작가로 근무하며 사진작가로 발돋움하려고 발버둥 치던 시절
  • 사건: 항상 무시해 오던 선배의 놀라운 사진으로 충격을 받고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 미사코와도 크게 다툰 이후, 기타가와는 자신을 작가로 만들어 주는 발판이 되는 걸작 사진을 찍게 된다.
  • 수수께끼: 이 사진 뒤에 감추어진 진실은?
22세 - <졸업사진>:
  • 기타가와의 상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잦은 데모로 휴교 중이던 학교보다 스튜디오 아르바이트에 신경 쓰던 시절
  • 사건: 대학 동기 구즈하라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고 유품을 기타가와에게 남긴다.
  • 수수께끼: 구즈하라가 사고사 이전에 보였던 알 수 없는 행동들과 그 이유는?

이렇게 각 단편별로 나름의 사건과 수수께끼가 있으며, 그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추리적인 기대를 충족시켜줍니다. 줄거리만 보면 드라마에 불과한데 이렇게 추리 소설로도 기능한다니 참 신기하더군요. 일상계 인간드라마 추리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어설픈 사랑과 감동에 치중하지 않고 그야말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친다는 점도 좋았어요. 사랑도 좋지만 자기 자신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속물 기타하라 코지라는 인물도 아주 현실적이고 말이죠. 인간적인 측면과 더불어 사진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의 디테일은 "내 집으로 와요"의 미키오가 연상되기도 하더라고요. 미키오도 나이가 들면서 결국 이렇게 변했겠지.

그 외에도 연작답게 인물들과 소재들이 작품별로 서로 연결되는 등, 예를 들어 <영정>에서 기타가와가 자신의 초창기 작가 시절 찍었다고 짤막하게 언급하는 사진은 <한순간>에서 기타가와를 작가로 만들어 주는 걸작 사진이자 주요 소재입니다. 한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네요. 제 베스트 에피소드는 <영정>이며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에는 작가의 정통 추리소설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기대가 큽니다!

PS: 원제가 더 마음에 드는데 제목을 왜 바꿨는지 모르겠네요.

2024/05/31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 미야지마 미나 / 민경욱 : 별점 2.5점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 6점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왜 매일 가려는 거야?"
"올여름의 추억 만들기랄까?"


평이 좋길래 읽어본 최신 일본 단편 연작 소설. 2024 제 21회 일본 서점 대상 수상작입니다. 서점 대상은 서점 직원들 투표로 선정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먹힐만한 오락성이 보장된 작품이 많은 편이지요. 이 작품도 확실히 읽는 재미만큼은 전혀 빠지지 않더군요. 재미있게,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루세 아카리의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까지를 다루는 6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청춘 소설로 나루세 아카리가 작품의 핵심입니다. 나루세는 공부와 운동 모두를 잘하는 슈퍼 우먼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엄청난 마이 페이스 소녀입니다. '다,나,까'에 가까운 딱딱한 말투도 독특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특징은, 한 번 세운 목표는 몸과 마음을 다해 전념한다는 겁니다. 천하를 잡을 목표를 세우면 정말로 잡을지도 모를 정도로요. 
이러한 특징은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 백화점!"과 "제제에서 왔습니다"라는 두 편의 단편에서 제대로 선보입니다. "고마웠어! 오쓰 세이부 백화점!"에서는 곧 문을 닫는 도시의 유일한 백화점에 폐점 때까지 매일 방문해서 지역 방송에 매일 나오겠다는 여름 방학 계획, "제제에서 왔습니다"는 만담 경연대회인 M1 그랑프리 예선전 출전이라는 계획과 실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견 황당무계한 계획이 점차 틀을 갖춰가는 과정이 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등과 얽혀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아울러 이 두 편에서 화자 역할로 등장하는 나루세의 유일한 친구 시마자키 미유키가 불러일으키는 재미도 큽니다. 만담의 보케 - 츳코미 관계와 비슷하거든요. 황당한 계획을 세우지만 자신만의 기준으로 이를 강행하는 나루세가 보케, 상식인으로 계획의 황당함을 지적하는 미유키는 츳코미 역할이라 할 수 있는데, 둘의 티키타카가 정말 볼만합니다! 미유키가 결국 어느새 말려들어가서 계획의 일부분이 된다는 전개도 뭔가 만담스러웠고요. 정작 M1 그랑프리 출전은 보케가 미유키, 츳코미를 나루세가 맡는다는 의외성도 좋았어요. 
이렇게 황당함이 강한 캐릭터를 바라보는 평범한 주변 사람을 소재로 한 작품은 "멋지다! 마사루"를 비롯하여 엄청나게 많습니다. 1년 전에 소개해드렸던 "유가미군은 친구가 없다"도 별다를게 없죠. 그러나 이 작품은 소녀 청춘물스러운 분위기로 '개그'보다 추억 만들기같은 '일상'에 주력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황당 캐릭터를 여성 작가가 여성의 마음으로 바라본 따뜻한 묘사로 소녀스럽게 그려내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시가현'이라는 무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뭔가 중요한게 빠져있는 동네이지만 비와호라던가 빅쿠리돈키 등 나름의 매력이 가득하다는게 잘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오래전 시가현 출신 일본 개그맨의 히트곡 '시가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세븐 일레븐도 없어' 같은 가사가 있었는데....
"레츠 고 미시간"은 화자가 미유키가 아니라 나루세에게 호감을 가진 남학생 니시우라로 바뀝니다. 미유키처럼 분석적이 아니라 그냥 순수한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츳코미'보다는 단순 관객으로 보이는데, 이것도 나름의 맛이 있더군요. 나루세의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녀가 깊이 고민하고 니시우라의 마음에 어렵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장면은 아주 상큼했어요. 이 작품이 영상화된다면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세 단편들은 재미가 덜합니다. 화자가 바뀌는 탓이 큽니다. "선이 이어지다"가 특히 별로였어요. 나루세와 정 반대로 어떻게든 평볌함을 연기하려는 동급생 오누키가 화자인데, 그녀의 성격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루세의 기이함만 강조되는 듯한 전개가 영 별로였기 때문입니다. 끝 부분에서 약간의 이해 정도로 수습하고 넘어가기는 하는데, 너무 무난한 결말이라 썩 개운치는 않았어요. 마지막 "도키메키 고슈온도"는 화자가 나루세 본인인데, 타인이 바라본 그녀의 독특함을 잘 느끼기 어려워 아쉬웠고요. 유일한 친구 시마자키 미유키와의 우정과 제제카라의 존속을 그리며 끝맺는 마무리도 지나치게 평범했습니다. 천하를 잡으러 가는 소녀 이야기의 결말로는 너무 부족하잖아요!
"계단에서는 달리지 않아"는 아예 나루세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아저씨들이 주인공이라 붕 뜹니다. 첫 단편과 엮이기는 하는데 다소 작위적이며, 구태여 엮을 이유도 없었고요. 내용도 흔해 빠져서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루세와 시마자키 컴비의 캐미가 폭발하는 앞의 두 편은 별점 5점도 아깝지 않은데, 뒤이은 단편들이 평균을 많이 깎아 먹었습니다. 혹시라도 후속작이 나온다면, 미유키 시점으로 나루세의 황당한 계획을 계속 그려주었으면 합니다.

2008/09/24

도쿄겐지 이야기 - 아기 타다시 : 별점 2점

도쿄겐지 이야기 - 4점
아기타다시 지음/서울문화사

Act 1 나비의 장송 :
어렸을때부터 친구와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등 주위에 죽음을 몰고다니는 겐지 (별명). 그녀는 자신의 메일 친구인 아게하의 남자친구로부터 그녀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Act 2 사신의 키스 :
친구 린과 함께 인기 그룹 "기요틴"의 라이브를 찾아간 겐지는 "기요틴"의 보컬 토우야의 목소리에서 묘한 기지감 (旣知感)을 느끼게 된다. 토우야의 초대로 자리를 함께 하지만 먼저 자리를 뜬 겐지는 토우야를 제외한 기요틴 멤버들에게 연락을 받고 린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Act 3 장미의 낙인 :
메일 친구 유리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만난 겐지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언니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Act 4 냉혈의 론도 :
연쇄 강도 살인사건이 발생하던 와중의 어느날, 겐지는 후배 쥰을 우연히 만나고 그가 자신의 애인을 소개해 주는 자리에 따라가게 된다.

Act 5 만화경의 개미 :
후배 쥰이 주워온 만화경을 보던 겐지는 갑작스럽게 과거의 사실을 알게되고, 과거 친구의 살인사건의 조사를 위해 고향을 찾아간다.


40여일만의 추리 소설 관련 포스팅입니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차에 이글루스 렛츠 리뷰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리뷰에 앞서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이글루스와 서울 문화사에 감사 드립니다.

이 책은 "신의 물방울" 로 국내에서의 지명도를 크게 높인 만화 원작가 아기 타다시(필명)의 소설입니다. 추리 애호가들에게는 김전일의 원작가 "아마기 세이마루 (필명)" 으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죠. 총 5편의 단편이지만 서로 이어지는 일종의 연작 소설집으로 심리 서스펜스와 추리물이 뒤섞여 있습니다.

일단 만화 원작가로서의 작가의 경력을 읽으면서 계속 느낄 수 있었는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쉽고 빠르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이겠죠. 1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독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머리속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음직한 묘사 방법도 괜찮았습니다. 주인공 겐지의 왜곡된 기억에 관련된 이야기는 얼마전 읽었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에 접했던 내용이라 왠지 반갑기도 했고요.

그러나 단점 역시 존재합니다. 인물 설정부터 굉장히 만화적인데 주인공 겐지의 독특한 분위기 감지 능력, 그녀의 "사신" 인 파트너 토우야가 초미소년에 천재 음악가이자 격투의 달인이라는 등의 설정이 그러하고 피해자나 용의자들의 설정 또한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더군요. 그리고 트릭들이 왠지 "그림" 에 더욱 어울릴 것 같은 것들도 많았다는 것과 그다지 참신한 트릭이나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예를 들자면 그나마 트릭이 등장하는 "Act 2 사신의 키스" 는 경찰의 첫 현장 수사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미흡했을 뿐더러 현대의 과학수사로 충분히 범행 증거를 밝혀낼 수 있는 사건으로 생각되거든요. 3번째 단편 "장미의 낙인"과 4번째 단편 "냉혈의 론도" 는 일종의 서술 트릭물로 볼 수 있긴 합니다면 별로 새로운 것도 없고, 서술트릭에 사용하기에는 서술이 부족할 정도로 짤막한 단편이라 설명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라이트 노벨과 추리물의 경계선상에 있어보이는 쉽게 읽히고 나름 자극적인 묘사가 담긴 추리 성향의 캐릭터물로, 본격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심리 스릴러로 보기에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는 알맹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겐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괜찮았는데 관련된 내용만 장편화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만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작 단편 소설로서 자립할 만한 가치를 느끼기 어렵더군요. 고어 요소를 덜어낸 "GOTH"라고 생각할 수 있는 책인데 단점 역시 비슷하네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만큼 평가가 많이 나뉠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에게는 단점 쪽이 더 눈에 들어온 책이었습니다. 비록 좋은 기회를 통해 공짜로 얻어 읽게 된 책이지만 리뷰는 냉정해야죠.... 별점은 2점입니다.

2011/03/05

루피너스 탐정단의 우수 - 츠하라 야스미 / 고주영 : 별점 1.5점

루피너스 탐정단의 우수 - 6점
츠하라 야스미 지음, 고주영 옮김/북홀릭(bookholic)

주의!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이 별로라 읽으셔도 상관 없겠습니다만...

츠하라 야스미의 루피너스 탐정 연작 단편집 2권.

전작이 비교적 긴 호흡의 중편들이라면, 이번에는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캐릭터나 배경 설명이 대폭 삭제되었기 때문일 텐데, 덕분에 읽기도 편하고 한 호흡으로 읽기에도 적당해서 1편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싶습니다.

첫 이야기의 시작이 졸업 후 10년 후 루피너스 탐정단 4인방의 한 명인 쿄노 마야의 장례식이라는 파격적인 구성은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만... 굳이 비교하자면 "명탐정 코난"이 갑자기 소노코의 장례식을 무대로 Season2가 시작되는 느낌이에요. 초반 내용도 졸업 이후 각자의 삶을 다루는 에필로그 느낌이 강했고요. 그래도 확실히 아이들이 성장한 덕분에, 전작에서 느꼈던 건방진 고등학생들의 철없어 보이는 추리 모험극 냄새가 덜하다는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편의 문제점은 여전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별로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어요. 사건의 동기와 증거가 엄청나게 취약하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동기'가 취약하다는건 네 번째 단편 "자비의 화원"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꽤 오래 지속된, 옅어지는 종교색에 대한 반감이 왜 갑자기 폭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이야기의 설득력이 전무하거든요. '마리아상의 위치'에 대한 기묘한 트릭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이야기를 짜 맞춘 느낌이에요. 수녀의 과거사가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대체 모르겠고요.

부실한 '증거'는 세 번째 단편 "첫밀실"이 대표적입니다. 4년 전에 벌어졌던 밀실 살인 사건의 진상을 다루는 작품인데, 이미 모든 관계자가 사망했고, 다른 누군가가 이미 죄를 뒤집어쓰고 잠자코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죄를 밝힌다는건 어려운데, 이를 추리쇼만 펼친 뒤 추궁을 통해 범인의 자백을 이끌어내어 그걸 녹음하고, 마지막에는 '비겁하다' 운운하며 범인의 자수를 강요하는 희한한 결말은 전대미문이라 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등장하는 트릭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다음에 밀실을 그 위에 짜 맞췄다니 작위적인 것도 유분수지... 하여간 트릭도 별로고 내용도 별로니 완전 최악이었습니다.

다행히 첫 번째 단편 "백합나무 그늘"과 두 번째 단편 "개는 환영하지 않아"는 일상계 느낌이 가득해서 읽을 만 했습니다. 이 중"백합나무 그늘"은 팬서비스적인 에필로그 형식의 후일담과 일상계적인 느낌 이외에는 별로 건질 게 없기는 합니다. 어렸을 적 약속을 성인이 될 때까지 유지한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고, 마야의 행동도 납득하기 어렵거든요. 평작 이상도 안 되긴 하지요.

그러나 "개는 환영하지 않아"는 아주 좋았습니다. 사건의 기이한 동기를 비교적 충실하게 앞부분부터 설명해 주고 있는 점과 단서를 공정히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줄 만하거든요. 시지마와 아오우를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사건이 벌어진 이유 역시 나름 설득력 있고 요. 합리적이고 기발하다는 점에서 이 작품 하나만큼은 별점 3점은 충분해 보입니다.

하지만 단 한 작품만으로는 역부족. 앞서 말했듯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추리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덧붙여 번역 문제를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전작에서도 '주인 住人'이라든가 '중정 中庭' 같은 일본식 한자 표현을 여과 없이 쓴 것이 눈에 거슬렸었는데, 이 책에서는 여러 명의 긴 대사가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구분이나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대체 누가 이야기하는지 혼란스럽게 만들어 책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전작도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이렇게 쓰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강하게 남겨준다는 장점은 있군요...

때문에 별점은 1.5점.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구태여 찾아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특히나 책 뒷표지의 "거꾸로 가는 시간이 수놓는, 마법과 같은 노스텔적 연작 탐정 미스터리"라는 현란한 문구에 속지 마시길. 마법과 같은 노스텔적 미스터리 좋아하시네.

2006/12/22

독초콜릿 사건 - 앤소니 버클리 콕스 / 김선옥 (자유추리문고 10) : 별점 4점

독초콜릿사건
앤소니 버클리 콕스 지음, 손정원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유명한 난봉꾼 유스티스 펜퍼더 경은 선물로 도착한 초콜릿을 같은 클럽 회원 벤딕스씨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초콜릿을 먹은 벤딕스씨의 부인이 초콜릿에 들어있던 독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런던 경시청의 수사는 난항에 빠졌고, 경시청 주임경감 모리스비는 친분이 있는 소설가 로저 셀링검에게 그가 회장으로 있는 범죄 연구회에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한 뒤, 그들의 추론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경시청에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범죄 연구회 멤버 6인은 순번을 정해 차례로 자신들의 추리를 발표하는데...

이번에 구입한 자유추리문고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아주 유명한 고전 명작이지요. 너무 늦게 읽은 감은 있네요.

이 작품 전에 발표되었다는 단편 버젼은 이미 읽어봤지만 이 작품은 단편 버젼의 사건과 상황을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6명의 범죄 연구회 회원들이 각자의 추리를 펼친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독자에게 다양하고 화려한 추리의 향연을 느끼게 해 줍니다. 추리 클럽 회원들의 추론 및 결과 하나 하나가 각각 추리소설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은 흡사 단편 연작을 읽는 듯한 느낌도 전해 줍니다.
전에 읽었던 "시행착오"의 치터윅씨의 등장도 반가왔고, 각 회원들이 자기 차례가 될 때마다 이전의 추론을 뒤집고 새로운 결론을 발표하는 전개로 독자가 회원들과 동일한 정보를 입수하여 끝까지 함께 두뇌 게임을 펼치게끔 하는 구성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공정한 승부야말로 정통파 고전 미스테리로서의 최고 미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작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동안의 추리소설의 탐정들의 추리방식, 즉 하나의 단서만 가지고 단 하나의 추론만 내세우며 그것이 바로 결과가 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 소설이면서도 추리 소설의 헛점을 제대로 꼬집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보완하여 다양한 추론이 등장하게 한 아이디어가 이 작품을 당시의 기존 추리 소설보다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지니게 만든 힘이었다 생각되네요.

단 너무 복잡하게 꼬아놓은 나머지 결론이 조금 황당하다기는 합니다. 한두발짝만 더 나아가면 좋았을 것을 대여섯걸음 더 나아간 느낌에요. 그런 면에서는 단편 버젼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었다 생각됩니다. 물론 단편 버젼의 추리도 주요 추론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역시 추리소설사에 이름을 남긴게 당연할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치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좋은 작품은 몇년, 아니 몇십년이 지나도 재미있고 좋은 작품인거죠. 별점은 4점입니다. 고전 정통파 추리물 애호가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8/07/07

탐정 갈릴레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억관 : 별점 2.5점

탐정 갈릴레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재인

"용의자 X의 헌신"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등장하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그래도 단편 연작이고 평도 괜찮아 구입하게 되었네요.

일단 천재 물리학자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걸맞게 과학 수사물로 보일 만큼 과학적, 물리학적 이론에 대한 설명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실제 사건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냐 하면 꼭 그런것은 아니라는 것이 약점입니다. 때문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좀 부족한 약간은 애매한 성격의 작품집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말이죠. 솔직히 소설이라는 쟝르보다는 영상물이나 만화에 더 어울리는 소재라 생각됩니다(Q.E.D 스러운 트릭도 몇개 눈에 띄였고요).  시니컬한 천재 유가와를 다시 보는 재미는 크지만, 이 캐릭터 역시 지나칠 정도로 스테레오 타입이라 지루한 점이 없잖아 있네요. 왓슨 격의 캐릭터 구사나기 역시 뻔하고요.

그래도 이만큼의 다양한 과학적 지식을 조사하여 묘사한 작가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고,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해서 후속작도 기대가 되네요. 이정도로 쉽게, 빠르게, 재미있게 읽힌다면 추리물로서의 쾌감이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쟝르문학 나름의 가치는 충분하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참고로, 개인적인 베스트는 교과서적인 미스테리 과학 수사물 "이탈하다" 였습니다.

1장 타오르다

거리에서 발생한 석유통의 자연발화사건으로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다쳤다. 경시청 수사 1과의 구사나기는 미궁의 자연 발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테이토 대학 동기인 물리학자 유가와를 방문하여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방 바꾸기 트릭이라던가 나름의 서술 트릭은 좋았지만 기본적인 범행 자체의 현실성이 너무 많이 떨어져 보입니다. 주요 소재인 "레이저"라는 장치가 나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기는 했지만 그 위험성을 놓고 볼 때 다른 시한장치 쪽이 더욱 안전하고 현실적이지 않았나 싶네요.

2장 옮겨 붙다

중학생들이 쓰레기로 가득찬 저수지에서 발견한 알루미늄 판을 이용하여 만든 데스마스크를 학교 축제에 제출했는데, 그 데스마스크가 실제 실종된 치과의사의 얼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저수지에서 치과의사의 시체를 찾아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서 유일한 단서인 알루미늄판으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의 생성 과정을 밝혀내기 위해 구사나기는 다시 유가와를 만나는데... 

데스마스크가 주요 소재이긴 하지만 실제 사건을 밝혀내기 위한 가장 큰 단서는 아닙니다. 트릭이 기발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추리적 재미는 떨어지지만 제목에서도 묘사된 데스마스크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좀 더 해당 현상이 추리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3장 썩다 

자린고비 슈퍼마켓 주인이 욕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가슴 근처 조직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괴사한 것 때문에 진상 규명을 위해 구사나기는 다시 유가와를 찾아간다. 

"초음파"를 주요 소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음파를 범행에 이용했다는 트릭인데, 어차피 증거(조직의 괴사)가 너무 뚜렷이 남는 탓에 당쵀 왜 이러한 도구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용의자도 특정이 가능한데 용의자의 알리바이도 애매한 이상, 흉기가 규명되지 않더라도 수사에도 무리가 없어 보이고요. 과학적으로는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추리물로는 빵점 짜리입니다.

4장 폭발하다

쇼난 해안 해수욕장에서 벌어진 폭발 사고로 한 여성이 죽었다. 그 뒤 한 남자가 자기 방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구사나가는 테이토 대학 졸업생이었던 피해자가 테이토 대학 주차장의 사진을 소지하고 있었다는걸 단서로 유가와를 찾아가 탐문하는데... 

두 개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주요 소재인 "나트륨"과 관련된 사건은 폭발 사고고요. 또 다른 살인 사건은 첫 번째 사건과 연관된 부수적인(?) 사건입니다. 

그래도 두 번째 사건을 통해 첫 번째 사건과의 연관성을 밝히고 동기와 범인을 알아내는 전개가 매끄러운 덕분에 단편으로서의 완성도는 높습니다. 과학적 이론이 실제 범행에 실질적으로 응용되는 점도 높이 살 만 하고요. 

그러나 위험 물질에 대한 보관 관리의 문제, 실제 범행 도입 시 행여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너무 축소하여 대충 넘어간 것은 좀 거슬립니다. 그래도 꽤 완성도 높은 단편입니다.

5장 이탈하다

한 살인사건에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보험 영업 사원의 유일한 알리바이는 범행 시간 대에 회사일을 땡땡이치고 인적드문 강변에서 차를 주차시켜 놓은 뒤 낮잠을 잤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는 전무했지만 해당 시간대에 그 강변과 차가 도저히 보일 수 없는 위치의 아파트에서 고열로 아파하던 한 소년이 "유체이탈"로 용의자의 차를 목격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림의 단서 채택 유무를 판단하기 위해 구사나기는 유가와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전 작품을 통틀어 과학적 이론이 범행과 아무 관련없는 유일한 작품으로 억지스러운 트릭보다는 관련된 이상 현상 (여기서는 "유체이탈") 을 과학적으로 밝혀나가는 "미스터리 수사단" 같은 전개를 보여주는데, 꽤 현실성 있고 공정한 단서의 제공으로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빛의 굴절"이라는 꽤 잘 알려진 현상을 통하여 이론적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타당하고 설득력있어 보였고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2012/07/03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 - 히가시가와 도쿠야 / 한성례 : 별점 2점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 - 4점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어컨 상품명과 같은 이름을 가진 탐정부 부부장 키리가미네 료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휘센?)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일상계 단편 연작.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넘친다는 점입니다. "유머 미스터리"를 표방하는 작가의 작품답습니다. 

문제는 유머의 정도가 너무 과하다는거...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좋았고 딱히 흠을 잡고 싶지도 않아요. 재미는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머"가 아닌 "미스터리" 쪽은 문제가 큽니다. 추리적으로 수준 이하의 에피소드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즉흥적이고 장난스러운, 우연에 의지한 트릭이 너무 많아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많은 에피소드가 동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단지 트릭만 소개되는 것도 단점입니다. 단편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범인을 특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버린 셈이니, 이래서야 추리 퀴즈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죠.

그래도 주인공 키리가미네 료가 탐정을 자처하나 실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역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따로 존재하며, 료가 항상 헛다리를 짚는다기보다는 2% 부족한 추리를 펼치고 나머지 부분을 다른 인물들이 보완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는 점은 독특했습니다. "가사사기의 중고매장" 같은 "표면적인 가짜 탐정 - 뒤에 숨어있는 진짜 탐정" 구도와 비슷하지만 또다른 설정이라 재미있었어요. 이런 형식은 추리소설에서는 처음 보았네요.

한마디로 추리보다는 유머, 재미에 대한 비중이 더 큰 작품입니다. 웃기기는 하는 만큼 별점은 2점입니다. 최소한 한 가지의 목적은 달성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추리적인 수준은 작품 선정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더운 여름날 가볍게 읽으시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키리가미네 료의 굴욕"

시리즈 첫 단편으로 도입부답게 코이가쿠보가쿠엔 학원 및 주인공 탐정부 부부장 키리가미네 료 (에어컨) 등 주요 배경과 등장인물이 소개됩니다. 탐정역은 추리부 고문을 맡게 된 생물교사 이시자키가 소화하고요.

독특하게 생긴(E자형) 건물에서 벌어진 도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일상계에 가깝지만 트릭은 괜찮았습니다. 간단한 서술트릭이 인간 소실 트릭과 합쳐져 있는데, 독창성도 느껴지고 내용도 만루에서의 볼넷 상황을 토대로 설명할 수 있는 등 꽤 합리적이었거든요.

그 외에도 히로시마 카프의 팬이기도 한 료의 설정에서 주는 재미 등 유머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키리가미네 료의 역습"

유명 탤런트 스캔들 사진을 찍으려는 파파라치에게 말려든 료가 현장에서 유명 탤런트가 깜쪽같이 사라진 인간 소실 트릭을 밝혀내는 작품. 탐정역은 전편과 같은 이시자키지만, 료의 비중도 꽤 높습니다.

추리적으로 후반부에서 의외의 반전이 거듭되는 등 평균 이상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동기도 확실한 편이고요. 이 정도면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

"키리가미네 료와 보이지 않는 독"

친구가 얹혀사는 저택의 주인 할아버지가 독살당할 뻔한 사건 이야기. 진짜 탐정역은 친구 나오입니다.

할아버지가 마시던 커피에서는 정작 독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트릭인데 트릭도 대충이고 동기도 대충이고 뭐 하나 제대로 설명되는 게 없는 수준 이하의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무식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맛을 즐기기 위해 커피를 빨대로 먹다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추리퀴즈를 무리하게 소설화한 느낌이랄까요. 수선스러운 코믹한 묘사가 없었더라면 별점은 1점도 과했을 졸작입니다.

"키리가미네 료와 X의 비극"

범인의 발자국이 없는 살인미수사건과 우연히 목격된 UFO를 연결시킨 작품. 탐정역은 지구과학을 가르치는 이케가미 후유코 선생.

트릭은 꽤 기발한데 연에 야광물질 좀 발랐다고 멀리 떨어진 데에서 UFO로 착각할 정도가 될지, 줄의 회수도 작품에서처럼 잘 됐을지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네요. 그리고 어차피 피해자가 죽지 않은 시점에서 결국 사건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결정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키리가미네 료의 두 번째 굴욕"

첫 번째 이야기와 쌍을 이루는 마지막 단편으로 사건이 일어난 장소도 E관이고 주요 트릭도 인간 소실 트릭이며 탐정역 역시 이시자키 선생인 등 수미쌍관식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편에 어울리게 제법 복잡한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펼쳐진다는 점에서 꽤 괜찮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부족했던 동기도 합리적이고 자켓에 대한 수수께끼 등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등 추리적으로는 합격점을 줄 만하거든요. 교복 안에 체조복을 입고 있던 이유가 무엇인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이 정도면 별점 3.5점은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07/30

"46번째 밀실"의 트레비스 타란트 시리즈에 대하여

얼마전 읽은 "46번째 밀실"에 언급된 미국 작가 댈리 킹의 트레비스 타란트 시리즈가 너무 궁금해서 찾아본 결과입니다. (사실 원본 텍스트파일이나마 구할 수 없을까 하는 속셈도 있었는데 역시나 없네요)

46번째 밀실이 90년대 초반에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의 일본 내 번역 출간이 2000년이더군요. 번역 출간에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영향도 컸던 거 아닌가 싶네요. 이런 책까지 번역 출간된 일본 추리문학계가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지만 국내에서도 46번째 밀실이 잘 팔려준다면 이 책이 번역될지도 모르니... 희망을 가져봐야겠지요.

어쨌건, 트레비스 타란트는 본격 황금 시대 후기에 활약한 미국작가 C.데일리 킹이 창작한 불가능범죄를 주로 다루는 아마츄어 탐정입니다. 단편집이 1935년에 발표되었더군요. 단편들은 뉴욕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타란트에게 화자인 친구 제리가 방문하여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형태로 되어있다고 하며, 그 외의 제리의 아내 발레리와 여동생 메어리가 중요 캐릭터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각 단편 사이의 연관성이 강해서 연작단편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네요. 특히 타란트의 집사로 일본인 "가토" 가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나름 환영받는 요인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린 호네츠인가?

아무튼 전 12편의 단편에서 활약하는 타란트의 유일한 출판물인 단편집 "타란트 씨의 사건부"에는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4번째 작품이 46번째 밀실에서 언급된 "트멘트 4세호 에피소드" 입니다. 원제는 The Episode of the "Torment IV" 로 일본어 제목은 "제 4의 고문" 이네요. 일본어 제목보다는 46번째 밀실의 제목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제목 그대로 "토멘트 4세호"라는 배에서 일어난 불가능범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거든요. 일본어 제목만 보면 고문 중심의 호러영화 "호스텔"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약간 호러적인 취향도 가미된 단편이라고 하네요.

작품의 줄거리는,
타란트가 배 안에서 사람이 돌연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가까운 호수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이야기해줍니다. 그 사건은 호수에서 가족 3명이 타고 있던 배 "토멘트 4세호"가 좌초하고 즉시 구조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배 안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건이죠. 이후 양친의 시체가 호수에서 발견되고, 그들이 배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뛰어내린 이유는 전혀 없는 상태...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직후, 타란트와 친구들의 눈 앞에서 이 배를 인수한 부자가 똑같은 방법으로 배에서 호수로 뛰어들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라는 이야기인데 정말 궁금하고 읽고 싶어집니다. 줄거리만 봐도 흥미진진해요. 과연 어떤 트릭이었을까요? 배 밑에서 유령 소리를 내는 장치같은 걸 사용한 시한장치 + 기계장치 트릭? 아니면 독가스 같은 것을 연출하는 장치 트릭? 아... 정말이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빨리 번역되기만을 바래야겠어요.

2010/05/17

세계 챔피언 - 로얄드 달 / 정해영 외 : 별점은 2.5점

세계 챔피언 - 6점
로알드 달 지음, 정해영 외 옮김/강

"기묘한 맛" 류 단편의 거장인 로얄드 달 단편선입니다. 일전에 읽었던 "맛"에 이어 나온 시리즈죠. 다양한 쟝르의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클로드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5편의 연작 시리즈는 크게는 사기-범죄 몽상물로 규정할 수 있을테고 "탄생과 재앙"은 약간의 반전이 있는 드라마, "조지 포지"는 여성 공포증을 테마로 한 환상 단편, "로열 젤리"는 이형(異形) 동물로의 변신에 대한 환상 단편, "달리는 폭슬리"는 잔잔한 일상계 반전 드라마, "소리잡는 기계", "윌리엄과 메리"는 SF 단편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클로드의 개" 시리즈가 좋았습니다. 뀡 밀렵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유머러스한 결말이 인상적인 "세계 챔피언", 경주용 개에 대한 잘 짜여진 사기극을 다룬 "피지 씨", 갑자기 늘어난 쥐 떼를 잡으러 나타난 쥐잡이 사내가 손,발 등을 전혀 쓰지 않고 쥐를 잡는 것에 대한 내기를 다룬 "쥐잡이 사내", 건초더미를 치우는 단순한 일에서 서서히 긴장이 고조되는 맛이 일품인 "러민스"(단, 아무런 동기와 이유가 등장하지 않아서 범죄물로의 밀도는 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클로드가 여자친구 클라리스의 아버지 호디 씨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신사업 아이템인 구더기 공장에 대한 장황한 계획을 떠벌인다는 "호디 씨", 이렇게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인데 기발한 발상과 유머는 "세계 챔피언"과 "호디 씨", 서늘하고 기묘한 맛의 분위기는 "쥐잡이 사내"와 "러민스"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야말로 로열드 달의 매력이 모두 담겨있는 시리즈였습니다. ("피지 씨"는 사기 계획의 디테일과 진행 과정은 좋았지만 돈을 지급해야 하는 꾼들이 담합해서 돈을 안 준다는 결말이 황당해서 뺐습니다.)
그 외의 작품으로는 학창 시절의 괴로웠던 추억과 현재의 출근길이 결합하는 전개와 묘사가 인상적이었던, 그야말로 일상계 심리 썰렁 반전물인 "달리는 폭슬리"를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은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탄생과 재앙"은 뻔하고 지루했고, "조지 포지"는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로열 젤리"는 작가와는 잘 맞지 않는 분위기인데다가 묘사나 상상력이 징그러워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SF라 할 수 있는 "소리잡는 기계", "윌리엄과 메리"는 좋은 작품이고, 뛰어난 상상력이 돋보이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평점은 평범한 수준인 2.5점입니다. 작품마다 편차가 심한 것이 아쉽습니다. 아직 접해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맛" 쪽을 먼저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0/09/12

괴담의 테이프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괴담의 테이프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미쓰다 신조)는 편집자 도키토 미나미로부터 녹음된 괴이담을 기초로 한 단편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녹음한 카세트나 MD는 많아도 대부분 써먹기 힘든 탓에 거절했지만, 도키토 미나미는 자기가 듣고 소재를 찾아보겠다며 카세트와 MD를 빌려갔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작품이 "빈 집을 지키던 밤"이었다. 

도키토는 후속 작품도 정기적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연작 단편 구성을 취하기 위해 실제 괴담을 겪은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고 쓴 글이라는 머릿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도키토는 녹취를 시작한 이후, 기묘한 걸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마시던 홍차 속 기묘한 반원형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나날이 바뀌어 결국 작은 사람의 모습이 되었고, 도키토는 이후 홍차 마시기를 그만두었다. 이외에도 샤워할 때 빗소리가 들리는 등의 괴이 현상이 그녀 옆에서 계속 일어나자 나는 그녀에게 녹취를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

작품 연재를 마무리한 나는, 도토키 미나미로 부터 회수한 MD와 카세트 중에서 예전에 듣다가 무서워진 나머지 꽁꽁 봉해놓고 처분했던 기류 마사히코의 카세트를 다시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카세트를 듣다가 그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괴기 현상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실제 사연들을 소설화 했다는 설정의 생활 괴담 단편들이 미쓰다 신조가 괴담 단편을 창작하는 과정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가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또 저자의 '작가 시리즈'와 유사하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처럼 쓰여진 덕분에 실제감, 현실감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작품은 논픽션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야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도 빼어나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쓰다 신조 장편이 두께 때문에 손대기 어려우셨던 분들이라면, 이 책으로 발을 들여놓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 

나 (미쓰다 신조)는 자살 명소에 대한 글을 의뢰하기 위해 프리랜서 작가 기류 요시히코를 만났다. "호러 재피니스크 총서" 기획 때문이었다. 기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테이프를 여러개 가지고 있다며, 그 테이프 녹취를 출간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3개월 뒤, 기류는 3개의 테이프를 듣고 기록한 샘플 원고를 보내 오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생함입니다. 특히 진짜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듯한, 생생한 테이프 녹취가 아주 일품이에요. 그 처절한 죽음의 순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섬찟합니다. 생생함은 미쓰다 신조 1인칭으로 쓰여지고, 미쓰다 신조의 과거 펀집자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낸 덕분이기도 합니다. "붉은 눈"에 수록되었던 1인칭 괴담과 같은 계열이지요.

또 3개의 괴담 테이프 녹취 중 앞의 2개는 호텔에서 목을 매거나, 자동차로 절벽을 향하는 등 일반적인 자살에 대한 단순한 녹취이지만, 마지막 녹취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류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고, 미쓰다 신조가 기류의 테이프를 잠시 틀어보고는 바로 봉인해 버리는 결말이지요.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은 듯 하지만 기류는 죽었고, 기류가 녹음한 테이프는 누군가 회수해서 미쓰다 신조에게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받은 사람이 듣기를 원했을테고요. 즉, "링"과 같은 일종의 저주, 죽음의 연쇄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로서의 얼개는 갖춰진 셈이지요. (*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이야기에서 어느정도는 비슷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입니다.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가 1인칭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생생함도 대단했고요. 무서워야 한다는 괴담의 조건도 아주 잘 충족하고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빈집을 지키던 밤"

마이코는 대학 문예부 선배 오다기리로부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젊은 부부가 백모와 함께 살고 있는 시골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부부가 집을 비운 동안 백모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아르바이트 내용이 소개되는 시작부터 흥미를 잡아 끕니다. 여대생이 선뜻 수락하기에는 너무 수상한 아르바이트잖아요? 역에서 저택까지 거리도 멀고, 인기척도 없는 곳에 홀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다니, 이래서야 바로 납치되어 이상한 비디오 주인공이 되는 전개도 어색하지 않죠. 당연히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마이코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겨우 탈출한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뻔한 설정과 전개임에도 여러가지 복선과 디테일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택에 대한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아치 장식 등을 통해 위화감과 뒤틀림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하여튼, 미쓰다 신조의 무서운 집 묘사는 정말이지 최고에요.
또 저택에서 느낀 위화감과 뒤틀림을 젊은 부부에게서도 느끼게 된다는 연계도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가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백모님을 숭배하고 있으며, 백모님은 낯선 사람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집을 지킬 때 백모님이 계신 3층에는 올라가지 말아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백모님은 이미 죽었으며 남편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아, 정말 섬찟합니다.

단순한 체험 괴담이 아니라 한 편의 완성된 소설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3층에 있던건 백모님이 아니라 젊은 남편 미쓰노부였으며, 그가 이전 아르바이트 생들을 살해했다는 명확한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말에 앞서 마이코는 팔 다리가 길었고, 저택 근처에서 양팔만 잘라 가슴께에 평행하게 올려놓은 기묘한 토막 살인 사체가 발견되었었고, 부부가 저택 안을 오갈 때에 복도 한 가운데로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등의 복선과 단서를 통해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앞서 위화감을 느꼈던 아치는 '도리이'이며, 도리이 아래 길은 신이 지나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백모의 방과 통해 있다, 사체의 토막은 도리이를 나타내고, 그래서 긴 다리를 지닌 피해자가 필요했다... 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니까요.

젊은 부부의 광기, 백모님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미쓰노부가 살인마라는 반전은 뻔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호러, 공포 소설로 나무랄데 없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우연히 모인 네 사람"

오쿠아먀 가쓰야는 가쿠 마사노부의 하이킹 계획에 동참했는데 정작 가쿠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쿠야마가 리더가 되어 하이킹을 이끌어 달라는 휴대전화의 부재 중 메시지 탓에 가쓰야는 모르는 세 사람과 하이킹을 떠나는데...

네가히산이 실존하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를 보는 듯한 상세한 묘사도 좋고, 가쿠씨가 오지 못한 이유로 불안이 쌓여가는 전개도 멋집니다. 가쿠씨가 보낸 메시지 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서서히 하나씩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하이킹을 일렬로 가야 하는 상황도 불안하고요. 그러다가 숨겨진 길로 발을 들이는건 그야말로 화룡정점입니다. 알 수 없이 무서운 공간에 대한 묘사도 좋지만, 길에 남아있는 발자국 오른쪽보다 왼 쪽이 더 먼저 찍힌것으로 보인다는 묘사가 아주 기가 막혔어요. 방 구석에 있는 사람을 차례로 터치하는 게임처럼, 가쿠가 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특급 열차에 네 명이 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의심을 품는 장면도 오싹합니다. 가쿠가 오지 못한다는건 미리 알지 못했다면, 표가 모자랐을테니까요!

하지만 괴이한 존재였던 이마이 쇼조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쿠는 어떻게 되었는지, 산에서 주은 계란돌은 무엇인지 등 수수께끼만 남긴채 이야기는 마무리되기에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생생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었습니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

'나'에게 중학교 동창 K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는 기묘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던 요양병동에서는 밤마다 희미한 비명 소리나 남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 이어 입원한 노인 로쿠바 히로는 K의 뒤에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거의 정신을 잃은 노인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이야기를 모아 놓았더니 무서운 이야기였더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습니다. 로쿠바 히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는 그야말로 엄청나고요.

로쿠바 히로 노인의 이야기를 설명드리자면,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다른 가족들이 다치거나 상황이 어려워 부의금을 가지고 상가에 혼자 방문하게 된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소년은 출발 전 할머니와 함께 한 곳쿠리님에서 '시체와 함께 자지 마라'는 계시를 받죠. 그러나 기차에서 소년은 이상한 노인을 만나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서 잠을 깨고,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의 부고를 받는다... 는 루프물입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운 요소는 없어요. '나'를 통해서 노인의 괴이한 행동은 노인이 젊은 아이의 몸을 빼앗는 과정이라 설명되는데 이 역시도 뻔한 설정입니다. 또 이야기만 놓고 보면 K에게 시카바네 히로(로쿠바 히로)가 뒤집어 씌여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쿠바 히로가 한 말 중 '휴대'와 '뉴루우스'라는 말 뜻을 몰라 궁금해 하는 장면이 있어서 충격적인 진상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도 전혀 없어서 실망스러웠고요.

흥미로운 설정이었고, 전개도 대단했지만 결과물은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아쉽습니다.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내었더라면 분명 걸작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

잡지의 편집자인 '나'는 점성술사 취재를 하다가, 그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냐는 질문에 절대로 답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답을 알려준 적이 있다는 점성술사에게 '나'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단 사토루와 '기우메' 이야기로 답해 주었다.

기우메는 사토루 자취방에서 학교 통학로에서 목격된,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과 레인코트, 장화, 우천용 모자를 노란색으로 전부 갖춰입은 여자였다. 사토루는 어느 날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선배의 조언으로 기우메를 무시했다. 그리고 여름 방학, 점성술사는 사토루와 헤어져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며 편지로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사토루의 마지막 편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기우메가 수로에 휩쓸려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사토루의 자취방을 찾아간 점성술사는 빈 방에서 쓰다만 편지를 읽었다. 사토루가 기우메의 시체를 발견하기까지 했지만, 계속 기우메를 통학로에서 목격했는데 그녀가 볼 때마다 점점 자취방으로 다가왔으며 마지막에는 폭우와 함께 문을 두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토루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초반에 비중있게 설명되는 '나'가 과거 고교 시절 겪었던 기묘한 유령 체험은 본 편인 기우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점성술사의 기우메 이야기도 그녀가 왜 죽을 날을 손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지와 크게 관련이 없고요. 괜히 이야기만 두서없이 전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기우메 이야기는 충분히 무섭기는 했습니다. 괴이한 무언가를 눈치챈 후 '그것'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온다는걸 알게되는 이야기는 몇 편 읽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말이지요.

실화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

도쿄에서 직장에 다니며 혼자 사는 유나는 어느날 집을 나서다가 문 앞에 꽃이 꽂혀 있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져 있는걸 발견했다. 그 뒤 유나는 출근길에서 검은 이상한 형체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형체는 출근길을 거슬러 점점 유나의 집으로 다가왔고, 유나는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검은 형체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었던게 아닌가 싶어 공포에 떨었다.

드디어 어느 월요일 아침, 유나의 집 앞에 검은 형체가 도착해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도움을 요청한 친구 히나타가 도착하자 이상한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후 히나타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 기우메와 비슷하게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대한 괴담입니다. 마지막 유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 히나타에게 무언가 씌워진다는 결말은 상당히 오싹합니다. 이전 작품과 유사하기는 한데, 정확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애매한 공포라서 실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차별화 요소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왜 유나의 집 앞에 그것이 다가오는지, 대체 그건 무엇인지 등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기는 합니다. 유나의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건널목 근처 사고 현장에 놓여진 공양물이었고,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이를 가져다 유나의 집 앞에 놓았기 때문에 원령이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식의 추리가 살짝 등장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작은 유리병과 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유나의 집 앞에 놓여 있는지도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기승전결은 있고, 오싹한 맛도 괜찮았습니다.

2022/12/10

도대체 무엇이 동기? 와이더닛을 만끽할 수 있는 걸작 미스터리들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3편인데, 다 좋은 작품들입니다. '와이더닛'에 촛점이 맞춰졌다기 보다는, 서정적이면서도 깊이있는 문학적인 묘사에 촛점이 맞춰진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요.


'와이더닛', 즉 'Why done it'은 미스터리의 세계에서는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게 핵심인 미스터리 작품을 의미합니다. 불가능 범죄 상황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미스터리 작품의 장점을 모아 놓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와이더닛 걸작을 소개해 드립니다.

"토오미 사건, 사토 마코토는 왜 목을 절단했을까?" 요미사카 유지 : 국내 미출간
80개가 넘는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 킬러 사토 마코토의 이야기를 작가 요미사카 유지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미스터리. 다른 범행은 모두 완벽하게 저질렀는데 토우미 사건에서만 예외적으로 목을 자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플한 와이더닛이면서도 저자 특유의 비틀림이 더해진 작품.

"동기" 요코야마 히데오
"64" 등 장편 소설이 영화화되고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단편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이 단편집에는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각자만의 '왜?"를 능숙한 인물과 심리 묘사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세계관이 가득 담긴 주옥과 같은 4편의 단편들을 즐겨 보시길.

"칼과 우산" 이부키 아몬 : 국내 미출간
에도 막부 말기에서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격동의 교토를 무대로, 실존인물이었던 에토 신페이와 가공의 무사를 탐정역으로 하여 전개하는 연작 역사 미스터리. 사형 집행 당일 왜 죄수가 살해되었는지를 쫓는 "감옥사의 살인", 도서 추리물이자 우수한 와이더닛물인 "벛꽃" 등의 걸작이 수록되어 있다. 시대 배경을 살린 두 주인공의 관계 변화에도 주목하면 좋을 단편집.

"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우
주인공이 방문한 이국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과 수수께끼를 밝혀나가는 5편의 단편이 이어지는 연작집. 걸작인 "사막을 달리는 뱃길"을 시작으로, 이국의 풍경과 문화를 서정적이면서도 환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수록작 모두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매력적인 수수께끼로 가득 찬 좋은 와이더닛물이기도 하다.

"회귀천 정사" 렌조 미키히코
다이쇼에서 쇼와 시대를 무대로, '꽃'을 모티브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작 모두 선명한 와이더닛물로 렌죠 미키히코의 요염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에 대한 평가도 높은, 미스터리의 틀에만 담기에는 아까운 불후의 명작.

2004/09/07

빅포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1.5점

빅포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이름 그대로 4명의 인물 - 조직의 보스이자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중국인 리창옌, 자금을 대는 거부 미국인 에이브 라일랜드, 천재 여류 과학자이면서도 사악한 무기를 개발하려고 하는 프랑스인 올리비에 부인, 조직의 킬러인 전직 연극배우 - 을 중심으로 구성된 빅 포 (Big Four)라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린 단편집.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정복(?) 계획에 포와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리라 예상하여 포와로를 제거하려 하고 포와로는 헤이스팅스와 함께 힘을 모아 대결한다는 조금은 단순한 설정인데 각 단편들이 하나의 큰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연작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행방불명 되었었던 영국 정보부원 메이얼링의 살해사건입니다. 메이얼링이 포와로에게 빅포의 위험을 알리다가 포와로 방 침대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며 살해당한 증거는 시계의 문자판으로 만든 "4"라는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정작 트릭은 범인이 "변장의 명수"였다.. 라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라 뭐라 이야기할게 없네요.

두번째 사건은 훼일리라는 빅포의 존재를 알고있는 노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트릭이 등장합니다. 범인이 진작부터 살해를 목적으로 하인을 포섭하는 부분은 좀 억지스럽지만 영국의 여름 날씨와 푸줏간 주인을 연결하는 부분이 아주 괜찮았어요.

세번째 사건은 젊은 유망한 과학자 할리데이의 실종사건입니다. 빅포의 구성원 중 한명인 과학자 올리비에 부인의 정체가 폭로되는 부분으로 빅포의 하수인으로 포와로의 옛사랑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등장하는 등 연작의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중요한 작품이나 추리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웠습니다. 스파이 소설이나 모험 소설로 보는게 더 타당한 작품이었어요.

네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나머지 멤버가 미국인 거부 에이브 라일랜드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헤이스팅스가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로 세번째 사건처럼 전체에 있어서는 중요한 내용이긴 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한마디로 별로라는 이야기죠...

다섯번째 사건은 부유한 여행가 페인터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빅포가 페인터의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페인터가 죽기 전 남긴 "노란 자스민"이라는 글귀를 토대로 범인을 알아낸다는, 어떻게보면 전형적인 포와로식 단편입니다. 이 책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 추리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내용이라 그나마 마음에 든 편입니다.

여섯번째 사건은 러시아 체스 고수와 미국인 체스 고수의 시합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입니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단편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에서 거의 보기 드문 과학적, 기계적 트릭이 등장하고 있으며 살인의 원인과 동기도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일곱번째 사건은 헤이스팅스의 부인을 납치,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포와로를 배신하게 하려 하는 빅포의 음모가 그려집니다. 그냥 뻔한 모험소설로 포와로의 "액션"이 등장하긴 하지만 건질건 거의 없는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크리스티 여사 작품 중에서도 최악으로는 1, 2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어요.

여덟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킬러인 연극배우의 정체를 밝히려는 포와로의 치밀한 노력이 빛나는 편입니다. 외모와 행동에서 유출한 데이터만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모험소설적인 내용과 추리적인 부분과의 모범적인 공존 형태를 보여주고는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역시 마지막 부분이 많이 허무한 등 아쉬운 점이 더 많았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포와로의 죽음과 포와로의 쌍동이 형 아킬의 등장, 빅포의 회의장소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사투를 담고 있습니다. 쌍동이 형에 관한 반전은 괜찮았지만 빅포의 너무나 허무한 최후나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탈출이 "운이 좋아서" (물론 포와로의 준비는 있었지만) 가능했다는 등, 내용상의 헛점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결론내리자면 홈즈 시리즈의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 모험물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리고 싶었던 크리스티 여사의 의도는 확실히 전해지고요. 그러나.... 포와로라는 캐릭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라 생각되며 빅포라는 악의 조직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그려져서 설득력도 떨어지고 왠지 아동물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거의 "검은별" 수준입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나 트릭이 간간히 등장하고 여섯번째 사건 같은 경우는 상당한 수준으로 충분한 재미를 전해주긴 합니다만 괜찮은 아이디어들을 빅포라는 조직과 무리하게 연관 시키면서 무너져 버리는 부분이 많아 안타깝네요.
"부부탐정" 처럼 악당 조직은 중간 중간 별개의 이야기로 등장하고 아예 다른 내용으로 꾸며져 한권의 단편집으로 처리하였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여간.... 제가 읽은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