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저택 -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
특별한 존재들이 머무르는 고향, 시월의 저택을 중심으로 그곳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단편들을 모아놓은 연작 단편집.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고, 고양이 아누바를 비롯한 주민들이 모이고, 버려진 인간 아이 티모시가 가족이 되고, 전 세계 친척들이 저택에 모이는 귀향 파티가 열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성난 군중들에 의해 저택이 불타버리고, 네프 할아버지는 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총 23장에 이르는 이야기들로 이어집니다.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이름에서 떠올릴 법 한, 반전 매력 넘치는 호러 혹은 비슷한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약간 호러풍일 뿐 기본적으로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들이며,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랑'과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이 나쁘다는건 아닙니다. 그러나 초창기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아담스 패밀리>>와 같은 유사 컨텐츠가 넘쳐나는 지금 상황에서는 새롭다는 느낌을 전해주기는 힘들죠.
또 이렇게 긴 흐름의 이야기는 연작으로 묶어 개작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것으로, 원래 존재했던 단편은 발표 시간 순서대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여행하는 이>>< <<귀향 파티>>, <<에이나르 아저씨>>, <<바람 속의 마녀>>, <<시월의 서쪽>>, <<오리엔트 북행 특급>>
문제는 그래서인지, 좀 억지스럽게 엮인 작품들도 눈에 뜨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여행하는 이>>입니다. 후일 추가된 단편인 <<삶을 서두르라>>도 딱히 연작 이야기에 포함될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요. 이렇게 후대에 하나의 시리즈로 모아 엮은게 과연 좋은 방법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아름다운 문장들, 묘사들이 넘쳐나며 매력적인 설정도 많지만 여러모로 생각과는 다르기에 감점합니다. 작가의 팬이시라거나,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지만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주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바람 속의 마녀>>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조종할 수 있는, 저택 다락방에 사는 세시가 사랑을 하고 싶다며 앤이라는 소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 뒤 실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이야기. 한 여름 밤 변덕스러운 첫 사랑을 호러 터치로 그려낸 감성 호러 틴에이저 로맨스 소설.
마지막 장면, 찌르레기의 마음 속에 들어간 세시가 자신의 주소를 적은 종이를 꼭 쥔 톰을 보고 사라져 버리는 결말이 애틋하네요. 레이 브래드버리가 이런 작품도 쓸 수 있다는게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귀향 파티>>
핼러윈 이브에 시월에 저택에 온갖 이능력자 친척들이 귀향하는 파티가 열린다. 시월의 저택에 버려졌던 인간 아이 티모시는 흥미 반, 두려움 반으로 이 파티에 참석하여 파티를 마지막까지 지켜본다.
얼마전 개봉했었던 <<아담스 패밀리>> 애니메이션 영화와 아주 흡사한 분위기와 내용의 작품. 모두 친척인 이능력자들이 특정 저택에 모여 파티를 연다는 기본 설정이 동일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화자이자 기록자 역할을 수행하는 '인간' 가족이 있다는 점만 차이점이죠.
그러나 이능력자들의 기묘함과 능력에 대한 화려한 묘사 외에는 특별히 대단한 내용은 없습니다. 티모시 시각에서 이야기가 많이 전개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러나 작 중 티모시는 유한한 삶과 무한한 삶을 비교하며 자신이 다르다는걸 자각한다는 정도에 그칠 뿐입니다. 지금 보다는 성장기 느낌을 좀 더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월의 서쪽>>
귀향 파티 후 저택에 머무르던 피터, 윌리엄, 필립, 잭은 세시의 도움으로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 상태로 놀다가 육신이 머물던 외양간이 불타버려 머물 곳을 잃고 만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네 명은 4천살 먹은 나일강 고조할아버지 머리 속에 머물게 된다.
세시의 능력이 잘 드러난 단편. 성인용 코믹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라는게 독특했습니다. 4명의 사촌들이 모두 여자를 밝힌다던가, 할아버지의 과거 속에 수많은 여성이 있었다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말이죠. 세시가 사실은 할머니였으며, 할아버지가 세시를 노리고 다락방을 가끔 찾아간다는 결말도 그러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리엔트 북행 특급>>
유령을 믿는 노처녀 간호사 미네르바 할러데이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우연히 유령 '창백한 승객'을 만난다. 그리고 일 평생 박제처럼 지냈던 자신의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영국에 있는 시월의 저택으로 향하는 것을 발벗고 돕게 된다...
유령인 '창백한 승객'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는건, 사람들이 유령을 믿지 않게 되어서라는 설정이 인상적인 작품. 미네르바 할러데이가 유령을 살려내기(?) 위해 온갖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들 - <<햄릿>>, <<크리스마스 캐럴>>, <<폭풍의 언덕>>, <<나사의 회전>>, <<레베카>>, <<원숭이 손>> - 을 읽어주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이며, 유령과 인간, 즉 이종족간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물이라는 점도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미네르바마저 유령이 된다는 결말은 조금 뻔해서 아쉽더군요. 1988년 발표된 비교적 후기작인데, 전성기만큼의 반전 매력은 전해주지 못했어요.
<<에이나르 아저씨>>
시월의 저택의 친척인 날개달린 이종족 에이나르 아저씨는 사고로 밤에 비행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대낮에 고향 유럽으로 날아가다가는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몰라 귀향을 포기한 그는, 사고 후 그를 도와주었던 젊은 브루닐라 웩슬리와 결혼하여 마을에 정착하는데...
시월의 저택 다른 주민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에이나르 아저씨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스핀오프 단편. 사고 후 결혼하여 정착하는 과정과 대낮에도 비행할 수 있도록 '연'으로 변장한다는 결말까지 유쾌했던 소품입니다.
<<삶을 서두르라>>
마드모아젤 안젤리나 마르게리타는 뒤집힌 삶을 사는 존재. 그녀는 무덤에서 환생하여 점점 어려지다가 누군가의 뱃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시월의 저택 버젼. 벤지만 버튼과 데이지처럼 안젤라니와 티모시의 관계가 동일하고, 전해주는 주제도 유사합니다. 무덤에서 삶을 끝내지 않고 어린 신부의 석류같은 미궁 속에서 잠들다니 운이 좋다고 말하는 안젤리나의 초긍정 대사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이죠. 티모시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시월의 저택 연작에 포함될 이야기로 생각되지도 않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여행하는 이>>
시월의 저택 주민들을 해하려 했던 '부정한 존'은 마을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고통받다가, 경찰서를 찾아가 저택 주민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는데...
시월의 저택 주민들보다는 잔혹한 '부정한 존'을 해치우는 이야기로, 부정한 존을 고통스럽게 만든 종소리는 알고보니 세시가 만들었다는 내용. 다른 단편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능력을 활용한 비교적 정통적인 호러물이거든요.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표된 (1945년) 작품인데, 발표 당시 유행했던 단편 호러물들과도 여러모로 유사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개작하여 연작 단편집으로 묶이기 이전에는 시리즈에 속한 작품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자만 등장한다면 써 먹을 수 있는 반전이니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