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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벨벳의 악마 - 존 딕슨 카 / 유소영 : 별점 3점

벨벳의 악마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고려원북스

1925년, 58세의 역사학 교수 니콜라스 펜튼은 악마와 계약해서 240년 전, 헨리 2세 통치하 영국의 니콜라스 펜튼 경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는 아내 리디아의 독살을 막고 자신과 관련된 정치적 암투를 해결하며, 헨리 2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화요추리클럽'의 운영자로 유명한 장경현님이 감수하셔서 이른바 "장경현의 MOM(Magnum Opus Mystery)"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고려원북스의 걸작 미스터리 시리즈 두번째 작품 - 첫번째 작품은 역시 딕슨 카의 "구부러진 경첩" 이었죠 - 입니다.
유명 추리애호가의 감수답게 국내 미출간된 거장의 작품을 선정하여 출간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 역시 딕슨 카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어 저같이 영어가 딸리는 추리 애호가들의 맘을 아프게 했었는데, 이번 출간으로 오랜 갈증을 해소한 것 같아요.

그런데 작품은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 물이라 놀랐습니다. 저는 그동안 역사 추리소설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작품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과거로 타임 슬립한다는 상상 밖의 이야기더라고요.

그런데 이러한 전개는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유치하다는 느낌까지 받았으니까요. 유사한 시공 이동 판타지를 너무 많이 접한 탓이지요. 하여튼, 작품 발표 당시에 발휘되었을 새롭고 신선한 맛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아울러 시공 이동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타임 패러독스의 딜레마" - 역사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꿀 경우 현재가 영향을 받아 결국 과거로 이동한 자신마저 영향을 받게 된다는 - 역시 편법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기 때문에 실망스럽습니다. 

내용도 부실하고 황당한 부분 역시 많습니다. 원래는 58세인 주인공의 행동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초딩스러운 행태를 많이 보이는 점이라던가 팜므파탈로 설정한, 그야말로 악마의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여인의 존재와 정체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또 역사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정도로 추리와 역사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역사 추리물이라면 실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후대의 추리적 고찰이 반영되어야 할텐데, 이 작품은 단지 2세기 전을 무대로 한 독살 사건일 뿐이며, 사실 시대적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트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단점만 가득한 작품은 아닙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명성에 값하는 재미도 충분한 덕분입니다. 일단 헨리 2세 치하의, 이른바 토리당 - 휘그당의 대립을 소재로 쓴 역사 이야기 부분은 제대로 된 활극의 재미가 넘칩니다. 주인공 니콜라스 펜튼이 "벨벳의 악마"라 불릴 정도의 영국 제일의 검사이자 과격한 인물이라는 것 덕분에 "검의 대가" 나 "스카라무슈" 만큼이나 검술 액션이 가득하니까요. 검술의 기술, 칼의 고증 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딕슨 카의 디테일도 제대로라서 볼거리가 많습니다.
다만 이러한 디테일은 실제 2세기전의 영어로 대사를 표현하는 등 이 작품에서 신경쓴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한글로 번역되면서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긴 하네요.

추리적인 부분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비소 독살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제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의표를 찌르는, 예상밖의 트릭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소개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악마가 영혼을 거래할 때 맺는 계약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 가 잘 드러나면서도, 이 계약 내용을 복선으로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서 나름 본격물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점입니다. 딕슨 카는 역시나 딕슨 카 였달까요. 역사 추리물은 아니지만, 시공 이동 판타지 물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는 대가의 노련함이 엿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부러진 경첩" 보다는 확실히 의표를 찌르는 맛이 넘치는 의외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통 추리 애호가라면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는데 재미와 아이디어, 독창성 측면에서 충분히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9/03/18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 제임스 굿윈 / 한은경 : 별점 3점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6점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비채

술탄 마흐무트 2세 치하의 19세기 중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광이 서서히 저물던 시기의 이스탄불에서 제국의 근대적 군대 신위병 장교 4명이 실종되었다. 군대 총사령관 세라스케르는 환관 야심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야심은 이외에도 궁정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수사도 맡는 등, 쉴틈없는 나날을 보냈다. 
신위병 장교 4명은 한명씩 살해된채 발견되었고, 수사를 진행하던 야심은 이 사건의 배후에 10년전 신위병이 끝장낸 구제국의 유물이었던 전투기계집단 "예니체리"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서서히 사건의 흑막, 본질에 접근하는데....

'19세기 초-중반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무대로 환관 탐정이 활약하는 팩션'이라는 책 소개를 믿고 구입한 책입니다. 제가 추리 소설은 물론 역사물도 좋아하기도 하고, 역사 추리물은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이 책의 장점으로는, 제일 먼저 19세기 초-중반의 이스탄불의 세밀한 묘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 한권만 읽어도 당시 이스탄불 거리의 정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당시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정치적 상황같은 국제 정세, 술탄과 귀족들, 거리나 지명과 같은 단순한 정보 이외에도 요리나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지는 등 그 깊이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 모든건 작가가 원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 연구를 계속해 온 학자출신인 덕분입니다.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서 느껴질만큼 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추리 소설 역사에 없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환관탐정" 야심의 캐릭터 역시 독특한 맛이 넘칩니다. 성실하고 똑똑하며 요리 역시 뛰어나지만, 환관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는 환관탐정... 멋지지 않나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의 화끈한 친구인 망한 나라 폴란드의 전권대사 팔레브스키 역시 멋졌습니다. 이 친구가 주인공인 스핀오프격 외전이 나와도 재미있겠더라고요.

마지막으로는,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잘 몰랐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황제의 모후 발리데 술탄이라는 인물 같은 경우겠지요. 프랑스 출신의 미녀로 노예시장을 거쳐 술탄을 낳아, 결국 황태후의 자리에 이르르게 된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이라니.. 이 여자 이야기만으로도 소설이 한권이겠어요! 
번역도 깔끔한 편이라 쉽게 쉽게 읽을 수 있고, 책 뒤의 "예니체리" 부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등 책 만듬새도 좋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소설이라는 측면 이외의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술탄의 근대적 개혁 칙령 발표 직전에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중심으로 술탄의 모후인 발리데의 보석 도난 사건, 그리고 하렘에서 일어난 궁녀 교살 사건이라는 사건이 계속 벌어져서 사건 자체는 풍성하지만, 이 모든 사건이 연관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야심의 추리에 의해 해결되는 것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야심은 충실한 수사관이긴 하지만 그가 수집하여 독자와 공유하는 정보는 대부분 쓰잘데 없는 것들이고, 중요한 정보들은 너무나 작위적인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흑막인 마지막 반전 부분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범인이자 흑막은 사건 자체를 일으키면 안되는 상황이거든요. 은밀하고 조용하게 거사를 진행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어처구니 사건을 벌인다니.... 설득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요. 그리고 거사가 실패하는 결말 역시 별로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흑막자체가 너무나 어설펐다!" 라고나 할까요.... 
아울러 당대 오스만투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실제 역사와 실제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세계의 판타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약점입니다.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픽션인 "팩션"으로 읽히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에 읽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음모" 과 유사합니다. 역사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역사물, 아니 "역사 모험물"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요. 야심부터가 이 작품에서 3번이나 죽을 뻔하고, 스스로도 격투로 사람을 잡고, 죽이고,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등 많은 모험이 담겨 있는데, 이럴 거라면 차라리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저 자신도 추리적인 부분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도 지루한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많은 모험과 더불어 나름 추리적 요소가 담겨있는건 사실입니다. 당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매력을 아주아주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점도 분명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저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국적인 매력에 푹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추리 매니아로서는 실망한 점이 분명 있기 때문에 시리즈 작품이 더 있더라도 계속 읽어볼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2012/09/17

부러진 용골 - 요네자와 호노부 / 최고은 : 별점 3점

부러진 용골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사자왕 리처드의 시대, 영국령 북해 솔론제도 영주의 딸 아미나는 동방에서 온 기사 팔크와 그의 종사 니콜라를 만나 암살기사가 영주의 목숨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영주 로렌트는 바로 그날 살해되고 마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가상 역사 판타지 추리소설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인데 흡입력이 상당해서 길이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더군요. 한마디로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일단 시대 배경과 마술이라는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추리적으로도 거의 완벽하다는 장점이 돋보입니다. 독자를 위해 공정한 정보 제공을 하는 것은 물론, 마지막에는 나름대로 "독자에의 도전장"도 삽입되어 있을 정도거든요. 더군다나 추리의 과정이 모두 이치에 합당해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다양한 용병 캐릭터의 소개, 마지막 "불사의 데인인"과의 전투 등 그냥 판타지 소설로도 볼거리가 상당히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기존 작품에서 보였던 "작위적이다"라는 단점이 워낙에 작위적인 설정 덕분에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것도 좋았고요.

물론 실제 있었던 사자왕 리처드의 시대가 무대이지만 세세한 고증 없이 일본 판타지스럽게 구성했다는 점, 진부한 캐릭터들은 조금 아쉽습니다. 팔크가 에드릭과 한판 승부를 벌였다는 중요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점, 로렌트가 과거 데인인과의 전투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데인인의 우두머리에 대한 정보도 공유해 주지 않은 점은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무엇보다도 뭔가 있어 보이는 "부러진 용골"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별다른게 없다는게 가장 실망스러웠습니다. 좀 더 작품과 어울리는 제목을 붙이는 게 좋았을 것 같네요.

그래도 단점은 굉장히 약간일 뿐, 재미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뛰어납니다. 중세 영국을 무대로 공식적으로 "마술"이 통용되는 시대라는 점에서는 "다아시경 시리즈"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의 데인인과의 대전투 등 볼거리가 많으며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리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군요. 이런저런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 당연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읽었던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 중에서는 최고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5/04/20

야수 1,2 - 우에하시 나호코 / 이규원 : 별점 3점

야수 특별 세트- 전2권 - 6점
우에하시 나호코 지음, 이규원 옮김/노블마인

에린은 "야료"라 불리우며 터부시되는 종족 출신이자 투사지기인 어머니 소욘과 함께 살아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형을 당한 뒤에는 마을을 떠나 꿀벌지기 조운의 양녀가 되었다. 이후 조운의 도움으로 카자룸의 수의사 학교에 입학한 에린은 학교에서 키우던 어린 왕수 리란을 돌보면서, 왕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수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상전의 최강자 "투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유일하게 압도할 수 있는 왕수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왕국이 커다란 혼란에 빠질 수 있어서 고민에 빠지는데...

2015년 서점 대상 목록을 보다가 급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작품. 원제는 "야수조율사"입니다. (獣の奏者).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질 정도이니 당시 꽤 인기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네요. 읽어보니 역시나, 확실히 인기를 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첫 번째 이유로는 일본 판타지 특유의 흔해빠진 설정에서 탈피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거대 세력의 싸움이나 왕위를 둘러싼 암투 등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주인공 에린이 '동물 애호가'로서 역경을 딛고 성장하며 왕수 리란과 교감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덕분입니다. 거대 위험 동물과의 교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나우시카"와 비슷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고 있고요. 주인공 에린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특유의 호기심, 그리고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어서 왕수와 교감을 이루게 되는 과정 묘사가 아주 설득력 넘칩니다. 이렇게 자신과는 다른 종족과의 커뮤니케이션 묘사의 설득력은 작가 우에하시 나오코의 독보적인 강점 -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가진 현직 교수 - 이 최대한 발휘된 결과로 보입니다. 

두 번째로는 전반적인 이야기가 소소한 일상계 스타일로, 에린의 생활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약간 '소녀풍 판타지'라서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던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지만도 않습니다. 신권을 지닌 왕 요제와 병권을 총괄하는 대공 아루한 세력의 암투가 함께 펼쳐지고 있으며, 요제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복잡하면서도 흥미롭게 전개되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에 대공령의 투사 부대가 몰려오는 장면은 기존 판타지 애호가도 만족할 만큼 멋진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마지막으로 요제가 어떻게 이 땅에 내려왔는지, 왕수 규범이 생긴 이유와 아료(아오로우)족의 과거가 밝혀지는 장면도 높은 설득력을 지닌 명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곳곳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점은 옥의 티입니다. 특히 이야기의 핵심인, 누간과 손잡고 하르미야를 죽인 뒤 세미야와 결혼하려는 다미야의 음모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르미야가 살아 있으면 결혼하기 힘들었으리라는 묘사도 없고, 누간 역시 반란을 일으켜서 얻을 게 별로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아루한의 지위 정도? 왕이 되려는 야심도 없이 이 정도만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또한 다미야가 에린을 뜻대로 조종해 왕수를 다룰 수 없다면, 투사 부대를 이끄는 아루한이야말로 큰 위협이 되었을 텐데, 장기적으로는 세력이 약화될 게 뻔하다는 점에서 참 바보 같은 계획이 아니었나 싶네요. 신성을 강화해도 병권은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중세 시대에 교황이 이미 증명한 사실이니까요. 이건 물론 다미야야 알 수 없는 역사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고, 위기에 처한 에린을 왕수가 구해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는게 가장 아쉽습니다. 분명 멋진 장면이고, 왕수와 에린이 진짜 교감을 나누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기는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탓입니다. 결국 요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미야를 비롯한 반역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하기까지 했습니다. 첫 발표 당시에는 1, 2권으로 완결되는 작품이었는데, 몇 년 뒤 3, 4권이 후속으로 나왔다는건 아무래도 저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많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아울러 요제의 경호원을 뜻하는 "세잔" 번개 이알은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 가구 목공의 자식이었다는 등 상당한 분량으로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스테레오 타입으로 별다른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일본풍 판타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독특함, 작가 특유의 묘사는 마음에 들었으며,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흡입력도 좋았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덧1 : 참고로 이 작품은 절판 상태라 중고도서로 구입하여 읽었습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중고 물량은 많은 편이니 구하시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덧2 : 애니메이션 화면도 찾아봤는데, 왕수는 날개 달린 늑대개, 투사는 뿔, 다리 달린 용 비스무레한 뱀 정도로만 묘사되어 실망스럽더군요. 좀 더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구석이 많았는데 너무 뻔했달까요... 그래도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영상으로 보고 싶긴 합니다.

2017/06/09

인어공주 - 기타야마 다케쿠니 / 김은모 : 별점 2.5점

인어공주 - 6점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실각 이후, 동맹국이었던 덴마크는 노르웨이에 해당하는 영토를 빼앗기는 등 빈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6세의 둘째 아들 크리스티안 왕자는 스웨덴의 실력자 가문의 딸 루이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왕자는 결혼식 직후 피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편 덴마크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병사한 후, 의지할 데 없는 나날을 보내던 학생 한스 안데르센은 우연히 만난 화가 루트비히 그림과 함께 해변에서 자신이 인어라고 주장하는 셀레나라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왕자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히기 위해 심장을 내걸고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를 도와 그림과 안데르센은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기타야마 다케쿠니의 판타지 본격 추리물입니다. 장르 측면에서는 여러모로 요네자와 호노부"부러진 용골"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실제 역사를 이야기에 강하게 접목시키고 있다는 차이점은 큽니다. 나폴레옹에게 반해버린 마녀가 나폴레옹을 돕기 위해, 크리스티앙 왕자와 루이세 왕자비간 결혼을 파탄내어 스웨덴과 덴마크 간 동맹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왕자 살해 동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에도 실제 덴마크 역사를 이야기에 많이 삽입하고 있습니다.
화자 역할로 한스 안데르센을, 탐정 역할로 그림 형제의 막내 루트비히를 내세우고 있는 것 역시 팩션 분위기를 더해주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실제 역사, 인물과 대척점에 있는 '인어 공주' 이야기도 괜찮습니다. 안데르센동화를 가져와 추리 소설로 변주하는데, 후더닛, 하우더닛 물로는 충분한 수준의 본격물인 덕분입니다. 도개교를 이용하여 시체를 발코니로 옮겼다는 핵심 트릭이 특히 그럴 듯 했습니다. 작품 분위기하고도 잘 어울리는 트릭이라는 점도 좋습니다. 또한 세세한 별궁 묘사는 물론, 한스와 셀레나가 별궁에서 도망 다닐 때 도개교는 아이의 힘으로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걸 보여주는 등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물론 시체가 도개교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을지?라는 의문은 존재하며, 이 정도는 추가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았어요. 작가가 워낙에 물리 트릭을 많이 내세워 '물리의 기타야마'라고 불리울 정도라는데 그 명성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마녀의 단도는 마녀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는데, 마녀의 시체 갈비뼈와 입수한 단도의 손잡이 모양이 다르다는 점에서 마녀가 사실은 2명이라는걸 끌어내는 추리도 좋습니다. 마녀가 일종의 '대를 잇는' 존재라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았고요. 여러가지 가설을 늘어놓고 가장 합리적인 가설을 선택하는 루트비히의 추리법도 괜찮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설이 전부 등장하며, 가설 모두 논리적으로 분석되어 설득력이 높은 편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마녀가 마법으로 왕자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가장 궁금했는데, 구태여 '살인 사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 마녀의 마법이라면 자연사나 사고사를 노렸을테니 - 말이 안된다는 이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셀레나가 사건 수사에 왜 뛰어드는지 잘 모르겠어요. 바닷속 나라에서 인어공주 사건 때문에 내분이 생겼다는데 설득력이 약합니다. 바다 속 왕국은 어차피 덴마크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공주가 왕자를 죽이건 말건 그게 왜 큰 문제가 될까요?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공주가 이미 죽은 이상 처벌도 끝난건데 말이지요.

핵심 동기도 본격물다운 설득력은 갖추고 있긴 하나 설정에 오류가 있습니다. 인어 공주는 원래 크리스티앙 왕자를 사랑해서 인간이 되었는데, 마녀가 됨으로서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나폴레옹에 대한 사랑만 간직하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나폴레옹을 사랑한 인어도 마녀를 죽이고 마녀가 되었다고 묘사되는 탓입니다. 크리스티앙 왕자를 사랑한 인어가 이전 마녀를 죽였다면, 사랑의 대상도 바뀌는게 더 합리적이잖아요?
아울러 루이제가 왕자를 살해한 것도 마녀에게 조종당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질투 때문이었다고 하는게 훨씬 깔끔했을 겁니다. 이 부분은 동화 속 주인공 중 하나인 루이제를 배려하기 위한 티가 역력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싹 정리하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가 왕자 살인범의 누명을 쓴 탓에, 진상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언니 셀레나가 나섰고, 범행은 루이제 왕자비가 질투 때문에 저질렀다는 정도로요. 물론 이런 식이었다면 장점이라고 했던 실제 역사 이야기가 작품에 거의 녹아들 여지가 없어지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훨씬 설득력 높고 깔끔해 졌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괜찮기는 한데, 지나치게 살을 붙인게 아쉽습니다. 조금만 힘을 뺐더라면 "부러진 용골"급의 작품은 되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워낙에 독특한 점이 있는 만큼,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4/06/02

탐정사전 - 김봉석, 윤영천, 장경현 : 별점 1.5점

탐정사전 - 4점
김봉석.윤영천.장경현 지음/프로파간다

제가 어렸을 적,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출판사였던 해문은 "세계의 명탐정 50인"(이후 일본 탐정을 뺀 44인으로 축약 재간)이라는 책을 출간했었습니다. 명탐정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명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퀴즈를 한 개 선보이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었죠. 이런 핵심 내용 외 일러스트, 수록된 여러가지 추리 관련 정보도 인상적이었고요. "스포일러"라는 점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추리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던 추리 키드에게는 정말로 좋은 선물 같은 책이었습니다.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이라는 동일 구성의 유사 도서가 연이어 출간되었던 걸로 보면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네요.

이 책 "탐정 사전"의 출간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세계의 명탐정 50인"의 현대적인 재구성이 될 걸로 예상했습니다. 스포일러 문제 및 저작권 이슈로 추리 퀴즈 부분이 빠지더라도 그만큼 잘 만들어진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솔직히 실망이 큽니다. 이 책이 대체 누구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가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 문학 초보자를 위한 책이라면 정말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엄선하여, 그중 등장한 탐정들을 중심으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애호가를 위한 책이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탐정을 소개하거나, 기존에 소개된 탐정이라도 다양한 정보를 충실히 실었어야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뷔페에서 맛이나 코스 구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얹어놓은 쟁반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일단, 어떤 기준으로 탐정들이 선정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탐정을 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선정 기준은 막연하게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출판물이라면 판매 부수나 시리즈 권수, 방송물이라면 시청률이나 방영 횟수, 또는 역사적 의의 등의 기준이 있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솔직히 선정 기준은 그냥 저자들의 팬심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IWGP"의 마시마 마코토, "트릭"의 야마다 나오코와 우에다 지로, 니시오 이신의 이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일본의 3대 탐정 중 하나인 가미즈 교스케, 다카기 아키미쓰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우치다 야스오의 시나노의 콜롬보 다케무라 이와오나 경시청의 오카베 경부,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쓰가와 경부 등을 제치고 소개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꼭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걸작에서 활약했으며 추리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탐정들 중 소개되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프렌치 경감, 커크릴(콕크릴) 경감, 방코랑은 그렇다쳐도, 대체 뤼뺑은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보기엔, 그 외의 황금기 명탐정은 거의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차일드 44"의 레오 데미노프와 같은 스탠드얼론 작품의 주인공이 포함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작품이 추리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레오 데미노프가 전통적인 ‘탐정’ 역할에 충실한 인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소련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평가하고 싶었다면, 시리즈 캐릭터인 아르카디 렌코가 더 타당했을 것입니다. "토로스 & 토르소"의 헥터 라시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즈라고는 하나 국내에선 한 권만 소개되어 있어 스탠드얼론으로 보이고, 탐정 같지도 않은 인물인데 뤼뺑마저 빠진 명단에 포함되었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탐정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가 실려 있는 부분은 어이없음의 극치입니다. "지뢰진"의 이이다 쿄야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요. 굳이 추리만화에서 뽑고 싶었다면 "Nervous Breakdown"의 두 컴비나 "절대미각 식탐정"의 다카노 세이야를 꼽는 게 나았을 겁니다. 완성도를 떠나 최소한 ‘추리 만화’이긴 하니까요. 대중문화적 아이콘으로 넣고 싶었다면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가 더 적절했을테고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절판본이나 국내 미출간작에 등장한 탐정을 소개한 점도 아쉬웠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메이즈리크 시리즈를 소개하며 국내 절판이라 언급했는데, 이런 식이면 독자보고 어쩌라는 건가요? 커트 캐넌 시리즈도 한 권만 출간되었는데, 현재 절판입니다. 뒤렌마트의 베르라하(베를락) 경감 시리즈, 모돌이 탐정도요.

캐릭터별 글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도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전이라면 구성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캐릭터는 단순히 정보만 나열하는 반면, 어떤 경우는 작품 분석과 작가 소개까지 이어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정보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 항목도 많습니다. 반 두젠(밴 듀슨) 교수의 경우, '생각하는 기계'라는 별명과 대표작 "13호 독방의 문제" 언급만으로 그치는데, 이런 내용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개 작성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라리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항목에서 주요 작품과 그 속에서의 활약상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에요. 

그 외, 탐정들의 배열도 시대순이나 장르순이 아니라 이름순이라는 점도 의아했으며 실제 캐릭터가 묘사된 일러스트조차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건질 만한 부분도 없진 않았습니다. 결과물 자체는 아쉬웠지만, 고전 본격물부터 하드보일드, 현대물, 대체역사 판타지, SF, 만화, 드라마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범위는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하라 료의 사와자키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게 읽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스가무라 사부로 시리즈, 센도 타카시의 "폐허에 바라다"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로버의 악당들"의 빌 파믈리, 토니 힐러만의 인디언 탐정 조 리프혼과 짐 치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Q.E.D"의 토마 소같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적은 탐정 소개도 반가왔던 점입니다. "Q.E.D" 소개글은 작품의 매력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졌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괜찮았던 몇몇 항목에 비해 전체적인 만족도가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방향성이 없는 기획과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정보들이 대다수인 탓이지요. 30여 년 전 읽었던 "세계의 명탐정 50인"과 비교해 특별히 나은 점도 없고요. 가격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덧붙여 눈에 띈 몇 가지 오류를 정리해봅니다. 엉클 애브너 항목에서 "나보테(나봇)의 포도원"을 "나보프의 포도밭"이라 오기한 부분, "차이나타운" 작가 소개 영역에서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표기된 점(각본가가 언급되었어야 함), 유불란의 후속작이 없다고 언급한 점 등입니다.

2025/07/11

올드 가드 (2020) -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 별점 2점

앤디가 이끄는 용병단은 코플리의 의뢰를 받고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매복 중이던 군인들의 공격으로 전원이 사망했지만, 곧바로 되살아나 군인들을 전멸시키고 현장을 떠났다. 이들은 모두 고대부터 살아온 불사의 존재들이었고, 이들을 노리는건 제약회사 CEO 메릭이었다. 불사의 유전자를 이용한 생체 실험 및 신약 개발이 목표였다. 

한편, 새롭게 불사의 능력을 각성한 미 해병 나일이 등장했고, 앤디는 그녀를 데리고 프랑스에 있는 은신처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습격을 받아 조와 니키가 붙잡혔다. 조와 니키를 구하려는 과정에서 동료 부커가 배신했고, 앤디 또한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나일이 나서서 모두를 구해냈고, 앤디는 불사의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도 메릭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들이 팀을 이뤄 현대 사회에서 은밀히 활동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액션 판타지 영화입니다. 2020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작품이지요. 원작은 그레그 루카와 레안드로 페르난데스가 만든 그래픽 노블입니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주연 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입니다. 고대부터 살아온 전사 안드로마케(앤디) 역을 맡아, 강인한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의 퓨리오사를 떠올리게 하는데, 단순한 액션 연기뿐 아니라 오랜 시간 살아온 이의 내면까지도 설득력 있게 표현해냅니다. '미중년 액션물'의 여성 버젼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외모와 연기였어요. 강한 중년 여성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시는 분들께는 이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야기도 익숙하지만, 생각보다는 안정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사의 존재들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슈퍼히어로물의 틀에 현대 밀리터리물의 분위기를 결합한 형태인데, 과장된 판타지보다 현실적인 액션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살아온 불멸의 전사가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정은 "하이랜더"를, 불사의 존재들이 현대 밀리터리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과 제약 회사의 생체 실험 설정은 "아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뤄낸 편입니다. 특히 이들이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구해왔고, 그 구한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설정은 생각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이 항상 던지는, '불사의 존재가 세상에 남기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나름의 해답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전개도 빠른 편이라, 별 생각 없이 보기 좋은 팝콘 무비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깊이나 감정선보다는 액션과 설정 위주로 흘러가며,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 부담 없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이야기 속 설정과 인물들의 행동 사이에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띕니다. 예를 들어, 나일은 초반에 사람을 죽이기 싫다며 작전 참여를 거부하지만, 이후에는 주저 없이 총을 쏘며 메릭 본사에 난입해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이러한 심리 변화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메릭의 사주를 받아 앤디 일행을 납치하는 주역인 코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며 납치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앤디 일행의 일생을 조사하다가 그들의 사명을 깨달았다며 한편이 되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럴거라면 진작에 메릭의 손을 잡지 말았어야죠.
부커가 동료들을 배신하는 이유 역시 설득력이 약합니다. 죽고 싶어서 제약회사에 협조했다는 설정인데, 그럴 거라면 본인이 직접 연구 대상으로 나서면 될 일이지, 함께한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들의 죽음을 동기의 배경으로 제시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그리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배신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동료들이 100년동안 만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장면도 이상해요. 자기들을 팔아넘긴 핵심 인물은 코플리는 바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으니까요. 물론 부커와의 인연은 수백년 이어져왔기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설명이 부족하기는 했습니다.

액션 장면의 완성도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장면 구성이 다소 단조롭고, 최근 액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동선이나 창의적인 무기 활용도 부족한 편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의 매력 외에는 팀 전체의 조화나 전략적 액션에서 오는 시너지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들이 불사의 존재들을 상대로 단순 총격으로만 대응하는 부분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취탄을 쓰건, 되살아나기 전까지 계속 죽이면서 포획하건, 생각해볼만한 작전이 많은데 너무 단순하게 들이받다가 죽어나가서 시시했고, 긴장감을 느끼기도 어려웠습니다.

불사 설정도 "아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목을 자르면 어디서부터 재생되는 걸까요? 산산이 부서지면 재생이 가능한걸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완성도 높은 액션 영화나 탄탄한 드라마를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수 있지만, 큰 기대 없이 시간 보내기용으로는 그럭저럭 즐길만 합니다. 무겁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전용 영화로는 무난했어요.

그렇지만 이 정도 완성도의 영화가 넷플릭스 최대 히트작 중 하나라는걸 보니, 확실히 짧고 강렬한 자극에 주력하며 이야기가 점점 부실해지는게 트렌드인것 같습니다.

2005/09/09

바람의 12방향 - 어슐라 K 르귄 : 별점 3.5점

바람의 열두 방향 - 8점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여류 작가 어슐라 K 르귄의 단편집입니다. 이쪽 쟝르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형이 구입했길래 우연찮게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 하기도 하죠.

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단편이 12편 있겠구나 싶었는데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15편(!) 이나 되는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양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유명 장편 시리즈물의 초안이나 외전격 이야기도 있고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도 있으며 장르도 SF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품의 수준 또한 높고요. 한마디로 쟝르문학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선물세트 같은 책이랄까요? 
거기에 각 단편별로 소개하는 말머리 글까지 꼼꼼하게 번역한 번역도 좋고 책도 깔끔하고 예쁘게 나와서 즐거움을 더해주네요.

사실 조금 어려운 글들도 제법 되기는 합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으면 참 재미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외전격 이야기도 몇개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금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모든 작품들이 글 하나는 확실히 유려하게 잘 쓴다는 느낌은 전해주며 거장으로서의 풍모를 잘 느끼게 하는 좋은 작품들입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더불어 이 바닥 단편집의 양대산맥으로 남을 것 같군요.

제가 재미있었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샘레이의 목걸이"
다른 장편과 연관이 있는 고전적인 SF-환타지로 새로울 것이 없는 설정이지만 작가 특유의 묘사로 작품이 힘을 받는 느낌입니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단편이었어요.

"파리의 4월"
작가로서의 데뷰작이라고 하는군요. 현대 프랑스 역사학자와 14세기 프랑스 흑마술사의 기이한 우정을 그리고 있는 환타지인데 유머스러운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에 몰입하기는 좀 어려웠어요. 꼭 여자들을 불러내어야만 했는지도 의심스럽고 불러낸 다음의 이후 이야기가 오히려 볼거리 같은데 좀 어정쩡하게 끝난 느낌도 들고요.

"어둠상자"
이 작품이 저 사진의 표지 삽화입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장편 판타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 단편인 탓에 세계관과 설정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아 아쉽더군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해제의 주문"
두 마법사들의 마법대전을 다루고 있는데 무척 긴박하고 현실감이 넘치는 묘사 탓에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주문인 "해제"가 무슨 뜻일까요? 한자어를 같이 표기해 주던지 원문을 언급해 주었어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의 법칙"
동화같은 전개로 진행되어 의아했지만 반전이 확실한 작품입니다. "용과 기사"류의 이야기의 독특한 변주인데 간단명료하고 약간의 반전이 있는, 이런 쉬운 이야기가 아무래도 제 취향이라서 아주! 즐겁고 재미나게 읽은 작품입니다. 이 책에서 저의 베스트입니다. 

"겨울의 왕"
아주아주 예전에 읽었던 "어둠의 왼손" 세계관을 공유하는 외전격 이야기입니다. 장편 덕에 워낙 방대한 설정이 쌓여있는터라 작품에 힘이 느껴집니다.

"아홉 생명"
복제인간 이야기로 정통 SF입니다. 설정이나 전개는 지금 읽기에는 약간 식상한, 그다지 독특하지 못한 소재이지만 결말부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물건들"
벽돌공장 사장으로 최후의 땅에서 마지막 벽돌로 섬까지의 둑을 만드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 몽환적인 끝맺음이 인상적이네요.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오즈본이 소속된 행성 탐사대가 공포의 감정을 발산하는 외계 행성에서 벌이는 이야기. 오즈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굉장히 좋습니다. 결말은 약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재미있었어요.

"땅속의 별들"
중세시대의 천문학자를 모델로 한 듯 합니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기 직전 탈출한 천문학자가 광산에 숨어살며 땅의 별자리를 발견하는 이야기인데 발상과 전개, 모든것이 완벽하게 맞물린 작품입니다.

"시야"
심한 충격을 받아 이상이 생긴 두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인데 굉장히 기발하면서도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신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랄까요? 



2009/12/07

이 미스터리를 읽어라! 해외편 - 본격물 목차 소개

이전에 읽었던 "이 미스터리를 읽어라 - 일본편" 에 이은 해외편입니다. 형이 구입했기에 빌려서 읽게 되었죠^^ (땡쓰~)

무려 100편이나 되는 작품이 총 7편의 큰 주제로 나뉘어 소개되고 있는데 첫번째가 본격물, 두번째가 하드보일드, 세번째가 경찰소설, 네번째가 법정 미스터리, 다섯번째가 서스펜스 스릴러, 여섯번째가 모험 & 스파이물, 일곱번째가 괴기환상 & 패러디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리뷰 전에 이 중 본격물부터 먼저 간략하게 정리해서 목차만이라도 소개해볼까 합니다.

읽은 것은 적색 (그중 리뷰가 있는 것은 링크), 번역 자체가 안된 것은 녹색, 번역되었지만 땡기지 않거나 절판 등의 이유로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은 파란색입니다. 총 30편 중 6편이 번역되지 않았고, 남은 24편 중 4편을 읽지 않았으니 84% 독파니까 나름 선방한 편이군요. 나머지도 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미스터리라고 한다면 본격물! 저릿저릿한 무서움을 만끽해라!
1.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에드가 알란 포우 - 모르그가의 살인
2. 영국 미스터리의 기념비적 대작 - 월장석

3.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홈즈 시리즈, 그 중 최고봉은 "바스커빌가의 개"
4. 준비된 의외의 비장의 카드! 실속이 빛나는 "구석의 노인"
5. "심리적 밀실" 스타일을 창출한 불후의 명저 "노란방의 비밀"
6. 소년의 꿈. 괴도 뤼뺑의 진면목이 떠오르는 "813"
7.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의 동심"을 읽지 않은 독자는 가짜다!
8.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킨 추리소설중의 추리소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9. 크리스티와 인기를 양분했던 도로시 세이어스의 "나인 테일러스"
10. 일본의 여정 미스터리 붐에 불을 당긴 F.W 크로포츠의 "통"
11. 미국 미스터리 중흥의 시조. 회심의 역작 "그린 살인사건"

12. 30년간 베스트 원의 자리를 독점.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13. "세개의 관"으로 불가능범죄를 풀어나가는 놀라운 쾌감을!
14. 개성파탐정의 필두는 "독사"로 데뷰한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
15. 변호사물의 원조 "기막힌 살인사건"은 최고의 유머 미스터리.
16. "본격단편"에 반드시 꼽히는 실력파 "9마일은 너무 멀다"
17. 안락의자 탐정의 고독한 자리를 지키는 브롱크스의 "엄마는 뭐든지 알고 있다"
18. 현재의 쥴리안 소렐이 더욱 숙달시킨 완전범죄.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
19. 전통과 참신한 모험소설의 융합이 호평받은 "사이먼은 누구?"
20. 사상 최저의 무능한 탐정이 책 속으로! "도버 4 / 절단"
21. 순도높은 영국 본격파의 맛. 레지널드 힐의 "뼈와 침묵"
22. 중후하고 고귀한 향기. P.D 제임스 "욕망과 음모"
23. 수많은 상을 모두 획득! 루스 랜들 "장미의 살의"
24. SF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펼쳐놓는 고도의 수수께끼 "흑거미 클럽 1"
25. 아 이런 방법이 아직 있었다니! 본격 팬들이 감탄한 "호그 연속살인"
26. "숲을 지나가는 길"은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듯이 읽는 것으로도 충분
27. 희대의 명 요리장이 팔을 걷어올리고 만든 일품요리 "초대받지않은 손님들의 뷰페"
28. MWA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백골의 판타지. 엘킨즈의 "오래된 뼈"

29.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궁극의 역사 미스터리 "장미의 이름"
30. 수도사를 탐정으로! 성인들의 역사 미스터리 "수도사 캐드펠"

2018/03/23

요괴 헌터 1 : 지편 - 모로호시 다이지로 / 서현아 : 별점 2.5점

요괴 헌터 1 : 지(地)편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서현아 옮김/시공사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작가 생활 초기인 1974년부터 꾸준히 발표해 왔던, 고고학자 히에다 레이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 호러 단편 연작입니다. 요새 좀 복잡한 스토리, 설정을 갖춘 고전 만화에 꽂혀서 호시노 유키노부를 비롯한 몇몇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쭉 찾아보다가 이러한 저만의 유행에 편승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명성이야 전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이런게 취향이 되는게 신기하네요.

읽어보니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무려 40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독특하다 느껴질 정도거든요. 발표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네요.
러브크래프트 느낌의 코즈믹 호러 분위기를 한껏 풍겨주는 묘사들은 왜 이 작가가 우메즈 카즈오와 호러 만화계에서 같은 급으로 인정받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며, 이런 저런 설정들의 적절한 이종 교배를 통해 참신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체로 앞서 말씀드린 코즈믹 호러, 크리처를 일본 전통 문화와 교배시키는 식인데 예를 들자면, 코스믹 호러와 크리처 세계관에 일본 고전 설화를 끼얹은 "검은 탐구자", 가쿠레 키리시탄 설정을 이용하여 역시나 코즈믹 호러 느낌의 새로운 성경과 종교적 기적을 그려낸 "생명의 나무", 코즈믹 호러 크리처와 일본 고사기에 기반한 역사를 섞어 '해룡을 맞이하는 해룡제' 라는 행사로 그려낸 "해룡제의 밤" 이 대표적입니다.
이 중에서도 "생명의 나무" 는 이렇게 짧게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성서에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을 잘 짜깁기한 대단한 작품이었거든요. 가쿠레 키리시탄이 성경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자신들만의 성경을 만들어 전승시켰다는 역사 속 실화를 토대로 하고 있는데, 아담 외에 쥬스헤루라는 인류의 선조가 있으며, 쥬스헤루는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했다는 작품 속 창세기 설정부터 참신합니다.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쥬스헤루의 후손들 중에서 그들만의 "예수"가 태어나 모두를 구원한다는 결말도 무척 대담했고요. 이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는건 정말이지 놀라운 재능입니다.

하지만 단점과 한계 역시 명확합니다. 우선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설명의 부족은 여전한 편입니다. 설정은 좋지만 펼쳐놓은 설정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이야기들이 제법 되거든요. 게다가 괜찮은 설정을 갖춘 작품들도 전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선 "붉은 입술"은 단순한 크리처 호러물에 불과하고, 지극히 평범한 좀비물 클리셰 투성이인 "죽은 자가 돌아왔다"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남편을 아이보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인데, 오히려 이 설정을 강조하는게 더 독특하고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내를 살해하고 묻은 자리에서 아내와 똑같은 풀이 돋아났다는 "사인초"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내용이었고요. "우주해적 코브라" 에서 다이아몬드 이빨을 가진 인면초가 시체에서 피어난다는 "만드라고라" 에피소드가 떠오르더군요.
"개미지옥"은 여러개의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고, 특정 구멍은 죽음과 영원한 고통을, 특정 구멍은 바라는 걸 이루어 준다는 설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원숭이 손" 이라는 유명 단편과 흡사한 결말이 뻔해서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한건 주인공 히에다 레이지로의 무존재감입니다. 이 작자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만 볼 뿐입니다. 그리고 복잡한 설정을 독자에게 설명, 전달해 주는게 전부에요. 한마디로 나레이터에 불과합니다. "죠죠" 시리즈의 스피드 웨곤보다도 활약이 못해서 존재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스트레이트 롱 헤어에 어딜가나 정장을 갖춰입는 독특한 비쥬얼만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과 졸작, 장점과 단점이 혼재되어 있는 탓에 앞으로 계속 구입해야 할 지는 조금 망설여지는데, 혹 후속권을 읽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읽어봐도 좋을지 고견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2020/11/1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로버트 바 외 / 이정아 : 별점 2.5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6점
로버트 바 외 지음, 이정아 옮김, 박광규/코너스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두 번째 권입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의 초기인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발표되었던 단편들이 수록된 앤솔러지입니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과 마찬가지로 정가 할인되었기에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셜록 홈즈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탐정들 등장이 많은게 이채롭습니다. 유명한 외젠 발몽, 마틴 휴잇을 비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당대 탐정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사나이, 자연인 명탐정 노벰버 조와 초창기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는 독특해서 인상적이더군요. 플랙스먼 로우는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수록작들 수준이 모두 높지는 않습니다. 셜록 홈즈의 영향을 짙게 받은, 모방작이 많은 탓입니다. 시대와 유행에 충실했지만, 뛰어넘지는 못한 셈이지요. "두 개의 양념병"이라는 걸작이 수록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수준 이하 작품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가 인하된 가격이 워낙 저렴하기에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거브 탐정, 일생 일대의 사건"

파일로 거브는 마대 자루에 꿰메어진 채 익사한 헨리 스미츠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다. 그의 활약을 모든 리버뱅크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끊어진 전구를 쥐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하는데...

도배 및 인테리어 사업을 하면서, 통신 교육으로 탐정이 된 파일로 거브가 활약(이라고 쓰고 좌충우돌이라고 읽는)하는 시리즈 단편입니다.

통신 교육을 받은 탐정은 "탐정 피트 모란"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피트 모란은 겉에 드러난 것들만 1차원적으로 해석하는 단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민따위는 하지도 않지요. 당연히 추리보다는 코미디가 핵심인 이야기 들이었고요. 이 작품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탐정에 대한 희화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요. 마을 주민 모두가 변장이라는 걸 알아채는 변장을 한 뒤 탐문 수사에 나선다던가, 파일로 거브가 펼치는 수사를 마을 주민 모두가 지켜본다는 등의 묘사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피트 모란" 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웃음거리를 제외하면, 나름대로는 추리물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 기묘하게 죽었던 헨리 스미츠 사건의 결정적 단서는 피해자가 쥐고 있던 전구였으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어디서 전구를 갈았는지?"를 파악한 뒤 피해자의 작업실로 올라가 전구를 가는 동작을 따라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거든요.
피해자는 자신이 만든 '양고기 자동화 포장 기계'로 넘어져 마대 자루로 포장된 뒤 강물로 던져졌던 겁니다. 단서를 찾고, 추리한 뒤 추리를 검증한다는 순서만큼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셈이에요. 추리라기 보다는 겉에 드러난 단서를 '추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넓은 범주의 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단한 추리는 아니며, 흡사 "월레스 앤 그로밋"을 연상케 하는 황당무계한, 일종의 다고베르트 머신같은 기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도 언급되긴 했는데, 단지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만 점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당연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 

로드 던세이니가 1934년에 발표했던 작품으로 장르 문학을 사랑하시는 모든 애호가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 고전 걸작 단편입니다. 마지막의 의외성이 돋보이는, 이른바 '기묘한 맛' 장르의 대표작이지요.

이전에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정통 추리물 성격이 강할 뿐더러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충실해서 놀랐습니다. 이는 마지막 반전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상세한 묘사를 통해 반전을 탐정역인 린리 씨가 룸 메이트인 스메더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스메더스는 살인 용의자 스티거가 구입했다는 양념 '넘누모'를 파는 행상인이라서 린리씨는 샐러드에 뿌려먹게 넘누모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메더스는 거절합니다. "고기와 짭짤한 음식에만 뿌려 먹는 겁니다"며, 잘 모르고 채소에 뿌려 먹더라도 "두 번은 안 하죠"라고요. 이 말로 진상이 드러납니다!

2주일 동안 고기를 어떻게 보존했을지, 뼈와 정말 먹을 수 없는 내장 같은 부산물은 어떻게 처리했을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는 합니다. 그래도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고전 걸작임에는 분명해요.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린리 씨와 스메더스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더 많이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백작의 사라진 재산" 

외젠 발몽 시리즈 단편으로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에도 수록되었던 작품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트릭이 황당해서, 이전만큼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주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래시계" 

버트럼 이스트퍼드는 골동품상에서 오래된 모래 시계를 구입했다. 시계는 30분 정도 지나면 시간이 멈추는 문제가 있었다. 그날 밤, 모래 시계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던 (?) 버트럼 앞에 옛날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 모래 시계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190여년 전 자신이 참전했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시계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는데...

표제작으로 저자는 '외젠 발몽' 시리즈 작가인 로버트 바인데, 작품은 외젠 발몽 시리즈와는 관계없는 역사 판타지입니다.

일단, 모래 시계 소유권을 주장하던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해 준 전쟁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중위는 장군으로부터 기습 공격 작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걸 몰라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작전 실패 후 체포되었습니다. 장군은 '모래 시계 모래가 다 떨어지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리를 떠나고요.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 탓에 총살을 집행할 수 없었고, 장군도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총살 지시를 철회한다는 내용입니다. 긴박하면서도 왠지 모를 유머, 여유가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어떻게 버트럼 앞에 나타났는지부터 이유 불명이니까요. 왜 모래 시계가 파괴되고 중위는 사라졌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버트럼 이스트퍼드가 꾼 꿈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그래서 점수는 2.5점입니다. 여러모로 마무리가 아깝습니다.

"일곱 명의 벌목꾼" 

노벰버 조를 벌목꾼 막사 책임자 클로즈 씨가 찾았다. 작년에 나타났던, 벌목꾼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는 검은 가면이 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클로즈 씨로부터 범인 체포를 부탁받은 조는 파트너 쿼리치와 함께 막사로 향했다. 다음날, 강도를 막기 위해 여섯 명이 뭉쳐 떠났던 인부들이 강도를 당했다며 돌아 오는데...

탐정 노벰버 조 시리즈 단편입니다. 노벰버 조는 깊은 산 속에서 일하는 벌목꾼이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이지요.

전개 방식은 셜록 홈즈와 동일합니다. 주어진 단서를 통해 귀납적 추리를 펼쳐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여섯 명 벌목꾼이 차를 마셨던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행동 등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사소한 일이 단서가 된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마신 차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주전자를 씻었던 겁니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단서가 범인을 드러내는건 아닙니다. 범인을 드러내는건 돈을 숨겨 놓았을 막사를 해체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덕분이거든요. 이에 놀란 범인을 현장에서 잡는게 전부입니다. 차에 수면제가 들어있던건 분명해서, 그걸 씻으나 안 씻으나 별 차이가 없었고, 범인이 특정 시간에 개울가에서 무슨 짓을 했건 별로 중요한 단서가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완성도는 그닥이었습니다. 셜록 홈즈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한참 미치지 못해요. 벌목꾼이라는 직업이 유용하게 사용돼지도 못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부여한 가치도 역사적 중요성과 초판본 희귀성 뿐입니다. 엘러리 퀸도 '오지 탐정' 이라는 개념 도입만 높이 평가한 셈입니다.

"유령 저택의 비밀" 

잘 생각해보게.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말이지. 또한 거기에 덧붙여 이 단 하나의 발자국까지 잘 생각해보게 뭔가 번쩍하고 해답 같은 게 떠오르지 않나?" 

심령학에 정통한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가 등장하는 단편. 심령 현상도 과학과 추리로 풀어낸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나병에 걸렸다는걸 추리해 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고요.

그러나 진짜 유령이 나온거라는 결말 만큼은 영 별로네요. 이 정도까지 추리로 풀어내었다면, 사람이 꾸민거라는 진상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는 좋고, 추리도 볼만하지만 앞서 설명드렸듯 진상, 결말 때문에 감점합니다.

"레이커 실종 사건"

은행에서 수금을 담당하던 사원 레이커가 실종되었다. 그는 1만 5천 파운드를 지닌 채였다. 경찰은 그가 돈을 가지고 도주한걸로 판단했지만, 마틴 휴잇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

사립탐정 마틴 휴잇 (휴이트) 시리즈 단편입니다. 마틴 휴잇은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연재된 스트랜드 매거진 출신 탐정으로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이지요. 그래서인지, 작품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사건이 벌어지고, 탐정이 사건을 조사하여 추리 한 뒤, 경찰과 다른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이니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리한 결과가 의외라는 전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도 셜록 홈즈의 라이벌답게 추리적으로는 꽤 괜찮습니다. 수금할 때 레이커를 제대로 바라본 은행 직원은 거의 없었다, 은행 중 한 곳은 입구가 수리 중이었다는 수금 당시 정황, 그리고 레이커가 파리행 표를 살 때 본명을 댔고 독특한 우산만 채링크로스 역에 남겨졌다는 도주 정황을 통해 마틴 휴잇은 수금을 한 레이커는 변장한 가짜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합리적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의외성있는 반전이었을 테고요.

하지만 마틴 휴잇이 진범을 알아내는건 작위적입니다. 레이커 이름이 적힌 우산 속 광고지가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요. 광고지만 없었더라도, 이 범행은 완전 범죄가 되었을거에요. 광고 내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들에게 진범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광고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지요. 최소한 암호 정도는 써 줬어야 합니다. 이럴 거라면 마틴 휴잇이 구태여 발품을 팔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신문 광고란 속 수상한 광고만 보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마틴 휴잇 캐릭터도 문제에요. 유명세에 비하면 별다른 매력은 없기 때문이에요. 이름만 바꾸면 셜록 홈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형적이더라고요. 후대에 그나마 이름을 남긴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은 다들 차별화된 특징들이 있었지요. 도둑인 뤼뺑을 비롯해서 장님인 맥스 캐러도스,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안락의자 탐정 구석의 노인, 멋드러진 별명만큼은 길이 남은 밴 듀슨 (반 두젠), 법의학 탐정의 시조인 손다이크 박사처럼요. 물론 독특하다고 해서 역사에 길이 남는건 아닙니다. 아마추어 괴도 탐정 래플스처럼 지금은 잊혀진 존재도 허다하지요. 그러나 이는 작품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마틴 휴잇 시리즈는 추리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만큼, 마틴 휴잇만의 개성과 매력을 더하지 못한게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셜록 홈즈 스타일을 잘 따르고 있는,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이야기지만 단점이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바다 건너온 살인자"

로프터스 디컨 씨가 자택의 하치만 성상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현장은 거의 밀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고인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헨리 콜슨 씨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둘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헨리 콜슨 씨는 고인이 애지중지했던 '마사무네 검'이 사라졌다는걸 알아챘다. 그 검은 일본인 게이고 가나마로가 되찾기 위해 부탁과 협박을 반복했던 과거가 있었다. 가나마로는 원래 검의 소유주 아들로, 아버지 영전에 검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헨리 콜슨 씨는 게이고 가나마로가 일본으로 돌아갈 표를 예약했다는걸 알아내는데...

아서 모리슨이 쓴 단편인데 의외로 마틴 휴잇 시리즈가 아니네요. 내용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로, 마틴 휴잇이 등장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겁니다. 등장하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이 마틴 휴잇, 셜록 홈즈와 구분되는 특별한 매력이나 특기,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 했습니다. 추리가 진행되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거든요. 약간의 범인 심리 분석도 눈길을 끄는 요소였고요. 디컨 씨는 외출했다가 급한 용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집 안에 있었던 누군가가 범인이었을테고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왔을까요? 경찰은 침실 창문을 주목했지만, 도링턴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침실 창문으로 들어왔다면, 디컨 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침실로 향했을테고, 그곳에서 범행이 일어났을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요. 그리고 도링턴은 하치만 성상이 집에 들어온 날 범행이 일어났고, 성상이 원래 있던 상점에서 물건이 없어지고 부서진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하치만 성상 안에 누군가 숨어서 잠입했다'고 추리하지요. 물건 안에 범인이 숨는 이야기는 많을테지만, 이 정도면 꽤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되네요. 범인 카스트로를 특정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했습니다.

게이고 가나마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시킨 전개도 좋습니다. 앞서 피해자가 집착했다는 마사무네 검과 보라빛 옻칠 세공품 소개를 통해 가나마로가 한 말 - 큰 돈을 들여서 겨우 검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의미 - 의 뜻이 드러나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일본 물품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 했습니다.

물론 하치만 성상 무게에 대해 좀 대충 넘어가고 있기는 합니다. 사람 한 명 무게가 추가되었다면 이상함을 느끼는게 당연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범행을 저지른 카스트로가 다시 성상에 숨은 뒤 몰래 빠져나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한 몫 잡아서 도주 자금을 마련하는게 상식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단점은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빼어난 점이 분명 있고요. 탐정이 조금만 더 매력적이었다면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날 밤의 도둑"

프로비던트 은행 지점장 아일랜드가 텅빈 금고를 보고 혼절했다. 그런데 경비원 제임스 페어베언은 전날 밤, 지점장 아내인 아일랜드 부인이 지점장실을 향해 남편을 부르는걸 목격했었다. 아일랜드 부인은 그 사실을 부정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지점장이 지점장실 문을 통해 금고로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건강을 회복한 뒤, 범행 시간에 있었던 완벽한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그리고 그의 재산 상태는 완벽해서 금고 돈을 훔칠 필요가 없다는게 드러나는데...

'구석의 노인' 단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좋아해서 여러 편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낯서네요. 이전 다른 단편집 수록작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다른 단편집에서 빠진게 이해가 되더군요. 단순하고 뻔한 탓에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지점장은 범인이 아니다', '지점장 아내는 거짓말을 해가며 누군가를 감싸주려 한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결론은 쉽게 추리할 수 있어요. 범인은 바로 아일랜드 지점장의 아들이었던 거지요. 아들이 사건 발생 후 은행을 바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이 추리를 뒷받침하고요. 이 정도 사건을 구석의 노인에게 의지하는 버튼 양은 너무 무능력한게 아닌가 싶네요. 경찰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좋아하는 시리즈의 미번역 초역을 읽어보았다는 의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대리 살인" 

작가는 M.M 보드킨입니다. 작가는 영국에서 판사까지 역임했던 법조인이었다네요. 그래서인지, 클라이막스는 법정 공방이더군요. 정식 법정은 아니고, 검시이긴 합니다만 배심원이 배석하고,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하는 등 정식 법정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법정 미스터리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밀실에서 구식 전장총이 발사된 장치 트릭입니다. 물병을 돋보기처럼 쓴 게 진상이고요.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으로 익숙한 트릭이지요. 엉클 애브너는 1918년 발표되었으니 이 작품이 원조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작가 보드킨과 탐정 폴 벡이 포스트와 명탐정 엉클 애브너만큼 알려지지 못했다는 겁니다. 원조로서의 영광은 커녕, 잊혀져 버린거지요.

읽어보니 잊혀진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설 완성도가 별로인 탓입니다. 우선 쓸데없는 묘사가 많고 장황합니다. 에릭 네빌이 정원으로 나가 복숭아를 먹는 묘사가 2페이지에 걸쳐 설명될 이유는 없어요. 그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 트릭은 대충 넘어가는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에릭 네빌이 압박에 못 이겨 자백하고 쓰러진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어요. 트릭이 간파되었다 하더라도, 실수인지 살의가 있었는지 증명하는건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에릭 네빌이 정말로 목이 말라서 물병을 그곳에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엉클 에브너 시리즈가 훨씬 좋은 작품입니다.

2022/12/25

엔진의 시대 - 폴 인그래시아 / 정병선 : 별점 3점

엔진의 시대 - 6점
폴 인그래시아 지음, 정병선 옮김/사이언스북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동차들에 대해 시기별로 소개해주는 책.
그 자동차를 만든 주역이 누구인지와 함께 자동차가 출시되었던 당시 상황, 사회적 분위기를 엮어서 성공했다면 왜 성공했는지, 실패했다면 왜 실패했는지와 그 외 어떤 후폭풍(?)을 불러 왔는지 등 관련된 이야기를 무려 47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15편의 이야기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당대를 대표했고, 큰 인기를 끌었던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다보니 시대와 트렌드, 유행이라는 것에 대해 식견을 넓힐 수 있었었어요. 자동차야말로 소비재의 끝판왕 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미국 중심의 이야기라는 한계가 있고, 소개되는 도판과 책의 편집이 그닥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여러모로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15편의 소개 중 인상적이었언 몇 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소개드리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모델 T대 라살>>
자동차를 일반인도 소유할 수 있게 한 포드의 모델 T의 등장, 그리고 곧 돈이 있는 사람들은 고급진 무언가를 찾게 되었지만 모델 T의 디자인 개선을 등한시했던 포드가 시장을 잃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모델 T의 개발 과정도 상세하지만, 무엇보다도 헨리 포드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접근이 돋보였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독재자로 그가 벌였던 여러 행각이 가감없이 소개되며, 차를 개발했던 인물 중심으로 서술되는 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조금 놀랐던건 모델 T는 완벽해서 더 개량할게 없다고 포드는 믿었다는데, 소개되는 내용을 보니 실제로도 그러했다는 점입니다. 보기에는 아름다웠던 라살이 지금은 거의 잊혀진 차라는 것도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쉐보레 콜벳>>
제네럴 모터스가 업계 최초로 자동차 디자인을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얼의 등장, 매년 디자인을 바꿔 차를 출시하고, 양산하지 않는 프로토타입 개발 등의 혁신적인 조치로 자동차 업계를 리드하는 과정과 콜벳의 아버지 아르쿠스-둔토프와 콜벳의 성공적인 역사를 알려줍니다. 얼은 독재자였지만 확실히 시대를 읽는 눈은 있었나봐요.
"학교를 지나치는데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지 않으면 다시 제도판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말은 새겨들을 명언입니다.

<<1959년식 캐딜락>>
쉐보레의 업계 선두 지위를 빼앗아 온 크라이슬러의 '테일핀' 전성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쉐보레가 따라할 수 밖에 없었던 테일핀의 탄생과 그 유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정말로 암 런 맥락이 없더군요. 쓸데없지만 멋있다고 생각되어 유행한 경우인데, 아무래도 2차 대전 후 고도 성장기를 맞아 풍요와 화려함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필요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그걸 대표하는게 바로 엘비스의 핑크 캐딜락이기도 하니까요.

<<폭스바겐 비틀과 마이크로 버스>>
테일핀과 같은 화려함과 속물 느낌의 감성과 반대되는, 그래서 지식인들의 아이콘이 된 폭스바겐의 비틀과 마이크로 버스의 탄생과 2차 대전 후 하인츠 노르트호프가 회사를 이끌며 살아남아서, 결국 미국 시장까지 진출 후 성공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후 폐허 상태에서 복구하는 폭스바겐의 분투도 볼만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광고 프로모션이 기억에 남습니다.

<<쉐보레 콜베어 : 소비자의 반란>>
에드워드 콜이 주도했던, 미국인을 위한 비틀이었던 콜베어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콜베어의 오버스티어링 문제 (뒷바퀴 미끌림)로 변호사 찰스 네이더의 주도로 고발과 조사가 시작되어 결국 미국의 소비자 운동이 출범하게 된 콜베어의 사건을 설명해줍니다. 미국에서의 소비자 보호법 - 징벌적 손해배상 등 - 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인, 쉐보레 콜베어의 코너 조향 문제가 설명됩니다. 결국 쉐보레가 후기 모델에서 개선 방안을 도입했기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결말은 다소 씁쓸했습니다.

<<포드 머스탱 : 아이아코카와 신세대 미국인>>
자동차 세대 교체의 아이콘이었던 머스탱과 함께 그 성공 비결을 알려 줍니다. 1960년대 ~ 70년대 초반의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자동차 소비 전면에 나서며 "누구나 원하는 자동차"로 멋진 디자인, 저렴한 가격, 다양한 옵션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네요. 현대차의 이른바 '옵션질'은 역사가 증명하는 탁월한 마케팅 기법인 셈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 자서전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리 아이아코카의 활약도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당시는 자서전의 시대였었는데, 저도 아이아코카 자서전과 척 예거 (최초로 음속을 돌파했던 비행사) 자서전 두 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재미있었어요.

<<폰티액의 GTO : 들로리안의 염소>>
두 가지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하나는 머스탱과 전혀 다른 '상남자'를을 노린 들로리안의 머슬카 폰티액의 전성기, 다른 하나는 폰티액의 아버지로 '들로리안 모터스'를 만들었던 업계의 풍운아 들로리안의 흥망성쇠이지요. <<백 투더 퓨처>>의 타임머신으로도 유명한 들로리안의 DMC-12는 청설모의 카툰을 통해 그 탄생과 멸망(?) 과정을 잡해 보았었는데, 훨씬 자세하고 깊이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혼다 어코드 :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전통적인 미국 차와 달랐고, 디트로이트 문화와도 전혀 달랐던 일본차 어코드와 혼다가 어떻게 미국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미국내 양산에 성공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어코드의 성공 이면에는 독재자같았던 혼다 소이치로를 제어할 수 있었던 2인자 후지사와 다케오가 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흥미로왔습니다. 후지사와 다케오 덕분에 문제가 있었던 공랭식 엔진이 아닌 수냉식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때 후지사와 다케오가 혼다 소이치로와 독대하며 했던 말이 대박이네요.
“혼다, 어떤길을 갈 건가? 자네는 회장인가, 아니면 엔지니어인가?”
인데, 기업 회장이면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참고로 이때 개발된 엔진이 CVCC 엔진으로 별다른 장치 추가 없이 미국에 새로 제정된 배출가스 기준을 만족하는 유일한 엔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혼다의 성공담을 이 책에서는 "애플 컴퓨터"의 첫 등장과 비슷하다고 언급하는데, 실제로도 그런 느낌이에요.
또 그간 읽었던 일본 회사의 성공담은 판타지 <<시마 과장>>은 제껴두더라도 도요타 자동차 성공담처럼 세일즈맨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판매와 마케팅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갔었는데, 일본인 관리자가 미국인 직원을 채용하여 그간 디트로이트의 관행을 깨는 수평적 조직을 만들어 미국 내 생산 기지를 만드는데 성공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신선했습니다.

<<크라이슬러 미니밴>>
앞서 말씀드렸던 리 아이아코카의 또다른 히트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래전 읽었었던 자서전에서도 언급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베이비 부머 세대인 '사커맘' 들이 아이들 여럿을 나르듯 가족이 함께 이동하는데 필요한, 외장이 작으면서도 내부가 큰 그런 차가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는데, 상품기획자라면 관심있게 볼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새로운 소비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걸맞는 기존에 없었던 제품을 내 놓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BMW3 시리즈>>
마케터, 상품기획자라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내용. BMW 3 시리즈가 '보보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건 그들의 기호에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보보들은 화려하지만 저속한 것들은 가지려 하지 않는다.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쓴다는 인상도 줄 수 있는데, 당연히 싫다. 그들은 희소성을 추구한다. 대중이 몰라야 하고, 디자인이 탁월해 삶이 더 편하고 특별해지는 물건이라면 금상첨화다.……… 그들 중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찬의 주최자가 사용하는 샐러드 분배용 포크에 아프리카적 감수성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고 화제로 삼는 행위라면 정말이지 멋지다."
라는데, 지금 말로 따지면 '홍대병' 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차라는 뜻이겠지요? 우리말로 '하차감'이 중요한 사람들을 위한 차라는 뜻도 될 테고요. 이들을 위한 차는 독일차 BMW 3였다는게 결론인데,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자동차는 특정 계층 이상에서는 어느 정도 허영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2009/06/09

나폴리 특급 살인 - 랜달 개릿 / 김상훈 : 별점 4점

나폴리 특급 살인 - 8점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가상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SF 소설이면서도, 탐정 다아시경이 활약하는 추리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전에 "세르부르의 저주"를 읽고 딱히 취향이 아닌듯 해 관심을 끊었던 시리즈지만 이번의 50% 할인 행사를 놓칠 수 없어 구매하여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정말 안 읽었더라면 엄청 후회할뻔 했습니다. 일단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세계관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과학적 마법 문명의 지배를 받는 영-불 제국을 무대로 하여 마법이 증기기관과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일본 만화들의 원조격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다른 파생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자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이 세계관에서 "마법"은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마법은 "전문가" 가 행하는 "전문적인 행위" 이기는 한데, 현대 과학기술에서 관련된 전문가가 행하는 역할과 유사한 점이 있는 일종의 "기술" 처럼 그려질 뿐이거든요. 예를 들면 "방부처리" 라던가 "자물쇠 전문가" 같은 식이죠. 즉 수사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에서의 검시관이나 감식관이 수행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획기적 발상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마법이 사건에 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에서 마법은 단지 설정과 재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며, 각 사건들 마다 "마법이 개입된 사건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마법사들이 조사해서 먼저 알려주는 점 등으로 철저하게 추리의 영역과 마술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서 뻔하디 뻔한 SF-판타지가 될뻔한 작품을 추리물로서도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중심을 잘 잡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약간 바람끼(?)도 보이는 카사노바 다아시경과 강의를 좋아하는 현학적이고도 호기심 많은 마술사 마스터 숀, 현명하고 비범한 결단력의 플랜태저넷 왕가 군주인 노르망디공 리처드 등 고정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뛰어나고, 작가가 상상해 낸 영불제국의 묘사 역시 비범한 편이라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은 작품이기에 할인행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만족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전작에 비해 "추리" 요소가 더욱 풍성해 진 것에 가산점 하나 얹어서 별점은 4점입니다. 첫 단편 "중력의 문제" 는 정말이지 정통 추리팬도 탄복할만한 멋진 밀실 트릭물이에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만한 장치도 풍부하니 쟝르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 작품이자 밀실 트릭 걸작 중 하나라는 "중력의 문제" 는 앞서도 말했듯 정말 빼어난, 추리적으로 아주 파헤치는 다아시경의 활약을 그린 단편인데,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멋진 작품입니다!

일단은 탑 꼭대기에 위치한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려 추락했지만 방은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이었다는 무대 설정을 비롯, 유력한 동기를 지닌 것 처럼 보이는 아들에다가 광신도인 딸이라는 기묘한 가족구성, 가스등과 거대한 샹들리에로 대표되는 - 고딕호러스타일도 느껴지는- 배경 묘사가 굉장히 과학적, 합리적으로 잘 짜여진 트릭과 어우러지고 있으며, 동기 및 단서의 제공도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서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SF로 유명한 "다아시 경" 시리즈이기 때문에 추리적으로 손해를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두 번째 작품인 "비터 엔드"도 상당한 수준의 추리적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다아시경의 부하인 마술사 마스터 숀이 우연찮게 말려드는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특징도 있지만,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인물이 모이는 카페에서 범인은 가까이 가지도 않은 상태로 피해자만 콕 집어 독살시킨다는 원격조정 트릭이 설득력있게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경찰이 약간만 디테일하게 수사한다면 범인은 곧바로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헛점은 존재하지만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세 번째 작품인 "입스위치의 비밀"은 좀 애매합니다. 한 남자의 시체가 해변에서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옆에 발자국은 첫 발견자의 발자국밖에 없었다! 라는 추리적으로 흥미진진한 화두를 던져놓지만, 죽은 남자의 신원이 정보부 소속의 노엘 스탠디쉬라는 것, 그리고 스탠디쉬는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입스위치 파이얼"이라는 물건을 폴란드 제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폴란드 제국의 비밀경찰 세르카 요원을 추적하던 중에 결국 시체로 발견된 거라는 내용으로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폴란드 제국과의 스파이 전쟁 첩보물로 확 바뀌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름 첩보전의 스릴과 더불어 흥미로운 요소 - 스탠디쉬의 다이잉 메시지라던가, 갑자기 별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를 알수없는 특이한 현상 등 - 이 많이 등장해서 지루하지는 않지만, 폴란드 제국과의 첩보전을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묘사해서 결과적으로는 추리적으로 흥미로울 수 있던 소재와 트릭이 첩보전에 파묻혀버려 아깝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폴란드의 미녀 스파이가 등장해서 꿍짝을 맞추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래도 재미는 있고 추리적으로도 버려진 낡은 외투를 가지고 벌이는 추리와 해변가에서 시체가 발견된 트릭의 발상 자체는 좋았기에 평작 수준은 됩니다. 무엇보다도 카사노바 다아시경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폭소! 왠지 피터 웜지 경 같은 느낌을 전해주던 다아시경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에 듭니다.

네 번째 작품 "열여섯개의 열쇠"는 영불제국과 루멜리아제국과의 이른바 "해군조약"에 관련된 이야기로, 주 콘스탄티노플 대사였던 복스홀 경이 맺은 조약의 문서가 사라지고 복스홀 경은 엄청나게 나이를 많이 먹은 모습으로 완전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내용입니다. 다아시경이 곧바로 출격(?) 하여 복스홀 경과 그만이 통과할 수 있는 그의 여름 별장 열쇠 16개를 단서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요.

조금 소품스러운 느낌이기도 한데, 하룻밤의 소동(?)을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야기도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건너기"를 연상시키는 수학적 트릭과 더불어 합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유쾌한 느낌이 가득해서 좋았습니다. 사람이 기괴하게 죽어나가고 중요 문서가 없어졌는데도 이렇게 유쾌하다니 정말이지 모를 일이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트릭 자체는 설득력이 떨어지긴 합니다.

덧붙이자면 "해군조약"은 홈즈, 포와로 등 많은 탐정들이 활약한 전력이 있는 추리계의 완소 아이템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 조약 문서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운 점이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중 하나겠지요.

마지막 작품 "나폴리 특급 살인"은 네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해군조약"을 극비리에 운송하는 특명을 띈 다아시경과 마스터 숀이 탑승한 나폴리행 특급 열차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밀 임무이기에 정체가 발각되면 안되는 이 두 컴비는 열차가 로마에 도착하기전에 사건을 대신 해결해 주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사건해결에 나서게 됩니다. 

제목 그대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패러디이자 오마주 성격의 작품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트릭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정통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추리 애호가가 즐길만한 장치가 가득해서 정말이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집의 표제작에 어울리는 좋은 작품이에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어서 완성도도 아주 높으니까요. "중력의 문제"와 더불어 이 단편집의 투탑, 쌍두마차라 할만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 작품 덕분에 작가의 또다른 패러디 - 오마주 작품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당연히 오리저널은 "요리장이 너무 많다" 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여, 절판도서임에도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서 겨우 한권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배송되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우리 형제의 안팔리는 판타지-추리 소설 "장미빛 인생" 도 유사 쟝르죠. 차이점이라면 우리 작품에서는 마법이 추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정통 추리물처럼 써내려갔으니... 그래서 안팔리는건가?

2011/11/08

더 크레이터 2 / 3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1점 / 1.5점

The Crater 더 크레이터 2 - 2점 데즈카 오사무 지음/학산문화사(만화)
The Crater 더 크레이터 3 - 4점 데즈카 오사무 지음/학산문화사(만화)

1권을 읽고 실망한 나머지 더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관성으로 결국 읽게 된 2, 3권입니다.

그런데 1권과 동일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더군요.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시대를 뛰어넘는 아이디어, 설정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이야기의 장르적 속성이나 전개 방식에도 많은 의문점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수준 이하라고 생각되었어요.

각 권마다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자면, 2권은 쌈장 고딩 오쿠친을 주인공으로 한 3편의 이야기 "오쿠친의 기괴한 체험", "운이 좋은 계절", "오쿠친과 위대한 괴도"로 시작하는데 도라에몽의 청소년판 같은 느낌입니다. 유령과의 이상한 거래나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 미래에서 온 또 다른 나라는 설정과 과학적인 근거나 배경 설명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대소동이 일어난다는 전개가 유사하거든요. 그러나 도라에몽처럼 작정하고 아동 - 개그물로 나간 것도 아니고, 나름 진지한 복선을 깔고 있으면서 결말이 뭔가 석연치 않다는 점에서 이도저도 아닌 듯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차라리 작정하고 즐겁게 달려주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토모에의 가면"은 초·중반은 진지한 괴담류의 호러물인데 마지막 결말은 개그에 불과한 당황스러운 작품으로 디씨에서 봄직한 썰렁 호러 개그 수준의 졸작입니다. 좋은 점을 찾는다는 게 힘들 정도였습니다.

"3명의 침략자"는 데즈카 오사무가 중요한 배역으로 등장하여 스스로의 희생으로 분위기를 호러스럽게 만들기는 하나, 이후의 결말이 개그스러울 뿐 아니라 독자의 상상의 범주 안에 머무르기에 역시나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나름의 반전이 있다는 점 하나는 괜찮았기에 "토모에의 가면"보다 살짝 좋은 정도랄까요? 별 차이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이긴 합니다.

3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팔각형의 저택"은 두 명의 내가 있다는 전형적인 패러렐 월드물인데 설득력 없는 전개에 더하여 급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은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생각하기가 귀찮아서 대충 마무리한 느낌마저 들어요.

"브룬넨의 수수께끼"는 지금 읽기에는 낡아 빠진, 뻔하디 뻔한 판타지 멜로 + 크리처물입니다. 미지의 미녀와 그녀의 애인, 우연히 사건에 휩쓸린 주인공과 그들을 위협하는 미녀와 관계 있는 크리처라는 설정과 이야기 모두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지...

"추락기"는 독특한 반전 블랙코미디 장르물이기는 하나 역시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된 소재와 설정, 전개였습니다. 더 웃겨줬더라면 점수를 줄 만했는데 조금 아쉽긴 하네요.

상당히 묵직한 정통 SF "크레이터의 남자"도 발상과 전개, 주제의식은 좋았으나 지금 읽기에는 핵전쟁의 공포가 만연했던 냉전 시대의 흔해빠진 SF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아예 볼 만한 작품이 없는건 아닙니다. 2권에서의 "두 개의 드라마"는 어이없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말의 반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게 나름 명쾌한 맛이 좋았습니다. 3권의 "풍혈(風穴)"은 설정이 황당하고 전개도 설득력이 없기는 하나 결말이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던 심리 호러물이었고요. 복잡한 인간 군상이 폐쇄된 비행기 안에서 대형 독거미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졈보"도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확실한 편이라 읽을 만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분량에 비해 좋은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많이 빈약한 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네요.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솔직히 그린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느낌이에요.

별점은 2권은 1점이고 그나마 읽을 만한 작품이 더 많은 3권은 1.5점입니다. 역사적이고 자료적인 가치 이외의 다른 장점을 찾기는 어려웠고 가격도 많이 비싼 편이니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6/08/28

비밀기지 만들기 - 오가타 다카히로 / 임윤정, 한누리 : 별점 2점

비밀기지 만들기 - 4점 오가타 다카히로 지음, 임윤정.한누리 옮김, 노리타케 그림/프로파간다

일본의 기지학회 회장이라는 건축가 오가타 다카히로의 저서로, 이런저런 독특한 책들을 내놓고 있는 출판사 프로파간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동안 프로파간다에서 출간했던 책들을 몇 권 읽어보았었는데, 컨셉은 괜찮지만 정작 결과물은 여러모로 애매했었고 이 책 역시 딱 그렇습니다.

우선 주 독자층이 누구인지 불분명합니다. 어린 시절 비밀 기지를 만들어 본 적이 있거나 그러한 것을 동경하는 키덜트들인지, 아니면 여러 '비밀 기지'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어요.
첫 번째 독자층인 '키덜트'들을 위해서는 설문 조사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밀 기지를 나름대로 분류하여 소개하는데, 내용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일러스트도 괜찮고요. 하지만 설명이 너무 빈약합니다. 아동용 그림책 수준의 내용에 불과합니다. 이 내용이 페이지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저는 앞서 이야기한 독자층 중 후자에 가까운 독자이기에 실망이 더 컸습니다. 토관이라는 소재가 등장할 때마다 언급되는 "도라에몽"이라던가, 비밀 기지가 큰 역할을 차지하는 "20세기 소년" 등의 작품을 소개해 준다던가, 역시나 작중에서 언급된 대로 "스탠 바이 미"에서의 비밀 기지 장면을 보여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동서고금의 역사와 다양한 콘텐츠에 등장했던 비밀 기지를 선보여 주기를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함께 수록된 전문가들을 위한 듯한 콘텐츠도 내용이 애매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파크라는 공원 소개에 대한 칼럼은 비밀 기지가 아니라 새로운 놀이 공간?에 가까운 개념이라 책의 주제에는 적합치 않았으며, "건축가가 비밀기지 설계도를 그린다면"이라는 칼럼은 몇몇 실존하는 비밀 기지를 단순히 설계도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별다른 해석이 개입되어 있지도 않고요.
게다가 이런 식의 전문가적인 정보 제공 영역은 앞서 수록되어 있는, 설문조사를 통해 재현한 이이들의 비밀 기지와 비밀 기지에서의 활동이라는 판타지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책을 합친 느낌마저 들 정도에요.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앞부분의 비밀 기지들도 전부 이런 도면, 실제 제작된 예시 사진과 함께 더욱 디테일하게, 정말 건축물 관련 글처럼 쓰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프로파간다의 전위적인 편집도 다른 책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포스트잇 노란색 같은 용지는 그림과 글자는 괜찮더라도 사진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소였으며, 뒤에 메모지 영역이 있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12,000원이라는 가격도 담긴 콘텐츠 내용에 비하면 과한 편이고요.

그나마 뒷부분의 "어른이 만드는 비밀 기지"와 편집부가 썼다는 "이야기 속의 비밀 기지"가 정보 제공이라는 제 의도에 조금이나마 부합합니다만, 문제는 이 부분을 다 합쳐도 10페이지가 될까 말까 하다는 점입니다. 일러스트와 몇몇 디테일도 좋았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모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키덜트를 위한 그림책으로 재편집하여 판매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을까 싶네요.

2004/04/21

디 에이트 - 캐더린 네빌 / 조윤숙 : 별점 2.5점

디 에이트 2 - 6점 캐서린 네빌 지음, 조윤숙 옮김/자음과모음

컴퓨터 전문가인 캐더린 벨리스는 알제리에서 OPEC 회담을 위한 컴퓨터 시스템 설치를 강요받는 자리로 좌천된 후, 지인 해리의 딸 릴리를 통해 체스 천재 솔라린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계속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 과거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는 공식이 숨겨져 있는 “몽글랑 서비스”라는 신비의 체스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손에 있는 “8”의 손금으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인 체스 게임에 뛰어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캐더린은 비밀을 이용하려 하는 “백”의 세력에 맞서 자신의 편인 “흑”의 세력과 더불어 체스판과 말,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뛰어드는데...

캐더린 네빌 여사의 장편 데뷰작.
위의 줄거리로 요약 가능한 현재 시점의 캐더린 벨리스 이야기, 그리고 몽글랑 서비스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격동의 프랑스 혁명기를 무대로 한 수녀 미레유 이야기라는 두가지 축으로 전개됩니다. 마지막에는 이 3세기의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이죠.
전자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몽글랑 서비스와 “8”의 비밀에 휩쓸려 가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자각해 가는 일종의 성장기라면, 후자는 처음에는 소꿉친구인 발렌티느의 복수를 위해, 그 이후에는 비밀스러운 힘의 정체와 자신과 맞서 싸우는 “백”의 여왕과의 전투를 위해 모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주체적인 이야기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캐더린 벨리스의 이야기보다는 미레유의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알제리까지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 비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의 묘사까지 훨씬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모리스 탈레랑, 다비드,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장 자크 루소, 벤자민 프랭클린, 거기에 나폴레옹까지 등장하여 역사 추리물 느낌을 가득 전해주기 때문이에요. 초반의 크로스워드와 글자를 이용한 암호풀이 트릭도 괜찮은 편이라 추리소설 애호가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한가지 특이했던 점이라면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다 미남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키가 굉장히 작은, 결코 잘생겼다고 알려지지는 않은 나폴레옹 조차 엄청난 미남으로 묘사하더군요.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캐더린 벨리스의 모험 부분은 미레유에 비하면 조력자도 훨씬 많고 문명의 이기와 돈을 충분히 사용하기 때문에 긴박감면에서 많이 부족하고, 갑작스럽게 솔라린과 사랑에 빠진다는 등의 설정 등이 너무 순정만화, 로맨스 소설 분위기가 느껴져 영 별로였어요
게다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인 몽글랑 서비스의 비밀이 밝혀지면서부터는 급작스럽게 판타지 소설이 되어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입니다. 연금술 등 과거의 모든 신비적인 지식과 자료를 총 동원해서 설명해 놓기는 했지만 워낙 황당무계한 이야기라 당최 실감이 나지 않았거든요. 몽글랑 서비스를 보다 실질적인 힘으로 묘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제일 당황스러웠던건 체스세트를 완전히 갖추지 않아도 비밀을 풀 수 있다는 마지막 부분이었습니다. 다 모이면 빛이라도 한번 번쩍여 주면서 고대의 비밀을 알려줄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사뭇 달라 완전 실망스러웠어요. 영화와 만화 등에 너무 길들여진 탓도 있겠지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별로도 아닌 그런 작품입니다. 데뷰작치고는 적절했달까요. 작가의 후속작이 더욱 기대되네요.

덧붙이자면, 어떤 분은 체스를 잘 모르면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표현하셨는데 뭐 그 정도로 체스가 중요한 역할로 쓰인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나이트나 폰 등의 행마에 관한 약간의 지식만 알면 무리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2013/12/16

사또 인 다 하우스 2 - 김진태 : 별점 2점

"사또 인 다 하우스 1 - 김진태 : 별점 3점"

2권이 나왔는지도 몰랐는데 네이버북스를 둘러보다가 발견해서 바로 읽게 되었습니다. 2권은 출판물은 없고, e-book으로만 구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권의 핵심 재미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 작가가 많이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더군요. 제가 생각한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조선을 무대로 하여 동-서양의 가치관 충돌에서 벌어지는 작가 특유의 지적이며 현학적인 개그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오베르마스의 동-서양 퓨전 사찰인 "육탄사"라던가, 타로점으로 점을 쳐주고 여자 무당과 판타지 배틀을 벌이는 식의 개그들 말이지요. 또 하멜 표류 당시 벨테브레를 통역관으로 불렀으나, 너무 오랜 시일이 지나 말을 잊었더라...라던가, 짐이 소박맞은 여자와 살림을 꾸리는 등 당대 조선의 역사를 나름 연구하여 작품에 응용한 센스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2권은 1권의 단점이었던 과장된 상황에 의존하는 슬랩스틱 개그만 넘치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그물에 불과합니다. 그나마의 캐릭터 개그도 로빈슨의 비중이 커지고, 박포교와 육탄사 주지의 힘 대결 같은 뻔한 개그만 반복되어 지루하고요. 사실 로빈슨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너무 뻔한,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 큰 재미를 주기는 힘듭니다. 노예였던 짐이 성공하는 과정을 살짝 보여주는 개그 역시 현대 문물인 노래방을 '시조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구현한다는 흔해빠진 아이디어라 실망스럽긴 마찬가지고요.

아울러 로빈슨이 눈독들이는 사또의 딸 떡밥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사로잡은 왜구 사또 나오리가 영의정 딸이라는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애매하게, 흐지부지 완결되는 결말도 별로였습니다.

물론 현학적인 재미를 주는 남만초 에피소드, "바람의 화원"으로 제시된 신윤복의 정체에 대한 설정을 "애원 신윤봉"이라는 화가를 등장시켜 조선 최초의 집단 누드화라는 결말로 마무리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작가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되기는 합니다(아래의 바위 두 개가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댄 여성의 은근한 표정이 그려진 음란한! 그림 참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장점도 있지만 1권에 비하면 단점이 두드러져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래도 김진태라는 작가의 팬이시라면 대여료도 엄청 저렴하니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