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여류 작가 어슐라 K 르귄의 단편집입니다. 이쪽 쟝르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형이 구입했길래 우연찮게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 하기도 하죠.
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단편이 12편 있겠구나 싶었는데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15편(!) 이나 되는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양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유명 장편 시리즈물의 초안이나 외전격 이야기도 있고 완전히 독립된 이야기도 있으며 장르도 SF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품의 수준 또한 높고요. 한마디로 쟝르문학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선물세트 같은 책이랄까요?
거기에 각 단편별로 소개하는 말머리 글까지 꼼꼼하게 번역한 번역도 좋고 책도 깔끔하고 예쁘게 나와서 즐거움을 더해주네요.
사실 조금 어려운 글들도 제법 되기는 합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으면 참 재미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외전격 이야기도 몇개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금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모든 작품들이 글 하나는 확실히 유려하게 잘 쓴다는 느낌은 전해주며 거장으로서의 풍모를 잘 느끼게 하는 좋은 작품들입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더불어 이 바닥 단편집의 양대산맥으로 남을 것 같군요.
제가 재미있었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샘레이의 목걸이"
다른 장편과 연관이 있는 고전적인 SF-환타지로 새로울 것이 없는 설정이지만 작가 특유의 묘사로 작품이 힘을 받는 느낌입니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단편이었어요.
"파리의 4월"
작가로서의 데뷰작이라고 하는군요. 현대 프랑스 역사학자와 14세기 프랑스 흑마술사의 기이한 우정을 그리고 있는 환타지인데 유머스러운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에 몰입하기는 좀 어려웠어요. 꼭 여자들을 불러내어야만 했는지도 의심스럽고 불러낸 다음의 이후 이야기가 오히려 볼거리 같은데 좀 어정쩡하게 끝난 느낌도 들고요.
"어둠상자"
이 작품이 저 사진의 표지 삽화입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장편 판타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 단편인 탓에 세계관과 설정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아 아쉽더군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해제의 주문"
두 마법사들의 마법대전을 다루고 있는데 무척 긴박하고 현실감이 넘치는 묘사 탓에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주문인 "해제"가 무슨 뜻일까요? 한자어를 같이 표기해 주던지 원문을 언급해 주었어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의 법칙"
동화같은 전개로 진행되어 의아했지만 반전이 확실한 작품입니다. "용과 기사"류의 이야기의 독특한 변주인데 간단명료하고 약간의 반전이 있는, 이런 쉬운 이야기가 아무래도 제 취향이라서 아주! 즐겁고 재미나게 읽은 작품입니다. 이 책에서 저의 베스트입니다.
"겨울의 왕"
아주아주 예전에 읽었던 "어둠의 왼손" 세계관을 공유하는 외전격 이야기입니다. 장편 덕에 워낙 방대한 설정이 쌓여있는터라 작품에 힘이 느껴집니다.
"아홉 생명"
복제인간 이야기로 정통 SF입니다. 설정이나 전개는 지금 읽기에는 약간 식상한, 그다지 독특하지 못한 소재이지만 결말부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물건들"
벽돌공장 사장으로 최후의 땅에서 마지막 벽돌로 섬까지의 둑을 만드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 몽환적인 끝맺음이 인상적이네요.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오즈본이 소속된 행성 탐사대가 공포의 감정을 발산하는 외계 행성에서 벌이는 이야기. 오즈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굉장히 좋습니다. 결말은 약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재미있었어요.
"땅속의 별들"
중세시대의 천문학자를 모델로 한 듯 합니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기 직전 탈출한 천문학자가 광산에 숨어살며 땅의 별자리를 발견하는 이야기인데 발상과 전개, 모든것이 완벽하게 맞물린 작품입니다.
"시야"
심한 충격을 받아 이상이 생긴 두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인데 굉장히 기발하면서도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신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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