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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나폴리 특급 살인 - 랜달 개릿 / 김상훈 : 별점 4점

나폴리 특급 살인 - 8점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가상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SF 소설이면서도, 탐정 다아시경이 활약하는 추리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전에 "세르부르의 저주"를 읽고 딱히 취향이 아닌듯 해 관심을 끊었던 시리즈지만 이번의 50% 할인 행사를 놓칠 수 없어 구매하여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정말 안 읽었더라면 엄청 후회할뻔 했습니다. 일단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세계관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과학적 마법 문명의 지배를 받는 영-불 제국을 무대로 하여 마법이 증기기관과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일본 만화들의 원조격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다른 파생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자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이 세계관에서 "마법"은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이곳에서의 마법은 "전문가" 가 행하는 "전문적인 행위" 이기는 한데, 현대 과학기술에서 관련된 전문가가 행하는 역할과 유사한 점이 있는 일종의 "기술" 처럼 그려질 뿐이거든요. 예를 들면 "방부처리" 라던가 "자물쇠 전문가" 같은 식이죠. 즉 수사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에서의 검시관이나 감식관이 수행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획기적 발상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마법이 사건에 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에서 마법은 단지 설정과 재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며, 각 사건들 마다 "마법이 개입된 사건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마법사들이 조사해서 먼저 알려주는 점 등으로 철저하게 추리의 영역과 마술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서 단순한 SF, 판타지가 아니라 추리물로서도 인정받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뻔하디 뻔한 SF-판타지가 될뻔한 작품을 추리물로서도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중심을 아주 잘 잡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 외에도, 약간 바람끼(?)도 보이는 카사노바 다아시경과 강의를 좋아하는 현학적이고도 호기심 많은 마술사 마스터 숀, 현명하고 비범한 결단력의 플랜태저넷 왕가 군주인 노르망디공 리처드 등 고정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뛰어나고, 작가가 상상해 낸 영불제국의 묘사 역시 비범한 편이라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은 작품이기에 할인행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만족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전작에 비해 "추리" 요소가 더욱 풍성해 진 것에 가산점 하나 얹어서 별점은 4점입니다. 첫 단편 "중력의 문제" 는 정말이지 정통 추리팬도 탄복할만한 멋진 밀실 트릭물이에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만한 장치도 풍부하니 쟝르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PS : 우리 형제의 안팔리는 판타지-추리 소설 "장미빛 인생" 도 유사 쟝르죠. 차이점이라면 우리 작품에서는 마법이 추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당. 그러면서도 정통 추리물처럼 써내려갔으니 ^^;; (그래서 안팔리는건가?)

첫번째 작품이자 밀실 트릭 걸작 중 하나라는 "중력의 문제" 는 앞서도 말했듯 정말 빼어난, 추리적으로 아주 파헤치는 다아시경의 활약을 그린 단편인데,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멋진 작품입니다!

일단은 탑 꼭대기에 위치한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려 추락했지만 방은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이었다는 무대 설정을 비롯, 유력한 동기를 지닌 것 처럼 보이는 아들에다가 광신도인 딸이라는 기묘한 가족구성, 가스등과 거대한 샹들리에로 대표되는 - 고딕호러스타일도 느껴지는- 배경 묘사가 굉장히 과학적, 합리적으로 잘 짜여진 트릭과 어우러지고 있으며, 동기 및 단서의 제공도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서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SF로 유명한 "다아시 경" 시리즈이기 때문에 추리적으로 손해를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두번째 작품인 "비터 엔드"도 상당한 수준의 추리적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다아시경의 부하인 마술사 마스터 숀이 우연찮게 말려드는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지만, 추리적으로도 불특정 다수의 인물이 모이는 카페에서 범인은 가까이 가지도 않은 상태로 피해자만 콕 집어 독살시킨다는 원격조정 트릭이 설득력있는 수준으로 전개되거든요. 경찰이 약간만 디테일하게 수사한다면 범인은 곧바로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헛점은 존재하지만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세번째 작품인 "입스위치의 비밀"은 좀 애매했습니다. 한 남자의 시체가 해변에서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옆에 발자국은 첫 발견자의 발자국밖에 없었다! 라는 추리적으로 흥미진진한 화두를 던져놓고 이야기는 곧바로 폴란드 제국과의 스파이 전쟁으로 전환되거든요. 이야기는 죽은 남자의 신원이 정보부 소속의 노엘 스탠디쉬라는 것, 그리고 스탠디쉬는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입스위치 파이얼"이라는 물건을 폴란드 제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폴란드 제국의 비밀경찰 세르카 요원을 추적하던 중에 결국 시체로 발견된 거라는 내용의 첩보물로 확 바뀌어 버립니다. 물론 나름 첩보전의 스릴과 더불어 흥미로운 요소 - 스탠디쉬의 다이잉 메시지라던가, 갑자기 별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를 알수없는 특이한 현상 등 - 이 많이 등장해서 지루하지는 않지만, 폴란드 제국과의 첩보전을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묘사해서 결과적으로는 추리적으로 흥미로울 수 있던 소재와 트릭이 첩보전에 파묻혀버려 아깝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폴란드의 미녀 스파이가 등장해서 꿍짝을 맞추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고 말이죠.
그래도 뭐 재미는 있고 추리적으로도 버려진 낡은 외투를 가지고 벌이는 추리와 해변가에서 시체가 발견된 트릭의 발상 자체는 좋았기에 평작 수준은 된다고 해야겠네요. 무엇보다도 카사노바 다아시경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폭소! 왠지 피터 웜지 경 같은 느낌을 전해주던 다아시경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달까요?^^

네번째 작품 "열여섯개의 열쇠"는 영불제국과 루멜리아제국과의 이른바 "해군조약"에 관련된 이야기로, 주 콘스탄티노플 대사였던 복스홀 경이 맺은 조약의 문서가 사라지고 복스홀 경은 엄청나게 나이를 많이 먹은 모습으로 완전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다아시경이 곧바로 출격(?) 하여 복스홀 경과 그만이 통과할 수 있는 그의 여름 별장 열쇠 16개를 단서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다는 전개죠.
조금 소품스러운 느낌이기도 한데, 하룻밤의 소동(?)을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야기도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건너기"를 연상시키는 수학적 트릭과 더불어 합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유쾌한 느낌이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사람이 기괴하게 죽어나가고 중요 문서가 없어졌는데도 이렇게 유쾌하다니 정말이지 모를 일이에요^^ 하지만 아쉽게도 트릭 자체는 좀 설득력이 떨어지긴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해군조약"은 홈즈, 포와로 등 많은 탐정들이 활약한 전력이 있는 추리계의 완소 아이템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 조약 문서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운 점이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중 하나겠죠.^^

마지막 작품 "나폴리 특급 살인"은 네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해군조약"을 극비리에 운송하는 특명을 띈 다아시경과 마스터 숀이 탑승한 나폴리행 특급 열차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밀 임무이기에 정체가 발각되면 안되는 이 두 컴비는 열차가 로마에 도착하기전에 사건을 대신 해결해 주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사건해결에 나서게 됩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패러디이자 오마주 성격의 작품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트릭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정통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추리 애호가가 즐길만한 장치가 가득해서 정말이지 재미있게 읽은, 작품집의 표제작에 어울리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어서 완성도도 아주 높고요. "중력의 문제"와 더불어 이 단편집의 투탑, 쌍두마차라 할만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 작품 덕분에 작가의 또다른 패러디 - 오마주 작품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 (당연히 오리저널은 "요리장이 너무 많다" 죠) 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여, 절판도서임에도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서 겨우 한권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배송되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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