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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4

가상가족놀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선영 : 별점 2점

가상가족놀이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수사 끝에 사흘 전에 일어난 21세 여대생 이마이 나오코 살인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언뜻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딸의 닉네임인 '가즈미'는 도코로다의 친딸 이름이기도 했다.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야베 미유키의 범죄 수사물입니다. 초반부에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잠시 등장한 뒤에는 취조실에서 진행되는 3 명의 가짜 가족에 대한 심문, 그리고 이를 매직 미러 뒤에서 지켜보는 피해자의 딸 가즈미와 그녀를 보호하는 경찰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이지요. 실제로 심문은 '연극' 이기도 하고요.

비교적 짤막한 길이에, 이야기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건 장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요. 가족 해체가 진행 중인 현재 시점에 통용될만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은근하고 깊은 심리 묘사들도 여전히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별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가짜 가족을 데려다가 진행하는 심문부터가 아무리 봐도 진범을 밝히려는 목적은 없어 보인 탓입니다. 심문 과정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 가짜 가족 놀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살인 사건은 언급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문의 목적은 뭘까요? 서로 너가 죽였지! 너가 범인이야! 라고 싸우다가 누군가 자멸하여 자백할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즈미가 가짜 증언에다가 범인과 가짜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복수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심문이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거듭하기 때문에 가즈미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문은 가즈미가 동요하게 만들어 자백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심문 자체가 연극이었다는 것 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요. 

그러나 이렇게 거창한 연극을 벌여가면서 가즈미의 범행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 방법이 고작해야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라는건 어설픕니다. 또 경찰이 연극을 벌여가며 가즈미를 함정에 빠트리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건 수사가 벽에 부딪혔다 하더라도, 이런 노골적인 함정 수사는 위법 아닌가요? 아울러 범행 때 사용된 파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온 이상, 어차피 가즈미의 애인 이시구로 다쓰야는 체포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다면 범인을 잡는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말이죠. 실제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헛수고였어요. 연극에는 가즈미의 분노와 복수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이지만, 경찰이 두 명이나 죽인 살인범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극을 벌인다는건 말도 안되겠죠. 경찰이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 이마이 나오코 가족이 연극을 벌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겁니다. (가면 산장 살인 사건?)

가즈미가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진짜 가족을 내버려두고 외부에서 가짜 가족, 심지어 딸 이름이 똑같은 가족을 만들어 놀았다는걸 알면 분노할 수는 있을거에요. 그러나 이게 살인으로 이어지게 될까요? 그것도 그 사실을 알고 난 직후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 젊은 연인이었던 이마이 나오코를 가짜 가족 가즈미로 착각해 살해한 다음에? 연기이건 아니건, 친아버지가 살인에 대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데 거기서 더 큰 살의가 생겼다는 뜻인데 이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아무리 아버지 료스케가 실수를 많이 했다 해도, 이런 진심까지도 연기로 치부되어 살해된다는건 지나친 비약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불만과 단점을 잔뜩 썼는데, 이는 책 뒤 소개글에 낚인 탓도 큽니다. 책 뒤에서 두 번의 반전이 있다고 소개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일단 가즈미가 진범이라는 건 앞서 말씀드렸듯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영 수상쩍기 때문에요.
두 번째 반전인 세 명의 가짜 가족이 경찰의 대역이라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예상하지 못한건 맞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초반부에 다케가미가 대역의 대사 운운하는 장면을 통해 제공해주고요. 그러나 이 사실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건 전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연극을 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다쓰야의 파카에 엄청난 피가 튄 걸로 봐서 료스케 살인의 실행범은 다쓰야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즉, 반전물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반전도 대단하지 않으므로 반전물을 기대한 저 같은 독자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애초에 수사를 위해서는 진행할 이유가 없는 연극이 소재인 탓에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장점은 딱히 없습니다.

2012/04/02

다이몬즈 1~13 - 요네하라 히데유키 : 별점 2점

다이몬즈 13 - 4점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요네하라 히데유키 그null림/서울문화사(만화)

데즈카 오사무의 "철의 선율"을 리메이크한 작품. 친구에게 배신당해 양 손을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정신력으로 조종하는 철의 의수를 얻는다는 기본 설정 이외의 모든 이야기를 새롭게 창작하여 13권에 이르는 장편으로 탄생시켰습니다.

가장 손을 많이 댄 부분은 배경 설정과 등장인물들입니다. 배경 설정은 "북두의 권"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근미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캐릭터, 특히 최종 보스인 프로그레스는 "베르제르크"에서의 아름다운 절대악 그리피스의 이미지를 끌어왔고요. 친구에게 배신당한 좌절감과 복수심 역시 원작보다는 "베르제르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원작과 대 히트작의 설정만 베껴온다고 걸작이 되는 것은 아니죠. 공은 좀 들였지만, 흔해빠진 이능력 배틀물 이상의 무언가는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복수의 이유만큼은 확실한 주인공 헤이토 이외의 인물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나노머신을 자신의 몸에 부여했다는 적들은 설정부터가 건맨, 최면술사, 검사, 근육맨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의 식상한 존재들이었고, "자연을 생각한다"는 최종보스 프로그레스 역시나 한 권 정도의 분량을 할애해가며 배경 설정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역부족인 평면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또 다른 제스모스 능력자 스왈로우가 원천적인 복수심을 가지고 상상 이상의 자해(?)를 통해 헤이토와 대적하며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친구도 마지막이 너무 별로여서 당쵀 왜 등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황당했던건 원작에서 끝까지 복수심을 잃지 않는 헤이토를 이 작품에서는 마지막에 "차갑지만 내 여자와 친구에게는 따뜻한 남자" 로 포장, 각색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원작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한 어처구니없는 각색의 결과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그나마 주인공 친구들도 대부분 죽고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는다는 다크엔딩과 함께 제스모스를 이용한 복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액션, 특히 제스모스만의 독특한 능력 (연결 부위에는 어떠한 것도 연결하여 팔로 사용할 수 있다)을 이용한 몇 번의 반전과 마지막 프로그레스와의 승부에서 보여지는 결말은 괜찮은 편이긴 합니다만.... 원작을 재미있게 본 입장에서는 점수를 주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거창하게 이야기를 벌이지 말고 원작을 보다 충실히 리메이크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8/17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4점
최희주 외 지음/나비클럽

구독 중인 서비스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봄 호에 이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수록 단편들이 대체로 호러 성향을 띄는게 특징입니다.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뻔한 설정과 전개를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좀 더 신선한 발상과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딥페이크 업체 추적기
실제 있던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사진, 동영상 딥페이크 제작을 요청하면 건당 돈을 받고 결과물을 보내주며, 심지어는 업체의 API를 연결하여 직접 생성할 수도 있는 현실을 취재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취재를 통해 딥 페이크 범죄가 널리 확산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규제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범죄는 여성들 피해가 많은데, 저도 딸 아이의 아빠로서 좀 더 강한 처벌이 시행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취재라는 점에 더해, 이전 호보다 더 논픽션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탁묘
작가 효진은 고등학교 동창 애희와 동네에서 오랫만에 재회한 뒤,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날, 손을 다친 애희가 찾아와 자기와 남편 지욱에게 닥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번 호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작. 두 여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공포물인데, 수상이 당연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빼어난 흡입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되살아난 지욱이 효진에 대한 집착만 남아 그녀를 덮치는 결말도 강렬했고요.
 
그러나 애희가 살해한 지욱을 윗층 할머니가 되살려냈다는건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고양이를 되살린 것, 고양이를 죽게 만든 택시 운전 기사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등의 다른 설정들도 마찬가지에요. 기묘한 집안 물건들 정도로 이런 능력이 가능하다고 하는건 무리입니다. 주술이건, 부적이건, 조금이라도 설명을 덧붙여 주는게 좋았을겁니다.
또 효진이 지욱과 불륜관계라는 뻔한 설정도 별로입니다. 게다가 효진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건 반칙이에요. 특히 애희가 남편 불륜 상대와의 문자를 봤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커녕 제 3자처럼 "화양연화" 운운한건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수상자 인터뷰에서 밝혔던 창작 동기 - 층간소음 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복수심으로 윗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훔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를 잘 살린 것 같지는 않네요.

메리
의대 진학을 앞둔 '나'는 아르바이트로 삼촌의 스마트 축산 건축업을 돕기 위해 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성적 노리개인 정신지체자 '메리'의 아기가 죽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된 메리는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데...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의 결과로 빚어지는 복수극.
그러나 핵심인 '메리'의 복수심에 대한 빌드업보다는 '나'의 개인 심리 묘사에 치중한 탓에 복수극으로서의 맛은 다소 부족합니다. 도축 현장과 가축 축사 등이 어우러진 배경 묘사는 그럴듯하지만 지나치고요. 복수극이라면 그에 걸맞게 화끈하게 달려주는게 낫습니다. 괜한 문학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어요.
메리의 복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유사성이 짙다는 문제도 큽니다. 복수 장면도 독극물을 먹은 잔치 참석자들이 복통으로 몸부림치는걸 난도질로 끝장낸 상황인데, '나'가 창고에서 걸어나와 문을 나서는 중에 이 모든게 이루어진다는건 이상합니다. 최소한 사전에 독극물을 먹였다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환상통
두 손이 잘려나간 환자가 자신의 손이 자기 목을 조르는 환상에 시달렸다. 그 상황에서 20여년 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아이 이름을 불렀다. 딸은 백화점 붕괴사고로 환자 눈 앞에서 죽고 말았었다. 

환상통과 거울 치료 등 의학적인 부분에서의 디테일은 볼만했던 작품.
하지만 죽어가는 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건 많이 뻔했고 이야기 전개에서 의외성도 별로 없습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이게 무슨 장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호러는 아닌데, 그렇다고 심리 스릴러도 아니고... 여튼 장르물로의 기대에는 전혀 값하지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수지
제주도의 물 빠진 저수지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한 구는 박서현의 남편 시신이었다. 남편은 같은 마을 동우 엄마와 불륜 관계였고, 박서현도 요가 수강생 은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사건이 등장하고,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힘든게,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경찰 수사에 의해 모든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건 조현병 환자인 박서현의 망상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박서현도 은우와 불륜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망상 때문에 은우와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지요.
반전은 괜찮았지만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장화 홍련(영화)"와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가 블랙박스와 사진 등을 통해 현실이 드러나는건 영상물에 어울리지, 소설에는 잘 어울리는 작법이라 할 수도 없고요. 소설이라면 독자도 속일만한 디테일한 묘사가 많았어야 했습니다. 
또 이야기와는 별 관계없는 제주 무당(심방) 관련 설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야기의 본질만 흐립니다. 흥미롭기는 한데 작품에 잘 녹아들지는 못해요. 박서현이 귀신에 홀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제주 무당 관련하여 작가가 '내가 이렇게까지 자료조사를 했다!'는걸 과시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드는 탓에, 차라리 이 설정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스트 하이커
휴직 중인 경찰 수연은 동료 태현을 쫓아 찾아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 태현은 아내 살해 용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진 상태였다.

수연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영원히 떠도는 - 제목 그대로 '고스트 하이커'가 되어 '부랑'을 하는 - 내용의 작품. 
솔직히 장르가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진상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연이 결혼한 태현에게 집착한 나머지, 태현의 아내는 자살했고 태현은 부랑자가 되었다던가, 수연이 베로나 실종 사건에서 알랭이 수상하다는걸 리즈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던가 하는건 모두 수연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애매한 사건들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 보다는 중간에 수연이 죽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복선을 삽입한 뒤, 수연이 유령이라는걸 드러내는 전개가 더 좋았을거에요. 정교한 맛도 살리면서 말이지요. 여러모로 부족하고 애매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읽는 네 가지 키워드 2 : 욕망과 갈등의 논리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에 대해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연재물. 이번에는 '사연'과 '한'이라는 한국 미스터리만의 특별한 주제에 대해 "아홉 꼬리의 전설"과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라는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저 두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에 가까와서 별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 두 작품이 한국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도 아니니까요. 보다 보편 타당한 고전을 예로 들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과 해석이라면, 연대순으로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을 당시 주요 사회 현상과 연결하여 통사적으로 설명하는게 더 와 닿았을것 같네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외 비평, 인터뷰, 추리 퀴즈 등은 점수를 주기 애매해서 생략합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내용들도 아닙니다.

2026/01/0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 - 드니 빌뇌브 : 별점 3.5점

FBI 요원 케이트는 CIA 작전 참여를 명령받고 책임자 맷과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를 만났다. 그녀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맷과 알레한드로의 수사에 위협을 느꼈지만, 사명감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선을 넘은 소노라 카르텔을 응징하는게 아니라, 그 세력을 메데인 카르텔에게 귀속시키는게 목적이었다는걸 알게 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2015년작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명성만 익히 듣고 그동안 보지 않았었는데, 와 정말 잘 만든 영화더군요. 특히 연출이 압도적입니다. 특수 효과나 과도한 액션 없이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가 대단한 덕분입니다. 절묘한 구도 및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미장센, 배우들의 의상, 절정부 터널 진입 씬에서의 야시경 등 모든 디테일이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요. 그야말로 '삭막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건조한 멕시코 국경 지대 풍광 묘사도 좋습니다. 

맷과 알레한드로의 진짜 목적을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알레한드로의 복수심을 설득력있게 전개한 각본도 좋습니다. 정의롭지만 힘이 없고 방관자에 머무는 케이트, 강한 힘으로 불법이면서 강요된 정의를 행하는 맷, 힘을 이용하여 복수를 달성하는 알레한드로라는 등장인물별 설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케이트 역의 에밀리 블런트는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의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강한 마초 미국'을 상징하는 맷 역의 조시 브롤린도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요. 무엇보다도 정의를 넘어선, 치외법권의 '시카리오(암살자)'인 알레한드로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복수심과 고독함, 그리고 전략가로서의 냉철함과 충분한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 일가족을 모두 죽인 뒤, 케이트에게 나타나 모든게 정당했다는 서류의 서명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두 명배우의 불꽃튀는 연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액션 쪽은 다소 심심합니다. 총격전이나 대규모 액션보다는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전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액션도 '상상력'에 의존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고요. 주인공 케이트가 관찰자이자 이용당하는 인물로 머무는 탓도 큽니다. 그녀의 능동적인 활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때문에 액션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재미는 전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맷과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작전 내용을 숨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작전이 불법이라서 숨겼다? 하지만 이 작전은 대통령급의 결정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현장 요원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설정은 말이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반 협박으로 불법이 아니었다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더욱요. 말 잘 듣는 FBI 요원에게 작전에 협력하라고 설득하는게 훨씬 쉬운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임에도 예술성을 갖춘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이라는 뻔한 소재를 통해서 국가의 폭력성과 목적의 정당성을 묻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데 놀라게 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4/06/07

리뎀션 - 안데슈 루슬룬드, 버리에 헬스트럼 / 이승재 : 별점 1.5점

리뎀션 - 4점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중요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베트 그랜스 경정은 손님을 걷어차 뇌출혈을 일으키게 만든 밴드 가수를 체포했다. 그런데 존 슈워츠라는 가수의 여권은 위조였다. 가수의 정체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존 메이어 프레이였다. 존 메이어 프레이는 오하이오의 사형수였는데, 6년 전 탈옥했었다. 그가 무죄라고 믿었던 교도관 버논 및 사형 폐지 연합의 도움 덕분이었다. 버논은 식사에 독을 섞어 건강 이상을 유발시킨 뒤, 사형 폐지 연합 소속 의사가 마취제 등을 투여하여 존의 사망을 위장했었다. 시체 운반 부대를 통해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존은 러시아 등을 거쳐 위조 여권으로 스웨덴에 입국할 수 있었다.
존의 생존을 알아낸 미국 정부는 송환 후 사형 집행을 원했다. 스웨덴은 사형과 같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개인의 송환요구는 거부하고 있었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갈까 우려하여 존을 러시아로 추방하는데 합의했다. 존은 러시아에서 곧바로 미국으로 끌려가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사형제를 반대하던 교도관 버논의 계획이었다...


모르는 스웨덴 컴비 작가의 범죄 스릴러. 에베트 그랜스 경정 시리즈 중 하나로 내용의 핵심은 교도관 버논이 엘리자베스 피니건을 살해하고 존이 사형 선고를 받도록 만든 음모입니다. 존이 사형 집행을 당한 다음에, 자신이 진범임을 밝혀 체제를 뒤흔들 생각으로요. 사형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형과 같은 '동해보복'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살할 때 에드워드 피니건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조작하여 에드워드를 살인 사건의 피고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합니다.
버논이 계획을 밀고 나가던 중간에 존을 불쌍히 여겨 교도소에서 탈옥하게 만든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약물로 심장에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킨 후, 교도소에 고용된 같은 편 의사들이 존을 언뜻 보기에 죽은 것처럼 마취시키도록 만들어서 사망 선고를 내렸고, 그 뒤에는 시체 안치실에 집어 넣었다가 부검 절차를 핑계로 시체 운반 부대에 넣고 빼돌리는 과정 모두가 설득력있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송환되면 죽을게 뻔한 존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스웨덴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도 흥미로왔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딜레마는 항상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소재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살인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게 만든 뒤, 이를 폭로한다는 핵심 계획부터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그가 살해했다는 피해자는 자살했었습니다. 피해자는 데이비드 게일의 공범이었고요. 이 사실은 게일의 사형 집행 직후에 드러납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죠. 게다가 이 작품은 이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데이비드 게일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피해자로 알려진 콘스탄스도 불치병에 걸려 자살했던 공범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버논은 무려 세 명 - 사형 선고를 받은 에드워드까지 - 이나 죽게 만든 살인범입니다. 버논의 존재가 사형 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근거인 셈이지요. 살인마가 사형 제도 폐지를 논한다는건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큰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살해당했던 엘리자베스 피니건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니건은 작 중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존에게 엄청난 복수심을 불태우는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작가들은 에드워드 피니건을 복수심 때문에 제 정신을 잃은 변태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버논은 꽃다운 청소년 두 명을 희생시킨 살인범입니다. 에드워드 피니건마저 자신을 죽인 살인자로 조작한건, 에드워드가 그가 사랑했던  앨리스와 결혼한 것에 대한 복수로 보이고요. 그런데 작 중 버논은 시종일관 나름의 정의와 신념을 굳게 지키는 정의로운 인물처럼 등장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에드워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존이 갇혔던 사형수 동에 감금되었다는 에필로그도 억지스럽습니다. 끈을 이용하여 자살 후 총이 튕겨 나가도록 만들고, 끈은 까마귀가 먹어치우도록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경찰이 '초연 반응' 정도를 검사하지 않을리 없어요. 존이 자살한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걸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을겁니다. 설령 수사가 미비하여 에드워드가 버논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썼다고 치죠. 그래도 딸을 살해한 범인을 직접 처단한 아버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버논이 그의 딸을 살해했다는건 이미 밝혀진 다음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워요.
다른 인물들도 엉망이거나 별볼일 없습니다. 기껏 목숨을 건진 존이 분노를 참지 못해 사건을 저질러 정체가 드러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멍청하다면 죽어도 싸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해서 지루했고요.
에베트 그랜스도 영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지 주변 인물들에게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뇌손상이 온 아내(?) - 전작을 읽지 않아 이 설정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은 안 됩니다만 - 안니에 대해 신경쓰는 것 밖에는요. 나이 많고 화도 많은, 붙임성 없는 거구의 경찰이라는 인물 설정도 "메그레" 경감과 똑같습니다. 그나마 독특한건 스웨덴 가수 시브 말름크비스트의 광팬이라는 것 뿐입니다. 마리안나 헬만손 경위도 이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미모의 여성 형사의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그리고 버논의 계획은 스웨덴 형사 에벤트 그랜스와 별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에베트 그랜스가 존의 무죄를 믿고 송환에 반대할 까닭도 없지요. 한 국가의 고위 경찰이 남의 나라 사법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니까요. 한마디로. 스웨덴 형사 에베트 그랜스 시리즈일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에베트 그랜스의 등장 부분을 거의다 잘라내고, 존과 버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도 충분했어요.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탈옥에 대한 디테일 외에는 전부 꽝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10/16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미나가와 히로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런던, 해부학 교실을 운영하는 외과의사 대니얼 버턴의 연구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사지가 잘린 소년과 얼굴이 짓뭉개진 중년 남자였다.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은 부하들과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섰다. 대니얼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사체로 발견된 소년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를 위해 사체를 훼손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소년과 중년 남자 해링턴을 죽인 범인으로 대니얼 버턴의 형인 로버트 버턴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데...

"죽음의 샘"으로 잘 알려진 여류 작가 미나가와 히로코의 대장편입니다. 제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허구추리"와 공동 수상했다지요. 사실 이 상의 권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검증된 '본격 추리물' 임에는 분명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영국 해부학 교실이 무대인 역사 추리 소설로 해부학 교실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전개와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목부터 해부학 교실을 위해 몸을 열게 해 준 시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무대가 이러하니 당연히 시체가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해부학 교실에서 기묘한 사체 두 구가 발견된 사건입니다. 손과 발이 토막나 사라져 있던 첫 번째 사체는 가난한 소년 네이선, 얼굴이 뭉개져 있던 두 번째 사체는 퍼블릭 저널 사장이자 대중을 선동하는 선동가 해링턴으로 밝혀집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치안판사 존 필딩에게 대니얼 버턴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사체를 훼손했다고 고백합니다. 네이선이 자살한걸 발견한 뒤, 자살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거라 여겨 상흔이 있던 손을 떼어냈다는 거지요. 손만 떼어내면 이상하니 발까지 떼어 은닉했던 겁니다.
해링턴 사체는 해부학 교실 제자들도 몰랐다고 하는데, 존 필딩은 백년도 더 전에 사용했던 '루퍼트 왕자의 난로' 구조를 이용하여 은닉한 상황을 보고 난로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추리하죠. 그래서 해부학 교실 관계자 외에 유일하게 난로 구조를 알고 있을 저택 주인 로버트 버턴이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이자 사기꾼 가이 에번스가 치안판사 부하들 눈 앞 밀실에서 살해되는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번스가 있는 방으로 로버트 버턴이 들어간게 목격되었지만, 그는 사라지고 에번스의 시체만 발견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침대에 걸려있더 천을 이용하여 옆 방으로 탈출한 걸로 드러나고요. 그런데 에드워드가 이 사건은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합니다. 네이선을 이용하고 괴롭힌 에번스에 대한 복수라면서요. 그러나 만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네이선을 위해 에드워드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여러모로 석연치 않지요. 여러모로 로버트 버턴이 범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로버트는 에번스에게 사기를 당해 거액을 빚지고 있었고, 에번스가 계획한 사기를 돕기 위해 해링턴까지 살해했다는걸로 밝혀지니까요. 토마스 해링턴은 네이선이 가지고 있는 고문서 작성 능력을 알고 있어서 입막음을 위해 죽인겁니다.

뒤 이어 로버트 버턴이 에번스 자택에서 불에 타 죽은 채로 발견된 세 번째 사건으로 연쇄 살인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에드워드가 자백한건, 궁지에 몰린 로버트에게 해부학 교실과 교실이 보유한 여러가지 표본, 즉 대니얼 버턴의 가진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를 쓰게 만드려는 계획으로 밝혀집니다. 즉, 모든 사건은 로버트 버턴이 저질렀고 결국 채무 관련 문서를 불태우려다가 죽은 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진범은 에드워드와 나이절이었습니다. 대니얼 버턴이 발견한 내용, 표본 등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던 로버트 버턴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가이 에번스에게서 네이선이 탈출해 찾아온걸 계기로 이 모든걸 꾸민겁니다.
둘은 우선 변장하여 가이 에번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로버트 버턴을 불러 궁지에 몰리게 한 뒤, 탈출시켜 각서를 쓰게 만들고 살해합니다. 대담하게 치안판사 수사 중에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당시 런던에서는 누군가가 고소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는걸 이용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이 두 사건, 즉 가이 에번스가 로버트 버턴의 살해에 대한 재판이 열리지 않을걸로 판단했거든요. 예상대로 에반스에게는 상속인이 없었고, 로버트는 저지른 범죄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탓에 미망인은 소송을 포기하지요. 

그러나 치안판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도 두 사건에 대한 재판은 포기하지만, 네이선 어머니의 고발을 통해 네이선 사건 실행범으로 둘을 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는 성공하니까요. 네이선이 남긴 유서와 옷의 잉크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걸 단서로 둘이 궁극적으로 로버트를 살해하려고 네이선을 먼저 죽였다고 추리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네이선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지며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달리 구입한 사체를 네이선으로 꾸몄던게 진상입니다.

이렇게 사건도 많고, 토막 시체와 밀실 살인 등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으며, 진짜 네이선이 살아있있다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까지 괜찮아서 추리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격 추리물답게 탐정 역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도 거의 공정합니다. 독자는 존 필딩과 판사와 같은 수중에서 추리를 전개할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도 납득이 가네요. 

아울러 디테일하게 그려낸 18세기 런던에 대한 묘사가 아주 빼어납니다. 여기에 더해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해서 설득력도 배가됩니다. 당시 재판 방식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부분도 인상적이고요. 일본 작가가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소설을 쓰면 당연히 엉망일거라고 생각한 제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줍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죽음의 샘"보다 훨씬 낫더군요.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도 눈에 뜨입니다. 범행 동기가 그 중 첫번째에요.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네이선과 사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를 위해 사람을 죽어가며 복수를 한다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석연치 않지요.
게다가 로버트 버턴에 대해 복수심과 살의를 품고 범행을 저지른건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가 대니얼의 성과와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한다 한 들, 그건 두 형제의 문제이지 제자들의 문제는 아닙니다. 소중한 해부학 교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사명감이나 연대 의식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나지 있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로버트가 대니얼의 재산을 포기하게 만들려면, 구태여 에번스를 죽일 필요도 없었어요. 일레인 양 사건과 토머스 해링턴 사건으로 협박만 하면 충분했을 테니까요. 

가이 에번스와 네이선이 얽힌 과거사 이야기는 함께 전개되어 독자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반면, 로버트에게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가 에번스가 엮여 거액의 손해를 보고 해링턴은 죽이는 과정, 그리고 에번스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뒤 에드워드 방 옷장 안에서 에드워드가 각서의 댓가로 범행을 고백하는걸 엿듣는 장면 정도는 로버트 시점에서 묘사해 주었어도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일레인 양을 임신시킨 뒤 살해한 사건도 곁가지로 나오기 보다는, 로버트를 악인으로 확실히 부각시킬 수 있도록 그 진상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테고요. 

에드워드 본인의 복수심과 때문에 재판이 엉망이라는걸 대중 앞에 선보이려고 일부러 재판에 회부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는 정말이지 작위적인, 그야말로 반전을 위한 전개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변장해서 밤문화(?)를 즐기는 인물이라는 설정은 설명도 부족하고, 등장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더군요. 여장 후에는 그 바닥에서 요정 여왕(?) 이라고 불리우는 나이절이 자기 매력을 이용하여 치안판사의 부하인 데니스 애벗마저 유혹해 정보를 빼돌린다는 등 억지스럽기만 할 뿐이었어요. 안 나와도 됐을 듯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 측면에서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충분하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애호가 분들 중에서도 역사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2020/12/18

빨간 리본 - 헨닝 망켈 / 홍재웅 : 별점 2점

빨간 리본 - 4점
헨닝 망켈 지음, 홍재웅 옮김/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헤세발렌에서 열 아홉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자들은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비르기타 로슬린 판사는 병가 중에 충동적으로 헤세발렌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록들을 통해 피해자 중에 어머니의 양부모가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르기타는 미국 네바다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고 이야기해 준 빨간 리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냈고 간단한 조사로 수상한 중국인 손님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정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르스 에리크 발프리드손이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던 탓이었다.
그 뒤 휴가를 얻어 친구 카린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던 비르기타는 수상한 중국인 손님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이다가 당한 강도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 실력자인 훙취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훙취는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동생 야뤼에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비르기타에게 전해지는데...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 (헤닝 만켈)이 쓴,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창조한 유명 탐정인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아닙니다. 비르기타 로슬린이라는 헬싱보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요.

2006년 1월, 한 마을에 사는 친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 아홉 명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왜 이런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비르기타 로슬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서류를 통해 피해자들이 '안드렌' 집안 사람들이라는게 이유일 거라고 추리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네바다의 안드렌 일가도 얼마 전 처참하게 살해된걸 알아내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뒤, 갑작스럽게 1863년의 중국인 '싼'이 겪는 역정이 그려지는데, 흥미롭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속아서 미국으로 끌려간 뒤, 네바다에서 철로를 놓는 노역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을 잃고, 중국으로 귀향한 뒤 선교사들 때문에 결혼할 여자와 뱃속 아이마저 잃어 복수귀가 된다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엄청난 내용이거든요. "황비홍" 1편에서 '금산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 뒤 노예로 팔아먹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빨간 리본의 출처, 에덴 호델 주인의 증언과 피해자 유품인 JA의 일기를 통해 사건 배후에 중국인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게 됩니다. 중국인 '싼'의 후예인 냉혈한 야뤼가 철천지 원수인 안드렌 가문에게 복수를 집행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합친건 아무리 무리수였습니다. 거의 150년 전, 증조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철로 노역 감독관 후손들을 죽인다는 동기부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싼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펼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거에요
 물론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 일가를 모두 몰살시키는건 억지입니다. 미국 노예의 4~5대 쯤 되는 후손이 복수를 위해 노예선 선장이었던 백인 후손들을 몰살시킨다면, 미국에는 남아날 사람이 별로 없을거잖아요? 

게다가 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야뤼가 등장한 뒤부터는 이야기는 아예 다른 길로 향합니다. 중국 특권층이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빈부격차로 분노한 농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농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탓입니다.
계획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마오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정책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설득력이 높거든요. 관련된 자료 조사가 철저했던 듯 싶네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함이 잘 살아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채 50Kg이나 되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아낙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아내의 황당무계한 권력욕으로 유명해진 무가베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설명되는 짐바브웨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습니다. 또 이 계획이 식민지 주의의 재현이라며 반대하는 훙취와 야뤼의 대결도 볼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본편 살인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다른 작품에서, 다른 주제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별 상관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1/3 분량을 할애한 뒤, 누나인 훙취까지 제거한 야뤼가 비르기타를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서고, 훙취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작 중에서 야뤼는 전용 비행기까지 있는 거부이자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발상부터가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없을 외국인 여판사를 중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직접 죽인다? 말이 될 리가 없지요.
몰래 커피에 유리 가루를 섞는다는 살해 방법도 불확실합니다. 많이 어설퍼 보였어요. 이보다는 초반부에 벌어진 헤셰발렌 사건을 직접 저질렀다는게 차라리 말이 될겁니다. 그 사건 피해자들은 납득은 잘 돼지는 않아도 가문의 원수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니까요. 

전개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에덴 호텔에서 리우신이 야뤼의 사무실 주소를 적은 팜플렛을 두고 간 것, 마침 중국 베이징 여행을 간 비르기타가 그 건물을 탐문하다가 강도를 당한 것, 그래서 훙취와 만나게 된 것 모두가 우연입니다. 비르기타가 중국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야뤼가 런던에 나타나 죽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덧붙여, 주인공인 비르기타 판사의 행동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녀는 지나치게 경찰을 불신합니다. 그녀가 중국인이 배후에 있음을 알렸음에도 경찰이 무시한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흉기까지 공개한 용의자가 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사건 담당 경찰 비바 순드베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중요 물건이었던 일기장을 훔친 그녀를 용서해주고 일기장을 빌려주는 등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비르기타는 경찰을 불신할까요? 판사가 경찰을 이렇게까지 불신해도 되는걸까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야뤼의 살의를 눈치채고 런던으로 도주하는 과정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 없는 중국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경찰이 움직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 호텔 주인 스튜레 헤르만손이 수상한 중국인 투숙 후 살해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텔 투숙객 장부가 없었졌고, CCTV라는 증거도 있고요. 스튜레 헤르만손이 전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다음 목표가 비르기타라는 것도 합리적인 추리일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왜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중국인 여자 말만 믿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 외에도, 비르기타가 소싯적 마오 사상에 경도된 극좌였다는 설정도 불필요했고 야뤼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면서 스튜레 헤르만손을 살해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빨간 리본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고요. 살해 현장에 리본을 남길 이유는 나오지 않거든요. 구태여 해석해 보자면, 서구권이 노략질하고 약탈했던 중국이 복수자로서 돌아왔다는 상징적 의미이겠지만, 추리물 기준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단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제법 빠른 시점에서 중국의 위협을 드러낸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된 드라마도 제법이었고요. 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디테일들 중에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이라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8/21

자완: 확장판 (2023) - 애틀리 : 별점 2점


의적 비크람 라토레가 나타나 홀로 온갖 사회 병폐를 해결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위기 의식을 느낀 사악한 무기상 칼리는 비크람 라토레의 정체가 여자교도소 소장 아자드라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진짜 비크람 라토레가 나타났다. 비크람 라토레는 과거 칼리와의 악연으로 죽다 살아난 인물로 아자드는 그의 아들이었다. 부자는 손을 잡고 칼리를 끝장내 버린다.

인도에서 대흥행했다는 액션 영화.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빈민을 위해 싸우는 의적 이야기는 흔한지만 몇가지 차별화되는 점이 있습니다. 의적이 정체가 여자 교도소장으로 수감자 중 에이스(?) 들을 뽑아서 함께 작전을 펼친다는 설정처럼요. 대단하지는 않지만 아자드의 범죄 계획이 나름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피카레스크물 느낌도 살짝 납니다. 의적이 자신을 쫓는 여수사관(나르마다)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는 설정도 재미나고요. 의외였던건 사회적인 요소가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특히 마지막 아자드가 정체를 드러내며 '무지성적인 투표를 하지말고, 왜 이 사람에게 투표를 해야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범죄물이나 사회 고발물로 가치가 높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슈퍼스타 사룩 칸이 1인 2역을 맡은, 비크람 라토레와 아자드의 액션씬입니다. 격투씬의 합도 잘 맞아서 무척 찰지며, 무엇보다도 시가 연기를 내뿜는 비크람 라토레의 '후까시' 하나 만큼은 정말 대단합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건 상관없이, 슬로우 모션으로 점철되어 있고 장면장면이 화려해도 비상식적인게 많으나 이건 인도 영화의 특징이니 즐기면서 볼 만 합니다. 오히려 이런 비정상적인 화면들은 "죠죠" 시리즈를 인도에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야말로 만화적이니까요.
아자드가 비크람 라토레를 자처하는 이유인 칼리에 대한 복수심도 설득력있게 그려졌고, 마지막 복수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제가도 흥겹고 신나고요.

중간중간 이야기가 엄청 건너뛴다던가, 누군가 죽는 심각한 상황에서 즐거운 대동단결 분위기로 급작스럽게 전환하는 등 연출과 전개가 다소 와 닿지 않는 부분은 있습니다. 방금 전에 의적단 멤버였던 락슈미가 죽어서 슬퍼하는데, 나르마다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하니 다시 신나서 으쌰으쌰한다는건 정말 무슨 연출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더운 여름, 킬링타임용으로 적절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내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으시는 분들은 액션씬만 골라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19/01/26

위작의 기술 - 노아 차니 / 오숙은 : 별점 4점

위작의 기술 - 8점
노아 차니 지음, 오숙은 옮김/학고재

역사적인 위조와 사기에 대한 논픽션입니다. 유명한 사건 위주로 나열했던 다른 책들과의 차이점은 위작을 만들고 위조하는 이유를 몇 가지 -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위조를 다룬 "천재성", 작품을 감정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에피소드들이 수록된 "자존심", 미술계와 전문가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위조가 시작된 이야기들을 다룬 "복수", 위조 경력이 밝혀진 후 오히려 부와 명성을 누린 사람들을 다룬 "명성", 순수하게 범죄 목적이었던 사건들인 "범죄", 여러 기회주의자들에게 이용된 딱한 위조꾼이 등장하는 "기회주의", 가장 강력한 동기인 돈에 얽힌 사건들인 "돈", 단순히 미술계가 아닌 정말로 큰 권력에 대한 이야기인 "권력" 순 - 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당연히 위작을 만드는 방법, 출처를 위조하는 방법 등 위작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갤러리 페이크"를 읽었다면 친숙한 여러가지 방법, 기술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림을 그린다면 상당히 유용할 정보도 많아요. 과거 사용된 카본블랙 잉크는 숯검정에 기름이나 풀, 고무질같은 고착제를 섞어 간단히 만들 수 있다던가, 유명한 위조꾼 헵번이 추천하는 거장의 작품을 베끼기 위한 이상적인 '위조꾼의 팔레트(연백, 옐로 오커, 크롬 옐로, 로 시에나, 레드 오커, 번트 시에나, 버밀리언, 로 엄버, 번트 엄버, 테르 베르데, 순수 울트라 마린, 아이보리 블랙의 12가지)' 같은게 그러합니다.

재미있는 실제 사건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스키아가 죽기 전 친하게 지내던 마약상 집 철문에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 죽었는데, 마약상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증받으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스키아 유산 관리 위원회에서는 진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 바스키아의 죽음에 한 몫 했을 마약상에게 큰 돈을 쥐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 탓이 컸을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죽은 바스키아를 위해서는 공식 작품으로 인정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한 작품이라도 더 알려지는게 작가에게는 좋은 일일테니까요.
미술계 이외의 유명한 위조, 위작에 대한 소개도 충실해서 하워드 휴즈 자서전 위조나 가짜 히틀러 일기나 토리노의 성 수의 등 다양한 위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중 콜럼버스 전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증거인 "빈란트 지도"가 위조임이 판명되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다만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조하여 괴링에게 팔아넘긴 반 메헤렌 이야기 같이 다른 유사한 책들에 등장했던 유명 범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반 메헤렌이 재판에 회부된 후 오히려 괴링을 속였다는걸 실제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 증명했으며, 덕분에 '나치 협력자'에서 '괴링에게 사기 친 남자'라는 평판을 얻어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던가, 괴링이 처형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등의 후일담이 실려있는 식으로 디테일이 압도적이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특히나 사건들에 관련된 도판은 정말이지 다른 유사 도서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강력한 장점이고요.

이렇게 재미와 현학적인 지적 욕구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입니다. 동서고금의 유명 위작, 위조 사건에 대해 통사적으로 훝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명 위작가들과 위조품에 대한 일람이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로 밝혀진 이야기는 후일담까지 충실하다는 점에서 위작, 위조에 대해 관심있으신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기도 하고요. 번역과 도판, 만들어진 책의 완성도도 최고 수준이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약간 감점한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타 도서에서 이미 소개되었던 이야기가 제법 있고, 분류도 아주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인데(자존심이고 뭐고 솔직히 돈이 가장 중요한 목적일 테니까요) 책의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2009/11/01

고백 - 미나토 가나에 / 김선영 : 별점 3점

고백 - 6점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비채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사고로 딸을 잃은 교사가 봄방학을 맞아 마지막 조회에서 학생들 앞에서 충격적 사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반에 있습니다"....

*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읽으실 분들은 미리 염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출간소식을 알았을때에는 그닥 구입생각이 없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많은 호평을 접해서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워낙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혹한것도 있죠.

그런데 제게는 그냥 평균작 수준이었어요. 대단한 작품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기에는 좀 부족했거든요.
물론 1인칭 시점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성직자"라는 단편은 대단했고, 이 첫번째 단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등장인물을 바꾸어가며 극단적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형식도 독특해서 - 두번째 단편 "순교자"는 서간문 형태, 세번째 단편 "자애자"는 일기, 네번째 단편 "구도자"는 1인칭 추억담, 다섯번째 단편 "신봉자"는 유서, 마지막 단편 "전도자"는 전화통화라는 형태 - 이러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작가의 고민과 노력이 눈에 선할 정도에요. 또 그만큼 충분한 재미는 가져다 주고 말이죠.

그러나 기본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해서 끝까지 몰입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비현실적인것은 큰 문제로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한명인 슈야가 대표적이죠. 유년기의 애정결핍으로 삐뚤어진 양심을 지니게 된 천재라는 설정도 뻔하지만 묘사된 캐릭터가 너무 극단적이라 감정이입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작품 후기 등에서 소개되기를 등장인물 이력서가 있고 그 이력서에 기반하여 작품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것처럼 홍보되고 있는데 사실 슈야 캐릭터는 그동안 만화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물 설정이기도 하죠. 읽자마자 저는 "암즈"의 건방진 천재 쌍둥이 알과 제프가 연상되었거든요. 그나마 요새는 만화에서도 쓰이지 않는 케케묵은 설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요. 슈야에 비하면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작중에 등장하는 AIDS에 걸린 세상을 바꾸는 철부지 선생이나 다양한 약품을 손에 넣는 중학교 여반장같은 캐릭터는 그나마 약과겠죠...

게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건물을 날려버릴만한 폭탄을 현실세계의 중학생이 제조한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모리구치 유코가 그 폭탄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황당의 극치더군요. 결국 모리구치 유코 역시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 수준으로 자기합리화에만 골몰하는 뻔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모리구치 유코의 경우 하나뿐인 혈육이 죽었으므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긴 하지만 이렇듯 이후의 전개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당위성이 서서히 희박해져 가는것이 뒤로 갈 수록 너무 막가는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거야 캐릭터들의 설정이 설득력이 없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천사의 나이프"처럼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첫 단편 이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복수극으로 보기도 힘들며 추리물로 보기에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분명히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긴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현실성이 떨어지는 등 단점이 확연하기에 그냥 첫번째 단편으로 끝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8/03

베이비 드라이버 (2017) - 에드가 라이트 : 별점 2.5점

베이비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박사가 계획한 범죄 계획에 전용 드라이버로 고용되어 왔다. 오래전 박사의 차를 훔쳤던 탓에 빚을 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빚을 다 갚고, 사랑하게 된 데보라와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는데 박사의 협박으로 새로운 범죄 계획에 합류하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베이비는 작전을 망쳐버리고 마는데...

음악과 액션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몇 년 전 흥행작이지요. 에드가 라이트 감독 작품입니다.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음악과 화면의 완벽한 싱크에 있습니다. 베이비가 일종의 장애(귀울음)이 있어서 항상 음악을 들으며 생활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장면이 특정 곡의 리듬에 맞춰 편집되어 있습니다. 총격전, 도주 장면, 걷는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음악에 맞춰 조율되어 있으며, 립싱크 장면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액션 영화임에도 마치 뮤지컬처럼 느껴질 만큼, 연출과 편집의 밀도가 높습니다.

제목에 걸맞게 수차례 등장하는 카 체이스 장면들도 일품입니다. 특히 시작과 동시에 펼쳐지는 카 체이스가 압권이에요. 도심을 질주하며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과정을 생생함과 유쾌함, 그리고 약간의 치밀함이 곁들여진 리듬감있는 연출로 잘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청춘 영화적인 감성도 좋습니다. 베이비와 웨이트리스 데보라 사이의 관계를 풋풋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둘이 현실을 박차고 함께 떠나는 미래를 꿈꾸는 구조는 전형적인 청춘 로드무비 구성이고요. 마지막 장면에서 수감 중인 베이비가 데보라의 편지를 받은 뒤 석방되어 데보라와 키스를 나누고 떠난다는 씬은 이런 장르 판타지의 결정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25년형을 선고받은 뒤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를 복역해야 가석방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장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가까우며, 그래서 더 아련합니다.

다만 전체적인 서사는 아쉬움이 큽니다. 베이비가 범죄에서 손을 떼려다 계획이 틀어지고, 결국 조직원들과 충돌한 뒤 모두 죽고 베이비만 체포되는게 줄거리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그래도 범죄가 성공하고 베이비와 데보라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는 중반부까지는 유쾌해서 좋았는데,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급작스럽게 진지하고 무거운 범죄극으로 돌변할 뿐더러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베이비와 버디의 대결도 단순한 육체적 충돌에 불과한 탓입니다. 별다른 전략이나 반전은 등장하지 않아요. 청춘 로맨스와 액션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트루 로맨스"가 떠올랐고, 최소한 그 정도의 드라마나 두뇌 게임을 기대했는데 실망했습니다. 최소한 베이비가 모든 말을 녹음한다는 설정이라도 잘 써먹어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인물 구성도 단조롭습니다. 베이비와 데보라는 그냥 '아이들'이고, 배츠는 단순무식한 폭력적인 악역이거든요. 버디 정도만 베이비를 따뜻하게 대하는 등 약간 입체적으로 보였는데, 그마저도 애인 모니카의 죽음 이후에는 복수심만으로 움직이는 전형적인 악역으로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어른(?)이자 흑막으로 묘사되는 박사만 개성있게 등장하지만, 마지막에 베이비를 돕고 죽는건 급작스러우며 일관성을 해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청춘 감성과 감각적인 연출은 뛰어나지만, 이야기와 인물 구성은 아쉽습니다. 그래도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합니다.

2022/08/14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마이클 코넬리 / 조영학 : 별점 2점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물 변호사 미키 할러는 운 좋게 거물 부동산 업자 루이스가 한 여성을 잔인하게 폭행했다는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미키 할러는 루이스가 무죄라는걸 확신하여 변호에 임했지만, 어느 순간 루이스가 유죄일 뿐 아니라 과거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루이스에 의해 조사원 라울이 살해당했고 유력한 증거마저 빼앗겼을 뿐 아니라, 라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루이스는 이런 미키 할러를 협박하여 자신의 변호에 힘을 쏟게 만드는데....


마이클 코넬리의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엄청난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입니다. 매튜 매커너히 주연의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었고요. 작가가 생각했던 멋진 트릭과 설정을 아낌없이 쏟아붓기 때문에 시리즈의 경우는 첫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경우가 많기도 하고, 이전에 읽었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 대한 기억도 좋아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완독했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일단 미키 할러 캐릭터부터가 별로에요. 정의로운 변호사와 악덕 변호사 사이의 애매한 무언가로 그려져 있거든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미키 할러는 의뢰인들이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만드는데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는걸로 묘사됩니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고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으로, 나 역시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지 않는다" 면서요. 이 과정에서 "돈이 없으면 죄를 짓지 말라"며 엄청난 돈 욕심도 부립니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의뢰를 받아들일 때 그가 무죄임을 확신하고 변론에 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던대로 법의 헛점을 찾아내어 의뢰인을 빼내면 그만이지요.
같은 이유로 루이스가 연쇄 살인범이고, 미키 할러가 과거 사법 거래를 유도해 징역을 선고받게 만든 지저스 사건의 진범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저스는 돈이 없었고, 루이스는 돈이 많으니까요. 피고만 풀려나게 해 주고 돈만 벌면 되지요.
게다가 앞서 여러 명의 마약 사범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하는데에는 일말의 주저도,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으면서 루이스에 대해서만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도 앞 뒤가 맞지 않았어요. 이를 미키의 부친 말을 인용하면서 '무고한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식으로 포장하고는 있는데 이 정도로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물론 루이스가 라울을 살해했기 때문에 복수심을 갖는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는 미키 할러가 불필요한 정의감을 불태워 루이스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즉, 주객이 전도된 상황인 것이지요.
그 외 다른 캐릭터들도 별로인건 마찬가지입니다. 변태 연쇄 살인마 루이스에 대한 설정이라던가 미키 할러와 전처이자 검사 매기와의 관계 등도 진부했습니다. 특히나 루이스의 경우는, 다른 작품들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왔던 두뇌파 연쇄 살인마들과 흡사했을 뿐더러, 다소 뜬금없이 살인마라는게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설득력있게 그려냈어야 했습니다.

이야기도 작위적인 전개가 많아서 잘 짜여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차리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옛 의뢰인 지저스 사건의 피해자 마사 렌테리아와 루이스 사건의 피해자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는걸 알아채고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확신합니다. 허나 두 피해자가 그렇게 닮았다는 것 부터가 비상식적이고 작위적이에요. 루이스가 미키 할러의 총을 훔쳐 라울을 살해할 때 사용했다는건 작위적인 설정의 끝판왕 격입니다. 총은 루이스가 미키를 옭아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만약 미키 할러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루이스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미키 할러를 협박할 생각이었을까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치밀하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법정에서 밀고자의 입을 빌어 루이스가 과거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정도인데, 그 밀고자의 증언이 허술하다는건 이미 법정에서 미키 할러 자신이 증명해 버립니다. 경찰이 이 증언으로 보강 수사를 벌일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유력한 용의자였던 지저스가 사법 거래를 통해 이미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걸 자백해버렸는데, 경찰이 다시 수사에 나설만큼 한가할리도 없고, 심지어 담당 형사는 미키 할러를 미워하기까지 하는데 왜 다시 수사를 벌일까요?
루이스의 범죄 행각도 왜 진작에 체포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대충이었습니다. 루이스는 CCTV에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히 피해자를 찾아가거든요.

그나마 전자 발찌로 모든 행적이 추적당하는 루이스가 어떻게 라울을 살해했는지? 에 대한 트릭은 하나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루이스의 어머니가 대신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지요. 상당히 설득력이 높을 뿐더러, 라울이 죽기 전 손가락으로 남긴 다이잉 메시지 - W, 즉 여자가 범인이다! 라는 것 - 와 연결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들이 더 많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영상화가 되었으니, 소설보다는 영상화된 버젼을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 시리즈 전체 보기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05/05/16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 엘러리 퀸 / 설명환 : 별점 2점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엘러리 퀸 지음, 설영환 옮김/해문출판사

웨스트 버지니아의 시골마을 애로요에서 마을 학교 교장 앤드류 밴이 교차로의 "T"자 형 표지판에 목이 잘린채 매달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엘러리는 사건 조사차 애로요 마을에 방문했지만, 마을에 수상한 "절름발이"가 나타났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6개월 뒤, 롱아일랜드의 부유한 카펫 수입상 토머스 브래드가 저택의 토템 기둥에 마찬가지로 목이 잘려 매달린 채 발견되자, 엘러리는 은사였던 야들리 교수의 소개로 사건에 뛰어들었다. 

목이 잘린 시체와 "T" 라고 남겨진 이니셜에 주목하여 두 사건의 연관성을 캐 나가던 엘러리는, 브래드의 동업자 메가라의 협조로 앤드류 밴과 토머스 브래드, 메가라가 형제이며 앤드류가 아직 살아있다는걸 알아냈다. 범행 동기는 오래된 가문간의 전쟁으로 인한 복수심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로 절름발이 "크로삭"이 떠오르지만, 메가라마저 요트 마스트에 목이 잘려 매달린 시체로 발견되는데...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 중 가장 지명도 높고 잘 알려진 작품이지요. 오래전에 해문의 어린이 문고로 읽기는 했는데, 마침 해문의 세계 추리 걸작선집을 싸게 구입할 기회가 생겨 다시 정독해 보고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 작품은 네 건의 연쇄살인, 그것도 목을 잘라 "T"자 형으로 매다는 엽기적인 살해 방식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는 독자를 강렬하게 사로잡지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얽힌 간단한 트릭, 브래드의 살해 장소를 잠깐 위장해서 중대한 단서를 깨닫게 해주는 트릭 등도 논리적으로, 그리고 작품 중간중간에 계속 등장하여 읽는 재미도 어느 정도 보장해 주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일단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범인의 동기부터 설득력이 없는 탓입니다. 네 명이나 살해하고 목을 잘라 매달기까지 해서 얻는게 단지 5천달러 뿐이니까요. 고작 이 정도의 돈이 목적이었다면, 범인인 앤드류는 브래드를 죽인 직후 메가라로부터 돈을 받으므로 이후에는 살인을 그만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계속 연쇄살인을 범할 이유가 없어요. 

마지막에 엘러리 퀸의 "독자에게의 도전장" 역시 이론적으로 타당하며 상당히 설득력 있지만, 결과적으로 범인을 잡는건 추리 덕분이 아닙니다! 범인의 행적을 우연하게 발견한 야들리 교수의 도움을 얻은 "추적"덕분이지요. 트릭도 이제는 "김전일"에서도 인용하는 "목없는 시체 바꿔치기"라서 지금 읽기에는 식상했고요.

그 밖에도 "대단한 힘"이 필요했을 살해 방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점, "이집트"라는 상징을 무리하게 끼워넣으려는 시도 역시 아쉬운 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국명에 집착했을까요? 이집트 십자가라는 소재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은 솔직히 불필요했어요.

이렇듯 헛점도 많고 문제도 많은 부분들 때문에 그렇잖아도 아쉬움이 남는 판에, 너무나 잘난척하는 엘러리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저에게 심히 짜증까지 유발시켰습니다.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이 작품에서 엘러리 퀸의 역할은 잘난척과 부가 설명을 위한 "해설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탐정으로서의 역할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었지만 읽고 난 감상은 예전과 사뭇 다르군요. 그 당시의 무섭고 두근두근했던 감정은 거의 없고 불만족스러운 부분만 눈에 띄니 말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이 작품을 읽고나니 역시 국명 시리즈는 라이츠빌 시리즈 보다는 한단계 아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5/09

야당(2025) - 황병국 : 별점 2.5점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마약 수사의 뒷거래
모든 것은 야당으로부터 시작된다!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이강수(강하늘)는 검사 구관희(유해진)로부터 감형을 조건으로 야당을 제안받는다. 강수는 관희의 야당이 돼 마약 수사를 뒤흔들기 시작하고, 출세에 대한 야심이 가득한 관희는 굵직한 실적을 올려 탄탄대로의 승진을 거듭한다.

한편, 마약수사대 형사 오상재(박해준)는 수사 과정에서 강수의 야당질로 번번이 허탕을 치고, 끈질긴 집념으로 강수와 관희의 관계를 파고든다.

마약판을 설계하는 브로커 강수,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관희, 마약 범죄 소탕에 모든 것을 건 상재.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이해관계로 얽히기 시작하는데… (공식 시놉시스)

올해 개봉해서 간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범죄 스릴러극입니다. 연휴에 감상하였습니다. 

좋은 흥행 성적이 이해가 되더군요. 시종일관 관객을 몰입시키는 전개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는 덕분입니다. 특히 이강수와 오상재 복수극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유튜브 생중계가 일품이에요. 굉장히 대담하면서도, 구관희와 조훈의 추악한 거래를 전국민에게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 통쾌함을 선사해 주니까요. 생중계를 눈치챈 구관희 일당이 다급하게 블라인드를 내리는 장면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생각되고요. 이 생중계를 마지막 순간까지 감춘 구성은,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으로서의 효과를 극대화 해 줍니다. 

등장인물 설정도 좋습니다. '야당'이라는, 전혀 몰랐던 직업(?)을 주요 소재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에 더해, 검사가 절대악이자 최종 빌런으로 대통령 선거의 흐름까지 뒤흔든다는 설정이 최근 현실과 맞닿아 있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구관희 검사에 대한 약간이지만 나름 복잡한 설정도 잘 그려져 있고, 강하늘과 유해진의 연기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줍니다.

하지만 단점도 뚜렷합니다. 우선 이강수라는 인물의 설정이 다소 납득이 어렵습니다. ‘야당’이라는 직업 특성상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그가, 마약사범들과 경찰 앞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요. 아무리 구관희 검사라는 뒷배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고, 이런 경솔한 면모는 이후 등장하는 치밀한 복수극과도 어울리지 않아서 인물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대선후보 아들로 구관희를 설득해 강수, 상재, 수진의 인생을 망치고 복수심을 품게 만든 조훈은 더 최악이에요. 요즘 시대에, 대선후보 아들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고 막나간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잘 나가던 배우였지만 마약으로 인생을 망친 수진은 뻔한 설정이라 진부했고요.

이강수와 오상재가 꾸미는 작전도 설득력이 다소 부족합니다. 조훈의 마약 투약 장면이 담긴 영상을 USB에 담아 야당 의원에게 전달하려다 실패하는 설정은,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같은 더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이 있는데 굳이 USB를 사용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든요. 이건 오상재가 체포되는데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듀폰 라이터를 이용한 도청 장치 역시 마찬가지에요. 라이터가 영화 속에서 너무 자주 비춰져서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폐인이 되었던 이강수가 마약을 끊고, 체력을 키워 복수에 나서는 과정은 설명이 더 필요했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 걸맞게 수위 높은 장면들도 다소 과합니다. 마약 복용 후 벌어지는 난교 장면이나 과도한 살인 묘사는 굳이 이 정도까지 노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장면을 빼고 수위를 조절해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다면 흥행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겁니다.

그래도 별점은 2.5점입니다. 인물 설정의 허술함과 작위적인 장치들, 과도한 수위는 몰입을 저해하지만 재미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킬링타임용 범죄극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06/02/08

살인자들의 섬 (Shutter Island) - 데니스 루헤인 / 김승욱 : 별점 4점

살인자들의 섬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황금가지

화려한 군 경력을 지닌 역전의 용사지만 아내가 방화에 의해 죽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던 연방보안관 테디(에드워드)는 파트너 처키와 함께 비밀임무를 띄고 수수께끼의 정신병원이 있는 외딴섬으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병동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진 레이첼 솔란도라는 여성 환자의 수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헐리 상원의원의 특명으로 정신병원 내부에 만연하는 불법 시술을 밝히는 임무와 함께 아내를 죽게 만든 방화범 레이디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을 품고 수사에 임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불어닥친 허리케인으로 고립된 테디와 처키는 레이첼 솔란도가 남긴 암호를 해독하며 진상에 접근해 갔고, 허리케인으로 병원 내부의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직접 행동에 나서는데.... 

"미스틱 리버"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사실 스릴러물이라 불리우는 이런 쟝르도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그동안 읽어 보았던 현대 미국 작가의 책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뻔한 내용이 많아서 최근에는 별로 읽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동안의 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리네요. 한마디로 물건입니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전개와 묘사의 탁월성도 놀랍지만 독자를 빨아들이는 재미와 몰입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정도의 대단한 흡입력, 그리고. 서두와 결말,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한치의 오차 없는 치밀한 구성과 함께 중간중간의 디테일한 묘사까지도 책의 내용과 완벽하게 부합된다는 것에서 작가의 어마어마한 내공과 역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스릴러물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나름의 "암호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추리 매니아로서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어요. 정통파 추리물로 보기에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지만 내용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의 재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잘 해 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딱 한가지, 반전 이후에 나오는 에필로그와 같은 마지막 날 오전의 풍경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잡역부 중 한사람이 나르던 물건은 과연 뭐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기고요. 또 주인공 테디의 캐릭터는 작품 설정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이런 류의 작품에 항상 나오는 스테레오 타입 (터프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지닌 트라우마로 괴로워 하며 자살 충동마저 느낀다는) 이라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그간 읽은 미국식 스릴러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질렸던 참인데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던 것 같네요. 미스틱 리버도 읽어봐야겠다는 것과 앞으로 현대 미국 작가 책도 눈여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영화화 이야기도 있는데 책의 내용만 잘 살린다면 "야곱의 사다리" 못지않은 이바닥의 수작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물론 잘 살린다는 것이 어려운 이야기겠지만요....

2018/02/24

지문 - 콜린 비번 / 유혜경 : 별점 3점

지문 - 6점
콜린 비번 지음, 유혜경 옮김/황금가지

지문이 신원 확인에 사용된다는건 지금은 일반 상식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지문이 신원 확인의 수단이 되었을까요?
이 책은 지문이 현재의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지문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자 과학사 서적입니다. 거기에 더해, 지문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인 뎁퍼드가에 위치한 채프먼 화방의 강도 살인 사건의 전말 및 재판 과정과 최종 판결까지의 전말이 지문의 역사와 함께 소상하게 펼쳐지는 논픽션 성격도 띄고 있습니다. 즉, 지문의 역사가 뎁퍼드가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실제 지문 응용 사례와 함께 전개되는 구성이지요.

'지문학'의 역사는 학술적인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지문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한 이후, 지문의 여러가지 특성에 대한 연구 과정과 실제 지문을 분류하는 방법 등의 디테일과 지문 연구의 발명자(?)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가 아주 흥미로왔던 덕분입니다. 흡사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어요. 사고방식부터 썩어빠진 거물 쓰레기 골턴이 또다른 쓰레기 허셜과 손잡고, 실제 지문 연구의 권위자로 이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폴즈의 연구를 빼앗은 후 폴즈를 부정하는 양심도 없는 행각이 그것으로 다행히(?) 골턴도 다른 인물들에 의해 영광의 월계관을 빼앗기고 잊혀진다는 결말인데, 씁쓸하면서도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또 폴즈가 지문을 알리기 위해 절박한 노력을 하던 와중에 발표되었던 기사가 마크 트웨인의 "미시시피에서의 삶" 이라는 작품 속 "엄지손가락 지문 채취와 그 결과" 라는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복수를 위해 '수상가' 로 위장하여 살인범을 찾아나선 인물의 이야기라는데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지문학의 역사보다는 관련된 사건들 쪽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유아 살인 사건 등 초창기 지문을 활용하여 해결한 범죄들 모두 흥미진진하며, 지문이 사용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던 범죄들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여러 명의 피해자 증언으로 수년간 구속되었었지만 진범이 다른 사람으로 드러났던 아돌프 벡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면식 식별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데, 책에 실려있는 사진을 보니 범인과 벡은 정말 닮긴 닮았더라고요. 이러니 명확한 개인별 확인 수단이 필요할 수 밖에요.

그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나 서두와 마지막을 장식할 정도로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서술되는 뎁퍼드가 살인 사건입니다. 몇가지 정황 증거는 있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범인의 지문 밖에 없는 상황, 지문이 아직 널리 인정받지 못한 때에 지문만 가지고 과연 용의자들에게 유죄 선고, 더 나아가 '사형 선고' 를 내릴 수 있는지? 라는 딜레마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문학의 아버지 폴즈 역시 '지문으로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는지?' 에 대한 개인적 의구심으로 변호인 측에 협력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또 이 과정에서 범인측 변호사와 증인들, 검찰측이 벌이는 치열한 법정 싸움도 아주 볼만합니다. 지문 도입으로 자리를 잃게 된, 전 원래 영국 경시청 신원 확인 전문가로 일했던 복수심 불타는 가슨 박사와 검사측이 벌이는 논쟁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잘 짜여진 법정물로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체포된 두 형제 모두 교수대로 향했는데, 아마 제가 배심원이었다 하더라도 지문 외 증거들로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지문은 밥 숟가락 한 개 얹은 정도의 재판이긴 했으니까요. 그래도 이후 지문이 증거로 채택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니 제 몫은 충분히 다 한 셈이겠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서로 다른 손가락에서 채취한 두 개의 지문이 동일할 수 없다' 는 것은 아직도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어요니다. 이를 증명하는 한 방법은 현재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지문끼리 서로 비교하는 것 밖에는 없는데 이는 불가능하니까요.

지문 관련 이야기 외에도, 당대 지문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베르티용'과 베르티용의 측정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해줍니다. 실험을 통해 두 사람이 어느 특정 치수가 똑같은 경우는 4:1의 비율로, 모두 11가지 측정치를 보유하는 베르티용 측정법을 통해 두 사람에게 모두 동일한 치수가 나올 확률은 4의 11제곱 대 1이었다는 기본 이론과 베르티용 측정법이 지니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측정 자체가 번거롭고 어려우며 측정 기준도 상황, 장소, 사람에 따라 일정치 못함)를 비롯, 베르티용도 지문을 등록하는건 찬성했지만 이를 상세 분류하는 것을 반대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모나리자 도난 사건' 의 범인 확인이 늦어지게 되어 치명타를 입었다는 이야기 등은 이전에 미쳐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었어요.

이렇게 재미와 지적 호기심을 모두 만족시키는 괜찮은 책입니다. 법의학이나 법과학 등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책만 읽으면 지문이 어떻게 신원 확인에 이용되어,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자리잡았는지를 잘 알 수 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