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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6

검색, 사전을 삼키다 - 정철 : 별점 2.5점

검색, 사전을 삼키다 - 6점
정철 지음/사계절

네이버, 다음 카카오에서 웹 사전을 만들고 있는 정철씨가 쓴 사전과 검색에 대한 책입니다. 사전에 대한 개괄 및 간략한 사전의 역사, 사전 역사에 있어 활약했던 유명 편집인과 저자들이 소개된 후 사전과 검색의 차이와 검색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이론과 저자의 경험, 그리고 검색의 문제와 미래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사전의 역사는 분량상 큰 변곡점만 짚어주지만, 개요를 이해하기에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검색 전문가로서 사전을 만드는 방법을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장점은 큽니다. 실체를 감잡기 어려웠던 '말뭉치(코퍼스)'를 활용하여 어떻게 사전을 만드는데 응용하는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말뭉치는 빈도와 분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예문을 뽑기도 좋고, 저빈도 사용례를 찾아 사전에서 제시하는게 가능해졌다는군요. 그러면서 서울대학교의 꼬꼬마 세종 말뭉치 활용 시스템과 같은 사이트도 알려주는 식으로 제공되는 정보도 풍성해서 마음에 듭니다.

과거 '백과전서'와 현대의 '위키 백과' 모두 마찬가지로 토론과 논쟁이 사전 편찬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는 것도 새겨 봄직 합니다. 실시간성, 정보의 진위 여부, 언론 통제 등을 극복하기 위해 당연한 방법이고, 앞으로의 사전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당연해 보이네요.

검색 엔진의 검색 방법론인 '색인'에 대한 설명은 이런 저런 컨텐츠에서 많이 접해보기는 했지만 '넘나드며 읽기' 방식을 극대화했다는 이론은 독특했습니다. 책은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고, 무의미한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되는 매체이다. 검색 역시 지식을 효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지식과 지식 사이를 점프하며 둘러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라는 발상이 신선했던 덕분입니다. 이게 정답이다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이후 검색이 진화하면서 랭킹 시스템이 도입되고, 야후에서 다단계 트리를 만들어 수작업 랭킹 시스템을 만든 후, 구글이 페이지랭크로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습니다. 많이 인용된 논문이 좋은 논문이듯이 많이 링크된 페이지가 좋은 페이지라는 아이디어였다는데 참 그럴듯해요. 물론 지금은 단순 링크는 많이 사라졌고 다른 복잡한 방법론이 도입되었으나, 누구나 알 수 있고 그럴듯하며 아날로그 시대로부터 증명된 것이야말로 진실 그 자체라는건 변함없는 사실인 듯 합니다.

아울러 검색과 큐레이션 서비스의 비교는 제 현업에서의 고민거리와 조금 유사한 부분이라서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큐레이션은 검색보다는 우연, 세렌디피티와 인스퍼레이션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은 공감이 갑니다. 실제 개발을 위한 알고리즘, 서비스 방식에 있어 단순히 이렇게만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리고 네이버, 다음카카오 모두에서 검색 서비스를 기획 개발한 개발자로서의 경험담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네이버 사전을 쓰지만 다음에는 다음 사전도 한번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전의 미래와 좋은 검색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요.

이렇듯 재미있는 부분도 많고, 또 개인적으로 '백과사전'과 같은 형태의 책을 좋아하며(사전, 시대를 엮다와 같은 책을 찾아 읽을 정도로), 예전에 전자사전 제조사에서 근무한 적도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한 권의 책으로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저자의 개인 블로그, 개인 글을 두서없이 편집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자 스스로 아카이브를 만들고 DB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차, 순서는 그닥 정리되어 있지 못합니다. 사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검색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유명 사전 편집자를 소개하는 식입니다.

수록된 내용도 검색 방법론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비전문가가 쓴 티가 난다는 것도 역력합니다. 특히 사전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심한 편이에요. 전문 사학자가 아닌 만큼 한계는 명확했겠지만, 이럴 바에야 잘 아는 분야에 집중해서 책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저자가 제기한 문제점, 국내에서 종이 사전이 사라지고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만 제기할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개인으로서 한계야 있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책을 출간할 만한 위치와 경력의 소유자가 현실적인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은 좀 부족했다 생각되네요. 특히 이 문제는 제가 전자사전 업체에서 근무했던 거의 10여 년 전부터 불거진 문제인데 해결책이 전혀 없이 현재까지 흘러왔다는 점에서는 심각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결론내리자면 재미도 있고 건질 거리도 있지만, 아무래도 보다 심도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한 시작점, 진입점 역할에 가까운 책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2/10

사전, 시대를 엮다 - 오스미 가즈오 / 임경택 : 별점 3점

사전, 시대를 엮다 - 6점
오스미 가즈오 지음, 임경택 옮김/사계절

사전을 중심으로 고대에서 근대까지 일본의 지식 문화사를 재구성한 책입니다. 헤이안 시대 율령국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유취국사"에서 시작하여, 일본이 자국의 힘으로 백과사전을 만들어 근대국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상징적 의미까지 가진 "일본백과대사전"까지 모두 13종의 사전 및 유서(백과사전)과 관련 서적에 대해 소개해 줍니다.

"사전"은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사전을 통해 당시에 관심을 가졌던 주제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게 핵심입니다. 해당 시기에 대해 가장 정확한 문화적인 맥락은 물론, 그것이 편찬되기까지의 사회 정치적 틀도 담고 있다는 시각도 인상적이었어요. '"도서 분류"야 말로 도서를 검색하는 사람들의 관심에 맞추어 모든 도서를 분류하는 체계를 갖추는,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문화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접점이며 한 치도 틀림이 없는 사상 표현의 하나라고 해도 좋다.'는 시각이 좋은 예입니다. 사전을 편찬한 인물들, 그리고 그 당시 사회가 어떠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할테지요. 우리가 업무를 진행하면서 별 생각없이 작업하는 일종의 카테고라이징과 그룹핑, 목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용도 이러한 저자의 사상을 충실히 뒷받침해줄만큼 자세하면서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당대 사전들에 대한 다양한 도판도 볼거리고요.

재미로 읽는 책은 아니고 지루한 부분이 없지는 않기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3점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본 문화사에 대해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일본이 참 부럽습니다. 이런 책이 출간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일본이 확실히 출판강국이구나 싶었거든요. 우리나라도 테마가 있는 역사책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하나의 주제로 원래 있던 역사를 엮어 놓은 것일 뿐 이렇게 아예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달리한, 그리고 재미까지 있는 책은 찾기 어려우니까요.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이런 깊이있으면서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책들이 보다 많아졌으면 합니다.

2018/09/09

만물의 유래사 - 피에르 제르마 / 김혜경 : 별점 1.5점

사물의 기원을 다룬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피에르 제르마가 1980년에 간행한 책입니다.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발견했는데, 잡학 사전류의 책을 좋아해서 주저없이 구입했습니다.

수록된 '만물'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백 개 항목에 대해 짧게는 몇 줄, 길게는 한두장 정도로 설명해 주는 구성입니다.
이 중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몇몇 사물들에 대한 정보는 고맙더군요. 비엔나 커피의 유래처럼요. 커피 찌꺼기를 싫어했던 비엔나인을 위해, 커피 찌꺼기를 걸러낸 후 커피액에 우유를 넣은 카페 주인 쿨크지스키의 아이디어였다네요. 익히 알려진 유래와 조금 달라서 기억에 남습니다. 비프 스테이크는 영국에서 프랑스로 전래된 요리로 워털루 전투 이해 유럽 전체에 퍼졌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프랑스 요리가 아니었다니 의외였어요.
이러한 정보들과 함께 하는 클래식한 도판들도 마음에 듭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삽화가 많은 덕분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항목들이 관심만 있다면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기는 합니다. 백과사전이 사양길에 접어든지 오래라는걸 다시금 깨닫게 해 주네요. 그나마 그냥 백과사전이라면 한두 장씩 읽는 재미는 있었을텐데, 지나치게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술이 더 큰 문제입니다. '라비올리'는 파스타의 한 종류일 뿐인데 구태여 프랑스식 이름을 갖추었다고 따로 항목을 만들어 설명하고, 민들레는 옛날부터 식용이었다는 설명 다음에 '프랑스에서 민들레 재배가 시작된건 18세기 말 부터이다' 등 프랑스에서의 설명만 이어지는 식으로요. 산업디자인의 창시자가 프랑스의 레이몽 뢰이라는 것은 오류를 넘어 왜곡 수준입니다. 이 바닥은 바우하우스가 앞선다는건 기본적인 상식이잖아요.

이렇게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위해 만든 시대 착오적인 사전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따로 찾아 읽거나 옆에 둘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런 책을 읽느니 그 시간에 네X버 지식 사전이나 뒤져보는게 나을거에요.

2015/02/16

처음 만나는 우리 문화 - 이이화 : 별점 2.5점

처음 만나는 우리 문화 - 6점
이이화 지음/김영사

백과사전처럼, 여러 문화사적 주제를 다루며 그 역사와 유래를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특정한 주제나 엄선된 항목보다는 저자가 생각나는 대로,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을 소개한 느낌이었어요. 이런 류의 만물박사형, '읽을 수 있는 사전' 스타일의 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사전, 시대를 엮다"에 나오는 메이지 시대 일본 백과사전(화한삼재도회)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처음 알게 된 내용이나 생각지도 못한 주제들도 꽤 있어서 기억에 남는 항목들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동학: 평등을 중요시. 양반·상놈, 적자·서자 구분을 없애고 모두를 "접장"이라 부름. 1914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동무"라는 표현이 평등 호칭의 예로 알려졌지만, 동학은 그보다 20년 앞섰음.

사대부집 여인의 태교: 일곱 가지. 음식을 고르게 썰어 먹고, 자리는 가운데에 앉고, 무거운 짐을 들지 않으며, 험한 길을 피하고, 위태로운 냇물을 건너지 않으며, 높은 마루에 오르지 않고, 부정한 말을 하지 않음.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걸고, 사내아이는 붉은 고추, 계집아이는 푸른 솔잎을 함께 꿰어 구분. 부정한 기운을 막기 위해 상중이거나 생리 중인 여성은 출입을 삼감.

소주의 유래: 고려 중기 원나라 군이 장기 주둔하면서 가져온 증류 기술이 안동에 전해져 전통 소주가 만들어졌다고 함.

북촌: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 명문가들이 북촌에 거주. 몰락한 양반들은 남산 밑에 모여 살았음. 북촌 골목은 대문 앞 말 탄 벼슬아치들이 지나기 위해 일부러 꼬불꼬불하게 만들었으며, 말이 지나갈 땐 하인이 "물럿거라" 외쳐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피맛골이 생김.

신라의 종이: 중국에서도 명품으로 인정받음. 하얗고 반질반질해 "백추기"라 불렸고, 주로 절에서 제작. 이 전통은 조선까지 이어져, 종이와 관련 기술은 거의 절에서 전수됨. 한지로 여성 생리대도 만들었음.

다만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보다는 개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짜장면이나 고무신, 전차 도입 등은 다른 사료에서 더 자세히 다뤄졌던 내용이라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주제를 소개하는 방식이 매력이라지만, 너무 산만하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또한 이 책에 나온 정보들이 확정된 사실인지, 하나의 설에 불과한 것인지 애매한 것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윷놀이의 유래"입니다. 이 책에서는 부여의 행정구역인 "사출도"에서 비롯됐다고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 상징사전에 따르면 확정된 사실은 아니라고 하니까요.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고, 도판도 충실한 편이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깊이 있는 정보는 다른 책에서 보충하면 되고, 이 책은 우리 문화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학생이나 청소년들에게 특히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9/03/03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 아서 코난 도일 / 레슬리 S 클링거 주석 / 승영조 : 별점 4점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 8점
아서 코난 도일 원작, 레슬리 S. 클링거 주석, 승영조 옮김/북폴리오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1004쪽이라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분량에 걸맞는 무게를 자랑하는 책이기에 읽는 것 자체가 좀 힘들더군요. 태어나서 읽은 책 중 두껍기로는 순위를 다툴 것 같습니다... 어쨌건 이 책은 명탐정의 대명사인 진퉁 고전 셜록 홈즈 시리즈 중 첫번째, 두번째 단편집인 "셜록 홈즈의 모험" 과 "셜록 홈즈의 회고록" 두개의 단편집에 더불어 작품별 상세한 주석, 관련 자료 등을 추가하여 편집한 책으로 두 단편집 모두 진작에 완독했지만 관련 자료가 워낙에 풍성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 단편집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셜록 홈즈 시리즈이기도 했고 말이죠.

일단 몇가지 아쉬운 점을 먼저 짚어 보자면, 일단 셜록 홈즈 작품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불친절한 주석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습니다. 초반에 범인을 밝혀 버리고 다른 작품 범인도 알려주는 주석이 많다는 것이 그러하고요, 또한 홈즈와 왓슨을 "실존인물"로 단정짓고 주석과 관련 자료를 첨부한 것도 읽다보면 좀 혼란스럽고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라는 짜증이 날 정도로 너무 세세한 부분에서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설명하는 주석도 많더군요. 연구자나 셜록키언을 위한 책이니 감안해야겠지만 왓슨을 "제임스"라고 부른 것에 대한 방대한 논의 같은 것은 정말이지 필요없는 내용이 아니었나 싶어요. 제가 보기엔 그냥 작가의 실수일 뿐인데...
아울러 구입 당시에 먼저 이야기했던 종이질 같은 책의 완성도가 미흡한 것 역시 아쉬웠습니다. 종이질야이 그렇다 치더라도 책을 다 읽을때 쯤 되니 책의 무게 탓인지 제본이 끝부분에서 깨져 나가기 시작했거든요. 이럴거면 왜 이 두께로 냈는지 조차 의심스러워요. 차라리 여러권으로, 최소한 "모험"과 "회고록"을 나눠 2권으로 내 놓았어도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거 아닙니까? 두께 탓에 폼은 나지만 그 외의 보관, 휴대, 독서, 완성도는 모두 떨어집니다...

불만이 좀 길긴 한데 그래도 "돈 값은 한다" 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정가가 아니라 제가 구입한 금액인 17,800원일 때 만족도가 보다 상승하긴 하겠죠. 페이지당 약 17원밖에 안하는 저렴한 가격이 일단 매력적이니까요. 또한 작품들 모두 새롭게 번역되어 다른 판본들과는 다른 맛을 전해 줄 뿐 아니라 셜록 홈즈가 활약한 19세기 후반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각종 도판 및 주석, 여러 셜록키언과 셜록 홈즈 연구자들의 짤막한 논문과 주장 등을 책 한권에서 셜록 홈즈 이야기 본편과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여러 연구자들이 셜록 홈즈 "정전 (이른바 카논)" 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논하며 작품의 단점이나 불합리성을 지적한 부분, 고증에 대해 지적한 부분들은 추리소설을 창작하는 사람 입장에서 정말 눈여겨 볼 항목들이었고요. 예를 들자면 제가 최고 걸작이라 생각하고 있던 "붉은 머리 클럽"의 맹점 -"붉은 머리 클럽을 해산한 시점의 불합리성 / 은행에 보관한 금화의 불합리성 등" - 을 지적한 부분에서는 정말이지 무릎을 칠 만 하더군요.

그 외에도 홈즈 영상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비롯하여 얼룩끈에 등장한 독사는 무엇이었나에 대한 연구나 홈즈와 왓슨의 권총 연구와 같은 작품에 관련된 셜록키언들의 갖가지 짤막한 논문들과 홈즈 연표까지 실려 있어서 거의 셜록 홈즈 백과사전이라 칭할만 합니다. (물론 나머지 2, 3권까지 갖춰야 진정한 백과사전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겠지만요...) 덧붙여 대표적인 셜록키언, 셜록 홈즈 연구자로 추리소설가 도로시 L 세이어스, 도널드 녹스의 예가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고 제가 이미 구입해서 가지고 있는 베어링 굴드의 셜록 홈즈 평전이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팬이자 소장자로서 기분좋은 일이기도 했고요. (이 책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했더랬죠)

한마디로 "정전 (카논)" 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팬들은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5점 만점에 4점입니다. 팬으로서 이런 책이 존재하고 출간되었다는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니까요. 그래도 정가대로 2, 3권이 출간된다면 과연 구입하게 될 것인지는 심각하게 고민할 부분이긴 합니다.... 1권을 40% 할인 가격에 파는 것을 이미 봐 버렸으니....

2004/04/30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 - 량셔우쭝 / 김영수, 안동준 : 별점 4점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 - 8점
량셔우쭝 지음, 김영수. 안동준 옮김/김영사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중국 역사에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무협소설의 역사와 그 줄기를 치밀하게 추적한 일종의 무협 백과사전. 잘 알려진 "삼국지"나 "수호지"는 물론이고 요사이 드라마화 된 "사대명포"나 "칠협오의"같은 고전, 그리고 김용과 양우생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무협 소설까지 이쪽 장르의 모든 것을 간단한 줄거리와 더불어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무협의 요소, 특히 "협"이라는 관점에서 일관되게 그 역사와 내용을 파고들어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단순히 역사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고사나 여러 시가들, 그리고 당시 사회 분위기와 실제 역사 및 여러 무공이나 무기 등의 설명 역시 자세한 편이에요.
특히나 무협소설을 하위 문학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반론하듯 무협소설은 중국의 생활과 문화, 모든것을 담고 있는 하나의 문화 그 자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작가의 생각도 잘 표현되어 있어서 무협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홀딱 반할 수 밖에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것은 책의 거진 50%를 김용 관련 글로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주루주 (촉산전)나 다른 양대 산맥인 양우생, 그리고 고룡 (초류향 시리즈) 등의 설명도 충실한 편이긴 하고, 김용이라는 작가의 대단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이 너무 크다보니 원래 의도하고 있는 "무협 백과사전"으로서의 가치는 좀 약해지지 않았나 싶거든요.

그래도 무협소설에 대해 이만큼 알려주는 책은 찾기 힘들죠. 별점은 4점입니다. 무협소설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관련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뒷부분에 부록처럼 실려있는 국내 무협소설가 금강이 서술한 '한국무협소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자료적 가치가 본편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글이라 생각되네요.

2015/02/24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 로버트 템플 / 과학세대 : 별점 3점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 6점
로버트 템플 지음, 조지프 니덤 서문, 과학세대 옮김/까치글방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저본으로 하여, 중국이 3,000년 동안 세계 최초로 이룩한 발명과 발견을 200여 점의 도판과 함께 농업, 공학, 수학, 의학, 음악, 물리학, 수송, 전쟁기술 등 100가지 항목으로 편집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책 소개 인용)

중국 고대 발명품과 발견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 이런 류의 '읽을 수 있는 백과사전'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 책도 기본적인 재미는 물론 설득력을 높여주는 도판이 많이 실려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 항목도 100가지나 되어 내용도 풍부했고요.

내용이 많다 보니 요약은 어렵고, 인상 깊었던 것 몇 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 복동식 피스톤 풀무 :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기계같은 느낌의 이름인데 피스톤을 밀고 당길때 모두 바람이 나오게 하는 것이 전부인 일종의 자동 밸브. 그러나 이 단순한 발명품이 기원전 4~5세기 (!)에 등장한 덕분에 중국의 모든 산업 (특히 제철과 같은 야금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니 허투루 볼건 아닙니다.
  • 크랭크 핸들 : 지금도 이런 저런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레바퀴 측면에 막대기를 끼워 손잡이로 삼아 돌리게 만든 발명품. 비슷한 것을 서양에서 생각해 내기까지는 무려 1,10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어떻게보면 참으로 단순한 것인데... 의외였어요.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것이었을까요?
  • 천연 가스 채굴 :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천연 가스를 채굴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순전히 인력으로 평균 900미터에 달하는 구멍을 팠다는 것 (주로 소금 채굴을 위해), 여기서 나오는 가스를 잘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고안 역시 대단했습니다. 잘만 활용했더라면 고대 중국을 무대로 한 스팀 펑크 스타일 SF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대나무에 저장한 천연가스를 활용한 동력원!
  • 칠 : 옻칠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소재인데 일종의 니스로 플라스틱과 같다고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태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특유의 보존력, 강도, 내구성을 볼 때 그렇구나 싶기도 했어요.
  • 성냥 : 여태 서양의 누군가 개발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최초는 북제 왕조의 여관들이 유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 성 호르몬 추출 : 소변에서 성 호르몬을 추출했다는 것이 기원전 125년전의 회남왕의 서적에 적혀있다고 합니다! 불을 이용한 승화, 강제 증발 이외에도 증류수를 넣은 뒤 태양열로 자연 증발시켜 얻었다고 하네요. 아울러 남녀 소변을 구별하여 제조하고 싶은 호르몬 종류에 따라 소변 혼합 비율을 바꾸었기 때문에 결과물인 "추석"은 어느 경우는 안드로겐 (남성 호르몬)이 많았고 어느 경우는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이 많았다고도 합니다.
  • 지리 식물학 : '특정 광물질이 많아 다른 식물들은 잘 자라지 못하는 토양에서도 번성하는 식물들을 가지고 탐광하는 것'으로 이런 학문이 있다는 것부터 처음 안 사실입니다. 고서 "산해경"에 "혜당은 금광 근처에서 자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근거이며, 이후 1421년의 "경신옥책"에서는 금은 순무에, 은은 수양버들에, 동은 인도산 괭이밥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한 학문으로 자리잡은 듯 합니다. 광물의 미량원소가 실제로 특정 식물에 존재하며 거기서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 참고로 예전에 전파과학사 문고 "과학사의 뒷얘기"에 실려있던, 토마스 챌러너 경이 요크셔에서 명반석 광상을 발견한 것이 유럽 최초의 지리식물학적 탐광 사례라고 합니다. 1600년 경의 일이죠.
  • 지진계 : "갤러리 페이크"에도 나왔던, 용 입의 구슬이 두꺼비로 떨어지는 기계로 도판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실려있습니다. 실제 어떻게 동작했는지까지 알려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지진"과 "단순 진동"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지진계 옆에서 아이가 뛰어놀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인쇄 : 중국에서 인쇄는 대단히 활발했다고 하는데 10세기 어느 불교도 문집은 지금도 40만부 이상이나 남아있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얼마나 찍었을지 상상도 안되네요. 40만부 이상 남아있는 것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골동품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도 궁금하고요. 인쇄에 관련된 상세한 설명 - 인쇄에는 유실수를 사용한다. 침엽수에 포함된 수지는 먹이 균일하게 칠해지는데 방해 작용을 하기 때문 등 - 도 볼거리였어요.

마지막으로 "대나무"가 서양에서는 나지 않아서 중국의 획기적인 신기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시각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만큼 튼튼하면서도 속이 비어있어서 가벼운 재료가 없었기 때문으로, 대표적인 예로는 선박의 "활대"를 들고 있는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도 있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은 재미없는 부분은 너무 재미없다는 것, 그리고 조지프 니덤의 원저를 베이스로 새롭게 추가하고 엮은 내용이라고 하는데 억측이 상당히 많아서 모든 것을 믿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해당 기술이나 발견의 시기를 단어나 문장 몇마디 가지고 굉장히 오래전 것으로 정의한다던가, 유럽에서의 발견도 중국인에게서 유래되었다고 추측하는 식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사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가 중국인이 먼저 개발했던 석궁을 보고 도시 방어용 무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 중국에서 "대진"이라고 불리운 시리아와 교역을 하였다는 것을 증거로 대는 정도인데 이 정도는 증거도 뭐도 아니죠. 지리 식물학 이야기에서 고서 "산해경"에 "혜당은 금광 근처에서 자란다"라고 기록된게 근거라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근거치고는 많이 약해요. 실제 혜당이 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말이죠. "문자"에 쓰여진, "옥이 묻힌 곳에는 나뭇가지가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글이 단순 지리 식물학이 아니라 식물의 생리적 상태까지 간파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고요. 이런 억측은 우리에게는 동북공정과 같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어서 더욱 신경이 쓰이네요. 이 책에 따르면 불국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중국에서는 자기들 유물이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아울러 내용에서 단순 년도만 표기하지 말고 해당 시기 중국의 왕조는 무엇이었을지 정도만이라도 함께 써주는 배려가 없는 것도 아쉬웠으며, 번역도 괜찮은 편이지만 장기 이야기에서 "포"를 "로켓 소년"이라고 번역한 것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한국어로 재 번역할 때 당연히 걸러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을까요? 중국 장기는 뭐가 조금 다른건지...

그래도 관련된 사료도 충실하고 도판도 만족스러운 수준일 뿐더러 첫 발견 시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은 수긍이 가기에 아주 폄하하기는 어렵군요.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 50% 할인 가격에 구입했기에 더 만족감도 크고요.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책보다는 영상 다큐멘터리로 보는게 더 낫지 싶긴 하네요.

2020/01/12

중국요리 백과사전 - 신디킴, 임선영 : 별점 2.5점

중국요리 백과사전 - 6점
신디킴.임선영 지음/상상출판

부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진짜 중국 음식'으로, 중국요리의 정석이라고 하는 8대 요리 - 루차이 (산둥요리), 촨차이 (쓰촨요리), 웨차이 (광둥요리), 쑤차이 (장쑤요리), 저차이 (저장요리), 민차이 (푸젠요리), 샹차이 (후난요리), 후이차이 (후이저우요리) -와 기타 지역별으로 대 분류를 나눈 뒤, 각 분류별 주요 요리를 3~4페이지씩 할애하여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90개가 넘는 요리에 여러가지 기타 정보가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각 요리별 소개는 말씀드린대로 3~4 페이지 분량에 불과해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로 그 맛과 유래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어서 불필요한 설명도 별로 없고요.
또 8대 요리에 대한 설명이 요리별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는게 눈에 뜨입니다. '루차이, 즉 산둥 요리의 핵심은 육수로 "군인의 창, 요리사의 탕"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쓰촨의 매운 맛은 화자오와 고추가 조화된 '마라'의 맛이며, 광둥 요리는 제철 음식과 식재료의 궁합을 중하게 생각한다. 장쑤 화이양 요리에서는 칼을 절묘하게 쓰는 요리가 많다. 저장 요리는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식입니다.

'딤섬'을 소개하며 그 종류 - 빠오, 자오, 까오, 펀, 퇀, 쑤 등 - 를 알려주는 것처럼 음식의 종류는 물론, 중국 4대 민물고기는 '황하의 잉어, 송강의 농어, 흥개호의 대백어, 송화강의 쏘가리'이며 저장 요리의 3대 보물은 '룽징차, 사오싱 황주, 진화햄'이라는 등 재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샤오롱빠오는 워낙에 존엄하기에 초간장에 적신 생강채를 만두에 가져가는게 원칙이라는 식문화 관련 내용 등 관련되어 소개되는 정보가 실로 깊고 범위 또한 넓으며, 처음 알게 된 내용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배추의 탄생이 천여년 전 중국 장강 이남에서 즐겨 먹던 채소 숭차이가 북방에 전해졌는데, 추운 날씨에서 잘 자라지 않자 북방에서도 잘 자라는 순무 우징과 교배시킨게 유래라는 이야기 등이 그러합니다.
전세계에 퍼진 화교의 요리가 주로 푸젠과 광둥 요리인 이유도 그럴듯 했어요. 중원지역 한족들이 청나라의 침략 때문에 푸젠 지방으로 피난을 간 뒤,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개방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간게 계기라고 하네요. 나가사키 짬뽕을 만들어 낸 천핑순도 푸젠 사람이었죠.

오래된 문헌과 자료에만 의지하는게 아니라 최신 정보에 기반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쓰촨요리 푸치페이펜이 '2017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올해의 애피타이저 상을 수상하였는데, 영문이름은 Mr and Mrs Smith였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푸치는 부부, 페이펜은 허파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허파가 아니라 여러가지 소 내장을 재료로 쓴다는군요. 데친 뒤 썰어낸 소 내장을 고추기름, 화자오, 깨, 참기름, 간장 등으로 양념하는 요리라는데 차가운 곱창볶음 비슷해 보입니다.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상세하지는 않지만 대략의 맛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준의 레시피가 수록된 것도 마음에 듭니다. 불과 웍을 자유자재로 다루어야 하는 요리들이 많아서 집에서 해 먹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건 아쉽지만요. 이 중에서는 국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레시피들이 인상적입니다. 대표적인게 궈바오러우에요. 우리나라에 알려진 '찹쌀 탕수육'이라는 명칭과는 다르게 찹쌀은 중요하지 않고, Double Cooked Pork Slices라는 영어 이름처럼 두 번 나누어 튀기는게 핵심이라는군요. 1차로 고기를 약불에 오래 튀겨 익히고, 2차로 센 불에 빠르게 퀴겨 색을 입히는게 비결이라나요.

이렇게 많은 요리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먹고 싶었던걸 한 가지 꼽으라면 당나귀 고기 화덕 빵 샌드위치인 뤼러우훠사오를 꼽겠습니다. '천상에는 용 고기, 지상에는 당나귀 고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는 당나귀 고기를 육식 중 최고로 꼽는다니 그 맛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죠. 고기를 12시간 정도 끓여내는 동안 맛을 살리기 위해 제가 질색하는 중국 향신료도 거의 쓰지 않는다니 왠지 제 입맛에 딱 맞을 것 같고요. 당 현종이 제위 전 허베이성 허지엔에 들어 이 음식을 먹고 갔다는 등 유서까지 깊으니 호기심이 무척 동합니다.

또 이미 접했었던 요리가 소개되는 것도 반가왔습니다. 유명하기 그지없는 동파육, 궁바오지딩, 마파두부, 샤오롱빠오, 훠궈, 탄탄멘 등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일테고, 그 외에도 국내에서 체인점으로 접했던 '꺼우부리빠오주 (구불리 만두)', 남경 출장 때 접했었던 차가운 오리 요리 '옌수이야', 옛날 구로동 중국인 거리에서 처음 먹어보았던 맵디 매웠던 닭볶음 '라즈지' 등은 나름대로 추억도 떠오르고, 그 맛도 떠올라서 읽는 내내 무척이나 흐뭇했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여럿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지역별 요리를 대표하는 요리로 선정되어 소개되는 요리들이 무슨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겁니다. 단지 저자가 알고 있는 요리라서 소개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해당 지역 요리를 대표하는 요리인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북경 오리는 물론 거지닭, 불도장, 빠바오판, 딤섬, 동파육, 띠산센, 마라롱샤, 마라탕, 마파두부 등 몇몇 요리들은 그 유명세가 익히 국내에도 알려져 소개가 납득이 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요리들은 왜 그게 대표 요리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연길 냉면이 여기 수록될 정도의 중국요리라는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연길 냉면이 중국 10대 면 요리에 선정되었다는게 이유라면, 다른 10대 면 요리는 왜 다 소개하지 않는지 그 이유도 불명확하고요. 심지어 마카오 에그타르트가 소개되다니,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된다고 생각되네요.

또 중국 발음과 중국어 한자를 그대로 쓴 표기 방식은 정말이지 최악입니다. 발음이야 그렇다쳐도 원래 이름을 간체가 아닌 일반 한자체로 표시해주었다면 그래도 그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으로서는 초보자 수준의 짐작에 그칠 뿐이라 답답했거든요. 레시피도 가지된장볶음 장체즈 항목에서처럼 '집에서 따라할 수 있다', '오늘 당장 해 먹어 볼 수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정확한 분량과 그 방법을 소개하지 않은 건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실제로 소개 자체가 간단해 보여서 양념 분량만 정확하게 알려주었더라면 도전해 보았을텐데 말이죠. 그 밖에도, 대분류별로 분량이 일정치 않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도판도 좋고 내용도 재미있지만 자료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조금 부족해 보여서 감점합니다. 재판이 나온다면 분류와 요리 선정에 있어서 학술적인 근거가 좀 더 뒷받침된다면 좋겠습니다.

2014/07/28

포토로그 신화와 전설 - 필립 윌킨스 / 김병화 : 별점 3점

신화와 전설 - 6점
필립 윌킨스 지음, 김병화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신화-전설 백과사전으로 전 세계 각지의 신화와 전설을 집대성하여 다양한 풀컬러 도판과 함께 소개해주는데 그야말로 양과 질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전식 구성으로 모든 주제가 도판 포함해서 한 장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좋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베다 - 라마야나 - 마하바라타를 중심으로 신들과 신화, 전설을 소개해주는 힌두교 부분이 여러모로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읽으면서 "3×3 아이즈"라던가 "신들의 사회"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장르물들을 접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라던가 오딘, 아서왕 전설과 같이 익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대량 포함된 서구권 신화, 전설이 거의 1/3을 차지하며, 일본의 신화 비중이 불교 비중보다 많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전체적인 비중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 들어요. 한 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요약이 지나친 탓에, 깊이 있는 내용을 얻기 조금 어렵다는 단점도 있고요. 번역과 교정도 조금 미흡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전 세계 신화와 전설에 대해 기본적인 수준의 지식은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심지어 저는 알라딘 15주년 기념행사로 10,000원이라는 가격에 구입하기도 했으니까요. 만화책도 비싼건 만 원 가까이 하는 현실에서 300페이지가 넘는 풀컬러 양장본이 만 원이라니... 가성비만 놓고 보았을 때는 별점 5점도 충분합니다!

2018/12/29

술 취한 식물학자 - 에이미 스튜어트/ 구계원 : 별점 3점

술 취한 식물학자 - 6점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구계원 옮김/문학동네

부제인 "위대한 술을 탄생시킨 식물들의 이야기" 그대로 을 만들때 사용되는 다양한 식물들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친숙한 사과나 보리, 포도, 쌀 등 고전적인 술의 원료에서 시작하여 바나나와 카사바와 같은 이색적이고 독특한 재료들,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 꽃과 나무, 열매들, 견과류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망라되고 있습니다. 이 재료로 만들어진 술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관련된 칵테일 레시피도 50여가지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요. 집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재료인 경우, 그 재배법까지 실려있고요.

분량도 400여 페이지를 훌쩍 넘어서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마시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술에 대한 소개입니다. 켄터키 버번이 첫 번째입니다. 켄터키가 지금과 같은 버번의 땅이 된 이유가 아주 매력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옥수수가 재배하기 쉬웠고 초기 이민자들이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출신이라 증류기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풍부한 석회암 매장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석회수는 지하에서 솟아 나올 때 1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이 온도는 냉각과 응결 과정에 꼭 맞는 완벽한 온도라네요. 석회수의 높은 알칼리성과 풍부한 칼슘, 마그네슘, 인산 함유도 맛을 더해주는 요소고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한 번 구입해야겠어요.
담배로 만든 술인 프랑스의 "페리크 리쾨르 드 타박"도 맛보고 싶습니다. 니코틴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데 과연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합니다. 참고로 담배로 고급 술집에서 수제로 "시가 비터즈"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담배와 향신료를 알코올 도수 높은 증류주에 우려내는 것으로 지나치게 많은 니코틴이 함유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군요.
포틀랜드 증류업자 스티븐 매카시의 갖은 노력으로 완성된 미송 증류주도 탐납니다. DOUGLAS FIR BRANDY 라는 술인듯 한데 1년에 250상자만 제조하는 술 치고는 가격도 5만원대로 저렴하군요. 우리나라에서 구하려면 그 배를 주어도 구하기 어렵겠지만요.

갖가지 토막 상식도 재미를 더합니다. 금주법 시행 당시 캘리포니아의 포도 재배 업자들은 "과일 벽돌"을 팔았다고 합니다. 포토를 말려서 압축한 뒤 와인 제조용 효모와 묶은 상품으로 물을 더하면 양조가 시작되는 물건이었다는군요. 아이디어가 정말 빼어나죠?
또 프랑스 포도나무는 19세기 포도나무뿌리진디에 의해 초토화 된 후 미국 포도나무와 접목하여 살아남은 것이며, 현재의 칠레 와인이 포도 나무 뿌리 진디 이전의 포도나무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이유 외에도 칠레 와인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은 셈입니다.
호밀이 맥각균에 감염되면 LSD 성분이 생기고, 이 맥각중독이 중세의 무도병의 원인이라는것도 마찬가지로 처음 알았고요. 마약 중독자라면 호밀 재배를 시도해봄직 하겠네요.
"그로그"는 영국에서 선원들에게 럼을 배급할 때 홀랑 마셔버리지 않게 물과 라임 주스, 설탕을 섞어 배급한 음료입니다. 그런데 럼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선원들의 의심이 커지자 비중을 증명하기 위해 럼과 화약을 섞어 불을 붙이는 테스트를 했다는군요. 대략 57% 정도의 알코올이 함유되어야 불이 붙었다는데, 이 테스트 결과를 "프루프 Proof" 로 제시한 것에서 현재의 프루프 단위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즉 57%의 알코올이 함유된 병은 100 프루프인 것이죠. 미국에서는 더 간략화해서 50%의 알코올이 100 프루프고요.
그 외에도 중국 요리에 많이 사용하는 "팔각"은 허브 리큐어에도 사용되지만 독감약 "타미플루"의 원료이다, 스위트 우드러프라는 여러해살이 풀의 "달콤한 풀내음"은 잠재적 독성 성분인 쿠마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표시이다는 등의 설명도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풀내음에 대한 설명은 정말 맞는 말인지 궁금하네요. 달콤한 풀내음을 가진 풀은 많으니까요. 의외로 우리나라 들판에도 독초가 가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록된 칵테일 레시피도 볼게 많은데, 감자로 만든 보드카인 스웨덴의 칼손스 골드 보드카로 만든 "블랙 골드"는 심플함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칼올드패션드 글래스에 얼음을 채운 후 그 위에 칼손스 골드 보드카 1과 1/2온스를 붓고 후추를 갈아 뿌리는게 전부거든요. 상당히 터프한 느낌인데 맛이 궁금하네요.
사케 칵테일은 니코리 사케 4, 망고 복숭아 주스 2, 보드카 1, 도멘 드 캉통 진저 리큐어 소량을 잘 섞은 뒤 칵테일 잔에 따르고 셀러리 비터즈 한 방울을 떨어트려 만듭니다. 대충 느낌은 복숭아맛 호로요이 느낌이 아닐까 싶군요.

이렇게 많은 정보가 수록된, 술과 관련된 식물의 백과사전이라 해도 무방한 책으로 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소장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단순 정보의 나열 뿐이라 읽는 재미가 덜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8/12/31

2018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7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15차, 열 다섯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8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40 (52)권, 기타 장르문학 3 (3)권, 역사서 9 (1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8 (9)권, 기타 도서 21 (20)권으로 모두 91 (101)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 작년보다는 독서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한달에 7~8권 수준이면 뭐 나쁘지는 않네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8년 베스트 추리소설 :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올해 추리 분야 도서 중 유일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소설이 아니라는게 유일한 단점입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2018년 워스트 추리소설 : "유령탑" 

사실 모리 히로시의 사이카와 모에 시리즈 중 한 권인 "지금은 더 이상 없다"도 올해 별점 1점을 받은 망작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과 그림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고 팔아먹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빠 단독 워스트로 선정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과 설명을 제외하면 건질만한 부분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디 다른 분들은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8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3권, 그 중에서도 두 권만이 정식 출간된 책이라 따로 선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발 살인사건""마음의 지배자" 모두 좋았어요. 두 작품 모두 단편집인데 별점 4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말이죠.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8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원더랜드"

역사 관련 서적을 10권 이하로 읽은건 오랫만이네요. 다행히 별점 4점짜리 책은 언제나처럼 존재합니다. 유희와 놀거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한 이 책입니다. 제 리뷰로는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취미와 오락, 유희 관련 문화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년 워스트 역사 도서 : "만물의 유래사" 

미시사 서적과 백과 사전류를 좋아해서 충동 구매한 책인데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위해 만든 시대 착오적인 결과물입니다. 확실히 백과 사전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2018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늑대를 요리하는 법"

올 한해 제법 많이 읽었는데 별점 4점짜리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은 충분했을터라 베스트 도서로 선정합니다.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참고가 될 내용도 많은 좋은 책이에요.

2018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소주 이야기"

미시사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두서가 없고, 소주 자체에 대한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저자 스스로 석달 자료 조사를 거쳐 열흘 만에 쓴 책이라고 하는 말 만큼이나 내용이 두서없는 졸작입니다. 저렴한 가격만이 장점입니다.

2018년 베스트 기타 도서 :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이번 해에 기타 도서의 베스트는 별점 4.5점에 빛나는 이 책입니다. "깃털",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아주 오래된 서점"의 별점 4점 트리오는 조금 아깝네요.

2018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올해 기타 도서는 별점 2점 아래가 없어서 워스트는 딱히 꼽지 않겠습니다. 별점 2점으로 워스트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결산평 : 15년 째라니... 강산이 변해도 이제 한번 반이 변했네요.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냈다는게 너무나 기쁩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0/06/11

에도 일본 - 모로 미야 / 허유영 : 별점 2.5점

에도 일본 - 6점
모로 미야 지음, 허유영 옮김/일빛

바쿠후 시대의 에도의 문화와 풍속을 다룬 미시사 서적입니다. 크게 음식 - 생활 - 오락 - 사랑 - 바쿠후 - 의협 - 괴담으로 목차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에도 문화를 다루는 것은 사랑까지고 바쿠후는 바쿠후 쇼군들의 간략한 소개, 의협은 쥬신쿠라 이야기, 괴담은 한시치 체포록의 한 단편을 실어놓은 것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음식 - 생활 - 오락 -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다행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음식"의 경우, 바쿠후시대의 에도는 동시대 세계 다른 어느곳 보다도 외식문화가 발전했던 곳이었다던가, 복어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왔지만 장어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무젓가락이 에도시대 우나돈 식당 주인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생활" 부분에서의 기모노와 화장 등은 저자가 여성이기 때문인지 관심가졌던 분야 같은데 역시 새롭게 알게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작가가 소개한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화장사"를 구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단지 사랑뿐만이 아니라 요시와라와 같은 유곽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정보가 많지만 유녀와 하룻밤 보내는데 모두 합쳐 거의 100냥 (1냥은 12만엔 정도?) 정도 들었다는건 놀라왔습니다. 지금 돈으로 1억이 넘으니 어마어마하잖아요? 에도시대 유명한 부호였던 기노쿠니야의 기행 같은건 독립된 이야기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요.

그 외의 내용도 백과사전같은 재미는 충분합니다. 예를 들면 에도시대 의적으로 알려진 괴도 네즈미코조에 대한 이야기같은 것이죠. 10년동안 다이묘저택 19곳을 도둑질해서 모두 3,200냥정도의 돈을 훔쳤다니 놀라울 뿐이네요. 실존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보를 직접 접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처형당한 뒤 묘지가 도쿄 스미다구 에코인(回向院)에 위치하는데 비석 조각이 수험생들 호신부로 인기라고도 하니 (모든 관문 통과!) 다음에 도쿄에 가게 된다면 한번 찾아가 봐야 겠습니다.^^ 잠깐 찾아보니 근처에 에도박물관도 있네요.

절반정도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고 너무 잡다한 내용을 모아놓은 느낌도 강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그래도 이 책에서만 알 수 있었던 것들도 많아서 자료적 가치는 충분한 만큼 에도에 대해 관심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도 재미있게 잘 쓰여진 편입니다.

2011/09/03

연쇄살인범 파일 - 헤럴드 셰터 / 김진석 : 별점 3점

연쇄살인범 파일 - 6점
헤럴드 셰터 지음, 김진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연쇄살인의 정의에서 시작해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의 사례는 물론 그들의 최후와 미결 사건들, 그리고 연쇄살인범과 관련된 다양한 서브컬처까지 담아낸,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연쇄살인 백과사전입니다.

과거 콜린 윌슨의 저서에서 접했던 내용을 가볍게 뛰어넘는 방대함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푸른수염 질 드레, 마리 드 브랭빌리에 등 역사적 인물에서 시작해 17~19세기를 거쳐 2000년대까지 거의 전 시대를 망라합니다. 슈퍼스타이자 원조 격인 잭 더 리퍼는 물론, 샘의 아들 버코위츠, 보스턴 교살자 드살보, 언덕의 교살자들 비안치와 부오노, 고속도로 살인자 보닌, 새크라멘토의 뱀파이어 데이비드 카펜터, 미친 짐승 안드레이 치카틸로, 캔디맨 딘 코얼, 밀워키의 식인종 제프리 다머, 달빛 광인 앨버트 피쉬, 살인 광대 존 웨인 게이시, 플레인필드의 시체도둑 에드 게인, 고릴라 살인자 넬슨, 소년 미치광이 제시 포메로이, 나이트 스토커 리처드 라미레즈, 붉은 거미 루시안 스타니악, 조디악 등 그 수를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소개됩니다.

또한, 서구에 집중된 다른 저서들과 달리, 타 문화권 범죄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담긴 점도 마음에 듭니다. 20세기 최악의 연쇄살인범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콜롬비아의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비토(1992년부터 7년 동안 140명 이상 살해), 아이들을 100명 죽이는 것이 목표였고 결국 달성했다는 파키스탄의 자베드 이크발, 안데스 산맥의 괴물 페드로 로페스(110명을 살해했다고 자백), 미해결 상태인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괴물 사건, 중국의 매춘부 살인자 리 원시엔(홍콩에 떠내려온 잔혹한 피해자의 사체로 서방 세계에 정체가 알려짐) 등의 정보는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들었거든요. 추후 증보판에는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다룬 범죄자들이 추가되면 더욱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과학적, 역사적인 고찰도 포함되어 있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깊이가 아주 깊거나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중세의 늑대인간 전설을 사이코패스와 연관 지은 것은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사체의 상태를 고려하면, 당시 사람들이 짐승의 짓이라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죠. 또한, 거의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유년 시절을 겪었거나 머리에 외상을 입었다는 설명(물론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두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인물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프로파일링 관련 이야기 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연쇄살인범들이 체포된 계기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찰의 집요한 노력 외에도 범인의 실수나 순전한 우연이 작용한 경우가 많더군요. 대표적인 사례로, 릴링턴가의 괴물 존 레지널드 크리스티는 부엌 찬장에 시체 3구를 숨기고 벽지만 바른 뒤 이사를 갔다가 덜미를 잡혔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의 ‘제프리 다머’라 불리는 데니스 닐슨은 토막 낸 사체를 화장실에 버리고 물을 내리다가 건물 파이프가 막혀 발각되었다고 하네요.

너무 많은 주제를 담아내려다 보니 편집이 다소 혼란스럽고, 목차와 색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검색이 어렵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또한, 특정 인물이 여러 주제에 중복되어 등장하는 문제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소장할 만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충실한 각종 자료와 괜찮은 도판 등 여러모로 볼거리도 많은 편입니다. 너무 끔찍한 내용이 많아 남에게 권하기는 힘든 책이지만, 순수하게 자료적 가치로만 평가하면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집에 이 책을 두면 근처의 원귀들이 모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드는군요...

2005/06/08

추리소설 필독서 16선이라는 목록을 보고...

추리소설 필독서 16선?! 

산왕님 포스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추리소설 목록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2. 오리엔트 특급살인 ~ 애거서 크리스티
  3. Y의 비극 ~ 엘러리 퀸
  4. 통 ~ 프리먼 윌스 크로포츠
  5. 바스커빌의 개 ~ 코난 도일
  6.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 엘러리 퀸
  7.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 존 딕슨 카
  8. 벌거벗은 얼굴 ~ 시드니 셀던
  9. 불새의 미로 ~ 유우제
  10.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11. 노란방의 비밀 ~ 가스통 르루
  12. 그린 살인사건 ~ S.S. 반 다인
  13. 환상의 여인 ~ 윌리엄 아이리쉬
  14. 최후의 증인 ~ 김성종
  15. 천사와 악마 ~ 댄 브라운
  16. 다빈치 코드 ~ 댄 브라운
모 무가지의 어떤 기자가 작성하셨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글 치고는 국내 추리소설이 2편이나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척 환영할 만 하네요. 저도 무척 좋아하는 "Y의 비극"이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전 걸작 "통"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반갑고요.

하지만 걸작이긴 해도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이 3 작품이나 포함된 것은 좀 아쉽고 대체로 작가의 지명도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 합니다. 예전 "명탐정 추리특급" 어쩌구 류의 백과사전에서 나올법한 정보인거 같기도 하고요.
또한 목록의 5, 6번은 유명세에 비한다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니며 홈즈 시리즈의 진정한 걸작은 단편선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좀 의외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편선집이 포함되지 않은 장편 위주의 선정이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불만스럽습니다. 얼마전에 읽었었던 쓰레기 "벌거벗은 얼굴"이 대체 왜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겠고요. 시드니 셀던이라는 작가 이름 때문일까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도 정통파 독자라면 그다지 찬성할 만한 초이스는 아닌 듯 싶군요. 많이 팔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목록에서 보기에 반가운 작품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추리소설 입문자"를 위한 가이드로는 비교적 적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공신력은 전혀 없는 목록이긴 하지만 체크해 보니 총 12편을 읽었네요. 반 다인의 작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도 읽을 예정은 없지만 한국 작품 2편은 꼭 읽어 봐야 겠습니다.

* 2013년 1월 8일 추가. 이후 전권을 다 읽었습니다.

2014/01/03

일본 근대의 풍경 - 유모토 고이치 : 별점 3.5점

일본 근대의 풍경 - 8점
유모토 고이치 지음, 연구공간 수유 + 너머 '동아시아 근대 세미나팀' 옮김/그린비

"근대 초창기에 여러 가지 문물들이 일본에 언제 도입되었는지, 어떠한 배경으로 도입되었는지 등을 항목별로 2~3페이지 정도를 할애하여 관련된 도판과 함께 소개해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장 정치·경제
페리 내항 / 세관(운조쇼) / 견미사절단 / 견구사절단 / 요코스카 제철소 / 파리 만국박람회 사절 / 이민 / 화족(華族) / 관리 / 이와쿠라사절단 / 오키나와현 / 훈장 / 재판제도 / 지폐료 / 조폐료 / 국립은행 / 위식주위조례 / 시구개정 / 도미오카 제사장 / 기독교 / 징병 / 초지회사 / 원로원 / 자유민권운동 / 신문지조례 / 성냥 / 연설 / 가이코샤 / 세이난 전쟁 / 동상 / 야스쿠니 신사 / 집회조례 / 일본철도회사 / 계엄령 / 관보 / 조약개정 / 내각제도 / 보안조례 / 추밀원 / 대일본제국헌법 / 만세삼창 / 장사 / 아시오 광독사건 / 교육칙어 / 제1회 총선거 / 제국의회 / 구매조합 / 대본영 / 일청전쟁 / 사회주의 / 동맹파업 / 내지잡거 / 일영동맹 / 일러전쟁 / 철도국유법 / 대역사건 / 일영박람회 / 일한병합 / 공장법 / 천황붕어

2장 풍속·사물
가스등 / 간코바 / 고아원 / 구세군 / 권총 / 그림엽서의 유행 / 나체화 / 난로 / 남극탐험 / 냉장고 / 램프 / 무도회 / 미싱 / 박람회 / 백화점 / 비누 / 사진 / 선풍기 / 수도 / 시계 / 시계 2 / 안전 면도기 / 엘리베이터 / 연필 / 오포 / 온도계 / 유모차 / 일루미네이션 / 자유폐업 / 전등 / 제등행렬 / 철제다리미 / 축음기(레코드) / 클리닝 / 토끼의 유행 / 페인트 / 펜·만녀필 / 하이칼라

3장 레저·스포츠·예능
경마 / 노조키카라쿠리(요지경) / 당구 / 동물원 / 메리고라운드 / 보트 레이스 / 볼링 / 수족관 / 스케이트 / 신극 / 야구 / 양악 / 여배우 / 여배우 양성소 / 영화 / 예기의 만박 참가 / 예능인의 해외공연 / 옷페케페이부시 / 워터 슈트 / 테니스 / 파노라마 / 해수욕 / 환등 / 활인화

4장 복식
가방 / 구두 / 모자 / 서양식 머리 / 숄 / 안경 / 양복(남성용) / 양복(여성용) / 양산 / 이발

5장 음식
레모네이드 / 맥주 / 빙수 / 서양요리 / 소고기 전골 / 우유 / 커피 / 통조림 / 포도주

6장 미디어
명함 / 신문 / 인쇄 / 전신 / 전화

7장 교통
도로정비 / 비행기 / 비행선 / 승합마차 / 인력거 / 일전증기 / 자동차 / 자전거 / 전차 / 철도 / 철도마차

8장 직업
경찰 / 군대 / 군악 / 보험 / 부기 / 소방 / 우편 / 치과의학 / 호외팔이

9장 교육
고교생 / 국정교과서 / 대학생 / 도서관 / 박물관 / 박사학위 / 소학생 / 식물원 / 어진영 / 여학생 / 운동회 / 유도 / 유치원 / 중학생 / 체조 / 프랑스어학교 / 화족학교(학습원)

10장 토목·건축
근대공원 / 기상대 / 등대 / 로쿠메이칸 / 료운카쿠 / 벽돌 / 벽돌거리 / 비와호 수로 / 양육원 / 엔료칸 / 온실 / 철교 / 프랑스 기와 / 호텔

11장 위생
종두 / 콜레라 / 페스트

부록
일본의 역사 / 메이지 연표 / 메이지 시대 인물 / 메이지 시대 신문·잡지 / 찾아보기

목차만 보아도 굉장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게다가 번역도 깔끔하고 도판이 풍성하여 자료적 가치도 높은 편입니다. 대부분의 도판이 사진 없이 삽화와 그림들(특히 신문인 "마루마루 진문" 삽화의 비중이 높음)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어요. 아.. 저는 이렇게 특정 항목에 대한 것을 요약된 글과 그림으로 설명하는 백과사전처럼 구성된 책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록입니다. 두꺼운 책의 상당 분량을(거의 1/4 정도?)일본 역사의 개요와 이 책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의 약력을 소개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데, 분량 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본 근대에 대해 관심 있는 독자가 일본 전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도 별로 없을 뿐더러, 등장하는 인물들의 약력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정 궁금하면 다른 상세한 자료를 찾아보지, 이러한 미시사 서적을 왜 찾아보겠습니까... 원저에도 있는지 궁금하긴 한데, 한국에 번역 출간하면서 덧붙인 것이라면 쓸데없는 삽질이라고 전해드리고 싶네요.

그래도 다른 곳에서 구하기 힘든 정보가 많기에 추천합니다. 별점은 3.5점. 감점요인인 부록을 들어내고 해당 분량에 해당하는 가격을 내렸다면 만점을 줄 수도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2018/07/29

대구 - 마크 쿨란스키 / 박중서 : 별점 3점

대구 - 6점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라는 부제 그대로, 대구라는 물고기가 인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으로 이런저런 음식 관련 저서로 잘 알려진 마크 쿨란스키의 또 다른 역작입니다.
바이킹의 장기간 해외 원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풍부했던 대구의 장기 보존 방법을 깨우쳤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이후 대구를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알아낸 바스크인들이 대구 무역 시장을 세계적으로 확장시켰고, 영국 뉴펀들랜드의 대구 어업이 시작된 후 신대륙 대구 어장을 둘러싼 강대국의 세력 다툼 속에서 거대한 어항, 도시가 생겨났고, 현대에 접어들어 국가별 배타적 수역 설정과 대구 남획으로 인하여 이 도시들이 쇠퇴했다는 전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대구를 잡아서 처리하는 방법이 어떻게 진화하여 남획에 의한 고갈 사태에 이르렀는지, 세계 각지의 대구를 이용한 요리들은 어떤게 있는지 그 레시피까지 50여 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는 등, 그야말로 대구에 대해서는 총 망라된 대구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재미있게 만드는 마크 쿨란스키의 글 솜씨도 정말 탁월합니다. 도무지 재미가 없을 것 같은 내용인데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대구 때문에 북아메리카에 식민지가 생겨난 건 아닐테고, 보스턴도 유럽과 유럽의 식민지가 열렬히 원하던 뉴펀들랜드의 대구를 중계하는 무역에서 비롯되었다던가 대구가 가난한 식민지 뉴잉글랜드를 국제적 상업 세력으로 격상시켰다는건 조금은 지나친 비약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만큼 상세한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잘 와 닿지는 않네요. 미국 독립 전쟁까지 엮는건 비약 아닐까요?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노동 집약적 노예 무역이 저렴한 식량인 대구의 보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고요.
또 당연한 현실인 남획으로 인한 어장 고갈 이후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긴 것도 조금 지루했습니다. 가장 공들여 취재가 이루어진 부분인건 맞지만 결론은 신세 한탄 외의 대안이나 미래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분량을 이렇게까지 할애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이에요. 마지막으로 도판이 부실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하며 가치와 재미가 어디 갈 정도는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런 류의 미시사, 인문학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관심이 없으시더라도 마크 쿨란스키의 마법과 같은 글솜씨를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나저나 읽다보니 대구 요리가 먹고 싶어지는데 조만간 대구 지리나 한 번 먹으러 가야겠네요.

2010/06/13

맛의 유혹 - 마크 쿨란스키 / 이은영 : 별점은 4점

맛의 유혹 - 8점
마크 쿨란스키 지음, 이은영 옮김/산해

미식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해서 곡물, 달걀, 채소, 어패류, 육류와 가금류, 향신료와 양념, 송로, 지방. 과일, 달콤한 음식, 음료에다가 벌레요리까지! 전 종류를 망라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요리가 다 실려있는 미식과 요리의 백과사전 같은 책입니다. 단지 요리의 종류만 많은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나 탈무드, 14세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요리사의 요리, 자메이카 가정요리 등 문헌으로 남아있는 역사적 / 지역적으로 특기할만한 다양한 레시피도 함께 실려있죠.
게다가 안톤 체호프나 에밀졸라 등 대문호의 문학작품에서부터 트리니다드 섬의 흑인음악 칼립소 가사와 중국에서의 소금만드는 시까지 번역되어 실려있는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가 다 실려있는 느낌이에요. 도대체 저자의 자료조사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로마의 만찬음식 레시피, 프랑스와 이탈리아 궁정 음식, 17세기 샐러드의 조리법, 자메이카 가정요리 등의 레시피를 얻을 수 있는 현존 국내 유일한 책으로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꼭 구입해서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음식과 요리, 미식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자료적인 가치만 따져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방대한 자료에 비하면 도판이 부실하다는 점인데 혹 개정판이 나온다면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인상적이었던 레시피 모음 :
<혀가자미 튀김>
꼬리와 지느러미, 창자를 떼어낸 신서한 혀가자미. 빵가루. 달걀.
생선에 밀가루를 살짝 뿌린 뒤 달걀, 빵가루 순서로 입힘. 프라이팬에 최고급 루카산 오일, 라드 또는 쇠고기 기름을 프라이팬 두께의 절반 정도로 채움. 비결은 기름을 아주 넉넉하게 넣는 것. 프라이팬에 든 혀가자미 위로 0.5인치 두께의 기름이 유지되도록.
생선을 프라이팬에 넣고 처음 넣은 쪽은 약 5분, 반대쪽은 3분 30초에서 4분 튀김.
튀긴 뒤 그릇에 넣고 파슬리 튀김으로 장식함.
최상의 소스는 액상 버터임.
<음식에 관한 질문 (1860)> - 타비타 티클투스 (영국 요리책 작가)

<풍미가 완벽한 검은 게구이>
자메이카 참게 열두마리를 삶은 후 집게발에서 살을 파냄. 그다음 등을 따고 알을 꺼낸 후 내장을 버리고 요리 마지막에 사용할 검은 액은 치워놓는다.
게 손질이 끝나면 버터 2테이블스푼, 검은 후춧가루 2티스푼, 소스나 후추, 식초 1디저트스푼, 고춧가루 약간, 육두구 조금을 게살에 더함. 잘 섞어 소금으로 간함.
게의 등껍질에 버터 몇방울을 떨어트려 촉촉하게 한 후 빵가루를 채울 자리를 남기고 위의 준비한 재료를 꽉 채움. 하지만 그전에 껍질마다 달걀 한두개를 넣어 검은 액에 섞어 놓아야 함.
게 열두마리로 껍질에 넣을 소 10개 분량을 만듬.
<자메이카 요리책 (1893)> - 캐롤라인 설리번 (자메이카 대저택 안주인)

<부드러운 영국식 비프스테이크>
영국식 비프스테이크는 우둔살을 2분의 1인치 두께로 두껍게 자른다.
평평해지도록 약간 두드리고 스테이크 요리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동판에 요리. 연료는 목탄 대신 일반 석탄을 이용.
진정한 비프 필레는 활활 타는 석탄불 위에 고르게 가열된 그릴에서 굽고 육즙을 보존하기 위해 단 한번만 뒤집는다. 그 뒤 메트르 도텔 소스를 뿌린다.
영국 선술집에서처럼 마데이라 와인이나 앤초비 버터 또는 식초를 뿌린 냉이류 채소와 곁들여 먹으면 좋다.
<요리대사전 (1873)> - 알렉상드르 뒤마

2010/06/27

이야기 파라독스 - 마틴 가드너 / 이충호 : 별점 3점

이야기 파라독스 - 6점
마틴 가드너 지음, 이충호 옮김/사계절출판사

원래는 20여년전인 90년대 초반에 읽었던 책인데, 요사이 패러독스 요소가 가미된 트릭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작업하고 있던 차라 자료삼아 읽게 보았습니다. 심리학 / 기하학 / 수 / 통계 / 확률 / 시간의 파라독스라는 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제별로 여러가지 문제와 이론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구성입니다.
제목처럼 상식을 벗어난 수학적 결과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도 많으며, 저자 마틴 가드너가 워낙에 책을 잘 써서 정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의 파라독스"에서 백과사전 전체를 간단한 막대에 선하나 긋는 암호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 (소수를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와 "확률의 파라독스"에서의 카드 야바위 - A|A / A|B / B|B 로 앞뒤가 구성된 카드에서 한장을 선택한것이 "A"면일 경우 야바위꾼이 뒷면도 "A"라고 거는 것의 확률이 더 높은 이유 - 와 몬티홀 패러독스와 동일한 거북이 뒤집기 이야기, 주사위 게임의 함정 이야기 등이 재미있었습니다.

나이 30대 후반에 1318교양문고라는 책을 읽으려니 조금 쑥스럽기도 했는데 외려 어렸을때 (?) 이해 못했던 부분이나 감추어진 재미를 새롭게 많이 알게된 것 같아 무척이나 뿌듯하네요. 청소년용 책들도 꼼꼼하게 다시 챙겨봐야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3/27

책방출 리스트 : 공짜입니다! - 마감했습니다.

이사 관계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책을 방출합니다.

버리느니 필요하신 분들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포스트를 남깁니다. 단 제가 시간이 거의 없으므로 방법은 무조건 일요일 오후, 2호선 문래역까지 오시는 분에게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나중에 협의를...) 원하시는 분은 책 제목을 주인장에게만 보이는 비공개 덧글로 글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연락처 포함해서요)

책 상태는 책마다 다르지만 다 읽을 만 합니다. 새책도 있고요. 예약이 끝난 책은 체크하겠습니다. 대단한 책은 없지만 필요하신 분들에게 잘 갔으면 하네요. 4월달 안으로만 정리하고 이후에는 버리는 수 밖에는....

추리소설 :
호메로스 살인사건 - 츠치야 다카오(예약)
백색살인 - 로스 토마스(예약)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 장용민 / 김성범(예약)
죽음의 편지 - 보브 렌들 (예약)
스티븐 킹, 미스터리 환상특급 1 (예약)
소환장 - 존 그리샴
황새 -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예약)
마지막 칸타타 - 필립 돌레리스 : 바흐의 푸가곡 속의 암호 해독 미스터리 (예약)

기타 서적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에약)
심심풀이로 읽는 화학 (예약)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외계인 백과사전 (예약)

만화 :
춤추는 세무관 1 ~ 9 (예약)
피스전기만물상 1~22 (예약)
Joker 1~6 (예약)
여검시관 히카루 1, 5 (예약)
신암행어사 1~4
가가탐정사무소 1~2 (예약)
만화 셜록 홈즈 전집 1~2 (예약)
성 하이퍼 경비대 1~9
쵸비츠 1~5 (예약)
두더지 1~2
돌연변이 파워걸즈 1~4 (예약)
하이퍼 레스토랑 1~2 (예약)
캄브레이커 1~6
귀참십장 1
의천도룡기 1~18
은하군웅전 라이 1~13 (옛 해적판본)

2023/05/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2. 카라쿠리 미로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2. 카라쿠리 미로
다음 날, 토시오가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마이코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한 장의 종이를 놓고 몰두하고 있었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차나 마시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카페 테이블에 가져온 종이를 펼쳤는데, 그것은 소우지의 노트에서 복사한 미로의 개략도였다.
"카츠 군, 이 미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이코는 미로가 그려진 그림을 토시오 앞에 내밀었다.
"커피, 커피로, 괜찮지?"
토시오는 우물쭈물 대답하며 미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도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카츠 군은 카오리와 함께 미로에 들어갔지만, 미로의 중심부에는 도착하지 못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형과 복연결형 두 종류가 있는데, 단연결형 미로에서는 한 손을 미로 벽에 대고 진행하면 돼. 손이 항상 벽에 닿아 있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맞지?"
"맞습니다."
"이 미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다지 어려운 미로는 아니야. 그게 문제였어.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미로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었고.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나서 네가 시도한 방법으로 미로를 진행해보았어."
마이코는 성냥개비를 꺼내 토시오에게 건넸다.
"자, 이 그림으로 네가 실제로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미로를 통과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 끝을 미로의 왼쪽 벽에 대고 조용히 따라갔다. 성냥개비는 몇 개의 막다른 골목길을 돌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에는 정확하게 오각형의 중심에 도달했다.
"어때?"
마이코가 미로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도착했어요."
"반대편 벽으로도 시도해 봐."
토시오는 성냥개비를 오른쪽 벽에 대었다. 결과는 같았다. 성냥개비는 똑같이 마지막에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카츠 군은 그때 벽에서 손을 뗀 적은 정말 없었어? 아니면 앞만 보고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걸 빼먹은건 아니었어?"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이 그림이 잘못 그려진건 아니야. 실제로 그날 소우지가 미로를 안내할 때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굽이굽이마다 구석구석 확인해 두었어. 이 미로는 단지 단연결된 미로에 불과해."
"그럼 저는 왜 미로 중심부로 골인하지 못했을까요?"
커피가 나왔다. 마이코는 설탕을 컵에 듬뿍 담아 제대로 섞지도 않고 마셨다.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은 꽤나 머리를 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미로로 보여. 하지만 실제로 미로에 서보면, 조금만 실수해도 골인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어. 이 미로를 만든 사람의 세심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야."
"그런가요 ......"
"첫째, 이 모양에 주목해야 해. 오각형말이야. 이 모양이 인간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야."
"오각형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요?"
"그래. 이상하게도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기본 형태는 삼각형도 아니고, 오각형도 아니야. 언제나 사각형이야. 네모난 집, 네모난 테이블, 네모난 침대, 네모난 종이, 네모난 책 ...... 인간이 보통 접하는 대부분의 물건이 네모야. 잘 정비된 도시는 반드시 바둑판의 눈처럼 깔끔한 사각형으로 구분된 길이 붙어 있기도 하고. 길을 잃기 쉬운 길은 그것의 형태와 구분이 깔끔한 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오각형의 굴곡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사각형의 굴곡으로 인식될 것 같아."
"이 미로의 모든 면이 휘어져 있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것도 있지. 그리고 또 하나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의 시야를 없애는거야. 미로를 나아가다가 갑작스럽게 돌발적인 느낌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도록. 실제로 그렇지 않았어?"
"그랬어요. 정말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햄튼 코트의 미로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일부에 이런 갈림길이 쓰여 있더라고. 하지만 부채꼴 모양으로 장식성은 있을지언정, 나사 저택의 미로처럼 현기증을 유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아. 나사 저택처럼 모든 길에 현기증이 나는 갈림길이 준비되어 있는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또 이 미로를 자세히 보면........"
마이코는 빨간 연필을 꺼내 미로의 바른 길을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바른 길 말이야. 미로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심부를 향하게 돼. 그래서 당연히 중심부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른 길은 미로의 중심을 등지고 돌아가야만 하는 갈림길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 ……. 뭐, 이것은 미로의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건 이렇게 다양한 장치를 담은 미로가 결국 단연결 미로였다는 점이야."
"단연결 미로는 안 됩니까?"
"안 돼지. 카츠군이 시도한 방법, 즉 손을 벽에 대고 나아가는 방법은 미로를 소개하는 책에는 반드시 설명되어 있어. 그렇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풀 수 있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야. 오각형 등 여러가지 장치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열중하던 사람이 말이야.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실제로 저는 미로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었죠......"
"그게 핵심이야. 이 미로를 굳이 단연결로 만든 것은, 때로는 미로에 들어간 사람이 절대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있는 게 분명해."
"절대로 골인할 수 없는 장치?"
토시오는 무심코 미로 그림을 다시 보았다.
"실제로 토요일에 카츠 군이 미로 중심부에 골인하는데 실패했잖아? 그거야말로 단연결 미로 해결 방식으로는 중심부로 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지."
"그런가요?"
"다시 한 번 그 미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이코는 비가 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오렌지색 코트를 에그의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나사 저택 안에는 많은 차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제복을 입은 경찰이 차를 세웠다.
마이코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라키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나라키 대신 호시자와가 저택에서 나왔다.
"당신이 오면 항상 나쁜 일만 일어나."
호시자와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혼잡한 것 같네."
마이코는 늘어선 차를 보며 말했다.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이 모였어. 사장님을 중심으로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야."
해바라기 공예의 핵심 간부를 두 명이나 잃었으니, 회사로서도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일 것이다.
"데츠바씨는 잘 지냈어?"
"건강해 보여. 강인하더군. 아들과 딸을 잃고도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약한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어. 대단한 분이야."
"마사오 씨를 만나고 싶은데..."
"안 돼."
"안 된다고? 설마, 용의자로 지목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안 돼. 바빠서 말이야."
"언제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용건인가?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어."
"나라 공이 그렇게 시켰겠지. 변함없이 융통성 없는 남자로군."
"우리가 알면 안돼는 용건인가?"
"뭐, 됐어. 그 대신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닐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술에 취한것 같은 짓거리는 당연히 하지 않아. 잠깐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야."
"나쁜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거야."
"경찰이 민간인의 협조를 거부하게 된 건가?"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럼 괜찮지 않아? 호위병이 있어도 상관없어."
호시자와는 마지못해 차를 통과시켰다.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쉬고 나면 바로 돌아가. 오늘은 마사오 씨와 만날 수 없어."
라며 말렸다.
마이코는 어슬렁어슬렁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호시자와는 한 순경을 붙잡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정말로 호위병과 함께 걷게 되었다.
정자의 흙에는 아직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흙에 흡수되어 신경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었다.
마이코는 정자 앞의 다소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돌다리를 건너 미로 쪽으로 걸어갔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따라 천천히 미로를 돌았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마이코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라고 말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토시오도 뒤따라 달렸다. 마이코는 그대로 미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이코는 미로의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확하게 길을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지도대로야."
마이코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지도는 틀리지 않았어. 그렇다면, 카츠 군은 왜 그날 실패했던 걸까?"
마이코는 돌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뭔가 있는 모양인데.... 뭔가 ......."
마이코는 돌로 된 테이블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하고, 탁자 밑으로 몸을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성냥개비의 타버린 조각이었다. 끝이 씹혀서 부서져 있었다. 마이코는 지겹다는 듯 성냥개비를 탁자 밑에 버렸다.
"미로 안에 돌 의자가 놓여 있었어요."
토시오는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 그림에도 제대로 적혀 있어요."
마이코는 그림의 ○표를 가리켰다.
"올바른 길은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도록 되어 있군요."
"맞아. 올바른 길로 지나가면 의자 앞을 지나치지 않아. …….잠깐만. 의자 앞을 지나쳤다고?"
마이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날 의자 앞을 지나쳤어?"
"네."
마이코는 지도를 두드렸다.
"이 지도에서는 의자가 막다른 골목 안쪽에 표시되어 있어."
마이코는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중앙을 벗어나 미로를 거꾸로 따라간다. 몇 번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골목 안쪽에 타원형의 돌이 보였다.
"의자는 이걸 말하는거지?"
"맞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앞을 지나갔던 기억이 나는데요."
마이코는 몸을 굽혀 타원형 의자를 면밀히 살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마이코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의 속임수를 알아챈 것 같아."
마이코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와 다시 미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심부 입구의 울타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울타리의 바로 뒷편에 돌 의자가 놓여 있어."
마이코는 계속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울타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레버 같은 것이 나와 있어. 잡아당겨 보지."
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
마이코는 몸을 움츠렸다. 울타리는 마치 문처럼 움직여 오각형의 중심부 광장을 꽉 막아 버렸다.
"즉, 의자 앞의 통로가 열려있으면 ……. 이쪽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반대로 이 중심부는 닫힌 방으로 변해버리게 돼지. 여기가 닫히면 더 이상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거야."
마이코는 다시 한 번 닫혀 방처럼 변해버린 미로의 중심부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기에는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군."
이 장난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곧 알게 되었다.
토시오는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땅속에서 물이라도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오각형 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앙에 있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탁자는 튕겨져 나오듯 일어섰고, 탁자 밑에 있던 오각형의 포석이 가라앉으면서 오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구멍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조심스럽게 구멍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꽤 깊었고, 돌계단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습한 공기가 희미하게 불어왔다.
"이게 뭐죠?"
토시오는 깜짝 놀라며 마이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굴이야."
마이코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몸을 날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조경은 인공적인 도원향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었어. 정원에는 이국적인 정자, 분수, 미로, 실물 크기의 자동 인형이 놓여 있고, 동굴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
"이 동굴은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건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상상으로는 반반인 것 같아. 오나와라는 땅에서는 고대인의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으니, 고대인이 살던 동굴을 조금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오나와라는 지명은 다혈(多穴)이라는 뜻의 '오아나(おおあな)'가 사투리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이 큰 돌 탁자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력인가요?"
"전력 따위가 아니야. 수력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물소리가 들리네요."
"이 동굴은 꽤 넓은 것 같아. 연못의 물이 흘러서 동굴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저 레버를 당기면 그 물이 한꺼번에 흘러서 그 힘으로 테이블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
"이 동굴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나사 저택은 마와리 호도가 만들었지만, 이 동굴은 호도의 아버지인 사쿠조가 만든 것 같아"
"그 시대 사람들처럼 사쿠조는 이상향으로 이 동굴을 만들었을까요?"
"그건 아닌것 같아. 이 미로부터가 매우 폐쇄적이니까. 단지 재미나 장식을 위해서라면 이런 장난은 불필요했을거야."
"그러니까 동굴이 열려 있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미로를 닫아놓는 거군요."
"내려가 보자."
마이코는 아무렇게나 말하면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손전등과 양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다이 씨는 미로 안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토시오가 놀랐다.
"마와리 가문의 철야 때 만났던 스님이 미로를 만드는 동기도 다양하다고 말했었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어."
마이코는 직접 촛불을 들고 손전등 쪽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지금도 이 미로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최근에 누군가가 이 미로를 손질한 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아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양초가 필요해. 만약 양초의 불이 꺼지면 산소가 없다는 뜻이니까."
마이코는 촛불에 불을 붙이고 구멍 옆에 섰다. 동굴의 바람이 불어서 양초의 불이 꺼져버렸다. 마이코는 불을 다시 붙인 뒤 바람을 피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뒤따라가며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돌은 검고 축축하고 가팔랐다. 동굴 안은 따뜻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이코는 돌계단 중간에 몸을 굽혀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까의 성냥개비 조각이 떨어져있었다. 동굴의 문이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온걸로 보였다.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계단은 꽤 깊었다. 희미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시오는 손전등으로 마이코의 발밑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여섯 장 정도의 넓이의 돌방이 나왔다. 바닥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하얀 거미 같은 벌레들이 도망쳐 나갔다. 석실 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멍 두 개가 나란히 눈동자처럼 열려 있었다.
"보라고."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마이코는 방금 내려온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박쥐의 손아귀처럼 녹슨 쇠막대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로 미로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겠지."
마이코는 막대기에 손을 대었다가 바로 물러섰다,
"지금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하겠지. 호위 아저씨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이코는 두 개의 동굴 안쪽에 촛불을 비췄다. 하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물론 안쪽까지 빛이 닿지는 않았다.
"카츠 군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래?"
마이코는 촛불의 반짝임 속에서 섬뜩하게 웃었다.
토시오는 땅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근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이론적으로 풀려고 하네."
마이코는 토시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말했다. 하지만 두 동굴 어느 쪽에도 발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또 한 쪽 손을 벽에 붙이고 가야할까? 이 구멍은 꽤 길 것 같은데?"
"그럼, 우다이 씨는 어느 길이 맞는지 알 수 있나요?"
불만을 품은 듯한 토시오의 목소리에 마이코는 다시 웃었다.
"물론, 왼쪽이야."
마이코는 망설임 없이 왼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꺾는 순서를 메모해 둘까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어."
"그럼 동굴의 길찾기 지도를 찾았나요?"
"그런 것,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천장이 낮아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걸어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마이코가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바라보았다.
"왁스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 내 생각이 옳았던 것 같군."
그러다 길이 다소 넓어지고 평탄해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로 접어들었다.
"봐."
마이코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두 개의 구멍은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를 거야. 한쪽은 벽을 깎은 흔적이 새롭지. 그러니까 이 두 구멍이 생긴, 혹은 만들어진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새로운 구멍은 동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된 길을 선택하면 되겠군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새로운 구멍은 불완전했던 동굴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길 순서는 새로운 구멍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 해석이 옳은가요?"
"결국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이코는 얼른 오래된 쪽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의 폭이 넓어지고, 왼쪽에 좁은 도랑이 뚫려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마이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상하네. ...... 누군가가 미로의 문을 닫은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걸음을 옮길수록 물소리가 더 커졌다.
"...... 폭포가 있어."
"폭포가? 동굴에?"
토시오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코는 촛불을 들었다. 그 빛 끝에 실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가느다란 폭포였다.
폭포가 있는 곳은 꽤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석실 양 옆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고, 두 구멍 사이로 튀어나온 듯한 바위가 있고, 물은 바위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표면은 물보라로 빛나고, 떨어지는 물은 도랑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렸다.
폭포는 두 갈래로 꼬불꼬불하게 휘어져 각각 뾰족한 바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접시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고인 물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도 맑고 깨끗해 보였다.
"이번에는 이쪽이야"
폭포를 바라보던 마이코가 몸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동굴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는 거지요?"
토시오는 마이코가 선택한 동굴에 전등을 비췄다.
"아하, 동굴의 지도가 있었군요."
마이코가 돌아보았다.
"있었어. 엄청나게 큰 녀석이."
"어디에요?"
마이코는 천장을 가리켰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 땅 위에 있었어."
토시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마이코는 양초를 토시오에게 건네주며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 나사 저택의 주인인 마와리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했다고 하지. 장난감의 창작보다는 상술에 능숙했기 때문에 작은 회사였던 츠루슈도를 해바라기 공예라는 큰 회사로 키울 수 있었어. 그런 사람이 왜 장난감 나라에나 나올 법한 나사 저택 같은 집을 지었을까?"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요?"
"아니야. 호도는 장사도 잘한걸 보면 굉장히 계산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일거야. 변덕스럽게 이런 이상한 건물을 만들지는 않았을테지."
"그럼 또 다른 동기가 있었나요?"
"그래. 나는 나사 저택 같은 기괴한 건물이라면, 정원에 이상한 미로가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있을 거라는게 이유라고 생각해. 만약 일반 가정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봐. 미로만 너무 눈에 띄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미로에 집중되었을거야."
"그럼 미로를 만들고 싶어서 호도는 나사 저택을 만든 건가요?"
마이코의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럼, 그 미로는 왜 만들었나요?"
토시오는 그때까지 미로를 만들어야만 했던 호도의 마음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왜 미로를 만들었을까?"
마이코는 가방을 열어 오각형의 미로 그림을 펼쳤다.
 
"이건 땅에 그린 동굴의 지도인 것 같아."
"지도? ...... 에서도 이 동굴은 오각형이 아니잖아요."
"지도라는건 실물과 똑같은 축척으로 그려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도쿄의 야마노테 선의 지도는 만두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그려지기도 하잖아. 즉, 실제 길과 그림이 상대적으로 동일하다면 그림은 아무리 변형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알겠습니다."
"즉, 나사 저택의 미로와 이 동굴의 길은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지."
"위상적?"
"오각형 미로의 입구와 골목을 잇는 길에 밧줄 하나를 놓았다고 하자. 그 밧줄에 갈림길, 즉 막다른 길에도 밧줄을 뻗어 본길과 연결해 주는 거지. 미로 안의 모든 길에 밧줄이 깔렸을 때, 밧줄을 빼내어 양 끝을 잡고 잡아당겨 보라고."
"내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융통성 없는 남자네. 로프를 훨씬 더 짧게 만들어서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될 거야."
마이코는 미로 그림을 토시오에게 보여주었다. 마이코는 그림의 모서리에 나뭇가지 같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미로나 동굴의 길을 생각할 때 길의 길고 짧음, 오르막과 내리막, 길의 굴곡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길이 아무리 구불구불하고 각이 져 있어도 상관없다고. 다만 문제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지."
"오각형의 미로와 동굴의 길이 같다는 의미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갈림길에서는 미로와 같은 방식으로 꺾어 왔던 거군요."
"맞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것 같네."
"동굴의 지도를 그리는 데 왜 이런 엉뚱한 방법을 택한 거죠?"
"호도는 일반인에게 동굴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어. 그런데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놓을 경우,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저택 안에 동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문제가 많지. 그래서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미로로 바꾸어 놓는 방법을 생각해냈던거야."
"미로 자체가 지도였던 거군요"
"호도는 동굴의 그림을 지상에 크게 그린 거지. 설마 이것이 동굴의 길을 표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숨기려고 한 동굴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궁에는 왕과 크로커다일이 묻혀 있었다고 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호도는 그저 통로로 이용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건가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 나사 저택 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마이코는 다시 한 번 지도를 훑어본 후 촛불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길의 굴곡은 점점 심해져 불규칙한 계단과 언덕이 이어졌고, 땅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로 둘러싸인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길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듯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각형의 미로에 대응시키면 E의 지점에 해당되지."
마이코는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미로의 E 지점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이코는 주변의 바위를 둘러보며 돌아다녔다,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동굴 안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고 해. 물론 다양한 장식도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또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는 벽면에 많은 불상 등이 새겨져 있었어.”
"이 동굴 안에 그런 것이 있나요?"
"없군. 보이지 않아. 그냥 맨땅과 흙이 있을 뿐."
"이상한 말이지만, 이 동굴에서는 실용주의적인 냄새가 나네요."
마이코는 바위 틈새에 몸을 넣었다.
"오각형의 미로에는 본 길에 대해 여섯 개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 막 여섯 번째를 지나고 있는 중이야. 내 생각대로라면 드디어 출구가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 출구에 도달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길은 쉴 새 없이 굽이굽이 이어졌고, 좁은 곳은 몸을 옆으로 눕혀야만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소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처음에 돌계단을 내려왔던 곳과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넓이도 거의 비슷했고,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도 있었다. 토시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는 레버가 없어."
마이코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이코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마이코의 말대로 돌계단 옆에 있던 막대가 이 방에는 없었다. 막대기뿐 아니라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 보자"
마이코가 먼저 서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 중간쯤에 뾰족뾰족한 흰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 두꺼운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녹슨 철제 틀이 끼워져 있고, 나무 껍질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기름을 바른 흔적이 있네."
문의 경첩을 보고 있던 마이코가 말했다.
마이코는 문에 살며시 체중을 실었다. 문이 작은 소리를 냈다. 마이코는 촛불을 껐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보였다.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해."
마이코가 작게 말했다. 토시오는 시키는 대로 전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문 반대편 상황을 살폈다.
마이코는 몇 숨을 쉬고 나서 문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크게 움직였다. 문 반대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희미하고 먼지가 자욱한 방이었다. 사방이 거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빛은 천장 가까이 열린 작은 사각형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토시오는 어렸을 때 친구 집에 있던 낡은 창고를 떠올렸다. 바로 그 창고 안과 똑같았다. 낡은 인형, 제등, 검은 상자 더미, 큰 화로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토시오는 무심코 방금 들어온 문을 닫았다.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문은 방에 면한 쪽이 사방의 벽과 같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시오는 당황하여 문을 찾으려고 벽을 쓰다듬고 돌렸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문이 없어졌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말했다. 마이코는 벽의 위아래를 살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마이코는 문이 사라진 곳의 기둥을 세게 잡아당겼다. 기둥과 벽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 뒤에 기둥과 벽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마이코는 문을 다시 닫으면서 오른쪽 벽에 주목했다. 이 벽이 미닫이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눈을 속이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마이코가 벽에 손을 얹고 힘을 주자 벽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틈이 나타났다. 마이코는 틈새에 눈을 대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내 생각대로군. 데츠바의 방이야."
마이코는 벽을 크게 당겼다. 벽의 구멍 맞은편에 갈색 종이가 걸려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대담함에 놀라며 말했다.
"여기 있는 종이는 족자야. 이곳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이고. 이 족자는 산수화지. 그날 나는 이 방에서 산수화를 보며 데츠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
마이코는 족자를 치우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이코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뒷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
마이코는 신발을 걷어차고 구멍을 빠져나갔다. 토시오도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방. 검은색으로 칠해진 책상 위에 데츠바가 엎드려 있었다. 데츠바는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열린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듯 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