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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4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 장유정 : 별점 2점

살림지식총서 342권. 제목 그대로 근대 경성"다방""카페"에 대해 서술한 미시사 서적입니다. 경성을 무대로 한 소설을 창작하고 있는터라 자료 삼아 구입했습니다.

처음 생겨난 이후, 속속 개업한 다양한 다방과 카페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점은 좋았습니다. 카페 여급의 월 수입이라든가 여급들의 전직, 그녀들의 생각 등도 확인할 수 있었고요.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모호했던 다방과 카페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게 된 것도 수확이었습니다. 다방은 문화인들의 문화 공간이었으며, 카페는 여급과 술을 마시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환락의 공간이었다는 점을 상세한 사료와 함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이 쓴 책이라 그런지 발터 벤야민 등을 인용하며 시대를 분석하는 부분은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대 다방과 카페에 대한 사료적 접근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이론적 분석을 덧붙인건 아쉬웠어요. 1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으로는 깊이 있는 논의가 무리이기도 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가격이 워낙 저렴하니 아주 나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2025/01/11

커피 일가 - 가바야마 사토루 / 임윤정 : 별점 2점

커피 일가 - 6점
가바야마 사토루 지음, 임윤정 옮김/앨리스

3대에 걸쳐 오쿠노 가문이 운영하고 있는 일본 교토의 작은 찻집 로쿠요샤(六曜社)의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로쿠요샤는 단순한 찻집을 넘어 교토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 잡았는데, 교토신문 기자 가바야마 사토루가 창업주 미노루부터 2대 오사무, 3대 군페이에 이르기까지 가족이 가게를 어떻게 운영하고 발전시켰는지 알려줍니다.

3대에 걸친 교토 명물 카페의 일대기는 흥미로왔습니다. 세대를 거듭하며 변화한 경영 철학이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창업주인 1대 미노루는 최고의 접객 서비스 - 손님 자리를 향해 서서 끊임없이 살펴 본다. 밀크 저그는 손님이 쓰러뜨리는 일이 없도록 컵에서 5센티미터 정도 떨어뜨린 곳에 둔다. 빈 그릇, 빨대 포장지나 밀크 저그는 바로 치운다. 손님 테이블에 놓인 물컵이 비면 바로바로 채운다. 담배꽁초가 쌓이기 전에 새로운 재떨이로 바꾼다. 등 - 에 집중했으며, 2대 오사무는 자가배전 커피를 도입해 찻집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현재 3대 군페이는 보다 자유로운 발상으로 운영 방식을 새롭게 하고 있고요. 이 과정에서의 세세한 디테일들도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전전의 유명 카페들 목록, 1950년대 징병되었다가 라바울에서 커피맛을 알게되었다는 커피 도매상, 1971년 베스트셀러 "스무 살의 원점"에 등장하는 로쿠요사 이야기, 당시 커피 가격 등 여러가지 정보가 가득합니다. 

로쿠요사 성공의 비결로 작용한 '운'도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창업 초기 로쿠요샤가 위치한 거리가 번화가로 발전하거나, 오사무의 포크 가수로서의 유명세가 가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 등이 그 예입니다. 특히 오사무가 70년대 일본 록의 태동기에서 버블에 이르기까지 구가했던 자유로운 인생은 그 자체로서 상당히 볼만 했어요. 음악적 성취도 상당한 수준으로 묘사되는데, 몇 곡 찾아서 들어보았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좋았습니다. "자기 실력 이상의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고,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큼의 벌이면 된다. 찻집의 마스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오사무 씨의 이상과 비슷한 곡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오사무의 뮤지션으로서의 유명세와 더불어, 80년대 중반에 이미 자가배전한 자신만의 맛을 찾아내어 커피를 제공했다는, 시대를 앞서간 감각이 현재 로쿠요샤 인기의 핵심으로 생각되네요. 오사무가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점이기도 합니다. 3대를 이어갔다고는 하지만, 오사무가 없었다면 과연 로쿠요샤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 솔직히 의문이거든요. 미노루는 커피 장인으로 보기는 어려운 접객 특화 사장이고, 군페이는 스스로 이룬게 없고 철학도 없으니까요. 
오사무의 커피조차도 80년대에는 특이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자가배전 스페셜티 커피'는 꽤 흔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카페의 핵심은 커피 맛일 텐데, 로쿠요샤의 커피맛이 좋다는 묘사는 전무합니다. 명물로 언급되는 수제 도넛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요. 이래서야 카페 소개로는 영 별로지요. 교토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설령 간다한들 딱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앞으로 10년 뒤, 과연 이 카페가 남아있을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2010/01/15

I LOVE COFFEE and CAFE 아이 러브 커피 앤 카페 : 별점 2점

I LOVE COFFEE and CAFE 아이 러브 커피 앤 카페 - 4점
이동진 지음/동아일보사

커피에 대한 관심이 있던 차 우연찮게 읽게된 책입니다.

하지만 읽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예비 바리스타들을 위한 입문서에 가까운 책으로 실용서처럼 쓰여져 있기에 별다른 재미도 없거니와, 그나마도 인터넷 등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정보들 뿐인 탓입니다. 책을 저술한 이동진이라는 전문 바리스타의 노하우 및 생각을 단편적으로 접할 수 있다라는 것 이외에 별다른 가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약간의 가치도 정보도 책의 절반 분량일 뿐입니다. Part 3과 Part 4는 사실 전혀 도움이 안되는 무가치한 항목이라 무척 실망스러웠어요. Part 3은 레시피 모음일 뿐 아무것도 아니고, Part 4는 "지금 뜨고 있는'HOT'카페를 엿본다"는 카페 소개글인데 인터넷 뒤지면 하루에 10꼭지는 충분히 쓸 수 있는 내용으로 보이거든요. 여성지 부록을 돈주고 사본게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이 책에서 기대한게 이런 내용은 아니었는데...

결론내리자면 별점 2점입니다. 12,000원짜리 책이 무려 50% 할인된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게 이 책의 현실이죠. 제 돈주고 사보지 않은게 다행이라 생각되네요.

2012/08/16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하)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하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어쩌다 보니 두 번째 권부터 읽게 된 스티븐 킹의 단편집. 이전의 "스켈레톤 크루"가 80년대 작품 중심이라면, 이 책은 90년대 이후의 비교적 최신작이 실려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L.T.의 애완동물 이론
  • 로드 바이러스, 북쪽으로 가다
  •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
  • 데자뷰
  • 1408
  • 총알 차 타기
  • 행운의 동전

"1408" 이외의 모든 작품들이 1인칭의 강한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독특합니다. 또한 "스켈레톤 크루"와 같은 예전 작품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이 그려진 뒤, 그 상황이 어떻게든 종료되었던 반면, 여기서는 알 수 없는 상황 그 자체만이 중요한 것으로 묘사된다는 차이가 큽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 상황에 대한 혼란스럽고 복잡한, 강한 1인칭 심리묘사를 통해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호러 소설인 줄 알고 읽었는데 교훈적인 주제를 갖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었습니다. - 결혼 생활의 중요성 ("L.T의 애완동물 이론", "데자뷰"), 어른들이 하는 말은 잘 들어야 한다 ("1408"), 어머니 계실 때 잘해라 ("총알 차 타기"), 담배를 끊어라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 "총알 차 타기") 등인데, 우화 같은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더군요.

결론적으로 묘사가 강화되고 주제의식은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호러"라는 측면에서는 예전 80년대 작품들에 미치지 못했어요. 물론 작품성이야 더 좋아졌을 수도 있고, 완성도도 나쁘지는 않으나 막 달려주던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이 제게는 더 취향이네요. 스티븐 킹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별점은 2.5점. 개인적인 베스트는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입니다.

덧붙이자면, 각 단편 서두에 스티븐 킹이 친절하게 작품에 대한 해설을 붙여 놓았는데 꽤 재미있더군요. 작품 본편보다 해설이 탁월하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L.T의 애완동물 이론"

화자의 동료 L.T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 대해 떠벌이는 수다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인 작품. 결말 부분에 그녀가 연쇄살인범의 피해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끝나기는 하나, 진상이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답답한 느낌이 더 큽니다. 그래서 룰루는 어떻게 되었는지? LT가 죽이고 고양이 먹이로 줬다는 이야기? 좀 더 깔끔하게 끝맺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별점은 2점입니다.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

갑작스럽게 의외의 장소에서 정신병자 살인마와 격투를 벌인다는 액션 슬래셔 호러.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이혼을 앞둔 아내와의 디테일한 싸움이 깨알 같은 재미를 전해줍니다. 블랙코미디 느낌도 나더군요. 조금 과장하자면 스크루볼 코미디?

게다가 예상했던 해피엔딩(역경을 헤쳐나간 두 명이 다시 재결합한다는)이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개인적인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데자뷰"

두 번째 신혼여행 중인 중년 부부 아내의 1인칭 심리묘사를 통해 그려지는 무간지옥 이야기. 특유의 시각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묘사는 탁월하나,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과 설정이라 딱히 새롭지는 않더군요. 반복의 원인에 대해 뭔가 설정이 한 개 정도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1408"

"유혹하는 글쓰기"에도 소개되었었고, 존 쿠삭 주연의 영화로도 알려진 작품이죠.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도입부에서 지배인이 귀신 들린 방 1408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부터 흥미진진하며,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에 대한 묘사는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등 역시나 만만치 않은 재미를 선사해줍니다.

그러나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그래서 어쩌라고" 거든요. 그 방에 귀신이 있다는 게 전부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총알 차 타기"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을 알게 된 대학생 앨런이 히치하이킹으로 고향에 돌아가다가 사신을 만난다는 내용의 중단편.

히치하이킹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와 더불어 새롭게 창조한 사신 캐릭터는 그럴싸한데,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딱 우리나라 전래동화의 호랑이(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수준입니다. 호러보다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주제 의식이 더 강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행운의 동전"

팁으로 받은 25센트 동전에 대한 일종의 망상(?)을 그린 소품.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2/11/13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기타쿠니 고지 / 문승준 : 별점 2점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4점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변호사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도시타는 가난한 동네 변호사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의뢰 해결이 주 업무라 법정 다툼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정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보다는 일본 추리 소설 시장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소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일상계 추리 단편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문가 - 서점 점원, 헌책방 주인, 요리사, 화과자 장인, 시계 수리 전문가, 사진가, 바리스타, 라쿠고가, 복화술사, 호텔리어, 심지어 스님까지 - 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자의 직종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그냥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설정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법률 전문가스러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도시타는 화자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일 뿐, 탐정 역할은 도시타의 동생 리쓰가 담당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리쓰 캐릭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일단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시타' 에 관련된 말을 하는 루틴이 있고, 현재 상황과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떠오르게 만드네요. 결은 좀 달리하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설정마저도 똑같고요. 그러나 우영우만큼 호감가게 묘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문가 일상계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에 목숨을 건 나머지 이상한 만화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또 추리한 결과를 형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는데, 여기에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에 더해져 굉장히 비호감이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글래머 소꼽친구 간호사 사키, 여자를 밝히는 스님 마루메, 전 야쿠자 출신이자 현 카페 주인인 이모부 등 비현실적이거나,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괜찮았다면 나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록된 네 편의 단편들 모두 그렇게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이야기 전개가 리쓰 캐릭터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았던 탓입니다. 입 안에 넣은 치과 치료용 충전물이 라디오처럼 동작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따뜻한 인간 드라마 중심의 전형적인 일상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가 일상계로 보기에는 전문성, 일상성 모두 떨어지며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꼽자면 일본에서도 변호사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도? 딱히 영상화 되었다는 소식도 없고, 후속권도 출간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금새 절판된걸로 보면 다른 분들의 평가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울러 '고양이'는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므로 집사분들께서는 낚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1화 "못된 며느리와 낙서 소동" 

고토에 아줌마는 도시타에게 며느리 험담 끝에 며느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토에 아줌마가 돌아간 후, 리쓰는 그녀의 섬망성 기억 상실을 눈치챘다. 형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며느리 에가와 씨를 만나러 갔다가 ,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던 낙서 소동에 휘말리는데...

진상은 알고보니 고토에 할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고해 며느리 에가와가 마당에 자생하는 디기탈리스 잎을 떼어 말린 뒤 몰래 먹였다는 겁니다. 고토에 할머니는 디기탈리스 잎의 부작용으로 치매와 비슷한 용태를 보인거지요. 

그런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디기탈리스가 심장병에 효과가 있지만 독성 또한 강하다는건 정보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 완성으로 '디기탈리스 중독'이 함께 뜰 정도로요. 이걸 약재로만 알고 먹였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자기 험담만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살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이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마무리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도시타가 제대로 된 변호사였다면 며느리를 경찰에 신고하는게 맞았어요. 추리를 하기 위한 정보 제공도 빈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차라리 낙서 소동 쪽이 추리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다른 낙서들과는 그림이 달랐고, 키가 작은 사람이 그렸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하지만 진상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생이 새가 부딛힐까봐 '버드 스트라이크'를 리카 씨네 가게 쇼윈도에 그렸다는게 전혀 와 닿지 않은 탓입니다. 쇼윈도가 그 가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1층 건물 쇼윈도에 새가 날다가 부딛힐일이 그렇게 많을리 없으잖아요. 애초에 범인 신지의 집 창문에 새가 부딛혀 죽은 것부터가 작위적이지요. 이를 리쓰가 맨션의 깨진 창문만 보고 바로 알아챘다는 추리도 비현실적이고요.

또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화 "협상 상대는 요통으로 고생하는 전과자" 

도시타 형제는 연립 재건축을 앞두고, 퇴거를 거부하는 임차인을 설득하는 의뢰를 받았다. 리쓰는 찾아간 임차인 아라키 데쓰조의 집 안에서 '사취'가 나는걸 느꼈고, 여러가지 주변 정보들을 조합하여 그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길고양이를 돌본다는걸 훔쳐온 쓰레기 봉투 속 내용물을 통해 추리하는 과정, 그리고 사취는 길고양이가 물어온 쥐의 시체였다는 진상까지의 전개와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퇴거를 불응했던 이유가 유치원에 드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작위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고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일상 드라마 느낌을 가득 전해주는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3화 "만화가 지망생과 사라진 유언장" 

도시타는 이모네 카페 단골인 만화가 지망생 레논 씨의 사건 을 수임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형이 레논 씨가 유언장을 숨겼다고 주장해서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논 씨는 도시타에게도 유언장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형이 어머니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을 녹음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수록작 중 유일하게 변호사가 활약할만했던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유언장은 어디에 숨겼나?' 라서 변호사가 나설만한 부분은 없지만, 레논 씨가 왜 유언장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레논 씨가 어머니 장례식 초야 직후, 카페를 방문한 뒤 책꽂이 위에 있는 책을 떨어 트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카페의 만화책 중 한 권 안에 유언장을 숨겼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에 대해 사소해보였던 레논 씨의 질문이 중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유산을 형이 아니라 레논 씨에게 전부 남긴다는 거라서 유언장을 숨기고 형과 유산을 반으로 나누려 했다는 동기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바보같아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동기였다면 유언장을 숨기는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식으로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유언장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전개를 보면 더더욱요. 이는 유언장이 없을 경우 법률적으로 레논 씨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4화 "한심한 피고인과 소음 트러블" 

도시타는 마약용 주사기를 수백개 구입하려다 경찰에게 상처를 입힌 에비스 씨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으려고 도시타는 노력했지만, 에비스 씨는 거부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리쓰가 급작스럽게 증인 요청을 하여 판결은 연기되었다. 그 사이 도시타는 소꼽친구 사키의 소개로 이웃이 내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도모코 씨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도시타 형제는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도시타가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법정에서 날선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왜 에비스 씨가 징역형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추리해낸 뒤, 진상을 파악하여 그의 갱생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도모코 씨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소음 공해는 단순한 소재였고, 도모코 씨 남편이 정리 해고를 앞두고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근무하는 상황의 극복이 핵심이거든요.

드라마 모두 좋은 이야기에요.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에비스 씨 시간의 경우, 오래전 이혼한 아내가 키우던 아들이 칼에 찔린 뒤, 부모는 수혈이 안 되는 탓에 행인들로부터 피를 뽑으려고 주사기를 구입했다는 동기부터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딱히 추리를 할 부분도 없고요. 도모코 씨가 치과 진료를 받은 이후, 이빨에 채운 충전물이 우연히 방송을 수신하게 되어, 일종의 광석 라디오처럼 동작했다는 진상도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겁니다. 설령 실제 일어나더라도 입 안에서 소리가 나는걸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아쉬움이나 여운을 남기기는 커녕 더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만 굳게 만들어 주네요.

2026/03/20

지뢰 글리코 - 아오사키 유고 / 김은모 : 별점 3점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작가인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의 단편 연작집입니다. 2024~25년에 걸쳐 일본의 4대 미스터리 랭킹 1위를 휩쓸었던 작품이지요. 저 역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습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유쾌함과 만화적인 설정, 그리고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본격 미스터리를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게임’의 영역으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모두 다섯 가지 게임이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게임이지만, 여기에 약간의 변주를 더했다는 점에서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게임은 ‘정확하게 정해진 조건’ 아래에서 진행되며, 그 조건의 허점을 파악하고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는 플레이어가 승리하게 되고요. 이러한 점 덕분에 단순한 놀이를 넘어 두뇌 게임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계단 오르기나 가위바위보에 더해진 약간의 변주만으로 순수한 두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여러 랭킹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축제 때 좋은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카페 주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등 비교적 일상적인 이유인 게임의 목적들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인 이모리야 마토도 꽤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놀라울 정도의 분석력을 지닌 천재이기는 하지만, 게임 이외의 부분에서는 그렇게 기이한 면모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연이나 기묘한 습관도 없는, 다소 가벼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여학생입니다. 구누기 선배에게 거는 장난스러운 모습이 본래 모습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아래 만화판 이미지처럼요.
친구이자 주요 화자인 고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며, 다른 등장인물들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사립 세이에쓰 고교와 화폐처럼 유통되는 S칩을 걸고 게임을 벌이는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1억 엔에 가까운 돈이 걸린 게임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도박 실력이 학교 내 서열을 결정한다는 "카케구루이" 수준의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세이에쓰 고교와 얽히면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어 학생회장 사부리나 이모리야와 비슷한 수준의 게임 천재인 우키타 에소라 등도 앞서 등장했던 평범한 학생들과는 상당히 다른, 다소 비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토가 세이에쓰의 용벙(?)처럼 활약한다는 여지를 남기는 에필로그도 영 별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게임을 고도의 두뇌 게임 영역으로 끌어들인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등장하는 이야기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뢰 글리코 :

학원제 때 옥상의 사용권을 놓고 마토와 학생회의 구누기 선배가 ‘지뢰 글리코’라는 게임으로 대결합니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플레이어가 3의 배수만큼 계단을 올라가는 게임인데, 서로 계단에 ‘지뢰’를 장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마토가 장치한 지뢰에 걸린 구누기 선배가 3연타로 30계단을 미끄러져 패배하고 맙니다.

3의 배수로 올라가는 상황을 이용하는 초반부 전개, 그리고 설치한 지뢰 위치에 선배가 서도록 유도한 마지막 승부는 볼 만합니다. 그러나 구누기 선배가 마토의 지뢰를 모두 밟아 열다섯 계단 차이가 벌어진 뒤 바로 패배 선언이 이어지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위나 보로 이기면 여섯 계단씩, 바위로 이기면 세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니 3연승만 하면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두뇌 게임이라면 모를까, 순수한 가위바위보 승부라면 3연승 정도는 그리 낮은 확률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님 쇠약 :

카루타 카페에 출입 금지당한 카루타부를 위해, 카페 사장과 마토가 백인일수 카루타와 ‘신경 쇠약’을 결합한 ‘스님 쇠약’ 게임으로 승부를 벌입니다.

그런데 ‘두뇌 게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카페 사장은 카루타 카드에 몰래 표시를 하여 사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를 간파한 마토가 카드를 바꿔치기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카드 마킹을 새로 한 뒤 바꿔치기한다는 방법 자체도 비현실적이고, 마지막 카드 조합 역시 운의 비중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사기를 고발해 망신을 주는 편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 :

마토를 마음에 들어 한 학생회장 사부리 선배가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합니다. 선배가 이기면 마토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마토가 이기면 선배가 마토의 중학교 동급생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만들어 준다는 조건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는 일반적인 가위바위보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각각 ‘독자손’을 추가해 7전 4선승제로 겨루는 게임입니다. 독자손은 형태와 이름을 정하고 그 효과를 설정할 수 있는데, 최소한 한 종류의 손에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설정들이 꽤 복잡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토는 ‘형태가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교묘하게 활용해 마지막 대역전승을 이끌어냅니다. 핵심은 중반 이후 고다에게 부탁한 핫초콜릿을 마시기 위해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던 장면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손이므로 사실상 무효가 되어 그 판에서는 패배한 셈이었는데, 사부리 선배는 이를 독자손 설정의 효과로 오해해 마지막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처럼 평범한 게임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두뇌 게임으로 만든 점이 인상적인 이야기이며, 주어진 조건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길 수 있다는 전제도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물론 사부리 선배가 이 게임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안했던 ‘스네일’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 :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사립 세이에쓰 고교 학생회와 게임을 벌입니다. 그들의 ‘S칩’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승부 게임은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로, 방법은 한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표적(술래)은 몇 개의 단어로 외칠지를 먼저 정하고, 암살자(공격자) 역시 몇 걸음을 움직일지를 미리 선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사실 게임을 만든 스도는 그동안 잔꾀를 부려 ‘0’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 왔고, 그 덕분에 항상 승리해 왔습니다. 암살자는 최소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마련이니,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모리야는 이 트릭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표적에게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을 걸어 둡니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 정면만 보고 움직여야 한다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표적이 보지 못하는 공원 밖으로 돌아 나간 뒤, 떡갈나무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 표적을 붙잡는 데 성공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승리한다는 두뇌 게임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만, 세이에쓰의 오케가와가 엄청난 청력으로 숫자를 추측한다는 설정은 다소 과합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거액이 게임에 걸리는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게다가 스도의 필승법도 소문이 나면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4 Rooms Poker :

마토가 호적수 에소라와 S칩 전액을 걸고 세 장의 카드로만 패를 만들어 겨루는 포커 게임으로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처음 받은 카드는 버리고 한 번 다시 받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포커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가 제한된 시간 안에 카드를 가지러 네 개의 무늬 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방에 놓여 있는 카드 중 원하는 카드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이지요.

등장하는 게임 중 조건이 가장 많고 복잡하며 여러 장치들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건들 가운데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에 불까지 지른다는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생각되네요.

마지막 승부 역시 아쉽습니다. 아무리 카드의 뒷면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에소라가 최후의 승부 순간까지 뒷면의 색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입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뒷면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가 원래의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에 모든걸 걸기에는 너무 확률이 낮지 않나 싶어요.

무려 1억이라는 판돈을 쿨하게 포기하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토의 성격이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본인은 몸을 팔 생각까지 했는데 그걸 이대로 퉁친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0/23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오카자키 다쿠마 / 양윤옥 : 별점 2점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6점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커피 애호가 아오야마는 여자친구와의 트러블 직후, 카페 탈레랑 간판을 발견한게 계기가 되어 인생 커피를 만났다. 아오아먀는 탈레랑의 명언과 같은 달콤한 커피를 찾아 헤메었는데, 탈레랑에서 그런 커피를 맛 본 것이었다. 커피를 내린 바리스타는 기리마 미호시로, 아오야마보다도 연상이었다. 그녀는 아오야마의 이메일 주소만으로 그의 이름을 추리해 내는 뛰어난 추리력을 선보인 뒤,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잔 이유 등의 소소한 일상 속 수수께끼를 커피를 갈면서 풀어내었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과 함께.

특정 분야 전문가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흔해빠진 일상계 단편 추리물. 이런 류의 작품은 엄청나게 많지요. 제가 읽었던 것만 해도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작품은 이 중에서도 여러모로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를 연상케 합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젊은 전문가 아가씨 탐정, 그리고 그녀를 연모하는 어수룩한 남성 화자 컴비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에서는 헌 책의 역할이 중요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커피'의 역할은 미미하다는 차이는 큽니다. 카페 탈레랑은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과 해결은 커피, 그리고 바리스타와는 무관하거든요. 그나마 관련이 있는건 "제 2장 비터스위트 블랙" 정도 뿐입니다. 이래서야 바리스타탐정일 필요도 딱히 없지요. 추리를 하는 동안은 핸드밀로 커피를 갈다가, 추리를 마친 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을 하는게 바리스타가 탐정일 유일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너무 만화적이고 유치했다는 거지요.

추리적으로도 비약과 억지가 눈에 띄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바리스타 미호시가 상처입었던 과거 이야기가 조금 긴 호흡으로 설명되며, 묻지마 폭행이라는 강력 범죄가 연루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최악이었고요. 과거 미호시의 접대를 개인적 호감으로 착각했던 스토커가 있었다는건 설득력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주변을 맴돈다는건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긴 호흡의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비블리아 고서당"과 살짝 비슷하네요.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도 말이죠. 이외에도 서술 트릭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문제에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지겹기까지 했습니다.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낭비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커피'가 보다 중요하게 사용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은 그냥 흔해빠진 양산형 일상계 단편에 불과하네요. 2권에서는 보다 폭넓게 커피가 활용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사건은 두 번째 방문 때" 

아오야마가 탈레랑을 처음 찾는 이야기로 시리즈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호시가 이메일 주소만 가지고 아오야마의 이름을 알아낸 추리는 마음에 들었어요. 커피 애호가라고 소개되기에 "블루 마운틴"은 커피인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단서로 그게 이름을 의미한다는걸 추리하는게 지극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지고, 새빨간 우산이 남아있었던 상황에 대한 추리는 조금 억지스러웠습니다. 애초에 이미 헤어진 여자 친구의 친구가 아오야마를 비난할 자격 따위는 없고요. 코믹하고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설득력없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2장 비터스위트 블랙"

아오야마의 친척 아가씨 고스다 리카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이야기. 진상은 리카만 남자친구라고 생각했을 뿐, 그 남자의 진짜 연인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리카가 외국에서 살다왔던 탓에 오해가 생긴 것이었는데, 이를 '블랙 커피'를 통해 드러내는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일본에서 블랙커피는 설탕도 밀크도 넣지 않은 스트레이트 커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에서는 커피 색깔만을 의미한다네요. 그래서 리카는 머그컵만 보고서 블랙커피라고 단정했지만, 쓴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남자 친구는 혼자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셨던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의 차이를 세련되게 드러낸 좋은 장면이지요.

남자친구 녀석도 리카와 하룻 밤을 같이 보낸건 사실인데 아오야마가 그 녀석을 좋게 바라보는건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그 녀석은 리카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저지른건 맞습니다. 단지 '오해'라고 넘어가는건 무리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3장 유백색에 하트를 숨기다"

아오야마는 창 밖에서 뛰어가던 혼혈아 켄토에 대한 이야기를 미호시에게 해 주었다. 켄토에게 가끔 우유를 사 주며 친해졌지만, 교토 여름의 풍물시 오쿠리비 축제 날, 다친 켄토를 걱정해주다가 다투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아오야마의 이야기와 켄토의 행색에 주목했던 미호시는 카페 밖으로 달려나가 켄토를 찾기 시작하는데...

아오야마가 처음에 커피 맛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호시와 함께 다른 카페에 왔다는 것, 그리고 아오야마가 켄토에게 우유를 사 준게 아니라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의 서술 트릭이 숨어있는 작품.

서술 트릭은 신선했지만, 정작 다른 수수께끼들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우선 다른 카페의 커피가 탈레랑과 맛이 같았던건 우연히 같은 원두를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미호시가 탈레랑 커피 원두 구입처를 앞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수수께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던 아오야마가 멍청한 거지요. 

켄토가 돌보던 고양이를 나쁜 아이들이 괴롭힌다는걸 미호시가 간파했던 건,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할 뿐 추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비약이 심했던 탓입니다. 방학, 그리고 매일같이 축구를 핑계로 학교를 가면서 우유도 가져갔지만, 정작 축구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학교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진상을 끄집어 낸건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아이들이 고양이를 빼앗아 죽이려고 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급식 주머니는 단서가 되기 힘들었으니까요. 미호시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4장 바둑판 위의 추격전" 

아오야마는 산책 도중 전 여자친구 마미를 만났다. 그녀를 피해 도주하던 끝에 탈레랑으로 향했지만, 마미가 그곳까지 쫓아온 탓에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새 여자친구라고 소개해버리고 말았다. 마미는 잠자코 물러났지만, 그녀는 어떻게 아오야마가 탈레랑으로 도망쳐 올 것이라는걸 미리 알았던 것일까?

제목의 바둑판은 탈레랑이 있는 상점가 거리를 의미합니다. 바둑판과 같이 직선으로 나누어진 구획의 거리라는 설정이지요. 상점가 거리를 비롯하여 교토 시내를 무대로 펼쳐지는 아오야마의 산책과 도주 과정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줍니다. 교토 시내 거리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 덕분입니다. 그 와중에 "마루타마치 르부아"의 마루타마치 시가 등장하는 것도 반가왔고요. 풋풋한 사랑 싸움, 그리고 도라야 마미와의 옛 추억을 잃어버린건 슬픈 일이라는걸 아오야마가 깨닫는 결말은 여운이 남겨져서 좋았습니다.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모카와 마타지가 전화로 알려주었다는게 진상인데, 모카와 할아버지가 마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단서가 사전에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가 전무했거든요. 아무리 '일상계' 작품에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래서야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5장 past, present, f*****?" 

아오야마는 잡화점에서 고가의 다트를 보고 홀딱 빠졌지만 막상 사려고 하자 이미 팔리고 없었다. 잡화점을 나온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우연히 만났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미호시는 저녁 술자리에서 아오야마의 깜짝 생일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고, 선물로 그 다트를 주었다. 그런데 다트가 마음에 들었다는걸 미호시는 어떻게 알았을까? 다음날, 아오야마는 고나이라는 남자를 만나, 미호시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 진상은 전편과 같습니다. 잡화점에서 아오야마를 보고 미호시에게 정보를 알려준 공범(?)이 있었던 거지요. 다행히 전편보다는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범의 정체를 진작부터 노출시키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오야마도 진상을 추리해 내는데 거의 성공하고요.

하지만 고나이를 통해 드러나는 미호시의 과거는 뜬금없었고, 고나이도 굉장히 작위적인 설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네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미호시의 다정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찐따가 위험한 스토커가 되었다는건 지나치게 뻔했을 뿐더러, 고나이가 아오야마아게 접근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6장 Animals in the closed room" 

아오야마는 환상의 커피인 몽키 커피 원두를 구했다는 말로 미호시를 자기의 방으로 초대하는데, 그리고 이 때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는 계획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선물이었던 테디 베어 인형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찢긴 채였다. 밀실인 자취방에서 인형을 찢은건 누구였을까?

탈레랑의 고양이 샤를이 미호시 토트백 안에 숨어 몰래 들어와 인형을 찢었다는게 진상인데, 여러모로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샤를이 가방 안에 들어간걸 눈치채지 못할 수 있을까요? 약에 취해 잠들었다는 설정이 붙어있기는 합니다. 그럼 깨어나서 인형을 찢었다는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샤를이 마침 아오야마가 미호시가 자리를 비운 틈에 가방에서 빠져나와 인형을 찢은 뒤, 아오야마와 미호시가 도착하기 전 조용히 옷장 안에 숨어 들어가 잠들었다는 우연도 과합니다. 세 번째로 새끼 고양이가 인형을 찢었다면, 작 중 묘사처럼 날카로운 날붙이로 악의를 가지고 찢은 것 같았을리가 없습니다. 조금 긁히고 만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이외에도 아오야마가 선물을 미호시 몰래 등장시키기 위해, 낚시줄과 후크를 이용해 만든 복잡한 장치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수상해 보였던 신문배달원(?)과 아오야마가 침대 밑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의 등장을 통해 위험인물 고나이의 존재를 다사금 떠올리게 만들고, 다음 에피소드를 위한 복선으로도 적절히 사용한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앞서의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7장 다시 만난다면 당신이 내려준 커피를" 

고나이 나미카즈는 미호시가 아오야마와 사이좋게 지내는걸 참지 못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어두운 밤, 미행 끝에 브래스 너클로 폭행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아오야마는 이 폭행은 자신이 미호시와 만남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전에 받았던 고나이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미호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1권의 마지막 이야기. 고나이의 폭행으로 입원한 당사자가 아오야마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전편의 괴한은 아오야마의 전 여친 마미로, 유도부원이었던 그녀가 고나이를 처절하게 응징한 뒤 우여곡절끝에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독자는 아오야마를 미호시로 착각하고, 고나이는 마미를 미호시로 착각하는 이중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셈이지요. 아오야마의 정체가 다른 카페 바리스타였고, 본명도 아오야마가 아니라 아오노 야마토라는 것도 밝혀지는데, 이에 대한 미호시의 추리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커피맛을 훔치러 왔다는 둥, 사랑 싸움같은 중반부 전개와 고나이가 폭행을 결심하는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건 단점이에요. 고나이의 생각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오야마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오히려 미호시를 생각한다면, 고나이같은 위험인물은 감옥에 보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서술 트릭도 병문안을 온 사람까지는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친 사람은 미호시, 병문안을 온 사람은 아오야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였는데, 지나쳤습니다. 병문안을 온 건 그럼 도대체 누구랍니까? 마미? 이런 단점들 탓에 별점은 2점입니다.

"에필로그"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는걸 공식적으로 알리는 짤막한 분량의 에필로그. 바리스타 고나이가 카페 로크온이 아니라 탈레랑에 있다는게 서술 트릭 형태로 밝혀지는데, 이 쯤 되니까 지겹네요.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분량이라,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2006/09/21

[번역] 이콜 Y의 비극 (5)

에필로그 [무대 뒤에서]

꽉 막혀 도무지 진전이 없던 수사 선상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돌파구가 열린것은, 다치가와 아카네가 살해된 뒤 5일이 지난 5월 3일, 헌법 기념일의 일이었다.

그 날 아침, 세이쥬서의 수사본부에 얼굴을 내민 노리츠키 경시는, 수사관 한명으로부터 기묘한 보고를 들었다. 세타가야 서 관내에서 발생했던 살인사건 수사에 관련하여, 어제 동서로부터 사카자키 부부에 관련된 사항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타가야 서 관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라고 한다면, 4월 30일 저녁, 타이지도우의 공원에서 나고야에 살고 있던 여성이 강도에게 습격당해 죽은 사건의 일인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여성이, 살해당하기 전날 [벨코포 시노다]의 206호실에 전화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사카자키 부부 집에 전화를?"

여성이 살해당하기 전날이라고 한다면, 다치가와 아카네가 살해당한 4월 29일의 일이다. 연속해서 일어난 이 2개의 사건에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경시는 지푸라기 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곧바로 세타가야서에 연락하여, 30일에 일어났던 강도 살인 사건에 관한 수사정보를 이쪽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부터 계속 생각한 뒤 집에 전화를 걸어 자고 있던 아들을 깨웠다.

" 무척 급한 일이라서 그러니 곧바로 세이쥬서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구나"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4월 30일 오후 2시 30분경, 타이지도우 X쵸메의 공원의 공중 화장실에서, 20대 후반의 여성이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발견한 것은 근처의 주부로, 목에 나일론 끈이 감겨져 있었다. 누군가가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은 명백했다.

사망 추정 시각은 그날 오후 1시 30분 전후. 백주 대낮의 범행임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목격정보는 없었다. 사체에 난폭한 짓을 한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지갑 등의 소지품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당초 사건은 노상강도에 의한 범행으로 생각되었다.

소지품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피해자의 신원은 곧바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공원 쓰레기통에서 차 공원 호텔이름이 적힌 봉투가 발견되었고, 지문 등으로부터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 종이 봉투의 내용물은 결혼식의 초대장으로, 짐을 줄이기 위해 범인이 버린 것 같았다. 곧바로 호텔에 문의한 결과, 살해당한 여성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피해자는 나고야 시에 거주하는 토고 유카리라고 하는 28세의 여성으로, 4월 29일 아침,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신칸선으로 상경했다고 했다. 그날 밤은 피로연 잔치 때문에 호텔에서 1박한 뒤, 살해당한 당일 오전 11시에 호텔을 체크 아웃 했다고 했다. 양친에 따르면 유카리는 도쿄의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도내의 회사에서 근부하다가 2년전에 나고야로 돌아와 집안 일을 돕고 있었다고 했다. 30일은 도쿄의 동창 친구와 만난 뒤, 밤까지 나고야의 자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고 했다.

살해당하기 직전 피해자의 발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옷 주머니에서 새것인 성냥 상자가 발견된 덕분이었다. 그 성냥 상자에 범행 현장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상점가에 위치한 카페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카페 [카자미도리]의 주인은, 피해자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토고 유카리는 학생시대부터 가게의 단골로,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곤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방문이 점차 뜸해져 슬슬 얼굴 보기 힘들어 졌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0일 오후, 시계바늘이 1시를 가르키기 직전에 유카리가 오랫만에 가게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친구 결혼식때문에 상경했다가 들렸다고, 대학 동창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었습니다만-"

그러나,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만날 상대는 오지 않았고 유카리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때에, 가게에 남자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와서 '그곳에 토고 유카리라고 하는 여성분은 계십니까?' 라고 물었다. 시각은 1시 10분경. 주인은 유카리에게 전화를 건네주었지만, 전화를 건 남자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유카리는 곧바로 상대와 이야기 했고, 이야기가 끝나자, 만나기로 한 상대는 오지 않게 되었다고 주인에게 말하고, 서둘러 계산을 했다. 그 때 '담배는 피지 않지만, 모처럼 가게에 온 기념으로' 라고 말하고, 계산대에 놓여 있던 가게 이름이 들어간 성냥 상자를 집어 들고 주머니에 넣었다고 말했다-

노리츠키 경시는 타이지도우의 사건 개요를, 요약해서 아들에게 설명했다. 린타로는 잠버릇 탓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사건 내용은 대체로 알겠습니다만, 그것과 [벨코포 시모다]의 사건과의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말거라. 토코 유카리가 숙박한 호텔 프론트를 조사한 결과, 객실에서 걸은 전화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더구나. 유카리가 전화를 건 것은 29일 오후 5시 2분부터 4분까지의 하나 뿐이였다. 그런데 건 곳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결과, 그것이 세타가야구의 맨션 [벨코포 시모다]의 206호실이라는 것이 밝혀졌거든"

경시가 그렇게 말하자 린타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카자키 부부의 집이요?"
"그렇다. 아직 본인에게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토고 유카리와 사카자키 미도리는, 확실히 같은 대학에 적을 두었던 동급생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30일 오후ㅡ 유카리가 타이지도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해서 기다렸던 상대라고 한다면, 사카자키 미도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토고 유카리의 29일 오후 6시대의 알리바이는? 설마 그 다이잉 메시지는 (=)등호 (토고), Y의 말을 조합했을 지도..."

경시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아니다. 유카리는 친구 결혼식의 피로연에 출석한 뒤, 오후 6시부터 롯퐁기의 가게에서 끝날때 까지 2차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밤은 늦을 때까지 술을 마셨던 것이 확인되었다. 같이 있던 회사시대의 친구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알리바이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는 것은, 토고 유카리가 [벨코포 시노다]의 사건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란다"

경시는 거기까지 말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린타로는 턱에 손을 대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2시 지나서 전화를 걸어왔던 남자라고 말하신 부분이 신경이 쓰이는군요"
"아아, 아마 그 남자가 유카리를 살해한 범인일거야. 뭔가 구실을 대고 유카리를 가까운 공원까지 유인해 낸 뒤, 그 장소에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겠지. 밝혀진 대로 계획적인 범행이야. 지나가던 강도의 짓은 아니야. 소지품을 훔쳐간 것은, 강도를 당한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면, 범인은 어떻게 유카리가 그 카페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카자미도리]라고 했죠? 가게 이름은"
"그렇다"
"- 어? 잠깐 기다려 주세요"
린타로는 눈을 감고, 카자미도리, 카자미도리 라고 여러번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등을 곧게 펴고 번쩍 눈을 떴다.

"그렇구나. 그 다이잉 메시지는 그런 뜻이었구나!"
"뭔가 알아낸거냐?"

경시가 조심조심 물어보자, 린타로는 싱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쯔부라야 아케미 범인설이 부정된 것에 대한 휴유증은 없는 듯 했다.

"예. 이번에는 틀림 없습니다. 같은 실패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정리해 보도록 하죠- 토고 유카리는 29일 오후 5시를 지나 [벨코포 시노다]의 206호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마 유카리는, 학생시대의 동급생이었던 사카자키 미도리와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겠지만, 미도리는 그 때, 담편 애인 맨션을 감시하고 있어서 집에 없었죠. 전화를 받은 것은 집을 지키고 있던 동생 아케미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아카네는 그때까지는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는 것이 가능했었죠. 유카리의 용건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수사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다음날 만날 약속을 하는 것이었겠지. 혹은 전에 약속을 했었다면, 그 확인을 하기 위한 전화였을 수도 있고. 시간이나 만날 장소 같은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전화를 건 흔적이 없는 이상, 유카리는 집을 지키고 있던 동생 아카네에게 언니에게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자연스럽겠죠?"
"흠, 그래서?"
"다음날 유카리의 발자취대로라면, 메시지의 구체적 내용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토고 유카리씨로부터 전화. 타이지도우의 [카자미도리]라는 카페에서, 오후 1시에 만나자] 최소한 이 정도의 정보를 아카네에게 전해준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유카리로부터 전화를 받은 아카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도록 하죠. 그녀는 확실히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전화 옆에 놓여져 있던 메모 패드에 지금 말한 내용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거실의 사이드 보드 위에 메모용의 필기용구가 없었나요?"

라고 린타로가 물었다. 경시는 범행 현장의 상태를 떠올렸다.

"음, 그렇게 말하니, 메모 패드 옆에 검은 사인펜이 있었던 것이 기억 나는구나"
"검은 사인펜. 그것으로 분명해 졌습니다. 아카네는 유카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만날 장소와 시간의 메모를 적었다- 그러나 [風見鷄 (카자미도리)]라고 하는 가게 이름이나, 喫茶店(카페)라고 하는 단어는 항상 한자를 적는 것은 획수가 많기 때문에 메모에 적는 것은 귀찮은 글자죠.  전화를 계속 하던 도중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미도리는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 생략하여 메모를 남긴 것이 분명합니다. 종이와 펜을 좀 주시겠습니까? 뭐 이런 식으로-"

"아카네가 살해당할때 까지, 이 메모는 메모 패드 제일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녀가 누군가에게 등을 찔리고 빈사 상태로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를 남기는 순간에도 메모 패드 위에 이 문자열이 있었던 것이죠. 우리들이 그 가능성을 놓쳤던 것은, 아카네가 메시지를 적은 메모를 사인펜으로 후루룩 써서 2장째의 종이에 흔적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그 다이잉 메시지는, 새 메모지에 써서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완전한 실수야. 그런데 그렇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는 사인펜으로 쓴 메시지 메모 위에 붉은색 볼펜으로 이콜 Y라고 써서 남긴 것이었군"
"그렇습니다. 이런 식이죠"

"아카네는 범인에게 습격당하기 직전까지, 빨간 볼펜을 써서, 미니-코미 잡지의 인터뷰 원고에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최후의 체력과 기력을 짜내어 단서를 써서 남겼을 때도 편집자로 일하던 발상의 연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는 등호가 아니고 문자열을 소거하기 위해 쓰는 이중선, [Y]는 필요한 문자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는 삽입기호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쨌건, 그녀는 메시지를 쓰던 도중에 힘이 빠져서 삽입해야 하는 문자를 써 넣지는 못했죠. 메시지를 완성하기 전에 숨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미완성이라도 이 문자열을 본다면 그녀가 추가로 써 넣고 싶었던 문자가 무엇인지는 일목요연합니다. 다름아닌-

"-사카자키 미도리인가... 하지만 미도리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네. 전에도 그렇게 말했을텐데?"

경시가 의견을 내자 린타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아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미도리의 진술을 다시 한번 잘 검토해 보도록 하죠. 사건의 관계자가 사카자키 미도리의 모습, 아니 목소리라도 실제로 확인한 것은, 오후 5시 30분 이전과 7시 20분 이후의 일에 한정되는데, 그 사이에는 2시간 가까운 공백이 있습니다. 그 정도의 사간 여유가 있다면, 전차를 갈아타서 세타가야의 시노다 까지 왕복하고, 동생인 아카네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말한다면야 미도리의 알리바이는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그 2시간 사이에 미도리가 계속 남편과 그 애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지 않나? 특히 6시대의 미도리의 진술은 모조리 사카자키의 행동과 부합하고 있다. 만약 그 때, 미도리가 니시나마 마유미의 맨션으로 부터 떨어져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 사카자키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 가능했겠니?'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맹점에 빠져버린 것이죠. 미도리가 남편과 공모해서 미리 그 날의 행동에 관해 입을 맞춰 놓았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경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미도리가 사카자키와 공모했다고? 그런 바보같은!"
"그렇게 바보같은 것입니까?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침식을 같이하는 부부였습니다. 운명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죠. 사전에 세밀한 시나리오를 세워 세세한 곳 까지 입을 맞출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겠죠. 범행 당일, 사카자키가 그 시나리오 대로 행동하기만 한다면, 마유미의 맨션에 숨어서 감시하지 않아도 미도리는 그 사이의 움직임을 손에 잡듯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뒤에는 사람들 앞에서 두사람의 부부 사이가 위험한 것 같은 연기만 하면 되지요"
"- 기다려라. 자, 배달 피자의 건은 어떻냐? 미도리는 7시 조금 전에, 피자 배달원이 마유미의 맨션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일은 그 장소에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아뇨. 그것도 아닙니다. 미리 배달 시각이 7시 전후가 되도록 사카자키가 타이밍을 맞춰서 피자를 주문하도록 마유미에 시킨 것일 뿐입니다. 확실히 그 전후의 미도리의 진술은 시간의 기억이 애매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피자 배달원도 미도리의 모습은 보지 못했고요"

"그렇게 한다면 구노 경부가 생각했단 사카자키와 마유미의 공모설과는 반대로, 니시나마 마유미는 간접적인 알리바이 증인으로 삼기 위해, 사카자키 부부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란 말이냐?"
"아마도, 그렇겠죠"

라고 린타로는 동의했다.

"사카자키 부부의 계획의 교묘한 점은, 니시나마 마유미에게 알리바이가 성립 하는 것 같이 타임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미도리의 입으로 그녀가 범인이라고 고발하게 한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마유미에게 아카네 살인을 뒤집어 씌울 생각은 전혀 없었죠. 다만 마유미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는 것을 경찰에게 확인 시키면서, 반대로 마유미와 사카자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한 미도리의 알리바이를 보강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제 3자일 뿐인 마유미를 끌어들인 것도, 부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언뜻 보기에는 미워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시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드디어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을 느꼈다. 린타로는 계속 말했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보지요. 미도리가 이 다이잉 메시지를 눈치챈 것은, 범행 직후는 아니고 8시 30분에 집에 돌아와서 사체의 발견자를 가장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미도리는 메모패드를 보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이 거의 적혀 있는 것에 깜짝 놀라, 메모 용지를 찢어서 숨겼습니다. 그 때, 한장 아래의 종이에 볼펜 자국이 남아 있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한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흠. 그렇게 된다면 이 전날 밤, 너가 쯔부라야 아케미에 관해서 세웠던 가설은, 그대로 사카자키 미도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겠군. 그러나 미도리가 범인이라면, 2색 볼펜의 글자색을 검은색으로 바꾸어 놓은것은 왜지? 검은색 잉크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빨간 색을 싫어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에에 굉장히 사소한 것이지만, 이유는 확실합니다"

"어떤 것이지?"
"미도리가 남긴 단서는, 단적으로 말한다면 [수정해 넣는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죠. 다시 한번, 범행 현장의 상황을 머리속에 떠올려 주십시오.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아카네가 수정하고 있던 인터뷰 원고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메모패드의 메시지와 동시에 그것을 본 미도리는 [수정해 넣는다]라고 하는 말을 연상해서, 당연히 그것을 피하려고 서둘러 볼펜의 글자색을 바꿨겠죠."

경시는 목을 숙이고, 불만의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미도리는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었을까? 메모 용지를 찢어 낸 이후에는 [킷사카자미도리]라고 하는 원래의 문자열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수정하던 뭘하던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는 없어진 것 아니냐?"
"아뇨. 아버지.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은, 그 시점에는 그 메모를 남기게 한 토코 유카리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뭔가의 우연으로 아카네가 남겼던 메모의 내용이 밝혀질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미도리는 생각을 거듭, 아카네의 메시지가 문자 그대로 [수정해 넣는다]라는 것을 숨기려 했던 것이죠. 아마도, 유카리가 미도리가 집에 없었을 때 전화를 걸었던 것 자체가 미도리에게는 정말로 예상외의 사고였기에, 그 시점에는 아직 그녀의 입을 봉하는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겁니다"
"역시나"
"미도리가 당황하고 급해진 것은, 사정청취를 받고 있던 도중에, 이콜 Y라고 하는 볼펜 자국이 메모페드 아래 용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된 때라고 생각합니다. 망연자실한 미도리는, 간신히 그 형태가 니시나마 마유미의 仁이라는 글자와 닮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럭저럭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유카리를 살해할 결의를 굳히게 된 것은 그 때, 그 순간임이 분명합니다. 유카리의 입으로부터 [카자미도리]라고 하는 카페의 이름이 드러난다면, 자신의 범행이 들통날지도 몰랐기 때문이지요"

경시는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린타로의 말대로였다. 메모 패드를 보던 순간, 미도리가 숨을 멈췄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만 경시는, 그녀의 반응이 의미하는 것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경시는 기분을 돌리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의 말 대로, 사카자키 부부가 공모했다라고 한다면, 토고 유카리를 살해한 것은 미도리가 아니라 남편 사카자키의 짓일 가능성이 높겠군. 사카자키가 세이쥬서에 출두했던 것은 30일 오후 3시를 지났을 때였다. 유카리의 사망추정시각은 오후 1시 30분경. 타이지도우의 공원에서 그녀의 입을 봉한 뒤, 흔적을 없에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세이쥬서에 나타날 여유는 충분히 있었겠구나"
"그렇습니다. [카자미도리]에 걸려왔던 전화도, 남자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사카자키 부부는, 사람 앞에서는 부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 연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범행을 위해 연락용 휴대전화를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미도리는 메모 패드에 남겨진 메시지로부터, 토고 유카리가 30일 오후 1시에 타이지도우의 카페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남편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서, 선수를 쳐서 유카리의 입을 봉하라고 명령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기는 뭐지? 사카자키 부부가 이 정도의 수단을 동원해서 연극을 꾸미면서 까지, 동생 아카네를 살해할 수 밖에 없었던 동기는?"

린타로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어이어이 아버지.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아버지의 일 아닌가요?"

******

세이쥬서에 임의출두를 명령받은 사카자키 교우스케가 범행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3일후의 일이었다. 기운을 잃고 어깨를 늘어트린 사카자키의 입에서 사건의 전모와 다치가와 아카네 살해의 동기가 밝혀지게 되었다.

다치가와 아카네 살해 범인과 알리바이 공작에 관해서는, 대부분 린타로가 추측한대로였다. 곧바로 사카자키는 토고 유카리를 타이지도우의 공원에 불러내어, 그 자리에서 살해한 사실을 인정했다. 29일 심야에 휴대전화를 통해 미도리가 범행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사카자키는 20일 오후 [카자미도리]에 전화를 걸어 '아내가 급한 병으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내가 말했던 가게에 가려고 했지만 장소를 잘 알지 못해서 찾기가 어렵다. 가까운 공원에 있으니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유카리에게 전했다. 사카자키는 몇번 아내와 같이 토고 유카리와 만난 적이 있어서, 그녀는 공원에 와서도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준비한 나일론 끈으로 목을 조를 때에도 거의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카리의 가방을 가지고 간 것은, 강도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은 아니었고, 그녀의 휴대전화를 처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유카리가 [벨코포 시모다]에 전화한 것이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카리가 호텔 객실 전화로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사카자키는 굉장히 허탈해했다.

사카자키는 토고 유카리의 살해가 결국 실패한 범행으로 끝나 버린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범행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카리가 전화를 걸어왔던 것은, 계획외의 사고였고, 아카네가 남긴 다이잉 메시지의 의미를 깨닫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유카리가 아카네의 죽음을 알기 전에, 입을 막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메모 패드의 적혀진 메모를 본 미도리는 유카리가 휴대폰으로 전화 했다고 생각해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번 그녀의 번호를 걸어 보았지만, 그 번호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것 같았다. 새로운 휴대폰 번호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유카리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카자미도리]에서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이것 역시 너무나 위험한 방법으로 보였다고 했다.

또한 밝혀진 것은, 사카자키 부부가 아카네의 살해을 떠올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사카자키가 니시나마 마유미와 불륜의 관계에 빠진 것이었다. 마유미는 돈 씀씀이가 헤픈 여자로, 사카자키가 돈을 계속 쏟아부어도, 바닥이 없는 눞과 같아서 좀 더, 좀 더라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여자의 기분을 계속 맞추어 주기 위해 사카자키는 결국 회사의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들통나지 않고 맛을 들여 회사의 장부를 조작해서 결국 백만단위의 돈을 횡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회사 돈을 빼돌리고 있다는 소문마저 사내에 퍼지게 되어 6월의 결산기를 앞두고 사카자키는 자신의 목을 지키기 위해 조급히 장부의 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안되는 궁지에 몰렸다.

그렇다 해도, 그만한 돈을 쉽사리 융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카자키는 고민끝에 아내 미도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 궁지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없는지 상담했다.

"이것을 기회로 니시나마 마유미와 완전히 손을 끊겠다고 약속해준다면, 뭔가 당신을 도울 방법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라고 미도리는 말했다. 수년전, 미도리의 양친이 차례로 돌아가신 직후, 두 자매가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동생 아카네와 같이 서로를 상호 수취인으로 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했다고 했다. 아카네를 살해, 사망보험금을 받아넨다면, 지금까지의 회사 장부의 구멍을 메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사카자키는 처음에는 아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카자키 이상으로 미도리 쪽이 진심이었다. 그 진심에 이끌려 가게 되어, 곧바로 사카자키도 아카네를 살해하는 일을 결의하게 된 것이었다. 사카자키에게도 생각이 닿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미도리와 결혼하고 얼마간이 지나서, 대수롭지 않은 불장난의 결과로, 동생 아카네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서로가 거북했기에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미도리는 그 사실을 희미하게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출장으로 집을 비웠을때에 한해서만 동생을 집으로 부른것은, 남편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탓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카네의 살해에는 1개월전부터 시간을 들여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했다. 니시나마 마유미를 알리바이 증인으로 세우자고 말한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도리 쪽이었다. 아니, 그것에 한해서가 아니라 모든 계획과 실제 범행 전부에 있어서 주도권을 쥔 것은 아내쪽이었다. 범행당일이 가까와 오자, 사카자키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내의 진짜 동기는, 보험금도,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물론 동생에 대한 질투때문도 아닌것 같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대로 조종해서 같이 범죄에 손을 담그도록 움켜쥔 뒤, 영원히 자신의 손에서 내가 도망칠 수 없도록 속박하는 것, 미도리는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이번 범행계획을 세운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 한편, 아내 미도리는 범행을 부인. 의연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PS :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재미있으셨나요? 오타와 의역 투성이라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내용 전개는 되는 수준이라 자평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으셨으면 감상이라도 한줄~

2024/02/24

하드웨이 - 리 차일드 / 전미영 : 별점 2점

하드웨이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전미영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여름밤,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리처에게 존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영국 공수특전단(SAS)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레고리는 전날 밤에도 리처가 그 카페에 있었던 걸 확인한 뒤, 전날 자정쯤 카페 앞에 주차되어 있던 벤츠를 타고 사라진 남자를 목격했는지 묻는다. 리처가 그렇다고 하자 그레고리는 자신의 상사이자 전직 특수부대원들을 모아 민간 용병 사업을 하는 에드워드 레인에게로 리처를 데려간다.
레인은 자신의 아내가 납치되었으며, 리처가 목격한 남자가 몸값 100만 달러가 실린 벤츠를 탈취한 납치범이라고 말한다. 레인은 아내를 되찾아 달라며 리처를 고용하고, 리처는 수사 과정에서 5년 전 레인의 첫 번째 아내였던 앤이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 후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리처는 전직 FBI 요원이자 사립탐정인 로런 폴링과 함께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나간다.


잭 리처 시리즈 10번째 작품. 이번에는 유괴극입니다. 유괴극의 핵심인 몸값 전달에 대한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인은 특정 차를 지정하여 차 안에 현금을 두고, 차 키를 다른 곳에 두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레인의 부하들과 리처가 차 키가 있는 곳을 감시하는 동안, 미리 빼돌렸던 스페어 키를 이용해 유유히 차를 몰고 달아나는 것이지요. 최소한 한, 두 번 정도는 먹힐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레인의 의붓딸 제이드가 그린 그림, 그리고 아이 침실의 인형들을 통해 유괴가 아닌 자작극이라는걸 깨닫게 만드는 소소한 디테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범인이 차를 열쇠로 열었다'는 것에 주목하는게 괜찮았어요. 무선 리모컨 키가 일반화된 시대에 잘 어울리는 착안점이었거든요. 군인처럼 시야 확보 등을 염두에 두고 범인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과정도 설득력 높았고요. 범인을 쫓으며 뉴욕의 지리를 상세하게 풀어내는 묘사도 좋았고, 레인이 아프리카에 버리고 왔던 부하 호바트 이야기도 그럴싸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추리적으로 점수를 주기 힘든 탓이 큽니다. 리처와 용병들 모두 유괴 사건은 백화점에서 차가 잠깐 멈췄을 때 유괴범이 총을 들고 올라타 유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화점 어디에서 차가 멈출지 범인은 알 수 없었다는게 문제였다는데, 이 점 하나만으로도 운전하던 테일러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테일러가 아니면 피해자 케이트가 공범이었을테고요. 심지어 범인은 레인이 보유한 현금이 얼마인지, 레인에게 무슨 차가 있는지를 꿰뚫고 있는 등 내부자가 아니면 모를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모두들 테일러가 죽었다고 확신하며 그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지 알 수 없어요. 자동차나 현금 가방에 GPS 추적장치 하나 몰래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일반인이라면 구하기 힘들었을 수 있지만, 레인 일당은 용병 부대이니 이런 장치를 구하는건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레인을 포함한 레인의 부하들이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 마지막 클리이막스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리처를 제외한 테일러 가족을 사로잡은 뒤, 성폭행과 낙태를 운운하며 잔인함을 부각시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수깡 인형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반격다운 반격은 아예 하지 못하니까요. 전직 델타포스, SAS 등 엘리트 특수 부대원 출신들이라는 설정이지만, 하는 짓과 최후는 시리즈 다른 악당들보다도 못해서 허무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테일러가 일부러 단서를 조금씩 남겨 레인을 영국 시골 농장으로 유인했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어요. 유능한 대원이라는 설명은 있었지만, 장기간 포위와 대치가 가능한 용병들인 레인 일당과의 전면전은 무리입니다. 이보다는 유괴극을 꾸미기 전에 레인을 먼저 살해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거에요. 케이트가 위자료 대신 레인이 가진 현금 절반을 몸값을 가장하여 챙겼다는데, 레인이 죽었다면 전부를 챙길 수도 있었을테고요.
레인의 남은 용병 버크, 크룸, 코왈스키가 미국으로 돌아가 레인의 남은 돈을 빼앗아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죽은 보스의 돈에 손을 대지 않을 정도의 도덕군자들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미 소액은 착복하려는 시도도 했었는데 말이죠.

인물들도 매력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입니다. 레인과 그 일당은 악덕 용병 부대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인물들로 묘사됩니다. '기뉴 특전대'와도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약하다는 점에서는 그보다도 못하고요.
잭 리처의 파트너인 전 FBI 수사관이자 현직 탐정 폴링 역시 시리즈 다른 작품 여주인공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등장하는 이유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그녀가 사건 수사와 해결에 도움을 주는 요소는 거의 없거든요. 탐정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영국 내에서 몇가지 정보를 얻는 등의 활약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리처 혼자서도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였습니다. FBI 출신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마지막 레인 일당과의 결전에서는 사로잡힌 공주님 역할 뿐이고요. 결론적으로, 그냥 리처의 스쳐지나가는 애인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0/05/19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가 뽑은 2009년 미스터리

 100518 :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가 뽑은...

가입은 했지만 거의 활동하지 않는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카페에서 '우리가 뽑은 2009년 미스터리'라는 행사를 진행했더군요. 전혀 몰랐네요... kisnelis님 포스팅을 보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무려 56위까지 있는데 일단 1위부터 10위까지는
1. 고백 - 미나토 가나에
2. 경관의 피 - 사사키 조
3. 내가 죽인 소녀 - 하라 료
4. 천사의 나이프 - 야쿠마루 가쿠
5.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 야마구치 마사야
6. 신세계에서 - 기시 유스케
6.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8. 항설백물어 - 교고쿠 나츠히코
9. 은폐수사 - 곤노 빈
10.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이네요.

그 외 순위에서 읽어본 작품은
15. 인체 모형의 방 - 나카지마 라모
15.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에도가와 란포
24.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 요코미조 세이시
26. 도착의 사각 - 오리하라 이치
32.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수첩 - 와카타케 나나미
49. 귀를 막고 밤을 달린다 - 이시모치 아사미
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문학 팬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선정된 58권 중 읽은게 달랑 11권 뿐이라 창피하네요. 최소한 절반은 읽었어야 하는데... 올해는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많이 읽지 않은 책이 쌓여가면 좀 곤란한데 큰일입니다.

2010/02/25

더 박스 - 리처드 매드슨 / 나중길 : 별점 2.5점

더 박스 - 6점
리처드 매드슨 지음, 나중길 옮김/노블마인

"나는 전설이다"의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비롯해서 전부 10편의 작품이 실려있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버튼, 버튼
  •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 매춘부 세상
  •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 옷이 사람을 만든다
  • 카페에서 생긴 일
  • 충격파
  • 벙어리 소년
  • 특이한 생존 방식
  • 소름 끼치는 공포
반전물로는 "버튼, 버튼", "매춘부 세상", 그리고 범위를 좀 넓게 잡으면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까지 총 4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작품들은 범죄 서스펜스 스릴러 ("카페에서 생긴일"), 썰렁 판타지 ("옷이 사람을 만든다"), 풍자 블랙 코미디 ("소름 끼치는 공포") 등 다양한 장르가 실려있어 일견 풍성한 느낌을 전해주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별로였어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좀 옛날 작품이라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온다는 것과 반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 많았거든요. "나는 전설이다"와 비교한다면 한참 처지는 단편집이라 생각되더군요.
예를 들자면, 표제작인 "버튼, 버튼"의 경우 20년전 환상특급 (Twilight Zone)의 에피소드를 연상케하는 작품인데 반전으로서의 설득력도 부족했고 너무 예상 가능한 결말이 아니었다 싶었어요. 버튼을 누를 경우 모르는 사람이 죽는 대신 5만달러를 받는다는 기본 설정은 분명 거장의 솜씨인데 전개와 마무리가 너무 약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버튼을 누르면 특정 "방"의 전원이 완전히 차단되고 그 전기료를 한전이 버튼 주인에게 보내준다는 소박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매일 아내가 버튼을 눌러 적게나마 용돈벌이를 하는데 어느날 남편이 버튼의 작용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고 안에서 질식해서 죽는다는 이야기... 이게 더 재미있지 않나요?
그리고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그야말로 "썰렁한" 이야기더군요. 반전물도, 범죄물도 아닌 드라마인 "충격파"는 독특하기는 한데 기대와는 너무 다른 작품이라 겉도는 느낌이 강했고요. 차라리 두 작품 모두 "스멀스멀" 계열로 쭈~욱 끌고 갔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좀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 진지하고 짤막한 드라마 "특이한 생존 방식" 도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고 풍자성격이 강한 블랙코미디 "소름 끼치는 공포"도 독특함은 좋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 특화된 발상과 풍자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하지만 거장다운, 기대에 값하는 좋은 작품도 물론 실려있습니다. 영매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는 마지막 부분의 서늘한 느낌이 일품이었고, 블랙코미디스러운 맛과 독특한 설정, 반전까지 깔끔한 "매춘부 세상"은 그야말로 반전물 단편의 교과서같은 작품이더군요. 고딕 호러에서 시작해서 완전범죄 추리물로 끝나는 "흡혈귀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는 추리 애호가로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고요. 초능력에 대한 작가의 색다른 시각이 돋보이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뻔해졌지만) "벙어리 소년"도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 특유의 서스펜스와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진지한 범죄물 "카페에서 생긴일"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돋보이이기에 이 단편집 베스트로 꼽고싶습니다. 디테일하게 파고든다면 범죄가 너무 빨리 들통난다는 것과 주인공 여성을 범인들이 너무 쉽게 놓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지만 이런 단점을 뛰어넘을 정도로 숨막히는 전개가 돋보이는 명편이거든요.

결론내리자면 절반정도는 괜찮았고 절반정도는 그냥 그랬던 어중간한 책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읽는 재미는 있고 짤막한 작품들이니 만큼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적합한 단편집이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되도록 구입보다는 빌려읽으시기를 권합니다.

PS : "버튼, 버튼"은 카메론 디아즈 주연으로 영화가 개봉되었다는데 보지는 못했지만 대관절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원작 단편은 30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들어도 충분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2010/05/07

클로버문고의 향수 : 별점 3점

클로버문고의 향수 - 6점
클로버문고의 향수 카페 지음/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저도 가입해있는 카페 "클로버문고의 향수"에서 간행한 클로버문고 만화관련 도록입니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발간되었던 클로버문고 429권 중 389 권에 이르는 만화만 추려내어 총 7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죠. 카테고리는 "명랑 / 공상과학 / 스포츠 / 순정 / 고전,명작 / 시대,역사 / 액션,추리,드라마" 로 나뉩니다. 세부 항목으로는 각 만화별 이미지와 작가와 줄거리 소개는 물론 짤막한 감상과 복간여부, 그리고 원작관련 (불법으로 복제된 만화라면 그 일본 원작까지!) 소개까지 무려 7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실려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클로버문고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네요.

클로버문고는 과거 에이브와 함께 제 어린시절을 함께했던 문고라 읽는 내내 굉장히 반갑더군요. 이렇게 과거 명작의 흔적이나마 지금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클로버문고의 향수" 카페 여러분께 감사드려야 할 테고요.

새롭게 알게된 사실도 무척 많았어요. 예를 들자면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일본 작품의 카피판들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날개"와 같이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이 카피판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아다치 미츠루 작품까지 카피했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트렌드에 굉장히 민감했던걸까요?
그리고 이원복의 과거 만화가 가와사키 노보루와 치바 데츠야 화풍을 절반씩 섞은 독특한 화풍이었다는 것도 새로왔어요.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대표적 장면만 나열하니 확 와 닿더라고요)
또한 의외로 "소년중앙", "어깨동무" 등의 월간지 연재만화가 많다는 것도 특이하더군요. 이우정의 걸작 "갈기없는 검은사자"라던가 탐정만화 "모돌이 탐정", 김형배의 "20세기 기사단" 등은 제가 당시 월간지를 통해 읽었었는데, 단행본이 클로버문고에서 발간되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었거든요.

하여간 읽었었거나 소장했었던 작품들은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무척 읽고 싶은 작품들이 넘쳐나서 도록을 넘기는 순간순간마다 지름과 소장의 욕구를 참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개인적으로는 방학기의 "초립동이"와 "사라진 낡은 집", 이 두권은 어떻게든 다시 나와주면 참 좋겠습니다. "초립동이"야 워낙에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이기 때문이고, 엘러리 퀸의 "신의 등불"을 조선시대로 각색한 "사라진 낡은 집"은 어린시절 무서워서 못 읽은 작품인데 꼭 읽어보고 싶거든요.
물론 과거의 명작이라 하더라도 지금 읽으면 낡은 기분이 드는 작품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만해도 어린시절 푹 빠졌었던 "20세기 기사단"의 경우 복간본을 구입한 뒤 생각과는 너무 달라서 실망했던 기억이 있죠. 하지만 "철인 캉타우" 등 복간된 뒤에도 아직도 그 생명력과 재미가 유지되는 좋은 작품도 굉장히 많은 것 역시 사실이니 만큼, 클로버문고의 클래식하고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좋은 작품을 선별하여 복간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구입하고 싶네요.

별점을 매길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구태여 별점으로 평가한다면, 옛 향수와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며 한국 만화계의 한 역사이기도 한 자료적 가치도 충분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다양한 저자가 손을 댄 작품별 소개의 편차가 큰 탓에 (굉장히 부실하고 단지 작품 감상에 불과한 짤막한 소개글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감점했는데 사실 만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도록이죠. 저와 같은 시대를 공유하셨다면 꼭 한번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읽었던 작품 중 클로버문고 베스트 10을 감히(!) 작성해 봅니다. 순서는 무순입니다. 다시 읽게 된다면 많이 바뀌겠지만요...
갈기없는 검은사자 - 날개 - 소년 007 - 암행어사 허풍대 - 요철발명왕 - 변칙복서 - 벤허 - 홍의장군 곽재우 - 땅콩찐콩 - 초립동이

2026/06/14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7) 달콤한 커피의 뒷 맛

추리소설 속 커피는 대개 쓰고 진한 음료가 연상됩니다. 밤늦게 사건을 조사하는 탐정의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피로를 쫓기 위해 마시는 각성의 음료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커피의 쓴맛은 긴장감이나 고독한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고요.

하지만 커피가 언제나 블랙으로만 통했던 것은 아닙니다. 커피에 설탕을 넣는 습관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고, 우유나 크림을 더해 쓴맛을 줄이는 방식도 커피 문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니까요. 커피에 데운 우유를 섞어 마시는 프랑스의 카페오레,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더해 마시는 비엔나식 카푸치노처럼요. 오늘날 익숙한 카푸치노와 카페라테, 카페모카 역시 에스프레소에 우유와 거품, 초콜릿 등을 더해 커피의 쓴맛을 부드럽게 조절한 커피입니다. 여기에 바닐라 라테나 캐러멜 마키아토처럼 향과 단맛을 더한 음료까지 생각하면, 달콤한 커피도 엄연히 커피를 즐기는 오래된 방식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생각하면, 추리소설 속에서 커피에 설탕이나 우유를 넣는 장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설탕과 우유를 섞는게 커피를 마시는 익숙한 방식이었을 수 있습니다. "빙과"로 잘 알려진 고전부 시리즈의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에 나오는 이바라가 방문한 커피 맛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가게에서는 주문할 때 우유와 설탕이 필요한지를 먼저 묻고, 필요하다면 각설탕 두 개를 내주고 우유는 커피에 미리 넣어 주거든요. 이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조금 낯선 방식이지요. 보통은 손님이 직접 취향에 맞게 우유나 설탕을 넣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이렇게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더해 마시도록 준비된 곳도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 "커피, 그리고 교수와 여대생"도 비슷합니다. 주인공 다케미야 교수는 집에서 직접 원두를 볶을 정도로 커피에 관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 역시 커피를 마실 때 자연스럽게 설탕을 넣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설탕은 커피 맛을 망치는 첨가물이 아니라, 커피에 진심인 사람의 취향에 따라 커피를 완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달콤한 커피는 생각보다 평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리 소설에서도 달콤한 커피를 여러모로 활용하고 있고요.

첫 번째로는 강한 쓴맛과 단맛을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 "잔 속에 든 독"에서 스텔라는 남편의 불륜녀를 모르핀으로 독살할 때 뜨겁고 진한 커피를 선택합니다. 설탕을 듬뿍 넣어서요. 이는 친절이나 취향이 아닙니다. 커피의 쓴맛과 설탕의 단맛이 모르핀의 이상한 맛을 덮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탕 때문에 스텔라는 콕크릴 경감에게 덜미를 잡히고 맙니다. 단맛은 독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범행을 드러내는 단서가 된 셈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단 맛이 아니라, 달콤하게 만든 형태가 트릭으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단편 "키리가미네 료와 보이지 않는 독"에 등장하는 모카치노처럼요. 모카치노는 초콜릿 시럽을 섞고, 휘핑크림을 얹고, 초콜릿 가루를 뿌린 뒤 시나몬 스틱까지 꽂아 내는 음료로 커피라기보다는 디저트에 가깝습니다. 작품 속에서도 그 모습은 컵에 담긴 케이크처럼 묘사될 정도지요.

그런데 카도쿠라 할아버지가 모카치노를 마시다가 독살당할 뻔합니다. 당연히 의심은 모카치노로 향하지요. 초콜릿 시럽, 휘핑크림, 초콜릿 가루, 시나몬 스틱 등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간 음료라면 달콤한 맛과 향이 이상한 냄새나 쓴맛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커피와 시나몬 스틱 어디에서도 독은 검출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결국 할아버지가 한쪽 손을 다쳤다는게 열쇠가 되어 진상이 밝혀집니다. 범인은 모카치노의 레시피를 활용하여 커피에 독을 넣지 않고 독을 먹였던 겁니다. 단순한 블랙 커피였다면 성립하기 어려웠을 트릭이라서, 특별한 커피 레시피가 수수께끼, 트릭의 형태가 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례는 미나토 가나에의 "리버스"에 등장하는 달콤한 벌꿀을 넣은 커피입니다. 이 커피는 죽은 친구 히로사와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이자 반전의 핵심 역할을 합니다. 히로사와는 단것을 좋아하던 친구였고, 특히 벌꿀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후카세가 카페에서 벌꿀을 커피에 넣어 마시는 장면은 처음에는 좋았던 추억으로만 보입니다. 커피에 꿀을 넣고 천천히 저어서 커피와 벌꿀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만든, 들꽃 향이 입안에 퍼지는 듯한 맛은 히로사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하지만 후카세와 주변 사람들이 히로사와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벌꿀은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히로사와가 좋아했던 것, 후카세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그리고 과거의 어떤 순간이 커피 한 잔을 통해 다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는 핵심 반전으로 이어지고요.

이 점에서 "리버스"의 벌꿀 커피는 다른 작품 속 달콤한 커피와 조금 다릅니다. 앞서의 달콤한 커피들이 주로 범죄를 숨기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리버스" 속 달콤한 한 잔의 벌꿀 커피 안에는 우정과 기억, 그리고 아직 말해지지 않은 진실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커피의 쓴맛은 추리소설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달콤한 커피도 못지않게 추리소설적입니다. 쓴 커피가 탐정의 정신을 깨운다면, 달콤한 커피는 사건의 표면을 부드럽게 덮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뜻밖의 수수께끼가 천천히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카세가 히로사와를 위해 만들었던 벌꿀 커피 레시피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작품 속에서는 후카세는 융 필터로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에 벌꿀을 넣어 텀블러에 담아 히로사와에게 건네 주었지만, 집에서는 조금 간단하게 만들어도 좋습니다.

  1. 커피를 진하게 내린다.
    가능하다면 핸드드립이나 융드립처럼 향이 잘 살아나는 방식이 좋고, 산미가 강한 커피보다 부드럽고 묵직한 원두가 어울린다. 집에 드립 도구가 없다면 평소보다 조금 진하게 내린 아메리카노를 사용해도 괜찮다.
  2. 컵이나 텀블러를 미리 데운다.
    뜨거운 물을 잠시 담았다가 버리면 커피가 빨리 식지 않는다. 작품 속 후카세처럼 누군가에게 건넬 커피라면 텀블러에 담는 쪽이 더 어울린다.
  3. 벌꿀을 넣는다.
    가볍게 단맛만 더하고 싶다면 1티스푼이면 충분하다. 설탕 한 스푼 정도의 단맛을 원한다면 벌꿀은 2~3티스푼 정도 넣는 편이 좋다.
  4. 바닥까지 천천히 젓는다.
    벌꿀은 설탕보다 무겁고 끈적해서 컵 아래에 가라앉기 쉽다. 스푼으로 바닥을 긁듯이 천천히 저어 커피와 잘 섞는다.
  5. 토스트와 함께 먹는다.
    "리버스"를 떠올린다면 허니 토스트를 곁들이는 것도 좋다.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고, 남은 벌꿀을 조금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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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백창화, 김병록 : 별점 1.5점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4점
백창화.김병록 지음/남해의봄날

제 오랜 꿈 중 하나가 카리스마 헌책방 주인입니다. 뜨내기 손님이 들어와 책값 좀 깎아보겠다고 하면 "당신한테 내 책은 안 팔아!"라고 호방하게 외칠 수 있는 주인이요. 이 책은 이러한 저의 꿈과 맞물려 있는 듯 하여 호기심에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충북 괴산에 귀촌한 후, 이른바 "가정식 서점"을 표방한 "숲속 작은 책방"을 연 부부가 쓴 자신들의 이야기에 더하여, 비슷하게 동네 서점을 표방한 책방들에 대한 조사와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통영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 작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에서 출간되었더군요.

그런데... 아쉽게도 딱히 도움이 되거나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 꿈이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것만 느껴져 읽는 동안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별다른 아이디어(후술하겠지만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없이 동네 서점이 중요하다, 이런 서점과 책방 하나쯤 동네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올시다였거든요.
저는 1년에 약 백여 권의 책을 읽는, 취미가 "독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만, 동네에 책방이 없다고 아쉽거나 제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여기 나오는 것처럼 특정 주제에 집착하거나 카페처럼 만든 그런 곳이라면 오히려 제 취향과는 맞지 않을 듯 합니다. 저는 그냥 "책" 자체가 좋고 "책"만 많으면 됩니다. 이런 동네 서점보다는 조금 멀어도 교보문고, 혹은 동네 도서관이 훨씬 낫습니다.
설령 동네 서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책에서 주장하듯 무슨 대단한 동네 문화 허브일 수도 없습니다. 가당치도 않지요. 

또 책 속에 등장하는 꿈같은 동네 서점, 즉 지역 주민들이 사랑하고 도와주는 서점은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전세난으로 2년마다 이사 다니고, 학원과 직장에 치이는 인생에 무슨 동네 서점이랍니까. 그리고 이런 논리라면 옛 추억이 어린 동네 떡볶이집이나 오래된 어머니들 사랑방 역할의 미용실도 망하면 안 되겠지요.

그나마 등장하는 동네 서점들도 책만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는, 서점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 보여서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특정 주제에 집중해서 골수 단골을 확보하는 전략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동네 장사가 아니라 멀리 있는 손님이 일부러 발품 팔아 찾아올 정도라면 그 자체가 이미 "동네 서점"의 정의에서 벗어난 일종의 맛집 같은 관광 상품에 더 가까워진 것이니, 저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셈 아닐까 싶습니다. 소개된 서점들 중 다수가 홍대, 연남동 등에 터를 잡은 것도 결국 동네 서점이 아니라 관광지 핫 플레이스를 꿈꾼다는 증거라고 생각되네요.

게다가 책이나 정보는 인터넷으로 훨씬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발전하는데 만들고자 하는 서점은 수십 년 전 스타일이라면 곤란하죠. 인터넷 서점은 기본적으로 정가의 10% 할인은 물론, 마일리지에 카드사 할인까지 더하면 거의 20% 할인된 가격에 책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는 덤이고요. 과연 경쟁이 될까요? 

이러한 답답함 외에도, 뒷부분의 귀촌 후 서점을 만들어 가는 과정 이야기는 책의 주제와 거의 상관없는, 일종의 DIY 및 인테리어 이야기라 실망스러웠고 전체적인 완성도와 디자인도 감점 요소입니다. 성격에 맞게 동네 서점 같은 편안하고 얌전한 디자인이 좋았을 텐데, 너무 튀고 산만한 느낌이었어요. 실려 있는 사진들도 그닥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동네 책방들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만들기는 했지만, 내용은 전문성이 부족하고 이야기도 왔다 갔다 해서 건질 건 없습니다. 동네 서점에는 미래가 없다는 기존 생각만 더 확고해졌다는 것 정도가 수확이랄까. 이 정도의 내용치고는 책값도 비싼 편이라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소개된 서점 중 이 잔인한 자영업 사막화 국가에서 2년 뒤까지 얼마나 많은 서점이 살아남아 있을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덧 1 : 저자들 책방에 들어오면 꼭 책을 사야 한다는 일종의 강매 행위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둘러보고 살 만한 게 없으면 그냥 나오는 거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랍니까. 정착하여 삶을 꾸리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을 날로 먹으려는 외지인들에게도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여기는 소매업을 하는 엄연한 가게잖아요? 관광지 비슷한 곳에 무언가 가게를 열면 당연히 받는 질문들인데, 서점만 예외가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서점, 책을 판다는 것에 선민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덧 2 : "동네 서점"이 살아남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보라고 할 때, 제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들과 이 책에 소개된 동네 서점을 해당 방법별로 분류한 것입니다. 역시나, 크게 별다를 건 없습니다.

1. 특이한 주제에 집중한다.

: 홍대 앞 땡스 북스 (디자인), 서울 마포 짐프리와 서대문구의 일단 멈춤 (여행), 연남동 책방 피노키오 (외국 동화), 일산 알모 (동화)

수요층이 확실한 디자인, 여행,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예쁜 책과 외국 동화들, 아동용 도서로 구분되는데 뻔하디 뻔한 발상이죠.

2. 카페와 결합한다

: 상암동 북바이북 (술 마시는 책방) 외

북카페야 흔하디흔하고 요즘은 그 유행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소개된 곳 중 유일하게!) "책맥"이라는 맥주 마시는 책방은 좀 신선했습니다. 허나 주객, 아니 주책이 전도된 게 아닌가 싶은데, 매출에서 맥주와 책의 비율이 궁금하네요.

3. 관광지와 결합한다

: 제주에 있는 책방들과 저자들의 "숲속 작은 책방"

역시나... 특별할 게 없어요.

4. 책은 물론 다양한 인문학적 교류가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 부산 인디고 서원 외

서점이라는 공간에 대한 상식선 끝자락에 위치한 것이죠. 뻔할 뿐더러 이 정도면 동네 작은 책방의 범위를 넘어서는 듯 합니다.

5. 유명인이 참여한다

: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홍대 여신이라는 요조가 책방을 냈다죠?

6. 독립 출판물에 집중한다

: 서울 마포 유어마인드, 서촌 더북소사이어티

1번과 유사하지만 성격이 조금 다르므로 별개로 치겠습니다. 이거 하나만큼은 제가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것으로, 일본으로 따지면 동인지 전문 판매숍쯤 되어 보이네요. 독립 출판물만 판매해서는 매출이 나오지 않을 텐데, 수익 모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조금 궁금합니다.

2020/10/23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요시키 다케시에게 이혼한 전처 가노 미치코로부터 5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함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우에노를 찾아 유즈루 9호에 탄 미치코를 창 밖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오모리에 정차한 유즈루 9호에서 젊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휴가를 내어 아오모리 경찰서를 찾은 요시키는 피해자가 미치코는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미치코가 걱정된 탓에 그녀가 이혼 후 머물렀던 홋카이도 구시로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라는걸 알게 되는데....

시마다 소지가 쓴 요시키 형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본격 미스테리 100선에도 선정되어 있습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는 이전에 딱 한 작품만 읽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전형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보다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탐정이라 느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키 형사의 인간적인 매력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돈이나 지적 만족감 따위는 필요없이, 사랑하는 전처가 무죄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 사랑꾼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도 그녀를 구하는 모습은 슈퍼 히어로를 연상시킵니다.

범인들이 미치코 집 안에 시체 두 구를 옮겨 놓는 순간 이동 트릭도 괜찮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미치코 집과 범행 현장인 범인들 자택 사이의 건물 옥상에 로프를 매달아 만든, 일종의 커다란 그네(진자)를 이용하여 시체를 옮긴 겁니다. 시체에 갑옷을 입혀 진자 운동을 시키면, 반대쪽 정점에 오면 속도는 0이 됩니다. 그러면 회수는 가능했을테니 나름 '과학적'이지요.
가면 무사가 유령처럼 사진이 찍힌 이유도 이 진자 운동 트릭과 맞물려 '과학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관리인실 뒷 창을 막 지나게 되어 사진에 찍힌 겁니다. 발상만큼은 정말 기가 막혀요.
이 때 로프가 난간에 부딛혀 나는 소리를 현장에 있었던 '밤에 우는 돌' 전설과 연결시키고, 시체가 벽에 부딛혀도 괜찮도록 시체에 갑옷을 입힌걸 '가면 무사' 유령 전설과 엮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민속 탐정 야쿠모" 속 베스트 에피소드에 뒤지지 않을 정도에요. 그만큼 전설이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본격 추리 100선에 꼽힐만 합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대부분이 갖춘 특징인 여정 미스터리 성격도 잘 드러납니다. 도쿄에서 아오모리로, 아오모리에서 배를 타고 하코다테로,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를 타고 삿포로로, 삿포로에서 기차로 구시로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구시로 범화가인 기타오도리 외길 및 구시로를 포함한 각 지역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트릭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맞은편 건물까지, 개천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으니 약 10m 떨어져 있다고 칩시다. 1층 관리인실 창문을 지날 정도면 5층 높이이니 거의 비슷하겠죠. 후지쿠라 레이코가 시체를 놓쳤을 때 회수를 쉽게 하려고 로프를 한 번 더 연장했다니 두 배, 그러니까 최소 20m는 되는 긴 로프가 필요합니다. 현장도 두 곳이라 두 군데에 걸쳐 설치해야 하고요. 그런데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로프를 잘 설치하고, 회수한 방법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10m 로프에 매달린건 갑옷 입은 시체입니다. 50kg 이라고 할 때,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엄청났을 겁니다. 특히 중심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요. 이 속도로 가운데 건물에 충돌했다면? 갑옷을 입었다고 시체가 무사할리 없습니다. 그 소리를 관리인 등이 들었을게 뻔하고요. 한마디로,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성공했을 뿐입니다. 설득력은 무척 낮아 보여요. 최소한 건물에 로프를 걸 부분이 튀어나와 있었다는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진범인 후지쿠라 이치로, 지로 형제에 대한 묘사도 아쉽습니다. 이런 고급 트릭(?)을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실수가 많은 탓입니다. 유쾌한 모습을 요시키 형사에게 들키는 첫 등장부터 실수에요. 레이코가 실종되었다는건 미치코를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살아서 증언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는건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의심한 요시키 형사를 습격해서 중상을 입힌건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입니다. 용의선상에 있지도 않은데 도쿄 경시청 수사 1과 형사를 습격해서 폭행한다?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요시키 형사가 살아만 있다면 중상을 입건 말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황상 요시키 형사를 습격한건 그들 형제가 분명하니까요. 두 형제와 요시키 형사의 다툼을 카페 아르바이트와 손님들이 목격하기도 했고요. 즉, 살인 혐의가 아니더라도 요시키 형사 폭행 혐의로 충분히 수사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자기 무덤을 판 셈이에요.

나중에 직접 미치코를 살해하려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어설퍼요. 원래 계획대로 미치코를 자살한 걸로 위장해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미치코는 살아서 누군가의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난게 목격되었습니다.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 '화이트'에 전화를 건 뒤, 카페에서 보낸 차를 타고 떠났다는 것도 호텔에서 증언해 줄 수 있고요. 그런데 이 뒤에 호수에서 미치코 목을 졸라 죽인다? 바로 체포될 겁니다. 설령 경찰이 호수에 빠트린 미치코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요. 정황이 너무 확실하니까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습격과 미치코 살인 미수 당시에는 별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는 행동에서도 고급 트릭을 고안하고 실행한 두뇌파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있습니다. 이래서야 요시키 형사 상대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죠.

그 외에도, 게이코가 미치코 집에 들어간건 관리인에게 안 들켰고 열쇠도 복제해 놓았을 뿐이라던가, 미치코가 어린 시절 형제에게 지은 죄로 살인 공작에 끌려 들어갔다던가 하는건 모두 작가 편의에 따른 전개에 불과해 보입니다.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미치코가 형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죄의식이 있었다면, 형제가 거창하게 장치를 마련해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없습니다. 최소한 미치코 돈부터 빼앗는게 순서죠.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요시키가 중상을 입고, 추리에 시간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요. 특히 시간 제한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미치코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도 공식 재판까지 시간을 두고 추리해도 되니까요. 구태여 영장 발부 전으로 시간을 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영장이 발부된다고 다 전과자가 되는게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지만 단점도 명확한, 전형적인 신본격 추리물입니다. 선뜻 권해드릴 정도는 아니지만, 본격물 팬이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습니다.

2006/09/19

[번역] 이콜 Y의 비극 (3)

제 2 막

경시는 뭔가 발견했다는, 성취감에 들떠 미소를 띄며, 메모패드를 구노우에게 건네주었다. 구노우는 상사와 똑같이 눈을 의심하며 메모패드를 몇번이나 돌려 보았다.

"볼펜 자국이네요. 이콜 (=) Y 라고 읽을 수 있겠군요"
"자. 이게 바로 다이잉 메시지라는 놈이야. 우리 아들놈이 듣는다면 기뻐서 펄쩍 뛰어오를지도 모를 단서라구"

"그런데 피해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써서 남긴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린가?"

돋보기를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경시는 자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답했다.

"피해자는 전화 수화기에는 손이 닿지 않았지만 메모패드는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있었을거야. 그리고 습격 당했을때 마침 쥐고 있던 볼펜으로 간신히 범인을 나타내는 메시지를 남긴 거라고. 아마도 칼에 찔리기 직전, 혹은 찔린 직후에 범인의 얼굴을 본 것이겠지. 피해자를 찌른 범인은 그때는 그녀가 즉사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실을 나가 강도가 든 것 처럼 보이기 위해 다른 방을 뒤집어 놓았을테니 미처 그것을 막지 못한거지. 메모 패드의 메시지를 눈치챈 것은 위장 공작을 끝내고 이곳에 돌아온 뒤였을 것이네. 메모패드는 마루 바닥 위, 피해자 바로 옆에 떨어져 있었을거야. 범인은 그것을 집어들어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제일 윗장을 뜯어낸 뒤 사이드 보드의 원래 위치에 올려 놓았겠지. 그것만으로도 증거를 인멸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볼펜 자국이 아래 종이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네. - 이 설명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딱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잠깐 생각하던 구노우가 답했다. 경시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뭔가?"
"감찰의의 판단으로는 피해자는 테이블에서 문서작성을 하던 도중에 습격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칼에 찔린 직후에도 눈 앞에는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겠죠. 그 경우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종이를 집을 수 있는데 왜 사이드 보드가 있는 곳 까지 기어가서 전화용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기려 했을까요?"

"좋은 지적이군. 그러나 그 의문도 간단히 설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 피해자는 등을 찔렸던 순간, 그 충격에 의해 볼펜을 손에서 떨어트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볼펜이 테이블 위를 굴러 사이드 보드 앞 까지 굴러간 것이 아닐까?"
"역시나, 테이블 주변에 다른 필기용구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군요. 말씀대로라면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볼펜을 주으러 사이드보드까지 기어갈 수 밖에 없었겠군요. 볼펜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이동하는데 체력을 거진 전부 소진하였을테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마침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있던 메모패드에 손을 뻗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조금은 이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범인은 단독범일걸세. 공범이 있었다면 피해자가 메시지를 남길 여유, 가능성이 거의 없었겠지. 그리고 메모패드의 찢다가 남겨진 조각이 오른쪽 상단에 있는 것으로 보면 범인은 오른손잡이일 가능성이 높겠군. 뭐 여기까지는 상상의 영역에 지나지 않네만, 감식에 메모패드와 볼펜을 중점적으로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겠네. 지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는 아니네만, 뭔가 다른 것이 밝혀질지도 모르잖나?"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메시지가 이 정도뿐이라는 것은 뭔가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요. 이렇게 판단하기 어려운 기호같은 것 보다는 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을 써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요"
"쓰는 도중에 힘이 빠져버린것이 아닐까? 또 우리들이 보기에는 알수 없지만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본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피해자의 언니에게 보여주는 것이 급선무겠구먼. 사체를 운반해 나가면 곧바로 사카자키 미도리를 이곳으로 불러와 주었으면 하네"

구노우는 두어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

"아까 쯔부라야 아케미의 증언에 대해서는 경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 남편의 불륜에 대한 증언 말인가? 확실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더군. 남편 사카자키 쿄우스케가 출장으로 집을 비웠다는 타이밍도 뭔가 관련이 있는것 같고. 조금 부인쪽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겠어"

사카자키 미도리는 곧 206호실에 나타났다. 외출때 입었던 옷 그대로 쓰러져 누워 있던 탓에 흡사 전날밤의 과음으로 아침에나 돌아오는 듯한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그래도 한시간전에 받았던 쇼크에서는 어느정도 회복한 듯, 나타나자마자 옆집에 돌려주어야 할 배달된 물건에 대해 신경쓰는 눈치였다.

"물건은 부엌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범인이 손을 댄 흔적도 없으며 송장의 기재도 문제는 없는 것 같고요. 야마네코 운송의 영업소에 문의한 결과 담당자의 확인도 있었습니다. 추후 쯔부라야씨에게 건네드리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은 좀 괴로우시겠지만 동생분의 유체를 발견했을 때의 일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구노우가 그렇게 말하자 미도리는 양손을 허리위에 올려 놓은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에는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술은 앞서 이야기했던 쯔부라야 아케미의 증언과 별로 다른 내용은 없었고 흉기로 사용된 칼도 이전에 본 기억은 없다고 했다. 구노우는 생전의 피해자의 행동에 대해 물어보았다.

"동생분은 언제부터 댁에 계신거죠?"
"어젯밤부터요. 남편이 출장가서 없는 동안에는 전부터 자주 놀러오곤 했었어요. 생활비를 굉장히 절약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식사도 별로 잘 차려 먹는 것 같지 않아서, 되도록 우리 집으로 불러 먹이고 싶기도 했고요. 몇년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부터는 내가 부모님 대신인 셈이라 되도록이면 잘 보살펴주고 싶었어요"

"동생분에게 집을 맡기고 외출하신 것은 몇시경이셨습니까?"
"2시 조금 지나서였어요"
"외출은 어디로?"

미도리는 일순 입을 앙다무는 것처럼 보였고, 순간 이젠 어쩔 수 없다라는 시선이 드러났다.

"-게이오선으로 신쥬쿠까지 물건을 좀 살게 있어서..."

구노우의 표정은 순간 굳어 버렸다. 물건을 사러 갔다 왔다면, 집 안에 사온 물건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사온 물건이 있었더라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시체를 발견한 미도리에게는 물건을 달리 어떻게 할 여유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점은 언급하지 않고 구노우는 다음 질문을 계속 했다.

"외출하실 때, 동생분에게 같이 나가시자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 아이가 마침 인터뷰를 수정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때까지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서 널어놓은 세탁물과 시트를 정리해두고, 잠자리를 펼쳐 놓더군요.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하룻밤 더 자도 좋겠지'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잖아'라고 답해주었었어요. 아카네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이여서 휴일도 집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했었어요. 만약 이런 일이 생길줄 알았더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나가는 쪽이 좋았을텐데-"

"어제부터 오늘에 걸쳐 동생분에게 뭔가 평상시와 다른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음... 언제나와 같았었다고 생각해요"

"최근 동생분으로부터 일관계, 혹은 남녀관계의 트러블 등의 원인으로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들은 적은 없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생각나는게 없네요. 특별히 사귀는 남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사카자키 부인. 부인쪽은 어떻십니까?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거나 생명을 위협받을만한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미도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 저 말인가요? 하지만 왜...?"
"동생분은 당신 대신에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평범한 강도의 범행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동생분은 이 방에서 혼자서 집을 보던 도중에 등 뒤에서 습격당했습니다. 때문에 당신을 노렸던 범인이 착각해서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혹시 아카네씨가 온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미도리는 입을 손으로 누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아뇨. 남편이 출장을 떠난 뒤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온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렇다면 동생분이 오늘 여기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죠? 스토커 같은 인물이 그녀의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미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별개로 하죠., 혹 그러한 인물이 있다면 부모님같은 당신에게 상담했을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도리는 듣는둥 마는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숙였던 고개를 일으켜 격렬하게 목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한 일을 떠올린 듯, 그 생각을 머리로부터 흔들여 지워버릴 기세였다.

"아뇨. 아니에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노우가 묻자, 미도리는 실수했다는 듯 금방 표정이 굳어버렸고 이윽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는 그녀의 마음 속에 한번 떠오른 의문을 불식시킬 수 없는 듯 복잡한 생각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노리츠키 경시는 구노우 경부와 교대하여 질문을 계속 이어나갔다.

"남편분은 신쥬쿠의 여행 대리점에서 근무하신다고요. 이번의 출장지는 어디십니까?"
"교토예요. 어떤 회사의 위안여행인가 뭐래나, 원래 다른 사람이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그이가 교토에 가보고 싶어서 서포트로 동행한 거에요. 어제 아침 여기를 떠나면서 내일 저녁에 돌아온다고 말했었어요"

흡사 책을 읽는 듯한 말투로 건조하게 거기까지 답하다가, 미도리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숙소는 교토의 여관이냐는 질문에도, 고개를 흔들 뿐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내뱉을 용기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젠 마무리인가, 하고 경시는 생각했다.

"그러면, 부인께 잠깐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까의 메모패드를 미도리 앞에 놓았다.

"동생분은 숨지기 직전에 이 메모패드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메모의 원본은 범인이 가지고 가 버린 것 같지만, 다행히 아래 종이에 볼펜의 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콜 Y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메모패드를 본 미도리는 처음에는 숨을 멈추고 망연자실해 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 안색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볼펜 자국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는 한순간 참았던 숨을 한번에 몰아쉬며 말했다.

"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걸 뒤집어 볼 수 없을까요?"
"이렇게 말입니까?"

경시는 메모패드를 거꾸로 놓았다.

"그러니까... 확실히-. 형사님. 이거, 仁 이라는 한자로 보이지 않으세요?"
"인? 흠... 확실히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군요. 만약 이것을 그렇게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도리는 눈을 빛내며, 승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시나마 마유미 (仁科眞弓) 라는 여성을 알고 있어요!"
"그 분은 어떤 분이시죠?"
"남편 회사 부하 직원이에요"
"남편분의 회사? 그 여성이 왜?"

미도리는 뭔가 확신한 듯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아까 쯔부라야 부인이 말했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렇다면 아까 역시 듣고 계셨군요. 그나저나 말하신대로라면-"
"그래요. 니시나마 마유미는 남편 애인의 이름입니다"

메모를 본 뒤 갑자기 사카자키 미도리는 뭔가 깨우친 듯 태도를 바꾸어 그때까지의 애매한 진술을 뒤집었다. 오후 외출의 목적은 물건을 사러 나간 것이 아니고 (물론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게이오선으로 신츄쿠로 이동한 뒤, JR 사이쿄우선으로 갈아타서 도다역에 내렸다고 말했다.

"도다역이요? 사이타마의? 왜 그런 곳에?"
"니시나마 마유미가 살고 있는 맨션을 보러 간 거에요"

미도리가 남편 주위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작년 말 경이었다. 사소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상한 행동이 잦아졌고 그 후 의심만 가득한 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요우스케의 불륜을 확실히 알게된 것은 올해 1월 되어서였다. 부부가 같이 외출했던 날,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쳐서 계장님 이라고 친밀하게 말을 걸던 젊은 여자 - 그것이 니시나마 마유미였던 것이다. 그때는 거리에서의 짧은 만남을 가졌을 뿐이었지만, 남편의 당황 - 변명할 수 없는 반응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미도리는 곧바로 두사람의 관계를 직감했고 곧이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고 있지만, 요우스케의 아내인 내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해 라고.

그런 일이 있던 탓에 미도리는 이번의 교토 출장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계장이 된 요우스케가 국내 여행에 써포트로 동행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사실 출발 전부터 거동이 수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2박 3일의 일정이라고는 하지만 교토에 간다고 아내에게 말해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사실은 하루 빨리 귀경하여 불륜의 하룻밤을 그 여자와 보내는 것이 아닐까? 미도리는 그렇게 가슴 속에서 떠다니는 의문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침 놀러온 동생과 상의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 여자 집까지 가서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어때?"

라고 아카네는 말했다. 미도리가 말릴 틈도 없이 남편 서재에 들어간 아카네는 니시나마 마유미로부터 온 연하장을 찾은 뒤 미도리에게 건네주었다. 미도리는 조금 겁을 먹었었지만 아카네가 그녀의 기를 북돋으며 정 뭐하면 자기도 같이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만약 형부가 그곳에 있다면, 내가 언니 몫까지 맛을 보여줄께" 라고 말하는 동생에게
"아냐. 이건 우리들 부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역시 나 혼자 해결하는 것이 좋겠어" 라고 말하고, 집을 봐 달라고 부탁한 뒤, 미도리는 혼자 그 여자의 맨션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 연하장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경시가 요청하자, 미도리는 자신의 백에 손을 뻗어, 속에서 연하장을 꺼냈다. 겉과 뒤 모두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된 조잡한 것이였다. 보낸이의 주소는 도다시내의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라고 하는 맨션의 512호실. 경시는 연하장을 구노우 경부에게 건네주며 조치를 지시했다. 구노우는 곧바로 거실 한쪽 끝으로 가서 휴대폰으로 본부에 연락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주소로 형사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경시는 미도리의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 동생 앞에서는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집을 나서긴 했지만,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곳에 가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어쨌든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간 뒤, 다음일은 그곳에서 생각하자,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섰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제발 남편을 보지 않기를 계속 빌기만 했어요"

미도리가 도다역에 내린 것은 오후 3시를 막 지나서였다. 낯선 도시를 헤멘 끝에, 연하장의 주소를 보고 니시나마 마유미의 맨션을 찾아내었을 때는 거의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는 현관이 자동문으로 되어 있어서 외부인은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했었고, 미도리가 현관에서 몇번이고 인터폰 벨을 눌러 보았지만 마유미는 집에 없었는지 512호실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맥이 빠져서 그대로 돌아가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요우스케와 마유미가 어딘가 밖에서 만나 같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맨션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1층 상가 구역에 카페가 있었고, 미도리는 그 카페의 창 바로 옆 좌석에 앉았다. "챨스톤"이라는 한가한 가게로 손님은 그녀밖에 없었다.

마유미가 돌아온 것은 오후 5시 30분 경이었다. 다행히 요우스케와 함께는 아니었다. 미도리는 카페 창 너머로 마유미가 맨션 현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노리츠키 경시는 거기서 미도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5시30분 경이라는 시간이 틀림 없는지 확인했다. 틀림없어요, 몇번이나 시계를 봤는걸요, 라고 미도리가 답했다. 경시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았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니시나마 마유미와는 길거리에서 딱 한번, 스쳐지나가듯 본 적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확실히 같은 여성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미도리는 왜 그런 당연한 것을, 이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확실하게 말했다.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 여자 얼굴을 잊어버릴리는 없잖아요. 그리고 목소리도... 조금 기다린 뒤 나는 카페를 나왔어요"
"니시나마 마유미의 뒤를 따라간 것입니까?"
"예"

가게를 나선 미도리는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현관으로 들어가 다시 512호실 인터폰 벨을 눌렀다. 마유미의 목소리가 들려, 재빨리 화장품 세일즈를 가장해서 마이크를 향해 적당한 말을 몇마디 던졌다. 물론 상대해 줄 리는 없었다.
'곧 손님이 올거니까 그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마유미는 인터폰을 끊었다.

손님이 있다고 말한것은 단순히 방문판매를 쫓아내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도리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까의 카페로 돌아간다면 카페 주인이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장소를 바꾸기로 하고 장소를 찾다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이동했다. 맨션의 앞 까지 뻥 뚫려 있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척 미도리는 벤치에 앉았다.

오후 6시 5분경, 역 쪽으로부터 남편과 굉장히 닮은 뒷모습의 남자가 여행가방을 한손에 든 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도리는 얼굴을 숨기고 석양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 계속 그냥 닮은 다른 사람이길 빌었지만, 그것은 남편 요우스케였다. 그는 사람의 이목에 신경쓰는 듯 조용한 걸음으로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 들어갔다.

남편의 모습을 보았지만 미도리는 곧바로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공포가 현실로 다가온 순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속은 하얗게 되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확실히 아카네와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걸, 이라고 후회도 해 보았지만 곧 저절로 그녀의 발은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 쪽으로 향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갔어요- 그 사이에도 계속, 분명히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그 여자 집을 찾아간 것일거야, 이제 5분만 있으면 기쁜 얼굴로 맨션에서 나오는 그를 볼 수 있을거야, 그런 생각만 가득했어요"

그런 그녀의 생각이 통했는지, 요우스케가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향하는 곳은 길 반대 방향의 편의점 자판기였다. 담배를 사러 나온 것이었다. 자신의 담배 뿐만이 아니라 여성용 담배까지도 같이 사는 것이 보였다. 전부터 담배를 피는 여자는 싫다는 말을 했었는데... 맨션에 돌아가는 남편의 뒤를 숨어서 바라보던 그 때, 비로서 미도리는 배신당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에서는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로부터 3,40분 정도, 미도리는 그녀 주위에 땅거미가 둘러싸기 시작할 때 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전후의 시간 경과를 확실히 기억하기 못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때 쯤 그 자리를 떠났다. 이유는 생각도 나지 않고 알 수도 없었지만 어딘가에 묶인 것 처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허탈한 미도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맨션의 현관앞에 서 있었던 것 정도였다.

"그 피자 배달 말인데요, 어떤 피자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경시가 묻자 미도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였더라... 얼굴을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 전부터 계속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럼 저희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 가게에 물어본다면 배달 시간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인은 그 이후에 뭘 하셨습니까?"
"언제까지 계속 기다린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죠. 깨닫는 것이 굉장히 늦어버렸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여자 방으로 찾아가서 남편의 불륜 현장을 덮치지 않으면 안돼. 늦어지긴 했지만 그렇게 결심 하고 다시 맨션 현관으로 갔어요"

용기를 내어 512호실의 인터폰을 누르고 미도리는 마유미가 답하기도 전에

"사카자키 요우스케의 아내입니다. 남편을 내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소리쳤다. 상대는 숨을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었다. 남편은 안 계시다, 라고 마이크를 통해 마유미는 시치미를 뗐다. 남편이 맨션에 들어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보았다고 답해도 '잘못 보신 거에요'라고 딱 잘라 말했고 있다, 없다의 지루한 문답을 계속하다가 '아까 화장품 판매도 당신짓이었군요' 라는 말을 끝으로 마유미는 회선을 끊어버렸다. 그 뒤도 계속 인터폰을 눌러 보았지만 두번다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분해서, 그 집 우편함에 들어있던 뒷면이 흰 광고지를 끄집어 내어 그 여자에 대한 것을 거기 썼어요. 그리고 아까의 편의점까지 가서 복사를 한 다음 맨션에 돌아와 그 복사물을 맨 끝에서 부터 우편함에 차례로 집어 넣었어요. 니시나마 마유미가 어떤 여자인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쳐 주려고요"
"그 복사물 남은 것은 가지고 있으십니까?"

미도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채, 백 속에서 반으로 접힌 복사물을 꺼냈다. 경시가 펼치자 종이 한 가득 크래용으로 갈겨 쓴 듯한 글자가 나타났다. 루즈를 사용하여 쓴 것 같았다. 문구는 이러했다.

'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 거주하시는 모든 분들께. 512호실의 니시나마 마유미는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오늘밤도 불륜 상대를 방에 데리고 들어와서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 발정난 돼지같은 색정광이 이곳에 살고 있는데 여러분은 괜찮으신가요?'

터무니없는 중상모략 글이었다. 경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미도리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이것도 부족할 정도라고요! 그 여자는 더욱더 심한 짓을 했습니다. 512호실의 니시나마 마유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라고, 그 때 써버리는 것이 좋았을텐데!"
"부인. 기분은 알겠지만-"
"아니요"

위로하는 경시를 미도리는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혼합된 연료가 마음 속에서 타 오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5시 30분에 그 여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뭔가 사러 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런것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 니시나마 마유미는 나와 엇갈려서 이 집으로 들어와서, 나를 죽일 생각으로 아카네를 살해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아무것도 아닌 듯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서 아까 사람을 찔러 죽인 그 손으로 이번에는 내 남편을 방으로 끌어들인 거라고요. 정말 무서운 여자! 그래도 니시나마 마유미의 정체를 알게되면, 확실히 그 사람도 나에게 돌아와 주겠죠. 그러니 형사님. 제발 한시라도 빨리 그 여자를 체포해서 남편의 실수를 깨우쳐 주세요!"

사카자키 미도리의 사정청취를 끝냈을 때는, 오후 11시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경시는 뒷끝이 찜찜한 피로감이 느껴져 당분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노우 경부도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다가 웅얼웅얼 말을 꺼냈다.

"처음은 부인의 진술로 한번에 체포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좀 약한것 같네요"
"아아, 알리바이 때문인가? 미도리의 진술 대로 니시나마 마유미가 5시 30분에 도다시의 맨션에 돌아왔고, 그 뒤에 계속 집에 있었다면 다치가와 아카네를 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사망추정시각은 6시부터 7시 사이니까"

경시는 괴로운 표정으로 인정했다. 그 일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기 때문에 미도리에게 몇번이나 목격 증언을 확인했었다. 구노우는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 듯한 어조로

"감찰의의 검시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사법 해부의 결과가 나올 때 까지는 속단할 수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을걸세. 감찰의 나카지마는 저렇게 젊어 보여도 실력은 있어. 약간 사망 추정시각의 폭은 넓어질 수 있어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거야. 세타가야와 시이타마의 거리는 택시를 타고 날라온다고 하더라도 왕복 한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니시나마 마유미의 범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분명 이 경우는 남편 사카자키 요우스케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까? 미도리 부인도 처음에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의심한 것 같은데-"
"음. 진술 도중에 갑자기 입이 무거워 진 것은 그 탓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6시15분에 마유미의 맨션에 찾아 왔다는 미도리의 목격증언이 사실이라면, 사카자키의 경우에도 범행 당시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네.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들킨것이 알리바이라니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원"
"하긴 남편이 범인이라면 아내와 착각해서 동생을 살해할 일도 없겠죠"
"그것도 그렇지. 미도리가 말한 것 같이, 사카자키가 출장 일정을 조정했다면 조금 수상한 점도 있어. 어떻게 사건과 연결되는 점이 없을까?"
"사카자키가 몇시의 신칸선으로 교토를 출발해도, 표를 살 필요가 있습니다. 도쿄역으로부터 도다시의 마유미의 맨션까지 직행한다면 그게 최고였겠죠. 만약 중간에 비는 시간이 있다면-"

휴대폰 착신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실례, 라고 말하며 구노우가 전화를 받았다. 마유미의 맨션에 파견한 수사관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선수를 쳐서 중요 참고인의 신병 확보에 나선 것이었다. 구노우는 부하의 보고에 귀를 기울인 후, 오늘 밤은 일단 연행할 것을 지시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쪽은 어떻게 되고 있나?"

경시가 묻자 구노우는 보고의 내용에 만족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니시나마 마유미의 진술은 사카자키 미도리의 진술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부인이 맨션에 나타나서 인터폰을 눌러 문답이 오간 것도 인정하고 있고요. 그 대신 회사의 상사가 방에 왔다는 것은 부정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 사카자키는 마유미의 방에 없었단 건가?"
"네. 하지만 별로 이상한 건 아닙니다. 보고에 따르면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에는 자동 잠금 현관과는 별도로 안에서부터 잠그는 비상구가 있다고 하는데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곳이 열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사카자키가 도망갔다면 수사관이 인터폰으로 용건을 말하는 사이에 512호실로부터 빠져나와 비상구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높죠. 또한 마유미의 방의 테이블에 빈 피자 박스가 2인분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마유미는 배가 너무나 고파서, 2인분을 먹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요"
"역시, 그렇다면 아까 진술에서 미도리가 목격한 피자 배달은, 니시나마 마유미가 주문했던 피자의 배달이라는 것이구만. 그 배달이 있던 시각은?"
"6시 45분에 주문의 전화를 받아, 피자가 도착한 것은 7시 조금 전. 사카자키 미도리가 인터폰을 눌러 남편을 보내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20분 정도 뒤로 보입니다"
"타임 테이블의 공백이 대충 맞아 떨어져 가는구먼. 오후의 외출에 대해서 마유미는 뭐라고 한다던가?"
"역전의 영화관에 가서 혼자서 영화를 보았다고 합니다. 돌아온 것은 5시 30분경, 그 직후에 화장품 세일즈를 사칭한 여자와 인터폰으로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역시나 미도리 부인의 진술대로죠. 그리고 또 하나, 조사원의 보고에 따르면 [니이조 그랜드 하이츠]의 현관 우편함에 니시나마 마유미를 중상하는 유인물이 놓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흠, 마유미의 맨션은 도다역으로부터 걸어서 몇분정도 걸리나?"
"도보 5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 미도리가 복사한 유인물을 마유미의 맨션 우편함에 뿌린 것이 7시 30분 전후라고 했으니, 도다역에 도착한 것이 7시 35분. JR 기타게이선으로부터 게이오선으로 갈아타서 치도리야마에 도착한데에 필요한 소요시간은 - 갈아타는 시간을 포함해서 45분 정도인가.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우는데 10분정도 걸릴테니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딱 맞아 떨어지는구먼. 아직 남편 행동에 관한 부분이 남아있지만 미도리의 진술은 대체로 확실하다고 여겨지는군"
"사카자키가 여자 방으로부터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노우가 묻자 경시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론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당연한 반응 아니겠나? 반대로 자기 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모처럼의 알리바이를 자신이 버리는 듯한 행동을 취할리가 없었겠지. 확실히 사카자키는 범인이 아니야. 특별히 수배하지 않더라도, 사건의 대한 이야기를 어디 다른 곳에서 듣는다면 창백해진채, 내일이라도 출두할 것이 분명해"

구노우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사카자키 부부의 주위에는 지금까지 범인으로 추측될 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하더라도 강도의 범행이라는 가정도 수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니시나마의 니시(仁)가 아니라면 저 이콜 Y라는 다이잉 메시지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으음... 아들놈의 지혜를 빌리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오늘 오후 이 방을 방문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뒤는 이시바시라고 하는 야마네코 운송의 배달원 정도밖에는 없는데"
"야마네코 운송이라-"

구노우가 아직 팔짱을 끼고 있는 채로 그렇게 웅얼거렸다. 짧은 침묵 뒤에 갑자기 경시는 깜짝놀라 구노우의 얼굴을 보앗다. 구노우의 쪽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이쪽의 얼굴을 놀려 자세히 옅보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대체로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아까의 부재자 연락표는?"

이라고 경시가 말했다. 205호실의 쯔부라야 마유미가 가져온 연락표를 꺼내어 놓고 구노우도 흥분한 어조였다.

"이겁니다. 저 메시지는 문자나 기호는 아니고, 피해자가 고양이의 마크를 닮은 그림을 그려 남긴 것입니다. 한쪽끝에 수염과 입을 그리던 도중에 힘이 떨어져 버린 것이죠. 이 이시바시라고 하는 인물이 배달을 왔다가 젊은 여성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칼로 협학해서 난폭한 짓을 하는 정신이상자라고 한다면-"

경시는 연락표에 눈을 떨구었다. 회사명과 평행하게 고양이의 얼굴을 그린 야마네코 운송의 트레이드 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생긴 도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