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모험담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모험담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16/08/05

제라르 준장의 회상 - 아서 코난 도일 / 김상훈 : 별점 3.5점

제라르 준장의 회상 - 6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웠던 제라르 준장의 소싯적 모험담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아버지 코난 도일 경의 작품으로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마이클 더다가 극찬했던 탓에 관심을 갖던 작품인데, 얼마 전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되어서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극찬받을 만하더군요!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정말 발군이었던 덕분입니다. 준장의 생명을 건 모험들의 긴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손에 땀을 쥐고 읽었습니다.
여섯 명의 펜싱 사범과 결투를 벌였다는 식의 허세 끼 있으면서도,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여성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매너를 보여주는 제라르 준장도 아주 매력적이고요. 시기적으로 본다면 얼마 전 읽은 "내 방 여행하는 법"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떠오르는데, 허세는 동급이더라도 유머 감각은 월등합니다. 그래서 모험담도 전반적으로 유쾌해요. 잘난 척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쾌한 친구인 셈이지요.

아울러 역사 모험물답게 나폴레옹, 네 원수, 탈레랑, 워털루 장군, 뮈라 원수 등 다양한 실존 인물들과 실제 전쟁이 벌어졌던 곳들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좋습니다. 군복을 비롯한 여러 세세한 디테일들과 전투 장면의 묘사 역시 큰 볼거리에요.

결론적으로 추천작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약간 시대는 다르지만 "스카라무슈""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교할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잃어버린 세계"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도일 경은 추리물뿐 아니라 모험물에도 확실히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프랑스 군인의 이야기를 영국 작가가 이렇게나 실감나게 쓴 것도 정말이지 놀라와요. 영국 군인을 지나치게 영웅시하지 않은 것도 신기했습니다.

각 단편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라르 준장, 음울한 성으로 가다"

1807년 2월, 제라르 중위는 연대 본부에 출두하던 중 우연히 경기병 연대 순찰대를 만났다. 순찰대의 지휘관 뒤로크 소위는 아버지의 원수 슈트라우벤탈 남작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둘은 남작의 계략으로 성에 갇혀버리는데...

제라르 준장의 회고에서 시작되는 모험담의 첫 이야기입니다. 나이 지긋한 인물의 1인칭 방백에서, 본 이야기는 3인칭의 소설로 전환되는 구조인데 예전 "샘 호손의 사건부"와 같은 방식입니다. 이야기의 현실성을 높이는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네요.

시리즈의 시작으로 나무랄 데 없습니다. 지하에 갇힌 후 탈출하는 과정, 그 와중에 남작을 중오하는 의붓딸의 도움, 그리고 남작과의 최후의 결투와 완벽한 해피엔딩 등 모험물로서의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라르 준장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각인될 뿐 아니라, 사악한 남작의 캐릭터도 잘 살아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아작시오의 자객들을 처단하다"

1807년, 제라르 중위는 퐁텐블로 궁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밀명을 받았다. 밤 10시에 황제와 함께 어떤 사내들을 상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에서 '아작시오 형제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했었는데, 그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팩션적 요소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황제가 암살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핵심인데, 이미 결과(암살 실패)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재미를 주기 어려운 탓입니다. 검술로는 상대도 안 되는 두 명의 자객과 대결하는게 모험의 전부이기도 하고요.

물론 나폴레옹을 위장한 일종의 가게무샤가 대신 죽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제라르가 궁을 나갈 때 처음 들어올 때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즉 모든 걸 잊고  나가겠다고 하자 나폴레옹이 한 답변 — "그럴 수는 없을걸, 그때 자넨 중위였으니까 말이야. 이제 가서 푹 쉬게, 제라르 대위" — 등 재치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더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을 잡다"

1810년, 부상으로 후방에 머무르던 제라르 대령은 연대 복귀를 위해 산을 넘다가 게릴라들에게 사로잡혔다. 잔혹한 게릴라 엘 쿠치요에게 사지가 찢길 뻔했던 제라르를 구해준 건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영국군 용기병대였다.
용기병대의 지휘관 바트와 친해진 제라르는 그와 카드 게임 '에카르테'를 벌여 당당하게 탈출할걸 계획하는데...

산적에게 습격받았다가 영국군에 사로잡히고, 마지막에는 웰링턴 장군까지 나오는 드라마틱한 구성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제라르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스페인 산적들의 묘사도 생동감 넘치며, 프랑스인이 영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 카드 게임의 박진감 등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요. 에카르테를 프랑스 전체를 뒤져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될까라는 식의 귀여운 허세도 여전합니다.

마지막 웰링턴의 한마디도 인상적입니다. 급작스럽게 나타난 웰링턴에게 제라르가 하는 말 — "내가 카드 게임에서 이겼다, 약속대로 자유를 달라, 자신은 킹을 잡고 있다" — 에 대한 답변으로 웰링턴이 "자넨 우리 킹에게 잡혔거든" 이라고 하는 장면은 영국적이면서도 재치 있더라고요.

모험물로도 재미있고, 팩션으로도 괜찮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왕, 제라르 준장을 잡다"

1810년, 다트무어 감옥에 수감된 제라르는 탈출을 감행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치밀한 탈출 — 창의 철봉을 뽑고, 벽돌을 빼낸 후 이중 벽을 철봉에 침대보로 만든 밧줄을 묶어 넘음 — 도 재미있지만, 탈출 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우선 찰스 메러디스의 마차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외투를 훔칩니다. 그러나 그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형무소 근처에 오고 말지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말한 방향과 반대로 향했지만, 영국 복싱 챔피언 브리스톨 버슬러를 만나 격투를 벌인 끝에 사로잡힌다는 좌충우돌 행각이 정말 흥미진진한 덕분이에요.
메레디스의 편지로 풀려난다는 반전도 아주 기막히며, 이 와중에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는 기사도 정신도 반짝반짝 빛납니다. 메레디스 부인과 나누는 농짓거리도 인상적이었고요.

한마디로 탈출기로서도, 모험담으로서도 빼어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밀플뢰르 원수와 맞서다"

1810년, 마세나 원수는 제라르 대령에게 탈주병 출신으로 엄청난 세력의 산적 집단을 만든 밀플뢰르 원수 타도 및 그가 사로잡은 부유한 백작 부인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과 산적의 근거지로 향하던 제라르는 도중에 영국군을 만났다. 다행히 지휘관이 친분이 있던 바트이며, 그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산적의 근거지인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마침 그 수도원에서 쫓겨났다는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패잔병을 가장하여 잠입할 것을 모의하는데...

일단 바트의 재등장은 반가웠고 수도원장의 정체가 밀플뢰르 원수였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원수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허나 중간에 제라르의 목숨을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등 전개 면에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영국군을 사로잡은 방법과 똑같이 아침에 제라르를 유인하여 프랑스 군도 일망타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방심을 노렸다 치더라도 밀플뢰르 원수가 직접 나설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또 반가운 캐릭터였던 바트가 전사한다는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제라르보다는 밀플뢰르가 더욱 주인공에 가까운 일종의 안티 히어로물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네요. 결국 밀플뢰르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그러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국을 걸고 도박을 하다"

1812년,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후 괴멸적 상황에 빠졌다. 때문에 제라르 대령은 프랑스로 복귀하여 부대를 재건할 것을 명받았다.

독일을 가로질러 귀국하는 와중에 제라르는 항상 프랑스와 친밀했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고, 협력자를 통해 곳곳에 표시된 기묘한 "T"자 마크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프로이센 상류층의 비밀 결사 투겐트분트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제라르는 죽어가는 군위대 장교 아르노 후작을 만나 황제의 밀서를 건네받았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호프성의 작스-펠슈타인 대공에게 밀서를 전해 독일이 황제에게 거역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그리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게 거역하는 상황의 한가운데 놓인 제라르의 모험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팩션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실상 모험이랄 것은 대단치 않습니다. 대공을 찾아가 이야기하는 게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제라르가 팔로타 백작부인을 자칭한 대공비에게 서류를 뺏기는 과정, 궁지에 몰려도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역사를 거스르지 못하는 제라르의 실패만큼은 인상적이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훈장을 타다"

준장이 된 제라르는 전우 샤르팡티에 소령과 함께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았다. 황제는 당면한 작전 내용과 밀서를 스페인 국왕인 자기 형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후, 친히 경로까지 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 경로는 프로이센 군 등에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제라르는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여 명령을 완수하는데...

태사자가 홀로 북해성 밖의 원군을 청하는 것과 같은,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을 가로지른다는 화끈한 모험이 펼쳐집니다. 태사자처럼 제라르의 기지도 돋보입니다. 시장 저택에서 벌어지는 프랑스군 - 프로이센군 전투, 그리고 이후 프로이센 군에게 다시 점령된 상황에서 코사크 장교 부트킨 백작을 속여 탈출하는 과정은 정말 기가 막히거든요.

게다가 황제의 의도는 그들이 사로잡히게 만들어 거짓 정보를 적에게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 그래서 황제는 사로잡힌 샤르팡티에게 레지옹도뇌르를 수여하고 제라르에게는 특별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는 결말까지도 완벽합니다. "저 친구는 우리 군에서 최악의 돌대가리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용감한 군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말이야."라는 말과 함께요. 그 말 정말이지 정확합니다! 아무래도 제라르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머리는 타고났지만 좀 더 큰 그림은 볼 줄 모르는 인물인 것 같아요.

여튼 별점은 4점. 모험도 화끈하고 결말까지 완벽하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제라르 준장, 악마의 유혹을 받다"

나폴레옹 군대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라르 준장은 프랑스 군 내에서 최고의 용사로 알려진 다른 전우 2명과 함께 베르티에 원수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나폴레옹을 적군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3명 모두 분노와 함께 제안을 거절했지만, 직후 황제가 나타나 그들을 시험했다며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그의 후계자를 증명하는 서류와 4천만 프랑에 해당하는 증권을 숨겨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레랑의 지시를 받은 악당들에게 서류를 빼앗겼고,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추격과 격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단편집의 아쉽지만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마지막답게 황제 나폴레옹의 최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단 한통의 편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도입부로부터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밝히는 전개는 괜찮습니다. 허나 무려 전우 2명이 죽었음에도 대단한 모험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 임무를 성공하더라도 나폴레옹에게 내일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좀 맥이 빠고요. 나폴레옹 2세는 결국 한 게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이 서류들이 그의 존재를 어떻게 한 건 아니니까요.

결론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4/05/28

미사고의 숲 - 로버트 홀드스톡 / 김상훈 : 별점 2.5점

미사고의 숲 - 6점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2차 세계 대전 후 스티븐은 군에서 제대하고 라이호프 숲 가장자리에 있는 잉글랜드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형 크리스찬과 해후했지만, 크리스찬의 기묘한 행동에 의구심을 느끼게 되었다. 알고보니 크리스찬은 숲에 매료된 나머지 "숲"이 만들어 낸 소녀 귀네스의 환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강박적으로 라이호프 숲의 내부를 조사했던 박물학자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크리스찬은 아버지처럼 숲속에서 행방을 감췄고, 홀로 남은 스티븐은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읽은 뒤 "숲"에는 사람의 무의식적인 사고를 실체화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데...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적 사고를 실체화한 것이 보여지는 것'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작품입니다.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Mythago는 신화(myth)와 심상(imago)의 합성어입니다. 바로 이 실체화된 결과물을 의미하지요. 개인적으로는 美思考, 즉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한자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하여튼, 작품은 크게 아래의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제1부 미사고의 숲
  • 제2부 사냥꾼들
  • 제3부 숲의 심장

1부는 고향으로 돌아온 스티븐이 형 크리스찬을 통해 미사고에 대해 알게 되지만, 형이 귀네스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뒤 그를 잃게 되는 과정까지의 이야기입니다. 2부에서는 귀네스가 실체화된 후 스티븐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돌아온 크리스찬이 이끄는 매의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그녀를 빼앗기게 되고요. 3부는 귀네스를 되찾기 위해 스티븐이 해리 키튼과 함께 숲의 내부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단계별로 이야기가 점점 업그레이드되고 스케일이 커지는데, 개인적으로는 2부까지가 딱 좋았습니다. 특히 2부에서 매의 전사들이 나타나는데, 그 우두머리가 나이를 한참 먹은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반전이 괜찮았어요. 그러나 3부는 지나치게 신화화를 의식한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특히 스티븐까지 신화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전투 장면, 여러 마법과 기묘한 인물들이 실체화되어 등장하기 때문에 재미만 놓고 보면 가장 흥미롭긴 하나, 단순한 모험물에 불과해 새로움이나 깊이를 느끼기 어렵기도 했고요. 이 장대한 설정이 결국은 연인을 구하기 위한 모험담이자 사랑 이야기였다는 것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귀네스를 기다리는 스티븐이 그 자체로 전설이자 신화가 되었다는 케케묵은 결말은 "백발마녀전"과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80년대 출간 당시라면 꽤나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을 수 있으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느낌이에요. 무의식 속 무언가를 실체화한다는 설정은 일본 만화 등에서 많이 본 것이기도 하죠. "파프리카"처럼요. 신화냐 꿈이냐의 차이일 뿐, 사람의 무의식을 실체화하고 그것에 외려 사람이 휘둘린다는 설정 자체는 동일하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화라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시리즈로 이어질 만한 재미와 설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흔해빠진 판타지 모험담에 불과합니다. 시대가 너무 많이 흐른 탓이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은 아니었다는 뜻도 되겠지요. 시리즈 후속권이 국내 출간되지는 않았는데, 출간되었더라도 더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덧 : 그래도 유명작품이니 만큼 인터넷 상에 정보는 많네요. 제가 본 것 중 가장 괜찮은 귀네스 이미지 한 장 올려봅니다.

2011/11/20

클라인의 항아리 - 오카지마 후타리 / 김선영 : 별점 2.5점

클라인의 항아리 - 6점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비채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년 백수 우에스기가 한 잡지에 응모한 게임북 시나리오 "브레인 신드롬"이 입실론이라는 회사의 새로운 가상현실 게임기 K-2에 채택되었다. 그로부터 1년 반 뒤, 우에스기는 K-2 시운전 모니터 요원으로 참가했다. 우에스기와 같은 모니터 아르바이트생 리사는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현실적인 K-2의 세계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K-2 내부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언온 뒤 리사가 실종되었고, 우에스기는 리사의 친구 나나미와 함께 K-2와 입실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는데...

일본의 컴비 작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마지막 발표 작품. 이런저런 리스트에 포함되는 대표작 중 한 편이기도 하죠. 국내에는 어째서인지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컴퓨터의 덫"과 컴비 해산 이후 컴비 중 한 명인 이노우에 유메히토가 발표한 작품인 "메두사", 이렇게 딱 두 편만 소개된 낯선 작가입니다. 그러나 추리 애호가로서 명성만큼은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작품의 출간은 무척 반가웠어요.

일단 1989년이라는 발표 시기를 감안한다면 "가상현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설정과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구미에서 사이버펑크가 유행한 뒤라서 참신하지는 않고, 지금 읽기에는 낡아빠진 소재이지만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간 듯한 Klein-2 (K-2)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1테라 메모리로 완벽한 가상현실을 구현한다는 시스템이라서 설득력이 많이 약한, 꿈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 외의 설정과 묘사는 괜찮았습니다. 하긴 스티븐 킹이 말했듯 "무엇이 로켓에게 움직일 힘을 주느냐" 하는 것은 과학잡지가 따질 문제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 기계에 얽혀 있는 음모를 밝혀낸다는 모험담 그 자체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엔터테인먼트 작품이라는 점도 확실합니다.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리사의 실종, 나나미의 등장에서부터 전개되는 과정이 긴박해서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들기 때문이죠. 마지막의 현실과 비현실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모호한 결말은 왠지 "메두사"를 연상케 하는데,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는 측면에서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점 역시 확실합니다. 설정부터 이야기하자면 K-2에 대한 설정 이외에는 부실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CIA가 언급될 정도의 거대 시스템 관리가 소홀하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겠지요. 게다가 게임 소설 한 권 써본 청년 백수가 달랑 며칠 조사해서 진상을 꿰뚫는다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고요.

"가상현실"을 이용한 중간 부분의 트릭, 즉 현실을 속이고 건너뛰게 만든다는 것이 너무 쉽게 드러나는 점은 비슷한 류의 가상현실 SF를 많이 본 탓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꽤나 중요한 떡밥으로 사용된(하도 많이 등장해서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는) 모모세 노부오의 경고가 단지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당황스러운 점이었습니다. "메가존23"의 이브처럼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더라도 뭔가 도움은 줄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 외에도 이 기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결국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이노우에의 엔딩이 실질적인 클리어가 아니라는 것(여기서 이노우에가 더 큰 의문을 가지고 행동을 벌이게 되니까) 등 세세한 디테일도 아쉬움이 좀 남습니다.

그래도 흥미와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고 가상현실을 이용한 이야기가 워낙 많이 있기에 신선함은 떨어지나,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서는 충분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왠지 영화나 만화 쪽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긴 하네요.

마지막으로 컴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99%의 유괴"가 번역되기를 기대해봅니다.

2004/02/19

おざなりダンジョン - Motoo Koyama : 별점 3점

일찍이 대원에서 “전사 모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던 판타지 만화. 작가 코야마 모투의 데뷰작이자 최대 히트작(인 모양)으로 전 17권으로 완결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도 상당히 매니악한 만화만 연재되던, 하지만 제가 좋아했던 코믹 NORA의 최대 히트작 중 한편으로 애니메이션화까지 되었었죠. (NORA의 다른 만화로 국내 소개된 것은 “MAPS”와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비너스 전기”, 타카미 요시히사의 “Nervous Breakdown”, 그리고 “수인성역” 등이 있습니다)
곤드와나 대륙이라는 가상의 대륙을 무대로 다양한 국가, 조직들과 여러 형태의 주민들(인간형, 동물형, 지오사우르스의 파충류형…)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세계관이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에요. “마력”을 에너지로 하는 동력기관이 있는 세계라는 설정을 기본으로 하여, 군사적 우위에 있는 과학+마법집단 길드, 일종의 평화 수호 단체(?) 매직 아카데미와 그 일원들인 아스트랄 등의 독특한 설정이 가득하거든요. 이를 무식하지만 힘 하나는 일품인 주인공인 전사 “모카”, 유능한 도둑 “블루맨”, 말없는 개그 메이커이지만 사실은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인 “키린맨”의 파티에 백룡의 기사 활코와 길드 최강 검사인 변태 사나이 바스터 키톤 등의 재미있고 다채로운, 디자인도 화려한 캐릭터로 뒷받침하고 있고요.

처음에는 단편 연재로 시작했다가 꾸준한 인기로 장편화 된 때문인지 초반부는 짤막 짤막하고 유쾌한 옴니버스 스타일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지만 중반 이후는 아카데미에 소속된 아스트랄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였으나 자신의 과거, 즉 과거에 번영했지만 지금은 멸망한 용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각성한 뒤 세계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흑룡 “로고스”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백룡 “나가”의 싸움을 축으로 하는 장대한 이야기와 같이 병행하여 독립적인 사이드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이 긴 호흡의 이야기를 다루는 전체적인 흐름은 거칠고 이야기가 툭툭 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약간 미숙함이 엿보입니다만 그런대로 결말까지 꽤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독특한 세계관 만큼은 한번 볼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슬레이어즈”의 한 토막과도 좀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한데,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트라이였던가..넥스트였던가…

덧 1 : 개인적으로 “코믹NORA”에 연재할 때부터 관심있게 봤었고 좋아했었으며, 단행본 뒤에 끼어있는 저자의 초기 단편들도 재미있었던 등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서 대원에서 정식 발매한 번역본을 출간할 때 마다 한권씩 꾸준히 사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오 마이 갓! 딱 한권만 남겨두고 16권까지만 나온채로 책이 절판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이런 X같은 경우가….! 차라리 중반부터 안나왔으면 모를까 딱 한권 남겨두고 안 나오다니....
우연한 기회에 마지막 권을 구할 수 있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일 뿐입니다. 원서였지만 이해가 아주 안 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오랜 숙제를 끝낸 느낌마저 드는 괜찮은 완결이었어요. 그래도 대원의 만행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덧 2 : 스스로 2부라는 “なりゆきダンジョン” 이라는 작품을 연재했었나 본데 이 후속작은 별 주목을 받지 못한 듯 하네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뭐 이런 류의 후속작이 걷는 뻔한 자가복제 루트를 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덧 3 : 국내에는 코야마 모투의 다른 작품 “기억의 환무” (이 책은 다행히! 4권 완결이 전부 발간 되었습니다…)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정이나 캐릭터 등도 독특하고, 짤막하고 유머러스한 모험담으로는 재미있지만, 긴 호흡의 심각한 장편 스토리 부분은 재미가 없다는...

2005/01/26

이상한 집 - 모리스 르블랑 / 도화진 옮김 : 별점 3.5점

이상한 집 모리스 르블랑 지음, 도화진 옮김/태동출판사

여배우 레진느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를 선보이는 오페라 극장에서의 패션쇼에서 갑자기 화제가 발생하고 레진느가 납치된다. 그녀는 다이아몬드를 빼앗기고 겨우 풀려나지만, 모델 아를레트가 동일 인물에게 같은 장소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모험가 장 당느리는 그 장소가 유명한 자선사업가 멜라미르 백작의 저택임을 밝혀낸다. 

장 당느리, 다이아몬드 상인 반 후벤 등과 동행했던 베슈 반장은 현장에서 백작을 검거하고 백작의 가문에 이상한 도벽의 피가 유전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사건은 거의 해결되는 듯이 보이지만 정체불명의 호남아 앙투완느 파즈로가 등장하여 관련 인물들을 소집한 뒤 백작의 무고를 주장하여 백작은 풀려나게 된다.
앙투완느 파즈로는 장 당느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를레트의 환심조차 얻어 그녀와 결혼까지 발표하게 되며 장 당느리는 질투와 사명감에 불타 파즈로의 정체와 사건의 진정한 흑막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아르센 뤼뺑 시리즈 중 한권. 원래 이 시리즈는 성귀수씨가 번역한 까치글방 책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마침 자주가던 헌 책방에 이 태동출판사 책이 싼값에 나와 있어서 그냥 구입해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번역 등은 괜찮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책이 작고 가벼워서 마음에 들더군요.

일단 뤼뺑은 자신의 본명 대신에 요트로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온 모험가 장 당느리 자작이라는 인물로 등장하여 활약하는데 무려 3명의 여성을 유혹하는 바람둥이로서의 뤼뺑, 불가사의한 범죄를 풀어내는 탐정으로서의 뤼뺑, 정체가 밝혀지기까지 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가볍게 탈출하는 뤼뺑, 베슈 반장을 데리고 노는 뤼뺑 등 뤼뺑의 모든 매력이 전부 등장해서 뤼뺑 팬에게는 큰 재미를 안겨다 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또 이전에 읽었던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바리바"에서 인상적인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베슈경감이 등장해서 역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막강한 라이벌이자 연적으로 묘사되는 앙투완느 파즈로가 뤼뺑과 좋은 승부를 계속 펼쳐보여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뤼뺑을 묘사하는 앙투완느 파즈로의 한마디가 뤼뺑을 굉장히 잘 나타내고 있어서 인상적이네요.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바람둥이... 당신들 모두를 휘어잡으려는 교활한 돈주앙" ^^
내용도 뤼뺑 시리즈 특유의 모험담과 활극이 추리와 잘 어우러진 형태로 유머도 넘치고 평균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안정적인 퀄리티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작품처럼 모험담 중심으로 추리가 곁들여져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추리적인 부분의 수준도 높아서 멜라미르 백작 가문의 굴절된 역사가 인용되는 약 4대, 반세기에 걸친 장대한 수준의 역사적, 공간적 트릭은 - 이 트릭은 엘러리 퀸의 "신의 등불"의 모티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상당한 수준이에요. 놀라운 수준의 퍼즐 미스테리는 아니지만 트릭에 관련된 앞부분의 복선이나 단서가 상당히 공정하고 설득력있는 편이라 공들여 잘 짜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아쉬웠던 부분이라면 관계자를 전부 모아놓고 일종의 "깜짝쇼"를 펼쳐 사건을 마무리 할 때 입니다. 종반까지 강력한 적수로 묘사된 파즈로가 이 깜짝쇼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며 계속 끌려다녀 결말이 너무 시시해졌기 때문이에요. 좀 더 파즈로와의 대결 구도를 유지했으면 재미있었을텐데 말이죠. 뭐 이 정도로도 뤼뺑 상대로는 제법 오래 버틴 것이긴 하지만요. (나름대로 승기를 잡기까지 했던 뤼뺑의 몇 안되는 적수 중 한명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발표된 순으로 보니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와 "바리바" 사이에 위치한 작품이던데 세 작품 모두 뤼뺑-베슈반장 이야기로 매력적이면서 재미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유쾌한 악당 뤼뺑의 매력을 느끼시기에 충분한 만큼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도 이제 후반 작품들만 읽어보면 완독할 수 있을것 같아 기쁩니다!

2011/10/21

일본의 탐정소설 - 이토 히데오 / 유재진 외 : 별점 3점

일본의 탐정소설 - 6점
이토 히데오 지음, 유재진 외 옮김/문

메이지 시대 구로이와 루이코로 대표되는 다양한 번안소설과 실화소설, 다이쇼 시대 영화 지고마의 인기로 촉발된 모험·탐정 활극의 유행, 그리고 잡지 신청년을 중심으로 한 창작 단편들, 마지막으로 쇼와 전기의 에도가와 란포와 오구리 무시타로의 번안·창작 소설까지—추리 강국 일본의 초기 추리소설 역사를 시대별 대표 작가와 작품을 통해 설명하는 책입니다.

저처럼 일본 추리소설을 애호하는 독자나 다이쇼·쇼와 시대 자료가 필요한 창작자에게는 반드시 구입해야 할 책이긴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가장 큰 이유는 각 시대별 대표작의 줄거리 요약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건조해서 읽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실존했던 탈옥의 명수를 소재로 한 "실화소설 탈옥수 후지쿠라", 타이완의 광산 조사를 배경으로 한 "광산의 마왕",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모험소설 작가 오시카와 슌로의 "전기소설 은산왕", 마에다 쇼잔의 "뒤쫓는 그림자",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요시카와 에이지의 "에도 삼국지" 등 흥미로워 보이는 작품이 다수 소개되지만, 정작 본문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원작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좀 더 보기 좋고 읽기 쉽게 각색했더라면 자료적 가치뿐만 아니라 읽는 재미까지 더할 수 있었을 텐데요.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이 엄밀한 의미의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탐정소설'—즉, 정교한 트릭보다는 모험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도 자료적 가치가 크다는 점은 분명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단,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에 따른 평가이며, 일본 추리소설의 깊은 애호가가 아니거나 근대를 무대로 한 창작물을 준비하는 분이 아니라면 다소 흥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참고해 주세요.

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렸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지병인 고혈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분입니다.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요.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또 미스 마플의 은밀한 탐정 활동도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입니다.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든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세 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은 설득력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는 컸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 모양새입니다.

2019/05/11

모래톱의 수수께끼 - 어스킨 칠더스 / 사주영 : 별점 1.5점

모래톱의 수수께끼 2 - 4점
어스킨 칠더스 지음, 사주영 옮김/바른번역(왓북)

외무부 직원 커러더스는 옛 친구 데이비스의 초대로 늦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함부르크로 향했다. 젠틀맨에게 어울리는 우아한 요트 여행을 기대했는데, 데이비스의 요트 덜시벨라호는 선원 한 명 없는 작디 작은 요트였다.
독일 인근 북해 연안을 무모하게 누비는 몇일간의 요트 여행 후, 무엇을 위해서인지 커러더스가 궁금해하자 데이비스가 얼마 전 만났던 대형 요트 선장 돌만이 자신을 죽이려 했고 그는 독일의 스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이유는 데이비스가 북해 인근 모래톱을 항해했기 때문으로, 데이비스는 모래톱의 수로는 초계정과 얼마전 들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어서 군사적 가치가 높다고 주장했다.
커러더스는 수로들을 조사하고 돌만의 음모를 박살내자는 데이비스의 부탁을 받아들이는데...

"블러디 머더"에서 스파이 소설의 원점이자 정점이라고 소개했던 작품입니다. 이렇게까지 소개하면 읽어 보지 않을 방법이 없죠. 셜록 홈즈를 읽어보지 않고 추리 소설을 논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것과 같으니까요.

하지만 읽어보니 스파이 소설로는 합격점을 주기 힘듭니다. 우선 돌만이 '스파이' 이며 그의 음모는 이러저러하다! 는 두 청년의 확신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탓이 큽니다. 커러더스가 돌만과 폰 브뤼닝, 헤르 뵈메와 그림이 참석했던 회의를 몰래 염탐했을 때의 느낌처럼 그들은 정말 멤메르트 섬에서 오래전 난파선을 인양하려는 목적으로 뭉친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진상은 결국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니까요. 돌만이 과거 영국 해군 소속이었다는걸 숨겼다는게 과연 그리 대단한 비밀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설령 둘이 밝혀낸(것 처럼 보이는) 독일의 음모, 즉 독일이 자국 앞바다 수로를 영국과 최단거리로 이어지는 항로로 개척하여 병력을 태운 바지선을 영국 해안에 상륙시키려 한다는게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자국 앞바다에서 항로를 개척하는건 당연한 군사 훈련이자 작전입니다. 오히려 두 청년이 하는 짓이야말로 염탐이자 스파이 행위에요! 이러한 스파이 행위를 배신자 돌만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포장하는 행위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돌만이 배신자이건 아니건간에 둘의 스파이 행위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게다가 이 음모도 둘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근거가 없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지만, 둘의 모험담에서도 잘 알 수 있듯 아주 날씨가 좋고 물 때가 맞아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으니까요. 주위에서 보는 사람도 많고요. 이래서야 효과가 있을리 없지요. 차라리 멤메르트 섬에서 인양 회사를 가장하여 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있다는 처음의 가설 쪽이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이렇게 스파이 소설로는 여러모로 함량미달이라면 다른 재미라도 주었어야 하는데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요트에 의지해서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라면 최소한 해양 모험 소설로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두 청년의 모험이 너무나 보잘 것 없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인 위험이라곤 데이비스가 좌초할 뻔 했던 무모한 항해 뿐이며, 이는 돌만의 입을 통해 안전할 줄 알았다는 식으로 부정됩니다. 그 외에는 안개 속에서 적의 본거지로 노를 저어 간다던가, 몰래 창 뒤에서 대화를 엿듣는게 전부에요. 스파이 소설에서 기대해 봄직한 서스펜스와 스릴은 커녕 모험 소설로 최소한의 액션도 등장하지 않아서 무척이나 지루합니다.

애송이에 불과한 두 청년이 활약을 해 봤자 이 정도에 불과할 거라는건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킹스맨" 등이 날아다니는 시대에 읽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따분했습니다. 항해와 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도 지루함을 가중시킵니다. 디테일을 살리며 설득력을 높여주는 요소임은 분명하지만 재미와는 영 거리가 멀더군요. 게다가 번역도 좋지 못해서 읽다가 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후 발표된 다양한 스파이, 모험 소설의 원조라는 점에서는 높은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읽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10/08/21

정말이야? 1,2 - 안드레아스 슈뢰더 / 이영민 : 별점 3점

정말이야? - 6점
안드레아스 슈뢰더 지음, 이영민 옮김/재승출판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역사속 사기꾼들과 사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총 2권으로 1권에는 17개, 2권에는 11개의 목차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기 중 인상적이었던건 아래와 같습니다.

"모나리자를 훔쳐낸 뒤 다수의 위작을 거액으로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긴 '모나리자 절도사건"
진품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작을 여러개 만들어 비싼 값에 팔기 위해 진품을 훔쳐낸다는 발상이 기발했어요.

"역사상 최대의 은행 절도 사건인 프랑스의 스파갸리 사건"
1억달러 이상의 금과 지폐, 귀중품 등을 지하 금고실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통해 훔쳐낸다는 스케일도 크죠. 그러나 더욱더 인상적인 것인 의외로 금방 체포된 주범 스파갸리가 판사 집무실에서 전직 낙하산병다운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탈출한 뒤 사라져 버렸다라는 후일담이었습니다.

"100만달러의 현금을 탈취한 D.B 쿠퍼 사건"
"프리즌 브레이크"로도 친숙한 D.B 쿠퍼 사건입니다. 미국에서 거의 최초로 비행기 폭파 협박으로 100만달러의 현금을 갈취한 뒤 낙하산으로 도망간 사건이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다시 감옥에 수감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행복하게 살다가 80년대 후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하는군요. 어쨌건 담대한 싸나이의 '인생은 한방' 철학에 충실한 모험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돈을 마음껏 농락한 여상 마르트 하나우 사건"
1920년대에 이미 매체를 통한 주가조작이라는 첨단 사기방법을 보여준 여성 마르트 하나우가 등장합니다. 아예 공식적으로 언론사를 운영하면서 전국 규모의 매체조작으로 주가를 상승시키는 대담함이 돋보이네요.

"미국의 황제 노턴 1세"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던 정신병자 노턴 1세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황제인 정신병자가 정말로 황제로 대접받으며 근사한 말년을 보냈다는 내용인데 이러한 사기 정도는 유머와 여유로 받아주던 19세기 후반의 샌프란시스코가 부럽네요. 혹 여행갈 일이 있다면 책에서 언급한 노턴 1세의 자취를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셰라톤 팔레스 호텔의 식당이름이 황제 노턴실임 / 엠페러 항에는 노턴 1세의 얼굴이 세겨짐 / 피어39 쇼핑센터 앞의 황제 마네킹 등)

"최고의 위작가 엘미르 드 호리"
1920년대 유명 후기 인상파 화가 페르낭 레제의 미술학도로 공부하며 후기 인상파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게 된 엘미르 드 호리가 막대한 위작을 팔아넘긴 사기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결국 체포되어 자살했지만, 사기당했다는 사람들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외려 그의 위작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후일담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위작가로서의 능력이 정말 뛰어났던 것 같네요.

"군대를 손아귀에 넣다"
1차대전 당시 프러시아와 2차대전때의 오스트리아에서 각각 군복을 입고 지위를 사칭하여 주변을 농락한 이야기입니다. 군국주의 파시스트가 판치던 분위기에서 아주 효과적인 사기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무래도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풍자의 의미가 컸던 탓인지 두 사건 모두 주인공들이 나름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는게 이채롭기도 하군요.

"인류에게 에너지를!"
에테르 엔진을 개발한 미국 발명가 존 킬리, 물에다가 자신이 개발한 약간의 약품을 첨가하면 휘발유를 대체할 수 있다는 엔리히 이야기 2편이 등장합니다. 존 킬리 사건은 너무나 전형적인 장치 설비 사기라서 좀 허탈하기도 하네요. 엔리히 이야기는 결국 그 물질이 뭐였을까?에 대한 답은 없이 끝나는데 뒷날 조사 결과로는 '에탄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독일의 원격조종 강도 다고베르트 사건"
90년대 독일을 휩쓸었던 지능범 다고베르트 사건입니다. 직접 개발한 원격 조종 장치 박스안에 현금을 넣고 기차에 부착하라고 지시한 뒤 원격으로 기차에서 떨어지게 조작한다던가, 하수구 뚜껑 위에 직접 만든 모래상자를 놓고 밑에서 현금을 빼낸다던가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하수구 뚜껑 위의 장치는 영화 "스피드"가 연상되기도 하더군요. 어쨌건 오랜 기간동안 경찰을 농락하다가 결국 체포되기는 했지만 독일에서 굉장한 화제를 모으고 영화 이야기도 여럿 나왔다고 하니 다고베르트 역시 앞날은 걱정없겠네요. 영화를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이외의 사건들도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료들이라 읽으면서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왜 2권으로 분책했냐는 거죠. 조금 두꺼워지더라도 활자 크기를 조정해서 1권으로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어쨌건 별점은 3점입니다. "쿠로사기"와 같은 사기 관련 컨텐츠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사기의 원점을 둘러보는 의미에서 볼 만 하니까요.

2005/03/13

드래곤과 조지 - 고든 R 딕슨 / 강수백 : 별점 3.5점

드래곤과 조지 - 8점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시공사

대학강사 짐 액커드는 박봉에 시달리지만 사랑하는 약혼자 앤지가 있어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는 가난한 청년, 그러나 어느날 앤지가 조수로 일하던 연구실에서 앤지가 애스트랄 투시 기계의 오작동으로 다른 세계로 전송되는 사건을 목격하고 장치를 이용하여 그녀 뒤를 쫓게 된다.

그러나 짐이 도착한 곳은 중세시대의 영국과도 같은 세계고 짐 자신은 드래곤의 육체에 전송되어 버린 것이었다! 앤지의 행방을 쫓던 드래곤 짐은 그녀가 "암흑의 권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마법사 캐롤리너스에서 듣고 그녀를 구해내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동반자"들을 모아 암흑의 권세를 쓰러트리는 모험에 착수한다.

용맹한 기사 브라이언과 원래 드래곤이었을때부터의 친구인 말하는 늑대 아아라, 그리고 활의 명수 다휘드, 황야의 무법자 가일즈와 그녀의 딸 다니엘,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 드래곤인 스므르골과 호수 드래곤 세코등과 힘을 합쳐 짐은 암흑의 권세에 도전하게 되는데....

아주 어렸을적에 TV에서 "용이여 불을 뿜어라!"라는 인상적인 영국풍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물리학을 가르치는 주인공이 보드게임같은 게임을 하다가 환타지 세계로 정신만 이동하여 용의 몸에 들어가 그 세계의 악과 싸운다라는 설정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악의 두목 앞에서 현대 물리학 이론을 열거하며 환타지 세계를 붕괴시키는 마지막 결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죠.

이 작품은 이 애니메이션과 기본적인 설정이 동일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환타지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충분해요. 용과 기사, 아름다운 레이디 등 이런 류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들에서 시작해서 중세사 전문가인 작가의 지식이 디테일하게 살아있는 궁수들에 대한 묘사나 말하는 늑대같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결합되어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짐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온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이 세계에 남기로 결심한 결말부는 애니메이션과는 반대더군요.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여주인공인 공주가 주인공의 세계로 온다는 결말이었는데 말이죠. 허나 소설도 워낙 매력적인 동반자들과 함께 했기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결말이에요.

하지만 상당히 기발하고 유머스럽게 풀어나갔던 전반부에 비해 암흑의 권세와의 실제 한판 승부는 생각보다 시시한 편이라 약간 불만스럽긴 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아이디어가 도입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데, 결국 순수하게 힘대 힘의 승부를 보여주기 때문에 좀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도 조금 있고요. 물론 드래곤 대 드래곤, 오우거 대 드래곤 등 화려한 등장인물의 리얼한 전투 묘사를 즐기는 즐거움은 컸지만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전통적인 영국 환타지의 줄기를 어느정도 충실히 따르면서도 유머와 독특함이 잘 살아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재미 역시 빠지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SF중심의 그리폰북스에 이 작품이 왜 포함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는 뒷부분 해설도 볼거리였습니다. "반지의 제왕"같은 거대 장편에 압도되신 분들이라면 기분 전환을 위해 가볍게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다시한번 "용이여 불을 뿜어라!"를 보고 싶어 지는군요. 어디 구할데 없나....

2015/07/16

인사이드 아웃 (2015) - 피트 닥터 : 별점 5점


픽사의 신작. 딸아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선택한 영화. 더운 여름 집에만 있는 것도 뭐하고 해서 지난 주말에 가족 나들이용으로 감상했습니다. 딸아이가 좀 크니까 좋네요. 딸아이를 위해서 당연히 더빙판으로 봤습니다.

솔직히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의외로 완전 대박! 어떻게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감정을 의인화하다니... 이러한 감정이 실제 사람들의 행동과 엮이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라일리의 머릿 속 관련 설정도 디테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정을 "섬"으로 표현한게 개중 압권이었어요, 그 외에도 머릿속에 시도때도없이 흥얼거리는 CM송이나 잊혀진 기억들, 꿈 공장, 상상속 친구 등에 대한 이야기도 세세하게 갖추어져 재미를 더하고요. 아트웍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아름다왔습니다.

또 단순히 감정 의인화에 그치지 않고, 라일리의 이사에 따른 변화 때문에 머리 속에서 기쁨이와 슬픔이가 이런 저런 장소를 넘나들며 컨트롤타워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내용도 모험담으로 손색없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습니다. 웃기는 장면에서 확실한 웃음을 주는 것과 함께 "슬픔"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마지막 장면도 좋았고 말이죠.

한마디로 왜 픽사가 픽사인지를 알려주는 걸작. 아이도 좋아했지만 어른도 모두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2011/12/24

삼수탑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1.5점

삼수탑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하기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후, 이모댁에서 딸처럼 귀하게 자란 오토네 앞에 먼 친척이라는 겐지 노인이 무려 100억이라는 유산을 남긴다는 유언이 전해졌다. 조건은 다카토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러나 백부의 회갑연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피해자가 정체불명의 정혼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 뒤 변호사에 의해 유산은 오토네를 포함한 사타케 가문 사람들 모두가 나누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가문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되면서 오토네는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는데...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이지만 긴다이치의 비중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오토네와 다카토의 모험담이 오토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일단, 사타케 가문 사람들이 100억이라는 거액을 둘러싸고 한 명씩 죽어나가는 꽤나 큰 스케일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문도 모른 채 사건에 휩쓸리는 전형적인 피해자인 오토네의 시각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추리적인 요소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나마 추리적인 요소라고 할 만한 것은 후루사카 시로의 부서진 트렁크와 삼수탑 사진의 존재 정도인데, 이는 유카리와 쇼이치의 무고함을 약간이나마 증명해 주는 증거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결국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는 황당하기가 그야말로 서울역에 그지없을 정도고요. 지금까지 읽어본 추리소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어요.

범행 동기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 사건이라는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연쇄살인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인의 유도 실력에 대한 복선이 살짝 등장하긴 하지만, 실로 초인적인 운동 능력과 결국 연쇄살인 자체가 순전히 운에 기인한 결과라는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뭔가 있어 보이던 "삼수탑"의 존재가 사실 별 의미 없고, 시로가 삼수탑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이미 관련된 증거는 챙겼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말의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차라리 초반의 살인 하나만 범인이 저지르고, 유언장 발표 후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였으며, 마지막 삼수탑에서는 내분과 애정 싸움으로 모두가 목숨을 잃고, 범인은 오토네와 다카토의 관계를 알고 자살한다는 결말이 더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결국 "여왕벌"의 자가복제에 불과하다는 작품의 근본적인 단점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순진하지만 본의 아니게 사건을 일으키는 원흉인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미녀, 그리고 악인인지 선인인지 모호한 그녀를 중심으로 맴도는 남자라는 설정과 전형적인 사건 구도가 똑같거든요.

그래도 당대의 인기작답게 전혀 건질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 단계별로 사건이 계속 일어나며, 다음 이야기를 빨리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전개는 연재물이라는 작품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서스펜스와 스릴이 전편에 걸쳐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은 과연 명불허전이라 할 만했습니다.

또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토네와는 정반대로, 신출귀몰하며 변장에도 능하고 다양한 신분을 가진 다카토라는 안티 히어로적인 캐릭터가 비교적 중심을 잡아주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였습니다. 비교적 현대적이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라 이 작품 한 편으로 끝나기에는 아깝더군요.

아울러, 통속적인 면에서는 지금 보아도 완벽한 작품이라 생각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점도 인상적입니다. 초반부터 펼쳐지는 찐한 애정 묘사, 사타케 가문 사람들이 모두 호색한 또는 호색녀이며 문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설정 등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실 이러한 설정들은 작품의 전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순전히 재미를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최근까지도 이 작품이 계속해서 영상화되는 주요한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형적인 통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참고할 만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추리소설이라 부르기에는 민망할 뿐 아니라 긴다이치마저도 별다른 역할이 없기에, 작가의 팬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추천하기 어렵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긴다이치 시리즈 중 최저점인데, 이후 작품들은 솔직히 별로 기대되지 않는군요.

2025/09/14

대우주시대 - 네이선 로웰 / 이수현 : 별점 2점

행성 네리스에 거주하던 이슈마엘 왕은 어머니의 사고사 이후 쫓겨날 위기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반의반' 몫 선원으로 우주 무역선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탑승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이슈마엘은 주방장 쿠키, 동료 핍을 비롯한 여러 선원들과 친해지며 자신을 발전시키며,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통해 한 몫 잡을 계획을 세워 진행시키는데...

네이선 로웰의 장편 SF 소설입니다. 특징이라면 우주선이 주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나 액션, 모험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무역’이라는 비즈니스적 요소를 도입한 덕분입니다. 특정 행성에서 싸게 구입한 물품을 다른 행성에서 비싸게 되파는 식의 간단한 구조이지만, 개인별 운송할 수 있는 무게 제한과 부족한 자금으로 단순 운송을 넘어서는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죽 세공이 뛰어난 행성에서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벨트를 사고, 벨트를 팔아 얻은 이익금으로 보석 세공이 특화된 행성에서 버클을 구입한 뒤 일부 남은 벨트에 결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식으로요. 물건을 팔기 위해 행성마다 있는 '벼룩 시장'에 출점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우주선 운영과 생활에 관한 세밀한 설정도 좋습니다. 일종의 인턴이라 할 수 있는 ‘반의반 몫’에서 시작해 한 사람 몫에 이르는 직급 체계, 4개의 직무군으로 구분되며 승급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정책, 선원들이 선박 운영으로 발생한 추가 이익을 규칙에 따라 분배하는 보수 체계, 남녀 구분이 없는 침실과 넓게 보장된 운동 시설 및 사우나 같은 선내 생활 등 생활 전반이 디테일하게 설계되어 있어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앞서 말했듯, 직급에 따라 철저히 관리되는 화물 무게 할당이라는 설정은 무역이라는 소재에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런 점에서는 상세한 설정이 뒷받침된 해양 무역 모험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부실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주인공의 여정이 지나치게 순탄한 탓입니다. 행성 네리스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승선할 기회를 얻고, 첫 임무인 커피 맛 개선도 무난히 해내며, 친구 핍 덕분에 행성간 무역의 요령을 빠르게 익혀서 곧바로 큰 수익을 내는 식이거든요. 실패가 없어요. 주변 인물들 또한 무개성에 모두가 주인공을 돕는 선한 사람들로만 그려져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도 찾을 수 없고요. 우주 공간 항해에서의 위기 역시 전무합니다. 때문에 작 중에서 긴장감 있는 드라마는 찾기 어렵습니다. 전생 지식을 활용해 무쌍을 찍는 이세계 전생물조차 이 정도로 무탈하지는 않을 거에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내 번역이 1권에서 멈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막 무역 협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끊겨 버리니 독자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디테일과 무역 묘사의 신선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완결되지 못했다는 치명적 문제 탓에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10/12/10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 - 로버트 바 / 이은선 : 별점 3점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 - 6점
로버트 바 지음, 이은선 옮김/시공사

프랑스 총경 출신으로 영국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외젠 발몽이 주인공인 단편집으로, 1907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예전에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을 통해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 국내 출간이 반가웠고, 기대만큼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유쾌한 분위기입니다. 마치 마크 트웨인이 추리 소설을 쓴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고 할까요? 특히 프랑스인 탐정 발몽이 영국 사회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태도와 유머가 돋보입니다. 그의 허영심과 자의식 과잉이 만들어내는 코믹한 요소도 재미를 더하죠. 이러한 자뻑 탐정의 전형적인 예로는 '에르퀼 포와로'를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발몽은 여성에게 약하다는 점에서 포와로와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추리적인 요소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살인 사건보다는 도난과 사기 사건이 중심이 되는데, 단순한 해결 과정뿐만 아니라 범죄 계획 자체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한, 20세기 초반 셜록 홈즈의 라이벌 탐정들이 활약하던 시기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기존 정통 단편 추리 소설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탐정이 사건 해결에 실패하는 이야기나 '추리'보다는 '모험'에 집중한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죠.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고, 지금 읽어도 별로 낡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추리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인 '공정한 정보 제공'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본격 추리로서의 완성도도 다소 아쉬웠습니다. 또한, 이야기마다 수준 차이가 큽니다. 마지막에 실린 셜록 홈즈 패러디 단편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요. 특히 "셜로 콤즈의 모험"은 최초의 셜록 홈즈 패러디 단편이라는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내용 자체는 가벼운 장난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쾌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추리 단편을 좋아하시거나 유머러스한 추리소설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이 잘 팔려서 더 많은 고전 추리 걸작들이 출간되면 좋겠네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500개의 다이아몬드에 얽힌 수수께끼

외젠 발몽이 프랑스 총경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

백만달러짜리 마리 앙투아네트 목걸이의 경매와 경매이후 벌어진 목걸이 행방을 뒤쫓는 추격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능한' 발몽이 무능한 부하와 생각못한 방해로 작전에 실패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벌어지죠. 간단하지만 효과적이었던 범인의 다이아몬드 운송 계획도 볼거리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인'에게 주인공 명탐정이 패배하는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 등장해서 의외였습니다. 뤼뺑 시리즈 제 1작이 뤼뺑이 체포되는 이야기였던 충격과 버금가더군요.

이 시리즈의 특징, 자뻑 외젠 발몽과 그의 떠벌임, 자의식과잉 묘사와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반전까지 모두 등장하는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2. 두 얼굴의 폭탄 테러범

발몽이 영국으로 온 이후 이중신분으로 무정부주의자 조직에서 정보를 캐 내다가 폭탄투척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막으려 활약하는 모험담.

이 이야기는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첩보 - 모험물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당시 영국에 대한 발몽의 비판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죠. 쉽게 읽히고 재미도 있으며 발몽의 옛 부하 아돌프 시마르가 등장하는 등 시리즈 팬으로 즐길거리가 많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3. 은숟가락에 담긴 단서

벤섬 기브스가 발몽을 찾아와 사건해결을 의뢰한다. 사건은 그와 친구들이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사라진 백파운드를 찾아달라는 것.

라이오넬 데이커라는 유력한 용의자를 등장시키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독특한 소품입니다. 두명의 대화도 맛깔나고 은숟가락을 이용한 마술이라는 단서도 꽤나 유용한 등 소품이지만 풍성한 느낌이 좋았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라이오넬 데이커가 어떻게 빚을 갚았나?' 에 대해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좀 아쉽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4. 치젤리그 경의 사라진 재산

치젤리그 경이 숨겨둔 막대한 재산을 찾는 이야기.

이 단편집에서 가장 정통 추리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가지 단서와 치젤리그 경의 유언을 토대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어떻게보면 좀 단순한 발상이기는 하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긴 힘든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5. 건망증 클럽

예전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을 통해 접했던 단편.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두가지 사건 - 은화 위조와 사기사건 - 이 묘하게 겹쳐져서 하나로 이어지는 전개도 좋았지만 발몽의 런던 경시청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활약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사기꾼에게 한방 맞는 결말도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이 평가할 부분은 너무나도 기발한 사기꾼의 계획이겠죠. 지금 보기에는 허술하기도 하고 약간 설득력이 처지는 부분도 있긴 하나 아이디어만큼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별점은 4점입니다.

6. 기형 발 유령

랜트림리 경의 저택에 출몰한다는 기형 발 유령의 발소리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 영국 경찰에 대한 발몽의 떠벌임같은 유쾌함은 잘 살아있긴 하지만 초반에 저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지 않아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며 내용도 지나치게 과장이 심한 듯 싶어서 여러모로 조금은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 와이오밍 에드의 석방

와이오밍 에드로 불리우는 미국 무기징역수의 탈옥을 돕는 발몽이 탈옥에 감추어진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

두가지 사건, 즉 와이오밍 에드의 탈옥과 탈옥에 관련된 사기사건이 등장하는데 탈옥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도 않고 가볍게 넘어가기 때문에 '사기사건' 으로 보는게 적당하겠죠.

솔직히 탈옥도 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을까 읽으면서 기대가 컸었는데 좀 실망스럽긴 했습니다. 그러나 범인의 사기 계획이 나름 치밀하고 설득력이 있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나 싶네요. 물론 마지막 '변장쇼'는 좀 오버라 생각되지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8. 레이디 알리시아의 에메랄드

도난당한 블레어 에메랄드를 되찾고 레이디 알리시아를 만족시키겠다는 발몽의 일념이 빛나는 이야기. 그러나 도난사건 자체가 일종의 장난같고 두 연인의 치기어린 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추리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여성에게 약한 발몽의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점은 즐거웠지만 전체적으로 평균 이하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셜록 홈즈 패러디

1. 셜로 콤즈의 모험

셜로 콤즈가 페그럼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이야기. 스코틀랜드에 대한 조롱과 더불어 패러디로서 즐길거리는 많으나 결국 셜로 콤즈의 추리와 수사는 치기어린 과대망상이었고 결국 운이 좋아서 단서를 찾았을 뿐이라는 결말은 추리 소설 애독자로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하더군요.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높지만 개인적으로는 씁쓸함이 더 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 두 번째 돈주머니의 모험

코난 도일에게 홈즈가 원고료를 요구하러 찾아오지만 도일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나름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용에 알맹이도 없고, 패러디도 아닌 이상한 작품이에요. 저자 로버트 바가 코난 도일의 절친한 친구라는데 친구에게 거는 가벼운 장난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이라는 의미 이외의 것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04/09/13

80일간의 세계일주 - 쥘 베른 : 별점 5점!

80일간의 세계일주 - 10점
쥘 베른 지음, 홍은주 옮김/창작시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의외로 제대로 정독하지 못하고 어린 시절 "세계 명작 동화" 같은 시리즈의 다이제스트판으로 접했을 유명한 소설입니다.


이 책은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가 기획한 "스칼라 월드 북스"시리즈를 창작시대라는 출판사가 펴낸 책으로 고전 명작들을 초판본 무삭제 완역함은 물론, 각존 차별화된 삽화와 참고 자료의 화려한 도판으로 꾸며진 책입니다. 14,500원이라는 가격은 제법 부담되지만 워낙 책의 질이 뛰어난 편이라 별로 아깝지는 않네요.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필리어스 포그라는 영국 신사가 클럽 친구들과의 20,000파운드가 걸린 내기를 통해 80일간 세계를 일주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충직한 하인 빠스빠르두와 필리어스 포그를 은행 털이범으로 착각한 픽스 형사, 인도에서 구해준 아름다운 아우다 부인 같은 조연들이 가세하여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보여줍니다.

워낙 예전에 읽었었기 때문에 기억도 가물가물 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역시 구관이 명관! 빠스빠르두가 불길속에서 변장하고 아우다 부인을 구하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시간에 쫓기게 되자 배를 뜯어서 땔감으로 쓰며 항해하는 장면, 동쪽으로 여행했기 때문에 하루를 벌게되는 반전은 알고 있어도 역시 명불허전!

또한 다시 읽어보니 영국인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으로, 프랑스인은 과장되고 흥분을 잘하며 유머스럽게, 미국인들은 화끈하지만 무모한 인물들로 묘사한 점이나 여러 식민지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이랄까.. 그런것들이 조금 느껴져서 이채로왔습니다.
기억나지 않았지만 굉장히 유머스러운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미국 횡단 기차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모르몬 교 목사의 집회에 일부 다처제에 혹해 참석한 빠스빠르두. 모르몬 교의 장황한 역사를 설파하는 선교에 지루해진 참석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며 결국 설교가 끝날때 혼자 남게 되는데 목사가 마지막으로 노기띈 목소리로 묻습니다.
"그리고 당신 형제여! 당신도 우리 깃발 아래 당신의 천막을 세워 보시려오?"
"싫은데요"^^;

좀 아동용 취향이긴 하지만 제가 읽어도 그렇게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잘 구성된 책입니다. 도판과 삽화가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 더욱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왠지 책 선전이 되어 버렸네요.^^ 그래도 이런 책은 사줘야 합니다.

2011/11/27

계간 미스터리 2011.가을 - 청어람M&B 편집부 엮음 : 별점 3점

계간 미스터리 2011.가을 - 6점
청어람M&B 편집부 엮음/청어람M&B

국내 최고의 추리소설 커뮤니티 "하우미"에서 진행한 이벤트로 당첨된 도서입니다. 먼저 이벤트를 주최한 황금펜클럽 편집부와 하우미 담당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드립니다.

"계간 미스터리"는 국내 유일의 추리문학 전문 잡지이며 제목 그대로 계간지인데, 이번 호 특집은 김내성 선생님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들과 선생님의 미발표 논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시, 김내성"이라는 제목의 자료입니다. 이 자료 하나만으로도 이번 "계간 미스터리"에 대한 만족도는 아주 높았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단편들과 연재작이 실려 있습니다. 간단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일석간 - 김내성

거금 2천 원의 분실 사건에 얽힌 유쾌한 연애물. "연문기담"과 유사한 일상계 로맨틱 코미디 추리물입니다. 단서가 너무 명확하고 우연이 많이 개입된다는 점은 조금 아쉽지만, 범인(?)의 행동에 대한 이유와 동기가 확실해서 깔끔하다는 장점도 돋보입니다. 변격물로 유명한 김내성의 새로운 면을 느낄 수 있었던 수작입니다. 귀여운 악녀 이미지의 미망인 전혜봉 여사 캐릭터도 인상적이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킬힐 (Kill Heel) - 정석화

시체와 함께 발견된 여인과 그녀를 취조하는 형사, 두 명의 대화와 심리 묘사로만 전개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설정은 평범하나 사소해 보이는 단서를 통해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위적인 알리바이 트릭, 경찰 수사로 비교적 손쉽게 드러난 범인들의 관계, 반전이기는 하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아버린 진짜 동기 등 자잘한 부분에서 정교함이 약간 아쉬웠어요. 특히 진짜 동기가 밝혀진 뒤가 그러합니다. "디아볼릭" 등 수십 년 된 작품과 유사했기 때문이죠. 또, 오타가 굉장히 많은데 거슬리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우리 동네 살인마 - 정명섭

동네에서 벌어진 한 일가족의 집단 음독 사건을 수사하는 청년 백수의 모험담.

추리소설가를 꿈꾸는 추리 애호가이자 청년 백수인 탐정 캐릭터와 더불어 시종일관 유쾌한 전개가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국내에도 이런 작품이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어요. 개인적인 이번 "계간 미스터리"의 베스트 단편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딱 한 가지,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게 단점인데, 작품 길이를 늘리더라도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게 좋았을 것 같네요.

막다른 골목 - 김이제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 있다... 라는 설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작품.

문제는 설정은 그럴듯한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겠죠. 한국적 이차원 판타지랄까요? 나름 의미를 부여하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장르문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네요. 재미도 그닥이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The Whisper of Blood - 미지의 속삭임 (2부)

1부를 읽지 않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세계 지능체와 엮여 고생길에 접어드는 주인공을 그린 SF입니다.

독특한 이세계 지능체 캐릭터는 괜찮았는데, 세계관이 이런 류 작품치고는 많이 뻔한 편이었어요. "기생수"를 비롯한 근미래 SF에서는 많이 보아온 설정이었거든요.

그러나 아직 완결된 것도 아니고 일부만 읽었기에 속단하기는 이를 것 같습니다. 별점은 완독할 때까지 유보합니다.

위험한 호기심 - 홍성호

펜션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고, 형사 준영은 펜션에서 사라진 충전기에 주목하는데...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당선작입니다. 전개와 결말이 이치에 맞고,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리를 거쳐 수사해 나가는 과정이 괜찮은 범죄-수사 스릴러물로, 첫 작품이라는 것이 놀랍네요.

하지만 아쉬웠던 점도 있습니다. 일단 지나친 성적 묘사가 거슬렸어요. 뭐, 사건이 성적인 관계에 기반한 만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 외에도 의도하지 않은 알리바이의 작위성 등 우연이 많다는 점, 주인공 형사 캐릭터가 그야말로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데뷔작이기도 하고, 아이디어와 전개는 좋았던 만큼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정태원 추모글

한국 추리문단에 큰 공헌을 하신 고 정태원 선생님에 대한 추모글입니다. 소개된 선생님의 저작만 해도 정말 엄청나서 다시금 고개가 숙여집니다. 평이나 별점을 남길 글은 아니죠.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알리바바의 주문 - 도로시 세이어즈

피터 경의 부고 기사에서부터 시작되는 충격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피터 웜지 경 시리즈 단편인데 "검은별"과 너무나 판박이였습니다. 설정부터 전개가 똑같아요.

덕분에 추리물이 아니라 모험물로 보일 뿐더러, 추리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아동 취향의 수준 낮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작가의 명성과 시리즈의 후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작품으로, 차라리 "검은별"을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그 외 노원 선생님의 장편 연재작은 연재물이라 이번 권만 읽어서는 이해가 힘들어서 뭐라 평가하기 어렵네요. 스케일이 큰 작품인데 디테일이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추후 단행본이 나오면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별점은 그때까지 유보합니다.

이러한 단편들을 포함한 총 별점은 3점입니다. 국내 유일의 추리문학 전문지답게 미발표 외국 단편이 한두 편 정도 더 소개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긴 하나, 앞부분 김내성 선생님의 다양한 글들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기에 큰 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한국 추리문학을 사랑하시는 몇 안 되는 모든 분께 추천드립니다.

2015/05/20

멀리 돌아가는 히나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2.5점

멀리 돌아가는 히나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고전부 시리즈" 네번째.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단편집입니다. 가을, 겨울을 거쳐 봄방학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고 있죠.

각 이야기별 줄거리 및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은 간략하게"

가미야마 고등학교 7대 불가사의 중 첫 번째라는 "비밀클럽의 권유 메모"를 찾는 내용입니다. 소박한 학교 관련 일상계 소품으로 추리적으로도 별다른건 없습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터에"라는, 브라운 신부 단편 "브라운 신부의 옛날 이야기"에서도 인용되었던 격언이 핵심이지요.

그래도 이야기 서두에 등장하는 음악실 괴담에서부터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호타로의 행동이 잘 연결되는 결말 부분의 반전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상계도 이런 반전이 가능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에요. 사토시도 의외로 정곡을 찔러서 만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요. 여기에 음악실 괴담까지 해결해주기 때문에 여러모로 풍성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추리지만 이런 게 고등학교 무대에 적합한 트릭이겠죠. 여기가 뭐 부동고교도 아니니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일상계 왕도를 걷는 작품이에요. 시리즈 팬에게 여러 가지 재미를 선사해 주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대죄를 짓다"

수학선생님이 진도를 착각한 이유에 대한 아주 짤막한 이야기. 진상은 소문자 a와 d를 착각했다는 사소하고 별거 아닌 것입니다. 그냥 화를 낸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지탄다의 생각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하지만 그것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과연 화를 내는 것도 에너지 낭비인 건지 좀 궁금하네요. 별 내용이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정체 알고 보니"

고전부원들이 온천 여행을 떠나는데 숙소인 여관에서 지탄다와 마야카가 목매달아 죽은 시체의 유령을 본다는 이야기. "고전부" 시리즈 추리의 핵심, 즉 "신경쓰이는" 지탄다를 납득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게 잘 드러납니다. 진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추리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전달되는 단서들을 조합하여 나름의 합리적으로 설명해주기는 합니다. 유카타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뭐 그런 변수까지 다 등장시키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겠지요.

"고전부" 시리즈의 핵심을 꿴다는 측면에서 꼭 봐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기억이 있는 자는"

"10월 31일, 역 앞 고분도에서 물건을 산 기억이 있는 자는 지금 즉시 교무실 시바자키한테 와라." 라는 교내 방송에 대한 호타로의 추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누군가가 한 말을 추리해서 의외로 숨겨져 있는 범죄에 대한 진상을 파헤친다는 건 "9마일은 너무 멀다"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진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호타로가 지탄다를 납득시켜 승부에 이기기 위한, 순수한 추론일 뿐이거든요. 몇 가지 증거, 즉 방과 후에 호출 방송을 한 것, 학생지도부가 아니라 교감이 불렀다는 것, 10월 31일이라고 날짜를 지칭한 것, 방송을 두 번 반복하지 않은 것 등만 가지고 추론을 이끌어내는 호타로의 솜씨는 인상적이지만 진상이 위조지폐와 관련된 범죄라는 것은 비약이 너무 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새해 문 많이 열려라"

새해 참배에서 창고에 갇히게 된 호타로와 지탄다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 너무 추운 날에 남녀 단 둘이서 신사 창고에 갇힌다는 설정은 만화스럽습니다. 궁지에 몰리고 별다른 수단이 없는 둘이 가진 몇 가지의 소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펼쳐지는 과정은 일종의 모험담이라고 봐도 될 테고요. 이전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팥을 담은 주머니 양 끝을 묶어 전달했다"는 고사를 효과적으로 써먹는건 좋았습니다. Side라는 부제로 구분하여 이바라와 사토시 시점, 호타로와 지탄다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는 "이니시에이션 러브" 같은 전개도 독특했고요.

그러나 유실물이 무녀 아르바이트 중인 마야카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운에 의지한 작전이라는 것, 창고에 갇힌 시점에서 지탄다의 체면을 그렇게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 잘 납득이 안 된다는 것, 무엇보다도 "고전부" 시리즈의 핵심인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계로 보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제 초콜릿 사건"

이바라 마야카가 사토시에게 주려던 초콜릿이 고전부실에서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별 건 없지만 고등학생의 순진하고 풋풋한 사랑 이야기, 즉 집착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면 더 편한 마음으로 지내던 사토시가 마야카에게 집착해야 하는 딜레마를 다룬 이야기라 생각하고 보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별로라 잘 와닿지는 않더군요. 특이한 캐릭터를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지만, 이런 류의 평범한 일상계 사랑이야기에는 적합한 캐릭터들은 아닌 탓입니다. 일상계라면 보다 일상계다운 주인공이 나와 주는 것이 훨씬 좋았을 거예요. 또 에너지 절약 주의, 즉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는다는 호타로만큼이나 특이한 사상을 가진 사토시 같은 고등학생이 실존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기도 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멀리 돌아가는 히나"

표제작. 제목 그대로 히나 축제에서 히나 인형(으로 분장한 지탄다)이 다리에 생긴 문제로 멀리 돌아가게 된 경위를 밝혀내는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

그러나 이 추리는 곁가지일 뿐이고 내용은 히나 인형 옆에서 우산을 받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호타로와,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지탄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 편의 사토시의 심리묘사보다는 호타로 묘사가 괜찮아서 그런대로 괜찮게 읽혔습니다. 사토시는 3인칭이고 호타로는 1인칭인 덕분입니다. 훨씬 말랑말랑하고 귀엽고, 여튼 좋았어요.

아울러 히나 인형이 돌아가게 된 계기 역시 일상계답게 괜찮았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럴듯했거든요. 공정한 정보 제공도 돋보였고 말이죠. 별점은 3점. 묘사, 전개, 추리적인 부분 모두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일상계 작품다운, 평범하게 재미있는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챙겨볼 만한 시리즈임에는 분명해요. 이 시리즈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호타로와 지탄다의 관계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너무너무 궁금해집니다. 후속권이 빨리 나와주면 좋겠네요.

2020/01/27

지구빙해사기 상 / 하 - 다니구치 지로 : 별점 1.5점

지구빙해사기 - 상 - 4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지구빙해사기 - 하 - 4점
다니구치 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빙하기가 찾아온 지구, 인류는 컴퓨터 라 벨 메르의 도움으로 어비스 메가로폴리스를 구축한 뒤 극지 자원을 채취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는 대격변을 맞이했다. 자원 개발 공사 석탄 채굴 기지 털파에서 일하는 타케루와 동료들은 상황을 파악한 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기지를 빠져나와 어비스로 향했다. 이 여정의 와중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며 타케루는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힘'을 자각하게 되는데.... 

1987~1990년 까지 연재된 다니구치 지로SF 만화로 상, 하권 구성입니다.
일단, 상권 초반에서 묘사되는 자원 개발 공사 석탄 채굴 기지 털파를 무대로 한 일상 속 모험담은 꽤 재미있습니다. 가혹한 환경 하의 고립된 기지에 갇혀 근무하는 사람들의 디테일이 볼 만하기 때문입니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 접대부가 바뀌지 않는 술집, 극한의 폐쇄 공간인 탓에 사소한 일로 벌어지는 싸움들, 지하와 지상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다양한 사고와 수리 작업 등이 다니구치 지로의 정교한 그림으로 손에 잡힐 듯한 느낌으로 그려진 덕분이지요. 당연히 엄청난 현실감을 보장하고요.

그러나 이러한 기지의 일상 이야기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도저히 모르겠거든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호해요. 처음에는 급작스러운 태풍으로 고립된 털파 기지에서의 탈출을 보여주나 했더니, 그 다음에는 빙하기가 끝났다며 살아 움직이는 숲이 나오는 등 나우시카스러운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마지막에는 어비스에 도착한 타케루가 컴퓨터 라 벨 메르가 만든 신인류와 맞서 싸운다는 급작스러운 결말로 끝이 납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요. 

더 큰 문제는 뿌려놓은 떡밥조차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타케루가 어떻게 거인신과 교신하는지, 거인신의 정체와 의도는 무엇인지, 살아 움직이는 숲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 모든 상황이 묘사만 있고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더 가관이에요. 타케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털파 기지의 생존자들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 하나 없이 마무리되거든요. 이 정도면 소드전사 야마토급 엔딩이라고 봐도 무방할겁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합니다.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으니까요. 

또 디테일한 작화에 비해 캐릭터들은 영 별로입니다. 주인공 타케루가 가장 심각한데, 사장의 사생아로 사고만 치는 문제아였다가 급작스럽게 모두의 리더로 거듭나는 과정의 설득력이 너무 약합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모두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일 뿐이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당대를 풍미했던 오토모 가즈히로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 설정, 작화와 분위기를 적당히 섞어 만든 하이브리드 혼종이나 결과물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절대로 권해드릴 수 없는 졸작입니다. 편집자 잘못인지, 아니면 다니구치 지로는 제대로 된 원작이 없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건지 판단은 잘 되지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아닐까 싶네요.

2004/02/06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로저 젤라즈니 / 김상훈 : 별점 4점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작가의 초기 중단편들로 구성된 작품집. 원래 집에 사두기는 꽤 오래 되었지만 무언가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 거창한 작가 이름만 보고 지레 기죽어 모셔만 두고 있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형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한 “신들의 사회”가 워낙 괜찮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기 시작해서야 알아챘는데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중, 단편집”이더군요. 그것도 무려 17편!이나 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으며 각 작품들 하나하나마다 일정수준 이상의 즐거움을 주는, 실로 주옥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워낙 수록작품이 많아 전부 소개하는 것은 어려우니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 짤막하게 소개해드리자면,

첫 단편 “12월의 열쇠”
“신”이 되어가는 한 피조물과 행성의 장대한 이야기를 짧게 풀어놓은 작품.
“신들의 사회”와 비스무레하게 장대한 시공간을 아우르는 작품이었습니다. 젤라즈니라는 작가에 대해 놀라운 것은, 이 단편의 주인공 캐릭터와 “행성의 환경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과학적이면서도 현실적이며, 또한 풍자적이라는 것입니다.

2번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금성에 살고있는 100미터나 되는 “이키”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낚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모험소설 SF로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젤라즈니답지 않은 현실적이고 조금 허무주의적인 주인공도 좋았던 작품.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는 조금 떨어진다 생각되더군요.

3번째 “악마차”
지성을 가진 자동차들이 인간을 습격한다는, 스티븐 킹의 “맥시멈 오브 드라이브”등과 비슷한 설정의 작품.
신선함은 좀 떨어졌지만 여러가지 성격의 인공지능 차량에 대한 묘사와 여운을 남기는 후반부 묘사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4번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표제작이기도 한 걸작 중편.
서두 부분의 고대 화성 문명과의 조우에서부터 결국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고 모든 것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결말까지, 장중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 나가는 젤라즈니의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 부분에서 후대에 미친 영향이 상당할 것 같은데, 후대의 모방작들과는 전혀 다른 원전으로서의 품격과 가치를 잘 알려주는군요.

6번째 “이 죽음의 산에서”
외계의 100마일이나 되는 높이의 산을 등반하는 탐험가와 그들을 방해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2번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과 같은 모험소설 SF인데 모험소설 쪽으로 더 치중한 느낌의 작품. 약간의 SF적인 설정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냥 산악 모험담으로 보아도 좋을 작품입니다. 그만큼 모험소설로의 가치가 높아요.

9번째 “폭풍의 이 순간”
머나먼 외계의 한 행성을 무대로 한 “재난”드라마. SF적인 설정, 묘사보다는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전개가 돋보이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의 후일담은 조금 사족인 듯 싶긴 합니다.

14번째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거대한 인간 냉동 창고의 묘지기(?)역할을 하고 있는 사이보그(?)와 화이올리라는 신화적 존재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독특한 작품.

16번째 “프로스트와 베타”
인류가 멸망한 이후의 새로운 신, 새로운 인류가 되어가는 컴퓨터의 이야기.
설정이나 스토리, 결말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벽한,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이런 작품을 걸작이라고 하는 것이겠죠.

결론내리자면, 수록작마다 편차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이 많아 전체 평균 별점은 4점입니다.
SF와 환타지를 잘 조화시키며 거기에 나름의 독특한 설정과 이야기를 부여하는 젤라즈니라는 거장의 재능을 한껏 느낄 수 있게해준 좋은 작품집으로,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쉽게 접할 수 없었지만 한번 손을 댄 이후에는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모셔만 놓았던 다른 책들도 한번 손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6/05/18

SF 영화 - 김종철 외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별점 1.5점

SF 영화 - 4점
김종철 외 지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엮음/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사)

동서고금의 SF 영화의 대표작들을 시대순으로 훝는, SF 영화 소개 연대기입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엮음' 이라는 명칭 하에 김종철, 이용철, 김봉석, 듀나, 김도훈, 유지선, 이상호 씨가 저자로 참여하였습니다.

머리말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장르별로 100여 편의 걸작들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책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책에 소개된 작품은 88편입니다. 수록작 면면을 보면 100편을 채우기가 그리 어려웠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군요. 뭐 소개작 중 제가 본 영화는 32편에 불과하니 이래라 저래라 하긴 어렵지만요.

그런데 솔직히 기대에 전혀,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냥 피상적인 개인 감상에 그치는 글이 있는 식으로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한 탓이 큽니다. 개중 최악은 "사구"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그냥 거대한 실패작이다라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낼 뿐이에요. 저는 아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만,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거대한 실패작이 왜 SF 걸작이랍시고 소개된답니까? 책의 취지에 맞지 않는 글이 수록된건 필자가 여러 명 때문이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책의 취지에 맞게 왜 그 영화가 선정되었는지, 후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등 모든 글들이 동일한 포맷으로 작성하도록 명확한 가이드를 줬어야 했어요.

물론 소개된 영화가 왜 SF 영화사에서 중요한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대로 짚어주는 글이 없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 역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의 재탕에 불과한게 많다는 점이지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은 정보가 노출된 유명 작품일수록 그 정도가 심합니다. "매트릭스"가 대표적입니다. 어떤 내용이 언급될지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더라고요. 스탠리 큐브릭, 제임스 카메론, 존 카펜터, 폴 버호벤, 뤽 베송의 작품들 소개들도 대체로 그러했고요.

마지막으로 도판이 부실하다는 점도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소개에서 작품의 아름다운 미술을 찬양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반드시 도판이 필요했다 생각되는데, 이 책에서는 영화 포스터조차 수록되지 않은 작품이 대부분이에요. 저작권 문제가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상상력을 비쥬얼로 표한한 시각효과가 SF 영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유사한 책의 사례를 볼 때 솔직히 직무유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참고할 수 있는 사진은 물론, 보다 상세한 소개에 무료 감상이 가능할 경우 방법까지 소개해주고 있는 몇몇 블로그들(이글루스의 예를 들자면 사자왕 님 등)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다행히 건질게 없는건 아닙니다. 영화제의 이름을 걸고 쓴 책다운 독특한 기획은 괜찮았거든요. 여러 거장들 - 린 타로, 가네코 슈스케, 더글러스 트럼블, 토미노 요시유키 장 지로 (메비우스) - 과의 인터뷰가 개중 백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더글러스 트럼블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가 어떻게 특수 효과의 세계에 뛰어들었는지, 어떤 영화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왜 더 이상 영화를 감독하지 않는지 등이 담담하게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 달라는 말에 "애니메이션을 절대 좋아해서는 안 된다. 좋아하면 그 틀 안에 갇혀 버리게 된다."라고 답한 것도 인상적이고요. 저는 절대 동의하진 않지만...
SF 영화에 대한 컬럼들도 꽤 재미있는 편입니다. 특히나 리메이크에 대한 글은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아울러 제가 보지 못했던, 그리고 잘 몰랐던 영화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반가운 일이긴 합니다. 개중 몇개 뽑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환송대": "12 몽키즈"의 원형. 30분짜리 단편으로 스틸 사진을 연결해서 만들었다는 형식도 독특할 것 같이 기대되네요.
  2. "세컨드": 인물의 정체성에 대한 SF의 선구자적 영화라는데 엔딩이 무척 궁금합니다. 다른 인생을 살게 된 남자가 전 부인을 다시 만난 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3. "흡혈귀 고케미도로": 일본산 SF인데 소갯글만 읽어도 황당합니다. 당연히 관심도 가고요.
  4. "사일런트 러닝": 숨겨진 SF 영화의 걸작을 단 한 편만 꼽으라면 이 영화를 꼽겠다는 도발적인 서두, 만약 이 영화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SF 영화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북 하나를 통째로 날린 것이나 다름 없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스타 워즈" 사이의 연결 고리다라는 마지막 글만으로도 흥미를 잡아끄는 작품.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보고 싶군요.
  5. "죽음의 중계": 대부분의 병이 퇴치된 세계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여주인공을 TV로 생중계한다는 플롯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무려 1980년에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할 따름이에요. 스포일러이기 때문인지 엔딩이 소개되지 않았는데 결말이 궁금해 미치겠습니다!
  6. "슈퍼 에이트": JJ 에이브럼스가 만든 스필버그 식 모험담이라죠? "구니스" 등과 비슷한 작품일 것 같은데 언젠가 때가 되면 딸아이와 보고 싶어집니다.

이렇듯 장점이 없지는 않으나 앞서 말씀드린 단점이 더 커서 좋은 점수를 줄래야 줄 수 없네요. 90년대 "키노"의 전성기처럼 책이나 잡지 외에 정보를 구할 방법이 없었더라면 나름의 가치는 분명했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책입니다. 웹진 컬럼으로 해당 영화 정보가 링크로 걸려있는 형태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말이죠. 단지 영화 소갯글 모음에 15,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SF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싶다! 정도의 매니아가 아니시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긴, 그 정도의 매니아시라면 이 책에 실린 정보들 정도는 이미 알고 계실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