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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바텐더 1~21 - 조 아라키, 나가토모 겐지 : 별점 2.5점

바텐더 Bartender 21 - 6점
조 아라키 지음, 나가토모 겐지 그림/학산문화사(만화)

"바텐더" - 조 아라키 원작 / 나가토모 켄지 그림

몰랐었는데 이 만화도 완결되었군요. 주말에 몰아서 완독하였습니다.

작품은 크게 주인공 "신의 글라스" 류가 여러 바를 떠돌아다니며 용병생활을 하는 전반부, 호텔 카디널의 바 이덴홀에서 근무하는 중반부, 그리고 독립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 바를 찾은 손님들과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펼쳐지는 전개이죠.

요리만화 스타일의 배틀이 펼쳐지는 에피소드는 거의 없고, 바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최고의 한 잔을 대접한다는 치유물 계열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주인공이 천재라는 점만 빼면 "심야식당"과 비슷한 분위기지요. 이러한 이야기 특성상 주인공 사사쿠라 류보다는 손님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인게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가와가미 쿄코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연히 바를 찾은 첫사랑에게 고백을 결심하지만 그가 약혼자와 함께 나타나자 "라스트 키스"라는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에피소드(내내, 내내,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또 그녀가 어머니를 급작스럽게 잃은 뒤 바텐더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핑크 리본"이라는 칵테일을 만드는 에피소드가 좋았어요.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작품의 히로인은 미와가 아니라 쿄코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명언이 등장하는 것도 명언 덕후로서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아쉽게도 쿠루시마 타이조가 죽은 뒤 류가 독립하게 되기까지를 그리는 후반부는 재미가 떨어집니다.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치유물 분위기가 희석되고, 류의 제자인 와쿠이 츠바사의 성장기와 독립 준비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배틀이 중심이 되는 탓입니다. 차라리 쿠루시마 미와와의 관계를 좀 더 진전시키거나, 아니면 ‘미스터 퍼펙트’와의 최종 결전과 같은 빅 이벤트로 마무리했더라면 임팩트는 더 있었을 텐데 이도저도 아니라 좀 아쉬웠어요.

그래도 새로 오픈한 이덴홀을 중심으로 이전처럼 끌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절히 마무리한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재미고 뭐고 다 없어진 채 좀비처럼 연명하는 일부 만화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ㄴ비다. 후반부 이야기는 맥이 좀 빠지지만, 전체적으로 잔잔하면서도 푸근한, 그러면서도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싶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2016/05/29

음식의 별난 역사 - 이안 크로프턴 / 김시원 : 별점 2.5점

음식의 별난 역사 - 6점
이안 크로프턴 지음, 김시원 번역/레몬컬쳐

'한 권으로 맛있게 즐기는 음식 교양서'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음식에 대한 미시사 서적입니다. 선사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양한 음식들과 음식에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줍니다. 책의 분량이 300여 페이지에 불과해서, 이야기들은 굉장히 짤막하지만 핵심을 잘 전달하고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아주 좋았습니다. 음식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음식과 관련된 유명인들의 명언이나 일화, 음식에 대한 다양한 저작물들의 인용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아서 만족도가 높은 덕분입니다.
저자 이안 크로프턴은 일반인들이 쉽게 참고할 수 있는 도서를 주로 집필했다는데,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요약하는 능력이 탁월해 보입니다. 정리와 요약의 달인이라 생각되네요. 국내 출간된 책은 이 책 포함 3권인데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책에 소개된 일화 중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프렌치 토스트"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1346년 그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에게 포박된 영국 기사들이 몸값 지급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후 독일에서 달걀물을 입힌 토스트를 '가난한 기사들'이라는 뜻의 '알메 리터'라 부르기 시작했고, 영국에서는 이를 '독일식 토스트'라고 부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동맹국을 기리는 의미로 "프렌치 토스트"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스크림 콘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세계 박람회에서 페르시아식 패스추리를 팔던 시리아계 미국인 어니스트 함위가 접시가 떨어진 아이스크림 장수에게 패스추리를 콘 모양으로 말아준 게 시초라고 합니다. 오무라이스 잼잼에서도 등장했었던 이야기인데 이 책을 참고한 것일까요?

저작물에서 인용된 이야기로는 1729년 조너선 스위프트의 "겸손한 제안"이라는 단편 풍자 소설이 인상적입니다. 12만 명의 어린아이들 중 2만 명 정도를 식재료로 사용해야 한다는 제안인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린아이 요리는 특히나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영주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요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라는 마지막 줄의 풍자로 마무리됩니다. 지금 제안해도 풍자로서는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비슷한 풍자로는 기근에 고통받는 아일랜드 농부들에게 '배가 고프면 뜨거운 물에 커리 가루를 타서 마시면 된다'고 말한 노퍽 공작에 대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런던 비프스테이크 클럽 회원이 "타임스"에 기고한 레시피로 제목은 "노퍽 커리 요리!!!". '멍청한 정도에 관계없이 살이 통통하게 찐 공작을 잡아 후추와 여러 향신료로 뭉근히 끓인다. 농부들이 모이는 날 내어 놓으면 좋은데 누구나 달려들어 이 요리를 자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네요. 재미있죠?

명언들은 신랄한 것들이 많습니다. 1799년 나폴리 대사 프란체스코 카라시올로의 말이 대표적이죠. '영국에는 종교가 60개나 되지만 먹을 만한 소스는 오직 한 개밖에 없다'는 말인데 영국 요리가 형편없음을 알리기 위함으로 보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먹을 만한 바로 그 한 개가 무슨 소스인지도 궁금해 집니다.
1880년 마크 트웨인이 "유럽 방랑기"에서 한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인은 라인의 화이트 와인을 아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이 와인과 식초의 차이점이라곤 라벨이 다르다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돌직구 풍자의 대가 마크 트웨인답습니다.
좋은 말도 있습니다. 마티니를 찬양하는 말들이 그러한데 1949년 미국 소설가 버나드 디보토는 "키스보다도 좋은 게 바로 마티니다"라고 했고, 문예비평가 헨리 루이스 멩켄은 "영국 소네트에 견줄 수 있는 미국의 유일하게 완벽한 발명품"이라고 했으며, 동화작가 E.B. 화이트는 "평안함의 묘약"이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까지 "가장 치명적인 무기"라고 불렀다네요. 소련에는 보드카가 있으니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 조금 의외군요.

레시피로는 록키 산맥에서 나는 굴, "록키 마운틴 오이스터"가 돋보입니다. 당연히 록키 산맥에서 굴이 날 리가 없고, 재료는 바로 황소 고환입니다. 황소 고환을 물에 넣은 뒤 껍질을 벗겨 타원형 모양으로 자르고, 밀가루 + 옥수수가루 + 달걀로 만든 튀김옷을 두른 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튀겨내는 요리이지요. 닭똥집 튀김과 비슷하리라 예상할 수 있는데 한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완전 맥주 도둑일 듯한 느낌!

그 외에도 벌레나 기묘한 재료들을 먹어본 사람들의 감상평 등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판이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주요한 항목이라도 도판을 곁들였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15,000원이라는 가격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성비가 좋다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음식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놓치기 힘든 책인 것은 분명합니다. 음식 관련 잡학, 미시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5/05/1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 미카미 엔 / 최고은 : 별점 2.5점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 - 6점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고서 전문 헌책방 비블리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연작 옴니버스 추리 단편집 두 번째 권입니다. 이번에는 세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두 편은 중학생 소녀의 독후감, 헌책 출장 감정과 같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그리는 전형적인 일상계입니다. 시오리코씨 어머니와 수백만엔에 이르는 책 도난 사건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의 과거편은 단순 일상계로 보기는 어렵지만, 현재편은 책을 팔려고 내 놓은 뒤 사라진 손님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 일상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인 셈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추리물을 좋아하고, 독서와 헌책방 역시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 리뷰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시오리코씨 어머니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게 좋았을겁니다. 최종보스 느낌인데 작품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책을 좋아하는 미녀 시오리코씨, 그녀를 흠모하는 근육 알바 고우라 다이스케의 순진무구한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 주변, 동네의 소소한 책 관련 사건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다른 시리즈에 비하면 추리적으로 건질게 별로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시오리코씨가 당사자 중 한 명이라서 추리라고 부르기 애매하고, 두 번째 이야기는 시오리코씨가 책을 확인하지 못했던 실수가 더 크게 다가오는 탓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추리적으로는 가장 괜찮지만, 앞서 이야기한대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소재와 설정이었고요.

덧붙여, 시리즈 다른 편들과는 다르게 등장하는 책들 중 딱히 읽고 싶은 마음이 든 책이 없다는 점, 그리고 책의 완성도는 좋지만 각 단락별로 추가된 일러스트는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책과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점도 실망한 부분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만 놓고 보면 나쁘지는 않지만 아주 좋지도 않은, 뭐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중 한권으로는 충분히 읽을만 합니다.

각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1권에서도 등장했었던 고스가 나오가 자신의 똑똑한 여동생 유이가 쓴 "시계태엽 오렌지" 독후감으로 생긴 문제를 고우라에게 의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독후감으로 생긴 문제라니! 책 관련 추리 소설 중 이 정도까지 사건성을 낮춘 일상계가 있었을까요? 여튼, 소재는 정말이지 참신했습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영화로 잘 알려진 내용은 '불완전판'이며, 원래는 알렉스가 개과천선하여 과거의 삶과 결별하고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는 결말이 '완전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요.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내용과 잘 어우러지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독후감은 상당히 잘 쓴 내용으로 큰 문제는 없어보이는데 외려 주위의 설레발이 너무 심한게 아닌가 싶더군요. 원칙적으로는 중학생이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은 것 부터가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왜 그런건 지적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고요.

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는 과정은 치밀해서 괜찮기는 하지만, 결국 원본은 시오리코씨가 썼다는 일종의 반전 때문에 추리적으로는 뭐라 이야기할 거리가 없습니다. 결말을 알고 나서 단서를 짜맞추는 방식과 다를게 없으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의 왕도를 걷는 점에서는 별점 4점도 충분하지만 추리적 요소가 약해 약간 감점합니다.

후쿠다 데이치 "명언수필 샐러리맨"

고우라 다이스케가 대학교 1학년때까지 사귀었던 옛 동창 아키호로부터, 그녀의 돌아가신 부친의 수집 도서 정리를 의뢰받은 뒤의 이야기.

고우라의 과거사, 그리고 현재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푸근한 이야기로, 첫 시작에서 비블리아 고서당으로 팩스와 전화가 온 사실과 아키호가 출장 감정을 의뢰한 이유가 연결되는 치밀한 구성도 괜찮습니다.
알 수 없는 가족간의 사랑이라는 주제와 그것을 드러내는 묘사들, 그리고 후쿠다 데이치가 유명작가 시바 료타로의 본명이며, "명언수필 샐러리맨"은 성공 전에 발표한 책이라는 잡학 지식도 좋았고요.

그러나 내용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아무리 엿듣는 사람이 많았고, 부녀가 만날 때마다 싸우는 등 복잡한 가정 사정이 있었다지만, 귀중한 책을 몰래 물려주려 했다는 설정이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물려줘봤자 받는 사람이 그 가치를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이 에피소드가 사건으로 성립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출장 감정을 나선 시오리코가 귀중한 책을 놓쳤다는 것인데, 이건 큰 문제입니다. 아팠다는 설정은 있지만 그래도 그간 보여주었던 책에 관련해서는 너무나 완벽했던 캐릭터성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감기로 인해 시오리코씨는 출장 감정을 나서지 않고 고우라에게 원격으로 지시했기 때문에 책을 놓쳤다... 라는 식으로 전개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시즈카 후지오 "utopia"

시오리코씨의 어머니 이야기가 첫 등장하는 에피소드.

일단은 시오리코씨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이야기입니다. 수상한 손님이 판매를 의뢰한 책만 가지고 주소를 짐작하여 찾아오는 부분에서는 그녀의 뛰어난 추리력을 알려주며, 이후 깨우친 진상을 가지고 협박하여 손에 넣기 어려웠던 휘귀본을 입수한다는 부분에서는 사악함을 알려주기 때문이죠. 아울러 "선의의 제삼자"가 되기 위한 교묘한 장치, 즉 장물인 "최후의 세계대전"에 2,000엔이라는 가격표를 붙여 책을 판매, 구입한 것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이 없게끔 안배하는 '악마의 술책' 역시도 돋보였어요.
개인적으로는 만화가 후지코 후지오를 좋아해서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허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시오리코 씨의 어머니가 이렇게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은, 그야말로 최종보스로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치고는 너무 거창하잖아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훨씬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11/13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기타쿠니 고지 / 문승준 : 별점 2점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4점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변호사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도시타는 가난한 동네 변호사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의뢰 해결이 주 업무라 법정 다툼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정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보다는 일본 추리 소설 시장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소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일상계 추리 단편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문가 - 서점 점원, 헌책방 주인, 요리사, 화과자 장인, 시계 수리 전문가, 사진가, 바리스타, 라쿠고가, 복화술사, 호텔리어, 심지어 스님까지 - 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자의 직종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그냥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설정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법률 전문가스러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도시타는 화자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일 뿐, 탐정 역할은 도시타의 동생 리쓰가 담당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리쓰 캐릭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일단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시타' 에 관련된 말을 하는 루틴이 있고, 현재 상황과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떠오르게 만드네요. 결은 좀 달리하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설정마저도 똑같고요. 그러나 우영우만큼 호감가게 묘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문가 일상계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에 목숨을 건 나머지 이상한 만화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또 추리한 결과를 형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는데, 여기에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에 더해져 굉장히 비호감이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글래머 소꼽친구 간호사 사키, 여자를 밝히는 스님 마루메, 전 야쿠자 출신이자 현 카페 주인인 이모부 등 비현실적이거나,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괜찮았다면 나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록된 네 편의 단편들 모두 그렇게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이야기 전개가 리쓰 캐릭터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았던 탓입니다. 입 안에 넣은 치과 치료용 충전물이 라디오처럼 동작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따뜻한 인간 드라마 중심의 전형적인 일상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가 일상계로 보기에는 전문성, 일상성 모두 떨어지며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꼽자면 일본에서도 변호사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도? 딱히 영상화 되었다는 소식도 없고, 후속권도 출간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금새 절판된걸로 보면 다른 분들의 평가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울러 '고양이'는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므로 집사분들께서는 낚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1화 "못된 며느리와 낙서 소동" 

고토에 아줌마는 도시타에게 며느리 험담 끝에 며느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토에 아줌마가 돌아간 후, 리쓰는 그녀의 섬망성 기억 상실을 눈치챘다. 형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며느리 에가와 씨를 만나러 갔다가 ,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던 낙서 소동에 휘말리는데...

진상은 알고보니 고토에 할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고해 며느리 에가와가 마당에 자생하는 디기탈리스 잎을 떼어 말린 뒤 몰래 먹였다는 겁니다. 고토에 할머니는 디기탈리스 잎의 부작용으로 치매와 비슷한 용태를 보인거지요. 

그런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디기탈리스가 심장병에 효과가 있지만 독성 또한 강하다는건 정보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 완성으로 '디기탈리스 중독'이 함께 뜰 정도로요. 이걸 약재로만 알고 먹였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자기 험담만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살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이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마무리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도시타가 제대로 된 변호사였다면 며느리를 경찰에 신고하는게 맞았어요. 추리를 하기 위한 정보 제공도 빈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차라리 낙서 소동 쪽이 추리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다른 낙서들과는 그림이 달랐고, 키가 작은 사람이 그렸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하지만 진상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생이 새가 부딛힐까봐 '버드 스트라이크'를 리카 씨네 가게 쇼윈도에 그렸다는게 전혀 와 닿지 않은 탓입니다. 쇼윈도가 그 가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1층 건물 쇼윈도에 새가 날다가 부딛힐일이 그렇게 많을리 없으잖아요. 애초에 범인 신지의 집 창문에 새가 부딛혀 죽은 것부터가 작위적이지요. 이를 리쓰가 맨션의 깨진 창문만 보고 바로 알아챘다는 추리도 비현실적이고요.

또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화 "협상 상대는 요통으로 고생하는 전과자" 

도시타 형제는 연립 재건축을 앞두고, 퇴거를 거부하는 임차인을 설득하는 의뢰를 받았다. 리쓰는 찾아간 임차인 아라키 데쓰조의 집 안에서 '사취'가 나는걸 느꼈고, 여러가지 주변 정보들을 조합하여 그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길고양이를 돌본다는걸 훔쳐온 쓰레기 봉투 속 내용물을 통해 추리하는 과정, 그리고 사취는 길고양이가 물어온 쥐의 시체였다는 진상까지의 전개와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퇴거를 불응했던 이유가 유치원에 드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작위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고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일상 드라마 느낌을 가득 전해주는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3화 "만화가 지망생과 사라진 유언장" 

도시타는 이모네 카페 단골인 만화가 지망생 레논 씨의 사건 을 수임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형이 레논 씨가 유언장을 숨겼다고 주장해서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논 씨는 도시타에게도 유언장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형이 어머니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을 녹음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수록작 중 유일하게 변호사가 활약할만했던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유언장은 어디에 숨겼나?' 라서 변호사가 나설만한 부분은 없지만, 레논 씨가 왜 유언장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레논 씨가 어머니 장례식 초야 직후, 카페를 방문한 뒤 책꽂이 위에 있는 책을 떨어 트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카페의 만화책 중 한 권 안에 유언장을 숨겼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에 대해 사소해보였던 레논 씨의 질문이 중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유산을 형이 아니라 레논 씨에게 전부 남긴다는 거라서 유언장을 숨기고 형과 유산을 반으로 나누려 했다는 동기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바보같아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동기였다면 유언장을 숨기는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식으로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유언장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전개를 보면 더더욱요. 이는 유언장이 없을 경우 법률적으로 레논 씨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4화 "한심한 피고인과 소음 트러블" 

도시타는 마약용 주사기를 수백개 구입하려다 경찰에게 상처를 입힌 에비스 씨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으려고 도시타는 노력했지만, 에비스 씨는 거부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리쓰가 급작스럽게 증인 요청을 하여 판결은 연기되었다. 그 사이 도시타는 소꼽친구 사키의 소개로 이웃이 내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도모코 씨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도시타 형제는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도시타가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법정에서 날선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왜 에비스 씨가 징역형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추리해낸 뒤, 진상을 파악하여 그의 갱생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도모코 씨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소음 공해는 단순한 소재였고, 도모코 씨 남편이 정리 해고를 앞두고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근무하는 상황의 극복이 핵심이거든요.

드라마 모두 좋은 이야기에요.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에비스 씨 시간의 경우, 오래전 이혼한 아내가 키우던 아들이 칼에 찔린 뒤, 부모는 수혈이 안 되는 탓에 행인들로부터 피를 뽑으려고 주사기를 구입했다는 동기부터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딱히 추리를 할 부분도 없고요. 도모코 씨가 치과 진료를 받은 이후, 이빨에 채운 충전물이 우연히 방송을 수신하게 되어, 일종의 광석 라디오처럼 동작했다는 진상도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겁니다. 설령 실제 일어나더라도 입 안에서 소리가 나는걸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아쉬움이나 여운을 남기기는 커녕 더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만 굳게 만들어 주네요.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2024/04/20

권외편집자 - 츠즈키 쿄이치 / 김혜원 : 별점 3점

권외편집자 - 6점
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컴인

일본의 편집자이자 작가, 사진가인 저자가 자신이 출판계에서 쌓아온 경력을 털어놓는 에세이집.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저도 아주 좋아하는 잡지인 'popeye'와 'Brutus'에서 시작하여, 독립후 사진까지 직접 맡아 취재하여 발표한 Tokyo Style, 일본의 기묘한 장소들과 같은 기사들과 기사를 토대로 발표한 책들, 지금은 e-mail magazine 작업을 진행한다는 저자의 출판 여정과 함께, 이러한 취재와 창작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들과 단상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기자, 작가, 사진가, 창작자로서의 작업이 훨씬 많은건 의외였습니다. 저자가 원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한데, 여튼 익히 알고있고 친숙한 편집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직접 기획해서 만든 기발한 책들 소개도 인상적이었어고요.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데, 일본, 미국의 기묘하고 재미있는 장소라던가 러브 호텔 사진집 등 소개만 보아도 재미있는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 중 가장 흥미로왔던 책은 성인 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에 주목하여 출간한 기획이었습니다. '핀카라타이소 (ぴんから体操)'라는 작가는 그 중에서도 특출났던 덕분에, 출간 후에 유명해져서 전시회까지 정기적으로 열린다고해서 어떤 작품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변태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승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시선, 판매량과 관계없이 원하는 책을 내고야 마는 열정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책을 만들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문화적 저변도 부럽고요. 물론 저자도 인세로 먹고 살지 못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이런 책을 여러 권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요.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안타까운 최후가 겹쳐집니다)

백전노장다운 조언, 경험담도 새겨들을만한게 많습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 돈 주고 구입하기'
무작정 인터넷으로 검색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와 주머니의 돈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열어봐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머지않아 주변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좋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 "현시연"의 마다라메의 말이 떠오릅니다.

속독이나 다독은 밥을 급하게 먹거나 과식하는 것과 같다.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추리소설 1,000권을 넘게 읽었다고 우쭐했던 저를 반성하게 만드는 명언입니다. 추리 소설 중에 100번 읽을만한 책이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록만 들을거야라고 고집부리다가 어른이라면 재즈를 들어야지 하다가 마지막에는 고급 노래방에서 언니들과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승자 그룹보다, 죽을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들으며 만족하는 패자 그룹이 훨씬 존경스러워졌다.
: 성인잡지 독자 투고 일러스트를 모아 책으로 만드는 사람다운 견해였어요. '병신같지만 멋있어!' 느낌의 말이기도 하지요. 패자들을 위한 멋진 헌사라 생각됩니다.

프로란 대신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생각만 끝없이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대신해 철학자는 평생 동안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책을 읽는다. 이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 먼 곳까지 가보는 사람, 맛을 연구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일을 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
: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직장인이 그 업무의 '프로'라서 월급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기도 하니까요.

이외에 실제 책을 여러 권 출간한 '프로'다운 말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는 정도가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준비는 결과를 가정하고 단정짓는 과정이 아니라 기초를 닦아두는 과정이다." 처럼요. 미술 대학을 부정하는 말도 기억에 남네요. 저 역시 아득히 오래 전이지만 미대 졸업생인데, 솔직히 대학에서 예술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무언가 배웠다는 실감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작업을 하는 공간과 같은 분야에 관심있는 친구들을 모아놓은 오프라인 모임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전부가 다 볼만하고 좋은건 아닙니다. 꼰대스러움이 글 곳곳에 묻어나는건 별로였어요. 대표적인게 '기획과 여정도 처음부터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는게 좋다.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걸 꼼꼼하게 계획해야 하는 취재, 업무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MBTI가 J인 사람은 견디지 못할 상황이기도 하고요. 업무의 특성과 사람마다 개성이 모두 다른데, 자신에게 잘 맞았다고 남에게도 단정지어 이야기하는건 꼰대지요.
"그들의 삶은 세상에서는 패배자라 하고 부모에게는 근심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건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글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주는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신선했던 취재들도 거듭되다보니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와 비슷해져서 식상해져 버리고 맙니다. 러브돌을 만드는 오리엔트 공업 이야기는 그냥 같은 취재더라고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인터넷 메일 형태의 매거진을 정기 간행하는 등 꺾이지 않는 저자의 열정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8/02/09

책낸자 - 서귤 : 별점 3점

책 낸 자 - 6점
서귤 지음/디자인이음

"고양이의 크기" 라는 독립 출판물을 발표했던 서귤의 4컷 만화 모음집입니다. 자신이 책을 만든 과정을 그렸습니다. 독립 출판에 관심이 많기에 주저없이 구입해 보았습니다.

장점이라면 저 역시 출간을 꿈꾸는 사람으로 많은 자극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책을 출판한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도 되었고요. 특히 초반 책 만들기 워크샵 강사 덕집장(독립잡지 THE Kooh 편집장)의 주옥같은 명언들은 심금을 울립니다. "매일 하면 그게 직업이다. 매일 책을 만들면 작가다." 처럼요. 정말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왜 나는 매일 하지 않았을까...
또 적은 분량의 4컷 만화지만, 책을 출간하여 유통할 때 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낸 내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화도 빼어나지는 않지만 내용과 잘 어울리며, 범상치 않은 상상력을 지닌 작가의 개그 센스도 재미있고요.

그러나 직장 생활 묘사는 마음에 들지 않네요. 실제 직장 생활을 하는 작가의 묘사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이 없을 뿐더러, 힘들고 안 좋은 쪽으로만 묘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현실에는 이 책 속 과장처럼 예의없게 이야기하고 사람에게 상처주는 상사, 지루하고 따분하며 사람을 소모시키기만 하는 업무가 존재한다는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좋은 동료, 친구와 상사,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업무도 존재합니다. 힘든 일만 있으면 회사를 다니는건 불가능해요. 아니, 진작에 때려 치웠어야지요. 그러나 이 책 속에서 직장 생활에서의 좋은 점은 단 한 개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작품 속 회사와 상사는 '독립 출판은 힘든 직장 생활을 잊기 위한, 그리고 자신을 찾기 위한 탈출구이다'라는 당위성을 이야기에 부여하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일 뿐입니다. 솔직히 걸러 읽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이런 뻔하디 뻔한 묘사보다는 "직장 생활에 쫓기지만 30대도 되었으니 기념삼아, 또 나의 어린 시절 꿈과 성취를 위해 책을 한번 내 보기로 했습니다!"라는 평범한 이유와 함께 책을 만드는 과정을 보다 심도깊게 다루는게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고, 개인적으로는 눈여겨볼 부분이 많았던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사해보니 "고양이의 크기"도 증쇄가 결정된 모양인데, 앞으로도 서귤 작가의 좋은 작품들을 기대해 봅니다.

2022/02/28

순전히 팬심으로 써보는 2022 두산 베어스 예상!

 


2010년대 두산 왕조 주역들의 라스트댄스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향후 2년은 현재 전력에 신인과 군 제대 선수들을 보태어 가면서 시즌에 임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장 중요한 김태형 감독의 계약이 코 앞이기는 한데, 여튼 선수들만 놓고 보면 그래요.
올해 성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풀어냈던 만큼, 다가올 22 시즌에 대한 이야기만 해 보겠습니다.

타선부터 살펴보자면, 박건우 선수는 떠나보냈지만 김재환 선수를 잡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오버페이라는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박건우 선수보다 김재환 선수가 더 필요했던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두산에 가장 부족하고, 그래서 필요한건 장타력이니까요. “홈런왕은 캐딜락을 몰고, 안타왕은 쉐비(포드)를 운전한다. (The home run hitter drives a Cadillac, and the single hitter drives a Chevy or Ford)”는 메이저리그 명언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지요. 박건우 선수의 공백은 대체 1순위인 김인태 선수가 그래도 홈런은 더 많이 쳤고 출루율도 준수한 편이니 일정 수준 메꾸어주는건 기대해 봄 직 합니다. 여기에 정수빈 선수의 반등까지 이루어진다면, 외야는 최소한의 구색은 갖춘 셈이에요.
내야는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졌고, 박계범 선수와 강승호 선수가 각자 포지션 주전을 꿰차고 맞는 첫 시즌이라는 점이 호재입니다. 박건우 선수의 보상 선수 강진성 선수도 기대가 됩니다. 두산에는 1루수 백업 자원이 부족했으니 괜찮은 선택이었어요. 20년 활약이 플루크였다고 하더라도, 21년 성적에서 장타력만 조금 더 회복한다면 보탬이 될 게 확실합니다. 작년 1루수 백업이었던 선수들은, 페르난데스 선수 말고는 처참한 수준이었거든요. 마침 양석환 선수가 부상으로 잠깐 공백을 가질 예정이니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 되었고요. 이렇게 보면 내야진도 나쁘지는 않네요.
결론적으로 스탯티즈 기록으로는 21시즌에 2위를 차지했었던 두산의 팀 타선 wRC+는, 22년에도 비슷한 수준은 유지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선발 투수진은 두 외국인 투수의 +30승 활약과 함께 이영하 선수가 2년간의 부침과 부진을 딛고 다시 토종 3선발 역할을 수행해 줄 경우, 리그 중위권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이 뒤를 2년 연속 10승투수 최원준 선수와 알을 깨고 나오기 직전인 곽빈 선수가 받쳐주니까요. 작년 후반기에 심하게 탈이 났던 미란다 선수가 기량을 회복하고 돌아올지, 새 외국인 투수 스톡이 연착륙 할 수 있는지가 가장 큰 관건이겠지만, 외국인 선수의 불확실성은 다른 팀도 마찬가지니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요.
그러나 계투진과 마무리는 문제입니다. 김강률 선수는 부상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마무리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이닝당 출루허용률이 너무 높아요. 당장은 어쩔 수 없더라도 슬슬 새로운 얼굴 발굴이 필요합니다. 계투진도 이승진 선수의 부진과 박치국 선수의 부상 이탈로 구멍이 뻥 뚫린 상태지요. 홍건희 선수도 작년에 많이 무리했고요. 확실히 1이닝을 맡길 수 있는 투수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베테랑 임창민 선수와 김지용 선수가 보강되기는 했지만,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상무에서 전역한 박신지 선수, 밸런스를 잡았다는 남호 선수 , 신데렐라 최승용 선수 등 영건들도 아직까지는 물음표고요.
그래서 타선과는 다르게 팀 투수력은 작년보다는 소폭 떨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스탯티즈 팀 분석으로는 21시즌 선발진은 4위, 구원 3위의 좋은 성적이었지만 이번에는 전체 종합해서 5위 정도로 봅니다.

타력이 2~3위, 투수력이 5위 정도 수준이라면, 과연 올 시즌도 5위 이상의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 팀의 전력 보강이 탄탄한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22시즌의 스트라이크존 확대라는 큰 변수 때문입니다. 투수진에게는 유리하지만, 이는 10개 구단 모두 마찬가지이니 논할게 없고, 그나마 두산이 상대적 우위를 가졌다 보여지는 타선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게 분명합니다. 두산에서 0.370 이상의 출루율을 가지면서 볼삼비가 1:1 이상인, 소위 '눈야구'가 되는 타자는 주전급 중에서는 페르난데스, 김인태 선수 (아슬아슬하게 박계범 선수) 정도뿐이니까요. 이런 점을 고려하면 평균 성적도 더 하락할 겁니다. 그래서 제 예상 순위는 6위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2년 안에 승부를 볼 생각으로 22시즌은 옥석 가리기와 육성에 집중한 뒤, 2023년을 기약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지명대상 신인들도 괜찮다고 하니까요. 지난 7년간 충분히 달렸으니, 조금 쉬어가도 됩니다.
쉬어가더라도, 올 시즌도 화이팅 허슬~두!

예상 라인업
투수 엔트리 :
선발 (5) : 미란다, 스톡, 이영하, 최원준, 곽빈
계투 (6) : 홍건희, (+김명신, 임창민, 최승용, 이현승, 권휘, 윤명준, 김지용, 이형범, 박정수, 남호, 박신지, 장원준 .... 등 중 5명)
마무리 (1) : 김강률
타선 (9): 정수빈 (중) - 허경민 (3) - 페르난데스 (지) - 김재환 (좌) - 양석환 (1) - 김인태 (우) - 박계범 (유) - 박세혁 (포) - 강승호 (2)
백업 (8) : 내야 - 강진성, 안재석 / 외야 - 조수행, 안권수 / 포수 - 장승현 + 최용제, 오재원, 김재호, 김민혁, 신성현, 권민석... 등 중 3명

순전히 팬심으로 써보는 2021 두산 베어스 예상!

2016/09/15

명품 가구의 비밀 - 조 스즈키 / 전선영 : 별점 3점

명품 가구의 비밀 - 6점 조 스즈키 지음, 전선영 옮김/디자인하우스

가구 역사상 길이 남을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 조명을 엄선하여 그에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목차는 "전설적 명작의 비밀", "현대 디자인의 비밀", "디자인 신세대의 비밀", "경영자의 비밀"이라는 4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요. 이 중 디자인 회사 경영자 중심인 마지막 챕터를 제외하고, 총 3개 챕터에서 26개의 작품이 연대 순으로 소개됩니다.

20세기 초반부터의 가구 중에서 미적, 역사적 가치를 통틀어 엄선했기 때문에 그냥 보기만 해도 멋질 뿐더러, 작품별로 관련된 일화도 흥미로와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일린 그레이와 르 코르뷔지에에 얽힌 일화입니다. 아일린 그레이는 귀족 출신 여성으로, 독학으로 익힌 건축으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와의 친분도 생겼고요.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가 그녀의 집인 E1027의 새하얀 벽에 원색적인 벽화를 그린 후 관계는 틀어지고, 그 뒤부터 르 코르뷔지에는 그녀를 매장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참 어이가 없네요. 아일린 사후에 명예가 회복된건 다행이지만, 르 코르뷔지에를 다시 보게 되었네요. 거장이 전에 인간부터 되어야지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라는 윌리엄 모리스의 말인 "쓸모없는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은 집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좋은 예입니다. 그동안은 부르주아가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속물 마인드에서 태어난 말이라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본가에 의해 조악한 품질의 대량 생산품이 보급되는 상황에서 이를 막고자 "미술 공예 운동"을 제창했던, 행동하는 디자이너의 명언이었더라고요.

1925년에 발표된 PH 램프가 로그 나선과 황금비를 활용한 제품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딱히 별다를 게 없는 디자인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이론적인 바탕이 뒷받침되었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니 시대를 초월해서 아직도 사랑받겠지요. 여담이지만 아내가 이사를 위해 식탁 등으로 비슷한 램프를 샀는데, 원작을 보고 나니 확실히 뭔가 품격이 달라 보이네요.

조명 "글로볼"도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디자이너 모리슨의 기본 자세인 "평범함은 특별함을 능가한다"는 것이 잘 표현된 멋진 작품으로, '보통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줍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경영자의 비밀"은 디자인 회사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 중심이라 다른 챕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역시 꼭 한 번 볼 만합니다. 특히 독일 가구 회사 발터 크놀이 유명 디자이너가 아닌 무명 디자이너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며,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최우선으로 꼽았다는게 가장 와닿았습니다. 확실히 잘 나가는 회사는 다르구나 싶어요. 커뮤니케이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저 역시 이 바닥 생활 20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책의 특성상 반드시 뛰어나야 할 도판 역시 기대에 값하기에, 참 좋은 독서였습니다. 16,000원이라는 가격과 디자인 전문 서적다운 "여백의 미"가 과하기에 조금 감점합니다만, 디자인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책이야말로 가까운 미래에 3D 이미지가 포함된 디지털 콘텐츠로 진화하기 용이하리라 생각됩니다. 다양한 각도, 환경에서 가구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3D로도 출력해서 소장하고... 와, 멋질 것 같아요!

2011/05/15

세상에 이런 만화가?! (1) - 패미코만도 류 (ファミコマンドー竜)

웹 서핑 중에 발견한 황당 만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제목하여 최강권사전설 패미코만도 류! (最強挙士伝説 ファミコマンドー竜) 1989년 패미코믹 (ファミコミック)에 연재되었던 만화입니다.

-줄거리-
199X년 핵전쟁에 의해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고 지하 대피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아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오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패미콤 게임이었다!
그리고 결국 패미콤 게임으로 우열을 가르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모두를 지배하는 독재자 매드 크로스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포의 시대의 구세주. 그것이 류!
류는 패미콘살법 콘트롤러 쌍절곤으로 전투원들을 제압하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다!
마침내 마을의 독재자 매드 크로스와의 최종 대결!
"받아라 폭렬패미콤!"
"패미혼살법 아룡란격타!"

폭발하는 매드 크로스. 그는 로봇이었던 것이다. 해방된 사람들.
"어쩐지 게임을 잘 하더라..."

그리고 석양과 함께 엔딩.
"류 상은 이제부터 어디에?"
"어딜까나. 패미콤 게임의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마지막으로 류의 명언 소개
"패미콤은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야! 즐기기 위한 것이다!"

2021/02/28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윤덕노 : 별점 3점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6점
윤덕노 지음/더난출판사

음식 관련 식문화사, 미시사 서적. 관련 서적을 많이 저술해 왔던 윤덕노 씨의 근간입니다. 주로 우리나라 역사나 일화 속 음식과 요리들을 다루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제목처럼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의 중국 역사에서 요리 관련된 이야기들을 뽑아내어 소개해 줍니다.

요리에 대한 단순한 소개보다는 그럴듯한, 그리고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었던 역사적 사실을 뽑아내는 글들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조개가 높은 가치를 가졌었다는걸 "삼국지"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사료를 통해 우선 소개한 뒤, 그 이유로 옛날 중국의 주요 도시들이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이었다고 설명하는 식입니다. 물론 단지 거리 문제만은 아닐 수 있겠지만, 뭐든 구하기 힘들면 가치가 높아지는건 당연하니 그럴듯한 발상입니다.

당나라 이전 차가 유행하지 못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저자는 우선, 당나라 이전은 북방이 남방에 비해 문화적으로 월등하게 발전했던 시기였다고 해석합니다. 당시 북방 민족은 차보다 낙농 제품을 더 선호했습니다. 차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접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러다가 당나라 때 강남의 발전,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호방한 북방 호족 문화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정신을 맑게 하는 차가 대접받는 남방 문인 귀족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지요. 차의 대 유행은 이런 역사적 흐름이 맞물린 덕분이라는군요.

남북조 시대, 남제 출신으로 북위에 투항 후 대장군을 지낸 왕숙이 양고기와 물고기를 비교했던 일화도 마찬가지에요. 북위의 수도 낙양은 허난성에 위치한 중원의 중심인데, 이 곳까지 북방 유목민 음식이 널리 퍼졌다는 뜻으로 남북조 시대부터가 호한 胡漢 융합이 시작된 시기로 보는 좋은 증거라고 하거든요. 충분히 설득력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왜 중국에서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많이 먹고 대접받는지?에 대한 설명도 실제 역사와 잘 맞아 떨어져서 재미있었습니다. 돼지고기가 황제 수랏상에 오른건 명 태조 주원장 때가 처음인데, 그 이유는 주원장이 탁발승 노릇까지 했던 밑바닥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송, 원나라 때 귀족, 부자들은 주로 양고기를 먹었습니다. 돼지고기는 주로 가난한 서민이나 하층민이 먹었고요. 그런데 주원장이 황제가 된 뒤, 자기 입맛에 맞는 돼지고기를 수랏상에 올리게 했고 이후 돼지고기를 제일 좋아하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여 중국 육식 문화에서 돼지고기의 자리는 확고 부동해졌다고 하네요.

그 외 중추절 토란이나 오리고기를 먹는 풍습이 원나라 때, 몽골인을 죽이는 심정에서 비롯되었다던가, 도삭면은 몽골족이 한족으로부터 식칼을 압수해서 어쩔 수 없이 쇳조각으로 만들었던 상황에서 유래되었다는 고사도 역사와 음식을 잘 배치하여 설명한 사례라 생각됩니다. 몽골족은 한족으로부터 주방용 식칼을 압수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팩트 체크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고요.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여러 일화나 명언 등에 관련되어 있는 요리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강남 귤이 강북 가면 탱자 된다'는 고사를 예로 들며, 이 강은 화이허강이며, 귤과 탱자는 아예 다른 종류이고 강북에서 귤 재배가 되지 않는건 북방 한계선이 화이허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는 것 처럼요. 

국수가 장수를 의미하는 음식이 된 유래도 기억에 남네요. 이는 그만큼 밀이 비싸고 고급 음식이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보통 생일날에는 평소와 달리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기 마련이니까요. 송나라 이후는 밀이 흔해졌지만, 숲이 많은 북방에서 평야 지대인 남방으로 밀려난 탓에 찌는 요리법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럴듯했습니다. 화덕에 구울 때는 화력이 센 장작이 필요한데, 숲이 없는 남방에서는 볏짚이나 밀짚과 같은 농업 부산물 혹은 낙엽을 연료로 쓴 탓에 연료 소비가 적은 수증기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지요. 

복날과 보신탕의 유래도 가치있는 정보였습니다. "사기"에 근원을 둔 역사적인 행사와 음식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호떡은 군것질거리나 값싼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황제가 먹기에 손색없는 고급 음식이었다는 이야기도요.
조조, 수양제, 장한, 소동파 등 수많은 권력자와 문인들을 사로잡았던 송강 농어의 정체가 정약용을 포함한 조선 학자에 따르면 '꺽정이'라고 하는데 한 번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지금은 보호종이라고 하니 먹을 기회는 그다지 얺겠지만요. 그런데 고려, 조선인들은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는데 중국에서는 왜 이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아주아주 궁금해집니다. 

그 외에도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등 여러모로 쓸만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내용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저자가 만주족이 돼지고기를 선호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고기를 썼다는 이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책 다른 부분에서 송나라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건, 주변 강대국인 요와 금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목민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예 먹지도 않았다는 이유로요. 만주족도 말갈, 여진의 후예로 유목민에 가까운데 왜 돼지고기를 선호했을까요?

또 남송에서 찌는 요리가 발달한건 연료가 부족했던 탓이라는 이유는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찌거나 볶거나, 연료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직화'인 경우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중국 요리에 직화 요리가 많지도 않으니까요. 이렇게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모호한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크게 3개 단락으로 구분해서 시대별로 목차를 구성해 놓았는데,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통사적으로 목차를 구성하여 해당 시기에 대해 여러가지 요리들을 일람하도록 하는 구성이 훨씬 보기 좋았을것 같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중국 요리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07/02/25

근황

1. 경성탐정록 4번째 이야기의 시놉을 완성했습니다. 아이디어에서 시놉 완성까지 한달 넘게 걸렸네요. 제가 추구하는 정통 추리물은 사실 별게 아닙니다. 너무 작위적인 트릭이나 기계장치, 우연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동기가 확실한, 그런데도 불구하고 범인을 특정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꾸며나가고 싶을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여러가지 작위적인 이야기들, 예를 들자면 밀실 살인인데 힘들여 밀실로 꾸몄는데 살인으로 밝혀지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자살로 위장해야죠. (Nervous Breakdown의 안도의 명언이죠^^) 이번 이야기도 저희 형에 의해 완성되려면 좀 걸리겠지만 위의 제 철학을 담으려고 노력하긴 했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더라도 많은 분들이 마음에 들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작품은 좀 단순하고 간단한 사건을 써 볼까 하는데 설홍주가 수학과 출신이라는 설정이 있으니 관련 이야기를 좀 풀어보고 싶네요. 너무 QED 스럽지 않게, 간단한 것으로^^

2. NDSL은 이제 흥미가 한풀 꺾였습니다. 요새는 그냥 출퇴근할때 하는 정도로 띄엄띄엄 "Wish Room"이라는 게임만 계속 붙잡고 있는데 클리어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이걸 클리어하면 다른걸 잡고 하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사실 이 게임도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고요. 원래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도 역시 호기심과 흥미가 너무 빨리 식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아깝기도 합니다.

3. 회사생활이 좀 어렵고 복잡하네요. 직장 경력이 10년차도 안되는데 벌써 7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8번째 회사를 알아봐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되도록 오래 남아 있으려고 했는데 주위 환경이 여의치 않군요. 일단은 사태 추이를 관망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단, 이 이유 때문에 최근 포스팅을 하기가 좀 어렵네요. 제가 직장운이 정말 없는건지 모르겠지만 이거 굿이라도 한번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6/06/05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 최지혜 : 별점 2.5점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 "딜쿠샤"의 역사와 복원 과정을 다룬 인문학, 미시사, 근대미술사 서적입니다.

책은 우선 "딜쿠샤"의 역사부터 짚습니다. 테일러 부부가 이 집을 지은 과정, 화재 이후 다시 보수한 과정, 그 뒤 누가 이 집에 살았고 누가 이곳에서 일했는지를 차례로 알려주거든요. "딜쿠샤"는 이른바 문화 주택 열풍의 출발점처럼 볼 수 있는 집으로, 이 집의 건축 과정 소개를 통해 당시 조선에 방갈로를 비롯한 서양식 주택이 어떻게 들어오고 퍼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핵심인 복원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당시 촬영된 사진을 기준으로 실내의 세부 요소를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전등이 몇 개였는지 같은 고증은 물론, 복원에 필요한 물품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어떻게 제작했는지도 설명됩니다. 이를 통해 복원이라는 일이 단순히 낡은 건물을 고치는 수준에 그치는게 아니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사진과 온갖 자료들을 조사하여 물건의 쓰임을 확인하고, 없어진 것은 다시 만드는 굉장히 치밀한 작업이더군요. 그 정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리고 복원 과정에서 구하거나 만든 여러 소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좋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비연호는 코담뱃가루를 담는 작은 병입니다. 청나라 때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청에서는 담배는 금지했지만, 코로 흡입하는 코담배는 감기, 두통, 위장병 같은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약으로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담뱃가루는 습기에 약했기 때문에, 공기에 덜 닿도록 입구가 작은 병을 만들었고요. 그 병이 비연호입니다.

딜쿠샤 벽난로 옆에 놓인 둥근 그릇은 히바치로 일본 전통 화로입니다. 나무, 도자기, 동으로 만들었는데, 특징이라면 난방용으로만 쓰인건 아니라는 점 입니다. 방 안에서 차나 국을 데우거나, 김을 굽고, 찰떡을 구워 먹고, 깨를 볶는 데에도 썼다고 하네요.

2층 거실 탁자는 상판과 다리까지 조각 장식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건 일본의 닛코보리 탁자입니다. 닛코보리는 일본 닛코 지역의 공예품입니다. 1643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닛코의 도쇼구를 크게 고치면서 많은 조각 장인들이 모였고, 공사가 끝난 뒤 이들이 그 지역에 정착해 방문객을 대상으로 쟁반과 가구 같은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서양인의 서양식 주택이지만, 당시 조선의 가구와 소품들도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조선의 돈궤를 서양인들이 캐시박스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전통 가구 중 장은 분리되지 않지만 농은 층층이 분리되는걸 의미하며, 당시 서양인들에게 삼층장은 조선 가구의 대표였는데 1920~30년대 조선을 찾은 미국인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번쩍거리는 장식이 많이 붙은 삼층장을 선호했다는 등의 정보가 가득한 덕분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하는 도판도 좋습니다. "딜쿠샤" 복원에 관련된 소품과 세부 디테일 사진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소품과 관련된 도판, 당시 분위기를 알려주는 사진도 충실합니다. 이런 책은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사진 자료가 많아서 읽기 편했습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특히 문장이 아쉽습니다. 이런 저런 명언과 미학 이론을 들먹이며 이야기를 멋스럽게 쓰려는 표현이 많은 탓입니다. 책의 소재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만큼 오래된 사진을 보고, 사라진 물건을 찾고, 공간을 다시 만드는 과정만 담백하게 쓰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괜히 문장을 꾸미려는 부분이 오히려 정보 전달을 방해한다고 느껴집니다.

또 다른 단점은 일부 정보의 근거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전문분야인 건축, 미술, 복원 외의 생활문화 부분은 다소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한 이유를 영국 물의 미네랄 함유량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차 문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역사, 무역, 계급, 식민지, 기호품 소비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처럼 한, 두 페이지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10/23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오카자키 다쿠마 / 양윤옥 : 별점 2점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6점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커피 애호가 아오야마는 여자친구와의 트러블 직후, 카페 탈레랑 간판을 발견한게 계기가 되어 인생 커피를 만났다. 아오아먀는 탈레랑의 명언과 같은 달콤한 커피를 찾아 헤메었는데, 탈레랑에서 그런 커피를 맛 본 것이었다. 커피를 내린 바리스타는 기리마 미호시로, 아오야마보다도 연상이었다. 그녀는 아오야마의 이메일 주소만으로 그의 이름을 추리해 내는 뛰어난 추리력을 선보인 뒤,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잔 이유 등의 소소한 일상 속 수수께끼를 커피를 갈면서 풀어내었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과 함께.

특정 분야 전문가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흔해빠진 일상계 단편 추리물. 이런 류의 작품은 엄청나게 많지요. 제가 읽었던 것만 해도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작품은 이 중에서도 여러모로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를 연상케 합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젊은 전문가 아가씨 탐정, 그리고 그녀를 연모하는 어수룩한 남성 화자 컴비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에서는 헌 책의 역할이 중요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커피'의 역할은 미미하다는 차이는 큽니다. 카페 탈레랑은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과 해결은 커피, 그리고 바리스타와는 무관하거든요. 그나마 관련이 있는건 "제 2장 비터스위트 블랙" 정도 뿐입니다. 이래서야 바리스타가 탐정일 필요도 딱히 없지요. 추리를 하는 동안은 핸드밀로 커피를 갈다가, 추리를 마친 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을 하는게 바리스타가 탐정일 유일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너무 만화적이고 유치했다는 거지요.

추리적으로도 비약과 억지가 눈에 띄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바리스타 미호시가 상처입었던 과거 이야기가 조금 긴 호흡으로 설명되며, 묻지마 폭행이라는 강력 범죄가 연루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최악이었고요. 과거 미호시의 접대를 개인적 호감으로 착각했던 스토커가 있었다는건 설득력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주변을 맴돈다는건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긴 호흡의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비블리아 고서당"과 살짝 비슷하네요.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도 말이죠. 이외에도 서술 트릭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문제에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지겹기까지 했습니다.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낭비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커피'가 보다 중요하게 사용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은 그냥 흔해빠진 양산형 일상계 단편에 불과하네요. 2권에서는 보다 폭넓게 커피가 활용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사건은 두 번째 방문 때" 

아오야마가 탈레랑을 처음 찾는 이야기로 시리즈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호시가 이메일 주소만 가지고 아오야마의 이름을 알아낸 추리는 마음에 들었어요. 커피 애호가라고 소개되기에 "블루 마운틴"은 커피인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단서로 그게 이름을 의미한다는걸 추리하는게 지극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지고, 새빨간 우산이 남아있었던 상황에 대한 추리는 조금 억지스러웠습니다. 애초에 이미 헤어진 여자 친구의 친구가 아오야마를 비난할 자격 따위는 없고요. 코믹하고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설득력없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2장 비터스위트 블랙"

아오야마의 친척 아가씨 고스다 리카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이야기. 진상은 리카만 남자친구라고 생각했을 뿐, 그 남자의 진짜 연인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리카가 외국에서 살다왔던 탓에 오해가 생긴 것이었는데, 이를 '블랙 커피'를 통해 드러내는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일본에서 블랙커피는 설탕도 밀크도 넣지 않은 스트레이트 커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에서는 커피 색깔만을 의미한다네요. 그래서 리카는 머그컵만 보고서 블랙커피라고 단정했지만, 쓴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남자 친구는 혼자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셨던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의 차이를 세련되게 드러낸 좋은 장면이지요.

남자친구 녀석도 리카와 하룻 밤을 같이 보낸건 사실인데 아오야마가 그 녀석을 좋게 바라보는건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그 녀석은 리카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저지른건 맞습니다. 단지 '오해'라고 넘어가는건 무리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3장 유백색에 하트를 숨기다"

아오야마는 창 밖에서 뛰어가던 혼혈아 켄토에 대한 이야기를 미호시에게 해 주었다. 켄토에게 가끔 우유를 사 주며 친해졌지만, 교토 여름의 풍물시 오쿠리비 축제 날, 다친 켄토를 걱정해주다가 다투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아오야마의 이야기와 켄토의 행색에 주목했던 미호시는 카페 밖으로 달려나가 켄토를 찾기 시작하는데...

아오야마가 처음에 커피 맛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호시와 함께 다른 카페에 왔다는 것, 그리고 아오야마가 켄토에게 우유를 사 준게 아니라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의 서술 트릭이 숨어있는 작품.

서술 트릭은 신선했지만, 정작 다른 수수께끼들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우선 다른 카페의 커피가 탈레랑과 맛이 같았던건 우연히 같은 원두를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미호시가 탈레랑 커피 원두 구입처를 앞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수수께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던 아오야마가 멍청한 거지요. 

켄토가 돌보던 고양이를 나쁜 아이들이 괴롭힌다는걸 미호시가 간파했던 건,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할 뿐 추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비약이 심했던 탓입니다. 방학, 그리고 매일같이 축구를 핑계로 학교를 가면서 우유도 가져갔지만, 정작 축구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학교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진상을 끄집어 낸건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아이들이 고양이를 빼앗아 죽이려고 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급식 주머니는 단서가 되기 힘들었으니까요. 미호시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4장 바둑판 위의 추격전" 

아오야마는 산책 도중 전 여자친구 마미를 만났다. 그녀를 피해 도주하던 끝에 탈레랑으로 향했지만, 마미가 그곳까지 쫓아온 탓에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새 여자친구라고 소개해버리고 말았다. 마미는 잠자코 물러났지만, 그녀는 어떻게 아오야마가 탈레랑으로 도망쳐 올 것이라는걸 미리 알았던 것일까?

제목의 바둑판은 탈레랑이 있는 상점가 거리를 의미합니다. 바둑판과 같이 직선으로 나누어진 구획의 거리라는 설정이지요. 상점가 거리를 비롯하여 교토 시내를 무대로 펼쳐지는 아오야마의 산책과 도주 과정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줍니다. 교토 시내 거리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 덕분입니다. 그 와중에 "마루타마치 르부아"의 마루타마치 시가 등장하는 것도 반가왔고요. 풋풋한 사랑 싸움, 그리고 도라야 마미와의 옛 추억을 잃어버린건 슬픈 일이라는걸 아오야마가 깨닫는 결말은 여운이 남겨져서 좋았습니다.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모카와 마타지가 전화로 알려주었다는게 진상인데, 모카와 할아버지가 마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단서가 사전에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가 전무했거든요. 아무리 '일상계' 작품에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래서야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5장 past, present, f*****?" 

아오야마는 잡화점에서 고가의 다트를 보고 홀딱 빠졌지만 막상 사려고 하자 이미 팔리고 없었다. 잡화점을 나온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우연히 만났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미호시는 저녁 술자리에서 아오야마의 깜짝 생일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고, 선물로 그 다트를 주었다. 그런데 다트가 마음에 들었다는걸 미호시는 어떻게 알았을까? 다음날, 아오야마는 고나이라는 남자를 만나, 미호시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 진상은 전편과 같습니다. 잡화점에서 아오야마를 보고 미호시에게 정보를 알려준 공범(?)이 있었던 거지요. 다행히 전편보다는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범의 정체를 진작부터 노출시키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오야마도 진상을 추리해 내는데 거의 성공하고요.

하지만 고나이를 통해 드러나는 미호시의 과거는 뜬금없었고, 고나이도 굉장히 작위적인 설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네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미호시의 다정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찐따가 위험한 스토커가 되었다는건 지나치게 뻔했을 뿐더러, 고나이가 아오야마아게 접근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6장 Animals in the closed room" 

아오야마는 환상의 커피인 몽키 커피 원두를 구했다는 말로 미호시를 자기의 방으로 초대하는데, 그리고 이 때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는 계획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선물이었던 테디 베어 인형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찢긴 채였다. 밀실인 자취방에서 인형을 찢은건 누구였을까?

탈레랑의 고양이 샤를이 미호시 토트백 안에 숨어 몰래 들어와 인형을 찢었다는게 진상인데, 여러모로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샤를이 가방 안에 들어간걸 눈치채지 못할 수 있을까요? 약에 취해 잠들었다는 설정이 붙어있기는 합니다. 그럼 깨어나서 인형을 찢었다는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샤를이 마침 아오야마가 미호시가 자리를 비운 틈에 가방에서 빠져나와 인형을 찢은 뒤, 아오야마와 미호시가 도착하기 전 조용히 옷장 안에 숨어 들어가 잠들었다는 우연도 과합니다. 세 번째로 새끼 고양이가 인형을 찢었다면, 작 중 묘사처럼 날카로운 날붙이로 악의를 가지고 찢은 것 같았을리가 없습니다. 조금 긁히고 만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이외에도 아오야마가 선물을 미호시 몰래 등장시키기 위해, 낚시줄과 후크를 이용해 만든 복잡한 장치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수상해 보였던 신문배달원(?)과 아오야마가 침대 밑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의 등장을 통해 위험인물 고나이의 존재를 다사금 떠올리게 만들고, 다음 에피소드를 위한 복선으로도 적절히 사용한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앞서의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7장 다시 만난다면 당신이 내려준 커피를" 

고나이 나미카즈는 미호시가 아오야마와 사이좋게 지내는걸 참지 못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어두운 밤, 미행 끝에 브래스 너클로 폭행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아오야마는 이 폭행은 자신이 미호시와 만남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전에 받았던 고나이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미호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1권의 마지막 이야기. 고나이의 폭행으로 입원한 당사자가 아오야마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전편의 괴한은 아오야마의 전 여친 마미로, 유도부원이었던 그녀가 고나이를 처절하게 응징한 뒤 우여곡절끝에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독자는 아오야마를 미호시로 착각하고, 고나이는 마미를 미호시로 착각하는 이중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셈이지요. 아오야마의 정체가 다른 카페 바리스타였고, 본명도 아오야마가 아니라 아오노 야마토라는 것도 밝혀지는데, 이에 대한 미호시의 추리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커피맛을 훔치러 왔다는 둥, 사랑 싸움같은 중반부 전개와 고나이가 폭행을 결심하는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건 단점이에요. 고나이의 생각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오야마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오히려 미호시를 생각한다면, 고나이같은 위험인물은 감옥에 보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서술 트릭도 병문안을 온 사람까지는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친 사람은 미호시, 병문안을 온 사람은 아오야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였는데, 지나쳤습니다. 병문안을 온 건 그럼 도대체 누구랍니까? 마미? 이런 단점들 탓에 별점은 2점입니다.

"에필로그"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는걸 공식적으로 알리는 짤막한 분량의 에필로그. 바리스타 고나이가 카페 로크온이 아니라 탈레랑에 있다는게 서술 트릭 형태로 밝혀지는데, 이 쯤 되니까 지겹네요.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분량이라,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2021/06/29

만화 돈 까밀로와 뻬뽀네 1 - 죠반니노 과레스끼, 다비데 바르치 / 김정훈 외 : 별점 3점

만화 돈 까밀로와 뻬뽀네 1 - 6점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다비데 바르치 그림, 김정훈 외 옮김/서교출판사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는 제 어린 시절 베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국내 출간된 전권을 갖추어 놓고, 틈날 때마다 탐독했었지요. 호적수인 돈 까밀로 신부와 공산주의자 읍장 빼뽀네의 이야기는 어느 권, 어느 편을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작가 죠반니노 과레스끼가 직접 그려넣은 일러스트도 아주 좋았었고요. 물론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어 빼보네가 국회의원이 되고, 그 아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는 솔직히 재미가 떨어지기는 했습니다만...

하여튼, 이 작품의 만화 버젼이 있다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국내에 정식 출간되었다는걸 이번에야 알고 구해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2014년에 나왔던 책의 복간이더군요.1권만 먼저 읽었는데, 모두 1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원작 순서대로는 아니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재미있고, 의미있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만화화한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장점이라면 빼어난 작화입니다. 만화 강국 이탈리아 작품답네요. 특히 캐릭터 묘사가 아주 일품이에요. 돈 까밀로와 뻬뽀네 모두, 머릿 속에 담겨있던 그 사람을 그대로 그려냈습니다. 아주 오래전 감상했던 드라마 버젼은 돈 까밀로 역이 "내 이름은 튜니티"의 테렌스 힐이라 영 안 어울렸었거든요. 

이야기들도 모두 재미있습니다. 일종의 츤데레들인 돈 까밀로와 뻬뽀네의 티격태격이라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설과 주먹을 나누다가도, 서로에게 이해와 용서를 주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폭력이(?) 난무하지만 제 아이에게도 권해주고 싶은, 그런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예수님의 뼈를 때리는, 피와 살이 되는 명언들도 그대로고요.

그러나 만화의 전개 방식이 친숙하지 않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중간 생략이 왠지 모르게 많고, 액션 장면의 묘사가 부족하거든요. 컷 사용도 굉장히 정형화되어 있고요. 우리에게 친숙한 만화와 그림 소설, 그 두 중간에 위치한 느낌입니다.

소설보다도 돈 까밀로에 치우쳐 있는 점도 약간 아쉬웠어요. 상남자 뻬뽀네 중심 전개인 이야기도 한 편쯤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배경 설정을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고요. 두께와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좀 비싼 편입니다.

그래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팬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2권도 바로 구입해 봐야 겠습니다.

2022/12/25

엔진의 시대 - 폴 인그래시아 / 정병선 : 별점 3점

엔진의 시대 - 6점
폴 인그래시아 지음, 정병선 옮김/사이언스북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동차들에 대해 시기별로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자동차를 만든 주역이 누구인지와 함께 자동차가 출시되었던 당시 상황, 사회적 분위기를 엮어서 성공했다면 왜 성공했는지, 실패했다면 왜 실패했는지와 그 외 어떤 후폭풍(?)을 불러 왔는지 등 관련된 이야기를 무려 47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15편의 이야기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당대를 대표했고, 큰 인기를 끌었던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다보니 시대와 트렌드, 유행이라는 것에 대해 식견을 넓힐 수 있었었어요. 자동차야말로 소비재의 끝판왕 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미국 중심의 이야기라는 한계가 있고, 소개되는 도판과 책의 편집이 그닥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여러모로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15편의 소개 중 인상적이었던 몇 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소개드리며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모델 T대 라살" 

자동차를 일반인도 소유할 수 있게 한 포드의 모델 T의 등장, 그리고 곧 돈이 있는 사람들은 고급진 무언가를 찾게 되었지만 모델 T의 디자인 개선을 등한시했던 포드가 시장을 잃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모델 T의 개발 과정도 상세하지만, 무엇보다도 헨리 포드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접근이 돋보였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독재자로 그가 벌였던 여러 행각이 가감없이 소개되며, 차를 개발했던 인물 중심으로 서술되는 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조금 놀랐던건 모델 T는 완벽해서 더 개량할게 없다고 포드는 믿었다는데, 소개되는 내용을 보니 실제로도 그러했다는 점입니다. 보기에는 아름다웠던 라살이 지금은 거의 잊혀진 차라는 것도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쉐보레 콜벳" 

제네럴 모터스가 업계 최초로 자동차 디자인을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얼의 등장, 매년 디자인을 바꿔 차를 출시하고, 양산하지 않는 프로토타입 개발 등의 혁신적인 조치로 자동차 업계를 리드하는 과정과 콜벳의 아버지 아르쿠스-둔토프와 콜벳의 성공적인 역사를 알려줍니다. 얼은 독재자였지만 확실히 시대를 읽는 눈은 있었나봐요. "학교를 지나치는데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지 않으면 다시 제도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새겨들을 명언입니다.

"1959년식 캐딜락" 

쉐보레의 업계 선두 지위를 빼앗아 온 크라이슬러의 '테일핀' 전성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쉐보레가 따라할 수 밖에 없었던 테일핀의 탄생과 그 유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정말로 아무런 맥락이 없더군요. 쓸데없지만 멋있다고 생각되어 유행한 경우인데, 아무래도 2차 대전 후 고도 성장기를 맞아 풍요와 화려함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필요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그걸 대표하는게 바로 엘비스의 핑크 캐딜락이기도 하니까요.

"폭스바겐 비틀과 마이크로 버스" 

테일핀과 같은 화려함과 속물 느낌의 감성과 반대되는, 그래서 지식인들의 아이콘이 된 폭스바겐의 비틀과 마이크로 버스의 탄생과 2차 대전 후 하인츠 노르트호프가 회사를 이끌며 살아남아서, 결국 미국 시장까지 진출 후 성공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후 폐허 상태에서 복구하는 폭스바겐의 분투도 볼만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광고 프로모션이 기억에 남습니다.

"쉐보레 콜베어 : 소비자의 반란" 

에드워드 콜이 주도했던, 미국인을 위한 비틀이었던 콜베어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콜베어의 오버스티어링 문제 (뒷바퀴 미끌림)로 변호사 찰스 네이더의 주도로 고발과 조사가 시작되어 결국 미국의 소비자 운동이 출범하게 된 콜베어의 사건을 설명해줍니다. 미국에서의 소비자 보호법 - 징벌적 손해배상 등 - 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인, 쉐보레 콜베어의 코너 조향 문제가 설명됩니다. 결국 쉐보레가 후기 모델에서 개선 방안을 도입했기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결말은 다소 씁쓸했습니다.

"포드 머스탱 : 아이아코카와 신세대 미국인" 

자동차 세대 교체의 아이콘이었던 머스탱과 함께 그 성공 비결을 알려 줍니다. 1960년대 ~ 70년대 초반의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자동차 소비 전면에 나서며 "누구나 원하는 자동차"로 멋진 디자인, 저렴한 가격, 다양한 옵션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네요. 현대차의 이른바 '옵션질'은 역사가 증명하는 탁월한 마케팅 기법인 셈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 자서전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리 아이아코카의 활약도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당시는 자서전의 시대였었는데, 저도 아이아코카 자서전과 척 예거 (최초로 음속을 돌파했던 비행사) 자서전 두 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재미있었어요.

"폰티액의 GTO : 들로리안의 염소" 

두 가지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하나는 머스탱과 전혀 다른 '상남자'를을 노린 들로리안의 머슬카 폰티액의 전성기, 다른 하나는 폰티액의 아버지로 '들로리안 모터스'를 만들었던 업계의 풍운아 들로리안의 흥망성쇠이지요. "백 투더 퓨처"의 타임머신으로도 유명한 들로리안의 DMC-12는 청설모의 카툰을 통해 그 탄생과 멸망(?) 과정을 잡해 보았었는데, 훨씬 자세하고 깊이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혼다 어코드 :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전통적인 미국 차와 달랐고, 디트로이트 문화와도 전혀 달랐던 일본차 어코드와 혼다가 어떻게 미국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미국내 양산에 성공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어코드의 성공 이면에는 독재자같았던 혼다 소이치로를 제어할 수 있었던 2인자 후지사와 다케오가 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흥미로왔습니다. 후지사와 다케오 덕분에 문제가 있었던 공랭식 엔진이 아닌 수냉식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때 후지사와 다케오가 혼다 소이치로와 독대하며 했던 말이 대박이네요. “혼다, 어떤길을 갈 건가? 자네는 회장인가, 아니면 엔지니어인가?” 인데, 기업 회장이면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참고로 이때 개발된 엔진이 CVCC 엔진으로 별다른 장치 추가 없이 미국에 새로 제정된 배출가스 기준을 만족하는 유일한 엔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혼다의 성공담을 이 책에서는 "애플 컴퓨터"의 첫 등장과 비슷하다고 언급하는데, 실제로도 그런 느낌이에요. 

또 그간 읽었던 일본 회사의 성공담은 판타지 "시마 과장"은 제껴두더라도 도요타 자동차 성공담처럼 세일즈맨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판매와 마케팅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갔었는데, 일본인 관리자가 미국인 직원을 채용하여 그간 디트로이트의 관행을 깨는 수평적 조직을 만들어 미국 내 생산 기지를 만드는데 성공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신선했습니다.

"크라이슬러 미니밴" 

앞서 말씀드렸던 리 아이아코카의 또다른 히트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래전 읽었었던 자서전에서도 언급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베이비 부머 세대인 '사커맘' 들이 아이들 여럿을 나르듯 가족이 함께 이동하는데 필요한, 외장이 작으면서도 내부가 큰 그런 차가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는데, 상품기획자라면 관심있게 볼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새로운 소비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걸맞는 기존에 없었던 제품을 내 놓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BMW3 시리즈" 

마케터, 상품기획자라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내용. BMW 3 시리즈가 '보보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건 그들의 기호에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보보들은 화려하지만 저속한 것들은 가지려 하지 않는다.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쓴다는 인상도 줄 수 있는데, 당연히 싫다. 그들은 희소성을 추구한다. 대중이 몰라야 하고, 디자인이 탁월해 삶이 더 편하고 특별해지는 물건이라면 금상첨화다.……… 그들 중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찬의 주최자가 사용하는 샐러드 분배용 포크에 아프리카적 감수성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고 화제로 삼는 행위라면 정말이지 멋지다." 라는데, 지금 말로 따지면 '홍대병' 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차라는 뜻이겠지요? 우리말로 '하차감'이 중요한 사람들을 위한 차라는 뜻도 될 테고요. 이들을 위한 차는 독일차 BMW 3였다는게 결론인데,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자동차는 특정 계층 이상에서는 어느 정도 허영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2014/10/20

삼국지가 울고 있네 - 리동혁 : 별점 2.5점

삼국지가 울고 있네 - 6점
리동혁 지음/금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갑작스러운 해외 출장으로 한 주 정도 블로깅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책은 삼국지 관련 서적입니다. 중국 동포 출신 작가가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고 오류가 너무 많다 느껴 이를 지적하기 위해 썼다고 하네요. 한자를 잘못 본 번역 오류는 물론, 당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까지 포함해 깨알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문열 삼국지에 얼마나 많은 오역과 오류가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하나하나 다 들기도 어려울 정도인데요, 물론 이야기의 큰 줄기를 바꾸는 오류는 아니지만, 유비가 조조와 술자리를 가지다가 천둥이 치는 것을 겁내는 장면처럼 원작자의 의도가 무시된 부분은 심각한 각색이자 오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오역, 류를 몇 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창을 끼고" 달려 나간다는 표현은 원래 "꼬나쥐다" 또는 "들다"가 맞고, "대도를 찬다"는 표현도 틀렸습니다. 고대의 다다오(대도)는 자루가 긴 언월도 형태로, 허리에 찰 수 없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원술이 겨드랑이에 두 벌의 보검을 걸고 있었다는 표현 역시 오류이고요. "손을 어루만지며 크게 웃다"라는 표현도 현대어로는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고대에서는 "손을 두드리다"라는 뜻이라 "손뼉을 치며 크게 웃다"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합니다. 코미디에 가까운 오역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자객 예양을 "예"와 "양"이라는 지명으로 잘못 번역했다든지, "하늘이 가죽띠에 그 뜻을 밝혀 무왕이 주를 치게 했다"는 문장은 사실상 "혁명"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합니다.

비슷한 글자를 오독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뜻하는 "훠"라는 글자를 순욱의 이름인 "위"로 착각한 것, 손책을 "주둥이 노란 어린놈"으로 번역한 것도 오역인데, 황구(黃口)는 단순히 "어린아이"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카이"라는 말은 갑옷을 뜻하는데, 작품에서는 계속 투구로 묘사되었다고 하고요. 또 "물이 쏟아지고 흙이 밀려오듯 적군이 덮쳐 와야 맞서겠다는 뜻입니까?"라는 하후돈의 말도 잘못된 번역으로, 실제 의미는 "물이 밀려오면 흙으로 막고, 장수가 오면 군사로 막는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적군이 오니 맞서 싸우자는 의미죠. 산과 관련된 표현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자의 말처럼 실제 전투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문열 삼국지의 오역과 오류 지적 외에도 이 책은 다양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당대 무기나 진법, 역사적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장팔사모가 뱀 모양이라는 주장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는 "삭모"라는 말에서 유래된 긴 창일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도 흥미로웠습니다.
무게 단위 관련해서는 후한 시대의 1근이 지금의 약 500g이 아닌, 222.73g 정도였다는 정보가 대표적입니다. 정사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전위의 쌍철극이 80근이라고 하니, 약 18kg 정도로 장사라면 들 수 있는 무게였겠죠.
신체 치수도 당대 척도의 차이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1자는 약 19.91cm라 공자의 키는 약 191cm, 후한 시대의 1자는 약 23~24cm로, 제갈량의 키는 184~196cm로 추정되며 관우의 경우 정사에는 키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조운의 활약도 당대 사료들을 바탕으로 보면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고 설명하고, 조조가 언제부터 악의 화신이 되었는지, 관우가 언제부터 신으로 떠받들어졌는지 등에 대한 탐구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촉나라 인물들이 유독 미화된 이유로, 촉은 사관이 없었던 반면 위나 오에는 사료가 남아 있어 인물들의 전설화가 어려웠다는 분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초한지 인물과 삼국지 인물을 연결한 전설도 흥미로웠는데, 명나라 후기 소설집 "유세명언"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초한지의 인물들이 삼국지 속 인물로 환생한 배경이 꽤 논리적으로 설명되더군요.

중국 역사를 인용한 실제 사례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모택동이 실제 공성계를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나, 항일전쟁 시기 허베이성 민병들이 금속 조각을 구하기 위해 가짜 목표를 설치해 일본군의 총포 사격을 유도하고 파편을 회수한 일화는 "풀 실은 배로 화살을 얻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 유비의 관상을 설명하며 1970년대 말 백전풍을 앓던 한 농민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자신의 몸에 있는 흰 점을 근거로 들었던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결국 그는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하네요. 그 외 흥미로운 이야기로는 제갈량과 같은 사주팔자가 1981년 8월 3일 12시~14시 사이에 태어난 사람과 동일하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말은, 중국인들은 삼국지를 인생 지침서나 성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라"는 말은 실제로는 허구이며, 광고 문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문열 삼국지에 대한 오류 증명이 중심이라 피식 웃게 되는 재미 외에는 큰 깊이는 없지만, 삼국지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국내에서 이문열 삼국지가 정본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의미 있는 작업일 수도 있겠죠. 이 책이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발휘해, 지적된 오류들이 수정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 제가 다시 이문열 삼국지를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2017/05/13

손자병법의 탄생 - 웨난 / 심규호, 유소영 : 별점 2.5점

손자병법의 탄생 - 6점
웨난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일빛

1972년 산동선 임기현 은작산 1호, 2호묘에서 발굴된 죽간과 출토물들에 대해 여러가지를 풀어놓는, 580여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고고학, 미시사, 역사 서적입니다. 웨난 작가의 고고학 관련 책을 워낙 좋아하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는 군단"은 진시황릉에 대한 바이블같은 책이죠. "마왕퇴의 귀부인"은 그만 못했지만 역시 괜찮았고요. "삼성퇴의 고대문명"을 절판 전에 구하지 못한 게 한스럽기만 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부활하는 군단"과 같습니다. 먼저 발굴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이후 유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지금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첫 시작인 발굴 과정부터 드라마틱합니다. 문화대혁명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전문가가 아닌 지역 담당자의 무식한 발굴이 겹쳐져 일어난 엄청난 피해, 고고학자들의 유물을 복원하기 위한 분투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흙탕물 속에서 죽간을 그러잡아 뜯어 올리는 식의 엄청난 발굴이 보여집니다! 이 와중에 정치적인 논리가 개입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고요.
그리고 제목 그대로 발굴된 죽간이 "손자병법"이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묘는 한나라 무제 때로 추정되지만 이 죽간의 필사 연대는 한나라 문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늦어도 서한 전기), 한나라 시대 죽서 "손자병법"은 손무가 직접 쓴 원본일 가능성이 많기에 그야말로 초기 "손자병법"에 대해 생생하게 알게 된 것이라고 하네요. 송나라 판각본과의 대조 결과, 명확한 차이를 보인 부분이 있다고 하고요.
또 "손자병법", "육도", "관자" 등의 고적이 실존하며, "손빈병법"이 발굴되어 손무와 손빈이 각기 병법서를 세상에 전했다는게 밝혀진 것도 큰 성과입니다.
참고로 죽간을 수장품으로 묻은 이유는, 인쇄술이 시작된 당나라 이전에는 모두 손으로 필사했기 때문에 서적이 굉장히 귀해서 수장품에서 서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작산 한묘의 죽간은 크게 열 묶음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수량인데 유가의 경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법가 사상이 퍼져나가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되네요. 후대의 '비림비공(임표와 공자를 비판함)'과 크게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죠!

여기까지가 약 12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고, 이어서 360페이지에 걸쳐 발굴된 죽간을 연대별로 구분한 후 실제 해당 시기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항목별 간단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육도" 

강태공이 주문공을 만나고, 주나라가 천하를 재패한 후 봉지로 제나라를 하사받는 과정까지의 이야기.
주문공과 첫 만남에서 강태공이 말한 '삼상주의'는 은작산 한묘 발굴로 알려지게 되었다는데, 최순실에 농락당한 대한민국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네요. '그 능력에 관계없이 사돈에 팔촌을 엮어 관직에 앉힐 경우 그 화가 나라와 백성에게 미쳐 결국 나라를 망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육도"에 대한 설명이 뒤에 이어지는데 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화복과 길흉에 대해서, 인사가 하늘에 달린게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고, 백성 사랑이 치국과 치군에 가장 중요한 전제라는게 분명히 지적됩니다. 천하가 평화로와야 모든 것이 이롭다는 것, 인심에 순응해 천하의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 등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3천년도 더 전에 쓰여진 죽간 속 내용이 지금도 통용될만 하다는게 신기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왕병"

'절개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고집스럽고 답답한 서생에 불과합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지금 세상은 사람 노릇을 하는 데 그리 진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 포숙이 관중을 데려오려 할 때 한 말. 

주 왕조가 쇠학하여 춘추 시대로 돌입하게 되고, 제나라가 관중과 포숙을 얻어 제후국의 맹주를 차지할 때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관중이 죽은 후 그의 언설을 정리한 책이 "관자"입니다. 대체로 군사 사상으로 다섯가지 원칙으로 정의되는데 부국강병, 우병어농, 군정일체, 선계후전, 이인위본, 선전준비가 그것이죠. 은작산에서 출토된 "왕병"은 관중의 정치, 군사 사상에 대한 완전한 작품이며 후대에 전해진 "관자"는 불완전한 작품이라네요.

"안자춘추"

'귤은 회수 남쪽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명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안자는 처음 들은 이름이네요. 사마천 왈 "관중이 죽고 백여년이 지나 안자가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물인데 말이죠. 

안자 안영과 전양저가 힘을 합쳐 제나라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이후 제나라 위왕이 양저의 군사 사상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사마병법"이라지요. 전양저의 친척이자 전씨 가문의 유력인인 전서가 공을 세워 "손"씨 성을 하사 받았으며 이후 손무, 손빈 등의 후손들로 이어집니다.

"손자병법" 

손무가 오나라 국경 궁륭산에 터를 잡고 혁명을 위한 군사조직을 이끌다가 오자서를 만나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뒤는 "열국지" 등에서 본 이야기 그대로, 초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오자서가 오나라왕 합려와 함께 전쟁을 일으키고, 이후 오나라가 패망할 때 까지의 흥망성쇠가 그려집니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 신선함은 덜했지만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손무가 일종의 도적단 두목같은 포지션으로 등장해서 오자서와 밀약을 나눈다는 설정이 그것입니다. 손무가 오나라의 왕이 되고, 오자서는 초나라의 왕이 된다는 밀약인데, 작가의 창작인지 아니면 뭔가 유래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울러 초나라가 정벌된게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는 연구자들의 의견도 신선했습니다.

"손빈병법" 

오나라를 떠난 손무가 제나라에 정착한 후 증손자 손빈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역시나 "열국지"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방연과의 인연, 귀곡자 문하에서의 생활, 위나라에서 방연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의 처참한 생존 과정과 탈출, 그리고 복수가 차례대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미친 척을 해서 방연의 눈을 피하는 것은 그럴듯한데 제나라 묵적의 제자 금활리라고 자신을 밝힌 인물에게 너무 쉽게 속 마음을 드러내는 전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실제로는 수차례 연극을 더 했을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나머지 200여페이지에서는 현재 도출된 각종 의문과 문제에 대해 다루어 집니다. 대표적인 건 방연이 죽은 마릉의 정확한 위치, 후대에 수차례 대두되었던 손무 허구인물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은작산 손자병법에 의해 밝혀진 진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차이점 - 춘추 말기 낙후된 생산력과 경제력 탓에 손자병법은 속전속결을 주장하며 공성전을 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빈병법이 쓰여진 전국 시대에는 쇠뇌, 투석기와 같은 선진 무기의 도입과 기병전의 증가, 전쟁 규모의 확대 및 도시의 발전으로 공성전을 적극 주장하는 등 전략, 전술, 진법이 크게 변하였음 - 등 입니다. 손무의 고향이 어디인지에 대한 지역과 학계 간 암투 -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고향 소유권 쟁탈' - 도 소개되고 있고요.

그런데 손무 허구설,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의 차이는 재미있었지만, 마릉의 위치나 손무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중국 내에서야 관심사일 뿐 저에게는 하등의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역 경제 부흥을 중요시 여기는 듯한 저자의 글도 와닿지 않았고요.

그나마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료가 소개, 인용되는데 그 중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는 항목이 몇가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자 곽말약, 여공아의 주장 중 '춘추'와 '전국'을 나누지 않고 한데 묶어 '춘추 전국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대목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당연히 '춘추 전국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중국 내에서 '두 시기는 사실상 연결되어 있고 그 간격은 약 28년에 불과하여 분명하게 차이가 나기 어렵기 때문에 묶어야 한다!'는 주장이 의외로 소수파라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지금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손무 무덤 발굴에 관련된 이야기 중 합려의 무덤인 검지 발굴을 위해 물을 뽑았었지만 검지 붕괴 위험과 비밀로 남겨두는 편이 지역 관광산업 발전, 경제 효과를 높이는데 유리하여 발굴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알았네요. 어장검 등 각종 보검이 궁금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듯 싶군요.
손빈의 후예라는 손노가 손씨 가족을 연구할 때 '일부 당성이 탁월하고 정치적 견해가 뚜렷하고 영리한' 사람들을 모아 좌담회를 가졌다는 중국 공산당식 마인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 때 손씨 가문 족보를 태우겠다고 소란을 피웠으며, 손씨 가문의 어른인 손지일이 홍위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족보는 잘 숨겨놓아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고요.
손씨 가문 내력을 조사하여 손빈의 무덤 위치와 말년을 알아내는 과정은 조상과 제사를 중시하는 우리나라 현실과도 잘 맞아떨어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국 내 사학계에서 손씨 족보의 발견이 굉장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라니 족보라는게 참으로 중요하구나 싶더라고요.

이어서 1996년에 벌어진 손자병법 82편의 영인본을 발견했다는 사기극이 등장합니다. 역시나 홍위병이 등장하여 고대 죽간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일부만 건졌고, 필사한 사본만 남았다는 주장에서 시작되는데 고대 죽간을 손에 넣었다는 조부 장서기의 일대기를 분석하여 사기꾼의 주장을 반박하고, 장서기의 진짜 직계 후손이 등장하여 이름 돌림자를 가지고 사기꾼들을 박살내는 전개는 우리나라 상황과 유사하여 재미있었습니다. 가짜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인 분석 결과와 사기에 가담했던 국방대학교 강사 방립중이 벌인 민사 소송으로 벌어진 재판 과정도 법정 추리물 느낌이라 아주 흥미로왔고요. 솔직히 너무 유치하고 어설픈 사기극이라 이렇게까지 크게 이슈가 된 것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죽간과 다른 출토물들의 후일담을 그립니다. 죽간은 그나마 신경써서 보존되었지만, 성 박물관도 문화대혁명에 휩쓸려 직원들이 밭을 경작하느라 관리가 소홀해진 탓에 훼손이 심해졌다니 문화대혁명이 정말 문화와 역사에 몹쓸 짓을 한게 맞는 것 같네요. 그리고 최초 발견자들과 관계자들 후일담도 소개되는데 첫 발견자인 '당나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아내의 외도를 보고 자살했으며, 한묘도 지금은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이후 죽간 소유권을 놓고  벌인 추잡한 암투가 벌어졌다니 이것도 무슨 저주 비스무레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하기사 발굴이라고 해 봤자 멀쩡한 묘를 대놓고 터는 것이니 좋은 결과일리 없겠지요.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 이런저런 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부활하는 군단"이나 "마왕퇴의 귀부인"에 비하면 유물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도판이 극도로 부족, 부실하고 잘 알고 있는 열국지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현대에 이르러 별 관심 없는 중국 지방 행정부의 관광 수익을 노린 이권다툼이 많이 소개되는건 좀 아쉬웠습입니다. 다른 곳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역사편과 쓸데없는 지방 행정부 이야기를 덜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핵심인 은작산 출토 "손자병법"의 발굴 과정과 이로 인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 중심으로만 소개하는 식으로요.  물론 저자의 허락없는 제멋대로의 편집은 안될 말이겠지만요.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손자병법"과 춘추 전국 시대(중에서도 춘추 시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 쯤 볼만합니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딱히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불필요한 내용도 많은 편이고요. 가격도 상당한 만큼 구입하실 것이라면 신중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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