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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3

죽이는 화학 - 캐스린 하쿠프 / 이은영 : 별점 3점

죽이는 화학 - 6점
캐스린 하쿠프 지음, 이은영 옮김/생각의힘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열네 종의 독약 - 비소, 벨라도나, 청산가리, 디기탈리스, 에세린, 독미나리, 바꽃, 니코틴, 아편, 인, 리신, 스트리크닌, 탈륨, 베로날 - 에 대해 각각 약 30여 페이지의 분량으로 역사와 효과, 실제 사례 및 검사 방법과 같은 정보를 여사님 작품 중 해당 독약이 등장한 대표작의 줄거리와 함께 설명해주는 병리학, 약학 서적이자 추리 소설 안내서입니다.

책은 여사님이 1차 세계 대전 중 지역 병원에서 조제사로 일하기 위해 자격 시험까지 치뤘던 나름 독약 전문가라는 설명에서 시작합니다. 덕분에 등장하는 독약의 작용 사례에 대한 묘사는 약학 학술지에서 칭찬 받았을 정도로 정확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 덕분에 이런 책까지 나올 수 있었겠지요.

소개되는 독약의 역사, 효과, 사례 모두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례 부분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유명 사건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나폴레옹 비소 독살설입니다. 당시 유행했던 비소 염색 벽지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줍니다. 비소 벽지의 독소는 실제로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지 못한 건강 상태에 기여했고, 의사들이 이를 치료하기 위해 더 많은 중독성 화합물을 주입한게 죽음의 원인이라는 추리도 꽤나 그럴싸 했어요.
라스푸틴이 시안화물 중독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가설 검증 부분도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라스푸틴이 알코올성 위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위산이 적어서 시안화칼륨이 치명적인 시안화수소로 변환되는 양이 적었으리라는 추리는 신기했어요. 

이러한 유명인 사례 외에도 수록된 사례는 많습니다. 디기탈리스 설명에서는 1863년 처음으로 피해자에게서 디기탈리스가 검출된 사건 사례부터 설명해 줄 정도로 충실하기도 하고요. 이 사례에서 피해자의 토사물이 묻었을 침실 바닥을 대패질 해 올 정도로 끈질겼던 경찰의 수사 의지도 인상적입니다.
실제 여사님 작품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사례도 등장합니다.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대표적입니다. 1935년 일어났던 워딩엄 간호사가 저지른 모르핀 독살 사건이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는데, 설정을 보면 꽤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그 외에도 에세린이 함유된 콩이 자생되던 서아프리카 칼라바르(그래서 칼라바르 콩이라 불리움)에서 용의자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이 콩이 혼합된 음료를 마시게 한 다음 결정했다는 옛날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천천히 콩을 씹어 삼키려 했고, 죄가 없는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확신 하에 재빨리 삼켰을텐데 천천히 먹을 수록 독약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신체가 독약을 흡수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일종의 심리적 근거가 있는 재판 방식이라는게 굉장히 새로왔어요. 

해독제에 대한 소개도 충실한데 그 중 비소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숯"을 삼킨다는 내용은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독약을 흡수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하니 사무실 숯도 치우지 말고 그냥 두어야 할듯요.

또 이미 읽었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죽음과의 약속", "비뚤어진 집",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삼나무 관 (슬픈 사이프러스)", "부부 탐정" 등) 여사님 작품과 병행되어 설명되는 구성도 흥미를 자극합니다. 대표작과 독약을 결부시키기 위해 여사님 전 작품을 분석하여, 해당 독약이 쓰인 작품이 무엇인 선정한 것도 책을 참 정성들여 썼구나 싶었고요. 제일 처음 소개되는 비소 항목 첫 문단에서 "실제로는 네 편의 소설과 두 편의 단편에서 오직 일곱 명의 등장인물만이 이 악명높은 독약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알려줄 정도입니다. 참고로 비소만큼이나 유명한 청산가리는 "10편의 장편과 4편의 단편에 등장하여 17명을 해치웠다" 고 합니다. 
도로시 세이어스 여사님의 맹독은 비소였는데,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여사님 작품 속 최고 킬러는 청산가리라는 사실도 재미있네요. 

이렇게 독약과 내용을 결부시켜 설명하면서도 작품 속 주요 스포일러에 대해 잘 감추는 솜씨도 빼어납니다. '탈륨' 에 대해 설명하는 "창백한 말" 에 대한 설명 외에는 흥미만 자극할 뿐 핵심 내용은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정말로 책을 읽고 싶게 만들거든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가 가득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만 놓고 보면 4점도 아깝지 않지만 독약의 성분과 체내 작용 과정 설명을 위한 복잡한 화학적, 생리학적 반응에 대한 설명이 조금 지루하고 따분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을 비롯한 추리 소설 애호가, 추리 소설 작가 등 이 쪽 바닥 사람들께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12/20

독약 한방울 - 샬롯 암스트롱 / 김석환 : 별점 3점

독약 한 방울 - 6점 샬롯 암스트롱 지음, 김석환 옮김/해문출판사

55세의 독신남자인 케네스 깁슨은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 동료 교수의 딸 로즈메리를 장례식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후 동생 에셀도 같이 동거하게 되면서 생활은 점점 꼬여만 가고, 점차로 로즈메리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운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다가 자살을 결심한다.
이후 옆집에 살고 있는 화학자 친구인 폴 타운젠드의 연구실에서 독약을 훔치는 데 성공하나 독약이 든 병을 그만 잃어버리고 아내와 더불어 독약병을 찾기 시작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난 뒤 함께 독약병을 찾으며 서로의 감정과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상당히 유명한 작품으로 고전축에 드는 작품이지만 이제서야 뒤늦게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추리소설은 아니더군요... 미국 추리 작가 협회 최우수 장편상을 탄 만큼 세간에는 추리소설로 통하는 것 같지만. 주인공의 미묘한 환경과 심리의 변화의 와중에 발생한 독약 분실사건으로 인한 일종의 해프닝을 다룬것만 가지고 "추리"라는 쟝르명을 붙이는 것이 과연 어울렸을지 의문입니다. 사건의 전개도 긴박하지만 유머스러운 분위기라 몰입하기 어려웠고 말이죠.
그냥 밝고 유쾌한 서스펜스 드라마랄까요? 독약을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점점 불어나는 과정과 그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잘 표현한 묘사는 좋지만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순수 문학에 가까운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여튼 절묘하게 쟝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에 서 있는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추리물은 아닐지라도 수상이력과 명성에 어울리는 재미는 확실합니다. "인생극장"을 보는 것 같은 독특한 맛이 좋았어요. 특히 독약을 결국 찾게되는 마지막 부분은 여러가지로 꽤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저처럼 퍼즐 미스테리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히 쟝르문학을 즐긴다면 유쾌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2023/07/02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4. 잠자는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4. 잠자는 인형
"그건 귀찮은데."
마이코는 호시자와에게 말했다.
"뭐가 귀찮아?"
호시자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이코도 굴복하지 않았다.
"첫째, 나는 데츠바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둘째, 아까 내가 온 것을 환영하지 않았잖아. 마지막으로, 나는 너무 바쁘다고."
"하지만 말이야. 데츠바가 죽었잖아. 그것도 너가 마침 왔을 때 말이야."
"내가 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너처럼 뚱뚱한 사신 따위가 어디있어. 혹시 너, 데츠바가 살해당할걸 알고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범인을 못 알아낸 모양이군."
호시자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라키 경감도 곤란한 상황이겠네."
"맞아. 그래서 부탁하는데, 혹시 만났을 때 경감이 뭔가 물어본다면 알고 있는건 대답해주라고."
"내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정말로 죽었다면 나 역시도 큰일이야."
"마이코가? 왜지?"
"나라키 경감이 말해주지 않았어? 데츠바는 내 마지막 증인이었다고."
"증인?"
"내가 경찰서를 그만두게 된 경위를 알고 있지? 나한테 지폐를 주고 도망친 차 사건 말이야. 그 차가 해바라기 공예의 차라는 걸 알아냈어. 데츠바는 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그럼 지폐를 마이코에게 건네준 사람은 누구였지?"
"운석에 맞아 죽은 마와리 토모히로였어."
"잠깐만. 그러면 마이코의 증인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건가."
"그래서 곤란한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마이코가 서에 돌아오게 되면 누가 가장 곤란할까?"
"교도 씨인가. 그 시끄러운 여자가 또 돌아온다고."
"다른 사람은?"
"이 사람이야. 또 실직하게 될테니."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며 말했다. 호시자와도 묘한 표정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동기는 너무 약하네. 예를 들어, 우다이 군 같은 경우는 어떨까?"
"우리 남편?"
"서에 마이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에 돌아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이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네, 그거. 하지만 그렇다면 소우지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할거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호시자와는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나라키 경감에게 가 봐."
"그 대신 교환 조건을 걸지. 마사오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건 안 돼."
"안 된다고? 왜?"
호시자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 마사오는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야."
"설마? 지금 어디에 있는데?"
"방금 전까지 카오리의 방에서 계속 조사를 받고 있었어"
"도대체 왜 그녀가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된 거지?"
호시자와는 힐끗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 말하지 않으면 나라키 경감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대로 돌아갈거라고."
"어쩔 수 없군. 마이코 상대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데츠바는 자신의 방에서 죽어 있었어. 사인은 청산성 화합물에 의한 중독사. 감식 보고는 아직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틀림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쓰러져 있던 책상 위에 약병이 놓여 있었는데, 그건 마사오가 주었던 약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마사오가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토시오가 항의했다.
"글쎄, 끝까지 들어봐. 그 약병 안에 독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어."
"그럼 그 약병 안에 독약 캡슐이 섞여 있었단 말이야?"
"그 약병이라고? 그럼 마이코는 그 약병을 알고 있는 건가?"
"토모히로의 철야 당시, 데츠바가 불편하다고 했었지. 마사오가 약은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복용하고 있느냐고 묻자, 데츠바는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아침마다 제대로 복용하고 있다고 대답하며 약병을 꺼내 보였어. 빨간 라벨이 붙어있었는데, 라벨 가장자리는 벗겨져 있었어."
"그건 중요한 증언이 될 거야. 그걸 본 사람이 또 있어? 그 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어?"
"그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소우지, 카오리........"
"모두 죽었어."
"그 약병이라면 나도 보고 있었어요."
토시오가 입을 열었다.
"라벨의 가장자리가 말려서 뒤집혀 있었어요. 틀림없어요."
"그 약병이 데츠바가 죽은 현장에 있었던거야."
마이코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약병에 독약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다는 거지?"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 약병의 캡슐에는 전부 독이 섞여 있었어."
"전부 다…….?"
마이코는 토시오와 눈을 마주쳤다. 의외의 일이었다.
"한 알도 빠짐없이?"
"그래, 한 알도 남김없이. 당연히 자살은 아니야. 자살을 하려면 모든 캡슐에 독약을 넣고 그 중에서 한 알만 마시는 짓은 하지 않을테니."
"데츠바는 정말 그 캡슐 독을 마신게 맞아? 다른 음식에 섞여 있던건 아니야?"
"아니야. 시체를 해부하면 녹아내린 캡슐도 발견될 거야. 약병이 마이코가 본 것이라면, 약병을 범인이 준비한 독약병과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라 캡슐만 바꿔치기한 것이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데츠바가 계속 그 약을 먹고 있던건 확실해?"
마이코의 목소리가 숨을 헐떡거렸다.
"데츠바는 매일 아침마다 약을 빠뜨리지 않았어. 특히 어제 아침에는 데츠바가 그 약을 먹는 것을 동거하는 가정부가 목격했어."
"어제는 죽지 않았었으니........"
"그래. 캡슐이 바꿔치기 된 건 어제 데츠바가 약을 먹고 오늘 아침 데츠바가 약을 먹은 지 24시간 사이에 이루어진거야."
"그 동안 약병은 어디에 있었지?"
"데츠바의 주머니에 있었어."
"밤에는?"
"데츠바의 방이야. 데츠바 저택은 문단속이 엄격할 뿐 아니라, 데츠바는 두 자식이 죽고 난 뒤부터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어. 밤은 물론 낮에도 필요 없는 문은 잠가두었어. 어제 나사 저택에 있었던 사람은 데츠바, 마사오, 가정부 세 사람밖에 없었어. 나사 저택을 드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낮에 누군가가 침입해서 나사 저택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사 저택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불가능해. 게다가 데츠바는 잠을 잘 때 자기 방에 자물쇠를 잠그고 잤다고."
"자물쇠를?"
"마이코도 가 봤으니까 알겠지? 데츠바의 방은 들어가면 서양식 응접실이고, 그 안쪽에 일본식 거실이 있어. 방의 출입은 응접실 문으로만 가능한데, 그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어."
"열쇠는? 찾았어?"
"데츠바 주머니에 있었어."
"그럼 마사오라도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을 갈아 끼울 수는 없잖아."
"나라키 경감은 마사오라면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그건 왜지?"
"데츠바는 마사오를 신뢰하고 있었어. 그래서 마사오라면 데츠바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군."
"그리고 마사오가 데츠바의 주머니에서 캡슐만 빼냈다는 거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다만 마사오라면 어떻게든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더라고. 말로 잘 다독여서 말이야."
"무슨 말?"
"그건 모르지."
"무슨 말을 해야 데츠바를 속일 수 있었을까?"
마이코는 팔짱을 끼고 미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마이코는 동굴을 통과하면 데츠바의 방에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데츠바의 약병의 캡슐을 바꾼 인간,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저녁에 데츠바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누구야?"
"가정부야. 이부자리를 깔고 데츠바를 방에 들여보냈고, 데츠바가 자물쇠를 내리는 소리도 들었다는군."
"아침은?"
"평소와 똑같아. 아침을 마사오와 함께 먹고 방으로 돌아갔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들이 이곳에 모이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간부들이 모인 건 9시 반부터 10시까지였어. 그때는 이미 데츠바는 죽어 있었지."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은 결국 데츠바를 만나지 못했군?"
"그래. 시간이 되어도 데츠바는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 응답도 없었고. 마침 우리도 왔던 터라, 그 자리에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지."
"데츠바가 죽어있었군."
마이코와 토시오가 데츠바의 방에서 동굴로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데츠바는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 이봐, 마이코. 이제 그만하자. 같이 가자고."
호시자와가 손짓했지만 마이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약병의 캡슐에 대해서."
마이코는 겨우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독을 넣은 캡슐을 오래 전에 데츠바의 약병 속에 섞어 놓은 게 아닐까 싶어서."
"마사오를 감싸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왜?"
"왜라고? 마이코답지 않네.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에는 모두 독약이 섞여 있었어. 그리고 데츠바는 어제까지 살아있었고. 마이코의 말대로 이전에 독 캡슐이 투입되어 있었다면, 범인이 약병 중 몇 개의 약병에 독을 섞어 놓았는데 데츠바는 그 다음 날부터 일반 캡슐만 골라 먹다가 일반 캡슐이 다 떨어진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독약 캡슐에 손을 댔다는거라고."
"그건 안 되나?"
"불가능하지. 데츠바는 일일이 캡슐을 고르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어. 누구나 하듯 약을 먹었어. 약병을 기울여 우연히 굴러나온 한 알을 집어 입에 넣는 거지. 가정부도 그렇게 증언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우연히 평범한 캡슐만 데츠바의 손바닥 위로 굴러나왔다는 것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
"절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을거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호시자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사관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라키 경감의 표정이 달라져있었다. 수사 도중 그의 눈앞에서 사람이 또, 세명이나 살해당한 것이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임에 틀림없다.
나라키는 끈질기게 질문을 반복했지만, 토시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로의 중심부에 동굴이 있다는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라키는 동굴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라키가 알고싶어한건 마이코가 자주 나사 저택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토시오는 자신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토시오를 대신해 마이코가 불려갔다. 마이코도 나라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이코가 카오리의 아틀리에에 배치된 수사본부에 들어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이코는 돌아와서 말했다,
"생각보다 마사오에 대한 혐의가 짙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사오 씨는 어디 계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데츠바의 응접실인 것 같아. 감시를 받고 있다는군.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요코누마 씨에게 보고서를 전달해야 해. 오늘 중으로 전달하기로 약속했거든. 대동 흥신소에 가야 해."
마사오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곁에 있으면서도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사오 씨는 어떻게 될까요?"
"저런 상태라면 구금될지도 모르겠어."
"우다이 씨는 정말 마사오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 데츠바가 죽어 있는 상태가 저렇다고 가정하면 말이야."
토시오는 침착함을 잃었다. 마사오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어느새 토시오의 손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구름이 낮아지고 있었다. 회색 하늘에 검은색 굵은 구름이 두 줄로,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기온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마사오가 데츠바의 캡슐에 독을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사오가 위험에 처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사 저택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마이코가 고개를 돌렸다. 토시오는 조용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마이코는 토시오의 발밑을 보았다. 토시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이코는 시선을 옮겼다.
"어?"
마이코는 한 점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사 저택을 크게 감싸고 있는 굵은 담쟁이덩굴의 뿌리 부근이었다.
"카츠 군, 보고 있어?"
토시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코가 무엇을 보고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잡초 속에 작은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이코는 몸을 숙여 눈을 땅에 가까이 가져갔다. 토시오는 별다른 관심 없이 그 빛나는 물체를 보았다.
"주사기네…… 아직 새 것이야."
마이코가 말했다.
그것은 가느다란 바늘이 빛나는 작은 주사기가 틀림없었다. 3분의 1 정도 액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왜 주사기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조금, 곤란하네."
마이코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런 걸 찾았다고 하면 또 발이 묶일 것 같아."
"제가 발견한 걸로 하고 형사에게 설명할게요."
그때의 토시오는 그저 나사 저택에 남아있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을까? 아니, 내가 남아 있을게. 너는 서류를 요코누마 씨에게 전달해줘. 전달만 해 주면 돼."
그래도 좋았다. 마이코와 헤어져 혼자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코는 에그의 문을 열고 서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전달하고 나면 사무실에 들러."
마이코는 하늘을 바라보며 에그에서 검은색 코트를 꺼냈고, 가방 속 양초와 손전등은 좌석에 올려 놓았다.
경관이 문에 매단 밧줄을 풀었다. 토시오는 에그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마이코는 경관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었다.
토시오는 도로로 나가자 속도를 줄이고 나사 저택 뒤편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잡목 숲 속에 좁은 길이 있었다. 에그를 거칠게 몰고 나아갔다.
미로 바로 뒤에 차를 세운 토시오는 에그에서 손전등을 꺼내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풀숲을 헤쳐 나가자 미로가 보였다. 인적은 없었다. 경찰은 미로 안쪽이 나사 저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듯 했다. 토시오는 미로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미로의 길은 이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중심부에 도착한 토시오는 마이코와 마찬가지로 울타리 아래를 살폈다. 곧 레버가 손에 닿았다. 세게 당기자 반응이 있었고, 중앙에 놓인 돌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몸을 날려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달리, 섬뜩함이나 공포감은 사라졌다. 손전등과 기억만 의지할 뿐이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좁은 통로를 지나 폭포가 있는 석실을 통해 동굴에서 가장 넓은 E 지점에 이르자 토시오의 심장 박동은 이미 빨라져 있었다.
마지막 돌계단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돌계단 위에 빛이 보였다. 토시오는 본능적으로 전등을 끄고 바위 그늘에 몸을 숨겼다.
빛은 천천히 움직이면서 돌계단을 내려왔다. 전등을 든 사람은 마사오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사오라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이나 놀라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마사오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자신을 알릴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용히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마사오가 돌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토시오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 부인"
전등 불빛이 멈췄다. 토시오는 계속 말했다.
"저입니다. 카츠입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전등을 켜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사오는 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토시오를 향해 서 있었다. 마사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기색은 알 수 있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계속 말하면서 다가갔다. 마사오는 뒤로 물러났다. 토시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토시오가 조용히 손전등을 비추자 마사오는 거부하는 듯 얼굴을 돌렸다.
토시오는 옆으로 다가가 손전등을 들고 있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저항하는 마사오의 힘은 너무 약했다.
"안심하고, 나를 따라오세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나직히 말했다.
"난폭한 짓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저를 어떻게 하려는거죠?"
마사오는 겁에 질린 눈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의 이런 눈빛을 전에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눈동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인, 저를 믿어주세요.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내 편? 그게 무슨 뜻이죠?"
마사오의 눈빛에 다소 침착함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쪽으로 가면 미로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어요."
토시오는 손전등을 검은 구멍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알아요."
이 말은 조금 의외였다.
"안다고요?"
"토모히로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토모히로에게 들었다고?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나가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소름끼쳐서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카츠 씨는 왜?"
그것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부인, 저를 싫어하세요?"
싫다고 대답해도 좋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싫다느니 뭐니 하는 것은 ......"
마사오는 토시오의 단호한 말투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세요. 길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려고요?"
"동굴을 지나서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미로 끝에 차를 두고 왔어요. 저와 함께 도망치시죠."
"도망친다고요?"
"조금만 더 있으면 당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올 겁니다. 데츠바 씨를 살해한 범인으로 말입니다."
"데츠바를 내가 죽였다고요 ......"
마사오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럴까봐 혼자서 나사 저택을 빠져나온거 아닌가요?"
"아니요."
부정하는 마사오의 말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마사오는 스타킹만 신고 있었다. 어떻게든 급히 도망칠 생각 뿐이었구나, 라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좁은 동굴에 들어가자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잡은 손의 촉감과 숨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시오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폭포야……. 이상하네요."
폭포의 석실에 들어서자 마사오가 작게 외쳤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소리였다.
"다리는 괜찮나요?"
토시오는 바위가 많은 길에서 말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마사오는 몇 번이나 걸려 넘어져 토시오의 가슴에 쓰러질 뻔했다. 출구가 가까워질 무렵에 두 사람은 거의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다.
미로 한가운데로 나오자 안개 같은 비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비가 오네요."
마사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시오는 아까부터 마사오의 무심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두려움이 사라진 마사오의 표정에는 천진난만함이 묻어났다.
동굴 입구를 닫고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을 잡으려 했다. 보니 손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팠나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으며 꽉 쥐고 있던 손전등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미로 출구에서 나사 저택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몸을 움츠리고 미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이 차로 도와주시는군요."
마사오는 길에 놓인 에그를 보고 말했다. 뒷좌석에는 마이코의 샌들이 놓여 있었다. 토시오는 샌들을 마사오의 발에 신겨주었다.
차를 도로로 올려놓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푸세요."
토시오가 말했다. 마사오는 뒤로 묶은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립스틱을 짙게 바르세요."
마사오는 가방을 열어 립스틱을 짙게 칠했다.
"뒷좌석에 우다이 씨의 코트가 있으니 입어보세요."
마사오는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마이코의 오렌지색 코트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사오의 행색이 많이 달라졌다.
국도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차량 검문때문인 것 같다고 토시오는 직감했다. 토시오는 에그를 길가에 세워두고 차에서 내린 뒤, 진흙투성이 옷 위에 자신의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다시 국도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예감이 맞았다. 검문이 있었지만, 경찰관들은 소형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마사오가 물었다.
"일단 슈젠지로 가죠."
토시오의 마음가짐은 정해져 있었다.
"슈젠지…… 여행 같네요."
마사오가 말했다.
"체육관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거리로 나가자 마사오가 신고 있는 마이코의 샌들이 눈에 띄었다. 토시오는 터미널 백화점에 들어갔다.
"돈이라면 있어요."
마사오는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이상하게도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갖고 싶어요."
마사오는 화려한 빨간 스카프를 보고 말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2/11/26

명탐정에게 장미를 - 시로다이라 교 / 김은모 : 별점 1점

명탐정에게 장미를 - 2점
시로다이라 교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허구추리>>로 유명한 시로다이라 교의 데뷰작.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망작 of the 망작입니다. 올해는 아직 다 가지 않았지만, 올해의 최악으로 꼽겠습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당연히 없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수록작별 상세 리뷰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메르헨 난쟁이 사건>>
'난쟁이 지옥'이라는 독약에 관련된 참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첫 번째 피해자 후지타 게이코는 난쟁이 지옥을 만들었던 다케바야시의 딸이었고, 두 번째 피해자 구니오는 다케바야시의 조수였다. 두 사람은 각종 언론사 등으로 보내진 <<메르헨 난쟁이 지옥>>이라는 동화 속 모습 그대로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인 다케바야시의 또 다른 조수였던 쓰루타는 첫 번째 사건에서의 알리바이가 완벽했다. 오히려 쓰루타는 후지타 가에 나타나 게이코의 딸 스즈카를 동화의 마지막 피해자 한나처럼 죽일 수 있다며 협박하는데...


어떤 이야기와 살인 사건이 맞물려 전개되는 작품은 많습니다. '마더 구스' 동요를 이야기 전개에 써먹었던 크리스티 여사님의 <<주머니 속의 호밀>>이나 밴 다인의 <<비숍 살인 사건>> 처럼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빼 놓을 수 없을테고요.
이렇게 범인이 무언가를 따라서 범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이거나 범행에 관련된 중요한 무언가를 숨기려고 했다는 등이 있습니다. 단순히 범인이 정신병자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이유는 특이했습니다. 난쟁이 지옥을 팔고 싶은데 독약의 효능 등이 잊혀졌으니, 이를 다시 세간에 알리기 위해 기묘한 잔혹 동화를 창작하여 뿌리고 동화대로 잔혹한 사건을 저지른 것이거든요.
쓰루타는 구니오의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구니오의 뒷통수를 쳐 그를 살해하고, 신출귀몰한 능력자 범인인양 후지타 가에 나타나 자기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며 협박했다는 진상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세가와 미유키가 사건의 모순을 눈치챈 계기가 된 동화 속 등장 인물 이름인 한나, 니콜라스, 플로라는 모두 후지타 가족 이름과 연결된다는 등, 단서 제공도 공정합니다. 히브리어 뜻까지 알아야 하는 등 좋은 단서로 보기에는 어렵지만요.

명탐정 세가와 미유키도 일본 만화 등에서 흔히 보았던 전형적인 쿨 뷰티, 차도녀 안경 선배 설정이기는 한데 명탐정으로서의 고충 - 진상을 드러내어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입는 - 을 묘사한건 신선하더군요.
물론 명탐정이 마음에 상처 따위는 입어서는 안되지요. 유불란의 말대로 명탐정의 혈관에는 강침이 돌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유불란도 감정에 휩쓸려 버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억지가 심합니다. 아이 사체로 만든다는, 주술에 가까운 독약 '난쟁이 지옥'의 설정부터가 억지입니다. 기묘한 동화를 창작하고, 성인 여성을 납치하여 온 몸을 난도질하는 엽기 범죄 역시 마찬가지에요.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독약 광고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어떤 장소에 '난쟁이 지옥'을 풀어서 사람들을 심부전으로 죽게 만들고, 매스컴에 '난쟁이 지옥'으로 일으킨 범죄라는 성명서를 내는게 훨씬 손쉽고 깔끔했을겁니다. 게이코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후지타 가에 독을 푸는게 더 현실적이었을테고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게이코에게 '난쟁이 지옥'에 대해 알린 뒤, 범행 현장으로 찾아오도록 시켰던 트릭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게이코가 '난쟁이 지옥'에 대해 업보가 있다고 생각한건 독을 이용하여 친모를 살해한 탓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죄의식을 느끼고 구니오의 덫에 스스로 빠질리 없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구니오 등이 알 턱이 없으니 이는 모순입니다. 게이코가 친모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경찰에 신고했을거에요.

딱히 명탐정이 필요했던 사건도 아니라는 문제도 큽니다. 쓰루타가 게이코 사건에서의 알리바이가 어쨌건 간에, 구니오 사건에 대한 수사만 철저히 진행했어도 사건은 해결되었을테니까요. 게이코는 퇴근길에 납치당한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현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알리바이가 생겼는데 아를 밝히지 못한건 경찰의 부실 수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납치는 못했더라도 공범이 있었다면 범행은 저지를 수 있잖아요. 세간의 화제가 된 강력 사건을 이렇게 허술하게 수사한다는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게이코의 편지를 후지타 가에서 내놓지 않는걸 경찰이 방관하는 것도 납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기발한 부분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독배 퍼즐>>
미하시의 후배로 스즈카의 가정 교사를 맡았던 야마나카 후유미가 '난쟁이 지옥'에 독살당했다. 가족이 모두 모인 티 타임에서 차를 마신 직후였다. 조사 결과 티 포트에 '난쟁이 지옥'이 가득 들어있었다. 누가, 왜 포트에 독을 넣었을까? 미하시는 이번에도 명탐정 세가와 미유키에게 사건을 맡기는데....

한마디로 최악. 진상은 명탐정 세가와 미유키를 흠모하게 된 스즈카가 명탐정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녀가 어머니의 유품인 '난쟁이 지옥'을 티 포트에 넣었던 거지요.
그런데 스즈카는 중학생입니다. 아무리 명탐정이 보고 싶어도 가족 모두가 먹는 차에 먹으면 바로 죽는 독을 다량으로 푼다는게 과연 말이나 될까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풀었다면 모를까요. 너무 써서 바로 뱉을 수 밖에 없다는건 증명되지도 않았고, 증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족이 모여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차가 쓰다고 바로 뱉어낸다는 것도 잘 상상이 안되고요. 야마나카 후유미가 미각 장애가 있어서 차를 삼켰다는 만화같은 설정도 거슬렸습니다.

어쨌건 명탐정은 불렀지만 이유를 알려줄 수 업어서 미하시 등이 내세운 가짜 진상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즈카가 계모 교코의 살의를 눈치채고, 독이 묻은 찻잔 흔적을 감추기 위해 독을 포트에 쏟아 부은거라는데, 비상식적입니다. 계모가 자기 목숨을 노리지만 계모와 아버지가 너무 사랑해서 그걸 숨기고 독을 가지고 도박을 한다? 아버지, 아니면 미하시에게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게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교코가 스즈카를 죽이려 했다면 '난쟁이 지옥'을 썼을리도 없어요. 그 독이 어디에 있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온 가족이 다 아니까요. 의학적으로는 병사로 판단되더라도, 아버지 가쓰히토와 미하시는 의심의 눈초리를 절대 거두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하시가 스즈카를 은밀하게 조종해서 후유미를 살해한 진짜 흑막이었다는 연극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건실한 청년 미하시 캐릭터와 어울리지도 않으며, 그래봤자 스즈카가 실행범이라는건 바뀌지 않으니까요. 이런 억지 연극을 꾸미는 것 보다는 차라리 스즈카의 뇌종양을 미유키에게 알리고, 경찰 고발을 취소해달라고 부탁하는게 나았을 겁니다.

제일 큰 문제는 명탐정 미유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스즈카만 걱정하고 피해자 야마나카 후유미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미하시와 미유키에게는 후배이기도 한데 왜 그녀의 죽음은 비통해하지도 않고, 진상을 덮으려고만 할까요? 살인범 스즈카를 무슨 순정만화 속 비련의 피해자처럼 묘사하는 마지막 장면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명탐정이 진실을 밝히는 바람에 비극을 불러왔다 운운하는데, 스즈카가 사람을 죽인건 사실이라서 뭐가 비극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 명탐정을 부르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만화같은 동기를 비롯하여, 뭐 하나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시리즈가 더 이어지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2015/11/20

내가 그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내가 그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예 시인 간바야시 미와코와 유명 작가 호타카 마코토의 결혼식에서 호타카가 독살당했다. 호타카에게 버림받은 동물병원 조수 나미오카 준코도 음독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동반 자살을 위해 호타카가 먹는 비염약에 독을 섞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결과, 그녀가 호타카의 비염약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와코는 약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던 용의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려 하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어 범인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단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는 추리적으로 훨씬 낫습니다. 특히 ‘필케이스에 전혀 다른 인물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는게 스루가 나오유키의 범행을 증명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합니다.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고 그것 자체를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당연히 호타카와 접점이 없는 다카히로는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남은 두 명인 스루가와 유키자사 중에서 스루가가 '호타카 전처의 짐을 맡았다'고 말했으니 범인은 스루가라는 결론이 도출되고요. 이 정도면 독자에게 충분히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미와코가 다카히로에게 케이스를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키자사 가오리가 호타카와 관계가 있었을 때 케이스를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경찰에서 수사를 보강할 필요는 있겠지만, 독자는 넘어가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나미오카 준코가 사망한 장소를 밝혀나가는 디테일—상품 전단지에 쓴 유서, 머리에 묻은 잔디, 샌들에 묻은 흙, 짝이 맞지 않는 휴대폰 충전기 등—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실험적인 시도 때문인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제법 많습니다. 우선 캡슐의 개수에 대한 지루한 공방이 그렇습니다. 자살 시체가 놓인 상황에서 과연 캡슐이 몇 개였는지를 세고 있을 정신이 있을까요? 스루가는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도, 방에 잠깐 숨어 있던 유키자사 가오리의 눈에 캡슐 개수가 들어왔다는건 영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매일 먹는 알약이 지금 몇 개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여섯 개 있었다’라고 증언해봤자, 그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핵심 증거(필케이스)에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기 위한 억지 설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또한 준코가 캡슐을 구한 시점이 금요일 오후였기 때문에 약통에 독을 집어넣을 틈이 없었다는 주장은, 뒷 부분에서 다카히로 혼자 1층에 있을 때 그녀가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었다는게 밝혀지면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누군가 집에 있을 때도 독약을 넣는 게 가능했다면, 밤에도 넣는 것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더해 마지막 추리 쇼는 작위적이라는 단점의 절정입니다. 가가가 수집한 증거라면, 이런 비공식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 대신 스루가를 바로 연행해 취조하는 게 더 합리적이니까요. 캡슐에 집착하면서 용의자들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있어야 소설로서 성립되니 트집 잡긴 애매하지만, 가가의 말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에 가까운 소설같은 이야기라는건 분명합니다.

용의자인 스루가 나오유키, 유키자사 가오리, 간바야시 다카히로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는 구성도 흥미로우나 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전개 역시 객관적이지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범인 시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가공한다는 점에서는 "악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악의"는 애초에 수기 형식을 빌린 서술 트릭물에 가까운 작품이니 비교 자체가 어렵지요.

또 호타카를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묘사하여 용의자들의 동기를 그리고 있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인 심리 묘사 탓에 오히려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에요. 특히 스루가의 속내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이 모두 자기 변호에만 급급하다 보니 오히려 간바야시 다카히로가 가장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스루가는 흠모하던 여인이 죽었고, 유키자사는 낙태를 한 바 있어 ‘죽음’과 연결되지만, 간바야시는 여동생에 대한 그릇된 애정을 제외하면 호타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동기 면에서는 가장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설령 동기가 있다 해도 여동생의 결혼식을 망칠 인물 같지는 않습니다. 동기를 드러내려면 본인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키자사가 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을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와 재미 모두 전작보다는 낫지만, 다양한 단점이 뚜렷한 범작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마찬가지로 정답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추리소설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을 마무리한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2024/06/29

직장 내 살인사건 -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 박종대 : 별점 2점

직장 내 살인사건 - 4점
헤너 코테 & 크리스티안 룬처 지음, 박종대 옮김, 표창원 해제/지식트리(조선북스)

일의 조건이나 일자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의 대표격은, 취업을 위해 자기 윗 순위 대기자(?)를 살해한다는 내용의 걸작 "도끼"일 겁니다. 작품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읽으면서 이런 류의 실화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만 보면 이런 실화를 다룬게 분명해 보이는 논픽션이 있더라고요. 독일의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 작가가 쓴 책으로,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그간 눈에 뜨이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쳤네요. 주말을 맞아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볼프가 푀펠에게 법정에서 총격을 받아 살해당했던 1927년 사건은 말 그대로 '직장 내 살인사건'입니다. 볼프는 같은 회사 동료 푀펠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푀펠의 해고와 이익 배당금 지급 방해, 그리고 인격 모독에 앞장섰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읽어보니 죽어도 싸다 싶을 정도로 못되게 굴었더라고요. 범인 푀펠이 오히려 꽤나 선처를 받았다는 이후 판결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1909년 호프리히터 독살 사건은 "도끼"를 연상케 합니다. 호프리히터는 출세길이라 할 수 있는 참모 본부에 들어가기 위해 엘리트 장교들에게 독약을 보냈고, 그 중 한 명인 마더 대위가 독약을 먹고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독약을 '정력제'라고 속이고 보낸 범행 과정, 호프리히터가 범인임을 밝혀내는 수사 과정 모두 한 편의 범죄 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스가 유명한 철학자 슐리크를 살해한 사건도 "도끼"와 동기는 비슷합니다. 한스는 학계의 유명인사이자 실력자 슐리크의 눈 밖에 나서 먹고 살 길이 막혀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역시, 비슷한 실화가 많긴 많네요.

이렇게 직장 내 문제 때문에, 혹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에 더해,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직장을 찾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범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1883년, 직업 소개를 미끼로 다수의 여성들을 살해한 생크와 그 일당들의 범행, 그리고 1891년 거의 동일한 방식이었던 프란츠 슈나이더와 그의 아내가 저질렀던 범행처럼요. 그러나 이 범행들은 '직장 내 살인'으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직장'은 피해자들을 유혹한 무기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금품을 노린 살인 강도에 불과한 탓입니다. 
1964년의 음식점 부부 살인 사건, 1905년의 루스 중령 살인 사건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단순 강도 사건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피해자와 범인이 주종 관계였지만, 이들의 관계 때문에 범행이 일어난건 아니니까요. 1896년의 베르너, 그로세가 레비 변호사를 살해한 사건 역시 그 옛날에 미성년자들이 상당히 체계적인 계획하에 저지른 범죄라는 점은 놀랍지만, 단순 살인 강도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외에도 '직장 내 살인'과는 별 관계없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직장을 잃은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2006년의 후베르트 사건을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회적 타살일 수는 있겠지만, 이를 직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명 소설 "비아말라"의 소재라는 클라인슈로트 살인 사건도, 잔혹한 가정 폭력을 저지르던 아버지를 나머지 가족들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직장 내 살인 사건이라고 볼 수 없고요. 동성애 관계에 빠졌다가 파트너를 살해한 베르노 사건, 2002년, 퇴학으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사회보호 대상자로 전락하게 된 슈타인호이저가 학교로 쳐들어가 17명을 사살한 사건도 그러합니다.
이런 사건들보다는 서두에 짧게 언급되고 지나가는, 학대받던 하녀들이 주인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1933년 파팽 자매 사건이 더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유니스 파치먼이 주인 가족을 살해한다는 소설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의 원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직장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 비중이 적다는건 분명 기대와는 어긋나며, 시대도 1차대전 이전 제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게 많고 지역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만 한정된다는건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04/10

로마 모자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이기원 : 별점 1.5점

로마 모자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월 24일 월요일 저녁 로마 극장. 인기리에 공연 중이던 연극 "건플레이"의 2막이 끝나갈 무렵, 좌측 LL32번 좌석에서 앉은 채로 독살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이름은 몬테 필드로, 변호사이지만 수많은 악행으로 유명했다. 수사에 나선 퀸 경감과 아들 엘러리는 피해자의 모자가 사라진 사실에 주목하는데.....

기념비적인 엘러리 퀸데뷰작으로 이른바 '국명'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엘러리 퀸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문체가 지나치게 딱딱하고 장황하며, 탐정인 엘러리 퀸의 과시욕과 허세가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의 저자 다카미 요시히사처럼 잘난 척 하는 탐정과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거죠. 이 작품은 그래도 데뷰작인 덕분인지 그렇게까지 허세가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이런저런 고전 속 대사를 인용하는 정도라 충분히 참을만 하더군요.

하지만 의외로,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에서 기대했던 추리적인 요소가 완전 실망스러웠습니다. 변호사이자 비열한 악당인 피해자 몬테 필드의 시체 옆에는 그가 쓰고 왔을 모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게 핵심 요소인데, 엘러리는 '범인이 몬테 필드의 모자를 자기 것 대신 쓰고 갔고, 범인의 모자는 극장 안에 남아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즉 연극 소품의 모자일테니, 연극 배우가 범인이다'라고 추리합니다. 그런데 모자를 겹쳐서 쓰거나, 자기 모자 안에 몬테 필드의 모자를 어떻게든 구겨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모자를 구겨서 품 안에 넣을 수도 있었을 테고요. 몬테 필드가 쓰던 모자는 크고 화려하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런 모자를 쓰면 눈에 더 잘 띄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꼭 배우인 스티븐 배리가 아니라 극장 지배인이나 극장 홍보 담당자 등이 범인일 가능성은 왜 배제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티븐 배리만 사건 당일 극장 밖으로 나갈 때 양복을 입고 있었다는 설명이라던가, 초반에 꽤 중요하게 언급했던 머리 크기에 대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에의 도전'이 있기는 하지만, 책에 등장한 정보만으로 범인을 특정하기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게다가 몬테 필드가 모자 안에 협박에 사용한 서류를 넣고 다녔다는 설정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몬테 필드는 협박 대상자와 같은 수의 모자를 구입한 뒤, 이를 비밀 장소에 숨겨 놓고 협박 대상자를 만날 때 마다 비밀 장소에서 모자를 꺼내어 쓰고 나갔다고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런 비밀 장소가 있었다면, 서류만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가지고 가면 되잖아요? 왜 비싼 모자를 다수 구입해 가면서 그 안에 서류를 숨겼을까요? 마지막으로, 묘사만 보면 당시 신사들이 모자없이 다니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나 본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도 잘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모자를 중심으로 추리가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한 추리와 설정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 외의 여러 등장 인물의 묘사도 불필요한 부분이 많고 지루했고요. 어차피 극장 내 관계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에서, 극장 외 다른 인물들로 분량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독살에 사용된 테트라에틸납이라는 독약은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휘발유에 첨가되기 시작한 물질로, 작 중 전문가 존스 교수에 따르면 독살에 굉장히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색투명하고 오로지 희미한 냄새만 나지만 독성은 강력할 뿐 아니라, 양조용 증류 장치만 있으면 휘발유를 가열하여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완벽한 독약은 본 적이 없는데, 왜 다른 작품에 사용되지 않았을까요? 궁금해집니다. 참고로 테트라에틸납은 오래전에 첨가되던 물질로 지금은 모두 퇴출되었다니, 혹시라도 시도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독특한 독약의 존재가 작품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작가와 탐정의 데뷰작이라는 역사적 가치 때문에 0.5점을 더했을 뿐 그 외의 다른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준이 그닥 높지 않은 편인 국명 시리즈 중에서도 최악으로, 엘러리 퀸의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3/06/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3 나사 저택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3 나사 저택
"건드리지 마!"
마이코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건드릴 리 없었다. 토시오는 다다미방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이코는 데츠바 옆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데츠바의 양손 손가락이 비틀려 있었다. 죽기 직전에 데츠바는 어떤 고통에 시달렸을까. 의복 가슴 부분의 흐트러짐도 고통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방금 전에 죽었네."
마이코는 토사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검은 칠을 한 책상에는 주홍색 쟁반이 놓여 있고, 물이 반쯤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쟁반 옆에는 뚜껑이 잘 닫힌 작은 빨간 병이 놓여 있었다. 낯익은 병이었다. 병 바닥에는 여전히 몇 개의 빨간 캡슐이 들어 있었다.
마이코는 방을 둘러보았다. 방의 가구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미로로 돌아가자. 누군가 발견하면 귀찮아질테니까."
마이코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앉아있던 다다미 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다미방 안쪽으로 돌아갔다. 낡은 도구들이 쌓여 있는 방에 들어서자 마이코는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젠장 ...... 드디어 나의 마지막 증인까지 죽여버렸군……"
라는 말을 내뱉었다.

"데츠바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동굴의 세 갈래 길, 마이코가 말한 E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 토시오는 물었다.
마이코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그것은 데츠바의 죽음을 목격한 뒤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 몸을 추스르기 위한 것 같았다.
"자살이 아니야. 독약을 먹은 거야."
마이코는 그렇게 단정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병을 기억하겠지? 그건 마사오가 데츠바를 위해 준 약이었어. 만약 데츠바가 자살했다면 죽기 직전에 그 병을 놓아두었을리 없어."
"그렇군요."
"데츠바는 아침 식사 후 늘 그렇듯이 그 약을 먹었을거야."
"식사에 독극물이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토시오는 마사오가 준 약에 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지. 식사에 독이 들어있었다면 당연히 식사 중에 쓰러졌을테니까."
"식사를 누군가가 치웠을 수도 있잖아요?"
"안 돼. 책상 위의 토사물은 책상이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에서 토한 것이니까."
"컵의 물 속에 독극물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마이코는 멍하니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책상 위에 약병이 있는 이상, 독극물은 그 약에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럽지 않겠어?"
"그건 그렇긴 하지만 ......"
"당신은 마사오가 데츠바에게 건네준 약병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분명 누군가가 똑같은 캡슐에 독을 담아서, 그 약병과 똑같은 약병에 담아서 바꿔치기 한 것이겠죠."
"하지만 데츠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썼을 거야. 최근에 가족이 네 명이나 죽었으니까. 데츠바가 가지고 있는 약병을 바꿔치기 할 틈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걸."
"......독극물 캡슐을 하나만 준비해서 데츠바의 약병에 몰래 넣었다는건 어떻습니까? 카오리 씨와 소우지가 죽기 전에요. 데츠바가 아직 자기들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말입니다."
"호오......."
마이코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그럴싸한 말을 하는군. 맞아. 독약 캡슐을 하나만 넣었다면 가능성은 있어. 책상 위에 있던 약병 안에 얼마나 많은 캡슐이 남아있었을까?"
"열 알도 채 안 됐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그 약병이 캡슐로 가득 차면 몇 알 정도 들어갔을까?"
"오십 알은 들어가겠지요."
"데츠바는 그 캡슐을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습관이 있었어. 따라서 범인이 독극물을 넣었다면 거의 40일 전에 넣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역시 가장 쉽게 독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마사오야"
"독은 무엇일까요?"
"청산성 독극물인 것 같더군...... 마사오는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
"독극물은 꼭 병원이 아니어도 구할 수 있어요. 청산가리라면 도금에도 쓰이지 않나요? 해바라기 공예는 작지만 도금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
마이코는 손전등으로 동굴의 바위 하나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거울로 햇빛과 놀고 있는 것처럼 전등 불빛이 춤을 추었다.
"마사오 씨는 동기가 없어요."
토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
마이코는 무심코 말했다.
"데츠바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와리 가문의 유산은 마사오의 것이야."
"유산이라니........"
"있어."
마이코는 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건, 제니야 고헤에가 덴포 14년에 오노 벤키치에게 상담했던게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야."
"제니야 고헤에가 ......"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 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오노 벤키치의 츠루슈일록 첫머리에 적혀 있었잖아.
‘….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카네이시는 당연히 고헤에의 집이야. 비가 오든 말든 벤키치는 카네이시에 갔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었음을 알 수 있지. 카네이시에서 은밀한 회의가 있었고, 고헤에는 중요한 일을 벤키치에게 부탁했던거야. 하지만 쉽게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고심 끝에 승낙을 미루었고."
"그게 뭐였을까요?"
"다음 날들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 다음 날은 ‘도면은 진전이 없다….. ‘라고. 너무 큰 일이라서 도면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던거야. 그리고 다음 날, 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를 가지고 찾아왔어.…..구우에몬에게 맡길까, 벤키치는 고민했지. 또 다음 날,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통풍이 회복된 우타는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들었어. 이 기록은 구우에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 벤키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
"그 구우에몬이란?"
"마와리 사쿠조야."
마이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은 가명을 지을 때 아예 엉뚱한 이름으로 짓지는 않는 법이야. 그때 스승 벤키치는 칼로 베지 못하는 말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 ……..말을 베는 마와리 사쿠조, 어때? 딱 맞는 이름 아니야?"
"............"
"구우에몬은 그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번을 떠나 도망쳐 버렸어. 명목상으로는 시녀에게 손을 댔다고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야. 구우에몬은 가나자와를 떠나 오나와로 옮겨왔지."
"사쿠조의 아내는 오나와 태생이었어요."
"거기서 비롯되었겠지. 구우에몬은 생계를 위해 가나자와에서 배운 기우라기리코보시(起上り小法師)와 쌀을 먹는 쥐에서 힌트를 얻은 키츠키(きつつき)를 만들기 시작했어. 카라쿠리를 배웠던 만큼, 섬세한 일에 능했을테고. ……생활이 안정된 후, 구우에몬은 가게 이름을 츠루슈도(鶴寿堂)로 짓고, 아이에게도 도키치(東吉)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 벤키치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지 않아?"
"그렇다면 구우에몬이 물려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제니야 고헤에의 입장이 되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 모르겠습니다."
"이봐.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 고헤에는 절정의 시기였어. 나이는 칠십. 하지만 가가번에서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세간의 시기와 질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 오히려 더 강하게 느꼈을거야. 지금 손을 잡고 있는 히데미도 병이 들었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으면 내일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요도야 진고로(淀屋辰五郎)의 사례도 있다, 사소한 일로 상인이 재산을 몰수당한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시대였어. 자신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이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말했다,
"재산의 일부를 은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토시오는 생각에 잠겼다. 재산의 은닉.......그래, 그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 금화를 담은 항아리가 발굴되는 경우가 있다. 재산을 은닉하는 것은 당시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식적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제니야 고헤에의 자산이 삼백만 양이었다니 10%만 해도 삼십만 양이야. 천량상자가 삼백 개나 된다고."
마이코는 회계업자처럼 계산을 했다.
"고베에가 아무리 해운업자였더라도 그런 막대한 돈을 다른 번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노 벤키치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벤키치는 젠고 재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두뇌였어. 하지만 벤키치는 거절했어. 벤키치의 은둔 생활을 보면 상상이 가. 벤키치는 지금까지 없던 가라쿠리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번주의 눈을 피해 재산을 은닉하는 일은 꺼려했어. 너무 세속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벤키치는 고민 끝에 모든 것을 구우에몬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어."

"구우에몬이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랬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벤키치에게 푹 빠져 있었고, 동시에 제니야 고헤에의 신봉자였다고 생각되는군. 그렇지 않다면 벤키치가 구우에몬에게 상담할리도, 고헤에가 일을 맡길리도 없었을테니까."
"구우에몬은 그 일에 성공했군요?"
"그렇지. 구우에몬은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탈번 후 가나자와를 떠났지. 벤키치는 그 때 마지막 작별의 선물로 역립 인형을 주었을테고. 그리고 어떤 계획에 의해 고헤에의 재산의 일부가 이 오노와에 숨겨졌던거지. 장소는 이 동굴 안이 틀림없을거야."
"그 재산은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구우에몬은 정직한 사람이었어. 고베에의 재산을 맡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스스로 장난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던 중 가가 번에서는 결국 집정관 히데미가 죽어버려서 반대파가 득세하게 되었어. 고헤에는 공식어선의 지위를 빼앗긴 뒤, 하호쿠가타 매립공사에 착수했다가 투독사건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했고, 제니야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했어. 구우에몬은 가슴이 아팠을거야. 유산을 제니야에게 돌려주어야 했는데 불가능해져버렸으니까. 결국 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병으로 죽고 말았지."
"그 사실을 자신의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물론, 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들 도키치는 한, 두 가지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어."
"마와리 호도말씀이시죠?"
"그래. 도키치는 자신의 이름도 버린 뒤 호도라 자칭하고, 츠루슈도를 없애고 해바라기 공예라 했지. 문장까지도 바꾸었고. 이유는 하나야. 가나자와와의 인연을 끊고 고헤에의 재산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했던거야."
마이코는 손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호도는 요코하마의 도박판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그 자금은 고헤에의 재산 중 일부였을거야. 하지만 호도는 상술에 능한 사람이었어. 은닉 재산의 대부분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마이코는 계속했다,
"호도는 요코하마를 떠나 오노와로 이주했어. 물론 동굴에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야. 그리고 기괴한 나사 저택을 지었어.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이런 건물을 지은건 아까 말했듯이 이 저택에 미로 같은 것이 있어도 부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야. 그 미로는 지하 동굴의 지도이자 입구였고. 평범한 건물에 미로 따위를 만든다면, 미로는 금방 관심의 대상이 되었겠지. 그러면 미로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동굴도 발견되고 말았을테니까."
"나사 저택 전체가 입구를 숨기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미로였던 셈이군요."
"그리고 호도의 언행도 생각해보면 마찬가지야. 호도는 기행이 많은 남자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격 역시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꾸민 것이었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서 숨겨진 재산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동굴 속에 재산을 숨겨놓는건 과연 호도가 할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호도가 나사 저택을 만든 진짜 속뜻은 바로 이것이야."
"호도는 이 사실을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아마도? 미로로 그린 지도만 남겼지. 설령 아들에게 전했을지 몰라도 데츠바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어. 데츠바는 전쟁 후 가난을 경험했잖아? 만약 알았더라면 당연히 은닉 재산을 사용했을 거야. 그리고 둘러보니 이 동굴이 발견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 같아."
"누가 발견했을까요? 토모히로, 아니면 소우지?"
"둘 다겠지. 소우지는 오노 벤키치의 역립 인형을 발견했어. 역립 인형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 작은 방에 있었고........ 토모히로가 가나자와의 다카라다 노인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두 사람 뒤에 찍힌 소나무 숲의 모양이 카네이시의 소나무 숲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토모히로는 가나자와에 갔었군요"
"그렇다면 마사오도 당연히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에 대해 들었을거야. ...... 이제 가 봐야겠다."
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약한 햇살이 비췄지만,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눈에는 꽤나 눈부셨다.
마이코는 남은 양초와 손전등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의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마이코는 진흙을 털어낸 뒤, 닫힌 담벼락 문 아래로 손을 뻗었다.
물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돌판이 조용히 동굴 입구를 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미로의 문을 열었다.
"정말 잘 만들었어."
마이코는 오각형의 돌탁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타리 사이로 몸을 넣었다.
미로를 걷던 중, 미로 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을 만났다. 두 사람의 모습을 쫓고 있던 순경이었다.
"어머, 마중 나왔어요?"
마이코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
경찰관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길을 잃었어요. 출구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게 ......"
"그건 곤란하네요. 아마 이쪽인 것 같은데요."
마이코는 순경과 자리를 바꾸어 먼저 나섰다.
미로를 빠져나와 소정 쪽으로 가니 호시자와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덕분에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어요."
마이코가 지나가려고 하자,
"나라키 씨가 만나고 싶대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오호. 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구나."
"그런 게 아니야. 데츠바의 시체가 발견됐어. 이제는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고. 각오해."
마이코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4/04/27

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점

7인 1역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농락당해 모든걸 잃은 의사 사사하라가 범인이라 생각했다. 사건 현장, 그리고 청산가리 봉투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가 사망 추정일에 레이코를 방문한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드 섬유회사의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서 사사하라는 풀려났다.
그런데 사와모리 말고도 레이코가 평상시 원수라면서 이를 갈고 협박해오던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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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장편. 1984년 첫 출간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렌조 미키히코는 정통 본격물보다는 "회귀천 정사"같은 서정적인 문체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렌조 미키히코하면 떠오르는 작품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과 전개를 보여줍니다. 미오리 레이코 시점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하는 범죄물이자 도서 추리물로 시작해서,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드러나는 시점부터는 하우더닛 본격 추리물이 되는 작품이거든요.
 
가장 인상적인건 트릭입니다. 트릭을 잘 사용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꽤 현실적인 트릭을 멋드러지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트릭을 조금 설명해 드리자면, 레이코의 과거 직장 동료 이시가미 요시코는 레이코가 성형 수술을 했다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레이코는 요시코를 꼬드겨 자기처럼 성형 수술을 시켜준 뒤, 그녀를 독살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자택 침대 위에 놓아 두고, 7명의 원수들을 한 명씩 불러 거실에서 한바탕 연기 - 나에게 농락당한 의사 사사하라가 나를 죽이려고 독약을 가져왔지만 실패했다. 독약은 저 술잔에 들어있다라며 술잔을 바꿔치도록 유도 - 를 펼친 뒤, 술을 마신척 하고 침실로 뛰어들어가 곧바로 몸을 숨겼습니다. 뒤쫓아 침실로 온 손님들은 레이코와 똑같은 시체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술잔을 바꿔치기해서 레이코가 죽었다고 여기고 도망쳤고요. 이렇게 해서 7명이 한 명을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는 범죄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 트릭을 성공시키려면 마지막에 레이코가 진짜로 독을 먹고 죽은 뒤, 그 시체를 숨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사사하라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청산가리를 준비할 수도 있었고, 세간에는 레이코 때문에 신세를 제대로 망친걸로 알려져있으니 독을 레이코 집에 가져온 동기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더할나위 없었던 덕분이지요.

단서도 적절히 제공됩니다. 사사하라가 경찰에 체포된 후, 레이코의 집을 방문할 날짜를 대충 얼버무리는게 대표적입니다. 무려 7명을 대상으로 벌인 계획이라 이틀에 걸쳐 진행했던 탓에, 날짜를 특정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날짜를 대충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일의 알리바이만큼은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는걸 통해, 7명 모두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레이코의 입으로 완벽한 알리바이 계획이 설명되었기에, 이를 이용하여 15일 이후 범행이 일어났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본인들은 15일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금붕어 1마리가 죽은 수조를 보고 수사를 펼쳐서 원래는 7마리를 샀다는걸 알아내는 등의 경찰 수사 과정도 합리적으로 그려집니다. 결국 경찰은 이러한 꼼꼼한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사건 진상에 도달하고요. 이렇게 경찰이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건 여러모로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특히 레이코, 하마노, 사사하라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데 경찰까지 신경써서 분량을 안배해 준 정성(?)이 신기하더라고요. 사실 경찰은 헛다리를 짚는 수준으로 그쳐도 내용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사와모리의 완벽한 자백 유서를 확인한 뒤에 개인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없지요. 이건 작가가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라는걸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캐릭터와 상황, 심리를 묘사하는 방법과 문체가 굉장히 옛스러워서 확실히 40여년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인 미오리 레이코에 대한 캐릭터 설정이 영 별로입니다. 그녀가 7명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요. 7명 모두 그녀에게 아픔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정당한 거래 관계였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얻은게 훨씬 더 많아 보여요. 모두가 선망하는 대 스타가 되어 큰 돈을 만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멋대로 그들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건수를 잡아 협박한다? 솔직히 죽어도 싼 여자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피해의식에 가까운 복수에 동참해서 스스로 그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하는 사사하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게 아무리 푹 빠져다 한들, 이건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현대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작가가 썼더라면 아마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결과물은 조금 부족합니다. 최소한 '동기'만큼이라도 설득력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2023/03/05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아와사카 쓰마오 : 별점 3.5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구회사 해바라기 공예의 후계자인 마바리 토모히로는 아내 마사오와 함께 해외 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중, 떨어지는 운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토모히로의 의뢰로 그 뒤를 쫓던 흥신소 사장 우나이 마이코와 조수 카츠 토시오의 바로 앞에서였다. 마이코와 토시오는 사고 당시 마사오를 구해준 인연으로 은근슬쩍 마바리 가문에 접근하는데, 장례식날 토모히로의 어린 아들 토우이치를 시작으로 뒤이어 토모히로의 동생 카오리, 소우지, 가문의 당주 테츠마까지 차례대로 살해되는걸 목격하게 되었다. 마사오에게 마음을 빼앗긴 토시오는 유력한 용의자 마사오와 함께 도주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만 소개되어 있는 아와사카 쓰마오의 미소개 장편. 1977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기도 하지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원서를 읽는건 언제나 힘든데, 이 작품은 기계장치 자동 인형에 대해 장황한 소개가 포함되어 있어서 더 힘들더군요. 그래도 완독을 하기는 했네요. 무려 4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해당할 뿐더러, 마바리 가문의 호도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나사 저택과 정원에 있는 미로, 그리고 여러 장난감과 기계 장치 인형 들이 중요하게 등장하여 흥미를 계속 자극하는 매력이 넘치는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번역기의 도움도 컸고요.

정통 본격물 작품을 발표했던 작가 답게 굉장히 트릭넘치는 살인 사건들이 인상적인데, 우선 어린 토우이치의 수면제 과다 복용에는 뚜렷한 단서가 있지는 않습니다. 토모히로가 단 것을 주지 않는 교육을 했다는 등은 모두 정황 증거일 뿐이지요. 하지만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정자에서 눈에 총을 맞고 죽은 카오리, 기계에 장치된 독극물 주사로 살해당한 소우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약병 속 약을 독약으로 바꿔치기 당해 죽은 테츠마 사건은 모두 불가능 범죄로 추리 애호가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사용된 트릭도 기발했습니다. 카오리는 알고보니 총에 맞은게 아니라, 총알이 발사되도록 장치된 만화경을 들여다보다 죽었던 겁니다. 앞서 카오리가 만화경에 관심이 많다는 설명도 있고, 그녀가 죽기 전 '마른 우물 (카레이도)' 이라는 말을 남겼다는건 확실한 단서이기 때문에 - 카레이도스코프 (만화경) 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임 - 공정함 측면에서도 만점을 주고 싶네요.
소우지 사건은 거꾸로 서는 기계 인형 태엽 장치에 설치된 주사기가 금방 드러나는데, 이는 굉장히 기묘한 수수께끼로 이어집니다. 소우지가 마사오, 마이코와 토시오 앞에서 기계 인형을 조작하다가 죽지 않았다면, 인형 속에 설치된 주사기는 쉽게 발견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최소한 카오리 살해 직후에는 장치를 설치해서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어요. 저택 안에 경찰이 가득했으니까요. 이는 토모히로 장례식으로 관계자가 많았던 시점에 토우이치를 살해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추리로 이어져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테츠마의 약을 바꿔치기한 범행도 기발하다는 점에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토시오는 알약 하나만 바꿔치기한 일종의 시한폭탄 장치라 생각했지만, 경찰 조사결과 약병 안의 캡슐 내용물은 모두 독약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즉, 약병 내용물을 통째로 바꿔치기했어야 했다는거지요. 하지만 테츠마는 연이은 살인 사건으로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기에 이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미로에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던 마사오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고요. 그녀가 비밀 통로로 밤중에 테츠마의 방에 몰래 침입해서 약을 바꿔치기했다는 거지요. 하지만 진상은 애초 -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 에 약은 바꿔치기되어 있었고, 다만 딱 한개만 몸 속에서 녹는 재질의 캡슐이었다는 겁니다. 다른 캡슐은 모두 녹지않는 플라스틱이었던거지요. 일종의 시한폭탄 장치는 맞는데, 그 발상을 한 번 더 꼬아 놓은 발상은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저택 내 오각형 미로에 얽힌 수수께끼도 볼만했습니다.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니라,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장치가 되어있었으며 이 비밀 통로는 실존인물 제니야 고헤에의 숨겨진 재산과 관련이 있었다는건데, 에도 시대 상인 제니야 고헤에, 그리고 에도 시대 일본 발명가인 오노 벤키치와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그럴듯하게 짜 낸 서사는 상당히 설득력있었습니다. 제니야 고헤에가 변화하는 시대에서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해 재산 일부를 은닉하려 했다는건 충분히 그럴싸했으니까요. 덕분에 <<다빈치 코드>>같은 팩션 보물찾기 모험물스러운 재미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토시오가 처음 미로에 들어갔었을 때 담벼락을 따라 갔지만 중심부에 갈 수 없었던건, 미로 내부의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으로 이어지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미로에 대해서도 기계 장치 인형만큼이나 상세하게 설명되는데, 이 역시 현학적인 재미는 충분히 충족시켜 주고요.

범인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범인은 토우이치 군이 죽은 날 많은 사람들이 토모히로 씨 장례로 모일 줄 몰랐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토모히로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죠. 또 카오리 씨가 죽은 날, 카츠 일행이 나사 저택에 가는 것을 몰랐던 사람이며 같은 날, 마사오 씨가 소우지의 방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마지막으로 데츠바 씨가 살해당했을 때, 마사오 씨가 나사 저택에서 잠을 자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즉, 범인은 토모히로였고, 토모히로는 알리바이를 위해 자기가 출장간 동안 사건이 일어나도록 정교한 장치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과연 장난감 전문가다운 발상의 범행이었달까요. 범행 동기인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과 친부 류키치 때문에 생긴 원한도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 많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해가 안되는건 마바리 호도가 나사 저택과 미로를 만든 이유입니다. 호도는 제니야 고헤에의 숨겨진 재산을 이미 찾아내었던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재산을 모두 현금화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재산만 따로 숨기면 될 일이었어요.
게다가 미로는 비밀 통로 어디에 보물이 놓여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는데, 도대체 뭘 위해서 이런걸 만들었을까요? 자식들에게 알려주려면 그냥 말로 설명해줘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지상에 거창한 미로이자 보물 지도를 만들 까닭은 없었습니다. 마이코는 나사 저택을 이상하게 만든건, 미로가 이상하다는걸 숨기려는 목적이었다는데 그럴거면 아예 안 만드는게 훨씬 낫잖아요?
그리고 토모히로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동 살인 장치를 만들었다는건 합리적이지만, 카오리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이 저택에 깔리는건 마찬가지였을겁니다. 즉, 소우지와 테츠마마저 연이어 살해된다면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 드네요. 이런 거창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 보다는 이미 위치를 파악한 보물을 그냥 빼돌리는게 더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마이코의 과거 경찰 시절 누명을 증명해줄 사람이 마바리 테츠마였다던가, 카츠 토시오가 마사오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설정도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불필요한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이런저런 리스트 (이런 거라던가 이런거이런거....)에서 빠짐없이 언급될 정도의 재미를 안겨다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언젠가 국내 출간이 되어서 많은 분들이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오노 벤키치의 가라쿠리 인형 (기계 장치 자동 인형) 소개 동영상이 있더군요. 생각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아니긴 한데, 에도 시절에는 충분히 먹혔음직 해 보입니다. 아울러 덧붙이는데, 발표 직후인 1979년에 영화화되었었는데 주연이 무려 마츠다 유사쿠! 낡은 느낌 가득하지만 영화도 한 번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2026/01/25

명탐정 코난 : 17년 전의 진상 (2025) - 야마모토 야스이치로, 카마나카 노부하루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티빙에 업로드되었길래, 작년 말에 기말고사가 끝난 딸과 오랜만에 감상한 코난 극장판입니다. 리뷰가 많이 늦었네요. 정확히 말하면 해당 내용의 TV 시리즈 총집편입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현재 벌어진 체스 대회 살인 사건과 17년 전에 있었던 아만다 휴즈와 하네다 코지 살인 사건이 이어지며 전개됩니다. 현재 체스 대회에 참가했던 쿠로다 관리관이 17년 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설정이지요.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추리적으로 완성도가 치명적으로 낮습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에요. 우선 체스 대회 살인 사건은 ‘다이잉 메시지’가 핵심 단서로 등장하는데, 피해자가 죽기 전에 굳이 이런 암호 같은 메시지를 만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범인의 이름을 쓰면 되니까요. 트릭을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범인이 잔을 깨는 척 자작극을 벌인 트릭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네덜란드의 눈물’이라는 일종의 유리 덩어리를 활용해 잔을 깨뜨렸다는 트릭인데, 번거롭고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한 손으로 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네덜란드의 눈물 끝부분을 부러뜨릴 만년필을 사용하는 모습도 어색할 테고요. 이럴 바엔 잔 깨지는 소리를 녹음해 틀어놓은 뒤 컵을 떨어뜨려 깨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원작 이야기를 읽지 않아서 왜 검은 조직과 럼이 아만다를 살해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독약이 완벽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조직원이 호텔에 침투해 보디가드들을 제압했다면 굳이 독을 사용할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괜히 다이잉 메시지를 남길 시간만 준 셈이니까요.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독약 설정도 유치했고, 다이잉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도 유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리고 17년 전 당시 현장에서 도주했던 생존자, 아만다의 보디가드 아사카가 현재 소년 탐정단의 부(副)담임인 루미 선생님이라는 설정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초반부터 ‘수상하다’는 분위기를 깔고 가서 대단한 반전도 없었고, 코바야시 선생님을 죽을 지경으로 만들면서까지 검은 조직을 노렸지만 결국 헛수고로 끝난 결말도 황당했습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더군요. 키안티 등의 저격을 코바야시 선생 일행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도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긴 시리즈를 끌고 가는 중간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졸작입니다. 등장인물의 매력도 별 볼 일 없고, 추리와 트릭은 엉망이며, 액션은 부족하고 작화 역시 수준 이하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총집편 "흑철의 미스터리 트레인"은 이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는데 아쉽네요. 앞으로 총집편은 웬만하면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2019/11/11

요녀전설 1 - 호시노 유키노부 / 강동욱 : 별점 1.5점

요녀전설 1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강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요녀 (妖女)의 사전적 의미는 '요사스러운 여자'입니다. 요망하고 간사한 데가 있는, 한마디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악녀를 뜻하지요. 제목만 보고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들어 조종하고, 그래서 파멸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요녀'와는 관계없는 작품이 더 많습니다. 수록된 8편의 단편 중 제목에 값하는 작품은, 질투심 때문에 젊은 여인을 죽이려다가 파멸하는 귀족 여성이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와 젊은 여성을 이용하는 늙은 흡혈귀 여성의 이야기인 "카르밀라의 영원한 잠" 두 편 뿐입니다.
조금 폭을 넓혀 본다면 일본 인형극 용 인형이 감정을 가져 연주가와 동반 자살한다는 "히다카가와", 설녀가 다가오는 빙하기에서 인간을 구하기위해 후손을 남기려 한다는 "만가"는 여성형 크리쳐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애보나 드라마에 가까와서 요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요녀 커트라인선인데, 나머지 작품들은 아예 '요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재미라도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요. "월몽"은 카구야 히메의 SF 변주인데, 일본 전래 동화를 소재로 한 탓에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할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마을에 찾아온 여인과 화가를 마녀로 몰아 죽인다는 "로렐라이의 노래"는 히틀러와 엮은 결말이 영 억지스러웠고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마타 하리가 타이타닉호에서 라스푸틴과 추격전을 벌인다는 이야기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 루크레치아가 칸타렐라를 로마 시내에 뿌린 탓이라는 "보르자 가의 독약"은 간단한 줄거리 요약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내용이 어처구니를 쌈싸먹은 수준이라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작품 중 "보르자 가의 독약"이 이야기의 완성도로는 조금 더 낫기는 합니다.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실제 역사를 가지고 노는 팩션 전개가 돋보이는 덕입니다. 문제는 루크레치아를 무슨 성처녀처럼 그린 것과 칸타렐라가 전염병의 숙주같은 존재였다는 설정입니다. 루크레치아가 오빠와 놀아나는 등 문란한 행각을 벌였다는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고, 칸타렐라는 '삼산화비소' 였을거라는게 대부분 역사가들의 추측이니까요. 다 빈치의 등장과 결말 역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제목에 부합하고 내용도 괜찮았던 작품은 "카르밀라의 영원한 잠" 딱 한 편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여러모로 완성도도 부족하고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2권이 있다는데 찾아보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2022/01/07

샘 호손 박사의 두번째 불가능 사건집 - 에드워드 D. 호크 / 김예진 : 별점 2점

샘 호손 박사의 두 번째 불가능 사건집 - 4점
에드워드 D. 호크 지음, 김예진 옮김/GCBooks(GC북스)

안녕하세요. 2022년 첫 리뷰네요. 먼저 새해 인사 드립니다.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노스몬트에서 일하는 시골 의사 샘 호손이 명탐정으로 등장해서, 온갖 불가능 사건을 해결하는 고전 스타일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 시리즈입니다. 1권에 이어 2권도 읽게 되었네요. 

수록작은 무려 열 다섯 편이며,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던가, 대도시 보스턴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져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별로입니다. 모두 일종의 밀실 상황에서 일어난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닌 상황이 많은 탓입니다. 대략 네 작품은 명백하게 밀실이 아니었어요. 트릭도 무려 여섯 작품에서 변장이 사용되고 있고요. 그리고 절반이 넘는 무려 여덟 작품에서 불가능 범죄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버리는 억지를 보여주는데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범행 동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설득력이 없어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몇몇 작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술한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범인을 모두 알려주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입니다.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무려 열 다섯 편의 리뷰를 상세하게 올리니 시간이 엄청 걸리네요. 다음부터는 인상적이었던 단편들만 추려서 올리는걸 고려해야 겠습니다.

"치유하는 천막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어린 아들을 치료사로 내세워 시골 환자들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기꾼 조지 예스터의 공연을 찾아갔다가 그와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자기 환자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이 그에게 주먹을 날린 뒤 나가려고 잠깐 뒤를 돈 순간, 조지 예스터가 가슴을 칼로 깊게 찔려 살해당했다. 천막 안에는 예스터와 샘 호손밖에 없었고, 잠깐 사이에 샘 호손의 눈을 피해 현장에서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했다...

짧은 순간에 범인이 사라져 버리는 인간 소실 트릭이 사용된 작품인데, 범인인 매지가 동상으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게 트릭이라서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동상과 사람이 몸에 페인트 칠을 한 건 명백히 달랐을 텐데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물론 어느 정도는 정말 동상처럼 보이게끔 하는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동상이 그녀를 모델로 만든거라는 일종의 복선도 제공되기는 하고요. 때문에 짧은 시간, 제한된 조건에서라면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지 혼자 거대한 동상을 천막 밖으로 잠깐 치워 놓았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가져다 놓는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신대 금속 조각상이라면 무게가 아무리 적어도 백 킬로그램은 되었을테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동상으로 변장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샘 호손(아니면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트릭을 사용했다? 말도 안됩니다. 샘 호손,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날 조지밖에 없는 천막으로 찾아와 다툴 거라는걸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이걸 예상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설령 다툼을 예상했더라도, 천막 안이 아니라 천막 밖에서 다퉜을 수도 있고요. 

즉, 살해하려면 그냥 천막에 숨어있다가 죽이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이 동상의 존재를 은근슬쩍 묻고 지나가는 전개가 별로 공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자와의 두뇌 싸움을 펼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속여넘기려는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또 트릭을 떠올릴 수도 있는 대학 시절 사진을 훔쳐내기 위해 매클로플린 교수를 습격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예스터의 공연에 찾아가기로 한 건 매지가 샘 호손과 함께 있었을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사진을 회수했으면 됩니다. 추가적인 범행을 저지를 필요 없이요. 매지가 토비 예스터의 엄마였었다는 동기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는 상황 말고는 건질게 없었던 졸작이었습니다.

"속삭이는 집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유령사냥꾼 태디어스 슬론과 함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오는 비밀의 방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브라이어 가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둘은 한 밤중에 당장 나가라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은 뒤, 누군가 저택에 들어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걸 목격했다. 그리고 30여 분이 지나도 남자가 나오지 않아서 둘은 비밀문을 열어보는데, 남자는 죽어 있었고 방 안에는 다른 사람, 다른 출구도 없었다. 샘 호손은 피해자가 최소 15시간 전에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챘는데, 수사를 이어가던 샘 호손의 차가 누군가가 설치한 조잡한 폭탄에 의해 불타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비밀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건, 그 방에 다른 비밀 출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숨겨진 출구만 찾으면 될 일이라, 이걸 불가능 범죄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도 너무 뻔합니다. 상황을 아는건 초반에 샘의 치료를 받는 빌리밖에는 없으니까요. 빌리는 어린 시절 유령 집에서 자주 놀았으며 치료를 받을 때 샘과 슬론이 그 집으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고, 시체가 들고 있던 총은 발사된 흔적이 있었는데 빌리가 샘 호손의 치료를 받은 이유는 쇠스랑에 발을 관통당했다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상한 불가능 상황으로 만드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방이었다면, 그 안에 시체를 숨겨놓고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이잖아요? 구태여 샘과 슬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사건을 키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사건을 기획한 빌리의 모친이 사후경직을 통한 사망시각 추정이 가능하다는걸 몰라서 벌인 것이었다는 설명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작품은 아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나마 샘 호손의 애차 피어스 랜스 어바웃이 7년만에 불에 타 버리고, 새로운 차를 구입한다는 이야기만 기억에 남네요.

"보스턴 공원의 수수께끼" 

샘 호손이 의학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보스턴애 도착한 날, 보스턴 공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쿠라레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되었으며, 이전에도 3명이나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했었다. 하지만 공원은 숨어서 총을 쏘거나, 대롱을 부는게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 번째 사건 때부터는 공원에 형사가 가득했고, 네 번째 피해자는 죽을 때 까지 경찰이 예의 주시하며 미행행하기까지 했었다. 범인은 어떻게 독이 묻은 화살을 피해자들에게 쏠 수 있었을까?

"사건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에 의해 사건이 벌어진다는 일종의 '투명 인간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범인이 기차 차장이나 레스토랑 웨이터 등이었다는 류의 트릭으로 이 작품에서는 호텔 도어맨이 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호텔 도어맨이라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건 마음에 듭니다. 핵심은 샘 호손이 쿠라레에 대해 조사하여 밝혀낸대로, 공원 안이 아니라 공원 입구, 즉 호텔 근처에서 화살에 맞았다는 겁니다. 쿠라레는 즉효성이지만 맞고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어서 피해자들은 공원 안에 들어가서 이동하다가 죽었던 거지요. 도어맨은 호루라기를 부는게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라서 호루라기를 부는 척 하고 불특정 다수인 공원 이용자에게 독화살을 쏘았고요. 

노스몬트가 이닌 대도시 보스턴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도 처음에는 그냥 재미 요소라 생각했는데, 트릭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큰 공원, 그리고 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큰 호텔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시골 소도시 노스몬트보다는 큰, 보스턴같은 대도시를 무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범인의 동기가 애매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을 무대로 한 작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된 건 작위적이기는 했습니다. 샘 호손이 스스로 미끼기 되는 장면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잡화점의 수수께끼" 

노스몬트에 미모의 중년 여성 매기 머피가 이사와서 맥스 하크너 잡화점 옆에 부동산을 열었다. 그녀는 자주 잡화점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에 마을 남자들이 싫어했지만, 워낙 미인이라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다. 존 클레이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날, 맥스의 잡화점에서 일했던 프랭크가 샘 호손을 찾아와 자신이 맥스의 아내 어밀리아와 불륜 관계였다는걸 털어 놓았고, 그 직후 맥스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잡화점 안에는 시체와 함께 기절했다는 매기 머피밖에 없었는데, 잡화점 문과 창문은 안쪽에서 모두 잠겨 있었다...

밀실물처럼 소개되지만 환풍기 날개 사이로 총을 집어넣어 쏘았다는게 진상이라서, 이게 밀실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현장에서 발견된 맥스의 총은 더블 배럴이라 환풍기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없었지만, 밖에 있었던 존 클레인 노인의 총은 싱글 배럴이라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있었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니고요. 부실한 현장 조사에 더해 흉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생겨난 실수일 뿐입니다.존 클레이 노인의 범행 동기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고, 범인이 살인 때문에 놀라서 죽었다는 등 내용도 전반적으로 억지스럽습니다.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장치 트릭보다야 현실적인 발상입니다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법원 가고일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조스트로 살인 사건의 배심원을 맡게 되었다. 피고 애런 플레이버는 조스트로의 고용인으로, 그는 실수로 총이 발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조스트로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재판 도중, 베일리 판사가 마시던 물 잔 속 청산가리에 의해 독살당했다. 판사가 죽기 전 '가고일'이라는 말을 남겨서 범원 가고일 상을 조사해보니, 베일리 판사가 메이틀랜드 판사와 함께 밀주 밀매점에 투자했다는 문서가 들어있었다. 샘 호손은 이런 저런 단서들을 확인한 뒤, 사건 현장을 재현해서 추리쇼를 펼쳐보이는데...

애런 플레이버가 자살하려고 조스트로 부인에게서 건네받은 청산가리를 잔에 부어 놓았는데, 판사가 착각해서 먹고 죽은 거라는 진상부터가 말도 안됩니다.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직접 입에 털어 넣었어야죠. 

독약을 애런이 손에 넣은 방법에 대한 설명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재판 중에 조스트로 부인이 껌을 계속 씹고 있었다는 증언을 통해, 그녀가 껌으로 독약병을 증인석에 붙여 놓았다고 추리하는건 일견 그럴싸했지만 이 역시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추리에요. 아무리 20세기 초반이라고 해도, 재판을 받는 피고가 흉기를 손쉽게 손에 넣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을리가 없잖아요. 가능했다해도 총이나 칼을 손에 넣는게 나았을거에요. 

억지스러운 설정, 부실한 설명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졸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수록장 중 최악입니다.

"청교도 풍차의 수수께끼" 

'청교도 풍차'라 불리우는 네덜란드 풍차가 보존되어 있던 부지에 청교도 기념 병원이 신설되었다. 노스몬트 최초의 흑인 의사 링컨의 근무로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오고 있었던 중, 부지를 병원에 기증했던 랜디 콜린스가 풍차에서 몸에 불이 붙어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사건 당시 "루시퍼"라는 말을 겨우 남겼었고, 의식을 회복하여 풍차 안에 악마의 불덩이가 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샘 호손은 주유소를 운영하는 아이작 밴 도런이 풍차 안으로 걸어 들어간 뒤, 풍차와 함께 불에 타 죽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링컨 존스는 검시 결과 밴 도런의 다리가 심하게 골절되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첫 사건은 백인 우월주의자 랜디 콜린스가 풍선을 이용하여 풍차 날개 4개에 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풍선이 터져 화상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루시퍼"는 성냥을 부르는 명칭으로, 나중에 의식을 회복하고 악마 어쩌구로 말을 바꾼거지요. 

두 번째 사건은 랜디에게 휘발유를 팔았던 주유소 주인 밴 도런이 진상을 눈치채고 협박해서, 랜디가 그에게 풍차 윗쪽에 보물을 숨겨두었다고 알려주었던 겁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확인해보라면서요. 그리고 이 말을 따른 밴 도런은 풍차 윗 쪽으로 날려보냈던 휘발유에 불이 붙어버린 탓에 처참하게 죽었고요. 다리는 위에서 떨어질 때 부러졌던 것이었지요. 

랜디의 동기는 인종차별을 하기 위했던 것으로, 인종차별이 뒤의 범죄들과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매끄럽습니다. 사회파 느낌도 살짝 나서 괜찮았고요. 첫 번째 사건은 일종의 실수라 특별할 건 없지만, 두 번째 사건에 사용된 일종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부분들은 문제가 많아요. 제일 먼저, 풍차를 십자가 형태로 불태우기 위해 풍선을 이용하려 했다는 발상이 억지스러웠어요. 이게 사건의 핵심인 탓에 이야기 전개도 다소 헐거운 편입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풍차 윗쪽을 확인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죠. 손전등도 있는 시대인데다가, 이렇게 한다고 불이 그렇게 쉽게 붙었을지도 의문이며, 설령 불이 붙었다 해도 밴 도런이 죽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랜디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걸 보다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건 공정해 보이지 않았어요. 단서가 없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티가 물씬 나서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나쁘지 않았는데 관련된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낮아서 감점합니다. 체스터튼 소설같은 사건이라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는데,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은 절대로 아닙니다.

"생강빵 하우스보트의 수수께끼" 

노스몬트 근처 체스터 호수는 마을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였다. 샘 호손은 여름 휴가를 왔던 미란다 그레이와 사랑에 빠졌다. 미란다의 삼촌인 제이슨, 기티 그레이 부부와 그 이웃 별장의 레이, 그레텔 하우저 부부와도 친해졌는데 어느날, 샘과 미란다 눈 앞에서 하우저 부부의 화려한 하우스 보트를 타고 놀던 두 부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메리 셀레스트호 괴담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 올리지만, 특별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보트에는 레이 하우저와 키티 그레이만 타고 있었고, 그레텔 하우저와 제이슨 그레이는 이미 살해당해서 별장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레이와 키티는 보트를 출발시킨 후, 별장에서 안 보이는 쪽으로 헤엄쳐 나왔고, 보트는 폭파시키려고 다이너마이트를 셋팅했는데 그게 불발했던거지요. 보트를 조사해서 다이너마이트를 찾아내면, 배 주인인 레이 하우저가 범인이라는게 뻔하니 후더닛 물로 볼 수도 없고요. 

설령 레이 하우저의 계획대로 폭파되었더라도 문제에요. 그는 배가 폭파된 후 그레텔과 제이슨의 시체를 떠내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익사하지 않았다는건 부검으로 밝혀졌을테니까요. 함께 배를 타고 있던 네 명 중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익사가 아니라면, 다른 두 명이 범인이라는건 당연하잖아요? 

아울러 이렇게 무거운 강력 범죄 이야기로 끌고가지 않고, 두 부부가 장난으로 이 일을 벌였다는 일상계 물이었다 한 들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샘 호손과 미란다 눈에 보이지 않게 배 반대쪽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간게 전부인 탓입니다. 즉, 이건 애초부터 불가능 범죄가 아니었어요. 차라리 장난에 가깝죠.

부실 수사와 부실한 계획이 합쳐진 망작입니다. 샘 호손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게 독특했을 뿐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분홍색 우체국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간호사 에이프릴과 노스몬트 우체국을 방문했다. 개장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우체국장 베라는 우체국을 분홍색으로 칠해놓았다. 분홍색 페인트가 값이 쌌던 덕분으로, 한 쪽 벽에 마저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흄 백스터를 불렀다. 흄이 페인트를 칠하기 시작했을 때, 은행장 앤슨 워터스가 주식 대공황을 알리며 1만 달러어치 무기명 채권의 특별 배송을 부탁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 봉투가 사라지고 마는데....

샘 호손이 미란다와 파국을 맞지만, 렌즈 보안관이 베라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애정 전선이 크게 움직이는 에피소드.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어요. 샘 호손이 봉투 행방에 대해 우체국 현장에서 펼쳐보이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그럴싸했지만,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흄 백스터가 주워서, 벽에 붙인채 페인트 칠을 해 버렸다는 진상도 합리적이었거든요. 페인트가 마르면 바로 들통날테니 그날 밤 봉투를 회수하러 올 것이라는 마무리 추리까지 깔끔했고요.

물론 당장 봉투를 찾지 못했더라도, 수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렌즈 보안관의 무능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제일 수상한건 흄 백스터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은 단편이었습니다. 다른 작품들 수준이 워낙에 별로라 이 정도면 충분히 선녀급이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팔각형 방의 수수께끼" 

렌즈 보안관은 베라와 에덴 하우스의 팔각형 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팔각형 방은 거대한 서재로, 네 귀퉁이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거울이 달린 수납장을 설치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방문이 열리지 않아서 잠긴 문을 부수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눈에 뜨이는 건 문 손잡이에 묶여 있던 끈 한 줄이었다. 끈으로 빗장을 잠글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끈은 너무 짧았고, 방문은 끈 한 올 통과할 틈이 없었다.

문 손잡이에 끈이 묶여 있었으니 이를 밀실물로 보기는 애매합니다. 이 끈으로 밀실을 만든게 당연하니까요. 진상도 예상 그대로입니다. 범인은 문 바로 맞은편 창문 걸쇠에 끈을 묶고, 이걸 빗장에도 묶은 뒤 창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문을 부술 때 끈이 당겨져 창문 걸쇠가 잠긴 것이지요. 

이렇게해서 창문이 잘 잠겼을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끈 조각이 남은 탓에 딱히 대단한 트릭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잠긴걸 확인하지 않아서 밀실로 착각했을 뿐, 실제로는 밀실이 아니었다는 문제도 크고요. 범인이 밀실을 만든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이렇게 복잡한 장치를 만드느니, 문을 열어두고 한 패에게 살해당했다는 식으로 꾸미는게 상식적입니다.

물론 범인인 조시의 아내 엘렌이 창문을 부수는걸 반대했던 장면같은 복선이라던가, 언제나 이야기를 듣는 화자가 아니라 범인이었던 엘렌이 찾아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거라는 나름의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모든걸 잃었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부실했고, 상황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집시 야영지의 수수께끼" 

청교도 기념 병원을 찾은 샘 호손이 병원 경영의 전권을 맡은 에이블 프레이터 의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때, 집시 에도 몬타나가 들어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집시들은 무리의 지도자 루돌프의 저주 탓이라 여겼지만, 부검 결과 몬타나는 심장에 총을 맞았다는게 밝혀졌다. 그러나 몬타나의 가슴과 등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렌즈 보안관은 저주의 원인이 된 몬타나의 부인 테레즈를 구금하려 했지만 집시 스티브의 공격으로 실패했고, 철저한 수사를 위해 집시 무리를 하룻밤 동안 감시했는데 집시들은 스무 대의 마차, 말과 함께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불가능 범죄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범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슴과 등에 상처가 없었다면 누군가 가슴을 연 뒤 심장에 총을 쏜 것이고, 부검 자리에는 샘 호손과 에이블 프레이터밖에 없었으니 범인은 에이블인게 당연하지요. 집시들이 머물던 해스킨스 농장의 상속 문제라는 동기도 이야기에서 거의 곧바로 드러나고요. 애초에 왜 가슴을 열기 전에 총을 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구태여 기묘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집시들이 하룻밤 새 사라져버린 두 번째 트릭은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말과 마차모양 판지를 세워놓아 눈을 속인 뒤, 판지를 태우고 사람들만 몰래 빠져나갔다는건데, 보안관이 멀리서 감시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속아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 판지들을 모조리 태울 수 있었을지 의문인 등 세세한 점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밀주업자 자동차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밀주업자 래리 스피어스의 동료들에게 납치되었다. 총에 맞았다는 래리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래리는 중상이 아니었다. 동료 중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며 아픈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래리는 토니 배럴과의 거래 완료 때까지는 샘 호손을 풀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거래가 끝났을 때, 실수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차에 탔던 토니 배럴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진상은 래리 스피어스가 다친 척 위장해서 토니 배럴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뒤 살해했던 겁니다. 집 밖으로 나가 차에 탔던 건 래리가 매수한 토니의 부하 스쿠프였고요. 스쿠프는 래리가 뚱보로 변장할 때 썼던 완충재를 몸에 두르고, 수염을 붙인 뒤 웅얼거리며 토니인 척 나가서 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변장을 풀고 바로 운전석으로 넘어가 차를 몰고 떠나려고 했던 거지요. 잘 됐더라면 완전 범죄가 됐을텐데, 하필이면 총격전이 벌어진 탓에 스쿠프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불가해한 실종 사건이 생겨났던 겁니다. 이렇게 불가능 범죄가 일어난 이유를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합리적으로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래리가 술통 값을 낼 수 없는데 술통이 필요했다는 동기도 설득력 있었고, 토니 배럴의 차가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던가 (방탄을 위해서), 스쿠프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등의 복선도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갱들과 목숨을 걸고 담판을 지으며 사건을 해결하는 샘 호손의 모습도 독특했고요.

이렇게 이야기 완성도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트릭의 설득력이지요. 과연 저 정도의 변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속아넘어갔을까?는 잘 설명되지 못하거든요. 이번 권은 변장을 전가의 보도로 쓰고 있는 트릭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깡통 거위의 수수께끼" 

잠겨져 있던 비행기 조종석에 있던 조종사가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핵심은 조종석 안에 범인이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샘 호손의 눈을 피해 숨어있다가 몰래 문 밖으로 나갔던 거지요. 밀실이라고 볼 수는 없는 셈입니다. 왜 이런 기묘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잘 설명되지 못하고요. 

그래도 범인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비행기 곡예단 동료를 자기처럼 변장시켜 공연을 했다는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평작 수준은 될 듯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 오두막의 수수께끼" 

샘의 아버지 해리 호손이 아내와 함께 노스몬트에 방문했다. 그는 편지 왕래로 친해진 대지주 라이더 색스턴으로부터 사냥 초대를 받고, 샘도 함께 사냥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음날, 사슴 사냥을 하던 중 혼자 사냥꾼 오두막에 있었던 라이더 색스턴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오두막으로 들어온 발자욱은 색스턴 것 뿐이었고, 흉기는 저택 안의 무기 컬렉션에 있던 곤봉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건 오래된 깃털 뿐이었다. 범인은 어떻게 발자욱없이 곤봉을 가지고 들어와 색스턴을 죽였을까?

범인은 사냥꾼 오두막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위한 호스 자국 위로 이동하여 발자욱을 남기지 않았던 겁니다. 호스의 폭은 3cm에 불과했지만, 이 위를 '자전거'로 지나갔던 거지요. 상황을 잘 이용한 괜찮은 트릭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색스턴이 오두막으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호스를 연결했다가 떼는 장면이 상당히 오래 묘사되고 있어서, 작가가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잘 전해주고요. 자전거를 닭장 안에 두었었기 때문에 현장에 닭털을 흘렸고, 이 탓에 트릭이 들통나는 과정도 괜찮았어요.

왜 불가능 상황을 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건 아쉽지만, 트릭만큼은 정말 괜찮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건초 더미 속 시체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수의사 밥 위더스가 농부 펠릭스 베넷의 아내 세라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한 후, 펠릭스의 권유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가석방 중 펠릭스의 신세를 지다가 사고를 쳐서 펠릭스가 다시 교도소로 돌려 보냈던 로슨이 만기 출소했다며 나타나 펠릭스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곰 사냥을 위해 렌즈 보안관을 비롯한 여러 명이 농장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펠릭스가 샘 호손에게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중에 그는 방수포로 덮은 건초 더미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보안관은 펠릭스가 건초 더미를 쌓고 방수포를 치는걸 자기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방수포 안에 시체를 넣는건 불가능했다고 말하는데...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해결했다는 사건. 범인은 펠릭스 농장의 소작농 핼 패리였습니다. 그는 펠릭스의 상징과도 같은 큰 밀짚모자를 쓰고 건초 더미 뒤에 있던 펠릭스를 죽인 뒤, 자기가 펠릭스인 척 시체를 건초 더미에 넣고 그 위에 방수포를 쳤던 겁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변장 트릭이 사용되어서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만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괜찮은 본격 추리물인건 분명합니다. 일단 다른 작품들보다는 변장의 설득력이 높거든요. 밀짚 모자에 대해서, 그리고 펠릭스와 핼 패리의 키가 비슷했고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는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이지요. 유력한 용의자 로슨의 콧수염에 대한 언급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몰래 시체를 숲에다 가져다 버릴 생각이었는데, 곰이 나타나는 바람에 기묘한 불가능 범죄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도 합리적이었어요.

곰이 시체를 뒤지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노스몬트라는 시골 마을이라는 무대 특성 상 그렇게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타의 등대 수수께끼" 

여행을 떠난 샘 호손은 '산타의 등대'를 우연히 방문하여 해리와 리사 남매와 친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등대 꼭대기 전망대에 있던 해리가 칼에 찔려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마침 리사와 함께 있던 샘 호손 바로 앞에 시체가 떨어졌는데, 둘을 지나치지 않고 범인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샘은 사건 해결을 위해 수감 중인 남매의 아버지 로널드를 찾아갔다. 로널드는 등대에서 밀주 밀수를 했으며, 해산물 레스토랑 주인인 폴 레인과 거래를 해 왔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샘 호손은 처음에는 산타의 등대를 관광차 방문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었다고 추리했습니다. 난쟁이 킬러가 아이로 변장했다면서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헛점이 많은 추리였어요. 가족 요금이 더 싼데 아이들만 등대에 들여보낸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부터가 근거로는 터무니없이 빈약했으니까요. 아이들끼리 친하고 잘 노는데다가, 아이들을 돌봐줄 해리와 리사가 있는데 부모가 뭐하러 함께 들어간단 말입니까? 게다가 아이들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시설인데 아이들이 몇 명 들어가서 몇 명 나왔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수십명도 아니고, 고작 4~5명을 확인하지 못했을리가 없잖아요. 이 정도면 아이들 이름까지 외울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리사가 범인으로, 그녀는 오빠를 죽인 뒤 등대 전망대에 낚싯줄로 묶어 고정했던 거라는 진상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난쟁이 킬러보다야 나을 뿐, 말이 안되는건 마찬가지에요. 딱히 좋아보이는 트릭도 아닐 뿐더러, 샘 호손이 있을 때 시체를 떨어트린건 납득하기 어려웠거든요. 자기의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 들, 살인범이 등대로 들어갈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은 딱히 유리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오빠를 일어서 떨어트리고 사고로 위장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게 오빠라서 죽였다는 동기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지만,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2013/08/26

일본의 검은 안개 (하) - 마쓰모토 세이초 / 김경난 : 별점 3점

일본의 검은 안개 - 하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상권을 읽었으니 하권을 안 읽을 수는 없죠. 반쯤은 의무감으로 읽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상권과 마찬가지로 반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이국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제국은행 사건"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은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도 6.25에 대해 다룬 "그들의 이상한 전쟁"은 우리에게도 확 와닿는 주제며 내용이기에 상권보다는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결론내리자면 전체 별점은 3점. "그들의 이상한 전쟁" 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수록된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7장 열여섯 잔의 독배 - 제국은행 사건의 수수께끼

괴한이 은행 직원들에게 전염병 예방약이라고 속이고 독약을 먹인 뒤 현금을 가지고 사라진,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지요. 저자는 범인으로 발표된 화가는 단지 희생양일 뿐, 진범은 세균부대 출신으로 GHQ에 속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근거도 탄탄하여 설득력이 높고요. 전체적인 전개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느껴져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추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는건 좀 맥이 빠집니다. 이 논픽션의 가장 큰 테마인 미군정의 모략으로 인한 사건에 불과할 뿐이거든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좀 아쉬웠습니다.

8장 소설가인가 스파이인가 - 가지 와타루 사건

소설가 가지 와타루가 미군정에 납치되어 1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건을 다룹니다. 결국 누군가의 모함이 원인이었고, 목숨을 건진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내용인데 현실적이기는 하나, 재미는 없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독재정권을 거친 우리가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내용일 뿐이었으니까요.

허나 반세기 전 일본에서조차 이런 일이 큰 사건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은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지네요.

10장 다이아몬드를 사랑한 사람들 - 정복자와 다이아몬드

전쟁 당시 일본이 모았던 막대한 양의 다이아몬드가 사라진 경위를 파헤치는 내용.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서 약 62만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확보했지만 전쟁 후 남은 것은 16만 캐럿에 불과했다는 사건의 진상을 추적합니다. 점령군인 미군과 일본의 정치 권력 쪽으로 은닉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결말로 이어지고요.

사실 일본의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구전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고종의 독립운동을 위한 황금"도 이와 비슷하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중간에 언급되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슈가 독립운동 자금을 가지고 소련으로 향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을 때,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보슈의 트렁크 사건도 흥미로웠고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논픽션을 써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쯤 되면 완벽한 본말전도네요...

12장 그들의 이상한 전쟁 - 모략 한국전쟁

6.25에 대한 이야기. 일단 서두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여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부의 도발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부터 신선했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돌직구를 날리는 책은 처음 본 것 같아요.

그리고 전쟁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면서, 북한군의 뛰어난 유격 전투 능력과 실제 남한 주민의 협조를 언급하며 "이 전쟁은 미군이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방조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합니다. "한국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이 땅 혹은 세계의 어딘가에 한국이 없으면 안 되었다"라고 말한 미군 사령관 밴 플리트의 말이 진실의 모든 것이겠지요.

전쟁이 확대된 것은 남한군의 무능과 북한군의 실력 탓이었다는 점, 그리고 정말로 놀라운 북한군의 전과 등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 아시아의 세력 관계라든가, 맥아더의 중국 진출론 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고요.

한마디로 추천작. 이 책이 아니라 논픽션 전체를 놓고 보아도 손에 꼽을 만한, 그야말로 논픽션의 명편입니다.

2023/08/04

미궁 - 나카무라 후미노리 / 양윤옥 : 별점 2.5점

미궁 - 6점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놀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토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신견은 바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여자와 같이 살던 남자를 쫓는 탐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여자가 22년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가족이 살해당한 히오키 사건 (일명 '종이학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딸 사나에라는걸 알게 되었다. 신견은 히오키 사건을 개인적으로 수사해나가면서, 극복해낸줄 알았던 자신의 어두움에 또다시 함몰되어 가기 시작하는데....

<<쓰리>>로 유명한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
종이학 사건이라는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건에서 밝혀지지 않은 점은 아래의 두 가지입니다.
  1. 피해자인 아버지와 아들을 구타하고 피부조각을 남긴 왼손잡이 남자는 완벽한 밀실 상태의 집에 어떻게 침입해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2. 다소 강박적이었던 아버지 다케시는 모든 출입구와 창문에 설치했던 방범 카메라를 설치했는데, 사건 당일 다케시가 집에 돌아온 장면은 찍혀있지 않았고 신발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케시는 어떻게 집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지.
이 두 가지 수수께끼의 답은 하나입니다. 뒷문 방범 카메라가 실제로 촬영하는게 아니라, 원래 녹화된 파일의 날짜만 변경되도록 조작되었던 것이죠. 의처증이 심해진 남편 다케시가 모든걸 감시하는 탓에 가족들 심리가 서서히 붕괴하자, 이를 참지 못했던 아내 유리의 행동이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가정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던 딸 사나에가 뒷문을 몰래 열어두었습니다. 빈집털이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를 보고요. 예상대로 빈집털이는 집에 침입해 부모를 결박했는데, 빈집털이가 돌아간 뒤 부모를 증오하던 아들 다이치가 부모를 살해했고말았습니다. 하지만 빈집털이가 되돌아왔고 - 아마도 유리의 미모에 혹해서 -, 다이치가 덤벼들자 그를 구타하고 도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이치가 죽기 위해 독극물을 마신 뒤, 사나에가 부모가 묶였던 줄 등의 증거를 태운 뒤 집 밖으로 가져나가 (물론 뒷문으로) 인멸했던겁니다.
사나에의 고백이 전부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앞서 관계자가 말했던 공범자 설이라던가, 어른이 관절을 빼고 좁은 창문으로 들어와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추리보다는 훨씬 낫더군요.
이후 신견이 사나에와 동거하며 스스로 추리해내는 또다른 진상 - 아마도 더 사실에 가까울 - 도 괜찮았습니다. 신견은 어린 아이가 오빠가 달라는 독약을 가져다 주고, 증거를 인멸한건 이상하다며 일종의 리허설이 있었을거라 추리합니다. 다이치가 가져다 달라고 했던건 그 전에도 스트레스가 심할 때 먹었던 수면제였을거라면서요. 즉, 사나에가 오빠를 살해했다는 거지요.

묘사도 빼어납니다. 특히 사라진 줄 알았던 R이 다시 등장하여 신견이 서서히 폭주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사나에 가정이 붕괴되는 과정 등 극한 상황으로 빠져드는 과정이 아주 실감납니다. 신견의 심리 묘사도 탁월하고요.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한 작가다운 필력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런 전개 과정에서 신견이 자기 머리 속에 R이라는 범죄자같은 인격을 품고 있었다는 중2병스러운 설정을 비교적 적절한 복선으로 사용하고 있는게 좀 놀라왔습니다. 마음이 병들어 있던 사나에가 그런 신견을 중학생 때 보고 관심을 가진게 지금 시점에서 둘이 만나게 된 계기였다고 하거든요.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것 같아요.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경찰이 뒷문 방범 카메라가 조작되었다는걸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려 3명이나 되는 가족이 살해당한 강력 사건인데 , 이렇게 허술하게 수사가 이루어졌다는건 납득하기 힘들죠. 정신과 의사가 다이치가 치료 중 그렸던 그림과 공작이 사건 현장과 동일하다는, 즉 다이치가 범인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숨기고 있었던 이유도 석연치 않고요.
또 추리, 범죄물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다소 지루합니다. 추리, 범죄물보다는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둔 범죄 드라마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7/08

영국식 살인 - 시릴 헤어 / 이경아 : 별점 3점

영국식 살인 - 6점 시릴 헤어 지음, 이경아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약한 워벡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지들을 초대했다. 초대된 사람들은 아들인 로버트, 가까운 친척이자 재무장관인 줄리어스 워벡, 로버트와 연인이었던 백작가의 딸 레이디 커밀라, 오래된 지인 카스테어스 부인, 그리고 워벡홀에서 사료를 연구하던 보트윙크 박사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 차이, 로버트의 무례함 등 여러 이유로 참석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던 중, 크리스마스 자정에 로버트가 모두의 앞에서 독살당하고 마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저는 정통 고전물의 팬입니다. 허나 고전 퍼즐 미스터리의 팬일 뿐, 이른바 "영국식" 스타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신사 숙녀라 불리는 귀족과 부르조아들이 등장하여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유머로 예법이다 뭐다 하며 장황하게 기이한 가식과 가증을 떠는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잘난척이 보기 싫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피터경 시리즈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제가 싫어하는 정통파 영국식 스타일의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무대부터 전통 있는 워벡 가문의 오래된 저택이고, 정통 영국식 추리소설답게 눈으로 고립된 클로즈드 서클 상황에 놓이거든요. 범행 현장에 있던 인물도 워벡 가문의 후계자, 가문의 친척인 재무장관, 오래된 친구인 정치가의 아내이자 부유한 숙녀, 후계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백작 가문의 딸, 충직한 집사, 마지막으로 가문에 연구차 방문해 있던 보트윙크 박사라는 구성입니다. 귀족, 신사, 숙녀, 하인에 손님까지 정말 완벽한 구성이지요. 게다가 하나같이 영국식 귀족, 부르조아 예법에 쩔어 있는 건 물론이고요. 덕분에 첫 피해자로 로버트가 독살당했을 때에는 쾌재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재수 없고 짜증나는 극우 파시스트 귀족 떨거지였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러한 정통 영국식 스타일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영국식 스타일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의 핵심 장치로 사용된 덕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집사 브리그스가 자신의 딸과 로버트의 결혼 사실, 손자의 출생을 손님들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브리그스의 함구는 정통 영국식 부르조아 예법 덕분에 완벽한 설득력을 갖추었고, 사건의 동기, 전개, 결말이자 파국을 만드는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 탐정역인 보트윙크 박사가 외국인이자 역사학자라는 설정도 뛰어납니다.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영국식 관습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좌충우돌하며 깨닫는 과정과 사건의 핵심 동기가 과거 영국에 실존했던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을 간파해 내는 것에 높은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별다른 단서나 증거가 있는건 아니라서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윌리엄 피트라는 실존 인물이 관련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역사 추리물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동기 역시 정말로 "영국식"이라는 점에서 장르적 기대를 충족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도 분명합니다. 카스테어스 부인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독약병이 워벡 저택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점에서 보면 범행은 즉흥적인 결심으로 보이는데, 재무장관이 경호 차원에서 형사까지 대동한 상황에서 독살을 결심하고 실행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 저택이 고립된 상황이라,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범인인 게 분명하고 누가 득을 보게 될지가 명확하다면 빠져나가는건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유일하게 배신이라는 동기가 있는 레이디 커밀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을 수도 있으나, 범행 시점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줄리어스를 설득해 자살로 몰아가려는 시도 역시 작중 묘사대로라면 잘 되지 않았을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작위를 이용한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줄리어스를 직접적으로 독살하고 정치적으로 날선 대립을 보인 파시스트 로버트에게 뒤집어씌우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심리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영국식 설정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솜씨가 탁월하여 무척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이기는 하나, 상기 단점도 분명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국식"이라는 설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고전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이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17/06/18

미스테리아 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5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구하게 되면 읽곤 하는 장르문학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5호입니다. 작년 초에 출간된 한참 전 과월호지요. 언제나처럼 특집 기사와 신간 소개, 이런 저런 연재 기사, 인터뷰, 수록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관심 있던건 특집입니다. "음식 미스터리"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 문학 속 요리'에 대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좋은 비교, 혹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재가 진부하다는 겁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흔해 빠진 내용이에요. 도입부의 식인 천재 범죄자 한니발 렉터,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대표적입니다. 그나마도 인터넷을 뒤지면 알 수 있는 내용일 뿐이고요. 정작 기대했던 내용은 실려있지도 않습니다. 저라면 한니발 렉터의 '전두엽 소테'나 네로 울프의 '소시스 미뉴이'를 소개할 때 최소한 해당 음식의 레시피와 조리 사진을 수록했을 겁니다.
이어지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독약에 대한 소개는 '음식 미스터리'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같은 작품 소개가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작품 속 요리를 재현하는 코너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제와 연결되는 요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미스테리아 측에서 별다르게 창작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참고 도서 속 - 주로 "미국 미스터리 작가들의 요리책" -  요리를 재현한 것에 불과해요. 그나마 셜록 홈즈가 '해군 조약문'을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해군 조약문" 속 치킨 커리 정도만 어느정도 주제에 값할 뿐, 재현한 요리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았고요. 

마지막의 '10권의 맛있는 미스터리' 소개는 실망의 정점을 찍습니다. 기준, 근거를 알기 어려운 탓입니다. 일단 소개작 중 "스위트 홈 살인사건",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기나긴 이별"은 절대로 음식 미스터리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억지에요. "어느 백만장자의 죽음"은 아슬아슬하게 음식 미스터리 범주 안에는 들기는 한데,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추천 도서로 떡 하니 내미는 행위는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조앤 플루크의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빈말로도 좋은 작품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 작품들도 음식 미스터리로는 볼 만 하지만, 추천할만한 수준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특별 요리""맛" 외에는 모두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주자면 1.5점 정도? 제 개인 프로젝트에 필적할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조금 안심했지만,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힘든 기획입니다. 

다행히 특집 외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빼어난 리뷰가 많아서 "미스테리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신간 소개 코너는 역시나,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좋은 리뷰들이 많더군요. 솔직히 읽어본 결과에 따르면 좀 과한 홍보의 결과물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번에 소개된 작품 중 마쓰모토 세이초의 "범죄자의 탄생"은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원작, 영화를 함께 소개하는 코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신부""상복의 랑데뷰"보다 낭만적인 애상으로 넘쳐흐른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완성도 면에서 천지차이니까요. 영상화된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연재물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건축가 야스이 도시오의 밀실에 대한 대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써먹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다다미를 걷어내면 아마추어는 다시 깔 수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되는 정보를 토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 놓는 아이디어 - 다양한 기술자들이 등장하는 탐정물 - 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로관을 예로 들며 전기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는 등 건축 전문가의 식견이 느껴지는 여러 코멘트들도 기억에 남고요.

한국의 50~60년대 추리 소설을 발굴한 추리소설 평론가 박광규 씨와의 인터뷰 역시 좋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사고와 관련된 논픽션, 폴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젊은 지식인 발라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특히 범인 크리스티안 발라와 그의 작품 "아목", 형사 브로블레브스키라는 키워드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며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다는 기획물인 '동아시아 미스터리, 정치적 죄와 서스펜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대중 서사의 최고봉이라는 이병주의 "관부 연락선", "별이 차가운 밤이면"과 김내성의 "청춘 열차"는 틈 나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도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척박한 한국 장르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는 좋은 잡지이지만, 이번호는 특집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2편의 단편의 짤막한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나비 부인의 커튼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두 남자가 운영하는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 건너편에 '나비 부인'이라는 카페가 개업했다. '나비 부인'은 가면을 쓰고 서빙하는 독특한 컨셉과 인테리어,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기묘한 노인이 '나비 부인'에서 진상을 부린 다음 날 '나비 부인' 사장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최혁곤의 단편입니다. 시리즈 캐릭터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콤비가 등장하는 단편집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전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쾌한 분위기의 버디물인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별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초반에 나왔던 수상쩍은 노인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등 수수께끼의 여지도 없고요. 

특히 후더닛 물로는 영 아니올시다에요.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일종의 '사이버 테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회파적 측면이 강하며, 이것이 동기로 밝혀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와이더닛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사회파적 설정이 잘 어울리지는 않네요. 인터넷의 비방글로 자살을 한다는 것도 와 닿지 않고요. 또 고3 수험생 투신 사건도 불필요할 정도로 질질 끄는 느낌입니다. 동기 부분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도 와이더닛물로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진범 검은 뿔테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하니까요. 남자 친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아요.
진소담의 가족 관계 증명서 정도만 나름 증거일 뿐, 추리가 모두 정황 증거에 기반한다는 약점도 크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 이하였던 범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버디물로서는 충분히 즐길만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단편집은 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기흥 보리산 자락에 있는 무당의 당집에서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완벽한 밀실 안에서 홀로 생존한 채 발견된 유홍석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판사에게 유홍석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한국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물들을 발표하고 계신 도진기 판사님 - 현 시점에서 변호사가 되셨지만 - 의 스탠드얼론 단편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작가가 뼛속까지 고전 본격물 애호가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1인칭의 수기 형태로 전개되며, 끔찍한 사건이 초자연적인 현상과 얽혀 일어난다는 점이 완전 고전 스타일이었거든요. 비교하자면 코난 도일경의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이라던가, 앰브로스 비어스의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에 수록된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워낙 고전물을 좋아하기에, 완전 제 취향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단지 스타일을 따온 것에 그치지 않고, 무당 '인문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덕분에 독특한 한국적 오컬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특히 그녀가 서상표의 집에 몰래 부적을 붙인게 드러나는 장면은 굉장히 섬찟합니다. 만약 영상화한다면 클라이막스로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문희에 비하면 서상표는 전형적인 한국 쓰레기 남자와 다를 바 없어 지루합니다. 무엇보다도 진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요. 괜찮은 고전 오컬트물이 갑자기 크리쳐 호러로 변질되는데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게다가 잘린 목이 경동맥을 물어 뜯었다면 부검으로 밝혀지는게 당연한데 간과되고 있고, 유홍석이 현장 문을 잠가 밀실로 만든 이유도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등 디테일에서도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고전 스타일 오컬트 호러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를 굉장히 탈 텐데 저한테는 호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부적이 드러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