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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3점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이 작품은 경찰 관계자 3명 - 아일랜드인 존 캐러더스 형사 / 잉글랜드인 부국장 허버트 암스트롱 경 / 스코틀랜드인 데이비드 해들리 총경 - 각자가 한꼭지씩 맡아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형식부터 시작해서 그동안의 존 딕슨 카 작품과는 성격이 아주 다른, 굉장히 독특한 작품입니다.

이유로는 첫번째로 코믹하고 왁자지껄한 블랙코미디 군상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한 것을 꼽고 싶습니다. 설정부터가 황당하고 코믹하죠. 가짜 수염을 단 인물이 나타나 경관을 습격하고, 가짜 수염을 단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고, 흉기인 단검이 놓여있던 장식장 안에 가짜 수염이 놓여있고... 이렇듯 <멋지다 마사루> 수염부 일동이 일생 일대의 걸작으로 지목할만큼 많은 수염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주요 관계인들의 행색과 행동 하나하나도 실소를 자아내죠. 예를 들자면 사건이 벌어진 박물관 경비원이 나무상자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던가, 주요 관계인 한명이 경찰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두번째로는 다른 딕슨 카 작품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고딕 호러 스타일의 괴기성도 찾아보기 어렵고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이 얽히는 팩션 느낌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죠. 기드온 펠 (기디온 펠) 박사나 헨리 메리벨 (헨리 메리베일) 경 시리즈는 방코랑 시리즈나 딕슨 카의 다른 팩션 작품들 보다야 고딕 호러 느낌이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처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동방의 물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는 사건 현장 때문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약간 가져다 붙이는 정도에서 끝나니까요. 그나마도 박물관의 구조 이외에 사건에 필요한 요소는 전무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점은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죠. 오히려 이 작품의 문제는 전개 과정에 있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3인의 화자에 의해 전개되는 방식은 어차피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특함 이외에는 혼란만 가져다 줄 뿐, 1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진행하는 방식에 비해 나은 점을 찾기 어렵거든요. 솔직히 중간부분에서는 지루해서 깜빡 졸기까지 했습니다. 사건도 동기는 확실하지만 너무나 많은 우연이 겹쳐져서 일어난 것이라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고요. (여러가지로 이유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사족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아울러 증거도, 증인도 없다는 결말도 좀 허무했습니다.
때문에 작품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편이지만 딕슨 카라는 작가와 기드온 펠 박사라는 명탐정이 등장하는 작품 치고는 너무 평범한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래도 거장답게 별다른 트릭없이 수수께끼같은 사건을 펼쳐나가는 이야기솜씨는 일품이며 합리적인 추리에 따른 반전까지 갖춘 완성도 높은 추리소설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딕슨 카의 고딕 호러 스타일은 아무래도 좀 취향을 탈만한 내용이기도 하니 즐겁고 신나는 이러한 작품으로 딕슨 카라는 작가를 알게 되는 것도 괜찮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존 딕슨 카 작품 완독에 도전하기 위해 읽은 작품으로 다 읽고나서 완독이라고 좋아했더니 신작 <초록캡슐의 수수께끼>가 또 출간되었네요. 이 작품도 빨리 읽어야 겠습니다.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2021/02/27

나는 언제나 옳다 - 길리언 플린 / 김희숙 : 별점 4점

나는 언제나 옳다 - 8점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성스러운 종려나무(Spiritual Palms)'라는 호텔에서 일하는 매춘부이다. 손목에 문제가 생겨 남성 고객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하던 수음 테크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호텔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점을 보며 사람들의 기운을 읽는다. 물론 실제로는 신기(神氣)와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익힌 요령으로 손님들의 상황을 짐작해 마음을 읽어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전 버크가 찾아온다. 그녀는 카터후트 메이너 가문의 낡은 저택을 처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낡은 저택은 그녀의 문제투성이 의붓아들, 열다섯 마일즈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퇴마사를 자처하며 귀신이 나온다는 저택을 정화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직접 본 저택과 마일즈의 상태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벽마다 기괴한 핏자국이 나타나고, 마일즈는 나를 볼 때마다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저택에 관해 조사하던 나는 100년 전 카터후크 가문이 이 저택에서 큰아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으로 본 큰아들은 마일즈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마일즈와 수전 모두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나를 찾아줘"를 쓴 길리언 플린의 단편입니다. 단편 한 편만으로 책이 출간되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드물지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단독 출판되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대박이에요. 저주받은 저택이라는 고딕 호러로 시작해서 사악한 소시오패스와의 두뇌, 심리 게임으로 이어지는 얼개가 탄탄하고, 단계별로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나'가 봉으로 보였던 수전 버크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부터 기묘하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저택의 등장, 그리고 저택으로 이사온 뒤 부쩍 더 의붓아들 마일즈와 불화가 심해졌다는 수전 버크의 강박증으로 고딕 호러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고요.
세 번째 단계에서는 저택에서 과거 잔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범인은 마일즈와 똑같이 생긴 큰 아들이었다는게 드러나며 고딕 호러로의 진면목을 선보입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마일즈가 '나'에게, 이 모든건 남편이 '나'에게 수음을 받았단걸 복수하려는 수전의 음모라며 같이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멋진 완전 범죄 스릴러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일즈가 자기가 '나'를 속였다며 철저하게 '나'를 옭아매고 조종하는 마지막 단계인 심리 스릴러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각 단계 모두 개별적인 장르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일 뿐 아니라, 항상 앞선 단계를 뒤집는 반전이 등장해서 흥미를 자아냅니다. 자세한 묘사와 여러가지 복선으로 설득력도 높아요. '나'가 버크 가 가장의 사진을 마지막에 발견하고, 그가 자기 수음 서비스 단골이라는걸 알게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덕분에 마일즈의 거짓말이 설득력을 가지며 '나'가 속아넘어가는 네 번째 단계가 진행되게 되니까요.
위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자칭하던 '나'가 마지막에 마일즈에게서 '봄 냄새'를 맡는다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닳고 닳은 '나'와 악마를 구체화한 마일즈라는 주요 캐릭터 묘사도 아주 훌륭하며, 단편인 덕분에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에서 마지막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되짚어 생각하면 문제이기는 합니다. 마일즈가 '나'를 속여서 함께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그 이전 단계에서 '나'의 가방에 토를 하는 등으로 도발할 필요는 없었거든요. '나'가 저택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공포라는 감정도 설명되지 않는 작위적인 요소였고요.
또 결말에서 '나'가 마일즈의 어머니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서 사기를 쳐 거액을 얻는 꿈을 꾸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어요. 수전의 보석과 마일즈 유괴를 모두 뒤집어 쓸 수 있어서 '나'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니까요. 마일즈가 수전에게 전화했다고는 하는데, 내용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고요. 이래서야 수전은 경찰에 신고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조금은 애매한 열린 결말은 호불호가 갈릴 영역이 아닐까 싶어요. 스티븐 킹이라면 '나'가 자는 방으로 마일즈가 침입해서, 저택 살인 사건 내용처럼 난도질하면서 끝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다시 유추해서 떠올린 결과일 뿐, 읽는 내내 긴장감 넘쳤던 좋은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단편이 갖는 힘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2009/02/17

화형법정 - 존 딕슨 카 / 오정환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별점 4점

화형법정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오정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출판계에서 꽤 잘나가는 편집인 에드워드 스티븐스에게 주말 별장 이웃인 마크 데스파드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전 죽은 마크의 백부 마일즈가 사실은 독살당했다며 시체 발굴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마크와 그의 친구인 전직 의사 파팅턴, 마크의 고용인 헨더슨 노인과 스티븐스 네 명은 한밤중에 납골당 입구를 뜯어내는 대 공사를 진행했지만, 마일즈 백부의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여러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는데....

10여년전 다른 구판 동서 추리문고 몇권과 함께 제 첫 직장의 여사장님께서 하사하여 주셨던 구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습니다. 지금은 복간되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구판 동서 추리문고로 밖에는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너무나 감사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고전 추리물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샘솟던 차에 읽게 되었네요.

줄거리 요약부터 하자면, 위에 대충 써 놓기도 했지만 미모의 정체불명 아내와 못난 이웃 사촌때문에 벌어진 3일 동안의 대소동... 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써버리면 흡사 "어니스트 캠프 대소동"같은 코미디 영화가 연상되는데 딕슨 카 선생님 작품이니 당연히 코미디는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 그것도 흑마술 관련된 고딕 호러같은 이야기를 근대에 벌어진 사건과 절묘하게 결합시킨 딕슨 카 류 모던 고딕 호러 오컬트 추리물의 결정판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달랑 3일에 걸친 이야기 -그것도 대부분은 이틀 동안 벌어진- 를 장대한 장편으로 풀어낸 딕슨 카의 탁월한 글 솜씨는 역시나 탁월합니다. 또한 이틀동안 몇 안되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스케일을 커버하기 위해 앞서 말했듯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던 역사적인 사실, 즉 17세기 사형당했던 유명한 독살범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마리 도브리)과 생 클르와, 데프레와 같은 인물들을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재와 쌍으로 엮어서 색다른 맛과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전개도 좋았고요. 덕분에 최근 유행하는 팩션같은 형태를 띄는데, 이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탁월한 퍼즐러, 고전 미스터리 황금기의 거장답게 불가능 범죄 2건을 전면에 배치하여 대담하게 독자와 승부하는 맛이 잘 살아있어서 추리 애호가로서 너무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런게 진정한 고전 추리물의 맛이겠죠.
두 개의 범죄 -꽉 막힌 납골당에서 어떻게 시체가 사라졌는지와 마일즈 백부의 방에서 문을 뚫고 나가듯이 사라진 백부에게 독약을 먹인 여인의 정체- 모두 신선하면서도 예측을 뛰어넘는 전개와 더불어 고딕 호러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건과 어우러진 작품과 너무 잘 어울리는지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것 아닌 듯 했던 여러가지 복선들이 나중에 사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고전적 전개의 효과적인 사용 역시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알리바이에 대한 참신하면서도 거장다운 대담한 발상과 전개(응?)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 거리가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딕슨 카 선생 최 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지 않게 좀 지나칠 정도로 오컬트 쪽에 치우친 나머지 전개의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사건에 뛰어들어 탐정 역할을 하는 고던 클로스의 생뚱맞은 등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크의 도주, 오그덴의 돌출행동 같은 것들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에필로그가 지나칠 정도로 사족의 느낌이 강해서 무척 불만스러운데요. 왜 이런 에필로그를 구태여 집어넣어서 잘 마무리 된 정통 고전 추리물을 오컬트로 덧칠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에필로그 때문에 사건의 진범과 범행의 방법 등 모든 요소가 헝크러져 버리거든요. 아무래도 작가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과거에 벌어진 역사와 맞물리는 현대에 벌어지는 괴사건, 그리고 놀라운 진상! 덧붙여 반전까지 있는 저도 이런 작품을 한번 써보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읽은 딕슨 카 작품 중에서는 충분히 상위권을 점할 작품으로(해골성,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연속 살인사건 등이 상위권입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멋진 요소가 많고 재미 역시 확실하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도 이 작품을 읽지 않는 추리 애호가가 있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김내성 선생님의 "진주탑" 처럼 이 작품도 번안하면 무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 말기에 벌어진 살인사건과 얽힌, 경성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참극! 조선 총독부 주재원인 옆집 일본인 후루따(가칭^^) 의 부탁으로 우연찮게 사건에 뛰어든 조선인 변호사(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고도일, 그리고 그의 미모의 부인에 얽힌 놀라운 진상! 어쩌구 저쩌구...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2020/11/08

나선계단의 비밀 -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 / 판도라books : 별점 2점

나선계단의 비밀 (개정판) : 국내 최초 완역판 - 4점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 지음/판도라books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신 여성 레이첼 이네스는 조카 2명과 함께 써니싸이드 저택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먼저 도착하여 현지에서 집사 토마스 존슨을 채용했는데, 그로부터 저택에서 지난 몇 달 동안 아무도 없는 밤에 이상한 현상(문 소리가 나고, 창문이 닫히는 등)이 일어났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레이첼 이네스와 하녀 리디는 그 이상한 현상과 맞닥뜨렸다. 다행히 다음날에 조카 핼시와 커트루드, 핼시의 친구 베일리가 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날 새벽에 저택 주인의 아들 아놀드 암스트롱이 살해되고, 핼시와 존 베일리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레이첼 이네스는 기묘한 현상과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사관 중 한 명인 제이미슨과 손을 잡는데...

100여년전 발표된 서스펜스 스릴러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작품입니다. 다양한 추천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고 있지요.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에서는 40위네요. 무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보다도 순위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국내 소개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30년 전, 아동용 팬더 추리 걸작선이 마지막이었어요. 절판된지도 오래되었고요. 그런데 찾아보니 e-book으로 번역, 소개되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저작권료가 필요없는 퍼블릭 도메인이 된 덕분이겠지요.

읽어보니 명성을 얻고, 걸작의 지위를 굳힌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부분이 분명 있거든요. 합리적인 설정을 고딕 호러와 잘 결합한 아이디어가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밤마다 특정 장소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가 나고, 누군가 저택에 계속 침입하려고 한다는건 괴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건 '저택 안에 무언가 있고, 몰래 이를 손에 넣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에요! 나름 합리적이지요.
이를 피해자 아놀드의 부친인 트레이더즈 은행 회장 폴 암스트롱의 급작스러운 병사, 거금 횡령에 따른 트레이더즈 은행의 파산, 뭔가에 놀라 심장마비로 죽는 집사 토마스 사건 등과 엮은 전개도 합리적인건 마찬가지입니다.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트레이더즈 은행에서 거금을 횡령한건 폴 암스트롱이었습니다. 그는 죽은 걸로 위장하여 횡령한 돈을 가지고 도망칠 속셈이었지요. 그러나 아내가 써니싸이드를 임대한걸 모르고 써니싸이드에 돈을 숨겨 놓았던 탓에 집에 몰래 숨어들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겁니다. 집에 돈을 숨기려면, 원래 주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그럴듯하지요? 집사 토마스는 죽었다고 한 옛 주인을 보고 놀라서 죽었고요. 이 역시 앞서 토마스가 유령을 무서워하는 묘사가 나오는 등 복선을 쌓아 올린 덕에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런 류의 설정을 정통파 고딕 호러와 결합한 아이디어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로서 역사적 가치도 높고요. 사실 '몰래 숨어들려는 사람' 쪽에서 바라 본 이야기가 많은데 ("경찰서를 털어라"), '아무 것도 모르는 (집)주인' 쪽 시각에서 본 이야기라 독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유도 명확히 알겠더군요. 그만큼 문제도 많아요. 가장 큰 문제는 아놀드 암스트롱 살인 사건입니다. 범인이 작 중에서 행적과 과거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가정부 왓슨 부인이기 때문이에요. 뜬금없기 그지없죠. 이건 아무리 봐도 반칙입니다.
사건 속 우연도 지나칩니다. 아놀드가 핼시와 잭 베일리가 저택을 떠난 직후 살해된 것, 왓슨 부인이 거트루드 방에서 핼시의 총을 손에 넣어 살해했다는 것 모두가 우연이었으니까요. 이럴 바에야 아놀드 살인 사건은 빼고, 폴 암스트롱이 저택을 침입하려는 과정을 자세하게 그리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중요한 순간을 이런저런 이유로 놓치며, 중요한 정보를 사람들이 감추는 식의 옛스러운 전개도 굉장히 지루합나다. 또 모든 사건은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결국 범인인 폴 암스트롱이 사고로 사망하는 식으로 해결되고요. 추리 요소는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 지루했던 것 같네요. 

짜증나는 등장 인물들도 지루함을 유발하는 요소입니다. 조카 핼시와 거트루드가 대표적입니다. 핼시의 친구이자 거트루드의 연인 잭 베일리는 누가봐도 수상했어요. 거액 횡령에도 연루되어 있고,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새벽 3시에 달아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나 둘은 이유는 말하지도 않고, 그저 믿어달라고 징징대기만 합니다. 거트루드는 어느 때 보다 고모가 필요할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절규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레이첼 이네스가 말한게 맞습니다. "증명이 되어야 나는 믿을 거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이네스 가문은 그렇다." 이 작품 속 거의 유일한 '상식인' 이 주인공이라는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레이첼 이네스 역시 가문 운운하는 식으로 드러내는 봉건 귀족스러운 사고 방식의 소유자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는 별다를게 없어요. 시대를 반영하는 흑인 비하 대사도 거슬렸고요.
의미없는 캐릭터들도 많습니다. 왓슨 부인이 아놀드 암스트롱을 살해한 동기를 위해 등장시킨 루시앤, 폴 암스트롱의 협력자 워커 박사, 협박범 니나 캐링턴이 대표적입니다. 본 이야기와 관계없는 곁가지로 분량 늘이기에 불과해 지루함을 더해줄 뿐입니다. 작위적이기도 하고요.

아울러 레이첼 이네스 가족이 저택에서 휴가를 끝내기를 범인 폴 암스트롱이 기다리지 못한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그가 정말로 죽은게 아니라는걸 밝혀내지 못하는 한, 시간은 폴 암스트롱의 편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있지만, 지루하고 짜증나는 요소도 많은 탓에 감점합니다. 필요없는 부분은 과감히 들어내고 속도감있게, 그리고 더 고딕 호러 느낌으로 전개했다면 진짜 걸작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덧붙이자면, 제가 언급한 문제에는 번역 탓도 있습니다. 문장들이 매끄럽지 않고, 직역도 많으며, 교정도 제대로 보지 않은걸로 보이거든요. 주요 인물인 잭 베일리는 중반까지 '존' 베일리라고 등장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좋은 번역으로 제대로 읽으면 제 평가가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2020/05/23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5점

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 6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나'는 남편 맥심과 함께 작은 호텔에 머물며, 과거 함께 시간을 보냈던 대저택 맨덜리에서의 생활을 회상한다.

'나'는 결혼 후 드 윈터 부인으로 맨덜리에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맥심 드 윈터의 전처 레베카가 비참하게 사고로 죽었지만, 아직도 맨덜리에 그녀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다는걸 느꼈다. 그런데 우연히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녀 죽음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맥심 드 윈터는 '나'에게 자신이 그녀를 살해한 뒤 시체를 숨긴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전설적인 장편 소설입니다. 18~20세기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상류 사회와 로맨스, 범죄호러를 결합한 '고딕'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중 한 편이지요. 'MWA 추천 미스터리 100'이나 '동서 미스터리 100' 같은 이런저런 리스트에 포함될 정도로 명성만큼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거의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이렇게 두꺼운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숙제를 끝내기 위한 사명감 비슷한걸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숙제를 끝내기는 정말로 어렵더군요. 이야기의 2/3 대부분이 드 윈터 부인의 1인칭 심리묘사인데, 그녀의 마음에 전혀 공감할 수 없던 탓이 가장 큽니다. 어린 철부지 소녀가 급작스럽게 대저택의 안주인이 된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에요. 그러나 맨덜리 저택과 그 주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라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져 시종일관 소심함을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 눈치를 신경쓰고 그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에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당황스럽고, 철부지였다 하더라도 대저택 안주인으로 몇 개월 보냈으면 당연히 적응을 했어야죠. 몇 개월이 지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극복 하지 못하고 손톱이나 물어 뜯는 모습에는 공감을 할래야 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그녀의 어리버리함이 지나치게 부각되기 때문에, 저택 주변에 항상 맴도는 '레베카'의 그림자가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레베카를 숭배했다는 저택 관리인의 우두머리 댄버스 부인의 악의만큼은 실감나게 느껴집니다만, 이 역시 그녀가 어설퍼서 댄버스 부인의 증오를 초래한 것에 불과합니다.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에게 자신이 이제부터 드 윈터 부인이며, 그녀의 윗 사람이라는걸 처음에 확실하게 인지시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거든요. 댄버스 부인이 굴복하던가,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알아서 떠나버렸을테니까요.
심지어 지나치게 상황 인식이 부족한 탓에 스스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레베카가 정숙하지 못했다는걸 눈치채고 있습니다. 저택을 몰래 방문했던 사촌 파벨이 레베카의 문란한 생활 속 상대 중 하나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고요. 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맨덜리에서 오랫만에 수많은 손님이 방문하는 무도회가 열리는데, 댄버스 부인이 사근사근하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뻔합니다. 그러나 딱 한 명, 주인공 드 윈터 부인만 모를 뿐이지요. 이래서야 드 윈터 부인이야말로 문제의 원흉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남편 맥심이 그녀의 적응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건 이해합니다만, 그녀가 속 시원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더 큰 문제에요. 맥심지어 유일한 그녀의 편인 영지 관리인 프랭크에게는 어려운 상황과 댄버스 부인의 적의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이야기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 와 같은 말로는 부족했어요. 특히나 댄버스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레베카의 사촌 파벨을 맨덜리에 들였던게 탄로난 건은 하인으로서 하면 안될 일입니다. 이걸 꾸짖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댄버스 부인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루함을 참고, 2/3 정도를 지나면 다행히 명성을 회복합니다. 무도회에서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의 복수로 레베카의 옷을 입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진 직후, 레베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맥심 드 윈터는 아내에게 자신이 레베카를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고 고백하고요. 레베카가 저질렀던 온갖 부정들이 여기서 맥심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후 명백한 침몰 흔적때문에 벌어지는 재심리, 자살로 대충 결론내려지지만 이의를 제기한 사촌 파벨의 협잡 등 여러번의 위기가 몰아치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렇게 맥심 드 윈터에게 위기가 연이어 닥치고, 하나씩 위기를 넘는 듯 하지만 위기가 계속되는 전개는 그야말로 '서스펜스'가 뭔지 그 답을 제시해 주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파벨이 찾아와 협작질을 벌이는 날, 여러 명의 관계자들을 소환해 진상이 무엇인지를 추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맥심!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심정으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들더라고요. 아울러 이를 함께 극복해 나가며 소녀에서 진짜 귀족 여성이 되는 드 윈터 부인의 성장기로서도 볼 만합니다. 그녀의 맥심을 향한 장황한 심리 묘사에 더해, 맥심은 레베카를 진짜로 사랑하지 않았고, 진짜 사랑한건 자신이라는걸 깨닫는 장면 등은 이 작품이 로맨스가 중요한 요소인 고딕이라는 장르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고요.

그러나 치안판사 줄리언 대령이 직접 수사에 나설 정도의 단서를 파벨이 제시한게 맞는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레베카가 만나자고 보낸 쪽지를 들고 있던건 사실이지만, 그 쪽지가 레베카가 사망한 날 쓰여졌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지로 지역 명사를 협박한 파벨을 체포하여 재판하는게 당연한 수순이에요.

레베카가 몰래 의사를 찾아간 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걸 알게 되었다는 결말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자살 겸 해서 일부러 맥심 드 윈터를 도발한게 진상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쪽지를 남긴 이유는 설명되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댄버스 부인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맥심 드 윈터가 어찌되었건 아내를 살해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정숙하지 못한 아내에 대한 응징으로 포장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범죄에요. 빅토리아 시기 직후, 20세기 초반에야 레베카의 부정이 죽을 죄였을지는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건 무리지요. 어떤 식으로건 단죄는 필요하다 생각되어서 별로 개운치 못합니다. 단지 저택을 잃은 정도로 끝나기는 부족했어요. 이 때문에 작은 호텔 등에 숨어산다는 현재 역시도 그게 얼마나 큰 벌인지 잘 와 닿지도 않습니다.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레베카의 사인은 사고사이며 결말은 해피엔딩이라는데 저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을 위한 각색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우드식이기는 하지만, 이 쪽이 더 명확해서 좋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울러 진상을 눈치 챈 댄버스 부인의 복수도 허망합니다. 저라면 드 윈터 부부가 돌아온 직후, 불을 질렀을 거에요. 그깟 저택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후반부 1/3은 고딕 미스터리의 대명사다운 놀라운 서스펜스와 몰입감을 자랑하지만, 2/3 분량의 지루함에 대한 압박이 커서 감점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낡은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걸작은 아니라 생각되네요. 현대 독자라면, 영화 쪽을 감상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에서 중요한 요소로 쓰였던, 다과회에 나왔다는 비밀 샌드위치는 어디에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샌드위치는 맥심의 할머니가 티 타임에 먹은 물냉이 샌드위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된 오이 샌드위치가 기억에 남을 뿐인데 말이죠.
여기서 무언가 요리를 발췌한다면, 드 윈터 부인이 처음 보고 놀란 호화스러운 아침 식사나, 매형 자일즈가 감탄하는 영국에서 제대로 된 음식의 대표격인 수플레, 차를 마실 때 빠지지 않는 스콘과 카스텔라가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008/04/27

세 개의 관 - 존 딕슨 카 / 김민영 : 별점 3점

세 개의 관 - 6점
존 딕슨 카 지음, 김민영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수수께끼의 남자가 나타난 뒤 방 안에서 연기와 같이 사라진 그리모 교수 살인 사건과 거리 한복판에서 유령과 같은 목소리와 함께 살해된 카리오스트로 거리의 마술사 살인 사건, 불가능해 보이는 두 사건의 해결을 위해 기디온 펠 박사가 나섰고, 의외의 진상을 밝혀낸다.

존 딕슨 카 최고 작품 중 하나라는 작품입니다. 번역된지는 꽤 되었지만,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는 취향이 아닌 탓에 통 손이 가지 않아서, 이제서야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추리 소설 역사에 길이 남을 명탐정이긴 하지만 기디온 펠 박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잘난척하는 캐릭터와 장황한 언변으로 엘러리 퀸이나 파일로 밴스 같은 짜증 계열 탐정으로 저한테는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방코랑 탐정이 개인적으로는 더 취향이에요.

하여튼, 이 작품은 고딕 호러물과 추리물의 결합이 특기인 딕슨 카의 작품답게 "트란실배니아의 흡혈귀 전설"이라는 호러적인 소재를 도입하고 있으며. 흡혈귀 전설에서 유래한 관, 그리고 관에서 살아나온 시체라는 설정을 "불가능 살인"의 기묘함과 잘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눈 위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범인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흡혈귀나 마술사와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니까요.

또한 이러한 불가능 살인 사건이 무려! 두 건이나 벌어지며 - 모두 밀실 살인 사건으로 한 건은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그리모 교수 사건이고, 또 하나는 눈이 쌓인 거리 한 복판에서 총에 맞아 살해된 마술사 프레이 사건입니다 -   두 건 모두 의외의 진상을 보여주는 덕분에 추리적인 재미는 상당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보다는 두개가 낫지요.

하지만 그리모 교수 사건은 완벽한 트릭과 장치에 의한 정교한 밀실 살인 사건인 반면, 프레이 사건은 우연과 특수한 상황이 결합된 돌발 상황일 뿐이라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범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우연과 우연이 여러 개 겹친 상황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리고 첫번째 사건도 아주 정교하고 공들인 장치와 트릭이 어우러진 밀실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명성에 값하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범인의 "체력"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고 있다는건 설득력이 다소 부족합니다. 때문에 트릭 면에서는 알려진 것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너무 큰 탓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흡혈귀 전설에서 시작해서 마술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작품과 트릭에 녹여내는 솜씨 하나만은 과연 대단합니다. 트란실배니아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또 기디온 펠 박사의 밀실 살인 사건에 대한 장황한 강의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아울러 해드리 경감과 랜폴 등 시리즈 캐릭터의 등장도 반가왔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기디온 펠 박사는 여전히 짜증 계열 타입이기는 하지만 재미, 작품의 역사적인 의의를 되새겨 볼 때 별 세개는 충분히 줄 수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PS : 그리고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국내에 출간된 딕슨 카 작품 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네요.

작품목록 : 연속살인사건 (고성의 괴사건) / 해골성 / 황재의 코담배갑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 세개의 관 / 화형법정 / 모자수집광사건 / 감미로운 초대 (밤에 걷다)

이 중 딱 세 작품만 꼽아 본다면 저의 영원한 베스트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정통 추리와 고딕 호러의 완벽한 결합체인 "해골성", "화형법정" 을 꼽겠습니다.

2010/10/02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 와카타케 나나미 / 서혜영 : 별점 3.5점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 8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던 아이자와 마코토는 실직 후 바다를 찾아왔다가 익사체를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하츠키시에 머물게 된 마코토는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주인 베니코의 간단한 테스트를 통과한 뒤, 그녀의 취업 제의를 받아들였다.

한편 그녀가 발견한 익사체는 하츠키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에다 가문의 히데하루로 밝혀져 장례 준비가 진행되는데, 그 와중에 마에다 가문의 현 주인 마치코마저도 어제일리어에서 살해되고 마는데...

소도시 하자키를 무대로 한 와카타케 나나미의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라 주저 없이 선택했는데, 읽고 나서야 두 번째 작품이라는걸 알았네요. 

그런데 이 작품, 정말 재미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한 것에 더해 추리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가 수사와 추리의 과정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범인과 동기가 이치에 맞는 등 본격 추리적인 요소에 아주 충실합니다.

거기에 더해, 아이자와 마코토가 초반에 겪는 호텔 화재 사건이나 마코토와 치아키의 전화 통화, 베니코 여사의 옛날 이야기 같은 사소한 단서들이 모두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덕분에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복잡한 느낌 없이 추리 소설의 재미를 가득 느낄 수 있었어요.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 역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황당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만, 적절히 수위와 템포를 조절하며 작품과 어울리도록 녹이는 부분에서 작가의 내공이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코토가 처음 어제일리어를 방문한 뒤, 베니코 여사와 펼치는 '고딕 로맨스 퀴즈' 등 고딕 로맨스 소설에 얽힌 다양한 떡밥들은 매니아를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해 더욱 흥미로웠고요.

하지만 주요 사건의 깔끔한 해결에 비해 다른 사건들은 정리가 다소 부족하다는건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치코-구도가 얽힌 하쓰호 살해 및 유기 사건이 그렇습니다. 구도가 하쓰호를 죽인 이유도 명쾌하지 않았고, 시체 유기에 대한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거든요. 이 때문에 마치코 역시 유언장을 폐기하려면 차라리 불을 지르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하거든요. 유언장도 없애고, 생사가 불분명한 하쓰호의 행방을 파악할 수 있어 재산 상속에 문제가 없어지니 1석 2조가 되니까요. 어차피 자신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니, 마치코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구도가 마코토를 습격하면서까지 사체를 처리하려 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사건은 종결된 상태였으니까요. 이런 행동은 무리수였습니다. 차라리 고마지 반장의 추리로 밝혀내는 식으로 처리하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덧붙이자면, 히데하루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가 복수를 결심한 이후의 행동들 역시 다소 뜬금없었습니다. 복수 방법도 어설펐지만, 마이와 시노부가 얽히는 과정이 순전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점은 앞선 정교한 장치들과 비교한다면 너무 쉽게 처리된 듯 합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5점! 이상하게 단점을 리뷰에 상세하게 적기는 했는데, 장점이 훨씬 더 월등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빨리 1권을 구해 읽어야겠네요.

PS: '코지 미스터리'를 표방한 작품치고는 너무 강력한 사건이 등장하며,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재산 싸움이 펼쳐지는 점이 의외였습니다. 이런 작품도 코지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2013/08/14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구마 겐고 외 / 권은희 : 별점 2.5점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6점
구마 겐고 외 지음, 권은희 옮김/까치

건물 하나당 한 장 분량의 짤막한 글과 사진으로 구성된 전편에 이어지는 건축물 관련 서적. 몰랐는데 아사히 신문 연재 컬럼이라고 하네요.

이 책의 장점은 아주 확실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굉장히 멋지다는 점이죠. 글들은 4명의 작가가 나누어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움이나 기묘함만을 설명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 건축물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보는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글이 가장 좋았습니다. 일본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이 제법 있다는 정보는 솔깃했고요. 여행 갔을 때 좀 알고 돌아볼걸...

그러나 건축물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 전편보다 참신함과 재미가 부족하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정보 부족의 경우, 이 책을 사진과 함께 하는 일종의 건축물에 대한 감상 중심의 에세이로 규정한다면 단점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단점은 심각합니다. 에펠탑이나 런던의 유리 달걀 같은 관광지화된 유명 유적에다가 가우디, 르 코르뷔지에, 반 데어 로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의 대표작들은 이런저런 다른 매체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것들로, 이 책의 제목인 "불가사의한"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아트북 같은 책의 성격은 마음에 들지만 전편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에 든 건축물들을 몇 개 꼽아본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카이딘 황릉

베트남 최후의 황제 바오다이 바로 직전의 황제인 카이딘 황제의 능. 철근 콘크리트와 가우디 취향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지만 슬프고 품위가 없는 분위기라는 기묘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긴타이쿄

그야말로 우키요에의 풍경 그림 같은 독특한 다리.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마구치현, 이와쿠니번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세 미술관

1970년대 초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1968년 5월 혁명 후 이의가 제기되어 보존이 결정되고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내용은 잘 알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대한 이의제기가 관광 명소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씁쓸한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이탈리아의 몬테마르티니 박물관

히틀러의 전체주의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미래파를 후원하는 등 디자인 선진국다운 미의식의 소산이 보였다죠. 그래서인지 다른 국가의 오래된 건물을 박물관화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오르세 미술관처럼 역사적 건물 안에 근현대 미술품을 전시한 의외성이 특징이나, 이 미술관은 고대 조각을 수용했다는 독특함이 돋보입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것이 영원한 디자인 대국다운 면모라고 하네요.

스트로베리힐 빌라

고딕 호러 오트란트 성의 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자신의 고딕 취미를 반영하여 건축한 자택. 당시 기준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잔뜩 집어넣으려 노력한 것 같은데 사진만 보면 괴기스럽다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느껴집니다.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이겠죠.

긴자 라이온

1934년에 개업한 맥주 마니아의 성지. 건축적인 의미보다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보고 싶더군요. 사진만 보면 뭐... 그냥 강남 지하에 있는 맥주집 같긴 하지만요. 참고로 이 "긴자 라이온"은 대일본맥주의 직영 맥주홀로 1934년 개장하였으며, 연중무휴로 생맥주 한 잔은 25전이었다고 합니다.

2014/10/31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 셜리 잭슨 / 성문영 : 별점 2점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 4점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엘릭시르

블랙우드 일가는 6년 전, 윌리엄 삼촌과 콘스탄스, 매리캣 자매를 제외하고 일가족이 모두 독살당한 사건으로 마을에서 고립되었다. 당시 요리를 했던 콘스탄스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여전히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매리캣은 사고 후 미쳐버린 윌리엄 삼촌, 광장공포증으로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콘스탄스와 함께 어렵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는데, 사촌 찰스가 방문한 다음부터 생활에 균열이 시작되는데...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열 한 번째 책. 고딕 호러의 대가라는 셜리 잭슨의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섭다거나 섬뜩한게 아니라, 불편하다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작가의 엄청나게 상세한 묘사들 때문입니다. 특히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집요한 광기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 작품 속 사건 사고의 원흉인 화자 매리캣의 성격 묘사는 정말 압권입니다. 초반에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를 밝혀주지만, 내용 내내 초등학생 이상의 연령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순수하고, 그만큼 완전히 미쳐버린 여자아이의 심리 묘사가 그야말로 극에 달해 있거든요. 이런 류의 캐릭터, 성격은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굉장히 불편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파이 바닥의 달콤함"의 소악마 플라비아 들루스가 연상되었습니다.

또 시골 마을에서 고립된다는 설정은 "이끼"나 얼마 전 보았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사자개 저택의 비밀"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흔하디 흔하지만, 고립된 자매의 묘사에서 보이는 상세함과 깊이가 대단해서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과연 누가 얼마나 미친 것일까? 이러한 광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고요. 마지막 화재 이후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라 궁금증을 더해줍니다.

그러나 고딕 "호러"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무서운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독살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도 초반에 이미 짐작할 수 있어서, 대단한 반전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미쳐버린 노인과,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언니를 제외하면 과연 누가 남겠습니까? 또 완벽하게 미쳐버린 매리캣 시점으로만 전개되어 광기나 범행의 이유 같은 게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답답했습니다. 그게 뭐든, 최소한 '태양이 너무 뜨거웠다' 식으로라도 뭔가 설명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화형법정"이나 "어두운 거울 속에"와 같은 추리적인 재미 요소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는 완벽하게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묘사는 압도적이지만 추리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 책장’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될 작품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담고 있는 건 작가가 경험했다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광기 뿐이니까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선들 같은, 약간 마음 불편한 순문학을 원하신다면 좋은 선택일 수 있지만, 정통파적인 추리 혹은 공포를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18/03/10

유령탑 - 에도가와 란포 / 민경욱 : 별점 1점

유령탑 - 2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미야자키 하야오 그림, 민경욱 옮김/북홀릭(bookholic)

'아케치 코고로'나 '괴인 20면상', '소년 탐정단' 시리즈가 아닌 에도가와 란포의 스탠드 얼론 장편으로 쇼와 12년, 즉 1937년 첫 연재가 시작되었던 초기작입니다. 쿠로이와 루이코의 번역서를 에도가와 란포가 다시 재가공하였으며, 원작은 앨리스 M 윌리엄슨의 "회색빛 여인" 이라고 하네요.

사실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발표 시기나 발표된 형태(번역서의 재가공)를 볼 때 구릴 것이다! 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집어든 이유는 딱 한 가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그리고 해설한 서두 몇 페이지의 일러스트와 콘티가 마음에 들었던 덕분입니다. 지브리 미술관에서 "유령탑에 어서 오세요 전시 - 통속 문화의 왕도" 라는 기획전을 개최할 때 전시되었던 자료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 편은 역시나, 생각만큼 구립니다. 별로에요. 설정은 작위적이기 짝이 없으며 모든 내용은 우연에 의지하고 있는 탓입니다. 키타가와 미츠오와 노즈에 아키코가 폐허가 된 유령탑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작위적이며, 뒤로 가면 갈 수록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집니다.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 곡마단에서 탈출한 호랑이가 난입하고, 협박범을 미행하면서 탄 열차가 탈선 사고를 일으켜 협박범의 집에 잠입하게 되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설정과 전개는 슬랩스틱 개그물을 방불케 하거든요. 게다가 이를 공포스럽게 묘사하는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과장된 문체는 정말 가관입니다. "아아!" 라는 감탄사가 대표적이에요. 뭔 일만 일어나면 "아아...!" 거리니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네요.

작위적이라도 이야기 전개가 탄탄하고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설득력있고 합리적이라면 참아줄만 했을겁니다. 그러나 역시나, 그럴리가 없죠. 짜임새가 헐거워서 극적인 재미를 느끼기 힘듭니다. 이야기는 초반부의 "유령탑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어 보물을 찾는 이야기에서, 중반부터의 노즈에 아키코의 정체가 무엇인지? 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유령탑에 얽힌 비밀은 고딕 호러에 모험물이 섞인 느낌이고, 노즈에 아키코의 정체는 전형적인 추리 서사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짜임새가 헐거워 완성도가 낮습니다 .

보물을 찾는 과정은 고딕 호러같은 유래에 아주 약간의 암호 트릭이 결합된 전형적인 모험물인데, 결론적으로 보면 너무 쉬워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초록색 문(?)이 열린다는건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냥 시계탑에서 쳐다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미로로 들어간 뒤에는 아키코의 발자욱을 따라 걸어갈 뿐이라 극적 긴장감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아키코가 어떻게 미로의 비밀을 풀어냈는지 설명도 되지 않고요. 단지 연구로 미로의 비밀을 풀어냈다는건 너무 유치한 발상이잖아요? 최소한의 암호 트릭이나 비슷한 무언가는 독자에게 전해주었어야 했습니다.
노즈에 아키코의 정체 관련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과거 양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던 죄수 와다 긴코였다! 까지는 뭐 그럴 듯 합니다. 하지만 노즈에 아키코, 즉 와다 긴코가 유령탑의 보물을 찾고 진범을 찾으려고 하는 사명이 있다는 설정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요. 복수를 위해 진범을 찾고자 하는건 알겠지만, 보물을 찾는게 왜 사명이 될까요? 그리고 애초에 유령탑에 살 때에는 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또 변호사 쿠로카와를 제외한 잔챙이 악당들의 협박에 휘둘리는 것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번역작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라니르' 라는 독약을 이용하여 와다 긴코를 탈옥시킨 작전은 "몽테크리스토 백작" 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지금 시점으로 본다면 표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에요. 아울러 처음에 아키코의 정체는 살해된 노파의 하녀 아카이 도키코가 아닐까? 라고 의문을 던지지만 아키코가 항상 손목을 감추고 있다는 묘사로 그녀가 와다 긴코라는건 처음부터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분량 낭비일 뿐입니다.

주인공의 모험도 앞서 말씀드렸듯 우연이 이어지는 전개이며, 차례로 수수께끼에 대해 증언이 이어지는 식이라 추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무합니다. 무엇보다도 진범이 나카다 초조로 밝혀지는 장면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열 두 시 종소리에 공포를 느낀게 증거라니? 그리고 공포를 느껴 죽은게 천벌이라니? 20세기 초기의 사고 방식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말도 안되는 주장입니다. 당시 나카다 초조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혐의를 벗었다는데, 그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도 황당합니다.

딱 한가지 건질만 했던 부분은 죽은 와다 긴코가 어떻게 다르게 생긴 노즈에 아키코로 돌아왔는지? 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현재로서는 별거 아닌 미용 성형을 무슨 대단한 과학 기술인양 포장하여 묘사한건 우습게 느껴지지만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참아줄 만 합니다.

하지만 괜찮은 부분은 전체 분량의 1/10도 안되는 느낌이에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근대 직전의 신소설 느낌이 날 정도로 낡은 작품입니다. 그 어떤 가치도 찾기 힘들기에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에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미야자키 하야오의 해설 부분만 떼어내어 1/10 가격으로 파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2010/09/24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 앰브로스 비어스 / 정진영 : 별점 3.5점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 8점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진영 옮김/생각의나무

애드거 앨런 포를 잇는 미국 장르-환상-고딕-호러 문학의 귀재이자 기인인 앰브로스 비어스의 대표 단편선입니다. 최고의 문학 형식은 단편이라는 포의 말을 따르듯, 짤막한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가의 유명세야 익히 알고 있었고, 작품도 많이 들어왔기에 너무 늦게 읽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전쟁 소설 -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말 탄 자, 허공에 있었다" -부터 전형적인 괴담 - "막힌 창", "표범의 눈", "이방인" 등 -, 일상계 호러 - "인간과 뱀", "덩굴" 등 -와 크리처물 - "요물" - 까지 굉장히 다양한 장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장르를 하나로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환상 호러 소설이라고 보는 게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괴하고 환상적인 상상력이 발휘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100여 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어요. 뭔가 마약에 취한 듯한 정경과 분위기 묘사들도 일품이었고요. 또, 귀족적이고 근대에 가까운 스타일과 묘사가 많은 고딕 호러의 느낌보다는 '미국적'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물씬 풍기는 서부 개척 시대 분위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문체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마크 트웨인이 쓴 호러 소설 느낌입니다.

마지막의 서늘한 반전으로 섬뜩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은 것은 현대의 '기묘한 맛' 장르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장르물의 선구자격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상세하게 이야기하기에는 실린 작품들이 너무 많고, 모두가 빼어난 맛이 있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개기름", "시체를 지키는 사람", "인간과 뱀", "덩굴", "요물", "말 탄 자, 허공에 있었다"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평범하고 일반적인 상황에서 펼쳐지는 공포와 함께 나름의 반전이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몽환적이거나 서술이 복잡하지도 않았고요.

특히 "시체를 지키는 사람"은 시체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는 내기의 황당하고 충격적인 결말이 인상적인데, 나름 제 식으로 변주해서 풀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크리처물 "요물"은 현대 유사 콘텐츠의 원형을 제공한 듯한 발상이 좋았고요. 투명 괴물이라니!

한마디로 장르문학, 특히 호러 팬이라면 당연히 봐야 할 작품집이 아닐까 싶네요. 책도 아주 예쁘게 나와서 마음에 듭니다. 제가 호러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만, 단지 제 취향의 문제일 뿐입니다.

2010/03/05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4점

유다의 창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부유한 청년 제임스 앤스웰은 예비 장인 에이버리 흄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흄이 권한 술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정신이 든 그의 앞에 화살에 찔린 시체가 된 에이버리 흄이 놓여 있었고, 방은 방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진 완벽한 밀실 상태였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그를 구하기 위해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를 맡아 법정에서의 사투가 시작되는데...

드디어 나왔다! 오랜 시간 기다린 존 딕슨 카의 대표작이 드디어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네요. 소식을 듣자마자 구입했습니다. 작품도 하루만에 읽어버릴 정도로, 그야말로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멋진 작품이었고요.

일단 밀실 트릭의 대가다운 솜씨가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두터운 문에 빗장이 질러지고 창문마저도 빗장쳐진, 틈 하나 없는 완벽한 밀실(검찰측 말대로 "봉인된 방"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죠)에서의 살인이라는 설정도 흥미롭고, 트릭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남을 명트릭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여러가지 단서들도 굉장히 합리적이고요.

또 의외로 법정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게 대박입니다. 사건이 재판 과정을 통해서 증인들의 증언과 단서로 재구성되어 전개됨에 따라, 고전 추리물의 최대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완벽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독자가 머리속으로, 또는 손으로 그려야 하는 사건 시간표 같은 것도 전부 표로 제공해 주니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겠지요. 아울러 작가의 시리즈 탐정 캐릭터이기도 한 헨리 메리베일경의 왕실 고문 변호사로서의 활약을 보는 것도 즐거웠어요.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릭이 영미권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이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동기가 취약하다는 것, 그리고 헨리 메리베일경이 극중에서 언급하듯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뻔하다"는건 고전 본격 추리물로는 확실한 약점입니다. 헨리 경이 독자가 모르는 정보를 쥐고 있다는 설정도 약간 아쉬웠고요.
그래도 전개과정에서 나름 합리성을 보장하고 있기에 크게 흠 잡기는 어렵습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고전 황금기 시대 본격 추리물 및 법정 미스터리 걸작입니다. 동서 추리문고 스타일의 낡은 일어 중역본이 아닌 깔끔한 번역으로 소개된 것도 반갑고요. 추리 애호가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제가 읽은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및 개인적인 순위를 예전 "세개의 관" 리뷰에 언급했는데 업데이트해 봅니다. 확인해 보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하나만 아직 안 읽었는데, 일단 읽은 것 까지만 정리할께요.^^

"완독한 존 딕슨 카 작품 목록 : 순서는 무순"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 연속 살인사건 / 모자 수집광 사건 / 해골성 / 벨벳의 악마 / 화형법정 / 흑사장 살인사건 / 세개의 관 / 구부러진 경첩 / 감미로운 초대 (밤에 걷다) /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이 중 딱 세 작품만 꼽으라면 저의 영원한 베스트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정통 추리와 고딕 호러의 완벽한 결합체인 "해골성", 그리고 바로 이 작품인 "유다의 창" 을 꼽겠습니다.

2020/01/05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니시카와 다카아키, 사카구치 와카코 / 박유미 : 별점 2.5점

명작 의자 유래 사전 - 6점
니시카와 다카아키 지음, 사카구치 와카코 그림, 박유미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역사 속 대표적인 의자 350가지를 선정한 뒤, 큰 판형을 잘 활용한 상세한 일러스트와 디자이너 정보와 함께 시대순, 지역별로 구분하여 소개하는 디자인 역사서입니다.

의자 디자인에 대한 책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의자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제품 디자인'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의자 디자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지를 잘 알려주는데, 책에 따르면 의자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오늘날 의자의 형태가 이 때 거의 완성되었거든요.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황금 안락 의자, 그리고 좌석, 등판, 팔걸이, 4개의 다리, 하인방의 부재 (4개의 다리를 엮어 지탱하는 구조물)로 구성되어 오늘날의 의자 기본 구조와 거의 동일한 투탕카멘의 옥좌 등의 발굴로 증명되고요. 개인용 목제의자는 현대의 스툴 개념과 동일합니다.

그 다음은 현재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그림으로 확인 가능한 고대 그리스의 의자 클리스모스, 고대 로마의 카데드라를 거쳐 중세 유럽으로 넘어가는데, 중세 유럽은 문화와 건축 양식에 따라 구분됩니다.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의 세가지 양식으로요.
이러한 문화와 양식 측면의 구분은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으로 이어지며 해당 시기마다 그 양식을 대표하는 의자들이 소개됩니다. 로코코부터는 나라별로 신고전주의 (루이 16세 양식), 퀸 앤 양식 (영국 앤 여왕 제위 시대 양식) 등으로 더 상세하게 구분한게 특징입니다. 이 때부터 특정 문화와 양식에 종속되어 유행을 따라가지 않은 디자이너 -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토마스 치펀데일 - 가 등장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뒤는 특이하게 특정 '의자'의 소개로 넘어갑니다. 영국의 윈저 체어, 미국의 셰이커 체어, 토넷의 곡목 의자입니다. 한 시대를 거의 평정하다시피하며, 지금도 사랑받는, 일종의 '양식'과 '형태'를 만든 명작 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부터는 다시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 아르누보와 20세기 전반 모던 양식 등으로 이어지고, 20세기부터는 현대 의자라고 해도 무방한 의자들과 유명 디자이너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친숙한 이름이 많아서 반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매킨토시와 힐 하우스 래더백 체어, 해릿 토마스 릿펠트의 레드&블루 체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야콥센의 스완 체어와 더 에그 체어, 베르너 팬톤의 팬톤 체어, 핀란드의 영웅 알바르 알토와 그의 의자들, 미국의 천재 찰스 임스와 그의 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아론 체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20세기부터의 소개는 조금 아쉽습니다. 19세기까지의 소개는 크게 특정 시기를 묶어서 의자의 발전사를 시대순으로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었는데, 그냥 유명한 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책의 소개만으로 특정 양식이나 흐름 등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어요. 이렇게 나열식으로 의자와 디자이너를 소개하면, 이전에 읽었던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와 같은 책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아니, 흑백 일러스트로 소개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못합니다. 큰 판형을 살리지도 못하고 대부분 작은 사이즈로 소개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뒤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형태, 계통도로 정리해 놓기는 했는데 실제 본문과 연결해 보기는 어려운 만큼, 차라리 이 형태와 계통도를 맨 앞에 목차처럼 수록하고, 의자들의 소개도 계통도대로 명확하게 소개해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목 그대로 '유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아울러, 일본이 제품 디자인 강국이기는 하나 '명작 의자 유래 사전'이라는 책에 한 꼭지를 할애하여 역사를 소개하고, 주요 디자이너와 의자를 소개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나온 책이라 어쩔 수 없기는 하겠지만, 뭔가 공평한 시선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19세기까지는 별점 5점을 주어도 괜찮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감점합니다. 의자 디자인의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뒤의 부록과 같은 형태, 계통도만 참고하면 좋을 듯 합니다.

2005/04/04

해골성 - 존 딕슨 카 / 전형기 : 별점 4점

해골성 - 6점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라인 강변의 대 마법사 메이르쟈가 기차에서 사라지는 사건으로부터 17년 후, 메이르쟈의 친구로 그가 기거하던 해골성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당대의 명배우 마일런 아리슨이 총에 맞고 불에 타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파리의 명탐정 방코랑은 이 사건을 메이르쟈와 아리슨의 친구인 대부호 드오네이로부터 의뢰 받아, 아리슨이 거처하던 해골성 옆 별장으로 조수겸 화자인 소설가 제프리 마르와 함께 떠났다. 방코랑은 그곳에서 사건을 정식으로 담당한 독일의 명탐정 폰 아른하임 남작과 추리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이전에 읽었었던 "밤에 걷다" 이후 2번째로 읽은 딕슨 카의 방코랑 시리즈입니다. 딕슨 카의 3번째 작품이라고 하네요. 개인적으로 딕슨 카 작품은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정통 본격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굉장히 선호하는 편인데, 우연찮게 일신 추리문고 출간본을 헌책방에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동서에서 나온 책도 있지만 최근 자금의 압박이 심해서....(개인적으로 일신 추리문고 판본이 더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작가의 다른 시리즈인 펠박사와 헨리 메리베일 경 시리즈와는 다르게, 방코랑 시리즈는 오컬트를 넘어서는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주는게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밤에 걷다"는 흡혈귀 괴담, 이 작품은 "마술"을 배경 설정으로 다루고 있는데, 고딕 호러 스타일이 작품 전체에 굉장히 짙고 뭔가 약간 일본 변격물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단순히 괴담 분위기로만 끝나지 않고, 추리적으로도 우수해서 각종 단서가 독자에게 충실하게,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다는게 대단합니다. 굉장히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클로우즈 써클 타입 - "고립된 별장" 타입 - 의 미스터리인지라 용의자도 한정되어 있는 탓에 진부해 질 수 있는데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나간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무엇보다도 "올드보이" 못지 않은 반전과 이어지는 결말은 저의 예상을 초월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로 만들면 굉장히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의 "라이벌"격인 탐정이 등장해서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도 신선했습니다. 보통 주인공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이벌을 "찐따"로 만드는 이 바닥의 상식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비교적 공평한 시각으로 두명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거든요.

방코랑은 유머도 부족하고 잘난척도 심하며, 혼자만의 꿍꿍이가 많아서 주인공 탐정으로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 거장의 황금기 걸작다운 충분한 재미와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명작입니다. 저는 무척 즐겁게 읽었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해골성의 도해와 구조를 설명한 사이트가 있더군요. 아주아주 약간의 트릭이 밝혀지니 만큼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읽으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둘러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나저나 정말 해골 모양이네요^^

PS : 한가지 의문은 미국 작가가 왜 프랑스 탐정을 주인공으로 독일 라인강을 무대로 한 작품을 썼는 지는 조금 궁금합니다. 이렇게 설정하는게 더 있어보였을려나?

2022/02/26

세계를 매혹한 돌 - 윤성원 : 별점 3점

세계를 매혹한 돌 - 6점
윤성원 지음/모요사

보석과 주얼리가 주제인 책인데, 이전에 읽었었던 "보석 천 개의 유혹"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석과 주얼리의 유행과 디자인 변천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행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건, 얼마전에 읽었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보석과 주얼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또 보석과 주얼리는 가격 때문에 사회 지도층이 관련될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단순한 보석, 주얼리 유행 통사가 아닌, 약간 미시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국가별로 달랐던 유행의 이유는 그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베를린 아이언은 철로 만들어진 주얼리로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 당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념품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군자금에 보태기 위해 금 주얼리를 기부하고, 철로 만든 베를린 아이언 주얼리를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 민족의식 발현이라는 속 뜻과 무관하게, 적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1 제정 몰락 후 왕정복고기에 문학, 건축 등 전 분야에서 중세 고딕 문화가 유행했던 탓에 베를린 아이언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왕정복고기에는 고가의 큰 보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현실도 한 몫 했었고요. 

반면 영국에서는 19세기에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낀 주얼리가 유행했습니다. 상류층이 19세기의 놀라왔던 예술, 문학, 과학 기술의 진보를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동일시했던 덕분이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갈 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유행이었겠지요. 아울러 이 때 로마, 이집트, 헬레니즘 및 에트루리아 유적 발굴로 고고학적 복고 양식도 함께 유행했다고 합니다.

특정 아이템의 변천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여성의 목을 감싸는 초커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유행이 시작되었었습니다. 색깔도 빨간색이었고요. 허나 19세기에 접어들며 검은색 초커는 매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 등으로 잘 알 수 있고요. 이후 영국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갑상선 수술 흉터를 감추기 위해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여러 줄 세팅된 폭넓은 초커를 착용하기 시작한 뒤, 19세기 말 ~ 20세기 초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네요. 지금의 문신 (타투) 유행과도 조금 비슷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문신은 범죄 등 안 좋은 이미지의 대명사였는데 요새는 인스타그램 셀러브리티 등을 통해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초커의 유행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으로도 잘 알 수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 속 초커 실물은 나치의 압류 이후 사라졌다니 이 역시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 속 일화로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입니다.

이러한 흥미로운 역사 일화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인류 역사상 안정과 번영을 가장 길게 누렸고, 그 어느 때 보다 탐미적이었던 '벨에포크' 시대에서 유행을 선도했던 사교계의 중심지 막심 레스토랑을 무대로 화려함을 뽐냈던 3대 고급 매춘부인 라 벨 오테로, 리안 드 푸지, 에밀리엔 달랴숑의 승부 이야기처럼요. 이 일화와 함께 소개되었던 당시 쥬얼리는 도판만 보아도 그 화려함이 남다른 수준이라 과연 '벨에포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사교계를 주도했던 에스터 가문의 안주인 캐럴라인과 신흥 부호 밴더빌트 가문의 안주인 알바 밴더빌트의 승부와 거래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 외에도 벨에포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와 그녀의 쥬얼리, 영국 메리 왕비가 혼란기에 수집했던 당대 유럽 왕실의 명품 쥬얼리들 이야기도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소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상징과도 같은 '블라디미르 티아라'가 어떻게 영국 왕실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공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셋째 아들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던 마리아 파블로브나 '미첸' 블라디미르 대공작 부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몸을 피하면서 진짜 값비싼 보물을 블라디미르 궁전 비밀 장소에 숨겨두었었는데, 그녀의 친구였던 영국인 예술품 딜러 앨버트 스토퍼드가 노동자로 변장해서 궁에 잠입한 뒤 보물을 꺼내어 런던으로 빼돌렸다는, 혁명과 모험이 모두 들어가있는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를 메리 여왕이 구입하여 지금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식 석상에 착용하고 나오게 되었다는건 참 많은걸 느끼게 해 주고요. Winners takes it at all 인 거겠지요? 

1차대전 후, 아르누보와 벨에포크 복고풍 로코코는 모두 옛 것이 되었고, 미래지향적이고 기하학적인 모티브의 디자인의 유행은 야수파, 입체파 등의 미술사조, 디자인의 바우하우스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네요. 부족해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쥬얼리 디자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인도 마하라자들의 어마무시한 쥬얼리 컬렉션들, 1922년 투탕카멘 발굴을 통한 동서양이 융합된 디자인의 유행과 2차 대전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얼리 유행 테마들 소개도 볼만했습니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이아몬드 제국 드비어스의 탄생과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로 기억되는 성공 공식에 대한 설명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광고를 누가 어떻게 집행했는지를 다루는 글은 처음 읽어보기도 했고요.

전문적으로 쓰여진 글로 보기에는 저자의 개인 경험과 개인 생각에 대한 비중이 높으며, 미시사 서적으로 보기에는 쓰여진 내용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도 있으면서 여러가지 자료적인 가치도 높은 책인 덕분입니다. 도판만 보아도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보석, 주얼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3/04/09

활자본색 - 이재정 : 별점 3점

활자본색 - 6점
이재정 지음/책과함께

남아있는 조선시대 금속 활자 중심으로 우리나라 활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는 미시사 서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등으로 근무하며 금속활자 연구를 진행했던 저자의 오랜 연구와 학습이 바탕이 된 상세한 설명이 가득합니다.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글도 마음에 들었고요. 덕분에 그동안 몰랐었던 조선시대 금속 활자에 대해 많은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대표적인건 왜 조선에서는 금속 활자를 많이 만들었는지? 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태종부터 금속활자 계미자를 만든 이유를 인쇄 목적이라고 천명했지만, 어차피 똑같은 서적을 찍을 거라면 목판본으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 수 있습니다. 금속 활자로 인쇄할 수 있는건 하루에 많아야 20장 정도가 한계였다니 그다지 가성비가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때문에 저자는 왕들이 힘과 돈을 써 가며 금속 활자를 만든 이유를 왕권 강화, 왕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컸다고 풀이합니다. 문치주의, 유교 문화 영향 아래에서 사치의 상징으로 내세울게 금속 활자였다는 해석이지요. 정조를 도와 활자 정유자를 만든 서명응이 이를 '부서', 즉 상서로운 징조이자 왕권의 상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고요. 제왕의 상징인 '구정'과 같은 구리로 만들어서 그랬다는 해석은 참신했습니다. 때문에 왕권이 강했고, 나름 국력과 왕권이 강했던 시기에 많이 주조되었던게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고요. 활자로 당시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는게 재미있는데, 이런걸 보면 정조대왕 시기가 일종의 조선 후기 마지막 번영기였다는건 틀림이 없는 사실 같습니다. 화성이라는 거대한 건설 사업에 각종 기록들은 물론이고, 금속활자도 가장 많이 주조했다고 하니까요. 
왕의 서체를 직접 활자에 반영한다던가, '역적' 안평대군의 서체로 만들어졌던 활자를 없애고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그를 대체한 것도 같은 이유였을겁니다. 기껏 애써 만든 활자를 활용해서 많은 책을 출판하지 않은 것도, 왕의 것이라 아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민간에서도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족보를 위조해서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는 새로왔습니다. 목판은 족보 위조 시 판 하나를 갈아치워야 하지만 금속활자는 이름만 바꾸면 되었기 때문에 간편했다나요. 하지만 결국 민간에서 활자 제작하는걸 막을 수 없었고, 심지어 국력이 약했을 때는 민간 활자를 징발해 책을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각 활자별 분류도 상세합니다. 어떤 왕이 어떤 활자를 만들었고, 각 활자별로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알려주는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신답게 조선시대 금속 활자를 망라하고 있는 도판이 아주 좋습니다. 상세할 뿐더러 초반부의 해서체에서 후반부 명조체로 이동하는 일련의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많이 친숙한 명조체는 원래 송나라 시대 목판 인쇄가 성행하면서 판목에 글자를 새기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사용은 명나라 시기부터였고, 이 서체가 서양 납활자로 만들어진 후 일본에 도입된게 현재 명조체의 기원이 되었다는 역사는 처음 알았네요.
또 서체의 변화는 한자 서체와 함께 한글 서체도 함께 알려주는데, 한자보다 한글이 서체의 변화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한 디자인 변형을 보여주거든요. 극초기 훈민정음 창제 시기의 서체가 한자 서체와 유사하게 정방형 구조 안에 글자를 넣었고, 창제 원리에 맞게 점, 선, 그리고 네모 형태 기준으로 조합하는 디자인이라 더 모듈화된 느낌을 전해주었고, 그래서 형태적으로는 현대적인 고딕 서체와 거의 동일했다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모던한 서체였던 셈이네요. 이러한 초창기 맛이 이후 한자 서체의 해서체를 바탕으로 한글 서체가 발전되어 사라졌다는게 조금 아쉽습니다. 다시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보아도 멋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활자의 제작 방식과 실제 활용 - 출판 - 등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습니다. 활자로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간행되었던 책들을 기준으로 알려주는데, 한자와 한글이 섞인 책의 레이아웃 구성 비교가 재미있었어요. 글의 중요도에 따라 나누어 인쇄했는데, 현재의 '마스터 페이지' 개념이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활자 제작 방식은 일종의 모래 거푸집을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줍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지는 못했을테니 국가적인 사업이 맞았고, 당연히 왕권이 강했어야 했겠어요. 지금 기술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게 아쉬운데, 제대로 복원이 되면 좋겠습니다.
또 활자를 어떻게 조판했는지, 어떻게 활자 제작 기술이 발달했는지, 심지어 종이와 먹, 인쇄와 제본, 활자와 책을 만든 장인들과 기관명에 대한 소개까지 이어지는데, 두 종류의 먹 중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먹보다 각종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사용한 유연먹이 금속활자 인쇄에 유리했다는 등의 토막 상식도 재미있었어요. 금속 재질에 기름으로 만든 먹이 더 잘 달라붙었다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마지막의 활자 보관장은 처음보는 가구인데, 어떻게 활자를 분류해서 넣었는지를 짤막하게나마 알려주어서 좋았습니다. 나름 부수를 통합하거나 분리했는데, 저자는 단지 부수별로 구분하면 글자수 편차가 심하니, 자주 쓰는 글자는 찾기 쉬운 서랍에 넣고, 나머지 글자들은 부수를 줄여 적당히 모아 놓은 방식이었을거라 추측합니다. 그래도 조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활자가 어느 서랍에 있는지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을텐데, 정말 전문가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 중반부까지의 설명에 비해 뒷부분 설명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은 듭니다. 책 한 권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조선의 금속활자에 대한 모든걸 망라하여 쉽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비교대상을 찾기 힘든 좋은 미시사 책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9/11/28

시미가의 붕괴 - 기타무라 가오루 / 김해용 : 별점 3점

시미가의 붕괴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김해용 옮김/황매(푸른바람)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유명한, 그래서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추리 독자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의 작품입니다. 사실 대표작도 아니고 해서 이 작품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워낙 컸던 탓에 구입하게 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집은 크게 3가지 성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추리를 기반으로 한 블랙코미디적인 작품, 그리고 일상의 소소함을 디테일하게 추리와 결합시키는 (하지만 추리물은 아닌) 일상계 추리분위기 소품, 마지막으로 인간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린 드라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블랙코미디 류(類)로는 표제작이기도 한 "시미가의 붕괴"와 "죽음과 밀실", 그리고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 수 있을테고 두번째 일상계 소품은 "하얀 아침"과 "주사위, 데굴데굴", "오니기리, 꾹꾹"이 해당되며, 마지막 심리드라마는 "녹아간다"와 "나비", "나의 자리" 가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이중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소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계 미스터리로 유명한 작가답다고나 할까요? 추리적인 요소가 녹아있으면서도 그것이 그야말로 일상과 밀결합되어 있고 내용과 캐릭터들도 너무 귀여워서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거든요.

물론 그 외의 대부분의 작품들 역시 추리적인 성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포함되어 있기에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 류의 작품군은 조금 더 절제했더라면 동화적인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추리물로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설정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약간은 아쉽더군요.

그래도 국내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작가의 작품집이고 작가 특유의 센스가 충분히 느껴지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정통 추리물들도 아니고 작가의 대표작도 아니긴 해도 가볍게 즐기기에 좋아서 추리소설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 있는 초심자분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생각되네요. 특히 여성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울러 이 단편집을 계기로 추후 일상계 소품으로만 묶인 (대표작인 "하늘을 나는 말" 시리즈면 더욱 좋고요) 단편집이 나와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PS : 최근 너무 바빠서 좀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은 책이 쌓여가는데 포스팅할 시간이 없네요...
녹아간다
평범한 회사원 미사키의 정신 붕괴과정을 "만화"라는 독특한 매개체를 통해 표현한 심리 드라마입니다. 치밀한 묘사는 볼거리이지만 정신 붕괴, 즉 미쳐가는 과정에 대한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아서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평범한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시미가家의 붕괴
천재탐정과 그의 조수가 탐정의 친구인 장서수집가 시미가를 방문했다가 시미의 아내 가즈코가 밀실에서 살해된 것을 발견한다.
과장된 동화같은 설정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추리물입니다. 일단 서두의 등장인물 소개가 너무 장황하고 허무맹랑해서 당황스럽더군요. 그냥 천재탐정과 조수였어도 충분했을텐데 조수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탐정의 천재성도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채워놓고 있거든요. 하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밀실 살인과 다이잉 메시지트릭을 적절하게 사용한 덕에 그나마 황당한 이야기안에 추리적인 이야기가 깔끔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대한 책 소갯글이 더 예술적입니다. 별거없는 반은 장난같은 이야기를 흡사 고전 전통 트릭 미스터리와 고딕 호러의 결합물 처럼 소개해 놓았더군요.
(탐정에게 사건이란 이미 읽은 책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을 파헤치는 천재 탐정의 놀라운 활약!
완벽히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수집 강박증.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의 경계를 넘어선 그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치명적인 욕망으로 자라나 목숨마저 위협한다. 책 수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장서가 부부에게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이라는 손님. 책에 대한 무모한 집착이 부른 재앙 앞에서 탐정은 진실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 나가는데…….
아무리 채워도 꽉 차지 않는 서가의 구석에서 발견된 부인의 다잉 메세지. 남편의 가장 깊은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시미가는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붕괴하고 만다.)


죽음과 밀실
노인 추리작가들이 모여사는 공동체 "환상의 정원"에 정말이지 완벽한 밀실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시미가의 붕괴와 연결되는 천재탐정과 조수 이야기로 추리소설의 이상적인 형태를 냉소적으로 비웃는듯한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보기는 어려운, 추리애호가들을 위한 블랙코미디에 더 가까웠달까요?

하얀 아침
주인공이 과거 소녀였을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청춘드라마같은 깜찍한 사랑이야기가 나름의 추리적 요소 (누가 왜 아버지 차 백미러 성에를 닦아놓았을까?)와 잘 결합된 일상계 소품입니다. 여성작가다운 특유의 세밀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과연 일상계 미스터리의 거장이구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에서 추리적인 전개를 이끌어내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 중 한편으로 추리물에 대해 별로 내켜하지 않는 지인들에게 따로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사위, 데굴데굴
출판사 신입사원 치하루씨는 우연하게 한 남자가 떨어트린 십면체 주사위에 관심을 갖는데...
5페이지짜리 이야기로 이정도면 소품이라기 보다도 꽁트라 해도 무방한 분량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주 일상스럽지만 귀여운 발상의 트릭이 깜짝 등장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여간.. 아이들 머리는 정말이지 못 당하겠어요^^

오니기리, 꾹꾹
치하루씨는 회사 선배 미즈마치와 함께 이와테로 현장조사를 나간다...
전편과 같은 주인공 치하루씨 시리즈로 이번엔 분량이 약간 기네요. 하지만 역시나 귀여운 소품답게 이와테로 무대가 옮겨갔어도 여전히 일상스럽고 밝은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추리의 요소는 두가지로 한가지는 버린 깡통이 어떻게 멀리 있는 계곡까지 굴러가는지와 제목의 오니기리를 만든 결과물에 대한 추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다한 트릭이나 추리는 아니지만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역시나 마음에 들었어요.

나비
한 여성의 술자리 잡담이랄까... 심리묘사는 좋은데 두서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단상만 모아놓은 짧은 잡문이랄까요. 언급할게 별로 없네요....

나의 자리
주인공이 평상시와 다른 일상을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았는다는 설정도 굉장히 독특하지만 이러한 자신이 느낀 일상속의 불편함이 결국 자기자신과 연결된다는 결과가 굉장히 서늘해서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반전으로 이르는 전개와 묘사도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필력과 센스를 잘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두번째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일본의 전래동화 "카치카치야마" 이야기 (할아버지가 밭일을 하다가 잡아온 너구리로 너구리죽을 만드려 하는데 너구리가 외려 기지를 발휘해서 풀려난 뒤 할머니죽을 만든다는 엽기 이야기?)를 추리물 형식으로 꾸민 내용으로 서두에 지극히 개인적인듯한 느낌의 장황한 옛날 이야기 해석에 대한 이론이 묘사되는 등 작가 스스로의 생각을 대화하듯이 써내려간 형식이 무척 이채로웠던 작품이었습니다. 뭐 달리 이야기하자면 좀 쭉쭉 써내려간 느낌도 들긴 하네요. 왠지 좀 장난스러움이 많이 묻어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어차피 모티브가 된 전래동화가 내용을 잘 모르는 일본 전래동화이기 때문에 몰입하기 힘든 탓도 크겠죠.

하지만 워낙 개인적인 단상이 많은 글이다보니 실제 기타무라 가오루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된 것 같아 흐뭇한 느낌도 들고 추리적으로도 이야기를 잘 구성해 놓아서 감탄했습니다. 전래동화를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추리물로 각색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결과물도 상당한 수준이니 놀라울 따름이죠.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것 같은 작품인데 저에게는 무난한 평작 수준으로 생각되네요.

2011/05/05

공포의 보수 - H.P 러브크래프트 / 정광섭 : 별점 2점

공포의 보수 - 4점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광섭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광기의 산맥"으로 유명한 H.P. 러브크래프트의 중단편집입니다. 러브크래프트 하면 보통 "크툴루 신화"가 연상되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체 그게 뭔지 그동안은 접해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작품들 모두 유사한 설정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크툴루 신화 그 자체인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거든요.

읽고 나니 대체 왜 "크툴루 신화"가 세대를 초월한 전설이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압도적인 상상력과 묘사는 정말 발군이었어요. 20세기 초엽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또 모든 점에서 현대 그로테스크 호러 장르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 이야기가 새로울 게 없고, 플롯이 원패턴일 뿐만 아니라 전개가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압도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또 "크투루프"라는 일본어 중역 발음이나 "견신론자" 등의 낯선 용어는 번역에서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생각만큼 번역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용어 정도는 현대적으로 통일해 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마지막 작품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만큼은 3.5점을 줄 만큼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진부하고 낡은 느낌을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21세기에 읽은 제 탓이 크지만, 과연 제가 이 작품을 당대에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대단한 컬처 쇼크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호평을 했을지 혹평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을에 우연히 방문한 외지인이 뜻밖의 위험에 빠진다는 호러 장르물은 그야말로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보통 마을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재미의 초점이 맞춰지곤 하죠. 이 작품도 역시 마을의 비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건 마찬가지에요. 그야말로 한가운데 직구 승부지요. 

그런데 직구의 구위가 정말 엄청납니다. 비밀이 일종의 고대 괴물에 대한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에 "혼혈"이라는 요소를 추가해 변화를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한밤중에 인스마우스를 탈출하는 과정의 묘사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대단합니다.

다만 후반부는 아쉽습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리거든요. 마지막에 어설픈 변화구 하나 섞다가 역전 홈런을 허용한 기분이에요. 그만큼 작위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전무한 반전이었습니다. 차라리 자살했다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앞부분에 복선으로라도 살짝 넣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박감과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 이름에 값하지만, 어설픈 마무리는 실망스럽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벽속의 쥐"

저주받은 혈통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 고딕 호러물로 이 바닥의 거장인 포만큼의 현란한 묘사는 아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함 묘사는 더 뛰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발군이었습니다. 고대에서 시작된 저주받은 의식의 스케일도 엄청나고요.

그러나 후반부의 각성과 뒤이은 결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 가문이고 뭐고 다 잊은 채 미국에서 한 재산 모은 후손이 저주의 현장을 보자마자 각성한다? 너무 설득력이 없잖아요. 이럴 거였다면 전문가로 이루어진 발굴팀은 대체 왜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중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 용두사미 결말인데, 차라리 앰브로즈 비어스처럼 짧게 마무리하는 게 좋았을겁니다.

"어둠 속의 속삭임"

시골 지주 에이크리가 신비학자 월모트에게 보낸 편지와, 홍수 때 발견된 기묘한 생물체의 사체 목격담에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이 생물체들이 명왕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진상과 함께, 에이크리의 비참한 종말 또는 상상으로 끝맺는 SF - 호러입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묘사는 역시 발군입니다. 정말 이 작가의 괴기스러운 묘사는 타고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그러나 후반부 급작스러운 에이크리의 편지에서부터 이어지는 결말은 너무 뻔하고,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어서 아쉬웠어요. 극적 반전이 대단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예상대로 전개되는 것도 문제지요. 덧붙여 밝혀지는 외계인들의 정체도 식상했고요.

뇌를 담는 원통과 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그려낸 상상력은 현대 SF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결말은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월모트의 탈출이 별로 긴박하게 그려지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

앞선 이야기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크툴루 신화를 전면에 드러낸 정통 그로테스크 호러 작품으로 단편집의 메인 수록작입니다. 

주인공의 학술적 탐구를 통한 수기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설득력을 보입니다. 물론 몇몇 인물의 증언에만 기대고 있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나, 천재 조각가, 경찰, 선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전개는 지금 읽어도 압도적이에요.

무엇보다도 태고의 신이 별자리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 다시 지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이 러브크래프트의 진정한 능력 아닐까요? 노르웨이 뱃사람의 기록을 통해 밝혀지는 신화적인 유적지와 크툴루에 대한 묘사는 너무 대단해서 말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학술적 탐구에 이어 일종의 유언으로 끝나기 때문에 급작스럽기도 하고, 완결된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는 게 단점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명력을 가진 채 수없이 모방되고 인용되는 거대 서사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09/06/09

나폴리 특급 살인 - 랜달 개릿 / 김상훈 : 별점 4점

나폴리 특급 살인 - 8점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가상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SF 소설이면서도, 탐정 다아시경이 활약하는 추리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전에 "세르부르의 저주"를 읽고 딱히 취향이 아닌듯 해 관심을 끊었던 시리즈지만 이번의 50% 할인 행사를 놓칠 수 없어 구매하여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정말 안 읽었더라면 엄청 후회할뻔 했습니다. 일단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세계관이 아주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과학적 마법 문명의 지배를 받는 영-불 제국을 무대로 하여 마법이 증기기관과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일본 만화들의 원조격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다른 파생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자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이 세계관에서 "마법"은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마법은 "전문가" 가 행하는 "전문적인 행위" 이기는 한데, 현대 과학기술에서 관련된 전문가가 행하는 역할과 유사한 점이 있는 일종의 "기술" 처럼 그려질 뿐이거든요. 예를 들면 "방부처리" 라던가 "자물쇠 전문가" 같은 식이죠. 즉 수사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에서의 검시관이나 감식관이 수행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 정말 획기적 발상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마법이 사건에 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것도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에서 마법은 단지 설정과 재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며, 각 사건들 마다 "마법이 개입된 사건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마법사들이 조사해서 먼저 알려주는 점 등으로 철저하게 추리의 영역과 마술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서 뻔하디 뻔한 SF-판타지가 될뻔한 작품을 추리물로서도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중심을 잘 잡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약간 바람끼(?)도 보이는 카사노바 다아시경과 강의를 좋아하는 현학적이고도 호기심 많은 마술사 마스터 숀, 현명하고 비범한 결단력의 플랜태저넷 왕가 군주인 노르망디공 리처드 등 고정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뛰어나고, 작가가 상상해 낸 영불제국의 묘사 역시 비범한 편이라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은 작품이기에 할인행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만족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전작에 비해 "추리" 요소가 더욱 풍성해 진 것에 가산점 하나 얹어서 별점은 4점입니다. 첫 단편 "중력의 문제" 는 정말이지 정통 추리팬도 탄복할만한 멋진 밀실 트릭물이에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만한 장치도 풍부하니 쟝르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 번째 작품이자 밀실 트릭 걸작 중 하나라는 "중력의 문제" 는 앞서도 말했듯 정말 빼어난, 추리적으로 아주 파헤치는 다아시경의 활약을 그린 단편인데,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멋진 작품입니다!

일단은 탑 꼭대기에 위치한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려 추락했지만 방은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이었다는 무대 설정을 비롯, 유력한 동기를 지닌 것 처럼 보이는 아들에다가 광신도인 딸이라는 기묘한 가족구성, 가스등과 거대한 샹들리에로 대표되는 - 고딕호러스타일도 느껴지는- 배경 묘사가 굉장히 과학적, 합리적으로 잘 짜여진 트릭과 어우러지고 있으며, 동기 및 단서의 제공도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서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SF로 유명한 "다아시 경" 시리즈이기 때문에 추리적으로 손해를 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두 번째 작품인 "비터 엔드"도 상당한 수준의 추리적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다아시경의 부하인 마술사 마스터 숀이 우연찮게 말려드는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특징도 있지만,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인물이 모이는 카페에서 범인은 가까이 가지도 않은 상태로 피해자만 콕 집어 독살시킨다는 원격조정 트릭이 설득력있게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경찰이 약간만 디테일하게 수사한다면 범인은 곧바로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헛점은 존재하지만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세 번째 작품인 "입스위치의 비밀"은 좀 애매합니다. 한 남자의 시체가 해변에서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옆에 발자국은 첫 발견자의 발자국밖에 없었다! 라는 추리적으로 흥미진진한 화두를 던져놓지만, 죽은 남자의 신원이 정보부 소속의 노엘 스탠디쉬라는 것, 그리고 스탠디쉬는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입스위치 파이얼"이라는 물건을 폴란드 제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폴란드 제국의 비밀경찰 세르카 요원을 추적하던 중에 결국 시체로 발견된 거라는 내용으로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폴란드 제국과의 스파이 전쟁 첩보물로 확 바뀌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름 첩보전의 스릴과 더불어 흥미로운 요소 - 스탠디쉬의 다이잉 메시지라던가, 갑자기 별이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를 알수없는 특이한 현상 등 - 이 많이 등장해서 지루하지는 않지만, 폴란드 제국과의 첩보전을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게 묘사해서 결과적으로는 추리적으로 흥미로울 수 있던 소재와 트릭이 첩보전에 파묻혀버려 아깝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폴란드의 미녀 스파이가 등장해서 꿍짝을 맞추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래도 재미는 있고 추리적으로도 버려진 낡은 외투를 가지고 벌이는 추리와 해변가에서 시체가 발견된 트릭의 발상 자체는 좋았기에 평작 수준은 됩니다. 무엇보다도 카사노바 다아시경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폭소! 왠지 피터 웜지 경 같은 느낌을 전해주던 다아시경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에 듭니다.

네 번째 작품 "열여섯개의 열쇠"는 영불제국과 루멜리아제국과의 이른바 "해군조약"에 관련된 이야기로, 주 콘스탄티노플 대사였던 복스홀 경이 맺은 조약의 문서가 사라지고 복스홀 경은 엄청나게 나이를 많이 먹은 모습으로 완전 밀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내용입니다. 다아시경이 곧바로 출격(?) 하여 복스홀 경과 그만이 통과할 수 있는 그의 여름 별장 열쇠 16개를 단서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요.

조금 소품스러운 느낌이기도 한데, 하룻밤의 소동(?)을 재미나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야기도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건너기"를 연상시키는 수학적 트릭과 더불어 합리적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유쾌한 느낌이 가득해서 좋았습니다. 사람이 기괴하게 죽어나가고 중요 문서가 없어졌는데도 이렇게 유쾌하다니 정말이지 모를 일이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트릭 자체는 설득력이 떨어지긴 합니다.

덧붙이자면 "해군조약"은 홈즈, 포와로 등 많은 탐정들이 활약한 전력이 있는 추리계의 완소 아이템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 조약 문서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운 점이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추리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중 하나겠지요.

마지막 작품 "나폴리 특급 살인"은 네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해군조약"을 극비리에 운송하는 특명을 띈 다아시경과 마스터 숀이 탑승한 나폴리행 특급 열차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밀 임무이기에 정체가 발각되면 안되는 이 두 컴비는 열차가 로마에 도착하기전에 사건을 대신 해결해 주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사건해결에 나서게 됩니다. 

제목 그대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패러디이자 오마주 성격의 작품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트릭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정통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추리 애호가가 즐길만한 장치가 가득해서 정말이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집의 표제작에 어울리는 좋은 작품이에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어서 완성도도 아주 높으니까요. "중력의 문제"와 더불어 이 단편집의 투탑, 쌍두마차라 할만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이 작품 덕분에 작가의 또다른 패러디 - 오마주 작품인 "마술사가 너무 많다"(당연히 오리저널은 "요리장이 너무 많다" 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여, 절판도서임에도 인터넷 헌책방을 뒤져서 겨우 한권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배송되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우리 형제의 안팔리는 판타지-추리 소설 "장미빛 인생" 도 유사 쟝르죠. 차이점이라면 우리 작품에서는 마법이 추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정통 추리물처럼 써내려갔으니... 그래서 안팔리는건가?

2022/12/17

밤에 걷다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2점

 

밤에 걷다 - 4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경시청 총감 방코랭은 스포츠 스타 살리니 공작으로부터 신변 보호 요청을 받았다. 아내 루이즈의 전남편 로랑이 협박 편지를 보낸 탓이었다. 로랑은 정신병으로 입원했다가 의사를 죽이고, 성형 수술을 한 뒤 도주 중인 위험인물이었다.
공작 부부를 만나러 페넬리의 가게에 방문한 방코랭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한 밀실에서 목이 잘린채 살해된 공작의 시체를 발견했다.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공작의 친구 보트렐르도 목이 베여 살해되고 말았다.
로랑은 어떻게 유럽 대륙을 건너 밀실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깜쪽같이 사라졌을까?


존 딕슨 카의 앙리 방코랭 시리즈 장편. 데뷰작이기도 합니다. 괴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정신병자 살인마가 괴이한 상황에서 사람 목을 베어 죽이는 간담 서늘한 묘사들은 고딕 호러물 느낌도 전해줍니다. 같은 시리즈인 <<해골성>>과 비슷하게요.

추리적으로는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다운 밀실 살인 사건이 서두부터 등장하여 눈길을 잡아끕니다. 펠리니의 가게 3층의 방은 앞, 뒷문 모두 감시가 확실했고 (심지어 문 하나는 방코랭이 직접 감시!), 창 밖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으며 비밀 통로도 일체 없었던 완벽한 밀실이었고,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도 완벽했거든요. 트릭이 무엇이었을지 아주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지명수배범인 로랑이 국경을 건넌 방법에 사용된 트릭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륙에서 공작을 살해한 뒤, 공작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건넌 것으로, 간단해서 현실적일 뿐 아니라 단서들 제공이 아주 공정했던 덕분입니다. 유럽 대륙을 갔다온 이후 공작이 180도 변했다는 증언과 단서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거든요. 공작이 마약 중독자였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초반부 공작의 짐은 국경에서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와 연결하여 '공작이 마약 밀수를 했다'는 식으로 독자를 이끌지만, 알고보니 스포츠맨 공작은 마약 중독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단서였지요.
탐정으로서 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방코랭의 추리법에 대한 소개 등도 추리 애호가로서 볼 만 했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없이 타고난 통찰력만으로 수사관이 될 수 없다며, 과학 수사 기법을 비롯하여 분석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일갈하는데,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었어요.

벨 에포크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는 배경 설정도 볼거리였습니다.. 공작 등 귀족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며 마약을 빨면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데, 자동차를 타고다니고 전기불이 존재하는 이색적인 세계의 풍광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까요. 분명 존재했던 과거인데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라서 이런 곳이라면 명탐정과 미치광이 연쇄 살인범이 있어도 자연스러울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 강점기 당시, '마굴'이라 불렸던 상하이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딕슨 카의 다른 걸작들에 비하면 많이 처집니다. 추리적인 부분에서의 문제가 너무 커요. 밀실 트릭부터가 알고보면 별게 아니었거든요. 설명도 부족했고요. 공작 (으로 변장했던 로랑)은 이미 11시경에 부인에게 살해당했고, 11시 30분에 목격된 공작은 보틀레르의 변장(?)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카드룸 입구를 지켜보는 경찰 눈에 뜨이지 않고 흡연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카드룸 문은 벽 때문에 홀에 서 있는 그 누구라도 문을 볼 수 없었다나요. 그렇다면 이건 밀실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런걸 현장에 있었던 명탐정 방코랭이 몰랐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이 중요한 사실이 독자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맨 첫 장에서 약도가 제공되기는 하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보틀레르가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고 로랑처럼 보였던 이유, 루이즈 부인 몸에 반드시 튀었을 핏자욱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 설명되지 못한 점도 너무 많습니다. 보틀레르가 가발이라도 썼더라면 모를까, 여러모로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처음에 등장해서 살해당했던 살리니 공작은 변장한 로랑이었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고 얼굴이 닮았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아니고, 이 당시 성형수술 수준은 별볼일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옛 친구야 안 만났다쳐도, 공작 가문의 오래된 변호사 키라르의 눈까지 속였다는건 지나쳤어요.
또 변장에 성공했는데, 자기 자신을 협박하는 편지를 써서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한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경찰과 게임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도 않고, 그나마 생각해 볼만한건 자기 과시지만 그걸 위해서는 잃는게 너무 많아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방코랭의 추리대로 루이즈 부인을 살해하고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경찰을 부를 이유는 없었어요.

루이즈 부인의 자백만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그닥이었습니다. 첫 번째 범행은 그렇다쳐도, 보틀레르를 살해할 때의 증거는 이미 방코랭이 차고 넘치게 모은 것으로 보여서, 구태여 자백은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자들에게 농락당한 기구한 인생이라는게 잘 그려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용한 남자들을 깔끔하게 살해한 팜므 파탈로 보기에는 범행이 허술해서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게다가 루이즈 부인이 모든 트릭과 살해 방법을 스스로 말하는 탓에, 방코랭은 별로 하는게 없다는 문제도 큽니다. 모든 트릭을 알아챘다고는 하지만, 정작 하는거라고는 루이즈 부인의 자백에 추임새를 넣는 것 밖에 없어서 이게 과연 명탐정인가 싶더라고요. 물론 진짜 공작의 시체를 발견하고, 루이즈 부인이 진범이라는걸 알아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명탐정이라면 마지막 루이즈 부인 자백에서도 뭔가 존재감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이 방코랭을 다른 딕슨 카의 명탐정들만큼이나 기억에 남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네요.
화자인 미국인 제프 역시, '사랑꾼' 으로의 모습 말고는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해서 인상이 흐릿한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절판된지 오래인데,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독성도 떨어지는 편이고요.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봅니다. 제가 읽었던 딕슨 카 작품 중에서는 최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