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희생양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희생양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3/07

워 머신 : 전쟁 기계 (2026) - 패트릭 휴즈 : 별점 2점

미육군 최강 부대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 위한 8주간 훈련에 도전한 81번 훈련병은 우여곡절 끝에 최후의 시험인 '죽음의 행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훈련병들은 예정된 훈련 대신 외계에서 온 전투 기계를 만나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데...

넷플릭스 최신 영화입니다. 주말 맞이로 감상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초반부의 지루했던 배경 설명이 끝난 뒤, 핵심 이야기인 레인저 훈련생들이 벌이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상대 생존기는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미약한 희생자들이 도주하면서 생존하려 노력하는, 거대 크리처 호러물 장르물로의 가장 중요한 재미 요소인 '긴장감'을 잘 살린 덕입니다. 나침반 등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등으로 로봇 등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요. 망가진 무전기,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 고장난 장갑차 등의 여러 제약 사항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고요.

크리처 호러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크리처의 강력함 역시 훈련병들을 압도하며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들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 편이 다 죽는 영화는 정말 오랫만에 봅니다. 최소한 여군은 살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레인저 훈련병'이라는 미 육군 최강 군인들이 희생양 역으로 설정된 점도 좋습니다. 절벽에서의 레펠 기동을 비롯한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인간 이상의 활약이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약의 핵심인 주인공이 '잭 리처' 앨런 리치슨이라는 캐스팅도 딱 맞아 떨어지는 점입니다. 캐스팅이라면, 추억의 배우 데니스 퀘이드의 노병 연기도 반가왔어요.
아울러 주인공이 공병 출신이라서 로봇의 약점을 눈치채고 해치운다는 마지막 장면의 설득력도 꽤 높은 편입니다. 맨 앞의 차량 정비 장면과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군인들이 강력한 외계 크리쳐와 싸워 극히 일부만 겨우 살아남는다는건 "에일리언(2)"과 비슷하고, 이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엇비슷한 재미를 주지만 마지막 10여분이 영화를 완전히 망쳐버려서 아쉽습니다. 외계 로봇의 습격이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이 닥쳤는데 레인저가 되는 결승 라인에 도달하는게 지상 목표라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황당했는데(최소한 부상자는 의무병에게 바로 인계했어야지요),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게다가 막 복귀해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다시 전우들과 출동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비유하자면 "에일리언"의 리플리가 살아서 귀환한 뒤, 군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하고 선봉에 서서 에일리언을 박살낸다는 에필로그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 마지막 10여분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거만 없었어도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한데 아깝네요.
그래도 앨런 리치슨이라는 배우의 액션은 믿을만하다는 확신이 생기기는 합니다. 다른 작품도 찾아보고 싶군요.

2025/12/06

희생양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인으로 프랑스 역사 교수인 존은 프랑스 여행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프랑스 시골 귀족 장 드게와 만났다. 장은 다음 날 존의 옷과 짐, 차를 가지고 몰래 떠나면서, 존이 자신(장)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존은 장의 가족과 영지 마을에 가득한 갈등과 증오에 치이다가, 장의 아내 프랑수아즈의 비참한 죽음 이후 각성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장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는데...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입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난 뒤 벌어진 한 남자의 일주일간 대역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쭉쭉 읽힙니다. 일주일간의 대역극 이야기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짜여 있는 덕분입니다. 주인공 존이 보내야 하는 장 드게의 삶이 가족 간의 냉랭한 분위기와 갈등,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등으로 다양한 드라마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존이 장인 척하며 과거사와 갈등의 원인을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이 특히 볼 만합니다. 차례대로 단서가 제공되면서 결국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이 중 장 드게가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누나 블랑슈의 약혼자였던 모리스 듀발을 부역자로 몰아 직접 총살했다는 진실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질투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고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이념 충돌이 불러왔던 비극도 떠올리게 했습니다.

존이 감정적으로 가족과 얽히며, 프랑수아즈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존이 이 가족을 위해 계획한 '역할 분배' — 동생 폴 부부에게는 공장 경영에서 손을 떼고 해외 연수와 영업 기회를 주고, 공장은 원래 모리스의 연인이었던 블랑슈에게 맡겨 혁신을 이끌게 하고, 어머니는 모르핀을 끊고 다시 가문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직업을 주는 등 — 는 급작스럽지만, 앞부분에서부터 가족 각자의 사연과 불만을 충실히 쌓아온 덕분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야기 전개의 또 하나 재미 요소는, 존이 어떻게든 장 드게인 척하려 애쓰는 장면들입니다. 대표적인 게 사냥 장면입니다. 총을 쏴 본 적 없는 존이 사냥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손에 화상을 입어 빠져나가지만, 키우던 사냥개가 말을 듣지 않거나 말실수를 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는 과정이 아주 실감납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전형적이지만, 장 드게의 딸 마리노엘만큼은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아직 어린 천사 같은 소녀인데, 그녀가 악의 없이 행한 행동들이 상황을 수렁에 빠트리기 때문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장 드게의 선물을 가족 앞에서 풀어보게끔 유도하여 가족 간 불화를 키우고, 건강하다는 걸 과시하려다가 프랑수아즈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서 히스테리를 유발하고, 폴과 르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걸 지적해서 화를 돋우며, 고행을 자처해 실종된 바람에 홀로 남게 된 프랑수아즈가 사고를 당하고 마는 식입니다. 이런 류의 캐릭터는 지금은 흔하지만, 1957년이라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선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점도 큽니다. 우선 지금 읽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전혀 다른 배경의 두 남자가 얼굴이 똑같고, 그중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일주일간 대신 살아가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설정부터 말이 안 됩니다. 대가족이 사는 저택과 작은 시골 마을 영지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무리가 있지요. 가족 간의 갈등과 거리감이 크다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합리화하려 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보다 더 큰 단점은 결말이 굉장히 싱겁다는 겁니다. 프랑수아즈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 장 드게가 돌아오자, 존이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 냈는데도 불구하고요. 살의를 품기는 했지만, 결국 존이 마지막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모습은 여러모로 허무하고 시시했습니다. 특히 장 드게는 영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간 말종 쓰레기에 가까워서 제대로 처단되었으면 했는데, 그런 인물이 돈과 존 덕분에 정상 궤도에 오른 가족을 모두 손에 넣는다는 결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이라면 보다 치밀한 심리극이나 범죄극으로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가족과 사랑에 빠진 존이 장을 어떻게든 죽이고 시신을 잘 숨겼지만, 모종의 이유로 다가올 미래에 시신이 드러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프랑수아즈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틀에 떨어진 로켓을 주우려다 추락사했다는 진상은 너무 평범했습니다. 마리노엘의 악의 없던 장난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거나, 장 드게가 선물한 로켓에 뭔가 장치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런 반전은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종교적 색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쉽게 읽게 만드는 몰입감은 뛰어나지만, 이야기 전체를 지탱해야 할 중심 설정이 설득력이 부족하고 결말이 시시한 탓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기대했던 범죄극이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묵직한 심리극과 가족 드라마를 선호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겠습니다만, 범죄극이나 추리물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5/06/20

아이가 없는 집 - 알렉스 안도릴 / 유혜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산림재벌 페르 귄트(PG)는 사립탐정 율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시체 사진의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회사 주주총회 이후 만찬 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필름이 끊겨, 사진이 찍힌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PG는 사진 속 피해자가 자신의 형 베르테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의 시골 저택 ‘만하임’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옆에 위치한 맥주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저택에는 자정부터 경보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에, 사진은 저택 부지 내, 특히 맥주 공장에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아와 시드니는 저택에 머무르며 수사를 이어갔고, PG의 사촌 형제인 비에른, 안드레, 시리를 만났다. 비에른과 안드레는 과거 베르테르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만하임을 팔자는 문제로 PG 부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막내 시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PG의 아내 모니카와는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호수 위로 베르테르의 시체가 떠올랐고, 부검 결과 그는 일요일 오후 3시에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모니카는 시리와 함께 있었고, 안드레는 애인과 있었으며, PG와 비에른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율리아는 장애가 있는 줄 알았던 비에른이 실제로는 홀로 걸을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맥주 공장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거두었고, 우여곡절끝에 진상을 깨달은 뒤 베르테르의 장례식 날 관계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추리쇼를 펼쳐 범인을 지목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현대 스웨덴 장편 추리 소설. 사립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복고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들이 율리아의 추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풀이됩니다.

1. 베르테르는 왜 전 재산을 시리에게 남겼는가?
→ 베르테르는 시리를 동생이자 애인, 그리고 자기 소유물이자 희생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 PG와 베르테르의 아버지 쉴베스테르는 아내 린네아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해서, 갓난 딸 시리를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린네아는 자식을 빼앗긴 상실감에 자살했고, 시리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베르테르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시리를 농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2. 베르테르는 왜 살해당했는가?
→ 모니카가 베르테르와 맥주 공장에서 만날 때 시리와 동행했었습니다. 베르테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장소에서 1의 사실을 알게 된 시리가 분노에 휩싸여 베르테르를 살해했습니다.

3. 범인은 누구였는가?
→ 주범은 시리였고, 모니카는 공범이었습니다. PG에게 전송된 베르테르의 이메일을 숨기고, 공장 열쇠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는 모니카뿐이었습니다. 범행 후 두 사람은 범행 시간에 함께 보트를 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고요.

4. 왜 PG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가?
→ 모니카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울증을 앓고 있던 PG가 자신이 범인이라 오해하고 자살하게 되면, 그의 모든 재산이 모니카에게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5. 왜 시신을 댐에 유기했는가?
→ 숲에 묻었다면 절대 발견되지 않았을 테지만, PG가 탐정까지 불러 자기 범행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 하자 급해진 모니카가 사체가 드러나도록 유도했던 겁니다.

추리는 본격 추리물답게,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단서와 복선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모니카가 일요일에 시리와 함께 보트를 탔다고 말하면서 ‘손에 녹이 묻었다’고 했던 대목은, 열쇠가 녹슬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모니카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유추하는 단서가 됩니다. 피해자 사진을 본 시리가 베르테르라는걸 알아챈 배의 흉터는,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범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또한,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내 휴대폰에 살해된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왔어요. 300여페이지 남짓한 분량도 합리적이고요.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주로 음식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음울하지만 귀족적인 만하임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탐정의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설정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율리아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에서 혼자 생존한 후 PTSD를 앓으며, 타인과 접촉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야기 전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전남편 시드니를 못 잊고 맴도는 묘사 또한 장황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요. 솔직히 중간에 졸 정도였습니다.
율리아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멈춰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가는 디테일과 표정을 포착한다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만화적일 뿐이며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하니까요.  

또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 추리쇼는 극적이긴 하나 설득력은 다소 부족합니다. 시리가 PG와 베르테르의 친동생이었다는 사실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 나머지 추리는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 근거 없이 진행되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비에른이 열쇠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비에른의 형 안드레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네주거나 복제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용인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PG 또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베르테르가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리와 모니카가 범인이라는 사실도 시리의 자백이 없었다면 증명이 어려웠을 겁니다. 사건의 주요 현장인 맥주 공장이 불에 타버려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치밀하게 설계된,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이라는 제목과 작중 대사로 상징되는(핏줄이 사악해서 대를 끊어야 한다!), 일본 고전 변격물에서나 봄직한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콩가루 집안 설정도 와 닿지 않았고, 카리스마와 사악함을 모두 갖춘 최고 악당인 베르테르가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제대로 뭔가 보여줬을만한 설정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 구성은 돋보이지만, 심리 묘사의 과잉과 논리적 비약 등 아쉬움이 많아 감점합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4/26

엘리펀트 헤드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2점

엘리펀트 헤드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 병원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는 배우인 아내 기키, 대학생이자 가수인 큰 딸 마후유, 고등학생 둘째 딸 아야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가족의 행복이 쉽게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술사였던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아픈 기억 탓이었다. 그래서 기사야마는 가족의 행복을 망치려는 원흉을 사전에 제거해 왔고, 최근에는 딸을 취재 목적으로 스토킹하던 방송인 이즈미를 살해했다. 그러나 마후유가 애인 하루를 가족에게 소개시켜 주는 날, 하루가 기사야마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가졌다는걸 폭로해서 가족은 붕괴되고 말았다. 자포자기한 기사야마는 마약상 에덴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스마'를 주사했다. 그런데 시스마가 이상한 효과를 일으켜 시간을 역행한 기사야마는, 하루를 습격해서 입을 막고 가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 시간 역행이 아니라 시간 분기였다. 결국 두 개의 시스마를 사용해 사태를 해결한 행운아, 한 번 실패해서 시간 역행 효과만 확인한 복원자와 공격받아 입원한 산송장, 모두 실패한 도망자라는 다중 시간축이 생겨났다. 기사야마들은 어느 시간 축에서라도 사람이 죽으면(기사야마가 살해하면), 모든 시간 축 사람이 죽는다는걸 알아내고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살인을 막으려 했지만, 마후유와 기키, 아야카가 차례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신예 작가 중 '추리' 장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최신작.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추리하는 구성이 특징인데, 이번에는 각기 다른 시간축(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동일 인물이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다중 시간축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축이 달라도 죽음의 순간은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설정에서 일종의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탐정역을 소화하는 기사야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점도 큰 특징입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방해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소시오패스거든요. 아내의 스토커를 잡아다가 능욕하고, 딸 스토커는 살해하는 초반부 단계를 지나 후반부로 갈 수록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그 수준이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나 참신함, 독특함은 설정에 국한될 뿐, 정작 추리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큽니다. 여러 명의 기사야마가 가족의 죽음을 놓고 펼치는 대부분의 추리는 결국 ‘추리를 위한 추리’에 불과해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아야카가 폭발한 이유가 알약에 숨겨진 소형 폭탄 때문이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산산조각이 나고, 신체 조각이 날아갈 정도라면 알약 크기 폭탄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요. 다중 시간축에 있던 복수의 가족들이 동시에 죽었는데, 죽은 상태가 서로 극과 극이라 사망한 원인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저절로 폭발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 자체는 그럴싸한데, 상황이 너무 말도 안돼요. 추운 차를 운전하다가 동사하고, 두꺼운 탈을 쓰고 공연하다가 열사병에 걸려 죽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여러 명이 추리를 펼쳐봤자 다 억지스럽고 말이 안된다면, 이건 그냥 분량 낭비일 뿐입니다. 이런 류의 대표 걸작 "독 초콜릿 사건"처럼, 모든 추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 또한 억지스럽습니다. 기사야마들은 가족들이 죽는 순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범인 기사야마는 피해자가 죽는 순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시한 장치 트릭' 더하기 '원격 조종 트릭'을 사용했는데, 상황을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맞춰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후유는 '행운아'가 죽였습니다. '행운아'는 마후유가 하루와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는걸 알게된 뒤, '산송장'의 손을 빌어 하루를 죽게 만듭니다. '산송장'의 시간축에서 하루가 죽자, '행운아'의 시간축 하루도 죽는데 마침 운전 중이라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되고요. 사고로 차밖으로 튕겨나간 마후유는 공교롭게 지나가던 차량에 머리가 으깨져 죽습니다. 즉, 이 모든건 말 그대로 ‘기적의 타이밍’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마후유가 왜 튕겨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야카 폭사에 대한 진상은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도망자' 기사야마가 그녀를 성폭행해 임신시킨 뒤 태아를 불법으로 적출해 폭사시키고, 임신을 유지하던 '두더지' 시간대의 아야카의 뱃 속 아기가 폭발하자 다른 시간축의 아야카들 모두 폭사했다는건데, 이건 추리의 수준을 떠나 인간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이렇게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트릭으로 포장한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단점도 추리물로는 치명적입니다. 행운아는 마후유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행운아의 시간축에서는 마후유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소시오패스라서,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죽였다? 정신병자의 과대망상이 동기인 작품이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또 이게 동기라면, 행운아가 마후유를 살해했다는걸 숨길 이유는 없어요. 약속대로 다른 시간 축의 기사야마들이 가족을 죽이면, 손 안대고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설정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입니다. 죽음만 동일하게 적용될 뿐, 상처 등은 시간축에서 공유되지 않는다는게 대표적이에요. 상식적으로는 상처도 동기화되어야지요. 산송장이 중상을 입었을 때, 다른 시간축의 기사야마들도 모두 동일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더지가 도망자를 죽이려고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에필로그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도망자를 죽이려면 그냥 자살하면 됩니다. 시간축에 있는 모든 기사야마가 동일한 운명을 맞을테니까요. 또 에필로그에서처럼 한 시간축에서 터진 폭탄이 다른 모든 시간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앞서의 현란하고 복잡했던 시한 장치 및 원격 조종 트릭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그냥 하루와 마후유가 탔던 차에 폭탄을 설치하면 되잖아요?

기사야마에 대한 묘사도 이상해요. 기사야마들은 시간축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축마다 별개의 인격을 가진듯 보이는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야카 폭사 때 두더지는 도망자의 부탁을 받아 아야카의 아이를 살려주기까지 하는데, 이건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시스마를 잔뜩 맞은 탓에 시간축을 오가는 절대자가 된 우라시마도 사건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탐정역이 필요해서, 기사야마를 뛰어넘는 절대자가 필요해서 등장시킨 듯 한데, 인물 설정이나 등장 과정, 묘사 모두가 과장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스마를 맞은 복원자가 첫 번째 시스마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축을 한 번 더 분기시켜 ‘두더지’가 생겨났다는 설정은 참신했습니다. 이즈미 사키와 페페코 등 단순한 희생양으로 보였던 인물들을 활용하여 독자에게 시간 이동을 착각하게 만든 디테일도 눈에 띄었고요. 여러 시간축의 기사야마들이 추리를 펼칠 때, 사이렌 소리와 기키와의 과거사 등을 근거로 산송장이 사실은 아파서 누워있는 척 했다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참신한 설정과 캐릭터 구도는 흥미로웠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비윤리적인 트릭과 없다시피한 동기, 개연성 부족의 삼박자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전에 보았던 한 추천 리스트에서 언급했듯, 재미는 있지만 최악이에요.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2025/04/19

금병매 살인사건 - 야마다 후타로 / 권일영 : 별점 1.5점

금병매 살인사건 - 4점
야마다 후타로 지음, 권일영 옮김/스토리텔러

원제는 "妖異金瓶梅 (요이 금병매)". 중국 고전 "금병매" 속 인물들과 설정으로 본격 추리극을 만든 15편의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주로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을 질투하여 없애는 반금련의 계획이 그려지며, 탐정역은 서문경의 난봉꾼 친구인 응백작이 맡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대표적으로 이거)를 통해 언급되던 작품이지요. 국내에 출간되었다는걸 몰랐었는데, 얼마 전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특징이라면 본격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역사 소설 느낌도 난다는 점입니다. "금병매"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덕분이지요.

그러나 추리물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수록작 거의 대부분의 동기가 "반금련의 질투"이며, 핵심 트릭 대부분도 "반금련의 변장"으로 의외성과 설득력도 거의 없는 탓입니다.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뒤로 가면 갈수록 지루해지고요. 

게다가 마지막 몇 작품은 아예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금련이 서문경을 너무 사랑한 탓에 사건을 일으켰고, 반춘매와 응백작, 심지어 무송까지 금련 주변 인물들도 모두 금련을 사랑했다는 결말은 황당하고요. "메이지 단두대"에서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는데, 차라리 이게 추리 소설에는 더 어울렸습니다. '사랑' 때문이라는건, 호색한 서문경이 주인공인 "금병매"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대부분이 별로였고, 지루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금병매"와 "수호지"를 바탕으로 쓴 팬픽 정도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다만 딱 한 작품, "인어등롱"만큼은 빼어납니다. 작품에 반복되는 반금련의 질투로 인한 살인과 억지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현실적이고 "금병매" 세계관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이 작품 한 편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저택의 사육제" 정도 말고는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금병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이런 작품까지 꼼꼼하게 번역, 소개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이 작품보다는 "메이지 단두대" 쪽이 훨씬 낫습니다. "메이지 단두대"가 제대로 소개되는게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붉은 신발"

서문경의 부인 둘이 다리가 잘려 죽었다. 범인은 또 다른 부인 손설화로 의심되었다. 몽유병 증세가 있던 설화가 과형이라는 다리를 잘라 집행하는 사형 집행 과정을 본 뒤, 원한이 있었던 두 부인을 살해했다고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문경의 친구인 난봉꾼 응백작은 여성 다리에 대해 성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하인 내왕야가 범인이라고 추리했다. 죽은 부인들의 다리를 가져다 놓고 옮긴 과정이 설화의 짓으로 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응백작은 장례식 날, 송 부인과 봉 부인의 발이 바뀐걸 보고 이 모든걸 꾸민 진범은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챘다.  

반금련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걸 절대 용서하지 않는 독부라는걸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입니다. 동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은 송 부인의 발이 자기 발보다 작다는걸 공개적으로 과시해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송 부인의 발을 봉 부인 발과 바꿔친 후, 장례식에서 송 부인 발이 자기보다 크다는 말을 남기려고 다리를 옮겼던 겁니다.

그러나 범행이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금련 혼자 다리를 잘라 옮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이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미녀와 미소년"

서문경이 총애하는 두 명의 미소년 화동과 금동은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금동이 반금련과 정을 통하자, 화동은 이를 서문경에게 고해 바쳤다. 서문경은 반금련에게 탁랍형을, 금동에게는 궁형(거세형)을 내렸다. 형을 받은 금동은 동굴에 갇혀 화동을 원망했는데, 어느날 동굴 앞에서 화동이, 집 안에서는 금동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서문경이었습니다.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는건, 서문경이 사체를 업고 날랐기 때문이고요. 사체를 업고 옮길 수 있는건 서문경 밖에 없다는걸 밝혀내는 응백작의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들에게는 무리였으니까요.

하지만 반금련이 두 남자에게 질투하여 모두를 죽이려고 짜낸 계책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금동이 거세된 뒤에는 죽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반금련이 화동으로 변장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였습니다. 서문경이 이를 몰라보았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금련이 질투로 살인을 저지르고, 반금련이 먼저 상대방을 유혹하며, 반금련의 변장은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은 이후 모든 단편에서 반복되는데,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염마천녀"

양산박 도적 소탕 실패에 책임을 지게 된 사돈 양 제독 탓에, 딸과 사위 진경제는 서문경의 집으로 도피했고 서문경도 함께 근신하는 신세에 놓였다. 서문경은 이 와중에 사위 진경제의 몸종 주향란을 새로이 일곱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진경제와 주향란은 이미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반금련은 잔경제를 유혹했지만 들통난 뒤, 진경제는 서문경의 저택 우리에 갖혔다. 그리고 도성의 일이 정리된 날, 누군가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었는데...

주향란의 혀를 물어 뜯은건 누구일까?라는 후더닛 물인데, 특별한건 없습니다. 당연히 반금련이니까요. 정액을 발라 남자 냄새를 풍겼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이 등장하지만, 변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마다 유혹하고 다니는 반금련을 그냥 놔두는 서문경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저택의 사육제"

지현의 색기 넘치는 부인이 서문경 저택을 방문했다.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반금련은 그녀를 덮칠 계획을 서문경에게 알려주었다. 연회에서 술게임을 해서 취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너무 취한 임부인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임부인이 떨어져 죽은건 반금련의 계획이었고, 그녀의 시체를 지현의 부하들에게 고기 구이로 속여서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솔직히 엄청나게 뻔하지요. 하지만 여러 음식 및 작가 특유의 광기어린 분위기의 묘사는 좋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란꽃 살인"

유명 화가 소용면이 서문경의 처첩 초상화를 그려주는 날, 새로운 일곱번째 첩 양염방이 벌에 쏘였다. 반금련이 건네 준 모란 꽃 때문이었다. 그 뒤 자기 때문에 자살한 소자허의 원혼이 보인다며 난동을 부리던 염방은 반금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용면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양염방이 독살당하는데...

스스로 벌에 쏘인 반금련이 양염방인 척 연기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일부러 벌에 쏘인 상처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으려고 머리카락이 잘린 척 했다는건 괜찮았어요.

그러나 변장 트릭이 너무 허황됩니다. 소용면만 있던 것도 아니고, 서문경과 응백작 및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변장한 반금련을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봤다는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돈에 환장한 사내"

인색하기로 유명한 서문경의 생약가게 부지배인 한도국이 어느 날, 아내의 전남편 송철곤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송철곤은 납을 은으로 만드는 비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했고, 철곤에게 속은 서문경은 가마를 만들고 거액의 은도 투자했다. 그런데 가마에서 풀무질을 하던 중, 서문경은 한도국의 아내이자 유명한 추녀 요금에게 급작스럽게 음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한도국에게 요금을 아내로 달라고 제안했는데, 요금은 철곤 도사의 블꽃쇼 도중 화살에 맞아 죽고 도사도 가마 안에서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철곤 도사의 연금술 사기,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 철곤 도사의 불꽃쇼와 새부인 요금 살해 사건, 철곤 도사 살해 사건, 한도국 살해 사건이 차례로 벌어지는 탓입니다. 

철곤 도사의 연금술 비법은 당연히 사기인데, 나름 기발한 점이 있습니다. 가마 앞에서 음탕한 행동을 하면 은이 납으로 변한다고 말한 뒤,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약을 탄 술을 먹여 음란한 짓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거든요. 이게 서문경의 새로운 부인 맞이로 이어지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전별금'이라는, 한도국이 송철곤을 죽인 이유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극히 수전노스러운 동기로, 제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던 동기였던 덕분입니다.

그러나 핵심 트릭은 어처구니없네요. 삶은 달걀을 억지로 밀어넣어 목을 막아 죽였다는 방법도 황당하지만, 대충 만들어 자동으로 발사되게 만든 화살이 형편좋게 요금의 등에 맞았다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에요. 도사를 살인범으로 모는 것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고요. 한도국이 돌아온 뒤, 반금련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죽는 결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도주해야 했던 사람이 구태여 반금련을 만나 사지로 걸어들어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요금 이야기를 빼고 사기에만 집중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여인의 향기"

서문경과 반금련에게 원한을 품은 호걸 무송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문경 가족은 저택에 숨어있기로 했다. 심심했던 반금련은 향기로 여자 맞추는 게임을 제안했는데, 게임 도중에 무송이 쳐들어왔다. 서문경은 기생 이계저와 함께 관 속에 숨은 뒤 험한 꼴을 당한다... 

모든건 응백작과 반금련이 힘을 합처 꾸며낸 연극이었습니다. 소란 틈에 응백작은 돈을 훔치고, 반금련은 기생 이계저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거대한 무송은 응백작 어깨 위에 반금련이 올라타 연출했지요.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장난으로 경쟁자 이계저를 쫓아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보다는 조금 낫더군요. 무송이 엮이는 설정도 흥미로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 속 미녀"

여섯째 부인 이병아가 죽은 뒤, 서문경은 애틋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 편, 반금련은 금동의 여동생 춘연을 몸종으로 들인 뒤, 금동이 죽은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데....

춘연에게 옻독을 옮겨, 춘연을 덮치려 한 서문경이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는 반금련의 계획이 등장합니다. 이병아 초상화에 장난을 쳐서, 이병아에 대한 마음을 없애려는 목적으로요. 

죽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독특했는데, 방법이 잔혹하고 유치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자신이 죽인 남자의 여동생마저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1점입니다.


"아름다운 눈동자"

새로 들인 여섯째 부인 유여화는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유여화가 반금련과 서문경이 사랑을 나누는걸 엿보다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인데, 거울을 이용한 트릭이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노골적으로 거울을 강조하고 있는 전개 탓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여화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이미 서문경은 흥미를 잃었다는데 그런 여자를 해할 필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질투심이라면, 왜 자기보다 먼저 처첩이 된 이전 부인들은 죽이지 않고 가만 두는지 납득이 되지 않고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낙인 찍힌 미녀들"

새 부인 빙금보가 진주를 훔쳤다는게 밝혀져 쫓겨났다. 대식국에서 온 조오라 공주는 등에 십자가 낙인이 찍혀, 기독교를 포교하고 다니는 신하 알 무타츠와 함께 돌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사건과 트릭이 등장합니다. 빙금보가 깜깜한 곳에서 진주를 훔친 방법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게 전부라 시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에 달군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공주 등에 낙인을 찍은 트릭은 새로왔습니다. 화상이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 만든 동상이었다는게 진상이에요.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주가 흠뻑 젖었다는 상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대식국 출신 승려가 기독교를 포교한다는 독특한 설정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편을 섞은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동상을 입을 정도로 얼음 위에 오래 정자세로 누워있는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러운 돌풍이 승려와 공주를 데리고 갔고, 반금련의 몸에 십자가 상처를 남겼다는 결말도 억지스럽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젖가슴"

반금련은 서문경이 눈을 가린 채 시력을 잃은 유여화의 몸을 탐닉하는걸 목격했다. 그 뒤, 반금련은 유여화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새 첩 갈취병에게 푹 빠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눈을 멀게한게 반금련이라는걸 알아챈 유여화는 복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죽은건 갈취병이었다. 왜 갈취병이 반금련이 방에서 자고 있었고, 왜 그녀의 시체가 유여화 방에 나타났을까?

유여화가 실명했다는걸 이용해서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트릭인데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손가락 촉감에 자신있다는 서문경을 비웃듯, 반금련이 갈취병인 척 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뻔한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젠 지겹기까지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얼어붙은 환희불"

서문경이 자기 탓에 죽은 사람들의 귀신을 본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반금련은 서문경과 함께 퇴마를 위해 태산에서 수행 중인 수도승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송이 이끄는 양산박 무리와 마주쳤다. 무송은 서문경과 반금련을 쫓아온 것이었다. 반금련의 활약으로 둘은 목숨을 건지지만, 여자로 변장한 낭자 연청의 화살에 죽을뻔한 서문경은 그 뒤부터 여자를 두려워하게 되는데...

죽음 앞에서 당당한 반금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반금련은 모야차가 인정할 기개를 보여 목숨을 건지거든요. 이 부분은 수호지 설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수호지는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게다가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네요. 여자에 흥미를 잃은 서문경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낭자 연청을 가장하여 죽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네요. 별점은 1점.


"여인 대마왕"

서문경의 장례식, 반금련은 불륜을 저지르던 첩 향초운과 상대남 유포를 잡아 죽이자고 제안했다. 이 기회에 유산을 노리는 버러지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륜남녀와 함께 서문경 사체가 목이 베인채 발견되는데...

불륜남녀와 서문경 사체의 목을 자른 이유가 기발했습니다. 반금련이 자기 혼자 서문경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꾸민 짓이었거든요. 처음 무덤으로 향한 서문경의 상여 속 사체는 서문경 머리와 유포의 몸이 붙어 있었습니다. 반금련은 무덤에서 나중에 서문경의 머리만 빼 온 뒤, 특별한 장례도 없이 매장된 유포의 몸으로 위장한 무덤에 합쳤고요. 

반금련이 서문경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중국 전통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등, 이 작품만 놓고 보면 평작은 됩니다. 다만, 반금련의 서문경에 대한 '사랑'이 당쵀 납득이 되지 않는게 문제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연화왕생"

무송이 나타나 모야차와 함께 반금련의 몸종 춘매를 협박했다. 수비부 책임자 주수와 결혼한다는 반금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반금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송의 복수를 끊어버릴 계책을 짜냈다.

반금련의 죽음, 그리고 무송이 결국 반금련에게 반하고 만다는 최악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없습니다.


"살아있는 반금련"

방춘매는 주수비의 아내가 된 후, 주수비가 청하현 모든 남자를 양산박 토벌 작전에 징집하도록 만들었다. 모든건 반금련을 음탕하다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춘매의 계획대로 남자가 없는 귀부인들은 음탕한 축제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수비가 토벌 작전에서 죽은 뒤, 거란군은 남자가 없는 청하현을 덮쳤다. 그러나 응백작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시체로 무송 일행을 꿰어내어 청하현을 구했다.

줄거리만 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춘매가 금련에게 이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귀부인들이 남자가 없다고 삽시간에 음탕한 축제에 빠져든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얼음에 재워둔 반금련의 사체를 보고 아직 그녀가 살아있다 여긴 무송과 양산박 일행이 거란군을 물리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제가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르게 만드네요. 역시나 별점은 없습니다. 아니, 별점을 준다면 마이너스에요.


"인어등롱"

앞서의 "낙인찍힌 미녀들"을 일부 수정한 이야기. 진주를 훔치는 트릭은 동일한데, 범인만 갈취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의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진주를 훔친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잔혹한 서문경이 갈취병 뱃속의 진주를 낚시로 꺼내려다 그만 낚시바늘이 취병의 위에 박히는데, 반금련은 갈취병에게 염주를 먹게 하여 그 무게로 바늘을 빼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또 이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부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금련이 갈취병의 아름다운 치아를 부수기 위해 꾸민 계획이라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새로운 처첩을 이 정도 계책으로 쫓아내고,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정도가 확실히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새로 들어온 처첩이 계속 죽어나간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제 기준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빼어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09

퇴마록 (2025) - 김동철 : 별점 3점

"삼백이 반으로 나뉘고, 다섯이 모자랄 때 불씨가 하늘을 모두 태우리라"

해동밀교의 서교주는 산제물을 바쳐 절대 악(惡)의 힘을 얻기 위한 의식을 시작했다. 아들 준후가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을 알아챈 해동밀교의 장호법은 준후를 친구인 퇴마사 박신부에게 맡기려했다. 그러나 이미 악의 힘을 손에 넣은 서교주는 준후를 빼앗아 마지막 제물을 바치려 했고, 이를 막으려던 호법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나 박신부, 현암과 각성한 준후가 힘을 합쳐 서교주를 막아낸다...

1993년 연재가 시작되었던 이우혁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애니메이션. 극장에서 감상하였습니다. 극장 나들이도 오랫만이네요.

원작 중 "하늘이 불타던 날" 편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줄거리는 이미 잊은지 오래되어서 처음 보는 작품처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원작이 연재되고 출간되던 당시에 열심히 읽었었는데, 30여년 세월이 지난 탓입니다. 사실 등장인물들 설정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도 감상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더군요.

장점이라면 재미있다는 겁니다. 해동밀교 서교주가 산제물을 바쳐 악마의 힘을 손에 넣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양이 될 준후를 구해내려다가 호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지만 각성한 준후와 현암, 박신부의 협공으로 서교주를 제압한다는 결말까지 시원시원합니다. 호법들과 퇴마사들의 액션도 화끈하고요. 지루한 부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트웤도 좋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 원작에서 바로 뛰쳐나온듯 잘 그려졌고,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디자인도 빼어납니다. 한마디로, 아주 잘 만든 오락물입니다.

하지만 1시간 30분도 안되는 상영시간은 이야기를 담아내기는 좀 부족했습니다. 초반부, 아스타로트와 박신부가 대결할 때 잠깐 등장할 뿐인 승희의 존재가 대표적입니다. 승희가 누구이고, 어떤 능력자인지 원작팬이 아니라면 알 수도 없는데다가, 해동밀교에 찾아온 현암이 악마 서교주와의 싸움에 뛰어드는건 너무 급작스러웠어요. 이 이야기는 빼고 현암의 서사에 집중했어야 합니다. 승희가 등장하는 노골적인 속편 예고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이렇게 풀어낼 이야기가 많다면, 차라리 넷플릭스같은 플랫폼에서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원작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던 현암의 검 '월향'이 선보이지 않은 것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고, 준후가 아버지 장호법의 죽음을 보고 각성하는건 너무 뻔한, 그야말로 90년대스러운 서사였다 생각됩니다. 네 명의 호법을 순식간에 참살한 서교주가 준후, 현암, 박신부에게 밀리는 것도 설득력을 좀 더 부여했어야 했고요. 이 역시 분량의 문제였겠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액션, 퇴마 장르를 좋아한다면 누구나 즐겁게 감상할만한 잘 만든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흥행에 성공해서 후속편도 문제없이 제작되기를 바랍니다.

2025/01/26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소설 추천

가끔 소개해드리는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이번에는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 리스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을 추천하고 싶네요.


지진이나 사고로 폐쇄된 공간에 갇힌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소설을 소개합니다. 밀실 미스터리는 물론, VR 공간이나 우주 공간을 무대로 한 SF 작품까지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의 탈출극을 직접 체험해 보세요.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에 손에 땀을 쥐게 될 것입니다.

"방주" 유키 하루오

지진으로 지하 건축물에 갇힌 남녀 10명. 심지어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명이 희생되면 나머지 전원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살인범을 찾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합니다. 탈출이냐 죽음이냐의 시간적 제약,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 아름답게 짜인 논리적 추리 등, 읽는 재미가 가득한 걸작 미스터리입니다.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이노우에 마기

지하 복합 시설에 남겨진 여성은 시각과 청각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하루오는 최첨단 드론을 사용해 그녀를 구조하려 하지만, 연이어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닥쳐옵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고난도 탈출 미션극이자, 인간 드라마와 반전이 가득한 미스터리 요소를 갖춘 만족도가 높은 소설입니다.

"앨리스 살인게임" 가코야 게이이치

앨리스라 불리는 VR 공간에 갇혀 데스 게임에 강제 참가하게 된 주인공 하루가 탈출, 즉 로그아웃을 목표로 하는 이야기. 밀실 상황에서의 서바이벌,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 다양한 요소를 균형 있게 담은 오락 작품으로, VR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전개가 탁월합니다.

"천애의 요새" 오가와 잇스이 (국내 미발간)

사고가 발생한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지구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군상극 형식으로 그린 SF. 하지만 SF임에도 현실 세계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읽힐 것입니다. 독특한 인간 묘사를 즐길 수 있으며, 우주 공간에서의 절망감과 긴장감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서바이벌 패닉 소설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홀로 깨어난 라일랜드 그레이스. 자신이 있는 장소가 우주선 내부라는 것을 추측하며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가자, 지구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엄청난 미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성에서의 서바이벌을 다룬 영화화된 저자의 걸작 "마션"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은 SF의 재미가 응축된 소설입니다.

2024/09/07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별점 2점

오렌지와 빵칼 - 4점
청예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순종하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따라하며 모든걸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심리 상담을 통해 전두엽 기능을 일부 조절하는 시술을 받았다. 그 뒤 영아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고, 억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모든 금기를 범하며 엄청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시술 효과는 4주만 지속될 뿐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금기를 범하는, 도덕에 반하는 행동(배덕의 맛)은 쾌락을 주지만 이는 마약과 같다는 설정의 일상 심리물. 

뇌를 건드려 사람이 변모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전두엽 절제로 멀쩡한 사람을 로봇처럼 만든다던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혹성탈출 1" -, 아니면 바보를 천재로 만드는 - "앨저넌에게 꽃을", "론머맨" - 식으로요. 이 작품처럼 자기 통제를 없애는 설정은 뇌 조작으로 사악한 범죄자를 사회 규범에 충실하게 만드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반대 버젼이고요. 사회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들 자기가 옳다고 믿지만,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건 잘못되었고 이런걸 추종하지말고 자기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자기 통제, 죄의식을 없애는 설정이라면 SF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완벽한 군인이나 범죄자, 혹은 킬러를 만들 때 써먹음직 한데, 이를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풀어나간건 분명한 차별화 요소입니다. 사회 비판적 요소도 공정무역, 환경보호와 친환경, 기부 등과 같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소소한 것들이라 신선했어요. 이런 작품이 체제와 제도의 비판을 하지 않는건 거의 처음 본 것 같네요.
덕분에 신선한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온갖 통제에 얽매여 살아가는 오영아의 답답한 모습에서,시술 후 통제를 다 부숴버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주변인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묘사는 통쾌했고요.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낀다는 핵심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탓입니다. 자기 통제가 강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오영아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요. 영아의 연인 수원도 피실험자로 영아를 희생양삼아 공짜 시술을 받은 듯 한데, 평상시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영아에 대한 지극정성을 보여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원이 은우의 친부였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의 결말도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어딘가의 추천에서 접해서 읽어보았는데, 저는 그닥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 문학'은 아니었던 탓이 가장 큽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8/04

저지먼트 - 고바야시 유카 / 이영미 : 별점 1.5점

저지먼트 - 4점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예문아카이브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XX년, 급증해가던 범죄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이나 가학 행위를 똑같이 형벌로 집행할 권리를 피해자 측에 주는 '복수법'이 제정되었다. 단, 복수법을 선택한 경우 피해자 측이 직접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 도리타니 아야노는 복수법 집행자를 보호하고, 집행 현장을 감찰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복수 감찰관'으로, 복수 현장을 지켜보면서 복수법의 존재 의미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데...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으로 일본 신인 작가 고바야시 유카의 데뷔작입니다.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 별로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법률, 그리고 화자가 이 법률을 수행하는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만화 '이키가미'와 비슷한데,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이키가미'에서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데 반해, 이 작품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탓입니다. 과연 이런 복수가 정당한지, 그리고 복수 때문에 선량한 집행자들이 살인자가 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묻는데, 등장하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라서 별로 고민할 게 없거든요. 신림동 묻지마 칼부림 사건의 조선, 평택 아동 암매장 사건의 원영이 부모같은 인간 말종들을 단죄하는게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이렌'에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장면도 같은 이유로 전혀 공감되지 않았습니다.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를 아끼는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의 복수를 한다는 건 말이 되지만, 워낙에 지은 죄가 커서 적반하장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 가족이 판사에게 복수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서 불합리하기도 하고요.

억지 설정도 많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저지먼트'에서 복수자 하야토가 죽는 게 대표적입니다. 여동생을 아사시킨 부모에게 복수법을 집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여동생을 학대의 희생양으로 내세웠던 자신에게 벌을 가해 굶어 죽는다는 건데, 공공기관에서 소년이 죽어가는 걸 방치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소년의 죽음이 복수법 반대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복수법 반대에 활용하려면, 집행 대상인 범죄자가 사실은 무고한 인물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했습니다. 

장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마다 약간의 반전이 있는 건 좋습니다. '사이렌'에서 피해자의 아버지도 피해자에 대해 잘 몰랐었다라든가, '앵커'에서 엔도는 피해자 리오와 결혼할 생각을 접었던 상태였다든가, '페이크'에서 피해자의 엄마가 피해자를 학대하고 있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런 반전이 일종의 조사와 추리로 밝혀진다는 전개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특히 어머니를 살해한 딸 엘레나를 어머니가 복수법으로 죽이려 했지만, 알고 보니 딸 엘레나는 가스라이팅당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이 사실이 밝혀지자 어머니가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켰다는 '보더'는 추리적으로, 그리고 결말의 의외성 측면에서 제일 괜찮았습니다. 물론 엘레나의 행동이 친구 나쓰키의 편지 하나로 밝혀진다는 점에서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으며, 할머니의 가스라이팅도 복선은 잘 짜여져 있지만 억지스럽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대한 과대평가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화자 아야노를 내세워 어설픈 휴머니즘 드라마로 만들기보다는, 복수의 쾌감이 느껴지는 하드고어 복수 포르노로 만드는 게 더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야노 대신 처절한 복수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인물을 등장시켜서요.

2024/06/30

재난의 세계사 - 루시 존스 / 권예리 : 별점 2.5점

재난의 세계사 - 6점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눌와

폼페이 베수비오산 분화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일본 도호쿠 지진까지 총 11개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 소개하며 설명해 주는 책. 

몰랐던걸 새롭게 알게되는 재미가 컸습니다. 몇 가지 설명드리자면,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네요.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되며,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훌륭한 천연 요새가 되어 주고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베수비오산 일대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습니다. 유명한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산 분화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구조차 향했던 도시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래도 질식사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두 번째 분화로 사망한 폼페이 희생자들은 화산설쇄류로 타죽었거든요. 섭씨 2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무려 시속 480Km로 이동하여 사람을 덮쳐 닿자마자 사망했습니다. 정말 끔찍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최소 8.5에서 9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철학과 과학에 뚜렷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가는 성스러운 날, 교회가 가득찬 아침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 보였으니까요. 교회에 간 독실한 신자들은 목숨을 잃고, 근처 홍등가 창녀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여 기독교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돌로 지었고 홍등가의 집들은 나무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무는 돌보다도 유연하고 흔들림을 잘 견뎌 사망자가 적었던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네덜란드 정부가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 사상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숭배한 포르투갈을 신이 벌하였다면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783~18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산 분화는 인류역사상 임명피해가 가장 컸던 자연재해로 총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이었고 전 세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 탓입니다. 극심한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몬순이 사라져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화산은 자연재해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층권의 기체 조성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권 하층부는 극지방에서 밀도가 낮아서 아이슬란드 화산은 성층권으로 물질을 보내기도 쉬운 탓에 피해가 더 컸지요. 다행히 화산 폭발의 영향은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온실가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은 당시 폐쇄적이었던 중국 환경 탓에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저뚱 사후 4인방이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고전에서 지진은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 외에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음기가 강해져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하들이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경우, 또다른 하나는 여자가 정치에 나서는 경우로요. 4인방, 그리고 중심인물이 마오의 아내 장칭이라는게 이 경우에 해당되어, 인민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데 꽤 그럴싸 했어요.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의 죄수의 딜레마도 기억에 남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제방에 막대한 압력을 가할 때, 위험에서 마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맞은편 제방을 부수는 겁니다. 건너편 이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딜레마'라는 말이 걸맞는 상황입니다. 놀라운건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건너편 제방을 부쉈다 - 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 발생 시 일어났던 참극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소개된건 참 고마왔어요. 이 책에서는 학살 이유를 전통적인 세계관을 대체할만한 과학 이론이 부족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작위성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주장은 말은 되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인종 차별과 범죄는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방을 보강하게 시켰다가, 제방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서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도록 만든 범죄처럼요. 제방이 무너진 뒤 재방 붕괴지점 근처에 구조를 위해 동원된 배에도 백인과 흑인 모두 동등하게 타지 못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불과 4년 뒤라 세계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미국의 당시 사회 특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수십년의 차이는 있었을터라, 단지 세계관에 따른 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참극과 학살은 인종 차별과 인종 혐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걸 분명히 해 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이외의 토막 상식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미시시피강 홍수 때 구호활동을 지휘했던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건, 당시 흑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배신하여 흑인 표를 잃고 루스벨트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지원금이었던 10억 달러의 연방정부 자금 중 7억 달러가 불분명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도 새로왔습니다. 그냥 없다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잭 리처'가 나서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지진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많은데, 지금도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규모 5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측했지만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성공한 예측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도 새로왔어요.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규모 5의 두 배이기 때문이라지요. 어차피 지진 관련해서는 확률에 대한 논의를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세계사'라는 제목에 걸맞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볼 부분이 많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주로 과학과 재해 전, 후의 대책에 대한 주장이 보다 많은 편입니다. 마지막 장은 아예 지진에 대비해야 하는 내용이고요. 앞서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 좋았을겁니다.
설명도 쉽고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도판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1/27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 권도희 : 별점 2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4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권도희 옮김/엘릭시르

"녹색은 위험", "제제벨의 죽음"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집. 5부 구성으로 모두 1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통 본격물, 범죄물,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등으로 수록작 장르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정통 본격물의 비중은 무척 적은 탓입니다. 트릭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추리도 억지스러워서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아요. '기묘한 맛' 장르 느낌으로 마지막 한 줄, 한 문단으로 반전의 매력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티는 역력하지만 이 역시 모두 성공한건 아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5부 구성도 1부 코크릴 칵테일을 코크릴 경감 시리즈로만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도로 분류하여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인 게임"은 앙트레로 묶기 어려운, 이 단편집 최고의 메인 요리라 생각되거든요. 오히려 앙트레 선택에 5부 블랙 커피에 수록된 심리물들을 포함시키고, 범죄물을 메인 요리로 묶어 구성하는게 더 일목요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범죄물도 심리 묘사가 중심이거나 조금 가벼운 이야기와 묵직한 본격물을 구분하여 배치하고요. 제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아페리티프(식전주) : 코크릴 칵테일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피를 나눈 형제"
* 기존 구성에서 코크릴 경감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 한 편, 그리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정.

2부 앙트레 선택
"이 집에 축복을"
"수군거림"
"발코니에서"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
* 심리 묘사 중심의 작품들로 구성.

3부 르 푸아송 (생선 요리)
"말벌집"
"너무나 괜찮은 사람"
"신의 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 말벌집은 '굴'이 사용되어서 생선 요리로 분류했고 다른 작품들은 심리 중심의 범죄물들.

4부 리플렛 프로스펠 (메인 요리)
"살인 게임"
"희생양"
"여기 잠들다"
"회전 목마"
정통 본격 추리 범죄물들.

5부 데세르 (디저트)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

6부 블랙 커피
"잔 속에 든 독"
도서 추리물로 '커피'가 핵심 소재라는 점에서 블랙 커피로 분류.


마지막으로 수록작들의 간략한 리뷰는 아래에 요약하였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부 코크릴 칵테일.
코크릴 경감이 활약하는, 늙은 형사의 회고담인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뺑소니 살인과 정부 살인 사건을 저지른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인 "피를 나눈 형제", 성질 고약한 부자 노인이 후처를 맞은 결혼식 날 독살당한다는 "말벌집", 남편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독살한 아내 시점의 도서 추리 소설 "잔 속에 든 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범인의 조작을 코크릴 경감이 간파한다는 작품들로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에서는 유명 극단의 톱 스타 주연 배우 제임스 드래건의 아내가 살해당했는데, 극단 배우들이 모두 나서 경찰 앞에서 연극을 펼칩니다. 이를 통해 제임스 드래건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알고보니 범인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서 드래건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피를 나눈 형제"에서는 쌍둥이 형제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이고, 한 명은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었다면 누구를 체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둘 다 자기가 알리바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밝혀내는건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옷에 증거를 남겼다는 반전도 기발했고, 결국 진흙탕 속으로 서로를 밀어넣어 파멸하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말벌집"은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1966년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이 후원한 영국추리작가 협회 회원 대상 단편소설 경연대회 1등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죠. 이유는 범인 엘레자베스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훈제 연어를 준비하는게 어려웠다'는 말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된다는건 믿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가 사건을 연출했다는 것도 정황 증거에 불과하며 굴 안에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먹였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고요.
"잔 속에 든 독"은 범인 스텔라가 범인으로 몰리자, 임기 응변으로 남편 등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내용으로 도서 추리 소설과 심리 스릴러를 잘 결합한 좋은 작품입니다. 완벽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독이 든 커피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마지막 한 마디도 좋았고요.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2부 앙트레 선택.
유명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살인 게임", 일종의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희생양", 거짓 증언으로 선량한 히피가 파멸에 이른다는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의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게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도 소개되었던 단편이지요. 이전에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경찰로 변장한 뒤 밀실이었던 현장에 숨어있다가, 밀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 중 한 명으로 위장했다는 트릭이 기발합니다. 마지막에 이야기를 듣던 노인의 한 마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도 서늘했고요. 다만 범죄자의 혈통은 유전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는건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낡은 사고방식이라 아쉽네요. 그래도 2부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희생양"은 13년 전, 유명 마술사 미스테리오소가 저격당해 충직한 하인 톰이 대신 죽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저격용 총의 방아쇠에 묶인 끈에 사과 봉투를 위에서 떨어트린 장치 트릭인 것 처럼 풀어나가지만, 일종의 시간차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릭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이었던 경찰이 사과 봉투를 터트려 총소리를 위장한 뒤 진짜 저격은 나중에 벌였다는데, 사과 봉투를 터트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총 소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마지막에 소년이 미스테리오소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같은게 있었던걸까요? 2부, 아니 수록작 전체를 통틀어서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는 웨일스를 무대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탈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짓말의 연쇄가 진범의 알리바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선량한 히피 무리의 리더 크리스토가 누명을 쓰고 마는 과정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묘사됩니다. 셜리 잭슨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방불케할 정도에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볼만한 범죄 심리 스릴러였습니다.

3부 입가심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한 편이 소개됩니다. 블란쳇 부인의 진주 목걸이를 훔치려는 컴퍼트 양과 스네이스 씨의 작전, 그리고 이들을 농락하는 진짜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호지 양이 얽힌 재미난 범죄극이 펼쳐집니다. 진짜 도둑은 하녀 글래디스였다는 마지막 반전도 일품이고요. 그야말로 '입가심'에 적절한 유쾌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쾌작입니다.

4부 프티 푸르
'프티 푸르'는 한 입 디저트라고 하는데, 수록작들 대부분이 완전범죄 계획 살인물입니다. 한 입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네요.
하여튼, "여기 잠들다"는 아내를 사고사처럼 위장하여 죽이려는 제럴드의 치밀한 계획을 그립니다. 아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익사시킨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거의 성공했고요. 하지만 알리바이를 위해 고용했던 타이피스트 부처 부인이 제럴드를 죽인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부처 부인의 외모라던가 성격 묘사를 덧붙여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회전 목마"는 자신을 협박하던 빈들 씨를 살해한 하틀리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범죄물로도 좋은 수준이지만, 빈들 씨와 하틀리 부인의 꼬마 아이들이 범죄에 대해 모든걸 알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채 진상을 이야기하는 묘사도 서늘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는 악당 호러호러 족장을 살해한 이야기인데, 계획에 따른 완전범죄는 아니었습니다. 범인이 풀려났던건 목격자였던 존스 부인이 유리창 반사로 일으켰던 착각 탓이었지요.
"발코니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웃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킨 제닝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의 심리 스릴러 범죄물입니다. 히치콕의 "이창"을 뒤집어 놓은 설정과 제닝스 부인을 바라보는 이웃 시점의 묘사를 곳곳에 삽입하다가, 이웃들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5부 블랙 커피
수록작 네 편 중 세 편은 여자의 심리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에 축복을"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믿는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괜찮은 사람"은 그야말로 딱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너무나 괜찮았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심리를, "수군거림"은 자신의 실수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촌과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여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신의 힘"은 완전 범죄물입니다. 범인 에반스 경관의 범행 계획은 그냥저냥이지만, 딸과 손녀를 죽게만든 범인 젤링크스를 옭아맨 설정은 일품이었습니다. 에반스 경관의 거짓 증언으로 젤링크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무죄를 받아들인 뒤 협박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습니다.

2023/12/23

기기괴괴공모전 수상작품집 - 백해인 외 : 별점 2점

기기괴괴공모전 수상작품집 - 4점
백해인 외 지음/팩토리나인

"오싹함"이라는 주제의 단편 공모전인 '기기괴괴' 공모전의 입상작 5편을 모은 단편집.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전래 미스터리"처럼 인터넷 게시판 수준은 아니더군요. 공모전 수상작다운 기본적인 완성도는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장점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제와 걸맞지 않게 별로 무섭지 않다는 문제가 도드라지며, 대부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이라 의외성이나 반전의 묘미를 찾아보기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흔한 설정과 전개의 양산형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탈피, 키스" 백해인
원인모를 피부 트러블 탓에 제대로 외출도 할 수 없던 수희는 고운 피부를 되찾았다. 목욕탕에서 만난 여성이 바토리 백작 부인의 축복이라며 욕탕에 뿌린 핏물 덕분이었다. 그러나 핏물이 떨어지고 다시 피부 트러블이 찾아오자, 수희는 자기를 농락한 애인 이진을 죽인 뒤 그 피를 뒤집어 쓴다....
'미'를 쫓다가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댄 뒤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지요. 이 공모전과 이름이 같았던 웹툰 "기기괴괴"의 "성형수" 에피소드가 대표적입니다.
흔한 설정이라면 나름대로 변주라도 있어야 했을텐데, '아름다운 사람의 피'가 도구로 활용된다는건 안일한 발상이지요. 여기에 "바토리 백작 부인의 축복"이라는 설정을 덧 씌운 것, 이진이 수희를 등쳐먹는 악질 사기꾼이었다는 설정도 뻔하기 그지 없고요. 별로 기괴하지도,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레바퀴 소리가 들리면" 백승빈
궁핍했던 평안도의 어느 마을 노름꾼 아비 밑에서 자란 쌍둥이같이 꼭 닮았던 자매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장날의 인기인이 되었다. 그러자 검은 도포의 남자가 나타나 거액을 주고 언니를 사갔다. 동생은 언니가 해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겨우 그녀를 찾아갔지만, 언니는 검은 도포의 남자가 피를 빨아먹는 사내들을 집으로 끌고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내들의 피를 먹고 사는 불사의 존재였다. 자매는 검은 도포의 남자의 아내의 도움을 얻어 그의 가슴에 말뚝을 박아 쓰러트리는데 성공했지만, 마지막에 언니가 그에게 물리고 말았다....
전형적인 흡혈귀 이야기지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자매가 '이야기 꾼'이라는 특기를 살려 흡혈귀와 맞선다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차별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넷플릭스의 "킹덤"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지치기" 신도윤
뭔가에 물린 뒤 물린 자리에서 사람 머리카락이 나더니 결국 '머리'까지 자라났다. 확인해보니 내 얼굴이었다. 얼굴을 식칼로 잘라내가며 대응했지만 온 몸에 나기 시작했고, 결국 진짜 머리마저 두 갈래가 되어버렸다...
"토미에" 류의 인간 복제(?) 상상력을 일상 이야기와 결합한 작품. 혐오스러운 묘사를 '잘라낸 머리를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어 버렸다'는 식으로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묘사한건 독특했지만, 자라난 머리가 결국 온 몸을 뒤덮는다는 결말이 예상 그대로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본인의 진짜 머리조차 자라난 머리에 침식당한다는건 "블랙잭"에서의 "인면창" 에피소드와 흡사하니까요. 전개와 결말에서 조금 더 의외성을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비어 있는 상자" 이승훈
코인 등 투자 실패로 돈이 필요했던 정훈은 이상한 상자를 옮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상자에 들어있던건 살아있는 껍질같은 사람들로, 부자들이 껍질을 사서 입는 시장으로 옮겨지는 것이었다....
허세에 치중한 인간들은 겉 껍질밖에 없다는 세간의 비유를 그대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비유를 직유처럼 소화하니 색다르네요.
그러나 색다름보다는 진부한 요소가 더 많았습니다. 껍질 상태가 되어서도 허영은 남아서 어떻게든 부자들 눈에 들겠다고 발버둥친다는 반전도 그닥이었고요. 왜 사람들이 껍질만 남는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알고 수집하는지? 이들이 사라져도 세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등 설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다소 기발해보이는 아이디어가 전부일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무미의 끝" 정현수
강어진은 오래전 친구 준혁의 회고록(?)을 배달받았다. 스트레스와 가정 문제로 미각을 잃은 준혁이 결국 식인까지 저지른 뒤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어진은 준혁이 자살했다는 장소로 달려갔는데, 그곳에서 완전히 식인 괴물이 된 준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미각을 잃은 준혁이 이런저런 재료를 거쳐 식인에 이르는 과정은 꽤 엽기적으로, 실감나게 묘사되지만, 역시나 신선함, 새로움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설정부터가 너무 뻔한 탓입니다. '맛' 때문에 식인을 감행한다는 작품은 워낙에 많으니까요. "특별 요리"도 그렇고, "금단의 팬더"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최고의 맛'을 위해 식인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미각'을 찾기 위해 식인을 저지른다는 동기 측면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게다가 식인을 저지르다가 아예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비교적 현실적인 분위기로 그럴듯하게 끌고가던 초중반부와 동떨어져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처음에는 어진의 회상처럼 시작하는데, 결말이 어진의 죽음이라면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9/29

방주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5점

방주 - 6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슈이치는 대학 동창들, 그리고 사촌형 쇼타로와 함께 유야의 별장에 놀라왔다가 유야가 발견했다는, '방주'라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시설을 찾았다. 일행은 버섯을 따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야자키 가족과 하룻밤을 '방주'에서 보냈는데, 지진 탓에 그만 갇히고 말았다. 
지하에서부터 물이 차올라 일주일 안에 탈출해야 했지만, 방법은 입구를 막은 돌을 떨어트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돌을 떨어트린 사람 혼자 방주에 남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마침 유야가 살해되었고, 일행은 유야를 죽인 범인을 방주에 남도록 하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이뤘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사야카와 야자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쇼타로가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밝혀냈다.

2022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23년 '본격미스터리 10' 2위에 선정되는 등 최근 가장 뜨거운 작품. 추석 연휴를 맞아 읽어보았습니다. 찬사를 받은 이유는 바로 알겠더군요. 일반적인 클로즈드 써클 (클로즈드서클) 장르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덕분입니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한, 두편이 아닙니다. 산장이나 섬같은 고전적인 장소에서 현대적인 빌딩이나 기묘한 이공간 등으로 장소도 확장되어 왔고, 고립되는 이유도 폭설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정전 등의 현대적인 이유, 특수한 집단이 납치하여 게임을 벌이거나 좀비가 등장하는 식의 특수 설정까지 다양한 상황을 선보여 왔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고립된 장소도 독특하지만, '범행을 벌이는 동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범인 마이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원한따위가 아닙니다. 오로지 "고립된 장소에서 탈출해서 살아남기" 위해서에요. 게다가 이를 위해서 범행이 결국 밝혀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하고요. 전에 보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고립된 장소인 '방주' 설정도 좋습니다. 출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물론, 반전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출입구와 비상구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오래전 과격 분자나 사이비 종교 단체가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주 내에 이런저런 시설과 장비, 음식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말이 됩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방주'의 존재감이 너무 확실해서 초, 중반부까지는 방주가 주인공인 느낌마저 전해줍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범인'에게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고립될 역할을 맡긴다는 암묵적인 동의입니다. 범인이 누구든간에 자기 범행이 드러났다고 그런걸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범인이 피트니스 센터 강사 류헤이였다면? 완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기도 어려웠을테지요. 그리고 침수 중이라 시간 제한이 있다면 범인을 찾아서 희생하라고 설득하느니, 누구든 빨리 돌을 치워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구조를 기다리는게 빨랐을겁니다.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났어도 한나절 만에 올라온 산을 내려가는데 1주일이나 걸릴리가 없잖아요? 기본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설정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공기통을 활용하여 지하 3층을 지나 비상구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범인을 밝히는 것 외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마이가 범행을 저지르는 일련의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물론 마이가 곧바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희생자(?)를 고르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라는건 어느정도 말은 됩니다. 전에 '방주'에 왔던 경험이 있는 유야는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눈치챘을지도 몰랐기에 제일 먼저 죽였다는 것, 유야 사건에 증거가 남지 않고 모두가 범행이 가능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납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야카의 핸드폰 속 사진이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나타낼 수 있어서 죽였고, 사야카가 핸드폰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을 잘랐다 - 핸드폰이 안면인식으로 잠금 해제가 되는 모델이라 - 는 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애써 종이 타월을 가져오면서까지 증거 인멸을 위해 노력했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어차피 범인임을 드러내어 희생양이 될 목적이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다가 들통나는게 더 확실했을거에요. 제한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범행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사체의 목을 자르는 행동이 의심을 불러 일으킬까봐 그랬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겁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고립된 사람들 앞에서는요. 마지막 쇼타로의 추리쇼에서 어떤 사진 때문에 사야카를 죽였는지에 대해 마이가 설명한걸 아무도 부정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또 마지막 추리쇼에서 마이가 범인이라는건 증명하지만, 앞서 쇼타로가 말했듯 "동기가 없다"는 이유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다던가, 유야가 방주로 일행을 억지로 데리고 왔다는 등의 설정을 덧붙였더라면 좋았을겁니다.
마이가 탈출에 성공했다 한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실종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유야의 손톱깎기와 지퍼백을 범인이 가지고 왔던 이유는 핸드폰이 방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테이프 정도야 잊어버릴 수도 있지요. 지퍼백의 용도도 지나치게 국한되어 있고, 발표 시점에 생활 방수가 되지 않는 핸드폰을 사용하는 MZ 세대가 있을걸로 보이지도 않고요. 

이렇게 장점도 확실하고 단점 또한 확실한 그런 작품입니다. 돌직구 하나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변화구도 적절하게 섞어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가지 장점으로 정면 승부를 벌일만큼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슷한 설정들에 지친 추리 소설 애호가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덧붙이자면, 10명에 불과한 등장인물 - 심지어 3명은 중간에 살해당함 - 과 폐쇄된 공간, 일주일의 시간 제한 등의 설정은 '무대'에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각색해도 괜찮은 연극이 될 수 있을것 같네요.

2023/08/05

하얀 마물의 탑 - 미쓰다 신조 / 민경욱 : 별점 2.5점

하얀 마물의 탑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모토로이 하야타는 2차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했던 탓에 등대지기가 되었다. 해군 시절 등대의 중요함을 느꼈던 탓이었다. 양성학교를 거쳐 첫 부임한 곳은 간토의 다이코자키 등대였다. 그곳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는 등의 경험을 겪고 2년 후, 도호쿠 지방에 있는 고가사키 등대로 전근이 결정되었다.
어선으로 고가사키 등대에 접근하던 하야타는 등대에서 이상한 햐얀 형체를 목격했고, 이 때문에 어부가 직접 상륙을 거부해서 등대 아래 아지키 마을에서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하야타는 이동을 위해 안내인 모스케를 고용했지만, 모스케가 사라져버려서 홀로 출발했다. 그리고 하야타는 숲길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쫓는걸 알아채고 서두르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해까지 진 상태에서 발견한 민가는 기묘하게 생겼고 무척 낡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집은 마을 사람들이 '하얀집'이라고 부르며 피해가라고 했던, 시라가미를 모시는 무녀의 집이었다. 가면을 쓴 무녀와 손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야타는 친절한 손녀 하쿠호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보낸 뒤, 그녀에게서 받은 부적 덕분에 무사히 등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등대에는 아무도 없었고, 밤이 되어서야 등대장 이사카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야타를 찾으러 숲에 갔다왔다고 한 이사카는 하야타가 겪었던 일을 듣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다. 다이코자키에서 자살하려는 소녀를 구해주었었고, 고가사키 상륙 전에 하얀 형체를 목격했었고, 숲 길로 이동하다가 무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는 등 하야타와 거의 똑같은 이야기였다.
등대장의 회고는 마을 신주의 딸 미치코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하듯 홋카이도로 전근을 갔는데, 딸은 신주가 부리는 시라몬코에게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하야타는 자신의 경험담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뒤, 이사카의 아내 미치코는 마을 신사 신주의 딸이 아니라 하얀집의 딸 시라쓰유였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불가해한 일을 겪을 때는 합리적인 해석이 중요하다."

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신간 코너에 있길래 시리즈인줄 모르고 별 생각없이 집어들었는데, 읽다보니 시리즈더라고요. 다행히 첫 번째 작품은 읽지 않았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사관장>>과 비교적 흡사합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무속 신앙과 그들이 부리는 신(?)에 관련된 기묘한 능력, 그것에 얽히게 된 민간인이라는 핵심 소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이 무녀와 연을 맺는 전개와 사람들이 겪는 기현성이 '하얀색'이라는 것도 유사하고요.
하지만 주인공 모토로이 하야타의 존재가 결정적 차이를 만듭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온갖 기현상에 대한 나름의 추리를 펼칩니다. 이게 꽤 그럴싸해서 재미있었어요.
 
우선 '세기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유명한 아일린모어섬 등대 사건부터 자신만의 해석을 내 놓습니다. 등대장인 마셜이 미쳤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폭풍우가 오지 않았지만 일지에 폭풍우가 덮쳤다고 적혀있던건 마셜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고, 부하 중 듀커가 '화를 냈다'는건 마셜이 미쳤기 때문에, 그리고 듀커가 '여전히 조용했고' 맥아더가 '기도했다'는건 마셜이 듀커를 죽여서 맥아더가 기도했다고요. 실종의 진상은 마셜이 비옷과 장화를 신고 듀커의 시체를 버렸는데, 그걸 안 맥아더가 비옷과 장화를 신고 뛰어나와 말리다가 둘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 추리합니다.
홀로 숲 길을 해메던 하야타를 추격했던 하얀 괴물체에 대한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길 안내를 부탁했던 모스케였다는 겁니다. 슬쩍 수풀 사이로 본 거대한 하얀 형체는 모스케가 짐을 나르며 짐 위에 덮어놓았던 흰 천이고요. 하야타가 마을 여관의 딸 기리에와 사이가 좋은걸 봤기 때문에, 질투심으로 저지른 일종의 장난(?)이라는 동기까지도 잘 설명해줍니다. 밤에 돌을 던지고, 다음날 등대로 향할 때 숲 속에서 하야타를 포위했던건 원숭이들이었을거라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자료 조사도 충실해서 등대의 역사 등 온갖 정보들도 가득한데, 그 중에서도 오사카 케이키치 등대 소설을 읽는 묘사는 반가왔습니다. <<등대귀신>>은 <<등대귀>>라는 제목으로 읽었었던 적이 있지요. 다른 작품들도 언급되는데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전개는 다소 지루한 편입니다. 모토로이 하야타가 고가사키 등대로 향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게 거의 1/3 지점일 정도거든요. 하야타의 과거라던가, 신념에 대한 묘사, 그리고 등대의 역사 등 관련 자료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탓입니다. 작품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 말이지요.
또 합리적으로 모든걸 설명하려고 했으면 그렇게 모든걸 설명해 주었어야 했는데,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습니다. 이사카 부부는 유령(?)이었다는 결말은 어처구니를 상실케하며, 이사카 부부와 다른 등대지기 하마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애초에 이사카가 고가사키로의 전근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은 아예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 외에도, 하얀 집과 마을과의 관계처럼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한 때는 그 집에서 출산을 했다고 하는데, 불길하게 여기는 집에서 왜 출산은 했을까요? 출산을 앞 둔 임산부가 가기에는 너무 험한 산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좋은 일은 마을 신사에, 나쁜 일은 하얀집에 기원한다는 설정도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 자체가 애매하잖아요. 예를 들어, 먼 곳에 있는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해 시라몬코를 이용하면 안되는 걸까요?
등대에서 보이던 하얀 형체가 하얀 집의 딸 하쿠호 (이전에는 시라쓰유)의 하야타 (이전에는 이사카)를 향한 연심이라는 해석도 별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맞다면 하얀 형체는 이사카와 하야타에게만 보였어야 했습니다. 시라쓰유, 하쿠호의 연심은 그들이 자살하려 할 때 구해주었던 젊은 등대지기에게 향해 있었으니까요. 즉, 마을 어선 선장이 '하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들, 그걸 목격했다고 등대 상륙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얀 사람'이 귀신을 볼 수 있는 모두에게 보인다면, 그걸 '연심'이라고 하기도 힘들테고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구체화된다는 해석이었다면 말은 되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이런 경험에 진절머리가 난 하야타가 등대지기를 그만둔다는 결말도 영 아니었어요. 물론 하야타가 하쿠호의 사랑을 받아줄 리는 없지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이 유령이 되어버린 이사카 부부를 봤으니까요. 하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하얀 집의 무녀는 시라몬코를 부려 일본 각지를 조사하고, 심지어 아이를 납치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등대지기를 그만 둔 걸로 하쿠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쿠호에게 누군가 다른 남자가 희생양이 되기 전에는 말이지요. 하쿠호에게 희생양으로 모스케라도 던져주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이렇게 설명이 부족하고 결말이 대충이라는 점에서는 완성된 소설보다는 괴담에 가까왔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1편인 <<검은 얼굴의 여우>>는 추리물이라고 하는데, 1편이나 읽어봐야겠습니다.

2023/05/2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1. 베이지 않는 말
에그가 하치오지(八王子)에서 사가미호(相模湖)를 왼쪽으로 보고 오쓰키(大月), 사사코(笹子) 터널을 지나 코후(甲府)에서 주오자동차도로 나올 때까지 마이코는 뒷좌석에서 잠을 잤다.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이야."
그 말대로, 그녀는 조금만 틈이나면 정말로 기분 좋게 잠들곤 했다.
스와코 호수에서 밤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호숫가에 방사형 빛이 비쳤다. 시오지리에서 북쪽으로 마츠모토로 향했다. 마츠모토에서 국도 158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아즈미(安曇)의 댐군을 통하며, 왼쪽으로 노리쿠라(乗鞍)산, 오른쪽으로 야리가다(槍ヶ岳), 호다카(穂高)의 산맥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사카마키, 히라유 온천을 지나면 히다이였다.
구름이 흐려지고 안개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그는 깊은 산속을 지나 에치츄 도카이도에서 신토우 강변을 따라 히다 가도로 향했다. 도야마에 도착한 후 호쿠리쿠 자동차 도로를 달리니 어느새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에그는 쇼와강을 건너 후카야 온천을 거쳐 가나자와에 들어섰다.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아사노 강과 사이 강 사이에 펼쳐진 시가지에는 오래된 민가와 상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수와 흙담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가가 백만석 성곽 마을의 풍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점심은 고린보(香林坊)의 우동집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친 마이코는 지도를 꺼내들었다.
"오노에 갈 거야."
마이코가 말했다.
"오노 벤키치, 본명은 나카무라 벤키치. 오노에 살면서 오노 벤키치라고 불렸어. 오노초 덴센지(伝泉寺)에 벤키치의 무덤이 남아 있지."
토시오는 지도를 보았다. 가나자와 성터, 겐로쿠엔(兼六園), 혼간지(本願寺), 노마치(野町), 데라마치다이(寺町台) ......
오노는 가나자와 시가지에서 벗어나 동해에 면한 가나자와 항구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가와호쿠가타에서 흐르는 오노가와 사이카와 강 하구에 끼여 있는 오노의 바로 옆은 카네이시(金石)로, 제니야고헤에(銭屋五兵衛)의 유품관이 있었다.

일본해는 거칠게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묵직한 구름의 움직임, 하얀 거친 파도, 검은 항구도시의 지붕.
"호쿠리쿠의 바다는 이제부터가 진짜야."
마이코가 말했다.
덴센지에 있는 벤키치의 무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덤은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작고 낡은 비석으로, 벤키치의 이름은 알 수 있었지만 뒷면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 지은 것으로 보였는데, 묘비명은 같았지만 비석에 일월오봉도 문장이 새겨져 있는 훌륭한 비석이었다.
덴센지 주지스님은 최근 가나자와에 사는 한 독지가가 벤키치 기념관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만 기념관이라고 해도 건물 한 칸이 전부지만, 흩어져 있던 벤키치의 유품이 꽤 많이 모였으며, 열렬한 벤키치 팬이라서 멀리서 온 손님이라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했다.

사설 오노 벤키치 기념관 관장 다카라다 고로(宝田五郎)는 일흔이 넘은,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지금 병원 일은 대부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좋아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고 있다고 했다.
"벤키치의 역립 인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었어요."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을 개조한 기념관 관장실의 방 전면에는 커다란 패널 세 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오래된 사진을 복제한 것으로, 표면에 얼룩과 벗겨짐이 눈에 띄었다. 그 양옆에는 유리 케이스가, 방 중앙에는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간혹 소문을 들은 애호가들이 관람하러 오면 다카라다 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차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 주지스님께서 사설 기념관이라고 하셨나요?"
다카라다는 반쯤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념관이라고 하는건 사실 부끄럽습니다. 유품도 적고, 벤키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유리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테에보시(立烏帽子)에 산바소(三番叟) 의상을 입은 산바소 인형이었다. 이 인형은 태엽 장치로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면서 움직인다고 했다.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있는 가라코 인배대는 고쇼차 위에 잔을 올려놓으면 두 명의 가라코가 고쇼차를 끌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유명한 차 나르는 인형 ...... 노시메(熨斗目)의 옷에 금란(金襴)의 하카마(袴)를 입고, 눈이 동그란 동자(童子)로, 양손에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의상은 곳곳이 낡았지만, 얼굴에 칠한 호분(胡粉)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대학 교수님이 오셨어요. 내부를 꼼꼼히 조사하고 돌아갔는데, 정교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다카라다 씨는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말했다.
다카라다의 말에 따르면, 유물이 적다고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한 번에 다 볼 수는 없을 정도라고 했다. 금속으로 만든 원경(遠鏡), 안경, 전기 텔레비전, 사진기, 자명종, 점화기, 라이터, 권총, 도자기 자동 분수대, 증기선 모형 ......
또한 벤키치는 유리 세공과 조각, 대나무 세공과 금속 가공 기술도 뛰어났다고 했다. 다양한 공예품들을 살펴보니, 카라쿠리는 엄청난 지식과 고도의 기술로 형성된 벤키치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인형 제작자가 아니야. 소우지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이런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노 벤키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이코는 수많은 벤키치의 작품 앞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렇죠. 이토록 뛰어난 천재인데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첫째, 벤키치에 대해선 너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요. 비범한 학예를 가졌으면서도 평생 어느 번에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호쿠리쿠에 은거하다 죽은 기인(奇人)이니......."
"교토의 깃털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호오, 잘 아시는군요. 어렸을 때부터 시조류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더군요. 스무 살 무렵에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서양화도 배웠다고 합니다. 벤키치에 대해서는 이시카와현 출신의 정치가 나가이 유타로(永井柳太郎)씨의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를 통해 벤키치가 나가사키에 있었던 시기와 일본 서양학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시볼트 박사가 나가사키 데지마에 부임한 시기가 같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여기서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요. 추측에 불과하지만 천문학에서 역법, 의학에서 항해술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은 벤키치와 시볼트가 관계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시볼트는 간첩혐의로 고발당했었고, 그 결과 네덜란드로 떠나 나가사키에서 모습을 감췄지요. 벤키치는 그 후 대마도, 조선으로 건너갔고요. 이 역시, 시볼트 사건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귀국 후에는 기이(紀伊)에서 기마술, 포술, 산술 등을 가르쳤습니다."
"벤키치가 오노에 살게 된 계기는요?"
마이코가 물었다.
"덴포 2년, 벤키치가 서른 살이었을 때입니다. 성곽 마을의 외곽에 있는 오노 마을은 교토에서 결혼한 아내 우타의 생가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 후 메이지 3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벤키치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그 땅도, 바닷모래에 파묻혀서 집도 없어졌지만......"
그리고 다카라다 씨는 정면의 벽에 걸린 세 장의 패널을 가리켰다. 가운데 한 장이 오노 벤키치의 사진이었다.
큰 눈과 콧날, 뼈가 굵은 얼굴이었다. 개국론자로서의 강한 신념이 그 풍모에서 느껴졌다.
"오른쪽 사진은 벤키치의 아내 우타 씨입니다. 덴포 말기, 벤키치가 직접 만든 사진기로 촬영한 것이죠. 당시 사진은 기독교의 요술이라며 벤키치가 사진을 찍는 것을 다들 꺼려했죠. 부인도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벤키치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취미도 있었군요."
"그래요. 깊은 지식과 정교한 기술, 그것만으로는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 수 없죠.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번주가 벤키치에게 명령해 차를 나르는 인형을 만들게 했어요. 인형은 예의상 영주 앞에 차를 가져다 주었죠. 번주는 문득 부채로 인형의 머리를 두드려 보았어요. 그러자 인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갑자기 허리춤의 칼에 손을 얹어 자르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깜짝 놀라서 벤키치에게 물었더니, 벤키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형에 미리 장치를 해 두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번주는 분명 요술이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이야기라면 또 있습니다. 벤키치는 술장수 인형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어느 술집 앞에서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인형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술장수는 인형이라며 술의 양을 줄였는데, 인형은 술장수의 마음을 알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술장수가 어쩔 수 없이 술의 양을 가득 채워 주자 인형은 돌아갔다고 하고요.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어요. 인형은 술병이 일정한 무게가 되지 않으면 마개가 빠지지 않고, 기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만들어졌을 거에요."
"원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과 같다는 거군요"
"차를 나르는 인형에 대해서는 벤키치도 자필 설계도를 남겼는데, 원본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본을 보여드릴까요?"
다카라다 씨는 유리 케이스에서 한 권의 제본된 책을 꺼냈다. 제본된 표지에 '동시궁록(東視窮錄)'이라고 적혀 있었고, 내용 중 한 장에 정밀한 차 나르는 인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은 자동 인형 뿐만이 아니었다. 시계, 사진기, 화학약품, 색유리 제조법부터 자동분수대 내부, 볼타식 파일 도해 등이 세세한 설명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이코는 그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키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이 묘한 힘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학력과 창의력이 뛰어났있으니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많았겠지요?"
마이코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계속해서 벼슬길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벤키치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아주 적었어요. 불과 대여섯 명도 안 되는 제자 뿐이었지요, 카라쿠리는 요네하라 린하쿠에게, 의술은 다카라다 이스케에게 가르쳤어요. 다카라다 이스케가 제 증조부이십니다."
"그래서 벤키치의 유품을 많이 가지고 계신 거군요."
다카라다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벤키치는 매독을 치료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요. 수은을 이용한 요법입니다. 벤키치는 은광 채굴에 종사한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다카라다 이스케가 벤키치에게 가르침을 구한 기간은 극히 짧았어요. 가가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즉, 기존의 집정관인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가 죽고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젠고(銭五)씨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죠."
"잠깐만요."
마이코는 학생처럼 손을 들어 다카라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고 씨라고 하면 그 비극의 호상이라 불리는 제니야 고헤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가가, 카네이시의 호상 제니야 고헤에. 카네이시는 이 오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럼, 오노 벤키치와 제니야 고헤에는 친분이 있었나요?"
"그렇죠. 벤키치와 젠고 씨는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다카라다는 세 장의 사진 패널 중 왼쪽 사진을 가리켰다.
"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벤키치, 오른쪽에 있는 큰 사람이 젠고 씨예요."
토시오는 벤키치보다 더 큰 제니야 고헤에의 사진을 보았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벤키치는 젠고 씨의 틀니를 만들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를 알면 알수록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고요. 특히 자신이 미국에서 구한 권총과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벤키치는 자신이 비밀리에 만든 지구본을 젠고에게 보여주기도 했어요. 벤키치는 젠고 씨이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실수로 지동설 따위를 입에 올리면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도 벤키치가 만들어 젠고 씨에게 선물했다는 원안경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젠고 씨는 벤키치의 지식에 의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니야 고헤에는 오노 벤키치의 후원자였다는 말씀이시군요?"
"그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벤키치의 지식을 빌리면서 약간의 금품이 오갔겠지만, 벤키치는 젠고 씨의 비호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벤키치의 가난을 본 젠고 씨는 쌀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벤키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젠고 씨는 거액의 재산을 모은 뒤에도 장작과 등잔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보통 거상이 되면 어처구니없는 유흥비, 쓸데없는 사치가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단성 있는 결단을 상훈으로 삼고 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벤키치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동안 물건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즐거움은 고양이와 원숭이를 키우는 것 정도였다고 하고요. 이런 두 사람의 성격에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죠?"
"제니야 고헤에는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확실히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원래 젠고 씨의 집은 가나자와 항구도시 미야노코시(宮腰), 지금의 카네이시(金石)에서 환전상과 간장업을 하고 있었어요. 안에이 2년, 젠고 씨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가독(家督)을 이었고요.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가업을 이어받아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어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서른 아홉이라고 하면 당시로서는 이미 한창 때는 진작에 지난 나이였을텐데..."
"그게 바로 젠고 씨의 비범한 점이죠. 그는 전당포에 있는 오래된 배를 개조해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에는 배를 새로 한 척 만들면 두 번의 항해로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를 계기로 젠고 씨는 해운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해운업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해난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출몰했죠. 하지만 수익은 엄청났어요. 젠고 씨의 배는 홋카이도의 해산물과 비료를 도호쿠로 운반하고 도호쿠의 목재와 호쿠리쿠의 쌀을 간사이로 운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간사이의 잡화를 싣는 등 운송 이익 외에도 많은 거래가 얽혀 있었죠. 상술에 능했던 젠고 씨는 순식간에 거액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젠고 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 가가번이었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거군요"
"가가번에서는 젠고씨에게 자꾸만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어요. 평범한 상인이었다면 두말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젠고 씨는 그렇지 않았어요. 기꺼이 돈을 바쳤어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도 젠고씨의 상훈 중 하나였습니다. 공납금에 대한 보답으로 번의 물자 수송용 배를 한 척 맡을 수 있었고, 젠고 씨의 배는 곧바로 가가번의 공식 수송선이 되어 백만 석의 문장, 가가 매화 그릇을 염색한 깃발을 내걸고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가가번의 집정관은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였는데, 그와 손을 잡은 젠고 재벌은 흔들림 없이 성장해 나갔죠."
"제니야 고헤에의 재산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네, 천석선이 열 척. 오백 석선이 열한 척. 오백석선이 십일척.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이백 척의 선주였고, 전국에 서른네 개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추정 자산은 삼백만 양이라고 하는데요."
"삼백만 양--"
"그렇다고 해도 감이 잡히지 않겠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을 훨씬 넘을 겁니다."
"수백억!"
마이코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과 3억 엔의 강도 사건이 시효가 지나기 전까지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젠고 씨는 오쿠무라 히데미와 함께 밀무역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다케시마를 중심으로 한 조선 근해 무역, 카라우타의 산탄(山丹) 무역, 사쓰난(薩南)열도에서는 대영국 무역, 북해에서는 대러시아 무역. 멀리 북아메리카에서 남쪽으로 태즈메이니아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고 합니다. 그 이면에는 벤키치의 원양 항해술, 천문학, 어학에 대한 조력이 있었을테고요. 또한, 젠고 씨는 다양한 과학 기계를 밀수입해 벤키치에게 사용법을 배웠을 겁니다. 덕분에 벤키치도 몰랐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지식이 더욱 풍부해졌을테고요."
"여러 가지 과학 기계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마이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패널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장해나가던 젠고 재벌은 정말 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봉건제 하의 재력은 정치적으로는 정말 무력했음을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죠 ......"
다카라다는 수염을 몇 번이고 빗어 넘기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덴포 14년, 젠고와 함께 번영했던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奥村秀実)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젠고 씨는 71세였어요.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였죠."
다카라다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니야 고헤에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했다.
"당시 가가번에는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라고 해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오쿠무라 히데미 사망 후 검은 하오리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어요. 검은 하오리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젠고씨의 번(藩) 공식 상인 지위를 박탈한 거였어요."
"제니야 고헤에는 번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젠고 씨는 어디까지나 상인일 뿐이었으니,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젠고씨가 좌절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이 다음에 정말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든요. 그 유명한 하북 매립공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레가 26km, 약 2천6백 헥타르나 되는 곳을 20년 계획으로 매립해서 논을 만들겠다는 거죠. 이 공사가 완료되면 가가 백만석에 수만 석이 더 추가될 것이었어요."
"일흔일곱 살에 20년 계획이라니…… 정말 이 사람의 깊이를 알 수 없군요."
"공사는 가에이 4년에 착공했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공사였어요. 게다가 매립으로 인해 생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한 어민들의 격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젠고씨의 가훈 세 번째는 '세인의 믿음을 얻아야 한다’였는데, 이 때 세인의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던 것이지요. 과거 천보 대기근 때에도 쌀 수탈과 타 지역 유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는데, 매립 공사 시기에는 현지 노동력보다 임금이 싼 이주 노동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심해져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북 투독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극물 투척 사건이라니, 하북에 독극물을 투척한 건가요?"
"네, 하북의 물고기만 죽으면 어민들의 반대 운동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셋째 아들 요가 독극물을 투척했다는 것입니다. 요가 석회에 냄새나는 물인 쿠사미즈, 기생충인 고나무시의 기름 등을 섞은 것을 몰래 하북에 투입했다고 했지요. 그 결과, 붕어, 고니 등이 죽어 떠올랐고, 이를 먹은 가마우지, 비둘기, 까마귀, 고양이와 개가 죽었고,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물고기를 먹은 십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가에이 5년, 젠고씨 가문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헤에 일가와 공사 관계자를 합해 51명이 감옥에 갇혔죠."
"하북에 독극물을 던지는 그런 무모한 일이 정말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하북은 원래 수질이 좋지 않은 곳입니다. 수초가 너무 많이 번식하면 물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왜 고헤에가 체포된 거죠?"
"가가번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젠고 씨를 마음껏 이용해, 말하자면 번 전체가 밀무역을 하고 있었죠. 그 밀무역이 막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그것이 표면화되어 막부의 추궁을 받게 되면 번 존폐와도 관련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번은 밀무역의 죄를 젠고 씨 한 명에게만 뒤집어씌워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하북의 집단 중독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젠고 씨는 번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 희생양이 된 겁니다."
"매립 공사는 중단되었고요."
"물론 그렇죠. 대체로 간척이라는 공사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같은 시기에 막부는 인바누마(印旛沼)의 간척에 착수했지만 이것도 실패했어요. 세 번째 실패였습니다.…….. 한편 막부에서는 젠고 씨의 밀무역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죠. 막부 내부에서도 대외무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대정봉환이 눈앞에 다가왔고요. 일일이 밀무역을 감시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거기까지 왔던 거죠."
"번에게 시대를 판단할 힘이 없었던 거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도 당시 상업 자본은 정치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오사카의 요도야 다쓰고로(淀屋辰五郎), 하마다번의 아이즈야하치(会津屋八) 우에몬(右衛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사건의 결말은?"
"제니야 고헤에는 체포된 지 석 달째 되는 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젠고는 80세였어요. 요와 그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지금도 십자가의 소나무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니야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고요. 이것이 젠고 재벌의 마지막이 되었죠. 벤키치가 51세 때였습니다."
다카라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노 벤키치는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마이코가 물었다.
"좋은 지인을 잃은 외로움은 누구보다 컸을겁니다. 사람을 피하는 성격은 점점 더 강해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일개 촌부로서 일생을 마감했어요. 한편, 카라쿠리 기우에몬의 다나카 히사시는 젠고 씨가 투옥된 해에 교토에 기공당(技巧堂)이라는 가게를 열었죠. 이후 차근차근 키워나가 마침내 긴자에 다나카 제조소를 개업했고요. 그게 오늘날 도시바의 기틀이 된 겁니다. 같은 천재였지만, 인간의 일생은 정말 명암이 엇갈리는 법이에요. 이것은 그저 운의 좋고 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츠루슈일록(鶴寿日録)에 따르면........"
다카라다의 장탄식을 멍하니 듣고 있던 마이코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츠루슈..…"
"츠루슈 일록. 아까 말씀 안 드렸나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 츠루슈일록이라는 건?
"벤키치의 일기의 일부가 남아 있어요. 그걸 츠루슈일록이라고 합니다."
"왜 츠루슈인가요?"
"벤기치 씨의 호가 츠루슈였거든요. 또 이치토(一東)라는 호도 사용한 적이 있어요 ......"
"츠루슈에, 이치토 ......"
오노 벤키치와 오나와에 이주한 마와리 사쿠조와의 인연은 이미 분명한 것 같다. 사쿠조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鶴寿堂(쓰루슈도)'라고 짓고 자신의 아들을 '東吉(도키치)'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연도, 암시도 아니다.
"오노 벤키치의 제자 중에 마와리 사쿠조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이코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벤키치의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데, 마와리 사쿠조 ...... 라는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 츠루슈일록은 벤키치의 일생을 기록한 일기인가요?"
"아뇨. 아까 말씀드렸던, 오쿠무라 히데미 씨가 병사했던 해인 덴포 14년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벤키치의 유언대로 사후에 소각되었는데, 이 기록만 우연히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볼 수 있나요?"
"복사한 것이라면 거기에 있습니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東視窮錄)'이 들어있던 같은 유리 케이스 안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카라다는 츠루슈일록의 사본을 꺼내 마이코 앞에 놓았다.
츠루슈일록은 '동시궁록'과 같은 정갈한 서체로 세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일상 기록이라 길지 않았다.

3일, 맑음 저녁에 복어국을 먹다
4일, 흐림. 베지 못하는 말 도면 그리기. 우타가 통풍을 일으켰다.
5일, 비, 도면 그리기를 계속.
6일,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7일, 맑음, 하루 종일 고민하다.
8일, 맑음, 도면은 진전이 없다.
9일, 맑음, 久右衛門(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森八の千歳, 일본 전통 과자)를 가져옴. 久右衛門(구우에몬)에게 일을 맡기고 계속 도면을 그리다.
10일, 맑음, 우타가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듬.
11일, 맑음, 도면 그리기를 계속하다…..

마이코는 열심히 츠루슈일록을 읽어 내려갔다. 다카라다 노인은 다른 방에서 다도 도구를 가져왔다.
"이 일록의 앞부분에 '무자마(無斬馬)'라고 되어 있는데, 무자마(無斬馬)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마이코는 다카라다 노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물었다.
"베이지 않은 말이란,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라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실물은 남아있지 않겠군요."
"네, 아쉽게도 실물은 남아있지 않아요. 하지만 어떤 장난감이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벤키치가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서적에 그 장난감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죠. 베이지 않는 말이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만들었다는, 베어도 목이 다시 연결되는 목을 가진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네요."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목?"
"이 말은 금속으로 만들어졌어요. 포도주 잔을 대면 안의 술을 다 마시죠. 장치는 놀라울 정도로 간단해요. 그냥 말의 중앙에 있는 관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겁니다. 그 후 날카로운 칼로 말의 목을 베는데, 칼은 말의 목을 완전히 관통해 아래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베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목은 제대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잔을 대면, 말은 다시 포도주를 다 마시고요."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2천 년 전이겠군요."
마이코는 놀란 듯 말했다.
"헤론은 증기기관, 압착기, 압착 펌프, 사이펀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죠. 동시에 많은 장치도 만들어 냈어요. 제단의 불로 춤추는 신상, 흐르는 물로 우는 새, 동전을 넣으면 일정한 성수가 흐르는 그릇,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판기의 원조겠지요."
"그럼, 베어도 떨어지지 않는 말의 목의 장치는 뭐죠?"
"원래 말의 목에는 잘리는 절삭점이 있어요, 말의 목은 세 개의 고리로 연결됩니다. 칼이 첫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칼이 지나갈 길을 만들지만 목은 두 번째, 세 번째 고리가 지탱합니다. 칼이 두 번째 고리를 통과할 때, 첫 번째 고리는 원래대로 제자리에 연결되고요. 이렇게 해서 칼이 완전히 목을 통과해도 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포도주가 지나가는 길의 개폐도 있어서 실제로 만들기는 아주 어려운 장치였습니다. 벤키치는 그 장치 제작에 도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벤키치는 구우에몬이라는 사람과 자주 만났는데,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예전에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카라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스즈키 구스에몬, 마에다 도사마모루(前田土佐守)의 직행(直行) 가신으로 30석 봉록 무사였습니다. 당시 30살을 갓 넘겼을 것입니다. 벤키치의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입니다. 벤키치는 직행의 대우를 받았고, 그의 중재로 출입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즈키 구스에몬은 벤키치의 학문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배우는 도중에, 봉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죠."
"가가번의 개혁 때문이었나요?"
"아니요,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입니다.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번에서 쫓겨났죠."
"그래서 구우에몬은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다른 몰락 무사와 비슷한 길을 갔겠지요."
마이코는 아쉬운 듯 츠루슈일록을 덮었다.
"그런데 최근에 벤키치에 대해 조사하러 이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마이코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어?"
다카라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요즘은 옛날로 갈수록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 가까운 일이라면 어제의 일도 잘 떠올릴 수 없어요.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로부터 최근에 오노 벤키치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나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네요. 물론 당신 같은 미인을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다카라다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틀니가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오노 벤키치 기념관을 나와서 젠고 유품관으로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품관은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마이코는 그리 아쉽지 않은 듯 말했다.
에그는 젠고 유품관을 나오자마자 고베의 보금자리인 혼류사 앞을 지나 그대로 해안으로 향했다.
마이코는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진눈깨비 길에 섰다. 검게 드리워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제니야 고헤에의 동상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일본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헤에는 손에 원안경을 들고 있다. 오노 벤키치가 최신의 지식과 뛰어난 기술로 만든 원안경일 것이다.
다카라다 노인은 두 사람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젠고 씨, 벤키치라고 불렀다.
고헤에가 팔십,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떠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시오는 격렬한 파도소리를 들었다. 

2021/07/17

THE 좀비스 - 중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중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좀비가 핵심인 단편들을 모아놓은 앤설러지 두 번째 권인데, 전에 읽었던 상권보다 별로입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야기에 좀비를 끼워넣었거나, 좀비가 왜 등장하는지도 모를 이야기가 많은 탓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끔 노력했지만,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고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도 많고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어요. 차라리 정통 좀비 아포칼립스물이라면 평작은 될 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권 남았는데,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톡홀름 증후군"

좀비 떼로 둘러쌓인 집에 갖힌 나는 아들과 닮아서 '빌리'라고 이름지은 좀비 관찰에 재미를 붙였다. 빌리는 이웃집 침입을 위해 판자를 뜯어내는 일에 골몰하는데...

제목 그대로 가해자인 좀비와 동질화되어, 좀비가 사람을 죽이는걸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감정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통해, '살아있는 것과 사는 건 다르다'는 걸 알려주는 작품. 그냥 버티기만 할 뿐, 이렇게 살아가는건 좀비와 다를게 없다는 거지요. 동질화된다는 측면에서는 전권의 "나처럼 죽어봐"와 조금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는 절박함이나 처절함은 다소 부족한 반면, 조금 더 설득력이 높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집을 좀비떼가 습격하는 장면 묘사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주인공 사고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더군요. 일반적으로는 총알이 딱 한 발 남을 때 까지 살아남아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거리로 뛰어들어 좀비가 되어 버리던가....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저런 상황들이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고 방식과 행동은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난극" 

페스트로부터 구해진 오버라머가우 마을 전통의, 10년에 한 번 진행되는 예수 수난극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위해, 좀비를 분장시켜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을 생각이었다. 마이어 신부는 이를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에 신의 저주와 함께 파국이 찾아오고 만다.

마이어 신부는 좀비도 영혼이 있어서, 인간이 그들을 잔혹하게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좀비에게 영혼은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니까요. 종교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여지도 없어요. 좀비를 연극 소품으로 잔혹하게 대하는 행동은 조금 거슬렸지만, 좀비들은 그동안 더 잔혹한 행동을 보여 왔으니 딱히 큰 문제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이게 문제라면 가축 도살이 더 큰 문제아닐까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마이어 신부의 행동은 도무지 공감할 수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좀비를 구해주려는 신부의 행동에 분노한 관객들이 신의 저주로 좀비가 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페스트 유행 당시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가 떠오릅니다. 페스트에서 안전했던 성에서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보이지만, 결국 성주에게 페스트가 전염된다는 결말이었는데, 페스트가 좀비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맥락이지요. 아니, 그보다도 못해요. 페스트는 어쨌건 공기로도 전염될 수 있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급작스럽게 사람들에게 퍼진다는건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종교를 끌어들인 전개는 무리수였을 뿐더러 새로움도 없고, 잔혹함도 덜합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점수를 줄 여지가 별로 없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름다운 것" 

테러로 희생된 러스티는 시체 소생 기술로 되살아났다. 정치인이 그의 희생을 선거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연설 당일, 러스티는 정치인 요구와는 다르게 죽음은 아프니, 삶을 즐기라는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죽은 사람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의 행태는 우리도 익히,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를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좀비로 비판한다는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되살아난 테러범과 희생자 모두가 정치인 생각과 전혀 다른 진심을 털어 놓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그들의 진심이 "죽기 전에 즐겨라!" 라니? 황당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좀비들이 이런저런 소품들에 환장한다는 설정도 기발했지만, 이 황당한 메시지 전달에 활용될 뿐이고요. 또 딱히 좀비가 등장할 필요도 없었어요. 유령이라던가, 빙의한 영혼이라던가, 뭐든 좋을 그런 이야기거든요. 진짜 아이디어가 아까왔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 

좀비들이 연극을 한다는 이야기로 공포 문학의 거장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좀비물에서 기대할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좀비들이 나름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특이했지만, 그들은 연극 외에 다른 목적이 없거든요. 식인 따위는 원하지도 않고요. 죽은 여배우가 섹스를 요구하는 장면이라던가, 사악한 제작자를 죽이는 장면 정도가 조금 섬찟했습니다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좀비들이 벌이는 연극으로 현재의 연극계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로 보는게 맞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다면 더 웃기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으니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시체의 길" 

신으로부터 이 땅에서 악을 몰아내라고 명 받은 총잡이 목사 제비디아는 보안관보가 체포한 악당 빌을 호송하기 위한 여정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괴물이 나온다는 '시체의 길'을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일행은 괴물이 된 양봉업자 기멧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기멧이 괴물이 된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납치했던 소녀가 죽은 뒤, 소녀 어머니가 저주한 것이지요. 그런데 저주로 죽기는 했지만, 기멧이 이내 벌통이 가슴 속에 위치한 괴물로 되살아났다는건 좀 이상하더군요. 이게 저주가 맞나요? 어차피 악당이었으니, 무적의 괴물이 되면 더 좋은거 아닌가 싶은데 말이지요. 

또 괴물의 설정도 죽은 자가 돌아온 것이지만, 벌 떼와 함께 이동하며, 초인적인 힘과 빠르기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인 좀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식인이 목적도 아니고요. 그래서 좀비물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크리쳐물에 가깝습니다. 악을 없애기 위해 악을 접하면 불타는 성서, 악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은총알 등의 설정이 곁들여진 것도 크리처물 설정일테고요. 이야기 전개도 고생 끝에 괴물을 처치하는 크리처물 그대로라 특별한건 없습니다.

그래도 제비디아 목사의 활약은 화끈합니다. 괴물의 잔혹함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덕분에 머리를 비우고 단순하게 읽는 킬링 타임 물로는 나름 적당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부 개척 시대를 무대로 악을 멸하는 총잡이 신부가 등장하는 크리쳐물이라는 점에서는 "프리스트"가 연상되더군요. "프리스트"는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도 되었던 만큼, 나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바비 콘로이, 살아 오다" 

바비 콘로이는 배우로서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서 맡은건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이라는 영화의 좀비역이었다. 톰 새비니가 해 준 좀비 분장을 한 바비는, 촬영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해리엇과 재회했다. 그녀는 결혼해서 아들과 함께 분장하고 영화에 참여 중이었다...

좀비가 주제이기는 한데 방향이 굉장히 독특했던 작품입니다. 좀비가 아니라, 기념비적인 좀비 영화 "시체들의 새벽"에서 좀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이야기거든요. 아 이런 발상, 아주 마음에 들어요. 좀비를 주제로 단편을 써와! 라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가이드에 맞춰서 첫사랑과 현재에 대한 달달하면서도 아련한 이야기를 써 온 셈이니까요.

하지만 행복한 해리엇 가족에게 바비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결말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바비는 해리엇 가족, 특히 그 아들에게는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되는, 좀비물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지금 이야기는 발상에 비해 평이하고, 조금 뻔한 그런 이야기라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들" 

칼라는 메레디스를 찾아와 심장마비로 죽은 남편 아서의 소생을 부탁했다. 그녀가 바람피운걸 사과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되살려보니 아서는 칼라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죽었던 것이었다. 살해된 좀비는 살인범을 죽이는게 본능으로, 칼라는 죄책감때문에 자살할 생각이었다...

작가의 인기 캐릭터라는 시체 소생 전문가 메레디스가 등장하는 작품. 살인자가 죄책감으로 피해자에게 죽기를 원한다는 설정과 시체 소생에 대한 이런저런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서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걸 알고 난 후, 칼라가 죽는 결말까지는 좀 시시합니다. 예상대로의 이야기였거든요. 뭔가 좀 의외성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은 2.5점은 충분합니다.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농학자 닥 프리먼은 좀비 떼를 피해 콜로니를 만들고 생존자들의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콜로니는 안전했지만, 생산과 성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출산은 금지되어 있었다. 아이가 생긴 톰 부부는 낙태를 지시받고, 콜로니 외부 클리닉으로 수술을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좀비 때문에 격리된 폐쇄 공간은 생산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출산까지 관리한다는 설정은 꽤 설득력있었습니다. 낙태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부 수술실로 향하는 아이러니도 기발했고요. 무엇보다도 낙태한 태아가 살아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들은 생명이 아니라는 시각은 아주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좀비가 된 낙태 반대주의자를 날려버리는 결말을 더하니, 저자가 낙태를 찬성한다는건 잘 알겠더라고요. 

내용도 신선했고, 여러가지 볼 거리가 많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서두에 소개된 저자가 주제를 찾은 방법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동안의 좀비 주체 작품이 극단적 섹스 장면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며,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어진 적이 없는 터부를 고민해보다가 정치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하네요.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정치 이슈가 '낙태' 였다면서요. 우리나라도 따지면 '부동산'을 주제로 좀비물을 쓴 격이겠지요? 아 이거 재미있겠네요.

"죽은 아이" 

동네 깡패 루크 브래들리의 무리에 가입하고 싶었던 나에게 브래들리는 조건을 내걸었다. 살아있는 아이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공 소년이 희생양인 좀비 아이를 악으로부터 구해주고 구원받는다는 내용의 작품.

주인공 설정과 분위기 등은 모두 스티븐 킹의 "그것"이나 "스탠 바이 미"를 연상케합니다. 특히나 시골 마을에서 또래 깡패와 맞서 싸우는 아이의 성장기이며, 아이 시체가 중요한 소재라는건 "스탠 바이 미"의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아류작이면서도 "스탠 바이 미" 보다 훨씬 못하다는 겁니다. 주인공과 동생 앨버트는 좀비 시체를 상자에서 꺼내준 정도 밖에 한 게 없고, 이들의 여정도 하룻밤 나들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에요. 뭔가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과정이지요. 이 과정도 환상 소설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 고생스러움도 전혀 느낄 수 없었고요. 단편 분량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브래들리의 패악질만큼의 설명은 해 주었어야 해요. 루크 브래들리의 깡패짓 말고는 드라마라고 부를 내용도 없고요. 게다가 아이 시체가 좀비일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냥 시체여도 무방한, 그런 이야기거든요.

좀비 소재 단편을 의뢰받고 "스탠 바이 미"에 좀비를 우겨넣은 만들어낸, 졸속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졸작. 별점은 1점입니다.

"좀비들과 함께라면" 

중 2병에 걸린 소녀의 성장기랄까요. 서정적인 1인칭 묘사는 괜찮았고, 좀비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 현실은 가혹하다는 메시지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직장 생활도 20년차가 넘은 아저씨에게는 별로 와 닿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가혹하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리고 현실은 최소한 좀비보다는 낫습니다. 아울러 아무리 봐도 좀비물로 보기는 힘드네요. 작품에서 좀비가 진짜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만도 못한"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방탕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어느날 마약과 술에 취한 채로 이상한 클럽을 찾았다. 좀비를 학대하고 죽이는 스너프 필름을 상영하는 곳이었다. 클럽에서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은 일행이었던 제인을 죽이고 마는데...

변호사인 저자가 쓴, 브렛 이스턴 앨리스 소설의 패러디라는 작품. 원작을 모르니 뭘 어떻게 패러디했는지 모르겠는데, 내용도 잘 모르겠어요. 젊은이들의 타락과 방황을 묘사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게 좀비물인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좀비인건가요? 설령 그들이 좀비라 해도 그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괜히 뭔가 있어보이게끔 한 묘사들도, 결국은 별다른 알맹이는 없고요.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내용이 뭔지 이해할 수 없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미트하우스 맨" 

시체 취급자들이 시체를 조종해서 온갖 일을 하는 시대. 유능한 시체 취급자 트래거는 사랑을 찾아 이런 저런 곳을 전전하게 되는데...

"왕좌의 게임"의 작가 조지 R.R 마틴의 작품. 사랑없는, 자극만이 넘쳐나는 미래 세계에서 사랑을 찾아 떠도는 트래거의 모습은 "쿄시로 2030"의 쿄시로가 살짝 연상되더군요. 순정으로 접근하던 트래거가 여자에게 배신당한 뒤, 뒷골목 깡패나 하는 시체 검투 경기에 참여하게 되는건 곽철용의 명대사 "니가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가 떠올라서 좀 웃겼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며, 별다른 드라마도 없는 탓입니다. 요약하면 "사랑을 믿었던 트래거가 배신당한 뒤, 돈과 향락을 택했다"는 지극히 뻔하고 뻔한 이야기가 전부에요. 작가가 쓸 때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고 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왠만한 단편보다는 긴 분량을 갖춘만큼, 소개되는 방대한 설정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특히 제목의 '미트하우스' 관련 설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체를 살아있는 것 처럼 조종해서 성욕을 채워주는 곳인데, 시체 취급자가 아니라 피드백 회로를 통해 조종되고 있다는 등 이런저런 디테일이 빼어나거든요. 시체 취급자 (스트레커)와 관련된 설정들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야기가 별로라면, 좋은 설정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6/04

사형에 이르는 병 - 구시키 리우 / 현정수 : 별점 2.5점

사형에 이르는 병 - 6점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에이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케이 마사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승승장구했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전락했다. 그래서 지금은 3류 대학교에 겨우 입학하여 아웃사이더로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린 시절 단골 빵집 주인 하이무라 야마토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9명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였다. 마사야와의 면회에서 그는 9번째 범행만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무라 야마토의 과거, 그리고 범행에 대해 조사에 나선 마사야는 어머니 에리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녀는 야마토와 같은 학대 아동으로 어린 시절 한 때. 같은 양모 밑에 있었었다. 그리고 결국 변해가는 자신과 함께 충격적 사실에 마주하게 되는데...

천재 연쇄 살인범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살인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가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천재 범죄자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감옥 안에 갖혀 있는 천재 범죄자는 하니발 렉터라는 거물이 수십년 전에 이미 보여줬던 설정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에는 주인공과의 두뇌 대결이나, 주인공을 도와 또 다른 범죄를 막는 다른 천재 범죄자 작품들과는 분명히 차별화 되는 점이 있습니다. 천재 범죄자 하이무라 야마토의 진짜 목적이 가케이 마사야를 조종하는데 있었다는 반전입니다. 이 반전이 몇 가지 의문들, 왜 마사야에게 편지를 보냈는지? 9번째 범행인 네즈 가오루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등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이인 것 처럼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흥미로운 전개이지만, 이는 마사야의 모친 에리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리고 야마토가 사이코패스이며 자신의 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마사야를 골랐다는게 밝혀집니다. 네즈 가오루를 살해한 진범으로 의심되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통해서요. 즉, 마사야는 수많은 야마토의 조종 희생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야마 이츠키를 우연히 만나게 된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그 역시 희생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이무라 야마토의 목적을 사이코패스에 대해 비교적 충실한 사례와 근거들로 뒷받침하면서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작가가 저도 얼마전에 읽었었던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많이 참조한 듯 싶더군요. 그 책에 나왔던 사이코패스의 특징 - '강력한 통제력'과 '빼어난 거짓말 솜씨',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능력' - 이 이야기 안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아울러 사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 야마토가 이츠키를 조종하기 위해 '3초 안에 대답할 것' 등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9번째 네즈 가오루 사건과 연결시키는 과정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어쨌건 9번째 범행도 야마토가 저질렀다는것 뿐만 아니라, 왜 그 사건이 다른 사건과 범행 수법이 사뭇 달랐는지, 왜 네즈 가오루가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는지, 왜 이츠키가 계속 그 사건과 엮였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건 반전이 있는 일본 범죄 스릴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은 큽니다. 전능한 천재 사이코패스 야마토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해 왔던 쿨한 천재 악당 그대로인 탓입니다. 그 외 캐릭터도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사람 대하는게 서투른 마사야가 여러 증인들과 만나 인터뷰를 서슴없이 능숙하게 진행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그 외에 시점을 간혹 바꿔가며 독자에게 혼돈을 준다던가, 불필요하게 과장된 잔혹한 범죄 묘사 등은 그야말로 일본 범죄 스릴러물의 단점만 모아서 집대성한 느낌이었습니다.

야마토의 목적을 드러내는 전개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사야가 진행하는 야마토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의 경우,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9번째 살인을 야마토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조사라면, 야마토의 과거는 조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소설로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던 셈이지요. 

야마토의 피해자이자 사건 증인 중 한명이었던 가나야마 이츠키를 9번째 범행 용의자라고 단정짓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마사야와 엮이기는 했지만, 다른 근거는 하나도 없어서 억지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도 마사야의 친부가 누구인지, 가나야마 이츠키는 어떤 인물인지를 조사하는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마사야가 야마토의 아들인지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됐고, 가나야마 이츠키도 그냥 만나면 됐으니까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억지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리 일본 검찰이 기소한 범죄를 유죄로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3류 대학 법대생도 금방 눈치챌 정도로 이상한 사건을 엮어서 야마토의 범죄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긴, 애초에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찐따 가케이 마사야가 중학교 시절 약간의 접점밖에 없었던 야마토의 부탁으로 조사에 나선다는 것 부터가 억지스러웠으니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마지막에 마사야와 사귀게 된 아카리도 야마토에게 조종받고 있었다는 에필로그도 과했습니다. 사족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녀는 야마토가 납치했지만 운 좋게 살아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소녀일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야마토에게 조언을 얻으며 조종당하게 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걸작 잔혹 서술 트릭 작품인 "살육에 이르는 병"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나름의 독특한 맛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범죄 스릴러가 취향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11/27

골든 슬럼버 - 이사카 고타로 / 김소영 : 별점 2.5점

골든 슬럼버 - 6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택배 기사로 일하다가 아이돌 린카를 구해줘 유명세를 탔던 아오야기 마사하루는 오랫만에 대학 친구 모리타를 만났다. 그러나 모리타가 준 음료수를 먹고 잠들어 버린 뒤, 모리타는 도망치라며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총리 암살과 관련된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말이었다. 반은 억지로 도주를 택한 아오야기는 경찰에 쫓기며, 총리 암살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썼다는걸 알게 되는데....

이사카 고타로가 쓴 서스펜스 스릴러로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2009년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1위 등 차지했으며, 여러 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있지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영화화되기도 했었고요. 그동안 두께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지만, "남은 날은 전부 휴가"가 재미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반인이 거대 조직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도주하는, 이른바 "도망자" 장르물에 속하는데 전형적인 이쪽 장르 작품들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케일입니다. 무려 일본 총리를 암살했다는 누명이니 아내를 살해했다는건 비교할 수도 없지요. 누명을 씌우려는 조작도 증거를 조작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매스컴을 활용하는 수준입니다. 작 중에서는 '이미지' 구축이라고 언급되는, 아오야기가 범죄 성향이 있었다는걸 조작해서 드러내는 이 매스컴 활용 과정이 특히 재미난데 우선 아오야기에게 치한 누명을 씌운 뒤 도주하게 만드는 걸로 시작합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 증언이 이어지고요. 그리고 아오야기가 저지르지도 않았던 패밀리 레스토랑 난동을 조작하고, 음험해 보이는 사진을 골라 매스컴에 공개하는 등으로 범죄자 이미지를 덧 씌웁니다. 이는 과거 영웅 이미지에 대한 반동으로 더 큰 충격을 불러 일으키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만듭니다.
총리 암살 누명을 씌우기 위한 공작도 여성에게 호감을 가진 척 연기를 시켜 RC 헬리콥터를 구입하게 만드는 등 디테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 덕분에 설득력도 높고요.

두 번째 차이점은 진범을 잡거나, 흑막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흑막은 경찰보다도 위에 있는 거대 조직임이 암시될 뿐입니다. 결말도 아오야기가 겨우 도주하고, 성형 수술을 해서 모습을 감추는게 전부에요. 허무하고 시시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인 결말이기는 합니다. 경찰까지 좌지우지하는 세력 앞에서 누명을 쓰고 도주하는 평범한 일반인이 할 수 있는건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차이점만 있는건 아닙니다.이 쪽 장르물의 재미 요소, 장점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습니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도주하는 과정 묘사부터 빼어납니다. 단지 도망만 다니는게 아니라, 아오야기가 겪었던 경험들, 아오야기가 맺었던 여러가지 관계가 도주를 돕는걸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요하게 등장하는건 대학 시절 친구, 연인과의 경험과 추억입니다. 친구 모리타에게 배웠던 '밭다리 후리기'를 작중 내내 잘 활용하며, 대학 시절 알았던 버려진 차를 도주에 활용하고 있거든요. 과거 아르바이트 했던 도도로키 연화의 도움을 받아 불꽃놀이를 터트려 도주에 성공한다는 클라이막스도 마찬가지고요. 아오야기가 택배 기사로 일했던 시절 익혔던 정보를 이용한 도주극도 꽤나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인간관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택배 회사 선배 '록' 이와사키 에이치로, 예전에 도와주었던 아이돌 린카 및 옛 연인 하루코 등이 적절하게 등장해서, 적절한 도움을 주거든요. 

여러가지 디테일들도 돋보입니다. 하루코가 아오야기는 범인이 아님을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아오야기는 밥풀을 남기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아오야기가 범행 전 먹었다는 돈가스 집 주인이 TV에 나와서 "밥풀 하나 안 남기고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니까!" 라고 말하는걸 보는 장면이지요.
그 외에도 비틀즈의 'Help'를 부르는 노숙자를 도와준 뒤, 그 노숙자가 나중에 아오야기에게 도움을 주는 등 디테일은 아주 좋았습니다. 

대학 시절 추억과 여러가지 경험들, 아오야기의 인간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사건에 휘말려 도주하는 과정과 엮어 교차시키는 구성도 일품입니다. 등장인물과 시점을 달리하는 복잡한 교차 전개에 능한 작가 특징이 잘 살아있거든요. 제목처럼 '골든 슬럼버'라는 곡을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는 묘사들도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성형 수술로 도주에 성공한 아오야기에게 하루코가 딸을 통해 "참 잘했어요" 라는 최고급 칭찬을 남기는 장면, 부모님에게 비난같은 안부 편지를 보내는 장면도 마음에 드네요. 승리는 하지 못했어도 최소한 살아남기는 했으니까요. 맞아요. 죽어 천국보다는 살아 지옥이 낫습니다. 일단 살고 봐야죠. 나중에는 신분 세탁에 성공해 르포라이터가 되는 듯 하니 다행입니다. 두 장면 모두 앞서 설명된 복선이 적절하게 사용되는 등 디테일도 여전했고요.

그러나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해진다는 단점은 어쩔 수가 없군요. 앞서 말씀드렸듯 스케일이 큰 탓에 아오야기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오야기가 이 모든게 누명이며 조작되었다는걸 증명할 증거도 없고요. 그냥 도주만 이어나갈 뿐입니다.

도주 역시 초, 중반부까지 아오야기 혼자 이어나갈 때와 비교하면, 연쇄 살인마 미우라가 도와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영 이상해집니다. 우선 연쇄 살인마가 아오야기를 도와줄 이유가 도무지 설명되지 않아요. 단지 경찰, 공권력이 싫었다 치더라도, 도쿄로 이송되던 아오야기를 차로 들이받아 탈출시킬 정도로 도와줄 이유는 없잖아요? 본인도 생명과 체포당할 각오를 해야 벌일 수 있는 행동인데 말이지요. 미우라를 통해 자기 모습으로 성형 수술한 가짜가 있다는걸 알게 되고, 그 의사에게 성형 수술을 받게 된다는 결말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이었어요. 한 마디로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미우라' 카드를 내미는 식인데, 정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다른 도주 과정도 뒤로 가면 갈 수록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부지 어딘가에 있는 버려진 차의 존재가 대표적이지요. 거의 10여년 버려졌던 차가 배터리 교체만으로 움직일 거라는건 솔직히 말이 안됩니다. 이럴 거라면 택배 기사 시절 자동차 정비를 어느정도 배워서, 그 기술로 차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하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경찰도 딱히 하는게 없어서 도주 과정의 긴박감이 잘 살아나지 못합니다. 시민의 편이 아니라 흑막의 편임을 강조하는 무자비한 체포 과정 묘사만 두드러질 뿐이에요. 아오야기가 미우라 도움으로 대포폰을 확보하고, 폐차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경찰이 추적하지 못한다는 것도 좀 어이가 없었고요. 앞서 뭔가 두뇌파인 듯 등장했던 경찰 과장 사사키가 실상 하는게 없는 탓도 큽니다. 시큐리티 포드를 이용한 정보 수집도 거창한 소개에 비하면 정작 하는건 별로 없고요.

그리고 아오야기가 보이는 행동들도 많이 답답했습니다. 미우라가 말한대로 자기 모습으로 성형 수술한 가짜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해결책으로 생각한게 방송을 통해 직접 이야기를 하는 정도라는건 순진함이 도가 지나쳐요.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 흑막이 너무 거대해서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건 별로 없긴 합니다만, 그의 말을 누가 믿어줄걸로 생각한다는게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더라고요. 무슨 말을 해 봤자 '이미지'를 덧씌워 가공하는건 일도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도 아오야기에게는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경찰이 말한대로, 범인이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뻔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내지라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주극, 스릴러로서 기본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서 감점합니다, 제가 읽은 작품들 중에서도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네요. 그래도 엔터테인먼트로는 아주 우수한 만큼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