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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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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3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4) 최선을 다해 못 만들다.

추리소설과 장르문학의 세계에는 맛있는 음식과 요리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사건의 무대가 되는 저택의 만찬, 탐정이 즐겨 먹는 단골 메뉴,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음료와 간식까지, 음식은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인상적으로 쓰이지요. 그런데 의외로 맛없는 음식도 꽤 많이 등장합니다.

대개는 그냥 못 만든 음식입니다.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가 차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 “이보다 더 맛없을 수 없는 카레라이스를 먹었다”고 하는 것처럼요. 정성 없이 대충 만들어져 아무런 흥미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음식들입니다. 현실에서도 한 번쯤은 만나 봤을 법한,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들이지요.

하지만 작중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의 처지를 보여 주는 경우입니다. 예전에 소개해 드렸던 메그레 경감 시리즈인 "생폴리앵에 지다"의 죄네가 먹는 소시지 빵이 대표적이지요. 그 빵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죄네의 궁상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소품이었습니다.

마거릿 애커우드의 귀족 영애 시리즈 중 한 권인 "야간 열차 살인 사건"에 등장하는 하숙집 요리도 비슷합니다. 귀족 영애 프란실르의 의뢰로 용의자가 살고 있는 하숙집에 잠입한 탐정 버트가 마주하는 식사인데, 하숙집이 얼마나 엉망이고 주인이 얼마나 비양심적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지요.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닦은 적 없어 보이는 식탁,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는 더러운 식기, 그리고 형편없는 식사까지. 그런데도 나름대로 코스 요리라는 점이 놀랍기만 합니다. 수프는 거의 꿀꿀이죽 수준이고, 말고기로 의심되는 육즙과 지방이 엉겨 있는 납작한 구운 고기와 총알만큼 딱딱한 감자, 밀가루와 기름 범벅인 구스베리 푸딩, 마지막은 찻잎 세 개로 우려 낸 뜨거운 물 순서입니다. 식사 후 버트가 침대에 누워 1차 대전 전장이 더 편했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런 음식들은 말하자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맛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인물의 처지와 공간의 수준을 보여 주는 데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례도 있습니다. 단순히 못 만든 음식이 아니라,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맛없는 음식 말입니다. 바로 아즈마 나오미의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3작 "사라진 소년"에 등장하는 라면집 "현화원"의 라면입니다.

이 라면은 악명이 대단합니다. 택시 운전사가 “그 라면집 정말 별로예요! 손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정말 맛이 없어요!”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주인공이 그래도 가겠다고 하자 원통하다는 듯 입술까지 깨문다는 묘사에서는, 단순한 평판을 넘어 거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감정마저 느껴집니다. 주인공이 주문한 냉라면을 한 입 먹고 내린 평가도 압권입니다. 가게 주인의 배짱에 감탄하면서, 이런 라면을 먹이고도 돈을 받는다니 어지간히 대담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지요. 식욕이 지평선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표현까지 나오니, 얼마나 맛이 없는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삿포로 스스키노를 무대로 한 작품인데도 삿포로 라면의 대명사인 미소 라멘이 아니라 다른 라면처럼 보인다는 점도 묘하게 눈길을 끕니다. 아무리 엉망인 육수라도 어느 정도 맛을 보장하는 미소 라멘이 아닌데다가, 심지어 맛까지 없다니 황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라면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형편없는 음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최선을 다해 못 만든 라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싸구려 하숙집 음식이나 휴게소 카레라이스가 무성의함의 산물이라면, "현화원"의 라면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인공은 현화원 주인의 도움으로 실종된 아이가 다니던 중학교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고, 나름대로 실마리를 잡지만 결국 놓쳐 버립니다. 낙심한 채 새벽 거리를 헤매다가 현화원을 다시 찾는데, 여기서 비로소 "현화원" 아저씨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는 밤 10시까지 가게를 열어 놓고도 새벽 6시부터 다시 라면 준비를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육수도 돼지뼈 국물과 닭뼈 국물을 섞는 블렌드를 쓰고, 가게만의 비밀 재료까지 있다고 강조하지요. “어쨌든 라면은 국물 맛으로 승부가 나니까, 시판되는 육수를 사용하면서 프로라고 말할 순 없지.”라는 말까지 합니다. 심지어 지방의 단맛을 살리는 게 아주 어렵다며 직접 만든 차슈를 주인공에게 잘라 먹여 주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것 역시 맛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웃지 않을 수가 없지만, 아저씨의 장인정신과 도전정신에는 오히려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 정도면 안자이 미즈마루의 “최선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에 대응하는 “최선을 다해 못 만든 라면”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음식들 역시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주역은 아닙니다. 주인공의 좌절감을 드러내거나, 기묘한 유머를 만들어 내거나, 싸구려 하숙집의 수준을 보여 주는 보조적인 장치에 가깝지요. 제가 아는 한, 이야기의 핵심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한 맛없는 음식은 "전쟁터의 요리사들"에 나오는 분말 달걀 스크램블드에그가 거의 유일합니다. 말 그대로 군대 배급품인 분말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드에그로 봉지를 뜯어 거대한 볼에 가루를 쏟아 넣고, 물을 더해 주걱으로 섞은 뒤 뜨거운 트레이에 부어 만드는 음식이지요. 문제는 그 맛과 질감입니다. 스펀지를 씹는 느낌인데다 기름 냄새 비슷한 악취가 나고, 배에 유난히 가스가 찬다고 합니다. 전쟁터라면 웬만한 음식은 다 감사히 먹게 될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라니 대체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이 단지 맛없기만 했다면 이야기의 주역까지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요리가 핵심이 되는 이유는, 보급된 분말 달걀 수십 상자가 창고에서 사라진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목적은 보급 담당 장교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었지만, 주인공을 비롯한 몇몇 인물은 병사들 중 누군가가 그것을 먹지 않기 위해 훔쳐 갔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그만큼 맛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또 그 추리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렇게 보면 맛없는 음식도 충분히 이야기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읽다 보면 의외로 꽤 흥미롭기도 하고요. 전에 소개드렸던 '반전을 차린 식사' 속 요리들도 마찬가지지요.

현실에서도 우리는 맛없는 음식 이야기를 종종 재미삼아 나눕니다. 누구네 식당의 형편없는 반찬이 어떻다, 어디서 먹은 음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은근히 오래 가니까요. 게다가 작가들의 현란한 묘사까지 더해지면, 이상하게도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까지 생깁니다. 지금은 미식과 탐식이 유행하는 시대이지만, 언젠가는 괴식이나 맛없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장르문학 속에서는, 맛없는 음식 역시 이미 자기만의 자리를 꽤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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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25/08/09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구수영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 단편의 고수라는 작가의 단편집, 제74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했으며, 제2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까지 수상하며 2관왕의 영예를 누린 책입니다. 

"매미 돌아오다"부터 "서브사하라의 파리"까지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곤충을 관찰하며 다니는 에리사와 센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단편별로 특정 곤충이 주요 소재가 되는 일상계 추리 연작물입니다. 곤충과 생물학, 생태학과 같은 과학 지식이 추리와 결합된게 특징으로, 사건의 단서 배치나 해결 방식도 정교합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시되고요. 

"반딧불이 계획"이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과학 지식과 결합된 추리의 완성도가 뛰어나며 결말의 반전도 좋기 때문입니다 . "염낭거미"는 현실적인 일상계 미스터리로 완성도가 높고, "매미 돌아오다"는 매미라는 소재와 함께 잔잔하게 풀어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이고요. "저 너머의 딱정벌레"와 "서브사하라의 파리"도 나쁘지는 않은데, 앞선 세 작품보다는 전개나 결말이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관왕을 괜히 탄건 아니네요.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한 작품을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매미 돌아오다

헤치마는 16년 전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방문했던 산골 마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쓰루미야 교수와 에리사와 신에게 16년전 과거 자신이 목격했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6년 전 목격한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풀어내는 전형적인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당시 헤치마가 보았던 유령은 사실 실종된 소녀 오에 미키의 친구였습니다. 미키는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신의 연못’에서 수영을 한 뒤 실종되었고, 이를 부추겼던 친구가 죄책감 때문에 여성 출입이 금지된 신사에 몰래 들어갔던 겁니다. 자기를 대신 벌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요. 헤치마가 본 건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사에서 노숙 중이던 자원봉사자 이와쿠라가 사정을 눈치채고 그녀를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 준 덕분에 일종의 유령처럼 기억에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쓰루미야 교수의 글을 통해 그녀가 '유령'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에리사와의 추리가 맞았음이 확인되며 인상 깊은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핵심 인물들이 16년이 지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다시 모인다는 설정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장소에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능력을 지닌 에리사와가 우연히 함께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죽은 이를 기리는 ‘매미 공양’이라는 마을 풍습과 매미를 먹기 위해 숲을 찾은 쓰루미야 교수의 행위, 그리고 그날이 오에 미키의 17주기라는 상황이 잘 맞물려 있어서 설득력을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일상계답게 트릭이나 수수께끼 풀이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리는 합리적이고 과거 사건과 현재의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매미라는 소재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미스터리를 선호하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염낭거미

중학생 다이라 마치코는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사고는 어머니가 집에서 쓰러져 구급차가 출동한 직후에 일어났다. 그런데 마치코가 하교 후 곧장 집에 왔다면,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도 20분 넘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사고가 난 방향도 이상했다. 마치코가 그쪽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다.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트리고 도주하다가 사고가 났던 것일까?

주어진 상황만 놓고 본다면,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죄책감에 도망치다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상은 그 반대입니다. 어머니가 남자를 집에 들이고 있어서, 마치코는 하교 후 집에 곧장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뒤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마치코는, 어머니와 함께 있던 남자가 범인인게 분명하기에 그 남자의 차를 막기 위해 도로로 뛰어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처럼 느껴지는 설득력 있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일상 속 사건을 다룬 본격 추리물로서 손색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앞서 구급차가 도로 공사 때문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등 단서들은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다만, 제목에 등장하는 ‘염낭거미’와 작품 중에 언급되는 ‘고추잠자리’는 이야기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연작 설정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가져온 느낌이에요. 에리사와가 사건 해결자로 등장하는 설정도 다소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연작 중 한 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본격물 스타일의 구성은 좋은 만큼,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읽어볼 만합니다.


저 너머의 딱정벌레

에리사와는 지인 마루에가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랍인 투숙객 와그디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 와그디가 절벽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에리사와는 와그디의 신앙과 유품을 단서로 진상을 추리해낸다.

와그디는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기 위해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스카라베 장식 속에 숨겨진 나침반을 지니고 있었고요. 그런데 발견된 유품의 나침반은 고장 나 있었습니다. 와그디가 나침반을 몸에서 뗀 건 단 두 번, 목욕을 할 때와 낮에 급류타기를 했을 때 뿐입니다. 그런데 나침반이 고장 난 시점은 기도 전이었습니다. 즉, 범인은 급류타기 담당 직원인 가키모토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지요. 가키모토는 와그디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 장난을 쳤는데, 이를 알고 분노한 와그디가 다툼 끝에 가키모토를 죽인 줄 알고 자살을 선택한게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리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추리 전개는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키모토의 편견을 아르바이트생 사에키의 입을 통해 드러내며, 독자가 사에키를 진범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흐름도 나쁘지 않고요.

그러나 여러모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키모토가 스카라베 안에 나침반이 들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조차 몰랐던 정보인데 말이지요. 또 나침반을 고장 내는 방법이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일반인 입장에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실행하기에는 손도 많이가고 어리석은 장난이라 생각되고요. 스카라베가 쇠똥구리라면서 이야기 속에 곤충을 끌어들이는 방식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집니다.

반딧불이 계획

과학잡지 아피에의 편집장 사이토는 5년 전 연락이 끊긴 기고자 가이코에 대한 편지를 받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가이코를 따르던 학생 밧타의 도움으로, 사이토는 가이코가 그곳에서 '반딧불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반딧불이 계획'은 논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던 마을 풍경을 되살리는 계획이었다. 사이토는 가이코 집에서 숨겨진 네거티브 필름을 찾아 인화했고, 사진에서 최근 사망한 도토 이과대학 오사카베 교수를 확인했다.

에리사와 신 대신 사이토의 취재(?) 및 추리가 펼쳐집니다. 사이토는 남겨진 단서들을 통해 오사카베 교수가 유전자 조작으로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물고기를 만들었다는걸 알아냅니다. 이 사실이 가이코에게 발각되었고, 교수는 책임감과 압박 끝에 자살을 택했으며 가이코는 교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달랐습니다. 교수는 자살 직전 가이코를 살해했고, 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위령비 아래에 시신을 묻었고요. 죽기 전 유언처럼 “유령비에 묻어 달라”고 했던건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이토도 이 진상을 추리해냈지만 앞서의 이야기를 꾸며낸건 가이코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밧타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밧타 역시 빼어난 추리력으로 진상을 깨닫고 이 사실을 사이토에게 알리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밧타가 어린 시절의 에리사와 센이였다는게 밝혀지며 또다른 놀라움을 독자에게 안겨주고요.

놀라운 진상과 반전이 이어지는 추리적인 구조도 좋지만, 과학적인 소재도 이야기에 잘 녹아들고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입니다. 원래 교수가 만든 물고기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루시페린이라는 발광물질을 외부에서 받아들여야 빛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으로 흘러든 물고기들은 빛을 냈지요. 이건 논에 루시페린을 지닌 생물이 살고 있었고, 물고기가 그것을 섭취해 빛을 내게 되었다는 뜻이며, 가이코가 추진한 ‘반딧불이 계획’이 성공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 설정과 플롯이 정교하게 연결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작물로서의 설정과 생물학적, 과학적 소재에 추리가 잘 결합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물고기가 빛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싶네요.

서브사하라의 파리

대학 동창인 의사 에구치와 오랜만에 만난 에리사와는, 에구치가 체체 파리 번데기를 일본으로 반입한 이유를 추리해내는데... 

체체 파리 수면병은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는 풍토병입니다. 문제는 전염병이 아니라 감염된 파리를 통해서만 퍼집니다. 그래서 체체 파리가 서식하지 않는 선진국은 치료법 개발에 관심조차 갖지 않지요. 그런데 에구치가 사랑했던 아야나가 수면병에 걸려 죽자, 에구치는 이에 분노해서 체체 파리의 번데기를 일본으로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체체 파리의 번데기, 유충에는 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이 없습니다. 성충이 감염자의 피를 빨아야만 기생충을 얻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기발한 트릭은 에구치가 수면병에 걸린 상태로 귀국했다는 겁니다. 에구치는 번데기를 부화시킨 후, 자신의 피를 빨게하여 일본에 수면병을 퍼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렇게 생물학을 이용한 테러 계획은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리사와에 계획을 접는 결말은 다소 허무했습니다. 제 아무리 테러를 벌였다 한들, 겨울이 있는 일본에서 수면병이 고착화되는건 불가능했다는 점 등 계획도 상세하게 뜯어보면 어설픈 점이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강한 동기와 설정은 좋았지만, 마무리는 약했습니다.

2025/05/18

시계 도둑과 악인들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시계 도둑과 악인들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방주", "십계"로 유명한 신예작가 유키 하루오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집. 전직 도둑 하스노가 탐정역을 맡고, 그의 동료로 화가 이구치가 등장하는 다이쇼 시대 무대의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 작품은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연결되어 있어서 느슨한 연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집의 가장 큰 장점은 기발한 트릭과 추리 구조에 있습니다. 불가능 범죄로 보였던 사건이 논리적으로 해결되는데, 이를 위한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말 그대로 '정통파 추리물'인 셈이지요. 유괴, 밀실 살인, 연쇄살인, 보석 도난, 일상계스러운 편지에 얽힌 과거의 비밀 등 사건의 종류도 다양해서 흥미를 더해주며, 다이쇼 시대의 분위기를 잘 살린 묘사, 인물 간의 대화들도 볼거리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하스노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엘리트 출신의 전직 도둑으로, 굉장히 독특한 사고 방식을 갖춘 천재 탐정이라는 비현실적인 인물을 묘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편 전반에 걸쳐 범인의 동기가 전반적으로 약한 탓에, 와이더닛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이 눈에 띄며, 일부 트릭 역시 과정은 흥미로우나 실행 가능성이나 현실성 면에서 허술함이 느껴지고요. 또한 장황한 묘사로 인해 리듬이 끊기거나, 인물의 심리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하스노가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데, 화자가 이구치가 아닌 단편들에서는 하스노의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도 아쉬웠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로 트릭과 분위기는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추천드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에몬 씨의 미술관"

화가 이구치는 친구 하스노에게 시계 바꿔치기를 부탁했다. 이구치의 아버지가 자산가 가에몬 씨에게 판 시계가 사실은 모조품이었고, 가에몬 씨가 그것을 미술관에 전시하려 하자 일이 커지기 전에 진품으로 되돌리려는 목적이었다. 말로 설득하는걸 포기한 두 사람은 미술관에 잠입해서 직접 바꿔치기를 시도하는데...

이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도입부로는 충분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전직 은행원이자 도둑 출신인 미남자 하스노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좋습니다. 다이쇼 시대를 충실히 그려낸 시대 묘사도 매력적이고요. 별 거 아닌 것처럼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정통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도 괜찮은 편입니다. 가에몬 씨의 알 수 없는 언행 - 왜 미술관을 촌 동네에 만들었는지, 왜 미술관을 세우려는데 전시할 그림을 판매할 사람은 불신하는지, 본인은 그림을 보는 눈이 없다고 했으면서 왜 미술관에 소장품을 전시하려 하는지 - 와, 기묘한 미술관의 구조 - 긴 통로 위의 초가 지붕, 두꺼운 벽돌 담장, 화풍이나 시대순이 아닌 뒤죽박죽 전시 배치 - 등은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한 하스노의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미술관은 마음에 안 드는, 진위가 의심되는 소장품을 화재를 위장해 태워버리려고 만든 건물이었다는 것이지요. 하스노가 화재가 일어날 시점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논리적이라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진위가 의심된다면 단순히 폐기하거나 감추면 되는데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들고 복잡한 과정을 택했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추리는 나쁘지 않지만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악인 일가의 밀실" 

미노다 가의 차남 아키마사가 밀실에서 살해당했다. 미노다 저택에는 장남 유키마사, 장녀 미치에, 막내 아쓰요시, 당숙 아키히코 등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를 증오하는 막장 가족이었다. 아키마사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하녀 아쓰코와 함께 상식인처럼 보였으나, 실은 사기를 일삼던 악인이었다. 사기 피해 배상을 위해 저택을 찾은 하스노와 이구치는 하녀 아쓰코를 도와 밀실 살인의 진상을 밝혀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밀실 트릭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빗장으로 굳게 잠긴 문이지만, 사실 빗장은 애초에 바닥에 놓여 있었습니다. 문은 밀실에 굴러다니던 공구(끌)를 열쇠 구멍으로 실을 넣어 끌어 올린 뒤, 고정쇠에 걸어 잠갔습니다. 문을 부술 때 공구는 바닥으로 떨어져 증거가 인멸되었지요. '고정쇠에 꽉 끼어 외부에서 실 정도로는 움직일 수 없는 빗장'이라는 맹점을 깨고 현실적으로도 구현 가능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또 하나의 장점은 피해자가 유키마사였던 이유입니다. 이 막장 가족 내에서는 죽었을 때 곧바로 신고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유키마사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족이라면 죽든말든 아침까지 내버려 두었을거라는 거지요.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증오로 뭉친 가족을 묘사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 역시 동기의 설득력에 큰 결함이 있습니다. 범행 동기가 고작 '성질 고약한 아버지가 보낸 빗장을 망가뜨린 것을 숨기기 위함'이며, 이를 위해 문을 부술 때 망가진 걸로 위장하느라 밀실 살인을 저질렀다는데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문을 부수기 위해 밀폐했다'는게 목적이면, 그냥 불을 지르고 밀실을 만드는게 더 손쉬웠을거에요. 또한, 이따위 동기를 위해 이렇게 쉽게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윤리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워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인물 묘사도 지나치게 1차원적이라, 악한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만화 속 등장인물처럼 느껴집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하녀 아쓰코도 엿듣기 능력자라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해 존재 이유가 애매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트릭은 인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동기와 평면적인 인물 묘사는 끔찍한 수준입니다.

"유괴와 대설 - 유괴의 장 / 대설의 장" 

이구치의 처형 부부의 딸, 미네코가 유괴되었다. 이구치는 하스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유괴범들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둘은 여러가지 단서를 확보하여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 결국 둘은 미네코를 구해내고 범인 일당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품의 백미는 하스노의 추리 과정입니다. 하스노는 범인들이 남긴 몇 안 되는 단서, 예컨대 은행 영업시간 이후에 편지를 보낸 점, 자정에 몸값을 요구한 점, 현금으로만 요구한 점 등을 근거로 범행의 목적이 ‘집에 있는 특정한 현금’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 결과 집안의 돈 중 위조지폐가 섞여 있음을 밝혀내지요.
범인들이 몸값을 받기 위해 장인을 커다란 굴뚝 위로 유도하고, 올라간 틈을 노려 짐을 훔쳐낸다는 설정은 몸값 회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들이 숨겨놓은 돈을 위조지폐 사이에 넣기 위해 위조지폐를 직접 제작했다는 발상도 참신했고요. 

하스노와 이구치가 좁은 은신처 공간에서 강도 일당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장면도 긴장감과 함께 재미를 전해 줍니다. 제한된 환경 안에서 도구를 활용해 열세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은 영화 "나홀로 집에"를 연상케 하고요. 

하지만 동기에 대한 설득력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범인들이 유괴를 실행한 이유는 위조지폐의 출처가 드러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리에를 살해했고, 일본을 떠날 계획까지 세운 상황에서 굳이 유괴라는 위험한 수를 둘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강도 경험이 풍부한 일당이 원래 방식대로 범행을 저지르고 돈을 마련해 떠나게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니까요. 
아울러, 위조지폐를 만들어 돈을 숨겼다는 것도 참신하지만 설득력이 낮습니다. 

또한, 범인 일당이 두 패로 나뉘어 있었고, 아키야마가 만다를 살해한 뒤 미네코가 범인인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이미 돈을 확보한 상황에서 만다 일당을 제거하려 했다면, 더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와 활극은 인상적인 부분이 있지만, 범행 동기와 일부 전개는 여전히 무리수가 많아 감점합니다.

"하루미 씨의 외국 편지" 

이구치와 하스노는 은인인 하루노 사장을 만났다. 하루노 사장은 하스노에게,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도착한 프랑스어 편지를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자매 사이였던 세 명의 여자가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하스노는 과거를 조사하여 편지에 담긴 진실을 밝혀낸다.

이 작품은 앞선 단편들과는 결이 다른, 잔잔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지닌 일상계 힐링물입니다. 사람 사이의 은혜와 보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이 인상적이네요. 하루노 사장이 겪은 삶의 굴곡 — 처음 교제했던 하루미의 사고사, 이어 그녀의 여동생 쓰키요와의 결혼, 그리고 다시 쓰키요의 여동생 야요이와의 결혼 — 은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설득력있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하루미를 구하려다 불구가 되어버린 프랑스인 샹플랭에게 하루미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하루미의 동생들이 하루미의 삶을 대신 살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아주 그럴싸했습니다. 다이쇼 시대라면 더욱 '보은'에 신경썼으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루노 사장이 쓰키요 사후 겪었던 도난 사건은 야요이와 결혼하려는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추리도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해 줍니다.

다만, 아무리 보은이라도 일생을 바쳐 편지를 보냈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죽기 직전까지 야요이가 하루미인 척하며 샹플랭에게 편지를 썼다는건 감동적이기보다는 억지로 보였고요. 야요이가 하루노 사장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를 조금 더 뚜렷하게 드러냈더라면 감정선이 훨씬 명확해졌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따뜻한 이야기와 독특한 진상 설정은 좋았어요. 마무리만 여운을 남겨주었더라면 더 좋은 점수를 주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미쓰카와마루호의 요사스러운 만찬"

전쟁통에 돈을 번 졸부 히로카와는 '흑조회'라는 괴상한 회합을 열어 왔는데, 이번에는 화물선 미쓰카와마루호에서 호랑이를 요리해 먹기로 했다. 만찬 직전에 고용인 데루에는 손님 미나미의 처참하게 훼손된 시체를 발견하고 히로카와에게 알렸지만, 사체는 사라졌고 히로카와는 이를 함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데루에는 하스노 일행에게 사실을 고백했고, 이들은 함께 배 안을 재조사해 나갔다. 

그들은 미나미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던 신문기자로, 손님 중 누군가를 체포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또 다른 손님 히라이가 살해된 후 하스노는 히라이의 시체 유기 방식을 단서로 삼아 범인을 밝혀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수수께끼 풀이의 정석을 따르는 정통 추리물로서의 재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스노와 독자 모두에게 동일한 단서가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호랑이가 있는 창고를 여는 열쇠 주머니를 옮길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사체를 끌어올릴 수 있는 쇠밧줄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 진범이라는건 독자들도 모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의미해 보였던 요소들이 모두 퍼즐의 일부였다는 점도 인상적이에요. 예를 들어, 미나미의 시신에서 살덩이를 베어낸 행위는 단순히 연쇄살인의 특징으로 여겨졌지만, 실은 그것으로 호랑이를 유인해 창고 안 석탄 자루를 꺼내기 위한 장치였거든요. 배라는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건 전개와, 배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비들을 트릭과 연결시킨 설정은 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빛을 발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구리야마의 의도 — 승객 전원을 살해한 뒤 인육으로 식량을 조달하며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설정 — 는 작품에 섬뜩한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화가 이구치와 그의 친구 오쓰키가 나누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대화도 이 작품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입니다. 여성 시신을 훼손해 예술품처럼 연출한 범인을 예술가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원래 이구치는 '예술은 완전히 무의미하면서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오쓰키는 여성 시신을 훼손한 결과물이야말로 '무의미하고 가치있는 물품'이라서 예술일 수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구치는 성적 욕구 때문에 이렇게 저지른거라면, 배가 고파서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만든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고 대꾸하지요. 목적이 있는건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요. 그리고 성욕과 외설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끝나기는 다소 아깝다 싶을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아예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리야마의 범행 계획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전원을 한꺼번에 죽이려 했다는 설정은 독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인육을 식량으로 삼으려는 계획과는 모순됩니다. 굳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었는지도 설명이 부족해요. 추리적으로는 공정함 측면에서는 완벽하지만, 이 탓에 범인을 특정하기 쉬워진다는 약점도 존재하고요. 

아울러 전반적으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는 구간이 많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이야기의 밀도에 비해 분량이 과도하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완벽한 구성과 재미있는 주제의 대화는 돋보이지만, 범인의 계획과 이야기 구성의 일부는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평균 수준은 됩니다.

"보석 도둑과 괘종시계"

이구치는 집에서 괘종 시계를 도난당하고 친구 하스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최근 주변에서 일어난 루비 도난 사건과 이 사건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전말을 들려주었다. 하스노는 이구치의 설명을 바탕으로 관계자들을 만난 뒤, 치밀한 추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전작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사건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장점이라면 많은 수수께기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첫째, 범인은 어떻게 이구치가 철저히 숨겨놓았던 괘종시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는가? 둘째, 범인은 어떻게 미쓰에의 드레스 세 벌 중 진짜 루비가 달린 드레스만을 알아냈는가? 셋째, 수많은 꾸러미 중 어떻게 루비 팔찌가 들어 있는 꾸러미만 골라서 훔쳐낼 수 있었는가?인데 마치 불가능 범죄처럼 보이지만, 모두 논리적인 설명과 함께 트릭이 밝혀지며 독자에게 추리의 쾌감을 선사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트릭은 루비 팔찌를 훔친 방식입니다. 범인은 팔찌가 들어 있는 상자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자 하나만 강제로 열린 것처럼 만들어 미쓰에의 눈에 띄게 했습니다. 이를 보고 미쓰에는 팔찌가 도난당했다고 착각했고요. 이후 고리짝 안에서 상자가 담긴 귤색 꾸러미가 사라졌다고 매니저 미즈타니가 보고했으니, 결국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또한 이전 단편에서 등장했던 괘종시계나 인물 미네코가 다시 등장해 연작의 흐름을 이어가는 느낌도 좋습니다. 단편집 안에서 세계관이 공유되는건 확실히 읽는 재미를 더해주니까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괘종 시계를 발견한 방법입니다. 옷본을 찾다 우연히 시계를 발견했다는게 진상이라 시시했어요.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고요. 거대한 시계를 훔치는 것 보다 루비만 떼어가는게 빨랐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드레스에 달린 진짜 루비를 판별한 트릭도 역시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해당 드레스만 기장을 늘렸다는 트릭이 핵심인데, 범인이 옷본을 바꿔치기한 방법이나 드레스 수선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무엇보다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범인 미즈타니는 대신 보관하던 귀중한 루비를 가문 장남이 팔아치워서 루비를 훔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비의 디자인과 크기까지 완전히 똑같지 않다면, 단순히 같은 보석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진짜 루비만 골라 훔친 이유도 불명확해요. 겉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면, 가짜 루비로 대신해도 되잖아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수수께끼와 트릭의 구성은 기발했지만, 동기와 설정 면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해 완성도를 떨어뜨립니다.

2025/05/02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이노우에 마기 / 이연승 : 별점 2점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 4점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론 사업 벤처기업 탈랄리아 직원 다카기 하루오는 어린 시절 형의 사고사를 방조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다카기는 최첨단 조사용 드론 아리아드네의 3세대 모델인 SVR-3가 채택된 지하도시 WANOKUNI 개막식에 참석하는데, 마침 그날 지진이 일어났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사히 대피했지만, 붕괴와 침수가 계속되는 지하 5층에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이 생존자가 헬렌 켈러처럼 시각, 청각, 언어 모두에 장애가 있는 나카가와 히로미라는 점이었다. 물이 완전히 차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여섯 시간뿐으로, 다카기는 동료들과 함께 유일하게 지하에 접근할 수 있는 드론 아리아드네를 원격 조종해 생존자 수색과 구조에 나서는데....

일본 작가 이노우에 마기가 쓴 재난 구조 SF 소설입니다. 구조라는 테마에 첨단기술과 장애인이라는 소재를 결합한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존 재난소설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탈출극 추천'이라는 리스트에서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구조 과정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듬뿍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드론'을 활용하여 헬렌 켈러와 똑같이 시력, 청력 및 대화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지하 도시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설정 때문이지요. 그래서 '드론'은 '촉각'과 '후각' 만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해서 아리아드네는 향수를 내뿜어 도착을 알리고, 점자 카드가 포함된 구호 물품을 투척하며, 장착된 하네스(유도용 와이어)를 잡게하여 경로를 안내합니다. 또 이러한 설정들은 단순한 SF 상상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구조 과정의 설득력을 더해줍니다.

작품의 배경인 지하도시 WANOKUNI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에너지 보존과 탄소 배출 감소, 지진 대응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지하 건설의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드론을 활용한 물류 시스템, 개인 맞춤형 서비스, 광덕트를 통한 자연광 유입 등 매력적인 기술들이 상세하게 소개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통신망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드론 조종이 가능했던 원리, 드론의 무선 충전 방식 등이 논리적으로 잘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구조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WANOKUNI가 정치적인 이유로 활성 단층 위에 건설되었다는 설정도 괜찮았고요. 

재난 구조 소설답게 구조 과정에서 벌어지는 위기 상황들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진으로 인해 구조용 드론이 추락하고, 지하 4층 스파 구역에서 발생하는 누전, 폭주하는 지게차들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들, 그리고 다카기가 폭로 유튜버의 드론에 맞아 아리아드네의 통제권을 놓치는 장면까지, 하나하나의 위기들이 정교하게 쌓여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울러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히로미가 조명 스위치를 작동시키거나, 쥐떼를 감지하고, 돌진하는 지게차를 스스로 피하는 등, 의아한 행동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정말 시각을 잃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이 수수께끼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상 - 히로미가 사실은 도시에 추락했던 다른 장애인 미도리를 업고 있었고, 모든 기이한 행동들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반전 - 은 깊은 감동을 안겨주고요. 아울러 이 진상은 광덕트 붕괴와 발걸음이 갑자기 느려진 이유, 이유를 알 수 없는 배낭의 열기 등 여러 복선들과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정교함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재난 생존물로서 치명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 대상자인 히로미가 아니라 드론 조종자인 다카기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인물의 긴박감을 그리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카기는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드론을 조작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래서야 일종의 1인칭 슈팅게임과 별다를게 없지요.

또한, 서사의 일부 전개는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예컨대, WANOKUNI 입주식 날 하필 지진이 발생한다는 설정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 맞춘 듯 합니다. 평소대로 일상생활을 하다가 지진이 발생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구조 활동 중에 온갖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다카기, 그리고 계속해서 민폐를 끼치는 니라사와의 모습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특히 장애가 있는 동생을 계속 잃어버리는 니라사와의 행동은 짜증을 유발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애인을 구조하는 독특한 설정과 드론 기술의 활용, 그리고 정교하게 짜인 반전은 매력적이지만, 긴박감을 살리지 못한 시점 선택과 작위적인 전개는 아쉽습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3/29

산마처럼 비웃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2.5점

산마처럼 비웃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고키 가문의 넷째 노부요시는 미뤄두었던 성인식을 위해 고향 구마도로 귀향했다. 그러나 노부요시는 산속 사당을 순례하던 중 길을 잃고 흉산 부름산에 들어서고 말았다. 노부요시는 부름산의 유일한 민가인 가스미 가문의 다쓰이치 일가와 하룻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다쓰이치 가족은 노부요시만 남긴 채 밀실인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을 찾아나선 노부요시는 과거 광부와 사기꾼들이 살해되었다는 금광터 여섯 무덤굴에서 망자의 비명을 듣고 도망치다가 정체불명의 사악한 존재까지 목격한 뒤, 마음에 병이 들고 말았다.

도조 겐야는 노부요시의 병든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마도로 향했다. 지역 유지인 리키하라와 부름산에 오른 겐야는 다쓰이치의 집에서 얼굴이 불타고, 구전 동요의 지장 형태를 한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다쓰지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쓰지 아들 고지의 시신이 흑색지장 사당에서 역시 동요에 나오는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후 리키하라도 실종되었고, 겐야는 다니후지 형사와 함께 여섯 무덤굴에서 토막난 리키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쓰지의 장례가 열리던 날, 가설 극장에 불이 나 경찰의 주의가 분산된 사이, 가스미가에 남은 다쓰지의 아버지 단고로, 아내 시마코, 첩 슌기쿠도 동요 속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하는데....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찾아 읽는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네 번째 출간작으로, 반 년 전에 읽었던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바로 전작입니다. 2008년 일본 현지 출간 당시에 각종 랭킹 상위권을 휩쓸었었지요.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만큼 대담한 추리와 충격적인 진상이 돋보입니다.

진상은 다쓰이치 씨 가족과 다쓰지 씨 가족이 실은 동일 인물들이었다는 겁니다. 다쓰이치의 딸 유리는 소년 다쓰하루가 변장한 것이었고요. 이들은 마을에 들어온 유랑극단 ‘태평극단’으로 모습을 바꾸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부요시가 유리에게서 느낀 섬뜩함은, 결국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로 위장한 데서 비롯된 어색함 때문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단발머리는 연극 "거미줄 활시위"에 등장하는 단발머리 시동의 가발로, 그것 자체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요. 고지와 히라히토가 닮은 이유 또한,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다쓰지의 얼굴을 훼손한 이유 역시 이 진상을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얼굴이 온전하게 발견되면, 다쓰이치와 다쓰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금세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쓰지 일가가 변장을 택한 동기도 납득할 만합니다. 작년 백중 무렵, 다쓰하루가 부름산에서 금이 섞인 암석을 발견했고, 이를 다쓰지 혹은 고지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가즈토리 가문 소유였고, 가즈토리 리키하라의 사위 마사오는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금을 빼앗기고 채광 기회도 잃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다쓰지 일가는 다쓰이치 가족으로 변장하여 몰래 금을 캐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쓰이치 가족이 사라진 밀실 트릭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 유리가 혼자 남아, 두 문의 안쪽에 직접 빗장을 걸고 노부요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목욕통을 가리는 칸막이 뒤나 침구 속에 몸을 숨겼고, 노부요시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의아해하는 사이 2층으로 올라가 노부요시가 자던 방에 다시 숨은 것이지요.

이외에도 노부요시가 성인식 도중 겪었던 괴이 현상들에 대해, 겐야의 추리로 합리적인 설명이 덧붙여진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야생 여우나 염주 비둘기의 울음이었고, 소름끼치는 절규는 발정기의 야생 여우들이 서로를 부르거나 다른 짐승들과 대치하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산녀’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파였으며, 나병에 걸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게라의 길’이라는 외길을 이용해 이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무 위의 시뻘건 불덩이는 날다람쥐였고, ‘어어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형들이 노부요시를 찾으러 산에 들어왔을 때 외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추리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작품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서를 흘려두고, 이를 추리를 통해 조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전개는 정통 본격 추리물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다쓰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시신 훼손에 사용한 '두꺼비 기름'이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점은 추리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다쓰지, 고지, 시마코, 슌기쿠, 다쓰하루, 노부요시 단 여섯 명뿐입니다. 이 중 다쓰지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아이 다쓰하루가 범인일 수는 없기에 남는 사람은 노부요시뿐입니다. 

다쓰이치 가족의 정체를 밝혀내는 단서로, 소노코의 혼례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활용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노부요시가 소지한 물건 중 상대가 알지 못했던 건 혼례 시간 변경을 알리는 편지뿐이었고, 그걸 읽고 이들이 갑작스레 자리를 떠났다는 걸 통해 정체를 유추해낸 것입니다. 이유는 '태평극단'이 혼례 축하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구전 동요를 따라 연쇄 살인이 일어난다는 점이 특징인데, 억지스러운 느낌 없이 공포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이 동요가 ‘금광’의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어서, 사건의 핵심 동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은 전개가 조금 처지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진상인 ‘다쓰지 일가의 변장’ 설정의 설득력 부족입니다. 아무리 가즈토리 가문과 가스미 가문 사이가 멀어졌다고는 해도, 어릴 적 친구였던 리키하라가 다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무리입니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이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가족 단위의 변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고요. 가족 모두가 변장을 했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요. 금광을 몰래 캐기로 했다면 다쓰지와 고지만 변장했어도 충분했으니까요. 아니면 다쓰지만 변장해서 머무르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불렀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조 겐야는 처음에는 마사오를, 그 다음에는 수행자 단부로 변장한 다쓰이치, 다쓰지의 동생 다쓰조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들의 동기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마사오는 금광을 캐는걸 주장해 왔었기에 이를 반대했던 장인과 몰래 금광을 캐던 다쓰지 일가를 없앨 수 있었고(딸 유리의 실종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고요), 다쓰조는 이미 금광 때문에 여섯 명이나 살해했었으니까요.

반면, 진범인 노부요시의 동기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인식을 실패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며, 다쓰이치 일가가 장난을 쳤다고는 해도, 이로 인해 여섯 명이나 살해한다는 건 지나치게 과장된 반응입니다. 그럴 거였다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혔던 형들을 먼저 노렸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또한 금맥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묘사하다가, 결국 사냥용 총에 사금을 넣어 쏴서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부분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금광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런 사기를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소하지만 다쓰이치 가족이 나타난건 작년 백중 무렵, 태평극단이 나타난건 작년 여름께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한건 국내 독자에게는 이해가 힘든 부분이라 아쉬웠고요. 이런건 번역할 때 통일시켜 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시리즈 특유의, 일본 촌락에 전승되는 괴담이 실제 사건과 얽히며 전개되는 플롯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몇 가지 단점이 커서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입니다.

2023/12/06

애욕의 고전소설 - 서귤 : 별점 2.5점

애욕의 고전소설 - 6점
서귤 지음/이후진프레스

서귤 작가가 국내 고전 소설들을 읽고 그린 만화 에세이. 제목 그대로 연애담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고전을 배웠는지 온갖 19금 묘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게 핵심이고요.

날 것 그대로의 고전 해석이 빛납니다. 판서, 정상을 지낸 홍 아무개가 낮잠 중에 기막힌 태몽을 꿨지만 부인이 동침을 허락하지 않자 노비를 범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뒤, 한마디로 '미친 새끼'라고 일갈하는 식이지요.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도 독특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처지를 설명하며, 이를 둘 사이의 프리스타일 랩 배틀로 형상화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야한 내용들도 다른 책들에 비하면 굉장히 직접적으로, 대놓고 설명해주고 있는게 마음에 들더군요.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미처 제대로 읽지 못한 고전에 대한 소개도 반가웠습니다. 사씨남정기가 그것인데, 악녀 교채란에 대한 설명이 참으로 실감납니다.

하지만 작가의 우울증과 같은 개인 이야기도 많고, 깊이있는 내용이라고 보기 힘들다는건 감점 요소였습니다. 작가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과한 편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10/28

후회하는 소녀와 축제의 밤 - 아키타케 사라다 / 김은모 : 별점 2점

후회하는 소녀와 축제의 밤 - 4점
아키타케 사라다 지음, 김은모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 '나'는 구관 빈 교실에서 마루판을 뒤집는 기묘한 무언가를 만났다. 마쓰리비 사야로부터 이미 뒤집어진 마루판 위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던걸 떠올리고, 유일하게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마루판 위로 재빠르게 몸을 옮겼다...
고등학교 1학년 아사이 로쿠로는 밤마다 거대한 지네와 마주치는 꿈을 꾼다. '신사에 가면 안된다'는 말을 사촌 누나로부터 들었지만, 마쓰리비 사야의 권유로 신사를 지나친 뒤 지네는 아사이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이토카와 아오이는 어린 시절 '시게토라'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원피스 한 벌을 빚졌다. 시게토라는 10년 뒤 빚을 몸으로 받으러 오겠다며 때마다 나타나 이토카와를 괴롭혔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연인을 사고로 잃고, 구관에서 괴이를 접했던 '나'에게 사야가 도움을 요청했다. 마물로부터 오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오빠의 대역이 될 뼛가루를 품고, 축제의 밤 동안 자동차로 도망다니는 작전이었다. 사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아사이와 이토카와도 함께였다. 축제의 밤, 도망다니던 '나'는 신문 기사 등을 통해 알게된 정보, 그리고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달의 모양이 틀린 등의 현상을 통해 4년 전 사야의 오빠가 죽은 밤으로 시간을 이동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겸한 세 편의 단편,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힘을 합쳐 마물로부터 도망치는 모험을 펼치는 중편으로 이어지는 중, 단편집.
 
세 편의 단편은 짤막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마루판을 뒤집는 이야기에서 흠집 투성이 마루판은 알고보니 바닥 밑에서 '그것'이 딱딱한 뭔가로 흠집을 낸 것, '시게토라'는 자기가 준 것의 댓가를 '무게'로 계산하기 때문에 원피스는 머리카락으로 충분했다는 등의 진상, 반전은 아주 괜찮았어요.
본편도 전체적으로 읽기 쉽고, 마물로부터 도주하는 과정은 박진감이 넘쳐서 페이지가 쭉쭉 넘어갑니다. 자동차로 도망치지만 마물이 지능을 갖추고 있어서 자동차 도로를 나무로 틀어막고, 주행 경로를 예상하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덮치는 등으로 압박을 가하며 흥미롭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후회하는 소녀' 마쓰라비 사야는 오빠 겐이치로가 죽은 뒤 내내 후회해왔었지만, 모험을 끝낸 뒤 오빠는 사야 대신에 죽음을 택했었으며, 살아남은 뒤에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죽어서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는 결말도 깔끔합니다.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인과율의 법칙도 따르면서요.

하지만 큰 문제가 있는데.... 전혀 무섭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 25회 일본 호러 대상'을 수상했다는 이력과는 다르게요. 다른 수상작 - 예를 들어 <<보기왕이 온다>> - 들은 꽤나 무서웠었는데, 이 작품은 호러 소설이라기보다는 모험 소설에 가깝습니다.
설정과 소재도 어디서 많이 봤던거라 신선함도 부족합니다. 특히 마물을 잘 아는 미소녀 마쓰라비 사야 캐릭터는 진부함 그 자체였어요. 마물을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로 유인한 뒤 다리를 붕괴시켜 퇴치한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로 뻔했고요. 알고보니 4년전으로 타임 슬립해왔다는 전개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반전 매력이 떨어집니다. 잘 활용했더라면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였는데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나'의 연인이 붕괴 사고로 죽은 다리를 4년 전 시점에서 무너트려서, '나'의 새로운 현재에는 아내가 생겨 있다는 결말은 이상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사야의 오빠도 결국 죽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런 설정 오류 때문에라도 과거를 바꿔서 미래가 변하는건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지양해야 합니다. 즉, '나'의 연인도 어쨌건 죽고 없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머리를 비우고 가볍게 시간을 보내는데 적당한, 스낵같은 작품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3/08/20

꿀딴지곰의 레트로 게임 대백과 - 꿀딴지곰 : 별점 2.5점

꿀딴지곰의 레트로 게임 대백과 - 6점
꿀딴지곰 지음/보누스

저는 레트로 게임을 좋아합니다. 아래와 같은 패미컴 관련 책을 여러 권 구입해 읽을 정도로요. 제 추억을 공유하는 시기의 게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대놓고 레트로 게임 소개를 천명하고 있어서 궁금한 마음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한국 레트로 게임 전문가의 저서라는게 신기하기도 했고요. 꿀딴지곰의 글은 어딘가에 연재하는 게임 컬럼을 통해 잡했었고, 그 식견에는 감탄하고 있었기에 쉽게 손을 댈 수 있었습니다.
읽다보니 저와 비슷한 세대라 반갑더군요. 89년 경에 재수했다니까요. 심지어 학창 시절 사는 동네마저도 - 꿀단지곰은 방배동, 저는 반포동 - 비슷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같은 세대, 같은 지역에서 같은 관심사를 공유했으니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한건 어떻게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일본의 관련 서적과는 다른 구성을 보여줍니다. 챕터별로 초반에 개인 회고담이 수록되어 있고, 그 뒤에 꿀딴지곰이 즐겼던 해당 챕터에 관련된 게임을 소개하는 식이거든요. 게임에 대한 연대별, 콘솔이나 게임 종류별 정확한 소개보다는 이렇게 개인 추억 위주인 덕에 갖는 장점도 있습니다. 실제 당시 시대를 잘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게임에 대한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더 치밀한 소개와 게임별 장, 단점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거든요. 게임들의 우리나라 명칭 - 샐러드를 똥파리라고 불렀다던가 - 이 소개되는 식으로요.
글을 통해서 제가 즐겼던 게임들과 여러 공간들이 언급되는 것도 재미있었는데요, 첫 시작인 80년대 게임 소개부터 저 역시 어릴 때 즐겨했던 방구차, 미스터 도, 너구리, 푸얀, 엘리베이터 액션, 서커스, 올림픽, 너클조 등이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올림픽 할 때 자 등으로 버튼을 연타했던 추억은 어디가나 똑같은 것 같군요. 이 중 저의 베스트는 누가 뭐래도 1942였습니다. 꿀딴지곰은 싫어했다고 하지만요.
두 번째는 콘솔 게임 재믹스에 대한 소개에서는 주로 MSX 게임들이 언급되는데 남극 대모험, 왕가의 계곡, 루이스 정도가 기억이 납니다.
세 번째는 진짜 MSX, MSX2 이야기입니다. 제 주위에도 유저들이 많았었지요. 또 당시 강남권 게임 키드들의 메카였던 파파 상사에 대한 소개가 반가왔어요. 고속터미널 상가에 있었는데, 이 쪽에 이런 가게들이 참 많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MSX는 안 해본 게임인 우샤스와 스내처 내용이 궁금하네요. 우샤스는 반전이 인상적이라고 해서 찾아보았는데, 주인공들의 모험은 오히려 고대 문명이 개발했던 폭탄을 폭발시켰을 뿐이라는건 확실히 특이했습니다. 시대를 꽤 앞서간 설정이 아닌가 싶어요.




 MSX2 최고의 2인용 퍼즐 액션 게임이라는 퀸플도 모르는 게임이라 호기심이 생기고요.
네 번째 챕터는 패미컴입니다. 패미컴이야 뭐 저도 유저였고, 관련 책도 여러 권 읽어보아서 특별한 내용은 없겠지 싶었는데, MSX에 꽂아쓰는 컨버터는 처음 봤습니다. 꿀딴지곰은 RF 단자만 지원하는 정품이 아니라 AV단자도 지원했던 대만제를 샀다는 것도 신기했어요. AV 단자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대 같은데 말이지요. 게임 소개는 특별한 건 없지만 그래픽이 좋은 패미컴 게임의 대표예로 소개한 크라이시스 포스는 아래의 게임 같은데, 지금 보면 그닥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나 보네요.


그리고 1990년의 게임 환경에 대한 이야기, 오락실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1991년 스트리트파이터 2는 정말 대단했었죠. 당시 대입을 앞두고 있던 저와 친구들의 공부 시간을 빨아들였던 원흉이기도 했고요. 글과 게임 소개들을 읽다 보면 그 외에도 여러가지 추억이 떠오릅니다. 수왕기, 콘트라 - 우리 동네에서는 곤두라였는데 -, 다크실, 뉴질랜드 스토리. 에어리어 88, 파이널파이트, 더블 드래곤, 골든 액스, 천지를 먹다 (삼국지), 다이너마이트 형사, 캡틴 코맨도, 심슨, 어밴져스, TMNT (닌자 거북이) 등등등에 얽혔던 추억들이지요. 캡틴 코만도는 본가에 만화도 있을 정도로 좋아했었고요. 만화나 한 번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격투 게임의 전성기를 다루며 소개되는 스트리트파이터, 용호의 권, 사무라이 스피리츠, 아랑전설, 킹오파도 모두 기억에 생생하고요. 모르는 게임도 당연히 몇 개 있는데, D&D 세계관의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이라는 던전 앤 드래곤스 섀도 오버 미스터리는 궁금하네요. 황당해서 실소를 터트리게 만든다는 골든 액스의 오락실 엔딩은 찾아보았는데, 꽤 기발하더군요. 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에 스토리를 부여했다는 것도, 게임을 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체감형 게임 중에서는 스페이스 해리어만 해 봤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정말 놀랄만한 그래픽이었었죠. 다라이어스는 모르겠지만요.

6장은 가정용 게임기의 부흥을 다룹니다. 16비트 게임기가 등장했기 때문으로 메가 드라이브, 슈퍼패미컴이 그것입니다. 꿀딴지곰의 말로는 메가 드라이브 최고의 액션 게임은 슈퍼 시노비 2이고, 최고의 오프닝은 무자 알레스터, 그 다음이 엘리멘탈 마스터라고 하네요. 슈퍼패미콤 게임 소개도 많은데 슈퍼패미콤은 제가 해본 적이 없어서 딱히 와 닿는게 없었습니다. 게임보이는 테트리스에 푹 빠졌던 기억만큼은 생생합니다. 나름 엄청 열심히해서 겨우겨우 로켓트(?)를 쏘아 올리기까지 했었지요. 그게 제 한계였습니다.
7장은 오락실의 쇠퇴를 다룹니다. 아무래도 2000년대부터 PC방과 스타크래프트의 전설이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꿀딴지곰은 그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음악 게임과 댄스 게임이 반짝 흥행했다는 정도만 알려줍니다.
8장은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으로 대표되는 차세대 게임기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대학 생활 막바지에 정말 많이 했었습니다. 파이널판타지, 바이오하자드, 메탈기어 솔리드 등등등.... 이 중 제 베스트는 누가 뭐래도 철권입니다. 그러나 세가 새턴은 버츄어 파이터 말고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 게임들이었습니다. 새턴은 주위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해보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트로 게임 유행에 따른 레트로 게임 즐기는 법, 팁을 소개하며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서 8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대략의 한국 게임 유행사를 통사적으로 짚을 수 있습니다. 당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추억담으로도 볼만합니다. 큼직한 도판과 함께 하는 게임 소개도 좋았고요.

그러나 게임 소개가 개인 취향인 탓에 소개되는 기준이 없다는 단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발표 연대별로 소개되지도 않을 정도에요. 정상적으로 게임이 유통되지 않았던 국내 현실상 큰 의미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게임 자체가 발표된 시기는 명백한 만큼, 최소한 연대별로 소개되었어야 했다고 봅니다. 장르도 되도록 묶어서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자료적 가치가 없지는 않지만, 개인 에세이와 추억담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3/08/06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 관람

지난 달의 '젊은 모색 2023' 전시회에 이어, 이번 달에도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관람하였습니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입니다.
동산방화랑의 설립자 동산 박주환이 수집하고 그의 아들 박우홍이 기증한 작품 209점 중 90여점을 선별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입니다.

주로 한국화 중심으로,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한국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남종 화단의 명맥을 이었다는 허백련의 그림을 비롯하여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 이용우, 최우석 등의 산수화나 매화도 등은 익히 알고 있던 조선시대의 그림 바로 그것입니다.
노수현의 <<추경>>은 공들인 인왕산의 바위 암벽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어요.
근대 회화라 그런지, 의외의 디테일도 재미있었습니다. 아래의 이용우의 작품 속 작은 인물과 같이요. 이런 디테일들이 쌓여 다름 단계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렇게 나무들을 '마계'의 식물들처럼 묘사한 이유가 조금 궁금해지더군요. 이용우의 작품 외에도 아래와 같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마계의 식인 식물같은 나무들이 눈에 뜨였거든요. 조금 손을 대고 가공하면 현대적인 게임 일러스트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근대 초기를 넘어, 중기 이후 작품들이 이어지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운보 김기창의 <<매>> 였습니다. 상당히 큰 그림인데,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된 배경, 큰 붓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나무와 깃털, 거기에 엄청나게 디테일한 매의 얼굴 묘사가 잘 어우러지는게 아주 멋졌습니다. 거장이 왜 거장인지를 알려주네요.
운보 김기창이 아니더라도, 아래와 같이 디테일한 부분에서 서양화에 뒤지지 않는 작품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한국화의 저력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한국 전쟁 이후, 현대로 접어들면서는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동양화의 번짐과 같은 효과로 원근법, 일렁이고 출렁이는 물과 바람을 표현한 아래의 작품들은 한국화임에도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입니다.
현대적인 한국화라면 빼 놓을 수 없는게 아래의 <<신몽유도원도>>였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현대적으로 재 해석한 작품이라는데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원색적이면서도 오묘한 색 표현이 아주아주 빼어나다고 생각되거든요. 영화 <<바비>>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핑크핑크하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시리즈라는게 충분히 이해되더라고요. 저도 한 점 걸어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전형적인 산수화 스타일이지만 거친 마띠에르를 느낄 수 있는 <<북한산>>도 또 다른 현대적 한국화이면서도, 제 마음에 쏙 든 작품입니다. <<신몽유도원도>>가 다소 여성적이라면, 굉장히 남성적인 작품이라서 두 작품을 같이 전시하면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굉장히 눈이 즐거웠던 전시였습니다. 한국화에 애정이 깊은 컬렉터가 엄선하여 수집한 작품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다른 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딱 한가지, 한국화임에도 불구하고 액자로 설치된 작품이 많았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조명이 반사되는 탓에, 온전히 그림을 감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유리없이 감상하고 싶네요.

2023/07/02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4. 잠자는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4. 잠자는 인형
"그건 귀찮은데."
마이코는 호시자와에게 말했다.
"뭐가 귀찮아?"
호시자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이코도 굴복하지 않았다.
"첫째, 나는 데츠바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둘째, 아까 내가 온 것을 환영하지 않았잖아. 마지막으로, 나는 너무 바쁘다고."
"하지만 말이야. 데츠바가 죽었잖아. 그것도 너가 마침 왔을 때 말이야."
"내가 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너처럼 뚱뚱한 사신 따위가 어디있어. 혹시 너, 데츠바가 살해당할걸 알고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범인을 못 알아낸 모양이군."
호시자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라키 경감도 곤란한 상황이겠네."
"맞아. 그래서 부탁하는데, 혹시 만났을 때 경감이 뭔가 물어본다면 알고 있는건 대답해주라고."
"내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정말로 죽었다면 나 역시도 큰일이야."
"마이코가? 왜지?"
"나라키 경감이 말해주지 않았어? 데츠바는 내 마지막 증인이었다고."
"증인?"
"내가 경찰서를 그만두게 된 경위를 알고 있지? 나한테 지폐를 주고 도망친 차 사건 말이야. 그 차가 해바라기 공예의 차라는 걸 알아냈어. 데츠바는 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그럼 지폐를 마이코에게 건네준 사람은 누구였지?"
"운석에 맞아 죽은 마와리 토모히로였어."
"잠깐만. 그러면 마이코의 증인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건가."
"그래서 곤란한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마이코가 서에 돌아오게 되면 누가 가장 곤란할까?"
"교도 씨인가. 그 시끄러운 여자가 또 돌아온다고."
"다른 사람은?"
"이 사람이야. 또 실직하게 될테니."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며 말했다. 호시자와도 묘한 표정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동기는 너무 약하네. 예를 들어, 우다이 군 같은 경우는 어떨까?"
"우리 남편?"
"서에 마이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에 돌아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이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네, 그거. 하지만 그렇다면 소우지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할거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호시자와는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나라키 경감에게 가 봐."
"그 대신 교환 조건을 걸지. 마사오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건 안 돼."
"안 된다고? 왜?"
호시자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 마사오는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야."
"설마? 지금 어디에 있는데?"
"방금 전까지 카오리의 방에서 계속 조사를 받고 있었어"
"도대체 왜 그녀가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된 거지?"
호시자와는 힐끗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 말하지 않으면 나라키 경감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대로 돌아갈거라고."
"어쩔 수 없군. 마이코 상대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데츠바는 자신의 방에서 죽어 있었어. 사인은 청산성 화합물에 의한 중독사. 감식 보고는 아직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틀림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쓰러져 있던 책상 위에 약병이 놓여 있었는데, 그건 마사오가 주었던 약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마사오가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토시오가 항의했다.
"글쎄, 끝까지 들어봐. 그 약병 안에 독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어."
"그럼 그 약병 안에 독약 캡슐이 섞여 있었단 말이야?"
"그 약병이라고? 그럼 마이코는 그 약병을 알고 있는 건가?"
"토모히로의 철야 당시, 데츠바가 불편하다고 했었지. 마사오가 약은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복용하고 있느냐고 묻자, 데츠바는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아침마다 제대로 복용하고 있다고 대답하며 약병을 꺼내 보였어. 빨간 라벨이 붙어있었는데, 라벨 가장자리는 벗겨져 있었어."
"그건 중요한 증언이 될 거야. 그걸 본 사람이 또 있어? 그 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어?"
"그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소우지, 카오리........"
"모두 죽었어."
"그 약병이라면 나도 보고 있었어요."
토시오가 입을 열었다.
"라벨의 가장자리가 말려서 뒤집혀 있었어요. 틀림없어요."
"그 약병이 데츠바가 죽은 현장에 있었던거야."
마이코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약병에 독약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다는 거지?"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 약병의 캡슐에는 전부 독이 섞여 있었어."
"전부 다…….?"
마이코는 토시오와 눈을 마주쳤다. 의외의 일이었다.
"한 알도 빠짐없이?"
"그래, 한 알도 남김없이. 당연히 자살은 아니야. 자살을 하려면 모든 캡슐에 독약을 넣고 그 중에서 한 알만 마시는 짓은 하지 않을테니."
"데츠바는 정말 그 캡슐 독을 마신게 맞아? 다른 음식에 섞여 있던건 아니야?"
"아니야. 시체를 해부하면 녹아내린 캡슐도 발견될 거야. 약병이 마이코가 본 것이라면, 약병을 범인이 준비한 독약병과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라 캡슐만 바꿔치기한 것이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데츠바가 계속 그 약을 먹고 있던건 확실해?"
마이코의 목소리가 숨을 헐떡거렸다.
"데츠바는 매일 아침마다 약을 빠뜨리지 않았어. 특히 어제 아침에는 데츠바가 그 약을 먹는 것을 동거하는 가정부가 목격했어."
"어제는 죽지 않았었으니........"
"그래. 캡슐이 바꿔치기 된 건 어제 데츠바가 약을 먹고 오늘 아침 데츠바가 약을 먹은 지 24시간 사이에 이루어진거야."
"그 동안 약병은 어디에 있었지?"
"데츠바의 주머니에 있었어."
"밤에는?"
"데츠바의 방이야. 데츠바 저택은 문단속이 엄격할 뿐 아니라, 데츠바는 두 자식이 죽고 난 뒤부터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어. 밤은 물론 낮에도 필요 없는 문은 잠가두었어. 어제 나사 저택에 있었던 사람은 데츠바, 마사오, 가정부 세 사람밖에 없었어. 나사 저택을 드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낮에 누군가가 침입해서 나사 저택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사 저택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불가능해. 게다가 데츠바는 잠을 잘 때 자기 방에 자물쇠를 잠그고 잤다고."
"자물쇠를?"
"마이코도 가 봤으니까 알겠지? 데츠바의 방은 들어가면 서양식 응접실이고, 그 안쪽에 일본식 거실이 있어. 방의 출입은 응접실 문으로만 가능한데, 그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어."
"열쇠는? 찾았어?"
"데츠바 주머니에 있었어."
"그럼 마사오라도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을 갈아 끼울 수는 없잖아."
"나라키 경감은 마사오라면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그건 왜지?"
"데츠바는 마사오를 신뢰하고 있었어. 그래서 마사오라면 데츠바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군."
"그리고 마사오가 데츠바의 주머니에서 캡슐만 빼냈다는 거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다만 마사오라면 어떻게든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더라고. 말로 잘 다독여서 말이야."
"무슨 말?"
"그건 모르지."
"무슨 말을 해야 데츠바를 속일 수 있었을까?"
마이코는 팔짱을 끼고 미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마이코는 동굴을 통과하면 데츠바의 방에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데츠바의 약병의 캡슐을 바꾼 인간,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저녁에 데츠바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누구야?"
"가정부야. 이부자리를 깔고 데츠바를 방에 들여보냈고, 데츠바가 자물쇠를 내리는 소리도 들었다는군."
"아침은?"
"평소와 똑같아. 아침을 마사오와 함께 먹고 방으로 돌아갔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들이 이곳에 모이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간부들이 모인 건 9시 반부터 10시까지였어. 그때는 이미 데츠바는 죽어 있었지."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은 결국 데츠바를 만나지 못했군?"
"그래. 시간이 되어도 데츠바는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 응답도 없었고. 마침 우리도 왔던 터라, 그 자리에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지."
"데츠바가 죽어있었군."
마이코와 토시오가 데츠바의 방에서 동굴로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데츠바는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 이봐, 마이코. 이제 그만하자. 같이 가자고."
호시자와가 손짓했지만 마이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약병의 캡슐에 대해서."
마이코는 겨우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독을 넣은 캡슐을 오래 전에 데츠바의 약병 속에 섞어 놓은 게 아닐까 싶어서."
"마사오를 감싸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왜?"
"왜라고? 마이코답지 않네.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에는 모두 독약이 섞여 있었어. 그리고 데츠바는 어제까지 살아있었고. 마이코의 말대로 이전에 독 캡슐이 투입되어 있었다면, 범인이 약병 중 몇 개의 약병에 독을 섞어 놓았는데 데츠바는 그 다음 날부터 일반 캡슐만 골라 먹다가 일반 캡슐이 다 떨어진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독약 캡슐에 손을 댔다는거라고."
"그건 안 되나?"
"불가능하지. 데츠바는 일일이 캡슐을 고르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어. 누구나 하듯 약을 먹었어. 약병을 기울여 우연히 굴러나온 한 알을 집어 입에 넣는 거지. 가정부도 그렇게 증언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우연히 평범한 캡슐만 데츠바의 손바닥 위로 굴러나왔다는 것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
"절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을거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호시자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사관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라키 경감의 표정이 달라져있었다. 수사 도중 그의 눈앞에서 사람이 또, 세명이나 살해당한 것이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임에 틀림없다.
나라키는 끈질기게 질문을 반복했지만, 토시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로의 중심부에 동굴이 있다는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라키는 동굴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라키가 알고싶어한건 마이코가 자주 나사 저택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토시오는 자신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토시오를 대신해 마이코가 불려갔다. 마이코도 나라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이코가 카오리의 아틀리에에 배치된 수사본부에 들어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이코는 돌아와서 말했다,
"생각보다 마사오에 대한 혐의가 짙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사오 씨는 어디 계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데츠바의 응접실인 것 같아. 감시를 받고 있다는군.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요코누마 씨에게 보고서를 전달해야 해. 오늘 중으로 전달하기로 약속했거든. 대동 흥신소에 가야 해."
마사오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곁에 있으면서도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사오 씨는 어떻게 될까요?"
"저런 상태라면 구금될지도 모르겠어."
"우다이 씨는 정말 마사오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 데츠바가 죽어 있는 상태가 저렇다고 가정하면 말이야."
토시오는 침착함을 잃었다. 마사오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어느새 토시오의 손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구름이 낮아지고 있었다. 회색 하늘에 검은색 굵은 구름이 두 줄로,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기온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마사오가 데츠바의 캡슐에 독을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사오가 위험에 처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사 저택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마이코가 고개를 돌렸다. 토시오는 조용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마이코는 토시오의 발밑을 보았다. 토시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이코는 시선을 옮겼다.
"어?"
마이코는 한 점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사 저택을 크게 감싸고 있는 굵은 담쟁이덩굴의 뿌리 부근이었다.
"카츠 군, 보고 있어?"
토시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코가 무엇을 보고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잡초 속에 작은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이코는 몸을 숙여 눈을 땅에 가까이 가져갔다. 토시오는 별다른 관심 없이 그 빛나는 물체를 보았다.
"주사기네…… 아직 새 것이야."
마이코가 말했다.
그것은 가느다란 바늘이 빛나는 작은 주사기가 틀림없었다. 3분의 1 정도 액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왜 주사기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조금, 곤란하네."
마이코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런 걸 찾았다고 하면 또 발이 묶일 것 같아."
"제가 발견한 걸로 하고 형사에게 설명할게요."
그때의 토시오는 그저 나사 저택에 남아있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을까? 아니, 내가 남아 있을게. 너는 서류를 요코누마 씨에게 전달해줘. 전달만 해 주면 돼."
그래도 좋았다. 마이코와 헤어져 혼자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코는 에그의 문을 열고 서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전달하고 나면 사무실에 들러."
마이코는 하늘을 바라보며 에그에서 검은색 코트를 꺼냈고, 가방 속 양초와 손전등은 좌석에 올려 놓았다.
경관이 문에 매단 밧줄을 풀었다. 토시오는 에그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마이코는 경관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었다.
토시오는 도로로 나가자 속도를 줄이고 나사 저택 뒤편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잡목 숲 속에 좁은 길이 있었다. 에그를 거칠게 몰고 나아갔다.
미로 바로 뒤에 차를 세운 토시오는 에그에서 손전등을 꺼내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풀숲을 헤쳐 나가자 미로가 보였다. 인적은 없었다. 경찰은 미로 안쪽이 나사 저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듯 했다. 토시오는 미로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미로의 길은 이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중심부에 도착한 토시오는 마이코와 마찬가지로 울타리 아래를 살폈다. 곧 레버가 손에 닿았다. 세게 당기자 반응이 있었고, 중앙에 놓인 돌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몸을 날려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달리, 섬뜩함이나 공포감은 사라졌다. 손전등과 기억만 의지할 뿐이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좁은 통로를 지나 폭포가 있는 석실을 통해 동굴에서 가장 넓은 E 지점에 이르자 토시오의 심장 박동은 이미 빨라져 있었다.
마지막 돌계단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돌계단 위에 빛이 보였다. 토시오는 본능적으로 전등을 끄고 바위 그늘에 몸을 숨겼다.
빛은 천천히 움직이면서 돌계단을 내려왔다. 전등을 든 사람은 마사오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사오라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이나 놀라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마사오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자신을 알릴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용히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마사오가 돌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토시오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 부인"
전등 불빛이 멈췄다. 토시오는 계속 말했다.
"저입니다. 카츠입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전등을 켜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사오는 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토시오를 향해 서 있었다. 마사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기색은 알 수 있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계속 말하면서 다가갔다. 마사오는 뒤로 물러났다. 토시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토시오가 조용히 손전등을 비추자 마사오는 거부하는 듯 얼굴을 돌렸다.
토시오는 옆으로 다가가 손전등을 들고 있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저항하는 마사오의 힘은 너무 약했다.
"안심하고, 나를 따라오세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나직히 말했다.
"난폭한 짓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저를 어떻게 하려는거죠?"
마사오는 겁에 질린 눈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의 이런 눈빛을 전에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눈동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인, 저를 믿어주세요.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내 편? 그게 무슨 뜻이죠?"
마사오의 눈빛에 다소 침착함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쪽으로 가면 미로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어요."
토시오는 손전등을 검은 구멍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알아요."
이 말은 조금 의외였다.
"안다고요?"
"토모히로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토모히로에게 들었다고?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나가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소름끼쳐서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카츠 씨는 왜?"
그것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부인, 저를 싫어하세요?"
싫다고 대답해도 좋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싫다느니 뭐니 하는 것은 ......"
마사오는 토시오의 단호한 말투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세요. 길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려고요?"
"동굴을 지나서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미로 끝에 차를 두고 왔어요. 저와 함께 도망치시죠."
"도망친다고요?"
"조금만 더 있으면 당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올 겁니다. 데츠바 씨를 살해한 범인으로 말입니다."
"데츠바를 내가 죽였다고요 ......"
마사오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럴까봐 혼자서 나사 저택을 빠져나온거 아닌가요?"
"아니요."
부정하는 마사오의 말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마사오는 스타킹만 신고 있었다. 어떻게든 급히 도망칠 생각 뿐이었구나, 라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좁은 동굴에 들어가자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잡은 손의 촉감과 숨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시오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폭포야……. 이상하네요."
폭포의 석실에 들어서자 마사오가 작게 외쳤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소리였다.
"다리는 괜찮나요?"
토시오는 바위가 많은 길에서 말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마사오는 몇 번이나 걸려 넘어져 토시오의 가슴에 쓰러질 뻔했다. 출구가 가까워질 무렵에 두 사람은 거의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다.
미로 한가운데로 나오자 안개 같은 비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비가 오네요."
마사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시오는 아까부터 마사오의 무심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두려움이 사라진 마사오의 표정에는 천진난만함이 묻어났다.
동굴 입구를 닫고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을 잡으려 했다. 보니 손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팠나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으며 꽉 쥐고 있던 손전등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미로 출구에서 나사 저택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몸을 움츠리고 미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이 차로 도와주시는군요."
마사오는 길에 놓인 에그를 보고 말했다. 뒷좌석에는 마이코의 샌들이 놓여 있었다. 토시오는 샌들을 마사오의 발에 신겨주었다.
차를 도로로 올려놓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푸세요."
토시오가 말했다. 마사오는 뒤로 묶은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립스틱을 짙게 바르세요."
마사오는 가방을 열어 립스틱을 짙게 칠했다.
"뒷좌석에 우다이 씨의 코트가 있으니 입어보세요."
마사오는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마이코의 오렌지색 코트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사오의 행색이 많이 달라졌다.
국도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차량 검문때문인 것 같다고 토시오는 직감했다. 토시오는 에그를 길가에 세워두고 차에서 내린 뒤, 진흙투성이 옷 위에 자신의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다시 국도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예감이 맞았다. 검문이 있었지만, 경찰관들은 소형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마사오가 물었다.
"일단 슈젠지로 가죠."
토시오의 마음가짐은 정해져 있었다.
"슈젠지…… 여행 같네요."
마사오가 말했다.
"체육관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거리로 나가자 마사오가 신고 있는 마이코의 샌들이 눈에 띄었다. 토시오는 터미널 백화점에 들어갔다.
"돈이라면 있어요."
마사오는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이상하게도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갖고 싶어요."
마사오는 화려한 빨간 스카프를 보고 말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6/09

All of panpanya

최근 푹 빠진 작가 panpanya의 국내 소개된 작품 8편을 모두 완독하였습니다. 제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 (5)
  2. <<두 번째 금붕어>> (4)
  3. <<동물들>>, <<구아바노 홀리데이>>, <<게에게 홀려서>>, <<물고기 사회>> (3)
  4. <<침어>> (2.5)
  5. <<아시즈리 수족관>> (1.5) 
전권 평균 별점이 3점 이상이라니 놀랍네요. 
완독 기념으로 전권 리뷰를 올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즈리 수족관 - 4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초기작 중심 단편집. 작화는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편안함과 거침이 공존하고 있어요. 특유의 부드럽고 편안한 그림체가 아닌, 정석적인 만화식 펜 드로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는게 특이했습니다. 뎃생력은 영 아니었습니다만.
수록작은 기묘한 수족관, 기묘한 상점가, 기묘한 박물관, 두 번째 교토 타워와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방문한 방문기가 많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까지 가서 망자의 거리를 방문할 정도입니다. 환상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문제는 대부분 '우연히' 그 곳에 가서 기묘한 공간을 보고 올 뿐 특별히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완성된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설정이 치밀하지 않고 기존 작품들의 재구성이나 패러디가 많아서 신선함도 부족하고요.
그나마 이야기로 볼 수 있는건 <<심부름>> 정도입니다. 어머니가 써 준 심부름 메모에서 알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걸 사기 위해 없는게 없다는 완전 상점가 까지 여정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구입해 온다는 이야기죠. 

주인공의 기묘한 착안에 따른 노력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특유의 매력 포인트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판기 안에 동물들이 들어가 움직인다는걸 알고 나서,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동 자판기를 자유연구 과제로 제출하여 동물들에게 자유를 선사한다는 <<자판기>> 정도만이 기대에 값합니다.
그 외에는 수족관에서 보여줄 물고기를 잡으러 떠나는 이야기로 주인공을 구하고 격류에 휩쓸린 레오나르도가 물고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결말의 <<너의 물고기>>가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딱히 재미가 있던건 아니지만, 파트너 레오나르도가 첫 등장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반면 제목의 수록작이야말로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습니다. 열 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작품으로 별 비중은 없거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기대와 전혀 달랐고, 습작 수준의 수록작도 많아서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구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침어 - 6점
panpanya 저자/미우(대원씨아이)

단편보다 짧은, 쇼트쇼트라 부를 만한 초단편이 많이 수록된게 특징. 
벌 서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걸 깨닫는다는 <<벌 서는 법>>, 일상 속 이야기를 짧은 분량 안에서 무려 12년에 걸쳐 빌드업하고,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끝맺는 <<가로수의 순서>>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교적 긴 이야기로는, 비가 올락말락 하다가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질 때 우연히 만난 개구리 덕분에 무사히 귀가한다는 <<비 오는 날>>이 기묘하면서 따뜻하고 서정적인 느낌이라 좋았고요.

표제작, 그리고 젤리같은 물고기 뉴 피시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을 그린 <<뉴 피시> 두 작품은 '물고기'를 주 소재로 삼은 단편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뉴 피시>>는 물고기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식품이었는데, 맛이 없어서 외면받았지만 주인공 활약으로 기사회생하게 된다는 내용이고, 표제작은 전설의 편안한 오더메이드 베개 '침어'의 존재를 알고 쿠슈 카고시마로 떠난 주인공과 레오나르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너무 편안해서 베개로 쓰이던 물고기 '침어'는 실존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베고나면 죽어버려서 (물밖에 나와 하룻밤이 지나게 되니까), 그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베개를 만든게 현재의 '침어'였습니다. '침어' 베개를 구입한 주인공은 운 좋게 해변에서 진짜 침어를 한 마리 주웠고, 그래서 가끔 침어에 얼굴을 파묻곤 한다는 결말로 끝나는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일상 이야기처럼 펼쳐놓는 전개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반면 신주쿠 지하의 이상한 공간에서 피자 만두를 찾는 <<지하답사>>는 제법 길지만, 작화나 전개 모두 초기작 느낌으로 <<아시즈리 수족관>>과 비슷하더군요.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직은 스타일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감점합니다만, 볼 만한 작품도 제법 많았습니다.


두 번째 금붕어 - 8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연구'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많다는게 특징. 소재도 다양합니다. <<멜로디>>는 저녁이 되면 마을에 울려퍼지는 음악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울려퍼지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도 재미있고, 결국 찾아낸 음악의 정체도 기발했어요. '숨바꼭질'을 잘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고민이 펼쳐지는 <<숨바꼭질의 주의사항>>, 매미 소리를 겨울에 틀면 따뜻함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계절 보내는 법>>, 완벽한 등교길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펼쳐보이는 <<통학로의 소양>> 등도 모두 독특하고요. 그 외에도 소품 서랍을 정리하는 방법, 풍선 편지를 개조했더니 영원히 날게 될 지도 모르는 물건이 되었다는 등 다른 수록작들도 갖가지 분야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망라하여 선보여줍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주인공이 항상 무언가를 깨닫거나 익히고 끝나는데, 그게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도 재미요소였어요.

연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 속 사물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보여주는 작품도 많습니다. 전자동 부적 제작 기계가 어떻게 '공덕'을 부여 받는지를 그려낸 <<길흉화복 챙기기>>는 정말 생각도 못했던 전개를 보여줍니다. 해변의 집과 해수욕장의 시즌 오프 방법이 등장하는 <<바다 폐장하는 법>>도 그러하고요.

학교에서 키우던 금붕어를 잃어버린 뒤 새로운 금붕어를 구입하러 나서는 표제작은 그닥이었지만, 전체적으로 panpanya의 독특함과 기발함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구야바노 홀리데이 - 6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단편집이기는 한데, 무려 3부작 여행기 <<구야바노 홀리데이>>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
표제작 외에는 작가의 다른 단편들처럼 뭔가를 만들고, 찾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엉터리 일기술>>, <<비교 비둘기학 입문>>, <<부호>> 등 일상에 밀착해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일상 속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건 분명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됩니다. <<고구마 줄기 원더랜드>>는 는 고구마를 캐면서 땅 속을 헤집고 다닌 끝에 진짜 맛있는 군고구마를 알게되지만, 다시 캐 낼 수는 없게 되었다는 다소 환상적인 이야기인데, 결말만큼은 현실적이라는게 인상적이었고요.

그런데 표제작은 구야바노를 찾기 위해 필리핀을 간 여행기라 달리 기발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지는 못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해서 재미있기는 했는데, 작가의 특징이 온전히 발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게에게 홀려서 - 6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기묘한 반전들이 있는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게 특징. 
워싱턴 조약에 위배되는 왕도룡뇽을 키우다가 아마존으로 가서 놓아주지만, 알고보니 왕도룡뇽은 일본 원산의 고유종이었다는 <<왕도룡뇽 사건>>처럼요. 최고는 완벽한 일요일을 보내기 위해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일요일 준비에 바치는 <<perfect sunday>>입니다. 완벽한 일요일을 위해 온갖 기계 장치를 만들고, 일요일 산책 코스까지 사전에 답사하는 등 준비를 마치지만 '소풍은 당일보다 전날 준비와 저녁이 더 설레었던 것 같다'는걸 깨닫고, 알고보니 그 날이 일요일이었다는 반전, 다행히 다음날도 공휴일이었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쇼트쇼트 중에서는 <<decoy>>가 기억에 남습니다. 호수에 띄워놓은 가짜 나무 오리를 디코이라고 하는데, 동료로 착각하고 찾아온 오리를 그리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계속 그러다보니 수면을 잘 그리게 되있다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끝납니다.
암흑 전골 세트가 초심자 용이 있었다는 <<전골>>, 파인애플이 어떻게 열리는지 몰라 조사하러 나섰지만 결국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파인애플을 모르신다>>, 살아있는 돌고래 계산기가 리만 가설을 풀어낸다는 <<계산기의 마음>>도 재미있었고요. 인터넷에서 먼저 유명해진, 단무지만드는 프라모델이 나오는 <<DANMUJI DREAM>>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별다른 내용이 없었던 표제작이나, 전철에서 몸을 두고 내린다는 등으로 비교적 평이한 발상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어서 수록작별로 재미와 수준에 있어 다소 편차가 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동물들 - 8점
panpanya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앞 부분은 일상 생활을 소재로 - 특히 이사에 대해서 - 에서 지극히 평범하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단편들이, 뒤에는 제목에 걸맞게 붉은귀 거북이라던가, 야생동물 마미와 같은 동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동물 마미에 대해 그려낸 <<마미>>는 panpanya 작품 치고는 꽤 큰 스케일 - 일종의 대형 로봇까지 등장하는 등 -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무지나>>는 마미와 똑같은 동물인 무지나가 등장하는데, <<마미>>와는 다르게 일상과 결합된 전개를 보여준다는게 재미있었어요. 주인공이 무지나를 구해주자, 무지나는 은혜를 갚기위해 도토리를 가져오고 주인공이 도토리로 빵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전개되거든요. 같은 동물로 정 반대 분위기의 이야기를 그려낸, 일종의 '빛과 그림자'인 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쪽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panpanya 특유의 상상력과 기발함이 가득하며, 뒤에 용어집이 수록되어 있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 - 10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환상의 동물 츠치노코를 발견하고 난 뒤 생활을 그린 <<츠치노코 발견하다>>, 츠쿠바산 관광 이벤트에 당첨되어 말하는 여행권과 함께 투어를 떠나는 꽤나 긴 이야기인 <<츠쿠바산 관광 불안내>>, 쓰레기도 돈을 주고 사는 상점에 대한 <<도가니>>는 기발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 가공의 세계관을 재미나게 묘사한 작품들입니다.
표제작인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은 주먹밥이 굴러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내용인데, 비현실적인 설정을 일상과 결합하고, 그것을 '연구'하면 어떤 결과물이 될까?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고요.
언덕 위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올라가는 <<거기에 언덕이 있으니까>>와 카스텔라풍 찜케이크의 맛에 빠져 잘 수급되지 않는 찜케이크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카스텔라풍 찜케이크 이야기>>는 일상의 디테일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 등장하는 짤막한 일기도 이러한 일상성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환상, 기발한 설정, 연구, 일상 등 panpanya의 대표적인 매력 포인트를 잘 알려주는 좋은 작품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의 차이가 뭘까요? 좌석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하네요. <<츠쿠바산 관광 불안내>>에 나옵니다!


물고기 사회 - 6점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일상'을 특별하게 그려내는 panpanya의 매력 포인트가 잘 살아있는 작품집. 
<<맞지않는 계절>>은 크리스마스 산타 썰매의 순록은 아르바이트였고, 썰매도 평상 시에는 주차 중이라는 독특한 일상성이 좋습니다. 일상과 환상의 결합을 보여준달까요. 기묘한 일상성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매력적이었어요. 여행을 갔다가 이상적인 기념품을 직접 만드는 <<선물의 마음가짐>>이 대표적입니다. 최애빵 '카스텔라 풍 찜 케이크'를 소재로 한 연작은 일상성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카스텔라 풍 찜 케이크 생산 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생산품을 구하기 위해 편도 2시간 반 걸려 3개를 확보한다던가 -서울에서 대전 정도를 가서 호두과자를 사온 느낌 -, 직접 만들기위해 다양한 연구를 거치고, 생산이 재개된 후 재 구입을 위해 발품을 팔다가 안정적인 주문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을 담담하지만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레시피 소개도 충실하고요.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에요.


하지만 물고기가 진화하여 인간의 해산물 가공 공장을 인수하여 자체 통조림을 납품하게 된다는 표제작은 별로였습니다. 일상도 아니고, 환상으로 보기에는 상상력이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상 쪽에 집중하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