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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1

2018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7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15차, 열 다섯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8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40 (52)권, 기타 장르문학 3 (3)권, 역사서 9 (1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8 (9)권, 기타 도서 21 (20)권으로 모두 91 (101)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 작년보다는 독서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한달에 7~8권 수준이면 뭐 나쁘지는 않네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8년 베스트 추리소설 :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올해 추리 분야 도서 중 유일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소설이 아니라는게 유일한 단점입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2018년 워스트 추리소설 : "유령탑" 

사실 모리 히로시의 사이카와 모에 시리즈 중 한 권인 "지금은 더 이상 없다"도 올해 별점 1점을 받은 망작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과 그림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고 팔아먹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빠 단독 워스트로 선정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과 설명을 제외하면 건질만한 부분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디 다른 분들은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8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3권, 그 중에서도 두 권만이 정식 출간된 책이라 따로 선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발 살인사건""마음의 지배자" 모두 좋았어요. 두 작품 모두 단편집인데 별점 4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말이죠.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8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원더랜드"

역사 관련 서적을 10권 이하로 읽은건 오랫만이네요. 다행히 별점 4점짜리 책은 언제나처럼 존재합니다. 유희와 놀거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한 이 책입니다. 제 리뷰로는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취미와 오락, 유희 관련 문화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년 워스트 역사 도서 : "만물의 유래사" 

미시사 서적과 백과 사전류를 좋아해서 충동 구매한 책인데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위해 만든 시대 착오적인 결과물입니다. 확실히 백과 사전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2018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늑대를 요리하는 법"

올 한해 제법 많이 읽었는데 별점 4점짜리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은 충분했을터라 베스트 도서로 선정합니다.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참고가 될 내용도 많은 좋은 책이에요.

2018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소주 이야기"

미시사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두서가 없고, 소주 자체에 대한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저자 스스로 석달 자료 조사를 거쳐 열흘 만에 쓴 책이라고 하는 말 만큼이나 내용이 두서없는 졸작입니다. 저렴한 가격만이 장점입니다.

2018년 베스트 기타 도서 :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이번 해에 기타 도서의 베스트는 별점 4.5점에 빛나는 이 책입니다. "깃털",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아주 오래된 서점"의 별점 4점 트리오는 조금 아깝네요.

2018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올해 기타 도서는 별점 2점 아래가 없어서 워스트는 딱히 꼽지 않겠습니다. 별점 2점으로 워스트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결산평 : 15년 째라니... 강산이 변해도 이제 한번 반이 변했네요.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냈다는게 너무나 기쁩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8/12/30

10년 만의 인사이트 밀 - 요네자와 호노부 / 최고은 : 별점 2.5점

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학산문화사(단행본)

2008년 발표된 작품입니다. 저 스스로는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라고 부르는 장르물의 대표작이자, 요네자와 호노부의 출세작 중 하나이지요. 2010년에는 영화까지 제작되어 개봉되었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연말을 맞아 책 정리를 하다가 10년만에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처음 읽는 것처럼 읽을 수 있었네요.

재미는 있지만 비현실적인 설정은 조금 거슬린다는 개략적인 느낌은 10년 전과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후 읽었던 다른 유사 장르물에서는 "일단의 무리를 폐쇄 공간에 모으는 이유"를 설득력은 떨어지지만 복수, 살육극의 중계 등으로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내용을 전부 무시하고 "암귀관" 에서의 이야기만 묘사하는게 특이합니다. 문제는 선택과 집중 측면에서는 바람직할 수는 있는데 솢릭히 완성도 측면에서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이지요.
또 유사 장르물에 비하면 "암귀관" 에서의 게임 조건(?) 도 그다지 잘 짜여져 있지 않습니다. 작중에서는 니코틴을 가장한 "약살"이 파워 밸런스를 붕괴시킨다며 문제삼지만, 사실 전체적인 흉기의 파워 밸런스 자체가 문제인 탓입니다. 멋을 부리면서 유명 추리소설에 등장한 흉기를 배치하고, 이를 트릭으로 삼은건 그렇다쳐도 공기 피스톨과 보우건, 슬링샷같은 원거리 무기를 확보한 사람이 유리한건 당연하니까요. 밧줄이나 자살용 칼은 정말이지 이게 뭔가 싶네요.
그리고 10년 전에는 무심히 넘겼지만, 모든 식사가 포크나 나이프와 같은 흉기가 될 도구가 불필요한 샌드위치나 도시락으로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도 역시나 문제입니다. "젓가락"도 충분히 흉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지막 에필로그는 솔직히 불필요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10년의 세월 동안 0.5점이 감점되었는데, 이는 보다 나은 다른 유사 장르물이 많이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기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의 원형 중 하나로 다시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건 분명합니다. 다만 유사 장르물에서 손에 꼽을 걸작은 아닌 것이지요.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8/12/29

술 취한 식물학자 - 에이미 스튜어트/ 구계원 : 별점 3점

술 취한 식물학자 - 6점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구계원 옮김/문학동네

부제인 "위대한 술을 탄생시킨 식물들의 이야기" 그대로 을 만들때 사용되는 다양한 식물들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친숙한 사과나 보리, 포도, 쌀 등 고전적인 술의 원료에서 시작하여 바나나와 카사바와 같은 이색적이고 독특한 재료들,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 꽃과 나무, 열매들, 견과류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망라되고 있습니다. 이 재료로 만들어진 술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관련된 칵테일 레시피도 50여가지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요. 집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재료인 경우, 그 재배법까지 실려있고요.

분량도 400여 페이지를 훌쩍 넘어서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마시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술에 대한 소개입니다. 켄터키 버번이 첫 번째입니다. 켄터키가 지금과 같은 버번의 땅이 된 이유가 아주 매력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옥수수가 재배하기 쉬웠고 초기 이민자들이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출신이라 증류기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풍부한 석회암 매장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석회수는 지하에서 솟아 나올 때 1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이 온도는 냉각과 응결 과정에 꼭 맞는 완벽한 온도라네요. 석회수의 높은 알칼리성과 풍부한 칼슘, 마그네슘, 인산 함유도 맛을 더해주는 요소고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한 번 구입해야겠어요.
담배로 만든 술인 프랑스의 "페리크 리쾨르 드 타박"도 맛보고 싶습니다. 니코틴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데 과연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합니다. 참고로 담배로 고급 술집에서 수제로 "시가 비터즈"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담배와 향신료를 알코올 도수 높은 증류주에 우려내는 것으로 지나치게 많은 니코틴이 함유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군요.
포틀랜드 증류업자 스티븐 매카시의 갖은 노력으로 완성된 미송 증류주도 탐납니다. DOUGLAS FIR BRANDY 라는 술인듯 한데 1년에 250상자만 제조하는 술 치고는 가격도 5만원대로 저렴하군요. 우리나라에서 구하려면 그 배를 주어도 구하기 어렵겠지만요.

갖가지 토막 상식도 재미를 더합니다. 금주법 시행 당시 캘리포니아의 포도 재배 업자들은 "과일 벽돌"을 팔았다고 합니다. 포토를 말려서 압축한 뒤 와인 제조용 효모와 묶은 상품으로 물을 더하면 양조가 시작되는 물건이었다는군요. 아이디어가 정말 빼어나죠?
또 프랑스 포도나무는 19세기 포도나무뿌리진디에 의해 초토화 된 후 미국 포도나무와 접목하여 살아남은 것이며, 현재의 칠레 와인이 포도 나무 뿌리 진디 이전의 포도나무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이유 외에도 칠레 와인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은 셈입니다.
호밀이 맥각균에 감염되면 LSD 성분이 생기고, 이 맥각중독이 중세의 무도병의 원인이라는것도 마찬가지로 처음 알았고요. 마약 중독자라면 호밀 재배를 시도해봄직 하겠네요.
"그로그"는 영국에서 선원들에게 럼을 배급할 때 홀랑 마셔버리지 않게 물과 라임 주스, 설탕을 섞어 배급한 음료입니다. 그런데 럼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선원들의 의심이 커지자 비중을 증명하기 위해 럼과 화약을 섞어 불을 붙이는 테스트를 했다는군요. 대략 57% 정도의 알코올이 함유되어야 불이 붙었다는데, 이 테스트 결과를 "프루프 Proof" 로 제시한 것에서 현재의 프루프 단위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즉 57%의 알코올이 함유된 병은 100 프루프인 것이죠. 미국에서는 더 간략화해서 50%의 알코올이 100 프루프고요.
그 외에도 중국 요리에 많이 사용하는 "팔각"은 허브 리큐어에도 사용되지만 독감약 "타미플루"의 원료이다, 스위트 우드러프라는 여러해살이 풀의 "달콤한 풀내음"은 잠재적 독성 성분인 쿠마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표시이다는 등의 설명도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풀내음에 대한 설명은 정말 맞는 말인지 궁금하네요. 달콤한 풀내음을 가진 풀은 많으니까요. 의외로 우리나라 들판에도 독초가 가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록된 칵테일 레시피도 볼게 많은데, 감자로 만든 보드카인 스웨덴의 칼손스 골드 보드카로 만든 "블랙 골드"는 심플함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칼올드패션드 글래스에 얼음을 채운 후 그 위에 칼손스 골드 보드카 1과 1/2온스를 붓고 후추를 갈아 뿌리는게 전부거든요. 상당히 터프한 느낌인데 맛이 궁금하네요.
사케 칵테일은 니코리 사케 4, 망고 복숭아 주스 2, 보드카 1, 도멘 드 캉통 진저 리큐어 소량을 잘 섞은 뒤 칵테일 잔에 따르고 셀러리 비터즈 한 방울을 떨어트려 만듭니다. 대충 느낌은 복숭아맛 호로요이 느낌이 아닐까 싶군요.

이렇게 많은 정보가 수록된, 술과 관련된 식물의 백과사전이라 해도 무방한 책으로 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소장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단순 정보의 나열 뿐이라 읽는 재미가 덜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8/12/23

그린치 (2018) - 스콧 모지어, 야로우 체니 : 별점 2.5점

크리스마스를 맞아 딸아이와 함께 감상한 신작 애니메이션. 저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보고 싶었습니다만, 딸아이의 강력한 요청을 이길 수 없었네요.

유명 동화가 원작인데다가 이미 십여년 전, 짐 캐리 주연의 영화까지 개봉되어 내용은 새롭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덕분에 영화 버젼보다는 더 아이들 취향에 잘 맞게끔 제작되었습니다.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는 각종 아트웍도 굉장한 볼거리이고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 건 그린치의 충견 맥스에 대한 묘사입니다. 과거 영화버젼을 능가하는, 충견 캐릭터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로밋과 쌍벽을 이룰만큼의 충직함, 똑똑함에 귀여움까지 갖춘 캐릭터로 그야말로 작품을 하드캐리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아동 취향인 탓에 그린치의 사악함이 잘 묘사되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너무 개그로 소비되는 묘사가 많아서 악당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그냥 조금 심성 삐뚤어진 어른 정도로 보여서 극적 긴장감을 잘 불러 일으키지는 못한 탓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심리 묘사도 썩 잘 되어 있지 않아서 크리스마스를 훔치는 작전에 감정 이입하기도 힘들었고요.
차라리 대단한 천재 발명가이지만 외톨이로 동굴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설정을 잘 살려서 "배트맨" 느낌으로 풀었더라면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노린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맥스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 오프가 나와주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보다 조연이 인기를 얻는 "미니언즈"처럼 일루미네이션 스튜디오의 전통으로 자리잡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조금 생기네요.

2018/12/22

취미의 탄생 - 진노 유키 / 문경연 : 별점 2점

취미의 탄생 - 4점
진노 유키 지음, 문경연 옮김/소명출판

확실히 연말은 연말이네요. 블로그 운영은 물론 기본적으로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합니다. 하여튼, 이 책은 일본에서 "취미"라는 말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취미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 인문학,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책에 따르면 "취미" 라는 말이 돌연 널리 사용된 시기는 메이지 40년 전후이며, 처음에는 문학 방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며 의미가 다양한 의미로 확장된 건 일본이 근대적 소비 사회로 성숙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취미는 다양한 상품,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미쓰코시 백화점의 발전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백화점에서 유행을 연구하고 유행을 만들어내기까지 한 "유행회"를 조직해 운영하였으며, 다양한 전람회 등을 개최하고 잡지까지 발간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유행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결국 백화점이 취미와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백화점의 활동, 상품을 통해 일본이 단순하게 서양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인게 아니라 일본의 느낌을 유지하여 융합시킬지를 고민해 왔다는 점에 눈에 띄입니다. 파리의 일본 대사관 인테리어에 적용된, 양풍과 화풍을 결합한 이른바 "화양절충"이자 "미쓰코시 취미"라고 불리우는 테이스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에도 서양 문물을 들여와 자국화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확실히 디자인 강국 일본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선명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도판과 함께 설명하며 이해를 돕는 것도 좋았고요.

하지만 논문에 가까운 글로 그다지 재미가 있지는 않으며, 지나치게 지엽적인 부분만을 다루고 있어서 많은 분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책은 아닙니다. 저도 몇몇 포인트 외에는 딱히 소장하거나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300페이지도 안되는데 양장본으로 제작되어 가격이 제법 나간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일본의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백화점 중심 문화사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8/12/16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

1년에 한 번씩 그해 출간된 작품 기준으로 국내 (일본) / 해외 작품 순위를 발표하는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고노미스) 가 3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리스트를 총 망라하여 베스트 10을 선정하여 발표했네요. 국내 최고의 추리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스터리에서 보고 퍼 옵니다. (원문)

그런데 순위가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 개인 기준으로는 도저히 순위에 오를 수 없는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탓입니다. 단지 작품의 완성도 뿐 아니라 인기와 영향력을 감안해서 순위를 정한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신주쿠 상어"는 추리적으로 완성도는 그닥이지만 일본식 하드보일드의 전형으로 수많은 아류작과 이종 컨텐츠를 낳은 공을 높이 산 것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생각해보아도 "유니버셜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고백"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하여튼,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외 작품은 저도 많이 읽지 못했는데 부지런히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 2020.11.29 "골든 슬럼버", "개의 힘" 리뷰 링크 추가

(국내편) 

#1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2 64, 요코야마 히데오 

#3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4 화차, 미야베 미유키 

#5 신주쿠 상어, 오사와 아리마사 

#6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7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8 골든 슬럼버, 이사카 고타로 

#9 奇術探偵曾我佳城全集 기술탐정 소가 가조 전집, 아와사카 쓰마오 

#10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로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해외편) 

#1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2 개의 힘, 돈 윈슬로 

#3 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4 A Touch of Frost, R. D. Wingfield

#5 Pop. 1280, 짐 톰슨 

#6 심플 플랜, 스콧 스미스 

#6 The Crime Machine, 잭 리치 

#6 콜드 문, 제프리 디버 

#6 Flicker, Theodore Roszak 

#10 탄착점, 스티븐 헌터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 - 프랭크 에이헌 / 최세희 : 별점 2점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 - 4점
프랭크 에이헌 지음, 최세희 옮김/씨네21북스

오랫동안 스킵 트레이서, 즉 의뢰인이 요청한 누군가의 그 어떤 정보도 찾아서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사람이 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방법에 대한 책입니다.

그런데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일단 저자의 직업부터가 사기꾼 같아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잘 모르겠어요. FBI 운운하면서 잠적을 원하는 사람의 어설픈 행동을 우연히 본 게 계기였다는 책을 낸 동기 등 전체적으로 허세가 가득해 보여서 별로 와 닿지 않더라고요.
반 이상의 분량이 미국에서의 삶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표적인게 여러차례 언급되는 선불카드와 선불폰 사용인데, 이건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기 쉽지 않잖아요? 여러개의 사서함을 통해 오프라인으로 우편물을 받는 거창한 방법에 대한 소개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해서 우편물을 직접 받을 이유가 우리나라에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즉 이 책에 수록된 흔적없이 사라지는 방법 중 우리나라에서 사용 가능한 방법만 추린다면, 모든 소셜 네트워크를 탈퇴하고 계정을 삭제하라, 온라인에 올려 놓은 개인에 대한 정보도 모두 삭제하라, 새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은 공공망에서만 이용하라 정도입니다. 솔직히 이 뿐이라면 너무 단순해서 책을 살 필요도 없지요.

인터넷 시대를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내용들도 문제입니다. 스킵트레이스가 소셜엔지니어링을 통해 잠입을 원하는 사람의 예전 주소를 손에 넣은 후, 근처 서점에 전화를 걸어서 거기서 어떤 책을 샀는지를 보고 도피하려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다는 내용처럼요.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는 현재 트렌드를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책 구입 목적이 도피하려는 지역에 대한 정보라면 인터넷 검색을 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런걸 대단한 사례인 것 처럼 내세운다는 점에서 영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이 책 보다는 찬호께이의 "망내인" 쪽이 소설이기는 하지만 현재 시점의 개인 정보 획득 측면에서는 더 설득력이 높습니다.

물론 잠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실효성 있는 정보가 없는건 아닙니다. 실제 저자가 경험했던 다양한 정보 획득 사례와 경험에서 비롯된 각종 팁들도 인상적이고요. 그 중에서도 특히 채무 관련 팁은 눈여겨 볼 만 했어요. 가는 곳이 어디 건,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갚아야 하는데 이유는 잠적은 채무를 없애주지 못하며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빚투' 라는 말로 최근 불거진 요새 분위기에 정말로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싶더군요.

하지만 장점보다는 국내에서는 써먹기 어려운 과장된 이야기가 대부분이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잠적에 관한 컨텐츠를 기획하는 분이라면 실제 사례 참고 차 한번 쯤 읽어볼만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권해드리기 어렵네요.

2018/12/15

18세기의 맛 - 안대회 외 : 별점 2.5점

18세기의 맛 - 6점
안대회.이용철.정병설 외 지음/문학동네

18세기의 문화를 음식과 함께 잘 소개해주는 인문학, 미시사 서적으로 모두 23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된 글을 묶어 출간한 책인데, 연재 당시 몇몇 글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구입해 보았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에 대해 연관된 음식과 함께 소개해준다는 아이디어도 좋고, 결과물들도 상당한 수준이기는 합니다. 전문가다운 독특하면서도 새로운 시각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버터의 확산은 카톨릭에서 이탈한 나라와 일치한다던가, 감자가 확산이 늦어진 이유는 당대의 오해와 의혹인데 이를 감자를 소재로 해서 작품을 남긴 유명 화가는 민중 화가인 밀레와 고호밖에 없다는 사실과 연결시키고, 파스타는 18세기에 부유층만 소비하는 고급 음식으로 이를 "그건 마카로니야"라는 당시 속어로 드러내는 등의 방법이 그러합니다. 커피는 남성적 담론을, 홍차는 여성적 담론을 상징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진은 사회적 폐혜를 불러일으켰지만 맥주는 활력과 번영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호가스의 그림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와 같이 도판이 중요한 이야기가 많은데, 이를 위한 도판 및 그 외의 각종 참고 자료 역시 최고 수준입니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모두를 아우르는 등 다루는 범위도 넓습니다. 복어와 식용 국화, 삼해주와 조선의 술 문화 등을 통해 음식 그 자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아요. 이 중에서는 항상 궁금했던 "솔잎"을 먹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신선들이나 무림 고수들이 먹는 나름 괜찮은 음식으로 알았는데 심한 변비를 일으킨다는 건 처음 알았거든요. 하긴, 몸에도 좋고 맛있었다면 지금도 많이 먹고 있을테지요. 변비를 극복하고 맛을 좋게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도 상세하게 소개되어 무척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지엽적인 이야기 소개에 그치는 내용도 적지 않고, 어떤 이야기는 너무 좁은 분야에 매몰되어 소개되는 등 전체적인 수준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문가다" 라는 인식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너무 어렵게 쓴 글들이 적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네이버 캐스트 연재물이라면 독자를 고려해서 조금 더 쉽고 일상적으로 써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 "18세기에 대한 인문학"을 "음식"으로 잘 드러내는 글들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감점 요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문가들의 식견이 느껴지는 좋은 글들도 많지만 전체적인 글들의 편차가 일정하지 않은 등의 단점도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몇몇 특정 주제만큼은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문성이 느껴지는 만큼,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번 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8/12/09

호텔 - 도미타 쇼지 / 유재연 : 별점 2.5점

근대 일본에서 호텔이 형성되는 과정을 당시 분위기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이 책을 통해 근대 일본 호텔의 역사에서는 크게 3개의 키워드가 도출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 그건 바로 외국인과 서구화, 그리고 철도죠.

우선 외국인은 호텔의 역사에서 떼놓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최초에 호텔이 생긴 이유도 외국인들 대상의 숙박 업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니까요. 우리나라만 해도 최초의 호텔로 유명한건 "손탁 호텔" 이기도 하지요. 이후 요리가 유명한 작은 호텔들이 한, 두 개씩 생기다가 정부 주도의 영빈관 호텔이 들어서면서부터 "서구화"가 추진됩니다. 일본이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이후라서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서구화"를 강하게 추진한게 그 이유로, 당시 도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독일인 의사 베르츠는 일본인들이 고유 문화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렇게 서구화가 국가의 핵심 과제인 상황에서 외국인 손님들, 특히 영국 황태자같은 외국 왕실 일가가 방문을 하게 되면서 서양식 호텔을 서둘러 건축하고, 이는 각 지방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천황 일가의 방문도 겹쳐서 더욱 영빈관스러운 분위기를 추구하게 된 것이고요. 아울러 서구화는 단지 건축 양식 뿐 아니라 식사 및 호텔의 각종 운영 방식 모두가 포함되어 서비스됨으로써 전통 "료칸"과 더욱 차별화되게 됩니다. 결과야 어쨌건 결국 이를 통해 서구 문화를 접하게 되었기에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비싼 가격으로 "고급" 이미지가 함께 형성된 건 덤이라 할 수 있겠죠.

이후 각 지역 관광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관광지와 함께 생겨난 호텔이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광지는 교통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 휴양지 중 하나인 가루이자도 요코가와와 가루이자와 간 아프트식 철도 개통으로 피서객이 급증한게 발전의 가장 큰 이유라네요. 이렇게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숙소가 필요해져 호텔이 속속 도입되게 되었고요. 비슷한 내용은 "에키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철도 회사가 호텔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식민지 만주에서는 주요 철도역마다 "만철"이 운영하는 거대 호텔이 들어섭니다. 서구화 단계를 지나선 일본이 식민지 사람들이 외경심을 갖게끔 거대하고 웅장한 호텔을 짓기 위해서였다는데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심지어 부산과 경성에 세웠던 호텔마저 소개되니까요. 다행히 이 책의 저자는 식민지에서의 호텔 산업은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고 쓰고는 있습니다만, 씁쓸합니다.

이 세 개의 큰 키워드를 중심으로 실제로 세워졌던 다양한 호텔들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는게 주요 내용인데 지금은 사진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호텔이 대부분이며, 호텔 건설 및 운영에 참여한 인물들 소개는 딱히 관심이 가지 않는 등 조금은 불필요한 내용이 많은건 아쉽습니다.
특히나 여러 인물 소개는 영 별로입니다. 인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으로 실제로 뭘 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단순히 호텔을 세우거나 운영한 사람들이 많아서 뭐 이렇게까지 소개했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또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등 유명 인사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재미있기는 했지만 분량에 비하면 소개되는 호텔과 인물이 과한 편이라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이럴 바에야 이전에 읽었던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처럼 주요 호텔에 보다 촛점을 맞추어 소개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근대 일본의 분위기, 시대상을 호텔이라는 소재로 잘 드러낸 내용은 마음에 들고 당대 문화(특히 숙박업과 관광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사료적 가치가 크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나름의 가치는 확실하니 근대 일본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18/12/08

블로그 개설 15주년

블로그 개설 15주년

블로그 이웃이신 est님 포스팅을 보다가 우연찮게 확인해보니 저도 15주년이네요(15주년 +1일).

총 포스트는 3,046개이며 총 1,187,749명께서 다녀가셨습니다.

15년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대단합니다. 저도 est님처럼 이글루스 서비스가 유지되는 한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별 인기도 없고 방문자 수도 격감하고 있지만 그래도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원더랜드 - 스티븐 존슨 / 홍지수 : 별점 4점

원더랜드 - 8점
스티븐 존슨 지음, 홍지수 옮김/프런티어

"재미와 놀이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을까" 라는 부제로, 여러가지 대중 오락에 얽힌 역사를 풀어나가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의미있는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냥 재미와 유희, 놀이를 통해 만들어진 무언가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무언가에 이르른 갖가지 사례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재미 외에 특별한 목적이 수반된 경우도 있습니다. 자주색 염료를 만들 수 있는 뮤렉스 달팽이를 찾아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는 활동은 명백히 "돈"을 위함이니까요. 책에서는 이 역시 자줏빛 의상이 그것을 걸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요. 즐거움을 주는 물건들은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상업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신기술을 개발해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논리인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요.

첫번째 단락은 상점을 무대처럼 장식하여 고객을 사로잡고, 구매 행위를 일종의 오락처럼 만드는 과정과 면직물의 유행을 통해 산업 혁명이 촉발된 후 "유행"이 "소비"를 창출하여 "백화점" 이 등장하는 과정, "쇼핑몰"이 도시 계획과 맞물린 후 미래 도시의 비젼을 제시했다는 내용입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는 각종 악기의 발전과 오르골 등을 거쳐 로봇 공학과 자동 방직기로 이어집니다. 방직기는 프로그래밍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요.
악기의 발전은 전문적인 공학의 발전과 맞물려야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리고 음악 관련 기술의 발전이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 이르는 과정 모두가 굉장히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유희, 즐거움이라면 미식이 빠질 수 없죠. 향신료 교역이 불러온 갖가지 이야기도 소개되는데, 로마 제국이 후추에 너무나 열광해서 아피키우스의 요리책 조리법의 80%가 후추를 사용한다는 이야기 같은 잡학이 가득해서 마음에 듭니다. 프랑스인 푸아브르가 네덜란드가 독점하다시피 한 정향을 빼돌려 재배에 성공한다는 일종의 산업 스파이 이야기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향신료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사치품 지위를 유지한게 바닐라라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네요. 토머스 제퍼슨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조리법을 미국에 도입했다던가, 가루받이가 어려워 퍼지기 어려웠지만 한 노예 소년의 아이디어로 양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이 노예 소년 이야기가 향신료 교역을 상징합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멕시코에 자생하는 식물을 인도양에 있는 한 섬에서 프랑스인이 재배했고, 프랑스 노예상인들이 그 섬에 데려온 아프리카인의 후손인 한 소년이 그 꽃을 최초로 가루받이 했다" 는 이야기니까요.

다음에는 만들어진 "환영" 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영화의 전신인 특수 효과 공연과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유령 쇼 "팬태즈머고리아", 풍경을 실제처럼 느끼게 해 주는 파노라마 전시, 활동 사진과 월트 디즈니의 혁신, 이윽고 등장하게 된 "유명인들" 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다양한 도판과 함께 설명됩니다. 이러한 시각 효과를 활용한 오락거리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침투했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고찰이 함께 진행되는데,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게임 또한 빠지지 않습니다. 여기 소개된 단락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인데 체스 게임은 "비유"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도입부부터 신선했고, 이를 통해 인공 지능이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게임이 된 보드 게임 (모노폴리) 등 모든 소개 내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공 놀이"가 고무라는 혁신적인 물질의 역사로 이어지는 과정과 비디오 게임의 등장이 컴퓨터를 재미로 쓸 수 있다는 혁신적인 발상의 시작이었으며, 덕분에 컴퓨터가 일상 생활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마지막은 다양한 놀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선술집에서 시작해서 커피 하우스, 박물관, 동물원, 공원 등의 역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즐거움, 놀라움을 추구하는 인간이 얼마나 새로운 걸 많이 만들어내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혁신을 하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재미있게 즐기는 마음가짐이 필수일 듯 합니다. "즐기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옛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닌거죠. 또 단지 혁신에 대해 되새겨 보는 측면 외에도 다양한 놀거리와 즐길거리에 대한 미시사 서적으로도 탁월해서 만족스럽네요.
글의 내용이 통사적 구분이라기 보다는 주제별로 좀 널뛰는 감이 없잖아 있다는건 단점이지만 장점에 비하면 극히 사소합니다. 도판도 충실한 편이고요. 이렇게 취미에 가까운 놀거리, 즐길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최소한 엉망인 제 리뷰보다 훨씬 좋은 책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참고로 책 뒤 "감사의 말씀"을 보니 방송 프로그램을 책으로 만든 듯 싶더군요. 책보다는 방송으로 보는 게 훨씬 나은 내용일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방송으로 봤다면 4점 이상도 줬을 것 같습니다.

2018/12/02

세계 탐정 사전?

창작자가 컨텐츠를 기획하여 올린 후, 후원을 받아 목표를 달성하면 후원자들에게 컨텐츠를 제작하여 배송하는 시스템을 갖춘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가 있습니다. 색다른 컨텐츠가 소개되곤 해서 가끔 들여다보는 중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희", "중국집" 등이 텀블벅 후원을 통해 손에 넣은 책이고요.

오랫만에 들어가보니 "52인의 탐정들을 만나다. "세계 탐정 사전"" 이라는 책이 올라와 있더군요.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라 후원을 해 볼까 하고 내용을 좀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굉장히 실망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서네요. 무엇보다도 이들이 소개하는 52인의 탐정 명단이 아주 가관인 탓입니다. 만화 "명탐정 코난" 의 책 앞날개에 소개되는 "코난이 찾은 명탐정" 을 그대로 베꼈거든요. 아니, 제대로 베끼지도 못했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명단을 삭제했는데 대표적인 예는 아르센 뤼팽과 쥘 메그레의 명단 삭제입니다. 그 외에도 룰타비유까지 삭제된걸 보면 프랑스인을 싫어하나 싶은 의심마저 생기는군요. 이렇게 영미권과 일본 탐정만 소개할거면 "세계" 라는 제목은 가당치도 않죠.
이렇게 국내에 소개된 탐정들은(심지어 뤼뺑은 전작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멋대로 뺀 주제에, 국내에 제대로 소개도 되지 않은 아사부키 리야코, 사시치, 다카기 요시부미, 브롱크스의 어머니, 코코, 칸헤 다이스케, 제니가타 코이치, 센바 아코주로, 이바라키 칸키, 타라오 반나이 등은 명단에 있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탐정들이라도 이들보다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고 더 유명한 탐정은 여러 명 될 겁니다. 가가 교이치로, 미타라이 키요시, 아사미 미츠히코, 사와자키, 에노모토 케이, 엔시씨, 아 아이이치로, 삼색묘 홈즈, 사이카와 - 모에, 류몬 다쿠, 스스키노 탐정, 우라조메 덴마 등등등....

결론적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세계 탐정" 에 대한 기준이 없으며, 원작을 읽어본 후 탐정을 선정해서 소개하는 사전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때문에 저는 후원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전 "탐정 사전" 이라는 책 리뷰에서도 언급했듯, "세계의 명탐정 50인" 시리즈를 재간행하는게 훨씬 나을겁니다.

2018/12/01

오래된 책들 (5) - 매거크 소년 탐정단 3 : 사라진 신문배달 소년

딱히 포스팅꺼리가 없을 때 업로드하려고 모아놓은 오래된 책들 이야기 다섯 번째입니다. 

아동용 추리, 모험물인 매거크 탐정단 시리즈 중 한 권으로 1984년도 출간된 책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 굉장히 좋아해서 전 시리즈를 구입했었는데 본가에서 오랫만에 확인해보니 두 권 밖에 남아있지 않네요. 다 어디 갔나...

지금은 "맥거크 탐정단" 이라는 이름으로 몇 권이 새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소장 가치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번에 바뀐 컬러풀한 삽화보다는 옛날 버젼 삽화가 저는 더 친숙해서 마음에 듭니다. 캐릭터들도 옛 버젼이 특징을 더 잘 살린 것 같거든요.

그래도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기에 재출간은 환영할합니다. 요새 어린이들이 이 책을 읽고 추리 문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2018/11/30

위스키의 지구사 - 케빈 R. 코사르 (주영하) / 조은경 : 별점 2.5점

위스키의 지구사 - 6점
케빈 R. 코사르 지음, 조은경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눈에 띌 때마다 한 권씩 사 모으고 있는,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출간된 "~ 지구사"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이번에는 제목 그대로 위스키의 역사를 다루는데, 위스키란 곡물을 발효시킨 후 증류하여 만든 술이라는 정의에서 시작하여 기본적인 제조 방법의 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스키의 기원이 무엇이며 "위스키"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등 실제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위스키'가 '우스키', 즉 '생명의 물'을 뜻으로 '오스케바'라고 발음되는 게일어를 영어화한 것이라는데 재미있네요. 어원부터가 '생명의 물' 이라니!

다음은 맨 처음 위스키를 만들었다는 스코틀랜드, 경쟁자였던 아일랜드, 신대륙 미국에서의 국가별 위스키 역사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 위스키는 저도 무척이나 좋아하는터라 소개가 반가왔습니다. 그다지 잘 알려져있지 않은 아일랜드 위스키의 역사도 흥미로왔고요. 아이리시 위스키는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데 로크스 (locke's)라는 싱글 몰트 위스키는 구할 수 있다면 한 번 구해보고 싶네요. 미국 위스키의 역사는 정착민이 처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등 전반적으로 새로운 내용은 많지 않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이 위스키 애호가라는 등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괜찮았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 전쟁 당시 군대에 항상 충분한 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무척 놀랐네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던걸까요? 이후 알 카포네 등으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금주법 시대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고요. 그리고 "21" 이라는 제목으로 현재의 위스키 시장과 상황을 설명하며 내용은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지구사' 뒤에 한국의 음식 문화 전문가 주영하 씨의 한국 위스키의 역사가 특집으로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본편보다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처음에 위스키를 발음대로 '유사길' 이라는 한자로 표시했다는 내용부터 대한 제국 시절의 유통 과정, 일본 강점기 시기 위스키 시장의 확대와 위스키 원액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유사 위스키'의 등장, 그리고 해방 후 상황으로 이어지는 내용 모두 말이죠. 아무래도 우리 역사에 관련된 내용이라서 그랬던 것 같네요.

이렇게 대충이나마 통사적인 접근도 가능하고, '지구사'라는 말에 걸맞게 각 국가별 현황에 대해서 다루어 주기 때문에 위스키에 대해 대충이나마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역사만 서술된 것은 분명 아쉬운 점이지만 주영하 씨의 글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기도 하고요. 위스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으시다면 읽어보실 필요가 없겠지만, 이쪽 분야를 좋아하시거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11/25

피너츠 완전판 12 : 1973~1974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2.5점

피너츠 완전판 12 : 1973~1974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드디어 완전판이 제 출생년도에 진입하였습니다! 감개가 무량합니다.

수록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수년간 이어온 설정에서 유래된 개그가 많습니다. 찰리 브라운의 야구팀이나 여름 캠프같은 이야기이요. 조금 새로운 시도도 몇 개 보이는데, 대표적인건 찰리 브라운의 야구팀이 다른 이유로 몰수패당하기는 하지만 첫 승을 거두는 에피소드입니다. 저는 어떤 상황, 이유에서건 찰리 브라운이 감독, 투수로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이기지 못한 줄 알았는데 굉장히 의외였어요. 마찬가지로 패티가 스누피가 비글이라는 걸 알게된다는 것에도 놀랐고요. 영원히 모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학교 건물이 가장 독특했어요. 샐리 브라운과 대화하는(?) 식으로 등장하는데, 시각이 상당히 신선했어요. 아무도(심지어 샐리마저도) 정말로 답을 기대하며 대화를 하는게 아니지만, 실제로는 생각이 있다는 기묘한 설정을 잘 풀어나가고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면 처음으로 실체가 등장한 루시의 동생 리런은 좀 아쉽더군요. 라이너스와 크게 구분되는 특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 잊혀진 이유도 그래서였겠죠.

그 외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봉투를 뒤집어 쓴 채 참가한 여름 캠프에서 찰리 브라운이 대표로 선출되고 잘 나가는 에피소드들이 우선 떠오릅니다. 여러모로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들어요. 또 스누피의 대 기록(홈런 기록)을 앞두고 찰리 브라운이 견제사로 사망하는 에피소드는 최불암 시리즈의 오래된 옛 농담과 거의 비슷해서 좀 놀랐습니다. 아울러 이전 권들과 마찬가지로 당대 유행을 반영하는 에피소드들도 몇 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권에는 서머타임 시행 초기의 시행 착오와 스트리킹의 유행이 그러합니다. 오래된 작품이니만큼 이런 이야기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무엇보다도 이번 권에서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제 생일에 발표되었던 에피소드에요. 개인정보(?)라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서 꽤나 반가왔던 내용이라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빵빵 터지는 재미도 없고, 식상한 설정과 개그가 많아 감점합니다만 오래된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만 합니다. 여전히 은근한 개그도 매력적이고요. 이 정도 수준만 유지해 주어도 저는 만족합니다. 다음 권도 기대가 되네요.

2018/11/24

일본의 식문화사 - 이시게 나오미치 / 한복진 : 별점 2점

일본의 식문화사 - 4점
이시게 나오미치 지음, 한복진 옮김/어문학사

선사 시대( 정확하게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식문화를 정리한 책입니다. 특정 요리나 특정 시기만을 다루지 않고 통사적으로 전반적인 식문화사를 다루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을 꼽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조몬 시대 초 2만 명 정도였던 일본 열도의 인구가 조문 시대 중기 26만여명 까지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도토리, 상수리 나무 열매 및 각종 견과류가 식량 자원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수리 나무 열매는 동일 면적 대비 생산량으로 따지면 생산량이 많은 벼의 1/8에 해당될 만큼 생산량이 많아서 유용했다고 하네요. 이는 발굴된 당시 인골이 충치가 많은 것으로도 증명됩니다.
쌀이 주식으로 도입된 이유는 벼가 몬순 아시아에 적합하고 수확량이 많을 뿐더러 토양 침식이나 연작 장애가 없다는 농학적 장점에 더해 칼로리원이며 단백질도 우수하다는 영양학적 장점이 큰 덕분입니다. 부식물 없이 인체 유지를 위한 단백질을 쌀만으로 섭취하려면 체중이 70kg인 사람의 경우 조리하지 않은 쌀을 하루에 약 0.8kg 먹어야 하는데 이는 위장에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위장에 일단 채워두는게 가능했기에 유용했습니다. 이만큼을 밀가루로 섭취하려면 3kg을 섭취해야 하는데 이는 위장에 넣어두기 불가능한 양이라네요. 여튼, 이를 위해 농번기에 일본 농민은 하루에 1.5kg씩 쌀을 먹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고봉밥으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은 이유도 마찬가지겠죠.
식육의 공급은 여러모로 부족했고, 유제품 역시 거의 활용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기록에 남은 유제품은 '소'입니다. 유즙을 1/10로 졸인 음식입니다. 추측으로는 우유를 은근히 가열하여, 표면에 떠오른 막을 반복하여 걷어내 만든 유피일거라네요.

그리고 9세기 경에 현재에 계승된 전통적인 일본 요리의 기본적 조리법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차이점이라면 기름을 이용하는 요리법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육식을 하지 않아 동물성 지방, 버터를 이용할 수 없었고 식용유를 짤 수 있는 깨 등의 작물은 매우 비쌌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름진 맛이 진하고 품위없다는 인식이 정착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회의 형식도 같은 시기 확립되었는데, 공적 질서를 중시하는 전반부 음주가 끝나고, 자리를 바꾸어 예를 찾지 않는 2차회가 이어지는 2부 구성입니다. 현대와 똑같은데 이러한 형식이 헤이안 시대에 이미 확립된 것이라니 재미있네요.

그리고 다회, 가이세키 요리 등 지금도 친숙한 여러가지 용어가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네덜란드나 포르투칼 요리에서 비롯된 '난반 요리' 설명이 특히 재미있습니다. 서양식 요리를 일본식으로 변경한 아이디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가사키의 '히가도'는 참치, 무, 당근, 고구마를 주사위 모양으로 썰어 간장으로 맛을 낸 조림 요리로 원래는 소고기를 기름에 볶은 조림 요리라고 합니다. 소고기 대신 붉은 빛의 참치로 변경하고, 기름을 많이 쓰지 않는 일본 요리처럼 소테 과정을 빼고 조림 요리로 변화시킨 겁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전통적 식문화의 완성, 그리고 근대에 외국 요리가 대거 도입되며 일어난 변화로 식문화사를 정리하는데 이 과정도 난반 요리와 유사한 점이 엿보입니다. 대표적인게 우스터 소스의 사용입니다. 간장을 만능 조미료로 사용했던 전통적 식문화에 기반하여, 쌀밥에 어울리는 우스터 소스를 서양 간장으로 이해하여 이를 적극 활용하게 된 것이지요. 중국 요리가 일본적으로 변형되고, 여기서 '시나 소바'가 '라면'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같은 시각으로 설명합니다. 시나 소바는 원래 돼지고기와 닭뼈 스프에 구워서 조린 돼지고기를 얹고 후추를 뿌려 먹은 면 요리인데, 소바와 우동 등 전통적인 면류를 야식용으로 행상이 팔았던 것 처럼 야식으로 시나 소바가 활발히 팔리면서 일본적으로 변형된게 계기라고 말이죠. 그리고 예를 든 건 고명으로 차슈 외에 멘마, 나루토말이, 다진 파를 얹은 것입니다

이러한 식문화 역사가 1부 분량이며 2부에서는 식문화, 즉 예법과 용품, 조리법, 조리 기술 등을 망라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법과 용품에 대한 내용은 딱히 흥미롭지 않았으며, 조리법 등을 소개하며 사시미, 스시, 스키야키, 두부, 라멘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다른 관련 서적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30여 페이지에 불과한 3부인 세계로 뻗어나가는 일본 식문화에 대한 소개는 정말 볼 내용이 없었고요.

이렇게 기대에 미치지 못한 2부, 3부의 내용 외에도 책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도판이 부실한 점은 그렇다 쳐도 번역이 너무 엉망입니다. 보다 쉽게 쓸 수도 있었을텐데 너무 어렵고, 맞춤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오탈자도 많은 탓입니다. 번역을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요리 전문가가 했기 때문으로 보여지는데, 요리 전문가가 각종 용어에 대해서는 훨씬 잘 알 수 있기야 하겠지만 "제 2의 창작" 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번역의 역할을 너무 간과했습니다. 어찌되었건 20,000원이라는 가격에 어울리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국가의 식문화를 통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으로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완성도에 걸맞는 가격은 아니라서 감점합니다. 같은 이유로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18/11/23

맥파이 살인 사건 - 앤서니 호로비츠 / 이은선 : 별점 3점

맥파이 살인 사건 - 6점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고 없는 조용한 마을 색스비온에이번에서 대저택 파이 홀의 가정부 메리 블래키스턴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추도식을 맡은 목사, 음흉한 앤티크 숍 주인, 고인과 갈등을 겪은 아들, 시신을 발견한 관리인 등 등장인물들의 미심쩍은 행동과 죽음을 둘러싼 소문들이 밀도 있게 흘렀고, 이후 파이 홀의 주인인 매그너스 파이마저 기이한 죽음을 맞았다. 소식을 접한 탐정 아티쿠스 퓐트는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는데... 라는 내용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 최신작 "맥파이 살인 사건" 원고를 읽던 담당 편집자 수전 라일랜드는 소설의 결말이 누락된 것을 알아챘다.
원고를 전해 준 출판사 사장 찰스로부터 작가 앨런 콘웨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전은, 사라진 원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앨런의 자택과 주변 인물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앨런 콘웨이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작 중 최고의 인기 추리 소설 시리즈 중 하나인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맥파이 살인 사건"과, 이 책의 출판을 담당하는 클로버리프 북스의 소설팀 팀장 수전 라일랜드가 저자인 앨런 콘웨이 사망 사건에 얽힌 진상을 추적하는 두 개의 소설이 함께 수록된 작품입니다.
본 이야기 속에 하나 이상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일반적인 액자 소설이라기보다는 "맥파이 살인 사건"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완성된 추리 소설로 수전 라일랜드 이야기의 동기로 사용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보통 액자 소설은 본편 주인공에게 소설 내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 작품에서의 "맥파이 살인 사건"은 강력한 동기 외에는 딱히 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인기 시리즈로 베스트셀러가 확실한 작품인데다가 수전 라일랜드부터가 굉장한 추리소설 매니아라서 안 찾고는 못 배겼을 거라는, 굉장히 확실한 동기라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은 높습니다. 

문제는 "맥파이 살인 사건"이 앨런 콘웨이 사건에서 큰 단서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앨런 콘웨이가 추리 소설을 싫어하고 증오했는지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만 사용될 뿐입니다. 딱히 대단한 단서나 트릭이 숨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도구로의 사용도 대부분 앨런 콘웨이의 장난에 불과해서 크게 와 닿지 않고요. 오히려 "맥파이 살인 사건" 이라는 추리 소설 자체만으로의 완성도가 높은 수준이라 이렇게 사용되는게 아깝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1955년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크리스티 여사님으로 대표되는 당대 본격 추리물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였거든요. 단서의 제공도 공정하며 모든 등장 인물들이 동기가 있고 수상하다는 전개도 본격물스러우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도 무척이나 합리적이며 범인의 동기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전 라일랜드의 활약을 그린 본 편도 흥미롭습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딱히 대단한 능력은 없는 출판사 직원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대치를 뽑아내는 전개도 좋으며 ,본격물답게 엄청나게 많은 용의자가 엄청나게 많은 수상한 점을 드러내지만 이 모든게 마지막에 제대로 밝혀지는 결말까지는 아주 완벽했어요.

하지만 범인이 드러난 직후부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일단 범인이 찰스였다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게 밝혀지는 이유가 잠깐 스쳐지나간 해고된 비서와의 대화에서 비롯된다는건 우연에 기댄 작위적인 전개일 뿐 아니라, 찰스의 행동이 너무나 허술해서 황당할 정도에요. 앨런 콘웨이을 사전에 만났고, 이미 완성된 원고를 전달받았다는걸 수전이 아는 순간 모든게 끝나 버리잖아요? 마지막에 수전을 죽일 생각이 들었다면 비서부터 죽였어야지요.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낮습니다. 앨런 콘웨이가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를 완벽한 조롱거리로 끝장내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그의 계획과 인터뷰는 책을 화제로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작품 자체의 수준도 높은 만큼, 판매에 지장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아요. TV 시리즈야 물 건너 갈 수도 있겠지만 판매량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한다면 영상화 판권을 소유한 업체가 쉽게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즉, 수전 라일랜드가 처음에 찰스를 의심하다가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리 없다'고 생각을 접은게 타당한 추리입니다. 수전만큼의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을 찰스가 보였다면 그나마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래서야 현실성이 없죠.
아울러 앨런 콘웨이가 시리즈 제목을 활용하여 '애너그램' 이라는 말을 만들어 안배한게 고작 '아티쿠스 퓐트의 이름을 풀어서 해석하면 욕이다'라는 핵심 동기는 물론, 앨런이 추리 소설을 우습게 보았다는 각종 설정(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하철 역 이름이나 만년필 회사 등으로 대충 지은 것)도 딱히 이상하다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고 그것을 조롱하고자 했더라면 좀 더 거대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출판계 동료들이 수전을 배신자라 생각하여 등을 돌렸다는 후일담도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앨런 콘웨이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해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더라도, 수전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엄연한 범죄인데 배신자는 무슨 배신자입니까... 마지막 수전이 그리스로 옮겨가는 에필로그는 솔직히 완전한 사족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두 편의 완성도 높은 추리 소설을 한 권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굉장하지만 위의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욕심이 좀 지나쳤달까요? 차라리 "맥파이 살인 사건" 만으로 출간되었더라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한 부분이 많고, 현대에 전통 본격물을 제대로 복원한 공 만큼은 인정합니다. 추리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8/11/18

마블스 - 커트 뷰식, 알렉스 로스 / 최원서 : 별점 2.5점

마블스 - 6점
커트 뷰식 지음, 알렉스 로스 그림, 최원서 옮김/시공사(만화)

포토 저널리스트 필 셸던의 시각으로 바라본 마블 슈퍼 히어로 이야기입니다. 휴먼 토치가 첫 등장하는 1939년부터 시작하여 네이머와 토치의 사투, 2차 대전 후 영웅이 된 캡틴 아메리카와 다양한 영웅들의 등장, 엑스맨의 등장으로 시작된 초인들에 대한 공포, 갤럭투스의 침공,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 등이 필 셸던의 시선을 통해 전개됩니다. "마블스"는 필 셸던이 이 경이로운 능력자들을 부르는 자신만의 별칭이고요.

특징이라면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일반인 시선에서 바라본 슈퍼 히어로들의 경이, 두려움, 그리고 이를 이성으로 재단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가 심각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일반인 시각에서 바라본 일종의 르포르타쥬 형태로 묘사하고 있어서 설득력이 높고요. 여기에 탁월한 작화력의 소유자인 알렉스 로스의 그림이 더해진 덕분에 정말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그야말로 "현실감" 이라는 측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마블 세계관의 팬으로서는 휴먼 토치, 네이머,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판타스틱 4... 등 셀 수 없이 많은 마블 슈퍼 히어로들, 심지어 죠나 제이머슨과 벤 유릭 등이 등장한다는 점도 볼거리였고요.

그러나 액션이 제대로 선보이지 못한다는 단점은 큽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르포르타쥬, 다큐멘터리 형식이 강한 탓입니다. 필 셸던은 사건이 벌어지면 휩쓸리는 군중 1 정도의 비중으로 모든 사건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이거든요. 사진작가다운 과감한 앵글(앤트맨을 밑에서 찍는 장면은 정말이지 최고입니다)은 나쁘지 않지만, 슈퍼 히어로물 다운 재미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필 셸던의 생각과 고뇌는 시종일관 동일해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지루해 진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하기는 하나 재미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선뜻 권해드리기 어렵네요.

2018/11/17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 서미애 : 별점 1.5점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 4점
서미애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딸을 잃은 우진은 깊은 슬픔에 빠진 채 간신히 삶을 지탱해 왔지만, 아내마저 갑작스럽게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절망 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우진은 누군가 남긴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건 "진범은 따로 있다"는 단 한 줄의 메모였다.
이후 우진은 딸과 아내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기 위해 그 한마디를 붙들고 다시 일어났다. 가슴에 묻어둔 딸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드러나는데……

한국 추리, 장르 문학 암흑기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 서미애의 신작 장편입니다. 제목의 별은 주인공 우진의 딸 수정을 의미합니다. 딸이 고등학생 일당에게 살해 당한 후, 모든 것을 잃고 지옥에서 살게 된 우진의 심정을 잘 나타낸 제목이지요.

우진이 자살하려는 아내 혜인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뛰어가는 도입부, 그리고 아내의 자살 이후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처절한 고독과 새삼스러운 딸의 부재를 깨닫는 장면의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작가의 말의 따르면 친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쓴 작품이라는데, 확실히 이런 슬픔을 느껴본게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묘사는, 자신도 죽을 결심을 한 우진이 "진범은 따로 있다"는 메모를 발견하고 혼자만의 수사를 시작하는 전개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수사 초기, 아내 자살의 원인이 된 병원에서의 수모를 우진이 새삼스럽게 겪는 부분까지는 정말이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은 솔직히 엉망입니다. 어설픈 클리셰가 난무하고 캐릭터의 설정과 역할도 제대로 배분되어 있지 못하지만, 무엇보다도 추리, 스릴러물로 볼 수 없는 이야기 전개 때문입니다. 범죄, 사건은 등장하지만 추리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고, 스릴도 당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우진이 사건에 뛰어든 직후, 3인조 윤기, 재강, 승찬의 대사를 통해 세영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3인조는 우진이 다시 추궁을 시작해서 세영을 만나려 한 것이고요. 그럼 진범은 누구겠어요? 당연히 세영이지요... 이렇게 이야기의 핵심이 초, 중반에 드러나 버립니다. 

또 사건의 진범을 쫓는 전개에서 우진이 하는 일은 세영의 아버지인 검사 출신(딸 사건 담당) 변호사 재혁에게 문자를 남기는 것 뿐입니다. 정작 독자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역할은 사건을 은폐한 핵심 인물인 재혁이 담당하니 이게 뭔가 싶더군요. 재혁도 검사 시절 연줄로 우진의 위치를 추적해서 뒤를 쫓는 것 외에 하는게 없기는 마찬가지고요. 추리가 없으면 분위기라도 잡아줘야 하는데 우진과 세영은 평범한 부녀처럼 바다, 천문대 여행을 즐길 뿐이라 긴장감 역시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세영과 우진이 엮이는 장면부터 그러합니다. 세영은 우진의 딸을 살해한 3인조에게 쫓기던 와중에 '우연히' 우진의 차를 타게 되고, 우진과 함께 '우연히' 바다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연히' 트럭 사고에 휘말려 응급실을 방문하고 여기서 '우연히' 우진이 세영의 핸드폰으로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됩니다. 도대체 우연이 몇 번 겹쳐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네요.

그리고 사건을 '우연히' 키우게 된 원인인 3인조가 세영을 만나려 한 의도도 전혀 설명되지 않아서 의아합니다. 진범이 따로 있다고 해도 3인조가 지금 시점에 안달이 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법의 심판은 받았고,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재강은 서울대 법대에 다닐 정도로 모두들 부모의 재력으로 잘 살고 있는 와중에 무얼 두려워 하는걸까요? 본인들이 저질렀지만 숨겨 놓은 죄가 밝혀지는게 아니라, 본인들이 저지르지 않았지만 뒤집어 쓴 죄가 밝혀진다는데,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들을 단죄한 검사 재혁이 세영의 아버지로 일종의 딜을 통해 가벼운 형벌을 주었다 쳐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다시 법정에 세워 판결을 내리는 건 어렵습니다. 어차피 자기들끼리 여자를 보호하려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것이라고 입만 맞춘다면 무거운 형벌을 받지도 않을테고 부모들에게 피해가 갈 리도 없고요.
한마디로 쓰잘데 없는 행동입니다. 이를 3인조의 브레인같은 서울대 법대생 재강이 모른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3인조가 내분을 일으키고 재강이 윤기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당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황에서 재강이 당당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고 말이죠.
이러한 무리수는 제가 보기에는 독자는 다 알지만 작가 스스로만 세영의 정체를 잘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진정한 흑막은 3인조, 그 중에서도 재강이다! 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전형적인 추리 소설류에서 따온 뻔한 설정인데 정말이지 무의미했습니다.

아울러 캐릭터 설정과 묘사, 배분도 엉망입니다. 누가봐도 주인공 우진이 탐정 역할을 수행하며 악을 단죄해야 하고, 사건의 절대악은 진범인 세영과 이를 은폐한 재혁이어야 합니다. 허나 우진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하는게 없고, 세영은 마지막 부분의 묘사를 빼면 시종일관 가정 불화로 고통을 겪는 불쌍한 소녀로 그려집니다. 재혁도 세영 부분의 묘사와는 다르게 딸 바보 인격자로 묘사되고요. 3인칭 시점이었다면 단서가 복선처럼 등장했을지도 모르게지만, 세영과 제혁 모두 각자의 시점으로 묘사되어 이야기의 공정함이라던가 복선 모두 안드로메다만큼 거리가 멉니다. 세영이 마지막에 절대악으로의 면모를 드러내며 범행을 고백하는 장면도 뜬금없기 그지 없고 무언가 깔끔하게 단죄하는 느낌도 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요. 또 이를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 정도로 다 잘 해결될거라고 보는 것도 무리죠. 재혁과 세영을 감금, 포박한 상태에서 얻은 자백이 과연 증거 효력이 있을까요? 고문해서 증거를 날조한 거와 다를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딸과 아내처럼 가족, 친지를 잃은 사람의 슬픔이 어떤지를 그리는 절절하고 먹먹한 묘사만큼은 일품입니다만 추리, 스릴러 장르물로서는 꽝이에요. 추리물을 표방하지만 신파 드라마 쪽 완성도가 훨씬 높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한국 장르물이구나 싶네요. 여튼,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절대로 아닙니다.

2018/11/15

쥐덫 - 애거서 크리스티 / 김남주 : 별점 2.5점

쥐덫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황금가지

황금가지의 정식 한국어 판으로 다시 읽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대표 단편집입니다. 이전에, 무려 14년 전에 해문 출판사 버젼으로 읽고 리뷰를 남겼었죠. 다시 읽은 김에 짤막하게 리뷰 남깁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무려 9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보니 완성도가 낮은 작품도 존재한다는 단점이지요. 예전에는 다 좋아 보였는데, 14년 동안 너무 많은 작품을 읽어온 탓이겠지요. 예를 들어 "관리인 사건"은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해서 좋은 단편이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조니 웨이벌리 사건"의 경우는 증거가 너무 빈약하고요. "사랑의 탐정"은 범인들의 위증에만 기대고 있는 최악의 작품입니다.
여사님 리뷰의 바이블인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에서의 별점도 2점에 불과하며, 이유는 메인인 "쥐덫"의 트릭은 재탕한 것이고 추리 소설로 알맹이가 너무 없으며, 다른 단편들은 추리 퀴즈 수준이기 때문이라는데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갑니다.

그래도 마냥 폄하하기만은 힘듭니다. "쥐덫"은 아무리 트릭을 재탕했다 하더라도 폐쇄된 공간, 제한된 등장인물들끼리 빚어내는 긴장감은 일품입니다. 어차피 트릭도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인물 바꿔치기에 불과해 재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줄자 살인 사건"은 트릭에 기댄 추리 퀴즈 같은 작품이지만 짤막한 분량 안에 사건의 동기까지 집어넣은 솜씨는 눈여겨 볼 만 합니다. 피해자 스펜로 부인이 처음에 꽃집을 시작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한 페이지도 안되는 과거사를 살짝 언급한 후, 스펜로 부인이 하녀일을 할 때 사라진 에메랄드를 연결하는 식이거든요. 하녀 외에 여주인의 몸종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당대의 상식이 잘 공유되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요.
그 외에도 "완벽한 하녀 사건"과 "검은 딸기로 만든 '스물네 마리 검은 새'"는 이런 트릭을 사용한 작품의 교과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최소한 "퀸 수사국" 같은 정말이지 추리 퀴즈에 불과한 이야기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푸아로, 미스 마플에 할리 퀸까지 등장하는 종합 선물세트라는 점도 돋보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의 팬이자 크리스티 여사님 팬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이시라면 이미 읽어 보셨겠지만요.

2018/11/11

책 정리하는 법 - 조경국 : 별점 2점

책 정리하는 법 - 4점
조경국 지음/유유

저는 독서가 취미인 애서가입니다. 그 탓에 쌓이는 책에 대한 고민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 계획 때문에 최근에는 고민이 더욱 늘었고요. 그러던 와중에 이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부제인 "넘치는 책들로 골머리 앓는 당신을 위하여"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제만 보면 딱 저의 고민을 해결해 줄, 그런 책이라 생각되었거든요.

그런데 너무 완벽하게 기대를 배신당했습니다.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요. 저자가 이 책의 독자가 누구인지를 망각한 탓입니다. 머리말 서두에서 "이 책을 읽는 분이라면 분명 자신만의 특별한 책 정리법이 있을 겁니다."라고 쓴 걸 보면, 저자도 이 책은 어느 정도 책을 소유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독자라는걸 잘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으로서 저자만의 특별한 노하우 공유를 기대했고요. 하지만 실제 내용은 정말이지 '초보자' 수준의 지식을 설명하고 나열하는데 그칠 뿐입니다!

그나마 제목과 연결고리를 가질만한 내용은 4부인 "서가의 다양한 형태들" 정도입니다. 직접 만드는게 최고라며 사이즈 등 여러가지 팁을 소개해 주고 경량랙 등 기성품에 대한 소개도 충실한 덕분입니다. 자금의 여유가 있다면! 이라며 추천하는 이케아 빌리 시리즈도 눈여겨 볼 만 하더군요. 다음에 이사갈 때 저도 한 번 고려해 봐야겠다 싶을 정도로요.
7부인 "책을 싸는 이유와 노하우"에서 맥도날드의 포장용 봉투가 완벽한 책싸개라고 알려주는 부분도 실용적인 팁이라 인상적이었어요. 튼튼하기도 하고 가벼우면서도 색깔도 무난하니 괜찮다는 이유인데 실제로 사용해보니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앞으로 애용할 듯?

하지만 괜찮은 팁과 노하우 공유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다른 내용들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 수준에는 걸맞지 않는 초심자용 내용이 많아요. 예를 들어 4부인 "책 정리하는 법"은 제목만 놓고 보면 책의 핵심인데, 책을 어느정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자신만의 정리법이 있을테고 저 역시 그러한만큼 딱히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어요. 그냥 헨리 페트로스키의 방식, 십진분류법, 분야별 분류, 작가별 정리, 출판사별 정리 등 다양한 방식만 나열될 뿐입니다. 책 목록 정리법도 '비블리'라는 어플리케이션을 추천하며 마무리하는데 이 역시 새로운 내용도 아니며 딱히 땡기지도 않았고요.
마지막에 책을 정리하는 최후의 방법이라며 소개되는 다양한 책 처분법 역시 새로운 내용은 전무합니다. 기증하거나, 온라인을 통해 팔거나 헌책방에 파는 등의 방법이 소개되는데 책을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는 애서가라면 당연히, 누구나 알 내용이에요.

저자 본인 기준에 맞추어져 있어서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습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완벽한 서재의 조건 중 180*80 센티미터 크기의 책상이 필요하다는 게 대표적입니다. 서재는 책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고, 책을 읽는 곳이기도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허나 그런 것 치고는 책상이 너무 크잖아요! 차라리 이 책에도 등장하는 일본의 유명 애서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하는, "방 안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의자 주변의 반경 1미터 남짓이면 충분하다"는 완벽한 서재 쪽이 더 공감갑니다. 공간을 좁게 구성하는게 책을 보관하는 기능에는 훨씬 유용한게 당연하니까요. 이어지는 자신의 책상, 독서대, 스탠드, 커튼 등에 대한 이야기들도 모두 저자의 기준일 뿐이고요.
제목과 아예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은 것도 문제인데 2부인 "남의 서재 엿보기"는 저자가 과거 잡지사에서 일할 때 사진가의 서재를 찾아 인터뷰했던 기억을 더듬어 쓴 내용으로 책 정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저자의 헌책방을 열기까지의 과정도 재미는 있지만 단순한 개인사 에세이라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어요.

마지막으로 도서출판 유유의 책 답게 내용과 분량에 비하면 높은 가격도 매력을 떨어트립니다. 저는 전자책으로 약 7,000여원에 구입했는데 종이책은 200쪽에 불과한 분량임에도 정가가 무려 12,000원입니다! 도판도 모두 흑백에다가 특별한 일러스트가 사용되지도 않았고, 양장본도 아닌데 이 가격은 정말 미친게 아닌가 싶어요. 종이책은 모르겠지만 전자책은 1/3 분량이 유유 출판사 책 소개에 할애되어 있는데 이건 또 뭔가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쉽게 읽힌다는 점, 그리고 드물지만 유용한 팁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가격과 전체적인 수준을 고려한다면 권해드릴만한 책은 아닙니다. 사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은 저자의 머릿글에 모두 나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이렇게 길게 쓸 필요도 없었어요. 책 정리법의 핵심은 "책 욕심을 버리는 것" 이며, 그렇지 못하면 내가 가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내 정리법은 공간을 구분하는 데에서 시작하고 서가별로 여러가지 기준을 세워서 정리한다... 는 짤막한 글인데 이게 정말 전부입니다. 이 책 본문에 소개되는 실제 책 정리에 대한 디테일은 그만큼 별 볼일이 없습니다.

2018/11/10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상, 하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세트]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상.하 세트 - 전2권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 이후 헤어진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각각 다른 이성 친구와 교제하게 되었다. 오사나이와 교제하게 된 신문부 열혈 부원 우리노는 매달 벌어지는 연쇄 방화 사건에 집중하여 사건을 다룬 기사를 교내 신문에 발표했다. 기사를 통해 몇 개월간 다음 방화 장소를 예언하고 맞춘 우리노는 신문부의 손으로 범인을 잡을 계획을 세우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일상계 추리물의 존재를 우리나라에 처음 알림 소시민 시리즈 신간(이라고 하기는 작년에 나와서 좀 어색하지만 제 기준으로는)입니다. 십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은 아동용 동화같은 커버 일러스트로 충격을 주었는데, 예쁜 일러스트의 양장본으로 재출간된걸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십여년 전만 해도 요네자와 호노부는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거의 전작 출간이 되었을 정도의 인기 작가라는걸 여실히 보여주네요. 이런 추리, 미스터리 장르물의 인기에 저도 약간이나마 기여(?) 하지 않았을까 싶어 살짝 뿌듯하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 작품은 시리즈 1편인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 보다는 2편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과 더 비슷합니다. 조금 긴 호흡의 긴 이야기가 핵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주인공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거주하는 기라시에 매달 장소를 바꾸어가며 방화가 일어나고, 이를 쫓는 신문부 후배 우리노와 이에 얽히게 된 고바토와 오사나이의 이야기가 시간으로 따지면 2학년에서 3학년까지 거의 9개월에서 10개월 동안 펼쳐지거든요.

그런데 방화사건 쪽 주인공은 우리노이며 그와 교제하게 된 오사나이가 양념처럼 등장할 뿐입니다. 고바토가 다른 여자 친구 나카마루와 교제하며 일상계 추리를 펼치는 이야기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어요.
이러한 고바토의 일상계는 다른 일상계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사건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카마루와 함께 데이트를 가던 코바토가 만원 버스에서 누가 버스에서 먼저 일어날 것인지를 추리하고, 나카마루가 이야기해 준 자신의 오빠에게 있었던 기묘한 도난사건에 대해서 추리하고, 헤어지기 직전 나카마루가 토마토를 싫어하는게 아닌가하고 추리하는 정도입니다. 이 중 버스 이야기는 추리에 비하면 분량이 과할 정도로 길어 별로였고, 토마토 이야기는 정말로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도 헤비메탈 음악을 좋아하는 나카마루의 오빠가 3일간 여행 갔다 온 후 집에 유리창에 깨져있고, 누군가 침입했지만 없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기묘한 도난사건 이야기만큼은 꽤 괜찮았습니다. 그동안 오디오 알람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몰랐다는건 말이 안되고, 설령 이런 일이 생겨도 집 주인을 부르지 무단 침입은 하지 않겠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아요. 전부 다 소소하고 심심하지만, 담백한 덕분에 일상계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만 합니다.

그런데 연쇄 방화 사건 이야기는 불만입니다. 물론 추리적으로는 나름 번득이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특히 연쇄 방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습니다. 우리노가 다음 번 방화 장소를 추리해 낸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노의 친구이자 범인인 히야가 우리노의 기사를 보고 그곳에 불을 질렀다는 건데 상당히 의외성이 있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영화 "밀정"에서도 등장했었던, 간단한 트릭으로 용의자를 좁히고 진범을 추리해 내는 과정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제대로 된 추리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의 전편에 걸쳐 탐정역을 수행하고, 온갖 추리를 펼친 우리노의 마지막 추리쇼를 박살내기 위한 오사나이의 복수극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복수를 위한 오사나이의 공작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해있던 우리노와 통화했을 때 고의로 기차 소리를 들려주어 현장 근처로 오해하게 만들고, 범행 현장 근처에 서점에서 책을 산 영수증을 우리노의 눈에 띄는 곳에 놔 두는 식인데 우리노가 이를 추리해낸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렇게 해서 자신을 범인으로 오해하게 만든 의도가 불분명한 탓입니다. 마지막 순간 추리쇼를 펼친 우리노에게 면박을 주고 재기불능 수준의 창피를 주기 위해서? 복수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모든게 작위적입니다. 또 정통 추리물이라면 동기가 무엇인지를 파고들었어야 하는데 우리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는 그런 인식이 전무하다는 것도 실망스럽습니다. 추리를 위한 단서도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요. 이래서야 잘 된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고바토가 마지막에 구리킨톤을 먹으며, 오사나이가 우리노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 5월 이후라고 추리해내고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멋대로 오사나이에게 키스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장면은 깔끔했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복수를 꾸밀 정도의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또 우리노는 명예욕은 있지만 사건에 열정적으로 뛰어든 좋은 녀석인데, 이쓰카이치의 기사로 확인 사살까지 당하니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전개는 작가의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동일한 느낌의 또다른 일상계 시리즈인 고전부 시리즈와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였던 듯 합니다. 고바토가 마지막에 추리를 통해 자기 만족을 채우는 인물이라는 걸 깨닫는다던가, 오사나이는 대단한 행동력과 책략을 갖춘 팜므파탈로 묘사된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요. 소시민을 꿈꾸는 고바토 죠고로와 회색을 신봉하는 에너지 절약주의자 오레키 호타로의 캐릭터부터가 완벽하게 겹치기에,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지요. 아마 시리즈 다음 작품이 출간된다면 고바토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건에 뛰어들어 추리를 펼치고, 오사나이는 추리를 위한 각종 작전을 짜내고 실행하는 행동대장 역으로 묘사되리라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큰 변화가 작품에 좋게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바토야 그렇다 쳐도 오사나이 캐릭터 변화가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억지스러운 복수극 전개가 모두 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냥 예전처럼 한 발자욱 물러나 사건을 추리하는게 훨씬 좋았을텐데, 지금은 여러모로 작위적이고 억지스럽기만 해서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상계 추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드는 구성은 좋고,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도 제법 됩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해요. 억지스럽게 설정까지 바꾸어 가며 시리즈를 이어나가느니 그냥 고전부 시리즈에 집중하는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18/11/04

악몽을 파는 가게 2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악몽을 파는 가게 2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 단편집 2편입니다. 원초적인 공포보다 순문학 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물씬 풍기던 최근 작풍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수록작들 수준이 높습니다. 전권에서는 "우르"라는 기대 이하의 졸작도 수록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수록작 대부분 완성도가 평균 이상이에요. 과거와 같이 화끈하지는 않더라도, 일정 경지에 오른 거장이 맘먹고 쓴 쉼표같은 작품들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한마디로 스티븐 킹의 현재를 보여주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뛰어난 작품이 많아요. 작품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허먼 워크는 여전히 건재하다"

도망친 여러 남자들 사이에서 얻은 각각 4명, 3명의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 재스민과 브렌다의 이야기로 암담한 아줌마 버젼의 "델마와 루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둘의 암담함과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심리 묘사 외에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연로한 두 시인의 등장은 뜬금없습니다. 허먼 위크가 아직 건재한 것도 딱히 상관이 없고요.

하지만 두 아줌마들의 암담함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압권이라 그 둘이 순식간에 사로잡히는 자기 파괴적 생각에 동의하게 만드는 수작입니다. 이제는 스티븐 킹을 호러의 제왕이 아니라 암담함의 제왕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요. 같은 암담함이라도 "1922"는 픽션 느낌이 좀 있었는데, 이 작품은 너무 현실적이라 더 와 닿고 무섭습니다. 작품을 쓰게 된 발단이 되었다는 기묘한 교통 사고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컨디션 난조"

아내 엘렌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시체를 집 안에 방치해 놓은 광고쟁이 프랭클린의 이야기입니다. 

이전의 킹이었다면 프랭클린이 아내를 죽였거나, 아내의 시체가 모종의 이유로 되살아났거나, 아니면 시체 냄새를 맡은 아파트 주민들이 좀비같이 변해 거대한 학살을 불러 일으키는 식으로 전개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프랭클린은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인물이며, 그의 행동은 "사랑" 때문으로 묘사됩니다. 결말도 그냥 아내 시체 옆에 머물 뿐이고요.

이렇게 대단한 드라마는 없지만, 킹이 쓴 순애보라는 점 만큼은 독특합니다. 오지 오스본의 발라드같은 느낌이랄까요? 과거의 킹 스타일도 좋지만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철벽 빌리"

전 메이저리그 관계자 조지 그래섬이 스티븐 킹에게 1957년 뛰었던 '철벽 빌리' 라는 선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의 작품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철벽 빌리"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인터넷 용어로 따지면 "야모순바(야구밖에 모르는 순진한 바보)" 그 자체인데, 그래서 무섭거든요. 야구를 하고 싶은 소년에게서 야구를 빼앗으려 하자 모든걸 없애버리고, 친구의 승리가 빼앗겼다고 느끼자 심판을 살해해 버리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캐릭터가 존재함에도 빌리와 그의 잔혹한 행각의 비중보다는 1957년 당시 야생적이었던 메이저리그와 선수들, 시합 장면에 대한 묘사 비중이 높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도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고요. 또 이는 직접 살해 현장을 목격하지는 않은 조지 그래섬 1인칭 시점인 덕분도 큽니다. 조지 그래섬의 입을 빌어 실제 존재했던 팀과 선수들에 대해 조금씩 풀어가며 설득력을 높이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딱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빌리의 사연을 너무 대충 넘긴 부분입니다. 빌리 블레이클리와 그 가족을 살해한 원래의 유진 캣서니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에, 다른 평범한 싸이코 살인마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유진 캣서니스 시기의 암담함을 특유의 묘사로 풀어내었더라면 "1922" 수준의 수작 중편이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스터 여미"

노인 요양원에서 '미스터 여미'라고 불리우는 존재를 목격하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내용의 단편입니다.

노인들이 아직 젊었을 때 빛나던 존재를 목격하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그리고 노인들이 죽기 전 젊었을 때의 설레임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는 묘사는 킹도 늙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네요. 한마디로 죽을 날이 머지 않은 킹의 바람(?)을 그린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토미"

조금 독특한 운문(?) 형태의 짤막한 작품. 그런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를 추억하기 위해 쓴 개인적인 습작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록색 악귀"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돈이 많은 뉴섬은 비행기 사고를 당한 뒤, 지속적인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 바닥에서 잘 알려진 목사 라이드아웃을 초빙했다. 전속 물리치료사인 캣(캐서린)은 그가 사기꾼이라고 확신하는데... 

사기꾼으로 알았던 라이드아웃의 캐릭터가 돋보입니다. 실제로 몸 속에 존재하는,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악귀를 끄집어 내어 잡을 수 있는 능력자라는게 밝혀지는 전개도 좋았고요.

하지만 악귀를 끄집어내는 과정까지의 전개가 너무 길고, 악귀와의 사투도 심심하며 결말도 그냥저냥이라 아쉬움이 더 큽니다. 정전 상태에서 캣의 손으로 무언가 스물스물 올라온다는 정도로는 약합니다. 결국 라이드아웃의 용기에 담지 못한 초록색 통증 악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여러모로 보았을 때, 이 작품만큼은 과거의 크리쳐물 형태로 썼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저 버스는 다른 세상이었다"

뉴욕의 러쉬 아워에 갇힌 광고쟁이 월슨이 우연하게 나란히 선 옆 버스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걸 목격했지만, 중요한 프리젠테이션 생각에 그 사건을 무시해 버린다는 내용입니다.

윌슨에게 연이어 닥치는 불행에 대한 묘사는 재미있는데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네요. 윌슨이 프리젠테이션에 늦지 않을까?라는 드라마가 살인 사건보다도 비중이 클 정도로 사건이 건조하게 묘사되는 탓입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드라마가 없는거지요. 주위 사람들에게 무심한 현대인들, 돈이 더 중요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고 보기에는 풍자 요소도 많지 않고요.

한마디로 평범 이하 수준의 범작입니다. 창작 의도는 알겠지만 제대로 구현되었다고 보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부고"

인터넷 뉴스 매체에서 부고 기사를 쓰는 찐따 마이크에게 가짜 부고를 실제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게 밝혀지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2016년 에드가상 단편 부문 수상작이지요. 

작가가 의도치않게 쓴 글이 현실로 벌어진다는 설정 자체는 평범합니다. 오래전 킹 스스로도 "신들의 워드프로세서"라는 비슷한 작품을 쓰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부고를 쓴 인물 뿐 아니라 근처에 사는 같은, 혹은 비슷한 이름의 인물들이 함께 죽어나간다는 차별화되는 설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크가 오지 와이오밍의 라라미에서 숨어 산다는 결말도 괜찮습니다. 마이크는 (꿈자리는 사납지만) 꽤 괜찮은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는 듯 하고, 그의 능력으로 도움을 준 몇몇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생겼다는 해피엔딩인데 나쁘지 않아요. 최소한 모두 파멸해 버리는 뻔한 결말은 아니었으니까요. 인터넷 매체 '네온 서커스'와 거기 실리는 기사들, 소속 기자들에 대한 정신나간 묘사들도 최신 트렌드 느낌으로 잘 그리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작품들 중에서 돋보이냐 하면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에드가상을 수상할만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이름의 사람들이 죽는다는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냥 도망친다? 이야기를 너무 쉽게 마무리한 느낌이에요. 솔직히 부고를 쓴 후 그것을 기자가 실제로 만든다는 다른 단편들쪽이 더 오싹하죠.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라는 고전 서부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라라미가 정말 미국에서도 유명한 깡촌인가 보네요. 라라미로 도망치면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하고 사건이 해결될 정도라니...

"취중 폭죽놀이"

호수 산장에 사는 올던과 어머니가 호수 건너편 대저택에 사는 마시모 가족과 매년 7월 4일, 폭죽 놀이 배틀을 벌인다는 흥겨운 이야기. 결국 올던이 마지막에 구입한 2000달러 짜리 폭죽 "제 4종과의 조우"가 마시모 가족 저택을 홀랑 태우는 결말까지 한 치의 방심도 할 수 없이 유쾌하게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전작에서도 그렇고 킹이 여러 작가의 작풍을 모방하는 취미가 생긴 듯 한데, 이 작품은 어디로 보나 마크 트웨인이 떠오르더군요. 전편에 걸쳐 흐르는 유머도 그렇고, 마지막에 두 가족 모두 집을 태워먹고 화해한다는 결말까지 말이죠.

올슨과 어머니가 알콜중독이었다는 등의 불필요한 설정은 조금 거슬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킹 작품 중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흔쾌히 권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에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여름 천둥"

핵전쟁 이후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로빈슨이 유일한 친구 팀린과 애견 간달프마저 죽자 할레이 데이비슨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소품입니다. 

특징은 죽어가는 생존자들이 보이는 인간미가 돋보인다는 점입니다. 킹의 예전 작품이라면 이들이 사는 마을에 지옥도가 펼쳐졌을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지옥도 대비해서 화끈한 재미가 부족하다는건 단점입니다. "카페 알파"도 나쁘지야 않지만 "세기말 구세주 전설"이 아무래도 더 화끈한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8/11/03

위안텅페이 삼국지 강의 - 위안텅페이 / 심규호 : 별점 2.5점

위안텅페이 삼국지 강의 - 6점
위안텅페이 지음, 심규호 옮김/라의눈

중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역사 교사 위안텅페이의 "삼국지" 강의를 엮어 출간한 책입니다. 8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통해, 황건의 난에서 시작하여 진나라가 통일하기까지의 약 백년에 걸친 기간 동안의 역사를 주로 설명해 줍니다.

역사 교사의 강의 답게 '실제 역사' 중심의 강의라는게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여타의 작업물들과는 분명히 달라요. 소설에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삼국 정립 후 진나라 통일까지의 이야기가 책 분량의 1/4, 거의 200여 페이지에 달한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위나라에서 사마씨가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 제갈량 사후 촉한의 멸망 과정, 그리고 폭군 손호의 즉위와 함께 멸망으로 치달은 오나라 이야기를 굉장히 상세하게 소개합니다.
소설에서는 화려했던 전쟁들, 영웅들의 일기토 등의 비중이 한 없이 낮다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관도 전투가 20 페이지 분량도 안되며, 적벽 대전 역시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적벽에서의 전투 상황은 단 세 페이지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주요 인물에 대한 설명도 소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관우의 비중이 굉장히 낮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의 일화 중심으로 설명하다보니 딱히 활약도 없고, 전투에서 대단한 무공을 세우지도 않은 그냥 황제의 의형제 정도로 소개될 뿐입니다. 제갈량 역시 유비 사후 촉한의 리더로 비중이 작지는 않지만, 북벌에서의 실패와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더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제대로 승리한 적은 없고, 전쟁보다는 '정치'에 더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는게 결론이에요.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위연을 좀 더 잘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합니다면, 뭐 다 부질없는 이야기지요.
우리가 익히 알던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많습니다. 제 머리 속의 삼국지 인물들은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 설정이 뿌리깊게 박혀있는데 그런 전형을 많이 깨 주네요. 예를 들어 유비는 짚신을 삼는 가난뱅이 쪼다였다는게 고화백님 해석이었는데, 위안텅페이는 비록 짚신을 삼는 일이 생업이었지만 재벌 2세같은 부잣집 자제 분위기로 퇴폐적인 생활을 추구했다고 하니까요. 지역 토호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황건군 반란 진압 시에는 그들로부터 얻은 자금으로 1,000여 명의 군사를 모을 정도였다니 단순한 가난뱅이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또 조조에 대해서도 비교적 공정한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사람의 능력을 잘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임용할 줄 알았으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데 능해 헛되이 미혹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물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공과를 따지는데 엄격하고 심지어 검소하여 부유와 사치를 숭상하지 않았다고 하니 진짜 대단한 인물은 인물인 셈입니다. 사실 조조가 진정한 영웅이다! 라는 컨텐츠가 최근에 많아져서 딱히 새롭지는 않지만, 중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견해라 조금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 외에도 노숙도 인물이었다던가, 장비가 포악하기 그지 없었다는 등 작가만의 해석이 가득한데 그 중에서 조운 조자룡을 유비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게 가장 놀라왔어요. 조운이 오호상장 중 등급이 가장 떨어지고, 이릉대전 당시 후방을 지키라고 한 등을 예로 드는데 정말 생각도 못 해본 내용이었으니까요. 왠지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주요 인물에 대한 해석은 소설 삼국지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 외에도 소설과 연계되어 재미를 더해주는 부분도 많습니다. 삼국지에서 의문이었던 일화에 대한 설명이 좋은 예입니다. 동탁이 소제를 쫓아내고 진류왕 유협을 헌제로 옹립한 사건처럼요. 어차피 황제를 쥐고 흔들거였다면, 멍청한 인물이 황제여야 유리했을텐데 구태여 똑똑하다는 유협으로 대체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위안텅페이는 유협을 동태후가 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같은 동씨 일족이었다는 것이지죠. 솔직히 납득은 안되지만, 같은 성씨들끼리 해먹은게 많은 삼국지 이야기를 보면 아예 근거 없는 해석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인기많은 강사다운 말발(?)도 볼거리입니다. 공융에 대해 언급하면서, 네 살 때 부친이 배를 사주고 골라 먹으라고 하자 가장 작은 것을 골라 먹고 큰 것은 형한테 양보한게 유일한 업적(?)으로 배 하나 양보했다고 2,000년 동안 칭송된 인물이라고 비꼬는 식입니다. 이런 일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돌이켜보면 저자의 말대로 배를 사다준 날 배가 아팠거나 그냥 배가 불렀을 수도 있었는데 이런걸 대단하다고 띄워준 건 너무 과하지요.

이와 같이 삼국지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은 보물상자같은 책이긴 한데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전무하다는 겁니다. 특히 여러 지역을 중심으로 사건이 이루어지는 만큼 당시 지도는 필수적으로 포함되었어야 했는데 부재해서 아쉽습니다. 휴대폰으로 관련 지도를 검색해 읽으면서 함께 보기는 했지만, 책에 소개된 지명 기준으로 크게 볼 수 있는 지도가 맨 앞이나 뒤에 수록되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겁니다. 이 단점에 비하면 오탈자가 제법 많다는건 단점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후한 당시 군벌들이 모았던 인재들은 사실은 실의에 빠진 무뢰한들이었다는 시각 등 역사 교사의 개인 견해가 많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당대 역사를 한 번 일람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생각됩니다. 삼국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8/11/02

수학의 역사 - 지즈강 / 권수철 : 별점 2점

수학의 역사 - 4점 지즈강 지음, 권수철 옮김, 계영희 감수/더숲

중국 교수가 쓴 수학 역사책입니다. 딸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구입해 보았습니다.

장점이라면 서양 위주의 수학 역사서가 아니라 동양에서(중국 한정이지만) 어떻게 수학이 발전했는지를 잘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아예 "중국 수학의 고고한 품격" 이라고 따로 분량을 할애해서 소개할 정도인데, 내용도 아주 새롭고 재미있었어요. 중국판 피타고라스의 정리인 "구고의 정리"가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에서 시작해서, 중국 수학을 대표하는 문건인 "구장산술"에 대한 소개, 유명한 중국의 수학자들에 대한 소개, 당나라 때 관리 승진 시험 문제로 출제된 "영부족 계산법" 등 처음 알게 된 내용이 가득합니다. 심지어 중국의 고차연립방정식을 의미하는 '천원술'과 '사원술'을 소개하며 김용의 "사조영웅전"에 인용된 부분을 함께 소개해 주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읽을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수학적인 해석이 함께 해 주니 황용이 얼마나 똑똑한 소녀인지를 더욱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의 고증과 역사적 깊이에 탄복한 건 덤이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한데 너무 어렵습니다! 일반인, 특히 학생 상대로 적합한 책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정도에요. 수학사를 대표하는 여러 이론, 그리고 그 예를 소개하고 있는데 설명이 너무 부족해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유명 수학적 이론과 수학자 소개에 그치는 다른 수학 역사서에 비해 실제 이론과 문제를 소개한다는 측면은 분명한 장점이지만, 설명이 부족해서 득보다는 실이 큽니다. 물론 제 수학적 깊이와 사고가 유치한 수준에 그치는게 문제겠지만, 그래도 책 한 권으로 설명되었던 "페르마의 정리" 해법을 20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소개하는 식으로 요약이 과한 탓도 분명히 있습니다. 실려있는 각종 수식, 공식도 "왜 그런지?" 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학 역사서로는 괜찮지만 지금보다는 이해하게 쉽게 소개된 문제를 다루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이대로는 너무 어려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차라리 중국 수학 쪽에 집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18/10/28

피너츠 완전판 11 : 1971~1972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2.5점

피너츠 완전판 11 : 1971~1972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피너츠 완전판도 열 권을 넘어 열 한 권 째에 접어들었네요. 사두고 몇 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서야 읽고 리뷰를 올립니다.

이전 권에서부터 이어지는 설정을 활용한 - 정신 상담하는 루시, 찰리 브라운의 여름 캠프, 야구팀, 우드스탁과 스누피의 우정 등 - 개그가 많지만, 확실히 차별화되는 점도 많아서 좋습니다. 특히 페퍼민트 패티가 찰리 브라운에게 극 호감을 보이고, 겉모습과는 다르게 연약한 소녀라는걸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굉장히 새로왔어요. 페퍼민트 패티와 빨간 머리 소녀 사이에서 벌어진 에피소드, 찰리 브라운의 아빠가 1934년에 타던 까만 2도어 승용차와 그 당시 데이트하던 여자애 사이에서 있었던 소박하지만 설레이는 에피소드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들도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내용이고요. 또 패티만큼은 아니지만 샐리 브라운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진 것도 차이점입니다.

새 캐릭터도 등장하는데, 패티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마시는 꽤나 유명한 캐릭터인데 캠프에서 만난 줄은 몰랐습니다. 루시와 라이너스의 동생 리런이 태어난건 전혀 몰랐던 설정이라 놀랐고요. 이번 권에서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에피소드도 몇 개 없어서 인기는 그닥이었던 것 같지만요. 아울러 세계관에서 가장 인기 작가로 보이는 헬렌 스위트스토리도 처음 등장하는데 이를 활용한 개그도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빵 터지는 재미는 없지만 팬에게 친숙한, 한결같은 수준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가격과 시리즈 전체의 볼륨을 생각한다면 선뜻 권해드리기는 조금 어렵지만, 팬이라면 놓치기 힘든 작품임에는 분명하고요. 별점과 소장가치, 재미가 꼭 비례하는건 아니지요.

2018/10/27

비하인드 도어 - B.A. 패리스 / 이수영 : 별점 1.5점

비하인드 도어 - 4점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arte(아르테)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부부 잭과 그레이스. 남편 잭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유명 가정 폭력 전문 변호사로, 영화배우와 같은 외모까지 갖춘 근사한 남자다. 그레이스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동생까지 사랑해주는 잭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꿈꾸지만... 그녀는 괴물 같은 그의 손길이 사랑하는 동생 밀리에게 닿기 전에 이 악몽을 끝내려 한다. 닫힌 문 뒤에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처절한 심리 싸움이 시작된다...(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책 뒤에 소개된 짤막한 본문 -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공포를 주입할 수 있는 사람. 계속 숨겨 둘 수 있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 보는 한 편 내 갈망을 충족시킬 방법도 마련했어. 뭔지 알겠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잭은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너랑 결혼했어. 그레이스" - 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지인이 싸이코패스였다'는 책을 읽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핸섬하고 친절한 신사로, 결혼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잭이 결혼하자마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돌변한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류의 이야기라면 범인이 치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상대방을 협박하고 죽이려 하는지가 잘 묘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재미 핵심 요소고요.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실패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를 주기 위한 무리한 설정 탓입니다. 잭이 치밀해서 그레이스가 탈출도 못 하고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인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외출도 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다는건 솔직히 말이 안되지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놓기는 했지만 다 핑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있습니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같이 못 간다는 묘사가 등장하니 화장실에서 거울에 몇 자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방법을 생각해 볼 만 한데 절박함이 부족해요. 이래서야 감금과 협박을 즐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위기 극복, 탈출 과정이 재미있느냐? 아닙니다! 겨우 구한 약을 잭에게 먹이고 탈출한 그레이스가 태국으로 여행간 후 완전 범죄를 꾸민다는 내용인데 과정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우 탈출했을 뿐 잭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하실에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벌일 일은 아니잖아요. 이럴 계획이었다면 최소한 책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습니다. 단지 지하실에 가두었다고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잭이 깨어나 탈출하면 모든게 끝나버리니까요. 실제로 잭이 바로 태국으로 쫓아 왔다면 그레이스가 옭아매인 신혼 여행 상황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행을 가장한 죽음을 맞게 되었겠지요.
결말 부분에서 에스더가 그레이스를 도와줘 완전 범죄를 성공시킨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그 전까지 에스더와의 친분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뜬금없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밝힌 이유인 "빨간 방" 의 정체는 말이 되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부 묘사가 너무 부족했어요.

다른 부분들도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와 과거가 복합되어 진행되는 진부한 방식의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밀리의 수면제가 현재에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깔끔했던 것 정도만 볼거리였습니다만, 이 정도도 수습이 안 됐다면 이야기가 성립하지도 않았을테니 딱히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처음에 완벽함을 강요받는 그레이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완벽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허술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상계스러운 특이한 싸이코구나! 싶게 만드는 부분은 독특했기에 차라리 이런 설정을 밀어 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잭이 누군가를 감금해서 공포에 질리게 하는 모습을 즐기는 싸이코패스라는 이야기는 그닥 신선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니, 너무 뻔하죠. 이런 뻔한 내용이니 잭이 남편에게 폭행당한 여자들을 전문으로 변호하는 변호사라는 작위적인 설정은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아이디어라면 잭이 그레이스와 결혼한 이유입니다. 그레이스의 동생 밀리가 다운증후군이라서, 이를 이용해 밀리를 감금하려고 계획했다는 건데 불쌍한 장애우를 학대하는 악당이라는 느낌이 더해져 사악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밀리에 대해 그레이스가 가진 모정에 가까운 애정을 협박의 재료로 쓴다는 것도 그럴듯 했고요. 아울러 사건의 핵심인 공포의 "빨간방" 묘사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장점은 빈약해서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는 결론을 뒤집기는 무리에요. 영화도 많이 제작되는 인기있고 유행하는 소재를 억지스러운 설정을 덧붙여 변주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8/10/26

망내인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2.5점

망내인 - 6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다섯 살 여중생이 인터넷 익명 게시판의 악의적인 소문과 신상 공개를 견디다 못해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짓지만 언니 '아이'는 이 사건은 타살이며, 반드시 범인을 찾아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수소문하여 찾아간 유명 탐정은 온라인 사건은 맡을 능력이 없다며 고사했고, 대신에 신비에 싸인 해커이자 '탐정들의 탐정'이라 불리는 '아녜'를 소개해 주었다. 처음에 '너무 쉽고 재미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문전박대하던 아녜는 며칠 뒤 '예상 외로 재밌는 사건'이라며 의뢰를 받아들였다. 조사가 진행되고 용의자의 범위가 좁혀질수록 몰랐던 동생의 과거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중국의 추리작가 찬호께이의 7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아이의 동생 샤오원이 자살을 택하게 만든 인터넷 글을 올린 kidkit727을 찾는 전반부만큼은 철야책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을만큼 엄청난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설정부터가 굉장히 공감이 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상 공개 때문에 무차별한 비난에 시달린 유치원 여교사가 자살한 사건처럼 현실적인 소재인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kidkit727과 탐정 아녜의 현란한 두뇌 싸움도 굉장한 볼거리이며, 이를 친숙한 인터넷 및 각종 기술 용어 설명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동안 용어, 명칭만 알아왔지 실제 기술적인 원리나 내용에 대해서 잘 몰랐던 여러가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최신 기술이 개인 정보 유출, 해킹에 사용되며, 저 역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라서 더욱 관심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해킹이나 첨단 기술에 관련되지 않는 순수한 추리들도 볼만합니다. 아녜의 사회 공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다채로운 화술과 용의자 분석들도 그럴듯하지만 아이가 아녜의 집을 청소하면서 주요 증거물을 따로 모아 놓는다던가, 모탐정을 보고 아녜에게 어떤 정보가 전달되었을지를 알아내는 장면들 모두 왠만한 정통 추리물 못지 않은 추리적인 즐거움을 가득 전해 줍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용의자가 좁혀진 다음부터는 재미가 한 풀 꺾입니다. 특히 샤오원의 주변 인물 중 iOS 핸드폰을 사용하는 인물이 범인이다! 이후부터요. 용의자도 적고, 그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탐정의 탐문 수사에 불과한 활동이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이후 아녜가 이미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에 이르면 이런 행동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고요. 다른건 몰라도 샤오원의 유서를 위조하여 도서관 책에 숨기는 연극은 불필요했습니다. 해킹용 어플리케이션을 심을 수 있었기에 진작에 심어서 정보를 수집했더라면 그만이니까요.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리리로 자칭한 여학생이 정보를 빼냈다는 증언을 입수했을 때 모탐정을 통해 사진 등으로 그게 누군지 알아냈더라도 게임은 끝나고요. 두쯔위가 증거를 인멸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어 복수심을 끌어 올리기 위해? 그런것 치고는 너무 거창한 연극이었습니다.

또 이어지는 두쯔위에 대한 복수는 전개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아녜가 두쯔위의 와이파이, 스마트폰을 해킹하여 게시판을 위조하고 정보를 차단하는 작전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묘사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하고, 인터넷 세계에서 무기명으로 무차별한 음해와 신상털기가 자행되며 누구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주제 의식만큼은 빛나지만 두쯔위의 동기가 자신을 모함했던 샤오원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지는 결말이 문제에요. 너무 작위적이었거든요. 이 진상을 아녜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설정도 당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헛수고 하지 말고 최소한 아이가 복수를 의뢰할 때 알려줬어야 합니다. 그나마 샤오원도 가해자였다는 진상 정도면 충분했을텐데, 언니 아이가 샤오원에게 무관심했었다는 부분은 명백한 사족입니다. 어머니와 언니 때문에 샤오원이 자살 결심을 굳혔다는건데 이런 쓸데없는 죄책감을 불러 일으킬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이렇게 따지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또 샤오원이 자살을 결심한 건 잔혹한 메일 탓이 크고, 메일을 보낸 두쯔위가 아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에 포인트를 좀 잘못 잡은 느낌도 듭니다.

무엇보다도 분량으로는 1/3 수준인 진범 스중난 파트는 완벽한 사족이자 작위적인 전개의 결정판이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스중난이 사건의 원인이 된 샤오원 성추행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부터, 원조 교제를 통해 희생양을 물색하는 쓰레기라는 설정은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누구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는 인터넷 세계의 무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스중난이 동생 두쯔위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문 기술을 활용하여 샤오원을 공격했다 정도가 현실적이고 괜찮았을겁니다. 괜히 절대악으로 포장해서 응징할 필요는 없었어요. 스중난의 파멸을 위한 과정에서 불거지는, 가쉽을 사고파는 사이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처음에만 혹할 뿐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현실성없는 내용이었고, 이 사이트 투자를 미끼로 한 아녜의 작전도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그냥 스중난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동영상만 유포해도 끝날 일인데 쇼맨쉽이 지나칩니다.

그리고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임에도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지 못한 것도 단점입니다. 가난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빼어난 지성을 지닌 의뢰인이자 주인공 아이, 천재 해커 탐정으로 처음에는 비호감덩어리였지만 알고보니 정의의 화신이라는 아녜의 캐릭터 설정부터가 흔해 빠진 일본 추리 만화를 답습하여 식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재 탐정, 해결사가 첫 의뢰인과 컴비가 된 후 자기 집에 거주하게 하면서 자기 일을 돕게 하는 에필로그는 "시티 헌터" 를 떠오르게 만들고요.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투자자 그룹 SIQ의 2인자로 잘생기기까지 해서 아시아판 리처드 기어로 보인다는 스투웨이가 산발에 평균 이하로 보이는 아녜였다는 반전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의 극치었습니다. 사채꾼 우시지마가 알고보니 정의의 억만장자 토니 스파크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차라리 은둔하고 있는 천재 이노우에가 아녜였다면 모를까... 이 반전만큼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네요.

전체 700여 페이지 중 kidkit727의 정체가 두쯔위였음을 밝혀내는 약 절반 가량의 분량은 별점 3점을 줘도 좋을 만큼 재미있고 볼거리가 많습니다. 두쯔위에 대한 복수가 진행되는 150여 페이지는 앞서 말씀드렸던 작위적인 결말 때문에 진행 과정은 흥미진진함에도 별점은 2.5점 정도고요. 그러나 나머지 약 200여 페이지에 해당되는 스중난 파트는 총체적인 난국이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야기를 절반 정도로 줄이고, 스중난은 아녜와 같이 조력자의 위치로 하여 마지막 두쯔위 자살 직전에 그녀를 구해주고 개과천선 (?) 한다는 내용이었다면 별점 3점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노골적으로 에필로그에서 시리즈임을 어필하는데 앞으로 계속 읽어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18/10/21

불티 - 시즈쿠이 슈스케 / 김미림 : 별점 2.5점

불티 - 6점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 지방법원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는 일가족 살해 혐의를 받던 다케우치 신고 재판을 마지막으로 퇴관했다. 그의 마지막 판결은 무죄판결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다케우치기 가지마 이사오 바로 옆 집으로 이사왔다. 가지마 가(家)의 모든 대소사에 성의를 다하는 그에게 집안 사람들 모두는 호감을 느꼈지만, 며느리 유키미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법률 미스터리로 유명하다는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장편입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 놓을 수 없다는 뜻의 '철야책' 이라는 별명이 있다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작가의 이력, 그리고 초반부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딜레마 때문에 당연히 법률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싸이코 살인마 다케우치와 가지마 가(家)의 대결을 그린 전형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결에서 전해지는 서스펜스가 읽는 내내 넘쳐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 주기 때문에 '철야책' 이라는 별명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유일하게 비협조적인 인물인 며느리 유키미를 배제해 가는 첫번째 과정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의심들이 쌓여 진상을 알게 된 어머니 가지마 히로에가 위험에 처하는 전개, 뒤이어 집안일에 무심했다가 뒤늦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가지마 이사오와 그를 돕는 유키미의 활약이 교차되는 후반부까지 정말로 흥미진진한 덕분입니다. 다케우치가 수상하다는건 상당히 초반부터 암시되어서, 어떻게 남은 500여 페이지를 끌고 갈까 궁금했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흥미를 더하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특히 유키미 배제에 그녀의 딸 마도카를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쿠르트로 밤 잠을 못 자게 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자기 집에서 약간의 조작으로 마도카가 인형 놀이를 과격하게 하게끔 유도하면서 유키미의 폭행을 끌어내는 식인데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이 높아 감탄했습니다.

아울러 싸이코 다케우치의 설정도 독특해서 나름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사실 착하고 평범해 보였던 지인이 알고 보니 싸이코 살인자더라.. 라는 설정의 작품은 쎄고 쎘죠. 스플래터 고어 호러가 아닌 싸이코 살인자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마 비슷한 설정일 거에요. 주인공이 살인자의 정체를 알아내지만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공이 살인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 역시 대부분 비슷할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살인자 다케우치가 자신의 재력을 활용하여 상대방에게 무한에 가까운 호의를 베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으로부터의 애정과 호감을 강요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큰 차이점입니다. 한마디로 애정과 호감을 자신의 돈과 성의로 사려고 하고, 이를 거절당했을 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호감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착각하는 스토커, 혹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싸이코패스소시오패스들처럼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인물이 아니라는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케우치는 가지마 이사오가 재판관 시절 무죄 판결을 내린 피고 출신이라는 설정도 새롭습니다. 이는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정말 무죄로 보이는 다케우치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도 정말 진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중반부의 가장 큰 승부인 피해자 유족 이케모토와 대면한 다케우치가 이케모토가 진범이 아니냐고 되묻는 장면이 특히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유키미마저 속아넘어갈 정도이니 독자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원죄 운운한다던가, 재판관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심경을 그려내는 등의 법률 미스터리스러운 설정은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불필요한 묘사였습니다 제목의 '불티' 부터가 사건의 원인이 된 다케우치의 무죄 판결을 뜻하는데(아마도), 내용만 보면 이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다케우치를 스스로 단죄하고 죗값을 받는 가지마에 대한 에필로그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아들을 죽이려 하는 살인자를 누가 가만 놔 두겠어요? 이러한 전개를 통해 사형 선고 등 현재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딜레마를 짚고 넘어가려면 앞부분에서 가지마 이사오가 사형 선고에 극도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더 드러냈어야 합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걸 간접 살인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 스스로 사람을 죽인 상황에 대한 딜레마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억지로 법관 설정과 모호한 주제 의식을 끼워 넣은 탓이 큽니다. 그냥 평범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동네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분량과 내용도 훨씬 깔끔했을테고요.

그 외에도 다케우치의 무모한 범죄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가 수상하다는 걸 가지마 이사오가 몇일에 불과한 조사로 알아내는 전개는 경찰과 검찰이 대체 무엇을 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들며, 사건의 핵심인 다케우치 등에 나 있던, 도저히 혼자서 낼 수 없는 상처를 낸 트릭도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방망이에 줄을 묶어 기둥을 축으로 회전시켜 등을 때렸다는 건데... 이 정도로 세 명이나 살해당한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무죄 판결이 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히로에의 시어머니 간호와 고부 갈등, 유키미의 집안 문제도 사족입니다. 시어머니의 죽음이 사건의 도화선이며 장례 일정과 이야기가 발 맞춰 돌아가기는 하지만 시어머니, 시동생 이야기는 뺐어도 됐을 것 같아요. 읽으면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단점도 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드라마화도 두 번이나 되었을 만큼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조금 고급진(?) 킬링 타임용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참고로, 두번째로 제작된 드라마는 다케우치 역을 춤추는 대수사선의 마시타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연기했다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조금 조사해보니 결말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요. 가지가 이사오가 마지막에 다케우치에게 진짜 유죄 판결을 내리고 다케우치는 자살을 택하는 결말인데 앞서 말씀드렸던 제가 느꼈던 문제점 - 가지마가 살인을 저지르고 죗값을 받는다는 와닿지 않는다 - 을 제작진도 공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