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희 - 반바지 지음/나무야미안해 |
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후원한 거라 도착한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만화라고 하기에는 이야기 한편, 한편은 완결된다고 보기도 힘든 한, 두 페이지 분량에 컷 몇 개가 실려있을 뿐이었으니까요. 한 편의 이야기로 완결성이 있는 비교적 긴 (그래봤자 몇 페이지 정도지만) 작품은 표제작 <<슈뢰딩거의 고양희>>라던가 <<퐁당퐁당>>, <<아공간의 님프>>, <<할아버지의 시계>> 등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빠져들게 되더군요. 짤막한 컷들도 반-바지 작가의 단상과 결합되어 꽤 근사한 경험을 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고, 작가의 단상 일부만 드러나서 독자도 또 다른 상상의 여지를 많이 펼칠 수 있다는 예상 외의 장점 덕분이죠.
그리고 이야기의 길이를 떠나서 과학, 그 중에서도 양자 역학을 기반으로 펼쳐 놓는 상상력은 정말 발군이에요. 근접하기조차 어려운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공부가 부족한 저에게 여러모로 많은 자극을 주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감탄했던 건 백설공주의 어머니가 마법 거울에 "거울아 거울아 이 왕국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우냐?"고 물어보고, 그 답변 속도를 측정하여 나라의 인구 수를 파악한다는 <<검색 알고리즘>> 이었습니다. 대상이 많아지면 검색 결과를 도출하는 게 늦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죠. 동화에서 이렇게 수학적인 내용을 끄집어낸 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제가 가장 만들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라 부럽기만 합니다.
물론 워낙에 많은 짤막한 단편 (?)이 가득한 탓에 모든 작품이 대단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건 아니에요. 타임머신 관련된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은 등 특정 소재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기도 하고요. 타임 머신, 시간 관리국, 특이점 등의 이야기는 충분히 긴 장편 안에 녹여낼 만한 좋은 소재와 설정들인데 이들을 모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앞서 감탄했다고 설명드린 <<검색 알고리즘>> 만 해도 살을 더 붙여 훨씬 긴 호흡의 괜찮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 거에요. 검색 결과가 0인 상황에서 검색 시간을 측정하는데, 검색 결과가 1이 되어 버려 이 측정 방식이 제대로 동작하지 못해 국가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주를 죽이려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 경우 아버지인 국왕이 계모의 범행을 방조(?) 하는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고 말이죠.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이런 식이라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또 독립 출판사 "나무야 미안해" 에서 정성껏 만들기는 했지만 판형과 디자인도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림을 못 그린 건 아니지만 그닥 밀도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대사가 많다고 해도 일부 작품에 불과할 뿐인데 왜 이렇게 큰 판형으로 나왔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천 드릴 만 합니다. 워낙 기발한 발상이 많아 재미있고 장점이 더 많다는 건 부인하기 어려우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독립 출판물인 탓에 인터넷 서점 등에서는 구하기 어려운데, 제대로 정식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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