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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 모리 히로시 / 이연승 : 별점 1.5점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 4점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료 기타의 소개로 사이카와와 모에는 N 대학의 첨단 연구 시설인 ‘극지연’을 견학 방문하였다. 모든 실험이 끝나고 뒷풀이까지 마무리되는 시점, 완벽한 밀실 안에서 대학원생 니와와 다마코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모에가 단서를 잡고 극지연을 몰래 방문했지만 범인의 습격으로 실험실에서 동사할 위기에 빠졌다. 마침 네트워크를 통해 연락받은 사이카와가 그녀를 구해냈으나, 그 뒤 실험실에서 리더 기쿠마 교수의 시체까지 발견되며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한스미디어에서 새롭게 출간되는 모리 히로시의 사이카와–모에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는 그동안 딱 두 편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 "모든 것이 F가 된다"는 좋았지만 "웃지 않는 수학자"는 별로였었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작품은 아쉽게도 "웃지 않는 수학자" 쪽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더 못해요. 건질 부분은 공대 교수라는 작가의 배경을 살린 ‘극지연’과 연구에 대한 상세한 묘사밖에는 없는 탓입니다. 이 역시 불필요하게 분량만 늘이는 역할이라서 장점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고요.

제목에서의 밀실 트릭은 장황한 묘사로 포장되어 있을 뿐, 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우주복’이라 불리는 방한복을 이용한 트릭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치노세–다마코의 실험 투입 장면만큼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나마 트릭은 합리적이고 제대로 설명되기는 합니다. 사이카와가 범인이 알 수 없었던 돌발 상황—셔터 고장—에 초점을 맞추어 추리를 진행하는 것도 괜찮았으며, 범인의 ID로 보이는 “Shika”의 의미도 그럴듯 하고요. 더 큰 문제는 소설로서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공들여 짜낸 트릭을 풀어나가는 것이 추리 소설의 핵심 요소이기는 합니다만, ‘소설’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상 소설로서의 재미도 독자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허나 이 작품은 그러한 점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선, 거의 대부분의 진행은 사이카와, 모에 시점이며 이들의 일방적인 추리만 이루어집니다. 범인 시점에서의 이야기는 모두 사이카와의 추리와 관계자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어요. 즉, 범인과 동기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전무합니다. 추리소설에서 탐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범인이고, 트릭 외의 또 다른 한 축은 동기인데도 불구하고요. 범인이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의문과 그에 따른 드라마 없이 트릭만 풀어나간다면, 소설이 아니라 추리 퀴즈에 더 가깝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동기도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이치노세가 ‘성폭행을 당했다’에서 ‘마스다가 자살했다’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도 이해할 수 없으며, 니와가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나쁜 놈이라 하더라도 다마코까지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니까요.
솔직히 마스다라는 놈이 제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인을 지켜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뭐 하는 짓인지.... 이러한 동기에 비하면 기쿠마 교수와 이치노세가 부녀 관계였다는 설정은 작위적이지만 차라리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데뷔작 한 작품 외에는 전부 별로인데, 시리즈를 더 읽어봐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되는군요.

2016/07/28

사기꾼 - 애드 멕베인 / 홍지로 : 별점 2점

사기꾼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신원 미상의 표류 사체가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그녀는 익사한게 아니라 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는게 밝혀졌다. 87분서 형사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 그리고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 살인범을 쫓기 시작하는데...

"여자는 외모가 전부요." - 첫 번째 피해자 메리 루이즈의 아버지 프로셱이 딸을 떠올리며 하는 말.

87분서 시리즈입니다. 1957년 작으로 "마약 밀매인" 바로 다음 작품. 전작에서 총상을 입은 스티브 카렐라가 완쾌하여 등장합니다.

"마약 밀매인"처럼 초기작이라 나름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무려 두 명이나 살해당하고, 한 명은 죽기 직전에 몰릴 뿐 아니라 심지어 카렐라의 아내 테디까지 납치당함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너무 멍청해서 수사랄 게 없는 탓입니다.

범인 크리스 도널더슨에게 시대를 앞서간 매력은 있습니다. 혼인 빙자 살인 사기범이지만 회계사를 자처할 정도의 인텔리이며, 누가 봐도 훤칠한 금발 꽃미남이라는 점에서요. 이러한 능력을 잘 이용해 여자들을 끌어들인 후, 재산을 가로채고 살해하는 방식도 단순 무식한 깡패들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문제는 하는 짓이 무식한 깡패보다도 못하다는 겁니다. 자신이 죽일 여자 손에 이니셜을 문신으로 새기는 버릇이 있는데, 그냥 대놓고 문신 가게에서 문신을 해버립니다. 덕분에 두 명의 피해자가 문신을 한 곳이 밝혀진 후, 인상착의도 대충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래서야 죽어도 쌉니다.

경찰도 멍청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문신 시술소에 이놈이 또 나타나면 연락하라는 최소한의 요청도 하지 않거든요. 도시에 문신 시술소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범행이 거듭되면 그중 한 곳에 또 들릴 게 뻔하니 당연히 요청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요. 덕분에 선량한 모범 시민인 문신 시술소 사장 찰리 챈은 범인이 다시 나타났을 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심지어 곧 죽을 것 같은 피해자가 함께 있는데도요!
마침 자리에 있던 테디 덕에 경찰에 전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카렐라가 퇴근한 후라 별 소용이 없습니다. 범인이 듣고 있는 와중에 찰리가 지혜를 짜내 남긴 "문신 도안"이 가게에 있다는 메시지도 전화를 대신 받은게 "일단 때리고 물어보는" 멍청한 하빌랜드라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즉, 카렐라에서 시작된 무능한 경찰력의 연쇄반응인 셈입ㄴ비다.

그나마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테디가 범인을 미행하면서 종이 쪽지를 남겨 사람들에게 87분서로 전화를 걸게 만든 것, 그리고 눈물겨운 찰리 챈의 활약 때문입니다. 경찰은 그야말로 받아먹기만 했어요. 버트 클링이 신참 형사로 실수를 연발하는 멍청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도 색다르기는 한데 다른 형사들 모두 바보이니 특별할 게 없어 보입니다. 온갖 중요한 단서 (그중에서 핵심은 문신의 의미!)를 떠올렸지만 그걸 놓쳤다라고 작가가 스스로 친절히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스럽고요.

그래도 TV 속 광고 등 일상생활 속 모두가 사기이며, 그것은 모두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풍자에서 시작되는 혼인 빙자 사기 행각 및 브라운 형사가 쫓는 조무라기 커플의 시시한 사기극 등 사기 관련 이야기는 꽤 재미있기는 합니다. 5달러 지폐에 은총을 내린다면서 바꿔치기 한다던가, 우연을 가장하고 만난 후 일종의 야바위로 사기를 친다던가, 진짜 진주를 가짜로 바꿔치기 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정말로 이 범죄를 잘 알고 있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크리스 도널더슨의 혼인빙자 사기도 여자의 돈을 끌어내는 과정이 정말 그럴듯해서 감탄했고요. 중간중간 소소하게 등장하는 감칠맛 넘치는 대사들도 볼거리입니다. 브라운 형사의 조크 센스가 특히나 돋보이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87분서 시리즈의 명성에 걸맞는 묵직한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무라기 사기극은 여러모로 유머로 다루어지는 느낌이 더 강하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한 디테일들은 나쁘지 않고 속도감 넘치는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87분서답지 않아 감점할 수밖에 없네요. 묵직한 범죄물을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에드 멕베인이 조금 쉬어가는 느낌으로 87분서 시리즈 설정을 가져다가 쓴 로맨스물 이라고 생각됩니다. 작중 카렐라와 테디의 뜨거운 (!) 사랑 이야기 비중을 봐도 그러해요. 메인 스토리부터가 판타지 동화잖아요. 여자들을 납치해가는 사악한 마법사가 있고, 이 마법사에게 공주까지 납치되어 가지만 공주의 기지로 위치를 알아낸 기사(혹은 왕자)가 마법사를 물리치고 공주와 잡혀간(아직 살아있는) 여자들을 구해낸다... 아울러 카렐라와 테디의 뜨거운 사랑과 대비되는 크리스의 프리실라에 대한 거짓된 사랑을 그림으로써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는 거장의 작전도 포함되어 있고요. 사악한 마법사의 거짓된 사랑이 추가된 것이지요.

2016/07/25

몽환화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몽환화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키야마 리노는 올림픽 대표로까지 손꼽혔던 수영 선수였지만, 심리적 이유로 수영을 그만두었다. 그 뒤 리노는 사촌 나오토의 자살 후 가까워진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의 꽃 사진들을 블로그로 만드는걸 돕게 되었다. 그러나 아키야마 슈지가 살해당했고, 경찰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리노, 리노를 우연히 알게 되어 돕기 시작한 가모 소타, 개인적 인연으로 아키야마 슈지에게 보은을 하려는 경찰 하야세, 소타의 형으로 수면 밑에서 은밀하게 수사를 진행하는 요스케 등 여러 명이 사건 해결에 나섰고, 결국 그들은 사건에 정체불명의 '노란색 나팔꽃'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스탠드 얼론 작품입니다. 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언급되기에 2010년대 이후 발표된 근작이라 생각했는데, 책 뒤 해설을 보니 10여 년 전부터 연재해왔던 작품을 수정·가필해 단행본으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장점부터 말씀드리자면, 재미있고 속도감이 넘친다는 점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도입부로 시작해 여러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흥미를 자아냅니다. 결국 하나로 모여 깔끔히 끝나는 마무리도 좋고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납니다.

주인공 커플이 몇 안 되는 단서를 가지고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모험에 약간의 추리가 더해진, "부부 탐정" 스타일의 작품인 탓에 온전한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 와중에 등장하는 추리 역시 작가의 명성에 걸맞습니다. 현장에 남겨진 단서 — 젖은 방석, 페트병 차가 담긴 찻잔 — 을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하야세 경부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왜 시원한 페트병 차를 마시는데 유리컵이 아니라 찻잔을 사용했을까? 찬장에 근사한 유리컵이 있었는데?’라는 극히 사소한 의문에서 시작되는 추리가 아주 설득력 있습니다. 아들 유타와의 인연으로 오갔던 연하장의 내용이 주요 단서가 되었다는 건 다소 작위적이지만,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고요.(무언가의 성취를 기원해 차를 끊는다는 것이 일본에서 일반적인 문화인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또 아키야마 슈지가 개화시킨 노란 나팔꽃이 살인의 동기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예상과 다른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보통 이런 설정이라면 거액의 돈이나 비밀 조직이 얽혀 있기 마련인데, 손주의 친구에게 살해당했다는 평범한 결말인데 오히려 신선했던 덕분입니다.

소타와 리노의 성장기적 서사도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리노의 심리적 약점 극복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소타가 원자력 전공자로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빚도 유산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재미와 흥미에 비해 진상이 다소 시시합니다. 제목 그대로 ‘몽환화’라 불리는 나팔꽃 씨앗에 환각 효과가 있어 에도 막부메이지 시대에 걸쳐 통제되었지만, 마취제로 활용했다는 가공의 역사 설정까지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범인이 단지 우연히 얻은 씨앗의 환각 효과를 지속시키기 위해 번식 의뢰를 한 마사야라는 점은 김이 빠집니다. 역사적 스케일의 설정은 결국 곁가지일 뿐이니까요.

현대 파트에서도 가모와 이바 가문이 대를 이어 비밀리에 나팔꽃을 쫓는다는 설정, 소타가 나팔꽃 사건 피해자의 후손이며 첫사랑이 그와 얽힌 이바 가의 딸이라는 설정은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이 정도면 ‘핫토리 가문이 아직 닌자 일을 한다’는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작품 속 수수께끼 대부분이 이 두 가문의 비밀스러운 행각 때문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요스케가 소타에게 진상을 숨긴 이유, 이바 다카미가 구도를 추적하며 가명을 쓴 이유, 다카미가 소타를 만나고 도망치듯 떠난 이유, 요스케가 리노에게 정체를 숨긴 이유, 하야세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 모두가 그러합니다. 이 모든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요.
또한 뭔가 거대한 비밀에 휘말린 듯 보였던 리노와 소타 커플은 불필요한 ‘헛수고’를 했다는 뜻이기도 해서 허무합니다. 슈지 살인사건의 범인은 하야세가 밝혀냈고, 노란 나팔꽃의 진상은 요스케와 다카미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스터리를 만든 건 리노가 초반에 하야세 경부를 믿지 못한 탓인데, 그것조차 설득력 있지는 않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가모 소타보다는 경찰 하야세가 더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하지만 단점도 뚜렷하여 감점합니다. 그래도 작가의 팬이라면 읽어볼 만 합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16/07/18

내 방 여행하는 법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 장석훈 : 별점 1.5점

내 방 여행하는 법 - 4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유유

1794년에 프랑스 군인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결투를 치렀다는 이유로 42일간 가택연금을 당한 후, 자택에서 보낸 일과를 개인의 단상과 곁들여 써내려간 에세이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멋드러진 소갯글을 읽고 혹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42일간 작은 방 안에서 무슨 여행 관련 이야기를 풀어낼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소갯글과 비슷하게 방과 여러 가구들, 의자, 침대, 벽에 걸린 그림들, 애견과 하인 등을 바라보며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를 여행처럼 묘사하는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딱히 재미있거나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다는 겁니다. 발상만 독특할 뿐 작가의 능력이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 탓입니다. 장황한 장광설 스타일의 문체, 쓸데없는 미사여구, 난무하는 자화자찬이 가득해서 중학생이 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건질 만한 것은 당대 프랑스 부르주아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음악보다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등의 독특한 시각 정도? 허나 화가는 뒤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이유이며, 작곡가도 음악을 남기지만 음악은 유행에 따라 변화를 겪는데 회화는 그렇지 않다는 무식한 이야기라 딱히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짤막한 분량이라 읽기가 힘들지는 않았으며, 나름 충실한 도판에 유유 출판사 책다운 깔끔한 장정만큼은 돋보였습니다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약간의 장점도 12,000원이라는 가격이 납득이 되는 수준은 아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전 손택 등이 극찬했다는 소개가 전혀 와 닿지 않는군요.

그래도 아이디어는 괜찮은 만큼 저도 언젠가 비슷한 글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최소한 제 방이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방보다는 재미있을 듯 합니다.

2016/07/16

평론가 김봉석의 올여름 오싹하게 할 공포 소설 5

제목 그대로의 기사가 올라왔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기사는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위는 저 역시 높이 평가한 "대프니 듀 모리에"라 반갑더군요.
2위는 오노 후유미의 "시귀",
3위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
4위는 스즈키 코지의 "링",
5위는 H.P. 러브크래프트의 '러브크래프트 전집'입니다.

정통 공포, 호러 소설이라고 부르기 힘든 작품이 함께 선정되어 있기는 한데, 비교적 무난한 선택이라 생각되네요.

마지막으로 제가 뽑은 5편의 공포 소설은 아래와 같습니다. 더운 여름, 오싹한 경험을 원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등외: 정식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하드론의 "기지 살인사건"도 추천드립니다.

2016/07/13

사냥개 탐정 - 이나미 이쓰라 / 신정원 : 별점 3점

사냥개 탐정 - 6점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손안의책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 이어 읽은 사냥개 탐정 류몬 다쿠 단편집으로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크게 보면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서의 감상과 동일합니다. 추리적으로는 약하지만 진짜 사나이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멋드러지게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허나 시리즈로 묶여 나온 덕분에, 이 작품만의 매력이 보다 강하게 느껴지는게 좋았습니다.

우선 작품의 핵심인 류몬 다쿠가 정말 멋지게 등장합니다. 하드보일드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전형적인 마초는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 등은 남보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런 인물들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를 잘 이어받은게 "불야성"의 류젠이일 테고요.
그러나 류몬 다쿠는 다릅니다. 거친 터프가이로 목적을 가로막는 악당들을 파괴하는 강한 겉모습은 고전 하드보일드와 유사하나,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가 떠올랐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주인공 캐릭터인 셈입니다. 정의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그러면서도 여성과 아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진짜 남자들이요. "셰인"이나 "하이 눈"에서 처럼요. 현 시점에서는 너무 낡아빠진 설정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캐릭터들이 너무나 좋습니다!
작가도 이를 인지했는지는 몰라도 서부 영화의 악당들과 비슷한 악역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수르랑, 따라랑", "사이드킥" 두 편이 그러한데, 자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초 목장주 악당은 작중 언급된 대로 OK 목장의 악당이 떠오를 정도예요.

추리적으로도 내세울 부분은 많지 않지만 전작보다는 사건성 높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며, 현실적인 탐정의 활약도 그럴싸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그런대로 만족할 만 합니다. "악역과 비둘기"에서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의 존재에서는 나름 추리의 묘미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작품을 뒷받침하는 섬세한 묘사도 대단한 수준입니다. 류몬 다쿠의 생활 하나하나를 드러내는 디테일한 묘사들 — 사냥, 식사, 대화, 독서 등등등 —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합니다. 사냥 이야기에서 새의 내장을 빼는 묘사는 "산적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것인데 정말 생생하게 묘사해서 만화보다도 더 뇌리에 박히는 느낌이에요. 덕분에 가공의 인물이 실존하는게 아닌가 착각이 들게 만드네요.

하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아서, 낭만적인 분위기와 고전 서부극 분위기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기타와 사냥개"에서 의뢰인의 개를 잠깐 돌봐주는 길거리 가수 다마미즈의 가족 이야기, "악역과 비둘기"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덴도의 시노부를 향한 애틋한 연심과 안타까운 결말도 감정 과잉으로 보이고요.

쓸데없는 액션이 많은 것도 조금 아쉽습니다. "기타와 사냥개"에서 취객들을 제압하는 것 처럼요. "사이드킥" 앞부분에서 쓸데없이 야쿠자와 엮이는 전개도 불필요했으며, 중간에 다바타와 실버 고스트가 폭주족에게 쫓기는데 우연히 동승했던 학생이 신호총으로 오토바이를 날려버린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소소한 액션의 연속으로 마지막에 류몬이 스가이의 사주를 받은 야쿠자를 날려버리는 멋진 액션이 빛이 바래 버립니다. 딱 한 번만 임팩트 있게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한 편, 한 편만 놓고 볼 때는 최고라 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 진짜 사나이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게 좋았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진짜 사나이의 묵직하면서도 서정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 1: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970년대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시대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지만 발표 시기는 1990년대인데 의외네요.

덧 2: 류몬 다쿠는 3만 5천 평의 대지주이지만 현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허나 개 한 마리 찾아주는 대가가 50만 엔이라는 거액이라 잘 와닿지는 않더군요. 지금도 거액인데 1970년대에는 더 큰 돈이었겠죠. 게다가 모든 작품에서 보수를 받는 데 성공하는데 이게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면, 먹고사는 데 정말 문제없는 수준일 테고 말이죠. 있는 놈이 더한 느낌이랄까...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수르랑, 따라랑"

영화 기획자이자 예비 감독인 가네마키가 류몬 다쿠를 찾아왔다. 가네마키는 "성야 이야기"라는 영화 연출을 위해 유명 동물 사육자 기타 조켄의 '기타 동물 랜드'를 방문한 후, 기타 조켄의 후처 에미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 고유키, 살처분을 앞둔 순록 수르랑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고유키가 수르랑과 사라졌다는걸 에미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냥개는 아니지만 가네마키가 김계화의 시동생이라는 점, 그리고 딱한 사정을 이해한 류몬은 순록을 찾아 나서는데...

살처분을 앞둔 순록과 아버지에게 버림받다시피한 아들이 함께 탈출한다는 설정이 너무 뻔했던 작품. 마지막 엔딩도 작위적입니다.

고유키가 연약한 외모와는 다르게 진짜 사나이였다는 마무리는 작품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며, 세세한 묘사는 빛을 발하나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타와 사냥개"

류몬은 우메즈의 의뢰를 받아들여 사냥개 그레이를 찾아 나섰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포스터를 활용한 뒤, 택시 운전사에게서 그 개가 길거리 가수 다마미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사냥개를 찾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며, 수사 방법도 포스터를 통한 목격자 확보라는 현실적인 것이라 마음에 들었던 소품입니다. 일상계로 볼 수도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개를 찾는 과정에서의 드라마가 약한 탓에 몇 개의 무리수가 조금 눈에 거슬립니다. 독특한 괴한인 의뢰인 우메즈, 다마미즈에게 시비를 건 취객들에 대한 폭행, 마지막으로 다마미즈의 가족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냥 소품 느낌으로 깔끔하게 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이드킥"

일본 굴지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조련소 서일본농장 사장 스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라진 저먼 셰퍼드를 찾아달라는 의뢰 전화였다. 일단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알고보니 진짜 의뢰 내용은 셰퍼드와 함께 사라진 마필 관리사 다바타와 그가 끌고 간 과거의 명마 실버 고스트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3인조이기에 트럭을 이용했으리라 짐작한 류몬은,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서 알게 된 트럭 운전 기사 가와타니에게 수소문을 부탁하는데...

"수르랑, 따라랑"과 유사한 동기, 즉 살처분을 앞둔 가족과도 같은 경주마와 탈주한다는 동기가 등장하합니다. 동기는 뻔하지만 마필 관리사 다바타의 우직함은 매력적으로 묘사됩니다. 갈 데도 마땅치 않고, 연약한 소년보다야 나이는 들었지만 마필 관리사 쪽이 보다 현실적인 건 당연하니까요. 명확한 목적 — 수의사에게 보여주어 말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밝힌다! — 도 분명 존재하고요.

한마디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려고 하지 않는 진정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스가이와 담판을 짓는 류몬 다쿠의 마지막 장면까지 멋집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단 딱 한 가지, 앞서 말씀드렸듯 초·중반에 쓸데없는 액션 장면에 대한 묘사는 불필요했습니다.

"악역과 비둘기"

스트리트 파이터 덴도가 조깅할 때 데리고 다니던 이웃집 사냥개가 도둑맞았다. 의뢰를 받은 류몬 다쿠는 연이어 걸려오는 전화를 통해 사냥개 도난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으며, 사냥개를 암거래하는 조직적인 범죄가 있다는걸 눈치챘다. 지형적으로 사건 현장 중심을 흐르는 하천을 통해 배로 개를 옮기는 것을 알게 된 류몬은 덴도와 함께 밀거래선을 덮치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스케일이 큰 작품. 혈통 있는 사냥개를 노리는 거대 조직과의 승부가 그려집니다. 대단치는 않지만 나름의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이기도 하죠.

하지만 시리즈의 매력을 잘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이전 시리즈가 자연과 함께하는 산사나이의 이야기라면 이 에피소드는 그냥 전형적인 액션물 느낌이 더 강한 탓입니다. 시노부가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엔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그냥 덴도와 함께 류몬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생각되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액션물로서의 재미는 충분하지만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에는 아쉬웠습니다.

2016/07/11

신들의 연기, 담배 - 에릭 번스 / 박중서 : 별점 4점

신들의 연기, 담배 - 8점 에릭 번스 지음, 박중서 옮김/책세상

담배의 역사를 미국 중심의 근, 현대사와 엮어 설명하는 역사서입니다. 담배가 서구 문명을 어떻게 좌우했는지를 알려줍니다. 마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담배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는 큰 통사적 흐름 속에서, 역사 속에서 담배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거든요. 그러면서 담배를 발전시키고 유행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도 함께 펼쳐집니다. 잘 모르는 인물들도 많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월터 롤리 경,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 등 유명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교양과 재미가 잘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야인들이 신앙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담배였고, 이를 알게 된 유럽인들이 담배를 접한 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처방"의 용도가 컸다고 합니다. "대지가 인류를 위해 길러낸 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귀중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말이죠. 콜럼버스가 유럽에 들여온 담배는 에스파냐의 역사가 만리코 오브레곤이 "금 못지않게 값지고, 어쩌면 금 못지않게 해로운 것"이라고 언급했다는데, 아주 그럴싸합니다.

콜럼버스의 부하로 최초의 흡연자 중 한 명인 로드리고 데 헤레스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 때문에 주변 시민들은 그가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그가 내뿜는 연기는 지옥의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믿어 종교재판소에 신고했고, 아마도 유럽 최초의 흡연자 데 헤레스는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한 뒤 무려 3~7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네요.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잉글랜드에 흡연 열풍을 불러일으킨 월터 롤리 경에 대한 일화들도 화려합니다. 이후의 종교적, 정치적인 탄압과 맞물리는 그의 최후도 아주 인상적이에요. 처형당하기 직전 마지막에 담배를 피웠다고 하는데, 전기작가 존 오브리의 말 그대로 "그것이야말로 그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에 좋은, 적절한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후 미국이 식민지로 개발되는데, 담배가 큰 역할을 했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정착민 중 한 명이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아내 소금구이(!)를 만들 정도로 힘든 환경이었는데,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가 담배를 재배하여 가공하는 데 성공한 후, 해외 수출로 거액을 벌었던게 주효했다는군요. 당시 담뱃잎의 가치가 워낙 높아서, 한때는 화폐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잘나갔다고 하네요. 또 이러한 담배 재배는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한 대농장 체제로 발전했고, 이러한 대농장의 주인들이 운영 등에 능력을 발휘하여 결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으로 이끄는 인물들이 되었다니 정말 미국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작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담뱃대에서 엽궐련으로 흡연자들이 옮겨가는 중, 씹는 담배가 유행한 걸 당대의 역사적 흐름과 연결하는 시선도 인상적입니다. 약동하는 신세계답게 양손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정말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관련 사연도 재미납니다. 재채기를 유발해서 처음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코담배의 장점 -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고, 연기 구름도 만들지 않는 등 - 에 더해 왕실의 속물 근성을 자극했기 때문에 상류 계급에서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과시적인 행위에 어울리는 고급 케이스가 등장한 것도 이유의 하나라고 합니다. 온갖 귀금속으로 치장한 물건들도 많았다니, 유명 소설에 중요한 보물로 나온 것도 이해가 되네요.

다음에는 담배의 유행이 지궐련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설명됩니다. 쉽게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장점이 군인들에게 어필하였기에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으며, 본색의 지궐련 제조기가 발명되어 저렴한 가격에 공급이 가능하게 되는 등 복합적 이유가 작용한 탓으로 지궐련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존 J. 퍼싱 장군부터가 "이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총알만큼이나 많은 담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흡연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거대 담배 회사가 출현하고, 담배를 팔기 위한 광고가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겠지만, 여튼 현대 광고에도 담배가 정말 기여한 것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흡사 에세이에 가까웠던 장황한 설명조의 광고가 단순한 브랜드와 카피 위주의 광고로 바뀐 것이 '캐멀' 광고부터였다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러한 광고의 최대 걸작으로 소개되는 것은 아메리칸 토바코(럭키 스트라이크로 유명한) 회사의 사주 힐이 만든 "단 것 대신 럭키를 집으세요."입니다. 여성 흡연자를 노린 선전 문구로 광고 홍보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솜씨가 결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하네요. 이 사람의 전략은 지금 보아도 충분히 인상적으로, 럭키 스트라이크의 초록색이 촌스럽다고 생각한 여성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모든 마케팅 채널을 동원하여 초록색을 유행 색으로 만든다는 식입니다.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 PPL 투자는 기본이었고 말이죠.

하지만 점차 담배의 악영향이 분석되고, 1964년 미국 보건위생국장 루서 테리의 발표를 통해 담배가 만병의 근원임이 공표된 뒤 서서히 사양세를 걷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새롭고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한 덕분에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담배가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싶은 생각도 많이 들고요. 도판이 부족한 것은 살짝 아쉽긴 하지만, 도판이 중요한 책은 아니기에 큰 단점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흡연자라면 굉장히 반가울 요소가 많은 책입니다. 담배가 인류 문화와 역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 책 한 권이면 완벽하게 깨우칠 수 있고요. 비록 몸에는 좋지 않지만, 과거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이것이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담배를 피운다면 기분은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흡연자이시면서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6/07/09

검은 수도사 - 올리퍼 푀치 / 김승욱 : 별점 3점

검은 수도사 - 6점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문예출판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숀가우 교구 알텐슈타트 성 로렌츠 성당의 신부 안드레아스 코프마이어가 독살당했다. 현장을 조사하던 지몬과 야콥 퀴슬은 성당 지하실에서 템플기사단장의 묘를 발견했다. 지몬은 신부의 여동생 베네딕타와 함께 암호 풀이를 통해 템플기사단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 나섰고, 야콥 퀴슬은 법원 서기 요한 레흐너의 지시로 도적단을 토벌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지몬과 베네딕타 사이를 질투하여 스스로 아우크스부르크로 여행을 떠나는데...

원래 남자들은 다 그래. 손에 쥔 걸로 만족하는 법이 없지. 하지만 조만간 다시 돌아온단다. 항상. - 지몬과 베네딕타의 관계 때문에 속상한 마리아에게 산파 스승 슈테흘린이 하는 말.

"왜 항상 그렇게 말이 많은 거야?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그냥 입 다물고 죽여." 나타니엘 수사를 죽이고 퀴슬이 하는 말. 나타니엘이 말이 좀 많기는 했습니다...

17세기 바바리아 지방을 무대로 한 역사 추리물 "사형 집행인의 딸"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그런데 시대와 배경이 다를 뿐,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느낌이 물씬 납니다. 오래된 유물에서 하나씩 단서를 얻어 보물을 찾아나가는 과정, 그리고 그 보물이 예수가 못 박혔다는 십자가라는 종교적 장치가 핵심이라는 점에서요. 성당의 수장이 흑막이라는 점은 "천사와 악마"가 떠오르고, 성물을 찾는 조직과 핵심 성물이 십자가라는 설정은 "용오"의 한 에피소드도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우선 읽는 재미가 뛰어납니다. 지몬과 베네딕타 커플의 암호 풀이, 퀴슬의 강도단 추적, 마리아의 수도사 추적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잡한 이야기가 지루함 없이 속도감 있게 전개됩니다. 결말에 이르러 모든 내용이 유기적으로 하나로 이어지는 구성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덕분에 약 500페이지라는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17세기 독일 바바리아를 무대로 한 묘사도 빼어납니다. 시대와 장소, 다양한 인물, 민초들의 삶 등 모든 요소에서 철저한 고증과 설득력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네요.

전작에서 이어지는 캐릭터들의 개성도 여전합니다. 특히 이 시리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야콥 퀴슬의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집니다. 지성과 힘을 겸비한 먼치킨 캐릭터로 여전히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거든요. 특히 성 요한 예배당에서 천장을 타고 내려오는 결전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에요. 상상만으로도 전율을 자아냅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매력도 더해져 있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도적단 두목 한스 셸러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정도지요.

지몬 프론비저도 미워할 수 없는 뺀질 캐릭터로 톡톡튀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암호 풀이에서 보이는 대단한 활약은 조금 놀랍기도 했고요. 헐리우드식 버디 무비에서 흔히 등장하는 친구 캐릭터 정도로 생각했는데 의외의 활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사형 집행인의 딸" 마리아의 존재입니다.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는 여정에서 강도에게 돈을 빼앗기고, 우연히 만난 수도사를 미행하다 붙잡히는 등 민폐 캐릭터로만 그려지는 탓입니다. 지몬과 베네딕타의 관계를 질투하는 장면들도 불쾌하게만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캐릭터인 베네딕타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좋은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이랬을 것이라는 묘사 등을 통해 마리아의 복제판처럼 느껴집니다. 게다가 그녀가 도적단의 일원이라는 반전은 굳이 필요했나 싶을 정도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단순히 안드레아스 신부의 여동생으로 설정해도 충분했을 텐데, 이야기를 지나치게 확장시켜 오히려 주된 흐름에 방해가 되었어요.

우연에 의존한 전개도 다소 거슬립니다. 마리아가 야코부스를 우연히 만나 미행하고, 다시 우연히 지몬과 베네딕타를 구하게 된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다른 인물들의 만남이나 사건 진행도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고 있고, 결말에서는 곰팡이 슨 약초로 페니실린을 만들게 된다는 전개까지 등장하는데 이건 많이 억지였어요.

또한 암호 풀이는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해석도 흥미롭지만 독자가 함께 추리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 지역 고유의 역사나 지명에 기반한 내용이기 때문인데, 이런 점은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역사 모험물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쉬움은 있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6/07/06

알라딘 17주년, 나의 기록

알라딘 16주년, 나의 기록

올해도 돌아온 알라딘의 연례행사. 제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라딘에서만 책을 구입하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도 활용하는 만큼 실제 구매한 책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상위 1% 안에 든다니 조금 뿌듯하긴 하네요.

알라딘 회원이시라면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2016/07/04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어니스트 브래머 / 배지은 : 별점 2점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4점
어니스트 브래머 지음, 배지은 옮김/손안의책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눈먼탐정 캐러더스"라는 제목의 자유 추리문고로 접했던,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 중 한명인 캐러도스 시리즈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과 겹치는 작품은 2편밖에 없네요(하서판 걸작선에서 읽었던 "브룩벤드 장의 비극"까지 포함하면 3편이지만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좋은 작품들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별로인 탓입니다. 고전 황금기 작품답지 않은 수준이에요. 어떤 작품은 비약이 너무 심하고("디오니시우스의 동전" 등), 어떤 작품("나이트크로스 신호등 문제" 등)은 단서 추적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브룩벤드 장의 비극", "틸링 쇼 미스터리" 두 편은 괜찮지만 양적으로 부족해요.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던 "추리적으로 그다지 정교한 장치는 없다. 이야기의 논리는 합리적이지만 세밀한 복선이나 반전 없이 한방향으로 흘러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에 기복이 별로 없고 드라마도 재미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사건이 시시하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너무나 한심스러운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울러 캐러도스의 능력에 대한 과장이 너무 심합니다. 제목 그대로 장님이기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오감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거든요. 인쇄된 신문도 손끝으로 만져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너무 작은 글씨는 무리라서 비서에게 낭독을 부탁한다지만). 거기에 막대한 재산, 경찰 수사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위에 더해 심장 고동소리를 듣고 명중시킬 수 있는 총솜씨까지! 이 정도면 "데어 데블"에 필적하는 능력자이지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마블 혹은 DC 코믹스에서의 활동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추리 소설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간과한 느낌입니다. 탐정의 개성에 집중하면 잠깐 흥미거리야 될 수 있겠지만, 오래 가기는 힘들죠. 노래 실력 없이 유행과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아이돌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국내에 소개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다른 셜록 홈즈의 라이벌보다야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졌으니 아주 실패한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디오니시우스의 동전"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으로 접했던, 탐정 칼라일과 캐러더스가 처음 만나게 되는 시리즈 첫 단편입니다. 전설적인 명탐정이 첫 등장한다는 것 외에 딱히 언급할 만한 장점은 없으며,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하다는 단점만이 도드라집니다. 칼라일이 가져온 동전을 캐러더스가 이전에 만져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시스토크 경이라는 것 뿐입니다. 동전의 진위 여부를 감정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헬렌 브루네시가 니나 브룬이라는 가명을 계속 써가며 하녀로 일한다는건 추리의 영역도 아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이트크로스 신호등 문제"

"그때 성공을 갈구하는 내 욕망의 잔에 자네의 조롱을 가득 들이붓는 거야." - 캐러더스가 칼라일에게 도와줄 것을 약속하며 하는 말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작은 주택이라도 정부의 합법적인 약탈로부터 안전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 주식 투자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는 캐러더스에게 답하는 파킨슨의 대답

나이트크로스 역에서 발생한 중앙 교외선의 충돌사고로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관사는 통과 신호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신호원은 정지 신호를 바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칼라일은 기관사 허친스 씨의 의뢰로 조사에 나선 뒤 캐러더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진상은 신호등을 바꿔치기한 범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게 과연 사립탐정이 나서서 수사했어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두 명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제3자의 조작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 보는 것이 상식이니까요. 캐러더스의 추리도 거의 없고, 탐문 수사에 의지하는게 전부입니다. 

마지막에 드리슈나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라면 이런 인정을 베풀지 않았을 겁니다. 악당은 지옥으로 가야죠. 또 범인에게 유서도 없는 자살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체 불쌍한 기관사는 어떻게 풀어줄 셈인걸까요?

딱 한 가지, 범인 드리슈나가 수십 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되려 영국 정부와 군대가 인도의 죄 없는 수천 명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논리로 자신이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장면만큼은 인상적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보면 놀라울 정도죠.

"당신은 당신의 정부와 군대가 내 나라의 죄 없는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래도 저 한 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역부족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브룩벤드 장의 비극"

크리크와 결혼한 여동생 밀리센트의 생명이 걱정된 홀리어는 칼라일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현장 조사를 나간 캐러더스는 크리크의 트릭을 눈치채고 범행을 벌일 날짜를 예측하여 잠복하는데...

이런 저런 앤솔러지 등에서도 접해본 나름 대표작입니다. 범인이 공들여 만든 과학적인 트릭이 돋보이지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뒤처졌으며, 범인 크리크가 이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세공을 많이 했다는 단점은 있지만 발표된 시대를 감안하면 큰 단점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충분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먹혔을 테니까요. 의외성 있는, "사랑과 전쟁"을 연상케하는 막장 결말도 아주 괜찮았어요. 지금 읽어도 낡아보이지 않으며, 크리크의 행동도 살짝 이해할 수 있게 만들거든요.

낡긴 했지만 대표작다운, 읽을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리한 스트레이드웨이트 부인"

"어떤 상황에서 누가 뭘 할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지니는 단 하나의 특성만 연구하면 된다는 것이었지." - 캐러더스가 칼라일에게 추리법에 대한 단상을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하는 말.

"원의 호가 아주 작더라도 그 호를 가지고 전체 원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 하인들은 아는 게 거의 없을 거라는 스트레이드웨이트 부인의 말에 대한 캐러더스의 답.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으로도 읽었던 작품. 다시 읽어도 유치하고 조잡한 사기극입니다. 자기 물건이 아닌 물건으로 보험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잃어버린 척 하고 보험금을 타낸다는 건데 발표 당시에는 먹혔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습니다. 부부의 잘못이 크지만 보험사가 과연 이렇게 허술하게 보험을 가입해 주었을지도 의문이고요.

또 목걸이를 잃어버린 척 위장한 것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5천 파운드를 편취하려는 사기 행각이니까요. 그런데 남편이 목걸이를 반납하려 했다손 치더라도(그것도 의사를 처음부터 밝힌 게 아니라 캐러더스의 강압에 못 이긴 것), 이를 캐러더스가 받아들인 것은 엄연한 직권 남용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언급할 게 별로 없습니다. 캐러더스가 부인 장갑의 향수 냄새가 다른 것을 눈치채고 진상을 알아낸다는 것만큼은 캐러더스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지만, 문제는 이 정보가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범죄라 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부르주아 상황극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배우 해리의 마지막 업적"

루카스 스트리트의 사설 대여금고 회사는 런던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매니저만 아는 암호를 먼저 제출해야 하고 그 뒤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여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여금고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단편집에서 돋보이는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진상도 합리적이에요. '범인이 변장하여 12개의 금고를 임대하여 열쇠를 복사하고 반납한다. 이후 아내를 통해 매니저 장부를 몰래 사진을 찍어 암호를 알아낸 뒤, 소유자로 변장하여 방문한다'는 것인데 꽤 그럴싸합니다. 캐러더스의 불에 타지 않는다는 호텔 (결국 화재로 전소해버린)에 대한 견해도 인상적입니다. "그 호텔이 화재에 안전하다고 확신한 조심성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만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해리의 아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건 운과 우연 덕분이었으며, 변장이 만능처럼 사용된건 문제입니다. 아무리 변장이 특기라도 해도 한두 명도 아닌 열 두명을 변장했다? 무리입니다. 마지막에 범인 해리가 교회 간증회에서 구원을 얻어 훔친 물건을 모두 되돌려 준다는 결말도 어처구니가 없었고요.

또 캐러더스가 범인이 미국인일 것이라고 추리한 이유도 비합리적입니다. 현대 미국의 영민하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그를 기발한 장치의 전문가로 키워낸 것이라고? 이건 뭔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중 몇 안 되는 본격 추리물인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틸링 쇼 미스터리"

매들린 휘트마시는 캐러더스에게 아버지 윌리엄이 재산 때문에 오랜 분쟁이 있어온 조카 프랭크를 쏘고 자살했던 사건의 진상 조사를 부탁했다. 프랭크는 운 좋게 주머니 속 시계에 총알이 박혀 살아났었다. 그녀의 몇 가지 증언 - 아버지 서랍 속 총이 사라졌었던 것, 두 번째 총성은 조금 약했던 것 - 을 토대로 캐러더스는 사건을 재수사해 나가는데...

조금 올드하지만 '팜므 파탈'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매들린 캐릭터가 돋보였고, 지나칠 정도로 운이 좋은 프랭크에게 의심이 가게끔 하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우선 매들린부터 살펴보자면, 프랭크가 나쁜 놈이기는 하지만 일말의 죄책감 없이 캐러더스를 이용하여 그를 살인범으로 만드려는 조작을 벌이는 전개가 예상 외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당시 추리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굉장히 활동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생각됩니다.

또 매들린의 조작에 의해 프랭크가 범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결국 최초 알려진(거짓말같은) 진상이 진짜이며, 의뢰인의 의뢰 후 독자에게 공유된 증언과 증거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것 역시 시대를 앞서간 전개였고요.

물론 프랭크의 시계가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긴 합니다. 캐러더스는 여기서 진상을 알고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눈치챘지만, 독자는 시계를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끌려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아주 신선하고 놀라운 요소가 많기에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파운틴 코티지의 소동"

"사람들은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상황들을 운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버리곤 하지요" - 엘시가 최근 닥친 불운을 이야기하자.

칼라일의 사랑하는 조카딸 엘시 부부에게 이웃집에서 콩팥 요리를 정원에 던졌고, 멀쩡한 정원사가 저렴한 가격에 일하겠다고 자원하는 등의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캐러더스는 이 모든 일에 숨겨진 진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데...

일종의 일상계. 사실 지금 읽기에는 좀 뻔합니다. 원래 이 집의 집사였던 옆집 남자는 이 집에 세들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원래 이 집의 정원사였던 남자가 싼 값에 정원을 가꾸어 주겠다고 자원한다면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집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독자에게 보물 찾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주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책인 "돔 너머의 화염"이 독자에게 제공되지 않기에 암호문을 푸는 재미는 전무하고 그냥 캐러더스의 설명에만 의지하고 있거든요.

그 외 콩팥을 던진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에 더해, 도움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염치없는 엘시 캐릭터는 정말이지 호감을 갖기 어려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한마디로 그냥저냥한 소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어둠 속의 게임"

"귀도는 외국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악인 이탈리아인이었다." - 귀도에 대한 소개 중. 발로텔리에게 분노한 영국 팬이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편파적이라 외려 인상적이군요.

비델 경감이 X 백작부인의 의뢰로 중요한 서류를 훔친 귀도 일당의 체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흔쾌히 허락한 캐러더스에게 대영 박물관에서 귀중한 동전이 도둑맞았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이후 정체 모를 이탈리아 여인이 귀중한 동전을 발굴했다며 찾아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인 "디오니시우스의 동전" 사건에 등장했던 위조범 동피에르, 그의 부인 니나 브룬이 등장하여 단편집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식 구조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건은 별게 없어요. 동피에르와 니나 브룬이 동전을 미끼로 캐러더스를 유괴한 후, 귀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두려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후 납치된 캐러더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은신처를 정전시킨 후, 제목 그대로 어둠 속에서 납치범들과 대치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이래서야 추리물보다는 모험물에 가까와 보입니다.

때문에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비델 경감이 어떻게 은신처를 덮쳤는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의 약점만 도드라질 뿐이에요. 비록 캐러더스가 입구에 흔적을 남겼더라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또 과연 어둡다 하더라도 맹인 1명에게 2명, 아니 3명(니나 브룬까지)의 악당이 꼼짝없이 털리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캐러더스의 액션(?)이 펼쳐진다는 점은 놀랍긴 합니다. "데어데블"의 선구자격인 작품이랄까요. 어둠 속 클라이맥스의 긴장감도 대단했고요. 추리물로서 가치는 거의 없지만 만화 같은 극적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장님 슈퍼 히어로물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6/07/01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 강명관 : 별점 2점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 4점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

안경, 망원경, 우리거울, 자명종, 양금의 다섯 가지 물건에 대한 미시사 서적입니다. 언론을 통한 책 소개도 마음에 들었고, 조선 미시사 서적 분야에서는 유명하신 강명관 교수의 책이기도 해서 집어들었습니다. 

책은 저 다섯 가지 물건이 조선에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당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사료 중심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다섯 가지 물건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안경은 임진왜란 전후로 처음 수입되었으며, 조선시대 최초로 안경을 쓴 왕은 숙종이다("승정원일기"기준), 안경을 쓰고는 어른 앞에 나설 수 없는 법도가 생겼다는 등의 정보들이 빼곡하게 실려 있는 덕분입니다. 이익이 안경을 만들어 자신에게 시력을 되찾아준 '구라파' 사람들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조선의 천재라 할 수 있는 홍대용의 여러 활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망원경, 거울, 자명종, 양금 항목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이며, 그 중에서 북경 천주교당을 방문해서 처음 본 파이프 오르간의 동작 원리를 곧바로 이해하고, 바로 조선의 음악을 연주해서 들려주었다는 에피소드는 통쾌함마저 느껴졌습니다(보아라! 이것이 조선 남아다!). 1640년 이민철(백강 이경여의 서자)이 10세 (혹은 9세)에 자명종의 이치를 깨우치고 대나무못과 기름종이로 자명종의 모형을 제작했다는 일화에서는 입이 떡 벌어졌고요. 지금으로 따지면 이쑤시개와 마분지로 자명종 모형을 만든 셈인데 참으로 대단합니다.

조선에서 이러한 문물에 대해 어떻게 분석했고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이후 어떤 조선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특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 안경 외에 실용화가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었어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이런 고가의 사치품을 향유할 수 있는 경화세족의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든 것,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떨어질 뿐더러 유학에서 이야기하는 완물상지의 도덕적 경계에 걸려 진지한 탐구를 하지 않은 것, 농업 외 생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현실, 중국에 의해 재정립된 서양 과학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해할 필요도 없었던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망원경은 천문 관측과 전쟁에 도움이 되지만, 조선에서는 천문 관측, 전쟁에 따른 수요가 없었기에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이지요. 시계 역시도 농사가 주 산업인 조선에서 시간을 분초단위로 알 필요가 없었던 탓이 컸습니다. 농사 지으려면 절기만 알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흥미로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사료 중심의 나열이라 읽기 힘들고, 재미를 느끼기도 어렵거든요. 예를 들면 '누구누구의 글을 보면 이 물건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그런데 이 글은 누구누구의 무슨 글을 이렇게 인용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 꼬리를 물고 글의 유래를 찾아 나가는 식의 내용이 많습니다. 좀 더 요약해서 읽기 쉽게 정리했어야 했는데 나열 형식으로 이어 쓰고 있어서 분량도 많고 지루했습니다. 실생활과 관련된 에피소드라도 많았더라면 조금 재미있었겠지만, 실생활에 영향을 준 물건이 거의 없다보니 그렇게 쓰기도 힘들었을 테고요.

또 앞에 290여페이지에 걸쳐 다섯 물건에 대한 상세한 유래를 풀어내지만,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은 20여 페이지 남짓한 맺음말에 전부 요약되어 있다는 단점도 큽니다. 보고자료로 따지면 별첨이 앞에 있고 보고 핵심이 맨 뒤에 있는 느낌이에요. 앞부분의 사료적 가치가 빼어난건 분명하지만, 웬만한 일반 독자는 맺음말만 읽어도 내용 이해는 충분해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저자의 방대한 자료 조사에 따른 결과물은 분명 경이롭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흥미와 재미를 불러 일으키는 책은 아닙니다. 기회가 된다면, 앞서 말씀드린대로 맺음말 정도만 읽어보셔도 충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