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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8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8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시리즈 38권으로 이번 권은 기존 C.M.B와는 구성이 좀 다르다는게 특징입니다. Q.E.D처럼 조금 긴, 이야기 두 편만 수록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두 편 모두 설득력이 부족한 편입니다. 본 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고사, 역사 이야기 비중이 높은 반면, 본 편 쪽은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하고 헛점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언제나처럼 이야기의 양으로 승부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두 편 모두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목격증인"

하루미는 여자친구 마미를 칼로 찌른 죄로 4년 징역을 살고 풀려난 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줄 증인 이시바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정보를 전해준 간다는 마미의 아버지 스미다에 의해 회사가 망했다는 이유로 하루미를 도와 주었다. 하루미는 간다의 지원으로 원양어선을 탄다는 이시바나의 행적을 3년 동안 뒤쫓는데...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고사인 한단지몽, 그리고 소품으로 등장하는 환등기처럼 '환상'을 소재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환상'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고 사전에서 풀이되는데, 이야기 속에서 하루미가 찾으려는 이시바나가 바로 환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시바나 우게츠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인물이라는게 너무 뻔해서 좀 시시했어요. 이름부터 그렇잖아요. 돌에 핀 꽃, 빗 속의 달이라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하루미가 범행을 저지른 진범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범행을 저지른 사실을 잊어버린채 있지도 않은 증인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하루미가 누군가 (간다)의 꼬임에 넘어가서 자신이 무죄라는걸 '날조할 수 있을' 증인을 찾아나서는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처럼 하루미 스스로가 본인이 무죄라고 굳게 믿는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기억상실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에는요. 환상이 그 비밀, 정체를 아는 사람에게도 환상으로 보여질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이시바나의 존재를 던져주어 하루미가 3년 동안 허송세월하게 만든 간다가 마미의 아버지 스미다가 변장한 것이라는 진상, 그리고 그 동기만큼은 괜찮았습니다. 하루미가 선고받은 7년 형이 판결에서 4년으로 감형되었기 때문에 모자라는 3년을 더 썩게 만들려는 의도였다는데 꽤 그럴듯했어요. 간다의 이름을 핵심 소재이기도한 고사 '한단지몽'에서 이름을 따 온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물론 간다의 이름 트릭은 일본인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겠지만요.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납득할 수 없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빛의 거인"

성배나치라는, "인디애나 존스"로 친숙한 소재가 대거 등장합니다.

'아이슬란드'와 게르만 신화의 아버지 스노리라는 소재는 신선한데, 이야기는 어설픕니다. 게르만 신화의 원류가 "에다"의 고향 아이슬란드이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에 성배가 있다!는 추리부터 어설프지요. 설득력도 없고요. 아버지가 보내온 소포 속 물건인 방해석이 아이슬란드에 많이 난다는 단서는 나쁘지 않지만, 아이슬란드가 방해석의 유일한 산지는 아니라서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에요. 현무암이었다면 무대가 제주도가 되었을까요?
애초에 료타의 아버지가 보낸 소포 암호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바랐다면 그냥 편지를 쓰면 되니까요. 어차피 미행당하고 있어서 위치가 드러나는건 숨길 수 없었기에,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는 암호를 보내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빛의 거인"도 형태는 그럴듯하지만 바로 직전 권 수록작인 "고양이 꼬리"의 자가 복제에 불과해서 아쉬웠고요.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성배가 있는 장소의 함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시랍화된 사체를 간헐천에 넣으면 폭발한다는걸 이용한 함정이라는 아이디어만큼은 괜찮아요. 그러나 이 함정은 1회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 폭발하면 현장은 난장판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800년 전에 설치한 함정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게다가 잘 동작했다? 토목 공사의 신이라도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래도 함정 정도는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넘어간다고 치면,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스노리가 올슨의 병을 낫게 했다는 성배는 버드나무로 만든 잔을 물에 끓인 것으로, 이는 천연 아스피린 성분이었다는 이야기는 마음에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야 말로 C.M.B의 진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본 편 이야기와 함께 나란히 진행되는 스노리의 파란만장하면서도 호쾌한 생애도 역시나 C.M.B다운 현학적 재미를 가득 안겨다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아주 나쁘지도 않지만 납득이 가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 한단지몽이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일이다. 도사 여옹은 한단(邯鄲)으로 가는 도중 주막에서 쉬다가 노생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산동(山東)에 사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산다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으로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베개 구멍 속으로 들어가보니, 고래등 같은 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 명문가인 그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포박당하며 "내 고향 산동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벼슬길에 나갔던가.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거닐던 때가 그립구나"라고 말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수년 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노생은 모두 고관이 된 아들 다섯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런데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노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메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아직 뜸이 들지 않았을 정도의 짧은 동안의 꿈이었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웃으며 말했다. 노생은 한바탕 꿈으로 온갖 영욕과 부귀와 죽음까지도 다 겪게 해서 부질없는 욕망을 막아준 여옹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한단을 떠났다.

2016/01/18

엠브리오 기담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엠브리오 기담 - 6점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서평이 기억에 남아 주말 동안 읽기 위해 집어든 책으로 에도, 아니 메이지로 보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 단편집입니다. 온천에 대한 여행기를 쓰는 길치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동료인 미미히코가 등장하는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대물 설정, 거기에 전부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괴담이라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이나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 작품들보다는 환상 문학에 훨씬 가깝고,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들보다는 읽기 쉽고 명확한 내용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수록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나 리처드 매드슨 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엠브리오 기담"은 일상계 크리처물,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윤회 판타지, "수증기 사변"과 "끝맺음"은 일상계 괴담, "얼굴 없는 산마루"는 일상계 드라마, "있을 수 없는 다리"는 전형적 괴담, "지옥"은 끔찍한 고어 호러,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는 괴담 분위기의 자살극으로 넓은 장르를 포용하기 때문입니다("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그냥 사족입니다)

이렇게 많은 장르물을 포괄하면서도 대체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인다는 점도 대단합니다. 코미디에서 호러까지 오가는 선배 작가들만큼의 넓은 변화 폭은 아니긴 하지만요. 이 정도면 이름 모를 작가 치고는 제법이라 생각했는데, 후기를 보니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츠 이치의 또 다른 필명이더군요. 솔직히 취향이 아니라 많은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팔색조 매력은 여전한 듯 하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초 서평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오츠 이치의 이색작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놈의 기억력...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제법 있는 등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이 정도면 null괴담물로 기본은 해 주었으며, 오츠 이치의 단점이라 여겼던 만화적인 상상력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작품입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사족인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한 별점은 3점입니다. 괴담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덧 1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수록 작품들의 장르가 천차만별이지만 절반 이상이 '괴담'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추리 / 호러' 장르로 분류합니다.

덧 2 : 저도 온천을 좋아하는데 딸아이가 좀 더 크면 온천이나 다녀봐야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끔찍한 경험은 사절입니다만 끔찍한 경험을 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가 그래도 온천을 다니는 것을 봐서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게 분명하겠죠.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엠브리오 기담"

미미히코는 갓난아기 전 인간의 모습인 '엠브리오'를 우연히 구했다. 금세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엠브리오는 살아남았고, 도박빚에 시달리던 미미히코는 엠브리오를 이용하여 돈 벌 계획을 세우는데...

인간의 태아(이전 단계)인 '엠브리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엠브리오에 대한 설정 - 하얀 애벌레 같아 허여멀건 몸뚱이에 볼록 튀어나온 배, 발달이 덜 되어 단순한 돌기에 지나지 않는 손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머리에 점을 콕 찍은 듯한 눈, 도마뱀처럼 꼬리 같은 것까지 있고 갓난아기 피부와 내장 표면의 딱 중간 정도 피부로 쌀뜨물을 먹고 미지근한 물을 좋아한다 등등 - 이 실제 존재하는 생물처럼 상세하다는 것이 재미 요소입니다.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묘한 상상력'이 크리처에 발휘된 환상 문학이지요.

다만 결말은 아쉽습니다.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엠브리오를 넘겨 무사히 출산하게 하고, 수년이 지나 미미히코와 그 아이가 재회한다는건데, 공식대로라서 식상했던 탓입니다. 그래도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찾기는 어려웠으리라 짐작되며,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수준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

도매 서점에서 일하는 린은 행수 어르신의 지시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여행에 동행했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일행은 마침 발견한 마을에서 잠깐 머무는데, 다음날 촌장의 증손자가 고열로 쓰러졌다. 마침 린이 가지고 있던 약으로 아이는 생명을 구했고, 답례로 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피스 라줄리(유리)'를 선물하는데...

린이 '라피스 라줄리'를 받은 이후, 인생을 되풀이한다는 윤회 판타지입니다. 윤회를 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내용도 잔잔하니 읽을 만한데, 작품의 핵심은 반전입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촌장 노파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죽는 어머니를 위해 뱃속에서 탯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는 결말이거든요. 행복한 결혼 생활도 해 보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도 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인데 참 절절했습니다.
다른 수록 작품과는 다르게 미미히코 시점이 아니라 린 시점 묘사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등 세세한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린은 이전 기억을 계속 쌓아나가기 때문에 환생할 때마다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건 설득력이 약해 보였거든요. 미래도 읽을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공부도 한다면 세계를 바꿀 만한 재산이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증기 사변"

로안과 미미히코는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뒤 산기슭 온천 마을을 찾아냈다. 둘은 마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여관에 묵으며, 마을 온천을 밤에 찾아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밤에 온천에 몸을 담근 미미히코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로 죽어버린 유노카를 온천에서 만는데...

저승과 연결되어 있는 온천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 어린 시절의 추억과 유노카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마지막에 미미히코가 유노카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문제는 너무 잔잔해서 극적인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유노카의 죽음이 단순 사고보다는 드라마틱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실은 미미히코의 잘못으로 죽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끝맺음"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묵어 가게 된 바닷가 마을. 그곳은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기묘한 곳으로 식재료마저 그랬던 탓에 미미히코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아사 직전에 놓이는데...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는 이토 준지스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만화나 영화 같은 시각 매체로 발표되었더라면 굉장히 그로테스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상상의 여지가 더욱 많은 소설이 섬찟함을 느끼게 하는 데 더 좋긴 하겠지만요.

게다가 굶어 죽기 직전의 미미히코가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닭 아즈키를 잡아먹고 살아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기고 살아남는 왕따물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마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다리"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는 근사한 구름다리를 발견했다. 허나 마을에서는 구름다리는 이미 사십 년 전에 무너졌다고 했다. 둘의 말을 들은 숙소의 노파는 밤중에 넌지시 구름다리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구름다리가 무너졌을 때 아들을 잃었는데, 지나는 여행객들로부터 다리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는 다리에서 노파의 아들을 발견하고 둘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감동적인 상봉을 기대했지만 실상 소년은 그야말로 '귀신'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존재였다는 반전이 돋보입니다. 이전 수록작인 "수증기 사변"과 비슷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다가 깜짝 놀랐네요. 하긴 이게 귀신의 본모습이겠죠.

반전에 더해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소설보다는 영상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귀신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묘사도 좋지만, 특히 귀신이 노파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가 미미히코를 붙잡고, 미미히코는 욕설을 하면서 노파를 어떻게든 떼어 내려 하는 처절한 묘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재미도 있고 반전도 있는, 괴담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얼굴 없는 산마루"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우연히 방문한 마을 사람들은 미미히코를 보고 놀랐다. 이유는 그가 사고로 죽은 마을 사람 모키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가 자신과 똑같이 생기고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 모키치의 가족을 만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일상계 소품. 잔잔하고 여운을 주는 내용은 좋았습니다.

허나 모키치의 아내 야에의 말을 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뻔한 결말, 그리고 미미히코가 모키치와 모든 면에서 똑같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단점입니다. 그냥 닮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흉터까지 같다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조금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입니다.

"지옥"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는 여행 중 강도를 만났다. 사로잡힌 미미히코는 신혼부부 후지와 요이치와 함께 축축한 구덩이 속에 갇혔다. 셋은 강도 가족이 던져주는 육포 조각을 먹으며 삶을 이어갔는데, 강도들이 한 명을 꺼내 준다고 제안해서 여성 후지를 올려 보냈다...

구더기 그득한 축축한 구덩이 감옥 묘사도 사람 잡는데, '후지가 빠져나간 뒤 육포가 아니라 신선한 고기가 던져진다'에서 시작되는 공포스러운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핵심은 강도 가족이 사람을 죽여 먹고, 가죽으로 생활용품 등을 만든다는 설정으로 스코틀랜드의 소니 빈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해 보입니다. 허나 단순히 영감을 얻은 수준은 아닙니다. 아이가 사람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노는 등의 디테일이 잘 살아 있거든요.

이러한 묘사에 더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미히코가 머리카락을 엮은 줄을 이용하여 요이치를 끌어 올렸던 밧줄을 회수하고, 구덩이에서 탈출하여 역으로 강도 가족을 구덩이에 쳐 넣는 데 성공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가 보니 강도 가족이 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기에 뚜껑만 덮고 도망쳐 온다는 결말까지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이런 류의 돌직구 고어 호러는 오츠 이치의 특기이기도 하죠. "ZOO - seven rooms"처럼요.

물론 해당 단편과 단점은 동일합니다. 왜 강도 가족이 포로를 잡자마자 죽이지 않고 귀한 육포를 먹여 가며 살려두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점 등 세부 설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제법 있는 탓입니다.

그래도 섬찟함과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은 수록작 중 최고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 작품이 쉬어가는 느낌이라 공포심이 더욱 배가된 듯한데, 목차도 작가의 의도인지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전편의 경험으로 미미히코가 여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즈미 로안은 다른 고용인과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로안은 미미히코에게 동행인이 죽었다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는데...

떨어진 빗을 줍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줍는 것이기에 꼭 빗을 주워야 할 때는 발로 한 번 밟은 뒤 주워야 한다는 설정이 바탕입니다. 빗을 그냥 주웠다는 고용인이 머리카락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입에 들어 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 엄청난 양이 나왔다는 부분까지는 평범한 괴담입니다.

그러나 노파가 빗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로 그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머리카락은 죽은 어머니의 것이라고 밝혀지는 결말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괴담을 너무 좋아한 청년이 자작극을 벌이면서까지 괴담이 되려 했다는 내용이니까요. 누군가의 이야기가 괴담이 된다는 점에서 "백귀야행"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단순 괴담이 아니라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결혼한 뒤 온갖 괴롭힘을 당하던 여자가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데...

이즈미 로안이 길치가 아니라 사실은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텐구의 자식이라는 설정을 알려주기 위한 이야기.

단순한 설정 보강용이라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자를 괴롭히던 시댁에 뭔가 천벌이 내렸다는 이야기라도 있었더라면 완결성이 있었을 텐데요. 별점은 빵점입니다.

2015/02/03

이야기꾼 여자들 - 기타무라 가오루 / 정유리 : 별점 2.5점

이야기꾼 여자들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유리 옮김/북하우스

"하늘을 나는 말"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의 단편집. 모두 1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은 이 작품 외에 "시미가의 붕괴"뿐으로, 유명세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소개가 안되네요.

이야기를 해 주는 여자와 계절만 바뀔 뿐, 부유한 한량이 여러 여자들에게서 특이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동일한 형식을 지니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액자식 구성의 연작 단편이라 할 수 있는데 구성은 "천일야화"가, 내용은 모리 히로시의 "조금 특이한 아이 있습니다"가 떠오르더군요. 

담고 있는 장르의 폭도 넓습니다. 서늘한 느낌, 기묘한 맛 류의 전형적인 환상 문학 이야기들 중심으로 여운을 남기는 잔잔한 추억담,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추리적 속성은 전무합니다. 

그래도 환상 문학 쪽 장르물은 마음에 들었으며, 무엇보다도 환상 문학 단편에 작가 특유의 일상계스러운 분위기가 결합되어 있어 독특한 느낌을 전해주는건 좋았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초록 벌레"

초록색 벌레가 입에 들어왔는데 그 이후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 반전의 맛이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내가 아니야"

너무나 바쁜 아내를 복제한 마네킹을 사랑하게 된 남편의 이야기. 흔히 있는 설정이지만 잔잔한 전개와 마지막 여자의 말은 기억에 남습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 작품집을 샀는데, 알고 있던 메로스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실려있더라는 내용입니다. 작품의 메로스는 친구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는군요. 환상 문학이 일상계와 결합한 좋은 결과물이라 생각되네요.

"걸을 수 있는 낙타"

중동 지역 어느 도시에 여행을 갔다가 산 기념품인 "유리병 그림" 속 낙타가 움직이더라는 이야기. 약간 스멀스멀한 느낌이 괜찮았습니다.

"어둠의 통조림"

여섯 명의 친한 주부가 모여 라벨을 벗긴 통조림을 추첨하는 행사를 갖는데 통조림이 일곱 개가 등장했다는 이야기. 괴통조림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맛은 제법 괜찮았다는 결말은 "환상특급" 느낌이 났습니다.

"선물"

아, 이, 우, 에...로 이어지는 선물을 해 주는 남자 동료에 대한 이야기. "에가오"의 선물은 지하철에 있는 마크에 그려진 웃는 얼굴(스마일 마크)이라는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로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전개가 좋았습니다.

"바다 위의 보사노바"

장거리 페리 가수가 무례하고 매너없는 손님들 앞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비결을 그린 작품. 내용은 그냥 그런데, 비결만큼은 기억에 남을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음악은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의 귀에도 들리기 때문, 즉 공기와 같은 것으로 들을 생각이 없어도 공존하고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한다고 하네요.

"마술"

마음에 들었던 남자들이 모두 마술도구인 "P"가 그려진 상자를 꺼내더라는 일상 속 기묘한 이야기. 결말이 조금 난데없어서 아쉽기는 하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ambarvalia"

자기와 똑같은 취향의 친구가 결혼을 하자, 자신이 결혼해야 할 남자가 그 남자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 남자의 애독서를 바꿔치기하여 혼자 즐긴다는 내용입니다. 일상계 불륜물이랄까요? 여튼 기묘한 사고방식이 꽤 괜찮았어요.

"스이코(水虎)"

제목의 스이코는 갓파를 뜻합니다. 이야기꾼 여자의 회사 동료가 갓파의 후예라는 내용인데 만화 등에서 흔하게 보아온 설정을 일상계스럽게 전개한 것이 독특했습니다.

2009/06/01

삼월은 붉은 구렁을 - 온다 리쿠 / 권영주 : 별점 3점

삼월은 붉은 구렁을 - 6점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이쪽 바닥(?)에서는 꽤 인기를 많이 모았던 작품이죠. 하지만 정통 추리물이 아니라고 들어어서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는데, 할인 행사로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과 같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환상의 책을 소재로 한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인데, 소재가 같음에도 장르와 분위기가 작품별로 굉장히 다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분위기는 분명 유사하고, "의안의 남자" 와 같은 소재가 연결되어 있어서 "연작"이라는 냄새는 솔솔 풍기지만요. 나만 그런가..

어쨌건 읽고난 소감을 말하자면 "절반의 아쉬움" 입니다. 이 작품집에서 딱 반은 마음에 들었고, 나머지 반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마음에 든 작품은 앞의 두편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즈모 야상곡",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은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와 "회전목마" 였습니다. 제가 지나칠 정도로 추리 애호가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여성적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아서 뒤의 두 작품은 취향에 잘 맞지 않더군요.

그러나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솜씨는 그야말로 탁월하고, 뭔가를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실력이 대단해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그야말로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작품이 아닌가 싶고 말이죠. 다음번에는 이 책 안에서 묘사된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흑과 다의 환상" 부터 읽어봐야겠네요.

작품별로 좀 더 상세하게 소개해 드리자면

"기다리는 사람들" :
평범한 샐러리맨 고이치는 취미가 "독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장님이 주최하는 2박 3일간의 "봄의 다과회"에 초청됩니다. 다과회에 참석한 고이치는 회장님과 다른 3명의 손님들이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책을 매개로 이 모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죠. 회장은 고이치에게 이 환상속의 책이 다과회가 열리는 저택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 책을 찾는 키워드는 "석류 열매"라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독서광들이 찾아 해메는 환상의 책을 찾는 추리적인 재미와 함께, 실존하지 않는 책과 기묘한 저택의 묘사가 몽환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추리적인 요소도 괜찮지만 "소문"을 만들기 위한, 그리고 "소문"이 "전설"이 된다는 전개도 인상적이었고요. 무엇보다도 책 속에서 설명하는 또다른 환상의 책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책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이만큼 책 소개를 쓴다면 이 책을 사보지 않고는 못배기겠죠. 별점은 4점입니다.

"이즈모 야상곡"
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하는 다카코와 아카네는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실재 작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납니다. 단서는 다카코가 우연히 발견한 자신의 아버지의 젊은 시절 문집. 그리고 한 술병의 선전용 카드였습니다...

두 여성의 버디 무비이자 로드 무비와 같은 느낌을 풍기면서도, 전설의 책의 실재 작가를 찾기위한 이야기를 추리적으로 그럴싸하게 풀어놓는 작품입니다. 하룻밤 동안의 기차여행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몽환적"인 느낌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이야기의 논리는 훨씬 더 날이 서 있는, 정교하면서도 치밀한 느낌을 전해주더군요. 또한 작가의 정체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이며, 다양한 복선이 반전이 포함된 결말로 잘 이끌고 있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
두 고교생 소녀가 언덕 밑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사고사로 결론내려지지만 소녀의 전 가정교사와 남자친구는 이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소녀가 남긴 일기장을 근거로 조사에 착수하며, 소녀들에게 숨겨진 비밀을 알게됩니다...

고교생 소녀들의 심리가 주로 등장하는 하이틴 로맨스 백합물 같은 작품입니다. 그냥 하이틴 로맨스 같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전면, 후면에 배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건 자체도 너무 엽기적이라 뒷맛이 개운치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오츠 이치에게 더 잘 어울리는 소재가 아니었을까요? 오츠 이치가 이 소재로 작품을 썼다면 소녀들이 비밀을 알게 된 후에는 서로를 난도질한다는 결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어쨌건 저는 이런 류의 이야기는 전혀 취향이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회전목마"
이 이야기는 두개의 이야기, 즉 "3월의 나라"에 존재하는 "학원제국"에 전학온 여학생 미즈노 리세의 이야기 +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실제로 써 나가는 작가의 이야기가 결합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들이 왜 공존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요. 재미있는 시도이긴 하지만 연관성도 느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 너무 강하거든요. "학원제국" 이야기는 만화나 판타지에 너무 흔히 등장하는 소재라서 큰 감흥이 없기도 했고 말이죠.

실제 작가가 책을 써 내려가는 부분의 이야기는 다양한 과거의 소품들 - 옛날 만화, 헨리 다거의 그림, 영화 "엘모의 모험", 소설 "컬렉터" 등 - 을 등장시키는 등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지나치게 뻔하고 지루한 "학원제국" 이야기가 중간중간 섞여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통에 맛난 것만 먹고 싶은데 제가 싫어하는 아이스크림이 담겨서 싫어도 섞어 먹게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읽지 못했거나 접하지 못한 컨텐츠를 소개하는 작가의 글빨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학원제국" 이야기는 빼고 읽죠 머....

2004/08/31

R-Point - 공수창 : 별점 2.5점


1972년,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 200명의 부대원 중, 혼자 살아 남은 혼바우 전투의 생존자 최태인 중위(감우성)는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의 본대 복귀 요청은 철회되고, CID 부대장(기주봉)은 그에게 과실을 덮어주는 댓가로 비밀 수색 명령을 내린다.

작전은 6개월 전 작전 지역명 '로미오 포인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8명의 수색대원들로부터 계속적인 구조요청이 오고 있었던 것. 그 흔적 없는 병사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3일 후, 좌표 63도 32분, 53도 27분 _ 로미오 포인트 입구. 어둠이 밀려오는 밀림으로 들어가는 9명의 병사들 뒤로 나뭇잎에 가려졌던 낡은 비문이 드러난다.

不歸! 손에 피 묻은 자, 돌아갈 수 없다!!! 7일간의 작전이 시작되며 점차 소대원들에게 R-포인트의 끔찍한 과거와 그 과거에 얽힌 환상이 닥치기 시작한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별로 호러라는 쟝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공포라는 감정을 의사 체험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는 것 부터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그래도 워낙 예고편이 멋졌고, 각종 사이트와 잡지에 올라왔던 설정 시놉만 가지고도 관심이 가던터라 개봉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보게 된 영화입니다.

영화의 설정은 기대치를 충분히 반영해 주듯, 괜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6개월전 R-포인트에서 사라진 수색대원들과 R-포인트에서 계속되는 무전.... 그리고 여러가지 잔혹한 과거를 지닌 R-포인트와 흉가처럼 변모한 대 저택... 기묘한 현상들과 환상을 목격하는 소대원들....
이런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서스펜스도 만만치 않아서 흡입력 있게 관객을 끌어 당기는 매력도 제법이라고 할 수 있죠. 중반부에 소대원들의 숫자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부분 (예고편에도 등장했지만 소대원이 한명 죽어서 현재원 9명이라고 보고하는 최중위에게 본부에서 "너희들은 출발할 때 원래 9명이었어!") 이나 최중위 (감우성)가 밤에 목격하는 프랑스 군의 묘지의 환상, 그리고 전력 공급차 방문한 미군 부대원들과 봉인된 무전실에 얽힌 비밀 등이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니까요.
특히 유령의 시선을 구분한 촬영이나 미지의 영역의 존재들을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는 부분, 별다르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긴장감을 충분히 전해주는 연출은 좋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멋진 소재와 설정을 호러라는 장르로 제대로 살려내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별로 무섭지가 않아요! 잔인함이나 무서움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며 관찰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표현하는 것은 좋긴 했습니다만 너무 평범하게 찍은 느낌이에요. 보다 공포스럽고 전율을 느끼게 할 만한 내용으로, 특히 흉가나 환상같은 것은 조금 더 오버해도 영화가 괜찮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또 유령들의 증오와 소대원들에게 닥치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동기가 약해서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손에 피를 묻혀서" 라면 동기가 너무 약하잖아요? 특히 마지막 생존 병력에게 덥치는 유령들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진중사는 갑자기 왜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여자 유령은 왜 최중위 앞에만 나타나는지 무엇하나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고 영화는 끝나버립니다. 마지막에 무전기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전설의 고향 목소리로 무전을 보내는 장면은 또 왜 나오는지....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 싸구려 신파가 등장한다는 것도 감점 요소에요. 비교적 비중이 컸었던 한 실종된 소대원(카메라를 구해달라던)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결론적으로, 공포영화라는 쟝르에는 아주 약간, 한 2% 정도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국내 최초의 밀리터리 호러라는 수식어는 아깝지는 않고 충분히 흥행할만한 재미를 전해 주기 때문에, 인터넷 소설 영화나 수준낮은 코미디가 범람하는 한국 영화계에는 충분히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PS : 친구에게 영화 줄거리를 대충 설명해 줬더니 "일단의 부대가 미지의 모처에 들어가서 각자 환상을 보며 자멸한다.... 그거 스피어 아냐?"

2006/02/15

골프코스의 인어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민승남 : 별점 2점

골프 코스의 인어들 - 4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연달아 읽어버린 하이스미스 여사의 단편집 두 번째 권입니다. 원래는 이게 세 번째 단편집이고 먼저 읽었던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가 두 번째 단편집이라고합니다. 첫 번째 단편집을 착오로 구입 못해 순서가 좀 바뀌어 버렸네요. 뭐 단편집이니까 그건 별로 중요하진 않겠지만요. 

여튼, 전에 읽었던 단편집이 워낙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실망스러웠어요. 이전 단편집에서 언급한 로얄드 달의 "당신을 닮은 사람" 같달까요? 한마디로 심심합니다. 의표를 찌르는 맛이나 독자의 감정을 살살 건드리는 맛은 거의 없고, 세밀한 심리묘사에 더욱 치중한 경향이 강한 탓이에요. 작품들 개개의 결말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았고요. 저는 단편소설에서는 여운을 남기던, 반전이 있던 어쨌거나 결말의 끝맺음이 작품에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편집에서는 대체로 애매모호하고 시시하게 처리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이상할 정도로 해피엔딩이 많은게 특히나 불만스러워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하이스미스 여사 작품에서의 해피엔딩이라니 이건 정말 아니올시다죠. 배신감을 느꼈달까요? 

물론 특유의 불편한 인간 관계 설정과 심리묘사,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과 기발한 발상을 토대로 한 전개는 여전합니다. 역자가 해설에서 카뮤의 "이방인"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정도의 임팩트는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문장과 설정에서의 몽환적인 느낌은 확실히 거장의 풍모를 전해줍니다. 

그래도 확실히... 전작보다는 좀 읽는 맛은 확실히 덜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던 독특한, 기묘한 맛은 거의 없고 그냥저냥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기대가 너무 큰 탓도 있긴 하겠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시리즈의 구입을 망설이게 되네요. 지금까지 5할의 확률이니 기대를 한번 더 걸어봐야 하겠지만요... 

역시나! 싶은 이 단편집의 베스트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골프 코스의 인어들 

대통령의 생명을 구한 교수의 환상과 애증 이야기랄까요? 골프 코스의 인어들이라는 제목과 발상 자체는 기발하기 그지 없지만 그다지 끌리는 요소는 없었습니다. 

2. 단추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들과 아들 때문에 변해가는 아내 탓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던 회계사 롤랜드는 어느날 밤 갑작스럽게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상 생활속에서의 평범한 사람의 심리가 급작스럽게 변해가는 과정과 그 결말을 디테일하게 그린 수작입니다. 역자가 "이방인"을 언급한 작품으로 그만큼 순문학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나름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감점 요소로 보입니다. 막판에 힘이 팍 풀려버리는 바람에 뫼르소 만큼의 고뇌를 롤랜드가 끝까지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3. 우연한 특종

별볼일 없는 지방신문 사진 기자 크레이그는 어느날 우연히 찍은 성폭행 피해자의 사진 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평범한 일반인이 우연으로 성공하게 되지만 그 뒤에 도사린 죄책감과 결국 성공이라는 열매때문에 모든 것을 무시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비판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독특한 전개와 발상에 비해서 왠지 묘사의 섬세함이 좀 떨어지는 작품이더군요. 결말도 시시하고요. 

4. 크리스의 마지막 파티

자신을 배우의 길로 이끈 크리스 웰스의 죽음을 앞두고 배우 사이먼은 취리히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일과 현재를 돌아보게 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사이먼에게 있어서 크리스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그의 죽음으로 무엇이 변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추억과의 결별이 닥쳤을때의 심리묘사랄까요? 깊이 생각하자면 메시지를 많이 전해주기도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알맹이 없는 공허한 작품이었습니다.

5.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시계

자수성가한 샤를과 부호의 딸인 미셸은 서로 사랑하는 부부지만 미셸이 도와준 거리의 소년이 샤를의 물건을 훔쳐가면서 둘 사이에 서서히 금이 가게 되는데... 

부유한 부부와 거리의 소년에 대한 자세한 설정과 심리묘사는 모파상을 연상케 합니다. 출신성분이 다른 두사람의 디테일하게 묘사된 갭은 디킨즈 작품같은 느낌도 주고요. 

하지만... 기둥 스토리 자체와 결말이 시시한 편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6. 난데없이 날아온 총알

미국 청년 앤드류는 멕시코의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한 소년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신고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가 범인으로 몰려 악몽과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평범한 청년에게 닥친 악몽과도 같은 하루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틱한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에 생기가 가득 넘치는 것이 이 단편집에서 단연 돋보이더군요. 뭐 이야기 자체는 뻔하긴 했습니다만.... 

7. 애완동물 공동묘지 

변호사 크리스토퍼는 키워왔던 애완동물을 박제로 만드는 아내 페니의 취미를 싫어했지만 그 취미가 기사화되자 과거에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복수심으로 발전한다.

제목 그대로 애완동물의 공동묘지와 같은 기묘한 취미와 더욱 기묘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다룬 여사다운 단편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스티븐 킹 작품을 연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전혀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덜 자극적이고 원색적이지만 왠지 더 우울하고 기묘한, 아주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8. 어쩌면 다음 생에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엘리너는 어느 날 부터 유령과 같은 "그"를 보게 된다. 그와 엘리너는 서로 생활을 공유하며 가까와지지만 "그"는 결코 착하지 않은 존재였다.

여사님이 이런 작품까지 쓰셨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형적인 유령 공포 환상 괴담이자 심리학적으로도 눈여겨 볼 만한 곳이 많은 디테일한 작품이네요. 주인공 여성 엘리너의 애절한(?) 삶과 사고방식이 전혀 공감되지 않아 높은 점수를 줄 순 없었지만, 여러모로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생각됩니다.

9. 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

세일즈맨 랠프는 주말 별장 이웃인 에드와 그레이스 부부의 척척박사와 같은 작업들에 컴플렉스를 느끼며 불안해 하던 중 별장에 초대한 프랜시스라는 아가씨와의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일종의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한 남자에게 빗대어서 조금은 유머스럽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결국 주인공이 폭주하게 되지만 그나마 해피엔딩이라는 데 현대인으로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10. 가장 잔인한 달

영어교사 오딜의 취미는 소설가들에게 개인적인 팬레터를 보내는 일로, 그녀는 친구와 영국 여행을 떠나며 작가 데니스 홀리우드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여사 특유의 몽환적이고도 섬세한 심리묘사가 발군인 작품으로 환상이 현실 앞에서 잔혹한 얼굴을 드러낼때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이상하게 마무리가 좀 대충대충이라서...

11. 몽상가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은 항상 낭만적인 데이트를 꿈꾸지만 첫 데이트에서 바람을 맞고 만다. 그 후 다시 한 남자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는데...

바로 위의 "가장 잔인한 달"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역시 환상과 현실의 갭을 다루고 있으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심리묘사를 기반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결말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잔인한 달"의 주인공은 나름 현실을 수긍하며 환상을 전개하는 데 반해 이 작품의 이저벨은 아예 환상속에서 살기로 결심해 버리니까 말이죠. 여사의 글 솜씨를 느끼게 해 주는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남성인 저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긴 하지만, 비교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2010/08/10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 제프리 포드 / 박슬라 : 별점 3.5점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 8점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샘터사

저명한 초상화가 피암보가 샤르부크 부인이라는 부유한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그녀는 피암보에게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듣고 자기를 그려달라'는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의뢰를 합니다. 거액의 보수와 더불어 예술적인 활력을 새로이 얻고자 했던 피암보는 승락한 뒤, 그녀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구체화하지요. '결정학자'라 불리우는 예언자의 딸로 어렸을 때 쌍둥이 눈의 결정을 소유하게 된 뒤 예언능력을 보유하게 되고, 신통한 '무녀'로 알려져 큰 돈을 벌게 되었지만 샤르부크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 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피암보 주위에 창작을 방해하는 괴인이 등장하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연쇄살인극이 동시에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줄거리만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듯 일종의 판타지, 환상 소설입니다. 그러나 샤르부크 부인의 정체를 더듬어 가는 과정과 정체불명의 샤르부크씨, 그리고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괴사건의 진상 등 추리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습니다. 감수성 넘치는 샤르부크 부인의 이야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면서도, 작품의 주 내용이라는 점에서 근대의 아라비안나이트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한마디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작품이에요.

그런데 글을 정말이지 너무 잘 썼습니다. 시적인 표현을 과하게 사용하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전개하는 솜씨가 대단해요. 작중의 환상적인 이야기가 실재 현실과 겹쳐지게 만드는 팩션적인 구성 - 예를 들어 실존 화가 앨버트 라이더와 그의 그림 "경마장"존 워터하우스의 "사이렌"을 작품에 등장시키는 등 - 도 돋보이고요.
내용이 재미있어서 한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도 강합니다. 발상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얼굴을 보지 않고 초상화를 그리게 만드는 수수께끼의 여인!

샤르부크 부인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입니다. 독특한 설정에서 오는 힘도 크지만, 창조력을 갉아먹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다른 작품에서 보기 힘든 부분이니까요. 그만큼 야릇한 성적 느낌과 남자를 잡아먹는 요부로서의 존재감이 탁월합니다. 작중 '메두사'로 비유되는 것이 외려 이미지를 제한한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담고 있는 것도 좋습니다. 작품의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끌어올리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피암보가 보이지 않는 존재를 구체화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과정은 일종의 종교 행위를 표방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외에도 일찌기 신에게 도전했다가 타락한 - 초상화를 실패한 - 타락천사 셴즈라던가, 피암보가 겪는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 도 나름 의미가 있는 등 종교와 관련된 상징들이 작품 안에 가득합니다. 마지막에 피암보가 초상화를 완성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은 이러한 상징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고요.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주게 만드는 고대 카르타고의 독약, 한없는 악한 스토커 샤르부크씨의 존재, 허무하면서도 너무 쉽게 간듯한 결말은 조금 아쉽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밝혀지는 샤르부크씨의 정체에 대한 반전, 그리고 결국 피암보가 신을 그려내는데 성공했다는 기적같은 결말은 맥이 빠질 정도였습니다. 환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던 작품의 분위기를 단번에 허상으로 몰고 가는 탓입니다. 9회말 2아웃까지 퍼펙트로 투구하다가 마지막 타자에게 홈런맞은 기분이랄까요? 차라리 샤르부크씨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피암보의 그림도 환상으로 남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도 정말 잘 쓴,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독특한 장르문학에 빠져들고 싶은 분들께, 고급스러운 환상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3/09/15

꽃밥 - 슈카와 미나토 / 김난주 : 별점 2점

꽃밥 - 4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예문사

공포 소설에 가까운 환상 소설 <<도시전설 세피아>>로 접했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단편집. 몰랐는데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수상 이력이 중요한건 아니지만, 흥미가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부 주인공 화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오사카 변두리 어딘가에 있는 서민가 뒷골목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웃간 소통이 많고, 아이들끼리는 항상 어울려 놀곤 했던, 우리나라로 따지면 <<검정 고무신>>이 떠오르는 그런 시대 그런 거리입니다.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이 접하게 된 다소 기이하고 환상적인 경험들이 그려지는데, 환생, 성불하지 못한 영혼과 같이 뻔한 것도 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서정적인 묘사는 나오키 상을 수상할만하다 싶고요.

그런데 소년, 소녀가 묘한 경험을 한 뒤 한 뼘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들이 겪은 경험은 기억에 깊숙한 자국을 남기기는 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뻔하지 않아서 좋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래서 어쩌라고?'처럼 기승전결없는 단순한 추억담이에요. 그들이 겪은 기묘한 경험에 대한 설명도 거의 없고요.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려던 작가의 의도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답답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기승전결없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미쓰다 신조의 괴담물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결말은 명확해서 괴담물보다는 이야기로서 완성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결말은 모두 추억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무엇보다도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닙니다. 장르 문학 팬이 평가할만한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포일러를 알아봤자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요.

<<꽃밥>>
초등학생인 여동생 후미코가 열병을 앓고 난 뒤, 스물 한 살 때 살해당한 시게타 기요미라는 여자의 환생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기요미의 집을 보러가자고 졸라서, 나는 후미코를 데리고 히코네라는 동네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요미의 아버지가 딸이 살해당할 때 튀김을 먹고 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곡기를 끊었다는걸 알게 된 후미코는 기요미가 어릴 때 만들었다는 꽃으로 만든 밥을 기요미의 아버지에게 전해준다...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표제작. 후미코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초, 중반부는 사뭇 흥미진진했습니다. 후미코가 노트에 시게타 기요미 가족 이름을 써 둔 것, 어린 아이임에도 보이는 기묘한 행동들로 공포물스러운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약간 <<오멘>> 같은 분위기였달까요?
아직 어리지만 여동생을 끔찍히 아끼고 가족으로 여기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가족과 추억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이런 부분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하지만 환생임을 밝히고 난 뒤, 아버지에게 꽃밥을 전해준다는 최루성 가족 드라마스러운 전개는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너무 뻔했어요! 결말도 예상대로였고요. 뻔하고 무난한 탓에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도까비의 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쿄에서 오사카 서민촌으로 이사온 나 (유키오)의 주변에는 또래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중 모두가 은근히 따돌리던 한국인 형제가 있었다.
나는 형제 중 동생 정호와 친해졌지만 몸이 약했던 정호는 그 해 여름 죽고 말았다. 그리고 마을에 정호 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구 중에 한국인 형제가 있다는 설정은 반가왔습니다. 도까비 라는 제목도 도깨비에서 따 왔으며, 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고추를 문에 걸어둔다는 한국적인 설정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실제 작가 유년 시절에 한국인 친구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여튼 읽으면서, 정호 귀신 소동은 몸이 튼튼하고 강했던 정호의 형 준지가 자기들을 왕따시킨 마을에 대한 작은 복수극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정호의 도까비가 소동을 일으켰고, 이유는 원래 정호의 몸 상태 - 몸이 아프고 약해서 방에만 있었다 - 때문이었다는건 의외였어요. 그래도 죽은 뒤 아프지 않고 자유로와져서 온 마을을 싸돌아다녔다는 건 꽤 신선했습니다. 유키오의 장난감으로 신나게 논 뒤, 드디어 성불하게 되었다는 결말도 그럴싸 했고요.

그러나 진짜 도까비였다는건 개인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복수극으로 생각했던 탓입니다. 너무 추리, 범죄 소설에 뇌가 찌들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별다른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요정 생물>>
오사카 변두리 주택가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녀 세쓰코는 정체불명의 상인으로부터 '요정 생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키우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말처럼, 아빠의 부하로 잘생긴 훈남 다이스케가 찾아왔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엄마와 함께 도망가 버렸고, 세쓰코는 요정 생물을 죽여서 버렸지만, 그 뒤 아빠의 다른 부하 지로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긴 뒤,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요정 생물이라는 기묘한 존재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환상 소설에 가깝습니다. 요정 생물의 계란 프라이같은 생김새와 키우는 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 - 물은 사흘에 한 번 갈아줄 것. 물에 티스푼 절반 정도의 설탕을 풀 것. 강한 햇볕을 쬐면 안되고, 더운 곳에 두어도 안됨. 병을 바꿀 때는 같은 크기로. 병이 커지면 덩치도 커진다 - 등을 통해 <<그렘린>>과 비슷한 크리쳐 물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알고보니 어린 소녀가 '성'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을 '요정 생물'과의 접촉에 직접적으로 비유하여 전개하는 작품이더군요.

디테일한 설정이 뒷받침된 요정 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로였습니다. 엄마와 다이스케가 불륜을 저지를거라는건 너무 뻔했으며, 성적인 소재를 일본 특유의 변태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느낌이라 즐겁게 읽을 수가 없었어요. 세쓰코가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는 결말도 와 닿지 않았고요. 왜 요정 생물이 세쓰코에게는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은걸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참 묘한 세상>>
아키라의 백수 삼촌이 죽었다. 술에 취해 육교를 건너다 계단에서 떨어진 탓이었다. 그런데 장례식 후 화장터로 향하던 영구차가 멈춰버렸고, 관을 꺼낼 수도 없게 되었다. 영문을 모르던 어른들은 당황했는데, '나'는 삼촌의 애인이었던 가오루 씨를 부르면 될 것이라 여겼다...

장례식에서 난봉꾼 망자의 관 이동을 놓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 사실혼 관계의 아내 외의 애인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반전은 살짝 깼고, 이 여자들이 모두 친구가 된다는 결말도 유쾌합니다. 제목 그대로 참 묘한 세상이에요. 하지만 딱히 재미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오쿠린바>>
40년 전, 나는 어린 나이로 '오쿠린바'인 먼 친척 할머니의 조수가 되었다. 오쿠린바는 주문으로 사람의 혼과 몸의 연결을 끊어 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임종하면서 나에게 주문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그 일을 잇지 않기로 결심했다.

줄거리 요약은 단순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오쿠린바가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일화가 여러개 소개되며, 주문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주문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듣게 만들어야 효과가 있으며, 중간까지 들려주면 살아있지만 나머지를 듣게되면 바로 죽는다는 등으로요. 
하지만 일화들은 모두 비슷비슷했고, 설정도 작 중 그렇게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합니다. 그냥 오쿠린바 할머니의 또다른 회고로만 설명되며, 주인공 화자 미사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재미있고 극적인 드라마로 끌고 나갈 수 있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함 그 자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얼음 나비>>
수십년 전, 오사카 변두리 거리 동네에 살았던 나(미치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왔다. 친구가 없는 탓에 묘지에 놀러갔다가 18살이라는 누나 미와와 친해졌다. 그녀는 아픈 동생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타지로 나와 일하고 있다고 해다. 그리고 겨울에도 살아남는 신비한 나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겨울에도 살아있는 나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아픈 사랑(?)과 사라져버린 추억을 형상화한 작품.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신비로운 상황이라는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겨울 나비를 보고 미와와 헤어지는 미치오의 모습은, 청춘의 환영인 메텔을 떠나보내는 테츠로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은하철도 999>>의 서정적인 버젼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겨울 나비에 대한 묘사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습니다. 미와가 유령이 아니라면 몸을 팔고 있을 거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결말은 둘의 파국이라는게 너무 뻔해서 의외성도 없었고 진부했습니다.
환상 소설 측면으로 보아도 '겨울 나비' 자체는 실존하는 것이기에 딱히 언급할게 없네요. 마지막에 함께 본 나비는 환상일 수 있지만, 그건 단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상징일 뿐입니다. 특별히 장르 문학적으로 바라볼 부분은 없어요.
그 외에도 미치오가 왜 왕따를 당하는지 설명되지 않고, 미와와의 이별 후 급작스럽게 마사히코가 친구가 되자고 이야기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왕따 설정은 빼고 그냥 외로운 아이였다고 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0/05/28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 미치오 슈스케 / 김윤수 : 별점 3점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들녘(코기토)

주의 : 스포일러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살육해서 다리를 부러뜨려 유기하는 범죄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던 무더운 여름날, 초등학교 4학년 미치오는 방학식에 등교하지 않은 S에게 준비물 등을 전해주러 S의 집을 찾아갔다가 S가 목매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앞에서 시체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거미로 환생한 S의 부탁으로 미치오는 동생 미카와 함께 S의 시체를 찾아내고, 사건의 진상을 풀기 위해 나서는데...
 

 친구 S의 자살사건과 더불어 여러가지 사건들이 독특한 상상력을 토대로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전작 "섀도우"리뷰에서 tuppence님이 추천도 해 주셨고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가 뽑은 2009년 미스터리에서 10위를 차지하는 등, 다른 곳에서 본 리뷰들도 평이 괜찮았기에 바로 읽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소문대로 무지하게 특이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인 미치오의 혼란스러운 자아와 시각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아이의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되는 독특한 환상 소설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러한 상상을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결국 현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복선처럼 단서들을 곳곳에 삽입해 놓은 것도 좋습니다. 사건 없이 이러한 단서만으로도 추리 소설적인 흥미를 자아내니까요.

추리적으로도 크게 2개의 사건 - S 자살 사건과 개, 고양이 연쇄 살육유기사건 - 이 펼쳐지며, 이 사건들이 다양한 추리를 통하여 다양한 가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굉장히 풍성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가설들마다 단서는 물론 증거와 트릭들도 정교하게 배치해 놓고 있는데, 이게 제법이에요. "비누"가 주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이유, 다이조 할아버지와 미치오의 관계를 드러내는 여러가지 장치들 등 사건에 관계된 단서들이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등장하는 다이조 할아버지의 과거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짤막한 하나의 추리 호러물로 보아도 손색없는 완성도의 작품이고요.

그러나 "미치오"라는 주인공 소년 및 주변 인물 설정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져서 아쉽습니다. 먼저 미치오부터 이야기하자면, 꼬마아이가 뇌내보정을 통하여 여러가지 곤충이나 동물, 사물과 대화하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환생"에 대해 믿는다는 기이한 상상력도 그렇다 치고요.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머리가 좋다라는 것, 그리고 이렇게 머리가 좋은 아이가 자신만의 환상 세계에 갖혀 산다는건 모순으로 보입니다.
주변인물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광증과 아버지의 체념은 너무나 극단적인 설정이고 담임선생, 다이조 할아버지 등 주요 인물들의 과거와 사연 이야기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운 내용들이니까요.
저자 이름과 주인공 이름이 같고, 1인칭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낸 것으로 보기이고 하는데,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은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에 맞춰 정리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무엇보다도 마지막 결말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미치오가 다이조 할아버지를 직접 살해하면서까지 사건의 진상을 왜곡하려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탓입니다. 자신이 자살로 내 몬 S에 대한 죄책감? 과연 그것이 할아버지를 살해할 정도로, 그리고 다이키치까지 죽어가면서 실행했어야 할 큰 짐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경찰이 백엽상에서의 격투 흔적과 살해된 시체의 상태를 보고도 자살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결말은 무책임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지막 미치오의 각성과 방화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도 뜬금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미치오 가족에 대한 극단적 설정이 없었다면 그냥 잘 마무리할 수 있었을텐데 이래서야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싶기도 합니다.

주위 분들이 추천하실만한 재미있는 작품이기는 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세련되고 잘 짜여진 구성이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환상소설처럼 짜맞추려는 의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이는 부분과 극단적인 몇몇 설정들, 그리고 작품 전체적으로 풍기는 음울한 분위기는 취향이 아니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10/05/21

달님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 아사쿠라 세카이이치

달님은 알고있을지도 몰라 - 6점
아사쿠라 세카이이치 지음, 오주원 옮김/중앙books(중앙북스)

4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어른들을 위한 환상 동화 단편집. 심심하면서도 뭔가 여유로운 느낌이 가득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아사쿠라 세카이이치의 귀엽고 오묘한 그림과 결합되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블로그 이웃 "청정하수구" 님이 번역하신 작품이기도 하죠.

"여사장의 나날"
대리 운전 회사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단편. 바다 속에서 잠수정 사고가 난 우미노씨를 구하기 위해 잠수정과 자동차를 우연하게 운전하게 된 후, 대리 운전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는 여사장에 대한 상상력은 정말 압권이었어요. 부하 직원의 이야기도 좋았고요. 잔잔한 분위기와 더불어 그야말로 이게 아사쿠라 세카이이치다!라는 느낌 가득한 작품이라 시리즈로 계속되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터너씨, 고맙습니다"
영국에서 제작된지 40년이 지나서 운행되는 E.터너씨가 설계한 오토바이. 그 오토바이를 모는 청년의 드라이브에 대한 하룻밤 상상을 그린 작품. 상상과 현실의 갭을 느끼게 하는 현실적인 마무리가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좀 다르네요. 하지만 여전한 여유로움과 더불어 단순한 환상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 속으로 끌고 들어온 느낌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yaongderful"
고양이 요괴의 대를 이은 저주와 그것을 막으려는 엑소시스트의 한판 승부!를 코믹하고 여유롭게 그린 난장판 코미디입니다. 설정과 캐릭터보다는 왁자지껄 소동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장르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은데, "데보네어 드라이브"와 조금 유사합니다. 그러나 너무 단칼에 끝내버리는 (여운이 남긴 하지만) 시니컬한 결말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슬과 롯"
할아버지가 개발한 슬롯머신 로봇 "슬"이 롯을 위해 빠져있는 "7" 2개를 찾으려 심볼 군단과 싸워가며 모험을 한다는, 역시나 난장판 코미디. 청정하수구님에 따르면 파칭코 잡지에 연재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파칭코 잡지? 그럼 슬롯머신의 영웅담을 그리면 되겠네? 예쁜 소녀를 보호하는 정의의 슬롯머신! 그를 노리는 심볼군단!" 뭐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짜낸 듯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쉽게 쉽게 생각나는대로 그린 느낌이라는거죠.
이러한 대충 전개된 느낌에 더해서 에 비하면 엔딩이 시시하고 뜬금없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 튀는 느낌도 강해서 차라리 이 작품을 빼고 더 작고 예쁘게 책을 만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어쨌건 이렇게 해서 작품 평점은 3점입니다. 취향을 많이 탈만한 작가이고 작품인데, 이런 류의 환상 동화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0/01/30

도염 (陶炎) 1,2권 - 히라다 다이키 / 하시모토 미츠오 : 별점 3점

도염 1 - 6점
히라다 다이키 스토리, 하시모토 미츠오 그림, 김문광 옮김/삼양출판사(만화)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작품 발표를 삼가한채 "어둠의 도공사"라는 이름으로 의뢰받은 자기를 높은 보수로 재현해 주는 일을 하는 자유가마의 도공 하마다 토요타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도자기들을 만들고 사람들의 갈등을 풀어나간다는 만화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가마라는 작은 가마에서 아마츄어들을 가르키는 일을 하는 등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 등 모든 면에서 다른 "프로페셔널 직업군 히어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설정이긴 한데 "도예가"라는 직업군에서 특화된다고 할 수 있겠죠.

어시장 삼대째 작가이기도 한 하시모토 미츠오의 부드러운 작화가 빛을 발하는 2001년도 작품으로, 단 2권으로 완결되기 때문에 전부 3편밖에 에피소드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첫번째인 에치젠자기의 "눈물자기" 재현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함께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이익과 애증으로 얽히는 관계가 잘 묘사된 수작이었습니다. "물을 부으면 구멍은 없는데 눈물처럼 물이 흐르는 자기"라는 설정부터가 일단 호기심이 생기며 이것을 재현해 나가는 과정을 추리물처럼 다루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거든요. 별점 3점은 너끈합니다.

두번째인 "환상의 아씨다완" 이야기는 특이하게도 연쇄살인과 함께 시작됩니다. 노부나가에게 진상되었다는 차를 담으면 차안에 벛꽃이 휘날린다는 환상의 자기와, 그 자기의 재현에 성공한 사람이 살해당한다는 서두에서부터 뒤이은 연쇄살인극과 함께 토요타의 다완재현 이야기가 잘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다완 재현이야말로 범행의 동기인데 상당히 의외의 진상을 품고 있어서 추리적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이 정도면 별점 4개도 아깝지가 않죠.

그러나 좋았던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인 현대에 재현 불가능한 환상의 도기 "요변휘홍" 에피소드는 토요타가 어둠의 도공사가 된 과거, 원수, 라이벌, 그를 흠모하는 여인의 정체, 기타 등등 상상가능한 모든 요소들이 등장하여 억지스럽게 전개되다가 끝나버립니다. 그나마 "요변휘홍" 재현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필요없는 등장인물들과 억지스러운 설정들의 난무로 "요변휘홍" 이야기마저 매몰된 채로 별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끝맺기 위한 이야기였을 뿐으로 별점은 두점도 과한 수준입니다. 최소한 한 권 정도의 분량을 더 할애해서 완벽하게 마무리지었어야 했습니다.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뭐 그래도 첫번째, 두번째 에피소드만으로도 한번 읽을 가치는 있다 생각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소재는 좋았지만 인기없어서 아깝게 끝난 만화"의 전형적 케이스로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4/08/17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별점 2점

계간 미스터리 2024.여름호 - 4점
최희주 외 지음/나비클럽

구독 중인 서비스 '밀리의 서재'에 올라와 있기에 봄 호에 이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수록 단편들이 대체로 호러 성향을 띄는게 특징입니다. 더운 여름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뻔한 설정과 전개를 답습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좀 더 신선한 발상과 반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딥페이크 업체 추적기
실제 있던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사진, 동영상 딥페이크 제작을 요청하면 건당 돈을 받고 결과물을 보내주며, 심지어는 업체의 API를 연결하여 직접 생성할 수도 있는 현실을 취재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취재를 통해 딥 페이크 범죄가 널리 확산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규제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상황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범죄는 여성들 피해가 많은데, 저도 딸 아이의 아빠로서 좀 더 강한 처벌이 시행되면 좋겠네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취재라는 점에 더해, 이전 호보다 더 논픽션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탁묘
작가 효진은 고등학교 동창 애희와 동네에서 오랫만에 재회한 뒤,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날, 손을 다친 애희가 찾아와 자기와 남편 지욱에게 닥친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번 호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 수상작. 두 여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공포물인데, 수상이 당연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빼어난 흡입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되살아난 지욱이 효진에 대한 집착만 남아 그녀를 덮치는 결말도 강렬했고요.
 
그러나 애희가 살해한 지욱을 윗층 할머니가 되살려냈다는건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고양이를 되살린 것, 고양이를 죽게 만든 택시 운전 기사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등의 다른 설정들도 마찬가지에요. 기묘한 집안 물건들 정도로 이런 능력이 가능하다고 하는건 무리입니다. 주술이건, 부적이건, 조금이라도 설명을 덧붙여 주는게 좋았을겁니다.
또 효진이 지욱과 불륜관계라는 뻔한 설정도 별로입니다. 게다가 효진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건 반칙이에요. 특히 애희가 남편 불륜 상대와의 문자를 봤다고 했을 때, 놀라기는 커녕 제 3자처럼 "화양연화" 운운한건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수상자 인터뷰에서 밝혔던 창작 동기 - 층간소음 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복수심으로 윗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훔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를 잘 살린 것 같지는 않네요.

메리
의대 진학을 앞둔 '나'는 아르바이트로 삼촌의 스마트 축산 건축업을 돕기 위해 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성적 노리개인 정신지체자 '메리'의 아기가 죽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된 메리는 처절한 복수에 나서는데...

외딴 마을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의 결과로 빚어지는 복수극.
그러나 핵심인 '메리'의 복수심에 대한 빌드업보다는 '나'의 개인 심리 묘사에 치중한 탓에 복수극으로서의 맛은 다소 부족합니다. 도축 현장과 가축 축사 등이 어우러진 배경 묘사는 그럴듯하지만 지나치고요. 복수극이라면 그에 걸맞게 화끈하게 달려주는게 낫습니다. 괜한 문학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어요.
메리의 복수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유사성이 짙다는 문제도 큽니다. 복수 장면도 독극물을 먹은 잔치 참석자들이 복통으로 몸부림치는걸 난도질로 끝장낸 상황인데, '나'가 창고에서 걸어나와 문을 나서는 중에 이 모든게 이루어진다는건 이상합니다. 최소한 사전에 독극물을 먹였다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환상통
두 손이 잘려나간 환자가 자신의 손이 자기 목을 조르는 환상에 시달렸다. 그 상황에서 20여년 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아이 이름을 불렀다. 딸은 백화점 붕괴사고로 환자 눈 앞에서 죽고 말았었다. 

환상통과 거울 치료 등 의학적인 부분에서의 디테일은 볼만했던 작품.
하지만 죽어가는 딸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건 많이 뻔했고 이야기 전개에서 의외성도 별로 없습니다. 무섭지도 않고요. 이게 무슨 장르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호러는 아닌데, 그렇다고 심리 스릴러도 아니고... 여튼 장르물로의 기대에는 전혀 값하지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수지
제주도의 물 빠진 저수지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한 구는 박서현의 남편 시신이었다. 남편은 같은 마을 동우 엄마와 불륜 관계였고, 박서현도 요가 수강생 은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사건이 등장하고,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힘든게,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경찰 수사에 의해 모든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건 조현병 환자인 박서현의 망상이었다는게 진상입니다.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박서현도 은우와 불륜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망상 때문에 은우와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지요.
반전은 괜찮았지만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장화 홍련(영화)"와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가 블랙박스와 사진 등을 통해 현실이 드러나는건 영상물에 어울리지, 소설에는 잘 어울리는 작법이라 할 수도 없고요. 소설이라면 독자도 속일만한 디테일한 묘사가 많았어야 했습니다. 
또 이야기와는 별 관계없는 제주 무당(심방) 관련 설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야기의 본질만 흐립니다. 흥미롭기는 한데 작품에 잘 녹아들지는 못해요. 박서현이 귀신에 홀려 범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제주 무당 관련하여 작가가 '내가 이렇게까지 자료조사를 했다!'는걸 과시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드는 탓에, 차라리 이 설정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스트 하이커
휴직 중인 경찰 수연은 동료 태현을 쫓아 찾아온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 태현은 아내 살해 용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라진 상태였다.

수연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영원히 떠도는 - 제목 그대로 '고스트 하이커'가 되어 '부랑'을 하는 - 내용의 작품. 
솔직히 장르가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진상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연이 결혼한 태현에게 집착한 나머지, 태현의 아내는 자살했고 태현은 부랑자가 되었다던가, 수연이 베로나 실종 사건에서 알랭이 수상하다는걸 리즈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던가 하는건 모두 수연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애매한 사건들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 보다는 중간에 수연이 죽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복선을 삽입한 뒤, 수연이 유령이라는걸 드러내는 전개가 더 좋았을거에요. 정교한 맛도 살리면서 말이지요. 여러모로 부족하고 애매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한국 미스터리를 읽는 네 가지 키워드 2 : 욕망과 갈등의 논리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에 대해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연재물. 이번에는 '사연'과 '한'이라는 한국 미스터리만의 특별한 주제에 대해 "아홉 꼬리의 전설"과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라는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저 두 작품에 대한 해설과 비평에 가까와서 별로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 두 작품이 한국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도 아니니까요. 보다 보편 타당한 고전을 예로 들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과 해석이라면, 연대순으로 한국 미스터리의 특징을 당시 주요 사회 현상과 연결하여 통사적으로 설명하는게 더 와 닿았을것 같네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이외 비평, 인터뷰, 추리 퀴즈 등은 점수를 주기 애매해서 생략합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내용들도 아닙니다.

2026/01/31

아사토호 - 니이나 사토시 / 김진아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의 쌍둥이 동생 아오바가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 교수 후지에다가 실종되었고, 교수를 찾던 친구 아즈사도 자살했다. 다른 실종 사건이 여럿 있었으며, 이 모든 사건은 '아사토호'라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낸 나쓰히는 다시 재회한 아키토와 함께 '아사토호'의 정체에 대해 찾아 나섰다. 이 모든건 사람을 하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천과 관련이 있었다...

신예 작가 니이나 사토시의 장편 소설입니다.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지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펼쳐져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쓰히와 아키토 앞에서 아오바가 신비한 천에 의해 사라진 뒤, 둘 말고는 아무도 아오바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대학생이 된 나쓰히의 지도교수 후지에다의 실종과 교수를 찾던 아즈사의 기묘한 자살, 이 모든 것과 얽힌 책 '아사토호'에 관련된 수수께끼가 이어지는데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나쓰히와 아키토가 여러 자료를 토대로 아사토호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합니다. 아사토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마쓰무라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마쓰무라의 산장 위치를 추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키토는 기록의 증기 기관차에 탔던 시간과 버스를 탄 거리를 토대로 대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하고, 그 장소에서 결국 기요하라 병원까지 이어지는 단서들을 수집해 내어 진상에 도달하게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아사토호'에 대한 상세한 설정들도 굉장히 설득력 높습니다. 저자가 실제로 문학사 전공인 덕분이겠지요. 정말로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실감납니다.

추리적으로는 그 외에도 괜찮은 부분이 제법 많아요. 아키토가 영매사로서 선보이는 짤막한 에피소드처럼요. 일종의 콜드 리딩, 사전 답사와 의뢰인의 현황—신혼부부가 굳이 교외에 있는 단독 주택을 산 이유는?—을 토대로 추리를 통해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지요.

호러 장르물로서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아즈사가 남긴 논문이 유서처럼 이어지는 장면이라던가, 후지에다 교수의 아내 미나미의 등장, 그리고 나쓰히가 사라지고 아오바가 나타난 시점에서 '아사토호'라는 책이 고전 걸작으로 널리 퍼졌고 결말까지 달라진 - 원래는 온나니노미야가 추녀였다는 한심한 결말이었는데, 아오바처럼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다는 결말로 -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부분 등은 꽤 섬찟했습니다.

모든 건 앞뒤가 딱 맞게 말이 되는 패턴이고,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쓰히의 생각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는 진상도 잘 풀어냈습니다. 단순 괴기현상으로 풀어낸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고 말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 해요. 나쓰히는 아오바와 아키토의 환상 속 존재였다는 진상과 이에 따른 시점 변화도 적절했고요.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이, 천을 함께 본 사람들이 원하고 빠져드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아키토가 일으킨 사고로 크게 다쳐 흉터가 생긴 아오바가 상처 없는 나쓰히로 거듭난 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오바에 대해 나쓰히와 아키토가 이상한 기억을 공유하고, 새롭게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즈사가 원한 건 연구자로서의 성공이었는데, 천이 심어준 건 좌절감이었고, 그녀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립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원했던 후지에다 교수를 차지한 미나미 이야기뿐입니다.

천을 본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종의 다중 우주 세계관이라서 하나의 우주에 천을 본 사람들이 여럿 얽힌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들이 개입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니까요. '천'이 만든 이야기에서 '천'의 진상을 밝히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요. 기껏 꿈 속에 데리고 왔는데, 이게 꿈이라는걸 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의 정체가 밝혀진 뒤의 분량은 많이 길고 애매했습니다. 아오바가 천과 일체화되어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는 장면이 특히 길었어요. 감정 과잉이라 여겨지기도 했고요.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정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두사"처럼 환상은 환상처럼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실 만한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05/06/15

베스트 미스터리 2000 1, 2 -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정태원 역 : 별점 3.5점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1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2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소문만 듣던 책인데 인터넷 서점에 마침 재고가 있길래 냉큼 구입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들의 단편선이니 구입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목과 서론을 보니 일본 추리작가 협회에서 직접 선정한 2000년도판 베스트 단편선 쯤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한국 추리 작가 협회가 매년 출간하는 베스트 추리소설 모음집과 유사해 보입니다. 

워낙 일본이 추리 강국이라 저변과 시장이 넓은 덕분이겠지요? 수록된 작품의 양이 상당합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출판되었는데 1권에는 11편, 2권에는 9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수준도 우수합니다. 재미도 있고요.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통 추리물을 비롯해서 형사물, 공포스릴러, 환상단편, 인간 드라마, 심리 서스펜스에서 패러디까지 각종 쟝르를 넘나들며, 전개와 설정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고요.
작가군도 풍성합니다. 사노 요, 노리츠키 린타로, 이마무라 아야, 모리 히로시, 니카이도 레이토 등 유명 작가들은 물론 끝부분 작가 소개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라고 표시된 작가도 상당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렇듯 작가진만 보더라도 정말로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엄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전체적으로 우수하지만, 개인적으로 1권의 베스트는 사기극 "영원표묘", 정통추리물에 가까운 "사용중"과 "일곱통의 편지"이며 2권의 베스트는 정통 추리 "흉소면", "까마귀의 계시"였습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평균 이상 수준은 충분합니다.

번역이 약간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 조금 더 작은 판형으로 예쁘게 장정하였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렇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추리 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진수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수고롭더라도 구해볼 가치가 있는 책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후 2000년만 아니라 다른 년도의 베스트 단편 모음집도 소개되면 좋겠네요. 자세한 각 단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1. 잠들 수 없는 밤을 위하여 - 오리하라 이치 : 

 잡지의 "고민 상담실"의 투고와 신문기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으로 소품에 가깝습니다.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지만 마지막의 여운이 인상적이었어요.

2. 거짓말쟁이의 다리 - 사노 요 : 

 형사수사물. 두 형사의 대화로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의 뒤에 감추어진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는 전개로 잘 짜여져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마지막 반전은 약간 억지스럽습니다.

3. 배반의 푸가 - 스즈키 기이치로 : 

영안차 운전수라는 독특한 직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여자의 집착을 서늘하게 그린 소품. 약간 로얄드 달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인데, 조금 더 압축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4. 영원표묘 - 구로카와 히로유키 : 

미술상을 무대로 한 독특한 사기극으로 만화 "갤러리 페이크"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초반에 제공되는 명확한 단서를 통해 결말까지 이끌어내는 추리극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독자까지 속이는 세련된 전개와 트릭이 돋보입니다. 작가가 미대 출신의 전문가라 그런지 이야기에서 보이는 미술품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고요.

5. 지난날의 사랑 - 오사카 쓰요시 :

사립탐정이 여배우의 의뢰로 애인의 불륜 뒷조사를 한다는 내용으로, 별다른 추리적인 요소는 없지만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고 무난합니다. 베스트로 선정되기에는 지나치게 심심한게 아닌가 싶지만요.

6. 얼음설탕 - 후지모토 유키 : 

한 주부가 과거에 사라졌던 애인과 우연히 재회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점점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여성 버젼의 스텐리 엘린 단편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심리 묘사가 탁월하며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7. 야수의 기억 - 고바야시 야스미 : 

호러 스릴러의 성격을 띈 작품입니다. 다중인격의 소유자로 다른 인격일 때의 파괴적인 행동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잘 묘사하며, 추리적인 부분도 확실한 편이고 반전도 좋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속이기 위해서 전개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건 감점 요인이네요.

8. 은폐꾼 - 가스미 야스시 : 

사회적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불상사를 국가 차원에서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단체가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설정과 전개가 스티븐 킹의 "금연 주식회사"와 유사하지요. 기발한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후반 전개는 좀 뻔해서 아쉽습니다.

9. 사용중 - 노리츠키 린타로 : 

한 추리작가가 살해되었는데, 그가 생각한 추리 소설의 전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입니다. 스텐리 엘린의 작품을 인용해가며 전개되는데, 밀실 트릭에 대한 생각은 노리츠키 린타로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더욱 재미있더군요.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짧은 분량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충분히 전해주는, 단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10. 일곱통의 편지 - 아사기 마다라 : 

동거하던 남자의 어머니와 왕래한 편지로 이면에 숨겨진 살인사건이 밝혀지는 작품으로 전개도 독특하지만 추리적으로도 일품입니다.

11. 먼 창 - 이마무라 아야 :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이 불구가 된 사고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환상특급"에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소녀의 일기로만 전개되는 구성도 독특하고요. 재미도 있고 후반부의 아버지의 일기에서 밝혀지는 진상도 좋습니다. 다만 결말이 예측 가능하다는건 단점이에요.

2권 

시효를 기다리는 여자 - 니이츠 키요미 :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직전 진범의 심리와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작품. 독자를 속이는 소설만의 효과로서 이루어진 트릭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반전과 결말은 수긍하기 조금 어렵더군요.

부하 - 곤노 빈 : 

부하를 믿고 신뢰한 경부보가 방화범을 잡는다는 내용의, 인간 드라마와 추리물이 잘 섞여 있는 소품입니다.

흉소면 - 기타모리 코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 처럼 대학의 민속학자가 한 고택의 오래된 가면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본격 추리물입니다. 트릭과 전개도 깔끔하지만, 무엇보다도 단편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범인의 동기까지 설득력있게 등장하는게 마음에 듭니다.

독점 인터뷰 - 노자와 히사시 : 

유괴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약간 사회파 느낌을 전해 주는 작품입니다. 사소한 단서로 진상이 밝혀지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구성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였지만,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힌 드라마가 잘 살아있어서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석탑의 지붕 양식 - 모리 히로시 : 

사이카와와 모에 커플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하지만 둘이 탐정으로 등장하는건 아닙니다. 모에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사이카와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이야기거든요. 결국 정답은 집사가 맞춰버린다는 "흑거미 클럽"과 유사한 결말도 독특하고요.
그러나 고대 인도의 수수께끼의 석탑 지붕 양식에 관한 수수께끼라는 설정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개중 설득력 있는 것"이라는 결말은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명성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출범 - 와카다케 나나미 : 

메이지시대를 무대로 천방지축 아가씨의 탈출 계획을 막는 하녀의 기지가 발휘되는 소품입니다. 일본어를 이용한 트릭이 하나 등장하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에요. 유쾌한 분위기는 즐거웠지만요.

까마귀의 계시 - 우타노 쇼고 : 

동네 쓰레기를 마당에 모아놓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사건 자체가 백만분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만 뺀다면,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전개도 깔끔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생환자 - 츠부라야 나츠키 : 

산악 경비대 대장을 주인공으로, 산에서 발생한 알 수 없는 프로 등산인의 추락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재와 설정이 독특하며 등산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별로 평가할 건덕지가 없었어요.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 -니카이도 레이토 : 

사람들이 식사 대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장소인 "독서 레스토랑"을 무대로 주인공 가스케가 건방진 싸구려 평론가 고토쿠를 추리소설 품평 내기를 통해 혼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서 레스토랑과 추리소설 품평 내기라는 설정도 참신하고, 등장하는 방대한 추리 작품에 대한 지식도 상세한데다가 무엇보다 유쾌한 꽁트 분위기가 즐거웠던 작품입니다. 작가가 평론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엿보이는 점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전개는 로얄드 달의 "맛"에서의 포도주 맞추기 게임과 거의 유사해서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트릭도 추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문제가 많고요. 여러모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2023/10/08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점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마술사면서 사기, 거짓말, 위조도 서슴치 않는 안티 히어로 '블랙 쇼맨' 다케시 삼촌이 활약하는 단편집. 전작은 묵직한 장편 추리물이었던 반면, 이번 작품들은 가벼운 단편 범죄 드라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웠습니다. 핵심 매력 포인트였던 다케시의 안티 히어로적인 속성이 거의 사라진 탓이 큽니다. 손님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하는, '정의의 바텐더'로 캐릭터가 변해 버렸더라고요. 사건들도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결말도 거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칵테일이 주요 소재로 쓰이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만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속작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기대는 되지 않는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맨션의 여자>>
마요는 손님 우에마쓰 가즈미와의 미팅 장소로 다케시 삼촌의 바 '트랩핸드'를 이용하게 되었다. 다케시는 거짓말과 사기로 가즈미 남편의 지인인 척 했다.
어느정도 마요, 다케시와 친해진 가즈미는 다케시의 바에서 오래전 연이 끊긴 오빠 유사쿠와 만나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흔쾌히 허락한 다케시와 마요는 도청장치로 유사쿠가 가즈미가 가짜라고 협박하는걸 들었다. 다케시는 간단한 조사와 추리로 가즈미는 가짜가 맞지만 진짜와 협력했을거라 생각하고, DNA 검사를 요구하는 유사쿠를 가짜 사진으로 물리친 뒤 가즈미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나에는 가즈미의 부탁으로 역할을 수행했고, 그 이유는 췌장암으로 곧 죽게 되는데 유산이 자기에게 끔찍한 짓을 한 오빠에게 상속되는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케시가 사기꾼으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가짜 가즈미의 정체를 꿰뚫고, 조작한 사진으로 유사쿠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보이는 전반부, 그리고 나나에의 입을 통해 가짜 가즈미가 된 이유가 설명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탐정(?)의 활약과 범인(?)의 고백이 1, 2부 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셜록 홈즈와 같은 고전 추리물을 연상케합니다. 

다케시의 DNA 검사 요구를 퇴치하기 위해, 유사쿠는 아빠의 블륜으로, 가즈미는 엄마의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조작한건 기발했는데, 그 외에는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이 없습니다. 나나에와 가즈미가 꼭 닮았다는 우연에 모든게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이런 우연보다는 가즈미의 재산을 이용하여 나나에에게 성형 수술을 시켜주고, 회복 기간 동안 바꿔치기를 위한 학습을 했다고 풀어가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추리, 범죄물이라기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다는 점도 아쉽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위기의 여자>>
나미는 만남 어플로 만난 기요카와로부터 그가 가지고 있다는 하와이 별장 이야기를 듣고, 함께 트랩핸드에 방문해서 칵테일 '블루 하와이'를 마셨다. 연이어 자기 재산을 자랑하던 기요카와는 다케시의 칵테일 한 잔을 더 마신 뒤 미친듯이 졸려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알고보니 기요카와는 어플로 만난 여자에게 재신이 많다는 거짓말로 환심을 산 뒤, 수면제를 먹인 뒤 몹쓸 짓을 하는 악당이었습니다. 이를 꿰뚫어 본 다케시가 술잔을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이 과정에서 칵테일 '블루 하와이'가 트릭의 주요 소재로 사용된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면 유도제가 범죄에 악용되는걸 막기 위해 물에 녹으면 파랗게 변하게 만들었는데 (일본 이야기겠지요?), 그걸 숨기기 위해 원래 색이 파란 블루 하와이를 선택했다는 아이디어가 괜찮았거든요. 바텐더 다케시에게도 어울리는 소재였고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후속작이 나온다면 추가되어도 좋을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다케시가 기요카와의 수작을 눈치채고 경고를 하기 위해 '비트윈더시트'를 대접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재료만 듣고 칵테일 이름을 떠올리고, 이게 '경고'라고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까요. 또 같은 재료라도 비율에 따라 여러 결과물이 나오는게 칵테일이라서, 경고의 의미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뭐, 이 모든게 다케시 삼촌의 억지라면 할 말이 없지만요.

그래도 나름 트릭도 사용되었고, 다케시의 활약도 빛나며 기승전결도 깔끔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환상의 여자>>
유즈키는 치과의사이자 재즈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도모야와 불륜 관계였다. 그러나 도모야갸 교통사고로 죽은 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는 절친 야요이와 함께 트랩핸드를 찾은 유즈키는 도모야가 과거 요코스카에서 연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모야의 과거를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코스카에서 도모야가 '딸'이라는 여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걸 알아내는데....

표제작. 도모야가 딸과 함께 보냈던 과거는 모두 조작으로, 유즈키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려는 친구 야요이의 계획이었다는 내용.

불륜녀인 친구를 위해 본처를 설득하기까지 한 친구 야요이의 엄청난 노력은 절절이 전해집니다만, 이런 계획이 유즈키의 새로운 시작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차라리 요코스카에서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조작해서 정나미가 확 떨어지게 했더라면 모를까요. 불륜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소재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도 없고 알멩이도 없는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01/28

칼리의 노래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칼리의 노래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죽었다고 알려졌던 시인 M.다스가 아직 살아있고, 캘커타에 나타났다는걸 알게 된 잡지사의 의뢰로 시인 보비는 아내 암리타, 젖먹이 딸 빅토리아와 함께 캘커타로 향했다. M.다스의 신작 확보와 그에 대한 기사 작성이 목적이었다. 보비는 그를 찾아온 조력자 "크리슈나"로부터 M.다스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신작에 얽힌 "칼리" 신을 모시는 신앙과 폭력에 대해 들었다.
여차저차 M.다스의 신작을 입수해 독파한 보비는 반은 협박에 가까운 어거지로 M.다스를 직접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다스의 죽음과 카팔리카 교단의 납치와 폭력에 휩쓸리고 말았고, 크리슈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호텔에 돌아왔지만 빅토리아가 유괴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장르 소설가 댄 시먼스의 데뷰작입니다.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스티븐 킹, 딘 쿤츠 등이 격찬한 공포 소설이라기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캘커타를 무대로 범죄 집단의 광기에 휩쓸린 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사실 보비의 임무(?)는 별게 없습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시인의 복귀작을 구해오고, 관련된 기사를 쓰는게 전부니까요. 그러나 이를 독자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솜씨가 정말 빼어나며, 그 바탕에는 발군의 묘사력이 자리합니다. 캘커타라는 곳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 솜씨가 가장 돋보여요. 이 작품의 첫 문장부터가 그러합니다. "어떤 장소는 너무나 사악하여 그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어떤 도시는 지독히 악랄해서 용납할 수 없다. 캘커타는 그런 곳이다." 작품 내내 이 첫 문장을 그대로 증명하듯 캘커타의 치부와 오점만을 상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러한 캘커타 묘사 덕에 "폐쇄공포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포감이 모락모락 생겨나고요. 특정 장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데 그 장소나 너무나 혐오스럽게 묘사되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이렇듯 특정 장소에 대한 혐오감과 폐쇄 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은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과 좋은 비교가 될 정도에요. 이런 곳에서 하나 뿐인 아이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 공포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러한 공포에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묘사한 덕분에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되고요. 

다른 묘사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크타난다지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카팔리카의 예배 의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좋은 예입니다. 엄청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되어 있어 보이는 디테일, 신상이 밟고 있는 시체와 들고 있는 참수된 목을 이용한 아이디어도 아주 공포스러워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익사한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었고요.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무섭기에 시각화하더라도 아주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칼리의 노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좋아요. 일종의 서사시와 현대 문명을 결합하여 설명하는데, 번역된 결과물로는 천재 시인의 작품인지 잘 모르겠더라도 아이디어만으로 놀라운 결과물로 느껴졌습니다. 현대 문명이 진정한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광고나 뉴스 기사와의 결합을 통해(의도한 것이던 아니던) 잘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 속 표현 그대로 "칼리의 시대가 열렸도다"! 인 것이죠. 

적절하게 등장하는 소소한 액션, 빅토리아를 잃었지만 보비와 암리타 부부는 결국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는다는 나름대로의 해피 엔딩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해피 엔딩을 좋아하기도 할 뿐더러, 이 정도 고초를 겪었으면 좀 행복해져도 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주요 인물인 보비, 크리슈나의 급격한 심리 변화와 행동들의 이유, 목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보비가 다스를 꼭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 - 보비가 원고를 손에 든 시점에서는 M.다스를 만날 이유는 없음 -, 만남 이후 크리슈나가 건네준 권총을 M.다스가 부탁한 시집 속에 숨겨 넣은 이유, 마지막에 보비가 발작적으로 캘커타로 돌아가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등 이야기의 핵심 변곡점 모두가 그러합니다.
크리슈나 즉 산자이의 목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카팔리카가 되고 싶었지만, 되고 난 이후에는 왜 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를 전혀 모르겠거든요. 칼리 신의 뜻도 아니고, 그 스스로 칼리 신을 거역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정도의 실력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만약 크리슈나의 행동이 카팔리카의 목적이라면 M.다스를 죽인 이유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놔 두었어도 어차피 오래 갈 목숨은 아니고, 시의 출간을 막기 위해서라면 보비와의 만남과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칼리 신의 안배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 안배, 계획이 무엇인지 정도는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폭력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선언한다...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어요.
빅토리아를 납치한 것도 밀수품 운반을 위한 악당들의 음모였는지, 칼리 교도인 카팔리카들의 복수인지도 결국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악당들의 음모라면 사전의 안배 - 다스의 조카라는 카마키야 브하라티의 존재 - 라던가, 차터지가 M.다스와의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카팔리카가 연류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좀 애매해요. 이렇듯 좀 모호한 이야기가 '환상문학' 스타일이기는 합니다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보비가 과거 성폭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등의 짤막한 묘사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고요.

아울러 공포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다는 단점도 있지만 사소합니다. 재미도 있고 묵직한, 좋은 장르 문학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만큼 장황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러고보니 아주 무섭지는 않지만 환상 문학 쪽으로는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앰브로스 비어스 작품과도 비슷하군요. 여튼,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신 장르문학 팬 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리는 바 입니다.

덧붙이자면,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독서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인도는 절대 가면 안된다는 것을. 댄 시먼스가 캘커타에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앙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대부분은 캘커타라는 곳을 방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2006/12/06

나는 전설이다 - 리쳐드 매드슨 / 조영학 : 별점 3.5점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표제작 중편 이외에 10편의 단편이 같이 실려 있는 중단편집. 이 바닥에서는 유명하지만 호러 계열은 취향이 아닌지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형의 지인이 대여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읽게된 책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제 취향때문에 안 읽었더라면 큰일날뻔 했어요.
일단 표제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뱀파이어 호러물 "나는 전설이다"는 정말 대단한 작품으로 여러모로 생각해 볼 부분이 많더군요.
중편이긴 하지만 하나의 긴 기둥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4개의 시즌으로 구분하여 각 에피소드별로 나뉘어져 있는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살아남은 강아지 에피소드가 제일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만 다른 에피소드들도 전부 보통 이상입니다.
바이러스가 일종의 공기로 전염되는 것이라는 것이라던가 주인공이 뱀파이어 바이러스에 어느정도 면역이 있다는 등의 설정부터 쓰여진 시기를 생각한다면 굉장히 획기적이고 특이하며 홀로 집을 요새처럼 꾸며놓고 거의 좀비와 같은-사고(思考) 없는- 뱀파이어들과 싸운다는 설정은 후대 다른 많은 작품들, 특히 좀비물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또한 혼자서 뱀파이어들을 퇴치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의 리얼함이 정말 생생합니다. 읽다가 어느새 감정이입하게 될 정도로 말이죠.
아울러 뱀파이어라는 이질적 존재에 대한 나름의 과학적인 전개도 곁들여서 재미를 더하는데 주인공이 뱀파이어를 퇴치하기 위해 마늘과 십자가, 햇빛에 대해 여러가지 연구를 하는 부분, 또 그들의 라이프사이클(?)을 파악하고 낮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존과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구하고 만드는 부분 등은 리얼하면서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딱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 즉 작품 후반부에 중간존재(?) 격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영화적이고 작위적인 설정이었어요. 이 여성이 등장하지 않고 더 묵직하게 끝나면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모두가 비정상인 곳에서 혼자만이 정상이면 그 혼자가 결국 비정상, 괴물이라는 주제는 묵직하게 전달됩니다. 외눈박이 마을에 두눈박이가 가면 안되는 것 처럼요. 제목 그대로의 주인공 네빌의 독백이 정말로 와닿는, 재미도 있으면서도 작가의 철학과 주제가 잘 전달되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다른 단편들도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덧1 : 영화 "오메가 맨"의 원작인지는 몰랐는데 확실히 영화는 많이 달랐었죠. 영화에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등장해서 주인공의 고독을 극대화시키지 못했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이번에 다시 영화화 한다는데 주인공 네빌의 절망과 음울한 분위기를 얼마만큼 잘 살릴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주인공 역으로 윌 스미스는 영 아니라는 생각이...
덧 2 : 읽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이마 이치코의 걸작 단편선 3권 "외딴섬의 아가씨"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 "침묵"이 생각나네요. 정상인인 듯(?)한 한 마을에 동굴을 통해 찾아온 이웃 마을 마법사의 이야기인데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주제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던지기 놀이 :
작은 마을의 카니발. 탁구공을 던져 어항안에 집어넣으면 상품을 주는 코너에서 한 남자가 연달아 탁구공을 집어넣기 시작한다.
사소한 작은 일상에서 점차 커져나가는 스릴과 공포를 잘 나타낸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결말이 약간 황당하긴 하지만 전개가 상당히 매끄럽고 탄탄하네요.

아내의 장례식 :
굉장히 짧은 꽁트 형식으로 내용 요약이 어렵지만 유머러스하고 섬뜩한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이른바 "기묘한 맛" 류의 단편입니다.

죽음의 사냥꾼 :
아멜리아는 서른이 넘어서도 어머니에게 속박당한채 자유스럽지 못한 삶을 산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친구 아서에서 선물하기 위해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인형이 주술걸린 사슬이 벗겨져 그녀를 습격하는데...
스티븐 킹 느낌이 물씬 나는 호러물입니다. 약간의 배경 및 캐릭터 소개를 제외한다면 거의 전편에 걸쳐 주인공 아멜리아와 죽음의 인형의 사투를 다루고 있어서 깊이는 좀 없지만 내용 자체는 무척 재미납니다. 공포스럽기도 하고요. 그러나 마지막 결말에서의 반전은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드네요.

마녀의 전쟁 :
P.G 센터의 일곱명의 예쁜 소녀들은 사실 마녀로 적군을 마법으로 습격하는 작전을 시작한다.
굉장히 짧은 작품으로 마녀들의 저주와 술법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라 그다지 알맹이는 없습니다. 단지 아이디어만 좀 기발하달까... 작가의 이력에 TV시리즈 "환상특급" 원작을 여러편 썼다는 내용이 있는데 정말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영상화가 더 어울릴법한 소품이었습니다.

루피 댄스 :
순진한 소녀 페기는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건달인 버드와 렌, 그리고 렌의 파트너 바바라와 같이 금지된 우범지역 세인트루이스로 놀러가 "루피댄스"를 처음 접한다.
뭔가 전쟁이나 다른 이유로 약간 맛이간 세계를 무대로 해서 황폐하고 무절제한 젊은이들을 그린 작품. 초반부의 맛간 젊은이들 묘사는 스티븐 킹 작품의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데 괴물이 등장하는 등의 공포로 이어지지는 않고 "루피댄스"라는 기묘한 춤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끝납니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SF적인 몇몇 설정과 대사는 재치있지만 그다지 생각보다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어차피 제가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건지 무절제한 청춘 이야기는 식상하기도 했지만요.

엄마의 방 :
짧기도 하고 내용 요약이 힘든 작품이지만 나름 반전이 있는 소품입니다. 역시 "기묘한 맛" 류일까요? 루스 렌들 여사의 단편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드 하우스 :
한때 작가를 꿈꾸던 크리스는 허름한 집에서 결코 끝나지도 못할 소설을 붙들고 사는 말단 영어 강사로 삶에 대한 그의 분노가 너무 커져 그의 아내 샐리가 그를 떠난다고 통보한다.
분노와 성질이 누적된다는 굉장히 이색적인 아이디어로 설득력있게 쓰인 작품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말까지 깔끔해서 무척 마음에 드네요. 이 책의 단편들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장례식 :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 앞에 에스퍼라는 작자가 나타나 최고급 관을 주문한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소재이긴 하지만 무척 유머러스할 뿐더러 끝까지 유머의 끈을 놓지 않아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역시 영상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은 "환상특급"류의 작품 이었습니다.

어둠의 주술 :
의학박사 제닝스는 자신의 딸 패트리시아와 약혼한 피터가 광분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피터가 주술에 걸렸다고 이야기 한 덕분에 자신의 친구이자 주술의 권위자인 대학교수 하월박사를 불러 그를 치료하려 하는데...
주주 주술이라는 정체불명의 주술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주술에 대한 상상력과 그것을 묘사하는 내용은 리얼하고 생동감있지만 그다지 알맹이는 없는, 이색적인 소재에 많이 기댄 범작입니다. 괜히 길기만 기네요.

전화벨 소리 :
밀만은 새벽 3시에 걸려오는 전화때문에 미칠 지경. 그의 정신과 의사 팔머 박사의 조언대로 전화를 받아보지만 상대방은 정부 요원이니, 발명가니, 아버지니 하는 헛소리를 계속 해 대는데...
이 작품 역시 호러라고 보기엔 약간 썰렁하지만 나름 서늘한 맛이 있는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이색적이고 기발하면서도 서늘한 소재와 전개, 그리고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