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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이번영 : 별점 3점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6점
이번영 지음/이른아침

정조가 남긴 "심리록"을 기반으로,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 내용을 덧붙여 정조 당시 대표적 옥사 18건을 추린 후 사건의 전말과 소송의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책입니다. 참고로 "심리록"은 정조가 자신이 관여한 모든 중범죄 소송에 대하여 그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 등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 뒤, 이를 묶어 편찬한 종합적인 형사소송 판례집이라고 하네요.

무려 1,850건이나 되는 "심리록" 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을 꼽아서 수록한 덕분에 기본 재미는 보장됩니다. 소설 형식으로 쓰여져 읽기 편하다는 것 역시 큰 장점이고요. 정조 시절의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심문, 최종 판결에 이르는 과정이 사건별로 상세하게 소개되어 자료적인 가치도 아주 높습니다.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후진적인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과 비교되는 생각보다 놀라울 정도의 치밀한 과학 수사 및 판결 과정입니다.

문중 며느리가 간음의 소문이 났다는 이유로 친오빠까지 합세하여 물에 빠뜨려 죽인 사건, 소문으로 정절을 의심받은 여인이 소문을 낸 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 동네 천것에게 희롱당해 팔을 잡힌 여인이 작두로 자신의 팔을 자른 사건, 아버지의 원수를 직접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씹고 창자를 몸에 둘렀다는 엽기적인 복수극 등, 소문 중심의 동기와 여성의 정절과 인륜을 법보다 중시 여기는 문화에서 이어지는 끔찍하고 잔혹한 범행은 굉장히 후진적입니다.

반대로, 범인을 잡은 후 실제 판결을 내리기까지 심지어 10년 이상 걸릴 정도로 집요하게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은 나름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이라 대비됩니다. 일단, 수사는 "무원록"을 기반으로 한 검시가 기준이 됩니다. 예전에 "신주무원록에 대한 책"은 읽은 적이 있지만, 이 책이 실제 사건에서 어떻게 무원록이 활용되었는지 설명되는 덕분에 훨씬 쉽고 이해하기가 편했습니다. 무원록에 '만삭 여인의 태아가 다치거나 죽은 경우'까지 수록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그 상세함과 깊이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른바 "상명의 율", 즉 누군가의 목숨은 다른 목숨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사형만큼은 극도로 신중하게 판단한 후 임금이 직접 지시와 판결을 내리는 모습도 돋보입니다. 목숨을 중히 여기는 모습에서 후대에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헛점이 발생한 경우 관찰사 등 관계자까지 처벌하는 꼼꼼함은 오히려 지금보다도 나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원수의 간을 씹고 창자를 꺼낸 복수극'의 원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현감과 부사가 제대로 형사사건으로 처리하지 않은 탓에 사적인 복수극이 일어났다는걸 명확히 밝힌 후, 현감과 부사를 사헌부에서 구속·처벌케 하는 판부를 내린 것이 대표적입니다. "격쟁"이라는 제도를 통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고하는 행위도 지금보다 낫더군요.

물론 이러한 판결 과정도 후진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심문과 취조는 형벌 중심이라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덕분에 취조 중 용의자, 범인이 장독으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조카며느리 일가를 도둑으로 몰아 일곱 명이 자살하게 만든 사건의 범인 이경휘에게 '장일백으로 엄중히 처벌하라'라는 처벌로 '엄중히' 처벌받은 이경휘가 관문도 벗어나기 전 동헌 뜰에서 숨이 끊어지는 속 시원한 경우도 있어서 필요악이었다는 생각도 들긴 하고요.

판결을 내리는 데 기준이 되는 "대명률"에 있는 몇 가지 조항들도 후진적입니다. '부모를 죽인 현장에서 살인자를 죽이는 복수는 죄가 되지 않는다.' 처럼요.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를 법전에서 최상위 조항으로 정해놓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악용될 소지도 있고요. 

그리고 정조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실무자들이 철저히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대해 재검토를 지시하거나, 보고와 다른 본인 생각대로의 판결을 내리는 건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하여튼, 이러한 점을 종합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사건을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가장 복잡하고 최종 판결까지 오래 걸린 사건인 "04. 자신의 목을 세 번이나 찔러 죽은 의문의 자살 사건"입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박여인 사건입니다. 사건부터가 후진적이지요?

그런데 시체를 검시하는 과정부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무원록"을 토대로 한 검시관들의 다양한 의견이 펼쳐지는 덕입니다. 바보 같은 의견도 있지만 - 치명상이 세 번임에도 자살로 판단한 것 등 -, 목 맨 자국이 초검에서는 나타났으나 재검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죽은 뒤 목을 매어 목의 혈맥이 돌지 않은 까닭이라 밝히는 것 처럼 현대 과학 수사 못지않은 의견도 등장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시어머니와 간통남이 둘의 행각을 며느리에게 들켜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간통남 조광진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밤에 상복을 입고 방문했다는 일종의 트릭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당시 예법상 상제로 상복을 입고 다니던 이차망이 장기간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만, 수사 중 관계자의 증언으로 결국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도 볼거리였습니다. 간통남으로 몰린 이차망이 석방 전 옥사하고, 진범인 간통남 조광진도 심문 중 사망한다는 것 역시 앞서 말씀드린 형벌 중심의 후진적 취조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고요.

한마디로 후진적 사건을 해결하는 과학 수사와 단서를 조합하는 추리, 후진적 판결 과정 모두가 결합된 이야기였습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놀랍고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대동소이합니다. 소설 형식으로 구성되어 읽기도 편하고요. 조선 시대(후기)의 형사 사건 수사와 판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셔야 할 책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6/22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 별점 3점

책만 보는 바보 - 6점
안소영 지음/보림

정조 때 관리 이덕무와 그의 벗들에 대해 이덕무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역사, 전기 소설입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꽤 재미있더군요.
장점이라면 우선 이덕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서자' 출신으로 여러가지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덕무가 괴로움을 버티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갔는지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와 노력, 그리고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뻔한 해피 엔딩도 마음에 들어요. 이런 해피 엔딩이 거의 불가능했을 조선 후기였다는 점에서요.

두번째로는 이덕무 본인보다도 유명한 이덕무의 벗,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덕분입니다. 이덕무의 스승 격인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학의"의 박제가, "발해고"의 유득공, 이덕무의 처남으로 최근 이런저런 드라마 때문에 널리 알려진 "조선무예보통지"의 저자이기도 한 무인 백동수, 신분은 다르지만 순전히 책 사랑 때문에 친해진 이서구, 심지어는 정조까지 등장하는데, 이를 이덕무의 시점으로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예를 들자면 담헌 홍대용이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건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덕무 시점에서 홍대용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여러가지 장면을 그려내니 훨씬 생생합니다. 게다가 단순한 연주 묘사에 그치지 않아요. 홍대용이 천문, 수학,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걸 '자연의 이치는 곧 조화'라며 뛰어난 음악 실력과 연결하고 있거든요. 이런 장면들 덕분에 인물들이 더 입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웠집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이덕무와 친구들에게 명확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에 미친 책벌레로 책만 있으면 근심걱정 따위는 모두 잊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박제가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뜻을 굽히지 않고 올-인하는 혁명가로 그려지고요. 유득공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밝은 모습의 명랑한 메모광입니다. 백동수는 지위, 나이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 사교성 발군의 낙천적인 무예가죠.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 심지어 아끼던 책을 팔아 양식을 삼곤 했지만, 이런 벗들과 책들로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니, 뭔가 "성균관 스캔들" 스럽네요. 그리고 이들의 언행 모두가 굉장히 현대적이라서 읽기도 편합니다. 잘 된 고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종의 드라마같은 느낌을 주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세번째는 이덕무의 무지막지한 책 사랑입니다. 저도 한 사람의 독서인인 탓에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그가 직접 정리한 4가지 책 읽기의 이로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 둘째, 날씨가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야말로 독서 하나면 만사형통인 셈이에요. 배고픔, 추위, 근심걱정, 병을 독서로 잊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독서가 좋았으면 이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덕무가 추천하는 우리나라의 좋은 책 세 가지는 이이의 "성학집요", 유형원의 "반계수록", 허준의 "동의보감"입니다. "성학집요"는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마지막으로 당대, 즉 정조 시대 시대의 분위기 묘사도 마음에 듭습니다. 실학의 대두, 청나라와의 관계, 정조의 개혁 정치 등이 이덕무에게 닥쳤던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드라마가 함께 해서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이덕무가 출세하게 되는게 정조의 개혁 정치와 그대로 겹치기도 하고요.
물론 이 부분은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너무 이덕무와 백탑파를 좋게만 그리고 있어서 그렇지, 정조가 서자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을 발탁한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보겠다는 취지도 있었겠지만 당파에 좌지우지되던 당시 정국에서 자신만의 세를 키우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 더 컸으니까요. 결국 서자 출신들을 비롯한 이른바 '백탑파' 세력을 끌어올린건, 또다른 붕당을 만든 것과 다름 없는 셈이고요. 결국 서자 출신들은 고작해야 시골 군수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평양 감사까지 출세한건 신분이 높았던 이서구 뿐이었다는건 결국 현실의 벽이 높았다는 이야기라 여러모로 씁쓸합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역사, 조선 사람 시각으로 본 세상 등 '조선' 운운하는 발언이 많은 것도 너무 오버스러웠어요. 솔직히 진위여부도 의심스럽고 말이죠. 애초에 이덕무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위인전이라는 것 부터가 이덕무의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일종의 용비어천가스러운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백탑파에 편향된 시선, 고증과 진위여부가 모호하다는건 단점이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 한 선비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단점 때문에 완벽한 역사서라 하기는 어렵고 교훈적인 내용이 많은 위인전에 가깝기에 성인분들보다는 어린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제 딸에게도 언젠가 권해줄 생각입니다.

2008/05/22

바람의 화원 1/2 - 이정명 : 별점 3점

바람의 화원 1 - 6점
이정명 지음/밀리언하우스

정조 즉위 당시, 도화서에 두명의 천재가 있었으니 한명은 단원 김홍도였고 다른 한명은 혜원 신윤복이었다. 단원 김홍도는 신윤복의 스승으로 제자의 천재성에 경탄을 금치 못하나 신윤복은 고리타분한 도화서 양식을 거부한 이단아적인 존재. 두명의 천재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갖가지 어명을 받든 뒤, 어진화사의 지위에까지 오르나 결국 과감한 사실적 그림으로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내쳐지게 된다. 그러나 정조는 두명에게 진정한 어명, 즉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어진을 찾으라는 밀지를 내리고 신윤복은 내노라하는 세도가 김조년에게 몸을 의탁한 뒤 어진을 찾기위한 기나긴 여정에 들어간다...

이정명씨는 요새 잘나가는 한국 작가로 알고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책은 회사 동료가 추천해서 읽게 되었네요. 솔직히 한국의 이른바 "팩션" 쟝르는 그동안 읽어본 작품들도 실망만 안겨준 것이 많아서 별로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이 책은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제법 괜찮은, 길이가 제법 되는데 한번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을 안겨 주는 맛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팩션"이라는 쟝르명에 걸맞게 크게 2가지의 수수께끼, 즉 사라진 사도세자 어진, 그리고 어진과 관련되어 살해된 두명의 화원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와 신윤복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두가지의 수수께끼가 두 화원이 그린 당대의 걸작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작가의 세심한 자료조사와 노력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별 관련없어 보이는 유명한 작품들이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펼쳐지는 것은 정말이지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미대 출신이긴 하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갔던 작품들에 대한 과감한 해석이 정말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미스테리라는 쟝르만 놓고 본다면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사도세자 어진에 관련된 수수께끼는 결국 김홍도의 잠깐(?)의 조사를 통해 밝혀질 뿐더러 범인을 지칭하는 암호문은 억지 그 자체였거든요. 종이를 이용한 트릭이나 그림을 글씨로 읽는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그다지 효과적으로 쓰인 것 같지도 않았고요. 더군다나 또다른 수수께끼인 신윤복의 정체라는 것은 그것이 밝혀지는 것이 이른바 "감식안" 이라는 설정인지라 설득력이 너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신윤복의 정체가 이야기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약점이라 생각되네요. 특히 이 부분은 출판사의 미친 마케팅 덕에 수수께끼고 나발이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근영 주연 드라마로 SBS 방영 예정!" 이라고 홍보를 해 버리니 나원참 이거 장난도 아니고...

아울러 이야기도 좀 중구난방으로 튀고 결말도 약간 어이가 없긴 합니다. 진범에 대한 단죄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으며 결국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라는 식의 엔딩이라 약간 허무했거든요. 여운을 남기는 맛은 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치밀한 자료조사와 다양한 그림에 대한 재해석 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조 시대 도화서 이야기는 요새 자주보는 "이산"으로 친숙하기도 해서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어쨌건 "한국형 팩션"이라고 불리우는 쟝르가 만약 있다면 그 중에서 최고작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공들여 쓰여진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팩션"이라고 불리우기에는 약간 부족해 보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진심으로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출판사의 미친 마케팅은 불만이지만, 문근영 주연의 드라마도 꼭 보긴 봐야겠네요. 문근영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2021/08/22

왕의 밥상 - 함규진 : 별점 3점

왕의 밥상 - 6점 함규진 지음/21세기북스

'밥상으로 보는 조선왕조사'라는 부제 그대로, 조선 시대 왕들이 먹었던 식사와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알려주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는데, 이를 통해 여러가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브리아 샤바랭이 말했던 "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네가 먹는 게 무언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마" 가 허언이 아니라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게 세조입니다. 세조는 술을 좋아하고 주량이 남달랐다고 하니까요.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호전적인 성격답습니다. 종친 중 가장 어른으로 영향력이 상당했던 양녕대군이 수양대군 편에 섰던 이유도, 호탕하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천하의 호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니, 술을 좋아한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역사에서 보기 드문 한 예가 아닐까 싶네요. 

성종도 식사를 통해 할아버지 세조와 다른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수랏상 음식 양이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철선과 감선을 자주 했다는 점에서, 문치주의를 국정 기조로 삼았던 학구적인 왕이었다는게 드러나니까요. 그런데 성종이 서병이라는 병을 고질적으로 앓았던게 문제였습니다. 서병에는 찬 음식이 독과 같아서, 검소한 식단을 구성하고 물 말은 밥을 많이 먹은게 명을 재촉했던 거지요. 할아버지처럼 술은 좋아했고, 여색도 심하게 탐해서 병치레도 잦았고요. 

성종의 아들 연산군은 그 식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에서 소고기는 대부분 더 이상 농사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늙은 소의 고기였는데, 연산군은 소의 태아를 즐겨먹었다니 말 다했지요. 연산군의 강했던 왕권도 새삼 느낄 수 있고요. 덕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요.

연산군에 대해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당연히 왕권도 약해서 연산군만큼 막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슴 꼬리나 노루 새끼, 사슴의 혀와 같은 진미는 포기하지 못했다니, 식탐만큼은 이복형 못지 않았던 셈입니다. 

광해군은 편식이 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독선적이고 고집이 셌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중간이 없었던 셈인데, 그래서 당파간 세력 다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게 아닐까요? 

효종은 북벌을 결심했던 만큼 무인 기질이 강했고, 그래서인지 술을 좋아했고 식탐이 많았다는 사료가 많습니다. 세조 스타일인 셈입니다. 

영조는 장수와 오랜 집권 기간을 누린 군주답게, 철선과 감선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게 재미있네요. 왕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 처럼 보여서 신하들이 알아서 기게 만든거지요. 절대 왕권을 내세우거나, 특정 당파를 밀어주는게 아니라 신하들이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참으로 현명했다 싶어요. 게다가 이 철선과 감선이 과식을 막고, 결과적으로 장수를 누리게 했기에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반면 정조는 영조의 밥상 정치를 흉내내었지만 건강도 함께 챙긴 할아버지의 현명함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감선하면서 업무의 강도는 그대로였으며 편식도 심해서 건강을 해쳤고, 이씨 왕조 핏줄답게 술은 좋아했던데다가 담배까지 즐겨서 결국 천수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담배는 백해무익하다고 멀리했지만, 매독으로 사망한걸 보면 여색을 탐한 것으로 보이고요. 

고종 때에는 외국 문물이 들어와 마구 섞이고, 왕실 권위가 떨어져 궁중 법도도 흔들렸던 시기라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종이 돌이 든 밥을 먹다가 이빨이 부러지는 사고까지 있었다니 놀랍네요. 고종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는데, 직계가 아닌 탓이었을까요? 조금 궁금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식탐이 있었고 술을 좋아했으며 여색을 탐했던 왕들이 많은데 확실히 피는 못 속이나 보네요.

이러한 왕의 밥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 뒤에는 실제 왕의 수랏상에 올랐던 여러가지 음식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단순한 수랏상 소개를 넘어서서, 언제 어떤 요리를 먹었는지, 음양오행과 의식동원의 원리는 무엇인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아주 높아요. 조선 왕들은 그렇게 화려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건 새롭게 다가왔고요. 곰발바닥, 제비집같은 희귀한 재료도 없고, 세간에서는 못 먹고 왕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유밀과' 정도만 사치를 금하는 의미에서 민간에서 먹지 못하게 했을 뿐이거든요. 이유는? 나라가 가난했던 탓은 아닙니다. "청성잡기"나 "전집" 등의 사료에서 한양의 양반 대가들이 사치스러운 요리를 먹는 행태를 알려주고 있는걸 보면 말이지요. 저자는 그 이유를 조선의 궁중 요리 조리법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치스러운 재료보다는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사들의 손이 무척 많이 가면서, 재료들의 맛이 조화를 이루게 만든 평범한 음식이 조선의 궁중요리이기 때문이라면서요. 평범하면서도 은근하게 멋스러운, 조선백자의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의식동원에 대한 설명은 지나친 감이 있네요. 그냥 논문 한 편을 수록해 놓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왕의 밥상에 사용되기는 했지만, 의식동원 자체는 왕의 밥상을 통해 관련된 역사를 논한다는 취지와는 동떨어진 내용이었고요. 

그래도 독특한 미시사 서적으로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모두 높은 좋은 책이라는걸 부정할만한 단점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큐멘터리 영상물로 제작된다면 좋겠습니다.

2023/04/09

활자본색 - 이재정 : 별점 3점

활자본색 - 6점
이재정 지음/책과함께

남아있는 조선시대 금속 활자 중심으로 우리나라 활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는 미시사 서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등으로 근무하며 금속활자 연구를 진행했던 저자의 오랜 연구와 학습이 바탕이 된 상세한 설명이 가득합니다.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글도 마음에 들었고요. 덕분에 그동안 몰랐었던 조선시대 금속 활자에 대해 많은걸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대표적인건 왜 조선에서는 금속 활자를 많이 만들었는지? 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태종부터 금속활자 계미자를 만든 이유를 인쇄 목적이라고 천명했지만, 어차피 똑같은 서적을 찍을 거라면 목판본으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 수 있습니다. 금속 활자로 인쇄할 수 있는건 하루에 많아야 20장 정도가 한계였다니 그다지 가성비가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때문에 저자는 왕들이 힘과 돈을 써 가며 금속 활자를 만든 이유를 왕권 강화, 왕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컸다고 풀이합니다. 문치주의, 유교 문화 영향 아래에서 사치의 상징으로 내세울게 금속 활자였다는 해석이지요. 정조를 도와 활자 정유자를 만든 서명응이 이를 '부서', 즉 상서로운 징조이자 왕권의 상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고요. 제왕의 상징인 '구정'과 같은 구리로 만들어서 그랬다는 해석은 참신했습니다. 때문에 왕권이 강했고, 나름 국력과 왕권이 강했던 시기에 많이 주조되었던게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고요. 활자로 당시 국력을 가늠할 수 있다는게 재미있는데, 이런걸 보면 정조대왕 시기가 일종의 조선 후기 마지막 번영기였다는건 틀림이 없는 사실 같습니다. 화성이라는 거대한 건설 사업에 각종 기록들은 물론이고, 금속활자도 가장 많이 주조했다고 하니까요. 
왕의 서체를 직접 활자에 반영한다던가, '역적' 안평대군의 서체로 만들어졌던 활자를 없애고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그를 대체한 것도 같은 이유였을겁니다. 기껏 애써 만든 활자를 활용해서 많은 책을 출판하지 않은 것도, 왕의 것이라 아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민간에서도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족보를 위조해서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는 새로왔습니다. 목판은 족보 위조 시 판 하나를 갈아치워야 하지만 금속활자는 이름만 바꾸면 되었기 때문에 간편했다나요. 하지만 결국 민간에서 활자 제작하는걸 막을 수 없었고, 심지어 국력이 약했을 때는 민간 활자를 징발해 책을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각 활자별 분류도 상세합니다. 어떤 왕이 어떤 활자를 만들었고, 각 활자별로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알려주는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신답게 조선시대 금속 활자를 망라하고 있는 도판이 아주 좋습니다. 상세할 뿐더러 초반부의 해서체에서 후반부 명조체로 이동하는 일련의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많이 친숙한 명조체는 원래 송나라 시대 목판 인쇄가 성행하면서 판목에 글자를 새기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사용은 명나라 시기부터였고, 이 서체가 서양 납활자로 만들어진 후 일본에 도입된게 현재 명조체의 기원이 되었다는 역사는 처음 알았네요.
또 서체의 변화는 한자 서체와 함께 한글 서체도 함께 알려주는데, 한자보다 한글이 서체의 변화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한 디자인 변형을 보여주거든요. 극초기 훈민정음 창제 시기의 서체가 한자 서체와 유사하게 정방형 구조 안에 글자를 넣었고, 창제 원리에 맞게 점, 선, 그리고 네모 형태 기준으로 조합하는 디자인이라 더 모듈화된 느낌을 전해주었고, 그래서 형태적으로는 현대적인 고딕 서체와 거의 동일했다는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모던한 서체였던 셈이네요. 이러한 초창기 맛이 이후 한자 서체의 해서체를 바탕으로 한글 서체가 발전되어 사라졌다는게 조금 아쉽습니다. 다시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보아도 멋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활자의 제작 방식과 실제 활용 - 출판 - 등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습니다. 활자로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간행되었던 책들을 기준으로 알려주는데, 한자와 한글이 섞인 책의 레이아웃 구성 비교가 재미있었어요. 글의 중요도에 따라 나누어 인쇄했는데, 현재의 '마스터 페이지' 개념이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활자 제작 방식은 일종의 모래 거푸집을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줍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지는 못했을테니 국가적인 사업이 맞았고, 당연히 왕권이 강했어야 했겠어요. 지금 기술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게 아쉬운데, 제대로 복원이 되면 좋겠습니다.
또 활자를 어떻게 조판했는지, 어떻게 활자 제작 기술이 발달했는지, 심지어 종이와 먹, 인쇄와 제본, 활자와 책을 만든 장인들과 기관명에 대한 소개까지 이어지는데, 두 종류의 먹 중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드는 송연먹보다 각종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사용한 유연먹이 금속활자 인쇄에 유리했다는 등의 토막 상식도 재미있었어요. 금속 재질에 기름으로 만든 먹이 더 잘 달라붙었다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마지막의 활자 보관장은 처음보는 가구인데, 어떻게 활자를 분류해서 넣었는지를 짤막하게나마 알려주어서 좋았습니다. 나름 부수를 통합하거나 분리했는데, 저자는 단지 부수별로 구분하면 글자수 편차가 심하니, 자주 쓰는 글자는 찾기 쉬운 서랍에 넣고, 나머지 글자들은 부수를 줄여 적당히 모아 놓은 방식이었을거라 추측합니다. 그래도 조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활자가 어느 서랍에 있는지 대충은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을텐데, 정말 전문가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 중반부까지의 설명에 비해 뒷부분 설명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은 듭니다. 책 한 권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조선의 금속활자에 대한 모든걸 망라하여 쉽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비교대상을 찾기 힘든 좋은 미시사 책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4/04/29

조선의 명탐정들 - 정명섭 / 최혁곤 : 별점 2점

조선의 명탐정들 - 4점
정명섭.최혁곤 지음/황금가지

조선시대 사료를 바탕으로 실재했던 사건 해결 사례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논픽션 역사추리물이라고나 할 수 있습니다. 추리작가 정명섭, 최혁곤씨 공저로 모두 13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앉아서 수수께끼를 풀다 - 세종대왕
2. 권력의 중심에 칼을 겨누다 - 이휘
3. 법 위의 권력을 처단하다 - 박처륜
4. 악녀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 이의형
5.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타락한 탐정 - 연산군
6. 부인과 아들, 살인자는 누구인가? - 황헌
7.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다 - 이순
8. 부당한 수사에 맞선 용감한 선비들 - 이유달, 이민구, 목서흠
9. 방방곡곡을 떠돌며 캐낸 숨은 진실 - 심염조
10. 조선 최고의 명탐정 - 정약용
11. 한 치의 의심도 없게 하라 - 정조
12. 심리수사 기법으로 범인을 찾다 - 이름 모를 서흥 부사
13. 조선 투캅스 - 좌포청 군관 이종원, 우포청 군관 육중창

13편이나 되는 이야기가 실려있기 때문에 분량만 놓고 본다면 꽤나 풍성합니다. 그러나 해결이 어려웠던 이유는 단지 조선시대였기 때문이었던 사건 등 지금 보기에는 추리라고 보기에 민망한 수준의 사건도 많습니다. 검시 과정은 상세하지만 매번 유사하게 반복되어 지루하고요. 수사과정은 "국문"이라고 불리우는 고문에 의존하고 있어서 이게 정말 진상을 밝힌 것인지, 고문으로 또다른 피해자를 만든 것에 불과한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추리적으로 기대에 값했던 내용은 아래 세 편 정도입니다.

첫 번째는 "권력의 중심에 칼을 겨누다 - 이휘" 입니다. 사건 현장에 종이가 발라진 벽에서 혈흔을 체취하고, 벽과 기둥에 묻은 혈흔을 보고 바닥에도 흘렀을 것이라 추리하여 증거를 보강하고, 시신에 난 상처 (창대에 눌린 것 처럼 원형)를 통해 철창이 흉기임을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상세합니다. 동기를 밝혀내는 과정도 그럴듯했고요. 무엇보다 결말에서 세조의 최측근이자 공신인 민발이 범인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자, 이휘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사육신에 가담하게 된다는 후일담까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악녀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 이의형" 입니다. 피해자가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악녀 중의 하나이자 어우동의 어머니인 "귀덕"이라는것 부터 흥미로운데, 범인이 어머니의 패악을 못견뎌했던 아들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형벌은 능지처참이었다니... 죽을 죄이기는 하나 귀덕의 행실을 보자면 참작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텐데 유교 국가인지라 최고형이 선고된 듯 합니다.

마지막은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타락한 탐정 - 연산군"으로 유인홍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딸에게 발각되어 딸을 찔러 죽였던 사건입니다. 유인홍은 딸은 자살이고 첩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새 옷에 피가 묻는 것을 피하려고 헌 옷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목을 찔렀다는 내용에 주목하여 자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연산군이 알아냅니다. 결국 유인홍이 첩 무적과 언문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밝혀져 편지가 압수된 뒤 유인홍이 모든 증언을 조작, 조종하였다는 것, 그리고 첩이 간통이 드러나 딸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는게 밝혀지게 되지요.

내용은 평이하지만, 첩과 본처 소생 딸과의 갈등이라는 고전적 주제에 더해 피해자가 살해당했다는걸 간파하는 장면만큼은 추리소설같은 재미를 전해주기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로 정조편의 소박맞은 여동생을 살해한 오빠 사건 역시 동일한 발상으로 전개됩니다. 여동생이 자살할 결심을 했다면 돈과 베가 든 보자기를 가져갔을리 없다는 논리로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나머지 이야기들은 딱히 큰 재미가 있거나 자료적 가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료적 가치라면 "원통함을 없게하라" 와 같은 "신주무원록" 번역서가 더 낫겠죠. 얼마전 EBS에서 관련 다큐가 방영되기도 했고 말이죠.

아울러 책의 구성이 영 별로더군요. 본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짤막하게 소설 형식으로 시작한 뒤 상세한 내용을 기사처럼 쓰는 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다큐멘터리의 "재연화면"을 연상케하여 논픽션을 흥미롭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왜 똑같은 이야기를 두번 반복해서 분량을 늘리고 읽는 노력을 낭비하게 만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설적인 형식으로 쓰여졌다고 더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본편의 논픽션 부분에서 모두 소개되는데 말이죠.

게다가 최악은 각 이야기 후에 이 사건의 탐정역인 인물과 유사하다는 해외 명탐정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조선의 명탐정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해외 명탐정에 대해 관심이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유명한 파스타집에 갔더니 반찬으로 김치가 나오는 것과 다를바 없지요. 아무리 쉐프의 의도라도, 일반 손님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그나마 해외 명탐정들도 본편 내용과 억지로 연결시켰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범인을 잡아낸 탐정이 벤자민 위버라는 식인데 세상에 그렇지 않은 탐정이 있나요? 소개도 프로필 소개 정도에 불과해서 그닥 자료적인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이 무언가의 시작점이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재미, 자료적 가치 모두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좋은 디자인과 일러스트가 낭비된 느낌인데 차라리 신주무원록을 재미있게 소개해주는 식으로 논픽션 부분만 강화해서 책을 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21/03/19

조선의 미식가들 - 주영하 : 별점 2.5점

조선의 미식가들 - 6점
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

조선 시대, 음식과 요리에 대해 글을 남긴 문인과 그들의 글 속 주요 요리를 소개해주는 식문화, 미시사 서적. 당시 음식, 요리에 대해 글을 남긴 사람들을 '미식가'라 칭하고 있는 셈으로, 모두 15인이 소개되고 있는데 상세한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훈기가 뼛속까지 퍼지니” 이색의 소주
  • “돼지고기를 찍어 먹으니 참으로 맛있었다” 김창업의 감동젓
  • “관서의 국수가 가장 훌륭하다” 홍석모의 냉면
  • “맛이 매우 좋아서 두텁떡이나 곶감찰떡마저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허균의 석이병
  • "어해 중에서 으뜸이다” 김려의 감성돔식해
  • “가슴이 시원스럽게 뚫리는 듯했다” 이옥의 겨자장
  • “동치미 국물에 적시고 소금 조금 찍으면 그 맛이 더없이 좋다” 전순의의 동치미
  • “겨울밤에 모여서 술 마실 때, 아주 좋다” 이시필의 열구자탕
  • “지난번에 처음 올라온 고추장은 맛이 대단히 좋았다” 영조의 고추장
  • “지금 엿집에서 사용하는 좋은 방법이다” 김유의 엿
  • “먹으면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 파했다” 조극선의 두붓국
  • “목구멍에 윤낸다고 기뻐하지 말라” 이덕무의 복국
  • “잠깐 녹두가루 묻혀 만두같이 삶아 쓰나니라” 장계향의 어만두
  • “즙이 많이 묻어 엉겨서 맛이 자별하니라” 빙허각 이씨의 강정
  • “갓채는 물을 짤짤 끓여 부으면 맛이 좋으니” 여강 이씨 부인의 갓

주로 선비, 사대부들이 쓴 산문이나 시조, 편지 속에서 음식, 요리를 주제로 쓴 글을 찾아낸 뒤, 음식과 요리에 대해 분석하고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소개하는 구성입니다. "도문대작"을 쓴 허균이나 채소에 대한 시조를 남겼다는 목은 이색 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잘 모르는 조선 선비들이 음식에 대해 쓴 글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당대 식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게 좋았습니다. 또 귀양가서 쓴 글이 많다는게 이채롭더군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었습니다. 귀양가서 험한 음식을 먹다보니, 예전에 먹었던 맛난게 생각나 글로 남긴 경우도 있지만, 귀양가서 처음 보는 먹거리와 음식에 대해 글을 남긴 경우요. 전자의 경우는 허균, 후자의 경우는 조선 후기 김려의 글이 대표적입니다.

김려가 쓴 "우해이어보" 속 글들을 조금 더 살펴보자면, 김려가 현재 마산 지역인 '우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쓴 글로 당시 어떤 생선으로 어떻게 젓갈을 만들었는지 상세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최고의 젓갈이라는 감성돔을 비롯하여 볼락, 삼치에 붕장어까지 젓갈로 만들었다니 신기합니다. 당시 이런 물고기들이 많이 잡혔으며, 어민들도 판매를 위해 대량으로 젓갈을 담궈 시장에서 팔았다는걸 증명하기도 하고요. 꽤 거대했던 산업으로 짐작되는데, 지금은 그 전통이 많이 사라진듯 하여 무척 아쉽습니다. 함께 소개된 홍게로 만든 포는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이렇게 귀양지에서 처음 본 먹거리와 음식은 귀양지 특성 상 해산물이 많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귀양지에서 먹는 음식인데 등장하는건 지금은 쉽게 먹기 힘든 고급 재료들이더라고요. 과거 원나라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원나라에서는 비싸서 먹지도 못하는 전복 등을 일반 백성들이 쉽게 먹는걸 보고 놀랐다는데, 딱 그 심정입니다. 3면이 바다라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정조 때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이 남긴 글로는 당시 고추가 널리 전파되었다는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옥이 워낙 고추를 좋아해서 직접 심어 먹었을 뿐 아니라, 고추를 많이 먹으면 풍이 들거나 눈에 좋지 않다는 세간 속설을 반박하는 글까지 썼다니 고추 사랑이 정말 어지간했던것 같습니다. 인조 때 조극선이 남긴 글은 '연포회'라는 행사가 성행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연포회가 왜, 어떻게, 어디서 진행되었는지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기도 하고요. 연포회에서 먹었다는 두붓국 레시피도 꽤 자세합니다. 지금 만든다면 굴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육수에 연두부를 넣어 먹으면 비슷할거 같아요. 조극선은 닭고기를 써서 만든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만요. 음식을 먹을 때에도 선비다움을 유지하라는 '잔소리' 가득한 이덕무의 글은 꼬장꼬장했을 당시 선비들의 마음 속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고요.

잘 몰랐던 당대 요리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내용도 많습니다. 영조가 병을 다스리기 위해 자주 먹었다는 '이중탕'에 대한 소개가 특히 흥미로왔습니다. 재료는 인삼과 백출, 건강포, 감초인데 영조가 조선조 최대 수명을 자랑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저도 이제 중년을 넘어서는 나이이기도 하고요. 찍어 먹으면 맛있다는 감동적즙이 무엇인지도 소개해 줍니다. 감동즙은 젓갈의 일종으로 국물이 젓갈보다 넉넉하여 즙이라고 불렀으며, 김창업은 감동이 '자하젓'과 같다고 했다네요. 새우젓에 돼지고기를 찍어 먹는 현재 풍습과도 비슷한데, 역시 사람 입맛은 다 비슷한 법이겠지요?

현재도 재현 가능할 정도로 레시피 소개도 충실합니다. 목은 이색이 남긴 한시 "새벽에 한 수를 읊다" 를 볼까요? “기름에 두부를 튀겨 잘게 썰어서 국을 끓이고, 여기에 파를 넣어서 향기를보태네, 잘된 멥쌀밥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깨끗이 닦은 그릇들은 눈에 환히 빛나누나"로, 두부 요리 레시피가 아예 소개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쉬움과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허균과 "도문대작"은 이쪽 분야에서는 너무 많이 접한 소재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미식가를 꼽을 때 허균을 꼽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신선함이 떨어질 수 밖에 없지요. 몇 년 전에 읽었던 "조선의 탐식가"들과 내용면에서도 많이 겹칩니다. 세조 때 어의 전순의가 편찬한 요리책 "산가요록"이라던가, 사대부 가문 부인들이 가문의 레시피를 기록했던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는 취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선정이라 생각되고요. 도판도 그냥저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담고있는 내용은 가치있지만 단점도 있어서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여기 수록된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현재 네이버에서 공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책에 관심이 가시더라도 네이버를 통해 먼저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10/04

당일치기 조선여행 - 트래블레이블 : 별점 3점

당일치기 조선여행 - 6점
트래블레이블 지음, 이도남 감수/노트앤노트
딸과 함께 종로 투어를 할 때 도움이 될까 싶어 읽어본 책.
실제 가이드가 투어를 하듯이, 코스를 짜고 그 코스 안의 여러가지 사적지들에 대해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코스는 모두 14개인데 크게는 조선 코스 6개, 일제 강점기 코스 8개로 구분됩니다.

경복궁 코스는 광화문 - 홍례문 - 영제교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순입니다. 실제 궁궐에 들어가는 순서이지요. 광화문의 '광화'는 빛으로 세상을 교화시키다는 의미로 세종이 지은 이름입니다. 즉, 왕이 백성들에게 한 약속이지요. 홍례문은 '예를 널리 편다'는 의미로 대궐 문을 들어선 관료들에게 일러주는 말이고요. 홍례문을 지나 삼도를 거쳐 영제교를 건넙니다. 다리의 이름은 원래는 '금천교'였습니다. 왕이 있는 곳이라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의미로요. 하지만 세종은 영원히 건널 수 있다는 뜻의 '영제교'로 바꿨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왕의 공간입니다. 근정문과 근정전은 공식적인 행사를 치루는 곳입니다. 회사로 따지면 행사장, 회관같은 곳이겠지요?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고요. 사정전은 실제 업무를 보던 곳으로 한 마디로 사무실입니다. 이름도 그런 뜻이겠지요. 그리고 뒤의 강녕전, 교태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과 사적 공간입니다.
창덕궁 코스는 돈화문 - 금천교 - 인정문 - 인정전 - 선정전입니다.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이 만든 궁이라 강한 왕권이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금천교가 그대로 있는게 특이합니다. 말 그대로 왕과 신하를 구분한 것이지요.
창경궁 코스는 홍화문 - 옥천교 - 명정문, 명정전 - 문정전 - 경춘전 - 환경전이며, 뒤에 춘당지 - 대온실 로 이어집니다. 홍화문은 '천지를 밝히고 적의 조화를 넓혀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과거 홍화문 앞은 넓은 마당으로 백성과 왕실이 서로 어울리는 공간이기도 했고요. 다른 궁궐들처럼 궐내 다리인 옥천교를 건너면 왕의 공간으로, 명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입니다. 공식적인 의례와 행사를 진행한 곳이지요. 창경궁은 왕의 주거 공간 목적으로 지은 궐이라 다른 궐보다 규모가 작다는게 특징입니다. 다른 궐은 모두 삼문 원칙으로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지만, 정전까지의 문도 2개만 지나게 됩니다. 문정전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경춘전은 정조가 태어난 곳, 환경전은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이한 곳입니다. 주거 공간 목적답게 이런 역사가 많네요. 춘당지와 대온실은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며 위락시설로 전락시킨 산 증거입니다. 궁궐을 일반 대중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만든 것이지요.
경희궁 코스는 홍화문 - 서울고등학교 터 비석 - 방공호 - 서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희궁 자체가 고종 때 경복궁 증건을 위해 헐려 빈 터만 남은 탓에 내용이 적습니다. 이 중 '서암'이라는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왔습니다. 숙종이 강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조선 시대 왕 중 딱 7명만 가진 '적장자' 타이틀 덕분이었는데 이건 인조 반정이 성공해서 얻은 타이틀입니다. 인조가 정당한 왕이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원래부터 집에 왕기가 서려있었다!며 평범한 바위에 '왕의 기운이 어렸다'고 숙종이 직접 '서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타이틀이라는게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왕들에게는 정말로 어마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코스는 서암말고는 딱히 볼 건 없어보였습니다.
종묘 코스는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 종묘의 부속된 건물들을 차례대로 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부속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보다는 종묘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 위주이고요.

덕수궁 코스는 황궁우 - 대한문 - 중화문 - 중화전 - 석조전 - 중명전, 돈덕전 - 함녕전 순입니다. 이 코스는 '대한제국'과 '황제'라는 지위를 알리는 건물들 중심이에요. 덕수궁은 대한제국 때 고종이 법궁으로 선택하여 큰 발전을 이룬 궐이니까요. 우선 황궁우는 고종이 황제가 된 걸 알리는 건물이고, '대한문'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며 한양이 넓고 크게 뻗어나가기를 기원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중화전도 '황제'의 국가를 증명하기 위해 황금색과 황제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석조전은 황제가 된 고종이 새로운 근대 궁전을 만들려고 돌로 지은 건물이고요. 이 뒤의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나타냅니다. 석조전 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일제가 궁의 격을 낮춰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미술관으로 만들었던 건물이며, 그 옆의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 돈덕전은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곳이거든요.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급작스럽게 승하한 곳입니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짧았던 운명을 잘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정동은 궁궐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속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 미국공사관 - 구 프랑스공사관 - 구 러시아공사관 - 구 영국공사관 - 광혜원 - 배재학당 - 이화학당 - 언더우드 사택 -  정동제일교회 - 손탁 호텔을 둘러보게 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남아있는 건물은 몇 개 없네요. 그나마 주한 영국대사관이 1890년대 영국이 만들었던 구 영국 공사관 건물 그대로라는데, 한 번 가 봐야겠습니다.
서울역, 서대문 형무소는 건물만의 코스입니다. 서울역은 많이 가 보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장소는 기억에 없군요. 다음 기회에 한 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성북동은 혜화문 - 한양 도성 해화동 전시 안내 센터 - 최순우 고택 - 간송미술관 - 수연산방 - 심우장 순서입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간성미술관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다소 어려운 코스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3대 전통 정원이자 의친왕 이강이 죽기 전까지 머물던 것으로 유명한 성복동 별서는 한 번 가 보고 싶지만요.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 코스들과 정보들이 가득한데, 몇몇 코스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고궁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같이 특정 장소만을 중심으로 안내하는 코스가 특히 그러합니다. 종묘와 서울역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여러 명의 가이드가 글을 쓴 것 같은데, 사람에 따라 내용이 들쭉날쭉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어떤 코스는 구태여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는 애매해 보였기 때문에 코스들도 선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여행 코스라면 둘러보는데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정보는 꼭 들어갔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 궁궐에 대한 책은 몇 권 읽어 보았는데, 그 책과는 다르게 돌아볼 수 있는 코스 중심으로 설명하여 실제로 관람 시 도움이 됨직한 책이라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궁궐의 구성도 코스 중심이라 더 잘 알 수 있었고요.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번 둘러보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관심이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궁궐 관련 책을 읽는 순서로 읽어 나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6/08/10

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사건과 스캔들 - 전봉관 : 별점 4점

경성기담 - 8점
전봉관 지음/살림

 조선말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에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괴사건들을 모아서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역사와 추리를 모두 좋아하는 저로서는 흥미가 안갈래야 안갈 수 없는 책이었는데 마침 형이 구입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쌩유!)

책은 크게 2개의 주제로 나뉘어 구성되고 있는데 첫번째가 "1부 - 근대 조선을 뒤흔든 미스터리 살인사건"이고 두번째가 "2부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스캔들"입니다. 두가지 주제 모두 흥미롭고 제목만 보아도 읽고 싶어 지지만 역시 저같은 미스터리 팬에게는 첫번째 주제가 더 와 닿더군요.

1부에는 총 4개의 사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인 "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은 대낮 경성거리에서 발견된 아이 머리를 둘러싼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이고 두번째 사건"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은 안동에서 피살되어 발견된 일본인 순사 가와카미와 용의자로 붙잡힌 조선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세번째 사건은 "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으로 부산의 조선인 하녀 마리아가 주인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을 다루고 있고 네번째 사건은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으로 지금도 유명한 사교집단 백백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단순히 흥미거리위주로 수록된 사건들이라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역학관계를 논할만한 주제가 많아 의미 있는 선정이었다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의 용의자인 조선 청년들의 억울함과 "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다카하시 부인에 대한 수사와 처우, 처벌이 너무나 달라서 한번쯤 비교해 보며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거든요. 특히 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이끌어낸 순사 살해사건의 경우는 그 수사의 방법이 너무 원시적이고 황당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쩐지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기도 해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용의자 동생의 증언인 "형이 목을 졸라 죽이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봤지만 그 다음은 졸려서 잤기때문에 모른다"라는 증언은 폭소 그 자체였습니다. 조선 남아들은 형이 살인해도 졸리면 잔다는 이야긴지 원...

또한"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은 "문둥이가 아기 간을 먹으면 낫는다"라는 토속적인 주술적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역시 인상적이었고 법의학자로 경성제대 교수까지 등장하는 등 당시 수사 방식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자료적 가치도 상당합니다. 사건의 엽기성과 내용에서 최근 유명한 "프랑스 영아 유기 사건"을 떠올리게도 하더군요. (이 주술적 믿음을 소재로 퇴마록의 이우혁씨가 쓴 괜찮은 단편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1부의 마지막 사건인 백백교 사건은 다른 매체에서 많이 접해서 크게 새롭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역사적" 측면에서 선정한 것이겠죠? 이만한 대형 사건은 정말 드물테니 말이죠. 뭐 뻔한 내용이지만 그런대로 도판과 자세한 재판과정의 수록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2부는 "스캔들"이라는 주제를 다룬 만큼 내용적으로나 사건 측면으로나 1부에 비하면 아무래도 임팩트가 떨어지긴 하지만 역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전부 6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인 "중앙보육학교 박희도 교장의 여제자 정조유린 사건"은 3.1 운동때 민족대표 중 한명이었던 교육자 박희도의 여제자 성추행(?)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번째인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는 순종의 장인으로 매국노였던 윤택영 후작의 어마어마한 빚과 그 최후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고요. 세번째 "이인용 남작 집안 부부싸움"은 역시나 매국노였던 이인용 남작 부부의 재산을 둘러싼 의미없는, 허무한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도피행각"으로 조선 제일의 테너로 불렸다는 음악가 안기영 교수가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이야기, 다섯번째는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 사건"으로 당시 국내 제일의 신여성이었던 박인덕의 이혼에 관련된 이야기, 마지막 여섯번째는"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로 최영숙이라는 스웨덴 유학생의 비참한 최후를 서술한 내용입니다.

제가 제일 흥미롭게 읽은 것은 매국노들 대부분이 가산을 탕진하여 외려 총독부에 구걸(?)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두편의 이야기인 "채무왕 윤택영 후작" 이야기와 "이인용 남작 부부싸움" 이야기였습니다. 친일파들이 다 떵떵거리면서 한자리 차지하고 살아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부분 당대에 가산을 탕진했다는 통쾌한(!) 이야기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들끼리 싸우는 이야기도 신났고요. 특히 저자의 덧붙인 코멘트, 요사이 매국노들의 후손이 땅 반환 소송을 한다는데 과연 그들에게 남은 재산이 있었는지 부터 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가장 와 닿았습니다.

그 외의 남녀간의 문제를 다룬 이야기는 요사이 연예면에 나올만한 소재의 이야기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져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여성과 전형적 조선 남자와의 결혼이 "돈"에서 비롯되었다는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은 읽다보니 요사이 모 아나운서 결혼 이야기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마지막 이야기인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는 당시 조선에서의 여자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으로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지금 수준으로 보아도 5개국어에 능통한 수재 여성이 국내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콩나물 장사나 하다가 혼혈아를 낙태한 것 때문에 외려 탕녀 취급이나 받다니....저자가 하인스워드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과 같이 지금도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네요.

기획만으로도 무척 특이한 역사-인문 서적이지만 읽는 재미도 충분히 전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현재 30대 중반의 나이로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는 저자의 글 답게 고루한 역사관을 논하는 것이 아닌, 요사이의 시사적인 문제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새롭고 신선하면서도 재미난 내용이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거든요. 저 스스로도 반성하고 한번 생각해 볼만한 주제도 많았고요.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아울러 구상중인 일제 강점기 배경의 추리 소설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기쁨 두배였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단 가격이 12,000원이라는 것은 확실히 문제네요. 책의 내용은 재미있고 가치도 있지만 사진도 거의 없고 그다지 많은 분량의 이야기도 아닌데 솔직히 너무 비쌉니다! 한 8000원 정도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날 까지 팍팍 밀어줄만 한 책인데 가격이 좀 많이 걸리네요.

2013/10/14

조선 명수사관 다산 정약용 - 별점 1점

조선 명수사관 다산 정약용 - 2점
강영수 지음/로하스

정약용을 탐정으로 내세운 단편 옴니버스 구성의 역사 추리물.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죽은 자도 말한다.
  • 두 발로 선 꽃
  • 녹두패의 비밀
  • 약속
  • 강물 속에 숨다
  • 술 취한 새우
  • 세 개의 비방
  • 계책 속의 계책
  • 꿈길을 찾아온 노인
  • 저승에서 온 편지
  • 금서
  • 죽음을 부른 사랑의 시
  • 죽은 여인의 몸값
  • 괴이한 파자 법
  • 기이한 목걸이
  • 눈 위를 달리는 뱀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말 형편없더군요. 이런 책을 돈을 받고 판다는게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일단, 이야기들의 완성도가 낮아요. 기승전결이 없다시피한 뜬금없는 전개에 황당 결말로 일관한다던가, 아니면 아예 결말 자체가 없는 식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야기가 불륜이나 비전의 미약, 미향 등을 이용한 정사 등 얄팍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유치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만한 점도 없습니다. 양의 창자를 이용한 일종의 "콘돔"으로 아랫도리를 통해 여성을 독살시켰다는 이야기에서 콘돔에 남은 정액의 양을 증거로 들이대며 범인이 소갈증이라 정액 역시 그 양이 적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세원록"에 실린 '험적골친법'을 통해 해골 위에 친생자의 피를 떨어트리면 피가 뼛속으로 스며든다는 이론("저승에서 온 편지")이 핵심 증거로 등장하는 등 고증에 집착하여 설득력을 망각한 역사추리물 특유의 문제도 두드러지고요.

덧붙이자면, 주인공이 정약용이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정조의 은밀한 지시, 정약용의 신앙 등의 떡밥이 던져지는데 전혀 회수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그냥 역사추리물 유행에 편승한 싸구려 기획물일 뿐이지요. 솔직히 완성도만 놓고 보면 별점 한 개도 과합니다.

그러나 장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당시 시체 검안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괜찮았습니다. 갯버들 나무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으면 흔적이 짓무르고 색깔이 검게 변해 구타 흔적을 찾기 어려워진다, 화재 현장 검증을 위해 재를 쓴 뒤에 영초에 절인 종이를 깔아서 핏자국을 확인한다, 다른 상처들과 구분하기 위해 감초즙으로 시체를 닦는다, 시체 냄새를 막기 위해 진마유를 코 밑에 바른다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에 더해 몇몇 이야기의 경우 소재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첫 번째 이야기 "죽은 자도 말한다"는 불륜으로 인한 며느리의 자살 사건인 줄 알았던 사건이 사실은 시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른 것이라는 내용으로 반전이 제법 괜찮았고, "두 발로 선 꽃"에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중에서 한일자가 없는 것은 '묘'자 하나 뿐이라는 암호트릭도 꽤 그럴듯했어요. 이 암호트릭은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스쳐지나갈 뿐이지만요.
"꿈길을 찾아온 노인"에서 아들이 죽은 후, 아이 하나를 낳기 위해 며느리를 겁간하려 하는 시아버지라는 막장 설정은 후손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상과 결합되어 설득력있게 다가왔고요.

그래도 이 정도로 평가를 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에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만원이 넘는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완성도라면 구입할 가치는 전무합니다. "꿈길을 찾아온 노인"은 조금만 손을 대면 아주 괜찮은 작품이 될 수도 있어 보인 등, 가능성은 확인되기는 한 만큼 앞으로 많은 작가들에 의해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해 봅니다. 

2008/08/02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 이수광 : 별점 2점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 4점
이수광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제목 그대로 16건의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법의학, 수사기관 및 그 제도와 형벌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살인사건"에 따른 수사방법과 범인 색출이 등장하는 사건은 그다지 많지 않고, 권력형 비리 등이 더욱 많아서 좀 아쉽더군요. 사실 권력층이 노비를 살해한 것, 그리고 권력층 내부의 살인사건과 범죄는 당연하게도 별로 수사같은 것이 등장할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고 사건도 "상소" 를 통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크게 와 닿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또한 3부의 반군 소탕작전 챕터와 4부의 조선시대 강압수사 챕터는 제목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부분이라 왜 이 책에 포함됐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임꺽정 체포 작전이나 조선시대 검계 소탕작전은 살인사건으로 보기는 좀 무리잖아요? 강압수사 부분도 마찬가지고요.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목에 혹해서 산 저같은 독자는 완전히 낚였다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나마 제대로 된 사건 수사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정조때 있었다는 "평산 박소사 살인사건" 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이 사건은 자살로 위장된 사체를 무원록에 기반을 둔 세번의 검시 (삼검)을 통해 살인사건임을 밝히고 심문 등을 통해 증거 수집 및 동기를 확인한 사건으로 디테일한 시체의 검시 방법의 등장은 물론이고 수사 및 형벌에 대한 내용 및 당시 사회상 등도 잘 드러나 있으며 사건의 전개 자체도 굉장히 드라마틱 한 등 여러모로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16개의 토막 중 딱 하나가 마음에 들었을 뿐, 제목에서 기대한 것에 비하면 실망이 더 큰 책이었습니다. 아울러 추리작가이기도한 이수광씨가 저술하였는데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지나치게 문어체적인 느낌이 강하고 너무 설명이 부족해서 읽기도 힘들었고요. 빈말이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좀 어려네요.  별점은 2점만 주겠습니다.

2016/02/23

조선의 武와 전쟁 - 박금수 : 별점 1.5점

조선의 武와 전쟁 - 4점
박금수 지음/지식채널

조선의 무예에 대해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 EBS의 동명 다큐를 책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 주도의 편찬 사업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걸 소개해 주는 것에 그치거든요. 

물론 이러한 국가 주도에 의해 체계화된 무예에 대해서는 충실하게 전해주기는 합니다.

  1. 임진왜란 후 창설된 훈련도감에서 한교에 의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식 무예서 "무예제보" 편찬.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수록된 무예를 참고하여 만들어짐.
  2. 북방 기마병을 대처하기 위해 한교는 전투용 수레 전거를 활용하는 척계광의 "연병실기"를 응용하여 "연병지남" 편찬.
  3. 광해군 때 훈련도감에서 "무예제보번역속집" 출간.
  4. 사도세자의 지시로 "무예신보" 편찬.
  5. 정조 때 총 4권의 "무예도보통지" 편찬.

으로 구분되는 일련의 흐름과 십팔기에 해당하는 각종 무술들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이지만 짚어주는 덕분입니다. '십팔기'라는 용어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네요.

허나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보다는, 내용에서 살짝 소개된 본국검이나 신검 등 전통 무예에 대해 보다 심도 깊게 알려주는 책으로 생각했던 탓에 개인적으로 실망이 더 큽니다. 다큐가 존재한다는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부실한 도판 역시 마음에 들지 않고요. 아울러 모든 조선의 무예가 '십팔기'로 정리되었는데, 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에 제대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저자가 '십팔기'의 전수자인 탓에 펼치는 억지 논리라는 생각만 들었네요.

그나마 무예 관련 이야기는 괜찮다 치더라도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및 이후 서양 열강의 개항 압력과 군란 등에 대해 소개해 주는 분량이 많은건 정말 별로였어요. 내용도 부실하고 유사한 다른 서적, 예를 들자면 "조선 전쟁 생중계" 등과 비교해서 장점을 찾아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와 "무"는 '임진왜란 후 국가 주도로 체계화된 것' 외에는 별 상관이 없다는 점, 그리고 '무'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점도 문제입니다. 이 역시 저자가 무술인인 탓이 클 텐데 역사의 흐름을 '무'로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병자호란의 경우라면,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어도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겠죠. "겨울전쟁"의 핀란드처럼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얻을 수 있는 내용에 비해 과한 가격과 분량의 콘텐츠입니다. 그냥 다큐로 보는 게 훨씬 좋겠습니다.

2018/01/04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 - 황선도 : 별점 3점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 - 6점
황선도 지음/서해문집

2018년 첫 리뷰네요. 한국 어류학자 황선도가 한국 해산물에 대해 전문적 지식과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16종의 어패류 및 우리 바다 환경에 대한 글들이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관련된 도판도 충실합니다.

바다에 관련된 전문 지식의 양과 깊이가 실로 방대합니다. 그 중에서도 아무래도 제목과 연관된, "먹거리" 관련 이야기들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오분자기는 원래 지천에 널렸었고 국물 맛이 전복보다 좋아 해물 뚝배기에 많이 썼는데 지금은 씨가 말라버렸다는 이야기처럼요. 지금의 오분자기 뚝배기는 작은 전복을 쓴다는군요.
조선 정조 대 문인 이옥의 "백운필" '석화' 편에 "석화의 쓰임은 회가 최고이고, 무치는 것이 다음이고, 젓갈로 만드는 것이 그 다음이고, 죽을 만드는 것이 또 그 다음이고, 전을 만드는 것이 그 다음이고, 국으로 만드는 것이 제일 못하다"고 적혀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이 당시에는 튀김이 들어오기 전이었겠죠? 튀김이 있었다면 회하고 좋은 승부가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가 2박 3일 동안 사투를 벌여 잡은 물고기가 "대서양 녹새치"라는 주장도 재미있습니다. "맛의 달인"에서 새치를 주문한 이사무를 주위 사람들이 비웃는 에피소드도 떠오르네요. 새치가 "노인과 바다" 속 사투의 주인공이었다는 이야기를 이사무가 알았더라면 비웃던 사람들에게 "새치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가 2박 3일 동안 목숨을 걸고 잡은 물고기입니다. 여러분들도 문학의 향기를 좀 느껴 보시죠!"라고 한 방 날릴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이래서 공부를 해야 하나 봅니다.
참돔이 양식이 되는 탓에 양식이 안되는 감성돔이 고급 어종으로 부상했다는 등 좋아하고 즐겨 먹는 돔, 방어나 참치, 연어, 소라, 꼬막, 키조개 등 친숙한 해산물들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그리고 황폐화된 바다 자원을 재생하기 위한 노력 사례가 수록된 마지막 부분은 책의 화룡정점입니다. 남획 등으로 사막처럼 변한 마안도 재생을 위한 수중림 조성이 가장 돋보이는데,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위도와 마안도 등은 한 번 돌아보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저자의 전공 분야인 어패류 관련 지식 외의 각종 정보들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어원"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인상적입니다. "스키다시"의 어원은 "붙이다"라는 뜻의 일본어 스케루에서 온 것으로 우리말로는 "곁들이", 즉 사이드 디시를 의미한다, 중국의 '남삼여포'라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남자에게는 해삼, 여자에게는 전복이 좋다는 뜻이다, 멍게는 방언으로 원래 표준어는 "우렁쉥이" 였는데 방언이 더 널리 쓰이게 되어 표준어가 되었다, "진상"은 "진상품 부역"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던 과거에서 비롯된 말이다라는 것들입니다.
갯벌, 갯뻘, 개펄 중 뭐가 맞는 표현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줍니다. 개(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벌판이라는 뜻으로 "갯벌"이 맞으며 갯벌에 있는 흙이 "개펄" 이라고 하네요. 과학자도 글을 쓰려면 이 정도까지 공부하는구나 싶어서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료로 고증해 주는 우리 어패류에 관련 역사들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도루묵" 이야기에 나오는 왕은 선조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도루묵은 주로 강원도, 함경도, 경상북도 동해 북쪽 바다에서 잡히는데 선조는 임진강, 평양, 의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도루묵을 먹었을 가능성이 아주 낮기 때문이랍니다. 고려시대 왕들도 동해안 쪽으로 피난 간 왕이 없다니 과연 "도루 묵이라 불러라"고 한 왕은 누구였을까요? 궁금합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조선의 전복 진주가 명산품으로 소개된다는 이야기도 새로왔고요.

이렇게 재미도 있고, 담겨있는 정보도 충실한 좋은 인문학 서적입니다. 전문성을 찾기에는 조금 가벼운 에세이 느낌이 강하다는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저에게는 장점이 더 많았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역시, 믿고보는 서해문집이네요.

2021/07/30

영어 조선을 깨우다 1 - 김영철 : 별점 4점

영어 조선을 깨우다 1 - 8점 김영철 지음/일리

영어라는 외국어가 조선에 언제 처음 들어왔는지, 누가 영어를 가장 먼저 접했는지, 누가 영어를 처음 배웠고, 누가 영어를 처음 가르쳤는지, 조선에서 영어의 위치는 어땠는지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미시사 서적.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고 있으며, 내용은 모두 확실한 사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책은 조선에 처음 들어온 영어 사용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양선의 출현과 관련 사건을 거쳐 조일통상조약 뒤 미국과의 연합을 추진하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과정, 개화파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영어 학습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영어 학교가 설립되고, 영어가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한 시점까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우선 조선에 처음으로 나타난 영어 사용자는 영국함선 프로비던스호 선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정조 때 부산 동래 용당포 앞 바다에 나타났고, 배가 항구에 머무는 8일 동안 일반인들과 지방 관리들이 배에 올라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함장 브로튼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고요. 그 뒤 통상 등을 목적으로 여러 외국 배가 계속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 중 중국어 통역이 함께 한 배들이 등장해서 서로의 대화가 어느정도 가능해지고, 관련 기록도 풍성해지게 됩니다. 이 중 암허스트호의 린제이가 남긴 보고서에는 조선 관리들에게 스위트 와인과 독주 (Spirits)를 대접했는데, 관리들이 모두 독주를 선호했고 상당한 양을 마셨는데 멀쩡했다는 기록이 재미있네요. 아, 자랑스러운 조선 남아들이여!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그리고, 당시에 '영어'가 핵심 용어가 된 이유도 인상적입니다. 외국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출간된 관련 서적 들 중 가장 유명했던 "해국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미국이 부강하면서 공평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지금 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이 때 형성된거나 다름이 없는 셈입니다. 덕분에 고종과 개화파 역시 미국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요. 여기에 더해 조일통상조약 후 본격적으로 타 국가와의 외교가 시작되었을 때, 중국의 이홍장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할 수 있으니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맺으라고 권고했고, 청나라의 일본 공사 허루장도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 연합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호의를 가졌던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를 서둘렀고, 조미조약으로 미국 공사의 조선 주재, 보빙사 파견 등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더욱 상승했습니다. 고종은 미군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정도라니 말 다했지요. 그래서 결국 영어가 개화기 당시 조선에서 지배적 위치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영어 교육은 본격적으로 조약 체결을 하기 전, 정부 지원으로 중국에 유학생들이 파견된 것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이 중 가장 괄목할 성장을 보였던건 역관 가문의 고영철이었고, 귀국 후 영어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고 하네요. 이맘때 쯤 언어천재 윤치호도 등장하고요. 조미조약 체결 이후에는 당연히 영어 구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져서 조선 최초의 영어 학습기관 '동문학'이 만들어졌습니다. 교습법은 영어로 된 교재만 사용하여, 원어민이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직접교수법'이었다고 합니다. 원어민 선생들이 조선어를 할 수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죠. 그래도 덕분에 학생들의 영어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동문학 출신들은 조선 근대화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생도 남궁억이 남긴 기록에는 학생들이 가마를 타고 오고, 하인들이 요강과 학용품까지 들고 오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그려지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YMCA 야구단생각도 나고요. 

조선 내의 학습 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김옥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영어를 배웠다는데, 김옥균은 영어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는게 눈길을 끕니다.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랄까.... 세계 정세를 보는 시각만큼은 뚜렸했군요. 

동문학에 이어 본격적인 조선의 왕립 영어 학교였던 육영공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육영공원은 초반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였지만, 이미 벼슬이 있는 학생들이 태업해서 제대로 끝맺음을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관대작의 자제들인 탓이 가장 컸지요.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누리면서 포기하지 않으려는, 적폐들이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건 역시나 변함이 없군요. 이 육영공원 출신 적폐 무리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이 이완용이라는 점은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만들고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이 앞다투어 설립한 사학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제중원 알렌의 영어 교실에서 시작하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신, 배화 등이 설립되고, 운영된 과정을 알려주는데, 이 중 조선의 영어 학습열에 대한 아펜젤러의 판단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는 조선인들의 영어 공부 목적이 "출세" 라는걸 명확하게 알고 있더라고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당시 영어만 할 줄 알면 어떻게든 출세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걸 느끼게 해 주네요.

이러한 영어 교육의 시작과 여러가지 교육 기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 후기와 개화기 당시 있었던 주요 사건들과 영어를 배웠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 개화기에 밀사로 활약했던 조선의 괴승 이동인 이야기는 인상적이었어요. 개화파로 일본에 자주 방문했고, 나중에 조선 정부의 밀사가 되었지만 돌연 실종되었다는데, 정말 혼돈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간 것 같거든요.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이 '보빙사'로 조선 사람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여러 시찰 행적들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민영익이 입었던 화려했던 관복에 대한 묘사 - 자색 비단의 길고 넓은 겉 옷, 백설처럼 하얀 바지, 황금으로 기이하게 아로새긴 넓적한 허리띠, 가슴과 배에는 자두 빛 바탕에 희게 수놓은 쌍학과 가장자리에는 여러가지 화려하게 빛나는 포목 - 가 기억에 남습니다. 조선이 이렇게나 화려했었나요? 새삼 놀랐네요. 하지만 보빙사였던 민영익이 나중에 망명 후 공금을 착복하여 상하이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 천수를 다했다는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개인이 뭘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고는 해도, 일국을 대표했던 영관급 인물이 고작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은 아쉬움이 큽니다. 앞서의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적폐는 확실히 처단했었어야 했어요.

이렇게 '영어'라는 소재로 조선 후기, 개화기 당시 근대사를 돌아보는 독특한 시각도 좋았고, 여러가지 새롭게 알게된 사실도 많아서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어요. 언급된 내용들의 출처도 확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비슷한 소재였던 "외국어 전파담"과는 다르게, 조선 근대사와 영어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이해도를 높이는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지나치게 '영어' 중심이라는건 약점이기도 합니다. 이 책만 읽으면 조선 후기와 개화기 당시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외교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거든요. 우리나라에 미국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요. 도판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빨리 2권도 읽어봐야겠네요.

2009/02/18

화형법정 경성버젼 시놉시스

엊그제 읽은 화형법정의 경성 버젼을 업그레이드 해서 몇줄 적어보았습니다. 트릭같은것은 대충 구상이 끝났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뭐 이런 번안 소설이 지금와서 먹히진 않을테니.. 그냥 재미 삼아 쓴 것이니 만큼 가볍게 읽어 주세요. 일단은 전반부만 작성되었습니다.

** 주요 등장인물 소개 **
이완두 - 에드워드 스티븐스 : 경성의 모 일보 기자.
마리아 - 마리 도브리 : 이완두의 아내
다구치 - 마크 데스파드 : 이완두 옆집에 사는 지인. 조선 총독부 관리.
배동천 - 파딩턴 : 다구치의 오래된 친구로 전직 의사.
현씨 노인 (현씨 아범) - 헨더슨 노인 : 다구치 집안 고용인
고구수 - 고던 클로스 : 유명 작가.

** 전반부 줄거리 **

조선인으로 동경제국대학 유학 후 경성에서 신문기자를 업으로 먹고 사는 "이완두"는 유학시절에 만나 교제 후 결혼한 미모의 신여성 아내 마리아가 자랑거리이다. 별다른 사건 없이 평탄하고 무난한 나날이 이어지던 중, 완두는 신문사에 새로 연재하게 된 유명 작가 "고구수"의 최신작인 "전설 열전" 이라는 원고를 주말에 집에서 읽기 위해 가져가던 중 우연찮게 전차에서 정조시절 저잣거리에서 유명했던 무당이자 저주에 능했다는 한 여인에 대해 쓴 원고를 읽다가 그 여인의 설명에서 자신의 아내와 굉장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또한 사실상 아내의 과거라던가 고향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집에 도착한 뒤 아내에게 몇가지 물어보려 하지만 갑작스럽게 옆집 사는 일본인 "다구치"의 방문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만다.

큰 교제는 없었지만 제국 대학 동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몇번의 왕래가 있었던 다구치는 조선 총독부 식산과에 근무하는 관리로 얼마전 같이 살던 백부가 사망한 것 때문에 문상도 갔었던 터. 다구치는 자신의 친구라는 전직 의사 "배동천"과 함께 완두를 방문한 뒤 비밀스럽게 방문 목적을 털어놓는다. 방문 목적은 백부가 사실은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깊어져서 이문리 묘지에 매장된 백부의 묘를 몰래 파내는 일을 도와달라는 것. 물론 전직 의사 배동천이 시신을 검시하여 독살에 대한 확증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독살에 대한 의심은 백부가 사망하던 날 우연찮게 백부의방 옆에서 라디오를 듣던 고용인 현씨어멈이 무당같이 보이는 행색의 여인이 독이 든 음료수를 전해주고 유령처럼 사라졌다고 말한 것과 실제로 독이 든 음료수잔이 백부의 방에서 발견된 것 때문이었다.

그다지 멀지 않지만 한밤중에 몰래, 소문이 나지 않게 빨리 파내기 위하여 다구치의 고용인인 현씨 어멈의 남편이기도 한 현씨 노인까지 4명의 일행은 곧바로 묘역에 도착하여 묘 발굴에 착수한다. 그러나... 발굴된 관에는 시체가 없었다! 다구치는 당시 상여꾼으로 직접 참여했었기에 시체가 확실히 매장때까지 관에 들어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시체가 없는 것에는 도리가 없는 상태. 어쩔 수 없이 일행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는 다구치가 한밤중의 발굴을 숨기기 위해 여행보냈던 다구치의 아내와 여동생이 백부가 독살되었다는, 레이시치 경부가 보냈다는 의문의 전보를 받고 이미 돌아와 있는 상태.

다음날 여러가지 사건과 분위기 탓에 잠을 설친 이완두 앞에 다구치 백부의 고용 간호사와 다구치의 동생 오구리가 나타나고 뒤이어 실제 레이시치 경부 본인이 등장하는데....

2011/12/03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 한국인이 즐겨먹는 거리음식의 역사 - 윤덕노 : 별점 2점

제목과 책 소개만 보면 우리나라의 분식이나 거리 음식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소개를 하는 책으로 생각되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빵과 과자는 물론 해산물과 주식까지 망라하는 포괄적인 음식 칼럼이었습니다.

물론 주제가 많고 방대한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제에 명백하게 '한국인이 즐겨먹는 거리 음식의 역사'라고 적어 놓고, 정작 내용에는 땅콩버터, 오징어 먹물이나 빠에야, 리조또, 꾸스꾸스, 타타르 스테이크 등을 소개하는건 명백하게 독자를 기만한 것이지요. 또한, 각 주제별로 다루는 내용도 딱히 깊이가 없고 단지 유래만 다루거나,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만 곁들여 소개하는 수준이라 얄팍합니다. 단팥빵이나 카스텔라, 단무지, 오뎅처럼 간단하게 인터넷을 검색해도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구태여 소개하는 것도 페이지 낭비고요. 이럴 바에야 그냥 우리나라 거리 음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음식과 관련된 사회적인 분위기와 현상까지 포괄적으로 묶어서 깊이 있게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돈가스의 탄생"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워낙에 방대하고 저자의 아시아 쪽 자료 조사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생각과는 다르게 건질 만한 자료도 다수 있기는 합니다. 붕어빵의 원조는 1909년 도쿄 아사부의 나니와가 제과점의 도미빵 (다이야끼)이고, 도미빵의 꼬리에 팥을 넣는 것이 좋은지 아닌 것이 좋은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져 1953년 요미우리 신문에서 지상 중계까지 했다는 일화(결론은 꼬리에는 팥을 넣지 말자는 쪽이었다고 합니다. 손가락으로 집어먹기에 좋도록, 또 입가심하기에 좋도록) 등은 흥미로왔습니다. 또한, 소보로빵과 메론빵이 사실 같은 것이며, 메론빵은 1932년 일본 특허청에 실용신안이 등록된 아이디어 상품이었다는 점도 재미있었어요.

엿을 소개하면서 조선에 엿장수가 굉장히 많았었다는 점, 그리고 정조 21년 황해도 황주에서 신착실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엿장수 박형대의 엿을 빼앗아 먹고, 엿장수가 엿값으로 두 푼을 달라고 하자 엿장수를 땅에 밀어 넘어뜨렸는데, 하필이면 지게의 뾰족한 부분에 넘어지면서 항문에 지게가 꽂혀 사망한 사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점도 기억에 남네요.

또한, 문어는 중국 북쪽 지방에서는 잘 먹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어려움에 처한 조선에 파병 온 이여송을 접대하기 위해 정성껏 문어국을 내어놓았다가 명나라 장수들이 먹지 않아서 낭패를 보았고, 반대로 선조에게 명나라 장수가 "계두"를 바쳐서 선조가 당황했다는 고사도 소개됩니다. (계두는 계수나무속에서 자라는 벌레로, 한나라 역사서인 한서 남월전을 보면 남월의 왕이 중국에 공물을 바치면서 비취 40쌍, 공작새 두 쌍을 보낼 때 계두는 한 그릇만 바칠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음식에 대한 잡학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저는 제목과 책 소개에서 좀 더 깊이 있는 자료를 접하리라 기대가 컸고, 제 기준으로 이러한 책에 반드시 소개되어야 할 거리 음식 – 닭꼬치, 번데기, 튀김 – 도 빠져 있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6/02/03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 - 윤덕노 : 별점 2.5점

윤덕노 씨의 음식 문화사 책으로 저자의 구작들과 비교해 볼 때 보다 역사에 기반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사료들을 통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일단, 저자의 박식함에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네요. "주례"와 같이 유명 서적도 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다양한 책들, 예를 들면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는 임유원의 "임하필기" 등을 인용하는 식이니까요. 우리나라와 중국 고문서 중 음식 관련 이야기만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저자만의 DB가 있는 것일까요? 여튼, 덕분에 자료적인 가치는 빼어납니다.

하지만 저자의 구작들 대비 재미는 조금 처집니다. 이야기가 딱딱하고 그냥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인 탓입니다. 이전 저서들은 음식 관련 '잡학'에 가까웠다면 이 책은 '미시사' 서적에 가깝다는 형식적인 부분도 지루함에 한 몫하고요.

게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한성 김치 광고는 정말 깼습니다. 돈 주고 산 독자를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이게 한두 푼짜리 책도 아니고 왜 독자가 광고지가 포함된 책을 돈 주고 사서 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비록 한 장밖에는 안 되지만 충분히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조금 더 사료적인 것을 보강하던가, 아니면 단순히 사료 기반이 아니라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추가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덧붙여, 무려 100개나 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기에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를 요약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몇 가지 기억에 남는건 아래와 같습니다.

배춧국. 북촌 양반의 가을 별미

예전 무교동의 배춧국은 청진동 선짓국 못지않게 서울의 한량들에게 해장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중 유명했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나온 "해동죽지"라는 책에서 조선 팔도의 별미 중 하나로 꼽은 효종갱이라는 배춧국이다. 지금은 낯선 이름이 된 이 배춧국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아랫마을에서 하루 종일 배춧국을 끓여 항아리에 담아서 밤새 한양으로 올려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무렵 북촌의 양반집에 도착하였다고 해서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라는 뜻의 효종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동죽지"에 있는 설명대로의 재료와 레시피는 '배추속대인 노란 고갱이를 주재료로 콩나물, 송이버섯, 표고버섯, 소갈비, 양지머리, 해삼과 전복을 넣고 토장을 풀어 하루 종일 끓인다.'

보신탕. 한국인은 왜 보신탕을 먹을까?

가장 큰 이유는 고대에는 개고기가 좋은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왕과 귀족의 어록을 모아 놓은 "국어"에 따르면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에 복수하려고 군사력을 키우면서 백성들에게 출산을 장려하였다. 남자아이는 술 두 병에 개고기를, 여자아이는 술 두 병에 돼지고기를 출산 장려금으로 지급하였다. 돼지고기보다 개고기를 더 귀하게 여겼다는 증거이다. 주나라 때 예법을 적은 "주례"에도 개고기가 말, 소, 양, 돼지, 닭과 함께 제왕이 먹는 여섯 가지 고기 중의 하나로 포함돼 있다.

생태찌개. 장작더미보다 흔했던 명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임유원의 "임하필기"라는 문집에는 "함경도 원산을 지나다 명태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한강에 땔나무를 쌓아놓은 것처럼 많아서 그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고 적었다. 허나 지금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예전처럼 찾아보기는 어렵다. 마침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민정중이라는 사람이 "지금은 명태가 땔나무처럼 많지만 300년 후에는 이 생선이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정중은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인물로 1692년에 사망했으니 그의 예언이 맞은 셈. 신기하다.

준치. 준치를 맛보면 다른 생선은 모두 가짜

"썩어도 준치"의 준치. 준치의 한자 이름은 여럿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진짜 생선이라는 뜻의 "진어"로 맛으로 보면 준치만이 진짜 생선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름은 물고기 어 변에 때 시자를 쓰는 "시어"로 제철이 명확하기 때문에 생긴 이름. 맛이 좋은 데다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생선이니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시어를 고대의 산해진미인 팔진미 중 하나로 꼽았다. 산해진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흔히 곰 발바닥, 낙타 등, 사슴 꼬리, 바다제비 집, 상어 지느러미, 시어를 꼽았다.

중국에서는 시어를 미녀에 빗대어 비유하기도 했다. 중국의 4대 미인은 양귀비, 서시, 초선, 왕소군을 꼽는데 시어는 바로 "물속의 서시"라고 한 것. 생김새가 아닌 맛을 기준으로 꼽은 것인데 황하에서 잡히는 잉어, 이수의 방어, 송강의 농어, 그리고 양자강의 시어다. 중국에서는 양자강의 시어를 최고라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강의 시어를 가장 맛있다고 했다.

농어회. 역사상 가장 맛있는 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생선은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통틀어 볼 때 아마 농어일 듯. 고향의 농어회가 먹고 싶다며 높은 벼슬마저 팽개치고 낙향을 한 사람 - 4세기 무렵 중국 진나라의 재상이던 장한 - 이 있는가 하면 온갖 진수성찬에 입맛이 길들여진 황제마저 농어를 먹고는 맛있다며 젓가락을 놓지 못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금제옥회. 수나라 양제가 순시 여행 중 쑤저우 근처에서 먹은 요리. 금처럼 빛나는 양념장인 금제와 회로 뜬 농어의 살이 옥처럼 하얗다고 해서 옥회라고 부른 것에서 생긴 이름이다. 사실 수양제가 맛보기 이전부터 있던 요리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서인 "제민요술"에 금제라는 양념장을 만드는 법이 실려 있다.

금제는 여덟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에서 팔화제라고도 하는데 마늘과 생강, 소금, 좁쌀, 멥쌀, 소금에 절인 백매(白梅)를 귤껍질과 함께 장에 버무려 만든다. 횟감이 없으면 쏘가리로 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파김치. 왜 하필 '파김치가 됐다'고 했을까?

싱싱한 파는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고 다듬어 놓아도 빳빳한데 김치가 되면 축 늘어지기 때문. 고문헌을 찾아보면 늦어도 18세기에는 '파김치가 됐다'는 표현이 보인다.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피곤한 모습을 파김치에 빗대어 묘사한 표현이 보인다. 18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권상하의 문집 "한수재집"에도 파김치라는 표현이 수록되어 있다.

오이. 과년한 딸과 오이의 상관관계

'과년한 딸자식이 있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과過년'으로 나이가 들어 혼기를 놓쳤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과년(瓜年)한 딸'로 한창 나이, 결혼 적령기의 딸이라는 뜻이다. 과는 오이라는 한자인데 오이와 여자 나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과년을 결혼 적령기라고 한 것일까?

오이 '과'라는 한자의 가운데를 칼로 자르듯 반을 자르면 팔(八)과 팔(八)로 나누어진다. 여덟이 둘이니 더하면 열여섯이다. 그러니까 이팔청춘 열여섯 살이 바로 과년이다. 성춘향이 이도령과 사랑을 속삭인 때와 동일하다.

2021/05/22

밤과 낮 사이 1 - 마이클 코넬리 외 / 이지연 : 별점 2.5점

밤과 낮 사이 1 - 6점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자음과모음(이룸)

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단편 컬렉션이라는 책입니다. 장르 문학 단편을 좋아하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볼륨은 풍성합니다. 무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열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 추리물, 범죄물, 스릴러, 액션물에 섬찟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묘한 맛' 계열 등 수록 장르도 다양한 덕분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 마이클 코넬리와 같은 유명 작가들 작품이 수록된 것도 반가웠고요.

하지만 워낙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별 편차가 큽니다. 첫 수록작인 "그들 욕망의 도구"처럼 좋은 작품도 있지만, 뻔한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다던가, 심리 묘사에 치중할 뿐,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등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앤솔러지인데 선정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하여 출간한 것일까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대략 2.5점입니다. 1권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볼륨을 자랑하는 2권도 있는데, 읽어볼지 말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욕망의 도구" 

'나'는 죽기 전, 짐 오빠를 만나 그가 로니 언니를 이용했던 70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1931년, 아버지 가출 후 어려워진 가족을 위해 짐 오빠가 로니 언니에게 몸을 팔게 했었던 사건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몸을 팔았던건 로니 언니가 아니라 짐 오빠 자신이었다는 충격적 반전까지 완벽했던 단편입니다. 탁월환 회상과 심리 묘사는 독자를 반전으로 이끄는 선입견을 잘 쌓아 올려주고요. 

아빠 실종에 관련된 설정은 지금 읽기에는 뻔하고, 짐 오빠의 고백 후 결말까지가 조금 늘어지는 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단편의 맛을 잘 살린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밤과 낮 사이" 

표제작. 주인공이 겨우 열기구에 매달려 있고, 두 명이 열기구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첫 장면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열기구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결국 열기구 속 아이를 잃게 된 아버지이자 살인 강도인 브래들리가 주인공에게 복수심을 품고 습격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탈옥해서 주인공을 습격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 작위적이라는건 단접입니다. “전적이 있는 은행 강도로 풀려난 지 고작 이삼 일 만에 기구를 탈취해서 도와주려던 착한 이웃을 죽게 만든 놈인데, 그래 그놈을 튀게 놔뒀다고요?”라는 주인공 말 처럼 쉽게 이루어진 브래들리의 탈옥, 브래들리가 탈옥 후 주인공 집을 바로 찾아와 주인공을 납치한 것, 마지막 죽기 일보 직전에 사라진 열기구를 발견하는 것 등 모두가 말이지요. 주인공이 브래들리가 3만달러라는 돈을 숨겨놓았을 코인 락커 열쇠를 강탈한 뒤 죽게 만든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주인공의 뉴요커 스타일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이라면, 주인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게 나았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인공이 3만 달러를 거의 손에 넣었지만, 로키 산맥 끝자락까지 몰고 왔던 머스탱이 고장나서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쇼트쇼트스러운 결말로 마무리하던가요.

그래도 도입부만큼은 역대급이며 스릴과 서스펜스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환상특급"같은 TV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책 제본가의 도제" 

베네치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미국인 졸리 매독스는 부유한 괴짜 노인 샌본과 친해진다. 그는 졸리와 여자 친구 루치아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데....

굉장히 뻔했던 작품입니다. 제목과 책 제본에 대한 장인 정신 가득한 묘사, 희귀 서적 수집가와 책 제본가가 루치아의 피부 문신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에서 결말이 쉽게 예상된 탓입니다. 마지막에 졸리가 받은 선물이 인피로 제본된 책이라는것 역시도 뻔했고요. 

샌본과 제본가 주치니가 인피 제본 책을 졸리에게 선물할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졸리가 책 제본에 매력을 느껴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할 거라는걸 알려줄만한 단서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편의적인 전개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다른 재미도 느끼기 힘들어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차라리 졸리는 사실상 이용가치가 없고 루치아의 인피만 중요한 상황인 것 처럼 끌고 가서 결국 졸리가 체포되도록 만드는 결말이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졸리의 여자친구 사체 (머리?)를 여행가방에 몰래 넣어 두는 식으로요.

"스킨헤드 센트럴" 

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뒤 시골 마을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스킨헤드 머리를 한 데일에게 집안 일을 시킨 뒤, 짐 아내의 패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일의 동생 제이슨이 패물을 돌려주는데...

가정 폭력에 따른 범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야기가 명쾌하지 못해요. 동생 제이슨을 폭행한건 형 데일인지? 그렇다면 형 데일을 폭행해서 사과하게 만든건 그 아버지인지? 짐 부부 집에 데일이 불을 지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또 형제의 아버지가 폭력 성향을 간직한채 10여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데일이 저지른 범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데일은 절도를 저질렀고, 이는 맞아도 싼 짓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아이를 매질했다고 짐이 이야기하는건, 그 아버지 말대로 오지랖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에 집에 불을 지른 데일을 육군 훈련소에 보내는 결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당연히 경찰을 불렀어야 했습니다. 방화는 굉장한 중범죄니까요. 이미 성인이 된 데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비교적 길게 설명되는 짐 부부 아들이 죽은 비참한 사고도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데일 가족 이야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데일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이 역시 오지랖이죠.

좀 있어보이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지만, 알맹이는 그닥인 모래성같은 이야기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 

늙은 노파가 온갖 사람들에게 심술궂은 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다는 설정은 고전 영국 추리 소설에 등장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속에서 이런 편지는 은근한 협박이나 스캔들 폭로였던 반면, 이 작품 속 생크스 여사의 편지는 훨씬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이 은근한 심리 서스펜스라면, 이 작품은 현대물답게 스플래터 하드고어물인 셈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 상황 묘사와 엮어서, 독자에게 이 노파는 죽어도 싸다는걸 확실히 알려주거든요.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교사 시절 학생의 게이 성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었어요. 진작에 살해당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에 생크스 여사가 살해되지만, 동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아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끔찍한 범행'과 '처단' 자체의 자극적 쾌감에 비해 이야기가 평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란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첫 남편" 

잘 나가던 변호사 리오나드가 아내의 첫 남편 사진을 발견한 뒤, 자격지심과 질투로 오해를 만들고, 결국 첫 남편 야드만을 죽인다는 범죄극입니다. 비교적 분량이 긴데, 리오나드가 붕괴해가는 심리 묘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긴 만큼 디테일한 묘사는 좋지만, 전개는 평이합니다. 리오나드가 야드만을 죽인다는 결말은 뻔했고요. 아내 발레리도 죽였을 거라는 암시가 살짝 등장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야드만을 죽인 뒤, 그의 렌트카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차안에 있던 야드만의 애견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거나 범행이 드러난다는 결말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도 개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차량이 있었다는 작위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길이만큼 좋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운이 좋아" 

텔레파시 능력자 수키 스택하우스와 마녀 아멜리아 브로드웨이에게 보험 사업을 하는 그레그가 사건을 의뢰했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서류철을 뒤졌는데,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는 의뢰였다.

텔레파시 능력자, 마녀, 뱀파이어, 마술사 등이 나오는 판타지 범죄물로 그레그의 경쟁 업자 중 한명이 그레그의 비정상적인 행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수키 스택하우스가 더듬어 밝혀내는 과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동으로 뒤섞인 상황에 대한 정리도 깔끔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며, 판타지적인 설정과 능력들을 조사 과정과 이야기에 잘 써먹고 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화스러운 설정만큼이나 만화스러운 전개는 아쉽습니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게 많아요. 그레그가 주변 행운을 빨아들여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거야말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충분한 설정인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버지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단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벌어졌던, 더운 날씨에 차 안에 방치되어 사망한 아이 사건이 그려집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게 진상인데, 아내와 남편을 분리시킨 뒤 심문하여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 묘사가 빼어납니다. 아내가 먼저 자백했다며 자백을 유도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이고요. 또 그냥 심증이 아니라 '이미 그만 둔 보모를 재 고용하는 광고를 내지 않은 점' 에 착안하여, 어차피 아이가 죽을걸 예상했다는 추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부모 시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의 동기가 치열하게 드러나지 않는 탓에, 드라마의 깊이가 부족했어요. 전개와 결말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경찰 수사물로는 기본은 하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저명한 해리 보슈 시리즈다웠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개 산책 시키기" 

토론토에 사는 부유한 미시 로라 프랜시스는 개 산책 중에 단역 배우 레이를 만난 뒤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레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남편 로이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정부에게 남편 살인 청부를 맡기지만, 남편이 선수쳐서 정부는 죽고, 선수친 남편도 정부가 의뢰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왔던 -헨리 슬레셔였던가요? - 뻔하디 뻔한 내용이라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로라와 레이가 벌이는 질퍽한 정사 장면 묘사는 그나마의 수준을 더 낮고 저렴하게 보이게 만들고요. 이럴 바에야 뻔해서 짝퉁스러운 반전을 끼워넣지 말고, 포르노에 가까운 싸구려 펄프 픽션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볼 만한 부분이 있었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모자족인" 

부유한 의료기기 사업가 제더버그 마틴이 살해당했다. 스무살이나 어린 젊은 아내 나네트는 정체불명의 거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언니의 전 남자 친구인 카일 헤이에스 형사 밑에서 일하게 된 감식관 테스 캐시디가 주인공인 작품. 

단서, 증거, 동기 모두 애매하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입니다. 테스 캐시디가 몇 가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 귀납법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두가지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불을 두려워했으며, 친아들이 반대하는데도 나네트가 화장을 고집한 이유가 첫 번째, 흉기인 도끼에 찍힌 커다란 엄지손가락 지문이 두 번째입니다. 테스는 도끼에 찍힌 엄지손가락 지문은 고인의 엄지발가락 지문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 것으로 추리합니다.

이 엄지발가락 지문에 대한 추리를 우연히 테스가 알게 된 '모자족인' - 아이가 바뀌는걸 방지하기 위해 엄마의 손가락 지문과 어린아이의 엄지발가락 지문을 찍는것 - 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법의학으로 발가락과 손가락 구분이 불가능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구분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동기가 있는건 나네트와 아들 스티븐 뿐이니 어떤 식으로든 범행은 드러났을테고요. 이런 점에서 현대물보다는 근대물에 더 적합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아울러 테스와 상관과의 관계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뱁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뒷골목 싸구려 범죄극. 주인공이 스트리퍼 뱁스와 함께 마약 전달책을 찾아가 마약을 강탈해오는게 전부입니다.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특기할 만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주인공이 때때로 '십자가'를 본다던가, 대학교를 나왔다던가 하는 기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잠" 

묘지 관리인 그레이브 디거는 과거 마크 틴들이라는 과거 용병이었다. 실수로 포로가 되었었지만, 상관 월터 잭슨의 희생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지에 월터의 시신이 매장되게 되는데, 얼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시신을 모욕하자 그는 용병 마크 틴들로 돌아간다....

그레이브 디거가 용병으로 돌아온다는, 영화로 따지면 캐릭터 탄생을 알리는 도입부 격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각성은 조각내버렸다는 한 마디로 끝이고요. "존 윅"에 빗대어 보면, 자동차와 개의 복수는 하지도 않고, 다시 킬러로 각성해서 집에 쳐들어온 마피아 조직원을 죽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즐거운 응원단" 

고등학교 응원단에 미모의 호랑이 코치가 부임했다. 그녀는 단원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는데, 단원 중 3명은 그녀가 스터드 하사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했다. 코치는 그녀들을 꼬드겨 친해지지만, 3명 중 한 명인 베스의 도발로 결국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치가 불륜을 저지른 뒤 아이들을 입막음 시키려고 억지로 친한척을 한건 알겠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인 베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그녀를 견제한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코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륜남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다? 한국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남 스터드의 친구 프라인이 베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말도 뭔가 싶어요. 죽인 것도 아니고, 설령 이 자리에서는 죽였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게 뻔하잖아요? 볼짱 다 본 막장 인생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되지 않고 답없는 전개와 결말을 그려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로" 

3인조 은행 강도인 잭 일당은 서부 텍사스 일대를 떠돌다가, 교차로에 있는 작고 낡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더브와 로이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둘은 충동적으로 가게 주인인 노부부를 살해한다. 둘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목 잭의 분노가 두려워, 잭에게도 총격을 가하는데....

서부 텍사스의 황량한 묘사, 그리고 작은 가게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묘사가 볼 만했던 범죄 액션극. 가게를 찾은 꼬마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잭이 기사회생하고, 꼬마가 잭의 새로운 동료가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주어진 암시와 내용을 보면 잭은 악마이고, 나이가 들어 쓸모없어진 인간 부하들을 때때로 교체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액션 장면만으로도 별점 2점은 충분합니다.

"악마의 땅" 

소몰이꾼 출신으로 서던퍼시픽 철도탐정으로 일했지만 해고당한 형제는, 핑커튼 탐정사 취직을 위해 바바리 해안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형은 사람을 관찰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셜록 홈즈같은 취미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 메그가 둘에게 수상쩍은 일자리를 제안했다. 구스타프는 동생에게 일행인걸 들키지 말자고 말했고, 찾아간 술집에서 갑작스럽게 구스타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에 대해 기묘한 독촉을 하는 편지에서 시작해서, 편지를 쓴 사람이 형 구스타프와 겪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작품.

사람이 술집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본격물로 셜록 홈즈만큼 똑똑하다는 구스타프 형이 아니라, 힘쓰는 쪽인 동생이 추리를 하는 탐정과 이야기를 하는 화자 역할인 왓슨, 그리고 액션 담당인 브라운 신부의 동료 프랑보우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경구를 떠올리며 추리하는 과정은 홈즈 팬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술집에서 급작스럽게 피아노를 친 이유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이며, 좌, 우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위나 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추리하는 식입니다. 결국 동생은 바닥에 문이 있다는걸 알아내고 형을 구해내게 되지요. 

또 소몰이꾼 1인칭 시점의 말투로 전개하는 묘사, 특히나 중간중간 삽입된 소몰이꾼 감성 유머가 아주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근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 무식한 막노동꾼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탐정 피트 모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닥의 문은 셜록 홈즈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메그의 술집에서 벌어진 다툼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감점 요소이지만, 장점이 명확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구스타프 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킴 노박 효과" 

제목은 주인공이 벌이는 사기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애착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돈을 울궈내는 사기지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 역할에서 따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

주인공의 킴 노박 효과 사기 생각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정조역전세계처럼 나이든 과부들에게 킴 노박 효과를 일으키며 돈을 빼 먹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이게 바로 남녀평등이겠죠. 질퍽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된 범죄와 심리 묘사도 볼거리였습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교님'에게 사로잡힌 주인공이 빠져나온 뒤, 남창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은 설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완벽한 범죄자였던 주인공을 몰락시키려면,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쉽게 약점을 잡혀버려서 인생이 막장에 몰려 버린다면, 앞서 대단해 보였던 사기와 범죄 행각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 작품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버리고 마니까요.

주인공과 성형외과 의사, 킴 노박 효과를 일으켰던 배우, 피해자 등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괜히 복잡하게 보일 뿐, 이야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킴 노박 효과도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랑했던 애인이나 전처, 혹은 영화배우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게 과연 사기일까요? '그 사람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건 당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거짓말로 돈을 울궈내는건 사기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추억에 대한 댓가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들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은 단편에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훨씬 길고 정교한 작품으로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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