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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세기의 재판 이야기 - 장보람 : 별점 2.5점


딸아이 논술용 교재인 청소년용 법 관련 미시사 서적. 제목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12개의 재판에 대해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재판 및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크라테스의 재판 : 다수결이 과연 옳은 것인지?
  2. 토머스 모어의 재판 : 현행 법과 어긋나더라도, 옳은 양심을 처벌할 수 있는가?
  3. 세일럼 마녀 재판 : 제대로 된 근거 없이 타인을 비방하는 것에 대한 문제
  4. 드레퓌스 재판 : 억울한 상황에서는 여론의 힘도 중요하다
  5. 2차 대전 전범 재판 : 전쟁에서 일어났던 범죄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벌해야 하는가?
  6. 로자 파크스 재판 : 인종 차별 악법 없애기
  7. 미란다 재판 : 법에서는 결과 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
  8. 제인 로 재판 :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9. 워터게이트 재판 : 대통령도 탄핵될 수 있다
  10. 카렌 앤 퀸란 재판 :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11.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 : 부도덕한 기업과 싸우는 방법
  12. 벌링턴 산업 재판 : 성희롱은 기업도 책임져야 한다.
주요 쟁점들 모두 한 번 생각해볼만한 것들이며, 과거 사례를 현대에 빗대어 현대 재판 설명도 곁들여 주고 있는게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형사 소송과 민사 소송의 차이라던가 3심 재판의 기능 및 조건, 중재 등 여러가지 현대 법률 용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미란다 재판 이야기에서처럼 국내 판례를 예시로 들어주는건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음주운전이 의심되는 피의자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강제 연행하여 음주 측정을 한 결과는 위법한 수사이므로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를 통해 '공권력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걸 알려주는데, 범죄임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이런 한계를 두는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도 생기네요.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을 통해 중재 절차에 대해 알게된 것도 수확입니다. 법원의 판결 없이 당사자들끼리 합의하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걸 그동안은 잘 몰랐었거든요. 이런 방식은 크게 조정과 중재가 있는데 조정은 당사자 한쪽 또는 양쪽이 요청해 제3자를 조정자로 선임하여 해결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 중재는 반드시 '쌍방이 요청'한 후 중재인이 판정하면 양 당사자 동의 없이 바로 받아들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도 민사 조정 신청 절차가 별도로 있고, 소송 비용도 1/10이라고 하니 필요하다면 적극 고려해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재판보다는 재판 관련 상황에 더 촛점이 맞추어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게 드레퓌스 재판입니다. 이는 누명을 쓰게된 상황, 판결을 받은 뒤 벌어진 일련의 과정 등이 재판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재판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워요. '인종 차별', '낙태권', '존엄사' 등도 해당 이슈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재판'이라는 수단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또한 절반 이상의 내용이 현대가 무대라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역사'를 바꾼 재판이라면 과거 이야기부터 소급해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현대 재판을 가지고 설명하더라도, 미국 사건만 가지고 온 것도 불만스럽고요. 재판들도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주었어야 했습니다. '벌링턴 산업 재판'이 여기 사건들과 어깨를 나란히할만한 사건인지는 솔직히 갸우뚱합니다.
소크라테스 재판 이야기에서 '다수결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답이 없이 다른 법적 이론 - 시민 불복종, 저항권 - 을 설명하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저런 이슈를 한번 쯤 고민해봐야 하는 청소년이라면 모를까, 제 기대에는 별로 값하지 못했습니다.

2010/12/15

재판원의 여신 ( ) 1~5 - 毛利 甚八 외: 별점 2점

'2010년 12월 15일 수정'

간만에 읽어본 일본 원서로, 모리 진파치가 글을 쓰고 “대사각하의 요리사”로 유명한 가와스미 히로시가 그림을 맡은 만화입니다. "재판원 제도", 즉 일본의 배심원 재판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학습 만화의 성격이 강해 설명이 많고 지루합니다. 1권은 재판원의 선발 과정과 재판 절차 설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3권에서도 "사법의 독립"이라는 주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법정 장면과 무관한 설명이 길게 이어집니다.

둘째, 재판 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두뇌 싸움이 아닌, 재판원(배심원)들의 심리적 딜레마가 중심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고민을 다루는 설정 자체는 흥미로울 수 있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반복되는 묘사와 느슨한 전개는 몰입을 방해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식의 논조도 공감하기 어려웠고요.

셋째, 독특한 법정 추리물이나 재판물을 기대했지만, 그런 요소는 전무합니다. 1권부터 4권까지 등장하는 세 건의 사건 중 두 건(1권의 ‘강도 살인사건’, 2권의 ‘강간 살인사건’)은 피고가 범행을 인정했기 때문에 추리, 재판물로서는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3~4권에서 피고가 무죄를 주장하며 결정적 단서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지는 사건이 있기는 한데, 여전히 ‘심리 묘사’가 중심이라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합니다. 특히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에 의한 자백 외에 다른 증거가 없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떨어졌고요.

게다가 제목이 "재판원의 여신"인 만큼 유우키 미치코 판사가 주요 역할을 할 것 같은데, 정작 이야기는 재판원들이 중심이고 유우키 판사는 단순한 해설자 역할에 그칩니다. 그녀 없이도 이야기가 충분히 성립되기에, 왜 집어넣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심리 묘사 자체만 즐긴다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재미는 있으며, 재판 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볼 만하기는 합니다. 작화도 동적인 연출은 부족했지만, 쉽게 읽히는 스타일이라 일본어 원서임에도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고요. 그리고 5권에서 나온, "사형 판결을 내리더라도 실제 집행은 최소 10년이 걸릴 것이며, 그 안에 사형제도가 폐지될 것"이라는 법의 맹점을 이용한 설정은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이 사건도 결국 사형 판결이 당연한 범죄에 대한 이야기였고, 재판원들의 심리적 고민을 반복적으로 부각시켜서 지루한건 어쩔 수 없었지만요.

결론적으로, 기대와는 많이 달랐고 기본 논조도 마음에 들지 않아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일본 재판원 제도에 관심이 많지 않다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2021/10/03

법정에 선 수학 -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 김일선 : 별점 3점

법정에 선 수학 - 6점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아날로그(글담)

수학이 법정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재판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숫자가 잘못 사용되어서 재판 결과가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적인 조건으로 판단하고 곱하면 안되는데, 곱해서 숫자가 엄청나게 커진 경우처럼 대부분 통계와 확률 계산의 오류들이고요. "루시아 더베르크 사건", "샐리 클라크 사건", "콜린스 부부 사건", "조 스니드 사건" 이 대표적입니다. 

루시아 더베르크는 2001년 네덜란드에서 아동 연쇄 살인마로 몰렸던 간호사입니다. 여러 아이가 심정지로 사망했을 때,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현장에 있었을 확률이 왜곡되어 재판에 사용되었습니다. 수학은 단지 거들었을 뿐이고, 사실 무리했던 기소와 수사, 그리고 무능했던 변호사의 환장의 콜라보였기에 그녀는 결국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오류가 일어난 이유는, 모두 개별적으로 보아야 하는 독립 사건을 곱했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를 영아 돌연사로 연달아 잃은 뒤, 영아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던 샐리 클라크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샐리는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명명한 메도 박사의 증언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박사는 아이 두 명의 죽음을 모두 독립적이라고 생각하고 확률을 계산했었고요. 그러나 유전적일 경우 두 죽음은 독립적이지 않을 뿐더러, 설령 확률이 맞았다 하더라도 이게 샐리의 범행을 증명하는건 아닙니다. 운 나쁘게 불행한 죽음이 닥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여러모로 확률이 잘못 사용된 거지요.

콜린스 부부는 범인과 인상착의가 같을 확률 때문에 체포되었는데 검사측은 LA 시민 중 비슷한 특징을 지닌 커플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해서 증거로 제시했었습니다. 부부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지만, 배심원은 유죄를 선고했고요. 그러나 이 확률 계산이야말로, 오류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우선 사용된 값이 문제였어요. "여성이 머리를 묶었을 확률" 은 통계학적 근거에서 나온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건이 독립적이라고 확정하고 곱한 것도 실수였고요. 마지막으로, 설령 그 숫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이건 샐리 클라크 사건처럼 실제 범인을 찾아낼 확률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대법원에서 판결은 뒤집혔습니다. 이 재판에서 그나마 긍정적이었던건 검찰측 오류를 밝혀내는데 활약했던 트라이브가 법조계 유명인사가 되었고, 법정에서 수학 사용이 자제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것 정도네요. 

"조 스니드 사건"은 1964년 뉴멕시코 실버시티에서 스니드 부부가 살해된 뒤, 용의자였던 아들 조 스니드 재판을 다루고 있는데 재판의 승패는 조 스니드와 권총을 구입했다는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인지를 입증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었습니다. 검찰은 이를 수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권총을 구매한 사람의 특징 - 신장, 머리 색, 눈동자 색, 사서함 번호, 이름 등 - 을 독립적으로 보고 값을 뽑은 뒤 곱했는데, 이건 수학에 어두운 제가 봐도 설득력없는 숫자로 보입니다. 전체 인구에서 크로셋이라는 이름이 나올 확률을 추산했다? 가명을 썼다면서 그 이름이 존재할 확률을 계산한다는건 이상하지요. 다른 조건과 값도 비슷해서, 결국 이 확률 계산은 재판과는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숫자일 뿐입니다. 설령 숫자가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숫자는 조 스니드와 로버트 크로셋이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과는 상관도 없고요. 오히려 이런 검찰의 삽질이 드러나서, 수학이 사용되지 못했던 항소심 이후의 법정 공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검찰은 다른 한 방을 준비해야 했기에, 변호인측과 드라마틱하면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니까요. 참고로, 여기서 검찰이 마지막 날린 한 방은 스니드의 전처를 증언대에 세웠던 겁니다. 그녀가 스니드의 폭력 성향을 입증했던 덕분에, 스니드는 종신형을 받게 되었지요.

이렇게 수학이 재판 결과를 왜곡시킨 사건도 있지만 수학이 잘 사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2007년 11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영국인 유학생 메러디스 커처가 살해된 뒤,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어맨다와 남자친구 라파엘이 체포되었던 "어맨다 녹스 사건"은 재판 결과야 어찌 되었건, 수학은 증거로 유의미하다는걸 나름대로 증명했습니다. 여기서 앞 뒤가 나올 확률이 다른 동전을 이용한 설명도 좋았어요.

그런데 몇몇 사건은 주제와 벗어나 좀 아쉬웠습니다 .폰지 사기의 원조 찰스 폰지 사건 재판은 그의 사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월가의 마녀로 불렸던 해티 부인 재판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은 수학이 서명과 필적 위조를 입증하는데 사용되었지만, 실제 재판 결과와는 별 상관은 없었으니까요. 재판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었지만요. 드레퓌스 재판은 워낙 유명해서 이 책에서 따로 짚고 넘어갈 필요도 없어 보였고요. 저 같은 초보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이나 계산이 사용된 경우가 많은 점도 단점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수학 교양서로도 충분했고, 소개된 재판들 대부분이 한 편의 법정물을 읽는 듯한 재미를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비슷한 책으로 "넘버스"가 있는데, 재미 면에서는 이 책의 압승입니다.

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10/12/19

지키루와 하이드와 재판원 (ジキルとハイドと裁判員 1~4) (미완) - 森田崇 / 北原雅紀 : 별점 2.5점


재판원의 여신 (裁判員の女神 ) 1~5 - 毛利 甚八 외: 별점 2점

재판관 헨미 지키루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칭 "하이드"라는 존재. 그는 시공을 멈춘뒤 사람들의 "톤톤"을 불러내어 그 사람의 기억과 행동을 재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요새 몸이 좀 안좋고 해서 주로 만화만 보게 되네요.... 앞서 보았던 "재판원의 여신"과 동일하게 일본의 재판원 제도에 대해 다루고 있는 법정 만화입니다. 

줄거리 소개대로 판타지 설정을 도입해서 다른 흔해빠진 법정 관련 컨텐츠와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하이드"덕분에 헨미 지키루가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미리 알 수 있다는 설정은 독특합니다. 이를 이용하여 표면적으로 드러난 증거를 피고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조작하는 지키루의 활약이 재미의 핵심 포인트고요. 첫 번째 사건에서 무죄인 피고인이 현장에서 도망치는걸 피해자 동생이 목격했다는 결정적 증언을 "증언심리학"으로 뒤집는다던가, 두 번째 사건에서 유죄인 피고인의 거짓말을 밝혀내기 위해 재판에 사용할 수 없는 자료 이외의 잡지 기사를 인용해가며 재판원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 번째 사건에서 피고에게 살인 미수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것도 좋았고요. 미리 피고의 유죄 - 무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도서추리소설"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점도 장점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지키루가 존경하는 선배 재판관 야쿠시지의 말 -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실을 놓치게 된다 - 대로라면 하이드라는 존재와 지키루가 본 톤톤에 의한 피고인의 진실이 왜곡된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판타지와 법정물의 줄타기에서도 성공하고 있는 듯 싶어요. 결국 지키루의 판단은 "자기가 본 것"에 기반하고 있거든요. 뭐 이 부분은 두고봐야겠죠.

그러나 재판원들을 조종해 나가는 과정이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는 것은 감점 요소였으며 재판원들의 심리를 단순하게 그린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재판원 제도에 대한 고민 없이 오락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강하고, 분량에 비하면 너무 깊이가 없는 탓입니다. 3권 이후 지키루의 연인 아버지가 뒤집어쓴 누명과 관련된 사건은 정말로 지루했고요.

또한, 재판관이 재판원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재판장 가네마루의 재판원 제도를 비판하는 발언, 재판관의 "책임"을 강조하는 듯한 묘사들은 재판원 제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 싶은데 이 부분 역시 향후 추이는 좀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권까지 읽었는데 현재까지의 별점은 2.5점. 오락적으로 승부하기에는 좀 지루하고 애매했습니다. "재판원 제도"와 실제 재판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었다고 보기에는 단순했고요. 추천하기는 부족한데, 별로라고 보기도 어려운 작품입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심 있으시다면 1권을 읽어보신 뒤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2018/06/24

O. J. 심슨 사건의 진실 - 권영법 : 별점 3점

O. J. 심슨 사건의 진실 - 6점
권영법 지음/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그간 격조했습니다. 오랫만이네요. 업무 관련 출장과 야구 응원팀의 선전, 월드컵 때문에 통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집어 든 이 책은, 오래되긴 했지만 생중계된 도주극, 이어진 세기의 재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O.J 심슨 사건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책은 심슨이 무죄 선고를 받은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무죄 선고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방대했던 재판 과정을 앞에서부터 하나씩 되짚으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번역서가 아니라 한국의 변호사가 썼다는 점에서 걱정도 컸지만 읽어보니 방대한 자료 조사와 깊이 있는 분석이 상당한 수준이라 마음에 듭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심슨이 범인인데 거액을 들여 드림팀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운 좋게 빠져 나간 것일 뿐! 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만큼 검찰 측 증거가 확고한 것이 많았으리라 여겼고요.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니 검찰측 주장이 놀라울 정도로 상당 부분 신빙성이 떨어지더군요. 현장에서 발견된 심슨의 흔적들, 특히 혈액 검사 결과나 DNA 검사 결과 모두가 오염되거나 왜곡될 수 있었다는게 변호인단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검사가 주장한, 질투라는 동기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이혼한지 2년이 지났고 현재 미모의 여자 친구가 있는 심슨이 전처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질투를 한다? 설득력이 낮지요.
그 외에도 마크 퍼만으로 대표되는 백인 수사관들이 심슨이 범인임을 확신했었다는 게 증명되고, 심슨이 장갑을 끼며 맞지 않음을 증명하는 등 변호사 측의 승리가 이어지니 무죄 선고를 받은건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아울러 심슨이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민사에서의 패소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형사 재판은 '실재적 진실'을 발견해야 하기에 재판이 굉장히 빡빡해서 검사가 심슨이 유죄임을 입증하지 못해 패했지만, 민사에서는 단지 가능성이 높다 정도만 증명하면 될 정도로 기준이 낮기 때문이라는군요. 이런 정보는 정말이지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재판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진짜 니콜을 살해한 진범이 누구인지도 깊숙히 다루는데 이 부분은 그야말로 한 편의 추리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여러 가설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건, 유명 사립탐정 윌리엄 디어가 처음으로 주장한 심슨의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라는 가설입니다. 요리사인 제이슨은 칼을 사용하는데 능숙했다, 흉기와 유사한 칼을 실제로 소지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니콜에 대한 적개심을 품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제이슨이 일하던 식당 예약을 취소하고 다른 식당을 예약함), 알리바이도 없었다, 심슨의 옷과 신발을 자주 함께 착용하여 범인의 족적으로 밝혀진 고급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알콜 중독 및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등 수많은 근거와 이유가 차례대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O.J. 심슨이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와 증언도 이 가설을 통해 설명됩니다. 해당 증언, 증거들은 모두 심슨이 아들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아들을 감싸주려고 거창한 도주극을 벌인 뒤 스스로 죄를 뒤집어 쓰고 재판에 임한 것이고요. 부성애와 엇나간 아들에 대한 책임감을 생각하면 충분히 말이 됩니다.

이외에도 사건의 후일담, 가족들과 변호사와 검사, 증인, 배심원들 등 사건에 연관된 다양한 사람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까지 소개해 주기 때문에 그야말로 O.J. 심슨 사건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기억에 남는 건 심슨이 형무소에 가게 된 라스베거스 강도 사건은 사실 심슨에게는 억울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슨은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 분실한 것으로 알고 있던 자기 물건을 다시 찾은 것에 불과한데, 사건 후 친구들이 사건 관련 녹음 테이프를 거액에 팔고 사법 거래에 응해 빠져나가는 식으로 심슨의 뒤통수를 친 것이거든요. 의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인간 말종들이라 심슨이 정말로 불쌍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법정극, 추리물, 인간 드라마 등 모든 측면에서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책이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법률과 재판에 대해 조금 어려운 설명 분량이 제법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던 부분이었거든요. 물론 가설을 잘 못 세우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네 가지 전략 - 가설이 부당하다는 증거를 찾아보아야 한다, 증거를 객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믿음을 반박하는 증거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과신하면 안된다 - 등과 같은 좋은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분량은 조절해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사건이 이야기의 진행이 시간 순서가 아니라 뒤죽박죽인 것도 읽기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도판이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은 법정물 논픽션스러운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추천작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법, 재판에 대해 많은 걸 배운 듯 합니다. 예컨데 형사 재판에서는 목격 증인이 있으면 이러한 직접 증인 대신 그 말을 들은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면 안되는게 원칙이라고 합니다. 최근 경기도 지사 관련 트위터에서 이슈가 된 사건이 떠오르네요. 배심원들은 재판 초기에 결론을 내린다는 등 관련된 정보들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사건과 법정 다툼을 다룬 책, 논픽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2015/01/21

유괴 - 다카기 아키미쓰 / 이규원 : 엘릭시르 : 별점 2.5점

유괴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트 치과 의사가 유괴 살인을 저질러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기무라 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 그곳에 완전 범죄를 꿈꾸는 한 남자가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본다.
이윽고 고리대금으로 거금을 모은 이노우에 라이조의 아들이 유괴되고, 기무라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치밀함에 경찰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뒤, 라이조는 거금을 들여 범인에게 현상금을 거는데...

다카키 아키미쓰의 장편. 파계재판의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 시리즈로 실제 있었던 유괴 사건을 소재로 쓴 작품입니다. 범인이 유괴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재판을 방청하며 얻은 정보로 완전 범죄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는 내용이지요.

약간은 도서 추리소설 스타일로 전개되는데, 실제 사건과 거의 동일한 기무라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이노우에 가문에서 일어난 유괴 사건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흥미진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행의 "동기"와 범행의 과정만큼은 이쪽 장르 경쟁작들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 합니다. 특히 고령인 라이조의 나이를 감안하여 유산 상속을 노렸다는 진짜 동기는 정말이지 무릎을 칠 만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아들이 있고 특정한 유언이 없다면, 라이조 사후 아들에게 전 재산이 상속되지만 아들이 없다면 아내와 동생과 같은 친권자 기준으로 분배됩니다. 그런데 아내와도 이혼을 한다면? 이라는건 작중 내내 강조되는 라이조의 재산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이 느껴졌으니까요. 또 이 동기와 "실종 후 7년 동안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법적 조항이 맞물리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범행 과정 묘사도 실제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답게 생생합니다. 상세한 부분에서의 고민도 많이 느껴졌고요. 유괴 사건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서 제기되는 질문 - 결국 범인이 몸값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가? - 에 대한 나름의 해석도 괜찮았습니다. 거짓말 탐지기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전해주는 등 당대 수사 기법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주는 부분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거짓말 탐지기의 %에 대한 이야기나 부신 피질의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검사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고요.

또 당시 화제가 되었던 유괴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점, 정신 감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견지하는 설정 등에서는 사회파적인 성격을 느끼게 해 주는데, 권말에 상당한 분량으로 수록된 '마사키 유괴 살인 사건'의 재판을 다룬 논픽션이 그 방점을 제대로 찍어줍니다. 논픽션으로서도 뛰어나지만 실제 작품과 여러모로 연결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주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놓고 본다면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했던 범행 과정의 묘사에 비교하면 후반부는 너무 쉽고 어설픈 탓입니다. 범인을 지목한 이유가 "범인이 기무라 재판을 방청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재판이 보도된 신문을 연구하는게 훨씬 안전하고 손쉬웠을텐데 구태여 방청을 한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범행이 성공한 이후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기무라의 운명을 알기 위해 방청을 계속했다는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범인이 관련된 장소에 당당히 얼굴을 내민다는 것도 비상식적인 행동이라 생각되고요.

이렇게 근거 없는 추리와 설명할 수 없는 범인의 무의미한 행동이 결합된,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우연으로 보이는 전개는 또 있습니다. 다에코에게 불륜남이 때맞춰 전화하여 라이조에게 이혼 결심을 하게 만드는 장면, 오카 다미코의 죽음과 오카야마 도시오의 도주로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부분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그의 아내가 라이조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사건에 뛰어든다는 동기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너무 억지로 시리즈로 끌고가려는 느낌이었달까요. 차라리 시리즈가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던 에노모토 경위 그룹에서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는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게 어땠을까 싶어요. 아니면 최소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기무라 재판에 방청객, 혹은 참고인으로 참여했다가 범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내용이라도 나와 주던가요.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어머니 다에코의 공작에 의해 범인으로 확정된다는 결말도 깜찍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약합니다. 누군가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가장 유치한 수준의 공작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증거도 없는 인물의 집에서 유력한 단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바로 범인 취급을 해 버리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낭패를 볼 겁니다. 제가 봤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근거도 제법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본격 추리의 향취도 나면서도 사회파적인 느낌도 전해주는, 과도기의 교량 역할을 잘 해주고는 있지만 이러한 단점들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아래에서 순위를 다툴만한 작품입니다.

2012/09/25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 별점 3.5점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8점
박원순 지음/한겨레출판

지금은 서울 시장이 되신 박원순 '변호사'가 저술한 세기의 재판 이야기.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에서부터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한 재판까지 모두 10개의 역사적인 재판이 실려 있습니다.

사건의 시작에서부터 재판 과정, 그리고 결말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자세하게 펼쳐놓기 때문에 법정 드라마 같은 재미를 안겨 주는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드레퓌스, 패탱, 로젠버그 부부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명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와 함께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한 편의 소설 못지않아 읽는 재미가 빼어났고, 결국 사건을 은폐하려 한 대다수의 주동자들의 비참한 최후도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어서 좋았습니다.

2차 대전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인 패탱 원수의 재판은 우리나라의 일본 강점기 시절과 비교하여 진정한 "청산"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고요.

마지막의 로젠버그 재판은 발단과 전개 모두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법 위에 이른바 "이념"이 존재하여 피해자를 양산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얼마 전 읽은 "확신의 함정"에서 로젠버그 부부는 스파이였다는 씁쓸했던 결말과 맞물려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더군요. 물론 스파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사형을 시킨 것은 잘못이겠지만요...

어쨌건 명저는 명저. 법정에서 벌어진 불의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서 개인의 신념과 정의를 지켜나간 이야기가 대다수로, 법이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인지,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네요. 조금 지루한 부분이 있고 이상론을 다룬 부분이 있기는 하나,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14/04/22

자백의 대가 - 티에리 크루벨리에 / 전혜영 : 별점 2.5점

자백의 대가 - 6점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전혜영 옮김/글항아리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폴 포트 정권에서 S-21 교도소의 소장으로 일하며, 이른바 킬링 필드에서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관여했던 남자 ‘두크'의 국제 재판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이 알리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두크가 저지른 범죄가 과연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크를 비롯한 전범들은 혁명을 위해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열심히 일했을 뿐이며 이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데, 이는 일제 강점기 친일이나 독재 정권 시기 순응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이지요. 때문에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큽니다.

책은 두크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생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인터뷰를 5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제공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재판에 참여하고 함께 판단하게 만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크가 자신의 범죄를 불가항력으로 주장하고,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게 초반부입니다. 중반부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도움을 준 프랑스인 프랑수아 비조의 이야기 및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의 말로, 그리고 프놈펜 함락 이후 두크의 삶에 대한 내용이고요. 후반부는 재판 과정 중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장면, 즉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여야 했던 풍 떤 교수 가족의 인상적인 등장과 함께 재판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두크의 천재적인 기억력, 수십 년 전 심문 대상자의 자백을 기억하는 능력, 재판장에서 보여준 능수능란한 대응 등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그는 "밀그램의 복종 실험"처럼 단순히 권위에 복종한 인물이 아니라는걸 잘 알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스스로의 이상을 위해,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독특한 사례로 이해됩니다. 더불어 교도소장이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는 선생, 목회자 등으로 성실하고 신뢰받는 인물이었다는 이중적인 모습도 특이했고요.

그러나 제 기대와는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자백의 대가’라는 개인에 집중하기보다는, 크메르 루즈라는 거대한 조직 내에서 그가 왜 범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를 구조적으로 조망하는 데 주력하는 탓이 큽니다. ‘자백의 대가’로서의 조종 능력, 심리적 설계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고요. 제가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어요.

재판 논픽션으로서도 법정극적인 재미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두크의 범죄가 워낙 명확해서 빠져나갈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그가 직접 작성한 방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프랑수아 루 변호사가 펼치는 변론 역시 공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재미’의 측면에서는 부족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책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격동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는 주제를 담고 있고, 두크라는 인물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점도 똑같고요.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회심은 과연 가능하며 진실한가?” 하는 점인데, 등장하는 목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책이 내리는 결론은, 두크는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물이며, 과거에는 공산당이 그 믿음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종교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은 이기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분석이죠.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크메르 루즈의 집단학살 현장이 현재는 관광산업의 일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혹한 현실이 상업화되는 모습은 씁쓸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남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는 부족하지만, 크메르 루즈와 캄보디아의 현대사, 집단학살과 전범 재판, 인간 심리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어차피 죽일 거면 대체 왜 고문을 한 겁니까?"

2020/10/16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미나가와 히로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런던, 해부학 교실을 운영하는 외과의사 대니얼 버턴의 연구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사지가 잘린 소년과 얼굴이 짓뭉개진 중년 남자였다.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은 부하들과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섰다. 대니얼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사체로 발견된 소년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를 위해 사체를 훼손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소년과 중년 남자 해링턴을 죽인 범인으로 대니얼 버턴의 형인 로버트 버턴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데...

"죽음의 샘"으로 잘 알려진 여류 작가 미나가와 히로코의 대장편입니다. 제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허구추리"와 공동 수상했다지요. 사실 이 상의 권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검증된 '본격 추리물' 임에는 분명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영국 해부학 교실이 무대인 역사 추리 소설로 해부학 교실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전개와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목부터 해부학 교실을 위해 몸을 열게 해 준 시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무대가 이러하니 당연히 시체가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해부학 교실에서 기묘한 사체 두 구가 발견된 사건입니다. 손과 발이 토막나 사라져 있던 첫 번째 사체는 가난한 소년 네이선, 얼굴이 뭉개져 있던 두 번째 사체는 퍼블릭 저널 사장이자 대중을 선동하는 선동가 해링턴으로 밝혀집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치안판사 존 필딩에게 대니얼 버턴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사체를 훼손했다고 고백합니다. 네이선이 자살한걸 발견한 뒤, 자살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거라 여겨 상흔이 있던 손을 떼어냈다는 거지요. 손만 떼어내면 이상하니 발까지 떼어 은닉했던 겁니다.
해링턴 사체는 해부학 교실 제자들도 몰랐다고 하는데, 존 필딩은 백년도 더 전에 사용했던 '루퍼트 왕자의 난로' 구조를 이용하여 은닉한 상황을 보고 난로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추리하죠. 그래서 해부학 교실 관계자 외에 유일하게 난로 구조를 알고 있을 저택 주인 로버트 버턴이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이자 사기꾼 가이 에번스가 치안판사 부하들 눈 앞 밀실에서 살해되는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번스가 있는 방으로 로버트 버턴이 들어간게 목격되었지만, 그는 사라지고 에번스의 시체만 발견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침대에 걸려있더 천을 이용하여 옆 방으로 탈출한 걸로 드러나고요. 그런데 에드워드가 이 사건은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합니다. 네이선을 이용하고 괴롭힌 에번스에 대한 복수라면서요. 그러나 만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네이선을 위해 에드워드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여러모로 석연치 않지요. 여러모로 로버트 버턴이 범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로버트는 에번스에게 사기를 당해 거액을 빚지고 있었고, 에번스가 계획한 사기를 돕기 위해 해링턴까지 살해했다는걸로 밝혀지니까요. 토마스 해링턴은 네이선이 가지고 있는 고문서 작성 능력을 알고 있어서 입막음을 위해 죽인겁니다.

뒤 이어 로버트 버턴이 에번스 자택에서 불에 타 죽은 채로 발견된 세 번째 사건으로 연쇄 살인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에드워드가 자백한건, 궁지에 몰린 로버트에게 해부학 교실과 교실이 보유한 여러가지 표본, 즉 대니얼 버턴의 가진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를 쓰게 만드려는 계획으로 밝혀집니다. 즉, 모든 사건은 로버트 버턴이 저질렀고 결국 채무 관련 문서를 불태우려다가 죽은 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진범은 에드워드와 나이절이었습니다. 대니얼 버턴이 발견한 내용, 표본 등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던 로버트 버턴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가이 에번스에게서 네이선이 탈출해 찾아온걸 계기로 이 모든걸 꾸민겁니다.
둘은 우선 변장하여 가이 에번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로버트 버턴을 불러 궁지에 몰리게 한 뒤, 탈출시켜 각서를 쓰게 만들고 살해합니다. 대담하게 치안판사 수사 중에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당시 런던에서는 누군가가 고소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는걸 이용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이 두 사건, 즉 가이 에번스가 로버트 버턴의 살해에 대한 재판이 열리지 않을걸로 판단했거든요. 예상대로 에반스에게는 상속인이 없었고, 로버트는 저지른 범죄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탓에 미망인은 소송을 포기하지요. 

그러나 치안판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도 두 사건에 대한 재판은 포기하지만, 네이선 어머니의 고발을 통해 네이선 사건 실행범으로 둘을 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는 성공하니까요. 네이선이 남긴 유서와 옷의 잉크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걸 단서로 둘이 궁극적으로 로버트를 살해하려고 네이선을 먼저 죽였다고 추리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네이선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지며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달리 구입한 사체를 네이선으로 꾸몄던게 진상입니다.

이렇게 사건도 많고, 토막 시체와 밀실 살인 등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으며, 진짜 네이선이 살아있있다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까지 괜찮아서 추리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격 추리물답게 탐정 역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도 거의 공정합니다. 독자는 존 필딩과 판사와 같은 수중에서 추리를 전개할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도 납득이 가네요. 

아울러 디테일하게 그려낸 18세기 런던에 대한 묘사가 아주 빼어납니다. 여기에 더해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해서 설득력도 배가됩니다. 당시 재판 방식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부분도 인상적이고요. 일본 작가가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소설을 쓰면 당연히 엉망일거라고 생각한 제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줍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죽음의 샘"보다 훨씬 낫더군요.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도 눈에 뜨입니다. 범행 동기가 그 중 첫번째에요.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네이선과 사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를 위해 사람을 죽어가며 복수를 한다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석연치 않지요.
게다가 로버트 버턴에 대해 복수심과 살의를 품고 범행을 저지른건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가 대니얼의 성과와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한다 한 들, 그건 두 형제의 문제이지 제자들의 문제는 아닙니다. 소중한 해부학 교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사명감이나 연대 의식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나지 있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로버트가 대니얼의 재산을 포기하게 만들려면, 구태여 에번스를 죽일 필요도 없었어요. 일레인 양 사건과 토머스 해링턴 사건으로 협박만 하면 충분했을 테니까요. 

가이 에번스와 네이선이 얽힌 과거사 이야기는 함께 전개되어 독자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반면, 로버트에게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가 에번스가 엮여 거액의 손해를 보고 해링턴은 죽이는 과정, 그리고 에번스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뒤 에드워드 방 옷장 안에서 에드워드가 각서의 댓가로 범행을 고백하는걸 엿듣는 장면 정도는 로버트 시점에서 묘사해 주었어도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일레인 양을 임신시킨 뒤 살해한 사건도 곁가지로 나오기 보다는, 로버트를 악인으로 확실히 부각시킬 수 있도록 그 진상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테고요. 

에드워드 본인의 복수심과 때문에 재판이 엉망이라는걸 대중 앞에 선보이려고 일부러 재판에 회부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는 정말이지 작위적인, 그야말로 반전을 위한 전개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변장해서 밤문화(?)를 즐기는 인물이라는 설정은 설명도 부족하고, 등장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더군요. 여장 후에는 그 바닥에서 요정 여왕(?) 이라고 불리우는 나이절이 자기 매력을 이용하여 치안판사의 부하인 데니스 애벗마저 유혹해 정보를 빼돌린다는 등 억지스럽기만 할 뿐이었어요. 안 나와도 됐을 듯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 측면에서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충분하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애호가 분들 중에서도 역사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2/09/03

파기환송 - 마이클 코넬리 / 전행선 : 별점 1.5점

파기환송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전행선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방검사장 게이브리얼이 미키 할러에게 특별 검사 자리를 제안했다. 아동살해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20년 이상 수감되어 있었지만, 스스로 사법 투쟁을 벌여 파기 환송을 만들어낸 제이슨 제섭 사건 때문이었다. 사건 당시 발견되었던 정액이 DNA 분석 결과, 제이슨 제섭의 것이 아니었다는게 결정적 이유였다. 앞으로 60일 이내에 검찰은 그를 무죄 방면할지, 재심할지 결정해야 했다. 게이브리얼은 사건을 재심하기를 원했지만 특별 검사제를 시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키 할러가 필요했다. 

전처 매기를 차석 검사로, 이복형 해리 보슈를 전담 수사관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받아들인 미키는 팀을 꾸렸고, 재판을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한 끝에 세라의 증언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걸 알아챘다. 사건 당시 13살의 나이로 제섭을 범인으로 지목했던 그녀는 현재 실종 상태였다. 해리 보슈는 수사를 통해 세라를 찾아냈고, 그녀를 증언대에 세우는데 성공하는데....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이후 이어지고 있는 마이클 코넬리의 미키 할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전 작에서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미키 할러가 '특별 검사'로 변신하여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변호사 클라이브 로이스와 맞서 싸운다는 설정 변주가 독특했습니다. 전처인 검사 매기 맥퍼슨,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인기 시리즈 주인공 해리 보슈와 함께 하는 '드림팀' 구성도 볼만했고요.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제이슨 제섭 사건 재판은 분량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조사가 진행된 듯 하지만, 실상은 세라의 증언 - "제이슨 제섭이 동생을 납치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정액이 묻었던 옷은 원래 내 옷으로,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탓에 정액이 묻었었다." - 가 증거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이를 뒤집기 위한 클라이브 로이스의 카드도 별볼일 없습니다. 세라의 전 남편인 에디 로만을 증언대에 세워, 당시 양부가 멜리사를 죽였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세라에게 거짓 증언을 시킨 거라는걸 폭로하려 했는데, 이 시리즈 내내 반복되어 왔던, '검찰 측 거짓 증인' 이나 '교도소 내 밀고자' 를 통한 물 흐리기 작전과 똑같아서 식상했어요. 

게다가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에디 로만을 무너트리는건 전작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디 로만의 현재 동거인 소니아 레이예스를 법정 안에 데리고 들어온게 전부거든요. 그녀가 있거나 없거나 에디 로만의 증언이 바뀔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에디가 그녀를 본 뒤 증언을 완벽하게 번복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클라이브 로이스의 작전은 배심원들에게 의심의 씨앗만 심으면 충분했는데, 이렇게 전적으로 증언을 번복할 이유 역시 없고요.

추리, 범죄, 스릴러물로도 기대 이하입니다. 멜리사 사건의 진범이 제섭이고, 초반 재판의 키 포인트로 보였던 정액이 양아버지 것이었던 이유는 세라가 성폭행 당했기 때문이라는 등 주요한 수수께끼 모두는 세라의 증언으로 밝혀지니까요. 세라는 제섭의 얼굴을 24년이 지났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양아버지 정액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다른 수수께끼들은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제섭이 재판 전, 한 밤중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따라 프랭클린 캐니언 등의 공원에 몰래 방문해서 촛불을 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수수께끼가 대표적이에요. 제섭은 연쇄 살인범으로 자기가 죽였던 피해자들이 묻혀있어서, 그걸 기념(?)하는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해리 보슈의 지인인 FBI 심리 분석관 레이철의 분석으로 설명하는데 이해하기 힘듭니다.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뒤,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피해자를 살해했던걸 어떻게 연쇄 살인과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동 살해범이 이전에도 범행을 저질러왔던 연쇄 살인마라는건 당황스러울 정도로 전형적이었을 뿐더러, 설령 그렇다쳐도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는 곳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묻혀있는 시체를 제섭과 연결시킬 수 없으니 일단 묻고 가자는 미키 할러의 주장은 용납할 수도 없고요. 그게 제섭의 범행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종된 여자들과 그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심이 있다면 만사 젖혀두고 시체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제섭이 해리 보슈의 집 앞에 머물렀던 이유, 은밀한 거처를 만들었던 이유 등도 딱히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전개도 시원치 않습니다. 우선 미키 팀이 피해자의 언니 세러를 찾아내서 인터뷰하는 부분이 작품의 1/3 정도 지점이라 그 이후 제섭 사건에 대한 흥미는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제섭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니 당연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미키 팀이 에디 로만의 증언을 박살내 버린 후, 좌절한 제섭이 자기 변호사 팀과 감시하던 SIS 요원들을 사살하고 도주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법정물, 추리물 비스무레한 뭔가에서 헐리우드 액션물로 전락해버리는 탓입니다. 제섭이 도주 후 딱히 하는 것 없이 사살당하는 장면도 허무했고요. 복수를 노린 것도 아니고, 뭔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단지 숨어있으려고 했던 것 뿐이라 실망스럽습니다. 

아울러 중반부에서 엄청나게 치밀하고 복잡하다고 설명되었던 SIS 감시 시스템이 제섭의 도주로 별볼일 없이 무너져버리는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미 제섭이 총을 손에 넣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4명이나 제섭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SIS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해리 보슈의 등장이라던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름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제섭이 도주해서 사건을 키우지 않았다면, 배심원 중 한 명이 반대해서 - 심지어 미키 할러의 의도로 재판 초기에 바뀐 배심원 -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나름의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단점이 훨씬 더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이 시리즈도 이제 더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19/12/28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사노 신이치 / 류순미 : 별점 2.5점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6점
사노 신이치 지음, 류순미 옮김/글항아리

1997년 3월 19일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도쿄 전력 여직원 야스코 살인 사건의 배경과 재판 과정, 후일담까지를 거의 500여 페이지 분량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일본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런저런 콘텐츠에서 인용되었던 유명 사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여자 친구"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인 마키코는 명문 대학 법대생으로 재학 중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지만 전락하여 매춘을 반복했다는 설정인데, 이 사건과 거의 같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차에 국내 출간이 되었길래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완독했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리뷰를 조금 늦췄습니다.

특징이라면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루고 있지만, 진범이 누구냐를 탐구하는 법정 미스터리 속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네팔인 불법 체류자 고빈다를 범인으로 모는 경찰과 검찰의 비상식적이고 비정한 태도와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뒤집으려는 화자인 취재 기자의 취재와 추리를 3년여에 걸친 1심 공판 과정과 후일담 속에 담아낸 것이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검경 합동의 환장할 누명 씌우기는 볼 만합니다. 일단 검찰은 고빈다가 피해자 야스코와 만난 시간부터 제대로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고빈다가 근무지인 식당에서 퇴근 후 10시 7분 열차를 타고 시부야역에 11시 20분에 도착했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취재 결과로는 10시 22분 열차를 탔다는 쪽이 타당하다고 증명되거든요. 설령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고요.

검찰이 유력한 증거라고 내민 범행 장소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정액이 들어 있는 콘돔 역시 살인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빈다가 매춘을 하던 피해자의 손님으로 범행 장소에서 이전에 관계를 가졌던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현장에서는 피해자와 고빈다의 것이 아닌 음모 등 다른 증거도 발견되었고, 범인이 돈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잡아당기다 피해자의 숄더백에 묻힌 피부 조각 역시 고빈다의 것이 아니기도 했고요.
그 외 세세한 억지 주장에 대한 반론은 셀 수도 없으며, 고빈다의 무죄를 강하게 짐작하게 하는 증언과 증거가 마지막까지 드러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렇게 검찰과 경찰이 네팔인을 범인으로 몰려는 의도도 여러 가지 증거와 온갖 비인간적 행각의 폭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체가 발견된 3월 19일 이후, 고빈다를 출입국 위반으로 취조할 때 이미 타액을 채취했으며, 고빈다는 물론 그의 룸메이트들에게도 고문과 강압 수사로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조작했는데도 결정적 증거를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억지 주장만 되풀이한 검찰의 무능함도 돋보입니다.

또 고빈다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장면에서 끝나지만, 에필로그에서 검찰 항소로 열린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십수 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후일담은 기가 막힙니다. 1심 판사가 좌천되기까지 했다니, 어디까지 썩어 문드러진 건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재심으로 누명을 벗고 무죄 선고를 받았다지만, 십수 년의 세월은 보상받기 어렵죠. 게다가 이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전 경시청 간부 히라다가 ‘무죄 판결은 사법부가 여론을 의식한 결과이며 고빈다가 진범’이라고 우기며 극우 단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화자인 취재 기자 사노 신이치의 꼼꼼한 취재도 인상적입니다. 고빈다의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과 추방된 당시 룸메이트들의 결정적 증언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에 출두한 거의 모든 증인을 후속 취재하여 피해자 야스코가 살해되기까지의 동선을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각종 증거들도 상세한 보충 설명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사노 신이치의 추리력이 빛나는 장면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야스코의 지갑에서 발견된 이오카드의 존재에 대한 추리입니다. 검찰은 이 카드의 잔액으로 야스코가 특정 장소, 그러니까 정기권을 버리기 위한 장소로 이동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구두쇠였던 그녀가 돈을 써 가며 정기권을 버릴 이유는 없죠. 사노 신이치는 그래서 야스코가 이 이오카드를 주웠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비용이 남아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사실은 현금을 보태 표를 구입했기에 잔액이 0원이었고, 잔액을 몰랐던 야스코는 뒤의 잔액 기록만 보고 나중에 쓸 요량으로 챙겼다는 것입니다. 아주 합리적이에요.
야스코의 정기권을 아무런 접점이 없는 스가모 주택가에 버린 범인의 심리에 대한 변호인단의 추리도 볼 만합니다. 시체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자 범인의 의심이 커져 범행을 드러낼 요량으로 대낮 주택가에 정기권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 역시 그럴듯했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했던, “왜 게이오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 도쿄 전력의 간부로 근무하며 연봉이 천만 엔이 넘었던 야스코가 수년간 밑바닥에서 매춘을 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이 등장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도화선은 그녀가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여겼던 아버지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 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도쿄 전력 내 라이벌과의 승부에서도 패배하며, 스스로 좌천당했다고 여긴 인사 발령을 받고 아버지가 ‘징벌적 초자아’에 빙의하여 그녀에게 벌을 내립니다. 아버지보다 못한 나를 못나게, 더럽게 만들어야 된다는 이유로요.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사회의 밑바닥,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그 수준은 가히 참혹해서 2천 엔에도 여러 명의 외국인에게 길거리에서 몸을 팔고, 노상 방뇨 등을 서슴없이 저지를 정도였죠. 아, 무섭습니다. 확실히 현실이 픽션보다도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자극적인 사건과 극적인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아주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여러모로 별점 4점을 주었었던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와 비교됩니다. 핵심 용의자가 유죄를 선고받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로 풀려난다는 재판 과정도 동일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경찰과 검찰의 주장을 밝혀내기 위한 상세하면서도 방대한 취재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점도 같으니까요.
그러나 이 책은 별점 4점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저자인 사노 신이치가 이 사건을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이라든가 일본 사회의 어둠 등과 엮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문학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네팔에서의 여정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부분이라든가 야스코의 무덤을 찾은 감상 등이 그러한데, 전부 쓸데없을 뿐더러 그 양도 너무 많았어요. 그냥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과 연계하여 작금의 일본 사회를 드러내는 정도에 그쳤다면 좋았을 겁니다.

게다가 이러한 개인적 감상을 무리하게 사건 취재와 엮은 부분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예요. 대표적인 게 사건 당일 야스코를 목격한 증인 중 한 명인 샌드위치맨 하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험난했던 인생사와 야스코 사건을 엮고, 이를 내면의 어둠 운운하면서 비극적으로 포장하는데 솔직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토는 16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아내의 사망 이후 스스로 술독에 빠져 인생이 망가진 것이라, 이를 딱히 내면의 어둠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죠.

또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는 저자 스스로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취재를 통해 범인상을 그려내지만, 이 책에서는 그냥 뜨내기 손님이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예상 외에 그 어떤 정보도 추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현실만 취재해서 문제만 드러냈을 뿐, 그 이상의 진실은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니까요. 같은 이유로 법정 미스터리를 방불케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배분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고빈다의 억울한 재판이 9, 야스코의 삶과 죽음이 1 정도의 비중인데, 이 책을 구입한 독자라면 야스코의 삶에 대한 관심도 높은 건 당연합니다. 왜 그녀가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사 한 명과의 인터뷰가 전부라 취재의 양과 깊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의사의 견해도 증명된 것은 아니고요.
또 고빈다 재판에서 사건 당일 야스코와 고빈다의 행적도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이런 부분만 정리했더라도 분량은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고 내용도 흥미롭지만, 말씀드린 단점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지금보다 군살을 덜어내고 더 논픽션답게 썼더라면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했을 겁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떠오르는 그런 책이네요.

2014/01/08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 도진기 : 별점 2.5점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 6점
도진기 지음/추수밭(청림출판)

추리소설을 쓰는 현직 검사이신 한국의 존 그리샴 "도진기 작가"가 쓴 법률 안내서입니다. 염라대왕이 천국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판사 역할을, 소크라테스가 염라를 도와주는 변호사로 등장하여 여러 역사 속, 픽션 속 사건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을 진행한다는 설정입니다. 본인의 능력을 살려 일종의 소설같은 구성과 전개를 보여주는게 특징이고요.

장점이라면 등장하는 사건들이 흥미롭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쉽게 읽힙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윌리엄 텔이 아들에게 화살을 쏜 것에 대한 재판

결과가 생길 수 있지만 그래도 좋아! 라는 것이 미필적 고의, 결과가 생길 수 있지만 설마 그러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식 있는 과실로, 윌리엄 텔은 고의도 없었고 미필적 고의(아들이 죽어도 좋아)도 없었기에, 인식 있는 과실에 해당되어 처벌받지 않습니다.

하멜의 피리 부는 사나이 재판

피리 소리가 아이들을 꾀어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면 무죄입니다. 상당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검투사 막시무스가 다른 검투사들을 죽인 것에 대한 재판

기대 가능성이 없어서(올바른 행동을 기대할 수 없음) 죄가 되지 않습니다. 강요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한가요?

샤일록의 계약에 대한 재판

계약 자체가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 무효!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빼앗은 마녀와의 계약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른바 신체포기각서라든가 도박빚 역시 무효입니다. 단, 무효인 도박 빚도 일단 돈을 주었다면 돌려받지 못합니다.

짤막한 내용만 보아도 상당히 재미나죠? 그러나 소설도 아니고, 법률 안내서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라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소설적인 부분은 설정이 유치하며, 중간중간의 대사들 역시 그러합니다. 약간 아동 취향으로 보여서 많이 어색했어요. 법률 안내적인 측면으로는 깊이가 부족하고요. 소설적인 설정과 구성에 너무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는 탓입니다. 현직 검사의 관점으로 이 책에 등장한 사건들에 대해 쉽고 재미나게 설명해 주는 정도로 충분했을 텐데 아쉽네요. 너무 오버한 느낌이에요.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는 내용이 많고 장점도 확실해서 아예 폄하하기는 힘드나, 억지스러운 설정은 빼는 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유사하지만 금태섭 변호사의 책이 저는 더 마음에 드네요.

2014/08/04

타블로이드 전쟁 - 폴 콜린스 / 홍한별 : 별점 4점

타블로이드 전쟁 - 8점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양철북

19세기 말, 토막난 채 발견된 시체가 신원이 마사지사 굴든수프로 밝혀진 후,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마틴 손에 대한 재판과 사건을 보도하며 선정적 보도의 끝을 보여준 퓰리처의 월드, 허스트의 저널지의 경쟁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우선 빅토리아시대 말, 그야말로 셜록 홈즈 전성기를 무대로 상세하게 소개되는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은 굉장한 볼거리였습니다. 과학 수사의 초창기로, 아직 지문 대신 베르티용 측정법이 사용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혈흔 분석, 포장지의 출처 추적, 여러 목격자 증언을 통한 용의자 특정 등의 수사 과정은 현대 수사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고문에 의존하지 않는 냉정한 수사라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백여년의 시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보다 더 현대적 수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논란이 되는 시체 없는(또는 시체의 정체가 불명확한) 사건에 대해 혐의를 물을 수 있느냐는 쟁점도 흥미로왔던 점이며, 마틴 손의 변호를 맡았던 당시 최고의 변호사 하우의 실력도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피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묘사되는데, 예를 들자면 다른 사건에서는 핵심 증인을 돈을 주고 홍콩으로 이민 보냈다고도 하네요. 페리 메이슨이 떠오릅니다. 하여튼, 하우가마틴 손이 범인이라고 말했던 오거스터 낵을 법정에서 박살내는 장면,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와 증거(예: 사건 현장의 욕조가 시신을 썰기엔 너무 작았다)는 뛰어난 변론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마틴 손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배심원단의 음주 사실을 조사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물론 개인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지만요.

아울러 사건의 진상이 재판이나 수사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지만, 저자가 제시한 추론도 나름 설득력 있더군요. 굴든수프의 시신에는 반항 흔적은 있으나 섬유 증거는 없었고, 오거스터 낵 체포 시 멍자국이 있었으며, 빈 와인병이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굴든수프가 게이가 아닌 이상, 함께 와인을 마시고 알몸 상태에서 칼을 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오거스터 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추리였습니다.

오거스터 낵은 사건과 재판, 그리고 이후의 행보까지 볼 때 정말 대단한 팜므파탈이라 생각됩니다. 자기 확신과 합리화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소시오패스와 다를게 없더군요. 예전에 읽었던 "밀랍 인형"의 팜므파탈 미리엄의 리얼 버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의 또다른 축인 황색지의 보도 경쟁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현재의 언론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씁쓸함도 전해 줍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노력이 만들어낸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더군요. 무엇보다도 허스트의 말처럼, 사건을 실제로 만들어서라도 특종을 얻는다는 전략은 지금 보아도 놀랍습니다. 예전에, 평화로운 시골 마을 신문사 기자가 사건을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단편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게 그냥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재판 중 굴든수프의 사체 일부에 대한 묘사, 마틴 손의 외모를 언급하는 증언들, 일종의 ‘아이돌’이 된 피고의 인기, 그리고 사건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 등도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범죄 논픽션으로도, 황색 언론의 보도 행태를 다룬 기록물로도 손색 없는 책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추리물, 범죄물,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2014/04/21

파계 재판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파계 재판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신극배우였던 무라타는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남편을 살해한 내연녀 야스코를 위해 시체 유기를 도왔다는 혐의는 인정했지만,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검사는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했으나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으로 서서히 흐름이 바뀌고, 결국 무라타의 비밀까지 밝혀지는데...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인 무라타 가즈히코의 결백을 밝히고 진범을 밝혀내는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의 활약이 그려지는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추리작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이지요.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기로는, 이전 가미즈 교스케 단편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도서출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두 번째로 출간되었는데,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에 이어 국내 정식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네요.

장점이라면,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순간에 드러나는 진범과 그 진상이 매우 인상적인 덕분입니다. 작가가 사법고시 준비 수준으로 조사했다는 법정 묘사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고요. 증인이 한 명씩 등장해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도 매우 긴박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서는 사회파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부락민 출신이라 평생 차별에 시달렸다는 설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인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차별을 그린 동명 작품에서 따왔으며,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입니다. 검사가 제시하는 무라타의 과거 범죄들이 실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극단에서의 횡령은 출신을 이용한 협박 때문이었고, 동거녀와의 결별 역시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식으거든요. 특히 그 동거녀가 법정에서 결혼하겠다고 증언하는 장면과, 무라타가 이를 일축하며 "내 돈 때문이지!"라고 외치는 순간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합니다. 전부 법정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화자인 요네다가 법정출입기자로서 재판 과정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별도 취재나 외부 조사가 동반되는데,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엽기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서 보이던 과장된 묘사 없이 매우 절제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추리적인 요소의 한계입니다. 요네다의 시점만으로 모든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탓이에요. 법정 미스터리 특성상 상대가 어떤 증언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이는 이야기 구조를 제한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정보의 일부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대한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증인이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사건이 더 애매해졌을거에요. 또한 사라진 천만 엔의 행방에 대해 검사나 경찰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이며, 자금의 출처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진범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쓰가와 히로모토와 야스코의 관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쓰가와가 야스코의 시신을 어떻게 유기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유기에는 무라타의 자가용이 개입되었기에 개연성이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작품은 무라타의 재판에서만 끝을 맺습니다. 화자인 요네다를 내세운 만큼 쓰가와 재판 결과까지 다루는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배우 이토 교지나 여배우 호시 아키코 같은 인물들도 단순한 미스디렉션으로 사용하기엔 등장 비중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요. 무라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비까지 들여 조사에 나선 햐쿠타니 변호사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상황상 무라타가 범인처럼 보이니까요. 이후 시리즈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카기 아키미쓰의 법정 미스터리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극적 긴장감과 사회파적 메시지를 고루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사법고시 수준의 공부를 했다는 열정이 느껴졌고,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책의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책 하단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보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띠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런 디테일은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의 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21/05/29

다섯 번째 증인 - 마이클 코넬리 / 한정아 : 별점 2.5점

다섯 번째 증인 - 6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키 할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담보대출 관련 민사소송 변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뢰인 중 한 명이었던 리사 트레멀이 자신의 집을 압류하려 한 은행가 미첼 본듀란트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자, 다시 형사 소송 변호에 뛰어드는데...

해리 보슈를 창조했던 마이클 코널리의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큰 인기를 끌어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매튜 매커너히 주연 영화로 발표되기까지 했었지만, 마이클 코널리의 전작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동안은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엄청난 두께도 큰 진입 장벽이었고요.

하지만 읽어보니, 그동안 진작 읽지 않은게 후회될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재미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법정물로 완벽한 재미를 선사한다는 점입니다. 리사 트레멀 재판에서 변호사 미키 할러가 승리하기 위해 프리먼 검사와 벌이는 치열한 법정 공방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에요. 또 미키 할러는 재판 과정에 철저한 작전을 세워서 변칙적이고, 어떻게 보면 불법에 가깝거나 비열해 보이는 짓까지 서슴없이 동원합니다. 단순히 증거 몇 개로 난타전을 벌이는 수준이 아니고요. 그래서 더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미키 할러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피고인이 정말 무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든요. 돈을 받은 이상, 의뢰인 승리 - 여기서는 무죄 판결 - 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렇게 기브 앤 테이크에 충실한 모습, 그러면서도 변호, 그 중에서도 형사 사건 변호라는 직업적 전문 분야에서의 출중한 능력은 '페리 메이슨'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함께 일하는 수족과 같은 동료들과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은 성격, 엄청난 말주변까지 더해져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페리 메이슨의 적자인 셈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현실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 미첼 본듀란트는 키가 180cm가 넘어서, 키가 160cm밖에 안되는 의뢰인 리사가 망치로 정수리를 가격해서 살해하는건 어려웠다는 증언이 리사의 무죄 평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리사는 풍선을 이용해서 본듀란트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게 만든 뒤, 뒤에서 망치로 가격했던 겁니다.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미키 할러가 복수하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리사가 전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은닉했다는걸 폭로하고, 본인은 더 이상 변호사를 하지 않고 검사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보여줄 것 같아 두근두근해지더라고요.

그러나 리사가 진범이라는 반전과 트릭은 좋았지만,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동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리사가 본듀란트를 급작스럽게 죽인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거든요. 작 중 미키 할러의 변론을 통해서도 설명되지만, 미키 할러에 의해 리사의 집 압류는 늦춰질 예정이었지요. 작장을 잃은건 한참 전이니 그 때문에 갑작스럽게 살의가 폭발했을리도 없고요. 우발적인 범행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풍선을 이용해서 사건 현장을 꾸민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미키 할러의 재판 전략도 복잡하지만, 실상 들춰보면 그렇게 알맹이가 많지는 않아요. 검찰에서 내민 증거는 많다지만, 실제로 리사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리사가 쓰던 정원용 장화에 피해자 피가 아주 미량 묻어있던게 거의 유일한 증거지요. 흉기인 망치는 리사 집에 있었던 것이라는게 증명되지 못했고, 오히려 장화와 망치가 놓여있던 차고가 잠겨 있지 않았다는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탓에 직접 증거로 보기는 애매해 졌으니까요. 그러니 장화에 묻은 피 정도로 리사를 살인범으로 단정 짓는다는건 무리로 보였습니다. 제가 배심원이었다면,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했을거에요.

그리고 앞서 설명드렸던 결정적 트릭, 즉 키가 큰 피해자 정수리를 때리기 위해 풍선을 이용했다는 트릭도 조금만 생각해봐도 억지스럽습니다. 검시 결과, 피해자 무릎이 깨져 있는걸로 드러나고 이로써 고개를 뒤로 젖힌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부각됩니다. 그러나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정수리를 가격당한다면, 당연히 뒤로 넘어가서 뒷통수가 깨질 겁니다. 무릎을 다칠 이유는 없어요.

위탁 추심업체 ALOFT의 수장 오파리지오가 본듀란트로부터 협박을 받아 그를 죽였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본듀란트의 협박(?)성 편지는 딱히 큰 위협이 되지 않는걸로 보였고, 실제로 오파리지오가 회사를 매각하는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오파리지오가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증언을 끌어낸 뒤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장면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리사가 사건 현장을 잘 빠져나가고, 대부분의 증거를 인멸하는데 성공했다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던건 마찬가지에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니,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겠지만요.

그 외 전개에서 불필요한 부분도 많습니다. 미키 할러의 전처 등 사건 외적언 이야기라던가 미키 할러를 깡패들을 시켜 폭행하는 이야기, 잔챙이 3류 영화 제작자 허브 달의 존재, 신참 변호사 애런슨의 정의에 대한 고민 등은 이야기를 길게 늘일 뿐, 딱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킬링 타임용 펄프 픽션으로는 적당했습니다. 제 2의 페리 메이슨 자리를 차지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러나 책 보다는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영화로 보는게(나온다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2019/11/09

블러디 프로젝트 - 그레임 멕레이 버넷 / 조영학 : 별점 3.5점

블러디 프로젝트 - 6점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69년 8월 10일 아침, 스코틀랜드 북부의 마을 컬두이에서 17세의 소년 로더릭 멕레이가 메켄지 일가를 참혹하게 살해한다. 그는 인버네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중, 자신의 일생과 저지른 범죄를 반추하는 비망록을 작성한다.

우리나라 작가 한강이 수상했던 2016년의 맨부커상 후보작이기도 했다는 범죄물입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손에서 책을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책은 크게 메켄지 일가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로더릭 멕레이의 비망록, 그리고 로더릭 멕레이가 사건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싱클레어 변호사와 검사측의 치열한 싸움이 펼쳐지는 재판 과정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 중 비망록 부분은 정말이지 무섭습니다. 로더릭 멕레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삶에 갇혀 있다는 내용으로,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고, 오히려 빚 때문에 모든걸 잃고 가족은 행정관 메켄지에게 농락당하지만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소년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가족의 붕괴는 시간문제였을거에요. 

이어지는 재판 과정, 법정 다툼에서 여러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 비망록의 진실이 하나 둘 씩 밝혀지는 과정의 흡입력도 대단합니다. 작가의 구성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덕분이지요. 무엇보다도 재판 과정에서 제임스 톰슨 박사에 의해 밝혀지는 범행의 진짜 동기는 그야말로 충격입니다. 메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별 생각없이 저지른 충동적인 범죄가 아니라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매켄지의 딸 플로라를 능욕하는게 목적이었다는 것이지요. 검시 결과와 같은 여러가지 현장 조사 기록과 법정에서 증언으로 밝혀지는 현장의 모습 등도 이러한 진짜 동기를 강하게 뒷받침하고요.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이 장면만큼은 아주 괜찮았어요. 이외에 특별히 법정 미스터리같은 부분은 없습니다만, 교도소 의사인 먼로 박사를 다그치는 싱클레어 변호사의 활약은 꽤 볼만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와중에 밝혀지는 제임스 톰슨 박사의 사고방식은 정말이지 기도 안 차더군요. 범죄가 유전의 산물이고, 하층민의 전유물처럼 여기며 소장농들을 무시하는 지독한 특권 의식에다가 범죄자는 미적 감상이 불가능하다는 등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인데 이런 사람이 당대 최고의 범죄 심리 전문가로 인정받았다니 정말 야만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영적으로 주민들을 이끌고 보호해야 하는 목사마저도 주민들이 야만적이고 소년은 사악하다는 사심을 가감없이 드러내니 말 다했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로더릭 멕레이의 비망록의 문체입니다. 더 날 것 느낌이 났어야 했어요. 아무리 소년의 지능이 보통 이상이며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오래 받거나,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쓴 글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공의 소설을 실제 있었던 사건처럼 서술한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점을 볼 때 원문을 읽지 못했고, 읽을 실력도 없지만 번역하면서 유려하게 매만진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데, 좀 오버스럽기는 해도 차라리 '사투리' 로 막말을 포함하여 번역되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또 아버지 존 멕레이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입니다. 메켄지에게 농락당한건 그렇다 치더라도, 딸이 성폭행당해 임신까지 했는데 침묵한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아무리 무관심, 무저항으로 일관한다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존 멕레이의 존재가 모든 사건을 일으킨 것과 다름이 없는데, 캐릭터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건 분명한 단점이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작품의 가치를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재미와 함께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작가의 필력, 구성력도 나무랄데 없고요. 단점을 약간 언급하기는 했지만 작품의 수준을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소년의 끔찍한 삶이 너무 잔인해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4/05/26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하마모토 다카시 외 / 노경아 : 별점 1.5점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4점
하마모토 다카시 외 지음, 노경아 옮김/레드리버

제목 그대로 결투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는 미시사 서적. 유럽 중심으로 결투사를 개관하고,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발전되었고, 왜 사라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 저자는 근대와 현대의 결투는 '명예 회복을 위한 도전이자 심판'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전쟁에서의 일기토, 검투사들의 싸움은 결투로 볼 수 없다고 하고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결투가 이렇게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게 중세, 근대까지 왕과 귀족의 법을 따르는 '결투 재판'이 주류를 이루게 된 원인이라는 설명은 와 닿았습니다.
결투 재판은 판결의 신뢰성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반면, 기사도가 확산되는 바람에 명예 결투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과정 설명도 그럴싸 했습니다. 기사들은 사회적인 명예가 존재 기반의 하나였으니, 명예 훼손은 그들의 존재를 뒤흔드는 큰 위협이었겠지요. 그래서 당연히 명예 결투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건, 명예 결투의 시작이 이탈리아라는 설입니다. 보통 이런 '귀족'의 '결투'는 프랑스를 떠올리기 쉬운데, 왕의 권위가 막강한 프랑스에서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하네요. 왕이 재판을 하는게 당연하고, 또 그래야 권위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충분히 납득할 만 했어요. 심지어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 추기경이 결투를 없애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일화는 놀라왔습니다. "삼총사"에서 달타냥이 하루에 세 번의 결투 약속을 잡을 정도로 결투가 일반화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배 계급은 정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리슐리외는 눈의 가시였던 총사대 핵심 멤버들을 모두 사형대로 보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왜 그러지 않았는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결국 기사도와 관련이 깊은 결투를 아예 막는건 불가능했기에, 결국 유럽 대륙 전체에 결투 문화가 전파되었습니다. 심지어 북유럽을 넘어 그린란드까지요. 그런데 그린란드 이누이트족은 결투를 사람들 앞에서 노래 대결로 승부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모욕당한 자는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비웃는 노래를 불렀고, 혹시라도 가사를 잊어버리면 친구들이 그 대목을 대신 불러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결투 신청을 받은 자가 위트 넘치는 통렬한 가사로 반격했고요. 한 마디로 래퍼들의 디스 프리스타일 랩 배틀인 셈입니다! 

뒤이어 결투가 사라지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사라진 이유는 당연히 왕들이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왕정 군주들은 앞서 설명드린대로 결투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으며, 이후 계몽 군주들은 생명을 중시했기 때문에 결투를 금지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신사도'가 유행하고 신사들이 품위를 중시하면서 결투를 야만적으로 여긴 탓도 있지만, 왕권이 약화된 대신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며 근대적인 재판 시스템이 갖추어진 덕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의 득세로 장교들이 과거의 귀족처럼 특권을 인정받고, 명예를 중시하는 계급이 되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결투가 만연하였다고 하네요. 확실히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사회가 무식해지는게 사실인것 같습니다.
이런 결투의 전통은 현대에도 약간의 스포츠 형태로 바뀐 '멘주어' 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결론으로 결투의 역사 서술은 마무리됩니다.

이런 결투의 역사적인 큰 흐름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목차가 통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의 결투 설명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일화 중심으로 소개되는 등 글의 형식도 통일되지 못했고요. 여러 저자의 글을 모은 탓으로 여겨지는데, 누군가 통일성있게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 감수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감수할만한데, 더 큰 문제는 결투와 스포츠를 엮는 후반부입니다. 스포츠는 재미, 오락일 뿐입니다. 오락으로서의 스포츠는 고대에서부터 존재했고요. 그런데 두 개가 어떻게 엮인단 말일까요? "헝거 게임"처럼 나라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시합을 벌인다면야 모를까, 현대의 스포츠를 결투라고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언급한다면 칼싸움에서 발전한 펜싱 정도? 하지만 펜싱도 전쟁과 투쟁의 역사를 통해 탄생한 무술일 뿐입니다. 결투라고 보는건 무리에요. 
게다가 앞서 저자는 '심판'의 의미가 없다면 결투가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스포츠는 절대로 결투가 될 수 없어요. '결투와 스포츠는 미적 요소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는 특성을 공유하는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라면서 넘어가는데, 미적,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소가 중요한 모든게 다 표리일체의 관계가 되는걸까요? 어림도 없지요. 심지어 스포츠가 사람들의 투쟁심과 승부욕을 흡수해서 결투가 사라졌다!는 주장은 앞서의 본인들의 설명, 즉 근대화와 사회 분위기, 제도의 변화로 결투가 사라졌다는 설명에도 맞지 않습니다. 나치의 올림픽을 이용한 국민 통합(?)과 고양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고요. 이는 결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책 부제가 '스파르타쿠스는 어쩌다 손흥민이 되었나'인데, 저자들 스스로 검투사들의 싸움은 결투가 아니라고 했고, 축구가 결투일리는 없으니 이 부제는 애초에 이 책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에요. 이 정도면 사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후반부는 완전히 분량 낭비였습니다. 별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10/03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는 참을 수 없다! 법정 추리 소설의 고전 걸작들.

* 이전 소개드렸던 honto의 북트리 서비스에서 추천하는 법정 추리 소설들

법정 추리 소설의 고전 걸작들을 소개해드립니다. 1950~60년대 작품들이지만, 검찰측과 변호측이 증인을 서로 심문하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피고인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다투는 긴박감, 관계자들을 둘러 싼 복잡한 인간관계 등 작품의 핵심 매력들은 시대가 지났어도 전혀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읽을 가치가 충분한 명작들이니, 한 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사건" 오오카 쇼헤이 (국내 미출간) 

19세 소년이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건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법정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일본의 재판 제도와 절차가 상세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치밀한 르포르타쥬로 보이기도 하는, 읽을만한 법정 추리 소설.

"파계 재판" 다카기 아키미쓰 

 일본 법정 추리 소설의 원점이라고 불리우는 걸작. 전편에 걸쳐 법정 장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피고의 무죄를 믿는 변호사와 검사가 엮어내는 진검승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금씩 수수께끼가 밝혀지면서, 여러 복선이 회수되어 클라이막스로 이르는 과정은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외국 추리 소설 번역가로서 활약했던 저자의 데뷔작. 애거서 크리스티의 "검찰측 증인"을 의식하여 쓰여졌으며, 다카기 아키미쓰도 절찬했다는 법정 추리 소설. 과연 변호인 측 증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50년 전에 쓰여졌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복선과 트릭은 지금 읽어도 선명하게 그 가치를 내뿜는다.

"검찰측 증인" 애거서 크리스티 

남편이 살인 혐의로 재판받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게 된 아내. 그 곳에서 아내는 뜻밖의 증언을 하기 시작한다. 원래 희곡으로 쓰여진 작품답게 전편이 대화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으로 마치 연극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도 전해준다. 숨쉴틈없이 휘몰아치며 결말로 향하는 진행으로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걸작.

"유다의 창" 카터 딕슨 '밀실의 거장'으로 유명하지만 법정 추리 소설도 집필하고 있었던 저자가 밀실물과 법정 추리 소설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피고의 무죄 판결을 위해 헨리 메리베일 경이 파헤치는 진실은 무엇인지? 재판을 통해 상세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가설을 내놓고, 이를 입증해 나가는 과정이 훌륭하게 묘사된 본격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