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J. 심슨 사건의 진실 - 권영법 지음/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그간 격조했습니다. 오랫만이네요. 업무 관련 출장과 야구 응원팀의 선전, 월드컵 때문에 통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집어 든 이 책은, 오래되긴 했지만 생중계된 도주극, 이어진 세기의 재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O.J 심슨 사건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책은 심슨이 무죄 선고를 받은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무죄 선고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방대했던 재판 과정을 앞에서부터 하나씩 되짚으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번역서가 아니라 한국의 변호사가 썼다는 점에서 걱정도 컸지만 읽어보니 방대한 자료 조사와 깊이 있는 분석이 상당한 수준이라 마음에 들더군요.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심슨이 범인인데 거액을 들여 드림팀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운 좋게 빠져 나간 것일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검찰 측 증거가 확고한 것이 많았으리라 여겼고요.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니 검찰측 주장이 상당부분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무척 놀랐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심슨의 흔적들, 특히 혈액 검사 결과나 DNA 검사 결과 모두가 오염되거나 왜곡될 수 있었다는 것이 변호인단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검사가 주장한, 질투라는 동기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이혼한지 2년이 지났고 현재 미모의 여자 친구가 있는 심슨이 전처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질투를 한다? 설득력이 낮죠... 그 외에도 마크 퍼만으로 대표되는 백인 수사관들이 심슨이 범인임을 확신한 인물들이었다는 게 증명되고, 심슨이 장갑을 끼며 맞지 않음을 증명하는 등 변호사 측의 승리가 이어지니 무죄 선고를 받은건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아울러 심슨이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민사에서의 패소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형사 재판은 '실재적 진실'을 발견해야 하기에 재판이 굉장히 빡빡해서 검사가 심슨이 유죄임을 입증하지 못해 패했지만, 민사에서는 단지 가능성이 높다 정도만 증명하면 될 정도로 기준이 낮기 때문이라는군요. 이런 정보는 정말이지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재판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진짜 니콜을 살해한 진범이 누구인지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그야말로 한 편의 추리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여러 가설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소개해드리자면, 유명 사립탐정 윌리엄 디어가 처음으로 주장한 심슨의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라는 가설입니다. 요리사인 제이슨은 칼을 사용하는데 능숙했다, 흉기와 유사한 칼을 실제로 소지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니콜에 대한 적개심을 품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제이슨이 일하던 식당 예약을 취소하고 다른 식당을 예약함), 알리바이도 없었다, 심슨의 옷과 신발을 자주 함께 착용하여 범인의 족적으로 밝혀진 고급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알콜 중독 및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등 수많은 이유가 차례대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O.J. 심슨이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와 증언도 이 가설을 통해 설명됩니다. 해당 증언, 증거들은 모두 심슨이 아들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후 아들을 감싸주려고 거창한 도주극을 벌인 뒤 스스로 죄를 뒤집어 쓰고 재판에 임한 것이고요. 이 역시 부성애와 엇나간 아들에 대한 책임감을 생각하면 말이 되어 보입니다.
이외에도 사건의 후일담, 가족들과 변호사와 검사, 증인, 배심원들 등 사건에 연관된 다양한 사람들이 현재 어떻게 지내는지까지 소개해 주기 때문에 그야말로 O.J. 심슨 사건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기억에 남는 건 심슨이 형무소에 가게 된 라스베거스 강도 사건은 사실 심슨에게는 억울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슨은 친구의 꾀임에 넘어가 분실한 것으로 알고 있던 자기 물건을 다시 찾은 것에 불과한데, 사건 후 친구들이 사건 관련 녹음 테이프를 거액에 팔고 사법 거래에 응해 빠져나가는 식으로 심슨의 뒤통수를 친 것이거든요. 의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인간 말종들이라 심슨이 정말로 불쌍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법정극, 추리물, 인간 드라마 등 모든 측면에서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책이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법률과 재판에 대해 조금 어려운 설명 분량이 제법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던 부분이었거든요. 물론 가설을 잘 못 세우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4가지 전략 - 가설이 부당하다는 증거를 찾아보아야 한다, 증거를 객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믿음을 반박하는 증거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과신하면 안된다 - 등과 같은 좋은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분량만 좀 조절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에요.
그리고 사건이 이야기의 진행이 시간 순서가 아니라 뒤죽박죽인 것도 읽기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도판이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은 법정물 논픽션스러운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효과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추천작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법, 재판에 대해 많은 걸 배운 듯 합니다. 예컨데 형사 재판에서는 목격 증인이 있으면 이러한 직접 증인 대신 그 말을 들은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면 안되는게 원칙이라고 합니다. 최근 경기도 지사 관련 트위터에서 이슈가 된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배심원들은 재판 초기에 결론을 내린다는 등 관련된 정보들도 인상적이었고요.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3점. 사건과 법정 다툼을 다룬 책, 논픽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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