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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4

가을비 이야기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1.5점

가을비 이야기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비채

'현대 호러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 작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이 커서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인간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공포를 극대화한 기담집이다.
호러에 미스터리 기법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 이후 일본 호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일인자 자리에 오른 기시 유스케가,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가지 공포담은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읽는 이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서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는 책 소갯글을 보고 집어든 작품.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소갯글에서는 공포, 호러 소설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나 의외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작가 명성만 놓고 보면 "엠브리오 기담" 정도의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의 소재, 내용들도 "백조의 노래" 외에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완성도도 그닥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단편들 - "도깨비불의 집", "미스터리 클락" - 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도 역시나군요. 앞으로 기시 유스케 단편은 읽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귀의 논"

아오타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는 못하는 아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미하루는 그 말을 들은 뒤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미하루와 아오타가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미하루가 고백을 끝낸 아오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무섭지도 않고 의외의 반전도 없는 짤막한 소품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가"

작가 아오야마는 자다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이동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병원 의사는 마쓰나가에게 '푸가(해리성 전주)'라는 말을 꺼냈다. 자살 명소 수해로 이동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오야마는 영능력자에게 부탁해 침실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그러나 결계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는 침실에서 대량의 물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집자 마쓰나미는 얼마 후, 아오야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안으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떠오르는 작품. 에메의 작품에서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약의 부작용으로 벽에 갇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면서 순간 이동을 하던 주인공이 결계 탓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로 이동을 못해서 중간에 갇힌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짧았던 에메의 작품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아오야마 시점의 순간 이동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너무 길거든요. 읽다보면 비슷한 내용이라 지루해집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거미를 테마로 한 결계 등의 이야기도 지나치게 장황하며, 거미 꿈은 정말이지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반면 순간 이동에 대한 설명은 제목의 '푸가' 뿐인데 극히 부족하고요. 분량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반전 소재로 사용된 물침대는 너무 생뚱맞았어요. 물침대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침구는 아니니까요. 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억지 발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다는 함께 자던 동거인 아키 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게 더 호러블하지 않았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백조의 노래"

인기없는 소설가 오니시 레이분은 대부호 사가로부터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는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창법으로 부른 레코드를 남겼다.

탐정 로스의 보고를 통해, 미쓰코 존스의 창법은 사막에서 노래하다가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라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병이 성대를 찢어 얇게 만들고, 분할 진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환상이 깨진 사가에게 로스는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했고, 레이분은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콘덴서 스피커는 놀라운 기술이지만 저음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거나, 스테레오 녹음은 3D 영화 같아서 진기함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가지 내용은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소개된 노래들 - 메리 캠프가 무른 마농 레스코의 '홀로 외로이 버려져', 미쓰코 존스가 부른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고요. (아래와 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창법의 비결이 불치의 풍토병이라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의 비법이 제어할 수 없는 손가락 떨림이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궁극의 비법을 손에 넣었지만, 짧은 영광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앞서의 오디오, 음악에 대한 상세 설명에 비하면, 풍토병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반전을 위한 억지 설정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쿠리 상"

2003년 11월 28일, 대형 사고를 쳐서 자살을 결심한 열두 살 다쿠야에게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루토가 함께 죽자며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주술은 소원을 빈 네 명 중 세 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했다. 다쿠야와 하루토는 친구 가에데와 신이치를 끌어들여 고쿠리상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고, 숨을 거둔 하루토 외 세 명은 고쿠리상의 조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2일, 성공한 변호사가 된 다쿠야 앞에 주간지 기자 노구치가 나타나 18년 전 하루토의 돌연사, 가에데의 집 전소와 가족의 죽음 및 다쿠야가 저질렀던 사건을 언급하고 돈을 요구했다. 충동적으로 노구치를 살해하고 다급해진 다쿠야는 다시 한 번 고쿠리상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가에데와 신이치 등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쓰타나나누마로 가라는 답을 받은 다쿠야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주술이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쿠야는 쓰타나나누마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은 명확한 주술의 조건과 이를 불러낸 존재에 의한 저주와 공포가 필수입니다. 고전 걸작인 스즈키 코지의 "링"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은 조건, 목적은 물론 주술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설명과 주술 결과 모두 애매하게 묘사되어 혼란스럽고,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안락사를 선사하는 주술이었다면, 18년 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걸까요? 

마지막 순간에 이미 사망한 하루토와의 대화도 무슨 맥락으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쓰타나나누마의 경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도 뭐지 싶어요. 아오모리 현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2013/12/30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점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 4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검은숲

총 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초기 작품집.

"점성술 살인사건"은 일본에 추리문학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걸작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미타라이라는 탐정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후 작품들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엘러리 퀸과 반 다인의 뒤를 잇는 잘난척 덩어리에다가, 뭐 하나 못하는 게 없는 잘난 인물로 묘사되니 마음에 들래야 들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나 "마신유희"에서는 그 정점을 찍었었죠.

다행히 이 책 수록작들은 위의 단점이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바로 직후에 이어지는 초기작인 덕분이겠지요. 신본격 시대를 연 작가답게 고전적인 퍼즐 미스터리 스타일 정통 본격 추리물들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네 편의 이야기 모두 장르가 조금씩 다른 것도 재미를 더합니다. 첫 번째 작품은 전형적인 알리바이 깨트리기가 밀실 살인과 결합되어 있으며, 두 번째 작품은 일종의 순간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는 붉은 머리 클럽이 연상되는 일종의 사기극을 그린 소품이고 네 번째는 유괴극이거든요.

또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의 화자가 이시오카가 아니라는 것도 특이한 점이에요. 물론 두 번째 작품은 화자가 다르다고 해서 딱히 달라진건 없습니다. 미타라이의 경이적인 재즈기타 실력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고요. 반면 세 번째 작품은 사건이 워낙에 독특하고, 화자의 버릇이 사건의 핵심 중 하나라는 점에서 화자 변경이 꽤 효과적으로 사용된 편입니다.

결론내리자면, 작품마다 편차가 크고 불필요한 설정, 묘사가 많기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만, 최악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작품 "질주하는 사자"만 빠졌어도 별점 0.5점은 더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비교적 괜찮고, 무엇보다도 트릭만큼은 신본격의 장을 연 작가의 명성에 어울립니다. 본격 퍼즐 미스터리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장르소설의 명가 "검은숲"에서 출간된 책답게 장정과 디자인도 괜찮습니다.

덧붙여, 작가의 후기에서 미타라이 작품의 영상화를 반대하는 이유가 전형적인 일본인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구현하고 싶었다는 캐릭터론이 펼쳐지는데, 전형적인 일본인에 대한 설명은 수긍이 가지만 미타라이라는 캐릭터가 그것에 반하는 캐릭터라는 것에는 절대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을 싫어하고, 높은 사람을 싫어하는 잘난척하는 독설가에다가 사람의 본성에 관심이 많으며, 음악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는 점에서 아무리 봐도 "셜록 홈즈"의 판박이에 불과하니까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자물쇠"

"점성술 살인사건"에 등장했던 다케코시 형사가 미타라이에게 미궁의 밀실 살인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 내용으로, "점성술 살인사건" 바로 직후에 이어지는 초기작입니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순간 이동 트릭(정체되는 도로 위 트럭 짐칸에 있던 범인이 몰래 빠져나와 지하철로 이동하여 범행을 저지르고 다시 복귀!) 만큼은 아주 좋았습니다. 과연 짐칸을 향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을지는 의심스럽지만, 습관처럼 계속된 출근 방법이라는 전제가 있으니 딱히 문제라 할 수 없겠지요. 미타라이가 의외의 자상한 면을 드러내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밀실 트릭 자체는 별게 아니고, 초반 3단 숫자 자물쇠의 조합에 대한 경우의 수가 의도적으로 잘못 전달되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총 3자리의 번호가 1부터 0까지로 조합된다면 누가 생각해도 10*10*10으로 경우의 수는 1,000개밖에 없잖아요.

아울러 범인이 왜 번호를 하나씩 시험해가며 문을 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불가예요.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고 딱히 미궁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보이지 않은 만큼 그냥 힘으로 뜯어도 됐을 텐데 말이죠. 동기 역시 설득력이 약해 아쉽더군요.

때문에 별점은 2점. 숫자 자물쇠 이야기를 빼고 좀 더 짧고 깔끔하게, 설득력 있는 동기로 전개하는 게 좋았을 겁니다.

"질주하는 사자"

재즈 동호인 모임에서 진주목걸이 도난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 구도는 기차에 치인 시체로 발견되는데...

구도가 죽는 순간까지 도저히 기차에 치인 장소로 갈 수 없다는 불가사의를 다룬 작품.

앞선 리뷰에서 말씀드렸듯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일단 트릭부터 설명하자면, 조잡한 장치 트릭입니다. 문제는 작품 내에서의 설명으로는 독자가 떠올리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T자형으로 이루어진 맨션에 대해 작품 내에서 계속 장황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지만요.

범행의 동기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몇 명 없는 모임에서 보석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면 용의선상에 오를 건 분명한데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것도 황당하지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모임에서 목을 졸라 살해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돼지요.

작품과는 무관한 미타라이의 세계급 재즈기타 실력 설정 역시 짜증나는 요소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천재성의 묘사가 캐릭터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전혀 점수를 주고 싶지 않아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준 부분은 진주목걸이 절도와 관련된 마술 트릭과 마지막 숫자 "7"에 대한 가벼운 농담 같은 반전뿐입니다.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

화자인 세키네가 부장에게 자기가 겪은 가장 희한한 일을 이야기하는데 옆에 있던 미타라이가 간단하게 그 진상을 풀어 알려주는 이야기.

핵심은 이른바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 회장이라는 젠키치 할아버지의 사기극인데, 미타라이의 추리는 비약이 심해 논리적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젠키치 할아버지의 웅대한 이상이 너무 맛깔나게 묘사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추리와 트릭은 영 아니더라도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라는 발상에 점수를 줍니다. 희한한 일, 기이한 조직, 그리고 예상치 못한 범죄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붉은 머리 클럽"에 대한 오마주로 보이기도 하네요.

"그리스 개"

그리스의 일본인 해상왕 아들이 유괴된 사건을 다루는 전형적인 유괴극인데, 유괴극의 가장 큰 숙제인 몸값 전달에 대한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등장하는 암호 트릭도 꽤 기발했고요. 초반의 타코야키 가게 도난 사건까지 엮어 전개하는 짜임새도 괜찮았습니다.

범인이 누군지 피해자가 눈치챈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거 아닌가라는 문제, 그리고 "개"에 대해 지나치게 비중을 둔 전개는 약간 의아하지만 평작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4/08/03

타이거! 타이거! - 알프레드 베스터 / 최용준 : 별점 2.5점

타이거! 타이거! - 6점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이 책은 SF 매니아인 형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그간 어려운 책들로 머리가 지친터라 쉽게 쉽게 한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있던 참에 꽤 재미있다고 해서 주저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존트라 불리는 텔레포트가 일반화되어 혼란한 25세기, 무기력한 삼류 인생인 걸리버 포일은 난파된 우주선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보가호'에게 복수하기 위해 분노하며 복수에 모든 것을 바친다. 우여곡절끝에 얼굴에 "방랑자"라는 문신까지 새겨진 후 지구에 복귀한 포일은 자기가 난파되었던 우주선에 실려있는 금괴를 탈취하여 "포마일"이라는 거부로 변신하여 "보가호"의 승무원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래 자신의 배에 실려있었던 엄청난 폭발물과 포일의 "우주 존트"의 비밀이 얽히며 사건은 점차 우주적인 범위까지 확대된다.....

우선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본이 된 주인공 걸리버 포일의 "복수" 이야기가 드라마 자체로서 굉장히 멋질 뿐더러, "존트"라는 순간이동의 개념을 구체화 시킨 것이나 인체개조, 우주 방랑자, 행성 연합간의 전쟁 등 수많은 매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들은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특히 이 소설의 핵심인 "존트"라는 설정이 굉장히 재미있고 기발합니다. 일종의 순간이동으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설정, 방법은 이동하려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와 좌표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뇌의 전두엽을 절개하면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아직 우주적 범위로의 존트는 성공된 적이 없다는 점 등 디테일과 설정면에서 가히 최고 수준입니다.

작가 알프레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는 이전에 이미 읽어 보았었지만 이 책도 유사한 "광기"를 다루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그만큼 광기에 대한 독특한 묘사는 대단하며, 후반부의 포일의 초월의 경지를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묘사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번역한 번역도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선전하는 것 처럼 "몽테크리스토 백작"류의 복수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더군요. 뭐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비슷한 수준으로 전개되지만 후반부에서부터 포일의 "우주 존트"가 구체화 되며 범 우주적인 초월적 경지까지 이야기가 확대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초월적 경지보다는 단순한 복수극으로 끝나는게 더 제 취향에 어울렸을것 같은데 아쉽더군요. 항상 SF는 너무 어렵게 끝나서 문제랄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조금 어려운 후반부 덕에 약간 감점하지만 작가의 이력이 말해주듯 영화적, 만화적 상상력이 대단하여 읽는 재미는 충분히 전해주는 것은 분명한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 분들께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PS : 예전에 만화가 고유성씨 께서 이 작품을 만화화 하다가 여러 사정에 의해 중간에 중단하셨다고 하더군요. 만화 쪽이 더 어울렸을 내용임에는 분명하지만 고유성씨도 후반부의 초월적(?) 부분 묘사에 부담을 느끼시고 그만 두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간혹 듭니다.

2013/09/21

순서의 문제 - 도진기 : 별점 2.5점 (그러나 강추!)

순서의 문제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현직 판사이시기도 한 추리소설가 도진기씨의 단편소설. 한국 작가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변호사 고진 시리즈 장편(이거라던가 이거)은 트릭은 인상적이었지만 전개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워낙에 트릭이 뛰어난 작가라서, 차라리 트릭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단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이 책은 그러한 저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작품별 편차가 커서 평균이 깎였지만, 뛰어난 작품은 한국 추리문학 역사에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한국 추리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순서의 문제"

대리운전을 하는 주인공 진구에게 한 손님이 원주 터미널에서 전화 한 통만 걸어주면 50만 원을 준다는 알바를 제의했다. 의뢰를 수락한 진구는 알바의 이면에 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서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전 법대생이자 철저한 이성주의자인 주인공 김진구가 첫 등장하여 거액이 얽힌 범죄의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협박하는 이야기. 안티히어로 스타일의 주인공 캐릭터가 독특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서 단순히 원주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과 집주소, 주변 탐문에서 시작하는 개인적인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전개됩니다. 강현의 동기인 이른바 '순서의 문제'가 적절하게 사용된 것도 마음에 들고요. 트릭도 순간이동 트릭을 두 가지나 복합해서 사용하고 있어서 풍성합니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시체를 이동시키는 방법의 설득력이 약간 낮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강현을 협박하는 장면이 작위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단점은 사소할 뿐이며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대모산은 너무 멀다"

진구가 여자친구 혜미가 목격한 지하철의 수상한 남자의 행적을 가지고 순수한 추리를 펼쳐보이는 안락의자 탐정물.

추리적으로 논리정연하고 그럴듯하기는 하나 정말로 그것이 사실로 맞아떨어졌다는 것은 좀 억지스럽더군요. 자기 얼굴이 할퀴었다고 손을 잘라서 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정말이지 몇 명이나 될까요? 그것도 잘 모르는 산으로 버리러 간다... 솔직히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진구의 추리는 그럴듯하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추피추의 꿈"

진구가 혜미와의 마추피추 여행에서 비행기를 놓친 뒤의 이야기를 다룬 일상계.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려우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결국 목적지는 같다는 콜럼버스적인 마인드가 돋보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티켓다방의 죽음"

해미의 외숙부가 출장 중 여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결과는 자살. 그러나 보험금 문제가 있어서 혜미의 부탁과 보험금의 20%를 조건으로 진구는 타살 여부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진구의 목적은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라 외숙부 양문요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걸 경찰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라는 설정부터가 독특합니다. 

진구가 벌이는 여러 가지 작전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흉기 집중 효과를 응용하여 목격자인 다방아가씨 유현아에게 다른 사람 사진을 보여주어 증언을 헛갈리게 하고, 외숙부 양문요가 첫 자살을 시도할 때 1/3 남아있던 청산가리가 시체 발견 시에는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타살설을 주장하는 식인데 경찰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럴 듯 했습니다.

결국 노력이 벽에 부딪힌 뒤 우연히 얻은 단서를 바탕으로 진상에 접근하는 과정과 보온병을 이용한 작전 역시 탁월했고요.

단점이라면 여관주인 여춘길이 5만 원권을 1만 원권으로 바꾸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우연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춘길 방에 침입했을 때 관련된 단서를 발견했다는 식으로 전개했더라면 더 깔끔했을 것 같습니다. 여춘길이 1만 원권으로 바꾼 동기도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지폐에 청산가리를 묻힐 생각을 하느니 돈을 숨긴 장소에 숨어 있다가 미행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 행동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마지막에 첫 등장에 보여준 지폐를 이용하여 극적 반전과 함께 독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결말도 아주 좋은,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신 노란방의 비밀"

살인범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한 소녀 은비의 증언은 그곳이 노란색 방이었다는 것.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의 집은 노란색과는 거리가 멀어 경찰 수사가 난항을 겪는데...

공감각을 가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소리와 시각의 치환을 다룬 소품. 제목은 거창하나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벌이는 느낌이라 딱히 와닿지는 않았어요. 외려 진구의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더 재미있었던, 쉬어가는 작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뮤즈의 계시"

진구, 해미는 살인 사건의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해미의 직장 동료 김주희와 그의 동거남 하성남의 집들이 파티 때, 하성남의 아내 선혜영이 살해된 사건 재판이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시체를 옮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구, 해미와 함께 있으면서 살인을 저질렀는지? 라는 두 가지 수수께끼를 만든 트릭이 돋보입니다. 특별한 곳에 위치한 집과 그 집의 구조도를 잘 이용한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이 이용되었는데 아주 괜찮았거든요. 결정적 단서가 되는 USB 음악 재생 아이디어는 정말 기가 막혔고요. 트릭의 정교함과 아이디어는 고전 황금기 걸작에 비교될 만 합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해서 팬에게 서비스하는 모습도 좋았고, 작가의 경험을 잘 살린 법정 장면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과연 살해 현장에서 시체를 옮겼다는 것을 현대 법의학이 알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생기기는 하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최고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환기통"

보석 도둑을 쫓던 경비원이 살해된 사건의 진상을 다룬 소품.

진구와 해미가 처음 만나게 된 당시에 벌어졌던 사건을 그리고 있는데 트릭은 실제 사건 현장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되었더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에 그다지 눈여겨볼 건 없습니다.

오히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과정이라던가(어차피 체포되었으니까), 환기통 안에서 구멍을 내었는데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어색한 부분이 거슬릴 뿐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3/02/12

불과 해류 - 마쓰모토 세이초 / 이하윤 : 별점 2.5점

불과 해류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하윤 옮김/해문출판사

표제작을 포함하여 총 4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입니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단편집은 이미 미야베 미유키가 엮은 대작 단편집으로 정점을 찍었다 생각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 읽은 "미스터리의 계보"가 괜찮아서 집어들게 되었네요.

표제작인 "불과 해류"는 다이몬지로 유명한 교토와 이즈 7도를 연결하는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기발한 트릭은 아니지만 쿠마시로 - 아즈마 형사 컴비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철벽의 알리바이가 서서히 벗겨지는 묘미는 일품입니다. 교토의 다이몬지, 미나즈루 곶, 미야케지마 등 다양한 곳에서 수사가 진행되는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주는 것도 좋았고요.

그러나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건 밝혀냈으나, 결국 결정적 증거는 잡지 못하고 진상은 범인 시바무라의 자살과 유서를 통해 증명된다는 결말은 개운치 못했습니다. 철벽의 알리바이를 만들다 보니 생긴 문제라는 점에서 "점과 선"이 떠오릅니다. 결말마저도 비슷하니까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 알리바이를 파헤치고 결말에 이르는 과정의 깔끔함은 모리무라 세이이치 쪽이 한 수 위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증언의 숲"은 르포 느낌이 나는 건조한 전개의 작품으로 경찰이 조작한 증거로 형을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은 없고 2차대전 종전 전을 무대로, 당시 경찰의 무식한 수사와 조작이 눈에 띈 정도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종족동맹"은 무식한 촌부의 국선변호를 하면서 무죄평결을 이끌어내지만, 이후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알리바이 + 순간이동 트릭이 핵심인데, 진상이 밝혀지면서 개미지옥보다 더한 수렁에 빠져드는 주인공의 심리가 드러나는 결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찌릿찌릿할 정도였어요.
렌페이의 순간이동을 증명할 만한 공정한 묘사가 없고, 펜던트에 대해서는 주인공의 의견이 더 설득력이 높다는 점 등의 단점은 있지만 평균 이상은 충분히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은 다른 단편집에서 접했던 작품으로 상세한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결론적으로 평균 별점은 2.5점 정도? 아주 뛰어나지 않으나 거장의 편린은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어요. "종족동맹" 한 편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히 하니까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를 아직 접하지 못하셨다면, 이 책보다는 미야베 미유키가 엮은 단편집부터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6/11/05

프레스티지(Prestige) - 크리스토퍼 놀란 (2006) : 별점 4점

19세기 말 영국 런던의 두 마법사, "그레이트 단톤" 앤지어와 "교수" 보든은 과거 수행시절 보든의 실수로 인해 앤지어의 아내가 죽은 뒤 원수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마술쇼를 훼방놓으며 대결하던 중, 앤지어는 보든이 새로 개발한 "순간 이동" 마술의 비법을 파헤치지 못하자 마술 장치 개발자 커터의 도움으로 보다 화려한 순간이동 마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보든의 계략으로 쇼가 실패한 뒤, 보든을 협박하여 그의 비법의 단서를 찾은 앤지어는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천재 과학자 테슬라를 만나 보든의 마술 장치를 재현해 줄 것을 부탁한 앤지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보든의 계략이었다는걸 알게된 앤지어는 좌절하고 마는데.... 

두 마술사의 잔혹하며 처절한, 어떻게 본다면 유치하기까지한 대결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대결의 핵심은 서로의 "마술"의 트릭(여기서는 비법)을 밝혀 나가는 것이고요. 그런데 이 트릭을 밝히려는 대결이 워낙 흥미진진했고, 짜임새 있는 복선으로 전개되어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좀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메멘토"의 감독답게 시간축을 교묘하게 흔들어서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아울러 마술사들이 각각 서로에게 한방 먹는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그래서 뻔한 이야기를 복잡하면서도 색다르게 만드는 편집도 탁월했습니다. 상영시간도 제법 긴데 이렇게 편집의 묘를 잘 살린 덕분에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지며, 긴장을 조이고 푸는 맛도 빼어납니다.

둘 사이의 두뇌게임도 치밀했고, 마술의 트릭을 밝히는 과정 역시 뒷부분에서 관객이 거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면서 제대로 단서를 전달해줄 정도로 추리의 묘가 잘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트릭은 좀 허황되지만, 추리 스릴러 물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이에요. 반전의 맛도 살아있고요. 물론 정통파는 아니라 약간 사도에 가까와서 취향을 좀 탈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각적으로도 당시의 고풍스러운 시대상황을 잘 살리면서도 마술쇼의 화려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도록 촬영되어서 풍성합니다. 마술 소도구와 여러 "비법" 들에 대한 묘사 역시 재미가 넘치고요. 캐스팅도 완벽해서 보든 역의 크리스챤 베일은 예의 사악하면서도 냉정한 연기를 잘 보여주며, 마이클 케인의 묵직한 연기도 좋습니다. 단 휴 잭맨의 앤지어 연기는 좋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울버린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 약간 아쉽더군요. 아울러 스칼렛 요한슨은 정말 조연 2 정도의 비중이라 왜 포스터 한 가운데에 떡하니 나와 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슨 팬이라면 실망하실수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수조들을 불빛이 관통해서 안에 들어있는 엔지어의 시체를 전부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쿵 들긴 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부분은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흠 잡을데 없는, 전체적으로 크게 무리없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원작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요. 책을 사기는 좀 부담되니 집에 있는 니콜라 테슬라 전기나 일단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7/04/14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도진기 : 별점 2.5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 6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고진은 법정에 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남편을 죽인 혐의를 받는 미모의 중년 여인 김명진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명진은 20년 전 죽은 남편 신창순, 그리고 남궁현, 임의재, 한연우 네 명에게서 구애를 받았으나, 장난스러운 내기 끝에 신창순과 결혼했었다. 과거의 남자 세 명과 김명진의 동생 김해나는 그녀의 무죄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움에 나섰다...

현직 판사이자 소설가로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 해도 무방할 도진기의 장편으로 시리즈 캐릭터인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합니다. 

제가 읽었던 이전의 '어둠의 변호사'와 가장 큰 차이점은 '법정에 선 고진'의 활약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법정 미스터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작품 속에서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재판을 통해 피고인을 유죄로 만드는데 정평이 난 실력자 조현철 검사와 불꽃튀는 대결을 벌이거든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서로 배심원을 설득하고, 재판을 유리하게 이끄는 배틀이 아주 볼 만 합니다. 조현철 검사가 은근슬쩍 끼워넣었던 거짓말 탐지기 조사 결과를 뒤집는 변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말싸움도 현란하기 그지 없고요. 작가가 현직 판사이기에 쓸 수 있었던 묘사들,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재판 속행과 보석 신청 등 모든 상세한 설정들이 그러합니다. 이 정도면 해외 유수의 법정 미스터리물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만 하지 않나 싶을 정도에요.

법정에서의 대결이 중심이라서 이전 다른 작품들처럼 수많은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딱 한 가지 등장하는 트릭의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신창순 살해에 사용된 알리바이를 만드는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체가 발견된 이유와 범인 임의재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역업자라는걸 잘 활용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트릭 덕분에 "하우더닛" 물로서의 진가도 발휘됩니다. 결국 유럽에 있는 사람만 가능한 트릭이기에 범인이 임의재다!는 건데 꽤 설득력 있었어요.

지고지순한 일종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6명의 청춘들이 처음 만난게 격동의 1990년대라 더 와 닿았고요. 저 역시 1990년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지요. 이 사랑의 중심에 놓여있는, 작가의 이상형을 투영해 놓은 듯한 김명진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팜므파탈과 정 반대인, 순진무구한 천사같은 캐릭터를 잘 그려 놓았거든요. 작중 한연우의 표현을 빌자면, 오디오 기기에 취미를 갖는 사람들에게 마크 레빈슨 같은 존재랄까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우선 작위적 장치들이 많이 거슬립니다. 너무 '소설'을 의식한 티가 물씬 났어요. 신창순이 아내를 학대하던 인간 쓰레기였다는 중요 정보를 나중에 밝히는게 대표적입니다. 살인의 가장 큰 동기인데도 불구하고 변론을 맡은 변호사에게 그러한 정보를 숨긴건 말도 안돼지요. 임의재가 차용증을 가지고 김명진을 겁박하는 장면 역시 나중에 고진과 이우현의 인기척을 느끼고 쇼를 했다고 밝혀지지만 억지스러웠고요. 독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뿐, 현실적이지 않은 묘사였습니다. 그 외 많은 부분에서 작가가 한연우를 범인이라고 유도하는 것도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트릭도 순간 이동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디테일은 그닥입니다. 1주일에 걸친 운송기간 동안 사후 경직으로 뻣뻣해진 시체를 어떻게 무마했을지가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상당한 재산가로 묘사되는 임의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현지 조사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강도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언급되는데, 누군가를 고용하는게 훨씬 쉽고 간편했을겁니다. 중국인들이 당한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처리되었을 확률도 높고요.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기가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아무리 사랑했다 하더라도 20년이 흘렀습니다. 과거가 다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백야행" 시대에나 먹혔음직한, 자신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여자를 위한 순애보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지 오래에요. 그나마 "백야행"은 현재진행형이기나 했지, 20년 후에도 그렇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달리기 시합에 이어서 김명진이 술을 먹은 후 강제로 관계를 가진 탓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는 설정도 영 와닿지 않더군요. 1990년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덧붙이자면 심장 판막증이 있는 임의재가 장거리에 도전할 만큼 김명진을 사랑했다는 것도 작위적이라 별로였어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랑했다면 중간에 포기하면 안되는거잖아요? 차라리 뛰다가 쓰러져 기절이라도 하던가..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대 착오적인 순애보는 거슬리며, 작위적인 요소가 많아 감점하지만 미녀와 청춘,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고 법정 미스터리물로는 평균 이상은 되는 작품입니다.
블라디보스톡과 한국을 오가는 스케일도 크고 법정물로는 충분히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미녀의 존재도 확실하니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네요.

2020/08/02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9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9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추리 만화 시리즈인 Q.E.D 시즌 2도 어느덧 10권 째를 향하네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두 편 모두 강력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편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한 트릭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전 몇 권은 평균 이상은 해주었었는데 조금은 아쉽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음화(陰火)" 

유령이 나온다는 집을 돌며 심령 현상에 대해 취재한다는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의 촬영을 위해, 예능인과 배우, 영매사와 프로듀서, 작가 겸 촬영까지 5명의 일행은 15년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저택에 모였다.
15년전, 아내 마사코는 머리를 맞아 죽었고, 범인으로 체포된건 남편 토시가미였다. 그는 술에 취한 채 시체 옆에 앉아 있었다. 결국 토시가미는 상해치사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후 자살했다. 그리고 그의 원령이 '음화', 즉 사람의 혼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각자 카메라를 들고 저택을 돌아다니던 멤버들은 음화, 피웅덩이를 목격했다. 이윽고 프로듀서와 영매사가 폭행당해 쓰러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영매사 하코네의 카메라에 선명한 '음화'가 찍혀 있었다...

유령 저택의 음화에 얽힌 15년 전 살인 사건과, 현재의 폭행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내는 내용으로, 토마가 이전 작품에서의 활약으로 사건에 휘말린다는 설정이 인상적입니다. 예능인 도바 쥬리가 2권에 등장했던 "벌거벗은 임금님"의 유바리와 동료라서, 그를 통해 가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든요. 인기없는 예능인이 방송에 목숨거는 절박함은 이해되지만 애초에 도와줄 이유는 없지요. C.M.B의 신라처럼 수수께끼를 풀 때마다 뭐라도 받는다면야 모르겠지만요. 토마가 사건에 나서는걸 귀찮아했던건 다 이유가 있던거에요.

하여튼, 2명이 폭행당해 방송이 중지되었지만, 그 수수께끼만 풀면 방송이 가능하니 도와달라는 도바의 부탁으로 가나는 사건 조사에 나서게 됩니다. 조사 결과, 방송 프로듀서 토고는 15년전 사건은 범인 토시가미가 누명을 쓴 원죄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부부는 야구에 취미가 전혀 없었는데 흉기로 야구 배트가 사용된 건, 누군가 가지고 왔기 때문이라는거지요. 그러나 검찰청에서는 반대로, 토시가미가 범인이 분명해서 원죄 사건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모든 증거가 확실해서 죽일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만 쟁점일 뿐이며, 배트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다면서요. 노부부가 호신용으로 구입할 수 있지 않냐고 되묻는데, 타당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토고 프로듀서가 사건 조사를 위해 찾아왔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토고는 이 사건이 원죄 사건이 아니라는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왜 가나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심지어 토고는 영매사 하코네가 학창 시절 직접 재판을 방청해서 토시가미가 자백하는걸 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말이지요.

원죄도 없으니 유령이 나올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유령 소동이 일어났다면? 원죄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널리 알리고 싶은 프로듀서의 조작인게 당연합니다. 프로듀서이니 저택에 미리 이런저런 장치를 하는 것도 쉬웠을테고요. 전개만 보면 프로듀서의 범행이 명확한데, 이를 잘 감추는 전개는 나쁘지 않았으며 프로듀서가 고교 시절, 선배였던 토시가미를 숭배했기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도 그럴듯했습니다. 토고 프로듀서가 자기 확신에 가득차 모두를 비웃지만, 가나가 한 마디로 뭉개버리고 경찰에 넘기는 마지막 장면도 나름 통쾌하고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트릭인, "5명의 출연자 모두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몰래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는 그냥 교묘하게 시간을 맞춰 범인이 피해자의 카메라와 바꿔친게 전부라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나중에 편집 등으로 손을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딱 들어맞게, 오차없이 맞출 수 있었을거라 생각되지도 않네요. 또 '원죄 사건'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면, 구태여 폭행 사건을 일으켜 방송을 막을 이유도 없습니다. 방송되어 화제가 되는데, 방송 중단으로 SNS에서 화제가 되는 것 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테니까요. 또 이 정도라면 토마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15년 전 원죄 사건은 합리적이지만 지나치게 길었고, 본편 핵심 트릭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덧붙이자면, 가나와 함께 조사해 온 내용을 듣던 토마가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유령 '같은 걸' 봤다', '오래전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다'' 는 말 만으로는 확실한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답을 해 줄 수 없다는 말이지요. 냉정한 토마를 상징할 뿐더러, 실제로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와 닿습니다. 최대한 철저하게, 확실하게 조사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져오는게 우선이지요. 단지 추리 만화가 아니라 일상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규칙일거에요.

"아름다운 그림"

러시아 마피아 두목 잉크가 부하의 렌트카 트렁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잉크는 버밀리온 가의 당주 포크스에게 빌려주었던 돈을 받은 뒤 저택에서 하루 머물렀었다. 그리고 돈과 함께 사라진 후,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런던의 본 경부는 손님으로 찾아온 토마, 가나와 함께 저택을 방문하여 사건 조사에 나서는데...

왜 잉크가 살해되었는지, 어떻게 그가 살해되는 시간에 모두가 알리바이가 있었는지, 어떻게 사체를 렌트카 트렁크에 넣었는지, 돈은 어디로 갔는지 수수께끼가 많은데, 이를 차분히 풀어내는 본격 추리물로 알리바이와 시체 순간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빼어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트릭이 현실적이지 않은 탓입니다. 백작 부인이 일에 몰두할 때, 시계의 시간을 조작하여 시간을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알리바이 트릭부터 이상합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시계관의 살인사건"과 비슷하지만, 그 만큼의 설득력은 없어요. 편지를 여러 통 쓰는 정도의 일을 하는데, 한 시간 시간을 앞당겨 놓은걸 눈치채지 못한다? 납득하기 어렵지요. 편지를 쓰다가 단 한 번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약점이고요. 차라리 집사이자 진범인 우드 브라운이 백작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시계 조작 트릭을 언급했을 뿐, 두 명 모두 입을 맞춘 공범이라는게 더 나은 설명이었을 겁니다.

그나마 순간이동 트릭은 좀 낫습니다. 렌트카라 번호는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시체가 들어 있는 자동차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인데 그럴듯하거든요. 똑같이 생긴 차를 빌려 시체를 실어놓고, 대리 주차하는 사람에게 바꿔치기 한 손님의 자동차 열쇠를 주면, 손님도 바꿔치기한 차를 타고 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똑같은 차종이라도 인테리어나 기타 세세한게 같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저도 제주도 등에서 렌트카를 몇 번 이용해 보았었는데, 같은 차종이라도 비닐을 뜯지 않았던 차를 한 대 몰아보았던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영국의 귀족 문화를 숭배하는 나이 든 집사가, 저택을 지키기 위해 사악한 채권자를 죽이고, 저택에 오랜 시간 동안 걸려있었지만 채무 때문에 팔아야 했던 그림을 다시 구입하려고한 동기만큼은 나쁘지 않았어요.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과거에는 얽매이는 모습은 안타까왔으며, 몰락해 가는 와중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는 귀족이라는 멸종 직전의 존재를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레베카"와 같이 묵직한 고전 걸작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그러나 최소 반 세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먹힐 이야기는 아니긴 합니다. 귀족 문화와 저택, 전통을 사랑하는 오래된 집사는 지금은 이미 다 죽어버렸을테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물이라는건 좋은데, 트릭과 동기 모두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아서 감점합니다.

2010/11/12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 구지라 도이치로 / 박지현 : 별점 1.5점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 4점
구지라 도이치로 지음, 박지현 옮김/살림

시부야에 있는 니혼슈 전문 바 '숲으로 통하는 길'. 그곳에서 바의 마스터, 경시청 경부 구도, 술을 못하는 범죄 심리학자 야마우치는 자칭 '야쿠도시' 트리오를 이루며 다양한 화제로 수다를 나누다가, 매주 금요일만 나타나는 사쿠라가와 하루코라는 미모의 여성과 어울리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듣고 곧바로 해결하는 알리바이 깨기의 명수였다...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과 유사하게, 니혼슈 전문 바를 무대로 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 자체는 매우 고전적이지만, 니혼슈 바라는 공간적 특징을 살려 각 에피소드마다 맛있는 술과 요리, 안주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다양한 잡학 지식이 펼쳐지는 부분에서는 "심야식당"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추리 요소를 결합한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술과 요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에피소드를 '...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설정하여 사건을 동화와 연결시킨 점도 나름대로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추리소설로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트릭이 단순한 탓이 가장 큽니다. 모든 사건이 알리바이 트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대부분 우연과 운에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몇몇 트릭 장치는 지나치게 유치했고요. 게다가 '알리바이'만 강조될 뿐, 기타 현장 조사나 탐문 수사는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경찰이 보다 철저하게 수사했다면 쉽게 해결될 사건도 많습니다. 즉,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추리 퀴즈'에 가깝습니다.

또한 니혼슈와 다양한 요리뿐만 아니라, TV 드라마, 예능, 광고, 가수 등과 관련된 대화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비중이 크고, 이로 인해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집니다. 이러한 잡학 정보가 캐릭터들의 개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불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작가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동화와 사건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동화 속 숨겨진 진실을 사건과 엮는 방식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기존에 출간된 "어른들을 위한 그림동화"와 같은 책들에서 다루어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이 부족했거든요.

결론적으로, 읽기 쉬운 짧은 에피소드 구성과 술과 안주, 요리에 대한 묘사, 다양한 잡학 지식이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차라리 요리책으로 나왔다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정말 읽을 책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가볍게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아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비밀"

등장 요리: 조개구이, 송이버섯구이 (숯불에 구워 간장으로 양념) 

등장 니혼슈: 아즈마이치 (東一), 하루가스미 (春霞) - 아키타현의 향이 풍부한 다이긴조슈 

사건: 도미사와 이시라는 과자 회사 사장이 자택의 간이 소각로에서 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두 명이지만,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로, 사망 시간을 조작하는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 자체는 유치하고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여러 단서가 모여 결말에 이르는 전개는 비교적 탄탄했습니다. 동화의 내용을 사건과 연결하는 방식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빨간 모자의 비밀"

등장 요리: 날치 튀김 (신선한 미야케지마 산 날치와 참마를 다져 튀긴 요리, 레몬즙과 간장을 곁들여 섭취) 

등장 니혼슈: 사쿠라가와 (桜川) - 도호쿠 남부 지방에서 빚은 과일향이 나는 다이긴조슈

사건: 71세의 할머니와 21세의 손녀딸이 살해당했다. 사인은 모두 교살이며, 용의자는 손녀딸 이즈미의 남자친구 미타무라와 이즈미 계모의 애인인 백수 시모이였다. 그러나 시모이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사망 추정 시각의 공백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범인이 알리바이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즉, 순전히 우연과 경찰의 부주의한 수사로 인해 꼬였을 뿐인거지요. '시각 실인증'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지만,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브레멘 음악대의 비밀"

등장 요리: 돼지고기 소시지 구이

등장 니혼슈: 아즈마이치 (東一), 오토코야마 (男山), 센주시라뵤시 (千壽白拍子) - 야마다니시키 100%를 원료로 시즈오카 효모로 빚은 술. 첫맛은 깨끗하고, 뒷맛은 산뜻함

사건: 악단 '사계'의 멤버 세 명이 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죽었다. 화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기에 사고로 여겨지는데...

"명탐정 코난"에서도 사용된 팩스를 이용한 방화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정교하지 못하고, 기화하는 수면제라는 설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신데렐라의 비밀"

등장 요리: 생굴 (간장과 레몬을 곁들여 섭취)

등장 니혼슈: 시라마유미 (白真弓) - 기후현 히다의 명주

사건: 캐슬 호텔 오너의 아들 조 다쿠야의 애인 요시노 리호코가 절벽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기에 사망 시각은 확실했다. 그런데 유력한 용의자 조 다쿠야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고전적인 시체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경찰 수사가 부실하게 진행되었고, 알리바이 또한 범인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에 의한 것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백설공주의 비밀"

등장 요리: 애플파이, 자오우 산기슭에서 직송된 화이트치즈 (와사비 간장 소스), 샐러드를 곁들인 호로새 훈제구이 (마요네즈 소스)

등장 니혼슈: 시라유키 (白雪) - 효고에서 생산된 명주. 마쓰오 바쇼, 치카마츠 몬자에몬 등이 즐겨 마셨음

사건: 유키코는 계모 도모미로부터 살충제가 든 애플파이를 선물받았다. 그러나 파이를 먹기도 전에 둔기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차로 1시간, 오토바이로 30분이 걸리는 장소를 순간 이동하듯 이동하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연에 의지한 알리바이이며, 범인의 행동이 눈에 띌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점이 문제였습니다. 경찰 수사가 조금만 철저했다면 알리바이 없이도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비밀"

등장 요리: 광어회

등장 니혼슈: 메이보 (明眸) - 아이치현 세토산

사건: 채팅 사이트에서 바람잡이로 활동하던 네코다 마사미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인 가라바는 사망 추정 시간에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공원에서 데이트 중이었다는 알리바이 증명 사진을 경찰에 제출했다.

고전적인 트릭인 '시계 앞에서 찍은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조작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트릭이 조잡하고 유치한 수준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해당 시간대의 탐문 수사만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비밀"

등장 요리: 참치와 방어조림

등장 니혼슈: 히카리 백춘 (白春) 다이긴조 - 과일향이 나는 미주

사건: OL 노하라 유메코가 음독 자살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살 직전까지 중학교 동창인 탤런트 히키다 신지에게 줄 스웨터를 뜨고 있었다.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범죄성이 낮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적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치사량' 개념을 활용한 추리는 흥미로웠지만, 그 외의 요소들은 미흡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의 비밀"

등장요리 : 소 혓바닥 요리, 돼지고기 조림, 수제 로스햄, 흑돼지구이 - 사쓰마 자연 방목 흑돼지 로스를 간장에 절여 숯불에서 구운 것. 양파 슬라이스 곁들임

등장 니혼슈 : 와카다케 (若竹),

고시노칸바이 (越乃寒梅) - 매화의 명소에서 만들어진 니가타의 명주. 지방술 붐의 선두주자.

사건 : 보모 쓰키오리 아즈미 살해사건. 자택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직장 동료인 모토야 마사카즈였다.

경찰의 무능함이 부각되는 조잡한 알리바이 트릭입니다. 용의자 핸드폰 통화 내역이나 주변 탐문 수사만 했더라도 뻔하게 드러났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트릭의 핵심이 변장이라는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차라리 1:1 비율의 사진을 오려 붙였다고 하던가... 점수를 주기 힘든 졸작입니다. 구태여 점수를 주자면 1점입니다.

"꼬마 요정과 구둣방 할아버지의 비밀"

등장요리 : 도오바찜 - 돼지고기를 간장, 미린, 설탕을 넣고 푹 끓여 찐 요리. 슈토 (酒盜) - 토사 명물 가다랭이 젓갈. 기본 안주임.

등장 니혼슈 : 덴구마이 (天狗舞) - 이시카와 현의 저온 장기숙성 준마이슈

사건 : 지난 1년간 시부야를 휘저으며 보석만 훔치는 괴도 S89호가 '요정의 구두'라는 100캐럿 다이아몬드를 훔쳤다. 하루코는 S89호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편'이어야 하지만... S89호의 정체도 어이가 없을 뿐더러 증거라고 들이대는 것들도 설득력이 약해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가 전무합니다. 그냥 마지막 편이라는 의미 이외의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4/03/22

고르고 13 1~30 - 사이토 타카오 : 별점 2.5점

고르고 13 - 30 - 6점
사이토 타카오 지음/아선미디어

"고르고 13에 대해서"

전설의 만화지요. 관련 글을 읽고 포스팅합니다. 제가 읽은건 국내 출간된 전 30권 버젼입니다.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작품 내에서 선정한 베스트 에피소드 모음집이라고 소개되네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냉정하고 나쁜 놈인지는 몰랐는데 대단하더군요. 아이건, 여자건, 노인이건, 죽여야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입니다. 피해자가 불쌍한 경우 - 예를 들어 정말로 선한 사람이지만 악당에게 노려진 상황 - 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뢰를 고르고 13이 수락하면 그냥 죽는거에요. 암살자가 피해자에게 동조해서 악당들을 처단한다는 반전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치료해준 의사의 아버지까지 죽여버리니 말 다했죠.

보통 이런 류의 콘텐츠에서 봤었던, 숙적이 친구가 된다던가, 목숨을 노리던 여자가 사랑에 빠져 애인이 된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비슷했던 게 "스파르타커스"라는 동종 업계 경쟁자와 누가 최고인지 한판 승부를 겨루고, 그 승부가 돈 많은 부자들의 유흥거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죽어가는 스파르타커스의 의뢰를 받아들여 부자들을 처치한다는 것 정도? 아주 약간 스파르타커스와의 유대감이 느껴지는, 그나마 인간적인 에피소드였습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저격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먼치킨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인간 병기에다가 못 하는 게 없는 엘리트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군대를 상대로도 이길 뿐 아니라 거의 웬만한 것(예를 들자면 등산 등)은 해당 분야의 프로를 능가할 정도의 실력자로 묘사되거든요. 특정한 에피소드에서는 과장이 심해서 이게 개그 만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실제로 개그적으로 패러디도 많이 되었죠.

이런 점에서는 "분노의 늑대" 오가미 잇토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암살 따위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기는 전혀 어렵지 않을 텐데, 왜 위험한 삶을 살아가는지 살짝 궁금해집니다.

아울러 추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는데, 고르고 13의 과거를 살짝 밝히며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이 등장하는 "세리자와 일가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 기본적인 현장 검증을 망각한 경찰의 실수가 눈에 거슬리지만, 내용 자체는 실제로도 있었던 사례인 만큼 제법 설득력 있었어요.

주인공 직업에 걸맞게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디테일이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습니다. "자칼의 날" 같은 이 바닥 고전이 떠오를 정도에요. 예를 들어 철통같은 보안으로 이동 중인 중국인 망명자를 암살하는 에피소드의 경우, 고르고 13이 레즈비언 킬러의 정체를 알아낸 뒤 레즈비언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 외에도 널리 알려진 여러 가지 사실들 — 절대로 악수를 하지 않음, 누군가 자신의 뒤에 서면 응징함, 의뢰를 위한 방법 등 — 도 실제로 보니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장기 연재가 될 만한 작품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고, 소문만큼이나 국제 정세를 잘 다루었냐 하면 딱히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한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전설의 작품을 실제로 접한 기쁨도 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3/02/13

미녀 - 렌조 미키히코 / 모세종, 송수진 : 별점 1.5점

미녀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모세종.송수진 옮김/어문학사

80년대에 일세를 풍미했던 렌조 미끼히꼬가 90년대에 발표했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 불륜이 소재라는 점 외의 유사점은 없습니다. 장르로는 추리물인 "밤의 오른편", "밤의 제곱"과 '기묘한 맛' 류인 "야광의 입술", "희극 여배우", "밤의 살갗", 일반적인 드라마에 가까운 "타인들", "모래 유희", "미녀"로 나뉘고요.

추리물부터 소개하자면, 내 남편이 당신 아내와 불륜 중이라고 찾아온 여자와 복수를 위해 불륜을 저지르다가 결국 살인으로 치닫는다는 "밤의 오른편"은 극적인 반전과 더불어 놀라운 진상, 즉 불륜 상대방 커플의 치밀한 계획이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밤의 제곱"은 두 여인이 죽은 사건에서, 각각의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며 번갈아 증언하는 범인의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을 깨는 전통적인 방식의 추리물입니다. 꽤 괜찮았습니다.

"밤의 살갗"은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과거의 불륜을 고백하는 순간의 심리 묘사가 기가 막혔고요.

그러나 나머지 작품들은 그냥저냥이었어요. 자연스러운 인공미를 지니는 아내에게 끝까지 지배당하는 성형외과 의사를 그린 "야광의 입술"은 결말이 예상 가능했고, 8명의 독백을 통해 복잡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희극 여배우"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드라마 작품들도 현실적이면서도 나름 뼈가 있는 표제작 "미녀"를 제외하고는 역시나 이해하기 어려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또 작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현란하면서도 깊이 있는 심리 묘사가 지나친 것도 부담스러웠고, 비교적 최근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번역과 표기가 낡은 느낌을 주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심지어 저자명도 렌조 미"끼"히"꼬"라고 되어 있을 정도에요)

한마디로 추리물 및 기타 아주 일부만 저자의 이름값에 값하고 그 외의 작품들은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생각되네요. 전성기는 80년대였던 걸까요? "회귀천 정사"로 대표되는 "화장" 시리즈처럼 이 단편집도 좋았던 작품들, 즉 제목에 "밤"이 들어가는 추리물들만 따로 모아서 선보이는게 나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10/23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요시키 다케시에게 이혼한 전처 가노 미치코로부터 5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함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우에노를 찾아 유즈루 9호에 탄 미치코를 창 밖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오모리에 정차한 유즈루 9호에서 젊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휴가를 내어 아오모리 경찰서를 찾은 요시키는 피해자가 미치코는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미치코가 걱정된 탓에 그녀가 이혼 후 머물렀던 홋카이도 구시로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라는걸 알게 되는데....

시마다 소지가 쓴 요시키 형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본격 미스테리 100선에도 선정되어 있습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는 이전에 딱 한 작품만 읽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전형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보다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탐정이라 느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키 형사의 인간적인 매력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돈이나 지적 만족감 따위는 필요없이, 사랑하는 전처가 무죄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 사랑꾼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도 그녀를 구하는 모습은 슈퍼 히어로를 연상시킵니다.

범인들이 미치코 집 안에 시체 두 구를 옮겨 놓는 순간 이동 트릭도 괜찮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미치코 집과 범행 현장인 범인들 자택 사이의 건물 옥상에 로프를 매달아 만든, 일종의 커다란 그네(진자)를 이용하여 시체를 옮긴 겁니다. 시체에 갑옷을 입혀 진자 운동을 시키면, 반대쪽 정점에 오면 속도는 0이 됩니다. 그러면 회수는 가능했을테니 나름 '과학적'이지요.
가면 무사가 유령처럼 사진이 찍힌 이유도 이 진자 운동 트릭과 맞물려 '과학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관리인실 뒷 창을 막 지나게 되어 사진에 찍힌 겁니다. 발상만큼은 정말 기가 막혀요.
이 때 로프가 난간에 부딛혀 나는 소리를 현장에 있었던 '밤에 우는 돌' 전설과 연결시키고, 시체가 벽에 부딛혀도 괜찮도록 시체에 갑옷을 입힌걸 '가면 무사' 유령 전설과 엮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민속 탐정 야쿠모" 속 베스트 에피소드에 뒤지지 않을 정도에요. 그만큼 전설이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본격 추리 100선에 꼽힐만 합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대부분이 갖춘 특징인 여정 미스터리 성격도 잘 드러납니다. 도쿄에서 아오모리로, 아오모리에서 배를 타고 하코다테로,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를 타고 삿포로로, 삿포로에서 기차로 구시로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구시로 범화가인 기타오도리 외길 및 구시로를 포함한 각 지역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트릭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맞은편 건물까지, 개천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으니 약 10m 떨어져 있다고 칩시다. 1층 관리인실 창문을 지날 정도면 5층 높이이니 거의 비슷하겠죠. 후지쿠라 레이코가 시체를 놓쳤을 때 회수를 쉽게 하려고 로프를 한 번 더 연장했다니 두 배, 그러니까 최소 20m는 되는 긴 로프가 필요합니다. 현장도 두 곳이라 두 군데에 걸쳐 설치해야 하고요. 그런데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로프를 잘 설치하고, 회수한 방법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10m 로프에 매달린건 갑옷 입은 시체입니다. 50kg 이라고 할 때,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엄청났을 겁니다. 특히 중심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요. 이 속도로 가운데 건물에 충돌했다면? 갑옷을 입었다고 시체가 무사할리 없습니다. 그 소리를 관리인 등이 들었을게 뻔하고요. 한마디로,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성공했을 뿐입니다. 설득력은 무척 낮아 보여요. 최소한 건물에 로프를 걸 부분이 튀어나와 있었다는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진범인 후지쿠라 이치로, 지로 형제에 대한 묘사도 아쉽습니다. 이런 고급 트릭(?)을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실수가 많은 탓입니다. 유쾌한 모습을 요시키 형사에게 들키는 첫 등장부터 실수에요. 레이코가 실종되었다는건 미치코를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살아서 증언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는건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의심한 요시키 형사를 습격해서 중상을 입힌건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입니다. 용의선상에 있지도 않은데 도쿄 경시청 수사 1과 형사를 습격해서 폭행한다?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요시키 형사가 살아만 있다면 중상을 입건 말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황상 요시키 형사를 습격한건 그들 형제가 분명하니까요. 두 형제와 요시키 형사의 다툼을 카페 아르바이트와 손님들이 목격하기도 했고요. 즉, 살인 혐의가 아니더라도 요시키 형사 폭행 혐의로 충분히 수사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자기 무덤을 판 셈이에요.

나중에 직접 미치코를 살해하려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어설퍼요. 원래 계획대로 미치코를 자살한 걸로 위장해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미치코는 살아서 누군가의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난게 목격되었습니다.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 '화이트'에 전화를 건 뒤, 카페에서 보낸 차를 타고 떠났다는 것도 호텔에서 증언해 줄 수 있고요. 그런데 이 뒤에 호수에서 미치코 목을 졸라 죽인다? 바로 체포될 겁니다. 설령 경찰이 호수에 빠트린 미치코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요. 정황이 너무 확실하니까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습격과 미치코 살인 미수 당시에는 별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는 행동에서도 고급 트릭을 고안하고 실행한 두뇌파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있습니다. 이래서야 요시키 형사 상대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죠.

그 외에도, 게이코가 미치코 집에 들어간건 관리인에게 안 들켰고 열쇠도 복제해 놓았을 뿐이라던가, 미치코가 어린 시절 형제에게 지은 죄로 살인 공작에 끌려 들어갔다던가 하는건 모두 작가 편의에 따른 전개에 불과해 보입니다.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미치코가 형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죄의식이 있었다면, 형제가 거창하게 장치를 마련해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없습니다. 최소한 미치코 돈부터 빼앗는게 순서죠.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요시키가 중상을 입고, 추리에 시간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요. 특히 시간 제한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미치코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도 공식 재판까지 시간을 두고 추리해도 되니까요. 구태여 영장 발부 전으로 시간을 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영장이 발부된다고 다 전과자가 되는게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지만 단점도 명확한, 전형적인 신본격 추리물입니다. 선뜻 권해드릴 정도는 아니지만, 본격물 팬이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습니다.

2008/10/09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3점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시작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단편집입니다. 이 시리즈의 탐정은 범죄 심리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라 불리우는 이유는 작품의 왓슨 역이 저자 이름과 같은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원서로 읽고 리뷰를 남긴 “러시아 홍차의 비밀” 도 같은 시리즈의 한권이죠. 뭐 제가 좋아라 하는 일본 본격 추리 단편집이니 당연한 마음으로 사서 읽었습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대표작은 “국명 시리즈”로 알고 있는데 좀 엉뚱한 시리즈가 먼저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만.

감상평은 뭐랄까, 좀 애매하네요. “국명 시리즈” 이기도 한 “러시아 홍차의 비밀” 보다 재미와 수준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전체적인 책 자체의 평균은 비슷하지만 “러시아 홍차의 비밀” 은 수록작품의 편차가 커서 좋은 작품은 굉장히 좋은 반면, 이 책에 실린 작품의 수준은 엇비슷하지만 고만고만한 수준의 작품들이 모여 있어서 딱히 끌리는 작품은 없거든요.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특징이기도 한 정교한 트릭에 매몰되어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눈에 많이 거슬렸고요. 이런 단점까지 존경한다는 엘러리 퀸을 닮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어쨌건 별점은 3점입니다. 신본격 대표작가의 정통 추리 단편집을 국내에서 접하기는 쉽지 않기에 가산점을 더했습니다.^^

총 4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는데 작품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부재의 증명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 + 순간이동 트릭 등이 결합된 정통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이용한 결정적 단서 포착 부분은 좋았으며 동기와 범행 방식,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쳐서 완성도가 높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서의 베스트 작품이었습니다.

지하실의 처형
형사가 수배중인 테러리스트 들에게 사로잡힌채 그들의 처형 의식의 목격자가 된다는 기본 설정은 독특했지만 애당초 범인이 둘중 하나라는 근본적 한계 때문에 꽉 짜여진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의 추리 역시 경찰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이루어지기에 그다지 대단하거나 놀라운 진상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요. 차라리 논리 퍼즐 형태의 미스터리로 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쨌건 정통 추리의 맛을 느끼기 어려웠고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도 어렵기에 이 단편집에서의 워스트 작품으로 꼽겠습니다.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2건의 다이잉 메시지가 중요하게 사용되는 퍼즐 미스터리입니다. 그런데 2건 중 첫번째 메시지는 너무나 특정한 정보를 나타내는 것이며, 중간의 히무로의 착안이 명확하기에 해당 정보를 알고 있다면 크게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지 않아 그다지 정교한 트릭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사람이 그런 정교한 도안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요. 두번째 메시지는 피해자의 행동이 그럴싸 하다는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하고 피해자의 의도와 다른, 하지만 정확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은 신선한 발상이 엿보였습니다. 첫번째 메시지의 작위성만 없었다면 괜찮았을텐데 아쉽네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중편분량의 정통 추리물로 고전적인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긴 분량에 걸맞게 트릭 자체는 공들여 잘 만들어진 트릭으로 추리적으로는 만족할 만 한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야기 전개에 있습니다. 범인이 범행을 하는 동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동기가 되는 첫 사건의 동기는 전혀 설명되지 않으며, 애당초 첫번째 범행에서의 증거가 너무나 결정적이기에 두번째 사건이자 주 사건의 알리바이 트릭을 파헤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보여지거든요. 한 사건의 범인임이 명백하고 증거도 확실한데 왜 다른 사건에 시간과 공을 들이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토끼”라는 상징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서 나중에는 짜증마저 일었고요. 추리적 완성도가 높은, 잘 짜여진 작품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실패한 작품으로 보이기에 아쉬움이 큽니다.

2015/01/19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모비딕 : 별점 2.5점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6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고전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편집인데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집이라기보다는 '쇼트쇼트'가 연상되는, 조금 희한한 상상력이 발휘된 초단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보다는 추리적인 색채가 짙다는 차이점이 있지만요.

이런 장르도 좋아해서 즐겁게 읽기는 했지만, 실려 있는 작품들의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라는 점,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에 비해 전개가 낡고 지루하며 결말의 의외성이 없는 등의 단점은 아쉬웠습니다. 쓰여진 시기를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막 나가는 전개의 몇 작품은 의도인지 아니면 습작들이 이상하게 뭉쳐져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탈영병이 거름더미 속에 몇 달 숨어 있다가 잡혀온 이야기와,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상이용사 연금을 받던 로이지크가 양심 때문인지 정말로 불구가 되어간다는 이야기가 하나로 묶여 있는 "실종된 다리"가 좋은 예입니다. 어차피 초단편이라면 나누어 수록했어도 될 것 같은데 왜 하나로 묶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역시나 쓰여진 시기 탓인지 "양심"에 대한 것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띕니다. 등장인물들이 근본적으로 너무 선해서,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에 의해 갈등을 겪는 내용이 많거든요. 아무래도 좋았던 시기에 착한 사람이 쓴 작품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기묘하고 기발한 발상은 좋지만, 지금 읽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수록작 일부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추리물 성향을 지닌 작품부터 소개해 드리자면,

"도둑맞은 선인장"

식물원에서 귀한 선인장이 도난당하자 선인장에 치명적인 질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조작하여 발표한 뒤, 약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잠복하다가 범인을 체포한다는 내용입니다. 식물원에서 훔친 방법도 기발한데, 나이든 여자로 변장하고 가슴에 화분을 숨겨 나왔다는 것이죠.

"하르쉬의 실종"

아르메니아인들이 하르쉬를 어떻게 죽이고 시체를 옮겼는지에 대한, 즉 시체의 순간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굉장히 쉬운 트릭이기는 하지만 범행 당일 비가 왔다는 점, 카펫 속에 시체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체의 기묘한 반점을 연결하는 부분은 괜찮았어요. 명탐정 메이즈리크의 활약도 나쁘지 않았고요.

"도난당한 살인사건"

범인들이 경찰로 위장한 뒤 살인을 저지르고 깜쪽같이 뒷수습한다는 이야기. 목격자는 많았지만 경찰 복장을 한 범인을 보고는 단지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죠. "오터모울씨의 손"이 떠오르는데, 이런 트릭의 원조격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영아 납치 사건"

사라진 영아를 찾기 위한 바르토세크 반장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경찰들에게 아기를 보면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군요. 몇 개월 됐나요?"라고 말하라고 시키고, 그 말에 과민반응을 보인 어머니를 체포한다는 내용이지요.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심리를 이용한 트릭과 전반적으로 유쾌한, 블랙 코미디스러운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법정물도 있습니다.

"하브레나의 판결"

기자들이 법정 소식을 실으려고 노력하던 중, 실제 법정에서의 사건보다 더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창조하는 하브레나라는 인물에게 창작의 댓가를 지불하고 이야기를 전해받는다. 하브레나는 스스로 법에 대해 통달했다고 여기는데 어느날 그가 창작한 이야기, 즉 앵무새를 훈련시켜 이웃집 여자를 볼 때 마다 "화냥년"이라고 말하게 만든 늙은 독신남이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야기가 실제 법조인들에게서 잘못된 판결이라고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자 하브레나는 자신의 이야기 속 판결이 정당하다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앵무새를 훈련시켜 이웃집 여인에게 욕설을 하게끔 만들고 법정에 서게 되는데...

설정부터 흥미롭지만 진행 과정 역시나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법의학물의 선구적인 작품도 있습니다.

"바늘"

롤빵 속에 들어간 바늘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국립화학연구소의 우헤르 박사가 빵과 바늘에 대한 모든 상황을 검토한 끝에 롤빵이 만들어진 뒤에야 바늘이 들어갔다는 결론을 내리는 부분, 그리고 바늘을 누가 넣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빵을 찾기 위해 화학자들이 빵을 수도 없이 만들어본다는 과정에서 법의학물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반전이 괜찮은 작품도 있습니다.

"우표 수집"

한 노인이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하층민인 로이지크와 절친이 되었고, 우표 수집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성홍열로 앓아 눕고 얼마 뒤, 둘만의 비밀 장소에 숨겨둔 우표가 사라지자 로이지크를 의심하여 그와의 우정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본인 스스로도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표를 숨긴게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는 내용의 작품.

"고해"

너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탓에 마음이 무거워진 범죄자가 신부, 변호사를 찾아가 죄를 털어놓는다는 이야기. 신부와 의사가 이러한 이야기를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죠. 반전은 마지막에 그에게서 고백을 들은 의사가 모르핀 주사 2방을 추가로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는 괴로워하지 않게 말이죠.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유쾌한 범죄극도 있습니다.

"여의주와 새"

진귀한 카페트를 훔치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 엄청난 슬랩스틱으로 묘사된 작품입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의 연출감이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기발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서정적인 도둑"

도둑이 범행 후 남긴 시가 지역 신문에서 극찬받자,  도둑의 창작욕이 폭발하여 도둑질은 시를 발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풍자와 유머가 돋보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이야기"

영어를 못하는 지휘자가 영국에서 우연히 남녀의 대화를 몰래 듣게 되는데, 그 속에 담긴 범행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는 이야기. '남자의 사악한 말은 묵직한 베이스'같은 식으로 악기의 음색과 범행의 느낌을 연결한 설정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2012/06/10

혼진 살인사건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혼진 살인사건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혼진 살인사건"은 이미 예전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지만, 이번에 시공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중,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작품은 중편인 "혼진 살인사건"과 단편인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중단편 길이의 "흑묘정 사건"입니다.

수록작의 전체 평균 별점은 2점. 표제작 외 다른 두 작품이 점수를 좀 깎아먹은 탓입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보다는 예전 동서 추리문고의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더 좋았습니다. 이쪽은 별점 3점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나만의 요코미조 세이시 순위"에 추가한다면, "혼진 살인사건"은 공동 2위이고 이 책 전체적으로 따지면 7위입니다. 긴다이치 시리즈 팬분들께는 추천드리지만 그냥 추리 애호가분들께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혼진 살인사건"

이 작품은 기념할 만한 긴다이치 시리즈 첫 작품으로 시리즈의 전형적 특징 - 시골 마을 지역 유지 가문에 얽힌 원한 관계와 오싹한 살인사건, 그것을 해결하는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펼쳐지며, 공들인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에 있어 큰 문제가 있긴 합니다. 작품 속 공개된 정보만 가지고 트릭을 독자가 풀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한 탓입니다.

그래도 기념비적인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역사적 의미도 확실하며, 지금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전형적인 긴다이치 시리즈다운 소품. 긴다이치는 아주 잠깐 언급될 뿐 화자는 혼이덴 가문의 병약한 막내딸 쓰루요로, 그녀의 1인칭 시점 서간문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스기 죽음의 진상과 에마를 숨긴 이유를 쓰루요에게 숨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탓입니다. 게다가 오노 가문의 쇼지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수했다는 결말부는 어이가 없더군요. 강도, 퍽치기 전과가 있는 인간이 약간의 호의 때문에 살인죄까지 뒤집어써 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협박을 하면 했지...
편지로 진행되는 전개 역시도 몇몇 단락을 제외하면 그냥 소설이라 해도 될 정도로 편지 특성을 살리지 못했고요.

한마디로 쓰루요의 쓸데없는 오해가 내용의 대부분인 작품으로, 일종의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이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흑묘정 사건"

추리소설가 Y가 긴다이치 코스케와 함께 밀실 살인, 1인 2역, 얼굴 없는 시체라는 전통적 추리소설 트릭에 대한 견해를 나눈 뒤, 얼굴 없는 시체에 관련된 사건을 실제로 긴다이치가 해결하고 알려준다는 내용입니다.

얼굴 없는 시체 트릭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바꿔치기 트릭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아간, 나름 고심한 트릭이 펼쳐집니다. 특히 장지문과 다다미에 묻은 혈흔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뜬금없이 오노 지요코라는 여인이 등장해서 딱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사라진다던가, 그냥 봐도 수상한 변장과 뒤이은 밀회 쇼를 그냥 성격 문제였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 부분은 심하게 거슬렸습니다. 트릭 자체도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요. 아유코와 시게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너무 뻔했어요. 그 외에도 닛초가 공범이 되는 동기와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긴다이치 코스케의 개그스러운 만담과 과거사가 잠깐이나마 펼쳐져 팬으로서는 즐길 거리가 있고, 본격 추리 소설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게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1/06/14

백주의 악마 - 애거서 크리스티 / 하영진 : 별점 4점

백주의 악마 - 8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영국 래더콤만에 위치한 졸리 로저 호텔을 찾았다. 그들 중 케네스 마셜 대위의 아내 알레나는 엄청난 미인으로, 주변 남성들을 본의아니게 유혹하는 존재였다. 갓 결혼한 패트릭 레드펀이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녀에게 열중하여 여행객들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알레나가 해변 근처 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제목은 왠지 예스럽고 촌스럽지만 원제도 Evil Under The Sun! 책 뒤 해설을 보니 '마더구스 동요'에서 따온 제목이라 하네요. 찌는 듯한 태양 아래 휴양지에서의 악마의 소행같은 범죄를 다룬 이 작품에 정말로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소설도 명작이지만 피터 유스티노프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가 더욱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죠. 저 역시도 영화로 먼저 접해보았기에 그간 독서를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트릭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겁니다. 일종의 '순간 이동 알리바이 트릭'인데 지금 읽어도 무릎을 칠 만큼 기발합니다. 영화를 볼 때도 감탄스러웠지만 원작도 감동이 남달랐어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주어지는 사소한 단서들을 모아서, 놀랍지만 사실일 수 밖에 없는 결론을 내리는 포와로의 추리는 작중에 언급된대로 그야말로 '퍼즐을 맞추는 듯한' 고전 정통 본격물의 미덕을 제대로 전해주고요. 이런 단서는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공정성 측면에서도 백점 만점을 주어도 충분합니다. 포와로의 기이한 언행 묘사를 통해 진짜 명탐정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여러모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전개에서 아주 약간의 허술함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범인들이 옭아매려 한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우연찮게 증명된 이후에도 사건의 전개가 너무 범인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점입니다. 우연이 너무 심하게 겹쳐요. 막판 추리쇼의 기반이 되는 린다의 자살 소동도 좀 지나친 감이 들어 거북했고요. 그리고 증거가 없다고 운운하며 추리쇼를 펼치는데, 사진을 가지고 범인들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변치않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묵직하면서도 충실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30년대 고전 황금기 시대를 대표하는, "왕도"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뒤에 실린 정말로 짤막한, 꽁트 수준의 단편 "말벌집"도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 드라마지만 완벽한 범죄계획과 상황에 잘 맞는 해결이 존재하기에 걸작의 여운을 즐기는 식후 디저트로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도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2017/04/22

미스터리 사전 - 미스터리 사전 편집위원회 / 곽지현 : 별점 2점

미스터리 사전 - 4점
미스터리 사전 편집위원회 지음, 곽지현 옮김, 모리세 료 감수/비즈앤비즈

제목 그대로 미스터리, 추리라는 장르 문학에 관한 110개 항목을 설명해 주는 '사전' 입니다. 110개 항목은 6개의 대분류로 구성되고요. '게임 시나리오를 위해 꼭 알아두어야 할 110가지 추리 규칙·트릭·이론'이라는 부제를 보면, 이쪽에 관심있는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를 위해 쓰여진 책 같습니다.

일단 구성은 괜찮습니다. 항목별로 통일된 형태로 심지어 페이지 수 까지 똑같이 맞춰져 있어서 읽기 편하고 깔끔한 덕분입니다. 이런 건 정말 일본 사람들이 잘 하는 것 같아요. 이런 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탐정 사전"과 좋은 비교가 되네요.  

또 미스터리,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 부분도 제법 됩니다. 특히 소분류 항목별 대표작의 예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유명 소설 뿐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TV 드라마까지 방대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도'를 설명하며 '루팡 3세'를 예로 들고, '극장형 범죄'를 설명하며 "공각기동대" TV 애니메이션의 한 에피소드("웃는 남자")를 예로 드는 식으로요. '밀실 살인'의 예로는 RPG게임 "호라이 학원의 모험!"이 설명될 정도이지요. '살인범'의 예로 "죠죠 4부"의 키라 요시카게를 드는 등 지나치게 서브 컬쳐 중심으로만 소개되는 감도 없지는 않지만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제법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묘한 맛"이라는 분야가 어떻게 명명되었으며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된 책은 처음 봤네요. 에도가와 란포가 명명했다고 하며, 란포가 예시한 작법의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명탐정에게 범행을 간파당하고도 사기범은 뻔뻔스럽게 결백을 주장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범행을 계속한다.
  • 노부인에게서 집이나 재산을 빼앗고 감금까지 한 악당 청년이 알뜰살뜰 여자친구의 신변을 돌봐준다.
  • 신문기자에게 붙잡힌 연속살인마가 어째서 이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며 기자를 새로운 피해자로 만든다. 

솔직히 작법 예시는 영 와닿지 않습니다만, 사고와 발상, 그리고 상식의 틀어짐이 낳는 의외성이 중요하다는건 분명해 보이네요. 

몇몇 사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1981년 가부키쵸 러브호텔 연속 살인사건에서 두 번째 피해자 겨드랑이 밑에 액취 치료 수술 흔적이 있었기에 술집 여성이라고 판단했다는 내용은 신선했어요. 당시는 술집 여성이나 받을만한 수술이었나 봅니다.

'마지막 반전' 이라는 항목에서 '현대는 트릭만으로는 부족하여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트릭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트릭을 살리기 위해 플롯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은 추리 소설가를 지망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와 닿은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2페이지라는 제약 탓에 지나치게 요약된 부분이 많다는 점입니다. 하드보일드 등 장르에 대한 설명을 두 페이지 안에 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이런 항목들은 모두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추리 소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아는 정보에 불과하며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항목으로 꼽기에는 미약한 것들도 눈에 띕니다. 트릭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합니다. '발자국 트릭'이 하나의 항목으로 꼽힐만한 이야기였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순간이동, 소실 트릭과 같은 보다 큰 범주로 묶었어야죠. '눈의 착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량을 할애한 '착시 현상'은 미스터리 장르와는 무관해요.
이렇게 소분류 선정 및 분류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탓에 심지어는 왜 이런게 설명되나? 싶은 항목도 있습니다. '미스터리 연구회' 같은게 대표적이죠. 일본에 한정된 특정한 형태의 소모임일 뿐이고 그렇게 이쪽 바닥에서 유명한 소재는 아니니까요.

번역도 큰 문제입니다. 읽기가 힘들 정도에요. 조금 더 읽기 편하게 번역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딱딱하고 어려운 문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번역가가 이쪽 컨텐츠를 잘 모르는 티가 물씬 납니다. 이 바닥에서 자주 쓰지 않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거나 -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를 '나라 이름' 시리즈라고 소개하는 등 -, 잘 알려진 발음과 다르게 번역하거나 일본어 번역에서의 실수 - '면죄를 호소하다' -> '무죄를 호소하다' (99p), '사이타마현 아이켄가 연쇄 살인사건' -> '사이타마현 애견가 연쇄 살인사건' (101p) -, 당연한 고유 명사의 오류 - 히가시노 게이고 -> 토우노 게이고 (207p) -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오류, 오타가 너무 많아요. 조금이라도 이쪽 세계를 아는 사람이 한번이라도 교정, 검수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잘못 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초보자 대상의 학습 사전으로는 나름 괜찮지만 제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으며, 거기에 더해 번역 문제와 19,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합니다.
솔직히 이 책의 존재 의미도 잘 모르겠어요. 시나리오 라이터를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뭔가 만들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추리 소설에 첫 입문한다고 해서 이런 류의 '참고서'를 사 볼 필요는 더더욱 없죠. 고전 명작부터 찬찬히 읽어 나가면 그만이니까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저도 두번 읽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2010/04/02

유리망치 - 기시 유스케 / 육은순 : 별점 3점

유리 망치 - 6점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영림카디널

간병회사의 사장 에비라가 12층 빌딩 사무실에서 타살된 시체로 발견된다. 고층빌딩 최상층, 이중강화유리로 된 유리창, 적외선 센서와 고성능 감시카메라, 그리고 비밀번호 없이는 올라갈 수 없는 엘리베이터, 이중.삼중의 철문, 복도에서 지키고 있는 세 명의 비서... 옥상으로부터도, 창문으로부터도, 천장이나 배기구로부터도, 계단으로부터도, 또한 복도로부터도 침입할 수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유일한 출입문쪽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던 전무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고, 전무의 변호를 맡은 준코는 사건 해결을 위해 수수께끼의 보안 전문 컨설던트 에노모토 케이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한다...


오랫만에 읽는 듯한 일본 본격 장편소설입니다. 4월달 역시 추리소설과 함께 시작하는군요.
정통 본격 추리물답게 추리적으로 아주 풍성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21세기답게 감시카메라와 각종 보안장치로 무장된 하이테크 밀실이라는 설정에 더해, 가장 중요한 요소인 '어떻게 살인 현장에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가설 - 루피나스 V라는 로봇의 존재를 이용한 로봇 이용 원격 조작 살인, 원숭이를 이용한 살인, 3인의 여비서의 변장을 통한 시간 벌기, 타임랩스 비디오의 촬영 주기를 이용한 순간 이동 등 - 을 등장시키는게 좋았어요. 가설들 모두가 다른 작품이라면 핵심 트릭으로 사용되어도 괜찮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던 덕분입니다.
또한 이러한 추리적 완성도를 뒷받침하는 굉장히 상세한 자료조사와 자료들, 예를 들자면 감시 카메라의 종류라던가 다양한 공학적 설명 등이 잘 녹아들어가 있고, 가설들을 위한 소설적 장치와 복선들도 탄탄해서 설득력이 배가됩니다.
작품이 1부, 2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1부는 에노모토와 준코 컴비를 통한 다양한 가설과 추리의 향연이라면 2부에서는 실제 범인 시점으로 진행하며 도서 추리물 느낌을 전해 주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흡사 다른 소설 두권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거든요.

그러나 가설과 비교할 때 실제 범행이 오히려 작위성이 짙게 느껴진다는건 아쉬웠습니다. 범인이 왜 살인까지 저질러야 했는지에 대한 부분의 설명도 부족하고, 완전 범죄를 만들기 위한 스케일이 너무 커서 현실성이 떨어지거든요. 범행 역시 많은 부분 운에 기대고 있다는 것도 확실한 단점이고요.
물론 기시 유스케다운 심리묘사와 설정, 공들은 자료 조사 덕분에 이러한 단점도 어느정도 상쇄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인 수준의 범행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가설 중 하나를 실제 트릭으로 삼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평균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시니컬한 능력자이자 반쯤은 범죄자인 정체불명의 인물 에노모토 케이가 아주 괜찮았고 제목 그대로 "유리망치"가 트릭이라는 것 역시 의외성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2/07/19

탐정 클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억관 : 별점 2점

탐정 클럽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노블마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중단편집. 전부 다섯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주로 부유한 사람들이 가입되어 있는 회원제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하면 남녀 컴비 탐정이 출동하여 해결한다는 연작 구성이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트릭을 선보이는데 주력한 평작이랄까요. 생각해볼 만한 트릭들이 선보이기는 하는데 전체적으로 작위적이고, 사건의 전개나 동기도 설득력이 별로 없어서 작품에 녹아들지 못했으며, 탐정들의 매력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 이야기가 심심하더군요. 장점보다 단점이 많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위장의 밤"

대형마트를 경영하는 마사키 도지로의 희수 축하연 날, 그의 자살한 시체를 사위와 비서, 젊은 후처가 발견했다. 그들은 각각 개인적인 이유로 그의 죽음이 알려지는걸 미루려고 하는데...

도지로의 사체가 밀실에서 사라진다는 순간이동 트릭 + 밀실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워낙 간단해서 설득력은 높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발상으로 괜찮은 정통 트릭을 구현해 낸 것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그러나 피해자에 대한 묘사, 즉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안하무인적인 행동을 볼 때 목격자들이 사체를 발견하자마자 모두 자살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석연치 않습니다. 또 범인이 시체를 숨긴 행동 자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어요. 별장으로 옮긴 뒤 방화 등의 공작을 펼치는 게 나았을 텐데... 뜬금없는 공범의 존재는 공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위적인 설정의 극치였고요.

트릭의 설득력 말고는 그다지 건질 것이 없는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덫의 내부"

밀실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은 간단하나 효과적이죠. 그러나 그 외의 부분은 모두 수준 이하였어요. 일단 범행 가담자들의 동기가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혼이 목적이라면 최소한 죽이기 전에 말이라도 해보는 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과거의 불륜을 입에 담으면 더 큰 피해는 여자 쪽에 있을 텐데 남자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살의를 품는다?

그리고 공작을 위해서 벌인 싸움과 세탁기에 대한 묘사 역시도 비현실적이에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작이 먹힐 리가 없죠. 또 실제 범인의 행동과 자살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는 것도 큰 단점이고요.

앞부분 범죄를 모의하는 서두와 전개는 흥미진진하고 정통 추리물을 보는 분위기는 잘 살아 있지만, 그 외에는 모두 별로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의뢰인의 딸"

가정주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 세 명이나 되는 가족이 진상을 공유하는 이유 자체는 꽤 그럴듯하고, 진상도 예상과는 약간 달라서 신선했습니다. 탐정클럽 컴비의 의외의 자상함(?)이 살짝 엿보이는 등 소소한 재미도 있고요.

허나 과연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 가슴을 찔러 죽는다는 게 말이 되는지는 좀 의심스럽네요. 자살 방식이 여성스럽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죽을 각오였다면 남편이야 힘들었어도 동생이나 딸 정도는 뿌리치고 나가는 게 가능했을 텐데 말이죠. 이렇듯 중요한 진상 부분의 설득력이 떨어져서 별점은 2점입니다.

"탐정 활용법"

두 동창생의 남편들이 함께 죽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진상이 너무 뻔했습니다. 바람피는 현장에 대한 조작도 상당히 유치했고요. 추리소설 좀 읽은 독자라면 어느 정도 눈치챌 만한 진상과 트릭이었어요. 게다가 두 동창생이 나름 생김새가 비슷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은 반칙이며, 아베가 화가 났다는 것이 순전히 운이었다는 것도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탐정클럽 역시도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수준이 떨어지는(?) 실제 범죄자들과 상대하는 등 시리즈의 분위기와도 잘 맞지 않더군요. 모든 면에서 평균 이하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장미와 나이프"

대학 학과장이 딸의 임신을 알게 된 뒤, 아이 아빠를 찾으려고 탐정클럽에게 의뢰하지만 살인사건에 연루된다는 이야기. 불쌍하게 착각으로 죽은 줄 알았던 피해자가 사실은 진짜 표적이었다는 내용입니다.

비약은 심하나 다른 단편들과 비교해 본다면 나름 전개의 타당성도 있고 반전도 괜찮은 편이에요. 트릭도 굉장히 소소하지만 적절하게 사용되었고요. 한마디로 이러한 단편의 교과서적인 작품입니다.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8/11/26

최근 읽은 추리만화 짧은 평가

명탐정 코난 62 - 6점
아오야마 고쇼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전편에 이어지는 사건을 포함해서 총 세 건의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인 증권맨 살인사건은 61권에 추리적인 핵심 요소들이 모두 등장했기에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에리 변호사가 등장하는 살인 사건으로 "순간이동" 트릭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트릭이 그다지 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경찰의 합리적 수사가 있었더라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오랫만에 신이치가 등장! 가장 재미있게 읽은 에피소드였습니다. 범인(?)의 동기와 수법에 대해서는 설득력있게 전달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사건 두 건이 결합되는 이야기 전개도 좋고, 마지막의 살짝 반전 역시 괜찮았던 덕분입니다. 하이바라의 해독약이 점점 발전하고 있는 등 사건 외적인 즐길거리도 많았고요.

전체적으로는 그냥 무난한 수준의 코난 시리즈였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비밀 4 - 6점
시미즈 레이코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으로 1, 2권은 예전에 포스팅 한 적이 있죠. 그런데 이번 편은 전작에 비하면 약간 부족한 느낌입니다.

물론 좋은 작품이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여기는 미래지만)의 방관자적인 마인드를 극대화하여 구현한 설정 이외에는 전작들에서 전해지던 가슴아프거나 잔인한 사연이 잘 묘사되지 않고, 아오키의 사랑을 위해서인지 조금은 억지스러운 전개를 통해 해피엔딩을 이끌어 낸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작품들은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보여줬었는데, 이런걸 기대한 독자로서는 조금 아쉽습니다.
뇌를 스캔한 단서는 그야말로 단서일뿐 실질적인 범인 검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등 추리적으로도 크게 눈여겨 볼 부분이 없었고요.

시미즈 레이코의 실력은 여전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