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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6

Chat GPT가 그린 우미카타 후사나리 ("윤무 시리즈")

Chat GPT로 탐정들을 원하는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시도한 인물은 경시청 형사부 특수범죄수사과의 고참 형사 우미카타 후사나리(海方惣稔)입니다. 등장하는 작품은 바로 직전에 읽은 "죽은 자의 윤무"와 "독약의 윤무"입니다.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그동안 시도해 온 탐정들과는 달리 못생긴 인물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어서 그려 보았습니다.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듯한 얼굴과 머리의 움직임, 둥글고 큰 몸통에 비해 짧은 팔다리라는 특징 때문에 바다거북을 연상시키는 비호감 형사이지요. 어떻게 하면 술을 마실 수 있을지, 쉴 수 있을지, 마음에 든 여자와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습성도 이런 비호감 이미지를 굳히는 데 큰 몫을 하고요.

그러나 이런 비호감 습성과는 다르게, 불가능해 보였던 사건을 빼어난 추리력으로 해결해 낸다는 반전 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능글맞은 화술도 뛰어나서 마냥 미워할 수도 없고요. 

잘생기고 매력적인 수많은 탐정들 속에서 '비호감'이라는 특징으로 자신만의 존재감을 뿜어내는 멋진 인물입니다. 세상 모든 비호감들에게 용기를 주는 활약에 찬사를 보내며, 영상 매체를 통해서도 만나보고 싶네요. '정형돈' 씨가 연기하면 어울리지 않을까요?

2026/09/25

독약의 윤무(毒薬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2.5점

아래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특수범죄수사과의 형사 우미카타 후사나리는 병원에 입원한 뒤, 구입한 미개봉 캔 음료에 다른 물질이 들어있다는걸 발견했다. 특범에 보고 후, 수사를 위해 부하 고미나토 신스케까지 정신병 환자로 위장시켜 병원에 잠입시킨 우미카타는 자신을 세계은행 총재라고 믿는 모모타, 이상 행동을 일삼는 모로하시, 노출증 환자 라쿠, 어린 거식증 환자 산고 등 개성 강한 환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사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쓴맛을 내는 약물 PTC가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물에 섞이는 불가사의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처럼 보였지만, 병원에 과거 원장이 전쟁 중 개발한 맹독 리자드톡신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고가 의문의 죽음을 맞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괴짜 형사 우미카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이 괜찮길래 연이어 읽었습니다. 원서입니다.

천재 명탐정이면서 한없이 게으르고,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면서도 온갖 잡지식과 아첨에 능한 우미카타의 독특한 매력은 여전합니다. 기묘한 괴짜들이 넘쳐나는 정신병원이 무대인데, 그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줄 정도로요.

아와사카 쓰마오의 정통 본격 추리소설답게 불가능 범죄도 등장하며, 트릭도 깔끔합니다. 핵심 수수께끼는 PTC와 리자드톡신을 몰래 먹인 방법인데, PTC 사건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201호실: 마돈나와 아담이 먼저 물을 마셨을 때는 괜찮았지만, 뒤이어 우미카타가 마시자 심한 쓴맛이 났다. 
  • 국제회의 보고회: 식당에서 가져온 보온병 속 물을 모로하시가 먼저 마셨을 때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뒤이어 같은 물을 마신 총재는 쓴맛을 느꼈다. 
  • 병원 식당: 모모코가 물병에서 직접 따라 가져온 세 컵 가운데 산고가 마신 물에서만 PTC가 발견되었는데, 물을 따른 뒤 산고가 마실 때까지 약을 넣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모두 산고의 장난이었는데, 우연이 겹쳐 불가능 상황이 되었다는게 진상입니다. 201호실에서는 산고가 미리 물에 PTC를 넣었지만, 마돈나는 미맹이었고 아담은 구강청량제 때문에 일시적으로 미각이 마비되어 쓴맛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국제회의에서도 산고가 물병에 미리 PTC를 넣었지만, 이를 먼저 마셨던 모로하시가 꾀병이 들킬까봐 일부러 쓴맛을 참았고요. 식당에서는 마지막에 물을 마신 산고가 평범한 물을 마신 뒤 손수건으로 입을 닦는 척하며 숨겨 둔 PTC를 자기 컵에 넣었던 겁니다.

산고가 독 리자드톡신이 든 우유를 마시고 죽은 사건에서, 우유에 손대지 않고 독을 넣은 트릭도 볼만합니다. 범인은 마찬가지로 산고였습니다. 산고는 새어머니 모모코를 살해하기 위해 소리 센서 인형 ‘이즈와 폰’을 이용해서 아래와 같이 원격 독살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 개 인형 ‘폰’의 입속에 리자드톡신 캡슐을 넣어 두고, 인형 앞 독서대에는 책을 펼쳐 비스듬한 경사로를 만들었다. 그 아래에 우유 컵을 놓았다. 큰 소리가 나면 인형이 작동하면서 폰이 입을 벌리고 뛰어오르고, 그 순간 캡슐이 입에서 튀어나와 펼쳐진 책 위를 굴러 내려가 우유 컵에 떨어진다.

산고는 방 밖에서 모델건을 쏴서 장치를 작동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은 우유에 접근하지 않은 채 모모코를 독살할 생각으로요. 그러나 한밤중 모로하시가 가방을 떨어뜨린 소리에 장치가 예정보다 먼저 작동했고, 이를 몰랐던 산고가 범행을 단념했지만 이미 독이 들어간 우유를 마시고 죽었던게 진상입니다.

이러한 핵심 수수께끼 외에도, 병원에 출몰한 눈이 빛나는 유령의 정체에 대한 추리, 모지하라 병원 입원 환자들이 모두 꾀병이라는 추리, 라쿠가 남긴 수식을 풀어내는 추리 등 자잘한 추리들 모두 볼만합니다. 초반에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넣을 수 없는 밀봉된 캔에 다른 내용물을 넣은 트릭' 역시 간단하지만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 전개가 많이 어설픕니다. 아무리 정신병원 안에서 피해자가 꾸민 일이 잘못되어 스스로 죽게 된 사건이라 해도, 현직 경찰이 두 명이나 잠입해 있는데 이를 일반 변사 사건으로 무마한다는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리고 산고의 죽음이야 모두의 행복(?)을 위해 그렇다 쳐도, 사사키 의사가 하야사키 씨에게 리자드톡신을 먹인 건 엄연한 범죄 행위로 보입니다. 이것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덮고 넘어가는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병원에서는 해고했어야 합니다.

우미카타의 여성과 음식에 대한 집착도 지나칩니다. 괴짜 탐정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정도가 심해서 볼썽사납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볼만했던 후속작입니다. 억지스러운 설정은 분명 있지만 재미있는 요소도 많고, 불가능 범죄의 트릭도 깔끔해서 추리적으로 볼 만하니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본에서의 인기와 유명세도 그리 높지 않아서 우리나라에 소개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혹시라도 소개된다면 한 번쯤은 읽어볼만 합니다.

2026/09/20

쉘터(2026) - 릭 로만 워: 별점 1.5점

마이클 메이슨은 외딴 섬 등대에서 10년 동안 숨어살았다. MI6 요원 시절,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한 생명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물자를 보급해주던 옛 전우가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죽고, 함께 있던 전우의 조카 딸 제시는 구했지만 부상이 심했다. 메이슨은 제시를 위해 약을 사러 나섰지만, 국가 감시 시스템에 의해 위치와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데...

제이슨 스타뎀이 주연을 맡은 장편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에서 잠깐이나마 순위에 올랐길래 감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시간 낭비였습니다. 설정부터 전개까지 지나치게 뻔한 탓이 큽니다. 어린 소녀를 지키는 전직 특수 요원이라는 수없이 반복된 공식을 답습할 뿐이거든요. 새로운 요소는 거의 없어요. 게다가 10년 동안 정체를 숨기며 살아온 인물이 도시로 나가면서 얼굴조차 제대로 가리지 않는 등 설정도 허술합니다. 결말 역시 소녀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뒤 계속 지켜본다는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마무리되고요.

MI6 국장이 자기 명령을 듣지 않고 사라진 요원에게 10년 넘게 앙심을 품고 있다는 설정도 유치하기 짝이 없으며, 그나마 기대할 만했던 액션도 실망스럽습니다. 제이슨 스타뎀 특유의 격투는 많지 않고 상대하는 적들도 대부분 조무래기에 가깝습니다. 규모도 작아 1급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소규모 독립 영화 같은 인상까지 줍니다. 몇몇 포스터에서 강조된 쇠사슬 역시 마지막 격투에서 잠깐 등장할 뿐이라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뻔한 이야기와 허술한 설정, 느린 전개에 기대 이하의 액션까지 겹친 망작입니다.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9/19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10) 술병 속에 숨긴 비밀

추리 소설에서 술병은 꽤 익숙한 소품입니다. 이전에 와인병이 흉기로 사용된 작품을 소개해드리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술병은 무언가를 숨기는 역할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술병은 작은 물건을 감추기에 제법 괜찮습니다. 위스키나 코냑처럼 짙은 색 유리를 사용하는 병은 더욱 좋지요.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기 어려우니까요. 술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면 더 알아채기 쉽지 않을 테고요. 무엇보다 술병은 술을 담아두는 물건이라는 선입견이 강한 탓에, 책상이나 선반에 놓여 있어도 누군가 굳이 안을 확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인 "잃어버린 얼굴"에서는 이 점을 아주 잘 써먹습니다. 이야기 초반, 한 여성이 다세대주택 외부 계단 아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됩니다. 그녀의 곁에는 깨진 산토리 올드, 둥글고 짤막한 검은 병 때문에 '다루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위스키 병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병에서는 여성의 지문뿐 아니라 이미 살해된 남성 야기 다쓰오의 지문까지 검출됩니다. 

여성은 야기에게 선물하려고 가져간 위스키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지문이 새로 가져온 병에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그녀는 과거 야기에게 가져다준 술병을 그의 집에서 다시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연스럽게 수사에서는 왜 굳이 사건 현장에서 위스키 병을 가져가려 했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야기가 술병을 단순히 술을 담는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데이터를 작은 저장장치에 담아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그것을 위스키 병목 안쪽에 숨겨두곤 했습니다. 짙은 검은색 병이라 밖에서는 안쪽을 살펴보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했던 겁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형사 히노가 이 사실을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히노는 야기의 단골 바에서 기네스를 마시다가, 잔 속에 노른자를 넣은 ‘옐로 선셋’이라는 칵테일을 받습니다. 이렇게 검은 맥주 때문에 잔 안의 노른자가 잘 보이지 않았던 점에 착안하여, 검은 위스키 병 속에도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추리로 이어지거든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바텐더의 재치와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산토리 올드는 일본 위스키의 역사에서도 꽤 유명한 술입니다. 1940년에 처음 완성됐지만 전쟁으로 출시가 미뤄졌다가 1950년에 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둥글고 검은 병 모양 때문에 '다루마'나 '다누키'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1950~60년대에는 성공한 뒤 마시는 고급 위스키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과 함께 대중화되어 1970년대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위스키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요. 현재의 산토리 올드는 야마자키의 스패니시 오크통 원액을 키 몰트로 사용하는 블렌디드 위스키로, 강렬하고 거친 맛보다는 달콤한 향과 부드럽고 둥근 맛이 특징입니다. 지금도 특유의 둥근 검은 병을 유지한 채 판매되고 있는데, 실제 병을 보면 왜 작가가 무언가를 숨기는 장소로 이 술을 선택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병의 특징을 활용한 작품도 있지만, '술병'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작품도 있습니다. 엘러리 퀸의 "킹은 죽었다"입니다. 작품의 무대는 억만장자 킹 벤디고와 그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입니다. 킹에게 살인 예고가 전달되고, 예고된 시각이 되자 동생 유다는 자신의 방에서 권총을 발사합니다. 하지만 유다가 쏜 총에는 실탄이 들어 있지 않았고,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던 킹은 다른 방에서 실제 총탄을 맞습니다. 문제는 킹이 총을 맞은 방에서는 총도, 탄피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소품이 유다가 저택 곳곳에 숨겨둔 세공자크 V.S.O.P 코냑입니다. 피아노 현 위에서 여섯 병이 발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체육관, 수영장, 당구장 등 어디에서나 짙은 녹색 술병이 튀어나옵니다. 유다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라서, 술이 필요할 때마다 그게 어디든 자신만 알고 있는 장소에서 병을 찾아냅니다.

처음에는 괴짜 부호의 기이한 습관처럼 보이는 이 술병들은 사실 사건의 트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작품을 읽을 재미를 크게 해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만, 범행 직후 유다가 술을 찾는 장면과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과정에서 술병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V.S.O.P는 ‘Very Superior Old Pale’의 약자로, 코냑의 숙성 등급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 규정에서는 블렌딩에 사용된 가장 어린 원액이 최소 4년 이상 오크통에서 숙성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오래 숙성된 코냑을 뜻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20년이나 30년 이상 숙성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코냑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생산하는 브랜디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뒤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만듭니다. V.S.O.P급 코냑은 일반적으로 어린 코냑의 거친 느낌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과일 향에 바닐라와 견과류, 향신료, 오크 같은 숙성향이 더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브랜드와 숙성 기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스트레이트로 천천히 향과 맛을 즐기기에도 좋은 등급입니다.

"잃어버린 얼굴"과 "킹은 죽었다"는 시대도, 분위기도 상당히 다른 작품입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술병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누구나 술병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 자체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지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눈앞에 계속 보였는데도 의심하지 않았던 물건이 사건의 중요한 열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마술의 '미스디렉션' 같은 트릭을 활용하여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다음에 바의 선반에서 오래된 위스키 병을 보게 된다면, 라벨보다 먼저 병 안쪽이 궁금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다루마, 즉 산토리 올드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으니, 바에서 실제 병을 본다면 한 잔 주문하고 찬찬히 병 안쪽을 살펴볼까 합니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9/18

교토 살인 여행 - 야마무라 미사: 별점 2점

야마무라 미사의 교토 부경 검시관 에나쓰 후유코 시리즈 첫 번째 단편집입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는 대체로 별로고, 주인공 에나쓰 후유코도 이런 류의 작품 속 등장인물의 전형을 전혀 탈피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의 작품은 추리적으로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사용된 트릭도 나쁘지 않고, 현장에서 특유의 관찰력으로 '무언가 이상함'을 현장에서 느낀 후유카가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잘 짜여져 있는 덕분이에요.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상화도 여러 번 되었을 정도의 당대 인기작 중 하나로 읽어볼만은 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았었던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녀는 밀실에서 죽었다"

여중생이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열쇠는 책상 서랍 안에 들어 있었고요. 에어콘 배관을 빼기 위한 작은 구멍은 뚫려 있었지만, 너무 작아서 열쇠를 던져 서랍에 넣는건 무리로 보였지요. 하지만 범인은 속이 빈 빨래 장대를 구멍으로 집어 넣어 끝을 서랍에 위치시킨 뒤, 장대 안으로 열쇠를 넣어 떨어트렸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명확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면, 구멍이 트릭에 사용된게 분명해서 기발한 트릭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Nervous Breakdown" 중 입학 에피소드처럼요. 형상기억합금으로 만든 열쇠고리를 고정시킨 뒤, 고리에 연결한 끈으로 열쇠를 미끄러 떨어트린 뒤 고리가 열로 다시 원형 복구하면 끈을 회수하는 트릭이었습니다. 

오히려 트릭보다는 후유코의 관찰력을 선보이는 장면이 괜찮습니다. 빨래가 널린 방향이 사건 직후에는 반대라는걸 눈치채고 빨래 장대를 사용했다는걸 알아채는 장면입니다. 키가 큰 범인만이 빨래를 마당 쪽에서 널 수 있었으니까요.

"위장된 살인 현장"

전작처럼 후유코의 관찰력이 빚납니다. 식물의 성장 방향이 ‘최근까지 동쪽에서 빛이 들어왔다’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범인이 사건 뒤 방의 구조를 바꿔 원래의 출입구나 사건 현장의 상태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일종의 ‘과거의 방 배치를 기록한 증거’ 역할을 한 셈이지요.

"사라진 배우자"

기차에 치인듯한 여성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검시 결과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고, 그 여성이 이웃집 남편과 불륜 도피 중이었다는게 밝혀지면서 그녀의 남편, 이웃집 부인, 불륜 대상인 남성 세 명이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범인인 이웃집 부인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빠칭코를 했고, 딴 구슬로 경품을 바꿨다는 증언의 오류를 찾아내 알리바이를 깨트리는 과정도 좋지만, 범인을 밝혀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후유코의 관찰력, 눈썰미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열차에 끌려간 사람의 가방이 열리면서 내용물이 선로를 따라 흘러나온 것처럼 화장품이 군데군데 떨어졌는데, 처음에는 화장수, 그다음에는 파운데이션, 볼연지, 콤팩트, 아이라이너, 립스틱…… 이런 식으로 화장할 때의 순서대로 놓여 있었거든요. 이를 통해 후유코는 범인이 여자라는걸 직감합니다.

"목 없는 시체"

토막나서 목이 없는 사체가 발견되었고, 신분증 등의 유류품으로 피해자가 특정되었지만 알고보니 병원에서 빼돌린 사체 부위로 죽은 척 위장했다는 진상이 기발합니다. 과학 수사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아무리 심각한 사고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체 수습과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트릭이지만요.

2026/09/13

Q.E.D - 증명 종료 - THE BEST 有栖川有栖(아리스가와 아리스) SELECTION

아리스가와 아리스 관련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다가 발견한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골라 뽑은 Q.E.D 에피소드 5편을 모아 놓았습니다. iff가 아닌 시즌 1의 50권이 대상임니다. 선정된 수록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세 작품은 괜찮지만 "쿠로가네 저택 살인 사건"과 "Question!"은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작품이 아닌데 의외였습니다. 제 별점은 2점이었지요. 여러모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취향은 저와 많이 다르다는걸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덧붙이자면 같은 기획으로 다나카 요시키 selection도 있더군요.

제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다나카 요시키 선정작이 아리스가와 아리스 선정작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제 별점은 이쪽이 훨씬 높거든요. 다나카 요시키 선정작은 제 기준으로 모두 평균 이상은 됩니다. 만약 두 Selection 중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다나카 요시키 선정작을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인 시즌 1의 Best는 아래와 같습니다.

2026/09/12

내가 읽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 순위

어제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 헌정 단편 앤솔로지를 읽은 뒤 탄력받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서 포함해서 모두 12권 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 중에서는 여섯 권을 빼고는 전부 읽었습니다.

평균 별점을 확인해보니 2.3점입니다. 생각보다는 평균 별점이 높아서 의외인데, 제가 좋아하는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충실한 덕분이라 생각되네요.

제 순위와 별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공동 1위: 별점 3점

공동 4위: 별점 2.5점

공동 8위: 별점 2점

공동 11위 : 별점 1.5점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9/06

캐리온(Carry-On)(2024) - 자움 콜렛 세라: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이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공항 보안검색요원으로 일하던 이던은 정체불명의 이어폰을 전달받았다. 이어폰 속 남자는 특정 가방을 검사하지 말고 통과시키라며, 거부하면 공항에 있는 여자친구 노라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던은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따르면서도 이를 막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공항 경찰 라이오넬과 상사 필까지 살해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방 안에 있던 러시아제 독가스를 이용한 테러를 막기 위해 이던은 비행기 화물칸에 몰래 탑승하는데...

넷플릭스 제작 영화로 2년 전 작품입니다. 전개가 긴장감이 넘쳐서 나름대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이던에게 쉴 틈 없이 위기가 닥치고, 하나를 해결하는가 싶으면 곧바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덕분입니다. 이던을 협박하고 조롱하는 테러범과 어떻게든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이던의 두뇌싸움, 밀땅도 잘 그려져 있고요.

액션 연출에서도 신선함이 눈에 띕니다. 대표적인 장면은 경찰 엘레나가 CIA 요원으로 위장한 테러범 일당과 자동차 안에서 격투를 벌이는 부분입니다. 좁은 차량 안의 싸움을 독특한 촬영과 카메라 워크로 보여줘 인상적이었습니다.

폐쇄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공항'을 무대로, 일반 승객들은 잘 모르는 여러 장소를 보여주는 부분들도 좋습니다. 화물을 분류하고 이동하는 지하 공간처럼요. 마지막 화물칸에서의 승부에서, 일종의 '냉장고'를 이용하여 테러범과 세금을 그 안에 집어 넣고 밀봉한다는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이 역시 일반 승객들은 잘 모르는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헛점이 믾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범인들의 동기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테러범은 특정 국회의원을 러시아 독가스로 살해해서 테러 배후가 러시아인 것처럼 꾸미고, 이를 계기로 군비 증강을 유도해 군수 산업이 이익을 얻도록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애초에 이런 비행기 밀반입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공항 안에서 독가스를 퍼트려도 되니까요.

보안요원 한 명을 협박해서 독가스를 밀반입한다는 계획도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이던이 처음부터 농담이나 단순 협박으로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면 계획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공항에서 노라를 언제든 저격할 수 있다는 협박을 그대로 믿는다는걸 납득하기도 어렵고요.

이 정도 규모의 테러를 준비하면서 핵심 가담자가 사실상 두 명 뿐이라는 설정도 빈약합니다. 공항 내부를 파악하고 보안요원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면서 독가스까지 반입하는 계획에 비하면 조직의 규모가 지나치게 작습니다.

캐스팅도 아쉽습니다. 가족과 직장생활에 치여 열정을 잃어버린 30대 남성을 연기하기에 태런 에저튼은 너무 어려 보였습니다. 액션을 펼치기에도 다소 왜소한 체격이 개인적으로는 거슬렸어요.

그나 제이슨 베이트먼이 연기한 테러범은 괜찮았습니다. 이어폰 너머에서 차분하게 이던을 협박하고 조롱하는 모습이 효과적이었고, 두 사람의 심리전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테러범의 연기와 역할 만으로는 평범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기는 역부족인 결과물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특별히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2026/09/05

엔드 오브 에버노트 — 34,246개의 노트와 이별을 준비하며

저는 에버노트를 2012년부터 사용해 왔습니다.

처음 사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웹 클리핑 기능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읽다가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면 기사든 블로그 글이든 간단하게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가 직접 작성한 글과 메모까지 더해졌고요. 그렇게 14년 가까이 사용한 지금, 에버노트에 쌓인 노트는 34,246개입니다.

처음에는 무료로 사용했지만 저장하는 자료가 늘어나고 사용 빈도도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유료 회원으로 전환했습니다. 유료 결제를 이어온 지도 약 10년이네요.

그동안 에버노트의 가격 정책은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요금이 오르기도 했고, 요금제 구성이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용하는 범위에서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1년에 몇 만 원 정도라면 자료를 보관하고 검색하고 웹페이지를 쉽게 스크랩하는 비용으로 받아들일 만했으니까요.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계속 결제해 왔습니다. 작년에는 연간 이용료로 99,000원을 냈었지요.

그런데 최근 변경된 요금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변경된 요금제로 제가 사용하게 된 Evernote Starter의 연간 요금은 75,399원입니다. 그런데 현재 Starter 요금제에서 만들 수 있는 노트는 최대 2,000개입니다. 노트북은 20개, 첨부파일은 1,000개, 저장공간은 5GB, 동기화할 수 있는 기기는 3대로 제한됩니다.

물론 Starter 가입자라 해도 기존 노트가 삭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노트를 열어 보고 수정하거나 내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트 수가 한도를 넘은 상태에서는 더 이상 새 노트를 만들 수 없습니다. 당연히 웹 클리핑도 불가능하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하던 방식대로 에버노트를 계속 사용하려면 Advanced 요금제로 올라가야 합니다. 한국 기준 연간 요금은 Starter의 75,399원보다 매년 115,000원을 더 내야 합니다. 지금보다 약 153%가 늘어나며, 전체 이용료는 약 2.5배가 됩니다.

이건 단순히 가격이 조금 오른 게 아닙니다. 10년 가까이 유료로 사용하면서 3만 개가 넘는 노트를 쌓아 온 이용자가 지금까지 하던 일을 계속하려면 연간 이용료를 7만 5천 원에서 19만 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거니까요.

물론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비용이 들고, 운영비가 오르면 구독료도 오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비용을 지불해 왔으니 유료 서비스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기존 사용자의 기능을 줄여 놓고, 그 기능을 계속 사용하려면 훨씬 비싼 요금제로 옮기라고 요구하는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적은 금액도 아니고, Starter 역시 Advanced의 약 40%에 해당하는 비용을 내는 유료 요금제인데, 제 사용 방식에서는 새 노트 생성과 웹 클리핑이라는 핵심 기능조차 사실상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에버노트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동안 백업에는 너무 무심했습니다. 3만 개가 넘는 노트가 들어 있는데도요. 백업은 번거로웠고, 매년 비용을 내고 있으니 에버노트가 계속 잘 보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는 좋아하던 서비스가 사라지는 일을 이미 몇 번 겪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글루스입니다. 20년 가까이 사용했던 블로그 서비스였지만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오랫동안 제 기록을 쌓아 온 공간도 서비스가 끝나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구글 뮤직도 마찬가지예요. 구글이 운영하는 서비스라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기업의 판단에 따라 서비스는 언제든 종료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과 달리 에버노트는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서비스 종료를 발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어떤 서비스도 제 기록을 영원히 보관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버노트와 이별을 준비하려 합니다.

당연히 유료 서비스는 탈퇴하고, 34,246개의 노트를 제 손으로 다시 가져올 겁니다. 에버노트에만 있는 자료를 백업하고, 필요한 것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앞으로 사용할 웹 클리핑 대안도 마련할 생각이에요. 웹 클리핑은 우선 Firefox의 SingleFile로 HTML 파일을 저장한 뒤 Google Drive에 자동 백업하는 방식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본문 검색은 ChatGPT 연결을 활용하고요.

당연히 이 방식은 하나의 서비스에서 통합된 경험을 제공했던 에버노트보다 불편합니다. 그래도 서비스는 빌려 쓰는 것이지만, 기록은 결국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이글루스와 구글 뮤직을 떠나보낼 때 이미 어렵게 겪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14년 동안 에버노트에 쌓인 3만 4천여 개의 노트가 지금 다시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서비스에 종속되지 않고 데이터를 제가 직접 보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블로그에 쌓인 글들은 나중에 어떻게 백업하면 좋을까,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30

다시 뽑아보는 3대 미스터리 (from 알라딘)

"3대 미스터리"로 알려진 작품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하고, 이후에도 많은 미스터리가 발표되었기에 새롭게 3대 미스터리를 정해보자는 기획이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열두 명의 전문가와 알라딘 미스터리 마니아 100인이 작성한 추천 리스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세 작품을 선정하였다고 하네요.

선정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걸작이지만, "13.67"과 "용의자 X의 헌신"은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탓입니다. 장르 역사적으로 크게 의미있는 작품도 아니고요.

전문가라고 초빙된 분들도 아쉽습니다. 일본 소설 번역가, 출판사 대표의 경우 사심이 배제되기 어려울테니까요. 실제로 김은모 번역가의 추천작은 모두 일본 소설입니다. 에세이 작가 김혼비 님은 왜 전문가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알라딘 미스터리 매니아 100명의 투표 역시 일본 소설로 쏠려있는 국내 미스터리 시장의 현황이 극단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나마 아래 하우미스터리 운영자이신 decca님의 추천 정도만 납득할만 했습니다.

물론 이런 리스트는 수많은 매체에서 정리, 발표해 왔기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기는 합니다. 리스트에 선정되었다고 다 좋은 작품들도 아니고요. 이번 알라딘에서 선정된 작품들은 최소한 '재미'만큼은 보장되어 있으니, 오히려 추리 소설에 입문하는 분들에게는 더 좋은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알라딘 선정 정말 재미있는 미스터리" 같은 제목을 붙여서요. 선정 기준도 불분명하고, 트렌드에 치우친 현재의 투표 결과를 통해 선정된 작품을 '3대 미스터리'라고 부르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한 수식어에요.

마지막으로 저만의 역대 베스트 3을 소개드립니다. 책 소개는 링크의 리뷰로 대신합니다.

2026/08/29

츠쿠모고미 - panpanya: 별점 2.5점

애정하는 작가 panpanya의 신간입니다. 올해 4월에 출간되었는데, e-book 출간을 기다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구매하였습니다. 모두 17편의 짧은 에피소드를 수록한 단편집입니다. 일상적인 소재에 기묘한 상상과 설정을 더하는 panpanya의 기존 작풍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는 "Home Vacation", "파인애플을 모르신다", "철새의 계절", "우리는 일본 보도교 주식회사"가 특히 좋았습니다.

"Home Vacation"은 집 자체를 물에 띄워 휴가를 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을 떠나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니라 집 자체와 함께 움직인다는 단순하면서도 엉뚱한 발상이 재미있습니다.

"파인애플을 모르신다"에서는 파인애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탐구하다가 pineapple이라는 이름 그대로 솔방울과 사과를 합쳐 새로운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말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실제 상황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이 기발해요. 파인애플은 코스타리카에서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기밀이며, 주인공이 만든 '푸르츠 솔방울'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결말도 좋았고요.

"철새의 계절"은 어릴 때에는 새들이 거대했지만 성장한 뒤에는 평범한 크기로 보인다는 내용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차이를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일본 보도교 주식회사"는 육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상가를 도입하는 등 여러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이야기입니다. '수고'가 든다는 단점을 회피하기 위해 육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발상이 아주 그럴듯해요. 아래와 같은 상업 시설의 추가는 어렵더라도, 자판기와 간단한 휴식 공간 정도는 충분히 말이 됩니다. 아예 극단적으로 높이를 높인 전망대 형식도 그렇고요.

여유로운 분위기와 부드러운 그림도 여전히 좋습니다. 비현실적인 설정을 과장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처럼 그려내는 방식도 작품과 잘 어울립니다.

반면 전체적으로는 전작들보다 기발함이 부족한 편입니다. 특히 panpanya의 작품을 계속 읽어 왔다면 새롭거나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어요. "게에게 홀려서 2", "decoy 23, 봄", "여긴 어디일까요? 여행" 등 기존부터 이어져 온 시리즈가 수록된 탓이 큽니다. 익숙한 설정과 소재가 반복되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다는 느낌이 약해요.

비교적 긴 이야기인 "승리의 짜임새", "동물의 분수", 표제작 "츠쿠모고미"도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별로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여준다기보다 기존 작품의 설정과 분위기를 다시 활용한다는 인상이 강해 자가 복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panpanya 특유의 상상력과 분위기, 그림은 여전히 즐길 만하고 몇몇 단편은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작품들 중에서는 처지는 편입니다.

2026/08/28

종이학(折鶴)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한 단편집입니다. 표제작 포함하여 모두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8년 이즈미교카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네요. 원서로 읽어보았습니다.

아와사카 쓰마오의 다른 작품에서 흔히 보였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달리, 담백하고 순수한 연애물로 대체로 나이 든 중년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처럼요.

기모노에 문장을 그려넣는 '문장사'로서의 경력을 한껏 담아낸 기모노와 자수 등 전통 장인들의 세계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소재가 차분한 사랑 이야기와 어우러져 작품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요. 미싱과 같은 현대 기술 때문에 몰락해 가는 장인들의 모습은 참 실감납니다.

대단한 범죄는 등장하지 않지만, 본격 추리 작가다운 추리적인 요소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시노비야마 사랑 노래"에서는 여관 고카쿠로에서 요지로가 살해당한 뒤, 원한이 있던 유키다유가 범인으로 의심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키다유 일행은 샤미센을 연주하며 떠났다는 증언 덕분에 혐의를 벗었지요. 그러나 와키타는 증인들이 일행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듯한 샤미센 소리만 들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관을 떠난게 아니라 연주 소리를 조금씩 줄이다가 멈추어 떠난 것처럼 꾸며냈을 거라고 추리하지요.

"가쿠노다테에서"에서는 고급 프랑스 요리점의 성냥과 향수, 유코 가문의 정식 문장이 들어간 기모노를 단서로 도시유키가 유코의 마음을 알아챕니다. 범죄 해결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밝혀내는 데 추리적인 테크닉을 활용한게 인상적입니다.

표제작 "종이학"에서는 누군가 다고토의 이름을 사칭해 불륜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이는 쓰루코가 다고토를 이용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고요. 이 작품도 본격적인 범죄보다는 사람들의 관계와 감춰진 마음을 밝히는 장치로 추리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아무래도 추리 소설로서는 시시하다는 점입니다.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라 사건과 트릭이 소박하고, 기발한 범죄나 강렬한 반전을 기대한다면 아쉬울 수밖에 없어요. 강력 범죄와 트릭이 등장해서 그나마 가장 추리 소설다웠던 "시노비야마 사랑 노래"조차도, 와키타의 추리와는 다르게 진범은 그냥 강도였다는 진상이라서 허무합니다. 

그리고 여성 심리가 설득력있게 그려지지 못한 문제도 큽니다. "시노비야마 사랑 노래"에서 아야코가 와키타와 밤을 함께 보낸 이유, "사랑의 도피"에서 유리가 3일간의 도피 후 마음을 바꾼 이유, "가쿠노다테에서"의 유코가 전 남편과도 시간을 보냈으면서 구태여 도시유키에게 돌아왔던 이유 모두가 불분명합니다. 이런걸 순애, 혹은 여심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종이학"의 쓰루코는 정말 최악이에요. 원래 다고토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집안의 반대로 데릴사위 류지를 들여 결혼한 뒤, 나중에 가업을 살리기 위해 거래처 부장 요코쿠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거든요.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존 작품과 전혀 다른 아와사카 쓰마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담백한 순애와 중년의 마음, 일본 전통 장인의 세계에 소박한 추리를 곁들인 독특함에 더해 일본 전통 기모노 세계와 묘사도 아름답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인 재미는 약하지만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추천드립니다.

2026/08/23

책이라면 팔 만큼 - 코지마 아오: 별점 3점

헌책방을 중심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화입니다. 2025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남성편 <1위>, 2026년 일본 만화대상 <1위>라는 수상 실적에 혹해서 충동구매하여 읽었습니다. '서점'이나 '헌책방'이 등장하는 작품들 대부분이 재미있었다는 이유도 컸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있습니다. 이런 소재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억지스러운 신파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충분한 드라마를 갖추고 담백하면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가서 좋았어요.

모든 에피소드가 실제 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 "커피에 별사탕"의 경우, 남편과 사별한 노부인이 남편이 좋아했던 컵과 커피, 꽃에 대해 이야기하자 헌책방 주인은 그것들이 데라다 도라히코의 시에 나오며, 그 시에 따르면 노부인이 남편에게는 '미인'이었다는걸 알려줍니다. 책과 한 사람의 추억 연결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따스하지요. 저도 이런 이야기를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헌책방 '시월당'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점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구성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월당 자체의 이야기보다 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책을 읽지는 않지만 수집을 좋아하는 '조지 씨' 이야기처럼요.

물론 소재와 설정, 전개는 뻔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전문가나 특정 직종을 테마로 하는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 탓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신선함은 부족하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새롭지는 않아도 담백한 분위기와 책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추천작입니다. 다음 권에서는 실제 책과 사람들의 사연을 연결하는 매력 포인트를 더 잘 살려주면 좋겠네요.

2026/08/22

스파이더 맨 브랜드 뉴 데이(2026) -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별점 4점

지금 최고 흥행작이죠. 마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OTT를 통해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왜 리뷰가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번 작품은 오랫만에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가장 돋보인 건 액션입니다. 화끈하고 속도감 넘칩니다. 특히 초반의 1인칭 시점 질주, 활강 장면은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연출이라 신선했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도 적절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진 그레이가 점프하듯 다른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CG가 필요없는 아날로그적인 촬영으로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구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탄탄한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진 그레이가 벌이는 일종의 테러에는 V-Max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이는 나중에 진이 갇혀 있던 연구소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브랜드에서 유래되었다는게 밝혀지면서, 진의 언니 세라가 연구소에 감금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과거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단서가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고, 동시에 진 그레이의 행동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구성인데 아주 훌륭해요. 복선을 제시하고 회수하는 과정도 깔끔하고요.

중반에 진이 MJ의 육체를 강탈했지만, MJ인 척 피터 파커를 속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이 역시 진의 농간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의 가공할 능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켜 주거든요. 

블랙 위도우와 헐크 등 다른 마블 히어로들의 등장도 반갑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퍼니셔와 스파이더맨의 조합이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보면 잘 어울리는 콤비는 아니지만, 상극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의외로 잘 맞습니다. 피터 파커가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퍼니셔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등 개그 장면들이 아주 발군이에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피터 파커가 MJ를 잊지 못한 채 4년이나 홀로 지내며 괴로워한다는 설정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21세기 MZ 세대의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MJ 역의 젠데이야가 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외모를 갖췄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고요.

마지막 절정부도 조금 아쉽습니다. 영화의 중심이 강력한 슈퍼 빌런과의 대결보다는 피터 파커 내면의 사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액션 대결이 없습니다. 핸즈와의 대결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질 것 같지 않은 상대라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마블 영화와 세계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100% 즐기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신선한 아이디어, 적절한 유머에 잘 짜인 이야기를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2026/08/21

희극비기극(喜劇悲奇劇)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 화물선을 개조한 공연용 배 '우콘호'에 시치로는 마술사로 고용되어 조수 마코토와 탑승했다. 그러나 연예인 혹부리 곤타와 세가와 박사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치로 일행은 피해자들 모두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졌다는걸 알아냈다. 시치로는 전처 우타코, 조수 마코토(모리 마리모라는 예명)가 다음 피해자가 될까 걱정하면서 점차 사건에 깊숙히 휘말리게 된다...

일본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본격 추리와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소동극이 결합된게 특징입니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한다는 설정도 독특하고요. 목차의 모든 소제목도 회문으로 구성되어 있을만큼 회문을 전편에 걸쳐 적절히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첫 피해자였던 논 레논(None lenon)이 진범이었고, 그 정체는 그랜트였다는 전개도 좋습니다. 그랜트와 레논은 동일 인물이었으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고 있었다는건데, 이를 마술이라는 소재로 드러내는게 아주 기막힙니다. 

우선 레논의 특기 마술은 얼굴을 가린 채 선보이는 독심술인데, 이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장의 거대한 트럼프를 이용한 마술 리허설도 진상과 연결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바꿔치기 마술이었지만, 곤타만은 그 공연을 유난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곤타는 무대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트럼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해 보였던 바꿔치기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는걸 알아챈 것이지요.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사건 당시 배 안의 전화는 계속 불통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킨 단장은 전화로 곤타의 방에 불려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화는 배 밖에서 걸려 왔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모두 파악하면서 외부에서 바킨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그랜트뿐이었고요.

연쇄살인의 배경이 된, 과거 사이비 종교 집단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근처를 지나던 무일푼으로 궁지에 몰렸던 바킨 단장과 산엔자이 극단원들이 환자들을 돕는 대신 마약으로 독살하고 금품을 빼앗은 사건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이를 통해 범인 그랜트는 사이비 종교 집단 교주로 현재의 살인들은 산엔자이 극단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복수극이었던게 밝혀지는데,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높습니다. 아울러 앞서 결정적 조건으로 보였던 회문 이름은 단순히 회문을 좋아했던 바킨 단장이 단원들 예명을 지어서 생긴 우연의 일치였다는 상황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좌충우돌하는 희극적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곤타의 시체가 들어 있는 호랑이 탈 인형이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면서 벌어지는 대소동이 대표적입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과 황당한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제목처럼 희극과 비극이 뒤얽힌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주인공 시치로가 아주 별로입니다. 아내가 떠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마술사라는 설정, 조수 마코토와 전처 우타코를 둘러싼 관계 모두 진부합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논리적인 추리 과정과 다르게 개별 살인에 사용된 트릭들도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레논이 칼에 찔려 죽은 것처럼 꾸민 방법이 대표적입니다. 배의 근육과 지방을 등 쪽으로 이동시켜 칼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레논이 인도에서 특별한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세가와 박사를 사고사로 위장한 라이터 트릭 역시 가스 라이터에서 나온 불꽃이 사람을 태울 정도로 강하게 번진다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어서 비현실적이에요. 인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망할 정도의 사고가 될리는 없었을 겁니다.

곤타와 타마하의 시체가 뒤바뀐 과정도 별볼일 없어요. 당시 시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인물이 사실상 그랜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일찍 짐작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거 미국의 사이비 종교 집단과 관련된 외국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주요 인물 가운데 그 조건에 맞는 외국인은 사실상 그랜트뿐이니까요. 

그래도 '회문'과 마술이라는 소재의 사용과 추리적인 전개, 흥미로운 과거의 범죄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개별 트릭의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회문과 마술을 결합한 색다른 본격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추천드립니다.

2026/08/16

채권추심원(2026) - 수라퐁 플런상: 별점 2점

눔은 과거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의 채권 추심원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채권 추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10년 동안 복역했고, 출소 후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용히 살아가던 눔이 알고 지내던 노점상인 할머니와 손녀가 사채업자 포에게 잔혹하게 당한 뒤 눔은 포를 죽일 결심을 하는데...

넷플릭스로 감상한 태국산 액션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뻔합니다. "아저씨"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잘 알지도 못했던 소녀를 위해 남자가 목숨을 걸고 복수한다는 이야기의 변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를 사용했다는걸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뻔한 이야기라도 복수의 과정과 액션을 얼마나 멋지고 처절하게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니까요.

문제는 정작 그 액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좋게 보면 실제 싸움에 가까운 실전 액션이지만, 나쁘게 보면 동네 막싸움처럼 보여서 영 폼이 나지 않습니다. 눔이 전문 킬러나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라 전직 채권 추심원인 만큼 엄청난 전투 능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복수극의 핵심 볼거리라고 할 만한 장면은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액션을 추구했다고 해도 영화적인 쾌감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었어요.

악당 포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눔과 마지막까지 맞서야 하는 인물인데 무력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고, 비주얼에서도 위압감이 부족합니다. 주인공의 복수가 강렬하게 느껴지려면 그만큼 상대하는 악당도 강력해야 하는데, 최종 보스라고 하기에는 기생 오래비 느낌이라서 여러모로 격이 떨어집니다. 눔의 액션과 포의 존재감이 모두 약하다 보니 절정부의 액션도 시시하고요.

불필요한 설정도 많습니다. 눔이 뇌종양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눔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경찰인 콩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콩은 그냥 정의로운 경찰로 설정하고, 상관의 비밀 지령을 받아 수사하다가 그 상관이 실제로는 악당 포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정도로 이야기를 끌고 갔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러 사정을 추가하다 보니 인물은 복잡해졌지만 그만큼 이야기가 풍성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처음 접해 본 태국 영화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만듦새가 좋다는 점에는 크게 놀랐습니다. 연출은 물론 촬영과 편집, 음악까지 어느 하나 크게 빠지는 부분이 없는 웰메이드 영화더라고요.

하지만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인 만듦새는 좋지만 액션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까지 뻔한데 액션의 쾌감도 부족하다 보니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6/08/15

동궁(2026) - 최정규: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건이 연못 귀신의 저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연못 귀신의 원한은 자신을 모함해 죽인 대왕대비를 향한 것이었고, 왕과 동궁에는 원한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왕이 왕이 될 수 있던건 왕의 생모인 숙빈이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벌였던 독살 덕분이었고, 숙빈은 대왕대비와 연못 귀신의 원한을 이용해 진실을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하지만 이 과거의 사건 역시 현재 세자들의 죽음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의 악귀는 얼마 전 죽은 세자였거든요. 결국 죽은 세자가 형제를 독살해 왕이 되려 했고, 이를 알아챈 왕이 세자를 죽이면서 원한이 시작되었다는 진상이 밝혀집니다.
이렇게 반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못 귀신 - 대왕 대비 - 숙빈 최씨 - 세자로 주적이 계속 바뀌는 구성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왕 역의 조승우와 대왕대비의 연기는 감탄이 나오며 영상도 인상적입니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감을 유지하면서 왕의 곤룡포와 생강 옹주의 화려한 한복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장면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의상과 세트도 보기 좋게 갖춰져 있으며, 꺼먹살이의 귀여운 존재감도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였어요.

하지만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초반 영안군을 습격한 존재가 연못 귀신처럼 묘사된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연못 귀신은 영안군을 습격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또 이는 진상과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귀매의 눈을 얻은 구천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쪽 세계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와 같이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제법 되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액션입니다. CG도 과하지만 액션이 최근 다른 작품들에 비해 화려함, 강함, 속도감 모두 부족한 탓입니다. 특히 마지막 세자와 구천의 대결은 90년대 오래된 홍콩 영화 와이어 액션처럼 보입니다. 세자와 구천 모두 무술에 능하다는 설정도 없어서 이런 육탄 대결에 대한 설득력도 약하고요.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궁중 미스터리와 반전이 많은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추천드립니다.

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에요.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