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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1

2015 두산베어스 한국시리즈 우승!!!!

두산 베어스가 올 시즌 놀랍게도 우승을 하고야 말했습니다!!! 누가 두산 아니랄까봐 정규시즌 3위를 차지한 뒤 준플레이오프부터 거친 업셋 우승!

재작년, 13년에 3승 1패로 앞서나가다가 스윕당하고 패배한 기억이 남아있어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초반부터 타선이 폭발하여 비교적 마음 편하게 관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4년간 참으로 많은 안타까움과 아픔을 안겨다 주었는데 이거 참 어안이 벙벙하고 먹먹하네요.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신임 감독 선임 이후 주축 선수인 이용찬, 이원석 선수에 홍상삼 선수 등을 군입대 시킨터라, 리빌딩하면서 새판을 짜는 시즌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기대 이상의 성과입니다. 물론 장원준 선수를 FA 영입하기는 했지만 진짜 승부는 한 2년 뒤라고 봤었거든요.

삼성의 도박 선수 파문 등 운이 따른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두산도 시즌 중 외국인 선수가 없다시피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니퍼트 선수 한 명 뿐), 무너진 중간계투진은 결국 손쓸 방법이 없었음에도 선발 투수에게 최대한 맡기는 운용 및 적절한 선수기용과 빅볼, 스몰볼의 조합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선발 싸움에서 압승을 거둔데다가 타선마저 터져주니 이길 수밖에 없죠. 게다가 그동안 터질 듯 말 듯하던 허경민, 박건우 선수가 드디어 눈을 떴다는 것 역시 아주 기쁩니다.

또 두산이 잘한 것도 있지만 삼성은 정말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게, 정규시즌 1위팀 답지 않게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믿었던 피가로의 부진 탓이 가장 클 텐데 흡사 14년 전 두산이 우승할 때의 갈베스를 연상케하더군요. 침묵하는 몇몇 타자들의 타순조차 손보지 않은 믿음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고요.

여튼 선수들을 비롯하여 모든 구단 관계자, 감독님 이하 코칭 스태프, 그리고 두산 팬분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년부터 두산 팬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하루였습니다. 이런 맛에 응원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오늘 축제의 현장에 꼭 함께 했으면 좋았을 몇몇 선수들 (예를 들면 이재우 선수라던가...)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내년, 내 후년에는 같은 자리에서 꼭 함께 했으면 합니다.

언제나 파이팅 허슬! 두!!!!

2015/10/28

애프터 다크 - 무라카미 하루키 / 권영주 : 별점 2점

애프터 다크 - 4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한밤중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아사이 마리는 밤샘 밴드 연습을 준비하는 다카하시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는 과거 언니 에리와 더블 데이트할 때 만났던 인물인데, 그를 통해 마리는 전 프로레슬러 가오루가 매니저로 있는 러브 호텔의 중국인 매춘부 폭행 사건을 도와주게 되었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것은 프로그래머 시라카와로 그는 근처 사무실에서 새벽 근무 중이었다. 한편, 아사이 마리의 언니 아사이 에리는 2개월 동안 끝없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2004년작. 장편이라고는 하는데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만 놓고 보면 중편이라고 해야겠지요. 길이도 적당하지만 읽기 편해서 집어들고 한번에 읽을 수 있었네요. 빼어난 세부 디테일 묘사와 청춘들의 잘 알 수 없는 고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묘사라는 장점도 여전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실험적인 묘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일종의 방백처럼 독자가 바라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설명하는 아시이 에리의 침실과 TV에 대한 묘사가 그러해요.

그러나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미사여구로 치장하여 보기에는 풍성하지만, 결국 정리되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에리의 잠은 깰 것인지, 마리와 다카하시가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을 배경으로 눈 속에서 데아트를 할 것인지, 시라카와는 중국인 조직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등 뭐 하나 설명되는게 없어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정도면 열린 결말도 뭐도 아니고 작가의 직무 유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책 소갯글을 보면 어둠의 감촉, 고독의 질감을 담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만큼 이미지 묘사에 주력했을 뿐입니다. 이야기만 놓고보면 성공적인 결과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거면 마리와 다카하시의 청소년 이상 성인 미만 청춘의 하룻밤 만남 이야기를 깔끔하게 그리는 것이 훨씬 쉽고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가 스스로도 한밤중 패밀리 레스토랑에 혼자 있는 소녀에게 말을 거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구상했다는 말 그대로 말이죠. 섹스 없는, 그냥 이야기만 있지만 묘하게 감정을 사로잡는 그런 이야기로요.
특히나 "상실의 시대"(저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세대라...)에서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공중전화로 전화하는 마지막 묘사 스타일로 마지막 둘의 이별을 그렸으면 정말 좋았을 거에요. 과연 마리는 맛있는 계란말이를 먹으러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설레면서도 두근거리는 여운을 남기는 식으로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분위기 묘사는 최고지만 독자에게는 아주 불친절한 작품이었다 생각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전방위적인 호평이 쏟아진 작품이라고는 하는데, 저는 이해하기 쉽고 보다 친절한 작품이 좋습니다.

덧 1 : 도서출판 비채의 추리소설 레이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로 출간되었는데, 이게 추리소설이라는 의미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데, 제 분류로는 "기타"입니다.

덧 2 : 매 장면마다 배경 음악이 소개되는 것이 특이한데, 잊기 전에 적어봅니다.

11:56 데니스

퍼시 페이스 고 어웨이 리틀걸

다카하시가 등장하여 파이브 스폿 애프터 다크 허밍

버트 배커랙 에이프릴 풀

12:25 데니스

마틴 데니 악단 모어

01:18. 작은 바

벤 웹스터 마이 아이디얼

듀크 엘링턴 소피스티케이티드 레이디

01:56 스카이락

펫 숍 보이스 젤러시

홀 앤 오츠 아이 캔트 고 포 댓

02:43 시라카와의 사무실

이보 포고렐리치 영국 모음곡

03:58 시라카와의 사무실

브라이언 아사와가 부르는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칸타타

집으로 가던 중 들른 세븐일레븐에서는 서던 올 스타스 신곡

04:52 연습실

소니 롤린스 소니문 포 투 (다카하시 밴드 연주)

05:10 세븐일레븐

스가 시카오 폭탄 주스

2015/10/26

도해 전국무장 - 이케가미 료타 / 에이케이 : 별점 2점

도해 전국무장 - 4점
이케가미 료타 지음/에이케이(AK)

출판사 AK의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제목만 보고 전국 무장의 갑주나 무구 등에 대한 도해가 실려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책이더군요. 전국시대 전체를 114개의 주요 주제별로 분류한 뒤, 주제 하나당 한 페이지로 요약 정리하고 다른 한 페이지에서는 해당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래서야 "도해 전국무장"이 아니라 "도해 전국시대"잖아요! 실제 전국 무장은 개별적으로는 거의 소개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제목 사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또 그동안 "도해"가 일러스트의 한자어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의 도해는 그야말로 사전적 의미 ―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한 것 ― 그대로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러스트라기보다는 파워포인트 보고서에 가까운 결과물입니다.

물론 주제 자체가 재미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국시대 무장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 뭘 먹었는지, 뭐하고 놀았는지, 뭘 배웠는지, 어떻게 수련했는지 등 ― 에 대한 내용이나 전국시대 실제 전투에 관련된 정보들 ― 전투를 어떻게 했고, 비용이 얼마나 들었으며 어떻게 조달했는지 등 ― 은 꽤 흥미로왔습니다. 전국시대 실제 역사의 흐름도 알기 쉽게 요약해 정리해주고요.

허나 실제 있었던 사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내용과 이러한 "도해"를 볼 때, 이건 재미로 보는 책이 아니라 그냥 참고서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으나 기대와 전혀 달랐기에 감점합니다. '전국시대' 대해 관심이 있다면 괜찮은 참고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와 같은 무장과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오타가 상당히 많아서 꽤 거슬리더군요. 이래서야 참고서로 쓰기에도 좀 애매하네요.

2015/10/24

안녕, 긴 잠이여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2.5점

안녕, 긴 잠이여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오즈미라는 청년이 사와자키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그는 11년 전 고시엔 4강전에서 승부조작 누명을 썼던 인물이었다. 의뢰 내용은 승부조작 수사 도중 자살했던 누나 유키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였다.

하라 료의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1995년에 발표되었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죠. 초·중반부는 야구 승부조작 관련 작품이 아닐까 싶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군요.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솔직히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나쁜 작품은 아니었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단점이 더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단점 중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운과 우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작위적인 전개입니다. 큰 흐름으로 본다면 사와자키가 진상에 이르게 되는 수사는 아래의 4단계를 거칩니다.

  1. 아키바 도모코의 증언이 허위임을 밝혀냄 : 사와자키의 넘겨짚기
  2. 유키와 친하게 지내던 오토바이 타는 사람 정보 입수 : 아키바 도모코를 통함
  3. 오토바이 타는 사람과 친했던 이나오카에 대한 정보 입수 : 관리인을 통함
  4. 오토바이 타는 사람의 성별 및 오토바이 번호 입수 : 이나오카를 통함

우선 1번의 경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냥 사와자키의 넘겨짚기에 불과합니다. 아키바 도모코가 끝까지 자기가 봤다고 우겼더라면 거기서 게임 끝이지요. 게다가 10여 년 전 자신이 바람 피운 것을 들켰는데 불구하고 다른 정보를 굳이 사와자키에게 전해주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3번은 유키가 살던 TK 맨션 관리인이 사진 찍는 취미가 있고 그 사진을 모두 앨범에 정리해놓았다는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역시 지나치게 운에 의지한 겁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소설적 장치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나오카가 10년 전에 잠깐 동거했던 여자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억지입니다. 물론 일종의 말장난 같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사와자키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는 복선은 좋았지만 설득력은 낮아요. 게다가 초반에 벌어진 가와시마의 죽음, 이어지는 우오즈미 습격이 모두 사건과 관계없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뭔가 있음직하게 끌고 가려는 작위성이 지나쳤달까요? 그 외에도 사건의 흑막이 신조 유스케라는 설정은 억지스럽고, 이 비밀을 우오즈미 효도가 짊어지고 함구한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부실합니다. 결국 사와자키의 부지런한 탐문과 발품에 운과 우연이 더해져 진상이 드러날 뿐, 추리로 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는 탓입니다. 진상은 결국 당사자들의 자백에 의존할 뿐입니다. 사와자키의 근거 없는 직감 추리가 도를 지나친 것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거의 초능력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대표적으로 아키바 도모코 증언에 대한 직감 추리라든가, 우오즈미에게 승부조작을 제안한 것이 유키가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넘겨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다행히 추리적인 아쉬움은 꽤 그럴듯한 반전과 진상으로 어느 정도 덮이기는 합니다. 어차피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대단한 추리를 선보이는 것은 아니니, 추리 요소가 부족한게 큰 단점이라 보기 어렵기도 하고요. 명성에 걸맞은 좋은 부분도 많습니다. 콩가루 명문가의 복잡한 가정사, 폭력조직이 연계된 사기행위라는 미국 하드보일드풍 설정을 일본 현지화에 성공적으로 녹여낸 것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전통 있는 "노" 종가를 콩가루 명문가 설정에 집어넣은 건 아주 좋았습니다.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막장 가족사에 설득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하드보일드 탐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와자키의 고독하면서도 건조한, 늑대 같은 캐릭터도 여전히 잘 살아 있었고 손에 잡힐 듯한 묘사 역시 탄탄합니다. 대사와 분위기 모두 근사해요. 제목부터 그렇지요. 또 작품과 직접 상관은 없지만, 오랜 팬으로서 사와자키와 신주쿠서의 니시고리 형사, 폭력조직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를 엮는 과거 사건 ― 13년 전 경찰 자금과 폭력조직의 각성제를 들고 도망친 옛 파트너 와타나베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밝혀지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설정 없이는 이후 시리즈가 이어지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시리즈 전작들에 비해 단점과 아쉬움도 있었지만 좋은 점도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하드보일드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한 번쯤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015/10/21

특별요리 - 스텐리 엘린 / 김민수 : 별점 4점

특별 요리 - 8점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엘릭시르

2003년에 동서 추리문고 출간본으로 읽고 폭풍 감동했던 스텐리 엘린의 걸작 단편선집입니다. 당시 별점은 5점이었지요. 이번에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엘릭시르에서 정식 번역본으로 재출간되었기에 다시 구입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품들은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번역에서도 차이가 나더군요. 제목부터요. 원제를 보니 엘릭시르 번역본이 확실히 제대로 된 번역이네요. "the best of everything"은 "최상의 것"이지 "너와 똑같다"일리 없으니까요. "배반자들 (The Betrayers)"의 경우는 동서판의 "벽 너머의 목격자"라는 제목이 더 와닿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최초 일어판의 초월번역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겠지요. 번역은 일단 원제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엘릭시르 버전 쪽에 점수를 더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유명한 스빌로스의 아밀스턴 양 요리도 스비로스의 아미르스탄 양 요리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역시 엘릭시르 쪽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작품들 자체는 10년도 더 전에, 그것도 이미 한 번 읽었기에 신선함이 떨어지는건 어쩔 수 없네요. 아무래도 별점 5점을 줄 때만큼의 감동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오 헨리를 연상케 하는 반전의 맛은 여전히 살아 있고, 일상적이지 않은 독특한 세계와 인물을 그려내는 설정 역시 빼어납니다. 개인적으로는 각 단편에 등장하는 악당들 대부분이 지옥으로 간다는 결말들도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언제 읽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걸작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4점. 이런 말은 좀 식상하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각 작품별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특별 요리

스비로스의 아미르스탄 양 요리! 뭐 더할 나위 없는 걸작이지요.

손발의 몫

"미생"이 "완생"이 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랄까요. 비정한 고용인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본인은 그에 대한 자각 없이 하나의 기계로 동작한다는 작품. 지금의 한국 사회와 딱 어울리는 느낌이라 시대를 앞서간 듯 합니다. 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살해한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걸작 "도끼"도 떠올랐습니다.

성탄 전야의 죽음

이십여 년에 걸친 무간지옥 이야기. 누가 제시를 죽였는지에 대해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다가 마지막 대사 하나로 놀라운 반전을 터트리는 작품. 이런 류의 서늘한 느낌을 전해주는 반전 단편으로는 교과서라 해도 무방할 수작입니다.

애플비 씨의 질서정연한 세계

아내를 여섯 명이나 죽여가며 자신의 골동품 가게를 지키려던 애플비 씨는 일곱 번째 여자와 결혼하는데, 정작 그녀는 그에 대한 모든 범죄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 조금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블랙 코미디 느낌의 반전 결말이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체스의 고수

체스에 몰두하다가 자신의 상대가 될 또 다른 인격을 분열시킨다는 내용.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아 아쉬웠지만 평범한 사람의 정신이 붕괴하는 과정 묘사는 탁월해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했습니다.

최상의 것

"리플리"의 또 다른 버전이랄까요. 자신과 닮은 부잣집 아들을 죽이고 그에게 오는 돈을 가로챈 젊은이에게 파국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이어지는 설정, 그리고 반전 역시 좋았습니다.

배반자들

과거 읽었을 때에도 아주 좋았던 작품. 벽 너머에서 누군가 살해당하는 소리를 들은 이웃집 남자의 활약(?)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인데 역시 반전 매력이 돋보였습니다.

하우스 파티

무간지옥 2탄. "사랑의 블랙홀"의 막장물 버전이지요. 반전은 없고 다소 뻔한 내용이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연극과 무한 반복되는 세계라는 감옥을 연결시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브로커 특급

아내의 불륜을 눈치채고 불륜남 살인을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 다 좋은데 결말이 석연치는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한 게 뻔한데 진정한 사랑 운운하며 같이 죽는다는 건 납득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인 걸까요?

결단의 순간

태어나서 고민이라는 걸 한 번도 안 해본 남자가 일생일대의 고민을 앞둔다는 내용으로 열린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이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목숨을 건 딜레마라는 점에서,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피아니스트를 불타는 집에 수갑을 채워놓고 도끼인지 칼인지를 꽂아놓고 쿨하게 떠나는 남자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디서 읽었던 걸까요?

2015/10/18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 - 다이나 프라이드 / 박대진 : 별점 2점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 - 4점 다이나 프라이드 지음, 박대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과거 제 블로그에 "추리소설과 요리"에 대한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단 비공개 상태로 바꾸어 두었는데, 이 책도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궁금하여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물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위에 연결된 인터넷 서점 책 소개 페이지에서 보이는 샘플들 그대로, 소설에 등장한 요리를 재현하여 해당 문장과 사진을 배치한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물론 사진은 예쁘게 잘 찍혔습니다. 재현도도 높고요.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혹은 있어 보이는 카페의 인테리어 소품?)으로는 아주 괜찮습니다.

그러나 디자인 학교에 재학 중이던 저자의 프로젝트로 시작한 작업이라서 요리와 사진, 즉 보이는 비주얼에 공을 들이기는 했지만 그 외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원전인 책에 대한 비중이 낮을 뿐더러, 소개된 요리들도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문제입니다. 등장하는 작품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읽어보았던 작품 속의 해당 음식을 떠올려보면 기억에 남지도 않는 소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그나마 몇몇 아동용 소설과 동화 속 요리들, 그리고 "변신"에서 벌레가 되어버린 주인공을 강하게 드러내는 썩은 음식 정도만이 작품과 연결고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50개나 되는 꼭지 중 고작 이 정도라면 많이 부족합니다. 요리도 그냥 재현일 뿐, 요리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나 레시피조차 실려 있지 않고요.

한마디로 저자가 문학과 요리, 양쪽 모두 잘 모르고 그냥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에 집중한 결과물입니다. 문학 작품 속 요리를 재현한다는 거창한 목표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최소한 요리가 주가 되는 작품을 찾는 노력이라도 했어야지요. 추리소설이라면 "요리사가 너무 많다", 영화라면 "바베트의 만찬"같은 식으로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알맹이는 사진 외에는 찾기 어려습니다. 독자가 아니라 작가의 자기 만족을 위한 결과물에 불과해요. 예쁘기는 하나 건질 것 없고 얄팍한 내용과 만 원이 넘는 가격을 고려한다면, 음식·요리에 관심이 있으시더라도 굳이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슷한 스타일이라면 소개되는 요리는 훨씬 적지만 원전과 요리에 대해 깊이 있게 소개해주는 "라블레의 아이들"이 훨씬 제 취향이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한두 개씩 쓰던 "추리소설과 요리" 관련 글도 뭔가 책 한 권이 나올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기는 하네요.

2015/10/16

푸른 묘점 - 마쓰모토 세이초 / 김욱 : 별점 2.5점

푸른 묘점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정보상 다쿠라 요시조가 휴양지 절벽에서 추락해 죽었다. 그의 죽음이 여류작가 무라타니 아사코의 표절 의혹과 관련이 있음을 추리한 잡지사 편집부원 노리코와 다쓰오는 힘을 합쳐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조사를 통해 둘은 아사코의 소설이 그녀의 아버지 시시도 간지의 제자 중 한 명인 하타나카 젠이치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아사코의 남편 실종 후 아사코도 정신병원 입원 후 종적을 감추었고, 다쿠라 요시조의 처남 사카모토 고조도 동료를 살해하고 도주하는 등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1958년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일단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이 눈에 띕니다. 제가 읽은 작가의 장편 중에서는 이례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요. 첫 번째는 사회파 미스터리 거장의 작품임에도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 두 번째는 탐정역의 주인공들도 평범한 잡지사 편집부원들이라는 점, 세 번째는 두 남녀의 풋풋함 - 여성인 노리코 시점이지만 - 이 가득한 점, 마지막은 일본 각지를 누비는 여정 미스터리의 풍취가 강해서 후배작가 우치다 아스오의 작품 느낌이 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이 작품의 질을 떨어트리지는 않으며, 엄청난 두께임에도 술술 넘어가는 재미는 기본적으로 보장한다는게 과연 거장의 작품답습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적으로 굉장히 풍성한 덕이 큽니다. 특히 등장 인물들의 관계를 활용한 반전, 진상이 탁월합니다. 반세기 전의 아이디어인데 지금 보아도 신선했어요.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다쿠라 요시조의 아내가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아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사실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건의 복잡성과 의외성이 증가하게 되는 멋진 설정이었어요. 비슷한 발상이긴 하지만 무라타니 아사코를 다쿠라 요시조가 협박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일종의 '원본 소스 판매자'였다는 진상 역시도 놀라왔고요. 정말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아울러 시종일관 무라타니 아사코의 남편 료조라던가 시라이 편집장을 범인, 혹은 조력자로 몰아가서 긴장감을 높이는 분위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완성도 높은 걸작이라고 하기는 애매합니다. 우연으로 엮이는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쿠라가 여관을 빠져나간 직후 길에서 수면제 때문에 휘청휘청할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트럭 운전수 사가모토 코조와 마주친다는 것을 들 수 있겠지요. 이건 우연이라고 쳐도 너무 심합니다. 작가의 작품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10만 분의 1의 우연" 정도의 확률이 아닐까요? 그 외의 인간 관계들이라던가 단서, 복선이 등장하는 과정들도 작위적입니다.

석연치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갑자기 뛰쳐나간 다쿠라가 대체 술을 먹다가 그 시간에 어디를 나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고, 하타나카 구니코가 사카모토 고조와 연결되는 과정도 설득력이 없으며, 무라타니 아사코의 자살 이유 역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작중 설명된대로 정신병원 입원 후 사라지는 결말이면 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편집부원 두 명이 하타나카 젠이치의 동인시절 글을 읽고 한 번에 알아챈 무라타니 아사코의 표절을 동인 동료였으며 잡지계에서도 잔뼈가 굵은 시라이 편집장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반부터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시라이 편집장이 노리코와 다쓰오에게 조사를 시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당혹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구니코를 보호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추리적으로 풍성하다고는 했지만 정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쿠라 요시조의 추락사 관련 트릭이 별볼일 없고 설득력이 낮다는건 단점입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절벽이라는 장소를 더한 살해 방법인데 번거롭기 짝이 없더군요. 원래 추리대로 그냥 절벽에서 밀어버리면 되지 뭘 시간까지 들어가면서 이렇게까지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다쿠라 요시조가 친구의 연인을 빼앗고, 친구의 동생을 겁탈하고, 아내를 학대하고, 친구의 원고를 팔아먹는 등 죽어도 싼 희대의 악인인데 반해 그러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한 부분도 아쉬웠어요.

쓰다 보니 단점을 잔뜩 나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앞서 말씀드렸듯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여정 미스터리, 청춘 미스터리의 원형격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 추리적으로 풍성하기도 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비교적 별볼일 없는 후기작, 아류작들에 비하면 충분히 읽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무라타니 아사코의 표절 관련 설정은 Nervous Breakdown의 "산쥬(삼중) 노출"편이 떠오릅니다.

2015/10/15

군화와 전선 2- 하야미 라센진 / 성동현 : 별점 2.5점

군화와 전선 2 - 6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 성동현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하야미 라센진의 판타지 밀리터리 만화 2권, 완결권입니다.

나쟈와 바센카 콤비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옴니버스 단편물로 수록되어 있다는 건 1권과 같습니다. 특징이라면 러시아 고유 신화와 전설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고요. 신성한 곰, 물가에 사는 정령 루살카, 파르티잔 리더 "승리의 유리"(성 게오르기), 악령 쵸르트, 여름의 정령 폴루드니차, 전설의 영웅 일리야 무로메츠와 불사신 코시체이, 괴물 솔루베이 라즈보이닉, 집에 사는 노파 요정 키키모라, 성녀 파트니차, 머리 셋 달린 악룡 즈메이 고리니치(킹기도라?) 등 마지막 편을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에 러시아산 정령과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1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2권에 등장하는 신화와 전설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 특히 "전쟁"에 개입해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설의 영웅들이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싸우기 때문입니다.
또 2차대전과는 관계없이 마지막 결말에서 나쟈가 "죽음"과 한 판 승부를 벌여 바센카를 구해내는데, 여기서 약간 백합물스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노린 듯싶기도 합니다.

다만 1권보다는 아무래도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 마녀 바센카의 활약보다는 이런저런 정령과 요정들의 활약이 주가 된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2권 만에 완결된 것도 작가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일러스트 칼럼의 재미가 많이 반감된 것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군복이나 혁명 전 프랑스 드레스, 여걸들, 중세와 근대 유럽의 식사와 일본의 식사 등 다양한 소재를 망라해 소개하고 있는데, 작가의 넓은 지식은 충분히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그다지 관심이 가는 소재들이 아니었습니다. 1권에서는 러시아산 무기나 각종 장비 등 관심거리가 많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게다가 글이 너무 빽빽해서 읽기조차 힘든 점도 문제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난한 수준이지만 1권보다는 재미와 신선함 모두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깔끔하게 완결된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2015/10/11

퍼시픽 림 (2013) - 기예르모 델 토로 : 별점 3점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일본 특촬물을 헐리우드에서 구현해 낸 작품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포털을 통해 거대 괴수가 지구를 침략하고, 이를 막아내기 위해 범지구적인 기술과 자본이 결집된 "예거"와 한판 승부를 벌입니다. 그러나 예거를 능가하도록 업그레이드된 괴수들이 침략을 이어가자 이를 막기 위한 일종의 결사대가 조직되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내용은 별볼일 없습니다. 괴수의 침략을 예견한 박사가 등장하거나, 지구인들의 꿈과 희망을 모아 영웅에게 보내는 원기옥 클리셰 같은 것은 빠져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형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야기를 보기 위해 보는 영화가 아닙니다. 거대 괴수와 거대 로봇을 보기 위해 보는 영화니까요. 이 둘의 결전을 이만큼 박진감 있고 묵직하면서도 실감나게 구현한 영화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격투 신은 압도적입니다. 아이맥스로 감상하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습니다. 감독이 무엇이 중요한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확실히 오타쿠는 맞나 봐요.

이러저러한 설정 면에서의 구멍은 있지만, 제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킨 작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비슷한 기획물로 "고질라"가 있지만, 이야기와 영상 모두 이 작품이 훨씬 낫다고 생각됩니다. 미국 내 흥행이 부진하여 후속편 기획이 무산될 위기에 있었으나, 해외 흥행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고 하는 만큼 속편이 기대됩니다.

2015/10/09

라면이란 무엇인가 - 가와이 단 / 신은주 : 별점 1.5점

라면이란 무엇인가 - 4점
가와이 단 지음, 신은주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수많은 요리 만화 중에서 재미 면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라면 요리왕"의 작가 가와이 단이 새롭게 선보인 라면 만화라고 착각해서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맥이 풀릴 정도로 재미없고 지루한 책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라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시공을 초월하며 출몰하는 주인공 '박학다식 선생' 운치쿠 유조의 입을 빌려 대사로 전달하는, 일종의 라면 설명 찌라시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있는 드라마라면, 라면 오타쿠인 운치쿠에게 반한 아이쓰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라면 공부를 시작한 남자친구 쇼짱 이야기 정도인데, 이조차도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아 사실상 이야기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다고 라면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대사 처리와 관련 라면 컷 한 장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장황한 설명이 함께 이어지고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라면의 뿌리는 중국, 1871년 청일수호조약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일본으로 이주한 후 처음 만들어졌지. 1880년, 요코하마에 2172명, 고베에 516명, 나가사키에 594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지. 요코하마엔 난징 거리가 생겼고, 이곳을 다닐 수 있는 일본인은 무역, 해운, 세관 일을 하는 한정된 사람들뿐. 이 즈음 등장한 일본 최초의 라면은 담백하게 소금 간을 한 돼지고기 국물에 하얗고 부드러운 면을 넣은 것으로 '난징 소바'라고 불렀는데 요즘 라면과는 꽤 거리가 있었지."

이런 식의 설명이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이어지며, 컵라면을 설명하는 챕터 역시 "기적의 프로젝트 X : 컵라면의 탄생" 쪽이 훨씬 드라마가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래도 작가가 정말로 라면을 사랑하는구나 싶기는 하더군요. 지루하긴 해도 라면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라면 요리왕"보다도 꼼꼼해서 완성도도 높고요. 무엇보다도 정보 전달이 중심이긴 하지만, 워낙 많은 정보를 소개하고 있어서 새롭게 안 사실도 많습니다.
덧붙이자면, 주인공 운치쿠 유조는 미디어 팩토리의 학습만화 고유 캐릭터라고 합니다. 이 학습만화 시리즈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라면, 그러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던 제 잘못도 분명 있겠지요.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라면 만화'로서는 최악의 만화로, 성립을 위한 최소한의 이야기조차 없는 구성이었기에 도저히 점수를 더 줄 수 없었습니다. 단, "라면 정보" 부분에서 그나마 0.5점을 얹었습니다. 가격도 꽤 비싼 편이었는데 전혀 제값을 하지 못한, 근래 보기 드문 최악의 충동구매 서적입니다. 어떤 책인지 꼼꼼히 알아보지 않고 구입한 제 잘못이긴 하지만, 입맛이 씁니다.

2015/10/06

그랜드 투어 - 설혜심 : 별점 3점

그랜드 투어 - 6점 설혜심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18세기 영국에서 대유행했던 젊은이들의 유럽 여행, 이른바 "그랜드 투어"에 대한 미시사 서적입니다.

왜 이러한 여행이 시작되었으며 붐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배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제 여정과 관련 자료들, 여행을 떠났던 상류계층이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는지, 이후 유행한 예술과 문화, 여행의 득실, 그리고 마지막 대중화 과정까지 아래 목차 순서대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 프롤로그: 이 거대한 여행의 역사
  • chapter 1: 그랜드 투어의 탄생
  • chapter 2: 여행 준비와 안내서
  • chapter 3: 여정
  • chapter 4: 상류계층 만들기
  • chapter 5: 예술과 쇼핑
  • chapter 6: 여행의 동반자들
  • chapter 7: 코스모폴리탄으로 거듭나기
  • chapter 8: 해외 유학의 득과 실 논쟁
  • chapter 9: 엘리트 여행에서 대중 관광으로
  • 에필로그: 여행은 계속된다

책 소개와 이 목차만 보고 호기심이 생겨 구입했는데 다행히 책은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재미는 물론이고 자료적 가치도 충실한 덕분입니다. 특히 방대한 자료조사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국내 학자가 조사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랜드 투어를 이 코스로 다시 떠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용, 교육 과정, 의상, 음식, 숙소 등 실제 여행과 관련된 자료들이 상세합니다. 도판도 충실하고요.

익히 알고 있던 유명 인물들, 로크, 흄, 볼테르, 애덤스, 괴테, 기번 등에 대한 에피소드들도 흥미로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재능있는 리플리"의 그린리프가 그랜드 투어의 형태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해석은 추리소설 팬으로서 인상 깊었어요.

당연히 책의 핵심인 "그랜드 투어"에 대한 설명도 충실합니다.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인지, 젠틀맨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은 영국 문화가 외국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며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세계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여행자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어, 영국과 유럽 각국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보다 재미있게 알 수 있었고요.

또한 이 책은 "여행"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이 학습이나 개인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에 실린 체스터필드 경의 편지를 읽고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특히 와닿았습니다.

"너는 예술과 무기 양쪽에서 한때 너무나 유명했던 나라로 여행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그것이 얼마나 쇠퇴했든 간에 여전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살펴보고, 그것의 흥기와 쇠퇴를 가져온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흔히 우리 젊은이들이 그러듯이 쓰윽 훑고 지나가지 말고 제대로, 그리고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아라. 고대와 현대의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신중하게 살펴봄으로써 회화, 조각, 건축에 대한 취향을 기르렴. 그것이 교양 교육이고, 그런 것에 대한 진정한 취향과 지식이 진짜 상류층을 만드는 것이다."

저는 그동안 글 속 흔한 '우리 젊은이들'처럼 쓰윽 훑고 지나가며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는 전형적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이처럼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반성하게 됩니다.
물론 책에서도 그랜드 투어를 떠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유명 인사들이 모두 다녀왔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필수 코스이자 과시욕의 일환이었다고 지적하고는 있습니다. 1대 레스터 백작 토머스 코크처럼 그 취지에 충실한 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금 말로 '스펙 쌓기'에 가까웠다는 것이지요.

여행과 관광의 차이에 대한 설명도 의미 있었습니다. 여행은 특정 목적을 갖고 떠나는 것이라면, 관광은 오롯이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에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있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18세기 영국 상류층의 여행이 지금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은 참 놀라웠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 그리고 "여행"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은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그랜드 투어에 나선 외동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그 유명한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의 원전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된 정보였습니다. 제 딸에게도 읽혀주고 싶어 그 책도 최근에 구입했지요. 제 딸은 저보다는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5/10/04

방문자수 100만 돌파!

오늘 확인해봤는데 방문자수가 100만명을 넘었네요! 이글루스 블로그 오픈 후 12년 만입니다.

뭐 파워블로거 분들이시라면 1년 안짝에도 달성하는 방문자수이기는 하지만... 1년에 10만명도 찾지 않는 변방의 마이너 블로거로서는 감개 무량할 따름이네요.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많은 단골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글루스에서 계속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테랑 (2015) - 류승완 : 별점 3점

오랜만에 극장에서 감상한 '최신' 영화입니다. "쥬라기 월드" 이후 3개월 만이네요.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는데, 과연 재미있기는 했습니다. 특히나 각본이 아주 좋았어요. 최근 문제가 된 사회적 공분의 대상인 재벌과 권력자들의 패악을 선악구도에 녹여낸 구성이 아주 괜찮더라고요. 적절하게 삽입된 개그와 대사도 빛났습니다. 그리고 조태호가 사건을 은폐하려고 사력을 다한 이유가 밝혀지는 반전, 즉 투신이 아니라 폭행에 의한 과실치상을 감추기 위한 살인미수였다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었고, 그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잘한 요소들이 허투루 쓰이지 않고 단서로 연결되는 디테일은 추리 애호가로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연기들도 좋았는데, 특히 많이 언급되는 유아인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덕분에 감정이입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류승완 감독 영화답게 액션도 괜찮습니다. 스타일리시한 액션은 아니지만, 특유의 묵직한 실전 액션 느낌을 잘 살린 연출이 인상적이었어요.

다만 마지막 조태호를 옭아매는 마약 파티가 열리게 되는 과정은 조금 작위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또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인데, 유해진만큼은 적역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평소의 사투리 쓰는 된장냄새 나는 촌남자 이미지가 강해서, 이 작품처럼 재벌의 찌꺼기로 권력에 기생하는 하이클래스이면서도 비굴한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악당 느낌도 별로 들지 않았고요. 차라리 피해자인 트럭운전사 역의 정웅인이 이 역할을 맡았으면 더 설득력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평범한 경찰이 악당 권력자를 박살내는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로나마 대리만족이라도 해야죠.  별점은 3점입니다.

천만을 넘었고 광역수사대 팀은 건재한 만큼 속편도 기대됩니다. 조만간 극장에서 또 볼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2015/10/01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Avengers: Age of Ultron) (2015) - 조스 웨던 : 별점 2.5점

제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마블 슈퍼히어로 무비, "어벤져스" 2탄입니다. 이미 올해 초 개봉하여 폭풍 흥행한 작품이죠. "킹스맨"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감상하게 되었네요. 다들 아시는 영화일 터라 줄거리는 생략합니다.

일단 러닝타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근 영화치고는, 그것도 액션 블록버스터치고는 정말 길었기 때문입니다. 약 2시간 30분 정도인데 체감상 3시간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1, 2부로 나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어요. 덕분에 본전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질보다 양 아니겠습니까?

허나 늘어난 분량만큼 재미가 있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아이언맨 3",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져" 같은 최근 흥행작들과 비교해 보면 이야기와 캐릭터 모두 허술하고 문제가 많았습니다. 긴 러닝타임 동안 쉴 새 없이 액션이 이어지긴 하지만 지루함이 앞서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의 부실함입니다. 울트론이 토니 스타크에게 반감을 가지고 기계들의 세상을 꿈꾼다는 설정은 더 깊게 다듬었어야 했습니다. 호크아이의 가정사, 블랙위도우와 헐크의 썸, 급작스러운 비전의 탄생 등 곁가지 이야기들도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고요. 신 캐릭터인 스칼렛 위치와 퀵 실버도 등장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퀵 실버의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 퇴장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어요. 결국 이 모든건 마블의 다음 작품들을 위한 포석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지나치게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도 별로였고요.

또한 울트론이 악역으로서 강력함이 부족하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로키는 최소한 신이었는데, 울트론은 그저 깡통 느낌이거든요.

그래도 마지막 소코비아 결전은 약간의 유머가 살아 있었고, 어벤져스가 액션보다 시민 구호에 치중하는 모습은 현실적인 묘사로 인상 깊었습니다. 그동안 슈퍼히어로 영화가 간과했던 부분을 잘 짚어낸 장면이었지요. 대작 블록버스터다운 화려한 화면 구성도 볼거리는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대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인 탓에 완성도 면에서는 감점할 수밖에 없지만, 어벤져스 히어로들이 한 화면에서 함께 활약하는 모습만으로도 즐거웠기에 아예 폄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냥저냥 즐길 만한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추후 시리즈가 완성된다면 중간에 건너뛰어도 괜찮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퍼스트 어벤져", "아이언맨 2"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