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에서 대유행했던 젊은이들의 유럽 여행, 이른바 "그랜드 투어"에 대한 미시사 서적입니다.
왜 이러한 여행이 시작되었으며 붐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배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제 여정과 관련 자료들, 여행을 떠났던 상류계층이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는지, 이후 유행한 예술과 문화, 여행의 득실, 그리고 마지막 대중화 과정까지 아래 목차 순서대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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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 거대한 여행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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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그랜드 투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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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여행 준비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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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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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상류계층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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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예술과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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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여행의 동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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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코스모폴리탄으로 거듭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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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해외 유학의 득과 실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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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엘리트 여행에서 대중 관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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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여행은 계속된다
책 소개와 이 목차만 보고 호기심이 생겨 구입했는데 다행히 책은 기대를 크게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재미는 물론이고 자료적 가치도 충실한 덕분입니다. 특히 방대한 자료조사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국내 학자가 조사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랜드 투어를 이 코스로 다시 떠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용, 교육 과정, 의상, 음식, 숙소 등 실제 여행과 관련된 자료들이 상세합니다. 도판도 충실하고요.
익히 알고 있던 유명 인물들, 로크, 흄, 볼테르, 애덤스, 괴테, 기번 등에 대한 에피소드들도 흥미로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재능있는 리플리"의 그린리프가 그랜드 투어의 형태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해석은 추리소설 팬으로서 인상 깊었어요.
당연히 책의 핵심인 "그랜드 투어"에 대한 설명도 충실합니다. 문화와 예술이란 무엇인지, 젠틀맨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은 영국 문화가 외국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며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세계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여행자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어, 영국과 유럽 각국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보다 재미있게 알 수 있었고요.
또한 이 책은 "여행"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이 학습이나 개인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에 실린 체스터필드 경의 편지를 읽고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특히 와닿았습니다.
"너는 예술과 무기 양쪽에서 한때 너무나 유명했던 나라로 여행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그것이 얼마나 쇠퇴했든 간에 여전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서 살펴보고, 그것의 흥기와 쇠퇴를 가져온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흔히 우리 젊은이들이 그러듯이 쓰윽 훑고 지나가지 말고 제대로, 그리고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아라. 고대와 현대의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신중하게 살펴봄으로써 회화, 조각, 건축에 대한 취향을 기르렴. 그것이 교양 교육이고, 그런 것에 대한 진정한 취향과 지식이 진짜 상류층을 만드는 것이다."
저는 그동안 글 속 흔한 '우리 젊은이들'처럼 쓰윽 훑고 지나가며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는 전형적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이처럼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반성하게 됩니다.
물론 책에서도 그랜드 투어를 떠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유명 인사들이 모두 다녀왔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필수 코스이자 과시욕의 일환이었다고 지적하고는 있습니다. 1대 레스터 백작 토머스 코크처럼 그 취지에 충실한 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금 말로 '스펙 쌓기'에 가까웠다는 것이지요.
여행과 관광의 차이에 대한 설명도 의미 있었습니다. 여행은 특정 목적을 갖고 떠나는 것이라면, 관광은 오롯이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에 둘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있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18세기 영국 상류층의 여행이 지금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은 참 놀라웠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시는 분들, 그리고 "여행"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은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그랜드 투어에 나선 외동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그 유명한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의 원전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된 정보였습니다. 제 딸에게도 읽혀주고 싶어 그 책도 최근에 구입했지요. 제 딸은 저보다는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