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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9

8 여덟 1 - 타케모토 유지 / 고현진 : 별점 3점

8 여덟 1 - 6점
타케모토 유지 지음, 고현진 옮김/시공사

짤막한 단편들로 이루어진 개그 단편집입니다. 작화, 전개 모두 복고풍으로, 전통적인 기승전결 전개에 충실하다는 점과 여러 가지 면에서 기이한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기승전결은

  • 이야기를 시작하는 운을 띄우고 (기)
  • 그것을 조금 더 자세히 수식하거나 설명하고 (승)
  •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주제를 부각시키고 (전)
  • 마지막으로 주제를 정리하는 (결) 과정

으로 이루어지는데,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작법서에서는 "4컷만화"를 만들기 위한 황금공식으로 소개되었었죠. 그런데 이 책 수록작들은 개그만화이기 때문에 주제를 정리한다기보다는 황당하게 끝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승전황당’이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예를 들어 "드래곤 소울"을 보면, 왕따 학생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기), 그러다가 몸에서 갖가지 무기가 발견되고 (승), 지나가던 교장이 말린 뒤 자기도 이지메를 당했지만 노력해서 극복했다, 사람은 약한 것이 있어 성장한다는 훈훈한 주제를 부각시키고 (전), 마지막은 팔에 장치한 무기를 한번 쏴보라고 한 뒤 그 놀라운 위력에 경악한다는 결말 (황당)입니다.

"UROKO"는 생명을 구해준 곤들메기가 여자로 변신하여 우렁각시가 된다 (기), 곤들메기가 물을 떠나서인지 시름시름 앓게 된다 (승), 곤들메기를 돌려보내려 강으로 떠난다 (전), 던진 곤들메기를 새가 낚아채 사라진다! (황당)으로 끝납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러한 전개인데, 여기에 독특한 작가의 상상력이 결합되어 재미를 더해줍니다. 개인적으로는 SF적인 소품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좋더군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인간 전자레인지, 타임스톱워치, 인간형 휴대전화, 손바닥 맨처럼요. 팬이 있으면 공격할 수 없다는 츤데레 모질라 이야기와 "아", "이", "우", "에"라는 이름을 가진 용자들이 나오는 "마이 네임 이즈"도 빼놓을 수 없고요.

그 외에도 대부분 소소한 일상 분위기로 해피엔딩 결말이 많다는 점, 펜으로 정성껏 그린 작화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개연성 없는 황당 개그가 유행했던 적도 있지만, 저는 역시 스토리 개그가 좋네요. 복고풍 개그만화를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후속권도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2014/05/28

미사고의 숲 - 로버트 홀드스톡 / 김상훈 : 별점 2.5점

미사고의 숲 - 6점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2차 세계 대전 후 스티븐은 군에서 제대하고 라이호프 숲 가장자리에 있는 잉글랜드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형 크리스찬과 해후했지만, 크리스찬의 기묘한 행동에 의구심을 느끼게 되었다. 알고보니 크리스찬은 숲에 매료된 나머지 "숲"이 만들어 낸 소녀 귀네스의 환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강박적으로 라이호프 숲의 내부를 조사했던 박물학자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크리스찬은 아버지처럼 숲속에서 행방을 감췄고, 홀로 남은 스티븐은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읽은 뒤 "숲"에는 사람의 무의식적인 사고를 실체화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데...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적 사고를 실체화한 것이 보여지는 것'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작품입니다.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Mythago는 신화(myth)와 심상(imago)의 합성어입니다. 바로 이 실체화된 결과물을 의미하지요. 개인적으로는 美思考, 즉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한자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하여튼, 작품은 크게 아래의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제1부 미사고의 숲
  • 제2부 사냥꾼들
  • 제3부 숲의 심장

1부는 고향으로 돌아온 스티븐이 형 크리스찬을 통해 미사고에 대해 알게 되지만, 형이 귀네스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뒤 그를 잃게 되는 과정까지의 이야기입니다. 2부에서는 귀네스가 실체화된 후 스티븐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돌아온 크리스찬이 이끄는 매의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그녀를 빼앗기게 되고요. 3부는 귀네스를 되찾기 위해 스티븐이 해리 키튼과 함께 숲의 내부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단계별로 이야기가 점점 업그레이드되고 스케일이 커지는데, 개인적으로는 2부까지가 딱 좋았습니다. 특히 2부에서 매의 전사들이 나타나는데, 그 우두머리가 나이를 한참 먹은 크리스찬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반전이 괜찮았어요. 그러나 3부는 지나치게 신화화를 의식한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특히 스티븐까지 신화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전투 장면, 여러 마법과 기묘한 인물들이 실체화되어 등장하기 때문에 재미만 놓고 보면 가장 흥미롭긴 하나, 단순한 모험물에 불과해 새로움이나 깊이를 느끼기 어렵기도 했고요. 이 장대한 설정이 결국은 연인을 구하기 위한 모험담이자 사랑 이야기였다는 것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귀네스를 기다리는 스티븐이 그 자체로 전설이자 신화가 되었다는 케케묵은 결말은 "백발마녀전"과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80년대 출간 당시라면 꽤나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을 수 있으나,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느낌이에요. 무의식 속 무언가를 실체화한다는 설정은 일본 만화 등에서 많이 본 것이기도 하죠. "파프리카"처럼요. 신화냐 꿈이냐의 차이일 뿐, 사람의 무의식을 실체화하고 그것에 외려 사람이 휘둘린다는 설정 자체는 동일하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화라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시리즈로 이어질 만한 재미와 설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흔해빠진 판타지 모험담에 불과합니다. 시대가 너무 많이 흐른 탓이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은 아니었다는 뜻도 되겠지요. 시리즈 후속권이 국내 출간되지는 않았는데, 출간되었더라도 더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덧 : 그래도 유명작품이니 만큼 인터넷 상에 정보는 많네요. 제가 본 것 중 가장 괜찮은 귀네스 이미지 한 장 올려봅니다.

2014/05/27

타인의 목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점

타인의 목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사형수 외르탱은 사형 직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사실 탈옥은 메그레 경감이 외르탱이 진범이 아님을 직감하고 진범을 알아내고자 벌인 의도적인 작전이었다. 이후 외르탱이 체코인 라데크를 만나려고 시도한다는걸 알아챈 메그레는 라데크를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라데크의 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하고, 외려 외르탱의 자살 시도 등으로 궁지에 몰린다…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5, 6, 7, 8번째 작품을 건너뛰고 선택하여 읽게 되었는데, 오래전 "황색견"과 함께 국내 소개되었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 대표작이겠거니 싶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라데크라는 일종의 소시오패스 악당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별난 재능은 사람의 약점을 파악하여 뜻대로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묘사되는데, 당대 유행하던 "팡토마스"의 영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당이라는 점에서도요. 노파 하나의 생명을 빼앗아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는건 "죄와 벌"과도 비슷한데, 라데크는 구원 따위는 믿지 않는 내추럴 본 악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캐릭터 크로스비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범죄를 단순한 욕망의 충족이 아닌,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기 위해 저지른다는 점과 결국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는 최소한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유감스럽게도 볼 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정교한 맛도 없고 전개도 뜬금없는 탓입니다. 메그레가 자신의 목을 걸고 외르탱 탈옥 작전을 벌인 이유부터가 석연치 않습니다. 외르탱이 라데크와의 접촉을 시도해서 라데크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후의 수사는 지지부진하기 그지없거든요. 라데크가 무전 취식 후 경찰과 함께 나가는 전략으로 외르탱과의 접촉을 무효화시키는걸 메그레가 막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수고를 덜 수 있었는데 가만히 지켜본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생폴레옹에 지다"에서 메그레가 다른빈유를 방관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데, 과거의 실수에서 뭔가 배운게 없는걸까요?
또한, 메그레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 ‘외르탱이 짧은 시간 안에 귀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이 단순히 택시를 탔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허술합니다. 수사가 부실했다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라데크가 계속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는 듯한 허세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사건이 과연 쉽게 해결되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라데크가 최후의 순간에 메그레에게 총을 쏘는 우발적 행동 역시 큰 약점이고요. 이 장면 때문에 그나마 있던 천재 범죄자와의 두뇌 대결 분위기가 무너져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라데크가 무계획에 즉흥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은 L의 죽음 이후 급속도로 힘이 빠진 "데스노트"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찌질한 모습을 보여줘 실망을 안겨준 야가미 라이토와 다를게 없다는 점에서요.

이렇게 좋은 추리소설로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물론 멋드러진 제목만큼이나 문학적인 향취는 짙고, 외르탱의 탈옥을 지켜보는 메그레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한 등 심농이라는 작가의 필력은 유감없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차라리 "죄와 벌"처럼 라데크의 심리를 더욱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2014/05/26

노란 옷 왕 단편선 - 로버트 W. 체임버스, 앰브로즈 비어스 / 공진호 : 별점 1.5점

노란 옷 왕 단편선 - 4점
앰브로스 비어스 외 지음, 공진호 옮김/아티초크

"트루 디텍티브"의 중심 모티브 — 노란 옷 왕, 노란 표적, 카르코사 — 를 제공했다는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작가는 맛있는 식사보다 원고료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책은 영화·음악·게임과 당당히 겨루고 협력하는 ‘문화상품’이라는 것, 그리고 책을 합리적으로 팔기 위해 무조건 정가판매하고 직접 유통한다는 방침' 등 출판사 아티초크의 독특한 철학에 혹해서 구입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내용부터 문제입니다. 재미도 없고 무섭지도 않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웠거든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라고 소개되었지만, 그래도 정도껏 했어야지요. 뭔가 있어 보이는 척 폼만 잡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책의 구성과 디자인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읽던 영한대역 문고 식으로 200페이지 정도 되는 문고본 사이즈의 절반이 영어 원문으로 실린 탓입니다. 왜 이렇게 출간했는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영문학도가 공부를 위해 살 만한 책도 아닐뿐더러, 원서를 읽을 사람이 구태여 번역된 책을 사 볼 이유도 없을 텐데 말이죠. 

이렇게 원문이 실려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 이해합니다만, "뉴욕에서 활동하는 아트디렉터 쌤 쿠의 젊은 독자의 감수성에 맞는 뉴욕 빈티지 스타일 어쩌구"라며 홍보하던 디자인도 별로더군요. 뉴욕 빈티지 스타일이 뭔지 알고 쓴 용어인지 의심스러울 뿐더러, 실려 있는 이미지들도 작품과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거슬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 더하여 가격 역시 만만치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 지금 가격의 절반, 아니 2/3 정도 가격이 적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직거래의 장점은 유통과정을 최소화하여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제값을 받고 싶은 취지는 알겠지만, 구태여 사이트까지 접속하여 회원가입까지 하는 소비자에게도 뭔가 이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아티초크의 철학에는 100% 공감하는 만큼, 다음에는 보다 멋진 작품을 선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수록작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명예 회복 해결사"

자살이 합법화된, 죽음회관이 공식적으로 들어선 어느 시대. 주인공인 화자 카스테뉴는 낙마 사고로 머리에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명예회복 해결사를 자처하는 와일드와 어울리며 스스로가 하스티르의 왕위를 이어받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란 옷 왕의 왕관을 쓰고. 그러나 와일드의 사망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으로 끝난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노란 옷 왕"이라는 희곡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이 희곡은 책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 모두에서 핵심 소재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노란 옷 왕이 뭔지, 노란 표적이 뭔지, 하스티르 왕이 뭔지 전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네크로미콘" 정도의 디테일은 보여줬어야 했을 텐데, 그냥 '읽으면 안 된다' 수준으로만 설명되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때문에 비교적 괜찮았던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어 보이는 와일드라는 독특한 등장인물과 카스테뉴의 광기 묘사도 설득력 없는 광기의 향연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노란 표적"

노란 표적을 받은 화가와 그의 모델이자 연인 테시에게 노란 옷 왕이 찾아와 죽음을 선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작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사람들이 나오고, "노란 옷 왕"이라는 희곡에서 전해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살짝 선보입니다. 노란 옷 왕이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찾아와 노란 표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죽인다는 내용으로 보이거든요. 테시의 꿈과 화가의 꿈이 이어지는 것에 대한 묘사라든가, 썩어 문드러진 듯한 교회 경비원의 끔찍한 정체와 같은 묘사는 제법 공포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역시나 인과관계를 전혀 알 수 없는 소설이기에 뭐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카르코사의 망자"

죽은 자가 자신이 죽은 것을 깨닫는다는 대여섯 페이지 남짓한 꽁트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성은 갖추고 있지만, 딱히 드라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카르코사가 뭔지도 모르겠고요.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에서는 제법 먹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평가하기에는 애매하네요. 굳이 점수를 주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2014/05/24

1942 대기근 - 멍레이 외 / 고상희 : 별점 3.5점

1942 대기근 - 8점
멍레이 외 엮음, 고상희 옮김/글항아리

1942년 후난성에서 발생했던, 무려 30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대기근을 설명하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수집 가능한 거의 모든 자료와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전쟁이나 재해에서 고통받는 것은 평범한 민중들일 뿐이라는 진리를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아울러 이러한 재앙이 왜 일어났는지와 대기근의 와중에 위대함을 보여준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책 홍보문구 및 내용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참혹했던 실상의 설명이 압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땅이 갖고 싶어 곡식을 팔아 땅을 샀지만, 먹을 게 없어 농사 한 번 지어보지 못하고 땅도 팔고 아들도 굶어죽고 아내마저 미쳐버렸다는 리다차이의 이야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 100위안을 외치며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는 골동품 시장의 노부부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 정도는 그나마 인간성이 유지되는 수준인데, 이후 기근이 격심해진 뒤에는 상식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잘 와닿지 않더군요. 아내를, 자식을 팔고 심지어 삶아먹기까지 했다니까요. 목숨을 건 탈출에 대한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처절함은 정말이지 "바다 한가운데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존 본능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고요.

또 당시 대기근을 취재했던 타임즈 기자의 사진도 좋았습니다. 아주 잔인한 사진은 뺀 듯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주기에 충분한 수준이었습니다. 저자가 자료를 찾아 다니고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따는 과정을 삽입한 르포르타주 형식의 구성도 효과적입니다. 중국적인 디테일도 인상적인데, 대기근의 참상을 말할 때 인터뷰어들이 "대가 끊긴 집안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대기근은 인재였다는 설명도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기근의 이유를 크게 세 가지 — 극심한 가뭄, 메뚜기떼의 창궐, 군대의 수탈 — 로 들고 있거든요. 가뭄이야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메뚜기떼의 창궐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화위안커우 제방을 터뜨려 생태계가 교란되었기 때문이며, 군대의 수탈은 지금까지도 허난 지역에서는 4대 재해로 꼽는 게 '수해, 가뭄, 메뚜기 재해, 탕언보'라고 할 정도로 극심했다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당시 허난성을 수탈한 탕언보의 부대).

참사를 막기 위한 구호 활동이라도 서둘렀다면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겠지만, 후난성 전체가 일본군 손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장제스가 의도적으로 수탈에 전념하고 구호 활동을 소홀히 한 것이라는 설명도 책에서는 여러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남에게 빼앗길 거라면 나라도 싹 털어버려야겠다는 그런 생각인데 정말 너무한 일이죠. 청나라 후기의 혼란기에서도, 기근 때 정부의 노력으로 피해가 최소화된 적이 있었다는 설명이 등장하니, 이래서야 뭘 위해 정권을 잡고 전쟁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당시 유력 신문 "대공보"의 기자 장가오펑의 기사와 사장 왕윈성의 사설, "타임즈" 기자 시어도어 화이트의 기사 등으로 참상이 널리 알려져 구호가 시작되었고, 그 외에도 몇몇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었다는 점 정도만이 위안거리입니다. 이후 탕언보 부대는 일본군이 허난 성에 대한 전면공격을 감행한 1944년에 민중의 공격으로 패주하였으나, 탕언보는 건재했고 기근의 원흉인 군벌과 정치가들에게 제대로 된 철퇴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결말은 씁쓸한 뒷 맛을 남기네요.

그러고 보니 세월호 사건과 참으로 많은 것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관계기관의 무능함이 겹쳐져 발생한 인재라는 점과 빠른 구호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아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관계자에 대한 처벌은 현재진행형이니 지켜봐야 할 테지만요.

여튼 생각할 거리도 많고 놀라움을 안겨주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딱 한 가지, 지도가 몇 개 실려 있기는 하나 전체를 개괄할 수 있는 형태로 삽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쉽지만, 큰 단점은 아닙니다.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발간하는 '걸작 논픽션' 시리즈에 포함된 것이 납득되는 수준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역시나 같은 시리즈인 "자백의 대가"도 마찬가지지만) 미시사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4/05/20

64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3.5점

64 - 8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사부에서 홍보담당관으로 발령난 미카미는 교통사고 가해자 익명 보도건 때문에 기자단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허나 경찰총장의 방문이 예정되어 어느 때보다 기자단의 역할, 홍보담당관의 역할이 중요해져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 경찰총장의 방문이 사실은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의도라는 걸 알아챘다. 형사의 피가 흐르는 탓에 이러한 음모에 맞서지만, 딸의 가출 후 조사를 도와준 경무부장 아카마와 알력다툼이 벌어지던 와중에 14년 전에 벌어졌던 유괴사건, 속칭 64 사건을 쏙 빼닮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찰이라는 조직과 그 조직에서 겉돌게 되는, 그러나 천상 경찰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찰 소설입니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와 유사하게 조직과 개인의 갈등이 주요 소재인, 경찰이 등장하는 일련의 시리즈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지요. 제가 리뷰를 쓴 작품도 제법 됩니다.

이 작품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분량에 걸맞게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데, 간략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미카미의 딸 가출 사건
  • 14년 전에 벌어져 아직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채 시효가 코앞으로 다가온 유괴살인사건 64
  • "고다 메모"라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64사건 당시 일어났던 형사부의 치부
  • 주변 인물들에게 걸려온 장난전화
  • 형사부장을 캐리어로 교체하려는 본청 / 경무부의 음모와 이에 맞서는 형사부
  • 기자단과 홍보실의 다툼
  •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

이러한 사건들이 64사건의 범인 체포라는 큰 주제로 묶이는데, 뭐 하나 허투루 진행되는 것이 없고 이야기 하나가 완결되면 또다시 위기가 닥치는 연재소설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그야말로 지하철에서 읽다 보면 내릴 정거장을 깜빡해서 지나치게 만들정도로요(저는 한 정거장 지나쳤습니다).

경찰 출신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묘사도 여전합니다. 경찰 내 복잡한 조직 구성 및 조직 간 역할 관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작품이 있을까 싶네요. 비교할만한 "제 3의 시효"역시 같은 작가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경찰에 대한 깊은 내공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또 법의관이나 형사가 주인공인 작품은 많이 있지만, 이 작품처럼 홍보담당관이 주인공인 작품은 처음이라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관련된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경찰 담당 기자가 나오는 오시마 야스이치의 "특종 사건현장"과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만화에서는 기자와 경찰이 서로 협력 관계로 공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 작품에서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는 차이가 크게 다가옵니다.

경찰이라는 무대 설정만이 특이한 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제법 괜찮습니다. 미카미가 "고다 메모"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수사 과정의 디테일도 볼거리이지만, 64사건에서 범인이 몸값 회수에 성공하는 트릭도 괜찮습니다. 유괴범이 범행에 성공한다는 전개의 작품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64사건의 피해자 아마미야가 유괴범의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현 내의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부 순서대로 전화를 한다는 진상이 백미입니다. 이 설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였어요. 아-이-우-에-오 순으로 이어진다는 트릭적인 요소도 충분히 설득력 있을 뿐더러, 딸을 잃고 남은 게 없는 아버지의 절절함이 전해지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사고 당시 실수의 충격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히요시가 자신의 경력(NTT 직원)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수사를 벌인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의외의 진상이라 더욱 놀랐습니다.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미카미의 딸 아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메사키가 정말로 64의 진범인지(먹어버린 메모지에 쓰인 글귀는 무엇인지), 고다 메모를 둘러싼 형사부의 치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결국 하나도 정리되지 않고 끝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미카미가 짊어지고 끝까지 책임지겠구나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데 무척 세련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가장 중요한 메사키 가스미 유괴사건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메사키가 경찰에 신고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메사키를 경찰에게 넘겨준다는 일련의 행동은 수사 지휘관 마쓰오카가 메사키가 64사건의 범인임을 눈치채고 모든 진상을 파악했으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이런 번잡하고 불편한, 그리고 범죄에 가까운 사건을 벌이느니 청장이 방문하기로 했을 때 청장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대형 범죄를 저지른 메사키가 같은 현에서 계속 살아왔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고요.

그 외에도 경무부와 형사부의 갈등 관계를 만드는 후타와타리가 고다 메모를 들먹이며 형사부를 들쑤시는 행동의 저의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선의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냥 소문만 흘리는 게 훨씬 간단했을 테니까요. 이는 이야기를 번잡스럽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경 미쿠모도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얼굴"의 미즈호를 객관적으로 그린 듯한, 여경이지만 일 욕심 있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인물인데 이야기에서 별 영향을 주지도 않고, 작품 내에서 뚜렷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 탓입니다.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해서 아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그래도 문학적 성취와 대중소설의 재미, 추리적 완성도도 두루 갖춘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재미와 함께 유괴라는 범죄의 비정함,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 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길다 싶긴 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호평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등장하는 경찰 수사,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아버지 얼굴과 똑같은 얼굴로 생겼다고 좌절하여 가출까지 하다니... 저 역시 딸아이 아버지일 뿐더러 딸아이가 저하고 똑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지라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2014/05/19

조선의 음담패설 - 정병설 : 별점 3점

조선의 음담패설 - 6점
정병설 지음/예옥

제목 그대로 조선의 음담패설에 대한 책으로, 주로 "기이재상담"에 실렸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현재의 음담패설보다는 아무래도 은근한 것들이 많지만, 재미난 것들도 제법 있더군요. 선비가 비역으로 학질을 치료한 이야기는 그중 백미입니다. 음담패설이라 소개해드리기 어렵다는 게 안타깝기만 합니다. 참고로 학질 치료에 놀라게 하거나, 열을 올리는 식의 치료가 많아서 강간으로 학질을 치료했다는 음담패설이 제법 존재한다는데, 과연 이야기로만 끝난 것인지도 살짝 궁금해지네요. 남성 성기를 "역장군"이라고 의인화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고요.

이러한 야담이 주는 재미 외에도 야담에 대한 해설이 자세하여 자료적 가치도 높습니다. 양반들이 생계의 기술과 방법이 없어 사기와 착취로 먹고 살았다는 최양업 신부의 1855년도 서신, 1767년 윤7월 30일 산음에서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보고와 사내아이의 아버지는 소금 장수였다는 기록 등은 조선 후기의 사회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특히나 유교 국가로 상당한 통제가 있었으리라는 상식과는 다르게, 상상 이상으로 문란하고 방종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어떤 여자가 겁탈당한 위기에 놓였을 때 "저는 당신의 딸입니다"라고 말해서 강간을 막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또 한문의 뜻을 이용하여 한시를 짓는 이른바 육담풍월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더군요. 이 책의 제목부터가 그러한 방식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하는데, "기이재상담"은 기이(紀伊) + 집재(齋)로 "기집(계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그 외에 조선시대의 성문화 및 "기이재상담"과 같은 음담패설이 전래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인 등 외국인들의 학습용으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추측 등이 수록된 부록도 볼거리입니다. 이 중에서도 세책집에서 대여된 책들과 그 책들에 기록된 낙서들에 대한 것들은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한 자료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Mother fucker"스러운 욕과 낙서들은 뭐랄까, 지금 읽어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점이 참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평균 이상이므로,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4/05/16

육화의 용사 - 야마카타 이시오 / 김동욱 : 별점 2점

육화의 용사 1 - 4점
야마가타 이시오 지음, 김동욱 옮김, 미야기 그림/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신을 쓰러뜨렸던 성자가 '마신은 돌아오지만 자신의 힘을 이어받은 여섯 용사가 나타나 마신을 다시 쓰러트릴 것'이라 예언했다. 여섯 용사의 증거인 몸 어딘가에 떠오르는 꽃잎 여섯 개의 문장때문에 그들은 '육화의 용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마신이 두 번 깨어나지만 예언대로 여섯 용사에 의해 다시 봉인되었다.

다시 마신의 깨어날 조짐이 있는 시기, 자칭 "지상 최강의 사나이" 아들렛은 육화의 용사로 선택받아 다른 용사들과 함께 마신의 근거지 마곡령으로 항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용사는 일곱 명이었다. 가짜는 누구인가?

한국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회 하우 미스터리의 이벤트에서 어떤 분이 추천하였기에 읽게 된 작품.

마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용사들이 힘을 합친다는 전형적인 판타지 서사에서, 마신을 쓰러트리기 전 파티가 규합될 때 일어나는 일종의 해프닝에 집중한게 독특합니다. 정해진 숫자의 파티 인원을 초과한 상황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위기가 닥친다는 설정은 "11인이 있다!"와 동일한데, 진상을 밝히는 과정이 추리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는 차이가 있고요.

그런데 라이트 노벨이라는 장르가 모두 이런가요? 저하고는 전혀 맞지 않더군요. 제가 읽기에는 너무 유치한 설정과 묘사가 많았습니다. "타임 리프"는 이렇게까지 유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지요.
우선, 등장인물 설정부터 익숙해지기 어려웠습니다. 육화의 용사 모두가 만화 등에서 수없이 접해왔던 전형적인 인물들의 향연인 탓입니다.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고 두뇌로 싸워나가는 허세남, 타고날 때부터 천재, 그 외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들, 공주, 기사, 마족과의 혼혈아, 로리로리…… 죄다 어디선가 보아왔던 설정들입니다. 그나마 생동감있게 표현했더라면 조금 나았겠지만, 모두 평면적인데다가 묘사도 지루했습니다. 개중 별다른 능력 없이 근성과 노력, 장비와 잔재주로 버티는 아들렛만 약간 인상적이지만, 아들렛 역시 결국은 모든 면에서(심지어 트라우마까지도) 배트맨과 다를 바 없어 식상함을 이겨내지 못하더군요.
대사도 유치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에 대해 프레미와 아들렛이 나누는 대화는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어요.

게다가 등장인물들 이름은 모두 서양식인데, 지명이라던가 별호는 대부분 한자식인 것도 거슬렸습니다. 비유하자면 "무당파 장문인 톰 크루즈와 마교 교주 매튜 매커너히가 마신을 상대하기 위해 미들랜드 왕국의 고모령으로 향한다"와 같은 식이에요. 만화로 보았다면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소설로만 읽으니 그냥 웃기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육화의 용사들이 갇히게 된 결계의 비밀을 다루는 트릭 하나만큼은 괜찮기는 합니다. 아들렛이 결계를 동작시키는 밀실에 처음 들어가게 되어 가짜로 몰리게 된 사건 해결을 위한 밀실 트릭이지요. "결계를 동작시키는 방법으로 알려진 초반의 증언이 사실은 가짜였고, 진짜 결계 동작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결계가 동작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 안개를 대량으로 갑자기 발생시킨 것이다"라는, 과학과 마법을 잘 조화시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에 잘 어울리는 트릭이라 생각되네요. 독자에게 마곡령 근처의 기온이라던가 "태양의 성자"에 대해 알려주는 등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도 좋았고요. 추리 동호인의 추천을 받을 만 했어요.

허나 트릭 외의 추리적인 부분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먼저, 이렇게 복잡하게 작전을 꾸미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결계에 가두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발생했을테고 최소한 프레미를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용사가 죽으면 육화 문장의 꽃잎이 떨어진다는 설정으로 가짜로 몰아 죽이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으리라는 점 등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셰타니아가 아들렛이 무죄라고 믿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에요. 가짜, 즉 일곱 번째가 나셰타니아였다면 처음부터 가짜로 몰아 죽이면 되지 이런 불필요한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추리적인 모든 요소는 결계에 대한 것, 즉 밀실 트릭을 푸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지도 못하고, 범인의 정체가 너무나 뜬금없어 설득력을 전혀 가지지 못한다는 단점 역시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타지 추리 소설로는 다아시경 시리즈, 그리고 "부러진 용골"과 같은 작품과 차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입니다. 감히 비교한다면 "장미빛 인생"조차도 '소설'로는 더 낫지 싶군요. 괜찮았던 트릭을 잘 살린 추리물로 접근하였더라면 훨씬 좋은 점수를 주었을 텐데, 아쉽게도 제 취향은 전혀 아니었어요. 다음 권을 더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2014/05/14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존 엘리시 / 정병선 : 별점 3점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 6점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마티

1차대전의 참호를 중심 전선과 그곳에서의 병사들 생활을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의 전투나 전황은 전혀 설명되지 않고, 오로지 생활상에 초점을 맞춘 독특함이 돋보이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난중일기"에서 역사의 흐름이나 전투의 향방, 결과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당시 조선 수군이 어떻게 살았는지만 소개되는 서적이랄까요?(이것도 나름 재미있겠네요)

목차는 1부 땅 속의 일상 / 2부 전투의 실상 / 3부 고향에서 온 편지 / 4부 금지된 우정 순서로,

1부 땅 속의 일상은 참호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어떤 참호들이 있었는지, 참호를 고통스럽게 만든 환경 요인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등을 통해 실제 참호에서의 생활을 설명해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비가 왔을 때나 지하수가 솟아나는 최악의 상황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버틸 수 있었을지 정말 상상도 되지 않네요. 인간의 생명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2부 전투의 실상에서는 참호전이라는 전투의 참혹한 실상이 가감 없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특히나 현대전에 무지했던 지휘관들에 의해 자행된 '돌격'이라는 이름의 학살 행위가 핵심입니다. 오래전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갈리폴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왜 이러한 무모한 공격 명령에 저항하지 않고 병사들이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유가 간략하게나마 설명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아울러 마지막 부분의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된 병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참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나 앞서 소개해드렸듯이 전황이나 전투의 결과를 전혀 설명해 주지 않는 점이 단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연합군이 이런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도(특히 여러 번 언급되는 "솜 전투" 등)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졌는데, 이 책만으로는 알 수가 없더라고요.

3부 고향에서 온 편지는 참혹한 전쟁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식사와 편지 배달에서 시작해 도박, 술, 성생활과 같은 일상과 유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쨌건 사람 사는 곳이었으니 뭔가 즐길 거리가 필요하고, 기본적인 욕구도 해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죠. 이 중 성생활에 관련된 부분은 꽤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 미국 병사의 편지에 쓰여 있었다는 "마룻바닥을 오래 봐둬야 할 거요. 내가 집에 돌아가면 천정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을 테니까."라는 말도 인상적이었지만, 우리의 "정신대"라는 아픈 과거사를 되새기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4부 금지된 우정은 양 세력이 나눈 인간적인 유대 관계와 이러한 관계가 일어난 배경이 된 참호전의 특성, 전선에서의 극심한 피로감, 전우애를 다루며 끝맺고 있습니다. 워낙에 참호가 가깝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생겼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 서로 아침 시간에는 공격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던가, 유명한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 등 — 은 재미있기는 했지만, 앞부분과는 다르게 생활상이 크게 드러나는 내용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1차대전에 관련된 다른 책을 함께 읽어야 가치가 배가되기에 약간 감점합니다만, 이러한 분야에 있어 독보적인 책임은 분명합니다. 특성상 광속 절판될 수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신경 써서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1차대전사를 읽은 뒤 이 책을 읽는다면, 거시적 관점에서 큰 흐름을 파악한 후 그 큰 흐름에 매몰된 개개의 병사들의 힘들었던 삶을 디테일하게 조망하는 흐름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 나온 김에 얼마 전 5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한 "1차세계대전사"를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2014/05/10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 오자와 카오루 : 별점 2점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 4점
오자와 카오루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제목에서처럼 작가가 편집자 등과 함께 여러 독특한 장소에서 경험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만화입니다. 그야말로 일반인은 상상하기 힘든 장소,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겪는 작가와 지인들의 멘붕 상황이 핵심이고요. 초반의 메이드 카페와 바, 기이한 박물관 정도는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로 뒤로 가면 갈 수록 그 수준이 업그레이드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폭포 수행", "곤충 요리 체험", "폐허 탐험", "뱀 체험 및 요리 시식", "자살자가 몰리는 죽음의 숲 탐험"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곤충 요리"와 "죽음의 숲" 에피소드였습니다. "곤충 요리"는 그나마 상식적인 메뚜기 채집에서 갑자기 나방(!)까지 잡아 튀기고, 실제 먹는 과정의 디테일과 등장인물들의 반응이 그야말로 홀딱 깹니다. 참 먹고살기 힘들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죽음의 숲" 에피소드는 실제로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고 여운을 남기는 전개, 그리고 경찰을 불렀는데 시체가 있던 장소를 기억하지 못해 허둥지둥하는 현실감이 뒤섞인 그야말로 기묘한 에피소드였어요.

허나 이게 과연 좋은 만화인가 하는 의문은 듭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이 별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세이 만화 대부분이 대단한 작화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에세이 만화야 주로 심리묘사, 일상 생활 묘사라 큰 단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데, 이 작품은 기이한 장소와 체험이 주요 소재라서 최소한 주요 소재 정도는 디테일하게 그려졌어야 했다고 생각됩니다. 작가도 잘 알고 있는지 핵심 요소는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럴 바에야 체험기는 글로 쓰고 사진과 삽화로 보완하는 것이 훨씬 나았겠지요. 더 디테일하기도 했을 테고요.

또 몇몇 체험은 단순 여행기, 체험 소개에 불과해서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단식원이야 경험은 재미있지만 별다른 게 없고, 전생 체험은 뭔가 사기스러우며 손금 관련 이야기는 체험도 뭣도 아닌 단순 정보 전달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다 보면 빵 터지는 재미는 있습니다만 단점도 명확해서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170여 페이지에 8,000원이라는 가격까지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이죠. 독특한 장소와 체험, 괴인, 괴식에 대해 많은 흥미가 있으신 분들만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4/05/07

CMB 박물관 사건목록 23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CMB 박물관 사건목록 2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24권까지 출간되었다는 말을 이전 리뷰에서 했는데 이제서야 23권을 읽게 되었네요. 확실히 요새는 읽는 속도가 떨어졌어요. 특히나 신간을 챙기기가 쉽지 않군요. 

이번 편에는 총 4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네 번째 코테에
  • 아시즈리 계란말이 가게
  • Nobody
  • 그라운드

항상 그래왔듯 강력사건 - 일상계가 반반인 구성입니다. "네 번째 코테에", "Nobody"는 강력사건이고 다른 두편은 전형적인 일상계거든요.

수록작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네 번째 코테에"

신라가 지인의 부탁으로 환상의 코테에 (미장이 기술로 그린 회반죽 그림)를 찾기 위한 조사에 나선다는 내용.

환상의 코테에는 미장이 장인 쿄지로가 본인 최고 걸작이라 선언했던 것으로, 그가 부호의 별장 벽 4면에 만들었으나 불타버려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조사하려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쳐 저주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있고요.

그런데 신라가 밝혀낸 진상이 꽤 놀라우며 그럴듯합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추구한 쿄지로가 자신의 기술로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하자, 결국 여성 그 자체를 코테에로 만들었다는 것이거든요. 현대물 중 여성을 수집한다는 변태스러운 작품이야 여럿 있고, 포우의 "검은 고양이"라던가 란포의 고전 변격물도 떠오를 정도로 흔한 설정이지만 이를 에도시대와 코테에로 변주했다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작가가 평상시 보여주지 않던 스타일이라 더 의외성있게 다가왔던 것 같네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네번째 코테에의 파편이라는 증거도 적절히 제시되어 설득력을 높여주며, 코바씨 습격 사건이라는 곁가지 사건이 줄거리에 잘 녹아들어 있다는 점, 욕심내지 않고 짧게 마무리한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 시리즈 최고의 장점 중 하나인 박물학적 지식과 추리의 결합이 오랫만에 절묘하게 이루어졌다는 것도 좋았어요. 이래야 CMB지!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간만에 본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수작입니다.

"아시즈리 계란말이 가게"

계란말이를 사러 간 신라 일행이 주인이 부재 중인 가게 안에 우연히 들어간 뒤 난장판이 된 가게 상황을 놓고 이런저런 추리를 한다는 일상계.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소동극으로 남겨진 증거들에서 극단적인 상황만 예상하는 이웃 사람들의 추리가 웃음을 자아냅니다. 묘사도 아시즈리씨가 도둑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하이킥 연타,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은 프로레슬링으로 그려지고 있는 식으로 대놓고 개그스럽고요.

그러나 핵심 단서라 할 수 있는 "다.스.케.테"라는 글자가 작위적인 것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일종의 암호 트릭인데(당연하겠지만) 일본어라 국내 독자가 즐기기에는 무리일 뿐더러, 설정 자체가 억지스러웠거든요. 국내용으로 변주한다면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도지마롤", "와인", "주스", "슈크림"을 사러가기 위한 앞글자만 적어놓은 장보기 메모가 "도-와-주-슈"가 된다는 식인데... 설득력있게 와 닿지는 못했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Nobody"

밀매조직 소속으로 살인혐의로 체포된 3명의 용의자 중 진범이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내용.

여러모로 평균 이하였어요. 일단 핵심 트릭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서 프로 청부업자들이 시신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설정. 오랫동안 피를 모아 놓는다는 설정 모두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피해자 카를로의 도주가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이런 이야기에 억지로 "자바 코뿔소의 뿔"을 집어넣어 CMB스럽게 만드려는 꼼수를 부린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고정 캐릭터인 쿠지라자키 경감이 신라에게 사건을 의뢰한다는 설정도 경찰이 왜 고교생에게 이런 것을 부탁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내용도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시체가 없다면 기소할 수 없다는 것도 옛말이죠. 우리나라도 얼마전에 유명한 "시체없는 살인사건"이 남겨진 증거만으로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가 선고되기도 했으니까요. 일본의 판례는 좀 다를 수 있지만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 명백하다면 충분히 법원에서 살인혐의를 인정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라운드"

물바다가 된 학교 운동장에 얽힌 사연이 드러나는 일상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던 학교를 무대로 한 일상계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발단이 되는 운동장 사건은 야구부 감독이 21세기 출전권을 노린 꼼수라는 것이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고, 이후에는 신라 - 타츠키 컴비가 주축이 되어 벌이는 간단한 사기극이 전부입니다. 감독의 행동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것도 문제네요. 엄연한 범죄행위에 당한 것을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불가였거든요. 이런 유치한 사기극에 걸려들 정도의 인물이니 그럴만도 한건가?

여튼, 추리적 요소는 없는 그냥 학원 드라마에요. 타츠키 아버지의 활약 정도만이 인상적일 뿐이네요. 시리즈의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체 평균 별점은 약 2.5점. 수작과 졸작이 섞여 있는데 그래도 전부 평작인 것 보다는 마음에 듭니다. 다음 권에도 최소한 한편의 수작이 있는 구성이었으면 합니다.

2014/05/06

사형집행인의 딸 - 올리퍼 푀치 / 김승욱 : 별점 3점

사형집행인의 딸 - 6점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문예출판사

18세기 독일을 무대로, 사형집행인이 마녀로 위심받아 화형당할 위기인 산파 마르타의 생명을 구한 뒤 마르타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고아들 사망 원인과 아이들 어깨에 있는 기이한 문양의 정체, 그리고 나병진료소를 파괴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상세한 시대 묘사, 독특한 직업의 탐정이 등장하는 역사 추리 소설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역사 추리 소설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추리, 역사에 관련된 소재를 모두 좋아하며 그냥 독서가 아니라 뭔가 배우는 느낌이 드는게 좋거든요.
이러한 현학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필수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 충분히 값합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 및 조력자인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 등 등장인물들은 물론 군인들, 짐마차꾼들과 같은 다양한 직업과 숀가우라는 도시 및 작품의 중요한 요소인 마녀 심문 (고문) 절차 등의 행정적 설정과 같은 모든 요소가 현실감있게 제대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야콥 퀴슬입니다. 전직 군인으로 고문에도 능한 사람 죽이는 명수가 실제로는 의사보다도 뛰어난 학식을 지닌 진짜배기 르네상스맨이라는 설정인데, 아주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수많은 역사추리물을 읽어봤고, 실존 유명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업 - 고대 로마의 포도주 상인, 로마 장군, 수도사, 18세기 영국의 해결사, 터키 환관, 중국 판관 등 - 의 탐정들을 봤지만 사형집행인은 처음 접해보거든요. 단지 직업의 기발함으로 승부하는건 아닙니다. 디테일 역시 장난이 아니에요. 작가 올리퍼 푀치가 실제로 바바리아 주의 사형집행인 집안인 퀴슬가(家)의 후손이기에 가능했던 아이디어와 묘사라 생각됩니다. 덕분에 야콥 퀴슬이 지나치게 먼치킨으로 미화되었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다른 역사 추리소설과 동일한 단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추리 소설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복선이 정교하거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거든요.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요. 그냥 특정 단계를 클리어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식의 전개가 대부분입니다. 비교적 초반부터 진짜 범인인 군인들이 드러나는 등 수수께끼 풀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도 비교적 많고, 악마가 고아들의 은신처를 때맞춰 발견한 경위나 흑막의 정체 등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녀의 표식이라는 것이 아이들끼리의 장난이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단서가 애들 장난이라니!

또 야콥 퀴슬이 중요한 정보를 항상 한박자 늦게 알아챈다는 전개도 너무 반복되어 식상하며, 결말부에서 법원서기가 모든걸 알고있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정말로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마르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동기가 죄다 사라져버린 탓입니다. 흑막을 알고 있었다면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하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사건을 키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잖아요? 한명 죽인다고 나병진료소나 군인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파괴와 살인이 계속되면 수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당연할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은 작가의 데뷰작이라는게 이유라 생각됩니다. 너무 쉽게 써 내려 갔어요.

아울러 야콥 퀴슬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주인공만큼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젊은 의사 지몬은 처음에는 힘의 야콥 - 지혜의 지몬으로 역할이 분배되나 싶었는데 내용에서는 야콥이 훨씬 뛰어난 학식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기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위기와 문제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에요. 그나마 활약이라면 은신처에서 클라라와 조피를 구해낸 정도밖에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 역시 지몬과 야콥을 엮어주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고요. 미인에다가 나름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사건에 있어서는 후반부에서 군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식으로 민폐 역할에만 소비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왜 "사형집행인의 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사형집행인"이거나 "사형집행인과 사윗감"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흥미롭고 쑥쑥 읽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독특함은 물론 마녀사냥이라는 당대의 소재를 잘 녹여낸 줄거리는 매력적이고 산파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제한이 존재하여 긴박함을 더하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역사추리물이 아니라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싶더군요. 악인은 모두 응분의 벌을 받고 주인공 일행은 모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다는 완벽한 권선징악 서사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적나라한 고문과 처형 묘사가 관건인데, 이것만 조금 순화한다면 어린이용 모험소설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알렉산드르 뒤마나 쥘 베르느의 역사모험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4/05/02

처녀귀신 - 최기숙 : 별점 3점

처녀귀신 - 6점
최기숙 지음/문학동네

우리의 전래 이야기 중 귀신에 촛점을 맞추어 이야기 속의 숨겨진 의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낸 역사-문화서입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듯 여자, 처녀귀신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자도 여성이고 조선시대는 여성이 아무래도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겠죠. 

"한국의 학교 괴담"과 비슷하게 당대 전래되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저자의 해석을 자세하게 덧붙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국의..."와는 다르게 내용이(학술서치고는) 비교적 쉽게 쓰여져 있으며 생각도 못했던 파격적인 해석이 몇 가지 등장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성에게 혼례란 성인식과 동일시 된 것으로 처녀귀신은 미처 성인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실패자의 표상이라는 해석, 여자귀신은 억울하게 현실에서 쫓겨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라는 해석 등은 아주 새로왔습니다. 장화홍련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죽어버린 사또들은 자기만 아는 비겁한 소인배였다는 뜻이겠죠?

귀신들이 관리나 전도유망한 청년을 찾아가 하소연하는 합법적 절차를 존중한 이유 역시도 참신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존재가 뭐가 부족해서 스스로 복수하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이는 사대부 남성이 즐겨 읽던 야담 속 이야기가 많아서 관리의 능력을 부각시킨 것이라고 하네요.

또 전래 이야기의 재해석도 소개되는데, 인삼장수 최가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장한 사내귀신이 수절하던 최가 어머니를 찾아와 겁탈하고, 그 후 귀신이 올때마다 재물을 가져와 부자가 되었다. 어느날 여자가 귀신에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게 뭐냐고 물었고 노란색이라고 답하자 집안을 온통 노랗게 칠하고 귀신을 쫓았다"라는 이야기로, 청상과부가 부자가 되자 이를 기이하게 여긴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과부가 부자가 된건 사내와 성관계를 맺은 대가로 재물을 얻은게 분명하고, 부자가 된 여자는 남자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약점을 캐서 관계를 정리한 뒤 남자를 매몰차게 거절했을 거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듯해요!

다만 뒷부분에서 자살자를 다루면서 귀신보다는 자살에 이르게 된 당시 사회상 해석에 치중한건 아쉽습니다. 제목 및 앞부분 내용과 살짝 거리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독특하고 새로우며 재미도 있는 좋은 책입니다. 170여 페이지 정도되는 짤막한 분량, 책의 장정과 디자인도 좋았고요. 가격도 괜찮은만큼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